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관련/태조 이성계 교서

태조 이성계의 옹주 의령옹주 개성이씨 관련 자료

아베베1 2013. 4. 26. 21:48

 

 

 



     이미지 사진은  의령옹주와 부마 이징의 묘역이다  (2013.4.27)  묘역탐방

     도봉구 도종동 산87번지  

 


 도봉산 무수골의 의령옹주의 묘지가 

문화제로 등록된다는 신문기사가 있다는 내용   


勉菴先生文集卷之十八
 
開城李氏族譜序 a_325_443d

 

 

李氏貫鄕。數十計矣。而其以開城者。余於李君鉉九在守。始覯焉。問其世。曰入我朝。開國原從功臣贈戶判諱德時。乃中佚後起家之祖。而啓川尉胡安公䔲子也。工曹判書文良公宣。承議郞敦寧副丞宯孫也。縣令匡世。工判霽世。曾孫也。監司之良。其玄孫。以下而七世孫金海府使宗仁。壬辰之燹。與黃,金,崔三壯士。同殉于晉州之南江。此其載錄譜牒者然也。今雲仍之散在列邑者。近之寶城,南平。遠之金化,通川安邊。所在單寒。文獻不守。其寖遠䆮微。與浮雲流水。同其泯泯。而開城之貫。亦將難保者。爲可慮也。幸丈人悶惻。而賜以一言。使吾族有所依賴。李君之爲此言。其情甚眞。其所稱述。歷歷有根據。余動容嗟嘆。不可以陋拙辭。竊念尊祖敬宗。敦親講睦。修譜家不刊大義。而世敎衰微。人心陷溺。昧然於本末輕重之分者。滔滔皆是。今於板蕩之會。疢疾之中。能大小協力。不勸而奔走之。以底竣事者。其非講之有素而可容易乎。雖喙長三尺。不容贊一辭。因書其問答。以諗于李君僉君子。


 




고려사절요 제31권
 신우 2(辛禑二)
임술 신우 8년(1382), 대명 홍무 15년

○ 봄 정월에 전 판사 김극공(金克恭)의 사지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고, 그 가산과 처자를 적몰하였으며, 전교부령(典校副令) 정구(鄭矩)와 판사 장자충(張子忠)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이전에 이인임의 사위 강서(姜筮)의 집에 던져진 익명서에, “왕의 즉위에 의심나는 것이 없지 않으며, 또 매우 무도하므로, 조민수ㆍ임견미ㆍ염흥방ㆍ도길부ㆍ문달한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없애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워 왕을 삼으려 한다." 하였다. 김극공이 듣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임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는 김극공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잡아서 국문하니, 김극공이 매에 못이겨 거짓 자복하였다. 옥관이 김극공에게 글자를 쓰게 하여 보니, 익명서와 필적이 다르므로 이인임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임견미가 기어이 극공에게 죄를 가하려 하므로, 옥관이 감히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드디어 죽였다. 장자충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도 나라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 정창군에게 고하였고, 정구는 극공의 사위이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 요동 호발도(胡拔都)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 돌연 의주(義州)에 이르러 상만호(上萬戶) 장여(張侶)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여가 아들 장사길(張思吉)ㆍ장사충(張思冲)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장여는 창에 찔리고 두 아들은 화살에 맞았다. 호발도가 장여의 재물과 말 15필을 빼앗아 가니, 부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장여는 활 쏘고 말 타는 것이 능하였는데,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었다. 성질이 탐욕스럽고 무식하여 인심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경시당한 것이다.
○ 경상ㆍ전라ㆍ강릉도의 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 2월에 문하평리 한방언(韓邦彦)을 서북면 도체찰사 겸 안주도 상원수로 삼고, 전 지문하사 상의 김용휘(金用輝)를 도안무사(都按撫使) 겸 부원수로 삼아, 정요위(定遼衛)의 군대를 방비하게 하였다.
○ 판서운관사 장보지(張補之) 등이 글을 올려, 변괴가 자주 일어나니 도읍을 옮겨 재앙을 막기를 청하였다. 우가 그 글을 도당에 내렸으나, 이인임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 노씨(盧氏)를 봉하여 의비(毅妃)로 삼고, 아비 영수(英壽)를 대호군으로 삼았다. 노씨는 본래 근비의 궁인(宮人) 석비(釋婢)인데, 우가 매우 총애하였다.
○ 왜적이 임주(林州)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오언(吳彦)이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계해일에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는데 검은 기장ㆍ팥ㆍ모밀 같은 것이 있었다. 우가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흉년이 겹쳐들어 사람이 장차 서로 잡아먹을 징조입니다." 하였다.
○ 반전색(盤纏色 여비 조달을 맡은 관청)을 두어서 대소 문ㆍ무 관리로 하여금 마필(馬匹)ㆍ저포(紵布)ㆍ마포를 차등에 따라 내게 하여 명 나라의 세공(歲貢)에 대비하였다.
○ 아들 창(昌)이 병이 있으므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하였다.
○ 갑술일에 해 속에 크기가 계란만한 흑자(黑子)가 있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사삿집 종 무적(無敵)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칭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 해양(海陽 평북 길주(吉州) 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그 아들 부야개(夫耶介)를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 윤달에 왜적이 임주(林州)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을 침범하였다.
○ 우가 남교(南郊)에서 사냥하고, 또 동교(東郊)에서 사냥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관이 감히 나의 과실을 기록한다니, 만일 보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죽이겠다." 하였기 때문에, 사관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 김동불화가 제 관할 백성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독로올(禿魯兀 함남 단천(端川)의 땅에 살게 하였다.
○ 일본이 포로가 된 우리 백성 1백 50명을 돌려보냈다.
○ 3월에 왜적이 평해(平海)ㆍ삼척ㆍ울진ㆍ우계(羽溪) 등의 현(縣)을 침범하였다.
○ 곡성 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이 졸하였다.
○ 왜적이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을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사헌부에서 경상도 도순문사 남질이 왜적을 막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여, 도당에 내리어 의논하였으나, 이인임이 질과 좋은 사이여서 의령현(宜寧縣)에 안치시키기만 하였다.
○ 양수척(楊水尺)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를 불태우니, 판밀직 임성미(林成味) 등을 보내어 쫓아 잡아서 남녀 50여명과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 문하찬성사 김유(金庾),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 지밀직 김보생(金寶生), 동지밀직 정몽주(鄭夢周), 밀직부사 이해(李海), 예의판서 배행검(裵行儉)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으로 금 1백근ㆍ은 1만 냥ㆍ베 1만 필ㆍ말 1천 필을 바쳤다.
○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
○ 서해도 안렴사 이무(李茂)가 잡은 양수척 30여 명과 말 1백 필을 바치고 여러 도의 안렴사와 수령도 각각 잡은 양수척과 말을 바치니, 순군옥에 내리어 국문해서 그 주모자를 베고, 처자와 마필을 몰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양수척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 평민보다 차등있는 역사를 시켰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베었다.
○ 전 평리 양백익(梁伯益)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일찍이 충혜왕(忠惠王)의 아들 석기 (釋器)가 민가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양백익의 전장(田莊)에 숨어 있었다. 일이 발각되어 양백익은 귀양보내고, 석기의 아들은 머리를 깎아 계룡산으로 보냈으나, 비밀리에 아전을 시켜 도중에서 죽였다.
○ 왜적이 죽령을 넘어서 단양군을 침범하니, 원수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쳐서 깨뜨려, 80여 급을 베고 말 2백여 필을 노획했다.
○ 5월에 경상도 합주(陜州)에 사노(私奴) 한 명이 있었는데, 검대장군(劍大將軍)이라 자칭하고, 그 부하 1명은 초군장군(抄軍將軍)이라 일컫고, 또 1명은 산군장군(散軍將軍)이라 일컬으며, 무리를 모아서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략질하고, 그곳의 상전과 수령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려 하므로, 안림사 안경공(安景恭)이 잡아서 베었다.
○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을 베었다. 이금은 고성 백성인데,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을 속이기를, “나는 석가불을 강림하게 할 수 있다. 다른 귀신에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자, 마소의 고기를 먹는 자,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에 빛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부리면 풀에 푸른 꽃이 피기도 하고, 나무에 곡식 열매가 열리기도 하며, 한 번 심어서 두 번 베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우매한 백성들이 믿고 다투어 쌀ㆍ비단ㆍ금은을 보시하고, 소와 말이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재물이 있는 자는 모두 남에게 주었다.
이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하여 산천 귀신을 모두 일본에 보내면, 왜적을 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무당들이 더욱 공경하고 믿어서, 성황당과 사묘(祠廟)의 신위를 철거하고 이금을 부처같이 공경하여 복을 빌었다. 무뢰배들이 따라서 한패가 되어 제자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들을 속였는데, 이르는 고을의 수령 중에는 나와서 영접하여 상등 사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청주 목사 권화(權和)가 꾀어서 오게 하여 그 괴수 5명을 묶어 가두니, 이에 도당에서 여러 도에 이첩(移牒)하여 모두 잡아서 베었다. 전 판사 양원격(楊元格)은 본래 그의 말을 신봉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도망하여 숨었으나, 끝까지 수색하여 잡아서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는데, 귀양가다 길에서 죽었다.
○ 유양(柳亮)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왜적이 영춘현(永春縣)을 침범하였다.
○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안동에서 왜적을 쳐서, 30여 급을 베고 말 60필을 노획했다.
○ 왜적이 또 회양부(淮陽府)를 침범하였다.
○ 6월에 우가 상승(尙乘)의 집에 가서 말을 사열하고, 또 노영수(盧英壽)의 집에 갔다. 그 뒤로부터 상승과 노영수ㆍ이인임의 집에 가지 않는 날이 없고, 그 밖에 가는 곳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 김유(金庾) 등이 요동에 갔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 간관 정리(鄭釐)ㆍ박의중(朴宜中) 등이 상소하기를, “근년에 와서 왜적이 날로 성하여, 깊이 들어와서 도적질하며,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가옥을 불태우고 헐어서 주ㆍ군이 조잔(凋殘)해지고 전야(田野)가 황폐해졌습니다. 더구나 수재와 한재까지 겹쳐서 흉년이 거듭 들어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연이어지고, 창고가 비어서 용도도 부족합니다. 또 좀도둑이 일어나 사사로이 서로 죽이니, 인민은 흩어지고 부자(夫子)도 상존(相存)하지 못합니다. 화란(禍亂)의 지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상국(上國)에서 우호를 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까운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켜 틈을 엿보고 있는 때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천재(天災)ㆍ인요(人妖)ㆍ지괴(地怪)와 조수(鳥獸)ㆍ천어(泉魚)의 이변이 겹쳐 견고(譴告)를 보이니, 온 나라 백성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한 생각을 가지지 말고, 널리 여론을 받아들여 치안을 도모하고 변괴를 없애는 데 하루라도 게을리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물며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며, 이목(耳目)의 즐거움을 탐하여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자행해서 유흥과 오락을 일삼아 게으르고 거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주색과 가무의 즐거움을 파하시고, 매와 개로 사냥하는 유희를 끊어버리며, 성인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거스르지 말며, 덕이 있는 기로(耆老)를 멀리하지 말고, 못된 아이들을 가까이하지 말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참소를 멀리하고 간하는 것을 들으며,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버리며, 밤낮으로 부지런하며, 공손하고 조심하여, 항상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기를 힘쓴다면, 대업(大業)을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도 간하였으나, 모두 회답이 없었다.
○ 왜적이 경산ㆍ대구ㆍ화원(花園)ㆍ계림(鷄林) 등처를 침범하고, 또 통구현(通溝縣)을 침범하였다.
○ 전법판서 조준(趙浚)을 경상도 체복사(體覆使)로 삼았다. 이때는 왜적의 침범이 매우 강성하여, 각 고을이 소란해서 백성들이 모두 산골로 도망하였으며, 나라에 기강이 없고, 장수들은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세는 날마다 성하여졌다. 조준이 오자 호령이 엄하고 밝으므로, 장수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잇달아 전승하니, 도민(道民)들이 그 덕택으로 조금 편안해졌다.
이보다 먼저, 수성(守城) 사람 조희삼(趙希參)이 그 어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경산부(京山府)의 성에서 왜적을 피하려고 발길이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였다. 적이 쫓아오자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말을 달리어 화를 면하라." 하였다. 조희삼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어머니와 함께 밭 속에 숨었다. 적이 그 어머니를 칼로 치려 하자, 희삼이 몸으로 어머니를 가리어 적에게 해를 당하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경산부 사람 배중선(裵仲善)의 딸이 아이를 업고 왜적에게 쫓기다가 소야강(所耶江)에 이르렀는데 강물이 한참 불어 있었다. 그 여자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니, 적이 강 언덕에 이르러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네가 나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선비의 딸이다. 일찍이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죽을지언정 네놈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였다. 적이 활을 쏘아서 그 아이를 맞히고, 적이 활을 당기며 또 전과 같이 말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해를 당하였다.
영산(靈山) 사람 낭장 신사천(辛斯蕆)의 딸은 나이 16세였는데, 왜적에게 쫓기어 아비를 따라 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너려 할 때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배에 탄 사람을 거의 다 죽이고, 그 아버지도 해를 입었다. 한 도적이 그 여자를 잡아 배에서 끌어내리니, 여자가 말하기를,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죽을지언정 네놈을 따르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쥐고 차서 거꾸러뜨리니, 적이 노하여 그 여자를 죽였다. 조준이 그 일을 진달하고 아뢰기를, “세 사람의 절개와 효도가 이와 같으니, 그 문(門)에 정표(旌表)하여 후세 사람을 권면하소서." 하니, 드디어 비석을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였다.
○ 이인임을 영문하부사로, 최영을 영삼사사로, 홍영통(洪永通)을 문하시중으로, 이자송(李子松)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우리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으니, 이때에 호발도가 동북면 백성을 침범하였는데, 태조는 일찍부터 대대로 그 도의 군무를 관활하여 평소에 위신이 드러났으므로 보내어 위무(慰撫)한 것이었다.
○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이 졸하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삼가고 두터웠으며, 정도로써 관직을 수행하였다. 이때에 가묘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공권은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 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물을 극히 정결하게 하였다. 간신이 권세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항상 분히 여기고 한탄하더니, 마침내 등창을 앓아서 죽었다.
○ 경성에 기근이 들어, 베 한 필 값이 쌀 서너 되 값이었다.
○ 황제가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제주(濟州)에 안치하였다. 우가 밀직사사 유번(柳藩)을 경성에 보내서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 8월 무자일에 혜성이 보였다.
○ 한양(漢陽)에 도읍을 옮기기로 의논하고 정하니, 간관이 상소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한양으로 옮겼다. 경성은 시중 이자송에게 명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게 하고, 이임ㆍ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 등이 수행하였다. 모두 종을 보내어 여기저기에서 떼를 지어 백성의 토지와 집을 한없이 빼앗았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남원군을 침범하고, 또 왜선 50척이 진포(鎭浦)에 들어왔다. 해도원수 정지(鄭地)가 치니 달아났는데, 군산도(群山島)까지 쫓아 배 4척을 노획했다.
○ 11월에 대사헌 노숭(盧嵩) 등이 상소하기를, “근일에 전하가 나가 노는데, 입직(入直)한 이덕시(李德時)가 백관ㆍ유사에게 고하지 않았고, 내승(內乘) 김천수(金天守) 등이 훈련되지 않은 말을 내어서 넘어지고 미끄러지게 하였으니, 그 죄를 국문하소서." 하였다. 홍영통(洪永通)ㆍ이자송 등도 아뢰기를, “전하가 취하기만 하면 말을 달리므로, 신등이 항상 마음에 위태하고 두렵게 여겼었는데, 이제 과연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귀하신 몸을 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구중궁궐에 가만히 계시어, 사냥을 경계하고 주색을 삼가서 혹시라도 가볍게 움직이지 마소서." 하니, 우가 좋아하지 않았다.
○ 동직밀직사사 정몽주와 판도판서 조반(趙胖)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 조민수를 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삼았는데, 이색은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지 않았다.
○ 천재지변이 여러 번 일어나므로, 가벼운 죄는 사하였다.
○ 12월에 조민수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을 지키게 하였다.
○ 우가 교외에서 사냥하였는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신하들이 우의 간 곳을 몰랐는데,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정종 1년 기묘(1399,건문 1)
 10월17일 (계축)
장인·장사치·천례에게 벼슬주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청을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여,
“공(工)·상(商)·천례(賤隷)가 조정(朝廷)에 뒤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내노(內奴) 이덕시(李德時)가 의성고 별감(義成庫別監)이 되고, 한장우(韓長祐)가 보화고 별감(保和庫別監)이 되고, 이생(李生)이 의순고 별감(義順庫別監)이 되었기 때문에, 헌사(憲司)에서 말한 것이다.
【원전】 1 집 158 면
【분류】 *신분(身分) / *인사(人事)

정종 2년 경진(1400,건문 2)
 7월2일 (을축)
장군들의 모임인 장군방을 혁파하다

장군방(將軍房)을 혁파하였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장무(掌務)의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가 있어서, 새로 장군(將軍)에 제수된 자가 있으면, 그 방주와 장무가 반드시 그 족속(族屬)을 상고하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연후에야, 새로 제수된 자가 그 임무를 행할 수 있었는데, 국초(國初)에도 그 제도를 인습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주D-001]장군방(將軍房)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장군(將軍) 이상이 모여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곳. 고려 중방(重房)의 후신으로, 정종 2년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 6년에 호군방(護軍房)으로 다시 부활시켰음.
[주D-002]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 : 관원이 새로 임명되어 올 때, 그 관부의 방주(房主)와 장무(掌務)가 모여서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고, 또 찬성 여부를 서명하던 일.
정종 2년 경진(1400,건문 2)
 7월2일 (을축)
덕수궁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고 다닌 전 삼사 좌복야 이염과 전 판사 이덕시를 춘주와 이천현에 귀양보내다

전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이염(李恬)을 춘주(春州)에, 전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를 이천현(利川縣)에 귀양보냈다. 이염과 이덕시가 덕수궁(德壽宮)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듣고 소를 올려 그 임금을 속인 죄를 청하니, 임금이 다만 외방에 귀양보냈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태종 5년 을유(1405,영락 3)
 9월19일 (신해)
압량위천한 전 판사 이덕시를 강화로 귀양보내다. 신문고

전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를 강화(江華)로 내치었으니,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여 덕시(德時)가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을 만든 죄를 논(論)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 호군(護軍) 이등(李登)이 오결(誤決)이라 하여 북[鼓]을 쳐서 신문(申聞)하였다. 헌부(憲府)에서 또 말하기를,
“등(登)이 소사(所司)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상총(上聰)을 기망(欺罔)한 것이 심하오니, 등(登)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죄를 논하여 뒷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33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政論) / *신분-천인(賤人)




 


 

연려실기술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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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조 고사본말고사본말(故事本末)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太祖朝故事本末)
태조



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 8남 5녀를 두었다.
사(嗣) 정종대왕(定宗大王) 순서는 둘째이다.
사(嗣) 태종대왕(太宗大王) 순서는 다섯째이다.
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 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大匡輔國贈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㺶)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으며, 정종 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 밀양 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 김포 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兔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 개성 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부유 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薆)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주D-001]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고려 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수상을 말하는데, 수문하시중은 그 다음인 부수상 격이다.
[주D-002]기로소(耆老所) : 조선 때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의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 받던 곳으로, 태조 3년에 창설되었다.
[주D-003]휘호(徽號) : 왕이나 후비께 올리는 존호를 가리킨 것인데, 휘(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세조 3년 정축(1457,천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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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1일 (임술)
계천위 이등의 졸기

계천위(啓川慰) 이등(李登)이 졸(卒)하였다. 이등은 태조(太祖)의 딸 의령 옹주(義寧翁主)에게 장가들었으나, 성질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몹시 추울 때나 몹시 더울 때라도 한 번도 임금을 조알(朝謁)하는 예(禮)를 폐한 적이 없었고, 만년(晩年)에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는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를 만류하면,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서 모람되게 척리(戚里)인 인연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늠록(廩祿)만을 허비하고 조그마한 보탬도 있지 않았으니, 어찌 조알(朝謁)하는 예를 꺼리겠느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9세였다. 관가에서 장사(葬事)를 치러주고 ‘호안(胡安)’이라 시호(諡號)하니, 나이가 많고 오래 산 것을 ‘호(胡)’라 하고 화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한다. 아들이 4인이 있는데, 둘째 아들 이선(李渲)은 임자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위가 추밀(樞密)에까지 이르렀다.
【원전】 7 집 207 면
【분류】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인사(人事) / *왕실(王室)


[주D-001]척리(戚里) : 임금의 가까운 친척.
[주D-002]임자년 : 1432 세종 14년.


 

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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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紀年兒覽[下]
【修】本朝世年紀 附故實。功臣。配享。相臣。 a_257_450a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諱旦。字君晉。初諱成桂。字仲潔。號松軒。溫良好古曰康。聡明睿智曰獻。太宗庚辰上號啓運神武。肅宗癸亥。加上謚正義光德。乙亥 元順帝至元元年。高麗忠肅王後四年。十月十一日己未。誕降于永興黑石里。仕高麗。官至門下侍中。壬申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登寶位于松京壽昌宮。戊寅九月。傳位于定宗。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난001在位七年。在上王位十年。春秋七十四。有晬容三本。一本奉安于京城永禧殿。一本奉安于全州慶基殿。一本奉安于永興璿源殿。八男五女。健元陵난002在楊州儉巖山。神道碑誌257_450b文。幷權近撰。碑陰記。卞季良撰。
承仁順聖神懿王后韓氏。籍安邊。密直副使贈門下府事安川府院君卿女。大祖卽位初謚節妃。丁丑 元順帝至元三年。高麗忠肅王後六年。誕降。高麗時封元信宅主。辛未 皇明太祖洪武二十四年。高麗恭讓王三年。九月二十三日。昇遐于潛邸。春秋五十五。太祖壬申。追尊。誕 六男二女。齊陵。在豊德栗村。神道碑權近撰。
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난003籍谷山。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允成女。太祖卽位初。冊封顯妃。顯宗己酉上謚祔廟。丙子 皇明太祖洪武二十九年。我太祖五年。八月十三日。昇遐于移御所。判內侍府事李得芬家。二男一女。貞陵。丁丑初葬西部皇華坊。太宗己丑。移葬楊州沙河里。有表石。
257_450c嗣定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二。
嗣太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五。
一男鎭安大君芳雨。太祖潛邸時卒。追封大君。謚靖懿。○娶忠州池氏。贊成事奫女。生二男一女。
三男益安大君芳毅。錄開國定社功臣。階大匡。贈爲韓公。謚安襄。配享定宗廟庭。娶鐵原崔氏。知杆城郡事贈贊成仁㺶女。生一男二女。
四男懷安大君芳幹。庚辰朴苞之亂。安寘卒。○娶驪興閔氏。判書贈贊成璿女。再娶密陽黃氏。判書亨女。三娶金浦琴氏。正郞仁排女。生四男一女。
六男元尹芳衍。登高麗文科。拜成均博士。○太祖潛邸時卒。贈元尹。○以上。神懿王后誕生。
257_450d七男撫安大君芳蕃。戊寅鄭道傳之亂。被禍。○初封君。贈楸成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恭順。改謚章憲。○娶開城王氏。高麗宗室歸義君瑀女。有繼子。
八男宜安大君芳碩。初封世子。戊寅鄭道傳之亂。被禍。贈邱原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昭悼。○娶富有沈氏。大提學孝生女。有繼子。以上。神德王后誕生。
一女慶愼宮主。駙馬上黨府院君李薆。錄定社佐命功臣。景肅公。生一男。○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善公主。駙馬靑原君沈琮。生一女。○靑松人。父左政丞定安公德符。○以上。神懿王后誕生。
三女慶順公主。駙馬興安君李濟。戊寅罪死。錄開國功臣。景武公。配享太祖廟庭。有繼子。○星州人。父同知密直仁立。○神德王后誕生。
257_451a一女宜寧翁主駙馬啓川尉李䔲。生四男三女。○開城人。父判司水監事開。
二女淑愼翁主。駙馬唐城尉洪海。生三男一女。○南陽人。父判中樞彦修。
故實 壬申開國。
甲戌定都漢陽。建宗廟。入耆社。仍命文臣正二品。年七十。皆參入。
丙子。築都城。有八門。周九千九百七十五步。征對馬島。遣金士衡南在等。征之。
丁丑。招安女眞。遣李之蘭按撫。皆爲編戶。
戊寅。建文廟。鄭道傳之亂。道傳與南誾。挾芳碩爲亂。伏誅。北狩咸興。翌年。始回鑾松京。
錄勳 錄開國功臣。壬申。以奮義開國。錄益安大君芳毅等五十六人。○十七人。後罪削。
257_451b配享 領議政趙浚。文忠公。 義安大君和。襄昭公。太祖庶弟。 領議政南在。忠景公追配。 興安君李濟。景武公。罪死追配。 靑海君李之蘭。襄烈公。 判中樞南誾。剛武公。在弟罪死追配。 吏曹判書趙仁沃。忠靖公。
相臣 裴克廉。壬申。以前朝侍中。仍拜左侍中。 趙浚。前朝文科壬申。拜右侍中。至領議政。 金士衡。壬申。拜右侍中。至左議政。 鄭道傳。前朝文科。甲戌管都評議。戊寅罪死。 權仲和。前朝文科。甲戌。判都評議。至領議政致仕。 沈德符。丁丑。以前朝侍中判都評議。至左政丞。 柳曼殊。戊寅。判都評議。同年罪死。
皇明惠宗建文元年己卯。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諱曔。字光遠。初諱芳果。敬事供上曰恭。寬樂令終曰靖。○肅宗辛酉。追上廟號。加上謚懿文莊武。丁酉 元順帝至正十257_451c七年。高麗恭愍王六年。七月朔日。誕降于咸興歸州洞。仕高麗。
官至將相。太祖壬申。封永安君。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八月。冊封王世子。九月受禪。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 十一月。傳位于太宗。난004己亥 皇明成祖永樂十七年。我世宗元年。九月二十六日戊辰。昇遐난005。在位二年。在上王位十九年。春秋六十三。有 十五男八女。厚陵난006在豊德興敎洞。誌文卞季良撰。有行狀及表石。
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金氏。籍慶州。○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天瑞女。○定宗卽位。初封德妃。太宗卽位。尊號順德。○肅宗辛丑。追謚溫明莊懿。乙未 元順帝至正十五年。高麗恭愍王四年。誕降난007。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冊封德嬪。尋進封王妃。壬辰 皇明成祖永樂十年。我太宗十二年。六月二十257_451d五日。昇遐난008。春秋五十八。無嗣。厚陵난009與大王陵。同原
一男義平君元生。池氏出。○娶鐵原崔氏。監務致崇女。生五男三女。
二男順平君群生。奇氏出。謚忠簡。○娶淳昌薛氏。判司宰監事存女。生二男二女。
三男元尹義生。娶南陽洪氏。司直宿女。無后。
四男宣城君茂生。池氏出。○娶迎日鄭氏。參議宗誠女。生一女。後娶安康金氏。上護軍仲約女。生一男。
案文氏出。五男從義君貴生。贈君。○娶楊口柳氏。正贈贊成守濱女。後娶海豊張氏。主簿均女。有繼子。
六男鎭南君終生。李氏出。謚夷簡。○娶宜寧南氏。上護軍深女。生四男一女。
案淑儀尹氏出。七男守道正德生。娶礪山宋氏。府使繼性女。生三男一女。
257_452a案尹氏出。八男林堰正祿生。娶高靈朴氏。少尹溥女。生一男二女。
九男石保正福生。娶原州金氏。判中樞戴敬公連枝난010。生三男五女。
案池氏出。十男德泉君厚生。謚積德。○娶長水李氏。長川府院君良厚公從茂女。生四男五女。
案池氏出。十一男任城君好生。贈君。○娶平昌李氏。郡守繼童女。有繼子。
案池氏出。十二男桃平君末生。娶龍川李氏。府使守綱女。後娶全州崔氏。司直洙女。生一男一女。
案尹氏出。十三男長川都正普生。娶和順崔氏。郡事自海女。生四男一女。
案淑儀奇氏出。十四男貞石都正隆生。娶忠州權氏。直長敦女。生三女。
案淑儀奇氏出。十五男茂林君善生。奇氏出。謚昭夷。○娶南陽洪氏。司正興善女。生二男四女。
按璿系作池氏出。一女咸陽郡主。奇氏出。○駙馬知敦寧朴賡。生一男。○密陽人。父少尹得中。
257_452b按淑儀奇氏出。二女淑愼翁主。駙馬判敦寧良平公金世敏。生四男四女。○慶州人。父都觀察使謙。
三女德川郡主。駙馬行江陵府使邊尙服。生三男二女。○原州人。父都捴制頤。
四女高城郡主。駙馬知中樞金澣。生三男三女。○安山人。父蓮城君威靖公定卿。
五女祥原郡主。駙馬司直趙孝山。生一男一女。○平壤人。父義方。
六女▣▣郡主。駙馬司直李希宗。生三男一女。
七女仁川郡主。駙馬行府使李寬植。生五男三女。○全義人。父少尹成幹。
八女咸安郡主。駙馬知敦寧李恒信。生一男。
故實 己卯。還都松京。
庚辰。朴苞之亂。苞誘懷安大君芳幹。擧兵作亂。苞伏誅。芳幹安寘。
錄勳 錄定社功臣。戊寅。以平鄭道傳南誾之亂。錄義安大君和等二十九人。○十一人。後罪削。
257_452c配享 益安大君芳毅。安襄公。太祖朝大君。
相臣 成石璘。前朝文科。己卯。拜右政丞至領議政。 李舒。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再致仕。再還卜。 閔霽。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左政丞。 河崙。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致仕。
皇明惠宗建文三年辛巳。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諱芳遠。字遺德。敬事供上曰恭。純行不爽曰定。世宗卽位。上號聖德神功。肅宗辛酉。追上謚난011睿哲成烈。丁未 元順帝至正二十七年。高麗恭愍王十六年。五月十六日辛卯。誕降于咸興歸州洞。壬戌 皇明太祖洪武十五年。高麗辛禑七年。擢高麗進士試。翌年癸亥。登文科。官至密直司代言。太祖壬申。封靖安君。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二月。冊封王世257_452d子。十一月。受禪于松京壽昌宮。戊戌 皇明成祖永樂十六年。八月。傳位于世宗。壬寅 我世宗四年。五月十日丙寅。昇遐난012。在位十八年。在上王位四年。春秋五十六。有 十二男十七女。 獻陵난013在廣州大母山。神道碑卞季良撰。有行狀及碑陰記。燕山丙辰。定世室。
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난014籍驪興。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霽女。太宗卽位。初封靜妃。乙巳。元順帝至正二十五年。高麗恭愍王十四年。誕降난015。壬申。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我太祖元年。封靖寧翁主。庚辰。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冊封貞嬪난016。辛巳 我太宗元年。正月。追封王妃。庚子 皇明成祖永樂十八年。我世宗二年。七月十日。昇遐난017。春秋五十六。誕 四男四女。獻陵난018與大王陵同原。誌文卞季良撰。
按成宗朝始建昌慶宮此昌慶宮則新刊璿譜恐誤
257_453a嗣世宗大王。元敬王后誕生。序居第三。
一男讓寧大君禔。初封世子。戊戌。以敗德降封大君。謚剛靖。○娶光州金氏。光山君贈左議政漢老女。生三男四女。
二男孝寧大君初名祜。謚靖孝。●娶海州鄭氏。贊成贈左議政貞度公易女。生六男一女。
四男誠寧大君階大匡贈卞韓公。謚昭頃。○娶昌寧成氏。判院事贈左議政僖靖公抑女。有繼子。
一女貞順公主。駙馬淸平府院君李伯剛。生一女。○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貞公主。駙馬平壤府院君趙大臨康安公。生一男四女。○平壤人。父領議政文忠公浚。
257_453b三女慶安公主。駙馬吉昌君權跬齊簡公。生二男。○安東人。父贊成文忠公近。
四女貞善公主。駙馬宜山君南暉昭簡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捴郞景文。
一男敬寧君金氏出。謚齊簡。○娶淸風金氏。參議贈贊成灌女。生四男。
二男諴寧君䄄。信寧宮主辛氏出。初封恭寧君。○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一女。
按信寧宮主辛氏出。三男溫寧君䄇。謚良惠。○娶順天朴氏。副正贈贊成安命女。有繼子。
按貞嬪高氏出。四男謹寧君禯。謚僖懿。○娶河陽許氏。觀察使贈贊成之惠女。生二男六女。
按安氏出。五男惠寧君祉。娶茂松尹氏。司直贈贊成汴女。生一男二女。
按淑儀崔氏出。六男煕寧君謚夷靖。○娶淳昌申氏。僉知贈贊成淑女。生一女。後娶平山申氏。士廉女。生三男。
257_453c按崔氏出。七男厚寧君謚僖悼。○娶平山申氏。令贈贊成敬宗女。生一女。
八男益寧君淑善翁主安氏出。謚昭剛。○娶雲峰朴氏。節制使贈贊成從智女。生一女。
一女貞惠翁主。懿嬪權氏出。○駙馬雲城府院君朴從愚。錄貞難功臣成烈公。無后。○雲峯人。父贊成惠甫公信。
二女貞信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鈴平君尹季童。生一男一女。○坡平人父兵判向。
三女貞靜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漢原君趙璿昭懷公。生一男一女。○楊州人。父領中樞文剛公末生。
四女淑貞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日成君鄭孝全行判書。生二男四女。●延日人。父工判鎭。
257_453d五女昭善翁主。駙馬柔川尉邊孝順。生一男一女。○原州人。父監察尙周。
六女淑惠翁主。昭惠宮主盧氏出。○駙馬星原尉李正寧章節公。生三男一女。○星州人。父左尹師厚。
按信寧宮主辛氏出。七女淑寧翁主。駙馬坡城君尹愚。生一男一女。○坡平人。父司諫須彌。
按安氏出。八女昭淑翁主。駙馬海平君尹延命。生四男二女。○海平人。父縣監達誠。
按信寧宮主辛氏出。九女淑慶翁主。駙馬坡平君尹巖錄佐翼功臣齊度公。生六男一女。○坡平人。父生員太山。
按安氏出。十女敬愼翁主。駙馬全城君李梡。生六男一女。○全義人。父判事恭全。
按金氏出。十一女淑安翁主。駙馬懷川尉黃裕良悼公。生五男。○懷德人。父判書子厚。
按信寧宮主辛氏出。十二女淑謹翁主。駙馬花川君權恭錄佐翼功臣襄孝公。生一男。○安東人。父都節制復。
按李氏出。十三女淑順翁主。駙馬坡原尉尹泙。生二男一女。○坡平人。父參議敞。
257_454a故實 乙酉。復都漢陽。
己丑。李茂獄。相臣李茂與驪興君閔无咎等。以壞亂朝廷。幷賜死。自是遂罷外戚封君。
辛卯。始設四學。
乙未。禁錮庶孽。因右代言徐選言。禁錮庶孽淸顯。
錄勳 錄佐命功臣。庚辰。太宗冊封世子。尋受禪。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난019
配享 領議政河崙。文忠公。 右議政趙英茂。忠武公。 右議政鄭擢。翼景公。 完山府院君李天祐。襄度公。 鷄城君李來。景節公。
相臣 李居易。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 李茂。辛巳。拜右議政。己丑。罪死。 李稷。前朝文科。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 趙英茂난020。乙酉。拜右議政。 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난021257_454b 柳廷顯。丙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曼殊從弟。 朴訔。前朝文科。丙申。拜右議政。至左議政。 姜筮。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 沈溫。前朝文科。戊戌。拜領議政。同年。賜死。德符子。
皇明成祖永樂十七年己亥。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諱祹。字元正。嚴敬臨民曰莊。行善可紀曰憲。丁丑 皇明太祖洪武三十年。我太祖六年。四月十日壬辰。誕降난022。戊子。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封忠寧君。壬辰。進封大君。戊戌六月。冊封王世子。八月。受禪난023。庚午 皇明代宗永泰九年。二月十七日壬辰。昇遐于別宮。永膺大君琰第。在位三十二年。春秋五十四。有 十八男四女。英陵。257_454c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난024。行狀尹淮撰進。遷陵誌文。李承召撰。又有表石。神道碑。鄭獜趾撰。遷陵時埋碑不用。定世室。
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籍靑松。領議政靑川府院君安孝公溫女。乙亥난025皇明太祖洪武二十八年。我太祖四年。誕降于楊州私第。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行嘉禮。初封敬淑翁主。丁酉。封三韓國大夫人。戊戌六月。冊封敬嬪。十一月。進封恭妃。壬子。皇明宣宗宣德七年。我世宗十四年。改封王妃。丙寅 皇明英宗正統十一年。三月二十四日。昇遐于別宮。世祖潛邸。春秋五十二。誕 八男二女。英陵。난026 廣州與大王陵同原。誌文鄭獜趾撰。驪州亦同原。
嗣文宗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一。
嗣世祖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二。
257_454d三男安平大君瑢。癸酉。被禍。後伸雪。謚章昭。○娶延日鄭氏。判書贈左議政淵女。生二男。
四男臨瀛大君璆。謚貞簡。○娶宜寧南氏。左議政忠簡公智女。無後。後娶全州崔氏。奉禮贈右議政承寧女。生五男二女。
五男廣平大君璵。謚章懿。娶平山申氏。同中樞贈左議政自守女。生一男。
六男錦城大君瑜。丁丑。被禍。後伸雪。謚貞愍。○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
七男平原大君琳。娶南陽洪氏。府使贈左議政利用女。有繼子。
八男永膺大君琰。謚敬孝。○娶海州鄭氏。參判贈左議政忠敬女。無後。後娶礪山宋氏。同中樞贈左議政復元女。生一女。
一女貞孝난027公主。早卒贈公主。
257_455a二女貞懿公主。駙馬延昌尉安孟聃良孝公。生四男二女。○竹山人。父觀察使望之。
一男和義君瓔。令嬪姜氏出。癸酉。謫卒謚忠景。○娶密陽朴氏。參贊贈贊成仲孫女。無後。
二男桂陽君璔。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昭。○娶淸州韓氏。左議政襄節公確女。生三男三女。
三男義昌君玒。愼嬪金氏出。謚剛悼。○娶延安金氏。都觀察使贈贊成脩女。生一男二女。
四男漢南君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悼。○娶安東權氏。正郞贈知敦寧格女。生一男一女。
五男密城君琛。愼嬪金氏出。錄翊戴佐理功臣。謚章孝。○娶驪興閔氏。判尹贈贊成承序女。生四男二女。
六男壽春君玹。惠嬪楊氏出。○娶延日鄭氏。府尹贈贊成自濟女。生一女有繼子。
257_455b七男翼峴君璭。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成。○娶平壤趙氏。少尹贈贊成鐵山女。生一男一女。
八男永豊君瑔。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烈。○娶順天朴氏。參判贈判書忠正公彭年女。生一女。
九男寧海君瑭。愼嬪金氏出。謚安悼。○娶平山申氏。漢城尹贈贊成九童女。生二男一女。
十男潭陽君璖。愼嬪金氏出。早卒。謚夷襄。○有繼子。
一女貞顯翁主。尙寢宋氏出。○駙馬鈴川府院君尹師路。錄佐翼功臣。贊成忠景公。生二男。坡平人。父牧使垠。
二女貞安翁主。淑媛李氏出。○駙馬靑城尉沈安義。生一男一女。○靑松人。父觀察使璿。
故實 戊戌。始開經筵。
257_455c己亥。征對馬島。遣李從茂等。往征。大捷而歸。
庚子。設集賢殿。選文學之士二十員充之。專任文學。朝夕論思。以備顧問。卽今之玉堂。
辛丑。建永寧殿。奉安祧主。世子入學。八歲入學。遂爲定制。
丙午。始設輪對法。賜暇湖堂。選年少文臣。賜暇讀書。後稱湖堂。
戊申。纂五禮儀。許稠等纂定。
癸丑。始定雅樂。朴堧贊成之。征野人。遣崔潤德等。征婆豬江野人。大捷而還。
甲寅。纂三綱行實。圖畵事行。又命詞臣。係以詩讚。印布中外。
丁巳。設六鎭。遣金宗瑞。開拓六鎭。設寘城邑。
癸亥。定年分法。田分六等。年分九等。
乙丑。纂龍飛御天歌。命鄭獜趾等。纂穆祖以來肇基之跡。凡百二十五章。
257_455d丙寅。製訓民正音。命成三問申叔舟等。製諺文。
配享 領議政黃喜。翼成公。 左議政崔潤德。貞烈公。 左議政許稠。文敬公。 左議政申槩。文僖公。 吏曹判書李隨。文靖公。潛邸時師傅。
相臣 李原。前朝文科。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己酉。謫卒。 鄭擢。前朝文科。辛丑。拜右議政。 柳觀。改名寬。前朝文科。甲辰。拜右議政致仕。 趙涓。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 黃喜。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九十卒。 孟思誠。前朝文魁。丁未。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權軫。前朝文科。辛亥。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崔潤德。武科。癸丑。拜右議政。至左議政。 盧閈。乙卯。拜右議政。 許稠。前朝文科。戊午。拜右議政。至左議政。申槩。文科。己未。拜右議政。至左議政。 李貴齡。乙丑。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九十257_456a四卒。 河演。文科。乙丑。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皇甫仁。文科。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癸酉。被禍。 南智。己巳。拜右議政。至左議政。○在孫。
皇明代宗景泰二年辛未。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諱珦。字輝之。敬順事上曰恭。慈仁和民曰順。甲午 皇明成祖永樂十二年。我太宗十四年。十月三日癸丑。誕降난028。辛丑。我世宗三年。冊封王世子。入學。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二月。卽位于別宮。永膺大君琰第。壬申五月十四日丙午。昇遐난029。在位二年。春秋三十九。有 一男二女。顯陵。在楊州健元陵東岡。行狀申叔舟撰。有誌文及表石。
仁孝順惠난030顯德王后權氏。籍安東。判漢城府事贈領議政花山府院君景惠公專女。文宗卽位。追封王妃。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31于洪州257_456b合德縣私第辛亥。皇明宣宗宣德六年。我世宗十三年。選入東宮。封承徽。尋封良媛。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冊封世子嬪。辛酉七月二十四日。昇遐난032。春秋二十四。誕 一男一女。顯陵。初葬安山瓦里山。號昭陵。有誌文。○世祖丁丑。遷陵。○至中宗癸酉。改葬于大王陵左岡난033。誌文金國撰。
嗣端宗大王。顯德王后誕生。
一女敬惠公主。駙馬寧陽尉鄭悰。丁丑。謫卒。贈領議政。生一男。○海州人。父參判忠敬。
一女敬肅翁主。司則楊氏出。○駙馬班城尉姜子順。無後。○晉州人。父觀察使徽。
故實 辛未。寘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寘衛將。部將統將。建崇義殿。在麻田郡。祀高麗四王。以名臣十六人配享。
配享 領議政河演。文孝公。
257_456c相臣 金宗瑞。文科辛未。拜右議政。至左議政。癸酉。被禍。
皇明代宗景泰四年癸酉 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敬順敦孝大王。諱弘暐。乙亥。禪位。後上號恭懿溫文。肅宗戊寅。復位上謚。辛酉 皇明英宗正統六年。我世宗二十三年。七月二十三日丁巳。誕降난034。戊辰。冊封王世孫。庚午。皇明代宗景泰元年。我文宗卽位初。進封王世子。壬申五月난035。卽位。乙亥閏六月。禪位于世祖。七月。尊爲太上王。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六月。遜于外。降封魯山君。十月二十四日庚戌난036。昇遐于寧越。在位二年。在上王位三年。春秋十七。無嗣。肅宗辛酉。追封大君。戊寅。復位。莊陵。在寧越冬乙旨。有表石。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籍礪山。○判敦寧勵良君贈領敦寧勵良府院257_456d君玹壽女。○乙亥大妃時。上號懿德。○肅宗戊寅。復位上謚。庚申。皇明英宗正統五年。我世宗二十二年。誕降。甲戌。皇明代宗景泰五年。我端宗二年。冊封王妃。乙亥。我世祖元年。尊爲王大妃。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六月。降爲夫人。辛巳 皇明武宗正德十六年。我中宗十六年。六月四日。昇遐난037。春秋八十二。肅宗戊寅。復位。思陵。在楊州羣場里。
故實 癸酉。安平大君獄。以相臣金宗瑞等。謀推戴安平大君瑢。皆被禍。
錄勳 錄靖難功臣。癸酉。皇甫仁金宗瑞等。以推戴安平大君瑢。皆罪死。錄鄭獜趾等四十二人。四人。後罪削。
相臣 鄭莾。文科。壬申。拜右議政。癸酉。被禍。
○○○○。癸酉。以首陽大君난038。拜領議政。吏兵曹判書。內外兵馬都統使。 鄭獜趾。257_457a文魁。癸酉。拜左議政。至領議政。 韓確。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代宗景泰六年乙亥。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諱瑈。字粹之。柔質慈仁曰惠。嚴敬臨民曰莊。丁丑。上號承天軆道烈文英武。丁酉 皇明成祖永樂十五年。我太宗十七年。九月二十九日丙子난039誕降난040。戊申。皇明宣祖宣德三年。我世宗十年。初封晉平大君。後改咸平。又改晉陽。又改首陽。乙亥 皇明代宗景泰六年。我端宗三年。閏六月十一日。受禪난041。戊子 皇明憲宗成化四年。九月七日。傳位于睿宗。八日甲子。昇遐난042。在位十四年。春秋五十二。有晬容二本。奉安于永禧殿。四男一女。 光陵난043在楊州注葉山直洞。行狀徐居正撰。有誌文及表石。○明宗丁未。定世室。
257_457b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난044籍坡平。判中樞院事贈領議政坡平府院君貞靖公璠女。○丁丑。上號慈聖。○睿宗己丑。加上惠懿。○成宗辛卯加上神憲 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45洪州난046公衙。戊申。皇明宣宗宣德三年。我世宗十年。行嘉禮。初封樂浪府大夫人。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妃。癸卯 皇明憲宗成化十九年。我成宗十四年。三月三十日。昇遐于溫陽行宮。春秋六十六。誕 二男一女。光陵난047在大王陵左岡有誌文。
嗣德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一。
嗣睿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懿淑公主。駙馬河城府院君鄭顯祖。錄翊戴佐理功臣褊玎公。登文科。無後。○河東257_457c人。父領議政文成公獜趾。
一男德源君曙。謹嬪朴氏出。錄翊戴功臣謚昭簡。○娶慶州金氏。贈贊成從直女。再娶鳳山尹氏。三娶陽城楊氏。幷無後。
二男昌源君晟。謹嬪朴氏出。○娶交河盧氏。正贈贊成好愼女。後娶光州鄭氏。有繼子。
故實 丙子。六臣獄。成三問等六人。謀復上王。事覺。皆死之。
丁丑。錦城大君獄。順興府使李甫欽。與錦城大君瑜。謀復上王。皆死。
庚辰。西狩平壤。設科取士。
乙酉난048。南狩溫陽。設科取士。○戊子又幸設科如初。
丙戌。東狩江陵。設科取士。
丁亥。李施愛之亂。擧兵于吉州。殺監司兵使。遣將討平之。討建州。以皇命遣257_457d魚有沼等。往征。大捷而還。
錄勳 錄佐翼功臣。丙子。六臣等。謀復上王。金礩上變。獄편001。錄桂陽君璔等。四十四人。○三人後罪削。 錄敵愾功臣。丁亥。吉州賊李施愛叛난049北道。遣將討平之。錄曺錫文等四十五人。○四人後罪削。
配享 左議政權擥。翼平公。 左議政韓確。襄節公。 領議政韓明澮。忠成公追配。
相臣 李思哲。文科。乙亥。拜右議政。至左議政。 鄭昌孫。文科。丙子。拜右議政。至領議政。 姜孟卿。文科。丁丑。拜右議政。至領議政。 申叔舟。文科。戊寅。拜右議政。至領議政。 李仁孫。文科。己卯。拜右議政。致仕。 權擥。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韓明澮。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尙敬從孫。 具致寬。文科。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 257_458a黃守身。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喜子。 沈澮。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溫子。朴元亨。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 崔恒。文魁。丁亥。拜右議政。至領議政。 曺錫文。文科。丁亥。拜右議政。至領議政。 洪達孫。武蔭。丁亥。拜右議政。 龜城君浚。戊子。拜領議政。時年二十八。己亥。賜死。○世宗朝王孫。 康純。戊子。拜右議政。至領議政。同年。罪死。 金礩。文科。戊子。拜右議政。至左議政。○士衡曾孫。 洪允成。文科。戊子。拜右議政。至領議政。
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諱暲。字原明。初諱崇。慈仁短折曰懷。平易不訾曰簡。○在東宮昇遐。謚敬懿世子。戊午 皇明英宗正統三年。我世宗二十年。九月十五日丙申。誕降난050。乙丑。初封桃源君。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世子。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257_458b月二日癸亥。昇遐于東宮。春秋二十。成宗辛卯。追崇。有 二男一女。敬陵난051在高陽蜂峴誌文。李承召撰有表石。
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韓氏。籍淸州。○明朝宣授光祿少卿。本朝左議政西原府院君襄節公確女。○成宗辛卯。進冊王大妃。上號仁粹。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我世宗十九年。誕降난052。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粹嬪。辛卯。皇明憲宗成化七年。我成宗二年。尊冊爲王大妃。甲子 皇明孝宗弘治十七年。我燕山十年。四月二十七日。昇遐난053。春秋六十八。誕 二男一女。敬陵난054在大王陵右岡。
嗣成宗大王。昭惠王后誕生。序居第二。
一男月山大君婷。初封君錄佐理功臣。謚孝文。○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257_458c公仲善女。無後。
一女明淑公主。駙馬唐陽君洪常昭夷公。生一男。○南陽人。父左議政忠肅公應。
皇明憲宗成化五年己丑。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諱晄。字明照。初字平甫。因事有功曰襄。未中早夭曰悼。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我世宗二十二年。正月朔日丁丑。誕降난055。初封海陽大君。丁丑。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冊封王世子。丙戌。皇明憲宗成化二年。入學。戊子九月。受禪。己丑十一月二十八日戊申。昇遐난056。在位一年。春秋二十。有 二男一女。昌陵난057在高陽敬陵北岡。有行狀。又有誌文及表石。
徽仁昭德章順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乙丑。皇明英宗正統十年。我世宗二十七年。誕降난058。庚辰。皇明英宗天順四年。我世祖六年。257_458d封世子嬪。辛巳十二月五日。昇遐于私第。錄事安耆之家。春秋十七。成宗壬辰。追尊爲王妃。誕 一男。恭陵난059在坡州普施洞有誌文。
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난060籍淸州。○右議政淸川府院君襄惠公伯倫女。成宗辛卯上號仁惠。選入東宮。初封昭訓。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冊封王妃。戊午 皇明孝宗弘治十一年。我燕山四年。十二月二十三日。昇遐。誕一男一女。昌陵난061在大王陵左岡。
一男仁城大君。 早卒。贈君後加贈大君謚孝昭。○章順王后誕生。
二男齊安大君琄。謚靈孝。○娶尙州金氏。正贈左議政守末女。承安順王后旨。去之。改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公仲善女。其後。又以后命與金氏。復合。幷無後。
257_459a一女顯肅公主。駙馬豊川尉任光載無後。○豊川人。父判書士洪。○以上安順王后誕生。
故實 戊子南怡獄。柳子光誣告南怡謀逆。與領相康純。幷被禍。
錄勳 錄翊戴功臣。己丑。南怡等獄成。錄申叔舟等三十九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朴元亨。文憲公。
相臣 尹子雲。文科。己丑。拜右議政至領議政。 金國光。文科。己丑。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憲宗成化六年庚寅。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諱娎。溫良好樂曰康。寬樂令終曰靖。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七月三十日辛卯。誕降난062。辛巳。初封者山君。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改封乽山君。己丑十一月。奉貞熹王后命。卽位난063。甲寅 皇明孝宗弘治七年。十二月二十四日己卯。昇遐난064。在位二十五年。春秋三十八。有 十六257_459b男十二女。宣陵난065在廣州學堂洞。有行狀誌文及表石。○仁祖癸酉난066定世室。
以上屬成宗朝
徽懿愼肅恭惠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丙子。皇明代宗景泰七年。我世祖二年。誕降난067。丁亥。皇明憲宗成化三年。行嘉禮。己丑。冊封王妃。甲午 我成宗五年。四月十五日。昇遐난068。春秋十九。無嗣。順陵난069在坡州恭陵南岡。有誌文。
以上屬恭惠王后
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尹氏。籍坡平。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壕女。○燕山丁巳上號慈順。甲子。加上和惠。壬午。皇明英宗天順六年。我世祖八年。誕降난070于新昌公衙。癸巳。皇明憲成化九年。我成宗四年。選入大內。初封淑儀。庚子。冊封王妃。庚寅 皇明世宗嘉靖九年。我中宗二十五年。八月二十二日。昇遐난071。春秋六十九。誕 一男一女。宣陵난072在大王陵左岡誌文李257_459c荇撰。
嗣中宗大王。貞顯王后誕生。
一女愼淑公主。貞顯王后誕生。早卒。
一男燕山君㦕。母廢妃尹氏。初封世子。嗣位十二年廢。生二男一女。
二男柱城君恂。淑儀河氏出。○娶原州元氏。僉正贈贊成菑女。有繼子。
三男安陽君㤚。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謚恭懷。○娶綾城具氏。綾川君贈贊成壽永女。生一女。
四男完原君淑儀洪氏出。謚昭悼。○娶全州崔氏。生員贈贊成河臨女。無後。後娶楊川許氏。別坐贈贊成磧女。生二男二女。
五男檜山君恬。淑儀洪氏出。○娶竹山安氏。贊儀贈贊成邦彦女。有繼子。
257_459d六男鳳安君㦀。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娶平壤趙氏。判官贈贊成紀女。生一男。
七男甄城君惇。淑儀洪氏出。○娶平山申氏。奉事贈贊成友灝女。生二男一女。
八男益陽君懷。淑儀洪氏出。謚順平。○娶延日鄭氏。僉知贈贊成文昌女。生四男三女。
九男利城君慣。淑容沈氏出。謚章平。○娶南平文氏。引儀贈贊成簡女。生三男。後娶安東權氏。郡守贈贊成守中女。無後。
十男景明君忱。淑儀洪氏出。○娶坡平尹氏。僉正贈贊成堞女。生二男二女。
十一男全城君忭。貴人權氏出。○娶安東權氏。知中樞贈贊成忠敏公健女。有繼子。
十二男茂山君悰。淑儀金氏出。○娶平山申氏。別坐贈贊成銖女。生六男二女。
十三男寧山君恮。淑容沈氏出。癸酉被禍謚忠信。○娶靑松沈氏。郡守贈贊成順路女。生二女。後娶慶州鄭氏。別坐贈贊成弘光女。生一女。
257_460a十四男雲川君淑儀洪氏出。○娶安東權氏。參議贈贊成仁孫女。生四女有繼子。
十五男楊原君憘。淑儀洪氏出。○娶平壤趙氏。忠義衛贈贊成經女。無後後娶文化柳氏。正贈贊成從孫女。生一男。
一女惠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高原尉申沆文孝公。有繼子。○高靈人。父參判從濩。
二女徽肅翁主。淑儀金氏出。○駙馬豊原尉任崇載。生三女。○豊川人。父判書士洪。
三女恭愼翁主。貴人嚴氏出。○駙馬淸寧尉韓景琛。無後。○淸州人。父琅城君襄胡公堡。
四女慶順翁主。淑容沈氏出。○駙馬宜城尉南致元榮僖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府使燝。
五女敬淑翁主。淑儀金氏出。○駙馬驪川尉閔子芳。生一男○驪興人。父縣令宗元。
六女靜順翁主。淑儀洪氏出。○駙馬奉城尉鄭元俊。生一男。○奉化人。父主簿鉉。
257_460b七女淑惠翁主。淑容沈氏出。○駙馬漢川尉趙無疆。生一男。●楊州人。父參奉光世。
八女慶徽翁主。淑容權氏出。○駙馬鈴原尉尹鼐。生一男。○坡平人。父府使承世。
九女徽靜翁主。淑儀金氏出。○駙馬宜川尉南燮元。生一女。○宜寧人。父承旨忻。
十女靜惠翁主。貴人鄭氏出。○駙馬淸平尉韓紀無後。○淸州人。父判書亨允。
十一女靜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鈴平尉尹燮有繼子。○坡平人。父正承柳。
故實 庚寅。設弘文館。選文學之士十七員。充之。以備顧問。
辛卯。德宗追崇。始用經國大典。世祖朝命纂至是始成。
乙未。親耕籍田。丙申。又築觀耕壇於先農壇南。 王妃親蠶。親行釋菜。建尊經閣。建閣太學藏書籍。
丁酉王妃親蠶。築採桑壇於景福宮後苑。親行釋菜。仍行大射禮。
257_460c戊戌行養老禮。養老乞言于太學。纂輿地勝覽。纂東文選。
己亥。廢妃尹氏。以妬忌。貞熹王妃命廢之。因賜死。征建州。以皇明。遣尹弼商等。往征。大捷而還。
庚子親行釋菜。壬寅。又親行。
乙巳。錮改嫁女子孫。纂東國通鑑。
辛亥征野人。遣許琮等。往征。大捷而還。
壬子大酺師生。重修學宮。親臨大饗。
癸丑親耕籍田。王妃親蠶。
錄勳 錄佐理功臣。辛卯。以國家昇平。錄申叔舟等七十七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申叔舟。文忠公。 領議政鄭昌孫。忠貞公。 左議257_460d政洪應。忠貞公。
相臣 尹士昐。庚寅拜右議政。坐贓死獄中。 韓伯倫。庚寅。拜右議政。 成奉祖。辛卯。拜右議政。○石璘從孫。 尹士昕。乙未。拜右議政。○士昐弟。 尹弼商。文科。戊戌。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 洪應。文魁。己亥。拜右議政。至左議政。 李克培。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仁孫子。 盧思愼。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閈孫。許琮。文科。壬子拜右議政。 尹壕난073文科。甲寅。拜右議政。●弼商從叔。 愼承善。文魁。甲寅。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孝宗弘治八年乙卯。○附 燕山君㦕。母廢妃尹氏。判奉常寺事起畒女。○成宗丙申生。癸卯。冊封王世子。丁未。入學。甲寅。嗣位淫虐日甚。宗社將危。中宗反正。廢。封燕山君。放于喬桐。同年十二月卒。在位十一年。壽三十一。○夫人居昌愼氏。領議政章成公承善女。生二男一女。○墓在楊州海等村。
257_461a故實 戊午士禍。柳子光誣告金宗直吊義帝文。宗直戮死。其門徒。或誅竄。或廢錮。
甲子士禍。以廢妃尹氏賜死事。追罪廷臣。肆行誅戮。至有碎骨飄風之刑。追崇私親。追崇廢妃尹氏。改號懷陵。反正後廢。築內都城。撤都城百步內人家。寘運平樂。取各道娼妓。寘運平樂工。○宮女則有興靑,天科,地科之號。
乙丑築瑞葱臺。卽今春塘臺。改官制。革司諫院。罷經筵。减翰林員。增司僕寺掌樂院官。設獵藪。廢陵寢祭享。掇津渡舟楫。移畿內六邑于遠外。
相臣 鄭佸。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昌孫子。魚世謙。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鄭文烱。文科丙辰。拜右議政。改正。○道傳曾孫。 韓致亨。丙辰。拜右議政。至領議政。○確侄。 成俊。文科。戊午。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奉祖侄。 李克均。文科。庚申。拜右議政。至左議政。甲子。被禍。○克培弟。 柳洵。文科。癸亥。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後還257_461b卜。○曼殊玄孫。許琛。文科。甲子。拜右議政。至左議政。○琮弟。朴崇質。文科。甲子。拜右議政。至左議政。●訔孫。 姜龜孫。文科。乙丑拜右議政。●孟卿從侄。 愼守勤。丙寅。拜右議政。至左議政。反正日被誅。○承善子。 金壽童。文科。丙寅。起復。拜右議政。至領議政。○礩侄。
皇明武宗正德元年丙寅。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諱懌。字樂天。敬順事上曰恭。小心恭愼曰僖。戊申 皇明孝宗弘治元年。我成宗十九年。三月五日己巳。誕降。初封晉城大君。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九月二日。卽位。甲辰 皇明世宗嘉靖二十三年。十一月十四日。傳位于仁宗。十五日庚戌。昇遐난074。在位三十九年。春秋五十七。有 九男十一女。靖陵난075初葬高陽。號僖陵。○明宗壬戌。移葬于廣州宣陵東岡。誌文。洪春卿撰。有表石。
以上屬中宗朝
257_461c恭昭順烈端敬王后愼氏。籍居昌。○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守勤女。丁未。皇明憲宗成化二十三年。我成宗十八年。誕降난076。己未。皇明孝宗弘治十二年。我燕山五年。行嘉禮。封府夫人。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九月二日。正位中壼。九日。遜位于私第。丁巳 皇明世宗嘉靖三十六年我明宗十二年。十二月七日。昇遐。春秋七十一。無嗣。英宗己未。追復位。上謚溫陵。在楊州西山長興面水回洞。
宣昭懿淑章敬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原府院君汝弼女。辛亥。皇明孝宗弘治四年我。○成宗二十二年。誕降난077。丙寅。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選入大內。初封淑儀。丁卯八月。進冊王妃。乙亥三月二日。昇遐난078。春秋二十五。誕 一男一女。禧陵난079初葬廣州獻陵右岡。○中宗丁酉。移葬于257_461d高陽元堂里。誌文金安老撰。有表石。
聖烈仁明文定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山府院君靖平公之任女。明宗丁未。上號聖烈仁明。辛酉。皇明孝宗弘治十四年。我燕山七年。誕降난080。丁丑。皇明武宗正德十二年。我中宗十二年。冊封王妃。乙丑 皇明世宗嘉靖四十四年。我明宗二十年。四月七日。昇遐난081。春秋六十五。誕 一男四女。泰陵。在楊州蘆原西行錄明宗御製有表石。
嗣仁宗大王。章敬王后誕生。序居第一。
嗣明宗大王。文定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孝惠公主。駙馬延城尉金禧生一女。○延安人。父左議政安老章敬王后誕生。
二女懿惠公主。駙馬淸原尉韓景祿。生三男。○淸州人。父僉知承權。
257_462a三女孝順公主。駙馬綾原尉具思顔。有繼子。○綾城人。父縣監淳。
四女敬顯公主。駙馬靈川尉申檥。生一男。○高靈人。父牧使秀涇。
五女仁順公主。早卒。○以上文定王后誕生。
一男福城君嵋。敬嬪朴氏出。壬辰被禍。後伸雪。○娶坡平尹氏。縣監贈贊成仁範女。生一女。初宣祖爲繼。及入承大統。後命信城君翊。奉其祀。
二男海安君㟓。淑儀洪氏出。○娶晉州柳氏。晉山君贈贊成泓女。無後。後娶居昌愼氏。參奉贈贊成弘猷女。生一女。
三男錦原君岭。煕嬪洪氏出。○娶海州鄭氏。都事贈贊成承休女。生一女。有繼子。
四男永陽君岠。昌嬪安氏出。謚成悼。○娶順興安氏。司圃贈贊成世亨女。有繼子。
五男德陽君岐。淑儀李氏出。謚靖僖。○娶安편002權氏。判書贈贊成纘女。生一男。
257_462b六男鳳城君岏。煕嬪洪氏出。乙巳난082被禍。謚懿愍。○娶東萊鄭氏。正贈領議政惟仁女。生一女。有繼子。
七男德興大院君岹。昌嬪安氏誕生。庚寅生。己未卒。壽三十。●宣廟入承大統。後追尊爲大院君。○配河東府夫人鄭氏。判中樞贈領議政孝簡公世虎女。誕三男一女。
一女惠順翁主。敬嬪朴氏出。○駙馬光川尉金仁慶。有繼子。○光州人。父參議憲胤。
二女惠靜翁主。敬嬪朴氏出。○駙馬唐城尉洪礪。壬辰被禍。後伸雪。生一女。○南陽人。父觀察使叙疇。
三女貞順翁主。淑媛李氏出。○駙馬礪城尉宋寅文端公。生一男。○礪山人。父僉知之翰。
四女孝靜翁主。淑媛李氏出。○駙馬淳原尉趙義貞。生一男。○淳昌人。父府尹琛。
五女淑靜翁主。淑媛金氏出。○駙馬綾昌尉具澣。生三男三女。○綾城人。父副正信璟。
257_462c六女靜愼翁主。昌嬪安氏出。○駙馬淸川尉韓景祐。生一男三女。○淸州人。父縣監慈。
故實 丙寅反正。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奉主上反正。
丁卯。李顆獄。盧永孫告李顆等謀逆。幷被殺。
庚午。三浦倭亂。遣柳聃年黃衡等。討平之。
癸酉。復昭陵。卽顯德王后陵。○世祖丁丑。遷陵。失所在。至是。三司百官。上章請復。改葬于顯陵左岡。鄭莫介告密。公賤鄭莫介。告功臣朴永文辛允武等謀逆。幷正法削勳。親耕籍田。王妃親蠶。
乙亥。金凈,朴祥獄。是年。章敬王后上賓。金凈朴祥上䟽請復愼妃。幷拿鞠徒配。
丁丑。鄭文忠公從祀。以前朝儒賢鄭夢周。從祀文廟。
己卯。設賢良科。命京外各薦人才。庭策治道。取金湜等二十八人。罷昭格署。257_462d三司庭爭。罷之。乙酉。復建。壬辰亂後永廢。士禍。南衮,沈貞等。從北門誣告。趙光祖等諸人。皆被大禍。
辛卯。安瑭獄。宋祀連誣告。搆殺安瑭一門。
己丑。王妃親蠶。
庚寅。增修輿地勝覽。
壬辰。福城君獄。宮中巫蠱。敬嬪朴氏及其子女福城君嵋,唐城尉洪礪。幷被慘禍。後幷伸。
甲午。親行大射禮。
乙未。幸松京。設科取士。
丁酉。金安老獄。發卒圍捕。遠竄。未到配。賜死于葛院。
錄勳 錄靖國功臣。丙寅。燕山荒亂。宗社將危。朴元宗等。擧義反正。錄元宗等百十八人。○十一人。後罪削。錄定難功臣。丁卯。盧永孫告李顆等謀逆。獄成。錄永孫等二十二人。○後因臺啓257_463a單。錄永孫餘皆削功。
配享 領議政朴元宗。武烈公。 領議政成希顔。忠定公。 領議政柳順汀。文成公난083 領議政鄭光弼。文翼公。
相臣 朴元宗。武科。丙寅。拜右議政。至領議政。 柳順汀。文魁。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 成希顔。文科。己巳。拜右議政。至領議政。 宋軼。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 鄭光弼。文科。癸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應箕。文科。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申用漑。文科。丙子。拜右議政。至左議政。○叔舟孫。 安瑭。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辛巳被禍。金銓。文魁。己卯。拜右議政。至領議政。 南衮。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後追奪。 李惟淸。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權鈞。文科。癸未。拜右議政。 沈貞。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辛卯。罪死。 李沆。文科。丁亥。拜右議政。改正。 李荇。257_463b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甲午。謫卒。 張順孫。文科。庚寅。拜右議政。至領議政。 韓效元。文科。辛卯。拜右議政。至領議政。 金謹思。文科。癸巳。拜右議政。至領議政。丁酉。謫卒。金安老。文魁。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丁酉。罪死。○詮侄。 尹殷輔。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柳溥。文科。丁酉。拜右議政。至左議政。○順汀侄。 洪彦弼。文科。丁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克成。文科。丁酉。拜右議政。 尹仁鏡。文科。庚子。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世宗嘉靖二十四年乙巳。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諱峼。寵祿光大曰榮。寬樂令終曰靖。乙亥 皇明武宗正德十年。我中宗十年。二月二十五日癸丑。誕降난084。庚辰。冊封王世子。壬午。皇明世宗嘉靖元난085行冠禮入學。甲辰十一月受禪。乙巳七月朔日辛酉。昇遐난086。在位八月。春秋257_463c三十一。無嗣。孝陵난087在高陽禧陵西岡。行狀李彦廸撰。誌文申光漢撰。有表石。
以上屬仁宗朝
孝順恭懿仁聖王后朴氏。籍羅州。○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錦城府院君墉女。甲戌。皇明武宗正德九年。我中宗九年。誕降난088。甲申。皇明世宗嘉靖三年。冊封世子嬪。甲辰。進封王妃。丁丑 皇明神宗萬曆五年。我宣祖十年。十一月二十九日。昇遐난089。春秋六十四。孝陵난090與大王陵同原。
配享 領議政洪彦弼。文僖公。 左贊成金安國。文敬公。
相臣 李芑。乙巳。拜右議政。改正。同年復拜。 柳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同年。被禍。亮玄孫。 成世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戊申。謫卒。⊙奉祖曾孫난091
皇明世宗嘉靖二十五年丙午。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諱峘。字對陽。敬順事上曰恭。行善可紀曰憲。甲午 皇明世宗嘉靖十三年。我中宗二十九年。五月二十二日257_463d戊子誕降。初封慶原大君。乙巳七月。以仁宗遺命。卽位난092。丁卯 皇明穆宗隆慶元年。六月二十八日辛亥。昇遐난093。在位二十二年。春秋三十四。有 一男。康陵난094在楊州。泰陵東岡。行狀李滉撰。有表石。
宣烈懿聖仁順王后沈氏。籍靑松。●領敦寧靑陵府院君贈領議政翼孝公鋼女。壬辰。皇明世宗嘉靖十一年。我中宗二十七年。誕降。乙巳。冊封王妃。乙亥 皇明神宗萬曆三年。我宣祖八年。正月二日。昇遐난095。春秋四十四。誕 一男。康陵난096與大王陵同原。
嗣宣祖大王。
一男順懷世子諱暊。仁順王后誕生。明宗辛亥。誕降。丁巳。冊封王世子。庚子入學난097
此間必有闕文。而原本見漏。故不能續繕。
257_464a配享 領議政金昌集。忠獻公。 領議政崔奎瑞。文忠난098公。 左議政閔鎭遠。文忠公。 左議政趙文命。文忠公。 領議政金在魯。忠靖公。
相臣 柳鳳輝。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丁未謫死。乙亥。追施逆律。○尙運子。 趙泰億。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今上난099。丙申。追奪。○師錫侄。 鄭澔。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澈玄孫。閔鎭遠。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鼎重侄。 李觀命난100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健命兄。 洪致中。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重普孫。趙道彬。文科。丙午。拜右議政。○泰采侄。 李宜顯。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世白子。 沈壽賢。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連源八世孫。 吳命恒。文科。戊申。拜右議政。○允謙玄孫。 李台佐。文科。戊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恒福玄257_464b孫。 李㙫。文科。己酉。拜右議政。至左議政。○芑六世孫。 趙文命。文科。庚戌。拜右議政。至左議政。○相愚從孫。徐命均。文科。壬子。拜右議政。至左議政。○宗泰子。 金興慶。文科。壬子。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金在魯。文科。乙卯。拜左議政。至領議政。致仕。○構子。宋寅明。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 兪拓基。文科。己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趙顯命 文科。庚申。拜右議政。至領議政。○文命弟。 鄭錫五。文科。丙寅。拜右議政。至左議政。○致和曾孫。 閔應洙。文科。丙寅。拜右議政。○鎭遠從侄。 金若魯。文科。己巳。拜右議政。至左議政。○在魯從弟。 鄭羽良。文科。己巳。拜右議政。 李宗城。文科。壬申。拜左議政。至領議政。○台佐子。 李天輔。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廷龜五世孫。 金尙魯。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今上。丙申。追施大逆律。○若魯弟。 趙載浩。文科。甲戌。拜右議政。壬午。罪死。乙未伸。○文命子。 申晩。文科。丙子。257_464c拜右議政。至領議政。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時白五世孫。 閔百祥。文科。己卯。拜右議政。○鎭遠孫。 洪鳳漢。文科。辛巳。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 鄭翬良。文科。辛巳。拜右議政。至左議政。○羽良弟。 尹東度。文科。辛巳。拜右議政。至領議政。 金相福。文科。癸未。拜右議政。至領議政。○國光十一世孫。 金致仁。文魁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在魯子。 徐志修。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命均子。 金陽澤。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國光十世孫。 韓翼謩。文科。丙戌。拜左議政。至領議政。○應寅六世孫。 金尙喆。文科。丙戌。拜右議政。至領議政。 李昌誼。文科。戊子。拜右議政。至左議政。 申晦。文科。壬辰。拜左議政。至領議政。丙申。謫。○晩弟。 李溵난101文科。壬辰。拜右議政。○㙫孫。 李思觀。文科。壬辰。拜右議政。至左議政。 元仁孫。文科。壬辰。拜右議政。斗杓五世孫。 洪麟漢。文科。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丙申。以逆誅。○鳳漢弟。
257_464d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諱緈。字聖敬。己亥 肅宗四十五年。 二月十五日戊午。誕降난102。甲辰。初封敬義君。乙巳。英宗元年。 冊封王世子。丁未。入學。行冠禮。戊申十一月十六日壬戌。昇遐난103。春秋十。甲申난104。以今上난105特命爲嗣。丙申。賜號承統世子。八月十二日。追尊爲王。上謚溫良睿明哲文孝章。無嗣。永陵。在坡州順陵左岡。初墓。號孝章。後進號永陵。行錄及誌文。英宗御製。有表石。
徽貞賢淑孝純王后趙氏。籍豊壤。○左議政豊陵府院君贈領議政文忠公文命女。乙未。肅宗四十一年。誕降난106。丁未。英宗三年。冊封世子嬪。行嘉禮。乙卯。賜號賢嬪。辛未十一月十四日丁丑。昇遐난107。春秋三257_465a十七。壬申。賜謚孝純賢嬪。丙申。賜號承統。八月十二日。追尊爲王妃。上謚徽貞賢淑孝純。無嗣。永陵난108與大王陵同原。
嗣主上殿下。惠慶宮惠嬪洪氏誕生。
主上殿下。諱祘。字亨運。壬申 英宗二十八年。九月二十二日己卯。誕降于昌慶宮之景春殿。己卯。冊封王世孫。辛巳。入學行冠禮。甲申。特命嗣眞宗大王。丙申。受御筆孝孫銀印。同年三月十日辛巳。卽位于慶煕宮之崇政門。
妃殿下金氏。籍淸風。行參贊贈領議政淸風府院君靖翼公時默女。癸酉 英宗二十九年。257_465b十二月癸巳。誕降난109。壬午。冊封世孫嬪。行嘉禮。丙申。進封王妃。


 

[난-001]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 : 案英宗乙亥。卽上王時所御豊壤舊基。建閣竪碑。
[난-002]健元陵 : 案戊子九月九日。葬。
[난-003]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 : 案璿系闕年而只書六月十三日。誕降。
[난-004]傳位于太宗。 : 案璿系。庚辰十二月。上尊號。仁文恭孝。
[난-005]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6]厚陵 : 案庚子正月三日。葬。
[난-007]誕降 : 案乙未正月九日。誕降。
[난-008]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9]厚陵 : 案壬辰八月八日。葬。
[난-010]生 :
[난-011]追上謚 : 一本癸亥追上謚
[난-012]昇遐 : 按昇遐于泉達坊之新宮。
[난-013]獻陵 : 按壬寅九月六日。葬。
[난-014]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 : 世宗甲辰追上尊號彰德昭烈。
[난-015]誕降 : 按乙巳七月十一日。誕降于松京鐵洞。
[난-016]冊封貞嬪 : 按璿系。封貞嬪下有尋追封靜妃。
[난-017]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別殿今昌慶宮。
[난-018]獻陵 : 按庚子九月十七日。葬。
[난-019]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 : 一本。錄李薆等四十八人。而十人罪削。
[난-020]趙英茂 : 一本。趙英茂下。有義安大君和。太祖庶弟。丁亥。拜領相。
[난-021]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 一本。南在,柳亮。壬辰。拜相。韓尙敬。丙申。拜相。
[난-022]誕降 : 按誕降于漢陽潛邸。
[난-023]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24]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 : 按庚午六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英陵。
[난-025]乙亥 : 按璿系。乙亥下。有九月無日。
[난-026]英陵 : 按丙寅七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
[난-027]貞孝 : 按璿系。貞孝。作貞昭。
[난-028]誕降 : 按誕降于漢陽私第。
[난-02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千秋殿。按壬申九月朔日。葬。
[난-030]仁孝順惠 : 端宗甲戌。追上尊號仁孝順惠。
[난-031]誕降 : 按戊戌三月十二日。誕降。
[난-032]昇遐 : 按昇遐于東宮之資善堂。
[난-033]改葬于大王陵左岡 : 按辛酉九月。初葬昭陵。癸酉四月二十一日。改葬。
[난-034]誕降 : 按誕降于東宮之資善堂。
[난-035]五月 : 五月一作正月
[난-036]庚戌 : 庚戌一作甲寅
[난-037]昇遐 : 按英宗辛卯。御筆書凈業院舊基。竪碑于燕尾貞洞。
[난-038]首陽大君 : 世祖潛邸封號。
[난-039]丙子 : 一本丙子作辛巳
[난-040]誕降 : 按誕降于本宮。
[난-041]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42]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正殿。
[난-043]光陵 : 按戊子十一月二十八日。葬。
[난-044]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 : 按璿系睿宗己丑。加上自欽仁至忠懿十四字。
[난-045]誕降 : 按戊戌十一月十一日。誕降。
[난-046]洪州 : 一本洪州。作洪川。
[난-047]光陵 : 按癸卯六月十二日。葬。
[난-048]乙酉 : 一本乙酉作甲申
[편-001]戌 :
[난-049]遽 :
[난-050]誕降 : 按誕降于禁中。
[난-051]敬陵 : 按丁丑十一月二十三日。葬。
[난-052]誕降 : 按九月八日。誕降。
[난-05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景春殿。
[난-054]敬陵 : 按甲子五月。葬。
[난-055]誕降 : 按誕降于私第。
[난-05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紫薇堂。
[난-057]昌陵 : 按庚寅三月五日。葬。
[난-058]誕降 : 按正月十六日。誕降。
[난-059]恭陵 : 按壬午二月二十五日。葬。
[난-060]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 : 按璿系闕年只書三月十二日。誕降。
[난-061]昌陵 : 按己未二月十四日。葬。
[난-062]誕降 : 按誕降于東宮。
[난-063]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64]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大造殿。
[난-065]宣陵 : 按乙卯四月六日。葬。
[난-066]癸酉 : 一本癸酉作乙亥
[난-067]誕降 : 按十月十一日。誕降于蓮花坊私第。
[난-068]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求賢殿。
[난-069]順陵 : 按甲午六月七日。葬。
[난-070]誕降 : 按六月二十六日。誕降。
[난-071]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72]宣陵 : 按庚寅九月二十日。葬。
[난-073]尹壕 : 一本尹壕下。有居平君復。定宗朝王孫。拜右相改正。
[난-074]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歡慶堂。
[난-075]靖陵 : 按乙巳二月。初葬僖陵。壬戌九月四日。移葬。
[난-076]誕降 : 按正月十四日。誕降。
[난-077]誕降 : 按七月六日。誕降于會賢坊私第。
[난-078]昇遐 : 按昇遐于景福宮別殿。
[난-079]禧陵 : 按乙酉閏四月。初葬廣州。
[난-080]誕降 : 按十月二十二日。誕降。
[난-081]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昭德堂。
[편-002]束 :
[난-082]乙巳 : 一本乙巳。作丁未。
[난-083]文成公 : 一本。文成公。作烈成公。
[난-084]誕降 : 按誕降于景福宮。
[난-085]宗 :
[난-08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淸燕樓下小寢。
[난-087]孝陵 : 按乙巳十月十五日。葬。
[난-088]誕降 : 按十月朔日。誕降。
[난-08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90]孝陵 : 按戊寅二月十五日。葬。
[난-091]奉祖曾孫 : 一作奉祖從孫。
[난-092]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93]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養心堂。
[난-094]康陵 : 按丁卯九月二十二日。葬。
[난-095]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通明殿。
[난-096]康陵 : 按乙亥四月二十八日。葬。
[난-097]庚子入學 : 一作庚申入學。
[난-098]文忠 : 一本文忠作忠正。
[난-099]今上 : 正宗朝
[난-100]李觀命 : 一本李觀命。拜至左議政。
[난-101]李溵 : 一本李溵。拜左議政。
[난-102]誕降 : 按誕降于順化坊彰義宮。
[난-10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進修堂。
[난-104]甲申 : 英宗朝甲申也
[난-105]今上 : 今上卽正宗
[난-106]誕降 : 按十二月十四日。誕降于崇敎坊私第。
[난-107]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建極堂宜春軒。
[난-108]永陵 : 按壬申正月十一日。葬。
[난-109]誕降 : 按誕降于嘉會坊私第。


 

           

 


 
연려실기술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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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조 고사본말고사본말(故事本末)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太祖朝故事本末)
태조

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 8남 5녀를 두었다.
사(嗣) 정종대왕(定宗大王) 순서는 둘째이다.
사(嗣) 태종대왕(太宗大王) 순서는 다섯째이다.
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 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大匡輔國贈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㺶)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으며, 정종 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 밀양 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 김포 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兔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 개성 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부유 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薆)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주D-001]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고려 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수상을 말하는데, 수문하시중은 그 다음인 부수상 격이다.
[주D-002]기로소(耆老所) : 조선 때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의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 받던 곳으로, 태조 3년에 창설되었다.
[주D-003]휘호(徽號) : 왕이나 후비께 올리는 존호를 가리킨 것인데, 휘(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세조 3년 정축(1457,천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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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1일 (임술)
계천위 이등의 졸기

계천위(啓川慰) 이등(李登)이 졸(卒)하였다. 이등은 태조(太祖)의 딸 의령 옹주(義寧翁主)에게 장가들었으나, 성질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몹시 추울 때나 몹시 더울 때라도 한 번도 임금을 조알(朝謁)하는 예(禮)를 폐한 적이 없었고, 만년(晩年)에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는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를 만류하면,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서 모람되게 척리(戚里)인 인연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늠록(廩祿)만을 허비하고 조그마한 보탬도 있지 않았으니, 어찌 조알(朝謁)하는 예를 꺼리겠느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9세였다. 관가에서 장사(葬事)를 치러주고 ‘호안(胡安)’이라 시호(諡號)하니, 나이가 많고 오래 산 것을 ‘호(胡)’라 하고 화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한다. 아들이 4인이 있는데, 둘째 아들 이선(李渲)은 임자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위가 추밀(樞密)에까지 이르렀다.
【원전】 7 집 207 면
【분류】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인사(人事) / *왕실(王室)
 
  세종 19년 정사(1437,정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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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28일 (을유)
예조 참판 이선을 북경에 보내 성절을 하례하게 하다

예조 참판 이선(李渲)을 북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세자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표문을 배송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 뇌거 사목(賚去事目)은,
1. 홍무 3년 공민왕 때에는 면복과 원유관포(遠遊冠袍)를 하사받았고, 영락 원년에는 면복의 하사는 받았으나 원유관·강사포는 하사를 받지 못했으므로, 본국에서 고려의 옛 것을 썼지만, 전한 지 해가 오래 되어 체제와 규모가 잘못 전해지고 본색을 잃게 되었으니, 지금 있는 것이 제도에 합당하겠는가. 또 홍무 3년에 원유관과 면복을 하사하실때의 자문(咨文)의 면복 조항 속에는 패옥이 있고, 원유관 조항 속에는 패옥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전해서 내려온 원유관에는 패옥 하나가 있고, 폐슬(蔽膝) 앞의 충아(衝牙)는 푸른 옥을 썼으며, 형우(珩瑀)와 거황(琚璜)은 흰 옥을 쓰고, 관주(貫珠)는 구어서 만든 수정(水精)을 썼으니, 또한 푸른 옥·흰 옥·수정을 섞어 쓰는 것이 제도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있고 없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잘못인지도 알지 못하겠다. 또 면복 조항 속에 푸른 옥의 규(圭)가 있으나 원유관 조항 속에는 규(圭)가 없으니, 또한 규가 하나를 가지고 통용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면복은 윗사람을 뵙는 데 쓰는 것이므로 규가 있고, 원유관은 조회 받는 의복이므로 규를 쓰지 않은 것인가.
1. 이제 만약 자세하게 그 제도를 알게 되면, 거기에 쓰이는 명주(明珠)와 취우(翠羽) 등 물건이 본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면 사지 말고 본국에 없는 것은 사 가지고 올 것이며, 강사포를 만들 붉은 비단·흰 비단 등의 물건도 또한 사 가지고 올 것.
1. 이번의 이 물음은 급하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세히 살펴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예부에 직접 나아가 경솔하게 물으면, 중국 조정에서 하사하기를 바라는 것같이 여겨질 것이니 심히 염려된다. 하물며 지금 천자의 연소한 때에, 이런 것으로 기롱이나 꾸짖음을 들으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니 더욱 두려운 것이다. 마땅히 처음에는 예부의 낭청(郞廳) 한 사람과 결탁(結托)하고, 또한 뇌물을 주면서 기회를 보아서 물어서 그 얼굴을 보고 그 말을 들어서 익히 의논하고, 익히 생각해서 혹은 글로 써서 올리거나 혹은 온순한 말씨로 예부에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만약에 형편이 좋지 못해서 어렵게 되거든 중지하는 것도 옳을 것이니 삼가서 소홀히 하지 말라.
1. 만약에 차는 물건이 꼭 고쳐야 될 것이 있거든 만들어서 차야 할 옥도 사 가지고 올 것.
1. 낭관이 만약에 묻기를, ‘전하께서 원유관을 쓸 때에 면복의 규를 통용하느냐. 따로 다른 규를 쓰느냐. 규를 쓰지 않느냐.’고 하거든, 대답하기를, ‘배신(陪臣)은 벼슬이 미천해서 가까이 모시지 못해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할 것.
1. ‘전하께서 원유관과 강사포를 입을 때에 공민왕 때에 준 것을 그대로 쓰느냐. 너희 나라에서 따로 만들어 쓰느냐.’고 하거든, 즉시 대답하기를, ‘배신의 벼슬이 미천해서 가까이 모시지 못해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할 것.
1. 원유관에 장식할 명주(明珠)가 값이 비싸서 형편이 다 사기 어렵거든, 이 뒤에 사신 갈 때마다 계속해서 사 오는 것도 무방하다.
1. 애당초 예부의 한두 사람들과 결탁한 것이 만일에 친밀하여지지 않아서 다른 사람과 도모하였다면, 그 처음에 받아주지 않던 관원이 혹시 나쁜 말로 방해할런지도 모르니, 이번 첫 일에 구태어 급히 서둘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들어 보고 다음 갈 때에 다시 도모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
1. 고려 공민왕 때에는 면복과 원유관포를 한꺼번에 받았는데, 면복에는 푸른 옥이 있었고, 규의 왼쪽과 바른쪽에 패옥(佩玉)이 있었으나, 원유관포에는 규와 패옥이 없었으니, 면복의 규와 패옥은 원유관포에도 통용하는 것이 아닌가. 위의 조항에 대하여 낭관이 만약에 말하기를, ‘원유관포에도 역시 규와 좌우에 차는 옥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을 물어서 바로잡도록 하라.
1. 본국에 연대를 알 수 없는 고려 때 전해 온 원유관 하나가 있는데, 위에는 매미[蟬] 아홉 마리가 붙어 있고 전면 세 곳에는 칠보(七寶)로 장식하고, 또 차는 옥이 하나 있으면, 폐슬(蔽膝)의 앞에는 충아(衝牙)·형우(珩瑀)·거황(琚璜)을 모두 푸른 옥을 쓰고, 관주(貫珠)는 담백색 옥을 썼는데, 이제 비록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제도에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원전】 4 집 101 면
【분류】 *외교-명(明) / *역사-전사(前史) / *의생활-관복(官服)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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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26일 (임신)
정분·이견기·윤형·조혜 등 제 관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분(鄭苯)을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이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吏曹事)로, 이견기(李堅基)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윤형(尹炯)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조혜(趙惠)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인지(鄭麟趾)를 공조 판서(公曹判書)로, 이선(李渲)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김효성(金孝誠)·이균실(李均實)·홍약(洪約)을 모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권맹손(權孟孫)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기건(奇虔)를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민공(閔恭)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정이한(鄭而漢)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효신(任孝信)·김수연(金壽延)·하결(河潔)을 모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조극관(趙克寬)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성봉조(成奉祖)를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박중림(朴仲林)을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로, 이인손(李仁孫)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사원(李師元)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기건은 행수(行首)에서 출신하여 중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이간(吏幹)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제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로서 들어와 호조 참판이 되었으나, 그가 전라도에서 재임 중에 매우 청렴하지 못하다고 이름이 있었고, 정이한은 양계(兩界)에서 성을 쌓은 공로로서 차례를 무시하고 서용(敍用)하게 되었다.
【원전】 5 집 15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南圃先生集卷之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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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郊日記[上] 自己丑止庚寅。又自己亥止乙巳。
[辛丑] b_036_43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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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正月初九日己未少陽。訪尹保氏兄弟于蓬山山室。尹公與兄儆。築室于其先塋之下。兄弟率妻子卜居。一室相對。友于耽樂。不出洞門。今十有餘年。年亦七十矣。二人雖非學古踐跡之士。志行之高有可尙者。余往訪焉。命酒穩話移時而來。山趣頗有動人意思者。十一日辛酉少陽。往見主倅。主倅設酒穩話。聞自上蠲減海邑災損人民今年田稅。以賑飢民。山邑則減上細布。其人木方物等賦云云。南平名雖山邑。災損與海邑無異。本道監司金始振別啓請與海邑一體施行。自上下該曹。戶判許積防啓。036_437a人民㤪之云。聞吏曹判書宋浚吉在家上疏辭職。上命遞云。主倅又言余欲括富民粟。救濟飢民。其事已定奪。而別有司約正輩憑依官令。私斂民財者多有之。余懲是方欲革破括粟救民之令矣。余答曰分出富民之財。救恤將死之民。亦隣里相救之義。今仍約正之濫而廢之。則無乃近於仍噎而廢食耶。又曰歲饑民困。主少國疑。世臣連喪。國將奈何。主倅曰自上蠲減賦稅。爲民撫養之道至矣。但十六司貢物則不論歲之豐凶而一定無進退。今年田結過半損縮。而各司貢物之納。依前無減。守令無路變通。而036_437b飢民坐受其苦。可憫可憫。余曰如此之事。未可報使通變乎。曰監司雖啓請。該司例必防啓。奈何奈何。余曰聞我朝祖宗朝。田一結賦米一斗則經一年無他役矣。海州地有其故事。栗谷建請行之八方。竟不得行。今之大同則一結十三斗而亦不足於國用云何歟。主倅曰世變可知矣云。二月初八日戊午風寒。午潭陽居呂益吉來見。呂云潭陽士人柳震碩。眉庵之曾孫也。年今二十有餘。篤志古學。結屋于雲巖李公興浡之隱處。讀書爲學。不出山口今數年云。余聞斯人之名久矣。仍其言而記之云。二十七日036_437c丁未少陽。三學齋儒生等請書齋規儀。乃敍二十四條而贈之。詳見經義說 二十八日戊申少陽。余於春夏。例患上氣。氣神昏眩。口焦體勞。頭重脚憊等症。種種不佳。余深憫之。年前得修養要訣一冊於靜軒高公之舊庄。試用其法。今年則氣頗小平。無乃得其驗耶。今朝點檢神氣。仍記之以愼疾之戒云。靜軒乃余之妻外祖諱循厚。霽峯之第三子。精於禮學。氣像古朴。行操端重。眞古之學者。余少登其門。觀感實多。而倐焉二十年。鬂髮欲斑。而病宂懶習。一無小成。言念及此。不覺浩歎也。公官至刑曹正郞。年七十二而卒於庚036_437d辰十二月十日。平生操履端方。守貧不屈。緇冠布褐。糲飯茅屋。未免飢寒。而怡然不以慮。廷臣交薦。職命屢下而竟不起。丁卯胡亂。奮然以出義勤王爲志。與士人安邦俊,趙坪等。召募義士。方欲赴難而死於節。辭義凜烈。有不可犯之氣象矣。俄而亂平之報至。敗師而歸。終身恬靜。不動聲色。守道而歿。嗚呼非有道之士而能然乎。深居僻巷。不求人知。世未有知其操者。身後無聞於人可歎也。仍念及而興感記于此。二十九日己酉大陰。靜坐看書終日。仍思人之病痛。都由氣質上出。若按伏得這般氣上罪過。使氣之濁036_438a者淸偏者正躁者靜急者緩懶者勤。隨其所偏。一歸於中。氣之中。性自然復其中矣。余之氣質病痛。每生於昏弱懶濁。又麁而不細。或和則易流。急則易暴。至於兩斧之害。亦未免牽慮。今麴糱之嗜。斷念有年。若夫遠色之戒。雖每用鋤割之功而暮歸喜獵之念。或不能不萌于中。此皆氣之所使。從此定可猛省痛絶之。仍記于此。自午後雨作。戌時地震。終夜雨不止。春雨之數。農談忌之。地震之變。春秋所書。爲民爲國。其無憂乎。三月十七日丙寅大陰。尹俶以太守言來言曰。當此大饑之歲。十六司貢物。無一毫蠲減。濟用監036_438b正布方在輸納。而本縣災結外所餘者僅二百夫。而當平歲貢物之元數。公私俱竭。無由出辦。今欲仍人民等呈狀。轉報監司。以爲入啓。姑請待秋輸納。而難於措辭。請得一轉語以助之。余對曰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於人必有所濟。方今生民之困極矣。余安敢以他辭辭也。遂構狀辭以送之。聞監司金公始振以祭無等山來光州。盖以民間多厲疫來祭云。十八日丁卯少陰。尹生先夔,文君晩郁來見。聞綾州士人及本縣士人等。會于熊岾寺。通文于道內及長興。盖長興人金公光遠配享于靈川書院。物論短金公。欲036_438c仍書院重修。仍出其位板。文致郁,李漙等先發通文。金公子孫又囑生員曺德吉。通文于列邑。告其毁出之非義。當時配享之論。首發於安牛山邦俊。故牛山子若孫輩。勸起綾州士人。通文伸救云云。余嘗執其中而論之曰。金公之出處言行。余雖未能詳知其首末。不敢輕議。然書院之名則所關至重。必也有功於吾道。任重於斯文。爲一邦之宗儒。作百代之師表。士林欽仰。公論齊發。然後立廟妥靈。一以崇道學之先正。一以振儒林之元氣。傳之百代而無愧。倡示天下而有辭。今則不然。一名之士。稍有硜硜之行。而其子036_438d孫枝屬。蟠據於一鄕。則遽出享祀之論。遂建巋然之宇。諂祀非禮。擧世滔滔。彼所謂先儒者。雖道德不及於眞賢。廉恥一念。必有過於凡人。倘使已死而有知。寧不自愧於心而安受其非禮之享乎。况世習日降。士風澆漓。春秋之祭。名之曰享賢。而屯聚廟宇。醉飫終日。喧呼叫讙。放縱自恣。仍之以爭闘日起。讎㤪遽作。其流之弊。可勝言哉。世道至此。誰能挽回而廓淸之耶。悲夫。夕宿于三學齋。諸生三十餘人會宿。曉鷄初鳴。諸生起而講學。頗有菁莪之樂矣。二十八日丁丑。種柳于門前及大小陰陽四泉之邊。幹其事者乙036_439a生及道乙伊兩童奴也。四泉及岸邊者。通三十餘根也。不知何時。綠陰成蹊。隱映園林而護我門戶。怳然有風來月上之懷也。令人不覺起意焉。余自少酷有山水之癖。見一山一石園林澗泉之勝。終日忘歸。歸來數月。亦不覺意牽而神。半世貧病。兼之以憂患。尙未得一山一水之勝而卜居焉。吁可嘆矣。雖然郊野田園。亦足以藏棲遁之跡而寄棄世之懷。今新卜雖無山水形勝。而郊原泉脉。若加粧點。庶有荷鋤帶月之興。而民田相雜。無資可買。而俗亦不佳。長懷茂林崇山。不勝鳥歸之情而無可爲矣。奈何奈何。雖然036_439b大隱隱城市。苟有吾之至樂。自有眞得之妙。可樂於人不及知之間。而至於篤信無疑之地。則彼山水亦一外物耳。豈可牽懷於其中也哉。自此可不勖哉。仍記自警焉。四月初九日戊子。聞主倅以飢民賑給事。去于將多勿坪。今年飢饉。振古所無。號饑官門者日數百人。塡咽於官道。太守定十日一開倉門賑救之。設幕于官庭。作粥而食飢民。飢民之就食者日三百餘人。預作太醬七十餘甕。貿海菜百餘石。作羹食之。飢民大悅。又於兩大路上。令僧徒設幕作粥。他鄕流民之入境者。賑救活之。四方聞聲雲集者無數矣。又036_439c慮農民不能遠來官門。親駄米粟而往賑之。邑民誦恩不已。太守之愛民如此。太守卽李侯晸也。十一日庚寅。雲升于天。細雨欲下。微風不動。草木枝葉皆踈直上向于天。有若冀蒙雨露之意。細看其氣象。令人起感發之意。植物之無知者而亦有感應於二氣相交之際。况此有運動知覺而受性命於天者哉。是日坐迎春齋。令兒僕取小陽泉水。和松葉一器而下之。精神頗覺明爽矣。余素多病。探考方書。節食服餌。以養精神。得服松葉法于本草。服之有年。今日覺有興趣。仍記于此。是日空齋孤坐。閴無來人。春鳥聲嬌。趁036_439d簷尋巢。飛繞於楹棟之間。而前山邱隴。菜童牧竪。短歌輕笑。往來相戲。耕夫野老。牽牛荷鋤。相尋於野田草林之際。此間儘有眞意。靜觀不覺起感。仍起逍遙于泉畔。趁興而歸。則空堂寥寂。春日方午。數秩書史。自能捲舒於微風之過也。十四日。是日南郊精舍乘茅于屋。手治庭梅之雜茂者。僮子掃庭。小婢掃室。庭宇無塵。茅簷齊整。靜對書冊。益覺有味。但歲饑民困。滿目愁㤪。田園之樂。恐亦難得。時未免出位之憂。可嘆可嘆。是夜吟成一絶。有亂叫羣蛙說箇心之句。盖前郊稻田新耕。羣蛙亂鳴。潛思彼虫無知一物耳。其036_440a鳴聲或作或止。若有節次。况其自得於溝瀆之間。其鳴也必有其樂。噪噪之聲。亦若相道其心情者。天機自動。至發於聲者。亦一箇心也。這間眞箇意思。暗有相感於知覺本源之地。吾亦不覺自發於吟哦之間者。亦可見物我之無間矣。是所謂藹然天理。隨事發見者也。夜分就枕。又成一絶。有調氣怡神整枕衾之句。十五日甲午。夜天月爽朗。獨倚小窓而坐。吟成一絶。有獨倚松窓夜已深之句。十六日乙未。淨掃庭宇。塵事不有相撓者。默坐一室。靜對案上聖賢。若此之際。豈無眞境意思哉。但懼守之未一。物接之後。易爲牽去耳。無時無處而存此036_440b間氣象。則於道庶有可入之徑蹊矣。勉夫。二十三日壬寅。喜雨新晴。萬物皆有歡顔。但飢歲食絶。麥尙未登。閭里之間。滿目愁嘆。余家素貧。况値凶歉。饘粥難繼。則家屬或有慍見者。余本心慮寬緩。居產之間。不爲掛意。不以豐約爲欣慼。然到此思之。士夫之有家屬。猶國家之有臣民。爲君父而使臣民未免飢寒。責有所歸。爲家長而使家屬至於飢怨。獨無惻隱哉。古人簞瓢屢空而能得其樂者。能令家屬喩於義。寧飢死而無非義之慕故也。今我之仁。旣不能化僮僕至於義。而飢寒困厄。迫乎其身。則非但於我心有不忍之惻。僮僕之仍無恒心。爲036_440c不善於隱暗之際。安可保也。爲今之計。在平歲董令僮僕勤耕力穡。令家間節用尙儉。常蓄不虞之備。免餓餒於凶歲可也。然在吾之大本未立。先事於營產。計校豐約之念。或作仍賓作主之勢。則浸浸然流入於邪吝犯義之歸。大可懼也。故記于此。以戒於嚴立本源之地。然後推其餘以及於事務而無過不及之患云。是日雨後風氣淸和。牛眠橫坂而麥浪飜風矣。鷺下平郊而稻田水漲矣。足以敍田間之興致矣。余近日每坐新齋。見原野間有小鳥。其鳴甚輕巧。飛自草蓬間。漸漸飛舞。翻翻直向于天。百般弄舌。便捷輕姣。其聲初暫低緩。高極于天036_440d則節節細數。細數之極則又旋旋飛下而其聲差緩。至于地而止。其名俗稱鍾至理鳥。吾聞其聲。有高下長短踈數之節。其飛有周旋進退上下之漸。看來亦有理趣。仍思凡生天地之間者。莫非理氣之發見而各有知覺。屬氣 知覺之本。屬理 乃天命之性也。吾人與物。本無殊也。但有偏正之分而已。雖然聲音出於心而運動由於氣。旣有知覺。故有運動聲音。則彼物之有聲而鳴呼者。必有意味而道其情者。而但人不解聽耳。夫人哀則哭樂則歌。相逢而語其情。讀書而長其聲。我自各有其意。而彼鳥獸亦不能解聽。亦如人之不能解036_441a聽禽語也。而其間至理所寓則彼與我無間也。詩曰鳶飛戾天。魚躍于淵。子思引是語發明君子之道。亦有見乎此也。是以古人。聞鳳鳴上下而作十二律。則鳳與此小鳥。其爲鳥則一也。其同得理氣而生。亦一也何間焉。古之至人。見一物必竆其理。羲之仍馬爲圖。禹之見龜畫疇。至於程子之見兎起數此也。故余每見一微物聞一禽語。未嘗不詳致意焉。但恨見未透。故理難竆耳。今仍小鳥而謾記之。又曰人知吾心之通乎天地。周乎萬物。無內外無彼此無物我。同是一體之理。則自然心不淺狹而器量亦宏大矣。人徒036_441b知有我不知有物。一身區殼之外。氣全不通。故心不廣而量小矣。午後有鄕中知舊者過門外。不入相見而去。是人曾與我相從。而與我亦有姻婭之分矣。昔或相從而今過門不見何耶。細思其由。近有鄕之一二少年。亦余之外屬族眷也。往來學文字頗頻。稍得解蒙。頃者鄕人有來言。某學書於子。人多不好。子何不停寢而止謗耶。余曰經傳聖賢之公言。我幸先覺其糟粕。人之欲學。亦天下之公心也。余安可絶人之誠心學古哉。人亦豈可謗人之公心爲學耶。其人嘿嘿而去。其後隣鄕某人。昌言于衆曰。金某與某人爲036_441c黨論云。豈儒者之事耶。聞者來傳于余。盖鄕人之造訛傳播故也。我國自東西黨分之後。自朝廷至鄕曲。指點名目。黨同伐異。光海朝以是亡國。其論尙今不息。右所謂少年來學者。卽鄕人之有名目者子弟。故他邊人忌而造謗及於余。而今之過門不相訪者。必含忌而然耳。可笑可笑。夫人心天下之公器也。稟天理之大中。爲天下之公器。如衡之平如水之明。苟有偏係於一隅則喪失天所賦之正理。入於自私自賊之邪境矣。人而尙忍此哉。故余嘗立論曰。文如韓范。學如程朱。若或拘係於今之所謂偏黨。其人不足036_441d觀。又常言曰若爲今之黨論。則一朝而至萬鍾之富五鼎之貴。我不爲也。若秉心中正。不偏不倚。則枯死於蓬蓽之間。我自甘心矣。是以凡平日與人往來及立論措語間。平生未嘗片言自偏於黨論。故東西之人皆致疑惑。或曰某爲東論。以其雖西人。理曲則非之故也。或曰某爲西論。以其雖東人。非義則斥之故也。或曰中無所主。以其兩非則兩非之。兩是則兩是之故也。今者某人來學而某人忌之。至於蔽面過門。人之偏嗇。至於此耶。甚可笑也。以余至公至正之心。居鄕而鄕人如此。立朝而朝人亦如此。推可知矣。世036_442a道如此。其可行乎。余有數畝野田。力耕而歲豐則妻子不至於飢寒矣。新構頗淨。前有泉而後有柴矣。又有數帙經書。足以治吾心而復吾性矣。從此閉門淨掃。養氣頤神。安父母之遺體。服往哲之至訓。順天命樂閑靜。足以安過一生。沒吾寧也。豈不樂哉。但自古國之將亡。必有朋黨相傾。不公不正而國隨以亡。言之至此。誠可寒心。老婆心切。奈何奈何。近看退溪先生文集。吾東義理之文。無出於此。今看集中。有曰某與南時甫論花潭之學之病處。許太輝聞之。有一書相詰。與黃仲擧論學。偶及松堂白鹿洞規解。未免指036_442b摘其差失。其門人見之。多不平云云。今見此言。忽憶十年前牛山安公著牛山答問書。余偶發未解處若千條。奉質牛山門下。往來人見誚不貲。至今不已。盖天下義理之是非。乃公共底事也。後覺之於先覺。就質證正。或論難是非。亦天下之公道也。今之人不然。各護其所好而一槩崇奉。不許人論質疑惑。甚可笑也。今仍此書偶見此論漫記之。盖牛山林下之士。氣象甚好。但本源之地。或欠於涵養沈潛。專以記聞敍述爲學。故論議多激揚發露而少溫厚得中底氣意矣。余嘗有解人心虛靈之說曰理本虛。兼乎氣然後036_442c有靈。氣本不靈。資於理而有靈。今見朱子理與氣合。便能知覺之說。果與瞽說偶合。仍此用工。或可小進於見道耶。朱子又曰譬如燭火。因得脂膏。便有許多光焰。又曰所覺者心之理也。能覺者氣之靈也。余乃解火膏之說曰。膏不能自光焰。得火然後光焰。火不能自發光焰。得膏而光焰發。此理氣相合。生知覺之說也。夕奴輩覓牛不得而來曰。牛之見盜丁寧矣。余曰歲饑民困。赤子將死。雖良民變而爲盜。將以免死也。奈何奈何。况我雖失。人則得之。何慮焉。毋更求也。二十七日丙午少陽。朝起而坐。霽天氣佳。草木滋潤。036_442d有一野鶴獨立泉源。俄然而飛。仍興到成一絶。有玄裳素服一仙童之句。又成一絶。甘雨新晴麥已秋。滿園芳草氣淸幽。靜看萬物生生意。還向吾心一理求。近來心氣頗穩當。本源之妙。庶可仍此得見。恒日孜孜。或於發見之際。倐覺有好意思。而俄然之頃。自不覺其爲他慮引去。盖工夫未熟故也。今朝仍觀物而有省悟。至發於吟詠不已。記之以戒雪消草生之患云。午洪兄鍾華氏來話于新齋。爲陳鄕黨和厚之義曰。凡鄕黨隣里之道。以忠厚敦睦爲重。有過申申相戒。不可遽加揮斥。有善循循相勉。不可輒生猜疑。老036_443a者敬之。賢者尊之。幼者導之。弱者植之。強者戒之。務相並至於寡過之地。則鄕里之風。漸可變而爲厚矣。鄕中以此事爲相勉者。在於兄輩數人。其勖之。盖近者鄕風似有不好之漸。故言及之。二十八日丁未大陽。霽後氣象。此日尤佳。步出前蹊。點檢新栽楊柳。前月久旱。故枯死者三分之二矣。生存者新葉已抽可愛。仍思天之生物。其品萬殊。而其生理亦有萬不同。然花而結實。實而又生。其無實者。必移其根荄而種植然後乃生者。草木莫不皆然。獨楊柳刈取其枝。扱于土而得生何哉。盖此木得天地陽生之氣最先且036_443b富。故先春草木未榮而此木先着葉矣。得陽先故初秋之日。易感於陰氣。其葉先零。古人制字。从木从昜。古陽字 意以此歟。其扱地易生者。稟得陽生之氣富盛。故陽氣上升之時。易得其氣而爲生也明矣。譬若稟氣淸明之人。先覺於天理之本源。易於爲善者也。細思其理。有感於心。記于此。儻此樹綠葉成陰。嫰茂條暢之時。主人亦有長進志意。上達本源之地而發揚於云爲之際。與此樹而同敷也歟。戒之哉。仍成一絶。有數株楊柳種門前之句。又成一句。有野居新卜傍淸漪之句。李仁老言渠高祖生員李應霖。卽我太036_443c祖朝駙馬都尉李䔲之孫也。葬于楓山楸松谷。今二月術士李啓玄來言。此墓地甚凶。子孫當有凶疾。盖其子孫方有其事。仁老聞極大駭。卽卜日遷葬其生員公墓道。有水氣若潮水新退之狀。白骨爲水浮沉。積置一邊。浮漚濕淤。宛然如潮退水涯之形。而其內墓則有一木根自地板下潛入。大小根荄。締結於骸骨者無數。纏繞不可解開云。聞之不覺悚然。盖子孫之於祖先。若枝葉之於根本。程子彼安此安之說。甚爲近理。今李姓之人。以瘡疾致死者一家皆然。只餘仁老輩數人而已。雖不知其墓山之應。術人之言。適036_443d然符驗。此亦不可不知底事也。記之以爲塋窆不密者之戒云。又曰壙中之用石灰。將防木根螻蟻虫蛇之患也。今人惑於地家吉氣不升之語。地板底例不用石灰。余嘗極言其非。地板之下。若厚築三物以凝堅。木根何從而入哉。送終誠孝者不可不知云。午後披閱圃隱集。歷覽其往來中國時詩什。數千里道途。山川物色。盡入吟哦牙頰之間。使後人追詠章句。怳若親見神州之形勝。其馳車往還之狀。得句呻吟之象想形神。思若在今日之目中。而不覺已經三百年事也。欽愴之餘。仍念男兒生世。事業至重。上可以達天036_444a地無竆之理。下可以跡萬里山川之勝。前可以通千古已往之事。後可以立萬代不朽之名。若先生者。俛仰今古。其人有幾。哀此孤露之生。生於海隅偏陋之鄕。守一畝荒田於竆原寂寞之中。知不周一身之事。見不出千里之外。殘編破冊。尙不能通其理。朝飮夜伏於蓬蒿之下。未免欣慽於一毫之得失。喜怒於愚夫之毁譽。百年之過。倐若一瞬之後。草木塵土。同歸於泯滅而已。則以此方之於先生事業。不翅壤虫之於鵬翼也。嗚呼噫嘻。可傷也已。雖然君子事業。不出於方寸間而已。方寸一物。在我非嗇。豈獨豐於古人036_444b哉。自此至于盖棺日。亦不甚促。孶孶日夕。死而後已。雖不能彷彿於古人之萬一。庶幾不負爲人之名而免於草木禽獸之同歸矣。今見先生文集。倐然有驚惕之心。不覺隨筆而記。他日進業怠惰之時。或可目寓於此手記。冀有翻然覺悟。惕然矜式之念而警其頹懦之志云。五月初四日辛亥少陰。與徐君鳳翎語。語間每以節義爲言。以學問爲不足貴。以禮經爲虛文。言言若是。余曰學問禮經。果是虛文而不足貴。則三綱五常。皆學問中事。排去學問而求節義。則是不耕五糓而求腹飽也而可乎。徐君仍歷陳吾東古今036_444c人事實累數百言。其語輕浪慨切。信奇士也。但學不求之本源之地。每每牽掣於外面。論古今人物而歸宿於節義。故以學問守禮。爲曲謹小廉。經涉世務。爲節義忠信。其學盖出於隱峯安丈。安丈嘗學於牛溪。何故其學至於如此太支離也。雖然亦足以勵末世頹惰之習也。豈可以一槩非之。取其長處而友之可也。初五日癸酉大陽。日氣淸和可愛。放家畜驪馬于前坂。綠草沒脛。終日飽吃。旣無鉗勒轡銜之牽縶。任意齕草。下飮泉瀆之水。臥起行齕自在。其意看甚閑放。家又有赤馬。性多慾不馴。故縶繫于槽櫪之間。一036_444d飮一齕。動須于人。看甚苦楚。仍思雖在物畜。因其慾之多寡而苦樂懸殊如此。人而不可案伏得一慾字耶。不能克慾而受制於人。拘縶其手足而不能自爲者。何異於吾家赤馬耶。看來忽有警惕而感於事者記之。初六日甲戌大陰。李文碩來見敍別。盖以城主秩滿當歸。以明日內行發程。故告別于余矣。此人相從數年。志意雅尙。今成遠別。不任悵然。問余曰今歸當讀何書以自立歟。余曰文章辭藻末流之學。吾不敢相期於君。惟願於四子中探其本源之地。則文章在玆。義理在玆。何用馳心於餘外哉。見君氣質淸弱。036_445a不宜久居於城市囂閙之中。聞君有東湖別墅。境極淸勝。可抱遺經於此。養精頤神。涵養本源。是吾之望也。若余者索居荒僻。又別吾君。能不悵然哉。言竟雨作。冐雨別去。多有惜別之思。李文碩言李司諫壽仁辭職疏末款。言本道監司金始振阿謏苟容。賑政無實。不恤竆民。督捧貢米云云。監司方上辭職疏。仍自分疏。李司諫此擧如何。余曰此老高臥不出已十年餘矣。讀古人書。所得亦多。必見合義而後發言於君父矣。但進陳德義之言。長益君德。則雖山林未進之人。或可爲矣。至於論人長短是非則未知如何也。036_445b初七日乙卯少陰。送書于李文碩問行。且寄三章別句。其一有南郊寂寞一茅廬之句。其二有東湖形勝擅東隅之句。其三有知覺無差在正心之句。文碩昨日告別之時。請敎佩服之言。故末篇及之矣。夕忽得句有曰雨霽碧天闊。白雲生遠山。孤村日欲暮。木末鳥知還。仍自解曰雨霽天闊則知道體之廣大。雲生遠山則知生意之無竆。孤村日暮則知此生之易老。木末鳥還則覺此心之歸宿。此詩盖因寓目之物。自不覺心會句成。而深思之又有味如此。此詩之發於性情。而性情之本於天理者。可謂妙乎妙矣。初九日036_445c少陰。午讀退陶山詩序。不覺爽然起慕之至。仍成一絶。有白石淸溪光霽問之句。十三日辛酉少陽。曉早起開窓。霽天蒼翠。風露滿空。白雲在山。棲鳥不起。人聲寂然。萬境具敻。惟有晨鷄喔然相唱而已。超然有俯視人寰。獨立物表之意。口吟成律。有元氣淋漓露濕天之句。又有露氣凄凄天地空之句。朝飮茶。有栢葉煎茶氣作霞之句。又服松葉。有凜凜貞心雪裏顔之句。十四日壬戌大陽。安生一大有天圓字韻。用其韻遂一絶。有天君高拱立丹田之句。十五日癸亥少陽。曉欲覺之時。得一絶有戶窓深鎖夜茫茫之句。午036_445d令安一大染皁冠布。手自整疊而服之。名其冠曰兩儀冠。仍作冠說曰。用布一幅。其長足繞頭而剩一寸八分。一寸八分爲㡇子。㡇子之制。提起四分半摺向右。四分半摺向左。用線掇住而空其中則成㡇恰九分矣。當未成㡇之初。布幅兩邊及兩端疊向裏。然後就幅一邊而作㡇子。當額兩眉上。以其餘繞頭左右。至後腦縫而合其端。用線掇之。而連上邊爲縫。前面㡇子。其長及冠之中。橫分兩脉。而各至上兩隅。未及兩隅而又分爲兩脉。兩脉之端。作兩橫隅而左右凡四角也。合而論之。㡇子九分。象太極也。一㡇之端分036_446a爲兩脉。象太極生兩儀也。兩脉分爲四脉。象兩儀生四象也。前後四葉。象四時也。其高一尺二寸。象十二月也。余惟太極之體立而後。二儀四象分焉。二儀四象之道行然後。四時十二月之功成。萬物各遂其性而天地之道成矣。故合而名之曰兩儀冠。百年之間。作我元服而冠其首矣。庶可顧名思義。反之於吾心之太極。而有所省悟也云。

兩儀冠前後分釋之圖

 
 濯溪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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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槐堂李公行狀 壬戌 b_094_53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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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天啓字亨伯號槐堂。系出洪州之新平縣。高麗平章事李德明之後也。國初有軍器少監諱士彦。始094_535d居報恩。於公爲五代祖也。高祖諱括生員敎導。曾祖諱晩生進士司甕正。娶大祖駙馬啓川尉李䔲之女。祖諱文忠副司直。考諱鐵拳將仕郞。妣淸州韓氏。贈領議政曾女。以正德丁卯正月十七日。生公于梨坪里第。生有異質。早喪所怙。從舅氏韓相國效元學。擧止異凡兒。相國甚愛之。姑夫金相國克誠亦奇之曰。此兒他日。必爲巨人。旣長篤學。動遵繩尺。嘉靖丁酉。登式年丙科。選承文院。薦入藝文館爲檢閱。轉待敎,奉敎。陞司書。歷兵戶曹正郞。淸愼奉職。羣譽藹菀。遷吏曹正郞。尋特拜檢詳。陞舍人。以御史出按嶺南。094_536a命下之日。朝野動色。守令貪汚者。望風解印。家舍踰制者。亦皆毁撤。風聲所及。郡邑肅然。入朝復舍人。甲辰出拜嶺南都事。時李晦齋文元公爲其道觀察使。一見便托爲道義交。秋公以持平召。當是時。羣小滿朝。公議不行。李芑,尹元衡,鄭順朋等。附麗幽陰。朋黨締結。朝夕且相芑以顓國政。先是芑以贓吏女婿。動阻於銓郞中書之薦。朝廷士流或以芑有才諝。可破格許通。晦齋尤主可通之論。及芑得志。漸與士流角立。晦齋追悔不已。至是公被召將行。晦齋慨然語曰。前日不知芑之奸邪。頗主許通之論。近者識破094_536b其心術必將禍士林者。公其勉之。又贈詩送別云九重思讜論。千里召公歸。消長須存戒。安危更審幾。匡時須正直。臨事莫依違。衮鉞留靑史。寧論世是非。公答曰平生所學。在此一行。陽城裂麻。乃吾職也。及赴命。果以三䟽極論芑奸邪狀。時當士氣摧折。君子道消。而正論一出。權姦退縮。芑竟不得相。於是直聲振中外。移拜掌令。言事益鯁切。遂大忤於時。乙巳十月。芑陰嗾大司憲崔輔漢。論李湛罪。公以掌令。堅執不從。芑挾前憾。翌日啓曰。李天啓,李滉,權勿,李湛,丁熿罪與金䃴同。上批曰。李天啓以下五人。一幷094_536c削職。於是五賢皆同日削職。丁未九月。鄭彦愨壁書之變出。芑會賓廳。錄罪人名。點其當死者。至圭菴宋公名大點之。次及公名。遂與仁鏡,順朋,元衡,百齡等合啓論竄李晦齋,盧蘓齋以下二十九人于外。一時士流。網打且盡。無一人在朝者。公以遠方付處謫寧海。嘗於立春日有詩曰風將春信報園林。生物森森各淺深。葵藿地中雖未出。孤根猶有向陽心。雖於尋常吟咏之間。其愛君憂國之誠。亦可見矣。庚戌四月丁母憂。不得奔喪。絶食號擗。羸毁成疾。竟以六月十三日。卒于謫中。享䄵四十四。十一月返葬于報恩縣094_536d北銅峴酉坐之原。從先兆也。後十七年丁卯。因領相李公浚慶疏。始得雪寃復爵。配康津金氏。諱潤璿女。府使謹孫。柔嘉淑明。配君子無違禮。後公卒。祔公墓左。擧三男三女。長宜正遊成大谷門。進士副直長。贈戶曹參議。仲宜直。季宜中。女適金大好,李命百,尹混。長房子厚培贈戶曹參議。厚封,厚栽。仲房無子。季房亦無子。子厚栽。厚培子廷芳,廷馨。厚封子廷瑚,廷珝,廷玧,廷琬。厚栽子廷若,廷翊,廷彧,廷馥,廷攝,廷碩。以下多不盡錄。公風儀爽朗。器局峻整。炯然無一點塵氣。長益涵揉。律己甚嚴。莊重寡默。不妄言笑。好094_537a善嫉惡。出於天性。剛方正直。風節自勵。論其氣像。眞所謂壁立千仞。有不可犯者。義利公私之辨。剖析甚精。君子小人之分。界障極密。一劒兩端。斬釘截鐵。而至於與人爲善之地。又是一團和氣。溫然如春陽。淸而不激。和而不流。當時端人正士皆樂與之交。而媢嫉者尤益忌之。其居家也。誠於奉先。睦於宗族。敎子弟有法度。御僮僕莊而恩。閨門肅穆。外內斬斬。鄕鄰慕其家法。有從而化之者。士大夫之行過南中者。無不禮於其門。其立朝也。忠於事上。潔於持身。以陳善閉邪爲己任。守正奉公。不撓不屈。遇事敢言。不避鈇094_537b鉞。彤庭一言。凜若秋霜。雖爲羣小所排擠。不得展布其所蘊。而其所樹立。光明正大。磊磊落落。有足以寒奸諛之骨。張正士之膽。在當時皆謂之朝陽鳴鳳。而至于今其淸風直節。照映靑史。有可以瞻仰於萬代者。豈不偉哉。噫。公有遺集若干卷。禍變之後。嘗託鄭寒岡文穆公。校讐撰序。寒岡寄公子直長公書曰。先生遺稿序文。尙未起草。何嘗少忘。又書曰。先生文集。承將圖刊於貴縣。鄙人亦當盡心焉。未幾寒岡家失火。遺稿盡入於煨燼之中。公之所抱負。不徒不見用於當世。並與其文字而亡失。不得傳示後人。可勝惜094_537c哉。重峯趙文烈公嘗於癸未䟽。有曰乙巳遺直臣李天啓。亦處遠地。飮恨而死。朝廷士大夫至今嗟惜。又於丙戌封事。有曰宋麟壽絶芑而被害。李天啓論芑而斥死。臣命孤危。自此益甚。當時先輩之所以推詡而悼惜。於此槩可見矣。嗟乎。今距乙巳之歲。二百五十有餘年矣。朝廷之處分已行。士林之公議已成。當日同禍網之諸賢。擧蒙褒賞之典。多有俎豆之奉。而獨此槐堂先生之墓。寄在荒山蕪草之中。樵牧吟嘯。狐兔騰跳。世不復知其爲乙巳名賢李舍人衣履之藏。則公之身後事。又何其悲凉也。此蓋子孫衰094_537d替。不能繼述先業。又困貧窶。不能走謁於當世秉筆之賢。因循寂寥以迄于玆耳。公家故篋。有行狀一篇。而作者姓名不傳。且多踈漏。公之七世孫雲漢八世孫彦榮等。方營墓道顯刻。以爲不朽之圖。而欲請墓文。不可無行狀。故詢謀及於相進。相進誠愚賤病癃。何敢當文字之役。屢辭不獲。特以高山景行之慕積於中。有不敢終辭者。姑依舊狀。參以乙巳錄野史諸書。叙次成文。以奉質于立言君子云爾

 
문종 즉위년 경오(1450,경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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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16일 (무오)
정갑손·이견기·정인지·이선·성득식·신진보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정갑손(鄭甲孫)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견기(李堅基)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정인지(鄭麟趾)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선(李渲)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성득식(成得識)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신진보(辛晉保)를 경상도 우도 처치사(慶尙道右道處置使)로, 이승평(李昇平)을 평안도 좌도 도절제사(平安道左道都節制使)로, 마승(馬勝)을 평안도 우도 도절제사(平安道右道都節制使)로, 김수연(金壽延)을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使)로 삼았다.
【원전】 6 집 25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단종 3년 을해(1455,경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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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3일 (기축)
이선·성승·김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선(李渲)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성승(成勝)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김개(金漑)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조어(趙峿)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흥상(李興商)을 계림군(雞林君)으로, 조상치(曹尙治)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이종목(李宗睦)을 충청도 병마 절제사(忠淸道兵馬節制使)로 삼았다.
【원전】 7 집 1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세조 1년 을해(1455,경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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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27일 (무진)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②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조(金銚)·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인손(李仁孫)·지돈녕(知敦寧) 강석덕(姜碩德)·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연(河演)·예조 판서 이승손(李承孫)·동지돈녕(同知敦寧) 노물재(盧物載)·대사헌(大司憲) 노숙동(盧叔仝)·판중추원부사(判中樞院副使) 김순(金淳)·동지중추(同知中樞) 황치신(黃致身)·부윤(府尹) 안숭효(安崇孝)·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도절제사(都節制使) 김윤수(金允壽)·부윤 마승(馬勝)·도절제사 이종목(李宗睦)·행 첨지중추(行僉知中樞) 김개(金漑)·도절제사 하한(河漢)·행 첨지돈녕(行僉知敦寧) 김한(金澣)·판중추(判中樞) 조혜(趙惠)·판한성(判漢城) 기건(寄虔)·판한성 이견기(李堅基)·좌참찬(左參贊) 이숙치(李叔畤), 행 상호군(行上護軍) 이령(李齡)·연경(延慶), 동지돈녕(同知敦寧) 심회(沈澮)·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 심결(沈決)·증 사헌부 감찰(贈司憲府監察) 심준(沈濬),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연지(金連枝)·조서안(趙瑞安), 지중추(知中樞) 김청(金聽)·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황(金滉)·도절제사(都節制使) 한서룡(韓瑞龍)·행 상호군(行上護軍) 박거겸(朴居謙)·부윤(府尹) 이호성(李好誠)·중추원 부사 이사명(李思明)·관찰사(觀察使) 김광수(金光睟)·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 유자해(柳子偕)·동지돈녕(同知敦寧) 박거소(朴去疎)·동지중추(同知中樞) 설순(偰循)·제학(提學) 유효통(兪孝通)·참판(參判) 유의손(柳義孫)·처치사(處置使) 이사평(李士平)·도관찰사(都觀察使) 정척(鄭陟)·부윤(府尹) 변효문(卞孝文)·판목사(判牧使) 이수의(李守義)·파원 위(坡原尉) 윤평(尹坪)·첨지중추(僉知中樞) 이휴(李携)·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송복원(宋復元)·첨지중추 맹효증(孟孝曾)·부윤 이명겸(李鳴謙)·처치사(處置使) 유강(柳江)·참판(參判) 신석조(辛碩祖)·참의(參議) 어효첨(魚孝瞻)·지돈녕(知敦寧) 이선(李渲), 부제학(副提學) 김예몽(金禮蒙)·송처관(宋處寬), 중추원 사(中樞院使) 이승평(李昇平)·절제사(節制使) 이종효(李宗孝)·판도호부사(判都護府事) 변효경(卞孝敬)·절제사 유익명(兪益明)·관찰사(觀察使) 유규(柳規)·참판 이보정(李補丁)·관찰사 이석형(李石亨)·행 목사(行牧使) 김억지(金億之)·행 상호군(行上護軍) 박소(朴昭)·부제학(副提學) 김신민(金新民)·중추원 사 이변(李邊)·도절제사 이화(李樺)·절제사 강순(康純)·상호군 이효례(李孝禮)·첨지중추 마흥귀(馬興貴)·직제학 양성지(梁誠之)·첨지중추 낭이승거(浪伊升巨)·상호군 선석년(宣錫年)·사헌 집의(司憲執義) 이예(李芮)·겸 군기 감정(兼軍器監正) 심중은(沈仲恩)·직제학 강희안(姜希顔)·부정(副正) 주상례(朱尙禮)·우사간(右司諫) 이영견(李永肩)·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김득례(金得禮)·장령(掌令) 신영손(申永孫)·경력(經歷) 심치(沈寘)·주부(注簿) 강자의(姜子儀)·판사(判事) 매우(梅佑)·상호군(上護軍) 조지당(趙之唐)·직집현전(直集賢殿) 이승소(李承召)·판관(判官) 유균(柳均)·사직(司直) 이임미(李林美)·부사직(副司直) 민운(閔惲)·직제학(直提學) 김지경(金之慶)·행 사직(行司直) 김길호(金吉浩)·호군(護軍) 김유선(金有銑)·군사(郡事) 윤기견(尹起畎)·양운석(梁雲石), 행 내시부사(行內侍府事) 이중근(李重斤)·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김인민(金仁民)·부정(副正) 권효량(權孝良)·호군(護軍) 김문달(金文達)·행 사정(行司正) 서수(徐綬)·정랑(正郞) 강희맹(姜希孟)·검상(檢詳) 김위(金瑋)·사예(司藝) 김질(金礩)·정랑 홍연(洪演)·응교(應敎) 조근(趙瑾)·서령(署令) 김경손(金慶孫)·정랑 최사로(崔士老)·소윤(少尹) 장계증(張繼曾)·군사(郡事) 김윤복(金閏福)·소윤 강노(姜老)·판내시(判內侍) 홍득교(洪得敎)·행 동첨내시(行同僉內侍) 임동(林童)·행 동첨내시 이득부(李得富)·판내시 안노(安璐)·행 지내시(行知內侍) 윤득부(尹得富)·정랑(正郞) 김서진(金瑞陳)·군사(郡事) 전가생(田稼生)·주부(注簿) 홍일동(洪逸童)·응교(應敎) 서거정(徐居正)·군사 이유약(李有若)·도관찰사(都觀察使) 민건(閔蹇), 정랑 이문형(李文炯)·성임(成任)·강미수(姜眉壽), 좌랑(佐郞) 이계손(李繼孫)·행 부사직(行副司直) 오연(吳衍)·좌랑 배효숭(裵孝崇), 도사(都事) 강효문(姜孝文)·직강(直講) 이익(李翊)·좌랑 이윤인(李尹仁)·부정(副正) 최효생(崔孝生)·판사(判事) 선형(宣炯)·사직(司直) 이득림(李得霖)·호군(護軍) 지유원(池有源), 사직 맹득미(孟得美)·석자의(石子議), 좌랑(佐郞) 김덕원(金德源)·직강(直講) 이계전(李季專)·좌랑 안초(安迢)·교리(校理) 정문형(鄭文炯)·좌랑 오백창(吳伯昌)·사직(司直) 구문로(具文老)·행 사정(行司正) 허형손(許亨孫)·참군(參軍)·이숙기(李淑琦)·주부(注簿) 노경신(盧敬信)·행 사직(行司直) 황석생(黃石生)·행 부사정(行副司正) 유종화(柳從華)·행 사직 김일용(金日容)·사직 김효조(金孝祖)·호군(護軍) 민형손(閔亨孫)·행 사정(行司正) 양처공(梁處恭)·판관(判官) 홍귀해(洪貴海)·사정(史正) 홍백연(洪伯涓)·부사정(副司正) 김기(金耆)·직장(直長) 이인규(李仁畦),
부사직(副司直) 유산보(兪山寶)·조주(曹柱)·이종경(李宗慶)·이순경(李順慶), 행 사용(行司勇) 유포(柳晡), 현감(縣監) 이계중(李繼重)·이계중(李係重), 행 사직(行司直) 김경손(金敬孫)·상호군(上護軍) 이중윤(李中允)·직장(直長) 송숙기(宋叔琪)·호군 안운수(安雲壽)·주부(注簿) 안의(安義)·봉훈랑(奉訓郞) 김득문(金得門)·부지사(副知事) 민희(閔僖)·선무랑(宣務郞) 이옥림(李玉林)·행 판관(行判官) 박지(朴枝), 사직(司直) 홍효손(洪孝孫)·이중말(李仲末), 군사(郡事) 김증(金曾)·박종대(朴宗大), 호군 박훤(朴萱)·행 사정(行司正) 이윤약(李允若)·판사(判事) 조유신(趙由信), 군사(郡事) 이전수(李全粹)·조원희(趙元禧), 사인(舍人) 이효장(李孝長)·부사정(副史正) 최계근(崔繼根), 사정 이미성(李美成)·하숙전(河叔傳), 대호군(大護軍) 이거을다개(李巨乙多介)·행 호군(行護君) 김가신(金可伸), 행 사직(行司直) 장평(張平)·마우기(馬右其), 호군 낭삼파(浪三波)·사직 배우문(裵珝文)·대교(待敎) 이문환(李文煥)·사직 남치효(南致孝)·주부(注簿) 김석제(金石梯), 사알(司謁) 조이생(趙異生)·최유지(崔有池), 부사정(副司正) 이득행(李得行)·부사정 원처중(元處中)·사용(司勇) 김의지(金義智), 부사정 전습(田濕)·김순거(金舜擧)·김상미(金尙美), 직장(直長) 박서창(朴徐昌)·호군 조경지(趙敬智)·부사직(副史直) 주비(周備)·부사정 이숭무(李崇茂)·사약(司鑰) 진수(陳守)·사용 강자흥(姜子興)·판관 주호(朱瑚)·행 호군(行護君) 박수미(朴壽彌), 겸교리(兼校理) 전동생(田秱生)·조변안(曹變安), 교리(校理) 홍응(洪應)·군사(郡事) 나치정(羅致貞)·부사직(副司直) 정충원(鄭忠源)·겸교리(兼校理) 이상(李相), 현감(縣監) 임숙(任淑)·김호인(金好仁), 좌랑(佐郞) 정종주(鄭宗周)·부교리(副校理) 정효항(鄭孝恒)·겸박사(兼博士) 임효검(林孝儉)·정자(正字) 조지(趙祉)·권지 정자(權知正字) 구치동(丘致峒)·지사(知事) 최사유(崔士柔)·부교리 조안정(趙安貞)·박사(博士) 허적(許迪)·권지 정자(權知正字) 이극기(李克基)·저작(著作) 윤효손(尹孝孫), 권지 정자 박숙진(朴叔蓁)·양순석(梁順石)·김자정(金自貞), 검열(檢閱) 윤민(尹慜), 권지 정자 윤기반(尹起磻)·정자(正字) 정이아(鄭以雅)·사직(司直) 김유지(金有智)·장령(掌令) 이함장(李諴長)·판관(判官) 임효선(林効善)·사예(司藝) 박인(朴璘)·행 사정(行司正) 김경장(金慶長)·지형조사(知刑曹事) 최중겸(崔仲謙)·도사(都事) 민순손(閔順孫)·판관 김영유(金永濡)·목사(牧使) 황보공(皇甫恭), 정랑(正郞) 최한경(崔漢卿), 이한겸(李漢謙), 대교(待敎) 유지(柳輊)·소윤(小尹) 민효열(閔孝悅)·부사(府使) 조계팽(趙季砰)·행 지사(行知事) 조상치(曹尙治)·판사 민원(閔瑗)·주부(注簿) 신자교(申子橋)·군사(郡事) 모순(牟恂)·겸 종학 박사(兼宗學博士) 이뇌(李賴)·직집현전(直集賢殿) 남수문(南秀文)·현감(縣監) 김한계(金漢啓)·좌랑(佐郞) 윤배(尹培)·사정(司正) 권경행(權景行)·군사(郡事) 김수온(金守溫)·감정(監正) 박제함(朴悌諴)·현감 김영전(金永湔)·정랑(正郞) 우계번(禹繼藩)·상호군(上護軍) 안위(安位)·겸 종학 박사(兼宗學博士) 원자직(元自直)·직제학(直提學) 안지귀(安知歸)·판사(判事) 이형(李逈)·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말(金末)·중추원 부사 조어(趙峿), 교리(校理) 이파(李坡)·박건(朴楗), 수찬(修撰) 김수령(金壽寧)·행 주부(行注簿) 이우(李堣)·군사(郡事) 김숙검(金叔儉)·행 정자(行正字) 권징(權徵)·저작(著作) 신의경(辛義卿),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이계선(李繼善)·행 부정자(行副正字) 권제(權悌), 좌랑(佐郞) 윤필상(尹弼商)·강복(姜輻), 저작 정충기(鄭忠基)·감찰(監察) 유계번(柳季潘)·정자(正字) 이근(李覲), 권지 정자(權知正字) 최응현(崔應賢)·성수린(成壽嶙)·백사수(白思粹)·신말주(申末舟)·고태익(高台翼), 부정자(副正字) 강기수(姜耆壽)·경력(經歷) 하길지(河吉之)·좌랑(佐郞) 권지(權至), 부수찬(副修撰) 노사신(盧思愼)·성간(成侃)·정효상(鄭孝常), 좌사간(左司諫) 신전(愼詮)·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 조무영(趙武英)·동첨지돈녕(同僉知敦寧) 이서(李墅)·승훈랑(承訓郞) 안훈(安訓)·승의랑(承議郞) 정심(鄭深)·부사직(副司直) 정윤각(鄭允恪)·통선랑(通善郞) 안극사(安克思)·주부(注簿) 송문림(宋文琳)·행 호군(行護軍) 허곤(許稇)·소윤(少尹) 송처검(宋處儉)·판사 이종검(李宗儉)·행 사용(行司勇) 함귀(咸貴)·동부지(同副知) 윤흠(尹欽)·수사직(守司直) 이계정(李季町)·행 사용 윤사례(尹思禮)·감찰(監察) 이증석(李曾碩)·지통례(知通禮) 김수(金脩)·행 부사직(行副司直) 조숙생(趙肅生)·호군(護軍) 김효온(金孝溫)·부사직 원자정(元自貞)·소윤 나인(羅寅)·직강(直講) 조추(趙秋)·소윤 신후갑(愼後甲)·교리(校理) 권절(權節)·주부(注簿) 이지행(李墀行)·능직(陵直) 이철견(李鐵堅)·사직(司直) 고수겸(高守謙)·행 호군(行護軍) 손계조(孫繼祖)·승의랑(承議郞) 신수지(申守祉)·부윤(府尹) 이심(李審)·부사(府使) 이언(李堰)·사예(司藝) 홍경손(洪敬孫)·현감(縣監) 정명응(丁明應)·헌납(獻納) 고태필(高台弼)·군사(郡事) 김호(金湖)·판관(判官) 윤영의(尹永義)·녹사(錄事) 서중성(徐仲誠)·행 부사직 장맹도(張孟道)·사정(司正) 여근도(呂近道)·행 사정(行司正) 김산해(金山海)·사정 김사일(金思一)·주부(注簿) 박근(朴瑾), 학유(學諭) 박계성(朴繼姓)·남승보(南勝寶), 저작 김성원(金性源), 훈도(訓導) 김구영(金九英)·김지(金祗), 감찰(監察) 이질(李垤)·권지 학유(權知學諭) 박치명(朴致明)·권지 정자(權知正字) 김부필(金富弼)·훈도(訓導) 김병문(金炳文)·군사(郡事) 이계수(李桂遂)·좌랑(佐郞) 김용(金勇)·행 호군(行護軍) 이갑충(李甲忠)·만호(萬戶) 이종덕(李宗德), 부사직(副司直) 유숙(柳塾)·유양(柳壤), 부사정(副司正) 이창(李昌), 사직 유인효(兪仁孝)·이손경(李孫景), 행 사정(行司正) 우효선(禹孝先)·부사직 김석산(金石山)·소윤(小尹) 조철산(趙鐵山)·행 사직(行司直) 박지(朴之)·호군(護軍) 이계흥(李季興), 사직(司直) 차석견(車石堅)·전숭제(全崇悌), 부사직 설순조(薛順祖)·사용(司勇) 양사제(楊斯悌)·진용 교위(進勇校尉) 설창신(薛昌新)·행 사정(行司正) 설성(薛成)·사직 홍지(洪漬)·호군 장이생(張二生)·사직 송석순(宋碩孫)·사용 이효명(李孝明)·사직 권마(權摩)·사정(司正) 윤사지(尹思智)·행 사용(行司勇) 유인습(柳仁濕)·군사(郡事) 서조(徐遭)·현감(縣監) 이순백(李淳伯)·부사정(副司正) 손효윤(孫孝胤)·승훈랑(承訓郞) 신선경(愼先庚)·
대호군(大護軍) 윤오(尹塢)·참의(參議) 나홍서(羅洪緖)·행 사직(行司直) 조욱(趙頊)·만호(萬戶) 한자침(韓自琛), 호군(護軍) 이후(李逅)·한상완(韓尙完), 상호군(上護軍) 김효당(金孝當)·훈도(訓導) 민우증(閔友曾)·좌랑(佐郞) 조원지(趙元祉), 훈도 조서정(趙瑞廷)·인순부 승(仁順府丞) 정극인(丁克仁)·권지 학유(權知學諭) 김영벽(金映璧)·훈도 하한근(河漢根)·교수관(敎授官) 최수지(崔水智)·감찰(監察) 정침(鄭忱)·훈도 김효신(金孝新)·판관(判官) 김계원(金繼元)·감찰(監察) 김한(金漢)·호군(護軍) 오익창(吳益昌)·대호군(大護軍) 윤신우(尹莘遇)·행 사용(行司勇) 전계원(全繼元)·훈련 녹사(訓鍊錄事) 이수붕(李壽朋)·행 부사정(行副司正) 하기린(河起麟)·행 사용 신흥례(申興禮)·사직(司直) 이근효(李近孝), 권지 훈련 녹사(權知訓鍊錄事) 최명전(崔命全)·강근손(姜謹孫), 사정(司正) 한계사(韓繼思)·권지 훈련 녹사 김석종(金錫宗)·사정(司正) 강전(姜專)·권지 참군(權知參軍) 권효신(權孝信)·권지 훈련 녹사 노지(盧祉), 사정 박유손(朴有孫)·이지정(李之楨)·인진행(印珍行)·전자완(全自完), 권지 훈련 녹사 황진손(黃振孫)·사직(司直) 이청신(李淸新), 권지 훈련 녹사 김효손(金孝孫)·정승중(鄭承重), 행 녹사(行錄事) 이종연(李宗衍)·사직 남지(南贄)·사용(司勇) 이종생(李從生)·과의 장군(果毅將軍) 연수염(延壽恬)·부사(府使) 조규(趙珪)·현령(縣令) 조유(趙瑜)·행 주부(行注簿) 김명중(金命中)·사직 이찬원(李贊元)·사용 이효손(李孝孫)·만호(萬戶) 이승명(李承命)·군사(郡事) 이염의(李念義)·사정(司正) 노덕기(盧德基)·판통례문(判通禮門) 윤삼산(尹三山)·영평위(鈴平尉) 윤계동(尹季童)·부윤(府尹) 홍심(洪深)·행 상호군(行上護軍) 조연(趙憐)·행 사용(行司勇) 이세량(李世樑)·판관(判官) 이형손(李亨孫)·행 상호군 신자수(申自守)·부교리(副校理) 홍약치(洪若治)·교수관(敎授官) 유자문(柳子文)·도사(都事) 이유의(李由義)·지평(持平) 안중후(安重厚)·감찰(監察) 전효우(全孝宇)·좌랑(佐郞) 박찬조(朴纘祖)·정랑(正郞) 한서봉(韓瑞鳳)·부사직(副司直) 김상진(金尙珍)·주부(注簿) 윤자영(尹子濚)·봉례(奉禮) 이제림(李悌林)·감찰 최한보(崔漢輔), 봉교(奉敎) 권이경(權以經)·김겸광(金謙光), 대교(待敎) 민정(閔貞), 검열(檢閱) 안신손(安信孫)·김이용(金利用), 행 사정(行司正) 박부(朴桴), 사정 정종아(鄭從雅)·판관 이계창(李繼昌)·훈도(訓導) 정지소(鄭至韶), 권지 정자(權知正字) 유천(柳阡)·김윤종(金潤宗), 현감(縣監) 김서(金溆)·권지 정자 신복륜(申卜倫), 권지 학유(權知學諭) 이삼산(李三産)·최청(崔埥), 훈도(訓導) 김해(金咳)·권지 학유 김적복(金積福)·훈도 남기(南䄎), 권지 학유 조호지(曹好智)·박맹지(朴孟智)·훈도 문소조(文紹祖)·감찰(監察) 이원효(李元孝), 권지 학유 조극치(曹克治)·이문요(李文饒), 검열(檢閱) 김영견(金永堅)·소윤(小尹) 한치인(韓致仁)·부사(府使) 양인백(楊仁伯)·주부(注簿) 유오(柳塢)·군사(郡事) 정결(鄭潔)·유수(留守) 김세민(金世敏)·부사정(副司正) 김삼산(金三山)·부윤(府尹) 이순지(李純之), 녹사(錄事) 김신조(金愼祖)·오창(吳彰)·박종무(朴宗武)·최치당(崔致瑭)·홍범(洪範)·문자수(文自修)·전세적(錢世積), 현감(縣監) 이수생(李壽生), 지인(知印) 문한생(文漢生)·유효지(柳孝池), 녹사(錄事) 안계의(安季毅)·호군(護軍) 장서(張瑞)·상호군(上護軍) 동간고(童干古)·사정(司正) 손계온(孫繼溫)·행 사정(行司正) 조계손(調繼孫)·행 현감(行縣監) 조맹손(曹孟孫)·행 부사정(行副司正) 박철산(朴鐵山)·사용(司勇) 김계종(金繼宗), 녹사(錄事) 김익륜(金益倫)·하맹산(河孟山)·김종(金鍾)·조순경(趙順敬)·강정(姜精)·염순(廉淳)·나달선(羅達線), 현감 박거명(朴居明)·녹사 박계종(朴季宗)·행 부사직(行副司直) 박한생(朴漢生)·훈도(訓導) 손차면(孫次綿), 권지 학유(權知學諭) 임수경(林秀卿)·김계금(金係錦)·곽자용(郭自容), 권지 정자(權知正字) 구자평(仇自平)·행 사용(行司勇) 박순달(朴順達), 권지 훈련 녹사(權知訓鍊錄事) 최계한(崔季漢)·이황진(李黃振), 사직(司直) 노윤필(盧允弼), 진의 부위(進義副尉) 조윤하(曹允夏)·이담(李聃), 경창부 승(慶昌府丞) 이숙함(李淑瑊)·사정(司正) 이철명(李哲命)·진의 부위 윤원동(尹元同)·사정 박사형(朴思亨)·진의 부위 박종문(朴宗文)·우군 사용(右軍司勇) 이규(李珪)·우군 사정(右軍司正) 허인(許麟), 권지 훈련 녹사 조경치(曹敬治)·오자경(吳子慶), 알자(謁者) 장말동(張末同)·사정 최함(崔涵)·사용(司勇) 인경(印卿)·호군(護軍) 김숭해(金崇海)·승의 교위(承義校尉) 김인지(金靷之)·수의 교위(修義校尉) 나문수(羅文繡), 돈용 부위(敦勇副尉) 최신지(崔信之)·최한지(崔漢之), 진용 부위(進勇副尉) 이말봉(李末奉)·승의 부위(承義副尉) 김계돈(金繼敦)·수의 부위(修義副尉) 김말손(金末孫), 진의 부위(進義副尉) 장영진(張永珍)·김자유(金自柔), 수의 부위 최준(崔浚)·이우(李遇)·김효생(金孝生)·백귀령(白龜齡)·이효량(李孝良)·백신손(白信孫)·유태종(劉泰從)·한후생(韓厚生)·신한생(申漢生)·이시영(李時濚)·이맹정(李孟禎), 진의 부위 정중손(鄭仲孫)·김자옥(金自玉)·이형(李衡)·유귀(柳龜)·최자청(崔自淸)·엄유경(嚴有敬), 승의 부위(承義副尉) 남치목(南致睦)·돈용 부위(敦勇副尉) 최림(崔霖), 사정(司正) 성장(成章)·견중달(甄仲達), 수의 부위 정기효(鄭起孝)·한상문(韓尙文)·진척(陳滌)·오준동(吳峻童)·봉극순(奉克純)·김경희(金敬熙)·조맹손(曹孟孫)·서민(徐敏)·황보종(皇甫種)·김여인(金汝仁), 진무 부위(進武副尉) 김자하(金自河)·전호인(全好仁), 진의 부위(進義副尉) 이종수(李從遂)·이산택(李山澤)·최장(崔章)·오변은(吳變殷), 승의 교위(承義校尉) 최급(崔汲), 사정(司正) 이덕유(李德裕)·승의 부위(承義副尉) 정문치(鄭文治)·부사정(副司正) 예인호(艾仁浩), 사용(司勇) 신치복(申致復)·정지주(鄭至周)·박치명(朴致明)·이맹근(李孟根)·이원양(李原壞)·황신지(黃信之), 수의 부위 박재문(朴載文)·김자렴(金自廉)·주계생(朱繼生)·윤처신(尹處信)·정덕행(鄭德行)·이종실(李種實)·권효(權曉)·장계창(張季昌)·안극유(安克柔), 돈의 부위(敦義副尉) 박맹손(朴孟孫)·부사정(副司正) 최경의(崔景義), 수의 부위(修義副尉) 공명선(孔明善)·김욱(金澳)·이초(李貂)·안효문(安孝文)·황무(黃茂)·나귀정(羅貴貞)·이계선(李季善)·손중혁(孫仲赫), 승의 교위(承義校尉) 조경소(曹敬所)·수의 교위(修義校尉) 윤흔(尹昕),
사정(司正) 이시(李蒔)·안승조(安承祖), 부사정(副司正) 소균(蘇鈞)·신한(辛澣), 행 사용(行司勇) 오유현(吳惟顯), 수의 부위 오윤생(吳尹生)·이복동(李復東)·정사(鄭仕)·최택(崔澤)·김계주(金季珠)·이응선(李應善)·장경지(張敬之)·강연(姜演)·한승조(韓承祖), 진의 부위(進義副尉) 손효정(孫孝貞), 사직(司直) 박문회(朴文會)·전실(田實)·박초(朴超), 부사직(副司直) 원효정(元孝貞)·오사하(吳事夏)·배경량(裴敬良), 사정(司正) 김경의(金敬義)·신효의(申孝義)·강유지(康有智)·김극경(金克敬)·이효공(李孝恭)·백분(白墳), 부사정(副司正) 최중수(崔仲水)·염포(廉抱)·정복례(鄭卜禮)·오치지(吳致智)·유순손(柳順孫)·유춘기(柳春寄), 사용(司勇) 심말생(沈末生)·최영하(崔永河)·임해산(林海山)·이득부(李得夫)·김하창(金河昌)·
이온(李溫), 사직 홍우전(洪禹傳)·조숭헌(趙崇憲), 부사직(副司直) 이수인(李守仁)·고의지(高義智)·배문욱(裵文郁)·안근(安謹), 사정(司正) 김효검(金孝檢)·손경종(孫敬宗)·박안지(朴安止)·박승무(朴升茂)·윤신손(尹信孫), 부사정(副司正) 민척지(閔滌之), 사용(司勇) 신가흠(辛可欽)·박거형(朴居亨)·장효생(張孝生)·배유인(裵有仁)·강극명(姜克明)·배유정(裵有貞), 현령(縣令) 이문검(李文儉), 사직(司直) 전영수(全寧壽)·이서남(李瑞南), 부사직(副司直) 정노(鄭老)·이문례(李文禮), 사정(司正) 남경인(南敬仁)·행 부사정(行副司正) 박복경(朴復卿)·수의 부위(修義副尉) 김석정(金石貞)·진의 부위(進義副尉) 전상미(田尙美), 진무 부위(進武副尉) 장득부(張得富)·김소생(金小生), 진의 부위 이안(李岸)·장중경(張仲敬)·노원말(盧元末)·최운걸(崔雲傑)·김복리(金福利)·김계남(金繼南)·손성우(孫成佑)·박만(朴萬)·신귀존(申貴存)·배안습(裵安濕)·유중련(劉仲連)·박귀성(朴貴成)·김귀치(金貴致)·윤산(尹山)·신경선(申敬善), 수의 부위(修義副尉) 한문(韓文), 진의 부위(進義副尉) 윤경(尹敬)·서경(徐敬)·김을부(金乙富)·박계무(朴戒茂)·한신(韓信)·박유산(朴由山)·최철생(崔喆生)·왕치손(王致孫)·김효례(金孝禮)·김중정(金仲情)·강득(姜得), 진무 부위(進武副尉) 김봉(金奉)·김거손(金居孫), 진의 부위(進義副尉) 윤금음동(尹今音同)·임복정(林福汀)·김수(金守)·김휴(金休)·김치강(金致江)·한귀견(韓貴堅)·이약로(李若老)·하인귀(河仁貴)·최중산(崔仲山)·이신(李信)·정수(丁守)·김영남(金永南)·수의 부위(修義副尉)·김처인(金處仁)·조송(趙松)·최원(崔元), 진무 부위(進武副尉) 김곤(金坤), 진의 부위 김여수(金儷水)·전을생(全乙生)·임유생(林有生)·정유달(鄭有達)·김벌개(金伐介)·김중근(金仲斤)·김중련(金仲連)·전수(全守)·정효생(鄭孝生)·김특생(金特生)·김광신(金光信)·원명례(元明禮)·박생(朴生)·정연수(鄭延守)·최해(崔海)·김수강(金守江)·양중생(梁仲生)·박득현(朴得賢)·김여생(金麗生), 수의 부위(修義副尉) 이춘무(李春茂)·김효손(金孝孫)·진무 부위(進武副尉) 안우(安祐), 진의 부위(進義副尉) 최영달(崔榮達)·고을부(高乙夫)·심의(沈義)·박금산(朴今山)·서문(徐文)·박중남(朴仲南)·최득강(崔得江)·김이장(金以鏘)·김성미(金成美)·안호생(安浩生)·박계생(朴戒生)·조맹희(趙孟熙)·심극인(沈克仁)·김효지(金孝智)·윤잠(尹岑)·정효산(趙孝山)·서자평(徐自平), 좌승직(左承直) 신운행(申雲行), 알자(謁者) 김눌행(金訥行)·알자 현녹(玄祿), 우승직(右承直) 이존(李存)·호군(護軍) 김이충(金以忠), 사정(司正) 장유의(張有義)·임희무(林希茂)·김호의(金好義)·정득현(鄭得賢), 부사정(副司正) 이기동(李奇童)·이운강(李云江)·김효윤(金孝潤)·이유례(李由禮), 사용(司勇) 박성생(朴成生)·김이곤(金以坤), 부사정 정가지(丁可智)·조대덕(趙大德)·유여평(兪汝平)·김자려(金自麗)·구복상(仇復祥)·배돈(裵敦)·정효신(鄭孝信), 행 사용(行司勇) 주흥도(周興道)·배상례(裵尙禮)·조예산(趙禮山)·한자렴(韓自廉)·김성기(金成己)·이옹(李雍)·임의민(林義民)·김경동(金敬童)·유증손(庾曾孫), 사직(司直) 김선기(金善奇)·정의종(鄭義宗), 부사직(副司直) 최자윤(崔自潤)·고치화(高致和)·진무 부위(進武副尉) 이소동(李小同), 사정(司正) 김경손(金敬孫)·박건원(朴乾原)·김수산(金水山), 부사정(副司正) 명복초(明復初)·양안위(楊安渭)·이지화(李之華)·변이문(卞以文)·박효동(朴孝童), 사용(司勇) 유호선(兪好善)·장좌원(張佐元)·이복산(李福山)·전유선(全有先)·박춘경(朴春敬)·사직(司直) 서치회(徐致淮)·사용 정산휘(鄭山彙)·사직 홍영호(洪永湖)·권지 참군(權知參軍) 허탁행(許倬行)·전사(典事) 황윤례(黃允禮)·행 부관사(行副管事) 장치손(張治孫)·행 관사(行管事) 김맹흥(金孟興), 학생(學生) 김일(金逸)·장순(張順), 사직 김담(金擔)·사정(司正) 김화(金和)·서리(書吏) 백질(白質)·학생 한인부(韓仁富), 별감(別監) 박반자(朴般者)·나잉질동(羅芿叱同)·김정(金貞), 종[奴] 양동(梁同)·종 홍지(洪地)·종 내은동(內隱同)·김광(金光), 사정(司正) 장인기(張仁己)·차마류(車馬硫)·부알자(副謁者) 심말동(沈末同)·사직(司直) 김검(金劍)·사정(司正) 한사민(韓思敏)·알자(謁者) 홍금강(洪金剛), 종 김막동(金莫同)·이수산(李壽山), 사용(司勇) 김파지(金波知)·김계수(金桂壽), 사정(司正) 최군자(崔群子)·학생(學生) 문장수(文長壽)·행 사용(行司勇) 박막동(朴莫同), 종 박용(朴龍)은 2등에 녹(錄)한다.
【원전】 7 집 102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變亂)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세조 5년 기묘(1459,천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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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20일 (경오)
지돈령부사 이선의 졸기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이선(李渲)이 졸(卒)하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였다. 이선(李渲)은 이때 상사(喪事)를 당하여 함길도(咸吉道)로부터 돌아오다가 길에서 큰 비를 만났는데, 고산역(高山驛) 앞 내[前川]에 이르러 그 아들이 먼저 건너다가 물에 빠지니 이선(李渲)이 나아가서 구하려고 하다가 또한 따라서 물에 빠져 죽었다. 이선은 계천군(啓川君) 이등(李登)의 아들인데, 임자년의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기어 정2품에 이르게 되었다. 시호(諡號)를 문량(文良)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온화하고 선량(善良)하여 화락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良)이라 한다.
【원전】 7 집 334 면
【분류】 *인물(人物) / *과학-천기(天氣) /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


[주D-001]임자년 : 1432 세종 14년.
 
세조 3년 정축(1457,천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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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1일 (임술)
계천위 이등의 졸기

계천위(啓川慰) 이등(李登)이 졸(卒)하였다. 이등은 태조(太祖)의 딸 의령 옹주(義寧翁主)에게 장가들었으나, 성질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몹시 추울 때나 몹시 더울 때라도 한 번도 임금을 조알(朝謁)하는 예(禮)를 폐한 적이 없었고, 만년(晩年)에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는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를 만류하면,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서 모람되게 척리(戚里)인 인연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늠록(廩祿)만을 허비하고 조그마한 보탬도 있지 않았으니, 어찌 조알(朝謁)하는 예를 꺼리겠느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9세였다. 관가에서 장사(葬事)를 치러주고 ‘호안(胡安)’이라 시호(諡號)하니, 나이가 많고 오래 산 것을 ‘호(胡)’라 하고 화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한다. 아들이 4인이 있는데, 둘째 아들 이선(李渲)은 임자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위가 추밀(樞密)에까지 이르렀다.
【원전】 7 집 207 면
【분류】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인사(人事) / *왕실(王室)

 
연려실기술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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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태조

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 8남 5녀를 두었다.
사(嗣) 정종대왕(定宗大王) 순서는 둘째이다.
사(嗣) 태종대왕(太宗大王) 순서는 다섯째이다.
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 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大匡輔國贈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㺶)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으며, 정종 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 밀양 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 김포 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兔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 개성 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부유 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薆)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주B-001]고사본말(故事本末) : 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
[주D-001]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고려 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수상을 말하는데, 수문하시중은 그 다음인 부수상 격이다.
[주D-002]기로소(耆老所) : 조선 때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의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 받던 곳으로, 태조 3년에 창설되었다.
[주D-003]휘호(徽號) : 왕이나 후비께 올리는 존호를 가리킨 것인데, 휘(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정종 2년 경진(1400,건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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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일 (을축)
장군들의 모임인 장군방을 혁파하다

장군방(將軍房)을 혁파하였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장무(掌務)의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가 있어서, 새로 장군(將軍)에 제수된 자가 있으면, 그 방주와 장무가 반드시 그 족속(族屬)을 상고하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연후에야, 새로 제수된 자가 그 임무를 행할 수 있었는데, 국초(國初)에도 그 제도를 인습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주D-001]장군방(將軍房)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장군(將軍) 이상이 모여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곳. 고려 중방(重房)의 후신으로, 정종 2년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 6년에 호군방(護軍房)으로 다시 부활시켰음.
[주D-002]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 : 관원이 새로 임명되어 올 때, 그 관부의 방주(房主)와 장무(掌務)가 모여서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고, 또 찬성 여부를 서명하던 일.



정종 2년 경진(1400,건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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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일 (을축)
덕수궁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고 다닌 전 삼사 좌복야 이염과 전 판사 이덕시를 춘주와 이천현에 귀양보내다

전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이염(李恬)을 춘주(春州)에, 전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를 이천현(利川縣)에 귀양보냈다. 이염과 이덕시가 덕수궁(德壽宮)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듣고 소를 올려 그 임금을 속인 죄를 청하니, 임금이 다만 외방에 귀양보냈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태종 5년 을유(1405,영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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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19일 (신해)
압량위천한 전 판사 이덕시를 강화로 귀양보내다. 신문고

전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를 강화(江華)로 내치었으니,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여 덕시(德時)가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을 만든 죄를 논(論)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 호군(護軍) 이등(李登)이 오결(誤決)이라 하여 북[鼓]을 쳐서 신문(申聞)하였다. 헌부(憲府)에서 또 말하기를,
“등(登)이 소사(所司)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상총(上聰)을 기망(欺罔)한 것이 심하오니, 등(登)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죄를 논하여 뒷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33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政論) / *신분-천인(賤人)

 

조선 태조의 서녀 의령옹주와 부마 호안공 이등의 묘역 서울시 문화재로 서울시 자료 

수정일 | 201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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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서녀 의령옹주와 부마 호안공 이등의 묘역이 서울시 문화재로 신규 지정‧보존된다

※ 서녀 : 후궁 소생의 딸을 일컬음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서녀 의령옹주와 그녀의 남편 호안공 이등의 묘역은 도봉산 무수골(도봉구 도봉동 산85번지)의 아담한 구릉 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성 당시에 설치한 묘비, 문인석 등의 석물과 함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 태조는 정비 2명(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4명의 후궁(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후궁)과의 사이에 적자 8명, 적녀 3명, 서녀 2명을 두었다. 2명의 서녀 중 한 명인 의령옹주는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는 후궁 소생으로서 안타깝게도 그녀에 대한 기록은 사료 상으로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묘역에서 확인된 묘비에 “성화2년(1466) 2월 초1일 예장”이라는 문구가 확인되고 있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한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성화 2년은 1466년 (세조 12년)

 

 

■ 정종실록 5권 - 1400년(정종 2) 7월 2일 中

(전략).........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 연려실기술 태조조 고사본말

(전략).........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후략)

 

 

□그의 남편인 호안공(胡安公) 이등(李登)은 “1379(우왕 5)년에 태어나1457(세조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개성, 이덕시(李德時)의 아들이며 태조의 庶장녀 의령옹주를 맞이하여, 1435년(세종 17)에 계천군으로, 1444년(세종 26)에 봉헌대부(奉憲大夫)에 봉하여졌다. 1457년(세조 3)에 7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라는 등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 세조실록 8권 - 1457년(세조 3) 7월 1일

계천위(啓川尉) 이등(李登)이 졸(卒)하였다. 이등은 태조(太祖)의 딸 의령 옹주(義寧翁主)에게 장가들었으나, 성질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몹시 추울 때나 몹시 더울 때라도 한 번도 임금을 조알(朝謁)하는 예(禮)를 폐한 적이 없었고, 만년(晩年)에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는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를 만류하면,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서 모람되게 척리(戚里)인 인연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늠록(廩祿)만을 허비하고 조그마한 보탬도 있지 않았으니, 어찌 조알(朝謁)하는 예를 꺼리겠느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9세였다. 관가에서 장사(葬事)를 치러주고 ‘호안(胡安)’이라 시호(諡號)하니, 나이가 많고 오래 산 것을 ‘호(胡)’라 하고 화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한다. 아들이 4인이 있는데, 둘째 아들 이선(李渲)은 임자년(1432) 과거에 급제하여 지위가 추밀(樞密)에까지 이르렀다.

 

 

□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서는 태조의 부마 및 옹주의 묘로서 조성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석물의 품격이 높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시 기념물로 지정 가치가 있다고 의결(2013.1.11)하였다.

※ 기념물 : 서울시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무형문화재) 중 한 종류로 역사 유적지․고고 유적․전통적 경승지(경치나 경관이 뛰어난 곳)․식물 중에서 학술적․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지정함

 

□ 이에 서울시는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의 묘역>에 대한 문화재 지정계획을 2013년 4월 25일부터 5월 25일까지 약 30일 동안 공고하여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최종심의를 거쳐 2012년 6월 말까지는 서울시 기념물로 최종 지정고시할 예정이다.

 

□ 한편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이 위치한 무수골에는 이미 시 문화재로 지정된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시 유형문화재 제106호)이 자리하고 있고, 가까이 북한산 둘레길 20구간 왕실묘역길이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 왕족의 묘역을 두루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 서울시에서는 앞으로도 우리의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정 추진을 통해 보다 철저히 보존․관리하여 전 시민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길이 남길 것이다.

 

이 지정계획과 관련하여 의견이 있는 경우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133-2639)로 제출하면 된다.

 

<서울시 문화재 지정절차>

 

문화재

지정 신청

(개인․자치구

⇒ 서울시)

문화재위원

조사

(서울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1차 심의

(서울시)

문화재 지정계획 공고 및 의견 수렴

(현 진행단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2차 심의

(서울시)

지정 고시

(서울시)

 

※ 문화재 지정 효력은 지정 고시로 발생함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위치도 및 현황사진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위치도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위치도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전경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전경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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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학 - 자서(字書)
《설문(說文)》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9)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은 이르기를 “예서(隸書) 이후로 육서(六書)의 본 뜻을 잘 밝혀, 삼대(三代)의 글을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하여 고인(古人)이 글자를 만든 근본을 알게 한 것은, 허숙중(許叔重 숙중은 허신(許愼)의 자)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공로가 크다 하여 후세의 학자들이 받들어 법을 삼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나는 모든 점이 다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육경(六經)의 글인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의 전(傳)과 모장(毛萇)ㆍ공안국(孔安國)ㆍ정중(鄭衆)ㆍ마융(馬融) 등 여러 학자의 훈고(訓詁)로도 그 모두가 경전(經傳)의 본 뜻과 반드시 합치된다고는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숙중(叔重)은 동경(東京 후한(後漢))의 중엽에 태어나서 《설문해자》의 바탕을 삼은 것이라고는 유흠(劉歆)ㆍ가규(賈逵)ㆍ두임(杜林)ㆍ서순(徐巡) 등 10여 인의 학설에 불과한데도 완전히 옛사람의 본뜻을 터득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그럴까 하는 것이 첫째 이유요, 오경(五經)은 채옹(蔡邕) 등이 정정(正定)하기 이전에는 전사(傳寫)할 때마다 사람에 따라 달랐다. 이제 그 책에 수록된 것이 대체로 이자(異字)가 많은데 현재의 경전을 가지고 비교해 볼 때 《설문》이 그만 못하고, 또 《설문》은 같은 책 중에서 동일한 것을 두 군데에 인용하면서 그 글이 서로 다르니, 이를테면 사(氾)자 아래에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강유사(江有氾)라 쓰고 사(洍)자 아래에도《시경》을 인용하면서 강유사(江有洍)라 하였고, 구(逑)자 아래에는《서경(書經)》을 인용하면서 방구잔공(旁逑孱功)이라 쓰고 잔(僝)자 아래에도《서경(書經)》을 인용하면서 방구잔공(旁救僝功)이라 하였다. 또 근(巹)자 아래에는 《시경》을 인용하여 적석기기(赤舃己己)라 쓰고, 견(掔)자 아래에도《시경》을 인용하면서 적석견견(赤舃掔掔)이라 썼다. 후세에 이 책을 읽는 자들이 장차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하는 것이 둘째 이유이다. 정현(鄭玄)이 허신(許愼)의 《설문》이 오경과 뜻이 다름을 논박하였고,《안씨가훈(顔氏家訓)》에도 “《설문》중에 경전을 인용한 것이 지금의 경전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 있으므로 감히 따를 수 없다.” 한 것을 이른다. 유전(流傳)된 지 이미 오래이니 어찌 탈루(脫漏)가 없으랴! 그러므로 서현(徐鉉)도 이르기를 ‘전서(篆書)가 인체(堙替)된 지 오래이므로 착란(錯亂)되고 유탈(遺脫)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제 예를 들면 《설문》에 빠진 글자는 반드시 옛날에는 없던 글자인데도 따로 한 글자를 지적하여 그 자에 해당시켰다.’ 한 것이다. 이를테면《설문》에 유(劉)자가 없는데 후인이 유(鎦)자로 그에 해당시켰고, 유(由)자가 없는데 유(甹)자로, 태(兌)자를 통(統)자로 해당시킨 것 등이다. 경전을 고쳐 《설문》에 맞추어 지리하게 둘러 붙인 것이 그 셋째 이유이다. 이제 그 중 한두 가지를 들어 평하려 한다.
진(秦)ㆍ송(宋)ㆍ설(薛)은 모두 국명인데, 진자는 화(禾)를 따랐으니 토지가 벼농사에 합당한 것이라 하였으니 또한 너무 오활한 말이고, 송(宋)자는 목(木)을 따라 거처를 삼았고, 설(薛)자는 신(辛)을 따라 고(睾)가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비서(費誓) 《서경》의 편명)의 비(費)자를 고쳐서 비(粊)라 쓰고는 악미(惡米)라 풀이하였고, 무왕재패(武王載旆)의 패(旆)자를 고쳐서 발(坺)로 쓰고 한 삽으로 떠낸 흙이다(臿土)하고, 위(威)자를 시어미[姑]라 하고 야(也) 자를 여음, 예(殹)자를 격성(擊聲), 곤(困)자를 고려(故廬), 보(普)자를 태양이 빛이 없는 것[日無色]이라 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또 ‘학(貉) 자의 뜻은 악(惡)이다.’ 한 것과, ‘견(犬)자의 모양을 보면 마치 개를 그려 놓은 것 같다.’ 한 것과, ‘구(狗)자는 두드린다는 뜻이다.’ 한 것이 어찌 공자의 말이겠는가?
유(有)자를 마땅히 없어야 될 것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춘추(春秋)》에 일유식지(日有食之)라 한 것을 인용하였고, 곽(郭)자를 ‘제(齊) 나라 곽씨(郭氏)의 구허(舊墟)이다. 곽씨가 선인(善人)을 착하게 여기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물리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하였으니, 초설(勦說)에 가까워서 그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거(居)자를 옛 것을 본받는다는 뜻이라 하고, 용(用)자를 복중(卜中), 동(童)자를 죄지은 남자, 양(襄)자를 옷을 벗고 밭가는 것, 조(弔)자를 사람이 활을 가지고 모여서 짐승을 모는 것, 욕(辱) 자를 밭가는 철[耕時]을 놓친 것이라 하였으며, 벌(罰)자를 칼을 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꾸짖는 것, 노(勞)자를 불이 문(門)을 태운다는 뜻이라 하였고, 재(宰)자를 죄인이 집안에서 일하는 것, 명(冥)자를 16일에 달이 비로소 기울어 어두워 간다고 하였고, 형(刑)자를 칼을 가지고 우물을 지킨다는 뜻이라 하였으니, 천착하여 정리(情理)에 먼 것이 아니겠는가?
삼(參)을 풀이하여 상성(商星)이라 한 것은 천문(天文)과 맞지 않고, 박(亳)자를 풀이하여 경조(京兆) 두릉정(杜陵亭)이라고 한 것은 지리(地理)와 맞지 않는 것이다. 책 중에 인용한 낙랑(樂浪)의 사실 수십 조가 다른 경전에는 도리어 빠져 있으니, 이는 사실의 수집에 타당성을 잃은 것이다. 이제 학자들이 그 중 큰 것을 취하고 그 작은 것은 버리며 그 옳은 것만을 취하고 잘못된 것을 버린다면 《설문》을 잘 연구하는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왕망전(王莽傳)을 인용하여 ‘유(劉)자의 구성은 묘금도(卯金刀)로 되어 있다. 정월은 강해서 묘금도의 날카로움이 다 행해지지 않는다.’ 하고, 또 ‘수명(受命)한 날인 정묘(丁卯)는, 정(丁)은 화(火)에 해당되니 한(漢) 나라의 덕이고, 묘(卯)는 유(劉)씨의 성이니 이것이 유(劉)자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다.’ 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하늘에 고하는 축문에는 참기(讖記)를 인용하여 ‘묘금(卯金)이 덕을 닦아 천자가 되었다.’ 하였다. 조환광(趙宦光)은 이르기를 “《설문》에는 유(劉)자가 없고 다만 유(鎦)자만이 씌어 있는데 이제 《한서(漢書)》의 묘금도(卯金刀)의 참기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옛 인장(印章)을 상고해 볼 때 유씨 성이 수없이 많으나 모두 유(劉)자로 씌어 있고 유(鎦)자로 된 것은 없다” 하였다. 위 명제(魏明帝) 태화(太和 227~232) 초기에 공경들이 아뢰기를 ‘노래로써 덕을 칭송하고 춤으로써 일을 상징하는 것인데, 글자로는 문(文)자와 무(武)자가 합하여 빈(斌)자가 됩니다. 신등이 삼가 악무(樂舞)를 만들고 장빈무(章斌舞)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위(魏) 나라는 숙중(叔重)이 생존한 후한과는 멀지 않으니, 이로 보아 고대에도 빈(斌)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서현(徐鉉)의 《교정설문(較正說文)》에는 앞에 빈(斌)자를 배열하고 “이는 속서(俗書)이다.” 하였다. 또 《설문》원본의 차례는 볼 수가 없다. 현재 사성(四聲)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은 서현(徐鉉) 등이 정한 것이고, 반절(反切)도 서현 등이 추가한 것이다. 조고칙(趙古則)의 《육서본의(六書本義)》에 이르기를 “한(漢) 나라 이전에는 반절(反切)이 없어서 허씨의《설문》과 정씨(鄭氏)의 전주(箋注)에는 다만 아무 자와 같이 읽는다[讀若某]라고 하였을 뿐이다. 현재 《설문》의 반절은 바로 주고(朱翶)가 손면(孫愐)의 《당운(唐韻)》에 있는 것을 가져다 추가한 것이다.” 하였다. 널리 후유(後儒)들의 설을 인용한 것 중에서 두예(杜預)ㆍ배광원(裵光遠)ㆍ이양빙(李陽氷) 등의 유도 서현(徐鉉) 등이 추가한 것이고, 또 ‘제가의 설 중에서 채록되지 않은 것을 이제 자운(字韻)의 뒤에 첨부한다.’ 한 것도 미(瀰)자 아래임 서현 등이 추가한 것이다. 모(眸)자 아래에 이르기를 “《설문》에는 바로 모(牟)라고 썼다.” 하였다. 조환광(趙宦光)은 이르기를 “이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설문》은 여러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니 어찌 무예(蕪穢)가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경전을 참정(參訂)할 때에는 반드시 본인의 이름을 앞에 실어야 전인들의 설과 혼동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시(始)자는 《설문》에 ‘여자의 처음이다[女之初也]’ 하였는데,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서현은 이를 ‘지극하도다 곤(坤)의 원기여! 만물이 이에서 시작된다’ 한 것을 가지고 풀이하였으니, 그는 경문(經文)에 ‘크도다 건(乾)의 원기여! 만물이 이에 의해서 시작된다’ 한 것을 모른 것이다. 만일 그의 풀이대로라면 반드시 남자라고 했어야 맞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모두《설문》에서 사람에 관계되는 것을 풀이한 것 중에 잘못된 것의 예이다.
상고하건대, 허신(許愼) 자는 숙중(叔重), 소릉인(召陵人)으로서 효장(洨長)에 임명되었다. 은 한 화제(漢和帝) 때에 사주(史籒)ㆍ이사(李斯)ㆍ양웅(揚雄)의 저서를 채취하고 자학(字學)에 밝은 사람들에게 널리 묻고 가규(賈逵)의 고증을 받아서《설문》을 지었다. 총 14편 5백 40부, 9천 3백 53자에 해설이 총 13만 3천 4백 41자로서, 일(一)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에서 끝났는데, 만물의 근원을 구명(究明)하였다. 그의 아들 허충(許沖)이 건광(建光 한 안제(漢安帝)의 연호 121~122) 원년 9월 기해 삭(朔) 20일(무오)에 주상(奏上)하였다. 서개(徐鍇)는 이르기를 “건광 원년은 한 안제 15년인데 이해는 신유년(121)이다. 이는 숙중의 자서와 허충의 상서문(上書文)에 자세히 실려 있다.” 하였다.
명(明) 나라 진대과(陳大科)의 《설문이동(說文異同)》에 “상고하건대,《설문》은 한 화제(漢和帝) 때에 허신이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 허충이 안제에게 올린 것이다. 이를 당(唐) 나라 이양빙(李陽氷)이 간정(刊定)하였고, 송(宋) 나라 초기에 서개(徐鍇)가 증정(增正)하였다. 조(詔)ㆍ지(志)ㆍ문(文)ㆍ흔(舋)ㆍ개(个)자 같은 것은 빠지거나 잘못된 것을 서현이 비록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으나 이루 다 기재할 수 없었던 듯싶다. 또 필적이 약간씩 다른 것은 이 몇 개의 글자에 그치지 않는다. 서기성(徐騎省 이름은 현(鉉))이《설문》에서 빠진 글자인 조(詔)ㆍ지(志)ㆍ건(件)ㆍ차(借)ㆍ추(魋)ㆍ기(綦)ㆍ척(剔)ㆍ국(觷)ㆍ잔(醆)ㆍ저(趄)ㆍ초(顦)ㆍ여()ㆍ응(譍)ㆍ삼(檆)ㆍ치(緻)ㆍ소(笑)ㆍ아(迓)ㆍ환(睆)ㆍ봉(奉) 등 19자와 속서(俗書)와 잘못된 것으로서 육서(六書)의 체에 맞지 않는 흔(舋)자 등 28자를 교정하였는데, 현의 아우인 개(鍇)가 동시에 이에 주석을 달아 태종(太宗) 옹희(雍熙) 3년(986)에 이를 국자감에 석각(石刻)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책은 대력(大曆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 연간에 간정(刊訂)되고 옹희(雍熙) 연간에 증보하였으니 어찌 허씨(許氏)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또 구본(舊本)에는 ‘오음운보(五音韻譜)’라는 네 자가 있는데 허충의 상서문에 의하면 스스로 《설문해자(說文解字)》라고 칭하였다. 진직재(陳直齋 직재는 진손(陳孫)의 호)는 이르기를 ‘부서(部序) 2편, 통론(通論) 3편, 거요(袪要)ㆍ유서(類序)ㆍ착종(錯綜)ㆍ의의(疑義)ㆍ계술(系述)이 각기 1편인데 이는 서현이 지은 것이다.’ 하였고, 조환광(趙宦光)의 《설문장전(說文長箋)》에는 ‘허씨의《설문》은 15편으로서 일(一)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에서 끝났는데, 서개와 서현이 당 나라 임금의 조칙을 받들어 그 차서를 변동시켜 5백 40개의 부수를 사성(四聲)의 운에 따라서 선후를 정하여 그 모부(母部) 소속 글자는 반드시 운에 의거 배열하여 동(東)자에서 시작하여 갑(甲)자에서 끝나게 하고,《설문해자오음운보(說文解字五音韻譜)》라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아래의 ‘해자오음운보’의 6자를 빼놓고《설문》이라고 읽으면서 그것이 잘못인 줄을 모른다. 《설문》은 현재 전서(全書)가 없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서현본(徐鉉本)이다.’ 했다.” 하였다.
청(淸) 나라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모자진(毛子晉)의 집에 송판본(宋板本)인 허씨의《설문》이 있는데, 지금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허숙중(許叔重)의 구본은 바로 글자의 획수로써 부(部)를 나눈 것으로, 자(子)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에서 끝났는데, 전체를 15권으로 나누었고, 현재 전하는 판본은 바로 심약(沈約)의 운(韻)을 따라서 편차한 것이다. 또 부(部)로써 분류해 넣은 것은 바로 송(宋) 나라 이도(李燾)가 서기성(徐騎省)의 것을 개정한 본이다. 원 나라 때 탕성홍(湯聖弘)이 허신의 원본《설문》을 판각하였는데 아깝게도 불에 타서 훼손되었다 한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숙중의《설문해자》이후로 당(唐)ㆍ촉(蜀)ㆍ이(李)ㆍ서(徐)가 도합 13가인데, 첫째《한간설문(汗簡說文)》, 둘째 《연설문(演說文)》, 모두 그 지은이의 성명을 알 수 없다. 셋째, 오숙(吳叔)의 《설문오의(說文五義)》, 넷째 이양빙(李陽氷)의《설문간정(說文刊定)》, 다섯째 이등(李騰)의《설문자원(說文字原)》 1권, 여섯째 서개(徐鍇)의《설문계전(說文繫傳)》 38권, 일곱째 서현(徐鉉)의《설문보(說文譜)》 12권, 여덟째《설문간정(說文刊定) 》15권, 아홉째 승려 담역(曇域)의《보설문(補說文)》 30권, 열째《설문음은(說文音隱)》 4권, 열한째《당본설문(唐本說文)》, 열두째 《촉본설문(蜀本說文)》, 열셋째 낭희로(郞稀魯)의 《설문보의(說文補義)》이다. 이 외에 또 명(明) 나라 조환광(趙宦光)의 《설문장전(說文長箋)》 40권, 청(淸) 나라 장정석(蔣廷錫)의《설문자원표(說文字原表)》 1권, 오조(吳照)의 《설문편방고(說文偏旁考)》 2권이 있는데 이는 모두 참고할 만한 것들이다.
《한간(汗簡)》은 왕사정(王士禎)의《한간》발문에 “곽충서(郭忠恕)가 지은《패휴(佩觿)》와《한간》두 책은 모두《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으나,《한간》은 지금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현재 수수 주씨(秀水朱氏)가 초본(鈔本) 6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오문(吳門)에서 새로 판각한 것으로서 고본(古本)에 가까워 보배로운 것이다. 표면에 이건중(李建中)이 ‘한간’이라고 쓴 것이 있고 지은 이의 성명도 빠진 것이 없으니, 이로써 동해(東海) 서기성 현(徐騎省鉉)을 알 수 있다. 곽충서(郭忠恕)가 이 책을 지을 때에 참고한 것이《고문상서(古文尙書)》이하 총 71가(家)나 되는데, 조범부(趙凡夫)가《한간》은 지은 이를 모른다고 한 것은 어째서일까?” 하였다.
청(淸) 나라 방중리(方中履)의《고금석의(古今釋疑)》에는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설문》 이후로 진(晉) 나라 동래군(東萊郡)의 견령(惤令) 여침(呂忱)이 이를 이어《자림(字林)》을 지어 그 누락된 것을 보충하였고, 승려 운승(雲勝)이 이에 주를 달았는데 현재도 왕왕《설문》에 부록된 것이 보인다. 이손암(李巽巖)은 이르기를 “고문(古文)ㆍ주문(籒文)은 아마도 여침(呂忱)이 처음으로 증입(增入)시킨 것 같다.” 하였다. 진(陳) 나라 고야왕(顧野王)이 다시《설문》을 따라《옥편(玉篇)》을 만들었는데 그 글자 수는 더욱 증가되었으나, 숙중(叔重)은 오로지 전서(篆書)로만 썼었고 야왕(野王)은 예서(隸書)를 섞어 써서 다시《설문》의 옛 면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당(唐) 나라 대력(大曆) 연간에 이양빙(李陽氷)이 특히 전학(篆學)으로 명성을 얻어 이에《설문》을 간정(刊定)하였고, 남당(南唐)에 이르러 서 초 금 개(徐楚金鍇 초금은 자임)가 이를 다시 정정하여《설문계전(說文繫傳)》을 지었는데, 그는 대체로 허씨의《설문》을 경서와 같이 존중하였다.
송(宋) 나라 옹희(雍熙) 3년에 개(鍇)의 형인 서현(徐鉉)이 조서를 받들어《설문》을 상교(詳較)할 때에 처음으로 손면(孫愐)의《당운(唐韻)》의 음절(音切)을 채택하였는데, 지금 세상에 통행되는 것은 바로 서본(徐本)이다.
《범장편(凡將篇)》과《훈찬편(訓纂篇)》은 모두 없어지고 한(漢) 나라 서적 중에《설문》만이 남게 됨으로써 고고(考古)의 원유(苑囿 연총(淵叢))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서(二徐 서현(徐鉉)ㆍ서개(徐鍇)) 이외에 장유(張有) 《복고편(復古編)》ㆍ곽충서(郭忠恕) 《패휴(佩觿)》 와 근대에 이르러 조휘겸(趙撝謙) 《육서본의(六書本義)》ㆍ시광진(柴廣進) 《성음문자통(聲音文字通)》ㆍ조환광(趙宦光) 《설문장전(說文長箋)》ㆍ이등(李登《서문음의편고(書文音義便考)》 은 모두 《설문》을 따르고, 《설문》이 실로 빠지고 중복되고 잘못 풀이된 것이 많은 줄을 몰랐으니, 어찌 다 좇을 수 있겠는가?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은 숙중(叔重)과 동시대 사람이면서 곧 이를 논박하였고, 유원위(庾元威)는 ‘허신(許愼)은 가씨(賈氏 가규)의 학문을 천착하여 이에 《설문》을 지어 상주하였다’ 하였으니, 어찌 이소온(李少溫 이름은 양빙(陽氷))ㆍ정어중(鄭漁仲 이름은 초(樵))ㆍ양신천(楊辛泉)ㆍ대합계(戴合溪)ㆍ위자재(魏子才)오경보(吳敬甫) 등의 지적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허신의《설문》을 존중하는 자들은 이리저리 둘러 맞추는 자들이 많다. 나는 《통아(通雅)》에서 이렇게 논했다.
초(草)자는 있으면서 조(皁)자는 없고, 사()자는 있으면서 묘(妙)자는 없고, 빈(●)자는 있으면서 빈(頻)자는 없고, 엽(躐)자는 없으면서 엽(獵)이라고도 쓴다 하였으니, 이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유(瀏)자는 있으면서 유(劉)자는 없고 다만 죽인다는 뜻으로 풀이한 유(鎦)자만 있으며, 유(劉)자는 한(漢) 나라 임금의 성이니 허씨가 응당 죽인다는 뜻으로만 풀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반드시 빠졌거나 생략된 부분이 있음이 분명하다.
타(妥)자는 없으면서 수(綏)자는 타(妥)를 따른다 하였고, 춘(春)자는 없으면서 초부(艸部)에 춘(), 충부(䖵部)에 준()자가 있다. 준()자는 준(蠢)자의 고자(古字)이고, 춘()자는 즉 춘(春)자로서 모두 춘(春)을 따랐다. 또, 종(蹤)자는 없으면서 거부(車部)에 종(䡮)자가 있고, 규(跬)자는 없으면서 규(䞨)자 아래에 규(跬)자와 같이 읽는다 [讀若跬]하고, 연()자는 없으면서 연(●)자는 있으며, 여전절(輿專切)이니 이는 바로 연(鳶)자인데 《설문》에는 연(鳶)자가 없다. 희(希)자는 없으면서 화부(禾部)에 희(稀)자가 있고, 면(俛)ㆍ면(凂)ㆍ면(勉)ㆍ면(冕)자가 모두 면성(免聲)이라 하면서 정작 면(免)자는 없고, 각부에 유성(由聲)이라고 인용하면서도 유(由)자는 없으니 오류(誤謬)가 아니면 어찌 잘못 전해진 것이 없다 하겠는가?
기타 이필(異筆)이면서 통용되는 글자를 번번이 반복해서 쓰고 거듭 풀이한 것으로는 고(鼓)자와 고(鼔)자, 역(鬲)자와 역(䰜)자는 모두 다른 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㜽)자와 자(子)자, 수()자와 수()자의 관계와 같은 것 인데 하필 두 글자로 나누어 썼는가? 이 역(鬲)자는 한(漢) 나라 법령에 역(㽁), 혹은 역(䰛)이라 썼는데, 역(鬲)ㆍ역(䰜)과 모두 같은 자이다. 국(鞠)자를 나누어 다섯 가지로 하였고, 기(企)자를 나누어 넷으로 하였으며, 국(鞠)ㆍ국()ㆍ국()ㆍ국(麴)ㆍ국(●)자는 동음(同音)인 이자(異字)이고 기(企)자를 기(跂)자로 쓰고 또, 기()ㆍ기()라 썼는데 이는 발뒤꿈치를 드는 것을 말하고, 기(跂)는 발에 발가락이 많은 것[足多指]이요, 기(岐)는 갈래진 것을 말하는데, 다지(多指)는 마땅히 다기(多岐)로 써야 한다. 착(躇)자가 또 착(趞)ㆍ착(逪)이 있고, 주()자가 또 주()가 있으며, 흉(凶)자를 따랐다. 《서경》의 주자(疇咨)를 인용하면서 주자(咨)라고 썼다. 서본(徐本)에는 멱(覛)자가 있고 다시 인(眽)이 있으며, 천(踐)자가 있고 또 천()과 천(俴)이 있다. 천()자와 천(俴)자는 모두 적(迹)이라 한다.
남(藍)자를 나누어서 염(染)이라 하고 저(菹)라고 한 것도 같은 예이며, 우(吁)자와 연(孌)자를 양쪽으로 실어서 분명히 중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씨(戴氏)는 이르기를 “남(藍)자의 뜻은 두 가지로 쓰이나, 글자의 모양은 같으니 마땅히 한 글자에 모아 기록했어야 할 터인데 무슨 이유로 양쪽에 나타내어 염초(染草)라고도 하고 과저(瓜菹)라고도 했는가? 과저는 오이김치[灆]이다. 또, 남문(漤文)이 있으니 구부(口部)에 우(吁)자가 있는데 경(驚)이라 하였고, 우부(于部)에 또 우(吁)자가 있는데 놀랐을 때 하는 말이라 하였고, 연(孌)자는 사모한다는 뜻이고 또 난()은 순종한다는 뜻이라 하였다. 연(孌)자를 고문으로서 역윤절(力沇切)이라고 하였는데 사실 연(孿)자ㆍ연(攣)자와 음과 뜻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원(妴)자와 원()자를 무슨 이유로 완(婉)자와 분리하였으며, 부(孚)자와 보(保)자에는 번갈아 가며 고문(古文)이라고 인용하였는가? 글자를 풀이하여 의미를 밝힌 것은 더구나 견강부회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 12신(辰)과 같은 것은 구생지해(俱生支閡)이다. 맥(麥)자를 금생화사(金生火死)라 하여 내(來)자를 따랐고 이삭[穗]이 있는 것으로 사(夊)를 따랐다 하였고, 축(逐)자를 돼지가 달아나는 것[豚走], 부(頫)자를 도생(逃省), 고(辠辠)자를 코를 찡그리는 것[蹙鼻], 구(臼)자를 합조(合爪), 지(止)자는 풀[艸]에서 본뜬 것이라 하고, 노(勞)자를 형화소문(熒火燒門), 배가 양쪽 언덕에 잇닿은 것이 호(互)자요, 몸이 변하여 하늘에 오르는 것이 진(眞)자라 하였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한단 말인가? 손서(孫徐 손면ㆍ서현)가 망령되이 해석하고 음(音)을 지어낸 것은 더욱 그들이 근거한 것 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고문(古文)이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저절로 의전(疑傳)이 있게 되고 초록(抄錄)을 거치면서 착간(錯簡)이 없을 수 없는 것인데도 후세의 호사가가 그 의전(疑傳)과 착간에 대해 곡설(曲說)을 지어 냈으니 다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설문》은 본래 견령(惤令 여침(呂忱))이 추가한 것과 운승(雲勝)이 주를 지은 것, 초금(楚金 서개(徐鍇)의 자)이 풀이한 것이 많았는데 이제 모두 유실되었고, 황직옹(黃直翁 직옹은 공소(公紹)의 자)의《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인용한 것과 왕백후(王伯侯 백후는 응린(應麟)의 자)가 인용한 것과《고이(考異)》에 인용한 것은 대부분 현존하는 본이 아니다. 합계(合溪)는 걸핏하면 당본(唐本)ㆍ촉본(蜀本)ㆍ서본(徐本)을 인용하였는데, 오정의(吳正儀)의《설문》은 또 이와 다르니, 마땅히 다른 책에 인용된 것을 수집하여 참고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잔결(殘缺)된《설문》을 고수(固守)해 무엇하랴!
또 《설문》에서 경전을 인용한 것이 본자(本字)가 아닌 것이 많으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주서(逸周書)》에 있는 구장(竘匠)과 사분민지산(士分民之祘), 주서(周書)의 유묘유계(維緢有稽) 묘(緢)는 깃술[旄絲] 이다.잔잔교언(戔戔巧言) 같은 것은 유문(遺文 일문(逸文))이니 말할 것도 없고,《주역》에서 인용한 서건자(噬乾)와 승마진여(乘馬驙如), 《좌전(左傳)》에서 인용한 발이온숭지(發以蘊崇之)와 이비진삼각(以備陳三愙), 《맹자》의 경석(滰淅), 《시경》의 기마기도(旣禡旣禂), 주서(周書)의 왕삼숙 삼제 삼도(王三宿三祭三㓃) 당고절(當故切) 는 고문이니 혹 이렇다 치더라도 그 외에 항룡(亢龍)의 항(亢)자를 항(忼)이라 쓰고, 재삼독(再三瀆)의 독(瀆)자를 독(黷), 기우체(其牛掣)의 체(掣)자를 체(觢), 풍기옥(豊其屋)의 풍(豐)자를 풍(寷), 복우승마(服牛乘馬)의 복(服)자를 비(犕), 천지인온(天地絪縕)의 인온(絪縕)을 일운(㚃), 적상(的顙)의 적(的)자를 적(馰), 오품불손(五品不遜)의 손(遜)자를 손(愻), 조화분미(藻火粉米)를 조분미(璪黺䋛), 강색(剛塞)의 색(塞)자를 색(㥶), 병경(缾罄)의 경(罄)자를 경(), 훤초(諼艸)를 훤초(藼艸), 계여지족(啓予之足)의 족(足)자를 다(跢), 여유소립탁이(如有所立卓爾)의 탁이(卓爾)를 태작(), 적왕소개(敵王所愾)의 개(愾)자를 해(鎎), 비서(費誓)를 비서(粊誓), 범부(凡夫)는 굉자비(宏玆粃)를 인용하였다. 양암(諒闇)을 양음(瘖), 원수총좌(元首叢脞)의 총좌(叢脞)를 총솨(叢䐝) 서현(徐鉉)은 유()자로 썼다. 회변(會弁)을 괴변(䯤弁), 아흥수기패(我興受其敗)의 패자를 패(䢙), 잡이불월(雜而不越)의 월자를 월(䢕), 기미차종(旣微且尰)의 흉자를 종(), 증점(曾點)의 점자를 감(), 언언(言偃)의 언자를 언(㫃), 유능비예(有能俾乂)의 예자를 예(䢃), 아지불피(我之弗辟)의 피자를 벽(), 비음식(菲飮食)의 비자를 비(餥), 언말기마(言秣其馬)의 말자를 말(䬴), 상백(常伯)의 백자를 백(), 필작오복(弼作五服)의 필자를 필(), 설구장(褻裘長)을 설의장(絬衣長), 훼종엽행(毁宗躐行)의 엽자를 엽(●), 유가지색(惟家之索)의 색자를 색(), 일융의(壹戎衣)의 일자를 예(●), 이륜유두(彛倫攸斁)의 두자를 두(●), 슬피옥찬(瑟彼玉瓚)의 슬자를 슬(璱), 진진로(振振鷺)의 진자를 진(䟴), 면류(冕旒)의 유자를 유(瑬), 함옥(含玉)의 함자를 함(琀), 솔순(率循)의 솔자를 솔(䢦), 장솔(將率)의 솔자를 솔(), 고골(枯骨)의 고자를 고(), 방량(厖凉)의 방자를 방(●), 궤란(爛)의 궤자를 궤(●), 대부사왈졸(大夫死曰卒)의 졸자를 졸(), 면목여흑(面目黧黑)의 여자를 여(㿛), 신주(神主)의 주자를 주(宔), 기(朞)자를 기(稘), 석(石)자를 석(祏), 별성(別盛)의 성자를 성(晟), 별연(別然)의 연자를 연(嘫)이라고 한 따위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는 모두 하나의 뜻이 있으면 그에 해당되는 하나의 글자로써 해석하여 구별한 것이다.
또, 준(䜭)자의 풀이를 우서(虞書)에 준견회거천(䜭畎澮距川)이라 한 것을 인용하고, 천(川)자를 풀이하면서도 이 글을 인용하여 준(濬)이라 썼으며, 주(袾)자에는 정녀기주(靜女其袾)를 인용하고 주()자에도 이를 인용하였고 또 별도로 주(姝)자가 있는데 좋다[好]는 뜻이다. 질질(秩秩)을 혹은《시경》을 인용하여 질질(●●)이라 쓰기도 하고, 질질(豑豑) 또는 질질(袟袟)이라고 썼으며, 요(夭)자를 요(祅)라고도 인용하고 요(䄏)라고도 썼다. 기기(几几)를 인용하면서 견(掔), 또는 기(己)라고 썼으며 옹(이농절(而隴切) 자를 우렵위고(羽獵韋絝)라 하고 혹은 용()이라 쓰면서《서경》의 조수용모(鳥獸毛)를 인용하고, 또 용()이라고 쓰고는 다시《서경》을 인용하면서 용모(毛)라고 썼다.
사(汜)자에는《시경》을 인용하여 강유사(江有汜)라 하는가 하면 사(洰)자에도《시경》을 인용하면서 강유사(江有洍)라 하였고, 기(蘄)ㆍ은(䓄)ㆍ호() 세 자를 통틀어 강하(江夏)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라 하였다. 유(愉)자를 풀이하여 엷어진다[薄]는 뜻이라 하면서 사적유유(私覿愉愉)를 인용하였고, 점(坫)자를 병장[屛]이라 하였으니 반드시 그 아래에 있는 수색(樹塞)을 잘못 쓴 것이요, 석척약인(夕惕若夤)은 바로 간(艮)괘의 열인(列夤)의 인(夤)자를 합한 것이다. 날(涅)자는 일(日)자를 따르고 횡(湼)자는 구(臼)자를 따랐으며, 조(詔)ㆍ지(志)ㆍ봉(峯)ㆍ면(免) 등의 글자는 주(注)를 서술한 데만 있고 본문에는 그 자가 없으니 누락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상고하건대, 숙중(叔重)의 시대에는 이미 석경(石經)이 간정(刊定)되었는데, 어찌 이다지도 다른가? 대체로 한(漢) 나라 이후로 명물(名物)과 사건이 많이 새로 발생하여 명칭이 혼동되기 쉬우므로 차츰 그것을 구별하여 혹은 그 음을 바꾸고 혹은 변(邊)이나 방(旁)을 더하기도 하였다.
자학(字學)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드디어 한 글자마다 각기 한 가지 뜻만을 갖게 하고자 하여, 육조(六朝)와 당(唐)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증가한 것이 무수하였고, 사부(詞賦)를 지으면서 창조된 기이한 글자와 잘못 쓴 글자를 널리 모아 한데 묶어 수집하여, 중복되고 난잡하고 누락되며 번쇄(繁屑)한 것을 모두《설문》에 부록하였다.
한(漢) 나라 말기를 당하여 허씨는 분별해서 말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으나, 중고 이후로는 부득이 이를 전요(典要)로 삼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육서(六書) 고문의 자원(字原)을 몰랐으므로 한 나라 때에 습관적으로 쓰던 것과 증개한 것들을 인습하여 편집해 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그 잘못된 것을 상고해 보면 많아서 다 지적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설문》을 높이는 자들은 자기의 저서를 또한《설문》이라 하니, 이는 동시에 쓴 것이 아니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송(宋)ㆍ원(元) 이후로 여러 학자들이 변론하여 배척한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그러므로 위매(魏枚) 《육서정온(六書精蘊)》ㆍ왕응전(王應電) 《동문비고(同文備考)》ㆍ오원만(吳元滿) 《소원정의(溯原正義)》ㆍ《육서총요(六書總要)》ㆍ주모위(朱謨㙔) 《기자(奇字)》 는 다시 정초(鄭樵) 《육서략(六書略)》ㆍ양환(楊桓) 《육서통(六書統)》ㆍ대통(戴侗) 《육서고(六書考)》ㆍ주백기(周伯琦) 《육서정위(六書正譌)》를 바탕으로 고문(古文)을 추구(推究)하여 소전(小篆)의 잘못을 바로잡기에 온 정력을 다 하였는데도 조범부(趙凡夫)는 또 정(鄭)ㆍ대(戴)ㆍ위(魏)ㆍ오(吳)를 배격하였으며, 그가 지은《설문장전》은 한결같이 서현본(徐鉉本)《설문》을 주축으로 하였으니 그가 어찌《설문》이 온전한 허씨의 책이 아님을 알았겠으며, 또 어찌 허씨의 학이 온전한 한학(漢學)이 아니었음을 알았겠는가? 다만 자재(子才 위매(魏枚)의 자)의 무리들은 임의로 글자를 만들어 억설을 면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옛것을 잘 지킨 것만도 못하다.
그러나 범부(凡夫)의 예(殹)자와 방(匚)자에 대한 억설이야 또 말해 무엇하랴! 《설문장전(說文長箋)》에 “야(也)자를 반드시 예(殹)자로 쓰라.”고 한 주에 “반드시 예(殹)로 써야 한다.” 하였고, 호(好)자는 호()로, 상(像)자는 상(襐), 필(畢)자는 필(縪)로, 중(重)자를 중(緟)으로, 방(方)자를 방(匚)으로, 입(入)을 지(臸)로 썼는데, 우선 그 중 한두 가지를 검토해 보겠다. 야(也)자는 본래 이기(匜器)를 가리키는데 음이 이(移)이다. 그런데 야(也)자를 조사로 쓰기 때문에 이(匜)자로 써서 구별하였고, 방(匚)자는 본래 광(筐)자를 쓴 것으로서 고문(古文)에는 방(方)자를 방(匚)이라 썼는데, 너무 간단하므로 방(方)이라 쓴 것이다. 이제 수천 년을 상용한 야(也)자와 방(方)자를 쓰지 않고 새로 예(殹)와 방(匚)으로 써야 하겠는가?그러므로 범부(凡夫)가 어지럽게 고친 것과 위오(魏吳 위매(魏枚)ㆍ오원만(吳元滿)을 이름)가 새로 창조한 것은 그 병폐가 다를 것이 없다.
학자는 마땅히 석경(石經)과《사기》ㆍ《한서(漢書)》를 따르고 널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가지고 고증함으로써 고인(古人)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옳다. 금석(金石)인 한비(漢碑)와 통하는 것을 어찌 반드시 억지로 맞추어야 하겠으며,《설문》에 중복된 글자를 또 어찌 억지로 나누어야 하겠는가?”
나는 상고하건대, 서기성(徐騎省)의《오음운보(五音韻譜)》는 숙중(叔重)의《설문》원본을 가져다가 부거(部居)를 바꾸고 음절(音切)을 고쳐서 따로 이 책을 만들었는데, 단지 검토에는 편리하나 뜻은 제가(諸家)의 것을 그르쳤다. 이것이 유통하므로 세상에서 마침내 이것을 허씨의《설문》이라 여기니 잘못이다. 그리하여 서본(徐本)이 나오자 허본(許本)은 사라지게 되었다.
숙중본은 일(一)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로 끝났고, 정신본(鼎臣本 정신은 서현의 자)은 동(東)자에서 시작하여 갑(甲)자에서 끝났으니, 현재 통행본은 바로 서씨가 지은 것이다.
한산(寒山) 조범부(趙凡夫) 같은 이는 다시 그의 잘못을 답습하여《장전(長箋)》을 저술하고 제목을《설문》이라 한 것은 왜일까? 그가 스스로 《장전》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서, 스스로 허씨의 원본이 아님을 알면서도 억지로 《설문》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기성(騎省)의 운보(韻譜)는 비록 숙중의 본지는 아니나 검색에는 편리하므로 《장전》에서 모두 그 차서를 따르고 다만 그의 자구(字句)를 그르친 것과 음절(音切)을 바꾼 것 등에 대하여 원본을 고찰하여 간정(刊定)하였다.” 한 것이다.
그런데 고정림(顧亭林)은 이를 논박하여 “만력(萬曆) 말년에 오중(吳中) 사람 조범부 환광(趙凡夫宦光)이《설문장전》을 지었는데, 예부터 전해오는 오경(五經)을 자기 생각대로 간개(刊改)하여 작은 지혜를 가지고 선유(先儒)들과 다른 것을 구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청청자금(靑靑子衿)을 음분(淫奔)을 읊은 시라 하여 금(衿)자는 바로 금(衾)자라 하였는데, 《시경》에 본래 금(衾)자가 있으니, 포금여주(抱衾與裯)라고 한 것과 금금난혜(錦衾爛兮)라 한 것이 이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는 사실 사서(四書)도 제대로 외지 못해서 《논어》의 호시출어합(虎兕出於柙)을 인용하면서 ‘《맹자》의 호표출우갑(虎豹出于甲)’이라고 잘못 쓰기까지 하였다. 시(兕)자 아래에 보임 그러나 그는 육서(六書)의 본지에 대하여는 관견(管見)이 없지 않았는데, 마침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괴이한 것을 숭상하는 시대를 만나 이 책이 세상에 성행하여 지금까지 분변하지 못하니, 후일에 잘못된 것에 젖어 옳은 것을 그르다 하여 후세의 학자들에게 해가 됨이 적지 않을까 염려되므로 그 특히 잘못된 10여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하였는데, 이제 그 모두를 초록할 겨를이 없다.
《설문장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모두 4질, 40권으로서 강도(江都 강화도) 행궁(行宮)과 홍계희(洪啓禧)ㆍ재상 김치인(金致仁)ㆍ초재(蕉齋) 심염조(沈念祖)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역부(部) 이하 식부(食部)에서 갑부(甲部)까지 25부가 모두 누락되었는데, 위에 든 네 곳에 소장된 것이 모두 같으니, 아마 중국의 판본이 이와 같이 낙질된 모양이다. 아울러 기재하여 후세의 《설문》을 독실히 논하는 자들이 깊이 연구하기를 기다린다.
《설문》에 인용된 글이 육경(六經)과 다른 데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설문》에 인용된 경전은 바로 당시의 이본(異本)이다. 그러므로 숙중(叔重)은 다만 자기 집안에서 읽은 책만을 가지고 기재하고 다른 판본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그 한 예로《한서》채옹전(蔡邕傳)에 “채옹의 자는 백개(伯喈)로 영제(靈帝) 때 낭중(郞中)에 임명되어 동관(東觀)에서 교서(校書)하다가 의랑(議郞)으로 전직되었는데, 경적(經籍)은 성인이 지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르매 글자가 많이 잘못되었고, 속유(俗儒)들이 이를 천착하여 후학을 그르친다고 생각하여 희평(熹平 한 영제(漢靈帝)의 연호. 172~177) 4년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 당계전(唐谿典),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楊賜), 간의대부(諫議大夫) 마일제(馬日磾), 의랑(議郞) 장순(張馴)ㆍ한열(韓說), 태사령(太史令) 선양(單颺) 등과 함께 육경(六經) 문자를 정정(正定)할 것을 주달하자 영제가 이를 허락하므로 옹이 직접 비석에 쓰고 석공(石工)을 시켜 새겨서 태학(太學) 문 밖에 세웠다. 이에 후배 학자들이 모두 이를 표준으로 하여 오류(誤謬)를 바로잡았다. 비석이 처음 세워지자 구경꾼과 사본(寫本)을 뜨는 자들의 수레가 매일 천여 량이나 모여 거리를 메웠다.” 하였으니, 석경이 정해지기 전에는 육경의 문자가 사람마다 각기 달랐으므로 옹이 이러한 요청을 해서 정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숙중이 인용한 경전이 어찌 다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증거이다. 또 《후한서(後漢書)》 유림전(儒林傳)의 서문에 “본초(本初 한 환제(漢桓帝)의 연호) 이후로 유학(游學)이 증가하여 태학생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구(章句)는 점차 소홀히 하고 대부분 문장만을 숭상하여 선비의 기풍은 더욱 쇠퇴하였다. 당인(黨人)이 제거될 때 고명선사(高名善士)들이 대부분 연좌 유폐(流廢)되자, 이후에는 마침내 서로 다투고 고소하는가 하면 또 사사로이 뇌물을 써서 난대칠서경자(蘭臺漆書經字)를 자기들의 사문(私文)과 합치하게 만드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희평(熹平) 4년에 영제(靈帝)가 마침내 여러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을 정정하여 비석에 새기되, 고문(古文)ㆍ전서(篆書)ㆍ예서(隸書)의 3체 서법으로 써서 태학문에 세워서 모든 사람들이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했으며, 주에 “고문(古文)은 공자의 벽중(壁中)에서 나온 글이고, 전서(篆書)는 진 시황(秦始皇)이 정 막(程邈)을 시켜서 만든 것이며, 예서(隸書)도 역시 정막이 바친 것인데, 도예(徒隸)들을 다스리는 데 썼으므로 간편함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이순전(李巡傳)에도 나타나 있다. 순(巡)은 여양(汝陽) 사람으로 영제(靈帝) 때에 환관이 되었다. 순은 모든 박사들이 갑을과(甲乙科)를 시험하면서, 서로 고하(高下)의 등급을 다투는가 하면 서로 고발하고 심지어는 뇌물을 써서 난대칠서경자(蘭臺漆書經字)를 자기들의 사문(私文)과 맞추려는 자까지 있다 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모든 학자들과 함께 오경(五經) 문자를 돌에 새겼다. 이로부터 오경이 한번 정해지자 다투는 자들이 없게 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이보다 앞서 모든 학자들이 오경 문자의 사기(私記)를 가지고 있었는데 각기 이동(異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또한 한 가지 증거이며, 또 황백사(黃伯思)의 《동관여론(東觀餘論)》을 상고해 볼 때 한석경(漢石經)이 금문(今文)과 같지 않은 것이 또 한 가지 증거이다. 상고하건대, 만사동(萬斯同)의 〈한위석경잔비(漢魏石經殘碑)〉에는 현재 경전의 문자와 다른 것이 많으니, 숙중(叔重)이 인용한 경전의 글자가 다른 것이 뭐 족히 의심스럽겠는가.
또 고염무는 말하기를 “오경(五經) 문자가 같지 않은 것이 많다. 같은 한 경이면서도 다른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상심(桑葚)은 위시(衛詩)에 보이는데 노송(魯頌)에는 심(黮)자로 되었고, 창궁(鬯弓)은 정풍(鄭風)에 나타났는데 진풍(秦風)에는 창(韔)자로 되었으며, 같은 《좌전(左傳)》에서 초(楚) 나라의 기사에 있어 위씨(薳氏)를 혹은 위씨(蔿氏)로, 잠윤(箴尹)을 혹은 침윤(鍼尹)이라 했다.” 하였다. 〈경전을 기재하면서도 이러하였는데〉 하물며 종정(鍾鼎)에 기재된 문자와 제유(諸儒)들이 기록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예기》의 ‘서동문(書同文)’이라 한 것은 또한 그 대략을 말한 것이다. 나는 이로써 숙중(叔重)의 《설문》에 경을 인용한 것이 다르게 된 것을 증명한다. 석고문(石鼓文)의 주에, “《설문》에 남아 있는 주서(籒書)가 2백 3자인데 석고에는 겨우 ‘鼎’ㆍ‘’ㆍ‘’ㆍ‘●’ㆍ‘●’ㆍ‘’ㆍ‘雩’ㆍ‘’ 등 9자만 있다.” 하였다.

[주C-001]《설문(說文)》에 …… 변증설 : 본 변증설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에 인용된 경문(經文)이 현재의 경문과 일치하지 않는 점과 기타의 오류(誤謬)에 대하여, 주로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 방중리(方中履)의 《고금석의(古今釋疑)》, 주양공(周亮工)의 《서영(書影)》, 조환광(趙宦光)의 《설문장전(說文長箋)》등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 오주는 이에 대하여 허신이 사용한 경전은 당시의 이본(異本)으로서 오경의 정문이 정정(定正)되기 이전의 각 개인의 사기(私記)이므로 한 영제(漢靈帝) 희평(熹平) 4년(175)에 정정된 현재의 경전과 다르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번역과 역주에 있어 주로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 예문인서관(藝文印書館) 1973 영인본)》를 사용하였다.
[주D-001]10여 인의 학설 : 《일지록(日知錄)》 제21권 설문(說文) 조의 고염무의 주에 양신(楊愼)의 육서색은 서(六書索隱序)를 인용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설문》에 학설이 인용된 자는, 공자ㆍ초 장왕(楚莊王)ㆍ좌씨(左氏)ㆍ한비(韓非)ㆍ회남왕(淮南王)ㆍ사마 상여(司馬相如)ㆍ동중서(董仲舒)ㆍ경방(京房)ㆍ위굉(衛宏)ㆍ양웅(揚雄)ㆍ유흠(劉歆)ㆍ상흠(桑欽)ㆍ두림(杜林)ㆍ가규(賈逵)ㆍ부의(傅毅)ㆍ관박(官薄)ㆍ담장(譚長)ㆍ왕육(王育)ㆍ윤동(尹彤)ㆍ장림(張林)ㆍ황호(黃顥)ㆍ주성(周盛)ㆍ녹안(逯安)ㆍ구양교(歐陽僑)ㆍ영엄(甯嚴)ㆍ원예(爰禮)ㆍ서순(徐巡)ㆍ장도(莊都)ㆍ장철(莊徹) 등 29인으로 되어 있다.
[주D-002]강유사(江有汜) : 국풍(國風) 소남(召南)의 편명. 사(汜)는 본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강이 다시 본줄기로 흘러 드는 곳. 단옥재(段玉裁)는 “사(洍)라고 쓴 것은 삼가시(三家詩)를 따른 것이고, 사(汜)는 모시(毛詩)를 따른 것이다.” 하였다. 《說文解字 洍字註》
[주D-003]방구잔공(旁逑孱功) : 널리 의견을 모아 일을 잘 처리한다는 뜻. 현재 요전(堯典)에는 “方鳩僝功”이라 보인다. 《설문해자》 구(逑) 자의 단주(段註)에는 “대체로 《고문상서(古文尙書)》에는 방(方) 자를 쓰고 《금문상서》에는 방(旁) 자를 썼으니 이는 《금문상서》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4]적석기기(赤舃己己) : 현재 빈풍(豳風) 낭발(狼跋)에는 “公孫碩膚 赤舃几几”라 보이는데, 적석은 붉은 신, 기기는 점잖고 의젓한 모양이다. 《설문해자》 근(巹) 자의 단주(段註)에는 “几几 各本作己己 昏義釋文 作几几 今據以正之”라 하였고, 또한 견(掔) 자 주에는 “掔掔 當依豳風 作几几”라 하였다.
[주D-005]진(秦) 자 …… 것이라 : 《설문해자》에서 진(秦)을 “백익(伯益)의 후손이 봉해진 나라이다. 토지가 벼[禾]에 알맞다. 화(禾)를 따랐고 춘(春) 자를 줄인 것이다. 진(秦)은 벼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 것을 이름이다.
[주D-006]무왕재패(武王載旆) : 《시경》 상송(商頌) 장발(長發)에 보이는데, 무왕(武王)은 탕왕(湯王)을 가리키고, 재패(載旆)는 깃발을 세운다는 뜻이다.
[주D-007]위(威) 자를 시어미[姑] : 《설문해자》 위(威) 자에 “姑也 從女戌聲 漢律曰婦告威姑”라 하였다.
[주D-008]야(也) 자를 여음 : 본서 남녀근자 상형변증설(男女根字象形辨證說) 참조.
[주D-009]학(貉) 자의 …… 말이겠는가 : 《설문해자》의 학(貉)ㆍ견(犬)ㆍ구(狗) 자 조에 각기 공자의 말로 되어 있다.
[주D-010]복중(卜中) : 《설문해자》 용(用) 자에 “시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복중(卜中)을 따랐는데 이는 위굉(衛宏)의 설이다.” 하였다. 이는 용(用) 자를 전서에서 ‘●’로 썼기 때문에 복중(卜中)을 따랐다고 한 것이다.
[주D-011]욕(辱) 자를 …… 놓친 것 : 《설문해자》 욕(辱) 자에 “恥也 從寸在辰下 失耕時 於封畺上戮之也 辰者 農之時也 …… ”라고 보인다.
[주D-012]삼(參) …… 한 것 : 《일지록》 제21권 설문(說文) 조 전씨(錢氏)의 주에는 “《설문》에는 본래 삼(參)과 상(商)을 모두 별의 이름이라 하였고, 삼(參) 자를 상(商)이라고 풀이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주D-013]노래로써 …… 명명하였습니다 : 《송서(宋書)》 제19권 악지(樂志) 1에 보인다.
[주D-014]서현(徐鉉) …… 정한 것 : 《일지록》 제21권 설문 조의 황여성(黃汝成)의 주에 “고씨(顧氏)가 사성(四聲)으로 배열되어 있다 한 것은, 이도(李濤)가 편집한 《오음운보(五音韻譜)》이고, 서현 등이 정한 것이 아니다 …… ” 하였다.
[주D-015]현재 …… 것이다 : 전대흔(錢大昕)은 “주고(朱翶)는 독자적으로 반절(反切)을 만들어서, 《당운(唐韻)》의 반절과는 다른 것이니, 조고칙(趙古則)의 말은 잘못이다.” 하였다. 《日知錄 說文條 註》
[주D-016]지극하도다 …… 시작된다 : 《주역》 곤괘(坤卦) 단사(彖辭)에 보인다.
[주D-017]크도다 …… 시작된다 :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보인다.
[주D-018]이양빙(李陽氷) : 당(唐) 나라 조군(趙郡) 사람. 자는 소온(少溫). 문장과 전서(篆書)에 능하였는데 그의 전서는 특히 유명해서 “당(唐) 3백 년 간에 전서로 일컬을 자는 오직 양빙(陽氷)일 뿐이다.”라고까지 하였으며, 또 창힐(蒼頡)의 후신이라고도 한다. 《全唐詩 10, 全唐文 437》
[주D-019]서개(徐鍇) : 남북조 시대 남당(南唐)의 학자. 자는 초금(楚金), 서현(徐鉉)의 아우. 저서에 《설문계전(說文繫傳)》ㆍ《설문해자운보(說文解字韻譜)》가 있다. 《宋史 卷44》
[주D-020]심약(沈約)의 운 : 심약이 《사성보》에서 1백 6운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주D-021]방중리(方中履) : 청(淸) 나라 때 학자. 자는 소백(素伯). 저서에 《한청각집(汗靑閣集)》ㆍ《고금석의(古今釋疑)》 등이 있다. 《淸史 卷499 列傳 285 方以智》
[주D-022]양신천(楊辛泉) : 신천은 원(元) 나라 학자 양환(楊桓)의 호. 전주(篆籒)에 관한 학문에 특히 정통했다. 저서에 《육서통(六書統)》ㆍ《육서소원(六書泝源)》ㆍ《서학정운(書學正韻) 》등이 있다. 《元史 卷164 本傳》
[주D-023]위자재(魏子才) : 자재(子才)는 명 세종(明世宗) 때의 학자인 위교(魏校)의 자. 호는 장 거(莊渠). 저서에 《주례연혁전(周禮沿革傳)》ㆍ《대학지귀(大學指歸)》ㆍ《육서정온(六書精蘊)》 등이 있다. 《明史 卷282 儒林傳一》
[주D-024]오경보(吳敬甫) : 경보(敬甫)는 명 신종(明神宗) 때의 학자인 오원만(吳元滿)의 자.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만을 힘썼는데 특히 자학(字學)에 밝았다. 저서에 《육서정의(六書精義)》ㆍ《육서총요(六書總要)》ㆍ《육서소원직음(六書溯原直音)》ㆍ《해성지남(諧聲指南)》 등이 있다. 《四庫全書總目提要 經部 小學類》
[주D-025]유(劉) 자 …… 분명하다 : 전대흔(錢大昕)이 이에 대해 “《설문》 죽부(竹部)에 유(藰) 자가 있는데 ‘從竹劉聲’이라 하였으니, 본래는 유(劉) 자가 있었던 것이 옮겨 쓰면서 빠진 것이다.” 하였다. 《日知錄 註》
[주D-026]유성(由聲) …… 없으니 : 유(油) 자에 “從水由聲”이라 한 것과 축(舳) 자에 “從舟由聲”이라 한 것 등을 말한다.
[주D-027]자(㜽)자와 …… 같은 것 : 자(㜽) 자는 자(子) 자의 고자(古字). 수() 자는 수(首) 자의 고자이다.
[주D-028]주자(疇咨) :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疇咨若時 登庸”이라 보이는데, 주(疇) 자는 ‘누구[誰]’라는 뜻이고, 자(咨) 자는 조사이다.
[주D-029]12신(辰) : 십이지(十二支)를 이르는데, 《설문》의 자(子) 자에는 “11월에 양기(陽氣)가 움직여 만물이 자라므로 사람들이 이로써 명칭을 삼은 것이다.” 하였고, 축(丑) 자에는 “잇는다는 뜻이니 12월에 만물이 용사(用事)한다.” 한 것 등을 말한다.
[주D-030]금생화사(金生火死) : 《설문》 맥(麥) 자에 “金王而生 火王而死”라 보이는데, 보리는 금기(金氣)가 왕성한 가을에 나서 화기(火氣)가 왕성한 여름에 죽는다는 뜻이다.
[주D-031]돼지가 달아나는 것[豚走] : 《설문》 축(逐) 자에는 “追也 從辵豕省聲”이라고 보인다.
[주D-032]도생(逃省) : 《설문》 부(頫) 자에 “低頭也 從頁逃省”이라 한 것을 말한다.
[주D-033]노(勞)자를 형화소문(熒火燒門) : 《설문》 노(勞) 자에 “勮也 從力熒省焱火 燒冖用力者勞”라 한 것을 줄인 말이다.
[주D-034]구장(竘匠) : 일문(逸文) 편에 보인다. 《설문》 구(竘) 자에 “竘 健也”라고 보인다.
[주D-035]사분민지산(士分民之祘) : 사(士)가 백성의 수효를 나눈다는 말이다. 산(祘) 자는 산(算) 자와 뜻이 같다.
[주D-036]유묘유계(維緢有稽) : 《서경》 여형(呂刑)에는 “惟貌惟稽”라 보이는데, 오직 그 용모를 살피라는 뜻이다. 《설문》 묘(緢) 자의 단주(段註)에는 “호리(豪釐)를 살피라는 뜻이다.” 하였다.
[주D-037]잔잔교언(戔戔巧言) : 능숙한 솜씨로 남을 해치는 교묘한 말. 현재 《서경》 진서(秦誓)에는 “截截善諞言”이라 보인다.
[주D-038]서건자(噬乾) : 건포(乾脯)를 씹다. 서합괘(噬嗑卦) 구사(九四) 효사에는 “噬乾胏得金矢”라 보인다.
[주D-039]승마전여(乘馬驙如) :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뜻. 둔괘(屯卦) 육이(六二) 효사에는 “乘馬班如”라고 보인다.
[주D-040]발이온숭지(癹以蘊崇之) : 풀에 베어 쌓아서 썩게 함. 은공(隱公) 6년 조에는 “芟夷蘊崇之”라 보이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芟 刈也 夷 殺也 崇 聚也”라 하였다.
[주D-041]이비진삼각(以備陳三愙) : 양공(襄公) 25년에는 “以元女 太姬 配胡公 封諸陳 以備三恪”이라 보이는데, 무왕(武王)이 우알보(虞閼父)의 아들 호공(胡公)에게 장녀를 시집보내고 진(陳)에 봉하여 3각(恪)을 세웠다는 말이다. 3각은 진(陳)ㆍ기(杞)ㆍ송(宋)의 3국을 이르니, 두예(杜預)의 주에 “주(周) 나라가 우(虞)ㆍ하(夏)ㆍ은(殷)의 후손을 봉하여 공경하는 뜻을 보였으므로 3각이라 한다.” 하였다. 우알보는 우(虞) 나라 순(舜) 임금의 후손이다.
[주D-042]경석(滰淅) : 《설문해자》 경(滰) 자 조에 “浚乾漬米也 孟子去齊 滰淅而行”이라 보이는데, 현재 《맹자》 진심 하(盡心下)와 만장 하(萬章下)에는 모두 접석(接淅)으로 보인다. 접(接)은 받는다[承]는 뜻. 석(淅)은 쌀을 씻은 물이니,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어 놓았다가 갑자기 떠나고자 하여 쌀을 물에서 건져 가지고 그냥 떠나는 것을 말한다.
[주D-043]기마기도(旣禡旣禂) : 이미 마제(禡祭)를 지내어 빌었다는 뜻. 마제는 전쟁 때 군사가 주둔한 곳에서 군법을 처음 제정한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설문해자》 도(禂) 자 조 단옥재(段玉裁)의 주에 “서개(徐鍇)가 《시경》을 인용하여 ‘기마기도(旣禡旣禂)’라 하였는데 《시경》에는 이런 말이 없다. 그런데 서현(徐鉉)이 잘못하여 《설문》의 본문에 삽입한 것이다.” 하였다.
[주D-044]왕삼숙 삼제 삼도(王三宿三祭三㓃) : 왕이 세 번 앞으로 나가 술을 부어 잔을 올리고 물러나온 것을 이른다. 《서경》 고명(顧命)에는 “王三宿三祭三咤”라 보이는데 채침(蔡沈)의 주에 “宿 進爵也 祭 祭酒也 咤 奠爵也 禮成於三 故三宿三祭三咤”라 하였다.
[주D-045]항룡(亢龍) : 높이 올라간 용. 《주역》 건괘(乾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亢龍有悔”라 한 것을 이른다.
[주D-046]재삼독(再三瀆) : 두 번 세 번 점치면 신(神)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주역》 몽괘(蒙卦) 괘사(卦辭)에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독(黷) 자 조에는 “握持垢也 易曰再三黷”이라 하였다.
[주D-047]기우체(其牛掣) : 《주역》 규괘(睽卦) 육삼(六三) 효사에 “見輿曳 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체(觢) 자 조에는 “一角仰也 易曰其牛觢”라 하였다.
[주D-048]풍기옥(豐其屋) : 그 집을 풍성하게 한다는 뜻. 《주역》 풍괘(豐卦) 상륙(上六) 효사에 “豐其屋 蔀其家”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풍(豐) 자 조에는 “大屋也 易曰풍其屋”이라 하였다.
[주D-049]복우승마(服牛乘馬) : 소를 길들이고 말을 탄다는 뜻. 《주역》 계사 하(繫辭下) 2장에 “ 服牛乘馬 引重致遠 以利天下”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비(犕) 자 조에는 “易曰犕牛乘馬”라 하였다.
[주D-050]천지인온(天地絪縕) : 천지의 기운이 화합한다는 뜻. 《주역》 계사 하 5장에 “天地絪縕 萬物化醇”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운()자 조에는 “易曰㚃”이라 하였다.
[주D-051]적상(的顙) : 이마가 흰 말. 별박이ㆍ대성마(戴星馬). 《주역》 설괘전(說卦傳) 11장에 “震 …… 其於馬也 …… 爲的顙”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적(馰) 자 조에는 “馬白額也 易曰爲馰顙”이라 하였다.
[주D-052]오품불손(五品不遜) : 오륜(五倫)의 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뜻. 《서경》 순전(舜典)에 “命契 百姓不親 五品不遜”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손(愻) 자 조에는 “順也 唐書曰五品不愻”이라 하였다.
[주D-053]조화분미(藻火粉米) : 조(藻)는 수초(水草)로서 무늬가 있는 것, 화는 불, 분미(粉米)는 흰쌀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보인다. 《설문해자》 조(璪) 자 조에는 “虞書曰璪火粉米”라 하였다.
[주D-054]강색(剛塞) : 강건(剛健)하고 독실하다는 뜻.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剛而塞”이라 하고, 채침의 주에 “剛而塞者 剛健而篤實也”라 하였고 《설문해자》 색(㥶) 자에는 “實也 虞書曰剛而㥶”이라 하였다.
[주D-055]병경(缾罄) : 술병이 비었다는 뜻.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 3장에 “缾之罄矣 維罍之恥”라고 보이는데, 《설문해자》 경() 자에는 “空也 詩曰甁之矣”라 하였다.
[주D-056]훤초(諼艸) : 원추리. 《시경》 위풍(衛風) 백혜(伯兮) 4장에 “焉得諼草 言樹之背”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훤(藼) 자에는 “令人忘憂之艸也 詩曰安得藼艸”라 하였다.
[주D-057]계여지족(啓予之足) : 증자(曾子)가 임종시에 제자들에게 한 말로서 이불을 걷고 나의 발을 보라는 뜻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라 보인다.
[주D-058]여유소립탁이(如有所立卓爾) : 앞에 우뚝 세워 놓은 것이 있는 듯싶다는 말. 안연(顔淵)이 공자를 찬양한 말.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주D-059]적왕소개(敵王所愾) : 왕의 노여움을 받다. 《좌전》 문공(文公) 4년에 “諸侯敵王所愾 而獻其功”이라 하고 두예(杜預)의 주에 “敵猶當也 愾恨怒也”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희(鎎) 자에는 “怒也 春秋傳曰 諸侯敵王所鎎 而獻其功”이라 하였다.
[주D-060]비서(費誓) : 《서경》 주서(周書)의 한 편명. 비(費)는 산동(山東)의 비현(費縣)에 해당하는 곳인데 이 편은 노(魯) 백금(伯禽)이 회이(淮夷)를 정벌하기에 앞서 군사들에게 행한 훈시라 한다. 《설문해자》 비(粊) 자에는 “惡米也 周書粊書”라 하였다.
[주D-061]양암(諒闇) : 천자가 거상(居喪)하는 동안을 이른다.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는 “高宗諒陰”이라 보이고, 《논어》 헌문(憲問)에는 “高宗諒闇 三年不言”이라 보인다.
[주D-062]원수총좌(元首叢脞) : 《서경》 익직(益稷)에 실려 있는 고요(皐陶)의 갱재가(賡載歌) 중의 일절로서 “元首叢脞哉 股肱惰哉 萬事墮哉”라 보이는데, 임금이 번쇄(煩碎)하면 신하들이 게을러져서 모든 일이 잘못된다는 뜻이다.
[주D-063]회변(會弁) : 회(會)는 옷 같은 것을 꿰맨 솔기, 변(弁)은 백록비(白鹿皮)를 여러 장 합해서 만든 주(周) 나라 관의 일종.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에 “有匪君子 充耳琇瑩 會弁如星”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괴(䯤) 자에는 “骨擿之可會髮者 詩曰䯤弁如星”이라 하였다.
[주D-064]아흥수기패(我興受其敗) : 나는 일어나 멸망을 당하겠다는 뜻. 《서경》 미자(微子)에 “商今其有災我興受其敗”라 보이는데, 이는 상(商) 나라가 망하려 할 때 미자가 나라 떠날 것을 결심하고 기자(箕子)와 상의하자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기자의 답변이다. 《설문해자》 패(䢙) 자에는 “也 周書曰我興受其䢙”라 하였다.
[주D-065]잡이불월(雜而不越) : 복잡하면서도 마땅한 범위를 넘어 잘못되지 않는다는 뜻. 《주역》 계사하(繫辭下) 6장에 “其稱名也 雜而不越”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월(越)자에는 “踰也 易曰襍而不”이라 하였다.
[주D-066]기미차종(旣微且尰) : 이미 정강이에 종기가 나고 다리가 부었다는 뜻.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 6장에 “旣微且尰 爾勇伊何”라고 보이는데 《설문해자》 종(瘇) 자에는 “脛氣腫 詩曰旣微且瘇”이라 하였다.
[주D-067]증점(曾點) : 증자(曾子)의 아버지. 자는 석(晳), 공자의 제자. 《설문해자》 감()자 에는 “雖晳而黑也 古人名字晳”이라 하였다.
[주D-068]언언(言偃) : 춘추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자는 자유(子游). 공자의 제자로서 문학에 능하였다. 《설문해자》 언(㫃) 자에는 “旌旗之游㫃貌 古人名㫃 字子游”라 하였다.
[주D-069]유능비예(有能俾乂) : 유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겠다는 뜻. 《서경》 요전(堯典)에 보이는데, 요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인재를 구하면서 한 말이다. 《설문해자》 예(䢃) 자에는 “治也 虞書曰有能俾䢃”라 하였다.
[주D-070]아지불피(我之弗辟) : 《서경》 금등(金縢)에 “周公乃告二公曰 我之弗辟 我無以告我先王”이라 보인다. 이는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이 섭정하였는데,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이 “주공은 장차 성왕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므로, 주공이 내가 이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면 의리상 선왕에게 고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설문해자》 벽() 자에는 “法也 周書曰 我之不”이라 하였다. 피(辟) 자에 대하여 채전(蔡傳)에는 정현(鄭玄)의 설을 인용하여 “辟讀爲避”라 하였고, 공씨전(孔氏傳)에는 “辟法也”라 하였다.
[주D-071]비음식(菲飮食) : 비자는 박(薄) 자의 뜻이니, 음식을 간략하게 먹는다는 뜻으로 《논어》 태백(泰伯)에 “공자가 ‘우 임금은 흠잡을 수 없다. 음식은 박하게 하고, 귀신에게 효도하였다’ 했다.[子曰 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라고 보인다.
[주D-072]언말기마(言秣其馬) : 《시경》 주남(周南) 한광(漢廣)에 “之子于歸 言秣其馬”라 보이는데, 이는 신부가 타고 올 말에게 먹이를 먹이겠다는 뜻이다.
[주D-073]필작오복(弼作五服) : 임금을 보좌하여 오복(五服)의 제도를 만들다. 《서경》 익직(益稷)에 보이는데, 작(作) 자가 성(成) 자로 되어 있다. 오복(五服)은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주위를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으로서, 상고의 오복은 전(甸)ㆍ후(侯)ㆍ수(綏)ㆍ요(要)ㆍ황(荒)이고 주(周) 나라 때는 후(侯)ㆍ전(甸)ㆍ남(男)ㆍ채(采)ㆍ위(衛)라 하였는데, 1복은 5백 리이다. 《설문해자》 필() 자에 “輔信也 虞書曰 成五服”이라 하였다.
[주D-074]설구장(褻裘長) : 설구를 길게 만들어 입었다는 뜻. 설구는 집에서 입는 평복의 갖옷이다. 《논어》 향당(鄕黨)에 보인다. 《설문해자》 설(絬) 자에는 “衣堅也 論語曰 絬衣長”이라 하였다.
[주D-075]훼종엽행(毁宗躐行)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及葬 毁宗躐行 出于大門”이라 보이는데, 이는 장사 때가 되면 종묘문의 서쪽 담을 헐고 밟고서 대문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주D-076]유가지색(惟家之索) : 집안이 소삭(蕭索)해짐. 《서경》 목서(牝誓)에 “古人有言曰 牧鷄無晨 牝鷄之晨 惟家之索”이라 하고, 채전(蔡傳)에 “索 蕭索也”라 하였다.
[주D-077]일융의(壹戎衣) : 한 번 싸움. 《서경》 무성(武成)에 “一戎衣 天下大定”이라 보이는데, 이는 무왕(武王)이 한 번 군복을 입으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는 말이다. 《설문해자》 예(殪) 자에 “死也”라 하고, 단주(段注)에 “中庸言壹戎衣 注衣讀爲殷 聲之誤也 壹戎殷者 一用兵而伐殷也”라 하였다.
[주D-078]이륜유두(彝倫攸斁) : 이륜(彝倫)이 무너지다. 이륜은 상도(常道)를 이름. 《서경》 홍범(洪範)에 보인다. 《설문해자》 두(●) 자에는 “敗也 商書曰 彛倫攸殬”라 하였다.
[주D-079]슬피옥찬(瑟彼玉瓚) : 아름다운 옥찬. 옥찬은 창주(鬯酒)를 담는 제기(祭器)의 이름. 규찬(圭瓚).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 2장에 “瑟彼玉瓚 黃流在中”이라 보인다. 《설문해자》 슬(璱) 자에는 “詩曰 璱彼玉瓚”이라 하였다.
[주D-080]진진로(振振鷺) : 《시경》 노송(魯頌)의 유필(有駜)에 “振振鷺 鷺于飛”라 보이는데, 진진(振振)은 떼지어 나는 모양, 노(鷺)는 곧 춤출 때 손에 드는 백로의 깃을 말한다.
[주D-081]면류(冕旒) : 옛날에 대부 이상이 조의(朝儀)나 제례(祭禮) 때 쓰는 예관, 유(旒)는 관의 앞뒤로 끈에 꿰어 늘어뜨린 구슬. 천자는 12, 제후는 9, 상대부는 7, 하대부는 5로 한다. 《설문해자》 유(瑬) 자에 “垂玉也 冕飾”이라 보인다.
[주D-082]함옥(含玉) : 장례 때 죽은 사람의 입에 넣어주던 옥으로서, 천자는 옥(玉), 제후는 벽(璧), 사(士)는 패(貝)를 사용하였다. 《설문해자》 함(琀) 자에 “送死口中玉也”라 하고, 단주(段注)에 ‘經傳多用含 或作琀’이라 보인다.
[주D-083]방량(庬涼) : 얼룩소. 《좌전》 민공(閔公) 2년에 “尨涼冬殺”이라 하였는데, 《설문》 양(㹁) 자에는 “牻牛也 春秋傳曰 牻㹁”이라 하였다.
[주D-084]대부사왈졸(大夫死曰卒) : 대부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한다. 《예기》 곡례(曲禮)에 보인다. 《설문》 졸() 자에는 “大夫死曰”이라 하였다.
[주D-085]준견회거천(䜭畎澮距川) : 전간(田間)의 수도(水道)를 터서 내에 이르게 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보인다.
[주D-086]정녀기주(靜女其袾) : 《시경》 패풍(邶風) 정녀(靜女)에는 정녀기주(靜女其姝)로 되어 있다. 주주(朱注)에 “靜者 閒雅之意 姝 美色也”라 하였다.
[주D-087]질질(秩秩) : 차서가 있는 모양.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秩秩斯干”이라 보인다. 《설문》 질(●) 자에 “讀若詩●●大獻”이라 하였고, 질(豑) 자에는 “虞書曰平豑東作”이라 한 것을 이른다.
[주D-088]우렵위고(羽獵韋絝) : 우렵을 복건(服虔)은 “士卒負羽也”라 하고, 유향(劉向)은 “羽 箭也 言使士卒負箭而獵”이라 하였다. 위고(韋絝)는 가죽으로 지은 바지이다.
[주D-089]조수용모(鳥獸毛) : 조수가 솜털이 나다. 요전(堯典)에 보인다.
[주D-090]사적유유(私覿愉愉) : 개인적으로 만날 때에는 유유(愉愉)하게 하다. 《논어》 향당(鄕黨)에 보이는데, 정현(鄭玄)의 설에 의하면 유유(愉愉)는 용색(容色)이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주D-091]점(坫)자를 …… 것이요 : 《논어》 팔일(八佾)에 보이는데, 반점(反坫)은 흙을 돋우어서 만든 술잔을 놓는 대(臺)이고 수(樹)는 병장(屛墻)을 말한다.
[주D-092]석척약인(夕惕若夤) …… 것이다 : 《주역》 건(乾)괘 구삼(九三) 효사에 “夕惕若 厲无咎”라 한 것과 간(艮)괘 구삼 효사에 “列其寅 厲”라 한 것을 말한다. 같은 《설문》에서도 척(䯜) 자에서는 “讀若夕惕若厲”라고 하였다.
[주D-093]청청자금(靑靑子衿) : 파란 그대의 옷깃이라는 뜻으로 《시경》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보인다. 이에 대하여 모시 서(毛詩序)에는 학교가 폐지됨을 풍자한 것이라 하였고, 주자는 음분시(淫奔詩)라 하였다.
[주D-094]포금여주(抱衾與裯) : 이부자리를 안고 자다. 《시경》 소남(召南) 소성(小星)의 한 구절이다.
[주D-095]금금난혜(錦衾爛兮) : 비단 이불이 눈부시다는 뜻. 《시경》 당풍(唐風) 갈생(葛生)에 보이는데, 이 시는 남편이 정역(征役)에 나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 자신의 외로움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라 한다.
[주D-096]호시출어합(虎兕出於柙) : 범과 들소가 우리에서 빠져나옴. 계씨(季氏)에 보인다.
[주D-097]10여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 “만력(萬曆) 말년에 ~ 10여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까지의 대문은 《일지록》 제21권, 《설문장전》조에 보인다.
[주D-098]상심(桑葚)은 …… 되었고 : 위풍(衛風) 맹(氓)에 “아, 저 비둘기여! 오디는 따먹지 말라. [于嗟鳩兮 無食桑葚]” 하고,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솔개가 훌쩍 날아 반궁 숲 속에 모여들어 우리 오디를 따먹는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한 것을 이른다.
[주D-099]창궁(鬯弓) : 대숙우전(大叔于田)에 “활집ㆍ전통 다 풀어 활과 살을 넣어 두네.[抑釋掤忌 抑鬯弓忌]” 한 것을 이른다. 주주(朱註)에 “鬯與韔同”이라 하였다.
[주D-100]창(韔) : 창(韔)은 활집. 진풍(秦風) 소융(小戎)에 “交韔二弓”이라 한 것을 이른다.
[주D-101]위씨(薳氏)를 …… 했다 : 위엄(蔿掩)을 양공(襄公) 25년 조에서는 위엄(蔿掩)이라 하고 ,소공(昭公) 13년 조에서는 위엄(薳掩)이라 한 것 등과, 잠윤고(箴尹高)를 정공(定公) 4년 조에서는 침윤고(鍼尹固)라 하고, 애공(哀公) 16년 조에는 잠윤고(箴尹高)라고 하는 등 일정하지 않은 것을 이른다.
[주D-102]서동문(書同文) : 주 19)의 동서문자(同書文字) 참조.
 
태조 7년 무인(1398,홍무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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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26일 (기사)
조사의·이염 등을 옥에 가두고 정진 등을 충군하고 이조 등을 귀양보내다

전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이조 의랑(吏曹議郞) 이조(李慥)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정진(鄭津)과 강택(康澤)을 전라 수군(全羅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대장군 한규(韓珪)·손원만(孫原萬)·송천우(宋千佑)를 경상 수군(慶尙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사복 경(司僕卿) 이보검(李寶劍)과 장군 임득방(任得邦)은 강원 수군(江原水軍)에 충군(充軍)하고, 전 장군 하승해(河承海)를 풍해 수군(豊海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목인해(睦仁海)·박미(朴)·이천우(李千祐)는 청해 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이조(李慥)를 흥덕진(興德鎭)으로, 강계권(康繼權)을 각산(角山)으로, 정신의(鄭臣義)를 영해진(寧海鎭)으로, 오몽을(吳蒙乙)을 이산진(伊山鎭)으로, 장군 조홍(趙洪)과 전 장군 이등(李登)을 순성진(蓴城鎭)으로, 군자감(軍資監) 김우(金宇)와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남포진(藍浦鎭)으로 귀양보내고, 김사행(金師幸)과 조사의(趙思義) 등 21인을 사유(赦宥)하였다.
【원전】 1 집 135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행형(行刑) / *군사-지방군(地方軍)

 
정종 2년 경진(1400,건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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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일 (을축)
장군들의 모임인 장군방을 혁파하다

장군방(將軍房)을 혁파하였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장무(掌務)의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가 있어서, 새로 장군(將軍)에 제수된 자가 있으면, 그 방주와 장무가 반드시 그 족속(族屬)을 상고하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연후에야, 새로 제수된 자가 그 임무를 행할 수 있었는데, 국초(國初)에도 그 제도를 인습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주D-001]장군방(將軍房)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장군(將軍) 이상이 모여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곳. 고려 중방(重房)의 후신으로, 정종 2년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 6년에 호군방(護軍房)으로 다시 부활시켰음.
[주D-002]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 : 관원이 새로 임명되어 올 때, 그 관부의 방주(房主)와 장무(掌務)가 모여서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고, 또 찬성 여부를 서명하던 일.
 
태종 5년 을유(1405,영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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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19일 (신해)
압량위천한 전 판사 이덕시를 강화로 귀양보내다. 신문고

전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를 강화(江華)로 내치었으니,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여 덕시(德時)가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을 만든 죄를 논(論)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 호군(護軍) 이등(李登)이 오결(誤決)이라 하여 북[鼓]을 쳐서 신문(申聞)하였다. 헌부(憲府)에서 또 말하기를,
“등(登)이 소사(所司)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상총(上聰)을 기망(欺罔)한 것이 심하오니, 등(登)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죄를 논하여 뒷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33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政論) / *신분-천인(賤人)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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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20일 (을미)
상왕 누이의 아들 이선과 혼담을 꺼냈다가 가난을 이유로 사절한 평득방을 하옥하다

선지하기를,
“이등(李登)의 아들 이선(李宣)은 태조께서 사랑하시던 외손이요, 그 어미가 비록 천생이나 나의 누이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사랑하는 처지이다. 그런데 일찍이 전 지평주사(知平州事) 평득방(平得邦)과 더불어 혼인 말이 있어 득방이 허락 하였었는데, 요새 와서 집이 가난하다고 사절한다니, 득방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그 연유를 문초하라.”
고 하였다.
【원전】 2 집 303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왕실-종친(宗親) / *풍속-예속(禮俗)

 
 세종 4년 임인(1422,영락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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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12월26일 (기묘)
이등·정간·윤회·이육·하경복·김정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등(李登)을 개성군(開城君)으로 삼고, 정간(鄭幹)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윤회(尹淮)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이육(李稑)을 이조 참의로, 하경복(河敬復)을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로, 김정준(金廷準)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삼았다.
【원전】 2 집 5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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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8일 (계묘)
죽은 판부사 이화영의 아내 동씨가 법석을 베푼 일과 관련된 자들을 추핵케 하다

사헌부 장령 유사근(柳士根)을 불러 이르기를,
“죽은 판부사 이화영(李和英)의 아내 동(童)씨가 친히 절에 가서 법석(法席)을 베푼 일을 추핵하지 말라.”
하니, 사근이 계하기를,
“동씨가 남편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것은 그 심정은 용서할 만하오나, 동씨의 어미와 딸과 친족 부녀들과 더불어 3간 암자에서 중들과 더불어 발[簾]을 가리고 있었으니, 금령을 범한 것이 첫째이고, 금은(金銀)을 녹여서 《법화경(法華經)》을 베끼어 닷새 동안 읽으며 유밀과(油蜜果)로써 중을 대접하였으니, 금령을 범한 것이 둘째입니다. 동씨가 중들과 더불어 국법을 범한 것이 이와 같고, 또 신의군(愼宜君) 인(仁)과 개성군(開城君) 이등(李登)은 또한 고의로 조정의 법규를 범하고 가서 참예하였으며, 김점(金漸)의 딸은 여승[尼僧]으로 이미 폐출(廢黜)되었으나, 일찍이 궁중(宮中)에 들어 왔었으니 다른 여중과는 비할 것이 아닌데 공공연히 가서 참예하였으니, 모두 징계해서 나라의 법을 바르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씨는 지각이 없으니 추핵하지 말고, 다른 사람은 추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또 계하기를,
“이화영의 재 올린 법석(法席)의 두목 노릇한 선사(禪師) 신생(信生)은 그 경(經)을 베끼어 읽고 중들을 접대한 일을 숨기어 모두 실상을 고하지 않았으니, 청하건대 직첩을 거두고 죄를 추궁할 것이며, 또 강주승(講主僧) 신남(信南)은 밖에 있으니 곧 사람을 보내어 잡아올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699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사법(司法)

 
세종 5년 계묘(1423,영락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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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11일 (경인)
사헌부에서 국상기간에 술 마신 이등·홍해 옹주의 처벌을 아뢰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개성군(開城君) 이등(李登)과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 등 두 옹주(翁主)가, 국상(國喪)과 금주(禁酒)의 시기를 당하여, 신을 섬기는 모임이라 핑계하고 거문고를 타고 술도 마셨으며, 또 이등·홍해 등이 가장(家長)으로서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2 집 541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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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8일 (계묘)
죽은 판부사 이화영의 아내 동씨가 법석을 베푼 일과 관련된 자들을 추핵케 하다

사헌부 장령 유사근(柳士根)을 불러 이르기를,
“죽은 판부사 이화영(李和英)의 아내 동(童)씨가 친히 절에 가서 법석(法席)을 베푼 일을 추핵하지 말라.”
하니, 사근이 계하기를,
“동씨가 남편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것은 그 심정은 용서할 만하오나, 동씨의 어미와 딸과 친족 부녀들과 더불어 3간 암자에서 중들과 더불어 발[簾]을 가리고 있었으니, 금령을 범한 것이 첫째이고, 금은(金銀)을 녹여서 《법화경(法華經)》을 베끼어 닷새 동안 읽으며 유밀과(油蜜果)로써 중을 대접하였으니, 금령을 범한 것이 둘째입니다. 동씨가 중들과 더불어 국법을 범한 것이 이와 같고, 또 신의군(愼宜君) 인(仁)과 개성군(開城君) 이등(李登)은 또한 고의로 조정의 법규를 범하고 가서 참예하였으며, 김점(金漸)의 딸은 여승[尼僧]으로 이미 폐출(廢黜)되었으나, 일찍이 궁중(宮中)에 들어 왔었으니 다른 여중과는 비할 것이 아닌데 공공연히 가서 참예하였으니, 모두 징계해서 나라의 법을 바르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씨는 지각이 없으니 추핵하지 말고, 다른 사람은 추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또 계하기를,
“이화영의 재 올린 법석(法席)의 두목 노릇한 선사(禪師) 신생(信生)은 그 경(經)을 베끼어 읽고 중들을 접대한 일을 숨기어 모두 실상을 고하지 않았으니, 청하건대 직첩을 거두고 죄를 추궁할 것이며, 또 강주승(講主僧) 신남(信南)은 밖에 있으니 곧 사람을 보내어 잡아올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699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사법(司法)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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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15일 (경술)
동씨의 법화경 사건으로 경문을 서사한 중 성준 등을 장과 속태에 처하다

사헌부가 이화영(李和英)의 아내 동씨(童氏) 등과 족친 부녀와 중 15명과 신의군(愼宜君) 인(仁)·개성군(開城君) 이등(李登)·김점(金漸)의 딸 등의 죄를 탄핵하고 형률을 지적하여 올리니, 동씨와 인·등·김점의 딸은 불문에 붙이고, 경문(經文)을 서사(書寫)한 중 성준(性濬)과 두목이 되었던 중 신생(信生)은 각각 장(杖) 80에, 그 나머지 남녀들은 모두 속태(贖笞) 50에 처하게 하고, 모든 공판(供辦)한 물품은 관(官)에 몰수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2 집 701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세종 17년 을묘(1435,선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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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14일 (병술)
헌릉 제사는 비로 인하여 정지하고 개성군 이등으로 대행케 하고 건원릉에 제사하다

건원릉(健元陵)에 친히 제사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헌릉(獻陵)에 친히 제사하려다가 비로 말미암아 정지하고, 명하여 개성군(開城君) 이등(李登)에게 이를 대행하게 하였다.
【원전】 3 집 619 면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특수군(特殊軍) / *농업-농작(農作)


 
세종 17년 을묘(1435,선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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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23일 (임술)
이등을 계천군으로 삼다

이등(李登)을 계천군(啓川君)으로 삼았다.
【원전】 3 집 648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세종 21년 기미(1439,정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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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0일 (병술)
이등·춘덕·산해 등에게 죄를 주다

계천군(啓川君) 이등(李登)이 아뢰기를,
“본궁(本宮)의 종 산해(山海)·호돈(好敦) 형제가, 신의 아들 효(宯)가 그 종년 춘덕(春德)과 간통(奸通)함을 미워하여 꾸짖기를, ‘음부(淫婦)가 나은 아들이라.’고 하여, 욕이 옹주(翁主)에게 미쳤으며, 그 업신여기고 욕보임이 한 두 가지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명하여 사유를 국문(鞫問)해서 아뢰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국문하니, 산해와 호돈이 대답하기를,
“춘덕이 밤마다 음분(淫奔)하기에 그 사통(私通)하는 바를 물었더니, 계천군의 아들 효(宯)였습니다. 노(奴)의 어미가 계천군의 집 계집종을 꾸짖었더니, 계천군이 노여워하여 우리 형제를 힐책(詰責)하기를, ‘너희들이 네 누이의 세력을 믿고 감히 나쁜 짓을 하느냐. 네 누이가 비록 시녀(侍女)로 있을지라도 네 어미도 본래 음녀(淫女)였었다.’ 하므로, 저희들은 마음이 실로 부끄럽고 한스러워 다만 울기만 하였습니다. 어찌 감히 만홀하게 꾸짖어서 욕이 옹주에게 미치게 하였겠사옵니까.”
하고, 또 춘덕과 효의 서로 간통한 사실을 국문하니, 효와 춘덕이 모두 자복하므로 승정원에서 말을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해 형제는 본시 무상(無狀)한 장인데, 천인(賤人)으로서 부마(駙馬)를 꾸짖어 욕보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춘덕은 바로 산해의 누이 이씨의 계집종인데 오래 궁중에 있었고, 이씨의 아이가 병이 들자 춘덕이 아이를 데리고 이씨의 본가(本家)에 나가 있다가 아이는 죽고 그대로 있는데, 효는 왕실(王室)의 친척으로서 사사로이 간통하였으니 불가함이 없겠느냐. 등(登)은 조정의 대신들과 자주 다투고, 또 일찍이 길에서 야인과 서로 격투하고서 와서 내게 아뢰었고, 이제 또 그 아들의 나쁜 것은 알지 못하고 뻔뻔스럽게 감히 와서 아뢰니, 내가 취하지 않겠다. 유사(攸司)에 내려 국문(鞫問)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김돈이 대답하기를,
“산해는 천인(賤人)으로서 부마를 꾸짖어 욕보였으니, 그 죄가 작지 아니함은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효는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여 죄를 다스림이 마땅하오나, 만약 그렇게 하면 반드시 종신(終身)토록 허물이 될 것입니다. 효는 나이가 적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는 자이오니, 다만 먼 지방으로 내쫓음이 적당하오며, 등은 남과 서로 다투기를 좋아하므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그 벼슬을 파면시킴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니, 내가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하고자 하는데 어떨까.”
하니, 돈이 아뢰기를,
“상교가 옳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승정원에 명하여 효를 불러 간절히 꾸짖고, 등은 파직시키고, 춘덕은 형장 80대를 치고, 산해는 60대를 쳤다. 산해는 그 집의 어른이기 때문에 홀로 죄를 받았다.
【원전】 4 집 218 면
【분류】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세종 21년 기미(1439,정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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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4일 (경인)
사헌부에서 이등·이효 부자를 법대로 죄를 과할 것을 상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이조(吏曹)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계천군(啓川君) 이등(李登)의 파직(罷職)된 이유를 알았습니다. 등의 아들 효는 의(義)를 모르고 색을 탐하여 음욕(淫慾)을 방자히 행하여 몰래 춘덕과 간통하였사오니, 대저 춘덕은 일찍이 궁중(宮中)에 들어왔었사오매, 무릇 신자(臣子)로서는 대의(大義)로써 범할 수 없거늘, 하물며 효는 유복지친(有服之親)으로서 예사로 범간(犯奸)하고,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사오니 죄가 작지 아니하온데, 그 원인은 실로 등이 집을 올바르게 못한 까닭으로서 그러한 것입니다. 산해(山海) 등이 와서 효에게 힐책(詰責)하였으면, 등(登)으로서는 마땅히 송연(悚然)히 놀라고 두려워하여 그 아들을 깊이 꾸짖을 것이온데, 이를 생각지 아니하고 산해의 공경치 못한 말에 분개하여 꾸짖고, 말을 내되 효의 범간(犯奸)한 사실은 숨겨서 아뢰지 아니하고, 도리어 산해 등의 무례하다는 이유로써 흐리멍덩하게 말을 올렸사오니, 그 간사하고 곧지 못하여 기망(欺罔)함과 불경(不敬)함은 이와 같음이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특히 관대한 법을 내리시어 벼슬만 파면시키고 효의 범한 바는 논하지 아니하시니, 신 등이 그윽이 두렵건대, 이와 같이 한다면 나쁜 짓을 하는 무리들이 징계하는 바가 없어서 법을 가볍게 범하는 자가 장차 잇대여 일어날까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예단(睿斷)을 내리시어 등 부자를 법대로 죄를 과(科)하여 국법을 엄히 하고, 후세 사람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4 집 21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정론-간쟁(諫諍)


 
세종 22년 경신(1440,정통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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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0일 (계미)
이등·안완경·김길통 등을 제수하다

이등(李登)으로 계천군(啓川君)을, 안완경(安完慶)으로 사간원 우사간 대부를, 김길통(金吉通)으로 사간원 우헌납을 삼았다.
【원전】 4 집 26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세종 26년 갑자(1444,정통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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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1일 (무신)
이채·이개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채(寀)를 소덕 대부(昭德大夫) 의성군(誼成君)으로 하고, 개()를 소덕 대부 순성군(順成君)으로, 친()을 숭덕 대부(崇德大夫) 서원윤(瑞原尹)으로, 포()를 숭덕 대부 함양윤(咸陽尹)으로, 합(㝓)을 숭덕 대부 보성윤(寶城尹)으로, 수(洙)를 승헌 대부(承憲大夫) 예천군(醴泉君)으로, 이군생(李群生)을 중의 대부(中義大夫) 순평군(順平君)으로, 영(寧)을 중의 대부 평안윤(平安尹)으로, 혜(譿)를 중의 대부 서산윤(瑞山尹)으로, 질(秩)을 중의 대부 고양군(高陽君)으로, 정(定)을 중의 대부 영천윤(永川尹)으로, 우직(友直)을 중의 대부 의춘군(宜春君)으로, 주(澍)를 중의 대부 오산군(烏山君)으로, 이귀생(李貴生)을 명선 대부(明善大夫) 종의정(從義正)으로, 이덕생(李德生)을 명선 대부 수도정(守道正)으로, 이녹생(李祿生)을 명선 대부 임언정(林偃正)으로, 이복생(李福生)을 명선 대부 석보정(石保正)으로, 이후생(李厚生)을 명선 대부 덕원정(德原正)으로, 이호생(李好生)을 명선 대부 임성정(任城正)으로, 이융생(李隆生)을 명선 대부 정석정(貞石正)으로, 선생(善生)을 명선 대부 무림정(茂林正)으로, 의(宜)를 명선 대부 원천정(原川正)으로, 제(濟)를 명선 대부 저천정(紵川正)으로, 민(敏)을 명선 대부 곤의정(坤義正)으로, 이종생(李終生)을 명선 대부 진남정(鎭南正)으로, 이보생(李普生)을 명선 대부 장천정(長川正)으로, 숙평(淑平)을 광휘 대부(廣徽大夫) 신의령(新義令)으로, 검(儉)을 광휘 대부 어산령(語山令)으로, 중지(仲智)를 병직랑(秉直郞) 죽청감(竹靑監)으로, 이백강(李伯剛)을 수록 대부(綏祿大夫)로, 안맹담(安孟聃)을 광덕 대부(光德大夫)로, 박종우(朴從愚)를 광덕 대부 호조 판서로, 윤계동(尹季童)·이등(李登)을 모두 봉헌 대부(奉憲大夫)로, 윤암(尹巖)·황유(黃裕)·윤평(尹泙)을 모두 통헌 대부(通憲大夫)로, 윤사로(尹師路)를 자의 대부(資義大夫)로 하였으며, 한확(韓確)을 병조 판서로, 성억(成抑)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맹진(李孟畛)·정연(鄭淵)을 모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를 예문관 대제학, 신인손(辛引孫)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성염조(成念祖)를 병조 참판, 김의지(金義之)·유효통(兪孝通)을 모두 동지중추원사, 이익박(李益朴)을 호조 참의, 이선제(李先齊)를 병조 참의, 이사임(李思任)을 형조 참의, 윤창(尹敞)을 공조 참의로 임명하였다.
【원전】 4 집 56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세종 27년 을축(1445,정통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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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21일 (갑자)
태조의 쉬용을 평양부 영숭전·개성부 목청전에 봉안하게 하다

통헌 대부(通憲大夫) 이등(李登)을 보내어 태조의 쉬용(晬容)을 평양부 영숭전(永崇殿)과 개성부 목청전(穆淸殿)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원전】 4 집 617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세종 29년 정묘(1447,정통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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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4월11일 (임신)
안변부에서 민폐를 끼치는 봉헌 대부 이등을 올라오도록 독촉하다

함길도 감사(監司)에게 유시하기를,
“봉헌 대부(奉憲大夫) 이등(李登)이 말미를 청하여 가족을 데리고 안변부(安邊府)에 가더니,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머물러 있는데, 이제 흉년을 당하여 민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독촉하여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등(登)은 태조(太祖) 후궁의 사위로서 성질이 본디 광패(狂悖)한데, 자기가 부마(駙馬)임을 믿고 시골로 맘대로 다니면서 요란하게 작폐(作弊)를 하므로 명령이 있었다.
【원전】 5 집 18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인물(人物) / *농업-농작(農作)

 
단종 2년 갑술(1454,경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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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21일 (신미)
세조가 경회루에서 풍정을 올리다

세조(世祖)가 4공신(功臣) 등을 거느리고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풍정(豊呈)을 올렸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계양군(桂陽君) 이증(李增)·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한남군(漢南君) 이어(李)·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영해군(寧海君) 이장(李璋)·의성군(誼城君) 이심(李宷)·도원군(桃源君)【의경왕(懿敬王)의 휘(諱).】·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순성군(順成君) 이개(李)·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서원윤(瑞原尹) 이친(李)·함양윤(咸陽尹) 이포(李)·보성윤(寶城尹) 이합(李㝓)·계천위(啓川尉) 이등(李登)·전의위(全義尉) 이완(李梡)·유천위(柔川尉) 변효순(邊孝順)·해평위(海平尉) 윤연명(尹延命)·파평위(坡平尉) 윤암(尹巖)·화천위(花川尉) 권공(權恭)·파원위(坡原尉) 윤평(尹泙)·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예천군(醴泉君) 이수(李洙)·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여량군(礪良君) 송현수(宋玹壽)·의평군(義平君) 이원생(李元生)·낙안윤(樂安尹) 이영(李寍)·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사이 제조(司彝提調) 유수강(柳守剛)·사옹 제조(司饔提調) 조유례(趙由禮)·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옥산군(玉山君) 이제(李躋)·덕성군(德城君) 이민(李敏)·원천윤(原川尹) 이의(李宜)·화성군(花城君) 이감(李堪)·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좌승지(左承旨) 박팽년(朴彭年)·우승지(右承旨) 박원형(朴元亨)·좌부승지(左副承旨) 권자신(權自愼)·동부승지(同副承旨) 구치관(具致寬)·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김개(金漑)·김한(金瀚)·고정정(古丁正) 이겸(李謙)·장평정(長平正) 이흔(李訢)·오성정(梧城正) 이치(李)·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연산군(延山君) 김효성(金孝誠)·견성군(甄城君) 이사철(李思哲)·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혜(趙惠)·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연경(延慶)·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남경우(南景祐)·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효정(李孝貞)·한성부 윤(漢城府尹) 박중손(朴仲孫)·판내시부사(判內寺府事) 엄자치(嚴自治)·전균(田畇)·화림군(花林君) 백규(伯規)·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관(趙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마승(馬勝)·유수(留守) 조서안(趙瑞安)·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박강(朴薑)·이조 참판(吏曹參判) 최항(崔恒)·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련(趙憐)·대사헌(大司憲) 권준(權蹲)·송현 정(松峴正) 견신(堅信)·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조수산(趙壽山)·도승지(都承旨) 신숙주(申叔舟)·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흥상(李興商)·전 동부승지(同副承旨) 함우치(咸禹治)·호조 참의(戶曹參議) 홍원용(洪元用)·우부승지(右副承旨) 권남(權擥)·병조 참의(兵曹參議) 양정(楊汀)·지병조사(知兵曹事) 이예장(李禮長)이 시연(侍宴)하였다.
공신들이 상수(上壽)하고 일어나 춤추었는데, 이계전이 취해서 홀로 여러 번 춤을 추며 그치지 아니하였다. 세조(世祖)에게는 칼·활·화살 각각 2사(事), 비단 2필을, 한확(韓確)·박종우(朴從愚)·김효성(金孝誠)·이사철(李思哲) 등 1품 이상에게는 비단 1필을, 또 시연(侍宴)한 자에게는 부채 각각 하나씩을 주었다.
【원전】 6 집 684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세조 3년 정축(1457,천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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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1일 (임술)
계천위 이등의 졸기

계천위(啓川慰) 이등(李登)이 졸(卒)하였다. 이등은 태조(太祖)의 딸 의령 옹주(義寧翁主)에게 장가들었으나, 성질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몹시 추울 때나 몹시 더울 때라도 한 번도 임금을 조알(朝謁)하는 예(禮)를 폐한 적이 없었고, 만년(晩年)에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는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를 만류하면,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서 모람되게 척리(戚里)인 인연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늠록(廩祿)만을 허비하고 조그마한 보탬도 있지 않았으니, 어찌 조알(朝謁)하는 예를 꺼리겠느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9세였다. 관가에서 장사(葬事)를 치러주고 ‘호안(胡安)’이라 시호(諡號)하니, 나이가 많고 오래 산 것을 ‘호(胡)’라 하고 화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한다. 아들이 4인이 있는데, 둘째 아들 이선(李渲)은 임자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위가 추밀(樞密)에까지 이르렀다.
【원전】 7 집 207 면
【분류】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인사(人事) / *왕실(王室)


[주D-001]척리(戚里) : 임금의 가까운 친척.
[주D-002]임자년 : 1432 세종 14년.
 
세조 5년 기묘(1459,천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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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20일 (경오)
지돈령부사 이선의 졸기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이선(李渲)이 졸(卒)하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였다. 이선(李渲)은 이때 상사(喪事)를 당하여 함길도(咸吉道)로부터 돌아오다가 길에서 큰 비를 만났는데, 고산역(高山驛) 앞 내[前川]에 이르러 그 아들이 먼저 건너다가 물에 빠지니 이선(李渲)이 나아가서 구하려고 하다가 또한 따라서 물에 빠져 죽었다. 이선은 계천군(啓川君) 이등(李登)의 아들인데, 임자년의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기어 정2품에 이르게 되었다. 시호(諡號)를 문량(文良)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온화하고 선량(善良)하여 화락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良)이라 한다.
【원전】 7 집 334 면
【분류】 *인물(人物) / *과학-천기(天氣) /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


[주D-001]임자년 : 1432 세종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