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동영상/09.12. 불암산 동영상(행복)

조선국(朝鮮國)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불암사 사적비 내용 (자료)

아베베1 2013. 5. 28. 15:08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인수봉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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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73~1744), , (1687~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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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朝鮮國)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불암사 사적비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工曺參判兼同知義藥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이덕수(李德壽)는 짓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조명교(曺命敎)는 전액(篆額)하고 글씨를 쓰다.

왕성(王城) 동쪽에 높은 산이 있으니 천보산(天寶山)이다. 산 북쪽에 큰 가람이 있으니 그 액자에 불암(佛巖)이라 적혀 있다. 절은 창건 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신라 승 지증(智澄)이 처음으로 창건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다. 고려 중기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고 그 법제(法制)를 더하더니, 그 뒤 무학대사가 다시 보수하여 새롭게 만들었다. 절은 창건된 지 천백여 년이나 지나갔는데도 무너져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국초(國初)에 산 남쪽 한 가닥에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절을 지었다.
처음에 세조(世祖)와 성종(成宗), 양대에 사방의 사찰에서 비구들이 날마다 많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일현(一玄)이란 스님이 있었다. 그는 절의 중수(重修)를 가슴 속 깊이 맹세하고 재물을 모아 보수할 것을 계획하여 울긋불긋 단청하니 절은 나는 새와 같이 선명하고 빛났다. 새로이 불상 하나를 만드니 장엄했고 범패(梵唄)와 기명(器皿)들도 찬란하였다. 승려가 거주할 저택과 객사까지 완비하였으며 주위에 채마밭까지 장만하니 절에서 먹는 음식물을 충당하는데 충분하였고 필요한 것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라의 국비를 소모시키지도 않았고 백성들을 동원하는 수고도 끼치지 않았으나 사람마다 모두들 시주하기를 즐거워하여 절을 짓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모두가 열성조의 돌봐주신 은혜이며 일현의 무리가 분주하게 노력하여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랑하며 사는 승려들은 본래 저축해 놓은 양식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 저택은 항상 가난을 근심하였다. 절이 비록 수고하였어도 불공이 자주 끊어지게 되니, 승려들은 항상 이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강희(康熙) 계사년에 이 절에 스님 각수(覺粹)가 선남선녀들의 시주를 모아서 사찰을 위한 전토(田土)를 사려고 계획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우리 성상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무신년에 이르러 거사(居士)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동맹하여 원력(願力)을 세워 시주를 거두어 사찰 부근의 토지를 사 모았다. 조석으로 불공을 올리도록 하고 해마다 거기서 생산되는 양식을 가지고 사찰에서 먹고 쓰는 비용을 충당하였고 다시 시주를 하러 다니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사찰이 더욱 보완되었고 길이 보전되어 폐단이 없게 되었다. 내가 요즈음의 산승(山僧)들을 보면,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땀을 흘려가며 재물을 모아 사재(私財)로 삼는 사람이 많으니, 응사(應師)의 지난날 업적을 살펴본다면 어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를 수가 있는가. 응사는 공을 성취하고서도 오히려 후세에 그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 절에 사는 사람들은 응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지 않고 비석에 새겨 후세에 남길 것만을 꾀하였다. 그래서 내게 글을 청하였고 여기에 기록하고자 하니, 이 일이 너무 유감스럽도다.
불교는 우리 유교와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 유교도 세상을 교화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아 인륜이 무너졌다. 세상에서 말하는 유교의 옷을 입고 유교의 관을 쓴 자들이 모두 충성과 효도를 극진히 하지 못하고 이익과 욕심에만 빠져있어 도리어 석씨(釋氏)에게 비웃음을 사는 자들이 적지 않으니, 지금 원응(圓應)의 무리가 이런 가운데 지은 것을 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홀로 법문(法門)을 보호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금경(金經)에서 나왔으니, 이런 마음이라면 내가 어떻게 속세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왕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그 뜻이 가상하다. 저들을 어떻게 저 화복의 설로 세상을 현혹하고 자비의 이름을 빌어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하여 재물을 축내며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2년 10월 일 세움.

기미생 김씨(金氏), 한진건(韓震建), 한득량(韓得良), 한익량(韓益良), 김보익(金寶益), 김지선(金枝善), 김자근섬(金者近暹), 박진번(朴震蕃), 정묘생 박씨(朴氏), 이씨 아강(李氏阿江), 상궁 이씨 숙(尙宮李氏淑), 양오남(梁五南), 홍건(洪健), 양이찬(梁二▨), 최익순(崔益順), 한태발(韓泰發), 김지영(金枝榮), 송덕기(宋德起), 이인성(李仁晟), 이석번(李碩蕃), 박찬익(朴燦益), 조여▨(趙與▨), 김여▨(金麗▨), 이상만(李尙萬), 강진(姜進), 최차의(崔次義), 송▨주(宋▨柱), 문두명(文斗明), 신의철(申義哲), 김수석(金壽碩), 안만지(安萬枝), 김정택(金鼎澤), 이완창(李完昌), 신▨▨(申▨▨), ▨동화(▨東化), 한무선(韓武先), 한태흥(韓太興), 최일천(崔一千), 이씨 큰아기(李氏大阿只), 이씨 소애(李氏昭愛), 안씨 ▨정(安氏▨貞), 유씨 계분(劉氏戒分), 박▨▨(朴▨▨), 김세욱(金世郁), 정흥▨(鄭興▨), 김상직(金尙直), 오유례(吳有禮), 석▨주(石▨主), 김원성(金元成), 김유동(金有同), 김▨광(金▨光), 이창균(李昌均), 박옥▨(朴玉▨), 송씨 ▨▨(宋氏▨▨), 이중익(李重益), 현씨 영심(玄氏永心), 이씨 작은아기(李氏小阿只), 이순흥(李順興), 고씨 아기(高氏阿只), 이계강(李繼江), 이세징(李世澄), 김성발(金成發), 이인수(李仁壽), 이무치(李武致), 김씨 봉화(金氏奉化), 조▨기(趙▨起), 이수태(李水泰), 송▨일(宋▨一), 이씨 아기(李氏阿只), 김덕하(金德夏), 갑신생 최씨 막개(崔氏莫介), 거사(居士) 운징(雲澄), 차재연(車載連), 조흥부(趙興夫), 석몽치(石夢致), 김매명(金昧命), 옥서정(玉瑞汀), 김씨 큰아기(金氏大阿只), 나만영(羅萬英), 김차노미(金次老未), 왕세▨(王世▨), 윤덕천(尹德天), 이유병(李友柄), 장우한(張遇漢), 조상빈(趙尙彬), 최건이(崔建伊), 한수강(韓壽江), 최성진(崔聖眞). - 이하의 전면에 기록할 인명 54인 및 후면에 기록할 전답질(田畓秩)과 인명은 생략하였다. -

 

佛岩寺事蹟碑
朝鮮國楊州天寶山佛巖寺事蹟碑嘉善大夫工曺叅判兼同知義藥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李德壽撰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 經筵參賛官春秋館修撰官 曺命敎 并篆書
王城之東有山嶐然曰天寶山山之北有伽藍焉扁其額曰佛巖寺之剏靡惟久矣羅僧智澄始開基而住錫焉麗初道詵國師重建而增其制其後無學大師又補葺而新之閱百千餘年而能不爲荊楚之埋沒焉至 國初山之南一支爲 國濩則師始爲世祖 成宗兩朝願刹十方比丘日益聚而層僧一玄者誓心興復鳩材營修攘題拀藻繪丹碧翬飛鳥革煥焉一新像設纓盖之飾梵具器皿之屬粲然而完僧廡客寮儼翼周圍以至庫厨之所自用所宜者無不備具費不國削役不民藉而人皆樂施功成不日此皆由 列聖朝顧助之恩而一玄軰奔走之力以成者也然流丐之僧素無儲粮佛宇之借每患艱匱寺雖巋然而齋鍾屢絕僧徒每以此病之康熙癸巳寺僧覺粹始券善男善女聚其施財謀佛田而未就逮至我 聖上即位之四年戊申居士覺信淨仁同盟發願得施布施錢廣置田土於近畿俾朝夕齋供歲用其出而毋至來丐於檀越我於是乎寺益充完可以永久遵守而無弊矣予觀近日山僧軰傍門流汗募財私餉者多矣觀應師所爲能不媿其心乎應師功旣成而獵懼夫後其身而居是寺者不能以其心爲心謀刻石以銘後請予文爲記於是前有感焉夫毀冦▨▨▨▨▨▨▨▨▨佛之所以異於吾儒而吾儒之所以▨▨▨之者也然世敎不古彛倫斁敗夫所謂衣冠儒冠者未必皆忠孝之士而方洋乎利欲場中反取笑於釋氏者不少則今圓應軰其中之所造吾未知其如何而獨其外護法門念念不已者出於金經此豈不足以激吾哀俗乎又况護守 園陵祝釐 君上其志可嘉則豈與夫眩禍福之說假慈悲之名極侈與麗傷財病民者比哉故予不辭而爲之記如之
崇禎紀元後再年糸十月 日立
己未生金氏 韓震建 韓得良 韓益良 金寶益 金枝善 金者近暹 朴震蕃 丁卯生朴氏 李氏阿江 尙宮李氏淑 梁五南 洪健 梁二賛 崔益順 韓泰發 金枝榮 宋德起 李仁晟 李碩蕃 朴燦益 趙與▨ 金麗▨ 李尙萬 姜進 崔次義 宋▨柱 文斗明 申義哲 金壽碩 安萬枝 金鼎澤 李完昌 申▨▨ ▨東化 韓武先 韓太興 崔一千 李氏大阿只 李氏昭愛 安氏賛貞 劉氏戒分 朴▨▨ 金世郁 鄭興▨ 金尙直 吳有禮 石▨主 金元成 金有同 金▨光 李昌均 朴玉▨ 宋氏▨▨ 李重益 玄氏永心 李氏小阿只 李順興 高氏阿只 李繼江 李世澄 金成發 李仁壽 李武致 金氏奉化 趙賛起 李水泰 宋▨一 李氏阿只 金德夏 甲申生崔氏莫介 居士雲澄 車載連 趙興夫 石夢致 金昧命 玉瑞汀 金氏大阿只 羅萬英 金次老未 王世▨ 尹德天 李友柄 張遇漢 趙尙彬 崔建伊 韓壽江 崔聖眞(以下前面人名五十四人及 後面田畓秩及人名省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