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북한산)은 한양 鎭山이며 병풍산이기도 하다.
조선이 1392년 개국 이후 1395년 개성에서 한양인 현재의 수도로 남하를 하여
한 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600여년을 지켜오면서 수도 서울의 진산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주간룡의 산이기도 하다.
한때는 백제의 舊止 , 고구려의 구지 , 신라의 구지에서 수천년을 지켜온 산
동국여지승람 경기도 양주에서 보면 인수봉 백운봉 국망(만경대)를 보고 삼각이라 불러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
시대에 따라 부아악, 화산, 정산, 북한 ,삼각 등으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리 불리기도 한다.
백제의 고성과 북한산성,행궁지 진관사 승가사 국령사 원효사 노적사 증흥사 등의
많은 사찰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오악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을 뜻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백운대에 올라'라는 시에
어느 뉘 뾰족하게 깎아 다듬어 / 誰斲觚稜巧
하늘 높이 이 대를 세워 놓았나 / 超然有此臺
흰 구름 바다 위에 깔려 있는데 / 白雲橫海斷
가을빛 온 하늘에 충만하구나 / 秋色滿天來
육합은 어우러져 결함 없건만 / 六合團無缺
한번 지난 세월은 아니 돌아와 / 千年漭不回
바람을 쏘이면서 휘파람 불며 / 臨風忽舒嘯
하늘 땅 둘러보니 유유하기만 / 頫仰一悠哉
서도 서울의 건치 연혁의 내용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취하여 성을 쌓고,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성을 나가 달아나다가 해를 당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설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韓山州) 군주(軍主)를 임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 2보(輔)를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여 양광도(楊廣島)에 예속시켰다. 문종(文宗) 때에 승격시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아, 유수 1명ㆍ부유수 1명ㆍ판관(判官) 1명을 두고 이웃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의하여,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도성(都城)을 건립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고, 일자(日者 천문관)ㆍ문상(文象)이 따라서 주장하니, 임금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경도(京都)의 구장(口帳 호구장부)ㆍ시전(市廛)ㆍ가사(家舍)ㆍ전토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투구(鬪毆 쟁투와 구타 상해)ㆍ주순(晝巡)ㆍ검시(檢屍)ㆍ거량고실(車輛故失)ㆍ우마낙계(牛馬烙契) 등의 일을 맡게 하여, 판부사(判府事)ㆍ윤ㆍ소윤(小尹)ㆍ판관ㆍ참사(參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예종조(睿宗朝)에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이라 하고 소윤을 서윤(庶尹)이라고 하였다. 영종 조(英宗朝)에 참군을 고쳐 주부(主簿)로 하였는데 그 밑에 5부(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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