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3.3.3. 도봉산 산책

2013.3.3. 봄이 오는 길목에 중랑천 무수골 자전거 산책

아베베1 2013. 3. 3. 16:12


 

 

                                

                                 도봉산 만장봉 선인봉등 정상부 암릉  

                                    도봉산 만장봉 선인봉등 정상부 암릉  

                                     도봉산 만장봉 선인봉등 정상부 암릉  

                                     삼각산 인수 백운 만경대의 모습이 저멀리  

                                     수락산 주봉 철모바위 하강바위 도솔봉등 정상부   

                                    도봉산 만장봉 선인봉등 정상부 암릉  

                                    도봉산 우이암  할미바위 우이남능선   

                                      도봉산 무수골 계곡 얼음속에서 봄이 오는듯   


                                   도봉산 무수골 느티나무 보호수   


                                   도봉산 무수골 계곡 봄이오는듯 얼음은 차츰 녹아가고  






                                       도봉산 무수골 친환경 논  

                                    도봉산 무수골 밤남무 노거수  

                                   도봉산 무수골의 유래 세종의 17남이 영해군이라고 기록하면서 확인도 하지않고 표석을 ..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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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世宗)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홍무 30년 정축,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낳았다. 무자년(1408)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임진년(1412)에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었고, 무술년(1418)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그해 8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경태(景泰) 원년 경오 2월 17일 임진에 별궁(別宮)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32년이고, 수는 5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장헌(莊憲) 엄함과 공경으로써 백성에 임함을 장(莊)이라 하고, 착함을 행하여 기록할 만함을 헌(憲)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능은 영릉(英陵) 처음에는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편 산에 장사했다가, 예종(睿宗) 원년 기축 3월 6일에 여주(驪州) 서북편 성산(城山)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옮겼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승소(李承召)가 묘지(墓誌)를 지었고, 윤회(尹淮)가 행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정인지가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능을 옮길 때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이다.
○ 비(妃) 선인제성소헌 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본관은 청송(靑松)이니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다. 홍무 28년 을해 9월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영락(永樂) 무자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여 처음에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해졌다가, 정유년(1417)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지고, 무술년에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얼마 안 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임자 선덕(宣德) 7년 에 왕비가 되었다. 정통(正統) 병인 11년 세종 28년 3월 24일 신묘에 별궁 세조(世祖)의 잠저. 에서 승하하니, 수가 52세였다. 문종(文宗) 2년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능은 영릉 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애초에는 헌릉(獻陵) 서편 산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에 이장하였다. 이다.
○ 18남 4녀를 두었다.
사(嗣) 문종대왕(文宗大王) 순서로는 첫째이다.
사(嗣) 세조대왕(世祖大王) 순서로는 둘째이다.
3남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시호는 장소(章昭)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判書) 증 좌의정(贈左議政) 연(淵)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며, 계유년(1453)에 화를 입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충간공(忠簡公) 지(智)의 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봉례(奉禮) 증 우의정(贈右議政) 승녕(承寧)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중추부사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찬성 증 좌의정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정축년(1457)에 화를 입었고, 그 뒤에 신원되었다.
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처음의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증 좌의정 이용(利用)의 딸이다.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일찍 죽었다.
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아내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맹담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망지(望之)이다.
1남 화의군(和義君) 영(瓔) 영빈(令嬪) 강씨(姜氏)가 낳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찬성(贈左贊成) 공효공(恭孝公) 중손(仲孫)의 딸이다.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2남 계양군(桂陽君) 증(璔) 신빈(愼嬪)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딸이다. 3남 3녀를 두었다.
3남 의창군(義昌君) 공(玒)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도관찰사 증 찬성 수(脩)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4남 한남군(漢南君) 어()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낳았다. 정축년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증 지돈녕부사 격(格)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5남 밀성군(密城君) 침(琛)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이고,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윤 증 찬성 승서(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6남 수춘군(壽春君) 현(玹) 혜빈 양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영일 정씨(迎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윤 증 좌찬성 위양공(威襄公) 자제(自濟)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7남 익현군(翼峴君) 곤(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 증 찬성 철산(鐵山)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8남 영풍군(永豊君) 전(瑔) 혜빈 양씨가 낳았다. 정축년에 화를 입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팽년(彭年)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9남 영해군(寧海君) 당(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성윤 증 찬성 윤동(允童)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10남 담양군(潭陽君) 거(璖)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일찍 죽었으니 시호는 이양(夷襄)이다.
1녀(一女) 정현옹주(貞顯翁主) 상침 송씨(尙寢宋氏)가 낳았다. 좌익공신 좌찬성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아내이다. 2남을 두었다. 사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참의 은(垠)이다.
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안의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선(璿)이다.
태종 18년 무술 6월에 책봉하여 세자가 되었다. 8월에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제 벌써 19년이나 되었다. 아침에나 밤에나 삼가며 두려워하였으나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내리고 또 묵은 병이 있으니, 이제 세자에게 이 자리를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정부와 육조(六曹) 및 모든 공신들이 궁문을 헤치고 들어와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여 내렸던 명령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이 보평전(報平殿)에 거둥하여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빨리 세자를 불러들여 국새(國璽)를 전하고, 곧 자기의 거처를 연지동(蓮池洞) 별궁으로 옮겼다. 세자가 그 뒤를 따라가서 국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內庭)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이 되었는데도 윤허하지 않았다.드디어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조하(朝賀)를 받고 죄인에게 사면령을 반포하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上王殿)에 사은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는 모두 상왕에게 여쭙기로 하였다.
11월에 세종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상왕에게 성덕 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와 대비(大妃)에게 후덕(厚德)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상왕의 시어소(時御所)에 행차하여 경헌례(敬獻禮)를 행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전한 것은 애초에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뜻대로 편히 지내고자 해서이다. 다만 군사(軍事)에 대해서만 친히 보살피려 하는 것은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의 나이가 서른이 되고 일에 경험이 많기를 기다려서 모두 전해주려 한다.지난 날에 만일 모든 아들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어찌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이는 저 양녕(讓寧)이 시기하고 음험한데 모든 아우들이 제각기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면 어찌 서로 용납하였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못한 것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세종이 상왕에게 상수(上壽)할 때 뭇 신하들이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상왕은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피한 것은 복을 쌓아두고자 해서였는데 이제 와서 도리어 더욱 높아졌도다.” 하였다.술에 취하자 뭇 신하가 춤을 추었는데, 상왕 역시 춤추며 이르기를, “왕위를 맡기는데 만일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면 비록 걱정을 잊으려 한들 되었겠는가. 임금은 참으로 개국한 뒤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룩할 임금이로다.” 하였다. 《국조보감》
○ 정종(定宗)이 피서하기 위하여 광나루에 머무를 때,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동교(東郊) 대산(臺山)에 거둥하여 정종을 맞이하고, 술자리를 차려 매우 즐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상왕이 흰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말에서 내려 지신사 하연(河演)을 불러 이르기를, “내 평소부터 이 말이 길이 잘든 것을 사랑해 왔는데, 이제 이 말을 임금에게 주리라.” 하고는, 곧 상승(尙乘)으로 하여금 안장을 갈아서 임금께 드리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상왕을 뵐 때, 사신 조량(趙亮)과 이절(易節)이 뒤를 따라 이르렀기 때문에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조량이 찬탄하기를, “하늘이 이런 선경을 마련해 주었으니 전하께서는 한가하게 지내며 수양하기에 가장 알맞고, 새 전하께선 조정[明朝]을 공경하며 늙으신 상왕을 높여 충성과 효도가 겸전하시니, 내 일찍이 사신 간 나라가 많았으나 새 전하처럼 어진 분은 보지 못하였오.” 하고, 이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손의 어진 것은 사지 못하리.”라는 옛 구절을 읊었다. 이에 상왕이 사례하기를, “이제 사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절로 내리오.” 하였는데, 그 자리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국조보감》
○ 상왕이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차하였을 때에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서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하나이다.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가 없었느니라.” 하였다.
또 일찍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임금께서 날마다 와 이야기를 하니 매우 좋기는 하나, 정사를 폐할까 두렵다. 네가 가서 여쭈어 격일로 오게 하라.”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상감께서는 매양 일을 처리하신 뒤에 와 뵙는 것이며, 와 뵙는 동안에도 일이 있으면 곧 따라 여쭙게 하여 지체가 없습니다. 상감께서는 늘 옛날 문왕이 그 아버지께 날마다 세 차례 뵙던 일을 본받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격일로 와 뵈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그러면 호위하는 군사가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다만 매일 당번된 금군만을 거느리고 올 따름이니, 뉘가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 2년 경자에 대비가 돌아가셨다. 상례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부르짖고 슬퍼하여 수일 동안을 음식을 들지 않았으며, 때마침 날씨가 덥고 습했으나 평상을 버려두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모신 이들이 몰래 유지(油紙)를 그 밑에 깔았더니, 세종이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명하였고, 큰 비가 와서 물이 여차(廬次)에 스며 들었으나, 임금은 그래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여 드디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날이 밝자 곧 여차로 돌아왔다. 《국조보감》
○ 3년 신축에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상왕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려는 뜻을 상왕에게 여쭈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태상왕의 호를 사양함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 태조께서 태상왕이 되었고, 둘째는 인덕전(仁德殿 정종)이 태상왕이 되지 못했으며, 셋째는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굳이 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玉冊)ㆍ금보(金寶)로써 상왕을 높여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모셨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의 병이 위독하여 신궁(新宮)으로 옮길 때, 임금이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금이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뫼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태상왕이 돌아가신 뒤,흙비[霾雨]가 심하여 대신들이 술을 드시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 꾸지람을 내려 이르기를, “상중에 술을 마심은 예법이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비례(非禮)의 말을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 병환이 심하시던 날로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이제 이미 20여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옮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 태종의 초상에 명 나라 황제가 내관 유경례(劉敬禮)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부물(賻物)을 주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렸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나가서 예를 거행할 때 임금이 우시니, 사신도 또한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가 모두 우는 정경을 보니 더욱 부왕께서 인후하고 덕이 있었음을 알겠나이다.” 하였고,또 세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덕스러운 얼굴이 전하와 같으니, 이는 한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술을 돌리자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사신이 관반(館伴)황희(黃喜)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군신의 분수가 진실로 엄하기는 하나 전하께서 일어서심은 형제의 천륜을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이 “전일 우리나라에서 촉왕(蜀王)이 들어와 황제를 뵈올 때, 황제께서 동궁에게 명하여 길을 비키게 하더니, 이제 전하가 효녕을 대우함이 이와 같소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 임금은 침착하고 과묵하며 제왕의 위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과 지혜는 만민에 뛰어난 성인이었고, 너그러움과 온유함은 뭇 백성을 용납하고 기르는 덕을 지녔다. 사물을 처리함에 혼자서 판단하여 주장이 있었고 위엄있고 모범이 되어 근엄하고 중정한 조심성이 있었으며, 정미한 의리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사물의 조리를 세밀히 관찰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네 번째 인경 소리가 나면 일어나 옷을 입고 평명(平明)에 조회를 받고 나서는 곧 일을 보고, 다음에는 신하를 번갈아 만나보고, 다음에는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내전(內殿)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서적을 보아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시행되지 않음이 없었고 일은 처리되지 않음이 없었다. 〈신도비 지문(誌文)〉
○ 임금은 늘 이르기를 “나는 서적에 대해서 눈으로 한번 거친 것은 곧 잊지 않았다.” 하였으니, 총명과 글 좋아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나는 궁중에 있을 때 손을 거둔 채로 한가히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제왕으로서의 공덕은 백왕(百王) 중에서 높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니,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만년에 기력이 줄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는 더욱 유의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해서 모든 책을 편찬케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모두 직접 재단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몇십 권에 이르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동북 지방의 다른 민족들이 모두 복종하여 국경 안이 편안하니, 당시 사람들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일컬었다. 《국조보감》
국초에는 고려가 망한 뒤를 이었기 때문에 예악에 손댈 겨를이 없었는데, 임금이 비로소 종(鍾)ㆍ경(磬)과 당악(唐樂)ㆍ국악의 악보(樂譜)를 제정하고,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시의(時儀 물시계)를 정하였으며, 《칠정편(七政篇)》ㆍ《오례의(五禮儀)》ㆍ《삼강행실(三綱行實)》ㆍ《명황계감(明皇誡鑑)》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 등이 모두 임금의 직접 재단에서 나온 것이다.정인지(鄭麟趾)의 〈영릉비서(英陵碑序)〉에, “실로 동방의 요순이다.” 한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기(秘記)에 전하기를, “황려(黃驪 여주)의 산에는 마땅히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영릉(英陵)이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임금은 모든 진기한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림원(上林苑)에 명하여 온갖 꽃과 새들을 모두 민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이 길들인 사슴을 바치고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상한 새나 기이한 짐승은 옛 사람들이 경계한 바이니, 들이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이 경회루 동편에 남는 재목으로 별실(別室)을 지었는데, 돌 층대를 쓰지 않고, 또 짚으로 지붕을 올려 되도록 검소하게 한 후 늘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문 밖에 짚자리가 깔려 있음을 보고 물으시기를, “이건 누가 한 짓인가.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내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안에 들이지 말라.” 하였다.
○ 강음현(江陰縣) 백성 조원(曺元)이 농토 문제로 관가에 송사를 할 때, 현관(縣官)이 송사를 지체한다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밝지 못하여 이제 이따위를 수령으로 삼았다.” 하였다. 금부(禁府)와 삼성(三省)의 관원이 모두 죄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심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달아서 백성이 몹시 괴로운데, 조원의 고을 수령이 이러한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손님과 술을 마시느라고 송사를 지체하고 판결하지 않았으니, 조원의 말은 다만 이를 미워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하고, 끝내 죄 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 임금이 일찍이 병이 나서 누웠는데, 나인(內人) 등이 무당의 말에 혹하여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를 하니 유생들이 무녀를 쫓아냈다. 중사(中使)가 크게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세종이 병든 몸을 부축케 하여 일어나 앉으면서 이르기를, “내 일찍이 선비를 기르지 못했는가 염려하였는데, 이제 선비들 기운이 이러하니 내 무슨 걱정을 하리오. 이 말을 들으니 내 병이 낫는 것 같구나.” 하였다.
명종조(明宗朝)에 유진동(柳辰仝)이 이 이야기를 경연에서 아뢰며, 말하기를, “군주가 선비의 기운을 돋구어 주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한 어린 궁녀가 후궁(後宮) 중 가장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청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하교하기를, “아녀자가 감히 간청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하겠다.” 하고는, 곧 물리쳐 멀리하여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측실(側室) 홍씨(洪氏)의 오라비 유근(有根)이 사랑을 받아 임금이 벗은 헌옷은 반드시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가 일찍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을 때, 임금이 거둥하다가 연(輦) 끄는 말이 저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에 유근은 자기 말을 스스로 자랑하며 자기 말로 대신 끌게 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극형을 청할 것이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하고, 유근을 도보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듣고 유근을 베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은 놓아주고는 그를 한 평생 버렸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9년 정미에 금천(衿川)에 행차하여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과 눈보라가 매우 치며 물결이 사나와 배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다. 명령을 내려 금천의 쌀과 콩을 가져다가 호종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고 새벽이 될 무렵에야 겨우 건넜었다.좌의정 이직(李稷)이 길가에서 뵈었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종께서는 매사냥을 구경하러 가셨지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으니, 매우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 이제 잘못하여 남의 말을 듣고 강을 건너갔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꾸짖은 것이오.” 하였다.
사헌부에서 백관이 미처 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禮官)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오늘 일은 나의 과오이니 논하지 말라.” 하고, 이로부터는 다시 강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해동청(海東靑 보라매)을 바치고 금은(金銀) 바치는 것을 감해달라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이르기를, “해동청은 얻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뿐더러 달아나기라도 하면 응사(鷹師)가 그것을 찾기 위해 촌락에 침입하게 되어 백성에게 폐해가 되므로 내가 모두 놓아 버렸다.”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사책(史冊)에 써서 만세에 법이 되도록 할 만 합니다.” 하였다.
○ 임금은 항상 소갈증으로 고생하였다. 대언 등이 아뢰기를, “의원의 말에 이는 먼저 음식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흰 수탉ㆍ누런 암탉ㆍ양 고기가 모두 갈증을 다스릴 수 있다 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날마다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내 어찌 내 한 몸을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해치겠는가. 하물며 양이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님에랴.” 하였다. 대언 등이 다시금 아뢰기를, “관가에 기르는 양이 번식하니, 청컨대 한번 드셔보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임금이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구경할 때, 말을 천천히 몰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인 새 정자에 올랐다. 때마침 단비가 내려 잠깐 동안에 온 들이 흡족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였다.
○ 임금이 항상 근정전(勤政殿)에 앉아서 대신과 더불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 되게 하려 하였으므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정부에서 물러가서도 오히려 옷을 끄르지 못하였으니, 불시에 부르는 일이 있을까 해서이다. 《정암집(靜菴集)》 〈연주(筵奏)〉
○ 임금이 신하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당대에는 사대부로서 극형을 당한 이가 없었다. 〈지장(誌狀)〉


 

[주D-001]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맡은 관원.
[주D-002]여차(廬次) : 상주(喪主)가 거처하는 곳.
[주D-003]옥책(玉冊)ㆍ금보(金寶) : 왕이나 후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 금보와 옥책을 드리는데, 보(寶)는 도장과 같은 것이며, 책(冊)은 거기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4]관반(館伴) : 외국 사신이 유숙하는 관(館)에서 접대의 책임을 맡은 사람.
[주D-005]응사(鷹師) : 매를 다루는 사람.

 

 


                                   중랑천 넘어 상계동 수락산 정상부 모습  

                                  


                                   최근에 단장된 무수골 계곡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