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朝鮮國)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불암사 사적비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工曺參判兼同知義藥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이덕수(李德壽)는 짓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조명교(曺命敎)는 전액(篆額)하고 글씨를 쓰다.
왕성(王城) 동쪽에 높은 산이 있으니 천보산(天寶山)이다. 산 북쪽에 큰 가람이 있으니 그 액자에 불암(佛巖)이라 적혀 있다. 절은 창건 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신라 승 지증(智澄)이 처음으로 창건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다. 고려 중기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고 그 법제(法制)를 더하더니, 그 뒤 무학대사가 다시 보수하여 새롭게 만들었다. 절은 창건된 지 천백여 년이나 지나갔는데도 무너져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국초(國初)에 산 남쪽 한 가닥에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절을 지었다. 처음에 세조(世祖)와 성종(成宗), 양대에 사방의 사찰에서 비구들이 날마다 많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일현(一玄)이란 스님이 있었다. 그는 절의 중수(重修)를 가슴 속 깊이 맹세하고 재물을 모아 보수할 것을 계획하여 울긋불긋 단청하니 절은 나는 새와 같이 선명하고 빛났다. 새로이 불상 하나를 만드니 장엄했고 범패(梵唄)와 기명(器皿)들도 찬란하였다. 승려가 거주할 저택과 객사까지 완비하였으며 주위에 채마밭까지 장만하니 절에서 먹는 음식물을 충당하는데 충분하였고 필요한 것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라의 국비를 소모시키지도 않았고 백성들을 동원하는 수고도 끼치지 않았으나 사람마다 모두들 시주하기를 즐거워하여 절을 짓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모두가 열성조의 돌봐주신 은혜이며 일현의 무리가 분주하게 노력하여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랑하며 사는 승려들은 본래 저축해 놓은 양식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 저택은 항상 가난을 근심하였다. 절이 비록 수고하였어도 불공이 자주 끊어지게 되니, 승려들은 항상 이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강희(康熙) 계사년에 이 절에 스님 각수(覺粹)가 선남선녀들의 시주를 모아서 사찰을 위한 전토(田土)를 사려고 계획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우리 성상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무신년에 이르러 거사(居士)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동맹하여 원력(願力)을 세워 시주를 거두어 사찰 부근의 토지를 사 모았다. 조석으로 불공을 올리도록 하고 해마다 거기서 생산되는 양식을 가지고 사찰에서 먹고 쓰는 비용을 충당하였고 다시 시주를 하러 다니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사찰이 더욱 보완되었고 길이 보전되어 폐단이 없게 되었다. 내가 요즈음의 산승(山僧)들을 보면,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땀을 흘려가며 재물을 모아 사재(私財)로 삼는 사람이 많으니, 응사(應師)의 지난날 업적을 살펴본다면 어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를 수가 있는가. 응사는 공을 성취하고서도 오히려 후세에 그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 절에 사는 사람들은 응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지 않고 비석에 새겨 후세에 남길 것만을 꾀하였다. 그래서 내게 글을 청하였고 여기에 기록하고자 하니, 이 일이 너무 유감스럽도다. 불교는 우리 유교와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 유교도 세상을 교화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아 인륜이 무너졌다. 세상에서 말하는 유교의 옷을 입고 유교의 관을 쓴 자들이 모두 충성과 효도를 극진히 하지 못하고 이익과 욕심에만 빠져있어 도리어 석씨(釋氏)에게 비웃음을 사는 자들이 적지 않으니, 지금 원응(圓應)의 무리가 이런 가운데 지은 것을 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홀로 법문(法門)을 보호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금경(金經)에서 나왔으니, 이런 마음이라면 내가 어떻게 속세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왕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그 뜻이 가상하다. 저들을 어떻게 저 화복의 설로 세상을 현혹하고 자비의 이름을 빌어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하여 재물을 축내며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2년 10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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