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사진은 의령옹주와 부마 이징의 묘역이다 (2013.4.27) 묘역탐방 도봉구 도종동 산87번지
도봉산 무수골의 의령옹주의 묘지가 문화제로 등록된다는 신문기사가 있다는 내용
○ 봄 정월에 전 판사 김극공(金克恭)의 사지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고, 그 가산과 처자를 적몰하였으며, 전교부령(典校副令) 정구(鄭矩)와 판사 장자충(張子忠)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이전에 이인임의 사위 강서(姜筮)의 집에 던져진 익명서에, “왕의 즉위에 의심나는 것이 없지 않으며, 또 매우 무도하므로, 조민수ㆍ임견미ㆍ염흥방ㆍ도길부ㆍ문달한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없애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워 왕을 삼으려 한다." 하였다. 김극공이 듣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임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는 김극공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잡아서 국문하니, 김극공이 매에 못이겨 거짓 자복하였다. 옥관이 김극공에게 글자를 쓰게 하여 보니, 익명서와 필적이 다르므로 이인임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임견미가 기어이 극공에게 죄를 가하려 하므로, 옥관이 감히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드디어 죽였다. 장자충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도 나라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 정창군에게 고하였고, 정구는 극공의 사위이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 요동 호발도(胡拔都)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 돌연 의주(義州)에 이르러 상만호(上萬戶) 장여(張侶)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여가 아들 장사길(張思吉)ㆍ장사충(張思冲)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장여는 창에 찔리고 두 아들은 화살에 맞았다. 호발도가 장여의 재물과 말 15필을 빼앗아 가니, 부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장여는 활 쏘고 말 타는 것이 능하였는데,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었다. 성질이 탐욕스럽고 무식하여 인심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경시당한 것이다. ○ 경상ㆍ전라ㆍ강릉도의 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 2월에 문하평리 한방언(韓邦彦)을 서북면 도체찰사 겸 안주도 상원수로 삼고, 전 지문하사 상의 김용휘(金用輝)를 도안무사(都按撫使) 겸 부원수로 삼아, 정요위(定遼衛)의 군대를 방비하게 하였다. ○ 판서운관사 장보지(張補之) 등이 글을 올려, 변괴가 자주 일어나니 도읍을 옮겨 재앙을 막기를 청하였다. 우가 그 글을 도당에 내렸으나, 이인임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 노씨(盧氏)를 봉하여 의비(毅妃)로 삼고, 아비 영수(英壽)를 대호군으로 삼았다. 노씨는 본래 근비의 궁인(宮人) 석비(釋婢)인데, 우가 매우 총애하였다. ○ 왜적이 임주(林州)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오언(吳彦)이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계해일에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는데 검은 기장ㆍ팥ㆍ모밀 같은 것이 있었다. 우가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흉년이 겹쳐들어 사람이 장차 서로 잡아먹을 징조입니다." 하였다. ○ 반전색(盤纏色 여비 조달을 맡은 관청)을 두어서 대소 문ㆍ무 관리로 하여금 마필(馬匹)ㆍ저포(紵布)ㆍ마포를 차등에 따라 내게 하여 명 나라의 세공(歲貢)에 대비하였다. ○ 아들 창(昌)이 병이 있으므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하였다. ○ 갑술일에 해 속에 크기가 계란만한 흑자(黑子)가 있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사삿집 종 무적(無敵)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칭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 해양(海陽 평북 길주(吉州) 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그 아들 부야개(夫耶介)를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 윤달에 왜적이 임주(林州)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을 침범하였다. ○ 우가 남교(南郊)에서 사냥하고, 또 동교(東郊)에서 사냥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관이 감히 나의 과실을 기록한다니, 만일 보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죽이겠다." 하였기 때문에, 사관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 김동불화가 제 관할 백성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독로올(禿魯兀 함남 단천(端川)의 땅에 살게 하였다. ○ 일본이 포로가 된 우리 백성 1백 50명을 돌려보냈다. ○ 3월에 왜적이 평해(平海)ㆍ삼척ㆍ울진ㆍ우계(羽溪) 등의 현(縣)을 침범하였다. ○ 곡성 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이 졸하였다. ○ 왜적이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을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사헌부에서 경상도 도순문사 남질이 왜적을 막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여, 도당에 내리어 의논하였으나, 이인임이 질과 좋은 사이여서 의령현(宜寧縣)에 안치시키기만 하였다. ○ 양수척(楊水尺)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를 불태우니, 판밀직 임성미(林成味) 등을 보내어 쫓아 잡아서 남녀 50여명과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 문하찬성사 김유(金庾),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 지밀직 김보생(金寶生), 동지밀직 정몽주(鄭夢周), 밀직부사 이해(李海), 예의판서 배행검(裵行儉)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으로 금 1백근ㆍ은 1만 냥ㆍ베 1만 필ㆍ말 1천 필을 바쳤다. ○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 ○ 서해도 안렴사 이무(李茂)가 잡은 양수척 30여 명과 말 1백 필을 바치고 여러 도의 안렴사와 수령도 각각 잡은 양수척과 말을 바치니, 순군옥에 내리어 국문해서 그 주모자를 베고, 처자와 마필을 몰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양수척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 평민보다 차등있는 역사를 시켰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베었다. ○ 전 평리 양백익(梁伯益)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일찍이 충혜왕(忠惠王)의 아들 석기 (釋器)가 민가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양백익의 전장(田莊)에 숨어 있었다. 일이 발각되어 양백익은 귀양보내고, 석기의 아들은 머리를 깎아 계룡산으로 보냈으나, 비밀리에 아전을 시켜 도중에서 죽였다. ○ 왜적이 죽령을 넘어서 단양군을 침범하니, 원수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쳐서 깨뜨려, 80여 급을 베고 말 2백여 필을 노획했다. ○ 5월에 경상도 합주(陜州)에 사노(私奴) 한 명이 있었는데, 검대장군(劍大將軍)이라 자칭하고, 그 부하 1명은 초군장군(抄軍將軍)이라 일컫고, 또 1명은 산군장군(散軍將軍)이라 일컬으며, 무리를 모아서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략질하고, 그곳의 상전과 수령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려 하므로, 안림사 안경공(安景恭)이 잡아서 베었다. ○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을 베었다. 이금은 고성 백성인데,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을 속이기를, “나는 석가불을 강림하게 할 수 있다. 다른 귀신에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자, 마소의 고기를 먹는 자,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에 빛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부리면 풀에 푸른 꽃이 피기도 하고, 나무에 곡식 열매가 열리기도 하며, 한 번 심어서 두 번 베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우매한 백성들이 믿고 다투어 쌀ㆍ비단ㆍ금은을 보시하고, 소와 말이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재물이 있는 자는 모두 남에게 주었다. 이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하여 산천 귀신을 모두 일본에 보내면, 왜적을 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무당들이 더욱 공경하고 믿어서, 성황당과 사묘(祠廟)의 신위를 철거하고 이금을 부처같이 공경하여 복을 빌었다. 무뢰배들이 따라서 한패가 되어 제자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들을 속였는데, 이르는 고을의 수령 중에는 나와서 영접하여 상등 사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청주 목사 권화(權和)가 꾀어서 오게 하여 그 괴수 5명을 묶어 가두니, 이에 도당에서 여러 도에 이첩(移牒)하여 모두 잡아서 베었다. 전 판사 양원격(楊元格)은 본래 그의 말을 신봉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도망하여 숨었으나, 끝까지 수색하여 잡아서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는데, 귀양가다 길에서 죽었다. ○ 유양(柳亮)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왜적이 영춘현(永春縣)을 침범하였다. ○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안동에서 왜적을 쳐서, 30여 급을 베고 말 60필을 노획했다. ○ 왜적이 또 회양부(淮陽府)를 침범하였다. ○ 6월에 우가 상승(尙乘)의 집에 가서 말을 사열하고, 또 노영수(盧英壽)의 집에 갔다. 그 뒤로부터 상승과 노영수ㆍ이인임의 집에 가지 않는 날이 없고, 그 밖에 가는 곳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 김유(金庾) 등이 요동에 갔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 간관 정리(鄭釐)ㆍ박의중(朴宜中) 등이 상소하기를, “근년에 와서 왜적이 날로 성하여, 깊이 들어와서 도적질하며,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가옥을 불태우고 헐어서 주ㆍ군이 조잔(凋殘)해지고 전야(田野)가 황폐해졌습니다. 더구나 수재와 한재까지 겹쳐서 흉년이 거듭 들어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연이어지고, 창고가 비어서 용도도 부족합니다. 또 좀도둑이 일어나 사사로이 서로 죽이니, 인민은 흩어지고 부자(夫子)도 상존(相存)하지 못합니다. 화란(禍亂)의 지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상국(上國)에서 우호를 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까운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켜 틈을 엿보고 있는 때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천재(天災)ㆍ인요(人妖)ㆍ지괴(地怪)와 조수(鳥獸)ㆍ천어(泉魚)의 이변이 겹쳐 견고(譴告)를 보이니, 온 나라 백성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한 생각을 가지지 말고, 널리 여론을 받아들여 치안을 도모하고 변괴를 없애는 데 하루라도 게을리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물며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며, 이목(耳目)의 즐거움을 탐하여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자행해서 유흥과 오락을 일삼아 게으르고 거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주색과 가무의 즐거움을 파하시고, 매와 개로 사냥하는 유희를 끊어버리며, 성인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거스르지 말며, 덕이 있는 기로(耆老)를 멀리하지 말고, 못된 아이들을 가까이하지 말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참소를 멀리하고 간하는 것을 들으며,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버리며, 밤낮으로 부지런하며, 공손하고 조심하여, 항상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기를 힘쓴다면, 대업(大業)을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도 간하였으나, 모두 회답이 없었다. ○ 왜적이 경산ㆍ대구ㆍ화원(花園)ㆍ계림(鷄林) 등처를 침범하고, 또 통구현(通溝縣)을 침범하였다. ○ 전법판서 조준(趙浚)을 경상도 체복사(體覆使)로 삼았다. 이때는 왜적의 침범이 매우 강성하여, 각 고을이 소란해서 백성들이 모두 산골로 도망하였으며, 나라에 기강이 없고, 장수들은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세는 날마다 성하여졌다. 조준이 오자 호령이 엄하고 밝으므로, 장수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잇달아 전승하니, 도민(道民)들이 그 덕택으로 조금 편안해졌다. 이보다 먼저, 수성(守城) 사람 조희삼(趙希參)이 그 어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경산부(京山府)의 성에서 왜적을 피하려고 발길이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였다. 적이 쫓아오자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말을 달리어 화를 면하라." 하였다. 조희삼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어머니와 함께 밭 속에 숨었다. 적이 그 어머니를 칼로 치려 하자, 희삼이 몸으로 어머니를 가리어 적에게 해를 당하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경산부 사람 배중선(裵仲善)의 딸이 아이를 업고 왜적에게 쫓기다가 소야강(所耶江)에 이르렀는데 강물이 한참 불어 있었다. 그 여자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니, 적이 강 언덕에 이르러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네가 나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선비의 딸이다. 일찍이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죽을지언정 네놈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였다. 적이 활을 쏘아서 그 아이를 맞히고, 적이 활을 당기며 또 전과 같이 말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해를 당하였다. 영산(靈山) 사람 낭장 신사천(辛斯蕆)의 딸은 나이 16세였는데, 왜적에게 쫓기어 아비를 따라 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너려 할 때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배에 탄 사람을 거의 다 죽이고, 그 아버지도 해를 입었다. 한 도적이 그 여자를 잡아 배에서 끌어내리니, 여자가 말하기를,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죽을지언정 네놈을 따르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쥐고 차서 거꾸러뜨리니, 적이 노하여 그 여자를 죽였다. 조준이 그 일을 진달하고 아뢰기를, “세 사람의 절개와 효도가 이와 같으니, 그 문(門)에 정표(旌表)하여 후세 사람을 권면하소서." 하니, 드디어 비석을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였다. ○ 이인임을 영문하부사로, 최영을 영삼사사로, 홍영통(洪永通)을 문하시중으로, 이자송(李子松)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우리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으니, 이때에 호발도가 동북면 백성을 침범하였는데, 태조는 일찍부터 대대로 그 도의 군무를 관활하여 평소에 위신이 드러났으므로 보내어 위무(慰撫)한 것이었다. ○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이 졸하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삼가고 두터웠으며, 정도로써 관직을 수행하였다. 이때에 가묘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공권은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 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물을 극히 정결하게 하였다. 간신이 권세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항상 분히 여기고 한탄하더니, 마침내 등창을 앓아서 죽었다. ○ 경성에 기근이 들어, 베 한 필 값이 쌀 서너 되 값이었다. ○ 황제가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제주(濟州)에 안치하였다. 우가 밀직사사 유번(柳藩)을 경성에 보내서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 8월 무자일에 혜성이 보였다. ○ 한양(漢陽)에 도읍을 옮기기로 의논하고 정하니, 간관이 상소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한양으로 옮겼다. 경성은 시중 이자송에게 명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게 하고, 이임ㆍ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 등이 수행하였다. 모두 종을 보내어 여기저기에서 떼를 지어 백성의 토지와 집을 한없이 빼앗았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남원군을 침범하고, 또 왜선 50척이 진포(鎭浦)에 들어왔다. 해도원수 정지(鄭地)가 치니 달아났는데, 군산도(群山島)까지 쫓아 배 4척을 노획했다. ○ 11월에 대사헌 노숭(盧嵩) 등이 상소하기를, “근일에 전하가 나가 노는데, 입직(入直)한 이덕시(李德時)가 백관ㆍ유사에게 고하지 않았고, 내승(內乘) 김천수(金天守) 등이 훈련되지 않은 말을 내어서 넘어지고 미끄러지게 하였으니, 그 죄를 국문하소서." 하였다. 홍영통(洪永通)ㆍ이자송 등도 아뢰기를, “전하가 취하기만 하면 말을 달리므로, 신등이 항상 마음에 위태하고 두렵게 여겼었는데, 이제 과연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귀하신 몸을 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구중궁궐에 가만히 계시어, 사냥을 경계하고 주색을 삼가서 혹시라도 가볍게 움직이지 마소서." 하니, 우가 좋아하지 않았다. ○ 동직밀직사사 정몽주와 판도판서 조반(趙胖)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 조민수를 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삼았는데, 이색은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지 않았다. ○ 천재지변이 여러 번 일어나므로, 가벼운 죄는 사하였다. ○ 12월에 조민수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을 지키게 하였다. ○ 우가 교외에서 사냥하였는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신하들이 우의 간 곳을 몰랐는데,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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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 8남 5녀를 두었다. 사(嗣) 정종대왕(定宗大王) 순서는 둘째이다. 사(嗣) 태종대왕(太宗大王) 순서는 다섯째이다.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 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大匡輔國贈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㺶)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으며, 정종 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 밀양 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 김포 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兔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 개성 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부유 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薆)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주D-001]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고려 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수상을 말하는데, 수문하시중은 그 다음인 부수상 격이다.
[주D-002]기로소(耆老所) : 조선 때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의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 받던 곳으로, 태조 3년에 창설되었다. [주D-003]휘호(徽號) : 왕이나 후비께 올리는 존호를 가리킨 것인데, 휘(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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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諱旦。字君晉。初諱成桂。字仲潔。號松軒。溫良好古曰康。聡明睿智曰獻。太宗庚辰上號啓運神武。肅宗癸亥。加上謚正義光德。乙亥 元順帝至元元年。高麗忠肅王後四年。十月十一日己未。誕降于永興黑石里。仕高麗。官至門下侍中。壬申 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登寶位于松京壽昌宮。戊寅九月。傳位于定宗。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난001在位七年。在上王位十年。春秋七十四。有晬容三本。一本奉安于京城永禧殿。一本奉安于全州慶基殿。一本奉安于永興璿源殿。有 八男五女。健元陵난002。在楊州儉巖山。神道碑誌
![]() 承仁順聖神懿王后韓氏。籍安邊。密直副使贈門下府事安川府院君卿女。大祖卽位初謚節妃。丁丑 元順帝至元三年。高麗忠肅王後六年。誕降。高麗時封元信宅主。辛未 皇明太祖洪武二十四年。高麗恭讓王三年。九月二十三日。昇遐于潛邸。春秋五十五。太祖壬申。追尊。誕 六男二女。齊陵。在豊德栗村。神道碑權近撰。
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난003籍谷山。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允成女。太祖卽位初。冊封顯妃。顯宗己酉上謚祔廟。丙子 皇明太祖洪武二十九年。我太祖五年。八月十三日。昇遐于移御所。判內侍府事李得芬家。誕 二男一女。貞陵。丁丑初葬西部皇華坊。太宗己丑。移葬楊州沙河里。有表石。
![]() 嗣太宗大王。神懿王后誕生。序居第五。
一男鎭安大君芳雨。太祖潛邸時卒。追封大君。謚靖懿。○娶忠州池氏。贊成事奫女。生二男一女。
三男益安大君芳毅。錄開國定社功臣。階大匡。贈爲韓公。謚安襄。配享定宗廟庭。娶鐵原崔氏。知杆城郡事贈贊成仁㺶女。生一男二女。
四男懷安大君芳幹。庚辰朴苞之亂。安寘卒。○娶驪興閔氏。判書贈贊成璿女。再娶密陽黃氏。判書亨女。三娶金浦琴氏。正郞仁排女。生四男一女。
六男元尹芳衍。登高麗文科。拜成均博士。○太祖潛邸時卒。贈元尹。○以上。神懿王后誕生。
![]() 八男宜安大君芳碩。初封世子。戊寅鄭道傳之亂。被禍。贈邱原公。○肅宗庚申。加贈大君。謚昭悼。○娶富有沈氏。大提學孝生女。有繼子。以上。神德王后誕生。
一女慶愼宮主。駙馬上黨府院君李薆。錄定社佐命功臣。景肅公。生一男。○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善公主。駙馬靑原君沈琮。生一女。○靑松人。父左政丞定安公德符。○以上。神懿王后誕生。
三女慶順公主。駙馬興安君李濟。戊寅罪死。錄開國功臣。景武公。配享太祖廟庭。有繼子。○星州人。父同知密直仁立。○神德王后誕生。
![]() 二女淑愼翁主。駙馬唐城尉洪海。生三男一女。○南陽人。父判中樞彦修。
故實 壬申開國。
甲戌定都漢陽。建宗廟。入耆社。仍命文臣正二品。年七十。皆參入。
丙子。築都城。有八門。周九千九百七十五步。征對馬島。遣金士衡南在等。征之。
丁丑。招安女眞。遣李之蘭按撫。皆爲編戶。
戊寅。建文廟。鄭道傳之亂。道傳與南誾。挾芳碩爲亂。伏誅。北狩咸興。翌年。始回鑾松京。
錄勳 錄開國功臣。壬申。以奮義開國。錄益安大君芳毅等五十六人。○十七人。後罪削。
![]() 相臣 裴克廉。壬申。以前朝侍中。仍拜左侍中。 趙浚。前朝文科壬申。拜右侍中。至領議政。 金士衡。壬申。拜右侍中。至左議政。 鄭道傳。前朝文科。甲戌管都評議。戊寅罪死。 權仲和。前朝文科。甲戌。判都評議。至領議政致仕。 沈德符。丁丑。以前朝侍中判都評議。至左政丞。 柳曼殊。戊寅。判都評議。同年罪死。 皇明惠宗建文元年己卯。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諱曔。字光遠。初諱芳果。敬事供上曰恭。寬樂令終曰靖。○肅宗辛酉。追上廟號。加上謚懿文莊武。丁酉 元順帝至正十![]() 官至將相。太祖壬申。封永安君。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八月。冊封王世子。九月受禪。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 十一月。傳位于太宗。난004己亥 皇明成祖永樂十七年。我世宗元年。九月二十六日戊辰。昇遐난005。在位二年。在上王位十九年。春秋六十三。有 十五男八女。厚陵난006。在豊德興敎洞。誌文卞季良撰。有行狀及表石。 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金氏。籍慶州。○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天瑞女。○定宗卽位。初封德妃。太宗卽位。尊號順德。○肅宗辛丑。追謚溫明莊懿。乙未 元順帝至正十五年。高麗恭愍王四年。誕降난007。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冊封德嬪。尋進封王妃。壬辰 皇明成祖永樂十年。我太宗十二年。六月二十
![]() 一男義平君元生。池氏出。○娶鐵原崔氏。監務致崇女。生五男三女。
二男順平君群生。奇氏出。謚忠簡。○娶淳昌薛氏。判司宰監事存女。生二男二女。
三男元尹義生。娶南陽洪氏。司直宿女。無后。
四男宣城君茂生。池氏出。○娶迎日鄭氏。參議宗誠女。生一女。後娶安康金氏。上護軍仲約女。生一男。
案文氏出。五男從義君貴生。贈君。○娶楊口柳氏。正贈贊成守濱女。後娶海豊張氏。主簿均女。有繼子。
六男鎭南君終生。李氏出。謚夷簡。○娶宜寧南氏。上護軍深女。生四男一女。
案淑儀尹氏出。七男守道正德生。娶礪山宋氏。府使繼性女。生三男一女。
![]() 九男石保正福生。娶原州金氏。判中樞戴敬公連枝生난010。生三男五女。
案池氏出。十男德泉君厚生。謚積德。○娶長水李氏。長川府院君良厚公從茂女。生四男五女。
案池氏出。十一男任城君好生。贈君。○娶平昌李氏。郡守繼童女。有繼子。
案池氏出。十二男桃平君末生。娶龍川李氏。府使守綱女。後娶全州崔氏。司直洙女。生一男一女。
案尹氏出。十三男長川都正普生。娶和順崔氏。郡事自海女。生四男一女。
案淑儀奇氏出。十四男貞石都正隆生。娶忠州權氏。直長敦女。生三女。
案淑儀奇氏出。十五男茂林君善生。奇氏出。謚昭夷。○娶南陽洪氏。司正興善女。生二男四女。
按璿系作池氏出。一女咸陽郡主。奇氏出。○駙馬知敦寧朴賡。生一男。○密陽人。父少尹得中。
![]() 三女德川郡主。駙馬行江陵府使邊尙服。生三男二女。○原州人。父都捴制頤。
四女高城郡主。駙馬知中樞金澣。生三男三女。○安山人。父蓮城君威靖公定卿。
五女祥原郡主。駙馬司直趙孝山。生一男一女。○平壤人。父義方。
六女▣▣郡主。駙馬司直李希宗。生三男一女。
七女仁川郡主。駙馬行府使李寬植。生五男三女。○全義人。父少尹成幹。
八女咸安郡主。駙馬知敦寧李恒信。生一男。
故實 己卯。還都松京。
庚辰。朴苞之亂。苞誘懷安大君芳幹。擧兵作亂。苞伏誅。芳幹安寘。
錄勳 錄定社功臣。戊寅。以平鄭道傳南誾之亂。錄義安大君和等二十九人。○十一人。後罪削。
![]() 相臣 成石璘。前朝文科。己卯。拜右政丞至領議政。 李舒。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再致仕。再還卜。 閔霽。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左政丞。 河崙。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致仕。 皇明惠宗建文三年辛巳。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諱芳遠。字遺德。敬事供上曰恭。純行不爽曰定。世宗卽位。上號聖德神功。肅宗辛酉。追上謚난011睿哲成烈。丁未 元順帝至正二十七年。高麗恭愍王十六年。五月十六日辛卯。誕降于咸興歸州洞。壬戌 皇明太祖洪武十五年。高麗辛禑七年。擢高麗進士試。翌年癸亥。登文科。官至密直司代言。太祖壬申。封靖安君。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二月。冊封王世![]() 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난014。籍驪興。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霽女。太宗卽位。初封靜妃。乙巳。元順帝至正二十五年。高麗恭愍王十四年。誕降난015。壬申。皇明太祖洪武二十五年。我太祖元年。封靖寧翁主。庚辰。皇明惠宗建文二年。我定宗二年。冊封貞嬪난016。辛巳 我太宗元年。正月。追封王妃。庚子 皇明成祖永樂十八年。我世宗二年。七月十日。昇遐난017。春秋五十六。誕 四男四女。獻陵난018。與大王陵同原。誌文卞季良撰。 按成宗朝始建昌慶宮此昌慶宮則新刊璿譜恐誤![]() 一男讓寧大君禔。初封世子。戊戌。以敗德降封大君。謚剛靖。○娶光州金氏。光山君贈左議政漢老女。生三男四女。
二男孝寧大君
四男誠寧大君
一女貞順公主。駙馬淸平府院君李伯剛。生一女。○淸州人。父領議政文度公居易。
二女慶貞公主。駙馬平壤府院君趙大臨康安公。生一男四女。○平壤人。父領議政文忠公浚。
![]() 四女貞善公主。駙馬宜山君南暉昭簡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捴郞景文。
一男敬寧君
二男諴寧君䄄。信寧宮主辛氏出。初封恭寧君。○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一女。
按信寧宮主辛氏出。三男溫寧君䄇。謚良惠。○娶順天朴氏。副正贈贊成安命女。有繼子。
按貞嬪高氏出。四男謹寧君禯。謚僖懿。○娶河陽許氏。觀察使贈贊成之惠女。生二男六女。
按安氏出。五男惠寧君祉。娶茂松尹氏。司直贈贊成汴女。生一男二女。
按淑儀崔氏出。六男煕寧君
![]() 八男益寧君
一女貞惠翁主。懿嬪權氏出。○駙馬雲城府院君朴從愚。錄貞難功臣成烈公。無后。○雲峯人。父贊成惠甫公信。
二女貞信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鈴平君尹季童。生一男一女。○坡平人父兵判向。
三女貞靜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漢原君趙璿昭懷公。生一男一女。○楊州人。父領中樞文剛公末生。
四女淑貞翁主。信寧宮主辛氏出。○駙馬日成君鄭孝全行判書。生二男四女。●延日人。父工判鎭。
![]() 六女淑惠翁主。昭惠宮主盧氏出。○駙馬星原尉李正寧章節公。生三男一女。○星州人。父左尹師厚。
按信寧宮主辛氏出。七女淑寧翁主。駙馬坡城君尹愚。生一男一女。○坡平人。父司諫須彌。
按安氏出。八女昭淑翁主。駙馬海平君尹延命。生四男二女。○海平人。父縣監達誠。
按信寧宮主辛氏出。九女淑慶翁主。駙馬坡平君尹巖錄佐翼功臣齊度公。生六男一女。○坡平人。父生員太山。
按安氏出。十女敬愼翁主。駙馬全城君李梡。生六男一女。○全義人。父判事恭全。
按金氏出。十一女淑安翁主。駙馬懷川尉黃裕良悼公。生五男。○懷德人。父判書子厚。
按信寧宮主辛氏出。十二女淑謹翁主。駙馬花川君權恭錄佐翼功臣襄孝公。生一男。○安東人。父都節制復。
按李氏出。十三女淑順翁主。駙馬坡原尉尹泙。生二男一女。○坡平人。父參議敞。
![]() 己丑。李茂獄。相臣李茂與驪興君閔无咎等。以壞亂朝廷。幷賜死。自是遂罷外戚封君。
辛卯。始設四學。
乙未。禁錮庶孽。因右代言徐選言。禁錮庶孽淸顯。
錄勳 錄佐命功臣。庚辰。太宗冊封世子。尋受禪。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난019
配享 領議政河崙。文忠公。 右議政趙英茂。忠武公。 右議政鄭擢。翼景公。 完山府院君李天祐。襄度公。 鷄城君李來。景節公。
相臣 李居易。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 李茂。辛巳。拜右議政。己丑。罪死。 李稷。前朝文科。乙酉。拜右議政。至領議政。 趙英茂난020。乙酉。拜右議政。 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난021 皇明成祖永樂十七年己亥。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諱祹。字元正。嚴敬臨民曰莊。行善可紀曰憲。丁丑 皇明太祖洪武三十年。我太祖六年。四月十日壬辰。誕降난022。戊子。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封忠寧君。壬辰。進封大君。戊戌六月。冊封王世子。八月。受禪난023。庚午 皇明代宗永泰九年。二月十七日壬辰。昇遐于別宮。永膺大君琰第。在位三十二年。春秋五十四。有 十八男四女。英陵。![]() ![]() 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籍靑松。領議政靑川府院君安孝公溫女。乙亥난025。皇明太祖洪武二十八年。我太祖四年。誕降于楊州私第。戊子 皇明成祖永樂六年。我太宗八年。行嘉禮。初封敬淑翁主。丁酉。封三韓國大夫人。戊戌六月。冊封敬嬪。十一月。進封恭妃。壬子。皇明宣宗宣德七年。我世宗十四年。改封王妃。丙寅 皇明英宗正統十一年。三月二十四日。昇遐于別宮。世祖潛邸。春秋五十二。誕 八男二女。英陵。난026 廣州與大王陵同原。誌文鄭獜趾撰。驪州亦同原。
嗣文宗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一。
嗣世祖大王。昭憲王后誕生。序居第二。
![]() 四男臨瀛大君璆。謚貞簡。○娶宜寧南氏。左議政忠簡公智女。無後。後娶全州崔氏。奉禮贈右議政承寧女。生五男二女。
五男廣平大君璵。謚章懿。娶平山申氏。同中樞贈左議政自守女。生一男。
六男錦城大君瑜。丁丑。被禍。後伸雪。謚貞愍。○娶全州崔氏。贊成贈左議政敬節公士康女。生一男。
七男平原大君琳。娶南陽洪氏。府使贈左議政利用女。有繼子。
八男永膺大君琰。謚敬孝。○娶海州鄭氏。參判贈左議政忠敬女。無後。後娶礪山宋氏。同中樞贈左議政復元女。生一女。
一女貞孝난027公主。早卒贈公主。
![]() 一男和義君瓔。令嬪姜氏出。癸酉。謫卒謚忠景。○娶密陽朴氏。參贊贈贊成仲孫女。無後。
二男桂陽君璔。愼嬪金氏出。錄佐翼功臣。謚忠昭。○娶淸州韓氏。左議政襄節公確女。生三男三女。
三男義昌君玒。愼嬪金氏出。謚剛悼。○娶延安金氏。都觀察使贈贊成脩女。生一男二女。
四男漢南君
五男密城君琛。愼嬪金氏出。錄翊戴佐理功臣。謚章孝。○娶驪興閔氏。判尹贈贊成承序女。生四男二女。
六男壽春君玹。惠嬪楊氏出。○娶延日鄭氏。府尹贈贊成自濟女。生一女有繼子。
![]() 八男永豊君瑔。惠嬪楊氏出。丁丑。謫卒。謚貞烈。○娶順天朴氏。參判贈判書忠正公彭年女。生一女。
九男寧海君瑭。愼嬪金氏出。謚安悼。○娶平山申氏。漢城尹贈贊成九童女。生二男一女。
十男潭陽君璖。愼嬪金氏出。早卒。謚夷襄。○有繼子。
一女貞顯翁主。尙寢宋氏出。○駙馬鈴川府院君尹師路。錄佐翼功臣。贊成忠景公。生二男。坡平人。父牧使垠。
二女貞安翁主。淑媛李氏出。○駙馬靑城尉沈安義。生一男一女。○靑松人。父觀察使璿。
故實 戊戌。始開經筵。
![]() 庚子。設集賢殿。選文學之士二十員充之。專任文學。朝夕論思。以備顧問。卽今之玉堂。
辛丑。建永寧殿。奉安祧主。世子入學。八歲入學。遂爲定制。
丙午。始設輪對法。賜暇湖堂。選年少文臣。賜暇讀書。後稱湖堂。
戊申。纂五禮儀。許稠等纂定。
癸丑。始定雅樂。朴堧贊成之。征野人。遣崔潤德等。征婆豬江野人。大捷而還。
甲寅。纂三綱行實。圖畵事行。又命詞臣。係以詩讚。印布中外。
丁巳。設六鎭。遣金宗瑞。開拓六鎭。設寘城邑。
癸亥。定年分法。田分六等。年分九等。
乙丑。纂龍飛御天歌。命鄭獜趾等。纂穆祖以來肇基之跡。凡百二十五章。
![]() 配享 領議政黃喜。翼成公。 左議政崔潤德。貞烈公。 左議政許稠。文敬公。 左議政申槩。文僖公。 吏曹判書李隨。文靖公。潛邸時師傅。
相臣 李原。前朝文科。戊戌。拜右議政。至左議政。己酉。謫卒。 鄭擢。前朝文科。辛丑。拜右議政。 柳觀。改名寬。前朝文科。甲辰。拜右議政致仕。 趙涓。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 黃喜。前朝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九十卒。 孟思誠。前朝文魁。丁未。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權軫。前朝文科。辛亥。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 崔潤德。武科。癸丑。拜右議政。至左議政。 盧閈。乙卯。拜右議政。 許稠。前朝文科。戊午。拜右議政。至左議政。申槩。文科。己未。拜右議政。至左議政。 李貴齡。乙丑。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九十 皇明代宗景泰二年辛未。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諱珦。字輝之。敬順事上曰恭。慈仁和民曰順。甲午 皇明成祖永樂十二年。我太宗十四年。十月三日癸丑。誕降난028。辛丑。我世宗三年。冊封王世子。入學。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二月。卽位于別宮。永膺大君琰第。壬申五月十四日丙午。昇遐난029。在位二年。春秋三十九。有 一男二女。顯陵。在楊州健元陵東岡。行狀申叔舟撰。有誌文及表石。![]() 仁孝順惠난030顯德王后權氏。籍安東。判漢城府事贈領議政花山府院君景惠公專女。文宗卽位。追封王妃。戊戌。皇明成祖永樂十六年。我太宗十八年。誕降난031于洪州
![]() 嗣端宗大王。顯德王后誕生。
一女敬惠公主。駙馬寧陽尉鄭悰。丁丑。謫卒。贈領議政。生一男。○海州人。父參判忠敬。
一女敬肅翁主。司則楊氏出。○駙馬班城尉姜子順。無後。○晉州人。父觀察使徽。
故實 辛未。寘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寘衛將。部將統將。建崇義殿。在麻田郡。祀高麗四王。以名臣十六人配享。
配享 領議政河演。文孝公。
![]()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籍礪山。○判敦寧勵良君贈領敦寧勵良府院
![]() 故實 癸酉。安平大君獄。以相臣金宗瑞等。謀推戴安平大君瑢。皆被禍。
錄勳 錄靖難功臣。癸酉。皇甫仁金宗瑞等。以推戴安平大君瑢。皆罪死。錄鄭獜趾等四十二人。四人。後罪削。
相臣 鄭莾。文科。壬申。拜右議政。癸酉。被禍。
皇明代宗景泰六年乙亥。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諱瑈。字粹之。柔質慈仁曰惠。嚴敬臨民曰莊。丁丑。上號承天軆道烈文英武。丁酉 皇明成祖永樂十五年。我太宗十七年。九月二十九日丙子난039。誕降난040。戊申。皇明宣祖宣德三年。我世宗十年。初封晉平大君。後改咸平。又改晉陽。又改首陽。乙亥 皇明代宗景泰六年。我端宗三年。閏六月十一日。受禪난041。戊子 皇明憲宗成化四年。九月七日。傳位于睿宗。八日甲子。昇遐난042。在位十四年。春秋五十二。有晬容二本。奉安于永禧殿。有 四男一女。 光陵난043。在楊州注葉山直洞。行狀徐居正撰。有誌文及表石。○明宗丁未。定世室。![]() 嗣德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一。
嗣睿宗大王。貞熹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懿淑公主。駙馬河城府院君鄭顯祖。錄翊戴佐理功臣褊玎公。登文科。無後。○河東
![]() 一男德源君曙。謹嬪朴氏出。錄翊戴功臣謚昭簡。○娶慶州金氏。贈贊成從直女。再娶鳳山尹氏。三娶陽城楊氏。幷無後。
二男昌源君晟。謹嬪朴氏出。○娶交河盧氏。正贈贊成好愼女。後娶光州鄭氏。有繼子。
故實 丙子。六臣獄。成三問等六人。謀復上王。事覺。皆死之。
丁丑。錦城大君獄。順興府使李甫欽。與錦城大君瑜。謀復上王。皆死。
庚辰。西狩平壤。設科取士。
乙酉난048。南狩溫陽。設科取士。○戊子又幸設科如初。
丙戌。東狩江陵。設科取士。
丁亥。李施愛之亂。擧兵于吉州。殺監司兵使。遣將討平之。討建州。以皇命遣
![]() 錄勳 錄佐翼功臣。丙子。六臣等。謀復上王。金礩上變。獄戌편001。錄桂陽君璔等。四十四人。○三人後罪削。 錄敵愾功臣。丁亥。吉州賊李施愛叛遽난049北道。遣將討平之。錄曺錫文等四十五人。○四人後罪削。
配享 左議政權擥。翼平公。 左議政韓確。襄節公。 領議政韓明澮。忠成公追配。
相臣 李思哲。文科。乙亥。拜右議政。至左議政。 鄭昌孫。文科。丙子。拜右議政。至領議政。 姜孟卿。文科。丁丑。拜右議政。至領議政。 申叔舟。文科。戊寅。拜右議政。至領議政。 李仁孫。文科。己卯。拜右議政。致仕。 權擥。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韓明澮。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尙敬從孫。 具致寬。文科。壬午。拜右議政。至領議政。 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諱暲。字原明。初諱崇。慈仁短折曰懷。平易不訾曰簡。○在東宮昇遐。謚敬懿世子。戊午 皇明英宗正統三年。我世宗二十年。九月十五日丙申。誕降난050。乙丑。初封桃源君。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王世子。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九![]() ![]() 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韓氏。籍淸州。○明朝宣授光祿少卿。本朝左議政西原府院君襄節公確女。○成宗辛卯。進冊王大妃。上號仁粹。丁巳。皇明英宗正統二年。我世宗十九年。誕降난052。乙亥。皇明代宗景泰六年。我世祖元年。冊封粹嬪。辛卯。皇明憲宗成化七年。我成宗二年。尊冊爲王大妃。甲子 皇明孝宗弘治十七年。我燕山十年。四月二十七日。昇遐난053。春秋六十八。誕 二男一女。敬陵난054。在大王陵右岡。
嗣成宗大王。昭惠王后誕生。序居第二。
一男月山大君婷。初封君錄佐理功臣。謚孝文。○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
![]() 一女明淑公主。駙馬唐陽君洪常昭夷公。生一男。○南陽人。父左議政忠肅公應。 皇明憲宗成化五年己丑。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諱晄。字明照。初字平甫。因事有功曰襄。未中早夭曰悼。庚午 皇明代宗景泰元年。我世宗二十二年。正月朔日丁丑。誕降난055。初封海陽大君。丁丑。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冊封王世子。丙戌。皇明憲宗成化二年。入學。戊子九月。受禪。己丑十一月二十八日戊申。昇遐난056。在位一年。春秋二十。有 二男一女。昌陵난057。在高陽敬陵北岡。有行狀。又有誌文及表石。徽仁昭德章順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乙丑。皇明英宗正統十年。我世宗二十七年。誕降난058。庚辰。皇明英宗天順四年。我世祖六年。冊
![]() 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난060。籍淸州。○右議政淸川府院君襄惠公伯倫女。成宗辛卯上號仁惠。選入東宮。初封昭訓。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冊封王妃。戊午 皇明孝宗弘治十一年。我燕山四年。十二月二十三日。昇遐。誕一男一女。昌陵난061。在大王陵左岡。
一男仁城大君。 早卒。贈君後加贈大君謚孝昭。○章順王后誕生。
二男齊安大君琄。謚靈孝。○娶尙州金氏。正贈左議政守末女。承安順王后旨。去之。改娶順天朴氏。判中樞贈領議政昭襄公仲善女。其後。又以后命與金氏。復合。幷無後。
![]() 故實 戊子南怡獄。柳子光誣告南怡謀逆。與領相康純。幷被禍。
錄勳 錄翊戴功臣。己丑。南怡等獄成。錄申叔舟等三十九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朴元亨。文憲公。
相臣 尹子雲。文科。己丑。拜右議政至領議政。 金國光。文科。己丑。拜右議政。至左議政。 皇明憲宗成化六年庚寅。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諱娎。溫良好樂曰康。寬樂令終曰靖。丁丑 皇明英宗天順元年。我世祖三年。七月三十日辛卯。誕降난062。辛巳。初封者山君。戊子。皇明憲宗成化四年。改封乽山君。己丑十一月。奉貞熹王后命。卽位난063。甲寅 皇明孝宗弘治七年。十二月二十四日己卯。昇遐난064。在位二十五年。春秋三十八。有 十六![]() 以上屬成宗朝 徽懿愼肅恭惠王后韓氏。籍淸州。領議政上黨府院君忠成公明澮女。○丙子。皇明代宗景泰七年。我世祖二年。誕降난067。丁亥。皇明憲宗成化三年。行嘉禮。己丑。冊封王妃。甲午 我成宗五年。四月十五日。昇遐난068。春秋十九。無嗣。順陵난069。在坡州恭陵南岡。有誌文。 以上屬恭惠王后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尹氏。籍坡平。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壕女。○燕山丁巳上號慈順。甲子。加上和惠。壬午。皇明英宗天順六年。我世祖八年。誕降난070于新昌公衙。癸巳。皇明憲成化九年。我成宗四年。選入大內。初封淑儀。庚子。冊封王妃。庚寅 皇明世宗嘉靖九年。我中宗二十五年。八月二十二日。昇遐난071。春秋六十九。誕 一男一女。宣陵난072。在大王陵左岡誌文李
![]() 嗣中宗大王。貞顯王后誕生。
一女愼淑公主。貞顯王后誕生。早卒。
一男燕山君㦕。母廢妃尹氏。初封世子。嗣位十二年廢。生二男一女。
二男柱城君恂。淑儀河氏出。○娶原州元氏。僉正贈贊成菑女。有繼子。
三男安陽君㤚。貴人鄭氏出。燕山時被禍。謚恭懷。○娶綾城具氏。綾川君贈贊成壽永女。生一女。
四男完原君
五男檜山君恬。淑儀洪氏出。○娶竹山安氏。贊儀贈贊成邦彦女。有繼子。
![]() 七男甄城君惇。淑儀洪氏出。○娶平山申氏。奉事贈贊成友灝女。生二男一女。
八男益陽君懷。淑儀洪氏出。謚順平。○娶延日鄭氏。僉知贈贊成文昌女。生四男三女。
九男利城君慣。淑容沈氏出。謚章平。○娶南平文氏。引儀贈贊成簡女。生三男。後娶安東權氏。郡守贈贊成守中女。無後。
十男景明君忱。淑儀洪氏出。○娶坡平尹氏。僉正贈贊成堞女。生二男二女。
十一男全城君忭。貴人權氏出。○娶安東權氏。知中樞贈贊成忠敏公健女。有繼子。
十二男茂山君悰。淑儀金氏出。○娶平山申氏。別坐贈贊成銖女。生六男二女。
十三男寧山君恮。淑容沈氏出。癸酉被禍謚忠信。○娶靑松沈氏。郡守贈贊成順路女。生二女。後娶慶州鄭氏。別坐贈贊成弘光女。生一女。
![]() 十五男楊原君憘。淑儀洪氏出。○娶平壤趙氏。忠義衛贈贊成經女。無後後娶文化柳氏。正贈贊成從孫女。生一男。
一女惠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高原尉申沆文孝公。有繼子。○高靈人。父參判從濩。
二女徽肅翁主。淑儀金氏出。○駙馬豊原尉任崇載。生三女。○豊川人。父判書士洪。
三女恭愼翁主。貴人嚴氏出。○駙馬淸寧尉韓景琛。無後。○淸州人。父琅城君襄胡公堡。
四女慶順翁主。淑容沈氏出。○駙馬宜城尉南致元榮僖公。生一男一女。○宜寧人。父府使燝。
五女敬淑翁主。淑儀金氏出。○駙馬驪川尉閔子芳。生一男○驪興人。父縣令宗元。
六女靜順翁主。淑儀洪氏出。○駙馬奉城尉鄭元俊。生一男。○奉化人。父主簿鉉。
![]() 八女慶徽翁主。淑容權氏出。○駙馬鈴原尉尹鼐。生一男。○坡平人。父府使承世。
九女徽靜翁主。淑儀金氏出。○駙馬宜川尉南燮元。生一女。○宜寧人。父承旨忻。
十女靜惠翁主。貴人鄭氏出。○駙馬淸平尉韓紀無後。○淸州人。父判書亨允。
十一女靜淑翁主。淑儀洪氏出。○駙馬鈴平尉尹燮有繼子。○坡平人。父正承柳。
故實 庚寅。設弘文館。選文學之士十七員。充之。以備顧問。
辛卯。德宗追崇。始用經國大典。世祖朝命纂至是始成。
乙未。親耕籍田。丙申。又築觀耕壇於先農壇南。 王妃親蠶。親行釋菜。建尊經閣。建閣太學藏書籍。
丁酉王妃親蠶。築採桑壇於景福宮後苑。親行釋菜。仍行大射禮。
![]() 己亥。廢妃尹氏。以妬忌。貞熹王妃命廢之。因賜死。征建州。以皇明。遣尹弼商等。往征。大捷而還。
庚子親行釋菜。壬寅。又親行。
乙巳。錮改嫁女子孫。纂東國通鑑。
辛亥征野人。遣許琮等。往征。大捷而還。
壬子大酺師生。重修學宮。親臨大饗。
癸丑親耕籍田。王妃親蠶。
錄勳 錄佐理功臣。辛卯。以國家昇平。錄申叔舟等七十七人。○二人。後罪削。
配享 領議政申叔舟。文忠公。 領議政鄭昌孫。忠貞公。 左議
![]() 相臣 尹士昐。庚寅拜右議政。坐贓死獄中。 韓伯倫。庚寅。拜右議政。 成奉祖。辛卯。拜右議政。○石璘從孫。 尹士昕。乙未。拜右議政。○士昐弟。 尹弼商。文科。戊戌。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 洪應。文魁。己亥。拜右議政。至左議政。 李克培。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仁孫子。 盧思愼。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閈孫。許琮。文科。壬子拜右議政。 尹壕난073。文科。甲寅。拜右議政。●弼商從叔。 愼承善。文魁。甲寅。拜右議政。至領議政。
皇明孝宗弘治八年乙卯。○附 燕山君㦕。母廢妃尹氏。判奉常寺事起畒女。○成宗丙申生。癸卯。冊封王世子。丁未。入學。甲寅。嗣位淫虐日甚。宗社將危。中宗反正。廢。封燕山君。放于喬桐。同年十二月卒。在位十一年。壽三十一。○夫人居昌愼氏。領議政章成公承善女。生二男一女。○墓在楊州海等村。
![]() 甲子士禍。以廢妃尹氏賜死事。追罪廷臣。肆行誅戮。至有碎骨飄風之刑。追崇私親。追崇廢妃尹氏。改號懷陵。反正後廢。築內都城。撤都城百步內人家。寘運平樂。取各道娼妓。寘運平樂工。○宮女則有興靑,天科,地科之號。
乙丑築瑞葱臺。卽今春塘臺。改官制。革司諫院。罷經筵。减翰林員。增司僕寺掌樂院官。設獵藪。廢陵寢祭享。掇津渡舟楫。移畿內六邑于遠外。
相臣 鄭佸。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昌孫子。魚世謙。文科。乙卯。拜右議政。至左議政。鄭文烱。文科丙辰。拜右議政。改正。○道傳曾孫。 韓致亨。丙辰。拜右議政。至領議政。○確侄。 成俊。文科。戊午。拜右議政。至領議政。甲子。被禍。○奉祖侄。 李克均。文科。庚申。拜右議政。至左議政。甲子。被禍。○克培弟。 柳洵。文科。癸亥。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後還 皇明武宗正德元年丙寅。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諱懌。字樂天。敬順事上曰恭。小心恭愼曰僖。戊申 皇明孝宗弘治元年。我成宗十九年。三月五日己巳。誕降。初封晉城大君。丙寅 皇明武宗正德元年。九月二日。卽位。甲辰 皇明世宗嘉靖二十三年。十一月十四日。傳位于仁宗。十五日庚戌。昇遐난074。在位三十九年。春秋五十七。有 九男十一女。靖陵난075。初葬高陽。號僖陵。○明宗壬戌。移葬于廣州宣陵東岡。誌文。洪春卿撰。有表石。![]() 以上屬中宗朝 ![]() 宣昭懿淑章敬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原府院君汝弼女。辛亥。皇明孝宗弘治四年我。○成宗二十二年。誕降난077。丙寅。皇明武宗正德元年。我中宗元年。選入大內。初封淑儀。丁卯八月。進冊王妃。乙亥三月二日。昇遐난078。春秋二十五。誕 一男一女。禧陵난079。初葬廣州獻陵右岡。○中宗丁酉。移葬于
![]() 聖烈仁明文定王后尹氏。籍坡平。●領敦寧坡山府院君靖平公之任女。明宗丁未。上號聖烈仁明。辛酉。皇明孝宗弘治十四年。我燕山七年。誕降난080。丁丑。皇明武宗正德十二年。我中宗十二年。冊封王妃。乙丑 皇明世宗嘉靖四十四年。我明宗二十年。四月七日。昇遐난081。春秋六十五。誕 一男四女。泰陵。在楊州蘆原西行錄明宗御製有表石。
嗣仁宗大王。章敬王后誕生。序居第一。
嗣明宗大王。文定王后誕生。序居第二。
一女孝惠公主。駙馬延城尉金禧生一女。○延安人。父左議政安老章敬王后誕生。
二女懿惠公主。駙馬淸原尉韓景祿。生三男。○淸州人。父僉知承權。
![]() 四女敬顯公主。駙馬靈川尉申檥。生一男。○高靈人。父牧使秀涇。
五女仁順公主。早卒。○以上文定王后誕生。
一男福城君嵋。敬嬪朴氏出。壬辰被禍。後伸雪。○娶坡平尹氏。縣監贈贊成仁範女。生一女。初宣祖爲繼。及入承大統。後命信城君翊。奉其祀。
二男海安君㟓。淑儀洪氏出。○娶晉州柳氏。晉山君贈贊成泓女。無後。後娶居昌愼氏。參奉贈贊成弘猷女。生一女。
三男錦原君岭。煕嬪洪氏出。○娶海州鄭氏。都事贈贊成承休女。生一女。有繼子。
四男永陽君岠。昌嬪安氏出。謚成悼。○娶順興安氏。司圃贈贊成世亨女。有繼子。
五男德陽君岐。淑儀李氏出。謚靖僖。○娶安束편002權氏。判書贈贊成纘女。生一男。
七男德興大院君岹。昌嬪安氏誕生。庚寅生。己未卒。壽三十。●宣廟入承大統。後追尊爲大院君。○配河東府夫人鄭氏。判中樞贈領議政孝簡公世虎女。誕三男一女。
一女惠順翁主。敬嬪朴氏出。○駙馬光川尉金仁慶。有繼子。○光州人。父參議憲胤。
二女惠靜翁主。敬嬪朴氏出。○駙馬唐城尉洪礪。壬辰被禍。後伸雪。生一女。○南陽人。父觀察使叙疇。
三女貞順翁主。淑媛李氏出。○駙馬礪城尉宋寅文端公。生一男。○礪山人。父僉知之翰。
四女孝靜翁主。淑媛李氏出。○駙馬淳原尉趙義貞。生一男。○淳昌人。父府尹琛。
五女淑靜翁主。淑媛金氏出。○駙馬綾昌尉具澣。生三男三女。○綾城人。父副正信璟。
![]() 故實 丙寅反正。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奉主上反正。
丁卯。李顆獄。盧永孫告李顆等謀逆。幷被殺。
庚午。三浦倭亂。遣柳聃年黃衡等。討平之。
癸酉。復昭陵。卽顯德王后陵。○世祖丁丑。遷陵。失所在。至是。三司百官。上章請復。改葬于顯陵左岡。鄭莫介告密。公賤鄭莫介。告功臣朴永文辛允武等謀逆。幷正法削勳。親耕籍田。王妃親蠶。
乙亥。金凈,朴祥獄。是年。章敬王后上賓。金凈朴祥上䟽請復愼妃。幷拿鞠徒配。
丁丑。鄭文忠公從祀。以前朝儒賢鄭夢周。從祀文廟。
己卯。設賢良科。命京外各薦人才。庭策治道。取金湜等二十八人。罷昭格署。
![]() 辛卯。安瑭獄。宋祀連誣告。搆殺安瑭一門。
己丑。王妃親蠶。
庚寅。增修輿地勝覽。
壬辰。福城君獄。宮中巫蠱。敬嬪朴氏及其子女福城君嵋,唐城尉洪礪。幷被慘禍。後幷伸。
甲午。親行大射禮。
乙未。幸松京。設科取士。
丁酉。金安老獄。發卒圍捕。遠竄。未到配。賜死于葛院。
錄勳 錄靖國功臣。丙寅。燕山荒亂。宗社將危。朴元宗等。擧義反正。錄元宗等百十八人。○十一人。後罪削。錄定難功臣。丁卯。盧永孫告李顆等謀逆。獄成。錄永孫等二十二人。○後因臺啓
![]() 配享 領議政朴元宗。武烈公。 領議政成希顔。忠定公。 領議政柳順汀。文成公난083。 領議政鄭光弼。文翼公。
相臣 朴元宗。武科。丙寅。拜右議政。至領議政。 柳順汀。文魁。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 成希顔。文科。己巳。拜右議政。至領議政。 宋軼。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 鄭光弼。文科。癸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應箕。文科。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申用漑。文科。丙子。拜右議政。至左議政。○叔舟孫。 安瑭。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辛巳被禍。金銓。文魁。己卯。拜右議政。至領議政。 南衮。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後追奪。 李惟淸。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權鈞。文科。癸未。拜右議政。 沈貞。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辛卯。罪死。 李沆。文科。丁亥。拜右議政。改正。 李荇。 皇明世宗嘉靖二十四年乙巳。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諱峼。寵祿光大曰榮。寬樂令終曰靖。乙亥 皇明武宗正德十年。我中宗十年。二月二十五日癸丑。誕降난084。庚辰。冊封王世子。壬午。皇明世宗嘉靖元宗난085。行冠禮入學。甲辰十一月受禪。乙巳七月朔日辛酉。昇遐난086。在位八月。春秋![]() ![]() 以上屬仁宗朝 孝順恭懿仁聖王后朴氏。籍羅州。○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錦城府院君墉女。甲戌。皇明武宗正德九年。我中宗九年。誕降난088。甲申。皇明世宗嘉靖三年。冊封世子嬪。甲辰。進封王妃。丁丑 皇明神宗萬曆五年。我宣祖十年。十一月二十九日。昇遐난089。春秋六十四。孝陵난090。與大王陵同原。
配享 領議政洪彦弼。文僖公。 左贊成金安國。文敬公。
相臣 李芑。乙巳。拜右議政。改正。同年復拜。 柳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同年。被禍。亮玄孫。 成世昌。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戊申。謫卒。⊙奉祖曾孫난091。 皇明世宗嘉靖二十五年丙午。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諱峘。字對陽。敬順事上曰恭。行善可紀曰憲。甲午 皇明世宗嘉靖十三年。我中宗二十九年。五月二十二日![]() 宣烈懿聖仁順王后沈氏。籍靑松。●領敦寧靑陵府院君贈領議政翼孝公鋼女。壬辰。皇明世宗嘉靖十一年。我中宗二十七年。誕降。乙巳。冊封王妃。乙亥 皇明神宗萬曆三年。我宣祖八年。正月二日。昇遐난095。春秋四十四。誕 一男。康陵난096。與大王陵同原。
嗣宣祖大王。
一男順懷世子諱暊。仁順王后誕生。明宗辛亥。誕降。丁巳。冊封王世子。庚子入學난097
此間必有闕文。而原本見漏。故不能續繕。
相臣 柳鳳輝。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丁未謫死。乙亥。追施逆律。○尙運子。 趙泰億。文科。甲辰。拜右議政。至左議政。○今上난099。丙申。追奪。○師錫侄。 鄭澔。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澈玄孫。閔鎭遠。文科。乙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鼎重侄。 李觀命난100。文科。乙巳。拜右議政。至領議政。○健命兄。 洪致中。文科。丙午。拜右議政。至領議政。○重普孫。趙道彬。文科。丙午。拜右議政。○泰采侄。 李宜顯。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致仕。○世白子。 沈壽賢。文科。丁未。拜右議政。至領議政。○連源八世孫。 吳命恒。文科。戊申。拜右議政。○允謙玄孫。 李台佐。文科。戊申。拜右議政至左議政。致仕。○恒福玄 ![]() ![]() ![]() 徽貞賢淑孝純王后趙氏。籍豊壤。○左議政豊陵府院君贈領議政文忠公文命女。乙未。肅宗四十一年。誕降난106。丁未。英宗三年。冊封世子嬪。行嘉禮。乙卯。賜號賢嬪。辛未十一月十四日丁丑。昇遐난107。春秋三
![]() 嗣主上殿下。惠慶宮惠嬪洪氏誕生。 主上殿下。諱祘。字亨運。壬申 英宗二十八年。九月二十二日己卯。誕降于昌慶宮之景春殿。己卯。冊封王世孫。辛巳。入學行冠禮。甲申。特命嗣眞宗大王。丙申。受御筆孝孫銀印。同年三月十日辛巳。卽位于慶煕宮之崇政門。
[난-001]五月二十四日壬申昇遐。 : 案英宗乙亥。卽上王時所御豊壤舊基。建閣竪碑。 [난-002]健元陵 : 案戊子九月九日。葬。 [난-003]順元顯敬神德王后康氏。 : 案璿系闕年而只書六月十三日。誕降。 [난-004]傳位于太宗。 : 案璿系。庚辰十二月。上尊號。仁文恭孝。 [난-005]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6]厚陵 : 案庚子正月三日。葬。 [난-007]誕降 : 案乙未正月九日。誕降。 [난-008]昇遐 : 案昇遐于仁德宮。 [난-009]厚陵 : 案壬辰八月八日。葬。 [난-010]生 : 女 [난-011]追上謚 : 一本癸亥追上謚 [난-012]昇遐 : 按昇遐于泉達坊之新宮。 [난-013]獻陵 : 按壬寅九月六日。葬。 [난-014]彰德昭烈元敬王后閔氏 : 世宗甲辰追上尊號彰德昭烈。 [난-015]誕降 : 按乙巳七月十一日。誕降于松京鐵洞。 [난-016]冊封貞嬪 : 按璿系。封貞嬪下有尋追封靜妃。 [난-017]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別殿今昌慶宮。 [난-018]獻陵 : 按庚子九月十七日。葬。 [난-019]錄李薆等四十六人。八人後罪削。 : 一本。錄李薆等四十八人。而十人罪削。 [난-020]趙英茂 : 一本。趙英茂下。有義安大君和。太祖庶弟。丁亥。拜領相。 [난-021]南在。前朝文科。甲午。拜右議政。至領議政。 柳亮。前朝文魁。乙未。拜右議政。 韓尙敬。前朝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 一本。南在,柳亮。壬辰。拜相。韓尙敬。丙申。拜相。 [난-022]誕降 : 按誕降于漢陽潛邸。 [난-023]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24]初葬廣州獻陵西岡。睿宗己丑。移葬于驪州城子山 : 按庚午六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英陵。 [난-025]乙亥 : 按璿系。乙亥下。有九月無日。 [난-026]英陵 : 按丙寅七月。初葬廣州。己丑三月六日。移葬。 [난-027]貞孝 : 按璿系。貞孝。作貞昭。 [난-028]誕降 : 按誕降于漢陽私第。 [난-02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千秋殿。按壬申九月朔日。葬。 [난-030]仁孝順惠 : 端宗甲戌。追上尊號仁孝順惠。 [난-031]誕降 : 按戊戌三月十二日。誕降。 [난-032]昇遐 : 按昇遐于東宮之資善堂。 [난-033]改葬于大王陵左岡 : 按辛酉九月。初葬昭陵。癸酉四月二十一日。改葬。 [난-034]誕降 : 按誕降于東宮之資善堂。 [난-035]五月 : 五月一作正月 [난-036]庚戌 : 庚戌一作甲寅 [난-037]昇遐 : 按英宗辛卯。御筆書凈業院舊基。竪碑于燕尾貞洞。 [난-038]首陽大君 : 世祖潛邸封號。 [난-039]丙子 : 一本丙子作辛巳 [난-040]誕降 : 按誕降于本宮。 [난-041]受禪 : 按受禪于景福宮之勤政殿。 [난-042]昇遐 : 按昇遐于壽康宮之正殿。 [난-043]光陵 : 按戊子十一月二十八日。葬。 [난-044]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尹氏 : 按璿系睿宗己丑。加上自欽仁至忠懿十四字。 [난-045]誕降 : 按戊戌十一月十一日。誕降。 [난-046]洪州 : 一本洪州。作洪川。 [난-047]光陵 : 按癸卯六月十二日。葬。 [난-048]乙酉 : 一本乙酉作甲申 [편-001]戌 : 成 [난-049]遽 : 據 [난-050]誕降 : 按誕降于禁中。 [난-051]敬陵 : 按丁丑十一月二十三日。葬。 [난-052]誕降 : 按九月八日。誕降。 [난-05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景春殿。 [난-054]敬陵 : 按甲子五月。葬。 [난-055]誕降 : 按誕降于私第。 [난-05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紫薇堂。 [난-057]昌陵 : 按庚寅三月五日。葬。 [난-058]誕降 : 按正月十六日。誕降。 [난-059]恭陵 : 按壬午二月二十五日。葬。 [난-060]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韓氏 : 按璿系闕年只書三月十二日。誕降。 [난-061]昌陵 : 按己未二月十四日。葬。 [난-062]誕降 : 按誕降于東宮。 [난-063]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64]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大造殿。 [난-065]宣陵 : 按乙卯四月六日。葬。 [난-066]癸酉 : 一本癸酉作乙亥 [난-067]誕降 : 按十月十一日。誕降于蓮花坊私第。 [난-068]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求賢殿。 [난-069]順陵 : 按甲午六月七日。葬。 [난-070]誕降 : 按六月二十六日。誕降。 [난-071]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72]宣陵 : 按庚寅九月二十日。葬。 [난-073]尹壕 : 一本尹壕下。有居平君復。定宗朝王孫。拜右相改正。 [난-074]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歡慶堂。 [난-075]靖陵 : 按乙巳二月。初葬僖陵。壬戌九月四日。移葬。 [난-076]誕降 : 按正月十四日。誕降。 [난-077]誕降 : 按七月六日。誕降于會賢坊私第。 [난-078]昇遐 : 按昇遐于景福宮別殿。 [난-079]禧陵 : 按乙酉閏四月。初葬廣州。 [난-080]誕降 : 按十月二十二日。誕降。 [난-081]昇遐 : 按昇遐于昌德宮之昭德堂。 [편-002]束 : 東 [난-082]乙巳 : 一本乙巳。作丁未。 [난-083]文成公 : 一本。文成公。作烈成公。 [난-084]誕降 : 按誕降于景福宮。 [난-085]宗 : 年 [난-086]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淸燕樓下小寢。 [난-087]孝陵 : 按乙巳十月十五日。葬。 [난-088]誕降 : 按十月朔日。誕降。 [난-089]昇遐 : 按昇遐于景福宮。 [난-090]孝陵 : 按戊寅二月十五日。葬。 [난-091]奉祖曾孫 : 一作奉祖從孫。 [난-092]卽位 : 按卽位于景福宮之勤政門。 [난-093]昇遐 : 按昇遐于景福宮之養心堂。 [난-094]康陵 : 按丁卯九月二十二日。葬。 [난-095]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通明殿。 [난-096]康陵 : 按乙亥四月二十八日。葬。 [난-097]庚子入學 : 一作庚申入學。 [난-098]文忠 : 一本文忠作忠正。 [난-099]今上 : 正宗朝 [난-100]李觀命 : 一本李觀命。拜至左議政。 [난-101]李溵 : 一本李溵。拜左議政。 [난-102]誕降 : 按誕降于順化坊彰義宮。 [난-103]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進修堂。 [난-104]甲申 : 英宗朝甲申也 [난-105]今上 : 今上卽正宗 [난-106]誕降 : 按十二月十四日。誕降于崇敎坊私第。 [난-107]昇遐 : 按昇遐于昌慶宮之建極堂宜春軒。 [난-108]永陵 : 按壬申正月十一日。葬。 [난-109]誕降 : 按誕降于嘉會坊私第。 |
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 8남 5녀를 두었다. 사(嗣) 정종대왕(定宗大王) 순서는 둘째이다. 사(嗣) 태종대왕(太宗大王) 순서는 다섯째이다.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 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大匡輔國贈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㺶)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으며, 정종 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 밀양 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 김포 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兔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 개성 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부유 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薆)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주D-001]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고려 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수상을 말하는데, 수문하시중은 그 다음인 부수상 격이다.
[주D-002]기로소(耆老所) : 조선 때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의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 받던 곳으로, 태조 3년에 창설되었다. [주D-003]휘호(徽號) : 왕이나 후비께 올리는 존호를 가리킨 것인데, 휘(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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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正月初九日己未少陽。訪尹保氏兄弟于蓬山山室。尹公與兄儆。築室于其先塋之下。兄弟率妻子卜居。一室相對。友于耽樂。不出洞門。今十有餘年。年亦七十矣。二人雖非學古踐跡之士。志行之高有可尙者。余往訪焉。命酒穩話移時而來。山趣頗有動人意思者。十一日辛酉少陽。往見主倅。主倅設酒穩話。聞自上蠲減海邑災損人民今年田稅。以賑飢民。山邑則減上細布。其人木方物等賦云云。南平名雖山邑。災損與海邑無異。本道監司金始振別啓請與海邑一體施行。自上下該曹。戶判許積防啓。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兩儀冠前後分釋之圖 | |||||||||||||||||||||||||||||||||||||||
公諱天啓字亨伯號槐堂。系出洪州之新平縣。高麗平章事李德明之後也。國初有軍器少監諱士彦。始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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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경진 정종 2년 에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존호를 올렸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강헌(康獻) 온량호락(溫良好樂)을 강(康)이라 하고, 총명예지(聰明睿知)를 헌(獻)이라 한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9년 계해에 시호를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더 올렸다. 화상(畵像)이 두 벌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또 한 벌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을 모사(摸寫)하였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산(儉巖山)에 있으니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지(誌)가 있는데 권근(權近)이 지었고,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이다. ○ 비(妃) 승인순성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 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올렸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豐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신도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었다. 이다. ○ 계비(繼妃) 순원현경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 6월 14일에 났으며,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顯宗) 10년 기유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으니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 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이다. ○ 8남 5녀를 두었다. 사(嗣) 정종대왕(定宗大王) 순서는 둘째이다. 사(嗣) 태종대왕(太宗大王) 순서는 다섯째이다.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 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大匡輔國贈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㺶)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으며, 정종 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 밀양 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 김포 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兔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 개성 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부유 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년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薆)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주B-001]고사본말(故事本末) : 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 [주D-001]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고려 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수상을 말하는데, 수문하시중은 그 다음인 부수상 격이다. [주D-002]기로소(耆老所) : 조선 때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의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 받던 곳으로, 태조 3년에 창설되었다. [주D-003]휘호(徽號) : 왕이나 후비께 올리는 존호를 가리킨 것인데, 휘(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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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방(將軍房)을 혁파하였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장무(掌務)의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가 있어서, 새로 장군(將軍)에 제수된 자가 있으면, 그 방주와 장무가 반드시 그 족속(族屬)을 상고하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연후에야, 새로 제수된 자가 그 임무를 행할 수 있었는데, 국초(國初)에도 그 제도를 인습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주D-001]장군방(將軍房)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장군(將軍) 이상이 모여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곳. 고려 중방(重房)의 후신으로, 정종 2년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 6년에 호군방(護軍房)으로 다시 부활시켰음. [주D-002]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 : 관원이 새로 임명되어 올 때, 그 관부의 방주(房主)와 장무(掌務)가 모여서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고, 또 찬성 여부를 서명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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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서녀 의령옹주와 부마 호안공 이등의 묘역 서울시 문화재로 서울시 자료수정일 | 2013-04-25 조선 태조의 서녀 의령옹주와 부마 호안공 이등의 묘역이 서울시 문화재로 신규 지정‧보존된다※ 서녀 : 후궁 소생의 딸을 일컬음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서녀 의령옹주와 그녀의 남편 호안공 이등의 묘역은 도봉산 무수골(도봉구 도봉동 산85번지)의 아담한 구릉 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성 당시에 설치한 묘비, 문인석 등의 석물과 함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 태조는 정비 2명(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4명의 후궁(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후궁)과의 사이에 적자 8명, 적녀 3명, 서녀 2명을 두었다. 2명의 서녀 중 한 명인 의령옹주는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는 후궁 소생으로서 안타깝게도 그녀에 대한 기록은 사료 상으로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묘역에서 확인된 묘비에 “성화2년(1466) 2월 초1일 예장”이라는 문구가 확인되고 있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한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성화 2년은 1466년 (세조 12년)
□그의 남편인 호안공(胡安公) 이등(李登)은 “1379(우왕 5)년에 태어나1457(세조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개성, 이덕시(李德時)의 아들이며 태조의 庶장녀 의령옹주를 맞이하여, 1435년(세종 17)에 계천군으로, 1444년(세종 26)에 봉헌대부(奉憲大夫)에 봉하여졌다. 1457년(세조 3)에 7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라는 등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서는 태조의 부마 및 옹주의 묘로서 조성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석물의 품격이 높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시 기념물로 지정 가치가 있다고 의결(2013.1.11)하였다. ※ 기념물 : 서울시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무형문화재) 중 한 종류로 역사 유적지․고고 유적․전통적 경승지(경치나 경관이 뛰어난 곳)․식물 중에서 학술적․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지정함
□ 이에 서울시는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의 묘역>에 대한 문화재 지정계획을 2013년 4월 25일부터 5월 25일까지 약 30일 동안 공고하여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최종심의를 거쳐 2012년 6월 말까지는 서울시 기념물로 최종 지정고시할 예정이다.
□ 한편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이 위치한 무수골에는 이미 시 문화재로 지정된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시 유형문화재 제106호)이 자리하고 있고, 가까이 북한산 둘레길 20구간 왕실묘역길이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 왕족의 묘역을 두루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 서울시에서는 앞으로도 우리의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정 추진을 통해 보다 철저히 보존․관리하여 전 시민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길이 남길 것이다.
이 지정계획과 관련하여 의견이 있는 경우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2133-2639)로 제출하면 된다.
<서울시 문화재 지정절차>
※ 문화재 지정 효력은 지정 고시로 발생함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위치도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전경 |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은 이르기를 “예서(隸書) 이후로 육서(六書)의 본 뜻을 잘 밝혀, 삼대(三代)의 글을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하여 고인(古人)이 글자를 만든 근본을 알게 한 것은, 허숙중(許叔重 숙중은 허신(許愼)의 자)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공로가 크다 하여 후세의 학자들이 받들어 법을 삼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나는 모든 점이 다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육경(六經)의 글인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의 전(傳)과 모장(毛萇)ㆍ공안국(孔安國)ㆍ정중(鄭衆)ㆍ마융(馬融) 등 여러 학자의 훈고(訓詁)로도 그 모두가 경전(經傳)의 본 뜻과 반드시 합치된다고는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숙중(叔重)은 동경(東京 후한(後漢))의 중엽에 태어나서 《설문해자》의 바탕을 삼은 것이라고는 유흠(劉歆)ㆍ가규(賈逵)ㆍ두임(杜林)ㆍ서순(徐巡) 등 10여 인의 학설에 불과한데도 완전히 옛사람의 본뜻을 터득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그럴까 하는 것이 첫째 이유요, 오경(五經)은 채옹(蔡邕) 등이 정정(正定)하기 이전에는 전사(傳寫)할 때마다 사람에 따라 달랐다. 이제 그 책에 수록된 것이 대체로 이자(異字)가 많은데 현재의 경전을 가지고 비교해 볼 때 《설문》이 그만 못하고, 또 《설문》은 같은 책 중에서 동일한 것을 두 군데에 인용하면서 그 글이 서로 다르니, 이를테면 사(氾)자 아래에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강유사(江有氾)라 쓰고 사(洍)자 아래에도《시경》을 인용하면서 강유사(江有洍)라 하였고, 구(逑)자 아래에는《서경(書經)》을 인용하면서 방구잔공(旁逑孱功)이라 쓰고 잔(僝)자 아래에도《서경(書經)》을 인용하면서 방구잔공(旁救僝功)이라 하였다. 또 근(巹)자 아래에는 《시경》을 인용하여 적석기기(赤舃己己)라 쓰고, 견(掔)자 아래에도《시경》을 인용하면서 적석견견(赤舃掔掔)이라 썼다. 후세에 이 책을 읽는 자들이 장차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하는 것이 둘째 이유이다. 정현(鄭玄)이 허신(許愼)의 《설문》이 오경과 뜻이 다름을 논박하였고,《안씨가훈(顔氏家訓)》에도 “《설문》중에 경전을 인용한 것이 지금의 경전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 있으므로 감히 따를 수 없다.” 한 것을 이른다. 유전(流傳)된 지 이미 오래이니 어찌 탈루(脫漏)가 없으랴! 그러므로 서현(徐鉉)도 이르기를 ‘전서(篆書)가 인체(堙替)된 지 오래이므로 착란(錯亂)되고 유탈(遺脫)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제 예를 들면 《설문》에 빠진 글자는 반드시 옛날에는 없던 글자인데도 따로 한 글자를 지적하여 그 자에 해당시켰다.’ 한 것이다. 이를테면《설문》에 유(劉)자가 없는데 후인이 유(鎦)자로 그에 해당시켰고, 유(由)자가 없는데 유(甹)자로, 태(兌)자를 통(統)자로 해당시킨 것 등이다. 경전을 고쳐 《설문》에 맞추어 지리하게 둘러 붙인 것이 그 셋째 이유이다. 이제 그 중 한두 가지를 들어 평하려 한다. 진(秦)ㆍ송(宋)ㆍ설(薛)은 모두 국명인데, 진자는 화(禾)를 따랐으니 토지가 벼농사에 합당한 것이라 하였으니 또한 너무 오활한 말이고, 송(宋)자는 목(木)을 따라 거처를 삼았고, 설(薛)자는 신(辛)을 따라 고(睾)가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비서(費誓) 《서경》의 편명)의 비(費)자를 고쳐서 비(粊)라 쓰고는 악미(惡米)라 풀이하였고, 무왕재패(武王載旆)의 패(旆)자를 고쳐서 발(坺)로 쓰고 한 삽으로 떠낸 흙이다(臿土)하고, 위(威)자를 시어미[姑]라 하고 야(也) 자를 여음, 예(殹)자를 격성(擊聲), 곤(困)자를 고려(故廬), 보(普)자를 태양이 빛이 없는 것[日無色]이라 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또 ‘학(貉) 자의 뜻은 악(惡)이다.’ 한 것과, ‘견(犬)자의 모양을 보면 마치 개를 그려 놓은 것 같다.’ 한 것과, ‘구(狗)자는 두드린다는 뜻이다.’ 한 것이 어찌 공자의 말이겠는가? 유(有)자를 마땅히 없어야 될 것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춘추(春秋)》에 일유식지(日有食之)라 한 것을 인용하였고, 곽(郭)자를 ‘제(齊) 나라 곽씨(郭氏)의 구허(舊墟)이다. 곽씨가 선인(善人)을 착하게 여기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물리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하였으니, 초설(勦說)에 가까워서 그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거(居)자를 옛 것을 본받는다는 뜻이라 하고, 용(用)자를 복중(卜中), 동(童)자를 죄지은 남자, 양(襄)자를 옷을 벗고 밭가는 것, 조(弔)자를 사람이 활을 가지고 모여서 짐승을 모는 것, 욕(辱) 자를 밭가는 철[耕時]을 놓친 것이라 하였으며, 벌(罰)자를 칼을 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꾸짖는 것, 노(勞)자를 불이 문(門)을 태운다는 뜻이라 하였고, 재(宰)자를 죄인이 집안에서 일하는 것, 명(冥)자를 16일에 달이 비로소 기울어 어두워 간다고 하였고, 형(刑)자를 칼을 가지고 우물을 지킨다는 뜻이라 하였으니, 천착하여 정리(情理)에 먼 것이 아니겠는가? 삼(參)을 풀이하여 상성(商星)이라 한 것은 천문(天文)과 맞지 않고, 박(亳)자를 풀이하여 경조(京兆) 두릉정(杜陵亭)이라고 한 것은 지리(地理)와 맞지 않는 것이다. 책 중에 인용한 낙랑(樂浪)의 사실 수십 조가 다른 경전에는 도리어 빠져 있으니, 이는 사실의 수집에 타당성을 잃은 것이다. 이제 학자들이 그 중 큰 것을 취하고 그 작은 것은 버리며 그 옳은 것만을 취하고 잘못된 것을 버린다면 《설문》을 잘 연구하는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왕망전(王莽傳)을 인용하여 ‘유(劉)자의 구성은 묘금도(卯金刀)로 되어 있다. 정월은 강해서 묘금도의 날카로움이 다 행해지지 않는다.’ 하고, 또 ‘수명(受命)한 날인 정묘(丁卯)는, 정(丁)은 화(火)에 해당되니 한(漢) 나라의 덕이고, 묘(卯)는 유(劉)씨의 성이니 이것이 유(劉)자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다.’ 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하늘에 고하는 축문에는 참기(讖記)를 인용하여 ‘묘금(卯金)이 덕을 닦아 천자가 되었다.’ 하였다. 조환광(趙宦光)은 이르기를 “《설문》에는 유(劉)자가 없고 다만 유(鎦)자만이 씌어 있는데 이제 《한서(漢書)》의 묘금도(卯金刀)의 참기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옛 인장(印章)을 상고해 볼 때 유씨 성이 수없이 많으나 모두 유(劉)자로 씌어 있고 유(鎦)자로 된 것은 없다” 하였다. 위 명제(魏明帝) 태화(太和 227~232) 초기에 공경들이 아뢰기를 ‘노래로써 덕을 칭송하고 춤으로써 일을 상징하는 것인데, 글자로는 문(文)자와 무(武)자가 합하여 빈(斌)자가 됩니다. 신등이 삼가 악무(樂舞)를 만들고 장빈무(章斌舞)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위(魏) 나라는 숙중(叔重)이 생존한 후한과는 멀지 않으니, 이로 보아 고대에도 빈(斌)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서현(徐鉉)의 《교정설문(較正說文)》에는 앞에 빈(斌)자를 배열하고 “이는 속서(俗書)이다.” 하였다. 또 《설문》원본의 차례는 볼 수가 없다. 현재 사성(四聲)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은 서현(徐鉉) 등이 정한 것이고, 반절(反切)도 서현 등이 추가한 것이다. 조고칙(趙古則)의 《육서본의(六書本義)》에 이르기를 “한(漢) 나라 이전에는 반절(反切)이 없어서 허씨의《설문》과 정씨(鄭氏)의 전주(箋注)에는 다만 아무 자와 같이 읽는다[讀若某]라고 하였을 뿐이다. 현재 《설문》의 반절은 바로 주고(朱翶)가 손면(孫愐)의 《당운(唐韻)》에 있는 것을 가져다 추가한 것이다.” 하였다. 널리 후유(後儒)들의 설을 인용한 것 중에서 두예(杜預)ㆍ배광원(裵光遠)ㆍ이양빙(李陽氷) 등의 유도 서현(徐鉉) 등이 추가한 것이고, 또 ‘제가의 설 중에서 채록되지 않은 것을 이제 자운(字韻)의 뒤에 첨부한다.’ 한 것도 미(瀰)자 아래임 서현 등이 추가한 것이다. 모(眸)자 아래에 이르기를 “《설문》에는 바로 모(牟)라고 썼다.” 하였다. 조환광(趙宦光)은 이르기를 “이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설문》은 여러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니 어찌 무예(蕪穢)가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경전을 참정(參訂)할 때에는 반드시 본인의 이름을 앞에 실어야 전인들의 설과 혼동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시(始)자는 《설문》에 ‘여자의 처음이다[女之初也]’ 하였는데,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서현은 이를 ‘지극하도다 곤(坤)의 원기여! 만물이 이에서 시작된다’ 한 것을 가지고 풀이하였으니, 그는 경문(經文)에 ‘크도다 건(乾)의 원기여! 만물이 이에 의해서 시작된다’ 한 것을 모른 것이다. 만일 그의 풀이대로라면 반드시 남자라고 했어야 맞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모두《설문》에서 사람에 관계되는 것을 풀이한 것 중에 잘못된 것의 예이다. 상고하건대, 허신(許愼) 자는 숙중(叔重), 소릉인(召陵人)으로서 효장(洨長)에 임명되었다. 은 한 화제(漢和帝) 때에 사주(史籒)ㆍ이사(李斯)ㆍ양웅(揚雄)의 저서를 채취하고 자학(字學)에 밝은 사람들에게 널리 묻고 가규(賈逵)의 고증을 받아서《설문》을 지었다. 총 14편 5백 40부, 9천 3백 53자에 해설이 총 13만 3천 4백 41자로서, 일(一)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에서 끝났는데, 만물의 근원을 구명(究明)하였다. 그의 아들 허충(許沖)이 건광(建光 한 안제(漢安帝)의 연호 121~122) 원년 9월 기해 삭(朔) 20일(무오)에 주상(奏上)하였다. 서개(徐鍇)는 이르기를 “건광 원년은 한 안제 15년인데 이해는 신유년(121)이다. 이는 숙중의 자서와 허충의 상서문(上書文)에 자세히 실려 있다.” 하였다. 명(明) 나라 진대과(陳大科)의 《설문이동(說文異同)》에 “상고하건대,《설문》은 한 화제(漢和帝) 때에 허신이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 허충이 안제에게 올린 것이다. 이를 당(唐) 나라 이양빙(李陽氷)이 간정(刊定)하였고, 송(宋) 나라 초기에 서개(徐鍇)가 증정(增正)하였다. 조(詔)ㆍ지(志)ㆍ문(文)ㆍ흔(舋)ㆍ개(个)자 같은 것은 빠지거나 잘못된 것을 서현이 비록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으나 이루 다 기재할 수 없었던 듯싶다. 또 필적이 약간씩 다른 것은 이 몇 개의 글자에 그치지 않는다. 서기성(徐騎省 이름은 현(鉉))이《설문》에서 빠진 글자인 조(詔)ㆍ지(志)ㆍ건(件)ㆍ차(借)ㆍ추(魋)ㆍ기(綦)ㆍ척(剔)ㆍ국(觷)ㆍ잔(醆)ㆍ저(趄)ㆍ초(顦)ㆍ여( 청(淸) 나라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모자진(毛子晉)의 집에 송판본(宋板本)인 허씨의《설문》이 있는데, 지금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허숙중(許叔重)의 구본은 바로 글자의 획수로써 부(部)를 나눈 것으로, 자(子)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에서 끝났는데, 전체를 15권으로 나누었고, 현재 전하는 판본은 바로 심약(沈約)의 운(韻)을 따라서 편차한 것이다. 또 부(部)로써 분류해 넣은 것은 바로 송(宋) 나라 이도(李燾)가 서기성(徐騎省)의 것을 개정한 본이다. 원 나라 때 탕성홍(湯聖弘)이 허신의 원본《설문》을 판각하였는데 아깝게도 불에 타서 훼손되었다 한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숙중의《설문해자》이후로 당(唐)ㆍ촉(蜀)ㆍ이(李)ㆍ서(徐)가 도합 13가인데, 첫째《한간설문(汗簡說文)》, 둘째 《연설문(演說文)》, 모두 그 지은이의 성명을 알 수 없다. 셋째, 오숙(吳叔)의 《설문오의(說文五義)》, 넷째 이양빙(李陽氷)의《설문간정(說文刊定)》, 다섯째 이등(李騰)의《설문자원(說文字原)》 1권, 여섯째 서개(徐鍇)의《설문계전(說文繫傳)》 38권, 일곱째 서현(徐鉉)의《설문보(說文譜)》 12권, 여덟째《설문간정(說文刊定) 》15권, 아홉째 승려 담역(曇域)의《보설문(補說文)》 30권, 열째《설문음은(說文音隱)》 4권, 열한째《당본설문(唐本說文)》, 열두째 《촉본설문(蜀本說文)》, 열셋째 낭희로(郞稀魯)의 《설문보의(說文補義)》이다. 이 외에 또 명(明) 나라 조환광(趙宦光)의 《설문장전(說文長箋)》 40권, 청(淸) 나라 장정석(蔣廷錫)의《설문자원표(說文字原表)》 1권, 오조(吳照)의 《설문편방고(說文偏旁考)》 2권이 있는데 이는 모두 참고할 만한 것들이다. 《한간(汗簡)》은 왕사정(王士禎)의《한간》발문에 “곽충서(郭忠恕)가 지은《패휴(佩觿)》와《한간》두 책은 모두《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으나,《한간》은 지금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현재 수수 주씨(秀水朱氏)가 초본(鈔本) 6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오문(吳門)에서 새로 판각한 것으로서 고본(古本)에 가까워 보배로운 것이다. 표면에 이건중(李建中)이 ‘한간’이라고 쓴 것이 있고 지은 이의 성명도 빠진 것이 없으니, 이로써 동해(東海) 서기성 현(徐騎省鉉)을 알 수 있다. 곽충서(郭忠恕)가 이 책을 지을 때에 참고한 것이《고문상서(古文尙書)》이하 총 71가(家)나 되는데, 조범부(趙凡夫)가《한간》은 지은 이를 모른다고 한 것은 어째서일까?” 하였다. 청(淸) 나라 방중리(方中履)의《고금석의(古今釋疑)》에는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설문》 이후로 진(晉) 나라 동래군(東萊郡)의 견령(惤令) 여침(呂忱)이 이를 이어《자림(字林)》을 지어 그 누락된 것을 보충하였고, 승려 운승(雲勝)이 이에 주를 달았는데 현재도 왕왕《설문》에 부록된 것이 보인다. 이손암(李巽巖)은 이르기를 “고문(古文)ㆍ주문(籒文)은 아마도 여침(呂忱)이 처음으로 증입(增入)시킨 것 같다.” 하였다. 진(陳) 나라 고야왕(顧野王)이 다시《설문》을 따라《옥편(玉篇)》을 만들었는데 그 글자 수는 더욱 증가되었으나, 숙중(叔重)은 오로지 전서(篆書)로만 썼었고 야왕(野王)은 예서(隸書)를 섞어 써서 다시《설문》의 옛 면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당(唐) 나라 대력(大曆) 연간에 이양빙(李陽氷)이 특히 전학(篆學)으로 명성을 얻어 이에《설문》을 간정(刊定)하였고, 남당(南唐)에 이르러 서 초 금 개(徐楚金鍇 초금은 자임)가 이를 다시 정정하여《설문계전(說文繫傳)》을 지었는데, 그는 대체로 허씨의《설문》을 경서와 같이 존중하였다. 송(宋) 나라 옹희(雍熙) 3년에 개(鍇)의 형인 서현(徐鉉)이 조서를 받들어《설문》을 상교(詳較)할 때에 처음으로 손면(孫愐)의《당운(唐韻)》의 음절(音切)을 채택하였는데, 지금 세상에 통행되는 것은 바로 서본(徐本)이다. 《범장편(凡將篇)》과《훈찬편(訓纂篇)》은 모두 없어지고 한(漢) 나라 서적 중에《설문》만이 남게 됨으로써 고고(考古)의 원유(苑囿 연총(淵叢))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서(二徐 서현(徐鉉)ㆍ서개(徐鍇)) 이외에 장유(張有) 《복고편(復古編)》ㆍ곽충서(郭忠恕) 《패휴(佩觿)》 와 근대에 이르러 조휘겸(趙撝謙) 《육서본의(六書本義)》ㆍ시광진(柴廣進) 《성음문자통(聲音文字通)》ㆍ조환광(趙宦光) 《설문장전(說文長箋)》ㆍ이등(李登) 《서문음의편고(書文音義便考)》 은 모두 《설문》을 따르고, 《설문》이 실로 빠지고 중복되고 잘못 풀이된 것이 많은 줄을 몰랐으니, 어찌 다 좇을 수 있겠는가?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은 숙중(叔重)과 동시대 사람이면서 곧 이를 논박하였고, 유원위(庾元威)는 ‘허신(許愼)은 가씨(賈氏 가규)의 학문을 천착하여 이에 《설문》을 지어 상주하였다’ 하였으니, 어찌 이소온(李少溫 이름은 양빙(陽氷))ㆍ정어중(鄭漁仲 이름은 초(樵))ㆍ양신천(楊辛泉)ㆍ대합계(戴合溪)ㆍ위자재(魏子才)ㆍ오경보(吳敬甫) 등의 지적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허신의《설문》을 존중하는 자들은 이리저리 둘러 맞추는 자들이 많다. 나는 《통아(通雅)》에서 이렇게 논했다. 초(草)자는 있으면서 조(皁)자는 없고, 사( 타(妥)자는 없으면서 수(綏)자는 타(妥)를 따른다 하였고, 춘(春)자는 없으면서 초부(艸部)에 춘( 기타 이필(異筆)이면서 통용되는 글자를 번번이 반복해서 쓰고 거듭 풀이한 것으로는 고(鼓)자와 고(鼔)자, 역(鬲)자와 역(䰜)자는 모두 다른 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㜽)자와 자(子)자, 수( 남(藍)자를 나누어서 염(染)이라 하고 저(菹)라고 한 것도 같은 예이며, 우(吁)자와 연(孌)자를 양쪽으로 실어서 분명히 중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씨(戴氏)는 이르기를 “남(藍)자의 뜻은 두 가지로 쓰이나, 글자의 모양은 같으니 마땅히 한 글자에 모아 기록했어야 할 터인데 무슨 이유로 양쪽에 나타내어 염초(染草)라고도 하고 과저(瓜菹)라고도 했는가? 과저는 오이김치[灆]이다. 또, 남문(漤文)이 있으니 구부(口部)에 우(吁)자가 있는데 경(驚)이라 하였고, 우부(于部)에 또 우(吁)자가 있는데 놀랐을 때 하는 말이라 하였고, 연(孌)자는 사모한다는 뜻이고 또 난( 원(妴)자와 원( 고문(古文)이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저절로 의전(疑傳)이 있게 되고 초록(抄錄)을 거치면서 착간(錯簡)이 없을 수 없는 것인데도 후세의 호사가가 그 의전(疑傳)과 착간에 대해 곡설(曲說)을 지어 냈으니 다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설문》은 본래 견령(惤令 여침(呂忱))이 추가한 것과 운승(雲勝)이 주를 지은 것, 초금(楚金 서개(徐鍇)의 자)이 풀이한 것이 많았는데 이제 모두 유실되었고, 황직옹(黃直翁 직옹은 공소(公紹)의 자)의《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인용한 것과 왕백후(王伯侯 백후는 응린(應麟)의 자)가 인용한 것과《고이(考異)》에 인용한 것은 대부분 현존하는 본이 아니다. 합계(合溪)는 걸핏하면 당본(唐本)ㆍ촉본(蜀本)ㆍ서본(徐本)을 인용하였는데, 오정의(吳正儀)의《설문》은 또 이와 다르니, 마땅히 다른 책에 인용된 것을 수집하여 참고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잔결(殘缺)된《설문》을 고수(固守)해 무엇하랴! 또 《설문》에서 경전을 인용한 것이 본자(本字)가 아닌 것이 많으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주서(逸周書)》에 있는 구장(竘匠)과 사분민지산(士分民之祘), 주서(周書)의 유묘유계(維緢有稽) 묘(緢)는 깃술[旄絲] 이다.ㆍ잔잔교언(戔戔巧言) 같은 것은 유문(遺文 일문(逸文))이니 말할 것도 없고,《주역》에서 인용한 서건자(噬乾 또, 준(䜭)자의 풀이를 우서(虞書)에 준견회거천(䜭畎澮距川)이라 한 것을 인용하고, 천(川)자를 풀이하면서도 이 글을 인용하여 준(濬)이라 썼으며, 주(袾)자에는 정녀기주(靜女其袾)를 인용하고 주( 사(汜)자에는《시경》을 인용하여 강유사(江有汜)라 하는가 하면 사(洰)자에도《시경》을 인용하면서 강유사(江有洍)라 하였고, 기(蘄)ㆍ은(䓄)ㆍ호( 상고하건대, 숙중(叔重)의 시대에는 이미 석경(石經)이 간정(刊定)되었는데, 어찌 이다지도 다른가? 대체로 한(漢) 나라 이후로 명물(名物)과 사건이 많이 새로 발생하여 명칭이 혼동되기 쉬우므로 차츰 그것을 구별하여 혹은 그 음을 바꾸고 혹은 변(邊)이나 방(旁)을 더하기도 하였다. 자학(字學)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드디어 한 글자마다 각기 한 가지 뜻만을 갖게 하고자 하여, 육조(六朝)와 당(唐)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증가한 것이 무수하였고, 사부(詞賦)를 지으면서 창조된 기이한 글자와 잘못 쓴 글자를 널리 모아 한데 묶어 수집하여, 중복되고 난잡하고 누락되며 번쇄(繁屑)한 것을 모두《설문》에 부록하였다. 한(漢) 나라 말기를 당하여 허씨는 분별해서 말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으나, 중고 이후로는 부득이 이를 전요(典要)로 삼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육서(六書) 고문의 자원(字原)을 몰랐으므로 한 나라 때에 습관적으로 쓰던 것과 증개한 것들을 인습하여 편집해 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그 잘못된 것을 상고해 보면 많아서 다 지적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설문》을 높이는 자들은 자기의 저서를 또한《설문》이라 하니, 이는 동시에 쓴 것이 아니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송(宋)ㆍ원(元) 이후로 여러 학자들이 변론하여 배척한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그러므로 위매(魏枚) 《육서정온(六書精蘊)》ㆍ왕응전(王應電) 《동문비고(同文備考)》ㆍ오원만(吳元滿) 《소원정의(溯原正義)》ㆍ《육서총요(六書總要)》ㆍ주모위(朱謨㙔) 《기자(奇字)》 는 다시 정초(鄭樵) 《육서략(六書略)》ㆍ양환(楊桓) 《육서통(六書統)》ㆍ대통(戴侗) 《육서고(六書考)》ㆍ주백기(周伯琦) 《육서정위(六書正譌)》를 바탕으로 고문(古文)을 추구(推究)하여 소전(小篆)의 잘못을 바로잡기에 온 정력을 다 하였는데도 조범부(趙凡夫)는 또 정(鄭)ㆍ대(戴)ㆍ위(魏)ㆍ오(吳)를 배격하였으며, 그가 지은《설문장전》은 한결같이 서현본(徐鉉本)《설문》을 주축으로 하였으니 그가 어찌《설문》이 온전한 허씨의 책이 아님을 알았겠으며, 또 어찌 허씨의 학이 온전한 한학(漢學)이 아니었음을 알았겠는가? 다만 자재(子才 위매(魏枚)의 자)의 무리들은 임의로 글자를 만들어 억설을 면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옛것을 잘 지킨 것만도 못하다. 그러나 범부(凡夫)의 예(殹)자와 방(匚)자에 대한 억설이야 또 말해 무엇하랴! 《설문장전(說文長箋)》에 “야(也)자를 반드시 예(殹)자로 쓰라.”고 한 주에 “반드시 예(殹)로 써야 한다.” 하였고, 호(好)자는 호( 학자는 마땅히 석경(石經)과《사기》ㆍ《한서(漢書)》를 따르고 널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가지고 고증함으로써 고인(古人)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옳다. 금석(金石)인 한비(漢碑)와 통하는 것을 어찌 반드시 억지로 맞추어야 하겠으며,《설문》에 중복된 글자를 또 어찌 억지로 나누어야 하겠는가?” 나는 상고하건대, 서기성(徐騎省)의《오음운보(五音韻譜)》는 숙중(叔重)의《설문》원본을 가져다가 부거(部居)를 바꾸고 음절(音切)을 고쳐서 따로 이 책을 만들었는데, 단지 검토에는 편리하나 뜻은 제가(諸家)의 것을 그르쳤다. 이것이 유통하므로 세상에서 마침내 이것을 허씨의《설문》이라 여기니 잘못이다. 그리하여 서본(徐本)이 나오자 허본(許本)은 사라지게 되었다. 숙중본은 일(一)자에서 시작하여 해(亥)자로 끝났고, 정신본(鼎臣本 정신은 서현의 자)은 동(東)자에서 시작하여 갑(甲)자에서 끝났으니, 현재 통행본은 바로 서씨가 지은 것이다. 한산(寒山) 조범부(趙凡夫) 같은 이는 다시 그의 잘못을 답습하여《장전(長箋)》을 저술하고 제목을《설문》이라 한 것은 왜일까? 그가 스스로 《장전》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서, 스스로 허씨의 원본이 아님을 알면서도 억지로 《설문》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기성(騎省)의 운보(韻譜)는 비록 숙중의 본지는 아니나 검색에는 편리하므로 《장전》에서 모두 그 차서를 따르고 다만 그의 자구(字句)를 그르친 것과 음절(音切)을 바꾼 것 등에 대하여 원본을 고찰하여 간정(刊定)하였다.” 한 것이다. 그런데 고정림(顧亭林)은 이를 논박하여 “만력(萬曆) 말년에 오중(吳中) 사람 조범부 환광(趙凡夫宦光)이《설문장전》을 지었는데, 예부터 전해오는 오경(五經)을 자기 생각대로 간개(刊改)하여 작은 지혜를 가지고 선유(先儒)들과 다른 것을 구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청청자금(靑靑子衿)을 음분(淫奔)을 읊은 시라 하여 금(衿)자는 바로 금(衾)자라 하였는데, 《시경》에 본래 금(衾)자가 있으니, 포금여주(抱衾與裯)라고 한 것과 금금난혜(錦衾爛兮)라 한 것이 이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는 사실 사서(四書)도 제대로 외지 못해서 《논어》의 호시출어합(虎兕出於柙)을 인용하면서 ‘《맹자》의 호표출우갑(虎豹出于甲)’이라고 잘못 쓰기까지 하였다. 시(兕)자 아래에 보임 그러나 그는 육서(六書)의 본지에 대하여는 관견(管見)이 없지 않았는데, 마침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괴이한 것을 숭상하는 시대를 만나 이 책이 세상에 성행하여 지금까지 분변하지 못하니, 후일에 잘못된 것에 젖어 옳은 것을 그르다 하여 후세의 학자들에게 해가 됨이 적지 않을까 염려되므로 그 특히 잘못된 10여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하였는데, 이제 그 모두를 초록할 겨를이 없다. 《설문장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모두 4질, 40권으로서 강도(江都 강화도) 행궁(行宮)과 홍계희(洪啓禧)ㆍ재상 김치인(金致仁)ㆍ초재(蕉齋) 심염조(沈念祖)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역부( 《설문》에 인용된 글이 육경(六經)과 다른 데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설문》에 인용된 경전은 바로 당시의 이본(異本)이다. 그러므로 숙중(叔重)은 다만 자기 집안에서 읽은 책만을 가지고 기재하고 다른 판본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그 한 예로《한서》채옹전(蔡邕傳)에 “채옹의 자는 백개(伯喈)로 영제(靈帝) 때 낭중(郞中)에 임명되어 동관(東觀)에서 교서(校書)하다가 의랑(議郞)으로 전직되었는데, 경적(經籍)은 성인이 지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르매 글자가 많이 잘못되었고, 속유(俗儒)들이 이를 천착하여 후학을 그르친다고 생각하여 희평(熹平 한 영제(漢靈帝)의 연호. 172~177) 4년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 당계전(唐谿典),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楊賜), 간의대부(諫議大夫) 마일제(馬日磾), 의랑(議郞) 장순(張馴)ㆍ한열(韓說), 태사령(太史令) 선양(單颺) 등과 함께 육경(六經) 문자를 정정(正定)할 것을 주달하자 영제가 이를 허락하므로 옹이 직접 비석에 쓰고 석공(石工)을 시켜 새겨서 태학(太學) 문 밖에 세웠다. 이에 후배 학자들이 모두 이를 표준으로 하여 오류(誤謬)를 바로잡았다. 비석이 처음 세워지자 구경꾼과 사본(寫本)을 뜨는 자들의 수레가 매일 천여 량이나 모여 거리를 메웠다.” 하였으니, 석경이 정해지기 전에는 육경의 문자가 사람마다 각기 달랐으므로 옹이 이러한 요청을 해서 정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숙중이 인용한 경전이 어찌 다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증거이다. 또 《후한서(後漢書)》 유림전(儒林傳)의 서문에 “본초(本初 한 환제(漢桓帝)의 연호) 이후로 유학(游學)이 증가하여 태학생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구(章句)는 점차 소홀히 하고 대부분 문장만을 숭상하여 선비의 기풍은 더욱 쇠퇴하였다. 당인(黨人)이 제거될 때 고명선사(高名善士)들이 대부분 연좌 유폐(流廢)되자, 이후에는 마침내 서로 다투고 고소하는가 하면 또 사사로이 뇌물을 써서 난대칠서경자(蘭臺漆書經字)를 자기들의 사문(私文)과 합치하게 만드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희평(熹平) 4년에 영제(靈帝)가 마침내 여러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을 정정하여 비석에 새기되, 고문(古文)ㆍ전서(篆書)ㆍ예서(隸書)의 3체 서법으로 써서 태학문에 세워서 모든 사람들이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했으며, 주에 “고문(古文)은 공자의 벽중(壁中)에서 나온 글이고, 전서(篆書)는 진 시황(秦始皇)이 정 막(程邈)을 시켜서 만든 것이며, 예서(隸書)도 역시 정막이 바친 것인데, 도예(徒隸)들을 다스리는 데 썼으므로 간편함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이순전(李巡傳)에도 나타나 있다. 순(巡)은 여양(汝陽) 사람으로 영제(靈帝) 때에 환관이 되었다. 순은 모든 박사들이 갑을과(甲乙科)를 시험하면서, 서로 고하(高下)의 등급을 다투는가 하면 서로 고발하고 심지어는 뇌물을 써서 난대칠서경자(蘭臺漆書經字)를 자기들의 사문(私文)과 맞추려는 자까지 있다 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모든 학자들과 함께 오경(五經) 문자를 돌에 새겼다. 이로부터 오경이 한번 정해지자 다투는 자들이 없게 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이보다 앞서 모든 학자들이 오경 문자의 사기(私記)를 가지고 있었는데 각기 이동(異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또한 한 가지 증거이며, 또 황백사(黃伯思)의 《동관여론(東觀餘論)》을 상고해 볼 때 한석경(漢石經)이 금문(今文)과 같지 않은 것이 또 한 가지 증거이다. 상고하건대, 만사동(萬斯同)의 〈한위석경잔비(漢魏石經殘碑)〉에는 현재 경전의 문자와 다른 것이 많으니, 숙중(叔重)이 인용한 경전의 글자가 다른 것이 뭐 족히 의심스럽겠는가. 또 고염무는 말하기를 “오경(五經) 문자가 같지 않은 것이 많다. 같은 한 경이면서도 다른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상심(桑葚)은 위시(衛詩)에 보이는데 노송(魯頌)에는 심(黮)자로 되었고, 창궁(鬯弓)은 정풍(鄭風)에 나타났는데 진풍(秦風)에는 창(韔)자로 되었으며, 같은 《좌전(左傳)》에서 초(楚) 나라의 기사에 있어 위씨(薳氏)를 혹은 위씨(蔿氏)로, 잠윤(箴尹)을 혹은 침윤(鍼尹)이라 했다.” 하였다. 〈경전을 기재하면서도 이러하였는데〉 하물며 종정(鍾鼎)에 기재된 문자와 제유(諸儒)들이 기록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예기》의 ‘서동문(書同文)’이라 한 것은 또한 그 대략을 말한 것이다. 나는 이로써 숙중(叔重)의 《설문》에 경을 인용한 것이 다르게 된 것을 증명한다. 석고문(石鼓文)의 주에, “《설문》에 남아 있는 주서(籒書)가 2백 3자인데 석고에는 겨우 ‘鼎’ㆍ‘ [주C-001]《설문(說文)》에 …… 변증설 : 본 변증설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에 인용된 경문(經文)이 현재의 경문과 일치하지 않는 점과 기타의 오류(誤謬)에 대하여, 주로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 방중리(方中履)의 《고금석의(古今釋疑)》, 주양공(周亮工)의 《서영(書影)》, 조환광(趙宦光)의 《설문장전(說文長箋)》등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 오주는 이에 대하여 허신이 사용한 경전은 당시의 이본(異本)으로서 오경의 정문이 정정(定正)되기 이전의 각 개인의 사기(私記)이므로 한 영제(漢靈帝) 희평(熹平) 4년(175)에 정정된 현재의 경전과 다르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번역과 역주에 있어 주로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 예문인서관(藝文印書館) 1973 영인본)》를 사용하였다. [주D-001]10여 인의 학설 : 《일지록(日知錄)》 제21권 설문(說文) 조의 고염무의 주에 양신(楊愼)의 육서색은 서(六書索隱序)를 인용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설문》에 학설이 인용된 자는, 공자ㆍ초 장왕(楚莊王)ㆍ좌씨(左氏)ㆍ한비(韓非)ㆍ회남왕(淮南王)ㆍ사마 상여(司馬相如)ㆍ동중서(董仲舒)ㆍ경방(京房)ㆍ위굉(衛宏)ㆍ양웅(揚雄)ㆍ유흠(劉歆)ㆍ상흠(桑欽)ㆍ두림(杜林)ㆍ가규(賈逵)ㆍ부의(傅毅)ㆍ관박(官薄)ㆍ담장(譚長)ㆍ왕육(王育)ㆍ윤동(尹彤)ㆍ장림(張林)ㆍ황호(黃顥)ㆍ주성(周盛)ㆍ녹안(逯安)ㆍ구양교(歐陽僑)ㆍ영엄(甯嚴)ㆍ원예(爰禮)ㆍ서순(徐巡)ㆍ장도(莊都)ㆍ장철(莊徹) 등 29인으로 되어 있다. [주D-002]강유사(江有汜) : 국풍(國風) 소남(召南)의 편명. 사(汜)는 본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강이 다시 본줄기로 흘러 드는 곳. 단옥재(段玉裁)는 “사(洍)라고 쓴 것은 삼가시(三家詩)를 따른 것이고, 사(汜)는 모시(毛詩)를 따른 것이다.” 하였다. 《說文解字 洍字註》 [주D-003]방구잔공(旁逑孱功) : 널리 의견을 모아 일을 잘 처리한다는 뜻. 현재 요전(堯典)에는 “方鳩僝功”이라 보인다. 《설문해자》 구(逑) 자의 단주(段註)에는 “대체로 《고문상서(古文尙書)》에는 방(方) 자를 쓰고 《금문상서》에는 방(旁) 자를 썼으니 이는 《금문상서》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4]적석기기(赤舃己己) : 현재 빈풍(豳風) 낭발(狼跋)에는 “公孫碩膚 赤舃几几”라 보이는데, 적석은 붉은 신, 기기는 점잖고 의젓한 모양이다. 《설문해자》 근(巹) 자의 단주(段註)에는 “几几 各本作己己 昏義釋文 作几几 今據以正之”라 하였고, 또한 견(掔) 자 주에는 “掔掔 當依豳風 作几几”라 하였다. [주D-005]진(秦) 자 …… 것이라 : 《설문해자》에서 진(秦)을 “백익(伯益)의 후손이 봉해진 나라이다. 토지가 벼[禾]에 알맞다. 화(禾)를 따랐고 춘(春) 자를 줄인 것이다. 진(秦)은 벼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 것을 이름이다. [주D-006]무왕재패(武王載旆) : 《시경》 상송(商頌) 장발(長發)에 보이는데, 무왕(武王)은 탕왕(湯王)을 가리키고, 재패(載旆)는 깃발을 세운다는 뜻이다. [주D-007]위(威) 자를 시어미[姑] : 《설문해자》 위(威) 자에 “姑也 從女戌聲 漢律曰婦告威姑”라 하였다. [주D-008]야(也) 자를 여음 : 본서 남녀근자 상형변증설(男女根字象形辨證說) 참조. [주D-009]학(貉) 자의 …… 말이겠는가 : 《설문해자》의 학(貉)ㆍ견(犬)ㆍ구(狗) 자 조에 각기 공자의 말로 되어 있다. [주D-010]복중(卜中) : 《설문해자》 용(用) 자에 “시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복중(卜中)을 따랐는데 이는 위굉(衛宏)의 설이다.” 하였다. 이는 용(用) 자를 전서에서 ‘●’로 썼기 때문에 복중(卜中)을 따랐다고 한 것이다. [주D-011]욕(辱) 자를 …… 놓친 것 : 《설문해자》 욕(辱) 자에 “恥也 從寸在辰下 失耕時 於封畺上戮之也 辰者 農之時也 …… ”라고 보인다. [주D-012]삼(參) …… 한 것 : 《일지록》 제21권 설문(說文) 조 전씨(錢氏)의 주에는 “《설문》에는 본래 삼(參)과 상(商)을 모두 별의 이름이라 하였고, 삼(參) 자를 상(商)이라고 풀이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주D-013]노래로써 …… 명명하였습니다 : 《송서(宋書)》 제19권 악지(樂志) 1에 보인다. [주D-014]서현(徐鉉) …… 정한 것 : 《일지록》 제21권 설문 조의 황여성(黃汝成)의 주에 “고씨(顧氏)가 사성(四聲)으로 배열되어 있다 한 것은, 이도(李濤)가 편집한 《오음운보(五音韻譜)》이고, 서현 등이 정한 것이 아니다 …… ” 하였다. [주D-015]현재 …… 것이다 : 전대흔(錢大昕)은 “주고(朱翶)는 독자적으로 반절(反切)을 만들어서, 《당운(唐韻)》의 반절과는 다른 것이니, 조고칙(趙古則)의 말은 잘못이다.” 하였다. 《日知錄 說文條 註》 [주D-016]지극하도다 …… 시작된다 : 《주역》 곤괘(坤卦) 단사(彖辭)에 보인다. [주D-017]크도다 …… 시작된다 :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보인다. [주D-018]이양빙(李陽氷) : 당(唐) 나라 조군(趙郡) 사람. 자는 소온(少溫). 문장과 전서(篆書)에 능하였는데 그의 전서는 특히 유명해서 “당(唐) 3백 년 간에 전서로 일컬을 자는 오직 양빙(陽氷)일 뿐이다.”라고까지 하였으며, 또 창힐(蒼頡)의 후신이라고도 한다. 《全唐詩 10, 全唐文 437》 [주D-019]서개(徐鍇) : 남북조 시대 남당(南唐)의 학자. 자는 초금(楚金), 서현(徐鉉)의 아우. 저서에 《설문계전(說文繫傳)》ㆍ《설문해자운보(說文解字韻譜)》가 있다. 《宋史 卷44》 [주D-020]심약(沈約)의 운 : 심약이 《사성보》에서 1백 6운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주D-021]방중리(方中履) : 청(淸) 나라 때 학자. 자는 소백(素伯). 저서에 《한청각집(汗靑閣集)》ㆍ《고금석의(古今釋疑)》 등이 있다. 《淸史 卷499 列傳 285 方以智》 [주D-022]양신천(楊辛泉) : 신천은 원(元) 나라 학자 양환(楊桓)의 호. 전주(篆籒)에 관한 학문에 특히 정통했다. 저서에 《육서통(六書統)》ㆍ《육서소원(六書泝源)》ㆍ《서학정운(書學正韻) 》등이 있다. 《元史 卷164 本傳》 [주D-023]위자재(魏子才) : 자재(子才)는 명 세종(明世宗) 때의 학자인 위교(魏校)의 자. 호는 장 거(莊渠). 저서에 《주례연혁전(周禮沿革傳)》ㆍ《대학지귀(大學指歸)》ㆍ《육서정온(六書精蘊)》 등이 있다. 《明史 卷282 儒林傳一》 [주D-024]오경보(吳敬甫) : 경보(敬甫)는 명 신종(明神宗) 때의 학자인 오원만(吳元滿)의 자.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만을 힘썼는데 특히 자학(字學)에 밝았다. 저서에 《육서정의(六書精義)》ㆍ《육서총요(六書總要)》ㆍ《육서소원직음(六書溯原直音)》ㆍ《해성지남(諧聲指南)》 등이 있다. 《四庫全書總目提要 經部 小學類》 [주D-025]유(劉) 자 …… 분명하다 : 전대흔(錢大昕)이 이에 대해 “《설문》 죽부(竹部)에 유(藰) 자가 있는데 ‘從竹劉聲’이라 하였으니, 본래는 유(劉) 자가 있었던 것이 옮겨 쓰면서 빠진 것이다.” 하였다. 《日知錄 註》 [주D-026]유성(由聲) …… 없으니 : 유(油) 자에 “從水由聲”이라 한 것과 축(舳) 자에 “從舟由聲”이라 한 것 등을 말한다. [주D-027]자(㜽)자와 …… 같은 것 : 자(㜽) 자는 자(子) 자의 고자(古字). 수( [주D-028]주자(疇咨) :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疇咨若時 登庸”이라 보이는데, 주(疇) 자는 ‘누구[誰]’라는 뜻이고, 자(咨) 자는 조사이다. [주D-029]12신(辰) : 십이지(十二支)를 이르는데, 《설문》의 자(子) 자에는 “11월에 양기(陽氣)가 움직여 만물이 자라므로 사람들이 이로써 명칭을 삼은 것이다.” 하였고, 축(丑) 자에는 “잇는다는 뜻이니 12월에 만물이 용사(用事)한다.” 한 것 등을 말한다. [주D-030]금생화사(金生火死) : 《설문》 맥(麥) 자에 “金王而生 火王而死”라 보이는데, 보리는 금기(金氣)가 왕성한 가을에 나서 화기(火氣)가 왕성한 여름에 죽는다는 뜻이다. [주D-031]돼지가 달아나는 것[豚走] : 《설문》 축(逐) 자에는 “追也 從辵豕省聲”이라고 보인다. [주D-032]도생(逃省) : 《설문》 부(頫) 자에 “低頭也 從頁逃省”이라 한 것을 말한다. [주D-033]노(勞)자를 형화소문(熒火燒門) : 《설문》 노(勞) 자에 “勮也 從力熒省焱火 燒冖用力者勞”라 한 것을 줄인 말이다. [주D-034]구장(竘匠) : 일문(逸文) 편에 보인다. 《설문》 구(竘) 자에 “竘 健也”라고 보인다. [주D-035]사분민지산(士分民之祘) : 사(士)가 백성의 수효를 나눈다는 말이다. 산(祘) 자는 산(算) 자와 뜻이 같다. [주D-036]유묘유계(維緢有稽) : 《서경》 여형(呂刑)에는 “惟貌惟稽”라 보이는데, 오직 그 용모를 살피라는 뜻이다. 《설문》 묘(緢) 자의 단주(段註)에는 “호리(豪釐)를 살피라는 뜻이다.” 하였다. [주D-037]잔잔교언(戔戔巧言) : 능숙한 솜씨로 남을 해치는 교묘한 말. 현재 《서경》 진서(秦誓)에는 “截截善諞言”이라 보인다. [주D-038]서건자(噬乾 [주D-039]승마전여(乘馬驙如) :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뜻. 둔괘(屯卦) 육이(六二) 효사에는 “乘馬班如”라고 보인다. [주D-040]발이온숭지(癹以蘊崇之) : 풀에 베어 쌓아서 썩게 함. 은공(隱公) 6년 조에는 “芟夷蘊崇之”라 보이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芟 刈也 夷 殺也 崇 聚也”라 하였다. [주D-041]이비진삼각(以備陳三愙) : 양공(襄公) 25년에는 “以元女 太姬 配胡公 封諸陳 以備三恪”이라 보이는데, 무왕(武王)이 우알보(虞閼父)의 아들 호공(胡公)에게 장녀를 시집보내고 진(陳)에 봉하여 3각(恪)을 세웠다는 말이다. 3각은 진(陳)ㆍ기(杞)ㆍ송(宋)의 3국을 이르니, 두예(杜預)의 주에 “주(周) 나라가 우(虞)ㆍ하(夏)ㆍ은(殷)의 후손을 봉하여 공경하는 뜻을 보였으므로 3각이라 한다.” 하였다. 우알보는 우(虞) 나라 순(舜) 임금의 후손이다. [주D-042]경석(滰淅) : 《설문해자》 경(滰) 자 조에 “浚乾漬米也 孟子去齊 滰淅而行”이라 보이는데, 현재 《맹자》 진심 하(盡心下)와 만장 하(萬章下)에는 모두 접석(接淅)으로 보인다. 접(接)은 받는다[承]는 뜻. 석(淅)은 쌀을 씻은 물이니,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어 놓았다가 갑자기 떠나고자 하여 쌀을 물에서 건져 가지고 그냥 떠나는 것을 말한다. [주D-043]기마기도(旣禡旣禂) : 이미 마제(禡祭)를 지내어 빌었다는 뜻. 마제는 전쟁 때 군사가 주둔한 곳에서 군법을 처음 제정한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설문해자》 도(禂) 자 조 단옥재(段玉裁)의 주에 “서개(徐鍇)가 《시경》을 인용하여 ‘기마기도(旣禡旣禂)’라 하였는데 《시경》에는 이런 말이 없다. 그런데 서현(徐鉉)이 잘못하여 《설문》의 본문에 삽입한 것이다.” 하였다. [주D-044]왕삼숙 삼제 삼도(王三宿三祭三㓃) : 왕이 세 번 앞으로 나가 술을 부어 잔을 올리고 물러나온 것을 이른다. 《서경》 고명(顧命)에는 “王三宿三祭三咤”라 보이는데 채침(蔡沈)의 주에 “宿 進爵也 祭 祭酒也 咤 奠爵也 禮成於三 故三宿三祭三咤”라 하였다. [주D-045]항룡(亢龍) : 높이 올라간 용. 《주역》 건괘(乾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亢龍有悔”라 한 것을 이른다. [주D-046]재삼독(再三瀆) : 두 번 세 번 점치면 신(神)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주역》 몽괘(蒙卦) 괘사(卦辭)에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독(黷) 자 조에는 “握持垢也 易曰再三黷”이라 하였다. [주D-047]기우체(其牛掣) : 《주역》 규괘(睽卦) 육삼(六三) 효사에 “見輿曳 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체(觢) 자 조에는 “一角仰也 易曰其牛觢”라 하였다. [주D-048]풍기옥(豐其屋) : 그 집을 풍성하게 한다는 뜻. 《주역》 풍괘(豐卦) 상륙(上六) 효사에 “豐其屋 蔀其家”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풍(豐) 자 조에는 “大屋也 易曰풍其屋”이라 하였다. [주D-049]복우승마(服牛乘馬) : 소를 길들이고 말을 탄다는 뜻. 《주역》 계사 하(繫辭下) 2장에 “ 服牛乘馬 引重致遠 以利天下”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비(犕) 자 조에는 “易曰犕牛乘馬”라 하였다. [주D-050]천지인온(天地絪縕) : 천지의 기운이 화합한다는 뜻. 《주역》 계사 하 5장에 “天地絪縕 萬物化醇”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운( [주D-051]적상(的顙) : 이마가 흰 말. 별박이ㆍ대성마(戴星馬). 《주역》 설괘전(說卦傳) 11장에 “震 …… 其於馬也 …… 爲的顙”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적(馰) 자 조에는 “馬白額也 易曰爲馰顙”이라 하였다. [주D-052]오품불손(五品不遜) : 오륜(五倫)의 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뜻. 《서경》 순전(舜典)에 “命契 百姓不親 五品不遜”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손(愻) 자 조에는 “順也 唐書曰五品不愻”이라 하였다. [주D-053]조화분미(藻火粉米) : 조(藻)는 수초(水草)로서 무늬가 있는 것, 화는 불, 분미(粉米)는 흰쌀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보인다. 《설문해자》 조(璪) 자 조에는 “虞書曰璪火粉米”라 하였다. [주D-054]강색(剛塞) : 강건(剛健)하고 독실하다는 뜻.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剛而塞”이라 하고, 채침의 주에 “剛而塞者 剛健而篤實也”라 하였고 《설문해자》 색(㥶) 자에는 “實也 虞書曰剛而㥶”이라 하였다. [주D-055]병경(缾罄) : 술병이 비었다는 뜻.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 3장에 “缾之罄矣 維罍之恥”라고 보이는데, 《설문해자》 경( [주D-056]훤초(諼艸) : 원추리. 《시경》 위풍(衛風) 백혜(伯兮) 4장에 “焉得諼草 言樹之背”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훤(藼) 자에는 “令人忘憂之艸也 詩曰安得藼艸”라 하였다. [주D-057]계여지족(啓予之足) : 증자(曾子)가 임종시에 제자들에게 한 말로서 이불을 걷고 나의 발을 보라는 뜻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라 보인다. [주D-058]여유소립탁이(如有所立卓爾) : 앞에 우뚝 세워 놓은 것이 있는 듯싶다는 말. 안연(顔淵)이 공자를 찬양한 말.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주D-059]적왕소개(敵王所愾) : 왕의 노여움을 받다. 《좌전》 문공(文公) 4년에 “諸侯敵王所愾 而獻其功”이라 하고 두예(杜預)의 주에 “敵猶當也 愾恨怒也”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희(鎎) 자에는 “怒 [주D-060]비서(費誓) : 《서경》 주서(周書)의 한 편명. 비(費)는 산동(山東)의 비현(費縣)에 해당하는 곳인데 이 편은 노(魯) 백금(伯禽)이 회이(淮夷)를 정벌하기에 앞서 군사들에게 행한 훈시라 한다. 《설문해자》 비(粊) 자에는 “惡米也 周書粊書”라 하였다. [주D-061]양암(諒闇) : 천자가 거상(居喪)하는 동안을 이른다.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는 “高宗諒陰”이라 보이고, 《논어》 헌문(憲問)에는 “高宗諒闇 三年不言”이라 보인다. [주D-062]원수총좌(元首叢脞) : 《서경》 익직(益稷)에 실려 있는 고요(皐陶)의 갱재가(賡載歌) 중의 일절로서 “元首叢脞哉 股肱惰哉 萬事墮哉”라 보이는데, 임금이 번쇄(煩碎)하면 신하들이 게을러져서 모든 일이 잘못된다는 뜻이다. [주D-063]회변(會弁) : 회(會)는 옷 같은 것을 꿰맨 솔기, 변(弁)은 백록비(白鹿皮)를 여러 장 합해서 만든 주(周) 나라 관의 일종.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에 “有匪君子 充耳琇瑩 會弁如星”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괴(䯤) 자에는 “骨擿之可會髮者 詩曰䯤弁如星”이라 하였다. [주D-064]아흥수기패(我興受其敗) : 나는 일어나 멸망을 당하겠다는 뜻. 《서경》 미자(微子)에 “商今其有災我興受其敗”라 보이는데, 이는 상(商) 나라가 망하려 할 때 미자가 나라 떠날 것을 결심하고 기자(箕子)와 상의하자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기자의 답변이다. 《설문해자》 패(䢙) 자에는 “ [주D-065]잡이불월(雜而不越) : 복잡하면서도 마땅한 범위를 넘어 잘못되지 않는다는 뜻. 《주역》 계사하(繫辭下) 6장에 “其稱名也 雜而不越”이라 보이는데, 《설문해자》 월(越)자에는 “踰也 易曰襍而不 [주D-066]기미차종(旣微且尰) : 이미 정강이에 종기가 나고 다리가 부었다는 뜻.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 6장에 “旣微且尰 爾勇伊何”라고 보이는데 《설문해자》 종(瘇) 자에는 “脛氣腫 詩曰旣微且瘇”이라 하였다. [주D-067]증점(曾點) : 증자(曾子)의 아버지. 자는 석(晳), 공자의 제자. 《설문해자》 감( [주D-068]언언(言偃) : 춘추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자는 자유(子游). 공자의 제자로서 문학에 능하였다. 《설문해자》 언(㫃) 자에는 “旌旗之游㫃貌 古人名㫃 字子游”라 하였다. [주D-069]유능비예(有能俾乂) : 유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겠다는 뜻. 《서경》 요전(堯典)에 보이는데, 요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인재를 구하면서 한 말이다. 《설문해자》 예(䢃) 자에는 “治也 虞書曰有能俾䢃”라 하였다. [주D-070]아지불피(我之弗辟) : 《서경》 금등(金縢)에 “周公乃告二公曰 我之弗辟 我無以告我先王”이라 보인다. 이는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이 섭정하였는데,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이 “주공은 장차 성왕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므로, 주공이 내가 이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면 의리상 선왕에게 고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설문해자》 벽( [주D-071]비음식(菲飮食) : 비자는 박(薄) 자의 뜻이니, 음식을 간략하게 먹는다는 뜻으로 《논어》 태백(泰伯)에 “공자가 ‘우 임금은 흠잡을 수 없다. 음식은 박하게 하고, 귀신에게 효도하였다’ 했다.[子曰 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라고 보인다. [주D-072]언말기마(言秣其馬) : 《시경》 주남(周南) 한광(漢廣)에 “之子于歸 言秣其馬”라 보이는데, 이는 신부가 타고 올 말에게 먹이를 먹이겠다는 뜻이다. [주D-073]필작오복(弼作五服) : 임금을 보좌하여 오복(五服)의 제도를 만들다. 《서경》 익직(益稷)에 보이는데, 작(作) 자가 성(成) 자로 되어 있다. 오복(五服)은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주위를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으로서, 상고의 오복은 전(甸)ㆍ후(侯)ㆍ수(綏)ㆍ요(要)ㆍ황(荒)이고 주(周) 나라 때는 후(侯)ㆍ전(甸)ㆍ남(男)ㆍ채(采)ㆍ위(衛)라 하였는데, 1복은 5백 리이다. 《설문해자》 필( [주D-074]설구장(褻裘長) : 설구를 길게 만들어 입었다는 뜻. 설구는 집에서 입는 평복의 갖옷이다. 《논어》 향당(鄕黨)에 보인다. 《설문해자》 설(絬) 자에는 “衣堅也 論語曰 絬衣長”이라 하였다. [주D-075]훼종엽행(毁宗躐行)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及葬 毁宗躐行 出于大門”이라 보이는데, 이는 장사 때가 되면 종묘문의 서쪽 담을 헐고 밟고서 대문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주D-076]유가지색(惟家之索) : 집안이 소삭(蕭索)해짐. 《서경》 목서(牝誓)에 “古人有言曰 牧鷄無晨 牝鷄之晨 惟家之索”이라 하고, 채전(蔡傳)에 “索 蕭索也”라 하였다. [주D-077]일융의(壹戎衣) : 한 번 싸움. 《서경》 무성(武成)에 “一戎衣 天下大定”이라 보이는데, 이는 무왕(武王)이 한 번 군복을 입으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는 말이다. 《설문해자》 예(殪) 자에 “死也”라 하고, 단주(段注)에 “中庸言壹戎衣 注衣讀爲殷 聲之誤也 壹戎殷者 一用兵而伐殷也”라 하였다. [주D-078]이륜유두(彝倫攸斁) : 이륜(彝倫)이 무너지다. 이륜은 상도(常道)를 이름. 《서경》 홍범(洪範)에 보인다. 《설문해자》 두(●) 자에는 “敗也 商書曰 彛倫攸殬”라 하였다. [주D-079]슬피옥찬(瑟彼玉瓚) : 아름다운 옥찬. 옥찬은 창주(鬯酒)를 담는 제기(祭器)의 이름. 규찬(圭瓚).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 2장에 “瑟彼玉瓚 黃流在中”이라 보인다. 《설문해자》 슬(璱) 자에는 “詩曰 璱彼玉瓚”이라 하였다. [주D-080]진진로(振振鷺) : 《시경》 노송(魯頌)의 유필(有駜)에 “振振鷺 鷺于飛”라 보이는데, 진진(振振)은 떼지어 나는 모양, 노(鷺)는 곧 춤출 때 손에 드는 백로의 깃을 말한다. [주D-081]면류(冕旒) : 옛날에 대부 이상이 조의(朝儀)나 제례(祭禮) 때 쓰는 예관, 유(旒)는 관의 앞뒤로 끈에 꿰어 늘어뜨린 구슬. 천자는 12, 제후는 9, 상대부는 7, 하대부는 5로 한다. 《설문해자》 유(瑬) 자에 “垂玉也 冕飾”이라 보인다. [주D-082]함옥(含玉) : 장례 때 죽은 사람의 입에 넣어주던 옥으로서, 천자는 옥(玉), 제후는 벽(璧), 사(士)는 패(貝)를 사용하였다. 《설문해자》 함(琀) 자에 “送死口中玉也”라 하고, 단주(段注)에 ‘經傳多用含 或作琀’이라 보인다. [주D-083]방량(庬涼) : 얼룩소. 《좌전》 민공(閔公) 2년에 “尨涼冬殺”이라 하였는데, 《설문》 양(㹁) 자에는 “牻牛也 春秋傳曰 牻㹁”이라 하였다. [주D-084]대부사왈졸(大夫死曰卒) : 대부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한다. 《예기》 곡례(曲禮)에 보인다. 《설문》 졸( [주D-085]준견회거천(䜭畎澮距川) : 전간(田間)의 수도(水道)를 터서 내에 이르게 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보인다. [주D-086]정녀기주(靜女其袾) : 《시경》 패풍(邶風) 정녀(靜女)에는 정녀기주(靜女其姝)로 되어 있다. 주주(朱注)에 “靜者 閒雅之意 姝 美色也”라 하였다. [주D-087]질질(秩秩) : 차서가 있는 모양.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秩秩斯干”이라 보인다. 《설문》 질(●) 자에 “讀若詩●●大獻”이라 하였고, 질(豑) 자에는 “虞書曰平豑東作”이라 한 것을 이른다. [주D-088]우렵위고(羽獵韋絝) : 우렵을 복건(服虔)은 “士卒負羽也”라 하고, 유향(劉向)은 “羽 箭也 言使士卒負箭而獵”이라 하였다. 위고(韋絝)는 가죽으로 지은 바지이다. [주D-089]조수용모(鳥獸 [주D-090]사적유유(私覿愉愉) : 개인적으로 만날 때에는 유유(愉愉)하게 하다. 《논어》 향당(鄕黨)에 보이는데, 정현(鄭玄)의 설에 의하면 유유(愉愉)는 용색(容色)이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주D-091]점(坫)자를 …… 것이요 : 《논어》 팔일(八佾)에 보이는데, 반점(反坫)은 흙을 돋우어서 만든 술잔을 놓는 대(臺)이고 수(樹)는 병장(屛墻)을 말한다. [주D-092]석척약인(夕惕若夤) …… 것이다 : 《주역》 건(乾)괘 구삼(九三) 효사에 “夕惕若 厲无咎”라 한 것과 간(艮)괘 구삼 효사에 “列其寅 厲”라 한 것을 말한다. 같은 《설문》에서도 척(䯜) 자에서는 “讀若夕惕若厲”라고 하였다. [주D-093]청청자금(靑靑子衿) : 파란 그대의 옷깃이라는 뜻으로 《시경》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보인다. 이에 대하여 모시 서(毛詩序)에는 학교가 폐지됨을 풍자한 것이라 하였고, 주자는 음분시(淫奔詩)라 하였다. [주D-094]포금여주(抱衾與裯) : 이부자리를 안고 자다. 《시경》 소남(召南) 소성(小星)의 한 구절이다. [주D-095]금금난혜(錦衾爛兮) : 비단 이불이 눈부시다는 뜻. 《시경》 당풍(唐風) 갈생(葛生)에 보이는데, 이 시는 남편이 정역(征役)에 나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 자신의 외로움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라 한다. [주D-096]호시출어합(虎兕出於柙) : 범과 들소가 우리에서 빠져나옴. 계씨(季氏)에 보인다. [주D-097]10여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 “만력(萬曆) 말년에 ~ 10여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까지의 대문은 《일지록》 제21권, 《설문장전》조에 보인다. [주D-098]상심(桑葚)은 …… 되었고 : 위풍(衛風) 맹(氓)에 “아, 저 비둘기여! 오디는 따먹지 말라. [于嗟鳩兮 無食桑葚]” 하고,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솔개가 훌쩍 날아 반궁 숲 속에 모여들어 우리 오디를 따먹는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한 것을 이른다. [주D-099]창궁(鬯弓) : 대숙우전(大叔于田)에 “활집ㆍ전통 다 풀어 활과 살을 넣어 두네.[抑釋掤忌 抑鬯弓忌]” 한 것을 이른다. 주주(朱註)에 “鬯與韔同”이라 하였다. [주D-100]창(韔) : 창(韔)은 활집. 진풍(秦風) 소융(小戎)에 “交韔二弓”이라 한 것을 이른다. [주D-101]위씨(薳氏)를 …… 했다 : 위엄(蔿掩)을 양공(襄公) 25년 조에서는 위엄(蔿掩)이라 하고 ,소공(昭公) 13년 조에서는 위엄(薳掩)이라 한 것 등과, 잠윤고(箴尹高)를 정공(定公) 4년 조에서는 침윤고(鍼尹固)라 하고, 애공(哀公) 16년 조에는 잠윤고(箴尹高)라고 하는 등 일정하지 않은 것을 이른다. [주D-102]서동문(書同文) : 주 19)의 동서문자(同書文字)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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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방(將軍房)을 혁파하였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장무(掌務)의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가 있어서, 새로 장군(將軍)에 제수된 자가 있으면, 그 방주와 장무가 반드시 그 족속(族屬)을 상고하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연후에야, 새로 제수된 자가 그 임무를 행할 수 있었는데, 국초(國初)에도 그 제도를 인습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원전】 1 집 181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주D-001]장군방(將軍房)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장군(將軍) 이상이 모여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곳. 고려 중방(重房)의 후신으로, 정종 2년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 6년에 호군방(護軍房)으로 다시 부활시켰음. [주D-002]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 : 관원이 새로 임명되어 올 때, 그 관부의 방주(房主)와 장무(掌務)가 모여서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고, 또 찬성 여부를 서명하던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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