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휘 세영 監察崔公行狀

12대 조고 감찰 증 가선대부 호조 참판공 휘 세영 관련 자료

아베베1 2013. 12. 21. 21:52

 

 

 

 

 

 

 

 

 

 

 

 

 

 

 

 

 

 

 

 

 

 

 

 

 

 

 

 

 

 

 

 
寒水齋先生文集卷之三十一  
  
 墓表
監察贈參判崔公 世榮 墓表 


光海昏亂。賊臣爾瞻倡讎母論。勢焰黨天。時則有若太學生崔公琢。倡多士抗章。直斥其兇邪。聲名震一時。遂杜門田廬。與世相忘者十餘年。仁廟改玉。擢文科官郡守。尤菴宋先生銘其墓。亟稱其賢。有丈夫子二人。公其長也。諱世榮字夢與。生於萬曆癸丑復月廿日。天資厚重。不妄游戲。自幼好讀書。及長修擧子業。有名場屋。庚寅中司馬。壬辰丁外艱。居喪盡禮。制終奉母夫人居于墓下。爲力田專養計。戊戌筮仕爲典牲參奉。庚子陞奉事。乙巳母夫人下世。公年已衰而率禮如前。公嘗爲奉事時。値慶科。做點于泮宮。臺官流言以詆訾國子長劾遞。後國子長秉銓。知其誣。首先牽復。除寧陵參奉。例遷司瞻奉事。仁宣大妃之喪。以山陵監董勞陞司圃別提。出爲三嘉縣監。時邑儒權鑑以尊尙儒賢。見仇於兇黨。方伯欲鍛鍊成獄。而公終始守正。確然不撓。方伯大加慍怒。而亦不敢中傷。有一勢家子畜邑妓橫甚。公大斥不饒。其人銜之。嗾繡衣構誣。經年逮獄。卒無事實。壬戌拜司憲府監察。有盡職稱。秋除平陵察訪。時値荐饑。盡心撫摩。郵卒穌馬政擧。漁戶徵供。一倂蠲除。積瘼如洗。衆皆懷惠。秩滿閒居數年。氣力康健。丙寅五月廿日無疾而逝。壽七十四。始葬交河綱橋里。丙戌移窆于公州治西曲火川負坎之原。後以長子貴贈嘉善大夫戶曹參判。二配俱贈貞夫人。淑人徐氏祔焉。公性至孝。竭力事親。左右無違。奉先極其誠敬。與弟世章友愛篤至。世章早歿。躬莅凡百。至鬻己田而營葬。撫視諸孤如己出。推以至於宗族。無不得其歡心。所與交皆當世賢人君子。平生無躁暴之言。峭刻之行。酒戶甚寬。而居官未嘗近口。律己甚嚴而撫下以仁。去後民追思不忘。樹石而誦之。蓋其廉節。是公之長物。所至不以一毫自累。及歸環堵蕭然。而處之晏然。常以爲譜牒不可不明。裒稡氏族之書。編成一部。以爲講睦之資。全州之崔。以高麗侍中阿爲上祖。入我朝。有曰霮。集賢殿提學。有曰德之。藝文館直提學。世號煙村先生。立祠俎豆。高祖諱彥淸。奉事。是一蠹之彌甥。人稱小一蠹。曾祖諱稀壽。判官。祖諱應夏。縣監。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之女。尤齋先生撰郡守公墓表。備列其賢德。淑人貫連山。其考贈佐郞效積。稟性淑哲。取與不妄。甘旨之供。蘋蘩之薦。一出於至誠。宗門式之。年八十六。歿於乙亥八月十日。擧三男二女。男長邦彥。以學術屢登別薦。歷幾官。今爲老職同樞。次邦藎,邦顯。女適宋彝錫縣監。次許玶。邦彥四男。守綱,守紀,守經,守約。守紀爲邦藎後。四女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壽兼。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安希仁,尹侃。宋壻三男百源,性源參奉,萬源。四女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敍,趙明濟。許壻二男紳,繗。女未行。內外曾玄不盡錄。嗚呼。公以名父之子。祇承慈訓。行誼兼備。文藝夙成。宜其早揚王庭。大鳴于世。而不幸蹉跎。棲遲朱墨之間。惜哉。余綴戚屬。自幼周旋於牀下。景仰有素矣。顧今長老零落已盡。知公之詳莫余若也。同樞公徵以墓文。義不敢辭。遂撮少日所見聞。略序如右。

 

감찰(監察) 증(贈) 참판(參判) 최공(崔公) 세영(世榮) 묘표



광해(光海) 난정(亂政)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앞장 서서 수모론(讎母論)을 주장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태학생(太學生) 최공 탁(崔公琢) 같은 분이 있어 많은 선비들의 앞에 서서 그의 흉물스럽고 간사함을 항장(抗章)으로 곧바로 배척하여 그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전려(田廬)에 앉아 세상을 잊고 살기를 10여 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우암(尤菴) 송 선생도 그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그의 어짊을 극구 찬양하였다.
그에게 장부다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공이 맏으로 휘는 세영(世榮) 자는 몽여(夢與)였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5) 1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중후하여 함부로 놀거나 장난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과거에 관한 공부를 하여 과거 마당에서 이름을 날려 경인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으면서 예도를 다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 아래에 살면서 오로지 농사지어 봉양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술년에 벼슬길에 올라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 되고 경자년에 봉사(奉事)에 올랐다. 을사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공이 그때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버지 상 때와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이 봉사로 있던 시절 경과(慶科)를 당하여 반궁(泮宮)에서 주점(做點)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국자장(國子長 성균관 대사성)을 공이 헐뜯었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공을 탄핵하고 체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국자장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이 무함인 것을 알고 공을 맨 먼저 복직시켜 영릉 참봉(寧陵參奉)을 제수하였다. 그 뒤 예에 따라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가 되었고, 인선대비(仁宣大妃 현종(顯宗)의 비)의 상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다스렸던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올랐다가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그 고을 선비 권감(權鑑)이 유현(儒賢)을 존중히 여긴다는 이유로 흉한 무리들이 원수로 여기고 방백(方伯)은 그것을 죄로 만들어 옥(獄)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정도를 지키며 확고부동하였다. 그리하여 방백이 그에 대해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감히 중상은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세력가의 자제가 읍기(邑妓)를 데리고 살면서 횡포가 심하자 공이 그를 용서없이 물리쳤는데, 그가 앙심을 품고 수의(繡衣)를 사주하여 공을 무함한 결과 1년 넘게 옥에 갇혔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어 풀려났다.
임술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책을 다한다는 칭송이 있었고, 가을에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기근이 거듭 닥친 때였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손을 써서 우졸(郵卒)도 되살아나고 마정(馬政)도 잘 되었으며, 어호(漁戶)의 징공(徵供)도 일체를 면제하여 쌓였던 폐단들이 씻은 듯 없어졌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은혜로움을 느끼었다. 질(秩)이 차고 나서 몇 년을 한가히 보내며 기력도 강건하다가, 병인년 5월 20일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74세였다. 처음에는 교하(交河)의 강교리(綱橋里)에 장사 지냈다가 병술년에 공주(公州) 읍 서쪽 곡화천(曲火川) 자좌(子坐)의 둔덕으로 이장하였는데, 그후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두 배위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숙인(淑人) 서씨(徐氏)가 부장되어 있다.
공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있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좌우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조상도 성경(誠敬)을 다하여 받들었다. 아우 세장(世章)과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세장이 일찍 죽자 모든 일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전답까지 팔아 장례를 치렀고, 아비 잃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겨레붙이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사귄 친구는 모두가 당대의 현인이요 군자였다. 공은 평소 조급해 하거나 폭언하는 일이 없었고 각박한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술도 무척 좋아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기 몸가짐은 매우 엄하게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하여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비를 세워 송덕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청렴한 절조야말로 공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될 정도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가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돌아오고 나면 온 집 안이 썰렁하였으나 자신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공은 항상 보첩(譜牒)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1권의 책을 만들어두고 그것을 화목을 다지는 자료로 삼았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국의 시중(侍中)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아조에 와서 담(霮)이라는 이는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었고, 덕지(德之)라는 이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세상에서 그를 연촌 선생(煙村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고조인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렀다. 증조의 휘는 희수(稀壽)로 판관(判官)이고, 조부의 휘는 응하(應夏)로 현감이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충익(忠益)의 딸인데, 우재(尤齋) 선생이 공의 아버지 군수공(郡守公)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부인의 현덕(賢德)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숙인(淑人)은 관향이 연산(連山)이고 그의 아버지는 좌랑(佐郞)에 추증된 효적(效積)이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 명철하고 주고받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시부모 봉양하는 일과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을 하나같이 지성으로 하여 온 집안이 존경하고 본받았다. 나이 86세로 을해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방언(邦彦)은 학술(學術)로 여러 번 별천(別薦)에 올라 몇 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노직(老職)으로 동추(同樞)가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방신(邦藎)과 방현(邦顯)이다. 큰딸은 현감 송이석(宋彝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평(許玶)에게 시집갔다. 방언은 4남을 두었으니 수강(守綱)ㆍ수기(守紀)ㆍ수경(守經)ㆍ수약(守約)인데, 수기는 방신의 양자가 되어 갔으며, 네 딸은 황준(黃鐏)ㆍ군수 이정영(李挺英)ㆍ김일정(金日井)ㆍ윤수겸(尹壽兼)에게 각각 시집갔다. 방현은 3남을 두었는데, 수손(守遜)ㆍ수도(守道)와 좌랑 수적(守迪)이고, 2녀는 안희인(安希仁)ㆍ윤간(尹侃)에게 시집갔다. 사위 송씨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백원(百源)ㆍ참봉 성원(性源) 그리고 만원(萬源)이고, 딸은 진사 이흥조(李興朝)ㆍ이사도(李思道)ㆍ김시서(金時叙)ㆍ조명제(趙明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허씨의 두 아들은 신(紳)ㆍ인(繗)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밖에 내외 증손과 현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했다.
아, 공은 이름 있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자훈(慈訓)을 잘 받아 행의(行誼)까지 겸하여 갖추었으며 문예(文藝) 또한 숙성하였으니, 일찍이 왕정(王庭)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을 크게 울렸어야 옳았을 것인데, 불행히도 길이 어긋나 주묵(朱墨 하급 관리를 의미함)의 사이에서 맴돌다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의자 밑에서 놀았기에 평소에 공을 존경하고 사모해 왔었는데, 지금 보면 장로(長老)들이 이미 다 가 버리고 없어 공에 관하여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동추공이 부탁한 묘도 문자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젊은 시절 듣고 보았던 것을 엮어 대략 이상과 같이 쓴다.


 

 

 

芝村先生文集卷之二十三
  
 墓誌銘
縣監崔公墓誌銘 幷序 a_170_455c




公諱世榮。字夢與。全州人。上祖文成公阿。仕高麗。官至侍中。入本朝。有諱德之。藝文館直提學。以淸名直道。當韓明澮時。見幾退老。世稱烟村先生。歷四世 而至安東判官諱稀壽。見長官年少。不肯折腰。投紱而歸。人服其高。卽公之曾祖也。祖諱應夏。縣監。沙溪金先生。嘗稱有長者風。考諱琢。進士。値光海昏亂。倡率方外同志。䟽論爾瞻罪惡。被停擧特罰。及仁祖反正。始闡大科。官止兵曹正郞。尤齋宋先生銘其墓。亟讚其節行。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女。鄭古玉碏之外孫也。通經史識道理。古玉嘗愛而敎之曰。恨汝不爲男子也。古玉歿。䟽食三年。仁祖孝廟喪。亦久而不肉曰。女子獨非臣子耶。公以萬曆癸丑十一月二十日生。庚寅。中生貟。壬辰。正郞公卒。甲午制 除。戊戌。拜典牲署參奉。時宋先生在朝。公言本署之設。專爲祭享。而今兼管司畜。接待虜人。事殊未安。先生聞而是之。遂卽建白。復司畜舊署而別之。庚子。陞奉事。有媢嫉者嗾㙜官。劾公做點泮宮時。有詆訿國子長語。後㙜官知其誣。慚悔來謝。乙巳。丁內艱。丁未。憂吉。庚戌。除寧陵參奉。公嘗爲祭官。入齋。守僕房有火變。同僚以入直未久。諉之公。公不與辨。卽身自就吏。遇赦徑出。翌年。以刑官誤達。更被逮。對簿卽放。癸丑。有遷陵之禮。故事。因山畢。陵官皆陞叙。而公故不遅待。先六七日。例遷司瞻奉事。後代公者。出 六品。聞者咸歎其不可及。甲寅。爲仁宣王后山陵監造官。以勞。拜司圃別提。冬。授三嘉縣監。公時年已衰。而自望闕禮。以至聖廟焚香社壇城隍等祀。一皆躬行。祁寒盛暑。亦不廢。遇旱禱雨。無不立應。民以古崔少府比之。邑儒權鑑。曾爲宋先生。罰星州兇徒之墨削先生名於院錄者。至是方伯欲鍛鍊成獄。公終始堅執不聽。方伯恚甚。卽移其獄於金山。鑑竟被刑禍。幾死得生。時有繡衣褒公善政。而末以鑑事爲疵。故賞典不及焉。時相姪子在鄰境。挾本邑妓橫甚。公面斥不饒。其人衘公次骨。戊午。時相私人。又爲御 史廉問。遂相與媒糵。以十餘條爲罪。於是朝廷下公廷尉。問鉤覈經年。終無事實。金吾讞奏。又添入他事。必欲重究。至再行査。而亦不能得。以己未四月。見宥。盖公守正奉法。不以利害有所撓屈。故其見嫉而中毒者如此。壬戌。拜司憲府監察。府舊有直宿之䂓。久廢不擧。公排衆議獨行之。諸僚多厭憚。秋。除平陵察訪。撫摩驛卒。愛恤漁戶。專以省約爲務。衆皆感戴。丙寅二月二十日。暴得疾。卒于第。享年七十四。公天資沉重。自幼不妄游戱。事父母。承顔盡歡。左右無違。侍正郞公之疾。藥必先嘗。衣不解帶。歷數歲。如一日。 及創巨。雖甚窮空。送終諸具。皆極無憾。其丁內艱也。執禮一如前喪。與弟世章。友愛甚篤。逮其喪。至鬻己田而葬之。視諸姪。如己出。推以及於內外親族。靡不各盡其道。與人交。必厚而敬之。平生無粗暴之言。峭刻之行。客至。不問貴賤大小。輒開心見誠。人無不愛慕欣欣焉。性喜飮酒。多而不亂。然當官則絶不近口。其莅民一以仁愛爲先。興利除害。如恐不及。律己嚴而接下寬。故吏民俱安。久益追思。至樹石以頌。居家不事産業。每自官歸。槖中如洗。僦屋蕭然。䟽糲不繼。其廉節可知也。公嘗謂人家譜牒不明。往往知父而 不知祖。此豈爲人之道乎。遂裒聚諸宗家乘而編摩之。積以歲月。久乃成書。豈亦有得於程夫子所謂明譜系厚風俗者耶。公娶連山徐氏。贈戶曹佐郞效積女。婦德甚高。非其義也。一介不取於人。隨公之官。亦未嘗以毫髮累公。以庚戌十月二十四日生。壽八十六。而歿於乙亥八月十日。始與公同葬於交河網橋里。後改卜于公州治西曲火川面佳佐里子坐午向之原。以丙戌十月日。合窆焉。擧三男。長邦彦。以學行被剡薦。歷幾官。今爲老職僉樞。次邦藎,邦顯。二女長適宋彛錫。縣監。次適許玶。僉樞四男。守綱,守紀,守 經,守約。四女。適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守兼。邦藎無子。以守紀爲後。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適安希仁,尹侃。宋縣監三男。百源,性源。奉事。萬源。四女適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叙,趙明濟。許玶二男。紳,繗。普明,普翼,普天,普昌,辛聖憲,趙光臣妻。守綱出。普成。守紀出。普淵,趙重彬,金相鼎妻。守經出。普元,李燧妻。守遜出。普哲。守道出。普協,普悅,普,趙宅彦妻。守迪出。李郡守男。相華。進士。金日井男。普演。餘不能盡錄。竊惟公內承名父賢母之訓。外交一時賢人君子。薰染將就。行誼甚備。孝悌行於家。而淸白著 于官。斯已無愧於先徽。况有賢子。依歸大賢之門。士友莫不推重。豈不亦于前有光哉。余於僉樞公。平日蒙幸不淺。今以公幽誌見屬。義有不敢辭者。謹據家狀。剟錄其一二。系之以銘。銘曰。
嗚呼烟村。間世名賢。公實後承。典刑猶存。恢弘之度。厚重之質。人推國器。謂當必達。乃困祿仕。白首棲屑。一縣一郵。用亦未卒。德非不高。才豈不多。命也奈何。識者興嗟。公山之原。體魄所藏。我銘納竁。百世永寧。


 

 

 

 

 


 





감찰(監察) 증(贈) 참판(參判) 최공(崔公) 세영(世榮) 묘표

    
광해(光海) 난정(亂政)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앞장 서서 수모론(讎母論)을 주장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태학생(太學生) 최공 탁(崔公琢) 같은 분이 있어 많은 선비들의 앞에 서서 그의 흉물스럽고 간사함을 항장(抗章)으로 곧바로 배척하여 그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전려(田廬)에 앉아 세상을 잊고 살기를 10여 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우암(尤菴) 송 선생도 그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그의 어짊을 극구 찬양하였다.
그에게 장부다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공이 맏으로 휘는 세영(世榮) 자는 몽여(夢與)였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5) 1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중후하여 함부로 놀거나 장난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과거에 관한 공부를 하여 과거 마당에서 이름을 날려 경인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으면서 예도를 다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 아래에 살면서 오로지 농사지어 봉양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술년에 벼슬길에 올라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 되고 경자년에 봉사(奉事)에 올랐다. 을사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공이 그때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버지 상 때와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이 봉사로 있던 시절 경과(慶科)를 당하여 반궁(泮宮)에서 주점(做點)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국자장(國子長 성균관 대사성)을 공이 헐뜯었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공을 탄핵하고 체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국자장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이 무함인 것을 알고 공을 맨 먼저 복직시켜 영릉 참봉(寧陵參奉)을 제수하였다. 그 뒤 예에 따라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가 되었고, 인선대비(仁宣大妃 현종(顯宗)의 비)의 상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다스렸던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올랐다가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그 고을 선비 권감(權鑑)이 유현(儒賢)을 존중히 여긴다는 이유로 흉한 무리들이 원수로 여기고 방백(方伯)은 그것을 죄로 만들어 옥(獄)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정도를 지키며 확고부동하였다. 그리하여 방백이 그에 대해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감히 중상은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세력가의 자제가 읍기(邑妓)를 데리고 살면서 횡포가 심하자 공이 그를 용서없이 물리쳤는데, 그가 앙심을 품고 수의(繡衣)를 사주하여 공을 무함한 결과 1년 넘게 옥에 갇혔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어 풀려났다.
임술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책을 다한다는 칭송이 있었고, 가을에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기근이 거듭 닥친 때였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손을 써서 우졸(郵卒)도 되살아나고 마정(馬政)도 잘 되었으며, 어호(漁戶)의 징공(徵供)도 일체를 면제하여 쌓였던 폐단들이 씻은 듯 없어졌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은혜로움을 느끼었다. 질(秩)이 차고 나서 몇 년을 한가히 보내며 기력도 강건하다가, 병인년 5월 20일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74세였다. 처음에는 교하(交河)의 강교리(綱橋里)에 장사 지냈다가 병술년에 공주(公州) 읍 서쪽 곡화천(曲火川) 자좌(子坐)의 둔덕으로 이장하였는데, 그후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두 배위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숙인(淑人) 서씨(徐氏)가 부장되어 있다.
공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있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좌우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조상도 성경(誠敬)을 다하여 받들었다. 아우 세장(世章)과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세장이 일찍 죽자 모든 일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전답까지 팔아 장례를 치렀고, 아비 잃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겨레붙이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사귄 친구는 모두가 당대의 현인이요 군자였다. 공은 평소 조급해 하거나 폭언하는 일이 없었고 각박한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술도 무척 좋아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기 몸가짐은 매우 엄하게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하여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비를 세워 송덕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청렴한 절조야말로 공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될 정도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가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돌아오고 나면 온 집 안이 썰렁하였으나 자신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공은 항상 보첩(譜牒)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1권의 책을 만들어두고 그것을 화목을 다지는 자료로 삼았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국의 시중(侍中)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아조에 와서 담(霮)이라는 이는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었고, 덕지(德之)라는 이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세상에서 그를 연촌 선생(煙村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고조인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렀다. 증조의 휘는 희수(稀壽)로 판관(判官)이고, 조부의 휘는 응하(應夏)로 현감이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충익(忠益)의 딸인데, 우재(尤齋) 선생이 공의 아버지 군수공(郡守公)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부인의 현덕(賢德)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숙인(淑人)은 관향이 연산(連山)이고 그의 아버지는 좌랑(佐郞)에 추증된 효적(效積)이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 명철하고 주고받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시부모 봉양하는 일과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을 하나같이 지성으로 하여 온 집안이 존경하고 본받았다. 나이 86세로 을해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방언(邦彦)은 학술(學術)로 여러 번 별천(別薦)에 올라 몇 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노직(老職)으로 동추(同樞)가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방신(邦藎)과 방현(邦顯)이다. 큰딸은 현감 송이석(宋彝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평(許玶)에게 시집갔다. 방언은 4남을 두었으니 수강(守綱)ㆍ수기(守紀)ㆍ수경(守經)ㆍ수약(守約)인데, 수기는 방신의 양자가 되어 갔으며, 네 딸은 황준(黃鐏)ㆍ군수 이정영(李挺英)ㆍ김일정(金日井)ㆍ윤수겸(尹壽兼)에게 각각 시집갔다. 방현은 3남을 두었는데, 수손(守遜)ㆍ수도(守道)와 좌랑 수적(守迪)이고, 2녀는 안희인(安希仁)ㆍ윤간(尹侃)에게 시집갔다. 사위 송씨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백원(百源)ㆍ참봉 성원(性源) 그리고 만원(萬源)이고, 딸은 진사 이흥조(李興朝)ㆍ이사도(李思道)ㆍ김시서(金時叙)ㆍ조명제(趙明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허씨의 두 아들은 신(紳)ㆍ인(繗)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밖에 내외 증손과 현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했다.
아, 공은 이름 있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자훈(慈訓)을 잘 받아 행의(行誼)까지 겸하여 갖추었으며 문예(文藝) 또한 숙성하였으니, 일찍이 왕정(王庭)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을 크게 울렸어야 옳았을 것인데, 불행히도 길이 어긋나 주묵(朱墨 하급 관리를 의미함)의 사이에서 맴돌다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의자 밑에서 놀았기에 평소에 공을 존경하고 사모해 왔었는데, 지금 보면 장로(長老)들이 이미 다 가 버리고 없어 공에 관하여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동추공이 부탁한 묘도 문자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젊은 시절 듣고 보았던 것을 엮어 대략 이상과 같이 쓴다.


監察 贈參判崔公 世榮 墓表

     
光海昏亂。賊臣爾瞻倡讎母論。勢焰黨天。時則有若太學生崔公琢。倡多士抗章。直斥其兇邪。聲名震一時。遂杜門田廬。與世相忘者十餘年。 仁廟改玉。擢文科官郡守。尤菴宋先生銘其墓。亟稱其賢。有丈夫子二人。公其長也。諱世榮字夢與。生於 萬曆癸丑復月廿日。天資厚重。不妄游戲。自幼好讀書。及長修擧子業。有名場屋。庚寅中司馬。壬辰丁外艱。居喪盡禮。制終奉母夫人居于墓下。爲力田專養計。戊戌筮仕爲典牲參奉。庚子陞奉事。乙巳母夫人下世。公年已衰而率禮如前。公嘗爲奉事時。値慶科。做點于泮宮。臺官流言以詆訾國子長劾遞。後國子長秉銓。知其誣。首先牽復。除 寧陵參奉。例遷司瞻奉事。 仁宣大妃之喪。以 山陵監董勞陞司圃別提。出爲三嘉縣監。時邑儒權鑑以尊尙儒賢。見仇於兇黨。方伯欲鍛鍊成獄。而公終始守正。確然不撓。方伯大加慍怒。而亦不敢中傷。有一勢家子畜邑妓橫甚。公大斥不饒。其人銜之。嗾繡衣構誣。經年逮獄。卒無事實。壬戌拜司憲府監察。有盡職稱。秋除平陵察訪。時値荐饑。盡心撫摩。郵卒穌馬政擧。漁戶徵供。一倂蠲除。積瘼如洗。衆皆懷惠。秩滿閒居數年。氣力康健。丙寅五月廿日無疾而逝。壽七十四。始葬交河綱橋里。丙戌移窆于公州治西曲火川負坎之原。後以長子貴 贈嘉善大夫戶曹參判。二配俱 贈貞夫人。淑人徐氏祔焉。公性至孝。竭力事親。左右無違。奉先極其誠敬。與弟世章友愛篤至。世章早歿。躬莅凡百。至鬻己田而營葬。撫視諸孤如己出。推以至於宗族。無不得其歡心。所與交皆當世賢人君子。平生無躁暴之言。峭刻之行。酒戶甚寬。而居官未嘗近口。律己甚嚴而撫下以仁。去後民追思不忘。樹石而誦之。蓋其廉節。是公之長物。所至不以一毫自累。及歸環堵蕭然。而處之晏然。常以爲譜牒不可不明。裒稡氏族之書。編成一部。以爲講睦之資。全州之崔。以高麗侍中阿爲上祖。入我 朝。有曰霮。集賢殿提學。有曰德之。藝文館直提學。世號煙村先生。立祠俎豆。高祖諱彥淸。奉事。是一蠹之彌甥。人稱小一蠹。曾祖諱稀壽。判官。祖諱應夏。縣監。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之女。尤齋先生撰郡守公墓表。備列其賢德。淑人貫連山。其考 贈佐郞效積。稟性淑哲。取與不妄。甘旨之供。蘋蘩之薦。一出於至誠。宗門式之。年八十六。歿於乙亥八月十日。擧三男二女。男長邦彥。以學術屢登別薦。歷幾官。今爲老職同樞。次邦藎,邦顯。女適宋彝錫縣監。次許玶。邦彥四男。守綱,守紀,守經,守約。守紀爲邦藎後。四女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壽兼。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安希仁,尹侃。宋壻三男百源,性源參奉,萬源。四女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敍,趙明濟。許壻二男紳,繗。女未行。內外曾玄不盡錄。嗚呼。公以名父之子。祇承慈訓。行誼兼備。文藝夙成。宜其早揚 王庭。大鳴于世。而不幸蹉跎。棲遲朱墨之間。惜哉。余綴戚屬。自幼周旋於牀下。景仰有素矣。顧今長老零落已盡。知公之詳莫余若也。同樞公徵以墓文。義不敢辭。遂撮少日所見聞。略序如右。


권감(權鑑)


[생원시]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45위(75/100)

[인물요약]

※【補】: 원본에는 없지만, 참고할 수 있도록 다른 자료를 인용하여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UCI G002+AKS-KHF_12AD8CAC10FFFFB1631X0
형원(泂遠)
생년 신미(辛未) 1631년(인조 9)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삼가(三嘉)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권극경(權克經)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전행사근도찰방(前行沙斤道察訪)
[안항:형제]
: 권환(權鍰)
: 권박(權鎛)
: 권주(權鑄)

[출전]

『효종대왕3년임진증광사마방목(孝宗大王三年壬辰增廣司馬榜目)』(계명대학교[(고) 349.16 사마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