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익제 이제현 신도비문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3. 8. 12. 21:06

 

 

 

 

목은문고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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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지정(至正) 27년 정미년(1367, 공민왕16) 가을 7월에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익재(益齋) 선생 이공(李公)이 자택에서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8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추증한 데 이어, 10월에 유사(有司)가 의위(儀衛)를 갖춰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에 장사 지냈으며, 병진년(1376, 우왕2) 겨울 10월에 현릉(玄陵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공의 휘는 제현(齊賢)이요 자는 중사(仲思)요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 뒤에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셋째 관등)인 거명(居明)이 병부 영(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 왕 김부(金溥 경순왕(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에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윤홍이 승훈(承訓)을 낳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고, 주복이 칭(偁)을 낳고, 칭이 치련(侈連)을 낳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고, 선용이 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文林郞) 상의직장 동정(尙衣直長同正) 휘 득견(得堅)을 낳고, 상의가 증(贈) 좌복야(左僕射) 휘 핵(翮)을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檢校政丞) 시(諡) 문정(文定) 휘 진(瑱)을 낳았다. 문정이 대릉 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지원(至元) 정해년(1287, 충렬왕13)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글을 지을 줄 알면서부터는 이미 작자(作者)의 기상을 드러내었다. 공의 나이 15세 되던 대덕(大德) 신축년(1301, 충렬왕27)에 상시(常侍) 정선(鄭僐)이 성균관(成均館)에서 시험을 보였는데, 응시자 모두가 각기 재능을 자부하면서 서로들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다가 공이 지은 글을 듣고서는 기운을 잃고 움츠러들면서 감히 앞을 다투지 못했는데, 과연 공이 그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이해에 국재(菊齋) 권공 부(權公溥)와 열헌(悅軒) 조공 간(趙公簡)이 예위(禮闈 예조(禮曹)에서 주관하는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을 맡았을 적에 공이 또 병과(丙科)에 급제하자, 권공이 자기의 딸을 공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까지 하였다. 그러나 공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자그마한 기예를 시험해 본 것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덕을 크게 쌓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하고는, 고전(古典)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한편, 이를 다시 절충해서 정당한 결론에 이르려고 노력하였으므로, 문정공(文定公)이 크게 기뻐하면서 “하늘이 어쩌면 우리 가문을 더욱 성대하게 해 주시려는 모양이다.” 하였다.
계묘년(1303, 충렬왕29)에 권무 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가 되었다. 무신년(1308, 충렬왕34)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뽑혀 들어오니,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미루고서 양보하기만 할 뿐 감히 글을 논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기유년에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가 경술년에 선부 산랑(選部散郞)으로 옮겨진 뒤, 신해년에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 판관(三司判官)으로 전직(轉職)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황경(皇慶) 임자년(1312, 충선왕4)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선발되어 부월(斧鉞)을 쥐었던 옛사람의 풍도를 드날렸다. 성균 악정(成均樂正)으로 승진했다가, 겨울에 제거풍저창사(提擧豐儲倉事)가 되었으며, 계축년에 내부 부령(內府副令)이 되었다. 풍저창은 두곡(斗斛)의 일이나 감독하고 내부는 치수(錙銖)와 척촌(尺寸)이나 따지는 곳이었는데도 공이 전혀 난색(難色)을 표하지 않자, 사람들이 “이공은 어떤 일도 잘 해낼 수 있는 불기(不器)의 군자라고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맞아들여 황제로 옹립했기 때문에, 무종과 인종 두 조정에 걸쳐서 비할 데 없는 은총과 예우를 받았다. 그리하여 충선왕이 마침내 원나라에 청하여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자신은 태위(太尉)로 경사(京師)의 저택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 연구로 낙을 삼았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경사에서 문학하는 인사들은 모두가 천하에서 뽑혀 온 명사(名士)들인데, 우리 부중(府中)에 그만한 인물이 없다니 이것은 우리의 수치이다.” 하고는 공을 경사로 불러들였으니, 이때가 바로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1) 정월이었다. 당시에 원나라의 요목암(姚牧菴 요수(姚燧)), 염자정(閻子靜 염복(閻復)), 원복초(元復初 원명선(元明善)), 조자앙(趙子昻 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의 문(門)에 나아와서 노닐었는데,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날이 갈수록 학문이 진보하였으므로 제공(諸公)이 칭찬하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을묘년에 선부 의랑(選部議郞)으로 옮겨지고, 가을에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었는데, 의랑은 그대로 겸임하였다. 병진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촉(西蜀)에 갔는데, 가는 곳마다 읊은 시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널리 전해졌다. 이해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고, 정사년에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다. 기미년에 충선왕이 황제의 명으로 향(香)을 내려 주기 위해 강남(江南) 지방에 갔을 적에, 누대(樓臺)와 풍물(風物)을 보고 흥치가 우러나면 시를 읊어 회포를 풀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조용히 말하기를 “이런 곳에는 우리 이생(李生)이 없으면 안 된다.” 하였다. 경신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많이 얻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이때 공의 나이 34세였는데, 친어버이와 처부모와 좌주(座主) 세 분 등 모두가 건강한 가운데 공이 술잔을 올려 축수(祝壽)하자, 세상에서 모두들 부러워하였다.
이해에 상주(上奏)하여 고려 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제수되었다. 지치(至治) 임술년(1322, 충숙왕9) 겨울에 경사(京師)로 돌아갔는데, 도착하기 전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고 서번(西蕃)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듬해에 공이 왕을 찾아뵈었는데, 가는 도중에 읊은 시마다 충분(忠憤)의 감정이 애연히 서려 있었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광정대부(匡靖大夫)의 품계와 밀직사사(密直司事)의 관직이 가해졌다. 을축년에 공신(功臣)의 호가 추성양절(推誠亮節)로 바뀌어 내려지고,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차 전직(轉職)되었으며, 병인년에 삼사사(三司使)로 옮겨졌다. 천력(天曆) 경오년(1330, 충혜왕 즉위년)에 충혜왕(忠惠王)이 나라를 대리(代理)로 다스릴 적에 다시 정당문학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그 뒤 지원(至元)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에 이르러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지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가 되었다.
기묘년 봄 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훙(薨)하였다. 그해 가을에 정승 조적(曺頔)이 백관(百官)을 협박하면서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는 “임금의 곁에 있는 간악한 소인들을 쫓아내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사실은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암암리에 즉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에 충혜왕이 정예 기병(騎兵)을 이끌고 공격해서 그를 죽였으나, 연경(燕京)에 있는 그의 도당(徒黨)이 매우 많아서 기필코 충혜왕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였으므로,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이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님의 아들만을 알 뿐이다.” 하고는, 충혜왕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가서 말 대신 글로 적어 올려 일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게 하였으니, 그 공(功)이 1등(等)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귀국한 뒤에는 뭇 소인들이 더욱 날뛰었으므로, 공이 물러나 자취를 숨기고 출사(出仕)하지 않은 채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1344)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공을 부원군(府院君)으로 올리고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에 임명하였으며, 서연(書筵)에서 공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병술년에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하였고, 무자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묘년(1351) 겨울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즉위하였으나 아직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우정승(右政丞)에 임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직무를 대리로 처리하게 하였다. 몇 개월 동안 왕이 나라를 비워 두고 있었으나, 공이 적절하게 조치한 덕분에 사람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임진년에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공이 거하게 된 것을 시기하자, 공이 이를 알아채고는 세 번이나 표문(表文)을 올려 정승 자리를 고사(固辭)하였다. 그해 겨울 10월에 조일신이 여러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한밤중에 궁궐로 침입한 뒤에 자기가 꺼리던 사람들을 해치고 군사들을 풀어 주살(誅殺)을 자행하였는데, 공은 이때 자리를 사퇴하였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일신을 복주(伏誅)하고 나서 공을 다시 우정승으로 기용하였는데, 계사년 정월에 그만두었다. 그해 5월에는 부원군(府院君)으로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갑오년 12월에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또 사직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70세로서 김해후(金海侯)에 봉해졌으며,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정유년(1357, 공민왕6) 5월에 본직(本職)으로 치사(致仕)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이를 따랐다. 국가의 제도에 의하면, 군(君)에 봉해진 상태로 치사할 경우에는 봉록(俸祿)을 더 많이 받게 되어 있었는데, 공은 이미 노쇠한 몸인데도 후한 봉록을 받는 것이 의리상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히 예우하는 도리가 못 된다는 조정의 공론이 있었으므로,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다시 공을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에 봉하였다.
공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할 때부터 명성이 한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조정에 몸담은 이후로는 오로지 문서에 관한 일을 봉행하며,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에서 외지제고(外知制誥)를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속관(屬官)을 거쳐 양부(兩府)와 봉군(封君)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그 직책을 그만둔 적이 없었는데, 오직 충정왕(忠定王)이 재위(在位)했던 3년 동안만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공이 일찍이 중국에 표문을 올려 현릉의 즉위를 청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은 타고난 중후한 자질을 학문으로 잘 인도해서 고명(高明)하고 정대(正大)한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에, 의논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모두가 찬란하게 빛나 볼만한 점이 있었다. 처음에 공이 사서(史書)를 읽을 적에도 반드시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본받아서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엄하게 포폄(褒貶)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본기(本紀)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정통이 못 되는 주나라를 가져다가, 일월과 같은 당나라에 이어 붙였는고.[那將周餘分 續我唐日月]” 하였는데, 뒤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고서는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공은 남이 조금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이를 칭찬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선배들이 후세에 남긴 일에 대해서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은 따라가기 어렵다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다. 공은 평소에 다급하게 말을 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속된 화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님을 대하고서 술자리를 벌일 때에도 고금(古今)의 역사를 토론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래서 최졸옹(崔拙翁 최해(崔瀣))이 공을 보고 탄식하면서 “선비가 사흘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익재에게서 이를 확인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은 가능한 한 예전부터 내려오는 법도를 준수하려 하였고, 새로 바꿔서 개혁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와 관련해서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야 어찌 옛사람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마는, 나의 재주는 오늘날의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의 자손이 잇따라 기씨(奇氏)의 가문과 인척(姻戚) 관계를 맺자, 공은 가득 차서 넘쳐흐르는 걱정이 있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기씨가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자, 현릉이 내외의 지제고(知制誥)에게 시를 지어서 축하하도록 명하는 한편, 공에게도 그 일을 서술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사양하고 글을 짓지 않았다.
공은 자신의 호를 익재(益齋)라고 하였다. 신돈(辛旽)이 패망하고 난 뒤에 현릉이 이르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라갈 수가 없다. 익재가 일찍이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공은 나이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고 일컬었으며, 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른 뒤에도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익재라고 호칭하였으니, 공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저술한 문집 몇 권이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인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씨(權氏)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종부 부령(宗簿副令)이고, 다음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이다.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임덕수(任德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전농 정(典農正) 이계손(李係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簽書樞密院事翰林院太學士)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해졌다.
둘째 부인인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씨(朴氏)는 선수(宣授) 서경등처만호부 부만호(西京等處萬戶府副萬戶) 중현대부(中顯大夫) 사복 정(司僕正) 휘(諱) 거실(居實)의 딸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 윤(開城尹)이다.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송무(宋懋)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혜비(惠妃 공민왕의 왕비)인데 지금은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셋째 부인인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는 통직랑(通直郞) 지서주사(知瑞州事) 휘 중린(仲麟)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 우윤(三司右尹)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전의 부정(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2녀가 있는데,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종부(宗簿)는 밀직사 겸 감찰대부(密直使兼監察大夫) 홍유(洪侑)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政堂文學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上護軍)이다. 장녀는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무(趙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원적(李元)에게 출가하였다. 종부 영은 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내유(乃猷)로 조계종(曹溪宗) 광도사(廣度寺)의 주지(住持)이다.
총랑(摠郞)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朝奉郞) 여흥 군사(驪興郡事)이다. 다음 수림(壽林)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인데,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자선대부(資善大夫)가 되었으므로, 공에게 태상경(太常卿)이 추증되고, 훈호(勳號)와 품계(品階)와 작위(爵位)가 갖추어 내려졌다.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소부 윤(小府尹)이다. 딸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 윤(開城尹)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기인걸(奇仁傑)에게 출가하였다.
개성(開城)은 중대광(重大匡) 청성군(淸城君) 시(諡) 평간(平簡) 휘 공의(公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춘추 검열(春秋檢閱) 원서(元序)에게 출가하였다. 창로의 계실(繼室)은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김묘(金昴)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이고, 다음 곤(袞)은 경선점 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어리다.
사복(司僕)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 소윤(軍器少尹)이고, 다음 순례(純禮)는 중랑장(中郞將)이며, 장녀는 통직랑(通直郞) 기거랑 지제교(起居郞知製敎) 신혼(申渾)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친어군 대호군(親禦軍大護軍) 박영충(朴永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소부 윤(小府尹) 황간(黃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랑장 김추(金錘)에게 출가하였다.
전농 정(典農正)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즐(騭)은 낭장(郞將)이고, 다음 양(亮)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딸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안익(安翊)에게 출가하였다. 판전농(判典農)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 소윤(軍器少尹)이고, 다음 위(緯)는 별장(別將)이고,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어리다. 전교(典校)는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좌윤(左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상좌(上佐)이고, 다음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증손(曾孫)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조 위위(趙衛尉)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천선(遷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이 순흥(李順興)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유희(有喜)는 숭은전 직(崇恩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여흥(驪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伸)은 승봉랑(承奉郞) 공조서 영(供造署令)이고, 다음은 밀(密)이며,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이승원(李承源)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선덕랑(宣德郞) 통례문 지후(通禮門祗侯) 곽유례(郭游禮)에게 출가하였다. 밀직(密直)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숭의(崇義)이고, 다음 숭도(崇道)는 전객 녹사(典客錄事)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소부(小府)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어리고, 장녀는 사헌 지평(司憲持平) 김만구(金萬具)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기 개성(奇開城)은 1남을 낳았으니, 이름은 신(愼)이다. 순의(純義)는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순례(純禮)는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자(滋)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신혼(申渾)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호(浩)는 대전지유 중랑장(大殿指諭中郞將)이고, 장녀는 낭장(郞將) 황윤기(黃允奇)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대호군(大護軍)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別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황 소부(黃小府)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약노(藥奴)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즐(騭)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효노(孝奴)이고, 딸은 어리다. 양(亮)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고, 다음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천지의 정기가 한데 모여 / 天地儲精
걸출한 우리 공 태어났고 / 公迺挺生
규벽이 밝게 비치면서 / 奎璧耀芒
우리 공 문장을 일으켰네 / 公迺發揚
천하에 이름 떨치면서 / 名溢域中
몸은 해동에 거했나니 / 身居海東
도덕의 우두머리시요 / 道德之首
문장의 종장이셨어라 / 文章之宗
태산북두로 일컬어진 / 北斗泰山
창려 땅의 한자(韓子)요 / 昌黎之韓

광풍제월로 존경받은 / 光風霽月
용릉의 무숙이었다고 할까 / 舂陵茂叔

국정을 네 차례나 책임지면서 / 四秉國鈞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 / 年踰八旬
상서로움은 기린과 봉황이요 / 麟鳳其瑞
신령스러움은 시귀였다오 / 蓍龜其神
기우는 사직을 붙들어 일으키고 / 功在社稷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 주신 분 / 澤流生民
이제는 종묘에 배향이 되셨나니 / 閟宮升配
애영에 짝할 자가 어디 있을까 / 哀榮無對
아 그대 자손들이여 / 惟爾子孫
충효의 정신을 본받아 따를지니 / 忠孝是遵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 勿謂無知
공께서 무덤에서 살피고 계시리니 / 公在九原

[주D-001]부월(斧鉞)을 …… 드날렸다 : 도적을 소탕하여 무위(武威)를 떨쳤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수의 어사(繡衣御史) 폭승지(暴勝之)가, 황제가 내린 부월을 쥐고서 군국(郡國)의 도적 떼를 일망타진했던 ‘지부(持斧)’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66 王訢傳》
[주D-002]나는 …… 뿐이다 : 충숙왕의 맏아들인 충혜왕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는 뜻이다. 옛날 우(禹) 임금이 죽자 백성들이 ‘우리 임금님의 아들[吾君之子]’이라고 하면서 계(啓)에게 귀의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孟子 萬章上》
[주D-003]측천무후(則天武后)의 …… 확인하였다 : 측천무후가 정권을 찬탈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나라로 고친 뒤에 16년 동안 통치하였는데,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짓고 구양수(歐陽脩)가 《당서(唐書)》를 편찬할 적에는 측천무후를 정식 황제로 인정해서 본기(本紀)에 기록하였으나, 주희(朱熹)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를 비난하며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주D-004]선비가 …… 된다 : 삼국 시대 오(吳)나라 노숙(魯肅)이 여몽(呂蒙)의 등을 두드리면서 학식이 몰라보게 진보했다고 칭찬하자, 여몽이 “선비는 사흘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는 법이다.[士別三日 卽更刮目相待]”라고 대답한 고사를 가리킨다. 《三國志 卷54 吳書 呂蒙傳》
[주D-005]규벽(奎璧) : 28수(宿)에 속하는 규수(奎宿)와 벽수(璧宿)의 합칭으로, 옛날에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주D-006]태산북두(泰山北斗)로 …… 한자(韓子)요 : 당(唐)나라의 한유(韓愈)처럼 익재(益齋)의 문장이 세상의 숭앙을 받았다는 말이다.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 찬(贊)에 “한유가 죽은 뒤로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다.[自愈沒 學者仰之如泰山北斗]”는 말이 나온다.
[주D-007]광풍제월(光風霽月)로 …… 할까 : 송유(宋儒) 주염계(周濂溪)처럼 익재의 인품이 고결했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濂溪詩)〉 서문에 “용릉 땅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결해서, 가슴속이 쇄락한 것이 마치 비 갠 뒤의 바람과 달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如光風霽月]”는 말이 나온다. 무숙은 주염계의 자(字)이다.
[주D-008]시귀(蓍龜) : 점칠 때에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을 말한다.
[주D-009]애영(哀榮) : 생전(生前)과 사후(死後) 모두 영광스럽게 된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살아 계실 때에는 모두가 영광스럽게 여겼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모두가 애통해하였다.[其生也榮 其死也哀]”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