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양천허씨 족보서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 서(序)

아베베1 2013. 10. 7. 01:55

 기언 제12권 원집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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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씨(族氏)
양천허씨족보(陽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 서(序)川許氏族譜)》 서(序)


족씨(族氏)에 관한 전적은 옛날 태사(太史)가 맡았던 것이다. 주관(周官) 소사(小史)는 왕족의 계보를 기록하고 소목(昭穆)을 분변하는 일을 맡았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는 자리에서 족사(族師)가 효우목연(孝友睦婣)을 적었다. 지식이 있는 자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않거나 형제간에 우애롭지 않으며, 친족들과 화목하지 않거나 인척들과 화목[婣]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대사도(大司徒)가 향형(鄕刑)으로 다스리되 효를 위주로 하였다. 아, 성인의 교훈이 멀어졌구나.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아들, 아들에서 손자에 이르는데 백중숙계부(伯仲叔季父)는 할아버지에서 갈리고, 형제는 아버지에서 갈린다. 재종(再從)ㆍ삼종(三從)에서 족자(族子)ㆍ족손(族孫) 이하까지 계통(係統)이 멀수록 친분과 우애도 소원해진다. 그러나 그 근본을 소급해 보면 한 조상에서 나왔으니, 실은 한 기맥(氣脈)에서 갈라진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같은 유(類)를 사랑하면서 인(仁)할 줄 모르는 자는 없다. 대개 성인의 정치는 그 본성을 따라 인(仁)으로 이끌었으니, 이것이 바로 주관(周官)의 교육 방법이다. 족보는 주관이 왕족의 계보를 기록하고 소목을 분변하던 제도의 남은 풍습이다.
우리 양천 허씨는 가락(駕洛)에서부터 나왔는데, 보첩(譜牒)에 기록된 것으로는, 공암 촌주(孔巖村主 허선문(許宣文)) 이후부터 보첩에 드러나서 갑족(甲族)으로 불렸으며, 성씨를 얻은 이래 26, 7 대로 무려 7백 여 년이나 된다. 설부(說部)에 보면 허씨는 고려 5백 년 동안에 정승 11인, 관추(莞樞 중추원사(中樞院使))가 6인, 학사(學士) 9인, 부마(駙馬) 5인, 원(元) 나라에 벼슬한 이 1인, 봉군(封君) 14인이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정승 2인, 찬성 2인, 판서 4인, 공신(功臣) 3인, 학사 12인이었다. 그리고 인조ㆍ효종 이래로 명신 귀인이 또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았으니, 조선(祖先)이 인덕(仁德)과 착함을 쌓은 보답이라 할 수 있다. 우리 8대조 전리 판서(典理判書 이조 판서)가 맨 처음으로 적내(赤內 경기(京畿) 지방) 족도(族圖)를 작성했고, 그후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ㆍ김 문경공(金文敬公 김안국(金安國))ㆍ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뒤를 이어 보충해서 펴냈다. 그후 또 유옹(寙翁 허함(許涵))이 그 일을 물려 받아서 후세에 태어난 자손들에게 어느 할아버지는 어느 할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어느 할아버지는 몇 대(代)에서 갈렸으며, 어느 분이 소(昭)가 되고 어느 분이 목(穆)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 주었다. 다같이 조상의 교훈을 지켜 인애(仁愛)를 돈독히 하자는 것이 또한 족보의 교훈이리라.
신해년(1671, 현종11) 12월 5일 목(穆)은 삼가 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