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고봉 기대승 행장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3. 10. 2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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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란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근년에 국운이 다소 진작되고 있으나 남북통일은 아직 되지 못한 채 이륜(彛倫)이 거의 상실되고 풍속도 갈수록 퇴패(退敗)하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선생의 16대 주손(冑孫)인 성근(聖根) 씨가 선생의 묘도에 비를 세우려 하여 나를 찾아와 “비석을 세우는 일은 비단 선조의 학덕을 현창(顯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학의 유풍을 발양(發揚)하고자 하는 뜻도 있으니, 그것은 곧 유림들의 소망입니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비명(碑銘)과 서(序)를 청하였다. 나는 천학이라 굳이 사양하였으나 청하는 뜻이 간곡하였고, 또 퇴계 선생의 주손 이동우(李東愚) 옹도 사양하지 말라고 권하기에 마침내 봉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행주에 고봉(高峯)이라는 속현이 있어 선생이 고봉으로 자호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로써 장상(將相)이 된 분들이 많았고, 조선조에 와서는 문필과 덕행으로 당시에 저명한 분들이 더욱 많았다. 선생의 고조 휘 건(虔)은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세조(世祖) 때 청백리였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진(進)은 그 아우 준(遵)과 함께 성리학으로 당세에 저명하였다. 아우가 기묘사화(1519, 중종14)에 화를 당하자 세상일에 뜻을 끊고 광주(光州) 고룡리(古龍里)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덕성군(德城君)에 추증되었다. 비(妣)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며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고룡리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총명함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겨우 7, 8세의 나이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하면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글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가정에서 공부하는 데에 지장이 많아 마침내 향리 서당에 나아가 더욱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이미 육갑과 사물의 쇠왕(衰旺)의 이치를 대략 통하였다. 12세가 되던 무술년(1538)부터 17세가 되던 계묘년(1543)에 이르기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의 책을 두루 통하였고, 틈나는 대로 당송 고문(唐宋古文)도 읽었으며, 또 국조(國朝)의 전적을 널리 살펴보았는데 한 번 보기만 하면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선생은 평소에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으며 명성이 실제를 능가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과정기훈(過庭記訓)〉을 지어 부과(赴科)의 해를 논하여 이르기를 “벼슬길의 풍파는 참 두렵고도 두려운 것이니 자기의 뜻을 시행하기도 전에 화가 이미 따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주자는 조정에 벼슬한 기간이 겨우 40여 일이었으니, 학자들은 또한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진실로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였다. 숙부 덕양공(德陽公)이 이미 기묘사화를 당하고 또 계속하여 을사사화가 이어져 선생은 더욱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마침내 노산(蘆山)에 서실을 짓고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며 성명(性命)의 묘리에 침잠하고 천리와 인간의 이치를 연구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의정심(誠意正心)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논한 《대학(大學)》의 도리와 천명솔성(天命率性)ㆍ무성무취(無聲無臭)의 경지를 밝힌 《중용(中庸)》의 이치를 정밀히 분석하며 빈틈없이 힘씀으로써 스스로를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이미 몸에 갖추었다.
23세이던 기유년(1549, 명종4)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진사(進士)ㆍ생원(生員) 양시에 입격하였고, 32세이던 무오년(1558)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인(第一人)으로 입격하였다. 이때부터 14년간 허다한 관직을 두루 지냈는데 당시 조신들의 임명과 승진이 자주 변경되고 고관과 말직의 임기도 너무 짧아서 관리들이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 선생도 관직을 제수받고 체직됨이 역시 많았으니, 36세이던 임술년(1562, 명종17)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가 휴가를 얻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고, 37세이던 계해년(1563)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이 되었으며, 38세이던 갑자년(1564)에는 경연에 입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39세이던 을축년(1565)에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40세이던 병인년(1566, 명종21)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으며, 41세이던 정묘년(1567)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원접사(遠接使)의 시종관(侍從官)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42세이던 무진년(1568, 선조1)에는 홍문관(弘文館)ㆍ직제학(直提學)ㆍ좌승지(左承旨)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44세이던 경오년(1570)에는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45세이던 신미년(1571)에는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46세이던 임신년(1572)에는 대사성ㆍ대사간(大司諫)ㆍ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랐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10월 3일에 사직하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발병하였는데,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병이 더욱 심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국왕이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고, 또 어찰(御札)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으나 어의가 미처 도달하지 못하였다. 10월 30일에 장자 효증(孝曾)에게 유언을 남기고 11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보고되자 국왕은 몹시 슬퍼하였으며 수의(襚衣)를 추가로 보냈으며, 경사(京師)의 사대부들은 모두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종남산(終南山)의 선생의 우사(寓舍)로 가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이듬해 2월 8일에 나주(羅州)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조 23년인 경인년(1590)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조정에서 벼슬할 때 항상 근본에 힘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강상(綱常)을 세우고 어진 이를 높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경연 석상에서 아뢴 말씀의 대요(大要)는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일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읽고서 감탄하여 “지금 이 글을 탐독하면서 밤이 이미 깊어지고 촛불이 누차 바뀌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으니, 야대(夜對)를 10번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하였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2월 13일에 선생이 아뢰기를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후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서 임용할 수 있으니, 경연의 역할이 재상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하였고, 또 언로(言路)를 열고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는 대방(大方)을 반복하여 설명하였다.
41세이던 정묘년(1567)에 조강에 입시하였을 때 상주(上奏)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에게 일체(一體) 표창한다면 시비가 분명해지고 인심이 흥기할 것입니다.” 하였고, 또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儒臣)으로 오랫동안 적소(謫所)에 있었으니 지금 비록 방면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이미 6, 7십 대에 이르렀으니 의당 기용(起用)ㆍ발탁(拔擢)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다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조석(朝夕)으로 시강(侍講)하면서 아는 것은 모두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을 하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어, 반드시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어 이상 정치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부지하는 데 있어서는 말이 더욱 적절하였으며 그 고심과 지극한 정성은 군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경연의 강의는 경사(經史) 일반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역대 사론(史論)에 이르기까지 그 논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명쾌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이치와 국가흥망(國家興亡)의 귀감을 설파하였다. 당시 많은 인재들이 진출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에 급급하여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선생은 뜻을 세우고 현신(賢臣)을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함을 주청하였으니, 그 뜻은 근본을 바르게 세우는 데 두고 교화를 먼저 하고 법제를 뒤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개혁의 의논과는 별로 뜻이 맞지 않았다.
선생은 일찍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라고 자평(自評)하였으나 그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의 절도를 살펴보면 모두가 성현(聖賢)의 법도에 맞았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강의 배 안에서 어느 선비가 묻기를 “사대부로서 조정에 들어가 행동하는데 평생토록 지켜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군자의 출처는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때를 알고 형세를 살펴서 구차한 일이 없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행하기를 기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고금의 인인(仁人)과 지사(志士)가 관직에 임하는 대방(大方)이요, 오활한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다.
선생의 학문의 연원을 살펴보면 등과(登科)하던 해인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가던 도중 태인(泰仁)을 지나면서 일재(一齋) 이공(李公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당시 선생의 학문은 거의 대성(大成)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지만 선생으로 하여금 진일보하여 승당입실(升堂入室)의 경지에까지 올라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게 하신 분은 실로 퇴계(退溪) 선생이었다. 두 선생은 그해 경사(京師)에서 만났는데 한 번 보고도 십년지기(十年知己)와 같았다. 퇴계가 고봉에게 준 편지에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성에 간 일은 극히 낭패스러운 일이었으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후로 두 선생은 겨우 두 차례 상면하였지만 사제(師弟)의 예는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고봉은 탁월하고 명확한 자질로 행동거지는 오직 도산(陶山)을 본보기로 삼았고, 조정에서 경륜을 펼 때도 역시 오직 퇴계를 준칙으로 삼았다. 그 천품은 간결하고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는 않았으나 오직 퇴도(退陶)에게는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하였으며, 퇴계 역시 선생에게는 극진히 추허(推許)하고 항상 사석(師席)을 사양하였다. 매번 은미한 말이나 깊은 뜻이 담긴 글을 만날 때마다 항상 선생에게 질문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법(禮法)과 사단칠정이기(四端七情理氣)의 논설에 관해서는 선생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심오한 경지에 나아갔으니, 퇴계도 누차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선생을 따랐으며 독보적인 관점과 이론을 가졌다고 허여하였다.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선조가 묻기를 “조신(朝臣)들 중에 누가 학문으로 저명한가?” 하였다. 그 당시 많은 영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므로 실로 거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퇴계는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글을 박람하였고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가졌으니 참으로 달통한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의 수명은 지명(知命)인 50세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학문과 행적의 대요는 문집에 실려 있다. 《시문집(詩文集)》6권과 《주자문록(朱子文錄)》4권,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 《양 선생 왕복서(兩先生往復書)》3권, 《사칠ㆍ이기 왕복서(四七理氣往復書)》 상ㆍ하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 문장은 수식을 일삼지 않고 기력이 웅장하고 법칙이 준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한다. 달통한 선비의 학풍이 생기 있고 약동하여 볼만하였기에 당세의 명사와 후학들의 저술 중에 선생에 관련된 것이 극히 많았으니,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은 선생의 대하(大河)가 흐르는 듯한 문장과 구름을 넘는 듯한 기상을 찬양하였으며, 사암(思庵) 박 문충공(朴文忠公 박순(朴淳)), 택당(澤堂)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식(李植)), 계곡(谿谷) 장 문충공(張文忠公 장유(張維)),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모두들 선생이 이 나라의 대유(大儒)요 세상의 사표(師表)임을 칭송하였다.
배위 정부인 함풍 이씨(咸豐李氏)는 보공장군(保功將軍) 휘(諱) 임(任)의 따님으로 19세에 선생에게 시집와서 선생을 받드는 데 시종 어김이 없었고, 홀로된 25년 동안 자녀들에게 이록을 구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경계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8월 18일에 집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7세였다. 선생의 좌측에 안장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효증(孝曾)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고, 차남 효민(孝閔)은 전력부위 충좌위 부사과(展力副尉忠佐衛副司果)이고, 삼남은 효맹(孝孟)이며, 딸은 울산(蔚山)의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다. 효증은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정헌(廷獻)은 현감이며, 장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낸 한양(漢陽)의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청주(淸州)의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하였다. 효민은 참봉(參奉)의 남원(南原)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영헌(齡獻)이고, 차남은 동헌(東獻)이며, 장녀는 생원(生員)의 고령(高靈) 박동휘(朴東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함양(咸陽)의 여공준(呂貢俊)에게 출가하였다. 효맹은 승지인 광주(光州)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효민과 효맹은 중도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 출가한 딸과 며느리 양씨와 정씨는 적에게 겁박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모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선생의 후예들은 호남(湖南)에서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는데, 문학으로 국가의 원기(元氣)가 되기도 하고 무관으로 국가의 보장(保障)이 되기도 하였다.
선생께서 별세하신 지 7년 되던 해에 호남의 유림들이 고마봉(顧馬峯) 아래에 사우(祠宇)를 지었는데, 효종(孝宗) 5년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되었고, 고종(高宗) 5년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서기 1991년에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에 복원되었다. 아, 길고 아득한 500년 세월 동안 선생의 학덕(學德)은 우리나라에 견줄 이가 없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뛰어난 자질은 / 超詣之資
생이지지에 가까웠도다 / 近於生知
잠심하여 고요히 생각함은 / 沈潛幽思
칠팔 세 아이 적부터였도다 / 自髫齔時
나이 십오 세에 / 志學之年
이미 대성을 기약하였으며 / 已期大成
경학의 뜻과 역사의 관점 / 經義史觀
달통하고 분명하였도다 / 達通分明
격물치지 수신제가의 수양을 / 格致修齊
일신에 두루 갖추었고 / 備於一身
치국평천하의 큰 뜻은 / 治平大志
시종 순일하고 진실하였다 / 始終純眞
조정에서 직임을 맡아서는 / 立朝莅職
그 모습이 훌륭하고 영특하고 / 羽儀俊英
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 經筵侍講
그 논설이 종횡무진하였도다 / 論說縱橫
만조의 신료들은 / 滿朝臣僚
갱장에 뜻이 있었지만 / 意在更張
공의 대본은 / 公之大本
항상 강상을 중히 여기셨으니 / 恒重綱常
어진 이를 추천하고 사악한 이를 물리치며 / 推賢斥邪
극히 공명정대하셨다 / 至正大中
세상에 나갈 때나 물러날 때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 出處語默
한결같이 퇴옹을 준행하였고 / 一遵退翁
서신의 왕복은 / 書信往復
그 정의가 평생 변함이 없었다 / 情誼平生
성리의 학설은 / 性理學說
독보적 발명이었고 / 獨步發明
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변도 / 四七論辯
한편으로는 넓고 한편으로는 치밀하였으니 / 淹博精緻
통유의 풍치와 인격을 / 通儒風標
조야가 모두 우러렀으며 / 朝野仰止
오직 기세사만을 / 惟幾勢死
행신의 대방으로 삼으셨도다 / 行己大方
창졸의 순간이라도 / 造次顚沛
몸가짐과 행실을 엄중하게 지켰으니 / 操履嚴守
사림의 아망은 / 士林雅望
별 중에 북두성과 같았다 / 如星有斗
맹자의 말씀대로 천명을 순하게 받으셨으며 / 順受天命
백세에 향기를 남기셨도다 / 百世遺香

서기 2003년 계미 4월 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學術院會員)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울특별시장 후학(後學) 풍양(豊壤) 조순(趙淳)은 삼가 짓다.

후학 진원(珍原) 박경래(朴景來)는 삼가 번역하다.


 

[주D-001]승당입실(升堂入室) : 실(室)은 방이고 당(堂)은 대청마루이다. 도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뜻한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경지를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於室也〕”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2]생이지지(生而知之) :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애공(哀公)이 정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그 앎에 이르러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하였다. 《中庸章句 第20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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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시에 화답한 선생의 시를 삼가 받고 감사한 나머지 감히 다시 그 운을 써서 우러러 성람을 더럽힙니다. 바로잡아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伏蒙先生俯和鄙韻 感幸之餘 敢復用韻 仰塵盛覽 伏希郢正〕

보잘것없는 내가 외롭게 서 있는데 / 藐予立揭揭
사는 곳 외지고 때마저 늦었네 / 地偏時又晩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하니 더없이 이롭고 / 撫己戒莫益
도를 배우며 사모하니 해롭지 않아라 / 學道慕弗損
풍진 속에 한번 얽매이고 나니 / 風塵一繫縻
일이 처음의 바람과 어긋나 버렸네 / 事與始願反
벼슬길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 竊廩更悠悠
세속 생활 한갓 혼탁하기만 하네 / 處俗徒混混
물욕이 서로 침범하고 능멸하니 / 物慾互侵凌
심신은 매양 싸우고 사나워라 / 身心每鬪狠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기 쉽지 않고 / 覆水不易拾
흐르는 세월은 다시 오기 어려운 법 / 流年難再返
지금 나이 이미 마흔둘인데 / 秖今四十二
몽매한 식견 장애에 막혔네 / 蒙識蔽屛梱
행여 바라는 건 천령에 힘입어 / 惟冀賴天靈
혹시라도 능히 대본을 알았으면 / 或能知大本
선생은 일찍부터 앙모하던 분이신데 / 先生夙所慕
산천에 가로막혀 길이 멀어라 / 隔濶川塗遠
편지를 보내 누차 질의하니 / 憑書屢質疑
바로잡아 깊은 이치 계발해 주셨고 / 演刮啓玄楗
이제와 다행히 만나 뵈오니 / 今來幸承顔
미천한 정성 살펴 이끌어 주셨네 / 提掇鑑微懇
비유하자면 마치 커다란 명경이 / 譬如大明鏡
빠짐없이 사물을 비춤과 같다오 / 照物物莫遁
의사가 계합하니 빙그레 기뻐하고 / 意契莞而懽
지취가 다름은 묵묵히 헤아려 주셨네 / 趣異默相忖
도본을 기술함 몹시 심오하고 / 述圖極深奧
시문을 구사함 갈수록 청아하네 / 摛藻轉淸婉
배를 저어 물을 거슬러 오르려면 / 撑船要上水
바퀴살을 덧대어야 마침내 언덕을 넘으리라 / 員輻終踰阪
아비를 증명한 섭공의 무리가 우습고 / 證父嗤葉黨
임금을 송사한 위나라 원훤은 주륙되었네 / 訟君誅衛咺
호연하게 정기가 가득 차고 / 浩爾正氣充
시원하게 단전이 개간되었네 / 曠然丹田墾
흉금을 갈고 닦기만 할 뿐 / 襟期任切磨
세리에 어찌 매달릴까 보냐 / 勢利寧攀輓
지란은 성대하게 방에 있고 / 芝蘭藹在室
서직은 무성하게 밭에 가득하네
/ 稷黍紛盈畹
행장은 고명 박후를 지켰고 / 行藏葆高厚
잠약은 미물까지도 헤아렸네 / 潛躍攄蟺蜿
공경히 성인이 전한 단서를 생각하니 / 恭惟聖傳緖
천 년 동안 똑같이 곡진하여라 / 千載同繾綣
도가 합하니 원부를 만났고 / 道合遇元夫
벗이 오니 대건을 건넜네 / 朋來濟大蹇
추나라 맹자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했겠는가 / 鄒孟豈好辯
초나라 굴원은 충언을 근심하지 않았다오 / 楚屈休患謇
맹세코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 矢心斃後已
어찌 농부의 북돋는 일일 뿐이겠는가 / 奚啻農夫蔉

학문의 지도리 항상 굴리고자 하고 / 學樞欲恒轉
도의 바퀴 멀리 가기를 생각하네 / 道轄思遠發
성인의 법으로 호유를 열고 / 聖模闢戶牖
현인의 법으로 예월을 닦네 / 賢範修輗軏
마음을 오로지하여 만화를 살펴보니 / 凝心觀萬化
생겨나고 사라짐 잠시도 쉼 없네 / 起滅無少歇
정정하게 묵묵히 스스로 반성한다면 / 定靜默自反
누가 사악함과 이로움에 빠지겠는가 / 誰爲邪利滑
털끝만 한 차이를 살피지 못하면 / 毫釐有不察
간담 같은 사이 초월처럼 벌어지네 / 肝膽如楚越
침 흘리는 교룡과 악어 멋대로 날뛰어 / 垂涎蛟鰐橫
쇠뇌에 화살 걸어 갑자기 쏘아 대듯 하니 / 駭機弓箭伐
끝내 구법이 무너져 버리고 / 終然九法斁
마침내 오행과 더불어 없어지리라 / 竟與五行汨
이러한 이치 어긋나지 않으니 / 此理故靡忒
전전긍긍 삼가 소홀하지 말아야 하네 / 戰兢愼毋忽
차근차근 지키고 기르기를 잘해야 / 循循善持養
장수인 지가 졸도인 기를 다스리네 / 志帥攝氣卒
도의가 다행히 몸에 있으니 / 道義幸在躬
물욕으로 받는 형벌 종식되리 / 物欲息劓刖
담론하며 익히 가르침을 받드니 / 談論飽仰承
학술이 정말이지 밝고도 드높아라 / 學術正昭揭
그만두려 해도 참으로 그만둘 수 없어 / 欲罷亮不能
힘쓰고 힘써 나의 재주를 다하네
/ 勉勉吾才竭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 맹동(孟冬) 18일,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절하고 호현방(好賢坊) 우사(寓舍)에 글을 받들어 올립니다. 선생 좌전(座前).

몸 밖의 무궁한 일 생각지 말고 / 莫思身外無窮事
생전의 유한한 술잔 다 마셔 버리세
/ 且盡生前有限杯
두보의 이 뜻 참으로 맛이 있으니 / 杜子此意眞有味
하물며 가객을 끌고 춘대에 오름에랴 / 況携佳客上春臺

대승(大升) 취초(醉草).

[주C-001]저의……바랍니다 : 이하 5수는 《고봉 선생 유묵》에 수록된 시를 보충해 넣은 것이다. 그중 마지막 2수는 노소재(盧蘇齋) 문중에 소장된 고봉 선생 유묵시를 영인한 것이다.
[주D-001]바퀴살을……넘으리라 : 《시경》〈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네 수레 덧방나무를 버리지 말아 네 바퀴살에 덧대고 자주 네 마부를 돌아보면, 네 짐을 떨어뜨리지 않고서 마침내 몹시 험악한 곳을 넘어감이 일찍이 예상 외로 수월하리라.〔無棄爾輔 員于爾輻 屢顧爾僕 不輸爾載 終踰絶險 曾是不意〕” 하였다.
[주D-002]아비를……우습고 : 섭공(葉公)은 초나라 섭현(葉縣)의 윤(尹)인 심제량(沈諸梁)으로, 참람하게 공(公)이라 일컬었다. 《논어》〈자로(子路)〉에 섭공이 공자에게 “우리 무리에 몸을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하니, 공자께서 “우리 무리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하였다.
[주D-003]임금을……주륙되었네 : 원훤(元咺)은 위(衛)나라 대부(大夫)로, 자기 임금인 성공(成公)을 공격하여 망명하게 하였고, 숙무(叔武)를 죽인 일로 진 문공(晉文公)에게 소송을 제기한 끝에 진나라에서 성공을 붙잡아 주(周)나라 경사(京師)로 보내 밀실(密室)에 가두게 하였는데, 뒤에 성공이 귀국하여 다시 임금이 되자 바로 복주(伏誅)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28年》
[주D-004]지란(芝蘭)은……가득하네 : 지란과 서직(黍稷)은 모두 퇴계의 인품과 덕망을 비유한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 하였다. 서직은 종묘의 제사에 올리는 제수(祭需)이다.
[주D-005]행장(行藏)은……지켰고 : 행(行)은 세상에 나와 도를 행하는 것이며, 장(藏)은 초야에 은둔하는 것으로, 《논어》〈술이(述而)〉에 “쓰이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 한 데서 유래하였다. 고명(高明)ㆍ박후(博厚)는 지성(至誠)의 덕(德)이 밖으로 드러남을 형용한 말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6장에 “징험이 나타나면 유원하고, 유원하면 박후하고, 박후하면 고명하다.〔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퇴계의 출처가 도리에 맞음을 비유하였다.
[주D-006]잠약(潛躍)은 미물까지도 헤아렸네 : 《중용장구》에 “《시경》에서 ‘솔개는 하늘 높이 날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퇴계가 드러난 이치를 밝게 분변하여 체득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7]원부(元夫) : 《주역》〈규괘(睽卦)〉에 “구사는 규에 외로워 원부를 만나 서로 믿으니,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九四 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하였다. 선사(善士)와 같은 말이다.
[주D-008]대건(大蹇) : 《주역》〈건괘(蹇卦)〉에 “구오는 크게 어려우매 벗이 오도다.〔九五 大蹇朋來〕” 하였다.
[주D-009]추(鄒)나라……좋아했겠는가 :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도자(公都子)가 묻기를 “외인들이 모두 부자더러 변론하기를 좋아한다고 칭하니, 감히 묻겠습니다. 어째서입니까?〔外人皆稱夫子好辯 敢問何也〕”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 부득이해서이다. 천하에 인간이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하였다.〔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 하였다.
[주D-010]초나라……않았다오 : 《초사》〈이소(離騷)〉에 “내 진실로 충언(忠言)이 근심이 될 줄 알지만, 차마 그만둘 수 없노라.〔余固知謇謇之爲患兮 忍而不能舍也〕” 하였다.
[주D-011]죽은……것이니 : 《예기》〈표기(表記)〉에 “전심하여 날마다 힘쓰고 힘쓰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俛焉日有孶孶 斃而后已〕” 하였다. 또 《논어》〈태백(泰伯)〉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막중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또한 멀지 않은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하였다.
[주D-012]농부의 북돋는 일 : 《춘추좌씨전》〈소공 원년(昭公元年)〉에 “비유하자면 농부가 김매고 북돋아서 비록 기근이 들더라도 풍년을 기필하는 것과 같다.〔譬如農夫 是穮是蔉 雖有饑饉 必有豐年〕” 하였다.
[주D-013]호유(戶牖) : 봉호옹유(蓬戶甕牖)의 준말로, 선비의 거처를 형용한 말이다. 《예기》〈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담장과 환도의 실에다 대를 쪼개어 엮은 문을 달고 문 옆에 작은 문을 내며, 쑥대로 엮은 출입문과 옹기로 들창을 달고, 옷은 번갈아 입고 나오고 이틀에 하루치의 음식을 먹는다.〔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 易衣而出 幷日而食〕” 하였다.
[주D-014]예월(輗軏) : 예는 멍에 끝에 가로지른 나무이고 월은 멍에 끝에 위로 구부러진 부분으로, 신실(信實)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위정(爲政)〉에 “사람으로서 신실함이 없으면 그 가함을 알지 못하겠다. 큰 수레에 수레채마구리가 없고 작은 수레에 멍에막이가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는가.〔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하였다.
[주D-015]정정(定靜) : 《대학장구(大學章句)》에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한 뒤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 얻을 수 있다.〔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라고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지(止)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니 바로 지선(至善)이 있는 곳이다. 이것을 안다면 뜻이 정(定)한 방향이 있을 것이다. 정(靜)은 마음이 망녕되이 동(動)하지 않음을 이르고, 안(安)은 처한 바에 편안함을 이르고, 려(慮)는 일을 처리하기를 정밀하고 상세히 함을 이르고, 득(得)은 그 그칠 바를 얻음을 이른다.” 하였다.
[주D-016]구법(九法)이 무너져 버리고 : 구법은 《서경》〈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가리킨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으로, 곧 오행(五行)ㆍ오사(五事)ㆍ팔정(八政)ㆍ오기(五紀)ㆍ황극(皇極)ㆍ삼덕(三德)ㆍ계의(稽疑)ㆍ서징(庶徵)ㆍ오복(五福)이다. 한유(韓愈)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양주와 묵적이 서로 어지럽히매 성현의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성현의 도가 밝지 못하면 삼강이 매몰되고 구법이 무너지며 예악이 무너지고 이적이 횡행할 것이니, 어찌 금수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楊墨交亂而聖賢之道不明 聖賢之道不明 則三綱淪而九法斁 禮樂崩而夷狄橫 幾何其不爲禽獸也〕”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17]장수인……다스리네 :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지는 기의 장수요, 기는 몸에 꽉 차 있는 것이니, 지가 최고요, 기가 그 다음이다.〔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지는 진실로 마음의 가는 바이어서 기의 장수가 된다. 그러나 기는 또한 사람의 몸에 충만해 있어서 지의 졸도가 되는 것이다.〔志固心之所之而爲氣之將帥 然氣亦人之所以充滿於身而爲志之卒徒者也〕” 하였다.
[주D-018]그만두려……다하네 : 《논어》〈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공자의 도에 대해 탄식하여 이르기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마치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를 따르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하였다.
[주D-019]몸 밖의……버리세 : 이 두 구절은 두보(杜甫)의 시 〈절구만흥(絕句漫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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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
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
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
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
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
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
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
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
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
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
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
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
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
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
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
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
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
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
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
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
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

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논사록 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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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제문(致祭文)


효종대왕(孝宗大王) 을미년(1655, 효종6) 4월 을묘삭(乙卯朔) 2일에 신 예조 좌랑 원격(元格)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의 영령에 유제(諭祭)하였다.

영령이여 / 惟靈
하늘의 뛰어난 기운을 얻어 / 得天間氣
세상의 명유가 되었네 / 爲世名儒
정제한 금 윤택한 옥과 같으며 / 精金潤玉
물속의 달 얼음 호로와 같았네
/ 水月氷壺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 訓襲家庭
정주학을 연구하였네 / 學則程朱
기운은 한 세상을 덮고 / 氣蓋一世
이치는 만 가지 현상계를 꿰뚫었네 / 理透萬殊
이미 널리 배우고 예(禮)로 요약해서 / 旣博而約
체와 용이 구비되었네 / 體用之俱
탁월하게 높은 식견은 / 卓見高識
호로에 의지하지 않았네 / 不依葫蘆
일찍이 스스로 조예가 뛰어나 / 早自超詣
여러 어리석은 사람들을 계도하였네 / 爰啓羣愚
문정공 이후로는 / 文正之後
도가 날로 황폐해졌는데 / 道日榛蕪
도산이 뒤를 이어 선창하니 / 陶山繼倡
진정 그루터기가 되었네 / 寔爲根株
경이 실로 좌우에서 / 卿實左右
부축하여 정도를 이으니 / 接軔正途
사우가 의탁함은 / 師友之托
북에 북채가 있는 것과 같았고 / 若皷於桴
성리학의 분변은 / 性理之辨
여합부절하듯 합하였네 / 若契之符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으니 / 德必有隣
사문이 고단하지 않았네 / 斯文不孤
독에 넣어둔 보배로 / 韞櫝之寶
나라를 혼미하게 하지 않고 세상에 내놓아 / 不迷而沽
출처와 행장을 / 出處行藏
오직 의에 따라 하였네 / 惟義之趨
평소의 행동이 더욱 곧으니 / 素履彌貞
영고성쇠에 변하지 않았네 / 不替榮枯
귀전암이라 이름 붙였으니 / 歸全揭菴
석인이 즐기는 곳이었네 / 碩人之娛
깊이 생각하고 완미하여 / 覃思玩索
심오한 도의 경지 맛보았네 / 味道之腴
성조가 나오시니 / 聖祖龍興
어진 인재와 준걸들이 많고 많았네 / 賢俊于于
선류(善類)들이 대거 등용되어 / 拔茅彙征
청운의 길에서 함께 드날렸네 / 羽儀亨衢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천 년 만에 만나 / 明良千載
요순 시대를 도야하려 하였네 / 陶鑄唐虞
엄한 풍도로 스스로를 지키고 / 風裁自持
정론을 부지하였네 / 正論是扶
금고된 이와 억울한 이들 신원하느라 / 錮冤得伸
경은 때로 청포(靑蒲)에 엎드렸네 / 卿時伏蒲
경전을 인용하고 예를 정하여 / 引經定禮
검소하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하였으니 / 弗儉弗踰
당나라 때의 태산북두요 / 唐家山斗
한나라 조정의 모범이었네 / 漢朝楷模
남은 여사로 익힌 문장은 / 餘事文章
전모로부터 얻었네 / 得自典謨
초창하고 윤색하여 / 草創潤色
국가의 무함을 깨끗이 씻었네
/ 昭雪國誣
치도를 아름답게 꾸며 / 賁飾治道
훌륭하게 세상에 쓰였네 / 蔚爲時需
경연에서 유익한 말을 아뢰어 / 登筵啓沃
군주에게 인정을 받았네 / 曰都曰兪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은 / 微辭奧旨
한 치 한 푼을 분석했는데 / 剖析錙銖
혹은 이것을 책에 저술하고 / 或著於篇
혹은 도식을 만들었으며 / 或爲之圖
혹은 군주의 앞에서 진언하니 / 或陳於前
정성이 지극하여 믿음을 받았네 / 誠則有孚
책임은 경세제민을 맡았으나 / 任重經濟
마음은 강호에 있었네 / 心在江湖
남쪽 지방을 가다가 절반도 못 가서 / 南征未半
병이 들어 깨어나지 못했네 / 有疾莫蘇
의원을 보내 문병하였으나 미치지 못한 채 / 醫問靡及
철인이 영원히 가 버렸네 / 哲人長徂
큰 집에 대들보가 무너지고 / 樑摧厦屋
하늘의 추성이 꺾이었네 / 星折天樞
하늘은 어찌 이리도 빨리 빼앗아 갔는가 / 奪之何速
지금은 훌륭한 인재가 없도다 / 今也則無
시행을 끝까지 못하였으니 / 厥施未究
천운인 걸 어찌할 건가 / 奈如天乎
애통함이 더욱 깊으니 / 震痛冞增
은혜를 내리는 왕명이 더욱 지극해라 / 恩綸渙敷
능연각에 얼굴을 그리니 / 凌煙追繪
구천에도 영광이 있네 / 有賁泉塗
공로는 종묘에 남아 있고 / 功在宗祊
교화는 생도들에게 미쳤어라 / 化及生徒
부족한 내가 뒤를 이어 즉위하니 / 眇予嗣服
시대는 다르나 서글픈 탄식이 일어나네 / 曠世興吁
한 시대에 같이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우니 / 恨不同時
잠시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 可忘斯須
《논사록》이 남아 있으니 / 論思有錄
마땅히 이것을 좌우에 두고 보리 / 宜置座隅
울창한 저 아름다운 산소에는 / 薈彼佳兆
산골짜기 좌우로 감돌고 있으며 / 山谷盤紆
고반하던 유허에는 / 考槃之墟
아직도 남은 향기 변치 않고 있네 / 遺芳不渝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영령을 모시니 / 建宇妥靈
많은 선비들의 소원이었네 / 多士之諏
선비들이 이곳에서 수학하며 / 藏修有所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게 되었네 / 浴沂風雩
길일을 택하여 봉안식을 올리고 / 涓吉揭虔
맑은 술잔을 올리오니 / 式奠淸酤
신은 이것을 흠향하고 / 神其歆此
길이 이 구역에서 편안히 계시구려 / 永安斯區


 

[주C-001]치제문(致祭文) : 이하 《논사록》 상권ㆍ하권을 제외한 글들은 1970년에 행주기씨(幸州奇氏) 중종(中宗)에서 고봉의 15대손 영환(永桓), 형섭(亨燮), 세훈(世勳) 등의 주도로 간행한 석인본에 실려 있는 것을 보충해 넣은 것이다.
[주D-001]정제한……같았네 : 고봉의 고결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참고로 등적(鄧迪)이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아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빙호추월은 얼음으로 된 호로병에 맑은 가을 달이 담겼다는 뜻이다. 《宋史 卷428 李侗列傳》
[주D-002]널리……요약해서 : 공자가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한 데서 온 말로, 글을 통하여 지식을 넓히고 예를 통해서 행동을 검속한다는 뜻이다. 《論語 雍也》
[주D-003]호로(葫蘆)에 의지하지 않았네 : 옛사람을 모방하지 않고 새로운 생각을 창안해 냄을 이른다. 송 태조(宋太祖)가 한림 학사(韓林學士) 도곡(陶穀)을 조롱하기를, “듣건대 한림학사는 제서(制書)를 초할 때 옛사람의 작품을 베껴 가며 조금씩 말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는 바로 세속에서 이른 바 ‘조롱박 모양만을 본떠서 그려 낸다.〔此乃俗所謂依様畫葫蘆耳〕’는 것일 따름이니, 힘쓴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東軒筆錄 卷1》
[주D-004]문정공(文正公) : 조광조(趙光祖)의 시호이다.
[주D-005]귀전암(歸全菴) : 1570년에 고봉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지은 작은 암자이다. 귀전(歸全)은 자식이 부모가 남겨 주신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죽는다는 뜻으로, 증자(曾子)의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보전하고 돌아가야 한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D-006]석인(碩人)이 즐기는 곳이었네 : 석인은 현자(賢者)를 뜻한다. 《시경(詩經)》〈위풍(衛風) 고반(考槃)〉에 현자의 은거를 찬미하여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현자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하였다.
[주D-007]청포(靑蒲)에 엎드렸네 : 청포는 천자의 내정(內庭)에 푸른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곳으로 황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한 원제(漢元帝)가 병이 들었을 때 부 소의(傅昭儀)와 그 소생인 정도왕(定陶王)은 늘 좌우에서 모시고 황후와 태자는 가끔 찾아뵙자 원제가 태자를 폐위하고 정도왕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사단(史丹)이 직접 와내(臥內)로 들어가 청포 위에 엎드려 울면서 태자를 폐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하였다. 《漢書 卷82 史丹傳》 여기서는 고봉이 간관으로서 직언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8]전모(典謨)로부터 얻었네 : 전은 《서경》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며, 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 등의 편을 가리킨다.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논한 글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9]초창(草創)하고……씻었네 : 초창은 초고(草稿)를 쓰는 것이며, 윤색은 윤문(潤文)을 가리킨다. 고봉이 이태조(李太祖)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며 고려의 네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기록된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의 내용을 고쳐줄 것을 명나라 황제에게 주청하는 글을 지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10]능연각(凌煙閣) : 당나라 때 공신들의 화상(畫像)을 보관하던 곳이다. 태종(太宗)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 정관(貞觀) 17년(643) 장손무기(長孫無忌) 등 24명의 공신을 그린 화상을 이곳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후로 공신들의 화상을 보관해 두는 곳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주D-011]기수(沂水)에서……되었네 :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며, 무우(舞雩)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슬(瑟)을 울리다 말고,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고 시 읊으면서 돌아오겠다.” 하였다. 《論語 先進》 여기서는 선비들이 고봉의 교화를 입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논사록 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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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제문


정종대왕(正宗大王) 무신년(1788, 정조12) 4월 11일에 신 예조 좌랑 박흥복(朴興福)을 보내어 고(故) 승지 기대승의 영령에 유제(諭祭)하였다.

명종과 선조의 태평성세에 / 明宣盛際
여러 현인들이 울흥하였네 / 衆賢蔚興
퇴계와 율곡에게 / 維退曁栗
많이들 찾아가 고증했는데 / 于于就徵
경은 당시에 / 卿於是時
명성과 덕망이 함께 올라갔네 / 名德同升
천품이 크게 뛰어나고 / 天姿絶人
영기는 세상을 덮었어라 / 英氣蓋世
이와 기의 원류와 / 源流理氣
전례의 상과 변에 대하여 / 常變典禮
명쾌하게 분석하니 / 劈析明快
선배들도 존경하였네 / 先輩所畏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니 / 正色立朝
군왕의 외척들이 숨을 죽였네 / 戚畹屛息
태평성세를 만나 / 際遇明明
행하고 그침을 여유 있게 하였네 / 行止綽綽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 卷以南歸
명망과 절개가 더욱 드높았네 / 名節逾卓
내가 그의 유서를 읽으니 / 予讀遺書
그 이름이 《논사록》이었네 / 其名論思
사관이 모아서 기록한 것을 / 起注所裒
성조께서 명명하셨네 / 聖祖命之
훌륭한 그 말씀이여 / 旨哉攸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 燭跋頻剪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 / 擊節三四
시대는 다르나 감동되니 / 曠世相感
내 그리움은 더욱 두텁네 / 予懷冞摯
이는 실로 정신으로 사귀는 것이니 / 實維神交
어찌 옛날과 지금의 간격이 있을쏜가 / 豈間今古
그 풍치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 風韻未沫
저 호남을 돌아보네 / 睠彼湖鄕
선생의 사당 우뚝 솟아 있으니 / 祠屋巋然
그 덕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어라 / 山高水長
관원을 보내어 술잔을 올리니 / 伻官致酌
영령은 오시어 흠향하소서 / 靈其來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