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3.3.8. 삼각산 산행

삼각산 관련자료

아베베1 2013. 3. 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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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紀碑)

 

  북한산 금위영 이건기

숙종이 37년 신묘년 4월에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에 명을 내렸다. “백제의 옛 성을 개축한 뒤 각각 군영을 설치한 다음 목적지에 군량을 저장하고 무기를 준비하여 국가가 변란을 맞아 다급할 때 장차 서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내린 이 요새를 지킬 수 있게 하라.”
그 해 10월 성을 완축한 뒤 금위영을 설치했다. 용암(龍巖) 동남쪽으로부터 보현봉(普賢峯) 아래까지는 2821보이고 1,065개의 살받이가 있다. 성문은 대동문(大東門)과 소동문(小東門) 둘이고 문 위에 초루(譙樓)와 암문(暗門) 두 개를 설치했다. 시단봉(柴壇峯)에 장대를 짓고 그 아래 방옥(房屋) 10간을 두니 성랑 61채에 모두 178간이다. 보국사(保國寺), 보광사(普光寺), 용암사(龍巖寺), 태고사(太古寺)의 네 절에 소속시켰다.
군대의 영사와 창고는 90여 간으로 처음에는 소동문 안에 세웠는데, 그 지세가 높고 비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물길이 나서 무너지기 쉬워 을미년(1715년) 3월에 보국사 아래로 옮겨 세웠다.
초관 곽의빈(郭義賓)이 재력을 잘 관리하고, 파총 장우진(張友軫)이 공사를 잘 감독하여 8월에 완성을 고하게 되었다. 돌계단 120보를 쌓고 중당은 부손(負巽:동남을 뒤로 함) 방향으로 지었는데, 중군 이하가 거처할 곳과 창고, 행랑 등 모두 해서 145간이다.
산이 깊은 물을 품고 있어 맺은 것이 더욱 완고하니 영원히 보호할 만한 곳이라고 한다. 을미년(1715)은 곧 대명 숭정 갑신년 후 72년이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 기록.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 北漢山城 禁營移建記
今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 命訓
  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
  置軍營御信地廋糧備械 國家
  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
  也其十月城役完本營等自龍巖
  東南至普賢峯下二千八百二十
  一步一千六十五垜城門二曰大
  東小東皆上設譙樓暗門二柴壇
  峯爲將臺下有房屋十間城廊六
  十區凡一百七十八間保國普光
  龍巖太古四寺屬焉營舍倉庫九
  十餘間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
  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
  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哨官
  郭義賓經紀財力把摠張友軫董
  領攻役至八月告成石砌一百二
  十步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
  倉廏門廊共一百四十五間山抱
  水深結構增固可以永護儲胥云
  乙未卽 大明崇禎甲申後七十
  二年也 都提調李頣命識
 

 

 

  北漢僧徒節目」
北漢山城卽保障重地也寺刹之剏建僧徒之募」
入是豈徒然哉卽由於爲山城守護之意是去」
乙夫何挽近以來僧殘寺敗莫保朝夕此曷故焉」
盖僧徒之不殫燥濕竭力奉公者渠之所望惟」
在於摠攝一窠而每當差代城外僧圖差之弊」
比比有之由是而僧無固志散而之四勢所固然」
今當摠攝瓜遆之時若不申明定式以圖永久」
則其何以慰悅僧徒俾盡守護之責哉況受」
敎定式不啻鄭重則其在遵奉之道豈敢少」
忽茲成節目刻之于石爲去乎依此遵行毋墜成」
憲事」
一 摠攝有闕差代時依今番例初受缿笛更捧」
圈點後以多點施行俾知其公平無私之意是」
齊」
一 今此申明定式之後如有城外僧圖差者城內」
諸僧以受 敎定式及今番節目齊訴營門」
期無毀劃之地是齊」
一 今番定式寔出於爲僧徒支保之意則摠攝」
軆此憧憧之心寺弊則期於矯革奉公則克盡」
恪勤俾有來頭實效之地是齊」
乙卯五月 日寺洞金 等內」

 

 

 

북한산승도절목명문

북한산성은 국가를 보호할 중요한 지역이다. 사찰을 창건하거나 승도를 모집하는 것이 어찌 헛되이 그러겠는가? 곧 산성을 쌓아 수호하려는 뜻이거늘, 최근에 승도가 없어지고 사찰이 피폐하여 조석으로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승도들이 질거나 마른 것을 꺼리지 않고 힘을 다해 나라 일에 봉사하는 것은 장수에게 기대하는 바 오직 총섭 한 자리에 달려있을 따름인데, 매번 교체할 때마다 성 밖의 승려로 임명하는 폐단이 빈번하다. 이로 말미암아 승도들이 성을 고수하려는 뜻을 갖지 않고 흩어져 사방으로 가버리니 형세가 실로 당연하다. 이제 총섭의 임기가 다해 교체할 때 만약 정해진 규칙을 거듭 밝혀서 영구함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어찌 승도들을 위로하여 성을 수호하는 책무를 다하게 하겠는가? 하물며 임금의 교지를 받아 정한 규칙은 정중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떠받드는 도가 있어야 하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절목을 지어 바위에 새기고는 이에 따라 시행할 것이니, 만들어진 법령을 어기지 말지어다.

 

 

다산시문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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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행궁을 바라보며[望行宮] 북한산성은 백제 때부터 있던 것인데 숙종조(肅宗朝) 말기에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증축하였다. 내성과 외성이 있다


연로는 사자재로 뚫려 있고요 / 輦路通獅嶺
별궁은 기러기재 인접하였네 / 離宮接雁峯
진경은 검각 잔도 의지하였고 / 秦京依劍閣
연부는 거용 요새 믿었고말고
/ 燕府恃居庸
좁은 벼랑 사다리 경사 심하고 / 窄壁雲梯急
굽은 골짝 쇠사슬 겹겹이로세 / 回谿鐵鎖重
그런대로 열흘은 버틸 만한데 / 堪爲旬日計
이곳에 몇 사람을 수용할 건고 / 能得幾人容
묘당에서 짜낸 지혜 치밀하였고 / 廊廟謨猷密
백성들 불평없이 부역 응했네 / 黎元力役恭
올라보니 가슴에 감개무량해 / 登臨有感慨
저녁종 울릴 때까지 홀로 서 있네 / 獨立到昏鍾


 

[주D-001]연로 : 임금이 탄 수레나 가마가 다니는 길.
[주D-002]진경은 …… 믿었고말고 : 진경은 진 나라 서울 장안(長安)이고 검각은 사천(四川)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 잔도(棧道)의 이름이다. 사천과 섬서(陝西) 사이의 주요 통로로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연부는 북경(北京)을 가리키고 거용은 북경 창평현(昌平縣) 서북쪽 군도산(軍都山)에 있는 관(關) 이름이다. 우리나라 한양이 북한산을 등에 업고 의지하는 것이 장안은 검각을, 북경은 거용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聖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命訓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置軍營於信地。庾粮備械。國家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也。其十月。城役完。本營。築自龍巖東南。至普賢峰下。二千八百二十一步。一172_258c 千六十五垜。城門二。曰大東小東。皆上設譙樓。暗門二。柴壇峰爲將臺。下有房屋十間。城廊六十區。凡一百七十八間。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營舍倉庫。九十餘間。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哨官邢義賓。經紀財力。把摠張友軫。蕫領功役。至八月告成。石砌一百二十步。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倉廏門廊。共一百三十七間。山抱水深。結搆增固。可以永護儲胥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