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용재 이헹 선생 행장

용재 이행 선생 자료 덕수현 인이며 한때 의령의 정진 (정암에 이거를 하셨다)

아베베1 2013. 4. 28. 16:42

 

 

 




 

용재집 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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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기(刊記)]
[간기(刊記)]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이광(李洸)
통덕랑(通德郞)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
중직대부(中直大夫) 행 태인현감(行泰仁縣監) 황언(黃鶠)
교정(校正)

유학(幼學) 안의(安義) -태인(泰仁)-
유학 김후진(金後進) -태인-
참봉(參奉) 소이(蘇邇) -익산(益山)-
서사(書寫)

유학 최산립(崔山立) -무장(茂長)-
승사랑(承仕郞) 온영(溫詠) -금구(金溝)-
공생(貢生) 최경룡(崔景龍) -광주(光州)-
감역관(監役官) 영리(營吏) 김영종(金永宗) -전주(全州)-

만력(萬曆) 17년(1589, 선조22) 5월 태인현에서 개간(開刊)함. -구판(舊板)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공청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知中樞府事兼公淸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 이안눌(李安訥)
통훈대부(通訓大夫) 청주목사 청주진병마첨절제사(淸州牧使淸州鎭兵馬僉節制使) 이경증(李景曾)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이재(李材)

숭정(崇禎) 7년(1634, 인조12) 12월 청주목(淸州牧)에서 중간(重刊)함. -신판(新板)이다.

발(跋)
용재집(容齋集) 발(跋) [이안눌(李安訥) 찬]


위는 증조부 용재 선생의 문집 10권으로, 고시(古詩)ㆍ율시(律詩)ㆍ절구(絶句)를 모은 것이 셋이고, 집록류(集錄類)가 여덟이고, 산문(散文)ㆍ비지(碑誌)를 모은 것이 둘이고, 과문체(科文體)의 부(賦)를 모은 것이 하나이다. 집록은 모두 조부께서 손수 모아서 책으로 만드신 것이고, 고시ㆍ율시ㆍ절구ㆍ산문ㆍ비지 등은 선친께서 산일(散逸)된 원고들을 수습하고 교정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기타 망실(亡失)된 것들은 미처 수집하지 못하였는데, 예컨대 축야인격(逐野人檄) 같은 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동사록(東槎錄)》과 《남악록(南岳錄)》은 이미 먼저 간행되었고, 전질(全帙)은 종부(從父) 지사공(知事公)께서 처음 관북 안찰사(關北按察使)로 가서 활자로 약간의 시문을 인간(印刊)하셨으나 널리 유포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종부께서 다시 호남 안찰사로 가서 마침내 판각하셨으나 역시 널리 유포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을 만나 목판이 모두 불타 버리고, 공사(公私) 간에 소장하던 본(本)들도 많이 보존되지 못하고 없어졌다. 불초가 일찍이 금산(錦山)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을 중간(重刊)하였으나 전집(全集)은 일이 크고 힘에 부쳐서 여지껏 간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호서 안찰사가 되어서는 공교롭게도 국가가 중국의 칙사(勅使)를 맞이하는 터라 이런 큰일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 마침 종제(宗弟 경증(景曾)) 여성(汝省)이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가서 처음으로 개판(開板)을 도모하여 애써 녹봉을 덜어 내어 그 비용에 충당해서 청주의 보살사(菩薩寺)에서 일을 시작하고, 여성과 종질(從姪)인 진사 재(材)가 그 일을 감독하여 몇 개월 만에 작업을 마쳤다. 조정 사대부들이 소문을 듣고 기뻐하며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권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다행이라 자손들만의 사사로운 영광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불초도 은택을 입은 후손으로서 한 방면을 맡아 다스리는 터라 판각의 역사를 도울 수 있었으니, 마음속에 비감(悲感)을 이길 길 없다. 이에 대략 그 전말을 적어서 후인들로 하여금 이 일의 어려움을 알고 판본을 삼가 잘 지켜 가도록 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 인조12) 납월(臘月) 상한(上澣)에 증손(曾孫)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공청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知中樞府事兼公淸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 이안눌(李安訥)은 삼가 쓰노라


 

 

 
용재집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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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世子傅) 이공(李公) 행장 [주세붕(周世鵬) 찬(撰)]

공의 휘(諱)는 행(荇), 자(字)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며 세계(世系)는 덕수현(德水縣)에서 나왔으니, 그 땅이 지금은 경기도 풍덕군(豐德郡)에 속한다.
팔대조(八代祖)인 휘 소(劭)는 고려조에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자금어대(紫金魚帒)를 하사받았고 지삼사사(知三司事)가 되었으며, 칠대조(七代祖)인 휘 윤온(允蒕)은 벼슬이 민부 전서(民部典書)에 이르고 첨의정승(僉議政丞)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육대조(六代祖)인 휘 천선(千善)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기씨(奇氏)를 주벌하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 낙안백(樂安伯)에 이르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오대조(五代祖)인 휘 인범(仁範)은 벼슬이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고조인 휘 양(揚)은 벼슬이 공조 참의에 이르고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인 휘 명신(明晨)은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조부인 휘 추(抽)는 벼슬이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에 이르렀고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의무(宜茂), 자가 형지(馨之)이고 호가 연헌(蓮軒)으로, 타고난 바탕이 순정(醇正)하여 남을 성심(誠心)으로 대하고 심한 애증(愛憎)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며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겉모양을 꾸미지 않아 인품이 그야말로 후련히 틔었다. 정유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성묘(成廟)께서 바야흐로 예의(銳意) 문치(文治)에 힘써 대궐 뜰에서 문사(文士)를 시험하실 때 연이어 세 차례나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고 이조 정랑을 역임, 사헌부에 올라 집의가 되고 옥당(玉堂)을 밟아 응교가 되고 미원(薇垣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에 들어가 사간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연산조(燕山朝)를 만나는 바람에 큰 그릇을 지니고도 크게 베풀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포부를 펴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붓을 쥐면 이내 이루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벼슬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이르러 졸(卒)하였고,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지온양군사 이하의 증직(贈職)은 공이 존귀하게 됨으로 해서 은택을 추급(推及)한 것이다. 모친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니,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문숙공(文肅公) 휘 석용(石瑢)이 증조이고, 경기 도관찰출척사(京畿都觀察黜陟使) 휘 개(槪)가 조부이며, 교서관 교리 증 예조참판 휘 희(熺)가 부친이다. 이렇게 적선(積善)이 융숭한 내외의 두 덕문(德門)이 만나서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여경(餘慶)의 조짐에 부합한다 하겠다. 이에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중 맏이는 권(菤)으로 기유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렀고, 그다음은 기(芑)로 신유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좌의정이고, 그다음이 공이고, 그다음은 영(苓)으로 경오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해 군수(平海郡守)에 이르렀고, 그다음은 미(薇)로 을해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대사헌이다. 1녀는 곧 찬성(贊成) 조공(曺公) 계상(繼商)의 부인이다.
공은 성화(成化) 무술(戊戌) 5월 임오(壬午)에 출생했는데, 겨우 이를 갈 어린 나이 때부터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으며, 놀이와 장난을 좋아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과도 같았다.
홍치(弘治) 을묘년에 공의 나이 열여덟이었는데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뽑혔다.
정사년 겨울,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봉교(奉敎)로 전보되었다. 이때 선배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자못 소홀히 여기다가, 공이 초고(草稿)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미년 봄, 성묘 실록(成廟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가을에 관례에 따라 성균관전적 겸 남학교수에 제수되었다.
경신년 4월,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갔고, 가을에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배수(拜受)하였다.
신유년에는 논사(論事)로 인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임술년 봄,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세자시강원 사서로 전보되었다.
계해년 여름, 사헌부 지평을 배수하고 9월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됨과 동시에 관례에 따라 겸직(兼職)을 띠었으며, 이윽고 교리로 승진되었다.
갑자년 봄,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고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이때 연산주(燕山主)가 황란(荒亂)하여,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사약을 받고 죽은 데 깊이 유감을 품고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을 거의 다 죽이고, 또 윤씨를 추숭(追崇)하여 그 휘호(徽號)를 극진히 높이고자 조정에 의논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윤당(允當)하다고 했으나 공만은 동료들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여 “추승의 의전(儀典)이 예(禮)에 이미 극진하니, 지금에 와서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여 하옥(下獄)하고 국문하여 장차 논의의 주동자를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죄를 면하고자 극력 변명해 마지않았으나 오직 공만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한마디 변명도 없었다. 형제 친척들이 스스로 해명할 것을 다투어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죽음은 명(命)이다. 어찌 차마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구차히 삶을 훔치리오.” 하였다. 이때 응교 권공(權公) 달수(達手)가 외지에서 체포되어 아직 도성에 당도하지 않았었는데, 당도하여서는 말하기를 “의론을 주창한 자는 나이지, 이(李) 아무개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권공은 죽고 공은 장형(杖刑)을 받은 다음 충주(忠州)로 유배되니, 사람들은 모두 권공을 칭찬하는 한편 죽음이 임박해도 흔들리지 않는 공의 의연한 모습에 탄복하였다.
6월에 또 수찬 박은(朴誾)의 사안(事案)에 연좌되어 재차 장형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으며 관례에 따라 부역에 충원(充員)되었다.
가을 9월, 다시 조정이 전의 사안을 논의하여 뒤미처 포박하여 고문하는 통에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고, 겨울 12월에 이르러 사형에서 감면(減免)되어 장형을 받고 영남 함안군(咸安郡)의 관노(官奴)로 귀양가게 되었다.
을축년 봄 정월에야 비로소 배소(配所)에 당도하였고, 가을 8월에 또 익명서(匿名書)의 옥사로 인하여 포박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인 병인년 봄 정월에 이르러 거제도로 귀양을 떠나 2월에야 배소에 당도, 고절령(高絶嶺) 아래에서 가시 담을 두르고 살았다. 이해 가을 또 포박하여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라는 명이 떨어져 거의 압송 길에 오르려던 차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만나 사면되었다.
당초 연산군이 조정의 선비를 주륙(誅戮)하여 그냥 무사히 보낸 날이 없었다. 공이 전후로 체포되어 장형을 받고 유배됨에 그 형벌이 너무도 참혹하여 친척들이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한마디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필시 극형을 면치 못하리라.” 하였지만 공은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책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말라고 만류하면 공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 하였다.
병인년 9월, 중묘(中廟)가 즉위하여 공을 홍문관 교리로 소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은 승진하여 부응교가 되었으며, 또 어명을 받고 정업원(淨業院)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묘년 가을, 어명을 받고 강원도 향시(鄕試)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강릉(江陵)으로 갔고, 9월에는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12월에는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경오년 2월, 상기(喪期)가 끝나 성균관 사예에 제수되었고 4월에는 홍문관부응교 겸 예문관응교를 배수(拜受)하였으며, 이윽고 의정부검상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7월에는 승진하여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구례(舊例)에 사인(舍人)은 도당 낭청(都堂郞廳)을 맡아서 반드시 당시의 이름난 미색(美色)을 뽑아 연정회(蓮亭會)를 만들게 되어 있었는데, 공이 사인이 되자 어떤 사람이 벽에 글을 써 붙이기를 “도리(桃李)가 꽃이 없나니, 이(李) 아무개가 중서당(中書堂)에 들어왔다네.” 하였으니, 이는 공이 여색(女色)을 멀리함을 말한 것이다. 사림(士林)은 이 사실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비웃었지만 공은 종신토록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자기를 다스림에 엄격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신미년 5월, 봉상시 부정 지제교 겸 승문원참교에 제수되었고, 9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
계유년 11월, 상기(喪期)가 끝나 성균관 사예 지제교에 제수되었는데, 이후로는 늘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갑술년 3월에 사성(司成)으로 승진되었고, 11월에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다.
을해년 2월에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고, 6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별히 제수되고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공은 오래도록 하급 관료에 묶여 있었던 터라, 이러한 조명(朝命)이 내렸다는 소문이 들리자 사림이 서로 경하하였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상소하여, 폐빈(廢嬪) 신씨(愼氏)로 왕비의 자리를 잇기를 청하니, 외간의 의론이 흉흉하여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때 공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홀로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이는 안 될 일이니, 응당 죽음으로써 반대하겠다.” 하고 힘써 간쟁(諫爭)하니, 그 주장이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 지금의 우리 대비(大妃)를 친영(親迎)하셨던 것이다. 당시 사리를 알지 못하는 자가 공을 두고 말하기를,
“박상 등을 국문(鞫問)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사림을 모해(謀害)하려는 것이다.”
하니, 공은 말하기를,
“연산주(燕山主)가 모비(母妃)를 위하다가 도리어 우리 선왕(先王)을 원수로 삼아 조정 신료들을 도륙하여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한 지경에 빠졌었다. 신수근(愼守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워 패망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 나라 사직은 어찌되겠는가. 참으로 국가 대사(大事)를 위해 그 불가함을 극언한 것일 뿐이니, 어찌 이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고 싶어서이겠는가. 차라리 이러한 구설(口舌)을 내가 달게 받을지언정 종묘사직을 차마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언사(言事)로 인하여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고, 12월에 홍문관 부제학을 배수하였다.
병자년 겨울, 칭병(稱病)하여 사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으니,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정축년 봄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여름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 부제학이 되었으며, 6월에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사은(謝恩)하던 날 상께서 공에게 전지(傳旨)를 내리시기를 “부제학으로 있다가 대사성이 되는 것은 예전에는 이러한 예(例)가 없었는데, 다만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중요하기에 특별히 제수한다.” 하였다. 7월에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제수되었고, 8월에 도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으로 승진되었으며, 이달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에 특별히 배수되었다.
당초에 신진(新進)들이 제도를 개혁하고 자기네 주장만 내세우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이 이에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자 이로 말미암아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과연 이들이 대간에게 글을 보내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고 공을 논죄(論罪)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9월에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일신의 진퇴에 어찌 구차할 수 있겠는가. 고향으로 돌아가 살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고는, 이튿날 필마(匹馬)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면천(沔川)의 창택촌(滄澤村)에 우거하면서 자호(自號)를 창택어수(滄澤漁叟)라 하였다. 공은 생업을 일삼지 않았는데, 처음 면천에 우거할 때 백형(伯兄)인 절도공(節度公)이 공의 군핍함을 듣고 곡식 2백 섬을 주자 공이 말하기를 “제가 만약 굶주린다면 형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곡식을 가져다 먹겠습니다.” 하고는, 끝내 한 섬도 가져가지 않았다.
이때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성언(李誠彦)이 상소하여 공의 억울함을 변론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으며, 성균관의 유생들 역시 소장을 올려 변론을 진달하려 하였으나 안처겸(安處謙)에 의해 저지되니, 식자(識者)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공이 떠남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이조차 있었다.
무인년 정월, 병조 참지에 제수되어 애써 명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곧 병으로 사직하고 면천으로 돌아왔으며, 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묘년 겨울, 조정 여론이 다소 진정되어, 12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됨에 소환하라는 어지(御旨)가 있었다.
경진년 정월,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공은 당초에 기묘년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의 배척을 받았으나 조정에 소환되어서는 말하기를 “기묘년의 과오는 재상의 허물이다.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연소한 이들에게 갑작스레 높은 자리를 주어 마음대로 분란(紛亂)을 피우도록 방임하고서 재제(裁制)를 가하지 않았으니,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도리어 재상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2월에는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고, 10월에는 세자 우부빈객을 겸임하였으며, 가을에는 증고사(證考使)가 되어 호남과 영남으로 갔다.
신사년 정월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특별히 제수되어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이 되고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으며, 이윽고 또 의정부 우참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가 즉위함에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를 보내 등극(登極)의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하였는데,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아 국경에서 이들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때 왕복하는 길에 중국 사신들과 수창(酬唱)하여 깊이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당시 현재의 좌상(左相)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두 중국 사신이 공의 형수(荊樹)가 번성하단 말을 듣고 오성(五星)의 설(說)에다 지목해 찬미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우리 전하가 조서를 영접한 뒤 연(輦)을 타고 환궁(還宮)하기로 한 것을 비례(非禮)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사례에 의거하여 말하자 두 중국 사신이 대뜸 노한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우리는 오로지 예(禮)를 숭상하고자 하는데, 참찬(參贊) 또한 이런 말을 하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지금 교외(郊外)에서 조서를 기다려 조정의 예를 공경히 행하고 계시니, 대인(大人)께서도 절로 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니, 상사(上使)가 기쁜 기색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참찬의 정성과 공경으로 인하여 국왕의 정성과 공경을 이미 잘 알았소.”
하였다. 이때 중국의 상사는 천하의 정인(正人)이었는데, 매양 공의 사람됨과 시편(詩篇)에 탄복하여 시단(詩壇)의 노장(老將)이라 칭찬하고는, 경솔히 시를 지어 수작하지 말고 신중하도록 부사(副使)에게 경계하였다.
계미년에 좌참찬으로 승진하였고, 10월 25일에 왕세자가 입학(入學)하자 공을 박사관(博士官)으로 삼았다. 박사관은 곧 사부(師傅)의 직임으로 반드시 일대의 석유(碩儒)를 뽑게 되어 있었는데, 공은 강론할 때 응답하는 말이 모두 남들의 의표(意表)를 뛰어넘었다. 세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자, 공은 “지금 물으실 바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이어 효경(孝敬)의 도를 진달하니, 논자(論者)가 “사체(事體)를 제대로 알았다.”고 탄복하였다. 가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로 승진하였으며,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다.
하루는 공이 헌(軒)을 타고 대궐로 가는 길이었는데, 유생 배순(裵珣)이란 사람이 걸어가다가 경복궁 비석 모퉁이에서 공을 만났다. 배순이 몸을 숨기고 엿보니 공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 양쪽 눈이 모두 붉어져 있기에 몹시 괴이쩍어했는데, 가다가 어떤 사람이 형(刑)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공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운 것임을 알았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은 말하기를 “공의 이러한 마음은 곧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天地)의 마음이다. 세상에서 공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록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을 헐뜯지만, 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하였다.
갑신년 여름, 이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됨에 인재 전형이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기준에서 나와 흠잡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자(言者)가 “주상(主上)의 덕화를 크게 펼치는 데 궐위(闕位)가 있다.” 하여, 가을에 다시 좌찬성이 되었다.
정해년 10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무자년 봄, 만포 첨사(滿浦僉使) 심사손(沈思遜)이 야인(野人)에게 살해되었는데, 휘하의 사졸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상관을 구원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러한 자들을 주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을 보이리오.” 하였다. 조정은 끝내 그들의 죽음을 면해 주었으나 논자(論者)들은 모두 공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중묘(中廟)께서 바야흐로 불끈 노하여 예의(銳意) 서쪽으로 오랑캐를 토벌하려 하시니, 조정 의론이 대다수 찬동하여 이에 허굉(許硡)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공은 홀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극간(極諫)하여 충성에서 우러나온 주장을 반복하기를 마지않았으니, 그 말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그 대요(大要)를 말하자면, 군사를 일으켜 전쟁하는 것은 흉험(凶險)하고 위태하여 만전(萬全)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설사 허굉을 장수로 삼아 비록 필승에 만전을 기한다 하더라도 이미 승리한 뒤에는 또 허굉을 시켜 지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되면 변방의 우환이 끝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서북쪽 변방의 창생(蒼生)들이 지금껏 어육(魚肉)이 됨을 면한 것은 실로 공의 충간(忠懇) 덕택인 것이다.
9월에 상께서 여주(驪州)로 행행(行幸)하실 때 공은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경인년 겨울, 좌의정 겸 세자부가 되고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다.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喪)이 났을 때 선릉(宣陵) 남쪽 산기슭에 묘소를 잡았는데 예조가 관례에 따라 다시 살펴서 터를 정하기로 하였다. 당시 풍수(風水)로 이름난 자가 있어, 동료들이 계청(啓請)하여 그를 데리고 가고자 하니, 공이 “불가하다.” 하였다. 동료들이 억지로 계청하려 하자, 공은 의연히 말하기를 “이러한 무리는 자기 재주를 부리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 만약 그가 지금 잡아 놓은 터를 보고 못 쓴다고 한다면 장차 터를 바꾸어 다른 곳을 잡을 것인가.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말이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그 풍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당시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예조 판서였는데 그 후 중종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정릉(靖陵)으로 터를 잡아 놓았음에도 윤림(尹霖)이 삿된 말로 조정을 선동하는 바람에 능침을 만드는 큰 역사(役事)가 장차 시작되려다 결정을 보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이에 홍 상국이 그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용재(容齋)의 일에 대한 요량은 참으로 따를 수 없구나. 이공(李公)이 만약 지금 있다면 필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성군(福城君)이 세자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노부(老夫)를 죽이지 않고는 어떠한 동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하니, 듣는 이들이 흠칫 두려워하였다.
공은 조정의 형세가 점점 위미(委靡)해 가는 것을 보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항상 근심하여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매양 상께 진언하기를 “위력과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살피소서.” 하였으니, 대개 지목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신묘년 10월, 김안로(金安老)를 논죄한 일로 인하여 판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로 좌천되었다. 당초에 공이 김안로와 한림원(翰林院)에 함께 있고 독서당(讀書堂)에 함께 들어가 서로 마음을 터놓는 좋은 사이로 지낸 지 오래되었다. 남문경(南文景)이 조정 신료들을 대동하고 김안로를 유배하자고 청할 때 공은 홀로 “명분 없이 재상을 쫓아내면 폐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하면서 눈물로 전송하였는데, 남문경이 이 사실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관후(寬厚)하여 남을 너그럽게 포용하는지라 이 사람이 간사한 줄을 알지 못하니, 아무래도 필시 그에게 기만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이치상 김안로와 똑같이 문책해야 하겠지만 이공 같은 이는 흉중이 평탄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으니, 진실로 이러한 죄목으로 문책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그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연거푸 그 아비의 원통함을 상주(上奏)하여 삼공(三公)이 수의(收議)하게 되었다. 당시 공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김안로가 애초에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썼고 지금은 또 세월이 오래 흘렀으니, 응당 상께서 짐작하실 일이다.” 하였으니, 공의 생각은 대개 김안로로 하여금 그저 유배에서 벗어나 편히 살도록 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김안로가 유배지에서 풀려나 조정으로 돌아와 연줄을 타고 복직한 뒤 자기편 무리와 체결하고 급속도로 승진하여 사감(私憾)을 풀게 되어서는, 그와 평소 혐원(嫌怨)이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조정에서 내쫓기었다. 공이 그제야 비로소 그 정상(情狀)을 알아차리고서 김안로를 보면 그 음사(陰私)함을 꾸짖으면서 준엄한 말로 힐책하는 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에 김안로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이는 모두 대간(臺諫)이 한 짓이니,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공은 어찌하여 나를 지목해 말하시오?” 하고는, 물러나 자기편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공을 저해(沮害)할 모책을 꾸미고 자신이 앞장서서 말하기를 “이(李) 아무개가 나를 무고한 것은 그 목적이 나를 죄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차 사림(士林)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하였다. 이에 김안로 편의 무리들은 공을 모함하고자 획책하여 매양 공과 친하고 미더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공의 의중(意中)을 탐색하였다. 대사헌 심언경(沈彦慶)이 공에게 말하기를,
“바깥세상에 떠도는, 대간이 상공(相公)을 논죄하려 한다는 말은 대간의 논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간이 자기 입장을 해명하려 합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만세(萬世)의 권신(權臣)이 되는 셈이군. 대간이 어찌 이 일로 자기 입장을 해명한단 말인가.”
하였다.
한번은 친족 모임 중에 김안로 편인 사람이 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동궁이 외로운 터에 이숙(頤叔 김안로의 자(字))이 우익(羽翼)이 되고 있으니, 그를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의 세자 자리가 이미 정해졌으니, 조정의 신하가 누군들 동궁을 위해 죽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조정에 김안로 한 사람만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 김안로가 지은 ‘견우문(遣愚文)’이란 글을 보고는 공이 탄식하기를 “소인의 정상이 모두 여기에 드러나 있구나.” 하고 결연한 뜻으로 배척하니, 자제들이 두려워 다투어 간(諫)하기를 “병을 칭탁(稱託)하고 사직(辭職)하여 문호를 보전하소서.” 하였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선견지명의 지혜가 없어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하였는데, 또 화(禍)를 피하여 성명(聖明)을 저버린단 말인가. 이 한 몸 죽고 삶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단지 간사한 자가 뜻을 펴서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 갈까 두렵다.” 하고는, 드디어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김안로의 간사한 정상을 진달하고 조정에서 쫓아낼 것을 청하니, 정언 허항(許沆)이 말하기를 “이(李) 아무개가 탄핵을 받을까 겁이 나서 김안로를 탄핵한다는 명목을 빌어 사림을 모해하려 한다.” 하였다. 이에 김안로에게 빌붙은 대간과 시종(侍從)들이 무더기로 들고 일어나 도리어 공을 공격하였으나 공의 덕망이 평소 드러난 터라 감히 대뜸 죄명을 뒤집어씌우지는 못하고 단지 정부(政府)의 직함만 체탈(遞奪)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혹은 파직되고 혹은 유배되었다.
공론은 이미 막히고 사의(邪議)가 무더기로 일어나게 되자 “공이 아직도 죄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듬해인 임진년 3월에 생원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을 말하다가 이야기가 공이 무죄하다는 데 미치는 바람에 다시 김안로의 노여움을 격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은 마침내 평안도 함종현(咸從縣)에 유배되어 갑오년 10월 25일 적소(謫所)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이 57세였다.
을미년 봄 3월 13일, 면천(沔川) 장자동(長者洞) 선영의 남쪽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정유년 겨울 10월에 김안로 및 그 무리들이 죄를 받았고, 11월에 공의 옛 직함을 회복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은 10척(尺) 남짓한 신장에 얼굴은 네모지고 수염은 무성하며 거북의 등이요 기린의 이마였다. 그 기상으로 말하자면, 형옥(荊玉)을 품은 양 순박하고 화기(和氣)로 뭉쳐진 소상(塑像)과도 같았으며, 그 걸괴(傑魁)한 모습은 용호(龍虎)와도 같고 비상하는 자태는 난봉(鸞鳳)과도 같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였는데, 부친 연헌(蓮軒)이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가(四佳) 서공(徐公)을 보았더니 평생토록 신고(辛苦)를 겪더구나. 그런데 너 역시 신고를 겪으려 하는구나.” 하였으니, 대개 공의 소싯적에 연헌은 이미 장차 문병(文柄)을 잡으리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비록 만년에도 언제나 닭이 울면 일어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으니, 그 학문을 좋아함이 참으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탐내는 것과 같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는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한번도 급박한 말투나 조급한 기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며, 아무리 심하게 노하더라도 모진 말로 사람을 욕한 적이 없었다. 음식은 육류(肉類)를 좋아하지 않았고, 옷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면 그만이었다. 벼슬살이 30년 동안 살림을 돌보지 않은 탓에 집안이 흡사 빈한한 집 같아, 슬하에 가득한 자녀들이 근근이 의식(衣食)을 이어갈 뿐이었다. 혹자가 전장(田莊)을 두라고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조정의 녹을 먹는 집이 전답을 차지하려 애쓴다면 녹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의 녹이 경작(耕作)을 대신할 만하니, 장래 자손들을 위한답시고 전장을 두는 것이 또한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자제들의 복식(服飾)이 사치스러우면 공은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진실로 선(善)에 뜻을 두기만 한다면 비록 과거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전혀 여한이 없다.” 하였다.
평소 타고 다니는 말이 남들은 타지 못할 정도로 노쇠하여도 공은 개의치 않고 그 말이 죽은 뒤에야 다른 말로 바꾸었으며, 재상이 되었을 때 외사촌 형이 초헌(軺軒)을 하나 선물하였는데 그 한 대의 초헌을 십 년 동안이나 탔다. 대저 자신을 위한 것에는 이와 같이 지극히 검박하여 남들은 견딜 수 없는 정도인데도 공은 언제나 여유로웠다. 일찍이 말하기를 “녹이 친우(親友)에 미치지 못하면서 자신을 위해 사치를 부리는 짓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친척을 대할 적에는, 촌수의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급박한 자를 구휼하고 곤궁한 자를 위무하기를 흡사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듯 정성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집안 살림이 자주 바닥이 나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을 다하여 안배(安排)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신복(信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포의(布衣)의 벗 한 사람이 녹사(祿仕)할 길을 구하러 찾아왔기에 공이 반갑게 맞아 매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는 뇌물을 가지고 찾아오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반겨 대우한 것은 친구의 의리를 생각해서였네. 그런데 이제 자네가 곤궁해서 벼슬을 구하러 왔으면서 나에게 뇌물을 주니, 그렇다면 그대는 곤궁한 것이 아니로세. 굳이 벼슬을 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벼슬자리를 뇌물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사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니, 그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공은 언제나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내 평생 소득이 ‘속이지 않음[不欺]’에 있다.” 하였으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불선(不善)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책망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청탁을 넣을 수 없었으니, 이에 조정이 무거운 신임을 주고 의지하여, ‘뇌물이 통하지 않는다[關節不到]’는 말로 공을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신하가 지위를 차지하고 녹을 먹으면 의당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국가를 저버리지 않아야지, 자기 일신을 돌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권세를 빙자하여 사은(私恩)을 심고 재물을 갈취하여 전답을 불림으로써 자기 한 집안을 편안케 하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삼는 따위의 짓은, 나는 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면 모름지기 터럭만큼이라도 보답할 길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시의 정계(政界)에 용납되지 못하여 나의 뜻을 펼 수 없다면 의당 몸을 거두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저 지위와 녹을 탐내어 시세(時勢)를 따라 부앙(俯仰)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겠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배척하여 오직 자기 일신만 보전할 길을 도모하는 짓 따위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하였다.
재상을 배수(拜受)하였을 때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덕은 없이 지위만 높아졌으니, 어떻게 감당하리오.” 하고는 통렬히 자신을 억제하고 겸손하였다. 자제나 친족들이 벼슬자리를 청탁하면 번번이 거절하고 이르기를 “조정의 관작(官爵)이 어찌 재상의 시은(施恩)의 도구이겠는가.” 하였으며, 늘 왕증(王曾)의 은출원귀(恩出怨歸)라는 말을 재상의 체통에 맞다고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요행을 노리는 자들이 혹 많이 원망하였다.
말년에는 조정을 근심하여 탄식하기를 “사림이 저마다 붕당을 세우니, 국가의 복(福)이 아니다. 이것이 송(宋)나라가 망한 까닭이다.” 하였으며, 한번은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극력 진달하여 “후일에 무궁한 우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림을 보면 반드시 간절히 책망하기를 “그대들이 스스로 분란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이 눈을 흘기고 있다. 결국에는 그대들이 배척당하고 말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집에 보배로운 기물(器物)이 있으면 누구나 아낄 줄을 알아서, 그것을 가지고 다닐 때 반드시 신중을 기하여 혹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듯이 조심한다. 그러나 국가의 일에 이르러서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좌지우지하여 실수할까 염려하는 자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국가의 대기(大器)가 도리어 그 집안의 소기(小器)만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치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일찍이 남산(南山)의 청학동(靑鶴洞)에 작은 서재를 열고, 또 자호(自號)를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재로 난 길의 양쪽에 소나무, 회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공이 조정에서 퇴근하여 지팡이를 끌고 소요하면 그 모습이 소연(蕭然)히 마치 야인(野人)과도 같았다.
하루는 날이 어두울 무렵 녹사(錄事)가 공무상 보고하러 공을 찾아가는데,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거친 베옷을 입고 작은 동자를 데리고서 동문(洞門)을 나오고 있었다.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정승께서는 계시는가?” 하고 묻자, 공이 천천히 돌아보면서 “공무상 보고하러 왔는가? 내가 여기 와 있다네.” 하니, 녹사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그 충후(忠厚)하고 소박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무릇 서리(胥吏)들을 대할 때도 반드시 공근(恭謹)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 관인(寬仁)함을 일컫는다.
공이 김안로의 무함(誣陷)을 입고부터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후생을 위해 출제(出題)할 때면, 그 제목을 대다수 방예(放麑)로 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갱(啜羹)으로 내었으니, 대개 방예는 공의 인후(仁厚)함을 가리킨 것이고 철갱은 김안로의 잔인함을 가리킨 것이다.
공이 적소(謫所)에서 숨을 거두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반면에 김안로가 패망하게 되자 중외(中外)의 모든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아이들도 모두 기뻐 발을 구르며 뛰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저렇게 기뻐하는가.” 하자, 또 한 사람이 대뜸 그 말을 받아 말하기를 “저 아이들의 아비가 예전에 김안로의 독해를 입었으니, 그 때문에 비록 어린아이이지만 역시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군자와 소인이 구분되고 인심(人心)은 속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종실(宗室)인 장산 부수(璋山副守) 조(稠)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중 맏이는 원정(元禎)으로 면천(沔川)에 한거(閑居)하여 벼슬하길 좋아하지 않았고, 그다음은 원상(元祥)으로 현재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있고, 그다음은 원복(元福)으로 현재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으로 있고, 그다음은 원록(元祿)으로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축년 과거에 급제하여 현재 홍문관 교리로 있다. 딸 중 맏이는 돈녕부 참봉 최세룡(崔世龍)에게 출가하고, 그다음은 유학(幼學) 유몽선(柳夢宣)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유학 유자(柳滋)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학문은 《논어》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시문(詩文)은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쓰고 문장 수식을 없애어 궤이(詭異)하고 험벽한 문사(文辭)를 쓰지 않아, 하늘이 이루고 귀신이 만든 듯 다듬고 꾸민 흔적이 없었으나 사람의 감정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포괄하여 어김없이 그 극치에 오묘히 나아갔기에, 우뚝이 드높아 남들이 발돋움하여 미칠 수 없었다. 일찍이 〈축야인격문(逐野人檄文)〉을 지었는데, 남지정(南止亭)이 깊이 탄복하였다. 옛날에는 주문연(主文硯)이 없었는데, 지정(止亭)이 큰 벼루를 하나 만들어 공에게 전해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사문(斯文)의 심법(心法)을 전하는 물건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 벼루를 미처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하지도 못한 채 공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의 저술은 초록(草錄)해 둔 적이 없어 수고(手稿)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적거록(謫居錄), 남천록(南遷錄), 해도록(海島錄)과 남유록(南遊錄), 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뿐이고, 사방에서 두루 찾아 수집하니 시(詩) 약간 권(卷)과 문(文) 약간 권이 되었다. 그리고 함종(咸從)에 우거할 때에는 다시는 시를 읊지 않고 오직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었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산정(刪定)하여 완성하고 손수 베껴서 정서(淨書)하였다.
공은 쌓은 덕이 마치 높은 산과 같았기에, 밖으로 드러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이 구름과 비를 머금어 흘려 내는 듯 아득하여 그 끝없이 두터운 근저를 엿볼 수 없었으며, 너른 도량이 마치 큰 바다와 같았기에 밖으로 드러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이 고래와 곤어(鯤魚)를 품어서 기르는 듯 드넓어 그 가없이 먼 기슭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어눌하여 마치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고, 그 마음은 독실하여 마치 옷을 이겨내지 못할 듯하였으며, 검소하면서도 능히 편안하고 정직하면서도 작은 신의(信義)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형제간에 공경과 우애를 다하고 믿음과 의리가 붕우들 사이에 드러났다. 이렇게 한 생각이라도 삼가고 모든 행실을 갖추었으니, 어찌 천지가 정기(精氣)를 쌓아 중흥에 맞추어 세상에 탄강(誕降)시켜 국가의 상서로 삼은 이가 아니겠는가.
위태한 연산군의 조정에서 직언한 것이며, 극형을 앞두고서도 변명하지 않은 것이며, 국혼(國婚)을 바로잡은 것이며,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 예의(禮儀)를 합당하게 한 것이며, 세자가 입학했을 때 질문에 잘 대답한 것이며,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운 것이며, 서쪽으로 오랑캐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막은 것이며, 뇌물을 일절 받지 않은 것이며, 전답을 소유하지 않은 것 등에 이르러서는, 그 충성은 유향(劉向)과 같고, 그 절개는 공융(孔融)과 같고, 그 덕은 병길(丙吉)과 같고, 그 위의(威儀)는 공서적(公西赤)과 같고, 그 효성은 영고숙(潁考叔)과 같고, 그 인애(仁愛)는 자산(子産)과 같고, 그 충간(忠諫)은 위상(魏相)과 같고, 그 청렴은 양진(楊震)과 같고, 그 용기는 제갈량(諸葛亮)과 같으니, 문장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도 백성이 알지 못하고 공(功)이 사직(社稷)에 있어도 나라에서 녹권(錄券)이 없었으니, 이른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공이 있는 것이 공인 줄만 알고 공이 없는 것이 공이 있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공의 아들 원록(元祿)이 공의 사적을 기록해 가지고 와서 행장을 기술해 주길 청하거늘, 내가 공에게 가장 깊은 지우(知遇)을 입은 터라 감히 글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보고 들은 바를 두서없이 기록해 둔다.
삼가 행장을 쓰다.


[주D-001]기씨(奇氏) : 고려 공민왕 때 반란을 꾀하다 주살(誅殺)된 기철(奇轍)을 가리킨다.
[주D-002]여경(餘慶)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善)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餘慶]가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장경왕후(章敬王后) :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첫째 계비(繼妃)로 인종(仁宗)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주D-004]신수근(愼守勤) : 폐빈(廢嬪) 신씨(愼氏)의 아버지로,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이고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연산군의 처남이고 중종의 장인이다.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으나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살해되었다.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주D-005]증고사(證考使) : 왕자나 왕손(王孫)의 태(胎)를 묻을 장소를 찾기 위해 파견하는 임시 관원이다.
[주D-006]형수(荊樹) : 자형화(紫荊花)라는 화초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경조(京兆) 사람인 전진(田眞) 삼형제가 각기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마지막으로 뜰에 심은 자형화를 갈라서 나누어 가지려 하니 자형화가 곧 시들었다. 삼형제가 이에 뉘우치고 다시 재산을 합하니, 자형화가 다시 무성하게 자랐다 한다. 《續齊諧記 紫荊樹》
[주D-007]오성(五星)의 설(說) :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별이 동시에 한 방향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는데, 여기서는 용재(容齋)의 남자 형제가 다섯이었기에 비유한 듯하다.
[주D-008]복성군(福城君) : 중종의 서자(庶子)로 경빈 박씨(敬嬪朴氏) 소생이며 이름은 미(嵋)이다. 세자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어머니 박씨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주D-009]형옥(荊玉) : 춘추 시대 초(楚)나라 변화(卞和)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얻었다는 직경이 한 자나 되는 좋은 옥으로, 전국(傳國)의 옥새로 만들어져 전해졌다.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일컫는다.
[주D-010]연헌(蓮軒) : 조선조 문신인 이의무(李宜茂)이다. 그의 자는 형지(馨之)이고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주D-011]사가(四佳) 서공(徐公) : 조선조 문신 서거정(徐居正)이다. 그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본관은 달설(達城)이며, 시문에 능하여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잡았다.
[주D-012]왕증(王曾)의 은출원귀(恩出怨歸) : 송(宋)나라 때 재상이었던 왕증이 사류를 등용하거나 퇴출할 때 남들이 모르게 하자 범중엄(范仲淹)이 그에게 “사류를 공공연히 등용하는 것이 재상의 임무인데 공의 성덕(盛德)은 유독 이 점이 부족하다.” 하였다. 이에 왕증이 “대저 집정자는 은혜는 자기에게 돌리려 하기 마련이니, 원망은 누구에게 돌아가게 하겠는가.” 하여, 원망은 자기가 감당하고 은혜는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宋史 卷310 王曾列傳》
[주D-013]방예(放麑) : 맹손(孟孫)이 사냥을 하다 새끼 사슴을 잡아 진파서(秦巴西)를 시켜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 어미 사슴이 따라오면서 울기에 진파서가 차마 볼 수가 없어 새끼 사슴을 돌려주었다. 《韓非子 說林上》 인덕(仁德)을 지닌 사람에 대한 전고(典故)로 쓰인다.
[주D-014]철갱(啜羹) : 악양(樂羊)이 위(魏)나라 장수가 되어 중산(中山)을 공격하였는데, 그 아들이 당시 중산에 있었기에 중산의 임금이 그 아들을 삶아서 국을 끓여 악양에게 주니 악양이 그 국을 먹었던 고사를 뜻한다. 《戰國策 中山策》 잔인한 사람에 대한 전고로 쓰인다.
[주D-015]남지정(南止亭) :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의 호가 지정(止亭)이다. 그의 자는 사화(士華)이고 지정 외에도 지족당(知足堂)이란 호가 있으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문명(文名)을 떨쳤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한 죄로 명종(明宗) 때 관작과 시호를 삭탈당하였다.
[주D-016]주문연(主文硯) : 조선조 홍문관 대제학이 가지던 벼루인데, 대제학이 바뀔 때 이 벼루를 전수하는 의식이 있었다.
[주D-017]사문(斯文)의 심법(心法) :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던 것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남곤이 당대 문장의 일인자임을 허여한다는 뜻으로 용재(容齋)에게 벼루를 주면서, 이 벼루를 문장의 일인자끼리 전수하는 신표(信標)로 삼는다는 뜻이다.
[주D-018]그 말은 …… 듯하였으며 :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문자(文子)는 그 마음이 겸손하여 마치 몸이 옷을 이겨내지 못할 듯하고, 그 말이 어눌하여 그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였다.”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몸가짐과 말투가 매우 겸손하고 진실함을 나타내고 있다.
[주D-019]유향(劉向) : 한(漢)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현손(玄孫)으로 초명은 갱생(更生), 자는 자정(子政)이다. 문장에 능통하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으며, 누차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함에 그 말이 매우 통절(痛切)하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를 신랄하게 공척(攻斥)하였다.
[주D-020]공융(孔融) :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다. 문장에 특히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 권병을 잡았던 환관들 및 동탁(董卓), 조조(曹操) 등의 비위를 거슬렸으나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결국 조조에게 대역부도(大逆不道)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주D-021]병길(丙吉) : 한 무제(漢武帝) 때 노국(魯國) 사람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특히 인품이 관대하였다.
[주D-022]공서적(公西赤) : 공자의 제자로 자는 자화(子華)이며, 제(齊)나라로 사신을 간 사실이 《논어》에 보인다.
[주D-023]영고숙(潁考叔) : 춘추(春秋) 시대 정(鄭)나라 사람으로 어머니와 결별하고 살던 장공(莊公)을 효성으로 감화시켜 지하의 수도(隧道)를 통해서 만나게 하여, 순효(純孝)란 평판을 받았다. 《春秋左傳 隱公元年》
[주D-024]자산(子産) : 전국(戰國) 시대 정(鄭)나라의 재상으로 인정을 베풀었으며, 자기가 타는 수레로 사람을 태워 물을 건너게 해 준 사실이 《맹자》에 보인다.
[주D-025]위상(魏相) : 전한(前漢) 때 사람으로 자는 약옹(弱翁)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있으면서 권력에 굽히지 않고 직간을 많이 하였으며,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졌다.
[주D-026]양진(楊震) :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백기(伯起)이며 성품이 매우 청렴하였다. 그가 천거하여 벼슬하게 된 왕밀(王密)이란 사람이 찾아와 금 열 근을 주면서 “밤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라.”고 하자, 그는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하여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 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小學 善行》

 
용재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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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 절구(五言絶句)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 가 지정(止亭)의 소나무 분재(盆栽)를 얻고 이십 수(首)의 절구(絶句)로 보답했다는 말을 듣고

노년의 절개가 본래 귀한 법 / 老節從來貴
천금인들 널 어이할 수 있으랴 / 千金奈若何
그대의 시는 한 자로 족하니 / 君詩一字足
이십 편이나 될 필요 없어라 / 不用卄篇多

어느 곳인들 복사꽃 오얏꽃이 / 何處無桃李
춘풍에 제 자태 뽐내지 않으랴만 / 春風各自誇
작은 솔의 절개를 오게 하는 건 / 能來小松節
오직 최씨네 한 집 있을 뿐이로세 / 尙有一崔家

장평의 만 줄기 푸른 솔숲 속 / 長坪萬蒼碧
어린 솔을 간난에서 구출하였지 / 保子出艱危
이날 맑은 창에서 마주하노니 / 此日晴窓對
거 땅에 있을 때를 잊지 말게나 / 無忘在莒時

사방 한 치 땅에 뿌리내려도 / 託土才方寸
간난을 또한 사양하지 않나니 / 艱難亦不辭
어찌 이천 척 높을 필요 있으리 / 何須二千尺
그래도 세한 자태 감상할 수 있는데 / 且賞歲寒姿

구름을 찌를 뜻 어이 없으랴만 / 凌雲豈無意
뿌리내리기 어려움을 어이하랴 / 奈此託根難
풍상 이기는 절조 지킬 뿐이니 / 但保風霜操
이제부턴 또 세한이 다가왔구나 / 從今又歲寒

만 마리 소가 끌 거대한 솔도 / 丘山萬牛力
오히려 도끼질에 무참히 넘어지니 / 尙被斧斤殘
화분 속이 비좁다 말하지 말라 / 莫道盆中窄
그래도 늠름한 자태를 볼 수 있다오 / 猶將凜凜看

남방 수령 가서도 날 잊지 않았구려 / 南宰非相棄
보내온 시 맑은 풍격 절로 높아라 / 淸詩價自高
때로 시편을 펼쳐 읊고 나서는 / 時時披咏罷
오솔길 따라 동쪽 비탈을 거니노라 / 尋徑步東臯

동쪽 비탈엔 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 東臯幾多樹
울창히 우거져 서로 높다 다투누나 / 鬱鬱競相高
고개 돌려 다시금 생각할 테지 / 回首還應憶
나의 솔은 이들과 격이 다르다고 / 吾松異此曹

솔을 나는 몹시도 사랑하나니 / 松吾愛之甚
그 무엇도 이에 비길 바 없어라 / 無物可酬旃
시가 짝이 되는 줄 일찍 알았거니 / 早識詩能當
이십 편쯤 짓는 게 무에 아까우랴 / 寧慳二十篇

그대는 솔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 君非松也愛
솔을 감상하는 시 짓기 즐기는구려 / 愛作賞松篇
나 역시 그대 닮고자 하는 자이니 / 我亦希君者
시편을 일일이 보내올 필요 없다오 / 無煩一一傳

충재 그대는 세한의 사람인데 / 盅齋歲寒人
만년에야 세한의 벗 얻었구려 / 晩得歲寒友
세한의 마음을 시험하고 싶으면 / 欲試歲寒心
모름지기 세한 뒤에 보아야 하리 / 須看歲寒後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자라기론 / 朝種暮則長
어찌 느릅과 버들 따위 없으리요 / 豈無楡與柳
이 굳고도 곧은 자태 지키나니 / 保玆堅貞姿
천년토록 장구하길 기약하누나 / 期以千歲久

잠시 동안 시인과 이별했더니 / 暫與詩人別
또 시인이 보낸 부탁받았구나 / 又得詩人托
어이하여 이리도 여위었느뇨 / 如何太瘦生
모두가 괴로이 시구 찾은 탓이지 / 摠爲苦語迫

풍대는 진실로 그대가 좋아하지만 / 楓臺固君樂
서리 내린 뒤엔 역시 쓸쓸해지나니 / 霜後亦蕭索
어찌 몇 촌 높이 푸른 솔이 / 何似數寸碧
한서에 그 모습 변치 않음만 하랴 / 寒暑無榮落

그대 집 한 그루 매화는 / 君家一株梅
요즘도 탈 없이 잘 있는가 / 邇來無恙未
크고 작음이야 따질 것 없고 / 大小固莫論
솔이 그대와 기미가 꼭 같구나 / 與爾同氣味

낙양성 안 천만 호 집들은 / 洛陽千萬家
집집마다 모란을 좋아라 심었지 / 家家尙姚魏
그대는 바야흐로 두 벗을 대하니 / 君方對兩友
부귀 따윈 오연히 굽어보겠지 / 傲視富與貴


그대 집은 남산 기슭에 있으니 / 君第南嶽麓
만 그루 솔이 항상 눈에 보이지 / 萬松常在目
게다가 시를 가지고 솔과 바꾸니 / 又將詩換松
이 물건 역시 녹록한 게 아니로세 / 此物非碌碌

남방의 그대 시는 나라의 종장 / 南詩國宗匠
단번에 곧잘 천 폭 종이 휘갈겨 / 一寫動千幅
게다가 또 솔로써 시를 청하니 / 又用松請詩
그대 시는 진실로 탄복하겠구려 / 君詩固所服

내가 솔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나 / 吾非不愛松
청산이 앞을 막아 보러 가지 못하고 / 而與靑山阻
내가 시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나 / 吾非不喜詩
재주가 다 바닥나 좋은 시어 없다오 / 才盡無好語

이 솔을 외려 보낼 수 있다지만 / 此松尙可致
이 말을 어찌 허락할 수 있으리요 / 此語安能許
양쪽 모두 그만 그대로 두고 / 不如兩置之
술 싣고 그대에게 가느니만 못하리 / 載酒向君去

[주C-001]충재(盅齋)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숙생(崔淑生)의 호이다. 그의 자는 자진(子眞),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1]거 땅에 …… 말게나 : 춘추(春秋) 시대(春秋) 제(齊)나라에 내란(內亂)이 일어나서 공자(公子) 소백(小白)이 거(莒) 땅으로 망명하였다가 그 후 본국으로 돌아와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환공(桓公)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書)》에, “환공이 관중(管仲), 포숙(鮑叔), 영척(甯戚)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포숙이 술잔을 들고 일어나서 ‘바라건대 우리 주군(主君)께선 망명하여 거 땅에 계실 때의 일을 잊지 마소서.’ 하였다.” 하였다. 이 고사는 왕년의 고난을 비유하는 데 쓰이는데, 여기서는 분재로 심어진 소나무가 과거 솔숲 속에 끼어서 고생하며 지낼 때를 비유하고 있다.
[주D-002]이천 척 :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栢行)〉에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앞에 있는 거대한 잣나무를 두고 “짙푸른 빛 하늘을 찔러 높이 이천 척일세.[黛色參天二千尺]”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주D-003]세한(歲寒) 자태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한 데서 온 말로, 곤궁한 처지나 난세(亂世)에 지조를 잃지 않는 군자(君子)의 자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역시 소나무 분재의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주D-004]만 마리 …… 솔도 : 역시 두보의 〈고백행〉에서 “큰 집이 무너지려면 들보가 필요한 법, 산처럼 무거워 만 마리 소가 고개 돌리누나.[大廈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주D-005]풍대(楓臺) : 최숙생의 집에 있는 대(臺)로서 이곳에 단풍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듯하다.
[주D-006]그대는 …… 굽어보겠지 :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인데, 충재는 군자의 절조를 상징하는 매화와 솔을 대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오언 절구(五言絶句)
지정(止亭)이 충재의 왜송운(矮松韻)을 써서 지은 이십 수의 절구에 차운하여 삼가 올리다.


다른 산인들 어찌 솔이 없으랴만 / 他山豈無松
백악 봉우리를 가장 사랑하노라 / 最愛白嶽峯
그대의 집 뜰 안에 떨어지고 / 落君庭戶內
그대의 시구 속에 들어오누나 / 入君詩句中

충재는 팔두의 재주 지녔으니 / 盅齋八斗才
서른 수 시쯤에 어찌 군색하랴 / 豈吝三十首
저 솔이 천 척 높이로 자라거든 / 待渠千尺長
만언의 솜씨를 시험하시라 / 試玆萬言手

우뚝한 저 산 위의 푸른 솔은 / 落落山上翠
응당 이 솔에게 한 걸음 양보해야지 / 還應讓一頭
구름을 찌른다고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니 / 凌雲未必貴
조용히 물러난다고 어찌 유약하다 하리요 / 歛退豈爲柔

구불텅한 줄기 곧지 않으니 / 詰曲不中矩
사람들은 저 또한 굽었다 하네 / 人云渠亦枉
그러나 만약 외모로 말한다면 / 若將外貌論
느릅과 버들이 외려 볼만할 테지 / 楡柳還可賞

다만 솔의 본래 성품을 보면 / 但看本來性
본래 푸른 줄을 누구도 모른다네 / 莫認本來碧
이러한 성품이 진실로 있지 않다면 / 此性苟不存
이러한 푸름은 종당에 바뀌고 말 테지 / 此碧從當易

평소 늘 절개를 지키는 그대 / 平生抱節君
이 솔과 한 근원에서 나왔구려 / 與爾同出自
함께 서리와 눈을 이겨 내고서 / 共保霜雪餘
금석 같은 뜻 더욱 굳게 다지누나 / 益堅金石志

충재 집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 盅齋靡不有
돈대(墩臺)엔 단풍이요 문에는 버들이라 / 臺楓又門柳
만약 서리와 눈이 오지 않으면 / 若無霜雪至
솔이 저들보다 뒤늦게 시들려 하랴 / 安肯落渠後

방풍씨 모양 한갓 장대할 뿐이니 / 防風徒長大
오래되어 썩으면 뼈가 수레에 가득하리 / 久朽專車骨

늠름하여라 저 안고경의 혀는 / 凜凜杲卿舌
겨우 세 치로 조급한 호갈을 떨게 했지 / 三寸懾燥羯


분분히 저마다 오솔길 이루나 / 紛紛各成蹊
그 누가 늦게 시드는 자인가 / 誰是後凋者

천부의 성품 너 홀로 바르니 / 受命爾獨正
성인께서도 탄식하신 바이지 / 聖之所歎也

옹종하니 그 몸집이 왜소하니 / 擁腫形矮短
뉘라서 네가 장부인 줄 알리요 / 誰知爾丈夫
심상한 저 낙양성의 모란은 / 尋常洛陽紫
농염한 자태가 경국의 미색이지 / 艶色傾國都

그대 안목이 높은 줄 아노니 / 知君高眼孔
평생에 솔과 대만 사랑하겠지만 / 松竹只生涯
꿈속엔 남화의 나비로 화하여 / 夢化南華蝶
때로는 응당 들꽃을 찾아갈 테지 / 時應趁野花
충재군(盅齋君)의 시에 “종래 안목이 높은 탓에, 봄꽃은 구경할 줄 모른다오.[從來高眼孔 不解看春花]”라고 한 구절이 있기에 희롱해 보았다.

어찌 도리의 오솔길이 없으랴만 / 豈無桃李徑
오래 견디는 건 바로 저 솔뿐이지 / 耐久政須渠
담담히 말을 잊은 채 마주하니 / 澹爾忘言對
결습이 없어진 줄 이로써 알겠구려 / 從知結習除

솔의 마음은 천년토록 푸르고 / 方寸千年碧
농염한 저 꽃 열흘 동안 붉어라 / 穠華十日紅
누가 능히 이러한 사실 아느뇨 / 誰能知許事
백발의 늙은이 지정옹뿐이라오 / 白首止亭翁

열흘 걸쳐 내린 지리한 장마에 / 霪霪十日雨
참대도 죽순이 새로이 돋았건만 / 苦竹亦生孫
알겠노니 한줄기 옹골찬 저 솔 / 知渠一箇節
변함없이 맑은 헌함(軒檻) 마주하누나 / 不改對淸軒

맑은 시는 이십 수의 절구요 / 詩淸二十絶
늙은 솔은 두세 줄기 가지라 / 松老兩三枝
가치 따져 보매 서로 엇비슷하니 / 索價相輕重
창관이 보고 틀림없이 웃겠구나 / 蒼官定笑之

남산에 울창한 천 길의 솔들은 / 南山千丈蔭
저마다 동량이 될 재목감이지만 / 各許棟樑材
알겠구나 저 솔은 쓸모가 없기에 / 知渠無用用
도끼와 자귀를 맞은 적이 없었음을 / 未有斧斤來

구법은 창고(蒼古)한 노송과 같고 / 句法蒼松古
마음은 백악처럼 높길 기약한다 / 心期白嶽高
어느 때나 반가이 서로 만나서 / 幾時靑眼對
풍우처럼 붓 휘두르는 모습 볼꼬 / 風雨看揮毫

고절을 지키면 본래 여위는 법 / 苦節從來瘦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느뇨 / 星霜閱幾重
이렇게 작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如許小
그래도 창룡으로 화할 수 있느니 / 猶得化蒼龍

청산에 어찌 땅이 없으리요 / 靑山豈無地
원컨대 세 칸 띳집 짓고 싶어라 / 願結三間茨
솔일랑 동쪽에 심고 나는 서쪽에 살며 / 著子東我西
이 세상 마치도록 세한의 자태 마주하리 / 終歲對寒恣

구불텅 솔가지 내 동산 덮었으니 / 偃蓋定吾園
깃들어 쉴 곳이 없는건 아니지만 / 非無棲息處
백발의 이 몸 돌아가지 못한 채 / 白首未得歸
우두커니 서서 속절없이 서성댄다오 / 遲廻足空竚


 

[주D-001]팔두(八斗)의 재주 : 매우 탁월한 재능을 형용하는 말로,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천하의 재주는 모두 한 섬인데 조자건(曹子建)이 혼자서 여덟 말을 가지고 내가 한 말을 가지고 천하 모든 사람들이 나머지 한 말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釋常談 八斗之才》
[주D-002]만언(萬言)의 솜씨 : 매일 만언의 긴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솜씨라는 뜻으로, 재기(才氣)가 넘치고 문사(文思)가 민첩함을 뜻한다.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청컨대 날마다 만언의 문장을 시험하되 문장이 완성되길 말에 기대어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D-003]방풍씨(防風氏) …… 가득하리 : 옛날 우(禹) 임금이 회계산(會稽山)에 뭇 신(神)들을 불러 모았는데, 방풍씨가 늦게 도착하였기에 우 임금이 그를 죽이니, 그의 신장이 세 길이나 되어 뼈가 수레 하나에 가득 찼다 한다. 《國語 魯語下》 여기서는 다른 소나무가 쓸모없이 크기만 한 것을 비유하고 있다.
[주D-004]늠름하여라 …… 했지 : 안고경(顔杲卿)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군사를 일으키고, 격문(檄文)으로 하북(河北)의 군현(郡縣)에 고(告)하기를, “당나라 조정이 영왕(榮王)을 하북병마대원수(河北兵馬大元帥)로 삼고 가서한(哥舒翰)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삼십 만 대군을 거느리고 안녹산을 토벌한다.” 하였다. 군현 사람들이 이 격문을 듣고 모두 반군(叛軍)의 장수를 죽이니, 원근이 호응하여 안녹산에게 투항했던 하북의 열일곱 군(郡)이 다시 당나라 조정으로 돌아왔다. 《舊唐書 卷187》 호갈(胡羯)은, 안녹산이 본래 호족(胡族) 태생이므로 일컬은 것이다.
[주D-005]분분히 …… 자인가 :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의 논(論)에 나오는 속어(俗語)인 “복숭아 오얏이 말이 없으나 그 아래 절로 오솔길이 생긴다.[桃李不言下自成蹊]”라는 구절을 차용한 것으로, 여기서는 복숭아 오얏이 그 꽃과 과일이 좋아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는 하지만 세한이 오면 잎이 모두 떨어지고 오직 소나무만이 푸르름을 간직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주D-006]성인께서도 탄식하신 바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한 데서 온 말로, 곤궁한 처지나 난세(亂世)에 지조를 잃지 않는 군자(君子)의 자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7]저 낙양성의 모란 :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의 《낙양모란기(洛陽牧丹記)》 화석명편(花釋名篇)에, “백성인 요씨(姚氏)의 집에서 나는 요황(姚黃)이란 모란과 재상 위인보(魏仁溥)의 집에서 나는 위자(魏紫)라는 모란이 낙양성에서 가장 으뜸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8]남화(南華)의 나비 : 남화는 남화진인(南華眞人), 즉 장자(莊子)이다.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는데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자신이지 몰랐다 한다. 《莊子 齊物論》
[주D-009]도리(桃李)의 오솔길 :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의 논(論)에 나오는 속어(俗語)인 “복숭아 오얏이 말이 없으나 그 아래 절로 오솔길이 생긴다.[桃李不言下自成蹊]”라는 구절을 차용한 것으로, 여기서는 복숭아 오얏이 그 꽃과 과일이 좋아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는 하지만 세한이 오면 잎이 모두 떨어지고 오직 소나무만이 푸르름을 간직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주D-010]결습(結習)이 없어진 줄 : 결습은 불교에서 번뇌를 뜻하는 말이다. 《유마경(維摩經)》 현중생품(現衆生品)에 “유마힐(維摩詰)의 방에서 한 천녀(天女)가 나타나 천화(天花)를 뿌리니, 그 꽃이 보살들의 몸에 이르러서는 그냥 땅에 떨어지고 불타의 대제자(大弟子)의 몸에 이르러서는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결습이 다 없어지지 않은 사람의 몸에는 꽃이 붙고 결습이 다 없어진 사람의 몸에는 꽃이 붙지 않는다.” 하였다. 여기서는 지정(止亭) 남곤이 복사꽃 오얏꽃 같은 아름다운 꽃을 찾지 않고 소나무 분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칭찬하여 말하고 있다.
[주D-011]창관(蒼官) : 소나무의 별칭(別稱)이다.


 

 

 

오언 절구(五言絶句)
유월 팔일에 관사(館舍)의 제공(諸公)들이 제천정(濟川亭)에 올라 불어난 물을 구경하면서, ‘조선제일강산(朝鮮第一江山)’ 여섯 자로 운(韻)을 나누어 각각 절구 한 수씩 지었는데, 이튿날 내가 제공들의 시운(詩韻)을 가지고 시를 지어 올리고 화답해 주길 청하였다. 절구 한 수는 일실(逸失)하였다.


흰 물은 하늘과 멀리 잇닿고 / 白水天同遠
푸른 산은 비 내리니 더 고와라 / 靑山雨更鮮
어찌하면 신선을 이 자리에 불러 / 若爲招羽客
이 옥당의 신선들과 함께 취할꼬 / 共醉玉堂仙

강가에 서 있는 많은 교목들 / 江邊喬木多
태반이 공후 집 재목으로 쓰이지 / 太半公侯第
생전에는 즐거움 다하지 못하고 / 生前不盡歡
다른 사람을 위해 남겨 주는구나 / 留與他人計

다만 보이느니 낮은 구릉뿐 / 但見丘陵卑
모래톱이 잠긴 건 알지 못해라 / 未知洲渚沒
저 구름에 닿은 높다란 산만은 / 只應雲際山
헌걸찬 모습 언제나 한결같아라 / 偃蹇長如一

도도한 물결에 끝없이 이는 흥 / 滔滔興不盡
장강을 굳이 부러워할 필요 없구나 / 不必羨長江
술 취한 뒤 붓을 종횡으로 휘두르니 / 醉後縱橫筆
그 풍류는 참으로 짝할 이 드물어라 / 風流儘少雙

서로 다가앉아 고담준론 나누는데 / 高談方促席
비낀 석양은 이미 서산에 걸렸어라 / 斜日已㗸山
하늘이 여흥을 남아 있게 하니 / 天遣留餘興
다시 또 놀기에 인색하지 마시라 / 重遊莫作慳


 

 

오언 절구(五言絶句)
대관자(大觀子) 심의(沈義) 의 시에 차운하다.


젊을 적에 천리마의 자태이더니 / 少年千里姿
늙어서도 기상이 여전히 사나워라 / 老翁猶覂駕
길을 나설 제 다시 한 번 우니 / 臨路更一鳴
높은 값 받기 위한 것은 아니지 / 非緣取高價
위 시는 ‘늙은 말[老馬]’이다.

비록 천금의 고삐는 없으나 / 雖無千金轡
수초는 역시 씹을 만하여라 / 水草亦堪噍
때로 뿔 두드리는 사람 따르니 / 時從打角人
지음이 드물다고 말하진 말라 / 莫謂知音少
위 시는 ‘늙은 소[老牛]’이다.


 

[주C-001]심의(沈義) : 자는 의지(義之), 호는 대관재(大觀齋)이며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그는 심정(沈貞)의 아우인데 거짓으로 바보 행세를 하여 사화(士禍)를 면했고 문장이 뛰어났다.
[주D-001]뿔 두드리는 사람 : 한(寒)나라 채옹(蔡邕)의 《금조(琴操)》에, “영척(甯戚)이 수레 아래에서 소를 먹이며 소뿔을 두드리면서 상가(商歌)를 노래하였는데, 제 환공(齊桓公)이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하였다.


 

오언 절구(五言絶句)
벗에게 답하다. 3수(三首)


자네는 구존하신 부모님 모시매 / 君趨具慶堂
몸에 걸친 색동옷 찬란히 빛나건만 / 彩服爛生光
나는 부모님 무덤가에서 늙으며 / 我老松榟傍
슬프고 슬픈 육아의 노래 부르노라 / 哀哀蓼莪章

자네는 내게 팔경 시 지어 달라 해서 / 君求八景詩
가져다 어버이 기쁘게 해 드린다지만 / 持以爲親嬉
병든 나는 나태하고 쇠약하여 / 我病懶且衰
재주 바닥나 좋은 시구가 정녕 없다오 / 才盡無好辭

내 가난하여 끼니가 곤란하나 / 我貧雖食艱
술 먹는 일이야 곤란하지 않지 / 酒事未應艱
자네의 수레 돌아오길 기다려 / 待君車騎還
한 잔 술 마시며 활짝 웃으리 / 一杯堪解顔


 

[주D-001]색동옷 :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稽古》
[주D-002]육아(蓼莪)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자식이 부모님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마음을 읊고 있다.

 

 

그림에 제(題)하다. 3수(三首)


인물은 멀어져 터럭처럼 작고 / 人物秋毫杳
푸른 물결뿐 만리가 비었어라 / 滄波萬里空
여기에서 세계를 보건댄 / 這邊看世界
다시금 돛단배 한 척이 있누나 / 還亦一帆風

상강에 비는 스산히 내리고 / 浙瀝湘江雨
반죽 숲은 희미하게 보여라 / 依俙斑竹林
여기서 그려 내기 어려운 것은 / 此間難寫得
당시 두 왕비의 마음이로세 / 當日二妃心

산은 푸르고 구름은 절로 희니 / 山靑雲自白
온갖 만물 색색이 본래 같아라 / 色色本來同
한 번 웃고 무심히 마주하노니 / 一笑無心對
구름도 비고 산 또한 비었어라 / 雲空山亦空


 

[주D-001]반죽(斑竹) : 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서 나는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인 소상 반죽(瀟湘斑竹)이다. 전설에 의하면 순(舜)

 

 

 

오언 절구(五言絶句)
아우 채지(采之)의 집 벽에 적다. 2수(二首)


산기슭에다 집터를 잡으니 / 卜宅在山麓
산을 보는 것만으론 오히려 부족해 / 看山猶未足
다시금 그림 속에다 집을 옮기고 / 更移畫圖間
밤마다 부지런히 촛불 밝혀 노누나 / 夜夜勤秉燭

촛불 밝히곤 우선 산을 볼지니 / 秉燭且看山
촛불 밝히고 술을 마시진 말게 / 秉燭莫飮酒
술을 좋아하면 광자의 무리요 / 愛酒狂者徒
산을 좋아하면 인자라 오래 산다네 / 樂山仁者壽


 

[주D-001]산을 …… 산다네 : 공자가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니,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며 지자는 낙천적이고 인자는 장수한다.” 하였다. 《論語 雍也》


 

오언 절구(五言絶句)
여원(礪原) 송 상공(宋相公)이 시로 읊은 ‘물고기와 신선을 그린 화첩[畫魚畫仙帖]’에 제(題)하다. 화첩의 시운을 사용하였다.


허공과 물은 본래 둘이 아니니 / 空水本非二
어느 곳에선들 얻을 수 없으리요 / 何地不可得
물고기에게 이 가운데 맛을 물으니 / 問魚這中味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하네 / 無苦亦無樂

상공이 그림 속 물고기를 보니 / 相公觀畫魚
그들은 저마다 자득하여 노니네 / 各自得其得
물고기 즐거움을 내 어찌 알리요 / 魚樂我安知
이러한 마음이라야 참 즐거움이지 / 如是乃眞樂


절로 인간의 속된 뜻 소멸시키니 / 自使人意消
우리 스승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로세 / 吾師默非默

스승께 마음 편안하게 할 비법 물으니 / 問師安心方
병이 없으면 즐거움 또한 없다 하시네 / 無病亦無樂

상공이 그림 속 신선 마주하니 / 相公對畫仙
말하지 않고 또한 침묵하지 않네 / 不語亦不默
말과 침묵 모두 잊어야 하나니 / 語默兩俱忘
이와 같아야 신령스러운 즐거움이지 / 如是乃靈樂


 

[주D-001]물고기 …… 참 즐거움이지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강물 위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물고기의 자득(自得)한 모습을 보는 송 상공 역시 자득하여,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즐겁고 송 상공은 송 상공대로 즐거워야 진실로 자득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주D-002]절로 …… 아니로세 : 말 없는 그림 속 신선을 보기만 해도 인간 세상의 속된 뜻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언 절구(五言絶句)
이선원(李善元) 형의 시에 차운하다.


각박한 세태 내 일찍이 알았거니와 / 世態吾曾識
우리의 친밀한 정 늙을수록 더해라 / 親情老自加
이별은 많고 만남은 늘 적었으니 / 別多相會少
묻노니 그대의 회포는 어떠하신가 / 懷抱問如何


 

 

 

 

용재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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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언 절구(七言絶句)
어자유(魚子游) 득강(得江) 의 동주도원(東州道院) 시에 차운하다. 10수(十首)


지금 임기가 찬 저 성주는 / 今時彌秩夫城主
지난날 도산 봉관의 신선이지 / 往日道山蓬館仙
한 번 이별 후 삼 년을 소식 끊기더니 / 一別三年消息斷
시권이 내 앞에 떨어지매 홀연 놀라라 / 忽驚詩卷墮吾前

신선처럼 혼돈산 속에 노닐며 / 神遊每涉混茫境
별미라 시냇가 나물 흔연히 맛보누나 / 異味欣嘗溪沚毛
날마다 산 보며 좋아라 시를 읊으니 / 日日對山吟不厭
푸른 산이 어찌 이 사람만큼 높으리요 / 靑山那得似人高

청향 어린 연침 추위 견디기 어려워 / 燕寢淸香不耐寒
짧은 시로 애오라지 계산에 답하누나 / 小詩聊復答溪山
나는 쇠약하여 이러한 일 함께 못하고 / 吾衰不得供玆事
백발로 홍진 세상 낯 두껍게 살아간다오 / 白首紅塵只強顔

군재는 소쇄하여 승방과 같고 / 郡齋蕭灑如僧舍
군수는 청고하기 출가한 스님이라 / 太守淸高已出家
여생에 묵은 빚 아직도 못다 갚아 / 宿債餘生猶未盡
새해엔 매화 위해 새로 삼경을 열었고나 / 新年開徑爲梅花

아전들아 번거롭게 아침 인사 오지 말라 / 朝來謝吏莫相溷
빈 서재 소쇄하는 일 나도 하지 않으련다 / 灑掃空齋吾且休
홀로 턱 고이고 보니 서산에 맑은 기운 일고 / 拄笏西山生爽氣
새로 지은 시는 청절하기가 소주보다 나아라 / 新詩淸絶勝蘇州

중요한 일없다 장인은 말하지 마소 / 丈人莫謂無機事
가구가 인구에 회자되는 조의루라오 / 佳句爭傳趙倚樓
좋은 날 상춘하러 수레 타고 나서니 / 勝日探春車騎出
일세의 풍류는 우리 군수님 차지로세 / 風流一世屬遨頭

훈업을 이룰지라도 그림의 떡이요 / 勳業可成如畫餠
덧없는 광음은 탄환처럼 빠르구나 / 光陰難賴似跳丸
그 언제나 이 몸 백구와 어울려서 / 幾時身逐白鷗去
맑고 푸른 물가에서 맘껏 노닐꼬 / 滄澤晴波無限寬

옛날에 유락한 건 광태 때문인데 / 昔年流落坐狂顚
백발의 몸으로 임금 곁에 돌아왔지 / 白首歸來侍日邊
나라의 은혜 보답하고 은퇴하려니 / 報了國恩方擬退
고향엔 싱싱한 물고기와 나물 없어라 / 故鄕魚菜沒芳鮮

열여섯 수라 새 시에 가구(佳句)가 많아도 / 新詩十六多佳語
그윽한 정은 아무래도 그리기 어려우니 / 只是幽情寫得難
어찌 도인이 붓과 벼루 불사르고 / 何似道人焚筆硯
때로 술잔 잡고 남산을 마주하느니만 하랴 / 時時把酒對南山

뉘 알랴 동쪽 지경 빈한한 선비가 / 誰知東境臞寒士
그 옛날 대궐의 시종신이었을 줄을 / 曾是西淸侍從臣
대 심고 매화 심어 물 주기 바쁘니 / 種竹種梅還抱瓮
지금도 여전히 한가하진 못하구려 / 只今猶是未閑人


 

[주C-001]어자유(魚子遊) : 조선조의 문신으로, 이름이 득강, 자는 자순(子舜) 또는 자유이고 호는 관포당(灌圃堂) 또는 혼돈산인(混沌山人)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주D-001]청향 어린 연침 : 연침(燕寢)은 한가한 잠자리를 말하는데, 성어(成語)로 연침청향(燕寢淸香), 또는 연침응향(燕寢凝香)이라 하여 주로 지방관의 관아(官衙)나 군재(郡齋)의 한가한 생활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계산(溪山)에 답하누나 : 산천의 좋은 풍경을 시로 읊는 것을 말한다.
[주D-003]삼경(三徑)을 열었고나 : 전한(前漢) 때 장후(蔣詡)는 자가 원경(元卿)으로, 두릉(杜陵)에 은거하였는데, 그의 집 안에는 삼경, 즉 세 가닥 길을 만들어 놓고 당시 고사(高士)였던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하고만 어울렸다고 한다. 《文選 謝靈運 田南樹園激流植援 李善注》 참고로 도연명(陶淵明)의 〈전거(田居)〉 시에, “평소 마음 정히 이와 같나니, 삼경을 열어 삼익우(三益友)를 맞으리.[素心正如此 開徑望益友]” 하였다.
[주D-004]홀로 …… 일고 :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는 성품이 소방(疏放)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업무를 보지 않았다. 이에 환충이 “그대가 부중(府中)에 있은 지 오래이니 이제 업무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하니, 왕희지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수판(手板), 즉 홀로 턱을 고이고서 “서산에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이 이는구나.” 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주D-005]소주(蘇州) : 당(唐)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을 가리킨다. 그가 강주(江州)와 소주(蘇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했으므로 위 강주(韋江州) 또는 위 소주(韋蘇州)라고 부르며, 그의 시체(詩體)가 도연명(陶淵明)을 닮았다 하여 도위(陶韋)라고도 일컫는다.
[주D-006]조의루(趙倚樓) : 당나라 조하(趙嘏)를 지칭한 말이다. 그는 시를 잘 지었는데, 두목(杜牧)이 “긴 젓대 한 소리에 사람은 누각에 기댄다.[長笛一聲人倚樓]”라고 한 그의 시구를 좋아함으로 인하여 이렇게 일컬어지게 되었다.
[주D-007]물고기와 나물 : 후한(後漢) 오군(吳郡) 사람인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를 차용하였다. 《晉書 文苑列傳》


 

칠언 절구(七言絶句)
종형(從兄) 자수(子秀)가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부임하러 길을 떠날 때, 부지런히 학문하도록 그 아들을 권면하는 내용의 시를 지어 주길 나에게 청하기에 써서 부쳤다.


바라노니 너는 탁마장을 반복해서 보아라 / 願渠三復琢磨章
선성께서 은근히 면장을 경계하셨단다 / 先聖慇懃戒面墻
공부하길 능히 쉬지 않는다면 / 做得工夫能不息
늘 네 부친 곁에 있는 것과 다름없단다 / 卽如長在乃翁傍


 

[주D-001]탁마장(琢磨章) : 《시경》 위풍(衞風) 기욱편(淇澳篇)을 가리킨다. 이 시에서는 사람이 학문하는 것을 공인(工人)이 골각(骨角)과 옥석(玉石)을 다듬는 것에 비유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부를 말하고 있다.
[주D-002]면장(面墻) :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 같다.” 한 데서 온 말로, 일반적으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이치를 알지 못하여 앞길이 캄캄하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論語 陽貨》

 

 

 

희인(希仁) 신공제(申公濟) 에게 보내다.


문밖에 참새 그물 편다 자랑 말라 / 門外張羅莫自多
나는 베개 높이고 남가의 꿈 꾼다오 / 我方高枕夢南柯
산 가득 비바람이 봄빛을 재촉하니 / 滿山風雨催春色
버들과 꽃구경하러 한번 와 주시겠소 / 問柳尋花肯一過
공이 이조(吏曹)의 직임을 벗은 뒤로, 나의 집에도 손님이 드물어 서로 축하할 만하였다.


 

[주D-001]참새 그물 : 나작(羅雀)이라 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문전이 썰렁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는 빈객이 문에 가득하더니 관직에서 축출되자 문밖에 참새 그물을 펼 만큼 썰렁하였는데, 그 후 그가 다시 정위가 됨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적공이 문에 큰 글씨로 적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사니 벗의 우정을 알 수 있고, 한 번 빈한하고 한 번 부유하니 벗의 태도를 알 수 있고,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하니 벗의 우정이 드러난다.” 하였다. 《史記 汲鄭列傳》
[주D-002]남가의 꿈 :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하여 덧없는 인생에 곧잘 비유되는 말이나, 여기서는 단순히 꿈을 뜻한다.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느티나무 남쪽 가지 아래에서 잠을 자다가 꿈에 괴안국(槐安國)에 이르러 온갖 부귀를 누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승려 도오(道悟)가, 지정공(止亭公)이 첫머리에 시를 적어서 그 스승 설미(雪眉)에게 준 시축(詩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스승이 천화(遷化)하실 때 그 말씀이 이와 같았다.” 하기에, 내가 펼쳐서 읽어 보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이에 절구 두 수를 써서 도오에게 주었다.


지정의 시구는 다시금 논할 만하니 / 止亭詩句更堪論
큰일 마치매 한마디 말 남겼구려 / 大事了來餘一言
시축 어루만지니 마음 절로 슬퍼라 / 拂拭自然生楚愴
백발의 이 몸 이제 다시 친구가 없구나 / 白頭無復故人存

삼생이 찰나임은 논할 것 없나니 / 彈指三生不足論
괴이할손 스님은 죽음만 잊고 말 잊진 못했군 / 怪師忘死未忘言

선가의 의발을 가벼이 없애지 말라 / 禪家衣鉢休輕廢
제자 가운데 도를 깨달은 이가 있다네 / 弟子之中悟者存


 

[주D-001]큰일 …… 남겼구려 : 대사(大事)를 마쳤다는 것을 불교에서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마쳤다 하여 임종을 뜻하는바, 지정(止亭)이 죽고 시를 남겼음을 뜻한다.
[주D-002]삼생이 …… 못했군 : 설미(雪眉)가 임종할 때 남긴 게송(偈頌)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생(三生)이 손가락 한 번 퉁길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해 죽음을 잊긴 하였으나 임종게(臨終偈)를 남겼으므로 결국 말을 잊진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주D-003]선가의 …… 있다네 : 선가(禪家)에서는 도를 깨달은 제자에게 의발(衣鉢)을 전하는 관습이 있는데, 도오(道悟)란 승려의 법명이 도를 깨달았다는 뜻이 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개성(開城)의 장 도사(張都事) 옥(玉) 가 산과일과 등나무 지팡이를 선물로 보낸 데 사례하다.


오늘 아침 그윽한 흥취 홀연 일어나니 / 今朝幽興忽相催
서리 맞은 산과일 대흥에서 온 줄 아노라 / 霜果知從大興來
어찌하면 등나무 지팡이 짚고 가서 / 安得手携藤杖去
천마령 잿마루 위를 잠시 배회할거나 / 天磨嶺上少徘徊
대흥(大興)은 동네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보내 준 데 사례하다.


낚시하던 물가로 속절없이 고개 돌리매 / 釣蓑滄澤首空回
재상 벼슬 여러 해 육식한 게 부끄러워라 / 肉食多年愧鼎台
이날 보내 준 편지로 애오라지 자위하노니 / 此日素書聊自慰
상사어라 물고기 우리 친구로부터 왔구나 / 相思魚自故人來
상사(相思)는 물고기 이름이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자미(子美)의 차완릉선생집(借宛陵先生集)이란 시에 차운하다.


시가 이 늙은이 곤궁케 했다 누가 말했느뇨 / 誰謂詩能窮此老
참된 영광으로야 완릉만한 이가 없지 / 眞榮無若宛陵然
당시에 구양수의 칭찬을 한 번 받았고 / 當時一被歐陽賞
오백 년 뒤에 또다시 그대를 만났구려 / 又復逢君五百年


 

[주D-001]구양수(歐陽脩)의 칭찬 : 제목에서 완릉 선생(宛陵先生)은 북송(北宋)의 시인 매성유(梅聖兪)를 지칭하는 듯하니, 그의 집이 완릉(宛陵)에 있었다. 구양수의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에,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곤궁해져야 시가 더욱 공교해진다.”고 말하고, 매성유의 시와 문장을 극찬하였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웅 상인(雄上人)이 용문산(龍門山)에서 나는 나물을 보내고 아울러 밀랍으로 만든 초를 선물한 데 답례하다.


상인이 나물을 나눠 준 뜻 어떠하오 / 上人分餉意如何
내가 고기반찬 먹는 게 부끄럽구려 / 慙愧吾生食有魚
긴 밤 작은 서재에 촛불 밝히고 앉으니 / 永夜小齋明燭坐
돌아가서 고향 산의 나물을 캐고 싶어라 / 却思歸采故山蔬


 

 

정운경(鄭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당시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었다.


이별 후 서신이 드물어 자못 괴이쩍더니 / 別來頗怪信書稀
홀연히 맑은 시편 받고 옷깃을 여미었소 / 忽得淸篇爲整衣
오언 칠언 시들의 천백 가지 뜻이 / 五絶七言千百意
반은 옛날 생각이요 반은 고향 생각일세 / 半因懷舊半思歸

오마의 은광 또한 세상에 드무니 / 五馬恩光世亦稀
지금 와서 하의를 찢은 것 후회 마오 / 只今休悔裂荷衣
구중궁궐 임금을 뵙고 전석하였으니 / 九重宵旰勤前席
좋은 성적 거두고 자급 높아 돌아오리 / 政最行看增秩歸

시주의 풍류 눈에 드는 이 적더니 / 詩酒風流眼底稀
백발의 종적 선비 옷에 부끄러워라 / 白頭蹤迹愧儒衣
도리어 생각노니 풍설 치는 관서 길에서 / 却思風雪關西路
말 타고 높이 시 읊으며 반쯤 취해 돌아왔지 / 倚馬高吟半醉歸

늙으매 상념이 많아 잠이 적으니 / 老抱多端夢寐稀
한밤에 말똥말똥 옷 입은 채 누웠노라 / 中宵耿耿臥連衣
나라 은혜 갚기도 전에 몸 먼저 병드니 / 國恩未報身先病
무슨 수로 노 저어 푸른 물가로 돌아갈꼬 / 滄澤何因一棹歸
중국어(中國語)에, 옷을 벗지 않은 채 자는 것을 연의(連衣)라 한다.

문전에 오는 손님이야 드물건 말건 / 一任門前客到稀
성품 본래 소방하여 의관 차리기 귀찮아라 / 從來疏放懶冠衣
저물녘 남쪽 창에 턱 고이고 앉아 / 南牕抵暮支頤坐
추운 숲으로 돌아가는 지친 새 세어 보노라 / 數盡寒林倦鳥歸

또 절구 한 수를 지어, “취향(醉鄕)을 어찌 얻을 수 있으랴. 고향도 꿈속에서나 돌아갈 뿐일세.”라는 마지막 장(章)의 뜻에 답하다.


드문드문 샛별 스러져 가는데 / 落落晨星看漸稀
옷섶을 적시는 서리는 또 어이할꼬 / 微霜更奈霑人衣
취향이 어찌 고향만큼이야 좋으리요 / 醉鄕何似故鄕好
꿈속에 돌아갈 길 없다 말하지 마오 / 夢裏莫言無路歸


 

[주C-001]정운경(鄭雲卿) : 조선조 문신 정사룡(鄭士龍)의 자가 운경(雲卿)이다. 호는 호음(湖陰)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주D-001]오마(五馬) : 다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 태수(太守)의 행차를 뜻한다.
[주D-002]하의(荷衣)를 찢은 것 : 하의는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隱者)의 옷이니, 하의를 찢는다는 것은 은거하다가 세상에 나옴을 뜻한다. 남북조(南北朝)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마름풀로 만든 옷[芰製]을 불사르고 연잎으로 만든 옷[荷衣]을 태웠다.”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D-003]전석(前席) : 자리를 앞당긴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다가 일 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몸이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고 한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칠언 절구(七言絶句)
응경(應卿)과 만나 술을 마시다가 생질 노인(盧禋)의 영낙화탄(詠落花嘆)이란 시에 차운하다.


꽃 피는 시절엔 절로 바람이 많은 법 / 花開時節自多風
꽃과 사람 얼굴이 얼마나 오래 붉을꼬 / 花與人顔幾日紅
꽃의 수명 무궁하지만 사람 수명 유한한데 / 花自無窮人有盡
억지로 유한한 몸으로 무궁한 데 나아가누나 / 強將有盡趁無窮


 

백씨(伯氏)와 이별하며


평생토록 척령 시만 읊을 줄 알았더니 / 平生只解鶺鴒詩
부귀할 때 외려 상심할 줄 뉘 알았으랴 / 誰料翻傷富貴時
오늘 서로 만나매 모두가 백발이니 / 今日相看俱白髮
풍우 치는 뒷날 밤 서로 그리워 맙시다 / 他宵風雨莫相思


 

[주D-001]척령 시(鶺鴒詩) :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척령이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을 구한다.[脊令在原 兄弟急難]” 하였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눌헌(訥軒)의 시에 차운하다.


술자리에서 조용히 기이한 주책 운용하여 / 尊俎從容倚運籌
위엄스러운 명성 천리 밖 변방을 제압했지 / 威聲千里壓邊頭

나라 평안케 할 계책 조정에 필요하니 / 朝家政要平平策
공이 이루어지길 기다려 비로소 쉬시리 / 待得功成始擬休
‘의당 쉬어야겠다’는 말에 대답한 것이다.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공을 어느 때나 이룰 수 있겠는가.


 

[주D-001]술자리에서 …… 제압했지 :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계책으로 멀리 있는 적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5에, “술동이와 도마[尊俎]의 사이에서 성을 뽑고 자리 위에서 적을 무찌른다.”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榮川郡守)의 직임을 청하여 가는 이비중(李棐仲)을 보내며


비단옷 입고 가서 색동옷 입고 장난하매 / 錦衣去作斑衣戲
구존하신 양친 연세에 기쁨과 두려움 교차하리 / 具慶年今喜懼幷
나라에 보답할 날 길고 어버이에게 보답할 날 짧으니 / 報國日長親日短
새로운 은총 받고 절하매 군수된 게 영광이구려 / 拜章新寵郡爲榮


 

[주D-001]색동옷 입고 장난하매 :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稽古》
[주D-002]기쁨과 두려움 교차하리 : 공자가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하였는데, 기쁜 것은 오래 사시기 때문이고 두려운 것은 어버이를 모실 날이 적을까 염려해서이다. 《論語 里仁》


 

 

감회(感懷) 2수(二首)


상기도 생각노니 절차탁마하던 제공들 / 尙想諸公自切磋
지금엔 인재가 많다고 다투어 말하누나 / 至今爭道得人多
못난 나 유보에 부끄런 줄 익히 알거니 / 不才久識慙遺補
한가한 이때에 병이나 조리한들 어떠리 / 無事何妨且養痾

수십 년 전 당시의 일을 회상하노니 / 憶曾數十年前事
내 몸이 괴롭게도 더디 태어남을 탄식했지 / 自嘆吾身生苦遲
지금은 전날보다 못함에 다시금 놀라나니 / 今日更驚非昨日
이후에는 다시 몇 사람이나 나를 알아주랴 / 後來能復幾人知


 

[주D-001]유보(遺補) : 당(唐)나라 때 간관(諫官)인 습유(拾遺)와 보궐(補闕)의 합칭으로, 모두 임금의 궐실(闕失)을 보완하여 보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감회(感懷) 2수(二首)


상기도 생각노니 절차탁마하던 제공들 / 尙想諸公自切磋
지금엔 인재가 많다고 다투어 말하누나 / 至今爭道得人多
못난 나 유보에 부끄런 줄 익히 알거니 / 不才久識慙遺補
한가한 이때에 병이나 조리한들 어떠리 / 無事何妨且養痾

수십 년 전 당시의 일을 회상하노니 / 憶曾數十年前事
내 몸이 괴롭게도 더디 태어남을 탄식했지 / 自嘆吾身生苦遲
지금은 전날보다 못함에 다시금 놀라나니 / 今日更驚非昨日
이후에는 다시 몇 사람이나 나를 알아주랴 / 後來能復幾人知


 

[주D-001]유보(遺補) : 당(唐)나라 때 간관(諫官)인 습유(拾遺)와 보궐(補闕)의 합칭으로, 모두 임금의 궐실(闕失)을 보완하여 보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화(士華)와 중열(仲說) 두 학사(學士)에게 삼가 올리다. 4수(四首)


높은 이름은 이미 의춘자 몫이 되었고 / 高名已付宜春子
묘한 시구는 온전히 읍취옹에게 양보했지 / 妙句全輸挹翠翁
늙은 나 평생 두고 무엇이 한스러우랴 / 老我平生何所恨
게다가 두 눈이 남아 나는 기러기 보내는데 / 且留雙眼送飛鴻
내가 바야흐로 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대명 아랜 진실로 오래 머물기 어려운 법 / 大名之下信難居
자기 몸가짐엔 처음이 중요한 줄 알아야지 / 行己須知自有初
비방과 칭찬이 우리들에게 무슨 상관이랴 / 毀譽豈關吾輩事
지금에야 비로소 뉘우치고 전거로 삼노라 / 只今方悔作前車

평소의 출처가 대략 서로 같았더니 / 平生出處略相如
내가 몹시 부끄러운 줄 이제야 알겠구려 / 此日方知媿有餘
우리들 몹시 요락함이야 아랑곳 않나니 / 遮莫吾儕太寥落
옥인이 다시금 이영려에 가까이 갔구나 / 玉人還近邇英廬
당시 사화가 응교(應敎)에 배수되었다.

지금 사람은 앞사람 무시해선 안 되니 / 今人未可薄前人
조금 굽힌 것은 크게 펴기 위함인 것을 / 少屈那知欲大伸
인생 백 년 사업을 다 마치기 어려운데 / 事業百年難自必
세상에서 어찌 내 몸 잃는 것 한탄하리 / 世間何恨失吾身


 

[주D-001]의춘자(宜春子) :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을 가리킨 말이다. 그의 자가 사화(士華)이고, 본관이 의령(宜寧)인데 의령의 또 다른 이름이 의춘(宜春)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2]읍취옹(挹醉翁) : 조선조 학자요 시인인 박은(朴誾)의 호가 읍취헌(挹翠軒)이고 자가 중열(仲說)이다.
[주D-003]두 눈이 …… 보내는데 : 위(魏)나라 혜강(嵇康)의 시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에 “눈으로 멀리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 오현금을 뜯는다.[目送歸鴻 手揮五絃]”라고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매우 자적(自適)함을 뜻한다.
[주D-004]대명(大名) …… 법 : 성대한 명성을 얻으면 화를 초래하기 쉬워 오래 있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월세가(越世家)에 보이는 범려(范蠡)의 말이다.
[주D-005]전거(前車) : 앞의 잘못을 거울삼는다는 뜻으로, 《대대례(大戴禮)》 보부(保傅)편에, “앞의 수레가 넘어짐에 뒤의 수레가 조심한다.[前車覆 後車誡]” 하였다.
[주D-006]이영려(邇英廬) : 송(宋)나라 때 금원(禁苑)의 궁전인 이영각(邇英閣)으로, 영재(英才)를 가까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