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3.10.6 도봉산 산행

2013.10. 6. 천년고찰 도봉산 천축사의 모습

아베베1 2013. 10. 6. 18:39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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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7월12일(계미)
10-윤07-12[04]
강  묘소도감이 부사군(浮莎軍)과 보토군(補土軍)의 별단으로 아뢰었다.
목  ○ 해당 도감이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그동안 자원한 보토군과 부사군을 두 조목으로 구별하여 별단을 갖추어 써서 들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각 해당 영문(營門)과 아문(衙門)에 알려서 쌀을 지급하도록 하였고, 논하지 말라고 한 액속(掖屬) 및 소관 영문과 아문에 대해서는 별단 안에 하나하나 주(註)를 달았습니다. 앞으로는 일절 실어다 바치지 말라는 것도 각사(各司)에 감결(甘結)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강화(江華)의 시민(市民)은 한성부에서 품지(稟旨)하고 이송하였으므로, 하루 동안 부역하도록 허락하고 별단에 첨가하여 기록했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 가운데 글씨를 지워서 내린 자들은 액속과 궁속(宮屬)의 규례대로 물론질(勿論秩)에 놓아 두고, 궁속 중에서 낙점하여 내린 자들은 다른 원역(員役)들의 규례대로 똑같이 쌀을 주며, 원래의 별단은 다시 수정하여 들이라. 서울에 사는 백성, 평양(平壤)과 경주(慶州)의 백성 및 훈련도감의 군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역한 자들은 상전(賞典)을 별단으로 써서 들일 때에 별도로 써서 들이고, 쌀은 주지 말라.”
하였다.
○ 별단은 다음과 같다.
자원군 부사질(浮莎秩)은 종묘서(宗廟署) 원역 6명, 사직서(社稷署) 수복(守僕) 이하 원역 9명, 영희전(永禧殿) 수복 이하 원역 7명, 저경궁(儲慶宮) 수복 2명, 육상궁(毓祥宮) 수복 3명, 의열궁(義烈宮) 수복 4명, 경모궁계(景慕宮契)에 사는 백성 82명, 대원군방(大院君房) 원역 22명, 의소묘(懿昭墓) 수복 2명, 대빈궁(大殯宮) 수복 2명, 향실(香室) 원역 5명, 호위 군관 384명, 좌변포도청 군관 30명, 우변포도청 군관 30명, 한강진(漢江津) 별장(別將) 30명, 내의원 원역 40명, 사직동(社稷洞) 무호민(無戶民) 20명, 주전장(鑄錢匠) 31명, 공조의 소로장(小爐匠) 30명, 시장(匙匠) 28명, 정토사(淨土寺) 승려 24명, 신흥사(新興寺) 승려 13명, 봉국사(奉國寺) 승려 12명, 영도사(永導寺) 승려 13명, - 이상은 진휼청이다. - 성균관 전복(典僕) 300명 - 성균관이다. -, 병조 당상 군관 15명, 교련관 14명, 가후 금군(駕後禁軍) 50명, 원내취(元內吹) 50명, 용호영 겸내취(兼內吹) 6명, 금군별장청(禁軍別將廳) 마의(馬醫) 7명, - 이상은 병조이다. - 훈련도감 교련관 35명, 별무사(別武士) 69명, 각소(各所)의 감관(監官) 4명, 별대 마병(別隊馬兵) 114명, 겸내취 30명, 대년군(待年軍) 8명, - 이상은 훈련도감이다. - 금위영 교련관 20명, 기패관(旗牌官) 2명, 별기위(別騎衛) 46명, 겸내취 30명, - 이상은 금위영이다. - 어영청 교련관 23명, 가전별초(駕前別抄) 50명, 겸내취 30명, - 이상은 어영청이다. - 수어청 교련관 11명, 남한산성 승려 133명, - 이상은 수어청이다. - 총융청 교련관 18명, 북한산성 승려 176명, 승가사(僧伽寺) 승려 37명, - 이상은 총융청이다. - 경기 감영 표하군(標下軍) 160명 - 경기 감영이다. -, 경릉(敬陵) 수호군 30명, 창릉(昌陵) 수호군 30명, 명릉(明陵) 수호군 75명, 익릉(翼陵) 수호군 65명, 홍릉(弘陵) 수호군 65명, - 이상은 고양군(高陽郡)이다. - 영우원(永祐園) 수호군 70명, 조포사(造泡寺) 승려 15명, 호운사(護雲寺) 승려 10명, 진관사(津寬寺) 승려 38명, 화계사(華溪寺) 승려 5명, 불암사(佛巖寺) 승려 5명, 옥천암(玉泉菴) 승려 12명, 회룡사(回龍寺) 승려 16명, 회은암(晦隱菴) 승려 2명, 학림암(鶴林菴) 승려 5명, 흥국사(興國寺) 승려 5명, 원통암(圓通菴) 승려 6명, 망월암(望月菴) 승려 2명, 은석사(銀石寺) 승려 15명, 범굴암(梵窟菴) 승려 6명, 화양사(華陽寺) 승려 21명, - 이상은 양주목(楊州牧)이다. - 파주(坡州) 백성 112명 - 파주목(坡州牧)이다. -, 불성사(佛聖寺) 승려 11명, 관음사(觀音寺) 승려 6명, 자운암(紫雲菴) 승려 6명, 화장사(華藏寺) 승려 11명, - 이상은 과천현(果川縣)이다. - 망해암(望海菴) 승려 11명, 삼막사(三幕寺) 승려 42명, - 이상은 금천현(衿川縣)이다. - 봉은사(奉恩寺) 승려 26명, - 광주부(廣州府)이다. - 영수사(靈水寺) 승려 5명이다. - 진천현(鎭川縣)이다. - 대전(大殿)의 수라간(水刺間) 원역 23명, 등촉색(燈燭色) 4명, 조라치(照羅赤) 2명, 왕대비전의 수라간 원역 8명, 등촉색 2명, 혜경궁(惠慶宮)의 수라간 원역 6명, 등촉색 2명, 중궁전의 수라간 원역 8명, 내반원 직(內班院直) 8명, 육상궁 차지(次知) 이하 원역 100명, 의열궁 차지 이하 원역 100명, 용동궁(龍洞宮)의 차지 이하 종 100명, 어의궁(於義宮) 차지 이하 종 100명, 경수궁(慶壽宮) 원역 30명, 의빈방(宜嬪房) 원역 50명, 영빈방(寧嬪房) 원역 50명, 귀인방(貴人房) 원역 50명, 양제방(良娣房) 원역 25명, 은언군방(恩彦君房) 원역 25명, 은신군방(恩信君房) 원역 100명, 화순옹주방(和順翁主房) 원역 50명, 화평옹주방(和平翁主房) 원역 50명, 화유옹주방(和柔翁主房) 원역 50명, 화녕옹주방(和寧翁主房) 원역 50명, 화길옹주방(和吉翁主房) 원역 50명, 청연군주방(淸衍郡主房) 원역 50명, 청선군주방(淸璿郡主房) 원역 50명, 상고(廂庫) 원역 4명, 내시부 원역 7명, 내농포(內農圃) 원역 9명, 채원 직(菜園直) 36명, 내수사 원역 150명, 내원 직(內苑直) 6명이다. - 이상은 논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자원군 보토질(補土秩)은 종묘서 수복 이하 원역 38명, 경모궁 수복 이하 원역 32명, 경모궁 아래 사는 백성 20명, 관왕묘(關王廟) 수복 2명, 묘소 밖 화소(火巢) 안의 출신(出身) 12명, 봉원사(奉元寺) 승려 20명, - 이상은 진휼청이다. - 금위영 별군관 10명, 별무사 31명, - 이상은 금위영이다. - 승가사 승려 42명, - 총융청이다. - 개성부(開城府) 시민(市民) 50명, - 개성부이다. - 강화부 백성 100명, 시민 34명, - 이상은 강화부이다. - 평양(平壤) 백성 18명, - 평양부이다. - 법성(法聖) 조군(漕軍) 220명, - 영광군(靈光郡)이다. - 제주(濟州) 백성 30명이다. - 제주목이다. - 대전의 사알(司謁) 2명, 사약(司鑰) 13명, 별감(別監) 23명, 중금(中禁) 4명, 무수리간(水賜間) 별감 1명, 무예별감(武藝別監) 142명, 별기군(別技軍) 60명, 왕대비전의 별감 10명, 무수리간 별감 1명, 혜경궁의 별감 8명, 무수리간 별감 1명, 중궁전의 별감 6명, 동산 별감(東山別監) 1명, 액정서 각처의 군사 12명, 명례궁(明禮宮)의 차지 이하 종 100명, 수진궁(壽進宮)의 차지 이하 종 100명, 궁임(宮任) 182명, 배동(陪童) 70명, 내시부 종 172명, 내궁방(內宮房) 궁시인(弓矢人) 26명, 내각(內閣) 원역 52명, 시강원 원역 48명, 익위사(翊衛司) 원역 26명, 별군직청(別軍職廳) 30명, 원역 9명이다. - 이상은 논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1인당 미 1두를 준다. - 넉넉하게 줄 자에게는 2두를 준다.

 

靜坐窩先生集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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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峯行日記 b_073_31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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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八月二十七日。牛渚講罷。余謂諸生曰。道峰書院。乃吾道所在。而兼有水石之勝矣。余欲一往講學於其間。倘佯水石而歸。從我者誰。咸曰好事。盍往從之。於是議定。九月十二日戊子。余以匹馬單童。持五073_311d日粮。發向鑑湖。萬丈峯已在眼前矣。秋高氣淸。此心飄然有遺世意。從之者家兒樂賢,從弟瀁,族侄吉賢,喆賢,卨賢,具生允行,申生大敎,梁生重煕,李生献祚,李生光協,尹生得禹。余獨騎。餘皆步。到鑑巖。篙工已艤舡于巖下矣。擧帆渡江。午炊于二山江村。東行二十里。暝色已生。寒樹帶月。崎嶇行山谷中。揭深川。始得大路。踰鄭嶺抵沙院店。夜已深矣。吾父子宿于李友國美家。餘人宿于店。十三日晴早發。李生復興又從之。踰僧嶺行十五里。入北漢西門。乍憇西巖寺別舘。飮酒于閔漬巖。此實山中第一佳處。巖石則依舊。073_312a而但以久旱。溪流斷續無可觀。登中城門。門外有數株丹楓。獨色不渝如錦繡。無乃化翁故留此以待吾行耶。可愛也。登山影樓。又登重興寺別舘。宛然昔年光景。宴坐沽酒引數盃。舍侄一賢讀書寺中。招與語良久。夜宿大古寺。捴攝名道澄。十四日曉。大雷雨。崇朝未已。待晴晏發。乍觀普國寺。登東門下界。山川明潔。令人胷次爽豁。白雲處處生。俄傾彌滿遠近。如大洋海。亦奇觀也。下山而騎馳到道峰洞口。下馬坐良久。步者來集。携入書院。拜祠訖。坐講堂。堂曰繼開。懸揭于北壁。賜額道峯書院四字。揭于前簷北壁之073_312b東。揭書院記。卽栗谷先生所著。西揭尤翁詩。乃寒水齋先生所寫也。堂號懸板之下。東付寒泉講䂓。西付隱屛學䂓。東壁揭敬齋箴。西壁付白鹿洞䂓。盖祠宇在北。講堂在南。其間庭除豁然。東曰依仁齋。西曰居敬齋。東齋之東小北。有光風堂。堂之最東一間曰藏書閣。講堂之南。有枕流堂。堂之東軒曰霽月樓。講堂之西。有醒心樓。樓之西小南。有詠歸門。枕流堂之東小北。有大門。此院宇之形制也。詠歸門外有溪。源出萬丈峯下。溪上舊有舞雩壇。爲大水漂流。今則無矣。而淸流白石。奇巖異壁。咸萃此處。或懸而爲瀑。或난001073_312c爲壑。幽夐洒落。不可形言。谷雲以八分書高山仰止四字。深刻于石。爲沙所覆。只出高字與山字上頭。溪東側巖。刻泉翁書光風霽月四字。沿流而下。數層當枕流堂之南。有一高巖。東面刻同春書洙泗眞源濂洛正派八字。其下有一卧巖。南面橫刻尤翁書霽月光風更別傳。聊將絃誦答潺湲一句。西面竪刻寒水翁書舞雩㙜三大字。自此越溪。溪南有數層平巖臨瀑。搆一間茅亭於巖上。前簷揭昭曠亭三字。乃寒水翁所題。楣間揭記文。亦寒水所述也。亭下淸流盤石。曲曲可愛。處處可坐。此則溪石與古跡之梗槩也。斜073_312d陽出詠歸門。宴坐于昭曠亭。霜葉飛下。意象極蕭然。飮酒而樂之。夕餉于繼開堂。夜登霽月樓。泉聲月色。正是無限光景。夜與諸生會坐依仁齋。明燭各誦或詩或文。講討疑義到夜深。十五日晴。早起參焚香。盖居齋數箇士子主其禮。而吾輩則只參拜而已。拝訖。分立于神門外相揖。食後命齋直設席于講堂。講西銘。講罷。樂賢輩五人。窮源至萬丈峯下。賞沃泉庵。吉賢輩四五人。往賞水落洞天。拝淸節祠。余與周卿在院中。開見藏書閣。出靜菴集,栗谷全書,旅軒集。看閱于繼開堂。向夕又觀泉石。更登昭曠亭。是夜又登霽073_313a月樓。看月色聽溪聲。十六日曉。大雷雨。呼燭起坐。看旅軒集太極說。橫說竪說。觸處通透。未知此老於他處如何。而太極之妙則可謂見得到矣。讀之洒然。盥櫛參晨謁。臨發出詠歸門。雨後巖瀑。益壯可喜。日出。出洞門。回首悵然。李獻祚,梁重煕直入京。餘皆從我入北漢。山路高峻難登。午飯于重興寺。出西門。又別吉賢兄弟及李光協之德殷。日仄至沙原。十七日晴。早發。諸生直向二山。樂賢留沙原。我獨行歷訪杏湖梧下。主人病卧。哭達夫几筵。拝南塘遺像。與主人草草數語。穩渡江。暮還家。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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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21일 (경오)
진관사의 수륙사를 영국사로 옮기는 일에 대해 의논하라 명하다

선공 제조(繕工提調) 정분(鄭苯)과 민신(閔伸),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 참판(參判) 조극관(趙克寬), 참의(參議) 이인손(李仁孫)이 아뢰기를,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는 샘물이 불결하고 또 땅도 좁고 하니, 만일 수리하고자 하면 수륙사뿐 아니라, 본사(本寺)도 수리하여야 하겠는데, 도로(道路)가 험조(險阻)하여 재목과 기와를 운반하기에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중이 말하기를, ‘영국사(寧國寺)는 지세(地勢)가 매우 시원하고 정결하며, 물이 또한 맑고 깨끗하다.’ 하옵고, 옛 책에 또한 이르기를, ‘풍(風)·수(水)·화(火) 세 가지 재앙을 진압하여 나라에 유리하다.’ 하였나이다. 또 창건한 지가 오래지 않고 도로도 평탄하오니, 수륙사를 옮겨 설치하는 것이 편하겠나이다.”
하고, 허후가 또 아뢰기를,
“신이 진관사에 이르니, 중이 말하기를, ‘이 수륙사는 태조(太祖)께서 설치한 것이라.’ 하옵더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할 듯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신(忌辰)의 수륙(水陸)은 내가 즉위한 뒤에 시작된 것인데, 태조께서 처음에 진관 수륙사(津寬水陸社)를 설치하신 것은 처음부터 조종(祖宗)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씨(王氏)를 위한 것이니, 어찌 이것 때문에 다른 절에 옮기지 못할 것이 있는가.”
하매, 분(苯) 등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처음에 수륙사를 설치하신 뜻이 왕씨를 위한 것이라면, 지금 조종(祖宗)을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사옵니다. 마땅히 승지(承旨)와 주장관(主掌官)으로 하여금 영국사(寧國寺)에 가서 편부(便否)를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갑자기 정할 수가 있는가. 다만 이것은 중의 집 일이니 탄주(坦珠)·신미(信眉) 등으로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야 한다.”
하였다.
【원전】 5 집 127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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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30일 (기묘)
수륙사를 영국사에 옮겨 설치할 것을 의논하게 하다

선공 제조(繕工提調) 정분(鄭苯)·민신(閔伸),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 참판(參判) 조극관(趙克寬)을 불러 영국사(寧國寺)에 수륙사(水陸社)를 옮겨 설치함의 편부(便否)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원전】 5 집 128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세종 31년 기사 (1449, 정통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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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30일(기묘)
수륙사 터를 보게 하다

임금이 수륙사 터를 보게 하매, 정분(鄭苯)이 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과 함께 가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5 집 128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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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2일 (신사)
정분·허후·민신 등이 수륙사를 영국사에 옮길 것을 아뢰다

정분(鄭苯)·허후(許詡)·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이사철(李思哲)이 영국사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수륙사를 영국사에 옮기는 것이 편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부로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원전】 5 집 128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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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


동쪽으로 포천현(抱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또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되기도 하며,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이다. 남쪽으로는 광주 경계까지 67리이고, 또는 82리가 되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40리이고, 파주(坡州) 경계까지는 33리이다. 북으로는 적성현(積城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인데, 창화군(昌化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쳤다. 고려 초에는 승격하여서 견주(見州)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는 양주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 곧 옛 양주 -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 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었다. 6년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 옛터에 옮기고, 그대로 양주라 불렀다.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12년에 승격하여서, 목으로 만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풍양현(豐壤縣) 주(州)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다. 신라에서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豐德)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포천에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본현에 내속하였다.
【진관】 주(州) 하나 파주. 군(郡) 하나 고양. 현 다섯 영평(永平)ㆍ포천ㆍ적성ㆍ교하(交河)ㆍ가평.
【관원】 목사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 갑자년에 이 지역을 비워서 놀이하는 장소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분할하여서 이웃 고을에 예속시켰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매성(買省)ㆍ창화(昌化)ㆍ내소(來蘇)ㆍ견주(見州).
【성씨】 견주 이ㆍ김ㆍ송ㆍ신(申)ㆍ백ㆍ윤ㆍ피(皮). 한양 한ㆍ조(趙)ㆍ민ㆍ신(申)ㆍ함(咸)ㆍ박ㆍ홍(洪)ㆍ부ㆍ최ㆍ정(鄭) 모두 來姓이다. 예(艾) 촌. 풍양 조(趙)ㆍ이ㆍ강(姜)ㆍ윤ㆍ유(劉). 사천 이ㆍ경(耿)ㆍ임(任)ㆍ송ㆍ허.
【형승】 세 영(嶺)이 하늘에 꽂힌 듯하다[三嶺揷天] 이색의 시에, “깍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 하였다.
【산천】 불곡산(佛谷山) 주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삼각산 주 남쪽 39리 지점에 있다. 한성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도봉산(道峯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아차산(峩嵯山)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수락산(水落山)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 주엽산(注葉山) 주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천마산(天馬山)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주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소요산(逍遙山) 주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묘적산(妙寂山)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왕방산(王方山)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 적었다. 고령산(高嶺山)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갈립산(葛立山)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대산(金臺山) 주 남쪽 75리 지점에 있다. 검암산(儉巖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홍복산(弘福山) 주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소라산(所羅山)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차유령(車踰嶺) 주 동쪽 65리 지점에 있다. 벽석령(碧石嶺) 주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문령(石門嶺)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효성현(曉星縣) 주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고려 고종 때에 김산(金山) 군사가 풍양 효성현을 침범하자, 관군(官軍)이 산 바깥쪽에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노원역(盧原驛)까지 추격하였는데, 참수(斬首)한 것이 매우 많으니, 우마(牛馬)와 의량(衣糧)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전두령(田頭嶺)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추현(槌峴)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주을동(住乙洞)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녹양평(綠楊坪)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양진(楊津)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대탄(大灘) 주 북쪽 7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체천(砌川)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연천ㆍ영평을 지나 서남쪽 임진으로 들어간다. 풍양천(豐壤川) 풍양현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천마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광진에 흘러든다. 백달천(白達川) 주 동쪽 85리 지점에 있다. 일곡천(一谷川)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홍복산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삼기강(三岐江)에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동쪽 67리 지점에 있다. 노지(蘆池)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ㆍ옥돌 옥돌은 갈립산에서 산출한다. 잣ㆍ송이ㆍ은어.
『신증』 녹반(綠礬) 주 서쪽 청송리(靑松里)에서 난다.
【봉수】 아차산 봉수(峨嵯山烽燧)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을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 서울 남산) 첫째 봉을 응한다. 대이산 봉수 주 동쪽 50리에 있다. 북쪽으로 포천현 잉읍재(仍邑岾)를 응하고, 남쪽으로 아차산을 응한다.
【궁전】 풍양궁(豐壤宮) 풍양현 동쪽에 있다. 연희궁(衍禧宮) 주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봉선전(奉先殿)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있다. 우리 세조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학교】 항교(鄕校) 주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영서역(迎曙驛) 주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찰방(察訪)의 본도인데, 속역이 여섯이다. 벽제(碧蹄)ㆍ마산(馬山)ㆍ동파(東坡)ㆍ청교(靑郊)ㆍ준예(狻猊)ㆍ중련(中連)이다. ○ 찰방은 한 사람이다. 평구역(平丘驛)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 한곳을 찰방하는데, 녹양(綠揚)ㆍ안기(安奇)ㆍ양문(梁文)ㆍ봉안(奉安)ㆍ오빈(娛賓)ㆍ쌍수(雙樹)ㆍ전곡(田谷)ㆍ백동(白冬)ㆍ구곡(仇谷)ㆍ감천(甘泉)ㆍ연동(連洞) 등이다. 녹양역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 오세문(吳世文)의 시에, “꽃이 있어 마을 값이 중하고 버들 없어 역 이름 외롭다. 높은 나무엔 해 먼저 비치고, 마른 잎엔 바람 먼저 분다.” 하였다.
쌍수역 풍양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주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광인원(廣仁院)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상지원(相知院) 주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도공원(陶孔院) 주 동쪽 74리 지점에 있다. 덕해원(德海院)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30리 거리이다.
○ 서거정의 시에, “누구네 집 울타리에 가시 삽짝 닫혔네. 버들은 우거지고 꽃 폈는데, 빛나게 또 마을 하나, 날 저물어 절룩 나귀 갈 곳 몰라 하는데, 작은 다리 밑에 물 흐르고 달빛이 밝혀 주네.” 하였다.
○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번 웃으니, 수없는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 이루었네. 돌아오고자 부질없이 십 년을 귀래시(歸來詩)만 지으니, 백발(白髮)은 다정하게 짐짓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도제원(道濟院) 풍양현 남쪽 15리쯤에 있는데, 토원(兎院)이라 하기도 한다.
【불우】 회암사(檜巖寺)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중창기(重創記)에, “우리나라 산수 경치가 천하에 이름이 났으며, 불사로서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또 몇 십 개인지 모르지만, 인사(仁祠) 제도의 극진한 것과 법왕(法王)ㆍ행화(行化)의 체제를 갖춘 것은 회암(檜巖)같은 것이 없다. 옛적 천력(天曆 원 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西天博伽納提尊者)가 이 절터를 보고, ‘서천 아란타사 터와 꼭 같다.’ 하고, 또 ‘가섭불(迦葉佛) 때에 벌써 큰 도량이 되었다.’ 하였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그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 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임시로 집을 덮어서 그 대개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현릉왕사보제존자(玄陵王師普濟尊者)가 지공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記)를 받고, 드디어 여기에 와서 살았다. 이에 크게 창건하고자 하여, 책임을 나누어 맡기고 바쁘게 불연(佛緣)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공역이 반도 못되어서 왕사도 또한 서거(逝去)하였다.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澗) 등이 왕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그가 남긴 규모를 계승하여 공역을 마쳤다.” 하였다.
○ 목은 문정공이 기를 쓰기를,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으로 향했고, 전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이 5칸이다.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이 1칸이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이 3칸이다.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인데 각 3칸이다. 동쪽 방장 동편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3칸이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정(大藏殿)이 3칸이다. 보광전 동쪽과 서쪽에서 좌우로 나뉘어, 여러 전이 우뚝하게 섰고, 여러 요사들이 높고 낮게 되었으며, 종루(鐘樓)ㆍ사문(沙門)과 부엌의 장소와 빈객(賓客)의 자리가 질서정연하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 62칸이었다.” 하였다.
○ 이로부터 재간(才幹)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 불전을 시작했으나 승료(僧寮)까지는 미처 못했고, 혹 종루는 보수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리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면 북쪽이 또 상했다. 이는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큰 총림이 거의 빈 집이 되었다.
○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임진년 봄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의지(懿旨)를 전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한 부인으로서 조부의 여음(餘蔭)을 받들어 우리 세조대왕을 돕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아 길렀다. 이것은 비록 황천(皇天)이 동방(東方)을 돌보신 것이나, 또한 오랜 세대로 덕을 닦은 것이 불법에 근본하였던 것이다. 예부터 자애로운 어미가 그 자손을 보호하고자 하고, 충신이 그 임금의 장수를 빌고자 하면, 오직 삼보(三寶 부처)에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암은 동국에서 큰 가람(伽藍 절)이다. 세 화상(和尙)이 서로 이어서 개산(開山)하였는데, 세 개의 산과 두 가닥 물 사이라는 말이 지공(指空)에서 비롯하였으니, 실상 임금의 장수를 빌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곳이다. 내 들으니, 터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전사(殿舍)의 섬돌을 잡석(雜石)으로 쌓았기 때문에, 창건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집이 벌써 퇴락하였다 한다. 지금 간각(間閣)의 제도는 옛날대로 하여 고치지 않고, 뜰에 박힌 것은 모두 다듬은 돌로써 바꾸고자 하는데, 공역(工役)을 계산하니 초창하는 것보다 두 배나 된다. 경(卿)도 또한 덕을 심은 인과(因果)가 있었으므로, 공주(公主)와 짝할 수 있었으니, 경은 힘을 다해서 나의 넓은 원심(願心)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현조(顯祖)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중수(重修)하는 일이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과 곡식 저축이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양사(正陽寺) 주지(住持) 처안(處安)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재질로서, 그를 따를 자가 적습니다.” 하니, 의지(懿旨)로써 허락하였다. 드디어 처안(處安)을 회암사에로 이주(移住)시키고, 재물과 곡식 따위 비용은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모자라는 대로 보급하여 쓰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부원군도 또한 개인의 재산을 내어서 모자라는 것을 제공하였다. 처안이 승도(僧徒)와 속인(俗人)으로서 자원(自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일한 것을 계산하여 품값을 주도록 아뢰었다. 날마다 만 여명을 사역 시켰으나 감독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껏 하였다. 그 해 월 일에 시작해서 거의 열 석 달을 지나 마쳤다. 전사(殿舍) 칸살은 다시 고친 것이 없고, 난간과 담의 넓고 좁음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어도 방문과 문 차면이 더욱 넓어졌고, 단청을 칠하여 더욱 현란하였다. 백여 년 퇴락한 옛 절이 일조에 새로운 보찰(寶刹)로 변하게 되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노송나무 푸르고 돌 기세 완악 한데, 잎 사이 풍우로 공중 기후가 차다. 늙은 중 출정(出定)하여 성색(聲色)을 잊으니, 머리 위에 구슬 같이 세월이 달리는 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에 익은 여장(藜杖) 짚고 절 찾아가니, 장송(長松)이 바위에 기대어 나지막하네. 산 이름을 중에게 묻지 않고, 문에 걸린 현판에서 큰 글자 본다. 만학(萬壑)에 구름 피니 숲이 더 깊고, 천년 일 아득한데 새 자주 운다. 삼사탑(三師塔)이 칡덩굴 넘어 있어 꼭대기에 오르려니, 마음 더욱 아득하다.” 하였다.
봉선사(奉先寺) 주엽산(注葉山) 광릉(光陵) 남쪽 둔덕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기문에, “봉선사(奉先寺)란 것은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세조 대왕을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성화(成化) 기원(紀元) 4년에 우리 세조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여러 신하가 양주(楊州) 땅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터를 가렸는데, 산은 주엽(注葉)이고 둔덕은 운악(雲岳)이다. 그해 12월에 세조 대왕의 현궁(玄宮)을 받들어 장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의지(懿旨)를 내리기를, “우리 대행대왕께서 몸소 큰 변란을 만나, 백성이 크게 원망하는 것을 바로잡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은 동방이 생긴 이래로 비교할 데가 없다. 국가가 불행하여 갑자기 뭇 신민을 버리시니, 아, 애통하다. 옛 제도를 상고하니, 선왕의 능침(陵寢)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를 설치하였다. 지금 큰일을 마쳤으니, 경들은 절 지을 터를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신 정현조(鄭顯祖),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신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陵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능실(陵室) 남쪽에 깊숙한 구역 하나가 있는데, 산이 감돌았고 물이 차서 절 터로서 알맞으므로, 신 현조 등이 아뢰어서 허락을 받았다.
○ 기축년 6월에 짓기 시작하여, 가을 9월에 마쳤다. 칸살을 계산하면 총 89칸이고, 검고 붉은 것을 발라서, 극히 선명하였다. 불전과 승료(僧寮)가 빛나고 넓으며, 방울과 목탁이 바람만 불면 절로 울렸다. 천석(薦席)과 상탑(床榻)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빗장과 방망이 따위 도구와, 집기 따위도 넉넉하게 구비하여, 여러 사찰 중에 비교될 곳이 없었다. 전지(田地)와 노비ㆍ전곡(錢穀) 등 상주하기 위해 밑천으로 하는 숫자는, 영구히 부처와 중의 공양을 위한 것으로서 별도로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여기에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해 9월 7일에 세조를 위한 천도(薦度)를 크게 베풀어서 낙성(落成)하였다. 또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절을 지었으나 능침과는 둔덕이 서로 격했으니, 절 곁에다가 진전(眞殿)을 지어서 하늘에 계신 대행대왕의 혼령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여, 저승에서 노니는 데에 이롭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절 동쪽에다가 영전(影殿)을 건립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이름하였다. 참봉(參奉) 두 사람을 두어서 새벽과 저녁에 배알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헌관을 보내서 능실(陵室)과 같이 예배하였다. 이에 제조 신 정현조 등이 돌아와서 일이 완성됨을 아뢰니,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 ‘봉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 들으니, 예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후(后)의 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과 주(周) 나라의 태사(太姒)의 사적은 경전에 나타났고, 그 일도 빛남이 있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우리 세조를 보좌하였다. 잠저에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영특한 지략과 과단함으로써 성덕(聖德)에 이바지하였다. 집을 변화시키고, 국가로 만들어서, 큰 명(命)이 붙는 데가 있게 하였다. 사적(史籍)을 살펴도 성덕의 높음과 내조(內助)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우뚝하였다. 비록 도산이 하(夏) 나라를, 태사가 주(周) 나라를 도왔다 하더라도, 우리 대비 전하보다 낫지는 못하리라.
○ 들으니, 산 사람을 섬기는 데에 공경을 다한 자는 반드시 죽은 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고, 처세(處世)하는 가르침을 높이는 자는 반드시 출세(出世)하는 법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신과 효자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능히 그 덕을 온전히 하는 도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위해 애통해하는 정성과, 추모하고 기도하는 뜻에 이미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큰 가람을 묘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창건했고,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펼쳐서, 초승(超昇)하는 편제(便梯)를 일으켰다. 이것은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덕을 더욱 온전히 한 것이며, 여러 어진 덕을 겸비한 후비들과 나란히 할 수 있다. 또한 전대 제왕에도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종명(鐘銘)〉에, “삼가 생각건대,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대왕 전하(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大王殿下)께서는 구오(九五)에 오르시고 금륜(金輪)에 임어(臨御)하시니, 신화(神化)가 미치는 곳에 가까운 데는 편히 여기고 먼 데서는 두려워하였으며, 백성과 만물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14년이 되어 불행히도 숙연(宿緣)은 다하였고 명수(命數)는 피하기 어려우며, 뭇 신하들은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심을 당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命)과 통하여, 우러러 호곡하심이 다함 없었다.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사모하였다. 이에 광릉(光陵) 곁에다가 큰 절을 영건(營建)하여 ‘봉선사’라 이름하고, 유사에게 큰 종을 주조(鑄造)하도록 명하였다. 해당 관원이 왕의 뜻을 받들고 이에 부씨(鳧氏)를 상고하고, 금과 주석을 헤아려, 여섯 가지 재료를 형성하였다. 본[模範]이 이루어질 무렵에 신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종이라는 기물이 쇠로 된 것 중에서는 가장 크다. 그 소리가 용용(舂容)하여 먼 데는 놀라게 하고 가까운 데는 두렵게 하며, 그 묘함이 위로는 삼천(三天)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를 겸한다. 타왕(吒王)이 윤회(輪回)를 받고 꿈에도 종치기를 원했고, 제파(提婆)가 두번 울려서 크게 진교(眞敎)를 일으켰다. 인연 공덕(因緣功德)을 어찌 모두 말하랴. 지금 이 종으로써 육부(六府)를 깨우치니, 어찌 특히 도려(道侶)가 깊은 각성(覺醒)을 말하며, 아득한 무리가 고뇌(苦惱)를 그칠 뿐이리요. 반드시 아득한 현궁(玄宮)에도 통하여, 좌우에 들리면, 돈연(頓然)히 불지(佛智)를 더하여, 피안(彼岸)에 속히 오를 것이다. 하물며, 우리 세조대왕은 성한 덕과 높은 공이 만고에 빛나고,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는 정성이 천지와 함께 다함이 없음에랴. 이러한 바를 종정(鐘鼎)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삼가 절하며 머리 조아리고 명(銘)하기를, “능침 곁에다 보찰(寶刹) 지으니, 금벽(金碧)이 우뚝하게 솟아났구나. 법악(法樂)이 인간의 세계와 하늘에 울리니, 묘한 소리 유명(幽明)을 화하게 한다. 그 중에 커다란 방망이 있어, 고래가 투그리듯 소리가 높다. 연모로써 두드려서 울리기만 하면, 귀 있는 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제진(諸塵)을 떠나지 않고, 삼기(三紀)가 합친 다음 이루어진다. 듣는 것이 있어도 들림이 없고, 마땅히 실(實)을 듣는 본성이 있다. 능히 듣는 자, 어찌 옳으랴. 본래는 실상, 청정(淸淨)뿐이다. 청정하면 때와 더러움 없이 이것을 이름하여 대원경(大圓經)이라 한다. 사람마다 이 이치 갖추어져서, 한 번만 들어도 깨치게 된다. 위로 통함은 아가니(阿伽尼)에게, 옆으로 둘리는 건 항하사(恒河沙)까지 법이 다하면 끝없는 삶의 복리가 이루어진다. 열성(列聖)이 올라서 바로 보니, 모든 형체 있는 것이 삼매에 든다. 삼광(三光)의 돗수가 순리로 되고, 만 백성이 요사(夭死)와 역질이 없다. 진묵검(塵墨劍)이 지나도록 요도(瑤圖)와 함께 나라는 반석 같아 견고하리라. 산이 평지 되고 바다는 말라도, 공덕은 마침내 닳지 않으리라.” 하였다.

개경사(開慶寺) 옛날에는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는데, 능침과 가깝다하여 지금은 남곡(南谷)에 옮겼다. 중대암(中臺菴)ㆍ백운암(白雲庵)ㆍ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아울러 소요산에 있다. 고령사(高嶺寺) 고령산에 있다.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범굴사(梵窟寺) 아울러 기슭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 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하였다.
묘적사(妙寂寺) 묘적산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이 있다.
○ 신종호(申從護)의 시에, “한가히 생대(生臺) 밑에 앉아 있으니, 임궁(琳宮)에 밤들어 적적하구나. 매화(梅花) 보고 시 지으니 격(格)이 여위고, 차 달이며 술 마시니 취기 가신다. 깊은 원(院)에 바둑 소리 급하고, 주렴(珠簾)에 촛불이 일렁거린다. 밤이 새면 서울로 떠나야 할 터,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도하다.” 하였다.
불곡사(佛谷寺) 불곡산에 있다. 수락사(水落寺) 수락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食後)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하였다.
○ 앞사람의 서문에,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수락산에 왕래한 것도 또한 두 번이며, 이 시를 우연히 벽 위에다가 적은 지도 지금 30여 년 전이다. 그저께 일암 전상인(一菴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장단 백태수(長湍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었다.’ 하면서, 나에게 그릇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갑자기 짓고 문득 버려서 한두 마디의 말로 상자에 남겨 둔 것이 없다. 하물며 광망한 소년 적에 지은 것으로 유전(流傳)시킬 뜻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하였겠으며, 32년 전 일이 아득하게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찌 그릇된 글자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한번 읽어보니, 운자(韻字) 단 것과 글자 놓은 것에 불만스러운 곳이 있다. 반드시 나의 유치한 시절의 잘못이거나, 혹 외우는 자의 잘못이 아닐까. 우선 그냥 두었으나, 옛일을 생각하니 능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드디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드렸다. 일암은 그때 불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이다. 후일 일암과 함께 한번 놀게 된다면 나의 말을 마치겠다.” 하였다. 그 시(詩)에, “산중(山中) 옛절에 유람하던 일, 손꼽으니 지금 벌써 30년이다. 객과 함께 거닐면서 많은 시간을 중을 위해 머물렀다. 한가한 긴 날, 꽃이 짙고 대나무 빽빽하여 지역이 깊고, 나무 늙고 바위 돌아 작은 누(樓)를 안았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소년 적 지난 일이 유유하여라.” 하였다.
○ “유유한 지난 일은 소년 적일세. 취한 중에 필세(筆勢)가 용솟음쳤다. 판벽(板壁)에 내 쓴 것은 무심하였고, 화등(花藤)에 중 베낌은 다사(多事)도 하다. 붉은 소매 푸른 비단은 본분 아닌 것이 부끄럽고, 흰머리 누른 티끌 속에 늙음이 밉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높은 봉에 또 오르면 쾌함 있으리.” 하였다.
○ “다시 최고봉(最高峯)에 오르고 싶다. 정(井 별 이름)을 지나 참(參 별 이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한낮에 새 한 마리 머리로 날아 지나고, 푸른 산은 여러 용이 눈아래 노는 듯, 금은(金銀) 불찰(佛刹)은 3천 계(界)이고, 금수(錦繡) 강산은 백 두 겹이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해질 무렵 앉아서 차를 끓이며.” 하였다.
○ “저녁 해 떨어지고 차 끓는 소리, 청산은 거만한 듯 아랑곳없다. 굽어보니 구름은 평지에 일고, 쳐다보니 폭포는 반공(半空)에 난다. 꽃비는 누(樓)에 가득 옷이 다 젖고, 베갯머리 송도(松濤)는 뼈에 사무친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청련(靑蓮)과 결연(結緣)하여 여생 보내리.” 하였다.
○ “여생에 결연하기 첨 마음일세. 서글퍼라 연래에 눈 같은 머리. 원(願) 맺기가 옅지 않음 누가 알리. 산에 들면 안 깊을까 항상 염려라. 스님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총림(叢林)과 가깝구나 불암 촌서(村墅)가.” 하였다.
○ “총림이 불암산 가까이 있고, 산 밑에는 내 집이 두어 칸 있다. 도잠(陶潛)의 세 가닥 길, 적막하여도 양로(楊老)의 한 구역 집 반환(盤桓)하노라. 나물 캐고 죽순 구워, 예삿일이고 국화 보내고 매화 맞았다 하여라.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저문 나이 내 신세가 함께 따르리.” 하였다.
불암사(佛巖寺) 불암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 소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하였다.
석천사(石泉寺) 수락산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죄다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홍복산에 있다. 정토사(淨土寺) 주 서쪽 59리 지점 백련산(白蓮山)에 있으며,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
【사묘】 사직단 주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여단 주 북쪽에 있다. 양진사(楊津祠) 광나루[廣津] 아래쪽에 있다. 용에게 제사하는 단이 있는데, 봄ㆍ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린다. 신라 때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社)에 올렸는데, 지금은 소사(小社)에 기재되어 있다.
【능묘】 건원릉(健元陵) 본조 태조의 능이다. 주 남쪽 57리 지점인 검암산(儉巖山) 기슭에 있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 권근(權近)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서 치운(治運)을 열어 주는 데에는, 반드시 상서(祥瑞)가 먼저 있어서, 천명(天命)에 부합(符合)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우(夏禹)가 일어날 때에 하늘에서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왕으로 될 적에는 꿈과 점괘가 합치하는 상서가 있었다. 한당(漢唐) 이래로도 역대(歷代)로 일어날 때에 각각 부합하는 상서가 있었다. 이것은 지혜로써 구할 수 없고, 힘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성철(聖哲)한 자질과 신무한 덕을 소유하고서 큰 운수에 응하여 탄생하고, 요도(瑤圖)를 잡아서 발흥한 다음이라야 쇠퇴한 세상을 변화시켜 다스려지는 태평한 세상으로 돌리고, 큰 기업(基業)을 창건하여 통서(統緖)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니, 모두 하늘에서 주는 것이고, 사람의 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 용잠(龍潛)에 있을 때에, 나가면 장수이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에 천명에 부합한 상서가 전후로 아울러 이르렀다. 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잡고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다.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자는 공이 아니면 누구인가.’ 하였으니, 하우(夏禹)의 현규(玄圭)와 주무(周武)의 점괘와 합치하는 꿈을 꾼 것과 거의 되좇아 짝할 만하다. 장수로 되어서는 경술년에 올라(兀羅)를 공격하면서 군사가 압록강을 넘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고, 경사년 운봉 전첩(雲峯戰捷)에는 군사가 장단을 나서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한 고조(漢高祖) 망탕(芒碭)의 운기(雲氣)와, 송(宋) 태조 진교(陳橋)의 일광(日光)과 또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무진년에 요(遼)를 공격하라는 최영의 핍박을 당했다. 밖으로는 감히 상국(上國) 경계를 침범하지 못할 형편이고, 안으로는 감히 폭군(暴君)의 영을 어길 수 없었다.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오직 딱하기만 하여 군사를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 여러 날 장마가 졌으나, 물이 매우 붇지 않았는데, 의기로써 군사를 돌이켜 언덕에 오르니, 큰물이 때맞추어 와서 온 섬이 빠져 버렸다. 한 광무(漢光武)의 호타하(滹沱河) 얼음과 원 세조(元世祖)의 전당(錢塘) 조수가, 모두 그 미담(美談)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구변도(九變圖)라는 국판[局]과 십팔자(十八子)라는 설(說)이 단군 때부터 벌써 있었던 것인데, 수천 년을 지난 지금에 징험된다. 또 이상한 중이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그 말이 위에 말한 단군 때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합치하였다. 이것은 또한 광무(光武)의 적복부(赤伏符)라는 것과 유사하다. 비기(祕記)가 비록 떳떳하지 못하다 하나, 또한 이치가 혹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번 징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봄이 참으로 증거 있는 것이다.
신이 삼가 선원(璿源 임금의 족보)을 상고하니, 이씨는 전주(全州)에서 이름난 씨족이었다. 신라 적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휘 한(翰)으로부터, 그 후 23대 황렬고 환왕(皇烈考桓王)까지 여러 대로 승적(承籍)한 아름다움을, 우리 태조께서 용잠하실 때에 선정(先正) 신 이색(李穡)이 지은 환왕 묘비에 갖추어 기재하였다. 그 뒤에 태조께서 대업을 창건하시고 대통을 드리우신 신기한 공과 거룩한 업적으로써 4대를 추존 할 때에, 문신 정총(鄭摠)이 지은 환왕 정릉(定陵)의 비에 모두 적었다. 신이 지금 명을 받들었으나 감히 작은 것을 아뢰지 못하고, 우선 큰 것만을 모아서 말한다.
사공(司空)이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대를 지나 긍휴(競休)에게 와서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다. 13대를 지나 황고조 목왕(皇高祖穆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원 나라에 벼슬하여 천부(千夫)의 장이 되었고, 4대로 거듭 벼슬을 이어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원 나라 운수가 쇠하여지므로, 황고 환왕이 들어와서 고려에 벼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서 중국의 도성(都城)을 침범하고,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유린(蹂躙)하였으나, 천하에서 그 칼날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지정(至正 원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적이 왕경(王京)을 함락하므로, 공민왕이 서울을 버리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시켰다. 우리 태조께서 앞장서서 싸움을 이기니, 위엄이 비로소 떨쳤다. 다음 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쫓아버렸고, 또 다음 해 계묘년에는 거짓 임금 탑첩목(塔帖木)을 축출하였다. 날카로운 기세를 꺾고 적군을 물리쳐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니, 이 때문에 공민왕의 믿고 의지함이 더욱 중하였다. 여러 번 장상(將相)이 되어 중외(中外)로 나들면서 도적을 제압해서 민생을 편하게 하여, 여러 번 특별한 공을 세웠다. 호령(號令)이 명백하고 신실하여, 추호도 백성에게 범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제하려는 활달한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후한 덕이 천성에서 나왔다. 묘당(廟堂)에서 계획하는 여가와 전진(戰陣)에서 창을 던져 두는 여가에, 명유(名儒)를 맞이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열심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혹 밤중까지 자지 않고 더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아서,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뜻이 있었다. 용맹스러운 계략은 세상을 뒤덮고, 영걸찬 예기는 무리에서 뛰어났으므로, 일시의 물망(物望)이 또한 주목(注目)하지 않는 자 없었다.
공민왕이 갑자기 죽자, 명령(螟蛉)이 왕위를 도절하고 권세 잡은 간신이 국정을 멋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어 탐탁하고 살륙함이 끝이 없었다. 시중 최영은 이를 분하게 여겨, 주륙(誅戮)하면서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은 태조가 청충용렬(淸忠勇烈)하다 하여, 특히 천거하여 우시중(右侍中)으로 삼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越)을 주면서, 망령되이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도록 핍박해서 보냈다. 이에 위화도(威化島) 행차가 있었는데,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대의(大義)를 가지고 군사를 돌렸다. 그리하여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21년 무진 6월에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명유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아서, 서정(庶政)을 고쳐 새롭게 하여 일국을 편하게 하였다. 이때에 처음에는 탐포한 무리의 탁하고 어지러운 정사를 만났고, 다음에는 광패한 신하가 틈을 만들어 잡게 됨을 당하여, 나라가 아주 위태하고 화란을 측량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화위복하는 힘이 아니었더라면, 온 나라 민생이 거의 혼란되었을 것이다.
이색이 우리 태조에게 아뢰기를, ‘공이 지금 의거하여 군사를 돌리고 죄인을 쳐서 중국을 높였다. 노부(老夫 이색 자신)가 윗자리에 있어 이 국정(國政)을 같이 맡았으니, 공의 충성을 황제에게 모두 아뢰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하고, 기일을 정하여 중국 서울에 갔다. 우리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가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를 서장관(書狀官)에 충수하여, 이색을 따라 함께 조회하게 하였다.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후하게 예하여 보내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의 교지(敎旨)를 받으니, 딴 성씨를 왕씨(王氏)의 뒤로 삼은 것을 책망한 것이었다. 태조는 여러 장수와 함께 왕씨의 종친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뽑아 세웠다. 마음껏 보좌하고 정사와 형벌을 명백히 하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억지로 빼앗은 것을 징계하고, 벼슬을 중히 하여 용렬하고 외람한 자를 도태하니,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잘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공명이 높으니 시기함을 받아 참소가 서로 얽히는데, 정창은 일에 어두워, 도리어 참소에 의혹되었다. 우리 태조는 지위와 공명이 너무 가득한 것으로써 전문(箋文)을 올려 노퇴(老退)하기를 청했으나 해임되지 않았다. 마침 서쪽으로 갔다가 병에 걸려서 돌아왔는데, 모해하려는 자가 틈을 타서 화가 신변에 절박하였다. 우리 전하는 시기에 따라 변을 제어하여 뿌리를 잘라버리니, 지당(支黨)이 와해되고 정창은 정사에 어두워서 국세가 불안하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홍무 25년 임신 가을 7월 16일에 하늘이 전하를 도와서,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명과 함께 의기를 주창하여 추대하게 하니, 신료와 부로가 모의하지 않아도 마음이 모두 같았다. 우리 태조께서 변을 듣고 놀라서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민심이 절박하여 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당(堂)에 내리지 않고 나라를 변화시켰고, 나라를 바꾸어[易姓] 명을 받기가 구슬을 굴리는 것같이 쉬웠다. 하늘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덕 있는 이를 돕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요. 곧 지중추(知中樞) 조반(趙胖)을 보내어 천자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 백성이 이미 이씨를 높여서 백성에게 병화(兵火)가 없고 각자 천명에 따르니, 상제(上帝)의 명이다.’ 하였다. 또 계속하여 칙서로서, ‘나라 이름을 무엇이라 고쳤느냐.’ 하여, 유성(流星)같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므로, 곧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나라 이름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조서하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으로써 근본하여 계승하고, 하늘을 본떠서 백성을 기르며, 영원히 후사(後嗣)가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우리 태조의 위정(威靜)이 본래 나타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용맹에 복종하고, 충의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슬기를 높이고, 공덕이 높이 들리었으므로 간택함이 황제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황명(皇命)을 청할 때를 당하여, 문득 유음(兪音)을 받았음이니, 어찌 우연한 일인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친아들을 조정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통하고 이치에도 밝으며, 일찍이 중국 조정에 조회하였다는 것으로써 곧 보내어 황명에 응하였다. 중국 서울에 가서 아룀이 성지(聖旨)에 합당하니, 후한 예로써 위로하여 보낸 것이었다.
그해 겨울 10월에 도읍을 한양에 정해서, 궁실을 건축하고 종묘를 건립하였다. 추존하여 황고조 목왕(穆王)과 황고조 비(妣) 효비 이씨(孝妃李氏)를 제1실에, 황증조 익왕(翼王)과 황증조 비 정비 최씨(貞妃崔氏)를 제2실에, 황조 도왕(度王)과 황조비 경비 박씨(敬妃朴氏)를 제3실에, 황고 환왕과 황비 의비 최씨(懿妃崔氏)를 제4실에 봉사(奉祀)하였다. 또 각 산릉(山陵)에는 능을 수호하는 민호(民戶)를 두고 때에 따라 제사하였다. 예악(禮樂)을 닦아 제사ㆍ절차를 삼가고, 장복(章服)을 제정하여 위의(威儀)를 분변하였다. 학자(學資)를 넉넉히 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녹봉을 증가하여 사대부를 권장하였다. 분쟁하는 소송을 분변하고, 수령(守令)의 출척(黜陟)을 신중히 하니, 폐단이 죄다 없어지고 모든 정사가 화창하였다. 제후(諸侯)의 법도는 삼가 사대(事大)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전함(戰艦)을 갖추어서 도적 막는 것을 엄하게 하였다. 황제가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오고, 왜국(倭國)에서 보배를 바쳤다. 해적(海賊)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잇따라 와서 항복하니, 사방이 안정하여 백성이 편하고 불자가 성하였다. 우리 태조의 높고 넓으신 성덕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맹과 지혜이며, 또 총명하시어 뛰어난 무위(武威)로써 적을 죽이지 아니하고, 헌걸차고 거룩하여 범상하지 아니하니 호걸스러운 임금이라 하겠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의 표문(表文)으로 인해 꾸지람을 당하고,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하여 가지 않고 가만히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여 항명(抗命)하기를 꾀하였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편하지 못한 틈을 타서 여러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孽)을 끼고서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밤에 사제(私第)에 모였는데 화기(禍機)가 급박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기미를 밝혀 죽여 없애고, 상왕(上王)이 적장(嫡長)이므로, 세자(世子)로 봉하기를 청하여, 이륜(彝倫)을 바로잡으니, 종사(宗社)가 이에 안정되었다. 9월 정축일에 우리 태조께서는 병환이 낫지 않으시어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셨다. 상왕은 뒤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고, 또 국가를 창건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다 우리 전하의 공이라 하여, 우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우리 태조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께서도 또한 병환이 계시어,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시고 사신을 보내어 황명을 청하니,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고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셨다.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 여름 4월에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봉하고 잇따라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전하에게는 용포(龍袍)와 면류관(冕旒冠) 따위 구장복(九章服)과 비단ㆍ깁ㆍ서적 등속을, 왕비에게는 관(冠)ㆍ포(袍)와 비단ㆍ깁 따위를, 우리 태조에게는 비단과 깁을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약재(藥材)ㆍ실ㆍ깁과 보배로운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아울러 와서, 중한 총권(寵眷)이 옛날에는 없었다.
영락 6년 무자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가 74세였다. 왕위에 있은 것이 7년이고, 노년(老年)이어서 정사를 보지 않은 것이 11년이었다. 신민이 다 어버이처럼 임어(臨御)하여서 영원히 영양(榮養)을 누리도록 축원하였는데, 일조에 신선이 되어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애통하여라. 우리 전하께서 애모하심이 다함 없었다. 양암(諒闇)에서 예대로 다하며, 군신을 거느리고 책보를 받들어서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이해 9월 9일 갑인에 도성 동쪽 양주 검암산에 장사하였는데, 능 이름을 건원이라 하였다. 능 곁에다가 절을 설치하여 이름을 개경(開慶)이라 하고, 명복(冥福)을 빌었다. 초상 장사에 예를 성심껏 하여, 옛 예전(禮典)을 꼭 따랐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부고하니, 황제가 놀라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특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내리고, 글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그 대략에, ‘생각건대, 임금이 명달하고 착함을 좋아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천도(天道)를 공경히 따랐고 의를 힘쓰며, 충성을 드리어 사대하는 데에 공손히 삼갔다. 한 지역 백성을 보호하고 부(富)하게 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의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특히 하사하였다. 임금의 현저한 공덕은 비록 옛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고명을 하사하여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서하고 보물(寶物) 주는 것이 특히 후하고, 총권(寵眷)하는 예가 구비하여 유감이 없었다. 오직 우리 태조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으로 앞에서 터를 닦았고, 우리 전하의 부모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는, 뒤에서 받들어서 성군(聖君)과 성군이 서로 이어 능히 천심(天心)에 화합하였다. 그러므로 정성이 신명에 통하고 복과 경사가 종사(宗社)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서 끝까지 크게 하늘과 사람, 상하(上下)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니, 아, 성대(盛大)하시었다.
첫째 비(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에서 여러 대를 살던 집안에서 나셨다. 증직(贈職)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 경(卿)의 딸인데 먼저 승하 하였다. 처음 시호는 절비(節妃)였는데, 뒤에 승인 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탄생하였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께서 다섯째이다. 맏이는 방우(芳雨)로서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죽었다. 다음 셋째는 방의(芳毅)인데 익안대군(益安大君)이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 넷째는 방간(芳幹)인데 회안대군(懷安大君)이고, 다음 여섯째는 방연(芳衍)인데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딸로서 맏이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으니, 같은 이씨는 아니며, 다음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먼저 승하하여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였다. 2남 1녀를 탄생하였다. 아들로서 맏이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증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는데,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며 모두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配位)는 김씨인데, 지금은 왕대비(王大妃)로 책봉되었고, 증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이고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민씨(靜妃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 문도공(文度公)인 휘 제(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세자 제(禔)이고, 다음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며, 다음은 금상(今上) 충녕군(忠寧君)이요, 다음은 어리다. 맏딸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 이백강(李伯剛)에 출가하였다.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연(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2남을 낳았는데, 맏이는 복근(福根)인데 봉녕군(奉寧君)이고, 다음은 덕근(德根)인데 원윤(元尹)이다. 익안군(益安君)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석근(石根)을 낳았는데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군(懷安君)은 문하찬성사 벼슬을 추증받은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맹중(孟衆)을 낳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로 천명(天命)받은 임금을 보니, 신령한 상서의 경사는 당시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이 반드시 자세히 기록하고 특별히 쓴 것은 밝은 덕이 부합함을 밝히어 분에 넘게 나라를 얕보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간책에 빛나서 무궁하게 빛을 흘렸다. 지금 우리 조선이 일어날 때에는 천명을 받은 부험이 사방으로 모여들어 옛보다 빛났다.
이것은 비록 덕(德)에 인한 것이고, 경사할 것이 아니나, 하늘의 돌봄이 이 때문에 더욱 드러났다. 그리하여 마땅히 큰 덕이 천명을 받아, 이미 그 지위를 얻고 또 장수함이 마땅하다. 큰 기업이 우뚝하여 뽑히지 않으며, 큰 복이 내려서 다함이 없어 천지와 함께 장구하였던 것이다. 신은 못 쓸 재질(材質)로서 외람되이 사필을 잡았으니, 진실로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에 외람되이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감히 뜻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성덕을 포장(鋪張)하여 밝은 빛을 드리우지 않으랴. 그러나 신 근(近)은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공덕을 발양하여 밝으신 성지(聖旨)에 보답하기가 부족하오나, 이것은 소라 껍질로써 강과 바다의 물을 측량하고, 붓끝으로 천지를 모사하려는 것과 같다. 어찌 능히 그 물가에나마 이를 것이며, 방불하게나마 엿볼 수 있겠는가. 삼가 보고 들은 공덕을 뽑아서 감히 손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명(銘)을 바친다. 명에 이르기를, 멀고 아득한 옛날에 양의(兩儀 천지)가 비로소 열렸다. 사람이 참여하여 셋으로 되었는데,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에 길게 하고 다스리게 하여 이에 덕 있는 이를 돌보았으니, 하늘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나 명수(命數)가 있었다. 우(禹)에게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의 꿈은 점과 합치하였으니, 역대의 증거는 사책(史策)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은 처음부터 왕적(王跡)에 기초(基礎)가 있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다.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으며, 무지개가 햇빛에 엉겼었다. 상서가 잇달았으니, 하늘의 마음이 분명하였다. 고려 운수가 마치게 되어 전복(顚覆)을 스스로 취하였다. 임금은 어둡고 정승은 참혹하였다. 농삿달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과 틈을 얽었다. 나라가 이미 미약하여 위태하였다. 우리 군사가 의(義)로 돌리어 죄인을 이에 잡았다. 충성이 위에 알려지니, 황제 마음이 즐거웠었다. 윤음(綸音)을 잇달아 받아, 왕씨 종사를 다시 잇게 하였다. 도리어 혼약(昏弱)하여 천록(天祿)이 다 되었다. 역수(曆數)가 돌아가게 되므로, 여정(輿情)이 이에 박절하였다.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저자 가게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고황(高皇)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나라를 두면서 백성에게 병화(兵禍)도 없이 천명을 순종했다.’ 하였다. 잇달아 국호를 내렸는데, 조선으로 복구(復舊)하게 하였다. 터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수(漢水) 북쪽이었다. 백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곳이었다. 궁실이 높직하고, 종묘가 날 듯하다. 공경히 조종(祖宗)에게 제사하고, 왕작(王爵)으로 높이었다. 인(仁)이 두터워 살리기를 좋아하니, 다스림이 성하며 화하기를 생각하였다. 온갖 제도가 갖추어지니, 만 가지 교화(敎化)가 흡족하였다. 신민(臣民)과 부로(父老)가 춤추고 노래하였다. “옛날에 우리가 전복되어 어육(魚肉)될 뻔하였는데, 지금은 우리 다 소생하여, 은택에 젖었도다. 밭갈고 우물 파서 부모를 섬기고 처자(妻子)를 기른다. 만년토록 수(壽)하시어 많은 복을 누리소서. 이에 정사에 싫증이 나서 맏이에게 전하였다. 맏이는 또 공 있는 분에게 사양하여 부자 형제 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기미를 밝히는 것이 촛불 같았다. 싸락눈이 엉기다가 햇볕만 보면 풀려지는 듯하였다.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가 더욱 도타왔다. 새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단정한 것은 모두 우리 님의 공이었다. 대명을 사퇴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돌아가는 데가 있었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공손함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효제(孝悌)가 신에 통하니, 황제의 돌보심이 더구나 우악(優渥)하였다. 총애하여 주는 것이 해마다 와서 산 같고 뫼 같았다. 사방이 편하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정숙(靜肅)하였다. 상(喪)을 만나 조심하며 애모(哀慕)하고 뛰며 굴렀다. 황제 듣고 놀라며 슬퍼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곡(吊哭)하고, 대뢰(大牢)로 제사지냈다. 후한 부의(賻儀)와 칙서(勑書)로서 아름다운 시호를 포창(褒彰)하고, 휼전(恤典)을 갖추어 신칙하였다. 하늘에서 보우(保佑)하여 종시(終始) 변하지 않았다. 큰 복이 면면(綿綿)하여 자손이 천(千)이고 억(億)이어서 만년이 되도록 종사를 보전하리라. 높은 산이 날아가고 바닷 물은 말라도 종사는 길이길이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다.” 하였다.
○ 변계량이 지은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는 지극한 덕과 많은 공으로써 대업을 처음 이룩하였다. 다스림에 날마다 부지런히 생각하다가, 이에 편하지 못함이 오래이므로, 선위(禪位)하고 오래 영양(榮養)을 누리기를 도모하였는데, 영락(永樂) 무자년 봄 정월에 또 편하지 못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하늘에 빌고 수명(壽命)을 청하여 조금 나았다. 다섯 달을 지나 또 병이 발작하여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양주 검암산(儉巖山)에다가 예장(禮葬)하였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산 내맥(來脈)은 장백산(長白山)을 뿌리로 하여 2천여 리를 뻗쳐 내렸다. 철령(鐵嶺)에 와서 꺾어져 서쪽으로 다시 수백 리를 와서 우뚝한 것이 백운산(白雲山)이다. 또 남쪽으로 백여 리를 뻗어 와서, 북으로 모이면서 남으로 향하였으니 곧 검암산이다. 능(陵)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능에서 바로 병방(丙方)인 4백 21척 지점에 비(碑)를 세워서, 우리 태조 공덕을 기록하였는데, 훌륭한 것을 기록하여 이미 상세하였다. 전하께서는 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을 비 뒷면에 새기고, 정사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의 또한 시기에 응해, 계책을 정해서 우리 태조의 창업 수통(創業垂統)하신 사업을 넓힌 자들도 아울러 새겨서, 민멸(泯滅)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신 계량에게 기문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니, 하늘이 큰 덕 있는 이를 낳아서, 이 백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반드시 팔다리같은 보필하는 신하가 전후(前後)에서 분주하여서, 앞에 개발하고 뒤에는 지킨, 다음이라야 큰 공업이 성취하고, 큰 사업이 영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일어날 때에도 문무 대신이 천명을 밝게 알고 능히 좌우에서 계적(啓適)하였다. 무인년에 정사(定社)한 것과 경진년에 좌명(佐命)함 같은 것은, 또한 훌륭한 친척과 좋은 보필이 서로 더불어 보익(輔翼)하여, 그 공을 성취시켰고 큰 복을 영구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비석에다가 명을 새겨서 장래에 빛나게 할 것이며, 우리 전하께서 조상의 공업(功業)을 드날리고, 공신을 표창한 아름다움도 또한 아울러 전하여서, 영원토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현릉(顯陵) 본조 문종(文宗)의 능인데,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신증』 지금 임금 8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부장(祔葬)하였다. 광릉(光陵) 본조 세조(世祖)의 능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부장하였다. 고을 동쪽 41리 지점인 주엽산(注葉山) 직동(直洞)의 남쪽이다. 서울과는 60리쯤 되는 거리이다. 회묘(懷墓) 주 남쪽 57리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 10리 되는 거리이다. 유량묘(柳亮墓) 주 동쪽 80리 지점이다. 조운흘묘(趙云仡墓) 아차산에 있다. 남재묘(南在墓)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갑손묘(鄭甲孫墓) 주 동쪽 44리 지점에 있다. 윤형묘(尹炯墓) 주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신숙주묘(申叔舟墓) 송산리(松山里)에 있다. 이직묘(李稷墓) 주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윤자운묘(尹子雲墓) 주 서쪽 내죽리(乃竹里)에 있다. 조말생묘(趙末生墓) 주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영응대군묘(永膺大君墓) 주 동쪽 47리 지점에 있다. 홍응묘(洪應墓) 주 동쪽 63리 지점에 있다. 『신증』 연산군묘(燕山君墓)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박원종묘(朴元宗墓)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성희안묘(成希顔墓)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질묘(宋軼墓)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용개묘(申用漑墓)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유순묘(柳洵墓)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남곤묘(南袞墓)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사천폐현(沙川廢縣)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내이미(內尒米)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사천(沙川)이라 고쳐서 견성군(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대모산성(大母山城)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9백 6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수철성(水鐵城) 주 북쪽 51리 지점에 있다. 둘레는 3백 57척이고, 높이는 14척이며 적성(積城)과 서로 마주 있다. 해촌처(海村處)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산처(松山處)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권맹손(權孟孫) 부사(府使)가 되었다.
【인물】 고려 송저(宋詝) 견주(見州) 사람이며 젊어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에 어사 중승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집 종이 법을 범했으므로 잡아다 다스렸는데, 그 때문에 파직되었으나 곧 우간의대부로 제수받았다.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어서는 무신(武臣)에게 미움을 받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식견있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저가 외방으로 나간 뒤에는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자는 말이 틀림이 없었다.” 하였다. 뒤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조운흘(趙云仡) 풍양현(豐壤縣)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 과거에 올랐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사직하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밑에 살았다. 신우(辛禑) 때에 기용되어 좌간의대부로 제수되었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전보(轉補)되었다가, 또 물러나서 광주(廣州) 고원(古垣) 강마을에 살았다. 판교(板橋)ㆍ사평(沙平) 두 원(院)을 중수하고 원 주인이라 자칭하였다. 해어진 옷과 짚신으로 심부름꾼과 함께 노역(勞役)하니, 길가는 자들이 그가 지난날에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으나, 곧 병으로써 사직하고 광주 별장에 돌아갔다. 또 검교 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배명(拜命)되었다. 검교는 예에 따라 녹을 받는 것이나, 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람됨이 뜻 세우기를 기고(奇古)히 하여, 기이하고 높아서 뇌락하고 거룩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동하며, 시세에 따르기를 즐기지 않았다. 죽을 무렵에 자신의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조운흘은 본래 풍양 사람이다. 고려 태조의 신하였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고, 공민왕 때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 과거하여 서울과 지방 관직을 역임하였다. 다섯 주의 원을 겪었고, 다섯 도 관찰사를 지냈다. 비록 큰 성적(成績)은 없었으나, 또한 비루한 짓도 없었다. 나이 73세가 되어 광주 고원성(古垣城)에서 병들어 죽었고 후사(後嗣)는 없다. 일월(日月)을 주기(珠璣 폐역)으로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을 제물로 삼아서,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가야(摩訶耶)에 장사하였다. 공자(孔子)의 행단(杏壇) 위에나, 석가(釋迦)의 쌍수(雙樹) 밑에인들 고금으로 성현이라고 어찌 홀로 있는 자가 있으리요. 아, 인생사(人生事) 이것으로 마쳤다.” 하였다.
본조 조익정(趙益貞) 과거에 올랐고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고, 한평군(漢平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효자】 본조 최효손(崔孝孫) 부모가 함께 죽자, 죽을 때까지 무덤을 지켰다. 성종(成宗) 21년에 이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윤금(閏今)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갔다. 윤금은 용기를 내어 범을 치고 아버지의 영장을 빼앗았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교원우족맥장추(郊原雨足麥將秋)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서울 산하(山河) 중에서 몇째 주인가. 들녘에 비 흡족하니 보리 익으려 한다. 못을 보면 능히 정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들에 가서 머리 식히며 다시 계획한다. 부임(赴任)하는 누가 백학(白鶴)을 탔나. 다정한 객 청루(靑樓)를 꿈꾼다. 지명은 같아도 풍류는 다른데, 시름 속에 공연히 꾀꼬리만 운다.” 하였다. 운간계견무릉원(雲間鷄犬武陵源) 이인로(李仁老)의 풍양현 시에, “봉우리 밑 인가(人家)는 양삭(陽朔) 경계와 같고, 구름 속에 개ㆍ닭 소리는 무릉도원인가. 사군(使君)이 노란 소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리 이삭 일렁이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 하였다. 산연화악중(山連華岳衆) 권우(權遇)의 시에, “나귀를 타니 야취(野趣)가 많아, 천천히 저녁 빛 속에 걷는다. 역로(驛路)에는 모래와 먼지가 어둡고, 고을 성에는 수목이 울창(鬱蒼)하다. 산은 화악과 연이어서 많고, 물은 한수에 들어가서 길다. 이곳이 뽕나무 뿌리에 알맞아서, 칠경 초당(草堂) 짓기로 기약한다.” 하였다. 운외종성욕석양(雲外鐘聲欲夕陽) 이원(李原)의 사천현(沙川縣) 시에, “시냇가 풀 빛 아침비와 연했고, 구름 밖 종소리는 해질 무렵이다. 길손이 여가 없음을 스스로 웃는다. 내 말만 공연히 병들게 한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영아】 수어중영(守禦中營) 인조조(仁祖朝)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은 본목사(本牧使)가 겸하였다. ○ 속읍(屬邑)으로는 양주(楊州)ㆍ양근(楊根)ㆍ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ㆍ지평(砥平) 등이다.
【성지】 양진성(楊津城) 아차산(峩嵯山)의 동쪽 언덕 광진(廣津)의 위에 있으며 한강수에 접 해 있는데 광주(廣州) 평고성(坪古城)과 더불어 한강을 건너서 마주 있다.
○ 백제 시조(始祖)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천도하여 한산(漢山)에 성을 쌓고 한강 서북을 한성민(漢城民)으로 나누었다. 《여지승람고적(輿地勝覽古蹟)》에 이르기를, “장한성(長漢城)은 한강의 윗쪽에 있는데 신라가 중진(重鎭)을 두었으나 후에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다시 찾았다 한다.”
대모성(大母城) 서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9백 6척이다. 수철성(水鐵城) 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3백 5십 7척이고 적성(積城)과 수철성은 서로 맞은편에 있다. 중흥동고성(重興洞古城) 북한산성 안에 있으며 산영루(山映樓)의 좌우편에 유지(遺址)가 있다. 백제 개루왕(盖婁王) 5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14년에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한양의 중흥산성을 수리하게 한 것은 장차 왜적(倭敵)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성의 둘레는 9천 5백 17척인데 지금은 북한산성 안에 들어간다.
○ 이 성은 백제 때에 시작하였으나 백제의 도성(都城)은 아니다.
아차산고성(峩嵯山古城) 산의 정상(頂上)에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풍양고성(豐壤古城) 고현(古縣)이 서쪽으로 1리이다. 검암산고루(儉巖山古壘) 산의 서쪽 봉우리 두 곳에 있으며, 선조(宣朝) 임진(壬辰)년에 의병장(義兵將) 고언백(高彦伯)이 쌓은 것이다.
【궁실】 풍양행궁(豐壤行宮)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蹕)하셨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진전】 봉선전(奉先殿) 광능(光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세조(世祖)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는데 임진란 때에 강화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다시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영변(寧邊)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또다시 개성(開城)에 봉안하였다가 다시 경도(京都)의 영희전(永禧殿) 때문에 봉전을 폐했다.
【역참】 구곡역(仇谷驛) 동남쪽으로 90리에 있다.
【방면】 고주내(古州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5리이다. 주내(州內) 곧 읍내(邑內)이다. 어등산(於等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별비곡(別非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진대(榛代)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진관(眞官)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미곡(尾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상도(上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하도(下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8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둔야(屯夜) 처음이 15리, 마지막이 30리이다. 귀지(龜旨)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망우리(忘憂里)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해등(海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광석(廣石) 처음이 25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천천(泉川)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0리이다. 현내(縣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5리이다. 산내(山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영근(嶺斤)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회암(檜巖)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접동(接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건천(乾川)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금촌(金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시북곡(柴北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미음(美音)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고양주(古陽州)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노원(蘆原)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백석(白石)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석적(石積)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신혈(神穴)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진답(陳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이담(伊淡)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청송(靑松)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진도】 미음진(美音津) 동남쪽으로 70리에 있으며 광주(廣州)와 통한다. 광진(廣津) 동남쪽으로 75리에 있다. 광주(廣州)에 보라. 대탄진(大灘津) 대탄강에 있으며 연천(漣川)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목장】 전곶장(箭串場) 아차산(峩嵯山)의 서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15리이다. 국초(國初)에 설치했는데 명종(明宗) 10년에 사복제조(司僕提調) 상진건(尙震建)이 청설(請設)하여 석책(石柵)의 둘레가 30리이며 감목관(監牧官)이 있다. 수능(綏陵)을 옮겨 봉안하게 되니 목장을 철폐(撤廢)하였다.
【능침】 정능 남쪽 50리의 사아리(沙阿里)이니 경도(京都) 혜화문(惠化門) 밖이다. 태조(太祖)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데 기신(忌辰)은 8월 13일이다. 처음에는 능이 도성 안의 황화방(皇華坊)에 있었으나 태종 9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묘(墓)로 강등시켰는데 현종 10년에 다시 능으로 복귀하였다. ○ 영(令)ㆍ참봉(參奉)이 각 한 사람이다. 사능(思陵)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의 능인데 기일은 6월 4일 이다.
숙종 24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令)ㆍ참봉 각 한 사람이다.
온릉(溫陵) 장흥면(長興面) 서쪽에 있으며 산수가 동(洞)을 둘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50리이다. 중종비(中宗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愼)씨의 능인데 기일은 12월 7일이다. 영종 16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ㆍ참봉이 각 한 사람이다. 태능(泰陵) 노원면(蘆原面)에 있는데 중종비(中宗妃) 문정왕후(文定王后) 윤(尹)씨의 능으로 기일은 4월 7일이다. ○ 직장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강릉(康陵)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明宗) 대왕의 능이다. 기일은 6월 28일이다. 왕후 심(沈)씨도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정월 2일이다. ○ 별검(別檢)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목릉(穆陵) 건원릉(健元陵) 두 번째 언덕에 있는데 선조대왕 능이며, 기일은 2월 1일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6월 27일이다. 인무왕후 김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는데 기일(忌日)은 6월 28일이다. ○ 별첨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휘릉(徽陵)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비 장열왕후(莊烈王后) 조(趙)씨의 능인데 기일은 8월 26일이다. ○ 별검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숭릉(崇陵) 건원릉 서남쪽 다른 언덕에 있는데 현종대왕의 능이며 기일은 8월 16일이다. 명성(明聖)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12월 5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의릉(懿陵) 천장산(天藏山)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15리이다. 경종(景宗) 대왕 능이며 기일은 8월 25일이다. 선의(宣懿) 왕후 어(魚)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9월 29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혜릉(惠陵) 숭릉의 좌측 언덕에 있으며 경종비(景宗妃)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으로 기일은 2월 7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원릉(元陵) 건원릉의 우측 언덕에 있는데 영종 대왕 능이며 기일은 3월 5일이다. 정순(貞純)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정월 12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수릉(綏陵) 건원릉 좌측 언덕에 있으며 익종(翼宗) 대왕 능인데 처음에는 천장산(天藏山)에 장례했는데 헌종 병오년에 용마봉(龍馬峯)으로 옮겼다가 철종 을묘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기일은 5월 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경릉(景陵)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헌종대왕 능이니 기일은 6월 6일이다. 효현(孝顯) 왕후 김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8월 25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순강원(順康園) 풍양(豐壤)에 있으며 인빈(仁嬪) 김씨의 원이니 기일은 10월 29일이다. ○ 수봉관(守奉官)이 두 사람이다. 소녕원(昭寧園) 고령산(高嶺山)에 있으며 숙빈(淑嬪)의 원이니 기일은 3월 9일이다. ○ 수봉관이 두 사람이다. 수길원(嫂吉園) 소녕원 국내(局內)에 있으며 정빈(靖嬪) 이씨의 원이니 기일은 11월 16일이다. ○ 소녕원 관이 겸해서 보살핀다. 휘경원(徽慶園) 달마동(達馬洞)에 있는데 처음에는 배봉(拜峯)에 장례했었으나 철종 계해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수빈(綏嬪) 박씨의 원이니 기일은 12월 2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덕흥대원군 묘(德興大院君墓) 수락산(水落山)에 있으며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鄭)씨도 합장했으니 곧 선조대왕 황고(皇考)ㆍ황비(皇妃)의 묘이다. 회묘(懷墓) 천장산(天藏山) 남쪽 지맥에 있으며 성종 폐비(成宗廢妃) 윤(尹)씨의 묘이니 연산주의 어머니이다. 연산주가 즉위 때에 회릉(懷陵)으로 올려 불렀으나 중종 원년에 묘로 강등했다. 연산주 묘(燕山主墓) 해등면(海等面)에 있는데 처음에는 강화에 장례했으나 중종 7년에 왕자의 예로써 해등촌(海等村)으로 옮겼다. 신씨 묘(愼氏墓) 회묘(懷墓)의 국내(局內)에 있으니 곧 연산주 폐비의 묘이다. 성묘(成墓)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선조 후궁 공빈(恭嬪) 김씨의 묘이니 광해주의 어머니이다. 광해 계축년에 성릉(成陵)이라 추호했으나 인조 원년에 묘로 강등하였다. 광해주 묘(光海主墓) 군장리에 있으니 인조 21년 제주(濟州)에서 옮겼다.
【사원】 도봉서원(道峯書院) 선조 계유년에 건축하여 같은 해에 사액을 내렸다. 영종 을미년에 어필로 액을 달았다. 조광조(趙光祖)ㆍ송시열(宋時烈) 모두 경도(京都) 문묘(文廟)에 보인다. 석실서원(石室書院) 효종 병신년에 건축하여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용(金尙容) 강화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경도 종묘에 보인다. 김수항(金壽恒) 자는 구지(久之)이고 호는 문곡(文谷)이니 상헌(尙憲)의 손자이다. 숙종 기사년에 화를 당했는데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정중(閔鼎重)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니, 숙종 임신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좌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단상(李端相)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요 연안(延安) 사람이다. 벼슬은 부제학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청절사(淸節祠) 숙종 병인년에 건축해서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 정절사(旌節祠) 숙종 임진년 건축하고 정종 갑진년에 사액하였다. 남을진(南乙珍) 의령(宜寧)사람이며 벼슬은 고려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였고, 본조가 개국하자 감악산(紺岳山) 석굴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아니하니, 태조가 그의 거소를 찾아서 사천백(沙川伯)을 봉하였다. 조견(趙狷) 처음 이름은 윤(胤)이고 자는 거경(巨卿)인데, 평양 사람이다. 본조에서 여러 번 부르니 도망가서 이름을 견(狷)으로 바꾸었다. 호는 송산(松山)인데 본조에서 그의 공훈을 기록하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했으나 굴하지 아니하였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고읍】 견주(見州) 동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 매성군(買省郡)인데 마홀(馬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쳐서 두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중성(重城), 파평(坡平)은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정종(定宗) 2년에 다시 현주군(縣州郡)으로 하였는데 창화현(昌化縣)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6년에 양주에서 치소(治所)를 이곳 현주로 옮겼다가 뒤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 고려 문종(文宗) 13년에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아뢰기를 양주 경계안의 견주에 읍을 둔 지 백년이 되었으니 사(使)를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균정(均定)해 줄 것을 다섯 번이나 조정에 요청하였다. ○ 지금 고주내(古州內)이다.
풍양(豐壤)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 골의노(骨衣奴)이다. 노(奴)는 내(內)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여 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풍양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해서 후에 포주(抱州)로 하였다가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풍양에 속하였다.


 

[주D-001]구오(九五) : 《주역》괘에 구(九)와 오(五)는 영위(陽位)이므로 임금에 비하였다.

 

 

四佳詩集卷之五○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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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類
道峯山靈國寺 a_010_308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61_av005_01_087: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山下何年佛刹開。客來終日足徘徊。開窓雲氣排簷入。欹枕溪聲捲地來。

 

古塔有層空白立。斷碑無字半靑堆。殘年盡棄人間事。結社香山擬不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