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내고향 칠곡의 노래

아베베1 2013. 8. 9. 16:58

 

 

 

 

 

 

 

  내고향 의령현 칠곡

  장함현 의춘 의산 의 읍지인 칠곡 자굴산 영봉의  정기를 받은  칠곡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8리이고, 남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30리이며, 서쪽으로 삼가현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65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장함현(獐含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함안군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이 진주에 이속시켰고 공민왕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가, 그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신번현(新繁縣) 현 동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본래 신라 신이현(辛尒縣)인데 주오촌(朱烏村)이라 하기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의상(宜桑)이라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합주에 이속시켰으나 공양왕 때에 내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장함(獐含)ㆍ의춘(宜春)ㆍ의산(宜山).
【성씨】
본현 남ㆍ심(沈)ㆍ여(余)ㆍ옥(玉), 임(林)ㆍ김ㆍ강(姜) 모두 아전이다. 신번(新繁) 서(徐)ㆍ진(陳)ㆍ오ㆍ석ㆍ임(任), 김 속성(續姓)이다. 저지(楮旨) 박. 정골(正骨) 옥, 강(姜)ㆍ유(柳) 진주(晉州). 조(趙) 함안(咸安). 지산(砥山) 여(余).
【풍속】 습속이 굳세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에 있다.
【형승】
푸른 강과 큰 들 하연(河演)의 기문에, “푸른 강과 큰 들, 높은 두덕 무성한 숲이다.” 하였다.
【산천】 덕산(德山)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자굴산(闍崛山)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귀룡산(龜龍山)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미타산(彌陀山) 신번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가막산(可莫山) 현 동쪽 36리 지점에 있다. 장현(長峴) 현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대현(大峴)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정암진(鼎巖津) 현 동남쪽 9리 지점에 있으며, 진주 남강의 하류이다. 물 복판에 솥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동쪽으로 기음강(岐音江)에 흘러든다. 기음강 현 동쪽 10링 지점에 있다. 영산현(靈山縣) 편에 보라. 검정천(黔丁川)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자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정암전에 흘러든다. 세간천(世干川) 신번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자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우질포(于叱浦)에 흘러든다. 우질포(于叱浦) 신번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세간천과 낙동강이 교차하여 흐르는 곳이다.
【토산】 산무애뱀[白花蛇]ㆍ꿀[蜂蜜]ㆍ매실ㆍ은어[銀口魚]ㆍ대[竹]ㆍ모시[苧]ㆍ옻[漆]ㆍ석류ㆍ감ㆍ붕어[鯽魚]ㆍ닥종이[楮]. 『신증』 종이.
【봉수】 가막산 봉수(可莫山烽燧) 남쪽으로 함안군 파산(巴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계군 미타산(彌陀山)에 응한다.
【누정】 청서루(淸暑樓) 객관 동쪽에 있다. 영락(永樂) 말년에 현감 허계(許季)가 건립하였다.
【학교】 향교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신흥역(新興驛) 현 북쪽 54리 지점에 있다. 지남역(智南驛) 현 서쪽 9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정암원(鼎巖院) 정암진 북쪽 언덕에 있다. 박계원(朴桂院)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개금원(介金院)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세우원(世于院) 현 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신당원(神堂院)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말회원(末回院)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대현원(大峴院) 현 서쪽 13리 지점에 있다. 중제원(中梯院) 현 북쪽 27리 지점에 있다.
【불우】 보리사(菩提寺)ㆍ양천사(楊泉寺) 모두 자굴산에 있다. 청원사(靑猿寺) 귀룡산(龜龍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정골부곡(正骨部曲) 현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지산향(砥山鄕) 현 동쪽 60리 지점에 있는데 모두 곤명(昆明)에서 내속하였다. 장곡향(藏谷鄕) 신번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우물곡부곡(于勿谷部曲)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저지소(楮旨所) 신번현에 있다. 부곡소(釜谷所)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곡소(桐谷所)ㆍ궁곡소(弓谷所) 아울러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신증』 【명환】 본조 양하(梁賀)ㆍ박윤경(朴閏卿).
【인물】 본조 남은(南誾) 신우(辛禑) 때에 왜구가 크게 성하였다. 삼척군(三陟郡)은 성이 작고 또 위태하므로, 국가에서 고을 원을 선택하기에 곤란하였는데 남은이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군에 이르자 왜적이 갑자기 닥치니, 성문을 열고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에 신우가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하려 하였다. 남은은 우리 태조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하여 조인옥(趙仁沃) 등과 함께 군사를 돌이킬 계책을 올렸다. 공양왕 때에 동지밀직사로 임명되었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개국 좌명 공신이 되어 의성군(宜城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남재(南在) 남은의 형이다. 개국 공신이며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의산부원군(宜山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남지(南智) 남재의 손자이다. 문음(門蔭)과 재간으로서 요직을 지냈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옥고(玉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남간(南簡) 남지의 아우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청렴개결하다는 것으로써 일컬었다. 남계영(南季瑛)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정미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신증』 남곤(南袞) 자는 사화(士華), 성품이 단중(端重)하고 영걸찼으며, 문장이 넉넉하고 화려하였다. 젊었을 때 과거에 올랐고 오랜 동안 대제학을 맡았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호는 지정(止亭)이다.
【효자】 본조 전효종(田孝終) 곤미(昆湄) 사람이다. 12살 때에 아비가 죽었는데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어미가 말렸으나 듣지 아니하고 3년을 마쳤다. 세종조에 그 일이 알려져서 명하여 장사랑(將仕郞)을 제수하였다. 최치안(崔致安) 수원부(水原府) 사람이다. 할아버지 소(沼)가 죽자 치안의 아비 흘(訖)은 평소부터 병이 있는 데에도 시묘하였다. 치안의 나이 54세였는데 아비에게 고하기를, “병중인데 거적자리에 잠자고 흙덩이를 벤다면 병이 반드시 더해질 것이니, 집에 돌아가서 치료하십시오.” 하였다. 아비가 허락하니, 치안이 아비를 대신해서 3년 동안 무덤을 지켰다. 세종조에 일이 알려져 장사랑을 제수하였다.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의령현

의령현(宜寧縣)
본디 장함현(獐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고, 신번현(新繁縣)을 이에 붙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신번현(新繁縣)이다. 이는 본디 신이현(神尔縣)인데,【주오(朱烏)라고도 하고, 천천(泉川)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의상(宜桑)으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었다. 부곡(部曲)이 1이니, 정골(正骨)이요,【예전에는 곤명(昆明)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향(鄕)이 1이니, 지산(砥山)이다.【예전에는 곤명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망하고 직촌이 되었다.】

 

자굴산(闍崛山)은 현 북쪽에 있고, 정암진(鼎巖津)은 현 남쪽에 있다.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하류이다. 나룻배가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초계(草溪)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29리, 남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24리, 북쪽으로 합천(陜川)에 이르기 18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5백 4호, 인구가 1천 6백 29명이요, 신번(新繁)의 호수는 5백 55호, 인구가 9백 8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0명, 영진군(營鎭軍)이 70명, 선군(船軍)이 3백 27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4이니, 남(南)·심(沈)·여(余)·옥(玉)이요, 속성(續姓)이 3이니, 임(林)·김(金)·강(姜)이며,【모두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신번(新繁)의 성이 5이니, 진(陳)·서(徐)·임(任)·석(石)·오(吳)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며,【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정골(正骨)의 성이 1이니, 옥(玉)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강(姜)·유(柳)【모두 진주(晉州)에서 왔다.】·조(趙)【함안(咸安)에서 왔다.】 이며, 지산(砥山)의 성이 1이니, 여(余)요, 없어진 소(所)인 저지(楮旨)의 성이 1이니, 박(朴)이다. 인물(人物)은 좌의정 충경공(左議政忠景公) 남재(南在)와 참찬문하부사 강무공(參贊門下府事剛武公) 남은(南誾)이다.【형제가 함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서 본조(本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천 5백 58결이다.【논이 3분의 2에 약하다.】 토의(土宜)는 벼·조·보리·뽕나무·삼[麻]·모시[苧]·목면[木綿]·감·배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지초·가는 대·왕대·칠·종이·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麥門冬)·속단(續斷)·인삼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본현(本縣) 동쪽 원당리(元堂里)에 있고,【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원당리에 있다.【중품이다.】
역(驛)이 2이니, 지남(知南)【현(縣) 경계에 있다.】·신역(新驛)【신번(新繁)에 있다.】 이요, 봉화가 1곳이니, 가막산(可莫山)이 본현 동쪽에 있다.【남쪽으로 함안(咸安) 소산(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계(草溪) 미타산(彌陁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합천(陜川)의 남촌(南村) 어등화리(於等火里)와 초계(草溪) 다호점리(多乎岾里)가 신번현(新繁縣) 서촌(西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원전】 5 집 653 면

 

 

   

  장함현의 읍지 한때는 백제 거열성의  한고을

  한때는 신라의 한고을  조선에는 진주의 속현 이었네

 

  태어나서 자란 그곳은 향수가 전해 오는 곳

  저의 본향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뱃속에서 태어난곳

 

  삼면 앞 뒤로 산으로 가려진 그곳 이지만

  동녘의 뜨오르는 햇살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네

 

  한때는 장함현  의춘  의산  치실골의 고을

  수 천년이 흘러서 오늘에 이렀는데

 

  치실골의 한 골짝이인 수동 (壽富)라고 불러던 그곳

  그곳에서 태어나고 초년을 의 추억이 있었기에

 

 지금도 아련한 추억이 머리속을 스쳐가는 구나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지만 즐거움과 추억이 있었네

 

 세월지나서 머리속에는 어릴적 추억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서 머리속에서 ..

 

 아  아  산과 들에서 지난 세월이 있었기에

 오늘의 소인이 있었네 ...

 

 빈농의 아들이지만 늘 가슴속에는 잊지 않았던

 그때의 생각이 있었기에 오늘도 하루를 즐겁게 노내었는구나

 

 세월가도 그시절의  추억은 잊혀지지 않고

 부모님의 포근한  그 품안이 그리울 뿐이네

 

 지금은 어릴적 살던 그곳에는 집만 세월을 지키고

 고향을 버리고 떠나온 못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주라는 마음뿐이네

 

 내 고향  칠곡 (장함현 의산 의춘 치실 )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지울수 없는 고향 이구나

 

 얼마님지않은 이곳의 생활을 접고

 내고향에서 노년의 즐거움 향수를 달래며 만년의 향수에 젖을

 

 그때의 생각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구나 ...

 

  계사년 입추 지절 잠시의 시간에 내고향 칠곡을 생각하며...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