고전 관련 공부자료/새 카테고리

다산(茶山) 목공(睦公)의 묘갈명(墓碣銘)

아베베1 2013. 3. 3. 13:27


 
 
기언 별집 제25권
확대원래대로축소
 구묘문(丘墓文)
다산(茶山) 목공(睦公)의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대흠(大欽)이고 자는 탕경(湯卿)이며 호(號)는 다산이다. 성은 목씨(睦氏)인데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우리 중종(中宗) 때에 현헌 선생(玄軒先生) 세칭(世秤)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유일(遺逸)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에 대한 일은 기묘사(己卯事)에 있다. 이분이 이조 참판(吏曹參判) 첨(詹)을 낳았는데, 명종(明宗)ㆍ선조(宣祖)를 섬겨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증(贈) 병조 참판(兵曹參判) 건(謇)의 딸이다.
공(公)은 만력(萬曆) 3년(1575, 선조8) 2월 9일(무인)에 태어났는데 젊어서부터 사부(詞賦)로 명예를 날렸으며 27세에 진사과(進士科)에 두 번째로 합격하였고, 4년 뒤에는 별시(別試)에 급제(及第)하여 괴원(槐院)에 선입(選入)되었다. 곧이어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으로 옮겼고,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ㆍ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뒤에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책사(冊使)가 올 적에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으니 또한 극선(極選)이었다.
임자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걸군(乞郡)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는데, 그해에 정 부인(鄭夫人)이 죽었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다음 하동지사(賀冬至使)로 경사(京師)에 갔었는데, 공은 외모가 수려하고 예절이 있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보고서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훌륭한 대부(大夫)다. 어쩌면 그렇게도 예(禮)를 잘 익혔는가.”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당하여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산반(散班)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10년을 지내다가,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뒤에 전례에 따라 태복시 정(太僕寺正)을 강등하고 이어 다시 사가독서하게 하는 한편 상(賞)을 내려 총애하였다. 다음해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는 체상(體相)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돌아와서는 도당 사인(都堂舍人 도당은 의정부)이 되었다. 적을 평정하고 나서 호종(扈從)한 신하들을 상줄 적에 공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승진되었다.
기사년에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주둔하였는데, 금(金) 나라 군사가 사포(蛇浦)를 침범한 것 때문에 노여움을 우리나라에 전가시켜 장차 변란이 있게 되자, 상(上)은 공이 일찍이 빈접사(儐接使)가 되어 그의 환심을 얻었다 하여 가서 화해시키게 하였다. 공이 이르니 과연 크게 기뻐하여 다시 우리를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문금(文錦)ㆍ증백(繒帛)ㆍ진기(珍器)를 주면서 사례하여 보냈다. 복명(復命)하고 나서 선물 받은 물품을 탁지(度支)에 보낼 것으로 주청(奏請)하였으나, 상이 그 물품을 공의 집으로 하사하였다.
공이 당시의 중망(重望)을 얻자 권력자들의 꺼림을 받아 다시 현용(顯用)되지 못하였다. 계유년에 나가서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적에는 너그러운 덕으로 관리와 백성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떠난 뒤에 그 고장 사람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우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11년 1월 7일에 죽었는데, 향년은 64세이다. 공은 조정에 34년 동안 있었는데, 세 번 옥당에 들어가 교리(校理)에 이르렀고, 간원(諫院)에서는 정언(正言)이 되었고, 세 번 이조 좌랑이 되었고, 정부(政府)에서는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지냈고, 태복(太僕)과 상방(尙方)의 정(正)을 지냈고, 정원(政院)에서는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고, 병조ㆍ예조ㆍ공조의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외직(外職)으로는 광주(廣州)와 강릉(江陵)에 보임되었다.
공(公)은 간묵(簡默)하고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고상하고 깨끗하여 득실(得失)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세리(勢利)에 담박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대부인(大夫人)을 섬길 때에는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힘썼으며, 대부인 방을 ‘주경(駐景)’이라 명명하였으니 옛사람의 해를 아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원림(園林)을 만들어 꽃과 대를 심고 백씨와 중씨 두 분과 함께 그 속에서 서로 즐겼고, 혹 취하면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스스로 즐기되 시사(時事)에 대하여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숙부인(淑夫人) 유씨(柳氏)는 본관이 진주(晉州)인데, 훈련원 정(訓鍊院正) 해(海)의 딸이다. 성품이 자혜(慈惠)로워 집을 잘 다스렸으므로 종족(宗族)이 진심으로 붙좇았다. 부인은 공보다 한 살이 많은데 공보다 12년 먼저 죽었으며, 향년은 53세이다. 합장(合葬)한 묘는 양주(楊州) 금촌(金村)의 동쪽으로 향한 기슭에 있다.
공은 적처의 소생이 없었으므로 종자(從子) 행선(行善)을 후사로 삼았는데, 공이 강릉 부사로 부임하던 해에 상등(上等)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행선이 두 번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종유(宗儒)이고, 둘째는 창조(昌朝)이니 진사이고, 셋째는 창기(昌期)이니 직장(直長)이고, 넷째는 창명(昌明)이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참의(參議)가 되었다. 사위 2인은 관찰사 유하익(兪夏益), 사인(士人) 정광도(鄭光圖)인데, 그중 창명과 사인 정광도의 아내는 후부인(後夫人) 소생이다.
공의 측실(側室) 소생 자녀가 3인인데, 아들은 양선(良善)ㆍ윤선(胤善)이고 사위는 신숙(申淑)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행운에도 으쓱거리지 않았고 / 不訑訑於通
비색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 不戚戚於塞
말은 않았으나 마음은 정직하였도다 / 不言而內植

[주D-001]사가독서(賜暇讀書) : 재덕(才德)이 있는 젊은 문신(文臣)에게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하던 제도이다. 세종(世宗) 8년(1426)에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처음 명을 받아 장의사(藏義寺)에서 이를 행한 것이 시초였으며, 세조 때에 이를 없앴으나 성종 22년(1491)에 다시 복구, 용산(龍山)의 폐사(廢寺)에서 글을 읽게 하고 독서당(讀書堂)이란 현판을 붙이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두모포(豆毛浦)에 두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광해군이 다시 설치하였으나 병자호란을 당하여 아주 없어졌다.
[주D-002]해를 …… 뜻 : 늙은 부모를 섬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날짜 가는 것을 아낀다는 뜻이다. 본문(本文)의 주경(駐景)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뜻으로 지었으니, 이 또한 애일(愛日)의 정성이라고 하겠다.


 
기언 별집 제25권
확대원래대로축소
 구묘문(丘墓文)
대사간(大司諫) 목공(睦公)의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행선(行善)이고 자는 행지(行之)이며 별호(別號)는 남간(南磵)이다. 성은 목씨(睦氏)로 본관은 사천(泗川)인데, 현헌 선생(玄軒先生) 세칭(世秤)의 증손(曾孫)이고, 이조 참판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첨(詹)의 손자이며, 호조 참판 장흠(長欽)의 아들이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위(瑋)의 딸이다. 공은 숙부(叔父)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대흠(大欽)의 후사(後嗣)가 되었는데, 후모(後母 대흠의 아내) 숙부인(淑夫人) 유씨(柳氏)는 본관이 진주(晉州)로 훈련원 정(訓鍊院正) 해(海)의 딸이다.
만력 37년(1609, 광해군1) 6월 17일(병인)에 공이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희롱을 즐겨하지 않았고 성동(成童 15세 이상을 말함)도 되기 전에 이미 성인(成人)의 도량이 있었으며, 문사(文詞)가 성하여 일찍 성취하였다.
숭정(崇禎) 3년(1630, 인조8)에 성균 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하였고 6년에는 갑과(甲科)의 제1등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제수받았고 예조 좌랑으로 옮겨 기사관(記事官),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국사(國史)를 편수하다가 용사자(用事者)의 비위를 거슬러 산반(散班)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병자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옮겼는데, 관찰사 윤이지(尹履之)가 내심 훌륭한 인재로 여기던차 바야흐로 상이 재학(才學)이 있는 선비를 대거 선발하였으므로 공을 추천하였다.
겨울에 금(金) 나라가 대거 도성(都城)으로 침공하여 와서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모든 비빈(妃嬪)과 왕자(王子)가 다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공이 난에 임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난 점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의지하였다. 임기가 찼을 때, 큰 난리에 잔파된 피해는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하였던 터여서 관찰사 이명(李溟)이,
“이런 때에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하고, 잉임(仍任)시키도록 계청(啓請)하여 진휼하는 일을 주관(主管)하게 하였다. 여름에 다시 병조 좌랑이 되어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전임되었는데, 얼마 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승진하였다.
무인년에 승지공(承旨公)이 죽었고 신사년에 참판공(參判公)이 또 죽었다. 삼년상을 마치고서는 옥당(玉堂)에도 있었고 관직(館職)에도 있었다. 을유년에 청(淸) 나라에서 우리나라에게 해로(海路)로 군량을 공급하라 하여 일의 기한이 매우 촉박하였는데, 공이 헌납(獻納)으로서 어사(御史)에 특차(特差)되어 호남(湖南)의 곡식을 운반하여 조달해 보냈다. 돌아와서는 부교리(副校理)가 되었고, 이조 좌랑으로 전임(轉任)되어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다. 여름에 다시 부교리로서 걸군(乞郡)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3년 만에 수찬(修撰)으로 소환되었고, 이조 정랑에 옮겼다가 곧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하였다. 기축년에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사은 서장관(謝恩書狀官)이 되어 연경(燕京)에 갔으며, 돌아와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대사성(大司成)과 병조 참의를 두 번 지냈고 이조ㆍ호조ㆍ형조의 참의를 세 번 지냈으며, 대사간(大司諫)ㆍ승지(承旨)를 여덟 번 지냈다.
기축년에는 나가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으나 1년 만에 병 때문에 돌아왔고, 계사년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병신년에는 다시 상주 목사로 나갔는데, 이는 모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홍주 목사로 있을 때 중풍에 걸려 10년간 앓다가 기해년에는 예조 참의로 사직(辭職)하고 다시 벼슬하지 않고, 군직(軍職 체아직(遞兒職))에 있은 지 3년째 되던 해(1663) 7월 8일(계묘)에 죽으니, 향년은 53세이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祭祀)와 부의(賻儀)를 의식대로 하게 하였다.
공은 돈후하고 아량이 있어 일찍이 급한 말과 당황한 안색이 없었으며, 일에 임하여는 삼가고 주밀하게 하여 이해(利害)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산업(產業)을 영립(營立)함으로써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모두 구가(舊家)의 유법(遺法)에 맞았다고 한다.
전부인 이씨(李氏)는 고(故) 정승 문익공(文翼公) 덕형(德馨)의 손녀요, 관찰사 여황(如璜)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종유(宗儒)요, 둘째는 창조(昌朝)이니 진사(進士)인데 백부(伯父) 관찰사 성선(性善)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셋째는 창기(昌期)이니 직장(直長)이며, 사위는 참판(參判) 유하익(兪夏益)이다. 후부인 윤씨(尹氏)는 장령(掌令) 효영(孝永)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참의(參議)인 창명(昌明)이요, 사위는 사인(士人) 정광도(鄭光圖)이다.
공의 묘(墓)는 양주(楊州)의 읍치(邑治) 북쪽 이담촌(伊潭村) 산기슭에 있는데 계좌정향(癸坐丁向 남향을 말함)이며, 이 부인(李夫人) 및 윤 부인(尹夫人)과 무덤을 같이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주밀하고도 삼갔고 / 周而愼
청렴하고도 어질었으며 / 廉而仁
옛사람의 도를 이어받아 / 不愆不玷
어김없이 준행하여 잘못을 범하지 않았도다 / 以嗣其古人


 
 
 
 
 
 
 


'고전 관련 공부자료 > 새 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尙瑞院正藥圃先生家狀。  (0) 2013.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