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전주최문과 왕실과의 혼인관계

전주최문 문성공 후손과 왕실과의 혼인관련자료

아베베1 2013. 12. 2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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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조 고사본말(定宗朝故事本末)
정종

정종 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 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은, 휘는 경(曔)이며, 자는 광원(光遠)이고, 처음 휘는 방과(芳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 17년 공민왕 6년 7월 초하룻날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私邸)에서 낳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상(將相)까지 이르렀고,태조가 즉위한 다음에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하였다. 무인년 홍무 31년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9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 받고, 경진년 건문(建文) 2년 11월에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인문공예(仁文恭睿) 어첩(御牒)에 기록한 휘호에 겹친 글자가 있고 시호 가운데 온인(溫仁) 밑에 공용(恭勇) 두 자가 있으나, 공(恭) 자가 겹쳐 나오므로 어첩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라는 존호를 받았다.왕위에 있은 지 2년이고, 기해년 세종 원년 영락17년 9월 26일 무진에 인덕궁(仁德宮)에서 승하하였으니, 상왕위(上王位)에 있은 지 19년이며, 수(壽)는 63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공정(恭靖) 웃사람을 공경하여 섬긴 것이 공이고, 너그럽고 즐겁게 살다가 잘 마친 것이 정이라고 한다. 이라고 하였다.숙종(肅宗) 7년 신유에 추후해서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 하고 의문장무(懿文莊武)라고 시호를 더 올렸으며, 능은 후릉(厚陵)이다. 풍덕(豊德) 동편 흥교동(興敎洞)에 있으니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경자년(1420) 정월 초사흗날에 장사지냈는데, 표석(表石)이 있다.
○ 비(妃) 순덕온명장의정안 왕후(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 김씨(金氏)는, 본관은 경주이니,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증 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을미년 지정 15년 정월 9일에 나서 무인년(1386)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덕비(德妃)로 올려서 봉하였다. 경진년(1400)에 존호를 순덕(順德)이라고 올리고, 임진년 태종 12년, 영락(永樂) 10년 6월 25일 무인에 인덕궁에서 승하하였는데, 수가 58세고 자녀는 없었다. 숙종 신유년(1681)에 추후하여 휘호를 온명장의(溫明莊懿)라 올렸다. 능은 후릉(厚陵) 능은 대왕의 능과 같은 산에 있는데, 임진년(1412) 8월 8일에 장사지냈다. 이다.
○ 아들 열 다섯과 딸 여덟을 두었다.
첫째 아들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 지씨(池氏)가 낳았고,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금천 감무(衿川監務) 치숭(致崇)의 딸이다.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다.
둘째 아들 순평군(順平君) 군생(群生) 기씨(奇氏)가 낳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순창 설씨(淳昌薛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이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셋째 아들 금평군(錦平君) 의생(義生) 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금평군을 추증하였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직(司直) 홍숙(洪宿)의 딸이다.
넷째 아들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參議) 종성(宗誠)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안강 김씨(安康金氏)를 재취하였으니,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다섯째 아들 종의군(從義君) 귀생(貴生) 문씨(文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종의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양구 유씨(楊口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正)으로 찬성(贊成)을 추증한 수빈(守濱)의 딸이다. 해풍 장씨(海豊張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주부(主簿)장균(張均)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 이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상호군(上護軍) 남심(南深)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수도군(守道君) 덕생(德生) 윤씨(尹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수도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장가 들었으니, 부사(府使) 계성(繼性)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여덟째 아들 임언군(林堰君) 녹생(祿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언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혜안(惠安)이다. 고령 박씨(高靈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少尹) 박부(朴溥)의 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
아홉째 아들 석보군(石保君) 복생(福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석보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원주 김씨(原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대민공(戴敏公) 연지(連枝)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두었다.
열째 아들 덕천군(德川君) 후생(厚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장수 이씨(長水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양후공(良厚公) 종무(從茂)의 딸이다.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두었다.
열한째 아들 임성군(任城君) 호생(好生) 지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성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평창 이씨(平昌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수(郡守) 계동(繼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용인 이씨(龍仁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부사(府使) 수강(守綱)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사직(司直) 최수(崔洙)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열세째 아들 장천군(長川君) 보생(普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장천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화순 최씨(和順崔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사(郡事) 자해(自海)의 딸이다.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다.
열네째 아들 정석군(貞石君) 융생(隆生) 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정석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충주 권씨(忠州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직장(直長) 권돈(權敦)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 기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이(昭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정(司正) 흥선(興善)의 딸이다.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다.
첫째 딸 함양옹주(咸陽翁主) 지씨가 낳았다. 남편은 지돈녕부사 박갱(朴賡)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박갱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득중(得中)이다.
둘째 딸 숙신옹주(淑愼翁主) 기씨가 낳았다. 남편은 판돈령부사 양평공(良平公) 김세민(金世民)인데,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세민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김겸(金謙)이다.
셋째 딸 덕천옹주(德川翁主) 남편은 행부사 변상복(邊尙服)인데,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상복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總制) 변이(邊頤)이다.
넷째 딸 고성옹주(高城翁主) 남편은 지중추부사 김한(金澣)인데,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그 집 족보(族譜)에는 안성위(安城尉) 호평공(胡平公)이라 하였고, 본관은 안산(案山)이며, 아버지는 연성군(連城君) 위정공(威靖公) 정경(定卿)이다.
다섯째 딸 상원옹주(祥原翁主) 남편은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인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효산의 본관은 평양이고, 아버지는 의방(義方)이다.
여섯째 딸 전산옹주(全山翁主) 남편은 행사직 이희종(李希宗)인데,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희종의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일곱째 딸 인천옹주(仁川翁主) 남편은 행부사(行府使) 이관식(李寬植)인데,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다. 관식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성간(成幹)이다.
여덟째 딸 함안옹주(咸安翁主) 남편은 부지돈녕부사 월림군(月林君) 소정공(昭靖公) 이항신(李恒信)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항신의 본관은 경주이다.
○ 정종은 성품이 순수하고 삼가며, 지행(志行)이 단엄하고 방정하였다. 무략(武略)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일찍이 태조를 따라 출정해서 여러번 큰 공을 세웠다. 《축수편(逐睡篇)》
○ 정사(定社)하던 날, 정종은 기도할 일이 있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잤는데,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성을 넘어 독음(禿音) 마을 집에 숨었다. 다음날 사람을 보내어 청해서 돌아오니,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동각잡기》
○ 태종이 정도전의 난리를 평정하니, 내외의 신하들이 모두 태조에게 청하여 태종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정종을 세자로 삼으라고 청하니, 정종이 말하기를, “당초에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안(靖安 태종)의 공이니,내가 세자될 수는 없다.” 하였으나, 태종이 굳게 사양하므로, 정종이 다시 말하기를, “정 그러면 알아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정종이 즉위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지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하여야 하니, 이 일은 지체할 수가 없다.” 하니, 태종이 듣고 노하여 꾸짖었다.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한 뒤에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큰 일을 거의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도 만약 정안군이 없었다면 또한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또 어제의 일로 보아도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찍 세자의 칭호를 정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정종이 이르기를, “옳다.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내가 곧 이 아우를 세자로 삼으리라.” 하고, 곧 태조께 들어가 아뢰고 세자로 세웠다. 태조가 태종에게 이르기를, “시킬 수도 없고 안 시킬 수도 없다. 네가 이미 세자가 되었으니, 군국(軍國)의 일에 힘쓰라.” 하고, 썼던 갓[笠]을 주며 술을 올리라 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헤어졌다. 《동각잡기》
○ 당초에 태조가 왕업을 이루고자 할 때에 매양 태종과 가만히 의논을 하였는데, 정종은 장자(長子)인데도 피하고 참여하지 않아 태조가 꾸짖기를 마지 않았다. 태조가 개국하는 데에 정종은 적은 공도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은 진실로백이(伯夷)와 태백(太伯)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위태롭고 혐의스러운 때를 당하여 전위를 받아 왕위에 앉은 뒤 모든 왕자를 절로 보내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게 하였으니, 기미를 알고 후환을 염려하는 마음이 또한 지극하였다.정안왕후는 매양 태종이 들어가 뵐 때마다 정종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그의 눈을 어찌하여 못보십니까. 속히 왕위를 전하시어 마음을 편하게 하소서.” 하였더니, 정종이 그 말을 좇아서 상왕(上王)으로 별궁에 거처하였다.
태종이 별궁에 가서 뵐 때마다 신(臣)이라 칭하며, 우애를 극진히 하고, 모든 왕자를 환속(還俗)하게 하여 등급에 따라 작호(爵號)를 주었다. 정종이 한가하게 병을 치료한 것이 열 아홉 해였으니, 조선에서 정종처럼 복을 누린 임금이 몇 분 없고, 자손이 많아서 이름난 재상이 많이 났다. 《축수편(逐睡篇)》 《아성잡기(鵝城雜記)》
○ 상왕궁(上王宮)의 한 내관이 2월 그믐께 우연히 뒷동산에 갔는데, 두서너 사람이 쌓인 풀더미 옆에서 복숭아를 주워서 먹고 있었다. 가서 자세히 보니 복숭아가 크고 붉은 것이 9, 10월의 상도(霜桃)였다. 풀더미의 덤불을 헤치고 복숭아 수백 개를 얻어서 상왕[정종]께 올리니,상왕이 크게 기뻐하여 곧 문소전(文昭殿 태조의 사당)에 천신하고, 또 태종이 있는 곳에 보내며 말하기를, “다행히 선도(仙桃)를 얻었기에 감히 좌우에 드리오.” 하였다. 태종이 크게 기뻐하며 문소전에 올리라고 하였는데, 상왕이 이미 드렸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만 두고, 입었던 옷을 벗어 복숭아를 올린 내관에게 주었다.곧 유사에게 명하여 호위병을 거느리고 상왕궁으로 가서 선도를 담아 놓고 같이 구경을 하면서 크게 잔치를 하고 밤중까지 즐겁게 놀았다. 가을에 그 복숭아가 푹 익었으므로 상왕이 사람을 시켜 풀로 덮어 두게 하였다가 다음해 봄에 열어 보니, 복숭아가 다 썩어서 그 전해처럼 살찌고 아름답지 못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숙종 7년 신유에 묘호(廟號)를 추상(追上)하였다. 묘호와 시호는 전고(典故)에 자세하다.
○ 윤근수(尹根壽)가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에, 예종(睿宗) 때의 《일기(日記)》를 보니, 하교하기를, “공정대왕(恭靖大王)은 종묘사직에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찌해서 묘호가 없느냐. 이것은 전례(典禮)에 벗어난 것이니, 지금 시호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여, 곧 안종(安宗)이라고 시호를 올렸는데, 그뒤에도 공정이라고만 하고 안종이라는 시호로 일컫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다.이것은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있는 말이다. 지난해에 교리 오도일(吳道一)이 시호를 올리자고 청하여, 정종(定宗)이라 올리니, 오도일 또한 고사(故事)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였고, 신주(神主)에 쓴 것과 국가 문서의 한 군데에도 기록된 것이 없어서 이미 올린 시호를 겹쳐 올리게 되었으니, 국가의 전례가 괴란(乖亂)되었다 하겠다. 《회은집(晦隱集)》

[주D-001]백이(伯夷)와 태백(太伯) : 백이와 태백은 모두 아우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피하여 갔다.

 

상촌선생집 제24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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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墓誌銘) 13수
통훈대부 행 정선군수 정공 묘지명(通訓大夫行旌善郡守鄭公墓誌銘)


정후 사급(鄭侯思伋)의 자는 희성(希聖)으로서 관향은 경주(慶州)인데 신라 때부터 이미 우족(右族)이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고상(考常)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조 판서로서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에 책록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니 바로 후(侯)의 고조이다. 증조 홍선(弘先)은 군기시 별제를 지냈는데 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 양(良)은 익위사 시직(侍直)이었는데 나이 80세였으므로 비의(緋衣 붉은색의 관복)를 입었으며, 아버지 충인(忠仁)은 광흥창 수(廣興倉守)였는데 성종(成宗)의 몇째 아들인 영산군 전(寧山君恮)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후(侯)를 낳았는데, 젊어서부터 유학(儒學)에 종사하였고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에 보임되어 주부(主簿)에 승진되었으며, 여러 차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외직으로 나가 개령(開寧)ㆍ회인(懷仁)ㆍ신계(新溪)ㆍ전주(全州) 등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잘 다스렸다고 알려졌고, 내직으로 들어와 사복시 판관이 되었다. 계미년에는 청하 현령(淸河縣令)에 제수되었지만 부모가 늙었다는 것으로 면직시켜주기를 청하였다. 을유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정해년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복제(服制)를 벗고 나서는 서호(西湖) 가에 집을 짓고 날마다 그곳에서 소요하며 다시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갖지 않았다.
임진년에는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발탁 제수되었다. 당시 왜구가 한창 기세를 부리며 침략해오자 동로(東路) 주군의 수령들이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 숨었었는데, 후만은 고을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고 적을 베거나 포획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의 병폐에 대해서 상소하여 아뢰자, 상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권장하는 유지를 내리고 고을의 오래된 폐단을 모두 제거하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이 안정할 수 있게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자 관찰사가 그의 치적(治績)을 아뢰어 잉임(仍任)시키도록 하였는데, 을미년에 파직되어 촌장(村庄)으로 돌아왔다. 정유년 7월에 병으로 졸하였는데 향년이 61세였다. 8월에 임시로 그곳에 묻었다가 다음해 10월 경오일에 파주군(坡州郡) 대동(碓洞) 묘좌(卯坐)의 산에 반장(返葬)하였으니 이곳은 선영(先塋)이다.
후는 타고난 성품이 준엄하고 근신하여 지성으로 선조를 받들었으며, 남을 대해서는 함부로 그를 따르지 않았다. 전주(全州)에 있을 적에 정여립(鄭汝立)의 기세가 매우 떨쳤는데 후는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와 교제하기를 권유하자 후는 말하기를 “내가 그의 소행을 보건대 매우 흉패스러우니 그와 서로 알고 지내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여립에게 원한을 사게 되어 여립이 요로에 있는 자에게 부탁하여 상에게 아뢰어 후를 제거시키도록 하였다. 그 뒤에 여립의 역적모의에 연루되어 체포된 자가 많았으나 후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제서야 후의 선견지명을 탄복하였다.
후의 배위(配位) 김씨(金氏)는 참찬 개(鎧)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대복(大復)ㆍ대유(大有)는 일찍 죽었고, 희주(熙周)ㆍ종주(宗周)가 있다. 대복은 지평 최수(崔洙)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고, 대유는 참봉 신백(申栢)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다. 희주는 현감 박문필(朴文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고, 종주는 참봉 이돈(李敦)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며, 딸은 사과(司果) 윤찬원(尹贊元)에게 출가하였고, 측실(側室)의 딸 1명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가문에 행실이 알려지고 / 行聞于家
공적이 고을에 드러났도다 / 績著于官
세력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 不浼于勢
올바른 지조를 지켰네 / 所守之端
자신은 후한 복 못 받았으니 / 未食于己
후손이 훌륭하게 되리라 / 維後之成
내가 명 지어 돌에 새기니 / 我銘于石
그 명성 영원히 전해지리 / 繄永厥聲


 

 

 

 歸溪遺稿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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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系考]
淸風金氏世系考 a_122_290c
[UCI]G001+KR03-KC.121115.D0.kc_mm_a377_av002_09_023: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金氏之得姓。肇於新羅。蓋新羅之世。朴昔金三姓迭王。而金氏最盛。其子孫散處州郡。各因所居爲籍。如嶺南之慶州安東。善山義城。關東之江陵原州。湖南之順天光州。湖西之淸風。皆是新羅之裔。而唯駕洛之金。系自別焉。我淸風之金。以高麗侍中諱大猷爲鼻祖。世傳新羅之衰有王子一人。避地淸風。其後遂爲郡人。自侍中四傳而至判奉常寺事仲滂。淸虜將軍仲源。爲122_290d 二派。今之家於忠州淸州竹山者及近故判中樞府事藎國。卽奉常之後也。淸虜之孫校尉敬文。生四子。曰勵翰林。曰玩未第。曰耆武科上護軍。曰耋太常寺正。今之家於海州者。卽玩與護軍之後。而太常公。卽吾之七世祖也。太常之後。亦有家於海州者。又有諱吉通。生於永樂。戊子魁。宣德壬子。制科。策佐理功。封月川君。諡文平。其四代祖曰忡。自忡以上。譜牒不載。故不知其所出之祖。然今之家於利川長湍長興者。122_291a 皆其後也。按佔畢齋金宗直所著彝尊錄云。金氏之先。蓋出於新羅金閼智。初。閼智入金櫃。夜降鷄林。遂賜姓爲金。或云自謂金天氏之後以爲姓焉。閼智七世孫末鄒。以外孫入繼大統。其宗支苗裔散處四方者。不可勝紀。厥後競用豪武。霸於州郡。因以爲所在戶長。育子長孫。遂爲本貫。麗祖統合之初。戶長之能團結鄕兵。率先歸服。及有功於軍陣者。俾登于朝。有至侍中大匡者。其間或患本貫之俗。往往強梗不遵122_291b 法度者。欲綏治而鎭服之。則自大官謝事。還爲戶長。夾輔守宰。以聽民治云。今淸風之鄕吏姓金而族蕃。其爲夾輔民治者之後無疑。而無譜牒之可考。不知分派之自於何人。然溯其流而上之。則其出於一源明矣。第其安於故常。自以爲世德之名氏。訖千百年不能脫於吏役。是可惜也。抑吾於此不能無懼焉。今吾之宗。荷祖先之餘庥。蒙國家之恩澤。詩禮傳家。簪組奕世。苟或偭古人止足之戒。昧虧盈益謙之道。122_291c 知進而不知退。知得而不知喪。則豈不有愧於鄕邑之吏能世其家於千百年而勿失者哉。凡吾之宗人。盍亦勉之哉。崇禎丙子冬。先文貞公修族譜於皇都玉河館。越二年戊寅。宗人寅刊於嶺南。是歲。先公按湖西。取其板藏于淸風之霧庵寺。內外支孫。靡不錄於譜中。今溯吾之直派。上而接於鼻祖。錄其名位壽年卒葬以及齊體之世系。而女子之適人。外裔支孫而著稱者並載各世之下。詳於耳目之所覩記。略122_291d 於見聞之所未及。作淸風金氏世系考。
淸風本高句麗沙熱伊縣。新羅改今名爲奈堤郡屬縣。奈堤卽今堤川縣也。高麗顯宗九年。屬忠州。後置監務。忠肅王四年。以縣僧淸恭爲王師。陞知郡事。本朝因之屬忠淸道。我孝宗大王十年己亥。今上嗣位。以王妃姓鄕。例陞爲府。○別號沙熱金吉通。封月川君。按勝覽。郡西四十里。有月川。源出夫德山。流入忠州辰浦云。
122_292a始祖諱大猷。姓金氏。系出新羅。羅季有王子。避地淸風。後爲郡人。舊譜稱公生員。或云官侍中。贈淸城府院君。墓在淸風白峙。有碣石云。○公凡三子。長仁祐。次良祐。次文祐。文祐官門下侍中。
十三代祖諱仁祐。○公一子鉉。
十二代祖諱鉉。 一本作鉉昌 官監門衛上護軍。○公一子昌祚。
十一代祖諱昌祚。 一本作祚 官門下侍中。○公二子。長仲滂判奉常寺事。次仲源。仲滂之子122_292b 灌戶曹參議。灌四子。俒之同知。儀之漢城府尹。保之忠淸都事。億之僉知。俒之之子崇海。崇海之外孫曰權孝忠。孝忠之壻曰領議政柳順汀。順汀之孫曰郡守柳師弼。師弼之外孫曰延原府院君李光庭。觀察使李昌庭。儀之五子曰理。五代孫文科領中樞府事藎國。禮曹參判蓍國。曰珝之後。今居淸州。曰珸之子賢孫。六代孫淸陵君振聲。淸興君得聲。今居竹山。賢孫弟欣孫之後。今居忠州。
122_292c十代祖諱仲源。官上將軍。 一作大卿。一作濟虜將軍。配陽川許氏。重大匡僉議贊成事判開城尹僐之女。承奉郞版圖佐郞贈匡靖大夫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冠之孫。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世子師文敬公珙之曾孫。○公一子瀞。女金路司農卿。一作左尹。同知密直光富之子。義城人。路子叔儉。太宗朝登科。孫養中。世宗朝登科。命中。魯山時登科。養中子益謙。武科府使。益謙之壻曰錦城府院君朴墉。誕122_292d 仁聖王后。女奇勉左尹。郞將奇仲平之子。勉子判尹貞武公奇虔。虔曾孫典翰奇遵號服齋。玄孫大司諫奇大升號高峯。
九代祖諱瀞。仕至司憲府監察。配光州金氏。工曹判書南雨之女。典理判書光利之孫。政堂文學章榮公稹之曾孫。文忠公益齋李齊賢之外孫。○公凡四子。長敬信。次敬順副正。敬文。敬智。女淸渠守蕙。瑞原君之子。孝寧大君之孫。淸渠之外孫曰縣監金碩麟。碩麟之外孫曰金仁甲。仁甲之122_293a 子判中樞府事金時讓。
八代祖諱敬文。階進義校尉。配海州吳氏。咸從縣令晉卿之女。成均生員生韻之孫。墓在海州北面羅峙谷。卽咸從公所卜之山也。吳公許令進義公爲壽藏曰。子孫必大顯云。進義公具墓田祭器。且建齋寺。募僧居之。以良田三結給之曰。居此寺者。食此田。守祭器修節祀。而田賦之役。令諸子孫共答之。至今祭器匙筯尙存。祖考忌。十月二十六日。祖妣忌。十月二十九日。○公凡122_293b 四子。長勵。文科由翰林。爲宗學司誨早卒。葬進義公墓前。配文化柳氏。次玩。次耆。亦同年武科宣傳官。次耋。玩子玉堅。女縣監李公遂。玉堅二子。渾,波武正郞。李公遂之外孫李文馨吏曹判書。耆與通信使宋處儉。赴日本溺不返。葬衣冠于羅峙谷東五里許。子鐵堅。葬進義公墓下。木溪姜渾爲撰墓表。
七代祖諱耋。字壽翁。年二十七。以進士登世祖朝天順己卯科。與兄勵同榜。歷官掌122_293c令執義。爲安東府使。佔畢齋金文簡公宗直。亦公同榜。爲作映湖樓重修記。略曰。映湖之作。距今百有餘年。其間守宰豈無治其楹桷板檻之腐橈者。蓋瓦級甎之穿缺者。然人心不同。曲修人事者。苞苴問遺之爲急。徒守規模者。簿書期會之不暇。誰肯用力修擧廢墜。以渫吾所蓄之財用乎。樓之日以頹圮。無足怪已。吾同年金侯某由御史中丞。綰左符于茲。未數年。政通人和。仍歲穰熟。且土田臧獲之訟。一道之人。投122_293d 牒監司。願歸于侯。侯每當二分之際。夙夜裁決。伸者負者俱滿其意。由是收質之錢布。充溢帑藏。於是謀諸吏民。改構斯樓。遂以戊申三月日。召募游手。輪役吏戶。基地則因舊。而尋引丈尺。頗有增損。其崇廣頓加三之一。至其赤白之飾。金泥之榜。亦煥耀改觀。才閱數月而厥功乃就。州民耆幼瞻仰咨嗟。咸以爲神焉。越明年春。侯抵書於僕曰願爲述。僕輒不自揆。竊喜與淡菴牧隱二老聯名其間。遂操觚而歎曰。侯之122_294a 爲政。廉平不苛。動以法度。其視曲修人事者。不啻若狗彘。其視徒守規模者。不啻若僕隷。吏民愛而敬之。如見龔黃於千百載之下。其爲一樓而興功。豈不有餘裕哉。公生於宣德八年癸丑。卒於弘治六年癸丑四月初九日。享年六十一。官至奉常寺正。墓在海州西高山亥坐巳向之原。配淑人全州李氏。宗室順城君之女。太宗大王嗣讓寧大君褆之孫。生於正統六年辛酉。卒於弘治十七年癸亥二月十四日。享122_294b 年六十三。○公凡三子。長叔弼。次碩弼。次終弼進士號楓巖。有詩集。女德安守珍。烏山君澍之子。臨瀛大君璆之孫。德安之孫忠綽。文監司。
六代祖諱叔弼。字獻可。生員贈禮賓寺正。生於天順七年癸未。成化二十三年丁未二月二十三日。卒於安東府衙。享年二十五。太常公以子弟之喪。不可煩民遠致。依嬴博故事。卜葬于善山治西柏田里。益樹柏山上。俾官禁焉。表石題曰。生員金某之122_294c 墓。後以公曾孫參判權從勳贈官。歲在丙申。距成化丁未百七十年。五代孫垓爲新寧縣監。治石而改刻之。埋舊碣于墓左。先文貞公記事于碣陰。配贈淑人泗川睦氏。禮賓寺僉正哲成之女。舒川郡守寶男之孫。戶曹參判進恭之曾孫。後公五十一年而卒。生於成化丙戌。卒於嘉靖丁酉八月初十日。壽七十二。葬于楊州治南金村里坐艮之原。有墓碣。○公一子湜。
五代祖諱湜。字老泉。年二十。中辛酉進士。與122_294d 趙靜菴光祖爲道義交。首倡性理之學。遠近學者宗焉。正德乙亥。以三公薦。直拜廣興主簿。轉戶曹佐郞司憲府持平。至掌令。己卯四月。擢薦科壯元。超授弘文館直提學。陞副提學。尋移成均館大司成。特兼經筵參贊官。十月。北門禍作。配善山。庚辰五月十六日。卒於居昌。六月返櫬。自忠州舟下平丘。卜葬於金村里坐艮向坤之原。公生於成化十八年壬寅。及卒壽僅三十九。宣祖朝。追錄公光國從勛。贈嘉善122_295a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配贈貞夫人全州李氏。考永新君怡。祖誼城君寀。曾祖孝寧大君補。生於成化癸卯。卒於嘉靖癸酉十月十四日。後公五十四年而卒。壽八十一。祔公墓左。有碣石。○公五男二女。男長德秀。次德純。次德器。次德懋。生員顯陵參奉贈吏曹判書。海平尹根壽銘其墓。次德成。女長適虞侯孫世訥。次適濱陽令彥修。德純娶嵩善正灇女。無子。122_295b 有庶出子松,杉,檗。德器之子曰楗參奉。曰棨。女司僕正金就礪,黃顗。德懋之子曰權,樞,檼。權宣祖朝庚辰。文科參判。光海廢母時。獻議守正。仁祖朝。贈領議政。諡忠簡。德成無子。一女曰崔洙文科持平。楗之子曰興緖。棨之子曰興道。興緖之子曰塾,墍,墐。興道之子曰坦。權之子曰興祥僉正。樞之子曰興進,興達,興邁。檼之子曰興運,興戩,興祉縣令。興祥之子曰㙉別坐,坰僉知。興戩之子曰垕,埈。興祉之子曰㙐,埁。
122_295c高祖諱德秀。字景眞。號頤眞子。孝友出天。文章過人。家難不仕。訓誨後進。如尹相國斗壽,根壽兄弟。元忠壯豪皆出門下。公生於弘治十三年庚申。卒於嘉靖三十一年壬子十一月初二日。享年五十三。葬楊州金村里先塋北巳向之原。後以曾孫領議政堉推恩。累贈至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配贈貞夫人尹氏。祔公墓左。坡平望族。考諱商司僕。祖諱辰孫學生。曾祖諱自信判122_295d官。生於弘治十四年辛酉。卒於嘉靖丙申九月初九日。享年三十六。○公二男二女。男長樗英陵參奉。無子。一女曰節愼君壽崑。次棐。女適僉知李世經,士人安籍。
曾祖考諱棐。字孺良。以蔭筮仕。歷司憲府監察,山陰,松禾縣監,江東縣令。官至軍資監判官。所過有遺愛。栗谷李文成爲遠接使時。公任松禾。稱公善治理無愧賢者。後以先文貞公推恩。累贈至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122_296a都摠管。公生於嘉靖十三年甲午月二十九日。卒於萬曆十八年庚寅七月初一日。享年五十七。墓在楊州金村里坐艮向坤。初配贈貞敬夫人密陽朴氏。合葬公墓。考諱偉刑曹佐郞。嘉靖丙午。文科。祖諱承英。安州敎授。曾祖諱俶。成均生員。有二男二女。男長興宇。次興祿。女適僉正李春英。卽號體素者。次適監役任慶弘。繼配贈貞敬夫人江陵金氏。葬公墓左。考諱光濟學生。祖諱演學生。曾祖諱由岳軍器判122_296b官。外祖原州牧使趙崇祖。生三男一女。興孝,興悌,興信。興悌早卒班祔于廟。女適郡守成㮨。興祿娶承旨白惟咸女。生二男。址,圻。一女適僉正卞悌元。興孝一男垓縣監。興信一男一女。男埮。女適幼學李厚根。
祖考諱興宇。字善慶。生於嘉靖四十三年甲子四月十日。容儀甚偉。氣象卓爾。人望之儼然自生畏敬。近之溫然。和氣襲人。年二十二。中萬曆乙酉司馬兩試高等。少友善李體素春英,黃秋浦愼,金仙源尙容,金淸122_296c陰尙憲。相與爲修辭。又從牛溪先生問學。先生傾許之甚。庚寅。贊成公卒。公居廬墓側。執喪致毀。及遭難流離。菽水不繼。甲午。旅寓于海州。牛溪先生手簡問訊無虛日。連以米菽濟其急。宣祖大王聞公行誼。授康陵參奉。公病不赴。竟以其年四月十六日不起。壽僅三十一。公爲文。立草不加點。筆法遒逸逼古。嘗居盤松舊第。隣舍有日會客棋奕者。公一不迹其門。諸公來訪。在家酬酢而已。識者皆期以遠到。不幸122_296d 早世。嗚呼痛哉。公配漢陽趙氏。生於嘉靖壬戌。考通訓大夫行新昌縣監兼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諱希孟。祖通訓大夫原州牧使兼原州鎭兵馬節制使諱崇祖。卽靜菴文正公之弟也。曾祖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司憲府監察諱元綱。外祖通善郞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安處諴。順興人。卽貞愍公瑭之子也。後公六年。以萬曆庚子正月二十六日。卒于延安。享122_297a 年三十九。初公之喪。權厝于海州麋鹿村北發朗洞。至是奉兩喪。合葬于楊州金村里先塋贊成公兆次。以公長子文貞公堉貴推恩。累贈至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配趙氏贈貞敬夫人。淸陰金文正公撰墓誌。○公生二男二女。男長卽文貞公。次埥以蔭仕歷交河,龍安二縣,監察,水運判官,翊衛。至掌隷院司議。女長適忠義李天培。次適士122_297b 人李明傳。司議娶縣令韓汝潝女。生一男一女。男就明早死。有子曰錫齡。女適生員柳軸。李天培四男二女。男震柱,震棟,震樑,震材。女長適申應楨。次適高斗夏。李明傳一男二女。男守恒早死。女長適縣監尹杭。次適趙碩賓。尹杭生三男三女。男益全,益奐,益雋。女長適權懋。次適進士金澍。次適進士李範錫。趙碩賓生四男二女。男長敏普。次敏曾。餘幼。
附歸溪遺稿卷下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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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世宗)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홍무 30년 정축,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낳았다. 무자년(1408)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임진년(1412)에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었고, 무술년(1418)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그해 8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경태(景泰) 원년 경오 2월 17일 임진에 별궁(別宮)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32년이고, 수는 5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장헌(莊憲) 엄함과 공경으로써 백성에 임함을 장(莊)이라 하고, 착함을 행하여 기록할 만함을 헌(憲)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능은 영릉(英陵) 처음에는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편 산에 장사했다가, 예종(睿宗) 원년 기축 3월 6일에 여주(驪州) 서북편 성산(城山)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옮겼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승소(李承召)가 묘지(墓誌)를 지었고, 윤회(尹淮)가 행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정인지가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능을 옮길 때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이다.
○ 비(妃) 선인제성소헌 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본관은 청송(靑松)이니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다. 홍무 28년 을해 9월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영락(永樂) 무자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여 처음에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해졌다가, 정유년(1417)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지고, 무술년에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얼마 안 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임자 선덕(宣德) 7년 에 왕비가 되었다. 정통(正統) 병인 11년 세종 28년 3월 24일 신묘에 별궁 세조(世祖)의 잠저. 에서 승하하니, 수가 52세였다. 문종(文宗) 2년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능은 영릉 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애초에는 헌릉(獻陵) 서편 산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에 이장하였다. 이다.
○ 18남 4녀를 두었다.
사(嗣) 문종대왕(文宗大王) 순서로는 첫째이다.
사(嗣) 세조대왕(世祖大王) 순서로는 둘째이다.
3남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시호는 장소(章昭)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判書) 증 좌의정(贈左議政) 연(淵)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며, 계유년(1453)에 화를 입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충간공(忠簡公) 지(智)의 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봉례(奉禮) 증 우의정(贈右議政) 승녕(承寧)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중추부사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찬성 증 좌의정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정축년(1457)에 화를 입었고, 그 뒤에 신원되었다.
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처음의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증 좌의정 이용(利用)의 딸이다.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일찍 죽었다.
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아내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맹담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망지(望之)이다.
1남 화의군(和義君) 영(瓔) 영빈(令嬪) 강씨(姜氏)가 낳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찬성(贈左贊成) 공효공(恭孝公) 중손(仲孫)의 딸이다.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2남 계양군(桂陽君) 증(璔) 신빈(愼嬪)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딸이다. 3남 3녀를 두었다.
3남 의창군(義昌君) 공(玒)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도관찰사 증 찬성 수(脩)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4남 한남군(漢南君) 어()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낳았다. 정축년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증 지돈녕부사 격(格)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5남 밀성군(密城君) 침(琛)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이고,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윤 증 찬성 승서(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6남 수춘군(壽春君) 현(玹) 혜빈 양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영일 정씨(迎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윤 증 좌찬성 위양공(威襄公) 자제(自濟)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7남 익현군(翼峴君) 곤(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 증 찬성 철산(鐵山)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8남 영풍군(永豊君) 전(瑔) 혜빈 양씨가 낳았다. 정축년에 화를 입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팽년(彭年)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9남 영해군(寧海君) 당(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성윤 증 찬성 윤동(允童)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10남 담양군(潭陽君) 거(璖)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일찍 죽었으니 시호는 이양(夷襄)이다.
1녀(一女) 정현옹주(貞顯翁主) 상침 송씨(尙寢宋氏)가 낳았다. 좌익공신 좌찬성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아내이다. 2남을 두었다. 사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참의 은(垠)이다.
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안의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선(璿)이다.
태종 18년 무술 6월에 책봉하여 세자가 되었다. 8월에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제 벌써 19년이나 되었다. 아침에나 밤에나 삼가며 두려워하였으나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내리고 또 묵은 병이 있으니, 이제 세자에게 이 자리를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정부와 육조(六曹) 및 모든 공신들이 궁문을 헤치고 들어와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여 내렸던 명령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이 보평전(報平殿)에 거둥하여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빨리 세자를 불러들여 국새(國璽)를 전하고, 곧 자기의 거처를 연지동(蓮池洞) 별궁으로 옮겼다. 세자가 그 뒤를 따라가서 국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內庭)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이 되었는데도 윤허하지 않았다.드디어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조하(朝賀)를 받고 죄인에게 사면령을 반포하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上王殿)에 사은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는 모두 상왕에게 여쭙기로 하였다.
11월에 세종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상왕에게 성덕 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와 대비(大妃)에게 후덕(厚德)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상왕의 시어소(時御所)에 행차하여 경헌례(敬獻禮)를 행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전한 것은 애초에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뜻대로 편히 지내고자 해서이다. 다만 군사(軍事)에 대해서만 친히 보살피려 하는 것은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의 나이가 서른이 되고 일에 경험이 많기를 기다려서 모두 전해주려 한다.지난 날에 만일 모든 아들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어찌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이는 저 양녕(讓寧)이 시기하고 음험한데 모든 아우들이 제각기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면 어찌 서로 용납하였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못한 것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세종이 상왕에게 상수(上壽)할 때 뭇 신하들이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상왕은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피한 것은 복을 쌓아두고자 해서였는데 이제 와서 도리어 더욱 높아졌도다.” 하였다.술에 취하자 뭇 신하가 춤을 추었는데, 상왕 역시 춤추며 이르기를, “왕위를 맡기는데 만일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면 비록 걱정을 잊으려 한들 되었겠는가. 임금은 참으로 개국한 뒤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룩할 임금이로다.” 하였다. 《국조보감》
○ 정종(定宗)이 피서하기 위하여 광나루에 머무를 때,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동교(東郊) 대산(臺山)에 거둥하여 정종을 맞이하고, 술자리를 차려 매우 즐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상왕이 흰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말에서 내려 지신사 하연(河演)을 불러 이르기를, “내 평소부터 이 말이 길이 잘든 것을 사랑해 왔는데, 이제 이 말을 임금에게 주리라.” 하고는, 곧 상승(尙乘)으로 하여금 안장을 갈아서 임금께 드리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상왕을 뵐 때, 사신 조량(趙亮)과 이절(易節)이 뒤를 따라 이르렀기 때문에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조량이 찬탄하기를, “하늘이 이런 선경을 마련해 주었으니 전하께서는 한가하게 지내며 수양하기에 가장 알맞고, 새 전하께선 조정[明朝]을 공경하며 늙으신 상왕을 높여 충성과 효도가 겸전하시니, 내 일찍이 사신 간 나라가 많았으나 새 전하처럼 어진 분은 보지 못하였오.” 하고, 이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손의 어진 것은 사지 못하리.”라는 옛 구절을 읊었다. 이에 상왕이 사례하기를, “이제 사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절로 내리오.” 하였는데, 그 자리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국조보감》
○ 상왕이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차하였을 때에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서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하나이다.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가 없었느니라.” 하였다.
또 일찍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임금께서 날마다 와 이야기를 하니 매우 좋기는 하나, 정사를 폐할까 두렵다. 네가 가서 여쭈어 격일로 오게 하라.”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상감께서는 매양 일을 처리하신 뒤에 와 뵙는 것이며, 와 뵙는 동안에도 일이 있으면 곧 따라 여쭙게 하여 지체가 없습니다. 상감께서는 늘 옛날 문왕이 그 아버지께 날마다 세 차례 뵙던 일을 본받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격일로 와 뵈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그러면 호위하는 군사가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다만 매일 당번된 금군만을 거느리고 올 따름이니, 뉘가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 2년 경자에 대비가 돌아가셨다. 상례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부르짖고 슬퍼하여 수일 동안을 음식을 들지 않았으며, 때마침 날씨가 덥고 습했으나 평상을 버려두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모신 이들이 몰래 유지(油紙)를 그 밑에 깔았더니, 세종이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명하였고, 큰 비가 와서 물이 여차(廬次)에 스며 들었으나, 임금은 그래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여 드디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날이 밝자 곧 여차로 돌아왔다. 《국조보감》
○ 3년 신축에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상왕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려는 뜻을 상왕에게 여쭈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태상왕의 호를 사양함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 태조께서 태상왕이 되었고, 둘째는 인덕전(仁德殿 정종)이 태상왕이 되지 못했으며, 셋째는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굳이 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玉冊)ㆍ금보(金寶)로써 상왕을 높여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모셨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의 병이 위독하여 신궁(新宮)으로 옮길 때, 임금이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금이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뫼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태상왕이 돌아가신 뒤,흙비[霾雨]가 심하여 대신들이 술을 드시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 꾸지람을 내려 이르기를, “상중에 술을 마심은 예법이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비례(非禮)의 말을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 병환이 심하시던 날로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이제 이미 20여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옮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 태종의 초상에 명 나라 황제가 내관 유경례(劉敬禮)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부물(賻物)을 주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렸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나가서 예를 거행할 때 임금이 우시니, 사신도 또한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가 모두 우는 정경을 보니 더욱 부왕께서 인후하고 덕이 있었음을 알겠나이다.” 하였고,또 세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덕스러운 얼굴이 전하와 같으니, 이는 한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술을 돌리자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사신이 관반(館伴)황희(黃喜)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군신의 분수가 진실로 엄하기는 하나 전하께서 일어서심은 형제의 천륜을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이 “전일 우리나라에서 촉왕(蜀王)이 들어와 황제를 뵈올 때, 황제께서 동궁에게 명하여 길을 비키게 하더니, 이제 전하가 효녕을 대우함이 이와 같소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 임금은 침착하고 과묵하며 제왕의 위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과 지혜는 만민에 뛰어난 성인이었고, 너그러움과 온유함은 뭇 백성을 용납하고 기르는 덕을 지녔다. 사물을 처리함에 혼자서 판단하여 주장이 있었고 위엄있고 모범이 되어 근엄하고 중정한 조심성이 있었으며, 정미한 의리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사물의 조리를 세밀히 관찰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네 번째 인경 소리가 나면 일어나 옷을 입고 평명(平明)에 조회를 받고 나서는 곧 일을 보고, 다음에는 신하를 번갈아 만나보고, 다음에는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내전(內殿)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서적을 보아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시행되지 않음이 없었고 일은 처리되지 않음이 없었다. 〈신도비 지문(誌文)〉
○ 임금은 늘 이르기를 “나는 서적에 대해서 눈으로 한번 거친 것은 곧 잊지 않았다.” 하였으니, 총명과 글 좋아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나는 궁중에 있을 때 손을 거둔 채로 한가히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제왕으로서의 공덕은 백왕(百王) 중에서 높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니,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만년에 기력이 줄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는 더욱 유의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해서 모든 책을 편찬케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모두 직접 재단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몇십 권에 이르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동북 지방의 다른 민족들이 모두 복종하여 국경 안이 편안하니, 당시 사람들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일컬었다. 《국조보감》
국초에는 고려가 망한 뒤를 이었기 때문에 예악에 손댈 겨를이 없었는데, 임금이 비로소 종(鍾)ㆍ경(磬)과 당악(唐樂)ㆍ국악의 악보(樂譜)를 제정하고,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시의(時儀 물시계)를 정하였으며, 《칠정편(七政篇)》ㆍ《오례의(五禮儀)》ㆍ《삼강행실(三綱行實)》ㆍ《명황계감(明皇誡鑑)》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 등이 모두 임금의 직접 재단에서 나온 것이다.정인지(鄭麟趾)의 〈영릉비서(英陵碑序)〉에, “실로 동방의 요순이다.” 한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기(秘記)에 전하기를, “황려(黃驪 여주)의 산에는 마땅히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영릉(英陵)이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임금은 모든 진기한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림원(上林苑)에 명하여 온갖 꽃과 새들을 모두 민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이 길들인 사슴을 바치고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상한 새나 기이한 짐승은 옛 사람들이 경계한 바이니, 들이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이 경회루 동편에 남는 재목으로 별실(別室)을 지었는데, 돌 층대를 쓰지 않고, 또 짚으로 지붕을 올려 되도록 검소하게 한 후 늘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문 밖에 짚자리가 깔려 있음을 보고 물으시기를, “이건 누가 한 짓인가.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내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안에 들이지 말라.” 하였다.
○ 강음현(江陰縣) 백성 조원(曺元)이 농토 문제로 관가에 송사를 할 때, 현관(縣官)이 송사를 지체한다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밝지 못하여 이제 이따위를 수령으로 삼았다.” 하였다. 금부(禁府)와 삼성(三省)의 관원이 모두 죄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심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달아서 백성이 몹시 괴로운데, 조원의 고을 수령이 이러한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손님과 술을 마시느라고 송사를 지체하고 판결하지 않았으니, 조원의 말은 다만 이를 미워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하고, 끝내 죄 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 임금이 일찍이 병이 나서 누웠는데, 나인(內人) 등이 무당의 말에 혹하여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를 하니 유생들이 무녀를 쫓아냈다. 중사(中使)가 크게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세종이 병든 몸을 부축케 하여 일어나 앉으면서 이르기를, “내 일찍이 선비를 기르지 못했는가 염려하였는데, 이제 선비들 기운이 이러하니 내 무슨 걱정을 하리오. 이 말을 들으니 내 병이 낫는 것 같구나.” 하였다.
명종조(明宗朝)에 유진동(柳辰仝)이 이 이야기를 경연에서 아뢰며, 말하기를, “군주가 선비의 기운을 돋구어 주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한 어린 궁녀가 후궁(後宮) 중 가장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청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하교하기를, “아녀자가 감히 간청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하겠다.” 하고는, 곧 물리쳐 멀리하여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측실(側室) 홍씨(洪氏)의 오라비 유근(有根)이 사랑을 받아 임금이 벗은 헌옷은 반드시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가 일찍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을 때, 임금이 거둥하다가 연(輦) 끄는 말이 저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에 유근은 자기 말을 스스로 자랑하며 자기 말로 대신 끌게 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극형을 청할 것이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하고, 유근을 도보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듣고 유근을 베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은 놓아주고는 그를 한 평생 버렸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9년 정미에 금천(衿川)에 행차하여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과 눈보라가 매우 치며 물결이 사나와 배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다. 명령을 내려 금천의 쌀과 콩을 가져다가 호종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고 새벽이 될 무렵에야 겨우 건넜었다.좌의정 이직(李稷)이 길가에서 뵈었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종께서는 매사냥을 구경하러 가셨지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으니, 매우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 이제 잘못하여 남의 말을 듣고 강을 건너갔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꾸짖은 것이오.” 하였다.
사헌부에서 백관이 미처 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禮官)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오늘 일은 나의 과오이니 논하지 말라.” 하고, 이로부터는 다시 강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해동청(海東靑 보라매)을 바치고 금은(金銀) 바치는 것을 감해달라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이르기를, “해동청은 얻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뿐더러 달아나기라도 하면 응사(鷹師)가 그것을 찾기 위해 촌락에 침입하게 되어 백성에게 폐해가 되므로 내가 모두 놓아 버렸다.”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사책(史冊)에 써서 만세에 법이 되도록 할 만 합니다.” 하였다.
○ 임금은 항상 소갈증으로 고생하였다. 대언 등이 아뢰기를, “의원의 말에 이는 먼저 음식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흰 수탉ㆍ누런 암탉ㆍ양 고기가 모두 갈증을 다스릴 수 있다 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날마다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내 어찌 내 한 몸을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해치겠는가. 하물며 양이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님에랴.” 하였다. 대언 등이 다시금 아뢰기를, “관가에 기르는 양이 번식하니, 청컨대 한번 드셔보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임금이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구경할 때, 말을 천천히 몰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인 새 정자에 올랐다. 때마침 단비가 내려 잠깐 동안에 온 들이 흡족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였다.
○ 임금이 항상 근정전(勤政殿)에 앉아서 대신과 더불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 되게 하려 하였으므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정부에서 물러가서도 오히려 옷을 끄르지 못하였으니, 불시에 부르는 일이 있을까 해서이다. 《정암집(靜菴集)》 〈연주(筵奏)〉
○ 임금이 신하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당대에는 사대부로서 극형을 당한 이가 없었다. 〈지장(誌狀)〉


 

[주D-001]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맡은 관원.
[주D-002]여차(廬次) : 상주(喪主)가 거처하는 곳.
[주D-003]옥책(玉冊)ㆍ금보(金寶) : 왕이나 후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 금보와 옥책을 드리는데, 보(寶)는 도장과 같은 것이며, 책(冊)은 거기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4]관반(館伴) : 외국 사신이 유숙하는 관(館)에서 접대의 책임을 맡은 사람.
[주D-005]응사(鷹師) : 매를 다루는 사람.


 

 

 

 

 

 
연려실기술 제6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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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

성종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의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 세조 2년 7월 30일 신묘에 세자궁에서 낳았다. 신사년에 처음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가 성화(成化) 무자년에 현록대부 자을산군(顯祿大夫者乙山君)이라 더 올렸다. 기축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안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홍치(弘治) 7년 갑인 12월 24일 기묘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왕위에 있은 지는 25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강정(康靖) 온량(溫良)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이라 하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인조 13년 을해에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광주(廣州) 서학당동(西學堂洞)의 임좌이다. 을묘년 4월 6일에 장사 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비(妃)는 휘의신숙공혜 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청주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明澮)의 딸이다. 경태(景泰) 7년 병자 10월 11일 정미에 연화방(蓮花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정해년에 가례를 거행하였으며 기축년에 왕비로 책봉되고,갑오년 성종(成宗) 5년 4월 15일 기사에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19세였다. 연산주(燕山主) 정사년에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순릉(順陵)이다.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 산 묘좌이다. 갑오년 6월 7일에 장사 지냈다.
○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묘(起畝)의 딸이다.
○ 계비(繼妃)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 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평정공(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 호(壕)의 딸이다. 천순 6년 임오 세조 7년 6월 26일 기축에 신창(新昌)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계사년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기해년에 윤비가 쫓겨났으므로 경자년에 드디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주 정사년에 자순(慈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갑자년에 화혜(和惠)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嘉靖) 9년 경인 중종 25년 8월 22일 기묘에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69세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경인 10月 29일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의 왼쪽 산 간좌에 장사 지냈다. 이다.
○ 아들 열 여섯과 딸 열 둘을 두었다.
사(嗣) 중종대왕(中宗大王)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낳았다.
첫째 딸 신숙공주(愼淑公主) 정현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첫째 아들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융(㦕)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순(恂) 숙의(淑儀) 하씨(河氏)가 낳았다.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인데, 첨정 증찬성 치(菑)의 딸이다.
셋째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 귀인(貴人) 정씨(鄭氏)가 낳았다.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인데 능천군(綾川君) 증 찬성 수영(壽永)의 딸이다.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수(㥞) 숙의 홍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니, 생원 증 찬성 하림(河臨)의 딸이다. 후취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적(磧)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 회산군(檜山君) 염(恬)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인데 찬의 증 찬성 방언(邦彦)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봉안군(鳳安君) 봉(㦀) 귀인 정씨가 낳았는데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인데 판관 증 찬성 성기(成紀)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견성군(甄城君) 돈(惇)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고 봉사(奉事) 증 찬성 우호(友灝)의 딸이다.
여덟째 아들 익양군(益陽君) 회(懷)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인데 첨지 증 찬성 문창(文昌)의 딸이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관(慣) 숙용(淑容) 심씨(沈氏)가 낳았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인데, 인의(引儀) 증 찬성 간(簡)의 딸이다. 후취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군수 증 찬성 수중(守中)의 딸이다.
열째 아들 경명군(景明君) 침(忱)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첨정 증 찬성 첩(堞)의 딸이다.
열한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낳았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지중추 증 찬성 건(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무산군(茂山君) 종(悰) 명빈(明嬪) 김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수(銖)의 딸이다.
열세째 아들 영산군(寧山君) 전(恮) 숙용(淑容) 심씨가 낳았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니, 군수 증 찬성 순로(順路)의 딸이다. 후취는 경주 정씨(慶州鄭氏)이고 별좌(別坐) 증 찬성 홍선(弘先)의 딸이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열네째 아들 운천군(雲川君) 인() 숙의 홍씨가 낳았다. 아내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참의 증 찬성 인손(仁孫)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양원군(楊原君) 희(憘)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고 충의위(忠義衛) 증 찬성 경(經)의 딸이다. 후취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니 정(正) 증 찬성 종손(終孫)의 딸이다.
첫째 딸 혜숙옹주(惠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고원 위 문효공(高原尉文孝公) 신항(申沆)인데 본관이 고령(高靈)이다. 그 아버지는 참판 종호(從濩)이다.
둘째 딸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풍원위(豐原衛) 임숭재(任崇載)인데 본관이 풍천(豐川)이며, 그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셋째 딸 공신옹주(恭愼翁主) 귀인 엄씨(嚴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그 아버지는 낭성군 양호공(琅城君襄胡公) 보(堡)이다.
넷째 딸 경순옹주(慶順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시호는 영희공(榮僖公)이며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그 아버지는 부사 회(懷)이다.
다섯째 딸 경숙옹주(敬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인데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그 아버지는 현령 종원(宗元)이다.
여섯째 딸 정순옹주(靜順翁主) 숙의 홍씨(洪氏)가 낳았다. 남편은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인데, 본관이 봉화(奉化)이다. 그 아버지는 주부 현(鉉)이다.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인데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그 아버지는 참봉 광세(光世)이다.
여덟째 딸 경휘옹주(慶徽翁主) 숙용 권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인데, 본관이 파평이고, 그 아버지는 부사 승세(承世)이다.
아홉째 딸 휘정옹주(徽靜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인데,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그 아버지는 승지 흔(忻)이다.
열째 딸 정혜옹주(靜惠翁主) 귀인 정씨가 낳았다. 남편은 청평위(靑平尉) 한기(韓紀)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그 아버지는 판서 형윤(亨允)이다.
열한째 딸 정숙옹주(靜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정(正) 승류(承柳)이다.
○ 의경세자(懿敬世子 성종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세조는 자산군(者山君)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국과 도량이 웅걸스러웠으므로 세조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궁중에 있을 때, 마침 뇌성이 진동하여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내시 백충신(白忠信)이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으니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벼락이 전상(殿上) 좌우 기둥을 때렸다.”고 기록되었다.좌우에 있던 사람이 모두 넘어지고 넋을 잃었으나 《오산설림》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도 얼굴 빛이 변하고, 여러 왕손들은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성종은 전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이상히 여겨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애의 기국과 도량은 우리 태조를 닮았다.” 하였다. 《오산설림》에는 “세조가 정희왕후에게 이르기를, ‘뒷날의 나라 일은 마땅히 이 애에게 맡길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예종(睿宗)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었으므로 정희왕후가 성종으로써 대를 잇도록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안팎이 매우 불안하였다. 신숙주가 왕대비에게 아뢰기를, “속히 상주(喪主)를 결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왕대비는 성종으로써 왕통을 잇게 하고 친히 정사를 보살폈다.
예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월산군이 차례에 해당되나 정희왕후가 차례를 건너 뛰어 성종으로 위를 잇게 하였다. 성중은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었으나 오히려 조정이 편안하고 일이 없었다. 권 충정공(權忠定公) 벌(橃)의 을사년 상소
○ 임금이 열세 살에 들어와 왕통을 잇고 학문에 독실하며 어질고 밝아서 태평시대의 성군이 되었다.
○ 임금은 총명하고 영걸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는데 더욱 성리(性理)의 학문에 이해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의 글과 역법(曆法), 음악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고 활쏘기, 글씨, 그림도 또한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렀다.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며 제사는 사고가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몸소 지내고 몸을 삼갔다. 세 분 대비를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으며,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은혜와 예절로써 대우하고 종실 여러 친족들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보고 술을 내어 가인례(家人禮)를 행하여 매우 화락하였다.
○ 임금이 몸소 경안전(景安殿)에 제향(祭享)하고 경연으로 돌아오자 영경연(領經筵) 한명회(韓明澮)와 최항(崔恒)이 아뢰기를, “제사 지낸 후에 또 경연에 나오시니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나는 하루의 시간도 아끼는데, 재계하는 날은 할 수 없지마는 제사지낸 후에는 경연을 정지할 수 없다.” 하였다.
○ 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지금 날이 점점 길어가니 임금께서는 경연의 석강(夕講)에 나가야 할 것이요, 내시들과 늘상 함께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상(院相)김질(金礩) 등이 아뢰기를, “지금 한창 더위가 심한데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경연에 나오시면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되오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도 편전에서 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은 “내가 촌각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리오. 그리고 조신들을 편복으로 접견할 수 없소.” 하였다.
대비가 임금이 쉴 사이 없이 글 읽는 것을 보고, “피로하지 않으시오?” 하니 임금은 “읽고 싶어서 읽으니 피로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첨재(僉載)》
○ 임금은 학문에 뜻이 독실하여 아침ㆍ낮ㆍ저녁의 세 때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선비를 불러 강론을 마치고는 편복으로 마주 앉아 술을 내리면서 조용히 고금의 치란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을 물으니 전각 안에는 촛불 하나만을 켰을 뿐이었다. 때로 밤중에 이르러 선비들이 크게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御前燭]을 주어 본원까지 바래다 주게 하였으니, 곧 당 나라 금련거(金蓮炬)의 고사와 같은 뜻이었다. 《용재총화》
○ 이때 혜장왕비(惠莊王妃)ㆍ회간왕비(懷簡王妃)ㆍ양도왕비(襄悼王妃)가 한 궁중에 거처했는데 임금은 세 분을 똑 같이 섬기었다. 또 임금은 대비를 위하여 날마다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내수사의 여종 5~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얼굴과 재예(才藝)가 뛰어났더니 항상 임금에게 추파를 보내었다.임금은 이를 깨닫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는 궁중에서 작은 연회도 베풀지 아니하였다. 또 임금은 사고가 없는 한 날마다 세 번 경연에 나오고 세 번 대비전에 뵈러 갔으며 종실들을 불러 후원에서 술도 마시고 활도 쏘았다.종실들을 대하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태평시대의 좋은 일이지마는 논하는 이는 혹 말하기를, “연산군(燕山君)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니 애석한 일이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綠)》
○ 임금은 해서(楷書) 쓰는 법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으니,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바가 깊다. 또 묵화에도 뜻을 두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뛰어난 재능으로서, 모방하여 익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옛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 하여 약간 솜씨를 보인 것인데, 짧은 종이[寸牋]와 작은 서폭(書幅)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공경하며 감상하고 겹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귀중히 여기기를 주옥보다 더하였다. 《용천담적기》
후일에 중종(中宗)은, 일찍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필법을 볼 줄 안다고 하여, 궐내에 불러들여 간직했던 몇 장의 글씨를 내려주면서, “궐내에서는 성종과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것을 가려내어 들이라.” 하였다. 세창이 분류하여 아뢰었다.
○ 임금은 매양 월산대군(月山大君)을 궐내에 불러들여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나가 있을 때에는 편지로서 서로 수창(酬唱)하기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참외를 내려주는 시에,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 新苽初嚼水精寒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 兄弟親情忍獨看

하였다. 대개 그 우애의 지극함을 문자에서도 상상할 수 있었다. 《지봉유설》 《소문쇄록》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을 내 보이는 이가 있는데 종이와 필체가 보통 것과 달랐다. 그 종이에 쓰이기를,

깊숙한 정자는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고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 高樹俯潺湲
화류(驊騮 준마)는 푸른 풀밭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산기슭에 있구나 / 春在翠微間

하고, 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기대 선 무한한 뜻에 / 憑欄無限意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 하네 / 依約故山秋

하고, 또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 問兄何事送羲娥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 遐想洋琴與渭歌

하고, 또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 期會親戚 聘招佳妓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마는 은혜는 곧 형제이다 / 義雖君臣 恩則兄弟

하였다. 이것을 보건대, 임금의 평상시 희필(戱筆)임을 알겠다. 《소문쇄록》
○ 임금의 학문은 깊고 넓으며 문사(文詞)는 넓고 명백하였다. 글하는 선비 노사신(盧思愼) 등을 명하여 《여지승람》ㆍ《동국통감》ㆍ《삼국사절요》를 편찬하게 하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서적을 많이 간행케 하였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한서(前漢書》ㆍ《진서(晋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綱目)》ㆍ《통감(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전서(朱子全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 등이다. 그 밖에도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의 정난(靖難)에 한 장사치가 공이 매우 컸던 터라 세조가 어필을 내리기를, ‘세 번 죽을 죄를 지어도 용서 받는다.[三死無與]’ 하였다. 임금(성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그 장사치가 사람을 죽였는데 법 맡은 관원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논죄하였더니, 그 장사치가 세조의 어필을 올렸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교지를 내리기를,“선왕께서 손수 쓰신 유교(遺敎)가 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시오.” 하였다. 임금은 곤란해하며 말하기를, “선왕의 유교는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요, 사람을 죽인 자가 죽게 되는 것은 만세의 공법(公法)이니 어찌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써 만세의 공법을 폐기하겠습니까.” 하였다. 대비는 “비록 그렇지만 선왕의 유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용서해 주오.” 하였다.임금은 두 번 세 번 반대하면서, “대비께서 저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감히 나라 일을 맡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다른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소서.” 하였다. 대비는 “그렇다면 임금이 알아서 하오.” 하였다. 임금은 그 장사치를 곤장으로 치게 하였으나 끝내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밀부(密符)를 만들도록 명하여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두세 명의 중신에게 나누어 주어서 임금이 부를 적에 증거물로 삼게 하고 또 불의의 변고를 막도록 하였다.
○ 영안도(永安道)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 “본도는 조종(祖宗)께서 탄생하고 일어난 땅이므로 주(周)의 기산(岐山)이나 한(漢)의 패읍(沛邑)과 같사오나 다만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거나 서울에 가서 벼슬한 사람은 백 명에 한, 두 사람도 못 되어 조정의 예의ㆍ풍속과 문물의 아름다움을 귀와 눈으로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풍기(風氣)와 습성에 국한되어 오로지 억세고 사나운 것이 풍속이 되고 활쏘기,말타기로 업을 삼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형들도 가르치지 않고 자제들도 뜻을 두지 않으며, 공리만 서두르고 거짓을 일삼으며 예의를 버리고 기력만 숭상하게 되니, 습관이 풍속이 되어 드디어는 교만한 군사가 되고 맙니다. 지난번에 역적(이시애(李施愛))이 한번 일어나자 온 도민이 쏠리듯이 따라갔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고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기습(氣習)을 개혁시키고 교화를 밝히는 방법은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육진(六鎭)이 궁벽한 곳일지라도 자질이 영특하고 민첩한 사람이 왕왕 있으니, 바라건대, 영흥부(永興府)의 향교에 학업이 정밀하고 해박하며 명망이 있는 문관을 교수로 임명하여 여러 고을의 총명ㆍ민첩한 소년들을 가려 모아서 가르치고, 또 향교에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그 경비로 쓰도록 하소서.” 하였다.
○ 2년 신묘 겨울에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으므로 교지를 내려 직언을 구하였다. 임금이 보경당(寶敬堂)에 나와서 원상(院相) 김질(金礩)을 불러 조정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의논하였다.대비가 교지를 전하기를 “나의 일가 친척 중에서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봉록(俸祿)만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 혜성이 나타난 변괴는 아마 이에 관계된 것일 것이니 두려움이 실로 크다. 현명하고 준수한 선비로서 산림에 물러가 숨은 이를 마땅히 찾아서 불러 오라.” 하였다.
○ 3년 임진에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송골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임금이 경연에 나가자 신종호(申從濩)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매우 걱정하고 부지런하실 때이온데, 지금 궐내의 응방에서는 해동청을 기르고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완호(玩好)에 마음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이것은 아마 하늘을 공경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하는 실상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군자의 과실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니 내가 어찌 그 과실을 숨기리오.” 하고, 즉시 명하여 매[鷹]를 놓아 주게 하고 다시는 기르지 아니하였다.
○ 명하여 역대 제왕과 후비들의 본받을 만한 점과 경계할 점을 채록(採錄)하고 정리해서 세 편을 만들고,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 《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 하였다.
○ 임금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다가 한 나라 조조(晁錯)의 상서(上書) 중에,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모두 개간되지 못했고 놀고 있는 백성이 모두 농사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니, 시강관(侍講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도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중[僧]의 무리들이 군역(軍役)을 피하기를 도모하고 놀고 앉아 먹는 백성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다 쫓아버리기는 어려우나 청컨대, 승려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은 “사헌부로 하여금 규찰케 하라.” 하였다.맹현(孟賢)은 또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친히 밭 갈아서 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祭物))을 만들고 후비는 몸소 누에를 쳐서 제사 지낼 예복을 만들었으니 이는 제사를 중히 여겨 근본(조상)을 잊지 않고 갚는 것입니다. 한 나라 문제(文帝)는 가의(賈誼)의 말에 감동되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습니다. 예문이 갖추어 있는데도 조종조(祖宗朝)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은 원컨대, 임금께서 친히 적전을 갈아서 위로는 자성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힘쓰는 뜻을 모범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은 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명하여, “적전 가는 의식을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 6년 을미에 어떤 사람이 익명서를 승정원에 붙였는데 그 뜻은 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대비는 임금에게 정사를 돌려 주니 임금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대비가 듣지 않았으므로 또 원상(院相) 한명회로 하여금 대비에게 아뢰게 하였다. 명회가 대비에게 아뢰기를,“지금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이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대비는 따르지 않고 정사를 돌려주었다. 한명회가 아뢴 말에 온당치 못한 뜻이 있으므로 교지를 내려서 꾸짖었다.이에 양사에서 번갈아가며 세조가 언어가 불경한 죄로 양정(楊汀)을 죽이고 정인지(鄭麟趾)와 정창손(鄭昌孫)을 귀양 보냈던 일을 인용하면서 명회를 국문하기를 굳이 청했으나 왕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도 글을 올려 명회의 말 잘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자광이 다시 글을 올렸으나 말에 잘못된 점이 있어 파직되었다. 《야언별집》
○ 집현전이 폐지된 후에 독서당(讀書堂)도 폐지되었더니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먼저 홍문관을 열어 집현전의 옛 제도를 회복시켰다.
○ 7년 병신에 관각의 여러 사람이 건의하여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ㆍ양희지(楊熙止)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허침(許琛)ㆍ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후에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落成式)을 올렸다. 그 이튿날 감사하다는 글을 지어가지고 대궐에 나아갈 때 붉은 보로 싼 함을 메고 기생과 음악을 뒤따르게 하였다.
○ 명을 내려 신농(神農)ㆍ요제(堯帝)ㆍ순제(舜帝)ㆍ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은 고종(殷高宗)ㆍ주 문왕(周文王)ㆍ무왕(武王)ㆍ한 문제(漢文帝)ㆍ당 태종(唐太宗)과 주 문왕의 후비(后妃)ㆍ주 선왕(周宣王)의 강후(姜后)ㆍ제화(齊華) 맹희(孟姬)번희(樊姬)ㆍ한의 풍소의(馮昭儀)반첩여(班婕妤)명덕왕후(明德王后)ㆍ당(唐)의 문덕왕후(文德皇后)원헌황후(元獻皇后) 등의 모범될 만한 사적과 오왕 부차(吳王夫差)ㆍ한 무제(漢武帝)ㆍ진 무제(晋武帝)ㆍ당 명황(唐明皇)ㆍ덕종(德宗) 등 처음에는 현명하였으나 후에는 어두웠던 임금들의 사적을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글 잘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고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보면서 권면ㆍ경계의 자료로 삼았다.
○ 8년 정유에 사축서(司畜署)에서 가축 기르는 비용이 많이 들므로 명하여 가축의 수를 줄이게 하였다. 호조에서 돼지 3백 마리를 사재감(司宰監)에 맡겨 포육(脯肉) 만들기를 청하니, 임금은 “3백 마리를 어찌 차마 한꺼번에 죽이겠는가. 재신(宰臣)과 종신(宗臣)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 전에는 국왕이 탄생한 날에는 훈구(勳舊)의 신하가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며 복을 빌었는데 임금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복을 구하되 사특한 짓을 하지 않는다.’ 했으니,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겠는가. 그것을 폐지하라.” 하였다.
이때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이 글을 올려 축수하는 재(齋)를 폐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그대가 정도(正道)를 진술하고 이단(異端 불교)을 배척하여 나로 하여금 요ㆍ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자 하니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어두운 사람이지마는 실로 그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지금 말한 것을 따르겠노라.” 하였다.
○ 12년 신축 11월에 장원서(掌苑署 화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에서 영산홍(映山紅) 화분을 하나 올리니, 임금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은 인위(人爲)로 된 것이니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다시 올리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은 매양 경연에서 부지런히 강론을 듣고서도 오히려 범위가 넓지 못하다 하여 2품 이상 벼슬로서 고문될 만한 사람을 뽑아 차례로 참시(參侍)케 하고 그 칭호를 특진관이라 하였다.
○ 15년 갑진 5월에 명을 내려 조맹부(趙孟頫)의 서자(書字)를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에 걸어 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친히 왕우칭(王禹儞)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주면서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우칭의 기문이 비록 집정(執政)하는 이를 위해 지었던 것이지만 벼슬 자리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이것으로 좌우명을 삼을 만하다. 하물며 승정원은 추기(樞機)의 처지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은 일찍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각도에서 바치는 물품을 줄이게 하니 경상 감사가 아뢰기를, “해산물 같은 것은 구하기가 매우 쉬우니 종전대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뜻으로는 비록 갸륵하지마는 임금이 아랫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 또한 간절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0년 기유에 장령 이승건(李承健)이 황해도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향시에서 책문(策問)을 내어 본도의 여러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물으니, 영유 훈도(永柔訓導) 권계동(權季同)이 대답하기를, ‘오직 부처를 공양해야만 능히 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그 말이 명교(名敎)에 해로운 점이 있기에 내쫓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불교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대개 지각 있는 사람이면 이것을 당연히 물리칠 것인데, 계동은 남의 사표(師表) 되는 처지에 있으면서 유교를 배반하고 부처에게 아첨하여 불교로써 백성 구하는 방법을 삼으려 하니, 사도(邪道)로 백성을 미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는가. 사헌부로 하여금 국문케 하라.” 하였다. 또 손수 쓴 글씨로 교지를 내려,
“내가 일찍이 중들이 천륜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소모시키는 것을 미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뽑고 세상의 교화를 굳건히 하고자 했는데,지금 유생들이 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들어 쓰는 시기를 당하여 요ㆍ순의 도리는 진술하지 않고 부처의 법을 주창하게 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절에 가서 사신(捨身)하고 당 나라 헌종(憲宗)이 예불했던 것과 같이 하도록 하려 함이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국문케 하여 먼 지방으로 내쫓게 하라.” 하였다.
○ 대사헌 허침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왜인이 귤(橘)나무를 바치고 유구국(琉球國)의 사자도 또한 이상한 나무를 바쳤다 하니 만약 전하께서 이것을 받으시면 저들은 전하께서 먼 지방의 물건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다투어 와서 바칠 것이오니, 어찌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임금은 “지난번에 유구국에서 바친 나무는 약재이므로 받았다. 귤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니 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지중추 고태필(高台弼)은 아뢰기를, “신은 제주 사람이온데 제주에서 진주 앵무배(眞珠鸚鵡杯)를 바치므로 백성에게 폐를 끼침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것은 그 용도가 나라에 이로움은 없으면서 백성에게 폐만 끼치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4년 계축 6월에 임금이 병환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라야만 병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근시에게 이르기를,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고기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나의 구복(口腹)을 위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느냐.” 하였다.
○ 25년 갑인 겨울에 임금은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사를 결재(決裁)하고 쉬지 아니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의관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 임금이 글을 좋아하고 두 임금(세종ㆍ세조)을 계승하여 유림(儒林)을 사랑하며 장려함이 보통 규모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당대 문장에 걸출한 선비들이 옥당에 빛났다. 조위(曹偉)ㆍ신종호(申從濩)ㆍ유호인(兪好仁)ㆍ김흔(金訢)ㆍ성희안(成希顔)이 더욱 우대를 받아 항상 저술한 것을 그날 그날 써서 바치었다.조위와 유호인이 모두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외직을 원하므로 특히 쌀을 보내어 그 어버이를 우대하였다. 조위가 상사(喪事)를 당하자 치제(致祭)하여 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임금의 은총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함께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하였다. 인재를 고무하고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켰으니 진실로 천년을 두고 있기 어려운 장한 일이었다.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있을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치었다. 임금이 편전의 문 밖에까지 나가 맞으며 그를 위로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에 이 매로써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또 야대(夜對)할 적에 술과 과실을 주니 희안이 감자(柑子)와 귤 여 나무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술이 취하여 정신을 잃었으므로 내시가 엎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실이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 이튿날 임금은 감자와 귤 한 쟁반을 옥당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어제 희안이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므로 지금 내려준다.” 하였다.희안은 이 은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반정의 의거를 일으켜 은혜를 갚았으니 임금의 선비 대우하는 정성과 사람을 알아 보는 밝음이 진실로 남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안이 위태한 시국을 바로 잡아 안정하게 만들어 훈공(勳功)이 길이 국가에 남았으니 임금이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금이 착한 일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허종(許琮)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에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는 없다.”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재상 이영은(李永垠)과 이곤(李坤) 두 사람이 기생 하나를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 하였는데, 간관이 죄를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고 서로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거늘,임금은 “옛날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 가는 세상의 일이다. 나는 차마 이 세상을 쇠망해 가는 세상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대간(臺諫)의 파직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 그대들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임금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오는데 육승지(六承旨)가 각기 소속 관청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해당 관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금께 바치었다. 임금은 반드시 그 승지와 관원과 더불어 사리를 되풀이 연구하여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게 하고 옳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것이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하고 반드시 그 성명을 기록하여 훗날의 승진에 대비하였다. 수령과 변장들이 부임할 때에도 또한 반드시 한 사람씩 불러 보고 먼저 그 사람의 출신 내력과 친족 교우 관계를 묻고, 다음은 공사를 처리하고 군졸을 어루만지며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서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고 또 이어 등급을 뛰어 승진시켜 주며,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쫓고 아울러 그를 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주었다. 비록 시종하는 신하나 외국에 사신 가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이 자기가 그 임무를 감당하기 힘들게 여겨지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감히 부임하지 못하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임금께서 한 수령이 특이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뽑아 올려 집의(執義)를 명했다. 삼사에서 글을 번갈아 올려 다툰 지 수일 만에 또 그 사람을 승진시켜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삼사에서 또 극력 논란하자, 수일 만에 또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삼사는 드디어 중지하고 다시 논란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만약 이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그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내시가 충청도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임금은 조용히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일을 묻고 이어 그 밖의 이야기도 물었다. 내시는 답하여 아뢰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에게 어떤 객(客)이 있었는데, 한 기생을 보고 매우 사랑했으나 기생은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이별할 때에 객은 울면서 차마 작별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문(廣文) 도사(都事) 이 좌석에 있었으므로 문객은 광문의 손과 기생의 허리띠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의 이별하는 서러움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가.’ 하니 광문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자지작(紫芝雀) 띠는 가는 허리에 둘리었고 / 紫芝雀帶橫腰細
흑서화(黑黍靴) 신은 발에 맞아 편안하다 / 黑黍張靴着足安

했으나 문객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싱긋이 웃으면서 이내 광문의 이름을 기둥에 써 두었다. 훗날에 특별히 광문을 홍문록(弘文錄)에 들게 하니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이 불러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홍문록은 한 때의 공론(公論)을 채용하였으되 일찍이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은 “권력 있는 이에게 쫓아 다녀서 얻은 것이 공정하냐?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져 채용된 것이 공정하냐?” 하였다.그 사람 사헌부의 언관이 힘써 다투거늘 임금은 말 소리와 얼굴 빛에 노기를 띠며 나가라고 꾸짖으니, 그 사람은 벌벌 떨면서 나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임금이 다니는 길로 나갔다. 임금은 눈여겨 보다가 이윽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제가 가야 될 길도 알지 못하면서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광문이 결국 옥당에 들어 왔는데 아주 기특한 재주 있는 인물이었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임금은 당대의 인물을 이리저리 다루었는데 그 수단이 매우 능란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고 있을 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우연히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그 종이를 살펴보니,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선사한 물목 단자(物目單子)였다. 임금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영에 나가서 육승지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사한다면 예의를 돌보지도 않고 받겠는가?” 하니,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하였다. 좌승지만은 자리를 피하여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에게는 90세가 된 늙은 어미가 있사온데, 평소부터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사했으므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종이를 내어 보이고,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임금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는데, 한 장령이 축관(祝官)이 되어 축 읽을 때를 당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임금이 그 사람을 풍산 만호(豐山萬戶)로 임명하니 간관이 논쟁하였다. 임금은 “명색이 문관이라 하면서 축문 한 자도 읽지 못하는구나. 활 쏘는 것은 안다 하니 한 성보(城堡)나 지키면 족하지.” 하였다. 2, 3개월 후에 불러서 다시 전일의 벼슬을 시켰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어떤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원통한 일 풀어주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사인(士人) 강신(姜信)이 썼습니다.” 하였다. 곧 강신을 불러 해서와 초서를 써서 바치게 하더니, “해서는 비할 데가 없으리만치 잘 썼다.” 하고, 드디어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란 벼슬을 주고 자주 불러 보았다. 몇 년 동안에 벼슬 등급을 뛰어 판결사(判決事)에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역시 재능이 그 직무에 알맞았다. 《기재잡기》
○ 이번(李蕃)은 안강현(安康縣) 경주(慶州)에 소속되었다. 에 살았는데, 자질이 준수하고 얼굴이 단정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경주부(慶州府)의 향교에서 스승에게 배우고 친구를 사귀어 배우니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도 또한 정묘하였다.임금께서 이번이 향시에 장원했던 작품을 보고 이를 칭찬하여 즉시 역마를 타고 오라고 명하여 종이와 붓을 주어 다시 시험해 보았다. 또 의복과 식품 비용까지 내려 주고 성균관에 머물게 하여 그 학업을 마치게 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번은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언적(彦迪)이다.
임금이 일찍이 밤에 놀다가 보니 멀리 삼각산(三角山)에 불이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했더니, 서생이 등불을 달아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묻기를, “무엇하러 이렇게 부지런하며 고생하느냐?”고 하니 서생은 “과거에 급제하려고 한다.” 하였다. 임금은 그 사람에게 명하여 절구(絶句)를 짓게 하고 이내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베어 자기 집 문 앞에 세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시켜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문 앞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급제한다 하는데, 문 앞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좋은 징험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하였다.또 물어 이르기를, “강송(講誦)을 잘 하는가? 제술(製述)을 잘 하는가?” 하니 답하여 아뢰기를, “다 잘 하는데도 수십 년 동안이나 과거에 억울하게 실패하였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즉시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는 나이 75세가 되었는데, 이천(利川)에 살고 있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깊었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였다. 계묘년에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으로 불려 와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강송(講誦)하게 하고,서거정(徐居正)ㆍ허종(許琮)ㆍ이극기(李克基) 등에게 명하여 성리의 근원과 천지의 도수(度數) 및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세차역법(歲差曆法) 등을 논하게 하니 관의는 분변하여 대답함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였다. 임금은 감사에게 명하기를, “전 찰방 이관의가 성리학에 정통하고 숙달했다 하므로 불러 시험해 물어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았다.장차 크게 쓰려고 했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 많음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고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의복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감사는 그 지방의 수령을 시켜 미곡을 주어 내가 그 사람을 표창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 최한정(崔漢楨)은 성품이 순량(醇良)하고 근실하기에 임금이 후한 대우를 하니, 승지 임사홍(任士洪)이 그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기를,“최한정은 나이 많으니 시독(侍讀)하는 데 적합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대답하지 않고 어필로써 한정의 이름을 쓰고 등급을 뛰어 대사헌으로 임명하니 사홍은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사림(士林)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용재집(容齋集)》
○ 임금이 장차 반궁(泮宮)에 행차하여 옛 글을 강론하고 직언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노사신(盧思愼)과 이승소(李承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한 일이 있었다.이칙(李則)이 나와 아뢰기를, “노사신과 이승소는 노성(老成)한 대신인데도 아뢴 바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성균관에 행차하여 다시 무슨 말을 구하시렵니까.” 하자 임금이 그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 안계송(安繼宋)의 부인은 세종의 손녀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딸이다. 임금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돌아오다가 그 집에 들려 보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간할까 염려하여 흥인문(興仁門) 안의 둘째 다리에 이르러서야 타고 있던 연(輦)을 갑자기 배고개[梨峴]에 있는 계송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간관이 과연 논란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계송의 아내는 몸에 무명베 검은 적삼을 입고 손수 길쌈을 하다가 허둥지둥하면서 임금을 영접하여 뵈었다. 임금은 특별히 계송에게 장악원 봉사(掌樂院奉事) 벼슬을 주고 바로 그 날에 사은숙배(謝恩肅拜)케 하고, 또 행차 중에 썼던 금ㆍ은 그릇을 모두 다 내려주게 하였다. 《안씨추록(安氏追錄)》 ○ 후손의 집에 임금이 앉았던 방석이 있어 항상 집 안에 달아 두었는데 해가 오래 되매 삭아서 없어졌다.
계송은 자는 자윤(子胤)이며, 스스로 박전경수(薄田耕叟)라 불렀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팔대손(八代孫)이다. 천성이 어리석어 시 짓고 술 마시는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벼슬은 직장(直長)으로 17년이나 있어도 옮기지 아니하였다. 《추강록(秋江錄)》
○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임금에게 청하기를, “홍상(洪常)의 숙부 칭(儞)이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으나 아내가 병이 나서 부임하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본직을 갈아 주소서.” 하니, 임금은 명하여 경직(京職)으로 임명하였다. 대사간 손비장(孫比長) 등이 차자를 올려,“홍칭의 사정(私情)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 기한을 정하여 쓰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은 편지로 답하기를, “대사간의 말이 대단히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일은 사정이요, 공정한 것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과실을 듣고 곧 고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 직무를 다하니 나는 이를 매우 칭찬하노라.” 하였다. 《국조모열(國朝謨烈)》
○ 임금은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한 집안의 부자 사이처럼 하였으나 정사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실정을 숨기고 행실을 꾸미지 못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서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으나, 대궐 문 밖에 나가서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서로 기뻐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대개 임금의 뛰어난 밝음과 위엄있는 덕에 신하들이 감화를 받은 것이다. 《오산설림》
○ 임금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기가 물과 같은 옥 술잔 하나가 있었는데, 임금은 매양 술이 취하면 다른 신하에게도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종실의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이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지니 술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은 임금의 술 많이 마심을 은연히 간하는 뜻이었다. 임금도 또한 그것을 허물하지 아니하였다. 《오산설림》
○ 함경도의 유생 박원령(朴元齡)이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남의 소(疏)를 대신 써서 올렸다. 임금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박원령이 썼다고 대답하였다. 승정원으로 불러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화살통[箭筒]을 내어 주면서 그 거죽에 글을 써서 바치게 하고, 곧 임금은 손수 글씨를 쓴 병풍을 내려 주었다. 비록 작은 기예(技藝)라도 칭찬하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필원잡기》
진사 박원령이 글씨를 조금 쓸 줄 알므로 임금은 이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 고을에 글을 내리고 종이와 붓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영광스러움이 향리에 빛나고 떨쳐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작은 기예가 어찌 족히 임금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랴마는 임금은 자기가 능하다 하여 남의 잘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장려함이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이다.이로 인하여 문장ㆍ서화(書畫)ㆍ공예 등 온갖 기술이 모두 격찬을 받아 진보되었으니, 이것으로 임금의 고무(鼓舞)ㆍ격려시키는 기틀이 특히 한 번 찡그리고 웃는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임금이 진심으로 좋아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온갖 방법으로 권장ㆍ신칙(申飭)하고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웠더라도 다만 소란ㆍ번잡하고 퇴폐ㆍ나타(懶惰)함만 볼 뿐이지 능히 이처럼 깊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지평 유경(劉璟)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에 나오시지 않고, 행차하실 때에도 음악을 폐지 하셨습니다. 예(禮)에 기년복(朞年服)은 임금은 입지 않고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니, 청컨대, 의(義)로써 정을 끊으소서.” 하였다.임금은 “조회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아뢴 대로 할 것이지만은 대신의 죽음에도 오히려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거늘, 하물며 친형의 시체가 지금 빈소에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음악을 듣겠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이 한 왕자만을 매우 사랑하여 흔히 치우치는 일이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은 즉시 성상소(城上所)의 장령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글 한 구절을 써서 주었는데, 그 글에,

세상 사람이 늦은 가을 국화를 가장 사랑하나니 / 世人最愛霜後菊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 此花開後更無花

라 하였다. 그 사람이 눈물을 닦고 나갔는데 얼마 후에 임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산설림》

[주D-001]세실(世室) : 종묘(宗廟)에 모시는 신주(神主)는 위로 4대(代)가 넘으면 옮기게 되는데 공덕(功德)이 높은 임금은 특히 옮기지 않고 영원히 받들게 되는데, 이것을 세실이라 한다.
[주D-002]가인례(家人禮) : 왕실에 있어서 조정례(朝庭禮)와 가인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조정례에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성종에게 신하가 되지마는, 가인례에서는 월산대군이 형이 되고 성종은 동생이 된다.
[주D-003]원상(院相) : 국상(國喪) 직후에 임시로 국정을 대리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주D-004]금련거(金蓮炬)의 고사 : 임금 앞에만 쓰는 촛불인데, 당 나라 선종(宣宗)이 한림학사 영호도(令狐綯)를 불러서 밤 늦게까지 담화하다가 돌려 보낼 때에 금련거를 주어 앞에서 인도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5]밀부(密符) : 옛날 임금이 특정한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로서 주는 것인데, 부(符)라는 것은 동철(銅鐵)로 만든 것으로 두 조각을 내어 한 조각은 임금이 지니고, 다른 한 조각은 장수나 지방관이 지니어 일이 있을 때에 마음의 표시[信標]를 삼았던 것이다.
[주D-006]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로서, 그 토지에서 나는 수확으로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한 임금이 친히 경작함으로써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주D-007]강후(姜后)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어느날 강후와 동침한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났더니, 강후가 문 밖에 엎드려 사과하기를, “첩의 허물로 왕이 늦게 일어나시어 정사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맹희(孟姬) : 제(齊) 나라 화씨(華氏)의 딸이 예법을 지켜 정당한 예절을 갖추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 하여 늦도록 처녀로 있었더니, 임금이 듣고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이를 맹희라 하였다.
[주D-009]번희(樊姬) : 초(楚) 나라 장왕(莊王)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번희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0]풍소의(馮昭儀) :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풍소의를 데리고 상림원(上林苑)에서 동물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와 성제에게 덤벼들므로 풍소의가 곰 앞에 가로 막아섰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1]반첩여(班婕妤) : 한 나라 성제의 후궁이었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장신궁(長信宮)에 있었는데, 반첩여가 임금을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참소한 자가 있어 성제가 반첩여를 잡아 문초하였더니, 반첩여가 아뢰기를,“저주는 귀신에게 비는 것인데, 귀신이 아는 것이 있다면 사특(邪慝)하게 하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귀신이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하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2]명덕왕후(明德王后)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황후인데 어질고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후세의 황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주D-013]문덕황후(文德皇后) : 당 나라 태종이 하루 아침에 조회를 파한 뒤에 내궁에 들어가서 옷을 벗으면서 노한 어조로 “내가 장차 이 촌 늙은 이를 죽여 버리리라.” 하였다. 문덕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위징(魏徵)이 여러 신하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였다.” 하므로 황후가 엎드려 절하며 “임금이 밝아야 신하가 직언(直言)을 하는 것이니 축하합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4]원헌황후(元獻皇后) : 당 나라 숙종(肅宗)의 어머니. 현종의 궁인으로서 숙종을 임신했을 때 현종이 낙태시킬려고 하였는데 꿈에 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 그것을 막더니 과연 중흥주인 숙종을 낳았다.
[주D-015]장온고(張蘊古) : 당 나라 사람인데, 태종에게 대보잠(大寶箴)이라는 임금의 좌우명이 될만한 격언을 지어 올렸다.
[주D-016]왕우칭(王禹儞) : 송(宋) 나라 사람인데, 조회때 신하가 시간을 기다리는 휴게실에다 대루원(待漏院)이라는 대신을 경계하는 기문(記文)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주D-017]추기(樞機) : 문을 여닫는 문지방인 돌저귀를 말하는데, 사람의 말[言語]하는 일을 추기에 비하였다. 승정원은 임금의 말[言語]을 관할하는 곳이므로 추기하고 하였다.
[주D-018]육승지(六承旨) :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를 말하는데, 순위에 따라 육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 보았다.
[주D-019]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선거ㆍ임명하는 기록을 말하는데, 교리ㆍ수찬의 선거는 먼저 칠품(七品) 이하의 홍문관원이 뽑힐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의중의 사람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말한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4 - 사적류 2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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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잡설(史籍雜說) - 한국
우리나라 사서(史書)의 빠진 글은 증거할 것이 없다는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6)


우리나라의 문헌은 증거할 수 없다고 일컬어 왔는데, 본조의 사실은 더욱 빠진 글이 많으니, 앞으로 어떻게 고증하여 믿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設)》처럼 몇 조목을 변증하여 보겠다.
문종(文宗)의 왕후(王后)에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있었는데, 《고사촬요(古事撮要)》ㆍ《황명사(皇明使)》에는 보이지만 조선조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문종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휘빈 김씨(徽嬪金氏)는 두어 해 만에 폐하여졌고 순빈 봉씨(純嬪奉氏)는 8년 만에 폐하고서, 양제(良娣)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세워 빈으로 삼았으니 곧 현덕 왕후(顯德王后)인 소릉(昭陵)이다. 후(后)의 아버지 전(傳)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판서(判書)였고, 어머니는 부정(副正) 최용(崔鄘)의 딸인데, 광묘(光廟 세조(世祖)를 가리킨다) 병자년에 후의 어머니 최씨와 그의 아우 자신(自愼)은 극형(極刑)을 받고 죽었다.
단종(端宗) 대에 절개를 세운 명신(名臣) 봉여해(奉汝諧)와 세종(世宗) 을유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낸 봉석주(奉石柱)는, 아마도 순빈(純嬪) 봉씨의 친속(親屬)이 아닐까?
예종(睿宗) 때에는 공정왕(恭靖王 태종(太宗)을 가리킨다.)을 안종(安宗)이라는 시호(諡號)로 올린 적이 있었는데 또한 전해짐이 없고, 어느 야승(野乘)에는 신숙주(申叔舟)가 막았으므로 실행되지 않았다고만 할 뿐이다.’ 기타 왕비의 옥책문(玉冊文)과 축판(祝板)이 왕왕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주D-001]양제(良娣) : 조선조 때에 세자궁(世子宮)에 속한 궁녀직(宮女職)으로, 종2품인 내명부(內命婦)의 벼슬.
[주D-002]옥책문(玉冊文) : 제왕(帝王)이나 후비(后妃)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 송덕문(頌德文)을 새긴 간책(簡冊).

 

 

頤庵先生遺稿卷之四文集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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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道碑銘
宗室永順君贈諡恭昭公神道碑銘 a_036_12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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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溥。字俊之。我世宗莊憲大王之孫也。考。廣平大君諱璵。妣永嘉府夫人申氏。贈左議政諱自守之女。公以正統甲子生。生半歲而大君捐館。世宗哀之。使姆抱前而撫之。命其小字曰壽福。仍令大君養母王氏保養之。傳旨于政府。若曰。廣平不祿夭折。予甚悲之。幸有遺嗣。呱泣襁褓。尤可憐憫。其供給諸事。特依親子之例。年五歲。乃命入內。仍置禁036_123b中。嘗囑文宗世祖曰。汝等異時體予今日之意。撫恤無替。景泰庚午。世宗禮陟。始出就王氏之宅。辛未年八歲。文宗特授嘉德大夫。封永順君。乙亥春。魯山加階昭德。時世祖在潛邸。主婚行醮禮。是夏。世祖卽位。天順己卯。又陞興祿。世祖深念世宗遺敎。且以公謹愼祥密。常置左右。凡政院出納文書及諸司勘覈事務。皆令公參管。與駙馬河城君鄭顯祖。更日直宿。有所召問不計子夜曰。年少之人。逸則生病。故勞之也。成化丙戌七月。上聚文臣于闕庭。令列卿大官以至宗室駙馬皆赴焉。親製策036_123c問。名曰登俊試。命鄭麟趾,鄭昌孫申叔舟等諸大臣。爲對讀官以考之。公中第五。上喜甚。取試卷入內親覽。大服文章之美。御殿唱榜。百官陳賀。賜恩榮宴于議政府。壯元金守溫以下。各賜鞍馬。蓋從前未有之盛擧也。丁亥。李施愛叛于咸吉道。討平之。公與有功。賜精忠敵愾功臣之號。進階顯祿。戊子。上幸溫陽。公扈從。時於行在所。設科取士。仍開重試。公擢第一。上益喜。及還宮。兩殿幸公第。
賜米甚厚。伶優天童凡數百名。各給綿布有差。命具花蓋。隨駕入康寧殿。又命加一日遊街。寵渥036_123d之隆。無與爲比。九月。世祖昇遐。睿宗使公侍殯宮。後又命掌明皇誡鑑修撰。己丑。南怡等謀逆伏誅。公多所裨贊。策勳加號保己社定難翊戴功臣。十一月。睿宗昇遐。成宗卽位。命依世祖朝。掌出納庶政。仍監六典修撰。庚寅三月二十八日。適詣闕。感疾還第。蒼黃醫治。公勅左右曰。余將不興。速備喪具。令扶出正寢。俄而遂卒。春秋僅二十七。訃聞。
九重震悼。輟朝三日。賻賜加等。官庀喪事。太常諡以恭昭。卜得六月癸酉。葬于廣州治西彦州里光秀山子坐午向之原。公爲人純懿端慤。聰明英達。存心036_124a敬畏。接物謙恭。雖富貴崇極。略無驕矜之氣。爲文信筆。若不經意。而粲然成章。至於簡札。皆可觀玩構小堂於後園。扁曰明新。藏書數千卷。公退靜坐。手不暫釋。承累朝春遇。參掌機密。啓沃弘多。每出入班列。風采凝重。爲衆瞻望。及其卒也。莫不歎惜。配全州氏。封金堤郡夫人。考諱道一。豐儲倉丞。祖諱承寧。通禮院奉禮。贈議政府左議政。曾祖諱士康。議政府左贊成。妣鄭氏。議政府左參贊熙啓之女。天性徽柔敬順。不喜華靡。十五。歸于公。能執婦道。大爲申夫人所愛。生三男。未及長成。公遽棄背。夫人哀戚之餘。上036_124b事下敎。勤勞備至。旣而三子蚤被殊恩。竝授貴爵。金紫照門。爲一時榮慕。弘治癸丑夏。其季者亡。夫人傷之。致疾而歿。是年八月二十七日也。享年五十三。越十月己丑。就窆光秀山坐甲而向庚。西距公墓可百步。男長曰崝。襲封南川君。次曰嶸。淸安君。次曰崢。會原君。南川娶僉正崔曦女。生二男一女。長曰濚。昆明君。次曰湘。文城副正。女適護軍李亮。淸安娶領中樞府事盧公弼女。生五男。長曰延壽。功城副正。次曰壽定。臨汀副正。次曰千壽。定安副正。次曰億年。泰安副正。次曰億孫。高陽副正。會原娶河南君鄭崇祖女。036_124c生三男一女。長曰泂。昇平副正。次曰澄。加平副正。次曰滃。瑞城副正。女適忠義衛韓守忠。內外曾玄孫無慮二百餘人。始公之卒也。諸子皆幼。未及樹碑。乃今百有五年。曾孫前漢城判官恬。諗于宗人曰。我恭昭公之聲烈。國人所共聞知。而尙闕神道之刻。猶爲有子孫乎。遂相與謀。伐石加礱。而求文於寅。辭非人不獲。據其家乘以筆之復。繫短銘。其詞曰。
聖出東方。繄我世宗。盛德之報。播詠斯螽。詵詵七男。廣平居一。榮祿方殷。仙遊飄忽。尙遺掌珠。庸慰宸悲。常託繼體。我愛爾思。方在髫齕。封爵已加。
036_124d文廟光陵。異數實多。肫肫永順。展也麟趾。其質孔美。輔以文史。旣親又賢。宜左右。王。出納命令。裁度程章。爰雜儒臣。授簡試能。對策高等。殊賚是膺。再登科甲。寵典彌光。宗人矜式。朝著瞻相。贊謨伐叛。形繪凌煙。炳幾誅逆。鐵券重宣。貴絶班品。望重勳庸。成宗入承。眷倚尤隆。云何一疾。奄折遐壽。抑不盡取。歸豐于後。慶鍾三子。綿及曾玄。其麗百數。蘭玉聯翩。廣之西壤。佳城攸在。牲繫久缺。令孫追慨。貞珉待篆。爰屬友生。豈曰吾能。乃感厥誠。公葬百年。墓事維新。永詔仍雲。無忝前人。


 

 

 

頤庵先生遺稿卷之四文集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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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道碑銘
宗室永順君贈諡恭昭公神道碑銘 a_036_12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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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溥。字俊之。我世宗莊憲大王之孫也。考。廣平大君諱璵。妣永嘉府夫人申氏。贈左議政諱自守之女。公以正統甲子生。生半歲而大君捐館。世宗哀之。使姆抱前而撫之。命其小字曰壽福。仍令大君養母王氏保養之。傳旨于政府。若曰。廣平不祿夭折。予甚悲之。幸有遺嗣。呱泣襁褓。尤可憐憫。其供給諸事。特依親子之例。年五歲。乃命入內。仍置禁036_123b中。嘗囑文宗世祖曰。汝等異時體予今日之意。撫恤無替。景泰庚午。世宗禮陟。始出就王氏之宅。辛未年八歲。文宗特授嘉德大夫。封永順君。乙亥春。魯山加階昭德。時世祖在潛邸。主婚行醮禮。是夏。世祖卽位。天順己卯。又陞興祿。世祖深念世宗遺敎。且以公謹愼祥密。常置左右。凡政院出納文書及諸司勘覈事務。皆令公參管。與駙馬河城君鄭顯祖。更日直宿。有所召問不計子夜曰。年少之人。逸則生病。故勞之也。成化丙戌七月。上聚文臣于闕庭。令列卿大官以至宗室駙馬皆赴焉。親製策036_123c問。名曰登俊試。命鄭麟趾,鄭昌孫申叔舟等諸大臣。爲對讀官以考之。公中第五。上喜甚。取試卷入內親覽。大服文章之美。御殿唱榜。百官陳賀。賜恩榮宴于議政府。壯元金守溫以下。各賜鞍馬。蓋從前未有之盛擧也。丁亥。李施愛叛于咸吉道。討平之。公與有功。賜精忠敵愾功臣之號。進階顯祿。戊子。上幸溫陽。公扈從。時於行在所。設科取士。仍開重試。公擢第一。上益喜。及還宮。兩殿幸公第。
賜米甚厚。伶優天童凡數百名。各給綿布有差。命具花蓋。隨駕入康寧殿。又命加一日遊街。寵渥036_123d之隆。無與爲比。九月。世祖昇遐。睿宗使公侍殯宮。後又命掌明皇誡鑑修撰。己丑。南怡等謀逆伏誅。公多所裨贊。策勳加號保己社定難翊戴功臣。十一月。睿宗昇遐。成宗卽位。命依世祖朝。掌出納庶政。仍監六典修撰。庚寅三月二十八日。適詣闕。感疾還第。蒼黃醫治。公勅左右曰。余將不興。速備喪具。令扶出正寢。俄而遂卒。春秋僅二十七。訃聞。
九重震悼。輟朝三日。賻賜加等。官庀喪事。太常諡以恭昭。卜得六月癸酉。葬于廣州治西彦州里光秀山子坐午向之原。公爲人純懿端慤。聰明英達。存心036_124a敬畏。接物謙恭。雖富貴崇極。略無驕矜之氣。爲文信筆。若不經意。而粲然成章。至於簡札。皆可觀玩構小堂於後園。扁曰明新。藏書數千卷。公退靜坐。手不暫釋。承累朝春遇。參掌機密。啓沃弘多。每出入班列。風采凝重。爲衆瞻望。及其卒也。莫不歎惜。配全州氏。封金堤郡夫人。考諱道一。豐儲倉丞。祖諱承寧。通禮院奉禮。贈議政府左議政。曾祖諱士康。議政府左贊成。妣鄭氏。議政府左參贊熙啓之女。天性徽柔敬順。不喜華靡。十五。歸于公。能執婦道。大爲申夫人所愛。生三男。未及長成。公遽棄背。夫人哀戚之餘。上036_124b事下敎。勤勞備至。旣而三子蚤被殊恩。竝授貴爵。金紫照門。爲一時榮慕。弘治癸丑夏。其季者亡。夫人傷之。致疾而歿。是年八月二十七日也。享年五十三。越十月己丑。就窆光秀山坐甲而向庚。西距公墓可百步。男長曰崝。襲封南川君。次曰嶸。淸安君。次曰崢。會原君。南川娶僉正崔曦女。生二男一女。長曰濚。昆明君。次曰湘。文城副正。女適護軍李亮。淸安娶領中樞府事盧公弼女。生五男。長曰延壽。功城副正。次曰壽定。臨汀副正。次曰千壽。定安副正。次曰億年。泰安副正。次曰億孫。高陽副正。會原娶河南君鄭崇祖女。036_124c生三男一女。長曰泂。昇平副正。次曰澄。加平副正。次曰滃。瑞城副正。女適忠義衛韓守忠。內外曾玄孫無慮二百餘人。始公之卒也。諸子皆幼。未及樹碑。乃今百有五年。曾孫前漢城判官恬。諗于宗人曰。我恭昭公之聲烈。國人所共聞知。而尙闕神道之刻。猶爲有子孫乎。遂相與謀。伐石加礱。而求文於寅。辭非人不獲。據其家乘以筆之復。繫短銘。其詞曰。
聖出東方。繄我世宗。盛德之報。播詠斯螽。詵詵七男。廣平居一。榮祿方殷。仙遊飄忽。尙遺掌珠。庸慰宸悲。常託繼體。我愛爾思。方在髫齕。封爵已加。
036_124d文廟光陵。異數實多。肫肫永順。展也麟趾。其質孔美。輔以文史。旣親又賢。宜左右。王。出納命令。裁度程章。爰雜儒臣。授簡試能。對策高等。殊賚是膺。再登科甲。寵典彌光。宗人矜式。朝著瞻相。贊謨伐叛。形繪凌煙。炳幾誅逆。鐵券重宣。貴絶班品。望重勳庸。成宗入承。眷倚尤隆。云何一疾。奄折遐壽。抑不盡取。歸豐于後。慶鍾三子。綿及曾玄。其麗百數。蘭玉聯翩。廣之西壤。佳城攸在。牲繫久缺。令孫追慨。貞珉待篆。爰屬友生。豈曰吾能。乃感厥誠。公葬百年。墓事維新。永詔仍雲。無忝前人。


 

 

 
芝湖集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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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龜城君行狀 丁卯十二月 a_143_54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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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浚。字某。世宗大王第四子臨瀛大君貞簡公諱璆。是其考。齊安府夫人全州氏。奉禮承寧之女。是其妣。公於序爲第二。旣稍長。封龜城君。與我先祖永順君府君諱溥。爲光廟所眷愛。皆長禁中。引接無虛日。上之前後巡狩遊佃。未嘗不從行。而甲申之在溫陽湯泉也。公與貞簡公曁永順君,領相申叔舟,戶判金國光,都承旨盧思愼等。承命往審堀浦開143_548b鑿便否。上一日御思政殿常參。命公及永順君,河城尉鄭顯祖,勿巨君澈進前。顧謂贊成具致寬曰。予當評論四臣之爲人。若溥。天性質直。可任以事。顯祖。性本正直。善於傳命。澈。稟氣開明。然本質未厚。浚。心志明澈。性本穎異。又有膂力。才調過人。此四人者。予甚愛之。不離左右。致寬曰。誠如上敎。有頃入御康寧殿。召致寬,都承旨盧思愼及公等四人設酌。其依仗眷顧之隆有如此者。丁亥五月。吉州人前會寧府使李施愛。據北關以叛。殺監兵使及守令。兵勢甚盛。國內震懼。上乃以公拜四道兵馬都統使。以贊成143_548c曹錫文副之。帥諸道兵。往征鎭北。將軍康純,平虜將軍朴仲善等。皆受節度。大軍進屯于北靑。施愛夜以鐵騎薄之。我將士皆殊死戰。賊敗還利城。公慮賊潛師搗虛。分遣將士。先守要害。賊果令梟將。由他道欲襲咸興。扼於官軍。不得進。又得賊牒。悉其虛實。鼓行踰咸關嶺。賊望風奔潰。追至利城。大戰于居山驛。賊據險而陣。我軍賈勇先登。四面崩之。施愛遁歸吉州。麾下縛致軍前。傳首京師。餘黨悉平。時是年八月也。初公進兵敗賊也。上下書奬諭曰。卿等。已乘破竹之勢。予何有言。今以後益知卿等忠誠貫日。氣回山143_548d川。雖煙未盡而燎已滅。威未戢而恩已敷。豐功茂才。焉復如此。只慮風氣漸寒。姑賜厚綠緞襦帖裏,白紬襦,裏肚各一領及鹿皮靴玉絛環。宜悉予意。及報捷。又以御札諭之曰。汝吾之寵子。初因怒甚。遽委元戎。汝旣成大功。幅員萬里。歡聲洋溢。汝之功烈。古今所罕。九月。凱還。上遣茂松君尹子雲與宗宰。迎于郊。賜酒勞之。遂入。宴于大內。親執盞以慰之。策元勳。賜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之號。永順君。亦以左右周旋協贊謀畫策三等。十二月。大封諸功臣。設宴以享。戊子四月。勑使姜玉東來。贈公及永順君彩緞三匹。143_549a蓋聞其賢也。七月。特拜領議政府事。貞簡公聞之大驚。詣闕陳啓。請收成命。上不從。因設酌。逮光廟昇遐。命永順君及公。更日直宿禁中。己丑。南怡之獄旣畢。公與永順君。皆參翊戴勳籍。是年遭貞簡公喪。成宗元年庚寅正月。稷山人金允生與別侍衛尹敬義。詣政院呈小簡。蓋緣前直長崔世豪上年冬。有亂言也。旣設鞫。辭連權孟禧。憲官來啓。公爲崔世豪亂言所及。請囚鞫。待世豪鞫畢定罪。傳曰。彼自亂言。浚何與焉。時富平私奴石年。告同里住彭排金致云,良人朴末同等相詰曰。今山陵之役甚苦。如龜城君143_549b年壯者爲主。則陵役亦歇。因此又逮致云等。憲官請鞫問。傳曰。彼自亂言。無與於浚。不可鞫也。諫官又請廢爲庶人。流於外。又不從。時贊成韓繼美,西平君韓繼禧等。又以權孟禧亂言啓達。大臣申叔舟,韓明澮等請對。貞熹王后與上同御寶敬堂引見。叔舟啓曰。浚於世祖朝。交通內人。罪不可赦。世祖特眷愛庇覆。得至今日。今又憸小之徒。以浚嘗將兵有功。指而爲言所不忍聞。願治先王時罪。廢爲庶人。流於外。此乃所以保全也。貞熹王后曰。群小自造惡言耳。浚何得知其交通內人事。世祖已諭以143_549c不實。今不可追論。然當更思之。所謂交通內人云者。光廟承恩宮人。曾前以諺書授宦官。傳於公。公與貞簡公。卽啓達。上置之。乙酉。上在溫陽時。其宮人。又以諺書因宦官致意。公又與貞簡公上其書。上乃杖殺傳書兩宦。而又處絞其宮人。臺官請公罪。上痛言其無罪。仍設酌以慰之。至是以此爲言。貞熹王后。又御崇文堂。引見諸大臣及六卿內宗等。敎曰。龜城君。乃世祖所眷愛也。今黜於外。恐違世祖之意。叔舟等請之不已。乃不得已勉從。叔舟等遂啓削勳籍。籍沒家產。寧海府安置。傳曰。當令彼安心143_549d而去。不可罪之至此。乃抹籍沒家產四字。又敎曰。浚不可督迫出京。令徐徐治裝。命率去其妻妾及婢子五人。內侍齎藥物護行。下書慶尙道觀察使。月給食物酒饌。金致云,權孟禧等處辟後。臺諫又請加罪。而以懷安大君子孟宗爲證。貞熹王后又傳曰。浚事與孟宗不同。且宮人事。予備知其不然。斷不可從小人之藉口。非其所知。又何罪焉。臺啓乃止。公在謫凡十年。以己亥春卒。訃聞。貞熹王后爲之流涕。進素饌。命族親往葬之。公兄烏山君澍。啓請來葬廣州先塋。承旨等以爲不可而止。其後返葬於楊州西山。配143_550a淸州韓氏。卽右議政淸川府院君伯倫之女也。祔葬公墓。公初繼後於太宗大王子溫寧君裎。而以被罪罷繼。公亦無子。而不敢立後。其生年無從可知。小說有謂年十八。爲兵判。二十一爲元帥。二十八爲領相云。而以國乘見之。則其爲都摠使領相。在於丁亥戊子兩年。其言誠紕繆矣。蓋於我先祖永順君府君年歲似相近。永順君以庚寅三月年二十七卒。公又後十年而終。則其妙年樹勳。得籌不長。可槩而知也。某竊嘗慨然於公之抱深冤不伸。今二百餘年。乃敢陳疏請考實錄而伸之。幸蒙聖上允可。旣考出後。143_550b禮曹判書南公龍翼。覆啓請議大臣曰。某妙年勳望。古今罕比。而屢陷危疑之重。辟終荷曲。全之聖恩。被罪之時。特免籍沒。終止居謫而死。則與罪著伏法者有異矣。大臣領議政金公壽恒,領中樞府事金公壽興,右議政李公端夏。皆盛稱其冤狀。宜許伸雪。上於是乃命復其勳爵。嗚呼。公之天其亦定哉。第惟世代已遠。其於平生事行。無能尋逐。而以國乘所紀言之。則有曰。姿性沈靜。器宇老成。又善射御。光廟深器之。置諸左右。與承順君溥。朝夕啓稟。光廟每稱之曰。文永武龜。又光廟一日於禁中遊燕。戲置公143_550c於方席。使人擧而讚誦如新來鼓祝曰。誰是領議政。此是領議政。誰是天下英雄。此是天下英雄。噫。公以近宗。樹如此奇功。被如此恩寵。又從以身處首輔之位。雖使後人見之。猶不勝其懍懍危慄。而顧乃晏然居寵。不知遜避。以卒罹禍網何也。光廟嘗以無學術爲恨。嗚呼。聖主其知臣哉。雖然。公之勳名與處地旣如此。則雖力辭官位。閉門塞竇。終亦難免。其柰何乎。命與勢也。噫。玆略記其顚末。俾後人有所攷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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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友名行錄

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與余同庚。而日月後於余。居玄風。獨行無比。平居必冠帶。室家之外。未嘗近邑。手不釋小學。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人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恭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師。年益高。道益邵。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佔畢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全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先生和韻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豈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貳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蘇。
安遇字時叔。孝行冠於鄕。居父喪。一從家禮。從佔畢齋受業。旣而無仕心。始貳於畢齋。嘗擧於鄕。赴京入會試。四館年少者。驕傲長老鄕生欲撻之。時叔曰。安可以父母遺體。無罪而自毀。以求名利乎。不入而去。操節可東漢云。
權晏安東人。字和淸。年先於余二十餘歲。嘗曰。吾幸不死。垂亡之年。得遇三友。謂余及正中克昌也。少時以武才屬別侍衛。爲人淸。如於陵仲子。喜山水樂道眞。孝悌忠信。無能出其右者。屋毀不蔽風雨。或粮絶。其樂晏如。短褐蕭然。末路好佛。
鄭汝昌字自勗。入知異山三年不出。明五經。窮極其蘊。知體用之源同分殊。知善惡之性同氣異。知儒釋之道同迹差。性理之學醒狂敬之。庚子年。上下敎成均館。求經明行修儒生。館中擧自勗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伯勗而講經。自勗退。癸卯年進士。其父六乙。施愛之亂死國。是時自勗年少。居喪無闕。居母喪。典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庚戌年。參議尹兢薦其孝與學。士林無比。特召爲昭格署參奉。自勗上書請免。上下敎褒之。名益重。自勗爲人性端重。不飮酒醴。不茹葷菜。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也。少時居館。與人寢。鼾睡而不寐。人不知也。一宵見獲於崔鎭國。館中喧傳。以爲鄭某參禪不寐。
貞恩字正中號月湖。又號嵐谷。又號雪窓。拜秀川副正。音律冠於世。彈慷慨。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生然。
李坌字子野。居長安。好賢樂善。恬於勢利。詩學甚富。大猷伏其機軸深遠。
盧祖同字公緖。好讀小學。不喜躐等之學嘲弄之文科擧之才。持身守法。畧與大猷同。居父喪。廬墓三年。一依家禮。與時叔同學於佔畢齋之門。先生敬之。
鄭世麟字昌符。居嶺南。受業於佔畢齋之門。其學同於公緖。而詩才甚高。先生敬之。丙午年沒。年二十二。
楊浚字澄源。受業於佔畢齋。深沈有大度。安貧樂道。淡如也。又局量雄深。修爲不形於色。而聰明日進。儒林最卑下之。餘慶獨知之。
金時習江陵人。新羅之裔。先余二十歲。字悅卿號東峯。又號碧山淸隱。又號淸寒子。世宗乙卯年生。五歲能屬文。世宗命招承政院賦詩。大異之。召其父敎之曰。善養此兒。予將大用。乙亥年光廟攝政。入沙門。名曰雪岑。入居水落山精舍。修道鍊形。見儒生則言必稱孔孟。絶口不道佛法。人有問修鍊事。亦不肯說。或有言金乖崖守溫坐化之事。答曰。坐化於禮不貴。吾但知曾子之易簀。子路之結纓以死之爲貴也。不知其他。辛丑年間食肉長髮。爲文以祭祖父曰。伏以帝敷五敎。有親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故惡獸莫過虎狼。而微忠無踰豺獺。能全愛親之性。又謹報本之誠。皆天理之固然。而物欲之難蔽者也。伏念愚騃小子。嗣續本支。少沈滯於異端。嗟迷懵而未講。將修道可以薦拔。悟詤說莫如輪廻。壯歲因循。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攷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在腆以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感霜露之沾濡。憂歲月之逾邁。驚惶無已。歎訝良多。如贖舊愆。倘納堪輿之兩際。庶將面目。得拜祖宗於九原。自壬寅以後。睹世將衰。不爲人間事。爲棄人於閭閻間。日與人爭訟於掌隷院。一日飮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曰。汝奴宜休。鄭若不聞。人以此危之。其嘗與交游者。皆絶不往來。獨與市僮狂易者遨遊。醉倒於道側。恒愚恒笑。後或入雪岳。或居春川山。出入無常。人莫知其涯涘也。其所喜者。正中子容子挺及余。所著詩文數萬餘篇。播遷之際。散亡殆盡。朝臣儒士。或竊取之。以爲己作。
洪裕孫字餘慶。號篠叢。又號狂眞子。南陽吏順致之子。家世淸貧。僅裹身體。或不裙行。涉獵經史。放達不檢。不喜科擧。不爲免鄕計。辛丑年南陽守蔡申甫。以餘慶爲能文。放其役。卽步歸嶺南。謁佔畢齋受杜詩。先生曰此子已見顏子所樂處。學者皆宗之。入頭流山隷業。到京諫先生不建白時事。何空取人爵祿爲也。且當今學者。莫不惡佛老。而行器無一箇免於佛老者。行圓而惡方者老也。行獨而不恤者佛也。先生大惡之。自是每稱餘慶譎詐。餘慶亦自晦行。衣食於朱門而已。爲人文如漆園。詩涉山谷。才挾孔明。行如曼倩。
柳從善晉州人。字如登。居山自晦。朋戚罕見其面。
禹善言初字德父。號風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辛丑年。南行嶺南。謁佔畢齋先生於廬幕。先生字之曰子容。
金勿字介重。康津人。監司之子。端重好潔。癸卯年。生員重科第。
崔河臨字鎭國。號太虛堂。所性喜功名。庚子年進士。是年夏。妖僧學祖。敎其徒雪義。潛回佛像。云佛自行。致粟帛布錦。日以千數。太學生上書請誅妖僧。凡五上書不得允。疏文大抵皆出鎭國手。丙午七月沒。年三十二。家貧不能斂葬。友人致賻而葬之。所著安宅記。傳于世。
李達善字兼之。性喜善。丙午年及第第三名。調宗簿直長。
權景裕字君饒。安東人。剛毅識體。不作爲深嫉。姜公直以爲不近人情。晩聞其實行甚愛之。癸卯進士。丙午及第。調弘文館正字。
李尹宗字克昌。號此君堂。又號竹溪。工於詩文。爲人好賢。公直自勖。伯淵和淸。其所絶喜者也。
高淳。字熙之。又字太眞。又字眞眞。濟州人。爲人有聾病。人畫地成字以致意焉。戊戌年應詔上書論時政。得妄名。人或告之熙之聞而喜之。自號妄人。熈之初見辛德優於諸儒中。諸儒相與語翊翊。熈之書一絶於小紙云。小閣春風靜。淡談摠有餘。聾人無一味。垂首獨看書。德優喜之。和其詩曰。世聲聒溷濁。糞壤嗟鼻餘。羡君勝房老。晝隱千卷書。自是以爲知心交。戊申年生員。
辛永禧字德優。靈山人。宰臣碩祖之孫。倜倘不羈。磊磊多大節。不喜科名。詩名播聞中外。成參議俔以其詩爲出入蘇黃。癸卯進士。自後不應擧。
李宗凖字仲鈞。號浮休子。又號尙友堂。又號太庭逸民。又號藏六居士。又號慵軒居士。能詩文。丁酉年進士。丙午年及第第二名。今爲平安評事。少時不識君饒家。與余及正中。乘月翫花。到君饒家。余誣君饒曰。好賢坊杏花下。有異人吟詩。招與偕來。聞其語。倜倘不羈。見其詩。淸冷出塵。非煙火食人所道。世有仙者。無乃是耶。君饒倒屣出迎。相與坐月下。仲鈞作詩。故作淸瘦態。君饒果大服跪曰。陋幕至僻。秀才何因我情友幸臨耶。豈非天幸也。幸望一宿。仲鈞必欲求去。君饒跪奉衣裾而請留。談夜竟。明朝始識於背洞 於背洞名 寓居進士李宗凖也。相與附掌大笑。仲鈞君饒遂爲知心交。
金應箕字伯奉。丁酉年及第。今爲禮曹正郞。新羅宗姓方慶之後。
金應奎字仲聖。應箕之弟。慷慨有大節。父方慶鍾愛之。丁酉年年二十。擧平安道鄕貢。連魁三科。入進士會試。死於場。時議惜之。有子一人。
摠字百源。拜茂豐副正。太宗曾孫也。琴才與正中齊。宏量過之。卜築楊花渡口。自刺漁舟。自號西湖主人。
賢孫字世昌。神饒之後。官至鳴陽副正。年後余十三歲。動以法律身。篤行亞於大猷。嘗欲行冠禮。大猷止之。丁母憂。一從家禮。
君信字任之。坡州之世家文肅公之後。行同世昌。而深沈和緩過之。師事大猷。
李勣字仲栗。工於詩。後攻庸學味其道。自是不專攻詩。道志尙高遠。不事窠臼中事。尙友古人。平居冠帶。澹澹如也。師事大猷伯淵。
許盤字文炳。癸卯年進士。志於性學。恬於進取。欲事事師古。師友大猷。大猷服其端雅出於天性。蔭補社稷參奉。時左相洪應爲提調。文炳說之曰。王世子國之儲君也。他日東方萬姓之所仰賴者。今與宦寺居處。進見書筵之時少。遊翫狎昵之時多。請云云。
閔龜孫字瑞卿。驪州人。故僉正粹之子。子挺婦弟。嘗學詩於子挺。少焉卽工。又從正中貞之中栗遊。師事大猷。爲人端雅無累。
申用漑高靈人。字漑之。深沈有大度。工詩能文。叔舟乃其祖也。父沔死於施愛。
李胄固城人。字胄之。賢而能文。容軒先生之曾孫也。
李元龜浪翁也。益齋齊賢之後。朴參判彭年乃外王父也。二家賢能。萃于一人。
李繼孟字希醇。佔畢齋取其詩文。居全州。淸修出衆。
李世則字效翁。延安君叔琦之子。慷慨好直。淸操過人。能於詩文。
張世弼字彥卿。居高陽。家貧事母。必有酒肉。少不學。僅記姓名。云云。
崔世明字葆光。好讀書。重仕進。丁酉年進士。
安繼宋字子胤。號薄田。爲人性癡。詩酒之外。餘無留心。人知與不知。皆稱薄田而笑之。薄田不知也。承蔭拜敦寧府直長。到今十七年不遷。恬於勢利。可知也。
申誧字持正。號虛舟。工詩畫。家貧喜酒。嘗自號莊六。仲鈞喜其號。請以酒一壼易之。持正許焉。
丘永安江陵人。字仲仁號壼隱。有文名。己丑年生員第二名。重仕重利。又陰陽推步風水醫術仙釋乘除之法。無不涉獵。
深源字伯淵。號醒狂。又號默齋太平眞逸。太宗之玄孫。與余同年生。日月後於余。經明有行。兼通醫術。性忠孝。不喜巫佛。平居冠帶。手不釋卷。殿講通四書五經。進階明善大夫行朱溪副正。年二十五。凡前後五上書論治道。或允或不允。又廷論叔母夫任士洪不道異心。失意於祖父。謫長湍。又謫伊川。上書請見病父母。言語懇至。得允。丁未年。宗親科試講經史。擢第一人。賜藥賜酒。階二品而不封君。以前有忤祖父之過也。
姜應貞字公直。號中和齋。先余十餘歲。居恩津。以孝行稱。嘗母病。三年不解帶。藥必親嘗。一日夢天神降庭。謂公直云明日來客必醫汝母病。問之。明朝果有一少年名元。自云居輪王洞。請宿於公直。館之。以母病問之。一年果知醫藥者。以少年言試之。十五日病愈。後居父母喪。一從家禮。冬月裸跣。體無完肉。事聞。旌表門閭。蠲家丁役。公直爲人善誦經書。推步人命。又涉獵醫術。兼涉地理之書。少時遊大學。與長安俊士。依朱文公故事作卿鈞。或月朝講論小學。其選皆一時名士。如金用石字鍊叔。申從護字次韶。朴演字文叔。孫孝祖字無忝。鄭敬祖字孝昆。權柱字支卿。丁碩亨字嘉會。康伯珍字子韞。金允濟字子舟。此其尤也。餘不盡錄。世之不悅者喧之。或指爲小學之契。或指爲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坎軻鄕曲。終老不試。癸卯年生員爲訓導。
安應世竹山人。字子挺。號月窓。又號鷗鷺至人。又號烟波釣徒。又號藜藿野人。後於余一歲。爲人淸澹洒落。安貧喜分。不求名利。不學仙佛。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之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沒。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
蔡恂字叔孚。居陽川。庚子年進士。爲人重科擧。
韓訓字師古。小字學而。淸州人。居長安。工詩。丙午進士。
姜訢字時可。晉州人。觀察使子平之末子。始從餘慶于密陽。受杜詩於佔畢齋。次從德優學詩。次從大猷攻小學。次從時叔公緖讀書於兪克己廬幕。
趙自知平壤人。字性之。好施好賢好山水好遊戱。不喜功名。深沈少言語。學於餘慶能詩。
康伯珍字于韞。
金用石字鍊叔。
李長吉。
崔忠誠字弼卿。
盧燮。
柳房。
趙元紀。
趙廣臨。
鄭鵬。
師友名行錄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