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휘 지성 장인 김겸광

전주최공 문성공 6세손 휘 지성 의령공파 장인 김광겸 선생자료

아베베1 2013. 8. 11. 21:33

 

 

 

 

 
국역 국조인물고

김겸광

[ 金謙光 ]
  • 원본글 출처

    김겸광의 비명(碑銘)

  • 저자

    홍귀달(洪貴達)

  • 대표관직

    좌참찬(左參贊)

  • 이명

    : 위경(撝卿)
    시호 : 공안(恭安)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13 경재(卿宰)

큰 일을 하려고 하는 임금이 위에 있으면 반드시 기풍과 뜻을 같이 하는 자가 있어 아래서 응하여 팔과 다리며 심장과 등골 역할을 하며 분주하게 힘을 펼쳐서 한 시대의 정치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다. 때문에 우리 세조(世祖) 혜장 대왕(惠莊大王)이 잠저(潛邸)에 있으면서 경태(景泰, 명 경종(明景宗)의 연호)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에 간흉(姦兇)을 처형하여 왕업(王業)이 실제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광성군(光城君) 김공(金公)이 마침 이 해에 문과 출신(文科出身)으로 발탁되어 성궁(聖躬)의 좌우(左右)에서 끝까지 잘 도와 이상 정치에 오르게 하였으며, 뛰어난 공훈이 책에 기록되었으니, 아! 어진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헛되이 그러는 것이겠는가?

공의 휘(諱)는 겸광(謙光)이고, 자(字)는 위경(撝卿)이며, 광산(光山) 사람이다. 고조(高祖) 휘 정(鼎)은 추성 보리 공신 중대광 광성군(推誠輔理功臣重大匡光城君)이며, 중대광이 자헌 대부(資憲大夫)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약채(若采)를 낳았고, 관찰사가 숭정 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세자이사(議政府左贊成兼世子貳師) 문(問)을 낳았으며, 찬성이 수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輸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 부사 겸 관상감사 광성 부원군(領議政府事兼觀象監事光城府院君)에 추증된 철산(鐵山)을 낳았다. 부원군이 성천 대도호부사(成川大都護府使) 김명리(金明理)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정경 대부인(貞敬大夫人)으로 영락(永樂, 명 성종(明成宗)의 연호) 17년(1419년 세종 원년) 9월 정미일(丁未日)에 공을 낳았으니, 그 근원이 멀다고 하겠다.

공은 처음 벼슬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전보되어 감찰(監察)ㆍ정언(正言)ㆍ병조 정랑(兵曹正郞)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는데, 있는 곳에서 모두 직임을 거행하였다.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경진년(庚辰年, 1460년 새조 6년)에 북방의 오랑캐 낭이승합(浪伊升哈)이란 자가 있었는데, 교화가 통하지 않으므로 세조가 명을 내려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를 원수(元帥)로 삼고 공을 불러다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가서 정벌하게 하였으며, 이미 평정된 뒤에는 또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 일족을 토벌하도록 명하였고, 개선을 아뢰고 돌아와서는 그 공으로 다섯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통훈 대부(通訓大夫)가 되고 군기감 정(軍器監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신사년(辛巳年)에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고, 조금 있다가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지 9년 만에 차례를 뛰어넘어 승정원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겼다. 가을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공의 형(兄)인 김국광(金國光)이 호조 판서였으므로 은혜로 돌보심이 대단하였는데, 임금이 손수 공의 사모(紗帽)를 벗기고 공의 이마에 꽃을 꽂아주면서 이르기를, “그대가 비록 직질(職秩)은 형보다 낮지만 현명하고 충량(忠良)하기는 그대 형보다 우수하다.” 하고, 이어서 술잔을 올리도록 명하였으니, 그 총애와 예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임금이 낭이승합의 무리가 원한을 품고 있음을 염려하여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가서 유시(諭示)하게 하고 인해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8년) 가을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이해에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이 평안도(平安道)를 경유하여 와서 조회(朝會)하려고 하자, 임금이 또 가서 유시하도록 명하므로 공이 이해(利害)를 개진(開陳)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무릇 변경의 업무는 번번이 공에게 위임하였는데, 공이 항상 동서(東西)의 변경을 출입하여 오랑캐의 사정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계미년(癸未年)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으며, 이해에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자계가 더해지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니, 양계(兩界)를 중하게 여겨서였다.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1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고, 이듬해인 병술년(丙戌年)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의 자리가 비었으나 조정에서 적합한 인물을 고르려고 신중을 기하였다. 당시 공이 개성부(開城府)를 맡고 있었는데, 특별히 불러다 보임시키고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 이에 겨울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병이 들었으므로 임금이 유시하는 글을 보내기를, “지금은 농사가 이미 마무리되었고 강물도 얼지 않았으며 군무(軍務) 또한 틈이 있을 것이니, 경(卿)이 와서 보는 것이 가하다.” 하였으므로, 공이 부름을 받고 달려와 입대(入對)하니, 즉시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으며, 대부인(大夫人)의 병이 낫게 되자 되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467년 세조 13년)에 내직으로 들어와서 예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되었으며,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14년) 봄에 지공거(知貢擧)로 생원(生員) 조형문(趙亨文)과 진사(進士) 김흔(金訢) 등 각각 1백 명을 뽑았으며,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세조가 훙서(薨逝)하고 예종 대왕(睿宗大王)이 즉위하였는데, 이듬해인 기축년(己丑年)에 다시 예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禮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또 지공거로 생원 김괴(金塊)와 진사 한언(韓堰) 등 1백 명과 문과(文科)에서 채수(蔡壽) 등 33명을 뽑았다. 겨울에 예종 대왕이 훙서하고 금상(今上, 성종)이 즉위하였는데,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찬익(贊翊)한 공으로 순성 명량 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가 내려지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이해에 또 문과[文圍]를 관장하여 김흔(金訢) 등을 뽑았는데, 당시에 적합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겨울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옮겼다.

계사년(癸巳年, 1473년 성종 4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고 을미년(乙未年, 1475년 성종 6년)에 복(服)이 끝나자 광성군 겸 도총관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정조사(正朝使)로 북경(北京)에 갔다. 그리고 신축년(辛丑年, 1481년 성종 12년) 봄에 임금이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고, 여름에는 (명나라) 황제가 내린 조서(詔書)를 영접하였는데, 모두 공이 예의사(禮儀使)로 충원되어 동작과 주선(周旋)이 법도에 맞게 하였다. (이듬해인) 임오년(壬午年)에 황해도(黃海道)에 기근이 들자 공이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마음을 다해 조치하였으므로 한 도(道)가 의뢰하여 소복(蘇復)되었다.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에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승하(昇遐)하자 임금이 공에게 예조 판서를 겸임하도록 명하여 모든 상사(喪事)와 빈소(殯所)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였으며, 재궁(梓宮)을 산릉(山陵)으로 운반하는데는 공을 또 제조(提調)로 삼았다. 여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갑진년(甲辰年) 겨울에 임금이 창경궁(昌慶宮)을 짓도록 명하여 우의정 이극배(李克培)를 도제조(都提調)로, 공을 부제조(副提調)로 삼게 하고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큰일은 모두 공에게 위임하여 성상(聖上)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으니, 은혜로 돌보심은 다 기록할 수 없다. 하지만 공은 더욱 조심하고 삼가며 아침저녁으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을사년(乙巳年, 1485년 성종 16년)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이해에 세자궁(世子宮)을 짓는데 다시 공을 제조로 삼았다. 이듬해 병오년(丙午年)에 겸세자 우빈객(兼世子右賓客)이 되었다가 조금 지나 좌빈객(左賓客)으로 옮겼으며, 무신년(戊申年, 1488년 성종 19년) 봄에 나이 70세라고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술년(庚戌年, 1490년 성종 21년) 가을에 병으로 자리에 눕자 임금이 내의(內醫)와 약을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이 7월 경오일(庚午日)에 집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72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몹시 애도(哀悼)하며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그 상사(喪事)를 돕게 하였다. 그리고 시호(諡號)를 공안공(恭安公)이라 내렸다. 이해 12월 신유일(辛酉日)에 연산현(連山縣) 우수리(牛首里) 선영(先塋) 곁에 장사를 지냈는데, 모두 임금이 은덕을 베푼 사례였다. 공이 먼저 참판(參判) 유양식(柳陽植)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최세현(崔世賢)으로 강서 현령(江西縣令)이다. 뒤에 사직(司直) 진계손(陳繼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 극회(克恢)는 형조 정랑(刑曹正郞)이고 다음 극치(克恥)는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며, 다음 극핍(克愊)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이고, 다음 극개(克愷)와 극제(克悌)는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다. 사위 최지성(崔智成)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다음 이복정(李福禎)은 과거 공부를 하고 있다. 또 방지(旁枝)의 두 아들은 극신(克愼)과 극심(克心)이다. 극회는 군수(郡守) 박수종(朴壽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2남(男)은 석윤(錫胤)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극치는 별좌(別坐) 성맹온(成孟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극핍은 파성정(把城正) 이철동(李哲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극개는 사직(司直) 박수견(朴秀堅)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극제는 어리다. 최세현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1남은 최달해(崔達海)이고 사위는 선전관(宣傳官) 신용관(申用灌)ㆍ당해수(唐海守) 이명귀(李明龜)ㆍ신영철(申永澈)이다. 최지성은 2남을 낳았으니 최호문(崔浩文)과 최준문(崔浚文)이며, 이복정의 2남은 모두 어리다. 남은 자손이 당(堂)에 가득하여 장차 헤아릴 수 없으니, 덕을 쌓은 남은 경사(慶事)가 대체로 다하지 않아서이다.

공의 성품은 순수하고 조심스러우며 뜻을 세움은 돈독하고 후중하여,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하고 아랫사람을 접근함에는 공손함을 생각하며, 효도와 우애는 간단함이 없었고 붕우(朋友)와는 신의로 대하였으며, 일에 임하고 직무에 나아가서는 확실한 지조가 있었다. 그리고 변방의 변고에 대응하는 데 이르러서는 모두 기밀에 맞게 하였으니, 그것은 마음속에 지니고 대비하였기 때문에 시행하여 불가한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여러 임금을 받들어 보필하면서 마침내 공명(功名)과 은택(恩澤)을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누렸고 경사는 자손에게 전해지도록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명문(銘文)을 쓸만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훌륭하신 세조[聖祖]께서 그 범위를 증대시켰는데, 우리 주상(主上)께서 그것을 받으시어 더러는 계승하고 더러는 만들기도 하여, 우리나라를 태평의 영역으로 올리고 예악(禮樂)으로 빛나게 하였도다. 협찬(協贊)한 사람들 누구였던가? 위대하게 우리와 심덕(心德) 같이 한 이로, 우뚝한 광성군(光城君)이 몸은 하나인데도 쓰임은 백 가지였네. 조정 안과 지방이며 남쪽ㆍ북쪽으로, 더러는 외직에 나가고 더러는 내직에 들어와 때로는 정승으로 때로는 장수였는데, 임금께서 이르기를, “아! 공이여 그 계책 아름답게 여기노니, 조아(爪牙)와 수족(手足)처럼 하고 후설(喉舌)과 이목(耳目)처럼 하면서, 앞뒤로 분주하게 흉금을 털어 성의껏 인도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네. 아! 공의 이런 점을 의뢰하여 오늘에 이르렀도다. 운대(雲臺)1)와 능연각(凌烟閣)2)은 바로 공의 집안일세.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에 그대의 공훈을 기재한다 하매, 공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심복하기를 싫어함이 없었도다. 자손에게 전하여 영원토록 다함이 없으리니, 내가 쓰는 명문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고 이는 실제의 자취이도다.

각주

  • 1) 운대(雲臺) :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 추모(追慕)하기 위한 공신(功臣) 스물 여덟 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려서 걸어둔 곳임.
  • 2) 능연각(凌烟閣) :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정관(貞觀) 17년(643)에 훈신(勳臣) 스물 네 명의 초상을 그려서 걸어두었던 전각(殿閣).
참조어
국조인물고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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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김겸광 [金謙光]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