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사계 김장생 2

이조 판서(吏曹判書)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시장

아베베1 2013. 7. 8. 05:39

 


사계전서 제48권 / 부록(附錄)

행장(行狀) [송시열(宋時烈)]       

본관은 전라도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이다.
고조(高祖) 휘(諱) 극뉵(克忸)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다. 고조비(高祖妣)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비(曾祖妣) 영산 신씨(靈山辛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비(祖妣)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계휘(繼輝)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요, 자는 희원(希元)이니, 그 선대(先代)는 대개 신라(新羅)에서 나왔다. 신라 때 왕자(王子) 가운데 흥광(興光)이란 분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광주(光州)로 은둔하여 서민(庶民)이 되어 숨어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이곳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더욱 창성하여 8대를 잇달아 평장사(平章事)가 되었으니, 동의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한 것은 김씨(金氏)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대대로 현달한 분을 배출하였다. 좌의정 휘 국광(國光)은 두 번이나 훈맹(勳盟)에 참록(參錄)되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바로 광원공(光原公)의 고(考)이시다. 대헌공(大憲公)의 자는 중회(重晦)이고 호는 황강(黃岡)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빼어나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해 우뚝이 큰 인물이 되었다. 이에 당대의 명현(名賢)인 사암(思菴) 박순(朴淳)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모두 공을 추중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항상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명(短命)하여 미처 품은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였으므로 조야(朝野)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정부인(貞夫人)은 참찬(參贊)을 지낸 이간공(夷簡公) 신영(申瑛)의 딸이며, 고려조에서 태사(太師)를 지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7월 8일 신시(申時)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장중(莊重)하여 웃고 떠드는 것을 함부로 하거나 놀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미 공의 덕량과 기국의 됨됨이를 알아보았다. 11세 때에 모친인 신 부인(申夫人)이 돌아가시고 부친인 대헌공이 지방으로 쫓겨남에 따라 조부인 찬성공이 맡아 길렀다. 찬성공은 선생이 나이 어리고 약한 것을 안쓰럽게 여겨 항상 슬하에만 두고 스승을 찾아가 수학(受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금 자란 뒤에는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고 세속의 영리(營利)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처음에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사서(四書)와 《근사록》 등의 책을 배웠는데, 온 힘을 다 기울여 탐구하면서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니, 이때부터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이에 대헌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이미 이러하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장성해서는 율곡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성학(聖學)의 심오함을 두루 듣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실행하면서 자임(自任)하기를 매우 중하게 하니, 율곡 선생의 기대와 허여가 매우 깊었다.
을해년(1575)에 대헌공이 평안 감사로 나갔는데, 평안도는 본래 번화한 곳으로서 놀이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성색(聲色)을 즐겼으나, 선생은 매번 부친을 찾아뵙는 여가에도 정신을 가다듬어 스스로를 지키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모두들 다른 사람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점이라고 하면서 칭송하였다.
만력 무인년(1578)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유일(遺逸)을 널리 찾아 등용할 때 ‘성인의 경전에 조예가 깊고 옛날의 교훈을 돈독히 믿는다.[沈潛聖經 篤信古訓]’는 것으로써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81)에는 대헌공이 사신으로 경사(京師)에 가게 되어 선생이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조에서 ‘재랑(齋郞)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고 아뢰어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과 자리를 서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이 행차에서 만여 리가 넘는 먼 길을 왕복하였는데, 오가는 동안에 부지런히 봉양하면서 성효(誠孝)를 극진하게 하였다. 이때 심지어는 숟가락을 뜨는 숫자까지도 옆에서 헤아리면서 편안한지의 여부를 살폈다.
임오년(1582)에는 다시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다 하여 승서(陞敍)하는 명이 있었다. 이해에 대헌공이 서거하였는데, 여묘살이를 하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다 마쳤다. 상복을 벗고서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여 체차되었으며, 곧바로 다시 전의 명령으로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후에 물러났다. 이어서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무자년(1588)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경인년(1590)에 규례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로 승진하였다. 신묘년(1591)에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가서는 잔폐된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시정하였는데, 한결같이 충서(忠恕)로써 정사를 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노(倭奴)가 침입하였는데, 군대에 관한 일이 아주 번잡하고 백성들이 몹시 지치고 쇠약해졌다. 그런 처지에서도 선생은 책응(策應)하고 위무(慰撫)함에 있어서 모두 마땅하게 조처하였으며, 피난하여 온 사대부(士大夫)들도 정성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은 편안하고 떠도는 자들도 객지를 떠도는 괴로움을 잊었다. 그러자 방백(方伯)이 ‘모든 일에 성심을 다하였으며, 정사를 함에 있어서 번거로움이 없다.’고 포계(褒啓)하였다.
병신년(1596)에 임기가 만료되어 연산(連山)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사가 남하(南下)하자, 선생은 호남(湖南)으로 가 군량(軍糧)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을 마치고 복명(復命)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슨 일로 인해 면직되었다. 이에 해서(海西)의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는 막 난리를 치르고 난 뒤끝이라서 선비들이 학문 공부를 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선생은 문인(門人) 및 자제(子弟)들과 밤낮으로 강송(講誦)하며 강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다시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 여름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과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언관(言官)이 너무 갑작스럽게 승진하였다고 논하여 체직되었다.
기해년(1599) 봄에 양근 군수(楊根郡守)와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여 체차되었다. 얼마 후에 다시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었는데, 은명(恩命)을 여러 차례 사양하는 것은 온편치 못하다 여겨 나가 사은숙배하였다. 가을에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었다. 이때 경기도 일원이 난리를 겪은 지 오래되지 않은 탓에 백성들이 조락하여 초췌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음을 다해 무마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거의 회복되었다.
신축년(1601)에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특별히 부름을 받고 나아가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서 국의 일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신병으로 인해 공직(供職)하지 못하였다.
임인년(1602) 봄에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이 용사(用事)하면서 크게 함정을 설치해 놓고는 사류(士類)들을 금고(禁錮)시키자, 선생은 서울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서 마침내 향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계묘년(1603) 여름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을사년(1605) 겨울에 파직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광해군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곧이어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바뀌어 제수되었다.
계축년(1613)에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모살(謀殺)하고, 모후(母后)까지 해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무뢰배인 박응서(朴應犀) 등이 행상(行商)을 살해하고 약탈한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자, 이이첨이 박응서 등을 꾀고 협박하여 영창대군을 끌어들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때 선생의 서제(庶弟)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 등이 모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는데, 얼마 뒤에 육시(戮屍)를 하고 역률(逆律)로 논하였다. 이는 이이첨의 무리가 선생까지 해치려고 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의 온 집안이 연좌(緣坐)될 것이라고들 하면서 친구 중에는 벌벌 떨면서 화를 늦출 방도를 찾아보려고 도모하는 자도 있었으나, 선생은 태연한 자세로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만,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유사(有司)가 법제상 연좌시킬 수 없다고 하였고, 또 대신(大臣)의 건의가 있었으므로 일이 거기에서 그치게 되었다.
김경손이 체포되어 심문받을 적에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장생도 이 일에 관여하여 알고 있는가?” 하니, 박응서가 “김장생은 어진 사람입니다. 저희들이 처음 모의를 할 적에 그가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정협(鄭浹)이 무복(誣服)함에 미쳐서도 심문할 적에 역시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이 이후로는 시골로 물러나 살면서 문을 닫아건 채 외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오직 좌우에 경서(經書)를 놓아두고는 깊이 빠져 들어서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사되자, 상이 곧바로 하교하기를, “김장생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고 하고는 드디어 사헌부 장령을 제수한 다음, 소명(召命)을 내려 불렀는데, 선생은 상소를 올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훈재(勳宰)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규계하고 권면하였는데,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저는 일찍이 경천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가 갑작스럽게 그대들의 손에 의해 세워질 줄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인간 윤리를 바로 세우고 거의 망해 가는 국가를 다시 붙잡아 세운 것인바,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없을 크나큰 의거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모든 일이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선후책(善後策)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말하는 자들이 틀림없이 ‘당초에 의거를 일으킨 것이 종묘사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부귀공명을 위해서 한 짓일 뿐이다.’라고 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에도 이르기를, ‘끝없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몹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그 임금을 어떻게 보도(輔導)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 즉위한 우리 임금께서는 춘추가 젊어서 한창때이고 자질도 어려서부터 빛났으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흥성할지 쇠할지, 길해질지 흉해질지가 결정되는 중대한 고비입니다. 따라서 극진한 말과 지극한 의론을 가지고 날마다 앞에서 진달하여 잘 함양하고 훈도하여 성덕(聖德)을 성취시켜 기어이 삼대(三代) 시대 이전의 정치를 구현하도록 하여야만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당대에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풀려난 것과 같아서 기갈이 심한 나머지 먹고 마시게 하기 쉬운 경우와 같습니다. 그런즉 맹자(孟子)가 이른바 ‘일을 여느 때의 반만 해도 공은 배나 된다.’고 한 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예전대로 그럭저럭 시간이나 때우면서 그대로 두고 서둘러 구제하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저들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난리 뒤의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행정과 과외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모두 탕감하거나 줄여 주고, 공안(貢案)을 다시금 개정하여 수입을 계산하여 지출하고, 방납(防納)하는 길을 막아 침탈하는 폐단을 영원히 근절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마땅히 불속이나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듯이 서둘러서 해야 할 것이요,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적신(賊臣)이 국사(國事)를 맡아 다스리면서 그의 무리들이 크게 불어나서 모후(母后)를 유폐(幽閉)하고 천륜을 끊었으니, 그 죄가 더할 수 없이 크기는 합니다. 그러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체모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형(五刑)과 오류(五流)는 경중이 크게 다르니, 저울질을 하듯이 힘써 중정(中正)을 취하여 해야지, 혹시라도 기분에 따라서 하여 도에 넘치는 잘못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혹자는 오왕(五王)이 화(禍)의 불씨를 남긴 일을 가지고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군자의 말이 아닙니다. 왕자(王者)가 법을 씀에 있어서는 오직 그 실정(實情)과 죄상(罪狀)이 어떠한가만을 살펴볼 뿐이지,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편파적인 것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활짝 여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쪽 편이냐 저쪽 편이냐를 따질 것 없이 어진 인재면 등용해야 하고, 길고 짧음을 재어 보아서 적합한 인물이면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료(百僚)들이 서로 조심하고 협력해서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이룩한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난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이익을 독차지한 일들 가운데 말할 만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전선(銓選)과 과거(科擧)와 형옥(刑獄)에 관련된 일들은 모두 돈을 얼마나 바쳤느냐에 따라서 처리하였습니다.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고달픔을 겪었던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바르게 시작하는 초기를 당해서는 의당 교화(敎化)의 근원을 맑게 하고 고질적인 폐단을 개혁하는 말로 날마다 성상께 진달하여 성총(聖聰)을 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의당 청백(淸白)과 근신(謹愼)을 지키면서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요,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大將)이 하던 짓을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공사(公私) 간에 다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제공(諸公)이 이 서신을 받고는 탄복하면서 드디어 주상에게 올렸다. 그러자 상은 몹시 칭찬하면서 지론(至論)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그대는 속히 서울로 올라와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선생은 서울로 들어와 다시 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상이 장차 사묘(私廟)에 친제(親祭)하려고 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그에 대한 축사(祝辭)를 의논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와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자, 모두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친손(親孫)으로서 선묘(宣廟)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니, 방지(旁支)인 자가 들어와서 후사(後嗣)를 이은 것과는 다르고, 이미 선묘를 고(考)로 칭하지 않았으니만큼 사친(私親)을 고라고 칭하더라도 고가 둘이 되는 혐의는 없다. 그러니 마땅히 고로 칭하고 자(子)로 자칭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겨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의 법통(法統)은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춘추》의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희공(僖公)을 태묘(太廟)에 올렸다.’고 한 것을 보면, 공자(孔子)의 깊은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4전(傳)의 뜻도 모두 희공을 민공(閔公)의 아버지로 보았습니다. 이는 동생인 민공이 형인 희공의 뒤를 이었지만 부자 사이가 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선제(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잇고서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를 높여 황고(皇考)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 범씨(范氏)는, ‘선제는 소제에게 손자가 되므로 선제가 자기 아버지를 황고라 칭한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은 끝내 이에 대해서 옳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의 종통(宗統)에 합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또 이에 대해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의에 벗어난 것이 너무 심하다. 선제가 손자의 항렬로서 소제의 뒤를 이어 대통을 이어받았으니, 자기의 사친을 올려 위로 할아버지의 뒤를 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선조의 대통을 이으셨습니다. 그런데 또 성상의 사친을 끼워 넣어 위로 조묘(祖廟)를 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소종을 대종에다 합친다고 하는 것으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를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사친을 칭하여 고(考)라고 한다면 상복(喪服)도 반드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찌 들어와서 대통을 이어받고서도 자기의 사친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선제가 사황손(史皇孫)을 고라고 칭하고 또다시 그 위에 황(皇) 자를 보태어 명위(名位)가 너무나도 높았으므로 정자(程子)가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의를 어그러뜨렸다고 한 것이지, 고라고 칭한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황 자는 바로 대(大) 자나 현(顯) 자와 같은 뜻의 글자로서, 허자(虛字)인 것입니다. 정자의 뜻은 단지 사친에게 고 자를 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또 그렇게 하면 고위(考位)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집안에서는 단지 대통을 계승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고 형이 아우의 뒤를 잇더라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어찌 고위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서 정밀하게 살펴보지 못하고서 가면 갈수록 자꾸만 틀린 말만 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이제 마땅히 정자의 설에 따라서 숙부라 칭하고 조카라고 칭하는 것이 명분상으로나 의리상으로나 분명한 전거가 있어서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그대의 학문이 대단히 높고 숙덕(宿德)이 많다는 말을 듣고는 늘상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그대가 올라온 뒤에 마침 나라에 제사가 있어서 곧바로 만나 보지 못하였는바, 당초에 지성으로 기다리던 뜻과 크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나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몹시 간절하게 위로하였다. 이에 선생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어 아뢰기를,
“사묘(私廟)의 칭호에 대해서는 소신이 감히 함부로 논의할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헌부(憲府)의 직을 맡고 있는 몸이기에 감히 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이렇게 성안을 우러러뵙게는 되었으나, 정신이 혼모하고 말이 어눌하여 아뢰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품고 있는 뜻을 제대로 다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되기에 감히 짤막한 차자를 미리 지었다가 올립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품 안에서 그것을 꺼내어 올렸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학문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토론하여 그 의리를 정밀하게 추구해서 반드시 이를 몸에서 체득하고 일에서 증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이 없을 때에는 이 마음이 혼연(渾然)하여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고 담담하기가 고요한 물과 같다가, 한 생각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구분을 살펴 사욕(私慾)을 극복하는 것이 맹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선(善)을 확충하는 것이 폭넓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거지에 있어서 저절로 천리(天理)의 바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이 말한 ‘정밀하게 선택하고 한결같이 지킨다.[惟精惟一]’는 것이며, 공자(孔子)가 말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천리의 예를 회복한다.[克己復禮]’는 것이며, 자사(子思)가 말한 ‘보고 듣지 못하는 데에서도 두려워하고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간다.[戒懼謹獨]’는 것이며, 맹자(孟子)가 말한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고 사단을 확충한다.[收放心擴四端]’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현들이 서로 간에 전수(傳受)한 지결(旨訣)은 이와 같은 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한 생각에는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달려 있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면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이르기를,
“전번의 상소 내용은 매우 좋기는 했으나 일이 이미 정해진 뒤여서 그대로 따르지 못하였는바, 몹시 미안하다.”
하였다. 얼마 뒤에 선생을 체차하고는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삼았다.
6월에 연신(筵臣)의 건의에 의하여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설치하고 선생을 여기에 임명하여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는 한편 원자(元子)를 보양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당시에 사부(師傅)의 직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 엄선된 인물이었다. 선생이 노성(老成)한 숙망(宿望)으로서 매번 서연(書筵)에서 글을 강론하는 이외에도 일에 따라 규계하고 권면하니, 원자가 몹시 공경하면서 중히 여겼다. 얼마 뒤에 경연에 입시하였을 때 노병(老病)으로 인하여 종사할 수 없다는 뜻을 힘써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비상한 임무는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은 결코 적임자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유(師儒)의 직책은 반드시 덕망이 있는 자가 맡아야만 선비들이 보고 감동하여 흥기되는 법이다. 근자에 와서 선비들의 습속이 전과 달라지고 있으므로 그대를 이 직에 임명하여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8월에 다시 경연에서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고 귀까지 어두우면서도 선뜻 물러날 것을 결단치 못하는 것을 늘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이제 물러나 고향에서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상이 위로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선영(先塋)에 가서 성묘하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래도록 머물러 있지 말고 잘 다녀오라.”
하였다. 그러고는 특별히 궐내에서 술을 내리며 위로한 뒤 본도에 명하여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자도 직접 면대해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하였다.
선생은 향리로 돌아와 성묘하고 곧바로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겸하여 연로(沿路)에서 본 흉년이 든 상황과 민간의 고통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올리니, 상이 또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속히 서울로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선생은 성상의 은혜가 비록 감격스러웠으나, 늙은 나이로 길을 떠날 수 없다고 여기고는 드디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잠규(箴規)를 붙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장자(張子)는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는다.’ 하였고, 사마온공(司馬溫公)은 ‘나는 평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이런 말에 마음을 쓰시어 하나의 정사와 하나의 호령이라도 모두 마음에 되물어서 옳고 그름을 자세히 살펴서 행하시고, 깊은 밤이나 홀로 계실 때에도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여 신명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그러신다면 성학(聖學)의 성취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면서 탄복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2월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자, 선생은 공주(公州)로 나가 대가를 맞이하였다. 역적들이 평정되고 상이 환도(還都)할 때, 상이 하교하기를,
“이 길로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 것이 좋겠다.”
하자, 선생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상경하여 상의원 정(尙衣院正)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다.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으며, 인하여 말미를 청하여 귀향하였다.
6월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소회를 다 진술하였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신은 너무나 깊은 은총을 받았는데도 털끝만큼의 보탬도 되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몸은 전야에 있지만 무엇인가 보답해야겠다는 마음만은 절실합니다. 이에 삼가 다음의 13개 사항을 조목별로 진달함으로써 앞에서 직접 아뢰는 일에 대신할까 합니다. 그것은 대본(大本)을 세우는 것, 구업(舊業)을 회복하는 것, 홍범(洪範)을 높이 받드는 것, 소학(小學)을 강하는 것, 성효(聖孝)를 다하는 것, 사전(祀典)을 공경히 하는 것, 구족(九族)을 가까이하는 것, 군신(群臣)들의 뜻을 체득(體得)하는 것, 정무(政務)를 친히 처리하는 것, 민폐(民弊)를 제거하는 것,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는 것, 군정(軍政)을 잘 닦는 것, 금위(禁衛)를 엄하게 단속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것을 보니, 참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들이다. 그러니 내가 감히 이것들을 가슴속에 새겨 힘써 실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에 특별히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사헌부가 말썽을 부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를 잡아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는 중이었는데, 일이 자전(慈殿)의 일과 관련되었으므로 상이 엄한 전지(傳旨)를 내려 헌부의 관원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정원이 다시 그 전지를 봉환(封還)하였으므로 상은 더욱 노하여 정원의 관원을 꾸짖었다. 이에 선생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이어 그에 대한 일을 언급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폐조(廢朝) 때 인심을 잃은 일이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그중 내수사의 노비로 인한 폐단이 절반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법관(法官)이 나서서 그들을 단속하고 다스린 일이 있었다고 들어보셨습니까? 오늘에 와서는 위에 밝고 거룩하신 전하가 계시기 때문에 아래에서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이 참으로 자전의 전교를 받들기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정원이나 헌부를 추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에 정원이 주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하면서 복역(覆逆)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사알(司謁) 하나만 두면 충분하지, 승지를 둘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간도 오직 입 다물고 있기만 한 채 아무런 규정(糾正)하는 일이 없다면, 이는 단지 일개 의장마(儀仗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장차 그런 대간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 일이 비록 작은 잘못인 듯하지만, 그 병의 뿌리를 캐 보면 모두가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작은 문제라고 하여 소홀히 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틀림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결국 정사(政事)로 나타나고, 그 정사가 일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밀하게 살피소서. 그리하여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을 이겨 내지 못한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단호하게 징계하여 끊어 없앰으로써 다시는 그런 마음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들이기를 마지않았다. 10월에 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직임에 나아갔는데, 경연 신하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아주 늙은 사람으로서 소명을 받고 이미 올라왔으니, 의당 그로 하여금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원자(元子)를 보도(輔導)하게 한다면, 도움 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미 직질(職秩)이 승진되었으니, 별도로 칭호를 정하여 원자를 가르치게 하라. 그리고 나 역시 수시로 접견하고 싶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호칭을 고쳐 강학관(講學官)으로 삼았다.
을축년(1625) 1월에 원자를 책봉(冊封)하여 세자(世子)로 삼고는 선생을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그동안에 왕세자를 부지런히 교도(敎導)한 공로에 대해 표창한 것이었다. 얼마 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말미를 받아 시골로 돌아갔다. 떠나면서 상소를 올렸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금 한번 서울을 떠나고 나면 영원히 전하를 다시 뵈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에 더욱 힘쓰시고 성덕(聖德)을 더욱 높이소서. 그리하여 마음을 정대하게 가져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사로움이 없게 하시고, 일 처리를 함에 있어서 확고한 단안을 내려서 우유부단하게 하는 잘못이 없도록 하소서. 또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실제가 어떠한지만을 보시고 거짓된 것에 현혹되지 마시며, 아랫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하기를 힘쓰고 겉치레로 꾸미기를 일삼지 마소서. 또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마시고, 도를 지키는 선비를 홀대하지 마시며, 받아들이는 일은 되도록 넓게 하시고, 채택하는 일은 되도록 정밀하게 하소서. 그리고 선입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막지 마시고, 일반적인 규례에 얽매여 사기(事機)를 놓치지도 마소서. 그리하여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극한 치세를 이루신다면, 신은 비록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더라도 다시는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면서 이어 이르기를,
“내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영원토록 떠나 있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돌아가서 선영에 성묘한 다음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은 이미 향리로 내려온 뒤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상이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을 당하였다. 이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진위(進慰)하고 10일을 머물러 있다가, 향리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고하고는 지레 돌아왔다. 그러자 정원이 아뢰기를,
“김장생이 장차 내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덕이 높은 사람으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불러와야 마땅합니다. 지금 이미 올라왔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성상의 현인을 탐내고 덕 있는 이를 좋아하는 도에 있어서는 그가 임의대로 떠나가게 두어 없어진 것조차 몰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못 가게 붙잡도록 명하였으나, 이미 길을 떠난 뒤였다. 선생은 곧바로 상소를 올려 사례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슬픈 생각을 되도록 억제하시고 예법에 맞게 하실 것이며,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여 변례(變禮)에 대해 강구하소서. 신 역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처음에 올린 상소에서 대강 소견을 개진하였으므로 슬픔 속에 계시는 전하께 지금 감히 다시금 번거롭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당시에 사친(私親)에 대한 전하의 복제(服制)에 대해 혹자는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고, 혹자는 ‘당연히 자최장기(齊衰杖期)를 입어야 한다.’ 하고, 혹자는 ‘당연히 부장기(不杖期)를 입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결국 자최장기를 입는 것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그에 대해 옳지 않다고 여겼으므로 상소의 끝에 살짝 언급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를 올려 ‘사친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예묘(禰廟)로 삼고 그에 따라서 계운궁에 대해 삼년복을 입으며, 백관들은 종복(從服)을 입게 하라.’는 내용으로 청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무리인 이의길(李義吉)도 서로 잇달아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을 추숭(追崇)하라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은 고금(古今)의 변례(變禮)로, 한번 잘못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라고 여겼다. 이에 드디어 경전(經傳)의 내용을 참고하고 고금의 전례를 상고해 본 다음 글을 지어서 조정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박지계의 상소에서는 《의례》를 인용하면서 오늘날의 일에 대한 증거로 삼았습니다. 《의례》와 《의례도식(儀禮圖式)》의 뜻을 살펴보면, ‘정통(正統)으로 대를 이을 아들이 일찍 죽거나 몹쓸 병으로 인하여 뒤를 이어 즉위하지 못하여 그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잇거나 증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을 경우,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현(鄭玄)의 주(注)에는 ‘사위(嗣位)한 사람에 해당한다.’고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도 이르기를,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당연히 즉위해야 하는데도 폐질로 인하여 즉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즉위하게 된 경우라면, 이는 자기 증조에게서 나라의 대통을 전해 받은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무릇 방계(傍系)에서 들어와 정통을 이은 사람과 당연히 정통을 이을 사람이 이은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대원군(大院君)의 경우는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 즉위해야 할 신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상 역시도 자신이 당연한 후계자 신분으로서 증조에게서 대통을 물려받은 사람과는 같지 않습니다. 지금 이 조항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는데, 이는 예경의 근본 뜻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박지계의 상소에 이르기를, ‘자식으로서는 아버지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방계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사람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하여 스스로 사친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 취사선택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박지계는 상소에서 또 《근사록》에 나오는 ‘천자는 나라를 세우고 제후는 종통(宗統)을 빼앗는다.’고 하는 설을 인용하였습니다. 무릇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라고 한 말은, 한(漢)나라의 소하(蕭何)나 조참(曹參)과 같이 제후가 되었을 경우에 비록 지자(支子)이기는 하지만 적자(嫡子)의 종통을 빼앗아 자기에게로 옮겨가 자신이 봉해진 나라에 사당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사람이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는 말은, 아버지가 사서인(士庶人)인데 아들이 제후가 되었을 경우, 장자의 종적(宗嫡)을 빼앗아 자기가 그 제사를 맡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임금이 사친을 위하여 사당을 세운다는 뜻이겠습니까. 가령 선묘(宣廟)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지금의 주상을 책봉하여 세손(世孫)으로 삼으셨다면, 주상께서는 선묘의 후계자가 되신 것입니까, 아니면 대원군의 후계자가 되신 것입니까?
박지계의 상소에서는 또 위(衛)나라의 첩(輒)이 자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데 대해 말한 공자(孔子)의 설을 인용하였습니다. 무릇 공자가 위나라의 첩을 죄준 것은, 실로 위나라의 첩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죄준 것이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것을 그르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상(商)나라 탕(湯) 임금의 손자인 태갑(太甲)과 주(周)나라 평왕(平王)의 손자인 환왕(桓王)이 모두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자기 아버지를 추숭(追崇)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또 한(漢)나라 소제(昭帝)의 종손(從孫)인 선제(宣帝)도 자기 아버지인 사황손(史皇孫)을 묘(廟)에 들이지 않고서 단지 황고(皇考)라고만 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정자(程子)와 범진(范鎭)과 호인(胡寅)은 오히려 예를 어그러뜨리고 윤리를 어지럽힌 일이라고 배척하였고, 주자(朱子)는 그 사실을 《자치통감강목》에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박지계의 상소대로라면 한나라 선제가 소제를 아버지로 삼은 일 역시 위나라의 임금인 첩이 했던 짓과 같은 것이 되며, 정자와 주자의 말 역시 틀린 것이란 말입니까.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는 종조(從祖)로서 종손(從孫)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제(齊)나라 울림왕(鬱林王)과 위(魏)나라 문성제(文成帝)는 손자의 신분으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비록 자기 아버지를 높여 황제로 삼기는 하였지만, 역시 묘에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숙부(叔父)로서 조카의 뒤를 이었으며, 명(明)나라 건문제(建文帝)는 적손(嫡孫)으로서 태조(太祖)의 뒤를 잇고서는 자기의 아버지인 의문태자(懿文太子)를 추숭하여 묘에 들였는데, 그것은 《의례》의 ‘적손은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는다.’고 한 설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이후로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이들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할아버지로서 손자의 뒤를 잇거나 숙부로서 조카의 뒤를 이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소목(昭穆)이 도치되는데도 단지 대통을 이은 것으로 순서를 삼은 것은, 제왕(帝王)의 경우는 사서(士庶)와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천륜(天倫)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입계(入繼)의 뜻도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나가서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경우와 들어와서 대통을 이은 경우는 그 일이 비록 다르지만, 사친(私親)을 돌아보아서는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뜻으로는 예가(禮家)들이 말한 ‘나가서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거나 들어와서 뒤를 이은 자는 본생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설을 근거로 삼아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선생에게 수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주된 뜻은 ‘주상은 다른 사람의 후사(後嗣)가 된 경우와는 다르니, 자기 본생의 어버이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생이 답하기를,
“정경세(鄭經世)와 이정귀(李廷龜) 두 사람이 단지 고(考)라고 칭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면서도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을 배척한 것은 그래도 처음에는 실수를 하였지만 뒤에는 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는 그들의 주장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드시 삼년복을 입게 하고자 하시니, 혹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고금의 공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영공(令公)의 차자(箚子) 안에, ‘정경세가 고라고 칭해야 옳다는 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고서도 자기 생부에 대해서 고라고 칭한 경우가 어느 경전에 나와 있으며, 고라고 칭하면서 삼년복을 강복(降服)하는 경우 역시 어느 경전에 나와 있는가. 지난날에 고라고 칭해야 한다고 한 말이 옳다면, 지금 와서 강복해야 한다고 한 말은 틀린 것이고, 오늘날에 강복해야 한다는 말이 옳다면 지난날에 고라고 칭해야 한다고 한 말은 틀린 것이니,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 하셨는데, 그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이정귀와 정경세 두 사람을 힐책하신다면 옳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도리어 저를 힐책하려 드는 것은 어찌 너무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왕들 가운데에는 숙부나 할아버지로서 조카나 손자를 계승한 경우가 매우 많은데, 만일 영공의 뜻과 같이 한다면, 계승하게 된 임금에 대해서는 의당 ‘황종손(皇從孫)’이나 ‘황질(皇姪)’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의당 ‘효조부(孝祖父)’나 ‘효숙부(孝叔父)’라고 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저의 생각에는 의당 《통전》에 의거해서 자기 자신의 칭호는 ‘사황모(嗣皇某)’라고 칭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선황제(先皇帝)에 대해서도 역시 별다른 칭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선유(先儒)들의 정론이 없어서 감히 억설(臆說)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겠습니다. 예관이 이른바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으면서도 부자의 명분은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조상우(趙相禹)의 상소에서 한 말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호씨(胡氏)의 주장에 근본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온당치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렬이 높은 조부나 숙부가 손자나 조카의 항렬에 대해 아들이라고 칭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치가 없을 듯하기 때문입니다.
《의례》에 ‘적손(嫡孫)이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를 계승하였을 경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당 왕위를 이어받을 것을 자신이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손(衆孫)으로서 대통을 계승한 사람은 사친(私親)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중손으로서는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 ‘주상은 순서에 따라 뒤를 이어 즉위한 임금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 역시 적손(嫡孫)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공의 뜻은, 반드시 상께서 삼년복을 입고 또 상주(喪主)가 되어 조석(朝夕)의 궤전(饋奠)을 주관하도록 하려면서, 위(衛)나라 임금이 계씨(季氏)를 조문할 때 노(魯)나라 임금이 상주가 되었던 것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옛날에 노나라에서 계환자(季桓子)의 상을 당했을 때, 위나라 임금이 조문할 것을 청하자, 애공이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애공이 직접 상주가 되었습니다. 이는 계환자는 위나라 임금과 대등하게 빈주(賓主)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애공이 상주가 된 것으로, 이는 계환자의 상에 상주가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위나라 임금을 위하여 상주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을 가지고 오늘날의 일에 끌어다 댈 수 있겠습니까.
영공의 차자에 이른바 친제(親祭)를 할 경우에는 축문(祝文)의 호칭을 쓰기가 어렵다고 한 말은, 저의 생각 역시 그러합니다. 대체로 주상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이 이미 ‘효자(孝子)’라고 칭하고 있는데, 전하께서도 ‘자(子)’라고 칭한다면, 명분이 문란해질 것입니다. 또 이른바 ‘고(考)라고 칭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마다 모두 순조롭게 될 것이고, 고라고 칭할 경우에는 하나하나가 다 껄끄럽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박지계의 상소에 이르기를, ‘임해군(臨海君)은 아들이 없고, 광해군(光海君)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대원군(大院君)이 세 번째 아들이니, 주상께서 적통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애석하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 왕자 중에서 의안군(義安君)이 맏이이고, 신성군(信城君)이 그다음이고, 대원군은 서열상으로 다섯째인데, 의안군은 능원군을 후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주상께서 적통이 된다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이겠습니까. 주상께서는 지손(支孫)으로서 모후(母后)의 명을 받아 들어와서 선묘(宣廟)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명분과 의리가 아주 바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구차한 논리를 끌어다 붙여 천하 후세를 속인단 말입니까.
박지계는 또 말하기를, ‘대원군이 만약 생존해 계셨더라면 주상께서는 틀림없이 왕위를 양보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와서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하여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 같은 이가 지위(地位)를 얻지 못하였던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후세에 와서 아무리 공자를 존경한다 하더라도 감히 요순(堯舜)의 자리에 앉힐 수 없는 것은, 바로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공(周公)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섭정(攝政)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노(魯)나라에서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쓰는 것에 대해 참람하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명분과 자리는 거짓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의길의 상소에서는 말하기를, ‘대원군께서 만약 세상에 살아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성상께서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였을 것이다. 살아 계실 때에는 봉양하고 죽으면 제사 지내는 것은 차이가 있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종묘(宗廟)에 모시는 것에 대해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드러내 놓고 추숭하여 종묘에 들이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의 사친(私親)을 추숭한 일은 후세에서 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의 공(公)과 사(私), 득(得)과 실(失)에 대해 어찌 많은 말로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병인년(1626) 가을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선생을 찾아왔기에 이를 계기로 사친의 전례(典禮)에 대해 논변(論辨)한 것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이귀가 조정에 돌아가 차자를 올리면서는 ‘김장생도 지난날의 견해를 바꾸었다.’고 잘못 말하면서, 선생이 가정해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 설을 증명하였다. 이에 선생은 글을 올려 따졌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신과 이귀는 예론에 관한 소견이 본디 서로 맞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이귀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대충 논한 바가 있었는데, 이귀는 자세히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그때 신이 하였던 말 중에서 위아래는 다 떼어 버리고 자신의 견해와 비슷한 중간의 한 구절만을 뽑아 끌어다 대었으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신이 이 일에 관하여 갑자기 예전 견해를 바꾸지 못하는 것은 감히 늙어서 정신이 흐리다는 이유로 전후로 말을 달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묘년(1627) 봄에 서쪽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고 세자가 분조(分朝)하여 남하하였는데, 상이 유지(有旨)를 내려 선생을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삼았다. 선생은 명을 받고서는 곧바로 인근 경내로 나가 병력과 군량을 모집한 다음 행재소(行在所)로 실어 보냈으며, 몸소 분조로 나아가 면대하였다. 이는 인심을 모아서 삼남(三南)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랑캐들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분조에 있던 여러 재신(宰臣)들이 몹시 당황하여 세자를 받들고 영남(嶺南)의 외진 구석으로 이주하려고 하였으므로, 인심이 매우 소란해져 와해될 형세가 뚜렷했다. 이에 선생은 영남으로 이주하는 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님을 역설하고, 또 알현하기를 청하여 그에 관한 이해(利害)를 모두 진술하니, 세자가 ‘나의 뜻도 그러하다.’라고 하면서 수긍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언비어가 저절로 진정되었다.
3월에 문인들과 함께 강도에 갔다. 이때는 화약(和約)이 이미 이루어져서 적이 곧 물러가게 되었다. 상은 즉시 선생을 인견하고 위로하며 유시하기를,
“경은 노병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온 정성을 다하였기에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선생은 인하여 적병들의 기세가 조금 완화되었으니, 직명(職名)을 거두어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병들이 아직도 경계 지역에 있으니 그대로 직명을 띠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반드시 끝까지 마음을 다해 주어야 한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오늘날에 강화한 것은 진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척화(斥和)를 주장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그러나 혹자들은 당치도 않은 말을 떠들어 대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말한 것이 비록 지나쳤다 할지라도 그를 꺾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즘 진언했다가 견책을 받은 자가 서로 잇따르고 있으니, 뒷날에 누가 감히 할 말을 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고향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군사와 군량에 대해 조처를 취하고는 직책에서 벗어나 한가히 지냈다.
숭정 무진년(1628) 가을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재차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1629) 여름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김장생은 덕행이 높은 노유(老儒)로서 서울에 올라오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더라도 즉시 돌아가곤 하는데, 이는 나의 성의가 부족하고 예우가 소홀한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가 서울에 와서 오래도록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우상 이정귀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서울에서 생장하였는바,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선비가 아닙니다. 나이가 비록 많지만 상께서 정성과 예우를 극진히 하여 일반적인 규례에서 벗어나 특별히 대우한다면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즉시 따스한 내용의 교지를 내리고 또 가교(駕轎)를 타고 올라오라고 명하였으나, 선생은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손수 비답하기를,
“경은 국가의 대로(大老)로서 덕행(德行)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지금 만약 올라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다면, 사대부들에게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나를 일깨워 주는 도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곁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다.”
하고는, 소명을 계속해서 내렸으며, 그 내용 또한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이도 죽을 때가 다 되었고 정력도 이미 쇠약해진 터에 성상의 총애에만 연연해하면서 거취를 결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에 잇달아 상소를 올려 끝내 사면(辭免)되었다. 경오년(1630)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서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라갔다.
신미년(1631, 인조9) 5월에 갑작스럽게 몸이 조금 편찮았으므로 집사람이 손님을 거절하고 조용히 요양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문인들과 강론(講論)하기를 끊이지 않았으며, 기거(起居)와 흥침(興寢)을 평소와 다름없게 하였다. 8월에 이르러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3일 갑진일 유시(酉時)에 정침(正寢)에서 작고하셨다. 아, 애통하다.
당시에 둘째 아들인 판서공(判書公)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상을 당하자 문인들과 함께 일체 선생께서 평소에 정해 놓은 상례(喪禮)를 써서 장사 지냈는데, 대개 《가례(家禮)》를 주로 하면서 《의례》를 참작하여 쓴 것이었다. 막내아들 참판공(參判公)은 조정에서 관무(官務)에 매여 있다가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으나, 미처 뵙지 못하고 빈소(殯所)를 차린 뒤에야 도착하였다.
부음(訃音)을 아뢰자 상이 몹시 슬퍼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상주(喪主)에게 조문하고 부의(賻儀)도 성대하게 하였다. 세자는 강(講)을 중지하고 소식(素食)을 하였으며, 궁료(宮僚)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 어려서 공부할 적에 어긋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실로 김공 덕분에 계발되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이때에 선비들은 서로 들판에서 조문하고, 벼슬아치들은 서로 조정에서 조문하였다. 문인들은 면재(勉齋) 황간(黃榦)이 회암(晦菴) 주 부자(朱夫子)에 대해서 입었던 복식(服飾)에 의거하여 백포건(白布巾)에 수질(首絰)과 소대(素帶) 차림을 하고 상(喪)을 치렀다. 얼마 뒤에 연신이 아뢰기를,
“김장생은 덕행이 높은 선비로서 사문(斯文)에 공이 있으니, 의당 추증(追贈)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할 것이며, 또 장사 치르는 것도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본도에 명하여 호상(護喪)을 하고 봉분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이해 10월 19일에 진잠현(鎭岑縣)의 성북리(城北里)에 장사 지냈다.
그 뒤 병자년(1636)에 의논하는 자의 말로 인하여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얼마 뒤에 묏자리가 좋지 않아서 신사년(1641) 1월 9일에 연산현(連山縣) 고정산(高井山)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선조비(先祖妣) 허씨(許氏)의 산소 뒤편 곤좌(坤坐)의 등성이에 이장하였는데, 서북쪽으로 아버지인 대헌공(大憲公) 산소와의 거리는 겨우 1리 되는 곳이다. 비지(碑誌)와 묘표(墓表)가 갖추어져 있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인정이 많고 후하며 기풍과 모습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겸손하고 화평한 자질과 방정하고 확실한 지조는 저절로 도에 가까웠다. 선생은 일찌감치 가정에서의 훈계를 이어받아 이미 학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종사함에 미쳐서는 개연히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더니 마침내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는 데 뜻을 오로지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하는 자는 반드시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본연의 마음을 되찾아 힘써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글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의관을 단정히 갖춘 다음 공수(拱手)를 하고 무릎 꿇고 앉아서 온 마음을 다해 뜻을 쏟으면서 종일토록 푹 빠져 들었으며, 글자에서는 그 글자의 뜻을 찾고 글귀에서는 그 글귀의 뜻을 탐구하였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머리를 들어 깊이 생각하고 머리를 숙여 충분히 읽어서 반드시 그 뜻을 환히 꿰뚫어 알고 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낮과 밤을 지새면서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채 반드시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정밀히 생각하고 확실히 터득하는 것을 당무로 삼았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시종여일 하루같이 하였다.
선생은 《소학(小學)》을 학자의 기본으로 삼아 깊이 믿고 힘써 실천하여 종신토록 준칙(準則)으로 삼았다. 또한 매일 밤마다 《중용(中庸)》, 《대학(大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외우되, 돌려 가면서 충분하게 읽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듯이 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처음에는 스스로 재질이 노둔하여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와 같이 힘쓰기를 꾸준히 함에 미쳐서는 모든 이치가 환하게 풀렸으니, 글을 보고 이치를 분석함에 있어 날카로운 칼날로 고기를 해체하는 듯하여 막히거나 걸리는 곳이 없었다.
선생은 몸소 행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거경(居敬)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항상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아서 늘 맑고 고요하므로 외물(外物)이 침범하여 어지럽힐 수 없지만, 중인(衆人)들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흔들리는 탓에 마음이 움직일 때가 많고 고요할 때가 적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을 경(敬)으로써 곧게 한 다음에 학문을 하여야만 비로소 자리 잡을 곳이 있게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때에 처하거나 아무도 없어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적한 곳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엄숙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환하여 어두워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조존(操存)함이 날로 굳어지고 함양(涵養)함이 날로 익어져서 큰 근본이 이미 세워짐에 따라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이 각각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걸음걸이가 편안하여 척도(尺度)를 잃지 않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공손히 하고 삼가서 조금도 방심해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중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깊었는바, 다른 사람이 엄연한 그 기품을 바라보고는 무섭게 여겼으나, 가까이에서 얼굴빛을 보고 말소리를 들어보면 저절로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게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에 귀천(貴賤)과 노소(老少)를 따질 것 없이 모두 사모하고 기뻐하였으며, 감화되어 복종하였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에는 매일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예복을 갖추어 입은 다음 가묘(家廟)에 참배하고는 물러 나와서 서실에 들어앉아 조용히 책상을 대해 앉았으며, 절대로 사물(事物)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에는 엄연히 차서(次序)가 있어서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되 반드시 온 힘을 다하였고, 비속(卑屬)들과 어린이들을 잘 보살피되 반드시 두루 흡족하게 사랑하였다.
선생은 장사 지내는 예법에 있어서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을 지극히 갖추었고, 제사 지내는 예법에 있어서 정성과 공경 두 가지를 다 극진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기사년(1569)에 찬성공(贊成公) 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선생이 마침 해서(海西) 지방에 있다가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들어 눈물을 금치 못했는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음(訃音)이 들려왔다. 그리고 임진년(1592)에는 큰아들 은(檃)이 다른 곳에 있다가 왜적을 만나 해를 입었는데, 선생은 문득 온종일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의(誠意)가 순수하고 독실하여서 그런 것이었다.
선생은 제부(諸父)를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였으며, 아우와 누이들에 대한 우애는 늙을수록 더욱더 도타웠다. 이에 재물을 나눔에 있어서는 좋지 못한 것은 자신이 갖고 좋은 것은 모두 동생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김경손(金慶孫) 등이 비명(非命)에 죽자 추념(追念)하기를 하루같이 하여 애통해하는 뜻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 나와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 그 때문에 감동하였다. 그러니 은의(恩義)를 독실히 하고 윤리(倫理)를 올바로 하는 데 있어서 진선진미(盡善盡美)했다고 할 만하다.
벼슬한 행적에 드러난 것을 보면, 관직의 책임을 다함에 있어서는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봉행하였다. 중년(中年)에는 대부분 주현(州縣)을 맡는 직에 머물러 있었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왔다. 계해년(1623, 인조1) 이후로는 조정에 있은 날이 또한 많지 않았으므로 가슴속에 품고 있는 뜻을 끝내 다 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았으며, 일에 따라 바로잡고 구제하여 도움이 됨이 아주 많았다. 그러니 선생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 있다 하여 조금도 끊어진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도(治道)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천리(天理)를 밝혀서 왕도(王道)를 행하고, 인심을 바루어 나쁜 풍속을 바로잡으며, 기강을 진작시켜서 폐단을 개혁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았는데, 본말(本末)이 구비되어 있어서 모두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 빈말을 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스승과 벗들 사이에도 은혜와 의리를 모두 지극히 하였다. 송구봉(宋龜峯)의 온 집안이 화를 만나 곤궁하여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선생은 마음을 다해 주선해서 집안에 모시고서 봉양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조(仁祖)가 즉위한 뒤에는 선생이 여러 동문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송구봉의 원통한 사실을 드러내어 말하였으며, 그 유족들을 친동기간과 다름없이 대우하였다. 그리고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유감을 품은 자의 무함(誣陷)에 걸려들었는데, 그들은 정철을 간인(奸人)의 괴수로 지목하고는 인하여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는 큰 함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평소에 송강과 알고 지내던 사람까지도 혹 때를 틈타 돌을 던지면서 시론(時論)에 붙는가 하면, 조정에서 정철의 성명을 말하기조차 꺼린 지가 30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송강의 충직한 행실을 사모하여 항상 그의 마음 자취를 밝혔는데, 비록 헐뜯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뒤 계해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에는 등대(登對)하여서 송강이 무함에 걸려든 진상을 모조리 진달하고 관작(官爵)을 복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또 율곡 선생을 섬기되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선생은 바야흐로 상중에 있었는데, 스승을 위해 입는 상복(喪服)을 지어 입고 먼 거리에서 달려가 장례에 임하였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그 복을 입고 곡하였으며, 기일(忌日)에는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기를 평생토록 폐하지 않았다. 또한 구봉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우(師友)의 의리가 세상에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
선생은 후진(後進)을 대하고 이끌어 줌에 있어서 아무리 어리고 천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마음을 열어 성의를 보이면서 반복하여 이끌어 주되, 자세하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글을 읽힘에 있어서는 반드시 구두를 분명하게 떼고 의리를 깊이 탐색하게 해서 배우는 자가 스스로 그 뜻을 터득하여 마음으로 체득하고 일로 징험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대요(大要)로 말하면 반드시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하고 궁행(躬行)을 실제로 삼아서 각자의 재품(材品)에 따라 다방면으로 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배우는 자들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면서 실천하기를 힘쓰는 것을 보면 마음으로 기뻐하고 안색에 나타내어 마치 당신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겼으며, 혹 하는 것이 마음에 절실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용하고 자상하게 경계하여 주었다.
선생이 글을 가르치던 차서(次序)는 처음에는 《소학》과 《가례》를, 다음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다루어 배우는 자들의 학문의 근본을 배양하고 학문의 길을 열어 준 다음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가르쳤는바, 질서 정연하게 차서가 있어서 단계가 아주 엄격하였다. 그리고 과거 공부와 문장을 짓는 말단적 학문에 대해서는 일찍이 말과 의논에 언급한 적이 없었다.
선생은 일찍이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이(理)와 기(氣)는 둥글둥글 뭉쳐 있어서 본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두 군데서 나온다고 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호발(互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투철한 견해라고 볼 수가 없는바, 이와 기를 두 갈래로 갈라놓은 잘못을 범한 것이다. 율곡 선생이 ‘발한 것은 기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이다. 이라는 것은 태극(太極)이고 기라는 것은 음양(陰陽)이다. 이제 태극과 음양이 서로 간에 동한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태극과 음양은 서로 간에 동하게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와 기가 서로 간에 발한다고 한 것이 어찌 틀린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비록 성인이 다시금 나온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말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대학》에 나오는 물격(物格)과 지지(知至)에 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른바 ‘물리(物理)의 극처(極處)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것은, 사물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이미 그 극처에까지 나아갔으므로 다시 더 나아갈 데가 없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모두들 나의 앎이 극처에 도달한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 말이 옳다면, 그것은 지지이지 물격이 아니다. 사물의 이치로 말하였을 때는 그것을 물격이라고 하고, 내 마음으로 말하였을 때는 그것을 지지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한 가지 일이기는 하지만, 말에는 각각 그 마땅함이 있는 것이니, 이를 분명하게 따져 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이에 대해서 또 이르기를, ‘사물 이치의 극처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것은, 물리가 내 마음에 이르러 왔다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자면, 「손님을 초청하니까 손님이 왔다[請客而客來]」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주자가 말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대개 사람이 사물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다 알아서 사물 안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이미 그 극처에 도달하였을 경우, 나에게 있는 앎 역시 내가 나아간 바에 따라서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정자(程子)가 이른바 ‘저것을 알자마자 바로 이것도 알게 된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물의 이치가 본디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어찌 그것이 내 마음속으로 다시 올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또 일찍이 《중용》에 나오는 계구(戒懼)와 근독(謹獨)에 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계구는 동(動)과 정(靜)을 겸해서 한 말이고, 근독은 단지 동 한쪽 면만을 두고 한 말이다. 대개 집주(集註)에서 계구에 대해서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常存敬畏]’고 한 말은, 동과 정에 관계없이 일찍이 계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비록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雖不見聞 亦不敢忽]’고 한 말은, 비록 남이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계구하는 마음을 감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근독에 대해서 ‘이미 항상 계구한다.[旣常戒懼]’고 한 말은 위의 글에서 이른바 ‘계구는 동과 정을 겸해서 한 말이다.’라고 한 것을 다시금 되풀이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더더욱 삼가야 한다.[於此尤加謹]’고 한 말은 비로소 동의 초기에 나아가서 더더욱 삼가게 한 것이다. 호계수(胡季隨)가 물은 바에 대해 주자가 답하면서 계구(戒懼)를 정(靜)에 소속시키고 근독(謹獨)을 동(動)에 소속시켜 놓은 것은, 이는 주자의 초년의 소견이다.”
하였다.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함에 있어서는 나흠순(羅欽順)의 성정설(性情說)을 배척했고, 심성(心性)과 정의(情意)를 논함에 있어서는 호굉(胡宏)이 두 갈래로 나눈 잘못을 분변하였는데, 한결같이 주자의 가르침을 바른 것으로 삼았는바, 이것들은 모두 백대(百代) 뒤에 성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더라도 의혹되지 않는 것들이다.
선생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이른바 ‘평생 동안 한 일에 대해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나도 일찍이 이 경계를 잘 지켜서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였다. 선생은 또 우리 동방(東方)의 도학(道學) 연원(淵源)에 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고려 말기에 끊어진 도학의 연원을 일으켰고,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이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끊어진 계통을 이었으나, 은미한 뜻은 밝혀내지 못하였고 지극한 도는 창달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성명(誠明)의 학(學)을 가지고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려는 책임을 떠맡아서 조정에서 실시함에 따라 울연히 볼 만한 것이 있었는바,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족히 백대를 고무시킬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그 뒤에는 간간이 한두 분의 뛰어난 유현(儒賢)이 나와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우뚝하게 도를 전한 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퇴계 선생이 뭇 현인들이 죽임을 당한 뒤끝을 이어받아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는,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혔으며, 자신 한 몸의 겸손한 덕을 지키고 후학들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바, 그 공이 크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명백하여 순수하고 맑아서 찌꺼기 하나 없으며, 참으로 알고 참으로 실천하여 성인의 종지(宗旨)를 얻음으로써, 말과 행동에 있어서 고찰해 보아도 하자가 없고 베풀어 놓은 사업을 보아도 모두 시의에 맞을 뿐만 아니라, 출처(出處)가 다 올바르고 진퇴(進退)가 다 의리에 맞았으며, 몸소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크나큰 책임을 떠맡고 도맥(道脈)이 영원해지도록 해 놓은 이는 오직 우리 율곡 선생 한 분뿐이시다.”
하였다. 선생이 도학의 연원을 논하고 선철(先哲)들의 본말(本末)을 따져서 취사(取捨)를 신중하게 하신 것이 이상과 같았다.
선생은 평소에 저술을 일삼지는 않았으나 매번 글을 읽으면서 의심스러운 것을 기록해 둔 바로는 《경서변의》 8권, 《근사록석의》 1권, 《의례문해》 8권 및 서(書), 소(疏), 잡록(雜錄)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또 이 밖에 신의경(申義慶)이 편찬한 것을 산정(刪定)한 《가례집람》 3권과 《상례비요》 1권이 있는데, 《상례비요》는 간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비록 아주 먼 외방의 시골이라고 하더라도 모두들 이를 준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산정을 함에 있어서 완전하게 하지 못한 채 지레 유포된 탓에 선생은 대개 완전한 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에 뒤를 이어 다시금 수정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또다시 추가로 간행하였으므로 앞서 간행한 본(本)과 나중에 간행한 본이 각각 따로따로 있게 되었다. 대개 선생은 평소에 예학(禮學)에 대해서 가장 많이 힘을 쏟았다.
선생은 창녕 조씨(昌寧曺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분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이분은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창양군(昌陽君)에 봉해진 조광원(曺光遠)의 손녀이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조대건(曺大乾)의 따님이다. 이분은 정숙하고 유순하여 아주 뛰어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처음에는 연산현(連山縣) 거정리(居正里)에 장사 지냈다가 임신년(1632)에 진잠(鎭岑)에다가 개장(改葬)하였으며, 신사년(1641)에 또다시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선생의 묘로 옮겨 부장(祔葬)하였다.
선생은 아들 셋을 두었다. 맏아들은 은(檃)으로, 바로 임진왜란 때 죽임을 당한 분이다. 다음은 집(集)으로 이조 판서인데, 가업(家業)을 잘 이어받아서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그다음은 반(槃)으로 이조 참판이다. 또 딸 셋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감찰 서경휼(徐景霱)이고, 셋째 사위는 목사 한덕급(韓德及)이며, 둘째 딸은 일찍 죽었다. 측실에서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맏이는 영(榮)으로 생원(生員)이고, 다음은 경(檠), 고(杲), 구(榘), 규(槼), 비(棐)인데, 비는 진사이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이유(李梄)이고, 둘째 사위는 이명진(李名鎭)이다.
판서 집은 측실에서 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익형(益炯)이고 둘째는 익련(益煉)으로 생원이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생원 김태립(金泰立)이고 둘째 사위는 정광원(鄭廣源)이다. 참판 반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맏이인 익렬(益烈)은 군수이고, 둘째인 익희(益煕)는 부제학이고, 셋째인 익겸(益兼)은 어린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으나, 오랑캐의 변란 때 사절(死節)하여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넷째인 익훈(益勳)은 주부(主簿)이고, 다섯째인 익후(益煦)는 정자(正字)인데 일찍 죽었고, 여섯째인 익경(益炅)은 진사이다. 또 딸 다섯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부사 이정(李淀)이고, 둘째 사위는 판서 이후원(李厚源)이고, 셋째 사위는 수찬 장차주(張次周)이고, 넷째 사위는 생원 이해관(李海寬)이고, 다섯째 사위는 심약제(沈若濟)이다.
서경휼은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현감 신경(愼暻)이고, 둘째 사위는 성숙(成璹)이다. 한덕급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이는 군수 한수원(韓壽遠)이고, 그다음은 선전관(宣傳官) 한지원(韓智遠)이고, 그다음은 한지원(韓志遠)이다. 또 딸 셋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이여홍(李汝洪)이고, 둘째 사위는 김민성(金敏成)이고, 셋째 사위는 이시정(李時挺)이다.
영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이는 익황(益熀)이고, 둘째는 익정(益炡)이고, 셋째는 익견(益熞)이다. 경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익수(益燧)이고, 둘째는 익훤(益烜)이다. 고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익문(益炆)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송유진(宋有鎭)이고, 둘째 사위는 이숙(李俶)이다. 구(榘)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익돈(益燉)이고, 딸 셋을 두었다. 규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익륜(益㷍)이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유재(柳宰)이다. 비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어리다. 내외(內外)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모두 합해 200여 명이다.
아, 선생의 도덕과 학술의 아름다움은 후생의 말학(末學)으로서 엿보아 헤아릴 바가 아니며, 더구나 나는 가장 늦게서야 제자가 된 처지이니 만큼 더욱더 감히 무어라고 말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일찍이 그 시(始)와 종(終)을 나름대로 구해 볼 생각을 하였으며, 평소에 말하고 행동한 것의 요점을 미루어서 기록해 두었다.
대개 선생의 아버지인 대헌공(大憲公)이 큰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 서업(緖業)을 이어받아 문헌(文獻)의 전통을 이미 얻었다. 율곡 선생은 뛰어난 자품으로 문운(文運)의 상서에 응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거치지 않고 도학(道學)의 오묘함을 묵묵히 터득하여 사문(斯文)의 중책을 떠맡고서 성인(聖人)의 학문을 이 세상에 일으켰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 회옹(晦翁)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이미 그 학문을 이어받아 크나큰 도학(道學)의 요결(要訣)을 얻었다. 그러고는 드디어 한 뜻으로 중책을 담당하여 차츰차츰 학문을 쌓아 나갔는데, 어려서부터 노경에 이르기까지 혹한(酷寒)이나 혹서(酷暑) 등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일찍이 한순간이라도 중단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학이 밝아지고 진지하며 순수하고 전일해져 접하는 곳마다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밝은 마음으로 은미한 곳을 살펴봄에 있어서는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및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의 이치를 하나로 꿰뚫어 남김이 없었으며, 강인한 의지로 그 중책을 맡음에 있어서는 고금(古今) 성현(聖賢)들의 지극한 덕이며 뛰어난 행실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한 몸에 구비하여 빠뜨리지 않았다. 용력(用力)의 확고함은 사물의 이치가 얽히고설켜 있어도 앗아 가지 못하였으며, 자수(自守)의 독실함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순간에도 능히 바뀌지 않았다. 위의(威儀)와 용지(容止)의 법도는 쇠약한 노경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삼갔고, 계구(戒懼)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는 으슥한 곳과 남모르는 데에서도 더욱 엄격하여, 공부가 날로 새로워져서 상달(上達)하여 마지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도(道)와 덕(德)이 높고 성대해지자 그 경지가 원만하고 완벽하며 높고 깊고 넓어서 그 끝을 헤아려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온화한 기운이 온몸에 흐르고 화락한 뜻이 말과 웃음에 넘치며, 정신은 차분하였지만 모습은 엄숙하였고 얼굴빛은 온화하지만 말은 엄격하였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와 말할 때나 침묵할 때에는 어느 때고 여유가 있고 태평하며 자상하고 완만하여 자연스러운 가운데 분명하게 법도를 이루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지냄에 있어서도 매우 평온하였으며 성품이 화락하고 간이하여 그대로 보아 넘기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일을 처리할 때 의리로써 결단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히 처리하여 감히 범할 수 없게 하였다. 이상은 고루하고 우매한 내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아, 선생은 학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고서도 미처 보지 못한 듯이 노력하였고, 덕이 이미 순수하고 성대한 경지에 이르고서도 터득한 것이 없는 듯 겸손하였는바, 나이가 80이 넘은 이후에도 곰곰이 사색하는 노력을 날로 더하여 유연히 자신의 몸이 늙어가는 줄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을 본다면 그 정도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내면을 헤아려 본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은 미처 모르고 있는데 자신만이 진취하였음을 깨닫는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니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지며 도가 순수해지고 덕이 구비되어 성대히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된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배우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배우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으며, 묻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물으면 알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생각하면 터득하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할 바에는 그것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아니하며, 행하지 아니할지언정 행할 바에는 그것을 독실하게 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아니한다. 남이 한 번 하여 능해지거든 자신은 백 번 하여 능해지며, 남이 열 번 하여 능해지거든 자신은 천 번 하여 능해지도록 한다. 과연 능히 이를 제대로만 한다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고금(古今)을 두고 낱낱이 가려볼 때 능히 이와 같이 힘을 쏟아서 완성하는 데에 이르기를 우리 선생과 같이 했던 사람은 대체로 얼마 없다. 이것은 필시 하늘이 우리 사문(斯文)을 도우시어 우리 선생을 탄생시켜 학문을 하는 표준으로 만들어서, 자질이 영민한 자는 감히 차서를 뛰어넘고 소홀히 하여 부질없고 요원한 곳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하고, 자질이 노둔한 자는 선뜻 스스로 중단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분발하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 힘껏 실행하여 반드시 성취함이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선생의 공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도(道)를 준수하여 행하다가 힘이 부족하여 중도에서 그치더라도 부지런히 힘쓰면서 날마다 노력하다가 죽은 다음에나 그만둘 일이요, 햇수가 부족함을 의식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정자는 말하기를,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일이 진정 사랑스럽기는 하나, 늙어서 학문 좋아하는 일이 더욱 사랑스럽다.” 하였다. 그러니 후세의 나이와 힘이 쇠퇴해서 학문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을 두려워하여 힘쓰기를 게을리하는 자로 하여금 선생의 풍도(風度)를 듣게 한다면, 또한 필시 감동하여 분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하늘이 율곡을 앞 시대에 탄생시켜 고명하고 절륜한 자질로서 빗장을 뽑고 자물쇠를 풂으로써 도학의 근원을 활짝 열어 천지간에 환하게 빛나게 하였고, 또다시 우리 선생을 훗날에 탄생시켜 독실하게 실천하는 학문을 가지고 참된 마음을 오래도록 쌓아 끝내 성현들이 이루어 놓은 법을 모두 궁구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하늘이 우리 두 선생을 탄생시켜 우리 동방 도학의 연원을 열어 놓은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슬기는 높고 예의는 낮으니, 높은 것은 하늘을 본받고 낮은 것은 땅을 본받는다.[智崇禮卑 崇效天 卑法地]” 하였는데, 아마도 우리 두 선생의 기상이며 조예가 각기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자가 두 정씨(程氏) 부자(夫子)에 대해 논하기를, “마치 문왕(文王)은 기(岐)를 다스리고 주공(周公)은 예법(禮法)을 제작한 것처럼 같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한 경우와 또한 가깝다고 하겠다. 후세에 덕(德)을 알아보는 사람이 혹시 상고해 보는 일이 있다면 또한 나의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경인년(1650, 효종1) 4월 모일에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행장(行狀)을 짓는다.
[주-D001] 경천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 : 
위태로운 시국을 만회하여 나라를 지탱시키는 크나큰 공로를 세운 것을 말한다. 경천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을 말하며, 욕일은 희화(羲和)가 해를 나오게 해서 감천(甘泉)에 목욕시킨 것을 말한다.
[주-D002] 오형(五刑)과 오류(五流) : 
오형은 묵(墨), 의(劓), 비(剕), 궁(宮), 대벽(大辟)의 형벌을 말하고, 오류는 사형죄에 해당되는 다섯 가지 형벌을 범한 자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유배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오형에 복죄하게 하되, 오형에 복죄한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행형(行刑)하며, 다섯 가지 유형(流刑)에 머무는 곳이 있게 하되, 다섯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거처하게 할 것이다.[五刑有服 五服三就 五流有宅 五宅三居]” 하였다.
[주-D003] 오왕(五王)이 …… 일 : 
오왕은 당(唐)나라 무후(武后) 때 평양군왕(平陽郡王)에 봉해진 경휘(敬暉), 부양군왕(扶陽郡王)에 봉해진 환언범(桓彦範), 한양군왕(漢陽郡王)에 봉해진 장간지(張柬之), 남양군왕(南陽郡王)에 봉해진 원서기(袁恕己), 박릉군왕(博陵郡王)에 봉해진 최원위(崔元暐)를 가리킨다. 이들은 측천무후가 몸이 아프자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장이지(張易之)와 창종(昌宗) 등의 역모를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였으나, 무삼사(武三思) 등을 처형하지 않아 끝내 이들에게 모함을 받아 귀양 갔다가 처형되었다. 《舊唐書 卷91 桓彦範傳》
[주-D004]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大將) : 
중종반정 때의 세 대장인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을 가리킨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중흥의 원훈(元勳)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면서도 세상에 남을 만한 공적은 하나도 세우지 못한 채 자만심에 빠져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다 일생을 마쳤다.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相臣》








 
동춘당집 제21권
 시장(諡狀)
가의대부(嘉義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시장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고, 자는 희원(希元)이며, 성은 김씨(金氏)인데, 학자들이 사계 선생이라 칭한다. 그 선조는 신라에서 나왔다. 신라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들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현달한 사람이 있었다.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2대를 내려와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으로 적개 공신(敵愾功臣)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극뉴(克忸)를 낳았는데, 사간원 대사간으로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경릉(敬陵 덕종(德宗))을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강력히 간쟁하니, 당시의 의논이 옳게 여겼다. 사후에 예조 참판 광원군(光原君)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계휘(繼輝)는 세상에서 황강 선생(黃岡先生)이라고 칭하는데, 총명과 재주와 학문이 당세에 으뜸이었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양조(兩朝)를 섬겼으며,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공보(公輔)의 인재를 논할 때면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천거하였으나 벼슬이 사헌부 대사헌에서 끝났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참찬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따님으로 고려조의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인데,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7월 8일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선생을 출산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후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농담하며 버릇없이 굴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은 앞으로 덕을 수양하여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다. 나이 11세 때 신 부인(申夫人)이 서거하자, 찬성공은 선생을 어루만져 양육하며 항상 슬하에 두고서 스승에게 가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자란 뒤에는 스스로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힘을 쏟고, 세속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절 달가워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가서 사서(四書),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배웠는데, 마음을 집중해 깊이 연구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니, 황강공이 기뻐하며 “우리 아이가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뒤에는 또 이 문성공을 사사(師事)하여 도학(道學)의 요체를 자세히 듣고는 도학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기는 마음이 매우 중대하니, 문성공의 기대가 특별히 깊었다.
황강공이 평양 감사(平壤監司)로 나아갔는데, 평양은 본래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이어서 유객(遊客)들이 날마다 성색(聲色)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선생은 어버이를 뵙기 위해 갈 때마다 겉으로는 모나게 행동하지 않는 듯하였으나 조행(操行)이 매우 엄격하여 한 번도 성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로 여겼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11)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선비를 뽑을 적에 성경(聖經)에 조예가 깊고 고훈(古訓)을 독실히 믿는다는 이유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81)에 황강공이 명(明)나라로 사신 가게 되자 선생이 수행하려 하니, 이조에서 사관(祠官 능참봉)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 하여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과 자리를 바꾸어 제수하였다. 이 여행은 왕복 수만 리 길이었는데, 곁에서 모시며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여, 황강공이 드신 밥술까지도 모두 곁에서 묵묵히 세어 그것으로 건강 상태를 징험하였다. 임오년(1582)에 재행(才行)이 탁월하다 하여 승진의 명이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황강공의 상을 당하여서는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복을 벗고 나서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얼마 뒤에 전명(前命)에 따라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로 승진하였으나 이내 사직하였다.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등의 관직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였다. 무자년(1588)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어서는 교양에 법도가 있어 성취시킨 바가 많았다. 경인년(1590)에 상례(常例)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승진하였다. 신묘년(1591)에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아가서는 성실과 신의, 너그러움과 은혜로 다스려 이민(吏民)의 마음을 얻었다. 다음 해 임진년(1592)에 왜구가 침임해 오자, 선생은 군무(軍務)를 돕고 궁민(窮民)을 구휼하여 공사(公私)를 함께 구제하니, 방백(方伯)이 성상께 성실하고 겉치레가 없어 정사가 번거롭지 않다고 칭찬해 아뢰었다. 임기를 마치고는 연산(連山)의 장사(庄舍)로 돌아왔다.
이윽고 호조 정랑에 제수되어 명나라 군대를 따라 호남으로 가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이내 어떤 사건으로 파직되어 해서(海西)의 황주(黃州)ㆍ봉산(鳳山) 사이에 우거하였다. 이때 왜란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은 모두 학업을 폐하였으나, 선생은 날마다 문인, 자제들과 강송(講誦)을 멈추지 않고 학문을 즐기며 근심을 잊었다. 단양 군수(丹陽郡守),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호조 정랑, 양근 군수(楊根郡守),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 등에 누차 제수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또 군자감 첨정,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하니 억지로 부임하였다. 이때 경기(京畿)가 막 난리를 겪고난 끝이라서 피폐한 백성들이 소생하지 못하자, 선생이 마음을 다해 어루만지니 몇 년이 되지 않아 백성들이 예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신축년(1601)에 조정에서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부서를 설치하였다. 선생이 특별히 부름을 받고 들어와서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이 있어 직무를 보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권세를 부릴 때에 미쳐서는 선생은 서울에 있기를 싫어하여 드디어 연산으로 돌아갔다. 계묘년(1603)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어서는 3년 동안 있다가 면직하고 돌아왔다.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다시 익위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자, 이내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가 “그곳은 북관(北關)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무인(武人)을 등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니, 철원 부사(鐵原府使)와 자리를 바꾸어 제수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일어난 옥사에 선생의 두 서동생〔庶弟〕이 잡혀가 고문을 받다가 죽자, 간당(奸黨)들은 광해(光海)를 꼬드겨 육시(戮屍 시체의 목을 벰)의 형(刑)을 추가하고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선생의 가문 전체를 연좌시켰다. 친구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화(禍)를 풀 방도를 꾀하자, 선생은 태연한 모습으로 “화복은 천명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대신(大臣)과 대관(臺官)이 연좌시키는 것은 법률이 아니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일이 잘 풀렸다. 당초에 광해가 친히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모(金某 사계(沙溪))도 이 일을 알고 있느냐?” 하니, 박응서가 대답하기를, “김모는 현자(賢者)라서 저희들의 계획을 그가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정협(鄭浹)이 무복(誣服)함에 미쳐서도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박은서의 대답과 같았다. 그러므로 선생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초야에 은거하며 외인(外人)과 교통하지 않고, 오직 경적(經籍)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시고서 하교하기를, “과거에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김장생(金長生)의 이름을 익히 들었다.” 하고서, 즉시 사헌부 장령으로 부르니, 선생은 상소하여 노병(老病)으로 사양하였다. 그리고 여러 원훈(元勳)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의 덕을 인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형벌을 늦추고, 인재를 거두어 쓰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이어 제공(諸公)들도 스스로 청렴과 신중에 힘써 정국삼장(靖國三將)의 잘못을 답습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편지를 받아 본 제공들은 탄복하고서 드디어 성상께 아뢰니, 성상도 훌륭하다고 매우 칭찬하셨다. 선생의 사직소(辭職疏)가 들어가자, 성상께서 온화한 유지(諭旨)를 내려 가마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시고, 다시 하교하여 재촉하셨다. 선생은 명을 받고는 감격하여 병을 참고 조정으로 달려와서 또 상소해 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 성상께서 사친묘(私親廟)에 친히 제사 지내려 하자, 예관(禮官)과 유신(儒臣)들은 모두 “주상께서 선조(宣祖)의 친손(親孫)으로 선조를 계승하셨으므로 본생친(本生親)에 대해 고위(考位)가 둘이 되는 혐의가 없으니, 축사(祝辭)에 사친을 고(考)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자(子)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춘추(春秋)》와 정주(程朱)의 설을 근거로 상소해 변론하였는데, 대의(大意)는, “제왕의 예에는 계통보다 엄중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형으로서 아우를 계승하고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했다 하더라도 모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선조대왕의 뒤를 계승하셨으니, 사친에 대해 평상시에 호칭하던 대로 자(子)라고 칭해서는 부당합니다.”라는 것이었다.
다른 날 선생이 입시(入侍)하니, 성상께서는 매우 자상하게 위유(慰諭)하고서 이어 이르기를, “일전에 올린 소의 말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그대의 말을 따를 수 없으니 매우 미안하다.” 하셨다. 그러자 선생은 사례하고서 품속에서 주차(奏箚)를 꺼내어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제왕이 정치를 하는 요체는 학문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학문의 방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가지고서 의리의 당연을 강구하고 그것을 심신에 체험하여 마치 맑게 고인 물처럼 본원(本原)을 허명(虛明)하게 하였다가 기미가 움직일 즈음에 미쳐 공사(公私)와 의리의 한계를 자세히 살펴, 사욕을 극복함에는 용맹스럽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선을 확충함에는 광대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면 일상생활 사이에 자연히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인욕이 깨끗이 다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이른 바 ‘유정유일(惟精惟一)’이고, 공자(孔子)가 이른 바 ‘극기복례(克己復禮)’이고, 자사(子思)가 이른 바 ‘계구신독(戒懼愼獨)’이고, 맹자(孟子)가 이른 바 ‘수방심 확사단(收放心擴四端)’이니, 천고의 성현이 서로 전한 요지가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일념(一念) 사이에 국가의 치란(治亂)과 흥쇠(興衰)가 달렸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성상께서는 가납(嘉納)하였다. 이내 체직되어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에 제수되었다.
6월에 연신(筵臣)의 건의에 따라 특별히 성균관에 사업(司業)이란 관직을 만들어 선생을 그 자리에 앉혀 유생들을 훈도하게 하고, 또 원자(元子)를 보양하도록 명하니,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때 사부(師傅)로 선발된 제공(諸公)이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나, 선생은 덕이 높고 명망이 있는 유학자로 더욱 원자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글 뜻을 가르치는 이외에 일마다 바르게 간하고 권면하여 도운 바가 많았다. 선생은 나아가 성상을 뵐 때마다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청했는데, 성상께서 억지로 머물게 하고는 이르기를, “사유(師儒)의 자리에는 반드시 덕망이 있는 사람을 앉힌 뒤에야 유생들이 보고 감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대를 번거롭히는 것이다.” 하셨다. 8월에 전에 청했던 사직을 거듭 청하자, 성상께서 재삼 만류하였으나 선생이 더욱 간절히 사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잘 갔다가 돌아오라. 하지만 오래 머물 생각은 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하직 인사를 올리던 날에 특별히 술을 하사하고 위로해 보내셨다.
선생이 귀향한 뒤에 상소해 사은하고서 겸하여 연도(沿道)의 민폐(民弊)를 진달하니, 성상께서 훌륭히 여겨 받아들이고서 이어 빨리 돌아오라고 하유(下諭)하셨다. 선생은 또 상소해 사직을 청하면서 또 진계(進戒 경계의 말을 올림)하기를, “신이 듣건대 장자(張子 장재(張載))는 ‘내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으라.’라고 하였고,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은 ‘나는 평생 동안 한 일 중에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다.’ 하였다고 하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도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일을 명령하시는 사이에 모두 천군(天君 마음)에 물으시고, 깊은 밤 홀로 계시는 곳에서도 큰 제사를 받들 때처럼 조심하신다면 성학(聖學)의 성취를 어찌 한량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1월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성상께서 공주(公州)로 거둥할 때 선생은 길가에서 성상을 맞이하여 배알하였다. 역적이 토평(討平)되어 성상께서 환도(還都)할 때 전교하기를, “여기에서 함께 서울로 가서 원자(元子)를 교도(敎導)하는 것이 좋겠다.” 하시므로 선생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세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자, 휴가를 청해 시골로 돌아와서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대본(大本)을 세울 것, 구업(舊業)을 회복할 것, 홍범(洪範)을 준수할 것, 《소학(小學)》을 강습할 것, 성효(聖孝)를 다할 것, 사전(祀典)을 공경할 것, 구족(九族)을 친애할 것, 군신(群臣)을 한 몸으로 여길 것, 정사를 친히 다스릴 것, 민폐(民弊)를 개혁할 것,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할 것, 군정(軍政)을 닦을 것, 궁금(宮禁)을 엄중히 할 것 등 13개 조항을 진술하니, 성상께서는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술한 이 소(疏)를 보건대 실로 몸을 닦고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이니, 감히 가슴에 담아 힘써 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가을에 특별히 통정대부 공조 참의로 승급되자, 선생은 상소해 사직하면서 또 헌부(憲府)가 내노(內奴)를 금치(禁治)하고, 정원이 전지(傳旨)를 봉환(封還)하는 것은 모두 법을 봉행하고 직분을 지키는 일이니, 그들의 기를 꺾어 꾸짖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이때 마침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상소문 속에 이를 언급한 것이다. 성상께서 은혜로운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10월에 소명을 받고 가서 사은하니, 연신(筵臣)이 “김장생이 이미 올라왔으니 경연(經筵)에 출입시키고 또 원자를 시강(侍講)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는 이 말을 따르고서 시강의 명칭을 강학관(講學官)으로 개칭하였다. 을축년(1625) 봄에 원자를 왕세자(王世子)로 책립하고서 선생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렸으니, 이는 원자를 부지런히 보도(輔導)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휴가를 청해 귀향하였다. 떠날 때에 상소하여, 큰 뜻을 분발하여 성학에 더욱 매진하고, 편벽된 생각을 버리고 우유부단(優柔不斷)을 경계하기를 청하고, 겸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신하를 자주 접견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현자를 공경하고, 인재를 널리 찾아 정밀하게 선택하는 도를 진술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니 성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나의 마음은 확고하니 영원히 물러날 생각을 하지 말고, 성묘을 마치고는 즉시 올라오라.” 하셨다. 시골로 돌아온 뒤에 선생은 누차 상소하여 해직을 빌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듬해 봄에 성상께서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자, 선생은 대궐로 달려가 위로의 말씀을 올리고서 10여 일을 체류하였다가 휴가를 청하는 글을 올리고는 곧장 돌아왔다. 승정원이 선생을 만류하라고 계청(啓請)하여 머물라는 왕명(王命)이 내렸으나, 선생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돌아온 뒤에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면서, 또 억지로라도 슬픈 감정을 억제하시고 중등(中等)의 예제(禮制)로 낮추어 행할 것으로 경계의 말씀을 올렸다.
정묘년(1627, 인조5) 봄에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성상께서 강도(江都)로 거둥하니, 세자가 분조(分朝)를 만들어 남쪽으로 내려와서 선생을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삼았다. 선생은 명을 받들고 경내(境內)로 가서 군사를 소집하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로 보내고, 자신은 분조로 가서 세자를 알현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적군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라는 헛소문이 떠돌자, 분조의 재신(宰臣)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동궁(東宮)을 모시고 영남(嶺南)으로 이주하려 하였다. 선생은 영남으로 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강력히 말하고, 입대(入對)를 청하여 이해(利害)를 자세히 진술하니 세자도 옳게 여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헛소문이 저절로 잠잠해졌다. 3월에 강도로 가서 성상께 안부를 여쭈니, 성상께서 인견(引見)하고서 위로하며 칭찬하셨다. 이때 강화(講和)의 일이 이미 성립되어 적군이 거의 물러갔으므로 선생이 해직하고 귀향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적군이 아직 국경에 주둔하고 있으니, 호소사의 직임을 그대로 띠고 있는 것이 해로울 것 없다. 만약 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끝까지 마음을 다하라.” 하셨다. 선생이 이어 아뢰기를, “오늘의 강화는 진실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니, 척화(斥和)의 의논을 크게 칭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돌아가서 군사와 군량을 조처한 뒤에 해직하고서 한가로이 지내라.” 하셨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에 형조 참판에 제수하니, 사직소(辭職疏)를 두 차례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1629) 여름에 성상께서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김장생은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서울에 오려 하지 않고 왔다가도 즉시 돌아가니, 이는 나의 정성과 예가 부족한 소치이다. 어떻게 하면 서울로 불러들여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우상(右相)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서울에서 생장하였으니 처음부터 세상을 피해 은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정성과 예를 다하신다면 나이가 아무리 높다 하여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는 즉시 온화한 유지(諭旨)를 내리고, 또 편안한 수레를 타고서 길을 떠나오라고 명하셨다. 선생이 상소해 굳이 사양하니, 성상께서 “경은 나라의 대원로(大元老)로 덕행이 뛰어나니, 지금 만약 서울로 와서 체류한다면 사대부들이 존경하여 모범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계옥(啓沃)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바야흐로 측석(側席)하고서 기다리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라는 친히 쓴 비답을 내리셨다. 소명이 거푸 내리고 말의 뜻이 더욱 간절하니, 선생은 스스로 ‘나이가 노경(老境)에 이르러 정력이 이미 쇠한 몸으로 은총을 탐하여 번거롭게 길을 걷는 일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서, 계속 상소해 더욱 강력히 사직을 청했다. 경오년(1630)에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어 상례에 따라 가선대부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신미년(1631) 여름에 풍습병(風濕病)을 앓기 시작하였으나, 기거동작(起居動作)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날마다 문인들과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8월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서 3일 유시(酉時)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셨으니, 향년이 84세였다. 원근이 서로 조상(弔喪)하기를, “사문(斯文)이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성상께서 매우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賻儀)도 정해진 한도보다 더 많이 하셨다. 왕세자도 철강행소(輟講行素)하고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성상께서 또 본도(本道)에 명하여 초상(初喪)의 모든 일과 무덤 쓰는 일을 돕게 하셨다. 문인으로서 복을 입은 자가 수십 명이었으며, 장례일에 회장(會葬)한 자가 수천 인이었다. 이해 10월 19일에 진잠현(鎭岑縣) 성북리(城北里)에 장사 지냈다. 병자년(1636)에 건의에 따라 선생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특별히 추증하셨다. 신사년(1641) 1월에 묘지가 좋지 않으므로 연산현(連山縣) 고정산(高井山)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선조비(先祖妣) 허씨(許氏)의 무덤 뒤 간향(艮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많은 선비들이 의논을 내어 선생이 사시던 근방에 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선생의 발걸음이 미친 곳에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는 곳이 많다.
선생은 천품이 돈후하고 온화하고 순수하며 장엄하고 독실하고 확고하여 이미 절로 도(道)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일찍이 가정에서 교훈을 받고 또 대현(大賢 율곡(栗谷))에게 귀의하여서는 분발해 고인(古人)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순수하고 독실한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고 신명(神明)을 통하기에 충분하였다. 선생이 학문을 함에는 한결같이 정주(程朱)를 준칙으로 삼아, 경(敬)에 전념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힘써 행하여 실천하는 이 세 가지를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 부지런히 힘쓰며 늙음이 이르는 것도 몰랐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가묘(家廟)를 배알하고는 서실(書室)로 가서 책상을 마주하고 단정히 앉아 학문을 연구하니 날로 새로워지는 공효가 있었다. 항상 《소학(小學)》, 《심경(心經)》, 《중용(中庸)》, 《대학(大學)》, 《주역(周易)》 등의 글을 밤낮으로 계속해 돌려가며 복습하고, 비록 위급한 사이라 하더라도 잠시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은 곳을 만나면 침식까지 잊어가며 깊이 연구하고 힘써 사색하여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스스로 자질이 노둔하여 성취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오랫동안 노력함에 미쳐서는 글을 보면 이치가 분석되어 정확히 이해되고 의심이 풀려 다시 막히는 곳이 없었다. 오로지 소박과 진실에만 공력(功力)을 쏟고 자신의 능력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을 추구하지도 소성(小成)을 바라지도 않고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곳에 더욱 근신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제(上帝)를 대한 듯이 정숙하게 자신을 지켰다. 비록 7, 80의 나이와 질병 중에도 태만한 모습을 지은 적이 없었고, 겉으로 드러난 언행이나 속에 숨어 있는 생각이 순수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라는 말이 바로 내가 평생 스스로 노력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수양이 이미 깊어진 뒤에는 완전한 덕성(德性)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뒤까지 넘쳐흘러 멀리서 바라보면 고심(高深)하고 광대하여 끝이 없는 것 같았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여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여 가부를 따지지 않을 것 같았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선악을 분변함에 미쳐서는 엄격하고 강직하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처럼 용맹스러운 자라 하더라도 빼앗을 수 없는 굳은 절개가 있으니, 사방의 선비들이 알고 모르는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다.
선생은 효도와 우애가 천성이어서 생존시의 부모를 섬기고 사망후의 부모를 섬김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으며, 제부(諸父)를 어버이처럼 섬기고, 동기(同氣)를 사랑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일찍이 왕모부인(王母夫人 조모(祖母))이 사망했을 때, 선생은 해서(海西)에 있었는데 갑자기 슬픈 감정이 일며 금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며칠이 되지 않아 부고(訃告)가 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장자 은(檃)이 타향에 있다가 왜적을 만나 해를 당하던 날에도 선생은 종일토록 슬픈 감정이 일었다. 사람들은 이를 지성선지(至誠先知)의 증거라 하였다. 두 서동생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히 여겨, 자신도 모르게 슬픈 감정이 말과 용모, 잠자리 사이에 저절로 드러나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사우(師友) 사이에는 은의(恩義)가 더욱 지극하였다. 송귀봉(宋龜峯)의 온 가문이 화를 당하여 곤궁해 갈 곳이 없자, 선생이 모셔다가 공손히 봉양하였으며,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이 서거한 뒤에 당화(黨禍)가 더욱 심각하여 생전의 친지 중에도 간혹 부화뇌동하여 헐뜯고 비난하는 자가 있었으나, 유독 선생만은 이해를 계산하지 않고 송강의 심사(心事)를 대변하였다. 계해년에 등대(登對)함에 미쳐서는 송강이 무함당한 상황을 강력히 진술하였다. 율곡(栗谷)이 서거하였을 때 선생은 바야흐로 거상중(居喪中)이었으나, 예제(禮制)에 따라 스승의 복을 입고서 멀리 달려가 곡림(哭臨)하였고, 율곡의 기일(忌日)에는 재계하고서 소식(素食)하는 것을 평생 폐하지 않았으며, 율곡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다. 귀봉의 자제에게도 역시 그러하였다.
벼슬은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봉행하였다. 늦게 성명(聖明)을 만나 예우가 융숭하니, 매양 몸이 늙어서 국은(國恩)에 보답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상소하여 논할 적에는 반드시 근본을 바로잡아 근원을 맑게 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병폐를 제거하고, 천리를 밝혀 왕도를 행하고, 풍화를 바로잡아 기강을 진작시킬 것을 급선무로 삼아, 거행할 수 있도록 본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후진(後進)을 인도함에는 비록 어리고 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열어 성의를 보여 주고 그 재주와 인품에 따라 잘 교도하여 그들 스스로 감동해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였으며, 글을 가르치는 차례는 등급을 매우 엄격히 정하여 반드시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먼저 가르친 다음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가르쳐 근본을 배양하고 길을 개척한 뒤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혔고, 화려하게 문장을 꾸미는 세속의 글에 대해서는 일찍이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일찍이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계통에 대해 논하기를,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은 끊어진 학통을 고려 말엽에 비로소 제창하여 밝혔고, 김 문경공(金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은 거의 끊어져 가는 학통을 조선조 때 계승하였으나, 성현의 은미한 말씀과 지극한 도를 밝게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으로 군민(君民)의 책임을 담당하였고,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李滉))은 사화(士禍)로 현자들이 죽음을 당한 뒤에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선현을 계승하고 후학을 계발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그러나 총명하고 순수하며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문(聖門)의 주의(主義)를 터득한 것으로 말하면 율곡(栗谷) 이 문성공만 한 어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대 유현(儒賢)들이 논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에 대하여 이동득실(異同得失)을 한결같이 모두 문성공의 학설로 절충하였으나, 정미한 뜻을 변석(辨析)한 것에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았다.
선생은 예학(禮學)에 더욱 깊이 공력을 들여 고증이 정미하고 해박하니, 당시에 질문하는 자들이 모두 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이미 이 문성공의 학통을 물려받았으니, 심원한 연원과 바른 문로(門路)와 곤지면행(困知勉行)한 공부와 계왕개래(繼往開來)한 사업을 후세의 학자들은 고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저술을 일삼지 않았으나, 독서할 때마다 의심나는 것을 기록한 《경서변의(經書辨疑)》,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서소잡록(書疏雜錄)》 등 약간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고, 신의경(申義慶)이 편찬한 《상례비요(喪禮備要)》 1책을 산정(刪定)하기 위해 문인 및 친지들과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문답한 《의례문해(疑禮問解)》 4책은 모두 간행되어 세상에 돌아다닌다.
선생의 배위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판돈녕부사 창양군(昌陽君) 광원(光遠)의 손녀이고, 첨지중추부사 대건(大乾)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현철(賢哲)하고 부도(婦道)가 있었으나 나이 36세에 별세하였다. 선생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은(檃)은 임진년에 왜적에게 피살되었고, 차남 집(集)은 판중추부사로 교훈과 가업(家業 학문을 이름)을 전해 받아 또한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므로 학자들이 신독재 선생(愼獨齋先生)이라 칭한다. 삼남 반(槃)은 이조 참판을 지냈다. 장녀는 감찰 서경휼(徐景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청녕군(淸寧君) 한덕급(韓德及)에게 시집갔으며, 삼녀는 요사(夭死)하였다. 측실에서 낳은 여섯 아들은 생원 영(榮), 경(檠), 고(杲), 구(榘), 규(槼), 진사 비(棐)이고, 두 딸은 이유(李楢), 이명진(李名鎭)에게 시집갔다.
판중추부사공의 측실이 낳은 두 아들은 익형(益炯), 생원 익련(益煉)이고, 두 사위는 생원 김태립(金泰立), 정광원(鄭廣源)이다. 참판공의 여섯 아들은 군수 익렬(益烈), 이조 판서 익희(益熙),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여 지평에 추증된 익겸(益兼), 부사 익훈(益勳), 정자로 요사한 익후(益煦), 진사 익경(益炅)이고, 다섯 사위는 부사 이전(李淀), 판서 이후원(李厚源), 수찬 장차주(張次周), 참봉 이해관(李海寬), 심약제(沈若濟)이다. 서경휼의 두 사위는 현감 신경(愼暻), 성숙(成璹)이다. 한덕급의 세 아들은 정랑 수원(壽遠), 선전관 지원(智遠), 지원(志遠)이고, 세 사위는 이여홍(李汝洪), 김민성(金敏成), 이시정(李時挺)이다.
익희의 세 아들은 정언 만균(萬均), 만증(萬增), 만준(萬埈)이다. 익겸의 두 아들은 정자 만기(萬基), 진사 만중(萬重)이다. 익훈은 아들 셋, 익후는 아들 하나, 익경은 아들 둘을 두었다. 내외의 증현손(曾玄孫)이 모두 200여 인이다.
선생의 무덤에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지명(誌銘)을 짓고, 계곡(谿谷) 장 상공(張相公)이 비명(碑銘)을 짓고, 태학사 정공 홍명(鄭公弘溟)이 음기(陰記)를 짓고, 시랑 송공 시열(宋公時烈)이 행장을 지었으니, 도덕의 아름다움이 남김없이 밝게 다 드러났다. 그런데 동문에 여러 사우(士友)들이 또 나 준길에게 그중에서 중대한 것을 뽑아 역명(易名 시호(諡號))의 은전을 청하는 시장(諡狀)을 지으라고 하였다. 나 준길은 선생의 표질(表姪)로서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장려해 교육하신 은혜를 입은 것이 천지 부모 같으니, 의리로 볼 때 문장이 부족하다 하여 사양할 수 없으므로 따로 이상과 같이 찬차(撰次)하였다.

[주D-001]적개 공신(敵愾功臣) :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책록(策錄)된 공신이다.
[주D-002]좌리 공신(佐理功臣) : 성종(成宗) 때 왕실(王室)을 도운 공으로 책록된 공신이다.
[주D-003]계축년에 …… 옥사 : 광해군(光海君) 5년에 대북(大北)이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朴應犀)는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 시문에 능하고 학문이 높은 문사(文士)였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출세의 길이 막히자, 이에 불평을 품고 같은 명문(名門)의 서출인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허홍인(許弘仁), 박치의(朴致毅), 이경준(李耕俊), 김경손(金慶孫) 등과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조령(鳥嶺)에서 은상(殷商)을 죽이고 은을 강탈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일당이 검거되었다. 이때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해 은을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허위 자백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기타 소북(小北)을 숙청한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무고한 대가로 용서를 받고 벼슬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으로 체포되어 주살(誅殺)되었다.
[주D-004]두 서동생 :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을 이른다.
[주D-005]정협(鄭浹)이 무복(誣服)함 : 광해군 5년에 종성 판관(鍾城判官)으로 재직 중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김제남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라고 권하였다.’라고 허위 자백한 일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5年 6月 5日》
[주D-006]정국삼장(靖國三將) :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을 말한다.
[주D-007]유정유일(惟精惟一) : 형기(形氣)에서 생기는 인심(人心)은 사(私)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위태로우니, 정(精)하게 살펴 형기의 사심을 제거하고, 의리에서 생기는 도심(道心)은 어두워지기 쉽기 때문에 은미하니, 오직 전일(專一)하게 지켜 의리의 정도를 보존하라는 말이다. 《書經 大禹謨》
[주D-008]극기복례(克己復禮) : 자신의 사욕(私欲)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욕은 바로 이목구체(耳目口體)의 욕심을 이른다. 《論語 顔淵》
[주D-009]계구신독(戒懼愼獨) : 사려(思慮)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물이 없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도 항상 계신(戒愼)과 공구(恐懼)에 마음을 두어, 홀로 있을 때만이 아니라 남이 모르고 나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생각까지 삼가는 것을 말한다. 《中庸章句 首章》
[주D-010]수방심 확사단(收放心擴四端) : 사물(事物)을 따라 떠난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사단(四端)을 확충하는 것이다. 《孟子 告子上, 公孫丑上》
[주D-011]봉환(封還) : 내린 왕명(王命)이 도리에 맞지 않으면 그 왕명을 해당 부서로 보내지 않고 봉함(封緘)하여 임금에게 환송(還送)하는 것이다.
[주D-012]분조(分朝) : 전란(戰亂) 등으로 임금이 피란하였을 경우 행재소(行在所) 이외에 따로 설치한, 세자를 수반(首班)으로 하는 작은 조정이다. 행재소를 원조(元朝) 또는 대조(大朝)라 하고 분조를 소조(小朝)라고 한다.
[주D-013]계옥(啓沃) : 신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열어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임금을 보좌하는 뜻으로 쓰인다. 《書經 說命上》
[주D-014]측석(側席) : 현자(賢者)를 기다리는 마음이 초조하여 편히 앉아 있지 못한다는 말로 좌불안석(坐不安席)의 뜻이다.
[주D-015]우로(優老)의 은전 : 노인을 우대(優待)하는 뜻으로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을 주는 것을 말한다.
[주D-016]철강행소(輟講行素) : 애도(哀悼)의 뜻으로 서연(書筵)을 중지하고 흰옷을 입고 고기 반찬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017]보고 …… 곳 : 마음이 사물에 느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사물을 접하지 않아 사려(思慮)가 일어나지 않아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미발(未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미발의 상태를 말한다. 《中庸章句 第1章》
[주D-018]지성선지(至誠先知) : 조금의 사위(私僞)도 없이 지극히 성실한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밝아지기 때문에, 드러나는 기미(幾微)를 보고서 앞으로 생길 일을 미리 안다는 말이다. 《中庸章句 第24章》
[주D-019]군민(君民)의 책임 :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들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주D-020]곤지면행(困知勉行) : 힘들여 어렵게 지식을 얻고 노력해 도를 행하는 것으로 생지안행(生知安行)의 반대이다.
[주D-021]계왕개래(繼往開來) : 선현(先賢)의 학통을 이어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동춘당집 제21권
 시장(諡狀)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시장



선생의 휘는 집(集)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신라(新羅)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벼슬이 계속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2대를 내려와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으로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극뉴(克忸)를 낳았는데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회간(懷簡 덕종(德宗)의 시호)을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강력히 간쟁하니, 당시의 의논이 옳게 여겼다. 이분이 휘 종윤(宗胤)을 낳았는데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 휘 계휘(繼輝)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황강 선생(黃岡先生)이라 부른다. 고(考) 휘 장생(長生)은 형조 참판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사계 선생(沙溪先生)이라 부른다. 황강공은 재능과 책략, 지식과 도량이 당시에 으뜸이었으므로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매양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칭찬하였다. 사계 선생은 도덕과 학문으로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첨지중추부사 대건(大乾)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6월 6일에 서울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선생을 출산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영명(英明)하고 순수함이 매우 뛰어났다. 겨우 말을 배울 나이에 손가락을 입에 넣고서 “이것이 바로 중(中) 자이다.”라고 하니, 황강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겨 항상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5, 6세 때에 글을 읽을 줄 알고 대자(大字)를 썼으며, 7, 8세 때에는 문리(文理)가 갑자기 통하였는데, 간혹 천곡(泉谷) 송공 상현(宋公象賢), 귀봉(龜峯) 송공 익필(宋公翼弼)에게 가서 배우기도 하였다. 일찍이 대부송(大夫松)에 대해 시를 지었는데,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그 시를 보고는 문장의 솜씨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임오년(1582)에 황강공이 별세하여 노선생(老先生 사계를 이름)이 연산(連山) 묘려(墓廬)에서 거상(居喪)의 예제(禮制)를 지킬 적에 선생은 바야흐로 10여 세의 어린아이로 좌우에서 모시면서 제수(祭需)를 올리고 축문(祝文)을 읽는 등의 일을 삼가 예대로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술년(1586)에 조 부인(曺夫人)의 상을 당하여서는 성인(成人)처럼 집상(執喪)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몸이 파리해 병이 생겼다. 무자년(1588)에 복을 벗었다. 신묘년(1591)에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선생은 20세 이전이었으되, 문장과 글씨가 무리에 뛰어나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김씨 집안에는 대대로 인물이 있다.”라고 칭찬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 겨울에 성균관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을 마치고는 즉시 사면하였다. 계축년(1613)에 부임하는 노선생을 따라 철원부(鐵原府)로 갔는데, 마침 무고옥(誣告獄)이 일어나서 선생의 두 서숙(庶叔)이 잡혀가 고문을 받다가 죽으니, 간당들이 광해(光海)를 꼬드겨 육시(戮屍)의 형(刑)을 추가하고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선생의 가문 전체를 연좌시켰다. 그때 마침 법관(法官)이 “법률에 의거하면 연좌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라고 하고, 대신의 의논도 그와 같았기 때문에 일이 잘 풀렸다. 선생은 드디어 노선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천지가 꽉 막혀 인간의 도리가 끊어지니, 선생은 종적을 감추고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평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계해년(1623)에 인조대왕께서 반정(反正)하신 뒤에 노선생이 첫 번째로 부름을 받았다. 연신(筵臣)이 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이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발탁할 만하니 대헌(臺憲)의 직책을 맡기소서.”라고 하였으나, 이때 이조 판서로 있는 상촌(象村) 신 문정공(申文貞公 신흠(申欽))이 선생의 표숙(表叔)이었으므로 선생은 헌직(憲職)을 간곡히 사양하고서, 어버이를 봉양하기에 편리한 고을을 청하여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다. 부여에 부임하여서는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軍政)을 다스리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모든 조처를 빈틈없이 처리하니, 몇 년이 지나 정사가 이루어져 온 경내가 편안해졌다. 그러므로 선생은 날마다 고을의 젊은이들과 종일토록 글을 강독(講讀)할 뿐이었다. 정묘년(1627, 인조5)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 추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무진년(1628) 겨울에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버리고 돌아왔다. 경오년(1630)에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신미년(1631)에 노선생이 별세하니, 선생은 60에 가까운 나이에도 음식과 거처를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라 행하였으되 질병이 생기지 않으니, 사람들은 특이하게 여기며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해서이다.”라고 하였다. 계유년(1633) 10월에 복을 벗었다. 갑술년(1634) 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제수하였다가 여름에 사헌부 지평으로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을해년(1635) 가을에 다시 지평에 제수하자 또 사양하였다. 병자년(1636) 가을에 장령에서 집의(執義)로 두 번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간혹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과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12월에 변방의 급보가 이르러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선생은 달려가 문후할 요량으로 채비를 차려 천안(天安)에 당도하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은 동지들과 군사와 군량을 모와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성대하여 사람들이 놀라 흩어지니 다만 북쪽을 바라보며 속을 썩일 뿐이었다.
이듬해 2월에 서울로 가서 성상께 위로의 말씀을 올리고 돌아왔다. 무인년(1638) 가을에 집의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여 체직(遞職)되었다. 겨울에 서동생〔庶弟〕 고(杲)가 남의 무고를 당하여 화(禍)를 예측할 수 없자, 선생은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서울로 가서 아우 참판공(參判公)과 함께 대명(待命)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고가 진실로 말을 함부로 한 죄가 있으나, 그 부형이 모두 현자(賢者)이므로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다.” 하셨다. 이에 선생의 형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기묘년(1639) 4월에 집의의 벼슬로 부르니, 선생은 억지로 가서 사은하고서 누차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5월에 승급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에 제수되었다. 두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니, 성상께서 지극히 위로하셨다.
선생은 경(經)을 강론함을 인하여 글 뜻을 드러내어 친절히 규간(規諫)한 바가 많으니, 성상께서 주의 깊게 들으시고, 이어 전교하기를, “그대가 시골에서 왔으니 품은 생각을 다 말하라.” 하셨다. 선생이 사례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임금의 한 마음이 만사의 근원이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진실로 본원(本原)을 맑게 하고 드러나는 감정을 살펴서, 반드시 도심(道心)이 항상 주인이 되고 인심(人心)이 도심의 명을 따르게 한다면 일상 사이에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인욕(人慾)이 천리를 따르게 되어, 사물마다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서로 전한 것도 오직 이 심법(心法)뿐이었다. 진술한 바가 매우 타당하니 내 깊이 체념하겠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정사(政事)를 다스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요체로 삼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는 경(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정사를 다스림에는 성실이 가장 중요하니, 성상께서 착실히 공부하시어 경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성(誠)으로 일을 처리하여, 말하고 침묵하며 행동하고 정지하는 것이 성(誠)과 경(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며 근심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성상께서 훌륭하다고 칭찬하셨다.
얼마 되지 않아 우부승지로 승진하니, 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침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니, 성상께서 즉시 의원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도록 하셨다. 선생은 상소하여 사례하고서 거듭 체직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선생을 만류하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못난 내가 종전에 나오기를 어렵게 여겼던 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며, 지금 올라온 것 또한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겠는가. 다만 성상의 은명(恩命)을 끝내 저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와서 사은하기로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사은하였으니 오직 돌아가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세도를 만회할 책임은 세상에 따로 사람이 있으니 못난 내가 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고서, 즉시 귀향하였다. 연달아 승지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643) 가을에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에 제수하고서 소명(召命)을 내렸다. 선생이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하니, 성상께서 “그대는 경전(經傳)에 밝고 덕행(德行)을 수양하였으니, 실로 이 직임에 합당하다.”라고 비답하였다. 재차 상소해 사직을 거듭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부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선생을 도로 이 직임에 제수하고서 전지(傳旨)를 내려 속히 올라오라고 부르니, 선생은 또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갑신년(1644) 가을에 공조 참의,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을유년(1645, 인조23) 겨울에 금상(今上)께서 세자에 책봉되시자, 대신이 말하기를, “김집(金集)은 일생 동안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니, 정성을 다해 부탁하고 예를 다해 초빙하여 세자를 모시고 강독하게 한다면 훈도(薰陶)에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상께서 전지를 내려 부르니 선생은 세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병술년(1646) 3월에 이산(尼山)의 적(賊) 유탁(柳濯) 등이 변란을 모의하며 그 무리에게 “김 승지의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성상께서 이 말을 듣고 연신에게 “흉도(凶徒)도 현자(賢者)를 존경해 두려워함이 이와 같다.” 하셨다.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차자를 올려, 방정(方正)하고 독학(篤學)한 사람들을 널리 선발하여 따로 관명(官名)을 정하여 주연(冑筵 서연(書筵))에 입시시키기를 청하였다. 정해년(1647) 4월에 선생을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으로 삼으니 두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무자년(1648) 겨울에 다시 이 직임에 제수하니 또 사양하였다.
기축년(1649) 봄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시니 금상이 즉위하시어 전지를 내려 특별히 불렀는데, 그 전지에, “지금 국가가 망극한 슬픔을 당하고 보니 전고(典故)에 밝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과거 선왕조(先王朝) 때에 누차 부름을 받고서도 하루도 조정에 머문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부족한 나의 성의로 어찌 올라오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선생은 즉시 서울로 가서 빈전(殯殿)에 곡림(哭臨)하고서 이어 신명(新命 새로 명한 관직)에 사은하였다. 성상께서 특별히 쌀과 반찬을 제급(題給)하게 하시니,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특별히 선생을 가선대부 예조 참판에 제수하자, 이비(吏批)가 격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아뢰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전고에 밝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부른 것만으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부당하다.” 하셨다. 그러자 선생이 상소하여 개정해 주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이 직임에 맞는 사람을 선발함에 있어 경을 버리고 누구를 선발하겠는가. 나의 정성을 헤아려 속히 나아가 직무를 살피라.”라고 비답하셨다. 재차 상소하여 사양하니, 성상께서는 또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세 번째 상소하여 사양하니, 그 문제를 해조(該曹)로 내려보내어 의논해 처리하게 하셨다. 해조가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법전(法典)에 예조의 당상관은 반드시 문관을 등용하라는 말이 없는데, 무엇 때문이 이의를 제기하는가? 체차하지 말라.” 하셨다. 네 번째 상소하니 또 허락하지 않으셨다. 질병으로 관직을 맡을 수 없다고 두 차례 고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도 현자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억지로 경의 뜻을 따른다. 하지만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시고서, 즉시 공조 참판에 제수하셨다.
봉사(封事)를 올려 상례(喪禮)의 이동(異同)과 시무(時務)에 대해 논하고서 직질(職秩)의 개정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생각건대 천서(天序)와 천질(天秩)은 본래 상도(常道)가 있는데, 고경(古經)과 우리나라 제도에 인습과 개혁이 계속되었습니다. 대체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대부분 《개원례(開元禮)》를 따랐으므로 단상(短喪 복상(服喪) 기간을 줄임)의 오류에 구애되고, 혹은 세미한 것은 거론하고 중대한 것은 빠뜨리기도 하였으며, 혹은 형식은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는 허술하게 여기기도 하였으니, 예를 강론하는 선비들이 매우 부족하게 여긴 바였습니다. 얼마 전의 초종(初終 인조의 승하) 때에 사정이 급박하여 《국조오례의》를 준용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기왕의 잘못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변제(變除)에 대한 절문(節文)은 조용히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례(古禮) 및 《국조오례의》의 초종으로부터 상제(祥祭), 담제(禫祭), 길제(吉祭)까지의 조목마다 아무 조항은 같고 아무 조항은 다르며, 아무 조항은 빠지고 아무 조항은 지나치게 번거로움 등을 아울러 기록하고, 간혹 찌를 붙여 그 줄거리를 대략 논하고서,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들어 상소문과 함께 올리오니, 전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시어 한 시대의 정제(定制)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하의 큰 근본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하의 한 마음이고, 오늘의 급선무가 여섯 가지인데, 어진 도량을 넓히고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궁위(宮闈)를 엄중히 하고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실효를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정하는 일과 자강책에 대하여 논하고, 끝으로 섬에 귀양 가 있는 손자들을 일찍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하였다. 이 봉사에 대해 성상께서는 수찰(手札)로 비답하기를, “올린 일곱 조항의 일은 진실로 오늘날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다. 경의 절실함에 탄복하고 경의 권념(眷念)에 감동하여 잊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새기겠다. 그러나 모두 문제만 제기하고 해답을 말하지 않았으니, 경은 분명하게 들어 나를 가르쳐 주기 바란다. 내 어찌 직접 실행하여 조종(祖宗)께서 맡겨 주신 중기(重器 중요한 어보(御寶))를 보호하지 않겠는가. 끝의 한 조항은 나도 항상 마음에 걸려 염려하면서도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바이다. 다시 헤아려 처리하겠다. 그리고 또 상례를 논한 한 권의 책은 매우 완비되었으니, 예관(禮官)과 대신들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경은 또 수부(水部 공조(工曹))의 직임마저 사양하니, 나는 놀라 말할 바를 모르겠다. 사양하지 말아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원소(原疏)는 좌우에 두고서 항상 보고 싶기 때문에 계하(啓下)하지 않는다.” 하셨다.
선생이 명을 받들어 《소학(小學)》의 주(註)와 《중용혹문(中庸或問)》의 구두(句讀)를 정하여 올렸다. 7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때 성상께서 유신(儒臣)이 일을 논한 것으로 인하여 엄한 비답(批答)을 내리니, 선생은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면서 진계(進戒)하기를,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는 도리는 오직 마음을 비우고 포용해 받아들이는 데 있을 뿐이니, 비록 비위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응대하는 사이에 반드시 조용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절대로 갑자기 불평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어 뭇 신하로 하여금 군심(君心)의 천심(淺深)을 비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경이 이렇게 말하니 나도 후회가 된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나를 가르치고 보좌한다면 국가의 다행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답하셨다. 재차 사직하니 또 허락하지 않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연달아 약물을 하사하셨다. 세 번째 사직하니 해조(該曹)에게 의론해 체직시키라고 하셨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특별한 소명(召命)을 받고 김경여(金慶餘), 신천익(愼天翊) 등과 함께 입대(入對)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오래전부터 경들을 보고 싶었는데, 경들이 선왕조(先王朝)의 은총을 잊지 않고, 지금 와서 나를 만나 주니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나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경들을 보배로 여기니, 부디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 달라.” 하자, 선생이 사례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임금의 거상(居喪)은 사대부의 거상과 같지 않으니, 반드시 위로 종사(宗社)를 생각하고 아래로 자전(慈殿)을 위로하기 위해 성상의 몸을 보호하시어 임금의 대효(大孝)를 극진히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만사의 본원(本源)이니, 본원이 맑아서 털끝만 한 인욕(人慾)도 마음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도심(道心)이 주인이 되고 인심(人心)이 도심의 명령을 순종하여 사물마다 저절로 과불급(過不及)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왕년에 선대왕(先大王)의 소대(召對)를 받았을 때도 신은 이와 똑같은 말을 진달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이 밖에는 다른 도(道)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인재를 얻는 데 있고, 인재를 얻는 요령은 실로 임금의 정확한 감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傳)에 ‘순(舜) 임금이 고요(皐陶)를 등용하니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불인(不仁)한 사람이 없어졌다.’라고 한 말이 어찌 거짓이겠습니까. 전일에 신의 소(疏)에 대해 내리신 비답에 ‘문제만 제기하고 해답을 하지 않았다.’라고 분부하셨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오늘의 모든 폐단이 오늘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부터 이미 자세히 아셨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대략만을 들어 진술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에 진력하신다면 모든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감히 문제만 제기하고 해답을 하지 않은 것이 이닙니다. 지금 전하께서 비록 상중에 계시지만 잠시도 치도(治道)에 대한 마음을 늦추지 마시고, 때때로 신료들을 접견하시어 치도의 일을 강론하시면 서로 토론하는 사이에 슬프고 답답한 마음도 조금은 풀리실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이렇게 말하니 내 감히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셨다.
또 아뢰기를, “일전에 송시열(宋時烈)의 일이 조용하지 못한 잘못은 있으나, 그 사이에 좋은 의사가 담겼으니, 전하께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시골로 내려갔으니 다시 올라와서 벼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장령으로 입대(入對)를 청하였다가 허락을 받지 못하자 즉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갔기 때문에 선생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성상께서는 모두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 산릉(山陵)과 혼전(魂殿)의 조석제(朝夕祭)에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위(神位)를 함께 모시는 일로 선생에게 수의(收議)하니, 선생이 의논 드리기를,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병행해서는 안 되니, 병행하면 곳곳에 곤란한 일이 생긴다고 한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논의가 실로 정확한 말입니다.”라고 하고, 또 반곡(反哭)한 뒤에 안신제(安神祭)를 지내는 일로 수의하니, 선생이 의논 드리기를, “고례(古禮)와 《국조오례의》에 모두 의거할 만한 글이 없으니, 다시 명색(名色)없는 전(奠)을 올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반곡의 뜻은 장사를 지내고 신주를 모시고 돌아왔으나 사자(死者)의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산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뿐이니, 안신(安神)의 뜻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8월에 또 대사헌에 제수하니, 선생은 병으로 직무를 볼 수 없었으나, 성은에 감격하여 일마다 규간(規諫)하였다. 그리고 사직소 말미에 “삼가 보건대 요사이 관원을 임명하시는 사이에 어떤 자는 성상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오래도록 결재하지 않으시고 어떤 자는 친밀하다 하여 등급을 건너 뛰어 제수하시니, 이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대성인(大聖人)의 덕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장(疏章)을 오랫동안 유중(留中)하고 정부로 내려보내지 않는 것도 언로(言路)를 넓히고 불휘(不諱)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에서 눈을 닦고 새로운 교화를 바란 지가 지금 몇 달입니까. 그런데도 조정의 불안은 더욱 심하고 공의(公議)가 펴지지 않음은 여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러러 믿고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하의 마음뿐인데, 지금 만약 사람을 정확히 살피지 못하시어 혹 호오(好惡)가 바름을 잃으신다면 국사는 다시 가망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일신의 사욕을 제거하고 지공(至公)의 도리를 따르시어, 모든 언행이 한결같이 중정(中正)에서 나오게 하소서.” 하니, “경은 나를 사랑하여 이처럼 할 말을 다하니 매우 가상하다. 바로 이 점이 내가 경을 잊을 수 없어서, 대사간에 앉히려는 이유이다.”라고 비답하셨다.
이때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차자를 올려 전관(銓官)의 잘못을 논한 데 대하여 삼사(三司) 관원들의 논의가 매우 과격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또 두 번째의 상소에서 이에 대해 논하니, 비답하기를, “소관(小官)이 방자하게 원로대신을 능멸하니 나는 매우 놀랍노라. 대신을 존경하는 나의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닌지 경은 숨김없이 다 말하라.” 하셨다. 세 번째 상소하여 더욱 간절히 사면을 비니, 비답하기를, “이렇게까지 간절히 사직을 청하니 특별히 경의 뜻을 윤허한다. 경은 한가로운 곳에서 몸을 정양(靜養)하며 다시 더욱 진언(進言)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 하셨다.
9월에 궁박한 처지를 구휼한다는 명이 내리니, 선생이 상소해 사양하였다. 다시 공조 참판에 제수하니, 선생은 대행 대왕의 발인일(發靷日)이 박두하였으므로 부득이 나아가서 사은하고는 졸곡(卒哭)이 지나자 즉시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수찰(手札)로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疏章)을 보니 너무 서운하여 탄식이 일었노라. 전일에는 나에게 과실이 있을 때마다 상소해 간하였기 때문에 매우 다행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오랫동안 간하는 상소를 보지 못하겠으니, 세상을 피해 은거(隱居)를 계획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이 상소를 보니 참으로 나를 버리려는 것이다. 아, 어찌 선왕께서 알아서 예우하신 은혜를 생각지 않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조금 더 머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시고는 이내 옷감을 하사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선생은 상소해 사례하였다. 또 대사헌에 제수하자, 상소하여 산소의 수축을 위해 돌아가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으셨다.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자, 성상께서는 《중용(中庸)》 서문을 강독하면서 반복해 어려운 뜻을 물으셨다. 선생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대답해 올리고서, 이어 사치의 풍습이 실로 근래의 고질이니, 절약과 검소의 교화를 궁중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자 성상께서 “이 폐습은 선왕께서도 일찍이 개탄하신 바이니 내 감히 노력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앞서 대사간 김경여(金慶餘)와 집의 송준길(宋浚吉) 등이 김자점(金自點)의 죄상을 논하면서 그 무리 몇몇 사람까지 탄핵하니, 이로 인해 조정이 시끄러웠다. 성상께서 선생에게 이르기를, “송준길 등이 선한 자를 찬양하고 악한 자를 징계하는 일을 하고자 하였으니, 죄를 입은 자들은 원래 중한 죄가 아니므로 달게 받아들여 잠자코 엎드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데, 도리어 논죄(論罪)한 자를 배척하였다. 조정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하시고서, 신면(申冕) 등 다섯 사람에게 귀양을 명하셨다. 그러나 선생이 귀양 보내는 것은 처벌이 과중하다고 논하여 마침내 처벌이 경감되었다.
선생은 물러가기를 더욱 간절히 청해 세 차례 고하고 거듭 상소하니, 교체하여 부호군(副護軍)으로 삼으셨다.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고서 전에 청하였던 산소 수축의 일을 다시 청하니, 휴가와 말을 주라고 명하셨다. 이에 영의정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정원ㆍ옥당ㆍ태학의 제생(諸生)들과 함께 번갈아 상소하여 선생을 만류하라고 청하였다. 김 문정공도 선생이 돌아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에게 자제를 보내어 만류하기를, “옛날에 사마공(司馬公)은 병으로 물러날 때 국사를 여회숙(呂晦叔)에게 부탁하였는데, 지금 공(公)은 떠나면서 국사를 누구에게 부탁하려 하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상차(上箚)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김집(金集)은 유림의 두터운 명망을 지닌 사람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단아하고 성실하므로 사림이 모두 앙모하며, 성상께서 그를 초치(招致)하셔서 한 조정에 벼슬하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신의 뜻에는 떠나기를 청하는 그의 청원을 구치히 따르지 마시고 새로운 정화(政化)를 돕게 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재차 근신(近臣)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내려 머물기를 권면하니, 선생은 황공하여 사례하고서 명년 봄에 다시 올라오겠으니 이번에는 떠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성상께서 수찰을 내려 전교하기를, “무덤에 흙을 더 쌓는 일은 경의 자제들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부디 내려가지 말라.” 하셨다.
그러나 선생이 청파(靑坡)로 나아가 머물면서 거듭 상소해 돌아가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특별히 선생의 조카 좌부승지 김익희(金益熙)를 침전(寢殿)으로 불러들여 선생이 올린 상소문을 앞에 펴 놓고서 전교하기를, “비답을 내리는 것은 형식이 될 것 같으니, 그대가 가서 나의 뜻으로 깨우쳐 머물도록 권하라. 자제를 보내는 것은 그대가 나의 뜻으로 잘 깨우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시므로 선생이 부득이 우거(寓居)로 돌아오니, 성상께서 내관(內官)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시고 연달아 약재와 신탄(薪炭) 등의 물건을 하사하셨다. 선생은 재차 상소하여 더욱 간절한 말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을 머물도록 권한 것은 대신이나 근신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실로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 노인이 길을 가는 어려움을 염려했기 때문이니, 돌아갈 생각을 접고 나를 위하여 잠시 머문다면 국가에 도움이 되고 사림이 존경하여 모범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셨다.
대사헌에 제수하고서 특별히 상규에 얽매이지 말고 매양 경연에 들어와 참석하라고 명하셨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제수하자, 연달아 세 차례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해 마지않으니, 비답하기를, “천위(天位 관위(官位))와 천직(天職 관직(官職))을 함께하지 않는 것은 왕공(王公)이 현자를 존경하는 도가 아니다. 국가의 치란은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달렸으니, 내가 경에게 마음을 둔 지 오래이다. 경의 사직소에 이른바 ‘염치(廉恥)’라는 말을 나는 실로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세 차례 고하고 거듭 상소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으셨다. 선생은 성은에 감격하여 억지로 나아가 사은하고서 힘과 정성을 다하여 지우(知遇)에 보답하려고 생각하니, 조야(朝野)가 기대하며 치적(治績)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형세가 크게 어긋남이 있으니 선생이 입대하여 사례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도 이미 반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치국의 법도가 확립되지 않아 나라의 형세가 점점 쇠퇴하고 있으니, 신은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마음으로는 노력하지만 재주가 미치지 못해서이다.” 하셨다. 선생이 아뢰기를, “선왕 초년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노인들이 관직을 맡은 것이 오늘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처음에는 훌륭한 정치를 바랐으나 끝내 공적이 없었던 것이 천고의 한입니다. 혹시라도 오늘이 다시 전일처럼 될까 염려스러워 신은 기우(杞憂)를 금할 수 없습니다. 부견(苻堅)의 일은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만 그 또한 반드시 당시의 인재를 얻어 당시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을 믿고 맡기지 않으시니, 이것이 치국의 법도가 확립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하자,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전관(銓官)의 자리에 있으니, 인재를 살펴 선발하여 인재를 얻게 되기를 나는 매우 기대한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조(銓曹)의 장관은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리이고, 헌부(憲府)의 장관은 풍기(風紀)를 단속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이 두 자리에 적임자를 얻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신처럼 무능한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어찌 일을 망치지 않겠습니까. 근자에 보건대 문재(文宰 2품 이상의 문관(文官))가 매우 부족하여 주의(注擬)할 때 구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생각건대 성상께서 반드시 유능자와 무능자를 감별하고 계실 것이니, 무엇 때문에 쓸 만한 자를 골라 품계를 올려 등용하지 않으십니까? 옛날에 진 목공(秦穆公)은 소를 먹이던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았으니, 이미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엇 때문에 자급(資級)에 구애되십니까?” 하자,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하셨다.
또 아뢰기를, “임금의 도량은 넓어야 합니다. 그런데 근자에 보건대 성상의 뜻을 거스른 사람에 대하여 드러나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잊지 못하시는 뜻이 있으시니, 이는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가 아닙니다. 유계(兪棨)로 말하면 그 재주가 쓸 만하여 버리기에는 아깝습니다. 그리고 대동법(大同法)은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법이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치국의 법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먼저 시행할 절목(節目) 사이의 일이겠습니까. 만약 지레 이 법을 시행하여 민심부터 먼저 잃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후일에 만약 호패법(號牌法)의 시행을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가벼이 시행하지 마소서. 호패는 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이 만든 법입니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먼저 기강부터 세워야지 무엇 때문에 호패를 일삼겠습니까.”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말은 모두 덕이 높고 경륜이 풍부한 사람다운 말이라 나를 즐겁게 한다.” 하셨다. 마침 조카의 상(喪)을 당하여 겨우 성복(成服)을 끝냈을 때 대신의 계청(啓請)으로 패초(牌招)하여 대정(大政 도목정사(都目政事))을 열라고 하였다. 선생은 병으로 소명(召命)에 달려갈 수 없어서, 세 차례 상소하여 대죄하면서 체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위로하는 유지(諭旨)를 내리시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셨다. 경인년(1650, 효종1) 1월에 대정을 마치고는 또 세 차례 고하고 한 차례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 우상(右相) 김공 육(金公堉)이 호서(湖西)에 대동법의 시행을 매우 강력히 청하였는데, 선생의 의논과 서로 어그러지자 교외로 물러가 있으면서 올린 소(疏)에 미안한 말이 매우 많으니, 선생은 부득이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기를, “일전에 우상 김육이 신에게 와서 대동법의 편부(便否)를 물을 적에 신의 본의는 지레 이 법을 시행하면 인심을 잃게 될 것을 크게 곤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법의 시행을 찬성하지 않았고, 어전(御前)에서도 신중히 생각해야지 서둘러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습니다. 옛날에 사마광(司馬光)과 범진(范鎭)은 출처와 영욕을 함께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악률(樂律)을 논함에는 끝내 의견이 합치하지 않았고,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는 어전에 올라가서는 구차히 찬동한 적이 없었으나 어전을 내려와서는 우호(友好)의 기색을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옛날의 군자들은 서로 화합(和合)하되 뇌동(雷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언제 한마디가 서로 맞지 않는다 하여 바로 불편한 기색으로 상대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상의 소(疏) 가운데 ‘시대의 금기(禁忌)에 저촉되었으니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하다.’라고 한 말을 읽고 나자 등골이 오싹하여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잠시인들 체류하여 신의 죄를 보태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즉시 강외(江外)로 나아가 머물렀다.
성상께서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서운한 마음을 형용할 수 없다. 우상도 경에게 섭섭한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로에 떠도는 비방을 혐의쩍게 여긴 것이니, 경은 부디 이와 같이 하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안심하고 다시 머물라.” 하시고서,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踰)하여 다시 돌아오도록 권하셨다. 그러자 선생이 사례하기를, “소신(小臣)의 처사(處事)가 불민(不敏)하여 대신이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게 하였으니, 아랫사람의 도리로 어찌 감히 편안히 체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고는 드디어 시골로 돌아가니, 성상께서 수찰로 비답하기를, “경이 국사는 생각지 않고, 무엇 때문에 이처럼 자기 한 몸만 깨끗이 지키기 위해 세상을 피하려 하는가? 국사가 비록 위태로워도 믿는 바는 오직 한두 대신과 경뿐이다. 옛날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전국 시대의 전사(戰士)였으되 오히려 모욕을 참고 서로 몸을 낮추어 국사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고사(故事)를 현명한 경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니 부디 국사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속히 들어오라.” 하셨다.
이때 김 문정공이 또 차자를 올려 선생의 소환을 청하고, 태학생들도 상소하여 청하니,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종일토록 기다렸으나 이조 판서가 들어온다는 기별이 없으니 나는 매우 염려스럽다. 내일 새벽에 다시 사관을 보내어 나의 뜻을 전하고 돈유(敦諭)하여 돌아오도록 권하겠다.” 하였다. 사관이 갈원(葛院)까지 뒤쫓아가서 유지(諭旨)를 전하니, 선생은 도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고하였다. 성상께서는 선생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시고는 해조(該曹)에 명하여 말을 주어 전송하게 하시고서, 특별히 우상을 교체하셨다. 선생은 시골로 돌아온 뒤에 상소해 사정을 진달하기를, “신과 우상 김육은 오랜 벗으로 서로 불화할 혐의가 없고, 다만 대동법의 논의로 의견이 맞지 않아 한바탕 시끄러운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퇴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므로 신이 물러난 것이고, 애당초 염파와 인상여처럼 서로 사이가 나빴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상 또한 무슨 불편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후일에 서로 만나면 당연히 평소처럼 담소할 것입니다. 신이 물러나야 할 이유는 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죽을 나이에 가깝고 병 또한 심하여 조그마한 도움도 드릴 수 없으니, 어찌 여관(旅館)에서 죽어 천고에 비난을 남겨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가기 전에 대신이 성상께 “김집이 이미 내려갔으니 현자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 그의 관직을 벗겨 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니, 성상께서 윤허하셨다.
선생이 떠난 뒤에 시사(時事)가 더욱 혼란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김자점 등이 송준길 등에게 원한을 품고서 반드시 원한을 갚고야 말고자 하여, 안으로는 역란(逆亂)을 모의하고 밖으로는 북인(北人 청(淸)나라)과 내통하여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서, 김 문정공과 선생이 영수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북사(北使 청나라 사신) 여섯 명이 함께 나오니, 중외(中外)가 크게 놀랐으나, 이공 시방(李公時昉), 원공 두표(元公斗杓),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선후해서 주선하고, 성상께서 또 친히 미봉(彌縫)하심을 힘입어 일이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선생은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다.
5월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연사(練事 소상(小祥))에 참제(參祭)하기 위하여 병을 참고 서울로 와서, 김 문정공과 대궐에서 만나 감개에 젖어 흐느껴 울고는 손을 잡고 이별하였다. 돌아올 때에 임해 상소하기를, “우로(雨露) 같은 성은이 미쳐 마른 풀처럼 죽게 된 신이 되살아났습니다. 이미 일이 드러나서 예측할 수 없는 화(禍)를 당하게 된 신을 너그럽게 처리해 주기까지 하셨으니, 그간의 일을 묵묵히 생각건대 하나하나가 모두 성은입니다.” 하고, 이어 겸직한 제조(提調)의 체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대궐 지척까지 왔다가 나도 만나지 않고 서둘러 돌아간다면 돌아간 뒤에 그리운 마음 반드시 간절할 것이다. 내가 경을 만나고 싶으니 경은 헤아려 처신하라.”라고 하는 비답을 내렸으나, 선생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또 상소하여 대죄하고, 제조의 교체를 거듭 청하니, 대사헌에 제수하셨다. 이때 유계를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이 내리니, 선생은 상소해 사직을 청하면서 “신이 작년에 올린 소(疏) 가운데 망녕된 소견을 진술하였고, 탑전(榻前)에서도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유계가 이미 중한 견책을 받았으니 신 혼자만 죄를 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하자, 성상께서는 수찰로 비답하기를, “경이 나간 뒤로 내 어찌 하룬들 경을 잊었겠는가. 다만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뜻대로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는 서쪽의 일이 약간 풀렸는데도 경의 사직은 여전하니 서운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봄 날씨가 따뜻하니 마음을 고쳐먹고 올라오기를 나는 날마다 바란다.” 하셨다. 재차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올린 소장(疏章)을 연달아 보니, 경의 얼굴을 대한 듯하여 마음이 위로되었다. 봄 날씨가 따뜻해지면 올라오겠다는 경의 말이 나는 매우 기쁘므로 억지로 경의 뜻에 따라 잠시 체직을 허락하는 바이니, 경은 그 말을 잊지 말라. 아,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노성인(老成人)을 등용하려는 생각이 마음에 간절하다.” 하셨다.
신묘년(1651)에 연달아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임진년(1652) 4월에 시독관(侍讀官)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김집은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금년에 나이가 80이니, 성상께서 노인을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미루어 철마다 안부를 물으시면 사림(士林)이 의지해 존중할 바를 알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즉시 가자(加資)하고 음식물을 하사하라고 명하셨다. 이윽고 이조 판서에 제수하셨다. 실은 이때 선생의 나이가 79세였으므로 이태연이 즉시 잘못 아뢴 일로 스스로를 탄핵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80세가 머지않았으니 내린 가자를 고치지 말라.” 하셨으나, 선생은 연달아 네 차례 상소하여 잘못 내려진 가자의 삭제를 청하기를, “군자는 마음을 구차하지 않은 데에 두기 때문에 비록 작은 부정(不正)에도 잠시도 처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그 가자를 함부로 받아들인다면 이 한 가지 일로 위로 성상과 아래로 신이 함께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새로 발령한 이조 판서와 음식물의 하사를 간절히 사양하니, 성상께서 온화한 비답을 내려 면부(勉副)하고, 음식물은 그대로 영수(領受)하라 하고, 가자는 명년 봄을 기다려 거행하겠다고 하셨다.
겨울에 전교하기를, “김집의 나이가 이미 80이 되어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여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셨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성상께서 수찰로 비답하기를, “내가 경의 높은 나이와 높은 덕을 그지없이 사모하면서도 서울로 불러올려 아침저녁으로 인의도덕(仁義道德)의 말을 듣지 못하고, 또 사림의 모범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니, 변변치 못한 이 음식물을 말할 것이 뭐 있는가.”라고 하셨다. 그러자 선생은 그 음식물을 종족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향리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밤새도록 잔치를 벌여 즐기면서 모든 사람과 성은(聖恩)을 함께 누리는 뜻을 다하였다.
계사년(1653) 봄에 전일의 전교를 실행에 옮겨 선생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급시키자, 대신이 관등(官等)을 무시하고 올려주는 은전을 사용할 것을 청하니, 성상께서 즉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리라고 명하셨다. 선생이 두 차례 상소하여 개정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답하기를, “이는 선왕조(先王朝)로부터 내려오는 법도이고 내가 경에게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겨울에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하자, 선생이 두 차례 사양하니, 성상께서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갑오년(1654) 가을에 판중추부사에 제수하자, 두 차례 사양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으셨다. 을미년에 연달아 세 차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으셨다. 조가(朝家)에 중대한 논의가 있으면 성상께서 혹 낭리(郞吏)를 보내어 자문하기도 하셨다.
선생에게는 평소 한열증(寒熱症)이 있었는데, 병신년(1656) 봄에는 더욱 심해져서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앉고 누울 수 있었는데도 단정하고 엄숙하게 몸을 단속하는 것이 건강하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제생(諸生)에게 이르기를, “나는 사생(死生)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동요가 없으니, 이것은 거의 옛사람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별세하시기 수일 전에 조카 판서공(判書公 김익희(金益熙))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과 전형(銓衡 이조 판서)을 혼자서 겸직한 것은 우리 선대에 없었던 바이므로 사람들은 영화로 여기지만 나는 너를 위하여 두려워하니, 십분 조심하도록 하여라.” 하였다. 윤5월 13일 진시(辰時)에 별세하였다. 문인 윤선거(尹宣擧) 등이 병시중을 들 때로부터 염빈(殮殯)에 이르까지의 일을 한결같이 예에 맞게 시행하였으며, 가마(加麻)한 사람도 5, 60인이나 되었다. 원근에서 달려와 조상(弔喪)하며 “사문(斯文)이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부고가 알려지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며 전교하기를, “판중추부사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의 중망(重望)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서거하였으니 나는 매우 놀라고 슬퍼하노라. 해조(該曹)에 일러 특별히 예장(禮葬)을 내리고, 근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셨다. 8월 병신일에 연산읍(連山邑)의 동쪽 천호산(天護山)에 있는 고운승사(孤雲僧舍)의 북쪽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회장(會葬)한 자가 수천 인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의 단정하고 세심하며 온화하고 순수함이 정금미옥(精金美玉) 같아서 맑으면서도 지나치게 맑지 않고 굳으면서도 지나치게 고상하지 않았다. 여러 대 동안 적선(積善)한 뒤를 이었고 시(詩)와 예(禮)의 연원을 전해 받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입신(立身)의 근본으로 삼고, 궁리거경(窮理居敬)진덕수업(進德修業)의 방법으로 삼아서, 그 규모와 절도를 한결같이 가학(家學)을 준칙으로 삼았다. 어려서는 화려한 사조를 좋아하였으나 조금 자란 뒤에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간혹 어버이 명에 따라 과장(科場)을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즐기는 바가 이에 있지 않았고, 오직 성리서(性理書)에 전심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실천하여 공경하고 겸양하니, 그 언어동작이 묻지 않아도 쇄소응대(灑掃應對)의 학(學)에서 얻은 것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간에 도(道)가 소멸된 세상을 만나서는 다시 당세에 뜻을 두지 않고, 날마다 가친(家親)을 모시고서 도리를 강론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반드시 힘과 분수를 다하여, 매일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복장을 정제하고 용구(用具)를 찬 다음 노선생(老先生)의 처소로 가서 문안 인사를 올리고는 즐거운 낯빛과 유순한 용모로 곁에서 모시면서, 중요한 보옥(寶玉)이나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든 것처럼 모든 일에 조심하여 그 물건을 제대로 들지나 못할까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듯이 정성을 다해 섬겼고, 저녁이 되면 잠자리를 펴 드리고서 노선생이 취침하기를 기다린 뒤에 또 절하고 물러났다. 이렇게 하기를 시종 하루같이 하니, 노선생도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부자간에 스스로 지기(知己)라고 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하고 “이런 아들을 두었으니 노선생은 행복하다.”라고 감탄하였다. 노선생이 별세한 뒤에도 한결같이 가법(家法)을 따라 날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서 새벽에 가묘(家廟)로 가서 배알한 뒤에 정사(精舍)로 물러나와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았는데, 종일토록 앉은 자세가 단정하여 등이 꼿꼿하였다.
사람을 대함에는 온화하기가 봄바람이 사람을 엄습하는 것 같았으나, 비속한 말을 내지 않고 태만한 기색을 짓지 않으니, 비록 사납고 오만하고 해학을 즐기는 사람이거나 취향을 달리하여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선생을 대하면 모두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선생은 몸이 말라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고, 성품이 겸손하여 말도 겨우 하는 것 같았으나, 사변(事變)을 응대함에는 의리로 결단하여, 정세(精細)하고 치밀하며 굳세고 과감함이 칼로 자른 듯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선생은 보고 들을 수 없는 경지에 더욱 힘써 마음을 맑게 하고 묵묵히 앉아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조심하였다. 가정이 엄숙하고 화목하여 사람의 소리가 고요하였으나 모든 일이 저절로 다스려졌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아 드러난 곳이나 드러나지 않은 곳이나 한결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도둑의 무리일 뿐이고 말하는 앵무(鸚鵡)일 뿐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혼자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이 참으로 경계해 깨우치는 말이다.” 하고서, 만년에 서재(書齋)의 호를 신독(愼獨)이라 하였으니, 대개 자신의 실제를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학자들이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높은 자리를 엿보고 함부로 잘난 체하여 얻음이 없는 것을 매우 근심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차라리 낮을지언정 높지 말고 차라리 얕을지언정 깊지 말고 차라리 서툴지언정 공교롭지 말라. 우리 유가(儒家)의 법은 본래 이와 같다. 정주(程朱) 이후로 은미하고 심오한 뜻이 다 드러나고 밝혀져서 다시 풀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학들은 마땅히 삼가 준수하고 힘써 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혹시 어떤 사람이 새롭고 신기한 학설을 만들어 선유(先儒)의 학설에 이론을 세우는 것을 들으면 매우 옳지 않게 여겼다. 더욱 예학(禮學)에 밝아 반복해 연구하여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통달하였다. 노선생이 문인 및 친지들과 난의(難疑)를 문답한 《의례문해(疑禮問解)》가 쌓여 책을 이루었는데, 선생이 이를 종류에 따라 나누고서 참고하고 정정하여 초록(抄錄)해 4책으로 만들었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대해서도 노선생이 추가로 보충할 것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선생이 그 유지를 받들어 다시 참고하고 정정하여 중간(重刊)하여 배포하였다. 선생은 집안에서 행하는 길흉의 예를 모두 이 두 서적의 예를 준행하였는데, 세상에서도 따르는 자가 많았다.
종당(宗黨)을 어루만져 구휼함에는 은혜와 사랑이 두루 미쳐 사상(死喪)의 화(禍)에 슬픔과 예를 지극히 하였고, 원근 친구의 부고를 받으면 반드시 영위(靈位)를 배설(排設)하고서 곡을 하였으며, 비록 크게 늙은 뒤와 심한 병을 앓는 중에도 반드시 며칠 동안 소찬(素餐)을 들었다. 아래로 천한 비복(婢僕)이 죽었다는 말을 들어도 반드시 고기 반찬을 물리쳤으니, 대개 이른바 평생토록 예를 행하는 데 몸을 수고롭힌 분이다.
평소의 뜻이 온화하고 검소하여 세상 재미와 화려한 것에는 담박하였다. 중년에 비록 어버이 봉양을 위해 잠시 뜻을 굽히고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어버이가 별세한 뒤에는 가난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본래의 절조가 더욱 굳어 한 발짝도 문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만년에 밝으신 임금을 만나 은례(恩禮)에 감격하여,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았으니, 그 지극한 정성과 고고한 충성은 귀신이 증명할 수 있다. 비록 시대가 맞지 않았으나 진퇴에 의리가 있었고, 조정에 벼슬하여 직무를 본 것이 반월(半月) 미만이었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항상 간절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하여 다름이 있지 않았다.
선생은 성품이 본래 겸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만년에 나이가 더욱 높아질수록 덕이 더욱 높고 학문이 더욱 진전되니, 원근의 학자들이 모두 종사(宗師)로 여겨 변례(變禮)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선생에게 나아가서 시비를 질정하였다.
시문을 지음에도 그 내용이 단아하고 긴요하여 필요없는 말이나 군소리가 없었다. 유고(遺稿) 몇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필법도 힘이 있고 방정하여 왕희지(王羲之)의 해서체(楷書體)를 깊이 터득하였으나, 실은 심획(心劃)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년에는 더욱 오묘한 경지에 이르니, 글씨를 평론하는 자가 “근세의 명가(名家) 중에는 이런 글씨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에서 비롯하였고, 조선조의 제현(諸賢)이 크게 천명하였다 하니, 문운(文運)의 왕성으로 제현이 배출한 것이 성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노선생은 실로 이 문성공(李文成公)의 적전(嫡傳)을 물려받은 제자로 오로지 소박과 진실에 공력을 들였고, 선생은 그 정신을 계승하여 학문의 길이 매우 발랐으니, 율곡 선생의 학문을 전하는 데 거의 폐단이 없었다고 하겠다.
부인 유씨(兪氏)는 좌의정 홍(泓)의 따님으로 병이 있어 정신이 맑지 못하였다. 측실은 바로 율곡 선생의 서녀(庶女)로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익형(益炯), 생원 익련(益煉)이고, 딸은 생원 김태립(金泰立), 정광원(鄭廣源)에게 시집갔다. 익형은 6남 3녀를, 익련은 4남 1녀를, 김태립은 3남 2녀를, 정광원은 1남 3녀를 두었다.
나 준길은 유소년(幼少年) 때부터 노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또 내외종(內外從)의 정의(情義)까지 겸하였으므로 선생은 나를 동생으로 기르며 매우 지극히 인도해 권면하였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한없는 은혜’라는 것이다. 이에 감히 참람하고 외람함을 잊고 그 행적을 대략 추려서 이상과 같이 태사씨(太史氏)에게 고한다.


 

[주D-001]집상(執喪) : 부모의 상사(喪事)에 예절에 따라 상제 노릇을 하는 것이다.
[주D-002]무고옥(誣告獄) : 광해군(光海君) 5년에 대북(大北)이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말한다. 박응서(朴應犀)는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 시문에 능하고 학문이 높은 문사(文士)였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출세의 길이 막히자, 이에 불평을 품고 같은 명문(名門)의 서출인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허홍인(許弘仁), 박치의(朴致毅), 이경준(李耕俊), 김경손(金慶孫) 등과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조령(鳥嶺)에서 은상(殷商)을 죽이고 은을 강탈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일당이 검거되었다. 이때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해 은을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허위 자백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기타 소북(小北)을 숙청한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무고한 대가로 용서를 받고 벼슬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으로 체포되어 주살(誅殺)되었다.
[주D-003]이산(尼山)의 …… 모의 : 이산 사람 유탁(柳濯)이 서울에 사는 진사 권대용(權大用) 등과 반역을 공모하여, 임경업(林慶業)이 반군(叛軍)의 대장이 되었다고 사칭(詐稱)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인하고 군사를 모아 거사(擧事)하려 했던 역모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24年 3月 28日》
[주D-004]이비(吏批) : 이조에서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여 윤허를 받는 벼슬, 또는 그에 관한 문건인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주D-005]천서(天序)와 천질(天秩) : 천연(天然)의 질서라는 말로 천서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 붕우(朋友)의 순서이고, 천질은 존비(尊卑), 귀천(貴賤)의 등급을 말한다. 《書經 皐陶謨》
[주D-006]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소추(蕭樞) 등이 칙명(勅命)을 받고 편찬한 책명이다.
[주D-007]변제(變除) : 상복(喪服)을 바꾸어 입는 일로, 소상(小祥) 뒤에 연복(練服)으로 갈아입고, 대상(大祥) 뒤에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한다.
[주D-008]손자들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들을 가리킨다.
[주D-009]계하(啓下) : 상소문이나 일반 안건을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본 뒤에 계(啓) 자를 새긴 도장을 찍어서 해당 부서로 내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주D-010]유중(留中) : 상주(上奏)한 안건이나 상소문을 승정원으로 내려보내지 않고 궁중(宮中)에 그대로 두는 것이다. 안건이나 소(疏)가 올라가면 임금은 반드시 3일 이내에 그 문건을 승정원으로 내려보내야 한다. 만약 비답(批答)이 없을 경우에는 계(啓) 자를 새긴 도장을 찍어서 내려보낸다.
[주D-011]불휘(不諱)의 문 : 숨김없는 직언(直言)이 들어오는 문을 말한다.
[주D-012]면부(勉副) : 내키지는 않지만 요청이 하도 간절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른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조 판서의 사직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주D-013]가마(加麻) :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주D-014]정금미옥(精金美玉) : 정제된 금과 아름다운 옥이라는 뜻으로,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품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D-015]궁리거경(窮理居敬) : 독서하여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는 정주학(程朱學)의 수양법을 말한다.
[주D-016]진덕수업(進德修業) : 도덕을 증진하고 학업을 닦음을 말한다.
[주D-017]쇄소응대(灑掃應對)의 학(學) : 유가교육(儒家敎育)의 기본이 되는 학습으로, 주자(朱子)는 《대학(大學)》서문에서 “삼대 때에는……사람이 8세가 되면 왕공 이하로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교에 입학시켜 집안을 청소하고 어른의 명에 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예절을 가르친다.〔三代之隆……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以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라고 하였다.
[주D-018]보고 …… 경지 : 마음이 사물에 느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사물을 접하지 않아 사려(思慮)가 일어나지 않아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미발(未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미발의 상태를 말한다. 《中庸章句 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