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정운경 선생 묘지명

고려국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 상호군 영록대부 형부상서 정운경 선생 행장

아베베1 2013. 8. 28. 11:59

 

 
삼봉집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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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서(序)

문자가 천지의 사이에 있어, 사도(斯道)와 서로 운명을 함께하므로 도가 위에서 시행되면 문장이 예악(禮樂)과 정교(政敎)의 사이에 나타나고, 도가 아래에서 밝아지면 문장이 서적(書籍)과 필삭(筆削)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모(典謀)서명(誓命)의 문(文)에나 산정(刪定)ㆍ찬수(贊修)한 서(書)에나 도가 실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주(周)나라가 쇠약해짐에 따라 도마저 감추어 버리니, 백가(百家)가 한꺼번에 일어나 각기 자기의 학술로 세상을 울리게 되어 문(文)이 비로소 병들기 시작했다.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ㆍ양웅(揚雄)의 무리마저도 그 말이 오히려 순아(淳雅)하지 못했던 것이다.
급기야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오자 사문(斯文)은 더욱 병들었으며, 위ㆍ진(魏晉) 이후로는 더욱 황폐하여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당(唐)나라에 와서야 한유(韓愈)가 인의를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쳐 팔대(八代)의 쇠퇴를 일으켰고, 송(宋)나라가 흥기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글이 나온 뒤에야 도학이 다시 밝아져서 사람들이 모두 우리 도의 큰 점과 이단의 그른 점을 알게 되었으니, 후학에게 개시(開示)하고 만세에 밝혀 놓은 그 공은 진실로 거룩하다 하겠다.
우리 나라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기자(箕子)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부터 풍속은 염치를 숭상하고, 문물의 아름다움과 인재의 작흥(作興)이 저 중국과 견줄 만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과거(科擧) 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뽑되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훈도(薰陶) 성취하여 수백 년을 내려왔다. 그래서 경(卿)ㆍ사(士)ㆍ대부(大夫)의 사이에 학문하는 무리가 아주 성했던 것이다.
우리 집안 문정공(文正公 부(溥))이 비로소 주자사서(朱子四書)로서 입백(立白),
【안】 입백(立白)은 당연히 건백(建白)으로 해야 되는데 고려 태조의 휘(諱)를 피한 것이다.
간행하여 후학을 권장하자 그 사위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스승으로 섬겨 친히 배워 의리의 학을 제창하여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었다.
그리고 가정(稼亭 이곡(李穀))ㆍ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제공이 따라서 흥기시켰으며, 담암(澹庵) 백공(白公 문보(文寶))이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데에 더욱 힘을 썼다.
우리 좌주(座主)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일찍 가훈을 받들어 벽옹(辟廱)에 입학함으로써 정대정미(正大精微)한 학문을 이루었으며, 돌아오자 유림들이 다 존숭하였으니, 이를테면 포은(圃隱) 정공(鄭公 정몽주(鄭夢周))ㆍ도은(陶隱) 이공(李公 이숭인(李崇仁))ㆍ삼봉(三峰) 정공(鄭公 정도전(鄭道傳))ㆍ반양(潘陽) 박공(朴公 박상충(朴尙衷))ㆍ무송(茂松) 윤공(尹公 윤소종(尹紹宗)) 등이 모두다 승당(升堂)한 분들이었다.
삼봉은 포은ㆍ도은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강론하고 갈고 닦아 더욱 얻은 바 있었고, 항상 후진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아 왔다.
그 시서(詩書)를 강의함에 있어서는 능히 알기 쉬운 말로써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의(義)를 깨달았으며, 그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종유하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현관(顯官)의 자리에 오른 자도 어깨를 견주어 서게 되었고, 비록 무부(武夫)와 속사(俗士)라도 그 강설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부도(浮屠 불교)의 무리들까지도 따라서 향화(向化)한 자가 있었다.
그리고 예악(禮樂)ㆍ제도(制度)ㆍ음양(陰陽)ㆍ병력(兵歷)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해득하지 않은 것이 없어, 팔진(八陣)을 조(祖)로 삼아 36변(變)의 보(譜)를 만들고, 태을(太乙 진(陣)의 이름)을 요약하여 72국(局)의 도(圖)를 짓되, 간략하면서도 곡진하여 세상의 명장과 술사들이 모두 좋게 여겼다. 그러나 이는 다 선생에게는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았다.
선생은 절의가 심히 높고 학술이 가장 정하여, 일찍이 바른 말로 세상의 비위를 거슬려 남방으로 유배된 지 10년이 되었으나 그 뜻을 변하지 않았으며, 공리(功利)의 도당과 이단의 무리가 떼지어 업신여기고 무리를 지어 비방했지만 그 지킴이 더욱 굳건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도를 믿음이 독실하여 현혹되지 않는 분이라 이르겠다.
선생의 저술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약간 편이 있어 의리의 정함이 일목요연하여 능히 전현(前賢)이 발명(發明) 못한 바를 다 발명하였으며,
《잡제(雜題)》 약간 권은 신심(身心)ㆍ성명(性命)의 덕을 근본하고 부자ㆍ군신의 윤기(倫紀)에 밝아, 크게는 천지와 일월, 작게는 조수(鳥獸)와 초목까지도 이치가 이르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이 정(精)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왕국(王國) 사명(辭命 외교 문서)의 문은 전아하여 체제를 얻었으며, 고율(古律)을 지음에는 위ㆍ진(魏晉)을 승습하고 성당(盛唐)을 따랐으나 이취(理趣)는 아송(雅頌)에서 나와,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지고 온화하면서도 담담하여 진실로 옛사람에게 손색이 없었다. 또 악부소서(樂府小序)에 있어서도 번란(繁亂)과 음벽(淫僻)을 산삭(刪削)하고 오직 성정의 바름에서 감발된 것만을 기록했다.
아아, 선생의 문은 다 명교(名敎)에 보탬이 있으며 공언(空言) 따위에 비할 바 아니니 이는 그 도와 아울러 후세에 유전하여 썩지 않을 것이 의심할 바 없다.
비록 소국에 나서 그 문장이 중국 성세(盛世)의 전모(典謀)에 씌어지지 못했으나,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조회하는 동안 요해(遼海)에 배를 띄우고 제ㆍ노(齊魯)를 지나면서 지은 그 시와 문이 다 중국 문사가 가상히 여기는 바 되었다.
이는 능히 문장으로써 한 지방을 울리어 동점(東漸)의 정화(政化)를 찬송 선양한 것인 동시에, 동쪽 사람으로 하여금 만세에 노래하여 성대(聖代) 치도(治道)의 융성과 더불어 영원토록 전해질 것도 역시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근(近)은 비록 재주 없는 몸이지만 다행히 종유(從遊)의 반열에 참여하여 여론(餘論)을 들은 바 있고, 또 다행히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아 서(序)를 명하였기 때문에 감히 책머리에 쓰는 바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성균대사성 진현관 제학 지제교(成均大司成進賢館提學知製敎) 권근(權近)은 서함.

[주D-001]전모(典謨)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의 2전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의 모(謨)를 말한다.
[주D-002]서명(誓命) : 《서경》의 문체명. 서는 군대나 신하를 경계하는 문이며, 명은 임금이 신하에게 명령하는 문이다.
[주D-003]팔대의 쇠퇴 : 팔대는 동한(東漢)ㆍ위(魏)ㆍ진(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ㆍ수(隋)를 이름.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문은 팔대의 쇠퇴기에 일어났다[文起八代之衰].”란 말이 보인다.
[주D-004]좌주(座主) : 과거에 합격할 때의 시관을 좌주라 칭하고, 자신은 문생(門生)이라 했다.
[주D-005]벽옹(辟廱) : 고대 학궁(學宮)의 명칭.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주D-006]팔진(八陣) : 전장의 진(陣)을 말함. 《잡병서(雜兵書)》에 1방진(方陣), 2원진(圓陣), 3빈진(牝陣), 4모진(牡陣), 5충진(衝陣), 6윤진(輪陣), 7부저진(浮沮陣), 8안행진(鴈行陣)이라 했다.

 

 

삼봉집 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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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서(後序)
후서(後序)


일찍이 보건대, 옛날 영웅ㆍ호걸로 세상에 공을 세운 자는 그 끝을 보전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혹시 가득하면 덜리고 차면 이지러지는 이치로서 화를 스스로 불러들이기도 했고, 또한 운수 소관으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큰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큰 복을 누리게 마련이다. 만약 그 자신에게 미치지 못했다면 그 후손에게 돌아가게 된다. 베푼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소득이 있는 것은 진실로 천도(天道)이기 때문이다.
삼봉 선생은 천자(天資)가 뇌락(磊落 마음이 활달하여 구애되지 않는 모습) 괴위(魁偉 얼굴이 위대하게 생김)하여 실로 왕좌(王佐)의 재주를 지녔던 분이었다.
고려 말엽에 나라의 운수가 종말로 치달려 전국이 물 끓듯 하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므로 우리 태조(太祖)께서 시국의 간란(艱難)을 민망히 여기어, 동으로 정벌하고 서로 토죄하여 큰 어려움을 물리쳤는데 선생은 손수 일곡(日轂)을 이끌어 온 누리를 밝혀 우리 동방의 억조 창생을 건지셨던 것이다.
개국 초기를 당하여 무릇 큰 정책에 있어서는 다 선생이 찬정(贊定)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ㆍ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비록 종말의 차질은 있었다 할지라도 공에 견주어 허물이 족히 덮혀질 수 있었겠지만 역시 운수 소관으로서 옛날 호걸들이 벗어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일까?
나의 동년(同年 과거(科擧)에 함께 급제한 사람) 경상도 관찰사 정군(鄭君)은 선생의 증손이 되는데, 일찍이 선생이 끝까지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 무릇 선업(先業)을 계술(繼述)하고 조상의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힘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또 지금 선생의 시문(詩文)ㆍ잡저(雜著)를 찬집(撰集)하여 장차 판각에 붙일 양으로 서간을 보내어 나에게 서문을 명한 것이다.
선생이 시문에 있어서는 진실로 여사(餘事)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시의 고담(高澹)ㆍ웅위(雄偉)함과 문의 통창(通暢)ㆍ변박(辯博)함은 또한 그 학문과 포부의 만에 하나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선유(先儒)로서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양촌(陽村) 같은 제공들이 모두 추앙하고 탄복하여 마지못함에 있어서랴.
정군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운로(雲路 벼슬길)에 드날렸고 지금은 간의(諫議)의 직으로 경상도 안렴(按廉)으로 나갔으니, 간의는 낮은 계급이요 경상은 큰 도(道)라 그대는 아직 귀밑이 청청한데 금대(金帶)를 허리에 띠고 남비(攬轡)를 쥐게 되었으니 영광이 역시 지극하다 하겠다.
이야말로 선생의 남긴 복을 장차 군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도는 베푼 자에게 준다는 이치를 징험할 수 있거니와, 국가의 공로에 대한 보답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선업을 계승하고 조상의 허물을 덮는 일이 어찌 이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군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선생의 휘(諱)는 도전(道傳)이요 자(字)는 종지(宗之)이다. 군(君)의 이름은 문형(文炯)이고 자는 야수(野臾)이다.
성화(成化) 원년(元年) 을유(乙酉) 7월 어느 날.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영예문춘추관사 세자사(領議政府事領藝文春秋館事世子師)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는 삼가 씀.


 

[주D-001]왕좌(王佐) : 왕도 정치를 보좌하는 인물로 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 같은 이를 왕좌재(王佐才)라 한다.
[주D-002]일곡(日轂) : 일(日)은 왕자의 상징. 여기서는 태조(太祖)를 보필했다는 뜻.
[주D-003]남비(攬轡) : 고삐를 잡는다는 뜻. 처음으로 벼슬하여 천하를 맑게 해보겠다는 비유.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수레를 타고 고삐를 잡아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이 있었다[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 하였다.

 

 

 

 
삼봉집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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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고려국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 상호군 영록대부 형부상서 정 선생 행장(高麗國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榮祿大夫刑部尙書鄭先生行狀)

본관(本貫)안동부(安東府)봉화현(奉化縣)
부[考]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균(均)
조부(祖父)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 영찬(英粲)
증조부(曾祖父) 호장(戶長)공미(公美)

선생의 성은 정(鄭), 휘(諱)는 운경(云敬), 자는 ☐☐인데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나이 어떤 본에는 연[年]자가 없음. 겨우 10여 세에 학문에 분발하여 영주 향교(榮州鄕校)에 들어갔다가 복주목(福州牧 지금의 안동(安東))의 향교로 올라 갔다. 처음에 들어갔을 적에는 여러 학생들이 업신여기더니, 공부를 하는데 매양 수석을 하니 고을의 원들이 모두 중하게 여겼다. 외삼촌 한림(翰林)안장원(安壯原 원(元)자를 휘하기 때문에 원(原)자로 쓴 것임) 이름은 분(奮)이며 어머니의 오빠임. 을 따라서 개성으로 와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십이도(十二徒)에 노닐었는데, 여러 학생 가운데서 유명해졌고 자라서는 한림 유공(劉公 이름은 동미(東美))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근재(謹齋)안공(安公 이름은 축(軸))의 칭찬을 받게 되고, 가정(稼亭) 이공(李公 이름은 곡(穀))과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忘年交]이 되었다. 동방의 산수가 좋다는 말을 듣고서 가정 이공이 선생과 가 보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기꺼이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도보로 따라갔다가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러 머물러서 어떤 본에는 이(而)자가 없음. 글을 읽은 것이 수년이나 되었다. 또 고(故) 간의 대부(諫議大夫) 윤공(尹公 이름은 안지(安之))과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었는데 한 번 본 것은 다 기억하였고 대의(大義)를 통하고는 곧 그쳤다.
병인년(1326, 충숙왕13) ☐월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지순(至順) 원년(1330, 충혜왕 복위17) 10월에 송천봉(宋天逢)의 방(榜)에서 동진사(同進士)로 오르고 2년 정월에는 상주목(尙州牧)의 사록(司錄)이 되었다. 그때 용궁 감무(龍官監務)가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한 자가 있어서, 안렴사(按廉使)는 선생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용궁현에 가서 감무를 보고는 묻지도 않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관리가 부정을 하는 것이 비록 나쁜 짓이지만, 그 역시 재주가 법을 농락하고 위엄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뇌물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감무는 늙어서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무엇이 두려워서 뇌물을 주겠습니까?’하였다. 사람을 시켜 어떤 본에 이 위에 안렴(按廉) 두 자가 있음. 무고인 것을 안 안렴사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관리들은 모두가 까다롭게 따지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데, 사록(司錄 정운경을 가리킴)은 정말로 장자(長者)이다.’ 하였다.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하나가 천자(天子 원(元)의 황제임)에게 괴임을 받았는데, 사신으로 와서 상주에 들러 선생에게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다. 선생이 곧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니 아전과 선비들이 길에서 울부짖으며 울었다. 그러자 환자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밤에 용궁까지 뒤따라 와서 이마에 피가 흐르도록 조아리고 사과하면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3년 4월에 전교(典校)에 들어가 교감(校勘)이 되고, 4년(지순(至順)은 4년까지 없으니 혹 지원(至元)의 잘못인 듯함. 다음의 5년ㆍ6년도 마찬가지임) 3월에는 주부(注簿)에 임용되었다가 윤8월에 낭계(郞階) 어떤 본에는 개(皆)자로 됨. 에 올라 도평의 녹사(都評議錄事)를 겸하였다. 이때 원사(院使 다사(茶事)를 맡은 원나라의 벼슬)인 장해(張海)가 어향사(御香使)로 오는데 국가에서는 선생으로 접반 녹사(接伴錄事)를 삼았다. 어향사는 강릉(江陵) 기생을 사랑하여 데리고 왔다. 선생이 들어가 공사를 이야기하는데도 기생은 뻔뻔스럽게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생이 꾸짖어 내려보내니 어향사는 성을 냈다가 얼마 후 다시 위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추하게 여겨, 그 직을 사면하고 돌아왔다.
동 5년 9월에 삼사 도사(三司都事)로 옮겼다가 동 6년 10월에 통례문 지후(通禮門祇候)를 제수받고, 지정(至正) 원년(1341, 충혜왕 복위2) 6월에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다. 그때 자급(資級)은 다 승봉랑(承奉郞)이었다. 2년 8월에 덕직랑(德直郞)으로 올라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이 되고, 동 3년 ☐월에 밀성군 지사(密城郡知事)로 나갔는데, 이때 재상 조 영휘(趙永暉)가 밀성 사람에게 받을 빚이 있어서 어향사 안우(安祐)를 통해 본군 밀성 에 공문을 보내어 받아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묵살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밀성의 영접나간 아전이 어향사가 김해부(金海府)에 달려 들어가 교외[郊] 어떤 본에는 교(郊)자가 없음. 까지 마중나오지 않았다고 부사(府使)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는 빨리 달려와서 아전의 우두머리와 함께 들어와서 아뢰는 말이, ‘김해부사가 까닭없이 욕을 당하고 있으니 지금 명(빚 받으라는 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욕을 당할지 모릅니다.’ 했으나 선생은 듣지 아니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위태롭게 생각했다. 어향사가 군에 들어와서 인사를 나눈 다음 묻기를, ‘전번에 공문 보낸 일은 어찌되었소.’ 했다. 선생은 답하기를, ‘밀성 사람이 빚을 진 것이 있더라도 조상(趙相 조영휘를 가리킴)이 스스로 받을 일이지 상공께서 물을 일이 아닙니다.’ 하니 어향사가 성을 내어 좌우의 사람으로 포위하게 하였다. 선생이 정색(正色)하고서, ‘이제 들 밖까지 마중나와 즐겨 천자의 명령을 맞는데 어찌하여 나를 죄주십니까? 상공께서 덕음(德音)을 펴서 먼 지방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감히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니 어향사는 할 말이 없어 그만두었다.
관직이 갈릴 적에는 선생이 공무로 밖에 있다가 고을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떠났다. 그러자 밀성 사람들은 월봉(月俸)을 마땅히 행자(行資)로 드려야 한다고 가져 왔으나 부인이 그를 받지 않았다.
동 4년 9월에 복주목 판관(福州牧判官)으로 옮겼는데 그 고을 호장(戶長)권원(權援)은 전에 향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이었다. 부임하던 날 저녁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불러들여 같이 술을 마시며 이르기를, ‘지금에 내가 자네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음이다. 내일에 만일 법을 범함이 있으면 판관으로서 자네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 고을 승정(僧正 중[僧]의 벼슬)이 옹천(瓮川) 역로에서 도둑에게 해를 당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역리(驛吏)가 그를 보고는 그 연유를 물으니 승정은 말하기를, ‘내가 베[布] 몇 필을 가지고 모씨의 집을 가는데 밭에 거름 주던 일꾼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아무 곳을 가다가 사람들이 밭에서 김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나는 밭에 김매는 사람이다. 불러서 이야기하려 하였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더니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를 치고 베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였다. 역리가 그를 부축하고 집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안 가서 죽었다.
아전들은 김매던 자를 잡아다가 목사(牧使)에게 알렸고 김매던 자도 자복했다. 그리하여 옥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때 선생이 다른 곳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승정을 죽인 자는 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목사는, ‘이미 자복하였소.’라고 말했다. 선생은 ‘어리석은 백성이 국문(鞫問)의 고초를 견디지 못하여 겁을 먹고서 헛소리를 한 것입니다.’고 하니 목사는 ‘그러면 공이 밝게 처리하시오. 나는 알지 못하겠소.’ 했다.
선생이 밭에 거름 주던 주인을 불러 ‘내가 들으니 네가 일꾼들에게 술을 먹일 적에 승정(僧正)이 지나가니 승정의 베를 말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숨기지 말라.’고 하니, 밭주인의 대답이, ‘한 사람이 좌중에서 말하기를 「승정의 베로 술값을 보충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이에 그 사람과 그의 아내를 구속해 왔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밖에 두고 먼저 그 아내부터 국문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너의 남편이 베 몇 필을 너에게 주었다 하는데 그 베가 어디서 생겼다고 하던가?’ 하니 그 아내는 대답이, ‘아무 달 아무 날 남편이 베를 가지고 와서 빌려준 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라고 하므로, 선생이 그 사람을 불러 묻기를, ‘빌려 주었던 어떤 본에는 차(借)자 밑에 포(布)자가 있음.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그 사람은 말이 막혀서 사실을 자복하였다. 목사와 아전들이 놀라서 물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대개 도둑이란 그 종적을 감추고 누가 알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가 「나는 김매는 자이오.」한 것이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 하였다.
동 5년 ☐월에는 조정으로 들어가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고, 동 6년 10월에는 봉선대부(奉善大夫)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고, 이해 겨울에 하정사(賀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황후 기씨(奇氏)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내시(內侍)들 중에 우리 나라 사람이 많았는데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대접하는데 꽤 거만스러웠다. 선생이 정색하며, ‘오늘 대접하는 것은 옛 임금을 위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내시들이 놀라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대는 큰 수재(秀才)이십니다.’ 하였다.
동 7년 3월에 성균 사예(成均司藝)가 되고 그 해 12월에 봉상 전교 부령 직보문각 지제교(奉常典校副令直寶文閣知製敎)에 올랐다가, 동 8년 2월에 양광도(楊廣道)안렴사로 나가고, 이듬해 9년 10월에는 교주도(交州道)안렴사로 나갔다. 선생이 가는 곳마다 고을에 기강이 엄숙하게 섰다.
선생이 양광도에 계실 적에 가정(稼亭)이 그 선조의 분묘를 참배하기 위하여 한주(韓州)에 돌아와 있었다. 선생이 찾아가 뵙고 웃고 이야기하기를 평민으로 있을 때처럼 하였다.
선생이 술에 취하여 비스듬히 누워서 가정에게 하는 말이, ‘우리들은 이만하면 현달(顯達)했다고 할 것이오.’ 하니 가정은, ‘나는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내 위에 있는 자가 있었거늘, 자네는 지금 겨우 안렴사 4품직을 맴돌면서 감히 현달하였다고 말하는가?’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어찌 동해 가를 유람하던 때를 생각하지 않으시오.’ 하니 가정이 크게 웃었다.
동 10년 4월에 전의 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듬해 11년 정월에는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는데, 옥(獄)이 다스려져서 원통하고 지체됨이 없었다.
【안】 《고려사》 본전(本傳)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었다.
〈운경(云敬)이〉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전보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고 운경과 좌랑 서호(徐浩)를 시켜서 법을 맡게 했더니, 권귀(權貴)에게 흔들리지 않아서 왕은 그들을 불러 술을 하사했다. 그러자 상서(尙書) 현경언(玄慶言)이 말하기를, ‘양궁(兩宮)과 침전(寢殿)은 금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는 곳인데, 지금 외인(外人)들이 규제 없이 출입하여, 궁전(宮殿)ㆍ사문(司門)ㆍ환시(宦寺)의 직책을 지금 홀지(忽赤)에 맡게 하니 시사(視事)할 때에 궁전의 수위가 근엄해야 하는데, 지금은 좌우가 시장과 같아서 임금에게 아뢴 일이 말도 끝나기 전에 이미 밖에 새어 나가니 형(刑) 관장하는 관리를 가까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지금 정운경과 서호에게 침전에서 술을 하사하는 것도 모두 옛날 제도에 어긋납니다.’ 하니 공민왕이 그를 옳게 여겼다.

동 12년 9월에 또 전주목사(全州牧使)로 나갔는데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의 차함(借啣)으로 갔다. 이때 전주는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 가뭄이 심하였는데 선생이 부임하는 날 큰 비가 와서 관리와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한다.
이에 앞서 중이 장가를 들어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이 밖에 나가서 상처를 입고 산길에서 죽었다. 그 아내가 목사에게 정소(呈訴)를 하였으나 증거가 없어서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이 도임하던 날 그 아내가 또 와서 정소하였다. 선생이 즉시 그 아내를 국문하여, ‘사통한 남자가 있느냐?’ 하나, 그 아내는 없다고 말하면서 다만 이웃에 사는 홀아비 하나가 일찍이 저를 놀리기를 ‘늙은 중만 죽으면 일은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그 홀아비와 그 어떤 본에는 그[其]자가 없음. 어미를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홀아비는 밖에 두고 그 어미만 문초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 아들이 집에 있었느냐 밖에 있었느냐?’ 하니, 그 어미는 답하기를, ‘그날 아들이 밖에서 들어와 하는 말이, 「아! 고되다. 친구와 술을 취하게 마셨다.」 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곧 그 홀아비에게 같이 술을 마신 자가 누구냐고 추궁하니 그 홀아비는 말이 막혔고 과연 중을 죽인 자였다.
그때에 어향사 노모(盧某)가 횡포가 아주 심하여 가는 곳마다 수령들을 능욕하였다. 그리고 달려서 고을에 들어오고는 들 밖까지 영접 나오지 않았다고 죄목을 잡았다. 선생이 예(禮)를 인용하여 굴하지 않고서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니 부로(父老)들이 울부짖었다. 어향사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그 뒤 여러 번 조정에서도 명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신년(1356, 공민왕5) 7월 중산대부(中散大夫)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불려 무반(武班)의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그 전형과 주의(注擬)가 아주 공평하였다.
이해 9월에는 서해도(西海道)찰방(察訪)으로 군수품을 겸하여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다. 이때는 군사를 일으키는 처음이라서 군량이 가장 긴급하였는데, 선생이 곡식 수십만 어떤 본에는 만(萬)자 아래에 곡(斛)자가 있음. 석을 운반하되 한 달 만에 일을 끝마치니, 국가에서 여러 도에 독촉할 때에는 서해도를 끌어다가 말을 했다.
지정 17년(1357, 공민왕6) 2월에 중대부(中大夫) 비서감 보문각 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가 더해지고, 4월에는 존무강릉 겸삭방도 채방사(存撫江陵兼朔方道採訪使)가 되었다. 삭방도 여러 고을이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함몰되어 국경이 분명히 나누어 있지 않아서 전투가 벌어지면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선생이 강역을 정하고 백성의 살림을 보살피되 그 지방에 알맞게 하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겨 부로(父老)들 수백 인이 조정에 천장(薦狀)을 올렸고, 지금도 그 일이 칭송된다.
그 해 7월 대중대부(大中大夫)를 제수받고 이듬해 18년 2월에는 본직(本職)으로서 형부사(刑部事)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 내려온 송사가 있었다. 선생은 재상에게 말하기를, ‘백관의 차례를 정하여 능한 자를 쓰고 무능한 자를 물리치는 것이 재상의 일이며, 법을 지켜 행하는 데 있어서는 각각 맡은 관원이 있으니, 일마다 묘당(廟堂)에서 간섭하는 것은 백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송사(訟事)하는 자가 폭주(輻輳)하였는데, 선생이 판결하기를 처음에는 유의하지 않는 것처럼 하다가도 두 사람이 함께 와서 송사할 때에는 판결이 너무나도 정당하여 이긴 자나 진 사람이 다 공평하다고 하였다. 공민왕이 그를 가상하게 여겨 19년 3월에 영록대부(榮祿大夫)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초수(招授)했다.
동 20년 겨울에 공민왕이 남쪽을 순행하였는데 선생이 따라 가 충주(忠州)에서 뵈니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인견(引見)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23년 7월에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 상호군(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을 제수하였으니 이는 그 편의를 좇아서였다.
25년 겨울에 병으로 사양하고 영주(榮州)로 돌아왔다가 26년 정월 23일 을사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니 수(壽)가 62세였다. 선영의 묘 아래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곳은 영주읍에서 동으로 10리쯤이다.
이해 겨울 12월 18일에 부인 우씨(禹氏)가 돌아가서
【안】 포은 봉사고서(圃隱奉使藁序)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서 분상(奔喪)하여 영주(榮州)에서 2년을 살았는데, 이어 어머니 초상을 또 당하여 대략 5년을 지냈다.’고 했다.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는 착오가 있을 것이다.
선생과 부장(祔葬)하였는데, 우씨는 영주(榮州)의 사족(士族) 산원(散員)우연(禹淵)의 딸이다.
선생이 평소에 집안 살림을 일삼지 않았고 세상의 공리에도 담박하였으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벌였으며, 부인도 살림의 유무를 헤아리지 않고 알맞게 찬구(饌具)를 장만하여, 어진 이를 친하고 착한 이를 벗하는 뜻에 순응하였다.
아들 셋이 있는데, 큰 아들은 도전(道傳)으로 임인과(壬寅科)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여 지금은 선덕랑 통례문 지후(宣德郞通禮門祇候)에 올랐으며,
【안】 공이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통문 지후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지금 통문 지후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둘째는 도존(道存), 셋째는 도복(道復)인데 모두 글 읽은 선비이다. 그리고 딸이 하나 있어 선비 황유정(黃有定)에게 시집갔는데 성균 사예(成均司藝) 황근(黃瑾)의 아들이다. 손자 두 사람은 진(津)과 담(澹) 어떤 본에는 영(泳)으로 되었음. 모두가 어리다.
아들 도전이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십이도(十二徒) : 고려 때 개경에 있었던 열두 사학(私學). 곧 문헌공도(文憲公徒)ㆍ홍문공도(弘文公徒)ㆍ광헌공도(匡憲公徒)ㆍ남산도(南山徒)ㆍ서원도(西園徒)ㆍ문충공도(文忠公徒)ㆍ양신공도(良愼公徒)ㆍ정경공도(貞敬公徒)ㆍ충평공도(忠平公徒)ㆍ정헌공도(貞憲公徒)ㆍ서시랑도(徐侍郞徒)ㆍ구산도(龜山徒). 그 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성황을 이루던 곳이 최충(崔沖)의 문헌공도였다. 《高麗史 選擧志 學校》
[주D-002]동진사(同進士) : 과거 등급의 하나. 고려시대에는 과거에서 을과(乙科) 3인, 병과(丙科) 7인, 동진사(同進士) 23인, 합하여 33인을 자ㆍ오ㆍ묘ㆍ유년에 뽑았는데, 조선 정종 때 동진사를 고쳐서 정과(丁科)라 했다. 《高麗史 選擧志, 燃藜室記述 政敎典敎》
[주D-003]홀지(忽赤) : 위사(衛士)를 일컫는 몽고(蒙古) 말.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태자(太子)로서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에 독로화(禿魯花 뚜루화)가 된 사람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그 뒤 충렬왕이 즉위하여 번(番)을 짜서 숙위(宿衛)하게 하였음. 화아지(火兒赤)라고도 함.
 
삼봉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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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고시(五言古詩)
삼봉에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추억함[登三峯憶京都故舊]

공이 병오년(1366)부터 계속 양친의 상(喪)을 당하여 영주(榮州)에 살면서 복제를 마치고 기유년(1369)에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오다.

고요히 앉았자니 먼 생각 일어 / 端居興遠思
저 삼봉의 마루를 오르게 하네 / 陟彼三峰頭
송악산 서북쪽 바라보니 / 松山西北望
높고 높게 검은 구름 무심히 떴네 / 峨峨玄雲浮
벗님네 집이 그 밑에 있어 / 故人在其下
낮과 저녁 어울려 서로 노누나 / 日夕相追遊
나는 새 구름 뚫고 들어가니 / 飛鳥入雲去
내 생각 끝끝내 유유하네 / 我思終悠悠
캐는 지초 한 줌도 차지 않아 / 採芝不盈匊
저기 저 한길 가에 내버려졌네 / 寘彼道之周
한 번 가기 어려움도 아니건마는 / 一徃諒非難
어째서 이다지 머뭇거리는지 / 胡爲此淹留
도성 안이 즐거운 곳 아니리요마는 / 城闕豈不樂
깊숙한 바윗골이 사랑스러운걸 / 亦愛巖壑幽
계수나무 가지 부여잡고 노래 부르며 / 浩歌攀桂枝
세월아 가거라 실컷 노니니 / 卒歲以優游


 

삼봉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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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고시(五言古詩)
삼봉에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추억함[登三峯憶京都故舊]


공이 병오년(1366)부터 계속 양친의 상(喪)을 당하여 영주(榮州)에 살면서 복제를 마치고 기유년(1369)에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오다.

고요히 앉았자니 먼 생각 일어 / 端居興遠思
저 삼봉의 마루를 오르게 하네 / 陟彼三峰頭
송악산 서북쪽 바라보니 / 松山西北望
높고 높게 검은 구름 무심히 떴네 / 峨峨玄雲浮
벗님네 집이 그 밑에 있어 / 故人在其下
낮과 저녁 어울려 서로 노누나 / 日夕相追遊
나는 새 구름 뚫고 들어가니 / 飛鳥入雲去
내 생각 끝끝내 유유하네 / 我思終悠悠
캐는 지초 한 줌도 차지 않아 / 採芝不盈匊
저기 저 한길 가에 내버려졌네 / 寘彼道之周
한 번 가기 어려움도 아니건마는 / 一徃諒非難
어째서 이다지 머뭇거리는지 / 胡爲此淹留
도성 안이 즐거운 곳 아니리요마는 / 城闕豈不樂
깊숙한 바윗골이 사랑스러운걸 / 亦愛巖壑幽
계수나무 가지 부여잡고 노래 부르며 / 浩歌攀桂枝
세월아 가거라 실컷 노니니 / 卒歲以優游


 

삼봉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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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고시(五言古詩)
원유가(遠遊歌)


이때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짓는데 토목의 역사(役事)가 자주 일어나므로 공은 주ㆍ진(周秦)의 잘잘못을 칭탁하여 풍자한 것이다.
술잔치 벌여 빈객이 가득한데 / 置酒賓滿堂
일어나 춤을 추며 원유를 노래하네 / 起舞歌遠遊
멀리 노닌다면 어느 곳에 갈 건가 / 遠遊亦何方
구주를 돌고 또 구주를 돌자꾸나 / 九州復九州
동정호에서 아침에 배를 띄워 / 朝枻洞庭波
저물녘 역수에 닻을 내리네 / 暮泊易水流
사방을 돌아보며 아스라이 눈을 들어 / 四顧騁遐曯
지난날 태평시대 되새기노라 / 想像雍熙秋
넓고 넓은 요순의 도읍터나 / 翼翼唐虞都
높고 높은 하은의 언덕일레라 / 崇崇夏殷丘
세월이 어느덧 얼마나 흘렀는지 / 歲月曾幾何
아득해서 찾을 길 없네 / 邈矣不可求
수레에 올라 또다시 길을 떠나 / 登車復行邁
나는 듯이 주 나라로 머리 돌린다 / 翩翩逝宗周
천추에 우뚝하다 높은 저 영대 / 峨峨靈臺高
뭉게뭉게 오색구름 중천에 떴네 / 靄靄祥雲浮
봉황새는 고강에서 울음 울고 / 鳳凰鳴高岡
관저는 하수의 물가에 있네 / 關雎在河洲
면면히 이어라 몇 천 년 지난 뒤에도 / 綿綿千載後
그지없는 아름다움 지녔더니라 / 綽有無疆休
어찌타 뒷임금 계술이 없어 / 繼世何莫述
왕도 정치 나날이 사라졌느냐 / 王風日以渝
악독한 조룡(祖龍) 입을 벌리어 / 祖龍呀其口
한꺼번에 여섯 나라 제후 삼켰네 / 一擧呑諸侯
아방궁은 하늘과 가지런하여 / 阿房與天齊
촉산의 꼭대기를 내리눌렀네 / 兀盡蜀山頭
어호의 사이에 화가 일어나 / 禍在魚狐間
하루 아침 항우와 유방에게 바치었다오 / 一朝輸項劉
백성의 힘을 빼긴 뉘나 같지만 / 孰非出民力
잘되고 잘못된 건 훈유 같은 걸 / 得失如薰蕕
【안】 뒷사람의 평에 이는 영대와 아방궁이 다같이 백성의 힘을 이용했건만 흥망이 서로 다름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이제와 옛날을 느끼며 서성대다가 / 徘徊感今昔
해가 늦어 내 수레를 돌이켰다오 / 日晏旋我輈
만당한 빈객은 상기도 아니 흩어져 / 滿堂賓未散
술을 들어 서로 주거니 받거니 / 擧酒相獻酬
부르는 노랫가락 멎기도 전에 / 高歌未終曲
두 가닥 눈물이 그대 위해 줄줄 흘러라 / 雙涕爲君流
【안】 뒷사람의 평에 종말에는 눈물을 흘려 가며 일러주니 풍자가 깊고 간절하다 하였다.


 

[주D-001]영대(靈臺) : 주문왕(周文王)의 대(臺) 이름.
[주D-002]봉황새는 …… 울고 : 《시경(詩經)》 대아(大雅)권아(卷阿)에 “봉황은 저 고강에서 울고[鳳凰鳴矣于彼高岡]”이라 하였다. 이는 주성왕(周成王)을 경계한 시다.
[주D-003]관저는 …… 있네 : 관저는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 이는 문왕(文王)후비(后妃)의 덕을 상징한 것이다.
[주D-004]조룡(祖龍) : 조(祖)는 시(始)의 뜻이요 용은 임금의 상징이니, 시황(始皇)의 은어(隱語)이다. 《사기(史記)》에 “금년에 시황이 죽었다[今年祖龍死].” 하였다.
[주D-005]촉산의 …… 눌렀네 : 당(唐)나라 시인(詩人)두목(杜牧)의 아방궁부(阿房宮賦)에 “촉산 높고, 아방궁 우뚝 솟았네[蜀山兀 阿房出].” 하였다.
[주D-006]하루 아침 …… 바치었다오 : 진시황이 죽게 되자 조고(趙高) 등이 공자(公子)인 부소(扶蘇)를 죽이고 호해(胡亥)를 2세(世)로 세웠으나 곧 천하가 어지러워져 반란이 일어났으며,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투다가 결국 유방이 통일하여 한(漢)을 세웠다.
[주D-007]훈유(薰蕕) : 훈(薰)은 향초(香草)이고 유(蕕)는 악취 나는 풀인데, 이 두 가지를 섞어 놓으면 10년이 지나도 오히려 악취가 남는다고 하였다. 즉 선(善)은 소멸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일훈(一薰) 일유(一蕕)는 10년이 가도 오히려 남은 냄새가 있다[一薰一蕕十年尙有餘臭].”라 하였다. 《左傳 僖公4年》
 
삼봉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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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고시(五言古詩)
순흥의 남정에서 서울로 가는 하대사성 을 보내다[順興南亭送河大司成 還京]

【안】 무오년(1373) 이후에 영주(榮州)와 제천(堤川)을 왕래할 적의 소작이다.
옥경으로 돌아가는 임 보내나니 / 送君還玉京
구름 끝의 저 달을 임께 주노라 / 贈君雲端月
구름 끝이 멀다고 말하지 마오 / 莫言雲端遙
술잔 속에 곧장 비추나니 / 直照杯中物
바라노니 임이여 이 잔을 마시오 / 願君飮此杯
내 마음이 달과 함께 조촐하다오 / 我心月同潔
구름떼 날아들어 그늘이 지니 / 群飛劇昏陰
맑은 빛이 중도에 먹히고 마네 / 淸光中道蝕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 없으면 / 不有同心人
묻힌들 뉘라서 아깝다 하리 / 埋沒竟誰惜
이별에 다다르니 다시 값져라 / 臨分更珍重
달을 보면 행여 서로 생각하세 / 見月幸相憶


 
삼봉집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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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사실(事實)

공의 휘는 도전(道傳), 자는 종지(宗之), 봉화현(奉化縣) 사람으로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 운경(云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이색(李穡)에게 배웠으니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이존오(李存吾)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ㆍ박의중(朴宜中)ㆍ윤소종(尹紹宗) 등과 더불어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서, 쉬지 않고 강론(講論)하여 문견을 더욱 넓혔다. 문장은 왕양혼후(汪洋渾厚 크고 넓은 모습)하여 제공(諸公)들이 모두 추어올리고 양보하였다. 《고려사》 본전ㆍ본집 및 이존오전(李存吾傳)을 통해 엮었다.
공민왕(恭愍王) 임인년(1362) 10월, 박실(朴實)이 장원 급제한 과거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안】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ㆍ문희공(文僖公)유숙(柳淑)이 도시관(都試官)이 되어 시부(詩賦)를 가지고 선비를 뽑았는데, 유명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계묘년(1363, 공민왕12) 봄에 충주 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고, 갑진년(1364, 공민왕13) 여름에 전교주부(典校主簿)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로 전임하였다. 본전 및 《선거지(選擧志)》를 통해 엮었다.
병오년(1363, 공민왕15) 1월 제학공(提學公)의 상을 당하여 1개월이 넘도록 산소 자리를 구했으나 길지(吉地)를 얻지 못했다. 하루는 마침 한 자나 되는 큰 눈이 왔는데, 영주(榮州)에 있는 선영(先塋) 구내에만 한 점의 눈도 없으므로 드디어 그 자리에 장사지내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12월, 또 우씨(禹氏)의 상을 당하여 여묘(盧墓)에서 3년상을 마쳤다.
【안】 그때에 사부(士夫)들은 부모상을 1백 일 만에 끝내는데, 공은 전후(前後)로 부모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의 교서(敎書)에도 “부모상에 성인(聖人)의 예절을 잘 지켰다.” 하였다.
경서(經書)에서부터 제자(諸子)에까지 깊이 연구하여,
【안】 그때에 정포은(鄭圃隱)이 《맹자(孟子)》 1질(帙)을 보내오므로 공은 매일 1장 혹은 반 장씩을 연구하여 아주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남방(南方)의 학자들이 많이 배우러 왔으므로 그들을 잘 가르쳐서 모두 성립(成立)시켰다.
【안】 남방의 학자는 안 비판(安秘判 : 비판은 관직명)ㆍ이안렴(李按廉)ㆍ성중서(成中書)ㆍ김사농(金司農)ㆍ유판도(庾版圖) 같은 사람들로서 모두 등과하여 좋은 벼슬을 했으며, 공의 아우 도존(道存)은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고, 도복(道復)은 판윤(判尹)이다.
억세고 건장한 하인은 아우와 누이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늙고 약한 하인은 공이 스스로 차지하였다. 본전ㆍ본집 및 정씨 가전을 통해 엮었다.
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마암(馬巖)에 영전(影殿 초상(肖像)을 모신 집)을 짓는데, 공사를 크게 벌이고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므로 공은 주(周) 나라와 진(秦) 나라의 득실(得失)을 들어 원유가(遠遊歌)를 지어서 풍자하였다. 본집
경술년(1370, 공민왕19) 여름에 성균 박사(成均博士)에 제수되었다. 그 때에 성균관(成均館)을 중수하고 이색(李穡)에게 대사성(大司成)을 겸임시켜서 생원(生員)의 수를 늘리고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뽑되, 김구용ㆍ정몽주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으로 교관(敎官)을 겸하게 하니, 제공들이 공을 천거하여 박사(博士)를 시켰다. 공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제생(諸生)들에게 경서(經書)를 나누어 주고, 수업을 시작하여 강의가 끝나면 서로 더불어 토론을 했다. 이에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서로 더불어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본집 및 이색전(李穡傳)을 통해 엮었다.
신해년(1371, 공민왕20) 7월, 태상박사(太常博士)에 특진하였다. 이때에 명(明)나라가 처음으로 일어나니, 왕이 가장 먼저 귀부(歸附 제후가 천자에게 복속하는 것)하였다. 황제(皇帝)는 가상히 여기고 제복(祭服)과 악기(樂器)를 주었다. 왕은 장차 태묘(太廟)에 친히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안】 본집에 “그때에 왕이 신돈(辛旽)을 죽이고 친히 태묘에 고유했다.” 하였다.
공에게 ‘예수(禮數 예의 절차)와 악절(樂節)을 마련하라.’고 명령하였다. 공은 음악을 고교(考校)하고 제의(祭儀)를 연습하여 그 일을 끝낼 때까지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니, 왕은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다.’ 하고 예의 정랑(禮儀正郞)으로 옮겨서 성균ㆍ태상 두 곳의 박사를 겸임시키고, 이어 부보(符寶 임금의 옥새(玉璽))를 맡겨서 고원(誥院)의 문서를 담당하게 했으니, 전형(銓衡)을 맡은 기간이 무릇 5년이나 되었다. 본전ㆍ본집을 통해 엮었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9월, 왕이 시해(弑害)당하니, 권신(權臣)이인임(李仁任)이,
“신우(辛禑)를 맞아들이자.”
하자, 공은 허금(許錦)과 유백유(柳伯濡)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세력이 이미 굳어져서 제거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고, 왕대비(王大妃)의 임조(臨朝)를 청하려다가 그 계획도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백유와 더불어 탄식하기를,
“오늘날 이 같은 일에 한 사람의 충신도 없구나.”
하였다. 우(禑)가 왕이 되고도 명나라에 부고를 보내지 않으니, 공은 전교령(典校令)박상충(朴尙衷)과 함께 인임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명나라에 빨리 사신을 보내어 선왕의 상사를 고해야 한다.”
하니, 인임은,
“사람마다 다 가기를 꺼려하는데 누가 사신으로 가겠는가?”
하였다. 공은,
“왕이 시해를 당하고도 그 상을 고하지 않으면 황제가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만약 문책(問責)이라도 해오면 온 나라가 화를 당할 것이다.”
하였으나, 인임은 듣지 않았다. 본전 및 이인임전(李仁任傳)을 통해 엮었다.
11월,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이 돌아가는 길에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서, 호송관(護送官) 김의(金義)가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빈 및 그의 아들을 죽인 다음, 밀을 납치하여 북원(北元)으로 도망갔다. 공은 정몽주 등과 더불어 인임에게 이르기를,
“선왕은 불행(不幸 죽었다는 뜻)하였고, 명나라 사신은 돌아가지 않았으니, 미리 명나라 조정에 알리지 않으면 사직(社稷)이 위태하게 될 것이다.”
하니, 인임은 그제야 그 말에 따라서 최원(崔源)을 보내어 상사를 고하고, 또 사신을 죽인 연유를 아뢰었다. 신우전 및 정몽주전을 통해 엮었다.
신우(辛禑) 을묘년(1375, 우왕1), 성균 사예(成均司藝)ㆍ예문 응교(藝文應敎)ㆍ지제교(知製敎)를 제수받았다. 우(禑)는 공 등을 서연(書筵)으로 불러들여 《대학(大學)》을 강의하다가 ‘목목하신 문왕이여, 밝게 경(敬)에 머물렀다[穆穆文王於緝熙敬止].’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우부대언(右副代言)윤방언(尹邦彦)에게 묻기를,
“‘밝게 경에 머물렀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방언이 대답을 못 하자, 우왕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선비라면 경서는 능통할 것이다.’ 했더니 결국 이 모양인가?”
하였다. 공이 ‘인경(仁敬)하고 자효(慈孝)하다.’는 뜻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니, 우왕의 그 잘함을 칭찬하였다. 본전ㆍ본집 및 신우전을 통해 엮었다.
이인임 등이 다시 원(元)을 섬기려고 하여, 종친(宗親)ㆍ기로(耆老 원로 대신)ㆍ백관들과 더불어 연명(連名)으로 글을 지어서,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바치려고 하자, 공은 박상충ㆍ임박(林樸) 등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기를,
“선왕이 이미 남쪽의 명(明)을 섬기기로 결정하였으니, 지금 북원을 섬기는 일은 당치 않다.”
하고 서명하지 않았다. 본전 및 박상충전을 통해 엮었다.
북원(北元)의 사신이 와서 명나라를 협공(夾攻)하자는 의사를 전달하자, 이인임과 지윤(池奫)이 그 사신을 맞아들이려 하므로, 공은 김구용ㆍ이숭인ㆍ권근(權近)과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기를,
“만약 이 사신을 맞아들이면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은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죄를 짓게 될 것이니, 후에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 고려 공민왕)을 지하에서 만날 것인가?”
하였다. 인임과 경복흥(慶復興)은 그 상서를 받지 않고, 공으로 하여금 원사(元使)를 맞아들이게 하니, 공은 복흥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원 나라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결박을 지어 명나라로 압송하겠다.”
하니, 복흥은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반신(叛臣)김의(金義)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므로, 공은 그 일에 대한 이해(利害)를 갖추 설명하였는데, 말이 불손하였다. 또 태후(太后)에게,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
고 아뢰었더니, 복흥은 더욱 성이 나서 인임과 더불어 일을 보지 않고, 공을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보냈다. 대성(臺省)의 시종관(侍從官)들이 동교(東郊)에 나와 전송하는데, 염흥방(廉興邦)이 배상도(裵尙度)를 보내서 이르기를,
“내가 시중(侍中)에게 말하여 그 노여움이 조금 풀렸으니, 잠시 기다려보라.”
하므로, 공은 그 때 한참 술을 마시다가 벌컥 화를 내며,
“도전의 말이나 시중의 노하는 것이 제각기 소견은 다르지만, 모두 나라를 위하는 일이었다. 지금 임금의 명령으로 귀양을 가는데 어찌 당신의 말을 듣고 중지하겠소?”
하고는 곧 말을 타고 떠났다. 재상들은 그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이 그래도 뉘우치지 않는다.”
하여 사람을 보내서 매질을 하려다가 마침 석기(釋器)의 난(亂)이 일어나서 중지하였다.
【안】 석기는 충혜왕(忠惠王)의 아들인데, 호군(護軍)임중보(林仲甫) 등이 석기를 임금으로 세우려고 몰래 역모를 했었다. 본전 및 김구용전(金九容傳)을 통해 엮었다.
12월, 심문(心問)ㆍ천답(天答) 두 편을 저술하였다.
정사년(1377, 우왕3) 7월, 예(例)에 따라 고향으로 옮기고, 또 4년이 지난 뒤에 서울 밖에서는 마음대로 살게 허가되었다. 그래서 삼각산(三角山) 밑에 집을 짓고 글을 가르치니,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안】 공이 삼봉재(三峯齋)에서 글을 가르치니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에 같은 고향 사람으로 재상(宰相)이 된 자가 공을 미워하여 그의 서재를 헐어버려, 공은 제생(諸生)들을 거느리고 부평부사(富平府使)정의(鄭義)를 찾아가서 부평부 남촌(南村)에 자리를 잡았는데, 재상 왕모(王某)가 그곳에 별장을 짓겠다고 서재를 헐어버렸다. 공은 할 수 없이 김포(金浦)로 옮겼다.
항상 후생을 가르치는 데에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였다. 고성(固城)의 요민(妖民) 이금(伊金)이 자칭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대중을 현혹하기를,
“나는 석가불(釋迦佛)도 오게 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신에게 기도하면서 쇠고기와 말고기를 먹는 사람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만약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3월에 가서 보아라. 일월은 모두 광채가 없어질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조화를 부리면 풀에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 곡식이 열리는데, 어떤 것은 1년에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산천(山川)의 귀신들을 보내면 왜적(倭賊)도 사로잡아 올 수 있다.”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모두 그 말을 믿어서 성황사(城隍祠)를 훼철(毁撤)하고, 이금을 부처처럼 섬겼다. 중[僧] 찬영(粲英)
【안】 찬영은 신창(辛昌)의 스승.
은 말하기를,
“이금의 하는 말은 모두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그 중에도 ‘일월이 광채가 없어진다.’는 말은 더욱 가소롭다. 그런데 온 나라 사람들은 어째서 이다지도 믿는단 말이냐?”
하니, 공은,
“이금과 석가(釋迦)의 말이 다른 점은 없으나, 다만 석가는 멀리 타생(他生)의 일을 말하여 사람들이 그 허망한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이금은 가까이 3월의 일을 말하여 당장 그 허망한 것을 눈앞에 보게 되는 것뿐이다.”
하니 중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버렸다. 본전 및 권화전(權和傳)을 통해 엮었다.
계해년(1383, 우왕9) 가을에 공이 아태조(我太祖 이태조(李太祖))를 따라 함주막(咸州幕)에 갔으니 그때에 태조는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었다. 태조의 호령이 엄숙하고 대오(隊伍)가 정제된 것을 보고 가만히 아뢰기를,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였다. 공은 핑계대기를,
“동남쪽에 나가 왜적을 격퇴한다는 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영문 앞에 노송 한 그루가 있으므로 나무에 시를 쓰겠다고 청한 다음, 나무를 하얗게 깎고 쓰기를,
까마득한 세월의 한 그루 저 소나무는 / 蒼茫歲月一株松
첩첩한 청산 속에서 잘 자랐구나 /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거라. 이 다음에 다시 볼 수 있을는지 /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의 세월은 너무 쉽게 가는구나 / 人間俯仰便陳蹤
하였으니, 대개 천명(天命)의 소재를 알고 그 뜻을 붙인 것이다.《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갑자년(1384, 우왕10) 여름에 또 함주에 갔었다. 7월에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를 따라 명경(明京)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를 청하였다. 그때에 우리 나라와 중국 사이에 많은 틈이 생겨서, 황제는 진노(震怒)하여 장차 우리 나라를 군대로 위협하고 세공(歲貢)을 더 늘리며, 배신(陪臣)김유(金庾)ㆍ홍상재(洪尙載) 등을 원주(遠州)로 장류(杖流)시키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가기를 꺼려하고, 또 우리 나라에서 남경(南京 명(明)의 수도)까지의 거리는 무릇 8천 리나 되어서, 발해만(渤海灣)에서 바람 기다리는 날짜를 빼고 실제로 90일이 걸린다. 이때에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10일간의 바람 기다리는 날짜를 빼면 겨우 50일밖에 되지 않는다. 공은 몽주와 더불어 명령을 받는 즉시 길을 떠나서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금릉(金陵 남경)에 당도하여 성절에 참여하고 표를 올리니, 황제가 가상히 여기고 비로소 조회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행인(行人 우리 나라 사신을 말함)들도 석방하게 되었다. 본집 및 《정포은집》을 통해 엮었다.
을축년(1385, 우왕 11) 4월, 사신 갔다 돌아오는 날로 즉시 성균 좨주(成均祭酒)ㆍ지제교(知製敎)를 제수받았다. 5월에 우(禑)는 사신을 보내어 승습(承襲) 및 시호를 청할 때에 공으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짓게 하였다. 표는 습유(拾遺)에 나옴. 황제는 그 표문을 보고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시책사(諡冊使)장부(張溥)와 주탁(周倬) 등을 보내어 우를 책봉(冊封)하고, 사시(賜諡)했는데 그 제(制)에,
“표(表)의 말이 간절하다.”
하였다.
우는 오로지 말달리기만 일삼고 예의는 익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근심하였다. 이에 이르러서 우왕은 공으로 하여금 의주(儀注 나라의 전례의 절차를 적은 것)를 초하여 익히게 하니 행동이 조금 예절에 맞았다. 장부의 무리들은,
“예의(禮儀)가 훌륭하여 보는 것이 듣던 것과는 다르다.”
하니,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였다. 외보(外補 지방관)를 요청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으니, 어떤 뜻이 있어서였다. 많은 혜정(惠政)을 베풀어서, 온 고을에 칭송이 대단하였다. 아태조가 천거하여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불러들이니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다. 본전ㆍ본집 및 신우전을 통해 엮었다.
무진년(1388, 우왕14) 6월, 신우를 폐하고 그 아들 창(昌)을 세웠다. 이보다 먼저 공은 윤 소종 등과 더불어 ‘우왕을 신씨(辛氏)라 하는 사람은 충신이요, 왕씨라 하는 사람은 역적이다.’고 주장했었다. 이때에 와서 소종은 아태조 군문(軍門) 앞에 나가서곽광전(霍光傳)을 올리고 드디어 우왕을 폐한 다음, 왕씨 중에서 좋은 사람을 뽑아 세우려 하였다. 조민수(曺敏修)가 창을 세우기로 계획을 짰는데, 그것은 창이 이인임(李仁任)의 질녀(姪女) 근비(謹妃)의 소생인 때문이다. 그래서 제장들이 자기의 주장에 따라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그때에 이색(李穡)이 가장 명망이 높은 선비이므로 그의 말을 빌기 위하여 비밀리에 물어 보았다. 이색은,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므로 드디어 창을 세우게 되니, 여기서 공은 색의 무리들과 더불어 서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신창전(辛昌傳)ㆍ《상촌휘언(象村彙言)》을 통해 엮었다.
신창(辛昌)이 공으로 하여금 서연(書筵)의 시독(侍讀)을 시켰다가 얼마 후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하였다. 이때에 전제(田制)가 크게 문란해서 세력가들은 무제한으로 점령하여 1인이 경작하는 토지에 지주는 7~8명이 되는 곳도 있어서, 도조(賭租)를 바칠 때면 지주의 인마를 먹이는 비용과 그들이 억지로 사자는 물건이며 왕래하는 노자(路資)와 운반하는 비용이 도조보다 배가 넘게 되니, 그 폐단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심하였다. 공은 그 폐단을 잘 알고 반드시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태조를 극력 도와서 국내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만들어서 인구 비례에 따라 토지를 분배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하였다. 구가 세족(舊家世族)들이 그 제도가 자기들에게 불리하다 해서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게 되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그 이해를 논의하게 하니, 시중(待中) 이색은 ‘옛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 하여 반대하고, 조준(趙浚)ㆍ윤소종은 공의 말에 찬성하고, 정몽주는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니, 태조는 결국 개혁하였다. 본전ㆍ본집 및 조준전(趙浚傳)을 통해 엮었다.
10월에 공은 지공거(知貢擧)ㆍ지신사(知申事)가 되고, 권근(權近)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고, 이치(李致) 등 33인에게 급제(及第)를 주었다. 《선거지(選擧志)》
기사년(1389, 창왕1) 11월에 아태조는 공과 판삼사사(判三司事)심덕부(沈德符)ㆍ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ㆍ정당문학(政堂文學)설장수(偰長壽)ㆍ평리(評理)성석린(成石璘)ㆍ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조준(趙浚)ㆍ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葳) 등으로 더불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조(宗祧)를 받들 수 없고, 또 천자의 명령도 있으니,
【안】 이해 9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윤승순(尹承順) 등이 명경(明京)으로부터 돌아와서 성지(聖旨)를 받든 한 구절(句節)에, “고려의 임금 자리는 왕씨가 시해를 당한 뒤에 대가 끊어졌다. 비록 가짜로 왕씨라 하지만 다른 성이 임금이 되었으니, 이것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켜 오던 좋은 법이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슬기로운 신하가 있어서 군신의 신분(身分)을 바로 정하면, 비록 수십 년을 조회 오지 않은들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마땅히 가짜 왕씨는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워야 한다.”
하고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서 창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다. 공을 봉화현 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봉하고, 수충논도 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주었으며, 삼사 우사(三司右使)를 제배(除拜)하고, 전(田) 1백 결(結)과 노비(奴婢) 10구(口), 백금 50냥, 구마(廐馬) 1필, 채백(綵帛) 등 여러 가지 물건을 하사하니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교문(敎文)은 아래 나온다. 본전 및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를 통해 엮었다.
왕이 즉위하는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姜淮)와 계부(季父) 시(蓍)가 들어가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상(將相)들이 전하를 세운 것은 다만 자기들의 화를 모면하기 위해서이지, 왕씨를 위해서가 아니니, 전하는 아예 그들을 믿지 말고 스스로 보호할 길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옆에 모시고 있다가 듣고는, 그 어머니 윤씨에게 고했다. 그래서 윤씨의 사촌오빠 소종이 듣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서, 공 및 여러 공신들은 드디어 왕 앞에 나가서 아뢰기를,
“전하가 즉위하시자마자 참소하는 말이 당장 들어오고 있으니, 신등은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참소하는 말을 믿으시면 당장 신등에게 죄를 내리시고, 만약 신등이 가짜 왕씨를 내쫓고 다시 왕씨를 세운 것이 종사(宗社)에 공이 있다고 하시면, 참소하는 사람에게 죄를 내려서 상하(上下)에 간격이 없게 하소서.”
하니, 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아무 말도 못하므로 공 및 여러 공신들은 한참 엎드려 있다가 물러나왔다. 심덕부전(沈德符傳)ㆍ《용비어천가》를 통해 엮었다.
그때에 큰 호랑이를 바친 사람이 있었다. 공은 아뢰기를,
“제도(諸道)에서 아첨하기 위하여 헌납하는 물건은 물리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사(有司)에게 맡겼다가 국가 용도에 보태 쓰게 하소서. 그런데 큰 호랑이 따위는 먼 길에서 들것으로 운반해 오려면 수십 명이 동원되고, 또 그 고기는 제사상에도 오르지 않으니,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헌납하는 물건들을 유사에게 주게 했다. 본집
경오년(1390, 공양왕2) 1월, 왕이 비로소 경연(經筵)을 개설하고 공과 정몽주로 하여금 경연의 일을 맡게 하고, 여러 강관(講官)으로 더불어 4번(番)으로 나누어 나와서 강의하게 하였다. 왕은 공에게 이르기를,
“지금 위조(僞朝)의 첨설직(添設職)을 없애고 싶은데,
【안】 신우가 첨설직(添設職)을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어서, 봉익(奉翊)ㆍ통헌(通憲)으로부터 7~8품(品)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으니, 사람들이 “벼슬이 수레로 싣고 말로 되어야 할 지경이다.” 하고 비웃었다.
어떤 방법으로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사람 쓰는 법은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문학(文學)ㆍ무과(武科)ㆍ이과(吏科)ㆍ문음(門蔭)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과거를 보여서, 당선이 되면 등용하고 낙제하면 등용하지 않았으니, 그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 송(宋)나라 때에는 산관(散官 실직(實職)이 없는 관리)이 된 사람을 위해 대단관(大丹館)과 복원궁(福源宮)을 설치하고 혹은 제조(提調)를 주고, 혹은 제거(提擧)도 주었으니, 지금도 이 제도를 본받아서 별도로 궁성숙위부(宮城宿衛府)를 설치하고, 벼슬이 밀직(密直)과 봉익(奉翊)을 지낸 사람에게는 제조궁성숙위사(提調宮城宿衛事)를 시키며, 3~4품을 지낸 사람에게는 제거궁성숙위사(提擧宮城宿衛事)를 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행정(行政)도 올바르게 될 것이요, 체통(體統)도 엄숙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외방에 나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대우해야 좋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서울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대우하면 외방에 있는 사람들도 다투어 서울로 와서 왕실(王室)을 호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는 계급의 고하에 따라서 혹 제조도 시키고 혹 제거도 시키면 됩니다.”
하였다. 왕은 그 말에 따라서 드디어 궁성숙위부를 설치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당(唐)나라에서 사람 쓰던 법은 다섯 가지 조목(條目)이 있었으니, 첫째, 교양(敎養)은 재덕(才德)을 이루는 것이요, 둘째, 선거(選擧)는 우수한 사람을 뽑는 것이요. 셋째, 전주(銓注)는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요, 넷째, 고과(考課)는 공과(功過)를 조사하는 것이요, 다섯째, 출척(黜陟)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조목 가운데도 또 각각 조목이 있으니, 경사(經史)를 널리 알고, 법률(法律)에 밝고, 활쏘고 말달리는 데 익숙한 이 세 가지는 교양의 조목이요, 학문(學問)ㆍ재간(才幹)ㆍ무예(武藝)ㆍ문음(門蔭) 이 네 가지는 선거의 조목입니다. 덕망(德望)과 식량(識量)이 있는 사람은 정승이 되고, 지략(智畧)과 위용(威勇)이 있는 사람은 장수가 되고, 과감하게 말하여 숨기지 않는 사람은 대간(臺諫)이 되고, 명찰(明察)ㆍ평서(平恕)한 자는 형관(刑官)이 되고, 장부와 산수(算數)에 익숙한 사람은 전곡(錢糓)을 주관(主管)하고 교묘한 생각을 짜내서 좋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공장(工匠)을 주관하니, 이 여섯 가지는 전주(銓注)의 조목입니다. 공(公)만 알고 사(私)를 잊어 직무에 부지런한 것은 공(功)이 되고, 공은 축내고 사를 살찌워 자리를 비우고 일을 보지 않는 것은 과(過)이니, 이 두 가지는 고과의 조목입니다. 벼슬의 계급을 높이고 봉록(俸祿)을 올려주는 것은 척(陟)이 되고, 벼슬을 깎고 귀양을 보내는 것은 출(黜)이 되니 이 두 가지는 출척의 조목입니다. 본조(本朝)에서 사람 쓰는 법은 아주 엉망이어서 교양을 하려 하면 사도(師道)가 밝지 않고, 선거를 하려 하면 사로써 공을 가리고, 전주를 하려 하면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여 나오고, 고과를 하려 하면 청탁이 성행하고, 출척을 하려 하면 회뢰(賄賂)가 공공연히 오가서, 이 다섯 가지 조목이 모두 없어졌으니, 무엇을 가지고 사람을 뽑습니까? 요사이 5도(道)에 출척사(黜陟使)를 보내고 있으니, 이것은 근본은 생각하지 않고 지엽(枝葉)만을 잘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대단히 옳게 여겨 검토관(檢討官)한상경(韓尙敬)으로 하여금 그 말을 써 올리게 하였다. 본전 및 공양왕세가ㆍ선거지를 통해 엮었다.
4월, 왕이 공 및 여러 공신에게 교서(敎書)를 내려서 포상하고, 구마(廐馬) 1필, 백금 50냥, 백견(帛絹) 각각 5단(端)씩을 주었다. 공양왕세가
윤 4월, 공 및 여러 공신이 상서하여 사직(辭職)하니, 왕은 일을 보라 명하였다. 그때에 대간(臺諫)이 이색과 조민수가 창(昌)을 세운 죄를 논계하니, 지신사(知申事)이행(李行)이 말하기를,
“대간에서 논계하는 것이 공신들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이색을 좌주(座主)로 삼아 우대언(右代言)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대리로 서명(署名)하게 하였다. 대간이 행과 인옥을 탄핵하니, 왕은 할 수 없이 파면시켰다. 공은 여러 공신과 더불어 상서하기를,
“대간이 논계한 것은 신등이 아는 바가 아닌데, 우와 창의 무리들이 신등을 미워하여 비난을 꾸며대고 있으니, 벼슬에서 물러나 그 비난을 막고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소서.”
하고는, 모두 집에 들어앉아서 일을 보지 않으니, 왕은 평리(評理)배극렴(裵克廉)에게 명하여 도당(都堂)의 일을 서리(署理)하게 하였다.
대제학(大提學)안종원(安宗源)과 좌사(左使) 권중화(權仲和) 등이 그들로 하여금 벼슬에 나오게 하라고 청하니, 왕은,
“경등이 잘해 보라.”
하매, 대답하기를,
“옛날에는 정승 한 사람만 사직해도 도당을 모두 다시 임명했으니[改批] 지금도 마땅히 개비(改批)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나와서 일을 보게 하소서.”
하니, 왕은 그 말을 따랐다. 공과 여러 공신이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謝)하니, 왕은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서 술을 베풀고 위로하니, 이에 나와서 일을 보았다. 이색전(李穡傳)
6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고 명경(明京)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또 변무(辨誣 억울함을 변명함)하였다. 그때에 파평군(坡平君)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이초(李初)는 중국 조정에 하소하기를,
“이시중(李侍中)이 요(瑤)를 임금으로 세웠으니, 요는 종실(宗室)이 아니요 바로 그의 인친(姻親)이며, 요는 이(李 태조의 구휘(舊諱))와 더불어 상국(上國)을 침범하려 합니다.
”하였다. 공은 중국에 들어가 아뢰기를,
“윤이와 이초의 거짓말은 신이 감히 먼저 그 허실(虛實)을 변명할 수 없사오니, 흠차관(欽差官)을 보내어 따져 보시고, 또 신이 서울에 가서 면주(面奏)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였다. 흠봉(欽奉)한 선유성지(宣諭聖旨)에,
“윤이와 이초가 너희 나라 일을 어지럽히려는 것을 짐(朕)이 애초부터 믿지 않았고 벌써 죄로 다스렸으니, 너희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
하였다.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김종연(金宗衍)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그 도당 이방춘(李芳春) 등을 국문하니, 방춘이 말하기를,
“종연이 나에게 이르기를, ‘이시중은 천성이 본래 자인(慈仁)한데, 다만 정몽주ㆍ조준ㆍ정도전 등의 꾀임에 넘어가서 우리들을 이 지경이 되게 했으므로 내가 권격(權格) 등과 더불어 그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였다.”
했다. 권격을 국문하니, 격은,
“종연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용기(池湧奇) 등과 더불어 이시중을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으니 몽주와 도전 따위야 무엇이 어렵겠느냐?’ 했다.”
하였다. 그래서 종연을 체포하여 말려 죽였다. 김종연전(金宗衍傳)
헌부(憲府)에서 검토관(檢討官)신원필(申元弼)이 세자(世子)의 명(命)을 꾸며 낸 것을 탄핵하니 왕은 원필을 하직시키고, 얼마 후에 탄핵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노(怒)하여 죄를 주려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원필은 전하가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옛날 신하입니다. 만약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탄핵한 사람에게 죄를 주면, 사람들은 반드시 전하의 희로(喜怒)가 사정(私情)에 따른 것이다 할 것이니, 첫 정치의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왕은 화가 조금 풀려서 정당문학 동판 도평의사사 겸성균대사성(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에 제배하였다. 왕이 ‘적경원 중흥비(積慶園中興碑)의 글을 지으라.’ 명하고,
【안】 적경원은 곧 공양왕의 4친묘(四親廟)가 있는 곳.
옷 1습(襲)과 구마 1필을 하사했다. 본전
신미년(1391, 공양왕3) 1월, 오군(五軍)을 통합하여 삼군 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로 만들고, 공을 우군 총제사(右軍總制使)로 삼으니 공은 사양하기를,
“3군을 만든 것은 신이 중국에 간 사이에 헌사(憲司)에서 건의하여 된 것으로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원수부(元帥府)를 없애고 3군으로 만들어서 신을 총제사로 삼으면, 원수(元帥)들 중에 실직한 사람은 반드시 앙앙한 마음을 품고 ‘도전이 원수부를 혁파하고 스스로 총제가 되었다.’ 해서 원망과 비난이 한데 겹칠 것입니다. 또 활쏘고 말달리기에 익숙하지 못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으며,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관복(冠服)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도 모두 신이 주장한 것이 아닌데도 좌우에서 모두들 신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또 염치없이 이 직임을 맡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날로 불어나서 신은 위태하게 될 것이니, 제발 다른 사람을 임명하소서.”
하였다. 왕은,
“대국(大國)으로서 3군을 두는 것은 옛날의 제도였다. 중간에 권신(權臣)들이 그 제도를 없애고, 재상들이 제각기 원수라 일컬어서 온 나라의 백성이 그의 부하가 아닌 자가 없게 되었다. 지금 원수를 없애고 3군을 세웠으니, 이는 옛날의 제도를 되찾는 기회이며, 총제는 참으로 중요한 자리여서 시중(侍中) 두 사람에게 의논하고 경에게 맡긴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혹시 참소하는 말이 있어도 그 말을 듣지 마시고, 이 변변치 못한 신의 몸을 끝까지 보호해 주소서.”
하고 드디어 사양하지 않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2월에 여러 총제(總制)와 더불어 소관의 총병(總兵)을 사열하고 번(番)을 나누어 궁성(宮城)을 숙위하게 하였다. 본전 및 공양왕세가를 통해 엮었다.
왕이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회암사(檜巖寺)에 들러서 탄신(誕辰)이라 하여 불공을 올리고 중들을 공양하매, 공이 아뢰기를,
“탄신에 중을 공양하는 것이 비록 옛날 법은 아니나, 신하들이 자진해서 하는 것은 옳거니와, 임금이 스스로 복리(福利)를 기도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왕이 연복사(演福寺)의 탑전(塔殿)을 짓기 위하여 경기도(京畿道)와 양광도(楊廣道)의 백성들로 하여금 나무 5천 주(株)를 실어 오게 하니, 소가 모두 죽고 백성들의 원망이 자심하매, 공은 그 피해됨을 강력히 말하였다. 조금 뒤에 신병으로 물러가기를 간청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성균 생원(成均生員) 박초(朴礎) 등이 상소하기를,
“겸대사성(兼大司成) 정도전은천인성명(天人性命)의 연원(淵源)을 발휘하고,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학(道學)을 창도하여, 불교(佛敎) 백대(百代)의 속임수를 타파하고, 삼한(三韓)천고(千古)의 미혹(迷惑)을 깨우쳐서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지식(止息)시키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했으니, 우리 나라의 진유(眞儒)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전하께고요(皐陶)와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같은 신하를 주어서, 요순(堯舜)과삼대(三代)의 융성한 정치를 중흥(中興)하는 오늘날에 이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전의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은 조종(祖宗)의 죄인이 된다 하시고, 김전(金琠)의 불교를 신봉하자는 말은 전하의 충신이 된다고 하십니까?
【안】 전의부정(典醫副正) 김전이 상서하여 “위로 성조(聖祖)의 홍원(弘願)을 받들어서 불사(佛寺)를 많이 짓고, 전지(田地)도 더 주어서 불교를 흥왕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였다.
신등은 감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도전의 정학(正學)은 믿지 않으시고 김전의 사설(邪說)을 믿으신다면, 어찌 천하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만세(萬世)의 나무람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본전 및 김자수전(金子粹傳)을 통해 엮었다.
4월, 왕이 구언(求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공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에 상(賞)과 형(刑)을 받은 사람 중 같은 사건에 상형은 다르게 된 것이 있습니다. 김저(金佇)의 말은 동일했는데, 극형에 처한 사람도 있고 등용된 사람도 있으며, 김종연(金宗衍)을 감옥에서 탈주하게 한 것은 동일한 사건인데, 그 감수(監守)하던 관리들 중에 어떤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등용되었으니, 그가 탈옥하여 난리를 꾸민 것은 똑같은데 공모하고 숨겨 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살려 주고 어떤 사람은 죽였으니, 신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모를 일입니다. 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죄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면, 등용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어찌 자기만이 다행했으며, 등용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죄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 하면, 형을 받고 죽은 사람은 어찌 그리 자기만이 죄를 입었습니까? 우와 창이 우리 왕씨의 자리를 절취했으니, 참으로 조종(祖宗)의 죄인입니다. 그러면 왕씨의 자손이나 신민(臣民)이 된 사람으로서는 똑같이 원수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족인(族姻)이나 당여(黨與)라 하여 죽이기까지는 할 수 없으면, 먼 곳으로 귀양이라도 보낸 뒤에라야 사람과 귀신의 마음이 쾌할 것입니다. 옛날에무재인(武才人)이 고종(高宗)의 황후(皇后)가 되어 그 아들 중종(中宗)의 자리를 빼앗으니,오왕(五王)이 거의(擧義)하여 무씨(武氏)를 몰아내고 다시 중종을 세웠습니다. 무씨는 어머니이고 중종은 아들이니 친어머니로서 그 아들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호씨(胡氏)는 ‘오왕이 능히 대의로써 단안을 내려 그 죄를 다스렸으나 그 종족(宗族)을 멸하지 못했다.’고 나무랐거늘, 하물며 우와 창은 왕씨에 대하며 무씨와 같은 혈통은 없으면서 무씨와 같은 죄가 있으니 그 종족ㆍ인척과 당여야 어찌 무씨의 종족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제장(諸將)들이회군(回軍)하여 왕씨를 세우자고 주장했으니, 이것은 하늘이 회화(悔禍)하고, 조종이 음으로 도와서 왕씨가 다시 일어날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아들 창을 세워야 한다 하여 왕씨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안】 이색을 지목함.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의 대를 영영 끊어지게 꾀한 사람도 있었으니,
【안】 우현보(禹玄寶)를 지목함.
그들은 난적(亂賊)의 도당으로서 왕법(王法)에 용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기왕 살려 주셨으면 먼 곳으로 귀양이라도 보내었어야 옳을 것인데, 지금 모두 그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위로해서 안심시켜 주셨으니 만약 그들의 죄가 무고(誣告)라 한다면, 그가 왕씨 세우려는 계획을 방해하고 거짓 왕씨 창을 세운 것은 제장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며, 그들이 자백한 뚜렷한 증거가 있으니 ‘그가 신우를 맞아들여 왕씨의 대를 끊었다.’는 것은 김저와 정득후(鄭得厚)가 먼저 말하였고, 이임(李琳)과 이귀생(李貴生)이 뒤에 자백했으니, 이런데도 무고라고 하면 천하에 난신적자(亂臣賊子)를 토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唐)의중종(中宗)과 무삼사(武三思)의 일을 가지고 증거를 대보겠습니다. 무씨(武氏)의 도당 중에 용사(用事)한 사람은 삼사(三思)였습니다. 오왕(五王)들이 무씨의 아들을 황제로 세웠기 때문에 삼사가 도마 위의 고기가 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오왕은 오직 중종에게만 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사에게도 다시 살려 준 하늘과 땅 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삼사는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저지른 죄가 세상에 용납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밤낮으로 오왕을 참소하기를 ‘그의 권력이 너무 세고 저의 공이 높은 것만 믿고 마음대로 한다.’ 하여 중종의 마음을 현혹시켰습니다. 중종은 삼사가 자기를 사랑한다 하여 친근하게 하고, 오왕은 권력이 세다 하여 꺼려하다가 결국 오왕도 죽음을 당하고, 중종도 시해(弑害)당했습니다. 친분으로 말하면 어머니의 조카요, 은혜로 말하면 목숨을 살려 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덕은 보지 못하고 화만 입었으니, 참소하는 사람의 꾀는 그 방법에 익숙해지면 남의 몸을 망치게 하고, 남의 집안과 나라를 망치게 하고, 끝에 가서는 자신도 망하고야 말게 되니, 삼사 같은 사람이야 어찌 옛날과 지금이 다르겠습니까? 신등은 비록 오왕과 같은 피해를 당한다 해도 별로 아까울 것이 없지만, 왕씨가 이미 이룩해 놓은 왕업(王業)을 위하여 아깝게 여기옵니다. 만약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인데 말하는 사람이 틀렸다.’고 하시면, 그때 중종의 마음인들 어찌 그런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결국 후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고 있으니, 신은 후인들이 지금 사람을 비웃는 것이 지금 사람이 고인(古人)을 비웃는 것과 같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인하여 사전(辭箋)을 써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에 상서(上書)한 사람이 많이 있었으나 공의 대답이 제일이므로 왕이 매양 칭찬하였다. 그러나 숨김없이 할 말을 다해 왕의 뜻을 거슬렸다. 본전. 아래도 같다.
공이 무삼사로 우현보(禹玄寶)의 당파에 비유하니, 왕이 공을 좋아하지 않고,
【안】 우성범(禹成範)은 우현보의 손자이니, 왕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공을 좋아하지 않았음.
현보 및 이색의 무리들도 공을 미워하였다. 공은 또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색과 현보를 죽이자고 청하기를,
“생각하옵건대 형벌의 가장 큰 것은 찬역(簒逆)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왕씨 세우는 것을 방해하고 ‘아들 창을 세워야 한다.’는 것과 신우를 맞아들여서 왕씨의 대를 끊어지게 한 사람은 찬역(簒逆)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요, 난적(亂賊)의 괴수입니다. 마땅히 그 죄상을 따져서 전하께 아뢰고, 온 나라 사람들로 더불어 태묘(太廟)에 고유하여 그 죄를 낱낱이 들어 토죄한 뒤에라야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혼이 위로될 것이요, 신민의 울분도 풀릴 것이며, 천지의 법도 수립될 것이요, 재상의 책임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남의 죄악은 나의 알 바가 아니요, 살리고, 죽이고, 내쫓고, 귀양보내는 권리는 임금이 잡고 있으니 재상이 어떻게 관여하느냐?’ 한다면,동호(董狐)는 어째서 조돈(趙盾)이 그 임금 죽인 역적을 토멸(討滅)하지 않았다고 악명을 붙였겠습니까? 만약 ‘소위 죄인이란 사람이 유자(儒者)의 우두머리 되는 이도 있고 왕실(王室)과 연혼(連婚)한 사람도 있어서 그 법을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면, 옛날에임연(林衍)이 원왕(元王)을 폐하고 그의 모제(母弟 친동생) 창을 세울 때에 연이 먼저 계획을 세우고 뒤에 시중(侍中)이장용(李藏用)에게 고하니, 장용은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응응’ 하고 대답만 하였습니다. 뒤에 원왕(元王)이 반정(反正)하고 장용이 수상(首相)으로 있었는데, 능히 그 계책을 세우지 못하게 하고 그 난리를 꾸미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 하며, 서인(庶人)으로 쫓아냈으니, 지금 이색이 유림(儒林)의 영수(領首)가 된 것과 그때 장용의 위치와 비교하면 누가 더 중요한 자리에 있으며, 가장 먼저 간사한 꾀를 내어서 왕씨를 방해하고 아들 창을 세운 것과 장용이 다만 임연의 모역(謀逆)에 대답만 한 것과 비교하면 누구의 죄가 더 무겁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색의 말에, 우(禑)가 비록 돈(旽)의 아들이라 해도 현릉(玄陵)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강녕대군(江寧大君)에 봉했으며, 또 천자의 고명(誥命)도 받았으니 사실상 임금이 되었으며, 또 이미 신하가 되었으니, 내쫓는 것은 대단히 옳지 않다고 하니, 그 말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는 ‘왕위(王位)는 태조(太祖)의 왕위요, 사직(社稷)은 태조의 사직이니, 현릉이 참으로 당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또 천자의 고명으로 말하면 한때의 권신(權臣)들이 현릉의 아들이라고 속여서 얻은 것이어서 뒤에 천자가 명령하기를, ‘고려의 왕위(王位)는 아들이 없어서 비록 거짓 왕씨를 세우긴 했으나, 다른 성으로 임금이 되었으니 또한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켜 오던 좋은 모책(謀策)은 아니다.’ 했으며, 또 ‘과연 현명하고 슬기로운 신하가 있어서 군신의 자리를 바로잡아 놓으면 좋겠다.’ 하였으니, 전의 고명이 잘못된 것은 천자도 잘 알고서 다시 명령한 것이니, 어찌 감히 고명을 가지고 구실(口實)을 삼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신하가 되었다는 말에도 답변할 말이 있으니 《강목(綱目)》의 글에는 ‘심이기(審食其)는 제(帝)의 태부(太傅)가 되었고,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은 승상(丞相)이 되었다.’고 썼으며, 뒤에는 ‘한(漢)의 대신(大臣) 등이 아들 홍(弘)을 죽이고 대왕(代王) 항(恒)을 맞아들여 황제위(皇帝位)에 나아가게 했다.’고 썼으니, 그 글에 ‘제(帝)’ㆍ‘승상’이라 쓴 것이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대신’이란 말이나, ‘아들 홍을 죽였다.’라고 쓴 것은 역적을 토벌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것뿐이 아닙니다. 무재인(武才人)이 황제라고 한 지가 오래 되어서, 적인걸(狄仁傑)이가 장간지(張柬之)를 천거하여 재상을 시켰습니다. 간지는 무재인을 폐하고 중종(中宗)을 맞아들여 세웠으니, 그 천거해서 재상이 된 사람이 어찌 신하가 되지 않았으며, 무재인을 폐한 것은 또한 그가 역적이 되었으므로 토벌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세(百世)의 사람들이 주발과 진평은 유씨(劉氏)를 안정시켰고 장간지는 당(唐)나라를 회복한 공로가 있다고 칭찬하지만, 그들이 신하가 되어서 옛 임금을 폐했다고 나무라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신우를 다시 맞아들이려 한 것이 바로 그의 아들 창이 임금으로 있을 때였으니, 비록 신우를 다시 맞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해도 왕씨가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 하고, 그가 말하기를, ‘신우를 맞아들여서 왕씨의 대를 끊었다 하여 그 죄를 보태려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그때에 충신과 의사들이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서 다른 성을 내쫓고 다시 왕씨를 세우기로 의논하는데, 위신(僞辛)의 무리들이 먼저 예부(禮部 명(明)나라의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얻어서 천자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과 충신의 의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창의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라 하여 그 아비를 다시 맞아들여서 사욕(私慾)을 채우려 한 것이니, 이것이 신우를 맞아들여서 왕씨의 대를 끊어지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더구나 그들은 말하기를, ‘무진년에 우를 내쫓고 창을 세울 때에 유림(儒林)에서 이의(異議)가 있었다.’고 하니, 그 이의라는 것은 왕씨를 세우기로 의논했다는 말이요, 또 그는 여러 사람에게 큰소리치기를 ‘제장들이 왕씨를 세우려 할 때에 우리 아버지가 반대했으니 우리 아버지의 공은 크다.’ 하여, 그 말이 퍼져서 우와 창의 귀에 깊이 들어갔으니, 만약 우와 창이 임금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유림과 제장이 과연 그 목숨을 보존했겠습니까? 그들은 어찌 그렇게 야박합니까? 스스로 왕씨를 세우려 한 것을 이의라 하고, 왕씨 세우는 것을 방해한 것이 자기의 공이라 하니, 지금에 와서는 위신(僞辛)을 세운 것을 이의라 하고, 왕씨 세우는 데 방해한 것이 중죄가 된다 해도 옳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과 현보는 일찍이 시역(弑逆)한 일이 없는데,진항(陳恒)ㆍ주우(州吁)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하며, 또 ‘그런 죄가 없는데 잘못 누명을 쓰는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호씨(胡氏)의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임금을 죽이고 임금을 세우면 종묘(宗廟)는 없어지지 않지만, 종묘를 옮기고 국성(國姓)을 바꾸면 이것은 그 나라를 없애버리는 것이니 어찌 임금을 죽인 것보다 더 중하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지금 이성(異姓)의 당이 되어 왕씨의 종사(宗祀)를 폐지하려는 것은 진실로 호씨의 이른바 ‘그 종묘를 옮기고 동성(同姓)을 멸(滅)한다.’는 것으로, 그 죄는 임금을 죽인 데 그칠 뿐이 아닙니다. 그리고 옛날의 대신(大臣)은, 그의 죄를 고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죄수의 옷을 입고 죄를 청하였는데, 한(漢)의 곽광(霍光) 같은 사람은 무제(武帝)의 고명 대신(顧命大臣 임금의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받은 대신)으로 소제(昭帝)를 옹립해서 그 공적이 지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상서하여 그 죄를 고발하니, 감히 대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대죄(待罪)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죄를 고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눈물을 흘리며 간청(懇請)하여 몸소 유사(有司)들을 만나서 그 죄를 변명한 뒤에야 그 마음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처자(妻子)를 꾀어서 상서하게 하고, 병이 났다는 핑계로 밖에 나가서 의원을 만나 보며, 유사로 더불어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변명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춘추(春秋)》에 역적을 치는 법은 비록 그 종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도 그 생각의 동기를 따져서 그 죄를 주었는데, 하물며 이렇게 종적이 현저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전(箋)을 올려서 우군총제사를 사직하였다. 전은 습유에 나왔다.간관(諫官)들이 아뢰기를,
“도전은 사직에 공이 있는데, 전을 올려 사직한 지가 여러 날이 되도록 답을 하지 않으시니, 공신을 이다지 박하게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복직시켰다. 대성(臺省)에서 계속 상서하여 현보에게 죄를 내리도록 청하였으나, 왕은 성범(成範)이 그 사위이기 때문에 듣지 않고, 사람을 아태조(조선 태조, 즉 이성계(李成桂))에게 보내서,
“대성에서 논주(論奏)하는 일을 금지해 달라.”
하였다. 태조는 탄식하기를,
“왕은 내가 대성을 지휘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하였다.
왕은 아태조의 공이 높고 인심을 얻은 것을 시기하며, 또 구가 세족들이 사전(私田)을 개혁한 데 원한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헐뜯으며, 우와 창의 무리들이 왕실과 연혼이 있어서 조석으로 참소하니, 왕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밤낮으로 좌우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비밀리에 제거하려 하였다. 태조는 참소하는 말에 곤란을 당하여 공과 남은(南誾) 등에게 이르기를,
“나는 경등과 더불어 죽을힘을 다하여 왕실을 위해 일했으나, 참소하는 말이 자꾸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들이 이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할까 두렵다. 나는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그 화를 피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는, 먼저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행장을 재촉하여 떠나려 했다. 그때 공이 말하기를,
“공의 한 몸에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이 달렸으니 어찌 거취(去就)를 가볍게 할 수 있습니까? 왕실에서 정승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어진 사람은 나오게 하고 불초한 사람은 물러가게 하여 기강(紀綱)을 진작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하면 왕도 아마 깨닫는 바가 있어서 참소하는 말이 자연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한구석에 물러가 있으면 참소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여 말할 수 없는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옛날에 자방(子房 장양(張良)의 자)이 적송자(赤松子 신선(神仙))를 따라가 놀았는데, 고조(高祖)는 죄를 주지 않았다. 지금 내가 아무 다른 뜻이 없는데, 왕이 어찌 나에게 죄를 주겠는가?”
하여, 서로 더불어 의논을 결정하지 못했었다. 도진무(都鎭撫)황희석(黃希碩)이 가신(家臣 집안일을 보살피는 사람) 김지경(金之景)을 통해서 부인 강씨(康氏)에게 아뢰기를,
“도전과 남은 등이 공을 권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일은 다 틀리게 되었습니다. 빨리 이 두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강씨는 그 말을 믿고 태종(太宗)에게 고하기를,
“도전과 남 은 등은 모두 살려 둘 수가 없다.”
고 하니, 태종은 대답하기를,
“공이 참소하는 말에 곤란을 당하여 물러갈 의사가 있으므로 도전과 남은 등은 힘껏 이해를 설명하여 물러나는 것을 막는 사람입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지경을 꾸짖기를,
“이 두 사람은 공과 사생(死生)을 함께 하는 사람이니, 너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공을 불렀으나 공이 병이 났다고 사양하고 나가지 않으니, 대언(代言), 안원(安瑗)을 보내서 간곡하게 달래므로 그제야 나가니, 왕은 이색과 현보의 죄를 물었다. 공은 대답하기를 상소의 말과 같이 하면서 말이 물 흐르듯 하니 왕은 말하기를,
“색의 죄상은 대강 나타났지만 현보의 죄상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색의 죄가 이미 나타났으면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그 불충(不忠)한 것을 드러내야 할 것이요, 현보 같은 사람은 죄상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대간에서 계속해 상서하여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있으니, 신도 또한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왕이,
“색과 현보의 일은 덮어 놓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항소(抗疏)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반드시 경의 상소가 그 길을 터놓은 것이요, 경이 근일에 와서 과인을 보지 않는 것도 또한 이 일 때문이다.”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군신의 의(義)는 정(情)이 부자와 같아서 비유하면 아비가 자식에게 불효한다고 나무라고도 그 이튿날이면 전처럼 사랑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비록 신을 꾸짖으셨으나, 뒤에 만약 성심껏 신에게 맡겨 주시면 감히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창 농사철에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주지 않다가, 전하께서 신을 불러 직접 문의하시니 하늘이 당장 비를 내렸고, 전에 토우(土雨)가 와서 곡식이 자라지 못했는데, 전하께서 신을 불러 정사를 의논하시니 그 토우가 깨끗이 개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간당(姦黨)들이 전하의 말씀이라고 가장하여 신에게 죄를 주려 하면, 신은 직접 전하를 뵈옵고 아뢴 뒤에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았다. 본전 및 《용비어천가》를 통해 엮었다.
9월, 헌사에서 규정(糾正)박자량(朴子良) 등이 집의(執義)우홍득(禹洪得)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탄핵하여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그들의 말이 공에게 연루(連累)되어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나갔다. 성헌(省憲)과 형조(刑曹)에서 상소하여 공을 탄핵하기를,
“몰래 규정을 꾀어서 대간을 헐뜯었으니 극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공신이라 해서 용서하니, 다시 논핵하기를,
“공이 참람되게 공신 자리에 끼어서 속으로 간악한 생각을 품고 겉으로는 충직한 체하며 국정을 더럽히고 있으니 그에게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왕이 고향인 봉화현으로 쫓아내었는데도 대성에서 계속 상소하기를,
“도전이 지나치게 큰 벼슬을 받아서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 직첩(職牒)과 공신록권(功臣錄券)을 회수하여 그 죄를 밝히소서.”
하니, 왕은 직첩과 녹권만을 회수하고 나주(羅州)로 이배(移配)시켰다. 대사헌(大司憲)김주(金湊) 등이 상소하여, 그 아들 전농정(典農正) 진(津)과 종부부령(宗簿副令) 영(泳)을 논핵하여,
【안】 영(泳)은 본전에 담(澹)으로 되었으니 여기에는 잘못된 것이고, 담은 공의 아우 도존(道存)의 아들이다.
서인(庶人)으로 쫓아내고, 얼마 후에 공은 봉화현으로 양이(量移 형을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김)하였다.
【안】 우현보전(禹玄寶傳)에 “헌사에서 상서하여 이색의 죄만을 청하고, 우현보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으니, 규정 박자량 등이 서로 더불어 비난하였다. 그때에 현보의 아들 홍득이 집의가 되어서 관청에 나가니 자량 등이 뜰에 나와 맞아들이지 않았다. 대사헌 김주는 탄핵하여 자량 등을 순군(巡軍)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만호(萬戶)유만수(柳曼殊)는 묻기를, ‘헌사에서 현보 등의 죄를 의논하고 밀봉(密封)해 올렸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알았느냐?’ 하니, 자량은 ‘규정 안승경(安升慶)에게 들으니 승경이 이보다 앞서 정도전의 집에 가서 묻기를, 「들으니 공이 상서하여 일을 말하는데 몹시 절박하게 했다 하니 사실이냐?」 하였더니, 도전이 그렇다고 하며 그 상서 가운데의 일들을 말해 주어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홍득을 맞아들이지 않았으며, 또 도전을 보고 묻기를, 「근자에 성헌과 형조에서 우와 창과 이초(彛初)의 무리들을 논계하는데 모두 밀봉해 올렸다 하니 보았는가?」 하였다. 도전은 「자네들이 우와 창과 이초의 무리들을 대악(大惡)이라 하나,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다.」 하였다. 내가 들은 것은 이것뿐이다.’ 하였다. 이에 자량과 승경에게 매를 때리고 수군(水軍)으로 귀양보냈다.” 하였다. 헌사에서는 상소로 탄핵하여 공을 봉화현으로 귀양보냈다. 〈본전〉
임신년(1392, 태조1) 봄, 귀양에서 풀려 영주(榮州)로 돌아왔다. 그때에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아태조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해 가고, 안팎이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며, 또 공 및 조준ㆍ남은 등이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는 줄 알고, 일찍이 기회를 타서 제거하려 하였다. 태조가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이 대단히 불편하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간관(諫官)김진양(金震陽) 등에게 사주(使嗾)하기를,
“이(李) 태조의 구휘 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우익(羽翼)인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뒤에야 그를 도모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진양 등이 상소하기를,
“정도전은 천지(賤地)의 출신으로 교묘하게 당상관(堂上官) 자리에 앉아서 참소하는 말로 남을 얽어 넣어 많은 사람이 죄에 연좌(連坐)되었으며, 조준은 도전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변란(變亂)을 서로 부채질하며 권세를 농락하여 모든 사람들을 유인하기도 하고 위협도 하며, 남 은은 조준과 더불어 도전의 뜻에 맞추기 위하여 감히 가벼운 욕설과 불경한 말을 해서 전하의 뜻을 격동시키고 그 사욕을 채우려 하니, 조준ㆍ남 은 등의 직첩(職牒)과 공신권(功臣券)을 회수하고, 그 죄를 국문하여 국법대로 처벌하고, 도전은 귀양가 있는 그 곳에서 처벌하여 후세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니 궁중에 두고 조정에 내려 보내지 않았다. 본전 및 정몽주ㆍ김진양 등의 전을 통해 엮었다.
그 이튿날 진양 등이 복합(伏閤)하여 다시 청하니, 왕은 시중 심덕부(沈德符)와 정몽주를 불러 의논하고, 드디어 그 상신(上申)에 의하여 준 등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공도 귀양가는 사람들 가운데 끼었으나 지신사(知申事)이첨(李詹)이 깜빡 잊고 기록하지 않았었다. 진양 등은 ‘왕이 상신한 대로 하라.’ 한 말에 의거하여 사람을 봉화에 보내어 공을 압송해 보주(甫州)
【안】 보주는 지금의 예천군(醴泉郡).
에 가두었다. 대사헌 강회백(姜淮伯)ㆍ집의(執義)정희(鄭熙)ㆍ장령 서견(徐甄) 등이 상소하여 공 등에게 죄 주기를 청하고, 진양을 또 말하기를,
“옛날 사람의 말에, ‘풀을 뽑는데 뿌리를 뽑지 않으면 결국 다시 나오고, 악(惡)을 없애는데 그 근본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악은 더 자라난다.’ 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요, 남은과 윤소종 등은 악의 뿌리를 북돋아서 그 덩굴을 자라게 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신등이 상소하여 벨 것을 청했으나 오직 도전만이 특별히 윤허를 얻었고, 그 나머지는 외방으로 쫓는 데 그쳤습니다.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르게 되었으니 준 등으로 하여금 극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왕은 깜짝 놀라며,
“나는 처음부터 도전을 죽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고는, 명령하여 귀양을 광주(光州)로 옮기게 하였다. 대간에서 연일 상소하며 복합(伏閤)하고 정쟁(廷諍 조정에서 논란하는 것)하여 공과 준 등을 베라고 하니, 왕은 먼저 남은 등 여러 사람을 국문하여 그 말이 조준과 도전에게 관련이 있은 뒤에 아울러 국문하는 것이 옳다고 명하였다. 6월에 불러 돌아오게 하여 쌀과 콩 1백 석을 하사하고, 그 아들 진과 영에게 직첩을 올려 주고, 공을 다시 충의군(忠義君)에 봉했다. 본전 및 김진양전(金震陽傳)을 통해 엮었다.
7월, 공 및 남은ㆍ조준 등이 아태조를 추대할 것을 협의하고 전국보(傳國寶 임금의 옥새(玉璽))를 받들어 관저(官邸)로 나가니, 태조가 드디어 즉위하였다.
【안】 조준이 전(箋)을 올리기를, “일전에 전하께서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지시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대간을 사주하여 신과 정도전ㆍ남은이 전하의 복심(腹心)이 되었다 하여 틈을 타서 못된 짓을 하려 하고 죄로 얽어 넣어서 우리를 먼저 귀양보내고, 다음으로 전하께 손을 대려 했습니다. 악당들이 더욱 기세를 올려서 화가 당장 다가오게 되었는데, 하늘이 노하고 백성들이 배반하여 삼한(三韓) 전체가 일시에 전하를 추대하게 되었습니다.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전하가자장(子臧)의 절개를 지키려 하시면 되겠습니까?” 하였다.
개국 공신(開國功臣)을 정하고 차례로 상(賞)을 의논하여 공에게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 겸판상서사사 보문각태학사 지경연 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判戶曹事兼判尙瑞司事寶文閣太學士知經筵藝文春秋館事兼義興親軍衛節制使) 봉화백(奉化伯)에 봉하고, 실봉호(實封戶)를 더했으며, 비석을 세워 공적을 새기고, 공신각(功臣閣)을 지어서 화상(畫像)을 그려 안치하고, 삼대(三代)를 추증(追贈)하며, 맏아들에게 대대로 벼슬을 주어서 녹(祿)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죄가 있어도 용서해 주는 것을 영세(永世)에 미치게 하는 문서(文書)를 기재해서 주었다. 본집 및 《국조보감(國朝寶鑑)》 패승(稗乘)을 통해 엮었다.
상(上)이 도승지(都承旨)민여익(閔汝翼)에게 명하여, 공으로 하여금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의 덕(德)을 표하는 글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래서 자설(字說 자에 대하여 설명한 글)을 지어 바쳤다. 자설은 본집에 나온다. 본집.
전중경(殿中卿) 변중량(卞仲良)이 병조 정랑(兵曹正郞) 이회(李薈)와 더불어 말하기를,
“옛날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은 1인에게 겸임시킬 수 없으니, 병권은 마땅히 종실(宗實)에 있어야 하고, 정권은 마땅히 재보(宰輔)에 있어야 한다. 지금은 조준ㆍ정도전ㆍ남은 등이 이미 병권을 잡았는데 또 정권까지 잡게 되었으니,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이다.”
하였다. 상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이르기를,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로 종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의심을 한다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대사헌 박경동(朴經同)에게 명하여 군중(軍中)을 순찰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정리하게 했으며, 중량을 영해(寧海)로 귀양보내고, 회를 순천(順天)으로 귀양보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아래도 같다.
공이 배극렴(裵克廉) 등과 더불어 계(啓)하기를,
“왕자(王子)의 여러 군(君)들에게 하인(下人)을 구비하여 주지 않을 수 없고, 씀씀이도 넉넉히 주지 않을 수 없으니, 본과(本科 본래 받는 과목) 외에 토지(土地)를 더 주게 하소서.”
하였다. 상은 조용히 잠저(潛邸) 때의 일을 말하기를,
“본과 1백여 결(結)만 가져도 기한(飢寒)은 면할 수 있는데 만약 그 밖에 더 주면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아들만을 위한다.’ 할 것이며, 더구나 경기(京畿)에는 토지가 많지 않으니 어찌 함부로 많이 줄 수 있겠는가? 경등이 만약 더 주고 싶으면 먼저 공신들에게 더 주고, 그 비례에 따라 주어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주례(周禮)》에, 사마(司馬 군대를 맡은 관리)가 수수(蒐狩 사냥으로 군대를 훈련함)하던 법과 진ㆍ위ㆍ제ㆍ진(晋魏齊秦)
【안】 진문공(晉文公)이 피려(被盧)의 수(蒐)와 제민왕(齊湣王)의 기(技)를 가지고 위혜왕(魏惠王)의 무졸(武卒)과 진소왕(秦昭王)의 예사(銳士)를 격파했으니, 용병(用兵)하는 법이다.
과 양저(穰苴 제(齊)의 명장(名將))ㆍ이정(李靖 당(唐)의 장수)ㆍ제갈 무후(諸葛武侯) 등의 병법(兵法)을 가지고 오행진(五行陣)의 출기도(出奇圖)를 제작했으며, 또 사마병법(司馬兵法)을 증손(增損)하며 강무도(講武圖)를 만들어서 바치니, 상이 칭찬하고 군사(軍士)들에게 명령하여 연습하게 하였다. 본집. 아래도 같다.
겨울에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명경(明京)에 갔으니, 성은(聖恩)을 사례하고 또 하정(賀正)하기 위해서이다. 황제는 융숭하게 대우하여 가고 싶은 곳은 어디고 가게 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중도(中途)에 이르니 상이 특별히 중신(重臣)을 보내서 궁온(宮醞 궁중 의술)을 가지고 위로하였다.
계유년(1393, 태조2) 7월, 문덕곡(文德曲)ㆍ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의 악사(樂詞) 3편(篇)을 지어 바쳤다. 사(詞)는 집(集)에 나왔다. 상은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아! 나 같은 사람의 덕이 어찌 감히 그런 좋은 이름을 독차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창업(創業)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수성(守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마땅히 종묘에도 올리고 조정에도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고, 명령하여 내구마(內廐馬) 1필(匹)과 표리(表裏) 각각 1벌씩을 하사하였다.
갑술년(1394, 태조3) 6월, 상이 도승지(都承旨)한상경(韓尙敬)에게 명령하여, 공이 지은 《경국전(經國典)》을 가져다 보고 매우 칭찬하며 특별히 단자(段子 비단)와 채견(彩絹 물들인 비단) 각각 3필과 구마 1필ㆍ백금 50냥을 하사하였다.
【안】 하윤(河崙)이 다시 자세히 만들고 이름을 《경제육전(經濟六典)》이라 했다.
겨울에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정했다. 공에게 명하여 대궐 자리를 정하게 하니, 중[僧] 무학(無學)이 인왕산(仁旺山)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백악산(白嶽山 북악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하고, 목멱산(木覔山 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하려 하니, 공은 안 될 말이라고 반대하기를,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모두 남면(南面)하고 정치를 하였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였다. 무학은 말하기를,
“내 말을 듣지 않다가는 2백 년만 지나면 꼭 내 말을 생각할 것이다.”
하였으나, 결국 공의 말을 따랐다. 고려의 숙종(肅宗)이 만들어 놓은 터전이 너무 협착하므로 드디어 그 남쪽에 자리잡고, 해산(亥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임좌 병향(壬坐丙向)으로 결정하였다. 옛날에 신라(新羅)의 중 의상(義相)이 말하기를,
“도읍을 한양에 정하는 사람이 중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정(鄭)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시비가 많을 것이다.”
하더니, 지금에 와서 그 말이 맞았다. 《오산설림(五山說林)》 《상촌휘언》을 통해 엮었다.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요동(遼東)으로 보내어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을 싸 가지고 행례(行禮)한다는 핑계로 변장(邊將)을 유인했으며, 또 사람을 보내어 여직(女直)을 유인해서 몰래 압록강(鴨緣江)을 건너오라 했다는 일들을 가지고 수조(手詔 직접 쓴 조서)를 내려서 책망하니, 상은 공에게 명하여 변명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표는 습유에 나왔다. 《국조보감》 《고사촬요》를 통해 엮었다.
이 해에 심(心)ㆍ기(氣)ㆍ가(理)의 3편(篇)을 저술하였다. 본집(本集)
을해년(1395, 태조4) 1월, 《고려사(高麗史)》를 지어 바쳤다. 이보다 먼저 상이 공과 정총(鄭摠) 등에게 명령하여 《고려사》를 수찬하게 하였다.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을 바탕으로 하여 지었으니 《통감(通鑑)》의 편년법(編年法)을 모방하였는데, 원왕(元王) 이하는 참람한 기사(記事)가 많아서 종(宗)이라 한 것은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 한 것은 생일(生日)이라 쓰고, 짐(朕)은 여(予)라 쓰고, 조(詔)는 교(敎)라 쓰고, 폐하(陛下)ㆍ태후(太后)ㆍ태자(太子)라 한 것과, 시호(諡號)와 관호(官號) 따위는 고친 것이 많았는데, 책은 모두 37권이다. 지금에 와서 바치니, 명하여 내구마 1필, 백은(白銀) 50냥, 단자 1필, 채초(綵綃) 1필을 하사하였다 본집 및 《국조보감》을 통해 엮었다.
상이 판중추사(判中樞事) 이무(李茂)가 일찍이 전라도(全羅道)진무사(鎭撫使)로 나갔는데, 위혜(威惠)가 있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왔으므로 즉시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임명하였다. 그가 장차 떠날 적에 공은 주(周)와 한(漢)으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감사(監司)의 연혁(沿革)과 득실(得失)의 자취에다 선유(先儒)들이 평해 놓은 말을 덧붙이고, 또선최(善最)를 가지고 고과(考課)의 법을 만들어서 그 분수(分數)를 정해 놓고 감사가 된 사람으로 하여금 상고할 수 있게 했는데, 이름을 《감사요약(監司要約)》이라 해서 그에게 주었다. 《권양촌집(權陽村集)》
10월, 한양(漢陽)의 궁궐(宮闕)과 종묘(宗廟)가 완성되니, 상이 친히 태실(太室)에 제사지내고, 정전(正殿)에 나가서 공등을 위해 잔치하고 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본집 및 《권양촌집》을 통해 엮었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신궁(新宮)과 모든 전(殿) 및 모든 문(門)의 이름을 지으라.’ 하니, 공은 이름을 짓고 이름 지은 뜻을 모두 써서 올렸다.
【안】 지어 바친 뒤에 상을 주었으니, 정축년 5월이었다.
신궁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하고, 연침(燕寢)은 강녕(康寧), 동소침(東小寢)은 연생(延生), 서소침(西小寢)은 경성(慶成)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전(南殿)은 사정(思政)이라 하고, 그 남쪽의 정전(正殿)과 문은 근정(勤政)이라 했다. 동서의 두 누(樓)는 융문ㆍ융무(隆文隆武)라 하고, 남은 정문(正門),
【안】 뒤에 광화(光化)로 고쳤으니, 궁전(宮殿)과 문의 이름의 소주(疏註)는 본집에 나왔다.
동은 건춘(建春), 서는 영추(迎秋), 북은 신무(神武)라 했다. 도성 팔문(都城八門)의 남은 숭례(崇禮), 동은 흥인(興仁), 서는 돈의(敦義), 북은 숙청(肅淸), 동북은 홍화(弘化),
【안】 뒤에 혜화(惠化)로 고쳤다.
동남은 광희(光熙), 서남은 소덕(昭德),
【안】 뒤에 소의(昭義)로 고쳤다.
서북은 창의(彰義)라 하였다. 도성 안팎 49방(坊)도 공이 지은 이름이다.
【안】 공이 수진방(壽進坊)에 살다가 천명에 죽지 못하자 사람들이 ‘참(讖)이 되었다.’ 했으니, 대개 진(進)은 진(盡)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뒤에 수중(壽重)으로 고쳤다.
또 신도 팔경(新都八景)의 시(詩)를 지어 올렸다. 시는 집중에 나왔다. 본집 및 《국조보감》 패승(稗乘)을 통해 엮었다.
상이 경신일 밤에 공과 여러 훈신(勳臣)들을 불러 술상을 벌이고 풍류를 갖추었다. 술이 취한 뒤에 상이 이르기를,
“과인이 여기에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믿어서 자손만대까지 내려가도록 힘써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제환공(齊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나라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은 거(莒) 땅에 계시던 때를 잊지 마시고, 중보(仲父)는 함거(檻車)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 했으니,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지던 때를 잊지 마시고, 신은 목에 칼을 썼을 때를 잊지 말면,
【안】 칼을 썼던 것은 주(州)에 갇혔을 때다.
자손만대까지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은,
“옳은 말이다.”
하고는, 악공(樂工)들이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자, 공을 지목하며 이르기를,
“이 노래는 경이 지어 올린 것이니, 경은 마땅히 일어나 춤을 추어야겠소.”
하였다. 공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니, 상이 웃옷을 벗고 춤을 추게 하고, 구갑구(龜甲裘)를 주어서 밤새도록 흥겹게 놀았다. 본집 및 《국조보감》을 통해 엮었다.
상이 일찍이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을 위하여 잔치하는데, 문덕(文德)ㆍ무공(武功) 2곡(曲)을 듣고 하교하기를,
“공덕을 가송(歌頌)하는 것이 실정(實情)에 지나쳐서 이 가곡을 들을 적마다 내 마음이 대단히 부끄럽다.”
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그런 마음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대단히 기뻐하며 띠고 있던 오서대(烏犀帶)를 풀어 주었다. 《국조보감》ㆍ《권양촌집》을 통해 엮었다.
공이 명을 받고 하정(賀正)하는 표전(表箋)을 지어 올렸다. 표전은 없어졌다.
【안】 권근(權近)의 진정전(陳情箋)에 “병자년에 하정의 표는 신이 혼자서 짓고 고친 것이며, 정도전이 일찍이 같이 짓지 않았으므로 변명(辨明)합니다. 그리고 신이 받아 온 선유(宣諭) 및 자문(咨文)에 모두 정도전이 명경(明京)에 갔던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국조보감》 《고사촬요》
이해에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었다. 본집. 아래도 같다.
정축년(1397, 태조6) 5월에 칙위(勅慰)한 성지(聖旨)의 발어(跋語)를 지어 올렸다. 이보다 먼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승하(昇遐)하여 사신을 보내어 고부(告訃)하니, 황제는 칙서(勅書)를 내려 위로했는데 은례(恩禮)가 전에 없이 융숭하였다. 그래서 상이 명령하여 그 전문(全文)을 비석에 새기게 하고, 공으로 하여금 그 발어(跋語)를 지어 올리게 하고 특별히 백은 50냥, 내구마(內廐馬) 1필, 단자 1필, 채초 1필을 하사하였다.
이해에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였다.
국초(國初)의 여러 현인(賢人)들의 진적(眞蹟)을 모았다. 공이 국초의 명신(名臣)들의 필적(筆蹟)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혹은 시문(詩文)도 짓게 하고, 혹은 옛날 사람의 시문도 쓰게 하여, 그 첩(帖)의 이름을 ‘국초군영진적(國初羣英眞蹟)’이라 하였다. 《권양촌집》
12월, 공을 동북면 도선무 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를 삼고 명하여 원릉(園陵 덕릉(德陵)안릉(安陵))을 수리하고,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또 각 고을의 경계선(境界線)을 획정(劃定)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하며, 참호(站戶 역촌(驛村)지기)를 설치하는 데 편리할 대로 일을 처리하게 허락하였다. 본집 및 《국조보감》을 통해 엮었다.
무인년(1398, 태조7) 1월에 공이 그의 종사관(從事官)최긍(崔兢)
【안】 최긍은 전 장령(掌令)이다.
을 보내서 해온 일들을 보고하니, 상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도선위사(都宣慰使)를 삼아 수서(手書 손수 쓴 편지)를 가지고 옷과 술을 하사하게 하였다. 편지는 아래에 나온다. 《국조보감》. 아래도 같다.
공과 화산군(花山君)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성균관 제조(成均館提調)를 시키고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을 모아서 경사(經史)를 강습하게 하였다.
여름에 공이 병으로 휴가를 얻은 지 수일 만에 불씨잡변(佛氏雜辨) 19편을 저술했으니 윤회(輪回)와 오행(五行)ㆍ의복(醫卜)에 대한 학설은 더욱 분명하게 구비되었다. 본집
9월에공소(恭昭)의 난(難)에 공이 천년(天年)을 마치지 못했다.
【안】 그때에 “남산(南山)에 가서 돌을 깨니, 정(釘)이 남음이 없구나[南山往伐石釘無餘].” 하는 노래가 있었으니, 남은 남은을 가리킴이요, 정(釘)은 정(鄭)과 음이 같으니 공을 가리킴이요, 여(餘)는 남을 여 자이니, 남은과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공과 은이 과연 그 난에 죽었다.
상왕(上王 태조가 선위하고 상왕이 되었음)이 함흥(咸興)에 가 있다가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탄식하기를, ‘나의 원훈(元勳)을 죽였구나.’ 하였다. 정씨가전
태종(太宗) 신묘년(1411)에 명하여 공과 황거정(黃居正)ㆍ손흥종(孫興宗)의 죄를 추정(追正 죽은 뒤에 결정하는 것)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자손까지 금고(禁錮 벼슬을 못하게 함)하였다. 처음에 중국 조정의 태복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신으로 왔다 돌아갈 때에 이색의 자손이 하윤(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 사람에게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맹헌이 국자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사(通事)에게 보내왔다. 그 글에,
“공양왕이 들어서자 집권한 사람이 공이 자기에게 따르지 않음을 꺼려서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았다.”
는 등의 말이 있었다. 간원(諫院)에서 하윤과 권근에게 죄 주기를 청하기를,
“비명에 ‘집권한 사람이 공이 자기에게 따르지 않음을 꺼렸다.’는 것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입니까?”
하면서, 하윤을 국문하기를 청했다. 윤은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공을 꺼렸다는 것은 남은과 정도전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 등 6~7인을 때려죽인 것 같은 일을 어찌 태조가 아셨겠습니까?”
하였다. 상은 이르기를,
“숭인과 종학이 죽은 것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하고, 당장 헌사(憲司)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이 공과 남은의 사주를 받아서 종학 등을 죽였다고 자백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흥종과 거정이 권신의 사주를 받고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 태조의 남을 살려 주기 좋아하는 덕을 더렵혔으니 마땅히 중한 죄로 다스려야 한다.”
고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아뢰기를,
“종학과 숭인은 모두 고려의 유당(遺黨)이어서 도전 등이 우리 사직을 호위하기 위하여 한 일이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했다. 공신(功臣)조영무(趙英茂)ㆍ한상경(韓尙敬)ㆍ정탁(鄭擢) 등도 상서하기를,
“정도전ㆍ남은 등이 흥종과 거정을 사주하며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행동에는 비록 죄가 있으나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하였다. 상은 이르기를,
“숭인과 종학을 위하여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고, 천하 만세를 위한 계획이다.”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공 및 흥종ㆍ거정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자손을 금고시켰으며, 남 은은 개국한 공이 높으므로 논란하지 않았다.
【안】 패승(稗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치하지 않으나, 목은(牧隱) 이색이 해를 당한 일은 김시양(金時讓)의 축수편(逐睡篇)에 나왔고, 초옥(草屋)김진양(金震陽)이 죽음을 당한 일은 신흠(申欽)의 휘언(彙言)에 나왔고, 우홍수(禹洪壽) 등이 억울하게 죽은 일은 우현보(禹玄寶)의 가전(家傳)에 나왔고, 운암(雲巖)차원부(車原頫)의 온 집안이 죽음을 당한 일은 설원록(雪寃錄)에 나온 것 등이니 사람들은 모두 공이 기회를 타서 감정을 푼 것이 아닌가 의심하나,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오직 이종학과 이숭인의 일만이 국승(國乘)에 나왔으니, 만약 어진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다고 공에게 죄를 준다면 어째서 이 두 이씨만을 내세우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패승(稗乘)의 말이라는 것은 다 믿기가 어렵다. 《국조보감》ㆍ《동각잡기(東閣雜記)》를 통해 엮었다.
예조(禮曹)에서 원회(元會 정월 초하루 조회)에 사용하는 악장(樂章)의 차례를 정해 올리는데,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을 가장 첫 장으로 만들었다. 상이 대언(代言)들에게 이르기를,
“도참(圖讖)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지금 보록(寶籙)의 말을 보면 그 첫째에 ‘삼전(三奠)삼읍(三邑)이 삼한(三韓) 사람을 다 죽일 것이다.’ 하였으니, 삼전은 정도전ㆍ정총(鄭摠)ㆍ정희계(鄭熙啓)를 말한 것이다. 희계는 재덕(才德)도 없고 훈로(勳勞)도 없는데, 과연 시대에 맞게 나왔다 하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아래도 같다.
정유년(1417, 태종17) 상이 이조 판서 박신(朴信)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 도참(圖讖)에서 말한 목자(木子)와 주초(走肖)의 말에 대하여 정도전은 ‘이것은 반드시 호사자(好事者)의 짓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 글대로 보록의 곡조를 지어 바치니, 대신들은 믿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하였다.
세종(世宗) 계묘년(1423)에 유관(柳觀)과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공이 정해 놓은 《고려사(高麗史)》의 범례(凡例)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공이 《고려사》를 수찬할 적에 고친 것이 많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하윤이 조정에 건의하기를,
“정도전이 지은 사기에 그 사실이 많이 빠졌고, 잘잘못을 평한 것이 자기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선악(善惡)이 옛날 사기와 틀리게 되었으니, 마땅히 보탤 것은 보태고 뺄 것은 빼야 합니다.”
하였으나, 그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상이 유관 등에게 명령하여 변계량(卞季良)으로 더불어 교정(校正)하게 하였다. 관은 《주자강목(朱子綱目)》을 모방하여 편차(編次)하려 하고, 계량은 공이 고쳐 놓은 대로 그냥 두려 하니, 사관(史官)이선제(李先齊) 등이 말하기를,
“관호(官號)가 비록 참람하기는 하나 모두 그때의 제도였으니 ‘제(制)’라 하고 ‘칙(勅)’이라 한 것도 또한 그 사실을 전부 없앨 수는 없다. 아무리 명분(名分)을 바로잡기 위하는 일이라 하여도 마땅히《춘추(春秋)》에 교ㆍ체(郊禘)와 대우(大雩)를 써 놓은 것과 같이 그대로 두어서 감계(鑑戒)가 되게 해야 할 것인데 어찌 고칠 수 있느냐?”
하니, 계량은,
“그렇지 않다.”
고 하였다. 윤회가 상에게 아뢰기를,
“공자(孔子)의 《춘추》와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이 모두 그 사실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니, 어찌 기사(記事)하는 제도가 그렇지 아니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지금 붓을 들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이미 성인(聖人)들이 보탤 것은 보태고 뺄 것은 빼되, 그 뜻을 능히 알지 못하면 마땅히 그 사건의 잘잘못을 그대로 써서 자기의 본 바가 후세에 믿음을 줄 수 있게 할 것이요,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잘못을 가려 두려고 함부로 고쳐서 그 사실이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종(宗)’을 ‘왕(王)’이라 고친 것을 실록(實錄)에 있는 대로 두고, 묘호(廟號)와 시호(諡號)는 그 사실을 없애지 말아야 하니, 범례(凡例)를 고치는 것은 이것으로 준칙(準則)을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에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모두 구사(舊史)에 있는 대로 쓰게 하였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의 8편(篇)은 간행되어 세상에 나왔고,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ㆍ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ㆍ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ㆍ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ㆍ강무도(講武圖)ㆍ감사요약(監司要約)의 제서(諸書)와 《고려사(高麗史)》 37권은 없어져 전하지 못하고, 경제의논(經濟議論)과 채집(採輯)한 정씨역전(程氏易傳)의 오위효상(五位爻象)은 건괘(乾卦)에서부터 취괘(萃卦)까지는 남아 있고, 취괘 이하는 낙질(落帙)이 되어 완전하지 못하다. 본집
공이 최습(崔隰)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경숙택주(慶淑宅主)에 봉해졌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진(津)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전농정(典農正)을 지냈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개국원종훈(開國原從勳)에 녹(錄)되고, 태종(太宗)ㆍ세종(世宗)을 섬겨서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추증(追贈), 시(諡)는 희절(僖節)이며, 영(泳)은 소윤(少尹)이다. 증손(曾孫) 문형(文炯)은 세종(世宗) 정묘년(1447)에 등과(登科)하고 사인(舍人)ㆍ검상(檢詳)을 거쳐, 오도 관찰사(五道觀察使)ㆍ삼도 절도사(三道節度使), 형조(刑曹)ㆍ호조(戶曹)ㆍ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세조조(世祖朝)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우의정(右議政)에 배수(拜受)했으니,
【안】 정부(政府)의 선생안(先生案)에는 검교정승(檢校政丞)으로 되었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며, 6조(朝)를 역사(歷事)하였다. 문형의 아들 숙지(叔墀)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요, 숙지의 손자 원준(元俊)은 봉성위(奉城尉)니 성종(成宗)의 딸 정순 옹주(貞順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안】 공소의 난에 공이 천수를 마치지 못했으나, 조정에서는 역적의 죄를 적용하지 않았고, 태종 신묘년에 손흥종과 황거정의 옥사에 연좌되어 서인(庶人)으로 폐해지고 자손은 금고되었다. 그러나 형조판서 진(津)과 우의정 문형(文炯)은 아들과 손자로서, 태종과 세종 때에 계속해 좋은 벼슬을 하여 연루된 흔적이 없으니, 전에 연좌(連坐)되었던 안건(案件)에 용서할 점이 있어서 성조(聖朝)의 대를 물려 내려가는 법이 그 공(功)을 생각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을 터인데, 문헌(文獻)의 증거가 없다. 그러나 손과 황의 옥사에 장령(掌令)이방(李倣)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경(朴經)이 손과 황의 죄를 잘못 논의했다고 탄핵했는데, ‘몽롱(朦朧)하게 계문(啓聞)했다.’는 말이 있었다. 의정부에서 청하기를, “몽롱이라는 것은 흰 것을 검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하는 말이니, 이것을 보고 신등과 의정부 전체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 방을 유사(攸司)에게 맡겨서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은 그 말에 따라 방을 순금사옥(巡禁司獄)에 가두었다. 조금 있다가 김여지(金汝知)에게 이르기를, “이 방의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대신을 내가 존중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말에 따랐노라.” 하고 이내 용서하였다. 대개 상이 이때에 공의 원통한 것을 알고 금고를 풀어서 진은 구애 없이 등용되고 문형도 과거를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씨세보(鄭氏世譜)

[주D-001]곽광전(霍光傳) : 곽광은 한무제(漢武帝)의 고명(顧命)을 받고, 소제(昭帝)를 보좌(輔佐)했다. 소제가 죽자, 창읍왕 하(昌邑王賀)를 영립(迎立)했는데, 창읍왕이 실덕(失德)하자 폐하고 다시 선제(宣帝)를 영립하였다. 《漢書 卷68 霍光傳》 여기에서의 곽광전은 《한서(漢書)》 곽광전을 말한 듯하다.
[주D-002]천인성명(天人性命) : 하늘이 사람에게 품부(禀賦)한 이(理)와 기(氣), 여기에서 말한 것은 이기학설(理氣學說), 또는 성리학설(性理學說).
[주D-003]고요 …… 부열 : 고요는 순(舜)의 신하, 이윤과 부열은 탕(湯)의 신하로 모두 이상적인 정치를 하는 데 잘 보좌했음.
[주D-004]삼대(三代) : 왕도 정치를 시행한 하(夏)ㆍ는(殷)ㆍ주(周) 3대를 말함.
[주D-005]무재인(武才人) : 측천무후(則天武后). 처음에 당태종(唐太宗)의 재인(才人)이 되었다가 고종(高宗)의 후(后)가 되고, 고종이 죽은 뒤에 그 아들 중종(中宗)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중종이 복위(復位)한 뒤에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겼음. 《舊唐書 卷6 則天皇后本紀》
[주D-006]오왕(五王) : 측천무후를 폐하고 중종을 다시 영립한 평양왕(平陽王) 이경휘(李敬暉)ㆍ부양왕(扶陽王) 환언범(桓彦範)ㆍ한양왕(漢陽王) 장간지(張柬之)ㆍ남양왕(南陽王) 원서기(袁恕己)ㆍ박릉왕(朴陵王) 최현휘(崔玄暉)를 말함. 《舊唐書 卷91 中宗本紀》 《新唐書 卷120》
[주D-007]호씨(胡氏) : 송대(宋代)의 학자 호안국(胡安國)의 저서(著書)에 《춘추전(春秋傳)》ㆍ《통감거요보유(通鑑擧要補遺)》, 《상채어록(上蔡語錄)》 등이 있음.
[주D-008]회군(回軍) :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 정벌차 압록강 하류의 위하도까지 진군했던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 : 후의 조선 태조(太祖))가 군사를 돌려 개성에 와서 우왕(禑王)을 폐했음.
[주D-009]중종(中宗)과 무삼사(武三思)의 일 : 중종은 5왕의 힘으로 복위되었으나 후에 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를 가까이 하여 그의 무고를 듣고 5왕을 죽였으며, 얼마 후에 자신도 무삼사에게 시해당했다. 무삼사는 다시 태자 중준(重俊)을 폐하려다가 태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舊唐書 卷7 中宗本紀》 《新唐書 卷206 列傳 131》
[주D-010]동호(董狐)는 …… 악명을 : 동호는 춘추(春秋) 때 진(晉)의 사관(史官)인데, 진영공(晉靈公)이 조돈(趙盾)을 죽이려 하자 조돈이 도망갔었다.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인 뒤에 조돈이 돌아왔는데, 동호는 사기에 ‘조돈이 그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그래서 조돈이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하자 동호는 ‘그대는 일국의 정경으로 도망을 하면서 국경을 넘지도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도 않았으니, 그대가 죽인 게 아니고 누구인가?’ 했다. 이 사건으로 공자는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며, 조돈은 훌륭한 대부다.’ 했음. 《左傳 宣公 2年》
[주D-011]임연(林衍)이 원왕(元王)을 폐하고 : 1269년(고려 원종 10)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원종의 아우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영립(迎立)했으나, 원(元)의 위협으로 원종을 복위(復位)한 사건. 《高麗史 世家 卷26 元宗 10年》
[주D-012]진항(陳恒)ㆍ주우(州吁) : 춘추 시대의 인물들로 모두 반역을 했음. 진항은 자기 임금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세웠으며, 주우는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서자로 위환공(衛桓公)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음. 《左傳 襄公 14年, 左傳 隱公 4年》
[주D-013]자장(子臧)의 절개 : 춘추 시대 조(曹) 나라 공자 흔시(公子欣時)의 고사. 그의 자가 자장인데 그는 조나라 선공(宣公)이 죽고, 공자 부추(公子負芻)가 태자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자, 다른 나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르려고 했다. 겁이 난 성공(成公 : 負芻)이 가지 못하게 만류하여 나라 안에 있게 했는데, 후에 제후들이 성공을 토벌하고 자장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옛 기록에 성(聖)은 절(節)에 통달한 것이요, 다음은 절을 지키는 것이요, 제일 아래는 실절(失節)하는 것이라 했으니 임금이 되는 것은 나의 절이 아니다.’ 했음. 《左傳 成公 13年》
[주D-014]선최(善最) : 관리의 치적(治績)을 고과(考課)하는 법. 당육전(唐六典)에 ‘고과하는 법이 4선(善) 외에 27가지의 최가 있다.’ 했음.
[주D-015]제환공(齊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 제환공이 관중ㆍ포숙아ㆍ영척(寗戚)과 더불어 술을 먹다가 포숙아에게 묻기를, ‘어찌 과인을 위하여 축수(祝壽)하지 않는가?’ 하자 포숙아는, ‘공께서는 거(莒) 땅에 나가 있을 때를 잊지 마시고, 관자는 노(魯) 나라에서 결박당해 올 때를 잊지 말며, 영척은 수레 밑에서 소 먹이던 일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했다. 《管子 卷11 小稱 32》
[주D-016]공소(恭昭)의 난(難) : 태조(太祖)의 아들 방번(芳蕃)의 시(諡)는 공순(恭順), 방석(芳碩)의 시는 소도(昭悼)이니 왕자(王子)의 난을 말함.
[주D-017]《춘추(春秋)》 …… 것과 같이 : 교ㆍ체ㆍ대우는 모두 천자(天子)의 제사인데, 제후(諸侯)들이 이를 행하는 것은 참람된 일이므로 《춘추》에 명분을 바로잡기 위해 이를 기록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