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삼각산(三角山, 837 미터) | |||
산 행 지 소 개 | ||||
삼각산 즐기기 산행 (제7차) ☞ 삼각산의 에덴동산 (문수봉) 의상능선
삼각산의 유래는 산의 최고봉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높은 세 봉우리가 뿔처럼 높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백운대는 해발 836.5m로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서 전망이 무한히 넓고, 또 봉 위에는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암반이 있기도 하다.
동북쪽으로는 산맥이 서로 통하는 도봉산의 연봉이 줄을 이어 있고 아래로 강북, 도봉, 노원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강 건너 옆으로 뻗어나간 남한산을 바라볼 수 있고 서남쪽으로는 관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백운대 동쪽에 우뚝 솟은 인수봉도 온통 바위 하나가 하늘 높이 솟아 장관을 이루며, 동남쪽에 솟은 국망봉은 일명 만경대라고도 하는데, 이 국망봉의 봉명은 일찌기 이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왕사 무학이 영기에 올라가 새 나라의 도읍터를 바라 보고 정해서 국망이라는 봉명이 생겼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삼각산 일대의 지질기반은 중생대말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담조색을 띠고 있는데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되고 다시 그 절리와 표면에 생긴 풍화작용으로 오늘날과 같은 산모양이 된 것이다. 따라서 높이에 비해 산세가 험준하고 경사가 심하며 암벽으로 된 바위 봉우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북한산 일대에는 옛 한성의 방어역할을 했던 북한산성이 있으며, 성의 둘레는 12.7km이고 성안의 면적은 6,611,600m² (약 200만평)으로, 1990년부터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동장대의 성곽들을 일부 보수 복원하였다.
|
||||
산행일시 |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오전 11시 00분 | |||
모임장소 | 3호선 불광역 2번 출구 원형의자 11:00 | |||
산행코스 | 국민대- 형제봉- 대성문 -대남문 - 문수봉
-715봉 -행궁지 -중성문 - 산성입구 ※ 코스는 당일 참석 인원 사정, 기상 등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
산행시간 | 5시간-5시간 반 정도 | |||
산행의 난이도 | 초급 | |||
준비사항 | 산행 복장, 식수, 등산화(릿지, 반릿지) 도시락, 방풍의, 스틱 외 기타. | |||
발전기금 | 1,000원 | |||
산행문의 | 산행대장 : 아베베 011-9980-0000
|
|||
기타사항 | 대장의 임무 : 모임장소의 출발에서 1차 뒤풀이까지입니다. | |||
유의사항 | ○ 산행 중에는 대장의 통제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 |||
○ 산행 중에는 개인행동을 금지합니다. | ||||
○ 산행 중의 사고는 개인의 책임입니다. | ||||
○ 상해보험을 개인적으로 가입하기를 권장 합니다. | ||||
○ 시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 ||||
○ 산행 중에는 음주를 삼갑시다. | ||||
○ 산행 중에는 흡연을 삼갑시다. | ||||
○ 4050수도권산악회는 순수 동호인 모임입니다. | ||||
| ||||
총융청(摠戎廳) | ||||
북한산성(北漢山城) |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ㆍ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 ||||
제창(諸倉) | ||||
총융청의 각 창고(摠戎廳各倉庫) |
신영고(新營庫)
영종 정묘년에 세웠으니, 군향(軍餉)ㆍ군기(軍器)ㆍ공화(公貨)와 각색(各色) 군물(軍物)을 저적(儲積)하는 곳이다. 연융대(鍊戎臺)에 있음. 고(庫)가 31문. 3문에는 군향(軍餉)이 있음. ○ 11문에는 군기가 있음. ○ 2문에는 공화(公貨)가 있음. ○ 7문에는 각색 군물이 있음. ○ 8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평창고(平倉庫)
숙종 임진(1712, 숙종 38)에 건치함. 연융대(鍊戎臺)에 있음. 고가 17문. 9문에는 군향이 있음. ○ 1문에는 군물이 있음. ○ 7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책응소고(策應所庫)
당저(當宁) 정묘(1807, 순조 7)에 장용영(壯勇營)의 직방(直房)을 본청(本廳)에 소속시킴. 고가 13문. 12문에는 군물이 있음. ○ 1문에는 전화(錢貨)가 있음.
강창고(江倉庫)
인조조(仁祖朝) 초(1823, 인조 원년)에 주교사(舟橋司)로 설치하였던 것을 뒤에 본청(本廳)의 창(倉)으로 삼음. 양화진(楊花津)에 있음. 고가 7문. 5문에는 곡물(糓物)과 탄(炭)이 있음. ○ 2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관성소의 각 창고[管城所各倉庫]
숙종 신묘(1711, 숙종 37)에 건치함. 북한(北漢)에 있음. 중창(中倉) 이하 승창(僧倉)까지 모두 같음. 상창고(上倉庫)가 11문 2문에는 군향(軍餉)이 있음. ○ 2문에는 군기가 있음. ○ 1문에는 군향과 은화(銀貨)가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5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중창고(中倉庫)가 7문 4문에는 군향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2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하창고(下倉庫)가 4문 2문에는 군향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1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별고(別庫)가 3문 1문에는 군향(軍餉)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1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훈창고(訓倉庫)가 12문 4문에는 군향이 있음. ○ 3문에는 군기가 있음. ○ 1문에는 소금과 가마솥[釜鼎]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3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금창고(禁倉庫)가 14문 2문에는 군향이 있음. ○ 6문에는 군기(軍器)가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5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어창고(御倉庫)가 10문 4문에는 군향이 있음. ○ 2문에는 군기가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3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승창(僧倉) 각고(各庫)가 28문. 중흥사(重興寺)의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진국사(鎭國寺)의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상운사(祥雲寺)의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서암사(西巖寺)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국녕사(國寧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원각사(圓覺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부왕사(扶旺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보광사(普光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보국사(輔國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용암사(龍巖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태고사(太古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으며, 나머지 15문과 별고(別庫)의 2문에는 모두 있는 것이 없음.
호남고(戶南庫)
숙종 기미(1715, 숙종 41)에 보장(保障)을 위하여 세웠으니, 또한 탕고(帑庫)이다. 강화부(江華府)에 있음.
[주D-002]공화(公貨) : 공금.
[주D-003]연융대(鍊戎臺)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음.
[주D-004]직방(直房) : 입직(入直)하는 처소(處所)
[주D-005]중흥사(重興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6]진국사(鎭國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7]상운사(祥雲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8]서암사(西巖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9]국녕사(國寧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0]원각사(圓覺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1]부왕사(扶旺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2]보광사(普光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3]보국사(輔國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4]용암사(龍巖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5]태고사(太古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1-001]본청(本廳) : ‘본청(本廳)’이 어느 본에는 ‘本營’으로 되어 있음.
| ||||
捴戎廳 | ||||
[北漢山城] |
| ||||
諸國部 | ||||
國都 |
按高句麗始居遼東北。後世漸東遷于浿水之側。其地多入于渤海靺鞨。浿水卽平壤大同江云。然則世傳朱蒙所都卒本川。指爲成川者妄矣。
按東史。高句麗初都卒本。後移都國內城。又移丸都。又移平壤。百濟始都慰禮城。後移都漢山。又移北漢。山。又移熊津。又移泗泚。釋者以爲國內城在鴨綠以北。漢山今廣州。北漢山今漢陽。熊津今公州云。
輿地勝覽。載漢都十詠曰。莊義尋僧。濟川翫月。盤松送客。楊花踏雪。木覓賞花。箭郊尋芳。麻浦泛舟。興德賞蓮。鍾街觀燈。立石釣魚。姜希孟,徐居正,李承召,成任。皆有詩詞。按藏義寺。舊在彰義門外。興德寺。在東部燕喜坊。有蓮池云。而未知廢於何時。立石浦。在豆毛浦上流。
前朝時。用道詵圖讖種李於漢陽以厭之。故曰種李村。今鄕校洞。卽古漢陽鄕校之所。於義洞。舊稱漢陽東村。或謂楊柳村。閭閻最盛云。墨寺洞。古墨寺所在。宋松亭。乃宋姓人所居。有松亭故云。
俗謂漢都負兒巖有出去之狀。故山以母岳名。而南曰伐兒嶺。蓋欲其遮截而使不得去也。西曰餠市峴。蓋以餠餌誘而留之也。命名者有深意焉。
| ||||
시(詩) | ||||
산영루에서[山映樓] |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 巖蹊纔斷見危欄
겨드랑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 雙腋泠泠欲羽翰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 十院疏鍾秋色暮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 萬山黃葉水聲寒
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 / 林中繫馬談諧作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 雲裏逢僧禮貌寬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 日落煙霏鎖蒼翠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 行廚已報進杯盤
연로는 사자재로 뚫려 있고요 / 輦路通獅嶺 별궁은 기러기재 인접하였네 / 離宮接雁峯 진경은 검각 잔도 의지하였고 / 秦京依劍閣 연부는 거용 요새 믿었고말고 / 燕府恃居庸 좁은 벼랑 사다리 경사 심하고 / 窄壁雲梯急 굽은 골짝 쇠사슬 겹겹이로세 / 回谿鐵鎖重 그런대로 열흘은 버틸 만한데 / 堪爲旬日計 이곳에 몇 사람을 수용할 건고 / 能得幾人容 묘당에서 짜낸 지혜 치밀하였고 / 廊廟謨猷密 백성들 불평없이 부역 응했네 / 黎元力役恭 올라보니 가슴에 감개무량해 / 登臨有感慨 저녁종 울릴 때까지 홀로 서 있네 / 獨立到昏鍾 [주D-001]연로 : 임금이 탄 수레나 가마가 다니는 길. [주D-002]진경은 …… 믿었고말고 : 진경은 진 나라 서울 장안(長安)이고 검각은 사천(四川)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 잔도(棧道)의 이름이다. 사천과 섬서(陝西) 사이의 주요 통로로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연부는 북경(北京)을 가리키고 거용은 북경 창평현(昌平縣) 서북쪽 군도산(軍都山)에 있는 관(關) 이름이다. 우리나라 한양이 북한산을 등에 업고 의지하는 것이 장안은 검각을, 북경은 거용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
숙종 30년(1704)에 신완(申琬)이 아뢰기를, “북한산성은 매우 험조(險阻)한 데다 도성(都城)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대가(大駕)가 이곳에 주필(駐蹕)한다면 도성의 사민(士民)들이 힘을 합쳐서 이를 굳게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록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더라도 결단코 이를 모두 포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를 방해하였다.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보장(保障)할 수 있는 곳으로 말하면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다로 도적이 침입하게 될 경우 이때 대가(大駕)가 강도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말하면 이는 비록 산세(山勢)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실로 천연의 요새(要塞)로서 이 또한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성에 대한 계책으로 말하면 신의 생각은 수상(首相)과는 다소 다릅니다. 도성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북한산성의 둘레는 도성에 비하여 5리나 더 된다고 하며 지세의 험함도 도성보다 더하므로 이 또한 넓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북한산성을 새로 쌓는 공력을 도성을 증수(增修)하는 데 들인다면 그것이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으로서 사민(士民)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지키면서 이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 부모를 보호하고 처자를 보존하게 한다면 어느 누군들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바쳐 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신완이 말하기를, “험조(險阻)한 점으로 말하면 북한산성이 훨씬 더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에 주필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이미 북한산성을 쌓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성이라도 쌓아서 근본에 대한 계책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여가 말하기를,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말하면 바다의 방위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먼저 육지의 병력을 안정시켜서 근본을 튼튼하게 한 다음에 이를 굳건히 지켜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산성은 비록 험고(險固)하다고 말하지만 만약 도성을 적에게 내주고 위축된 병력을 가지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적들과의 간격이 단지 하나의 성문(城門)을 격한 것이 될 뿐이니, 이러고도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감히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성을 버리고서 군부(君父)를 모시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만전(萬全)을 도모하는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경인년(1710, 숙종36)에 장신(將臣) 이기하(李基夏)와 김석연(金錫衍)을 보내어서 북한산성 축성(築城)의 편의 여부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이에 김석연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이덕형(李德馨)은, 바로 도성의 지근(至近) 거리에 이와 같은 천연의 요새가 있는데도 이를 그냥 버려두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바다의 도적이 염려된다는 북자(北咨 청나라의 자문(咨文))로 인하여 상도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묘년(1711, 숙종37) 4월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이해 9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다음 해 임진년 4월에 거가(車駕)가 이곳에 행행(幸行)하여 그 천연의 험고함에 감탄하였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다. | |||||||||||
서울에서 가까운 요새 세 곳이 바로 심도(沁都), 남한산성, 북한산성이다. 심도는 성을 쌓은 뒤로 습지(濕地)의 험난한 장점을 잃었고, 또 양인(洋人)이 정박하여 염탐할 우려가 있다. 다만 두 곳의 산성이 있는데, 산성은 매양 험준한 곳에 있으면서 곁으로 대로(大路)와 통하여 식량을 운송할 수 있고 우물과 땅이 모두 많은 뒤에야 어느 정도 쓸 만한 것이 된다. 북한산성은 산이 대부분 돌로 되어 있어 한 조각도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없으니, 참으로 영구히 믿을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남한산성은 토양은 조금 좋으나 지하수의 물줄기가 매우 멀다. 동문 밖이 대로와 통하여 식량을 운송할 길이 충분히 있으나, 우리가 아는 것은 저들도 안다. 동문을 막아 버리면 남쪽으로 통하는 길도 따라서 막히고, 통할 수 있는 것은 서문뿐이다. 성안에 쌓아 둔 양식으로 어떻게 달을 계산하고 해를 계산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은 남쪽으로 수원에서부터 삼남(三南)까지 통하고, 동쪽으로 양근(楊根)까지 이르러 관동까지 통한다. 그러나 남쪽이 막히면 동쪽은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이곳 또한 영구히 믿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막힌 북한산성보다 낫다. 산성의 군량미가 도처마다 다 거덜 나 ‘편안할 때에 위험한 경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