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중봉 조헌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시장(諡狀)

아베베1 2013. 12. 2. 14:15

 

 

 

 신독재전서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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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諡狀)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시장(諡狀)


선생은 휘가 헌(憲)이고 자가 여식(汝式)이며 성이 조씨(趙氏)이고 관향이 배천(白川)인데, 학자들이 중봉 선생(重峯先生)이라고 칭하였다.
고려조 때 휘 문주(文胄)라는 분은 관직이 병부 상서(兵部尙書)였는데, 원(元)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소요를 일으켜 본국을 침해하는 유병(留兵)을 철수해 줄 것을 주청하였으므로, 당시 평판이 좋았다. 몇 대를 지나 휘 천주(天柱)라는 분은 원수(元帥)의 신분으로 홍건적(紅巾賊)을 방어하다가 안주(安州)에서 전사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휘 환(環)은 숨은 덕행(德行)이 있었는데, 세종(世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그의 최종 관직은 나주 목사(羅州牧使)이며, 선생에게는 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황(璜)이고, 조의 휘는 세우(世佑)이며, 고(考)의 휘는 응지(應祉)인데, 다 벼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는 선생의 공훈(功勳)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용성 차씨(龍城車氏)로 휘 순달(順達)의 따님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 39)에 태어났는데, 기국과 도량이 남달리 장중하였다. 나이 겨우 4, 5세 때에 또래 아이들과 임정(林亭)에 모여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고관(高官)이 호창(呼唱)을 하면서 그 아래로 지나가자 다른 아이들은 모두 구경을 하는데 선생만은 그대로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고관이 말에서 내려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이 아이는 훗날 틀림없이 큰 그릇이 될 것이다.” 하였다. 10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어른과 마찬가지로 슬픔을 다하여 상제를 마쳤다. 다 자라서는 경사(經史)에 몰두한 나머지 먹고 자는 것조차 잊었으며, 진지(眞知)와 실천(實踐)을 공부함에 옛날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았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인 무진년에 정주 교수(定州敎授)에 제수되어 교육에 힘쓴 결과 사풍(士風)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얼마 후 파주 교수(坡州敎授)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을 찾아 배움을 청하니, 성 선생은 선생의 학문의 깊이를 알아보고 외우(畏友)로 칭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 5)에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구례(舊例)에 교서관 관원은 향실(香室)을 관장하면서 불사(佛事)에 쓰기 위해 들여온 향을 반드시 직접 봉(封)하게 되어 있었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입으로는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손으로는 불사에 쓸 향을 봉하는 것을 신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강직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선생은 그 길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찾아뵙고 이어 서공 기(徐公起)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조용히 학문을 강마하여 학업이 날로 정진되었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저작(著作)에 오르고, 갑술년(1574, 선조 7)에는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성묘(聖廟)의 위차(位次)에 관한 질문을 예부(禮部)에 올렸다. 그 내용의 대략에,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주회암(朱晦庵)은 그 공로가 맹씨(孟氏)보다 못하지 않은데도 배향(配享)의 서열에 오르지 못하였고, 양귀산(楊龜山)은 정자(程子) 문하의 훌륭한 제자였는데 양귀산을 사숙(私淑)한 장남헌(張南軒)이 도리어 양귀산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나예장(羅豫章)은 장엄하고 의연하며 청고하고 도체(道體)에도 훤히 통하여 주자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칭찬하였고, 이연평(李延平)은 나예장을 사사하여 그의 전통을 혼자서 이어받았습니다. 주자를 창주(滄洲)에 종사(從祀)할 때 오성(五聖) 육군자(六君子)의 다음 자리에 위차를 정했는데, 지금 두 분이 모두 종사의 위차에서 빠져 있는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육상산(陸象山)은 지조가 있고 엄격하고 질박하며 차분하고 욕심이 적어 존경할 만한 점이 없지 않지만, 굳이 양지(良知)만을 고집하고 또 앉아서 돈오(頓悟) 공부에 집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도(道)가 막히게 한 죄는 어찌 보면 순자(荀子)나 양자(楊子)보다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빼버리고 이 사람을 올려놓은 데 대해 어떠한 설명이 가능합니까? 그리고 여동래(呂東萊)는 주자와 함께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였고, 진서산(眞西山)은 듣고서 안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시대적으로도 앞뒤의 차이가 있는데, 여동래의 위차를 진서산의 아래에 둔 것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주자가 일찍이 황직경(黃直卿)을 두고 말하기를, ‘오도(吾道)를 의탁할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나는 유감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주자가 죽은 뒤에 그가 행장(行狀)을 쓰고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이어서 편집하였으니, 스승의 깊은 뜻에 충분히 들어맞았음을 알 수 있으며, ‘자양(紫陽)의 바른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한 동씨(董氏)의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공부하여 똑같이 훌륭하게 된 구봉(九峯)과 함께 종사의 대열에 참여되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하였는데, 그곳 예부의 사람들이 논란을 주고받으며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선생이 중국의 훌륭한 문물(文物)을 눈여겨보고는 감개하여 우리나라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서 조정에 돌아와 당장 시행해야 할 8개 사항을 조목별로 분류하여 올렸는데, 성묘배향(聖廟配享), 내외서관(內外庶官), 귀천의관(貴賤衣冠), 연음식품(宴飮食品), 사부읍양(士夫揖讓), 사생접례(師生接禮), 향려습속(鄕閭習俗), 군사기율(軍師紀律)이 그것이었다. 선생이 성묘(聖廟)의 제도를 논하여 이르기를,
“신이 삼가 살피건대, 왕망(王莽)이 공자(孔子)를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 칭하였고,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또 선왕(宣王)이라 시호하면서 안자(顔子) 이하도 모두 공(公)ㆍ후(侯)ㆍ백(伯)으로 칭하였습니다. 이른바 공이라 칭하고 왕이라 칭한 것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도리에 모두 어긋나는데, 가신(家臣)을 둔 것을 속임수를 썼다고 책망했던 공자나 임종 때에도 대부(大夫)의 자리라 하여 바꾸라고 했던 증자(曾子) 같은 분들이 이런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황제(皇帝)라고 자칭하면서 자기 신하들에게 내리는 봉호를 억지로 성현들에게 내린다는 것은 성인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嘉靖) 10년(1531, 중종 26)에 태학사(太學士) 장부경(張孚敬)의 말에 따라 ‘지성선사공자(至聖先師孔子)’로 고쳐 쓰고, 안자(顔子) 이하도 모두 작위 이름을 지웠으며, 사당의 액호도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지 않고 선성묘(先聖廟)라 하여 그동안 실시해 온 잘못을 완전히 바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저속한 옛 제도를 답습하고 있으니, 당연히 논의를 거쳐 고쳐야 할 듯합니다.
신이 또 살피건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모시고 종사(從祀)하는 것은 성문(聖門)에 공이 있음을 보답하는 한편 후학들에게 추향(趨向)할 수 있도록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진염(秦冉)과 안하(顔何)에 대해서는 상고할 길이 없고 임방(林放)과 거원(蘧瑗)은 승당(升堂)할 수준이 아니며, 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정현(鄭玄)ㆍ복건(服虔)ㆍ범영(范寗)도 순수한 유자가 아니라 하여 사당에 모시고 종사하는 대열에서 제외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방의 예(禮)를 좋아했던 면과 거원의 허물 적은 면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정중 이하 여러 사람도 경문(經文)을 보익한 공로를 기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각각 자기 고을에서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공백료(公伯寮)는 성인의 문하에서 배웠는데도 도리어 공자의 도(道)에 해를 끼치려고 하였고, 순황(荀況)은 성악(性惡)을 주장하면서 자사(子思)와 맹자(孟子)가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하였으며, 대성(戴聖)은 탐오(貪汚)로 몸을 더럽힌 자이고, 유향(劉向)은 신선을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가규(賈逵)는 참위설(讖緯說)을 부회(傅會)하였습니다. 마융(馬融)은 양기(梁冀)를 위해 조서를 초안하여 이고(李固)를 죽였고, 하휴(何休)는 《춘추(春秋)》를 풀이하면서 주(周) 나라를 접어두고 노(魯) 나라를 왕통으로 삼았으며, 왕필(王弼)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종지(宗旨)로 삼았고, 왕숙(王肅)은 사마소(司馬昭)의 위(魏) 나라 찬탈을 도왔으며, 두예(杜預)는 관리로서도 청렴하지 못하고 장군으로서도 정의롭지 못하였으며, 오징(吳澄)은 출처(出處)가 바르지 못하고 학문까지도 선(禪)에 빠져 있었으니, 이들은 당연히 유자(儒者)의 반열에서 내쳐져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단호히 고쳤던 것인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들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니 아마도 논의하여 퇴출시켜야 하겠습니다. 후창(后蒼)이 처음으로 예서(禮書)에 주석을 낸 뒤로 《대대례(大戴禮)》와 《소대례(小戴禮)》가 이에 힘입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고, 왕통(王通)은 그 학문이 정통에 가까워 순경(荀卿)과 양주(楊朱)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격언을 남겼습니다. 구양수(歐陽脩)는 성도(聖道)를 붙잡아 세우고 이단(異端)을 물리쳤으므로 주자(朱子)가 인의(仁義)의 사람이라고 일컬었고, 호원(胡瑗)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닦아 맨 먼저 수(隋)ㆍ당(唐) 이래 이해만 추구하던 습속을 씻어 냈으며, 양시(楊時)는 정자의 학통을 이어받아 아래로 나예장ㆍ이연평을 거쳐 학맥을 주자에게로 전해 주었고, 설선(薛瑄)은 끊어진 학맥에 대해 분발하여 돈독한 뜻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홍치(弘治) 때 양시를 배향하고, 가정(嘉靖) 연간에는 구양수, 호원, 설선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강구하여 그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만 육구연(陸九淵)은 강문(講問) 위주의 학문이 아니고 오로지 돈오(頓悟)에만 힘썼으므로 주자는 그의 학설이 해가 되는 점을 걱정했는데, 점점 전해 내려오면서 모두 선학(禪學)으로 귀착되고 말았으며, 왕수인(王守仁) 같은 사람은 감히 엉뚱한 이론을 내세워 주자를 헐뜯었는데도 오히려 그들까지 종사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들에 대하여는 굳이 본받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은 또 성묘(聖廟)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는 북쪽에 있고, 선현(先賢)인 안무요(顔無繇)와 공리(孔鯉)는 동쪽에 있고, 증석(曾晳)과 맹손(孟孫)은 서쪽에 있었습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또 선유(先儒)인 정향(程珦)과 주송(朱松)과 채원정(蔡元定)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윤리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에서 아버지가 아들 아래에 있다면 정리(情理)로 보아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종 황제가 비로소 별묘(別廟)를 만들고 봄가을 석전(釋奠) 때면 동시에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아들이 비록 총명하고 명철할지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로 보아 이때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논의해 별묘를 세워 봄가을로 함께 제사를 모신다면 아마도 윤리가 바로 서고 온 나라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자기 위치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대체로 선생은 중국과 문화를 같이하자는 데 뜻이 있어 풍습이 점점 옛 도를 회복하기를 바랐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수선(首善)의 전당인 성묘에 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당시 주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은 또 한 통의 상소문을 초안하고 16개 조항을 갖추어 나열하였는데, 그 내용은 모두가 중국 조정에서 행한 본보기가 될 만한 착한 행실과 아름다운 정사였으나 결국 써놓고 올리지는 않았다. 얼마 후 박사(博士)로 옮겼다가 호조와 예조의 좌랑(佐郞),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겨울에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다. 부임한 후에 모든 민폐를 제거하는 데 주력하니, 관리들은 무서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여겼다. 얼마 후 내노(內奴)를 곤장을 쳐 죽인 일로 부평(富平)으로 유배되었다. 무인년(1578, 선조 11)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선생의 집이 김포(金浦)에 있었으므로 정배지 부평과는 수십 리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감히 분상(奔喪)하지 못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경진년(1580, 선조 13)에 풀려나와 그해 여름에는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으로 율곡 선생(栗谷先生)을 찾아가 몇 달 머물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돌아왔다.
신사년(1581, 선조 14) 봄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나갔는데, 상소하여 연산조(燕山朝) 때 부과된 공안(貢案)을 혁파할 것을 청하니, 주상이 선뜻 받아들였다. 얼마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본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에 선생은 최영경(崔永慶), 이발(李潑), 김우옹(金宇顒) 등과 잘 지내던 터라 그들의 말을 자못 믿고서 송강을 소인배로 여겨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송강이 굳이 선생을 만나자고 하여 이르기를,
“듣자니 공이 나를 소인배로 여겨 떠나려고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하니, 선생이 그렇다고 하자, 송강이 이르기를,
“공과 나는 평소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그런 줄을 알겠는가. 머물면서 함께 일을 해보고 참으로 소인임이 확인되면 그때 떠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네.”
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떠났다. 그 후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이 되돌아가도록 권하여 다시 왔는데, 함께 생활하면 할수록 둘 사이의 교분이 매우 두터워졌다. 선생이 이르기를,
“제가 처음에 남의 말을 잘못 듣고서 하마터면 공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사론(士論)이 분열되고 조짐이 좋지 않자, 선생이 시를 지어 율곡에게 바쳤는데, “소인과 군자는 원래 어울리기 어려운 법인데, 군자의 도가 점점 사라져 없어질 모양이요.[氷炭元難合 陽道恐漸消]”라는 구절이 있었다.
임오년(1582, 선조 15)에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제수받았다가 계모(繼母) 봉양을 위해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는데, 상소하여 민간의 질고(疾苦)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정책에 관해 극론하고, 또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의 후사를 둘 것, 사육신(死六臣)을 정표(旌表)할 것, 법도를 넘는 왕자(王子)들의 호화 저택을 금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 16) 가을에 이공 산보(李公山甫)가 경차관(敬差官)으로 호서(湖西)에 갔다가 돌아오자 주상이 여러 고을의 치적을 물었는데, 이산보는 선생의 치적이 전 도내에서 으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해 겨울에 정언(正言) 송순(宋諄)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선생을 파직할 것을 청했으나, 주상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가 이듬해인 갑신년에 마침내 논하여 파직하였다. 몇 해 전부터 뭇 소인배들이 날로 불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율곡을 중상모략하기 위하여 흉악한 술책을 부렸으나, 다행히도 선묘(宣廟)가 명철하여 저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율곡이 세상을 뜨자 당의(黨議)는 더욱 격렬해지고 조정 내부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서울 근처에 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물러나 옥천(沃川) 안읍현(安邑縣)에 있는 마을로 가 우거하였다. 이곳에서 자연 풍경을 친애하여 날마다 그곳을 거닐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는 선비들과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밭에 나가 하인들에게 농사일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 19)에 공주 교수(公州敎授)에 임명되어 소속 학교들을 지휘 감독하고 많은 몽학들을 깨우치면서 조약(條約)을 엄하게 정하여 솔선수범하니, 원근에서 책을 지고 몰려든 자가 매우 많았다. 선생은 조정의 공론이 날이 갈수록 괴리되는 것을 목격하고 또 사우(師友)가 무함받는 것을 원통하게 여긴 나머지 드디어 상소하여 우계와 율곡의 충현(忠賢)을 극력 진달하고 당시 소인배들의 간사한 점을 통렬히 지적하였으되 주상이 느끼고 깨닫기를 바라는 뜻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다 썼다. 그러나 소가 올라간 지 열흘이 되어도 비답이 내리지 않자 선생이 또 피를 짜내는 심정으로 다시 상소하여 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내용으로 사정(邪正)의 구분에 관해 논변하였다. 이때 옥당(玉堂)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주상은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해년(1587, 선조 20)에 또 만언소(萬言疏)를 쓰면서 정여립(鄭汝立)의 흉악상을 유궁(有窮) 나라의 군주 예(羿)와 한착(寒浞)에게 비유하여 논하였으나, 방백(方伯)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축문을 써서 선성(先聖)께 하직을 고한 뒤에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 옥천의 농삿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두문불출하고 강독하면서 일생을 마치려는 듯이 보였다.
그때 왜추(倭酋) 평수길(平秀吉)이 자기 임금 원씨(源氏)를 시해하고 이어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를 엿보게 하자, 온 조정이 겁에 질려 아무도 감히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한 자가 없었다. 이에 선생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상소를 초안했는데 그 대략에,
“역대의 교린(交隣)에서 처음에 서툴게 했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가 현저히 많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일본 사신은 무슨 명목으로 왔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마치 노(魯) 나라 계평자(季平子)가 소공(昭公)을 내쫓고 나서 제(齊) 나라와 화해를 이루려고 했던 경우나 진(晉) 나라 사마소(司馬昭)가 위주(魏主)를 시해하고 오(吳)와 촉(蜀)을 상대로 위엄을 보이려 했던 경우와 같은 데 불과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반드시 그간의 사항을 따져 묻고 나서 그들의 죄를 성토하고 절교를 선언하여야만 비로소 그들 마음속에 의리를 앞세워 싸웠던 제(齊) 나라 환공(桓公)과 진(晉) 나라 문공(文公)의 혼을 심어주게 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노중련(魯仲連)이나 송(宋) 나라 때 호전(胡銓)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항의하고 극언하여 진(秦) 나라를 황제로 모시자는 신원연(新垣衍)의 주장을 꺾었을 것이고 금(金) 나라로 가는 왕륜(王倫)의 행차를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날 동안 귀 기울여 봐도 의리를 앞세워 절교를 선언하자는 말이 들려오지 않으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대신(大臣)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가령 신왕(新王)은 공적이 두드러지고 구주(舊主)는 폐출되어야 마땅하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는 것처럼 그들이 다시 동황(東皇)이라고 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서계(書契) 속의 위호(僞號)를 삭제하도록 한 뒤에 관문을 열어 주고 왕래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한 가지 일만으로도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霸道)를 안정시키게 될 것입니다. 당당한 큰 나라에 열성조의 덕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진보(鎭堡)도 별처럼 벌여 있고 문교(文敎)도 수시로 베풀어지고 있으므로, 안으로는 불교(佛敎)에 의해 국력이 소모되고 밖으로는 오랑캐나 왜적들에 의해 국력을 소모했던 고려조와는 다릅니다. 그런데도 고려에 비하면 국가 향년(享年)이 아직 절반도 채 안 된 이 시점에서 벌써부터 고려조가 겪었던 쇠약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그동안 나랏일을 경영해 온 자들의 죄가 하늘에까지 통하여 회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그러나 당시 감사(監司)가 이를 주상께 올리려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선생은 한 통의 상소문을 다시 쓰고 전에 올리지 못했던 두 통의 상소문도 같이 가지고 도보로 대궐까지 나아가 직접 올렸다. 새로 작성한 상소문의 대략에, “부득이 왜국과 통호(通好)해야 한다면 아래 3개 사항을 약정한 뒤에 허락하소서. 첫째 천정(天定)이란 참람한 연호를 빨리 지우도록 할 것이요, 둘째 고기잡이하거나 나무하다가 끌려간 우리 백성들과 길을 인도하다가 도리어 나라를 배반한 사람들을 돌려보내도록 할 것이요, 셋째 세폐(歲幣)의 수량을 감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이산해(李山海)에게 나라를 그르친 죄를 물어 퇴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논하였지만,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선생이 우거하는 곳이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그 집의 주인까지 조사하여 치죄하였기 때문에, 친구들까지 다 화가 두려워 선생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두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았다. 기축년(1589, 선조 22) 여름에 선생은 또 도끼를 들고 궐문 밖에 엎드려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성학(聖學)을 밝히고 형벌(刑罰)을 줄이고 사치(奢侈)를 경계하고 기욕(嗜慾)을 절제하고 조부(租賦)를 견감하라는 내용을 청하였다. 이어 조정의 득실과 뭇 소인배들이 현자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재물을 탐내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실상들을 낱낱이 들어 말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안에서 강포한 도둑이 들끓어 외국의 침입을 막기가 어렵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하여 혹은 광망(狂妄)하다 하고 혹은 음험(陰險)하다고 지적하면서 귀양 보낼 것을 청했으므로 결국 길주(吉州)의 영동역(嶺東驛)으로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의금부의 이졸(吏卒)들이 서로 탄식하며 이르기를, “누구보다도 충직한 조(趙) 어른이 도리어 이런 화를 당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때 선생은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의금부 군졸이 나타나자 즉시 걸어서 길을 나서니, 의금부 군졸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우리가 사실은 오늘 아침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떠나올 때 우리 동배(同輩)가 말하기를, ‘조 제독(趙提督)은 어진 분이다. 하명을 듣고 나면 필시 잠시도 지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저녁때쯤 그 집에 당도하여 그분으로 하여금 밤에 행장을 꾸리게 하라.’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다음 날 출발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임금의 하명을 묵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드디어 밤길을 나섰다.
당시에 압송하는 의금부 군졸이 물품을 요구하는 전례가 있어 혹 제 욕구에 차지 않으면 곧 곤욕을 가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선생의 친구들이 얼마의 노자를 모아 의금부 군졸에게 주자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동배가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돌아와서의 전례적인 연회도 하지 않기로 서로 허락했는데, 지금 만약 그것을 받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사람 축에 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는 마치 종들처럼 시중을 들었고, 돌아올 때는 울면서 이별을 고하였다. 선생은 걸어서 재를 넘는 등 2천여 리의 길을 가면서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다. 비록 도주(道州)로 귀양가면서 다리에 피를 흘렸던 채서산(蔡西山)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정도였는데, 선생의 기운이나 얼굴빛은 조금도 꺾임이 없었다.
그때 북쪽에는 염병이 크게 번져서 10명 중에 7, 8명이 죽었다. 선생의 아우 전(典)도 귀양지에 따라왔다가 역시 염병에 걸려 죽었는데, 선생은 그의 병간호에서부터 죽은 뒤의 염습까지를 모두 직접 하고 아침저녁으로 널을 어루만지며 지극히 애통해하였지만 오히려 아무 탈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정기(正氣) 앞에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침범하지 못한다고들 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또 화해를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왔는데, 조정에서 전날에 침략해 왔던 일을 따지자 평수길이 즉시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 등을 보내고 그 편에 우리나라에서 끌려갔던 향도(嚮導)와 죄 지은 몇몇 왜놈을 보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이나 지방 할 것 없이 모두 축하를 하면서 그 보답으로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보내기로 하였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초안한 상소문에 이르기를,
“초(楚) 나라 사람이 세 번씩이나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박옥(璞玉)을 껴안고 놓을 줄 몰랐던 것은 그 속에 아름다운 옥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고, 송(宋) 나라의 장준(張浚)이 귀양살이하면서도 열 번씩이나 상소하였던 것은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이 충(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멀리서 듣기에, 왜사(倭使)가 반년씩이나 관(館)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도리에 어긋난 말을 제멋대로 하고 심지어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겠다는 말까지 해도 조정 전체가 겁에 질려 단 한 사람도 말을 꺼내 종주국을 배반하는 간악함을 꺾는 자가 없다 하니, 조선의 사기(士氣)가 그렇게까지 죽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로서 신은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스승 이이(李珥)가 죽은 뒤로는 글을 읽은 사람이 우리 왕 곁에 없다는 것이 더욱 한탄스럽습니다. 예전부터 승부의 형세는 병력의 강약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춘추 열국(列國) 시대에 강하기로는 초 나라를 당할 나라가 없었지만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기용하여 의리를 앞세워 말을 하자 소릉(召陵)에 집결했던 초 나라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맹약을 하였고, 항적(項籍)이 싸움을 잘해 천하무적이었으나 한왕(漢王)이 동공(董公)의 말을 듣고 의제(義帝)를 위해서라는 명분 있는 군대를 출동하자, 해하(垓下)의 초 나라 군대는 흩어지고 항적은 비장한 노래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체로 시역(弑逆)이라는 죄를 짓고서는 그 몸이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는 법이니, 비록 그가 남은 목숨을 부지한 채 바람과 천둥을 일으킨다 해도 결국은 사람들이 따라 주지 않고 하늘도 돕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도의(道義)가 백만대군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맹자(孟子)의 교훈에도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당당한 우리나라는 열성조의 은택이 아직 흐르고 있어서 스스로 지킬 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들의 속임수에 빠져 억지로 그들의 요구에 응한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지금 세상의 왕손만(王孫滿)을 골라 그로 하여금 왜사에게 말하게 하기를, ‘그대들이 우리 측 통신사를 요구하는 까닭이, 우리가 강해서 우리 군대가 몰래 쳐들어가 기습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우리를 약하게 보고 이 기근(飢饉)을 기화로 침범해 오겠다는 것인가? 남몰래 쳐들어가 이웃 나라를 도둑질하는 일은 우리 조상 때부터 하지 않으셨는데, 나 같은 임금이 차마 전에 않던 일을 하겠는가. 또 남의 불행을 다행으로 여겨 이웃 나라를 침범하는 일을 역사에서는 부도(不道)하다고 비난하였는데, 더구나 정권이 새로 바뀌어 안정되지 않은 때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 경계를 천하에 범하겠는가. 아버지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께서 배척한 바이다. 원왕(源王)이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우리로서는 자세히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설사 국교를 맺고 싶어도 우리 경사(卿士)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내가 들어주지 않는 데에 화가 나서 꼭 병사를 동원하고 싶다면, 내 비록 덕이 부족하지만 내 주위의 장사(將士)들이 임금 사랑하는 의리를 자못 알고 있고 국경을 지키고 있는 병졸들도 부모의 은혜만은 알고 있으므로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 사력을 다해 성을 둘러싸서 굳게 지킬 것이다. 남의 나라에 사신 와서 형혹(熒惑)을 일으킨 죄에 대하여는 《춘추(春秋)》에 그 대처법이 있다. 우리 신하들 중에는 지금 천자께 그 사실을 아뢰고 사신을 주벌하자는 사람들이 많지만, 바다를 건너와 쟁론하는 것이 각기 자기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 우선 용서하고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이니, 돌아가서 이 뜻으로 제도(諸島)에 두루 알리라.’ 운운한다면,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드러나서 결단코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방백(方伯)이 저지하는 바람에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 무렵에 마침 정여립(鄭汝立)이 모반(謀反)하다가 사건이 발각되어 자살하고 당여(黨與)들은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호남의 선비 양산숙(梁山璹)과 양천회(梁千會) 등이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를 올리자, 주상께서 이르시기를, “당초 귀양 보낸 것이 사실은 내 뜻이 아니었다.” 하며 즉시 석방을 명하였다. 선생은 돌아오는 길에 북령(北嶺)에 이르러 시를 읊기를,

북궐에는 임금님의 은혜 소중하고 / 北闕君恩重
남주에는 어머님 병 깊은데 / 南州母病深
마천령 넘어 돌아올 날 있으니 / 摩天有歸日
감격의 눈물 옷깃에 넘치네 / 感淚自盈襟

하였다.
처음에 선생이 정여립의 모반 소식을 듣고는 또 한 통의 상소문을 써서, 그의 역모가 일조일석에 싹튼 것이 아님을 갖추 말하고, 나아가 만약 통신사를 보내게 되면 틀림없이 교활한 그들의 꼬임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펼쳐 전번의 상소문과 함께 올렸으나,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결국 통신사를 보냈으며, 평수길은 또 현소(玄蘇) 등을 보내, 중국을 치려는데 길을 내달라고 청해 왔다. 일이 이쯤 되자 상하 모두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이 옥천에서 흰옷 차림으로 궐문에 이르러, 사신의 목을 베고 그 사실을 중국 조정에 아뢰자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 내용의 대략에,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의 사태는 그 안위(安危)와 성패(成敗)가 바로 순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오직 한 가지 길은 빨리 사신의 목을 베고 중국 조정에 그 사실을 급히 알린 다음 역적 사신의 팔과 다리를 찢어 유구(琉球) 등 여러 나라에 나누어 보내 천하의 공분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왜적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훗날의 흉사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주(李滿住 건주위(建州衛)의 추장)에게 자급(資級)을 준 종이 한 장이 중국에 발각되어 장녕(張寧)이 와서 추궁할 때 세조(世祖)께서는 무안해하셨습니다. 더구나 길을 빌려 중국을 치겠다고 한 평수길의 죄악은 이만주에 비할 정도가 아니고, 또 말을 퍼뜨려 우리를 모함하는 방법 역시 중추(中樞)의 자급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중국이 그의 간악함을 깨닫지 못하고 심하게 화를 내어 당(唐) 나라 때 소정방(蘇定邦)ㆍ이적(李勣)을 보내 백제ㆍ고구려의 죄를 묻듯이 하기라도 한다면 성상께서는 무슨 말로 사과하실 것이며, 백성들은 무슨 수로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가령 중국이 소정방ㆍ이적을 보냈던 방법을 쓰지 않고 우리도 왜적들과 똑같은 오랑캐로 쳐버린다면,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얼마나 수치스럽고 욕된 일이겠습니까. 조종(祖宗)도 200년 동안의 수치를 정성을 다한 끝에 이제야 겨우 씻어 냈는데, 천만세를 두고 전하께 욕될 일을 지금 이때에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삼강오상(三綱五常)은 이로부터 땅에 떨어질까 두렵고, 하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영령들께서도 제향이 끊기는 슬픔을 당하실 것이며, 제대로 교육이 안 된 백성들에게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허물을 꾸며대는 신하들은, 그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라 하여 화가 닥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손 놓고 있을는지 몰라도, 성시(城市)나 초야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목소리로 사신의 목을 베지 않으면 국위가 떨쳐지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공자(孔子)께서 어찌 이러한 도리가 없어서 영혹(熒惑)한 자를 베라고 하였겠습니까. 호전(胡銓)이 어찌 이러한 도리가 없어서 싸우지 않아도 기운이 배나 솟는다고 했겠습니까. 정강(靖康)ㆍ건염(建炎) 연간에 오랑캐와 화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자들이 양시(楊時)ㆍ이강(李綱)ㆍ장준(張浚)ㆍ호안국(胡安國)이었는데, 그들을 편당이라고 지목하여 버려둔 채 기용하지 않았으니, 간신배들이 나라를 망친 것이 만고를 두고 다 그와 같았습니다. 성상께서도 역사를 읽으시면서 당시 송(宋) 나라 임금에 대해 틀림없이 탄식하셨을 것입니다. 마식(馬植)이 돌아오자마자 금(金) 나라 군사가 황하를 건너왔고, 왕륜(王倫)이 강을 건너자 올출(兀朮)이 남쪽으로 갔던 것입니다. 적추(賊酋)의 간사한 속임수는 너무도 많아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들이 돌아와서는 ‘적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 장사들의 마음을 해이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당시 이른바 일덕대신(一德大臣)은 왕륜이 봉사(奉使)하는 데 뛰어나다고 극구 칭찬하여 금 나라 장종(章宗)의 총애를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은 공론이 혹시 격앙될까 두려워하여 평수길(平秀吉)이 참으로 반역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착(寒浞)이 순신(純臣)이라는 것입니까.
노둔한 신 같아서는 어차피 한 번 죽는 것이라면 차라리 연(燕) 나라나 초(楚) 나라의 길에서 죽음으로써 자공(子貢)이 유세(遊說)하여 제후(諸侯)들 군대가 오(吳) 나라의 허를 찔러 노(魯) 나라를 살리게 했던 일을 본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하면 신을 살려주신 성상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늘이 남자로 태어나게 해 주신 뜻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 남쪽 만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이 없다면, 신이 말단 사신의 자격으로 부절(符節) 하나를 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쪽으로 달려가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의 머리통을 중국 조정에 바침으로써 신포서(申包胥)가 울면서 진(秦) 나라의 원병을 청했던 것처럼 하여 우리 왕의 심사(心事)를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황상(皇上)께서 불쌍히 여겨 받아 주신다면, 말을 빌려 남쪽 변방으로 몰아 역적의 사지를 남양(南洋)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 보내 그들로 하여금 군대를 정돈하고 기회를 포착하게 효유하여 기어코 적들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하였다. 소(疏)가 들어간 후 선생은 3일 동안 궐문 아래에서 명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주춧돌에다 머리를 찧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구경꾼들이 담을 둘러친 듯이 에워싸고 있었다. 혹자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핀잔을 하자, 선생은 명년에 산골짝에 숨어 있게 되면 그때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또 한 통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속에 중국 조정에 올리는 글, 유구(琉球)ㆍ대마(對馬) 등 여러 도서와 일본의 유민(遺民)들에게 유시하는 글을 썼으며, 또 현소를 베어 죽일 죄목과 영남ㆍ호남 지방의 적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서도 보다 더 절실한 표현으로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재하였다. 그러나 역시 소식이 없었다. 선생은 나랏일이 이미 손쓸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드디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돌아갔으며, 날마다 높은 데 올라 먼 곳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풀을 깔고 앉아 흐르는 물을 굽어보았는데, 그것은 시름을 달래보려는 것이지 세월을 그냥 보내자는 뜻은 아니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 2월에 부인 신씨(辛氏)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은 변란이 금방 닥치리라 생각하고 집 뒤에다 갈장(渴葬)하였으며, 3월에는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서 난리가 나려 하니 영원히 하직하게 되었다는 뜻의 축문을 고하였다. 4월에 왜적이 대거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고을을 연거푸 함락시키고 드디어 새재[鳥嶺]를 넘어오자,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 변고를 들은 선생은 통곡하면서 문인 김절(金節)ㆍ김약(金籥) 등과 같은 군내의 무사(武士) 약간 명과 함께 보은(報恩)의 잿길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모여든 자가 매우 많았다. 그때 그 도(道)의 순찰(巡察)을 맡았던 자는 근왕(勤王)에는 뜻이 없이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게다가 의병(義兵)이 관군(官軍)에게는 불리하다고 하여 다방면으로 저지를 가했고 또 한편 선생의 일이 이루어지면 자기로서는 그동안 활동하지 않았던 죄를 면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에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선생의 휘하에 모여든 자들의 집안 식구들을 모두 잡아 가두라고 했기 때문에, 모였던 자들이 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선생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제 몸만 호위하면서 충의(忠義)의 길을 막고 있다고 책망한 다음 곧바로 호우(湖右)로 달려가 다시 모병을 시도하였다. 이에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 선비 장덕개(張德蓋)ㆍ신난수(申蘭秀)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 평소 선생의 정의로움을 사모하던 자들이 모두 모였고, 또 그들끼리 서로 불러모아 모두 1600여 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를 세우고 격문을 띄우는 등 적을 제압할 태세를 갖추자 민심도 그 덕분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적군은 청주(淸州)를 점거하고서 호서를 엿보고 있었는데,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 등의 군대는 연거푸 궤멸되고 오직 승장(僧將) 영규(靈圭)만이 혼자서 적병과 대치 상태에 있었다.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청주로 달려가 이옥을 진군하도록 독촉하는 한편, 자신은 영규와 합세하여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전쟁을 독려하며 성의 서문까지 육박하여 가니 병사들도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적이 크게 패하여 안전한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아군이 성을 점령하려던 찰나에 갑자기 서북쪽에서 소나기가 몰려와 천지는 깜깜해지고 군대들은 떨고 있었다. 선생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서, 징을 울려 조금 후퇴하였다. 이때 적들은 죽은 시체들을 모두 불태우고 밤을 이용하여 북문으로 빠져 나갔고, 호좌(湖左)에 머물고 있던 적들도 그 사태를 보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막하(幕下)에 있는 전승업(全承業)과 아들 완도(完堵) 편에 소장을 보내 사실을 보고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당(唐) 나라의 현종(玄宗)이 천하를 거의 다 잃었다가 급박한 상황에서 정의로운 단안을 내려 이임보(李林甫)의 관(棺)을 쪼개고 양국충(楊國忠)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다시 당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의사(義士)와 충신(忠臣)들이 있는 힘을 다했던 것입니다. 지금 현자를 해치고 나라를 그르침이 이임보보다 더 심한 자들이 아직도 살아서 활보하고 있고, 백성들의 원망이 쌓인 것이 양국충보다 더 심한 자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왕황(汪黃)ㆍ진회(秦檜)와 같이 화의를 주장하여 적을 불러들이는 무리들이 요로를 점거하고 있으면서 현자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으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백성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사기를 진작시킬 것입니까.” 하였다.
선생은 충의로운 인사를 더 모집하여 왕사에 종사하려고 온양(溫陽)에까지 왔는데, 금산(錦山)을 점거하고 있던 적들이 다시 날뛰면서 양호(兩湖)를 넘보려고 하였다. 이에 순찰사가 선생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을 무장하여 금산의 적을 함께 토벌할 것을 제의해 왔다. 막좌(幕佐)들 역시 대부분 “지금 국토 전체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데 양호(兩湖)만은 아직 완전하니, 아마 하늘이 우리를 묵묵히 도와서 중흥의 길을 열어 주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그곳을 버려두고 서쪽으로 올라가면 양호가 없어지므로, 우선 금산의 왜적부터 먼저 공격하여 적의 뒷길부터 끊어놓고 나서 근왕(勤王)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으므로, 선생도 그리 생각하고 공주(公州)로 진지를 옮겼다. 그러나 순찰사와는 의견이 또 엇갈렸다. 순찰사는 적의 토벌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찍이 선생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자로서, 선생이 행조(行朝)에 가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했던 일들이 들통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선생을 못 가게 하기 위하여 좋은 말로 그 길을 저지했을 뿐 선생과 일을 같이할 뜻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응모한 사람들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도록 관할지에 영을 내리고 관군들로 하여금 응원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므로, 선생의 휘하 장사들은 점점 떠나갔고 사생을 함께하기로 한 700명의 의사(義士)만이 남아 있었다.
8월 16일을 기해 병력을 금산(錦山)으로 옮기기로 날을 잡았는데, 별장(別將) 이산겸(李山謙)이 말하기를, “적들이 을묘년(1555, 명종 10)에 호남에서 패했던 것을 거울삼아 지금 금산을 점거하고 있는 적들은 모두 정예부대인 데다 수 또한 몇만 명이 되므로, 그 대적(大敵)을 가볍게 상대할 것이 아니라 병력을 정돈해 두고 형세 판단을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울면서 다짐하기를, “지금 군부(君父)가 어디에 계시는데 감히 이둔(利鈍)을 말하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으로, 나에게는 오직 한 번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고서, 드디어 영규와 함께 연합하여 진군하였다.
그 전에 호남 순찰사(湖南巡察使) 권율(權慄)과 함께 18일을 기해서 힘을 합해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때 권율로부터 약속 날짜를 바꾸자는 서신이 왔고 선생은 이미 금산과 10리밖에 안 되는 곳에 와 있었다. 적들은 우리 쪽의 후속 부대가 없음을 탐지하고는 우리의 전투 태세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편성하고 번갈아가며 출동하여 교란하였다. 이에 선생이, “오늘은 오직 한 번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사생 진퇴에 있어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고 영을 내리자, 군사들도 모두 명령에 따라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 싸운 지 한참이 지나 적의 부대가 연거푸 패하여 거의 궤멸되어가는 판에 우리 쪽에는 화살이 동이 나 어찌할 수가 없었고 이사(吏士)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의기자약(意氣自若)하여 더욱더 싸움을 독려했다. 적은 총력을 다해 공격하여 드디어 우리 진지까지 쳐들어왔는데, 편비(褊裨) 몇 사람이 선생을 죽음에서 탈출시키기 위하여 선생을 부축하며 도망칠 것을 청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순절(殉節)할 곳이다. 장부가 죽으면 그뿐이지 난리에 임하여 구차히 면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서 북채를 잡고 두드리니, 군사들도 다투어 죽기를 작정하고 맨주먹으로 치고 박고 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비록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우리 쪽은 전군이 다 죽었지만, 적들도 많은 수가 죽어 형세가 크게 꺾였으므로 남은 병력을 거두어 퇴진하였다. 그때 곡소리가 들을 진동시켰고, 시체는 사흘을 운반하고도 다 치우지 못하여 마침내 쌓아두고 불태웠다. 그리하여 결국 적이 무주(茂朱) 등지에 머물고 있던 여러 적들과 함께 모두 도망갔는데, 그 덕분에 호서ㆍ호남이 안전할 수 있었다.
선생의 아우 조범(趙範)이 전장에 들어가서 선생의 시신을 찾았는데, 선생은 기 아래에서 죽어 있었고, 곁에는 장사들이 서로 깔고 누운 채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와 옥천(沃川)에 빈소를 차렸는데, 그때까지 4일이 지났지만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꼿꼿하며 노기가 성대한 것이 마치 살아 있을 때의 안색과 똑같아 사람들이 죽었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선생이 처음 군대를 일으켰을 때 행조(行朝)에서는 포상의 하교를 내리고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제수하였는데, 죽은 후에는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했으며, 아들 완도(完堵)를 녹용하여 태릉 참봉(泰陵參奉)을 삼았고 집에는 월름(月稟)을 내렸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다시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을 세우도록 하여 표충(表忠)이라는 액호를 내렸으며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경기 지역과 양호(兩湖)의 인사(人士)들이 선생의 언행(言行)과 절의를 세운 시말을 기록한 비를 김포(金浦)의 유허와 금산의 순의(殉義)한 곳에 세웠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묘지가 좋지 않다 하여 그 군의 치소에서 동쪽으로 30리쯤 떨어진 도현(道峴)에 유좌 묘향(酉坐卯向)으로 이장하고 부인도 부장(祔葬)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기질이 건강(乾剛)하고 올바른 천성을 그대로 지켜, 효성과 우애는 신명(神明)과 통하고 충성심은 금석(金石)을 꿰뚫을 정도였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는 흑백(黑白)을 나누듯이 분명했고, 행실이 독실하기는 옥루(屋漏)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안팎의 정해진 분수는 부귀 빈천에 의하여 흔들림이 없었고, 확고한 지조는 도거(刀鋸)나 정확(鼎鑊)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식견이 초연하고 논리가 통쾌했으니, 사람이건 사물이건 뒤에 어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말은 마치 시초점과 거북점을 치고 강물을 터놓은 듯이 하나도 시원하게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름답고 강건하게 타고난 바탕이 물론 크게 남다른 데가 있기는 하였지만 올바른 전수(傳授)와 학문의 공력도 속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효경(孝敬)에 독실하였으니, 부모의 명령이면 반드시 꿇어앉아서 대답하였고 서신을 올리려면 반드시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 한 후 썼으며, 제사 때면 정성이 극진하였다. 한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하루는 어느 어른이 억지로 먹으라고 하자 선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임종시에 이것을 찾으셨는데, 가난해서 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차마 먹겠습니까.” 하였다. 계모인 김씨가 선생을 학대하였는데, 외조모가 울면서 그 사실을 말하자 선생이 엎드려서 듣다가 곧 작별하고 돌아갔다. 오랜만에 다시 왔을 때 외조모가 이유를 캐묻자, 선생이 말하기를 “전번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셨는데, 자식으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감히 오질 못했습니다.”라고 하여, 외조모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선생이 계모를 공경과 효성을 다해 섬겨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계모도 끝내는 느끼고 깨달았는데, 막상 선생이 죽자 밤낮으로 슬피 울었다. 그리고 아우와 누이 간에도 우애가 지극하여 늘 한방에서 화락하게 지내며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으니, 타고난 효우(孝友)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격앙하여 읊조리기를, “하늘이 남자를 낸 것이 왜 무단히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해 옷이며 신이 다 해졌는데도 눈바람을 가리지 않고 걸어서 스승을 찾았고,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사당에 배알하고 어버이의 기후를 살핀 다음 물러나와 밤까지 독서에 열중하였다. 혹 밭에라도 가게 되면 나무를 가로질러 시렁처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책을 얹고서 암송하였으며, 들에 나가 소를 먹일 때도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걸어가며 읽었고, 땔나무를 해다가 어버이의 방에 군불을 때면서도 그 불빛에 비춰 글을 읽었다. 밤이면 밤마다 《중용》ㆍ《대학》ㆍ《이소경(離騷經)》과 ‘출사표(出師表)’ 등을 읊다가 강개(慷慨)하여 밤이 깊어서야 조금 잤으며, 닭이 울면 또 일어나서 외우곤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장 좋아하여 한 질을 다 외울 정도였으므로 여행 중에는 그 목록(目錄)만 가지고도 책 내용을 암송했고,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우계(牛溪)ㆍ율곡(栗谷) 두 선생에게서 《역경(易經)》을 배우고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읽기를 늙도록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길을 가면서도 반드시 책을 가지고 다녀 밤이면 관솔불 아래에서 읽었다. 한번은 어느 여관에서 한 선비를 만나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밤이 깊었는데도 선생이 관솔불을 켜놓고 단정히 앉아서 행랑 속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꺼내 그에게 보이면서, “이 책 속에 수신(修身)ㆍ응사(應事)에 관한 중요한 뜻이 대충 들어 있으니, 선비라면 꼭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하면서 행랑 속에서 종이를 꺼내 베껴 주었으며, 닭이 울 무렵에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또 일어나 글을 읽었다. 선비는 그렇게 며칠을 동행하였지만 선생이 잠시도 쉬는 때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학문 방법은 오로지 실천을 위주로 하였는데,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그칠 뿐이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그칠 뿐이다.”라는 한 대목을 언제나 세 번씩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음미하였고, 날마다 하는 일도 자신을 반성하여 행동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 전부였으며, 근독(謹獨)의 공부에 있어서도 중단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자기를 위한 공부와 실천하는 공부에 역점을 두어, 나이 비록 3, 40이 된 자라도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 읽게 했다. 남과의 교제에 있어서도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에 관계없이 오직 성의를 다했다. 처음에는 이발(李潑)과 친구로 사귀어 대청에 올라가 그의 어머니에게 절까지 하였으나, 이발이 율곡을 무함하자 마침내 절교하였다. 그러나 기축년(1589, 선조 22) 옥사가 일어나 이발의 어머니가 체포되어 갈 때 선생이 길 한쪽에 엎드려 있다가 모의(毛衣) 한 벌을 건네주며 이르기를, “날씨가 이렇게 차가우니, 이게 비록 누추한 물건이지만 행자(行資)에 보태시기 바랍니다.” 하고 울면서 전송하니, 사람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선생은 임금이나 스승을 한결같이 섬겨 자기 할 바를 다하였지만, 선악(善惡)을 구별하고 성패(成敗)를 지적하는 데 있어서는 상대가 원망을 하건 화를 내건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할 줄을 몰랐다. 도끼를 들고 궐문 밖에 엎드릴 무렵에는 저자 가게에 우거하면서 밤낮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에는 늘 걱정하는 빛이 있었는데, 주인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은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때 주인의 집이 쓰러질 지경이어서 큰 나무로 지탱해 놓았는데,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와서 보고는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 집은 이 나무가 있어 몇 해는 지탱이 되겠지만, 기울어져가는 우리나라는 누가 있어 붙들어 줄까?” 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선생이 가슴속의 정성을 다 쏟아 내어 간절한 글월을 계속 올렸던 내용은 화란을 미연에 막고 대의(大義)를 천하에 밝히자는 것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광망(狂妄)하다고 배척하면서 하나도 채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급기야 왜구가 들이닥치면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중국의 장리(將吏)들은 과연 조선이 왜구를 인도하여 중국에 쳐들어오게 한 것으로 의심하고 죄를 주자는 논의까지 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 30)의 변란 때 왜승(倭僧) 하나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평수길(平秀吉)이 조선에는 일시적인 적에 불과하지만 일본에는 만세를 두고 역적이다.” 하였으니, 그때 만약 이웃 나라에서 격문을 띄워 그의 죄를 성토했더라면 화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대둔산(大芚山)에 가 놀면서 밥을 먹다가 그 자리에 있던 네 명의 승려에게 밥을 밀어주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변란이 있을 것이다. 나야 당연히 국난에 달려 나가겠지만, 이 밥을 함께 먹은 이들도 나와서 일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승려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냥 건성으로 승낙하였다. 그 후 승려 셋은 금산에서 선생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이 찬유(粲猷)인데, 당시에 병으로 국난에 나가지 못했다가 뒤에 이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또 신각(申恪)은 연안 군수(延安郡守)로 가고 권징(權徵)은 관서 안찰사(關西按察使)로 나갔는데, 선생이 두 사람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내년에 틀림없이 왜란이 있을 것이니, 서둘러서 참호도 파고 성가퀴도 더 올려 쌓으라.”고 하였다. 신각은 평소에 선생을 신복하였으므로 그 즉시 수어(守禦)의 도구를 준비해 두었는데, 그 후 이공 정암(李公廷馣)은 연안 고을 때문에 끝까지 무사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어느 누구는 다급할 때 믿을 만하다든지, 어느 지대는 수어책을 마련해야 한다든지 한 말들이 모두 들어맞았으므로, 그것을 보고는 사람들 모두가 그 선견지명에 감복하였으며 평소 원한이 있는 적들까지도 이의가 없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 4월에 동남쪽에서 큰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저것이 천고(天鼓)인데 왜적이 틀림없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하였고, 급기야 병란이 일어난 뒤에는 밤에 천상(天象)을 관찰하다가 북쪽을 향해 절하면서 곡을 하더니 조금 있다가 또 이르기를, “나는 화가 행조(行朝)에 미친 것으로 알았는데, 다시 살펴보니 북쪽으로 들어간 두 왕자가 적에게 사로잡힌 것 같구나.” 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자가 기억해 두었다가 뒤에 날짜를 확인해 보니,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선생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여사(餘事)이겠으나, 그의 학문으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토정(李土亭)은 당세의 인물을 논평할 때마다 반드시 선생을 제일로 쳤고, 율곡은 언젠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을 금방 당우 시대(唐虞時代)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여식(汝式)이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어지럽게 고치려 드는 것을 염려하지만, 모든 일에 숙달하여 크게 쓰이기를 기다려 볼 일이다.” 하였다. 선생은 평소에 저술을 일삼지 않았지만, 문장을 쓰면 반드시 경전의 뜻을 부연하는 것으로 문리가 통창하고 완곡하면서도 어딘가 장중하고도 근밀한 맛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싫증을 느끼지 않게 하였다. 선생이 쓴 봉사(封事) 몇 편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어 있다.
부인 신씨(辛氏)는 관향이 영월(寧越)이고 사인(士人) 신세함(辛世諴)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조완기(趙完基)이다. 조완기는 금산 싸움에서 일부러 관복(冠服)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선생 대신 죽고자 하여 적의 돌에 맞아 죽었다. 측실의 소생으로 3남 2녀가 있는데, 맏이 조완도(趙完堵)는 강음 현감(江陰縣監)이고, 조완제(趙完堤)는 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이며, 다음은 조완배(趙完培)이다. 맏딸은 김노(金簵)에게, 다음은 김성룡(金聖龍)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조완도는 아들이 조진(趙鎭)이고, 딸은 장응상(張應湘)에게 시집갔다. 조완제는 아들이 조빈(趙鑌)과 조순(趙錞)이고, 그 다음은 어리며, 맏딸은 김추(金樞)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조완배는 딸이 박취현(朴就賢)ㆍ이승담(李承聃)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김노는 아들이 김여량(金汝亮)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금 음성 현감(陰城縣監)이고, 다음이 김여옥(金汝玉)으로 현재 유학(儒學)에 종사하고 있다.
아, 선생은 뿌리와 기반이 깊고 두터우며 조예가 탁월하여 전현(前賢)을 능가하고 사문(斯文)의 우익(羽翼)이 되었으니, 일절(一節)의 선비라도 만분의 일도 따라갈 수가 없는 분이었다. 하늘이 그분을 내리신 것이 아마도 우연이 아닌 듯했는데, 세상과 빙탄(氷炭)의 관계처럼 되어 단 하루도 조정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세상일을 미리 내다보고 미치지 못할 듯이 입이 타도록 설득하며 서둘렀지만 세상에서 한 사람도 믿어 주지 않았고, 급기야 왜란(倭亂)을 당해서는 의리를 앞세워 목숨 버리는 일을 결행하였는데, 그것이 어찌 선생 한 분만의 불행이었겠는가. 그러나 외로운 충성과 큰 절의는 만고의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웠고 어리석고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웠으니, 백세의 스승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훌륭한 시호를 받아 그것을 세상에 뚜렷하게 알리고 나아가서 후세에까지 남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여기 삼가 선생의 보계(譜系)와 관벌(官閥), 뜻과 행실, 사업과 공로의 큰 것들만을 갖추어 경건히 유사(有司)에게 고한다.


 

[주D-001]왕손만(王孫滿) : 주(周) 나라 정왕(定王) 때의 대부(大夫)로, 초자(楚子)가 주정(周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왕손만이, 천하 통일의 길은 덕(德)에 있지 솥의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春秋左傳 宣公 3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