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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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13. 5. 13. 22:26

 

 

 

 



도봉산 둘레길

 

형제가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태조조(太祖朝)에 경신궁주(慶愼宮主)의 부마(駙馬)는 상당위(上黨尉) 이애(李薆)였는데, 아우 청평위(淸平尉) 백강(伯剛)은 태종의 정순옹주(貞順翁主) 부마였고, 예종조에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부마는 풍천위(豐川尉) 임광재(任光載)인데, 아우 풍원위(豐原尉) 숭재(崇載)는 성종의 휘숙옹주(徽淑翁主) 부마였으며, 태종조에 숙녕공주(淑寧公主)의 부마는 파성위(坡城尉) 윤우(尹愚)였는데 종제 파평위(坡平尉) 윤엄(尹嚴)은 숙경옹주(淑慶翁主) 부마였고, 성종조에 경순옹주(慶順翁主)의 부마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종제 의천위(宜川尉) 섭원(燮元)은 휘정옹주(徽貞翁主) 부마였으며, 선조조에 정선옹주(貞善翁主)의 부마는 동□위(東□尉《선원보》에는 길성위(吉城尉)로 되어 있다) 권대임(權大任)인데 재종제 동창위(東昌尉) 대항(大恒)은 정화옹주(貞和翁主) 부마였다.
또, 조부와 손자가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있으니, 세종조에 정현옹주(貞顯翁主)의 부마는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인데 손자 영평위(鈴平尉) 섭(燮)이 성종의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였고, 성종조에 혜숙옹주(惠淑翁主)의 부마는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인데, 그의 손자 영천위(靈川尉) 의(檥)는 중종의 경현공주(敬顯公主) 부마였다. 또, 삼촌과 조카가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있으니, 정종조에 덕천군주(德川郡主)의 부마는 부사(府使) 변상복(邊尙服)인데 조카 유천위(柔川尉) 효순(孝順)이 태종의 소선옹주(昭善翁主) 부마였다.

목조-효공왕후 이씨:안천대군,안원대군,안풍대군,익조(추존),안창대군,안흥대군

익조-정숙왕후 최씨:함녕대군,함창대군,함원대군,도조(추존),함천대군,함릉대군,함양대군,함성대군,안의공주

손씨:규수,복

도조-경순왕후 박씨:완창대군,환조(추존)

조씨:완원대군,완천대군,완성대군,문혜공주,문숙공주,문의공주

환조-의혜왕후 최씨:정화공주,태조

정안옹주 정빈 김씨:의안대군

이씨:완풍대군

태조-신의고황후 한씨:진안대군,영안대군(정종),익안대군,회안대군,정안대군(태종),덕안대군,경신공주,경선공주

신덕고황후 강씨:무안대군,의안대군,경순공주

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숙신옹주

후궁:의녕옹주

정종-정안왕후 김씨

성빈 지씨:덕춘군,도평군

숙의 지씨:의평군,선성군,임성군,함양옹주

숙의 기씨:순평군,금평군,정석군,무림군,왕자(조기사망),숙신옹주,상원옹주,옹주(조기사망)

숙의 문씨:종의군

숙의 이씨:진남군

숙의 윤씨:수도군,임언군,석보군,장천군,인천옹주

후궁:덕천옹주,고성옹주,전산옹주,함안옹주

 

가의궁주 유씨:불노

시비 기매:지운

태종-원경왕후 민씨:원자(조기사망),대군(조기사망),대군(조기사망),정순공주,경정공주,경안공주,양녕대군,효령대군, 충녕대군(세종)정선공주,성녕대군

효순궁주 효빈 김씨:경녕군

신녕궁주 신빈 신씨:함녕군,온녕군,정신옹주,정정옹주,숙정옹주,소신옹주,숙녕옹주,숙경옹주,숙근옹주

숙선옹주 선빈 안씨:옹주(조기사망),혜령군,익녕군,소숙옹주,경신옹주

정의궁주 의빈 권씨:정혜옹주

소혜궁주 소빈 노씨:숙혜옹주

명빈 김씨:숙안옹주

정빈 고씨:근녕군

숙의 최씨:옹주(조기사망),희령군

덕숙옹주 이씨:후령군,숙순옹주

숙공궁주 김씨

의정궁주 조씨

혜순궁주 이씨

순혜옹주 장씨

혜선옹주 홍씨

신순궁주 이씨

서경옹주

세종-소헌왕후 심씨:정소공주,문종,정의공주,수양대군(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영빈 강씨:화의군

신빈 김씨:옹주(조기사망),계양군,의창군,옹주(조기사망),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조기사망)

혜빈 양씨:한남군,수춘군,영풍군

장의궁주 귀인 박씨

명의궁주 귀인 최씨

숙의 조씨

소용 홍씨

소용 정씨

숙원 이씨:정안옹주

상침 송씨:정현옹주

사기 차씨:옹주(조기사망)

문종-현덕왕후 권씨:공주(조기사망),경혜공주,단종

공빈 최씨(문종의 계비로 추종)

휘빈 김씨(폐빈)

순빈 봉씨(폐빈)

숙빈 홍씨:옹주(조기사망)

칙 양씨:경숙옹주

숙의 문씨

소용 권씨

소용 정씨:왕자

소훈 윤씨

승휘 유씨

궁인 장씨:왕자

단종-정순왕후 송씨

숙의 김씨

숙의 권씨

세조-정희왕후 윤씨:의경세자(추존-덕종),세희공주,의숙공주,해양대군(예종)

근비 박씨:덕원군,창원군,아지(조기사망)

덕종-소혜왕후 한씨:월산대군,명숙공주,잘산대군(성종)

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예종-장순왕후 한씨:인성대군(조기사망)

안순왕후 한씨:현숙공주,제안대군,대군(조기사망),혜순공주(조기사망)

귀인 최씨

상궁 기씨

성종-공혜왕후 한씨

제헌왕후 윤씨(폐비):연산군,대군(조기사망)

정현왕후 윤씨:순숙공주(조기사망),신숙공주(조기사망),공주(조기사망),진성대군(중종),공주(조기사망)

명빈 김씨:휘숙옹주,경숙옹주,무산군,휘정옹주,왕자(조기사망),왕자(조기사망)

귀인 정씨:안양군,봉안군,정혜옹주

귀인 엄씨:공신옹주

귀인 권씨:전성군

숙의 홍씨:혜숙옹주,완원군,회산군,견성군,정순옹주,익양군,경명군,운천군,양원군,정숙옹주

숙의 하씨:계성군

숙용 심씨:경순옹주,숙혜옹주,이성군,영산군

숙용 권씨:왕자,경휘옹주

숙원 윤씨

연산군-폐비 신씨:원자(조기사망),휘순공주,폐세자 황,대군 영수(조기사망),대군 총수(조기사망),창녕대군

숙의 이씨:양평군

숙의 윤씨

숙의 곽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숙용 장씨:옹주(영수)

숙용 전씨

숙원 최씨

숙원 이씨

숙원 장씨

후궁:왕자(돈수)

정금:옹주(함금)

중종-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효혜공주,인종

문정왕후 윤씨:의혜공주,효순공주,.경현공주,경원대군(명종),인순공주

경빈 박씨:복성군,혜순옹주,혜정옹주

희빈 홍씨:금원군,봉성군

창빈 안씨:영양군,정신옹주,덕흥대원군(선조의 부)

귀인 한씨:왕자(조기사망)

숙의 나씨:왕자(사산)

숙의 홍씨:해안군

숙의 이씨: 덕양군

숙의 김씨:숙정옹주

숙원 이씨:정순옹주,효정옹주

인종-인성왕후 박씨

숙빈 윤씨

혜빈 정씨

귀인 정씨

명종-인순왕후 심씨:순회세자(조기사망)

순빈 이씨

경빈 이씨

숙의 신씨

숙의 정씨

숙의 정씨

숙의 신씨

숙의 한씨

덕흥대원군-하동 부대부인 정씨:하원군,이명순,하릉군,하성군(선조)

순단:이혜옥

선조-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정명공주,공주(사산),영창대군

공빈 김씨:임해군,광해군

인빈 김씨:의안군,신성군,정신옹주,정원대원군(추존-원종,인조의 부),정혜옹주,정숙옹주,의창군,정안옹주,정 휘옹주

순빈 김씨:순화군

정빈 민씨:인성군,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인흥군

정빈 홍씨:정정옹주,경창군

온빈 한씨:흥안군,경평군,정화옹주,영성군

귀인 정씨

광해군-문성군부인 류씨(폐비):원자(조기사망),폐세자 질,왕자(조기사망)

소의 윤씨:옹주

소의 홍씨

숙의 허씨

숙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숙원 신씨

후궁 조씨

원종-인헌왕후 구씨:능양대군(인조),능원대군,능창대군

김씨:능풍군

인조-인렬왕후 한씨: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인평대군,용성대군,공주(조기사망),대군(조기사망),대군(조기사망)

장렬왕후 조씨

폐 귀인 조씨:효명옹주,숭선군,낙선군

귀인 장씨

숙의 나씨

숙의 박씨

효종-인선왕후 장씨:숙신공주,숙안공주,원자(조기사망),현종,숙명공주,숙휘공주,숙정공주,대군(조기사망),숙경공주

안빈 인씨:숙녕옹주

숙의 김씨

숙원 정씨

현종-명성왕후 김씨:명선공주(조기사망),숙종,명혜공주(조기사망),명안공주

숙종-인경왕후 김씨:공주(조기사망),공주(조기사망)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희빈 장씨:경종,성수(남)

숙빈 최씨:영수(남),연잉군(영조),왕자

명빈 박씨:연령군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

경종-단의왕후 심씨

선의왕후 어씨

영조-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정빈 이씨:옹주(조기사망),효장세자(추종-진종),화순옹주

영빈 이씨:화평옹주,화억옹주(조기사망),옹주(조기사망),옹주(조기사망),화협옹주,사도세자(추존-장조,정조의 부),화완옹주

귀인 조씨:옹주(조기사망),화유옹주

폐 숙의 문씨:화녕옹주,화길옹주

진종-효순소황후 조씨:(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양자로 입적)

장조-현경의황후 홍씨:의소세손,정조,청연공주,청선공주

숙빈 임씨:은언군,은신군

경빈 박씨:청근옹주,은전군

양제 가선

정조-효의선황후 김씨

수비 박씨:순조,숙선옹주

의빈 성씨:문효세자,옹주

원빈 홍씨

화빈 윤씨:옹주

순조-순원숙황후 김씨:효명세자(추존-문조,헌종의 아버지),공주(조기사망),명온공주,복온공주,대군,덕온공주

숙의 박씨:영온공주

문조-신정익황후 조씨:헌종

헌종-효현성황후 김씨

효정성황후 홍씨

경빈 김씨

정빈 윤씨

숙의 김씨:옹주

은언군-상산군부인 송씨:상계군(완풍군,정조 후궁 원빈홍씨의 양자),풍계군,남,여

전산군부인 이씨:남,전계대원군(철종의 부)

전계대원군-완양 부대부인 최씨:회평군

용성 부대부인 염씨:덕완군(철종)

이씨:영평군

철종-철인장황후 김씨:원자(조기사망)

귀인 박씨:왕자(조기사망)

귀인 조씨:왕자(조기사망),왕자(조기사망)

숙의 방씨:옹주(조기사망),옹주(조기사망)

숙의 김씨:옹주(조기사망)

숙의 범씨:영혜옹주

궁인 이씨:왕자(조기사망),옹주(조기사망)

궁인 박씨:옹주(조기사망)

은신군-군부인 홍씨:(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5대순 이병원의 아들 남연군을 양자로 입적)

남연군-군부인 민씨: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대원군(흥선대원왕,고종의 부)

흥선대원왕-여흥 순목대원비 민씨:흥친왕,익성군(고종),여,여

계성월:완응군

고종태황제-명성태황후 민씨:원자(조기사망),공주(조기사망),순종,대군(조기사망),대군(조기사망)

귀비 엄씨:영친왕

귀인 이씨:완친왕,옹주(조기사망)

귀인 장씨:의친왕

귀인 양씨:덕혜옹주

귀인 정씨:우(남)(조기사망)

귀인 이씨:옹주(조기사망)

귀인 이씨:육(남)(조기사망)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

상궁 염씨:문용옹주

상궁 서씨

상궁 김씨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친왕비 김씨

영친왕-의민왕태자비 이씨

 

 

 

 

 

 

 

 

 

 

 

 

제9대 성종成宗 1457~1494(1469~1494 재위):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차남 

1. 휘: 이혈(李娎)

2. 별칭: 자산군(者山君) / 잘산군(乽山君) / 자을산군(者乙山君)→왕(王)

3. 시호: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4. 능호: 선릉(宣陵)

 

★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 청주 한씨

1. 이름: 한송이(韓松伊)

2. 가계

-부친: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 1415~1487)

-모친: 여흥 민씨(閔氏)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 민대생(閔大生 1372~1467)의 딸

-언니: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 = 예종 비

3. 별칭: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왕비(王妃)

4. 시호: 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5. 능호: 순릉(順陵)

 

★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 함안 윤씨

1. 가계

-부친: 함안부원군 윤기견(咸安府院君 尹起畎 ?~?)

-모친: 고령 신씨(申氏) 장흥부부인(長興府夫人 ?~1504) = 신평(申坪)의 딸 / 신숙주(申叔舟)의 사촌

2. 별칭: 숙의(淑儀)→왕비(王妃)→수빈(壽嬪)→왕비(王妃)→폐비(廢妃)

3. 시호: 효사제헌왕후(孝思齊獻王后)→추탈

4. 능호: 회릉(懷陵)→회묘(懷墓)

5. 자녀(3남)

*아들 대군 효신(大君 孝信 1475~1475)

*장남 연산군 융(燕山君 隆 1476~1506)

*아들 대군(大君 1477~1479)

 

★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1530): 파평 윤씨

1. 이름: 윤창년(尹昌年)

2. 가계

-부친: 영원부원군 평정공 윤호(鈴原府院君 平靖公 尹壕 1424~1496)

-모친: 담양 전씨(田氏) 연안부부인(延安府夫人) - 전좌명(田佐命)의 딸

4. 별칭: 숙의(淑儀)→왕비(王妃)→자순대비(慈順大妃) / 자순화혜대비(慈順和惠大妃)

5. 시호: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6. 능호: 선릉(宣陵)

7. 자녀(1남 4녀)

*장녀 순숙공주(順淑公主 1478~1488)

*차녀 신숙공주(愼淑公主 1481~1486)

*3녀 공주(公主 1485~?)

*차남 중종 역(中宗 懌 1488~1544)

*4녀 공주(公主 1485~?)

 

★ 명빈 김씨(明嬪 金氏 ?~?): 안동 김씨

1. 가계

-부친: 효소공 김작(孝昭公 金碏 1427~1488)

2. 별칭: 숙원(淑媛)→명빈(明嬪)

3. 자녀(3남 3녀)

*서차녀 휘숙옹주(徽淑翁主 ?~?)

*서5녀 경숙옹주(敬淑翁主 1483~?)

*서9녀 휘정옹주(徽靜翁主 ?~?)

*서11남 무산군 종(茂山君 悰 1490~1525)

*아들 왕자(王子) 2명

 

★ 귀인 정씨(貴人 鄭氏 ?~1504): 초계 정씨

1. 이름: 정금이(鄭金伊)

2. 가계

-부친: 정인석(鄭仁碩 ?~1504)

3. 별칭: 숙원(淑媛)→숙용(淑容)→소용(昭容)→숙의(淑儀)→소의(昭儀)→귀인(貴人)

4. 자녀(2남 2녀)

*서차남 안양군 항(安陽君 忄+行 14780~1504)

*서5남 봉안군 봉(鳳安君 忄+逢 1482~1505)

*딸 옹주(翁主 ?~?): 1483년 이전 출생, 요절한 듯

*서10녀 정혜옹주(靜惠翁主 1490~1507)

 

★ 귀인 엄씨(貴人 嚴氏 ?~1504): 영월 엄씨

1. 이름: 엄은소사(嚴銀召史)

2. 가계

-부친: 엄산수(嚴山壽 ?~1504)

-언니: 엄금소사(嚴金召史) = 종실 단계부정 인(丹溪副正 潾)의 부인

3. 별칭: 소용(昭容)→숙의(淑儀)→소의(昭儀)→귀인(貴人)

4. 자녀(1녀)

*서3녀 공신옹주(恭愼翁主 ?~?)

 

★ 귀인 남씨(貴人 南氏): 의령 남씨

1. 가계

-부친: 남흔(南忻)

2. 별칭: 숙의(淑儀)→귀인(貴人)

 

★ 소의 이씨(昭儀 李氏)

1. 별칭: 숙의(淑儀)→소의(昭儀)

 

★ 숙의 김씨(淑儀 金氏)

1. 자녀(1녀)

*딸 옹주(翁主 ?~?): 1483년 이전 출생, 요절한 듯

 

★ 숙의 하씨(淑儀 河氏)

1. 별칭: 숙원(淑媛)→숙의(淑儀)

2. 자녀(1남)

*서장남 계성군 순(桂城君 恂 1480~1504)

 

★ 숙의 홍씨(淑儀 洪氏 1457~1510): 남양 홍씨

1. 가계

-부친: 홍일동(洪逸童 ?~1464)

-모친: 남평 문씨(文氏) = 문유질(文由質)의 딸

2. 별칭: 상군(尙宮)→숙원(淑媛)→숙용(淑容)→소용(昭容)→숙의(淑儀)

3. 자녀(7남 3녀)

*서장녀 혜숙옹주(惠淑翁主 1478~?)

*서3남 완원군 수(完原君 忄+遂 1480~1509)

*서4남 회산군 염(檜山君 恬 1481~1512)

*서6남 견성군 돈(甄城君 惇 1482~1507)

*서6녀 정순옹주(靜順翁主 1486~1506)

*서7남 익양군 회(益陽君 懷 1488~1552)

*서9남 경명군 침(景明君 忱 1489~1552)

*서13남 운천군 인(雲川君 忄+寅 1490~1524)

*서14남 양원군 희(楊原君 憘 1491~1551)

*서11녀 정숙옹주(靜淑翁主 1493~1573)

 

★ 숙의 권씨(淑儀 權氏)

1. 자녀(1남)

*아들 왕자(王子)

 

★ 숙용 심씨(淑容 沈氏 1465~1515): 청송 심씨

1. 가계

-부친: 심말동(沈末同)

2. 별칭: 숙원(淑媛)→숙용(淑容)

3. 자녀(2남 2녀)

*서4녀 경순옹주(慶順翁主 1482~?)

*서7녀 숙혜옹주(淑惠翁主 1486~1525)

*서8남 이성군 관(利城君 慣 1489~1552)

*서12남 영산군 전(靈山郡 恮 1490~1538)

 

★ 숙원 권씨(淑媛 權氏 1471~1500): 안동 권씨

1. 가계

-부친: 권수(權壽)

2. 자녀(1남 1녀)

*서8녀 경휘옹주(慶徽翁主 ?~?)

*서10남 전성군 변(全城君 忭 1490~1505)

 

★ 숙원 윤씨(淑媛 尹氏 ?~1533)

 

☆ 아들 대군 효신(大君 孝信 1475~1475): 폐비 윤씨 生, 다섯달 만에 요절

 

☆ 장남 연산군 융(燕山君 隆 1476~1506): 폐비 윤씨 生

 

☆ 아들 대군(大君 1477~1479): 폐비 윤씨 生, 요절

 

☆ 장녀 순숙공주(順淑公主 1478~1488): 정현왕후 윤씨 生, 요절

1. 별칭: 옹주(翁主)→공주(公主)

 

☆ 서장녀 혜숙옹주(惠淑翁主 1478~?): 숙의 홍씨 生

1. 이름: 이수란(李秀蘭/李壽蘭)

2. 부마: 고령 신씨 고원위 문효공 항(高原尉 文孝公 申沆 1477~1507)

-고령부원군 신숙주(高靈府院君 申叔舟 1417~1475)의 증손

3. 자녀(없음) + 1남

*양자 신수경(申秀涇 1501~?): 신함(申涵)의 아들

 

☆ 딸 숙신옹주(淑愼翁主 1478?~1487/1487~1489): 생모 미상, 요절

1. 조선왕조 실록에선 숙신옹주가 요절한 시기의 기록이 1487년과 1489년으로 서로 엇갈린다. 1487년 기록엔 그저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고 되어 있으며 1489년 기록엔 1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되어있다. 이는 단순한 착오인지, 아니면 봉호가 같은 옹주가 두 명 있었는지 알 수 없다.

2. 1483년 정희왕후 애책문에 숙의 김씨 소생의 1녀와 귀인 정씨의 1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녀들 중 한 명의 소생이 아닐까 추정된다.

 

☆ 차녀 신숙공주(愼淑公主 1479~1486): 정현왕후 윤씨 生, 요절

 

☆ 서장남 계성군 순(桂城君 恂 1480~1504): 숙의 하씨 生

1. 시호: 희정(僖靖)

2. 정부인 원주 원씨(元氏) 안성군부인(安城郡夫人): 원치(元菑)의 딸

3. 자녀(1남) + 1남

*서장남 운성군 수철(雲城君 壽鐵)

*양자 계림군 유(桂林君 瑠 ?~?): 덕풍군 이(德豊君 恞)의 아들 / 을사사화 때 역모로 몰려 처형됨

 

☆ 서차남 안양군 항(安陽君 忄+行 1480~1504): 귀인 정씨 生

1. 아명: 수담(壽耼)

2. 시호: 공회(恭懷)

3. 정부인 능성 구씨(具氏)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능천군 구수영(具壽永)의 딸

4. 비첩 주이(朱伊)

5. 자녀(1남 3녀)

*장녀 이씨(李氏): 면천군부인 구씨 生, 덕수 이씨 사제(李思齊)에게 출가

*서장남 종남도정 억수(從南都正 億壽 ?~1543): 비첩 주이 生

*서장녀 이예일(李禮一): 첩 生, 경주 이씨 윤영(李允榮)에게 출가

*서차녀 이씨(李氏): 첩 生, 원주 원씨 팽로(元彭老)에게 출가

 

☆ 서3남 완원군 수(完原君 忄+遂 1480~1509): 숙의 홍씨 生

1. 아명: 수석(壽石)

2. 시호: 소도(昭悼)

3. 부인

-정부인 전주 최씨(崔氏)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1480~1500): 최하림(崔河臨 1455~1486)의 딸

-계부인 양천 허씨(許氏)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 1489~1521): 허적(許磧)의 딸

4. 자녀(2남 2녀)

*장남 이성군 수강(伊城君 壽剛 1502~?): 정선군부인 허씨 生

*차남 이천군 수례(伊川君 壽禮 1508~?): 정선군부인 허씨 生, 운천군에게 출계

*장녀 이씨(李氏): 정선군부인 허씨 生, 하양 허씨 귀(許龜)에게 출가

*차녀 이수진(李守眞): 정선군부인 허씨 生, 덕수 이씨 원겸(李元謙)에게 출가

 

☆ 서4남 회산군 염(檜山君 恬 1481~1512): 숙의 홍씨 生

1. 시호: 정간(貞簡)

2. 정부인 죽산 안씨(安氏)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 안방언(安邦彦)의 딸

-세종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부마 안맹담(安孟聃)의 증손녀

3. 자녀(1녀) + 1남

*장녀 이씨(李氏): 영원군부인 안씨 生, 동래 정씨 수후(鄭守厚)에게 출가

*양자 계산군 수계(桂山君 壽誡 1501~?): 성종의 서6남 견성군(甄城君)의 차남

 

☆ 서차녀 휘숙옹주(徽淑翁主 ?~?): 명빈 김씨 生

1. 부마: 풍천 임씨 풍원위 숭재(豊原尉 任崇載 ?~1505)

-임사홍(任士洪)의 아들

2. 자녀(3녀)

*장녀 임씨(任氏): 전주 최씨 국광(崔國光)에게 출가

*차녀 임씨(任氏): 연안 이씨 인수(李麟壽)에게 출가

*3녀 임씨(任氏): 순창 조씨 노성(趙老成)에게 출가

 

☆ 서3녀 공신옹주(恭愼翁主 ?~?): 귀인 엄씨 生

1. 부마: 청주 한씨 청녕위 경침(淸寧尉 韓景琛 1482~?)

2. 자녀(없음)

 

☆ 서5남 봉안군 봉(鳳安君 忄+逢 1482~1505): 귀인 정씨 生

1. 아명: 수장(壽長)

2. 시호: 정민(貞愍)

3. 정부인 평양 조씨(趙氏) 의춘군부인(宜春郡夫人): 조기(趙紀)의 딸

4. 첩1명

5. 자녀(1남 1녀)

*장남 흥원군 경(興原君 瓊): 의춘군부인 조씨 生

*서녀 이씨(李氏): 첩 生, 밀양 당씨 윤온(唐允溫)에게 출가

 

☆ 서6남 견성군 돈(甄城君 惇 1482~1507): 숙의 홍씨 生

1. 아명: 수정(壽禎)

2. 시호: 경민(景愍)

3. 정부인 평산 신씨(申氏)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 신우호(申友灝)의 딸 / 명빈 김씨의 질녀

4. 자녀(2남 1녀)

*장남 완산군 수함(完山君 壽諴 1500~?): 영양군부인 신씨 生

*차남 계산군 수계(桂山君 壽誡 1501~?): 영양군부인 신씨 生, 회산군에게 출계

*장녀 이씨(李氏 1507~?): 영양군부인 신씨 生, 동래 정씨 수후(鄭守厚)에게 출가

 

☆ 서4녀 경순옹주(慶順翁主 1482~?): 숙용 심씨 生

1. 이름: 이옥환(李玉環)

2. 부마: 의령 남씨 의성위 치원(宜城尉 南致元)

3. 자녀(1남 1녀)

*장남 남기(南沂)

*장녀 남씨(南氏): 덕평군 항(德平君 沆)에게 출가

 

☆ 서5녀 경숙옹주(敬淑翁主 1483~?): 명빈 김씨 生

1. 이름: 이합환(李合歡)

2. 부마: 여흥 민씨 여천위 자방(驪川尉 閔子芳)

3. 자녀(1남)

*장남 민희열(閔希說)

 

☆ 아들 왕자 수견(王子 壽堅 ?~?): 생모 미상

1. 최소 1483년 이전 生

 

☆ 서6녀 정순옹주(靜順翁主 1486~1506): 숙의 홍씨 生

1. 이름: 이복란(李福蘭)

2. 부마: 봉화 정씨 봉성위 원준(奉城尉 鄭元俊 ?~?)

3. 자녀(1남)

*장남 정응(鄭譍 1504~?)

 

☆ 서7녀 숙혜옹주(淑惠翁主 1486~1525): 숙용 심씨 生

1. 이름: 이벽환(李碧環)

2. 부마: 양주 조씨 한천위 무강(漢川尉 趙無彊 1488~1541)

3. 자녀(1남)

*장남 조연손(趙連孫)

 

☆ 아들 왕자 견석(王子 堅石 1486~?): 생모 미상

 

☆ 차남 중종 역(中宗 懌 1488~1544): 정현왕후 윤씨 生

 

☆ 서7남 익양군 회(益陽君 懷 1488~1552): 숙의 홍씨 生

1. 아명: 석수(石壽)

2. 시호: 순평(順平)

3. 정부인 영일 정씨(鄭氏) 순천군부인(順川郡夫人 1489~1550): 정문창(鄭文昌 1435~?)의 딸

4. 자녀(6남 3녀)

*장남 용천군 수한(龍川君 壽鷴 1505~?): 순천군부인 정씨 生

*차남 광천군 수기(廣川君 壽麒): 순천군부인 정씨 生, 성종의 서10남 전성군(全城君)에게 출계

*3남 황양군 수린(荒壤君 壽麟 1512~?): 순천군부인 정씨 生

*4남 장천군 수효(長川君 壽鹿+孝 1519~?): 순천군부인 정씨 生

*장녀 이의환(李義環): 순천군부인 정씨 生, 정지하(鄭之河)에게 출가

*차녀 이계환(李桂環 1513~?): 순천군부인 정씨 生, 연안 이씨 정수(李廷秀)에게 출가

*3녀 이필환(李畢環 1515~?): 순천군부인 정씨 生, 풍천 임씨 보신(任輔臣)에게 출가

*서장남 단천부정 수곤(丹川副正 壽鵾 1520~?)

*서차남 화천부정 수붕(花川副正 壽鵬 1550~?)

 

☆ 서8녀 경휘옹주(慶徽翁主 ?~?): 숙원 권씨 生

1. 이름: 이정복(李貞福)

2. 부마: 파평 윤씨 영원위 내(鈴原尉 尹鼐 ?~1552)

3. 자녀(1남)

*장남 윤희로(尹希老)

 

☆ 서9녀 휘정옹주(徽靜翁主 ?~?): 명빈 김씨 生

1. 이름: 이복□(李福□)

2. 부마: 의령 남씨 의천위 섭원(宜川尉 南燮元)

3. 자녀(1녀)

*장녀 남난향(南蘭香): 순흥 안씨 한(安馠)에게 출가

 

☆ 서8남 이성군 관(利城君 慣 1489~1552): 숙용 심씨 生

1. 시호: 장평(章平)

2. 부인

-정부인 남평 문씨(文氏) 곤산군부인(昆山郡夫人): 문간(文簡)의 딸

-계부인 안동 권씨(權氏) 풍산군부인(豊山郡夫人): 권수중(權守中)의 딸

3. 비첩: 금이(琴伊), 맹비(孟非)

4. 자녀(5남)

*장남 경양군 수환(景陽君 壽環): 곤산군부인 문씨 生

*차남 금귀정 수붕(金龜正 壽朋): 곤산군부인 문씨 生

*3남 운성군 수철(雲城君 壽鐵): 곤산군부인 문씨 生

*서장남 한원수 인수(漢原守 麟壽): 비첩 금이 生

*서차남 화산군 수경(花山君 壽卿): 비첩 맹비 生

*서장녀 이씨(李氏): 비첩 맹비 生, 경주 이씨 낙(李洛)에게 출가

 

☆ 서9남 경명군 침(景明君 忱 1489~1552): 숙의 홍씨 生

1. 아명: 충복(忠福)

2. 시호: 정민(貞敏)

3. 정부인 파평 윤씨(尹氏)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윤첩(尹堞)의 딸

4. 자녀(2남 2녀)

*장녀 이연환(李連環 1510~?): 강양군부인 윤씨 生, 안동 김씨 생해(金生海)에게 출가 / 김상헌(金尙憲)의 할머니

*장남 안성군 수령(安城君 壽齡 1516~?): 강양군부인 윤씨 生

*차녀 이옥녀(李玉女 1518~?): 강양군부인 윤씨 生, 전주 최씨 충수(崔忠秀)에게 출가

*차남 안남군 수련(安南君 壽鍊 1520~?): 강양군부인 윤씨 生

 

☆ 서10녀 정혜옹주(靜惠翁主 1490~1507): 귀인 정씨 生

1. 이름: 이승복(李承福)

2. 부마: 청주 한씨 청평위 기(淸平尉 韓紀 1490~1558)

3. 자녀(없음)

 

☆ 서10남 전성군 변(全城君 忭 1490~1505): 숙원 권씨 生

1. 시호: 숙민(肅愍)

2. 정부인 안동 권씨(權氏) 단양군부인(丹陽郡夫人): 권건(權健)의 딸

3. 자녀(없음) + 1남

*양자 광천군 수기(廣川君 壽麒): 성종의 서7남 익양군(益陽君)의 차남

 

☆ 서11남 무산군 종(茂山君 悰 1490~1525): 명빈 김씨 生

1. 아명: 복숭(福崇)

2. 시호: 효정(孝貞)

3. 정부인 평산 신씨(申氏)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 신수(申銖)의 딸

4. 비첩: 무명(無名), 존자(存者)

5. 자녀(8남 4녀)

*장남 영선군 구수(永善君 龜壽 1509~?): 영양군부인 신씨 生

*차남 영천군 미수(永川君 眉壽 1511~?): 영양군부인 신씨 生

*3남 영안정 학수(永安正 鶴壽 1512~1536): 영양군부인 신씨 生

*4남 영풍정 기수(永豊正 期壽): 영양군부인 신씨 生

*5남 태안군 팽수(泰安君 彭壽 1520~1592): 영양군부인 신씨 生

*6남 부안군 석수(扶安君 碩壽 1524~1598): 영양군부인 신씨 生

*장녀 이씨(李氏):영양군부인 신씨 生, 고령 신씨 대충(申大沖)에게 출가

*차녀 이씨(李氏): 영양군부인 신씨 生, 이언상(李彦祥)에게 출가

*사장남 중모수 담수(中牟守 聃壽): 비첩 무명 生

*서차남 영원군 덕수(永原君 德壽 1514~?): 비첩 존자 生

*서장녀 이인수(李仁壽): 첩 生, 황몽정(黃夢禎)에게 출가

*서차녀 이견수(李堅壽): 첩 生, 함양 박씨 주(朴舟)에게 출가

 

☆ 서12남 영산군 전(寧山郡 恮 1490~1538): 숙용 심씨 生

1. 시호: 충희(忠僖)

2. 부인

-정부인 청송 심씨(沈氏)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심순로(沈順路)의 딸

-계부인 경주 정씨(鄭氏) 교성군부인(交城郡夫人): 정홍선(鄭弘先)의 딸

-계부인 황씨(黃氏): 황징의 딸

3. 첩

-양첩 1명

-비첩: 향이(香伊), 어여분(於汝分)

4. 자녀(4남 5녀)

*장녀 이의정(李懿貞): 금릉군부인 심씨 生, 광주 김씨 종(金綜)에게 출가

*차녀 이경정(李敬貞): 금릉군부인 심씨 生, 경주 정씨 충인(鄭忠仁)에게 출가

*서장남 장흥군 상(長興君 祥): 양첩 生

*서차남 은천도정 정(銀川都正 禎): 비첩 生

*서3남 음성도정 유(陰城都正 裕): 비첩 향이 生

*서4남 양산군 녹(梁山君 祿): 비첩 어여분 生

*서장녀 이씨(李氏): 양첩 生, 유현조(柳顯祖)에게 출가

*서차녀 이종개(李終介): 비첩 어여분 生, 최진양(崔震陽)에게 출가

*서3녀 이막지(李莫只): 첩 生, 허광우(許光祐)에게 출가

 

☆ 서13남 운천군 인(雲川君 忄+寅 1490~1524): 숙의 홍씨 生

1. 아명: 철수(鐵壽)

2. 시호: 소회(昭懷)

3. 정부인 안동 권씨(權氏) 학성군부인(鶴城郡夫人): 권인손(權仁孫)의 딸

4. 자녀(4녀) + 1남

*장녀 이계영(李桂英 1505~?): 학성군부인 권씨 生, 고성 이씨 구(李嶇)에게 출가

*차녀 이씨(李氏 1509~?): 학성군부인 권씨 生, 전의 이씨 종효(李宗孝)에게 출가

*3녀 이주영(李珠英 1511~?): 학성군부인 권씨 生, 밀양 박씨 순년(朴舜年)에게 출가

*4녀 이씨(李氏 1515~?): 학성군부인 권씨 生, 연안 이씨 경종(李慶宗)에게 출가

*양자 이천군 수례(伊川君 壽禮 1508~?): 성종의 서3남 완원군의 아들

 

☆ 서14남 양원군 희(楊原君 憘 1491~1551): 숙의 홍씨 生

1. 아명: 무수(舞壽)

2. 시호: 정혜(貞惠)

3. 부인

-정부인 풍양 조씨(趙氏) 무천군부인(文川郡夫人): 조경(趙經 1458~1529)의 딸

-계부인 문화 유씨(柳氏) 양근군부인(楊根郡夫人): 유종손(柳終孫)의 딸

4. 첩

-양첩 학정(鶴貞)

-비첩 1명

5. 자녀(4남 8녀)

*장남 함녕군 수선(咸寧君 壽璿 1524~?): 양근군부인 유씨 生

*서장남 연성부정 옥정(蓮城副正 玉精): 양첩 生

*서차남 화녕군 옥명(花寧君 玉命 1538~?): 양첩 학정 生

*서자 강양수 옥호(江陽守 玉糊 1520~?): 비첩 生

*서장녀 이씨(李氏): 양첩 生, 성주 이씨 완(李完)에게 출가

*서차녀 이명복(李命福): 양첩 生, 광주 김씨 복휘(金復輝)에게 출가

*서3녀 이말종(李唜終): 양첩 生, 파평 윤씨 황(尹滉)에게 출가

*서4녀 이씨(李氏): 비첩 生, 단양 우씨 승경(禹承慶)에게 출가

*서5녀 이씨(李氏): 첩 生, 창원 황씨 수천(黃壽千)에게 출가

*서6녀 이씨(李氏): 비첩 生, 전의 이씨 대윤(李大胤)에게 출가

*서7녀 이씨(李氏): 비첩 生, 영산 신씨 경(辛鏡)에게 출가

*서8녀 이춘종(李春從 1540~?): 비첩 生, 남원 양씨 훈(梁訓)에게 출가

 

☆ 서11녀 정숙옹주(靜淑翁主 1493~1573): 숙의 홍씨 生

1. 이름: 이여란(李如蘭)

2. 부마: 파평 윤씨 영평위 섭(鈴平尉 尹燮 1492~1516)

3. 자녀(없음) + 1남

*양자 윤지함(尹之諴 1518~1547): 윤엽(尹燁)의 아들

 

☆ 아들 왕자 금수(王子 金壽 ?~?); 생모 미상

1. 최소 1493년 이전 출생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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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성종 대왕 행장(行狀)

그 예부(禮部)에 보낸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성(姓) 모(某) 휘(諱) 모(某)는 회간왕(懷簡王)의 제 2자(第二子)인데, 모비(母妃)는 한씨(韓氏)로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확(韓確)의 딸이었습니다. 천순(天順) 정축년 7월 30일[辛卯]에 왕이 탄생하였는데, 회간왕이 세자가 되어 일찍 훙(薨)하자, 왕의 조부(祖父)인 혜장왕(惠莊王)께서 왕을 궁중에 기르셨습니다. 왕은 천자(天資)가 영이(穎異)하고 기도(器度)가 웅위(雄偉)하므로, 혜장왕께서 기특히 여겨 사랑하셨으며,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셨습니다. 왕이 일찍이 동모형(同母兄)인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과 함께 왕궁(王宮)에 있었는데, 마침 천둥과 비가 갑자기 몰아쳐 시인(寺人)이 곁에 있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좌우에서 모두 놀라 넘어지면서 넋을 잃었으나 왕은 조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하니, 혜장왕께서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성화(成化) 5년 11월에 왕의 숙부(叔父)인 양도왕(襄悼王)이 병(病)으로 위독하였는데, 아들은 나이가 어리고 또 병이 있었으므로 후계자를 고르는데 왕이 덕기(德器)가 숙성(夙成)하여, 효제(孝悌)하고 학문을 좋아함으로써 국무(國務)를 권서(權署)하게 하였습니다. 양도왕이 승하하자, 왕이 배신(陪臣) 송문림(宋文琳)을 보내어 부음(訃音)을 고하고, 권감(權瑊)이 승습(承襲)을 청하니, 성화 6년 5월에 선황제(先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짐(朕)이 비도(丕圖)를 이어 지키고 환우(寰宇)를 무어(撫御)하여, 먼 지방과 외딴 지역까지도 모두 군장(君長)을 세워서 그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고, 대[世]가 바뀌면 봉작(封爵)을 내려 주는 것에 그 떳떳한 법이 있었다. 고(故) 조선 국왕 이(李) 휘(諱)는 선왕(先王)을 이어 받들고 사대(事大)하여서 충효(忠孝)로 알려짐이 있었는데, 봉작을 받은 지 한 해를 지나지 못하여 부(訃)를 고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돌아보건대 이 서업(緖業)은 마땅히 친족의 어진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므로, 이제 태감(太監) 김흥(金興)을 특별히 보내어 칙서(勅書)를 받들고 가서 왕의 조카 휘(諱)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국정(國政)을 이어서 다스리게 한다. 생각하건대 휘는 실로 혜장왕(惠莊王)의 손자이니, 본국의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한 마음으로 받들어 순종하여, 동토(東土)를 화합하게 하고 중조(中朝)의 번병(藩屛)이 되어 그대의 선왕(先王)의 업(業)을 떨어뜨림이 없게 하라. 이는 짐이 그대 나라를 권애(眷愛)하는 뜻이다.’ 하였고, 또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짐(朕)이 홍도(鴻圖)를 공경히 이어서 병한(屛翰)을 존중하는 데 힘썼다. 이에 먼 지방을 회유(懷柔)하여 가까이 하고, 한결같이 사랑하여 차별이 없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동번(東藩)은 세상에서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일컬으니, 진실로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 어진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조선 국왕의 조카 휘(諱)는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학문이 숙성(夙成)하여 국론(國論)이 돌아가는 바이므로 종조(宗祧)를 이음이 마땅하다. 이제 특별히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국사(國事)를 총통(總統)하게 한다. 아아! 오직 정성과 공경만이 몸을 닦을 수 있고 오직 예의(禮義)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오직 충성만이 사대(事大)를 할 수 있고, 오직 효도만이 종족을 보호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서 훈칙(訓飭)을 잊지 말지어다.’ 하였으며, 또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주달(奏達)한 것을 보건대 그대의 숙부(叔父) 왕(王) 휘(諱)가 성화(成化) 5년 11월 28일에 훙서(薨逝) 하였다고 하므로, 이에 특별히 태감(太監) 김흥(金興)과 행인(行人) 강호(姜浩)를 보내어, 제문(祭文)을 가지고 가서 유제(諭祭)하게 하고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지고 그대의 국인(國人)에게 보이며, 그대 휘(諱)를 봉(封)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서 나라 일을 이어 맡게 한다. 아울러 그대의 처(妻) 한씨(韓氏)를 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선업(先業)을 공경히 지켜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히 할 것이며, 충성을 돈독히 하여 조정을 섬기고 신의(信義)를 두터이 하여 인국을 화목하게 하며 절검(節儉)을 몸소 행하여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여, 동토(東土)로 하여금 백성이 편하고 물건이 풍족하게 하며 영구히 중국의 번보(藩輔)의 중함이 되게 하라. 짐(朕)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그대와 비(妃)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채폐(綵幣) 등의 물건을 내려 주니, 영수할 것이다.’ 하였는데, 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어 올려 사례하였습니다.
왕이 대소 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각각 시의(時宜)를 진술하게 하고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 6품 이상이 각각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습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효자(孝子)·절부(節婦)와 그 행실이 특이한 자에게 정문 복호(旌門復戶)하게 하여 이를 장려하고 홍문관(弘文館)을 대전(大殿) 곁에 설치하여 문학과 재행(才行)이 있는 선비 17원(員)을 골라 뽑아서 날을 바꾸어 직숙(直宿)하게 하여,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를 바르게 간하거나 풍자하여 간하게 하였습니다.
성화(成化) 7년 3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대뢰(大牢)로 제사를 지내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문사(文士)로 하여금 경의(經義)를 문난(問難)하게 하였습니다. 11월에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유충(幼沖)하여 선업(先業)을 이어받았는데, 무릇 조정(朝政)의 득실(得失)과 민생(民生)의 이해(利害)를 마음을 다해 다스리고 정돈하였으나, 사기(事機)가 지극히 번거로와서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제 날씨가 춥고 음(陰)이 폐색(閉塞)하는 때를 당하여 건양(愆陽)이 재앙을 이루니, 하늘의 뜻이 어찌 있는 바가 없겠는가?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매 진실로 과매(寡昧)함에 말미암았다. 여러 번 바른 말을 구하였으나 말을 다해 극진히 간하는 자가 없고 여러 번 어질고 준수(俊秀)한 이를 구하였으나 미천한 사람을 추천해 드날리게 한 자가 없었다. 백사(百司)를 독려해 다스려도 오히려 해이함이 있고 옥언(獄讞)을 심리(審理)하여도 오히려 억울함과 유체(留滯)됨이 있으며, 백성의 폐단을 부지런히 근심하였으나 억울함이 아직 많고 공역(功役)을 줄이기를 힘썼으나 공역을 일으킴이 그치지 아니하니, 이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널리 효유(曉諭)하여 자세히 연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8년에 황태자(皇太子)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예관(禮官)이 다음날 거애(擧哀)하기를 청하니, 말하기를, ‘슬픔이 마음속에 간절한데 어찌 내일을 기다리겠는가?’고 하면서, 곧 백관(百官)을 거느리고는 거애하고 표(表)를 받들어 올려서 진위(陳慰)하였습니다. 5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생재(生財)는 근본(根本)에 힘쓰는 데 있고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쓰기를 절약하는 데 있으니, 쓰기를 절약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검약(儉約)해야 할 것이다. 대저 사치하면 쓰임이 반드시 많을 것이고 쓰임이 많으면 재물이 반드시 고갈될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지력(地力)이 소박(疎薄)하므로 근검 절용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재용(財用)의 부족함을 근심할 것인데, 하물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末端)에 따르며 생산하는 자가 이미 적은데도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쓰는 것을 절제 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이를 염려하여 말리(末利)에 따르는 것을 엄하게 금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는 법을 정하며, 급하지 아니한 일은 파하고 무익한 비용을 없애어 그대 인민(人民)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려고 하니, 그대 인민은 농상(農桑)에 힘을 다하고 태만하지 말며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사치하지 말며, 재물을 헤아려 절약하여 쓸 것이며, 함부로 허비하지 말 것이다. 집과 나라는 크고 작음은 비록 다르더라도 그 대체는 한 가지이니, 진실로 능히 줄이고 절약하는 데 마음을 두면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대 인민은 각각 내 뜻을 체득하여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라.’ 하였습니다. 왕이 일찍이 《상서(尙書)》를 보다가, ‘나무는 먹줄을 따라 깎으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諫)하는 말에 따르면 성(聖)해진다.’는 데에 이르자, 말하기를, ‘임금이 되는 도리(道里)가 무엇이 이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임금뿐만 아니라 신하가 된 자도 능히 극진한 말을 받아들인 뒤에야 능히 그 임금을 간할 수 있으니, 그대들도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사서(史書)를 읽다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도둑이 나타난 것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쫓아가 잡게 하였다. 그런데 아홉 사람 중에서 네 사람은 도둑이 아닌데도 유사(有司)가 황제가 이미 참(斬)하기를 결정하였다고 하여 드디어 아뢰지 아니하고서 모두 죽였다.’는 데에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양제(煬帝)는 진실로 무도(無道)하다. 그러나 당시의 신하가 알면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양제로써 경계를 삼을 것이며 그대들은 또한 아뢰지 아니한 자로써 경계를 삼아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몸을 닦으면 또한 옳지 아니하겠는가?’ 하고, 또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이르기를, ‘정관(貞觀) 초년에는 폐하께서 절검(節儉)하고 간(諫)함을 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셨는데 근래에는 영선(營繕)이 조금씩 많아지고 간하는 것에 자못 뜻을 거스림이 있습니다.’고 한 데에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능히 끝까지 잘하는 자가 드물다.」고 하였는데, 태종의 초년에는 성대(盛大)하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였다. 태종의 어짊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태종에게 미치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근래에 자못 영조(營造)를 일으켰는데, 비록 모두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외(中外)에서 어떻다고 하겠는가? 내가 즉위[卽政]한 이래로 일찍이 일을 말한 한 사람의 신하도 죄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대들은 뜻을 거스리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일이 적당하지 못함이 있거든 마땅히 극진히 말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한 마리를 길렀는데 시신(侍臣)이 이를 말하자, 왕이 곧 놓아 보내라 명하고 끝내 다시 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성화 10년 9월에 왕이 배신(陪臣) 김질(金礩)을 보내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고 용렬한데도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어 선업(先業)을 얻어 지킨 지 몇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소생부(所生父)신(臣) 휘(諱)는 선조(先祖) 혜장왕(惠莊王) 신(臣) 휘(諱)의 적자(嫡子)로서 명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조서(早逝)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이미 왕의 작위를 받았고 처도 비(妃)가 되었는데, 소생부는 세자라고 일컫고 소생모는 명호(名號)가 없으니, 일국의 신민(臣民)의 일컫는 말이 순조롭지 못하여 인자(人子)의 마음에 진실로 미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미 선신(先臣) 양도왕(襄悼王) 휘(諱)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의(義)로 보아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고, 또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성(天性)의 친(親)은 은의(恩義)가 또한 중하니, 현양(顯揚)하는 회포를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작(爵)을 내리고 시호[諡]를 내려서 작은 정성을 펴게 하여 효(孝)로 다스림을 넓히소서. 지극한 소원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선황제(先皇帝)가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주본(奏本)을 보건대 왕의 소생부(所生父) 휘(諱)는 먼저 세자에 책봉(冊封)되었다가 일찍 서거(逝去)하고, 소생모 한씨(韓氏)는 현재 있으나 모두 명호(名號)가 없어, 비록 남의 후계자가 되어 의(義)가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양(顯揚)하려는 마음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다는 등의 말을 인하여 왕의 효성을 갖추어 알겠다. 이에 특별히 고(故) 세자(世子) 휘(諱)를 조선 국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회간(懷簡)으로 하며 한씨(韓氏)를 봉(封)하여 회간 왕비(懷簡王妃)로 삼아서 왕의 어버이를 나타내려는 뜻을 이루게 하고 또 고명(誥命)과 아울러 비(妃)의 관복(冠服)을 내려 주니, 영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왕이 은혜를 입자 감격하여 경내(境內)에 사유(赦宥)를 내리고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級)을 내려 주었으며, 표(表)를 올려서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성화 11년 정월에 왕이 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하고,드디어 적전(籍田)을 몸소 갈았습니다. 또 왕비로 하여금 친잠(親蠶)하게 하였는데 모두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습니다. 8월에 하교하기를, ‘옥(獄)을 맡은 관리가 잘못하는 바가 하나만이 아니다. 포학[苛暴]하고 심각(深刻)한 자는 항상 얽어 짜는 데 빠지고, 혼미(昏迷)하고 용나(庸懶)한 자는 항상 엄체(淹滯)함에 빠지니, 얽어 짜기를 좋아하면 율문(律文)을 심각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하며 고신(栲訊)을 엄하게 하여 끌어다 붙여서 일체 보태고 꾸미니 허물없는 사람이 형벌에 잘못 걸리며, 엄체하기를 좋아하면 머뭇거리고 결단하지 못하여 문득 세월이 흘러 질곡(侄梏)을 몸에 가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여 슬프게 부르짖다가 병이 들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한 사람이 상대하는 사람 없이 구석을 향하여 슬퍼하면 당(堂)에 가득한 사람이 즐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필부필부가 그 허물이 아닌 데에 죽으면 허물이 장차 누구에게 있겠는가? 대저 옥사(獄辭)는 처음에는 복잡한 것 같으나 정(情)을 인연하여 추구(推究)하면 칼로 벤 듯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다만 법을 맡은 자가 뜻을 더하지 아니한 것뿐이다. 그대는 혹 나직(羅織)하지 말고 그대는 혹 엄체(淹滯)하지 말 것이다. 어짊과 용서함으로써 근본을 삼고, 밝고 진실함으로써 이를 행하여, 죽는 자로 하여금 허물에 승복하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성화 12년 봄에 선황제(先皇帝)가 황상(皇上)을 책봉하여 황태자로 삼고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왕은 본래 예의(禮義)를 가지고 조정을 충성으로 공경하였다. 이에 짐(朕)이 황저(皇儲)를 세우고 여러 방면에 은혜를 베푸는데, 하물며 왕의 나라는 더욱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과 부사(副使) 행 인사 좌사부(行人司左司副) 장근(張瑾)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유시(諭示)하게 하고, 아울러 왕과 비(妃)에게 채폐(綵幣)와 문금(紋錦)을 내려 주게 하니, 수령(收領)하여 짐의 권대(眷待)하는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두 사신(使臣)이 왕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참으로 어진 임금이다.’고 하였으며, 작별할 때에 임하여 정사(正使)가 시(詩)를 지어 왕에게 주었는데, 그 서(序)에 이르기를, ‘기순(祈順)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 번 왕과 더불어 서로 접견하고 마음으로 심히 아름답게 여겼다. 대저 그 어린 나이에 준수 영오(俊秀穎悟)하여 유(儒)를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위덕(威德)이 널리 펴지어서 일국이 화목하니, 진실로 다른 나라에 짝이 드문 바이다.’ 하였습니다. 왕의 전세(前世)의 명군(明君)과 암주(暗主)가 행한 선악(善惡)의 사적(事跡)을 모아서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려 병풍을 만들게 하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시(詩)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여 앉으나 누우나 보고 살피면서 권계(勸戒)로 삼았습니다.
성화 13년 8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서 선성(先聖)에게 술잔을 올리고 사례(射禮)를 행하였습니다. 인하여 제도 관찰사(諸道觀察使)에게 하교(下敎)하여 소재지(所在地)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음사례(飮射禮)를 행하게 하고 해마다 상례(常禮)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국왕의 생일에 훈구(勳舊)의 신하가 승사(僧寺)에 나아가서 축리(祝釐)하자, 왕이 말하기를, ‘《시경》에 「복을 구함이 간사하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파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14년 4월에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서 친히 선성(先聖)에게 제사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노인들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왕이 여러 노인에게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안으로 색황(色荒)을 하고 밖으로 금황(禽荒)을 하며, 술마시기를 좋아하거나 집을 높이 짓고 담장을 치장하는 것들 중 하나라도 이런 것이 있으면 망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임금의 약석(藥石)이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써서 좌우(座右)에 붙여 두고 항상 보고 살폈는데, 이제 또 여러 노인들의 진술한 바를 들으니 모두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절요(切要)한 말이므로, 내가 마땅히 마음속에 두고 잊지 아니하겠다.’ 하였습니다.
성화 15년 겨울에 선황제가 사신을 보내 칙서를 내리기를, ‘건주(建州)의 여진(女眞)이 천명(天命)을 거역하고 은혜를 저버려서 여러 번 변경을 침략하기에 이미 감독(監督)·총병(總兵)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정병(精兵)을 뽑아 거느리고 기한을 정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그대 국왕은 계속해서 동번(東藩)이 되어 우리 국가에 충성을 바침이 더함이 있고 쇠함이 없으니, 짐이 심히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우리 군사가 적(賊)의 경내를 덮어, 적이 국경으로 달아나 숨는다면, 반드시 사로잡아 포로를 바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왕이 만일 편사(偏師)를 보내어 멀리서 응원하여 용맹한 군사의 위엄을 크게 떨쳐견양(犬羊)의 무리를 같이 섬멸하여서 역로(逆虜)가 이미 제거된다면, 왕의 적개(敵愾)의 공(功)이 더욱 성할 터인데, 명성이 어찌 무궁토록 누리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는데, 왕이 곧 배신(陪臣)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치게 하였습니다. 어유소가 강물이 얼었다가 곧 녹자 군사가 건너기 어렵다고 하여 군사를 파하고 돌아오자, 왕이 어유소가 군기(軍期)에 미치지 못한 죄를 다스리고, 다시 배신(陪臣) 윤필상(尹弼商)·김교(金嶠)를 보내어 군사 4천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굴로 쳐들어가서 적의 무리를 사로잡고 참(斬)하며, 둔락(屯落)을 분탕(焚蕩)하고 아울러 사로잡힌 요동(遼東)의 인구를 찾아서 돌아왔습니다. 왕이 배신 어세겸(魚世謙)을 보내어 포로를 바치게 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건주(建州)의 도적이 배역(背逆)하므로 짐이 일찍이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대 나라 선왕(先王) 휘(諱)가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와서 능히 쳐서 이겼다. 그런데 이번에 도적이 그래도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므로 짐(朕)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던 바 왕이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왔는데, 전의 군사는 비록 강물의 얼음이 풀려서 건너기 어려움으로 인하여 우리 군사와 합세(合勢)하여 그 공을 같이 이룩함을 얻지 못하였으나, 뒤의 군사는 또한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토벌하여 그 부속(部屬)을 사로잡고 참(斬)하며, 그 집과 양식을 불태우고 그들이 약탈한 우리 변위(邊衛)의 인구를 찾아서, 또 배신(陪臣)을 보내어 압송(押送)해 와서 바치게 하였으니, 왕의 충성은 선세(先世)의 뜻을 능히 이어 받들었다고 이를 만하고 짐의 명령을 저버림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아름다운 이름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제 내관(內官) 정동(鄭同)과 강옥(姜玉)을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백금(白金)·문금(紋錦)·서양포(西洋布)를 내려 주게 하고, 그 영병관(領兵官)인 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과 절도사(節度使) 김교(金喬)에게도 각각 예(例)와 같이 하사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게 하니, 왕은 공경히 이를 받을지어다.’ 하였는데, 왕이 표(表)를 받들어 올려서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성화 17년 8월에 영안도(永安道)의 수신(守臣)이 흰 사슴을 얻어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놓아 보내라.’ 하였습니다. 10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원유(苑囿)를 설치한 것은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농한기[農隙]에 친히 무사(武事)를 강(講)하고 수선(蒐獮)에 예(禮)를 거행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유사(有司)가 백성들이 나무하는 것을 금하여 새와 짐승이 더욱 성하니, 백성을 위해 해로움을 없애는 뜻에 어긋남이 있다. 예전에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풀 베고 나무하는 자도 가고 꿩이나 토끼를 잡는 자도 간다.」라고, 이제부터는 원유가 있는 곳에는 모두 금하는 것을 풀어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18년 6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예전의 어진 임금은 어진이와 능한이를 선발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든 정치를 함께 다스렸다. 우리 나라는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취하고 또 천거(薦擧)하는 법을 세워서 재덕(才德)이 있는 선비를 모두 등용(登庸)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어진이를 구하는 길이 넓지 아니함이 아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 빠뜨려진 구슬은 옛부터 어려워하는 바이니, 초택(草澤)과 암혈(巖穴) 사이에 어찌 재주를 품고 기이함을 가지고도 침울(沈鬱)하여 스스로 팔리지 못하는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그 지위에 있는 자는 유일(遺逸)을 찾아서 모두 이름을 계문(啓聞)하라.’ 하였습니다. 11월에 왕이 유신(儒臣)을 불러 내전(內殿)에 들어오게 하여,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강(講)하게 하고, 인하여 선유(先儒)의 같고 다른 해설과 역대(歷代)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진 자취를 평론하게 하였으며, 때로 규풍(規諷)함이 있으면 왕이 부지런히 들었습니다. 밤이 깊어 여러 신하가 물러가기를 청하면 왕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는 때가 많으면 기질(氣質)의 변화가 자연히 이루어 진다.」고 하였으니, 내가 오늘 아직 듣지 못한 말을 얻어들어 유익함이 크고 많아 자못 피곤하지 아니하니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19년 2월에 왕이 적자(嫡子) 휘(諱)를 세워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이 생각하건대 작토(爵土)를 가진 자는 대[世]를 길이 전하는 계책을 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다.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은 뭇사람들의 뜻이 바라는 바와 합치되게 하려는 것이니, 고금(古今)이 그러한 것이다. 주본(奏本)을 보건대 온 나라 신민(臣民)이 뜰에 모여서 명을 청하여 왕자 휘(諱)를 세워 세자로 삼으려고 하나, 왕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사신을 보내어 아뢴다고 하니, 짐이 보고 특별히 윤허하고, 곧 명하여 태감(太監) 정동(鄭同)을 정사(正使)로 삼고, 김흥(金興)을 부사(副使)로 삼아 칙서와 아울러 저사(紵絲)·사라(紗羅) 등 물건을 가지고 가서 휘(諱)를 봉하여 조선국 왕세자(朝鮮國王世子)로 삼게 하니, 그 맞추어 쓸 관복(冠服)은 왕의 나라에서 스스로 만들 것이다. 대저 조정의 명령은 왕이 받들 것이며, 번방(藩邦)의 그릇[器]은 세자가 맡을 것이다. 천지(天地)의 분수는 때를 넘을 수 없음을 알아서 위를 섬기는 정성으로써 거느리며, 국체(國體)를 잇는 도(道)는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알아서 예(禮)를 지키는 가르침에 따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근본이 더욱 튼튼하고 명예가 더욱 높아져서 왕의 표문[表]을 받들어 사례를 올렸습니다. 왕이 명유(名儒)를 뽑아서 세자의 사우(師友)로 삼고 경사(經史)를 주어 서로 갈고 닦게 하며, 또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게 하니, 무릇 교양(敎養)하게 하는 바가 지극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습니다. 3월에 왕의 조모 혜장 왕비(惠莊王妃) 윤씨(尹氏)가 승하(昇遐)하자 왕이 슬퍼하여 병이 났는데, 대신들이 술을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슬픔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굳이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성화 20년 4월에 하교하기를,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관리로서 수령(守令)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수령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생민(生民)의 큰 근심이 된다. 한 달을 관직에 있으면 한 달의 해(害)를 끼치고, 한 해를 관에 있으면 한 해의 해를 끼치는 것이니, 하물며 3기(三朞)·6기(六朞)의 오램이겠는가?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가혹한 정사는 호랑이보다 사납다.」고 하였으니, 대저 아래에서 가혹한 정사를 행하면 임금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겠는가? 내가 양덕(涼德)으로써 외람되게 선업(先業)을 이어받아서 신민(臣民)의 위에 임한 지 15년인데, 그 사이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따라서 백성이 굶주림을 만났으니, 이는 비록 나의 덕이 없는 소치라고 하더라도, 또한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관리가 침해를 일삼고 가혹하게 살피는 것으로 밝게 한다고 여겨,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형벌이 함부로 행해져, 그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서 한갓 자기만 살찌우기에 힘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방면(方面)의 신하는 비록 자거(刺擧)의 임무를 맡았으나 그 선악[薰蕕]을 구분하는 데 어둡고 전최(殿最)를 잘못하여 가끔 자상 개제(慈祥豈弟)한 자가 억울함을 품고 탐포 간회(貪暴奸回)한 자가 뜻을 얻음이 있으니,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앙(災殃)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라고 못할 것이다. 내가 별도로 올리고 내치는 것을 의논하여 권징(勸懲)을 보이고자 하니, 이에 그대 의정부(議政府)는 각각 아는 바를 분별하여 아뢰라.’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순량(循良)하여 다스리는 공(功)이 있는 자와 탐하고 나태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없는 자를 들어서 아뢰니, 곧 올리고 내칠 것을 명하였습니다. 5월에 왕이 명하여 조맹부(趙孟頫)가 쓴 글자를 본떠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便殿)에 걸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친히 왕우칭(王禹偁)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 내려 주면서 승지(承旨)들에게 이르기를, ‘왕우칭의 대루원기가 비록 집정(執政)을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벼슬에 있는 백집사(百執事)가 모두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할 만하다. 더욱이 그대 승정원이 추기(樞機)의 곳임에랴?’ 하였습니다. 12월에 하교하기를,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큰 근원이며 어진 인재는 국가의 이기(利器)인데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의 희름(餼廩)이 풍족하지 못하니, 내가 숭상하는 뜻이 아니다. 전사(田肆) 1백 경(頃)을 주어서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주부 군현(州府郡縣)의 학교에도 차등이 있게 주어라.’ 하였습니다. 왕이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제도(諸道)에서 공진(供進)하는 물건을 감하라고 명하자, 경상도 수신(守臣)이 아뢰기를, ‘해산물[海錯]과 같은 종류는 구하기가 쉬우니, 예전대로 올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가 윗사람을 받드는 뜻은 비록 정성스러우나 임금이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또한 간절하니,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23년 가을에 왕이 선황제가 승하(昇遐)한 것을 듣자 곧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곧 배신(陪臣) 변종인(卞宗仁)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이봉(李封)은 진향(進香)하였으며, 노사신(盧思愼)은 황상(皇上)의 등극(登極)을 하례하게 하였습니다.
홍치(弘治) 원년 봄에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朕)이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을 이어받아서 만방(萬方)을 통어(統御)하니,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에는 마땅히 은택(恩澤)을 널리 베풀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왕의 나라는 대대로 충성이 돈독하니, 내려 주는 예물을 더욱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바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우춘방 우서자 겸 한림원 시강(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 동월(董越)과 부사(副使)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유시(諭示)하고, 아울러 왕과 비(妃)에게 폐백(幣帛)·문금(紋錦)을 내려 주게 하였으니, 수령(收領)할 것이며, 더욱 짐의 사랑하는 마음을 체득하여 예(禮)를 잡고 의(義)에 따라서 번보(藩輔)를 더욱 융성하게 하여 함께 태평한 복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왕을 보고 탄복하기를, ‘노생(老生)이 예전에 듣건대 현왕(賢王)이 학문이 높고 밝으며, 예의(禮義)에 통달하다고 하더니, 이제 다행히 눈으로 보니, 과연 본래 들은 바와 합한다.’ 하였습니다. 11월에 대간(臺諫)이 옛날 이윤(伊尹) 소공(召公)이 그 임금에게 권계(勸戒)했던 말을 써서 올리며 규경(規警)하는 뜻을 붙였는데, 왕이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들의 올린 말을 보건대 대개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 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궁온(宮醞)을 내려 주고 밤이 되자 궁중의 초[燭]를 거두어서 보냈습니다.
홍치 2년 정월에 어떤 거자(擧子)가 향시(鄕試)의 대책(對策)에 부처에게 제사하여 화(禍)를 물리칠 것을 말하였으므로 시관(試官)이 이를 물리쳤는데, 왕이 이를 듣고는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유생(儒生)의 대책에 쓴 말을 내가 매우 분(憤)하게 여긴다. 부처의 해(害)를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하물며 공자(孔子)·맹자(孟子)를 배우는 자이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이단(異端)을 전공하면 이는 해(害)가 된다.’고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능히 말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으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해는 양주·묵적보다 심하니, 마땅히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女色)과 마찬가지로 멀리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후세의 배우는 자가 힘써 살피고 밝게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치도(緇徒)들이 천상(天常)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 것을 한(恨)스러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끊고 세상의 교화를 붙들어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제 유생이 국가에서 어진이를 올려 쓰는 날을 당하여 요순(堯舜)의 도(道)를 진술하지 아니하고 부도(浮屠)의 법을 고창(鼓唱)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같이 사신(捨身)하고 당(唐)나라 헌종(憲宗)과 같이 막배(膜拜)하게 한 뒤에 그만두게 하려는 것인가? 유자(儒者)라고 일컫는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무식한 사녀(士女)이겠는가?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국(推鞫)하여 먼 지방에 내쳐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밝게 보이게 하라.’ 하고, 또 해조(該曹)에 명하여 도승법(度僧法)을 회복시키지 말게 하였습니다. 왕이 향학(鄕學)에 서적(書籍)이 적다고 여겨 《사서(四書)》·《오경(五經)》과 제사(諸史)를 인쇄하라고 명하고 제도(諸道)에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홍치 3년 윤9월에 왕이 장헌왕(莊憲王)의 묘(墓)에 참배하고 지나가는 고을에 관원을 보내어 선성(先聖)의 묘(廟)에 치제(致祭)하고 학생(學生)에게 쌀을 차등 있게 주었습니다. 또 대가(大駕)가 머무는 곳에는 공돈(供頓)에 수고한 비용으로 이 해 전조(田租)의 반(半)을 감하게 하였습니다. 겨울에 성변(星變)이 있자 일관(日官)이 초제(醮祭)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앙(災殃)이 변하여 상서로움이 되는 것은 덕을 닦는 데에 있고 기양(祈禳)에 있지 아니하다.’ 하였습니다.
홍치 4년 5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지친(至親)인 사람은 한 몸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숙질(叔姪)은 부자(父子)의 의(義)가 있고 형제는 천륜(天倫)의 중함이 되니, 마땅히 화목한 행실을 돈독히 하여 돈목하고 후한 풍속을 이루게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왕상(王商)이 후(侯)가 되자 재산을 미루어 동생에게 주었고, 설포(薜包)는 분재(分財)할 때 나쁜 물건은 자기 자신이 가졌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습속(習俗)이 요박(澆薄)하여 혹은 서로 다투는 자도 있고 혹은 서로 꾸짖고 원망하기도 하니, 골육(骨肉)을 잔상(殘傷)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 뒤로는 형제·숙질이 쟁단(爭端)을 일으켜서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것이 현저(現著)한 자는 모두 변경에 옮기게 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또 하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중외(中外)에 일이 없으므로,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음식·복완(服玩)·거마(車馬)·제사(第舍)가 모두 사치하고 화려함이 지극하니, 내가 심히 그릇되게 여긴다. 오직 그대 신료(臣僚)들은 검약(儉約)하기에 힘쓸 것이며 폐풍(弊風)을 고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1월에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금년은 곡식이 조금 풍년이 들었는데 세(稅)를 거두는 것이 너무 가볍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어찌하여 부족하겠는가? 백성에게 1분(分)을 감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평안도에 변경(邊警)이 있어 병조(兵曹)에서 본도(本道)의 군사로 하여금 모두 변경을 지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番)을 나누어 방수(防戌)하도록 예전부터 법이 있었다. 누가 부모가 없으며 누가 처자가 없겠는가? 처자와 집을 떠나 있는 것을 내가 심히 가엾게 여긴다. 번을 나누어 가서 방수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홍치 5년 정월에 성균관 전고리(成均館典庫吏)가 쌀 약간을 소모하였으므로 유사(有司)가 추상(追償)하게 하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작을지라도 어찌 어진 선비를 기르는 자본이 없겠는가? 추상하지 말고 특별히 미포(米布)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8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사생(師生)과 백료(百僚)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며 이르기를, ‘술을 마시되 진실로 어지러운 데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진실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뜻이므로 각각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게 먹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학궁(學宮)을 중수(重修)하게 하였습니다.
홍치 6년 6월에 왕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가 있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왕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가 져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까 두려운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12월에 해조(該曹)에서 원일(元日)에 예연(禮宴)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임금은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그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홀로 즐기는 것이 가하겠는가? 정지하라.’ 하였습니다. 왕이 전대(前代)의 여러 왕과 명현(名賢)의 묘(墓) 중에 혹시 허물어진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는 곳에 명하여 수즙(修葺)하게 하고 초목(樵牧)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홍치 7년 12월에 왕의 병이 미류(彌留)하였으나 오히려 청단(聽斷)을 멈추지 아니하고, 병이 위독해지자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인견(引見)하여 뒤의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이튿날 24일[己卯]에 정침(正寢)에서 승하하니, 비록 어린아이와 부녀라 할지라도 달려와서 슬퍼하며 울부짖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26년입니다.
왕은 총명 영무(聰明英武)하고 관인 공검(寬仁恭儉)하며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뜻이 독실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함에 미쳐서는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진독(進讀)하게 하고 밤에도 소대(召對)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권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성력(星曆)·종률(鍾律)에 이르기까지 통하여 밝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예(射藝)와 초예(草隷)에도 그 묘(妙)함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事大)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무릇 공헌(貢獻)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친히 스스로 감시(監視)하였습니다. 한인(漢人)으로서 사로잡혔다가 오랑캐들로부터 도망해 오는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후히 주어서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냈는데, 전후에 모두 5백 55인(人)이었습니다.
왕은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하여 혜장 왕비(惠莊王妃)·회간 왕비(懷簡王妃)·양도 왕비(襄悼王妃)가 한 궁(宮)에 같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섬겨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고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친히 조리하며 약이(藥餌)를 반드시 먼저 맛보아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혜장 왕비가 만년(晩年)에 병으로 앓았는데, 매양 왕을 보면 문득 조금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제사 일에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일이 있지 아니하면 반드시 친히 행하였습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 은혜와 예(禮)가 모두 지극하였고, 졸(卒)함에 미쳐서는 슬퍼한 나머지 철선(輟膳)하여 병을 이루는 데 이르렀습니다. 종실(宗室)의 여러 친족도 때때로 내전(內殿)에 불러 보고 술자리를 차려 놓고 가인(家人)의 예(禮)를 행하여 화락하게 하였습니다. 가법(家法)이 심히 엄하여 궁곤(宮壼)이 숙연(肅然)하였으며, 여러 아들이 비록 어리더라도 옳은 방법으로 가르쳐서 모두 성인(成人)의 덕(德)이 있었습니다. 대신(大臣)을 접대하기를 예(禮)로 하여 매양 진현(進見)할 때에 태만한 모습을 가진 적이 없었고, 비록 작은 관리라도 모두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죄가 있으면 너그럽게 용서함이 많았으며 세상을 마치도록 형륙(刑戮)을 당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시(宦寺)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관대(寬貸)함이 없었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과 더불어 자세히 의논하여 처치하였으며, 조신(朝臣)으로 하여금 윤대(輪對)하게 하여 조정 정사의 득실(得失)을 물었습니다. 사람을 쓰는 즈음에 그 단점(短點)을 배척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장점(長點)을 취하고 반드시 〈모든 것을〉 구비할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매년 봄·가을로 친히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한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각 있는 곳에서 대접하게 하였으며, 가난하여 시집가지 못한 처녀에게는 자장(資裝)을 관(官)에서 주어서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수령이 배사(拜辭)하면 반드시 인견(引見)하고 계유(戒諭)하였으며, 사신(使臣)을 자주 보내어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었습니다. 달마다 두 번 열무(閱武)하고 해마다 수선(蒐獮)을 강(講)하여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청단(聽斷)하는 여가에 문사(文士)를 불러서 경사(經史)를 상고해 묻고 겸하여 문예(文藝)를 시험하며, 우림(羽林)군사에게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간혹 후원(後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하여 권려(勸勵)하고 성취(成就)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모두 구도(矩度)가 있었으며, 이단(異端)에 혹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며, 유전(遊畋)을 경계하고 절검(節儉)을 숭상하였으며, 상서(祥瑞)가 이르게 하고 음사(淫祀)를 금하였으며, 직간(直諫)하는 선비를 포상(褒賞)하고 충신(忠臣)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였으며, 패상(敗常)의 법을 엄중하게 하고 장리(贓吏)의 법을 엄하게 하였으며, 형벌이 지나치지 아니하여 영어(囹圄)가 여러 번 비었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후한 은혜가 온 나라에 젖었는데, 슬프다!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아니하여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애통하도다.”
하였다.
【원전】 12 집 61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회간왕(懷簡王) : 덕종(德宗).
[주D-002]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주D-003]정축년 : 1457 세조 3년.
[주D-004]혜장왕(惠莊王) : 세조(世祖).
[주D-005]성화(成化) 5년 : 1469 예종 원년. 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주D-006]양도왕(襄悼王) : 예종(睿宗).
[주D-007]권서(權署) : 대행.
[주D-008]승습(承襲) : 왕위를 이어받음.
[주D-009]성화 6년 : 1470 성종 원년.
[주D-010]비도(丕圖) : 제위(帝位).
[주D-011]환우(寰宇) : 천하.
[주D-012]서업(緖業) : 왕위 계승.
[주D-013]병한(屛翰) : 제후국을 가리킴.
[주D-014]동번(東藩) : 조선을 가리킴.
[주D-015]종조(宗祧) : 종묘. 왕위를 뜻함.
[주D-016]번보(藩輔) : 제후(諸侯)를 가리킴.
[주D-017]정문 복호(旌門復戶) : 열녀(烈女)·의부(義婦) 등을 상줄 때 그 문려(門閭)에 홍문(紅門)을 세워 주고, 그 집에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던 것.
[주D-018]성화(成化) 7년 : 1471 성종 2년.
[주D-019]대뢰(大牢) : 소·양·돼지 세 가지 희생을 갖춘 제수(祭需).
[주D-020]건양(愆陽) : 겨울날이 따뜻함.
[주D-021]옥언(獄讞) : 옥사를 평의함.
[주D-022]성화 8년 : 1472 성종 3년.
[주D-023]근본(根本) : 농사를 가리킴.
[주D-024]말단(末端) : 농업 외의 상공업을 가리킴.
[주D-025]정관(貞觀) : 당 태종의 연호.
[주D-026]성화 10년 : 1474 성종 5년.
[주D-027]소생부(所生父) : 낳은 아버지.
[주D-028]성화 11년 : 1475 성종 6년.
[주D-029]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하고, : 동교(東郊)의 제단(祭壇)에서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지내던 제사. 경칩(驚蟄) 후의 길일(吉日)인 해일(亥日)에 행하였음.
[주D-030]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밟고 가는 전지라는 뜻으로, 임금의 친경전(親耕田)을 말함.
[주D-031]친잠(親蠶) : 양잠(養蠶)을 장려하기 위하여 왕후(王后)가 몸소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함.
[주D-032]질곡(侄梏) : 수갑과 차꼬.
[주D-033]성화 12년 : 1476 성종 7년.
[주D-034]황저(皇儲) : 황태자.
[주D-035]성화 13년 : 1477 성종 8년.
[주D-036]축리(祝釐) :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복을 빔.
[주D-037]성화 14년 : 1478 성종 9년.
[주D-038]색황(色荒) : 여색에 빠짐.
[주D-039]금황(禽荒) : 사냥하는 데 탐닉(耽溺)함.
[주D-040]약석(藥石) : 경계가 되는 유익한 말.
[주D-041]성화 15년 : 1479 성종 10년.
[주D-042]견양(犬羊) : 여진을 가리킴.
[주D-043]적개(敵愾) : 제왕(帝王)을 위하여 원한을 풀려고 함.
[주D-044]성화 17년 : 1481 성종 12년.
[주D-045]수선(蒐獮) : 봄 사냥과 가을 사냥.
[주D-046]성화 18년 : 1482 성종 13년.
[주D-047]유일(遺逸) : 빠뜨려진 인재.
[주D-048]성화 19년 : 1483 성종 14년.
[주D-049]작토(爵土) : 작위(爵位)와 영지(領地).
[주D-050]그릇[器] : 명위(名位)와 작호(爵號)를 가리킴.
[주D-051]성화 20년 : 1484 성종 15년.
[주D-052]양덕(涼德) : 박한 덕.
[주D-053]자거(刺擧) : 악(惡)을 꾸짖고 선(善)을 쳐듦.
[주D-054]전최(殿最) :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정하던 일.
[주D-055]순량(循良) : 법을 지켜 백성을 잘 다스림.
[주D-056]조맹부(趙孟頫) : 원(元)나라의 문인(文人).
[주D-057]장온고(張蘊古) : 당나라 때 문장가.
[주D-058]왕우칭(王禹偁) : 송나라 때 문장가.
[주D-059]백집사(百執事) : 백관(百官).
[주D-060]추기(樞機) : 중요한 기관.
[주D-061]희름(餼廩) : 녹미(祿米).
[주D-062]성화 23년 : 1487 성종 18년.
[주D-063]홍치(弘治) 원년 : 1488 성종 19년.
[주D-064]노생(老生) : 자신을 가리킴.
[주D-065]이윤(伊尹) : 은(殷)나라 때 명신.
[주D-066]소공(召公) : 주(周)나라 때 명신.
[주D-067]홍치 2년 : 1489 성종 20년.
[주D-068]거자(擧子) : 과거를 보는 선비.
[주D-069]천상(天常) : 인륜(人倫).
[주D-070]막배(膜拜) : 땅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절함.
[주D-071]홍치 3년 : 1490 성종 21년.
[주D-072]장헌왕(莊憲王) : 세종(世宗).
[주D-073]초제(醮祭) : 별에 지내던 제사.
[주D-074]기양(祈禳) :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침.
[주D-075]홍치 4년 : 1491 성종 22년.
[주D-076]왕상(王商) : 한(漢)나라 때 사람.
[주D-077]설포(薜包) : 후한(後漢) 때 사람.
[주D-078]복완(服玩) : 의복과 노리개.
[주D-079]홍치 5년 : 1492 성종 23년.
[주D-080]홍치 6년 : 1493 성종 24년.
[주D-081]즉어(鯽魚) : 붕어.
[주D-082]홍치 7년 : 1494 성종 25년.
[주D-083]소대(召對) :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 이하를 불러서 임금이 몸소 글을 강론(講論)함을 말함.
[주D-084]성리학(性理學) :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례를 설명(說明)한 유교 철학(儒敎哲學). 송(宋)나라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주희(朱熹) 등이 주창(主唱)한 학설(學說).
[주D-085]초예(草隷) : 초서와 예서.
[주D-086]혜장 왕비(惠莊王妃) : 세조비.
[주D-087]회간 왕비(懷簡王妃) : 덕종비.
[주D-088]양도 왕비(襄悼王妃) : 예종비.
[주D-089]우림(羽林) : 궁중의 숙위(宿衛)·배종(陪從)·호위(護衛)를 맡은 군대.
[주D-090]패상(敗常) : 삼강 오륜(三綱五倫)에 위배되는 행위.
[주D-091]영어(囹圄) : 감옥.

 

海東野言[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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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

成宗篤志於學三時講書。乘夜又引玉堂入直之士。與之講論。講畢賜酒。從容問今古治亂民間利病。便服相對。閣中只張一燭而已。或至夜分。大醉而出。賜御前燭送歸院。卽金蓮炬之遺意也。 出慵齋叢話下同
成廟學問淵博。文詞灝噩。命文士撰東文撰輿地勝覽東國通鑑。又命校書館。無書不印。如史記左傳春秋前後漢書晉書唐書宋史元史網目通鑑東國通鑑大學衍義古文選文翰類選事文類聚歐蘇文集書經講義天原發微朱子成書自警編杜詩王荊公集。陳簡齋集。此余之所記者。其餘所印諸書亦多。又聚徐剛中四佳集姜景醇私淑齋集申泛翁保閑齋集惟李胤保及我文安公成任 詩文。逸失未印。可恨也。
宣廟好文續契。兩聖寵奬。儒林逈出常謨。一時文章魁傑之士。彪炳玉署。如梅溪三魁㵢溪曁先大人。 金訢 尤被隆眷。常所述作。隨月書進。梅溪㵢溪俱以親老丐外。特致米石。以優其親。㵢溪進稿。有北望君臣隔南來子母同之句。上從容賞咏曰。好仁身雖在外。心不忘君矣。梅溪遭艱。錫祭榮之。寵及存亡。人人感起。鼓舞人材。振作士氣。誠千歲罕遇之盛也。成領相希顏由弘文正字丁憂去。制闋復敍。例謝恩命。上召至閤門外慰之。命中官。臂一鷹以賜曰。爾有老母。公退有暇。可以郊獵。助供滋味。又入夜對。賜酒果。公袖柑橘十數枚。因醉伏不省。中官負出之。不覺袖橘墮散于地。明日下柑橘一盤于玉堂。敎曰。昨日希顏袖橘。意欲遺親。故賜。公鏤骨忘死。卒倡靖國之擧。以爲報效也。宣廟待士之誠。知人之明。固有以盡人忠也。而公之革危措安。勳在社稷。亦可謂不負知遇矣。 出龍泉談寂記下同
文成兩聖。精於楷法。文廟遒勁生動之眞。深奪晉人奧處。只有石刻數本。傳世至寶神秘。眞跡罕覩。惜哉。
成廟嫵媚端重。從容三昧於趙松雪規度。上又或留意於墨戱小畫。斯皆天縱之能。不煩模習。而妙詣古範萬機之暇。淸讌有時。時親翰墨。畧加揮掃。寸箋尺幅。散落人間。得之者欽玩複襲。不啻如拱璧矣。上舍生朴元秢稍善書。成廟覽而嘉之。下書其鄕。賜紙筆以奬之。榮耀鄕閭。無不驚動。夫才藝細技。豈足以動睿賞哉。然不以聖能而廢之。勸奬之隆。必出於誠如此。由是文章書畫工技百術。莫不賴激而精臻。乃知聖人鼓舞轉移之機。特在於一嚬笑之間。若非誠意之好敻超凡情。則雖百方勸勅。嚴立程課。秪見其騷頗頹墮耳。安能動人若此之深耶。
成廟爲王大妃。日設曲宴。選內需婢五六名。習俗樂。其中有一名。容色才藝冠絶。常目成廟不已。成廟覽之。命付其父母嫁之。勿令復出入宮掖。自此曲宴亦罷。又成廟苟無故。日三御經筵。日三朝王大妃殿。日引宗室射于後苑。對宗室必設小酌。妓樂隨之。此固太平盛事。然議者或以爲燕山之耽於宴樂。有耳目之習然也。惜哉。 出先君子前言往行錄
有出宮人。箱筐收貯截紙札翰異常。云。幽亭流水。高樹俯潺湲。驊騮嘶靑草。春在翠微間。又絶壁立千仞。松風鳴未休。憑欄無限意。依約故山秋。又曰新瓜初嚼水精寒。兄弟情親忍獨看。又曰問兄何事送羲娥。遙想洋琴與渭歌。又曰期會親戚。聘招佳妓。義雖君臣。恩則兄弟云云。見之者知爲成廟常時戱筆棄餘也。二絶句必題畫之詩。不知誰作。餘皆與月山大君之簡槁也。成廟每引月山入內曲會。出則簡寄酬唱無虛日。蓋其友愛至焉。 出謏聞瑣錄
世宗設集賢殿。揀文士有名者二十人。兼帶經筵。凡諸文翰之事。悉任之。早仕晩罷。日官奏時。然後乃得出。朝夕飯時以內官爲對客。其隆待之意至矣。由是爭相勸勉。雄才鉅士多出。有名文苑者。不可勝數。丙子之亂。世祖命罷集賢殿。揀文臣數十人。兼稱藝文。日日引見論思。及成廟卽位。依集賢殿。復設弘文館。又以本官兼經筵。待之尤厚。每賜宣醞。又招聚承旨對飮。多賜奴婢。以備役使。又令皁隷皆帶銀牌。又令作堂于龍山江上。館官分番讀書。又於上已仲秋重陽佳節。命遊郊外。仍賜酒樂。其寵榮至矣。而有文名者。不似世宗朝之盛也。 出慵齋叢話下並同
新羅高麗崇釋敎。專以供佛飯僧爲常。我太宗雖革寺社奴婢。其風猶在。公卿儒士之家。例於殯堂聚僧說經。名佛席。又於山寺設七七齋。富家爭務豪侈。貧者亦因例措辦。耗費財穀甚鉅。親戚朋僚皆持布物往施。名曰食齋。又於忌日邀僧先饋。然後引魂設祭。名僧齋。成廟祟正學闢異端。凡于佛事盡革極言其弊。由是士大夫家。畏憲章物議。雖遭喪忌。但依法行祭。不供僧佛。其因仍不廢者。惟無賴下民。然不得恣意爲之。又嚴度僧之禁。州郡推刷無牒者。長髮還俗。中外寺刹皆空。物盛而衰。理所當然也。
成均館專掌敎訓。國家設養賢庫。以館官兼之。常養儒生二百人。上黨府院君韓明澮啓建尊經閣。多印經籍藏之。廣川君李克增啓搆典祀廳。余亦啓建享客廳。其後皆搆聖殿東西廡及食堂。又賜布五百餘匹米三百餘石。又賜學田以備館中之需。李克增啓。今承聖恩。多受米布。乞備酒食聚朝中文士及諸生。以爲斯文盛事。成廟允之。於是文士大會明倫堂。饌品極精。承旨賚宣醞及御廚珍味。絡繹不絶。癸丑秋。幸成均館。祀先聖先師。退御帳殿于下輦臺。文臣宰樞入侍殿內。堂下官文臣分庭列坐。八道儒生雲集京師。皆無慮萬餘人。上下皆揷花參宴。新製章奏而侑之。各司分掌設饌。上頻遣內臣督察之。人皆醉飽。自前昔所未聞也。
太宗於永樂元年。謂左右曰。凡爲治必須博觀典籍。吾東方在海外。中國之書罕至。板刻易以刓缺。且難盡刊天下之書。予欲範銅爲字。隨所得而印之。以廣其傳。誠爲無窮之利。遂用古註詩書左氏傳字鑄之。此鑄字所由始也。名曰丁亥字。世宗又於庚子年。以所鑄之字大而不整。改鑄之。其樣小而得正。由是書無不印。名曰庚子字。甲寅年。又用爲善陰騭字鑄之。比庚子字。差大而軆甚好。又命世祖書綱目大字。世祖時爲首陽大君。遂範鉛爲字。以印綱目。卽今所謂訓義也。壬申年間。文宗改鎔庚子字。命安平書之。名曰壬子字。乙亥年。世祖改鎔壬申字。命姜希顏書之。名曰乙亥字。至今用之。其後乙酉年。欲印圓覺經。命鄭蘭宗書之。字體不整。名乙酉字。成宗於辛卯年。用王荊公歐陽公集字鑄之。其軆小於庚子而尤精。名曰辛卯字。又得中朝新板綱目字鑄之。名曰癸丑字。
成廟賜死廢妃。傳旨曰。尹氏性本凶險。多行悖逆。曩在宮中。暴惡日深。旣不順於三殿。又肆凶於寡躬。待之如奴隷。至曰並足跡而削去之。是特細事不足論也。至於嘗見歷代母后挾幼擅政之事。自以爲喜。常以毒藥自隨。或置之懷抱。或藏之篋笥。非唯欲去其所忌。又將不利於寡躬。常自言曰。我命長壽。將有所爲之事。此則不道之罪。關於宗社。而猶不忍斷以大義。只廢爲庶人。寘之私第。今者外人。見元子漸長。前後紛紛。多以此爲言。雖在當時。不足深慮。後日之禍。何可勝言。若使凶險之性。得操威福之權。則元子賢明。亦必不得有爲於其間。而跋扈之志日益自恣。漢呂唐武之禍。翹首可待。余念至此。深用寒心。今若優遊。不早定大計。而國事至於不可救。則悔之無及。而予實爲宗社之罪人。昔鉤弋無罪。漢武猶爲萬世之計。況此凶險。又有難赦之罪乎。肆於今月十六日。賜死于其第。宗社大計不得不爾。 出謏聞瑣錄下並同
壬寅十月初四日。唐陽公主卒。禮曹啓。公主卒無停朝市。上特命停一日。令弘文館考前事。云。宋時長公主卒。命停五日。曰。古亦如是。今胡不然。命停朝三日。
成化癸酉五月。慶尙監司移文禮曹云。寧海府地火。晝有烟氣。夜有火光。投以木則成火。長八尺許。廣二十尺許。上令弘文館攷古事。晉惠帝元煕間。地燃。趙石虎後秦苻堅時。及唐貞觀時。石燃于幽州。又高麗仁宗明宗時。白州地火。本朝世宗時。寧海有是災。文宗時尙州地火。命內臣李孝智往審之。持所焚石塊而來。黑如炭。置之於火。則生火。
甲辰九月。奉常上金良璥謚號。曰恭威公褊肅公齊克公。上問於承政院。對曰。良璥有偏心之病。故謚皆如是。上曰。曩者金國光尹繼謙之謚。慮有後弊。欲改而未果。今有正直之人。其朋友以私事請囑而不從。則皆云其心偏急。朝議靡然從之。以正直得偏急之謚。其可得乎。予欲改此謚何如。政院日奉常旣已定謚。改之似難。正直之人。豈可以偏急稱之。大抵以偏急得名者。於其所不當爲之事。偏執强爲者也。良璥偏急之病。想必公論皆然。今若改定。恐有後弊。但於奉常擬進六字中。上裁何如。御書恭肅公而出。敬事供上曰恭。執心決斷曰肅。甲辰十一月。奉常擬進李繼孫謚。曰長敬公玎憲公。誨人不倦曰長。述義不勉曰玎。金文簡公在經筵啓曰。繼孫爲永安道觀察使。興學養材。至今多中科第者。然謂之誨人不倦則失實。誨人不倦如金鉤金末則當矣。以監司興學而已。不自敎誨。何以得此謚。繼孫爲人得宰相軆。善人君子也。不須長字。亦可得美謚。其曰述義不勉恐亦失實。曾以罪謫罰。而謂之玎不可。上遂書敬憲公而出。
成化丙午。直提學金訢以命進其外曾祖成槪所書魏徵十漸疏。兼進箚子。以寓規警之意。上乃賜經御白綃帖裡黑黍皮靴。且手札金牋以賜曰。省所上箚子與魏徵疏軸。深用嘉焉。徵之此言實萬世之蓍龜也。爾父勸汝以魏相自許。爾又勸予以唐虞同治。可謂父愛其子臣愛其君者也。予雖不淑。其敢忘之。嘉汝之誠。賞以褒之。常寘左右。以自警焉。書之楷正。固無所取。特陞訢爲工曹參議。其父友臣爲丹陽郡守。
戊申二月初六日。納世子嬪。自朝風雨大作。御札付嬪父左參贊愼承善曰。世俗以婚日風雨爲忌。大凡風以動之。雨以潤之。萬物之生。莫非風雨之功云云。出於傳聞。雖不能盡記。眞帝王之言哉。自午開霽淸明。 出忠敏公雜記
成廟朝。孫勿齋舜孝。知燕山不克負荷。一日登御榻。有撫床之請。臺諫請罪。且欲聞密啓何事。上曰。戒予好色耳。竟不言。 出丙辰丁巳錄
高麗文士。皆以詩騷爲業。唯圃隱始倡性理之學。至我朝陽村梅軒兄弟。能明經學。又能於文。陽村定四書五經口訣。又作淺見錄入學圖說等書。羽翼之功不少。其後任函丈者。黃鉉尹祥金鉤金末金泮鉉之學無聞。祥最精而稍知作文。鉤與末皆精。而末則未免於固滯。常時議論。不相上下。爭之不已。受業者亦兩備焉。二公皆爲世祖所知。官至一品。泮爲大司成。年老致仕。卒餓死于故鄕。又其次者有孔頎鄭自英丘從直兪希益兪鎭頎。滑稽能談。至於作文。雖尺牘之微。不能措一辭語。常受人簡牘。不知裁答。生員金順明適在房。依所言而答之。辭語甚稱。頎嘆曰。子學出於我。子善用而我不能用。眞所謂靑出於藍而靑於藍也。自英非徒知五經。亦能博涉諸史。官至判書。從直以容貌奇偉。蒙世祖拔擢。竟至一品。希益未甚顯達。鎭頎固執不通於理。近有盧自亨李文興。久在學官。成宗以年老優之。竟陞堂上。皆退死于鄕。 出傭齋叢話
上黨府院君韓明澮。搆亭漢水之南。名曰押鷗。欲以定策功擬韓忠獻。而得恪退之名。將辭老江湖爲言。而顧戀爵祿不能去。上作詩別之。朝中文士爭相和韻。累數百篇。而判事崔敬止詩爲第一。其詞曰。三接慇懃寵渥優。有亭無計得來遊。胸中自有機心靜。宦海前頭可押鷗。明澮惡之。不列懸板中。 出秋江冷話
許忠貞公琮。少時奇偉不類凡兒。年十二三時。同隊小兒上寺讀書。一日夜半盜來。盡偸諸兒衣鞋而去。翌日諸兒恐佈皆散去。獨確然不動。高枕大臥。取筆書壁曰。旣奪我之衣兮。宜吾鞋之莫偸。旣奪衣又奪鞋。竊爲盜先生不取也。聞之者已知其非爲凡器也。出思齋摭言
陽川君許琮狀貌魁偉。風彩嶷然。一時推爲大人君子。自少博學能文。至於天文律曆醫卜之技。無不精通。而又能弓馬。國有大事。必以公爲元帥。然不治家產。所居僅蔽風日。淡如也。 出靑坡劇談
弘治戊申董侍講越王給事敞。來頒登極詔。許忠貞公以遠迎使。候于義州。兩使尙矜持。待人蔑如。左右執事。小失尺寸。則必詬怒曰。我非爾國貂璫。敢爾無禮耶。蓋往時奉使者。多我國入朝宦寺故有是言。及見公。長身玉立。衣冠偉然。兩使瞿然相目曰。堂堂哉若人。自是嚴稜稍消。左右雖或迕意。皆不問。每見公。必留語從容。相與討論經史。或至夜分而罷。一日王給事語及嘗奉使遊蜀。公問入蜀有二路。陸由褒斜。水由荊門。公由何路。給事曰由江而入。公又問江出岷。濫觴至巙。東峽極險。至夷陵始漫流。信否。因擧江至某某地水。沿江上下襄樊荊鄂數千里間。山川遠近。戶口多寡。以至古今英雄並呑割據。歷歷縷數。兩使心服。執公手曰。若非胸藏萬卷。何能如此。公問中朝典故。雖宮禁隱密。皆爲公盡言。略無所諱兩使還到江上。依依不忍別。至涕出曰。望公早時來朝。使中國知海外有此人。還朝嘖嘖縉紳間曰。所不知者天上也。人間則無雙。其後艾郞中璞奉使而來。爲人傲猥。遇卿相貴人。皆睥睨不爲禮。入境首問公起居。及見公。斂容屛氣。送迎鞠躬。甚禮重之。出稗官雜記
李陰崖有跋尙友堂詩曰。國朝名臣。在英陵曰黃曰許。在宣陵曰許公諱琮字宗卿。號尙友堂。初釋褐。以謾佛見忤。光陵壓以淫威。以試其守。旋命進爵。從容不失儀範。自是華問日著。躐致靑紫。不由階級。儀觀環偉。風采凝嚴。如秋天冬日。望之也厲。卽之也溫。尤好性理之學。沈潛考究。多其所自得者。非銖積寸累塗諸耳目者比。復貫穿諸史。閱朱文公通鑑綱目。更兩旬而畢。其精勤俊敏多類是。故其施諸注措者。皆爲模倣爲可法。知遇宣陵。比德元首。入爲皐夔。出爲方召。歡欣鼓舞。期臻大猷。而遽爾殂殞。豈非命也歟。其爲詩文。類其德焉。不事雕琢。而渾厚端愨。自中聲律。有德者必有言。詎不信歟。 出丙辰丁巳錄
孫判院聚三休四休之說。稱七休居士。爲人純謹無他。事每經情直行。若關風俗綱常。必先致意。醉則發豪語無己。時嘗爲江原道監司。適時大旱。禱雨無效。公曰不得求雨者無他。守令不盡誠也。如或誠心感天。則天必應之。遂齋戒親出祈雨。半夜聞雨聲。喜而起曰。我當謝天。被朝服立庭中。無數拜天。雨勢漸急。有吏持傘倚後。公曰壓尊處安用傘爲。命去之。衣裳盡濕。又爲慶尙監司。若過孝子烈女門閭。必下馬再拜。雖雨不避。都事李緝擁蓑坐田間。公拜畢謂都事曰。足下何以爲之。緝曰我先令監拜矣。左右無不掩口。又嘗至平壤。見箕子墓。下馬瞻拜曰東人囿於禮義之場者。專是太師之敎。又嘗陪獵于穿嶺。猛虎被圍。公乘醉抽木箭彎弓馳馬欲入射之。衆人力持而止。凡事多類此。每於上前。書忠恕二字。懇懇陳啓。成宗以爲忠直。遂至大用。公位高而操心愈約。每對設酌。只用黑豆苦菜松芽爲蔌。專惡繁華之事。 出慵齋叢話
圃隱鄭文忠祠堂。舊在永川縣。文貞七休公嘗按是道。巡過郡境馬上醉睡。瞢騰昏昏。過圃隱村。夢間依俙見一老翁。鬢髮皤如。衣冠偉然。自言圃隱。且云所居頹廢。風雨無庇。如有意相屬之色。七休驚異之。詢故老得其古址。勖郡人營之。堂成。備物躬奠以落之。自傾大巵。醉書壁上曰。文丞相忠義伯兩先生。肝膽相照。忘一身立人紀。千萬世景仰無已。惟利所在。古今奔走。淸霜白雪。松柏蒼蒼。搆屋一間。將以蔽風雨。公靈安兮。我心安兮。竊疑忠魂毅魄。在天地間。藹然與造化元氣。同其流。豈肯區區以祠宇成毀有所丐貸於人耶。意亦此老胸中休休。平生以忠恕爲心。或能感通於恍惚間耶。 出龍泉談寂記上同
七休按行列郡。道見孝子烈婦旌表。必下馬展拜而過。就金烏山下。吉先生再故居。爲文以奠之曰。拜瞻祠下。彷佛儀形。惟山洛鳥水之如昨。念先生兮安在。奠蕉黃與荔丹。冀英靈之不昧也。此老無意雕琢於文字間。而胸中所發自能如此。可以想見其風槩。
孫勿齋爲方伯時。若遇旱乾。每致齋虔。禱雨輒應。如不雨則乃怒其神曰。予禱汝雨。不雨何也。怒神之言。雖非自反之道。而身若不誠則必不能發此言也。 出丙辰丁巳錄
凡人之將死。精神不亂。然歸化者有非道者。則固不能矣。孫二相舜孝常自言。吾願必無疾痛而終。一日與宰相劇飮話竟夕。晨起謂夫人曰。吾氣似不平。呼諸子來速具飯。訖曰。吾欲效少時挾冊遊師門也。乃取一卷書掖之。上下階級數次。曰困矣。吾欲休焉。乃隱枕而臥。家人以爲就睡。良久視之。則息絶矣。嘗命好燒酒一大壺。埋於靈石下。如命焉。 出謏聞瑣錄
權參判景祐。成廟朝以監察充書狀官赴燕。譯官濫賚物貨。馹路騷然。其屬託之家。多聯權貴。公一切探索以聞。苟托一布者。皆鞫于詔獄。命超公三階。及爲正言。倡臺諫請黜任士洪。言甚抗直。士洪乘夕抵家。陽爲不知者曰。誰敢爲此論者。公直答曰。惟我敢爾。士洪氣沮。不敢出一言而退。其在弘文館。論廢妃雖有罪。不宜褻處閭閻。上震怒。以爲陰附世子爲後日地。命下牢獄。責詰備至。公略不沮拙。開陳誠悃。援據歷代人主待廢妃事。言益剴功。上乃霽威。只罷其官。 出稗官雜記
鄭判書錫堅。骯髒不拘小節。弘文館本無丘史。只有選奴一頭。故爲官員者。例借於他司帶率。鄭爲應敎。獨不借丘史。只以懸蠟牌皁卒前導。跨馬居中。唯一奴隨後。道路指笑言山字官員。僚員戱曰。借一丘何害於大義。而失儀容至此耶。鄭笑曰。借丘於人眼前事。衛從多少背後事也。爲所不見。而前乞於人。吾所不爲。寧作山字官也。不願丐丘於人也。聞者大笑。 出思齋摭言
韓淸城致亨爲刑判。衙仕甚勤。郞官不堪早暮。頗厭苦之。其族侄韓健爲正郞。暇日往候。從容語曰。魚咸從世謙雖晩仕早罷。尙無不可。尊叔何自苦如此。淸城再頷之。徐曰。咸從道德文章俱優。雖懶於聽斷。猶有可取者。在吾與爾。他無所長。唯謹守所職。不亦可乎。吾之所志如此。健慚而退。 出忠敏公雜記
姜應貞。字公直。號中和齋。居恩津。以孝行稱。嘗母病。三年不解帶。藥必親嘗。一日夢天神降庭。謂公直曰。明日客來。必醫汝母病。明早果有一少年名元義者。自云居輪王洞。請宿。公直館之。以母病問之。少年果知醫藥者。以少年言試之。十五日病愈。後居父母喪。一從家禮。冬日裸跣。軆無完衣。事聞。命旌表門閭。蠲家丁役。公直爲人善誦經書。推占人命。又涉獵醫術。兼涉地理之書。少時遊太學。與長安俊士。依朱文公故事作鄕約。或月朝講論小學。其選皆一時知名之士。如金用石字鍊叔。申從濩字次韶。朴演字文叔。孫孝祖字無忝鄭敬祖字孝昆。權柱字枝卿。丁碩亨字嘉會。康伯珍字子韞。金允濟字子舟。此其首也。餘不盡錄。世之不悅者喧之。或指爲小學之契。或指爲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坎坷鄕曲。終老不試。 出南孝溫師友名行錄下同
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居玄風。篤行無比。平居必冠帶。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室家之外。未嘗近女色。手不釋小學。人或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其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卽鳴陽副正也。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參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師。年益高道益卲。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畢齋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專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畊馬可乘。先生和韵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異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蘇。大猷以小學律身。以古聖人爲準則。招來後學。恂恂然執灑掃之禮。修六藝之學者。滿於前後。謗論將騰。自勗勸止之。大猷不聽。嘗謂人曰。釋陸行設爲禪敎。弟子攷業者千餘人。其友止之曰。禍患可畏。行曰。使先知先覺覺後知後覺。吾所知者告人耳。其禍福天也。吾何與哉。行雖緇流。豈無可取。其言至公。 出秋江冷話
金大猷性學淵源。謹獨不倦。成廟朝。以行首擧。累遷爲刑曹佐郞。去數十年間。責我曰。於君已欲絶交。而情不忍云。問之則云。非君能斷也。追問之則曰。伯恭百源正中文炳皆有晉風。晉以淸談累。不出十年。禍在此輩云。予誓自今不復來往。後皆不保。 出辛永禧師友言行錄
鄭汝昌字自勗。入智異山。三年不出。明五經。窮極其蘊。知體用之源同分殊。知善惡之性同氣異。知儒釋之道同迹差。潛心性理之 學。醒狂敬之。庚子上下詔成均館。求經明行修儒生。館中擧自勗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自勗而講經。自勗退。癸酉年進士。其父六乙。施愛之亂死國時。自勗年少居喪無聞。後居母喪。典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庚戌年。參議尹兢薦其孝與學。士林無比。特召爲昭格署參奉。自勗上書辭免。上下敎褒之名益重。自勗爲人性端重。不飮酒醴。不茹葷菜。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如也。少時居館與人寢。鼾睡而不寐也。人不知也。一宵見獲於崔鎭國。館中喧之。以爲鄭某參禪不寐。 出師友名行錄
鄭先生自勗少時嗜酒。一日與友人痛飮。醉倒曠野。經宿而返。母夫人責曰。爾如此吾誰賴乎。先生深自刻厲。君賜飮福之外。更不接口。 出內辰丁已錄下同
鄭先生早年卜築頭流山麓。以爲終老之計。成廟召爲昭格署參奉。懇辭不允。乃出。先生律身甚嚴。終日端坐。雖盛暑。妻子未見肌肉。平生不喜作詩。只有一篇。流傳於世。其詩曰。風蒲獵獵弄輕柔。四月花開麥已秋。看盡頭流千萬疊。孤帆又下大江流。胸中洒落。無點塵態。蓋可想見矣。 花開縣名
圃隱之後。我朝性理之學。實自金大猷先生倡。同志者鄭先生自勗其人也。大猷精於理。自勗精於數。惜乎遭時不祥。殞於非命。蒼蒼者天。謂之奈何。中廟朝皆贈議政。致祭家廟。南孝溫字伯恭。號秋江。又號杏雨。才行卓越。惡衣食。常乘雌馬。兒童婦女。相隨指笑。性嗜酒。母責之。著止酒賦。十年不飮。病風復飮。病已復作止酒賦。五年不飮。後病篤。酒作生涯。不仕終家。廢朝以畢齋門徒斬大猷。以復昭陵疏陵遲伯恭屍。范希文曰。忠信天所扶。何獨不扶兩人耶。 出師友言行錄
秋江性慷慨。嘗師淸寒子。放迹物外。與世俗不相關。年十八。上書成廟。請復昭陵。每憤時事。或登毋岳。慟哭而返。危言激論。雖觸諱莫忌也。大猷自勗戒止之。終不聽。二公講明性理。操履以小學爲律。其所造。實與秋江異。然交契相厚。眞所謂芝蘭同臭也。 出丙辰丁巳錄
南孝溫字伯恭。號秋江。性固倜儻。篤學好古。有志節。嘗上書請復昭陵。被謫而不撓屈。友朱溪正深源安應世子挺擧進士。或不試東堂。慈氏有言。則時就試而不屑也。由是竟不第。弘治壬子。年纔三十九而卒。成化己亥。予徵入京。將赴日本。伯恭袖詩求見。送予于漢江。因以相好。同遊松都。上天磨山。家在高陽。策蹇相尋。宿鴨島。燒荻火啖魚蟹。探韵賦詩以徹夜。介予謁畢齋于湖南。嘗愛其詩。比之古人。旣死。遺孤忠恕有狂易病。且死非命。餘皆女婿。不集草。 出謏聞瑣錄
寒暄先生爲佐郞時。馳見辛進士永禧氏曰。今日吾當絶君。觀今士氣。且類東漢之末。朝夕禍起。如我則禍已迫矣。進退無及矣。諸君遠遯鄕曲。不者吾卽相絶。肯聽我言否。辛公忽引去稷山斜山下。號安亭。安亭嘗與南孝溫洪裕孫。結爲竹林羽士。文章行義。爲一時領袖。東南行過者。無不禮於其門。 出景賢錄
姜菊塢景醇。編晉山世稿。與金參判壽寧。點抹增損。以快人目。揚父祖詩名於後世。人以此爲孝。餘則以爲不孝。辛上舍永禧家。有祖父文禧公之詩集。友人有曰。子之家集可以印行于世乎。辛曰。我祖雖有能文名冠世。而家集所載。無一可傳者。嘗有挽一門生詩曰三十二而卒。不幸同顏回句之外。無佳詩。豈可刊行。人以此爲不孝。餘則以爲孝也。何者直述祖父之行藝。祗乃孝道。假使巧言飾筆以譽。父母之鬼寧無愧心於冥冥之中乎。出秋江冷話
南孝溫辛永禧。俱以上舍未顯達。早死。爲人好古倜儻。出世俗科臼外。南之遣興詩曰。蒯生友安期。知爲不世翁。豎兒看大楚。蟻封視沛公。如何說齊王。顧欲作元功。若非桀狗辨。幾陷大辟中。又匹夫楊王孫。生當漢武時。帝方事西北。擧世務駒馳。緩帶食萬戶。顧乃學支離。平生殘祈候。稗葬得如期。又嗣宗爲亡魏。狐媚視文帝。猖狂引麴生。六旬托末契。却得僞主婚。大節昭萬世。曹賊責無禮。可笑不自計。又四十七奏疏。欲廣靈修聰。終然四字論。不啻耳過風。賴用季通筮。末路號遯翁。寒泉一間舍。端合訂參同。又胡元駒大宋。兩京迷黃塵。魯齊許文正。被髮爲其臣。欲將堯舜道。强敎板屋人。方圓不能周。畢竟無新民。辛之寓意詩曰。男僕掃庭除。女僕掃堂閨。丈夫掃邊塵。志不在門楣。高臥斗屋下。掉我胸中旗。野人非大夫。大夫各自奇。又走馬下急坂。呼鷹入雲際。下馬雪消處。踞石時少憩。僕夫開冷飯。敲火湯沸細。家在十里餘。山腰夕陽麗。又花枝揷破笠。垢袂翻舞臂。云云。辛有氣槩。而蹭蹬於世。委室私婢爲其主所辱。怏怏而死。南亦遭身後之變。何其命隻。 出謏聞瑣錄
金時習江陵人也。新羅之裔。字悅卿號東峰。又號碧山淸隱。又號淸寒子。世宗乙卯年生。五歲能屬文。世宗命招承政院賦詩。大異之。召其父敎之曰。善養此兒。予將大用。乙亥年。光廟攝政。入沙門。名曰雪岑。入居水落精舍。修道煉形。見儒生則言必稱孔孟。而口不道佛法。人有問修煉事。亦不肯說。或有言金乖崖守溫坐化之事。岑曰。坐化於禮不貴。吾但知曾子之易簀。子路之結纓以死之爲貴也。不知其他。辛丑年間。長髮食肉。爲文以祭祖父曰。伏以。帝敷五敎。有親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故惡獸豈過虎狼。而微蟲無逾豺獺。能全親愛之性。又謹報本之誠。是皆天理之固然。而物欲之難蔽者也。伏念。愚蠢小子。似續本支。少沈滯於異端。嗟迷懵而未講。將修道可以薦拔。悟謊說莫如輪回。壯歲仍修。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攷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在腆而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感霜露之沾濡。憂歲月之逾邁。驚惶無已。嘆訝良多。如贖罪愆倘納堪輿之兩際。庶將面目得拜祖宗於九原。自壬寅以後。賭世將衰。不爲人間事。爲棄人於閭閻間。日與人爭訟於掌隷院。一日飮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曰。汝奴宜休。鄭若不聞也。人以此危之。其嘗交遊者。皆絶不往來。獨與市中狂易者遨遊。醉倒路側恒愚笑。後或入雪岳。或居春川山。出入無常。人莫知其涯涘也。其所喜者正中子容子挺及余。所著詩文數萬餘篇。播遷之際。散亡殆盡。朝臣儒士或竊取之。以爲己作。 出師友名行錄
金時習與柳襄陽手簡累百。其略曰。僕生纔八月。自能知書。族祖崔致雲命名時習。三歲能綴文。作桃紅柳綠三月暮。珠貫靑針松葉露等句。五歲讀中庸大學於修撰李季甸門下。司藝趙須命作字說以授。許政丞稠到廬曰。余老矣。其以老字作句。僕應聲曰。老木開花心不老。許擊節嘆賞曰。此所謂神童也。英廟聞而召于代言司。命知申事朴以昌試之。知申事抱于膝上。指壁畫山水圖曰。汝能作句乎。僕應聲曰。小亭舟宅何人在。如此作文作詩甚多。傳旨欲親引見。恐駭人聽。宜韜晦敎養。待年長學業成就。將大用。賜物還家。十三歲詣大司成金泮門下。受語孟詩書春秋。又詣司成尹祥。受易禮諸史。比長不喜榮達。且以親戚隣里濫譽爲惡。旣而心事相違。顚沛之際。英廟顯陵相繼賓天。光廟之初。故舊喬木。盡爲鬼簿。而復異敎大興。斯文凌蔑。僕之志已荒涼矣。遂伴髡者。遊山水。故人以我爲喜釋。然不欲以異道顯世。故光廟傳旨屢召。而皆不就。處身益以疏曠。然使人不齒。故或以僕爲癡。或以僕爲狂。呼牛馬皆便應。今聖上登極。用賢從諫。冀欲筮仕。十餘年前後。於六籍溫熟稍精。而累見身世相違。如圓鑿方枘。舊知已盡。新知未慣。孰知余之素志。故復放浪於山水間矣。是皆實事。惟公默志。 出稗官雜記
梅月堂平生心懷。世人未窺。觀詩集。好使薇蕨字。亦不知意所在。余見老衲。頗聞玄理。問所受師。則少時以沙彌。逮事五歲。仍曰五歲著述傳世者。僅百中之一二。問其由曰。老僧以侍奉陪居中興寺最久。每値雨後。山水添流。折作片紙百餘端。令具筆硯隨後。沿流而下。必擇湍急處而坐。沈吟作詩。或絶或律。或五言古風。書于紙放流。見遠去。且書且放。或至終夕。紙盡乃還。有時一日所述幾百餘首。此亦其意難窺。 出思齋摭言
東峯金時習。自髫齓已有能詩聲。遂擺落科臼。祝髮爲僧。改名雪岑。與南秋江爲方外遊。狂吟放浪。玩弄一世。逃世於禪。不奉其法。世以狂僧目之。行過市肆中。或凝睇忘歸。植立移刻。或便旋衢路。不避稠視。群兒詆笑。爭擲瓦礫以逐之。其藏獲田宅。任人取寇。曾不屑意。復息從其人請還。其人不肯。岑身卽雀鼠之庭。面爭供對。譊譊如市井之競。竟獲辨理。官券旣成。納懷中出門。視天大笑。遽出券碎裂而投之溝中。其戱人侮俗如此。光廟嘗作法會于內殿。岑亦被揀預。忽凌晨逃出。不知所之。遣使踵之。則故陷街路溷穢中。露半面而已。有沙彌。喉音淸楚。能出商聲。浪咏長吟。遺響裊空。凄有餘感。每値皓月朗然。中宵獨坐。令沙彌咏離騷經一過。輒泣下霑襟。性嗜飮酒。醉則曰不見我英廟。流涕甚悲。諸比丘推以爲神師。服事頗謹。一日合辭請曰。弟子等奉大師久。尙靳一敎。大師淸净法眼終以付誰。諸生迷方。願受金篦之刮。請彌堅。岑曰諾。大開法筵。岑具袈裟法衣。坐跏趺。緇流坌擁。合掌羅跪方聳聽。岑曰可牽一牛來。衆莫測所以。牽牛繫庭下。岑又曰將蒭一束置牛後。大笑曰爾等欲聞法。類是矣。 牛於畜類中最爲頑然人之迷冥無識者俗謂之牛後置蒭 緇衆赧然而退。近代詩僧。岑爲領袖。爲詩典重。少蔬筍氣。入金鰲山著書。藏石室曰。後世必有知岑者。大抵述異寓意。效翦燈新話等作也。 出龍泉談寂記
深源字伯淵。號醒狂。又號默齋。又號太平眞逸。太宗之玄孫。與余同年生。月日後於余。經明有行。兼通醫術。性忠孝不喜巫佛。平居冠帶。手不釋卷。殿講通四書五經。進階明善大夫。行朱溪副正。年二十五。凡前後五上言論治道。或允或不允。又廷論叔母夫任士洪不道異心。失意於祖父。謫長湍。又謫伊川。上書請見病父母。言語懇至。得允。丁未年。宗親科試講經史。擢第一人。賜樂賜酒賜階二品。而不封君。以前有忤祖父之過也。 出師友名行錄
朱溪正深源。非但解理學。亦能綴詩。雨後晩望曰。一犁春雨杏花殘。處處人耕白水間。獨立蒼茫江海上。不勝惆悵望三山。到雲溪寺曰。樹陰濃淡石盤陀。一逕縈回透澗阿。陣陣香風通鼻觀。遙知林下有殘花。 出謏聞瑣錄
朱溪君深源。有先見之明。成廟朝。知姑夫任士洪姦邪。上疏力辨。竟竄士洪於外。燕山末年。士洪用事。讚殺之。中廟卽位。嘉其忠義。贈爵旌閭。蓋深源之意。我爲宗親。當與國休戚。豈私一家之姑夫乎。今讀其疏。凜凜然有生氣。 出稗官雜記
貞恩字正中。號月湖。又號風谷。又號雪牕。拜秀泉副正。音律冠於世。悲彈慷慨。則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士然。 出師友名行錄
宗室秀泉副正貞恩。日以詩酒琴琶自娛。詩文音律。與百源齊名。聞大猷責我。盡棄舊習。故作俗態。閉門不出。不敢與親故通。果獨保。參判金紐聞琴嘆曰。手段政如澗邊梅花格。其立春帖詩曰。細翦紅箋架小春。馬上口呼詩曰。桑乾牛吐舌。所作蓋皆如此。 出師友言行錄
國朝雅樂。自堧後士族無可稱者。成化年中。有秋 任興 始顯。正中百源國聞。 鄭子芝 起而一洗舊習。敎坊推四人爲冠。余未嘗曉音律。日與四子酣暢。聞伶人尙論熟矣。其論曰。有秋心平而手下。國聞手妙而心酷。百源雄渾而手雜。正中調高而氣偏。余與正中遊松都彈琴時。親見士人妓女皆泣下。聖居山僧不涕出者無幾。還都之日。乘馬躕躇。行人立聽。伯牙千載之後。非此人爲誰乎。氣偏之語。無乃過當。百源有秋嘗備樂器。日夜肄習。正中家無風物。行行到處偶執他樂器。而音律恂如也。余嘗服其手藝甚高也。然知音者或譏正中琴類伯牙。而時中不及百源。豈非濟世經略之才蘊而歸之於小技故發之偏也。僕不堪涕泗。嗚呼不展也。 出秋江冷語
賢孫字世昌。神堯之後。官至鳴陽副正。動以禮法。律身篤行亞於大猷。嘗欲行冠禮。大猷止之。丁母憂。一從家禮。 出師友言行錄
宗室鳴陽副正。瀟洒出塵。喜文雅作詩。如其爲人。遣意詩曰。懷疴謝塵事。終日檢詩篇。藥蔓穿疎壁。蛛絲掛短椽。傾壺盡餘酒。高枕眷飛鳶。到處生涯在。何須負郭田。小雨茅齋濕。新晴枕席涼。水衣緣礎上。庭草過墻長。露浥苽花净。風含蕙葉香。悠然午眠破。林抄淡夕陽。秋日詩曰。白露園林淨。高風草木衰。覆盃流竹葉。汲井煮桑枝。落日雁橫塞。秋窓蟲吐絲。誰憐貧病客。長吟楚人詞。又空盤推馬齒。荒苑長鷄腸。水閣靑奴冷。岩田腐婢香。莓苔侵礎遍。蓬艾繞窓長。紫蘇葉帶回風響。紅蓼花含返照明。溪禽帶雨全身濕。山杮經霜半臉紅。常有淸羸之疾。未三十而歿。其感懷詩可見兆其不壽云。光陰如電瞥。歲月不貸余。成名雖及時。畢竟空歸虛。形骸非我有。一朝無復餘。英華豈足賴。天地眞蘧廬。笑彼窮途人。痛哭終何如。 出謏聞瑣錄
安應世字子挺。號月窓。又號鷗鷺主人。又號烟波釣徒。又號藜藿野人。爲人淸淡洒落。安貧喜分。不求功名。不學仙佛。不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物。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於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歿。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 出師友名行錄下同
安遇字時叔。孝行冠於鄕。居父喪。一從家禮。從佔畢齋受業。旣而無仕心。始異於畢齋。嘗擧於鄕。赴京入會試。四館年少者驕傲。長老鄕生欲撻之。時叔曰。安可以父母遺體。無罪而自毀。以求名利乎。不入而去節操可方東漢云。
柳從善晉州人。字如登。居山自晦。朋戚罕見其面。
禹善言禮字德父。號楓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辛丑年。南行嶺南。謁佔畢齋先生於廬幕。先生喜之。字曰子容。
崔河臨字鎭國。號太虛堂。所性喜功名。庚子年進士。是年夏。妖僧學祖。敎其徒雪儀。潛回佛像。云佛自行。致粟帛錦布。日以千數。太學上書請誅妖僧凡五上書。不得允。疏文大抵皆出鎭國手。丙午七月歿。年三十二。家貧不能斂葬。友人致奠而葬之。所著安宅記。傳于世。
高淳字煕之。又字眞眞。又字太眞。濟州人。爲人有聾病。畫地成字以致意焉。戊戌年。應詔上書論時政。得妄名。人或告之。煕之聞而喜之。自號妄煕之。初見辛德優於諸儒中。諸儒相與語詡詡。煕之書一絶於紙云。小閣春風靜。淸談摠有餘。聾人無一味。垂首獨看書。德優喜之。和其詩曰。世聲聒溷濁。糞壞嗟鼻餘。羡君勝房老。晝隱千卷書。自是以爲知心友。
高煕之嘗有聾病。篤信好學。一日吟詩就寢。先父中樞。 守宗 夢與一詩曰。華髮蒼蒼減昔年。孤身寂寂守山前。莫言白骨無知感。聞汝吟詩我不眠。余嘗序其詩。略曰。一氣於天地。至而伸散而歸。其實一物。而人死之餘。氣各分諸子孫身上。有動於子孫。則有感於神明。昭昭也。雖然。人必直哉。惟淸而愀然。如復見父母陟降常在左右矣。若高煕之者。所謂惟淸者也。 出秋江冷話並下同
東人效兀良哈舞。搖頭揚目。聳肩屈臂。二股十指同時屈伸。或作張弓狀。或作狗行狀。或爲熊經鳥伸或退風生。自公卿大夫。以至於士庶人倡優女子。解音律便容體者。無不爲之。號胡舞。被之管絃。議政府右贊成魚有沼尤善之。余初亦以爲風流事。亡友子挺極言非之曰。媚人之行。柔嫚之態。非人所爲。況戎狄譬如禽獸安得吾身上加禽獸事乎。余聞之。頗不然之。旣讀漢書蓋次公效檀長卿沐猴辭。然後方知子挺之正論。而前賢後賢之同一揆也。
慶徵君諱延字大有。淸州人。冬月病父嘗欲食魚膾。君鑿氷置網。不得魚。君泣曰。古人叩氷而得魚。今吾寘網而不得。誠感固矣。赤脫巾襪。立氷穴經一夜。得烏鯉。父又欲食辛甘菜。君泣於菜根。菜忽生。歸而食其父。父病愈。及父歿。居廬三年。饘粥蔬果之羞。一依家禮。事母定省。年踰五十不少衰。母歿又如喪父時。光廟徵辟不就。主上之九年。應聘爲司宰監主簿。召入內殿。問曰。聞卿家居叩氷魚躍然乎。對曰。冬月無魚之時。父以爲必不得。設網以求甚密。幸而得之。父喜謂孝感所致。鄕里聞而不察。謂孝感所致。臣實不能如此。上曰。卿讀幾書。曰。四書二經。上曰。四書二經之中。何語爲第一義乎。對曰。四書二經之中。書稱舜之大孝。此臣之所欲而不能者。又稱周公之忠。此臣之所欲而不能者。上嗟歎久之。
淸州有楊水尺三兄弟。所行不類。聞慶徵君事親有道。棄其舊染。恂恂然執子道。亦昏定晨省。喪親之日。勺飮不入口。居廬三年。不進酒果。喪畢之後。三人同居。盡得歡心。相自戒曰。若有不類之行。慶生員聞之。不亦愧乎。
兪生員垣者沔川人。戊申年間。挾書詣闕。陳所學數千餘言。皆切中朝廷之病。士林萃而騰笑。兪嘗號其亭曰淸風。其友朴生扁其齋曰明月。縉紳之間有可笑事。必曰。兪淸風朴明月。以此言詆之。二人坎坷不試。亦未嘗有干進心。
壬寅年。開寧縣松坊里一人耕田。得古石佛。耳目口鼻皆泯滅。置之田畔。偶有病喘人。拜之病若輕歇。遂以爲靈。或云放光。隣邑有宿疾者。無嗣息者。未娶婦者。失藏獲者。凡中心有所爲。禱之輒驗云。男女雜還。持米布紙錢香燭花果者。日夜不絶。有僧來主香火。有施主作瓦屋。又將作大刹。士族婦女皆親至祈禱。開寧縣監金山訓導。皆禱其子病。或祈嗣。時金山郡守李仁亨聞之。遣儒生及吏卒。捕其僧及施主逐之。金文簡公辭應敎之命。方居金山。以詩賀李守云。拋擲菜田不記春。頑然拳石有何神。初如求食木居士。漸作撞錢土舍人。男女幾家將汙染。香燈一里欲因循。我侯直是邠州守。擊破妖狐▣▣▣。時人美之。有聖朝方信有英雄之句。今開寧之石佛。其怪愈於妖狐。而無敢攻袪惑者。明府不以爲他境之事。而毅然遣卒逐捕妖首。焚毀紙錢。使愚民曉然知其爲所誤。眞曠世一奇事也。 出謏聞瑣錄
崔應敎溥羅州人也。宋正字欽靈光人也。同時在玉堂。俱受由下鄕。相距十五里。一日正字訪應敎於家。語間應敎曰。君騎何馬來耶。正字曰馹也。應敎曰。國之所給。止于君家。自君家至吾居。乃私行也。何至乘馹。歸朝應敎啓此意罷之。正字來辭於應敎。則曰。若君年少輩。後當操心可也。祖宗朝士大夫奉法。友朋勸勵服義。可以想見。 出前言往行錄
成廟昇遐之日。城中士大夫巨族。多有婚媾者。或乘朝而往。或當午而往。或若不知而往。其後事覺。皆抵罪。竹城君朴之蕃武人。不解文字。前一日是醮子之夕。賓僚畢集。忽聞大內疾劇。乃曰。君父不豫。臣子何忍私行婚禮。遂謝絶賓僚而返之。時有議者曰。儒林反不如武。可歎也已。 出慵齋叢話


해동야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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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신하들이 밤이 깊어서 크게 취하여 나가면 어전(御前)의 촛불을 주어 원(院)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곧 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이다. 《용재총화》이하 동
○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같은 것인테, 이것음 모두 내(성현)가 기억하는 바요, 그 밖의 인쇄한 제서(諸書)가 또한 많다. 또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다만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의 시문(時文)은 산일(散逸)이 되어서 인쇄를 못하였으므로 한스럽다.
○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장력이 걸출한 선비가 옥서(玉署 홍문관)에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를테면, 매계(梅溪 조위)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이며, 뇌계(㵢溪 유호인) 그리고 나의 선대인(先大人) 김흔(金訢) 같은 이들은 더욱 많은 은총을 입어서 항상 지은 바를 매월 써서 올리게 하였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다 하여 외직(外職)을 청하므로, 특별히 쌀과 콩을 주어 그 부모에게 넉넉하도록 하였다. 뇌계가 외직에 가면서 한 시구를 올리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군신간이 멀어졌고 / 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조용히 감상하며 이르기를, “호인(好人)이 몸은 비록 외방에 있으나, 마음은 군(君)을 잊지 않는구나.” 하고, 또 매계가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제사를 내려 영화롭게 하여 은총이 죽고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해 일어났다. 인재를 고무(鼓舞)하고 사기를 진작함에 있어 진실로 천세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성사라고 하겠다. 영상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의 정자(正字)로서 상사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복을 마치자 다시 벼슬을 주니, 전례대로 은명(恩命)을 사례하였다. 임금이 다시 불러 합문(閤門)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鷹) 하나를 팔에 얹어 가지고 와서 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노모가 있으니, 공사에서 물러나 틈이 있으면 교외에 가서 사냥하며 자미(滋味)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또 밤에 입대(入對)하니, 주과(酒果)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소매 속에 감귤을 열두어 개나 넣고는 인하여 취해서 엎드려 인사를 가리지 못하는지라 중관이 업고 나갔는데, 소매 속에 넣은 감귤이 모두 땅에 떨어진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은 감귤 한 쟁반을 옥당에 보내며 이르기를, “어제 성희안이 귤을 소매에 감춘 것은 그 노친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사한다.” 하였다. 공이 뼈에 새기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더니, 마침내 정국(靖國)의 거사로 보은하였다. 선묘(宣廟)의 선비를 대우하는 데 지성스러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한 식견이 진실로 사람이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이었으나, 공은 위태한 것을 개혁(중종반정)하여, 나라를 안정하게 하고 공훈이 사적에 오르니 역시 지우(知遇)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용천담적기》이하 동
○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지만, 다만 석각(石刻)한 수본(數本)만이 있을 뿐이고, 세상에 전하는 지극한 보배는 귀신이 감추어서 진적(眞跡)은 보기 드무니 아깝도다.
○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임금이 또 가끔 먹 장난에 뜻을 두고 소화(小畫)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으로 별로 모습(模習)조차 아니 하여도 그 오묘함이 옛 법도에 이르렀다. 온갖 정무를 보는 여가에 청연(淸讌)의 자리가 있으면 때때로 한묵(翰墨)과 친하여 간략하게 붓을 휘두르곤 했는데, 한 치 되는 쪽지나 한 자 되는 폭도 세상에 산락(散落)되어 그것을 얻은 사람은 공경하여 애완하여 깊이 싸두는 것이 아름되는 옥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은 글씨를 좀 잘 썼는데, 성묘가 이를 보고 가상히 여기며 그 고을에 글을 내리어 지필을 주게 하여 장려하니 영화가 향려(鄕閭)에 빛나서 경동(驚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무릇 재예 세기(才藝細技)가 어찌 족히 임금의 기림을 움직였으리오 마는 성능(聖能)하다 하여 그것을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장하기를 융성히 함은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文章)ㆍ서화(書畵)ㆍ공기(工技)ㆍ백술(百術)이 그 격려에 힘입어 정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성인의 고무(鼓舞) 전이(轉移)의 계기가 다만 한 번 빈소(嚬笑)하는 순간에 있음을 알았다. 만일 그 성의가 범정(凡情)에서 크게 초월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백방으로 권칙(勸勅)하더라도 엄정한 정과(正課)를 세움에 있어 다만 소란하여 점차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심정을 감동하는 데 이같이 깊음이 있으리오.
○ 성묘(聖廟)는 왕대비(王大妃)를 위하여 날마다 곡연(曲宴)을 베풀고 내수비(內需婢) 5ㆍ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항시 성종에게 눈짓을 마지않는지라 성묘가 그것을 보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는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로부터 곡연도 파하게 되었다. 또 성묘는 굳이 볼 일이 없으면 하루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었으며, 또 날마다 세 번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문안드리곤 하였다. 또 종실(宗室)을 데리고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난 뒤에는 종실과 마주 대하고서 반드시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거기에는 기악(妓樂)이 따랐으니, 이는 진실로 태평성사(太平盛事)였다. 그러나 어떤 의론하는 자는 혹 연산군(燕山君)이 연락(宴樂)을 탐한 것은 눈과 귀에 익숙해져서 그러하였다 하니, 아까운 일이다.김흔의《전언왕행록》
○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상자 속에 거두어둔 절지 찰한(截紙札翰)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이르기를,
깊숙한 정자에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니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또,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듯 솟았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하였다. 또,
새 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같이 산듯하다 / 新瓜初嚼水精寒
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또,
형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시오 / 問兄何事送羲娥
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또,
친척과 모이기를 기약하고 / 期會親戚
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성묘가 평소 장난삼아 썼다가 버린 것임을 알겠다. 위에 두 절구는 반드시 그림에 쓴 시일 것인데, 누구의 소작인지 알지 못하겠고,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준 편지 초고이다. 성묘는 매양 월산대군을 내전에 데려다가 곡연(曲宴)을 베풀고, 나가면 편지로 수창(酬唱)한 것을 보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그 우애가 지극한 것이었다. 《소문쇄록》
○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經筵)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文苑)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丙子難 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藝文)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宣醞)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皁隸)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館官)을 분번(分番)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上巳 3월 3일)와 중양(重陽) 가절에는 주악(奏樂)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文)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이하 동
○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飯僧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寺社)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公卿)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殯所)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佛席)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七七齋)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포물(布物)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食齋)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지냈는데, 이것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度僧)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州郡)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牒)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物)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 태종이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鑄字)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古註)》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丁亥字)’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改鑄)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庚子字)’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서의 자(字)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대자(大字)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鉛)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訓義)”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文宗)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壬申字)’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乙酉字)’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王荊公)과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을 자본(字本)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辛卯字)’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綱目)》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癸丑字)’라고 한다.
○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면서 그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凶險)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寡人)의 몸에 흉처(凶處)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足跡 자손인 듯)을 삭거(削去)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宗社)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大義)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庶人)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外人)들이 원자(元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威福)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漢)의 여후(呂后)와 당(唐)의 무후(武后)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賜死)하였으니, 종사대계(宗社大計)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唐陽公主)가 죽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前事)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長公主)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地火)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晉)의 혜제(惠帝) 원희(元熙) 연간에 지연(地燃)이 있었고, 조(趙)의 석호(石虎)와 후진(後秦)의 부견(苻堅)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貞觀) 때에 백주(白洲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寧海)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尙州)에서 지화가 있었다.”고 하는지라, 내신(內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石塊)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 갑진년 9월에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恭威公)ㆍ편숙공(褊肅公) 그리고 제극공(齊克公)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과 윤계겸(尹繼謙)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偏急)하다고 하며, 조의(朝儀)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擬進)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恭肅公)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李繼孫)이 시호를 의진(擬進)하였는데, 장경공(長敬公)과 정헌공(玎憲公)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長)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玎)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李繼孫)은 영안도(永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誨人不倦)은 김구(金鉤)와 김말(金末)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善人君子)입니다만, 장(長)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述義不勉)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玎) 자는 불가하나이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敬憲公)이라고 써서 내렸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成慨)가 쓴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規警)을 삼으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帖裏 속옷)와 흑서피(黑黍皮 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金箋紙)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疏軸)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蓍龜)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위징)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楷正)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金友臣)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삼았다.
○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世子) 빈(嬪)을 납궁(納宮)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嬪父)인 좌참찬(左參贊) 신승선(愼承善)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婚日)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忠敏公) 《잡기》
○ 성묘조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군이 부하(負荷 임금의 큰 직무)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임금을 어탑(御榻)에 가까이 가서 용상을 어루만지며 청한 것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죄주기를 청하고, 또 어떤 밀계(密啓)인지 듣고자 하였지만, 임금은 “호색으로 나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하곤 끝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고려 때의 문사는 모두 《시경》과《이소경》으로 학업을 일삼더니, 오직 정포은(鄭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제창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권양촌(權陽村 권근)ㆍ권매헌(權梅軒 권눌) 형제가 능히 경학에 밝고 또 문장에 능하였다. 권양촌은 사서 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綠)》과《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서 유학에 우익(羽翼 보조)한 공이 적지 않다. 그 후임으로 스승된 자는 황현(黃絃)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잘 들을 수 없고, 윤상은 경전이 가장 정결하며, 작문(作文)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경전과 작문이 모두 정밀하였는데, 김말은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항시 의논이 있을 때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마지않으며, 수업(受業)하는 자도 역시 두 가지를 갖추었다. 두 공(김구ㆍ김말)이 모두 세조의 알아주심을 얻어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나이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끝내 그 고향에서 아사(餓死)하였다. 또 그 다음을 들어 말하면, 공기(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기(兪鎭頎)인데, 그들은 익살스럽고 말은 잘하나, 작문하는 데는 편지 같은 작은 문구도 한마디 못 지어서 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도 회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생원 김순명(金順明)이 마침 방에 있다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답장을 썼는데, 그 사어(辭語)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기(頎)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서 배웠는데, 자네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니, 진실로 청(靑)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쪽풀보다 푸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정자영(鄭自英)은 오경만 잘 알 뿐 아니라, 또한 능히 제사(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매우 출중하여 세조의 발탁을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유진기는 고집으로 사리에 불통하였다. 근자에는 노자형(盧自亨)과 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연로하다고 하여 우대하여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는데 모두 고향에 가서 죽었다. 《용재총화》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정자를 한수(漢水) 남쪽에 짓고 그 이름을 압구정(押鷗亭)이라고 하였다. 임금을 옹립한 공을 한 충헌공(韓忠獻公 충헌은 송 나라 명신인 한기(韓琦)의 시호)에게 견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늙었으므로 강호(江湖)로 사퇴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작록에 미련이 남아 있어 가지 못하더니, 임금이 작별의 시를 지어주니, 조중 문사(朝中文士)가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을 하여 수백 편이 되었다. 그중 판사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세 번 불러 보심이 은근하여 두터운 총애를 받았으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라고 하였더니, 한명회가 미워하여 현판 다는 데 끼워넣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어릴 때부터 출중 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나이 12ㆍ3세 때에 여러 아이들과 같이 절에 가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야반에 도적이 와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도적질해 갔다. 이튿날 여러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흩어졌으나, 허종은 홀로 끄떡도 하지 아니하고 베개를높이하고 길게 누워 붓을 들고 벽에 글을 쓰기를, “내 옷은 탈취해 갈지라도, 내 신은 훔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옷도 신도 모두 탈취해 갔으니, 내 생각에는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좋지 않게 여기노라.”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이미 그 바탕이 비범함을 알았다. 《사재척언》
○ 양천군(陽川君) 허종은 생김새가 훤칠하고 풍채가 점잖아서 당시에 대인군자로 추중하였다. 젊어서부터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천문(天文)ㆍ역률(曆律)ㆍ의복(醫卜)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므로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가산(家産)은 돌보지 아니하여 사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볕을 가릴 정도이면서도 항시 공은 담담하게 여겼다. 《청파극담》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신년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給事) 왕창(王敞)이 효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는데, 허 충정공(許忠貞公)이 원영사(遠迎使)로 의주에 마중갔는데, 양사(兩使)는 잘난 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며, 좌우의 집사(執事)가 조금만 실수하면 성내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환관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하고 꾸짖었으니, 이는 지난날 봉사자(奉仕者)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환관된 자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종을 만나니, 공의 큰 키와 단정히 서 있는 자태며 의관이 위연(偉然)함을 보고, 양사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짓하고 말하기를, “당당한 인품이로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더니, 이로부터 엄하고 모난 것이 조금 누그러져서 좌우에서 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매양 공을 보면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면, 밤이 깊어야 파하더니, 하루는 왕 급사(王給事)가 사신으로 촉(蜀)에 간 일이 있다고 말하니, 공이 묻기를, “촉을 가려면 두 길이 있습니다. 곧 육로는 포사(褒斜)에서 들어가고, 수로는 형문(荊門)에서 들어가는데, 공은 어느 길로 들어갔습니까.” 하니, 왕 급사가 답하기를, “강을 타고 들어갔소.” 하는지라, 공이 또 묻기를, “강이 민강(岷江)에서 시작하여 기산(■山)의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물이 극히 험하다가, 이릉(夷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흐른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던가요.” 하였다. 다시 말을 이어, 강이 모모(某某)란 곳에 이르는 강 연안 위아래의 양(襄)ㆍ번(樊)ㆍ형(荊)ㆍ악(鄂) 등지의 수천 리 사이를 산천의 원근과 호구(戶口)의 다과며 고금 영웅들의 뺏고 차지하고 나누어 점령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들어 세니, 양사가 심복하고 공의 손을 잡으며, “만일 가슴속에 만권 서책을 갈무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겠소.”라고 말하였다. 또 공이 중국 전고(典故)를 물으면 비록 궁중에서 금하는 비결이라도 공을 위하여 모두 말하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양사가 돌아가려고 강에 왔을 때에는 섭섭하여 차마 작별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빨리 조회하러 사신 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다. 환조하여 진신(縉紳)들에게 떠들고 찬양하며 말하기를, “천상(天上)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짝할 이가 없다.” 하였다. 그 후에 낭중(郞中) 애복(艾璞)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사람됨이 거만하고 외람되어 경상(卿相) 같은 귀인을 만나도 모두 흘겨보면서 예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국경에 들어와 첫말에 공의 기거(起居)를 묻더니, 공을 본 뒤에는 얼굴빛을 고치고 기색을 화하게 하여 대하고, 영송(迎送)하는 데 자신을 낮추며 대우하는 예법이 심히 정중하였다. 《패관잡기》
○ 이음애(李陰崖 이자)가 상우당(尙友堂 허종) 시집에 발문(跋文)하여 이르기를 “국조의 명신으로 말하면 영릉(英陵 세종) 때는 황희(黃喜)ㆍ허주(許稠)요, 선릉(宣陵 성종) 때는 허공이니, 휘(諱)는 종(琮)이요, 자(字)는 종경(宗卿)이요,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할 때에 불교를 만만(謾謾)히 본다고 역정을 받아 광릉(光陵 세조)이 지나친 위엄으로 눌러서 그 뜻가짐을 시험하고서야 곧 벼슬을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조용하게 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순서를 뛰어 재상에 이르렀고, 계급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체격과 용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화하고도 엄숙하여, 마치 가을 하늘과 겨울 날씨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가까이 나아가 대하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차분히 상고하고 연구하였으니, 대부분 그가 자득한 것은, 한 푼어치씩 쌓고 한 치 길이씩 덧붙여서 이목(耳目)에 칠한 정도의 자와는 비유가 되지 아니했다. 또한 모든 역사에 통달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20일 만에 끝마치니, 그 정근(精勤)하고 준민(俊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처리한 것이 모두 본받아 법으로 삼을만했다.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되어 그 덕이 원수(元首 임금)와 비등하여, 들어와서는 고요(皐陶) 기(夔) 같은 명신(名臣)이 되고, 나아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중신(重臣)이 되었다. 기뻐하고 고무되어 대유(大猷 큰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급작스레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의 시와 문도 그 덕망과 같아서, 깎고 다듬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여서도 혼후(渾厚)하면서 단정하고 정성스러워서 자연히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더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병진정사록》
○ 손 판원(孫判院 손순효)은 삼휴설(三休說)과 사휴설(四休說)을 취합하여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해서 다른 일이 없었으며, 매양 곧은 뜻으로 곧은 행실을 하였으나, 풍속과 강상(綱常)에 관한 일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가다듬었으며, 취하면 호기스러운 말이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에 마침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守令)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하늘이 감동하여 반드시 응해 줄 것이다.” 하며,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몸소 나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그 날 밤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고, 관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 절하였다. 우세가 점차 급하여, 한 아전이 우산을 가져다가 받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높으신 어른 앞에서, 어찌 우산이 필요하랴.” 하고, 명하여 가져가게 하니, 의복이 다 젖어 있었다. 또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효자와 열녀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비록 비가 올지라도 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때에 도사(都事) 이집(李緝)이 도롱이를 두르고 밭에 앉아 있는지라 공이 재배를 마치고 도사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이집이 대답하기를, ”나는 영감(令監)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므로, 좌우에서 입을 가리고 웃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또 평양에 갔을 때에는,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말에서 내려 우러러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동쪽 사람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교훈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한번은 천령(穿嶺)에서 사냥에 배행한 일이 있었는데, 맹호를 포위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나무화살을 뽑아 활에 메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쏘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항시 임금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서 지성스럽게 진계(陳啓)하니, 성종이 충직하다고 여겨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공은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이 더욱 검약하여 매양 술상에는 흑두채(黑豆菜)나 고채(苦菜 씀바귀)가 아니면 송아(松芽) 같은 것으로 안주로 삼았고 오로지 번화한 것은 싫어하였다. 《용재총화》
○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이 예전에는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칠휴공(七休公)이 이 도(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순찰하여 영천(永川) 군경을 지나다가, 마상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어 혼혼(昏昏)히 졸면서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가는데 꿈에 빈발(鬢髮)이 하얗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이 희미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포은(圃隱)이라 하며 말하기를, “사는 집이 퇴폐하여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의 뜻이 있는 듯한지라, 칠휴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옛 노인에게 물어서 그 고지(古趾)를 찾아서 군민들을 권면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제물을 갖추어 몸소 전을 드리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고 취하여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承相 남송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과 충의백(忠義伯 포은의 봉호가 충의백임) 두 선생은 간담(肝膽)이 서로 비치도다. 일신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강을 세웠으니, 천만 세를 두고 경앙(景仰)하여 마지않는도다. 이(利)가 있는 곳을 찾아 고금이 분주하건만, 서리와 같이 맑고 눈같이 희며, 송백(松栢)과 같이 창창(蒼蒼)하도다. 여기에 한 칸 집을 얽어서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공의 영혼이 편안할 때, 내 마음도 편안하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충성된 혼과 굳센 넋은 천지간에서 애연(藹然)한 화기로 조화원기(造化元氣)와 같이 흐르나니, 어찌 구구히 사당집의 성하고 헐어진 것으로써 인간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으리오마는, 생각건대 이 늙은이의 흉중이 평화하고 아름다우며 평소에 충서(忠恕)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혹 황홀한 사이에 서로 감통(感通)할 수 었었던 것인가. 《용천담적기》
○ 칠휴가 열읍(列邑)을 안행(按行)하면서 길가에 있는 효자와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전배(展拜)하며 지나는데, 어느 날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길재(吉再) 선생의 고거(故居)에 나아가서 글을 지어 전드리기를, “사당 아래서 우러러 절하니, 생시의 모습이 방불하외다. 오직 오산(烏山)과 낙수(洛水)는 예 같은데, 선생을 생각함이여, 어디 계신지요. 누른 파초 열매와 붉은 여자(荔子 과일 이름)를 전드리니 영령(英靈)이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이 늙은이는 문자를 깎고 다듬는 데에 뜻이 없으면서도 흉중에서 나오는 바가 자연히 이와 같았으니, 그 풍개(風槩)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천담적기》
○ 손물재(孫勿齋 손순효)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가뭄을 만나면 매양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서 비를 비는데, 문득 응하여 비가 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노(怒)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를 너에게 빌었는데, 너는 비를 주지 아니하니, 어찌 된 것이냐.” 하였으니, 신을 노하게 하는 말은 비록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아니나, 만일 자신이 정성스럽지 아니하였으며, 반드시 능히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병진정사록》
○ 무릇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나, 귀화자(歸化者 죽는 자)가 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二相) 손순효(孫舜孝)는 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통이 없이 죽기를 원한다.” 하더니 하루는, 재상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담화하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불편하니 아이들을 불러오고 속히 밥을 지으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책을 끼고 사문(師門)에 다니던 것을 흉내내 보겠다.” 하고는 이에 한 권의 책을 끼고 계단을 두어 차례 오르내리더니, “피곤하다. 내 쉬겠다.” 하고서는, 가만히 베개에 누우니, 집안 식구는 잠들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얼마 후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좋은 소주를 큰 병에 넣어 영석(靈石) 아래 묻어 두라고 전부터 명(命)하여서, 그같이 하였다. 《소문쇄록》
○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는 성묘조 때에 감찰로 있으면서 서장관이 되어 중국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역관들이 과대하게 물화를 가져오므로 역로(馹路)가 떠들썩하였다. 그 물화를 부탁한 것은 권귀의 집안과 많이 관련되었는데, 공은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게 하되 한 필의 직물이라도 부탁한 자는 모두 조옥(詔獄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승진하게 되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대간을 창도하여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임사홍이 그날 밤에 공의 집에 가서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언론을 하였는가.” 하니, 공이 솔직히 대답하기를, “오직 나라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소.”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히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홍문관에 있을 때 말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염(閭閻)집에 함부로 처해 있을 수는 없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음흉하게 세자에게 붙어서 후일의 영화를 바라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하옥을 명하고 많이 힐책하니, 공이 조금도 막히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역대 임금의 폐비에 대한 일을 끌어다 증거로 진술하니, 그 말이 더욱 개절(剴切)한지라, 임금이 이에 노여움을 풀고 그의 관직만 파하였다. 《패관잡기》
○ 판서 정석견(鄭錫堅)은 시원스러워서 작은 예절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홍문관은 본래 구사(丘史)가 없고, 다만 선노(選奴) 하나만 있었다. 그러므로 관원들이 출행할 때에는 타사(他司)에서 구사를 빌리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는데, 정석견은 응교(應校)가 되어서도 홀로 구사를 빌리지 아니하고, 다만 납패(蠟牌)를 든 조졸(皁卒)이 앞에서 인도하여 가운데서 말을 타고, 그 뒤에 종 하나만 따라가는지라, 길에서 보는 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자관원(山字官員 셋만 늘어선 것이 산(山) 자와 같음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였다. 동료가 희롱하기를, “한 번 구사를 빌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의에 어긋나기로 이같이 위엄을 잃느냐.” 하니, 정석견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사를 빌리는 것은 남의 눈앞의 일이요, 호위하는 자의 많고 적은 것은 등 뒤의 일이다.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남의 앞에서 구차한 말을 하는 것은 내 맹세코 하지 않겠다. 차라리 산자관(山字官)이 될지언정, 남에게 구사를 빌리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대소하였다. 《사재척언》
○ 청성군(淸城君) 한치형(韓致亨)이 형조 판서가 되어서 근무가 심히 성실하여 그 밑에 있는 낭관들이 아침저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족질인 한건(韓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틈이 있을 때에 문안차 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는 비록 늦게 출근하여 일찍이 파하여도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데, 존숙(尊叔)은 어찌 노고를 이렇게 많이 하시나이까.” 하니, 한 청성군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함종은 도덕과 문장이 모두 우수하여 비록 송사를 결단함에 게으르더라도 취할 바가 있지만, 나와 너는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직무에 부지런한 것이 좋지 아니하냐. 나의 뜻은 이렇다.” 하니, 한건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충민공잡기》
○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齋)며 은진(恩津)에 살았고, 효행으로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 병환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고 드리더니, 하루는 꿈에 천신이 뜰에 내려와서 강공직에게 말하기를,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니, 반드시 너의 어머니 병을 치료하리라.”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 과연 한 소년이 와서 이름은 원의(元義)이며 윤왕동(輪王洞)에 산다면서 유숙하기를 청하는지라, 공직이 쉬게 하였다. 어머니 병을 물으니, 소년이 과연 의약을 알므로 소년의 말에 따라 시험하였더니,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후일 부모상에 거할 때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고, 겨울에도 맨발에 솜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정문을 짓고 그 집에는 정역(丁役)을 면하게 하였다. 강공직은 사람됨이 경서를 잘 외우며, 인명(人命)에 대해 추점(推占)을 하였고 또 의술을 알았고, 겸하여 《지리서(地理書)》에도 능통하였다. 소시에 태학(太學)에서 놀며 장안의 준사(俊士)와 함께 주문공의 향약(鄕約) 고사에 따라 아침과 밤에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 이를테면 김용석(金用石)자는 연숙(鍊叔)ㆍ신종호(申從濩)자는 차소(次韶)ㆍ박연(朴演)자는 문숙(文叔)ㆍ손효조(孫孝祖)자는 무첨(無忝)ㆍ정경조(鄭敬祖)자는 효곤(孝昆)ㆍ권주(權柱)자는 지경(枝卿)ㆍ정석형(丁碩亨)자는 가회(嘉會)ㆍ강백진(康伯珍)자는 자온(子蘊)ㆍ김윤제(金允濟)자는 자주(子舟) 들인데, 이들은 그 우두머리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를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어 말하되, 소학계 혹은 효자계라고 지칭하며, 부자(夫子)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에 비기며 조롱하였다. 공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남효온 사우명행록》
○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행실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돈독하여, 평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였고 인정(人定)을 친 후에야 취침하며, 닭이 울면 곧 일어났다. 그리고 정실(正室)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에는 《소학》을 놓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혹 국가사를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大議)를 알겠냐.”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문학을 배우면서 여전히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여도 《소학》을 읽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친다.”라고 하였는데,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 글은 성인을 배우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齊 원 나라의 허형)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30세 후에야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이현손(李賢孫) 명양부정(鳴陽副正)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참(朴漢參)ㆍ윤신(尹信)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좋은 인재로서 독실한 행실이 또한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세상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나 세상 사람도 역시 알았다. 필재(畢齋)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건의하는 일이 없으니, 김대유(金大猷)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도가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데 있다지마는 / 道在冬裘夏飮氷
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말을 싫어해서 지은 글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달리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상(父喪)을 만나서는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대유는 《소학》에 의하여 몸가짐을 하며, 옛 성인으로써 준칙을 삼고, 또 후학(後學)을 불러들였는데, 순순(恂恂)히 쇄소(灑掃)하는 예를 지켜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제자가 전후에 가득한지라, 비방하는 여론이 바야흐로 비등하니, 정자욱(鄭自勗 정여창)이 그만둘 것을 권하였으나, 대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 행(陸行)은 선교(禪敎)를 베풀고, 제자 천여 명이 학업을 하는데, 그 벗이 만류하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답하기를, ‘선지 선각(先知先覺)로 하여금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를 깨우쳐 주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남에게 일러줄 뿐이다. 화복이 있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리요.’ 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나, 어찌 취할 말이 없으리오. ” 하였으니, 그 말이 지공(至公)하다고 하겠다. 《추강냉화》
○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淵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송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므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므로,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백공(伯恭 남효온)ㆍ백원(百源 이총)ㆍ정중(正中 이정은)ㆍ문병(文柄 허반)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晉)은 청담(淸淡)이 누(累)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므로,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신영희(辛永禧)《사우언행록》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자욱(自勗)인데,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3년을 나오지 아니하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궁극하고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사물의 본체와 작용이 근원은 같으나 나누어진 것이 다른 것을 알았으며, 선악이 본성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석(儒釋)이 도(道)는 같으나 행적(行迹)의 차가 있음을 알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성(性)을 깨달으니, 성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들까지도 모두 공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에 조서를 내려 경전에 밝고 덕행이 있는 유생을 구하라 하니, 관중에서 정자욱(鄭自勗)이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에게 강경을 하도록 하려고 하니, 자욱이 그만 물러났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부친인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죽었는데, 그때 자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상례 치른 일은 알 수 없으나, 후에 모친의 거상에는 전례(典禮)하는 법도와 죽 먹는 것을 일체 《주자가례》에 의하여 지극히 하였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행이 사림에서 견줄 이가 없다고 천거하여서, 특별히 조정에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는데, 자욱이 상서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포상한지라 이름이 더욱 중하여졌다. 자욱은 사람됨이 성품이 단중(端重)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며, 또 우마육(牛馬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지만, 내심은 분명하였다. 젊어서 학관에 있을 때 남과 같이 잠을 자되, 코를 골면서도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최진국(崔鎭國)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관중에서 정아무개가 참선(參禪)하고 잠을 안 잔다고 떠들어 대었다. 《사우언행록》
○ 정자욱 선생은 소시 때에 술을 즐겨하였는데, 하루는 벗들과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들판에 넘어져서 밤을 새고 돌아오니, 그 모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이같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의뢰하겠는가.” 하니, 선생은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임금이 주는 술이나 음복주 이외엔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정 선생은 젊어서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기슭에 정자를 복축(卜築)하고 만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더니, 성묘(成廟)가 소격서 참봉을 주고 부르자 선생은 간곡히 사임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이에 나오게 되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심히 엄격하여, 종일토록 단좌하고 있으면서 비록 아주 더운 날이라도 그 처자도 살갗을 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만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창포는 바람에 날려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데 / 風蒲獵獵弄泛柔
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알겠다. 화개(花開)고을 이름이다.
○ 포은(圃隱 정몽주) 이후에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대유(金大猷)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동지(同志)인 정 선생 자욱(自勗)도 성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대유는 이(理)에 정밀하고 정자욱은 수(數)에 정밀했는데, 아깝게도 상서로운 때를 만나서 못하여 비명으로 죽었으니, 창창(蒼蒼)한 저 하늘이 그를 어찌 하겠느냐. 중묘조 때에 다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고 한다. 재행(才行)이 탁월(卓越)하나 항시 의식(衣食)이 거칠고, 또 조랑말을 타고 다니므로 아동과 부녀자가 서로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며 웃곤 하였다. 성질이 술을 즐기었는데, 그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서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짓고 10년을 마시지 아니하더니, 풍병이 나자 다시 마시었다가, 병세가 좀 가라앉자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후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같이 생애하며 벼슬도 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폐조(廢朝)에서는 점필재 문도라고 하여 대유를 처형하였고, 또 소릉(昭陵)의 복위 상소를 하였다 하여 백공의 시체를 능지처참하였다. 옛날 범희문(范希文) 공이 말하되, “충신(忠信)한 분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이유일까.”《사우언행록》
○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였는데,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를 스승으로 삼고 물질 이외의 세상에 노닐면서 세속과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에게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한 일이 있었고, 때로는 시사에 울분하면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는데, 시사를 논할 때는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비록 꺼리고 숨기는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는지라, 대유와 자욱이 경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김ㆍ정 두 공은 성리학에 밝고 모든 조행은《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그 하는 바가 실로 남추강과 다르다. 그러나 교분에 있어서는 서로 두터워 진실로 소위 ‘지란동취(芝蘭同臭)’라고 하겠다. 《병진정사록》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과 안응세(安應世) 자정(子挺)과 벗이 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동문과 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니, 그 자친이 권유하므로 때로는 시험에 나갔으나,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겨우 39세로 졸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내가 서울에 불려가 장차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남백공이 나의 시축을 구경하고 나를 한강에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같이 송도에서 놀며 천마산(天磨山)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집이 고양(高陽)에 있었으므로, 당나귀를 몰아서 서로 찾아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 짓는 것으로 밤을 새웠다. 나의 소개로 점필재를 호남에서 보았는데, 전부터 그의 시를 사랑한다면서 고인(古人)에 비교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남은 아들 충서(忠恕)가 미친병이 있어서 또 비명으로 죽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위뿐이어서 문집 초고를 모으지 않았다. 《소문쇄록》
○ 한훤(寒暄 김광필) 선생은 좌랑으로 있을 때에 진사 신영희(辛永禧)씨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그대와 절교를 하겠다. 지금 사기(士氣)를 보면 동한(東漢)의 말과 같아서 어느 때에 무슨 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화가 박두하여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대들은 멀리 고향에 가서 숨어 사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절교하겠노라. 내 말을 잘 들어 주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면서 다짐하는지라, 신공은 이로 인하여 직산(稷山)으로 내려가서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안정(安亭)이라고 호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ㆍ홍유손(洪裕孫)과 같이 죽림(竹林) 우사(羽士 신선)를 맺은 일도 있어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당시 영수였으므로, 남으로 지나는 자는 그 문에 예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경현록》
○ 강국오(姜菊塢) 경순(景醇)은 진산 강씨(晉山姜氏)의 세고(世稿)를 편찬하면서, 김 참판(金參判) 수령(壽寧)과 같이 그 시문을 메우고 고치고 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으며, 부조(父祖)의 시명을 후세에까지 떨쳤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생각한다. 또 상사(上舍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 신영희(辛永禧)의 집에는 그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는데, 그 우인이 말하기를, “자네의 가집(家集)을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영희가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는 비록 글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가집(家集)에 실려 있는 것은 하나도 전할 것이 없고, 다만 한 문생의 만장 시에 말한, ‘32세에 졸하였으니, 불행한 것 안회(顔回)와 같도다.’ 라고 한 구절 외에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가히 간행하겠는가.” 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불효라고 하지만, 나는 효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祖父)의 행예(行藝)를 바른 대로 기술하여야 비로소 효행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공교한 말과 허식하는 붓을 빌려다가 칭예한다면 그 부모의 영혼이 있을진대, 부끄러운 마음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 남효온과 신영희는 모두 상사로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들은 사람됨이 옛 일을 좋아하고 기개가 있으며,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세속의 틀에서 벗어났다. 효온의 견흥시(遣興詩)에,
괴생이 안기(安期 예전 신선)와 벗을 삼으니 / 蒯生友安期
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또,
필부인 양왕손은 / 匹夫楊王孫
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사종(嗣宗 완적(頑籍))은 망위(亡魏)를 위하여 / 嗣宗爲亡魏
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47회나 올린 상소 / 四十七奏疏
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호원이 대송을 몰아내니 / 胡元駈大宋
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라 하였고 신영희의 우의시(愚意詩)에는,
남복은 뜰을 소제하고 / 男僕掃庭除
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말달려 급한 언덕 내리달려 / 走馬下急坂
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또,
꽃까지 꺾어 해진 갓 꽂았으나 / 花枝揷破笠
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하였다. 영희는 기개가 있었으나, 세상에는 뜻을 잃었다. 어느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었다가, 그 상전에게 욕을 보고 화가 나서 세상을 떠났고, 효온도 죽은 뒤에 참화를 만났으니, 어찌 이들의 운명이 이렇게 기박할까. 《소문쇄록》
○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인(江陵人)이며, 신라의 후예이다.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한다. 세종 을묘생인데, 5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서 부시를 짓게 하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어, 그 부친을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광묘가 섭정하자, 사문(沙門)에 들어가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정사(水落精舍)에 거하면서 수도연형(修道煉形)을 하였다. 유생(儒生)을 보면, 말마다 공맹(孔孟)을 칭하고 입으로 불법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수련(修煉)의 일을 물어도 또한 즐겨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예(禮)에 좌화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죽음에 있어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 연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글을 지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이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제(帝)가 오륜(五倫)을 베풀었사온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먼저가 되고, 3천 가지 죄 중에서 불효가 제일 크다 합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오리까. 그러므로 호랑(虎狼)이 같은 악수(惡獸)며, 수달(豺獺) 같은 미충(微虫)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할 수가 있고, 또 근본을 알며 갚은 정성을 삼가나이다. 이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당연함 이어서 물욕(物慾)에 가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둔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이으려고 젊어서는 이단(異端)에 침체되어 미몽(迷懵)하여 강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장차 수도(修道)로써 발탁될 것이요, 황설(謊說)로 윤회(輪回)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수도하였지만, 말년에 바야흐로 뉘우쳐서 이에 예전(禮典)과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찾아서 추원(追遠)하는 홍의(弘儀)를 고정(攷定)하였고, 청빈한 활계(活計)로 참작(參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간략(簡略)하면서 조촐히 할 것을 힘쓰며, 풍부히 하며 정성스럽게 하나니, 한 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백 세가 되고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화에 감화되었나이다. 상로(霜露)에 젖음을 느끼고 세월이 감을 근심하니 경황(驚惶)함을 마지아니하며, 탄아(嘆訝)마저 진실로 많습니다. 그저 죄를 속(贖)할 수 있어서 천지의 양제(兩際)에서 용납된다면 혹시나 면목을 가지고 구원(九原)에서 조종(祖宗)을 뵈려고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서는 세상이 쇠하려는 것을 보고 시달려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閭閻間)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로 남과 더불어 장례원(掌隷院)에서 다투고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시중을 지나가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네 놈도 그만 쉬어라.” 하고 외치니, 정창손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태롭게 여겼으며 일찍이 교유하던 자들도 모두 절교하며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홀로 시중의 정신병자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고 때로는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거꾸러지는가 하면, 늘 헛웃음을 웃고 하더니, 후일에 설악산(雪岳山) 또는 춘천산(春川山)에 들어가 있으면서 출입이 무상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중(正中 이정은)ㆍ자용(子容 우선언)ㆍ자정(子挺 안응세), 그리고 나남효온이다. 그가 시문을 지은 것이 수만 편인데, 옮겨갈 때에 흩어져서 거의 없어졌고, 간혹 조정의 신하와 유사들이 절취하여 자기 소작으로 만들었다. 《사우명행록》
○ 김시습은 유양양(柳襄陽 유자한)에게 수백 마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을 말하자면, “나는 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 되는 최치운(崔致雲)이 나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3세 때에 능히 글을 엮었는데, 거기에,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러 3월이 저물었는데 / 桃紅柳綠三月暮
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었다. 5세 때에는 《중용》과《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는데, 그때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설(字說)을 지어 달라고 명하여 지어준 일도 있다. 정승 허조(許惆)가 나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노자(老字)를 운(韻)으로 시를 지어라.’ 하므로, 내가 그 소리에 응하여서
늙은 나무가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안 늙었네 / 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하였더니,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고, ‘이는 이른바 신동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세종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대언사(代言司)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시험하라고 명하니, 박이창은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벽화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저 벽화를 두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기로, 내가 응하기를,
작은 정자에 배가 매인 집은 누가 사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같이 작문 작시(作文作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종이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친히 데려다 보고자 하나 사람들이 듣고 해괴히 여길까 두려워한다. 가리고 숨겨 키워서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서 장차 크게 쓰겠노라.’ 하면서, 물건을 주시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13세 때에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논어》ㆍ《맹자》ㆍ《시전》ㆍ《서전》, 그리고 《춘추》를 읽었으며, 또 대사성 윤상(尹祥)에게 가서 《주역》과 《예기》, 그리고 제사(諸史)를 읽었다. 좀 장성하여서는 영달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친척과 이웃에서 넘치게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세상과 내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곤란하게 되는 차에,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고, 세종 초기에 원로(元老)와 대가들이 모두 귀신의 명부(鬼簿)에 오르고, 다시 이교(異敎 불교)가 크게 일어나 사문(斯文 유교)을 능멸하니, 나의 뜻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졌다. 드디어 중과 짝을 하고 산수를 찾아 놀았으니,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이도(異道)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자 하였으므로, 세조가 전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은 더욱 거칠고 방탕해졌다. 이로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여 나보고 어리석다 하고, 혹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우마(牛馬)와 같이 대하나, 나는 모두 그에 응해 준다. 이제 성성(聖上)이 등극(登極)하여 어진이를 등용하고 충간(忠諫)을 잘 들으시므로 벼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10여 년 전후에 육적(六籍 여섯 가지 경서)을 익숙하게 연구하여 점차 정밀하여졌지만, 여러 번 내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둥근 도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 같고, 옛 친구는 모두 죽고 새 사람은 낯이 익지 아니하니, 누가 나의 본뜻을 알아주리오. 그러므로, 다시 산수간에 방탕하였노라. 이것이 모두 사실이니, 공만은 알아주시오. ”하였다. 《패관잡기》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평소의 그 심회(心懷)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다. 그의 시집을 보면, 미궐(薇蕨) 두 자를 잘 사용하였는데, 그 본뜻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내(김정국)가 늙은 중을 만나니 많은 현묘한 이치를 들은지라 그가 배운 스승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젊을 때 사미(沙彌)로 있으면서 오세(五歲 김시습의 별칭)를 모시고 섬기었는데, 오세의 저술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겨우 백에 하나나 둘이 될까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중이 말하기를, “노승이 중흥사(中興寺)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는데, 매양 비온 뒤에 산물이 불으면, 백여 장의 종이를 끊어 가지고는 나에게 필연(筆硯)을 들리고 뒤따르게 하여 물결을 따라 내려가 반드시 급류를 찾아 앉아서는, 절구ㆍ율시 또는 오언 고풍(五言古風)을 침음(沈吟)하여 시를 짓되, 조각 종이에 쓰고 물에 흘려 멀리 보내고 나서는, 또다시 써서 흘려 보내고 하기를 밤새도록 하여 조각 종이가 다 없어져야 집에 돌아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백여 수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본뜻을 엿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재척언》
○ 동봉(東峯)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세상 법규를 털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서는, 그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고쳤다. 남추강(남효혼)과 더불어 세상 밖에 놀면서 미친 듯이 읊조리며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도, 그 계율(戒律)을 지키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시가(市街)에 지나가면서 어느 때는 한 곳만을 눈여겨보고는 돌아가기를 잊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가로(街路)에서 똥오줌을 누어서 여러 사람이 보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며, 또 뭇 아이들이 욕하고 웃으며 다투어 기와 쪽을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기도 하였다. 그가 소유한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남들이 가져가고 도둑질하는 대로 맡겨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는지라 설잠은 관청에 고발하여 면대하여 공술하고, 싸우기를 시끄럽게 하고 시정(市井)에서 싸우듯이 하며, 마침내 승소하고 증서를 받아 품 안에 품고 관문을 나오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웃곤, 급히 증서를 내어 찢어서 개천물에 던졌으니, 그가 사람을 조롱하고 세상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일찍이 법회(法會)를 내전에서 베풀면서, 설잠도 간선되어 그 회에 참여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도망쳐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몰라 사람을 시켜 찾아 보았더니, 가로상에 있는 똥독 속에 빠져 있고, 겨우 얼굴만 보일 정도였다. 한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쟁쟁(錚錚)한 소리를 내면서 낭랑히 길게 읊으면, 그 소리가 창공에 울리어 처량한 여감(餘感)이 있으므로, 달빛 환한 밤을 만날 때마다 깊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을 한 차례 읊게 하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젖게 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취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한 심정을 풀지 못하였다. 여러 비구(叱丘)들은 항시 신사(神師)로 추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리더니, 어느 날은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저희 제자들은 대사(大師)님을 모신 지 오래오나, 아직까지 일교(一敎)를 해 주시기를 꺼리오니, 대사님은 그 청정한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생들이 나아갈 방향을 헤매고 있으니 저희들의 소원은 금비(金篦)로 긁어내시는 것입니다.” 하고,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설잠이, ‘그래라.’ 하고, 크게 법연(法筵)을 열어서 설잠이 몸에 가사와 법의를 갖추고 가부좌를 하니, 중들이 모여들어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벌여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고 한지라, 설잠이 말하기를, “소를 한 마리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앞에 매어 두었다. 설잠이 또다시 꼴 한 뭇을 소 뒤에 두라고 하는지라, 그대로 행하니 설잠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을 듣는다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하니, 소란 축류(畜類) 가운데 가장 우둔한 것이니 사람의 미명(迷冥)하고 무식한 자를 시속에서 소 뒤에 꼴을 둔 것이라고 한다. 중들은 낯빛을 붉히며 물러갔다. 근대의 시승(詩僧)을 말하면 설잠이 그 영수(領袖)인데, 그 시가 법도에 맞고 중후하여 중의 티가 없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서 저서(금오신화)를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 글은 대개 괴이한 것을 기술하여 우의(寓意)한 것인데, 전등신화(傳燈新話) 등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용천담적기》
○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齊)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 한다. 태종의 현손이며 나(김정국)와 동년생으로 달과 날이 나보다 뒤졌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과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갓과 띠를 두르고 손에는 책을 놓기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주계부정(朱溪副正)의 행직을 받았다. 나이 25세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 치도(治道)를 상소하였는데, 어느 때는 윤허(允許)를 얻고 어느 때는 얻지 못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 마음이 있음을 논박한 일로 그의 조부에게 미움받아 장단(長湍)으로 귀양가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었다. 병든 부모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이 간곡하고 지극한지라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는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당하여 제1인으로 발탁되니 풍악과 술 그리고 2품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전에 그의 조부에게 불순히 한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주계정(朱溪正) 심원은 다만 성리학에만 능숙할 뿐 아니라, 또한 시를 잘 지었다. 비온 뒤 저녁 때 바라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 보지락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 一犁春雨杏花殘
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하고, 또 운계사(雲溪寺)에 가서 읊기를,
나무 그늘 얼룩지고 돌은 서려 있는데 / 樹陰濃淡石盤陀
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주계군 심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성묘조 때에 자기 고모부 되는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알고 상소하여 힘껏 사리를 밝히어 마침내 임사홍을 멀리 귀양보내었다. 연산조 말년 임사홍이 세도를 부릴 적에 드러내어 죽였는데, 중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기어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니, 대개 심원의 의향은, “내가 종친으로서 마땅히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것이요, 어찌 한 사가(私家)의 고모부를 두둔하겠는가.” 한 것이었다. 상소를 읽으면 늠름한 생기가 떠오른다. 《패관잡기》
○ 정은(貞恩)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풍곡(風谷) 또는 설창(雪牕)이라고 한다. 수천부정(秀泉副正)을 제수되었는데,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강개히 슬픈 곡조를 타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됨이 독후(篤厚)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으며 총명하였다. 학문을 할 때에는 먼저 이(理)를 밝히고 난 후에 문(文)을 하므로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으며,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격(楁)에 맞추고 난 후에 문사를 꾸미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아니한다. 또 덕(德)을 닦을 때에는 먼저 내심을 가다듬고, 후에 외형을 바르게 하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것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아니하여 가장 가난한 선비 같았다. 《사우명행록》
○ 종실인 수천부정 정은은 날마다 시주(詩酒)와 금파(琴琶)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시문과 음률이 백원(百源 이창)과 이름이 같았다. 김대유(金大猷)의 책망을 듣고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俗態)를 꾸미고 두문불출하고 과감히 친구와 왕래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金紐)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格)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그가 지은 입춘첩시(立春帖詩)에 이르기를,
가늘게 홍전을 오려 소춘에 걸었다 / 細剪紅箋架小春
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고 하였으니, 그의 시 짓는 솜씨가 대개 이와 같았다. 《사우언행록》
○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박연(朴堧) 후에 사족(士族)으로는 칭할 만한 자가 없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임흥(任興) 가 처음 드러나고 이어 정중(正中 이정은)과 백원(百源 이창), 그리고 국문(國聞) 정자지이 한때에 같이 일어나서 구습(舊習)을 일소하였고, 향방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말한 4명이 으뜸이었다. 나(남효온)는 음률을 알지 못하나, 날마다 사자(四子)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광대들의 논평을 들으면 대개 다음과 같으니, “유추(有秋)는 마음씨는 평화하면서 그 가락이 저하하고, 국문은 가락은 절묘한데 마음씨가 혹(酷)한 편이다. 또 백원은 웅혼(雄渾)하기는 하나 솜씨가 좀 잡되고, 정중은 곡조는 고상하나 기(氣)가 편벽된다.” 하였다. 내가 정중과 같이 송도(松都)에서 놀 때에 그가 거문고를 타면,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날에 말에 오르기를 머뭇거리니 행인들도 서서 보았다. 백아(伯牙)가 죽은지 천 년 후인 오늘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기(氣)가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백원과 유추는 언제나 악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연습하나, 정중은 집 안에 풍물(風物)이 없어 여기저기 가는 곳에서 우연히 다른 악기를 가지고도 그의 음률은 순수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 수예(手藝)가 매우 고상함에 감복한다. 그러나 음률을 아는 자는 간혹 조롱하여 말하기를, “정중의 거문고는 백아(伯牙)와 같으나, 때로는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제세경략(濟世經略)의 재주가 쌓여서 적은 기술에 돌아갔으므로 나오는 것이 편벽된 것이 아니랴.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아 뜻을 펴지 못함이여. 《추강냉화》
○ 현손(賢孫)의 자는 세창(世昌)이요, 신요(神堯 태조 이성계)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까지 이르렀다. 예에 맞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독실히 하였으므로, 김대유(金大猷) 다음으로 꼽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다. 그 모친의 상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사우언행록》
○ 종실(宗室) 명양부정은 성품이 조촐하여 속세에서 벗어났고,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의 견의시(遣意詩)에 이르기를,
병은 품은 채 세상 일을 멀리하고 / 懷疴謝塵事
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였다. 가을 시에는,
하얀 이슬이 내린 뒤라 숲이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또,
빈 소반에는 마치채(馬齒菜)가 남아 있고 / 空盤推馬齒
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하였다. 항시 수척한 병이 있더니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보면, 가히 수하지 못할 징조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광음은 번개같이 잠깐인데 / 光陰如電瞥
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하였다. 《소문쇄록》
○ 안응세(安應世)의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ㆍ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 또는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 한다. 사람됨이 청담쇄락(淸淡洒落)하고 안빈희분(安貧喜分)하여, 공명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선불(仙佛)을 배우지 아니하며, 박혁(博奕)을 즐기지 않았다. 또 시에 능하며 특히 악부(樂府)를 잘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집을 돕는 데 그칠 뿐이요, 불의의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 그칠 뿐이니, 더욱 참견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주색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9월에 죽으니, 나이 26세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통탄해 마지아니않았다. 《사우언행록》이하 동
○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으뜸이었으며, 그의 부친상에는 일체를 《주자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점필재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얼마 뒤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그때부터 점필재와 뜻이 달라졌다. 일찍이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회시(會試)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사관(四館 사학(四學))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 많은 시골 선비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니, 시숙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죄 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며 들어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절조가 가히 동한(東漢)에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 유종선(柳從善)은 진주인(晉州人)이며, 자는 여등(如登)인데,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친구나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 보기 드물었다.
○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보(德父)요, 호는 풍애(楓崖)이며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신축년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그 여막에서 뵈니, 선생은 기뻐하여, “자를 자용(子容)이라 하라.” 하였다.
○ 최하림(崔河臨)의 자는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여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이해 여름에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제자 설의(雪儀)로 하여금 가만히 불상을 돌려 놓게 하고서, 세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스스로 걷는다.’고 하니, 곡식과 비단ㆍ베를 가지고 오는 자가 날로 천의 숫자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여 다섯 차례나 요승을 죽이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소문은 대개 최진국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병오년 7월에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장(斂葬)할 수 없었으므로 벗들이 치전(致奠)하여 장사지냈다. 그가 지은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 고순(高淳)의 자는 희지(熙之)요, 또 진진(眞眞) 또는 태진(太眞)이라고 하며 제주인(濟州人)이다. 귓병이 있어 땅에 글자를 써서 서로 뜻을 통했다. 무술년에 조서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 상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망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알리자, 고희지(高熙之)는 듣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스스로 호를 망희지(妄熙之)라 하였다. 여러 선비들 사이 중에서 신덕우(辛德優)와 초면 인사를 하였는데, 선비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고희지가 종이에 한 절구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소각에 봄바람이 고요하니 / 小閣春風靜
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하고, 이후부터 지심(知心)의 벗이 되었다.
○ 고희지(高熙之)는 일찍이 귓병이 있었으나, 성품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시를 읊고 취침하였는데, 그의 돌아간 아버지 중추(中樞)-고수종(高守宗)-가 꿈에 나타나, 시를 주며 말하기를,
화발은 창창하여 예보다 줄었는데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남효온)가 그 시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대략에, “천지간의 한 기운은 이르면 펴지고 흩어지면 돌아가나니, 기실은 하나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기(氣)가 여러 자손들의 신상에 흩어져 있다가, 자손이 동하면 그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은 곧고 초연하여 마치 다시 부모의 척강(陟降)하는 거동을 항시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이 함을 보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오직 맑은 자라[淸者]고 할 것이다.” 하였다. 《추강냉화》이하 동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캐의 춤을 본받아서 머리를 내두르고 눈을 까며, 어깨를 솟구고 팔을 구부리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부리고 활을 쏘는 형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개가 네 발을 헤매고 다니는 모양을 하기도 한다. 또 곰처럼 구부리고 새처럼 펴기도 하며, 혹은 물러가서 바람 소리를 낸다.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인(士庶人)이며 창기나 배우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이해하고 몸이 성한 자는 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 이름을 호무(胡舞)라고 하는데, 여기에 관현(管絃)을 같이 하면서 즐겼다. 의정부 우찬성인 어유소(魚有沼)는 더욱 잘하여서, 나도 또한 풍류로 해본 일이 있는데, 망우(亡友) 안자정(安子挺)이 그 잘못을 극언하여 비난하기를, “미인(媚人)의 행동과 유만(柔嫚)의 태도는 사람으로 할 바 아니거늘,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와도 같은데 어찌 내 몸으로 금수 같은 일을 하겠는가.” 하므로, 나는 듣고 퍽 그렇지 않게 여겼는데, 그 후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의 효단장경 목후사(效檀長卿沐猴辭)를 읽고 난 연후에야 안자정의 말이 정론(正論)임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현(前賢)이나 후현의 법규가 서로 같음을 알았다.
○ 경징(慶徵) 군의 휘는 연(延)이요, 자는 대유(大有)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겨울에 그의 부친이 병이 나서 어회(魚膾)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얼음을 뚫고 그물을 쳐도 고기를 얻지 못하자, 군이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니, 성감(誠感)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고, 버선을 벗고 얼음 구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에 검은 잉어를 얻어서 공양했다. 또 시금치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밭에 있는 채근(菜根)을 보고 울부짖으니, 문득 시금치가 나와 그 부친을 봉양하였고, 이어 부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부친이 죽자, 3년을 시묘 살면서 죽ㆍ채소ㆍ과일 먹는 것까지 《가례》에 의하였으며, 그의 모친을 섬기기를,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였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친이 죽자 그 부친의 초상 때와 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가, 주상(성종) 9년,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불려서 내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묻기를, “경은 집에 있을 때 얼음을 깨니 고기가 뛰었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군이 답하기를, “겨울은 고기가 없는 때라 부친은 잡지 못하리라 하였사온데, 그물을 치고서 애써 구하다가, 다행히 잡았습니다. 부친은 기뻐서 너의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하며, 고을 사람들은 깊은 연유도 살피지 아니하고,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신은 실로 그와는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묻기를, “경은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와 《이경》을 읽었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사서와 이경 중에서 어느 말이 제일 옳던가.” 하니, “사서 이경 중 《서전》에 순(舜)의 대효를 말하였사온데, 이는 신이 하고자 하는 바이오나 능하지 못하옵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말하였사온데, 신이 하고자 하오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살면서 소행이 어질지 못하더니, 경징(慶徵) 군이 그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감화하여, 그 나쁜 버릇을 버리고서 온화하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행하며, 또 혼정신성하였다. 부모의 초상 때에는 한 모금 물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또 3년을 시묘살이 하면서 술과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3형제가 같이 살면서 우애하는 환심이 극진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가 좋지 않는 행실을 하여서, 경 생원(경징군)이 그를 들으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였다.
○ 생원 유원(兪垣)은 면천인(沔川人)이다. 무신년간에 책을 끼고 궐문에 나가 배운 것 중에서 수천 가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조정의 병폐를 간절히 집어 내었다. 그런데, 사림들은 모여서 그저 웃곤 하였다. 유원은 자기가 거처하는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하고, 또 그 벗인 박생(朴生)은 그 재(齋)를 명월재(明月齋)라 편액하였는데, 진신(縉紳)들 사이에서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청풍ㆍ박명월 같다고 조롱하였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일찍 벼슬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하었다.
○ 임인년에 개령현(開寧縣) 송방리(松坊里)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 석불을 얻었는데, 이목구비가 모두 없어졌기로 그저 밭 언덕에 두었는데, 우연히 천식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였더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은지라 드디어 영험이 있다 하며, 어느 사람은 무슨 빛이 비친다고 하므로, 이웃 여러 고을에서 오랜 병으로 시달리던 자며, 아들이 없는 사람과 아직 장가들지 못한 사람, 노비를 잃은 사람들, 무릇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문득 징험이 있다고 하여, 남녀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미포(米布)와 지전(紙錢)이며, 향촉(香燭)ㆍ화과(花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향불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시주하는 자가 있어서,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절을 지으려 하니, 사족(士族) 부녀(婦女)들이 모두 친히 와서 기도 드리고,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금산(金山) 고을 훈도(訓導) 같은 이들도 와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빌었고, 혹은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에 금산 군수 이인형(李仁亨)은 이 말을 듣고, 유생과 아전 포졸을 보내어, 그 중을 잡아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이때 마침 김 문간공(文簡公 점필재)이 응교(應敎)의 명을 사퇴하고 금산에 있었는데, 이인형에게 하시(賀詩)를 주어 이르기를,
채전에 버려두어 몇 봄인지 모르던 것 / 抛擲菜田不記春
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하였더니,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어서, “성조(聖朝)에 영웅 있는 줄 이제야 알겠노라.”는 글귀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제 개령의 석불은 요호보다도 더욱 괴상한데도, 누가 감히 쳐서 고혹된 것을 없애지 못하였는데, 명부(明府)가 다른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아전들을 보내어 요수(妖首)를 쫓아 잡아오고, 시주하는 지전(紙錢)을 태워서 우민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소문쇄록》
○ 응교(應敎) 최보(崔溥)는 나주인(羅州人)이며, 정자(正字) 송흠(宋欽)은 영광인(靈光人)이다. 동시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들 본집의 거리가 겨우 15리쯤 되었는데, 하루는 송 정자가 최 응교의 집을 찾아가서 말마디 하다가, 최 응교가 묻기를,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하니, 송 정자가 답하기를, “역마를 타고 왔습니다.”고 하니, 최 응교가 다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준 역마를 자네 집에 매어둔 것과, 자네 집에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사사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하며, 최 응교가 조정에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파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송 정자가 응교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자, 최 응교는, “자네 같은 연소한 사람들은 앞으로 마땅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일렀으니, 조종조(祖宗朝 성종) 때에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며, 벗들 사이에 선(善)으로 권려하고, 의(義)로써 심복시킴이 이 같았으니, 가히 모든 일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언왕행록》
○ 성종이 승하하던 날에 성중에 있는 사대부며 거족으로서 혼인하는 집이 여러 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을 타서 가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가 되어서 가며,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갔었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이들 모두 벌받게 되었다. 그런데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때 하루 전날 밤에 아들의 초례를 지내게 되어서 손님과 동료들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상왕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박지번이 이에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병이 위독하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혼례(婚禮)를 사사로이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과 동료들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어느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오히려 무신보다 못하니, 한탄할 일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주D-001]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 : 당 나라의 무종(武宗) 때에 한림학사를 지극하게 대접하여 밤 늦도록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숙직실로 돌아갈 때에 황제 방에 있던 금련 촛대를 내시에게 들려서 앞길을 밝혀 주게 한 고사.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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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성종 대왕 묘지문[誌文]

그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대왕(大王)의 휘(諱)는 이모(李某)인데 덕종(德宗)의 두째 아드님이시다.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 한씨(韓氏)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년 7월 30일(辛卯)에 왕을 탄생하셨다. 덕종이 세자가 되어 일찍 훙(薨)하자 세조(世祖)께서 왕을 궁중에서 양육하며, 봉(封)하여 자산군(者山君)으로 삼으셨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우니, 세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동모형(同母兄)인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과 더불어 궁중에 있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며 그 자리에서 시인(寺人)에게 벼락이 떨어지자 좌우가 모두 넘어졌는데 왕은 홀로 예사롭게 여기셨으므로, 세조가 더욱 이상하게 여겨서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도(器度)가 우리 태조(太祖)와 비슷하다.’고 하셨다. 성화(成化) 5년 기축년에 예종(睿宗)이 훙(薨)하자 사자(嗣子)가 어리고 어리석으므로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의논을 정하여 왕을 후사(後嗣)로 삼으시고 경인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내렸다. 왕이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편의(便宜)를 진술하게 하며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하고 효자(孝子)·절부(節婦)를 정려(旌閭)하며 그 효행이 더욱 뛰어난 자를 녹용(錄用)하게 하셨다. 경연관(經筵官)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진강(進講)하게 하고 밤에도 소대(召對)하도록 하여, 상례(常例)로 삼게 하셨다. 신묘년 시학(視學)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시고 문사(文士)로 하여금 경의(經義)를 문난(問難)하게 하시며 임금을 잘 보좌하여 정치를 잘한 공훈이 있는 여러 신하들을 기록하여 공신호(功臣號)를 내려 주고 대간(臺諫)이 일을 말하여 직책을 다한 자에게는 각각 작(爵) 1급(級)을 내려 주셨다. 임진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백성에게 절검(節儉)하기를 유시(諭示)하시고, 역대(歷代)의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착하고 악한 것으로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채택하여 정리해 세 편(編)을 만들어서,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고 하셨다. 또 밝은 임금과 어두운 임금의 사적(事跡)을 병풍에 그림을 그려서 앉거나 눕거나 관찰하면서 반성하셨으며, 응방(鷹坊)에 해동청(海東靑)이 있었는데 놓아 보내도록 명하시고 끝내 다시 기르지 아니하셨다. 갑오년에 사신을 보내어 덕종(德宗)을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를 윤허하여 시호(諡號)를 내리기를 회간(懷簡)이라고 하고, 아울러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의 고명(誥命)을 내렸는데, 왕이 대사(大赦)를 시행하고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을 내려 주었다. 을미년에 선농(先農)에 제사지내고 적전(籍田)을 갈며 왕비가 친잠(親蠶)하였다. 존경각(尊經閣)을 성균관(成均館)에 세우고 경적(經籍)을 내려 주어서 간직하게 하셨다. 정유년에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으며, 탄일(誕日)의 축수재(祝壽齋)를 파하게 하셨다. 무술년에 선성에게 제사하고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노인(老人)들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명하여 고금(古今) 동인(東人)의 시문(詩文)을 모아서 이름을 《동문선(東文選)》이라고 하였고, 지리지(地理誌)를 찬(撰)하게 하여 이름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하였으며,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撰)하게 하셨다. 기해년에 황제가 군사를 발하여 건주(建州)의 야인(野人)을 토벌하면서 칙서(勅書)를 내려서 군사를 내어 정벌을 돕게 하였는데, 왕이 군사를 발하여 이를 격파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상(褒賞)하였다. 신축년에는 원유(園囿)에 나무하고 사냥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완화시켰다. 계묘년 금상(今上)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고, 3월에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훙(薨)하자 3년상(三年喪)의 복(服)을 입으셨다. 갑진년에 중외(中外) 관리의 선악[淑慝]을 명확히 구별하여 올리고 내쳤으며, 성균관(成均館) 학생에게 전지(田地) 4백 결(結)을 내려 주고 향학(鄕學)에도 전지를 내려 주었는데, 차등을 두셨다. 을사년에 명하여 이 뒤로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은 조반(朝班)에 끼이지 못하게 하셨다. 세조조(世祖朝)에 일찍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계속해서 완성하도록 명하셨다. 정미년에 고려(高麗)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셨다. 홍치(弘治) 무신년에 인수 대비(仁粹大妃)가 병이 있자, 왕이 일찍이 시약(侍藥)하고 병이 낫자 대사(大赦)하며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을 내려 주셨다. 기유년 향위(鄕圍) 책사(策士)가 ‘부처에게 제사하여 재앙을 물리친다.’는 말을 한 자가 있었는데 수교(手敎)로 이를 귀양보내어 내쫓게 하였다. 경술년에 여주(驪州)에 거둥하여 영릉(英陵)에 참배하고 고을 백성에게 이해 조세(租稅)의 반(半)을 감해 주게 하시고, 지나가는 곳 고을에 관원(官員)을 보내어 선성묘(先聖廟)에 제사하게 하셨으며 학생에게 쌀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셨다.신해년에 명하여 지금부터 형제(兄弟)·숙질(叔姪)·당형제(堂兄弟)가 서로 소송하여 도리에 어긋난 자는 사변(徙邊)하게 하셨으며, 영안도(永安道)에 야인(野人)이 침략하여 진장(鎭將)을 죽이니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격파하셨다. 임자년에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선성(先聖)에게 제사하여 스승과 학생 및 백관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악장(樂章)을 짓도록 하여 흥을 돕게 하였으며, 전대(前代)의 군왕(君王)과 명현(名賢)의 능묘(陵墓)가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도록 명하시고 초목(樵牧)을 금하게 하셨다. 갑인년 가을에 왕이 편찮으시면서도 서무(庶務)를 재결하시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셨고 12월 24일(戊寅)에 위독하셨는데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보셨으며, 이튿날 25일(己卯)에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시니,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재위(在位)하신 지 26년이셨다. 상(喪)이 알려진 날에 비록 심산 궁곡(深山窮谷)의 백성이라도 분주히 부르짖으며 슬퍼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왕은 총명 영무(聰明英武)하시고 관인 공검(寬仁恭儉)하시며 경사(經史)에 관통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조예가 깊으시며, 성력(星曆)·종률(鍾律)에도 강구(講究)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시며 사예(射藝)·서화(書畫)에도 그 오묘한 경지에 이르셨다. 효우(孝友)는 천성에서 나와 제사에 연고가 있지 아니하면 반드시 몸소 행하시고 반드시 조심하셨다. 세 대비(大妃)를 봉양(奉養)함에 있어서는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시고 동복형[母兄]을 대우하기를 은혜와 예(禮)가 지극히 갖추어지게 하였으며, 여러 아들은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셨고, 종족(宗族)에게는 그 화목함을 극진히 하셨다. 대신을 존경하시고 대간(臺諫)을 예우(禮遇)하사 조용히 상의하시고 허심(虛心)으로 채택하여 받아들이시며, 강관(講官)을 사랑하고 대우하여 특별한 은혜를 더하시고 매양 경연(經筵)에서 힘써 받아들이되, 오히려 넓지 못하다고 여기시어 2품 이상 고문(顧問)이 될 만한 자를 골라 날마다 돌려가면서 참시(參侍)하게 하여 이름을 특진관(特進官)이라 하셨다. 그리고 낭리(郞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주와 행실을 자세히 알아서 쓰는 데에 각각 그 능함을 다하게 하셨다. 권강(權綱)을 모두 잡으시고 명작(名爵)을 아끼고 중하게 여기시어 그 어짊을 알면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 뽑아 쓰며, 만일 명의(名義)를 범하면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반드시 물리치며, 너그러움으로써 아랫사람을 제어하고 죄가 의심스러우면 용서함이 많았으되, 오직 환시(宦寺)에게는 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반드시 징계하셨다. 늙은이를 봉양하고 고독(孤獨)을 구휼하며 상벌(賞罰)은 분명히 하시고 형벌을 삼가하시며, 이단(異端)을 물리치고정도(正道)를 붙드시며 유전(遊畋)을 끊으시고 일욕(逸欲)을 경계하며 충효(忠孝)하는 이를 녹용(錄用)하고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시며,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하고 학름(學廩)을 넉넉하게 하셨으며, 장사(將士)를 훈련하고 변수(邊帥)를 골라서 임명하시며 열무(閱武) 강수(講蒐)를 반드시 때를 맞추어 하셨다. 재앙(災殃)을 만나 기도하여 물리치기를 주청하면, 이르시기를,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덕을 닦는 데 달려 있다.’고 하시고 풍년이 들어 부세(賦稅)를 더하기를 주청하면, 이르시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부족하겠는가?’고 하시며, 진선(進膳)을 물리치면서 이르시기를, ‘위를 받드는 예(禮)가 비록 부지런하다 하더라도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또한 간절하다.’고 하시고, 예연(禮宴)을 정지하도록 하시면서 이르시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데 홀로 즐기는 것이 가하겠는가?’고 하셨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참으로 천지 부모와 같은 마음이로다.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는 데 이르니, 애통하도다.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양음(亮陰)에 있으시면서 애모(哀慕)함이 다함이 없어 여러 신하를 거느리시고 존시(尊諡)를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성종(成宗)’이라 하셨다. 을묘년 4월 초6일(己未)에 광주(廣州) 소재지 서쪽의 학당리(學堂里) 언덕에 안조(安厝)하고 이름을 선릉(宣陵)이라 하였다. 아아! 삼대(三代) 이하로 처음부터 끝까지 덕(德)이 온전한 임금이 적은데, 우리 성종께서는 순수(純粹)하여 의논할 것이 없다. 처음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영의정(領議政) 한명회(韓明澮)의 따님을 맞이하여 즉위하자 비(妃)로 봉하였는데 아들이 없이 훙(薨)하였으므로 시호를 공혜(恭惠)라 하였고,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올려서 비(妃)로 삼으니 바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따님인데,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탄생하였다. 또 숙의 윤씨를 올려 비로 삼으니, 바로 영돈녕 부사(領敦寧府事) 윤호(尹壕)의 따님이다. 1남(男)을 탄생하였으니, 이역(李懌)인데, 진성 대군(晉城大君)을 봉하였다. 숙의 엄씨(嚴氏)가 1녀(女)를 탄생하였으니, 공신 옹주(恭愼翁主)인데,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숙의 권씨(權氏)가 1남을 탄생하였는데, 어리다. 숙용(淑容) 정씨(鄭氏)가 2남 1녀를 탄생하였는데, 이행(李烆)은 안양군(安陽君)으로 지사(知事) 구수영(具壽永)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봉(李㦀)은 봉안군(鳳安君)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 조기(趙紀)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여(女)는 어리다. 숙용 홍씨(洪氏)가 7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혜숙 옹주(惠淑翁主)는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에게 하가(下嫁)하였고, 이수(李)는 완원군(完原君)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 최하림(崔河臨)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염(李恬)은 회산군(檜山君)으로 봉사(奉事) 안방언(安邦彦)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이돈(李惇)은 진성군(甄城君)으로 참봉(參奉) 신우호(申友灝)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숙원(淑媛) 하씨(河氏)가 1남을 탄생하였으니, 이순(李恂)인데, 계성군(桂城君)으로, 판관(判官) 원치(元菑)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숙원 김씨(金氏)가 3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휘숙 옹주(徽淑翁主)는 풍원위(豐原尉) 임숭재(任崇載)에게 하가하였고, 경숙 옹주(敬淑翁主)는 아직 하가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숙원 권씨(權氏)가 1남 1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숙언 심씨(沈氏)가 2남 2녀를 탄생하였는데, 경순 옹주(慶順翁主)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에게 하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원전】 12 집 616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주D-001]천순(天順) 원년 : 1457 세조 3년. 천순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주D-002]시인(寺人) : 환관.
[주D-003]성화(成化) 5년 : 1469 예종 원년.
[주D-004]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주D-005]신묘년 : 1471 성종 2년.
[주D-006]시학(視學) :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여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는 상황을 돌아보던 일. 이때 석전(釋奠)을 행하고 유생을 시험하여 인재(人才)를 뽑는 것이 상례였음.
[주D-007]경의(經義) : 경서(經書)의 뜻.
[주D-008]임진년 : 1472 성종 3년.
[주D-009]갑오년 : 1474 성종 5년.
[주D-010]을미년 : 1475 성종 6년.
[주D-011]정유년 : 1477 성종 8년.
[주D-012]무술년 : 1478 성종 9년.
[주D-013]기해년 : 1479 성종 10년.
[주D-014]신축년 : 1481 성종 12년.
[주D-015]계묘년 : 1483 성종 14년.
[주D-016]금상(今上) : 현재 임금. 곧 연산군(燕山君).
[주D-017]갑진년 : 1484 성종 15년.
[주D-018]을사년 : 1485 성종 16년.
[주D-019]조반(朝班) : 조정 관리의 반열.
[주D-020]정미년 : 1487 성종 18년.
[주D-021]무신년 : 1488 성종 19년.
[주D-022]기유년 : 1489 성종 20년.
[주D-023]향위(鄕圍) : 시골에서 보이는 과거 시험.
[주D-024]책사(策士) : 책문에 응시한 선비.
[주D-025]경술년 : 1490 성종 21년.
[주D-026]신해년 : 1491 성종 22년.
[주D-027]당형제(堂兄弟) : 사촌 형제.
[주D-028]사변(徙邊) :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에서 살게 하던 형벌.
[주D-029]임자년 : 1492 성종 23년.
[주D-030]갑인년 : 1494 성종 25년.
[주D-031]동복형[母兄] : 월산 대군(月山大君)을 가리킴.
[주D-032]권강(權綱) : 통치하는 권력.
[주D-033]명작(名爵) : 명예와 작위.
[주D-034]명의(名義) : 명분과 의리.
[주D-035]정도(正道) : 유교.
[주D-036]유전(遊畋) : 사냥하며 즐김.
[주D-037]일욕(逸欲) : 편안하게 성색(聲色)을 탐함.
[주D-038]변수(邊帥) : 변장.
[주D-039]열무(閱武) : 임금이 직접 하는 사열.
[주D-040]강수(講蒐) : 군사 훈련을 위한 사냥.
[주D-041]양음(亮陰) : 임금이 부모(父母)의 상중(喪中)에 있음. 또는 그 기간 중에 거처하는 방. 양암(諒闇). 양음(諒陰).
[주D-042]을묘년 : 1495 연산군 원년.
[주D-043]안조(安厝) : 장사.
[주D-044]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주D-045]이역(李懌) : 중종(中宗).

 

 

 성종 11년 경자(1480,성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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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28일 (정미)
생원 김경충 등이 이단을 금하도록 상소하니 임금이 노하여 김경충을 국문하게 하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김경충(金敬忠) 등 4백 6인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이치는 정(正)이 있고 사(邪)가 있기 때문에 정도(正道)가 사도(邪道)를 이기면 천하가 다스려져서 나라를 밝고 창성한 데에 올려 놓고, 사도가 정도를 이기면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나라를 어두운 데로 끌어 내리니, 대저 국가의 치란 흥망(治亂興亡)은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堯)·순(舜)·우(禹)·탕(湯)이 임금이 되자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朝廷)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르게 하며 만민을 바르게 하여 천하를 바르게 하여서 천하가 바르게 되었으므로, 일찍이 어떤 사람이 사설(邪說)을 주창하고 어떤 사람이 사설에 화답하여 세상을 미혹하고 백성을 속여서 인의(仁義)를 막아버렸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알지 못하거니와 당시의 천하가 다스려졌습니까, 어지러워졌습니까?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제(齊)나라·양(梁)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의 임금들이 정도(正道)를 버리고 사설(邪說)에 미혹하여 묵자(墨子)에게 붙좇지 않으면 불타(佛陀)에게 붙좇고, 불타에게 붙좇지 않으면 노자(老子)에게 붙좇아서 양주(楊朱)·묵자·불타·노자의 도(道)가 천하에 가득하니, 인심이 그것에 빠져 아무 의미 없이 지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어떤 사람이 정의를 주창하고 어떤 사람이 정도를 열어서 사설을 배척하고 인심을 바로잡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알지 못하거니와 당시의 천하가 어지려워졌습니까, 다스려졌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다스리는 것과 더불어 도(道)를 같이 하면 흥(興)하지 않는 것이 없고, 어지러운 것과 더불어 일을 같이하면 망(亡)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인주(人主)가 예전의 다스린 자와 더불어 도를 같이하겠습니까, 예전의 어지러운 자와 더불어 일을 같이하겠습니까? 신이 앞에서 말한 국가의 치란 흥망(治亂興亡)이 이 사정(邪正)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요(堯)·순(舜)·우(禹)·탕(湯)임금 같은 자품(資品)으로 요·순·우·탕임금 같이 세상을 다스려 외외(巍巍)하고 탕탕(蕩蕩)하여 천고에 으뜸이신데, 즉위하시던 처음에 참으로 그 중도(中道)를 잡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시고 간사한 것을 버리어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선무(先務)를 삼으시어, 새로 사사(寺社)를 창건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시고 도첩(度牒)이 없는 중[僧人]을 한결같이 충군(充軍)하게 하시며 또 도성 안의 이승(尼僧)·무격(巫覡)의 집을 일체 철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令)이 내리던 날에 갓을 털며 서로 경하(慶賀)하지 않는 이가 없어, 정도(正道)가 구름처럼 일어나고 사설(邪說)이 얼음처럼 녹아 다시 당우(唐虞) 삼대(三代)의 정치를 보겠다고 생각한 지 거의 12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들판을 태우는 불길은 완전히 끌 수 없고 무성하게 퍼지는 풀은 베어 없애기가 쉽지 않으며 해마다 쌓인 폐단은 갑자기 고칠 수 없어, 양종(兩宗) 재초(齋醮)가 전과 같고 원각사(圓覺寺)의 분수(焚修)가 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리의 괴탄(怪誕)한 괴수가 요망한 술책을 만 가지로 변화시키고 온갖 방법으로 엿보아 제 도(道)를 펴서 정도(正道)를 이기려고 생각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중 학능(學能)이 흥덕사(興德寺)를 중창(重創)하는 것으로 명목을 삼아 귀근(貴近)한 자에게 아부하고 민간의 백성을 유혹하고 요망하고 허탄한 말이 천총(天聰)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기를, 흥덕사는 조종(祖宗)께서 창건하신 것이고 자운사(慈雲寺)는 비어 있는 한 절이니 저것을 옮기어 이것을 창건하는 것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곧 유음(兪音)을 내리시었습니다. 저 요망한 중들은 요망한 술책이 행해진 것을 기뻐하여 크게 토목의 역사를 일으켜 ‘어이차[呼耶]!’ 하는 소리가 성 안에 서로 들리고 곤사(髡舍)와 불찰(佛刹)이 고대 광실(高臺廣室)하여 참람하게도 궁궐을 모방하였는데, 지금 2년이 되었으나 공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한 유음의 폐단이 여기에 이를 것을 아셨겠습니까? 그러므로 학능의 술책이 한 번 시험되자 요승(妖僧) 학전(學專)이 이어서 화답하여 흥천사(興天寺)를 중창한다는 명목으로 또한 요망하고 허탄한 말이 천총에 도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관원을 정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군사를 주어 그 역사에 복역하게 하여 공역(工役)을 일으킴이 아침 저녁으로 있기 때문에 중[方袍圓頂]의 무리가 분주하게 서로 경하하면서 그 말이 행해지고 도가 다시 행하여지는 것을 기뻐하고, 속이고 유혹하는 술책으로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원각사의 요승 설의(雪誼) 등이 널리 유수(遊手)의 무리를 모아, 명색은 안거(安居)라고 하나 재(齋)올리고 밥 먹이는 비용이 문득 거만(巨萬)을 헤아리니, 사도(邪道)의 조짐이 이미 크게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요승 설의 등이 본사(本寺) 대광명전(大光明殿)에서 손으로 불상(佛像)을 끌어 몰래 그 자리를 돌려앉히고 떠들어대기를 부처가 영험하여 능히 자리를 돌아앉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다투어서 떠들어대어 도시에 전파되고 이항(里巷)에 전파되며 거실(巨室)에 전해지고 궁액(宮掖)에 전해져서, 혹은 병담(餠餤)을 혹은 채백(綵帛)을, 혹은 소과(蔬果)를, 혹은 숙속(菽粟)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서 길에 서로 잇따랐으며, 경도(京都)의 남녀(男女)는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서 손을 모으고 이마를 조아려 군왕에게 절하듯 하니, 이것은 온 나라의 백성이 모두 술책 가운데에 빠진 것입니다. 불상은 본래 흙과 나무로 만들고 금벽(金碧)으로 꾸민 것이니, 다만 마른 나무와 식은 재에 불과한데, 어찌 몸을 움직여 스스로 그 자리를 돌릴 리가 있겠습니까? 가령 스스로 돌리기를 요승(妖僧)의 말과 같이 하였다면, 이것은 반드시 도깨비가 시킨 것이니 괴이하기가 심한 것인데, 무엇이 국가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마땅히 수화(水火) 가운데에 던져서 여러 사람의 의혹을 풀어 영구히 뿌리를 끊는 것이 가합니다. 신 등이 이것을 들은 지 수일 만에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하여 요망한 근원이 된 것을 연구하여 보니, 요승 학능(學能)은 앞에서 창도(唱導)하고 요승 학전(學專)은 뒤에서 화답하며 설의(雪誼)가 또 이어서 이 세중이 함께 당여(黨與)가 되어 백성의 이목(耳目)을 더럽혔으니, 당시 인심의 바른 것을 허물어뜨린 것이 이와 같음이 없습니다. 이것을 징치(懲治)하지 않으면 신 등은 아마도 군대에서 도망하고 부세를 피하는 자가 머리를 깎고 치의(緇衣)를 입어 이적(夷狄)의 가르침에 빠져들게 되어,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도가 장차 이로부터 없어질 듯합니다.
신 등이 들으니, 사(邪)와 정(正)은 양립(兩立)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율(律)에 이르기를, ‘요망한 말을 한 자는 베인다.’ 하였으니, 원하건대, 전하는 사정(邪正)과 소장(消長)의 이치를 밝히시고 전대 치란의 연유를 거울 삼아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도(邪道)를 막아서 양종(兩宗)의 토목의 역사를 파하고, 설의가 요망한 술책을 쓴 죄를 바로잡아 시조(市朝)에 공개하여 죽인다면, 온 나라 신민이 사도가 정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또한 전하의 총명 예지(聰明睿智)한 덕(德)을 알 것입니다. 신 등은 또 들으니, 예전에 말하기를, 악을 제거하려면 근본을 힘써야 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풀을 뽑으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끝내 다시 난다.’ 하였습니다. 지금 설의의 죄는 마땅히 베어야 하지마는, 창도하고 화답하여 앞에서 시작한 학능(學能)·학전(學專) 같은 자도 또한 베어야 합니다. 신 등의 말은 모두 지성에서 나온 것이고 사정(事情)에 오활(汚闊)한 의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굽어 예람(睿覽)하시어 쾌히 결단하여 머물러두지 않으신다면, 국가에 다행하고 오도(吾道)에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원각사의 목불(木佛)이 자리를 돌렸다는 일은 말할 수 있겠지마는, 흥덕사(興德寺)에 대하여서는 태종(太宗)께서 사전(寺田)을 다 혁파하면서도 오히려 폐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해조(該曹)에서 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운사의 재목을 운반하여 수즙(修葺)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니, 국가에 폐단이 조금도 없다. 그 상소에 말하기를, ‘참람하기가 궁궐에 비길 만하다.’ 하였으므로, 내가 이미 내관(內官) 신운(申雲)과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가보게 하였다. 과연 참람하게 모방하였다면 중에게 죄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유생에게 죄주겠다.”
하였다. 한참 뒤에 중관(中官) 신운과 가주서(假注書) 이두(李杜) 등이 규찰(糾察)하여 아뢰기를,
“현재 중수한 것이 12칸인데, 계단의 섬돌은 모두 숙석(熟石)을 썼고 화공(花拱) 초공(草拱)은 모두 그전대로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저 말이 격절(激切)하지 않으면 인주(人主)의 듣는 것을 움직일 수 없으나,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안다 하면서 궁궐을 참람하게 모방한 것이 아닌데 참람하게 모방하였다고 하였으니, 인군을 섬기기를 구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가하겠는가?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채수(蔡壽)가 전지를 초잡아 들어와서 아뢰기를,
“대저 유생은 광망(狂亡)한 무리입니다. 국가의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으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만일 관대히 용서하여 대우하면 성덕(聖德)에 있어 어찌 빛나고 크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세좌(李世佐)는 말하기를,
“저 유생들은 의관(衣冠)의 자제이며, 또 국가의 일은 알지 못하고 오직 오도(吾道)를 붙들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아 망령되게 격절한 말을 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관대히 용서하는 것이 성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성현(成俔)은 또한 말하기를,
“저 유생들이 국가의 대체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경망한 말을 발하였으니, 마땅히 국문하여야 하나, 다만 가두지 말고 추문하소서.”
하였다. 어필(御筆)로 전지를 초한 것에 쓰기를,
“승정원에서 아뢴 것이 가한 것이 같으나, 실은 그르다. 내가 이단에 미혹되지 않는 것은 경 등이 알 뿐 아니라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지금 김경충(金敬忠) 등의 상소를 보니, 원각사의 부처가 돌아선 일은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마는, 흥덕사(興德寺)의 수창(修創)에 대한 것은 모두 명예를 구하여 공연히 장소(章疏)를 지어서 임금에게 죄를 돌리어 나라 사람들의 청문을 선동한 것이니, 옳겠는가? 반궁(泮宮)에서 책을 잡는 것은 장차 임금을 섬기자는 것인데, 먼저 임금을 속이니, 유자(儒者)의 일이겠는가, 경망한 아이의 일이겠는가? 지금 이 소장이 만세에 전하지 않겠는가? 승정원에서 자세히 아뢰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해조(該曹)에서 아뢴 것에 의하면 자운사의 재목을 스스로 운반하여 보수하였다고 하니, 국가에는 한 재목도 허비하지 않고 한 백성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생들이 나를 가리켜 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참람하게 궁궐을 모방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속인 것이므로 징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채수가 다시 아뢰기를,
“지금 이 유생들이 무려 4백여 명이나 되는데, 의금부(義禁府)에 가둔다면 국가의 대체에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 내불당(內佛堂)을 창건하였는데,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어버리고 가자, 세종이 죄주려 하니, 그 때에 남지(南智)가 울면서 간(諫)하여 세종이 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무리는 경망한 아이들어서 조사(朝士)와 같이 조정의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이단을 배척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니, 바라건대 관대히 용서하소서.”
하고, 이세좌도 말하기를,
“저 경망한 아이들의 무리가 어찌 국가의 대체를 알겠습니까? 청컨대 관대히 용서하소서.”
하고,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이 훈련원(訓鍊院)에서 와서 아뢰기를,
“세종 말년에 내불당을 창건하였는데, 유생들이 성균관 문에 쓰기를, ‘이단이 바야흐로 성하니 오도(吾道)가 장차 쇠하겠다. 선성(先聖)께 예(禮)로 하직하고 관(館)을 비우고서 간다.’ 하였습니다. 세종이 크게 노하여 장차 죄주려 하니, 남지가 눈물을 흘리며 간하기를, 이같이 경망한 아이들을 어찌 죄주겠습니까?’ 하니, 세종이 관대히 받아들이고 죄주지 않았습니다. 권당(捲堂)하는 것은 쇠세(衰世)의 일이어서 죄가 이번보다 더 심한 것이 있었는데도 세종께서 관대히 용납하고 죄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재(千載)의 미덕(美德)입니다. 지금 이 유생들이 부처를 돌려세운 중에게 통분하여 우연히 발단이 되어서 이같이 경망한 말을 발하였으니, 저들이 반드시 자운사의 재목을 스스로 운반하여 수리한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유생들이 불교를 배척하는 일에는 반드시 팔뚝을 걷어붙이며 과격한 의논을 하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만일 세종의 고사에 의하여 관대히 용서하고 죄주지 않으시면, 성상의 덕이 더욱 나타날 것입니다.”
하고, 성현(成俔)은 말하기를,
“신의 뜻에는 생각하기를, 죄가 마땅히 추국하여야 하나 가둘 것까지는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예전에 임금을 걸주(桀紂)에게 비한 자가 있으나,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주의 뜻을 감동시키고자 한 것이다. 지금 이 유생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안다고 하였으니, 친구 사이에도 거짓말로 서로 속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임금에게 이겠는가? 징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인하여 소장을 내리고 김경충(金敬忠)만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김승경이 소장을 보고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상소를 보지 못하고 유생들이 자운사의 재목으로 수리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그릇되게 아뢰었는데, 상소를 보니 유생이 또한 이미 알면서 이런 말을 하였으므로, 죄가 마땅히 추국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를 알지 못하고 한갓 부처만 배척하여 광망한 말을 발하였으니, 어찌 딴 뜻이 있겠습니까? 광망한 말을 능히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면 그것이 인주의 성덕입니다. 만일 사책(史冊)에 ‘유생 4백여 인을 가두었다.’고 쓴다면 후세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가 비록 사책에 쓰더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을 가리켜 안다고 하였으니, 어찌 국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생원(生員) 남궁찬(南宮燦)·이오(李鰲)·이유청(李惟淸)·최하림(崔河臨)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실로 김충경과 함께 의논하여 상소하였는데, 김충경만 가두니, 신 등도 옥에 나아가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남궁찬 등이 스스로 함께 의논하였다 하니, 가두고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평하기를, “성현(成俔)은 유자(儒者)인데 임금의 뜻에 맞추어 부처를 배척하는 사람을 탄핵하도록 청하였으니, 옳겠는가?” 하였다.
【원전】 10 집 12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치안(治安)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주D-001]도첩(度牒) : 조선조 초기에 억불 정책(抑佛政策)으로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 증명서. 양반은 1백 필, 평민은 1백 50필, 천인은 2백 필을 받고 발급하였는데, 입적(入寂) 또는 환속(還俗)을 하면 도로 반납(返納)하였음.
[주D-002]충군(充軍) : 죄를 지은 벼슬아치를 군역(軍役)에 편입시키거나 죄를 지은 평민을 천역군(賤役軍)에 편입시키던 형벌의 일종임.
[주D-003]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주D-004]양종(兩宗) : 교종(敎宗)에 속하는 계율종(戒律宗)·법상종(法相宗)·열반종(涅槃宗)·법성종(法性宗)·원융종(圓融宗)의 오교(五敎)와 선종(禪宗)에 속하는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의 양종(兩宗)을 합하여 오교 양종이라 하였는데, 뒤에 오교는 각각 남산종(南山宗)·자은종(慈恩宗)·시흥종(始興宗)·중도종(中道宗)·화엄종(華嚴宗)으로 불리게 되고, 조선조의 억불 정책(抑佛政策)에 의하여 세종(世宗) 때에 선종(禪宗)·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통합 정리되었음.
[주D-005]재초(齋醮) : 중이나 도사(道士)가 단(壇)을 설치하고 재(齋)를 올리는 것을 말함.
[주D-006]분수(焚修) :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음.
[주D-007]유수(遊手) : 놀고 지내는 사람.
[주D-008]안거(安居) : 중이 일정한 기간동안 외출하지 않고 한데 모여 수행하는 것.
[주D-009]금벽(金碧) : 고운 색채.
[주D-010]오도(吾道) : 유교를 말함.
[주D-011]숙석(熟石) : 인공(人工)을 가하여 다듬은 돌.
[주D-012]화공(花拱) : 주두(柱頭)의 방목(方木)에 꽃모양을 새긴 것.
[주D-013]초공(草拱) : 주두(柱頭)의 방목(方木)에 풀모양을 새긴 것.
[주D-014]권당(捲堂) :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불평이 있을 때, 일제히 관(館)을 비우고 물러나가던 일.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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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 김굉필(金宏弼)은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이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나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될 바탕이 됨직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현손(李賢孫)ㆍ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과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도의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나서는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 蘭加從俗終當變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 자리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 匡君救俗我豈能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가 우졸하다고 조롱하지만 / 從敎後輩嘲迂拙
세도와 권리가 구구한 벼슬길은 탈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 안우(安遇)는 자(字)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그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중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점필재에게 학업을 닦았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비로소 점필재와 틈이 났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와서 회시(會試)에 응하려 하였는데, 사관소(四館所)의 연소한 자들이 오만하여, 나이든 지방 학생들을 때리려 하니,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없이 스스로 훼상시키면서까지 명예와 이익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장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 지조와 절개는 가히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할 만하다고 하겠다.
○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화청(和淸)이니, 나이는 나보다 20여 세나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말년에 세 익우(益友)를 만났다.” 하였는데, 이는 나와 정중(正中)과 극창(克昌)을 지칭한 것이다. 젊어서 무술에 능하여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된 일도 있었다. 사람됨이 청백하여 오능중자(於陵仲子)와 같았고, 산수를 좋아하고 도학과 진리를 좋아하며, 효제충신에 있어서는 그 이상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헐어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고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으며 짧은 베옷에도 소연하였다. 말년에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였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勗)이다.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한 가지이지만 갈린 끝이 다른 것을 알았고, 선(善)과 악(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의 도(道)는 같으나,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은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의 호)이 존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유생을 구하였는데, 성균관에서는 자욱이 제일이라 하여 천거하였고,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은 자욱을 경연에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자욱이 이를 사양하였다. 계묘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때 자욱의 나이가 적었으나 거상하는 데 결함이 없었고, 모상(母喪)에도 전례(典禮)의 수(數)나 죽을 먹는 일등을 일체 《가례》에 따랐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은 사림 중에 으뜸이라고 천거하여 특별히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시켜서 불렀으나 자욱은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았다. 자욱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항상 담담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대단히 영리하였다. 젊을 때 성균관에 유생으로 있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를 골며 졸았으나 누워 자지는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밤 최진국(崔鎭國)의 눈에 띄어서 성균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기를,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 하였다.
○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으며, 음를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꼭 눈물지을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돈후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히지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에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 이분(李坌)은 자가 자야(子野)며,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이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세력과 이욕에 담백하였으며 시를 잘하였다. 그의 심원한 기틀에 대해서 대유(大猷 김굉필)도 탄복하였다.
○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순서를 밟지 않은 공부나 조롱하는 글이나 과거의 재능 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거의 대유와 같았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다.
○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 이며,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그 학문은 공서(公緖 노조동)와 같으나, 시에 대한 재주가 월등하였다.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는데, 병오년에 죽었으니, 나이 22세였다.
○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속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커서 가난하여도 걱정이 없이 도를 즐기기를 담담히 하였다. 또 국량이 웅장하고 깊었으며 외형에 나타나지 않도록 수양을 닦아 총명이 날로 진전하였다. 유림들은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오직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만이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이다. 나이는 나보다 20세 위로,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를 동봉(東峯), 또는 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 했다. 세종 을묘에 태어났는데, 나이 5세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시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아버지를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정권을 잡게 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산(水落山)의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수련하였으나, 유생을 보면 말마다 공맹을 칭송하고 불법에 대하여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물으면 그는 또한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앉아 죽은 일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하기를, “앉아 죽는다는 것은 예(禮)에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의 역책(易簀) 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을 귀한 것으로 알 뿐이요, 그 외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1481, 성종 12) 연간에는 육식을 하고 머리를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 제사하며 말하기를, “삼가 아뢰옵건대, 순제(舜帝)는 오교(五敎)를 펴는 데 유친(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를 3천으로 나열하되 불효함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그러므로 악독한 짐승에는 범과 늑대보다 더함이 없고, 미물의 충성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능히 제 어버이를 사랑하는 품성을 온전히 가졌으며 또한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삼가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리의 원래 그러한 것이요, 물욕이 이를 덮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미련한 소자도 근본과 지염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되 젊을 때 이단에 빠져 어리석게도 배우지 아니하였음을 슬퍼하여 장차 도(道)를 닦아 뛰어나보려고 하였으나, 윤회설과 같이 황당함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壯年)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뉘우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으며 먼 조상을 추모하는 넓은 의례를 정하고, 가난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소하고 깨끗함에 힘쓰고 제수를 차림에 정성으로서 하였나이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 때에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다고 하오며, 원(元) 나라 덕공(德公)은 백 세가 되어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에 감화했다고 하나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지나감을 근심하니, 놀라웁고 황공함이 끝이 없어, 한탄함이 자못 많사옵니다. 만일 지난 허물을 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된다면 행여 면목을 세워서 구천에서 조종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는 세상이 쇠하여감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남과 더불어 장예원(掌隷院)에서 송사를 한 일도 있었고,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시가를 자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하니, 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하게 여겨 전에 서로 사귀어 놀던 사람들도 다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홀로 시정배의 미치광이 같은 아이나 만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고 늘 어리석은 척하며 늘 웃고 지냈다. 뒤에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이 무상하니, 사람들은 그의 정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ㆍ자용(子容)ㆍ자정(子挺)과 나였다.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의 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
○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요, 호는 조총(篠叢), 또 광진자(狂眞子)라고도 하였다. 남양(南陽) 아전 순치(順致)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겨우 몸만 감싸고 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탐독하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향리를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 잘하는 것을 이유로 그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었더니, 그는 곧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때 점필재 선생은,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한 바를 본 사람이다.” 하였고, 학자들도 다 그를 존경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 학업을 닦고 서울에 올라와 점필재 선생이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못함을 간하여,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학을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학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여경(餘慶)을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항시, “여경은 속이는 자이다.” 하였으니, 여경 역시 그 행동을 감추고 호화스러운 가정에서 의식을 하였을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에는 칠원(漆園 장자)과 같고, 시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비길 만하고 재주는 공명(孔明)을 지녔으며 행실은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
○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字)는 여등(如登)이다.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그 친구와 친척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었다.
○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는 덕부(德父)이고, 호는 풍애(風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뛰어나서 외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으로 영남에 내려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을 여막(盧幕)에서 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김물(金勿)은 자가 개중(介重)이다. 강진(康津) 사람으로 감사(監司) 반()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묵중하며 결백함을 좋아했다.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거듭 과거에 급제하였다.
 최하임(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으며,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해 여름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인 설의(雪義)를 시켜서 불상을 몰래 숨겨 돌리며 부처가 저절로 다닌다 하고, 곡식과 비단과 베 등을 매일 천여 건씩 거둬들였다. 태학생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요망한 중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 상소문은 다 진국의 손에서 된 것이었다. 병오년 7월에 죽으니, 나이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거두지 못하자, 그 친구들이 부의를 보내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안택기(安宅記)》가 있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착한 것을 좋아했다. 병오년에 셋째로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니,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질이 굳세고 대체를 알며 꾸밈이 없어서 강공직(姜公直 강응정(姜應貞)의 자)을 심히 미워하여 그이는 인정(人情)에 멀다고 하였으나, 늦게서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병오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다.
○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요, 호는 차군당(此軍堂), 또는 죽계(竹溪)라고도 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이를 좋아하며 공직(公直)ㆍ자욱(自勗 정여창의 자)ㆍ백연(伯淵)ㆍ화정(和情 권안(權晏)의 자)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벗들이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고 병오년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그는 젊어서 군요(君饒)의 집을 몰라,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밤을 타고 꽃을 완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거짓말로 군요에게,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이상한 사람이 글을 읊고 있기에 같이 데리고 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으며, 그 시를 보니 맑고 차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고 화식(火食)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아니니, 세상에 선인(仙人)이 있다 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 군요는 황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맞아들이며 서로 달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일부러 청수한 시태로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하고 궁벽한 곳까지 뛰어난 선비가 어떻게 나의 친구와 함께 오셨습니까. 천행이 아니오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중균은 굳이 가려고 하였다. 군요는 꿇고서 옷 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담소로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에 사는 진사 이종준(李宗準)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허락하는 친우가 되었다.
○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에 급제하고 지금은 예조 정랑이다. 신라의 왕족 계통인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이다. 응기의 아우로서 의분심이 강하고 절개를 중히 여겼는데, 아버지 방경이 이를 매우 사랑했다. 정유년 나이 20세에 평안도의 향공(鄕貢) 시험에 세 번 연거푸 장원을 했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가 시장(試場)에서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 총(摠) 종실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 부정(茂豐副正)을 지냈는다. 태종(太宗)의 증손(曾孫)이니, 거문고의 재주는 정중(正中 정은(貞恩)의 자)과 비슷했으나, 그의 넓은 도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진(楊花津) 입구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 배를 저었으며 자호하여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했다.
○ 현손(賢孫 종실)은 자가 세창(世昌)이요, 신요(神饒)의 아들이다. 벼슬은 명양 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는 나보다 13세나 적다. 매양 법도에 따라 몸을 자제하였으며, 독실한 몸가짐은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다음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유가 이것을 저지시켰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 윤신(尹信 종실)은 자가 임지(任之)다. 파주(坡州)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문숙공(文肅公)의 후예다. 몸가짐은 세창(世昌 현손(賢孫)의 자)과 비슷하였으나, 침착하고 원만한 것은 세창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 이적(李勣)은 자가 중율(仲栗)이다. 시에 뛰어났으나 뒤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道)를 맛보고는 시를 전공하지 않았다. 지향하는 바는 높고 원대하여 상투적인 일을 일삼지 않았고 위로 옛사람을 벗하였다. 평상시에도 의관을 갖추었다. 대유와 백연(伯淵)을 사사하였다.
○ 허반(許盤)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았다. 대유는 그의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경복하였다. 음직으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훗날 동방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몸이온데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가 적고 잡된 것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때가 많사오니, 청하건대…….” 하였다.
○ 민구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죽은 첨정 수(粹)의 아들이요,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얼마 아니하여 능하게 되자 또한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의 자)ㆍ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자)ㆍ중율(仲栗 이적(李勣)의 자) 등에 종유하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위인이 단정하고 우아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다. 대단히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와 문에 능하였다. 숙주(叔舟)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 면(沔)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다.
○ 이주(李冑)는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이다. 어질고 문에 능하였다. 용헌선생(容軒先生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 이원구(李元龜)는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요, 참판 박팽년(朴彭年)은 바로 그의 외조부다. 두 집의 현능함이 이원구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佔畢齋)가 그의 시문을 취택하였다. 전주(全州)에 살았는데 청수한 행동이 출중하였다.
○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숙기(叔琦)의 아들로 기개가 있었고 곧은 것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지조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 능숙하였다.
○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어머니를 섬겼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姓名)을 기록할 정도였다 한다.
○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요, 호는 박전(薄田)이다. 사람됨이 어리석어 시와 술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박전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박전은 그런 것도 몰랐다. 음직(蔭職)으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배명 받은 후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승진을 못하고 있으니, 세리(勢利)에 담담함을 알 수 있다.
○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요, 호는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고, 집이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장륙(莊六)이라 호하였는데,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니 지정은 허락하였다.
○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으로 자가 중인(仲仁)이요, 호는 호은(壺隱)이니, 문장의 명성이 있었고 기축년에 생원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였다. 또한 음양ㆍ추보(推步)ㆍ풍수ㆍ의술ㆍ선도ㆍ불도ㆍ승제(乘除 산술)의 법까지 섭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심원(深源 종실)은 자가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黙齋), 혹은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으로 나와 동년생이나, 달과 날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도 통하였다. 사람됨이 충효하고 무술(巫術)이나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관대를 하였으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 때는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서 주계 부정(朱溪副正)으로 진급하였다. 나이 25세에 전후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는데, 혹은 윤허를 받기도 하고 혹은 윤허를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이 무도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난하다가 조부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또 이천(伊川)에서 임금께 글을 올려 병중의 부모를 가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들이 간곡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 종친들만 보는 과거[宗親科]에서 경(經)ㆍ사(史)ㆍ강독에 제1등으로 뽑히어서, 임금께서는 약과 술을 내리셨고 계급은 2품으로 높아졌으나, 군(君)은 봉하지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祖父)에게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으며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3년 동안이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은 반드시 몸소 맛보고 바쳤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마당에 내려와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오는 손님은 반드시 의술가이니, 너의 어머니 병을 그에게 물어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과연 한 소년이 왔는데, 이름은 원(元)이라 하며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서 숙박하기를 청하므로 머무르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어보니, 한 마디 말에 과연 의약자(醫藥者)임을 알게 되어 소년의 말대로 시험해 본 결과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뒤에 부모상에 있어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여서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그 문에 효자의 정표(旌表)를 달았었고 집안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공직의 사람됨은 경서를 잘 외우며 사주ㆍ관상 등으로 인명(人命)을 예언하며, 또한 의술서를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 서적까지도 보았다. 젊어서는 태학에 노닐면서 장안의 준걸한 재사들과 더불어 주문공(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짓기도 하고, 혹 월삭(月朔)에는 《소학》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이는 다 한때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요, 신종호(申從護)는 자가 차소(次韶)요,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요,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無忝)이요,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요, 권주(權柱)는 자가 지경(支卿)이요,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요,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요,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인데 이들은 그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들을 비방하여 혹은 소학계(小學契)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효자계(孝子契)로 지목하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ㆍ사성(四聖)ㆍ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다가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훈도(訓導)가 되었다.
○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인데, 또는 구로지인(鷗鷺至人) 또는 연파조도(煙波釣徒),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도 하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담담하고 상쾌하며 가난한 생활에도 태연자약하여 분수를 달게 여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선불(仙佛)의 도(道)를 배우지 않고 장기와 바둑을 즐겨하고, 시를 잘하는데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그는, “의롭지 못한 재물을 집안에 보태두는 것이라든지, 의롭지 못한 음식으로 오장(五臟)을 보(補)한다는 것은 더욱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흰 옥에 흠이 있는 격으로, 그는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는데 그해 9월에 죽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를 알고 모르고 간에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니,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사람됨이 과거를 중시하였다.
○ 한훈(韓訓)은 자가 사고(師古)요, 아명은 학이(學而)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서울에 살았으며, 시에 조예가 있고 병오년에 진사를 하였다.
○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에게서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으며,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다음에 대유(大猷)에게서 《소학》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에게서 배웠으며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까지 가서 글을 읽었다.
○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으로 자는 성지(性之)이다.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를 좋아하였으며, 공명을 좋아하지 않고 침울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서 배웠는데, 시에 능하였다.
○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우온(于韞)이다.
○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 이장길(李長吉)
○ 최충성(崔忠誠)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 노섭(盧燮)
○ 유방(劉房)
○ 조원기(趙元紀)
○ 조광림(趙廣臨)
○ 정붕(鄭鵬)

[주D-001]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임종시에 대부의 대자리를 거두고 딴 자리를 바꾸어 깔고 죽었다.
[주D-002]자로(子路)가 결영(結纓) : 위(衛) 나라의 싸움에서 자로가 창에 맞아 관끈이 끊어졌는데,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 하고, 관끈을 매고 죽었다.

 
 
 
 
 
 
 
 
 
 
 
 
 
 
 
 
 
 
 

 

  중종 6년 신미(1511,정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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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8일 (갑신)
좌의정 유순정이 사직 상소하다

좌의정 유순정이 대궐에 나아가 여섯 번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니, 다시 상소하였다.
“생각건대, 땅이 우묵하면 모든 물이 모이며 사람이 패(敗)하면 뭇 악(惡)이 돌아옵니다. 그 돌아오는 것이 어찌 논계한 바와 다 같겠습니까. 자취는 혹 비슷하나 실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신의 노(奴) 귀선(貴善)이 양주 토원리(楊州兎院里)에 사는데, 풍양천(豊壤川)이 그 집 아래로 흘러서 옛물길로 흐르지 않고 딴 데로 흘러내려 밭둑을 먹어들므로, 귀선이 그 물을 막아서 옛물길로 돌림으로써 먹어드는 손해도 막을 겸, 흙을 메워 곡식도 심으려고 품파는 사람을 모아서 축대를 쌓아 물을 막았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허물어진 지 5∼6년이며 다시 제방(堤防)할 도리도 없습니다.
신의 생질 이삼(李蔘)은 평안도 영숭전(永崇殿) 참봉으로, 개만(箇滿)하면 당연히 경관(京官)과 교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삼은 학문에 뜻을 두어 일이 바쁘면 글을 읽을 겨를이 없겠기에 한가한 데와 교체하려고 했는데 전조(銓曹)가 주의(注擬)하여 광륙 참봉(光陵參奉)과 교체하였을 뿐이지, 처음부터 어느 관직을 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의 처족(妻族) 윤사우(尹士佑)는 이삼보다 앞서 역시 광릉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헐뜯는 자는 이것을 가지고서 ‘신이 광릉 수호군(光陵守護軍)을 빌어 전일에 마치지 못한 방천을 마저 쌓으려고, 청탁하여 일가붙이를 능참봉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신이 욕심을 갖고 기어이 광릉을 청했다면, 박열(朴說) 또한 대신이니 하문(下問)하실 적에 어찌 조금인들 숨겼겠습니까. 이웃에 사는 장원서(掌苑署) 노(奴) 이동(李同)이 신의 여종을 꾀어 강간하고 남의 집을 빌어 이틀 밤을 잔 정상이 명백하였으나, 신은 차마 한 여종으로 인하여 사람을 사지(死地)에 넣을 수 없었으므로, 목사 최하림(崔河臨)을 시켜 형조 당상(堂上)에 고하고, 가벼운 벌을 따라 결방(決放)토록 하였는데, 도리어 이르기를 ‘신이 청탁하여 무고한 자를 억울한 형신(刑訊)을 받게 하였다.’ 합니다. 저들의 권세가 이미 이루어지매, 또 논하기를 ‘신이 거짓으로, 도망한 계집종이 집 재물을 훔쳤다고 하여 함부로 물목(物目)을 만들어 형조에 보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신의 처족인 이기(李琦)의 여종 사금(四今)이 그 주인의 심부름으로 신의 집을 일찍부터 왕래하다가 신의 여종들의 재산이 있는 곳을 몰래 살피고 그의 간부(姦夫)와 통모(通謀)하여 모조리 훔쳐 달아났습니다. 이기가 도둑 맞은 물건을 기록해서 사는 부(部)에 고하여 입안(立案)을 받았으며, 두어 달 뒤에 사금을 붙잡아 형조에 넘겼는데, 입은 의복과 비녀·다리꼭지·신·버선이 모두 신의 여종의 물건이었습니다. 하나 신의 비자(婢子)들은, 보이는 장물만을 추징(推徵)했을 뿐 그 나머지 사금이 팔아 먹은 것은 모두 추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어찌 신의 여종이 가재를 훔쳐 도망한 것이며 또 함부로 추징한 일입니까. 이 두 가지 일은 추안(推案)이 갖추어 있으니, 한번 상고하시면 가릴 수 있습니다.
신의 누이 동생은 고 첨정(僉正) 변철산(卞哲山)의 아내로, 20여 년을 홀어미로 사는 동안 집도 없이 가난하여 종의 집 두어 간에 붙어 사느라,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홀로 상의 은혜를 입어 조석 끼니가 군색함은 없는데, 누이 동생의 군색함이 이와 같으므로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하여 집을 사 주려고 복첩(僕妾)들을 시켜 토지를 팔아 집 값을 마련하던 중, 마침 신의 마을에 집을 팔려는 자가 있어 신이 저축한 돈이 모자라 봉미(俸米) 10여 석을 더 내다가 베와 바꾸어 집 값에 보태어 사준 것은 이웃 마을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쌀을 베로 바꾼 때문에 신이 재산을 불린다고 의심하여 이 말이 있게 된 것인데, 만약 신이 재물을 늘리려 하였다면, 어찌 집 한 채 살 돈이 없어 봉미를 더 내어 베와 바꾸어야만 사겠습니까. 널리 전장(田庄)을 두었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켜서 한 말인지 모르겠으며, 장삿군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 함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은 일찍이 상처하고 집에 주모(主母)가 없었으므로, 첩을 택하는 일에는 아예 문벌과 지위를 가리지 않은 것이지 어찌 첩을 기화로 부자가 되려 했겠습니까. 설령 그의 조부 최미동(崔彌同)이 신을 빙자하여 중외(中外)에서 작폐(作弊)했다 하더라도, 이는 신이 미처 알지 못한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전일에 신이, 신을 팔아 작폐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사인사(舍人司)로 하여금 여러 차례 각 고을에 행이(行移)하기를 ‘만약 신의 노반(奴伴)이나 족친을 일컫고 관부(官府)에 드나드는 자가 있거든 곧 잡아 가두고 회보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들으니 신의 첩의 동모 제부(同母弟夫)가 의주에서 작폐한 일이 있다 하므로 즉시 그 고을에 고하여 엄히 다스리라고 하였음은 남들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만일 미동의 방자한 해동을 들었다면 신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용서하였겠습니까.
신이 행한 사정의 안팎이 이와 같으나 허다한 욕이 신의 몸에 덮치니, 신은 집집 마다 입[口] 하나를 둔다 하여도 일일이 밝혀 변명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이 이른바 ‘땅이 우묵하면 뭇 흐름이 모이고 사람이 패(敗)하면 온갖 욕이 돌아온다.’고 한 말을 더욱 징험하겠습니다. 신이 논핵(論劾)을 당하고 여러 달 동안 문밖 출입을 나오지 않고 대죄하니 당장 내쳐야 하거늘, 오히려 성자(聖慈)를 내리시어 끝내 책명(責命)이 없이 오래도록 공론(公論)을 지연하시니, 이는 신의 죄만 더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속히 신의 직을 갈아 물론(物論)을 쾌하게 하심으로써, 공속(公餗)을 엎지르는 흉함을 거듭하지 마시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온 쟁암을 면하게 하소서.”
【원전】 14 집 54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주D-001]결방(決放) : 소결(疏決)하여 방송(放送)한다는 뜻. 죄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여서 죄상이 가벼운 자나 죄가 없는 자를 석방하는 일.
[주D-002]봉미(俸米) : 녹봉으로 받은 쌀.
[주D-003]공속(公餗)을 엎지르는 흉함 : 중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일을 낭패시키는 것. 대신이 적임자가 아니면 솥의 발이 부러져서 솥안 음식을 엎지르는 것같이 국사를 그르친다는 말.

 

 

연려실기술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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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


성종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의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 세조 2년 7월 30일 신묘에 세자궁에서 낳았다. 신사년에 처음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가 성화(成化) 무자년에 현록대부 자을산군(顯祿大夫者乙山君)이라 더 올렸다. 기축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안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홍치(弘治) 7년 갑인 12월 24일 기묘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왕위에 있은 지는 25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강정(康靖) 온량(溫良)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이라 하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인조 13년 을해에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광주(廣州) 서학당동(西學堂洞)의 임좌이다. 을묘년 4월 6일에 장사 지냈으며 표석이 있다.이다.
○ 비(妃)는 휘의신숙공혜 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청주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明澮)의 딸이다. 경태(景泰) 7년 병자 10월 11일 정미에 연화방(蓮花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정해년에 가례를 거행하였으며 기축년에 왕비로 책봉되고,갑오년 성종(成宗) 5년 4월 15일 기사에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19세였다. 연산주(燕山主) 정사년에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순릉(順陵)이다.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 산 묘좌이다. 갑오년 6월 7일에 장사 지냈다.
○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묘(起畝)의 딸이다.
○ 계비(繼妃)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 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평정공(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 호(壕)의 딸이다. 천순 6년 임오 세조 7년 6월 26일 기축에 신창(新昌)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계사년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기해년에 윤비가 쫓겨났으므로 경자년에 드디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주 정사년에 자순(慈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갑자년에 화혜(和惠)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嘉靖) 9년 경인 중종 25년 8월 22일 기묘에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69세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경인 10月 29일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의 왼쪽 산 간좌에 장사 지냈다. 이다.
○ 아들 열 여섯과 딸 열 둘을 두었다.
사(嗣) 중종대왕(中宗大王)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낳았다.
첫째 딸 신숙공주(愼淑公主) 정현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첫째 아들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융(㦕)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순(恂) 숙의(淑儀) 하씨(河氏)가 낳았다.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인데, 첨정 증찬성 치(菑)의 딸이다.
셋째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 귀인(貴人) 정씨(鄭氏)가 낳았다.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인데 능천군(綾川君) 증 찬성 수영(壽永)의 딸이다.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수(㥞) 숙의 홍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니, 생원 증 찬성 하림(河臨)의 딸이다. 후취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적(磧)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 회산군(檜山君) 염(恬)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인데 찬의 증 찬성 방언(邦彦)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봉안군(鳳安君) 봉(㦀) 귀인 정씨가 낳았는데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인데 판관 증 찬성 성기(成紀)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견성군(甄城君) 돈(惇)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고 봉사(奉事) 증 찬성 우호(友灝)의 딸이다.
여덟째 아들 익양군(益陽君) 회(懷)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인데 첨지 증 찬성 문창(文昌)의 딸이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관(慣) 숙용(淑容) 심씨(沈氏)가 낳았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인데, 인의(引儀) 증 찬성 간(簡)의 딸이다. 후취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군수 증 찬성 수중(守中)의 딸이다.
열째 아들 경명군(景明君) 침(忱)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첨정 증 찬성 첩(堞)의 딸이다.
열한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낳았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지중추 증 찬성 건(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무산군(茂山君) 종(悰) 명빈(明嬪) 김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수(銖)의 딸이다.
열세째 아들 영산군(寧山君) 전(恮) 숙용(淑容) 심씨가 낳았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니, 군수 증 찬성 순로(順路)의 딸이다. 후취는 경주 정씨(慶州鄭氏)이고 별좌(別坐) 증 찬성 홍선(弘先)의 딸이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열네째 아들 운천군(雲川君) 인() 숙의 홍씨가 낳았다. 아내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참의 증 찬성 인손(仁孫)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양원군(楊原君) 희(憘)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고 충의위(忠義衛) 증 찬성 경(經)의 딸이다. 후취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니 정(正) 증 찬성 종손(終孫)의 딸이다.
첫째 딸 혜숙옹주(惠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고원 위 문효공(高原尉文孝公) 신항(申沆)인데 본관이 고령(高靈)이다. 그 아버지는 참판 종호(從濩)이다.
둘째 딸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풍원위(豐原衛) 임숭재(任崇載)인데 본관이 풍천(豐川)이며, 그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셋째 딸 공신옹주(恭愼翁主) 귀인 엄씨(嚴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그 아버지는 낭성군 양호공(琅城君襄胡公) 보(堡)이다.
넷째 딸 경순옹주(慶順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시호는 영희공(榮僖公)이며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그 아버지는 부사 회(懷)이다.
다섯째 딸 경숙옹주(敬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인데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그 아버지는 현령 종원(宗元)이다.
여섯째 딸 정순옹주(靜順翁主) 숙의 홍씨(洪氏)가 낳았다. 남편은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인데, 본관이 봉화(奉化)이다. 그 아버지는 주부 현(鉉)이다.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인데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그 아버지는 참봉 광세(光世)이다.
여덟째 딸 경휘옹주(慶徽翁主) 숙용 권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인데, 본관이 파평이고, 그 아버지는 부사 승세(承世)이다.
아홉째 딸 휘정옹주(徽靜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인데,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그 아버지는 승지 흔(忻)이다.
열째 딸 정혜옹주(靜惠翁主) 귀인 정씨가 낳았다. 남편은 청평위(靑平尉) 한기(韓紀)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그 아버지는 판서 형윤(亨允)이다.
열한째 딸 정숙옹주(靜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정(正) 승류(承柳)이다.
○ 의경세자(懿敬世子 성종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세조는 자산군(者山君)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국과 도량이 웅걸스러웠으므로 세조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궁중에 있을 때, 마침 뇌성이 진동하여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내시 백충신(白忠信)이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으니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벼락이 전상(殿上) 좌우 기둥을 때렸다.”고 기록되었다.좌우에 있던 사람이 모두 넘어지고 넋을 잃었으나 《오산설림》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도 얼굴 빛이 변하고, 여러 왕손들은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성종은 전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이상히 여겨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애의 기국과 도량은 우리 태조를 닮았다.” 하였다. 《오산설림》에는 “세조가 정희왕후에게 이르기를, ‘뒷날의 나라 일은 마땅히 이 애에게 맡길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예종(睿宗)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었으므로 정희왕후가 성종으로써 대를 잇도록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안팎이 매우 불안하였다. 신숙주가 왕대비에게 아뢰기를, “속히 상주(喪主)를 결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왕대비는 성종으로써 왕통을 잇게 하고 친히 정사를 보살폈다.
예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월산군이 차례에 해당되나 정희왕후가 차례를 건너 뛰어 성종으로 위를 잇게 하였다. 성중은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었으나 오히려 조정이 편안하고 일이 없었다. 권 충정공(權忠定公) 벌(橃)의 을사년 상소
○ 임금이 열세 살에 들어와 왕통을 잇고 학문에 독실하며 어질고 밝아서 태평시대의 성군이 되었다.
○ 임금은 총명하고 영걸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는데 더욱 성리(性理)의 학문에 이해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의 글과 역법(曆法), 음악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고 활쏘기, 글씨, 그림도 또한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렀다.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며 제사는 사고가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몸소 지내고 몸을 삼갔다. 세 분 대비를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으며,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은혜와 예절로써 대우하고 종실 여러 친족들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보고 술을 내어 가인례(家人禮)를 행하여 매우 화락하였다.
○ 임금이 몸소 경안전(景安殿)에 제향(祭享)하고 경연으로 돌아오자 영경연(領經筵) 한명회(韓明澮)와 최항(崔恒)이 아뢰기를, “제사 지낸 후에 또 경연에 나오시니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나는 하루의 시간도 아끼는데, 재계하는 날은 할 수 없지마는 제사지낸 후에는 경연을 정지할 수 없다.” 하였다.
○ 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지금 날이 점점 길어가니 임금께서는 경연의 석강(夕講)에 나가야 할 것이요, 내시들과 늘상 함께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상(院相)김질(金礩) 등이 아뢰기를, “지금 한창 더위가 심한데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경연에 나오시면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되오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도 편전에서 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은 “내가 촌각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리오. 그리고 조신들을 편복으로 접견할 수 없소.” 하였다.
대비가 임금이 쉴 사이 없이 글 읽는 것을 보고, “피로하지 않으시오?” 하니 임금은 “읽고 싶어서 읽으니 피로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첨재(僉載)》
○ 임금은 학문에 뜻이 독실하여 아침ㆍ낮ㆍ저녁의 세 때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선비를 불러 강론을 마치고는 편복으로 마주 앉아 술을 내리면서 조용히 고금의 치란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을 물으니 전각 안에는 촛불 하나만을 켰을 뿐이었다. 때로 밤중에 이르러 선비들이 크게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御前燭]을 주어 본원까지 바래다 주게 하였으니, 곧 당 나라 금련거(金蓮炬)의 고사와 같은 뜻이었다. 《용재총화》
○ 이때 혜장왕비(惠莊王妃)ㆍ회간왕비(懷簡王妃)ㆍ양도왕비(襄悼王妃)가 한 궁중에 거처했는데 임금은 세 분을 똑 같이 섬기었다. 또 임금은 대비를 위하여 날마다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내수사의 여종 5~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얼굴과 재예(才藝)가 뛰어났더니 항상 임금에게 추파를 보내었다.임금은 이를 깨닫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는 궁중에서 작은 연회도 베풀지 아니하였다. 또 임금은 사고가 없는 한 날마다 세 번 경연에 나오고 세 번 대비전에 뵈러 갔으며 종실들을 불러 후원에서 술도 마시고 활도 쏘았다.종실들을 대하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태평시대의 좋은 일이지마는 논하는 이는 혹 말하기를, “연산군(燕山君)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니 애석한 일이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綠)》
○ 임금은 해서(楷書) 쓰는 법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으니,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바가 깊다. 또 묵화에도 뜻을 두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뛰어난 재능으로서, 모방하여 익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옛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 하여 약간 솜씨를 보인 것인데, 짧은 종이[寸牋]와 작은 서폭(書幅)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공경하며 감상하고 겹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귀중히 여기기를 주옥보다 더하였다. 《용천담적기》
후일에 중종(中宗)은, 일찍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필법을 볼 줄 안다고 하여, 궐내에 불러들여 간직했던 몇 장의 글씨를 내려주면서, “궐내에서는 성종과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것을 가려내어 들이라.” 하였다. 세창이 분류하여 아뢰었다.
○ 임금은 매양 월산대군(月山大君)을 궐내에 불러들여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나가 있을 때에는 편지로서 서로 수창(酬唱)하기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참외를 내려주는 시에,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 新苽初嚼水精寒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 兄弟親情忍獨看

하였다. 대개 그 우애의 지극함을 문자에서도 상상할 수 있었다. 《지봉유설》 《소문쇄록》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을 내 보이는 이가 있는데 종이와 필체가 보통 것과 달랐다. 그 종이에 쓰이기를,

깊숙한 정자는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고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 高樹俯潺湲
화류(驊騮 준마)는 푸른 풀밭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산기슭에 있구나 / 春在翠微間

하고, 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기대 선 무한한 뜻에 / 憑欄無限意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 하네 / 依約故山秋

하고, 또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 問兄何事送羲娥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 遐想洋琴與渭歌

하고, 또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 期會親戚 聘招佳妓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마는 은혜는 곧 형제이다 / 義雖君臣 恩則兄弟

하였다. 이것을 보건대, 임금의 평상시 희필(戱筆)임을 알겠다. 《소문쇄록》
○ 임금의 학문은 깊고 넓으며 문사(文詞)는 넓고 명백하였다. 글하는 선비 노사신(盧思愼) 등을 명하여 《여지승람》ㆍ《동국통감》ㆍ《삼국사절요》를 편찬하게 하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서적을 많이 간행케 하였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한서(前漢書》ㆍ《진서(晋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綱目)》ㆍ《통감(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전서(朱子全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 등이다. 그 밖에도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의 정난(靖難)에 한 장사치가 공이 매우 컸던 터라 세조가 어필을 내리기를, ‘세 번 죽을 죄를 지어도 용서 받는다.[三死無與]’ 하였다. 임금(성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그 장사치가 사람을 죽였는데 법 맡은 관원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논죄하였더니, 그 장사치가 세조의 어필을 올렸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교지를 내리기를,“선왕께서 손수 쓰신 유교(遺敎)가 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시오.” 하였다. 임금은 곤란해하며 말하기를, “선왕의 유교는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요, 사람을 죽인 자가 죽게 되는 것은 만세의 공법(公法)이니 어찌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써 만세의 공법을 폐기하겠습니까.” 하였다. 대비는 “비록 그렇지만 선왕의 유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용서해 주오.” 하였다.임금은 두 번 세 번 반대하면서, “대비께서 저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감히 나라 일을 맡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다른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소서.” 하였다. 대비는 “그렇다면 임금이 알아서 하오.” 하였다. 임금은 그 장사치를 곤장으로 치게 하였으나 끝내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밀부(密符)를 만들도록 명하여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두세 명의 중신에게 나누어 주어서 임금이 부를 적에 증거물로 삼게 하고 또 불의의 변고를 막도록 하였다.
○ 영안도(永安道)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 “본도는 조종(祖宗)께서 탄생하고 일어난 땅이므로 주(周)의 기산(岐山)이나 한(漢)의 패읍(沛邑)과 같사오나 다만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거나 서울에 가서 벼슬한 사람은 백 명에 한, 두 사람도 못 되어 조정의 예의ㆍ풍속과 문물의 아름다움을 귀와 눈으로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풍기(風氣)와 습성에 국한되어 오로지 억세고 사나운 것이 풍속이 되고 활쏘기,말타기로 업을 삼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형들도 가르치지 않고 자제들도 뜻을 두지 않으며, 공리만 서두르고 거짓을 일삼으며 예의를 버리고 기력만 숭상하게 되니, 습관이 풍속이 되어 드디어는 교만한 군사가 되고 맙니다. 지난번에 역적(이시애(李施愛))이 한번 일어나자 온 도민이 쏠리듯이 따라갔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고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기습(氣習)을 개혁시키고 교화를 밝히는 방법은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육진(六鎭)이 궁벽한 곳일지라도 자질이 영특하고 민첩한 사람이 왕왕 있으니, 바라건대, 영흥부(永興府)의 향교에 학업이 정밀하고 해박하며 명망이 있는 문관을 교수로 임명하여 여러 고을의 총명ㆍ민첩한 소년들을 가려 모아서 가르치고, 또 향교에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그 경비로 쓰도록 하소서.” 하였다.
○ 2년 신묘 겨울에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으므로 교지를 내려 직언을 구하였다. 임금이 보경당(寶敬堂)에 나와서 원상(院相) 김질(金礩)을 불러 조정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의논하였다.대비가 교지를 전하기를 “나의 일가 친척 중에서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봉록(俸祿)만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 혜성이 나타난 변괴는 아마 이에 관계된 것일 것이니 두려움이 실로 크다. 현명하고 준수한 선비로서 산림에 물러가 숨은 이를 마땅히 찾아서 불러 오라.” 하였다.
○ 3년 임진에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송골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임금이 경연에 나가자 신종호(申從濩)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매우 걱정하고 부지런하실 때이온데, 지금 궐내의 응방에서는 해동청을 기르고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완호(玩好)에 마음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이것은 아마 하늘을 공경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하는 실상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군자의 과실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니 내가 어찌 그 과실을 숨기리오.” 하고, 즉시 명하여 매[鷹]를 놓아 주게 하고 다시는 기르지 아니하였다.
○ 명하여 역대 제왕과 후비들의 본받을 만한 점과 경계할 점을 채록(採錄)하고 정리해서 세 편을 만들고,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 《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 하였다.
○ 임금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다가 한 나라 조조(晁錯)의 상서(上書) 중에,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모두 개간되지 못했고 놀고 있는 백성이 모두 농사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니, 시강관(侍講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도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중[僧]의 무리들이 군역(軍役)을 피하기를 도모하고 놀고 앉아 먹는 백성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다 쫓아버리기는 어려우나 청컨대, 승려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은 “사헌부로 하여금 규찰케 하라.” 하였다.맹현(孟賢)은 또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친히 밭 갈아서 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祭物))을 만들고 후비는 몸소 누에를 쳐서 제사 지낼 예복을 만들었으니 이는 제사를 중히 여겨 근본(조상)을 잊지 않고 갚는 것입니다. 한 나라 문제(文帝)는 가의(賈誼)의 말에 감동되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습니다. 예문이 갖추어 있는데도 조종조(祖宗朝)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은 원컨대, 임금께서 친히 적전을 갈아서 위로는 자성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힘쓰는 뜻을 모범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은 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명하여, “적전 가는 의식을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 6년 을미에 어떤 사람이 익명서를 승정원에 붙였는데 그 뜻은 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대비는 임금에게 정사를 돌려 주니 임금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대비가 듣지 않았으므로 또 원상(院相) 한명회로 하여금 대비에게 아뢰게 하였다. 명회가 대비에게 아뢰기를,“지금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이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대비는 따르지 않고 정사를 돌려주었다. 한명회가 아뢴 말에 온당치 못한 뜻이 있으므로 교지를 내려서 꾸짖었다.이에 양사에서 번갈아가며 세조가 언어가 불경한 죄로 양정(楊汀)을 죽이고 정인지(鄭麟趾)와 정창손(鄭昌孫)을 귀양 보냈던 일을 인용하면서 명회를 국문하기를 굳이 청했으나 왕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도 글을 올려 명회의 말 잘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자광이 다시 글을 올렸으나 말에 잘못된 점이 있어 파직되었다. 《야언별집》
○ 집현전이 폐지된 후에 독서당(讀書堂)도 폐지되었더니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먼저 홍문관을 열어 집현전의 옛 제도를 회복시켰다.
○ 7년 병신에 관각의 여러 사람이 건의하여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ㆍ양희지(楊熙止)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허침(許琛)ㆍ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후에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落成式)을 올렸다. 그 이튿날 감사하다는 글을 지어가지고 대궐에 나아갈 때 붉은 보로 싼 함을 메고 기생과 음악을 뒤따르게 하였다.
○ 명을 내려 신농(神農)ㆍ요제(堯帝)ㆍ순제(舜帝)ㆍ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은 고종(殷高宗)ㆍ주 문왕(周文王)ㆍ무왕(武王)ㆍ한 문제(漢文帝)ㆍ당 태종(唐太宗)과 주 문왕의 후비(后妃)ㆍ주 선왕(周宣王)의 강후(姜后)ㆍ제화(齊華) 맹희(孟姬)번희(樊姬)ㆍ한의 풍소의(馮昭儀)반첩여(班婕妤)명덕왕후(明德王后)ㆍ당(唐)의 문덕왕후(文德皇后)원헌황후(元獻皇后) 등의 모범될 만한 사적과 오왕 부차(吳王夫差)ㆍ한 무제(漢武帝)ㆍ진 무제(晋武帝)ㆍ당 명황(唐明皇)ㆍ덕종(德宗) 등 처음에는 현명하였으나 후에는 어두웠던 임금들의 사적을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글 잘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고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보면서 권면ㆍ경계의 자료로 삼았다.
○ 8년 정유에 사축서(司畜署)에서 가축 기르는 비용이 많이 들므로 명하여 가축의 수를 줄이게 하였다. 호조에서 돼지 3백 마리를 사재감(司宰監)에 맡겨 포육(脯肉) 만들기를 청하니, 임금은 “3백 마리를 어찌 차마 한꺼번에 죽이겠는가. 재신(宰臣)과 종신(宗臣)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 전에는 국왕이 탄생한 날에는 훈구(勳舊)의 신하가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며 복을 빌었는데 임금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복을 구하되 사특한 짓을 하지 않는다.’ 했으니,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겠는가. 그것을 폐지하라.” 하였다.
이때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이 글을 올려 축수하는 재(齋)를 폐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그대가 정도(正道)를 진술하고 이단(異端 불교)을 배척하여 나로 하여금 요ㆍ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자 하니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어두운 사람이지마는 실로 그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지금 말한 것을 따르겠노라.” 하였다.
○ 12년 신축 11월에 장원서(掌苑署 화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에서 영산홍(映山紅) 화분을 하나 올리니, 임금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은 인위(人爲)로 된 것이니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다시 올리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은 매양 경연에서 부지런히 강론을 듣고서도 오히려 범위가 넓지 못하다 하여 2품 이상 벼슬로서 고문될 만한 사람을 뽑아 차례로 참시(參侍)케 하고 그 칭호를 특진관이라 하였다.
○ 15년 갑진 5월에 명을 내려 조맹부(趙孟頫)의 서자(書字)를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에 걸어 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친히 왕우칭(王禹儞)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주면서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우칭의 기문이 비록 집정(執政)하는 이를 위해 지었던 것이지만 벼슬 자리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이것으로 좌우명을 삼을 만하다. 하물며 승정원은추기(樞機)의 처지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은 일찍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각도에서 바치는 물품을 줄이게 하니 경상 감사가 아뢰기를, “해산물 같은 것은 구하기가 매우 쉬우니 종전대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뜻으로는 비록 갸륵하지마는 임금이 아랫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 또한 간절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0년 기유에 장령 이승건(李承健)이 황해도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향시에서 책문(策問)을 내어 본도의 여러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물으니, 영유 훈도(永柔訓導) 권계동(權季同)이 대답하기를, ‘오직 부처를 공양해야만 능히 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그 말이 명교(名敎)에 해로운 점이 있기에 내쫓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불교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대개 지각 있는 사람이면 이것을 당연히 물리칠 것인데, 계동은 남의 사표(師表) 되는 처지에 있으면서 유교를 배반하고 부처에게 아첨하여 불교로써 백성 구하는 방법을 삼으려 하니, 사도(邪道)로 백성을 미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는가. 사헌부로 하여금 국문케 하라.” 하였다. 또 손수 쓴 글씨로 교지를 내려,
“내가 일찍이 중들이 천륜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소모시키는 것을 미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뽑고 세상의 교화를 굳건히 하고자 했는데,지금 유생들이 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들어 쓰는 시기를 당하여 요ㆍ순의 도리는 진술하지 않고 부처의 법을 주창하게 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절에 가서 사신(捨身)하고 당 나라 헌종(憲宗)이 예불했던 것과 같이 하도록 하려 함이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국문케 하여 먼 지방으로 내쫓게 하라.” 하였다.
○ 대사헌 허침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왜인이 귤(橘)나무를 바치고 유구국(琉球國)의 사자도 또한 이상한 나무를 바쳤다 하니 만약 전하께서 이것을 받으시면 저들은 전하께서 먼 지방의 물건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다투어 와서 바칠 것이오니, 어찌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임금은 “지난번에 유구국에서 바친 나무는 약재이므로 받았다. 귤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니 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지중추 고태필(高台弼)은 아뢰기를, “신은 제주 사람이온데 제주에서 진주 앵무배(眞珠鸚鵡杯)를 바치므로 백성에게 폐를 끼침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것은 그 용도가 나라에 이로움은 없으면서 백성에게 폐만 끼치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4년 계축 6월에 임금이 병환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라야만 병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근시에게 이르기를,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고기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나의 구복(口腹)을 위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느냐.” 하였다.
○ 25년 갑인 겨울에 임금은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사를 결재(決裁)하고 쉬지 아니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의관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 임금이 글을 좋아하고 두 임금(세종ㆍ세조)을 계승하여 유림(儒林)을 사랑하며 장려함이 보통 규모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당대 문장에 걸출한 선비들이 옥당에 빛났다. 조위(曹偉)ㆍ신종호(申從濩)ㆍ유호인(兪好仁)ㆍ김흔(金訢)ㆍ성희안(成希顔)이 더욱 우대를 받아 항상 저술한 것을 그날 그날 써서 바치었다.조위와 유호인이 모두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외직을 원하므로 특히 쌀을 보내어 그 어버이를 우대하였다. 조위가 상사(喪事)를 당하자 치제(致祭)하여 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임금의 은총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함께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하였다. 인재를 고무하고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켰으니 진실로 천년을 두고 있기 어려운 장한 일이었다.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있을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치었다. 임금이 편전의 문 밖에까지 나가 맞으며 그를 위로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에 이 매로써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또 야대(夜對)할 적에 술과 과실을 주니 희안이 감자(柑子)와 귤 여 나무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술이 취하여 정신을 잃었으므로 내시가 엎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실이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 이튿날 임금은 감자와 귤 한 쟁반을 옥당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어제 희안이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므로 지금 내려준다.” 하였다.희안은 이 은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반정의 의거를 일으켜 은혜를 갚았으니 임금의 선비 대우하는 정성과 사람을 알아 보는 밝음이 진실로 남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안이 위태한 시국을 바로 잡아 안정하게 만들어 훈공(勳功)이 길이 국가에 남았으니 임금이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금이 착한 일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허종(許琮)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에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는 없다.”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재상 이영은(李永垠)과 이곤(李坤) 두 사람이 기생 하나를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 하였는데, 간관이 죄를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고 서로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거늘,임금은 “옛날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 가는 세상의 일이다. 나는 차마 이 세상을 쇠망해 가는 세상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대간(臺諫)의 파직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 그대들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임금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오는데 육승지(六承旨)가 각기 소속 관청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해당 관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금께 바치었다. 임금은 반드시 그 승지와 관원과 더불어 사리를 되풀이 연구하여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게 하고 옳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것이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하고 반드시 그 성명을 기록하여 훗날의 승진에 대비하였다. 수령과 변장들이 부임할 때에도 또한 반드시 한 사람씩 불러 보고 먼저 그 사람의 출신 내력과 친족 교우 관계를 묻고, 다음은 공사를 처리하고 군졸을 어루만지며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서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고 또 이어 등급을 뛰어 승진시켜 주며,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쫓고 아울러 그를 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주었다. 비록 시종하는 신하나 외국에 사신 가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이 자기가 그 임무를 감당하기 힘들게 여겨지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감히 부임하지 못하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임금께서 한 수령이 특이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뽑아 올려 집의(執義)를 명했다. 삼사에서 글을 번갈아 올려 다툰 지 수일 만에 또 그 사람을 승진시켜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삼사에서 또 극력 논란하자, 수일 만에 또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삼사는 드디어 중지하고 다시 논란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만약 이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그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내시가 충청도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임금은 조용히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일을 묻고 이어 그 밖의 이야기도 물었다. 내시는 답하여 아뢰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에게 어떤 객(客)이 있었는데, 한 기생을 보고 매우 사랑했으나 기생은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이별할 때에 객은 울면서 차마 작별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문(廣文) 도사(都事) 이 좌석에 있었으므로 문객은 광문의 손과 기생의 허리띠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의 이별하는 서러움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가.’ 하니 광문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자지작(紫芝雀) 띠는 가는 허리에 둘리었고 / 紫芝雀帶橫腰細
흑서화(黑黍靴) 신은 발에 맞아 편안하다 / 黑黍張靴着足安

했으나 문객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싱긋이 웃으면서 이내 광문의 이름을 기둥에 써 두었다. 훗날에 특별히 광문을 홍문록(弘文錄)에 들게 하니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이 불러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홍문록은 한 때의 공론(公論)을 채용하였으되 일찍이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은 “권력 있는 이에게 쫓아 다녀서 얻은 것이 공정하냐?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져 채용된 것이 공정하냐?” 하였다.그 사람 사헌부의 언관이 힘써 다투거늘 임금은 말 소리와 얼굴 빛에 노기를 띠며 나가라고 꾸짖으니, 그 사람은 벌벌 떨면서 나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임금이 다니는 길로 나갔다. 임금은 눈여겨 보다가 이윽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제가 가야 될 길도 알지 못하면서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광문이 결국 옥당에 들어 왔는데 아주 기특한 재주 있는 인물이었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임금은 당대의 인물을 이리저리 다루었는데 그 수단이 매우 능란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고 있을 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우연히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그 종이를 살펴보니,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선사한 물목 단자(物目單子)였다. 임금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영에 나가서 육승지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사한다면 예의를 돌보지도 않고 받겠는가?” 하니,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하였다. 좌승지만은 자리를 피하여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에게는 90세가 된 늙은 어미가 있사온데, 평소부터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사했으므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종이를 내어 보이고,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임금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는데, 한 장령이 축관(祝官)이 되어 축 읽을 때를 당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임금이 그 사람을 풍산 만호(豐山萬戶)로 임명하니 간관이 논쟁하였다. 임금은 “명색이 문관이라 하면서 축문 한 자도 읽지 못하는구나. 활 쏘는 것은 안다 하니 한 성보(城堡)나 지키면 족하지.” 하였다. 2, 3개월 후에 불러서 다시 전일의 벼슬을 시켰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어떤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원통한 일 풀어주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사인(士人) 강신(姜信)이 썼습니다.” 하였다. 곧 강신을 불러 해서와 초서를 써서 바치게 하더니, “해서는 비할 데가 없으리만치 잘 썼다.” 하고, 드디어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란 벼슬을 주고 자주 불러 보았다. 몇 년 동안에 벼슬 등급을 뛰어 판결사(判決事)에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역시 재능이 그 직무에 알맞았다. 《기재잡기》
○ 이번(李蕃)은 안강현(安康縣) 경주(慶州)에 소속되었다. 에 살았는데, 자질이 준수하고 얼굴이 단정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경주부(慶州府)의 향교에서 스승에게 배우고 친구를 사귀어 배우니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도 또한 정묘하였다.임금께서 이번이 향시에 장원했던 작품을 보고 이를 칭찬하여 즉시 역마를 타고 오라고 명하여 종이와 붓을 주어 다시 시험해 보았다. 또 의복과 식품 비용까지 내려 주고 성균관에 머물게 하여 그 학업을 마치게 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번은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언적(彦迪)이다.
임금이 일찍이 밤에 놀다가 보니 멀리 삼각산(三角山)에 불이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했더니, 서생이 등불을 달아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묻기를, “무엇하러 이렇게 부지런하며 고생하느냐?”고 하니 서생은 “과거에 급제하려고 한다.” 하였다. 임금은 그 사람에게 명하여 절구(絶句)를 짓게 하고 이내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베어 자기 집 문 앞에 세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시켜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문 앞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급제한다 하는데, 문 앞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좋은 징험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하였다.또 물어 이르기를, “강송(講誦)을 잘 하는가? 제술(製述)을 잘 하는가?” 하니 답하여 아뢰기를, “다 잘 하는데도 수십 년 동안이나 과거에 억울하게 실패하였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즉시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는 나이 75세가 되었는데, 이천(利川)에 살고 있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깊었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였다. 계묘년에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으로 불려 와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강송(講誦)하게 하고,서거정(徐居正)ㆍ허종(許琮)ㆍ이극기(李克基) 등에게 명하여 성리의 근원과 천지의 도수(度數) 및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세차역법(歲差曆法) 등을 논하게 하니 관의는 분변하여 대답함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였다. 임금은 감사에게 명하기를, “전 찰방 이관의가 성리학에 정통하고 숙달했다 하므로 불러 시험해 물어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았다.장차 크게 쓰려고 했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 많음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고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의복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감사는 그 지방의 수령을 시켜 미곡을 주어 내가 그 사람을 표창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 최한정(崔漢楨)은 성품이 순량(醇良)하고 근실하기에 임금이 후한 대우를 하니, 승지 임사홍(任士洪)이 그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기를,“최한정은 나이 많으니 시독(侍讀)하는 데 적합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대답하지 않고 어필로써 한정의 이름을 쓰고 등급을 뛰어 대사헌으로 임명하니 사홍은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사림(士林)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용재집(容齋集)》
○ 임금이 장차 반궁(泮宮)에 행차하여 옛 글을 강론하고 직언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노사신(盧思愼)과 이승소(李承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한 일이 있었다.이칙(李則)이 나와 아뢰기를, “노사신과 이승소는 노성(老成)한 대신인데도 아뢴 바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성균관에 행차하여 다시 무슨 말을 구하시렵니까.” 하자 임금이 그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 안계송(安繼宋)의 부인은 세종의 손녀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딸이다. 임금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돌아오다가 그 집에 들려 보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간할까 염려하여 흥인문(興仁門) 안의 둘째 다리에 이르러서야 타고 있던 연(輦)을 갑자기 배고개[梨峴]에 있는 계송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간관이 과연 논란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계송의 아내는 몸에 무명베 검은 적삼을 입고 손수 길쌈을 하다가 허둥지둥하면서 임금을 영접하여 뵈었다. 임금은 특별히 계송에게 장악원 봉사(掌樂院奉事) 벼슬을 주고 바로 그 날에 사은숙배(謝恩肅拜)케 하고, 또 행차 중에 썼던 금ㆍ은 그릇을 모두 다 내려주게 하였다. 《안씨추록(安氏追錄)》 ○ 후손의 집에 임금이 앉았던 방석이 있어 항상 집 안에 달아 두었는데 해가 오래 되매 삭아서 없어졌다.
계송은 자는 자윤(子胤)이며, 스스로 박전경수(薄田耕叟)라 불렀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팔대손(八代孫)이다. 천성이 어리석어 시 짓고 술 마시는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벼슬은 직장(直長)으로 17년이나 있어도 옮기지 아니하였다. 《추강록(秋江錄)》
○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임금에게 청하기를, “홍상(洪常)의 숙부 칭(儞)이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으나 아내가 병이 나서 부임하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본직을 갈아 주소서.” 하니, 임금은 명하여 경직(京職)으로 임명하였다. 대사간 손비장(孫比長) 등이 차자를 올려,“홍칭의 사정(私情)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 기한을 정하여 쓰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은 편지로 답하기를, “대사간의 말이 대단히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일은 사정이요, 공정한 것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과실을 듣고 곧 고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 직무를 다하니 나는 이를 매우 칭찬하노라.” 하였다. 《국조모열(國朝謨烈)》
○ 임금은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한 집안의 부자 사이처럼 하였으나 정사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실정을 숨기고 행실을 꾸미지 못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서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으나, 대궐 문 밖에 나가서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서로 기뻐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대개 임금의 뛰어난 밝음과 위엄있는 덕에 신하들이 감화를 받은 것이다. 《오산설림》
○ 임금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기가 물과 같은 옥 술잔 하나가 있었는데, 임금은 매양 술이 취하면 다른 신하에게도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종실의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이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지니 술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은 임금의 술 많이 마심을 은연히 간하는 뜻이었다. 임금도 또한 그것을 허물하지 아니하였다. 《오산설림》
○ 함경도의 유생 박원령(朴元齡)이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남의 소(疏)를 대신 써서 올렸다. 임금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박원령이 썼다고 대답하였다. 승정원으로 불러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화살통[箭筒]을 내어 주면서 그 거죽에 글을 써서 바치게 하고, 곧 임금은 손수 글씨를 쓴 병풍을 내려 주었다. 비록 작은 기예(技藝)라도 칭찬하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필원잡기》
진사 박원령이 글씨를 조금 쓸 줄 알므로 임금은 이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 고을에 글을 내리고 종이와 붓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영광스러움이 향리에 빛나고 떨쳐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작은 기예가 어찌 족히 임금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랴마는 임금은 자기가 능하다 하여 남의 잘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장려함이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이다.이로 인하여 문장ㆍ서화(書畫)ㆍ공예 등 온갖 기술이 모두 격찬을 받아 진보되었으니, 이것으로 임금의 고무(鼓舞)ㆍ격려시키는 기틀이 특히 한 번 찡그리고 웃는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임금이 진심으로 좋아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온갖 방법으로 권장ㆍ신칙(申飭)하고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웠더라도 다만 소란ㆍ번잡하고 퇴폐ㆍ나타(懶惰)함만 볼 뿐이지 능히 이처럼 깊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지평 유경(劉璟)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에 나오시지 않고, 행차하실 때에도 음악을 폐지 하셨습니다. 예(禮)에 기년복(朞年服)은 임금은 입지 않고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니, 청컨대, 의(義)로써 정을 끊으소서.” 하였다.임금은 “조회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아뢴 대로 할 것이지만은 대신의 죽음에도 오히려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거늘, 하물며 친형의 시체가 지금 빈소에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음악을 듣겠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이 한 왕자만을 매우 사랑하여 흔히 치우치는 일이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은 즉시 성상소(城上所)의 장령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글 한 구절을 써서 주었는데, 그 글에,

세상 사람이 늦은 가을 국화를 가장 사랑하나니 / 世人最愛霜後菊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 此花開後更無花

라 하였다. 그 사람이 눈물을 닦고 나갔는데 얼마 후에 임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산설림》


 

[주D-001]세실(世室) : 종묘(宗廟)에 모시는 신주(神主)는 위로 4대(代)가 넘으면 옮기게 되는데 공덕(功德)이 높은 임금은 특히 옮기지 않고 영원히 받들게 되는데, 이것을 세실이라 한다.
[주D-002]가인례(家人禮) : 왕실에 있어서 조정례(朝庭禮)와 가인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조정례에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성종에게 신하가 되지마는, 가인례에서는 월산대군이 형이 되고 성종은 동생이 된다.
[주D-003]원상(院相) : 국상(國喪) 직후에 임시로 국정을 대리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주D-004]금련거(金蓮炬)의 고사 : 임금 앞에만 쓰는 촛불인데, 당 나라 선종(宣宗)이 한림학사 영호도(令狐綯)를 불러서 밤 늦게까지 담화하다가 돌려 보낼 때에 금련거를 주어 앞에서 인도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5]밀부(密符) : 옛날 임금이 특정한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로서 주는 것인데, 부(符)라는 것은 동철(銅鐵)로 만든 것으로 두 조각을 내어 한 조각은 임금이 지니고, 다른 한 조각은 장수나 지방관이 지니어 일이 있을 때에 마음의 표시[信標]를 삼았던 것이다.
[주D-006]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로서, 그 토지에서 나는 수확으로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한 임금이 친히 경작함으로써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주D-007]강후(姜后)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어느날 강후와 동침한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났더니, 강후가 문 밖에 엎드려 사과하기를, “첩의 허물로 왕이 늦게 일어나시어 정사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맹희(孟姬) : 제(齊) 나라 화씨(華氏)의 딸이 예법을 지켜 정당한 예절을 갖추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 하여 늦도록 처녀로 있었더니, 임금이 듣고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이를 맹희라 하였다.
[주D-009]번희(樊姬) : 초(楚) 나라 장왕(莊王)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번희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0]풍소의(馮昭儀) :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풍소의를 데리고 상림원(上林苑)에서 동물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와 성제에게 덤벼들므로 풍소의가 곰 앞에 가로 막아섰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1]반첩여(班婕妤) : 한 나라 성제의 후궁이었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장신궁(長信宮)에 있었는데, 반첩여가 임금을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참소한 자가 있어 성제가 반첩여를 잡아 문초하였더니, 반첩여가 아뢰기를,“저주는 귀신에게 비는 것인데, 귀신이 아는 것이 있다면 사특(邪慝)하게 하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귀신이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하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2]명덕왕후(明德王后)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황후인데 어질고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후세의 황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주D-013]문덕황후(文德皇后) : 당 나라 태종이 하루 아침에 조회를 파한 뒤에 내궁에 들어가서 옷을 벗으면서 노한 어조로 “내가 장차 이 촌 늙은 이를 죽여 버리리라.” 하였다. 문덕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위징(魏徵)이 여러 신하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였다.” 하므로 황후가 엎드려 절하며 “임금이 밝아야 신하가 직언(直言)을 하는 것이니 축하합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4]원헌황후(元獻皇后) : 당 나라 숙종(肅宗)의 어머니. 현종의 궁인으로서 숙종을 임신했을 때 현종이 낙태시킬려고 하였는데 꿈에 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 그것을 막더니 과연 중흥주인 숙종을 낳았다.
[주D-015]장온고(張蘊古) : 당 나라 사람인데, 태종에게 대보잠(大寶箴)이라는 임금의 좌우명이 될만한 격언을 지어 올렸다.
[주D-016]왕우칭(王禹儞) : 송(宋) 나라 사람인데, 조회때 신하가 시간을 기다리는 휴게실에다 대루원(待漏院)이라는 대신을 경계하는 기문(記文)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주D-017]추기(樞機) : 문을 여닫는 문지방인 돌저귀를 말하는데, 사람의 말[言語]하는 일을 추기에 비하였다. 승정원은 임금의 말[言語]을 관할하는 곳이므로 추기하고 하였다.
[주D-018]육승지(六承旨) :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를 말하는데, 순위에 따라 육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 보았다.
[주D-019]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선거ㆍ임명하는 기록을 말하는데, 교리ㆍ수찬의 선거는 먼저 칠품(七品) 이하의 홍문관원이 뽑힐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의중의 사람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말한다.


 

 

 
 
 
 
 
 
 

 

訥軒文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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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安宅記 b_053_50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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粤厥生民之初。天君命無極翁。建一屋子。是爲安宅。寄於方寸之間。而其體也大而無垠。藏於六府之內。而其形也怳然難狀。萬理之鎖鑰畢具。衆善之戶牖分列。一入其中。心廣體胖。人欲凈盡。天理流行。藹然氣象。自爾呈露。其所以安宅爲名者。誠不虛矣。始以053_505a其制言之。拓基於禮義之鄕。立柱於道德之林。構之以仁木。築之以信土。以三綱爲棟樑。以五倫爲柱石。囿以七情。衛以四維。體隱用費。無往不可。巍巍焉不可測。蕩蕩乎無能名。八窻玲瓏。虛室生白。左右君子之正路。洞然大開。東西聖王之情田。泂乎無塵。博厚之仁山高峙。汪洋之智水拱圍。無當面之土牆。有向陽之竹牖。道體不息之妙。直與天地同流。若是乎玆宅之盡其美而極高明也。於是天君始排朱門入紫闥。敦臨定位。命志帥呼氣卒。羅列於前。宣布號令。使意馬不得隳突。情車不得橫馳。風雨不敢毁。盜賊不053_505b敢近。夫而後玆宅之美者益美。安者愈安。而形氣之斧斤。自不能伐之。私欲之膏火。自不能燃之。幽而天地之理。可得而通焉。大而帝王之業。可得而成焉。遠而道統之傳。可得而立焉。堯授舜舜授禹。爰居爰處。禹傳湯文傳武。肯構肯堂。使閉者而開。隱者而顯。洞開一心之天地。以覆天下之萬物。以至周公孔子。亦相傳守。繕修焉增築焉。旣有光於前聖。而尤有功於玆宅也。及其麟紱一去。斯道寢衰。則居是宅者。雖不能多見。而亦豈無高明超卓之資。出於其間者哉。陋巷簞瓢。三月不違者。顔子之所以居是宅也。闢乎異053_505c端。大明斯道者。孟氏之所以居是宅也。翫月方塘。胷襟灑落者。非濂溪之居是宅乎。安樂窩中。春意融融者。非康節之居是宅乎。景星慶雲。泰山喬嶽者。非紫陽夫子之居是宅乎。嗚呼。天之賦畁。初無豐嗇之異。而氣禀所拘。轉向不同。聖者安是宅而狂者舍而不由。智者安是宅而愚者曠而不居。贒者安是宅而不肖者棄而不求。原其所趨。考其所行。其所以聖者歸於聖。狂者歸於狂。智者歸於智。愚者歸於愚。贒者歸於贒。不肖者歸於不肖。無足怪也。大凡安宅無常主。惟仁者便是爲主。而仁道至大。非可以惰慢致也。非053_505d可以荒怠得也。固當眞積力久。至誠無息而後。方可以爲安宅之主人也。惟彼不知居仁。埴冥道者。其居也宅其所宅。非吾所謂宅也。抑又論之。其爲宅也。包括道體之無竆。兼備本心之全德。有天理自然之安。無人欲陷溺之危。仰之彌高。鑽之彌堅。歷萬古而長存。閱千秋而如一。雖使天地可壞而斯宅不壞。日月可墜而斯宅不墜。泰山可崩而斯宅不崩。滄海可變而斯宅不變。春秋風雨。斯宅如常。楚漢乾坤。斯宅依舊。水不得漂。火不得燒。天地莫能載。九州莫能破。則大哉居乎。形體巍巍。宗廟美也。威儀濟濟。百官富053_506a也。外有藩蔽。數仞墻也。傍有別室。誠意關也。査滓不動。止水恬也。茅草不塞。正道通也。和氣氤氳。光風吹也。門戶宣朗。霽月來也。綱常將墜。扶之者玆宅也。道脈將絶。繼之者玆宅也。所立卓爾。高若登天。抑不知其延袤幾萬里而高大幾萬丈也。宅乎宅乎。實是後學依歸之所。而前聖已逖。更無固守者。遂令玆宅。公然作道傍之一空舍。楊墨踰其牆。申韓穿其壁。老子毁其瓦。佛氏畫其墁。昔之安者。於是乎不安。昔之美者。於是乎不美。天君乃悶古屋之荒廢。思法令之更張。格汝無極翁。諄諄然語之曰。古者聖贒之相繼而053_506b相守也。藏修得其宜。保護得其道。玆宅之安。安於盤石。以至于今。盲風打其戶。慾浪蕩其域。害之者多。繕之者少。毁之者衆。緝之者寡。出入無時。莫知其嚮。抑爾無極翁。不能撿察而然耶。耳司目司。不能統領而然耶。今若峻其牆壁。使踰者穿者而自息之。補其瓦墁。使毁者畫者而不復之。則其視人之家室門牆傾圮。悍鄰升堂而欺罵。惡少騎屋而窺瞰者。其優劣可懸絶矣。語未卒。無極翁喟然而歎。飜然而起。驅逐羣邪。大開門闥。陪天君理天職。改轍易御。奮厲振作。向者幾危之宅。煥然復安於今日。於是志帥抃於戶。氣053_506c卒舞於庭。欣欣然有喜色而相告曰。大矣哉。天君之功也。厚矣哉。天君之德也。相與攢手而穪頌。天君不答。憑道樞而卧。惟見丹田之上赤墀之邊。梧桐月楊柳風。自在而已。


 

 

 

 

 
 
 游軒先生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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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宅記 壬子 a_034_06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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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_061a天開子。地闢丑。人生寅。曰有其宅。則仁也。非一人之私而天下之同。而聖人安之。衆人違之。而吉凶生焉。聖人與天地合德者以此。而在天曰元亨利貞。在人曰仁義禮智。合言則一。分言則四。以元統天。猶以仁擧人。易曰。大哉乾元。萬物資始。而仁其配乾元之無疆乎。舍神明對上帝。居天下之衆。而廓其有容。寓萬品之理。而條其不遺。存天地於方寸。由鬼神於範圍。語其大則莫能載。語其小則莫能破。遠而太古。邇而卽今。靡此事彼物之不난001。靜而室中。動而天下。有泛應曲當之相濟。一本而萬殊。死生以之。榮辱以之。今034_061b女下民。或敢侮余。堯舜之盛而不爲之得。湯文之厄而不爲之失。周召之達而不爲之加。孔孟之窮而不爲之損。以至逄干之死而自獻焉。夷齊之去而獨立焉。富矣其有也。則幷天地。勇矣其守也。則恒古今。非固聰明睿智。極天理之正。盡人欲之邪者。其孰能與於此乎。先儒曰。堯以是傳之舜。舜以是傳之禹。禹以是傳之湯。湯以是傳之文武周公。文武周公以是傳之孔子。孔子以是傳之孟軻。軻之死。不得其傳焉。前聖後聖以一宅也。宅曠且千有四百餘年。運啓文明。挺濂洛之生。得洙泗之傳。尊信表章。發揮旁通。綱擧034_061c正脈。鏡照罔象。目擊道存。皇皇我闥。雖不復二帝三王之隆。而化無時雍。封無比屋。爲生民立極。爲萬世垂訓。繼往聖開來學。其功豈特破說夢而已。可謂無忝爾孔孟矣。紫陽夫子善繼善述。其勤又倍。發前人之未發。程後人之未程。集大成之美。其殆乎孔子之於羣聖人也。嗚呼休哉。自經秦火。黃老佛氏之相承誤天下。民流離失所。未定厥居。乃禽乃獸。名爲學士大夫。猶且貿貿焉迷東西南北之歸。滔滔而是。則況在蚩蚩惷惷。草上之風必偃者乎。士生今日。去中國幾譯之。偏陬眇眇焉洋海一粟。且於文字糟粕上。其034_061d知尊孔孟而黜老釋。有區區指天之矢。謂所依者固吾之所有。而顚沛必於是。造次必於是。無終食之間離於是。由是而庶幾執鞭乎孔孟之門人者。其誰之賜乎。洚水滔天。不有大禹。民其魚矣。戰國異端。不有孟子。民其夷矣。秦漢之後。又不生有宋諸夫子。則免戰國之夷者。其保其不下喬木而入幽谷乎。茫茫九州之大。禮樂文獻之地。傳紫陽之統者。意必有人矣。旣爲天下之同而非一人之私。則仁遠乎哉。求之則是。似不得獨推中國而有是。而畫海外而亡是也。當仁不讓於師。聖謨洋洋。吾黨小子其不如鼎鐺乎。厥034_062a宅無守。主人出游。游旣無方。復多踰時。或一日一至。或二日一至。或三日一至。過此以往。其至尤遲。其至尤遲。其行尤卑。苟由牛之言訒。推仲弓見賓承祭。以達顏子克己復禮。至於欲罷不能三月不違之後。卒與聖人同造。則天下歸之。達則周公以上。窮則孔子以下。宅無古今。才有賢愚。旣以銘心。恐心或忽。筆以存之。以勵將來。又作銘曰。
後開闢關古今。歷千聖以一心。統性情包四德。鼎厥居安盤石。生也榮死也哀。嵩與華不足巍。河與海不足深。道中庸民鮮任。蹈白刃非輕身。辭爵祿034_062b非亂倫。蓄和順發英華。隘不損通不加。茅茨宮樂耕鑿。轍環路明道學。微馨輟故宅荒。幻魍魎恣主張。且千年生周程。至紫陽集大成。述舊業垂後昆。聖門洞邪徑昏。入左衽迄皇明。孰精銳能爲名。升堂希矧入室。哀我東學不及。今季世才其難。余其中最庸頑。離所安靡所之。趣姑息昧厥危。謂悅目是可思。謂悅耳是可爲。外誘行內德亡。蔽厥明失文章。塞厥聰角物我。舍如許爭幺麽。主蟊賊窘室廬。惡積小性遁初。舜所同蹠與歸。旣迷途盍覺非。敬直內義方外。惟直方不期大。聖有訓庸無力。惡034_062c于剛甘自賊。惡于柔甘自絶。絶以棄賊以忽。是下愚余罪人。剛于欲柔于仁。當剛柔是柔惡。當柔剛是剛惡。謂辛剛謂赧柔。赧於欲豈謂柔。辛於仁豈謂剛。惡于柔惡于剛。懼二王曷不蘉。喪乃安竝周商。士一身中天地。窮獨善達博施。所安何曰一宅。孔孟師羣賢席。孔泛論孟逼喩。泛言理逼言放。二書存詎無徵。手足痺病股肱。矧不推杜我門。門由人宅乃尊。視以禮聽以禮。言以禮動以禮。勿四從顏具體。雖無狀有階陛。由階陛堂庶邇。然堂高室何以。畫不可猶云至。實至難云至易。一日至天下034_062d同。聖謨的愼始終。

 

秋江先生文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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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師友名行錄 a_016_13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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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與余同庚。而日月後於余。居玄風。獨行無比。平居必冠帶。室家之外。未嘗近色。手不釋小學。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人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其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恭,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016_137c師。年益高。道益邵。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佔畢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全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先生和韻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貳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穌。
安遇字時叔。孝行冠於鄕。居父喪。一從家禮。從佔畢齋受業。旣而無仕心。始貳於畢齋。嘗擧於鄕。赴京入會試。四館年少者驕傲。長老鄕生欲撻之。時叔曰。安016_137d可以父母遺體。無罪而自毀。以求名利乎。不入而去。操節可方東漢云。
權晏安東人。字和淸。年先於余二十餘歲。嘗曰。吾幸不死。垂亡之年。得遇三友。謂余及正中,克昌也。少時。以武才屬別侍衛。爲人淸如於陵仲子。喜山水。樂道眞。孝弟忠信。無能出其右者。屋毀不蔽風雨。或糧絶。其樂晏如。短褐蕭然。末路好佛。
鄭汝昌字自勖。入智異山。三年不出。明五經。窮極其蘊。知體用之源同分殊。知善惡之性同氣異。知儒釋之道同迹差。性理之學。醒狂敬之。庚子年。上下敎016_138a成均館。求經明行修儒生。館中擧自勖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自勖而講經。自勖退。癸卯年進士。其父六乙。施愛之亂死國。是時自勖年少。居喪無闕。居母喪。典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庚戌年。參議尹兢薦其孝與學士林無比。特召爲昭格署參奉。自勖上書請免。上下敎褒之。名益重。自勖爲人。性端重。不飮酒醴。不茹葷菜。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也。少時。居館與人寢。鼾睡而不寐。人不知也。一宵見獲於崔鎭國。館中喧傳。以爲鄭某參禪不寐。
貞恩字正中。號月湖。又號嵐谷。又號雪囱。拜秀川副016_138b正。音律冠於世。幽彈慷慨。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生然。
李坋字子野。居長安。好賢樂善。恬於勢利。詩學甚富。大猷伏其機軸深遠。
盧祖同字公緖。好讀小學。不喜躐等之學。嘲弄之文。科擧之才。持身守法。略與大猷同。居父喪。廬墓三年。一依家禮。與時叔同學於佔畢齋之門。先生敬之。
鄭世麟字昌符。居嶺南。受業於佔畢齋之門。其學同016_138c於公緖。而詩才甚高。先生敬之。丙午年歿。年二十二。楊浚字澄源。受業於佔畢齋。深沈有大度。安貧樂道。淡如也。又局量雄深。修爲不形於色。而聰明日進。儒林最卑下之。餘慶獨知之。
金時習。江陵人。新羅之裔。先余二十歲。字悅卿。號東峯。又號碧山淸隱。又號淸寒子。世宗乙卯年生。五歲。能屬文。世宗命招承政院賦詩。大異之。召其父敎之曰。善養此兒。予將大用。乙亥年。光廟攝政。入沙門。名曰雪岑。入居水落山精舍。修道鍊形。見儒生則言必稱孔孟。絶口不道佛法。人有問修鍊事。亦不016_138d肯說。或有言金乖崖守溫坐化之事。岑曰。坐化於禮不貴。吾但知曾子之易簀。子路之結纓以死之爲貴也。不知其他。辛丑年間。食肉長髮。爲文以祭祖父曰。伏以帝敷五敎。有親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故惡獸莫過虎狼。而微蟲無踰豺獺。能全愛親之性。又謹報本之誠。是皆天理之固然。而物欲之難蔽者也。伏念愚騃小子。似續本支。少沈滯於異端。嗟迷懵而未講。將修道可以薦拔。悟謊說莫如輪廻。壯歲因循。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攷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016_139a在腆以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感霜露之沾濡。憂歲月之逾邁。驚惶無已。嘆訝良多。如贖舊愆。儻納堪輿之兩際。庶將面目。得拜祖宗於九原。自壬寅以後。睹世將衰。不爲人間事。爲棄人於閭閻間。日與人爭訟於掌隷院。一日。飮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曰。汝奴宜休。鄭若不聞。人以此危之。其嘗與交遊者。皆絶不往來。獨與市僮狂易者。遨遊醉倒於道側。恒愚恒笑。後或入雪岳。或居春川山。出入無常。人莫知其涯涘也。其所喜者。正中,子容,子挺及余。所著詩文數萬餘篇。播016_139b遷之際。散亡殆盡。朝臣儒士。或竊取之以爲己作。
洪裕孫字餘慶。號篠叢。又號狂眞子。南陽吏順致之子。家世淸貧。僅裹身體。或不裙行。涉躐經史。放達不撿。不喜科擧。不爲免鄕計。辛丑年。南陽守蔡申甫以餘慶爲能文。放其役。卽步歸嶺南。謁佔畢齋受杜詩。先生曰。此子已見顏子所樂處。學者皆宗之。入頭流山肄業。到京。諫先生不建白時事。何空取人爵祿爲也。且當今學者莫不惡佛,老。而行己無一箇免於佛,老者。行圓而惡方者老也。行獨而不恤者佛也。先生大惡之。自是每稱餘慶譎詐。餘慶亦自晦行。衣食於016_139c朱門而已。爲人文如▒▒。詩涉山谷。材挾孔明。行如曼倩。
柳從善。晉州人。字如登。居山自晦。朋戚罕見其面。
禹善言初字德父。號楓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辛丑年。南行嶺南。謁佔畢齋先生於廬幕。先生字之曰子容。
金圽字介仲。康津人。觀察使之子。端重好潔。癸卯年生員。重科第。
崔河臨字鎭國。號太虛堂。所性喜功名。庚子年進士。是年夏。妖僧學祖敎其徒雪義潛回佛像。云佛自行。016_139d致粟帛布錦。日以千數。大學生上書請誅妖僧。凡五上書。不得允。疏文大抵皆出鎭國手。丙午七月歿。年三十二。家貧不能斂葬。友人致賻而葬之。所著安宅記傳于世。
李達善字兼之。性喜善。丙午年。及第第三名。調宗簿寺直長。
權景裕字君饒。安東人。剛毅識體。不喜作爲。深嫉姜公直。以爲不近人情。晩聞實行。甚愛之。癸卯年進士。丙午年及第。調弘文館正字。
李尹宗字克昌。號此君堂。又號竹谿。工於詩文。爲人016_140a好賢。公直自勖,伯淵,和淸。其所絶喜者也。
高淳字煕之。又字太眞。又字眞眞。濟州人。爲人有聾病。人畫地成字以致意焉。戊戌年。應詔。上書論時政。得妄名。人或告之。煕之聞而喜之。自號妄人。煕之初見辛德優於諸儒中。諸儒相與語詡詡。煕之書一絶於小紙云。小閣春風靜。淸談摠有餘。聾人無一味。垂首獨看書。德優喜之。和其詩曰。世聲聒溷濁。糞壤嗟鼻餘。羨君勝房老。晝隱千卷書。自是以爲知心交。戊申年。生員。
辛永禧字德優。靈山人。宰臣碩祖之孫。倜儻不羈。磊016_140b磊多大節。不喜科名。詩名播聞中外。成參議俔。以其詩爲出入蘇黃。癸卯年進士。自後不應擧。
李宗準字仲鈞。號浮休子。又號尙友堂。又號太庭逸民。又號藏六居士。又號慵軒居士。能詩文。丁酉年進士。丙午年。及第第二名。今爲平安評事。少時。不識君饒。與余及正中。乘月翫花。到君饒家。余誣君饒曰。好賢坊杏花下。有異人吟詩。招與偕來。聞其語。倜儻不羈。見其詩。淸泠出塵。非煙火食人所道。世有仙者。無乃是耶。君饒倒屣出迎。相與坐月下。仲鈞作詩。故作淸瘦態。君饒果大服。跪曰。陋幕至僻。秀才何因我情016_140c友幸臨耶。豈非天幸也。幸望一宿。仲鈞必欲求去。君饒跪奉衣裾而請。雷談竟夜。朝明。始識於背洞 於背洞名 寓居進士李宗準也。相與拊掌大笑。仲鈞,君饒遂爲知心交。
金應箕字伯春。丁酉年及第。今爲禮曹正郞。新羅宗姓方慶之後。
金應奎字仲星。應箕之弟。慷慨有大節。父之慶鍾愛之。丁酉年。年二十。擧平安道鄕貢。連魁三科。入進士會試。死於場。時議惜之。有子一人。
摠字百源。拜茂豐副正。太宗曾孫也。琴才與正中016_140d齊。宏量過之。卜築楊花渡口。自刺漁舟。自號西湖主人。
賢孫字世昌。神堯之後。官至鳴陽副正。年後余十三歲。動以法律身。篤行亞於大猷。嘗欲行冠禮。大猷止之。丁母憂。一從家禮。
尹信字任之。坡州之世家。文肅公之後。行同世昌。而深沈和緩過之。師事大猷。
李勣字仲栗。工於詩。後攻庸學。味其道。自是不專攻詩道。志尙高遠。不事窠臼中事。尙友古人。平居冠帶。澹澹如也。師事大猷伯淵。
016_141a許磐字文炳。癸卯年。進士。志於性學。恬於進取。欲事事師古。師友大猷。大猷服其端雅出於天性。蔭補調社稷參奉。時左相洪應爲提調。文炳說之曰。王世子。國之儲君也。他日東方萬姓之所仰賴者。今與宦寺居處。進見書筵之時少。遊玩狎昵之時多。請云云。
○閔龜孫字瑞卿。驪州人。故僉正粹之子。子挺婦弟。嘗學詩於子挺。少焉卽工。又從正中,貞之仲栗遊。師事大猷。爲人端雅無累。
申用漑。高靈人。字漑之。深沈有大度。工詩能文。叔舟乃其祖也。父沔死於施愛。
016_141b李胄。固城人。字胄之。賢而能文。容軒先生之曾孫也。
○李黿字浪翁。益齋齊賢之後。朴參判彭年乃外王父也。二家賢能。萃于一人。
李繼孟字希醇。佔畢齋取其詩文。居全州。淸修出衆。
○李世則字效翁。延安君叔琦之子。慷慨好直。淸操過人。能於詩文。
張世弼字彥卿。居高陽。家貧事母。必有酒肉。少不學。僅記姓名。
崔世明字葆光。好讀書。重仕進。丁酉年。進士。
安繼宋字于胤。號薄田。爲人性癡。詩酒之外。餘無留016_141c心。人知與不知。皆稱薄田而笑之。薄田不知也。承蔭拜敦寧府直長。到今十七年不遷。恬於勢利。可知也。
○申誧字持正。號虛舟。工詩畫。家貧喜酒。嘗自號藏六。仲鈞喜其號。請以酒一편001易之。持正許焉。
丘永安。江陵人。字仲仁。號편002隱。有文名。己丑年。生員第二名。重仕重利。又陰陽,推步,風水,醫術,仙釋,乘除之法。無不涉獵。
深源字伯淵。號醒狂。又號默齋太平眞逸。太宗之玄孫。與余同年生。日月後於余。經明有行。兼通醫術。性忠孝。不喜巫佛。平居冠帶。手不釋卷。殿講。通四書016_141d五經。進階明善大夫。行朱溪副正。年二十五。凡前後五上書論治道。或允或不允。又廷論叔母夫任士洪不道異心。失意於祖父。謫長湍。又謫伊川。上書請見病父母。言語懇至。得允。丁未年宗親科試。講經史擢第一人。賜藥賜酒。賜階二品而不封。以前有忤祖父之過也。
姜應貞字公直。號中和齋。先余十餘歲。居恩津。以孝行稱。嘗母病。三年不解帶。藥必親嘗。一日夢。天神降庭謂公直云。明日來客。必醫汝母病。明朝。果有一少年名元。自云居輪王洞。請宿於公直。館之。以母病問016_142a之。少年果知醫藥者。以少年言試之。十五日病愈。後居父母喪。一從家禮。冬月裸跣。體無完肉。事聞。旌表門閭。甄家丁役。公直爲人。善誦經書。推步人命。又涉獵醫術。兼涉地理之書。少時遊大學。與長安俊士。依朱文公故事作鄕約。或月朝講論小學。其選皆一時名士。如金用石字鍊叔。申從濩字次韶。朴演字文叔。孫孝祖字無忝。鄭敬祖字孝昆。權柱字友卿。丁碩亨字嘉會。康伯珍字子韞。金允濟字子舟。此其尤也。餘不盡錄。世之不悅者喧之。或指爲小學之契。或指爲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坎軻鄕曲。終老016_142b不試。癸卯年。生員。爲訓導。
安應世。竹山人。字子挺。號月囱。又號鷗鷺主人。又號煙波釣徒。又號黎藿野人。後於余一歲。爲人淸澹洒落。安貧喜分。不求名利。不學仙佛。不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歿。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下止字恐誤
蔡恂字叔孚。居陽川。庚子年。進士。爲人重科擧。
韓訓字學而。淸州人。居長安。工詩。丙午年。進士。
016_142c姜訢字時可。晉州人。觀察使子平之末子。始從餘慶于密陽。受杜詩於佔畢齋。次從德優學詩。次從大猷攻小學。次從時叔,公緖。讀詩於兪克己廬幕。
趙自知。平壤人。字性之。好施好賢。好山水好遊戲。不喜功名。深沈少言語。學於餘慶。能詩。
康伯珍字子韞。
金用石字鍊叔。
李長吉
崔忠成字弼卿。
盧燮
016_142d柳房
趙元紀
趙廣臨
鄭鵬
秋江書于敬止齋


 

 

 

頤庵先生遺稿卷之四文集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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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宗室義泉君墓碣銘 a_036_12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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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惟我成宗康靖大王克有聖德。受天隆報。螽斯麟趾之盛。度越前古。其第三王子曰完原君。完原之冢嗣曰伊城君諱壽剛。是爲公考。妣淸川縣036_128d夫人韓氏。西原君諱恂之女。議政府右議政諱伯倫之孫也。以嘉靖甲申五月甲戌。生公。諱仁。字春卿。姿容端瑩。性度溫良。見者無不愛之。比長。隨例受爵。爲義泉副正。階資信。乙巳。明廟卽位。公參錄衛社原從一等。特陞堂上。階明善。庚申秋。順懷世子行冠禮。公以司饔院副提調。爲進爵官。已而陞秩正義。進封爲君。乙丑。文定王后上仙。擇宗室遞直魂殿。御批名以下。公居其一。旣祥。又陞中義。萬曆丁丑冬。朝廷追削乙巳勳。公亦降正義。戊寅十月乙酉。病卒。享年五十有五。訃聞。上哀悼輟朝。別致賻祭。036_129a命官庀喪葬事。十二月乙酉。窆于坡州治東馬場里壬坐丙向之原。蓋公治命也。公生長紈綺。而無豪侈之習。待人接物。無高下彼此。一披情曲。故與之交游者。皆視如士夫。不知其爲公子王孫也。平生無他嗜好。唯以麴蘖自適而已。每以先公早棄爲痛。奉大夫人。務盡誠意。數擊鮮供具。率子姪上壽取歡。以沒其世焉。公配韓氏。咸悅縣監贈西陽君慈之女也。封上黨縣夫人。生四男一女。男長曰夢禹。初以順興守。累陞至正義封君。次曰夢殷。復興守。次曰夢文。禮興守。次曰夢武。益興守。女適前陽城縣監金虎秀。順036_129b興有三男二女。長曰瑱。次曰繼宋。其餘幼。復興有一男三女。益興亦一男三女。陽城有二男二女。皆幼。旣葬公之數月。諸孤以碣文屬寅曰。知我先君。宜莫如子。寅不得以蕪拙辭。乃爲之銘曰。
展也宣陵。東方之舜。公是曾孫。玉葉光潤。章秩身榮。子姪堂牣。全福謂遐。眞遊胡迅。坡平東壤。馬場之里。乃考攸藏。爰卽其趾。豎石鐫文。敍宗紀美。曷不鄭重。來裔永視。


 

 

 
 
 
 
 

 

언 별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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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대사헌(大司憲) 완원군(完原君)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완원군 이공은 휘는 만(曼), 자는 지만(志曼)으로 우리 태종의 장왕자(長王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7대손이다. 고조부는 진안부정(鎭安副正) 이영남(李永男), 증조부는 의영고 봉사(義盈庫奉事) 이희년(李希年), 조부는 완릉군(完陵君)에 추증된 이세량(李世良)인데, 이분이 종조부 보안부정(保安副正) 이수남(李壽男)의 아들인 첨지중추부사 이희손(李希孫)에게 양자 갔다. 아버지는 형조 참의 이목(李莯)인데, 증직(贈職)으로 좌참찬(左參贊) 완녕군(完寧君)에 이르렀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선조의 공신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윤자신(尹自新)의 딸이다.
공은 문학을 좋아하여 인조 5년(1627)에 박사 제자(博士弟子)에 뽑혔고, 다음해에 대책(對策)에서 장원하여 추관랑 겸 기사관(秋官郞兼記事官)에 발탁되었으며, 8년(1630)에 예조 좌랑에서 정언(正言)으로 옮기고, 얼마 후 지평(持平)으로 바뀌었다. 9년에 직강(直講)에서 지제교(知製敎)로 뽑혔다가, 다음해 다시 지평이 되었다.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이 인성군(仁城君)의 제자(諸子)를 석방할 적에, 간원에서 계속해서 논쟁하며 대사간 정온(鄭蘊)이 쟁론(爭論)한다 하여 아울러 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극진히 말하고 정온의 직간(直諫)이 어찌 또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느냐고 말한 것이 드디어 시의(時議)에 거슬리어 지평에서 체직되었다.
14년에 수찬에 제배되었다. 이때에 심양(瀋陽)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약속하게 되자, 공이 여러 학사(學士)와 더불어 오랑캐와는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을 극론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끝내 남한산성에서의 패전이 있었다. 다음해 어머니의 상사로 사직하고 삼년상을 마친 뒤 교리에서 헌납으로 바뀌었는데, 유석(柳碩)의 일을 쟁론하다가 헌납에서 교체되었다. 유석이 김상헌(金尙憲)을 논핵하여 오랫동안 당시의 여론에 지목되는 바가 되었지만, 지금 또 논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이 따르지 않았다. 3년 뒤 또 아버지의 상사가 있었으며, 상복을 벗은 다음 다시 교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장령으로 바뀌었는데, 수천 마디의 말을 올려서 정치의 폐단을 극언(極言)하니, 상이 칭찬하고 발탁하여 동부승지를 제수하였다. 소(疏)를 올려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한 바가 정직하므로 특별히 발탁하여 등용해서 예의(禮義)를 권면하는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1년 만에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갔는데, 이때에 해서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여러 고을에서 관리하는 군량과 묵은 양곡을 내어 진휼(賑恤)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호조(戶曹)에서 불가하다 하였다. 연해(沿海)의 군(郡)들로 하여금 서울로 운반하도록 재촉하는 한편 그중에 아주 부패된 것은 여러 고을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므로, 공은 다시 불편한 일 열 가지를 열거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공은 또 편의한 일을 역말로 보고했는데, 우봉(牛峯), 강음(江陰) 두 고을을 없애고 금천군(金川郡)을 두어 모든 성(城)을 수리하고, 모든 역에 늠전(廩田 역에 속하는 토지)을 지급하는 동시에 많은 역참(驛站)을 설치할 것과, 관청에서 본전을 지급하고 이자를 받아서 용도를 편리하게 할 것 등이었는데 이런 여덟 가지 일을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은 것이 많았다. 다음해에 가선대부에 오르고 완원군에 봉해졌다.
25년에는 도승지로 있다가 관서 관찰사(關西觀察使)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정명수(鄭命壽)가 와서 하고 싶은 대로 대관(大官)을 업신여기고 욕설을 하는 등 꼴이 아닌 일이 많았지만, 공은 정도를 지켜서 흔들리지 않으니, 그 역시 마음으로 두렵고 어렵게 여겼으며 부끄러워서 기죽은 기색을 보이는 일이 많았다.
26년에 대사간(大司諫)에서 예조 참판에 제배되었다가 다시 영남 관찰사로 나아가서는, 위조된 결세(結稅)와 이름 없는 세목(稅目) 등 수만 가지의 폐단을 상소(上疏)하여 모두 없앴고, 가산(架山)이 성은 커도 군사가 적으므로 이웃 고을 속오군(束伍軍)을 이동하여 전속케 하였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겨울에 조정으로 들어와 병조 참판이 되었으며, 특진관(特進官 경연관을 말함)으로 나아가서 영남의 변방(邊防)과 성수(城守)의 편의를 갖추어 진술하고, 또 사람을 쓰는 데에는 한갓 명예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름에 따르는 실속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글과 사리가 엄정하여 상께서도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러나 상이 총애하여 등용한 사람에는 명예만으로 진출한 자가 많았기 때문에 떼 지어 꾸짖기를,
“이와 같은 자는 측근의 반열에 둘 수 없다.”
하였으므로, 대사헌에 제배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도승지로 교체되었다. 나라에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사졸을 훈련시키는 것은, 모두 정축년(1637, 인조15) 오랑캐와의 조약에서 금지되어 오던 터이므로 청인(淸人)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던 차에, 표류된 한선(漢船 청 나라 선박을 말함)이 우리나라에 닿았다. 이를 청 나라로 압송하면서 주본(奏本)에, 우리나라 남방 왜노의 말에 본국왜(本國倭)가 우리나라 남방을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핑계하여, 그것이 우리가 성지를 수축하고 사졸을 훈련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하였다. 이어서 관왜(館倭)와 봉행왜(奉行倭)가 우리에게 흔단을 만든 몇 가지 일을 우리나라 변수(邊守 변방을 지키는 벼슬아치)가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상부(相府 재상이 정무를 맡아 보는 곳)에 보고한 것처럼 갖추 말하였다. 그러나 섭정(攝政)은 도리어 우리가 왜노를 끼고 변명한다고 의심하였다. 다음해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책문(責問)하고 표류된 한선에 대한 일을 신문한 다음, 공에게 질문하였는데, 공은 주본에서와 같이 대답하면서도 더 추가하여 자세히 하였다. 다시 표류된 한선에 관한 일을 질문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통제사(統制使)의 계문(啓門)이었고, 앞서 사자가 들어갈 적에 벌써 압송하였으며, 변방(邊方)의 일이 중대하므로 상국(上國 청 나라를 가리킴)에게 갖추어 보고했다.”
하니, 이때에 동렬에 있던 이가 모두 칭찬하기를,
“하기 어려운 일을 맞아 변론이 더욱 자세하였다.”
하였고, 대신(大臣)도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첨하고 헐뜯는 자들은 대답한 바가 오로지 조정만을 허물하여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짓이라 하였다. 그 때문에 처음에 홍양(洪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청북(淸北)의 영변(寧邊)으로 옮겼는데, 그해 여름에 가뭄으로 인하여 억울한 옥사를 심리할 적에, 대신이 공을 위하여 죄가 없음을 말하고, 또 아뢰기를,
“재능 있는 이를 선발하는 데 아무[某]와 같은 이를 얻기 어려우니, 석방하소서.”
하였다. 그런데 그 뒤 우리 사자가 연경(燕京)에 갔을 때 파장(巴將)을 시켜 책문하기를,
“아무와 같은 이를 무슨 죄로 벌책(罰責)하는가?”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북사(北使 중국 사신을 가리킴)가 와서 신칙하기를,
“간신(奸臣)의 말을 들어서 신문 결과를 크게 그르쳤으니, 그의 원래의 직위를 다시 주라.”
하였다. 공이 풀려난 뒤 특별히 해서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연달아 소(疏)를 올려 사양하였으며, 그해 가을에 강도 유수(江都留守)가 되어 나갈 적에 상이 송별하면서 이르기를,
“경이 당초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적소(謫所)를 옮긴 것도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였다. 상이 보장(保障)의 중책을 위임한 뒤로, 공은 주민의 노고를 풀어 주고 사졸을 훈련하고, 저축에 힘쓰고 전함을 수리하고 동래(東萊)와 양서(兩西 관서와 해서)의 동(銅)과 철(鐵)을 수송하여 병기(兵器)를 많이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5년 뒤에 호남 관찰사로 옮겨서는 해변을 순시하고 고군산(古群山)의 지리(地利)를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이어 편의(便宜)와 방략(方略)을 말하려 하였으나 미처 올리지 못하였다. 상이 바야흐로 무인(武人)을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어, 향교(鄕校)의 생도 정철(丁哲)이 희생과 폐백을 가지고 영장(營將)을 함부로 어겼음을 노여워하였는데 공이 제사가 더 소중하다 하여 가벼운 법으로 죄를 논하자 상이 더욱 노하여 공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8년에 관서 절도사(關西節度使)가 되었고, 다음해에 관찰사가 되어서는 오가통(五家統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정하는 호적 제도)을 시행하고 자모법(子母法)을 제정하였으며, 흉년이 들자 연해의 곡식을 주민에게 대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참소(讒訴)로 파직되었다. 상(上 현종)의 원년 호서 관찰사의 임명이 있던 그해에 큰 흉년이 들었다. 다음해 봄에는 금년의 조세[田租] 1만 석을 탕감하고 강도의 양곡 1만여 석과 안흥의 양곡 2천 석을 옮겨다가 종자(種子)와 식량(食糧)으로 지급하여 농업을 돕자고 요청하였고, 그해 여름에는 보리가 없어서 비축된 1만여 필의 공포(貢布)를 헐어서 많은 보리를 무역하여 지방민을 진휼(賑恤)하였다.
공은 사물(事物)을 널리 알았고 지방의 토질과 어떤 농사가 잘 맞는지를 더욱 잘 알아서, 농사를 위주로 행정을 하였다. 3년에 호조 참판이 되고, 그 다음해 사명(使命)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우윤(右尹)이 되었으나 소(疏)를 올려 면직할 것을 청하였고, 연경에 갔을 때 잠상(潛商 법령에 금지된 물건을 매매하는 행위)한 사건으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신문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파직되어 시골로 돌아갔다. 공은 5년 7월 22일 생을 마치니, 나이 60세였다. 그해 9월에 대흥현(大興縣) 북작동(北鵲洞) 남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재예(才藝)로 소문이 났고 24세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이름이 드러났다. 그때 붕당(朋黨)이 만연하여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되자, 공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종척(宗戚)의 신하로서 도의상 떠날 수 없으니, 차라리 헌신하면서 스스로 행실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40년을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벼슬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면서, 한산하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여겼다. 일을 맡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힘을 다하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다. 아첨하고 시기하는 자의 이간으로 쫓겨나고 낭패를 본 일이 많았으나 그 뜻은 더욱 굳어만 갔다. 대체로 이분의 평생을 상고한다면, 모사(謨事)를 잘하여 잘 성사하였으며, 큰 어려움을 당해서도 동요되지 않는 분이라 하겠다.
부인 유씨(柳氏)는 관향이 문화(文化)로 첨지중추 유희성(柳希成)의 딸이다. 공이 부모를 섬김에 있어 자식된 도리를 다했지만, 그 부인도 시부모를 잘 섬겨서 한결같이 공이 부모를 섬기듯 섬겼고, 종족이나 인척간에도 마음을 모두 즐겁게 하였는데, 공보다 8년 뒤에 세상을 떠나니 68세였다. 합장을 하였는데, 묘는 공의 옛 장지(葬地)에서 서쪽 사향(巳向 동남향) 언덕에 있다. 아들은 이증(李增) 한 분인데 강원 도사(江原都事)요, 사위 두 분은 감역 송광엄(宋光淹), 참판 민종도(閔宗道)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재능 있는 이가 배척당함은 / 才能之斥
시기하고 참소하는 무리들 때문이라 / 讒妬成群
부정함이 성하면 / 枉之興
공정함이 무색해지며 / 公正傾
어질고 간사한 사람 뒤바꿔 쓰면 / 賢邪易施
세도의 위태로움을 / 世阽危
의심해 무엇하겠는가 / 又何疑


 

[주D-001]인성군(仁城君) : 선조의 후궁 소생으로 제7남인데, 이름은 이공(李珙), 시호는 효민(孝愍), 어머니는 정빈(靜嬪) 민씨(閔氏), 부인은 판서 윤승길(尹承吉)의 딸이다. 광해군이 폐모(廢母)를 논의할 때 종척(宗戚)을 데리고 참석한 사실에 대해, 중신(重臣)들이 모역의 주인공이라고 극론하여, 왕이 여론에 의하여 진도(珍島)로 귀양 보냈다가 인조 6년(1628)에 대신과 백관(百官)의 주청으로 할 수 없이 선전관을 보내어 자살하게 하였다. 《光海君日記》
[주D-002]정명수(鄭命壽) : 본래 평안도 은산(殷山) 지방의 천민(賤民)으로, 청 나라에 사로잡혔다. 성품이 교활하여 우리나라의 비밀 사정을 제공하였으므로, 칸(汗)이 믿고 사랑했던 자이다. 《仁祖實錄 15年 2月》
[주D-003]자모법(子母法) : 곧 이식(利殖)하는 법이다. 예를 들자면 쌀 1백 가마를 대여하고, 그 이자로 10가마를 받는 제도이다.


 

 

 
구묘문(丘墓文)
완천군(完川君)의 갈(碣)

완천군(完川君) 이공(李公)의 이름은 순신(純信)이요, 자는 입부(立夫)이다. 태종(太宗)의 큰 왕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3세손인 유제령(楡梯令) 이윤의(李允義)가 있었는데, 이윤의가 국자감 생원 이귀달(李貴達)을 낳았고, 이귀달이 이진(李眞)을 낳았고, 이진이 공을 낳았으며, 어머니는 복주 김씨(福州金氏) 국지감 진사 이귀수(李龜壽)의 딸이다.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儒學)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상(上)이 친림하여 창방(唱榜)할 적에 공이 굳세고 용맹하므로 눈여겨보아 마지않았는데, 반열에 시립한 사람들이 상의 마음에 무사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을 알았다. 참하(參下)로 재차 선전관이 되었다가, 이내 주사랑(籌司郞 비변사(備邊司)의 낭청(郞廳))으로 뽑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되어 나간 지 3년 만에 추천받아 온성 도호판관(穩城都護判官)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金誠一)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능(賢能)함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다.
육진(六鎭)에서 변방 오랑캐들에게 해마다 잔치를 베풀어 주는데, 호인(胡人)들이 취하도록 마시고 소란 피우는 일이 많았으므로, 잔치 때마다 절반쯤 마시면 곧바로 쫓아 버렸다. 그러자 공이,
“이는 성의와 신의로 호인을 대하는 일이 아니다.”
하고, 반드시 취하도록 마시게 하여 보내자, 호인들이 기뻐하면서 모두 머리를 조아려 감사했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의주목 판관(義州牧判官)이 되었는데, 사신 나가는 사람이 고을을 지나면서 물품 요구를 한없이 하였다. 공은 그것을 불가하다고 여겨, 노자만 마련해 주고 나머지 것은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사행에서 돌아와서는 일부러 다른 일을 꾸며 유감을 풀려고 하므로, 공이 곧 인수(印綬)를 풀어 놓고 돌아왔는데도 보고하여 파직시켰다. 이때 호인이 자주 운총(雲寵)에 침입하여 북변이 소란하므로, 공을 특별히 혜산진 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로 서용하여 호인을 막도록 하니, 공이 명을 받고 즉시 진에 가는데, 호인이 또다시 급히 운총을 침입하였다. 공이 즉각 달려 나가 그곳에 당도하자 호인이 이미 달아나 버렸다. 주장(主將)이,
“적이 왔는데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이순신과 변장 원희(元熹), 이억기(李億祺) 등을 법으로 다스리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으나, 상이 장사(壯士)를 아껴 원희와 이억기는 사형을 용서하여 충군(充軍)하고, 공은 특별히 놓아주어 파직만 하였다. 이전에 사신 갔던 사람이 마침 금오랑(金吾郞)으로 있으면서, 같은 율(律)로 모두 북쪽 변방에 충군해야 한다고 논했으나, 상이 특별히 용서하여 모두 해양(海陽)의 좋은 곳에 옮겼다.
왜인(倭人)들이 한창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자, 상이 그것을 근심하여 장수를 뽑아 왜인을 대비하는데 공은 특별히 방답진 첨절제사(防蹯鎭僉節制使)로 서용되었다. 공이 군대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며 기계를 수리하여 싸울 준비를 하였다.
다음해 임진년에 왜장 평행장(平行長)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는데, 원균(元均)은 배가 침몰되자 도망치고 호남(湖南)의 수군(水軍)에게 구원을 청하니, 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보내어 구원했는데, 공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옥포(玉浦)와 고성(固城) 앞바다를 지나면서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또 상황이 급박함을 듣고 공에게 앞 부대를 거느리고 먼저 사천(泗川)으로 가게 하였는데, 적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전함(戰艦)을 정렬하여 형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가 거짓으로 후퇴하여 그들을 유인하자, 왜적이 과연 우리를 급하게 추격하므로 공이 뒤에 남아 대군과 협공하여 대파하였다. 전진하여 당포(唐浦)에 이르니, 적의 기세가 매우 치성하였다. 다시 급히 공격하여 이기고 그 배를 모두 불태웠으며, 나아가 당항(唐項)을 공격하니, 적의 수군이 사면에서 포위하므로 합세하여 크게 쳐부쉈다. 또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서 기다리다가 공이 거느린 군사만으로 백 명쯤을 쳐 죽이고 그 장수를 베니, 군의 기세가 더욱 왕성해졌다.
이로부터 공은 항상 앞장서게 되었다. 사졸을 쉬게 하고 또 전진하여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지세가 불리하므로 한산(閑山)까지 유인하여 격파했다. 안골포(安骨浦)에 이르자, 적이 물이 얕은 해안에 의지해 있으면서 우리 군사가 유인하여도 끝내 나오지 않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전진시켜 공격하였는데, 매우 많이 죽였다. 적이 다급해지자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는데, 사상자를 불지른 시체가 쌓인 곳이 12군데였다. 우리 군사가 그들의 배를 모두 불사르고 지키며 대기하였는데, 다음달에 적이 철수하면서 여러 곳에 있는 왜인들을 소집하여 부산으로 모였다. 이때 절도사 이순신이 대병을 이끌고 그 뒤를 쫓는데, 공이 선봉을 이끌고 화준(花遵), 다대(多大), 서평(西平), 절영(絶影)에서 적을 만나는 대로 연달아 승리하고, 부산에 당도하여 또 그 선봉을 격파하고, 이어서 대군이 오자 더욱 힘써 싸우니, 적이 크게 기세가 꺾여 준동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놓고 서쪽으로 나올 생각을 못하였다. 이는 우리 수군이 연달아 승전하여 막아 버린 힘 때문이었다. 전공(戰功)을 보고할 때마다 공의 공로가 가장 많았으나, 미워하는 자가 저지하여 상(賞)이 공에게 미치지 못했는데, 절도사 이순신이 특별히 공의 공로를 조목조목 들어 올리기를,
“이순신(李純信)이 힘을 다해 싸워 자기가 거느린 군사만으로 적을 네 번이나 이겼는데, 머리 벤 것을 공으로 여기지 않았고, 당항의 싸움에 장수를 베고 진을 함락시켜 공로가 가장 높았으니, 여러 장수 중에 이 사람만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사람입니다. 이번 행상(行賞)에 이순신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싸운 공로만 있고 싸운 상은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절충장군으로 진급시켜 호서 수군절도사(湖西水軍節度使)를 제수하였다.
공이 진에 가자 첫 번째로 절제를 어긴 대관을 논하다가 도리어 공의 군법이 법제에 벗어난다 하여 체직되고, 이어 사사로운 원한으로 무고를 입어 심리(審理)를 받게 되었는데, 상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놓아주었다. 그러나 좌천되어 고령진 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가 되었는데, 1년 만에 주사(籌司 비변사의 별칭)가 추천하여 유도방호대장(留都防護大將)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서호에 주둔하며 서울을 방위했다. 조금 있다가 견성윤(甄城尹 견성은 전주의 옛 이름)을 제수하고, 다시 호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대신이 방호하는 일이 중하다 하여 아뢰어 머무르도록 했다.
그해에 적이 또 크게 침입해 왔는데, 원균(元均)이 군사를 잃고 도망치다가 적에게 죽고, 절도사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었는데, 공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적이 흥양(興陽)에 이르자 격파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때 평행장이 순천(順天) 해상에 웅거하여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니, 유 총병(劉摠兵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말함)의 전세가 불리하므로 또한 군사를 몰아 공격하되, 우리 군사가 진 도독(陳都督)의 군사와 연합하여 해구(海口)를 막고 바짝 쫓았다. 행장이 심안돈오(沈安頓吾)를 불러 대병을 이끌고 밤을 틈타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미리 방비하고 있다가 중위병(中衛兵)이 먼저 적의 배 5척을 발견하여 불살랐다.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일어나 합세하여 치니, 용기 백배하여 사졸들이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해 앞바다까지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자, 행장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모든 적이 다 퇴각했는데, 통제사 이순신이 군중에서 전사했다.
공이 중위장으로 제군을 독려하여 격퇴시키고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왔는데, 승전한 보고가 위에 알려지자 공이 가의대부로 진급되었으나, 공신을 봉하는 데는 들지 못했었는데, 상이 다시 고치도록 명하고 문책한 뒤에야 3등에 넣어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자헌대부에 진급시켜 완천군(完川君)을 봉하고, 3대를 추은(推恩)하여 증조부는 유제 도정(楡梯都正)이 되고, 할아버지는 호조 참판이 되었으며, 아버지는 좌찬성이 되고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처음에 적을 평정한 후로 수군절도사에서 오위장(五衛將), 행 훈련도정(行訓鍊都正), 동지중추부사, 호남 수군절도사, 수원 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 경기(京畿)ㆍ호남(湖南)의 방어사(防禦使), 서해(西海)ㆍ호서(湖西)ㆍ호남(湖南)ㆍ영남(嶺南)ㆍ함경남도(咸鏡南道)의 절도사(節度使)를 지내고 군(君)에 봉작(封爵)되었다. 직계가 올라서는 지훈련원사, 훈련대장이 되었으며 다섯 번 행야(行夜 밤에 궁성을 순찰한다는 뜻으로 호위청(扈衛廳)을 말함)를 영솔하고 여섯 번 금병(禁兵 금위영(禁衛營)의 군사를 말함)을 맡게 되어 도총관에 이르렀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임해군(臨海君 이름은 이진(李珒). 광해군의 형)의 옥사(獄事)를 일으켜 연루된 무신들이 많았는데, 공도 구금되었다가 조사받고 풀려나와 관직과 봉작(封爵)이 복구되었다. 3년 후에 호남 절도사로 9월에 군영에서 졸하니, 나이 58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상이 그를 위해 조회를 받지 않고 철시(撤市)하고 부의를 의례대로 내렸으며, 예장(禮葬)으로 금천(衿川) 남쪽 일직(日直)에 장사 지냈다.
인조 때 훈례(勳例)대로 좌찬성을 추증하고, 효종 때에 장남(長男) 이탁(李)이 무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자, 우의정에 완천부원군(完川府院君)을 더 추증했다. 금상(今上) 5년에 태상시(太常寺)가 시호를 의논하여 ‘무의(武毅)’라고 하였는데, 시법(諡法)에 적을 꺾고 침략을 막아 낸 것을 ‘무(武)’라 하고, ‘용감하게 적을 죽인’ 것을 ‘의(毅)’라 한다.
공이 장수가 되어 변방에 있을 때에 군사를 까다롭지 않게 부리면서도 상벌은 꼭 미덥게 하고, 부하를 너그럽게 대하여 대여(臺輿), 하졸까지도 꼭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도록 하였다. 곧은 성격으로 비굴하게 남을 섬기려 하지 않았고, 법을 어기거나 사정 쓰는 사람을 보면 가차 없어, 권귀(權貴)한 자라 하여 구애되지 않으므로 당로자(當路者)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직 선조(宣祖)에게 신임 받아 처음부터 은총으로 발탁되어 봉군(封君)하는 부귀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상이 써 준 덕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상에게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통제사 이순신은 ‘그는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하여, 나랏일에 죽을 사람이다.’ 하고 칭찬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경상도 병마우후 윤천수(尹天壽)의 딸이다. 천성이 지성스러워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되 꼭 그 뜻을 미리 알고 순종하여 기쁘게 하니, 시어머니가 늘,
“우리 며느리가 나를 지성으로 섬기는데 갚을 길이 없구나. 다만 나처럼 오래 살고 복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부인은 누차 봉작을 받아 정경부인이 되고, 두 아들도 모두 귀해져 봉군되었으며 자손이 좌우로 그득하였는데, 78세에 졸하니, 같은 자리에 합장했다.
두 아들은 이탁(李)과 이숙(李琡)인데, 이탁은 이괄(李适)의 반란 때에 제장으로 군중에 있으면서 적을 베지 못하게 되자 이윤서(李胤緖), 유순무(柳舜懋), 이신(李愼) 등과 각기 거느린 군사로 밤에 진을 무너뜨리고 나오니, 교란함을 타고 흩어져 돌아오는 자가 3천 명이나 되었다. 상이 이를 의리가 있다 하여 특별히 진무 원종(振武原從)의 우두머리로 내세워 완흥군(完興君)으로 승습하여 봉하였으나, 아들은 없었다. 이숙 또한 승습하여 완산군(完山君)으로 봉작했다. 이숙이 이광보(李光輔)를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고, 사위 셋은 호군(護軍) 남두명(南斗明), 현감(縣監) 유린(柳璘), 도사(都事) 이정관(李廷觀)이다. 이광보가 이석귀(李錫龜), 이덕귀(李德龜), 이원귀(李元龜), 이익귀(李益龜)를 낳았는데, 이덕귀, 이익귀는 진사이고, 사위는 세 사람으로 좌랑 이상익(李尙翼), 현감(縣監) 김왕(金迬), 선비 박희(朴繥)이다. 남두명이 남수성(南壽星), 남필성(南弼星). 남경성(南景星), 남상성(南相星), 남정성(南井星)을 낳았는데, 남수성은 부사(府使)이고, 딸은 승지(承旨) 이석(李晢)에게 시집갔다. 유린은 유수창(柳壽昌), 유태창(柳泰昌), 유시창(柳時昌), 유선창(柳宣昌)을 낳았는데, 유수창은 현감이고, 이정관이 이지행(李志行)을 낳았는데, 이지행은 현감이다. 공은 소실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판서 남이공(南以恭)의 장첩(長妾)이 되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힘을 다하여 / 躬盡瘁
나랏일에 죽기로 맹세하고 / 矢死事
나라에 몸을 바쳐 / 忘身循國
씩씩하게 적을 무찔렀으니 / 威敵克壯
삼군을 거느리는 인망이요 / 三軍之望也
충신을 앞세우고 / 仗忠信
상벌을 밝게 하며 / 明賞罰
공을 세워도 자랑하지 않고 / 功成不矜
싸움에 이겨도 뽐내지 않았으니 / 戰勝不伐
무신다운 공렬이네 / 戎臣之烈也
힘써 소임을 닦아 / 強而理
간성의 공을 자임하였으니 / 任干城
이정에 새기고 / 勒功彛鼎
청사에 빛나 / 垂耀汗靑
백대에 명예로우리 / 百代之名也

[주D-001]육진(六鎭) : 세종(世宗) 때에 여진족(女眞族)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두만강 하류에 있는 종성(鍾城), 온성(穩城),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등 여섯 고을에 설치하였던 병진(兵鎭)을 말한다.
[주D-002]충군(充軍) : 죄를 지은 관리나 평민을 군역(軍役)에 편입시키는 것을 말한다. 《經國大典 刑典》

 
 성호사설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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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문(人事門)
만달(晩達)

만년(晩年)에 영달(榮達)한 사람으로는 고금을 막론하고 강태공(姜太公)을 일컫는다. 근일에 들으니, 지사(知事) 김환(金鍰)이 89세에 비로소 자헌(資憲)의 품계(品階)에 올라 기사(耆社)에 들어갔는데, 지금 94세라고 한다. 김환은 곧 고 판결사(判決事) 효건(孝健)이 67세에 낳은 아들이니, 부자가 합하여 1백 60년을 조정에 벼슬한 셈이다. 지사의 처음 벼슬이 현감(縣監)에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처럼 귀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환의 두 누이와 두 형 및 서누이[庶娣]와 서형(庶兄)이 모두 80 상수(上壽)를 누렸고, 그 모친 또한 90 상수를 누렸으며, 그 형수(兄嫂)와 서 형수도 모두 80여 세를 살았으니, 이상한 일이다.
또 동지(同知) 이진기(李震箕)는 75세에 문과에 등제하여 지금 90세임에도 근력이 강건하여 소년도 미치지 못한다. 근세에 완원군(完原君) 권모(權某)가 87세에 서자(庶子)를 낳았는데, 그 서자의 나이가 60여 세가 되었으나 건강함이 보통 사람의 비교가 아니다. 사람들이 간혹 말하기를 “늦게 낳은 아들은 기질이 반드시 허박(虛薄)하다.”고 하는데, 어찌 꼭 그러하겠는가?

[주C-001]만달(晩達) : 뒤늦게 영달(榮達)하는 것.
[주D-001]강태공(姜太公) : 여상(呂尙)을 이르는데, 80세까지는 곤궁히 지내다가 뒤늦게 주 문왕(周文王)을 만나 영달하였다.
[주D-002]기사(耆社) : 기로소(耆老所)의 별칭. 춘추가 높은 임금과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의 문관이 들어가서 대우 받는 곳이다.

  완원군(完原君)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세 번째 서자. 숙의홍씨(淑儀洪氏)의 소생.

시대: 조선전기
연도: 1480-1509

 


 

東州先生文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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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碣銘
密陽府使李公墓碣銘 幷序 a_094_413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337_cv009_01_005: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李公惟達。字兼善。與余同壬子科。雅相慕嚮。至驩也。嘗爲密陽府使。有朴獻納漢柱者。本密人。事成廟著直聲。枉死燕山朝。公旣下車。抵書請余文表厥里閈。以激勵頹俗。蓋其意謬謂余可扎以不朽。余甚愧其厚。文成未入石。公以翌年崇禎乙亥病沒。壽廑五094_413b十七。余至今悲之。其孤袖狀來謁余墓刻之辭曰。舍是無以不朽我先人。且先生所以覆露其遺胤。亦庶幾在是。噫。殆公志也夫。公至性端愨。易親而難狎。平居未嘗大聲色。退然若不任冠衣。遇事自將。能不失其正。於朋儕游處。久而益莊。未嘗肯嫺飾求合。內行修飭。奉繼母黃氏盡其誠。至白首如一日。得一味必歸以獻。未嘗不先意承歡。黃氏安之。當祭。備物致敬。躬莅剸烹。未嘗不腆以潔也。與族兄惟宗同室居十年。通服食有無。婢僕未嘗有間言。當官廉白謹勤。不取名譽。居外郡。輒有功績可紀。屢蒙褒嘉。旣去。094_413c未嘗不見思。公少治詞賦。魁發解。丙午升上庠。旣擢第。選承文院正字。歷侍講院說書,承政院注書。因事忤權壬。調海美縣監。入爲司憲府監察,兵曹佐郞。癸亥初服。充御史。宣諭湖省。其後立朝十三年。諸曹則禮兵正郞。師儒則直講,司藝。各司則濟用,禮賓,軍資,軍器,宗簿,司䆃寺正。春坊則司書,文學,弼善。憲職則持平,掌令,執義。兼官則知製敎,春秋館記注官。外除則京畿都事,光州牧使,密陽府使。是公踐履。始成宗康靖大王有支子諱。爵完原君。諡昭悼公。傳伊城君諱壽剛,義原君諱億,莘興守諱夢尹。至忠義094_413d衛諱璨。娶密陽朴氏司議效元之女。是爲公考妣。公配淑夫人鎭川宋氏。在室有家。能敬且和。先公月日卒。有男一人曰。女二人。適觀察使尹鳴殷,士人金慶曹。公蘊藉純篤。內歲器。不以衒外爲矯厲行。年與位不克滿其德。識者疑焉。唯斤斤世其家。且有子姓不匱。倘所謂天道其在是耶。銘曰。
質則近俚。或文而肆。惟隨與敖。弊一于二。溫溫恭人。不矜不盈。出言若吶。操約居貞。始奮孤身。漸厥矩武。儀于朝署。有翽其羽。有樹其惇。歷敭終譽。胡不臷茂。而止大夫。彼睪之丘。有揭斯石。我銘我辭。式表窀穸。


 

 

 

 

 약천집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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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첨지중추부사 이공(李公) 묘갈명 신사년(1701, 숙종 27)


공은 휘가 훤(藼)이고 자가 낙보(樂甫)이고 계통이 국성(國姓)이다. 6대조 완원군(完原君) 휘 수()는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별자(別子)이다. 이분이 이성군(伊城君) 휘 수강(壽剛)을 낳았고, 이분이 의천군(義泉君) 휘 인(仁)을 낳았고, 이분이 순흥군(順興君) 휘 몽우(夢禹)를 낳았고, 이분이 휘 전(瑱)을 낳았는데 종친의 친함이 다하였으므로 벼슬해서 동복 현감(同福縣監)이 되고 문과에 올랐으나 미처 승진하기 전에 별세하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상질(尙質)을 낳았는데 문과에 장원하고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들어갔다. 원종대왕(元宗大王)을 추숭(追崇)하는 것을 강력히 간쟁하여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다가 석방되어 돌아오는 길에 별세하였다.
배위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문숙공(文肅公) 수몽(守夢) 선생 엽(曄)의 따님인데 숭정(崇禎) 무진년(1628, 인조 6)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난 지 12일 만에 모친을 여의었으며, 미처 열 살이 되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기 전에 선대부(先大夫)가 또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외롭고 고달프게 자랐으나 또한 자력으로 학문에 종사하였다.
15세에 태학사(太學士)인 낙정(樂靜) 조공 석윤(趙公錫胤)의 문하에 장가들고 그대로 수학하였는데, 낙정공은 기대하고 허여하기를 매우 중하게 하였다. 공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명망이 한때에 군림하였으며, 현종(顯宗)이 입학할 때 뽑혀 봉로(奉爐)가 되니, 선비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동춘(同春) 송 선생(宋先生)이 반궁에서 선비들을 가르칠 적에 공이 장의(掌議)에 추대되니, 송 선생은 공을 자주 칭찬하였다.
신축년 영릉 참봉(寧陵參奉)에 제수되고 갑진년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과 한원(翰苑)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기유년 성상이 직접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시제를 내어 문관들을 시험하였는데, 한동안 있다가 공에게 이필(珥筆)을 거두고 응제(應製)하게 하였다.
급제한 사람의 봉미(封彌)를 뜯을 적에 상신이 성상에게 아뢰기를 “한림(翰林)이 장원을 하였으니 크게 생색이 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은 전적으로 초자(超資)하여 승진시키도록 명하였다. 여러 번 양사(兩司)와 춘방(春坊), 옥당과 두 전조(銓曹)의 낭관을 역임하고 지제교에 뽑혔으며, 교서관 교리와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였다.
임자년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다가 계축년 옛 관직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와 다시 의정부의 낭관과 삼사(三司)의 아장(亞長), 춘방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갑인년 도청(都廳)으로 산릉의 일을 감독하였으며, 을묘년 이 공로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송서(送西)되었다.
순천(順天)과 인동(仁同)의 부사(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기미년(1679, 숙종 5)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또 사은숙배하지 않았는데, 9월 27일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서울의 집에서 별세하였다. 지평(砥平)의 중원동(中元洞)에 장례하였으며, 계해년에 그 왼쪽 임좌(壬坐)의 산에 개장하였다.
공은 깨끗한 이름과 고상한 명망으로 화려한 벼슬을 두루 지내었다. 풍채가 미치는 곳에는 진실로 사람들의 이목을 크게 흥기시켰다. 아침저녁으로 충직한 말씀을 올리고 날과 달로 군주의 좌우에서 논사(論思)한 것을 일일이 손을 꼽아 다 헤아릴 수가 없는데, 군주의 덕과 시운에 관계되는 큰 것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현종(顯宗) 말년에 영상 허적(許積)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상의 마음을 현혹시키자 대신(臺臣)이 논죄하여 탄핵하니, 상이 크게 노하였다. 이때 공은 헌납(獻納)으로 있다가 여러 번 아뢰어 간쟁하였다.
공은 또 수찬(修撰)으로 있으면서 상소하여 개진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군주를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은 지가 이미 양성(陽城)의 7년을 넘었으나 통곡하면서 마제(麻制)를 찢는 것을 신이 이미 하지 못했으니, 이러고서도 군주의 덕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평민의 입도 오히려 막을 수가 없는데 간쟁하는 신하의 입을 어찌 다 봉함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삭탈관직하는 벌이 초야의 선비에 이르고 노여움을 옮기는 조처가 이미 처벌한 신하에게 가해지니, 이는 바로 혼란한 세상에도 드문 일인데 성명(聖明)한 군주께서 어찌 이런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공의 말이 간절하고 곧음이 이와 같았으나 상은 다만 체직하도록 명하고 크게 처벌하지 않았다.
갑인년 봄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무뢰한 자들이 상소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가 맏며느리의 복을 입지 않았다고 말하여 성상의 노여움을 격발시켰다. 성상은 대신 이하로 하여금 빈청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신하들이 의논을 올릴 적에 성상의 뜻을 어기니, 상신과 간관(諫官)들을 모두 축출하여 귀양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때 공은 응교로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해년과 경자년 이후로 간사한 의논이 분분하여, 마침내 복제를 강등함으로써 종통(宗統)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말로 국중에 전파하고 상소문에 올려서 사림에게 화를 전가시키는 기화(奇貨)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그 말을 받아들이시어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을 스스로 해치시고 이목(耳目)과 같은 신하들을 스스로 내치시니, 오늘날의 국사가 급박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였다. 공은 또다시 앞자리에 입대하여 입이 쓰도록 강력히 말씀드리니, 함께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현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새로 즉위하자, 감정을 품은 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그리하여 양사(兩司)에서 첫 번째로 송공 시열(宋公時烈)에 대해 예(禮)를 그르치고 지존(至尊)을 폄하한 죄로 논하여 화가 장차 측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공은 사간으로 있으면서 인피(引避)하였는바, 그 대략에 “송시열은 초야의 선비로 효종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충성하려는 정성이 신명에게 질정할 만한데, 지금 예론에 가탁해서 마침내 효종을 폄하했다는 죄를 가하시니, 이것이 과연 한 나라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고 백세의 공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사화(士禍)가 임박함을 목견(目見)하고 있으나 성상의 마음을 돌릴 가망이 없으니, 구차하게 대간(臺諫)의 자리를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신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였다. 이에 상은 엄한 전지(傳旨)를 내려 체직하고, 다음날 또다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다시는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하늘이 또 그 수명에 인색했으니, 애통하구나.
나는 공보다 1년 늦게 태어나서 약관 시절부터 교분을 맺었고 한 부서에서 자리를 연하였으며, 붓과 벼루를 함께 하고 문예를 강론하여 서로 왕래하며 주선한 것이 10여 년이었다. 돌아보건대 나는 혼우하여 비록 공의 전체를 알 수는 없으나 또한 스스로 생각하건대 공을 잘 아는 자가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진다.
공은 회포가 평탄하고 솔직하며 조행이 준엄하고 깨끗하여 일찍이 자질구레한 예법에 구애되지 않았으나 천품(天稟)이 자연히 도(道)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무릇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사람의 잘잘못을 논할 때에는 일찍이 교분이 친하고 세력이 높다 하여 용서하거나 봐주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함께 앉아서 대면하더라도 또한 곧바로 잘못을 지적하고 뜻을 다하여 말씀하였다. 그러나 정성스러운 뜻이 남에게 믿음을 얻어 사람들도 심히 서로 거스르지는 않았다.
선조를 받들고 친족을 구휼하는 아름다운 행실과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의리에 있어서는 또 보통사람보다 몇 등급이 뛰어났다. 평소 고요함으로써 자신을 지켜서 담박하여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오직 경적(經籍)을 보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하였는데, 벼슬을 그만둔 이후에는 더욱더 연구해서 스스로 터득한 지취(旨趣)가 많이 있었다. 저술한 시문이 모두 간결하고 질박하며 고상하고 순수한바,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은 천성이 온화하고 유순하며 덕스러운 용모가 공손하였다. 시집가던 때에 시부모가 이미 별세하여 뵙지 못하였으나 제사를 받들고 남편을 섬김에 모두 떳떳한 법칙을 따라 세상의 명문(名門)이 되었다. 공과 같은 해에 출생하고 공보다 4년 뒤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하였다.
장남 한익(漢翼)은 진사인데 일찍 요절하였고, 차남 한종(漢宗)은 생원으로 현재 고산 현감(高山縣監)을 맡고 있으며, 다음 한장(漢章) 또한 일찍 요절하였다. 판서이고 대제학인 최규서(崔奎瑞), 판서이고 대제학인 서종태(徐宗泰), 진사 임세공(林世恭), 심정희(沈廷熙), 조하중(曺夏重), 참봉 홍중범(洪重範)이 사위이다. 한익은 1남 조(肇)를 두었는데 일찍이 옥당에 들어갔다가 부모를 봉양할 것을 청원하여 현재 양근 현감(楊根縣監)을 맡고 있으며 내외의 여러 손자와 손녀가 수십여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어찌 아름다운 자질을 받고 태어나고도 / 何稟之美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며 / 而年之不遐
어찌 순수하게 수양하고도 / 何養之粹
많이 베풀지 못하였는가 / 而施之不多
수명이 길지 못했다고 하나 / 雖曰不遐
명성은 장구하였고 / 聞則長矣
베풂이 많지 않았다고 하나 / 雖曰不多
말은 드러났네 / 言則彰矣
하늘로 올라간 혼은 깨끗하고 밝아서 / 升者淸明
아득하여 따를 수 없거니와 / 杳莫追矣
육신을 따라 내려간 넋은 유택이니 / 降者幽翳
표한 글이 이곳에 있다오 / 表在玆矣


 

[주D-001]이필(珥筆)을 …… 하였다 : 이필은 귀에 붓을 꽂는 것으로 숙직하는 사관(史官)을 이르는바, 옛날 사관들은 조정에 들어갈 적에 붓을 관 옆에 끼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응제(應製)는 임금의 특명으로 글을 지음을 이른다.
[주D-002]봉미(封彌) : 시험 답안지의 오른편 끝에 응시자의 성명과 생년월일, 주소와 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함하여 붙이는 일을 이른다.
[주D-003]송서(送西) : 동반(東班)의 벼슬자리에 있는 벼슬아치를 서반(西班)의 벼슬자리로 옮겨 보냄을 이른다.
[주D-004]양성(陽城)의 …… 것 : 양성은 당 나라 덕종(德宗) 때의 명신으로 간쟁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마제(麻制)는 삼으로 만든 마지(麻紙)에 쓴 황제의 조칙(詔勅)을 가리킨다. 양성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7년 동안 재임하였는데, 덕종이 육지(陸贄)를 파면하고 간신인 배연령(裵延齡)을 재상으로 임명하자, 이에 반대하여 마지에 쓴 황제의 조칙을 찢으려 하다가 덕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청장관전서 제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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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구심서 2(耳目口心書二)

망상(妄想)이 달릴 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온갖 잡념이 없어지는 것은 정기(正氣)가 돌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이 좋을 적에 꽃 한송이, 풀 한 포기, 돌 한 덩어리, 물 한 그릇, 새 한 마리, 고기 한 마리라도 가만히 관찰하노라면, 가슴속에 연기가 모락모락 구름이 뭉게뭉게 이는 듯하여 흔연(欣然)히 스스로 터득[自得]되는 것이 있는 듯하다가 다시 터득한 것을 이해하여 보려고 하면 도리어 아득해지고 만다.

자세히 만물들을 관찰하면,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 이외는 모두 생기가 발랄하여 억제할 수 없고, 후줄근히 축 늘어진 것은 오래지 않아 썩어서 냄새가 나게 될 것들이다.

일이 순조로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짐이 좋다는 것은, 아첨하고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첨하고 연약한 것이 어찌 순조로운 환경이겠는가. 이는 도리어 역경인 것이다.

재주 있고 경박한 사람은 기교(機巧)를 부림이 간사하고 천박하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기교를 부림이 간휼하고 노골적이기 때문에, 군자들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중에 혹 간사하면서도 음침하거나 간휼하면서도 비밀스러우면, 이런 사람은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아아, 고금에 기교 부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신장(腎臟)은 정액[精汁]을 저장하는 내장이니, 맡은 바가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귀가 두껍고도 단단하고 큰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사는 법이니, 비로소 신장은 귀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장이 실하면 귀가 좋고 귀가 좋아야 오래 사는 것은 자연적인 반응이다.

폐(肺)가 여섯 조각임은 육률(六律)과 공통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귀까지 합쳐 여덟 조각이 됨은 팔음(八音)과 공통됨이 아니겠는가. 한 조각에 24개의 구멍이 있음은 24절기(節氣)와 공통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생황(笙簧)의 형상대로 된 것이다. 또 금(金)은 오행(五行) 중에서 소리가 두드러진 것이니, 폐가 금에 속하기 때문에 소리를 맡은 오장인 것이다.

봄철의 우는 새 소리는 화평하고 가을철의 벌레 소리는 처절한데, 이는 절후(節候)의 기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당우(唐虞) 적의 글은 혼후[渾灝]하나 말세의 글들은 겉치레만 하니, 시절의 기운을 어찌할 것이가.

옛사람들은 자기의 재질을 부릴 줄 알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재주의 부림을 받는다. 자기 재질을 부리는 사람은 마땅히 쓸 데다 써먹고 또한 그만두어야 할 적엔 그만두지만, 재주의 부림을 받게 되면 한없이 날리어 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의 병폐는 부박하지 않으면 반드시 융통성이 없는 법인데, 두고 보건대, 이 두 가지를 면한 사람이 대개 얼마 되지 않는다. 부박함은 동(動)의 유폐(流弊)요, 융통성이 없음은 정(靜)의 유폐이니, 스스로 수양하려는 사람이나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

뜻만 크고 곡진하지 못한 사람은 허술한 짓을 하고, 재주가 거칠고 정밀하지 못한 사람은 외람한 짓을 하는 것이다.

편의(便宜)만 추구하는 사람은 큰 고비에 멍하고, 인순(因循 그전대로만 하는 것)하는 사람은 큰 사업을 놓치고, 고식적인 사람은 큰 근심거리를 만나고, 이기기 좋아하는 사람은 큰 적수를 만나게 되는데 사세가 그렇게 되는 법이다.

군자가 일을 처리함에 민첩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안정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정밀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정확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누구나 반드시 깊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성공도 하고, 또 깊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실패도 하는 것이다.

아무 일이 없을 때 지극한 낙(樂)이 있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뒷날 반드시 문득 깨닫게 되었을 적은 이를 위해 근심 걱정하는 때인 것이다. 가령 전 관장(官長)이 편안하고 조용하여 별로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없다가, 그 다음 관장이 조금 맹렬하여 백성에게 사납게 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전 관장을 사모하여 마지않는다.

맑은 하늘 복판에 뜬 한 조각 순백(純白)의 구름은 분명히 이형암(李炯菴 저자 자신)이 마음을 알게 되는 경지이다.

형이 그의 아우 업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노라니 속마음이 문득 애연(藹然 마음이 화평해지는 것)해져 웃음을 띠고서, 정대(鼎大)의 글읽는 소리를 한 식경이나 듣고 있었다.

의서(醫書)를 읽어, 사람이 기운을 받아 형체가 구성된 것과, 피부ㆍ뼈ㆍ살ㆍ골수ㆍ근육ㆍ터럭ㆍ맥ㆍ내장이 어디로부터 나와 비로소 사람이 된 것인지를 알고 나면, 사람들이 모두 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쉽사리 풍감(風鑑 관상보는 것)이나 성수(星數 사주보는 것)의 설에 현혹되어, 멋대로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이, 환난이나 영리(榮利)에 당하여 올바르게 할는지를 내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의 머리가 쳐들어진 것은 화(火)의 형상이고, 소의 머리가 수긋한 것은 토(土)의 형상이다.

천지 사이에 벌레가 없는 것이 없어, 강한 쇠나 뜨거운 불에도 모두 벌레가 있는 법이니, 사슴에게 벌[蜂]이 있고 뱀에게 모기가 있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지금 사람들이 스스로 하기를 옛사람들이 스스로 하듯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좋은 일 해두기를 오직 옛사람들처럼만 한다면, 반드시 후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아무 옛분이 해 놓은 아무 좋은 일은 배워야 한다.’고 칭찬하게 될 것이고, 그 소위 좋은 일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오늘 해둔 것에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부릅뜨고 치떠보는 눈동자와 오무렸다 폈다 하는 혀는, 아아, 두렵기만 하지만, 자애[慈祥]로운 거동과 화평[樂易]한 언사는, 아아, 사랑스럽기만한 것이다.

나는 천리마(千里馬)를 타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고요히 상상해보건대, 밤에 천리마를 타본 사람이 북두성(北斗星)을 쳐다본다면, 말쑥한 띠처럼 기다랗게 보일 것이다.

늘씬한 한 장부(丈夫)가 나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너는 한탄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성내는 버릇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시기하는 짓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자만심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급한 성질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게으름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명예에 대한 마음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서책에 대한 기욕을 버려라.”
하기에, 속으로 어이가 없어 뚫어지게 보다 말하기를,
“글을 즐겨하지 않고 무엇을 좋아해야 합니까? 나를 귀머거리와 소경을 만들려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그 장부가 웃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너를 시험해본 것이다.”
하였다.

내가 18~19세 되던 무렵에 하는 말들이,
“마음에 망령된 생각과 뜻을 갖지 않아야 오래되면 꽃이 피게 되고, 입에 망령된 말을 담지 않아야 오래가면 향기가 나게 되는 법이다.”
했었는데, 백양숙(白良叔)이 붓을 들고 끙끙거리다가,
“부처다.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하기에, 내가 오랫동안 서글펐다.

우둔한 동자(童子)들을 알아듣게 만들고, 소견 좁은 부녀자의 마음을 돌리기란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미욱한 백성의 송사(訟事)를 결단하고, 흐트러진 군병의 기율(紀律)을 정돈하기보다 어려운 것이다.

만물을 관찰할 적에는 따로따로 안목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니, 나귀가 다리를 지나갈 적엔 오직 귀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집비둘기가 뜰에서 거닐 적엔 오직 어깻죽지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매미가 울 적엔 오직 가슴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붕어가 물을 삼킬 적엔 오직 뺨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는 모두 그들 나름의 정신이 발로되는 곳으로 지극한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저자에 절반쯤 물고 절반쯤 성하여 20문(文) 가량 나갈 생선이 있다고 하자. 사려는 사람이 가장 부패된 것을 가져다 보고서는 어이없이 서서 코를 찌푸리다가 돌아보며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미 썩었으니 나나 주지.”
하자, 파는 사람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지그시 웃더니, 가장 덜 썩은 것을 들고서,
“오늘 잡은 것인데 어찌 썩었다고 하는가?”
하고, 거짓 화를 내며, 생선의 뺨과 지느러미를 손질하여 서서히 감추어 버린다. 사려는 사람이,
“그렇기는 하지만 값이 얼마인가?”
하자, 파는 사람이,
“썩은 고기가 무슨 값이 있어?”
하니,
“말해 보아라. 40문인가? 10문인가? 팔려면 팔고 말려면 말라.”
하여, 반 나절이 되도록 다투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권하며 20문으로 값을 조정하자, 둘이 다 툴툴거리기를,
“내가 돈을 많이 주었나보다.”
“내가 돈을 적게 받았나보다.”
해놓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족들에게 자랑하기를 생선 값이 각자가 모두 합당하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무엇하러 수고롭게 손빈(孫臏)ㆍ우허(虞詡)와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일까? 당초 각자의 마음에 이미 값이 20문 할 것을 알아차려, 서로 순조롭게 주고 받았어야 할 것인데, 지금 두 사람이 반 나절이나 다투었으니, 과연 누가 이득이고 누가 손해이겠는가.

음덕(陰德)을 펴기란 귀울음[耳鳴]과 같아서 자신은 알 수 있으면서도 남에게는 알게 할 수 없는 법이니, 내가 하지 못하면서도 능히 하려고 하는 일이다. 남의 과오를 논함은 피를 머금었다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는 법이니, 내가 하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다.

문장(文章)이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표현하기 어려운 경지(境地)에서 터득되는 것을, 나는 마치 천구(天球)처럼 좋아하는 바이다. 나의 조카 심계(心溪)가,
깊은 동굴에 한가한 거미 속절없이 휘감는다 / 邃洞幽蛛虛自裊
하였고, 나의 벗 기평자(騎萍子)는,
황소가 빗소리 듣느라 뿔을 쫑긋거린다 / 黃牛聽雨角崢嶸
하였는데, 거미가 휘감을 때를 상상하건대, 그 다리가 한가로이 헛놀았을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소가 빗소리 들을 때를 상상하건대, 그 뿔이 쫑긋해졌을 것을 알 수 있다. ‘동굴[洞]’이니 ‘비[雨]’니 하는 표현에 영자(影子)와 골자(骨子)의 차이가 들어 있다.

바라건대 하늘이 나의 가슴속에 묵은 것이 없게 해주고, 사람들의 입에 빗나간 의논이 없게 해주었으면 한다.

마음이 들뜨고, 또 무엇에 크게 빠져 정처가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찮은 놀이라도 하여 다소 마음을 붙이고 순탄하게 지내며 번거로운 조바심을 잊어야 한다.

비록 미미한 풀벌레라도 한 번 뒤집히거나 거꾸러지면 한 번 소리쳤지 어찌 일찍이 가식(假飾)하거나 구애(拘礙)받는 일이 있었는가. 오직 천성[眞機]대로 맡겨 둘 뿐이다.

내가 만일 복랍(伏臘)에 대접할 것이 있어 늙은 부모님들을 주리시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무엇하러 과거 공부를 일삼겠는가. 어찌 내가 도를 펴고 백성 혜택 보일 사람이겠는가. 밥만 먹는 우졸(迂拙)한 선비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아니하여 천성[天眞]을 상실하게 할 수야 있겠는가. 우졸하기는 하지만 십삼경(十三經) 이십이대 역사를 읽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원석공(袁石公)은 어찌 기이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의 시(詩)에,
시원하자 좋은 꿈 꾸었고 / 好夢因涼得
물에 오니 심심한 시름 잊힌다 / 閑愁到水忘
하였는데, 마음이 없었어도 꾸게 되고, 마음을 두어서 잊힌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있었는지 마음이 없었는지를 논할 것 없이 오직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독서(讀書)’라는 시에,
책 위 먼지 털고서 / 拭却韋編塵
의관하고 고인을 뵙네 / 衣冠對古人
쓰인 건 모두 심혈로서 / 著來皆肺腑
알고 나니 정신을 돕네 / 道破益精神
도끼 들고 주옥을 캐고 / 把斧樵珠玉
그물 쳐 봉린을 잡은 듯 / 恢綱網鳳獜
나도 한 자루 비 들고 / 擬將半尺帚
온 땅의 가시를 쓸리라 / 匝地掃荊榛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독서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을유년(乙酉年) 겨울 11월에 형재(炯齋 저자의 서재)가 춥기 때문에 뜰 아래 있는 조그마한 모옥(茅屋)으로 이사했는데, 집이 매우 누추하여 벽에 언 얼음이 뺨을 비추고 구들의 매연(煤煙)이 눈을 시게 했다. 아랫목이 불쑥하여 그릇을 놓으면 물이 반드시 엎질러지고, 해가 비치면 쌓였던 눈이 녹아 썩은 띠에서 누르스름한 장국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한 방울이라도 손님의 도포에 떨어지면 손님이 깜짝 놀라 일어나므로, 내가 사과하면서도 게을러서 집을 수리하지 못했었다.
어린 아우와 그대로 있은 지 무릇 석 달 동안에, 그래도 글 읽는 소리를 그치지 않으며, 세 차례나 큰눈을 겪었는데, 한 차례의 눈이 올 적마다 이웃에 사는 작달막한 늙은이가 반드시 새벽이면 대비를 들고 문을 두들기며 중얼중얼 혼자서 말하기를,
“딱한 일이여! 연약한 수재(秀才)가 추위에 얼지 않았는지.”
하면서, 먼저 길을 낸 다음 문 밖에 벗어 놓은 파묻힌 신발들을 찾아내어 털어놓고, 말끔히 쓸어모아 둥글하게 세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가곤 하는데 나는 이미 이불 속에서 옛 글을 벌써 3~4편씩이나 외곤 하였었다.
이제는 날씨가 자못 풀렸으므로 그만 책들을 챙겨 서쪽 형재로 옮겨야 하는데, 차마 떠나지 못하는 연연(戀戀)한 생각이 있어, 몸을 일으켜 서너 번 돌다가, 곧바로 형재로 나가 쌓인 먼지를 털고 필연(筆硯)을 정돈하고 도서(圖書)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시험삼아 앉아보니, 또한 오래 객지(客地)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 있었으며, 필연이나 도서와 자질(子姪)들이 나와서 인사하는 것이 비록 면목이 조금 생소한 듯했으나, 사랑스러워 안아 주기를 저절로 금할 수가 없었다. 아아, 이것이 인정인지.
병술년 상원(上元 음력 정월 보름)에 쓴다.

진정(眞情)의 발로는 고철(古鐵)이 활기차게 못에서 뛰놀고, 봄날 죽순(竹筍)이 성낸 듯이 흙을 뚫고 나오는 것 같고, 가식된 정이란 먹물이 매끈한 넓은 돌에 발린 것 같고, 기름이 맑은 물에 뜬 것과 같은 법이다. 칠정(七情) 중에 슬픔[哀]이 가장 직접 발로하여 가장하기 어려운 것인데, 슬픔이 극심하여 울음이 터지게 되면, 지성스러운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우는 울음은 뼈 속에 사무치게 되고, 가식으로 우는 울음은 겉으로 뜨게 되는 법이니, 만사의 진가(眞假)를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여, 오직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만 싶고 한 치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다행히 내가 두 눈알을 지녀 자못 글자를 알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자위(自慰)하며 보노라면, 조금 뒤엔 좌절되던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만일 내가 눈이 비록 오색(五色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을 볼 수 있지만 서책에 당해선 깜깜한 밤 같았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쓰게 되었을는지.

번뇌스러울 때 눈을 감고 앉았으면, 눈동자 속이 하나의 착색(著色)한 세계가 되는데, 붉었다 푸르렀다 검었다 희었다 하는 광채가 어른거려 형용할 수 없다가, 조금 있으면 뭉게뭉게 이는 구름처럼 피고 또 조금 있으면 푸른 파도처럼 되며, 또 조금 있으면 무늬 있는 비단처럼 되고, 또 조금 있다간 부서진 꽃송이처럼 되며, 어느 때는 구슬이 번쩍이듯 하고 어느 때는 좁쌀이 흩어진 듯하여, 잠시 동안에 변했다 없어졌다 하며 그럴 적마다 새 판이 생겨, 족히 한 바탕의 번잡한 근심을 해소하게 된다.

풍시가(馮時可)의《전행일기(滇行日記)》에 ‘전남(滇南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지방은 비록 눈이 산마루에 그득할 적에도 추위가 살갗에 들어오지 않고 겨울에도 해가 짧지 않다.’고 했다. 심전기(沈佺期)의 시를 고찰하건대,
사기가 추위를 적게 나누고 / 四氣分寒少
삼광의 해 배치를 치우쳤네 / 三光置日偏
하였는데, 이는 이 실지가 그런 것이다.

이태백(李太白)의 유별종십륙경(留別宗十六璟)이란 시에,
내가 동상 사람은 아니지만 / 我非東床人
영자와 부부가 되었네 / 令姊黍齊眉
하였으니, 비로소 태백의 아내가 종가[宗氏]임을 알 수 있다.

성리학[理學]을 한 선배들도 그림에 능한 분이 있었으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호)ㆍ퇴계(退溪 이황의 호)ㆍ농암(農巖 김창협의 호) 세 선생이 모두 그림에 능했었는데, 한훤당은 여러 가지 기법이 모두 좋은 분이었다.《화전(畫傳)》에 ‘사마속수(司馬涑水 사마광을 말한다)ㆍ주자(朱子)도 모두 유명한 화가다.’ 했고 《패설(稗說)》에 ‘진백사(陳白沙)는 매화(梅花)를 그렸다.’ 했다.

지리산(智異山) 속에 소[湫]가 있는데 소 위에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항시 그 소 속에 쌓여 있다. 거기서 나는 고기의 무늬가 매우 아롱아롱하여 가사(袈裟) 같으므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하니, 대개 소나무 그림자대로 변화한 것이다. 구득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삶아서 먹으면 병이 없게 되고, 오래 살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기에 삼공(三公)이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의 벼슬아치가 두루는 띠)를 이어받은 가문이 있어, 하연(河演)이 신석조(辛碩祖)에게 전했었는데, 석조가 판서까지만 하고 졸(卒)하여 드디어 서대를 전승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여건(呂虔)의 일 과 같은 것이다.

청평산(淸平山) 절에 고려 때의 청평산 거사(淸平山居士) 이자겸(李資謙)의 두골(頭骨)을 담아 놓은 돌함이 있었는데, 경오년(庚午年) 큰 장마에 산 물이 갑자기 몰아닥치게 되어 그만 돌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 김부식(金富軾)이 비문을 지은 석비(石碑)가 있었는데, 70년에 강원 감사(江原監司) 유모(兪某)가 아전을 시켜 탑본(搨本)하게 하자, 때가 겨울철이어서 먹물이 얼므로 숯불을 피워 비를 달구매 비가 모두 부서졌으니, 사리를 모르는 세속 아전의 짓이 애석하기만 하다.

온눌제(膃訥臍)는 해구(海狗)이다. 우리나라의 영해(寧海)ㆍ평해(平海) 등지에서 나는데 모두 수컷이다. 해마다 떼를 지어 바다를 따라 남으로 가다 남해현(南海縣)에 이르러 암컷을 만나 교미(交尾)하다 가는데, 암컷을 낳으면 그 지방에 두고 수컷을 낳으면 동해(東海)로 옮겨간다.

문중자(文仲子) 왕통(王通)은 15세에 남의 스승이 되었고, 정우 선생(定宇先生) 진역(陳櫟)은 15세에 마을 사람들이 스승으로 삼았으며, 이익재(李益齋 익재는 이제현의 호)도 15세에 사람들이 모두 스승으로 여겼었다.

자여역(自如驛)에 사는 사람이 새로 망아지를 샀는데, 꼴이나 콩을 먹지 않으므로 시험 삼아 오곡(五穀)을 주어도 역시 먹지 않았고, 사람이 먹는 것까지 모두 시험삼아 주어도 먹지 않다가, 소주(燒酒)를 주자 비로소 반가운 듯 마셨고 또 황대구(黃大口)를 썰어서 주니 잘 먹었으며, 그 뒤에 잇달아 두 가지를 먹이자 하루 7~8백 리씩을 갔는데, 정축년에 주금(酒禁)이 생긴 뒤 먹지 못해 죽었다.
옛적에 12세 동자(童子)가 산중 집에서 자며 지은 시에,
유인의 집에서 잠을 자니 / 夜宿幽人宅
속객의 마음 더없이 맑아지네 / 彌淸俗客心
문 앞엔 시냇물 흐르고 / 門前流水在
처마 귀엔 파란 산 섰도다 / 簷角碧峯臨
만년의 지조 국화에 의탁하고 / 晩節依寒菊
한가한 심정 거문고로 풀도다 / 閑情托素琴
솔바람이 이 뜻을 아는 양 / 松風如有意
불다말다 나의 시정 화답하네 / 斷續和孤吟
라고 했었다.

옛적에 만호(萬戶) 임득충(林得忠)이라는 사람이 성격이 호방했었는데,
숭례문(崇禮門)에 올라가 읊조리기를,
단청한 누각 허공에 높이 솟아 / 畫閣巖嶢出半空
올라보니 마치 나는 기러기 탄 듯 / 登臨怳若駕飛鴻
평소의 장지를 의탁할 데 없어 / 平生壯志憑無地
천지의 만리 바람에 혼자 누웠네 / 獨臥乾坤萬里風
라고 했었다.

옛적에 김흥갑(金興甲)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반 백성이었다. 시에
능하여 자못 한가롭고 담박했는데, 인로휴금(隣老携琴)이라는 시에,
끼니 뒤 종소리에 마음 절로 한가하여 / 飯後鳴鐘意自閑
다리 머리에 조그만 사립문 깊이 닫혔네 / 橋頭深閉小柴關
외로운 다듬이 언제나 황혼 때면 빨라지고 / 孤砧每急黃昏際
몇 집의 마을 언제나 고목 속에 쓸쓸하네 / 十室長寒古木間
울며 나는 외기러기 그래도 북곽 찾는데 / 鳴度斷鴻猶北郭
지쳐 오던 초승달 다시 서산에 지네 / 照來纖月更西山
이웃 늙은이 본시 청광이 아닌 분인데 / 隣老不是淸狂者
어찌 밤낮 술을 가지고 가랴 / 日夕那能佩酒還
했었고, 전파과산사(餞罷過山寺)라는 시에,
참선하는 자리에 오니 / 到來參佛坐
고요하여 도심이 생기네 / 寂寞道心生
헌칠한 벽엔 늘 구름기 일고 / 虛壁恒雲氣
텅 빈 문엔 단지 시내 소리 / 空門只澗聲
외로운 탑은 풍상 속에 섰고 / 風霜孤塔立
아침 저녁엔 종 한 번씩 울리네 / 朝暮一鍾鳴
자주 하늘가에 머리 돌려 / 天際頻回首
은근히 나그네 길 염려하도다 / 殷勤念客行
라고 했었다.

도학(道學)은 인습(因襲)해야 하고 문장(文章)은 개혁해야 되는 법이다.
천성(天性)은 동일하니 이치[理]이기 때문이고, 재주는 오만 가지로 기(氣)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일이 모두 하나의 권 자(權字)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경(經)이니 권(權)이니, 하는 권을 의지가 혼매한 사람이 사용하다가는 잘못 권세(權勢)의 권에 빠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 사용하다가는 저절로 실수하게 되고 마는 법이다.

졸(拙)한 사람은 외람하지 아니하니, 외람하지 않으면 결백하고, 결백하면 정직한 법이다. 아, 졸한 사람이 누구일까.

절벽[石壁] 위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층층이 크고 있어, 노(老)ㆍ장(壯)ㆍ유(幼)를 구별할 수 있다. 맨 아래 소나무는 맨 위 소나무의 손자이고, 중간에 있는 소나무와 맨 위 소나무는 맨 아래 소나무의 아비와 할아비로서, 오래도록 고요히 완상하노라면 엄연히 윤기(倫氣)가 있어 보인다.

웃음에는 세 가지가 있는 법이니, 기뻐서 웃고, 감개(感慨)스러워 웃고, 취미가 맞아 웃는 것은 누구나 모두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대저 무시하느라 웃고 아첨하느라 웃는 짓은 일체 없애야 한다.

외손(外孫)이 잇달아 문직(文職)이 되었다. 고려 때의 관제(官制)에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는 직품이 낮은 것이지만 반드시 문장과 중망(重望)이 있어 앞날에 문단의 맹주가 될 사람을 가려서 시켜, 그 선발을 지극히 깨끗하고도 소중히 했는데, 우리나라 초기에도 그대로 했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응교를 지낸 다음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맡았었고, 아들 지재(止齋) 권제(權踶)가 또한 그 직을 지냈으며, 권제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啓甸)에게 전했는데, 계전은 곧 양촌의 외손이다. 그가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에게 전했는데 곧 양촌의 외손서이며, 문충공(文忠公) 서거정(徐居正)에게 전했는데 거정도 역시 양촌의 외손이다. 양정공(襄靖公) 채수(蔡壽)는 곧 양촌의 아우 매헌공(梅軒公)의 외증손으로서 양촌에게는 재종(再從) 외증손인데 또한 그 직을 맡았었다.

처남과 매부가 한때에 대배(大拜 정승이 된 것)했었다. 좌상(左相) 윤자운(尹子雲)은 곧 영상 신숙주(申叔舟)의 처형(妻兄 아내의 오빠)으로서 한때에 대배했는데, 신숙주가 시 한 구를 짓기를,
심지 맞는 벗이 다같이 흰털 났네 / 靑眼故人俱白髮
하자, 윤자운이 화답하기를,
검은 머리 어진 정승은 오직 단심이라네 / 黑頭賢相只丹心
했었는데, 신숙주의 첩 이름이 ‘지단심(只丹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문에서 세 특이한 사람이 났었다. 북창(北窓) 정염(鄭)과 고옥(古玉) 정작(鄭碏) 형제가 이미 수련(修鍊)하는 법에 심오하였고, 그의 종형 계헌(桂軒) 정초(鄭礎)는 젊어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여러 번 지내다가 병으로 사양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금단(金丹)의 비법을 연구했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이 하늘의 신선이 그의 집에 내려와 시 한 구를 주기를,
계향의 꽃다운 향기 그윽하기에 / 桂香芳馨郁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왔노라 / 仙馭自天來
하므로 따라서 아호(雅號)를 계헌이라고 했다 한다.

종실(宗室 종친(宗親))의 나이 79세에 비로소 봉작(封爵)되었다. 호천군(湖川君) 모(某)는 세종의 증손이자 한남군 어(漢南君□)의 손자이다. 한남군의 어머니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일찍이 단종(端宗)을 봉양했었는데, 단종이 상왕(上王)이 되자 혜빈도 연좌되어 폐출되고 죽음을 받았었다. 어는 함양(咸陽)으로 귀양가 흥안군 중생(興安君衆生)을 낳았고 중생이 호천군을 낳았으나, 이미 속적(屬籍)이 끊어져 평민에 편입되었다. 나이 79세이던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갑오년(1534, 중종 29)에 대궐 문에 엎드려 글을 올리자, 비로소 다시《선원보(璿源譜)》에 올리도록 하고 호천 부수(湖川副守)로 봉작하였으며, 명종(明宗) 초년에는 그의 조부를 한남군으로, 그 아버지를 흥안군으로 추봉(追封)하도록 했었고, 호천군 또한 아들의 공으로 인해 군으로 추봉하게 된 것이라 한다.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기에 국자(國子 성균관)의 장관과 차관이 되었다. 퇴계 선생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을 때 귀암(龜巖) 이정(李楨)이 사성(司成)이 되었는데, 퇴계의 제자이다.

성균사업(成均司業). 인조(仁祖)가 큰 난리를 극복하고 나서 맨 먼저 초야에 있는 어진 사람을 찾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지평(持平)으로 불렀는데, 나이 늙었다고 사양하자 특별히 성균사업으로 제배(除拜)했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런 관직이 없었으니 특히 여헌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갑자생(甲子生)의 관작이 옛사람과 동일했다. 홍인재(洪忍齋 이름은 섬(暹))가 갑자생으로 두 차례 문형(文衡)을 맡았었고, 예조 판서로 이상(貳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겸임하고 있다가 무진년에 정승으로 들어갔었는데, 이월사(李月沙 이름은 정귀(廷龜))의 생년(生年)ㆍ문장(文章)ㆍ지위[位次]가 은연중 합치되었다. 그러나 인재는 80세를 살고 월사는 73세를 살았다고 한다.

세 손자가 한꺼번에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의 손자 셋이 동시에 한성(漢城)의 진사 시험에 제일 제이 제삼으로 합격하게 되자,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의 호)가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세 개의 구슬 나란히 꿴 삼형제 / 三顆聯珠叔仲昆
일시에 방이 올라 특이한 공 세우겠네 / 一時榜上策奇勳
누가 만일 그 집안을 묻는다면 / 旁人若問渠家世
상당과 고양의 내외손이라네 / 上黨高陽內外孫
했었다.

세 사위가 용두회(龍頭會)에 참례했다. 찬성(贊成) 채수(蔡壽)의 사위가 세 사람이니, 김감(金勘)ㆍ김안로(金安老)ㆍ이자(李耔)였다. 채수가 용두회를 마련했었는데, 안로와 이자가 모두 참례했고 김감도 참례하고 싶었으나 장원하지 못한 것 때문에 거절당하자, 김감이 자기 부인을 시켜 말하기를,
“사위 제가 35세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들어가 참례하게 되기 바란다.”
하므로 채수가 웃으면서,
“이야말로 참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불러다 잔치에 참례시켰었다.

은문(恩門 시관(試官)을 뜻한다)의 대부인(大夫人)에게 헌수(獻壽)했다. 신유년(辛酉年)의 삼방(三榜) 장원 이석형(李石亨)이 삼방의 합격자들을 거느리고 은문인 지재(止齋) 권제(權踶)에게 헌수하는데, 이때 대부인 이씨(李氏)가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건강하여 병이 없었고, 아들 찬성 남(擥)ㆍ승지(承旨) 지(摯)ㆍ중추(中樞) 반(攀)ㆍ호군(護軍) 마(摩)ㆍ사복(司僕) 경(擎)이 모두 한때의 훈신(勳臣)으로서 공명이 혁혁했었다.

우상(右相)이 이조 판서를 겸임했었다. 선조(宣祖) 신묘년(1591)에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의 호)가 우의정(右議政)이었는데, 상이 이조 판서를 겸임하도록 하므로 서애가 전에 그런 사례가 없음을 들어 사양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었다.

대사간(大司諫)이 바로 도승지(都承旨)에 제배됐다. 인조(仁祖) 을축년(乙丑年)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대사간으로 있다가 도승지로 전임되었다. 승정원의 옛 사례는 승지는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차례로 승진하게 되어 있는데, 이번은 사간원을 거쳐 곧장 본직(本職)에 제배되었으니 특별한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다.

의정(議政)이 대제학을 겸임했다. 세조(世祖) 때에 신숙주(申叔舟)가 영의정으로서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ㆍ예조 판서를 겸임했고, 어세겸(魚世謙)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가 의정으로서 대제학을 겸임했으며, 선조(宣祖) 때에 유성룡(柳成龍)이 좌의정으로서 대제학ㆍ이조 판서를 겸임했다.

성대하게 뽑힌 사신 접대관. 고천준(顧天埈)ㆍ최정건(崔廷健) 두 조사(詔使 중국 사신)가 나올 적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는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ㆍ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ㆍ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은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ㆍ석주(石洲) 권필(權韠)ㆍ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사자관(寫字官)으로서 역시 일행 중에 있었으며,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은 도사선위사(都司宣慰使 뒤에 영위사(迎慰使)라고 개정했다)로 차임(差任)되었으니, 대개 한 시대를 망라하여 뽑은 선량(選良)들이었다.

세 여인의 절행(節行). 형벌 받다가 죽은 이윤장(李允章)의 아내는 이오리(李梧里 오리는 이원익의 호)의 소실에서 난 딸이었는데, 남편이 죽자, 죽기로 맹세하여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다가, 하루 쌀 한 줌씩을 먹고 몸에 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채 5년 만에 죽었다. 그의 여동생은 이시행(李時行)의 아내였는데, 정축년(丁丑年)에 강화[江都]로 피난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어 오랑캐들이 자녀(子女)를 몰아가게 되자, 그대로 서서,
“나는 완평군(完平君) 이 정승[李相國]의 딸이다.”
부르짖고는 드디어 자결했다.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오리의 큰 딸인데, 처음에 여동생이 사로잡히게 되어 죽었다는 것을 듣고도 울지 않다가 까닭을 물어본 다음에 울면서 말하기를,
“죽기 잘했다.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정씨(鄭氏) 가문의 충효. 정백형(鄭百亨)은 자가 덕후(德後)인데, 오랑캐의 난리 때, 전장령(前掌令)으로 강화에 들어갔다가 오랑캐들이 성을 함락하자, 조복(朝服)을 입고서 행재소(行在所)를 바라보며, 4배(拜)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므로, 충신으로 정문(旌門)하게 했고, 아버지 효성(孝成)은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를 말한다) 때에 청렴한 선비로 이름났고 착한 행적이 있으므로 제문을 세웠으며, 조부 원린(元獜)은 또한 지극한 효행이 있어 효자로 정문을 세웠다. 고조 성근(誠謹)은 곧은 말로 간하기 좋아하므로 폐주(廢主 연산군을 말한다)가 죽였고, 증조 주신(舟臣)은 아버지가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먹지 않다가 생명을 잃었는데, 공희왕(恭僖王 중종을 말한다) 때에 모두 정문을 세웠고, 5대조 척(陟)은 세종 때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효자ㆍ열녀ㆍ충신ㆍ절의(節義)가 4대 동안에 여덟 사람이나 났다. 영응 선생(永膺先生) 이지남(李至男)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 장령(掌令) 언침(彦忱)이 을사년(乙巳年)에 서천(舒川)으로 귀양갔다 죽으매, 선생이 운상(運喪)하여 돌아와 장사하되 친히 흙과 돌을 날랐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가 슬프게 울므로 묘의 띠풀이 말라 죽기까지 했으며, 어머니 안 부인(安夫人)은 절행(節行)이 있었는데, 이질(痢疾)을 앓다 거의 위급하게 되자, 선생이 변[糞]을 맛보았고 목욕하고 하늘에게 빌었으며, 근심을 너무하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의 부인[孺人]정씨(鄭氏)는 을사년의 명신(名臣) 정원(鄭源)의 딸로 그의 친정이 이미 멸문(滅門)의 화를 입어 죽고 계모(繼母) 권씨(權氏)가 돌아갈 데가 없자, 유인이 시어머니에게 간청하여 데려다가 30여 년을 봉양하였고, 선생이 돌아가자, 하루에 한 줌 쌀로 연명하고 추워도 옷을 갈아 입지 않았으며, 3년 동안 곡하기를 한결같이 초상 때처럼 했었는데, 현종(顯宗) 12년에 선생 및 유인의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했었다.
장남 기직(基稷)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선생이 돌아가자, 슬픔이 극하여 울다가 머리가 모두 희게 되었는데, 소상(小祥)도 치르지 못하고 죽었고, 차남 기설(基卨)은 소경왕(昭敬王) 때 행신[行誼]이 있어 불러다 등용하였다가, 광해군 때에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차녀(次女)는 성년(成年)하기 전에 선생이 돌아갔는데, 죽만 먹으며 3년을 울다 죽었고 기설의 아들 돈오(惇吾)는 강화가 함락될 때 절의를 지키다 죽으매, 그의 아내 김씨도 난리에 임하여 자결하였으며, 차자 돈서(惇敍)는 강화에 있다가 적을 만나 의리를 굽히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가 죽었다.

한 가문에서 3대 동안에 네 열녀가 났다. 정축년(丁丑年)의 강화 난리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부인 권씨(權氏),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아내 박씨,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의 아내 이씨(李氏), 명한의 아들 청호(靑湖) 일상(一相)의 아내 이씨가 모두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일상의 아내는 분사(汾沙) 이성구(李聖求)의 딸인데, 성구의 아내 권씨 역시 죽었으니, 이는 또한 그 딸에 그 절개인 것이다.

전처(前妻)와 후처가 모두 열녀였다. 한오상(韓五相)의 자는 세익(世翊)인데 나이 37에 죽었다. 첫 아내는 상국(相國) 이성구(李聖求)의 딸인데, 정축년에 강화가 함락되자 절개를 지키다 죽었고, 다음 아내는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의 딸로, 오상이 죽자 정씨도 자결했으나 특히 절명하지 않았는데, 아들 균(均)이 또한 죽으매 마침내 먹지 않다 죽었다.

3대가 거상(居喪) 중에 죽었다.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가 상사를 다 치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아들 적(迪)이 역시 복제(服制)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으며, 적의 손자 유부(有阜)가 또한 법제에 벗어나게 애통하다가 삼년상을 치른 지 겨우 한 달 만에 죽었다.

영순군(永順君)이 거듭 과거에 합격했다. 세조 때에 등준시(登俊試)를 마련하여 모든 경대부(卿大夫)ㆍ대관(大官)ㆍ종실(宗室)ㆍ부마(駙馬)들을 모두 과거보도록 하고 친림(親臨)하여 책문(策問)하고, 대신 정인지(鄭麟趾)ㆍ정창손(鄭昌孫)ㆍ신숙주(申淑舟)가 대독관(對讀官 시관)이었는데,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름은 여(璵))의 아들 영순군 보(溥)가 정 1품으로서 응시하여 5등을 하자, 의정부(議政府)에다 은영연(恩榮宴)을 내렸고, 장원한 김수온(金守溫) 이하에게는 각각 안장 딸린 말을 내렸었다.

온양(溫陽)에 행행하여서는 중시(重試)를 마련했는데, 영순군이 또한 중시의 1등으로 뽑히자, 상이 크게 기뻐하여 특별히 하루를 더 유가(遊街)하게 하고, 쌀 50석ㆍ갈옹(喝翁) 3명ㆍ천동(天童) 2백을 내렸으니, 그야말로 특이한 은전(恩典)인 것이다. 영순군이 4대의 조정을 내리 섬기며 두 차례를 책훈(策勳)되었고, 총명하고 활달하며, 비록 부귀하였지만 조금도 교만하거나 과시하는 기색이 없었고,《계감(誡鑑)》및《육전(六典)》편찬을 맡아보았으며, 성종 때에 이르러 돌아갔는데, 나이 27세였다.

종실(宗室)과 부마(駙馬)가 급제했다. 영순군 보가 등준시(登俊試)에 오르고, 춘양군 내(春陽君䋱)가 식년(式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부마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가 친시(親試 임금이 친히 나와 보이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했다.

종실(宗室)이 문무직을 지냈다. 세조 때에 진례군 형(進禮君衡)이 문무의 재질이 있어,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있다가 이조 참판으로 들어왔다.

종실이 정승으로 들어갔다.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을 때인 단종 계유년(1453)에 영의정으로 제배되었고, 귀성군 준(龜城君浚)은 영묘(英廟 세조를 말한다)의 손자인데,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두 차례나 공신이 되었고, 세조 무자년(1468)에 특별히 영의정으로 제배되었는데, 이때의 나이 28세였으며, 18세에 병조 판서, 21세에 도원수(都元帥)를 지냈다.

지존(至尊 임금을 말한다)이 은문(恩門)이 되었다. 세조가 등준시(登俊試)를 보여 13명을 뽑고서, 제인(諸人)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이르기를,
“예부터 좌주(座主 급제할 적의 시관)니 문생(門生 급제한 사람의 시관에 대한 자칭)이니 하는 명칭이 있는데, 이번의 이 과거는 내가 친히 책문(策問)하였으므로 내가 마땅히 은문이 되어야 하니, 이 궁전(宮殿)을 마땅히 은전(恩殿)이라 해야 한다.”
하였고, 두어 날이 지나 양전(兩殿 임금과 왕비)이 사정전(思政殿)에 자리하고 제인들이 잔 올리기를 한결같이 문생이 좌주에게 하는 준례대로 했었으니, 우리 동방(東方)에 없던 훌륭한 일이다.

삼장(三場 곧 세 차례라는 뜻)의 과거를 모두 장원했다. 율곡 선생(栗谷先生)이 생원시(生員試) 및 회시(會試)ㆍ전시(殿試)에 장원하고,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가 또한 진사시ㆍ회시ㆍ전시에 장원했다.

종실(宗室)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세조 때에 은천군(銀川君 호를 세심정(洗心亭)이라 한다)이 강개(慷慨)한 의지와 정민(精敏)한 재주가 있었는데,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누차 금군(禁軍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의 장수가 되었으며, 두 차례나 명을 받고 제도(諸道)를 순찰했다.

형제가 다같이 한 지방의 장관이 되었다. 이파(李坡)가 뽑히어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되고, 이듬해에 아우 봉(封)이 또한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한 시기에 형제가 다같이 한 지방의 중한 소임을 받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정승이 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었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여섯 차례나 수상이 되어 의정부[黃閣]에 있은 지 10여 년이었는데 부모가 모두 생존하여 탈이 없었다.

아버지 및 남편과 아들이 모두 영상(領相)이었다. 영상 송일(宋軼)의 딸은 영상 홍언필(洪彦弼)의 아내인데, 아들 섬(暹)이 또한 영상이 되었으므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만사(挽辭) 짓기를,
한 덕으로 삼종하며 정승의 영화 보고 / 一德從三上臺貴
백 살에 여섯 빠지도록 오래 살았네 / 百年除六老星尊
하였다. 또한 그의 수명이 94세인데다가, 삼종(三從)이 또한 모두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내게 되어, 아버지 때에는 처녀(處女)로서 따라가 정원에다 복숭아나무를 심었는데, 남편 때에는 부인이 되어 따라갔다 보니 그 복숭아나무 꽃이 진실로 난만(爛熳)했었고, 그 다음에는 또 대부인이 되어 아들을 따라갔다 보니, 복숭아나무가 이미 노쇠하였으므로 드디어 더위잡고 한숨 쉬며 금성 읍류(金城泣柳)의 한탄을 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을 천거토록 했다. 문종(文宗) 신미년(1451) 11월에 상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조정에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귀한 집 자제들로서 배우지 않아 학술(學術)이 없다. 국학(國學)의 유생들 중에 반드시 경사(經史)를 꿰고 치체(治體)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천거하도록 하라.”
하므로, 드디어 진사 안양생(安良生)을 천거하니 상이 우등한 품계(品階)로 임용했었다.

젊은 나이에 입각(入閣 정승이 되는 것)하고 주문(主文 대제학이 되는 것)하다. 귀성군 준(龜城君浚)은 28세에 정승이 되고, 윤사흔(尹士昕)은 39세에 정승이 되고 이항복(李恒福)은 43세에 정승이 되었다. 이덕형(李德馨)은 38세에 정승이 되고 31세에 주문하였으며, 김수항(金壽恒)은 44세에 정승이 되고 34세에 주문하였으며, 김감(金勘)은 35세에 주문하고, 이행(李荇)은 40세에 주문하였으며, 남지(南智)는 17세에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되었으니 특이한 일이다.

가택(家宅)을 하사받은 것은 세 사람뿐이다. 세종 때에 황희(黃喜)가 가택을 하사받고, 선조 때에 이원익(李元翼)이 가택을 하사받고, 숙종 때에 허목(許穆)이 가택을 하사받았다.

기로연(耆老宴)에 친림(親臨)했다. 태종(太宗)이 기로연에 친림하여《제명안(題名案 지금의 방명록 같은 것)》을 가져다가 임금의 이름[御諱]를 친히 썼었고,〈이 뒤로는〉임금의 나이 60이 되면 임금의 이름도 실었으니, 상의 분부에 따른 것이다. 또, 토전(土田)ㆍ노비(奴婢)ㆍ어장(漁場)을 내려 후히 부양하고 기로소(耆老所) 대문 밖에서는 공경(公卿) 이하에게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홍씨 가문에서는 3대가 수(壽)를 누렸다. 홍유손(洪裕孫)은 남양(南陽)의 아전 족속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호)의 제자로서 호가 소총자(篠叢子)인데, 사화(史禍) 때에 선량한 사류(士類)들이 모두 죽었으나 홀로 몸을 깨끗이 가져 오래 살다 마쳤고, 그의 아들 지성(至性)은 백가서(百家書)에 해박하여 천 명의 사람들을 교수(敎授)하였는데, 또한 오래 살기로 이름났었으며, 또 그의 아들 찬천(贊天)이 역시 80까지 살아, 장헌왕(莊憲王 세종을 말한다) 때로부터 순효왕(純孝王 인조를 말한다) 시대까지 2백 70여 년 동안에 단지 3대가 되었을 뿐이다.

7대가 오래 살았다. 태종의 왕자 익녕군 이(益寧君移)가 80여 세, 아들 수천군 정은(秀泉君貞恩)이 87세, 아들 청기군 표(靑杞君彪)가 83세, 아들 함천군 억재(咸川君億載)가 84세, 아들 문충공 원익(文忠公元翼)이 88세, 아들 완선군 의전(完善君義傳)이 80세, 아들 창수 수약(倉守守約)이 79세를 살아, 7대가 2백 70여 년이 된다.

이씨(李氏) 가문의 축수연[慶壽宴]. 선조 35년에 승정원이 아뢰기를,
“전참의(前參議) 이거(李蘧)의 어미가 지금 나이 99이니 마땅히 늙은이를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하므로, 그 이듬해 1월에 희름(餼廩 고기와 쌀)을 내렸고, 그 아들의 벼슬을 우윤(右尹)으로 올리고 3대를 가자(加資)하였으며, 또한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제배하게 되자, 술을 마련하여 축수하는데, 경대부(卿大夫)로서 대부인을 봉양하여 받드는 사람이, 진흥군(晉興君)ㆍ금계군(錦溪君)ㆍ윤 판서(尹判書)ㆍ한 참판(韓參判)ㆍ홍 중추(洪中樞)ㆍ남 참판(南參判)ㆍ이 중추(李中樞)ㆍ진창군(晉昌君)ㆍ여흥군(驪興君)ㆍ윤 참지(尹參知)ㆍ권 소정(權少正)ㆍ강 익위(姜翊衛)ㆍ이 중부(李中部) 등 13명이나 되었다.
이듬해에 크게 경수연을 차리게 되자, 상이 제도(諸道)로 하여금 물품을 공급하게 하고 또한 법악(法樂 국가에서 쓰는 정악(正樂))도 내렸는데, 백세 부인(百歲夫人)이 상수(上壽)로서 가장 높고, 강 상국(姜相國)의 정경부인(貞敬夫人)이명부(命婦)로서 가장 현달하므로 모두 대청 중앙에 남향으로 앉고, 이 이하 여덟 대부인들은 각기 명수(命數 봉작(封爵)의 등급)에 따라 차서를 정하여 동과 서로 마주하여 앉았으며, 제부인(諸夫人)들은 각각 뒷줄에 차서대로 앉았다. 예가 끝나자, 진흥군 이하 제공(諸公)들이 모두 재배(再拜)하였고, 자손 중에 의관을 갖추고 모시고 선 사람이 19명이나 되었는데, 절충장군(折衝將軍) 문전(文荃)ㆍ국자 전적(國子典籍) 홍립(弘立)ㆍ헌납(獻納) 양(讓)이 가장 현저하였으며, 집사(執事)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또한 16명이었는데 각기 술잔을 올려 축수했다.
백세 부인은 채수(蔡壽)의 질녀인데, 홍치(弘治 명 효종의 연호)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출생하였다가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병오년(1606, 선조 39)에 세상을 떠나, 3만 6천 갑자(甲子)를 지남으로써 1백두 살을 먹었고, 관찰공(觀察公)은 7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두 누이는 모두 90세를 살았고, 손자 추부공(樞府公)은 또한 80여 세를 살았으며, 제집사(諸執事)의 자손 중에는 정승으로 들어간 사람이 1명, 수의(繡衣)가 되어 조정에 오른 사람이 7명, 대성(臺省 사헌부와 육조 관원)의 관원된 사람이 1명, 고을 원으로 나간 사람이 6명이었다.

두 딸이 왕비가 되었다. 예종(睿宗)의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의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모두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이었다. 또, 두 딸이 하나는 왕후가 되고 하나는 왕자(王子)의 부인이 된 일이 있으니,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이 소혜왕후(昭惠王后 덕종(德宗)의 왕비)가 되고, 또 하나는 계양군 증(桂陽君璔 세종의 아들)의 부인이었다. 또 사위 둘이 모두 대군(大君)인 사람이 있으니,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사위가 월산대군 정(月山大君婷 덕종의 아들)과 제안대군 현(齊安大君琄 예종의 아들)이었다.

외손 일곱이 왕자(王子)였다. 홍일동(洪逸童)의 딸이 성종의 숙의(淑儀)였는데, 완원군 수(完原君燧)ㆍ봉안군 봉(鳳安君 㦀)ㆍ견성군 돈(甄城君惇)ㆍ익양군 회(益陽君懷)ㆍ경명군 침(景明君忱)ㆍ운천군 연(雲川君 )ㆍ양원군희(楊原君憘)를 낳았다. 또, 김원(金元)의 딸이 세종의 신빈(愼嬪)이었는데, 계양군 증(桂陽君璔)ㆍ의창군 공(義昌君玒)ㆍ밀성군 침(密城君琛)ㆍ익현군 관(翼峴君璭)ㆍ영해군 당(寧海君瑭)ㆍ담양군 거(潭陽君 璖)를 낳았으니 이는 여섯 왕자이다.

형제가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태조조(太祖朝)에 경신궁주(慶愼宮主)의 부마(駙馬)는 상당위(上黨尉) 이애(李薆)였는데, 아우 청평위(淸平尉) 백강(伯剛)은 태종의 정순옹주(貞順翁主) 부마였고, 예종조에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부마는 풍천위(豐川尉) 임광재(任光載)인데, 아우 풍원위(豐原尉) 숭재(崇載)는 성종의 휘숙옹주(徽淑翁主) 부마였으며, 태종조에 숙녕공주(淑寧公主)의 부마는 파성위(坡城尉) 윤우(尹愚)였는데 종제 파평위(坡平尉) 윤엄(尹嚴)은 숙경옹주(淑慶翁主) 부마였고, 성종조에 경순옹주(慶順翁主)의 부마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종제 의천위(宜川尉) 섭원(燮元)은 휘정옹주(徽貞翁主) 부마였으며, 선조조에 정선옹주(貞善翁主)의 부마는 동□위(東□尉《선원보》에는 길성위(吉城尉)로 되어 있다) 권대임(權大任)인데 재종제 동창위(東昌尉) 대항(大恒)은 정화옹주(貞和翁主) 부마였다.
또, 조부와 손자가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있으니, 세종조에 정현옹주(貞顯翁主)의 부마는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인데 손자 영평위(鈴平尉) 섭(燮)이 성종의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였고, 성종조에 혜숙옹주(惠淑翁主)의 부마는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인데, 그의 손자 영천위(靈川尉) 의(檥)는 중종의 경현공주(敬顯公主) 부마였다. 또, 삼촌과 조카가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있으니, 정종조에 덕천군주(德川郡主)의 부마는 부사(府使) 변상복(邊尙服)인데 조카 유천위(柔川尉) 효순(孝順)이 태종의 소선옹주(昭善翁主) 부마였다.

3대가 장원으로 급제한 것은, 김천령(金千齡)ㆍ김만균(金萬鈞)ㆍ김경원(金慶元)이고, 형제가 장원한 것은, 유자한(柳自漢)ㆍ유자빈(柳自濱), 민정중(閔鼎重)ㆍ민시중(閔蓍重), 유명천(柳命天)ㆍ유명현(柳命賢), 오원(吳瑗)ㆍ오찬(吳瓚)이다.

6형제가 등과(登科)했다. 원해굉(元海宏)의 아들 식(植)은 인조(仁祖) 임오년에 등과하고, 집(楫)은 인조 을유년에 등과하고, 적(樀)은 효종 갑오년에 등과하고, 격(格)은 효종 신묘년에 등과하고, 절(梲)은 현종 정유년에 등과하고, 철(㯙)은 현종 계묘년에 등과했다.

선산(善山)의 명현(名賢)들. 선산에서는 고려 때부터 명현이 배출되었으니, 김주(金澍)ㆍ길재(吉再)ㆍ김숙자(金淑滋)ㆍ김종직(金宗直)ㆍ이맹전(李孟專)ㆍ하위지(河緯地)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이다.

명현(名賢)이 같은 시기에 장원했다. 퇴계(退溪 이황의 호)와 남명(南冥 조식의 호)이 다같이 경상도에 살면서 같은 시기에 모두 좌도(左道) 또는 우도(右道)의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각각 장원하였으니 훌륭한 일이다. 두 선생이 같은 시대에 출생하여 같은 도에 살면서도 평생에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퇴계가 돌아갔을 적에 남명의 비애가 심했으리라.

지존(至尊)이 교외(郊外)에까지 가서 도원수(都元帥)를 전송했다. 우리 국조(國朝)에서는 도원수를 어유소(魚有沼)ㆍ윤필상(尹弼商)으로부터 임진(壬辰) 이후의 몇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도 단(壇)을 설치하고 추곡(推轂)하는 예를 차린 적이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던 해 4월에 도원수 장만(張晩)을 서쪽 교외에서 친히 전송했는데, 상이 융의(戎衣 군복) 차림에 동궁(彤弓)과 적시(赤矢)를 갖추고, 말을 타고 나와 진(陣)에 이르자, 도원수가 장수와 사졸들을 거느리고 동개[櫜鞬 활집과 화살통]를 갖추고서 길 한편에서 맞이했으며, 상이 악전(幄殿 천막으로 만든 임시 궁전)에 나아가자 대사마(大司馬 병조 판서)가 군령(軍令)을 발하여 도원수를 불러들여 군중(軍中)의 예로써 만나보았고, 예가 끝나자 자리로 나아가 군악(軍樂)을 차리고 예선(禮饍 예식이 끝난 뒤의 음식)을 올렸는데, 상이 찼던 칼을 풀어 주었으니, 수백년 이래 없던 일이다.

남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가 짝이 되어 활쏘기를 했다. 세조(世祖) 신사년(1461)에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성직(宗成職)이 평무속(平茂續)을 보내 비밀히 변방 국경의 경계에 관한 보고를 하므로, 상이 아름답게 여겨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벼슬을 제수했다. 하루는 후원(後苑)에서 관사(觀射)를 하는데, 무속이 야인(野人 여진족) 낭장가로(浪將家老)와 짝이 되어 무예(武藝)를 겨루므로 상이 삼군도진무 예조 판서(三軍都鎭撫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에게 이르기를,
“네가 춘관(春官 예조)의 장관이고 또한 병무(兵務)를 맡아보아 변방 국경의 일을 모두 주관하는데, 지금 남북이 한집안이 되어 모두들 성의를 바침은 진실로 오직 경 등이 요리하는 방책 때문이다.”
하였고, 그 뒤에 무속이 직접 판서의 사제(私第)로 가서 뵙고 몸소 노예(奴隷)의 예절을 차리려 하매, 상이 특별히 편의하게 서로 접하도록 윤허하였다.

양생가(養生家)들이 자시(子時)가 된 다음에는 옷을 걸치고 동쪽 혹은 남쪽으로 향하고 앉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36번을 고치(叩齒)하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숨을 정지하며 마음속으로 오장을 내려다보며, 폐(肺)는 희고 간장(肝臟)은 푸르고 비장(脾臟)은 누르고 심장은 붉고, 신장(腎臟)은 검어지도록 생각한 다음, 마음이 광명하고 통철(洞徹)해져 하단전(下丹田 배꼽과 불두덩 사이)으로 몰리기를 생각한다.
불가(佛家)에는 백골관(白骨觀)이란 것이 있는데, 처음부터 자기의 형체가 한 점의 정기(精氣)에 따라 시작되어 점차로 포태(胞胎) 속에서 자라나고 출생하여 어릴 적엔 젖을 먹고 장성하여 튼튼해지며 노쇠하면 병으로 죽게 되어, 시체가 퉁퉁 붓거나 뻣뻣하게 말랐다가 오래 지나면 백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미 백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언제나 백골처럼 여기는 것이니, 이래서 이탈(離脫)을 싫어하면서도 연연한 생각을 둘 염려가 없게 되는 것이다.
대범 양생가와 불가가 하는 짓을 우리 유가(儒家)의 함양(涵養)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에 비교 해보면 모두 망령된 생각이다. 그러나 또한, 일종의 부황하고 경망한 무리가 한가하게 살고 홀로 있으면서도 뭇 욕망이 얽히고 설켜 한정이 없는 것보다는 십배나 나으니, 대저 양생가나 불가의 공부는 독실한 것이 사랑스럽다.

문장(文章)은 형용을 잘한 것이 좋은 것이다. 두보(杜甫)는,
거위 새끼 술빛처럼 누렇도다 / 鵝兒黃似酒
하였고,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는,
술은 천연한 사람 얼굴처럼 희도다 / 酒如人面天然白
하였으며, 조맹견(趙孟堅)의 매보(梅譜) 시에는,
매끈한 수염 일곱에 꽃받침 셋 / 踢鬚正七萼則三
점안은 초목(椒目) 가지는 서미 같도다 / 點眼名椒梢鼠尾
하였고, 부굉(傅宏 송대 사람 자는 자익(自翼))의《해보(蟹譜)》에는,
“게의 눈은 매, 발은 조개치레[鱟], 뇌는 큰 새우[䖱]는 매미 같고, 딱지는 주먹 쥔 것과 비슷하며, 쏘는 발은 집게와 비슷하다.”
하였으며, 유익기(兪益期)는,
“빈랑(檳榔)나무가 큰 것은 세 아름이나 되고, 높은 것은 아홉 길이나 되는데, 잎사귀가 나무 끝에 모여 있고 잎사귀 밑에 꽃받침이 달렸으며, 꽃은 꽃받침 속에서 피고 열매는 꽃받침 밖에서 맺는데, 이삭은 기장 이삭처럼 빠지고 열매는 도토리 열매처럼 붙는다. 나무 껍질은 오동나무 같으면서도 두껍고 마디는 대나무 같으면서도 빽빽하며, 속은 비었지만 겉은 강강하고, 굽은 것은 무지개 뒤집어 놓은 것 같으나 곧은 것은 밧줄 같으며, 그 숲 속을 지나보면 헌칠한 맛이 나고 그 그늘에 앉았으면 소조(蕭條)한 느낌이 돈다.”
하였고, 이치(李廌)의《화품(畵品)》에는,
“용 두 마리가 산 밑에서 나와, 한 마리가 굼틀굼틀 머리를 쳐들고 구름 속으로 올라가자, 물이 구름 기운을 따라 올라가 위에 펼쳤다가 비가 되어 용의 발톱과 갈기 속에서 쏟아지매, 고기와 새우가 딸려갔다가 더러 반공중(半空中)에서 떨어졌고, 용 하나는 아직도 꼬리가 굴 앞에 있으며 큰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를 들고 구름 속을 바라보며 함께 가려고 하여 성낸 발톱이 성성이[猩猩] 같으매, 푸른나무들이 모두 쓸리고 파도가 진탕 쳤다.”
하였으며, 《다경(茶經)》에는
“어목(魚目 고기 눈알처럼 되는 물거품)이 물 구멍에서 솟아나 구슬을 꿴 것처럼 되듯하는 것으로써, 물 끓이는 온도를 맞춘다.”
하였으니, 이런 것들은 미루어 문장이 잘 형용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어떤 일이 다행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는 법이니, 이광(李廣)과 옹치(雍齒)가 봉작[封侯]되고 봉작되지 않은 것만이 아닌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아들 다섯이 모두 돼지 같고 개 같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고, 두보(杜甫)의 종 단(段)과 한유(韓愈)의 종 성(星)이, 만일 부귀하기만 했지 무식한 사람의 종이 되었더라면 어느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장수로서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이 자고 이래로 몇 사람일지 알 수 없는데, 지금 중국 사람들이 집집마다 관운장(關雲長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의 신을 받들되, 조각한 초상ㆍ그린 초상ㆍ지어부은 초상ㆍ수놓은 초상ㆍ찰흙으로 만든 초상 등을 모시어 불교(佛敎)와 동등하게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당을 세웠으니, 어찌 다행한 중에도 특별한 것이 아니겠는가.
증선지(曾先之)의《십구사략(十九史略)》이 중국에서는 천히 여겨 거의 없어지고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와 소아(小兒)들이 먼저 배우는 글이 되었다. 가장 포복 절도(抱腹絶倒)할 한 가지 일은 왜국(倭國)의 관백(關白)에게 대대로 대사마 대장군 박륙후(大司馬大將軍博陸侯)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대개 한 선제(漢宣帝) 때에 곽광(霍光)이 머리를 조아리며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상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매 모든 일을 모두 먼저 광에게 관백(關白)한 다음 상주한 데에서 취한 것으로서 임금의 뜻에 관백이 발호(跋扈)하여 왕을 폐립(廢立)하는 일이 있을까 싶으므로 이를 빌어 이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광에게 다행한 일이겠는가. 불행한 일이겠는가. 어찌하여 겸해서 곽(霍) 자를 가져다가 성(姓)을 만들지 않았는지. 그렇게 하였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겠는가, 더욱 불행한 일이겠는가.

무릇 물이나 곡기(穀氣)의 맛이 위에 들어가면 진액이 각각 제 길로 가게 되어, 신맛은 먼저 간으로 들어가고 쓴맛은 먼저 심장으로 들어가고 단맛은 먼저 비장(脾臟)으로 들어가고 매운맛은 먼저 폐로 들어가고 짠맛은 먼저 신장(腎臟)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내가 일찍이 매운 것을 다 먹기도 전에 눈물이 나고 신 것을 먹다가 침을 흘렸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간은 목(木)에 속한 것이어서, 신맛이 돌아 목기(木氣)가 왕성해지면 토(土)인 비장(脾臟)이 움직이며 염천(廉泉)이 열려 침이 솟아나게 되고, 폐(肺)는 금(金)에 속한 것이어서, 매운맛이 돌아 금기(金氣)가 왕성해지면 목(木)인 간장이 움직이며 액도(液道)가 열려 눈물이 흐르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또한 비록 신 것을 먹지 않았어도 혹시 신 것을 보거나 신 것을 말하거나 신 것을 생각하면, 침이 금방 질질 나옴은 어째서인지 알 수 없다.

옛사람이 ‘애호하더라도 그의 악한 점을 알고, 미워하더라도 그의 착한 점을 알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천하에 공정한 마음이 광대하고도 곡진한 말이요, 또, ‘악한 점은 덮어두고 착한 점은 드러낸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남에 대하여 처신해가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별로 곡진함이 없는 것이요, 또 ‘착한 일을 보면 내가 한 것같이 여기고 악한 일을 보면 나의 병폐같이 여긴다.’하였는데, 이는 두 가지를 분별한 것으로서 측은한 진심이기는 하나 조금 모가 드러나는 말이다.
이 두어 가지에 있어서 일찍이 명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또한 스스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 내 몸에 도움이 되도록 주력하다가, 주자(朱子)가 ‘착한 점은 키워 주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준다.’고 한 말을 보게 되어서는 자연히 나도 모르게 되풀이하여 그 지극히 충후(忠厚) 정대함에 감탄하였다.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함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한 번 보게 되면서는 자연히 협소하게 되어버리고 더욱 의리가 무궁함을 깨달았었다.
다만 ‘애호하면서도 악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착한 점을 알기’와 ‘착한 점은 키워 주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주기’는 공부가 순실(純實)해진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나 ‘내가 한 것같이 여기고, 나의 병폐처럼 여기기’는 힘만 더 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점은 덮어두고 착한 점은 드러내기’와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기’는 비록 중등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의 할 수 있는 것이니, 이 두어 가지 말들은 대개 어렵고 쉬움과 정미(精微)하고 거친 구별이 있는 것이다.
또 일종의 치밀하면서도 자세히 그 실정을 따져보면 어그러짐을 엄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장자(莊子)가 ‘착한 일을 하여 명예를 가까이하지 말고, 악한 짓을 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 말라.’ 하였는데, 만일 이 말과 같이 한다면 소소한 악은 가려서 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하고 큰 선은 버리고서 감히 하지 아니하여, 중간에서 비위 맞추며 아첨하는 정상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니, 이는 중등 선비도 부끄럽게 여기고 하지 않을 일이다. 장자휴(莊子休)가 어찌 호걸과 거인(巨人)이 아니겠는가마는 어찌하여 말이 미미한 사람과 흡사한가. 몸을 보전(保全)하고 피해를 멀리하려는 학문의 유행하는 폐단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단(異端)인 것이다.
한 소열(漢昭烈 유비(劉備)를 말한다)은 경력이 전투에 벗어나지 않아 궁시(弓矢)와 군마(軍馬) 속에서 늙은 일개 무인(武人)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악이 적은 것이라 하여 하지도 말고, 선이 적은 것이라 하여 하지 않지도 말라.’ 하였었다. 이 말은 분명하고 정대하여 장자도 능히 하지 못한 말이니, 그가 젊었을 때 노식(盧植)을 스승으로 섬기며 조금 유자(儒者)들의 학술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단과 우리 도(道)의 구별이 어디서나 나타나게 됨이 이러한 것이다.

김진광 계승(金眞狂啓升)은 필법(筆法)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활달하였는데, 그의 도서(圖書)와 인장(印章)에 ‘신라 헌강왕 제3자파팔대 평장지손(新羅憲康王第三子派八代平章之孫)’이라고 새겼었다. 용문산(龍文山) 완희재(玩羲齋) 주인 김계승(金啓升)의 ‘군일(君日)’이란 명칭은 곧 ‘진광(眞狂)’이라고 자호한 73세 늙은이의 자(字)이다.
약관(弱冠)에 옥책 서사(玉冊書寫)로 뽑혀 들어갔었고, 17세에는 또한 도성의 문액(門額)을 쓰도록 차정(差定)되었었으나 마침내 참예하지 못했었고, 무진년(1748, 영조 24)에 통신사(通信使)가 일본(日本)에 갈 때 별서사(別書寫)로 따라갔다가, 일본 정전(正殿)의 전액(殿額)을 썼었는데, 일본 산동 거사(山東居士)는 평하기를,
“그의 글씨만 보고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하니 되겠는가. 우군(右軍 왕희지를 말함)이 쓴 것인지 진광이 쓴 것인지, 몸은 비록 다르지만 솜씨는 동일하도다. 특이하여 그 귀중함을 말하기 어렵도다.”
하였고, 화화부인(□□腐人) 임본유(林本裕)는 평하기를,
“중국의 필법(筆法) 정맥(正脈)이 원상(元常)에게서 시작되어 옹기춘(雍紀春)에게서 그치고, 다시 계승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보건대 김(金)ㆍ이(李) 두 사람의 필법이 해동(海東)에서 났으니, 해동의 산천(山川)이 과연 어떻게 되어 인재를 출생시켰는지 알 수 없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필법을 현재 천하에서 제일가는 필법이라 할 수 있다.

연산(連山)의 사인(士人) 강씨(姜氏)가 아들은 없고 딸 둘만 두어 장녀는 5세 차녀는 2세였는데, 자모(慈母)가 돌아가게 되자, 장녀가 그 여동생을 업어주며 길렀었다. 을유년(乙酉年)에 장녀는 이미 12세이고 차녀는 7세였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이웃 마을로 놀러가고 그의 집에 불이 나게 되었다. 두 딸이 불이 미치지 않을 곳에 자리를 깔고, 먼저 사당으로 들어가 4대의 신주(神主)를 안아다 차례로 자리 위에 안치하고, 또 들어가 장녀는 어머니의 신주를 안고, 부위(祔位)되어 있는 신주 한 자리는 차녀가 안고 장차 나오려는데 불이 이미 급하게 사당을 둘러싸므로, 두 딸이 각기 손으로 굳게 신주를 안고 엎드려 죽었었다.
사람들이 불을 끄고 찾아보니 살갗은 타서 문드러졌지만, 신주는 완전하여 조금도 연기에 그슬리지 않았고, 죽으면서도 오히려 굳게 안고 있었으므로, 고을 안 많은 선비들이 정문(旌門)하기를 주청하자, 상이 윤허(允許)하되, 정문을 ‘순효 이녀 강씨지문(殉孝二女姜氏之門)’이라고 하도록 했었으니, 대개 그 가풍(家風)이 예절을 준수하므로 두 딸들이 아름다운 교훈을 익히 들었던 것이라고 했었다.
병술 1월에 쓴다.

광주(光州)의 촌부(村婦)가 아들 둘을 두어, 하나는 일곱 살, 하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모두 군적(軍籍)에 편입되어 있으므로 이장[里正]이 군포(軍布)를 징수하러 오갔었다. 촌부가 밤이 새도록 물레로 무명실을 뽑는데 두 아이가 모두 잠들자, 촌부가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 손으로 두 아이의 음경(陰莖)을 만지며 혼자서 스스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이 있어 사내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고 실을 뽑는 것이다.”
했었는데, 두 아이가 거짓 잠든 체하여 몰래 듣고 있다가, 이튿날 함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로 대하여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음경을 지녔기 때문에 어머니가 근심하고 수고하시니, 어찌 이를 없애어 우리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칼을 가져다가, 형은 아우의 음경을 베고 아우는 형의 음경을 베어 묻어버리고서, 솜으로 상처를 쌌었는데, 피가 바지에 흐르므로 어머니가 놀라며 묻자, 아이들이 그 까닭을 말하니, 어머니가 붙들고 통곡하기를,
“너희들이 음경 지닌 것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이 사내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어여삐 여겨 농담한 것이었다.”
하였었다. 원[太守]이 이 말을 듣고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는데, 5~6년 전에 우리 외가 친척 박여수(朴汝秀)씨가 나를 위해 말해 주었다.
병술 1월에 쓴다.

내가《잡기(雜記)》속에서 발견한 두 효자는 모두 구걸하는 아이였는데, 이제 합쳐서 쓰노라니, 감동되는 마음이 있다. 또 왕연(王延)과 강혁(江革)의 효도를 생각할 때면 눈에서 일찍이 눈물이 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문(吳門 중국 소주(蘇州)의 통칭)에 사는 귀인(貴人)이 달밤에 다리 위를 지나다가 그 아래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내려가 보니 구걸하는 아이였는데, 한 노파[老嫗]를 흙덩이 위에 앉히고 구걸하여 얻은 술을 질병[缶]에 담아 꿇어앉아서 올리며 노래를 불러 권하므로, 귀인이 의아스러워 힐문하자, 구걸하는 아이가 놀라다 웃으며 말하기를 ‘저는 간구한 사람이기에 이렇게라도 해서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므로, 귀인이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돌아와 다음날 서로 전해가며 말을 하여 기이함을 칭찬했었고, 그 뒤 때때로 들여다보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린 일이 거개 이와 같은 것임을 보고는 이로부터 모든 귀인들이 잔치할 적마다 곧장 여분의 접시를 차려놓으며, 물으면, 구걸하는 효자 아이를 주려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었다.
장주(長洲)의 상성(相城)에 구걸하는 아이 하나가 있어, 성은 심(沈)가고 장년(壯年)이 되었는데 매양 심은군(沈隱君)이 살고 있는 맹주(孟洲)에 와서 구걸하기를 청하되, 무릇 얻은 것을 거의 먹지 않고 대롱과 광주리 속에 나누어 담았었다. 은군이 처음에는 여겨보지 않다가 오래 지나서 물어본즉 ‘늙은 어머니에게 드리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은군이 그제야 비로소 이상하게 여겨 가만히 사람을 시켜 그의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했었다. 구걸하는 아이가 한 군데의 언덕 곁으로 가더니 땅에 앉아서, 소쿠리 안의 음식을 내어 정리하여 받쳐들고 뱃머리로 갔다. 배가 비록 협착하나 매우 정결했고 노파가 그 안에 앉아 있었다. 구걸하는 아이가 배로 올라가 어머니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따라 꿇어앉아서 올리되, 어머니가 술잔 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 춤을 추며 산노래[山歌]를 부르다 우스갯소리를 하다 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하니, 어머니가 마음에 자못 안락하게 여겼다. 반드시 어머니 먹을 것이 다 되어가면 다시 달리 얻어 보고, 만일 얻은 것이 없으면 자신이 굶었으면 굶었지 종시 먼저 먹지 않았으며, 무릇 여러 해를 날마다 이렇게 하다가 어머니가 죽자, 구걸하는 아이가 그제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은근히 감탄하여 또한 때때로 조금씩 돌보아 주었다.

굴원(屈原)의 회사(懷沙)는 너무 지나친 충성이고, 오릉(於陵)의 토아(吐鵝)는 너무 지나친 염결(廉潔)이니, 무릇 선행(善行)이면서도 너무 지나친 데 빠지는 일은, 보통 사람일지라도 감히 한두 가지도 하지 않는 것이고, 성인들 역시 극진한 선행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직불의(直不疑)가 금(金)을 사서 그 사람에게 변상했었는데 다행히도 그 뒤에 죄인이 잡히어 무고(誣告)한 것이 밝혀졌으니, 만일 죄인이 잡히지 않았다면 끝까지 태연하게 도둑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을 것인가. 그 사람의 금은 오히려 작은 일이니, 혹시 종묘[太廟] 제기를 도둑질했다고 무고하더라도 또한 변명하지 않고 달게 죄를 받을 것인지.
누사덕(婁師德)은 얼굴에 침을 뱉자 마르기만 기다리며, 침 뱉은 사람이 지극히 더럽게 여기는데도, 개돼지처럼 보기만 했었다. 나에게 과오나 악한 일이 없었다면 씻어버리고 깊이 성내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니, 만일 그가 더욱 무시하여 칼로써 찌르더라도 역시 피를 씻어버리지 않고 스스로 평소처럼 해야 할 것인지. 비록 그러하나 사덕의 말은 경박하여 성급한 사람과 사납고 고약한 사람의 경계가 될 수 있다.
양(梁) 나라 유응지(劉凝之)는 어떤 사람이 신고 있는 자기의 신을 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자 즉시 주었었는데, 그 사람이 뒷날 잃었던 신을 찾게 되어 돌려보냈으나 다시 가지려 하지 않았다. 대범 주어버렸음은 남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돌려주는데도 받지 않았음은 무슨 의의 있는 일이겠는가. 집요한 짓이 아니라면 억지로 꾸미는 일이다.
금(金) 나라 왕거비(王去非)는, 북쪽 이웃에서 초상이 나 동쪽으로 나가기를 꺼려하고 있는데, 서북쪽은 모두 인가들이고 남쪽은 자기의 집이므로 거비가 잠실(蠶室)을 헐고 남쪽으로 나가도록 했었으니, 이도 역시 중(中)에 맞는 일이 아니다. 이웃 마을에 수화(水火)와 도적이나 병환 등의 급박한 일이 생겨 오직 내가 어찌한 다음에야 살게 될 수 있다면, 잠실뿐만이 아니라 비록 잠실보다 더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해야 하겠지만, 이는 하나의 기휘(忌諱)에 구애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 정당한 이치가 아닌 것이니, 비록 책망하여 바로잡아 주더라도 될 일인데, 어찌하여 도리어 그의 뜻을 이루게 하겠는가.
명 나라 양저(楊翥)는, 이웃에 사는 불량한 자가 업신여겼지만 공(公)이 개의하지 않았고, 심지어 노새 울음이 그의 어린 아들을 놀라게 할까 염려하여 팔아버리매 그 불량한 자가 감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노새가 무심코 우는 것이 이웃집 어린 아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혹시 집에서 키우는 사나운 개가 사람을 만나자 그만 물었다면 팔아버릴 뿐만이 아니라, 죽여버리더라도 되겠지만, 노새는 비록 울게 되더라도 꼭 그럴 것이 없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을 시켜 《강목(綱目)》의 책 제목을 쓰는데, 종이 약간의 먹을 것을 들고 공의 자리에 다가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므로, 문강공이 공에게 말하기를,
“술을 가져오는 모양입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아직 그대로 있거라.”
하자, 종이 다시 다가서서 있다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어찌 이리 더디십니까?”
하매, 공이 웃으면서,
“가져 오너라.”
하였고, 이미 가져 오자, 어린아이 여럿이 모두 남루한 옷에 맨발로 들어와 공의 수염을 잡았다 공의 옷을 밟다 하다가, 먹을 것을 모조리 집어가버렸고, 또한 공을 두들기기도 하니, 공이,
“아프다. 아프다.”
하였는데, 모두 노비(奴婢)들의 아이였다. 이는 공의 천성이 너그럽고 후중하여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나, 빈주(賓主) 사이의 예절과 상하 사이의 기율에 있어서는 되지 않을 일이 아니겠는가.
대제학(大提學) 윤회(尹淮)가 젊었을 적에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어가자 숙박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뜰 아래 앉았는데, 주인 아이가 큰 진주(眞珠)를 가지고 있다가 마당에 떨어뜨리매 흰 거위가 삼켜버렸다. 주인이 찾다가 찾지 못하자 드디어 공에게 의심을 두어 장차 관에 고발하려 하였으나, 공이 변명하지 않고 다만,
“저 거위도 잡아매라.”
했었는데, 이튿날 진주가 거위의 똥에 나오게 되자, 주인이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어제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공의 말이,
“말을 하면 반드시 해부(解剖)하여 찾아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욕을 참으며 짐짓 기다린 것이다.”
하였다. 공이 이미 ‘저 거위도 잡아매라.’ 했는데도, 주인이 어찌하여 헤아려보지 않았다가 이제야 부끄럽게 여겼는지 알 수 없고, 공도 역시 어찌하여 분명하게, 내가 저 거위가 삼키는 것을 보았으니, 나와 함께 거위가 똥을 싸기를 기다리자고 말하지 않았는지. 그렇게 하였다면, 주인이 거위가 아까워 마땅히 조금 거위가 똥 싸기를 기다리게 되지 어찌 해부하게 되겠는가. 만일 주인이 포악하여 해부하게 되더라도, 이미 ‘저 거위도 또한 잡아매라.’는 말을 따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전기(傳記)의 말이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들이 백이(白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다 쓰기를,
초목도 오히려 주 나라 우로에 자란 것이니 / 草木猶沾周雨露
그대가 수양산 고사리 먹은 것이 부끄럽도다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고, 또, 세이도(洗耳圖)에다 쓴 시에,
물 중에 깨끗한 물 있다면 / 水中若有水
그 물이 이 물을 씻으리 / 水亦洗其水
하였는데, 이는 남 책망을 여지없이 한 것으로서, 충후(忠厚)한 마음을 손상함이 또한 너무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비록 좋게 여기면서도 또한 섭섭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는 모두 현명한 사람들의 탁월한 대문인데도 오히려 뒷사람들의 논평을 받고 있으니, 더구나 중등 이하의 사람이겠는가. 더욱 처신하기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옛 세상에는 5가지 큰 낙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더러 범연히 여기고, 오직 공명(功名)이 혁혁한 것만 낙으로 여겼다. 내가 표시하여 내겠는데, 첫째는 노래자(老萊子)가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웃는 짓을 하여 두 어버이를 즐겁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당ㆍ우(唐虞) 시절의 군신(君臣)들이 도유우불(都兪吁咈)하면서 태평한 세상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는 문왕(文王)과 태사(太姒)가 금슬(琴瑟)과 종고(鐘鼓)를 가지고 애정과 단락(團樂)을 노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넷째는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의 행단(杏壇)에서 3천 제자들이 읍양승강(揖讓升降)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섯째는 장공예(張公藝)가 9대를 한집에 함께 살며 변함 없이 화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몇 가지 일이 요는 인륜(人倫)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으니, 비로소 인륜을 완비한 사람에게 지극한 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낙을 가리는 속에 성인이 세 가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정대(鼎大)에게 훈계하기를,
“네가 지금 나이 이미 10세가 되었으니, 마땅히 쉴 사이 없이 부지런하게 노둔(魯鈍)한 점을 씻어내며 극력 어른들의 훈계를 준수해야 하고, 한갓 뛰어다니며 놀기만 하여서는 안 된다. 잠깐 사이 15세가 되고 또 깜짝할 사이 20~30세가 되어 마침내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누가 너와 이야기하려 하겠느냐. 옛사람이 짧은 시간 아끼기를 금덩이 아끼듯 하여 장성하여서도 문견 없는 것을 평생의 큰 근심으로 여겨, 일찍 터전을 마련했었다. 지금 너는 부질없이 놀기에 빠져 짧은 시간 아끼지 않기를 비 끝에 먼지 버리듯 하고 헛되이 하루 보내기를 떡 하나 먹어버리듯이 하니, 내가 매우 근심스럽다.”
하고, 학동(學童)인 구씨(具氏)의 아들 궁기(宮其)에게 훈계하기를,
“네가 지금 나이 이미 15세이다. 대범 아들된 사람이 15~16세 무렵에는 어른이 될 바탕이 이미 7~8할은 틀이 잡히는 법인데, 지금 너는 걸음걸이가 차분하지 못하고 앉으면 몸을 흔들어대며, 말과 웃음이 철없고 글읽기를 매우 거칠게 하며 또한 싫증을 낸다. 대범 총기[聰明]란 지극히 정영(精英)한 것이니, 가령 총기에 신(神)이 있어, 네가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너의 그런 뜻을 사랑스럽게 여겨 너의 가슴속에 와서 있겠지만, 네가 만일 경박하고 태만하여 술 취한 사람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 같기도 하다면, 비록 잠시 네 가슴속에 있다가도 너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시급히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다.
네가 두 볼이 풍만하고 눈이 우묵하며 눈썹 사이가 널찍하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느냐마는, 사람들이 더러 네 얼굴을 기이하게 여겨 칭찬하기를 ‘사람됨이 저만하니 종시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네가 그런 말에 자부심을 가져, 글읽기를 제2의 일로 삼아서 되겠느냐. 비록 네가 도주(陶朱)와 석숭(石崇)처럼 되어 황금(黃金)을 울타리 사이에 버려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아는 글자 하나도 없어, 사람들이 너를 대할 적에 반드시 비루하게 여기는 마음을 더하게 된다면, 네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도주와 석숭이 어찌 일찍이 글을 읽지 않았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를 훈계하는 것이니 너는 힘써야 한다.”
하였다.

한(漢) 나라 주아부(周亞夫) 종리(從理)가 입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굶어죽었다고 하나,《남사(南史 남조(南朝) 시대의 사서(史書)》에 수군도독(水軍都督) 저나(褚蘿)는 얼굴이 매우 뾰족하고 종리가 입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나, 마침내 의식(衣食)을 보장하다 마쳤고,《사기(史記)》에 순(舜)은 중동(重瞳 겹으로 된 눈동자)이었고, 항우(項羽)도 중동이었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자결하여 죽었으며, 수(隋) 나라 어구라(魚俱羅) 역시 중동이었지만 양제(煬帝)에게 꺼림을 받아 베임 당하였고, 우리나라 남곤(南袞) 역시 중동이고, 우리 일가[族人]에도 옛적에 중동인 사람이 있었지만, 남보다 나은 일은 없이 다만 밥을 잘 먹지 못하므로 아침저녁으로 떡을 씹어 요기할 뿐이었다. 종리가 입으로 들어간 것은 동일하지만, 혹자는 굶어죽었고 혹자는 의식이 넉넉했으며, 중동은 동일하지만, 하나는 어진 제왕(帝王)이었고 둘은 모두 좋게 죽지 못하였으며, 하나는 충신과 선량을 모해(謀害)하여 만고에 간사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는 단지 용렬한 보통 사람이었으니, 관상(觀相)하는 법을 과연 믿어야 하겠는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도(禮圖 예서(禮書)에 수록된 도본)에는 대여(大轝 국가에서 쓰는 큰 상여)에 복토(伏兎)가 있고, 의경(醫經 의서)에는 신가(腎街)를 복토라고 했다. 대범 토끼는 숨느라 엎드리기를 잘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형상을 취하여 이름한 것인데, 모든 기구에 이러한 것이 많이 있다. 선구(船具)에 묘(猫)라는 것이 있는데 곧 닻[碇]으로서, 대개 고양이가 예리한 발톱으로 무슨 물건을 끌어다가 굳게 고정시켜 놓기 잘하는 형상을 취한 것이고, 또 치(鴟)라는 것이 있는데, 솔개의 꼬리가 바람을 따라 돌기 잘하는 형상을 취한 것이다.

심계자(心溪子)가 여름철에 청풍(淸風) 시내의 쭈글쭈글 주름이 잡힌 바위 위에 오래 누웠다가 갑자기 눈을 똑바로 뜨며,
“내 몸이 절반은 돌이 되었겠다.”
하고, 이어 한탄하기를,
“죽어서 이 산 귀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마음먹기에는 한가한 틈에 온갖 화초의 성질과 생태(生態)를 듣고 보아《화동호(花董狐 화사(花史)란 뜻》를 편집하고, 또한 고금의 고사(高士)들을 모아 논평을 붙여, 이름을《고사본초(高士本草)》라 하고 싶다.

심현재(沈玄齋 현재는 심사정의 호)가 수묵(水墨)으로 그린 용(龍)은, 턱[頦頷]이 비스듬히 모가 나고 앉은 길이가 한 길이나 되는 듯하여, 마치 다가와서 부딪힐 듯하고 수염 끝이 윤기가 나 물방울이 떨어지려 하는 것 같다.

방 안에다, 금분[泥金]으로 궁실(宮室)과 인물을 그린 왜연갑(倭硯匣)을 늘어놓고, 한석봉(韓石峯)의 액자(額字) 체첩(體帖)을 목각(木刻)하여 청색으로 장정을 하고, 필통(筆筒)을 마디 있는 대나무로 만들어 회회청(回回靑 도자기의 청색 도료)으로 ‘수ㆍ부ㆍ귀(壽富貴)’ 석 자를 써서 굽고, 화분에는 금봉화(金鳳花)ㆍ계관화(鷄冠花) 따위를 난잡하게 심어놓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아사(雅士)라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속물[俗輩]이라 할 것이다.

황금(黃金)으로 왕마힐(王摩詰)을 지어 부어놓고 채색실로 미원장(米元章)을 수놓아 늘어놓고서, 좋은 철의 아름다운 경치 때 고상한 벗과 명사[名㳘]들을 맞이하여 시축(詩軸)과 화첩(畫帖)을 펴놓되, 반드시 먼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다가 조촐한 개울에 띄우고 제를 지낸다면, 이날은 시정(詩情)과 화의(畫意)를 조장하게 될 것이니, 장사하러 오는 손들을 금하여 문 앞에 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한탄하기를,
“밭 1백 묘(畝), 책 1만 권, 화초 수백 그루, 법첩[法書]과 명화(名畫) 5~6백 폭, 징심당지(澄心堂紙) 10만 장, 반곡(潘谷) 이정규(李廷珪 남당(南唐) 제2의 묵공(墨工)의 먹 각각 1천 자루씩, 중산(中山)의 상호필(霜豪筆 질이 좋은 붓) 5~6독[瓮], 단계연(端溪硯) 수십 면(面)과 유명한 차ㆍ특이한 향(香)을 마음대로 명사 10여 인과 천호후(千戶侯)들에게 공급해 준다 하더라도 오히려 용탑(葺闒 쓸모가 없는 것)하여 고사(高士)가 되지 못할 것인데, 어찌 의관(衣冠)을 찢고서 버려진 백성이 되지 않으랴.”
했다.

뜻에 맞는 일이 오래도록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오색 구름을 한없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유리(琉璃)를 쳐도 부서지지 않게 하고, 양주학(楊州鶴)도 타고 다닐 수 있게 해야 될 것이다.

심계자(心溪子)가 말하기를,
“날카로운 두 눈동자로 가을 물에 환히 비치는 허공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하늘과 심령(心靈)이 만나게 될 적에는 한가운데의 싸여 있는 허공이 광대하게 보이니, 그때의 맛이란 아득하고도 그윽하여 표현할 수도 없고 또 한말로 들려줄 수도 없다.”
하자, 형암(炯菴)이 성을 내 흘겨보며,
“나의 두 귀가 영롱하게 뚫려 있는데, 유독 네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겠는가.”
하였다.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리고 최하등 사람은 가난을 은휘하다 가난을 호소하다 가난에 짓눌리다 가난에 사역되고, 또 그보다도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 죽어간다.

입술과 혀에서 나와 낭랑(琅琅)하고 발랄한 것은 형태가 없는 글인 것이고, 종이에 먹으로 표시되어 정연하다 들쭉날쭉하다 한 것은 형태가 있는 말인 것이다. 수염ㆍ눈썹ㆍ치아(齒牙)ㆍ두 볼을 흔연(欣然)스럽게 접할 수 있어 간담[肝肺]이 서로 통해지기는 글이 말만 못하고, 정신과 사고[意想]를 은연(隱然)한 속에서 찾을 수 있어 기맥(氣脈)이 완곡(婉曲)하게 통해지기는 말이 글만 못한 법이니, 말은 해도 문채가 없어 한 번 입에서 나와버리면 이미 흔적이 없게 되기 때문에 글로 쓴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글을 지을 적에는 따로 마고(麻姑)와 같은 손톱을 가지고 통쾌하게 조화(造化)의 굴 속에 있는 것을 긁어내야 신묘한 빛이 종이의 먹 위에서 서너 길씩 뛰놀게 되는 법이다.

옛사람의 것을 답습(踏襲)한 글을 ‘인면창(人面瘡)’이라 하는 법이니 무엇을 패모(貝母 인명창을 치료하는 한약 재료) 대신 사용하여 시급히 그런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매화가 있는 감실(龕室)에 유자(柚子)를 놓아둠은 곧 매화를 모욕하는 짓이다. 전부터 매화는 맑은 덕과 조촐한 지조가 있다는 것인데, 어찌 차마 다른 것의 향기를 빌어다가 그를 돕게 하겠는가.

재주 있는 사람의 뱃속에는 한 줄기의 봄 생수처럼 솟아나는 것이 있어, 맑게 흐르는 소리를 내며 고운 물결이 일게 되고, 멈추어 쌓여 있지 못하는 법이니, 시험삼아 오른팔로 내보낸다면, 졸졸 흘러서 붓대에까지 미치어 붓끝에서 동그랗게 방울방울 떨어지되, 똑똑 하여 홍주(汞珠 수은 방울) 같기도 하고 앵무 사리(鸚鵡舍利 공작석(孔雀石)을 말한다) 같기도 하고 교인(鮫人)의 눈물 같기도 한 것이다.

좌중(座中)에 옛 그림이나 기이한 책을 펴놓자, 소리 높여 웃어대어 거품이 날리게 하고, 때묻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문지르다 긁다 하는 사람은, 결코 그림이나 글을 알아보는 사람도 아니고 단아한 선비도 아니고 학식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옛사람들의 만사[輓詩]나 애사(哀辭)를 모아 차례차례 대어보면, 갑(甲)이 죽으매 을(乙)이 조위하고 을이 또 어느새 죽으매 병(丙)이 조위한 것으로서 끝이 없게 된다. 옛사람들의 의논도 모아서 차례차례 대어보면, 갑의 말을 을이 반드시 비난한 것이어서, 을이 일단 갑을 비난한 것에 있어서는 딴 의논이 없을 듯한데도 병이 또한 비난하여 역시 끝이 없게 된다. 온 세상이 다만 이 두 가지 일이 어떠어떠하다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 아닌지.

지인(至人 덕이 높은 사람)은 훼방이나 칭찬에 처했을 때, 사실이 있는 것이나 터무니없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배부를 것도 없고 목마를 것도 없고 가려울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는 법인데, 보통 사람들은 사실이 있는 칭찬이나 사실이 있는 훼방에 있어서도 잘 대처하지 못하니, 더구나 사실이 없는 칭찬과 잘못이 없는 훼방이 있어서이겠는가. 사실이 없는 칭찬이란, 어찌 꿈속에 밥 더 주고 그림자를 긁어 주는 것과 다르고, 잘못이 없는 훼방이란, 어찌 꿈속에 마실 물이 떨어지고 그림자를 때려 주는 것과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꿈에라도 밥 더 주기를 바라고, 괴팍한 성미의 사람은 그림자 때려 주기를 오히려 한하는 법이다.

말 속에 숨은 칼날이 있음은 곧 물여우가 사람의 그림자를 쏘는 짓이니, 서로 대면하여 통쾌하게 꾸짖어버린 다음에 조용해져 뒷공론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나 시 짓는 인사(人士)는, 좋은 계절의 아름다운 경치 때엔 시흥(詩興)으로 어깨가 산처럼 솟아오르고 눈에는 물결이 일게 되며, 두 볼에서는 향기가 생기고 입에서는 꽃이 피게 되는 법이지만, 조금이라도 노리는 짓을 한다면 곧 큰 결점이 되는 것이다.

시냇물이 맑고 돌이 시원스러운 데에서 낙엽을 주워다가 황량(黃粱 메조)으로 밥을 짓노라면, 구수한 향기가 진동한다.

청고(淸高)한 이웃, 기청(奇淸)한 아우, 괴기(怪奇)한 종[僕], 괴벽(怪僻)한 자손, 이 괴벽한 것 다음부터는 나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구가(九歌)와 구장(九章)은 부러워하기만 짝없이 한 것으로서, 필연(筆硯)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적이 한 달에 거의 4~5차례나 있었다.

시(詩)가 귀신을 울리게 되고 글씨가 조화(造化)를 탈취하게 되고 그림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 사람들은, 으레 청빈(淸貧)이 뒤따르니 빈궁한 귀신이 따라다니고, 태반이 세상일을 알지 못하니 바보 귀신이 끼었나 보다.

혀를 차며 한탄하는 세 가지 괴이한 일. 요(堯) 임금 때에 어찌하여 9년
홍수가 내리고, 구경(九經)이 어찌하여 진(秦) 나라의 화로(火爐)로 들어가고,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어찌하여 일찍 죽어 한(漢) 나라 왕실(王室)을 복구하지 못했는지.

세상에 세 가지 통쾌한 일이 있으니, 《강목(綱目)》에 ‘소열황제 장무 원년(昭烈皇帝章武元年)’이라 대서특필한 것, 단 태위(段太尉)가 홀(笏)을 빼앗아 주자(朱泚)를 친 것, 종동(終童)이 긴 바람을 타고 큰 파도가 이는 만리길을 돌파한 일이다.

조아(曹娥)의 비문(碑文)은 섬세하고 수려한 부인이 긍지(矜持)를 지키며 때로는 애교 있는 말을 하는 것 같고, 저수량(褚遂良)의《난정첩(蘭亭帖)》은 시와 술에 빠진 재사(才士)가 한 번 단아한 선비를 보게 되자 자기 스스로 조금씩 단속해가는 것 같고, 미 원장(米元章)의《아집도서(雅集圖序)》는 두 잠 지난 봄누에가 모두 활발하게 움직이려 하는 것 같다.

손님이 말하기를,
“뱃속이 포만할 적엔 글읽기가 좋지 않아 누어서 잘 생각만 하다가, 뱃속에 조금씩 시장기가 있어야 글읽기가 그제는 맛이 나게 되며, 글읽는 소리가 어느새 공중에 뜨게 되니, 부귀도 좋은 일이고 글 읽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하기에, 그제야 비로소 두 가지 좋은 일을 겸하여 누리는 사람은 천하에 유복한 사람임을 알았다.

아무도 없이 조용하다 하여 말을 실수하지 말 것이, 담에도 귀가 있어 듣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운 것이요, 아무도 없이 깜깜하다 하여 방심하지 말 것이, 방을 들여다보는 눈이 있을까 두려운 것이다. 극도로 조심하면 모든 장벽(墻壁)의 구멍이 환히 뚫려 귀나 눈처럼 여겨져서, 나귀의 귀가 쫑긋해지고 소의 눈이 날카로워져 응시(凝視)하거나 고요히 듣기를 무슨 뜻이 있어 하는 듯하니, 모두 삼가고 두려워서이다.

황봉(黃蜂 참벌)의 등에 까맣게 ‘무공(巫工)’ 두 글자가 씌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오이밭을 호미질하다가, 마루에 올라가 붓을 잡으면, 팔이 몹시 떨려 마치 바람 속에 배가 까불리듯 한다. 혹자가, 기이한 것을 좋아하므로 짐짓 전필(顫筆 떨린 글씨)을 쓰는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병을 참으로 짐짓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병이 아니기 때문에 떨리는 정신을 반드시 꾸짖어버리는 것이다.
6월 아침에 형암(炯菴)은 원각탑(圓覺塔) 동쪽에서 쓴다.

어린아이들이 모발 구멍과 뼈마디는 모두 어른들만 못하지만, 유독 눈동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니, 이들의 눈동자가 큰 것을 보면 곧 기특한 조짐이다.

뿔이 달린 것에게는 윗 니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 용(龍)을 보면 삐쭉삐쭉한 이가 입에 그득하여 도시 이와 입이 합쳐졌으니, 이래서 용을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납 탄환이 갑옷은 꿰뚫어도 회(灰)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완구[大碗砲]가 열 길 성을 부수지만 포장(布帳)으로 막아낸다. 강강(剛强)한 적이 왔을 때 유화(柔和)로써 제어한다면, 다시 무슨 수고로운 것이 있으랴.

하늘이 낸 만물은 형체가 둥근 것이 많으니, 사람과 금수(禽獸)가 지닌 구멍이나 사지의 마디와 초목의 가지와 등걸꽃과 열매 및 구름ㆍ우뢰ㆍ비ㆍ이슬이 그것이다. 달은 해가 둥근 것을 표준하고 해는 하늘이 둥근 것을 표준하며, 물은 이 세 가지를 표준하여 만물을 생장시키고 만물은 이 네 가지 둥근 것을 표준하여, 둥근 것이 대부분이다. 물이 어찌 둥근 것이냐고 하겠지만, 수은이나 물방울이 모두 둥글어, 돌을 물에 던지면 파도가 호랑이 눈알처럼 굽이치게 된다. 사람과 금수의 눈동자도 수화(水華)를 응결(凝結)하여 해와 달을 표준하였기 때문에 가장 둥근 것이다.

상점(商店) 머슴이,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싼 변이 모두 산 생선으로 변했으니, 이는 중들의 뱃속에 생선이 든 것이다.”
하자, 말 모는 사람이,
“부처가 만일 사람들에게 생선을 먹지 말도록 하였다면, 어찌하여 불상(佛像)에다 도금(鍍金)할 적에 부레풀을 사용하겠는가.”
했는데, 부처가 사람들에게 비늘 달린 생선ㆍ깃 달린 날짐승ㆍ털 달린 짐승ㆍ껍질 달린 것들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금법을 마련하여 중생(衆生)들이 크게 학살하는 짓을 경계한 것이다.

말의 입술은 누에 입술과 비슷하고, 호도(胡桃)씨는 곧 부화할 벌이나 나비의 새끼 같으며, 쥐의 꼬리는 뱀과 비슷하고, 이는 비파(琵琶)와 같다. 서캐는 맥황(麥黃)과 같고, 푸른 줄무늬 오이 껍데기는 황록(黃綠) 줄무늬 개구리의 등과 같으며, 야명(夜明 박쥐)의 날개는 소의 볼과 같다. 노루 꼬리의 꼭지는 매행(梅杏)의 수염 같다. 귀뚜라미 소리는 대나무 대롱에다 팥을 담아 흔드는 것 같고, 등불[燈穗]은 파리의 눈과 같으며, 겨울 소의 넙적다리는 솔방울과 같고, 거미의 배는 사람의 엄지손가락과 같고, 가죽나무 잎사귀의 꼭지는 말의 발굽과 비슷하며, 꽁보리밥은 개파리 떼와 비슷하다.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자)가 양 소윤(楊少尹 이름은 거원(巨源) 소윤은 벼슬 이름)을 전송 한 서(序)에,
“또한 승상에게 고하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亦白丞相去歸其鄕]”
하고, 또,
“그 도의 소윤을 삼았다.[以爲其都小尹]”
하였는데, ‘그의 고향’이니 ‘그의 도’니가 과연 어느 고향 어느 도인지. 퇴지의 붓 내려가는 길이 혼미해졌던 것이다.

갑(甲)이 말하기를,
“인간의 좋은 일들이 하나의 ‘먹을 식(食)’ 자에 구애되어 그 길이 막히게 되고 만다.”
하고, 을(乙)이 말하기를,
“코 밑에 있는 목구멍이 곧 잘못하여 빠지는 곳이다.”
하자, 병(丙)이 말하기를,
“매미는 코 밑에 구멍이 없고, 맑은 바람이 시원한 높은 나무에 들러붙어 온종일 마음대로 울어대기를 조금도 그치거나 위축되는 짓이 없이 하여 통쾌하다.”
하기에, 형형자(炯炯子 저자 자신을 말한다)가 듣고서 상쾌하여, 서쪽 처마 밑에서 적어둔다.

개가 사람을 물었을 적에 지렁이 똥을 상처에 발라 두면 개털이 그 속에 서리게 되니, 이는 곧 독이 모여 있기 때문이고, 상처가 이미 완쾌되었는데도 개털이 그 위에서 나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죽고 만다.

청한(淸寒)이,
“동이 이동 동이이 이동 동이 이동동(同異異同同異異異同同異異同同)”
하자, 혹자가 대구(對句) 짓기를 청하기에 형암(炯菴 저자)이 붓을 날려 ‘한 일[一 앞 구와 대구가 동일하다는 뜻] 자’를 그리고, 공계(□溪)가,
“삼사 사삼 삼사사 사삼 삼사 사삼삼(三四四三三四四四三三四四三三)”
하자, 또 대구 짓기를 청하기에 또한 ‘한 일 자’를 그리고 깔깔 웃으며 말하기를,
“청한과 공계는 잘도 지껄인다.”
했다.

부레풀[魚膠]과 밤버섯[栗茸]은 모두 밤이면 빛이 나고, 썩은 버드나무도 밤이면 인화(燐火)와 같으며, 오원(烏圓 고양이의 이칭)의 등을 캄캄한 밤에 스치면 불빛이 번쩍번쩍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음(陰)의 종류이지만, 지극한 음의 것은 통명(通明)한 법이다.

무심코 하는 말을 유심히 듣는다면 세밀한 데 치우쳐 옹졸한 사람을 면하지 못하게 되고, 유심히 하는 말을 무심히 듣는다면 소루한 데 빠지기는 하지만 호인(好人)이 되기에는 방해롭지 않은 것이다. 무심코 하는 말을 유심히 들으면, 비록 앙화는 닥치지 않더라도 귀신이 반드시 모해하게 되고, 유심히 하는 말을 무심히 들으면 혹시 재앙은 닥치게 되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가엾게 여기는 것이다. 무심코 하는 말을 무심히 듣되 점화(點化)를 잘 해나가면 유심히 들은 것처럼 되고, 유심히 하는 말을 유심히 듣되 응접(應接)을 잘 해나가면 무심히 들은 것처럼 되는 것이다.

요란한 사람은 곧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을 만듦이 극에 차면 우환이 닥치는 법이고, 고적한 사람은 곧 일을 덜어버리기 잘하는 사람인데, 일 줄이기를 오래하면 기쁜 낙이 긴 법이다.

약초밭 난간의 금봉화(金鳳花)가 이 새벽비에 붉은 기가 가셔버리게 되자, 어린 계집종이 꽃을 거머잡고 훌쩍거리매, 한 달관(達觀)한 사부(士夫)가 보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하기를,
“항 패왕(項霸王)이 우 미인(虞美人)과 울며 이별할 적에 정말 저러했을 것이다.”
했었다.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니, 거리낌없이 너그럽고 순탄 정직한 마음 갖기를 좋은 말을 타고 조금도 딴 마음 없이 큰길을 달리듯 해야 한다.

벌레나 새 등속의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들이 극도로 빠르게 날 적에는 털ㆍ깃ㆍ눈ㆍ부리가 온통 한빛이 되어 세밀히 분별할 수가 없는데, 예나 지금이나 화가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그릴 적에 섬세한 데도 빼놓ী 않고 온 몸을 모두 구상(具象), 쪼아 먹고 둥지에서 자는 것들과 다름이 없이 하니 이는 비록 명가(名家)라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점이다.

장무선(張茂先)이 말하기를,
“허리가 큰 것은 수컷이 없으니 거북이와 자라 따위이고, 허리가 가는 것은 암컷이 없으니 벌 따위이다.”
하자, 내가,
“개구리는 허리가 커도 교접(交接)하고, 잠자리는 허리가 가늘어도 교미(交尾)한다.”
했다.

호(號)가 ‘신재(矧齋)’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난하여 활과 화살을 직업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해 한숨짓거나 분개함은 쓸데없는 수고이다. 이름난 화공(畫工)이 사람의 얼굴을 반쪽만 그려놓는다고 하자. 밥 짓는 종이나 장사하러 다니는 지아비가 가리키며 비웃기를,
“애꾸눈 하나만 가지고 보면, 집 모서리와 계단 구석이 뚝 끊어져 비스듬히 보일 것인데, 필경에는 틀림없이 한탄하는 소리가 ‘좋은 큰 집이 장차 쓰러지겠다.’고 할 것이다.”
하리라. 천하의 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인데 무슨 한탄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욕심이 없어야 욕되는 일이 없는 법이다.

남의 것을 박탈하여 자신만 살찌게 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견디겠는가. 필경에는 남들에게 박탈당하게 되는 법이다.

옛날 한 감여가(堪輿家 묘자리를 잡는 풍수)가 어떤 우매한 자제를 유인하여, 어느 등성이를 가리키며,
“여기가 돼지 주둥이 형국(形局)이다.”
하고, 앞에 있는 조그만 바위를 가리키며,
“이것은 돼지 똥이 쌓인 형국이니, 돼지 주둥이에다 장사지내면 말할 수 없는 부자가 될 것이다.”
하자, 우매한 자제가 과연 그의 부모를 장사지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오직 부자가 되기만 바라고 또한 풍수들에게 현혹되어, 조상을 욕되게 하는 부끄러운 일인 것을 돌보지 않는다.

고양이와 개는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가 고양이를 만나 무턱대고 쫓으면, 고양이가 응당 재빠르게 집 모서리로 올라가 개를 내려다보고 앉는데, 개가 머리를 흔들며 서로 바라볼 만한데도 맥없이 물러가 버린다. 고양이가 그러지 않아서 개가 한 번 차고 물러선다면, 고양이가 반드시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볼을 비비다가 발톱을 펴 개의 코를 후비게 되니, 개가 비로소 정작 성을 낸다면 고양이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갑(甲)은 소를 타고 을(乙)은 말을 타고 가다 여관에서 자고, 새벽에 떠나게 되어 갑이 말을 타고 을이 소를 타고 가되, 침침하여 갑은 소를 타고 을은 말을 탔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가 날이 훤해진 뒤에 모색(毛色)이 다르자, 갑은 말을 탔고 을은 소를 탔었다.

아침 안개는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 안개는 석류꽃처럼 붉다.

남에게 돈이나 재물을 희사하면서 눈썹 사이에 억지로 하는 기색을 띠면 크게 음덕(陰德)을 덜게 된다.

장초보(張肖父)의 이우린(李于鱗)의 문집 서(序)에,
고악부(古樂府) 중의 오언선(五言選)은 백두(白頭)맥상(陌桑)ㆍ조매(曹枚)를 우맹(優孟)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나는 말한다.
“대범 이처럼 우린의 글이 손숙오(孫叔敖)를 모방하듯이 한 것이라면, 후세에 선비들이 우린의 글을 배우는 것은 곧 우맹을 모방하는 일인데 모방하는 우맹과 진짜 손숙오는 상거가 멀지 않겠는가.”

구각(口角 입 아귀)이 완전한 사람이 없는데, 그런 사람은 곧 완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호색(好色)하는 사람은 골수가 마르고 살이 빠지다가 죽게 되는 날 저녁에는 정욕이 상승되는 것인데도 마침내 뉘우치는 마음이 없어, 단지 하나의 호색 속에서 주려 죽는 귀신이 되는 법이다. 내가 일찍이 비웃고 가엾게 여기고 두려워하다 경계하다 하면서도 나 자신이 불행히도 가까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니,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호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사이 유행하는 풍열(風熱) 때문에 오른쪽 눈이 또한 가렵고 아프므로 사람들이 자못 책병[書祟]이라고 놀리게 되는데, 내가 다소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책은 차마 하루도 떠날 수가 없어, 매양 눈을 한 오라기 가량이라도 뜰 적마다 모여 있는 글자와 먹 속의 정수[精華]를 힘주어 식선자법(食仙字法)처럼 바라보게 되니, 색에 빠지는 그네들이 응당 나를 야유할 것이다.
9월 그믐날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는 실없이 쓴다.

나의 시문(詩文)은 2할은 달고 3할은 신 산과일[山果]와 같고, 나의 위인은 3할은 길들고, 7할은 선 야마(野馬)와 같다. 절반쯤 설고 절반쯤 익었으며 절반쯤 달고 절반쯤 시어, 세월이 아직도 까마득한데, 어찌하면 단사(丹砂)의 불처럼 농익은 과일이나 벽옥(碧玉)으로 다듬은 말발굽과 같게 될 것인지.
안목이 있어 논평을 잘하는 사람이 시(詩)나 문(文)을 읽어줄 적에는 큰글[章]과 거대한 편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흠있는 시구 틀린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만 값어치가 오르게 되니, 가만히 작자의 눈치를 살펴보면, 펄떡펄떡 하여 좋아하는 기색이 넘친다. 안목이 없어 논평을 잘 못하는 사람이 시나 문을 읽어줄 적에는 흠있는 시구 틀린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큰 글 거대한 편이라 하더라도 값이 떨어지게 되니, 가만히 작자의 눈치를 살펴보면, 위축되어 근심하는 기색이 감도는데, 값이 올라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값이 떨어져도 근심하는 기색 없는 사람이 곧 기예(技藝)와 명성에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알아보는 사람과 더불어 논하게 된다면 내가 또한 안석에 기대고서 웃겠노라.

전동간(錢東澗)은 일평생이 절반은 한족(漢族)이고 절반은 호족(胡族)이며, 학문은 한때는 불교를 배우다 한때는 유학(儒學)을 배우다 하였고, 문장은 해학(諧謔)도 아니고 미어(謎語)도 아니었으니, 결국 ‘낭(狼)’이 뒷다리를 잃고 ‘패(狽)’가 앞다리를 잃은 격이다.
제(齊) 나라에는 무염현(無鹽縣)이 있고 초(楚) 나라에는 불갱현(不羹縣)이 있었다. 왜가리[鵙]는 백조(伯趙 때까치)이고 개는 계촉(季蜀)이다. 한(漢) 나라 적에 두시(杜詩)가 있었고 명(明) 나라 때에 한문(韓文)이 있었다. 양사오(楊仕伍)와 이팔백(李八百)은 신선이었다. 백기(白起)와 황헐(黃歇), 이이(李耳)와 율복(栗腹), 손권(孫權)과 예형(禰衡)은 성명이 묘하게 짝이 된다. 지폐(地肺)와 천목(天目)은 산이고, 불류(不留 왕불류행(王不留行)의 준말)와 당귀(當歸)는 약이다.

공중에 서는 빗발은 거머잡고 볼 수가 없는데, 가령 볼 수 있다면, 원형으로 되었는지 육각으로 되었는지.

북두성의 윤곽이 네모난 것은 땅을 형상한 것이고, 북두성의 자루가 세번 꺾임은 하늘을 형상한 것인데, 네모가 난 것은 방(方)이고 세 번 꺾임은 원(圓)이다. 북두성은 생명을 맡아[司命] 원기(元氣)를 요량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형상한 것이다.

코에서 토해낸 회충(蛔虫)으로 자기(瓷器)의 깨진 틈을 붙일 수 있으니, 차진 기를 취하고 더러움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널리 알면서도 저술을 하지 못함은 열매가 맺지 않는 꽃과 같은 일이니, 어느새 떨어져버리지 않겠는가. 저술은 하면서도 널리 알지 못함은 근원이 없는 물과 같은 일이니, 어느새 말라버리지 않겠는가.

한(漢)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은 용납했고, 송(宋)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했고, 명(明)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또한 꾸짖거나 원수처럼 여긴 사람도 있었으니, 원미(元美)의 무리는 업신여긴 사람들이고 중랑(中郞 원굉도(袁宏道))의 무리는 꾸짖은 사람들이며 수지(受之 전겸익(錢謙益))의 무리는 원수처럼 여긴 사람들로서, 세도(世道)의 고저를 볼 수 있다.

양두사(兩頭蛇)와 구미호(九尾狐)는 천하에 지극히 악한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피 할 수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은 잡아죽일 수 있다. 오직 몸에는 의관을 꾸미고 입으로는 글과 역사를 곧잘 말하는 참부(讒夫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해치는 사람)에 있어서는, 현명한 사람도 피하지 못함은 그 참부의 유언비어 때문이니, 유언비어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용기있는 사람도 잡아죽일수 없음은 포(葡)가 여럿이기 때문이니, 인류(人類)를 어떻게 하나하나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는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집에서 생장하여 사방에 사우(師友) 하나 없었는데도 능히 묘하게 문장(文章)을 깨달아 시원스럽게 세속의 때를 벗는 수가 있으니, 이는 성불(成佛)할 수 있는 자품이다. 자기 처지가 문헌(文獻)이 많이 있고 사우가 또한 많은데도, 글[書籍]이 종년[終年]토록 무디고 거칠기만 한 사람은 장차 어찌할 것이지. 아아, 슬픈 일이다.

깊이 알지도 못하고서 어찌 억지로 말할 수 있으랴.

생명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섭생(攝生 양생)이고, 복약(服藥)과 도인(導引)은 어디까지나 외물(外物 없어도 되는 것)인 것이다.

문장(文章)을 규인(閨人 안방의 여인)과 비유하는 법인데, 종백경(鍾伯敬)은 숙녀이고, 원중랑(袁中郞)은 재녀(才女)이다.
두렵고 두렵기는 조금 재주가 있으면서 기운을 부리는 것이고, 민망하고 민망한 것은 전연 알맹이가 없으면서 말을 재잘거리는 것이다. 하늘이 고원(高遠)한 것이 아니지만 만물이 모두 하늘에 덮여 노니는 것은 하늘이 공허하기 때문이니, 마치 고기가 물에 덮여 노니는 것과 같다.

일 없는 낮에는 흰 하늘을 보고 일 없는 밤에는 눈을 감는다. 흰 하늘을 볼때는 마음이 평탄해지고 눈을 감을 때는 마음이 평온해진다.

높은 지조는 서리[霜]처럼 늠름하고, 우아한 도량은 봄처럼 온화한 것이다.

고매한 사람이 속인(俗人)을 대하면 졸음이 오고 속인이 고매한 사람을 대해도 졸음이 오는 것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인데, 속인이 조는 것은 비루하여 말할 것이 없거니와 고매한 사람이 조는 것은 어찌 그리 마음이 협소한지. 만일 참으로 고매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졸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능히 남을 용납하기 때문이다.

문장(文章)은 하나의 기예(技藝)인데, 오히려 아담한 것과 속된 것, 진짜와 모방한 것의 구별을 혼동하고 있으니, 어떻게 산수(山水)를 품제(品題)하고 어떻게 인물(人物)을 감식(鑑識)하겠는가. 공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문장을 알아보는 법이고, 편견을 가진 사람과는 구설로 다툴 수 없는 것이다.

모방한 문장은 오히려 말할 수 있어도 가장한 도학(道學)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태평한 세상에는 보검(寶劍)이 쓸데없는 것이지만, 때로는 열주(熱酒 독한 술)로 신에게 제사한다. 왼쪽으로 갈기다 흘겨보며,
“난신(亂臣)과 역적들이 어디로 도망갈쏘냐?”
하고, 오른쪽으로 갈기다 흘겨보며,
“참부(譖夫)와 임인(壬人 간사한 사람)들이 어디로 도망갈쏘냐?”
하다가, 등잔불에 가까이 대고 보면, 시퍼런 서슬이 그만 가을 물과 같게 보인다.

백향산(白香山)의 하주부(荷珠賦)에,
“기운 곳에는 처하지 않고, 항상 반듯한 곳에 의지하며, 그칠 곳에 그치되 반드시 연잎 복판에 위치하고, 둥글 대로 둥글지만 물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하였으니, 군자가 몸 지키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최응(崔膺)의 금경부(金鏡賦)에는
“옥갑(玉匣 거울집을 말한다)을 막 열면 서늘한 빛을 내쏜다. 위로 맑은 하늘을 비추면 천지가 환히 통하고, 삼라만상이 그 속에 들어 텅 비고 깊기가 한이 없도다. 맑아서 시원한 못과 같고 흔들면 번쩍이는 번개 같도다. 공변될 뿐 마음 없어, 곱거나 추한 그대로 나타난다.”
하였으니, 군자가 마음 밝힘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1]육률(六律) : 여섯 가지 음률(音律). 음률은 본래 음률(陰律)이 6, 양률(陽律)이 6으로 12율인데, 이 중의 양률에 해당하는 황종(黃鐘)ㆍ고선(姑洗)ㆍ대주(大簇)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을 말한다.
[주D-002]팔음(八音) : 여덟 가지 악기. 곧 금(金: 종(鐘))ㆍ석(石 : 경(磬))ㆍ사(絲 : 현(絃))ㆍ죽(竹 : 관(管))ㆍ포(匏 : 생(笙))ㆍ토(土 : 훈(壎))ㆍ혁(革 : 고(鼓))ㆍ목(木 : 지어(枳敔))을 말한다.
[주D-003]생황(笙簧) : 아악(雅樂)에 쓰는 관악기의 하나. 곧 큰 대[竹]로 판 통모양의 대마디 위에 길고 짧은 17개의 죽관(竹管)을 원형으로 세운 것. 그 끝에 소리를 내는 혀를 막아 불거나 들이마시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주D-004]당우(唐虞) : 중국 고대의 나라 도당(陶唐)과 유우(有虞). 도당은 요(堯), 유우는 순(舜)을 말한 것으로서, 요순 시절을 의미한다.
[주D-005]손빈(孫臏) …… 방법 : 쓸데없는 일을 수고롭게 한다는 말. 손빈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장수로 위(魏) 나라 방연(龐涓)의 군사와 싸울 적에 위 나라에 들어가는 군사들로 하여금 부엌을 처음에는 10만을 만들었다가 다음날은 5만, 그 다음날은 3만으로 줄이게 하여, 군세가 약화된 것처럼 기만하여 승전했었다. 우허(虞詡)는 후한 시대 사람으로 자를 승경(升卿)이라 하는데,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 방어하러 나가, 사졸들로 하여금 각기 부엌 둘씩을 만들되 날마다 배로 증가하도록 하자 ‘손빈은 부엌을 줄이게 했는데 더 만들도록 함은 무슨 뜻이냐?’고 하니, ‘손빈은 약하게 보여야 하였지만 지금 우리는 강성하게 보여야 하여, 사세가 같지 않다.’고 했었다.《史記 卷65》 《後漢書 卷58》
[주D-006]복랍(伏臘) : 복은 한여름의 삼복(三伏), 납은 한겨울의 납일(臘日)로 세시 복랍(歲時伏臘)의 약어. 전(轉)하여 사철을 뜻한다.
[주D-007]십삼경(十三經) : 중국 고대 성현들이 저작한 열세 가지의 경서. 곧《주역(周易)》ㆍ《상서(尙書)》ㆍ《모시(毛詩)》ㆍ《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ㆍ《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ㆍ《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ㆍ《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이아(爾雅)》ㆍ《맹자(孟子)》.
[주D-008]이십이대 역사 : 청(凊) 나라 건륭(乾隆) 무렵에 선정한 역대의 정사(正史). 곧 《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ㆍ《삼국지(三國志)》ㆍ《진서(晉書)》ㆍ《송서(宋書)》ㆍ《남제서(南齊書)》ㆍ《양서(梁書)》ㆍ《진서(陳書)》ㆍ《후위서(後魏書)》ㆍ《북제서(北齊書)》ㆍ《주서(周書)》ㆍ《수서(隋書)》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ㆍ《구당서(舊唐書)》ㆍ《신당서(新唐書)》ㆍ《신오대사(新五代史)》ㆍ《송사(宋史)》ㆍ《요사(遼史)》ㆍ《금사(金史)》ㆍ《원사(元史)》.
[주D-009]원석공(袁石公) : 중국 명대(明代) 사람. 이름은 굉도(宏道), 자는 중랑(中郞), 석공은 호. 형 종도(宗道)ㆍ아우 중도(中道)와 함께 재명(才名)이 있어 삼원(三袁)이라 불리며 시문(詩文)이 절묘했다. 저서에 《상정(觴政)》ㆍ《원중랑집(袁中郞集)》ㆍ《병화재잡록(甁花齋雜錄)》등이 있다.《明史 卷288》 《明詩綜 卷57》
[주D-010]칠정(七情) :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곧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ㆍ애(愛)ㆍ오(惡)ㆍ욕(欲). 또는 희ㆍ노ㆍ애ㆍ구(懼)ㆍ애ㆍ오ㆍ욕.
[주D-011]풍시가(馮時可) : 중국 명대 사람. 자는 민경(敏卿), 호는 여천(與川). 호광포정사 참정(湖廣布政使參政)을 지내며 치적(治績)이 있었고, 저서(著書)가 해내(海內)에서 중시되었다. 저서로는 《좌씨석(左氏釋)》ㆍ《상지잡기(上池雜記)》ㆍ《초연루집(超然樓集)》 등이 있다.《明史 卷388》 《明詩綜 卷51, 明詩紀事》
[주D-012]심전기(沈佺期) : 중국 당대 사람으로 자는 운경(雲卿)이고 벼슬은 태자소첨사(太子少詹事)에 이르렀다. 당시(唐詩)의 명가로서 송지문(宋之問)과 병치된다.《唐詩 卷202》 《舊唐書 卷190》
[주D-013]진백사(陳白沙) : 명대의 학자로 이름은 공보(公甫)이고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백사는 호이며 산 맹자(孟子)란 칭이 있었다. 서화(書畫)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ㆍ《백사시교(白沙詩敎)》가 있다.《明史 卷283, 明名臣言行錄 卷39, 明儒學案卷五, 盛明百家詩 卷1》
[주D-014]여건(呂虔)의 일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자는 자각(子恪), 벼슬은 서주 자사(徐州刺史)에 이르렀다. 당초에 여건이 차는 패도(佩刀)를 도공(刀工)이 감정하고서, 이 칼을 차고 있으면 반드시 삼공(三公)이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 뒤에 여건이 왕상(王祥)에게 주면서 ‘만일 적격자가 아니게 되면 반드시 해를 보게 되는 법인데, 당신은 삼공의 역량이 있으므로 주는 것이오.’ 했었는데, 과연 왕상이 삼공이 되었다는 고사.《三國志 卷18》 《蒙求 卷下》
[주D-015]왕통(王通) : 수대(隋代)의 학자로 자는 중엄(仲淹)이다. 문중자는 시호이다. 당(唐) 나라의 명신 방현령(方玄齡)ㆍ위징(魏徵) 등에게 왕좌(王佐)의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 저서로는 《문중자(文仲子)》 10권이 있다.《唐書 卷164, 舊唐書 卷190》
[주D-016]진역(陳櫟) : 원대(元代) 사람으로 자는 수옹(壽翁)이고 호는 동부노인(東阜老人)이다. 송(宋) 나라가 멸망한 뒤 은거(隱居)하면서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삼고 저술에 전념했다. 저서는 《상서집전찬소(尙書集傳纂疏)》ㆍ《역조통략(歷朝通略)》ㆍ《근유당수록(勤有堂隨錄)》이 있다.《元史 卷189》 《宋元學案 卷70》
[주D-017]수련(修鍊) : 몸을 건전하게 단련하여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하는 방법.
[주D-018]금단(金丹) : 선인(仙人)ㆍ도사(道士)가 조제한다는 불로 장수(不老長壽)의 묘약.
[주D-019]용두회(龍頭會) : 문과(文科)에 장원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잔치. 새로 장원한 사람이 여러 선배를 초청하여 베푼다.
[주D-020]등준시(登俊試) :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에게 특별히 보이던 과거.
[주D-021]책문(策問) : 문과 시험 과목의 한가지. 곧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것.
[주D-022]유가(遊街)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광대를 데리고 풍악을 잡히면서 거리를 돌며 시관과 선배ㆍ친척들을 찾아보는 것. 사흘 동안 행하는 것이 상례이다.
[주D-023]책훈(策勳) : 공로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하는 것.
[주D-024]식년(式年) : 정기적으로 과거 보이는 해. 곧 태세(太歲)에 자(子)ㆍ묘(卯)ㆍ오(午)ㆍ유(酉)가 드는 해.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
[주D-025]생원시(生員試) …… 전시(殿試) : 모두 과거의 한 가지. 생원시는 주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經書)를 시험 보이는 것. 회시(會試)는 문무과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시험. 전시는 문무과의 회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궐내(闕內)에 모여 왕의 친림(親臨)하에 서열을 매기는 시험.
[주D-026]삼종(三從) : 친정 아버지ㆍ남편ㆍ아들을 뜻하는 것이다. 옛날의 여성에게는 친정에서는 아버지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좇는 삼종의 도가 있는 데서 생긴 말이다.
[주D-027]금성 읍류(金城泣柳) : 진(晉) 나라 시대의 환온(桓溫:자는 원자(元子))이 강릉(江陵)에서 북벌(北伐)하러 나갈 적에 금성을 지나가다가, 젊어서 낭야(瑯琊) 지방관으로 있을 때 심어 놓았던 버드나무들이 모두 이미 열 뼘이나 된 것을 보고, 감개하여 ‘나무가 오히려 저렇게 컸는데, 사람이 어떻게 늙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며, 가지들을 거머잡고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이다.《淵鑑類函 楊柳》
[주D-028]사화(史禍) :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誣告)로 사초(史草)에 삽입되어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은 사건.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김일손(金馹孫)ㆍ정여창(鄭汝昌)ㆍ김굉필(金宏弼) 등은 죽거나 귀양갔다.
[주D-029]명부(命婦) : 문무관(文武官)의 아내로서 남편의 직에 따라 봉작(封爵) 받은 여자의 통칭.
[주D-030]3만 6천 갑자(甲子) : 1백 해를 뜻하는 말. 곧 1년은 3백 60일, 10년은 3천 6백 일, 1백년은 3만 6천 일이게 된다.
[주D-031]추곡(推轂) : 임금이 장수를 출정시킬 적에 친히 수레를 밀어주어 격려하는 것.
[주D-032]관사(觀射) : 임금이 친림하여 사예(射藝)를 관람하는 것. 성적이 우수한 자가 있으면 상을 내리는 것이 관례이다.
[주D-033]고치(叩齒) : 치근(齒根)을 튼튼히 하기 위해 위아래 이를 딱딱 부딪치는 것.
[주D-034]조맹견(趙孟堅) : 송(宋) 나라 종실(宗室)로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이재(彝齋)이다. 벼슬은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고 송 나라가 멸망하자 수주(秀州)에 은거하며 그림과 시문으로 소일했다. 원(元) 나라에 벼슬하던 종제 조맹부(趙孟頫)가 찾아오자 만나지 않다가, 부인의 권유로 뒷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만나고는 다음에 방석을 세탁했다 한다. 저서로 《매보(梅譜)》ㆍ《이재문편(彝齋文編)》이 있다.《南宋書 卷18》 《宋季忠義錄 卷14》
[주D-035]이치(李廌) : 송대(宋代) 사람으로 자는 방숙(方叔)이고 호는 덕우재(德隅齋)이다. 벼슬에 뜻이 없고 고금 치란을 논하기 좋아했다. 저서로 《사우담기(師友談記)》ㆍ《덕우재화품(德隅齋畫品)》등이 있다.《宋史 卷444》 《宋元學案 卷99》
[주D-036]《다경(茶經)》 : 당대(唐代)의 은사(隱士)이자 차의 제일인자인 육우(陸羽 : 자는 홍점(鴻漸))가 차의 근원 및 차에 관한 기구와 끓이고 마시는 방법 등을 10가지로 분류하여 저술한 책.
[주D-037]이광(李廣) …… 것 : 이광은 한대(漢代)의 장수로 문제(文帝) 때부터 흉노(匈奴) 정벌에 출정하여 무제 때에는 북평태수(北平太守)가 되자 흉노들이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두려워하여 여러 해를 북평 지방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했으며, 흉노들과 싸운 것이 대소 70여 차례가 되는데도 봉후(封侯)되지 못했다. 웅치는 한 고조가 기병(起兵)할 때 참여했고 뒤에 배반하고 갔다가 다시 귀순했다. 고조가 호감을 갖지 않았지만 전공(戰功)을 세웠기 때문에 십방후(什邡侯)로 봉작했었다.《史記 卷55ㆍ109》 《前漢書 卷1ㆍ卷54》
[주D-038]도연명(陶淵明)의 아들 : 중국 진대(晉代)의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이다. 그의 책자(責子)란 시에 아들들의 불초에 대한 지탄을 말한 것이 있다.
[주D-039]증선지(曾先之) : 송(宋) 나라 말엽과 원 나라 초기의 사가(史家)로 자는 종야(從野)이다.
[주D-040]관백(關白) : 일본의 제 59대 임금 우다(宇多) 때부터 강호 막부(江戶幕府) 시대까지 일본의 정치를 관장하던 막부의 우두머리 관직.
[주D-041]곽광(霍光) : 선제(宣帝)의 장인.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성(宣成).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유조(遺詔)를 받고 유주(幼主)를 보필하여 박륙후로 봉작(封爵)되었으며, 13년 동안 일체의 정사를 처결했다.《漢書 卷68》
[주D-042]애호 …… 한다 : 이 대문은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있는 말이다.
[주D-043]악한 …… 드러낸다 : 이 대문은 《중용(中庸)》 제6장에 있는 말이다.
[주D-044]장자(莊子) :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자는 자휴(子休)로 《남화경(南華經)》곧 《장자》의 저자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史記 卷63》
[주D-045]노식(盧植) : 후한 때 사람으로 자는 자간(子幹). 마융(馬融)을 사사(師事)하여 고금의 학문에 밝았다. 소제(少帝)의 폐출을 항쟁하다 동탁(董卓)에게 면관(免官)되어, 상곡(上谷)에서 은거했다.《後漢書 卷94》
[주D-046]임본유(林本裕) : 자는 익장(益長)이고 청 나라 초기의 명 나라 유민(遺民)으로서 절의(節義)를 지켰고, 성음학(聲音學)에 밝았다. 저서에 《성위(聲位)》ㆍ《요재전집(遼載前集)》이 있다.《四庫提要 卷74》
[주D-047]원상(元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종요(鍾繇)의 자이며 시호는 성(成)이고 당시의 명필이었다.《三國志 卷13》
[주D-048]군포(軍布) : 군보포(軍保布)의 약어. 곧 정병(正兵)을 보조하는 조정(助丁)에게서 병역을 면해 주는 대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
[주D-049]왕연(王延) : 전조(前趙 : 진(晉) 나라 때의 16국(國)의 하나) 사람으로 자는 연원(延元)인데 9세에 어머니를 잃은 뒤 기신 때마다 열흘이 넘도록 울었으며, 계모가 학대하였으나 더욱 조심스럽게 섬기므로, 감화되어 소생처럼 돌보게 되었다. 나이 60에 벼슬이 상서좌승(尙書左丞)이었는데, 변란에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 강혁(江革)은 후한 사람으로 자는 차옹(次翁)인데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다 난리를 만나자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며 항시 나무를 하여 봉양했다. 누차 도둑들과 마주쳤으나 그의 효성에 감동되어 어머니를 무사하게 모실 수가 있었다.《後漢書 江革傳》 《晉書 卷88》 《南史 卷60》
[주D-050]상성(相城) : 중국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동북쪽의 상성당(湘城塘) 근처.
[주D-051]굴원(屈原)의 회사(懷沙) : 전국 시대 초(楚) 나라 대부 굴원이 회왕(懷王)에게 신임을 받다가 동료들의 시기 때문에 소외되고, 아들 양왕(襄王) 때에는 또한 참소를 입어 장사(長沙)로 추방되자, 《어부사(漁父辭)》등 여러 편의 글을 지어 뜻을 표시한 다음, 돌을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史記 卷84》
[주D-052]오릉(於陵)의 토아(吐鵝) :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오릉에 은거하는 진중자(陳仲子)가 청백하여 형의 녹(祿)을 불의(不義)한 것이라 하여 먹지 않고 형의 집을 불의한 집이라 하여 살지 않으며, 형을 피하고 어머니를 떠나 오릉에 있다가, 어느 날 누가 거위를 형에게 선사하므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끼룩끼룩 하는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였었다. 그 뒤 어머니가 그 거위를 잡아 주며 먹게 했었는데, 그의 형이 밖에서 돌아와 ‘그것이 끼룩끼룩 하던 거위의 고기다.’ 하자, 나가서 토해버렸다는 고사이다.《孟子 滕文公下》
[주D-053]직불의(直不疑) : 한대(漢代) 사람. 시호는 신(信).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금(金)을 훔쳐 갔다고 의심을 두자 변상했었는데, 그 뒤 억울한 실정이 밝혀지자, 의심 두었던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게 되었다.《史記 卷103》 《漢書 卷46》
[주D-054]누사덕(婁師德) : 당대 사람. 자는 종인(宗仁) 시호는 정(貞). 30년 동안 장상(將相)으로 있으며 변방 일을 도맡아 보았다. 아우가 대주 자사(代州刺史)로 가게 되자 ‘극도한 은총과 영화는 남이 시기하는 법인데, 장차 어떻게 해야 별일 없게 되겠는가?’ 하매, 아우가 ‘이제부터 비록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제가 씻어버리기만 하겠습니다.’ 하자, 사덕이 ‘그러면 그의 뜻을 거스르게 되니 저절로 마르도록 해야만 한다.’ 하였었다.《唐書 卷108》 《舊唐書 卷13》
[주D-055]유응지(劉凝之) : 남조(南朝) 시대 사람. 자는 지안(志安), 소명(小名)은 장년(長年). 벼슬로 불러도 나가지 않고, 처자와 함께 강호(江湖)에서 노닐다가 형산(衡山) 남쪽에서 은거했다.《宋書 卷93》 《南史 卷75》
[주D-056]왕거비(王去非) : 금대(金代) 사람. 자는 광도(廣道). 집에서 지내며 교수(敎授)하여 수업료(授業料)가 많아지자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은애(恩愛)로 마을 사람들을 지도했었는데, 문인들이 순덕선생(醇德先生)이라고 사시(私諡)했었다.《金史 卷127》
[주D-057]양저(楊翥) : 자는 중거(仲擧)이며 호는 희안선생(晞顔先生)이고 벼슬은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독행(篤行)이 뛰어나 당시의 후덕한 진신(搢紳)들이 제일로 추앙했다.《明史 卷152》 《明詩綜 卷21》
[주D-058]세이도(洗耳圖) : 중국 고대의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양여하려 하자, 듣지 않고 하수(河水)에서 귀를 씻었는데, 소부(巢父)가 보고서 그 연유를 물은 다음 ‘내가 소[牛]에게 물을 먹이려는데 우리 소의 입을 더럽히게 되겠다.’ 하며 드디어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먹인 고사가 《고사전(高士傳)》에 있는데, 이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주D-059]노래자(老萊子) : 동주(東周)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겨, 나이 70에 어린애 짓을 하고 색동옷을 입었으며, 대청에 올라가다 거짓 미끄러지며 어린애 우는 시늉을 하여 양친을 즐겁게 했다 한다.《孝子傳》
[주D-060]도유우불(都兪吁咈) : ‘도유’는 찬성하는 뜻, ‘우불’은 반대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곧 임금이 군신들과 정사를 의논할 적에 쓰이던 말.
[주D-061]행단(杏壇) : 공자가 제자들을 교수(敎授)하던 자리. 이 자리가 은행나무 밑이던 것이 유래가 되어 각 문묘(文廟) 안에 은행나무를 심는다는 것이다.
[주D-062]장공예(張公藝) : 당 나라 사람. 고종(高宗)이 그의 집에 친림하여 9대가 한집에 동거하는 전말을 묻자, 인(忍)자 1백여 자를 써서 올리므로 고종이 착하게 여겨 비단을 내렸다.《唐書 卷190》 《舊唐書 卷188》
[주D-063]도주(陶朱)와 석숭(石崇) : 도주는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 범려(范蠡)로서 당대의 거부였다.《史記 貨殖傳》 석숭은 진대(晉代) 사람으로 자는 계륜(季倫), 소명(小名)은 제노(齊奴)인데 항해 무역(航海貿易)으로 당대의 거부가 되었다.《晉書 卷33》
[주D-064]주아부(周亞夫) :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으로 경제(景帝) 때에 오(吳)ㆍ초(楚) 등 7국의 반란을 평정하여 승상이 되었다. 그 뒤 임금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정위(廷尉)에게 내리자 5일을 먹지 않다가 드디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史記 卷57》 《漢書 卷40》
[주D-065]종리(從理) : 관상법(觀相法)에서 말하는 ‘법령(法令)’이라는 것. 곧 이 종리가 입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은 굶어 죽는다고 한다.
[주D-066]어구라(魚俱羅) : 수 나라 장수로 전공(戰功)이 있어 주국(柱國)이 되었다. 아우의 죄 때문에 양제의 의심을 받게 되자, 모면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隋書 卷64》 《北史 卷78》
[주D-067]복토(伏兔) : 수레축[車軸]의 양쪽 끝에 붙어 차체를 지탱하고 연결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막대.
[주D-068]왕마힐(王摩詰) : 당대의 시인이자 서화가로 이름은 유(維)이다. 안록산(安祿山)의 반란 때 절의를 지켰고, 뒤에 벼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남화(南畫)의 비조이다. 저서로 《왕우승집(王右丞集)》ㆍ《화학비결(畫學祕訣)》 등이 있다.《唐書 卷202》 《舊唐書 卷190》
[주D-069]미원장(米元章) : 송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이름은 불(芾)이고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이다. 벼슬은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다. 저서로 《보진영광집(寶晉英光集)》ㆍ《미불서화사(米芾書畫史)》ㆍ《해악명언(海嶽名言)》이 있다.《宋史 卷444》
[주D-070]징심당지(澄心堂紙) : 오대(五代) 남당(南唐) 후주(後主) 때에 만든 종이. 질이 좋은 귀한 종이이다.《蜀牋紙譜》
[주D-071]단계연(端溪硯) : 중국 광동성(廣東省) 고요현(高要縣) 단계에서 나는 돌로 만든 질이 좋은 벼루.
[주D-072]천호후(千戶侯) : 1천 호의 영지(領地)를 봉작(封爵) 받은 사람. 곧 부귀한 사람을 뜻한다.
[주D-073]마고(麻姑) : 중국 한 환제(漢桓帝) 때의 선녀(仙女)로 손톱이 매우 길었는데, 채경(蔡經)이 보고서 “등이 가려울 때 이 선녀를 시켜 긁게 하면 기분이 시원하겠다.”고 했다 한다.《神仙傳 卷7》
[주D-074]인면창(人面瘡) : 무릎 또는 손목ㆍ팔 등에 나는 부스럼. 그 모양이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다.
[주D-075]교인(鮫人) : 상반신은 인체(人體), 하반신은 어체(魚體)로 되어 있다는 가상의 동물. 고기처럼 물속에서 살며 끊임없이 베를 짜고, 울기를 잘하는데 우는 눈물이 진주가 된다고 한다.《述異記 卷下》
[주D-076]구가(九歌)와 구장(九章) : 모두 《초사(楚辭)》의 편명.
[주D-077]《강목(綱目)》 …… 것 : 주자(朱子)가 《강목》을 편찬할 적에 정통(正統)을 조조(曹操)에게 주지 않고 유비(劉備)에게 준 것을 말한다.
[주D-078]단 태위(段太尉) …… 친 것 : 단 태위는 당대 사람으로 이름은 수실(秀實)이고, 자는 성공(成公)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태위는 관직이며 사농경(司農卿)으로 있을 적에 주자(朱泚)가 모반하면서 인망이 높은 것을 생각하여 맞아오게 하므로 거짓 협력하는 체하고서 하루는 일을 논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홀(象笏)을 빼앗아 내리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크게 꾸짖으니 홀이 이마에 맞아 유혈이 얼굴을 뒤덮었는데 드디어 살해되었다.《新唐書 卷153》 《舊唐書 卷128》
[주D-079]종동(終童) …… 돌파한 일 : 한(漢) 날 때의 종군(終軍)을 말하는 것으로 남조(南朝) 시대의 송(宋) 나라 종각(宗慤 : 자는 원간(元幹))을 오서(誤書)한 것이다. 종각이 젊을 적에 그의 숙부가 뜻을 묻자 ‘긴 바람을 타고 만 리의 파도를 헤치며 가는 것이 소원이다.’ 했었다.《南史 宗慤傳》
[주D-080]조아(曹娥)의 비문(碑文) : 후한(後漢) 때의 효녀 조아가 아버지가 강에 빠져 죽었는데도 시체를 찾지 못하자 강가에서 밤낮없이 울다가 17일 만에 강에 투신하여 죽은 것을 기록한 비문의 탑본(搨本)을 말하는 것인데,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전해온다.
[주D-081]저수량(褚遂良) : 당대 사람으로 자는 등선(登善)인데 문사(文史)에 해박하고 해서(楷書)ㆍ예서(隷書)에 능했다.《新唐書 卷105》 《舊唐書 卷80》
[주D-082]항 패왕(項霸王) …… 이별 : 항 패왕은 항우(項羽)의 별칭이고 우 미인은 항우의 총희(寵姬)이다.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漢) 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우 미인이여 우 미인이여 어찌 하려는가?’라고 노래를 부르니, ‘ …… 천첩이 어찌 살게 되리까?’라고 화답하고 드디어 자결했다.《史記 卷7》 《前漢書 卷31》
[주D-083]이우린(李于鱗) : 명대의 시인으로 이름은 반룡(攀龍)이고 호는 창명(滄溟)이며 벼슬이 하남 안찰사(河南按察使)에 올랐다. 저서로 《고금시산(古今詩刪)》ㆍ《이창명집(李滄溟集)》. 《明史 卷287》 《明詩綜 卷46》 《明詩紀事 己籤一》
[주D-084]고악부(古樂府) : 한시(漢詩)의 한 가지 형식인데 풍속ㆍ인정 등을 읊은 것으로 민간에서 유행하던 가요이다,
[주D-085]백두(白頭) : 《백두음(白頭吟)》의 약어. 고악부의 한 편인데 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아내 탁문군(卓文君)의 작품으로 전해온다. 포조(鮑照)ㆍ이백(李白) 등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있다.《樂府詩集 白頭吟》
[주D-086]맥상(陌桑) : 맥상상(陌上桑)의 약어. 고악부의 한 편으로 조왕(趙王)이 자태가 아름다운 진녀(秦女)가 언덕 위에서 뽕 따는 것을 보고 차지하고 싶어 지었다는 것.《樂府詩集 陌上桑》
[주D-087]우맹(優孟) : 모방의 대명사.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명우(名優) 우맹이 초 장왕(楚莊王)을 섬기면서, 손숙오(孫叔敖)가 죽은 뒤에 그의 의관을 차리고 그의 행세를 하자, 초 나라 임금 및 좌우의 신하들이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고사.《史記 卷126ㆍ滑稽傳》
[주D-088]전동간(錢東澗) : 청대 사람으로 이름은 겸익(謙益)이고 자는 수지(受之)이며 호는 목재(牧齋), 또는 동간 노인(東澗老人)이다. 명 나라 때는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 청 나라 때는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郞)을 지냈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저서로 《초학(初學)》ㆍ《유학(有學)》 두 가지가 있었으나 발행이 금지되었다.《淸史稿 卷489》 《國朝名家詩鈔小傳》
[주D-089]두시(杜詩) : 후한(後漢) 시대 사람으로 자는 군공(君公)이고 세 차례를 시어사(侍御使)가 되고 남양 태수(南陽太守)를 역임했는데, 행정이 청렴하고 공평했으며 관내가 부유해지게 되므로 사람들이 두모(杜母)라고 불렀다.《後漢書 卷61》
[주D-090]한문(韓文) : 명대 사람으로 자는 관도(貫道)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벼슬을 지냈고, 호부 상서(戶部尙書)가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견지하여 권행(權倖)들의 진출을 저지했다.《明史 卷186》 《皇明名臣言行錄 卷22》
[주D-091]백기(白起)와 황헐(黃歇) : 백기는 전국 시대 진(秦) 나라 장수이고 황헐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장수이다. 여기서 백(白)은 황(黃)과, 일어난다[起]는 마친다[歇]와 대(對)가 된다는 말이다. 이하도 같다.
[주D-092]이이(李耳)와 율복(栗腹) : 이이는 초 나라 사람으로 일명 중이(重耳)이고 자는 백양(伯陽) 또는 담(耼)이다. 노담(老耼), 곧 노자(老子)를 말한다. 율복은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장수이다.
[주D-093]손권(孫權)과 예형(禰衡) : 손 권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임금으로 자는 중모(仲謀)이다. 예형은 후한 시대 사람으로 자는 정평(正平)인데 문필(文筆)에 능했다.
[주D-094]원미(元美) : 명대의 문장가로 이름은 세정(世貞)이고 호는 엄주(弇州) 또는 봉주(鳳洲)이다. 벼슬은 형부 상서에 올랐다. 저서로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稿)》ㆍ《왕씨서원(王氏書苑)》ㆍ《독서후(讀書後)》 등이 있다.《明史 卷287》 《明詩綜 卷46》 《明詩紀事》
[주D-095]종백경(鍾伯敬) : 명대 사람으로 이름은 성(惺)이고 호는 퇴곡(退谷)이며 벼슬은 복건제학첨사(福建提學僉事). 《고시귀(古詩歸)》ㆍ《당시귀(唐詩歸)》를 평선(評選)하여, 경릉체(竟陵體)라고 불렸다. 저서는 《제경도(諸經圖)》ㆍ《모시해(毛詩解)》ㆍ《명원시귀(名媛詩歸)》ㆍ《송문귀(宋文歸)》 등이 있다.《明史 卷288》 《明詩綜 卷60》
[주D-096]백향산(白香山) : 당대의 시문가로 이름은 거이(居易)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며 향산은 호이다. 시호는 문(文)이고 벼슬은 형부 상서이다. 저서에는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등이 있다.《唐書 卷119》 《舊唐書 卷166》
[주D-097]최응(崔膺) : 당대 사람으로 시문을 잘하고 그림에 능했다.《唐詩紀事 卷43》 《全唐詩 卷10》

 

동악집(東岳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東岳先生集(原集)
판심제  東岳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39年刊
권책  26권 12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19.5×14.7(㎝)
어미  上下雜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46-가1011
총간집수  
권수제  東岳先生續集(續集)
판심제  東岳先生續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70年代刊
권책  續集, 別錄, 附錄 합 2권 1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18.5×14.9(㎝)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563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78
 저자
성명  이안눌(李安訥)
생년  1571년(선조 4)
몰년  1637년(인조 15)
 子敏
 東岳, 東嶽, 東谷, 東广
본관  德水
시호  文惠
특기사항  古玉 鄭碏, 石洲 權韠, 月汀 尹根壽, 五峯 李好閔 등과 교유
 가계도
 李宜茂
 연헌잡고(蓮軒雜稿)
 李菤
 

 李芑
 
 李元祐
 
 李泌
 
 綾城具氏
 燕山君의 外孫
 李安訥  
 
 礪山宋氏
 掌令 宋承禧의 女
 李柙  
 
 閔聖徽의 女
 
 崔後定의 女
 
 側室
 
 李梄
 
 李楑
 
 李朾
 
 李荇
 용재집(容齋集)
 李元禎
 
 高靈朴氏
 朴誾의 女
 李準
 
 李泂
 
 慶州李氏
 李의 女
 李安謙
 
 李安訒
 
 李梣
 
 李安訥  
 
 女
 
 韓瓘
 
 李元祥
 
 李元福
 
 李元祿
 
 李苓
 
 李芄(李薇)
 

기사전거 : 行狀(李植 撰), 神道碑銘(金尙憲 撰), 李宜茂墓碑銘(洪彥弼 撰, 默齋集 卷5), 李荇行狀(周世鵬 撰, 武陵雜稿 卷8), 李泂墓碑銘(蔡裕後 撰, 湖洲集 卷6), 李柙墓碣銘(南龍翼 撰, 壺谷集 卷18)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1 6월, 서울에서 태어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10 朋友들과 唱酬한 詩로 詩卷을 10여 권 만들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12 再從父 李泌의 後嗣가 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16 騷賦로 泮試에서 수석을 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18 進士 初試에 수석을 하다. 곧 漢城試에도 합격하였으나 時輩의 시기를 받아 停擧당하다. 이에 擧業을 그만두고 古文詞에 진력하다.
~ ~ ~ ~ ~ ~ ~ 養父 監察公 李泌의 喪을 당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23 生父 進士公 李泂의 喪을 당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29 庭試에 乙科로 합격하다. ○ 8월, 承文院 權知副正字로서 咸鏡北道 兵馬評事가 되다. ○ 10월, 鏡城에 도착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30 3월에 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여 허락받아 5월에 서울로 돌아오다. ○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거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31 1월, 예조 정랑이 되다. ○ 4월, 進賀使 鄭光積을 따라 書狀官으로 명 나라에 가다. ○ 겨울, 서울로 돌아와 復命하다. ○ 성균관 직강이 되다. 지제교가 되다. ○ 곧이어 遠接使 從事官이 되어 義州에 가서, 명 나라 황태자의 책봉 조서를 가지고 나온 顧天埈과 崔廷健을 맞이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32 4월, 還朝하다. ○ 예조 정랑이 되다. ○ 8월, 충청도 京試官으로 淸風郡에 가서 試士하다. ○ 9월, 공조 정랑으로 災傷按覈御史가 되어 평안도 龍岡, 泰川 등의 고을에 가다. ○ 11월, 還朝하다. ○ 12월, 다시 예조 정랑이 되었다가 端川 郡守가 되어서 나가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34 8월, 모친의 나이가 70을 넘었다는 이유로 단천 군수를 사직하다. ○ 9월, 서울로 돌아오다. ○ 윤9월, 모친 具氏夫人 喪을 당하다. 楊州에서 3년 여묘살이를 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37 7월, 예조 정랑이 되다. ○ 8월, 洪州 牧使가 되다. 12월, 東萊 府使가 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39 5월, 동래 부사를 사직하다. ○ 7월, 서울로 돌아오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40 2월, 潭陽 府使가 되다. ○ 12월, 치적을 인정받아 관찰사 尹暉의 건의에 의해 옷감 한 벌을 하사받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41 2월, 병을 이유로 서울로 돌아와 파직되다. ○ 仲氏가 石城 縣監에서 파직되었으므로 生母 봉양을 위해 乞郡하여 9월에 錦山 郡守가 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43 10월, 慶州 府尹이 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44 8월, 監試初試 參試官에 차임되어 善山府 試所에 가다. ○ 9월, 善山 試所에서 作亂이 있었다는 이유로 慶州 府尹에서 파직되어 돌아오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45 2월, 성절사가 되다. 호조 참의가 되다.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다. ○ 4월, 동부승지가 되다. ○ 5월, 仁政殿 文臣庭試에 入格하다. ○ 7월, 우부승지가 되다. ○ 11월, 분승지가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46 1월, 公洪 監司에 제수되었다가 사간원의 논핵으로 체직되다. ○ 5월, 지제교가 되다. ○ 6월, 동부승지가 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47 2월, 예조 참의가 되다. ○ 6월, 비변사의 천거로 江華 府使가 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48 9월, 강화 부사로서 사간원의 논핵을 받아 추고를 당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49 12월, 秩滿으로 서울로 돌아오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50 3월, 生母 李氏夫人 喪을 당하다. 이후 3년간 沔川에서 여묘살이를 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53 2월, 승문원 제조가 되다. ○ 監軍 接伴使가 되어 關西에 나가 定州에서 오래 머물다가 監軍이 나오지 않으매 5월에 돌아오다. ○ 그 사이 仁祖反正이 일어나다. ○ 3월, 예조 참판이 되다. ○ 형조 참판을 거쳐 호조 참판이 되고, 승문원과 사역원의 제조를 겸하다. 濟州 牧使를 자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査文賚進及査官迎慰使 兼 毛都督問安使가 되어 關西 鐵山, 皮島에 가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54 2월, 서울로 돌아오다. ○ 3월, 李适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특명으로 함경도 鏡城府로 流配되다. ○ 12월, 幼學 申準 등이 상소하여 억울함을 아뢰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55 3월, 洪川으로 量移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57 1월, 사면되어 沔川으로 放歸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58 6월, 江華 留守로 서용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60 4월, 강화 백성들이 유임을 청하다. ○ 12월, 秩滿으로 체직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61 1월, 서울로 돌아오다. ○ 형조 참판이 되다. ○ 4월, 비국의 천거로 함경도 순찰사가 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62 3월, 병으로 사직하여 체차되다. ○ 4월, 奏請副使에 차임되다. ○ 6월, 表文을 받들고 출발하여 海路로 북경에 가서 章陵追典을 주청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63 5월, 예조 판서가 되다. ○ 6월, 예문관 제학을 겸하다. ○ 얼마 뒤 사직하고 沔川으로 돌아오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64 1월, 公淸監司 兼 都巡察使가 되다.
인조 13 1635 을해 崇禎 8 65 4월, 파직되어 돌아오다.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66 6월, 淸白吏로 뽑혀 崇政으로 加資되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67 3월 29일, 卒하다. ○ 윤4월, 海美縣 母山里에 장사 지내다. ○ 좌찬성에 증직되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 姪 李梣과 再從姪 李植 등이 全州에서 文集 24卷을 간행하다. (李植의 跋)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 10월, ‘文惠’라는 시호를 받다.

기사전거 : 朝鮮王朝實錄, 行狀(李植 撰), 神道碑銘(金尙憲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저자가 졸한 1637년경부터 自編 手稿를 바탕으로 姪 李梣과 再從姪 李植이 수집, 편차하여 1639년(인조 17)에 全州에서 간행하였다.
申翊聖이 1639년 12월에 쓴 원집 서문에는, 全集이 간행되었는데 澤堂 李植이 公의 詩를 撰定했다고 하였다. 또 1640년(인조 18) 1월에 李植이 쓴 원집 발문에는, 全州倅로 있던 李梣이 李植과 의논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관찰사 元斗杓, 具鳳瑞, 부윤 吳端, 韓興一 등의 도움을 받아 목판으로 24권을 간행하고, 나중에 登第하기 이전의 작품을 수습하여 만든 別集 2권은 미처 板刻하지 못하고 李梣이 喪을 당하여 면직되었다고 하였다. 元斗杓, 具鳳瑞는 그 당시에 전후로 관찰사를 지냈고 吳端, 韓興一은 全州 府尹이었으니, 발문에 李梣을 ‘全州倅’라고 한 것은 全州 判官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李梣의 부친인 李安訒이 1639년(인조 17) 11월에 卒하였으므로(竹南堂稿 卷11, 李安訒墓碣名) 李梣이 면직된 시기는 이때였던 것이며, 따라서 原集 24권은 1639년 李梣이 면직되기 전에 간행된 것이다.
한편 원집 권21 湖營錄 細註에는 “을해년 4월에 파직되어 돌아온 뒤로는 다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詩錄도 여기에서 끝난다.”라고 하였고, 권22의 拾遺錄 細註에는, “선생이 登第한 뒤에는 항상 외직에 보임되었고 가는 곳마다 하나씩의 詩錄을 만들었는데 모두 손수 編集하였다. 사이사이 散職에 있을 때의 작품들은 수습되지 아니하였고, 등제하기 이전의 작품은 단지 賦稿 약간 편만 있을 뿐이고 詩는 전혀 없다. 이제 우선 현존하는 草本을 編次하여 이 拾遺錄을 만들어 詩錄들의 끝에 붙인다. 그리고 뒤에 수습되는 詩文은 續集을 만들어서 간행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白沙集」 권2에는 李恒福이 쓴 〈東嶽道人 朝天錄跋〉이 실려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저자의 詩錄이 그때그때 自編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저자의 詩文은 권1~21까지는 自編稿로서 저자가 編集한 것이며, 권22~23의 拾遺錄과 권24의 集字體詩, 권25~26의 賦鈔와 雜著鈔는 澤堂 李植이 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중 권1~24까지는 1639년(인조 17) 11월 李梣이 부친상으로 면직되기 바로 전에 각 詩錄마다 권수에 細註로 그 詩錄에 대한 간략한 해설이 덧붙여져 간행되었고, 권25와 26은 1640년 1월 이후에 追刻되어 원집에 첨부된 것이다. 李梣은 삼년상을 마치고 1643년 3월에 全州府의 屬縣인 金溝의 縣令으로 부임하였으니(澤堂集 續集 卷6) 이때에 追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고 申翊聖의 서문과 李植의 발문은 추각되기 이전 刊本인 1639년 간행본에 첨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초간본》
이 초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011), 규장각(奎5636), 장서각(4-5932),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8-이안눌-동)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登第 이전의 작품으로서 원집 간행 이후에 수습된 詩를 모아 續集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別錄, 附錄 등이 첨부되어 있다. 원집 拾遺錄에, 차후 수습되는 시문은 續集으로 간행하겠다고 한 말이 들어 있으니, 원집 간행시에 이미 속집 간행을 계획하였으며, 이것은 원집 간행시에 미진하게 여겼던 부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續集은 1770년대 肅宗 초년에 저자의 아들 李柙 등에 의해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南龍翼의 문집인 「壺谷集」 卷7에는 〈允迪寄先稿東岳續集仍示所作依韻答謝〉라는 詩가 실려 있는데, 李允迪(저자의 아들 李柙)이 南龍翼에게 先稿인 「東岳續集」과 자신의 詩를 부쳐온 것에 대해 南龍翼이 次韻答詩를 지어서 사례한 것으로서, 이 시에는 지난번에 간행한 원집에 훌륭한 시문들이 모두 실려 있지만 그래도 주옥같은 글들이 빠진 것이 있어 속집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壺谷集」 卷7의 詩는 대체로 시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위의 詩는 1675년과 1680년에 지어진 詩 사이에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건데 속집은 1670년대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속집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5636),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목판 초간본으로 원집은 1639년에 간행되고 그 이후에 추각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고 속집은 1670년대경에 간행된 규장각장본이다. 저본 가운데 원집 권24의 第8板은 상태가 불량하여 동일본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으로 대체하였다.

기사전거 : 序(申翊聖 撰), 跋(李植 撰), 諡狀(李景奭 撰), 仁祖實錄, 澤堂集, 湖洲集, 壺谷集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26권과 續集으로 이루어져 있다.
原集은 外職에 있을 때의 작품을 시기별로 정리 편차한 自編 詩錄 21권, 기타 체직되어 散職에 있는 동안의 작품들과 서울에 있을 때의 작품들을 모은 拾遺錄 2권, 集字體 1권, 賦鈔와 雜著鈔 각 1권으로 되어 있다. 續集은 저자가 벼슬길에 나오기 이전의 작품들과 저자에 대한 묘도문자들이다. 詩錄은 詩體別로 편차되지 않고 연도별, 월별, 날짜별로 일기체 형식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각 권의 詩錄마다 권수에 편찬자가 달아놓은 설명이 들어 있고 시편 곳곳에 저자가 달아놓은 細註가 많으므로 저자의 일생 동안의 행력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권수에는 1639년에 申翊聖이 지은 序文이 실려 있다.
권1 北塞錄은 1599년(선조 32) 8월에 29세의 나이로 함경북도 兵馬評事에 제수되어 1600년 5월까지 鏡城의 任所에 있을 때 지은 작품이며, 권2 朝天錄은 1601년(선조 34) 進賀使 鄭光積의 書狀官으로 燕京을 다녀올 때, 권3 東槎錄은 1601년 11월 遠接使 종사관으로서 明使 顧天埈 일행을 맞이하러 갔을 때, 권4 湖西錄은 1602년 8월 충청좌도 京試官으로 淸風郡에 가 있을 때, 권5 關西錄은 災傷按覈御史로 1602년 9월부터 11월까지 평안도를 다녀올 때, 권6 端州錄은 1602년 12월에 端川 郡守에 제수되어 이듬해 1월에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권7 洪陽錄은 1607년(선조 40) 洪州 牧使로 재직하던 때, 권8 萊山錄은 1607년 12월부터 1609년 2월까지 東萊 府使로 재직할 때, 권9 潭州錄은 1610년(광해군 2) 2월에 潭陽 府使에 제수되어 1611년 3월 파직되기까지, 권10 錦溪錄은 1611년 9월 錦山 郡守에 제수되어 1613년 慶州 府尹으로 移授될 때까지의 작품이다. 권11 月城錄은 1613년 慶州 府尹에 제수되어 1614년 10월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권12 江都錄은 1617년(광해군 9) 강화 부사로 재직하던 때, 권13 關西後錄은 1623년(광해군 15) 明 나라 監軍의 접반사로 차임되어 關西에 나갔을 때, 권14 關西續錄은 1623년(인조 1) 12월 査官迎慰使 兼 毛都督問安使가 되어 關西에 다녀올 때, 권15 北竄錄은 1624년 3월 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10여 일 옥살이를 하고 함경도 鏡城府로 定配되었을 때, 권16~17 東遷錄은 1625년 3월에 洪川으로 移配된 뒤 1627년 사면될 때까지, 권18 江都後錄은 1628년 6월부터 1630년까지 강화 유수로 있을 때, 권19 咸營錄은 1631년 함경도 감사로 있을 때, 권20 朝天後錄은 1632년 6월 章陵追典을 주청하기 위해 파견되는 奏請使의 副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올 때, 권21 湖營錄은 1634년(인조 12) 1월에 公淸 監司에 제수되어 이듬해 4월 파직되어 돌아올 때까지 지은 작품이다.
저자는 이른바 東岳詩壇을 결성하여 權韠, 尹根壽, 李好閔 등과 교유하는 등 詩作에 특히 많은 관심을 지녔던만큼 4천여 수가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본집에도 이들과의 차운시가 다수 실려 있은데, 특히 五峯 李好閔과 나눈 시가 많다. 申翊聖이나 李植은 저자의 시에 대해, 七言律에 특히 능하고 그때그때의 感興과 諷刺를 자유자재로 표현하였다고 평하였다. 특히 萊山錄의 〈四月十五日〉 詩는 왜란 이후의 참상을 잘 묘사한 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北竄錄과 東遷錄은 대부분이 우국충정과 귀양살이의 슬픔을 표현한 시이고, 朝天錄과 朝天後錄은 燕京 使行의 과정이 소상하게 표현된 작품인데, 朝天後錄에는 提督 孔聞謤와의 酬唱錄이 附記되어 있다.
권22~23은 拾遺錄이다. 外職에서 체직되어 서울에 있을 때 지은 작품과 기타 自編稿에서 누락된 작품을 모은 것인데 이도 또한 연대별로 편차되어 있다.
권24는 集字體詩인데 歸去來辭, 蘭亭記, 前赤壁賦, 後赤壁賦에 있는 글자를 써서 지은 시들이다. 귀거래사의 글자로 지은 작품은 1604년(선조 37) 8월 端川 郡守로 있을 때에 지은 것이고, 난정기의 글자로 지은 작품은 1613년(광해군 5) 3월 錦山 郡守로 있을 때 지은 것이고, 전적벽부의 글자로 지은 작품은 1622년(광해군 14) 7월 沔川에서 여묘살이할 때에 지은 것이고, 후적벽부의 글자로 지은 작품은 1622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권25~26은 각각 賦鈔와 雜著鈔이다. 賦鈔는 주로 登科 이전에 지은 賦 작품을 정리한 것이며, 雜著鈔에는 21편의 祭文과 敎書, 賀箋, 銘, 跋, 帖, 謠 등이 실려 있다. 제문은 高祖 이하 조상들, 高敬命, 趙憲, 倭亂 때의 烈女, 孝子, 節婦 등에 대한 것이다.
원집 맨 뒤에는 1640년에 쓴 李植의 跋文이 있다.
續集은 詩, 別錄, 附錄으로 이루어져 있다. 詩는 원집에서 누락된 작품들로서 登科 이전에 지은 것들이다. 그중 〈龍山月夜聞歌姬唱…〉은 鄭澈의 〈思美人曲〉 노래를 듣고 지은 것이다. 別錄은 저자에 대한 당대 名士들의 挽詞와 祭文이며, 附錄에는 李植이 지은 行狀, 金尙憲이 지은 神道碑銘, 李景奭이 지은 諡狀, 宋時烈이 지은 墓誌銘이 차례로 편차되어 있다.

필자 : 朴憲淳

 

 

 

 

 

 

 

 

 
최후원(崔後遠)

[진사시] 효종(孝宗) 1년(165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3위(8/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D5CD6C4C6D0B1627X0
장경(長卿)
생년 정묘(丁卯) 1627년(인조 5)
합격연령 24세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형]
성명 : 최후정(崔後定)
성명 : 최후량(崔後亮)

[서제]
성명 : 최후○(崔後○)

[출전]

《경인 증광 사마방목(庚寅增廣司馬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一簑古351.306-B224gi])

 

이합(李柙)

[문과] 효종(孝宗) 8년(1657) 정유(丁酉)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2위(4/5)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774D569FFFFB1624X0
윤적(允迪)
대산(臺山)
생년 갑자(甲子) 1624년(인조 2)
합격연령 34세
본관 덕수(德水)
거주지 미상(未詳)

[이력사항]

선발인원 5
전력 진사(進士)
관직 대사간(大司諫)
타과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가족사항]

 
[부]
[생부]
[조부]
성명 : 이필(李泌)
[증조부]
성명 : 이원우(李元祐)
[외조부]
성명 : 송승희(宋承禧)
[처부]
성명 : 민성휘(閔聖徽)
[처부2]
성명 : 최후정(崔後定)
[자]
[손]
성명 : 이집(李集)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숙종(肅宗) 39년
과거시험연도 : 1713 계사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병과13(丙科1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최수범(崔守範)
자 : 군서(君敍)
본관(本貫) :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710(경인) 생원시
전력(前歷) :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 사서(司書)

[가족사항]

부(父) : 최창연(崔昌演)
조부(祖父) : 최석령(崔錫齡)
증조부(曾祖父) : 최후정(崔後定)
외조부(外祖父) : 원몽익(元夢翼)
처부(妻父) : 이인엽(李寅燁)

 

 1646년(인조 24) 3월에 시행된 生員·進士試의 합격자 명단이다. 표제는 <丙戌蓮牓>으로 되어 있다. 試官은 一所(漢城府)에 南以雄‚ 呂爾徵‚ 金益熙‚ 姜栢年‚ 南翧‚ 盧后卨 등 6인이다. 二所(東學)에 許啓‚ 韓興一‚ 李時楳‚ 閔應恊‚ 申恦‚ 宋斗文 등 6인이다. 生員試의 합격자는 1등에 尹策‚ 柳延寅‚ 宋光井‚ 尹弼殷‚ 李秞 등 5인이고‚ 2등은 徐漢柱‚ 吳峻標‚ 權大載 등 25인‚ 3등에는 柳攀‚ 柳廷瑗‚ 韓緗 등 70인이다. 進士試의 합격자는 1등에 金壽恒‚ 李柙‚ 兪燂‚ 李光鎭‚ 趙沔 등 5인‚ 2등에는 李球‚ 安後稷‚ 李熺 등 25인‚ 3등에는 朴?‚ 李伯麟‚ 羅星斗 등 70인이다. 방목 기재 사항은‚ 성명 아래에 本貫‚ 거주지‚ 그리고 父의 관직과 성명 및 형제에 관한 기록들이다. (김 호)

 

 
 
 

 

 가계도
 李宜茂
 연헌잡고(蓮軒雜稿)
 李菤
 

 李芑
 
 李元祐
 
 李泌
 
 綾城具氏
 燕山君의 外孫
 李安訥  
 
 礪山宋氏
 掌令 宋承禧의 女
 李柙  
 
 閔聖徽의 女
 
 崔後定의 女
 
 側室
 
 李梄
 
 李楑
 
 李朾
 
 李荇
 용재집(容齋集)
 李元禎
 
 高靈朴氏
 朴誾의 女
 李準
 
 李泂
 
 慶州李氏
 李의 女
 李安謙
 
 李安訒
 
 李梣
 
 李安訥  
 
 女
 
 韓瓘
 
 李元祥
 
 李元福
 
 李元祿
 
 李苓
 
 李芄(李薇)
 

기사전거 : 行狀(李植 撰), 神道碑銘(金尙憲 撰), 李宜茂墓碑銘(洪彥弼 撰, 默齋集 卷5), 李荇行狀(周世鵬 撰, 武陵雜稿 卷8), 李泂墓碑銘(蔡裕後 撰, 湖洲集 卷6), 李柙墓碣銘(南龍翼 撰, 壺谷集 卷18) 등에 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