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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 안정복 선생 행장

아베베1 2013. 12. 29. 14:43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인수  백운봉  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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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순암선생 행장(順菴先生行狀)

선생의 휘(諱)는 정복(鼎福)이고, 자(字)는 백순(百順)이다. 성은 안씨(安氏)로 광주인(廣州人)이다. 시조 안방걸(安邦傑)이 고려에 벼슬하여 광주(廣州)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광주를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안성(安省)이 있어 염리(廉吏)에 선발되었는데, 시호(諡號)는 사간공(思簡公)이다. 그 뒤 3대를 거쳐 호조 판서를 지낸 안윤덕(安潤德)이 있는데, 부원수(副元帥)로서 삼포(三浦)의 왜노(倭奴)를 토벌하여 이겼으며, 시호는 익헌공(翼憲公)이다. 다시 3대를 거쳐 돈녕 도정(敦寧都正)을 지낸 안황(安滉)이 있는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위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봉(冊封)되었으며, 형조 판서(刑曹判書) 광양군(廣陽君)에 추증되었다. 2대를 지나 현감을 지낸 안시성(安時聖)이 있는데,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지냈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문학(文學)과 기절(氣節)로 청의(淸議)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일찍이 당류(黨流)에 가로 막혀서 배척당해 쓰이지 못하였는데, 식자들이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에 비하였으며, 관직이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이르렀고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안극(安極)은 호조 참판 광평군(廣平君)에 추증되었으며, 행의(行誼)로 사류(士類)들에게 칭찬받았다. 어머니 증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이익령(李益齡)의 딸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숙묘(肅廟)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25일에 선생이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영특하였다. 처음에 《소학(小學)》을 읽어서 글뜻을 깨우쳤는데,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매일 천백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한 번만 스쳐 읽으면 그 즉시 암송하였다. 13세 때 ‘기삼백(朞三百)’의 주(註)를 보고는 그 수리(數理)를 추연하여 다음해의 달력을 만들었다.
조금 장성하여서는 일찍이 ‘선비가 한 가지 재예(才藝)로 이름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경사(經史)를 두루 열람한 다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유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광주(廣州)의 덕곡(德谷)은 골짜기가 깊고 숲이 우거졌으며 산수(山水)가 감돌아 흘러 은자(隱者)가 노닐 만한 곳인데다가, 또한 선대의 선영이 있는 곳이었다. 이에 선생이 드디어 그 곳에다가 자리잡은 다음 작은 집을 ‘菴’자 모양으로 짓고는 ‘순암(順菴)’이라고 편액을 내걸었는데, 이는 대개 천하의 일이 오직 순리일 뿐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는 과거 공부를 집어치우고 오로지 고인(古人)들의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영묘(英廟) 기사년(1749, 영조 25)에 조정에서 선생의 이름을 듣고는 천거하여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만녕전 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하자, 비로소 나아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신미년(1751, 영조 27)에 의영고 봉사(義盈庫奉事)로 승진하였다. 이에 공인(貢人)들이 의영고 관사의 문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우니, 세간에서 경아문(京衙門)에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전례에 의거해 정릉 직장(靖陵直長)으로 승진하였다가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갑술년(1754, 영조 30)에 참판공(參判公)의 상(喪)을 당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 집에 있은 것이 거의 20년이었다. 이에 공부가 더욱 깊어졌고 저술이 점점 많아졌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 뒤에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임진년(1772, 영조 48)에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에 제수되자, 비로소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이 때 정묘(正廟)께서 저위(儲位)에 있었는데,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진강(進講)하는 여러 관료들이 성의(聖意)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빈객(賓客)으로 있던 채제공(蔡濟恭)이 나아가서 진달드리기를,
“계방(桂坊 익위사의 별칭)은 박학(博學)한 선비이니,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심경(心經)》을 강(講)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중용》의 첫머리 장(章)은 만세 도학(道學)의 근원으로서, 제왕(帝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본성을 따른다.[率性]’는 한 구절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한 곳입니다. 계구(戒懼)함으로써 그 근본을 세우는 것은 존양(存養)하는 일이고, 신독(愼獨)함으로써 그 기미를 살피는 것은 성찰(省察)하는 일입니다.
천리(天理)를 확충하여 인욕(人欲)을 막을 경우에는 성정(性情)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중화(中和)를 말하였는데, 중화란 성정(性情)의 덕(德)입니다. 성정이 발(發)하여서 중도(中道)에 맞지 않으면 불화(不和)하게 되어서 불선(不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극치(克治)의 공부를 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릇 공부란 것은 존양(存養), 성찰(省察), 극치(克治) 이 세 가지일 뿐입니다. 존양하여 성찰하고, 성찰하여 극치하며, 극치하여서 또 존양하여, 순환하기를 그치지 않아 한 순간이라도 중단됨이 없게 한다면, 이것을 일러 ‘솔성지도(率性之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동궁(東宮)이 칭찬하였다. 선생이 또다시 나아가서 진달드리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서연(書筵)과 소대(召對)를 날마다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으니, 군덕(君德)이 실로 이를 말미암아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강학만 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아마도 체행(體行)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할 듯합니다. 다만 일상 생활을 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즈음에 살피면서 체험하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렸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체행하기가 더욱 어렵다.”
하자, 선생이 이어서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은 문사(文辭)를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모두 천하를 치평(治平)케 하는 인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하(邸下)께서 만약 제왕의 문장(文章)에 마음을 두신다면, 이것은 실로 신민(臣民)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 해 가을에 병으로 인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사년(1773, 영조 49) 겨울에 위수(衛率)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봄에 서연에 들어가 참여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하였다. “오만한 마음가짐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구절에 이르러서 선생이 아뢰기를,
“오만한 마음가짐은 흉덕(凶德) 가운데에서도 큰 것으로, 이 때문에 네 가지 가운데서 맨 먼저 말한 것입니다. 진(秦) 나라 이후로 군도(君道)는 날로 높아지고 신도(臣道)는 날로 낮아져서, 상하간에 정의(情意)가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금된 있는 자들이 매번 자신만이 최고라는 병통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모두 오만한 덕인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가납(嘉納)하였다. 동궁이 묻기를,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설(理氣說)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율곡의 설은 바로 스스로 터득한 견해이고, 퇴계의 설과 같은 경우에는 주자(朱子)의 학설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근원이 있는 학설입니다. 신은 퇴계의 학설 쪽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선생을 모시면서는 예우하는 것이 다른 신하들과는 달랐다. 이에 선생은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말을 함에 있어서는 곡진하게 다하였다. 그리고 조용하고 완곡하게 말하면서 강론을 인하여 의리(義理)를 깨우쳐주니, 동궁은 매번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선생에게 물었다. 이 해 가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을미년(1775, 영조 51)에 다시 익찬(翊贊)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동궁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어 백관(百官)들의 조참(朝參)을 받을 때 선생은 들어가서 시위(侍衛)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인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병신년에 목천 현감(木川縣監)에 제수되었다. 관직에 임함에 미쳐서는 교화(敎化)를 돈독히 하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으며, 묵은 폐단을 바르게 고쳤다. 먼저 대명(大明)의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만든, “부모에게 효순(孝順)하고, 웃어른을 존경하고, 마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들을 가르치고, 각자의 생업에 안정하고, 비위(非爲)를 저지르지 말라.”는 내용의 훈민육조(訓民六條)를 약법(約法)으로 정한 다음, 아전과 백성들로 하여금 매월 초하룻날 모여서 이를 읽게 하였으며, 혹 이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경우에는 반드시 형벌을 내려 제재하였다.
백성들을 깨우쳐서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면서는 밭갈고 김매는 자들로 하여금 남녀가 좌우로 나뉘어서 일하여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시행하여서 습관이 되면 풍속이 저절로 아름답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사마소(司馬所)를 복원하여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게 하였으며, 방역소(防役所)를 설치하여 편호(編戶)들의 부역을 견감하고 모두 늠봉(廩俸)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례를 정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것이 전해져서 읍규(邑規)로 되었다. 기해년(1779, 정조 3)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정묘(正廟) 신축년(1781, 정조 5)에 돈녕 주부(敦寧主簿)에 제수되었는데, 상이 헌릉 영(獻陵令)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선생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찬(撰)하였는데, 상이 한 본을 등사해서 올리도록 명하고는 선생으로 하여금 직재(直齋)에서 교정하여 내각(內閣)에 보관하게 하였다.
갑진년(1784, 정조 8) 가을에 세자(世子)를 책봉하고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해서 계방(桂坊)의 관원을 천거하게 함에 익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사은(謝恩)한 뒤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유년(1789, 정조 13)에 벼슬살이한 지 40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가자(加資)하도록 명함에 전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가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 다음해인 경술년에 나라의 경사로 인해 전례에 따라 직질(職秩)이 올라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광성군(廣成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신해년(1791, 정조 15) 7월 계사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이 80세였다. 상례(喪禮)는 송종록(送終錄)에서 정한 바를 따랐는데, 이는 유명(遺命)이었다. 부음을 아뢰자, 상이 전교하기를,
“지난날 서연(書筵)에서 고문(顧問)을 할 적에 예전의 고사를 상고함에 있어서 많은 힘을 빌었었는데, 지금 졸하였다고 들으니 몹시 애석하다.”
하고는, 특별히 명하여 부의(賻儀)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 해 9월 병자일에 덕곡(德谷)의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금상 원년에 특별히 좌참찬을 추증하였다. 이 때 서학(西學)의 무리들이 이미 주살되었는데, 대신(臺臣)이, 선생이 일찍이 사설(邪說)을 배격하여 학술(學術)이 글러지는 것을 바로잡았다고 아뢰어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천부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정신과 풍채가 깨끗하고 밝았다. 마음을 기르고 채우기를 도(道)로써 하여 덕기(德器)가 혼후하게 이루어졌으며,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말투가 부드러워서 자연스러운 가운데 마치 저절로 법도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분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고는 깊이 탐색하고 세밀히 완미하면서 많은 이치를 알아 축적하였는데, 밥 먹고 잠 자는 것을 잊기까지 하였다.
성호 선생(星湖先生) 이익(李瀷)이 퇴도(退陶) 이자(李子)의 학문을 사숙(私淑)하여 기전(畿甸)에서 강론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겼다. 성호 선생은 한 번 보고 단번에 큰그릇임을 알고 즉시 성문(聖門)에서 친히 들은 간절한 뜻을 가지고 말해 주었다. 성호 선생이 일찍이 이자(李子)의 언행(言行)을 모아 놓고는 미처 수정을 하여 다듬지 못하였는데, 선생으로 하여금 다시 덧붙이고 잘라내게 하였다. 이에 선생이 《근사록(近思錄)》의 규례에 의거하여 찬정(撰定)해서 《이자수어(李子粹語)》라고 이름 붙이고는 학문하는 목적으로 삼았는바, 대개 사문(師門)에서 도를 전한 은미한 뜻을 나타내었다고 하겠다.
당시에 문학(文學)을 하는 선비들이 모두 성호 선생의 문하에 모여 있었는데, 독실(篤實)하기로는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와 같은 사람이 있었고, 정밀하고 상세하기로는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공은 이들과 뜻이 같고 도가 맞아, 항상 강론하면서 서로 권면하기를 일삼았다. 혹 견해에 서로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또한 반복해서 논변(論辨)하여 하나로 귀결되게 함에, 울연(蔚然)히 건순(乾淳)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선생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먼저 본원(本源)을 함양하였으며, 특히 성찰(省察)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리하여 학문(學問)과 사변(思辨)에 있어서 독실하게 하고 시청(視聽)과 언동(言動)에 있어서 부지런히 하면서, 순박하고 진실한 바탕 위에서 순서 있게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다. 정밀한 의리와 요약된 경지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고 광대한 근원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런즉 크게는 천지와 음양의 운행을, 세밀하게는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의 모든 사물을, 멀리는 고금의 치란(治亂)과 인사(人事)의 변천을, 가까이로는 성정(性情)의 은미함과 일상 생활의 동정(動靜)과 어묵(語默) 등에 이르기까지,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의 소이연(所以然)의 이치와 소당연(所當然)의 법칙이 만 갈래이면서도 근본은 하나인 것을 두루 보고 하나로 관통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은 책이란 책은 읽지 않는 책이 없었으나, 전공한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의 책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절요(節要)》에 조예가 깊어, 평생토록 수용(受用)한 것이 이 책 안에서 나와 발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가 주서(朱書)를 읽어서 참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활연히 그 안에 다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주자어류》의 전편(全編) 중에서 학문을 하는 데에 절실한 것을 뽑아 모아서 8책으로 만들고는《어류절요(語類節要)》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이 책은 주자 문하의 《논어(論語)》로, 《주서절요》와 더불어 표리(表裏)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선생은 특히 일상 생활을 하는 중의 행사에 힘을 기울였는바, 심잠(心箴), 구잠(口箴), 이잠(耳箴), 목잠(目箴), 수잠(手箴), 족잠(足箴)의 육잠(六箴)과 조명(朝銘), 주명(晝銘), 모명(暮銘), 야명(夜銘)의 사명(四銘)을 지어 벽에 새겨 놓았다. 그리고 또 ‘경직의방(敬直義方)’이란 네 글자를 새겨 자리의 오른쪽에 붙여 놓았다. 선생이 병이 심해짐에 미쳐서는 모시고 있던 자로 하여금 그것을 찾아다가 침상 곁에 놓아 두게 하였으니, 평소에 어떻게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집안에서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자제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로써 이끌었다. 동생들이 이미 분가(分家)하였는데도 매번 있고 없는 것을 물어서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었으며, 친척과 인근 마을 사람들 가운데 혹시라도 곤궁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이 닿는 대로 도와 주었다.
생활이 검소하고 소박하였으며, 항상 절검(節儉)하기를 힘썼다. 몇 마지기 되는 돌밭에서 나는 소출이 적었으나, 제사 지내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궁핍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수입을 따져서 지출하였기 때문이다.
10대의 선영이 영장산(靈長山)의 남쪽에 있는데, 선생이 처음으로 제전(祭田)을 마련해 두고 선영 아래에 청사(廳事)를 건립하여 봄가을로 청(廳)에서 제사 지냈고, 10월 상일(上日)에 조위(祧位)에 합사(合祀)하였다. 또 선영 곁에 있는 후손이 없는 신위(神位)에 대해서도 전(奠)을 베풀었으며, 제사가 끝난 뒤에는 청 앞에서 나이 순서에 따라 앉아 음복하였는데, 드디어 이것을 정식 의례로 삼았다.
다른 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규범이 있어서 젊은 사람과 어른에 따라서 각각 마땅하게 하였다. 이에 향리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면서 흠모하였으며, 한 번이라도 선생의 예의범절을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복(敬服)하는 마음을 가졌다.
처음으로 덕사(德社)의 동약(洞約)을 결성하여 남전여씨(藍田呂氏)의 고사(古事)를 준행하였고, 이택재(麗澤齋)를 건립하여 시골의 학생들을 모은 다음 학약(學約)을 만들어 《소학(小學)》을 강(講)하였으며, 해마다 향사례(鄕射禮)와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이에 겨우 몇 년이 지나자 향리의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였다.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오로지 의(義)에 입각하여 처신하였는바, 의에 있어서 편안한 바에는 아무리 소관 말직이라 하더라도 개의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학자라고 이름하는 자들은 반드시 제수하는 명에 응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고상하다고 하면서 한 관직을 사양하여 한 직질(職秩)이 올라가는데, 이는 겉으로는 염퇴(恬退)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빨리 진출하려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아무리 하찮고 낮은 관직이라 하더라도 오직 직분을 다할 뿐이다.”
하였다.
관직에 거함에 미쳐서는 구차스럽게 용납되려고 하지 않아 문득 몸을 거두어 속히 물러났다. 조정에 벼슬한 것은 내직(內職)으로는 양대 조정의 계방직(桂坊職)이고, 외임으로는 호서(湖西)의 고을 수령을 한 차례 지내었으며, 그 나머지 관직은 한가한 관서의 산직(散職)을 역임하는 데 그쳤다. 이에 참으로 평소에 배운 바를 다 써먹을 수 없었으니, 도는 행해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멀리 떠나려는 생각을 가져 마치 이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의 일념(一念)만은 항상 마음 속에 간절하였는바, 등용되고 등용되지 못함에 따라 달리 마음먹지 않았다.
근세에 들어와 학술이 점차 쇠미해진 탓에, 선비들이 가까이로는 훈고학(訓詁學)에 빠져들어 귀로 듣고 입으로만 말하고, 멀리로는 새롭고 기이한 데로 흘러들어가 도(道)와 경(經)을 어겼다. 그리하여 진실되게 실천하여 우리 유도(儒道)의 영역으로 나아가기에는 이미 모두가 부족하였다. 더욱 아래로 내려옴에 이르러서는 하나는 문장학(文章學)이라 하고 하나는 공리학(功利學)이라 하였는데, 이들 학문은 이미, 말은 애당초부터 이치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는 애당초부터 일에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이치를 추구(推究)하지 않은 탓에 도(道)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그런데다 또 계속해서 이단(異端)의 학문이 일어났다.
선생은 항상 이러한 세상에 유도를 지켜나가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 이에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는 몸소 실행하고 마음 속에 얻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고 선유들의 학설을 따르면서 지키는 것을 법문(法門)으로 삼았으며,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차이 속에서 의리(義利)를 판별하고 천양지차의 간격 속에서 심적(心跡)을 판별하였다. 이단의 학설이 진리를 어지럽힐 경우에는 역시 발본색원하여 반드시 바른 도리로 돌려 놓은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이는 대개 걱정하는 것이 깊고 염려하는 것이 멀었던 것이다.
평상시에 말하면서는 반드시 이르기를,
“공자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도리는 《논어》 한 책에 갖추어져 있어서 하학(下學)의 공부를 하는 데 실로 의지할 바가 있다. 비록 명민하였던 자공(子貢)으로서도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공자로부터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하학의 실지 공부를 하찮게 여기면서 한갓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설(說)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언행을 가만히 살펴보면 학문하는 자의 모양새가 아니니, 이는 갈보들이 예(禮)에 대해 떠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성호 선생이 일찍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학문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꼭 선배들의 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자, 선생이 일어나서 답하기를,
“나이 젊은 후생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의지와 사려도 확고하지 못한 처지에서, 약간의 소견이 있다 해서 곧바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면서, ‘옛 사람들도 몰랐던 것이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습성이 점차 자라난다면 이는 경박하고 부화(浮華)한 기상만 더해 줄 뿐, 덕을 쌓아가는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성호 선생이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신진배(新進輩)들의 병통을 치료하는 약이 될 만한 말이다.”
하였다.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지어 퇴계(退溪) 이자(李子)의 이발기발론(理發氣發論)을 드러내어 밝히면서 ‘사단(四端)은 도심(道心)이고 칠정(七情)은 인심(人心)’이라고 하여 주자가 마음으로 전한 요결(要訣)을 얻었는데, 후인들이 그 뜻을 모르고서 이론을 제기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 뒤에 둔와(遯窩) 신후담(愼後聃) 공이 말하기를,
“‘기가 따른다.[氣隨]’는 곳에서의 기는 마음에 속하고, ‘기가 발한다.[氣發]’는 곳에서의 기는 형기(形氣)에 속한다. 공정한 이(理)에서 나오는 칠정은 도심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는데,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의 중발(重跋)을 지어 이를 기록하였다. 이에 소남 윤동규가 온 힘을 다해 이를 변석(辨釋)하자, 성호 선생이 다시 중발을 삭제하였다. 그 뒤에 정산 이병휴가 다시 신후담의 설을 주장하면서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만약 희노(喜怒)가 바름을 얻은 것을 일러 ‘이발(理發)’이라고 한다면, 사단이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일러 ‘기발(氣發)’이라고 할 것입니까. 성인(聖人)의 희노는 발함에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이고, 군자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맞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 일반 사람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안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맞고 안 맞고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이 형기(形氣)에서 발하는 것임은 차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일종의 어떤 의론(議論)이 명 나라 말기의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주장하면서 “경(敬)은 선(禪) 쪽으로 흘러들기가 쉽고 격치(格致)는 구이지학(口耳之學)으로 빠져들기가 쉽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창언(倡言)하여 배격하기를,
“정자(程子)의 경(敬)에 힘을 쏟아 마음을 집중해서 잡념을 버리되 고요한 데 치우치지 않게 하고, 주자(朱子)의 격치(格致)에 공을 쏟아 함께 닦아 덕에 나아가서 입으로만 외우는 데로 흘러들지 않게 하면, 여기에서 지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문하(門下)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가지고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의심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 때 후배들 가운데서 정자와 주자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은 반드시 그들을 경계시키면서 말하기를,
“정자와 주자는 후세의 성인이다. 만약 이 분들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나간다면,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아무런 꺼림이 없는 소인(小人)으로 될 것이다.”
하였다. 매번 학자들을 대할 적마다 문득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를 가지고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은 군자이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소인이다. 한 번이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을 가진다면, 숭상하는 것은 언론의 독실함과 외모의 장엄함일 것이며, 일삼는 것은 자신에게 아첨하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일 터이니, 마침내는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꾀하는 사사로움에서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니 만약 밝게 보고 굳건하게 서서 이 한 길을 지나쳐 버리지 못하면 반걸음의 차이에서 아주 간특한 자로 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옛날에 이미 허둔옹(許遯翁)이 그 폐단에 대해서 깊이 말하였다.”
하였다. 또 과거(科擧)의 폐단에 대해서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성주(成周)의 향거이선제(鄕擧里選制)가 변하여 진사시(進士試)의 제도가 시행되면서 선비들이 모두 실제의 행실을 돌아보지 않은 채 오로지 문사(文詞)만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글을 보내어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면서 유사(有司)에게 자신을 써 주기를 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얻은 사람은 대부분 홍도(鴻都)에서 자신을 팔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어서, 마침내 사습(士習)이 거짓스럽게 되고 인재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오래도록 인물다운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하였다. 또 속학(俗學)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천하의 의리는 하나에 근본하는데, 후세에는 시대를 따라서 각각 다르게 되었다. 이에 한 자[尺]를 구부려서 여덟 자를 펴고 특이한 짓을 하면서 요행수를 구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호광(胡廣)의 중용(中庸)으로, 성문(聖門)의 참되고 바른 의리가 아니다. 지금 천주학의 폐해는 노씨(老氏)나 불씨(佛氏)보다도 더 심하고, 속학의 폐해는 천주학보다도 더 심하다.”
하였다. 이에 앞서서 서양의 서적이 연경(燕京)으로부터 우리 나라로 마구 들어와 정도(正道)를 해칠 조짐이 크게 있었다. 이에 선생은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지어 본말(本末)을 궁구하고 시비(是非)를 판별하여 분명하게 이를 막았다. 이에 선생을 따라 배우던 자들이 왕왕 선생을 등지고 떠나가서 인심이 더욱더 무너지고 비방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선생은 더욱더 엄하게 이들을 물리쳤는데, 미워하는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더 밝게 변석하였으나, 지나치게 과격하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도가(道家)에서 노군(老君)을 존경하는 것이나, 석씨들이 석가(釋迦)를 존경하는 것이나, 서양 사람들이 예수[耶蘇]를 존경하는 것이나, 그 뜻은 다 한 가지이다. 서학(西學)은 뒤에 나왔으면서도 도가나 석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무상(無上)의 천주(天主)를 내세워 제가(諸家)들로 하여금 아무 소리도 못하게 하니, 그 계책이 교묘하다.
우리 유가(儒家)에서 말하기로는, 상제(上帝)가 내려주신 성품과 하늘이 명하신 성품은 모두 하늘에서 품부받은 것이다. 《시경》에 ‘상제가 네 곁에 계시니[上帝臨汝]’라고 하였고, 또 ‘상제를 대한 듯이 하라.[對越上帝]’고 하였고, 또 ‘천명을 두려워하라.[畏天命]’고 하였는바, 이 모두는 계구(戒懼)와 근독(謹獨)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고, 상제를 높이 떠받드는 도가 아닌 것이 없다. 서양 사람들이 상제를 자기들의 사주(私主)로 생각하여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지은 죄를 용서받기를 구하는데, 이것은 불가(佛家)에서 참회(懺悔)하는 일과 뭐가 다른가.
유가의 성인(聖人)은 괴이한 일과 귀신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바,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경우 그 말류의 폐단은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환망(幻妄)의 영역으로 몰아넣으면서 인심을 선동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에는 이른바 연사(蓮社)와 같은 무리들이나 미륵불(彌勒佛)을 사칭하는 자들이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으로, 못된 짓을 창안한 죄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당의(黨議)가 분열되어서 피차간에 서로 틈을 엿보고 있으니,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상대편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울 경우, 아마도 천당의 즐거움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이 세상의 화가 먼저 이를까 염려된다.”
하였다. 그 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몇 달이 채 못 되어 금지령이 제정되고 이언(異言)을 하는 자들이 처단 되었으며, 그 뒤에 사옥(邪獄)이 계속해서 일어나 천주학을 하는 무리들이 차례차례 형장으로 나아가니, 이때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선생의 문하에는 원근에서 종유하는 자들이 번갈아 와서 학문에 대해 물으면서 수업하였는데, 선생은 반드시 순서에 따라서 인도하여 도와 주고 부드러운 얼굴로 대하면서, 재기(材器)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각자 얻는 바가 있게 하였는데, 긴절하게 사람을 위해 주어 도의(道義)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문인(門人) 황덕일(黃德壹)이 수업하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퇴계(退溪)를 배우라.”
하면서, 인하여 《이자수어(李子粹語)》를 가르쳐 주면서 말하기를,
“공자·맹자의 말은 국가의 법령(法令)과 같고, 정자·주자의 말은 엄한 스승의 훈계와 같고, 퇴계의 말은 인자한 아버지의 훈계와 같다. 그러니 사람들을 감발(感發)시키는 것은 이 책이 더욱 절실한바, 나는 받은 바가 있다.”
하였다. 신해년 봄에 나 황덕길이 가형(家兄)을 따라서 중강(中江)에서 와서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선생이 막 《대학》을 보고 있던 참이어서 책상 위에 《대학》이 펼쳐져 있었다. 인하여 《대학》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첫머리의 ‘명명덕(明明德)’이 바로 책을 펴는 첫째 의리이다. 종전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 확연하게 알지 못한 점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매번 한 차례 볼 적마다 문득 마음으로 이해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언어로 능히 깨우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자기 자신이 묵묵히 이해하여 체인(體認)해야 한다. 옛날에 정자가 매번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겼던 점에 대해 말하면서도 역시 말하기만 하면서 틔어 주지 않았던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당시에 선생은 나이가 이미 늙었는데도 도를 믿음이 더욱 독실하여 공부하고 가르치는 데 싫증을 내지 않으면서 햇수가 부족한 것도 몰랐으니,참으로 후세의 요부(堯夫 소옹(邵雍)의 자임)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선생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선생의 저술 가운데 《하학지남(下學指南)》은 선생이 평생토록 공부하는 문로(門路)였고, 《내범(內範)》은 규중에서 행한 것이었고, 《희현록(希賢錄)》은 천고의 옛 사람들과 벗한 것이었고, 《가례집해(家禮集解)》는 예학(禮學)의 기반이었고, 《동사강목(東史綱目)》은 필삭(筆削)의 뜻을 붙인 자양(紫陽) 주 부자(朱夫子)의 유법(遺法)이었다.
《시명물고(詩名物攷)》, 《홍범연의(洪範演義)》, 《잡괘설(雜卦說)》, 《소학강의(小學講義)》, 《사감(史鑑)》, 《열조통기(列朝通紀)》, 《임관정요(臨官政要)》, 《광주지(廣州志)》, 《목주지(木州誌)》 및 몇 권의 문집(文集)에 이르러서는 논술(論述)한 것이 의리(義理)에 뿌리를 박고 경사(經史)를 경위(經緯)로 삼았는바, 여유롭고 매끈하여 자세하면서도 널리 통하여 모두가 후학(後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아,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어진이의 교화를 입어 울연히 문헌(文獻)의 나라가 되었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 이래로 문학(文學)과 경술(經術)에 있어서 왕왕 칭할 만한 자가 있었으나, 연원(淵源)의 바름과 체용(體用)의 온전함을 논해 볼 것 같으면 유학(儒學)의 책임을 맡아 밝게 드러낸 자는 대개 드물다. 오직 우리 퇴계 부자(退溪夫子)만이 저멀리 고정(考亭 주자(朱子)의 호임)의 계통을 이어받았고, 성호 선생만이 직접 퇴계의 학맥에 접해 있어서 도학(道學)의 전함에 근원이 있다. 선생은 절차탁마함에 있어서 이미 성호 선생을 이었고, 모범으로 삼아 따름이 오직 퇴계에게 있었으니,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하였던 바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정도(正道)를 보위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면서 선성(先聖)의 법을 밝혀 인도하여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이적(夷狄)이나 금수의 지경으로 빠져들지 않게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예전에 양명학(陽明學)의 학설이 행해짐에 퇴계가 그 난적(亂賊)을 물리쳤고, 태서(泰西)의 서적이 들어옴에 성호 선생이 먼저 그 요망함을 배척하였는데, 그 전통이 계속 전해져서 선생에게 이르러 더욱 밝아졌으니, 그 도(道)는 하나인 것이다. 퇴계의 도는 선생을 기다려서 전해지고 성호의 학문은 선생을 얻어서 드러났으니, 선생의 성대한 덕과 큰 업적은 여러 유자(儒者)들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는 학생(學生) 성순(成純)의 딸이다. 시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일찍이 남편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선생이 계방(桂坊)에 천거되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리 집은 선비 집안이라 관직의 영광스러움을 모르니, 힘써 농사지어서 아침저녁 끼니나 마련하면 그만입니다.”
하였다. 선생보다 14년 먼저 죽었는데, 선생의 묘와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안경증(安景曾)은 진사(進士)로 문행(文行)이 있어서 사람들이 선생에게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 칭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딸은 권일신(權日身)에게 시집갔다.
안경증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 안철중(安喆重)과 안필중(安弼重)이고, 딸은 남영(南泳), 이기성(李基誠), 권명, 한치건(韓致健)에게 시집갔다.
안철중은 5녀를 두었는데, 박은회(朴殷會), 이정태(李庭泰), 이규채(李圭采)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안필중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권일신은 3남을 두었는데, 권상학(權相學), 권상명(權相命), 권상문(權相問)이며, 1녀는 어리다.
선생이 후학(後學)들을 버리고 떠나신 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 아직 선생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없었다.
안철중은 나 황덕길이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기간이 오래라고 여겨 나로 하여금 선생의 행장을 짓게 하였다. 나 황덕길은 선생에 대해서 3대토록 통가(通家)의 친교가 있었는바, 나의 선친과는 도의(道義)로 서로 사귀었다. 나 역시 가형(家兄)을 따라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기를 20년 동안이나 하였는데, 몹시 어리석은 탓에 식견은 얕고 언사는 졸렬하여 그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며, 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삼가 듣건대, ‘지향(指向)할 바를 모르면 누가 그것이 공(功)이 되는 줄을 알겠으며, 이를 바를 알지 못하면 누가 그것이 명언(名言)이라는 것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는 군자임을 알아보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적은 법이다. 그러므로 포 좌승(蒲左丞)은 명경(名卿)이었는데도 지문(誌文)을 지으면서 누추하게 하는 잘못을 범하였고, 여거인(呂居仁)은 현사(賢士)였는데도 전(傳)을 지으면서 비근한 일을 어긋나게 서술하였다.
그러나 위료옹(魏了翁)은 그 당시 안자와 나란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다행히도 책심문(責沈文)을 지어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더구나 이런 사람들보다 한 등급 아래인 사람은 참으로 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인즉, 어찌 문장을 짓는 것에 대해서 더불어 논할 수가 있겠는가.
선생께서 일찍이 나 황덕길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평소에 강론하거나 들은 것을 고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모습이 이미 아득해져서 은미한 말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선생의 심학(心學)이 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후세의 설자(說者)들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참모습을 잃게 되었다.
나 황덕길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불민(不敏)한바, 감히 도학(道學)을 지닌 선생을 잘 형용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에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감히 이것저것 주워 모아서 차례대로 서술하였다. 그러면서 오직 사실을 기록하도록 힘써서 장차 후일에 덕을 알아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이를 근거삼아 재단하기를 기다린다.
문인 회산(檜山) 황덕길(黃德吉)은 삼가 행장을 짓는다.

[주D-001]삼포(三浦)의 왜노(倭奴) : 삼포는 세종 때 일본 사람들의 왕래를 허락한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중종 5년(1510)에 삼포에 거류(居留)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중종의 통제책(統制策)에 불만을 품고 대마도의 종정성(宗貞盛)과 연합하여 난을 일으켰다.
[주D-002]호성공신(扈聖功臣) :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하는 데 호종한 사람들에게 내린 훈호(勳號)이다.
[주D-003]원우(元祐)의 완인(完人) : 당론(黨論)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절조를 잘 지킨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우(元祐)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로, 이 당시에 당론이 아주 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파(舊派)와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의 신파(新派)가 심하게 대립하였다.
[주D-004]기삼백(朞三百) :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기삼백육순유육일(朞三百六旬有六日)’을 가리키는 것으로, 1년의 날수는 3백 66일이라는 학설을 말한다.
[주D-005]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하게 한다. : 《주역》 비괘(賁卦)의 단사(彖辭)에 나온다.
[주D-006]방역소(防役所) : 방역(防役)은 백성들에게 부역 대신 돈이나 곡식을 내게 하는 것이다. 《우서(于書)》 논전정(論田政)에, “혹자는 말하기를, ‘수령들이 성심으로 백성들을 위한다면 윗 관사에 보고하여 재결(災結)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인바, 이것을 가지고 혹 급재(給災)하거나, 민역 대신 받아들이거나[防民役], 공용(公用)에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모두를 사용(私用)이라고 지목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내가 답하기를, ‘윗 관사에 보고하고서 재결을 얻는 것은 세력 있는 수령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 방역(防役)에 대한 설은 더더욱 무식한 말로, 백성들은 임금의 땅을 부쳐 먹으면서 나라의 부역에 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고을 수령이 대신 방역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주D-007]성호 선생(星湖先生)……강론한다 : 이 때 이익이 경기 안산(安山)의 성촌(星村)에서 제자들을 모아 강론하였다. 이자(李子)는 이황(李滉)을 말함.
[주D-008]건순(乾淳)의 유풍(遺風) : 학문이 성하게 일어나 학자들 간에 서로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건순은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인 건도(乾道)와 순희(淳熙)로, 이 때 주희(朱熹), 장식(張栻), 여조겸(呂祖謙) 등의 학자가 활동하면서 서로 간에 학문을 논하였다.
[주D-009]남전여씨(藍田呂氏)의 고사(古事) : 향약(鄕約)을 말한다. 송(宋) 나라 때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규범은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계하고, 예속(禮俗)으로 서로 사귀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한다는 등 네 조항이었다. 이것이 후대에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六 善行》
[주D-010]《사칠신편(四七新編)》 : 이익(李瀷)이 지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해설서이다. 1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이황의 설을 더욱 명료하게 해석하였다.
[주D-011]구이지학(口耳之學) :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는 천박한 학문으로,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알릴 뿐 조금도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는 학문을 말한다.
[주D-012]향거이선제(鄕擧里選制) : 중국 고대에 인재를 선발하던 방식의 하나로, 향리(鄕里)에서 하는 행실을 보고서 추천하는 방식이다.
[주D-013]홍도(鴻都) : 한 나라 때의 문 이름으로 그 안에 학교(學校)를 두고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천하의 재사(才士)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주D-014]호광(胡廣)의 중용(中庸) :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적당히 대처하기만 하면서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말한다. 호광은 후한 사람으로, 자(字)가 백시(伯始)이다. 《후한서(後漢書)》 호광전(胡廣傳)에, “호광은 성품이 온순하고 부지런하였고, 말과 안색을 항상 공손히 하였으며, 일의 체모를 잘 알고 조장(朝章)에 밝았다. 비록 굳세고 강직한 풍모는 없었으나 여러 차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이에 경사(京師)의 속담에 ‘만사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백시에게 물으니, 천하의 중용이 호광에게 있다.’는 말이 있었다.”하였다.
[주D-015]연사(蓮社) : 백련사(白蓮社)를 말한다. 원(元) 나라 때 한산동(韓山童) 부자가 백련회(白蓮會)라는 것을 창설하여 민간에게 포교하다 관가에 잡혀 피살되었으며, 그 뒤 명(明) 나라 천계(天啓) 연간에 왕삼(王森)이란 자가 도당을 모아 백련교라고 칭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다 피살되었는데, 그의 잔당인 서홍유(徐鴻儒)가 산동(山東)에서 모반하다가 피살되었다. 그 후 백련교의 잔당들이 중국 각지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조정을 괴롭혔다.
[주D-016]태서(泰西) : 극서(極西)의 뜻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칭함.
[주D-017]포 좌승(蒲左丞) : 포종맹(蒲宗孟)을 가리킨다. 포종맹은 송(宋) 나라 신정(新井) 사람으로 자(字)가 전정(傳正)이며, 소식(蘇軾)과 친교(親交)가 있었다.
[주D-018]위료옹(魏了翁)은……책심문(責沈文) : 위료옹(魏了翁)은 진영중(陳塋中)의 잘못인 듯하다. 안자와 나란한 사람은 백순(伯淳)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책심문(責沈文)은 현자(賢者)를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을 적은 글이다. 《서언고사(書言故事)》에 “진영중(陳塋中)이 원풍(元豊) 연간에 예부 점검관(禮部點檢官)이 되어 범순부(范醇夫)와 더불어 같은 집에 있었는데, 순부가 ‘안자(顔子)처럼 불천불이(不遷不貳)한 사람으로는 백순(伯淳)이 있다.’고 하니, 진영중이 백순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순부가 ‘백순이 누구인지 정말 모르는가?’ 하고 묻자, 진영중이 사실 알지 못한다고 사과하였다. 그 뒤로부터 진영중은 항상 이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책심문을 지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