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사계(沙溪) 김장생 (金先生) 행장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시장

아베베1 2013. 10. 6. 09:27

 

 

 

 

동춘당집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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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諡狀)
가의대부(嘉義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시장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고, 자는 희원(希元)이며, 성은 김씨(金氏)인데, 학자들이 사계 선생이라 칭한다. 그 선조는 신라에서 나왔다. 신라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들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현달한 사람이 있었다.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2대를 내려와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으로 적개 공신(敵愾功臣)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극뉴(克忸)를 낳았는데, 사간원 대사간으로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경릉(敬陵 덕종(德宗))을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강력히 간쟁하니, 당시의 의논이 옳게 여겼다. 사후에 예조 참판 광원군(光原君)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계휘(繼輝)는 세상에서 황강 선생(黃岡先生)이라고 칭하는데, 총명과 재주와 학문이 당세에 으뜸이었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양조(兩朝)를 섬겼으며,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공보(公輔)의 인재를 논할 때면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천거하였으나 벼슬이 사헌부 대사헌에서 끝났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참찬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따님으로 고려조의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인데,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7월 8일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선생을 출산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후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농담하며 버릇없이 굴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은 앞으로 덕을 수양하여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다. 나이 11세 때 신 부인(申夫人)이 서거하자, 찬성공은 선생을 어루만져 양육하며 항상 슬하에 두고서 스승에게 가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자란 뒤에는 스스로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힘을 쏟고, 세속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절 달가워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가서 사서(四書),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배웠는데, 마음을 집중해 깊이 연구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니, 황강공이 기뻐하며 “우리 아이가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뒤에는 또 이 문성공을 사사(師事)하여 도학(道學)의 요체를 자세히 듣고는 도학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기는 마음이 매우 중대하니, 문성공의 기대가 특별히 깊었다.
황강공이 평양 감사(平壤監司)로 나아갔는데, 평양은 본래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이어서 유객(遊客)들이 날마다 성색(聲色)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선생은 어버이를 뵙기 위해 갈 때마다 겉으로는 모나게 행동하지 않는 듯하였으나 조행(操行)이 매우 엄격하여 한 번도 성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로 여겼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11)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선비를 뽑을 적에 성경(聖經)에 조예가 깊고 고훈(古訓)을 독실히 믿는다는 이유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81)에 황강공이 명(明)나라로 사신 가게 되자 선생이 수행하려 하니, 이조에서 사관(祠官 능참봉)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 하여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과 자리를 바꾸어 제수하였다. 이 여행은 왕복 수만 리 길이었는데, 곁에서 모시며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여, 황강공이 드신 밥술까지도 모두 곁에서 묵묵히 세어 그것으로 건강 상태를 징험하였다. 임오년(1582)에 재행(才行)이 탁월하다 하여 승진의 명이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황강공의 상을 당하여서는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복을 벗고 나서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얼마 뒤에 전명(前命)에 따라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로 승진하였으나 이내 사직하였다.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등의 관직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였다. 무자년(1588)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어서는 교양에 법도가 있어 성취시킨 바가 많았다. 경인년(1590)에 상례(常例)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승진하였다. 신묘년(1591)에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아가서는 성실과 신의, 너그러움과 은혜로 다스려 이민(吏民)의 마음을 얻었다. 다음 해 임진년(1592)에 왜구가 침임해 오자, 선생은 군무(軍務)를 돕고 궁민(窮民)을 구휼하여 공사(公私)를 함께 구제하니, 방백(方伯)이 성상께 성실하고 겉치레가 없어 정사가 번거롭지 않다고 칭찬해 아뢰었다. 임기를 마치고는 연산(連山)의 장사(庄舍)로 돌아왔다.
이윽고 호조 정랑에 제수되어 명나라 군대를 따라 호남으로 가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이내 어떤 사건으로 파직되어 해서(海西)의 황주(黃州)ㆍ봉산(鳳山) 사이에 우거하였다. 이때 왜란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은 모두 학업을 폐하였으나, 선생은 날마다 문인, 자제들과 강송(講誦)을 멈추지 않고 학문을 즐기며 근심을 잊었다. 단양 군수(丹陽郡守),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호조 정랑, 양근 군수(楊根郡守),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 등에 누차 제수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또 군자감 첨정,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하니 억지로 부임하였다. 이때 경기(京畿)가 막 난리를 겪고난 끝이라서 피폐한 백성들이 소생하지 못하자, 선생이 마음을 다해 어루만지니 몇 년이 되지 않아 백성들이 예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신축년(1601)에 조정에서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부서를 설치하였다. 선생이 특별히 부름을 받고 들어와서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이 있어 직무를 보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권세를 부릴 때에 미쳐서는 선생은 서울에 있기를 싫어하여 드디어 연산으로 돌아갔다. 계묘년(1603)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어서는 3년 동안 있다가 면직하고 돌아왔다.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다시 익위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자, 이내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가 “그곳은 북관(北關)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무인(武人)을 등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니, 철원 부사(鐵原府使)와 자리를 바꾸어 제수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일어난 옥사에 선생의 두 서동생〔庶弟〕이 잡혀가 고문을 받다가 죽자, 간당(奸黨)들은 광해(光海)를 꼬드겨 육시(戮屍 시체의 목을 벰)의 형(刑)을 추가하고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선생의 가문 전체를 연좌시켰다. 친구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화(禍)를 풀 방도를 꾀하자, 선생은 태연한 모습으로 “화복은 천명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대신(大臣)과 대관(臺官)이 연좌시키는 것은 법률이 아니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일이 잘 풀렸다. 당초에 광해가 친히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모(金某 사계(沙溪))도 이 일을 알고 있느냐?” 하니, 박응서가 대답하기를, “김모는 현자(賢者)라서 저희들의 계획을 그가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정협(鄭浹)이 무복(誣服)함에 미쳐서도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박은서의 대답과 같았다. 그러므로 선생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초야에 은거하며 외인(外人)과 교통하지 않고, 오직 경적(經籍)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시고서 하교하기를, “과거에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김장생(金長生)의 이름을 익히 들었다.” 하고서, 즉시 사헌부 장령으로 부르니, 선생은 상소하여 노병(老病)으로 사양하였다. 그리고 여러 원훈(元勳)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의 덕을 인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형벌을 늦추고, 인재를 거두어 쓰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이어 제공(諸公)들도 스스로 청렴과 신중에 힘써 정국삼장(靖國三將)의 잘못을 답습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편지를 받아 본 제공들은 탄복하고서 드디어 성상께 아뢰니, 성상도 훌륭하다고 매우 칭찬하셨다. 선생의 사직소(辭職疏)가 들어가자, 성상께서 온화한 유지(諭旨)를 내려 가마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시고, 다시 하교하여 재촉하셨다. 선생은 명을 받고는 감격하여 병을 참고 조정으로 달려와서 또 상소해 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 성상께서 사친묘(私親廟)에 친히 제사 지내려 하자, 예관(禮官)과 유신(儒臣)들은 모두 “주상께서 선조(宣祖)의 친손(親孫)으로 선조를 계승하셨으므로 본생친(本生親)에 대해 고위(考位)가 둘이 되는 혐의가 없으니, 축사(祝辭)에 사친을 고(考)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자(子)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춘추(春秋)》와 정주(程朱)의 설을 근거로 상소해 변론하였는데, 대의(大意)는, “제왕의 예에는 계통보다 엄중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형으로서 아우를 계승하고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했다 하더라도 모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선조대왕의 뒤를 계승하셨으니, 사친에 대해 평상시에 호칭하던 대로 자(子)라고 칭해서는 부당합니다.”라는 것이었다.
다른 날 선생이 입시(入侍)하니, 성상께서는 매우 자상하게 위유(慰諭)하고서 이어 이르기를, “일전에 올린 소의 말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그대의 말을 따를 수 없으니 매우 미안하다.” 하셨다. 그러자 선생은 사례하고서 품속에서 주차(奏箚)를 꺼내어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제왕이 정치를 하는 요체는 학문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학문의 방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가지고서 의리의 당연을 강구하고 그것을 심신에 체험하여 마치 맑게 고인 물처럼 본원(本原)을 허명(虛明)하게 하였다가 기미가 움직일 즈음에 미쳐 공사(公私)와 의리의 한계를 자세히 살펴, 사욕을 극복함에는 용맹스럽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선을 확충함에는 광대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면 일상생활 사이에 자연히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인욕이 깨끗이 다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이른 바 ‘유정유일(惟精惟一)’이고, 공자(孔子)가 이른 바 ‘극기복례(克己復禮)’이고, 자사(子思)가 이른 바 ‘계구신독(戒懼愼獨)’이고, 맹자(孟子)가 이른 바 ‘수방심 확사단(收放心擴四端)’이니, 천고의 성현이 서로 전한 요지가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일념(一念) 사이에 국가의 치란(治亂)과 흥쇠(興衰)가 달렸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성상께서는 가납(嘉納)하였다. 이내 체직되어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에 제수되었다.
6월에 연신(筵臣)의 건의에 따라 특별히 성균관에 사업(司業)이란 관직을 만들어 선생을 그 자리에 앉혀 유생들을 훈도하게 하고, 또 원자(元子)를 보양하도록 명하니,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때 사부(師傅)로 선발된 제공(諸公)이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나, 선생은 덕이 높고 명망이 있는 유학자로 더욱 원자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글 뜻을 가르치는 이외에 일마다 바르게 간하고 권면하여 도운 바가 많았다. 선생은 나아가 성상을 뵐 때마다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청했는데, 성상께서 억지로 머물게 하고는 이르기를, “사유(師儒)의 자리에는 반드시 덕망이 있는 사람을 앉힌 뒤에야 유생들이 보고 감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대를 번거롭히는 것이다.” 하셨다. 8월에 전에 청했던 사직을 거듭 청하자, 성상께서 재삼 만류하였으나 선생이 더욱 간절히 사직을 청하니, 성상께서 “잘 갔다가 돌아오라. 하지만 오래 머물 생각은 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하직 인사를 올리던 날에 특별히 술을 하사하고 위로해 보내셨다.
선생이 귀향한 뒤에 상소해 사은하고서 겸하여 연도(沿道)의 민폐(民弊)를 진달하니, 성상께서 훌륭히 여겨 받아들이고서 이어 빨리 돌아오라고 하유(下諭)하셨다. 선생은 또 상소해 사직을 청하면서 또 진계(進戒 경계의 말을 올림)하기를, “신이 듣건대 장자(張子 장재(張載))는 ‘내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으라.’라고 하였고,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은 ‘나는 평생 동안 한 일 중에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다.’ 하였다고 하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도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일을 명령하시는 사이에 모두 천군(天君 마음)에 물으시고, 깊은 밤 홀로 계시는 곳에서도 큰 제사를 받들 때처럼 조심하신다면 성학(聖學)의 성취를 어찌 한량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1월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성상께서 공주(公州)로 거둥할 때 선생은 길가에서 성상을 맞이하여 배알하였다. 역적이 토평(討平)되어 성상께서 환도(還都)할 때 전교하기를, “여기에서 함께 서울로 가서 원자(元子)를 교도(敎導)하는 것이 좋겠다.” 하시므로 선생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세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자, 휴가를 청해 시골로 돌아와서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대본(大本)을 세울 것, 구업(舊業)을 회복할 것, 홍범(洪範)을 준수할 것, 《소학(小學)》을 강습할 것, 성효(聖孝)를 다할 것, 사전(祀典)을 공경할 것, 구족(九族)을 친애할 것, 군신(群臣)을 한 몸으로 여길 것, 정사를 친히 다스릴 것, 민폐(民弊)를 개혁할 것,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할 것, 군정(軍政)을 닦을 것, 궁금(宮禁)을 엄중히 할 것 등 13개 조항을 진술하니, 성상께서는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술한 이 소(疏)를 보건대 실로 몸을 닦고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이니, 감히 가슴에 담아 힘써 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가을에 특별히 통정대부 공조 참의로 승급되자, 선생은 상소해 사직하면서 또 헌부(憲府)가 내노(內奴)를 금치(禁治)하고, 정원이 전지(傳旨)를 봉환(封還)하는 것은 모두 법을 봉행하고 직분을 지키는 일이니, 그들의 기를 꺾어 꾸짖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이때 마침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상소문 속에 이를 언급한 것이다. 성상께서 은혜로운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10월에 소명을 받고 가서 사은하니, 연신(筵臣)이 “김장생이 이미 올라왔으니 경연(經筵)에 출입시키고 또 원자를 시강(侍講)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는 이 말을 따르고서 시강의 명칭을 강학관(講學官)으로 개칭하였다. 을축년(1625) 봄에 원자를 왕세자(王世子)로 책립하고서 선생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렸으니, 이는 원자를 부지런히 보도(輔導)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휴가를 청해 귀향하였다. 떠날 때에 상소하여, 큰 뜻을 분발하여 성학에 더욱 매진하고, 편벽된 생각을 버리고 우유부단(優柔不斷)을 경계하기를 청하고, 겸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신하를 자주 접견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현자를 공경하고, 인재를 널리 찾아 정밀하게 선택하는 도를 진술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니 성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나의 마음은 확고하니 영원히 물러날 생각을 하지 말고, 성묘을 마치고는 즉시 올라오라.” 하셨다. 시골로 돌아온 뒤에 선생은 누차 상소하여 해직을 빌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듬해 봄에 성상께서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자, 선생은 대궐로 달려가 위로의 말씀을 올리고서 10여 일을 체류하였다가 휴가를 청하는 글을 올리고는 곧장 돌아왔다. 승정원이 선생을 만류하라고 계청(啓請)하여 머물라는 왕명(王命)이 내렸으나, 선생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돌아온 뒤에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면서, 또 억지로라도 슬픈 감정을 억제하시고 중등(中等)의 예제(禮制)로 낮추어 행할 것으로 경계의 말씀을 올렸다.
정묘년(1627, 인조5) 봄에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성상께서 강도(江都)로 거둥하니, 세자가 분조(分朝)를 만들어 남쪽으로 내려와서 선생을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삼았다. 선생은 명을 받들고 경내(境內)로 가서 군사를 소집하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로 보내고, 자신은 분조로 가서 세자를 알현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적군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라는 헛소문이 떠돌자, 분조의 재신(宰臣)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동궁(東宮)을 모시고 영남(嶺南)으로 이주하려 하였다. 선생은 영남으로 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강력히 말하고, 입대(入對)를 청하여 이해(利害)를 자세히 진술하니 세자도 옳게 여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헛소문이 저절로 잠잠해졌다. 3월에 강도로 가서 성상께 안부를 여쭈니, 성상께서 인견(引見)하고서 위로하며 칭찬하셨다. 이때 강화(講和)의 일이 이미 성립되어 적군이 거의 물러갔으므로 선생이 해직하고 귀향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적군이 아직 국경에 주둔하고 있으니, 호소사의 직임을 그대로 띠고 있는 것이 해로울 것 없다. 만약 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끝까지 마음을 다하라.” 하셨다. 선생이 이어 아뢰기를, “오늘의 강화는 진실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니, 척화(斥和)의 의논을 크게 칭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돌아가서 군사와 군량을 조처한 뒤에 해직하고서 한가로이 지내라.” 하셨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에 형조 참판에 제수하니, 사직소(辭職疏)를 두 차례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1629) 여름에 성상께서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김장생은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서울에 오려 하지 않고 왔다가도 즉시 돌아가니, 이는 나의 정성과 예가 부족한 소치이다. 어떻게 하면 서울로 불러들여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우상(右相)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서울에서 생장하였으니 처음부터 세상을 피해 은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정성과 예를 다하신다면 나이가 아무리 높다 하여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는 즉시 온화한 유지(諭旨)를 내리고, 또 편안한 수레를 타고서 길을 떠나오라고 명하셨다. 선생이 상소해 굳이 사양하니, 성상께서 “경은 나라의 대원로(大元老)로 덕행이 뛰어나니, 지금 만약 서울로 와서 체류한다면 사대부들이 존경하여 모범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계옥(啓沃)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바야흐로 측석(側席)하고서 기다리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라는 친히 쓴 비답을 내리셨다. 소명이 거푸 내리고 말의 뜻이 더욱 간절하니, 선생은 스스로 ‘나이가 노경(老境)에 이르러 정력이 이미 쇠한 몸으로 은총을 탐하여 번거롭게 길을 걷는 일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서, 계속 상소해 더욱 강력히 사직을 청했다. 경오년(1630)에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어 상례에 따라 가선대부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신미년(1631) 여름에 풍습병(風濕病)을 앓기 시작하였으나, 기거동작(起居動作)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날마다 문인들과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8월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서 3일 유시(酉時)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셨으니, 향년이 84세였다. 원근이 서로 조상(弔喪)하기를, “사문(斯文)이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성상께서 매우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賻儀)도 정해진 한도보다 더 많이 하셨다. 왕세자도 철강행소(輟講行素)하고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성상께서 또 본도(本道)에 명하여 초상(初喪)의 모든 일과 무덤 쓰는 일을 돕게 하셨다. 문인으로서 복을 입은 자가 수십 명이었으며, 장례일에 회장(會葬)한 자가 수천 인이었다. 이해 10월 19일에 진잠현(鎭岑縣) 성북리(城北里)에 장사 지냈다. 병자년(1636)에 건의에 따라 선생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특별히 추증하셨다. 신사년(1641) 1월에 묘지가 좋지 않으므로 연산현(連山縣) 고정산(高井山)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선조비(先祖妣) 허씨(許氏)의 무덤 뒤 간향(艮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많은 선비들이 의논을 내어 선생이 사시던 근방에 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선생의 발걸음이 미친 곳에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는 곳이 많다.
선생은 천품이 돈후하고 온화하고 순수하며 장엄하고 독실하고 확고하여 이미 절로 도(道)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일찍이 가정에서 교훈을 받고 또 대현(大賢 율곡(栗谷))에게 귀의하여서는 분발해 고인(古人)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순수하고 독실한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고 신명(神明)을 통하기에 충분하였다. 선생이 학문을 함에는 한결같이 정주(程朱)를 준칙으로 삼아, 경(敬)에 전념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힘써 행하여 실천하는 이 세 가지를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 부지런히 힘쓰며 늙음이 이르는 것도 몰랐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가묘(家廟)를 배알하고는 서실(書室)로 가서 책상을 마주하고 단정히 앉아 학문을 연구하니 날로 새로워지는 공효가 있었다. 항상 《소학(小學)》, 《심경(心經)》, 《중용(中庸)》, 《대학(大學)》, 《주역(周易)》 등의 글을 밤낮으로 계속해 돌려가며 복습하고, 비록 위급한 사이라 하더라도 잠시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은 곳을 만나면 침식까지 잊어가며 깊이 연구하고 힘써 사색하여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스스로 자질이 노둔하여 성취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오랫동안 노력함에 미쳐서는 글을 보면 이치가 분석되어 정확히 이해되고 의심이 풀려 다시 막히는 곳이 없었다. 오로지 소박과 진실에만 공력(功力)을 쏟고 자신의 능력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을 추구하지도 소성(小成)을 바라지도 않고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곳에 더욱 근신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제(上帝)를 대한 듯이 정숙하게 자신을 지켰다. 비록 7, 80의 나이와 질병 중에도 태만한 모습을 지은 적이 없었고, 겉으로 드러난 언행이나 속에 숨어 있는 생각이 순수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라는 말이 바로 내가 평생 스스로 노력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수양이 이미 깊어진 뒤에는 완전한 덕성(德性)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뒤까지 넘쳐흘러 멀리서 바라보면 고심(高深)하고 광대하여 끝이 없는 것 같았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여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여 가부를 따지지 않을 것 같았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선악을 분변함에 미쳐서는 엄격하고 강직하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처럼 용맹스러운 자라 하더라도 빼앗을 수 없는 굳은 절개가 있으니, 사방의 선비들이 알고 모르는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다.
선생은 효도와 우애가 천성이어서 생존시의 부모를 섬기고 사망후의 부모를 섬김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으며, 제부(諸父)를 어버이처럼 섬기고, 동기(同氣)를 사랑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일찍이 왕모부인(王母夫人 조모(祖母))이 사망했을 때, 선생은 해서(海西)에 있었는데 갑자기 슬픈 감정이 일며 금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며칠이 되지 않아 부고(訃告)가 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장자 은(檃)이 타향에 있다가 왜적을 만나 해를 당하던 날에도 선생은 종일토록 슬픈 감정이 일었다. 사람들은 이를 지성선지(至誠先知)의 증거라 하였다. 두 서동생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히 여겨, 자신도 모르게 슬픈 감정이 말과 용모, 잠자리 사이에 저절로 드러나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사우(師友) 사이에는 은의(恩義)가 더욱 지극하였다. 송귀봉(宋龜峯)의 온 가문이 화를 당하여 곤궁해 갈 곳이 없자, 선생이 모셔다가 공손히 봉양하였으며,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이 서거한 뒤에 당화(黨禍)가 더욱 심각하여 생전의 친지 중에도 간혹 부화뇌동하여 헐뜯고 비난하는 자가 있었으나, 유독 선생만은 이해를 계산하지 않고 송강의 심사(心事)를 대변하였다. 계해년에 등대(登對)함에 미쳐서는 송강이 무함당한 상황을 강력히 진술하였다. 율곡(栗谷)이 서거하였을 때 선생은 바야흐로 거상중(居喪中)이었으나, 예제(禮制)에 따라 스승의 복을 입고서 멀리 달려가 곡림(哭臨)하였고, 율곡의 기일(忌日)에는 재계하고서 소식(素食)하는 것을 평생 폐하지 않았으며, 율곡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다. 귀봉의 자제에게도 역시 그러하였다.
벼슬은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봉행하였다. 늦게 성명(聖明)을 만나 예우가 융숭하니, 매양 몸이 늙어서 국은(國恩)에 보답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상소하여 논할 적에는 반드시 근본을 바로잡아 근원을 맑게 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병폐를 제거하고, 천리를 밝혀 왕도를 행하고, 풍화를 바로잡아 기강을 진작시킬 것을 급선무로 삼아, 거행할 수 있도록 본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후진(後進)을 인도함에는 비록 어리고 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열어 성의를 보여 주고 그 재주와 인품에 따라 잘 교도하여 그들 스스로 감동해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였으며, 글을 가르치는 차례는 등급을 매우 엄격히 정하여 반드시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먼저 가르친 다음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가르쳐 근본을 배양하고 길을 개척한 뒤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혔고, 화려하게 문장을 꾸미는 세속의 글에 대해서는 일찍이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일찍이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계통에 대해 논하기를,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은 끊어진 학통을 고려 말엽에 비로소 제창하여 밝혔고, 김 문경공(金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은 거의 끊어져 가는 학통을 조선조 때 계승하였으나, 성현의 은미한 말씀과 지극한 도를 밝게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으로 군민(君民)의 책임을 담당하였고,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李滉))은 사화(士禍)로 현자들이 죽음을 당한 뒤에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선현을 계승하고 후학을 계발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그러나 총명하고 순수하며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문(聖門)의 주의(主義)를 터득한 것으로 말하면 율곡(栗谷) 이 문성공만 한 어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대 유현(儒賢)들이 논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에 대하여 이동득실(異同得失)을 한결같이 모두 문성공의 학설로 절충하였으나, 정미한 뜻을 변석(辨析)한 것에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았다.
선생은 예학(禮學)에 더욱 깊이 공력을 들여 고증이 정미하고 해박하니, 당시에 질문하는 자들이 모두 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이미 이 문성공의 학통을 물려받았으니, 심원한 연원과 바른 문로(門路)와 곤지면행(困知勉行)한 공부와 계왕개래(繼往開來)한 사업을 후세의 학자들은 고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저술을 일삼지 않았으나, 독서할 때마다 의심나는 것을 기록한 《경서변의(經書辨疑)》,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서소잡록(書疏雜錄)》 등 약간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고, 신의경(申義慶)이 편찬한 《상례비요(喪禮備要)》 1책을 산정(刪定)하기 위해 문인 및 친지들과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문답한 《의례문해(疑禮問解)》 4책은 모두 간행되어 세상에 돌아다닌다.
선생의 배위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판돈녕부사 창양군(昌陽君) 광원(光遠)의 손녀이고, 첨지중추부사 대건(大乾)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현철(賢哲)하고 부도(婦道)가 있었으나 나이 36세에 별세하였다. 선생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은(檃)은 임진년에 왜적에게 피살되었고, 차남 집(集)은 판중추부사로 교훈과 가업(家業 학문을 이름)을 전해 받아 또한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므로 학자들이 신독재 선생(愼獨齋先生)이라 칭한다. 삼남 반(槃)은 이조 참판을 지냈다. 장녀는 감찰 서경휼(徐景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청녕군(淸寧君) 한덕급(韓德及)에게 시집갔으며, 삼녀는 요사(夭死)하였다. 측실에서 낳은 여섯 아들은 생원 영(榮), 경(檠), 고(杲), 구(榘), 규(槼), 진사 비(棐)이고, 두 딸은 이유(李楢), 이명진(李名鎭)에게 시집갔다.
판중추부사공의 측실이 낳은 두 아들은 익형(益炯), 생원 익련(益煉)이고, 두 사위는 생원 김태립(金泰立), 정광원(鄭廣源)이다. 참판공의 여섯 아들은 군수 익렬(益烈), 이조 판서 익희(益熙),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여 지평에 추증된 익겸(益兼), 부사 익훈(益勳), 정자로 요사한 익후(益煦), 진사 익경(益炅)이고, 다섯 사위는 부사 이전(李淀), 판서 이후원(李厚源), 수찬 장차주(張次周), 참봉 이해관(李海寬), 심약제(沈若濟)이다. 서경휼의 두 사위는 현감 신경(愼暻), 성숙(成璹)이다. 한덕급의 세 아들은 정랑 수원(壽遠), 선전관 지원(智遠), 지원(志遠)이고, 세 사위는 이여홍(李汝洪), 김민성(金敏成), 이시정(李時挺)이다.
익희의 세 아들은 정언 만균(萬均), 만증(萬增), 만준(萬埈)이다. 익겸의 두 아들은 정자 만기(萬基), 진사 만중(萬重)이다. 익훈은 아들 셋, 익후는 아들 하나, 익경은 아들 둘을 두었다. 내외의 증현손(曾玄孫)이 모두 200여 인이다.
선생의 무덤에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지명(誌銘)을 짓고, 계곡(谿谷) 장 상공(張相公)이 비명(碑銘)을 짓고, 태학사 정공 홍명(鄭公弘溟)이 음기(陰記)를 짓고, 시랑 송공 시열(宋公時烈)이 행장을 지었으니, 도덕의 아름다움이 남김없이 밝게 다 드러났다. 그런데 동문에 여러 사우(士友)들이 또 나 준길에게 그중에서 중대한 것을 뽑아 역명(易名 시호(諡號))의 은전을 청하는 시장(諡狀)을 지으라고 하였다. 나 준길은 선생의 표질(表姪)로서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장려해 교육하신 은혜를 입은 것이 천지 부모 같으니, 의리로 볼 때 문장이 부족하다 하여 사양할 수 없으므로 따로 이상과 같이 찬차(撰次)하였다.

[주D-001]적개 공신(敵愾功臣) :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책록(策錄)된 공신이다.
[주D-002]좌리 공신(佐理功臣) : 성종(成宗) 때 왕실(王室)을 도운 공으로 책록된 공신이다.
[주D-003]계축년에 …… 옥사 : 광해군(光海君) 5년에 대북(大北)이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朴應犀)는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 시문에 능하고 학문이 높은 문사(文士)였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출세의 길이 막히자, 이에 불평을 품고 같은 명문(名門)의 서출인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허홍인(許弘仁), 박치의(朴致毅), 이경준(李耕俊), 김경손(金慶孫) 등과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조령(鳥嶺)에서 은상(殷商)을 죽이고 은을 강탈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일당이 검거되었다. 이때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해 은을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허위 자백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기타 소북(小北)을 숙청한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무고한 대가로 용서를 받고 벼슬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으로 체포되어 주살(誅殺)되었다.
[주D-004]두 서동생 :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을 이른다.
[주D-005]정협(鄭浹)이 무복(誣服)함 : 광해군 5년에 종성 판관(鍾城判官)으로 재직 중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김제남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라고 권하였다.’라고 허위 자백한 일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5年 6月 5日》
[주D-006]정국삼장(靖國三將) :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을 말한다.
[주D-007]유정유일(惟精惟一) : 형기(形氣)에서 생기는 인심(人心)은 사(私)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위태로우니, 정(精)하게 살펴 형기의 사심을 제거하고, 의리에서 생기는 도심(道心)은 어두워지기 쉽기 때문에 은미하니, 오직 전일(專一)하게 지켜 의리의 정도를 보존하라는 말이다. 《書經 大禹謨》
[주D-008]극기복례(克己復禮) : 자신의 사욕(私欲)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욕은 바로 이목구체(耳目口體)의 욕심을 이른다. 《論語 顔淵》
[주D-009]계구신독(戒懼愼獨) : 사려(思慮)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물이 없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도 항상 계신(戒愼)과 공구(恐懼)에 마음을 두어, 홀로 있을 때만이 아니라 남이 모르고 나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생각까지 삼가는 것을 말한다. 《中庸章句 首章》
[주D-010]수방심 확사단(收放心擴四端) : 사물(事物)을 따라 떠난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사단(四端)을 확충하는 것이다. 《孟子 告子上, 公孫丑上》
[주D-011]봉환(封還) : 내린 왕명(王命)이 도리에 맞지 않으면 그 왕명을 해당 부서로 보내지 않고 봉함(封緘)하여 임금에게 환송(還送)하는 것이다.
[주D-012]분조(分朝) : 전란(戰亂) 등으로 임금이 피란하였을 경우 행재소(行在所) 이외에 따로 설치한, 세자를 수반(首班)으로 하는 작은 조정이다. 행재소를 원조(元朝) 또는 대조(大朝)라 하고 분조를 소조(小朝)라고 한다.
[주D-013]계옥(啓沃) : 신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열어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임금을 보좌하는 뜻으로 쓰인다. 《書經 說命上》
[주D-014]측석(側席) : 현자(賢者)를 기다리는 마음이 초조하여 편히 앉아 있지 못한다는 말로 좌불안석(坐不安席)의 뜻이다.
[주D-015]우로(優老)의 은전 : 노인을 우대(優待)하는 뜻으로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을 주는 것을 말한다.
[주D-016]철강행소(輟講行素) : 애도(哀悼)의 뜻으로 서연(書筵)을 중지하고 흰옷을 입고 고기 반찬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017]보고 …… 곳 : 마음이 사물에 느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사물을 접하지 않아 사려(思慮)가 일어나지 않아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미발(未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미발의 상태를 말한다. 《中庸章句 第1章》
[주D-018]지성선지(至誠先知) : 조금의 사위(私僞)도 없이 지극히 성실한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밝아지기 때문에, 드러나는 기미(幾微)를 보고서 앞으로 생길 일을 미리 안다는 말이다. 《中庸章句 第24章》
[주D-019]군민(君民)의 책임 :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들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주D-020]곤지면행(困知勉行) : 힘들여 어렵게 지식을 얻고 노력해 도를 행하는 것으로 생지안행(生知安行)의 반대이다.
[주D-021]계왕개래(繼往開來) : 선현(先賢)의 학통을 이어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