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공(崔公) 묘갈(墓碣)
공(公)의 성은 최(崔)이고 휘(諱)는 득지(得之)로, 전주(全州)의 명망 있는 씨족이다. 그의 선조(先祖)는 ~마멸~ ▨호(▨戶)가 되었다. 최아(崔阿)에 이르러서 급제하여 ~마멸~ 집안이 되었다. 최아의 아들은 넷으로, 첫째는 최▨(崔▨)는 과거에 급제하여 최용갑(崔龍甲)이라고 하였다. 나머지는 최용생(崔龍生), 최용각(崔龍角), 최용봉(崔龍鳳)으로 모두 관직이 있었다. 최용봉은 바로 공의 증조(曾祖)로, 전조(前朝 고려조)에서 벼슬하여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최을인(崔乙仁)은 공의 조부로,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과 사온서 정(司醞署正)을 지냈다. 최담(崔霮)은 공의 선친(先親)으로, 우리 조정(朝廷)에서 벼슬하여 품계(品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내고 관직(官職)은 검교(檢校), 호조 참의(戶曹參議), 수문전 직제학(修文殿直提學)을 지냈으며, 전주의 대현(大賢)인 박인부(朴仁夫)의 딸과 혼인하여 홍무(洪武) 기미년(우왕 5, 1379년) 10월 1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르고 동작이 날쌔며 총명하고 슬기롭다고 일컬어졌다. 1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병술년(태종 6, 1406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고 그 해 가을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공이 경전(經傳)에 밝고 덕행(德行)이 닦아졌다는 것으로 처음 천거(薦擧)하여 선무랑(宣務郞) 장흥부 교수관(長興府敎授官)을 삼았다. 당시에 아버지 참의공(參議公)께서 아직 생존해 계셨는데, 또한 말하기를, “너에 앞서서 광지(匡之)와 직지(直之), 그리고 아우 덕지(德之)가 모두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이미 조정에 나가 벼슬하였는데, 일찍이 너만 혼자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오늘 조정에서 부르는 글이 문에 도착하니 내가 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관직에 나아간 다음해에 승훈랑(承訓郞) 전구서 영(典廐署令)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황▨현감(黃▨縣監)에 제수되었고, 기해년(세종 1, 1419년)에 예빈시 주부(禮賓寺注簿)에 제수되었다. 경자년(세종 2, 1420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3년간 방주감찰(房主監察)을 지내고 4개월간 전중(殿中)을 지내니, 호걸(豪傑)들이 숙연히 우러러 공경하였다. 을사년(세종 7, 1425년) 가을에 봉훈랑(奉訓郞)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고, 겨울에 장수현감(長水縣監)에 제수되었다. ~ 마멸 ~ 의영고사(義盈庫使)에 제수된 지 얼마 안 되어 참의공의 춘추(春秋)가 많은 것을 이유로 상서(上書)하여 물러나서 봉양(奉養)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비지(批旨)를 받고 종신토록 봉양할 생각을 하였다. 신해년(세종 13, 1431년)에 특별히 금구현령(金溝縣令)에 제수되었으나 공이 아버지를 섬길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갑인년(세종 16, 1434년)에 참의공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서 상(喪)을 마쳤다. 기미년(세종 21, 1439년)에 또 불러서 고산현감(高山縣監)을 삼자 이에 일어나 시사(視事)하여 정사(政事)를 베푼 지 6년 동안 고을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나중에 공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을 백성들이 곡을 하고 와서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였다. 갑자년(세종 26, 1444년) ~마멸~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으로 승진하였다가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으로 바뀌었다. 정묘년(세종 29, 1447년)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이 더해졌다. 무진년(세종 30, 1448년) 연로함을 고하고 고향으로 물러나와 쉬면서 정신을 함양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단종 3, 1451년)에 나이가 많고 덕(德)이 높은 것을 이유로 봉정대부(奉正大夫)가 더해졌다. 그해 7월 6일에 병으로 집에서 사망하였다. 유언(遺言)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될 수 있으면 꼼꼼하고 간결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때의 나이가 77세였다. 이해 12월 29일에 주덕리(周德里) 선영(先塋)의 북쪽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여산(礪山) 사람인 중랑장(中郞將) 송지손(宋智孫)의 딸과 혼인하여 5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최자목(崔自睦)으로 조산대부로 행(行) 현감을 지냈는데, 일찍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주도할 때에 선친을 잘 계승하였다는 칭찬을 들었다. 다음 차남은 최자연(崔自婣)으로 선교랑(宣敎郞)으로 주부(注簿)를 지냈다. 다음 최자임(崔自姙)은 사정(司正)을 지냈고, 다음 최자공(崔自恭)은 사마과(司馬科)와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이제 참군(參軍)이 되었다. 다음 최자검(崔自儉) 충순위(忠順衛) ~마멸~ 되었다. 또한 현감은 고부 이씨(古阜李氏)와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최분(崔汾)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주부는 고흥 유씨(高興柳氏)와 혼인하여 2녀를 낳았는데, 아직 출가(出嫁)하지 않았다. 유씨가 사망한 뒤에 문화 유씨(文化柳氏)와 두 번째 혼인을 하여 2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사정은 ~ 마멸~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참군은 나주 나씨(羅州羅氏)와 혼인하여 2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충순위는 청주 송씨(淸州宋氏)와 혼인하여 2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장녀는 현감 최여관(崔汝寬)에게 출가하였는데, 본관(本貫)이 같은 최씨(崔氏)가 아니다. 진사시에 응시하여 사마과에 합격하였고, 2남 ~마멸~ 낳았다. ~ 이하 마멸로 인하여 해석 불가 ~
천순(天順) 9년 정축년(세조 11, 1465년) 3월 15일에 세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