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안효공 신도비문 (펌)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문

아베베1 2013. 3. 17. 15:01

 

 

 

 

 

 

양효공안맹담신도비(良孝公安孟聃神道碑)  
 
 
     
  良孝公安孟聃神道碑
良孝安公墓碑(篆題)
有明朝鮮國駙馬綏祿大夫▨昌尉諡良孝公▨▨神道碑銘 幷序
……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河東▨ 鄭麟趾 撰
天順六年壬午十二月二十五日乙酉 我世宗莊憲大王之女貞懿公主駙馬延昌尉安公 以疾卒於第 春秋四十八矣 宗戚曁士 大夫 無不駭且悲焉 訃聞 上▨悼輟朝 其賜祭文 有齠齕同遊痛貫衷曲之語 諡良孝公 越明年癸未二月二十五日甲申有司以禮葬于楊州道峯山海村洞之原 公主隨柩號泣 親臨窆棺 虞卒哭朝夕上食望奠以至祥禫之祭 必親侍靈側 悲不能已 水漿不時進 毀瘠不自勝 制盡 立廟制度 進退升降之節 動遵禮法 諸子無敢違異 主之無驕貴相盡婦道 古今罕有 因以知公之以禮持家也 成化二年丙戍 季子來曰 石己具矣 子有婚姻之舊 請銘 余惟吾豚犬會爲長婿 夫婦皆蚤死 丙子哭婦 丁丑哭子 五年而又哭公 可勝悲哉 謹按其狀 公姓安氏 諱孟聃 字德壽 竹山望族也 高麗輸忠保節賛化功臣 重大匡 竹城君 右文舘大提學 知春秋館事 諡文貞 諱克仁 生奉翊大夫 西北面都巡問察理使兼平壤府尹諱淑老 察理使 生嘉善大夫 咸吉道都觀察黜陟使 咸興府尹 諱望之 觀察使 娶河陽世家 奉常主簿許之信之女 以永樂十三年乙未十二月二十八日生公 幼而端重聰慧 宣德三年戊申 齒尙公主 封竹城君 階崇政大夫 考贈崇政大夫議政府賛成 母封莊信宅主 祖贈正憲大夫 吏曹判書 祖母黃氏 封貞夫人 壬子 封延昌君 正統七年壬戍 陞崇祿大夫 九月甲子 改官制爲光德大夫 景泰元年庚午七月 凡駙馬改名稱尉 所以別宗室也 四年癸酉十一月 加成祿大夫 天順元年丁丑正月 陞綏祿大夫 位極矣 八月 賜原從功臣券 加贈考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母加封貞敬大夫人 三年己卯八月 丁大夫人喪 五年辛巳十月 服除 還拜本職 公不事生產 善草書射御 曉音律 備藥物施與 不以富貴生驕 行無引卒 食不重味 又好浮屠法 盖其天性然也 惜乎 天不之年 命也夫 生四男二女 長曰如獺 昭威將軍行虎賁衛副護軍 次曰温泉 朝散大夫 濟用副正 喪中歿 次曰桑鷄 通德郎 宗親府典簿 次曰貧世 宣略將軍 龍驤衛副護軍兼宣傳官 女長適折衝將軍 龍驤衛大護軍 世子左翊衛鄭光祖 即吾之嫡長子也 夫婦皆蚤死 次適通政大夫兵曹叅知韓致禮 虎賁 娶護軍安耆之女 生一男曰元卿 一女幼 副正 娶懷議都正菆之女 生一男曰彥卿 二女皆幼 典簿 娶尙衣院僉正安訓之女 生一男曰夢卿 一女幼 龍驤 娶中護軍李繼賢之女 大護軍 生一女幼 參知 生一男曰韓翊 二女皆幼 銘曰
公自趨庭 夙承義方 妙齡尙主 不顯其光 貴而能降 行己有恪 富而好禮 自奉甚約 克儉爲家 與物無竸 尊德撝謙 接人以敬 孝且友愛 終無間言 不壽奈何 誰叩帝閽 主盡婦道 俔天之匹 慶流千載 子孫逢吉
成化二年 丙戍 七月 日 立
貧世 拜書 幷篆
 
 

 

 

양효공안맹담신도비

유명조선국부마 수록대부▨창위 시양효공▨▨신도비명 병서. 좌익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하동▨ 정인지 찬

천순 육년 임오년 십이월 이십 오일 을유에 우리 세종장헌대왕의 딸 정의공주 부마 연창위 안공이 병환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48세였다. 종척과 왕실의 외척이며 사대부가 놀라고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부음이 들리자 임금은 크게 애도하고 조회를 폐하였다. 제문을 내렸는데, “어릴 적부터 함께 놀아 아픔이 가슴을 찌른다.”는 말이 있었다. 시호는 양효공이라 하였다. 그 이듬해 계미년 이월 이십 오일 갑신에 유사에서 예로써 양주 도봉산 해촌동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주는 영구를 따르며 소리쳐 울부짖으며 친히 하관을 지켜보았다. 우제 · 졸곡 때 조석 상식과 삭망전에서부터 소대상 · 담제 등의 제사까지 반드시 친히 영좌 곁에서 모셨는데,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제때에 먹지 않아 몹시 허약해졌다. 복제가 끝난 뒤에 사당을 세우는 제도와 나아가고 물러나며 오르내리는 절차를 예법대로 준수하니 여러 자식들이 감히 어긋나게 하지 못했다. 공주의 귀한 신분으로 교만하지 않고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은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니, 공이 예로써 가정을 지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화 이년 병술년에 공의 막내아들이 찾아와 말하기를,“돌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당신께서 혼인을 한 관계가 있으니 명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생각하여 보니, 내 아들이 일찍이 공의 맏사위였는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었다. 병자년에 며느리를 잃고 정축년에 아들을 잃었는데, 그 후 오년 만에 또 공을 잃으니, 그 슬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성은 안씨이고 휘는 맹담이며, 자는 덕수이며, 죽산의 대족이다. 고려 수충보절 찬화공신 중대광 죽성군은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를 지냈는데, 시호는 문정이다. 휘 극인은 봉익대부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겸평양부윤 휘 숙노를 낳았고, 찰리사는 가선대부 함길도 도관 찰출척사 함흥부윤 휘 망지를 낳았다. 관찰사는 하양의 세가인 봉상시 주부 허지신의 딸을 맞이하여 영락 십삼년 을미년 십이월 이월 팔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단아하고 전중하며 총명하였다. 선덕 삼년 무신년에 공주를 배필로 맞아들여, 죽성군에 봉해지고 숭정대부 품계를 받았다. 아버지는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에 증직되고 어머니는 장신택주에 봉해졌으며, 조부는 정헌대부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조모 황씨는 정부인에 봉해졌다. 공은 임자년에 연창군에 봉해지고, 정통 칠년 임술년에 숭록대부에 오르고, 구년 갑자년에 관제를 고쳐 광덕대부로 되었다. 경태 원년 경오년 칠월에 일체 부마 칭호를 고쳐 위라 부르니 종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사년 계유 십일월 성록대부에 오르고, 천순 원년 정축년 정월에 수록대부에 오르니 벼슬이 최고에 올랐다. 팔월에 원종공신 녹권을 하사하니, 아버지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으로 올려 증직하고 어머니는 정경대부인으로 올려 봉하였다. 삼년 기묘년 팔월에 대부인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오년 신사년 시월에 상복을 벗자, 도로 본직에 제수되었다. 공은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초서와 활쏘기 말타기를 잘하고 음률에 밝았으며 약물을 갖추어 놓고 남에게 봉사하였다. 부귀하다 하여 교만하지 않았고 길을 갈 때도 보좌하는 하인이 없었으며 식사할 때는 음식을 두 가지 이상 놓고 먹지 않았다. 또 불법을 좋아하였는데 대체로 천성 때문이었다. 아깝게도 하늘이 수명을 내려주지 않았으니 운명인 것이다.

공은 사남 이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달은 소위장군 행호분위 부호군이고, 차남 온천은 조산대부 제용감 부정인데 거상 중에 죽었고, 셋째 상계는 통덕랑 종친부 전부이고, 넷째 빈세는 선략장군 용양위부호군 겸선전관이다. 장녀는 절충장군 용양위 대호군 세자좌익위 정광조에게 시집갔다. 곧 나의 적장자인데 부부가 다 일찍 죽었고, 차녀는 통정대부 병조 참지 한치례에게 시집갔다. 호분은 호군 안기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을 두었는데 원경이라 하고, 일녀는 어리다. 부정은 회의도정 추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을 두었는데, 언경이라 하고 이녀는 다 어리다. 전부는 상의원 첨정 안훈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을 두었는데 몽경이라 하고 일녀는 어리다. 용양은 중호군 이계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대호군은 일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참지는 일남을 두었는데 한익이라 하고 이녀는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은 어릴적 부모로부터 일찍이 의로운 법을 배우고
묘령에 공주의 배필이 되었으니, 그 영광 아니 큰가.
귀한 몸으로 고개 숙여 행실을 진실하게 하였고
부자로서 예를 좋아하여 스스로 매우 검소하였네.
검약으로 가정을 꾸려가니 남들과 다툼이 없었고
덕있는 이를 높이고 자신을 겸손히 하여
남을 대할 때 공경으로 하였네.
효도하고 우애가 두터워서 끝내 비방이란 없었는데,
어인 일로 장수 못했는지 그 뉘 옥황상제께 여쭤보소.
공주는 아내의 도리를 다했으니 흡사 하늘이 내신 배필이어라.
그 경사 천추에 흘러 자손은 길운을 만나리.

성화 이년 병술 칠월 일 세움. 빈세 비문과 두전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