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진사공 휘 숙 등/6세 휘 숙 성균생원 묘석

전주최공 문성공 6세손 휘 숙 관련자료

아베베1 2013. 6. 16. 16:54

 

 

 

 

 

 

 

 

 

 
六寓堂遺稿册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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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
鳳栖軒 b_039_109a


枳林無數暗東西。何事前軒號鳳棲。當日命名深意在。

 

故留金字映榱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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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全羅道)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동쪽은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순천부 경계까지 67리, 곡성현 경계까지 33리, 서쪽은 순창군 경계까지 37리, 옥과현 경계까지 62리, 북쪽은 임실현 경계까지 43리,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70리며 서울까지는 6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중에는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시대에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뒤에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에 조서하여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그 땅을 합병하였고, 신문왕(神文王) 4년에는 소경(小京)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여전히 소경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부(府)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대방으로 삼았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다시 부로 승격시켰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곡부곡(楡谷部曲) 부의 남쪽 69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인데 신라 때에 구례(求禮)라 개명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기에 남원에 내속시켰고, 인종 21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래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는데, 현재 주상 5년에 현의 백성 중에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讖言)을 조작하고 무리들을 끌어모아 반역을 꾀하였다가 복주(伏誅)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현(縣)을 폐하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다시 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하나 담양(潭陽). 군 하나 순창(淳昌). 현 아홉 임실(任實)ㆍ무주(茂朱)ㆍ곡성(谷城)ㆍ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옥과(玉果)ㆍ운봉(雲峯)ㆍ창평(昌平)ㆍ장수(長水).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대방(帶方)ㆍ고룡(古龍)ㆍ용성(龍城).
【성씨】 본부 양(梁)ㆍ정(鄭)ㆍ진(晉)ㆍ양(楊)ㆍ견(甄)ㆍ황보(皇甫)ㆍ이(李)ㆍ윤(尹)ㆍ황(黃)ㆍ염(廉)ㆍ배(裵)ㆍ류(柳), 고(高)ㆍ전(全)ㆍ임(林)ㆍ안(安)ㆍ지(池)ㆍ이(李)ㆍ송(宋)ㆍ조(曺)ㆍ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거령(居寧) 백(白)ㆍ황(黃)ㆍ한(韓)ㆍ이(李)ㆍ장(張). 유곡(楡谷)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ㆍ진(陳), 박(朴) 속성(續姓)이다. 황(黃) 의창(義昌). 서(徐)ㆍ양(梁) 모두 내성(來姓)이다. 남전(南田) 임(林). 방광(放光) 유(劉). 사등촌(沙等村) 임(任), 정(鄭) 속성(續姓)이다.
【풍속】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납다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나워서 반역과 속임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하였다. 향음(鄕飮)과 사례(射禮)를 행한다 이 고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용담이나 율림(栗林)에 모여 향음과 사례를 행한다.
【형승】 동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中津)을 띠었다 《부지(府志)》에, “동쪽에는 지리산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이 띠를 두른 것처럼 흐르고 있으며, 사람과 물산이 많아 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하였다. 남방에 있어 오른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방이다 이규보의 송(頌)에, “대방(帶方)은 오래된 고을이니, 남방의 오른팔이다.” 하였다. 옥야백리천부지지(沃野百里天府之地) 황수신(黃守身)의 〈광한루기(廣寒樓記)〉에, “남원(南原)은 옛 이름이 대방(帶方)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기름진 들판이 백 리에 뻗쳐 있으니 실로 천연의 부고이다.” 하였다.
【산천】 백공산(百工山)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지리산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 자는 유(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 시의 ‘방장 삼한 외(方丈三韓外)’의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帶方郡)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을 둘러싼 고을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咸陽)이요, 동남쪽은 진주(晉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의 천왕봉(天王峯)과 서쪽의 반야봉(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기슭에 혹 구름끼고 비가 오며 천둥치고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몰려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하는 이야기에 태을(太乙 북극신(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거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지리산은 창창(蒼蒼)하게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니 천암만학(千巖萬壑)에 물방울이 뿌리도다. 골짜기의 청학(靑鶴)이 어찌하여 마땅히 절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고 조롱하리라.” 하였다. 보련산(寶連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교룡산(蛟龍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는데 북쪽에는 밀덕봉(密德峯)과 복덕봉(福德峯)이 하늘을 받치고 높이 솟아 있다. 장법산(長法山)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견수산(犬首山)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오산(鼇山) 유곡(楡谷) 남쪽 15리에 있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빈 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전하는 말에, 중 도선(道詵)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한다. 봉성산(鳳城山) 유곡(楡谷) 서쪽 1리에 있다. 숙성현(宿星峴) 부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비홍현(飛鴻峴)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율림(栗林) 광한루(廣寒樓)의 남쪽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일말(一抹)의 가을빛이 나무 끝에 닿아서, 담황색(淡黃色)과 천록색(淺綠色)이 가만히 서로 떠오르네. 바람이 금위(金蝟)에 불어오니 규란(虯卵)이 터져 나오고, 아이들은 짝지어 좋은 놀이 하도다.” 하였다. 동장수(東帳藪)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물 유유히 흐르고 모래 사장 길게 뻗친 곳에 버들 그림자가 깔렸는데 사는 사람들 모두 그윽한 거처를 얻었구나. 꽃은 지고 방초는 무성하여 봄이 저물었는데, 천고의 풍류는 회계산(會稽山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접했구나.” 하였다. 창활수(昌活藪)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바람에 나부끼는 표기[風帘 주막(酒幕)을 표시하는 기(旗)]는 희미하게 무성한 수풀과 격해 있고, 허물어진 역원(驛院)은 황량한데 깊은 산 속에 한 줄기 오솔길. 해는 지고 소와 양은 먼 길을 돌아오는데 반륜(半輪)같은 저녁해가 푸른 산봉우리에 걸려있네.” 하였다. 순자진(鶉子津) 진안현(鎭安縣) 중대산(中臺山)과 태인현(泰仁縣) 운주산(雲住山)의 물리 합쳐 흘러, 부의 서남쪽 40리에 이르러 순자진이 되었는데 곡성현(谷城縣)에 들어가서는 압록진(鴨綠津)이 된다. 원천(源川) 원천부곡(源川部曲)에 있다. 지리산에서 근원하여 부의 동쪽 선원사(禪院寺) 앞에 이르러서 요천(蓼川)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간다. 두가천(豆可川) 부의 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자진의 하류가 된다. 본조(本朝)의 마천목(馬天牧)이 물을 막아 어량(魚梁)을 만들었는데, 그 후에 본부(本府)에서 이것을 고쳤다. 대모천(大母泉)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한 구멍 맑고 맑은 돌 밑의 샘이 대모(大母)라 이름 전하기 몇 천 년인고. 자손[雲仍]이 다 변하고 남은 은택만 머무르니, 젖 같은 샘물이 6월 여름 날씨에 맑고도 달더라.” 하였다. 거령천(居寧川) 거령현(居寧縣)의 개현(介縣)에서 나와서 오수역(獒樹驛)동남에 이르러 임실현의 평당원천(坪堂院川)과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순창군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 요천(蓼川) 부의 동남쪽 1리에 있는데 시내 가운데에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와 같으므로 우암(牛巖)이라 한다. ○ 강희맹의 시에, “한 줄기 긴 시내가 고진(古津)에 접했으니, 바람이 압록(鴨綠)을 흔들어 고기비늘 같은 물결을 이루었네. 외로운 배가 여뀌꽃 언덕에 숨었다 비쳤다 하니, 그림 속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축천(丑川) 축(丑)은 혹 축(畜)으로도 쓴다. 부의 동북방에 시냇물이 들이치므로 마을을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의 말을 따라서 쇠로 소를 만들어 기세를 누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축천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소는 지금도 남아있다. 연탄(淵灘) 부의 서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창군 저탄(猪灘)의 하류로서 순자진(鶉子津)으로 들어간다. 구연(九淵) 유곡(楡谷)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연못 위에는 천척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비스듬히 누워 있어 병풍처럼 보인다. 압록진(鴨綠津) 유곡에서 29리, 곡성현(谷城縣)의 경계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유곡 남쪽 12리, 순천부(順天府)의 경계상에 있다. 용왕연(龍王淵) 유곡 동쪽 30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의 경계에 있으니 바로 잔수진 하류에 해당한다. 광양현(光陽縣) 부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신증』 용연(龍淵)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수원(水源)은 지리산에서 나온다.
【토산】 꿀ㆍ호두ㆍ오미자ㆍ감ㆍ닥종이ㆍ생강ㆍ표고버섯ㆍ송이ㆍ석류ㆍ석이버섯ㆍ치자ㆍ죽전ㆍ잣ㆍ산무애뱀[白花蛇]ㆍ복령ㆍ지황(地黃)ㆍ영양각ㆍ은어[銀口魚]ㆍ게.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는 8천 1백 99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과 샘이 71개 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는 5천 7백 17자, 높이 10자,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작은 시내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강희맹의 시에, “교룡산성이 백운 간에 솟았으니, 한 줄기 길이 겨우 꾸불꾸불 통하였네. 마치 이 한 고을의 절험(絶險)을 자랑하는 듯, 위급한 시절이면 여기 의지하여 오랑캐를 막아 내도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고을이 호남 산수간(山水間)에 자리하니, 산성은 우뚝 솟고 길은 꾸불꾸불, 대방(帶方)은 스스로 웅장한 번지(藩地)를 이루었으니, 팔방의 오랑캐를 공액(控扼)하고 제압하네.” 하였다.
【누정】 광한루(廣寒樓) 황수신(黃守身)의 기문에, “부의 남쪽 2리쯤 되는 곳에 지세가 높고 평평하며 넓게 트여 있는데 거기에 작은 누각이 있으니, 그 이름이 광통루(廣通樓)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니 갑인년에 부사 민공(閔恭)이 다시 새 누각을 세웠고, 정사년에 유지례(柳之禮)가 이어 단청을 더하였다. 갑자년에 정승인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가 광한루로 이름을 고쳤다. 아, 호남의 경치 좋은 곳으로 우리 고을보다 나은 곳이 없고, 내 고장 경치 좋은 곳 중에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남방의 이름난 광한루에 6월에 올라오니 가을처럼 서늘하네. 달그림자 홀연히 비치니 하늘이 가깝고, 붉은 난간 굽은 곳에 견우성이 지나가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방장산(方丈山) 앞에 백척누각, 푸른 산머리에 붉은 사다리가 높이 걸렸네. 물은 들판에 연하여 이내와 햇빛이 섞였고, 구름 걷힌 먼 산봉우리엔 비 기운이 걷히었네. 물가에 임하니 천상에 앉은 듯, 바람 앞에 서니 달 가운데서 노는 듯, 인간에 절로 달세계[淸虛府]가 있는데, 하필 구구하게 세상 밖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상쾌한 기운이 물가 누각에 스며드니, 요천(蓼川) 머리에 광한(廣寒)의 선경(仙境)이 펼쳐지도다. 남쪽 언덕에 바람이 일어나니 더위가 멀어졌고, 서산에 주렴 걷히니 저녁 비가 그쳤네. 달은 때마침 맑은 밤에 둥근데, 은하수 다리에서 누가 옛 사람을 이어서 놀꼬. 하늘빛은 상하에 명경처럼 밝으니, 몸이 청허부(淸虛府)에 바로 드달리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저녁에 풍류 잡히고 그림같은 누각에 오르니, 옥봉(玉峯)으로 지는 해가 성 머리에 걸렸구나. 시정(詩情)이 바다처럼 일렁거리니 봄이 정함이 없고, 검기(劍氣)가 하늘에 떠서 밤에도 걷히지를 아니하네. 눈처럼 춤추니 패옥을 던지며 가고, 물결을 도리어 밟고 가니 구슬을 희롱하며 노는도다. 인간에 또한 청허부가 있으니, 좋은 놀이를 세상 밖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연국루(戀國樓) 객관(客館)의 서쪽에 있는데 일명 죽루(竹樓)라고도 한다. ○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뚫은 푸른 대가 요란하게 비녀을 뽑은 듯, 홀연히 높은 루에 올라 바로 아래를 굽어봤네. 우로(雨露)가 비록 처음에 죽순을 무성케 하였으나, 얼음과 서리도 끝내 요림(瑤林)을 욕되게 하지 못하였네. 깊숙한 뿌리가 돌을 피하는 모양이 푸른 용이 숨은 듯하고, 맑은 피리소리는 바람을 맞아 푸른 봉황이 우는 듯하도다. 어떻게 하면 장안의 고관들이 그대처럼 굳은 절개에 곧은 마음 가질 수 있을까.” 하였다. ○ 윤향(尹向)의 시에, “한가한 날 백 자나 되는 누각에 오르니, 누각 지은 사람은 정오두(鄭遨頭)라네. 산은 지리산(智異山)에 연하여 천봉(千峯)이 빼어나고 물은 태량(苔梁)에서 합하여 한 줄기로 흐르도다. 주포(周浦)에는 구름이 비꼈으매 석양이 밝고, 교잠(蛟岑)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니 가을 기운 움직였네. 어디에서 부는 장적(長笛) 소리인가, 홀로 난간에 기대니 천리만리로 뻗친 근심일세.” 하였다.
축천정(丑川亭) 축천(丑川)의 서쪽 언덕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벼랑에 의지한 절벽 그림 병풍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높은 누각 있으니 돌로 축대를 만들었네. 만고(萬古) 세월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칠 줄을 모르고, 백 년 산색(山色)은 우뚝하게 둔덕이 되었네. 쇠로 만든 소는 소울음 소리내며 어느 날이나 일어날까, 황학(黃鶴)을 탄 손님 오늘 아침에 올 듯하구나. 여기가 대방(帶方)의 아름다운 곳인데, 풍류 제영(題詠)함에 재주없음이 부끄럽네.” 하였다. 봉서루(鳳棲樓) 유곡(楡谷)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현감(縣監) 오치선(吳致善)이 세운 것인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김작(金綽)의 기문에 이르기를, “고을의 지세가 나르는 봉황의 형국이라 이것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봉성산(鳳城山) 아래 봉서루, 바람이 서늘하여 여름도 가을인 양하여라.” 하였다. 사영루(四詠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이문병(李文炳)과 판관 이적(李績)이 세웠다. 휼민관(恤民舘) 즉 객관을 말한다. 부사 이문병과 판관 이적이 세웠다. 『신증』 허침의 시에, “은혜를 펴니 곳곳이 봄과 같다 세 사람의 연이어 꽃다운 이름 후세에 빼어났네. 성상의 은혜 감격하여 일신을 능히 보국(報國)하였고, 희끗희끗 양쪽 귀밑털 나니, 백성을 위해 근심함일세. 큰 고을 뛰어난 정사 대개 백성을 중히 여기니, 호협한 풍속이 점차 순화되어 가네. 나라를 요리할 수완이니 닭을 잡는 사람 노릇 오래하지 마소.” 하였다. 봉서헌(鳳棲軒) 유곡부곡(楡谷部曲)에 있다. 현감 최지성(崔智成)이 세웠다. 『신증』 월인헌(月印軒) 광한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부 치소(治所)의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오수역(獒樹驛)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 본도의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속역(屬驛)은 11개소로서 창활(昌活)ㆍ동도(東道)ㆍ응령(應嶺)ㆍ인월(引月)ㆍ잔수(潺水)ㆍ지신(知申)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덕양(德陽)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 등이 있다. ○ 찰방 한 사람이 임명된다. ○ 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술깬 뒤에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하였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하였으니 악부(樂府) 중에 〈견분곡(犬墳曲)〉은 바로 이것을 읊은 것이다. ○ 이규보의 시에, “낮에 오원(烏原)을 출발하여 오수에서 잠시 머물렀다. 한가로운 사슴은 깊은 풀숲에 잠들고, 깊은 숲 속에 사는 새도 얕은 도랑에서 목욕하네. 산은 그림 같은 풍경 눈에 담뿍 보여주고, 바람이 부니 가을 바람 옷깃에 살랑거리네. 다시금 대방 땅을 밟으니 하늘은 나에게 마음껏 경치를 즐기라고 하는구나.” 하였다.
동도역(東道驛)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응령역(應嶺驛)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창활역(昌活驛) 창활수(昌活藪)의 남쪽에 있다. 잔수역(潺水驛) 잔수진(潺水津) 언덕에 있다. 안신원(安信院)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호산원(虎山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비홍원(飛鴻院) 비홍현(飛鴻峴) 아래에 있다. 서림원(西林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순자원(鶉子院) 순자진(鶉子津) 언덕 위에 있다. 다시천원(多時川院)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운제원(雲梯院)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천원(遷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축천원(丑川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홍화원(弘化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율두천원(栗頭川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원천원(源川院) 원천의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잔수진의 언덕에 있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부의 서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분류(奔流) 흐르는 강 양쪽 언덕에 긴 다리가 걸려있고, 수면에는 침침(沈沈)하게 그림자 흔들리네. 천 자나 되는 무지개 다리는 허리와 등이 넓으니, 느릿느릿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네.” 하였다.
【불우】 만복사(萬福寺)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불전(佛典)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자의 동불(銅佛)이 있다.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것이다. ○ 강희맹의 시에,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 으름덩굴과 칡덩굴 덮인 오솔길은 인간에게 부귀를 묻지 않네.” 하였다. 선원사(禪院寺) 백공산(百工山)에 있다. 파근사(波根寺) 지리산에 있다. 용천사(龍泉寺) 교룡산(蛟龍山)에 있다. 승련사(勝蓮寺) 만행산(萬行山)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남원부의 산수가 좋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컫는 바이다. 중들이 그 사이에 절을 지어 대개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차지하였는데 승련사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강호문(康好文)이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또 주지인 대선사(大禪寺) 각운(覺雲)이 글로써 그 시말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좋은 산수에 대해서는 매양 가서 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고, 그곳에 내 이름을 걸어 두는 것이 실로 내 소원이었으며, 각운선사의 훌륭함은 내 또한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터이라, 기꺼이 서술한다.
절은 부중(府中)에서 동북편으로 30리 거리에 있고, 옛 이름은 금강사(金剛寺)였는데 어느 때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홍혜국사(弘慧國師)이며 휘(諱)를 중긍(中亘)이라 하는 분이 원당(願堂)에 있다가 늙어서 물러나와 이곳에 살았는데, 지붕이 낮고 누추하여 증축하여 확장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죽고나서 대선사 졸암(拙菴), 이름을 연온(衍昷)이라 하는 분이 조계(曹溪)의 장로로서 홍혜(弘慧)의 문도들에게 추앙을 받으니 모두 계권(契券)을 만들어 주며 졸암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졸암이 곧 설계하고 비용을 헤아리고, 시주를 모으는 것은 종한(宗閑)이라는 분이 주관하였다. 그 편액을 승련사(勝蓮寺)라 고치고 공사는 을축년에 시작하여 신축년 봄에 마쳤다. 불전(佛殿)ㆍ승무(僧廡)ㆍ선당(膳堂)ㆍ선실(禪室)ㆍ객실(客室)ㆍ곳간ㆍ부엌 등 칸수를 계산하면 모두 1백 11칸이며, 불전 기구와 일상의 도구가 하나도 완비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다 졸암의 바랑에서 나온 것과 종한의 힘으로 인하여 이룩된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상(像)을 불전 중앙에 모셨는데, 이는 졸암이 전적으로 마련한 것이요, 대장경을 새겨서 전 좌우에 쌓아 놓은 것은 고을 사람이 다같이 낸 시주로 한 것이다. 노비 몇 명을 희사하였으니 이는 바로 졸암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무술년 가을에 그가 죽게 될 적에, 친족으로는 조카가 되고 법통으로는 후계자가 되는 각운선사에게 절 살림을 부탁하였다. 바깥 담이 아직 없어서 각운선사가 쌓으니 계묘년 여름에 절의 공사가 끝이 났다. 내 생각에 불도들은 그 거처를 분수에 넘치게 할 뿐 아니라, 그 후계자에게 전해 줄 것을 도모하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 금강(金剛)과 승련(勝蓮) 두 이름의 뜻이 어떤 것은 장중하고 어떤 것은 가벼우니 반드시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리는도다. 그러나 졸암이 기어이 그 현판을 고친 것은 승련사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1대가 되고 다시 전하여 2대가 되어서 백천 대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보인 것이니, 그 뜻이 심원하다고 하겠다. 그가 각운선사에게 전한 것은 친족관계와 법통으로 하였으니 또한 혐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각운선사가 사람을 얻어 전함을 또한 그 스승과 같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 전해질수록 그 뜻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시 백천 대를 지나서 승련사(勝蓮寺)의 경내가 가시밭이 되지 않으면 족하고 친족으로 대를 잇든 법통으로 대를 잇든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졸암의 성은 유(柳)씨요,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증손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정(靖)의 동복동생으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존비(李尊庇) 공의 외손이다. 학수사선(學首四選)에 참여하여 시험에 응시하여 갑과(甲科)에 합격하였으며 명산에 두루 주석하여 불도의 명성이 높았다. 각운선사는 졸암의 조카로 학문이 깊고 행실이 고상하며 필법이 일세에 절묘하니, 사람들이, ‘청출어람(靑出於藍 스승보다 낫다는 뜻)이라.’ 하였다.” 한다.
개량사(開良寺) 견수산(犬首山)에 있는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연관사(煙觀寺) 지리산에 있다. 보현사(寶賢寺) 마행산(馬行山)에 있다. 용담사(龍潭寺) 장벌산(長伐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여의주 물고 있는 용공(龍公)이 잠들어 돌아오지 아니하니, 음침한 집문은 잠긴 지 오래로다. 못가 절에서 독경 소리 오래전에 폐하니, 오직 물결에 석대(石臺)만이 비추누나.” 하였다. 화엄사(華嚴寺)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연곡사(鷰谷寺) 지리산에 있다. 고려의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비(玄覺禪師碑)가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 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덕음당사(德陰堂祠) 덕성향(德城鄕)에 있다.
【고적】 거령폐현(居寧廢縣) 거(居) 자는 거(巨)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인데 신라 때에 청웅현(靑雄縣)이라 고치고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켰다. 영성(寧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부의 동북쪽 50리에 있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즉 지금 부의 치소(治所)이니 둘레가 몇 리나 되는데 옛 터가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마른 우물이 황량하게 저녁 연기에 잠겼고, 유공(劉公)의 사업은 이야기로 전해오네. 대당(大唐)이 먼 나라 포용할 계책은 구상하지 않고, 부질없이 고성(孤城)을 쌓아 뒷날의 웃음거리 되었네.” 하였다. 유곡성(楡谷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6백 81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이 9개소,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다. 정전유기(井田遺基) 당 나라 유인궤가 자사 겸 도독(刺史兼都督)으로 읍내에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있다. 금안부곡(金岸部曲)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원천부곡(源川部曲)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산동부곡(山東部曲)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고정부곡(古丁部曲)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덕성향(德城鄕)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도지향(道知鄕) 부의 서남쪽 5리, 속칭 돈다산(敦多山)이라 부른다. 수도향(守道鄕) 부의 동쪽 5리, 지금은 말이지(末伊旨)라고 부른다. 남안향(南安鄕) 부의 남쪽 2리, 지금은 야정지(野井池)라고 부른다. 경도향(京徒鄕) 부의 북쪽 60리, 지금은 백야곡(白也谷)이라 부른다. 보유향(寶有鄕)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거리향(居利鄕) 거령현(居寧縣)의 동남쪽, 지금은 성여이(城餘伊)라고 부른다. 백파향(白波鄕)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아인향(牙仁鄕)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미아향(未牙鄕)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성화점소(省火帖所) 부의 남쪽 50리. 두가소(豆加所) 부의 남쪽 60리. 웅음소(熊陰所) 부의 남쪽 50리. 용봉소(龍鳳所) 부의 동쪽 20리. 신내동소(申內洞所) 부의 남쪽 17리. 기오천소(岐於淺所) 부의 남쪽 30리. 양천소(陽川所) 부의 남쪽 8리. 금성소(金城所) 부의 동쪽 15리. 석주진(石柱鎭) 유곡(楡谷) 동쪽 15리, 남북쪽에 모두 큰 산이 있는데 그 가운데 큰 강이 흐른다. 고려 말기에 진(鎭)을 설치하고 왜적을 막았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사등촌부곡(沙等村部曲) 혹은 사도(沙圖)라고도 하는데, 유곡 동쪽 5리에 있다. 남전소(南田所) 유곡 북쪽 6리에 있다. 방광소(放光所) 유곡 북쪽 10리에 있다. 토지처(吐旨處) 유곡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 신라 김흔(金昕) 헌덕왕(憲德王)이 사람을 당(唐) 나라에 보내려 하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혹자가 김흔을 천거하였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후예로 정신이 빼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뽑힐 만하였다. 드디어 입조(入朝)하여 숙위하도록 하였던바, 세밑에 돌아오니 왕은 그가 사신의 직책을 잘 수행했다 하여 남원 태수(南原太守)를 제수하였다. 윤흥(允興) 신라인 귀금(貴金)은 옥보고(玉寶高)의 가야금을 전수받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나오지 않았다. 신라의 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윤흥에게 이르기를, “방편을 써서 그 금술을 터득하게 하라.” 하고, 곧 남원 공사(南原公事)에 임명하였다. 윤흥이 도임하여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두 사람을 산 중에 보내 배우도록 하여 귀금은 가르쳐 주긴 하였으나 깊은 묘리(妙理)는 전해 주지 않았다. 윤흥이 그 부인과 함께 찾아가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딴 이유가 없고 선생의 재주를 세상에 전하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께서는 감추시고 전해 주지 않으니 내가 무엇으로 복명하겠습니까.” 하고, 윤흥은 술을 받들고 부인은 잔을 잡고 무릎 꿇어 예를 드리니, 귀금이 그제야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전해 주었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仁宗)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충혜왕(忠惠王) 때 지부사(知府事)로 새로이 제용재(濟用財)를 두어 비용으로 지출하고 횡령하는 것이 없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대략 이르기를, “국자 학유(國子學諭) 양이시(楊以時) 군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여 말이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사또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에 새기지 않아도 남아있겠지만,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渧用財)는 쉽게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 알게 하지 않으면, 영구히 폐단이 없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하므로,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소서.’ 하였다. 내가 양군(楊君)의 말을 따라 그 일을 상고하여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사자(使者)가 와서 부세 바치기를 독촉할 때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바치지 못하면, 대충하는 까닭으로 혹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고는, 밀린 세금을 거둬모아 베 약간을 얻었고, 또 안렴사(安廉使)에게 아뢰니, 가상히 여겨 무명을 내서 보조하였고, 또 노비문제로 다투어 관아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한 명당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지현에서 급할 때에는 네 사람이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자는 받지 않으며, 부의 아전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영구히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을이 비록 산 중에 있으나 손님이 끊임없이 왕래하여 접대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우리 사또가 그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다시 이보다 더 하리오 라고 말하고, 또 재(財)를 설치할 의향으로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屯田)을 두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우리 사또께서 친히 그 일을 맡아 거둬들여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니 총계 쌀 2백 석, 콩 1백 50석이 되었습니다. 법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거둬들이어 본전은 두고 이자를 쓰게 하며, 또 새로 개간한 땅에서 72석을 거둬들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또 일용가구까지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 이름하니, 이에 백성들에게 횡포하게 거두는 것이 없고, 지현에서는 떳떳한 부세를 지켜서 이익을 보게 하고 손해를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한다.
윤위(尹威) 신종(神宗) 때의 사업(司業)으로 염찰사(廉察使)가 되어 오니, 한 지방이 경외 하였다. 부의 경내에 도적이 있어 무리들을 불러모아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윤위가 혼자 말을 타고 들어가 화복(禍福)을 들어 타이르니, 적이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명령에 복종하였다. 이에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니 경내가 편안해졌다. 이세화(李世華) 태수로서 그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 정국검(鄭國儉) 지부사(知府事)가 되어 하루는 속읍(屬邑)에서 행춘(行春 태수(太守)가 봄에 속읍에 다니며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일)할 때, 원천동(源川洞)을 지나게 되었는데 송림(松林)이 있는 좌우 벽 위에 중 정사(正思)가 한 절구를 크게 써놓기를, “고불(古佛) 바위 앞을 흐르는 물이 슬피 울고 다시 오열한다. 아마도 인간세계에 내려와 영영 운산(雲山)과 헤어지게 된 것을 슬퍼하는가.” 하였다. 다음날 노유(老儒) 양적중(梁積中)과 말을 나란히 타고 찾아가서 산수의 벗을 맺었다. 뒤에 매양 인물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정사를 중 가운데 용이라고 칭찬하였다. 주열(朱悅) 고종(高宗) 때 판관(判官)이었다. 본조 김희(金熙) 부사로서 백성 보살피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송사를 물흐르듯 처결하니, 부사로 있는 몇 해 동안에 한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병으로 순직하니, 읍인들이 매년 기일이면 잊지 않고 제사를 올린다. 최덕지(崔德之)ㆍ이효공(李孝恭) 둘 다 부사로 있었다. 『신증』 정회(鄭淮) 부사로서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폈다. 안구(安覯) 부사.
【인물】 고려 이능간(李凌幹) 거령(居寧) 사람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그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별실에다 따로 두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였다. 또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있을 때 왕이 토번(吐蕃) 땅에 귀양을 갔는데 능간이 금품을 품고 역리(驛吏)에게 몰래 주어 왕께 드리도록 하였으므로 왕과 종신(從臣)이 곤란을 면하였다. 왕이 승하하자 관을 모시고 귀국하는데 울부짖으며 멀리서 오느라고 애썼고 고생스러운 일을 끝까지 다하였다. 원 나라에서 본국을 중국의 성(省)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능간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 의논이 결국 중지되도록 하였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지냈다. 양서린(梁瑞麟) 부의 아전이다.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부사 이종(李悰)이 난을 피하여 가다가 말이 넘어졌는데, 서린이 자기가 탄 말을 바꾸어 타게 하고 자기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 이 일이 알려져서 뒤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양성지(梁誠之)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고, 남원군(南原君)에 봉작되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양순석(梁順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고, 효행이 있었다. 시호는 문효(文孝), 아들 지형(止衡)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까지 지냈다.
【우거】 본조 유규(柳規) 유언(柳漹) 이하 몇 대가 여기서 살았는데 다 현달(顯達)하였다.
【효자】 고려 양천룡(梁天龍)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묘막에서 6년을 지냈다. 이 일이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손순흥(孫順興) 성종(成宗) 9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례(求禮) 사람 손순흥은 그 어머니가 죽자 화상을 그려 놓고 제사를 받들며 사흘에 한 번 묘지에 찾아가 공양[饗]하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으니, 벼슬을 주어서 효도를 표창하려 하노라.” 하였다. 본조 유익경(柳益涇) 어머니 현씨(玄氏)가 병에 걸리자 익경은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다. 이 일이 왕께 보고 되니 동부 녹사(東部錄事)에 배수하였다. 조한(趙漢) 구례현(求禮縣)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흐느껴 울기를 3년, 채소 반찬에 물만 마시고 동구 밖에 나가지 아니했다. 일이 왕께 알려지니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임옥산(林玉山)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어머니의 병에 똥을 맛보아 살아날지를 가늠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상과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하였고, 3년상을 지낸 뒤에도 조석 삭망을 폐하지 아니했다. 그 일이 성종(成宗) 때에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우고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였다.
【열녀】 백제 지리산녀(智異山女) 구례현의 여자이다. 자색이 아름답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으나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들이려 하였으나 한사코 따르지 아니했다. 고려 이씨(李氏) 생원 양중수(梁仲粹)의 처다. 왜적이 범하려 하였으나 이씨가 항거하여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웠다. 본조 김씨(金氏) 호장(戶長) 양전(梁田)의 처이며 나이 20세에 남편이 죽자 피눈물을 삼년간이나 흘렸다. 부모가 그의 의지를 꺾고자 했으나 김씨는 따르지 않고, 소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친히 삭망 제사를 행하다가 죽었다. 강씨(姜氏) 최자강(崔自江)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강씨는 남편의 시체를 안고 7일간이나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웠다. 임씨(林氏) 구례현 사람으로 왕정(王淨)의 처이다. 왕정이 병이 나자, 극진히 치료하고 다짐하기를, “만일 꺼려하지 아니한다면 나는 꼭 여묘(廬墓)하리라.” 하더니, 왕정이 죽은 뒤 임씨는 71세에 장례와 제례를 가례대로 하고, 여묘를 3년동안 하면서 늘 절일(節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손들을 데리고 친히 무덤에 올랐는데 90세가 되어도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제영】 낙잔홍엽노청산(落殘紅葉露靑山) 김극기의 시에, “습하고 더운 남방에 유람하매 더위에 시달리더니, 홀연 서풍을 만나니 얼굴빛이 즉시 펴지네. 바람에 흰 연기 일어나서 푸른 들을 감싸고, 단풍잎 모두 지니 청산이 드러났네.” 하였다. 탐상풍연폐식면(貪賞風煙廢食眠) 앞사람의 시에, “흥에 겨워 눈이 머리에 가득한[盈 백발(白髮)] 것도 모르고, 풍광에 취하여 먹고 자는 일조차 잊었네. 도연명(陶淵明) 살던 골목의 버들은 여름빛이 푸른 장막에 짙었고, 육씨(陸氏) 못 속의 연은 홍방(紅房 연꽃)이 가을에 벌어지네. 미친 듯이 부르는 노래에 어찌 장단을 분간하며, 한껏 마시는 술에 어찌 청주와 탁주를 분간하리오. 멀리 바라보매 끝간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물빛과 산그림자가 멀리 하늘과 닿았네.” 하였다. 봉강요접견훤국(封疆遙接甄萱國)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경계는 멀리 견훤국에 접하였고, 풍월(風月)은 방장산(方丈山)과 이어졌네.” 하였다. 지령인걸천년색(地靈人傑千年色) 권진(權軫)의 시에, “땅이 영험하고 인물이 걸출한 천년의 고을이요,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만고(萬古)의 산이로다.” 하였다. 준령동분삼도경(峻嶺東分三道境)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준령은 동으로 세 도의 경계를 나누고, 서울은 북으로 몇 주의 산으로 막혀 있는가.” 하였다. 용성원수추운외(龍城遠岫秋雲外) 안숭효(安崇孝)의 시에,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멀리 보이는 멧부리 가을 구름 밖에 보이고, 만복사(萬福寺)의 맑은 종소리 저녁노을 사이에서 울리도다.” 하였다. 녹도홍거십리향(綠稻紅蕖十里香) 김극기(金克己)의 〈구례현(求禮縣)〉 시에, “저녁비 부슬부슬 홀연 서늘한 기운을 보내고, 시내 빛과 산 색은 점점 창망(滄茫)하여라. 강남(江南)의 빼어난 경치 실로 그림 같은데, 푸른 벼 붉은 연꽃 십 리에 향기롭네.” 하였다. 소계단정횡청천(小溪短艇橫淸淺) 백분화(白賁華)의 〈구례현〉시에, “아침에 백계산(白鷄山) 아래 길을 떠나서 저녁에 찬수역(鑽燧驛) 동편 마을에 머무네. 작은 시내 조그만 나룻배는 맑고 얕은 물을 가로지르고 해지자 외로운 마을은 어둠에 싸였구나. 절벽 위에 흩어진 구름은 은궐(銀闕 백은으로 지은 궁성의 문)이 솟아나는 듯, 먼 산에 타는 불은 장대한 화성(火城)이로다. 밤 깊어 곤한 잠자리 꿈을 깨니 벽을 등지고 희미한 등불이 침상 위를 비추네.” 하였다. 찬수(鑽燧)는 잔수(潺水)의 잘못이다. 숭악춘한설만산(嵩岳春寒雪滿山)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환해(宦海 벼슬길)에 부침(浮沈)하니 가는 곳마다 어렵다가, 남쪽에 와서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네. 창에 밤이 고요한데 바람은 대를 울리고, 숭악(崇岳)은 봄에도 차가워 눈이 산에 가득하네. 나그네 몸은 푸른 산 속에 노닐고, 어버이 생각하는 꿈 흰구름 사이에 둘렀네. 괴로운 인생 벼슬에 얽매여 물외(物外)에 한가로이 소요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조선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종(英宗) 15년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켰다가 26년 다시 승격시켰으며, 헌종(憲宗) 10년 현(縣)으로 강등시켰다가 철종(哲宗) 4년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통한(通漢) 읍 안이다. 장흥(長興) 처음이 1리이고, 끝이 3리이다. 만복(萬福) 서쪽으로 처음이 2리이고, 끝이 5리이다. 백파(白波)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주촌(朱村) 동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산동(內山洞) 동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외산동(外山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소의(所義) 동쪽이 처음으로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중방(中方) 위와 같다. 흑성(黑城)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주포(周浦)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송내(松內) 위와 같다. 수지(水旨)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두동(豆洞) 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안(金岸)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대곡(大谷) 두동(豆洞)에서와 같다. 초랑(草郞)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원천(源川)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기지(機池)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생오대(生烏代) 초랑(草郞)에서와 같다. 자성(者省)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이언(伊彦)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적과(迪果)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고절(高節) 위와 같다. 고달(古達)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덕고개(德古介)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돌고개(乭古介) 위와 같다. 지사(只沙)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말천(末川)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갈치(葛峙)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보현(普賢)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시라산(時羅山)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산동(山東)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둔덕(屯德)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영계(靈溪) 서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사동(蛇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성남(城南)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오지(吾枝)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견소곡(見所谷) 서쪽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아산(阿山)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왕지전(王之田)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매안(梅岸)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진전(內眞田)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외진전(外眞田) 북쪽으로 처음이 7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상번암(上磻巖) 동북쪽으로 처음이 90리이고, 끝이 1백 리이다. 하번암(下蟠巖)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서봉(棲鳳)ㆍ백암(白巖).
【창고】 읍창(邑倉)ㆍ지혜창(紙惠倉)ㆍ진휼창(賑恤倉) 성부(城府)는 성내(城內)에 있다. 동창(東倉)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40리에 있다. 구남창(舊南倉) 40리에 있다. 신남창(新南倉) 40리에 있다. 구북창(舊北倉) 30리에 있다. 신북창(新北倉) 40리에 있다. 산창(山倉)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다.
【진도】 순자진(鶉子津) 일명 중진(中津)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30리이고, 곡성 대로(谷城大路)로 통한다. 적성진(赤城津) 서쪽으로 30리이고, 순창 대로(淳昌大路)로 통한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서쪽으로 5리이다. 용두정교(龍頭亭橋) 서쪽으로 10리이다. 양수정교(兩水亭橋) 남쪽으로 5리이다. 갈어구교(乫魚口橋) 동쪽으로 10리이다. 금천교(金川橋) 동쪽으로 50리이다. 율천교(栗川橋) 북쪽으로 30리이다. 월천교(月川橋) 남쪽으로 30리이다. 오작교(烏鵲橋)ㆍ승차교(乘槎橋) 모두 광한루(廣寒樓) 앞에 있다.
【토산】 밤ㆍ옻ㆍ차, 매 두 종인데, 지리산에서 난다.
【누정】 용두정(龍頭亭) 서쪽으로 10리에 있고, 기암(奇巖)이 촉립(矗立)한 모양이 마치 용머리와 같다.
【묘전】 탄보묘(誕報廟) 서문(西門) 밖에 있으며, 선조 기해년에 총병(摠兵) 유건(劉健)이 세웠고, 정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관우(關羽) 경도(京都)의 동묘를 보라. 이신방(李新芳) 총부중군(摠府中軍)이다. 장표(蔣表) 총부천총(摠府千摠)이다. 모승선(毛承先) 총부천부(摠府千夫)이다. 위 세 사람은 정유 왜란(丁酉倭亂) 때에 나가 싸워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병신년에 세 장수를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사원】 영천서원(寧川書院) 광해군 기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안처순(安處順) 자는 순지(順之), 호는 사제(思齊)이고, 순흥(順興) 사람이다. 벼슬은 봉상 판관(奉常判官)이다. 정환(丁煥) 자는 용회(用晦), 호는 회산(檜山)이며, 창원(昌原) 사람이다. 벼슬은 경상 도사(慶尙都事)이다. 정황(丁熿)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游軒)이며, 정환(丁煥)의 아우이다. 명종 경신년에 귀양가서 죽었고, 벼슬은 사인(舍人)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대유(李大甹)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벼슬은 형조 좌랑이다. ○ 노봉서원(露峯書院)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축년에 현액을 내렸다. 김인후(金麟厚) 문묘(文廟)를 보라. 홍순복(洪順福) 자는 자유(子裕) 호는 고암(顧庵)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중종 경진년에 사화를 입었다. 최상중(崔尙重)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이며, 삭녕(朔寧)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대사헌(大司憲)으로 증직되었다. 오정길(吳廷吉) 자는 형보(亨甫), 호는 해서(海西)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교서 정자(敎書正字)이다. 최온(崔薀)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며, 최상중의 아들이다. 벼슬은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최휘지(崔徽之)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州)이며, 최온의 조카이다.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충렬사(忠烈詞) 광해군 임자년에 세웠으며 효종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이복남(李福南) 우계(羽溪) 사람으로 벼슬은 전라 병사(全羅兵使)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기원(鄭期遠)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이며, 동래(東萊) 사람이다. 양원(楊元)의 접반사로 난군(亂軍)한테 죽임을 당하였으며, 벼슬은 우부승지(右副承旨)인데 좌찬성 내성군(左贊成萊城君)으로 증직되었다. 신호(申浩) 자는 언원(彦源)이며 평산(平山) 사람이다. 벼슬은 장흥 부사(長興府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증직되고 시호는 무장(武莊)이다. 이덕회(李德恢) 자는 경렬(景烈)이며, 용인(龍仁) 사람이다. 벼슬은 본부판관(本府判官)이며, 형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이원춘(李元春) 벼슬은 구례 현감이며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오흥업(吳興業) 군향유사(軍餉有司)였다. 이상의 사람들은 선조 정유년에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 민충사(愍忠詞) 효종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황진(黃進) 진주(晉州)를 보라. 고득재(高得齎) 무과(武科)의 의병장(義兵將)이며, 선조 계사년에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평창 군수(平昌郡守)이며,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내렸다. 안영(安瑛) 광주(光州)를 보라.

 

 

 

성종 19년 무신(1488,홍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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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2일 (병인)
장령 김미가 이원을 복직시키는 명을 거둘 것과 유향소 설치를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장령(掌令) 김미(金楣)가 아뢰기를,
“전일(前日)에 전교하기를, ‘이원(李源)이 6년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어찌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와지는 마음이 없겠느냐?’고 하시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원(源)이 귀양가서 구례(求禮)에 있을 때에 신미(申眉)와 결탁하여 1읍(邑)을 횡행(橫行)하며 장리(長利)를 수납(受納)한다 사칭(詐稱)하면서 민간(民間)의 미속(米粟)을 많이 취해서 자기의 소유로 삼았고, 전지(田地)를 가진 중[僧]이 있다고 들으면 다 탈취하고, 중의 족친(族親)의 전지까지도 또한 모두 탈취(奪取)하므로, 읍민(邑民)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읍수(邑守) 최지성(崔智成)에게 호소(呼訴)하니, 원(源)이 최지성으로 더불어 말다툼하고 공사(公事)의 문권(文券)을 취하여 갔으니, 그 부도(不道)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비록 6년의 귀양살이를 겪었으면서도 곧 반성하는 마음이 없으니, 청컨대, 복직(復職)의 명(命)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源)은 바로 세종(世宗)의 친손(親孫)이며 영응(永膺)의 독자(獨子)이니, 봉사(奉祀)는 지중(至重)한 것이므로 지금의 복직(復職)은 영응(永膺)의 부인(夫人)의 상언(上言)에 의한 것이었다. 대저 사람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자가 아니라면 개행(改行)하는 이치가 없지 않으니, 원(源)이 만약 개과(改過)하였으면 진실로 서용(敍用)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범한 바가 강상(綱常)에 관계되고 그대들도 말하여 마지 않는 까닭으로 우선 성명(成命)을 거두겠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또 소매 속에서 글을 내어 올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전라(全羅) 1도(道)는 옛 백제(百濟)의 터[墟]이니, 그 유풍(遺風)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완한(頑悍)한 풍속이 다른 도(道)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그 도적(盜賊)은 혹 집에 불을 지르거나 혹 길가는 사람을 저격(狙擊)하여 대낮에 양탈(攘奪)하므로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습속은 강도(强盜)는 있어도 절도(竊盜)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또 왜복(倭服)에 왜어(倭語)를 하는 수적(水賊)이 있어, 해포(海浦)에 출몰(出沒)하면서 몰래 행선(行船)을 엿보고 있다가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바다에 던지고 몰래 도서(島嶼)에 숨고 하여 마치 귀신과 물여우[鬼蜮]와 같으므로, 관리(官吏)가 비록 수포(搜捕)하려고 하더라도 누구를 어찌할 수 없으니, 이것은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숨는 자는 세력 있는 백성[豪民]과 교활한 관리[猾吏]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긴 울타리에 겹문을 만들고 다투어 굴혈(窟穴)을 지어 줍니다. 만일 본주(本主)가 근심(根尋)하는 자가 있으면 공금(公禁)에 참여하지 않고, 심한 자는 혹 불량한 무리를 모아 본주(本主)를 구축(敺逐)하여 상처를 입혀서 가도록 하니, 이것 또한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귀신(鬼神)을 숭상함에 있어서는 강만(岡蠻)·임수(林藪)가 모두 귀신 이름이 붙어 있으며, 혹 목인(木人)을 설치하거나 혹 지전(紙錢)을 걸어 생황(笙簧)을 불고 북[鼓]을 치며, 주적(酒炙)이 낭자(狼藉)하고 남녀(男女)가 어울려서 무리지어 놀다가 노숙(露宿)하면서 부부(夫婦)가 서로 잃어버리기까지 하여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음일(淫佚)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여항(閭巷)의 백성이 처첩(妻妾)을 서로 도둑질하고 서로 원수가 져서 첩소(牒訴)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복잡합니다. 심지어 기공(期功)의 친(親)을 보기를 범인(凡人)과 같이 하여, 혹 아우가 형의 첩(妾)을 상피 붙고, 종[奴]이 주모(主母)를 간통하여서 인륜(人倫)을 무너뜨린 자가 간혹 있으며, 사치(奢侈)스러운 풍속을 논(論)하면 여염(閭閻)과 읍리(邑吏)의 의복(衣服)이 곱고 화려하며, 시골의 천한 백성들은 음식(飮食)을 물퍼쓰듯이 해먹으므로, 풍년(豐年)에 절재(節栽)할 줄을 모르고 한 번 흉년(凶年)을 만나면 강보(襁褓)의 어린아이까지 유리(流離)합니다. 능범(陵犯)하는 풍속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천(賤)한 이가 귀(貴)한 이에게 행패를 부리며 병졸이 장수를 모함(謀陷)하고 이민(吏民)이 수령(守令)을 꾸짖어 욕하며, 명예를 구하고 분수를 범함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근일(近日)에 광산(光山)에서 군수[倅]를 사살한 일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이 여섯 가지는 모두 다른 지방에 없는 풍속이니, 개혁(改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6년을 재임(在任)하였으므로 외방(外方)의 치체(治體)를 갖추 알고 있습니다. 감사(監司)가 된 자는 비록 그 폐단을 통렬히 혁신(革新)하려고 하여도 1년 안에 겨우 한 두 번 순행(巡行)하니,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알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풍속을 고쳐 박(薄)한 것을 뒤집어서 후(厚)한 데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단 1년으로 나라를 바로잡고, 3년이면 성과를 올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덕(德)으로써도 1년 동안에는 크게 다스릴 수 없고 3년이라야 성과를 올릴 수 있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자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강명 정대(剛明正大)한 자를 택(擇)하여 감사(監司)를 삼되, 그 임무를 오래 맡도록 하여 3년이 지나서야 체차(遞差)하면, 완한(頑悍)한 풍속이 점점 혁신 될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예전에는 1향(鄕) 가운데에 정직(正直)한 품관(品官)1, 2원(員)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아서 풍속을 바로잡게 하고 이름하기를 유향소(留鄕所)라고 하였었는데, 혁파(革罷)한 이래로 향풍(鄕風)이 날로 투박(渝薄)하여졌다.’고 합니다. 신(臣)의 생각에도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세워, 강직한 품관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으면, 비록 갑자기 야박한 풍속을 변모시킬 수는 없더라도 또한 향풍(鄕風)을 유지(維持)하여 완흉(頑兇)한 무리가 거의 조금은 그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감사(監司)의 임기(任期)를 3년으로 하자는 법은 만일 그가 어질면 가(可)하나 혹 용렬(庸劣)할 것 같으면 폐단을 백성에게 끼칠 것입니다. 또 풍속(風俗)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변모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1기(期) 안에 순행(巡行)함이 2, 3차(次)에 불과(不過)하니, 풍속의 박악(薄惡)함을 어느 겨를에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예전에도 유향소(留鄕所)가 있었으니, 만약에 다시 세우면, 완은(頑嚚)한 무리는 방자(放恣)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이 말하기를,
“혹은 유향소(留鄕所)가 향풍(鄕風)을 유지하는 데에 유익(有益)하다고 이르고, 혹은 유향소(留鄕所)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도리어 폐단을 받는다고 이릅니다. 대저 법(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려서 행하니, 요(要)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니, 관리가 봉행(奉行)하지 않으면 비록 신법(新法)을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유익하겠는가? 풍속(風俗)이 박악(薄惡)함은 마땅히 점차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원전】 11 집 313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풍속-풍속(風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주D-001]완한(頑悍) : 완악하고 독살스러움.
[주D-002]수포(搜捕) : 수색하여 체포함.
[주D-003]근심(根尋) : 철저히 찾아냄. 뿌리를 뽑아 버리듯 남김 없이 찾아냄.
[주D-004]음일(淫佚) : 남녀 사이의 음란한 교제.
[주D-005]능범(陵犯) : 업신여겨 범(犯)함.
[주D-006]유향소(留鄕所)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지방 수령(守令)의 정치를 돕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나라의 정령(政令)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를 막고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도와주었음.
[주D-007]완은(頑嚚) : 완고하고 도리에 어두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