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3.3.26. 도봉산리딩(4차)

2013 .3.26. 도봉산 리딩

아베베1 2013. 3. 26. 20:10


 



 도봉산 초보산행 

 아베베 대장 






































1


 
 
 
아베베|조회 19|추천 0|2013.03.26. 18:17http://cafe.daum.net/4050mountain/GIyX/19225 

 
  1.산행 제목  도봉산  초보산행       
2.일       시  2013. 2.26. 11:20 -16 :20
3.코       스  매표소 - 산정약수 - 보문능선 - 우이암 정상 - 오징어바위 -
  할미바위 -처녀바위 -총각바위 -무수골 -
   난향원 -
 윗 무수골 - 진주유씨 선산 - 왕실묘역길 -도봉산 -능원사 - 매표소   
4.대       장  아베베
5.총       무  아베베 
6.참석 인원 총    명 정회원 8 명  아베베 /노다지님/ 램프님/  오지연님/ 소율님 / 
 나윤정님/ 고운님/ 
 나연희님/ 
준회원 1 명  오지연 2
7.발전 기금  대장 제외 8,000 원 
8.뒤풀이내역  없음 
9.뒤풀이식당  
 

 

  [후기]


  도봉의 산행 자주로 가는 곳이지만 보문능선을 걸어서   산을오르기 시작하였다 

  봄이오는 길목에서 나뭇잎과  자연은  봄을 준비하는 모습이... 

  저를 포함한 아홉분의 산우님이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보문능선은 평일임에도  산을 오르시는 분이 많으시다 각자의 모습으로 

  시작은 조금 힘이 들었지만 중간중간 위험구간에는 남산우님이 도움을 주셨기에 통과를 할수

  있었다  우이남능선의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기차바위, 오징어바위 할미바위 처녀바위 총각바위 용바위  각각 올라서 보며 느낌은 산우님의 

  각자의 생각 일것입니다  

  할미바위를 올라본 모습이 아마도 최고의 하일라이트 였다 

 사잇길 살금 살금 서로의 도움으로 정상에 올라서 바라본 할미바위는 아마도 절경중의

 절경이었다 근자에 산우님이 올라보지 못한 바위...  

 

  산의 아름다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혜택을 준다 

  하지만 오르지 아니하고 게으른 자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줄수가 없을 것이다

  부지런 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많은 혜택을 줄것으로 사료 됩니다   

    

 오솔길 따라서 문화재 고분등을 사찰등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하루는 조용 하면서 

 알찬 산행 이었습니다

 

 산행에 참석하신 산우님 즐거운 산행 이었습니다 

 금요일의 도봉산을 기약 하면서  간단하게 몆자 남깁니다 

 산우님과 함께한 도봉의 시간이 하루의 줄거움과 행복을 주는 시간이 된것을 감사하게 ...   

 

행복한 산행 즐거운 하루를 위해 노력하고 존경하고 배우는 사람 

  

                         아베베 올림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여수례(旅酬禮)를 행하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는데 나는 ‘공(空)’ 자를 얻었다.


봉우리 높이 솟은 도봉산이여 / 峨峨道峯山
숲 나무 울창하다 서울 동쪽에 / 鬱鬱神京東
그 아래 일백 굽이 흐르는 시내 / 下有百折溪
수석 서로 어울려 영롱하다오 / 水石相玲瓏
삼나무며 소나무 흰 구름 닿고 / 杉松矯白雲
줄사철이 청풍나무 타고 오르네 / 薜荔裊靑楓
옛 현인 은거하여 소요하던 곳 / 昔賢所盤桓
사당 안에 놓인 제기 엄정하여라 / 俎豆儼明宮
선현의 곧은 절개 되새겨보니 / 曠世挹遺烈
진한 감동 나약함을 떨쳐 세우네 / 感慨激懦衷
삼월이라 늦봄에 이곳 찾으니 / 我來三月暮
초목은 그새 벌써 녹음 짙은데 / 草樹已葱蘢
여러 명의 푸른 옷 우리 유생들 / 侁侁靑衿子
무우단 부는 바람 함께 쏘일 제 / 共追舞雩風
조용한 뜰 늙은 괴목 그늘이 지고 / 閒庭老槐陰
해묵은 제단에는 붉은 꽃 날려 / 古壇飛花紅
사흘 동안 머무는 즐거움이란 / 留連三日歡
취한 밤과 맑은 대낮 가릴 것 없네 / 夜飮淸晝同
주나라 예법 따라 예를 행하며 / 揖讓用周禮
두 말들이 술동이 비지 않으니 / 朋樽殊不空
거문고를 탈 것이 무어 있으랴 / 點瑟何用鼓
샘 소리가 다름 아닌 거문고 가락 / 鳴泉自絲桐
세속의 얽매임을 떨쳐버리자 / 物累良已遣
깊고도 조화로운 도심이로세 / 道心穆以融
한번 웃고 세상 속 되돌아보니 / 一笑顧世間
봄날의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 野馬春濛濛
도봉산 봉우리만 구름 위 솟아 / 獨有雲表峯
풍진 속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네 / 不墮塵
벗들이여 여러분께 당부하거니 / 歎息謂諸子
영원히 이끗 명예 멀리했으면 / 永謝利名叢


 

[주C-001]여수례(旅酬禮) : 제사를 마친 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연회를 즐기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술잔을 권하는 의식이다.
[주C-002]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 : 소식(蘇軾)의 《동파전집(東坡全集)》 권98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의 끝구이다.


농암집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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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벗들이 차례로 산을 나가게 되자 시냇가에서 술을 부어 전별을 하다. 당(唐)나라 시인이 쓴 시의 운자를 써서 각기 절구 두 수씩 지었다.


따뜻한 봄산에는 사슴 뿔 자라나고 / 日暖春山鹿養茸
빽빽한 숲 속에는 안개가 자욱한데 / 煙蘿漠漠樹重重
술잔 비자 돌에 누워 이별의 정 생각타가 / 空樽臥石生離思
시내 서쪽 네댓 그루 솔 사이를 서성이네 / 徙倚溪西四五松

두 번째

구름 같은 객이 되어 놀던 생각 못 잊는데 / 雲如孤客戀羣游
시냇물은 벗님 따라 천천히 흘러가네 / 水逐歸人少緩流
오늘밤 텅 빈 산에 소쩍새만 울어댈 터 / 今夜空山子規裏
밝은 달아 누각 머리 비추지 말아다오 / 不須明月更樓頭

 

 

상촌선생집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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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66수
유희경 시축에 제하다[題劉希慶軸] 2수


유생(劉生)은 시장에 사는 사람이지만 십분에 일의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치를 하지 않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례(詩禮)로 몸단속을 하였다. 도봉산(道峯山) 아래다 집을 짓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칠십 구세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동안(童顔)이어서 내 그의 사람됨을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시를 써달라기에 이렇게 읊어 그에게 주었다.

수레 앞에 여덟 추졸 그도 나는 소용없고 / 車前八騶吾不管
재상이고 삼공이고 그도 모두 부질없어 / 兩府三事都悠悠
흰구름이 항상 있고 흐르는 물 옥과 같은 / 白雲長在水如玉
시내 머리에 집을 지은 그대가 제일 부럽네 / 羨爾結廬溪上頭

기이(其二)

십년 동안 쫓겨났다 이제야 돌아오니 / 十年放逐今始還
이도 머리도 다 빠지고 허리 다리 뻣뻣하다네 / 齒髮已空腰脚頑
뺨 고이면 아침에 시원한 기운 있으리니 / 柱笏朝來有爽氣
시가 되거든 그대의 그림 속 산에다 쓰려네 / 詩成題爾畵中山


 

 

서계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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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천주봉(天柱峯)


도봉산(道峯山)이 땅에서 치솟아 하늘에 닿을 듯 삐죽삐죽한 봉우리가 우뚝하니 조화옹이 유독 여기에만 솜씨를 부렸다. 고인들이 이 산은 바로 신선이 살고 있어서 봉호(蓬壺)의 으뜸이 되기 때문에 도봉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하였다. 또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등 상서로움과 신령함을 기르고 모아 무강한 기틀을 공고히 하는 것은 임안(臨安)의 천목산(天目山)과 비교해 보면 현격히 차이가 나는데도 산의 봉우리들은 거의 이름이 없으니 매우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 하나를 근래에 이르러서야 곧 ‘만장(萬丈)’이라 명명하였는데 속됨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천주(天柱)’라고 명명하고자 하니, 그 형상을 본뜬 것이다. 인하여 절구 4수를 짓는다.

옛적에 이 봉우리의 이름을 만장이라 하였는데 / 舊云萬丈是峯名
새 이름을 지어 다시 실정에 걸맞게 하려 한다 / 要與新名更稱情
도리어 하늘에 기둥 없어도 되게 하였으니 / 却遣天無柱亦得
그 어느 것이 이 봉우리와 높음을 다투겠는가 / 擎高誰與此峯爭

공공의 몸을 백억 개로 만들어 / 便化共工身百億
몸통 하나에 머리 하나씩 붙였어라 / 一身還着一頭來
머리마다 떠받아 깨져도 계속해서 떠받지만 / 頭頭觸碎頭頭觸
우뚝한 이 봉우리 어찌 갑자기 꺾이겠는가 / 看見孤撑詎忽摧

천주는 본래 옥황상제의 뜰과 가까워 / 天柱由來近帝庭
동서 만리에 깊은 바다 굽어본다네 / 東西萬里俯重溟
난새 참마와 규룡 수레 항상 내왕하여 / 鸞驂虬駕常來往
밤마다 성단에 온갖 신령이 모인다네
/ 夜夜星壇會百靈

형악에 천주봉 높다는 말 들었는데 / 衡嶽曾聞天柱高
오봉 중에 높이 다투면 어느 것이 가장 으뜸인가 / 五峯爭長孰推豪
도리어 비바람 치는 어둑한 밤에 / 還輸風雨冥冥夜
홀로 삼경에 토호 세는 것만은 못하리라
/ 獨向三更數兎毫


 

[주D-001]봉호(蓬壺) : 산 이름이다. 해중(海中)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하나는 방호(方壺)로 곧 방장(方丈)이고, 둘째는 봉호로 곧 봉래(蓬萊)이고, 셋째는 영호(瀛壺)로 곧 영주(瀛洲)이다. 모양이 병처럼 생겼다고 한다. 《拾遺記》
[주D-002]천목산(天目山) : 절강성(浙江省) 임안현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부옥산(浮玉山)이라고도 한다. 동천목(東天目)과 서천목(西天目)의 두 봉우리가 있다.
[주D-003]공공(共工) : 고대 전설상의 천신(天神)이다. 전욱(顓頊)과 제위(帝位)를 다투다가 노하여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으니,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기울고 땅을 매어 놓은 밧줄이 끊어져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어 해와 달과 별은 서북쪽으로 옮겨 가고 땅은 동남쪽이 낮아져 물은 동남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淮南子 天文訓》
[주D-004]난새 …… 모인다네 : 난새 참마와 규룡 수레는 신선이 타는 것이고, 성단(星壇)은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에 제사 지내던 단이다. 여기서는 천주봉(天柱峯)에 밤마다 신선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오봉(五峯) : 형산(衡山)의 다섯 봉우리로 자개(紫蓋), 천주(天柱), 운밀(雲密), 석름(石廩), 축융(祝融)이다.
[주D-006]도리어 …… 못하리라 : 도봉산(道峯山)의 천주봉이 구름보다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비바람 치는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할지라도 달 속에 있는 토끼의 털을 셀 수 있지만, 형산(衡山)의 천주봉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인 듯하다. 즉 도봉산의 천주봉이 형산의 천주봉보다 훨씬 더 높다는 뜻으로 말한 듯하다.


 

 

 
서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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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잠고(潛稿) 선생이 소싯적에 잠수(潛叟)라 자호(自號)하고 시고를 잠고라 하였다.
악록(岳麓)의 촌거(村居)에 가면서 초봄에 빗속에서 도봉산(道峯山)을 바라보다

봄 구름 나지막이 계곡물 스쳐 흘러가고 / 春雲低拂澗水流
점점이 먼 산봉우리는 빗줄기 너머 떠 있네 / 點點遙山雨外浮
연약한 풀 돋아나려 껍질을 이제 막 쓰고 / 細草欲生纔戴甲
그윽한 꽃 피기 앞서 망울이 맺혀 있네 / 幽花未發已苞頭
몇 이랑 황량한 정원 가꾸는 이 없고 / 荒園數畝無人種
세 칸 낡은 집 객에게 내주었네 / 老屋三間借客留
홀로 왔다 홀로 가도 스스로 부끄러우니 / 獨去獨來還自愧
십 년 종적이 그저 유유할 뿐 / 十年蹤跡漫悠悠

 

서계집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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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도봉산(道峯山)을 바라보며 짓다


조화옹의 기교에 마음 몹시 놀라니 / 奇巧心偏怪化翁
수많은 손놀림이 신묘 막측하구나 / 幾般摶弄妙難窮
온갖 형상이 땅 아래에 조밀한데 / 萬形掩翳黃塵下
한 바위 봉우리가 창공을 찌르네 / 一骨嵯峨碧落中
달을 보매 세상의 어둠 아랑곳없고 / 看月不妨人界黑
꽃을 흩날리매 내내 하늘이 붉어라 / 散花長得佛天紅
벼랑 중턱 노송에 걸린 높다란 둥지 / 半崖松老危巢倒
몇 조각 구름이 학의 뒤를 따르네 / 數片雲隨鶴背風
제2연이 어떤 본에는 ‘온갖 형상이 웅장한 대지에 낮게 깔려 있는데 하나의 봉우리가 광활한 우주에 우뚝 솟았네.[萬形低壓氛埃壯 一掌高開宇宙空]’로 되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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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豐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청파(靑坡)》
○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을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ㆍ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虛項嶺)ㆍ보다회산(寶多會山)ㆍ완항령(緩項嶺)ㆍ설령(雪嶺)이 된다.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ㆍ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ㆍ천수령(天守嶺)ㆍ조가령(趙可嶺)ㆍ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
○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ㆍ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ㆍ하검산(下劍山)ㆍ오봉산(五峯山)ㆍ마유령(馬踰嶺)ㆍ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ㆍ쌍가령(雙加嶺)ㆍ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亇屹)ㆍ마유령(馬踰嶺)ㆍ노인치(老人峙) 3령은 모두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 있다. 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ㆍ추지령(楸池嶺)ㆍ금강산ㆍ회전령(檜田嶺)ㆍ진부령ㆍ흘리령(屹里嶺)ㆍ석파령(石波嶺)ㆍ설악(雪岳)ㆍ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ㆍ 연수파(連水波)ㆍ오대산ㆍ대관령ㆍ두타산ㆍ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ㆍ마아령(馬兒嶺)ㆍ소백산ㆍ죽령이 되고,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ㆍ주흘산(主屹山)ㆍ조령ㆍ의양산(義陽山)ㆍ청화산(淸華山)ㆍ속리산ㆍ화령(火嶺)ㆍ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ㆍ무풍령(舞豐嶺)ㆍ대덕산ㆍ덕유산ㆍ육십치(六十峙)ㆍ본월치(本月峙)ㆍ팔량치(八良峙)ㆍ지리산이 된다.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 검산령(劍山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차리령(巨次里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청량산, 고달산(高達山)이 되고 곡산(谷山)ㆍ학령(鶴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한 산맥은 서쪽으로 내려가서 황해도가 되고, 한 산맥은 남쪽으로 뻗쳐 이천(伊川)ㆍ토산(兔山)ㆍ금천(金川) 경계를 지나서 화장산(華藏山)ㆍ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ㆍ오관산(五冠山)이 되고 송악 송경(松京)이 된다.
○ 황해도 산맥은 학령(鶴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쳐 덕업산(德業山)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내려가서 재고개(梓古介)ㆍ석달령(石達嶺)ㆍ증격산(甑擊山) 곡산의 진산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ㆍ망진산(望眞山)이 되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황주(黃州)의 구현(駒峴)이 되며, 정맥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음초산(古音初山)이 된다. 또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서쪽으로 뻗친 한 줄기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되고, 가로 뻗쳐서 서흥(瑞興)ㆍ봉산(鳳山)이 되고, 끊기지 않고 북쪽으로 뻗쳐서 대현산(大峴山)ㆍ자비령(慈悲嶺)ㆍ파령(岊嶺)ㆍ동선령(洞仙嶺)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 차유령(車踰嶺)이 되고, 정족산(鼎足山)이 되며, 남쪽으로는 평산(平山)ㆍ면악(綿岳) 혹은 멸악산(滅惡山)이라고도 한다. 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또 한 가지는 배천(白川)의 치악산과 연안의 비봉산(飛鳳山)이 된다. 정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해주의 창금(唱金)ㆍ수양(首陽)ㆍ북고(北高)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들로 내려가서 평강(平崗)이 되며, 서북쪽으로 내려가 신천(信川)의 치산(雉山)ㆍ달마산(達摩山)이 되며, 북쪽으로 돌아서 문화(文化)의 구월산이 된다.
○ 덕유산은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道)의 어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뻗은 한 가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 고달산(高達山)과 전주 동쪽에 있는 진안(鎭安)의 마이산이 되는데 두 돌봉우리가 치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서북쪽으로는 웅치(熊峙)가 되고,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전주부(全州府), 동쪽은 위봉산성(威鳳山城), 북쪽에는 기린봉(麒麟峯)이 되었으며, 한 산맥은 전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이 된다.
○ 마이산의 한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笠巖山)ㆍ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錦城山)이 되었다.입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추월산(秋月山)ㆍ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동남쪽으로 무등산이 되며, 남쪽으로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돌아 영암의 월출산이 되며, 남쪽으로 만덕미(萬德尾) 황등산(黃等山)에서 그치고, 동북쪽으로 돈 것은 송광(松廣) 계족산(鷄足山)이 된다.
○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熊峙)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石山)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九峯山)ㆍ주취산(珠崒山)ㆍ운제산(雲梯山)ㆍ탄현(炭峴)ㆍ이치(梨峙)가 되며, 대둔산(大芚山)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月城山)이 된다.
○ 월성산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이 된다.
○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ㆍ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七長山)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ㆍ동ㆍ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英陵)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淸溪山)ㆍ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修理山)ㆍ소래산(蘇來山)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 칠장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 영맥(嶺脈)이 되어 대문령(大門嶺)과 마일령(磨日嶺)이 되며, 전의(全義)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에서 일어나 차령(車嶺)이 되며, 또 서쪽으로 무성(武城)ㆍ오서(烏棲)ㆍ가야(伽倻) 등 여러 산이 되며, 흩어져서 내포(內浦)의 여러 산이 된다.
○ 태백산 동쪽 줄기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금장산(金莊山)ㆍ백암산(白巖山)ㆍ평해(平海) 경계가 되고 주령(珠嶺)ㆍ삼승령(三乘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져 영해(寧海) 북쪽에 이르러 월명산이 되며, 바다를 따라 남쪽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금오산이 된다.고개 동쪽 11읍(邑) 영해ㆍ영덕(盈德)ㆍ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ㆍ경주ㆍ장기ㆍ울산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동래 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경주에서 서쪽으로 뻗어 북쪽으로 돌아서 대구부가 된다.
○ 지리산 서쪽 줄기는 화개(花開) 남쪽에 이르러 하동의 경양산(慶陽山)이 되며, 청천강(菁川江)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곤양(昆陽)ㆍ사천ㆍ진해의 북쪽을 지나서 창원의 청룡산이 되고,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에 이르러 구지봉(龜旨峯)이 된다.
○ 주취산(珠崒山) 북쪽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탄현(炭峴)이 되고 운제산(雲梯山)ㆍ정토산(淨土山)이 되며 용화산(龍華山)이 되었으며, 기준(箕準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감)의 옛 성터가 그곳에 있다.
○ 평안도 산맥은 설한령(雪寒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두 줄기 중의 한 줄기가 희천(熙川)의 적유령(狄踰嶺)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북으로 내려간 것은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두 읍의 여러 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은 것은 흩어져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여러 고을의 산이 된다.
○ 설한령의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영원(寧遠)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묘향산에 이르러 두 강 사이를 끼고 꾸불꾸불 내려가다가 알일령(遏日嶺)과 유현(柳峴)이 된다. 안주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자모산(慈母山)과 서경 평양부의 금수산(錦繡山)이 된다.
○ 양덕(陽德) 남곡산(南谷山) 북령(北嶺) 산맥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함박산(含朴山)이 되고, 거꾸로 북으로 내려가서 성천(成川)의 검학산(劍鶴山)이 된다.
○ 자모산의 한 줄기는 영유강(永柔江) 서쪽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용강(龍崗)의 황룡산(黃龍山)이 된다.
○ 총전령(葱田嶺)의 한 줄기는 거꾸로 북쪽으로 내려가서 강계부(江界府)와 폐 4군의 여러 산이 된다.
○ 강원도 오대산의 서북쪽 한 줄기는 홍천 동쪽에 이르러 세 줄기로 나뉘어 하나는 서북쪽으로 내려가서, 춘천의 봉의산(鳳儀山)이 되는데 옛 맥국(貊國)의 땅이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원주부 치악산이 되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검의산(劍倚山)ㆍ팔봉산(八峯山)이 되고 용문산(龍門山)에서 그친다.
○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土門江)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東良)ㆍ북사(北斜)ㆍ지하(地河)ㆍ목하(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束障)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沙次磨島)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
무산(茂山) 서북에 있는 냇물은 근원이 설잠(雪岑) 북쪽에서 나왔고, 박하천(朴下川)은 근원이 장백산 북쪽에서 나왔는데, 두 물이 합쳐져서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무산을 거쳐서 동쪽으로 회령에 이르고 북쪽으로 꺾어져 종성을 거쳐 온성(穩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경원을 지나 경흥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훈춘강(訓春江)은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수빈강(愁濱江)은 근원이 백두산으로부터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는데, 혹은 속평강(速平江)이라고도 한다.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지나서 거양(巨陽)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함흥의 성천강(成川江) 혹은 군자하(君子河)라고도 한다. 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갑산(甲山) 경계 화기령(樺岐嶺) 태백산 남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천(熙川) 경계 황초령(黃草嶺) 동남쪽 에서 나와 합류하여 함흥부 서북쪽 탑란동(塔蘭洞)을 지나서, 성 남쪽 만세교(萬歲橋)에 이르고 함흥부 남쪽 35리 도련포(都連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초원(草原)의 금강진(金江津)은 근원이 검산령(劍山嶺) 동쪽에서 나와 초원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은 그 근원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함흥부 서쪽 50리 떨어진 정변사(靜邊社)에서 나오는데 이름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한다. 그 물 근원인 구멍의 둘레가 5척 3촌이요, 깊기는 끝이 없으며 물이 솟아 내가 된다.또 하나는 함흥부 서북쪽 2백 10리 거리의 마유령(馬踰嶺) 희천(熙川)의 경계 요해지에서 나왔고, 하나는 함흥부 서쪽 1백 80리 거리의 애전현(艾田峴) 맹산(孟山) 경계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와서 고암(庫巖)에서 송어탄(松魚灘)과 합했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용신당(龍神堂)을 지나서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밑에 이르러 창경연(鶬鶊淵)이 되었다.그 밑에 광탄(廣灘)이 있고 광탄 가운데 백마같이 생긴 흰 돌이 있는데, 그 돌이 물 속에 잠기고 물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물의 수위를 짐작한다. 읍성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원(高原)의 덕지탄(德之灘)ㆍ문천(文川)의 전탄(箭灘)과 합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본 이름은 횡강(橫江)인데, 하륜(河崙)이 사신이 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중류에 술자리를 베풀고 “함흥부는 도조와 환조께서 터를 정한 자리이며, 또 태조께서 여기서 탄생하셨는데, 아직도 이 강에 이름이 없으니 또한 한 가지 흠이 아닙니까?” 하니 하륜이 용흥(龍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의주의 압록강은 혹 마자하(馬訾河)라 하고 청하(靑河)ㆍ용만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요동 도사(都司)까지 1백 60리가 된다. 근원은 백두산인데 남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허천강(虛川江)과 합한다.
○ 허천강은 근원이 북청ㆍ북제령(北諸嶺)ㆍ벌성포천(伐成浦川)인데, 산 북쪽 파천(波川)ㆍ독산천(禿山川)ㆍ황수천(黃水川) 등 여러 물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청주기(靑州岐)에 이르고 허천역(虛川驛) 옆을 지나 허천강이 된다. 장백산 서쪽 여러 냇물과 합했고, 또 운총천(雲寵川)과 합류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 두 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삼수(三水)의 경계로 들어가서 압록강이 되고, 가을파지(加乙波知)에 이르러 장진강(長津江)과 합하니, 장진강은 곧 부전령(赴戰嶺)과 황초령(黃草嶺) 이북에 있는 물이다. 또 서쪽으로는 후주강(厚州江)과 합해서 서북쪽으로 흘러 무창(茂昌)ㆍ여연(閭延)을 지나 남으로 꺾여 흘러서, 옛 우예(虞芮)에 이르러 자성강(慈城江)과 합하고, 서남쪽으로는 위원(渭源) 경계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한다.
독로강은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희천(熙川)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신광진(神光鎭)을 지나고, 하나는 함경도 경계 화을첩(和乙岾) 밑 설한령(雪寒嶺) 북쪽 총전령(葱田嶺) 서남쪽에 있는 물 밑에 나와서 평남진(平南鎭)을 거쳐 강계(江界) 입석(立石)에서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강계에 이르며, 남쪽은 독로강이 되고, 서쪽은 위원 북쪽 오로량(吾老梁)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초산(楚山)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 만주강(滿洲江)과 합하며, 만주강은 혹은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하고 또는 퉁가강(佟家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한다.
동건강은 근원이 고리산(古理山)과 숭적산(崇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희천(熙川) 경계에 있는 우현진(牛峴鎭)과 운산(雲山) 경계의 차령진(車嶺鎭)의 여러 냇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를 거쳐 의주 북쪽에서 옥강(玉江)과 합한다.
옥강은 의주 동북쪽 6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천마산(天磨山)과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 옥강진(玉江鎭)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서 담청색 옥이 나기 때문에 옥강(玉江)이라고 한다.
○ 적도(赤島) 동쪽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굽이쳐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는데, 이것을 압록강이라 하니 물빛이 오리 머리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류를 따라 흐르는데, 이것을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고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과 합하고 적강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으니 오랑캐 땅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큰 강이 되어 위화도를 거쳐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다가 미륵당(彌勒堂)에서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고진강(古津江)과 합한다.
고진강은 근원이 보광산(普光山) 북쪽 선천(宣川) 경계 에서 나와서 식송진(植松鎭)을 거쳐 미륵당에서 삭주 지경의 천마산 남쪽 여러 냇물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강이다. 옛 정령(定寧)ㆍ옛 영주(寧州)ㆍ옛 인산(麟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 강기수(姜耆壽)가 여기 빠져 죽었기 때문에 서장강(書狀江)이라고도 한다.
○ 남쪽으로 서해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었다.” 하였고 옛 기록에 “천하의 세 곳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ㆍ장강ㆍ압록강이 이것이다.” 하였다.
○ 안주(安州) 청천강은 혹은 살수(薩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영변(寧邊) 묘향산에서 나와서 10여 리를 흐르다가 어천(魚川)과 합한다. 어천은 근원이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10리를 흘러 어천이 되었다. 영원 서쪽 경계에 있는 물이 서쪽으로 40리를 흐르다가 희천(熙川) 봉단성(鳳丹城)에서 합하고 아래로 흘러 영변 장항진(獐項津)이 된다.이 강은 안주부 동남쪽에 이르러 화천강(花遷江)이 되고, 또 남쪽으로 5, 6리를 흐르다가 안주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또 구음포진(仇音浦津)과 합한다. 구음포진은 근원이 초산과 벽동(碧潼) 지경에서 나와 운산(雲山)의 동천(東川)이 되고 영변을 거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또 개천(价川) 장항강(獐項江)과 합한다. 장항강은 바로 묘향산 남쪽 분탄(犇灘)의 하류인데 동천과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주 북성(北城) 아래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서쪽으로 30리를 흐르다가 박천강(博川江)과 합한다.
○ 박천강은 근원이 창성(昌城)의 부운산ㆍ삭주의 천마산ㆍ청룡산ㆍ옛 구주(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오는데 청천강과 합류하여 태천(泰川) 동쪽에서 오지천천(烏知遷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구성(龜城)의 구림천(仇林川)ㆍ팔령천(八嶺川)과 합해서 동쪽으로 흘러 박천(博川) 서쪽에서 곶적강(串赤江)과 합해서 박천강이 된다. 이 강이 가산(嘉山) 동쪽에 이르러 대령강(大寧江)이 되어 정주 가마천(加磨川)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합하고, 고성진(古城鎭)에 이르러 청천강과 합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노강(老江)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개사강(蓋泗江)이라 불렀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여기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모여서 다리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이름을 대령강이라 하였다.” 한다.
○ 평양의 대동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寧遠)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다시 꺾여 서쪽에서 흘러가다가 덕천 경계에서 삼탄(三灘) 영원 맹산(孟山)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서 합쳐 흐르기 때문에 삼탄이라고 부른다. 과 합쳤고 남쪽으로 흘러 개천(价川) 경계에서 순천강(順川江)이 된다. 다시 순천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었는데,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밑에는 기탄(岐灘)이 있으며 자산(慈山)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되어 은산(殷山)의 대천(大川)과 합했으며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강동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된다.
○ 하나는 양덕(陽德) 북쪽 문음산(文音山)과 오강산(吳江山) 및 맹산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다시 합해서 성천(成川)의 비류강이 되어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나는데 산 밑에 사석혈(四石穴)이 있어 물이 그 구멍 속으로 통해 흐르다가 솟아 올라 서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비류강이라 한다.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동 경계에 이르러서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다시 웅성강(熊城江)과 합한다.
웅성강의 근원은 옛 양덕 북쪽 40리에 있는 고원(高原) 경계 우라발산(亏羅鉢山) 거차리령(巨次里嶺) 남쪽 에서 나오는데, 흘러서 양덕(陽德)의 남천(南川)이 되고 곡산(谷山)으로 들어가서 말흘탄(末訖灘)이 되어 곡산 여러 냇물과 합한다. 이 물은 다시 수안을 지나 북쪽을 삼등(三登) 남쪽에 이르러서 웅성강이 되고, 또 서북쪽으로 흘러 서진강으로 들어간다.
○ 평양성 동북쪽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과 대동강이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그 하류는 평양강과 합한다. 평양강은 근원이 순안(順安)의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웅성강과 합류하여 중화 서쪽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강서의 구림천(九林川)과 합해서 용강(龍崗) 동쪽에 이르러 동쪽 급수문(急水門)으로 빠진다.
○ 금천(金川)의 저탄(猪灘)은 근원이 수안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는데 아래로 흘러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보음탄(甫音灘)이 되며 신계(新溪) 서쪽을 지나서 사팔적탄(沙八赤灘)이 된다. 이 물은 평산(平山)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가서 전탄(箭灘)이 되며, 저탄에 이르러 비로소 커져 하류는 금천 조읍포(助邑浦)의 조운(漕運)하는 곳이 된다.
○ 남쪽은 말롱포(末籠浦)가 되고, 그 남쪽은 배천(白川), 동쪽은 금곡포(金谷浦)의 조운하는 곳이며, 또 그 남쪽은 광정도(匡正渡)와 벽란도가 된다.
○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이라 일컫는다.
○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였지만 우통수가 그 주류이다. 오대산 물이 두타산 북림계(北臨溪)와 삼척의 죽현(竹峴) 물과 합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 동쪽 여량역(餘粮驛)을 지나 군(郡) 북쪽에 이르러 광탄진(廣灘津)이 되고, 군 남쪽은 대음강(大陰江)이 되고, 군 서쪽은 용암연(龍巖淵)이 된다.또 흘러가다가 영월 후진(後津)이 되고 금봉연(金鳳淵)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한다. 금장강은 바로 평창(平昌)의 연촌진(淵村津) 하류이며, 또 서쪽으로 주천강(酒泉江)과 합하는데 주천강은 바로 원주 동쪽 주천현 거슬산(琚瑟山) 여러 물의 하류이다.또 남쪽으로 흘러 영춘(永春)에 이르러서 눌어탄(訥魚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남진(南津)이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단양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상진(上津)과 하진(下津)이 되고, 서쪽은 소요항탄(所要項灘)이 된다. 또 북쪽으로 꺾어지고 서쪽으로 흘러서 청풍강이 되고, 병풍산 밑에 이르러 북진(北津)이 되며, 제천의 광탄(廣灘) 하류에 와서 합하고, 충주 북쪽 10리에 이르러 북진이 되며, 충주 서쪽 10리 금천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서로 합한다.
○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구요(九遙) 팔교(八橋)의 냇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청주 동쪽에 이르러 청천(靑川)이 되고, 청천은 파곶(葩串) 하류와 합하여 괴산에 이르러 괴진(槐津)이 되며, 연풍천(延豐川)과 합한다. 또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 서쪽으로는 월락탄(月落灘)이 된다.그 서쪽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또 그 서북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이 있는데, 섬강(蟾江)과 합한다. 섬강은 바로 오대산 서쪽 횡성(橫城)ㆍ원주의 여러 물인데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양근(楊根)의 대탄(大灘)과 월계천(月溪遷)이 된다. 군(郡) 서쪽 45리 병탄(幷灘)에 이르러 북강과 합하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이수두(二水頭)라고도 한다.
○ 북강(北江)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인제 서화현(瑞和縣) 소파령(所波嶺)ㆍ소동라령(所冬羅嶺)과 춘천 기린현(基麟縣)의 네 냇물이 합쳐서 인제 미륵천(彌勒川)이 된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주연진(舟淵津)이 되고 양구 남쪽에 이르러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며, 춘천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ㆍ주연(舟淵)ㆍ적암탄(赤巖灘)이 된다. 또 춘천부 북쪽 6리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고,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이르러 보제진(菩提津) 하류와 합했다.그 하나는 회양(淮陽)의 화천(和川) 하류에서 덕진(德津)이 되어 은계(銀溪)와 합했으며, 양구의 대연(大淵) 하류에서 회양ㆍ용연(龍淵)ㆍ남곡(嵐谷)의 물이 되어 금성(金城)의 남천(南川)이 되었고, 철령 남쪽 금강 서쪽에 있는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해서 금성(金城)이 보제진이 되는데 속칭 모천(牟遷)이라고도 한다. 이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통구(通溝) 다경진(多慶津)이 되고 금강 남쪽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오다가 양구의 곡계(曲溪)와 합치고 서쪽으로 흘러와 합쳐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남쪽으로는 대리진(大利津)이 된다.또 춘천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고 우두촌(牛頭村) 앞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해서 서쪽으로 흘러 신연진(新淵津)이 된다. 또 홍천강과 합해서 가평 동쪽에 이르러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이 되고 병탄에 이르러 남강과 합한다.
○ 남강과 북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천진(渡迷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또 송파(松波)ㆍ삼전도ㆍ저자도(楮子島)ㆍ뚝섬 두모포(豆毛浦)가 된다.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가 되고 또 서쪽으로는 서빙고ㆍ동작진ㆍ흑석(黑石)ㆍ노량(露梁)ㆍ용산강ㆍ마포ㆍ남타(南沱)ㆍ율도(栗島)ㆍ토정(土汀)ㆍ현석(玄石)ㆍ서강(西江) 농암(籠巖)이 된다.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 북쪽에 이르러 공암진ㆍ행주가 된다.또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임진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안변(安邊)과 영풍(永豐) 냇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장치(防墻峙)를 지나서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 미탄(美灘)의 물은 근원이 박달치(朴達峙)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해서 옛 성진(城津)이 되며 신계(新溪) 경계를 지나 안협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평강(平康) 분수령 물은 안협(安峽)의 저구리탄(猪仇里灘)이 되고 이 물이 합해서 포리진(浦里津)이 되어 토산으로 들어가서 동천(東川)이 된다. 다시 삭녕에 이르러 삭녕도가 되고 연천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며, 마전(麻田)에 이르러 후근도(朽斤渡)가 되어 양주의 대탄(大灘)과 합한다.
○ 그 하나는 철령 물이 서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을 지나서 철원의 체천(砌川)이 되는데 양쪽 언덕이 모두 석벽이어서 섬돌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 물은 순담(筍潭) 화적연(禾積淵)을 지나서 영평 북쪽에 이르러 직탄(直灘)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의 전탄(箭灘)과 합한다.포천의 여러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로주(白鷺洲)가 되고 백운산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영평 남쪽에 이르러 전탄이 되고, 또 마흘천(磨訖川)이 되며, 양주 북쪽에 이르러 대탄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의 아미천(峩嵋川)과 합하여 마전으로 들어가서 삭녕강과 합한다.
○ 적성(積城) 북쪽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 구연강(仇淵江)이 되고, 장단 동쪽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사미천(沙彌川)과 합해서 용산진과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는 덕진(德津)이 된다. 다시 교하(交河)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 오도성은 속칭에 오두현(鼇頭峴)이라 한다.
○ 공주의 금강은 근원이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나오고, 적등진은 근원이 덕유산 서북에서 나오니, 장수ㆍ진안의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용담(龍潭) 달계천(達溪川)이 되고, 무주에 이르러 대덕산(大德山)ㆍ적상산(赤裳山) 냇물과 합해서 금산 경계에 이르러 소이진(召爾津)ㆍ지화진(只火津)이 된다. 다시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中牟縣) 물은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靑山)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懷仁)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서쪽으로 동진(東津)과 합하고, 연기(燕岐)ㆍ동진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의 여러 냇물이 합류해서 청주 작천(鵲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목천ㆍ전의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동진이 된다.다시 공주 북쪽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웅진과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이 된다. 또 은진(恩津)에 이르러 강경포(江景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져 석성의 고다진(古多津)ㆍ임천(林川)의 남당포(南堂浦)ㆍ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ㆍ서천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임천에서 서천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포라고 한다.
○ 계룡산 한 골짜기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잠(鎭岑) 남쪽에 이르러 차탄(車灘)이 되고 진산(珍山)의 옥계(玉溪) 하류와 합했으며 또 동쪽으로 공주ㆍ유성에 이르러 여러 냇물과 합해서 회덕의 갑천(甲川)이 되고, 또 선암천(船巖川)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형각진(荊角津)으로 들어간다.
○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 광양의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에 이르러 방제천(方梯川)이 되며, 곡성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서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바로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 만경(萬頃)의 신창진(新倉津)은 근원이 고산(高山)의 남천(南川)에서 나오는데, 운제산(雲梯山)과 주취산(珠崒山)의 물이 현(縣) 남쪽을 지나 흘러서 전주 북쪽으로 들어가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鴈川)이 된다. 이 물은 또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서 전주 남천의 북류와 합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옥야(沃野)ㆍ이성(利城)을 거쳐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경현을 지나서 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 부안의 동진(東津)은 내장산과 노령 북쪽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으로 흘러서 고부(古阜)의 모천(茅川)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인의 남천(南川)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진이 된다. 금구(金溝) 상왕산(象王山)의 물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동진으로 들어간다. 흥덕(興德) 우등산(牛登山) 물은 고부의 눌제천(訥堤川)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진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경상도의 낙동강은 근원이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경상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또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ㆍ영산강 두 강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고 하였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과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蓼村灘), 물야탄(勿也灘), 대항진(大項津)이 된다.영양ㆍ진보(眞寶)ㆍ청송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祕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豐津)이 된다. 풍기ㆍ순흥(順興)ㆍ봉화ㆍ영천의 물은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ㆍ용연(龍淵)ㆍ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 곶천(串川)에 와서 합한다.
○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ㆍ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ㆍ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鯉埋淵)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는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離)ㆍ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ㆍ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바로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하양(河陽)ㆍ자인(慈仁)ㆍ경산(慶山)의 여러 물과 합하여 대구의 금호(琴湖) 달천진(達川津)이 되어 모두 합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무계진(茂溪津)이 되어 현풍(玄風)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 고령 동쪽에 이르러 개산강(開山江)이 되며, 성주의 가천(伽川)은 고령으로 들어가서 합천의 야천(倻川) 하류와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 초계(草溪) 동쪽 창녕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 덕유산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瀶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이 물은 산청 경계에 이르러 안의의 동천(東川) 하류와 합하여 진주 서쪽에서 우탄(牛灘)이 되며, 단성(丹城)에 이르러 신안진(新安津)이 되는데, 삼가(三嘉)의 여러 냇물이 흘러 합쳐서 진주 서쪽에 이르러 소남진(召南津)이 된다.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산을 돌아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주 서쪽에서 합쳐서 청천강(菁川江)이 되며, 성(城) 아래에 이르러 촉석강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鼎巖津)이 되며, 영산(靈山)의 기음강(岐音江)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亐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혹은 ‘무포(茂浦)’라고도 한다.창원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곳은 혹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보충 : 은하수의 형상은 하늘의 반쪽을 가로질렀는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에서 그쳤는데, 머리는 간방(艮方)이고 꼬리는 곤방(坤方)이다. 우리나라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으로서, 이 세 강은 모두 머리는 간방이고 꼬리는 곤방이다. 《성호사설》
○ 보충 : 우리나라 지도가 옛날에는 모두 평평하고 정방형이기 때문에 형세를 알 수 없었다. 영종(英宗) 경인년에 신경준(申景濬)에게 명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게 하니, 관청에 보관했던 십여 가지를 내어 오고 또 널리 여러 사람들의 금ㆍ고본(今古本)을 찾아 내었으나, 정항령(鄭恒齡)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완전하였다.여기에 약간 교정을 더해서 〈열읍도(列邑圖)〉 8권과 〈팔도도(八道圖)〉 1권과 〈전국도(全國圖)〉 한 폭을 만들었는데, 주척(周尺 주 나라 척도(尺度)를 기준으로 삼음) 두 치로 한 선(線)을 하고 세로는 76선, 가로는 1백 31선으로 하게 하였다. 또 동궁에게 이와 같이 만들어 바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짧은 서문을 지어 족자 위에 썼다. 정씨(鄭氏)의 지도는 항령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에 이르러 보충되었으니, 대개 3대(代) 50여 년이 걸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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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豐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청파(靑坡)》
○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을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ㆍ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虛項嶺)ㆍ보다회산(寶多會山)ㆍ완항령(緩項嶺)ㆍ설령(雪嶺)이 된다.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ㆍ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ㆍ천수령(天守嶺)ㆍ조가령(趙可嶺)ㆍ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
○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ㆍ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ㆍ하검산(下劍山)ㆍ오봉산(五峯山)ㆍ마유령(馬踰嶺)ㆍ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ㆍ쌍가령(雙加嶺)ㆍ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亇屹)ㆍ마유령(馬踰嶺)ㆍ노인치(老人峙) 3령은 모두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 있다. 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ㆍ추지령(楸池嶺)ㆍ금강산ㆍ회전령(檜田嶺)ㆍ진부령ㆍ흘리령(屹里嶺)ㆍ석파령(石波嶺)ㆍ설악(雪岳)ㆍ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ㆍ 연수파(連水波)ㆍ오대산ㆍ대관령ㆍ두타산ㆍ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ㆍ마아령(馬兒嶺)ㆍ소백산ㆍ죽령이 되고,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ㆍ주흘산(主屹山)ㆍ조령ㆍ의양산(義陽山)ㆍ청화산(淸華山)ㆍ속리산ㆍ화령(火嶺)ㆍ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ㆍ무풍령(舞豐嶺)ㆍ대덕산ㆍ덕유산ㆍ육십치(六十峙)ㆍ본월치(本月峙)ㆍ팔량치(八良峙)ㆍ지리산이 된다.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 검산령(劍山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차리령(巨次里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청량산, 고달산(高達山)이 되고 곡산(谷山)ㆍ학령(鶴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한 산맥은 서쪽으로 내려가서 황해도가 되고, 한 산맥은 남쪽으로 뻗쳐 이천(伊川)ㆍ토산(兔山)ㆍ금천(金川) 경계를 지나서 화장산(華藏山)ㆍ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ㆍ오관산(五冠山)이 되고 송악 송경(松京)이 된다.
○ 황해도 산맥은 학령(鶴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쳐 덕업산(德業山)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내려가서 재고개(梓古介)ㆍ석달령(石達嶺)ㆍ증격산(甑擊山) 곡산의 진산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ㆍ망진산(望眞山)이 되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황주(黃州)의 구현(駒峴)이 되며, 정맥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음초산(古音初山)이 된다. 또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서쪽으로 뻗친 한 줄기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되고, 가로 뻗쳐서 서흥(瑞興)ㆍ봉산(鳳山)이 되고, 끊기지 않고 북쪽으로 뻗쳐서 대현산(大峴山)ㆍ자비령(慈悲嶺)ㆍ파령(岊嶺)ㆍ동선령(洞仙嶺)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 차유령(車踰嶺)이 되고, 정족산(鼎足山)이 되며, 남쪽으로는 평산(平山)ㆍ면악(綿岳) 혹은 멸악산(滅惡山)이라고도 한다. 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또 한 가지는 배천(白川)의 치악산과 연안의 비봉산(飛鳳山)이 된다. 정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해주의 창금(唱金)ㆍ수양(首陽)ㆍ북고(北高)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들로 내려가서 평강(平崗)이 되며, 서북쪽으로 내려가 신천(信川)의 치산(雉山)ㆍ달마산(達摩山)이 되며, 북쪽으로 돌아서 문화(文化)의 구월산이 된다.
○ 덕유산은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道)의 어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뻗은 한 가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 고달산(高達山)과 전주 동쪽에 있는 진안(鎭安)의 마이산이 되는데 두 돌봉우리가 치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서북쪽으로는 웅치(熊峙)가 되고,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전주부(全州府), 동쪽은 위봉산성(威鳳山城), 북쪽에는 기린봉(麒麟峯)이 되었으며, 한 산맥은 전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이 된다.
○ 마이산의 한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笠巖山)ㆍ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錦城山)이 되었다.입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추월산(秋月山)ㆍ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동남쪽으로 무등산이 되며, 남쪽으로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돌아 영암의 월출산이 되며, 남쪽으로 만덕미(萬德尾) 황등산(黃等山)에서 그치고, 동북쪽으로 돈 것은 송광(松廣) 계족산(鷄足山)이 된다.
○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熊峙)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石山)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九峯山)ㆍ주취산(珠崒山)ㆍ운제산(雲梯山)ㆍ탄현(炭峴)ㆍ이치(梨峙)가 되며, 대둔산(大芚山)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月城山)이 된다.
○ 월성산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이 된다.
○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ㆍ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七長山)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ㆍ동ㆍ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英陵)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淸溪山)ㆍ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修理山)ㆍ소래산(蘇來山)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 칠장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 영맥(嶺脈)이 되어 대문령(大門嶺)과 마일령(磨日嶺)이 되며, 전의(全義)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에서 일어나 차령(車嶺)이 되며, 또 서쪽으로 무성(武城)ㆍ오서(烏棲)ㆍ가야(伽倻) 등 여러 산이 되며, 흩어져서 내포(內浦)의 여러 산이 된다.
○ 태백산 동쪽 줄기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금장산(金莊山)ㆍ백암산(白巖山)ㆍ평해(平海) 경계가 되고 주령(珠嶺)ㆍ삼승령(三乘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져 영해(寧海) 북쪽에 이르러 월명산이 되며, 바다를 따라 남쪽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금오산이 된다.고개 동쪽 11읍(邑) 영해ㆍ영덕(盈德)ㆍ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ㆍ경주ㆍ장기ㆍ울산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동래 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경주에서 서쪽으로 뻗어 북쪽으로 돌아서 대구부가 된다.
○ 지리산 서쪽 줄기는 화개(花開) 남쪽에 이르러 하동의 경양산(慶陽山)이 되며, 청천강(菁川江)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곤양(昆陽)ㆍ사천ㆍ진해의 북쪽을 지나서 창원의 청룡산이 되고,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에 이르러 구지봉(龜旨峯)이 된다.
○ 주취산(珠崒山) 북쪽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탄현(炭峴)이 되고 운제산(雲梯山)ㆍ정토산(淨土山)이 되며 용화산(龍華山)이 되었으며, 기준(箕準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감)의 옛 성터가 그곳에 있다.
○ 평안도 산맥은 설한령(雪寒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두 줄기 중의 한 줄기가 희천(熙川)의 적유령(狄踰嶺)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북으로 내려간 것은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두 읍의 여러 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은 것은 흩어져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여러 고을의 산이 된다.
○ 설한령의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영원(寧遠)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묘향산에 이르러 두 강 사이를 끼고 꾸불꾸불 내려가다가 알일령(遏日嶺)과 유현(柳峴)이 된다. 안주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자모산(慈母山)과 서경 평양부의 금수산(錦繡山)이 된다.
○ 양덕(陽德) 남곡산(南谷山) 북령(北嶺) 산맥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함박산(含朴山)이 되고, 거꾸로 북으로 내려가서 성천(成川)의 검학산(劍鶴山)이 된다.
○ 자모산의 한 줄기는 영유강(永柔江) 서쪽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용강(龍崗)의 황룡산(黃龍山)이 된다.
○ 총전령(葱田嶺)의 한 줄기는 거꾸로 북쪽으로 내려가서 강계부(江界府)와 폐 4군의 여러 산이 된다.
○ 강원도 오대산의 서북쪽 한 줄기는 홍천 동쪽에 이르러 세 줄기로 나뉘어 하나는 서북쪽으로 내려가서, 춘천의 봉의산(鳳儀山)이 되는데 옛 맥국(貊國)의 땅이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원주부 치악산이 되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검의산(劍倚山)ㆍ팔봉산(八峯山)이 되고 용문산(龍門山)에서 그친다.
○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土門江)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東良)ㆍ북사(北斜)ㆍ지하(地河)ㆍ목하(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束障)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沙次磨島)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
무산(茂山) 서북에 있는 냇물은 근원이 설잠(雪岑) 북쪽에서 나왔고, 박하천(朴下川)은 근원이 장백산 북쪽에서 나왔는데, 두 물이 합쳐져서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무산을 거쳐서 동쪽으로 회령에 이르고 북쪽으로 꺾어져 종성을 거쳐 온성(穩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경원을 지나 경흥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훈춘강(訓春江)은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수빈강(愁濱江)은 근원이 백두산으로부터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는데, 혹은 속평강(速平江)이라고도 한다.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지나서 거양(巨陽)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함흥의 성천강(成川江) 혹은 군자하(君子河)라고도 한다. 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갑산(甲山) 경계 화기령(樺岐嶺) 태백산 남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천(熙川) 경계 황초령(黃草嶺) 동남쪽 에서 나와 합류하여 함흥부 서북쪽 탑란동(塔蘭洞)을 지나서, 성 남쪽 만세교(萬歲橋)에 이르고 함흥부 남쪽 35리 도련포(都連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초원(草原)의 금강진(金江津)은 근원이 검산령(劍山嶺) 동쪽에서 나와 초원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은 그 근원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함흥부 서쪽 50리 떨어진 정변사(靜邊社)에서 나오는데 이름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한다. 그 물 근원인 구멍의 둘레가 5척 3촌이요, 깊기는 끝이 없으며 물이 솟아 내가 된다.또 하나는 함흥부 서북쪽 2백 10리 거리의 마유령(馬踰嶺) 희천(熙川)의 경계 요해지에서 나왔고, 하나는 함흥부 서쪽 1백 80리 거리의 애전현(艾田峴) 맹산(孟山) 경계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와서 고암(庫巖)에서 송어탄(松魚灘)과 합했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용신당(龍神堂)을 지나서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밑에 이르러 창경연(鶬鶊淵)이 되었다.그 밑에 광탄(廣灘)이 있고 광탄 가운데 백마같이 생긴 흰 돌이 있는데, 그 돌이 물 속에 잠기고 물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물의 수위를 짐작한다. 읍성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원(高原)의 덕지탄(德之灘)ㆍ문천(文川)의 전탄(箭灘)과 합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본 이름은 횡강(橫江)인데, 하륜(河崙)이 사신이 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중류에 술자리를 베풀고 “함흥부는 도조와 환조께서 터를 정한 자리이며, 또 태조께서 여기서 탄생하셨는데, 아직도 이 강에 이름이 없으니 또한 한 가지 흠이 아닙니까?” 하니 하륜이 용흥(龍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의주의 압록강은 혹 마자하(馬訾河)라 하고 청하(靑河)ㆍ용만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요동 도사(都司)까지 1백 60리가 된다. 근원은 백두산인데 남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허천강(虛川江)과 합한다.
○ 허천강은 근원이 북청ㆍ북제령(北諸嶺)ㆍ벌성포천(伐成浦川)인데, 산 북쪽 파천(波川)ㆍ독산천(禿山川)ㆍ황수천(黃水川) 등 여러 물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청주기(靑州岐)에 이르고 허천역(虛川驛) 옆을 지나 허천강이 된다. 장백산 서쪽 여러 냇물과 합했고, 또 운총천(雲寵川)과 합류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 두 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삼수(三水)의 경계로 들어가서 압록강이 되고, 가을파지(加乙波知)에 이르러 장진강(長津江)과 합하니, 장진강은 곧 부전령(赴戰嶺)과 황초령(黃草嶺) 이북에 있는 물이다. 또 서쪽으로는 후주강(厚州江)과 합해서 서북쪽으로 흘러 무창(茂昌)ㆍ여연(閭延)을 지나 남으로 꺾여 흘러서, 옛 우예(虞芮)에 이르러 자성강(慈城江)과 합하고, 서남쪽으로는 위원(渭源) 경계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한다.
독로강은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희천(熙川)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신광진(神光鎭)을 지나고, 하나는 함경도 경계 화을첩(和乙岾) 밑 설한령(雪寒嶺) 북쪽 총전령(葱田嶺) 서남쪽에 있는 물 밑에 나와서 평남진(平南鎭)을 거쳐 강계(江界) 입석(立石)에서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강계에 이르며, 남쪽은 독로강이 되고, 서쪽은 위원 북쪽 오로량(吾老梁)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초산(楚山)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 만주강(滿洲江)과 합하며, 만주강은 혹은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하고 또는 퉁가강(佟家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한다.
동건강은 근원이 고리산(古理山)과 숭적산(崇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희천(熙川) 경계에 있는 우현진(牛峴鎭)과 운산(雲山) 경계의 차령진(車嶺鎭)의 여러 냇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를 거쳐 의주 북쪽에서 옥강(玉江)과 합한다.
옥강은 의주 동북쪽 6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천마산(天磨山)과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 옥강진(玉江鎭)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서 담청색 옥이 나기 때문에 옥강(玉江)이라고 한다.
○ 적도(赤島) 동쪽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굽이쳐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는데, 이것을 압록강이라 하니 물빛이 오리 머리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류를 따라 흐르는데, 이것을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고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과 합하고 적강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으니 오랑캐 땅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큰 강이 되어 위화도를 거쳐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다가 미륵당(彌勒堂)에서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고진강(古津江)과 합한다.
고진강은 근원이 보광산(普光山) 북쪽 선천(宣川) 경계 에서 나와서 식송진(植松鎭)을 거쳐 미륵당에서 삭주 지경의 천마산 남쪽 여러 냇물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강이다. 옛 정령(定寧)ㆍ옛 영주(寧州)ㆍ옛 인산(麟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 강기수(姜耆壽)가 여기 빠져 죽었기 때문에 서장강(書狀江)이라고도 한다.
○ 남쪽으로 서해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었다.” 하였고 옛 기록에 “천하의 세 곳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ㆍ장강ㆍ압록강이 이것이다.” 하였다.
○ 안주(安州) 청천강은 혹은 살수(薩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영변(寧邊) 묘향산에서 나와서 10여 리를 흐르다가 어천(魚川)과 합한다. 어천은 근원이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10리를 흘러 어천이 되었다. 영원 서쪽 경계에 있는 물이 서쪽으로 40리를 흐르다가 희천(熙川) 봉단성(鳳丹城)에서 합하고 아래로 흘러 영변 장항진(獐項津)이 된다.이 강은 안주부 동남쪽에 이르러 화천강(花遷江)이 되고, 또 남쪽으로 5, 6리를 흐르다가 안주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또 구음포진(仇音浦津)과 합한다. 구음포진은 근원이 초산과 벽동(碧潼) 지경에서 나와 운산(雲山)의 동천(東川)이 되고 영변을 거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또 개천(价川) 장항강(獐項江)과 합한다. 장항강은 바로 묘향산 남쪽 분탄(犇灘)의 하류인데 동천과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주 북성(北城) 아래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서쪽으로 30리를 흐르다가 박천강(博川江)과 합한다.
○ 박천강은 근원이 창성(昌城)의 부운산ㆍ삭주의 천마산ㆍ청룡산ㆍ옛 구주(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오는데 청천강과 합류하여 태천(泰川) 동쪽에서 오지천천(烏知遷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구성(龜城)의 구림천(仇林川)ㆍ팔령천(八嶺川)과 합해서 동쪽으로 흘러 박천(博川) 서쪽에서 곶적강(串赤江)과 합해서 박천강이 된다. 이 강이 가산(嘉山) 동쪽에 이르러 대령강(大寧江)이 되어 정주 가마천(加磨川)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합하고, 고성진(古城鎭)에 이르러 청천강과 합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노강(老江)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개사강(蓋泗江)이라 불렀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여기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모여서 다리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이름을 대령강이라 하였다.” 한다.
○ 평양의 대동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寧遠)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다시 꺾여 서쪽에서 흘러가다가 덕천 경계에서 삼탄(三灘) 영원 맹산(孟山)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서 합쳐 흐르기 때문에 삼탄이라고 부른다. 과 합쳤고 남쪽으로 흘러 개천(价川) 경계에서 순천강(順川江)이 된다. 다시 순천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었는데,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밑에는 기탄(岐灘)이 있으며 자산(慈山)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되어 은산(殷山)의 대천(大川)과 합했으며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강동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된다.
○ 하나는 양덕(陽德) 북쪽 문음산(文音山)과 오강산(吳江山) 및 맹산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다시 합해서 성천(成川)의 비류강이 되어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나는데 산 밑에 사석혈(四石穴)이 있어 물이 그 구멍 속으로 통해 흐르다가 솟아 올라 서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비류강이라 한다.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동 경계에 이르러서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다시 웅성강(熊城江)과 합한다.
웅성강의 근원은 옛 양덕 북쪽 40리에 있는 고원(高原) 경계 우라발산(亏羅鉢山) 거차리령(巨次里嶺) 남쪽 에서 나오는데, 흘러서 양덕(陽德)의 남천(南川)이 되고 곡산(谷山)으로 들어가서 말흘탄(末訖灘)이 되어 곡산 여러 냇물과 합한다. 이 물은 다시 수안을 지나 북쪽을 삼등(三登) 남쪽에 이르러서 웅성강이 되고, 또 서북쪽으로 흘러 서진강으로 들어간다.
○ 평양성 동북쪽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과 대동강이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그 하류는 평양강과 합한다. 평양강은 근원이 순안(順安)의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웅성강과 합류하여 중화 서쪽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강서의 구림천(九林川)과 합해서 용강(龍崗) 동쪽에 이르러 동쪽 급수문(急水門)으로 빠진다.
○ 금천(金川)의 저탄(猪灘)은 근원이 수안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는데 아래로 흘러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보음탄(甫音灘)이 되며 신계(新溪) 서쪽을 지나서 사팔적탄(沙八赤灘)이 된다. 이 물은 평산(平山)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가서 전탄(箭灘)이 되며, 저탄에 이르러 비로소 커져 하류는 금천 조읍포(助邑浦)의 조운(漕運)하는 곳이 된다.
○ 남쪽은 말롱포(末籠浦)가 되고, 그 남쪽은 배천(白川), 동쪽은 금곡포(金谷浦)의 조운하는 곳이며, 또 그 남쪽은 광정도(匡正渡)와 벽란도가 된다.
○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이라 일컫는다.
○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였지만 우통수가 그 주류이다. 오대산 물이 두타산 북림계(北臨溪)와 삼척의 죽현(竹峴) 물과 합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 동쪽 여량역(餘粮驛)을 지나 군(郡) 북쪽에 이르러 광탄진(廣灘津)이 되고, 군 남쪽은 대음강(大陰江)이 되고, 군 서쪽은 용암연(龍巖淵)이 된다.또 흘러가다가 영월 후진(後津)이 되고 금봉연(金鳳淵)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한다. 금장강은 바로 평창(平昌)의 연촌진(淵村津) 하류이며, 또 서쪽으로 주천강(酒泉江)과 합하는데 주천강은 바로 원주 동쪽 주천현 거슬산(琚瑟山) 여러 물의 하류이다.또 남쪽으로 흘러 영춘(永春)에 이르러서 눌어탄(訥魚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남진(南津)이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단양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상진(上津)과 하진(下津)이 되고, 서쪽은 소요항탄(所要項灘)이 된다. 또 북쪽으로 꺾어지고 서쪽으로 흘러서 청풍강이 되고, 병풍산 밑에 이르러 북진(北津)이 되며, 제천의 광탄(廣灘) 하류에 와서 합하고, 충주 북쪽 10리에 이르러 북진이 되며, 충주 서쪽 10리 금천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서로 합한다.
○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구요(九遙) 팔교(八橋)의 냇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청주 동쪽에 이르러 청천(靑川)이 되고, 청천은 파곶(葩串) 하류와 합하여 괴산에 이르러 괴진(槐津)이 되며, 연풍천(延豐川)과 합한다. 또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 서쪽으로는 월락탄(月落灘)이 된다.그 서쪽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또 그 서북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이 있는데, 섬강(蟾江)과 합한다. 섬강은 바로 오대산 서쪽 횡성(橫城)ㆍ원주의 여러 물인데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양근(楊根)의 대탄(大灘)과 월계천(月溪遷)이 된다. 군(郡) 서쪽 45리 병탄(幷灘)에 이르러 북강과 합하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이수두(二水頭)라고도 한다.
○ 북강(北江)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인제 서화현(瑞和縣) 소파령(所波嶺)ㆍ소동라령(所冬羅嶺)과 춘천 기린현(基麟縣)의 네 냇물이 합쳐서 인제 미륵천(彌勒川)이 된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주연진(舟淵津)이 되고 양구 남쪽에 이르러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며, 춘천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ㆍ주연(舟淵)ㆍ적암탄(赤巖灘)이 된다. 또 춘천부 북쪽 6리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고,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이르러 보제진(菩提津) 하류와 합했다.그 하나는 회양(淮陽)의 화천(和川) 하류에서 덕진(德津)이 되어 은계(銀溪)와 합했으며, 양구의 대연(大淵) 하류에서 회양ㆍ용연(龍淵)ㆍ남곡(嵐谷)의 물이 되어 금성(金城)의 남천(南川)이 되었고, 철령 남쪽 금강 서쪽에 있는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해서 금성(金城)이 보제진이 되는데 속칭 모천(牟遷)이라고도 한다. 이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통구(通溝) 다경진(多慶津)이 되고 금강 남쪽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오다가 양구의 곡계(曲溪)와 합치고 서쪽으로 흘러와 합쳐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남쪽으로는 대리진(大利津)이 된다.또 춘천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고 우두촌(牛頭村) 앞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해서 서쪽으로 흘러 신연진(新淵津)이 된다. 또 홍천강과 합해서 가평 동쪽에 이르러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이 되고 병탄에 이르러 남강과 합한다.
○ 남강과 북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천진(渡迷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또 송파(松波)ㆍ삼전도ㆍ저자도(楮子島)ㆍ뚝섬 두모포(豆毛浦)가 된다.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가 되고 또 서쪽으로는 서빙고ㆍ동작진ㆍ흑석(黑石)ㆍ노량(露梁)ㆍ용산강ㆍ마포ㆍ남타(南沱)ㆍ율도(栗島)ㆍ토정(土汀)ㆍ현석(玄石)ㆍ서강(西江) 농암(籠巖)이 된다.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 북쪽에 이르러 공암진ㆍ행주가 된다.또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임진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안변(安邊)과 영풍(永豐) 냇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장치(防墻峙)를 지나서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 미탄(美灘)의 물은 근원이 박달치(朴達峙)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해서 옛 성진(城津)이 되며 신계(新溪) 경계를 지나 안협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평강(平康) 분수령 물은 안협(安峽)의 저구리탄(猪仇里灘)이 되고 이 물이 합해서 포리진(浦里津)이 되어 토산으로 들어가서 동천(東川)이 된다. 다시 삭녕에 이르러 삭녕도가 되고 연천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며, 마전(麻田)에 이르러 후근도(朽斤渡)가 되어 양주의 대탄(大灘)과 합한다.
○ 그 하나는 철령 물이 서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을 지나서 철원의 체천(砌川)이 되는데 양쪽 언덕이 모두 석벽이어서 섬돌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 물은 순담(筍潭) 화적연(禾積淵)을 지나서 영평 북쪽에 이르러 직탄(直灘)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의 전탄(箭灘)과 합한다.포천의 여러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로주(白鷺洲)가 되고 백운산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영평 남쪽에 이르러 전탄이 되고, 또 마흘천(磨訖川)이 되며, 양주 북쪽에 이르러 대탄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의 아미천(峩嵋川)과 합하여 마전으로 들어가서 삭녕강과 합한다.
○ 적성(積城) 북쪽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 구연강(仇淵江)이 되고, 장단 동쪽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사미천(沙彌川)과 합해서 용산진과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는 덕진(德津)이 된다. 다시 교하(交河)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 오도성은 속칭에 오두현(鼇頭峴)이라 한다.
○ 공주의 금강은 근원이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나오고, 적등진은 근원이 덕유산 서북에서 나오니, 장수ㆍ진안의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용담(龍潭) 달계천(達溪川)이 되고, 무주에 이르러 대덕산(大德山)ㆍ적상산(赤裳山) 냇물과 합해서 금산 경계에 이르러 소이진(召爾津)ㆍ지화진(只火津)이 된다. 다시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中牟縣) 물은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靑山)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懷仁)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서쪽으로 동진(東津)과 합하고, 연기(燕岐)ㆍ동진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의 여러 냇물이 합류해서 청주 작천(鵲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목천ㆍ전의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동진이 된다.다시 공주 북쪽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웅진과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이 된다. 또 은진(恩津)에 이르러 강경포(江景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져 석성의 고다진(古多津)ㆍ임천(林川)의 남당포(南堂浦)ㆍ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ㆍ서천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임천에서 서천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포라고 한다.
○ 계룡산 한 골짜기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잠(鎭岑) 남쪽에 이르러 차탄(車灘)이 되고 진산(珍山)의 옥계(玉溪) 하류와 합했으며 또 동쪽으로 공주ㆍ유성에 이르러 여러 냇물과 합해서 회덕의 갑천(甲川)이 되고, 또 선암천(船巖川)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형각진(荊角津)으로 들어간다.
○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 광양의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에 이르러 방제천(方梯川)이 되며, 곡성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서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바로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 만경(萬頃)의 신창진(新倉津)은 근원이 고산(高山)의 남천(南川)에서 나오는데, 운제산(雲梯山)과 주취산(珠崒山)의 물이 현(縣) 남쪽을 지나 흘러서 전주 북쪽으로 들어가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鴈川)이 된다. 이 물은 또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서 전주 남천의 북류와 합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옥야(沃野)ㆍ이성(利城)을 거쳐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경현을 지나서 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 부안의 동진(東津)은 내장산과 노령 북쪽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으로 흘러서 고부(古阜)의 모천(茅川)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인의 남천(南川)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진이 된다. 금구(金溝) 상왕산(象王山)의 물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동진으로 들어간다. 흥덕(興德) 우등산(牛登山) 물은 고부의 눌제천(訥堤川)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진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경상도의 낙동강은 근원이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경상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또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ㆍ영산강 두 강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고 하였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과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蓼村灘), 물야탄(勿也灘), 대항진(大項津)이 된다.영양ㆍ진보(眞寶)ㆍ청송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祕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豐津)이 된다. 풍기ㆍ순흥(順興)ㆍ봉화ㆍ영천의 물은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ㆍ용연(龍淵)ㆍ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 곶천(串川)에 와서 합한다.
○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ㆍ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ㆍ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鯉埋淵)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는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離)ㆍ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ㆍ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바로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하양(河陽)ㆍ자인(慈仁)ㆍ경산(慶山)의 여러 물과 합하여 대구의 금호(琴湖) 달천진(達川津)이 되어 모두 합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무계진(茂溪津)이 되어 현풍(玄風)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 고령 동쪽에 이르러 개산강(開山江)이 되며, 성주의 가천(伽川)은 고령으로 들어가서 합천의 야천(倻川) 하류와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 초계(草溪) 동쪽 창녕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 덕유산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瀶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이 물은 산청 경계에 이르러 안의의 동천(東川) 하류와 합하여 진주 서쪽에서 우탄(牛灘)이 되며, 단성(丹城)에 이르러 신안진(新安津)이 되는데, 삼가(三嘉)의 여러 냇물이 흘러 합쳐서 진주 서쪽에 이르러 소남진(召南津)이 된다.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산을 돌아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주 서쪽에서 합쳐서 청천강(菁川江)이 되며, 성(城) 아래에 이르러 촉석강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鼎巖津)이 되며, 영산(靈山)의 기음강(岐音江)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亐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혹은 ‘무포(茂浦)’라고도 한다.창원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곳은 혹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보충 : 은하수의 형상은 하늘의 반쪽을 가로질렀는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에서 그쳤는데, 머리는 간방(艮方)이고 꼬리는 곤방(坤方)이다. 우리나라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으로서, 이 세 강은 모두 머리는 간방이고 꼬리는 곤방이다. 《성호사설》
○ 보충 : 우리나라 지도가 옛날에는 모두 평평하고 정방형이기 때문에 형세를 알 수 없었다. 영종(英宗) 경인년에 신경준(申景濬)에게 명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게 하니, 관청에 보관했던 십여 가지를 내어 오고 또 널리 여러 사람들의 금ㆍ고본(今古本)을 찾아 내었으나, 정항령(鄭恒齡)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완전하였다.여기에 약간 교정을 더해서 〈열읍도(列邑圖)〉 8권과 〈팔도도(八道圖)〉 1권과 〈전국도(全國圖)〉 한 폭을 만들었는데, 주척(周尺 주 나라 척도(尺度)를 기준으로 삼음) 두 치로 한 선(線)을 하고 세로는 76선, 가로는 1백 31선으로 하게 하였다. 또 동궁에게 이와 같이 만들어 바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짧은 서문을 지어 족자 위에 썼다. 정씨(鄭氏)의 지도는 항령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에 이르러 보충되었으니, 대개 3대(代) 50여 년이 걸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용재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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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시(五言詩)
도봉산(道峯山)의 맑은 날 구름


구름은 빈 곳에서 일어나고 / 雲從虛處生
봉우리는 공중에 비끼었나니 / 峯向空中橫
이 둘이 만나 고운 자태 짓고 / 邂逅作媚娬
아침 해는 맑게 갠 하늘 비춘다 / 朝日弄新晴
고요히 앉아 이 광경 구경하는 / 宴坐自娛翫
주인 또한 속세의 정을 잊노라 / 主人亦忘情

 

월사집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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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하(記下)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


도성 뒤쪽의 명산으로는 반드시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을 꼽는다. 그리고 시내와 골짜기의 수석(水石)이 좋기로는 영국동(寧國洞)과 중흥동(重興洞)을 으뜸으로 치는데, 이 두 곳은 모두 이 두 산 계곡의 하류이다.
임오년(1582, 선조15) 가을, 내가 정시회(鄭時晦)와 영국서원(寧國書院)에서 글을 읽다가 도봉산과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였다. 당시 나와 정시회는 모두 약관(弱冠)의 나이라 위험한 곳을 꺼리지 않고 샅샅이 다 구경하였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이 산들을 노니는 꿈을 자주 꾸곤 하였다.
을묘년(1615, 광해군7) 가을, 백사(白沙) 상공은 견책을 받고 노원촌(蘆原村)에 우거하고 계셨고 나도 조정에서 축출되어 한거(閒居)하고 있던 터라, 윤후 중청(尹侯仲淸), 맏아이 명한(明漢)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찾아가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백사에게 이르기를, “수락산의 가을 폭포가 한창 장관이고 도봉산에는 새로 계당(溪堂)을 지었다 하니, 오늘 함께 구경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하니, 백사가 흔쾌히 승락하면서 “수락산은 내가 날마다 가는 곳이니, 나는 도봉산에 가 보고 싶구려. 그대와 함께 가니, 매우 즐거운 일이오.” 하고는, 즉시 아이를 불러 지팡이와 신발, 복건(幅巾)과 베옷을 준비하게 하여 여장을 갖추어 노새를 타고 나섰다. 시내를 따라 갈대숲 속으로 난 길을 수십 리 가서 누원(樓院)의 대로를 지나 동구로 들어서니, 이미 별세계(別世界)였다. 시냇물 소리와 산색(山色)이 너무도 좋아 일일이 감상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산음(山陰)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그 긴 폭포, 깎아지른 골짜기, 얕은 시냇물, 겹겹의 모래톱, 맑은 못, 우뚝 솟은 벼랑에 물가며, 언덕이며, 섬이며, 바위들이 다투어 기이한 형상을 바치니,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이는 모두 예전에 조석으로 다니던 곳이라, 바라보니 구면(舊面)이 아닌 것이 없었다. 다만 바위는 더욱 늙어 창고(蒼古)하고 나무는 더욱 늙어 기이하며, 봉우리는 더욱 높아졌고 물은 더욱 맑아졌을 뿐이었다.
사당에 참배한 뒤 무릇 앉을 만하고 거닐 만한 바위나 구릉은 모두 맘껏 노닐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침류당(枕流堂) 동루(東樓)에 올랐다. 누각은 예전에는 없던 것을 지금 증축했다 하는데 매우 깨끗하여 좋았다. 밤에 침류당에 묵었다. 물결 소리는 침상을 흔들고 산 위에 뜬 달빛은 문에 비쳐들어 삼경에 잠에서 깨니 마치 꿈속에 삼협(三峽)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백사가 나를 발로 차 깨우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좋은 경치를 만날 수 있겠는가.” 하기에 술을 가득 부어 몇 잔을 마신 다음 명한에게 춤을 추게 하고 앞뜰을 거닐면서 소자첨(蘇子瞻)의 〈적벽부(赤壁賦)〉를 낭랑하게 읊조리니, 표연(飄然)히 바람을 타고 등선(登仙)하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옛날에 이곳에서 삼추(三秋)를 보냈으나 이 밤처럼 맑은 경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에 옛날에는 아예 이곳에서 노닌 것이 아니었고 이제야 비로소 이곳에서 제대로 노닌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기록해 둔다.


 

[주D-001]산음(山陰) 길을 가는 것 : 중국 회계(會稽)의 산음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벗 대규(戴逵)를 찾아 늘 산음 길을 다녔는데, 그가 말하기를, “산음 길을 가노라면, 산천의 경치가 좌우에서 영발하여, 이루 다 구경할 겨를이 없다.〔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하여, ‘산음도상 응접불가(山陰道上應接不暇)’라는 성어(成語)가 생겼다. 《世說新語 言語2》
[주D-002]삼협(三峽)을 지나가는 것 : 이백(李白)의 〈아미산월가(峨嵋山月歌)〉에 “아미산에 반달이 뜬 가을, 그 그림자 평강의 물굽이에 비치누나. 밤에 삼계를 출발해 삼협으로 향하노니, 임 그리워도 보지 못하고 유주를 내려간다.〔峨嵋山月半輪秋 影入平羌江水流 夜發三溪向三峽 思君不見下渝州〕” 한 것을 차용하였다. 《古文眞寶前集》

월사집 제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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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 하(墓誌銘下)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증시(贈諡) 문충(文忠) 이공(李公) 묘지명


만력(萬曆) 무오년(1618, 광해군10) 5월 13일에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북청(北靑)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였다. 그해 8월에 포천(抱川)의 신향(辛向) 기슭에 귀장(歸葬)하고 궤연(几筵)이 동강(東岡)의 옛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는 교외(郊外)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이미 몇 줄의 글로 공의 묘표(墓表)를 지었고 또 1300여 자나 되는 장문의 제문(祭文)을 지어 곡(哭)하였다. 그리고 12년 뒤 기사년(1629, 인조7)에 태학사 장공 유(張公維)의 행장에 의거하여 서문을 쓰고 명(銘)을 붙인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공은 휘는 항복(恒福), 자는 자상(子常)이다. 그 시조에 이알평(李謁平)이란 분이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으로서 신라 시조를 옹립하여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마침내 계림(鷄林)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휘 제현(齊賢)이란 분이 있었는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고 세상에서 익재(益齋) 선생이라 일컫는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휘 연손(延孫)은 공조 참판이다. 이분이 휘 숭수(崇壽)를 낳았는데 첨지중추부사이다. 이분이 휘 성무(成茂)를 낳았는데 안동 판관(安東判官) 증(贈) 이조 판서이다. 이분이 휘 예신(禮臣)을 낳았는데 진사(進士) 증 좌찬성이다. 이분이 휘 몽량(夢亮)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 증 영의정이다.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으로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여 청검(淸儉)과 절효(節孝)로 이름났다. 현감(縣監) 최륜(崔崙)의 따님이고 눌헌(訥軒) 이공 사균(李公思鈞)의 외손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를 아내로 맞아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처음 태어났을 때 울지 않기에 집안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들어 보았다. 겨우 몇 살이 되자 총명이 비범하였고 성품이 침중하고 과묵하여 웃음과 말수가 적었다. 그래서 식자(識者)들은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이미 알았다.
8세에 부친 참찬공(參贊公)이 ‘검(劍)’과 ‘금(琴)’ 두 글자를 주며 대구(對句)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검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담겼어라.〔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하니, 듣는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9세에 부친 참찬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마치 성인(成人)처럼 집상(執喪)하였고 소식(蔬食)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14, 5세 때에 이미 재물을 가볍게 보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의기(義氣)를 중시하고 자질구레한 세행(細行)에 구애되지 않았다. 한번은 새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입고 싶어 하자 공이 즉시 자기 저고리를 벗어서 주었다. 공이 돌아와 대부인(大夫人)에게 말하기를 “남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차마 옷 하나를 아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씨름과 축국(蹴跼)을 잘하여 큰 거리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패를 나누어 겨루며 용맹을 뽐내면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였다. 대부인이 이 사실을 듣고 준절(峻切)히 꾸짖으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분부를 받들고 그날로 놀이를 그만두고 평소의 행실을 고쳐 책을 읽고 통렬히 자신을 검속(檢束)하였다. 모친 최 부인(崔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상중(喪中)에 예법을 지키는 것이 더욱 각고(刻苦)하여 죽을 먹고 시묘(侍墓)하며 애훼(哀毁)가 지나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복(服)을 벗고 학궁(學宮)에 들어가서는 누차 윤제(輪製)에서 장원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상국(相國) 권철(權轍)이 그 소문을 듣고 공을 손서(孫壻)로 삼았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의 정자(正字)가 되고 사국(史局)의 검열(檢閱)로 선임되었다. 선묘(宣廟)께서 《강목(綱目)》을 강독하려 할 때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질문에 대답할 만한 재주 있는 신하를 미리 뽑을 것을 명하셨다.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이 공 등 다섯 사람을 천거하니, 내각본(內閣本) 《강목》 한 질씩을 하사하는 한편 시강(侍講)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일로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명하였으며, 이윽고 장기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그리고 옥당(玉堂)에 뽑혀 들어가 정자가 되어서는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과 결탁한 죄상을 논핵하여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이에 공은 질병을 이유로 세 차례 정고(呈告)하니, 선묘가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옥당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 사직소를 받지 말라.” 하였다.
박사를 거쳐 봉교로 이임하고 전적ㆍ정언에 승진하였으며, 추천으로 이조 좌랑ㆍ지제교에 배수(拜受)되었다. 수찬ㆍ정언ㆍ교리를 거쳐 다시 이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다.
기축년(1589)의 역옥(逆獄) 때 공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민첩하기가 나는 듯하고 변재(辯才)가 신명과 같으니, 선묘가 “고재(高才)로다, 고재로다.”라고 자주 칭찬하고 매사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부르니, 다른 관료들은 팔짱을 낀 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저 입에 침이 마르게 찬탄할 뿐이었다. 대신(大臣)의 헌의 때마다 공이 주선하여 평번(平反)한 바가 많았다. 응교로 승진하고 검상(檢詳), 사인(舍人)에 천거되었다.
경인년(1590)에 문사 낭청으로 있을 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추충분의평난 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를 받고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한번은 경연에 입시(入侍)했을 때 선묘가 공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국옥(鞫獄) 때의 일을 얘기해 마지않았으며, 얼마 뒤에 준질(準秩)을 명하여 직제학으로 승진하였으며, 또 특명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동부승지로 승진하였으니, 장차 공을 크게 쓰기 위한 것이었다.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서 장원하여 구마(廏馬)를 하사받았다.
신묘년(1591)에 체직되어 호조 참의가 되었다.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일이 잘 다스려져서 창고가 충실해지니, 판서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문한(文翰)에 종사하는 선비가 전곡(錢穀)의 업무를 이처럼 잘 처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참으로 통재(通才)로다.” 하였다. 얼신(蘖臣) 홍여순(洪汝諄)이 송강(松江) 정공 철(鄭公澈)을 모함하여 당대의 사류들을 거의 다 유찬(流竄)하고, 이어 송강의 죄목을 방(榜)에 써서 조당(朝堂)에 내걸었으며, 승지로서 봉행(奉行)에 태만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여름에 서용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풀려는 자가 공을 더욱 심하게 모함하여 장차 중죄(重罪)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극력 구원하여 일이 무마되었다. 도승지로 서승(序陞)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적이 침공한다는 보고가 이르자 공은 밤낮으로 공무를 보면서 국가를 위해 순절(殉節)하리라 맹세했다. 퇴청(退廳)해서는 외사(外舍)에 거처하며, 집안일은 일절 상관하지 않게 할 것을 명하였다. 병든 첩이 한 번만 만나 뵙고 영결(永訣)하고 싶어 해도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도성을 떠나 몽진(蒙塵)하던 날, 비가 내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신료들은 아직 모이지 않고 중전께서 홀로 여시(女侍) 수십 명과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을 나가셨는데 공이 홀로 등촉(燈燭)을 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날 밤, 어가(御駕)가 임진(臨津)을 건넜는데 짐꾼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자 공이 진흙탕 속을 걸어 다니며 불러 모았다. 그리고 어가를 호종(扈從)하여 삼경(三更)에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렀다. 상이 공을 불러 입시하게 하는 한편 대신(大臣) 및 윤두수(尹斗壽)를 재촉해 불러 계책을 물었다.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병력으로는 이 적을 막을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가서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하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내 생각도 본래 그러하다.” 하였다.
송경(松京)에 도착하자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에 승진시키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한 다음 왕자를 호종하여 먼저 평양(平壤)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은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다는 것을 내가 평소에 알고 있으니, 경들과 함께 왕자를 호종하게 하라.” 하였다.
어가가 평양에 이르자 하교하기를 “이모는 충직하고 성실하니, 의당 승탁(陞擢)하여 중임을 맡겨야 한다.” 하였다. 얼마 뒤에 형조 판서와 대사헌에 배수되었다.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속히 천조(天朝)에 상주(上奏)할 것을 다시 청하고, 또 삼도(三道)에 조도관(調度官)을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여 천병(天兵)의 군량을 조달하게 할 것을 건청(建請)하였으니, 국가를 다시 회복한 공업이 실로 여기에 기반한 것이었다.
병조판서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兵曹判書弘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에 배수되었다. 임진(臨津)이 적에게 함락되자 군신(羣臣)들이 함흥(咸興)으로 행행(行幸)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윤상 두수(尹相斗壽)와 함께 말하기를 “이 성을 지킬 수 없으면 영변(寧邊)으로 행행해야 할 것이다. 한번 북령(北嶺)을 넘어가면 곧 상국(上國)과 멀리 떨어지게 될 터이니, 다시 누구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적이 패수(浿水)로 핍박해 들어오자 한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적장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만나 진격을 늦추어 줄 것을 청하고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몰래 용사(勇士)를 데리고 가서 두 적장의 목을 베어 오겠소.” 하였다. 공이 만류하기를 “당당한 국가가 어찌 도적의 꾀를 쓸 수 있겠소.” 하니, 계획을 그만두었다.
어가가 영변에 이르렀다. 공이 ‘구원병을 청하러 요동(遼東)에 가겠다.’라고 자청하였고, 한음도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하였는데, 심공 충겸(沈公忠謙)이 말하기를 “이모는 바야흐로 병조 판서로 있으니, 가서는 안 된다.” 하여 마침내 덕형(德馨)을 보냈다. 공이 서문(西門)까지 전송하여 자신의 참마(驂馬)를 풀어 주며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자네는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하네.” 하자, 한음이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의 해골이 노룡(盧龍)에 버려질 걸세.” 하니, 듣는 사람 모두 안색이 바뀌었다.
강탄(江灘)의 아군이 무너지자 선묘께서 밤에 신료들을 불러 중국에 귀부(歸附)하는 문제를 의논하며 하교하기를 “부자가 함께 압록강을 건너가면 국사가 가망 없게 될 것이니, 세자는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분조(分朝)하여 가라. 나는 약간의 신료를 데리고 의주(義州)로 들어갈 것이다. 나를 따를 사람은 누구인고?” 하니, 신료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신은 이미 부모가 없고 질병도 없으니, 따르겠습니다.” 하니, 상의 안색이 바뀌었다.
어가가 박천(博川)에 머물고 있을 때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이르렀다. 이에 어가를 재촉하여 밤에 출발하니, 호종하는 신하들이 도중에 많이 도망쳤다. 마침 비는 내리고 캄캄한 밤중이었다. 공은 창졸간에 변고가 생길까 염려하여 급히 말을 몰아 앞에서 길을 인도하니, 상이 더욱 공을 신임하였다.
정주(定州)에 이르렀을 때 공은 ‘며칠 머물며 적의 소식을 기다리고 먼저 신하 한 사람을 보내 의주의 부로(父老)들을 위유(慰諭)하는 한편 중국의 요광(遼廣)으로 자문(咨文)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할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다.
의주에 이르니, 백성들이 놀라 흩어지고 있었다. 공이 관청을 수리함으로써 오래 주둔할 뜻을 보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며칠 만에 차츰 백성들이 돌아와 모여 행궁(行宮)의 모양이 갖추어졌다. 공이 또 말하기를 “한남(漢南)의 각 지방에서는 필시 ‘어가가 이미 요동으로 건너갔다.’ 하며 백성을 선동하여 난리를 일으키려 할 터이니, 급히 사신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선유(宣諭)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의 명령이 호남과 영남에 통하게 되어 관군과 의병이 자못 군대를 정비해 달려왔고, 국세(國勢)가 이에 힘입어 진작되었다.
당시 요동에서는 “조선이 왜인(倭人)을 끌어들여 천조(天朝)를 침공하려 한다.”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중국의 병부(兵部)가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와 사실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황응양이 처음에는 몹시 의심하였다. 공이 도성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염려하여 신묘년(1591, 선조24)에 왜추(倭酋)가 보내온 오만 무례한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다가, 이때에 그것을 보여 주었다. 황응양이 그 국서를 보고 가슴을 치고 크게 통탄하며 말하기를 “귀국(貴國)이 중조(中朝)를 대신해 병화(兵禍)를 입었는데 도리어 오명(汚名)을 받았구려.” 하고, 중국에 돌아가 석 상서(石尙書)에게 보고하며 실상을 통렬히 진달하였다. 이에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는 일이 비로소 결정되어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이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선발대로 조선에 오니, 조정이 든든하게 믿었다. 그러나 공은 홀로 말하기를 “조승훈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지모(智謀)가 없으니, 군대가 반드시 패전할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평양에 진병(進兵)하였다가 과연 패주하고는 도리어 ‘조선이 왜적을 도왔다.’라고 무함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大臣)을 보내 변무(辨誣)할 것을 청하는 한편 서둘러 대병(大兵)을 보내 주길 요청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수복하자 경성(京城)의 적도 후퇴하였다. 공이 환도(還都)할 것을 힘써 청하니, 10월에 어가가 경성으로 돌아왔다. 백관은 비록 하릴없이 담장만 의지하고 있었으나 군정(軍情)은 공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였다.
중국의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명을 받들고 올 때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도에 영접하였다. 천조(天朝)의 칙유(勅諭)에 “세자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가서 그 지역의 군무(軍務)를 맡으라.”라고 했기 때문에 공은 병조 판서로서 접반사를 사임하고 세자를 배종(陪從)하여 남행(南行)하였다.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모반하자 관료들이 세자를 모시고 상경(上京)함으로써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학가(鶴駕)가 남하(南下)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지(潢池)의 작은 역적 때문에 소명(召命)이 있지도 않은데 허겁지겁 상경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의당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사중(士衆)을 독려하고 속히 토벌하여 군부께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역모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사람이 줄을 잇자 공이 아뢰기를 “역적은 조수(鳥獸)나 어별(魚鼈)처럼 곳곳마다 늘 나오는 것이 아닌데 어찌 이처럼 많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옳다고 하였다.
을미년(1595)에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 일본을 책봉(冊封)할 때 부사(副使) 양방형(楊方亨)이 공을 접반사로 삼고자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공은 조정을 떠날 때 동전(東銓)과 문병(文柄)에서 해임되고 우참찬에 배수되었다. 양방형이 공을 공경하여 예로써 대우하며 말하기를 “동국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정유년(1597)에 다시 병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중국의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가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오면서 호조ㆍ병조ㆍ공조의 판서를 만나고자 하였다. 공이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양 경리를 영접할 때 응대가 주밀(周密)하고 민첩하니, 양 경리가 칭찬하였다.
공은 모두 다섯 차례 병부의 수장이 되어 안으로는 국난을 평정하고 밖으로는 천장(天將)을 응접하였는데 재략(才略)이 기의(機宜)에 맞아 일 처리가 여유로웠으며, 전주(銓注)가 공명(公明)하여 무장(武將)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늘 만 필의 베를 비축해 두어 수용(需用)에 대비했다. 그래서 양 경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라 하며 공을 불렀다.
찬획(贊劃) 정응태(丁應泰)가 무함하는 주문(奏文)을 올려 우리나라를 탄핵하니, 선묘께서 크게 놀라 합문(閤門)을 닫고 정사(政事)를 보지 않았다. 신료들이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이 가서 변무해야 한다.” 하였는데 수상(首相)인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즉시 출행을 청하지 않았다. 선묘께서 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임명하여 진주 정사(陳奏正使)로 삼았고 나는 부사(副使)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둘러 중국으로 가서 진주(進奏)하니, 황상(皇上)이 정응태의 소장을 아울러 하달하고, 오부(五府)ㆍ육부(六部)ㆍ구경(九卿)ㆍ과도(科道)에게 명하여 우리의 주문(奏文)을 함께 심의(審議)하게 하였다. 공은 일행의 제관(諸官)과 함께 날마다 동각(東閣)에 가서 주문을 올려 사실을 진달하였는데, 그 글의 사어(辭語)가 매우 개절(凱切)하여 중국의 관료들이 보고 탄복하는 이가 많았다. 중국의 관료들이 복주(覆奏)하여 우리의 국치(國恥)를 후련히 씻게 되었다. 황제가 명하여 정응태를 파직하여 민적(民籍)에 넣게 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장려하는 뜻의 칙유(勅諭)를 내리니, 선묘께서 크게 기뻐하여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당시 의정부의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화의(和議)를 주장했는데 공은 자핵(自劾)하는 소장을 올려 “일찍이 화의에 동참했으니 감히 요행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다. 소장이 무려 열네 번이나 올라가서야 체직되었다. 선묘가 하교하기를 “사람들과 함께 일해 놓고 마침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는 것은 이모(李某)의 죄인이다.” 하였다.
경자년(1600)에 도체찰사(都體察使)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호남과 영남의 각 지방을 선무(宣撫)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安民〕’, ‘해상을 방어할 것〔防海〕’ 등 열여섯 가지 책략을 올렸다. 여름에는 영상으로 조정에 소환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여(喪輿)를 모시고 산릉(山陵)에 갔는데 궁인이 밤중에 실화(失火)하여 영악전(靈幄殿)을 불태우고 말았다. 이에 공이 예관(禮官)에게 방도를 지시하여 양사(襄事)를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이 법도에 맞게 마쳤다.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이 국서를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오랑캐는 천조로부터 작위를 받았으니, 본국에서는 의리상 사사로이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제하면 반드시 후일에 우환거리가 될 것이니, 그 사신을 사절하소서.” 하였다. 선묘가 호종 공신(扈從功臣)을 봉하면서 공을 원훈(元勳)으로 삼으니,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고사(固辭)하였다. 선묘가 “외로운 충성과 굳은 절개는 실로 조종(祖宗)의 충신이다.”라는 말로 하유(下諭)하고,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扈聖功臣)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임인년(1602)에 간신(奸臣)이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하여, 그 무리 문경호(文景虎)를 시켜 상소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습니다.” 하면서 서로 소장을 올려 죄를 청하였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차자를 올려 극력 진달하기를 “최영경이 체포될 때 성우계는 파주(坡州)에서 서찰을 보내 그를 구해 주려고 힘썼으니, 문경호의 소장은 거짓으로 꾸민 말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하였다. 차자가 올라가지 않았을 때 간신이 권신의 지시를 받아 상소하여 공을 공격하고 공을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공은 인책하여 사직소를 일곱 번이나 올린 끝에 면직되었다. 공은 비록 벼슬을 떠났으나 선묘의 예우(禮遇)는 줄지 않아 중대한 일은 반드시 공에게 자문하였다.
갑진년(1604)에 차자를 올리면서 시정(時政)의 궐실(闕失)을 극론하였다. 대마도(對馬島)의 추장 평의지(平義智)가 거짓으로 두 사수(死囚)를 결박하고 임진년에 능(陵)을 범한 도적이라 하면서 바치고 화친을 청하였다. 이에 공은 두 사수를 경상(境上)에서 죽이고자 하였으나 유영경(柳永慶)은 자신의 공으로 삼아 자랑하고자 두 사수를 심문할 것을 힘써 청하였다. 그리하여 심문하였으나 결국 아무 소득이 없었다.
김계(金稽)란 자가 사주를 받고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봉(追封)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 일을 하달하자 공이 의론하기를 “이 일을 실행한 이는 한(漢)나라 애제(哀帝), 안제(安帝), 환제(桓帝), 영제(靈帝)이고, 이 일을 그르다고 한 이는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입니다.” 하니, 분분하던 의론이 가라앉았다.
임해군(臨海君)은 선묘의 왕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고 거처하는 곳도 궁궐과 가장 가까웠는데 집안에 무뢰배들을 모아 두었다. 마침 도적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熙緖)를 죽였는데 포도대장(捕盜大將) 변양걸(邊良傑)이 그 옥사(獄事)를 끝까지 추궁해 밝히려 하다가 폄직되었다. 수상(首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소장을 올려 변양걸을 구원하려다 상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고 공이 대신 영의정이 되었다. 공은 차자를 올려 누차 사양하며 말하기를 “변양걸이 폄직된 일에 대해서는 신도 실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는데, 단지 미처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덕형은 곧 이미 말한 신이고 신은 곧 아직 말하지 않은 이덕형입니다.” 하였다. 소장이 여덟 번이나 올라가서야 체직되었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화(禍)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교묘한 유언비어로 선동하니 중외(中外)의 많은 사람들이 의혹하고 정인홍의 소장이 들어갔다. 광해(光海)가 왕위를 이어받자 임해군에 대해 쌓인 의혹이 더욱 심해져 군사를 모아 대궐을 호위하게 하고 궁문을 낮에도 열지 않았다. 삼사(三司)가 임해군의 불궤(不軌)한 죄상을 밀계(密啓)하고자 하여 간장(諫長 대사간(大司諫))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복상(服喪) 중인 왕자를 죄적(罪迹)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처형한단 말인가.” 하니,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겼으나 계획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옥사가 장차 갖추어지려 할 때 공이 수상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더불어 ‘동기간에 은의(恩義)를 온전히 지켜야 한다.’라는 뜻을 극력 진달하여 임해군이 마침내 교동(喬桐)에 유찬(流竄)되었다. 그러나 언자(言者)들이 공의 말을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지목하여 이 말이 마침내 사대부들에게 화를 끼치는 장본이 되었다.
산릉(山陵)의 자리가 이미 정해졌는데 기자헌(奇自獻)이 요술(妖術)을 따라 자리를 고치려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통렬히 변박(辨駁)하였다.
4월에 좌상 겸 도체찰사에 배수되었다. 삼사(三司)가 임해군을 주벌할 것을 청하자 공은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을 지켰다.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공을 공격하였고, 이에 공도 거듭 차자를 올려 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선정(先正)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를 문묘(文廟)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고 헐뜯으니, 태학의 유생들이 글을 올려 송변(訟辨)하는 한편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제명하였다.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호소하자 광해가 일을 주도한 유생을 금고(禁錮)할 것을 명하니, 태학의 유생들이 권당(捲堂)하여 떠났다. 공이 이 사실을 듣고 경악하여 말하기를 “망국(亡國)의 거조로다.” 하고 거듭 차자를 올려 진달하니, 정인홍의 무리들이 공에 대해 크게 앙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공이 맡은 체찰부(體察府)의 병권(兵權)이 너무 무겁다고 주장하여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에 빠뜨리고자 하니, 공도 매우 다급하고 절박한 내용의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소장이 무려 스무 번이나 올라갔으나 끝내 윤허가 내리지 않았다.
임자년(1612)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은 강직한 태도를 지켜 일에 따라 억울한 죄명을 바로잡아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시인(詩人) 권필(權鞸)이 시어(詩語) 때문에 죄망(罪網)에 걸려 체포되니, 공이 매우 간절하게 울며 선처(善處)를 호소했으나 광해군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천도(遷都)를 청하자 공이 홀로 헌의하여 그 요설(妖說)을 타파하니, 천도 계획이 무산되었다.
계축년(1613)에 흉측한 무리가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를 꾀어 고변(告變)하게 하니,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역모로 무함을 받아 합문(闔門)에서 사형을 받았다. 무인(武人) 정협(鄭浹)이 공사(供辭)에서 다른 사람들을 연루하여 죄 없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공은 일찍이 정협을 변방의 수령으로 추천했다는 이유로 도성 밖에 나가 대죄하다가 사자(使者)를 세 번이나 보내 소명(召命)을 전달하기에 국청(鞫廳)에 참가했다.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겨우 8세였는데 삼사가 역적의 수괴(首魁)로 지목하여 서로 소장을 올려 주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의정부만이 유독 정청(廷請)하지 않으니, 군소배(羣小輩)들이 이를 갈며 미워하여 장차 불측한 화를 당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두 재신(宰臣)이 연일 밤 공의 처소에 와서 화복(禍福)으로 협박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선조(先朝)의 두터운 성은을 입고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차마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 스스로 명의(名義)를 훼손하겠는가.” 하였다. 양사(兩司)의 장관이 국청(鞫廳)의 탑전(榻前)에서 강경한 어조로 진언하기를 “군의(羣議)가 대신이 복합(伏閤)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 하기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물러 나오니, 한음(漢陰)이 뒤따라 나와 말하기를 “정신(廷臣)들의 의론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먼저 화를 당하게 될 것일세. 자네는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예(禮)에 ‘내란(內亂)은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무엇 하러 굳이 영창(永昌)을 위해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영창을 단지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 정도로 그친다면 나도 뜻을 굽혀 따를 것일세. 그러나 기필코 삼사의 주장대로 한다면 이견(異見)을 세우지 않을 수 없네.” 하였다. 수상 한음이 드디어 백료(百僚)를 모아 ‘인에 근본하고 의에 따라 결단하여 궐외(闕外)로 내쫓는다.〔本仁斷義 出置闕外〕’라는 말로써 의론을 삼았다.
이에 권신(權臣)이 불만을 품자 장령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드디어 폐모론(廢母論)을 내놓으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구나. 영창을 위해 죽는다면 용맹을 손상하고 모후(母后)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의리를 손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춘추(春秋)》를 터무니없이 인용하고 있으니, 내가 그 경문(經文)을 인용하고 그 의리에 의거하여 조목조목 공파(攻破)해야겠다.” 하고, 차자(箚子) 한 통을 올리며 영창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함께 언급하였다. 이날 저녁, 공은 자택에 가서 조의(朝衣)를 벗지 않은 채 외랑(外廊)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무너져 없어졌으니, 내가 대신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공을 찾아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대(萬代)의 첨앙(瞻仰)이 이 한 거사에 있을 것이오.” 하였다. 최유원은 평소 공을 존경하던 터라 곧 의론을 결정하고 이지완(李志完)ㆍ김지남(金止男)과 더불어 정조ㆍ윤인과 의론을 달리하였으니, 폐모론이 즉시 결행되지 못한 것은 공의 힘이었다.
공이 차자를 갖추어 장차 올리려 할 때 정협(鄭浹)이 죄상을 자백하니, 헌납 유활(柳活)이 정협을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공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즉일로 하인 한 명에게 말고삐를 잡게 하고 동문(東門)을 나가 동교(東郊)에 우거(寓居)하며 고서(古書)에 침잠하여 마음을 달래고 틈이 나면 산수를 배회하였고, 양식이 부족해도 늘 태연하였다. 대관(臺官)이 누차 공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지 재상을 체직하고 서추(西樞)에 제수하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공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정사년(1617) 겨울, 폐모론이 이미 결정되자 공은 강개(慷慨)하여 음식을 들지 않고 있었는데 홀연 큰 우레가 집을 뒤흔들었다. 공은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와서 수의(收議)하였다. 공은 병석에 누웠다가 부축을 받고 일어나 붓을 휘둘러 쓰기를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책을 낸 자가 누구입니까? 요순(堯舜)의 도리가 아니면 임금께 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옛날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부모가 늘 우순을 죽이고자 하여 우물을 파게 하고 곳집을 수리하게 하는 등 위태하고 도리에 어긋난 짓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하늘을 부르며 울고 원모(怨慕)할 뿐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으니, 진실로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못할지라도 자식이 불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춘추》에 자식은 부모를 원수로 삼는 의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급(伋)의 처(妻)가 된 사람은 바로 백(白)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겠습니까. 지금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려 나라 안에 장차 교화가 퍼질 가망이 있는 때에 이러한 말이 어찌 성상의 귀에 이른단 말입니까. 오늘에 해야 할 도리로 말하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 효로써 화합하여 차츰 바로잡고 노여움을 되돌려 자애가 되게 하시는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하였다. 공의 의론이 조정에 들어가자 이를 보는 이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떨구었고 저리(邸吏)가 공의 의론을 기록할 때 두려움에 손이 떨려 붓을 제대로 쥐지 못하였다. 삼사(三司)가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할 것을 청하니, 모두 네 곳으로 배소(配所)가 바뀐 끝에 삼수(三水)에 유배하기로 했다가 북청(北靑)으로 찬축할 것을 명하였다.
무오년(1618) 1월에 배소에 당도하였고, 5월에 병이 들었다. 공의 꿈에 선묘(宣廟)가 소명을 내리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오래지 않아 죽겠구나.” 하였다. 노추(奴酋)가 요광(遼廣)을 침범하였는데 우리의 군사가 구원하러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가 강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이틀 뒤에 졸(卒)하니, 춘추(春秋)가 63세였다.
공은 일찍이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나는 대신으로서 이러한 견책을 받았으니, 죽으면 조의(朝衣)로 염습하지 말고 단지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쓰라.” 하였다. 그해 8월 4일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에 공을 안장하였다. 원근에서 부음을 듣고 와서 곡하는 사람, 부의(賻儀)를 가지고 와서 조곡하는 수령과 변장(邊將), 애도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술잔을 올리는 사대부 등이 그 숫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혹 공과 면식(面識)이 없는데도 천리 밖에서 와서 곡(哭)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북청과 포천의 유생들이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를 모셨는데, 시의(時議)가 이를 막았으나 끝내 막을 수 없었다.
부음이 들리자 광해(光海)가 복작(復爵)하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중외(中外)에서 부음을 들은 사람들이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목 놓아 곡하는 이도 있었다.
공은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이 지성에서 나와 집안에서의 행실이 고인(古人)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젊을 때 한 기녀(妓女)를 좋아하여 자못 정에 빠졌는데 홀연 생각하기를 ‘연정을 두면 마음에 해가 된다.’ 하고는 벗들을 모아 놓고 시를 지어 기녀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으며, 이후로는 일절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입조(立朝)한 지 40년 동안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누차 이름이 훈적(勳籍)에 올랐으나 집안에는 한두 섬의 비축해 둔 곡식도 없었다. 조정에 당파들이 서로 배척하여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도를 부지(扶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혹 어느 한쪽으로 표방하는 듯이 보였으나 공 자신은 시비(是非)의 밖에 초연히 특립(特立)하였다.
공의 문장은 기(氣)를 위주하고 준일(俊逸)을 숭상하여 뜻이 가는 대로 즉시 글이 이루어져 마치 애써 구상(構想)하지 않은 듯했으나 베틀에서 짜낸 베와 같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의 글의 편언척자(片言隻字)라도 얻으면 많이들 소중히 보관하여 진귀한 보배로 여겼다. 주소(奏疏)는 양한(兩漢)의 경지에 근접하였고, 필법은 더욱 호건(豪健)하여 법도가 있었다. 소싯적에 제가(諸家)의 전적을 두루 섭렵하여 이미 그 뜻에 박통(博通)하였으나 끝까지 궁구하려 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성리학의 군서(羣書)를 좋아하였으나 역시 전주(箋註)와 같은 말단에 자질구레하게 얽매이지 않았다. 고요히 한거(閑居)하며 학문에 침잠하여 더욱 자득(自得)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 및 치욕(恥辱)ㆍ서상(書牀)ㆍ양야(養夜)ㆍ계주(戒晝)ㆍ경석(警夕) 오잠(五箴)을 지어 벽에 써 놓았으니, 공의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또 이와 같았다.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과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 주의(奏議)와 계사(啓辭) 각 2권,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세상에 간행되어 있다.
공은 젊을 때는 호를 필운(弼雲)이라 하였고 만년에는 호를 백사(白沙)라 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는 성남(星男)이고 둘째는 정남(井男)으로 임자년(1612, 광해군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두 벼슬하여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은 사인(士人) 윤인옥(尹仁沃)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2남 2녀를 낳았다. 첫째 규남(奎男)은 계축년(161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둘째는 기남(箕男)이다. 첫째 딸은 학관(學官) 권칙(權侙)에게 출가하였고, 한 딸은 어리다.
성남은 초취(初娶)로 판서 권징(權徵)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녀 1남을 낳았다. 딸은 진사 최욱(崔煜)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시중(時中)이다. 계취(繼娶)로 판관 김계남(金季男)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3남 4녀를 낳았다. 장녀는 사인 이정환(李廷煥)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인 남두상(南斗相)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은 시정(時挺)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정남은 참의(參議) 윤의(尹顗)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술(時術)이고, 딸은 사인 정지화(鄭知和)에게 출가하였다.
규남은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행(時行)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기남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공의 광명(光明)한 의표(儀表)와 간결(簡潔)한 조행은 마치 상서로운 구름과 태양 같아서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을 지탱할 듯한 높은 공훈, 충효의 대절(大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업적, 정대(正大)한 의론은 국가의 시귀(蓍龜)가 되고 사림의 관면(冠冕)이 되니,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태사(太史)가 기술하여 명성이 중화(中華)에까지 넘치고 덕택(德澤)이 백성들에게 남아 있다. 나의 변변찮은 몇 마디 말을 기다려서야 선양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공과 깊은 정의(情誼)로 친교를 맺어온 지가 30여 년이다. 처음 낭관(郞官)이 되고 중도에 요속(僚屬)이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서로 뜻을 모아 함께 일했었다.
공은 평소에는 그저 온화하게 담소하는 모습이 온통 한 덩이 화기(和氣)와 같지만, 큰 의론이나 큰 시비(是非)에 이르러서는 의연히 벼랑처럼 우뚝하여 만 마리의 소가 끌어도 그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이윽고 공과 함께 위난(危難)할 때 사명(使命)을 받고 중국에 갔으며, 계축년(1613, 광해군5)에 화(禍)가 일어났을 때에도 나는 체포되었고 공도 재상에서 파면되었다. 무오년(1618)에는 공이 먼저 북방으로 유배되었고 나는 교외(郊外)로 찬축되었다. 따라서 전란으로 간난(艱難)할 때 및 사행(使行)의 긴 여정, 한가로이 지낼 때를 거치며 내가 공과 종유한 시간이 누구보다 길다. 그 호탕한 풍모, 활달한 기상과 걸출한 시구(詩句), 통쾌한 청담(淸談)이 언제 어디서나 넘쳐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고 경도(傾倒)하게 하였다. 그중 나만 홀로 알고 흠탄(欽歎)한 것 한두 가지를 기록해 보겠다.
공이 노촌(蘆村)에 있을 때 내가 아들 명한(明漢)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찾아가니, 공은 흔연히 맞이하며 말하기를 “내가 도봉산(道峯山)의 천석(川石)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마음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군이 마침 왔구려.” 하고는 도건(道巾)을 쓰고 망혜(芒鞋)를 신고 나귀를 타고 가서 명승(名勝)을 두루 구경하고 함께 침류당(枕流堂)에 유숙했다. 삼경(三更)에 달이 떠오를 때 나는 바야흐로 피곤하여 누워 있는데 공이 나를 발로 차며 말하기를 “달빛이 저토록 밝은데 어찌 잠만 잔단 말이오.” 하고 나를 데리고 시냇가로 나갔다. 공이 홀연 서글픈 기색으로 말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명한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외고 또 〈적벽부(赤壁賦)〉를 외게 하니, 표연(飄然)히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생각이 있었다.
정사년(1617) 겨울에 이르러 흉론(凶論)이 더욱 기세를 떨쳐 폐모(廢母)를 청하는 논의가 사면에서 일어났다. 진호선(陳好善)과 전형(全瀅) 등이 먼저 공과 나를 주벌할 것을 청하였다. 내가 필마로 새벽에 도성을 나가 동강(東岡)으로 공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화색(火色)이 몹시 급박하니, 우리들에게 먼저 수의(收議)하게 될 것입니다. 금일의 일은 다른 의론을 내는 자는 죽고 의론을 내지 않는 자는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녹(祿)을 받으며 재직 중이니 이치상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공은 이미 조정을 떠나 계시니 병중(病中)인 사람에게는 수의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니, 공이 수염을 쓰다듬고 웃으며 말하기를 “사생(死生)은 운명입니다. 그리고 상이 필시 우리를 죽이지는 못하실 터이니, 남쪽이든 북쪽이든 서로 멀지 않은 곳으로 찬축되면 다행일 것이오.” 하였다. 나는 공의 뜻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입으로 불러 짧은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는데, 그중에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로써 영결(永訣)하기에 충분하다.” 하고, 드디어 손을 맞잡고 이별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 공의 의론이 올라갔고, 다시 한 달 뒤에 공은 귀양 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공의 행장에는 실리지 않았고 나만 아는 것이기에 여기에 함께 기록해 둔다.
공의 풍류와 문채(文采)는 완연히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 공의 무덤에 나무가 이미 굵어졌으니,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다시 이분을 뵐 수 있으랴. 오호라, 다시는 이분을 뵐 수 없구나.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량은 천 년 전의 시조요 / 沙梁千載
익재가 가업을 일으켰어라 / 益齋倡業
정기가 모이고 신령이 내려와 / 聚精降靈
공이 또 우뚝이 일어섰도다 / 公又挺立
우리 공이 세상에 태어남에 / 我公之生
하늘이 온갖 재능 갖춰 주었지 / 天具衆美
그래서 멀리 세속에서 뛰어나 / 曠乎拔俗
그 덕이 오로지 순수하였으니 / 粹然離滓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모습이요 / 威鳳之祥
정금과 같은 존귀한 인격이었지 / 兼金之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난 그 재주 / 絶人才猷
세상을 덮을 호걸스런 그 기운 / 蓋世豪氣
중론을 진압하는 그 큰 도량 / 鎭物之量
침착하고도 원대한 그 자품은 / 凝遠之姿
바다처럼 드넓어 다할 수 없고 / 海不可窮
산처럼 무거워 옮길 수 없었어라 / 山不可移
그리하여 석갈했을 때로부터 / 爰自釋褐
사람들이 신선인 양 바라보았지 / 望若神仙
그 당시에는 선묘께서 / 維時宣廟
정치에 힘써 어진 인재 찾을 때 / 勵精求賢
공을 만난 것이 늦었다 하시고 / 謂公見晩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셨으며 / 暇以讀書
한 부의 《강목》을 진강할 때 / 一部綱目
그대가 나를 도와 달라 하셨으며 / 汝其佐予
공을 옥당의 벼슬에 제수하고 / 盛之玉堂
관리의 일을 시키지 말게 하셨지 / 不役以吏
만나는 일마다 능숙하게 처리하니 / 遇事刃發
이는 공이 잠시 재능을 펼친 것이지 / 亦公暫試
그러나 국가가 그만 환난을 만나 / 運屬艱虞
공을 병조 판서의 자리에 발탁하자 / 擢公中兵
공은 한 손으로 국가를 부지하여 / 隻手扶天
제왕의 사직이 다시 밝아졌으니 / 黃道重明
그리하여 중흥의 위대한 공렬은 / 中興偉烈
우뚝이 높아 고금에 으뜸이어라 / 卓冠今昔
많고 많은 업무가 앞에 가득해도 / 萬務盈前
공은 담소하며 말끔히 처리하여 / 談笑掃却
마치 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는 듯 / 如雲過空
한 점 오랑캐 기운 남겨 두지 않았지 / 不留一氛
이에 국가의 문장을 관장하고 / 乃主文盟
이에 국가의 군무를 관장하니 / 乃登師垣
내직에 들어와선 왕명을 빛내고 / 入煥皇猷
외직에 나가선 무략을 펼쳤어라 / 出宣戎略
급기야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 乃秉國鈞
조정에서 백관들의 사표가 되니 / 儀刑百辟
나라에 큰 예식이 있을 때나 / 國有大禮
시국에 큰 의론이 있을 때에는 / 時有大議
공이 한마디 말로 결단하여 / 公一言決
경전의 의리를 인용하였었지 / 引經傳義
험난한 때 만나면 그만두어 / 遇坎則止
종일을 기다리지도 않았나니
/ 不竢終日
큰 녹봉을 헌신짝처럼 버려 / 弊屣萬鍾
은거하는 집이 쓸쓸하였어라 / 蕭然衡泌
그러나 시국이 또 크게 어긋나 / 事又大謬
인륜이 무너지는 변고가 생기니 / 天紀淪夷
공은 비록 은둔하여 있었지만 / 公雖遯荒
국가를 위해 한숨을 내쉬었지 / 爲國喑噫
이에 진언한 바가 우뚝하여 / 其言卓卓
만세의 법도를 높이 세우니 / 立萬歲極
흉포한 자들이 마구 무함하여 / 羣兇鼓吻
공을 북방으로 귀양 보내었지 / 纍公于北
외진 골짜기에 물결이 달리는 듯 / 窮谷奔波
사람들 앞다투어 공을 영접하니 / 爭先迎見
미천한 하인들이 무엇을 알랴마는 / 走卒何知
공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어라 / 願識公面
공은 적소에서 편안히 지내며 / 公安于謫
세상을 하찮은 것으로 보았지 / 視世粃糠
하늘나라에 인재가 없어서 / 鈞天無人
상제가 무양을 보내시니 / 帝遣巫陽
공은 훨훨 날아 떠나가신 것이 / 公去翩然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듯했지 / 若有所期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니 / 騎龍上天
누가 공을 붙잡아 둘 수 있으랴 / 誰得以羈
세상에 오신 것은 시운이었고 / 適來時也
세상을 떠난 것은 하늘의 뜻이니 / 適去天也
세상에서의 영욕 따위야 / 世之榮辱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 公何與焉
오직 공이 세운 정기만이 / 維玆正氣
해와 별처럼 높이 빛나 / 日揭星明
천추에 길이 어둡지 않으니 / 不昧千秋
늠름한 기상 여전히 살아 계시도다 / 凜凜猶生


 

[주D-001]평번(平反) : 옥사(獄事)에서 원통하고 억울한 사안(事案)을 바로잡는 것이다.
[주D-002]중획(重獲) :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봉씨(逢氏)가 패전하여 두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두 아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레에서 내리자, 봉씨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 아래에서 너희들의 시체를 거듭 찾으리라.〔重獲在木下〕” 하였다. 그다음 날 가서 보니 과연 두 아들이 그 나무 아래에 죽어 있었다. 《春秋左氏傳 成公12年》 여기서는 기필코 전사(戰死)할 것임을 뜻한다.
[주D-003]석 상서(石尙書) : 당시의 병부 상서(兵部尙書)인 석성(石星)을 가리킨다.
[주D-004]황지(潢池) : 반란군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공수(龔遂)를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임명하며 말하기를 “발해에 난리가 일어나 짐이 몹시 근심하고 있다. 그대는 어떻게 도적을 진압하여 짐의 뜻에 부응하겠는가?” 하니, 공수가 “발해는 멀고 외진 지역이라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구휼하지 않기 때문에 적자(赤子)인 백성들이 황지(潢池)에서 폐하의 병력을 가지고 논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주D-005]과도(科道) : 과도관(科道官)의 준말로, 명(明)ㆍ청(淸) 때 급사중(給事中)과 각 도의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통칭한 것이다.
[주D-006]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선조(宣祖)의 사친(私親)으로, 이름은 초(岧)이다.
[주D-007]내란(內亂)은 간여하지 않는다 :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내란은 간여하지 않고, 외환은 피하지 않는다.〔內亂不與 外患不辟〕” 하였다. 이는 경대부(卿大夫)의 도리를 말한 것으로, 나라 안에서 동료(同僚)가 난리를 일으키려 할 경우에 자신이 토죄(討罪)할 능력이 없으면 간여하지 않을 뿐이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주D-008]요순(堯舜)의 …… 않는다 : 맹자가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왕 앞에 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제(齊)나라 사람 중에서 나보다 왕을 공경하는 자가 없다.”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D-009]우물을 …… 하는 : 만장(萬章)이 “순(舜)의 부모가 순으로 하여금 곳집을 수리하게 하고 순이 곳집의 지붕에 올라가자 사다리를 치운 다음 고수(瞽瞍)가 곳집에 불을 질렀고, 순에게 우물을 치게 한 다음 순이 우물에서 나오기 전에 흙으로 우물을 덮었다.” 하였다. 고수는 순의 아버지이다. 《孟子 萬章上》
[주D-010]우순은 …… 뿐 : 만장이 묻기를 “순(舜)이 밭에 가서 하늘을 부르며 우셨으니, 어찌하여 부르짖으며 우신 것입니까?” 하니, 맹자가 “원모(怨慕)하신 것이다.” 하였다. 집주(集註)에 “원모는 자기가 어버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함을 원망하여 사모하는 것이다.” 하였다. 《孟子 萬章上》
[주D-011]급(伋)의 …… 것이니 : 아버지의 처가 되면 그 자식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비록 생모가 아닐지라도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급(伋)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이름이고 백(白)은 자사의 아들이다. 백이 쫓겨난 어머니〔出母〕가 죽었을 때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것에 대해 자사가 “급(伋)의 처가 되는 사람이 바로 백(白)의 어머니인 것이요, 급의 처가 되지 않은 사람은 백의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은 원래 쫓겨난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가 아니므로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禮記 檀弓上》
[주D-012]기상(旂常) : 기(旂)와 상(常) 모두 왕후(王侯)를 상징하는 깃발로, 국가의 큰 공로를 이 깃발에 기록하였다. 명(明)나라 장거정(張居正)의 〈답응천순무손소계(答應天巡撫孫小溪)〉에 “선조(先朝)의 명신(名臣)으로서 기상에 공적이 새겨지고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긴 자는 공무를 봉행하고 법을 지키고 자기 몸가짐을 결백하게 가지고 백성을 사랑했을 뿐이다.” 하였다.
[주D-013]짧은 율시(律詩) 한 수 : 《국역 월사집》 제14권에 〈백사 이 상공께 드리다.〉라는 제하(題下)에 “정사년 겨울에 흉악한 무리가 박몽준(朴夢俊) 등을 사주하여 연이어 소장을 올려 모후(母后)를 폐위할 것을 청하였다. 동짓달 20일 후 소장이 하달되어 정부(政府)가 수의(收議)하려 하자 백관들이 정청(庭請)하라고 협박하였는데, 나는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병으로 휴가를 내고 있었다. 이때 백사 이 상공은 재상에서 체직되어 교외의 독촌(禿村)에 우거하고 있기에, 내가 맏아들 명한(明漢)을 데리고 술을 가지고 가서 방문하고는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이어 결별(訣別)하였다. 이별하면서 입으로 한 수 읊어서 드렸다.”라는 서문이 붙어 있고, 이어 “백발의 몸으로 다시 만나니, 여생은 모두 성은으로 얻은 것. 우리들 앞엔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세상사는 말하고 싶지 않구려. 물이 드넓으니 교룡이 숨고, 겨울이 따스해 기러기 놀란다.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白髮重相見 餘生各聖恩 吾儕唯有死 世事欲無言 水濶蛟龍蟄 冬暄鴈鶩喧 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시가 있다. 목릉촌(穆陵村)은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이 있는 마을이다.
[주D-014]험난한 …… 않았나니 : 소인이 득세하여 위태로운 시국에서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는 뜻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 종일을 기다리지 않는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하였다.
[주D-015]상제가 무양(巫陽)을 보내시니 : 하늘에서 뛰어난 인재를 데려갔다는 뜻이다. 무양은 신무(神巫)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하늘나라에 인재가 없어 상제가 슬퍼하여 노래하는 무양을 내려보내 공을 불렀네.〔鈞天無人帝悲傷 謳吟下招遣巫陽〕” 하였다.
[주D-016]용을 …… 올라가시니 : 소식의 〈조주한문공묘비〉에 “공은 옛날에 용을 타고 백운향에서 노닐며 손으로 은하수를 찢어서 하늘의 문장 나누었지.〔公昔騎龍白雲鄕 手抉雲漢分天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