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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아베베1 2013. 7. 27. 16:44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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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世宗)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홍무 30년 정축,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낳았다. 무자년(1408)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임진년(1412)에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었고, 무술년(1418)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그해 8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경태(景泰) 원년 경오 2월 17일 임진에 별궁(別宮)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32년이고, 수는 5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장헌(莊憲) 엄함과 공경으로써 백성에 임함을 장(莊)이라 하고, 착함을 행하여 기록할 만함을 헌(憲)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능은 영릉(英陵) 처음에는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편 산에 장사했다가, 예종(睿宗) 원년 기축 3월 6일에 여주(驪州) 서북편 성산(城山)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옮겼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승소(李承召)가 묘지(墓誌)를 지었고, 윤회(尹淮)가 행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정인지가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능을 옮길 때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이다.
○ 비(妃) 선인제성소헌 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본관은 청송(靑松)이니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다. 홍무 28년 을해 9월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영락(永樂) 무자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여 처음에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해졌다가, 정유년(1417)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지고, 무술년에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얼마 안 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임자 선덕(宣德) 7년 에 왕비가 되었다. 정통(正統) 병인 11년 세종 28년 3월 24일 신묘에 별궁 세조(世祖)의 잠저. 에서 승하하니, 수가 52세였다. 문종(文宗) 2년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능은 영릉 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애초에는 헌릉(獻陵) 서편 산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에 이장하였다. 이다.
○ 18남 4녀를 두었다.
사(嗣) 문종대왕(文宗大王) 순서로는 첫째이다.
사(嗣) 세조대왕(世祖大王) 순서로는 둘째이다.
3남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시호는 장소(章昭)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判書) 증 좌의정(贈左議政) 연(淵)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며, 계유년(1453)에 화를 입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충간공(忠簡公) 지(智)의 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봉례(奉禮) 증 우의정(贈右議政) 승녕(承寧)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중추부사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찬성 증 좌의정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정축년(1457)에 화를 입었고, 그 뒤에 신원되었다.
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처음의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증 좌의정 이용(利用)의 딸이다.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일찍 죽었다.
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아내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맹담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망지(望之)이다.
1남 화의군(和義君) 영(瓔) 영빈(令嬪) 강씨(姜氏)가 낳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찬성(贈左贊成) 공효공(恭孝公) 중손(仲孫)의 딸이다.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2남 계양군(桂陽君) 증(璔) 신빈(愼嬪)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딸이다. 3남 3녀를 두었다.
3남 의창군(義昌君) 공(玒)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도관찰사 증 찬성 수(脩)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4남 한남군(漢南君) 어()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낳았다. 정축년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증 지돈녕부사 격(格)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5남 밀성군(密城君) 침(琛)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이고,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윤 증 찬성 승서(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6남 수춘군(壽春君) 현(玹) 혜빈 양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영일 정씨(迎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윤 증 좌찬성 위양공(威襄公) 자제(自濟)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7남 익현군(翼峴君) 곤(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 증 찬성 철산(鐵山)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8남 영풍군(永豊君) 전(瑔) 혜빈 양씨가 낳았다. 정축년에 화를 입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팽년(彭年)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9남 영해군(寧海君) 당(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성윤 증 찬성 윤동(允童)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10남 담양군(潭陽君) 거(璖)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일찍 죽었으니 시호는 이양(夷襄)이다.
1녀(一女) 정현옹주(貞顯翁主) 상침 송씨(尙寢宋氏)가 낳았다. 좌익공신 좌찬성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아내이다. 2남을 두었다. 사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참의 은(垠)이다.
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안의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선(璿)이다.
태종 18년 무술 6월에 책봉하여 세자가 되었다. 8월에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제 벌써 19년이나 되었다. 아침에나 밤에나 삼가며 두려워하였으나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내리고 또 묵은 병이 있으니, 이제 세자에게 이 자리를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정부와 육조(六曹) 및 모든 공신들이 궁문을 헤치고 들어와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여 내렸던 명령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이 보평전(報平殿)에 거둥하여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빨리 세자를 불러들여 국새(國璽)를 전하고, 곧 자기의 거처를 연지동(蓮池洞) 별궁으로 옮겼다. 세자가 그 뒤를 따라가서 국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內庭)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이 되었는데도 윤허하지 않았다.드디어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조하(朝賀)를 받고 죄인에게 사면령을 반포하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上王殿)에 사은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는 모두 상왕에게 여쭙기로 하였다.
11월에 세종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상왕에게 성덕 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와 대비(大妃)에게 후덕(厚德)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상왕의 시어소(時御所)에 행차하여 경헌례(敬獻禮)를 행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전한 것은 애초에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뜻대로 편히 지내고자 해서이다. 다만 군사(軍事)에 대해서만 친히 보살피려 하는 것은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의 나이가 서른이 되고 일에 경험이 많기를 기다려서 모두 전해주려 한다.지난 날에 만일 모든 아들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어찌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이는 저 양녕(讓寧)이 시기하고 음험한데 모든 아우들이 제각기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면 어찌 서로 용납하였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못한 것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세종이 상왕에게 상수(上壽)할 때 뭇 신하들이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상왕은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피한 것은 복을 쌓아두고자 해서였는데 이제 와서 도리어 더욱 높아졌도다.” 하였다.술에 취하자 뭇 신하가 춤을 추었는데, 상왕 역시 춤추며 이르기를, “왕위를 맡기는데 만일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면 비록 걱정을 잊으려 한들 되었겠는가. 임금은 참으로 개국한 뒤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룩할 임금이로다.” 하였다. 《국조보감》
○ 정종(定宗)이 피서하기 위하여 광나루에 머무를 때,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동교(東郊) 대산(臺山)에 거둥하여 정종을 맞이하고, 술자리를 차려 매우 즐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상왕이 흰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말에서 내려 지신사 하연(河演)을 불러 이르기를, “내 평소부터 이 말이 길이 잘든 것을 사랑해 왔는데, 이제 이 말을 임금에게 주리라.” 하고는, 곧 상승(尙乘)으로 하여금 안장을 갈아서 임금께 드리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상왕을 뵐 때, 사신 조량(趙亮)과 이절(易節)이 뒤를 따라 이르렀기 때문에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조량이 찬탄하기를, “하늘이 이런 선경을 마련해 주었으니 전하께서는 한가하게 지내며 수양하기에 가장 알맞고, 새 전하께선 조정[明朝]을 공경하며 늙으신 상왕을 높여 충성과 효도가 겸전하시니, 내 일찍이 사신 간 나라가 많았으나 새 전하처럼 어진 분은 보지 못하였오.” 하고, 이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손의 어진 것은 사지 못하리.”라는 옛 구절을 읊었다. 이에 상왕이 사례하기를, “이제 사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절로 내리오.” 하였는데, 그 자리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국조보감》
○ 상왕이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차하였을 때에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서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하나이다.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가 없었느니라.” 하였다.
또 일찍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임금께서 날마다 와 이야기를 하니 매우 좋기는 하나, 정사를 폐할까 두렵다. 네가 가서 여쭈어 격일로 오게 하라.”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상감께서는 매양 일을 처리하신 뒤에 와 뵙는 것이며, 와 뵙는 동안에도 일이 있으면 곧 따라 여쭙게 하여 지체가 없습니다. 상감께서는 늘 옛날 문왕이 그 아버지께 날마다 세 차례 뵙던 일을 본받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격일로 와 뵈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그러면 호위하는 군사가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다만 매일 당번된 금군만을 거느리고 올 따름이니, 뉘가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 2년 경자에 대비가 돌아가셨다. 상례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부르짖고 슬퍼하여 수일 동안을 음식을 들지 않았으며, 때마침 날씨가 덥고 습했으나 평상을 버려두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모신 이들이 몰래 유지(油紙)를 그 밑에 깔았더니, 세종이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명하였고, 큰 비가 와서 물이 여차(廬次)에 스며 들었으나, 임금은 그래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여 드디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날이 밝자 곧 여차로 돌아왔다. 《국조보감》
○ 3년 신축에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상왕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려는 뜻을 상왕에게 여쭈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태상왕의 호를 사양함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 태조께서 태상왕이 되었고, 둘째는 인덕전(仁德殿 정종)이 태상왕이 되지 못했으며, 셋째는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굳이 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玉冊)ㆍ금보(金寶)로써 상왕을 높여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모셨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의 병이 위독하여 신궁(新宮)으로 옮길 때, 임금이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금이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뫼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태상왕이 돌아가신 뒤,흙비[霾雨]가 심하여 대신들이 술을 드시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 꾸지람을 내려 이르기를, “상중에 술을 마심은 예법이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비례(非禮)의 말을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 병환이 심하시던 날로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이제 이미 20여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옮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 태종의 초상에 명 나라 황제가 내관 유경례(劉敬禮)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부물(賻物)을 주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렸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나가서 예를 거행할 때 임금이 우시니, 사신도 또한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가 모두 우는 정경을 보니 더욱 부왕께서 인후하고 덕이 있었음을 알겠나이다.” 하였고,또 세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덕스러운 얼굴이 전하와 같으니, 이는 한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술을 돌리자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사신이 관반(館伴)황희(黃喜)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군신의 분수가 진실로 엄하기는 하나 전하께서 일어서심은 형제의 천륜을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이 “전일 우리나라에서 촉왕(蜀王)이 들어와 황제를 뵈올 때, 황제께서 동궁에게 명하여 길을 비키게 하더니, 이제 전하가 효녕을 대우함이 이와 같소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 임금은 침착하고 과묵하며 제왕의 위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과 지혜는 만민에 뛰어난 성인이었고, 너그러움과 온유함은 뭇 백성을 용납하고 기르는 덕을 지녔다. 사물을 처리함에 혼자서 판단하여 주장이 있었고 위엄있고 모범이 되어 근엄하고 중정한 조심성이 있었으며, 정미한 의리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사물의 조리를 세밀히 관찰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네 번째 인경 소리가 나면 일어나 옷을 입고 평명(平明)에 조회를 받고 나서는 곧 일을 보고, 다음에는 신하를 번갈아 만나보고, 다음에는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내전(內殿)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서적을 보아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시행되지 않음이 없었고 일은 처리되지 않음이 없었다. 〈신도비 지문(誌文)〉
○ 임금은 늘 이르기를 “나는 서적에 대해서 눈으로 한번 거친 것은 곧 잊지 않았다.” 하였으니, 총명과 글 좋아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나는 궁중에 있을 때 손을 거둔 채로 한가히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제왕으로서의 공덕은 백왕(百王) 중에서 높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니,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만년에 기력이 줄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는 더욱 유의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해서 모든 책을 편찬케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모두 직접 재단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몇십 권에 이르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동북 지방의 다른 민족들이 모두 복종하여 국경 안이 편안하니, 당시 사람들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일컬었다. 《국조보감》
국초에는 고려가 망한 뒤를 이었기 때문에 예악에 손댈 겨를이 없었는데, 임금이 비로소 종(鍾)ㆍ경(磬)과 당악(唐樂)ㆍ국악의 악보(樂譜)를 제정하고,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시의(時儀 물시계)를 정하였으며, 《칠정편(七政篇)》ㆍ《오례의(五禮儀)》ㆍ《삼강행실(三綱行實)》ㆍ《명황계감(明皇誡鑑)》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 등이 모두 임금의 직접 재단에서 나온 것이다.정인지(鄭麟趾)의 〈영릉비서(英陵碑序)〉에, “실로 동방의 요순이다.” 한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기(秘記)에 전하기를, “황려(黃驪 여주)의 산에는 마땅히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영릉(英陵)이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임금은 모든 진기한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림원(上林苑)에 명하여 온갖 꽃과 새들을 모두 민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이 길들인 사슴을 바치고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상한 새나 기이한 짐승은 옛 사람들이 경계한 바이니, 들이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이 경회루 동편에 남는 재목으로 별실(別室)을 지었는데, 돌 층대를 쓰지 않고, 또 짚으로 지붕을 올려 되도록 검소하게 한 후 늘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문 밖에 짚자리가 깔려 있음을 보고 물으시기를, “이건 누가 한 짓인가.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내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안에 들이지 말라.” 하였다.
○ 강음현(江陰縣) 백성 조원(曺元)이 농토 문제로 관가에 송사를 할 때, 현관(縣官)이 송사를 지체한다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밝지 못하여 이제 이따위를 수령으로 삼았다.” 하였다. 금부(禁府)와 삼성(三省)의 관원이 모두 죄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심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달아서 백성이 몹시 괴로운데, 조원의 고을 수령이 이러한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손님과 술을 마시느라고 송사를 지체하고 판결하지 않았으니, 조원의 말은 다만 이를 미워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하고, 끝내 죄 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 임금이 일찍이 병이 나서 누웠는데, 나인(內人) 등이 무당의 말에 혹하여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를 하니 유생들이 무녀를 쫓아냈다. 중사(中使)가 크게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세종이 병든 몸을 부축케 하여 일어나 앉으면서 이르기를, “내 일찍이 선비를 기르지 못했는가 염려하였는데, 이제 선비들 기운이 이러하니 내 무슨 걱정을 하리오. 이 말을 들으니 내 병이 낫는 것 같구나.” 하였다.
명종조(明宗朝)에 유진동(柳辰仝)이 이 이야기를 경연에서 아뢰며, 말하기를, “군주가 선비의 기운을 돋구어 주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한 어린 궁녀가 후궁(後宮) 중 가장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청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하교하기를, “아녀자가 감히 간청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하겠다.” 하고는, 곧 물리쳐 멀리하여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측실(側室) 홍씨(洪氏)의 오라비 유근(有根)이 사랑을 받아 임금이 벗은 헌옷은 반드시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가 일찍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을 때, 임금이 거둥하다가 연(輦) 끄는 말이 저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에 유근은 자기 말을 스스로 자랑하며 자기 말로 대신 끌게 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극형을 청할 것이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하고, 유근을 도보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듣고 유근을 베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은 놓아주고는 그를 한 평생 버렸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9년 정미에 금천(衿川)에 행차하여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과 눈보라가 매우 치며 물결이 사나와 배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다. 명령을 내려 금천의 쌀과 콩을 가져다가 호종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고 새벽이 될 무렵에야 겨우 건넜었다.좌의정 이직(李稷)이 길가에서 뵈었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종께서는 매사냥을 구경하러 가셨지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으니, 매우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 이제 잘못하여 남의 말을 듣고 강을 건너갔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꾸짖은 것이오.” 하였다.
사헌부에서 백관이 미처 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禮官)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오늘 일은 나의 과오이니 논하지 말라.” 하고, 이로부터는 다시 강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해동청(海東靑 보라매)을 바치고 금은(金銀) 바치는 것을 감해달라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이르기를, “해동청은 얻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뿐더러 달아나기라도 하면 응사(鷹師)가 그것을 찾기 위해 촌락에 침입하게 되어 백성에게 폐해가 되므로 내가 모두 놓아 버렸다.”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사책(史冊)에 써서 만세에 법이 되도록 할 만 합니다.” 하였다.
○ 임금은 항상 소갈증으로 고생하였다. 대언 등이 아뢰기를, “의원의 말에 이는 먼저 음식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흰 수탉ㆍ누런 암탉ㆍ양 고기가 모두 갈증을 다스릴 수 있다 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날마다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내 어찌 내 한 몸을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해치겠는가. 하물며 양이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님에랴.” 하였다. 대언 등이 다시금 아뢰기를, “관가에 기르는 양이 번식하니, 청컨대 한번 드셔보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임금이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구경할 때, 말을 천천히 몰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인 새 정자에 올랐다. 때마침 단비가 내려 잠깐 동안에 온 들이 흡족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였다.
○ 임금이 항상 근정전(勤政殿)에 앉아서 대신과 더불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 되게 하려 하였으므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정부에서 물러가서도 오히려 옷을 끄르지 못하였으니, 불시에 부르는 일이 있을까 해서이다. 《정암집(靜菴集)》 〈연주(筵奏)〉
○ 임금이 신하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당대에는 사대부로서 극형을 당한 이가 없었다. 〈지장(誌狀)〉

[주D-001]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맡은 관원.
[주D-002]여차(廬次) : 상주(喪主)가 거처하는 곳.
[주D-003]옥책(玉冊)ㆍ금보(金寶) : 왕이나 후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 금보와 옥책을 드리는데, 보(寶)는 도장과 같은 것이며, 책(冊)은 거기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4]관반(館伴) : 외국 사신이 유숙하는 관(館)에서 접대의 책임을 맡은 사람.
[주D-005]응사(鷹師) : 매를 다루는 사람.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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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집현전을 설치하고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다


임금은 문치(文治)에 정성을 다하였다. 2년 경자에 비로소 집현전을 두어 문사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더니, 그 뒤에 더 뽑아서 삼십 명이 되었다. 다시 이십 명으로 줄여 열 사람에게는 경연(經莚)의 일을 맡기고, 또 열 사람은 서연의 일을 보게 하여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기되,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게 하니, 문장하는 선비가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어 낳은 새끼가 모두 희더니, 몇해 사이에 요직에 오른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필원잡기》
○ 집현전에서는 일찍 출근하여 늦게야 끝나서 일관(日官)이 시간을 아뢴 연후에 나가게 하였고, 아침과 저녁에 밥을 먹을 때에는 내관으로 하여금 손님처럼 대하게 하였으니, 그 우대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금이 인재를 기르는 아름다운 일은 옛 임금들보다 뛰어났다. 집현전 선비들이 날마다 번갈아 숙직을 하는데, 그들을 사랑함과 대접의 융숭함을 사람들이 모두 영주(瀛洲)에 오른 것에다 견주었다. 어느날 밤 이경(二更) 쯤에 내시를 시켜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를 가서 엿보게 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가 바야흐로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내시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서너 번이나 가서 보아도 글 읽기를 오히려 끝내지 않다가 닭이 울자 비로소 취침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담비 갖옷을 벗어 그가 잠이 깊이 들 때를 기다려 그 위에 덮어주게 하였다. 숙주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선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을 쓰게 되었다. 《필원잡기》
○ 8년 병오에, 임금이 집현전 부교리 권채(權採)ㆍ저작랑(著作郞) 신석견(申石堅)ㆍ 뒤에 석조(碩祖)로 이름을 고쳤다.ㆍ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너희들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다 하니, 이제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각기 집에서 편히 있으면서 글 읽기에 마음을 전력하여 그 효과를 드러내도록 하되, 글을 읽는 규범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동각잡기》
○ 임금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몇십 년 동안을 길러서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관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 것을 오히려 우려하여 나이가 젊으며 재주 있고 몸가짐이 단정한 몇 사람을 뽑아 긴 휴가를 주어 번을 나누어 들어와 숙직하게 하며,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에서 그 비용을 제공하였다. 경사(經史)ㆍ백가(百家)와 천문ㆍ지리와 의약ㆍ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를 이룩하였으니,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기 때문에 집현전에 뽑히는 것을 영주(瀛洲)에 오른 것에다 견주었다. 《필원잡기》
○ 24년 임술에 또 신숙주 등 여섯 사람을 진관사(津寬寺)에 보내었다. 《용재총화》
○ 임금이 말년에 내불당(內佛堂)을 지었는데, 대신이 간했으나 듣지 않았고 집현전 학사들이 간해도 역시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학사들이 모두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서 집현전이 텅비었다.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황희를 불러 이르기를, “집현전의 여러 선비들이 나를 버리고 가버렸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가서 달래겠습니다.” 하고, 곧 두루 모든 학사의 집을 찾아가 간청해서 돌아오게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와 중봉(重峯)의 〈소(疏)〉
○ 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ㆍ신석조(申碩祖)ㆍ남수문(南秀文)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문장으로 일시에 이름을 날렸으나, 사람들은 수문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주D-001]영주(瀛洲) : 신선이 사는 곳.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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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찬술(纂述)과 제작(制作)


5년 계묘에 유관(柳觀)ㆍ윤회(尹淮)ㆍ변계량(卞季良)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고쳐 편찬하게 하였다. 애초에 정도전(鄭道傳)ㆍ정총(鄭摠) 등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이색(李穡)ㆍ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에 의거하여 편찬하였다.도전이 원종(元宗) 이후의 일에는 중국의 황제를 모방한 참람된 것이 많다 하여, 종(宗)이라 일컫는 것은 왕(王)이라 쓰고, 절일(節日)은 생일(生日)로 짐(朕)은 여(予)로 쓰고, 또 조서(詔書)는 교서(敎書)라고 고쳐서 실상을 잃은 것이 많았고, 시비의 판정은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따라 하였다. 하륜(河崙)이 구사(舊史)를 상고하여 필삭하기로 의견을 드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유관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이 엮은 《고려사》를 고쳐 편찬하게 하였다.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 등이 아뢰기를, “당시의 제도가 비록 참람하였다 하나 실상을 없애버리고 고침은 불가합니다.” 하였으나, 변계량은 그렇다고 하지 않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는데 있어서 천자의 권리에 의탁했으므로 붓질하고 깎아버리고 주고 빼앗는 것을 모두 성인의 마음으로 재량하였고,《좌전(左傳)》에서는 제후이면서 왕이라 참칭한 자에게도 한결같이 그 스스로 일컬은 것을 따라서 왕이라 써주어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으며, 주자의 《강목(綱目)》은 비록 춘추의 필법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칭호를 참람히 쓴 자에게도 모두 실상에 의거하여 기록하였으니, 기사(記事)의 예(例)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오늘 사필(史筆)을 잡은 이는 이미 성인의 필삭(筆削)하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쓴다면 포폄은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하고, 일체를 구사(舊史)에 의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조보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첫 초본(草本)은 모두 남수문(南秀文)의 손에서 나왔다. 《필원잡기》
○ 10년 무신에 임금이, 진주(晋州)에 살고 있는 백성이 아비를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다. 허조(許稠)가 매양 나에게 상하의 분수를 엄격히 세우라고 권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변계량(卞季良)이,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시골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평상시에 읽게 하여 점차로 효제와 예의를 숭상하는 습속을 이룩하게 하기를 청하니, 이에 설순(偰循)에게 명하여 《효행록》을 고쳐 편찬하게 하였다.
○ 17년 을묘에 윤회(尹淮)ㆍ권도(權蹈)ㆍ설순 등에게 명하여 문신(文臣) 사십여 명을 집현전에 모아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이때 임금이 친히 교정을 보았는데, 어떤 때는 밤이 깊을 때까지 하였다. 윤회에게 이르기를, “요즘 이책을 읽어서 글 읽는 것이 유익함을 깨달았다.총명은 날마다 더해지고 졸음은 훨씬 감해졌다.” 하였다. 곧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를 의거하고 또 다른 책을 참고로 해서 주석과 음과 구두를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이라 이름하였다. 《국조보감》 《필원잡기》
○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고금의 충신ㆍ효자ㆍ열녀 중에서 특별히 후세에 모범이 될만한 일을 편집하게 하였는데, 일을 따라 기록하고 아울러 시와 찬(贊)도 짓되, 무식한 민간의 남녀들이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그려 붙이고는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 이름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고, 곧 정몽주를 충신전에 넣도록 명하였다.
○ 임금은 오방(五方)의 풍토가 같지 않아, 심을 곡식이 각기 마땅한 곳이 있고 옛글에 있는 것과 모두 같지 않을 것을 알고는 각 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노농(老農)에게 실제로 경험한 방법을 골고루 알아 올리게 하였다. 이어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이를 순차로 정리해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 이름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들이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의 일을 그림으로 그린 이가 제법 많았으나, 이것을 희롱 또는 구경의 자료로 삼은 것에 불과하였을 따름이다. 내 이제 개원(開元)ㆍ천보(天寶) 때의 성패(成敗)의 자취를 채집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보고자 한다. 옛날 한 나라 때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에 두른 장막이나 병풍에 주왕(紂王)이 취해서 달기(姮己)를 베고 여러 날 동안 긴 밤 내내 잔치를 벌이는 그림을 그렸으니, 이는 세속 임금으로 하여금 지난 시대의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하도록 함이 아니겠는가.명황은 영주(英主)라 하였으나, 만년에 여색에 빠져 실패함에 이르렀으니 처음과 마지막의 차이가 이와 같은 이는 없었다. 심지어 월궁(月宮)에서 놀았다느니 용녀(龍女) 양통유(楊通幽)를 만났다느니 하는 일들은 극도로 허탄한 것이었으나, 주자의 《강목(綱目)》에도 명황제가 공중에서 나는 귀신의 말을 들었다는 구절을 써서 명황이 괴이한 것을 좋아하던 사실을 나타내었으니,이러한 말들은 역시 임금으로서 깊이 경계할 바이다.” 하고, 곧 유신에게 명하여 책을 편찬하되 그림을 그리고 선유(先儒)의 시와 논평을 붙여서 《명황계감(明皇誡鑑)》이라 이름하였다.
○ 임금이 정인지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전대(前代) 치란(治亂)의 자취를 살펴야 할 것이나, 서적이 너무 많아서 상고하기에 쉽지 않으니, 임금이 정치를 보살피는 여가에 어찌 널리 볼 수 있겠는가.경은 사적을 상고하여 선과 악이 족히 후세에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거나 또는 우리 동방의 흥폐와 존망에 관한 것들을 엮어서 책을 만들라.” 하고, 명하여 선비 몇십 명을 집현전에 모아 각기 분과(分科)를 맡아 이룩하게 하여 《치평요람(治平要覽)》이라고 이름하였다.
○ 권진(權軫)ㆍ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목조(穆祖) 이후에 나라의 기초를 잡은 사적으로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를 엮어서 기술하되, 먼저 옛 제왕의 사적을 서술하고 다음에 조선의 일을 써서 《용비어천가》라 이름하니,모두 1백 25장이었다. 명하여 궁중에서 간행해서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어 조회ㆍ제전ㆍ잔치ㆍ향사 등에 쓰는 악사(樂辭)로 쓰게 하였다. 《국조보감》 《대동운옥(大東韻玉)》
○ 임금이 오례(五禮)가 미비한 것을 걱정하여 허조ㆍ강석덕(姜碩德) 등에게 명하여, 명 나라 태조가 정한 옛 제도와 우리나라의 의례를 채택하여 덜고 첨가하되, 성상의 재량에 따라서 하여 《오례의(五禮儀)》라 이름하였다. 《역대총목(歷代摠目)》
○ 집현전 유신을 모아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할 제 세조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 가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는데, 단종(端宗) 계유년(1453) 봄에 이르러 겨우 완성되었다. 《서애집(西厓集)》
○ 옛날 신라(新羅) 때에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서 관가나 민간에서 이제까지 써왔으나 모두 글자를 빌려 만들었기 때문에 더러는 난삽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비루하고 근거가 없을 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모든 나라가 각기 자기 나라의 글자를 만들어서 자기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만 그것이 없다.” 하여 친히 자모(字母) 28자를 창제하여 ‘언문(諺文)’이라 이름하였으며,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편찬시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하였다.
초종성(初終聲)이 여덟 글자이니, ㄱ ㄴ ㄷ ㄹ ㅁ ㅂ ㅅ ᅌ이요, 초성(初聲)이 아홉 글자이니, ㅈ ㅊ ㅌ ㅋ ㅍ ㅎ  ᅀ ㅇ이요, 중성(中聲)이 열한 자이니,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ㆍ이었다. 그 글자 체는 옛전자[古篆]와 범자(梵字 인도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그리하여 모든 말소리나 한문자로서 기록할 수 없는 것을 막힘없이 통달하게 하였고, 《홍무정운(洪武正韻)》에 실린 모든 글자 역시 모두 언문으로 쓰게 되었다. 드디어 오음(五音)으로 나누어 구별을 지었으니, 곧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었다.순음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정(正)과 반(反)의 구별이 있으며, 글자 중에서도 역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차탁(次濁)ㆍ불청(不淸)ㆍ불탁(不濁) 등의 차이가 있어, 비록 무식한 여인이라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중국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때마침 요동에 귀양와 있었으므로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황찬을 찾아가 보고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에 왕복하기를 무릇 열세 차례나 하였다. 《용재총화》 《동각잡기》
○ 그때 임금이 처음으로 언문을 만들자 집현전의 모든 선비가 함께 불가함을 아뢰어, 심지어는 상소하여 극도로 논한 이까지 있었다. 임금이 최항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과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책을 지었다. 《사가집(四佳集)》
○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게 하였다. 《역법전고(曆法典故)》에 상세하다.
○ 임금이 경연에서 채씨(蔡氏)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론하다가 법도(法度)가 매우 정하고 존비(尊卑)가 순서 있음에 감탄하여 율(律)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황종(黃鍾)을 갑자기 얻기가 어려워서 곧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柳思訥)ㆍ집현전 대제학 정인지ㆍ봉상시 판관 박연(朴堧)ㆍ경시서 주부(京市署主簿) 정양(鄭穰) 등에게 명하여 구악(舊樂)을 정리하게 하였다.
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고, 영의정 황희ㆍ우의정 맹사성(孟思誠)ㆍ찬성 허조(許稠)ㆍ총제(摠制) 정초(鄭招)ㆍ신상(申商)ㆍ권진(權軫) 등을 제조(提調)로 삼아 악률(樂律)을 의논하게 하였다.
○ 박연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성악(聲樂)이 잘 조화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성음(聲音)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격경(擊磬)으로 주를 삼았고, 율관(律管)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누서(累黍)로 근본을 삼았는데, 이제 하늘에서 거서(秬黍 검은 기장)를 나게 하여서 지극히 조화될 징조를 보이고, 땅에서는 경석(磬石 경을 만드는 돌)이 생산되어 지극히 조화될 단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율관이라 생각합니다. 옛 일을 상고하면,주 나라에서는 유태(有邰)의 거서를 얻어 음악이 조화되었으나, 한(漢) 나라에서는 임성(任城)의 거서를 얻었고, 근고(近古)에 수(隋) 나라에서는 양두산(羊頭山)의 기장을 얻었으나 율관에 맞지 않았으며, 송 나라에서는 경성(京城)의 거서를 얻었으나 역시 맞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기장을 포개는 방법이 비록 글에 실려 있으나 알맞은 기장 낱알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신이 이제 동적전(東籍田)에서 길러낸 기장을 포개어 황종관(黃鍾管)을 만들어 불어 보았더니, 그 소리가 중국의 황종보다 일률(一律)이 더 높았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땅이 척박하고 해가 가물어 그 자란 것이 조화를 잃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같은 씨를 뿌려 자란 벼이건만 남방의 쌀은 윤기가 있고 통통하며,경기의 쌀은 메마르고 가늘며, 동북지방에서 생산된 쌀은 더욱 가는 것을 보면 기장의 대소 역시 그런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신은 남방 여러 고을에서 가꾼 기장들을 모아 세 등급으로 뽑아서 포개어 관을 만들되, 그 가운데 중국의 소리와 같은 것이 있으면 곧 삼분(三分)으로 손익(損益)하여 열두 율관(律管)을 만들어 오성(五聲)을 조화시키기를 바라니,그렇게 하면 도량형(度量衡)도 이것을 통해 분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역대 임금들이 음률을 지을 때에 기장이 한결같지 않았던 까닭으로 소리의 높고 낮음이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으니, 오늘날 중국의 음률이 참된 것이 아니요, 우리나라의 거서가 도리어 참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그러나 음률과 도량형을 고르게 함은 곧 천자의 일이요, 제후국이 멋대로 할 바가 아니니, 만일 오늘의 거서가 끝내 중국의 황종에 맞지 않는다면 잠정적으로 편의를 써서 다른 기장을 포개어 율관을 만들어 중국의 황종에 맞도록 한 연후에 법에 의거하여 손익하여 성률(聲律)을 바로 잡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 9년 정미에 임금이 이르기를, “거서(秬黍)로 율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만든 황종(黃鍾)을 박연이 만든 율관을 가지고 그 소리를 살펴보면 맞고 아니 맞는 것을 누구든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신상(申商)이 아뢰기를,“이는 다만 박연이 혼자 알아낸 것이 아니요,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악기(樂器)를 박연에게 맡기면 성음이나 절주(節奏)를 알아낼 것이다.” 하였다.
고려 예종(睿宗) 때에 송 나라 휘종(徽宗)이 제악(祭樂)에 쓰는 종(鍾)과 경쇠 각 한 틀과 거문고ㆍ비파ㆍ생(笙)ㆍ우(竽)ㆍ소(簫)ㆍ관(管) 등 악기를 각각 한 부씩 보내 왔더니,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 거의 다 흩어져 버리고, 늙은 악공(樂工)이 종과 경쇠 두 악기를 연못 속에 던져서 겨우 보존되었다.명 나라 태조와 태종이 모두 악기를 보내왔으나 소리가 율도에 맞지 않았으므로 제악의 팔음(八音)이 갖추어지지 못해서 제전(祭典)을 행할 때 경쇠는 와경(瓦磬)으로 대용하고 종도 역시 섞어 달아서 그 수를 갖추지 못하였다.
을사년(1425)에 거서가 해주(海州)에서 났고 병오년(1426) 봄에는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자, 임금이 개연(慨然)히 묵은 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다시 만들 뜻이 있어, 곧 박연에게 명하여 편경(編磬)을 만들게 하였다. 박연이 해주의 거서를 취해서 푼(分)과 치[寸]를 포개어 황종(黃鍾) 한 관(管)을 만들어서 불어보니,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조금 높았었다. 이로 인해 전현(前賢)의 의논을 상고해 보니, “땅에는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있고 기장도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서 성음의 높고 낮은 것도 시대마다 각기 같지 않다.” 하였고, 진양(陳暘)도 역시 말하기를, “대나무를 많이 끊어서 후기(候氣)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이 동방에 치우쳐 있어 중국과는 풍기(風氣)가 아주 달라 후기를 하기 어려웠다. 이에 해주에서 나온 거서를 가지고 낱알의 형체에 따라 납(蠟)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푼(分)을 포개어 관(管)을 만들되, 한 알이 한푼이 되고 열 알이 한 치가 되고 아홉 치가 황종(黃鍾) 길이가 되게 하고 삼분(三分)으로 손익(損益)하여 십이율(十二律)을 이룩하였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새로 만든 경쇠 두 틀을 드리며 아뢰기를, “이제 경쇠를 만들되 그 모양은 한결같이 중국의 것을 의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음에 있어서 중국의 경쇠는 유빈(蕤賓)의 소리가 도리어 임종(林鍾)보다 높고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으며 응종(應鍾)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마땅히 높아야 할 것이 도리어 낮고 마땅히 낮아야 할 것이 도리어 높았으니,아마도 한 시대에 만들어진 악기가 아닌 듯합니다. 만일 이에 의거하여 만든다면 결코 조화될 리가 없겠기에, 삼가 중국 황종에 대한 설명에 의거하여 황종관을 만들고 그것으로 손익(損益)하여 십이율의 관(管)을 만들어 불어서 율(律)에 맞추어 이로써 결정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새로 만든 경쇠 두 틀, 명 나라에서 받은 경쇠 한 틀과 소(簫)ㆍ관(管)ㆍ방향(方響) 등 악기를 취하여 새로 만든 율관으로 맞추어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경쇠는 과연 음률에 맞지 않고 이제 새로 만든 경쇠가 옳게 되어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박연이 율관을 만들어 음성을 구별한 것이 뜻밖에 매우 훌륭하니, 내가 매우 기쁘다. 다만 이칙(夷則) 하나만이 소리가 맞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박연이 곧 살펴보고 아뢰기를, “갈 때에 한정으로 표시한 먹이 아직 남아 있어 다 갈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곧 갈아서 먹이 다하자 소리가 저절로 맞게 되었다. 경쇠가 이룩된 뒤에 박연에게 명하여 그것을 전임하게 하니, 조회와 제전에 쓰는 음악이 비로소 갖추어지게 되었다. 《국조보감》
○ 박연이 임금의 인정을 받아 뽑혀 쓰이게 되어 관습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로서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만 맡았는데, 그는 앉아서나 누워서나 매양 손을 가슴 밑에 얹어서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 소리를 짓고 한 지 십여 년에 비로소 이룩하였다.
일찍이 석경(石磬)을 만들 때 박연을 불러서 살피게 하였는데, 그가 어떤 율은 한 푼이 높고 어떤 율은 한 푼이 낮다 하였다. 다시 보게 하니, 높은 율은 찌꺼기가 붙었으므로 긁어 버리고 또 낮은 율에는 찌꺼기 한 푼을 붙이고는 아뢰기를, “이젠 율이 바로 잡혔습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묘함을 탄복하였다. 《필원잡기》 《용재총화》
○ 10년 무신에 비로소 조회와 제사에 아악(雅樂)을 썼다. 한 책에는 15년 계축에 비로소 썼다고 되어 있다. 병오년(1426) 가을로부터 이해 여름에 이르기까지 악기가 모두 완성되었다.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헌가(軒架)에 편경(編磬)을 등가(登歌)하였는데, 경쇠가 모두 이백 스물 여덟 개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창제(創制)라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것이니, 임금이 하고자 하는 것을 혹 신하가 저지하기도 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것을 혹 임금이 듣지 않기도 하여, 또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하고자 하더라도 시운(時運)이 불리한 수도 있는데, 이제 내 뜻이 먼저 정해졌고 국가에도 일이 없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할 것이다.” 하고는 이내 명하여 조회에 쓸 경쇠는 남양(南陽)에서 만들게 하고, 조제(朝祭)에 쓸 종은 한강(漢江)에서 만들게 하되,모두 박연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고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일을 돕게 하였으며, 또 조종(祖宗)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과 ‘여민락(與民樂)’ 등의 음악을 지었다.
○ 12년 경술에 세종이 《의례(儀禮)》와 《시경(詩經)》의 음악과 임우(林宇)의 《석전악보(釋奠樂譜)》를 부연하여 《조제아악보(朝祭雅樂譜)》를 만들었다. 문종조(文宗朝)에 간행하였다.
○ 13년 신해에 임금이 박연에게 이르기를, “내 몸이 편치 못하므로 세자가 대리로 칙서(勅書)를 맞이할 때 쓰는 음악에 황종궁(黃鍾宮)을 쓰는 것은 불가하지 않은가? 고선궁(姑洗宮)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 14년 임자에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회례(會禮)에 쓰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두 악장(樂章)에 대하여 박연은 ‘마땅히 당세의 일을 노래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가사란 성공을 드러내어 그 덕을 찬송하는 것이니 당대의 일을 노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물며 나는 다만 대를 이었을 뿐이니,무슨 공덕을 찬송할 것이 있겠는가. 태조께서는 전조(前朝)의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워 백번 이기셔서 그의 공덕이 백성에게 흡족하게 미쳤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새 왕업을 후세에 물려주셨으며, 태종께서는 예와 악을 제정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어 중외가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武舞)를 짓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文舞)를 지어서 만세토록 행해질 제도를 만들어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가 문에 앞서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하니, 지난 역사 중에서도 역시 무가 문에 앞선 일이 있었던가. 박연ㆍ정양(鄭穰) 등과 의논하여 나에게 보고하라.” 하였다.
지신사 안숭선(安崇善)ㆍ좌대언 김종서(金宗瑞) 등은,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짓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야 하며, 겸하여 당대의 일을 노래할 것입니다.” 하였고, 좌부대언 권맹손(權孟孫)은, “마땅히 전하의 말씀대로 할 것이며, 당대의 일은 후세에 가서 반드시 노래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희ㆍ맹사성ㆍ권진ㆍ허조 등이 의논하기를, “종묘의 음악에는 이미 문을 먼저 하고 무를 뒤에 함이 옳다 하였으니, 조회에서도 무를 먼저 하고 문을 뒤에 할 수 없습니다. 태조와 태종의 문덕을 함께 찬송하여 문무를 만들고 태조와 태종의 무공을 함께 서술하여 무무를 만들게 하소서. 만일 2대의 공덕을 함께 서술하는 것을 옛일에 비해 말한다면 《시경》 〈대무편(大武篇)〉의 수장(首章)에 이르기를, ‘아아, 거룩하신 무왕이여, 그지없는 그 공렬이시도다. 진실로 문덕이 있는 문왕이 후세를 잘 열어주시거늘 뒤를 이어 무왕이 이를 받으시어, 은 나라를 이겨 살육을 저지해서 그 공을 이룩하셨도다.’ 하였으니, 이를 보아도 2대의 공덕을 함께 서술함이 어찌 의의가 없는 일이겠습니까.” 하였고, 대제학 정초(鄭招)는 아뢰기를,“진씨(陳氏)의 악서(樂書)에 한무(漢舞)는 무덕을 먼저하고 문치를 뒤에 하였고, 당무(唐舞)는 칠덕(七德 문덕)을 먼저하고 구공(九功 무공)을 뒤에 하였으니, 무는 백성에게 위엄을 보여 난을 평정하는 뜻이고, 문은 백성을 따르게 하여 세워진 나라를 지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난을 평정하는 것을 먼저 하고 나라를 지키는 일을 나중에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황희 등의 의논을 따랐다.
15년 계축 정월에, 임금이 근정전에 나와 회례(會禮)를 베풀었다. 3월에 임금이 권맹손(權孟孫)에게 이르기를, “지난 가을 예조에서 회례에 쓰는 악장을 의논하여 정하되, 첫째는 수보록(受寶籙)이요, 둘째는 근천정(覲天庭)이요, 셋째는 하황은(荷皇恩)이요, 넷째는 성택(聖澤)이요,다섯째는 포구락(抛毬樂)이요, 여섯째는 아박(牙拍)이요, 일곱째는 무고(舞鼓)였다.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은 태종께서 일찍이 태조의 꿈에 나타난 일과 도참(圖讖 비결(秘訣))에서 나온 말이라 하여 노래하여 칭송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하셨는데, 하륜(河崙)이 굳이 청하여 다만 수보록만 악부(樂府)에 올리고 몽금척은 일찍이 노래에 올리지 않았다.기해년(1419)에 태종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몽금척이 꿈 속에 나타난 일이라 하여 폐기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주 무왕(周武王)도 역시 이르기를, 「나의 꿈이 나의 점에 맞는구나」하였다. 그러니 이제 몽금척도 악부에 올리도록 하라.’ 하셨다. 태종의 말씀이 이러하셨다. 수명명(受明命)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새로 대를 이을 때에 항상 있는 것이라 하여 노래하지 않는다면 하황은도 역시 노래에 올려서는 안 될 것이다.그러나 고려 때에는 중국으로부터 고명과 인장을 받은 임금이 적었는데, 우리 태종에 이르러서 받게 되었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기 때문에 수명명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겠고, 하황은은 비록 노래에 올리지 않더라도 가할 것이다.” 하였다.
맹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두터운 황은(皇恩)을 입은 것은 옛 역사에 없었던 일이니 어찌 노래 불러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하황은을 폐할 수 없다면 수명명도 마땅히 악부(樂府)에 올려야 할 것이다. 지금 악부에 성택(聖澤)을 해서(海瑞)로 고친 것은 근래에 청낭간(靑琅玕)의 상서를 얻었기 때문인데,이런 세세한 일을 어찌 악부에 올릴 수 있는가. 또 포구락(抛毬樂)은 잡기로서 역대에 모두 쓰긴 하였으나 곡절이 지나치게 길어 회례의 음악에는 합당하지 않으니 폐기함이 어떠한가. 정척(鄭陟)으로 하여금 상정소(詳定所)에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맹손이 아뢰기를, “해서의 문제도 아울러 의논합니까.” 하니,임금이 이르기를, “앞으로 대수가 무궁할텐데 이런 일을 모두 노래하기로 한다면 장차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것이니, 의논할 것 없이 폐기하라. 다만 몽금척(夢金尺)은 태조의 공덕을 노래한 것이고, 수명명(受明命)은 태종의 공덕을 노래한 것이니, 정척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 14년 임자에 세종이 경연에 나와서 역상(曆象)의 이치를 논할 때,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해외에 있으나 모든 제도를 한결같이 중국의 것을 따랐다. 다만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가 없었는데,경이 이미 역산(曆算)을 맡은 부서의 제조가 되었으니,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옛법을 강구하여 의표(儀表)를 창조하여 천문 관측에 쓰게 하되, 그 요점은 북극(北極)이 땅 위에 솟은 높낮이를 정함에 있을 것이니,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정초ㆍ정인지 등은 옛글 상고하는 것을 맡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李蕆), 호군 장영실(蔣英實)은 기술자의 감독을 맡아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어서 서울에서 북극의 땅 위에 38도가 솟은 것을 측정하니 원사(元史)에 실려 있는 바의 측정한 것과 다소 부합되었다.드디어 구리를 녹여서 여러 가지의 의상(儀象)을 만들었는데, 7년이 지난 무오년(1438)에 이룩되었다. 첫째는 대소 간의(大小簡儀)요, 둘째는 혼의 혼상(渾儀渾象)이요, 셋째는 현주 천평 정남 앙부 일구(懸珠天平定南仰釜日晷)요, 넷째는 일성 정시의(日星定時儀)요, 다섯째는 자격루(自擊漏)였다. 모든 의상의 제도와 모든 신하들이 지은 명(銘)은 아울러 의상전고(儀象典故)에 자세히 실려있다.
그때 임금이 여러 의상을 만들었으니, 대소 간의대(大小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혼상(渾象)ㆍ앙부 일구(仰釜日晷)ㆍ일성 정시 규표(日星定時圭表)ㆍ자격루(自擊漏) 등이 모두 극도로 정교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임금의 재량에서 나왔다. 여러 기술자 중에 임금의 뜻을 헤아리는 자가 없었는데,다만 호군 장영실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서 기교한 방법을 운용하여 임금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종이 매우 중히 여겼다. 사람들은 모두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임금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난 인재라 하였다.
○ 김돈(金墩)ㆍ김조(金銚)에게 명하여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조그마한 정각 한 간을 짓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 자쯤 되게 하여 정각 가운데에 두고, 그 안에 옥루(玉漏)를 설치하고 바퀴를 달아 물로 돌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ㆍ십이신(十二神)ㆍ고인(鼓人)ㆍ종인(鍾人)ㆍ사신(司辰)ㆍ옥녀(玉女) 등을 만들어 모든 기관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여 마치 신이 그렇게 하는 듯 하였다.하늘과 해의 도수와 구(晷)와 누수(漏水)의 시각이 위로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기(欹器)를 만들었는데,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산의 사방에는 〈빈풍(豳風)〉 칠월시(七月詩)에 의거하여 사시의 경치를 만들고 나무에 인물ㆍ새ㆍ짐승ㆍ초목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그 절후에 맞게 배포하여 민생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보였다. 그 이름은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서경》의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국조보감》 《필원잡기》 《대동운옥》
흠경각은 세종 갑인년(1434)에 창건되었으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곁에 있었다. 뒤에 불탄 것을 명종(明宗) 갑인년(1554)에 그 옛터에 재건하였으나 또 임진왜란의 병화에 소실되었다. 광해군(光海君) 갑인년(1614)에 이르러 다시금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세웠으니,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번 갑인년을 만나서 세워졌었다. 세종조에 이룩된 정시의(定時儀)가 아직 완전히 남아 있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15년 계축에 임금이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그림을 그려서 돌을 새기고, 또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하여 선유들이 의논한 역대 제도를 수집하여 의상(儀象)ㆍ구루(晷漏)ㆍ천문(天文)ㆍ역법(曆法) 등의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 24년 임술에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었다. 《의상전고(儀象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 27년 을축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조회할 때에 아악(雅樂)을 속악(俗樂)과 섞어 연주해서는 안되니, 이제부터는 섞어 연주함을 허하지 마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주D-001]개원(開元) …… 자취 : 개원은 당명황(唐明皇)의 처음 연호이고, 천보는 말년의 연호인데, 개원 때에는 정치를 잘 하였고, 천보 때에는 양귀비와 음란한 생활을 하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리를 당하였다.
[주D-002]오례(五禮) : 길(吉)ㆍ흉(凶)ㆍ군(軍)ㆍ빈(賓)ㆍ희(喜)의 오례를 말함.
[주D-003]격경(擊磬) : 경(磬)을 쳐서 울리는 것.
[주D-004]누서(累黍) : 고대에 기장의 낱알을 계량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기장의 낱알을 일정한 방식으로 배열하여 음률ㆍ율관(音律律管)의 길이 정도를 정하였다.
[주D-005]팔음(八音) : 악기의 종류인데,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을 말한다.
[주D-006]후기(候氣) : 옛날에 갈대 속의 막(膜)을 태운 재를 율관(律管)안에 넣어 두면, 어떤 한 절기가 이르렀을 때 율관 안의 재가 서로 응해서 그 재가 날아가게 되는데, 이것에 따라 절기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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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강상인(姜尙仁)의 옥사

태종이 이미 상왕이 된 뒤에 병조에서 잘못한 일이 있었으므로 명하여 입직했던 참판 강상인, 좌랑 채지지(蔡知止)를 의금부에서 국문하고, 아울러 판서 박습(朴習), 참의 이각(李慤), 정랑 김자온(金自溫)ㆍ이안유(李安柔)ㆍ양여공(梁汝恭), 좌랑 송을개(宋乙開)ㆍ이숙복(李叔福) 등을 추고하여 모두 옥에 가두었다가 강상인은 수레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고 박습은 목을 벴다. 공사(供辭)에 관련된 이관(李灌)ㆍ심정(沈泟)도 베고, 영의정 심온(沈溫) 역시 관련되었으므로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양(李楊)으로 하여금 수원으로 압송하여 자살하게 하고 그의 처자는 종을 삼았으며, 그 나머지는 중도부처(中途付處)하게 하였다. 《동각잡기》
○ 무술년(1418) 8월 세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받고 태종이 상왕이 되었다. 병조 참판 강상인이 총제(摠制) 심정과 더불어 금위(禁衛)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다만 임금에게만 아뢰고 상왕에게는 아뢰지 않았다. 상왕이 노하여 그의 의중을 시험하고자 하여 상인을 불러 묻기를,“상패(象牌)와 매패(梅牌)는 어떤 일에 쓰는 것이냐.” 하였더니, 상인이 아뢰기를, “대신을 부를 때에 쓰는 것입니다.” 하였다. 곧 상인에게 상패와 매패를 주어서 임금에게 보냈더니 임금은, “이건 어디에 쓰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상인이 아뢰기를, “밖에 있는 장수를 부를 때에 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상왕에게 도로 바쳐라.” 하였다.
상왕은 상인이 간사하고 속인다 하여 곧 우부대언 원숙(元肅)과 도진무사 최윤덕(崔潤德)을 시켜 전교하기를,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군국에 관한 정사는 친히 결재하거늘, 지금 병조에서 다만 순찰하는 일만을 아뢰고 모든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아뢰지 않았다.내가 그 의견을 처음 낸 자가 누구인가를 묻노니, 만일 숨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고신(拷訊 곤장을 때리며 신문하는 것)을 가하리로다.” 하였다. 이에 병조 관원들이 대죄(待罪)하였다. 대개 옛 제도에 도총부(都摠府)에서 군병(軍兵)을 주관하고 본병(本兵 병조)에서는 으레 군색(軍色)을 겸하고 판서는 상관이 없는 법이었다.
대언(代言) 이우녕(李友寧)이 일찍이 초계수(草溪守)가 되었을 때에 박습(朴習)이 도순찰(都巡察)이 되어 우녕이 행정을 잘못했다 하여 성적을 하등에 두어 파면했는데 우녕이 돌아가는 길에 그 어머니가 더위를 먹어 죽었으므로 박습을 매우 원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우녕이 틈을 타 상왕에게 들어가 청하기를,“본병의 당상과 낭속들도 반드시 이 일을 알았을테니, 함께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판서 박습, 참의 이각, 정랑 김자온ㆍ이안유ㆍ양여공, 좌랑 송을개ㆍ이숙복 등을 함께 의금부에 내려서 고신하였다. 상인과 심정이 말하기를, “위사(衛士)의 분속은 전례에 따라 한 것이고, 상왕께 여쭙지 못한 것은 우연히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박습은 “본병의 일은 각기 맡은 것이 있으니, 위사는 입직하는 당상과 낭관이 분속시키는 것이요, 본시 판서에게 결재를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신이 간여하여 알았다 하더라도 죽을 죄는 아니니 은휘(隱諱)할 것이 없겠으나 실로 알지 못한 일이니,어찌 다른 말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특별히 박습과 강상인을 놓아주고 나머지는 다만 벌금형(罰金刑)에 부치려 하였으나, 형조와 양사가 여러 번 청함에 따라 먼 곳에 귀양을 보냈다.
9월에 영상 심온(沈溫)이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전별하는 사대부가 많아서 거마가 서울을 덮을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였으니 심온은 곧 심정의 형이며 세종의 장인이었다. 상왕이 그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더니, 때마침 경연이 폐해지매 시신(侍臣)ㆍ종관(從官)과 여러 재상이 모두 상왕의 궁에 들어와 뵙게 되었다.그러므로 바깥의 대소 모든 일이 들려오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다. 병조 좌랑 안헌오(安憲五)가 본래부터 강상인ㆍ심정과 사이가 좋지 못하더니 상왕이 심온을 의심하는 눈치를 엿보고 곧 고자질하기를, “심정이 박습ㆍ강상인과 더불어 사사로운 말로 ‘이제 호령이 두 곳(상왕과 세종)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한 곳(세종)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크게 노하여 이해 11월 21일에 다시금 명을 내려 박습ㆍ강상인ㆍ심정 등을 잡아들여 삼성(三省)에서 번갈아 다스리게 하였다. 강상인에게 압슬형(壓膝刑)을 네 차례나 가하니, 상인이 고문에 이기지 못하여 허위로 자백하기를, “신이 박습과 더불어 심정을 궁문 밖에서 만났더니 심정이 신에게 이르기를,‘내금위의 인원에 결원이 많아서 시위가 소홀한데 어찌하여 보충하지 않느냐.’ 하기에, 신이 이르기를, ‘군사가 만일 한 곳에 모인다면 많고 적음을 어찌 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심정과 대면시켰더니, 심정이 말하기를, “신이 총제(摠制)의 자리에 있어서 시위가 소홀함을 의논하였을 뿐, 한 곳에 어쩐다는 말은 신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상인에게 또 압슬형을 가했더니 곧 말을 변경하여, “신이 영의정 심온을 보고, ‘시위를 두 궁에 분속시키려면 갑사(甲士)가 매우 부족하니 삼천 명을 증가하여야 하겠다.’ 하고, 또 ‘군무(軍務)는 마땅히 한 곳으로 돌려야 한다.’ 하였더니, 심온 역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과연 내가 들은 바와 같으니 그 정상을 알 수 있다. 마땅히 큰 간신을 제거하여야겠으니 상세히 물어보라.” 하였다. 참판 조말생(趙末生)이 상왕의 뜻을 맞추어 아뢰기를, “두 전하께서는 자애와 효도가 지극하신데 이 무리들이 군무를 옮기고자 하니 그 마음을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상왕이 말생에게 명하여 다시금 국문하니, 상인이 아뢰기를,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였으나 사실은 모두 허위 자백입니다.” 하였고, 심정을 국문하자, 심정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허위로 그 형 심온을 끌어들였다. 박습 역시 압슬형을 당하고, 이내 말하기를, “과연 간여한 일이 있습니다.” 하였고, 또 공사(供辭)에 관련된 이조 참의 이관(李灌)을 국문하니 이관 역시 허위 자백하였다.
상왕이 더욱 노하여, “주모자는 심온이다. 이른바 한 곳에 어쩐다는 것은 그 뜻이 이미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나에게 아뢰지 않았을 때에 드러났다.” 하고, 곧 좌의정 박은(朴訔)과 우의정 유정현(柳廷顯)을 수강궁(壽康宮)에 불러서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박은과 유정현이 애초부터 심온과 더불어 권세를 다투어 서로 좋지 못하더니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여 아뢰기를, “그가 말한 한 곳이란 어찌 상왕 전하를 가리키겠습니까, 반드시 주상전하를 가리켰을 것이니, 이는 비단 심정의 말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필시 심온의 뜻일 것입니다.” 하였다.상왕이 이르기를, “박습 등은 마땅히 형에 처하겠지만 저 심온은 어떻게 처리할꼬.” 하였더니, 대언 원숙(元肅)ㆍ이명덕(李明德) 등이 모두 아뢰기를, “강상인과 이관은 죄가 무거워 응당 죽여야 하겠으나, 박습ㆍ심정은 상인에 비해서 죄가 가볍고, 또 심온이 중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먼저 박습 등을 죽인다면 심온은 변명하고 증거댈 길이 없게 되니,조금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왕이 이르기를, “심온이 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그 도당을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몸을 찢어서 오도(五道)에 돌려 보이게 할 것이니, 곧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유정현이 아뢰기를, “박습 등이 이미 자복하였으니 하루라도 형을 늦출 수 없습니다.” 하고,박은은 비록 유정현처럼 단연히 극력 청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아뢰기를, “심온이 비록 돌아오더라도 다시금 대변(對辨)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 달 25일에 드디어 수레로 상인의 몸을 찢어 죽이고, 박습과 이관은 베고, 이욱(李勗)으로 금부 진무(禁府鎭撫)를 삼아 심온을 의주에서 기다리다가 잡아오게 하였다.
심온이 말하기를, “이 일은 신이 중국으로 간 뒤의 일인만큼 한번 대면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왕이 사람을 시켜 심온에게 이르기를, “박습 등이 이미 죽었으니 누구와 대면을 하겠느냐.” 하고는 금부 진무 이양(李楊)을 시켜 수원으로 압송하여 사사(賜死)하였다.유정현이 심온의 아내 안씨(安氏)를 천안(賤案)에 넣기를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의정부의 여종으로 만들고, 그 밖에 이리 저리 관련된 경대부(卿大夫) 십여 인은 모두 역모를 같이하였거나 또는 그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논하였다. 강상인과 심정의 처자는 종이 되고, 박습과 이관은 재산을 몰수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였으며,나머지는 모두 먼 곳 가까운 곳에 각각 부처하였다. 유정현ㆍ박은ㆍ조말생 등이 여러 차례 왕비(심온의 딸)를 폐하기를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박습유사(朴習遺事)》
그때에 상왕이 심온을 의심하자, 유정현ㆍ이직(李稷) 등이 모두 심온의 평소에 좋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는데, 박은이 아뢰기를,“심온이 국구(國舅)로서 수상이 되었을 때에 수상은 자리가 비록 높기는 하나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은 으레 이조ㆍ예조ㆍ병조 판서를 겸임하고 우상은 으레 호조ㆍ형조ㆍ공조 판서를 겸임하는 것이므로 심온이 권세없음을 싫어하여 굳이 좌상의 자리를 얻고자 하였으니,권세를 탐내어 법을 무너뜨리려는 뜻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인정상 그 누가 권세잡기를 싫어하겠는가. 좌상의 이 말은 아니할 말인 듯하다.” 하였다. 《기재잡기》
○ 혹은 말하기를, “심온이 만일 이 소문을 듣는다면 반드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중국에 거짓을 꾸며 하소연하여 변란을 일으킬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또는 말하기를, “몰래 돌아와 도당을 체결하여 난을 일으키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하여, 의주(義州)에서 정탐하여 살피게 하였다. 《기재잡기》
○ 심온이 죽음에 임하여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대대로 박씨와는 서로 혼인을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는 박은이 자기의 죽음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깊이 한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심씨 집에서 과연 대대로 그 말을 지켜 감히 혼인을 논하지 못하였고, 다만 심륭(沈嶐) 한 사람만이 박씨의 문중에 사위가 되었으나 역시 자녀가 없었다. 《기재잡기》
○ 8년 을사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등이 아뢰기를, “무술년에 심온이 강상인 등의 옥사에 관련되어 태종께서 사사하셨으나 좋은 묘지를 골라 주고 관을 주어 장사하게 하였으며, 비록 금부의 청에 의하여 그 처자를 적몰하였으나 명을 내려서 그들을 종으로 부리지 말 것을 부탁하셨습니다.공비전하(恭妃殿下)께서 바야흐로 국모가 되셨는데 그 어머니 안씨(安氏)는 관가의 여종이 되었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한 소제(漢昭帝) 때 상관황후(上官皇后)의 아버지 안(安)이 역모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 아내는 경부인(敬夫人)으로 추존하여 원읍(園邑)을 두게 하였으니, 청컨대 한 나라의 고사를 본받아서 천안(賤案)에서 삭제하고 벼슬 첩지를 돌려 주소서.” 하였다.
이에 세종이 지신사 곽존중(郭存中) 등을 불러 직접 이르기를, “심온이 죽을 때에 금부에서 그의 아우와 형을 관가의 종으로 만들려 하자,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왕비의 백숙부를 이렇게 처단할 수는 없다.’ 하였고,또 그의 아내와 자녀를 천안(賤案)에 기록하기를 청했을 때에 박은이 아뢰기를, ‘자신의 죄도 아니요, 또 중궁의 어머니를 관가의 여종으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으나, 유정현이 금위 제조(禁衛提調)로서 굳이 청하였으므로 명을 내려서 잠깐 천안에 기록하게 하였다.
이때에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죄인의 딸이 왕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여 공비(恭妃)의 자리를 바꾸려 하자, 태종께서 이르시기를, ‘그게 무슨 말이냐. 공비는 바꿀 이치가 만무하다.’ 하였고, 태종이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었을 때 대비가 모시고 앉았다가 ‘공비의 모친이 천안에 기록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이니, 곧 고쳐 주소서.’ 하였더니, 태종이 마땅히 고쳐야 한다 하였다.그러나 일이 시행되기 전에 태종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내가 비록 부왕의 뜻을 알기는 하였으나 부왕이 미쳐 시행하지 않으신 일이므로 감히 말을 내지 못하였다. 공비의 외조 천보(天保) 안봉소(安奉巢)가 공비를 길렀고, 또 나이가 매우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갑진년(1424) 겨울에 공비가 그 집에 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안할 때, 내가 대신을 불러 ‘심온의 처 안씨와 공비는 모녀 사이니 만큼 함께 만나보이는 것이 어떠하냐.’고 의논했더니,대신이 이르기를, ‘왕비의 귀하신 몸으로 천인(賤人)과 서로 접촉하는 것은 의리에 통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다만 외조만 만나게 하였다. 요즘 의논하는 자가 많이들 모녀 사이를 이렇게 막을 수 없다 하고, 또 국모의 어머니로서 천인이 되어 있음은 정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모두 옳지 않다 하고,이제 대신의 말도 역시 이러하니, 안씨를 천안에서 삭제하고 벼슬 첩지를 돌려 주며 아울러 그 자녀도 면해 주라. 또 모녀가 서로 만나지 못한 지가 여러 해이니, 어찌 정리에 절박하지 않겠는가. 아무 날에 공비가 마땅히 안씨의 집을 찾을 터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동각잡기》
○ 드디어 심온의 벼슬을 회복시켰다. 《박공유사(朴公遺事)》
○ 문종(文宗)이 왕위에 오른 원년 신미에 좌의정 황보인(皇甫仁)ㆍ우의정 남지(南智)ㆍ좌찬성 김종서(金宗瑞)ㆍ좌참찬(左叅贊) 안숭선(安崇善)ㆍ우참찬(右叅贊) 허후(許詡) 등이 힘껏 청하여 비로소 당시에 죄를 받은 여러 사람의 직첩(職牒)을 돌려 주었다. 《박공유사》
박습은 자는 □□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고려말 계해년(1383)에 진사(進士)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태종과 동방(同榜)이었고, 을미년(1415)에 팔도도순찰사 출척사(八道都巡察使黜陟使)로서 조정에 청하여 김제(金堤)에 벽골제(碧骨堤)를 쌓았으니, 그 수리(水利)의 혜택과 공사의 거대함에 대하여 남방 백성이 비를 세워 기록하였다.

[주D-001]공사(供辭) : 죄인이 자백한 말.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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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이원(李原) 무신생이며, 1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원은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용헌(容軒)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려 말 을축년에 급제하였으니, 나이가 18세였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무술년에 정승이 되어 벼슬이 좌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헌공(襄憲公)이고, 62세에 죽었다.
○ 공은 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 이강(李岡) 호는 평재(平齋)니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들이다. 이 죽고, 자부(姊夫) 권근(權近)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학문이 날마다 진보되었다. 권근이 매양 그와 의논하였는데, 뛰어남이 짝이 없었으므로 권근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영원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기해년(14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채가 좋고 의젓하여 만인 중에서 우뚝하니, 문황제(文皇帝)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이르기를 “누런 수염 재상은 후에도 다시 오라.” 하였다. 《사가집(四佳集)》에 있는 공의 비문
○ 을사년(1425)에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하니,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 공을 미워하는 자가 애매한 일로 모함하였을 때에, 태종이 친히 변명하여 주었다. 태종이 돌아가신 뒤에 공을 미워하는 자가 전날의 사감을 가지고 사헌부에 사주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세종은 그가 죄가 없는 줄을 아나, 사헌부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礪山)으로 귀양보냈으니, 곧 병오년(1426) 봄이었다.세종은 그의 옛 공훈을 생각하여 전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으며, 매양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철성(鐵城)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불러서 다시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를 질투하는 자의 저해를 입었으며,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사가집(四佳集)》


정탁(鄭擢)

정탁은 자는 여괴(汝魁)이며, 호는 춘곡(春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 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고, 임인년(1422)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익경공(翼景公)이다.
○ 공양왕 때 병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 김초(金貂)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죄를 얻어서 장차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정탁이 글을 올려서 변론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면 길이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이른바 이루어 놓은 법이라는 것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는데 불씨(佛氏)가 이에 모두 배치되니, 이것은 김초가 선왕이 세운 법을 허문 것이 아니라 곧 전하께서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언 등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어서 마침내 김초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유관(柳寬)

유관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이며, 호는 하정(夏亭)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형조 판서를 거쳐 갑진년(1424)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공이 죽자, 세종이 흰옷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울었다.
○ 공의 온량(溫良)하고 돈후(敦厚)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 총랑(工曹摠郞)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기축년(1409)에 길주도 안무 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방을 지킬 때,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므로 그 위세가 북방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내리고, 이어 그곳에 머물러 두어 교화를 펴게 하였다.
○ 공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에 글을 올려서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이 대포(大酺)를 하사하던 옛일을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로 하여금 경치좋은 곳을 골라서 놀며 즐겨, 태평의 기상을 표현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세종이 옳게 여겼다. 공이 나이 많아서 치사하니, 명하여 제사과(第四科)의 녹을 주어 일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여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때마침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설치하였으니 그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수레나 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와 관자(冠者)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 초가집 두어 간에 밖에는 난간도 담장도 없어,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울타리를 그의 집에 설치하여 주되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고, 또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 어느 때 장마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바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공이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諸生)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내고, 제삿날에는 제생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를 돌렸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평소에 한번 배운 글을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고, 매양 밤중에 그 글을 외우며 뜻을 생각하고 항상 민생을 건질 것을 마음 먹었다.그리하여 교량(橋梁)이나 원우(院宇)를 지으려 하는 자 있으면 비록 중들에게라도 곧 돈과 베를 시주하였고, 또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으나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연(趙涓) 갑인생

조연은 자는 여정(汝靜)이며, 처음 이름은 경(卿)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의 아들이고, 환조(桓祖)의 외손이다. 그는 무인이었으므로 과거에 응하지 않았는데, 13세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병오년(1426)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 공이 우상으로 있을 때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과 더불어 송사 중에 있는 노비를 받고 힘을 써서 이기게 하였더니, 사헌부에서 이를 적발하여 공 등을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황희(黃喜)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말 기사년(1389)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 병오년(1426)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여든에 치사하여 임신년(1452)에 죽으니 나이가 아흔이었다. 제사(諸司)의 이서(吏胥)와 노예들이 모두 치제하였으며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14세에 음관(蔭官)출신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소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우보궐(拾遺右補闕)이 되었는데, 성격이 곧아서 바른 말을 과감히 하였다. 《조야첨재》
○ 고려 말에 적성훈도(積城訓導)가 되었다. 《경훈전고(警訓典故)》에 상세하다.
○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는 것을 간하였더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공조 판서로 좌천시키고, 또 평안도 도순무사(平安道都巡撫使)로 내보냈다가 무술년에 양녕이 폐위되어 서인이 되자 그를 교하(交河)에 좌천시켰다.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에게 죄를 주기를 청해 마지 않았으나,태종은 공의 생질 오치선(吳致善)을 공이 있는 교하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경을 공신으로 대우하여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해 마지 않으니, 양경(兩京 개성 서울) 사이에는 둘 수 없다. 경의 본관(장수(長水))에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옮기게 할 것이니 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편하게 같이 가라.” 하였고,또 사헌부에 명하여, “그가 갈 때에 관리가 압송하지 말라.” 하였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어라 하던고.” 하니, 치선이 아뢰기를,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지만, 의식이나 쓰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였으니, 신이 어찌 은덕을 배반하겠습니까.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였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이 명하여 공을 불렀다. 공이 이르러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 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막 시골에서 왔으므로 몸체만 큼직할 따름이어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그는 마음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계묘년(1423)에 강원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세종이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구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종이 크게 가상이 여겨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제수하고, 을사년(1425)에는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직시켜 소환하였다. 《조야첨재》에는 이르기를, “공이 돌아온 뒤에 관동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蔚珍)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하였다.
○ 공이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이다. 때마침 나라에 일이 있어 공을 기복(起復)시키니,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좌상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또 기복시키니,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곧 나와 일을 보았다. 《조야첨재》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기복되었다.” 하였다.
○ 그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로 떠날때 공으로 수행하게 하니, 공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 나라에서 칙서(勅書)를 보내어 세자는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하니, 그는 또 글을 올리기를, “세자께서 이미 명 나라에 조회하지 않기로 되었고, 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였다.세종은,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선왕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글을 내리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면 비록 상복을 입었어도 고기를 먹는 법인데, 이제 황희는 이미 기복도 하였으려니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찬을 하면서 일을 보리요. 정원에서 그를 불러 고기 먹기를 권고하라.” 하였다.
그가 빈청(賓廳)에 나아갔더니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기 먹기를 권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침 병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청컨대, 이 뜻을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흠지가 감히 그렇게 아뢸 수 없다 하니, 공이 그제서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었다. 《동각잡기》
○ 공이 정승이 되었을 때 김종서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 모였을 때에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어 드렸더니,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앞에 불러 놓고 준절히 꾸짖었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그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ㆍ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본인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를 가두기도 하였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매우 고달펐다. 어느날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이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뒤에 공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식소록(識少錄)》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우 서달(徐達)은 공의 사위이다. 서달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는데, 공과 우상 맹사성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튿날 보석되어 다만 파직되었으나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열흘이 지나자 복직을 시켰다.
○ 공이 좌상이 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 공이 감목(監牧) 태석구(太石鉤)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대관(臺官)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청탁하였다 하여, 파면시켜서 앞으로 청탁을 받고 법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란 가벼이 죄를 줄 수 없다.” 하다가, 뒤에는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여 그를 파면시켰다.그러나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복직시켰다.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보지 않고 친한 자를 사사로이 돌봐주기 위하여 사헌부에 청탁하였으니, 다만 그 직만 파면하였음은 황희로 보아서는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의 둔전을 이양받으려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직부(織婦)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버렸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런 지 한 해가 채 못되어 갑자기 백관의 수반(首班)에 제수하자, 임명을 받아 엄연히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그때에 사간원에서 논박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에게 둔전을 청하여 사사로이 농장을 삼으려 하였으니, 백관의 수반인 정승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고,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사람이니, 내 어찌 경솔히 끊어 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종수(宗秀)의 무리가 그에게 아부하여 많이들 불의를 행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리어 어긋나게 하였을 때에,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까 하였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하여 사태를 관망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생각하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하시고, 또 사단(史丹)의 일을 인용하여 해명해 주시면서, 이내 눈물지으며 말씀하던 것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으니, 내 이제 어찌 함부로 신진 간신(新進諫臣)의 말을 들어서 그를 끊어 버리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 태학(太學) 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면박하기를, “네가 정승이 되어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공이 상부(相府)에 있은 지 27년이나 되어, 조종(祖宗)때에 이미 이룩된 법을 힘써 따르고, 변경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이치에 따라서 하고 규모는 원대하였으며,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있어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태종으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신임이 매우 두터워,세종이 매양 황희의 견식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점치는 시구(蓍龜)와 물건의 중량을 다는 권형(權衡)에 견주었다. 더러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 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毅然)히 굽히지 않았다.
나이 팔십에 비로소 치사를 허락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서도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서,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는 듯이 산 가지로 세는 듯이 하여, 비록 기억 잘하는 장년도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우리 조선의 어진 정승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제일로 삼았으며, 공의 훈업(勳業)이나 덕량을 송 나라의 왕문정(王文正)과 한충헌(韓忠獻)에 견주었었다. 〈묘비(墓碑)〉
○ 공은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고, 비록 아손(兒孫)과 동복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희롱하여도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염을 뽑는가 하면 뺨을 치는 놈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일찍이 아래에 있는 신료들과 함께 일을 의논할 때, 바야흐로 붓을 풀어 글을 쓰려 하는데 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싸도 그는 아무런 노여워하는 빛이 없이 다만 손으로 훔쳤을 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7년 동안을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다만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눈을 대고 있었을 따름이더니, 그뒤 비록 나이가 많아서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었다. 《필원잡기》
○ 공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가 구십여 세나 되었는데도, 늘 고요한 방에 앉아서 종일토록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글을 읽을 따름이었다. 창 밖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다 따는데, 공은 나직한 소리로,“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좀 맛보자.” 하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양 아침 저녁으로 밥먹을 때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가 밥을 덜어서 주면 지껄이며 먹기를 다투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용재총화》
○ 공은 기쁨이나 노여움을 일찍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종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일찍이 매를 대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여종이 작은 종과 희롱하기를 지나치게 하였으나 공은 볼 때마다 웃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 하고는,그 뜻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홀로 동산을 거닐 때,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지니, 무르익은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 떨어졌다. 그가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 즉,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언 이석형(李石亨)이 뵈러 갔더니, 그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을 내어서 책 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약간의 안주를 갖고 공의 의자에 기대고 서서 이석형을 내려다 보며 공에게 묻기를, “곧 술을 올릴까요.” 하니, 공은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여종이 한참 기다리다가 고함을 치면서, “어쩌면 그리도 꾸물거리누.” 하니, 공은 웃으면서, “그럼 드려오렴.” 하였다. 술상을 들에오니, 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차림에다 맨발로 들어와서 혹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더러는 공의 옷을 밟고 안주를 다 집어 먹고 공을 두들기곤 하였는데 공은 “아야 아야” 하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그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하류에 있었다. 파주읍(坡州邑) 서편 15리에 있다. 자손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이내 반구라 이름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조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권진(權軫)

권진은 자는 희정(希正)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신해년(1431)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을묘년(1435)에 죽었는데, 나이가 일흔 아홉이었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이 다스린 고을마다 좋은 성적을 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합주(陜州) 원으로 나갔다가, 정종(定宗) 경진년(1400)에 조박(趙璞)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寧海) 축산도(丑山島)에 귀양살이 갔는데 얼마 안되어 사면되어 돌아왔다.


최윤덕(崔潤德)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공의 자는 백수(伯修)요,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양장공(襄莊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자는 여화(汝和)이며, 본관은 흡곡(歙谷)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인년(1434)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국초의 명장이었다. 그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운해는 변방을 지키느라고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공의 아버지가 합포(合浦)를 지켰다.” 하였다.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이웃에 살고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맡겨져서 자라났다. 점차 자라서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센 활을 잘 쏘았는데, 때로는 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많이 잡기도 하였다. 어느날 산중에서 마소[馬牛]를 먹이다가,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오자 마소들이 흩어졌다. 공이 말을 타고 화살 하나로 범을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수척에게 이르기를, “아롱진 무늬를 가진 큼직한 것이 무슨 짐승인지 나오기에 내가 쏘아 죽였다.” 하여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었다. 수척이 윤덕을 기이하게 여겼다.
서미성(徐彌性) 거정(居正)의 아버지이다. 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기려 마지 않았더니, 미성이 이르기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함께 사냥을 할 때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였다.미성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이 애의 기술은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여 옳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하고는 이내 활쏘기와 말달리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필원잡기》 ○ 운해(雲海)는 벼슬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공(襄莊公)이다.
○ 태조가 해주(海州)에 거둥하여 강무(講武)할 때, 가까운 길을 취해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더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물의 깊이를 알아가지고 오게 해주소서.” 하고는, 말을 타고 곧 물 속에 들어가 고삐를 잡고 목을 움추리고 거짓으로 그 몸을 기울이니 물이 안장에 미쳤다.곧 돌아와서 아뢰기를,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겠으니 전하께서 이 내를 건너시려는 것은, ‘큰길로 가고 지름길로 가지 말며, 배를 타고 가고 헤엄치지 말라.’는 옛말의 뜻과 어긋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건너는 것을 중지하였다. 〈행장(行狀)〉
○ 과거에 태안군(泰安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찼던 화살통에 쇠로 장식했던 것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로 기워 고쳤는데, 곧 명하여 기웠던 쇠장식을 도로 떼어 내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러하였다. 〈행장〉
○ 공이 이상(貳相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하였는데, 공무가 끝나면 공청 뒤 빈 땅을 경작하여 오이를 심고 손수 매어 가꿨다. 소송하러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묻기를, “대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하자, 그가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다.” 하고는,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임하였다. 시골에 사는 한 지어미가 울면서 이르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하고는 범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인 후 그 배를 쪼개고 뼈와 고기와 사지를 꺼내어 의복으로 싸서 관을 맞추어 매장하여 주었더니, 그 지어미가 슬피 울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청파극담》
○ 안주(安州)를 다스릴 때에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고을 남쪽에다 심어서 고을의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으니, 사람들이 감당(甘棠)에 비하여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 살고 있는 집 남쪽에 못 두 곳을 만들어 연꽃을 그 가운데다 심고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그 곁에다 심어서, 매양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 노인들을 청해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사이에서 담소하였으니, 산야(山野)의 취미가 있었다.


노한(盧閈) 병진생

노한은 자는 유린(有鄰)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민제(閔霽)의 사위이다. 16세에 벼슬하여 을묘년(143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계해년(1443)에 죽었는데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태종 계미년(1403)에 판합문사(判閤門事)로 하삼도(下三道)에 염문사(廉問使)로 갔는데, 때마침 바닷가에 전선(戰船)을 만들기 위한 오랫 동안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복명하는 날 소대(召對)해서, 역졸(役卒)들의 괴로운 실상을 극력 진술했다. 태종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르기를, “진시황(秦始皇)과 수양제(隨煬帝)의 포악한 것에 비해서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신이 명을 받들어서 삼도를 두루 시찰하였는데, 변방 백성의 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한 것입니다. 또 진시황과 수양제는 배를 만든 일은 있었으나, 어찌 백성이 곤경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서 사신을 보내어 물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이 웃으면서, “경은 갓을 쓰라.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 임자년(1432)에 우찬성이 되었을 때에 명 나라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이 매년 연달아 나와서 청구하고 토색함이 그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문득 모욕을 주었다. 세종이 공으로 하여금 관반(館伴)을 삼았더니, 공이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한 마디 말을 할 때에도 법도가 있었으므로, 비록 미친듯이 위세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망녕되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공의 어머니 왕씨(王氏) 부원군(府院君) 수(琇)의 딸가 나이 이미 80에 병이 있으므로 공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세종이 이르기를,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고, 명하여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이면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 우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게 되자, 민부인(閔夫人)이 들어와 사은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곧 태종께서 남긴 말씀에 의한 것이요.” 하였다.


허조(許稠)

허조는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고,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고려 말 경오년(1390)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 무오년(1438)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태종조에 공이 대간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조 정랑의 자리가 비게 되어 태종이 관안(官案)을 검열하다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직에 알맞다.” 하고는 곧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대범ㆍ엄숙ㆍ방정ㆍ공평ㆍ청렴ㆍ근신하여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디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국정을 의논할 때는 홀로 자기의 신념을 지켜서 남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법(家法)이 몹시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벌을 내리고,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은 어릴 때부터 깎은 듯이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하였다.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하 관원의 복색을 마련하여 제도가 분명하였으므로, 시정의 경박한 자식들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이라 별명을 지었다. 《필원잡기》
○ 공은 마음가짐이 맑고 바르며, 집 다스림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제를 가르치되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싶어 삼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陰陽 부부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였다. 《용재총화》 ○ 창기(娼妓)에 관한 제도를 고치지 않았음은 전고(典故)에 실렸다.
○ 공은 매양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다.
그의 형 허주(許周)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치사하였는데, 공은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허주도 역시 공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고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대고 기다렸는데,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허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였다. 공은 기뻐하여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청파극담》
허주는, 시호가 간숙(簡肅)이고, 성격이 준엄하여 가법이 있었다. 제사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어서 동생 허조에게 대행하도록 했더니, 전의 제도를 다소 변경하였다.허주가 이르기를, “작은 아들이 종가에서 옛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였으니, 이것은 종자(宗子)를 무시한 것이다.” 하고는 노하여 보지도 않고, 또 문지기로 하여금 문에서 거절하게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새벽에 그 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접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에, 밤중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 가는데,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선배의 극기의 공[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
○ 조선의 어진 정승으로 황희(黃喜)와 공을 첫째로 꼽는데,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자는 이 때문에 그들을 부족하게 여겼다. 《병진정사록》


신개(申槩) 기해생. 경오년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신개는 자는 자격(子格)이며, 호는 인재(寅齋)이고, 또 다른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미년(143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받고 을축년(1445)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같았으며, 일찍이 외조모 원씨(元氏)에게서 컸다. 나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창벽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더럽힌 자가 있거늘 외조모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힐책하니, 아이들이 다투어 변명하였으나 공은 홀로 말하지 않고 제 키를 가리키는데, 과연 키가 그림 그린 벽에 한자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외조모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해동잡록》
○ 평소에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 빛을 짓지 않았으며, 종들에게 죄가 있어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해동잡록》
○ 한원(翰苑)에 있을 때에 태조가 실록을 보고자 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서 불가함을 논하니, 태조가 그만두었다. 《사가집(四佳集)》 〈묘비(墓碑)〉
○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려서 대신의 잘못을 꺾었으므로 시론(時論)이 갸륵하게 여겼다.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신개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을사년(1425)에 강음(江陰)에 좌천되었다. 《사가집》 〈묘비〉
○ 일찍이 언충신(言忠信)ㆍ행독경(行篤敬)ㆍ소심익익(小心翼翼)ㆍ대월상제(對越上帝) 등 열네 글자를 써서 세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엔 마땅히 이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귀령(李貴齡) 시호는 강호(康胡)이다. 《조야기문(朝野記聞)》과 〈상신고(相臣攷)〉에 기록되었다. 혹은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연(河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내외 증손(曾孫)이 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연은 자는 연량(淵亮)이며, 호는 경재(敬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ㆍ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을축년(1445)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받고 치사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죽으니 나이는 78세였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유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는데, 태종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하자, 공이 “모릅니다.” 고 대답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전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능히 헌직(憲職)을 감당했으므로, 내가 그때에 경을 알았다.” 하였다.
○ 공은 평상시에 늘 검은 사모를 썼는데, 그 뿔은 빼어 버리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읊조렸다. 공의 시는 기벽(奇僻)하여 옛시의 격조에 가깝고 필법이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에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시를 지어서 하문학이 썼으니, 역시 인간 보물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일찍이 경상도의 안사(按使)가 되었을 때에 남지(南智)가 아사(亞使)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중히 여겨 하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찬탄하였으니, 공이 진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지가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산수는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주 출신인 하연을 가리킨 것임] 하니, 공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공의 아량에 심복하였더니, 뒤에 공은 남지와 함께 정승에 올랐다. 《필원잡기》
○ 공은 평안하고 검소하며 강직하고 명철하며 풍채가 단아하였다.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종족간에 매우 화목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사에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에는 힘쓰지 않고 기첩(妓妾)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하고 대궐을 향하여 앉는데 좌우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흔연히 곧 붓을 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욱 절묘하였고, 천성이 옛 도리를 좋아하여 일마다 모두 옛사람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으며, 사대부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에서 오래 기다리는 손님이 끊일 적이 없었다.오랫동안 이조에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않고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는 태평 시대의 문치(文治)를 이룩한 재상이었다. 또 학문이 정하고 깊고 문장이 법도 있고 우아하여 일세의 우러름을 받았다. 공이 죽은 뒤, 유명(遺命)에 따라 불사(佛事)를 짓지 않았다.
○ 공은 부모를 섬기는데 몹시 효도하였다. 두 어버이의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짓고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겨서 시를 지어 찬송하는 이들도 있었다.구경당은 초가로 지어 해마다 새로 이엉을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영모(永慕)로 편액을 고쳤다. 자질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시던 곳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역시 그대로 두어,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하여라.”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황보인은 자는 사겸(四兼) 또는 춘경(春卿) 이며, 호는 지봉(芝峯)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묘년(1447)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아서 단종(端宗)을 돕다가, 계유년(1453)에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죽었는데, 숙종조(肅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 공은 일찍이 차원부(車原頫)의 원통함을 간절히 논하느라고 사모가 거꾸로 쓰여진 줄을 몰랐더니, 원부가 그로 인하여 특별히 신설(伸雪)되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사모를 거꾸로 쓴 시종이라 일컬었다. 《해동잡록》
○ 공의 무덤이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편 발흥(勃興) 큰 길 가에 있었는데, 그 묘표(墓表)의 글에는 커다랗게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 라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 휘 인 노산조 수상 경태 계유 정난시 병 이자 일손 피화(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라는 스물 두 글자를 새겼고,또 ‘정덕 기묘 이월 입석 거 피화 위 육십 칠년(正德己卯二月立石距被禍爲六十七年)’ 이라 새겼는데, 수장(收葬)한 이나 그 무덤에 표석을 세운 이의 이름은 모두 나타내지 않았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남지(南智)


남지는 자는 지숙(智叔)이며, 본관은 의녕(宜寧)이고, 영상 남재(南在)의 손자이다. 음사로서, 기사년(144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 공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담력과 뜻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에,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간음을 하였다는 비방이 있었으나 감히 먼저 발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내가 하겠다고 공이 말하였다. 어느날 일찍 조회에 들어가면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 20여 인으로 하여금 먼저 이르러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구사(丘史)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묶어오게 한 뒤,곧 조방(朝房)에서 국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아무날 어느 곳에 갔으며 어느 집에서 잤느냐.” 하니, 구사들이 모든 것을 실상대로 말하였다. 또 간음한 집의 심부름하는 노파를 잡아서 국문하였더니 숨기지 못하였다. 세종이 그때 간음법(奸淫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서로를 곧 서인으로 삼았다. 《소문쇄록》
○ 하연(河演)이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에 공이 새로 경상도 도사로 임명되어 온단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여서 필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그가 처음 이르러서 뵈러 들어올 적에,하연이 시험삼아 판단하기 어려운 공문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공이 물러간 뒤에 사람을 시켜서 엿보게 하니 그가 장중(帳中)에서 손님과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하연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틀림없구나.” 하였더니, 공이 이튿날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하연에게 드리면서 말하기를,“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 같고,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하여야겠습니다.” 하므로 하연이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뒤부터 특별히 간곡하게 대우하였다. 그뒤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공도 정승이 되니, 하연이 이르기를, “감사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거의 도사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소문쇄록》
○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공과 더불어 혼인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여식이 있으나 얼굴이 못생겨서 귀댁의 며느리가 되기엔 어려우니, 한번 간선을 해 보시오.” 한 즉, 안평이 말하기를, “신부의 선을 직접 보는 것은 궁중의 일이니, 내 어찌 감히 참람한 짓을 하리요.대감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신부의 잘 나고 못난 것을 나는 개의치 않소.”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늙은 여종 하나를 보내어 내 딸을 보시오. 후회가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안평이 듣지 않았다. 공은 그대로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여쭈려 합니다.마침 하양(河陽)에 사는 소경 김학로(金鶴老)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는데, 우리 집의 길흉을 말한 것이 다 맞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댁의 두 딸이 다 운이 좋지 못해서 일생을 잘 지내기 어렵다.’ 하였는데, 혹 이것이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맏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홀로 살고 있고, 이 딸은 둘째입니다.” 하니,안평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어찌 무당과 점장이의 말을 믿습니까. 대인(大人)이 요망스러운 말을 물리치는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곧 말하기를, “그러면 승낙합니다. 우리 같은 한족(寒族)이 종실과 혼인하는 것은 실로 다행입니다. 다만 박복한 딸이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하여 뒷말이 있을까 염려했더니,이제 대군의 뜻이 확고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여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에 안평의 아들 우직(友直)이 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해 임신년에 공이 풍병(風病)을 얻어 세상일에 상관을 못했다. 또 그 다음해에 안평이 죄를 입었는데, 공이 사돈이면서도 연루되지 않은 것은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소문쇄록》 ○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南氏)는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쫓겨났다.
○ 공이 죽은 후 사위 우직 때문에 시호를 얻지 못하더니, 성종(成宗) 기유년(1489)에 그의 손자 남흔(南忻)이 소를 올려서 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운검(雲劍) :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차고 임금의 거둥에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무사
[주D-002]대포(大酺) : 임금이 백성에게 주식(酒食)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하는 것.
[주D-003]소공대(召公臺) : 주(周)의 소공(召公)이 자기 관내(管內)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행차가 감당(甘棠)나무 밑에서 멈추었다가 떠난 후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주D-004]구사(丘史) : 관원이 출입할 때, 모시고 다니는 하인.
[주D-005]직부(織婦)를 내쫓고 : 노상(魯相) 공의휴(公儀休)가 자기 집에서 베를 잘 짜는 부인을 내쫓으면서 “내집에서 베를 짜면 민간의 부인이 무슨 직업을 가지겠느냐”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것.
[주D-006]사단(史丹)의 일 : 한대(漢代)의 사단(史丹)이 태자를 바꾸도록 간한 사실을 말한다.
[주D-007]양수척(楊水尺) :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았던 천민.
[주D-008]강무(講武) : 열병(閱兵)을 겸한 사냥.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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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문형(文衡)




윤회(尹淮)

윤회는 자는 청경(淸卿)이며, 호는 청향당(淸香堂)이고,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소종(紹宗)의 아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도공(文度公)이다.
○ 공이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잔치할 때, 태종이 불러서 몸소 기대면서 이르기를, “경은 나의 주석(柱石)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공과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술을 좋아하여 늘 과도하게 마셨다. 세종이 그들의 재주를 사랑하여 술을 마셔도 석 잔 이상 마시지 말 것을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연회에서 술을 마실 때면 두 공은 꼭 커다란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는데 말은 비록 석 잔이라 하였으나,실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었다. 임금이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 도리어 더 마시기를 권한 것이 되었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의 문장이 그 시대에 으뜸이 되어 홀로 부름을 받을 때가 있었다. 공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지나치게 마셨는데 어느날 집에서 많이 취했더니, 임금이 내시를 시켜 급히 불렀다. 좌우 사람들이 붙들어 일으켜 말에 태우는데 술이 아직 깨지 않았으므로 모두 두려워하였더니,임금 앞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대답하되,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다. 임금이 명하여 교서(敎書)를 초하게 하니, 나는 듯 붓을 휘둘렀으나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 천재로군.”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글별[文星]과 술별[酒星]이 한곳에 모여서 한 어진이를 낳았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젊었을 때, 시골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유숙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뜰에 앉아 있는데, 주인의 아이가 커다란 진주(眞珠)를 가지고 놀다가 뜰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곧 삼켜 버렸다. 얼마 안되어 주인이 구슬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여 묶어 두었다가 날이 새면 장차 관에 고발하려 하였다.그러나 그는 변명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구슬이 거위 뒷 구멍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주인이 부끄러운 빛으로 말하기를,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하고 사과하니, 공은, “만일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필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았을 것이오. 그래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 하였다.


권제(權踶)

권제는 처음 이름은 도(蹈)이고, 자는 중안(仲安)이며, 호는 지재(止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태종 갑오년에 친히 시험을 보아 선비를 뽑을 때, 독권관(讀券官)하륜(河崙)이 우등에 든 세 거자(擧子)의 시권(試券)을 들이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태우고 장원을 뽑던 옛 일에 의할 것이다.” 하고는, 손 가는 대로 뽑고 보니, 권제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이르기를,“내가 권근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는데, 이제 장원에 뽑힌 그 아들을 얻고 보니, 저으기 위안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 방(榜)은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들은 자기의 문생으로 보지 못할 거요.” 하였다. 그리하여 하륜 등이 감히 신방(新榜)의 인사를 받지 못하였다.
○ 공은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일찍이 〈세년가(世年歌)〉를 지었다.


안지(安止) 선생안(先生案)에는 들지 않았다.

안지는 자는 자행(子行)이며, 호는 고은(皐隱)이고, 본관은 탐진(耽津)이니, 찬성 안 사종(安士宗)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생원ㆍ문과를 거쳐 병신년(1416)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 권제가 문형에서 체직될 때 공이 대신하였다가 곧 그만 두었다.
○ 그때 문사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따랐으나, 대군도 공에게만은 가까이 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청하기도 하고, 혹은 병풍이나 족자에 글씨를 써서 보내면 공은 이르기를, “대군의 편지를 어찌 앉아서 답하겠습니까. 마땅히 몸소 가서 뵙겠습니다.”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어느 날 안평대군 처소에서 여러 문사가 글짓기를 다툴 때에 이르기를, “그 늙은이가 잘 알 것이니 그에게 물어 보자.” 하였는데, 그는 일부러 글이 높은 것을 낮다 하고 낮은 것을 높다 하였다. 모든 선비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늙은이가 나이 많아서 정신이 없으니 교계할 것이 못된다.” 하고는 드디어 청하기를 중지하였다.
세조가 공을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에 공이 당시의 제조로 있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강진현(康津縣)에 좌천되었다. 세조는 글을 감사에게 내려 이르기를, “매양 음식물을 위에 진상할 적에, 봉한 나머지는 반드시 그에게 주고 그의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라.” 하였다.
○ 어느날 조회에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 등 여러 공들이 늦게 와서 조반(朝班)에 미처 참여하지 못하고는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를, “마침 옛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하였다.성종(成宗)이, “그 이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안지(安止)입니다.” 하였다. 성종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나 역시 그를 보고자 하니 빨리 불러 오라.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 것이다.” 하고 종일토록 즐기고는 명하여 숭정대부에 승진시켰다. 《소문쇄록》


정인지(鄭麟趾) 단종조(端宗朝)의 상신(相臣)에 들어 있다.


 

[주D-001]독권관(讀券官) : 과거(科擧)에서 답안을 읽는 고시관.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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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유종(儒宗)




윤상(尹祥)

윤상은 자는 실부(實夫)이며, 처음 이름은 철(哲)이고, 호는 별동(別洞)이다. 본관은 예천(醴泉)이고,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태조 임신년에 나이가 20세 진사에 올랐고 다음 해에 생원(生員)을 거쳐 병자년(1396)에 문과에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16년이나 있었고, 벼슬이 예문제학에 이르렀다. 을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서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오고갈 때 반드시 관솔[松明]을 따서 관사 은밀한 곳에 두었다가 밤에 글 읽을 때 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善山)ㆍ상주(尙州) 등지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 원손(元孫)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대사성으로 특명을 받아 원손의 입학을 지도하는 박사(博士)가 되니, 선비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 문종(文宗) 초년에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의 관아로 하여금 달마다 음식물을 주게 하였으니, 퇴로(退老)한 재신(宰臣)에게 음식물을 내리는 일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공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그 학문이 세 김씨 아래에 쓰였다. (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에 비하여 더욱 뛰어 났으므로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웠다. 공은 실오리처럼 올올이 가늘게 분석하여 일러 주되 종일토록 근면하여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시대의 달관(達官)과 문인(聞人)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니, 조선 개국 이래 사범(師範)으로서 제일이었다.


김구(金鉤) 과보(科譜)에는 이름을 균(鈞)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김구는 자는 직지(直之)이며, 본관은 아산(牙山)이고,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태종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장공(文長公)이다. 죄를 얻어 벼슬이 삭탈되었는데, 죽은 뒤에 도로 주었다.
○ 사람됨이 순실하고 근신하며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으므로 윤상의 뒤를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널리 들은 것은 윤상보다 나았다.
○ 공과 김말(金末)ㆍ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나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깊었다. 동시에 대사성이 되어 학도를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인재를 이룩하는데 효과를 거두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다.김반이 먼저 죽고 두 김씨는 나이 80세가 넘어서 벼슬이 일품(一品)에 올랐으며, 시호를 문장(文長)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장(長)이라 한다. 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 시호를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원잡기》


김말(金末)

김말은 자는 간지(幹之)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태종 을미년(141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장공(文長公)이고, 갑신년(1464)에 죽었다.
○ 공은 경학(經學)에 밝아서 윤상ㆍ김반과 함께 성균관에 있었는데, 경서의 뜻에 대하여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 공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듣건대, ‘천 사람의 눈을 열어 준 자는 하늘의 갚음을 얻는다.’ 하였다.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 동안 일찍이 학관(學官)의 직을 띠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가르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나이 90에 아들이 없으니 이 어찌 나의 황잡한 거짓 학문이 남에게 덕을 입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공이 임종할 때에 목욕한 뒤 관디를 하고 홀(笏)을 잡고 단정히 앉으니, 집사람들이 통곡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나는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으니 현달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가 높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바르게 죽는 것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내 죽었다. 《필원잡기》


김반(金泮)

김반은 자는 사원(詞源)이며, 호는 송정(松亭)이고, 본관은 강서(江西)이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정종(定宗) 을묘년(139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강서에 돌아가 늙었는데 조석 끼니를 잇지 못하다가 죽었다.
○ 공은 경서(經書)에 정통하여 성균관 직에 있은 지 40여년 동안 명사가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과거에 사신으로 명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물고기와 용을 그린 족자에다 시 쓰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쓰기를,

뉘라서 이 가벼운 비단에 / 誰畵經綃幅
바람 물결 운무를 그렸던고 / 風濤雲霧濛
고기는 깊은 바다에 뛰놀고 / 錦鱗翻碧海
용은 푸른 하늘에 솟아오르네 / 神物上靑空
형상은 비록 다르나 / 潛見形雖異
날아오르려는 뜻 같으리니 / 飛騰志則同
행여 꼬리타서 끊는 날엔 / 若爲燒斷尾
하늘에 있는 용을 따르리라 / 攀附在天龍

하였더니, 중국 사람들이 그를 ‘소단미선생(燒斷尾先生)’ 이라고 불렀다.


김숙자(金淑滋)


김숙자는 자는 자배(子培)이며, 호는 강호(江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종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세조 원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밀양(密陽)으로 돌아가 병자년(1456)에 죽으니 나이가 68세였다.
○ 윤상(尹祥)이 황간(黃澗) 원이 되었을 때에 그가 걸어 가서 《주역》을 배워 역학에 정통하였다. 《이준록(彝尊錄)》
○ 일찍이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학문의 조예가 깊어서 당대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남으로 돌아가 응천강(凝川江) 뒤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수에 취미를 붙여 스스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일컬었다.성품이 본시부터 염담(恬淡)하여 사물에 급급하지 않았으므로 혹자들은 그를 우활하다 하였으나, 대절(大節)에 있어서는 굳세어 흔들림이 없었으며, 세상에 있은 지 60여년에 한 가지 행실도 허술한 데가 없었다. 《이준록》
○ 임금이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검이 있어서 사유(師儒)가 될만한 자를 추천하라 하였는데, 그가 수천(首薦)이 되어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고 나가서는 선산 교수(善山敎授)가 되었다.그뒤에 개녕 현감(開寧縣監)으로 있을 때에 세종이 승하하였는데, 최질(衰絰 굴건 제복)로 대궐을 향하여 슬퍼하였고, 또 문종(文宗)의 상사를 만나서는 더욱 슬피 울면서, “아아, 가엾다. 사군(嗣君 단종)이시여.” 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감동하였다. 《명현록(明賢錄)》
○ 공은 학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반드시 상세히 이것 저것 인증하여 가르쳤으므로 매를 때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였다.상제로 봉암(鳳巖)에 여막(廬幕)을 짓고 있을 때, 그 고을 자제들이 그 곁에 서재(書齋)를 짓고 모여 오므로 조석전(朝夕奠)이 끝난 뒤에는 글을 강의하였으며, 매양 ‘산 부모를 섬기고 죽은 부모를 장송(葬送)한다.’ 는 구절을 볼 때마다 문득 흐느끼면서 울었다.


 

[주C-001]유종(儒宗) : 유림(儒林)의 종장(宗匠)
[주D-001]꼬리타서 끊는 날 : 고기가 용이 될 때에는 반드시 우레가 그 꼬리를 태워 버린다는 옛 얘기가 있다.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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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명신(名臣)




이수(李隨)

이수는 본관이 봉산(鳳山)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生員)에 장원하였고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사부(師傅)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여지승람》


이변(李邊) 오대손(五代孫)이 순신(舜臣)이다.

이변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다. 나이 30이 지나서 비로소 글을 읽었으며,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대제학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계사년(1473)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정정공(貞靖公)이다.
○ 공은 성품이 엄하고 곧았으며 남을 경계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조 참의가 되어 매양 사람을 뽑을 때에는 장관(長官)이 한 일을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공은 받지 않았으나 장관(판서)은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그날 장관이 그에게 맛있는 고기로 대접하자 공은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하였으므로 장관이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 《필원잡기》
○ 공은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바르고 곧기로 자부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남을 속인 일도 없었거니와 벼슬한 뒤로 한 번도 거짓병으로 결근을 한 적도 없었다.” 하였다.김종직(金宗直)이 말하기를, “실로 이 말씀과 같았다면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임금 앞에서 병을 칭탁한 이가 전후에 많이 있었으니, 상공(相公)의 덕이 진실하고 돈독하긴 하나 이 말씀은 너무 지나친 듯 합니다.” 하였다.
○ 공은 중국말을 잘 하였다.


허척(許倜)

허척은 본관이 하양(河陽)이며, 허조(許稠)의 아우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 일찍이 지평으로 있을 때, 세종이 만년에 불교를 좋아하여 기일(忌日)을 당하여 절에서 친히 제사하려 하였다. 공이 이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곧 아전과 노속을 거느리고 제사에 쓸 물건들을 쳐부수어 그 행차를 막고는 피하여 숨었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린 뒤에야 나왔다.


허성(許誠)

허성은 자가 맹명(孟明)이니 허주(許周)의 아들이다. 태종 임오년(140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工)이다.
○ 공은 성격이 고집스러웠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직무에 충실하고 올바름을 지켰으므로 청탁이 이르지 않았으며,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청탁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와 반대로 일을 행하였다.어떤 한 조관(朝官)이 예천(例遷)하여 외직을 맡아야 했는데, 남도 벼슬을 청탁해 왔으므로 일부러 평안도의 변방 군수로 제수하였고, 한 문사(文士)가 서울의 벼슬을 청탁했을 때는 반대로 외군의 교수(敎授)로 제수하였다.
흥덕사(興德寺) 중 일운(一雲)이 간사하고 꾀가 많아 단속사(斷俗寺)의 주지가 되고자 하여 공을 속이기를, “듣자오니 평양 영명사(永明寺)는 산수가 매우 좋다 하는데 가서 살고 싶습니다. 만일 단속사라면 내 일은 틀리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며칠 뒤에 일운을 단속사의 주지로 삼았다. 일운이 크게 웃으면서, “그가 내 꾀에 넘어갔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매양 말하기를, “벼슬을 탐내며 녹에 애착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심해져서 남에게 조소거리가 되어도 반성할 줄을 모르게 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였다.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제가 되어 3년상을 끝내고 복직되었을 때, 어느날 별안간 거울을 보다가 슬픈 기색을 짓더니 이내 거울을 던지면서, “나는 늙음이 이 지경에 이른 줄을 몰랐구나.” 하고 곧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으니 나이가 60여세였다. 《청파극담》


정척(鄭陟) 경오생이요, 무자년 사마(司馬)이다.

정척은 자는 명지(明之)이며, 호는 정암(整菴)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조상은 모두 진주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크게 현달하여 벼슬이 정헌대부(正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을미년(1475)에 죽었으니 시호는 공대공(恭戴公)이다.
○ 교서 정자(校書正字)로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겸했는데, 세종이 특명을 내려서 태상왕 대비의 인보(印寶)와 일본통신(日本通信) 도서를 전자(篆字)로 새겨서 바치게 하였다.
○ 정통(正統) 기사년(1449)에 야선(也先)이 북경(北京)을 침범하였으므로 광녕(廣寧)ㆍ요동(遼東) 등지를 거쳐서 조공바치러 가는 길이 막혀 사람들이 사신 가기를 꺼렸다. 그런데 공은 지원사(知院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었으나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하직하고 떠나는 날에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였는데, 도중에 황제가 이미 야선에게 사로잡히고 북경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두려워하며 머뭇거렸으나 공은 전진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북경에 이르니, 새 황제가 이미 즉위하였으므로 공은 새 황제를 뵌 뒤 다시 북을 향하여 사로잡힌 황제의 성절의 축하례를 의식대로 하였다. 《동각잡기》
○ 계축년(1433)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전에는 국상에 쓰는 관곽(棺槨)을 때에 임하여 만들었는데, 공이 청해서 관곽을 미리 만들어 놓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옳게 여겨 비로소 장생전(長生殿) 국상의 관곽을 준비하는 곳 을 세우고, 이어 그를 시켜 널리 황장목(黃腸木)을 구해서 관곽을 만들게 하니, 국상에 아무런 군색함이 없게 되었다.
○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세조가 그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부왕께서 일찍이 ‘청직(淸直)’ 두 글자를 경에게 허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나의 귀에 남아 있다.” 하였다.


어변갑(魚變甲) 신유생이며 숙권(叔權)의 고조(高祖)이다.

어변갑은 자는 자선(子先)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태종 무자년(1408)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어머니가 늙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 공의 먼 조상 중익(重翼)의 본성은 지씨(池氏)였는데 나면서 얼굴이 기이하고 백 근 무게의 활을 사용하였으며,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었다. 자라서 고려 태조를 섬길 때 어떤 이가 비늘이 있다 하니, 태조가 보고 이르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이는 곧 물고기이다.” 하고,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동각잡기》
○ 공이 장차 전시(殿試)에 응하려 할 때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얻었는데,

삼급의 풍뢰(風雷)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고 / 三級風雷魚變甲
아지랭이 피는 봄날에 말 울음소리가 드물다 / 一春煙景馬希聲
두 이름 대(對)가 되어 서로 겨루나 / 雖云對偶元相敵
용문(龍門)의 상객(上客)에 어찌 미치리요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더니, 공이 과연 장원에 뽑히고, 마희성(馬希聲)이 무과에 장원이 되었다. 《패관잡기》 《동각잡기》
○ 공이 좌정언(左正言)에서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었다. 그때에 공의 아버지 어연(魚淵)이 전 하양 감무(河陽監務)로서 한산(閑散)한 직에 있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자기의 직에 대신하기를 진정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고 어연에게 두 계급을 올려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그뒤 공이 헌납이 되었을 때 동료가 상소하여 계림 부윤(雞林府尹) 윤상(尹祥)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일이 애매하였다.이에 공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이 있는 곳에 있어서 이 사람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을 상세히 아는 바인데, 감히 없는 것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곧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좌석이 흩어지고 말았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은 신장(申檣)과 매우 친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 명성을 얻게되면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 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자 임금의 은혜가 잇달아 겹쳐서 차마 갑자기 떠나지 못하고는 늘 돌아가 부모 봉양함이 늦어짐을 한하여 매양 탄식하기를,“임금을 섬길 날은 길거니와 어버이를 봉양할 날은 짧다.” 하였다. 이에 허리 밑에 건습증(蹇濕症)이 나자, 곧 사직원(辭職願)을 내고 본가가 있는 고향에 내려가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 사람을 꼭 써야 할 텐데, 병을 다스려야겠다 하니, 어찌 구태여 만류하겠는가. 병이 낫는대로 빨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창녕(昌寧) 고향집에 이르러서 시를 읊기를,

병으로 돌아오니 한 집이 조용한데 / 謝病歸來一室幽
옛 연못가엔 초목들이 황량하기도 하구나 / 荒凉草樹古池頭
나 같은 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겠는가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어버이 살아계시니 멀리 놀진 못하겠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그뒤 신장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참판에 이르렀는데, 어변갑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남몰래 서로 약속하였는데 자네 아버지는 결단성 있게 돌아갔으나 나 혼자서 언약을 저버렸으니 매우 부끄럽네.” 하였다.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벼슬을 사양한 이가 둘이 있었을 뿐이니 판부(判府) 허주(許周)와 어변갑이다.” 하였다.
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모든 아우가 무고하였다. 조석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고 날마다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조정에서 공의 행실을 높이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패관잡기》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은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완역재(玩易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회백(淮伯)의 아들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가 죽으니, 나이가 65세였고, 시호는 대민공(戴敏公)이다.
○ 공은 성격이 드높고 과격하여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물러나며 탄식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나서 진실로 뇌락(磊落)하게 살 것이어늘 《명신록(名臣錄)》에는 스스로 즐길만한 도의(道義)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 과거 공부를 하여 하늘 아래서 재주를 다투어 평생 출세할 매개를 삼으리오.” 하고는 다시 응시하지 않았다. 《청파극담》
○ 음관 출신으로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補)했는데 임금이 공의 학문과 행실을 알아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삼았다가 여러 차례 승진시켜 집의와 승지가 되었다. 그때 세종이 문교를 숭상하여 《오례(五禮)》를 편수하는데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예조의 일을 맡겨 모든 길흉에 관한 큰 예식을 한결같이 공에게 위임하였다.
○ 공은 천성이 호탕하고 정직하고 의기가 넘쳤으며, 어머니 섬기기를 지극한 효도로 하고 형제 사이에 처하는 일과 친구에 대한 접대가 한결같이 성심에서 우러나왔다. 항상 두 아들 희안(希顔)과 희맹(希孟)에게 경계하기를,“사람의 부귀와 영달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은 효제(孝弟)ㆍ충신(忠信)ㆍ예의(禮義)ㆍ염치(廉恥)가 있을 따름이니, 만일 여기에 부끄럼이 있다면 그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다.” 하였다.


박연(朴堧)

박연은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난계(蘭溪)이고, 처음 이름은 연(然)이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삼사 좌사(三司左使) 박천석(朴天錫)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태종 신묘년(1411)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 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정갑손(鄭甲孫)

정갑손은 자는 인중(仁仲)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공은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크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기량이 넓었다. 공은 비록 여러 대 재상이었으나 집에 저축한 바 없었으며 베 이불과 부들 자리로 만족히 처하였다. 성품이 강개하여 곧은 말을 잘해 권세 있는 이를 피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탐하는 자들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이 자립할 줄을 알았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다.일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제수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을 받을 때, 하연(河演)은 겸판서로서, 최부(崔府)는 이조 판서로서 입시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연은 다소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온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다.조회가 끝난 뒤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 할 때,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였다. 곧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 분이 매우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아 풍절이 늠름하니, 사람들이 홀로 치는 새매에 견주었다.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그의 아우 창손(昌孫)의 비문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으며 엄준하여 자제가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된 것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어 있었다.이에 그는 수염이 꼿꼿하여지며 노하여 시관(試官)을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정오는 학업이 정밀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마침내 시관을 파면시켜 버렸다. 《필원잡기》
○ 공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드날렸기 때문에 조정의 기강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를 지녔다. 전례에 공회(公會)가 열리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막차(幕次)를 이웃하였으므로 혹 휘장을 걷고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서 권장음(捲帳飮)이라 하였다. 만일 주금(酒禁)을 만나면 사헌부에서는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마시지 않으나 사간원에서는 마시고 취함이 전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간관이 술잔을 가득 부어서 희롱하느라 휘장 틈으로 대장(臺長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 역시 희롱하느라 옷소매로 밀어냈는데, 술잔이 휘장틈으로부터 떨어져 굴러서 헌장(憲長 대사헌)의 책상 앞에 가서 멈췄다.모든 대장(臺長)들이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대리(臺吏 사간원과 사헌부의 이속(吏屬)) 역시 서로 쳐다 보면서 감히 얼른 치우지도 못한 채 종일토록 책상 앞에 있었으니, 대중(臺中)에서 혹시나 일이 날까 걱정하였다. 퇴근할 무렵에 공이 아전에게 말하기를, “저 거위알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니, 아전이, “백 알은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그가 말하기를, “그 들어왔던 틈으로 던져 버려라.” 하니,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사간원에 아란배(鵝卵杯)가 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들어갔으니, 이는 금령(禁令)을 범하여 만든 것이었다. 《필원잡기》


신석조(辛碩祖)

신석조는 자는 찬지(贊之)이며, 처음 이름은 석견(石堅)이고, 호는 연빙당(淵氷堂)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병조 판서 신인손(辛引孫)의 아들이다. 병오년(1426)에 생원과에서 장원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 개성 유수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 공의 조부 신유정(辛有定) 평안도 안무사(平安道按撫使)이고, 시호는 무절공(武節公)이다. 이 일찍이 왜적에게 잡혀서 꿇어 앉히고 베이려 할 때, 유정이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신낭(腎囊)이 늘어져 있음을 보고는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겨서 땅에 넘어뜨리고는 칼을 빼어 벴다.그뒤 변방에 장수로서 무공을 세웠으나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반드시 극구 꾸짖은 뒤에야 그쳤다. 공이 매양 말하기를, “할아버지의 급하신 성질을 거울삼아 가죽을 차서 스스로 경계한다.” 하였다.
일찍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 한 하관(下官)과 글씨를 같이 썼는데, 그 사람이 엉겁결에 서리(書吏)를 돌아보며 큰 목소리로, “신석조야, 벼룻물을 가져 오라.” 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여 쳐다보지를 못하였다.공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 선생이나 어른 앞에서 실언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하고, 곧 술을 차려오라 하여 잔 가득히 부어 마주 앉아서 마시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ㆍ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서 일시에 문장으로 이름이 날렸으나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안숭선(安崇善)

안숭선은 자는 중지(仲止)이며, 호는 옹재(雍齋)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 공은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스스로 나라를 경륜할 만한 재주와 학문이 있다고 믿고 도승지 자리를, 마치 턱에 있는 수염을 뽑듯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도승지 황보인(皇甫仁)이 갈려 갈 때, 공이 후임으로 발탁되었다.임명을 받고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에 들어오자 곧 도승지의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에 앉아야지.” 하니, 좌승지 김종서(金宗瑞)가 얼굴빛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둘의 사이에 금이 갔는데, 그뒤 공이 병조 판서로 죄를 얻어서 멀리 귀양살이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김종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하였다. 《용재총화》


최치운(崔致雲) 경오생이며, 무자년에 사마(司馬)에 올랐다.

최치운은 자는 백경(伯卿)이며, 호는 조은(釣隱)이고,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문과에 급제하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從事)가 되었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고, 다섯 차례 명 나라에 다녀왔다. 경신년(1440)에 죽으니, 나이가 51세였다.
○ 세종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가끔 불러 보고는 국정을 의논하고, 큰일이 있을 때엔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그의 천성이 술을 즐겼으므로 세종이 걱정하여 매양 친필로 서찰을 내려서 경계하였는데, 결국 그것을 벽 위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보면서 반성하였다. 어떤 때에 바깥에서 많이 마시고 크게 취해서 돌아오면 그 부인이 반드시 그의 머리를 들게 하여 벽을 가리켜 보게 하였다.그러면 그는 정신없이 취한 중에도 머리를 책상에 두드리면서 마치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다. 술이 깨면 곧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였다. 마침내 술 때문에 병이 나 마흔이 겨우 넘어서 죽었다. 《소문쇄록》
○ 세종이 일찍이 그에게 명하여 《무원록(無冤錄)》을 주석하게 하였고, 또 명하여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게 하였으며, 판결하기 어려운 형옥(刑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불러서 의논하여 억울하지 않게 된 것이 많았다.


김담(金淡)

김담은, 자는 거원(巨源)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을묘년(14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 공은 역수(曆數)와 관상(觀象)에 밝았으므로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ㆍ전세(田稅)ㆍ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을 받아 찬정(撰定)하였다. 《영천지(榮川誌)》
○ 공이 기사년(1449)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명하여 기복(起復)시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을 내렸다. 공은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서 사직하였고, 사간원에서도 역시 기복하여 벼슬을 줌이 타당치 않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 담복(淡服)을 입는 것이 어찌 자식의 애통한 정을 아주 빼앗아 기복시키는 예와 같으리요. 하물며 김담과 같은 재주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위에서 쓰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하리요.” 하였다. 《김문절유고(金文節遺稿)》 《기복전고(起復典故)》에 상세하다.


김조(金銚)

김조는 호는 졸재(拙齋)이며, 처음 이름은 빈(鑌)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태종 신묘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 공은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세종이 어느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신하가 모두 취하자 세종이 이르기를, “오늘 제군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진술하라.”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하고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이르기를, “신들의 소원도 김조의 것에 넘지 않습니다.” 하여 세종이 웃었다. 《필원잡기》


김돈(金墩)

김돈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참의 김후(金厚)의 손자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을 썼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문과에 오르니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젠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였다.
○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외직을 구하였고, 특별히 역말을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봉양에 편하게 하니, 선비들이 그를 영광으로 여겼다.
○ 공은 의상(儀象)에 정통하여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참여하였다.
○ 공은 오랫 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말로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승지의 직에 7년이나 있었다.


김하(金何)

김하는 본관이 연안이니, 유후(留後) 김자지(金自知)의 아들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선공(靖宣公)이다.
○ 공은 중국말 통역을 잘 하였으므로 세종이 특히 사랑하였다. 공은 판사(判事)가 되었을 때 녹명아(鹿鳴兒)라는 기생을 가까이 했는데, 한 종실(宗室)과 도승지 성(姓)이 안(安)이란 자가 모두 그 기생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서로 다투게 되었다. 종실이 자기가 먼저 가까이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세종이 사람을 시켜 종실에게 이르기를, “나라에 너 한 사람 있고 없는 것은 별 관계가 없지만, 김하는 남이 못하는 일을 하여 중국과 교제하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또 김하는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그 기생을 첩으로 삼게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다툰다면 죄를 주리라.” 하고는, 도승지로 하여금 그에게 이르기를,“너는 이 기생을 첩으로 삼겠는가.” 하니, 공은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뒤에 그가 상중에 있으면서 기생의 집에 출입하여 사헌부에서 적발하였으나 세종은 이르기를, “내가 준 것이니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주었으니, 비록 하찮은 기술이라도 애석하게 여겨 정려함이 이러하였다. 《소문쇄록》


이맹균(李孟畇)

이맹균은 자는 사원(士原)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장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 공은 세업(世業)을 이어 받아 문명(文名)이 높았다. 일찍이 송도(松都)를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오백년 왕기가 끝나고 말았으니 / 五百年來王氣終
계림(鷄林)을 차지하고 압록강을 차지한 것은 누구의 공이었나 / 操鷄博鴨龍何功
영웅은 간 곳 없고 산천만 의구한데 / 英雄已逝山河在
인물은 옮겨가고 빈 터만 남았구나 / 人物南遷井市空
상원(上苑)엔 가는비 내린 뒤 꽃피고 꾀꼬리 지저귀며 / 上苑鶯花微雨後
여러 능엔 석양 속에 초목이 서 있네 / 諸陵草樹夕陽中
내가 온 이 날에 느낌이 하도 많아 / 我來此日偏多感
지난 일 아득한데 물만 동으로 흐르는구나 / 往事悠悠水自東

하였고, 그는 또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 自從人道起於寅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 / 父子相傳到此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 我罪伊何天不弔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운가 / 未爲人父鬢絲新

하였다.
그뒤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와서 가화(家禍)를 일으키자,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귀양살이하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정초(鄭招)

정초는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태종 을유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해년(1407)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어떤 서적이고 한 번만 보면 외웠으므로, 과거가 이미 박두했으나 허랑하게 놀기를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육경(六經)을 뽑아서 한번 보고는 책을 덮고 다시 읽지 않았으나, 강석(講席)에 이르러서는 오묘한 뜻을 다 설명하여 응답함이 메아리치듯 하였다.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幕府)에 있을 때 군졸 몇백 명을 한번 보고는 그 얼굴을 다 기억하며 이름까지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인양 심복하였다. 젊었을 때에 어떤 중이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그 경(經)은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겠노라.” 하니, 중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외우면 내 성찬을 차릴 것이요, 그대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성찬을 차리시오.” 하였다. 서로 약속한 뒤 공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외기를 물 흐르듯이 하니, 반질(半帙)을 채 못외어서 중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신상(申商)

신상은 자는 득지(得止)이며, 본관은 은풍(殷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가 되고, 15세에 생원을 거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숭정대부 예조 판서에 이르렀고,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64세였고, 시호는 공도공(恭度公)이다.
○ 공이 예조 판서로 있었을 때 허조(許稠)가 이조 판서로 있었다. 공은 해가 중천에 뜬 뒤에 나갔다가 해가 기울면 곧 돌아오는데, 허조는 새벽에 나가서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날 허조가 먼저 가서 이조에 앉았다가, 공이 예조에 나왔다가는 얼마 안되어서 도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전갈하기를, “어째서 늦게 왔다가 일찍 나가시오.” 하였더니,공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이 일찍 출근하였으나 무슨 유익한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하였으나 무슨 해로운 일이 있으리요. 각기 손바닥이나 비빌 뿐이지요.” 하였다. 공은 일을 당하면 그때그때 처리를 잘하였으며, 허조는 부지런하고 충실하였으니 성격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용재총화》


권홍(權弘)

권홍은 호는 송설헌(松雪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서 벼슬이 영돈녕 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고, 저서에 《쌍당집(雙塘集)》이 있다.
○ 공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매우 잘 썼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고 향년(享年)이 87세였다.일찍이 남산(南山) 기슭에 집을 세우고 못 두 곳을 파서 연꽃을 심고 폭건(幅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소요하며 거닐어 맑은 운치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이 쓴 〈헌릉비(獻陵碑)〉와 〈성균관비(成均館碑)〉의 전서는 매우 좋은 글씨였다. 한성 판윤으로 있을 때 글을 올려서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울 것을 청했는데, 그 말이 자못 사체에 맞았으므로 세종이 허락하였다.


김문(金汶)

김문은 호는 서헌(西軒)이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 공은 남보다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더욱이 사학(史學)에 밝았으므로 역대의 고사를 묻는 자 있으면 곧, “아무 책 몇째 장에 있어.” 하고 대답하였는데,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세종이 선비들에게 명하여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을 때에 그의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총애가 높았으나, 한스럽게도 일찍 죽었다.
공은 천성이 술을 잘 마셨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다품(茶品)을 논할 때는 자소탕(紫蘇湯)을 제일로 삼았고,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궁중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찐닭을 제일로 삼았어.”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소탕이 항아리 속의 새로 익은 술에 비해서 어떠하며, 찐닭이 소간적[牛心炙]에 비해서 어떤 것이 나을까.” 하여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필원잡기》


하경복(河敬復)

하경복은,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 중추 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정공(襄靖公)이다.
○ 공은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용재총화》
○ 어머니 꿈에 자라가 품 속으로 들더니 이에 잉태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아명(兒名)이 왕빠[王八]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운이 남보다 세었다. 갑사(甲士)로 궁문에서 숙직할 때, 마침 동짓날이어서 상림원(上林苑)의 온실에서 기르던 매화 몇 분을 장차 궁문 곁에 두려 할 때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맡은 자가 크게 놀라서 꾸짖으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진주에 살고 있었다. 울타리 가에 마소를 맨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를 삼는 것도 이 나무이니,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요.”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거친 것에 대해 웃었으나 기개는 장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 일찍이 장수가 되어 동북면을 지킬 때 야인이 삼백 근 짜리 센 활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당겨 보라고 청하였다. 공은 그들을 위해서 술을 차려 마시게 한 뒤 말하기를, “이 활의 제도가 매우 묘하다.” 하고,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대로 만들게 하고는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불에 구어 힘을 풀리게 하였다. 이에 조용히 당기어 한도대로 버티니, 야인들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함길도 도절제(咸吉道都節制)가 되어서 변방을 지킬 때, 야인이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듣고 중히 여겨 공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오래도록 맡아 보게 하고, 후히 그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어 호군 홍사석(洪師錫)으로 하여금 편지를 주어 칭찬하기를, “내가 경을 믿기를 은연히 장성(長城)처럼 하였는데,어머니의 아들 기다림과 아들의 모친 그리워함이 이미 5년이나 되었다. 이제 경의 후임을 물색해 보았으나 실로 그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이에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위문하고 도와주노니, 경은 스스로 마음을 풀라. 이제 홍사석을 보내어 경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의관(衣冠)과 말을 내리노라.” 하였다. 《국조보감》
○ 공이 항상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힘으로 화를 면한 것이 세 번이었다. 태종이 내란(內亂)을 평정하실 때 우연히 대궐에서 숙직하는 친구에게 들어갔는데, 문이 닫쳐서 나올 수 없어 방황하면서 사방을 돌아보다가 군졸에게 끌려 가서 장차 목이 베어지게 되었을 때,팔을 뿌리치고 달아나서 바로 어전에 이르러서 고함치기를, ‘이 같은 장사를 죽이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께서 듣고 놓아 주셨다. 또 일찍이 깊은 산중에서 사냥하다가 별안간 사나운 범을 만났는데,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고, 나는 범의 턱밑을 잡아 쥔 채 왔다갔다하며 맨 손으로 싸우다가 굽어 보니, 벼랑 밑에 물이 괸 소(沼)가 있었다.이에 범을 떠밀어서 물 밑에 떨어뜨려 범이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서 힘을 잘 못쓸 때 이를 이용하여 박살하였다. 또 일찍이 국경에서 적을 방어할 때 적의 기병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마침 그 앞 몇십 보쯤 가서 커다란 나무가 있기에 몸을 솟구쳐 재빨리 달아나 먼저 그 나무에 의거하였더니 적이 따라오다가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싸움에 이겼다. 이때에 모두 힘이 없었으면 꼭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이종무(李從茂)

이종무는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익대 공신(翊戴功臣)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보국대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후공(襄厚公)이다.
○ 기해년(1419) 5월에 왜적이 비인(庇仁)에 침입하고, 또 절제사(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였다.세종이 유정현(柳廷顯)ㆍ박은(朴訔)ㆍ조말생(趙末生) 등을 불러서 적이 비어 있는 틈을 타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무찔러 되돌아오는 적을 맞아 싸울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들, “불가합니다.” 하였는데, 조말생만이 홀로 아뢰기를, “가능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서 세 도의 군함 2백 척을 거느리게 하고, 영상 유정현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았다. 세종이 한강에 거둥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 공이 아홉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65일 동안 먹을 군량을 싸 가지고 대마도에 이르러서 배 백여 척을 빼앗고 머리 백여 급을 베었으며, 또 적의 집 2천여 호를 불사르고 중국인 백여 명과 왜인 2십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순몽(李順蒙)

이순몽은 본관은 영천(永川)이니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의 아들이다. 음관으로 무과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위양공(威襄公)이다.
○ 공은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살면서 농사에 힘썼다. 어느날 들에서 김을 맬 때,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크게 일면서 커다란 독처럼 생긴 불덩이가 멀리서부터 바퀴처럼 굴러 오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여 마소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공이 호미로 그 불덩이를 쳤더니, 작은 아이가 누런 털이 이마를 덮고 파란 눈이 번쩍거리고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데 반이 부러져 마치 짧은 낫과 같았으며, 거꾸로 땅 위에 거꾸러져 있어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였다. 공이 호미로 흔들어 일으켰더니, 하늘이 또 캄캄해지며 비바람이 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기재잡기》


김효성(金孝誠)

김효성은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숭정대부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양공(孝襄公)이다.
○ 공은 김남수(金南秀) 장양공(莊襄公) 의 아들이다. 남수는 아내 길씨(吉氏)와 따로 살았다. 공의 나이가 네댓 살이 되었을 때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별안간 쌍 비둘기가 모여드니, 공이 말하기를, “저 쌍 비둘기를 보면 암놈 숫놈이 나란히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각기 동쪽과 서쪽에 계시니 어쩐 일인고.” 하고는 이내 울었다.종이 이상히 여겨서 길씨에게 고하니, 그도 역시 울어 동리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그의 나이가 57세에 길씨가 죽자, 시묘살이와 초상과 제사에 한결같이 정성껏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갸륵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조수(趙須) 유방선(柳方善)을 붙였다.

조수는 자는 형보(亨父)이며, 호는 송월당(松月堂)이고, 또는 만취정(晩翠亭)이라 하며,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 《만취정집(晩翠亭集)》이 있는데, 죽을 때에 그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 공이 관동(關東)에서 유랑 생활을 한 지 30여 년에 학문에 크게 힘써서 어느 책이고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못 시명(詩名)이 있어 세종이 매우 사랑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일찍이 그에게 《이백집(李白集)》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면서 굳이 거절하여 받지 않고, “이 속에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이 있습니다.” 하였다. 《청파극담》
○ 공이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금고(禁錮)를 당한 지 30여 년이나 되자, 세종이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서 만년에 불러 썼다. 《필원잡기》
○ 세종이 내시로 하여금 족자를 싸서 보내어 그에게 시를 쓰기를 명하였더니, 그가 붓을 뽑아 한번 휘두르니 글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웠다. 한편으로는 읊고, 한편으로는 말면서 말하기를, “늙은이의 서법이 새끼 가진 범의 할퀴는 발톱과 같구나.” 하고 곧 돌려 드리니, 그의 탄솔(坦率)함이 이와 같았다. 《청파극담》
○ 한윤(韓閏)이 당호(堂號)를 공에게 청했더니, 공이 삼외(三畏)라고 편액(扁額)을 써 주었다. 한윤이 묻기를, “선생께서도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세 가지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돈이 있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곧 길게 누워서 코를 골면 벼락도 두렵지 않는 것이 첫째요, 겨울에는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으며,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으며, 독에는 남은 식량이 없고 상자에는 남은 옷이 없어 도둑이 두렵지 않은 것이 둘째요, 10년 동안 벼슬길에 있었으나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만큼 물러서서 부귀는 뜬 구름인 듯 공명은 헌 신짝인 듯 하였으니, 재상도 두렵지 않은 것이 그 셋째일세.” 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
주부(主簿) 유방선(柳方善) 역시 금고를 당하여 등용되지 않았는데, 학문과 문장이 조수(趙須)와 더불어 서로 백중(伯仲)이었다. 세종이 집현전 선비로 하여금 두 공에게 왕복하여 질문하게 하였고, 서거정(徐居正)ㆍ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으며, 저서에는 《태재집(泰齋集)》이 있다. 《필원잡기》


조오(趙峿) 《과보(科譜)》에는 오(峿)가 오(珸)로 되어 있다.


조오는, 본관이 횡성(橫城)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굳세어 맑은 절개가 견줄 자 없었으며, 집이 극도로 가난하였다. 일찍이 예랑(禮郞)이 되었을 때 무슨 금기하는 일로 방위를 피해서 셋집에 거처하였는데 땔나무와 식량이 이어지지 못하여 동료들이 백미 서 말로 위문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그뒤 공석상에서 그것을 자랑하니, 어떤 이가 그를 기롱하였다. 일찍이 합천군(陜川郡)의 원이 되었을 때,그 고을에서 나오는 은어(銀魚)가 여름철이라 흔하여 부패할 지경이었으나 처자들에게 먹지 못하게 하였으며, 아들ㆍ사위나 노복들이 오고 갈 때에도 모두 자기 양식을 싸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있을 때에 집에 아무 것도 없었으나 조금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독실한 군자였다. 《필원잡기》


 

[주D-001]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제국의 재상이었다.중자가 어머니를 뵈러 형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거위를 선사했는데 형이 받으니, 중자가 형에게 “꽥꽥우는 것을 왜 받으시오.”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가 국을 끓였다. 중자는 모르고 먹는데 형이 들어와 “이것은 꽥꽥 우는 고기이다.” 하니, 중자는 씹던 고기를 토하였다.
[주D-002]무원록(無冤錄) :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법례(法例)를 해석한 글.
[주D-003]익대 공신(翊戴功臣) : 예종(睿宗) 때 남이(南怡)를 죽인 공로로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38인에게 내린 훈호(勳號).
[주D-004]삼외(三畏) : 《논어》에 “군자(君子)가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