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3.12.24. 도봉산 산행

2014.1 .5 소백산 비로봉

아베베1 2014. 1. 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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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小白山) 유람기


내가 젊어서부터 영주[榮川]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하였으니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바라보이고 발만 떼면 갈 수 있었는데도 조급하게 허둥대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고 마음으로만 달려간 것이 이제 40년이 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인부(印符)를 차고 풍기에 부임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주인이 되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워하며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백운동에 갔다가 그때마다 산문(山門)도 엿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4월 신유일에 며칠째 내리던 비가 막 개니 산빛이 목욕한 것 같았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유생들을 만나 보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이튿날 드디어 산에 들어갔는데, 진사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나섰다.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 속은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때로 물이 돌 위로 흐르며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걸어서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니, 초암은 원적봉(圓寂峰)의 동쪽 월명봉(月明峰)의 서쪽에 있는데, 양쪽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암자 앞을 감싸며 산문이 되었다. 암자 서쪽에는 바위가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데 그 아래로 맑고 급한 물결이 빙 돌아서 웅덩이가 되고 바위 위는 평평하여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주경유(周景遊)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어 이 이름이 혼동되니 백(白)을 청(靑)이라 고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졌다.
산인(山人) 종수(宗粹)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묘봉암(妙峰庵)에서 이곳으로 찾아왔기에, 인하여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술 두어 순배를 돌렸다.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하였는데, 나는 비록 허약하고 병들기는 하였지만 기어이 올라가 보고 싶었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견여(肩輿)가 아니면 안 되니, 전에 주 태수(周太守)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웃고 승낙하였더니, 잠시 후에 견여가 마련되었다고 알려왔는데, 모양이 간단하고 쓰기에 편하였다. 드디어 서경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갔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승려들이 혹은 앞에서 인도하고 혹은 뒤를 따랐다. 태봉(胎峯) 서쪽에 이르러 시내 하나를 건너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걷다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면 견여를 탔으니, 번갈아 가며 그 힘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산을 나올 때까지 대체로 이 방책을 썼는데,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기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 본 바를 기록하였다. 이날은 철암(哲庵)과 명경암(明鏡庵)을 거쳐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는데, 철암이 가장 소쇄(蕭灑)하였다. 맑은 샘물이 암자 뒤의 바위 밑에서 솟아 동서로 갈라져 흘렀는데 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며, 시야가 꽤 높게 트였다. 석륜사 북쪽에는 바위가 매우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푸드득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옛 이름이 봉두암(鳳頭岩)이다. 그 서쪽에 우뚝 선 바위가 있어서 사닥다리를 놓아야 오를 수 있는데, 경유가 광풍대(光風臺)라고 부른 것이다. 절 안에는 돌을 조각하여 불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승려들이 영험하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튿날인 계해일에 걸어서 중백운암(中白雲庵)에 올랐다. 이름은 잊었는데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짓고 그 안에서 좌선(坐禪)을 하여 선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지금은 승려가 없다 한다. 창 앞에는 묵은 우물이 완연하며, 뜰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할 뿐이었다. 중백운암을 지난 뒤로 길이 더욱 가파르게 깎아질러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수직으로 올라가, 있는 힘을 다하여 더위잡고 기어오른 뒤에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견여를 타고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 남짓 가니 석름봉(石廩峰)이 나왔다. 봉우리 꼭대기에 초막을 지어 놓았고 그 앞에 시렁을 매놓고 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 고되게 여겨졌다. 석름봉 동쪽 몇 리 되는 거리에 자개봉(紫蓋峰)이 있고, 또 그 동쪽 몇 리에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국망봉(國望峰)이다. 만일 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용문산(龍門山)으로부터 서울까지 바라볼 수가 있는데, 이날은 산 안개와 바다의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서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사이로 월악산(月嶽山)이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동쪽을 돌아보면 구름과 산이 천 겹 만 겹 첩첩으로 쌓여서 어렴풋이 상상만 되고 진면목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 태백산(太白山)ㆍ청량산(淸凉山)ㆍ문수산(文殊山)ㆍ봉황산(鳳凰山)이고, 남쪽으로 보였다 숨었다 하며 구름 속에 아스라한 것이 학가산(鶴駕山)ㆍ팔공산(八公山) 등 여러 산이며, 북쪽으로 형상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하늘 한쪽에 아득히 보이는 것이 오대산(五臺山)ㆍ치악산(雉岳山) 등 여러 산이었다. 바라보이는 물은 더욱 적어서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과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의 굽이 정도일 뿐이었다. 종수가 말하기를, “이 산에 올라 조망하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가 좋고 혹은 오랜 비가 새롭게 갠 날이 좋은데, 주 태수도 비에 닷새 동안 막혀 있다가 개자마자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가만히 그 뜻을 이해하였으니, 처음엔 답답하게 막혔던 자가 필경 쾌함을 얻는 것인데, 내가 와서는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떻게 만리의 쾌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매우 고랭(高冷)하여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나무가 자라면서 모두 동쪽으로 기울고 가지와 줄기가 굽어 있고 왜소하였다. 4월 그믐께라야 잎이 피기 시작하고 1년 동안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불과하며, 앙상하게 시달려 모두 애써 싸운 모양을 하고 있으니, 깊은 숲과 큰 골짝에서 자라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이, 식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ㆍ자개ㆍ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병풍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章)을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꽃 숲을 지나 내려와서 중백운암에 이르렀다. 내가 종수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제월대(霽月臺)에 오르지 않은 것은 다릿심이 먼저 빠질까 염려해서였는데, 지금 산에 올라 구경하고도 다행히 남은 힘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종수를 시켜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벼랑을 따라 발을 옆으로 디디면서 올라갔다. 이른바 상백운암(上白雲庵)이란 것은 불에 탄 지가 오래되어 풀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었으며, 제월대가 바로 그 앞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찔하고 떨려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려와서 이날 저녁에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갑자일에 나는 용기를 내여 상가타암(上伽陁庵)을 찾아 올라가 지팡이를 짚고 돌길을 더위잡아 환희봉(懽喜峰)에 올랐다. 환희봉 서쪽의 여러 봉우리들은 숲과 골짝이 더욱 아름다우니 모두 어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십 보를 지나서 석성(石城)의 옛터를 찾았는데, 성안에는 주춧돌과 폐기된 우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석봉(石峯)이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데도 소나무ㆍ삼나무ㆍ철쭉이 우거져 뒤덮고 있어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산중 사람들은 단지 모양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산대바위[山臺巖]라고 불렀다. 내가 사람들을 시켜 가린 것을 찍어 내도록 하고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데가 안 보이는 것이 없어서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주경유를 만나지 못하여 전날의 속된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고치지 않을 수 없어 자하대(紫霞臺)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그 성을 적성(赤城)이라 불렀으니, “적성에 노을이 일어나 이름을 붙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하대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ㆍ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색은 하얗고 달리 이름이 없어, 내가 감히 동쪽 것은 백학봉(白鶴峰)이라 이름하고 서쪽 것은 백련봉(白蓮峰)이라 이름하여, 이른바 백설봉(白雪峰)과 함께 모두 백(白)으로 일컬었다. 이렇게 백(白) 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은 이유는 그 실상을 들어서 소백(小白)이란 이름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또 깊은 숲을 뚫고 높은 산을 넘어 굽어보다가 구름과 물과 바위와 골짝이 더욱 절승한 곳을 찾아냈으니, 곧 상가타암(上伽陁庵)이었다. 그 동쪽은 동가타암(東伽陁庵)이 있는데, 종수가 말하기를, “희선 장로(希善長老)가 처음으로 여기에 살았고, 그 뒤에 보조 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하여 9년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습니다. 시집(詩集)이 있는데 제가 일찍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빌려 갔습니다.” 하며, 몇 구절을 외우는데 모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오곡(五穀)이 익지 못한 탄식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서북쪽의 금강대(金剛臺)와 화엄대(華嚴臺)는 옛 이름을 그대로 두었는데, 고승(高僧)의 자취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동쪽의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석봉(石峯)을 연좌(宴坐)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고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가타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고목(古木)과 푸른 등나무가 얽혀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으며, 가끔 수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중가타(中伽陁)의 어귀에 왔는데 중가타에는 승려가 없어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을 옮기니 몇 층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그 옆에 암석들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옛날에는 고죽(苦竹)이 뭉쳐났으나 지금은 다 말라 죽었는데 아직도 뿌리와 줄기가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암폭포(竹巖瀑布)라고 이름 지었다.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이 바위에만 대가 난 것이 아니라 숲 아래 땅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나서 온 산이 모두 그러했는데, 지난 신축년에 갑자기 일제히 열매가 열리더니 그해에 다 말라 죽었습니다.”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 길을 걸어 작은 시내를 건너니 금당암(金堂庵)과 하가타암에 이르렀다. 중가타암 위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암 옆에는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 모두 승려가 앓고 있다 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하가타를 따라 내려와 시내를 건너서 곧장 관음굴(觀音窟)로 올라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인 을축일에 산에서 내려오니, 산 밑에 반석이 평평하고 맑은 물이 그 위로 쏟아져 쟁쟁히 울리며 흘러가고 양편에는 목련화가 만개하였다. 나는 그 옆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서 양치질도 하고 장난도 하여 마음이 매우 유쾌하였다. 승려 종수가 “시냇물은 옥대(玉帶) 찬 손님 비웃으리니, 홍진의 자취 씻으려 해도 씻지 못하네.[溪流應笑玉腰客 欲洗未洗紅塵蹤]”라는 시구를 읊고는,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입니까?” 하였다. 마침내 서로 쳐다보고 한 번 웃고는 시를 짓고 떠났다. 시내를 따라 몇 리를 가는데 모두 구름과 숲과 벼랑과 골짝이 절경이었다. 길이 갈리는 곳에 이르러 잠깐 쉰 뒤에, 응기와 종수와 여러 승려들은 초암동(草庵洞)으로 향하고, 나는 박달재[博逹峴]로 길을 잡아 갔다. 작은 박달재에 이르러 견여에서 내려 걸어가노라니 인마(人馬)가 그 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시내를 건너 깊은 골짝을 빠져나와 큰 박달재를 넘으니, 곧 상원봉(上元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조금 야트막한 곳이었다. 거기서 상원사까지는 겨우 몇 리밖에 안 되지만 오를 힘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내려와 비로전(毗盧殿) 옛터 밑에 이르러 한낮에 시냇가 돌 위에서 쉬었다. 얼마 후 허공 간(許公簡)과 아들 준(寯)이 고을에서 찾아왔다. 맑은 샘과 무성한 나무가 사랑스러워 한동안 앉아서 얘기하고는 그 앉았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윽고 욱금동(郁錦洞)을 거쳐 나와서 고을에 이르렀다. 대저 소백산에는 수많은 바위와 수많은 골짝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데, 사찰이 있는 곳과 인적이 통하는 곳은 대개 세 골짜기가 있다. 초암과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짝에 있고, 성혈사(聖穴寺)와 두타사(頭陀寺) 등은 동쪽 골짝에 있고, 세 가타암은 서쪽 꼴짝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것은 길이 편해서인데, 얼마 지나 피곤하고 흥이 식으면 그만 돌아오고 만다. 비록 주경유처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유람한 곳은 그중 한 골짝에 그치고 마니,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매우 자세하게 기술했지만 실상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광풍대ㆍ제월대ㆍ백설대ㆍ백운대가 모두 가운데 골짝에만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쇠약하고 병든 내가 한 번 가서 온 산의 경치를 다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결국 동쪽은 남겨 두어 다음날에 유람하기로 하고 오직 서쪽 골짝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짝에서 얻은 백학봉ㆍ백련봉ㆍ자하대ㆍ연좌봉ㆍ죽암폭포 같은 절경을 마음대로 이름 지으며 사양하지 않은 것은 역시 주경유가 가운데 골짝에서 만난 절경에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有司)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었는데, 석륜사에 와 보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나는 그 시와 글의 웅장하고 빼어남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펴서 읊으니, 마치 홍안 백발의 늙은이와 함께 서로 얘기하고 수창(酬唱)하는 것 같아서, 이 때문에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록이 없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이 또 있으니, 문사로서 주경유(周景遊)보다 먼저 와서 유람한 자로 산인(山人)들이 일컫는 바로는 오직 호음(湖陰) 정 선생(鄭先生)과 태수 임제광(林霽光)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기술한 것을 찾아보면 임 태수는 일언반구도 찾을 것이 없고, 호음의 시는 겨우 초암사에서 읊은 절구 한 수가 보일 뿐이다. 또 그 밖의 것을 찾아보면 석륜사의 승려가 황금계(黃錦溪)의 시를 가지고 있고, 명경암 벽에 황우수(黃愚叟)의 시가 있을 뿐이며, 더 이상은 보이는 것이 없다. 아, 영남은 곧 사대부에게 기북(冀北)같은 지역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에 큰학자와 선비들이 잇달아 나와서 찬란하였으니, 이 산에 와서 유람한 사람이 고금을 통하여 얼마나 많았겠으며, 기술하여 전할 만한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竹溪)의 여러 안씨(安氏)들은 이 산 밑에서 정기(精氣)를 타고 나서 이름이 중원(中原)에까지 떨쳤으니, 틀림없이 이 산에서 노닐고 이 산에서 즐기고 이 산에서 읊고 노래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에는 벼랑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들이 입으로 외는 것도 없어서, 자취가 없어 찾을 수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고아함을 좋아하지 않고, 일을 좋아하여 전술(傳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명성을 드높이 세운 여러 안씨들과 큰 산으로 유명한 이 지역의 이 산처럼 빼어난 곳에 대해서도 마침내 전할 만한 문헌이 이와 같이 없으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산 언덕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천년 동안 참다운 은자(隱者)가 없으니, 참다운 은자가 없으면 참다운 감상(鑑賞)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어귀를 거니는 우리 같은 무리야 어찌 이 산에 가치를 실어주겠는가. 우선 본 것을 차례로 펴서 지은 것을 기록하노니, 뒤에 보는 자가 이 글에 대한 느낌이 또한 나의 주경유에 대한 느낌과 같을 것인가.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叟)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


 

[주D-001]주경유(周景遊) : 경유는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의 자이다.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주D-002]축융(祝融) : 남방의 화신(火神)으로, 붉은 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축융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적성에 …… 붙였다 : 진(晉)나라 손흥공(孫興公)이 지은 〈천태산부(天台山賦)〉에 있는 말인데, 천태산에 적성(赤城)이 있다.
[주D-004]오곡(五穀)이 …… 탄식 : 《맹자》 〈고자 상(吿子上)〉에 “오곡은 좋은 종자이지만 익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 하였으니,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이단이나 잡기를 배워 성공함만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5]호음(湖陰) : 정사룡(鄭士龍 : 1491~1570)의 호이다.
[주D-006]황금계(黃錦溪) : 퇴계의 문인 황준량(黃俊良 : 1517~1563)으로, 호가 금계이다.
[주D-007]기북(冀北) : 옛날 중국 기주(冀州)의 북부로 지금의 하북성을 말하는데,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학자가 많이 난 곳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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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 백악(白岳) -혹은 북악(北岳)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한성부(漢城府)의 경내에 있다. 본조(本朝) 초에 조선국의 왕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국성(國城)의 북쪽에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왕성에 웅거해 있으면서 북악산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향해 있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에는 백악이 있다.
○ 용두봉(龍頭峯) -혹은 용산(龍山)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조선국의 한강 동쪽에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이르면 한강 가에서 잔치를 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배를 띄워 용두봉에 올라가 강산의 승경(勝景)을 두루 구경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각산은 경도(京都)의 진산(鎭山)으로, 남쪽으로 문수봉(文殊峯)에 이르러 백악(白嶽), 응봉(鷹峯), 인왕산(仁王山)이 되는데, 왕궁(王宮)이 거기에 있다. 낙산(酪山)이 그 왼쪽에 솟아 있고, 무악(毋岳)이 그 오른쪽에 걸터 있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서 공읍(拱揖)하고 있고, 한강이 그 남쪽을 흐르니, 이곳은 참으로 만대토록 영원할 크나큰 터전이고 하늘이 만들어 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이다. 백악은 혹 북악(北岳)이라고도 하는데, 도성 안 정북쪽에 있다. 목멱산은 바로 동월(董越)의 《조선부》에서 말한 남산이다. 용두봉은 바로 잠두봉(蠶頭峯)으로, 혹 용산이라고도 하며, 양화도의 동쪽 강 언덕에 있다.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 마천령(磨天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천령은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으며, 조선에서는 동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천령은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
○ 극적혼산(克敵昏山)
《금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연골사호(烏延鶻沙虎)는 갈라로(曷懶路) 극적혼산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 북쪽 지역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영강산(永岡山)ㆍ올평산(兀平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영강산은 함흥 주변에 있다. 또 올평산이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을리골령(乙離骨嶺)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철령(鐵嶺) -안변부(安邊府)의 남쪽에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소백산(小白山) -바로 백두산의 남쪽 봉우리로 압록강이 발원하는 곳이다-ㆍ충천령(沖天嶺) -삼수부(三水府)의 서쪽에 있다-ㆍ증산(甑山) -단천부(端川府)의 서쪽에 있다-ㆍ회산(檜山) -이원현(利原縣)의 서쪽에 있다-ㆍ성대산(聖代山) -북청부(北靑府)의 북쪽에 있다-ㆍ입원산(立元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도안산(道安山) -정평부(定平府)의 남쪽에 있다-ㆍ비백산(鼻白山) -정평부의 북쪽에 있다-ㆍ우선산(遇仙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박산(大博山) -영흥부(永興府)의 서쪽에 있다-ㆍ반룡산(盤龍山) -문천군(文川郡)의 서남쪽에 있다-ㆍ검화산(劍華山) -바로 검봉산(劍峯山)의 잘못된 표기로, 안변부(安邊府)의 서남쪽에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백산 이하는 압록강조(鴨綠江條)에 나오고, 증산은 두만강조(豆滿江條)에 나오고, 회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온다.
○ 적유령(狄踰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삭주(朔州)의 서북쪽에 적유령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적유령은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에 있다.
○ 소철산(小鐵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철산은 압록강의 동쪽 강 언덕, 의주(義州)의 경내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곳이다. 또 서남쪽은 요동 경내의 승복도(僧福島)와 피도(皮島)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철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용골산(龍骨山) -어떤 데에는 용호산(龍虎山)으로 되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골산은 용주성(龍州城)의 동쪽에 있다. 용주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동녕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군(龍川郡)이며, 용골산은 용천군의 동쪽에 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호산은 용천군의 진산(鎭山)이다.
○ 웅골산(熊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골산은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웅골산은 철산군의 동쪽에 있다.
○ 장화산(長花山)ㆍ천성산(天聖山)ㆍ영산(靈山)ㆍ향산(香山)ㆍ웅화산(熊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산은 철주(鐵州)의 서남쪽에 있다. 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철주는 지금의 철산군이며, 장화산은 철산군의 서남쪽에 있다.- 천성산은 은주(殷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며, 천성산은 은주현의 동북쪽에 있다.- 영산은 선주(宣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주는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며, 영산은 선천부의 동남쪽에 있다.- 향산은 연주(延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며, 향산은 영변부의 동쪽에 있는데, 어떤 데에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웅화산은 곽주(郭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곽주는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곽산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을 웅화산에 해당시키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상의 주(州)는 모두 동녕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성산은 은주의 동북쪽에 있고, 영산은 선주의 서남쪽에 있고, 웅화산은 곽주군의 동북쪽에 있다. 또 육령산(育靈山)이 선주군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가 살펴보건대, 육령산은 영산(靈山)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한 것인 듯하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천군(龍川郡) 성의 동쪽에 있다.
○ 굴암산(屈巖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굴암산은 정원부(定遠府) 성의 동쪽에 있는데, 바위 골짜기가 구불구불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부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여지승람》에는 굴암산(窟菴山)으로 되어 있는데, 굴암산은 구성부의 동쪽에 있다.
○ 천마산(天馬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마산은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는 마산(馬山)으로 되어 있다. 천마산은 옛 정주의 북쪽에 있다.
○ 능한산(凌漢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산군 성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능한산은 곽산군의 동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 서쪽 강 언덕에 능한산이 있다.
○ 봉두산(鳳頭山)ㆍ가산령(嘉山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두산은 바로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산령이 가장 높은데, 그 꼭대기에는 ‘효성(曉星)’이라고 하고 ‘망해(望海)’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모두 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두산은 가산군 북쪽에 있다. 가산령이 《여지승람》에는 서문령(西門嶺)으로 되어 있는데,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산령은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가산군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한 것이다.
○ 마두산(馬頭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寧州)의 동쪽에 있다. 영주는 동녕로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며, 마두산은 안주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의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역시 마두산이 있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과 《대명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은 바로 한 산이다. 영주는 영주(寧州)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천보산(天寶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에 있는데, 산에는 사리(舍利)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보산은 영유현(永柔縣)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서쪽 경계에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장수를 파견해 천보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마읍산(馬邑山)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마읍산이 평양부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노양산(魯陽山) -혹은 용산(龍山),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ㆍ금수산(錦繡山)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는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고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금수산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池]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수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평양의 진산(鎭山)이다.
○ 위산(葦山)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위산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산은 평양부의 서남쪽에 있다.
○ 모란봉(牧丹峯)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계사년(1593)에 대군(大軍)이 평양성에 다가가자 왜적들이 모란대(牡丹臺)를 지키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모란봉은 금수산에 있다.
○ 토산(兔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묘(箕子墓)는 평양성 서북쪽 모퉁이의 토산에 있는데, 평양성과의 거리가 반 리도 채 안 되며, 산세가 몹시 높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 건복산(乾伏山)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적과 통하게 하였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평양의 건복산 기슭에서 만났다.
○ 관문산(觀門山)ㆍ화산(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土山縣)의 북쪽에 있다. 토산현은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여지승람》에는 관음산(觀音山)으로 되어 있다. 관문산은 상원군의 북쪽에 있다.-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화산은 상원군의 동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의 북쪽에 있고,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는데, 모두 토산현 경계의 큰 산이다.
○ 금당산(金堂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黃州) 삼화현(三和縣)의 서북쪽에 있다. 황주는 동녕로에 속하며,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다섯 현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당산은 삼화부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 삼화현의 서북쪽에 있다. 지(志)에 이르기를, “삼화는 황주에서 서남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정방산(政方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방산은 황주의 경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산은 황주의 남쪽에 있다.
○ 자비령(慈悲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송나라 순희(淳煕) 2년(1175)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자비령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조위총이 복주(伏誅)되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西京) 이하 60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동녕로를 설치하고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서흥부(瑞興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평양에서 경도(京都)로 통하는 옛길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강역고(高麗疆域考)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명 파령(巴嶺)이라고도 한다. 《중주집(中州集)》을 보면, 왕적(王寂)의 ‘송장중모사삼한시(送張仲謀使三韓詩)’에 이르기를, “압강에선 도엽이 아침에 건너는 걸 맞이하고, 파령에선 송화로 밤중에 탕 끓이리라.[鴨江桃葉朝迎渡 巴嶺松花夜煮湯]” 하였는바, 중국 사람들도 파령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에서 평안도 지역이 특별히 상세하여, 매번 이르기를, “주(州)는 동녕로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원나라 때 절령(岊嶺) 북쪽 지역이 동녕로에 속하여 산천의 이름이 원나라의 판도(版圖)에 실려 있으므로 《대명일통지》를 찬수하는 자가 상세하게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개막산(蓋幕山) -삭주(朔州)의 북쪽에 있다-ㆍ수양산(首陽山) -해주(海州)의 동쪽에 있다-ㆍ구금산(駒芩山) -황주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ㆍ악산(嶽山) -바로 약산(藥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변부의 서쪽에 있다-ㆍ이산(耳山) -영변부의 북쪽에 있다-ㆍ백벽산(白碧山) -운산군(雲山郡)의 서쪽에 있다-ㆍ태조산(太祖山) -안주(安州)의 동쪽에 있다-ㆍ대목산(大木山)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로, 강동현(江東縣)의 북쪽에 있다-ㆍ무학산(舞鶴山) -강서현(江西縣)의 북쪽에 있다-ㆍ부석산(傅石山)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로, 송화현(松禾縣)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막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오고, 악산 이하는 청천강조(淸川江條)에 나오고, 백벽산은 대령강조(大寧江條)에 나오고, 태조산 이하는 대동강조(大東江條)에 나온다.
○ 성불령(成佛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불령은 북쪽으로는 산을 베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개는 평산부(平山府)의 서쪽에 있다.
○ 총수산(蔥秀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수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해 있는데, 삐쭉 솟아 있어서 빼어나게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산(聰秀山)인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일찍이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총수산은 평산부의 북쪽에 있다.
○ 노고달령(奴古達嶺)
《요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북도(北道)를 경유해 진격하여 노고달령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패주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을 보면, “소배압이 북도를 경유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의 고개에 이르러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하였는바, 노고달령이 개성의 서쪽에 있음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송악(松嶽) -혹은 숭산(崧山)이나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해 있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는 송산(松山)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악은 개성부의 북쪽에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숭산은 개성부에 있는데, 일명 숭악(嵩岳)이라고도 한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웠다.
○ 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天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거(聖居), 송악(松嶽), 천마(天磨)는 모두 산 이름이다. 송악은 바로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성거산과 천마산은 동북쪽에서 뻗어나왔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하늘에 꽂힌 듯이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봉우리는 마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운데 한 봉우리는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낮아서 마치 시자(侍者)의 모습과 같다. 산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보기에 매우 좋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거산과 천마산은 모두 송악의 북쪽에 있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흥동(大興洞)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木蓮花)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 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오봉봉(五鳳峯)
《무몽원집(無夢園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지(志)를 보면, 오봉봉은 개성부에 있는데, 봉 아래에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다.
○ 오관산(五冠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오관산은 경기 장단부(長湍府)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마치 관(冠)과 같이 둥글게 모여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역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평산령(平山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산령은 개성부에서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흙 빛깔이 모두 붉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도봉산(道峯山)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원(淸源) 아래 제9대인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봉산은 양주(楊州)의 남쪽에 있다.
○ 금강산(金剛山)
《화엄경(華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더불어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한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은 조선의 강원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그 이름이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로부터 동방에 금강산이 있어 법희보살(法喜菩薩)이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로 인하여 금강산이라고 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 안에 있다. 일백 곳에서 흘러나와 날리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져 내려 그 형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만폭동이라고 한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산봉우리가 있어 오인봉(五人峯)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이 하나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탓에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칡넝쿨을 부여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가운데가 방아 절구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관음보살이 빨래를 한 곳이다.”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면 빠른 여울물이 돌에 엉키면서 벼랑에 부딪치는데, 물방울이 눈처럼 휘날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구슬을 뿜고 눈을 흩날리면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은 12층이고, 작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만폭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아래의 못을 주연(珠淵)이라고 한다. 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귀담(龜潭)이라고 부른다. 또 한 못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화룡담(火龍潭)이라고 한다. 그 위에 봉우리가 있는데,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만폭동 안에 보덕굴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쇠 기둥을 바깥쪽에 세운 다음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다가 만들고는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하였다. 관음각을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손으로 만질 수 없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세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포구산(浦口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포구산은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동쪽으로 9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포(高城浦)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계단과 같이 층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 같은데, 돌의 빛깔은 모두 희어서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한계산(寒溪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계산은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 산 위에는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바로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수백 척이나 떨어져 내려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며, 계곡의 물은 이리저리로 흘러서 무려 36번이나 건너야만 한다. 나무들은 마치 갈대자리를 말아 세운 듯이 위로 하늘에 솟았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하며,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으며, 반석이 평평하여 둘러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으며, 가느다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는데, 바위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고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있다. 이에 마치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다. 층층다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서 으뜸이다.
○ 분려산(分黎山)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는 분려산이 있다. 분려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이다. 분려산은 한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니, 금강산이 아니면 바로 오대산(五臺山)이다.
○ 오대산(五臺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의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나온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릉(江陵)은 옛 명주(溟州)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三韓)에는 12동천(洞天)이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동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산은 강릉부의 서쪽에 있다.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산(單單大山)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가 통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함경도 검산(劍山)의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철령, 금강산, 오대산에 이르기까지가 대관령인데,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는바, 바로 단대령이다.” 하였다.
○ 황룡산(黃龍山) -흡곡현(歙谷縣)의 서쪽에 있다-ㆍ추지령(秋池嶺) -바로 추지령(楸池嶺)의 잘못된 표기로, 통천군(通川郡)의 서쪽에 있다-ㆍ두사산(頭蛇山) -바로 두타산(頭陀山)의 잘못된 표기로, 양구현(楊口縣)의 북쪽에 있다-ㆍ장산(張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오갑산(五甲山)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김화현(金化縣)의 북쪽에 있다-ㆍ공작산(孔雀山) -홍천현(洪川縣)의 동쪽에 있다-ㆍ치악산(雉岳山)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다-ㆍ우두산(牛頭山)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ㆍ관악산(冠岳山) -과천현(果川縣)의 서쪽에 있다-ㆍ수리산(修理山) -안산군(安山郡)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산 이하의 산들은 해조(海條)에 나오고, 오갑산 이하의 산들은 한강조(漢江條)에 나온다.
○ 임존산(任存山)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서부(西部)의 임존산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임야기산(任射岐山)으로 되어 있다.
○ 부용산(富用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용창산(富用倉山)은 바로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이다. 그 산은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으며, 산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 둔 곡식이 많은데, 변경(邊境)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쓰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것이므로 부용(富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홍주산(洪州山)ㆍ동원산(東源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루어져 있다. 또 동쪽에는 금이 산출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 위에는 못[潭]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충주(忠州)의 서쪽 경계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홍주가 이 산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조금 동쪽에 동원산이 있는데, 금이 산출된다.” 하였다.
○ 소석산(小石山)
《후위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긴 뱀처럼 흉악한 것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석산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 월악산(月嶽山)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충주를 도륙하자, 사람들이 월악사(月嶽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월악산은 충주의 동쪽에 있다.
○ 속리산(俗離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리산은 충청도 보국현(報國縣) -삼가 살펴보건대, 보은현(報恩縣)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 있다. 산봉우리 아홉 개가 뾰족하게 솟아 있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고 일컬었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꼭대기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층이 쌓인 돌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공중에 높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며, 그 너비는 사람 3000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문장대 위에는 가마솥만 한 구덩이가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는다. 이 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서 허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팔교(八橋)와 구요(九遙)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 끝인 듯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보면 또다시 멀고 멀다. 이렇게 아홉 번을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구요라고 한 것이다. 구요 속에는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져서 흐르는데, 한 굽이마다 하나의 다리가 있어, 도합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교라고 한다. 첫 번째 다리는 수정교(水精橋)로,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그 각 속으로 다닌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갈령(葛嶺) -마땅히 부여현(扶餘縣)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백제 성읍조(百濟城邑條)에 나온다.
○ 차현산(車見山) -바로 차현(車峴)의 잘못된 표기로, 공주(公州)의 북쪽에 있다-ㆍ가야산(加耶山) -해미현(海美縣) 북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조(海條)에 나온다.
○ 조령(鳥嶺) -주흘산(主屹山)을 덧붙인다.
《광여기(廣輿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충주에 있는데,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다.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경주(慶州)의 서북쪽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尙州)의 경계에 접해 있다.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는데,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관목(灌木)이 우거져 있어서 말을 타고 줄지어서 갈 수가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남도(南道)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21년(1593)에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버리고 도망치자, 별장(別將) 유정(劉綎)이 상주에서 왜적들을 추격해 조령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험고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별장 사대수(査大受)가 충주에서 괴산감(槐山監)으로 넘어가 조령의 뒤편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책을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서쪽으로 27리 되는 곳에 있다. 주흘산은 문경현 북쪽에 있으면서 문경현의 진산(鎭山)인데, 조령과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명시종(明詩綜)》을 보면, 조선 사람인 이효칙(李孝則)의 조령(鳥嶺) 시가 실려 있는바, 그 시에 이르기를,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秋風黃葉落紛紛 主屹山高半沒雲]”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령(竹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령은 충주의 동쪽에 있는데, 구부러진 길이 빙빙 돌아서 자못 험준하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왕경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달아났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노음산(露陰山)
《정지거시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운흘(趙云仡)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음산은 상주의 서쪽에 있다.
○ 빙산(氷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빙산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동남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빙산의 큰 바위아래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폭이 4척 8촌, 가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아래에서 곧장 밑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한 길이며, 길이는 겨우 한 길까지만 잴 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구부러져서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부터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굳게 얼다가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도산(島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산은 울산군(蔚山郡) 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마귀(麻貴) 등이 울산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자, 왜적들이 모두 도산으로 달아나 산 앞에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세우고 버티면서 지켰다. 도산은 울산성보다 높은 데다가 왜적들이 또 그 위에 새로 석성(石城)을 쌓아 몹시 견고하였다. 이에 중국 군사들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는 패해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산은 울산부(蔚山府)의 남쪽에 있다.
○ 백석산(白石山)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ㆍ청량산(淸涼山) -영양현의 서쪽에 있다-ㆍ모자산(母子山) -영천현(永川縣)의 북쪽에 있다-ㆍ파음산(巴音山)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로, 상주(尙州)의 서쪽에 있다-ㆍ적암산(赤巖山)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로, 무주부(茂州府)의 동쪽에 있다-ㆍ화악산(華岳山) -밀양부(密陽府)의 북쪽에 있다-ㆍ금오산(金鼇山) -경주(慶州)의 남쪽에 있다-ㆍ윤산(輪山) -동래부(東萊府)의 북쪽에 있다-ㆍ웅산(熊山) -웅천현(熊川縣)의 북쪽에 있다-ㆍ무계산(武溪山)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동강조(洛東江條)에 나온다.
○ 지리산(智異山) -혹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두시전주(杜詩箋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지(志)를 보면, 지리산은 남원부(南原府)에서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진(女眞)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산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른다.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 시(詩)의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에 대한 주석과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에 있는데, 바로 남원의 남쪽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글과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두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다.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줄로 통해 있다. 몸을 구부리고 올라가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사방이 모두 기름진 옥토(沃土)라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 구정봉(九井峯)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석(動石)은 월출산(月出山) 구정봉 아래에 있다. 세 개의 돌이 층암(層巖) 위에 튀어나와 있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꼭대기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그 무게는 비록 수백 명을 동원해도 움직일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석(靈石)이라고 칭하며, 군(郡)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구정봉은 영암현(靈巖縣) 월출산에 있다.
○ 황산(黃山)
《유서찬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충청도는 옛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황산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은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의 서쪽에 있는바, 충청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모악산(母岳山) -태인현(泰仁縣) 동쪽에 있다-ㆍ무목산(無木山)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로, 광주(光州)의 동쪽에 있다-ㆍ송경산(松京山)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로, 순천부(順天府)의 서쪽에 있다-ㆍ천관산(天冠山) -장흥부(長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용잠산(龍岑山)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로, 담양부(潭陽府)의 서쪽에 있다-ㆍ추월산(秋月山) -담양부의 서쪽에 있다-ㆍ한라산(漢拏山)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악산은 금강조(錦江條)에 나오고, 무목산 이하의 산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 서산(瑞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탐라(耽羅)의 바다 속 남쪽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땅이 뒤흔들려서 우레가 치는 듯하였는데, 7일 밤낮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갰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둘레는 40여 리이다.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석유황(石硫黃) 같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전공지가 그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산은 정의현(旌義縣)에 있다.

이상은 경내에 있는 산(山)이다.

○ 장자도(獐子島)
《초학집(初學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적(敵)이 조선을 약탈하여 황해도(黃海道)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욱(周文郁)이 수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장자도(獐子島)에 신인(神人)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뭇등걸을 타고 바다에 떠 있게 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장자도는 지금의 신도(薪島)로, 용천부(龍川府)의 남쪽에 있다.
○ 석도(蓆島)ㆍ초도(椒島)ㆍ가도(椵島) -혹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東寧路)의 선주(宣州)는 석도진(蓆島鎭)을 관할한다. ○ 맹주(孟州)는 초도진(椒島鎭)과 가도진(椵島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도는 바로 석도(席島)인 듯한데, 은율현(殷栗縣) 서쪽에 있다. 초도는 풍천부(豐川府) 서쪽에 있고, 가도는 철산부(鐵山府) 남쪽에 있다.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1년(1621)에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을 구원하러 갔다가 피도에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피도는 또한 동강(東江)이라고도 하는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둘레가 80리이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 해안에서 바닷길로 80리를 가면 바로 청(淸)나라 경계이며, 그 동북쪽 바다 너머는 바로 조선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피도는 바로 가도이다.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진한 눈썹과 같으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새가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礁石)이 많을 뿐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도와 소청도는 모두 장연현(長淵縣)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도는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명 대청서라고도 한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그의 형의 아들인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고려로 내쫓고서는 그로 하여금 대청도에 살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다. 대청도와 가까운 곳에 또 소청서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대청도 안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궐 터가 있어 부서진 기왓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청요(靑瑤)이다.
○ 몽금도(夢金島) -장연현(長淵縣)의 서쪽에 있다-ㆍ정족도(鼎足島) -초도(椒島) 근처에 있다-ㆍ사야구미(沙也九味) -대청도 근처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백령도(白翎島) -대청도 서쪽에 있다-ㆍ교동도(喬桐島) -강화부(江華府)의 서쪽에 있다-ㆍ각화도(覺華島) -바로 강화도이다-ㆍ연자도(硯子島)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부도(大富島)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합굴(蛤窟)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그 산이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주민들도 많이 산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가면서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다.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급수문(急水門)과 비교해 볼 때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굴은 마땅히 예성강(禮成江)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개성부(開城府) 남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사는 백성들도 매우 많다. 산등성이에는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바다를 오가는 자들은 모두 제사 지낸다.
○ 자연도(紫燕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연도는 바로 광주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館舍)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쓰여 있다. 주민들이 사는 초가집도 많이 있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연도는 인천부(仁川府)의 서쪽에 있다.
○ 마전도(麻田島)ㆍ고사도(古寺島) -이들 두 섬은 마땅히 초도(椒島)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ㆍ득물도(得勿島) -어떤 데에는 덕물도(德勿島)로 되어 있으며,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 및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구두산(九頭山)ㆍ당인도(唐人島)ㆍ쌍녀초(雙女礁)ㆍ화상도(和尙島)ㆍ우심서(牛心嶼)ㆍ계심서(鷄心嶼)ㆍ섭공서(聶公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9일에 마도(馬島)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하여 맑고 윤기가 도는 것이 보기 좋았다. ○ 당인도(唐人島)는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며,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 쌍녀초는 그 산이 아주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이 없다. 앞에 있는 산은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는 않았다. 뒤에 있는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 출발해 이어 이 쌍녀초를 지나갔다. ○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다. 산속에는 호랑이가 많이 산다. 옛날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바로 그 유적(遺蹟)이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 섬을 화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 우심서는 작은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있어 그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牛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을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未時) 정각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몹시 뾰족한데 바짝 다가가서 보면 마치 담과 같다. 대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로 보는 것과 세로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화상도는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위에는 엽로사(葉老寺)가 있다. ○ 당인도는 청주(淸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구두산과 서로 가깝다. ○ 쌍녀초는 《고려도경》을 보면 섬과 같다고 하였는데, 순전히 돌로 이루어진 섬을 초(礁)라고 한다.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두산은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숲의 나무가 몹시 무성하게 자라 있다. ○ 우심서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또 계심서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를 보면, 고려의 당인도에서는 만화초(滿花草)가 산출된다고 하였는데,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당인도는 바로 이곳이다. 이제 《고려도경》의 해도일록(海道日錄)을 근거해 보면, 8일에 해미현(海美縣)의 마도(馬島)에서 출발해 북쪽을 향해 가 9일에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등 여러 섬을 지나고, 이날 인천부(仁川府)의 자연도에서 묵었다. 그런즉 이들 여러 섬은 모두 태안(泰安) 앞바다 북쪽에서 인천 앞바다 남쪽 지역에 있는 것이다.
○ 아자섬(鵶子苫)ㆍ마도(馬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자섬은 또한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마도는 대개 청주(淸州)의 경내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를 평상시에는 이곳에 방목(放牧)해서 기르므로 마도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고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도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나라 안의 방목지(放牧地)이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고 하였다. 알자섬과 가깝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알자섬은 청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도는 해미현의 서쪽에 있으며, 알자섬은 바로 태안군(泰安郡)의 갈도(葛島)이다. 《고려도경》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軋)이라고 한다.”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이르기를, “고려의 방언에 삿갓을 개(蓋)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본주(本注)에 “개(蓋)의 음은 갈(渴)이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알(軋)과 갈(葛)은 같은 음임이 분명하다.
○ 용도(龍島) -태안군의 북쪽에 있다-ㆍ원산도(元山島)ㆍ오평도(烏平島) -이들 두 섬은 모두 태안군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군산도(羣山島)ㆍ횡서(橫嶼)ㆍ자운섬(紫雲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羣山島)는, 산의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러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 군산정(羣山亭)이 있으며,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주민들의 집은 10여 호가 있다. ○ 횡서(橫嶼)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한 산이 특히 크며,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돌 밑뿌리를 둘러 있다. 한 개의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며,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 횡서에서 묵었다. 일찍 출발하였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였는데, 그것을 자운섬(紫雲苫)이라고 하였다. 가로지른 봉우리가 들쭉날쭉 포개져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푸른빛이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산도는 만경현(萬頃縣)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고군산도(古羣山島)라고 한다. 횡서와 자운섬은 마땅히 군산도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는 전주(全州)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서 성(城)과 같다. 그 남쪽에는 횡서가 있는데, 역시 안섬이라고도 한다.
○ 궤섬(跪苫)ㆍ춘초섬(春草苫)ㆍ빈랑초(檳榔礁)ㆍ보살섬(菩薩苫)ㆍ죽도(竹島)ㆍ고섬섬(苦苫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궤섬(跪苫)은 백의도(白衣島)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춘초섬(春草苫)은 궤섬의 바깥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에는 모두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면 울창하다. ○ 빈랑초(檳榔礁)는 형태가 빈랑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직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가리켜서 뱃사람들이 빈랑초라고 한다. ○ 보살섬(菩薩苫)은 고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일찍이 기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 죽도(竹島)는,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였으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들 가운데에는 또한 장(長)이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다. ○ 고섬섬(苦苫苫)은 죽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산의 생김새가 비슷한데, 역시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마치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살섬, 자운섬, 고섬섬, 춘초섬, 궤섬은, 《고려도경》을 보면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섬들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빈랑서(檳榔嶼)는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를 보면,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과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耽羅國)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지금 해미(海美), 태안(泰安), 남포(藍浦), 흥덕(興德) 등지에서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한두 곳이 아닌바, 《고려도경》 및 《수서》에서 칭한 죽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고섬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의 위도(蝟島)이다. 그 밖의 다른 섬은 전라도 서해에 있는 섬들이다.
○ 월서(月嶼)ㆍ난산도(闌山島)ㆍ백의도(白衣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서(月嶼)는 둘인데, 흑산(黑山)에서의 거리가 아주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하는데,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작은 배가 그 사이로 통행할 수가 있다. ○ 난산도(闌山島)는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벽같이 우뚝 서 있으며,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암초는 마치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 백의도(白衣島)는 세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비스듬히 자란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보기가 좋다. 또한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의도와 난산도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대월서와 소월서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에서 말한 세 섬은 나주(羅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 흑산도(黑山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매우 가깝다. 처음에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한데, 바짝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속에다가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의 바닷길을 보면, 이곳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그 당시의 관사(館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을 바꿨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는다. 섬 위에는 주민들이 사는 부락이 있는데, 나라의 대죄인(大罪人)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항상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적마다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까지 전달하는데, 봉화를 올리는 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宋史)》를 보면,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타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다시 5일 만에 고려의 흑산에 도착한다.” 하였고, 《원사》를 보면, “지원(至元) 5년(1268)에 일본의 정벌을 의논하면서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명하여 흑산도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였다. 이 섬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해도(海道)의 요충지로써, 고려에서는 흑산현(黑山縣)을 두었으며, 뒤에 나주에 속하였다. 나주에서의 거리가 뱃길로 900리이며, 둘레가 35리이다.
○ 백산(白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도(排島)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한 산이 보이는데, 아주 큰 것이 마치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으며, 햇빛이 쬐는 곳은 마치 옥같이 희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과 흑산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은 전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바로 백수산(白水山)이다. 당나라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高侃)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을 백수산에서 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은 흑산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 백수산을 끌어다 대었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 구룡도(九龍島)ㆍ고금도(鼓金島)ㆍ가덕도(加德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에 진린(陳璘)이 해상을 전담하여 관할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부총병(副摠兵)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등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전함(戰艦) 수백 척을 모두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고금도(鼓金島) 등 여러 섬에 정박시켜 두었다. 충청도에 구룡도란 섬이 있는데, 수족(水族)들이 신령스럽고 괴이스럽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절수영(浙水營)의 중군(中軍) 방일신(方一新)이 절병(浙兵) 3000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서 고금도에 주둔해 있는 등자룡에게 가다가 9월 29일에 이 섬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총을 쏘아 수족들을 놀래키자, 태풍이 갑자기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樓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 한꺼번에 뒤집어져서 몰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금도는 바로 고금도(古今島)의 음이 변한 것으로, 고금도는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있다. 가덕도는 웅천현(熊川縣)의 남쪽에 있고, 구룡도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추자도(楸子島)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5년(1740)에 소전현(蕭田縣)의 백성이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조선국의 추자도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자도는 영암군(靈巖郡)의 남쪽에 있다.
○ 한산도(閒山島) -어떤 데에는 안산도(鴈山島)로 되어 있다-ㆍ칠산도(漆山島)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고 한산(閒山)을 침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군사가 궤멸되어 드디어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서해 입구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도는 고성군(固城郡) 남쪽에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총병(摠兵)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계금(季金)과 우승은(于承恩)에게 남병(南兵)을 거느리고서 조선의 수병(水兵)과 함께 장기(長鬐), 진도(珍島)를 경유해 안산도(鴈山島)에 이르러서 의병(疑兵)을 펼쳐 방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산도는 한산도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산도는 경주의 서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서해 입구이다. 오른쪽으로는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가 막고 있어서 전라도의 외번(外藩)이 된다. 이곳을 한번 잃으면 연해변에 방비가 없게 되어, 천진(天津)과 등주(登州), 내주(萊州)가 모두 돛을 한 번만 올리면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한산도와 가까운 곳에 또 칠산도(漆山島)가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경주에 들어오고 한산도를 침입하면서 밤중에 칠산도를 습격하였는데, 관군이 궤멸되어 달아나 마침내 한산도를 잃었다. 이에 왜적들이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해서 함락시켰다.
○ 죽도(竹島)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도는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부산에 배를 정박시키고는 죽도를 왕래하면서 점차 양산(梁山), 웅천(熊川)을 핍박하였다. 얼마 뒤에 양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도는 울산부의 남쪽에 있다.
○ 송도(松島)ㆍ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송도, 울산, 부산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우산도는 바로 왜적들이 이른바 송도(松島)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한 섬으로, 사방 100리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때 그 나라를 토벌하여 정복하였다. 지금의 울진현(蔚珍縣)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하였고, 《수도제강》을 보면, “울진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을 천산도(千山島)라고 하는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하였다. 천산도는 바로 우산도의 잘못된 표기이며, 완릉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봉래산(蓬萊山)은 그 높이가 2만 리인데, 울이국(鬱夷國)이 있다.” 하였고, 왕유(王維)의 ‘송일본조감서(送日本晁監序)’에, “부상(扶桑)은 냉이 같고 울도(鬱島)는 부평(浮萍) 같으리라.” 하였는데, 울이국이나 울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절영도(絶影島)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ㆍ국도(國島) -안변부(安邊府)의 동쪽에 있다-ㆍ저도(豬島)ㆍ웅도(熊島) -두 섬은 영흥부(永興府)의 동쪽에 있다-ㆍ묘도(卯島) -바로 난도(卵島)의 잘못된 표기로,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ㆍ신도(薪島)ㆍ연도(連島) -두 섬은 덕원군(德源郡)의 동쪽에 있다-ㆍ화도(花島) -함흥부(咸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사도(沙島)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이상은 도서(島嶼)이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리고(地理考) 14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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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4
산수(山水) 2 경내(境內)의 수(水)


○ 바다 -제수(諸水)의 총설(總說)을 덧붙인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朝鮮國) -지형은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전라도의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닿았으며,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등 여러 섬이 바다의 동남쪽에 널려 있으면서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마주 바라보고 있다.- 은 동쪽, 서쪽, 남쪽의 삼면이 모두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북은 길고 동서는 좁다. -북쪽으로는 동경(東經) 11도(度) 4분(分), 북위(北緯) 42도가 약간 못 되는 장백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동남쪽 모퉁이의 바다에 있는 대마도와 서남쪽 모퉁이의 바다에 있는 한라산(漢拏山)까지에 이르는데, 북위는 34도이다. 그러나 그 실제 지역은 바닷가에 있는 진해성(鎭海城)과 고성(固城)으로, 북위가 34도 4분인바, 거리가 7도 반으로 1870여 리이다. 서쪽으로는 동경 8도, 북위 40도인 압록강(鴨綠江) 해구(海口)로부터 동북쪽으로는 동경 14도 반, 북위 42도 반인 토문강(土門江) 입구에 이르는바, 거리가 6도 반으로, 1600여 리이다. 왕경(王京)에서 동쪽으로는 동경 12도 6분, 북위 37도 5분인 양양(襄陽)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동경 9도, 북위 37도 4분인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는바, 동서 간의 거리는 900리이며, 양쪽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오직 남쪽 경계만이 조금 넓은데, 그 동남쪽 모퉁이의 동경 13도 8분, 북위 35도 3분인 좌수성(左水城)에서부터 서남쪽 모퉁이의 동경 8도 6분, 북위 34도 7분인 무안성(務安城)까지는 거리가 1300여 리이다.- 토문강(土門江) 남쪽 둔치에서부터가 조선의 동북쪽 경계이다. -나라에서 동북쪽으로 가장 먼 곳은 경원부(慶源府)의 서북쪽에 있는, 동경은 13도를 넘어 14도에 가깝고, 북위는 42도 조금 넘는 온성(穩城) 및 미천진성(美踐鎭城)이고, 가장 동쪽에 있는 곳은 경원부 동남쪽에 있는 경흥성(慶興城) 및 이봉파(李鳳坡)로, 동경 14도 5분, 북위 42도 5분인 토문강 입구에 해당된다. 또 남쪽은 해안에 있는 서수락성(西水洛城)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미천진(美踐鎭)은 바로 미전진(美錢鎭)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북쪽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서 토문강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토문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바다는, 토문강 입구에서 이봉파(李鳳坡) 동쪽을 경유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면 서수락성(西水洛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수라성(西水羅城)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간 다음, 또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큰 산의 기슭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200리가량 가다가 꺾어져서 남쪽으로 굽이굽이 300여 리를 간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서 조금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간다. 여기에서 비로소 꺾어져서 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단천성(端川城)의 동쪽을 지난다. -동경 12도 6분, 북위 40도 7분이다. 서수락성에서 이곳까지는 바닷가에 성곽이 없고 큰 산이 많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다. 단천에 이르러서야 조금 넓어지는데, 그 동쪽의 바닷물은 맑고 깨끗하여 10여 길 아래까지 훤히 들여다보여 다른 곳의 바다와는 다르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하나의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한 물은 단천에서 서북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중간에 세 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합해져 동남쪽으로 200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단천부(端川府)의 남대천(南大川)으로, 근원은 원산(圓山)에서 나와 가덕천(加德川)과 합류하여 단천부의 치소 남쪽에 이르고, 또다시 서쪽에서 흘러온 복대천(福大川)과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다가 이성(利城)의 동쪽을 지나 -이성의 서쪽에 회산(檜山)과 성대산(聖代山)이 있다.-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북청성(北靑城) 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성대산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세 개의 물이 합해져서 동남쪽으로 2백 수십 리를 흘러 북청성 동북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강(洛江)으로, 근원이 성대산(聖代山)에서 나온다. 또 하나의 물이 회산에서 나오고 하나의 물은 성의산(聖義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북청부의 동쪽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홍원성(洪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홍원성(洪原城)으로 되어야 한다.- 동쪽의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요원수(要原水)로, 근원이 북청부의 중산(中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홍원현(洪原縣)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수구가 있는 앞바다에는 도서(島嶼)가 있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입원산(入元山)의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함흥성(咸興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이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정평현(定平縣)의 북쪽 경계를 지나며,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도안산(道安山)의 동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성천강(城川江)으로, 근원이 함흥부의 낙림산(樂林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에서 흘러온 원천(元川)과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영흥성(永興城) 동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근원이 두 개인데, 하나는 서북쪽으로 정평현 서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른다. 여기에서 양덕(陽德)의 우선산(遇仙山) 동쪽에서 흐르는 물이 서쪽에서 와서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영흥의 북동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용흥강(龍興江)으로, 근원이 영흥부의 철옹산(鐵瓮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면서 오른쪽으로는 운곡천(雲谷川)의 물을 합하고 왼쪽으로는 요덕천(耀德川)과 비류천(沸流川)의 물을 합한 다음, 영흥부의 북쪽을 경유해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우선산(遇仙山)은 어느 산인지 상세하지 않다.- 수구가 있는 앞바다에는 바로 화도(花島), 사도(沙島)가 있으며, 그 동쪽에는 웅도(熊島), 연도(連島)가 있고, 그 동남쪽에는 신도(薪島), 묘도(卯島), 저도(猪島), 국도(國島)가 있어서 원근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연도는 홍원의 동쪽에 있는데 가장 북쪽에 있으며, 묘도는 조금 큰데 가장 동쪽에 있으며, 국도는 가장 남쪽에 있다. 나머지 섬들은 모두 함흥이나 영흥과 가까운 바다에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묘도는 아마도 난도(卵島)의 글자가 잘못된 듯하다.- 바다는, 영흥의 동북쪽에 있는 수구에서 동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대박산(大博山) 북쪽의 평지(平地)를 지나고, -여기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이 바로 국도(國島)이다.-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고원성(高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고원성(高原城)으로 되어야 한다.- 동쪽을 지난다. -동경 12도 5분, 북위 39도이다.- 여기에서 또 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문천성(文川城) 동북쪽의 경계에 소수구가 있다. -물은 큰 근원이 두 개인데, 문천성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하나는 동남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동쪽으로 흘러 100여 리를 가다가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반룡산(盤龍山)과 문천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문천의 배기이천(配岐伊川)을 말한 것인 듯한데, 용흥강과 합류하는 물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간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덕원성(德源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안변성(安邊城) 동북쪽의 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으로 평강성(平康城) 동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검화산(劍華山) 남쪽, 황룡산(黃龍山) 북쪽을 지나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안변성의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변부의 남대천(南大川)이다. 그 근원이 평강(平康)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안변의 북쪽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흡곡성(歙谷城)과 통천성(通川城) 동쪽을 지나고, -남북 간의 거리가 모두 50리이다.- 조금 남쪽으로 가면 고성(高城) 동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추지령(秋池嶺)의 남쪽 기슭에서 나와 동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추지령은 추지령(楸池嶺)으로 되어야 한다.- ○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금성(金城)의 동쪽을 지나고, -금성의 서쪽은 바로 금성산(金城山)이며, 금성산의 서쪽은 바로 회양성(淮陽城)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회양부는 금성의 동쪽에 있는바, 여기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양양성(襄陽城)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두사산(頭蛇山)이 있는데, 수구가 있다. -두사산은 바로 금성산 남쪽에 있는 행간산(行幹山)이다. 그 서쪽은 바로 금강산(金岡山)이며, 또 그 남쪽은 장산(張山)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두사산은 두타산(頭陀山)으로 되어야 한다. 두타산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 소양강(昭陽江)에 합해지는바, 여기에서 양양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금강산은 마땅히 금강산(金剛山)으로 되어야 한다. 금강산은 두타산의 동쪽에 있는바, 여기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장산은 어느 산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강릉성(江陵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삼섭포(三涉浦) -삼가 살펴보건대, 삼척포(三陟浦)로 되어야 한다.- 의 동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울진성(蔚珍城)의 동쪽을 지나게 되는데, 그 동남쪽 바다 건너에는 천산도(千山島) -삼가 살펴보건대, 우산도(于山島)로 되어야 한다.- 가 있으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동경 130도, 북위 36도 8분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평해성(平海城) 동남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봉화성(奉化城)의 동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두 개의 근원이 합해져서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는 바로 천산도가 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영해성(寧海城) 동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예안성(禮安城) 동쪽의 백석산(白石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영덕성(盈德城) 동남쪽으로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진보현(眞寶縣) 동쪽의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영덕성의 남쪽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오포(烏浦)로 들어가는 영덕현의 오십천(五十川) 하류를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직보현(直寶縣)은 마땅히 진보현(眞寶縣)으로 되어야 한다.- 이곳의 남쪽 해안은 청하성(淸河城)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흥해성(興海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연일성(延日城)의 동남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남쪽에 있는 영천성(永川城) 동쪽의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보현산(普賢山)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연일성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연일의 남쪽 해안은 장로일성(長老日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장기성(長鬐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지역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좌병성(左兵城)의 동쪽 경계를 지나고,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태화강(太和江)이다. 태화강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가 있다. -바로 양산성(梁山城) 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오는 물로,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좌수성(左水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조선 경계의 동남쪽 끝모서리인데, 동경 14도가 약간 못 되고, 북위 35도 2분이 조금 넘는다.-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동남쪽 모서리가 끝나는 지역이 된다. -동경 14도가 조금 못 되고, 북위 34도 9분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3백 수십 리 되는 바다 건너편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는데, 큰 섬이다. -대마도의 모양새는 서북쪽으로부터 비스듬하게 굽었으며, 서남쪽은 뾰족하고 길면서 안으로 굽었다. 그 가운데에는 가지가 있어서 서쪽으로 꺾여 큰 칼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북쪽 뾰쪽한 곳부터 서남쪽 뾰족한 곳까지에는 긴 산이 죽 뻗어 있어서 마치 등뼈와도 같다. 길이가 300리가량 되고, 너비는 가운데는 100리이고 앞부분과 뒷부분은 수십 리이며, 뾰족한 곳은 10여 리이다. 동경 14도, 북위 33도 8분에서부터 동경 15도가 약간 못 되고, 북위 34도 4분까지 이른다. 대개 조선 동남쪽 해방(海防)의 요충지로, 서북쪽으로는 절영도(絶影島) 및 동래현(東萊縣)과 정면으로 마주해 있고, 서남쪽으로 김해(金海)의 동쪽에 있는 대수구(大水口)까지가 400리가량 된다.- 바다는, 좌수성의 동남쪽 지역에서 비로소 서쪽으로 꺾인다. 서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기장성(機長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바로 기장 서쪽 경계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동래성(東萊城)의 남쪽을 지나는데, 동래성의 남쪽에서 30리 되는 해안이 바로 부산이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절영도가 있다. -해안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대수구가 있다. -동경 13도, 북위 34도 6분이다.- 이것은 조선 동남쪽의 큰 하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동강(洛東江)으로, 낙동강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 바다는, 김해성 남쪽에서 서쪽으로 100리를 가면 웅천성(熊川城) 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십 리나 되는 큰 섬이 있는데, 가덕(加德)과 천성(天城)이라고 한다. -서로 간의 거리가 5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가덕과 천성은 바로 두 진의 이름으로, 모두 가덕도(加德島) 안에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창원성(昌原城) 남쪽 경계 및 우병성(右兵城) 남쪽을 지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섬이 있는데, 영등도(永登島)라고 한다. -섬은 길이가 70리이고 너비가 30리이다. 섬의 동쪽을 우수영(右水營)이라 하고 섬의 서북쪽을 거제(巨濟)라 하며, 섬의 남쪽은 지설포(知泄浦)이다. 역시 조선 남방(南防)의 요충지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거제도로, 영등(永登)은 바로 섬 안에 있는 진(鎭) 이름이다. 지설포는 지세포(知世浦)로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진해성(鎭海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사천(泗川)의 남쪽 경계에 있는 고성(固城)의 남쪽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곤양성(昆陽城) 남쪽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섬이 있다. -섬 주위를 돌자면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고, 다시 동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가며, 여기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간다. 한 뾰족한 부분은 북쪽 해안을 향하여 있고, 한 뾰족한 부분은 남쪽을 향하여 있다. 너비는 100리이고, 길이는 80리이며, 섬 가운데는 50리이다. 북쪽에 있는 것을 남해성(南海城)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진조항(珍助項)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것을 평산포(平山浦)라고 한다. 북쪽 해안까지의 거리가 3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하동성(河東城)까지의 거리가 5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큰 섬은 바로 남해부(南海府)로, 남해부는 섬 안에 있다. 진조항은 미조항(彌助項)으로 되어야 한다. 미조항 및 평산포는 모두 섬 안에 있는 진 이름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하동성(河東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두치강(豆恥江)으로, 두치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100리를 가면 좌수성의 남쪽에서 조금 서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북쪽에 있는 낙안성(樂安城)의 동북쪽 송경산(松京山) 기슭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송경산은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흥양성(興陽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가면 천관산(天冠山)의 수구가 있다. -천관산은 흥양성 서북쪽에 있는 낙안(樂安) 및 보성(寶城)의 남쪽에 있다. 물은 천관산의 서북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장흥성(長興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병성(兵城)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는 수십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양강(汭陽江)으로, 그 근원이 나주(羅州)의 쌍계산(雙溪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장흥부를 감싼 다음, 서쪽으로 흘러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병성(兵城) 및 강진성(康津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해남성(海南城)을 지난다. 또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하나의 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창평(昌平)의 동북쪽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광주(光州)의 남쪽 경계를 지나 무목산(無木山)의 북쪽에 이른다. 또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데, 서북쪽에 있는 정읍(井邑) 서쪽의 용잠산(龍岑山) 남쪽 언덕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무목산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和順) 남쪽과 능주(綾州)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영암(靈巖)의 북쪽을 지난다. 또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데, 능주의 남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우수성(右水城)의 서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는 넓어서 수십 리나 된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호강(沙湖江)이다. 사호강은 근원이 담양부(潭陽府)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황룡천(黃龍川)과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정읍의 서쪽에서 온다고 하는 물이다.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나주(羅州)의 치소(治所)를 감싼 다음,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영암의 북쪽에 이르러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덕진포(德津浦)의 물과 합류한다. 이것이 이른바 능주의 남쪽 산에서 온다고 하는 물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무목산은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이고, 용잠산은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곳 해구(海口)에서 서남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을 흑산도(黑山島)라고 하며, 그 남쪽에 있는 조금 큰 섬을 여도(㻌島) -삼가 살펴보건대, 진도(珍島)의 잘못된 표기이다.- 라고 한다. 또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먼 곳에 가장 큰 섬이 있는데, 제주도(濟州道)라고 한다. -흑산도는 해구의 서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남해성(南海城) 해안과의 거리가 100리이며, 북쪽으로 무안(務安)의 남쪽 해안과의 거리가 50리이다. 모양새가 거위알처럼 생겼는데, 가운데에 흑산(黑山)이 있으며, 둘레가 50여 리이다. ○ 진도는 흑산도에서 동남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해성 해안과의 거리가 90리이다. 모양새가 길면서도 네모지게 생겼다. 남쪽에 금이산(金伊山)이 있으며, 그 북쪽을 남도포(南桃浦)라고 한다. 둘레가 100리가량 된다. ○ 삼가 살펴보건대, 여도(㻌島)는 진도(珍島)로 되어야 한다. 금이산은 바로 금갑(金甲)의 글자가 잘못된 것으로, 이는 섬 안에 있는 진(鎭) 이름이다. ○ 제주도는 진도에서 동남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해성 해안과의 거리가 1백 수십 리이다. 모양새는 세모지게 생겼으며, 동서 간의 거리가 130리이고,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의 거리는 100여 리이고, 북쪽에서 서남쪽까지는 90여 리이다. 섬 가운데에 한라산(漢拏山)이 있으며, 북쪽을 제주(濟州)라 하고, 동남쪽을 정의(旌義)라 하고, 서쪽을 대정(大靜)이라 하는데, 조선의 서남쪽 바다를 방비하는 요충지이다. 동경은 4도 5분에서 9도 약간 못 미치는 데까지 이르고, 북위는 34도에서 34도 3분까지 이른다.- ○ 해구(海口)의 서쪽에는 무안성(務安城) 남쪽 경계인데, 조선 서남쪽의 모퉁이 지역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꺾어져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무안성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산기슭을 지나며,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남평성(南平城) -삼가 살펴보건대, 함평성(咸平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용잠산(龍岑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장성(長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는바, 본문이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무장성(茂長城)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조금 길게 꺾어져서 서쪽으로 간 다음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고창성(高敞城)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조금 굽어들면 부안성(扶安城) 서쪽 경계를 지나며, 조금 북쪽으로 가면 수구가 있는데, 바로 옥구성(沃溝城) 서남쪽 경계이다. -물은 근원이 두 개이다. 남쪽 근원의 물은 동남쪽에 있는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금구성(金溝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만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고부성(古阜城)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만전성(萬塡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부안(扶安)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만난다. ○ 북쪽 근원의 물은 추월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성(金堤城)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임피(臨陂) 남쪽과 만전성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남쪽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의 길이는 300여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남쪽 근원의 물은 바로 동진강(東津江)으로, 근원이 정읍현(井邑縣)의 내장산(內藏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에 이르러서 태극포천(太極浦川)의 물과 만나 만경(萬頃)의 남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북쪽 근원의 물은 바로 사수강(泗水江)으로, 근원이 용담현(龍潭縣)의 주줄산(珠崒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의 북쪽과 임피의 남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만전성(萬塡城)은 바로 만경(萬頃)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옥구성(沃溝城) 서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과 바다를 격해 30리 되는 곳에 섬이 있어 군산도(羣山島)라고 한다. -섬은 타원형으로 둘레가 60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서천(舒川) 남쪽의 수구가 있는데, 바로 옥구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는 물로, 역시 조선의 큰 하천 가운데 하나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강(錦江)으로, 금강조(錦江條)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강 입구에서 바다를 격해 정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는 섬을 원산도(元山島)라고 한다. 그 남쪽에서 조금 동쪽에 있는 섬을 군산도라고 하는데, 앞에서 나왔다. 원산도의 모양새는 길이가 60리이고, 폭이 20리이다. 북쪽으로는 요아량(要兒梁) 지역과의 거리가 4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오평도(烏平島)와의 거리가 90리이다. 이 섬들은 모두 이 강 서쪽면의 수구이다.- ○ 바다는, 수구에서 북쪽으로 가면 기해저(岐海渚)이고, 다시 북쪽으로 가면 시인성(施仁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인성(庇仁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과 수성(水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영(水營)이다.-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결성(結城)의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태산성(泰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태안성(泰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동남쪽 경계의 해저(海渚)를 지나고,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꺾어져서 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요아량(要兒梁)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흥량(安興梁)의 잘못된 표기이다.- 지역을 지나는데, 바로 태산현 남쪽 지역이 한 줄기로 뻗어서 바다로 들어간 곳으로, 모양새가 코끼리의 코처럼 생겼다. 동쪽으로는 수성, 시인성의 해안을 바라보는데, 거리가 3, 4십 리이다. 바다는, 요아량의 남쪽으로부터 돌아서 서북쪽으로 가면 요아량의 서쪽을 지나는데, 그 서쪽은 오평도이다. -섬은 둘레가 50리이고 동쪽으로 요아량 해안과의 거리가 60리이다.- 바다는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태산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그 바깥은 덕물도(德勿島)이다. -섬은 거위알처럼 생겼으며, 둘레가 5, 6십 리이고, 동쪽으로 태산 해안과의 거리가 50리이다.- 여기에서 또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가면 태산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그 바깥쪽은 용도(龍島)이다. -섬의 모양새는 약간 길게 생겼으며, 둘레는 50여 리이고, 남쪽으로 해안과의 거리는 30여 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면 단산성(端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산성(瑞山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산 북쪽으로 지나는데, 조금 동쪽에 수구가 있으며, 수구의 서쪽이 바로 대부도(大富島)이다. -물은 동쪽에 있는 청주(淸州)의 서쪽 큰 산에서 나오며, 전의(全義)의 동북쪽에 이르러서 서북쪽으로 흘러 천안성(天安城)의 동북쪽 경계를 경유한 다음 동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성(安城)과 양성(陽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직산성(稷山城)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 있는 차현산(車見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진위(振威)의 남쪽과 평택(平澤)의 북쪽을 지난 다음 또 서북쪽으로 흐른다. 여기에서 북쪽에 있는 금천성(衿川城) 동북쪽의 관악산(冠岳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수원성(水原城)의 남쪽, 아산성(牙山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평성(富平城)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이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신창(新昌)의 남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예산성(禮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서남쪽에 있는 가야산(加邪山)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 다음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덕산성(德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서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아산성의 서쪽, 면천성(沔川城)의 동북쪽을 지나 흘러오는 물과 이곳에서 합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면천성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남양성(南陽城)의 남쪽, 당진성(唐津城)의 북쪽을 지나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수성의 남쪽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발원지에서부터 500여 리를 흐른다. ○ 삼가 살펴보건대, 경기와 호서(湖西) 두 도가 나뉜 경계의 대진(大津)은 그 근원이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선원천(禪院川)으로 양지현(陽智縣) 곡돈현(曲頓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돈곶진(頓串津)으로 청양현(靑陽縣) 백월산(白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미륵천(彌勒川)으로 공주(公州)의 차현(車峴)에서 나온다. 선원천은 서남쪽으로 흘러 소사(素沙)의 들판에 이르러서 왼쪽에서 흘러오는 아주천(牙洲川)의 물과 합류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오른쪽에서 흘러오는 항곶천(亢串川)의 물과 합류한 다음 평택현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공진포(貢津浦)에 이른다. 돈곶진은 남쪽으로 금마천(金馬川), 미륵천(彌勒川), 승선천(昇仙川) 등 여러 물과 합류하여 아산(牙山)과 면천(沔川) 두 현의 사이로부터 오는 물과 합류하여 대진(大津)이 되어서 또다시 서쪽으로 당진현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수도제강》에서 이른 바 근원이 청주(淸州)의 서쪽 산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아주천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 흘러가다가 천안성(天安城)의 경계를 지나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만난다고 한 것은 바로 선원천이다. 또 차현산(車見山)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있어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미륵천이다. 차현산은 바로 차현(車峴)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또 한 물이 관악산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항곶천으로, 그 근원이 수원부의 광교산(光敎山)에서 나오는바, 관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또 신창(新昌)의 남쪽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어서 예산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고 한 것은 바로 돈곶진이다. 또 가야산에서 흘러나오는 한 물이 있어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금마천으로, 그 근원이 홍주(洪州)의 오서산(烏棲山)에서 나오는바, 가야산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덕산의 경계를 지나서 서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승선천이다. ○ 수구에서 정서쪽으로 바다에 있는 섬이 대부도인데, 섬의 모양새는 둥글고, 둘레가 50여 리 된다. 동북쪽으로 수성 해안과의 거리가 40리이다.- ○ 바다는, 수구가 있는 수성(水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원부이다.- 서쪽으로부터 또다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가면 인천성(仁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조금 동쪽에 조선의 대수구(大水口)가 있는데, 이는 큰 하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한강(漢江)이다. 한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수구의 동남쪽 바다에 대부도(大富島)가 있으며, 수구의 정서쪽에서 약간 북쪽에 정포(井浦)가 있는데, 큰 섬으로 둘레가 200리이며, 가운데에 강화성(江華城)이 있다. 섬의 모양새는 네모졌으면서도 서남쪽이 뾰족하다. 동쪽으로는 교하성(交河城) 해안까지의 거리가 40리이다. 바로 예전에 각화도(覺華島)라고 하던 섬이다. 이 섬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 섬이 연자도(硯子島)인데, 섬의 모양새는 둥글면서도 긴 벼루 모양으로 생겼다. 남쪽으로 용도(龍島)ㆍ덕물도(德勿島)와 100여 리를 떨어져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면서 바깥쪽 대수구가 된다. ○ 바다는, 강 입구에 있는 교하성(交河城)의 서쪽에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100리가량 가면 임진강(臨津江) 입구가 되는데, 임진강 역시 큰 하천이다. -해구(海口)의 바깥쪽은 동남쪽에 있는 강화도(江華島)와 북쪽에 있는 교동성(喬桐城) 큰 섬으로 대수구(大水口)를 삼는다. ○ 임진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임진강 입구에서 북쪽으로 가면 풍덕성(豐德城)의 서남쪽 지역이 되는데, 조금 서북쪽에 하나의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성강으로, 예성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해구의 동남쪽은 바로 바다 가운데에 교동성이 있는데, 큰 섬이다. 섬의 모양새는 길게 네모졌는데, 서남쪽이 뾰족하다. 둘레는 200리로 강화도와 비슷하며, 해안까지의 거리는 40리이다.- ○ 바다는, 수구로부터 서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연산(延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연안(延安)의 잘못된 표기이다.- 남쪽이 되는데, 하나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구잠산(駒岑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건수성(建水城) 서북쪽과 봉산성(鳳山城)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배천성(白川城) 남쪽으로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수양산(首陽山) 남쪽 기슭 및 연산성(延山城)의 남쪽을 돈 다음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는 30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해주(海州)의 삼탄(三灘)으로, 근원이 평산부(平山府)의 성불산(成佛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단역(靑丹驛)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구잠산은 황주(黃州)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나, 구현은 삼탄의 근원이 아닌바 상세히는 알 수가 없다. 건수(建水)는 검수(劍水)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바다는, 연산성의 남쪽으로부터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강익성(康翊城) -삼가 살펴보건대, 강령성(康翎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옹진성(瓮津城)의 서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가면 장연성(長淵城)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바다 가운데에 초도(椒島)가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풍천성(豐川城)의 서쪽을 지나는데, 바다 가운데에 백령도(白翎島)가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동쪽으로 100리가량 가면 은율성(殷栗城)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8, 9십 리를 가면 삼화성(三和城) 남쪽이 되는데, 패수구(浿水口)가 있다. -동쪽으로 봉산(鳳山), 배천(白川)에서 서쪽으로 연산, 강령, 옹진, 장연에 이르기까지는 뒤쪽으로 모두 산을 등지고 있는데, 산이 끊이지 않고 연속되어 뻗어 있다. 여기에서 또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풍천(豐川), 송화(松花), 장련(長連)이 되며, 동쪽으로 가면 안악(安岳)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산들이 서려 있다. 그러므로 이곳 수백 리의 지역은 서쪽, 남쪽, 북쪽 삼면이 모두 바닷가에 닿아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송화는 바로 송화(松禾)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지금 대동강(大同江)이라고 한다. -대동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삼화성(三和城) 남쪽에 있는 수구에서부터 꺾어져서 북쪽으로 200여 리를 가면 함종성(咸從城)과 증산성(曾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증산성(甑山城)으로 되어야 한다.- 두 성의 서쪽을 지나고,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영유성(永柔城) 서북쪽을 지나며,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바로 순안성(順安城) 서북쪽에 있는 큰 산의 북쪽에서 나오는 물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통덕천(通德川)으로, 그 근원이 순안에 있는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숙천부(肅川府)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숙천성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안주(安州)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청천강(靑泉江)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淸川江)으로, 청천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대정강(大定江)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령강(大寧江)으로, 대령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가면 나청하(那靑河) 소수구가 있다. -나청하는 가산성(嘉山城) 서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봉두산(鳳頭山) 동쪽과 나청청(那靑廳) 서쪽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대천하(大川河)의 소수구가 있다. -대청하는 북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봉두산의 서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흘러 정주성(定州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상의 두 수구는 대정강과 청천강 두 수구와의 서로 간의 거리가 100리 사이에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대천하는 바로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인 듯하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정주의 서남쪽 경계 및 곽산성(郭山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동래천(東來川) 소수구가 있다. -동래천은 삭주(朔州) 북쪽에 있는 산과 개막산(蓋幕山)이 서로 연결된 곳에서 나오는데, 여기에서 북쪽으로 산 너머가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에 있는 오등성(敖登城), 요곽이성(遼郭爾城), 창성(昌城)의 세 성이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흘러 곽산성(郭山城) 서쪽과 선천성(宣川城) 동쪽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동로강(東路江)으로, 그 근원이 구성(龜城)의 마구리산(馬仇里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선천부(宣川府)의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오등성과 요곽이성 두 성에 대해서는 압록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선천성(宣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며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천하(宣川河) 소수구가 있다. -선천하는 북쪽 산에서 나오며, 그 산 너머의 서북쪽이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에 있는 숙주성(宿州城)이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흘러 철산(鐵山)의 동쪽 기슭을 돌아서 선천성의 서남쪽 경계 지점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선천부의 청강(淸江)으로, 그 근원이 보리산(菩提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철산군의 동쪽 경계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숙주는 삭주(朔州)의 음이 와전된 듯하다.- ○ 바다는,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철산성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용천성(龍川城)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삭천하(朔川河) 소수구가 있다. 용천성에서 하천 건너편의 북쪽 둔치에 바로 의주성(義州城)이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의 애주(愛州)이다. -삭천하는 동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용천성의 북쪽과 의주성의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진강(古津江)으로, 그 근원이 천마산(天磨山)의 동남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양책관(良策館)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애주는 바로 의주이다.- ○ 바다는, 삭천하의 수구로부터 의주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그 서쪽은 바로 압록강 수구이며, 서북쪽 둔치는 성경(盛京)과의 경계가 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막혀 있다. 그러므로 차풍(次風) 제소남(齊召南)이 수도(水道)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바다를 강(綱)으로 삼아 두만강 입구부터 시작하여 바다를 따라서 남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올라가 압록강 입구까지 이르렀는데, 매번 해구(海口)로부터 원류(源流)를 거슬러 올라갔는바, 마치 강(綱)을 쳐들면 목(目)이 따라 올라오는 것과 같아 자못 치밀하고 상세하다. 이는 본국의 여도(輿圖)를 살펴보고서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과 군(郡)의 호칭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제 조목에 따라서 변정(辨正)하였다. 큰 강 중에 다른 서책에도 나와서 각각의 목(目)을 세운 것은 각 목의 아래에다 나누어 붙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경계는 동쪽, 서쪽, 남쪽 삼면이 모두 바다에 닿아 있으며, 그 동해의 물은 맑고 깨끗하여 10길 남짓의 아래에까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고려의 동쪽에 임해 있는 바다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10길 아래에까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동남쪽으로는 명주(明州)가 바라다보이는데, 물이 모두 푸르다.” 하였다.- 구지(舊志)를 보면, 서쪽의 큰 바다에는 황주(黃州)의 장명진(長命鎭)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통강(大通江)으로 들어간다. 또 백주(白州)와 해주(海州)의 서쪽은 모두 바닷가와 가깝다. 강희(康煕) 50년(1711)에 조선국의 섬인 몽금도(夢金島), 정족도(鼎足島), 사야질구미(沙也叱九味) 등지가 모두 봉천부(奉天府)의 금주(金州)ㆍ복주(復州)ㆍ개주(蓋州)ㆍ해주(海州)와 서로 가깝다는 이유로, 봉천부의 장군(將軍) 및 부윤(府尹)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서 연해(沿海)에 사는 백성들이 조선과 가까운 바다에 가 고기잡이하는 것을 엄금하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문휘고(同文彙考)》를 보면, “강희 49년(1710)에 중국 예부(禮部)에 보낸 자문에, ‘오차포진(吾叉浦鎭)과 몽금도(夢金島) 앞바다, 초도진(椒島鎭)과 정족도(鼎足島) 앞바다, 소청도(小靑島)와 사야구미(沙也九味) 앞바다에 중국의 고기잡이 배가 끊임없이 오가서 변경에 사는 백성들이 놀라 소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칙령을 내려 금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강희 50년에 예부에서 봉천부의 부윤에게 자문을 보내어 금령(禁令)을 신칙하게 하였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바는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오차포(吾叉浦)는 장연현(長淵縣)에 있으며, 초도(椒島)는 풍천부(豐川府)에 있다.
○ 한강(漢江) -옛날에는 열수(列水)라고 하였으며, 혹 여강(驪江)이라고도 한다. ○ 습수(濕水)와 산수(汕水)를 덧붙인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쪽에 있다. ○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 ○ 주(注)에 이르기를, “열(列)은 물 이름으로, 지금 대방(帶方)에 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예로부터 혹 한수라고 하였음이 명백하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의 분려산(分黎山)은 열수(列水)가 근원하는 곳이다. 열수는 서쪽으로 점제(黏磾)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820리를 흘러간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세 강이 합해져 열수(列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듯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습수와 산수는 아마도 한강의 별원(別源)으로 회양(淮陽)과 보은(報恩)에서 나오는 물인 듯하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한강은 국성(國城)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근원은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남쪽은 바로 옛 백제국이다. ○ 양화도(楊花渡)는 왕성의 서남쪽, 한강 가에 있는데, 각도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이곳에서 모두 모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은 또 웅진강(熊津江)이라고도 하는데, 국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五台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두 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왕성(王城)은 이 강을 의지하여 험고함으로 삼는다. 한강의 남쪽은 바로 옛 백제국 지역이다. 명(明)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구원하자 왜적들이 왕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이여송이 성안에 들어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에 임하여 왜적의 후미를 뒤쫓아가 철수하는 자들을 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 양화도는 국성의 서남쪽, 한강 가에 있는데, 각도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모두 이곳에서 모은다. 혹자는 바로 임진도(臨津渡)라고 한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京畿)에 여강(驪江)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강의 물이 여주(驪州)의 경계에 이르면 혹 여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인천성(仁川城)의 북쪽에서 조금 동쪽은 조선의 대수구이다. 대수의 근원은 남파(南派)와 북파(北派)가 있다. 남파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우통(于筒)에서 나오는 한강의 정원(正源)이다.- 는 동쪽으로 장산(張山) -삼가 살펴보건대, 장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에서 나와 두 개의 물이 합해져서 서쪽으로 흘러 우두산(牛頭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 남쪽 기슭, 청풍성(淸風城)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 서쪽에 한 개의 강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섬강(蟾江)이다.- 이 있어, 동북쪽에 있는 영시촌(寧市村) 서쪽의 공작산(孔雀山) -삼가 살펴보건대, 공작산은 홍천현(洪川縣)의 남쪽에 있다.- 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섬강의 근원은 횡성현(橫城縣)의 덕고산(德高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흥원진(興元津)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제천성(堤川城)의 서남쪽에 있는 치악산(雉岳山)의 남쪽 기슭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가 원주의 동남쪽 경계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음성(陰城)의 동북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충주(忠州)의 서쪽 및 여주(呂州)의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천민천(天民川)으로, 그 근원이 충주의 소속리산(小俗離山)에서 나와 북동쪽으로 흘러 여주의 경계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원주성(原州城)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이주성(利州城) -삼가 살펴보건대, 이천(利川)으로 되어야 한다.- 의 북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은천(新恩川)으로, 그 근원이 지평현(砥平縣)의 부동산(不動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한강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광주성(廣州城)의 북쪽과 양근(楊根)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비정(碑亭)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조선의 국성(國城) 동남쪽에 있는 삼각산(三角山) 앞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북쪽 근원에서 나온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은 양근의 경계에서 한강에 합해지는바, 여기에서는 국성의 동남쪽에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북쪽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연강(新淵江)으로, 그 근원이 회양부(淮陽府)의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에서 나온다.- 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동북쪽의 금성(金城) 동남쪽에 있는 추지령(秋池嶺) -삼가 살펴보건대, 추지령(楸池嶺)으로 되어야 한다.- 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은 바로 신진(新津)으로, 근원이 회양의 말휘령(末暉嶺)에서 나온다.- 서쪽으로 흘러 서북쪽에서 흘러온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철령(鐵嶺)의 은계천(銀溪川)이다.- 과 합류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낭주(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낭천(狼川)으로 되어야 한다.- 의 동남쪽 경계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진은 북서쪽으로 흘러 은계천과 합류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신연강에 들어간다.- 하나는 회양성의 북쪽 산 및 남쪽의 금성산(金城山)에서 나온 두 개의 물이 합류해서 서쪽으로 흘러 양구성(楊口城) 및 인제성(麟蹄城)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회양의 북쪽 산과 금성산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이미 합류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가평성(加平城) 남쪽 경계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남쪽 근원에서 흘러오는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소양강(昭陽江)이다.- 이 동남쪽에 있는 금강산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동북쪽으로 흘러 평창성(平昌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양강은 근원이 오대산의 북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춘천부(春川府)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신연강과 합류하는바, 여기에서 가평군에 이르러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 개의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진 다음에는 서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오갑산(五甲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오신산은 김화현(金化縣)에 있다. 세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져서 오신산을 지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 남쪽 기슭과 홍천성(洪川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춘천성(春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횡성(橫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홍천강(洪川江)으로,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백치(柏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신연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저평성(底平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지평(砥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 경계와 포천성(抱川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양근성(楊根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그 북쪽 둔치에 있는 산은 바로 양주성(楊州城)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돌아서 삼각산(三角山) 앞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광주(廣州)에서 흘러온 남파(南派)의 물과 합류한다. ○ 남파와 북파 두 개의 강이 이미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서는 국성(國城)의 안산(案山)의 남쪽 기슭 -국성은 동북쪽으로부터 동쪽, 남쪽, 서쪽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쪽에 동경 10도 6분이 조금 넘고, 북위 37도 6분인 작은 산이 있는데, 산 너머 동쪽이 양주(楊州)이며, 그 북쪽 80리 되는 곳에 백악산(白岳山)이 있다. 백악산의 동북쪽은 적성(積城)이다. 또 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이 바로 임진강(臨津江)이다. 백악산에서 서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이 고양성(高陽城)이고, 또 서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이 파주(坡州)이다. 파주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이 바로 임진강이다. 국성의 서남쪽에는 산이 가로질러 있으면서 안산(案山)이 되는데, 동서쪽으로 수백 리에 뻗쳐 있으면서 강물을 따라서 안대(案對)가 되었다. 굉자원(宏滋院)이 성에서 서남쪽으로 50여 리 되는 곳의 산 사이에 있다. ○ 강물은 또 서쪽으로 흘러 안산의 남쪽 기슭을 돈 다음 과천성(果川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과천성은 국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또 과천의 서남쪽에는 용인성(龍仁城)이 있다. 또 서남쪽에는 관악산(冠岳山)과 수리산(修理山)이 있다.- 을 지나 1백 수십 리를 흘러 양천성(陽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산성(安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앵봉천(鸎峯川)을 말하는 듯하다. 앵봉천은 근원이 삼각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공암진(孔巖津)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을 받고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흘러 김포성(金浦城)의 서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수원성(水原城)의 북쪽 산에서 흘러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부평성(富平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통진성(通津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의 남쪽 둔치에는 인천성(仁川城)이 있고, 북쪽 둔치에는 교하성(交河城)이 있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100리이다. ○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종횡(縱橫)으로 10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보면, 한강 외에는 800리나 되는 큰 강이 없으니 아마도 한수(漢水)가 열수(列水)인 듯하다. 《산해경》을 보면, 맥국(貊國)은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맥국은 지금의 관동(關東) 지방인바, 과연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 또 세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져서 구불구불 800리를 흐르는바, 열수가 한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강은 그 근원에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오대산의 우통(于筒)에서 나오고, 하나는 회양(淮陽)의 금강산에서 나오는데 이를 신연강이라고 하고, 하나는 그 근원이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문장대(文藏臺)에서 나오는데 이를 달천(達川)이라고 한다. 오대산에서 나오는 물은 남쪽으로 흘러 정선군(旌善郡)을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충주(忠州)에 이른다. 여기에서 달천이 괴산(槐山)과 연풍(延豐) 두 현 사이를 지나 남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 충주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여주(驪州)를 지나고 양근군(楊根郡)에 이른다. 여기에서 신연강이 북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는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廣州)의 경계를 감돌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경성(京城)의 남쪽을 감돌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교하군(交河郡)의 남쪽에 이른다. 여기에서 임진강(臨津江)이 북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하여 풍덕부(豐德府)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살펴보건대, 《무비지(武備志)》를 보면, 우리나라의 지도에 팔도의 여러 강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대청일통지》에서는 한강을 또 웅진(熊津)이라고 하였고, 또 양화도(楊花渡)가 바로 임진도(臨津渡)라고 하였고, 또 백마강(白馬江) 하류가 한강에 합류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류강(沸流江)이 한강으로부터 나뉘어 흘러 대동강(大同江)에 합해진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잘못된 것을 다시 잘못 전하면서 바로잡지 않은 탓에 그렇게 된 것이다.
○ 달천(達川)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속리산의 산꼭대기에는 문장대가 있는데, 문장대 위에서 한 물이 나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한강의 별파(別波)로, 앞에 나오는 안설(按說)에 상세하게 나온다.
○ 임진강(臨津江) -옛날에는 대수(帶水)라고 하였으며, 혹 호로하(瓠蘆河), 청강(淸江)이라고도 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는 대수(帶水)가 있다. 대수는 서쪽으로 흘러 대방(帶方)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원(上元) 2년(675)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거느리고 호로하를 건너가서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였다.
《황명세법록(皇明世法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산동(山東) 문등현(文登縣)의 성산위(成山衛)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호로하로 들어가 신라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수는 지금의 임진강으로, 옛날의 칠중하(七重河)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사군강역 대방군조(四郡疆域帶方郡條)에 나온다.- 칠중성은 바로 적성현(積城縣)이다. 지금 임진강이 흐르다가 적성의 서쪽에 이르러서 호로탄(瓠蘆灘)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유인궤가 강물을 건넌 곳이다.
《요사(遼史)》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야율분노(耶律盆奴) 등이 고려를 정벌하면서 개경(開京)에 들어가서 왕경(王京)을 크게 약탈하고 불사른 다음 청강(淸江)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야율분노가 이미 개경을 약탈하고서 청강에 이르렀으니, 청강은 개경 남쪽에 있는 강임이 분명하다. 《명시종(明詩綜)》에 실려 있는 조선 이행(李荇)의 임진강(臨津江) 시에 이르기를, “임진에서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나루터를 물으면서 청강에 가네.[臨津催早發 問渡卽淸江]” 하였다. 이에 의거하면 청강이 바로 임진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선부(朝鮮賦)》의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진강은 장단부(長湍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이 임진을 건너서 개성을 약탈하였는데, 얼마 뒤에 이여송(李如松)이 개성에 주둔해 별장(別將) 사대수(査大受)를 파견하여 임진을 지키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책응(策應)하게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진강은 동북쪽에 있는 이천성(伊川城)의 서북쪽 큰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협(安峽)의 북쪽을 지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큰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정산탄(靜山灘)으로, 그 근원이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안협현(安峽縣)의 북쪽에 이르러서 임진강에 합류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삭녕성(朔寧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한 개의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마룡연(馬龍淵)이다.- 이 있어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철원(鐵原)의 남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룡연은 그 근원이 평강현의 상현(霜峴)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철원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삭녕의 남쪽에 이르러서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하나의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탄강(大灘江)이다.- 이 있어서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가평(加平)의 북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홀러 김화성(金化城)의 남쪽 경계와 영평성(永平城)의 북쪽 경계 및 연천성(連川城) -삼가 살펴보건대, 연천성(漣川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탄강은 그 근원이 회양부(淮陽府)의 쌍령(雙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철원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연천현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마전성(麻田城)의 남쪽 경계와 적성(積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큰 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러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에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이 바로 백악산(白岳山)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파주(坡州)의 북쪽 경계와 장단성(長湍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한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沙川)이다.- 이 동북쪽에 있는 개창부(開昌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의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장단의 북쪽 경계 및 개성부의 남쪽 경계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을 서쪽으로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천은 그 근원이 송도(松都)의 성거산(聖居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송도천(松都川)과 판적천(板積川)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에 들어간다.- 송악(松岳)은 바로 조선의 중악(中岳)으로, 백악(白岳)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이 되어 다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 강은 근원에서 7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강은 그 근원이 안변부(安邊府) 영풍고현(永豐故縣)의 방장동(防墻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이천부(伊川府)의 경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삭녕군(朔寧郡)의 경계로 들어갔다가 서남쪽으로 흘러 장단부(長湍府)의 남쪽을 돌아 교하군(交河郡)에 이르러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예성강(禮成江) -저탄(豬灘)을 덧붙인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성강은 두 산 사이에 있는데, 돌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데, 이것이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으로 몹시 험악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급수문은 그 문이 바다 섬과는 닮지 않았으며, 흡사 무협(巫峽)의 강로(江路)와 같았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바로 물길이다. 수세가 산협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어, 요란하기가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일로(一路)에 시냇물이 있는 곳에는 모두 소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았다. 보산관(寶山館) 근처에 시내가 있어 저탄(楮灘)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탄(豬灘)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라고 하는데, 폭이 20여 길이나 되는데도 역시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성항(禮成港)은 개성부의 남쪽에 있는데, 예성강의 하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또 급수문이 있는데, 《대명일통지》를 보면, 개성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흡사 무협과 같이 생겼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풍덕성(豐德城)에서 조금 서북쪽에 한 수구(水口)가 있다. 그 물의 근원은 동북쪽에 있는 곡산성(谷山城)의 동북쪽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서 곡산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서 흘러온 하나의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신계성(新溪城) 북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수산성(遂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수안성(遂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남쪽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에서 흘러온 큰 물과 합류하는데, 이 물은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토산성(兎山城)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송악산 개창부(開昌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開城府)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 산의 남쪽 기슭을 돈 다음 서쪽으로 흘러 동금천성(東金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서금천성(西金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이곳에서 금천하(金川河)와 합쳐지는데, 금천하는 동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동금천성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두 개의 근원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평산성의 남쪽을 지나는 물과 합류한다. 서쪽에서 흘러온 금탄하(金灘河)는 서쪽으로 흘러 서금천성을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만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풍덕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은 바로 예성강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원류(源流)가 지나는 바와 별파(別派)가 합류되는 바에 대해서 모두 뒤섞어서 말하여 어거지로 해석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금천성은 하나일 뿐인데, 이곳에서는 동금천성과 서금천성 두 개로 말하였으니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이른바 금탄하라는 것도 역시 어느 물을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5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성강은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신계현(新溪縣)의 서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평산부(平山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저탄(豬灘)이 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급수문은 아마도 이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 오조천(吾助川) -박연(朴淵)을 덧붙인다.
《허문목집(許文穆集)》의 회란석시(廻瀾石詩) 서문(序文) -허국(許國)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적에 지은 것이다.- 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조천 가에 병풍처럼 생긴 돌이 있어서 오조천의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 돌의 이름이 없었다. 이에 내가 그 돌을 명명하여 ‘회란석(廻瀾石)’이라 하였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연(朴淵)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는데, 모양이 마치 석옹(石甕)과 같이 생겼으며, 속을 들여다보면 온통 검은색이다. 반석이 있어 그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이를 도암(島巖)이라고 한다. 물이 절벽에 이르러서는 성난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나 되어 마치 흰 무지개가 허공에 걸린 듯하고, 눈발이 흩날리는 듯하며,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전설에, “옛날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연못가에서 젓대를 불고 있었는데, 용녀(龍女)가 그 소리를 듣고는 감동하여 그를 불러서 남편으로 삼았으므로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오조천은 바로 어조천(語早川)이 와전된 것이다. 그 근원은 송도의 천마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고연담(姑煙潭)과 박연폭(朴淵瀑)이 되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금천군(金川郡)의 서쪽을 돌아 조읍포(助邑浦)에 이르러서 예성강으로 들어간다.
○ 금강(錦江) -혹은 웅진강(熊津江), 백강(白江),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하기도 한다.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成山)에서 바다를 건너 웅진강(熊津江)의 어귀에 이르렀다. 백제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와서 저항하였는데, 크게 싸워서 격파하고는 백제를 모두 평정하였다. ○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주류성(周留城)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켰다. 2년에 유인궤(劉仁軌)가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백강의 입구에서 왜병(倭兵)들을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웅진은 국성의 남쪽에 있다. 옛 백제의 해구(海口)로, 당나라에서 이곳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백강은 웅진의 동남쪽에 있는데, 역시 큰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전주(全州)의 서쪽 경계에 닿아 있다. 당나라 용삭 3년(663)에 유인궤가 수군을 이끌고 웅진에서 주류성으로 나아가면서 백강의 입구에 이르러서 왜병과 만나 네 번을 싸워 모두 이겼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백마강은 청주(淸州)의 남쪽에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긍주(矜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천(舒川)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백마강이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청주의 경계를 들어갔다가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천안군(天安郡)의 경계를 지나고, 여기에서 꺾어져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그 하류는 한강에 합해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강이 일본의 서적에는 백촌강(白村江)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르기를, “천지천황(天智天皇) 2년(663)에 백촌강(白村江)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웠다.” 하였다.- 지금의 백마강이다. 지금 백마강의 상류를 웅진(熊津)이라고 하는데, 《당서》에서 칭한 웅진은 백강의 하류에 있는바, 이는 바로 고금(古今)의 칭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백강과 백마강을 나누어서 두 강으로 하였으며, 또 백마강을 한강에 끌어대어 합하였으니, 몹시 잘못되었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속리산에서 나오는 한 물은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천(舒川)의 남쪽 수구 역시 조선의 하나의 큰 하천이다. 강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하나는 동남쪽에 있는 금산성(錦山城) 동남쪽 경계의 적암(赤巖) 서북쪽 기슭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적천(赤川)으로, 그 근원이 무주부(茂朱府)의 적상산(赤裳山) 동쪽에서 나오는바, 적암은 바로 적상(赤裳)의 잘못된 표기이다. 금강은 그 근원이 장수현(長水縣) 분수치(分水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무주의 서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적천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금산성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제원천(濟源川)으로, 그 근원이 금산군 월봉산(月峯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진산성(珍山城)의 동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서남쪽에 있는 고산성(高山城)에서 나와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흘러 영동성(永同城)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천(松川)이다.- 이 동남쪽에 있는 파음산(巴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웅이산은 상주(尙州)에 있다.- 의 북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황간성(黃磵城)의 북쪽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천은 그 근원이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간현의 북쪽을 지나 영동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흘러 옥천성(沃川城)의 북쪽을 지나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회덕성(懷德城)의 북쪽과 문의성(文義城)의 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진잠성(珍岑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진잠성(鎭岑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을 지나며,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공주(公州)의 동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 북쪽의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동진강(東津江)으로, 그 근원이 충주(忠州)의 망이산(望夷山)에서 나온다.- 은 동북쪽에 있는 조령(鳥嶺)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안성(淸安城)의 서쪽 경계와 진천성(鎭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 있는 음성(陰城)과 괴산(槐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청주(淸州)의 서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 있는 보은(報恩)의 동쪽, 개경(開慶)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문경(聞慶)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청주의 남쪽 경계와 회인(懷仁)의 북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상의 두 물은 모두 동진강의 별파(別派)인데,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전의(全義)의 남쪽 경계와 문의(文義)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공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남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진강은 망이산으로부터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진천현(鎭川縣)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현(燕岐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 두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져서는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공주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성(燕岐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지난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부여성(扶餘城)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100리가량을 흐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석성(石城)의 북쪽 경계와 정산성(定山城)과 임천(林川)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 강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초포(草浦)로, 그 근원이 계룡산(鷄龍山)에서 나온다.- 은 동쪽에 있는 연산(連山)의 동북쪽, 진잠(珍岑)의 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산(泥山)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노성현(魯城縣)이다.- 의 남쪽 경계와 여산(礪山)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은진성(恩津城)의 북쪽을 지난다. 이곳에서 또 서남쪽에 한 물이 있어서 남쪽에 있는 전주(全州) 서남쪽의 모악산(母岳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익산성(益山城)의 서쪽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물은 어느 물인지 상세하지 않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용안(龍安)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함열(咸悅)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남쪽과 북쪽에서 흘러온 작은 물을 각각 만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큰 산의 남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정산과 임천의 큰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초포는 서쪽으로 은진현 서쪽의 강경(江景)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 이미 합류한 다음에는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청양(靑陽)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한산성(韓山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서천성(舒川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주현(州縣)에서 흘러오는 수십 개 근원의 물을 합하여 거의 1000리나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금강의 근원은 장수현(長水縣)의 분수치(分水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영동현(永同縣)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송천(松川)의 물이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흘러 옥천현(沃川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용천(龍川) -바로 《고려도경》에서 칭한 물이다.- 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산현(靑山縣)의 남쪽 경계를 돌아서 흘러와 합류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진강이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된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웅진(熊津)이 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여현(扶餘縣)의 동쪽에 이르러서 백마강(白馬江)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초포(草浦)의 물을 모은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두치강(豆恥江) -전탄(錢灘)과 광탄(廣灘)을 덧붙인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원균(元均)의 수군을 습격하여 한산도(閑山島)를 빼앗았다. 이에 왜적들이 수로와 육로로 한꺼번에 나와 왜선이 2, 3일도 되지 않아 광양(光陽)의 두치진(豆恥津)에 정박하였는데, 두치진은 남원(南原)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 우리나라의 각 장수들이 여러 차례 왜적들을 참획하였다. 12월에 광양의 전탄(錢灘)에서 싸워 왜적 4명의 수급을 참획하였고, 11월에 보성군(寶城郡) 광탄(廣灘)에서 싸워 왜적 1명을 참획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동성(河東城)의 서쪽에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물은 북쪽에 있는 남원성(南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남원(南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곡성(谷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이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요천(蓼川)으로, 그 근원이 장수현(長水縣)의 장안산(長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두치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영례성(永禮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구례(求禮)의 잘못된 표기이다.-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무목산(無木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나와 송경산(松京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및 순천성(順天城)의 북쪽을 거쳐 동남쪽으로 흐르는 한 물이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수(洛水)로, 그 근원은 장흥부(長興府)의 웅치(熊峙)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무등산의 서쪽을 돈 다음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두치진에 합류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광양성(光陽城)의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이 바로 하동성(河東城)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두치강은 일명 섬강(蟾江)이라고도 한다. 그 근원이 진안(鎭安)의 마이산(馬耳山) 중대(中臺) 및 전주(全州)의 웅치(熊峙)에서 나와 이 두 물이 합해져서 남쪽으로 흘러 남원부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요천(蓼川)을 지난 다음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낙수(洛水)가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흘러 광양현의 동쪽을 지나서 전탄(錢灘)이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서 칭한 광탄(廣灘)은 바로 낙수(洛水)의 상류이다.
○ 낙동강(洛東江) -진강(晉江)을 덧붙인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속리산에서 나오는 한 줄기 물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곡천(豬谷川)으로, 그 근원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대수구(大水口)가 있는데, 조선국 동남쪽의 큰 하천으로, 바로 진강(晉江)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을 진강으로 잘못 알았다.- 이다. 진강의 물은 북쪽의, 왕경(王京)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는 영천현(榮川縣)의 북쪽 큰 산에서 나오는데, 그 산맥은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과 소백산(小白山)으로부터 꾸불꾸불 서리면서 2000여 리를 내려오다가 봉화현(奉化縣)의 서쪽, 예안현(禮安縣)의 서북쪽에서 봉우리를 일으키며, 지봉(支峯)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두 줄기로 갈라져 남쪽으로 가 각 군현(郡縣)의 경락(經絡)이 되면서 바다까지 닿는다. 이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沙川)을 가리키는 듯한데, 사천의 근원은 안동부의 백병산(白屛山) 및 봉화현의 문수산(文殊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된다.- 은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영천현의 동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안동성의 서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백석산(白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백암산은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 의 물을 받아들인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소천(小川)으로, 그 근원이 영양현의 검마산(劍磨山)에서 나온다. 낙동강의 정원(正源)이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소천(小川)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청량산(淸涼山)의 서쪽 기슭을 지나고, -삼가 살펴보건대, 소천이 이미 황지에서 나온 물과 합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청량산의 서쪽, 안동부의 동남쪽을 지난 뒤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사천과 합류한다.-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의성(義城)의 서쪽 경계와 용궁성(龍宮城)의 동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의 북안성(北安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안성(比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서쪽에서 흘러온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위수(渭水)이다.- 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수는 그 근원이 의흥현(義興縣) 화산(華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비안현(比安縣)의 동쪽을 감싸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풍유천(豐酉川)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천군(醴川郡)의 와전으로, 천(川)의 이름으로 잘못 안 것이다.- 이 있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함창성(咸昌城)의 북쪽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곡천(豬谷川)으로, 속리산에서 흘러나온다. 이미 앞에 나왔다.- 서쪽에서 온 상주(尙州) 서북쪽의 파음산(巴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서 나온 물과 만나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이수(伊水)로, 그 근원이 상주의 웅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인동성(仁同城)의 서쪽과 선산(善山)의 동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령성(開寧城)의 동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감천(甘川)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적암(赤巖)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오다가 서남쪽에서 흘러온 거창(居昌)의 물과 합류한 다음 또다시 동쪽으로 금산(金山)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온 한 물과 합류하여 성주(星州)의 북쪽, 개령(開寧)의 남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감천은 그 근원이 지례현(知禮縣)의 대덕산(大德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면서 직지천(直旨川)과 아천(牙川)을 모으고, 꺾어져서 동쪽으로 흘러 선산부(善山府) 옥산(玉山)의 동쪽에 이르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호강(琴湖江)이다.- 이 있어 합류한다. 이 물은 동북쪽에 있는 경주(慶州) 서북쪽과 영천(永川) 동남쪽의 모자산(母子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하양성(河陽城)의 남쪽을 경유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공곡성(恭谷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칠곡성(漆谷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 경계를 지나 꺾어져서 정남쪽으로 흐르다가 대구성(大邱城)의 서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호강은 그 근원이 청송부(靑松府)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천(永川)과 하양(河陽) 두 현 사이를 지나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대구부의 북쪽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가야천(伽倻川)이다.- 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남쪽에 있는 협천성(浹川城)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고령성(高靈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가야천은 그 근원이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원풍성(元風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현풍성(玄風城)이다.- 남쪽과 의령성(宜寧城) 북쪽으로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흘러 창녕(昌寧)의 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진강(晉江)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남쪽에 있는 운봉(雲峯)의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함양(咸陽)의 남쪽과 단성(丹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산음(山陰)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산청현(山淸縣)이다.- 의 물을 받아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삼가(三嘉)의 남쪽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양천(梁川)으로, 그 근원이 삼가현의 화지현(花旨峴)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진강에 합류한다.- 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흘러 진주(晉州)의 남쪽을 지나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공원성(恭原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칠원성(漆原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을 지나 굽이굽이 동북쪽으로 700리를 흘러와서 합류하는데, 이 물이 바로 사천(泗川)인 듯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강은 그 근원이 무주부(茂朱府)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지리산에서 나오는 임천(瀶川)의 물과 합류해 동쪽으로 흘러 단성현(丹城縣)의 북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양천(梁川)을 지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진주의 남쪽을 지나며,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사천은 바로 현 이름인데, 잘못 진강이라고 하였다.- ○ 여기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흘러 영산성(靈山城)의 서쪽을 지난다. -영산(靈山)은, 큰 산맥(山脈)이 모자산(母子山)에서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경주(慶州), 손인(蓀仁), 경산(慶山), 화랑(火郞), 청도(靑道)의 다섯 성을 지난 다음 남쪽으로는 창녕(昌寧)에 이르러서 무계산(武溪山)이 되고, 동남쪽으로는 영산성(靈山城)의 북쪽에 이르러서 화악산(華岳山)이 되는데,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손인은 바로 자인(慈仁)의 잘못된 표기이며, 화랑은 아마도 화왕(火王)의 와전인 듯하다. 화왕산성(火王山城)은 창녕의 북쪽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응천(凝川)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동북쪽에 있는 밀양(密陽)의 북쪽에서 나와 경산(慶山)의 서남쪽 산 및 동북쪽에 있는 손인(蓀仁) 동쪽의 금오산(金鼇山)에서 나오는 물과 만난 다음 남쪽으로 흘러 언양(彦陽)과 양산(梁山)의 서쪽 경계와 밀양의 동쪽 경계를 지나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응천은 그 근원이 현풍(玄風)의 비슬산(琵瑟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청도군(淸道郡)을 감싸 흐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밀양부의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 동쪽 언덕은 동래(東萊)의 서쪽 경계이다. 동래의 북쪽에는 윤산(輪山)이 있고, 김해의 서쪽에는 웅산(熊山)이 있다. 강구(江口)의 동남쪽은 바로 절영도(絶影島)이고, 또 큰 바다 건너편의 동남쪽에는 대마대도(對馬大島)가 있다. 이 물은 근원으로부터 길게 1000리를 흐르면서 수십 성의 산에서 나오는 물을 모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강(晉江)은 경주(慶州) 서남쪽에 있는 사주성(泗州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성(泗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북쪽에 있는데, 혹 서강(西江)이라고도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마귀(麻貴)가 울산성(蔚山城)을 공격하면서 군사를 파견해 서강(西江) 입구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의 수로(水路)를 막게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강이 과연 사천현 북쪽을 지나기는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경주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막은 수로는 바로 울산부의 태화강(太和江)인데, 진강이라고 하였으니, 더욱더 잘못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은 그 근원이 안동(安東)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여러 물을 모은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예천군(醴川郡)의 남쪽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속리산에서 나오는 저곡천(豬谷川)의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대구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금호강(琴湖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영산현(靈山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진강(晉江)이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김해부(金海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흩어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랑강(三浪江)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탈취하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 한산(閑山)을 침입하였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이 송도(松島), 울산(蔚山), 부산(釜山)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경략(經略) 형개(邢玠)가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에 대해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영은 부산에 있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영은 서생포(西生浦)에 있다. 부산을 격파하고자 할 경우에는 육로로는 반드시 양산(梁山)의 서북쪽을 경유해야 하는데, 이곳에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한 필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악하다. 남원(南原) -삼가 살펴보건대, 원(原) 자는 연문(衍文)인 듯하다.- 을 경유할 경우에는 삼랑(三浪)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이 두 곳은 모두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요충지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삼랑은 아마도 낙동강 하류의 삼차하(三叉河)를 가리키는 듯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랑강(三浪江)은 양산군(梁山郡)의 남쪽에 있다. 구지(舊志)를 보면, 양산(梁山)의 서북쪽에는 험준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두 필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하며, 남쪽에는 삼랑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양산과 삼랑을 탈취하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갔다.
○ 태화강(太和江)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울산(蔚山)에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울산의 남쪽에 도산성(島山城)이 있는데, 도산성은 산세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견고함으로 삼았다. 성 한가운데에 강이 하나 있어 부채(釜寨)와 통할 수 있으며,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거쳐 부산과 통할 수 있다. 왜적들이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쌓았는데, 반구정(伴鷗亭), 성황당(城隍堂), 태화강(太和江)이 모두 도산(島山)의 앞에 있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로일성(長老日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장기성(長鬐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위산성(尉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울산성(蔚山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쪽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울산성의 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쪽으로 흘러 좌병(左兵)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좌병영(左兵營)이다.- 의 남쪽 경계를 지나 1백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태화강은 그 근원이 경주의 단석산(斷石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부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신라에 도착하자, 신라의 왕이 즉시 흰 끈으로 얼굴을 묶고 앞에 와서 강화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고는 거듭 맹세하기를,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또 아리나예하가 거꾸로 흐르고 냇물의 돌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지 않는 한, 봄가을로 조공을 빠뜨릴 경우에는 하늘의 신령과 땅의 귀신이 함께 우리들을 토벌할 것입니다.” 하였다.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압록강(鴨綠江)은 삼한(三韓)에 있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면,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은 천하의 세 대하(大河)라고 하였는바, 압록강은 세 대하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서기》에서 이른 바 아리나예하는 바로 압록강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신라 나해왕(奈解王) 때의 일이다. 이 당시에 신라의 강역은 경상좌도(慶尙左道)에 그쳤는바, 아리나예하는 마땅히 한나라의 대수(大水)로, 만일 태화강이 아니라면 과연 낙동강을 가리킬 것이다. 일본인이 아리나예하가 압록강이라고 한 것은 망녕된 설이다.
○ 대동강(大同江) -옛날에는 패수(浿水), 대통강(大通江)이라고 하였다. ○ 비류강(沸流江)과 흑하(黑河)를 덧붙인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서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에 살았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현(浿水縣)의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臨浿縣)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 지리지를 보면 임패현이 없다.- 동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주(水經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허신(許愼)이 이르기를, “패수는 누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鏤方東入海]” 하였고, 어떤 데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 하였으며, 십삼주지(十三州志)에는 이르기를,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쪽에 있으며, 누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패수는 대개 패수현에서 나와 누방현을 경유하는 것이다. 옛날에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리가 없다. 그 지역은 지금 고구려의 국성(國城)이다.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을 찾아가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평양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의 조선현(朝鮮縣)을 경유하는데, 조선현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로, 한나라 무제(武帝) 때 설치하였다. 그런데 서북쪽으로 흐르므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고금(古今)의 일을 상고해 보건대, 일이 어긋난다. 이는 대개 《수경》에서 잘못 증험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東入於海]’ 한 곳의 동(東) 자를 위 구절에 붙이면 《수경》의 글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주서(周書)》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치소(治所)는 평양성(平壤城)이다. 그 성의 남쪽은 패수에 임해 있다.
《수서(隋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읍은 평양성인데, 산을 따라서 굽이지게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해 있다. 매년 초에 패수 가에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왕이 요여(腰輿)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펼쳐 놓고 이를 관람한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이 사는 곳은 평양성인데,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다. 성은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外城)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에 임해 있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요동(遼東)의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낙랑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통강(大通江)은 평양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패수이며, 강 가운데에 조천석(朝天石)이 있다. 당나라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여 사로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부》 주(注)에 이르기를, “평양의 기린석(麒麟石)은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에 들어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 위로 나와 승천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 당시의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하였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동강은 바로 옛날의 패수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통강은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데, 대동강이라고도 하며, 옛 이름은 패수이다. 《사기》를 보면, “진(秦)나라 때 요동고새를 수리하고는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으며, 한나라 초기에는 연인(燕人) 위만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서는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여러 종족 및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역속(役屬)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는 한나라의 순체(荀彘)가 요동에서 나와 조선을 쳐서 조선의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렀다.” 하였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에 패수현(浿水縣)이 있는데,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개 왕험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경》을 보면,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는 내호아(來護兒)가 강호(江湖)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로 들어갔는데, 평양과의 거리가 600리 되는 곳이었다. 얼마 뒤에 고구려의 군사에게 패하여 도로 해포(海浦)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다. 당나라 용삭(龍朔) 1년(661)에는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패수 가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평양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만력 21년(1593)에는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에 이르자, 왜적들이 온 힘을 다해 막아 지켰다. 이여송이 그곳의 지형을 헤아려 보고는, 동쪽과 남쪽은 모두 강에 임하여 있고, 서쪽은 산을 타고 있어 가파르며, 북쪽은 모란봉(牧丹峯)이 높이 솟아 있어서 최고의 요해처임을 알아내었다. 이에 이여송이 장수를 보내어 모란봉을 공격하게 하고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사면에서 성에 기어 올라가게 해 마침내 함락시켰다. 얼마 뒤에 이여송이 개성(開城)에 주둔해 있으면서는 별장(別將) 양원(楊元)을 평양에 주둔시켜 대동강을 제압해 군량을 운송할 수 있게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비류강(沸流江)은 강동군(江東郡)의 남쪽에 있는데, 한강(漢江)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강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한강조(漢江條)의 안설(按說)에 나왔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는 지금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바로 대통강(大通江)이다.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큰 근원이 있다. 남쪽의 근원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동쪽에 있는 문천성(文川城)에서 서북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의 서쪽 기슭에서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류강(沸流江)으로, 그 근원은 양덕현(陽德縣)의 오강산(吳江山)에서 나온다.- 산에서 나온 근원이 하나는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조금 북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초천(草川)이다.- 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북쪽에 있는 덕양(德陽) -삼가 살펴보건대, 양덕(陽德)으로 되어야 한다.- 의 동남쪽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초천은 그 근원이 양덕현 삼방령(三方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비류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이것이 패수가 되어 성천성(成川城)의 동남쪽 경계에 이르러 다른 남쪽 근원의 물과 합류한다. 남쪽 근원의 다른 하나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능성강(能成江)이다.- 는 동남쪽에 있는 곡산성(谷山城)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 다음 다시 굽이굽이 서북쪽으로 200리를 흘러 다른 남쪽 근원의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비류강은 서쪽으로 흘러 성천부의 북쪽에 이르러서 대동강과 합해지는바, 이곳에서 비류강이 성천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능성강과 합해진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곡산성 -삼가 살펴보건대, 곡산(谷山)은 오자(誤字)인 듯하다.- 의 남쪽을 지난 다음,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삼등성(三登城) 대목산(大木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 경계와 상원성(祥原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 근원의 물은 바로 대동강의 정원(正源)이다. 능성강은 그 근원이 두류산(豆流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곡산부의 북쪽 경계를 감싸 흐른 다음에 서쪽으로 흘러 삼등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대동강과 합류한다.- ○ 북쪽의 근원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동북쪽에 있는 양덕현(陽德縣) 북쪽의 우선산(遇仙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계(錦溪)로, 그 근원이 옛 순천(順川)의 강서산(江西山)에서 나온다.- 서쪽으로 흘러 동북쪽에서 흘러온 맹산성(孟山城) 동남쪽 산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굽이굽이 200리를 흘러 은산성(殷山城)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계는 서쪽으로 흘러 은산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북쪽의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막탄강(瘼灘江)이다.- 은 정평성(定平城)의 서북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맹산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덕천성(德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개천성(价川城)의 동북쪽 경계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막탄강은 그 근원이 맹산현의 안도리산(安都里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맹산현의 북쪽 경계를 지나 대동강에 들어간다.- 또 다른 정북쪽의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의 정원(正源)으로, 영원군(寧遠郡)의 내낙림(內樂林)에서 나온다.- 은 영원성(寧遠城)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큰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원성의 동쪽 경계와 덕천성의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천성의 동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다른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또 다른 근원에서 나온 물이 동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내낙림에서 나온 대동강이 서남쪽으로 흘러 덕천현의 동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막탄강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은산현(殷山縣)의 서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금계를 지나고서 다시 서쪽으로 흐른다.- ○ 여기에서 약간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은산성의 서남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산성(燕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자산(慈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동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강동성(江東城)의 서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상원(祥原)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은 바로 능성강이다.- ○ 여기에서 서쪽으로 100리를 흘러 중화성(中和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평양성(平壤城)의 동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쪽으로 흘러 평양성 남쪽을 지난다. -평양은 바로 옛 왕험성(王險城)으로, 기자(箕子)의 고도(故都)이다. 한나라 때에는 일찍이 낙랑군의 치소(治所)를 두었으며, 진(晉)나라 이후로는 고구려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당나라가 평양을 함락하자 고구려가 비로소 평정되었다. 오대(五代) 때에는 왕건(王建)이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는 비로소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다. 지금 성에서 동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금수산(錦繡山)이 있으며, 그 북쪽에는 순천성(順川城)이 있고, 또 그 북쪽에는 큰 산이 있다. 이 산은 동북쪽에 있는 영원(寧遠)에서부터 뻗어 내려와 서남쪽으로 향산(香山)이 되고,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순안성(順安城)이 되며,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와 무학산(舞鶴山)이 되며, 다시 남쪽으로 강 입구에 이르는데, 총 500리를 끊이지 않고 남쪽으로 패수를 감싸고서 내려온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은 중화성의 북쪽 산이 되어 안산(案山)이 되며, 여기에서 남쪽은 황주(黃州) 및 봉산(鳳山)이다.- 평양성 남쪽에서부터는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30리를 흐르는데, 이곳을 대동강이라고 한다. 대동강은 강서성(江西城)과 용강성(龍岡城) 두 성의 동남쪽을 지나 삼화성(三和城)의 동남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황주(黃州) 북쪽에서 흘러오는 흑하(黑河)가 동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오는 안악(安岳)의 물을 합한 다음 다시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 흑하는 그 근원이 상원(祥原) 동남쪽의 경계에 있는 큰 산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이 합해져서 서쪽으로 총 300리를 흐른 다음 상원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황주의 북쪽 경계와 중화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흘러 삼화성(三和城)의 동남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안악에서 흘러온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흑하는 아마도 흑교천(黑橋川)인 듯하다. 대동강이 남쪽으로 흘러 중화현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흑교천을 지난 다음 급수문(急水門)을 통해 나가는데, 남쪽으로 황주(黃州), 재령(載寧), 안악(安岳) 등처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 절양해(絶瀼海)를 이룬다.- ○ 안악에서 흘러오는 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어초천(於草川)이다.- 은 동북쪽에 있는 황주의 동쪽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주의 남쪽과 봉산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재령성(載寧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안악의 동북쪽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어초천은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 천자산(天子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주의 남쪽을 지난 다음 급수문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대동강과 절양해에서 만난다.- 또 다른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진(迎津)이다.- 은 서남쪽에 있는 바닷가의 장연성(長淵城) 동북쪽에 있는 부석산(傅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 송화성(松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화성(松禾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남쪽과 신산성(信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천성(信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북쪽을 지나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영진(迎津)은 그 근원이 송화현(松禾縣)의 달마산(達摩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신천군의 북쪽을 돌아 절양해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신천(信川)의 남쪽 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해주성(海州城)의 북쪽을 지나오는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전방천(箭防川)으로, 그 근원이 해주의 수양산(首陽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월당강(月唐江)과 만나 절양해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안악성의 동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다른 근원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어초천(於草川)이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90리를 흘러 동쪽에서 흘러온 흑하와 합류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 대동강은 이미 남쪽에서 흘러온 물을 합한 다음에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 800리를 흘러가는바, 조선의 서북쪽에 있는 큰 하천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동강은 바로 패수로, 그 근원은 영원군 내낙림의 백산(白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막탄과 금계 등 여러 물을 합하여 성천부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비류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사천(蛇川)을 지난다. 여기에서부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삼등현의 서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능성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합류한 물은 평양성의 남쪽을 돌아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으로 발로하(發蘆河)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급수문을 통과하면서 왼쪽으로 어초천을 지나고, 남쪽으로 월당강과 만나서 절양해가 되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살펴보건대, 《위략(魏略)》을 보면, “한(漢)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는 격수(湨水)를 조선과 연의 경계로 하였다.” 하였다. 격수는 하내(河內)의 물 이름으로, 《춘추(春秋)》를 보면, 양공(襄公) 16년 3월에 양공이 진후(晉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거자(莒子), 주자(邾子), 설백(薛伯), 기백(杞伯), 소주자(小邾子)와 더불어 격량(湨梁)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이곳이 연(燕)과 조선(朝鮮)의 경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격수는 패수(浿水)의 오자(誤字)이다. 그리고 《당서(唐書)》를 보면, 현경(顯慶) 5년(660)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저강(沮江), 요동(遼東), 평양(平壤)의 길로 나아갔으며, 지리지(地理志)에는 이르기를, “패강(貝江) 입구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을 얻었다.” 하였다. 저강(沮江)이니 패강(貝江)이니 하는 것도 패강(浿江)이 와전된 것이다.

부(附) 패수(浿水)에 대해 잘못된 것을 밝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漢)나라의 패수현(浿水縣)이었다. ○ 패수는 또한 이하(泥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물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어니하(淤泥河)는 해성현(海城縣) 성에서 서남쪽으로 65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요사》를 보면, “요양현은 한나라 때 패수현으로, 그 북쪽에 패수가 있는데, 또한 어하(淤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이라고도 하는데, 물 안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하였는데, 《대명일통지》에서는 이 설을 그대로 따랐으며, 이어 또 조선의 대통강(大通江)을 패수라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어니하는 그 근원이 성수산(聖水山)에서 나와 흘러 미진산(迷眞山)의 서쪽에 이르러서 흩어지는바, 이 물이 바로 요동 지방의 헌우락으로, 조선의 경계 안에 있는 패강(浿江)과는 같지 않다.
《사군지(四郡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계 안에는 세 개의 패수가 있는 듯하다. 그 첫 번째는 《사기》에 나오는 패수로,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넜다.” 하였는데, 이것은 압록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당서》에 나오는 패수로, “평양부의 남쪽 가는 패수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다. 세 번째는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패수로, 평산부(平山府)의 저탄(豬灘)을 패강(浿江)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세 개의 패수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이지 패수가 아님을 밝혔는데, 이것은 제대로 된 설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압록강은 바로 마자수이다. 마자수와 패수가 동시에 낙랑군과 현도군 두 군에 나누어 보이고 있으니, 압록강이 패수가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하였다.- 그리고 또 《요사》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요양(遼陽)의 패수는 참으로 한(漢)나라 때의 패수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요사》는 요양부(遼陽府)를 평양(平壤)이라고 하였으므로, 또다시 어느 한 물을 가리켜 패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요사》가 찬수되기 전에 나온 《당서》에 평양의 남쪽 가가 패수임을 분명하게 말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는 태반이 두찬(杜撰)인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고기(古記) 및 《요사》 지리지는 모두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나라의 여지(輿地)를 밝힐 수가 있다. 저탄(豬灘)을 가리켜 패수라고 한 것은, 이것은 가탁하여 이름한 것이니 따지고 말고 할 것도 못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에서 저탄을 패수라고 한 것은, 백제의 온조(溫祚)가 북쪽으로 패강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이다. 백제의 패강은 바로 곡산부(谷山府)의 능성강(能成江)이 대동강에 합해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단지 평양부의 한 패수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견이 좁아서 《사기》를 읽으면서는 문득 연(燕)과 진(秦)의 동쪽 경계가 지나치게 먼 것을 의심하고, 또 위만이 건넌 강이 대동강이 아닌 듯하다고 의심한다. 이것이 바로 세 개의 패수 설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연과 진의 동쪽 경계가 어디까지이며, 위만이 동쪽으로 건너와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지금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나라 때에서 멀지 않은 시대에 나온 《수경주》나 《주서》, 《수서》, 《당서》에서 평양성의 남쪽 물을 패수라고 한 것을 정확하다고 믿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연과 진의 동쪽 경계가 대동강을 지난 것과 위만이 살았던 왕검성(王儉城)이 평양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조선조(朝鮮條)에서 상세하게 밝혔다.
○ 월당강(月唐江)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불당강(月不唐江)은 황주(黃州) 안악현(安岳縣)의 동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불당강은 황주 안악현의 동쪽에 있는데,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지(舊志)를 보면, 안악현은 황주에서 남쪽으로 1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불당강은 바로 월당강이다. 그 근원은 서흥부(瑞興府) 웅파산(熊坡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서흥부의 남쪽을 경유하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봉산군의 남쪽을 경유하고서 북쪽으로 흘러 대동강과 급수문(急水門)에서 만난다.
○ 사수(蛇水) -어떤 데에는 다하(茶河)로 되어 있다-ㆍ타하(陀河)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龍朔) 2년(662)에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가 고구려와 사수(蛇水) 가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패하여 전사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開泰) 7년(1018)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蕭排押)이 고려와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사이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수는 평양의 서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용삭 초에 방효태 등이 고구려를 칠 적에 영남(嶺南)의 군사로써 사수에서 벽을 쌓았다. 송나라 천희(天禧) 2년(1018)에 거란이 고려를 정벌할 적에 사하(蛇河)와 타하(陀河) 두 물에서 싸워 패하고서 돌아왔다. 구지(舊志)를 보면, 두 물은 모두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사수는 그 근원이 자산부(慈山府) 웅초덕산(熊草德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요사》에서 이른 바 다하(茶河)를 《대청일통지》에서는 사수라고 하였는데, 이는 음이 비슷하여서 그런 것인가? 타하 역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물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 발로하(發蘆河)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2년(669)에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근행(李謹行)에게 조서를 내려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근행이 발로하(發蘆河)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서로 이끌고 신라로 도망갔는바, 4년 만에 평정된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함형(咸亨) 4년(673)에 연산도 총관(燕山道摠管) 이근행이 고구려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호로하(瓠蘆河)의 서쪽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내가 《당서》 유인궤열전(劉仁軌列傳)을 살펴보건대, 호로하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북쪽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로하는 평양성의 서쪽에 있는데, 당나라 때 이근행이 이곳에서 신라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로하는 경주(慶州) 서쪽 경계에 있다. 구지(舊志)를 보면,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 북쪽에 있다. 당나라 함형 4년에 이근행이 호로하의 서쪽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고, 함형 5년에는 유인궤가 동쪽으로 신라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 호로하를 끊고서 신라의 대진(大鎭)인 칠중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로하는 그 근원이 자산부의 자모산(慈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순안현(順安縣)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평양부의 서쪽을 지나 대동강에 들어간다. 유인궤가 건넌 호로하는 바로 장단부(長湍府)의 임진강(臨津江)인바, 발로하와 혼동하여 칭해서는 안 된다. 《자치통감》에서는 발로하를 잘못 호로하라고 하였는데, 호삼성의 주(注)에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유인궤가 건넌 물이라고 하였으며, 《대청일통지》에서는 또다시 잘못된 호삼성의 주를 답습하였으니, 전혀 틀렸다.
○ 청천강(淸川江) -옛날에는 살수(薩水)라고 칭하였다.
《수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우문술(宇文述)이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문술에게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기를 청하자, 우문술이 돌아왔다. 우문술이 살수를 건널 적에 고구려의 군사가 후군(後軍)을 습격하였다. 이에 크게 무너져서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鴨綠水)에 이르렀는바, 450리를 행군한 셈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살수는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의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옛 이름은 살수이다.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살수는 《대명일통지》를 보면,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바, 지금 성경(盛京)의 경계 바깥에 있다.” 하였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주성은 아래로 살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로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를 칠 적에 패한 곳이다. 또 청천강이라고도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천강은 안주성의 동쪽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역시 살수라고도 한다. 수나라 대업 8년에 우문술 등이 고구려를 칠 적에 압록수를 건너서 고구려의 대신인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우문술이 동쪽으로 살수를 건넌 다음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는데, 평양성이 험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우문술이 군사를 철수하면서 살수에 이르러서 군사가 반쯤 건넜을 적에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여러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 장사(將士)들이 앞을 다투어 도망쳐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렀는바, 450리를 행군하였다. 지금은 대령강(大寧江)이라고도 한다. 구지(舊志)를 보면, 평양과 황주는 서쪽으로 대령강으로 막혀 있고, 동쪽은 대통강(大通江)으로 막혀 있어서 ‘양쪽 강의 중간’이라고 이른다. 본조(本朝) 강희(康煕) 37년(1698)에 조선에 흉년이 들자, 조선에서 표문을 올려 중강 개시(中江開市)를 열 것을 청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저축해 둔 미곡(米穀)을 수로와 육로로 4만 석을 운송하여 중강(中江)에 이르러서 매매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천강과 대령강을 한 강이라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개시(開市)를 한 중강(中江)은 바로 압록강인데, 잘못 청천강이라고 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주의 서남쪽 경계에 청천강(靑泉江)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淸川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수구(水口)가 있다. 청천강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한 근원은 동북쪽에 있는 영원성(寧遠城) 동북쪽의 큰 산에서 나오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의 정원(正源)으로, 강계부(江界府)의 갑현(甲峴)에서 나온다.- 덕천(德川)의 동북쪽 근원에서 나와 흘러서 패수로 들어가는 물과 단지 한 산을 격하여 있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서천성(西川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희천성(煕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으로 지나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끼고 돈 다음 영변성(寧邊城)의 남쪽에 이르러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악산(岳山)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약산(藥山)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의 남쪽 기슭을 돌아 안주의 동북쪽에 이르러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 북쪽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공포(孔浦)이다.- 은 남쪽 근원에서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하고, 다시 서쪽으로 굽이굽이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천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여러 산의 북쪽 기슭과 이산(耳山)의 뒤쪽과 영변성의 북쪽 경계를 돈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악산의 서쪽 기슭을 돌아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포는 그 근원이 운산군(雲山郡) 유동령(柳洞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변부(寧邊府)를 돈 다음 남쪽으로 흘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주성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 500리를 흘러간다. ○ 두 근원의 물은 근원에서부터 합해지는 곳까지가 400리이며, 가운데에는 단지 20여 리의 사이를 두고 산으로 막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청천강은 옛날의 살수이다. 그 근원은 강계부의 갑현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희천군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영변부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공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주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해망(海望)의 모퉁이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부터 흘러온 대령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대령강(大寧江) -혹은 대정강(大定江)이라고도 한다. ○ 박천군(博川郡)에 있는 강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은 박천군(博川郡)에 있으니, 바로 옛날에 주몽(朱蒙)이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준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동사(東史)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또 박천강이라고도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천군의 서쪽에는 대정강이 있는데, 혹 대령강이라고도 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은 동북쪽에 있는 청천강(靑泉江) 북쪽 근원의 서쪽을 격해 있는 산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창성강(昌城江)으로, 그 근원이 벽동군(碧潼郡) 구계령(九階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태천현(泰川縣)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대령강으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령강의 정원(正源)으로, 의주의 천마산(天磨山)에서 나온다.- 과 합류한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박천성(博川城)의 남쪽에 있는 백벽산(白碧山)의 남쪽을 지나 북쪽에서 흘러온 운산(雲山)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송림천(松林川)을 가리키는 듯하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구성(龜城) 동북쪽 산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구성강(龜城江)으로, 그 근원이 구성부 팔영령(八營嶺)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태천현(泰川縣)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대령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받아들인 다음 남쪽으로 흘러 큰 산의 북쪽 기슭을 돌아 가산성(嘉山城)의 남쪽 경계와 안주성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400여 리를 흐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령강은 창성강, 구성강 등 여러 강의 물을 모은 다음 남쪽으로 흘러 청천강과 합류한다.- ○ 해구(海口)의 동남쪽은 청천강(靑泉江)과의 거리가 20리이다. 근원으로부터 흘러오면서 청천강과는 단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데 불과하다.
○ 압록강(鴨綠江) -옛날에는 마자수(馬訾水)라고 하였으며, 혹 애강(靉江),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한다. ○ 독로강(禿魯江)을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서개마현(西蓋馬縣)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지나는 고을이 둘이고, 1200리를 흘러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안평현(西安平縣)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하며,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의 북쪽에 있다.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가 있는데, 그 근원은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鴨綠)이라고 부른다. 강물은 국내성(國內城)의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安市)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평(安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를 타고 건너야 하므로 이를 의지하여 참호로 삼는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는 일명 압록강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이라고 한 것이다. 요동에서의 거리가 500리이다. 국내성의 남쪽을 지나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한 물과 합류하는데, 바로 염난수이다. 두 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의 물 가운데에서 이 물이 가장 커서 푸르고 맑은 물결이 일렁이며, 지나가는 나루에는 모두 대선(大船)을 놓아둔다. 그 나라에서는 이 강을 의지하여 천참(天塹)으로 삼는다. 물의 너비는 300보이다.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50리 되는 곳에 있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쪽으로 480리 되는 곳에 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서북쪽으로 거란과 접해 있다. 압록강을 의지하여 험고함으로 삼는데, 강은 너비가 300보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쪽으로 56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시(安市)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압록수에서 무위(武威)를 뽐내었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 압록강은 조선 국성(國城)에서 서북쪽으로 1450리 되는 곳에 있다. ○ 큰 강이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러 대통강(大通江)으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고, 큰 강은 바로 압록강 하류의 별파(別派)이며, 대통강은 바로 대총강(大總江)의 음이 변한 것이다. 뒤의 안설(按說)에 상세하게 나온다.
《명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전요지(全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요양성(遼陽城)에서 동쪽으로 53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 협주성(夾州城)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독로강(禿魯江) -삼가 살펴보건대, 독로강은 그 근원이 함흥부(咸興府) 설한령(雪寒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을 경유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을 지나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 다음 애주(艾州)에 이르러서 파저강(婆豬江)과 함께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일명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하며, 혹 애강(靉江)이라고도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익주(益州)는 지금의 의주(義州)로, 중국의 음으로는 같다.- 장백산 남쪽의 여러 시냇물이 남쪽으로 모여들어 큰 강을 이루어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가강(佟家江)과 만난 다음 다시 500리를 흘러 봉황성(鳳凰城)의 동남쪽을 돌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동남쪽은 조선과의 경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길림(吉林), 오라(烏喇)에서 남쪽으로 977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조선과의 경계를 나누며, 봉황성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옛날의 마자수이다.
《황여고(皇輿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하에는 세 개의 대수(大水)가 있으니,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鴨綠江)이 그것인데, 압록강은 또한 외이(外夷) 지역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바로 화이(華夷)의 경계가 된다.
《향조필기(香祖筆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 두 물줄기 외에 북쪽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하고 압록강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먼 변방 바깥에 있어서 우(禹) 임금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다.
《장거유서(莊渠遺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지(大地)의 산맥(山脈)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을 조산(祖山)으로 삼는데, 남쪽의 산맥과 북쪽의 산맥이 가장 크다. 북쪽의 산맥은 유연(幽燕) 지방에서 끝나는데, 대하(大河)가 이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 압록강과 만난다. 동쪽에는 하사(下沙)가 있는데, 이곳은 산과 물이 한 번 크게 모여 만나는 곳이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바로 옛날의 마자수이다. 그 근원은 장백산 남쪽 기슭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에서 나누어 나와 합류한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온 물이 동쪽에서 와 모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조선의 북쪽 경계에서 나온 몇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장백산 서쪽 지역의 이어진 산들의 남쪽 기슭에서 나온 모든 물이 십이도구(十二道溝)로부터 두도구(頭道溝)에 이르기까지 모두 몰려들어 수세가 비로소 왕성해진다. -강물이 남쪽으로 흘러 조선의 사산성(謝山城)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건천구(建川溝)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사산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서 흘러온 물이 모여든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인선위(因禪衛), 낙언성(諾言城), 소진성(小辰城)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신갈이보(新噶爾堡)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남쪽에 있는 삼산성(三山城)에서 나온 한 물이 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옛 보(堡)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십이구(十二溝) 및 십일구(十一溝)의 물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충천령(沖天嶺) 동쪽의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으로 십구(十溝), 구구(九溝), 팔구(八溝)의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칠구, 육구, 오구, 사구의 물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삼구, 이구 및 두구(頭溝)의 물을 받아들인다. ○ 삼가 살펴보건대, 사산성은 혜산진(惠山鎭)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고, 건천구는 아마도 허천강(虛川江)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며, 인선위는 인차외보(仁遮外堡)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낙언성은 바로 나난보(羅暖堡)의 음이 변한 것이며, 소진성은 바로 소농보(小農堡)의 잘못된 표기이고, 신갈이보는 바로 신갈파지보(新噶坡知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삼산성은 아마도 삼수부(三水府)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그 ‘삼산성에서 나온 물이 와서 합류한다.’ 한 것은 아마도 장진강(長津江)을 가리키는 듯하고, 옛 보는 바로 옛 갈파지보(葛坡知堡)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모아산(帽兒山)의 동쪽 기슭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굽이져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30리를 흐른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가운데에 모래밭이 있어서 서쪽으로는 이자구(李子溝)의 물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는 해낙이(該諾爾)의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으로 이하(里河)의 물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한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만포성(滿浦城), 발등성(發登城), 고산리성(高山里城) 세 성 -삼가 살펴보건대, 발등성은 바로 벌등성(伐登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세 진(鎭)은 모두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에 있다.- 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네 개의 작은 물이 흘러와서 모인다. -그 가운데 큰 것을 백마령하(白馬嶺河)와 파성자하(破城子河)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도로하(圖魯河)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독로강(禿魯江)의 음이 변한 것이다. 앞글에 나온다.- 가 동쪽에 있는 장걸성(張傑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강계부(江界府)의 음이 변한 것이다.- 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조금 남쪽에 마역하(馬驛河)가 있어 서쪽에서 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미원촌(未源村)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오로량수(五老梁水)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위수(渭水)로, 그 근원이 강계부의 두읍령(杜邑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위원군의 남쪽을 지나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가 동남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지고이성(地古爾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직동보(直洞堡)로, 중국음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이산(理山)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세 개의 작은 물이 서북쪽에서 와서 합류한다. -지고이성 북안(北岸)에 곧장 있는 것을 유수하(楡樹河)라고 한다. 또 그 남쪽에 작은 물이 있으며, 또 그 남쪽에 있는 것을 차구(叉溝)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가강(佟家江)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산양공성(山陽公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산양회보(山羊會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금하(東金河)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동건강(童巾江)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동건강은 그 근원이 초산부(楚山府)의 유도막령(踰都幕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산양회진(山羊會鎭)을 지나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소비성(小丕城), 대비성(大丕城), 필동성(必東城) 세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해하(東垓河) -삼가 살펴보건대, 소비성과 대비성 두 성은 바로 소파아진(小坡兒鎭)과 대파아진(大坡兒鎭) 두 진의 음이 변한 것이고, 필동성은 벽동군(碧潼郡)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동해하는 아마도 벽동천(碧潼川)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필동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소거류성(小巨流城) -삼가 살펴보건대, 소길호리진(小吉號里鎭)의 잘못된 표기이다.- 과 대수고성(大水高城), 대길로성(大吉魯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길호리진(大吉號里鎭)이다.- 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창성부(昌城府)의 자잔천(自潺川)이다.- 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상주걸하(常州傑河)가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오등성(敖登城)과 요곽이성(遼郭爾城) -삼가 살펴보건대, 오등성은 어정진(於汀鎭)인 듯하다. 요곽이성은 바로 묘동보(廟洞堡)로, 중국음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과 창성(昌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객점하(客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장점하(長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소자가하(蘇子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포서하(浦西河)가 서북쪽에 있는 대전(大甸)으로부터 흘러나와 남쪽으로 흘러 합류하며, 그 남쪽에 작은 물이 있어 흘러와서 모인다. 여기에서 숙주성(宿州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아포하(阿布河)가 서북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아포하는 바로 애합하(愛哈河)로, 그 근원이 애합변문(愛哈邊門) 바깥의 동북쪽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근원이 합해져 서남쪽으로 흘러 유조변(柳條邊)으로 들어가 석두성(石頭城)의 서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유조변을 나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애주성(愛州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 -삼가 살펴보건대, 의주의 옥강천(玉江川)인 듯하다.- 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세 갈래로 갈라져서 20리를 흘러간 다음 다시 합해져 구련성(九連城)의 동남쪽을 지난다. -구련성은 조선의 애주성과 강안을 마주하여 경계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강물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영아하(永阿河)가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의주의 서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합련하(哈連河)가 서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장백산(長白山)의 위치는 동경 11도 8분 북위 41도 9분이며, 강어귀의 위치는 동경 8도 북위 40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압록강은 그 근원이 백두산의 큰 연못에서 나와 땅속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나와 혜산진(惠山鎭)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 삼수부(三水府)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옛 무창(茂昌)의 경계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독로강(禿魯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초산부(楚山府)의 서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파저강(婆豬江)이 새외(塞外)로부터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의주(義州)의 북쪽에 이르러서 세 갈래로 갈라져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해져 하나가 된다. 청수량(淸水梁)에 이르러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 -중국 쪽에 있다.- 과 합해지고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된다. 이 두 갈래가 위화도(威化島)를 감싸 흐르다가 다시 합해져서 대총강(大總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덕래하(德來河) -바로 대령강(大寧江)의 상류이다-ㆍ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 -대매하와 소매하는 바로 압록강 상하의 요충지가 되는 진(津)이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서북계 연혁 취청천강이북지조(取淸川江以北地條)에 나온다.
○ 이하(泥河) -덕원군(德源郡)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북계 연혁 여발해접계조(與渤海接界條)에 나온다.
○ 활녈수(活涅水) -어떤 데에는 활녜수(活禰水)로 되어 있다-ㆍ벽등수(闢登水)ㆍ을리골수(乙離骨水)ㆍ삼잔수(三潺水) -이상의 여러 물은 정평부(定平府) 등지에 있다.
《금사(金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이록고수(移鹿古水) -함흥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합라로조(合懶路條)에 나온다.
○ 복간수(僕幹水) -함흥부 이북의 지역에 있다-ㆍ주아문수(注阿門水) -정평부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다-ㆍ도온수(陶溫水) -어떤 데에는 토온수(土溫水)로 되어 있다. 마땅히 온성부(穩城府) 등지에 있어야 한다-ㆍ도롱고수(徒籠古水) -바로 종성부(鍾城府)의 오롱소수(吾籠所水)이다.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여여진위계조(與女眞爲界條) 및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혼동수(渾疃水)ㆍ성현수(星顯水)ㆍ잔준수(僝蠢水)ㆍ소빈수(蘇濱水) -이상의 여러 물은 삼수부 등지에 있다.
《금사》 본기(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 연혁 휼품로조(恤品路條) 및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알목하(斡木河)
《쌍괴잡초(雙槐雜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주위(建州衛), 해서위(海西衛), 올자위(兀者衛) 등의 사람들은 먼저 알목하에 살면서 칠성(七姓)의 야인(野人)들과 원수 관계가 되어 조선으로 달아나 투항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알목하는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 무산령(茂山嶺)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회령부의 서쪽에 이르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당초에 알목하 지역은 여진의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조선 세종(世宗) 14년(1432)에 칠성(七姓)의 야인들이 알목하를 침공하여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를 살해하자, 그의 동생인 범찰(凡察) 등이 경원부(慶源府) 근처의 지역으로 옮겨 와서 살기를 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빈틈을 타 알목하에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 두만강(豆滿江) -혹은 토문강(土門江), 도문수(徒門水), 통문하(統門河), 아야고하(阿也苦河), 애호강(愛滹江)이라고도 한다. ○ 팔하천(八下川)을 덧붙인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열전에 이르기를, “고려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을 수축하자, 혼탄(渾坦)이 석적환(石適歡)과 도문수(徒門水)에서 군사를 합하여 고려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사》 석토문열전(石土門列傳)을 보면, 석토문은 한자(漢字)로는 신도문(神徒門)이라고 쓰는바, 이를 근거로 해서 보면 도문(徒門)이 토문(土門)임은 분명하다.- ○ 세기에 이르기를, “요나라에서 경조(景祖)를 생여진절도사(生女眞節度使)로 삼으니, 통문수(統門水)의 온적흔부(溫迪痕部), 신은수(神隱水)의 완안부(完顔部)가 모두 서로 뒤를 이어 와서 귀부하였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 꼭대기에는 연못이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토문강은 영고탑성(寧古塔城)에서 남쪽으로 6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조선의 북쪽 경계를 감싸고 흐른 다음 다시 동남쪽으로 꺾어져서 여러 물을 모아 바다로 들어간다.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대명일통지》를 보면, 아야고하가 있는데, 그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 장백산의 물 가운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토문강이 있을 뿐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없다. 살펴보건대, 《금사》의 유가열전(留可列傳)을 보면, 유가(留可)는 통문(統門)과 혼준수(渾蠢水)가 합류하는 지역의 오고륜부(烏古倫部) 사람이다. 지금 혼춘하(渾春河)가 남쪽으로 흘러 토문강과 합해지니, 통문은 바로 토문(土門)의 음이 변한 것이다. 또 《명사》 지리지를 보면, 도문하(徒門河)가 있는데, 강물은 건주위(建州衛)의 동남쪽을 지나 10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바, 이 강이 바로 도문하로, 아야고하와는 당연히 같은 한 물이다.” 하였다. ○ 토문강은 조선국의 서북쪽 경계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 동남쪽 기슭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萬曆) 20년(1592)에 왜병들이 평양에 모여 있으면서 격문(檄文)을 보내어 조선에 고하기를, “부산에서 평양까지 오는 데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그런 데다가 풍신수길과 가등청정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만강(豆滿江) 가에 이르게 하였는바, 그 일대가 모두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토문강은 그 근원이 장백산 꼭대기의 동쪽 기슭에서 나오는데, 이를 토문색금(土門色禽)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흘러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또 수십 리를 흐른다. 이곳에서 한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하고, 또 두 근원이 합해진 한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데, 이 두 물은 모두 장백산의 지봉(支峯)에서 나오는 물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한 물이 있어 두 근원의 물을 합하여 서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이 물 남쪽은 바로 조선국이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북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남쪽 둔치로 작은 물 두 개와 큰 물 하나를 받아들인다. -두 개의 작은 물은 모두 증산(甑山) 북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100리가량을 흐른다. 하나의 큰 물은 홍단하(洪丹河)라고 하는데, 그 근원은 서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세 연못에서 근원하는 물을 합하여 동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한 작은 물을 합한 다음 다시 북쪽으로 흘러 증산의 동쪽 기슭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홍단하는 바로 홍단하(紅丹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조금 동쪽에 아궤개토문(阿几个土門)이 있어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한 다음 동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아궤개색금(阿几个色禽)은 장백산 산꼭대기에서 동북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 있다. 그 서쪽은 바로 이아모색금(泥牙母色禽)과 이아고색금(泥牙庫色禽)인데, 서북쪽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이 되는 물이다. 이 물은 산 동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진 한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는데, 역시 토문강의 별원(別源)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00리를 흐르며 남쪽 둔치에서 두 개의 물을 받아들인다. -한 물은 어순하(魚順河)라고 하는데, 남쪽으로부터 두 근원에서 나온 물을 합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한 물을 합하여 300여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또 한 물은 파하천(波下川)이라고 하는데, 세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굽이굽이 2백 수십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파하천은 바로 팔하천(八下川)으로,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 원산(圓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다가 회령부성 북쪽으로 지나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큰 산의 동쪽 기슭에 이르러 꺾어져 북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온 두 개의 물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쪽 언덕에는 조선의 무산성(茂山城)이 있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쪽 언덕에는 조선의 양옹성(良雍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양영보(梁永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동북쪽으로 평지(平地) 가운데를 1백 수십 리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물 세 개를 받아들이는데, 그 동남쪽 언덕에는 바로 조선의 방산보(方山堡) 및 회령(會寧), 고령(高岭)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령진(高嶺鎭)이다-, 왕탄(王坦)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방원보(防垣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종성(鍾城), 동관(潼關), 옹대(雍大)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달보(永達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등 일곱 성이 있는데, 모두 강가에 있다. 이곳에서 한 작은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온다. 그 북쪽 언덕에서 큰 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기까지 사이에는 갈합리하(噶哈里河)가 있다. 갈합리하는 북쪽의 흥안령(興安嶺) 서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물을 합한 다음 꺾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복아합토하(卜兒哈兔河)를 합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하는데, 이 역시 큰 하천이다. 이곳과 마주한 남쪽 둔치에 바로 조선의 온성(穩城)이 있다. -갈합리하는 흥안령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합달하(哈達河)가 있어, 서북쪽에 있는 마아호리령(馬兒呼里嶺)의 큰 산에서 나와 몇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을 합한 다음 동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활혼산(活渾山)에서 나온 애의육하(艾衣六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활궤하(活几河) 및 동쪽에서 흘러오는 살기고하(薩其庫河)를 받아들이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살극득향령(薩克得享嶺)의 부아합하(付兒哈河)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합순하(哈順河)를 받아들인다. 갈합리하는 근원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이미 400여 리를 흘러왔는데, 이곳에서 다시 복아합토하가 서쪽에서 와서 합해져, 두 개의 큰 물이 와서 모이는 것이다. ○ 갈합리하는 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토문강과 합류한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꺾어져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세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한 물은 이름이 없고, 한 물은 호란하(呼蘭河)라고 하고, 한 물은 미첨하(米瞻河)라고 한다.- 여기의 남쪽 둔치에는 조선의 미천진성(美踐鎭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미전진성(美錢鎭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있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또 동영액하(東英額河)가 있어 흘러 와서 합류한다. 이곳의 서쪽 둔치에는 바로 조선의 순진성(循鎭城)이 있고, 남쪽은 경원부성(慶源府城)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휘춘촌(輝春村)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혼춘촌(渾春村)이다.- 의 서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휘춘하(輝春河)가 있어 동북쪽에서 나와 10여 개의 물을 합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휘춘하는 동북쪽에 있는 여러 산속에서 나와 서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우비첨사리하(牛非尖舍利河)와 서쪽에서 흘러오는 부답족혼하(夫答足渾河)를 합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면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서백하(西白河)와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심계랍고하(心鷄拉庫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합이달산(哈爾達山)의 물 및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 남쪽에서 흘러오는 호로하(虎魯河), 이아하(你牙河), 하화리하(下禾里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합달하(哈達河), 늑특하(勒忒河)를 합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합달하를 합한다. 그러고는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흐르면서 조선의 서쪽 언덕에서 흘러오는 물 두 개를 받아들인다. -한 물은 경원부(慶源府)의 남쪽 물로, 서남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고, 한 물은 전원포(前元舖) 앞 물로,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100여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경원부의 남쪽 물은 바로 오룡천(五龍川)으로,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의 갈성령(葛城嶺)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건원보(乾原堡)에 이르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전원포(前元舖)는 바로 안원보(安原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꺾어져 남쪽으로 20리를 흐른 다음 다시 꺾어져 동쪽으로 흐르면서 남쪽 둔치의 한 물 -바로 아산포(阿山舖)의 남쪽에 있는 한 물로, 길이가 1백 수십 리이다.- 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동북쪽으로 20여 리를 흐르면서 -바로 오아곤산(烏兒滾山)의 남쪽에서 80리쯤 되는 곳이다.- 동쪽 둔치에는 무산성(茂山城)이 있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무산(茂山)은 아마도 중국쪽의 성 이름인 듯하다.- 북쪽의 물을 받아들인다. 이 물 이름은 서수락천(西水洛川)으로, 그 근원이 동원(東源) -삼가 살펴보건대, 동해(東海)로 되어야 한다.- 가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물 두 개를 받아들이고, 다시 북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무산성의 동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무산성 북쪽으로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또 북쪽에 한 물이 있는데, 이름은 없으며, 그 남쪽 둔치의 물굽이진 곳에 바로 조선의 경흥성(慶興城)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의 위치는 동경 14도 5분, 북위 42도 5분이다. 해구의 남쪽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그 동쪽에 있는 하나의 산이 바로 대도살합(代都薩哈)이다. 또 동쪽으로 수십 리 되는 곳이 바로 서사하도(西思河島)이다. 섬과 산의 북쪽은 바로 화탁화하(火擢火河)의 해구이다. 이 강은 근원에서부터 1000여 리를 흐르는데, 서쪽 둔치의 경흥성에서 남쪽 물가까지를 색봉파(索鳳坡)라고 하고, 다시 남쪽으로 대해구(大海口)까지를 서수락성(西水洛城)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토문강, 도문강, 통문강, 두만강은 모두 한 강으로, 음이 변한 것이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을 보면, 장백산은 압록강, 혼동강(混同江),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하였다. 애호강은 바로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음이 변한 것으로, 역시 두만강이다. 두만강의 근원은 백두산의 남쪽, 갑산부(甲山府)의 천평(天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무산부의 서쪽으로 지나고 회령부의 경계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알목하(斡木河)와 팔하천(八下川)을 지난다. 여기에서 꺾어져 북쪽으로 흘러 온성부의 북쪽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갈합리하(葛哈里河) -중국쪽 지역에 있다.- 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경원부(慶源府)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후춘강(後春江) -바로 혼춘하(渾春河)로, 중국쪽 지역에 있다.- 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오룡천(五龍川)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경흥부의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 합란하(合蘭河)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란부(合蘭府),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지에 5개의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호리개(胡里改)로, 이곳에는 호리개강(胡里改江)과 혼동강(混同江)이 있으며, 또 합란하(合蘭河)가 있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호리개는 금나라의 호리개로(胡里改路)로, 지금 우리나라 육진(六鎭) 북쪽, 영고탑(寧古塔) 동쪽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연혁 합란부조(合蘭府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호리개강은 바로 오소리강(烏蘇哩江)이다. 지금 육진 북쪽의 물로써 스스로 바다에까지 도달하면서 크기로도 오소리강과 나란히 칭할 만한 강으로는 두만강이 있을 뿐이다. 그런즉 합란하는 바로 두만강인 듯하다.
부(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인 달단(韃靼)과의 경계 지역에 큰 강이 있는데, 이름을 보려천(保呂川)이라고 하며, 그 너비가 15리이다. 매년 8월에서 3월까지는 강물이 굳게 얼어 강을 메우는데, 얼음의 두께가 세 자 남짓이나 되어 육지에서와 같이 배 밑에 수레바퀴를 달아 밀고서 다닐 수가 있으며, 사람들은 신발 바깥쪽에 못을 박고서야 걸어다닐 수가 있다. 3월 이후에는 얼음이 풀려서 다시 큰 강이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보려천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너비가 15리나 된다고 한 것은 망녕된 것으로, 상고할 수가 없다.


 

[주D-001]그 동쪽의 바닷물은 : 원문에는 ‘其東南海水’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其東面海水’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수구가 …… 있다 : 원문에는 ‘縣海中有島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懸海中有島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03]우선산(遇仙山) : 원문에는 ‘右仙山’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여도(㻌島) : 원문에는 진도(鎭島)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및 …… 다음 : 원문에는 ‘之延山城之南’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及延山城之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홍천현(洪川縣) : 원문에는 홍주현(洪州縣)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善德王)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써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08]무협(巫峽) : 양자강의 상류에 있는 세 협곡 가운데 하나로,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주D-009]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10]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주D-011]백촌강(白村江) : 《당서》에는 백강(白江), 《삼국사기》에는 기벌포(伎伐浦)로 되어 있다. 강경(江景) 근처의 금강(錦江)이라는 설과 변산반도(邊山半島) 남쪽의 줄포만(茁浦灣)이라는 설이 있다.
[주D-012]서남쪽으로 …… 지나 : 원문에는 ‘西南流經黃磵縣山’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西南流經黃磵縣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또다시 …… 이르러서 : 원문에는 ‘又西南置燕岐縣之南’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又西南至燕岐縣之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 원문에는 ‘兩朝平壤錄’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5]임천(瀶川) : 원문에는 ‘臨川’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 낙동강(洛東江)이나 알천(閼川)이라는 설이 있으나, 반드시 고유명사로 보이지는 않고 대하(大河), 대수(大水)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7쪽 주》
[주D-017]요동고새(遼東故塞) : 이병도(李丙燾)는 요동고새는 바로 번한새(番汗塞)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쪽)》
[주D-018]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障)은 상하 두 곳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大同江) 북안(北岸)에 비정(比定)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주D-019]600리 : 60리의 잘못된 표기이다. 《수서(隋書)》에는 60리로 되어 있다.
[주D-020]다시 …… 이르는데 : 원문에는 ‘又西經南至三和城東南’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又西稍南至三和城東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격수(湨水) : 패수(浿水)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달라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은 대동강으로, 정약용(丁若鏞)은 압록강으로, 이병도(李丙燾)는 청천강으로, 북한의 학자들은 대릉하(大凌河)로 비정하여 일정하지 않다.
[주D-022]이곳이 …… 말인가 : 원문에는 ‘河與於燕朝鮮之界耶’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何與於燕朝鮮之界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 이에 대해서 김상기(金庠基)는, “이는 고려 측의 기록에 보이는 석천(石川) 즉 지금의 황화천(皇華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하와 타하 두 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다타이(茶陀二)의 이(二)를 숫자로 본 데서 나온 착오이다.” 하였다.《高麗時代史 99쪽 주》
[주D-024]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소자하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4쪽》
[주D-025]중강 개시(中江開市) : 의주(義州)의 건너편인 중강(中江), 즉 지금의 마자대(馬子臺)에서 열었던 중국과의 무역을 말한다. 임진왜란 중에 기황(飢荒)을 계기로 요동의 미곡(米穀)을 수입하기 위하여 선조 26년(1593)에 처음 열었으며, 난이 끝나고 선조 34년(1601)에 폐지하였다. 다음 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열었으며,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폐지하였다. 그 뒤 청나라가 개국하자 인조 24년(1646)에 다시 열었는데, 이를 중강 후시(中江後市)라 한다.
[주D-026]유가열전(留可列傳) : 원문에는 ‘有可傳’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7]홍단하(紅丹河) : 원문에는 ‘洪丹’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심계랍고하(心鷄拉庫河) : 원문에는 ‘心難拉庫河’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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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周世鵬)


○ 자는 경유(景游)요 호는 신재(愼齋)다. 신재의 《이훈록(彛訓錄)》에 이르기를, “첫째는 입을 삼가고, 둘째는 몸을 삼가며, 셋째는 마음을 삼가라.” 하였다. 생각하건대, 공은 자제들을 가르침에도 항상 이 세 가지로써 경계를 삼았고 공의 신(愼) 자로써 재(齋)의 이름을 한 것도 대개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본집(本集)
○ 신재는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여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하였는데 이날 밤 꿈에 사람이 흰실 8냥쭝을 주며 말하기를, “병이 나으리라.” 하였는데, 80일이 지나서 죽으니 비로소 8냥은 80일을 연장한다는 징조였음을 알았다. 동상
○ 가락촌(駕洛村)에 한 쌍의 흰 거위가 있었는데 그의 주인이 죽자 거처하던 집을 바라보며 몇 달을 슬피 울다가 죽으니, 한 거위는 그 죽은 거위를 품고 날개를 치며 슬피 우는데 그 소리가 낮았다 높았다 하여 보는 사람이 불쌍하게 여겼다. 신재는 의로운 거위의 기(記)를 지었다. 동상
○ 일찍이 유동(柳洞)의 개천 위에 자리잡고 살면서 이름을 남고(南皐)라 하고 매양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는 반드시 올라가 소풍하면서 이와 같은 소원을 다 이루지 못함을 항상 한으로 삼았다. 동상
○ 일찍이 단양(丹陽)의 거북 못에서 놀 때 군수 정신환(鄭信還)과 석주탄(石柱灘)에서 쉬었는데, 그때에 정공은 나이 60으로 수염이나 살쩍이 눈과 같이 희고, 신재(愼齋)는 나이 50인데 수염이나 살쩍이 역시 눈같이 희었으므로 서로 보고 한 번 웃고 드디어 그 땅의 이름을 ‘이호대(二皓臺)’라 하였다. 동상
○ 아버지의 상을 만나 묘에서 시묘하면서 3일 만에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한 번도 사실(私室)에는 들지 않았다. 기르는 개가 항상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니는데 이 개에게 고기를 주면 먹지 않으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효성에 감동되어서라고 하였다. 동상
○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죽계 백운동(竹溪白雲洞)에 서원을 지었는데 현판을 소수(紹修)라고 하사하였다. 서원의 건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죽계지(竹溪志)》
○ 아버지가 홍시를 즐겼으므로 자기는 종신토록 차마 홍시를 먹지 못하였다. 〈행장〉
○ 나이 7세에 어머니가 병으로 오랫동안 빗질을 하지 못하므로 친히 스스로 기름을 바르고 머리를 어머니 머리에 맞대서 이가 건너오도록 하여 이를 없애니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동상
○ 일찍이 홍문관에 있을 때 어떤 제학의 주장하는 의론이 정당하지 아니하니, 경유(景游)는 그의 면전에서 배척하여 말하기를, “공은 직제학(直提學)이 아닌 곡제학(曲提學)이라.”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운 빛을 하였다. 《병진정사록》
○ 세상에서는 장연(長淵)의 백사정(白沙汀)은 서해의 절경이라고 칭찬하는데, 그 곳은 모래가 쌓여 흰 눈 같으며 절로 능선과 골짜기를 이룸이 한둘이 아니었다. 찬 소나무와 해당화가 서로 비쳐 우거지고, 홀로 높이 서서 눈을 이고 공중에 솟아 있는 것을 비로봉(毗盧峰)이라 부른다. 그러나 바닷바람이 모래를 후려치면 비록 백 척의 장송(長松)이라도 1년이 못되어 묻혀버리므로 비로(毗盧)의 명칭은 길이 존재하나 비로의 봉우리는 일정하지 아니하다. 신재집(愼齋集)
○ 견문산(犬門山) 탄금대(彈琴臺) 아래에 금휴포(琴休浦)가 있는데 신재(愼齋)의 시에,
월낙탄 머리에 짧은 노를 저어가 / 月落灘頭移短棹
금휴포 어구에서 장안을 바라보도다 / 琴休浦口望長安
하였다. 본집(本集)
○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자. 호는 회헌(晦軒))의 사당 앞에 깎아지른 석벽이 있는데 경(敬) 자를 새기고자 하였다. 서원의 모든 벗들이 다 세속에 괴이하게 여김만 취할 뿐이라고 경계하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스스로 마음에서 공경할 것이지 어찌 굳이 돌에다가 이것을 새겨야만 하는가?” 하여, 세붕도 감히 강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옹(晦翁 주자(朱子))의 경(敬) 자에 대한 설문(說文)을 얻은 후에야 모든 벗들 앞에 열어 보이고 말하기를, “선천(先天)의 모든 그림도 오히려 새겼는데 유독 경(敬)자를 새기는 것만 불가한가?”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경’자는 구차함의 반대됨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다면 이는 곧 불경(不敬)한 것이며, 이는 진실로 우리 회헌(晦軒 안유(安裕))이 회옹에게 부합되는 것이니, 더욱 새기지 않을 수 없다. 묘원(廟院 사당과 서원)은 비록 오래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이 새긴 것이 벗겨 떨어지지 않는다면 1천 년 후에 이것을 칭하여 경석(敬石)이라 하면 족한 것이다.” 하였던 바 모두 그렇다고 하여서 드디어 새겼다. 《죽계지(竹溪志)》
○ 학전(學田)을 설치함은 예로부터 있었다. 진실로 학자들로 하여금 집을 넉넉하게 한다면 비록 밥을 싸가지고 와서라도 배우면 좋겠지만은 만일 가난에 시달린다면 비록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형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슬프다! 밥을 쌀 만한 자는 밥이 있어도 취학하지 않고, 취학할 만한 자는 뜻은 있어도 밥이 없으니, 우리의 학문은 어찌 될 것인가. 이것이 진실로 서원(書院)의 밭을 갖고자 하는 까닭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격으로서 이 고을을 욕되게 맡아서 이미 문성공(文成公)의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모셨다. 생각하건대, 사당이 있으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여기에 서원을 세웠고, 또 생각하건대, 서원이 있으니 전지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이에 전지(田地)를 설정하고, 곡식으로 보(寶 어떤 사업을 위해 돈ㆍ곡식 등을 기금으로 하고 그것을 이용하던 재단)를 세워 우리 학도의 학업을 위한 공급재원으로써 약간의 결복(結卜) 밭을 만들어 해마다 벼 몇 섬과 쌀 몇 섬이 들어오고, 고을에 살고 있는 진사 황빈(黃彬)이 벼 75섬을 내어서 도왔으니, 봄과 가을의 제향을 지내고 남는 것으로 유학하는 선비들을 먹여 주기에 족하였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건녕부 숭안현(建寧府崇安縣)〈학전기(學田記)〉 및 옥산유씨(玉山劉氏) 〈의학기(義學記)〉를 읽고 감동한 바 있노라. 저 숭안(崇安)의 조씨(趙氏)가 다섯 군데의 폐허가 된 절의 밭을 취하여 학전에 돌렸으니, 주자는 이미 그 일거양득을 기뻐한 것이다. 그렇다면 숙수사(宿水寺)의 황폐한 터에다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세운 것도 한갓 어리석고 놀라는 의혹을 일소할 뿐만 아니요, 성조(聖朝)가 유학을 중하게 여기는 데에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날 밭을 일으킴은 곧 조후(趙侯)의 옛날 마음이요, 옥산(玉山)의 유씨(劉氏)에 이르러서는 능히 자기의 전답을 나누어 집을 세우고 스승을 초빙하여서 그의 자제를 가르치는데, 지방 사람이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배우도록 허락하였으니, 황씨(黃氏)가 오늘날 벼를 내놓음은 곧 옛날 유씨의 의거이다. 그러므로 두 기록을 아울러 새겨서 뒤의 군자에게 고한다. 아! 이 고을을 다스리는 자는 모두 나의 오늘날 마음을 품고, 이 고을에 사는 자는 모두 황씨의 오늘날 의로움을 품는다면, 이 밭은 백세(百世)를 지나도록 세력 강한 자에게 빼앗길 우려는 반드시 없을 것이며, 역시 오늘날과 같이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서원에 처해 있는 자는 또한 능히 살피고 충효의 성품을 다하여 내고 들이는 데 억지로 맞추는 사사로움이 없는 연후에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그 역시 힘써야 한다. 동상
○ 나는 6살에 《소학(小學)》을 배워, 이미 회암(晦菴) 선생이 공자를 계승하여 후학을 계몽함을 알았으며, 10세에는 사서의 주해를 외고 곧 오경을 읽었으니, 더욱 선생께서 평생의 고심함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교수(敎授) 진택(秦澤) 씨의 집에서 회암 선생의, ‘학문은 성현을 구함이요, 솔개는 날고 고기는 뛴다[學求聖賢 鳶飛魚躍].’는 8자의 큰 글씨를 얻어 보았다. 교수가 말하기를, “우리의 큰 외숙 재상 변수(邊修)가 연경(燕京)에서 얻어온 것이다.” 하므로, 곧 모각(模刻)을 박아다가 잡록(雜錄) 끝에 철해 두고, 깊이 성찰하여 주자보다 뒤에 태어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개 앞의 4자는 곧 학문하는 길을 지시함이요, 뒤의 4자는 요긴하고 묘한 이치가 나타난 것이다. 아아! 지극함이여. 옛날 소강절(邵康節)은 검속(檢束)이라는 두 큰 글자를 썼는데, 선생은 일찍이 그 글씨에 발문을 쓰기를, “강절 선생은 스스로 말하되, ‘큰 글씨를 씀은 뜻을 쾌하게 함이다.’ 하였으나, 그 필적의 근엄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지금 선생의 8자의 큰 글자는 선생이 우리 유학에 심력을 소모시킴이 매우 대단하건만 선생이 소자(邵子)의 글씨에 발문을 써서 발양한 것 같이 선생을 위하여 발양한 바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하랴. 앞의 4자는 학자들에게 다른 학문을 구하지 말고 반드시 성현을 구하라는 것이며, 연어(鳶魚)의 말씀 같은 것은 더욱 느낀 바 있으니, 이는 진실로 자사(子思)가 잘 당겨서 비유한 것인데 선생이 다시 4자로써 가르침을 삼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군자의 도는 시초를 부부(夫婦)에서 시작하여 그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를 살피게 되나니, 그런 후에 그 가르친다는 바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성현의 학문으로부터 시작하나 그 요점은 사단(四端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知))을 확충하고 사물(四勿)을 경계하여 삼강(三綱)이 거행되고 온갖 세목이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直)하고 방(方)하고 대(大)하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공경하여 안을 곧게 하며, 의로워 밖을 바르게 함이니, 진실로 능히 곧고 바르면 나의 기(氣)는 절로 커져서 천지간에 꽉차게 되나니, 그러므로 ‘그 기라 하는 것은 의(義)와 도(道)를 배합하니 이것이 없으면 허기지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솔개와 물고기는 하늘과 깊은 물에 있어서, 그 하나는 날고 하나는 뛰지만 둘 다 천지의 쌓인 기운을 탄 것이다. 진실로 사람마다 마음 가운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쌓게 한다면 사람은 각각 솔개와 물고기에 있어서와 같이 내 마음속의 하늘과 깊은 물에 날고 뛰게 될 것이다. 한 이치가 살아 활발해지면 천지간에 가득차게 되나니, 아! 슬프다. 어찌 오직 솔개와 물고기뿐이리오. 옛날부터 성현들의 즐긴 바가 여기에 있는데 나 홀로만 이것을 가져서 맛보게 되니,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 우선 이것을 써서 동지들과 같이 이 말에 종사할 것을 청하노라.” 하였다. 동상
○ 내가 태백산과 소백산의 모든 절을 보니 그 기둥과 집은 신라 시대로부터 흘러 전한 것이요 그들의 받드는 바는 곧 삼강(三綱)을 침체시켜 없애는 귀신이다. 그런데도 그 무리들이 믿고 지킴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문성공(文成公)이 학교를 창시하고 삼강을 밝혀서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를 붙들어 세운 것이랴. 그러나 그 고향 마을의 한 사당을 오히려 길이 보존하지 못한다면 또한 문헌(文獻)있는 옛나라의 부로(父老)나 사문(斯文)의 큰 부끄럼이 되지 않겠는가. 진실로 모든 부로와 모든 사문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여기에 공경을 바친다면 나는 그 사당이나 그 서원이 영구히 보존될 을 믿어 의심하지 않노라. 말이 거듭되고 글이 중복되어도 스스로 그칠 줄을 알지 못함은 오히려 그 지키는 자가 삼가지 못하여 태백산과 소백산의 모든 중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해서이다. 동상
○ 풍기(豊基)의 〈고적기(古跡記)〉에, “풍기군(豊基郡)은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으로 흙으로 쌓은 옛 성터가 있는데 주위가 매우 크다. 전하는 말에 성서천(城西川)에는 예전에 다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다락다리[樓橋]라 칭했으며, 성 북쪽 큰 길은 곧 저자의 거리로써 욱금동(郁錦洞)을 끊어서 점방산(占方山)에 가로 걸쳤는데 그 위에는 사장(射場)이 있다 하여 그를 북청천(北廳川)이라고 칭했다 하나, 어찌 그 때 냇물 위에 활 쏘는 청사가 있었겠는가. 삼국(三國) 초에 고구려가 가장 강하여 영남의 여러군 즉 급벌산(及伐山)순흥(順興)ㆍ내기(奈己) 영천(榮川)ㆍ옥마(玉馬) 봉화(奉化)ㆍ매곡(買谷) 예안(禮安)ㆍ임하(臨河)ㆍ진안(眞安) 진보(眞寶)ㆍ청기(靑己) 청송(靑松)ㆍ안덕(安德)ㆍ우시(宇尸) 영해(寧海)ㆍ시홀(尸忽) 영덕(盈德)ㆍ아혜(阿兮) 청하(淸河)같은 곳이 모두 그에 속하였으나, 홀로 기목(基木)만은 계림(鷄林)과 거리가 가장 멀면서도 우뚝히 막는 울타리가 되어서 적아(赤牙) 은풍(殷豊)의 서쪽을 마침내 털끝만치도 동요시키지 못하게 했으니, 그 웅장하고 강함은 천 년이 되어서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건대, 아달왕(阿達王) 3년인 병신년에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고 5년인 무술년에 죽령(竹嶺)의 길을 만들었다 하는데, 곧 한(漢) 나라의 환제(桓帝) 12년이다. 상원봉(上元峰)에 옛 길의 흔적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는, ‘상원사(上元寺)는 곧 옛 원의 터전이라.’ 한다. 죽령의 길이 트이지 않았을 적에는 고구려가 반드시 이곳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죽령의 구부러져 나간 남쪽에는 두솔봉(兜率峰)이 있어서 극히 높게 솟았는데 기도하면 곧 응험이 있었다. 그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고을과의 거리가 5리 정도에서 불쑥 큰 길에 임박한 것은 등강성(登降城)이라 하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이 산에 오른 지 7일 만에 백제(百濟)가 항복한다는 글이 왔기 때문이며, 태조의 초상이 지금도 용천사(龍泉寺)에 있는데 단정하고 엄숙하며 온화하고 명랑하여 바라보면 애착할 만하니 참으로 하늘 같은 얼굴이었다. 한 번 노(怒)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만세에 힘입었으니 왕씨(王氏)가 미약하였다면 우리는 그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다. 사문(斯文) 임제광(林霽光)이라는 이가 고을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서 불이나 초상은 완전했지만 사당집은 다시 일으키지 못하였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우리 문종(文宗)의 태(胎)가 명봉산(鳴鳳山)에 매장되었고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世宗妃))의 태 및 고려(高麗) 세 왕의 태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 안장되어 하나의 산에 어태(御胎)를 안장한 곳이 네 곳에 이르고, 한 고을에 어태를 안장함이 다섯 곳이니 다른 고을에는 있을 수 없는 바이다.
내가 보니 소백산은 북쪽에서 오다가 서편으로 뛰어서 그 결구된 것이 지극히 웅대하여 검푸른 빛이 하늘의 반을 가로질렀고 모든 봉우리의 안에 있는 것은 또 모두 빼어나게 피어서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어 솟구치는 것 같아 한 번 바라보니 울울창창하여 그 기르고 도움이 무궁함을 알겠도다. 그 휘돌아 동쪽으로 온 것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져 높이는 아홉 길에 미치지 못하며 거북이 엎드린 것 같은 것은 영구(靈龜)라 이르니, 곧 문성묘(文成廟)의 진산(鎭山)이다. 묘(廟)에서 산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이는 죽주(竹州)의 남은 터라.’ 하여, 그 자취가 완연하였으나 나라 역사[國乘] 및 지지(地誌)에는 모두 상고할 수 없으니, 대저 문헌을 고증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이 많다. 순흥(順興)은 급벌산(及伐山)으로부터 급산(岌山), 순정(順政), 순안(順安), 흥녕(興寧), 흥주(興州), 순흥(順興)으로 모두 7번이나 이름을 고쳤다가 마침내 이보흠(李甫欽)에서 그쳤고, 풍기(豊基)는 기목(基木)에서 연유하여 기주(基州), 기천(基川), 영정(永定), 안정(安定)으로 다섯 번 이름을 고쳤다가 지금 이름으로 되었으니, 앞일을 우러르고 다음 일을 굽어볼 때 나는 그 몇 번이나 폐하고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이 한 고을을 들추어 보면 천하의 일을 알 만하다. 슬프다. 세상에는 눈을 가로 뜨면서도 스스로 영리만 생각하는 자가 있으니, 역시 그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울러 이것을 기록하여 착한 것에 향하는 자를 위하여 권면하노라.” 하였다. 《죽계지(竹溪志)》
○ 풍기의 풍속을 숭상하는 기문(記文)에, “풍기군은 영남(嶺南) 일원에서 가장 높은 등성마루에 있고 그를 덮은 것은 소백산이요, 그 흐르는 것은 3강인데 순흥(順興)이 옮겨져 속함으로부터 더욱 시서를 돈독히 하여 교학(敎學)에는 안 문성공(安文成公)ㆍ문정공(文貞公)ㆍ문경공(文敬公) 등 제공의 유풍(遺風)이 있어서 사람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효도하며 공순함으로써 근본을 삼고 선비된 자에 이르러서는 염치있고 곧고 발라서 스스로 지켜 힘쓰지 않음이 없어 그 풍속을 보건대 잘 순화되었으며 아직 이리처럼 사납고 불손하며 탐내서 의리를 잊은 자가 있음을 듣지 못했는데, 유독 괴상스러운 것은 여지지(輿地志)에는, ‘풍속은 강한 이리와 같다.’ 하였으니, 어느 시대의 기록인지 모르겠으며, 풍성한 땅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욕됨을 받게 하였으니,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오늘날 풍속의 숭상함을 기록하여 뒤의 풍속을 채취하는 자로 하여금 취사할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동상
○ 전 훈도(訓導) 황한필(黃漢弼)이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 나이 90에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은 비록 배운 바가 깊고 얕음은 있을지라도 모두 그 여파가 서서히 뻗쳤으니, 곧 우수동주(愚叟洞主) 한충(漢忠)의 형이며 성균학정(成均學正) 황준랑(黃俊良)의 큰 아버지이다. 처음 한충은 생원으로서 태백산 우수동(愚叟洞)에 은거하여 스스로 우수동주(愚叟洞主)라고 불렀다. 그가 저술한 것으로는 《화당시고취(和唐詩鼓吹)》 2권이 있다. 동상
○ 농암(聾岩) 상공(相公) 이현보(李賢輔)의 자는 비중(棐仲)이다. 벼슬을 내놓고 예안(禮安)에 살면서 몇 번이고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별장은 군의 동쪽에 있었다. 집 앞에는 소나무가 있어 비스듬히 펼쳐진 일산 같았는데, 멀리 티끌 세상 밖에 뛰쳐 나와서 여름에 더위를 받지 않으므로 공이 오면 반드시 그 밑에서 바둑을 두고 노니, 얼굴은 붉고 머리는 희어서 바라보기에는 마치 신선과 같았으며 온 고을이 그 덕에 감화되었다. 동상
○ 백운동(白雲洞)에서 주문공(朱文公 주자(朱子))의 〈백록동부(白鹿洞賦)〉에 차운(次韻)하여 이르기를,
엄숙히 옥계(궁궐의 뜰)에서 은총을 받듦이여 / 肅承恩于玉階兮
흥주의 옛 고을을 맡았다 / 宰興州之舊疆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어른께 공경함을 생각함이여 / 念孩愛而長敬兮
뉘라서 첫 번에 타고 난 것이 좋지 않다고 이르리 / 孰云初賦之無良
회헌의 옛 마을을 물었음이여 / 咨晦軒之故里兮
연당(연묵지(硯墨池)를 가리킴)에 벼 심겨져 있음을 민망히 여기도다 / 悶䆉稏於硯塘
연묵지(硯墨池)는 지금 버려져서 수전(水田)이 되었음
죽계(竹溪)를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음이여 / 泝竹溪而窮源兮
소백산의 드높은 멧부리를 우러러 보도다 / 仰小白之嵬岡
아름다운 그 사람의 순미(純美)함이여 / 猗若人之純美兮
홍황(洪荒)(아직도 세상이 개명되지 않은 때)에 일월을 내걸었도다 / 揭日月於洪荒
주자를 예배하고 공자를 바라봄이여 / 謇禮朱而望孔兮
꽃다운 것을 먹고 향기로운 것을 마셨도다 / 顝食菲而飮芳
장획(노비)을 얻어서 도를 보호함이여 / 納臟獲以衛道兮
마음을 우리 학교에 기울였도다 / 勤一心於我庠
돌아보면 내 학문 한 잔의 고인물 같음이여 / 顧余學之杯潦兮
일찍이 뜻은 대양을 바라봄에 두었도다 / 夙有志於望洋
닭의 울음에 놀래어 부지런하게 함이여 / 惕鷄鳴以孜孜兮
하늘 운행의 굳셈을 본받는도다 / 法健行於天運
웅덩이에 찬 후에 나가는 것을 이해함이여 / 諒盈科而後進兮
진실은 저 근원이 있는 물이 끊이지 않고 흐름이로다 / 夫固原泉之混混
진실로 중용(中庸)에 의지해서 얻음이여 / 苟得依乎中庸兮
역시 숨어서 행함을 달게 여기도다 / 亦甘心於幸遯
전 사람들의 닦음을 따라서 힘쓸 점이여 / 跂前脩而黽勉兮
답하고 물음에 미치지 못함을 개연하게 여기노라 / 慨無及於答問
하물며 공자를 배향함이여 / 矧克配於宣尼兮
모든 자제들과 더불어 한가지로 나가리이다 / 與群弟而同進
오직 성스러운 조정의 제향을 드림이여 / 惟聖朝之致享兮
따라서 주현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으리로다 / 逮州縣而無倦
저 어찌 마을 사당에 제사를 빠뜨리리 / 夫何里社之闕祀兮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을 남길 것이다 / 俾遺恧於來孫
햇수는 이백 사십 년이여 / 年二百又四十兮
황연히 그 시초의 논리를 듣는 듯하도다 / 况親承其緖論
숙수(땅 이름)의 옛 절터를 찾음이여 / 訪宿水之古寺兮
당시의 글 읽음을 알겠도다 / 認當年之讀書
흰 구름이 가로놓여 어제와 같음이여 / 白雲橫而如昨兮
지인(지극히 훌륭한 사람)은 아득히 그 모습 알겠도다 / 至人夐其楷模
폐허된 자리를 걷다가 오래 멈춤이여 / 步廢礎而延佇兮
마을 노인을 불러 이를 의논하도다 / 招巷老而是諏
맑은 봉우리 눈썹을 높이 하고 형상을 바침이여 / 晴峯軒眉而獻狀兮
깊숙한 시내 비파소리를 머금고 급히 달려오도다 / 幽澗含瑟而爭趨
묘 지을 땅을 얻은 기쁨이여 / 喜立廟之得地兮
서원을 계속하여 계획함을 즐겨하도다 / 樂書院之繼圖
저 유생들의 물결같이 좇음이여 / 彼章甫之波從兮
쏟아지기 큰 개울을 터놓은 것 같도다 / 沛如水之决渠
농사 때를 뺏지 않음을 생각함이여 / 思不奪乎農時兮
세월이 쉽게 가버릴까 두려워하도다 / 懼日月之其除
백록서원 경영함을 회상함이여 / 想白鹿之經營兮
마음은 만 년 지나도 서로 부합하도다 / 心萬古之一符
마을 이름 고쳐서 백운이라 이름함이여 / 改洞號曰白雲兮
나의 일이 꼭 될 것을 맹세하도다 / 矢我事之或集
엄연한 묘의 모습의 빛나고 빛남이여 / 儼廟貌之煥赫兮
또한 남겨진 초상을 맞아들임이로다 / 又遺像之延入
시냇물에 풀잎 있고 산에는 잣나무가 서 있음이여 / 溪有毛兮山有栢兮
거의 변두를 잇달아 바칠 만하도다 / 庶籩豆之可給
그윽한 난초를 맺고서 공경함이여 / 結幽蘭而欽欽兮
슬프도다! 끊어진 계통을 뉘라서 이을건가 / 悵絶緖之誰緝
당과 단을 짓고 책을 쌓음이여 / 闢堂壇而藏書兮
강하고 익힘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도다 / 冀有補於講習
물이 황황히 솟아 끊이지 않음이여 / 水洸洸其不舍兮
산은 높고 높게 탁월하게 서 있도다 / 山巘巘其卓立
어찌 도끼자루의 법칙이 멀리 있다고 할 것인가 / 豈柯則之在遠兮
오직 변함없는 덕을 놓치지 않고 잡을 것이로다 / 惟一德焉允執
비유하건대 맑은 못에 달이 박힌 것 같음이여 / 譬淸潭之印月兮
또한 뉘라서 손으로써 주울 것인고 / 又孰可以手拾
하였다. 난(亂)에 말하기를,
회옹과 회헌이 / 晦翁晦軒
한 가지 구슬을 꿰었도다 / 貫一璆兮
골짜기가 백운에 들어가서 / 洞入白雲
번거로이 드리운 나뭇가지를 쳐냈도다 / 剔繁樛兮
묘에 여지(열매과일)를 드림직하고 / 廟可薦荔
당은 놀 만하도다 / 堂可遊兮
산은 높고 물줄기는 기니 / 山高水長
함께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하도다 / 偕止流兮
후대의 철인을 기다리니 / 以俟來哲
다시 무엇을 걱정하리오 / 復何憂兮
오직 배부름과 편안함은 / 惟飽與安
구하는 바 아니로다 / 匪所求兮
하였다. 《죽계지》
○ 백운동(白雲洞)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운 규칙
1, 제사를 삼간다. [謹祀]
2, 어진 분을 예우한다. [禮賢]
3, 집을 잘 수리한다. [修宇]
4, 쌀창고를 갖춘다. [備廩]
5, 서적을 점검한다. [點書]
대저 삼가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어도 흠향하지 않고, 예우하지 않으면 어진 이가 이르지 않고, 집을 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허물어지고, 쌀창고를 갖추지 않으면 반드시 다 소비할 것이요, 서적을 점검하지 않으면 반드시 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문(斯文)이 총괄하여 검사하고 유사(有司)가 보아서 관장한다.
학전(學田 성균관에 내려준 땅)에서 나오는 것은 매년 11월에 원장이 책 3권을 만들어 하나는 관(官)에 들여놓고, 하나는 사문(斯文)에 보고하고, 하나는 원(院)에 두게 한다. 빗 주는 쌀[寶米 어떤 사업을 위한 기금을 만들 목적으로 이자를 붙여 꾸어 주었던 곡식]의 수납은 매년 정월에 책 3권을 만들어 전과 같이 보고하고, 반드시 본전은 두고 이식(利息)을 받아 이것을 쓴다.
별도로 문(文)을 업으로 하고 믿음 있고 행실이 좋은 한 사람을 뽑아 원장(院長)으로 삼고, 또 한 사람을 택하여 부원장을 삼아 함께 원(院)의 일을 주관한다. 원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멀리 살게 되면 비록 지성(至誠)이 있더라도 형세상 자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황폐할 것이니, 모름지기 5리 이내에 사는 사람으로 하는 것이 가하다. 춘추(春秋) 배향(配享)은 예로 계절의 끝 달[季月] 처음 정자 날[上丁]로 하지만, 이날에 유고(有故)면 둘째 정자 날[中丁]로 바꾸어 정한다. 유고(有故)라는 것은 나라에서 피하는 국휘(國諱), 사사로 피하는 사휘(私諱)같은 것이다.
대개 선성(先聖)의 제사는 반드시 봄ㆍ가을 중월(仲月)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끝달을 택한 것이다. 공은 이미 중월에 배향되었는데, 상사(上巳 삼짇날 음력 3월 3일)의 청명과 중양(重陽)의 가절은 곧 공이 평생 목욕하고 모여서 이곳에 놀았으니, 이것을 추모하여 제사하면 공이 반드시 즐거이 강흠(降歆)할 것이다. 제삿날에는 고을의 부로(父老)와 사문 수사(秀士)들이 모두 시내 위에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하고 서로 시를 읊고 돌아가면 소위 신과 사람이 화(和)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헌관(獻官) 3, 집사(執事) 6명을 둔다.
유사는 기일 7일 전에 사문에 고하여 헌관과 모든 집사를 미리 정한다.
치재(致齋 제관(祭官)이 된 사람이 3일 동안을 재계(齋戒)하는 것)하는 날 헌관은 장서(藏書)를 점검하여 볕에 쪼이고, 담장이나 집에 틈이 있는지 물이 새나를 살피고, 미곡(米穀) 등 물건을 회계(會計)하였다가 제삿날에 여러 사문과 같이 살펴본다.
사마유사(司馬有司)는 매절(每節)에 반드시 원(院) 안을 점검하고, 유사는 매월 반드시 점검한다.
읍재(邑宰)의 자제들이 이곳에 머물고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머물게 되면 인솔한 병졸들이 수직(守直)하는 집에 침입하여 폐를 끼칠뿐더러 동리에 다니면서 밥을 취해 먹어 분함과 원망이 일어나고,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심한 것은 묘정(廟庭)을 공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원도 삼가지 않고 깨끗한 방을 보고는 음란한 생각을 하고, 화옥(華屋)을 보고서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되며, 기왕를 헐고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들 자제들한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 같다. 아아! 세상에는 부형은 어진데 자제는 어질지 않은 자가 있고, 또 자제는 어진데 부형은 어질지 않은 자가 있으리니, 이들은 나의 말을 듣고 어찌 감동됨이 없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부형과 자제가 모두 어진 사람이 있을 것이요, 역시 부형과 자제가 모두 어질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이들에게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읍재(邑宰) 자제들이 책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
책을 마음대로 한다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아 훔치고 도둑질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자제들의 마음을 부형들이 어찌 다 알리오. 만약 책을 학원문 밖으로 가져 나갔다가 간혹 유실해 버리면 남이 꼭 훔쳐갔다 할 것이니, 그 부끄러움이 죽계(竹溪)의 물같이 흘러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부형된 사람이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제된 사람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큰 뜻이 있는데 책이 없어서 정성스럽게 와서 배우려 하는 군자는 일체(一切)를 이 예(例)에 구애하지 말 것이다.
과녁[射帿]를 세우고 활을 쏘며 잔치하고 노는 것을 금한다.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사문들의 조촐한 음주는 행해도 마땅한 곳이기는 하나, 무식한 부랑배가 기녀류(妓女類)에 취하며 어깨를 두드리고 소매를 잡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며 음일(淫佚)한 짓으로 쾌락을 삼는 자에 이르러서는, 비단 시내와 산에 대해서 부끄러울 뿐 아니라 반드시 묘원(廟院)을 손상시킬 것이니, 역시 조용히 충고하여 가까이 하지 말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만약 갑작스럽게 금지하면 오히려 불량배들의 노여움을 살 것이니, 차라리 금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스스로 피할 것이니, 일부러 금할 것도 없을 것이다.
복호(復戶)한 수직(守直) 4집은 남이 부릴 수도 없고 관에서 빼앗아 갈 수도 없다.
지금의 여러 고을에는 사사로 된 사건이 많을 것인데, 저것을 뺏지 않고 이것을 취한다면 이것은 무력 쓰는 사람이 만세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학원(學院)에 들어오는 선비는, 사마(司馬)가 태학(大學)에 들어 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 다음은 초시(初試) 합격한 자이지만 비록 합격하지 못한 자라도 오로지 학문을 향하는 마음이 있고 조행(操行)이 있는 자로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유사가 사문(斯文)에 품신하여 이를 맞아들인다. 학원을 연 것은 진실로 현인을 맞아들이려 한 것이니 아무렇게나 들어오게 하면 부덕한 사람이 끼어 들어올 것이니, 이렇게 되면 공연히 양식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책이나 물건까지도 손해가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오게 되면 현자(賢者)는 반드시 오려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 역시 묘원을 황폐하게 하는 한 가지 조짐이니, 그 선택을 불가불 삼가야 한다.
별도로 입원록(入院錄)을 둔다. 무릇 학원에 들어오는 선비는 반드시 성명을 기록하고 또 몇 년 몇 월에 왔다는 것을 기록한다.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뒤에 온 사람이 반드시 이것을 보고 가리키면서, “아무는 자기를 위하여 배우고 누구는 남을 위하여 배운다. 아무는 살아서 부끄러움이 있고 누구는 죽어서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할 것이어서 그 궁하고 잘된 것이 비록 다르지만 현명하고 어리석음도 역시 서로 다른 것이니, 아아! 어찌 두렵지 않겠으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D-001]결복(結卜) : 우리나라의 토지 면적을 정하는 단위는 복(卜) 혹은 부(負)라고 쓰지만 실상은 같은 말이다. 곡식 한 짐을 수확할 수 있는 면적을 말하는 것인데 복도 부도 짐이란 말이다. 곡식 열 단을 한 짐으로 하고 백 짐을 1결(結)로 하였다.
[주D-002]사물(四勿) :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의 네 가지이다.
[주D-003]일찍이 …… 두었도다 : 장자(莊子)가 한 말인데, 장마가 져서 큰 강물이 가득하게 창일하여서 강의 신은 자기가 물중에 제일 크다고 생각하고 그 물결을 타고 바다에까지 내려가서 그만 정신을 잃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후회하였다는 뜻.
[주D-004]난(亂) : 사(辭)나 부(賦)의 말미에서 전편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요약하는 말.
[주D-005]향음주례(鄕飮酒禮) : 시골에서 덕망 있고 나이 많은 선비를 중심으로 향풍(鄕風), 교화를 위한 의식으로 그 예법이 상당히 복잡하고 질서가 정연하여 사림의 교훈 되는 것이 많은 것이다.
[주D-006]복호(復戶) : 충신ㆍ효자ㆍ절부(節婦)에게 국가에서 일체의 세금과 부역하는 것을 면제하여 주는 것인데 서원에 적을 가진 사람도 국가의 세금은 면하였다.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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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별곡(竹溪別曲)


죽령(竹嶺) 남, 영가(永嘉 안동의 옛이름) 북, 소백산(小白山) 앞, 천재(千載) 흥망(興亡). 풍류도 한결같은 순정(順政)의 성읍(城邑)이라. 딴 세대(世代)에 숨지 않을 취화봉(翠華峰).
천자(天子)의 태(胎)를 감춰, 중흥(中興)을 빚어내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청풍(淸風) 장각(壯閣), 양국(兩國)의 직함(職銜)이라. 그래서 산수는 청고(淸高)하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숙수루(宿水樓) 복전대(福田臺) 승림정자(僧林亭子) 초암동(草菴洞) 욱금계(郁錦溪) 취원루(聚遠樓) 위에 반은 취하고 반쯤 깬 홍백화(紅白花) 산비 속에 피고, 고이 절에 노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고양(高陽)의 주도(酒徒)와 주리(珠履)가 삼천(三千), 손에 손잡고 상종(相從)하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채봉(彩鳳)은 날고 옥룡(玉龍)은 도사린 벽산(碧山) 송록(松麓)이요, 지필봉(紙筆峰) 연묵지(硯墨池)에 모두들 향교에 들어와 마음은 육경(六經)에 달리고 뜻은 천고에 다하는 부자도(夫子徒 공자의 교를 배우는 사람)들, 봄에는 글 외고 여름에는 거문고 타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해마다 3월이면 기나긴 길에 소리치고 길 비켜라 호통치는 행차 맞이하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초산(楚山) 새벽 꽃구름 산원(山苑)의 좋은 절기, 꽃은 무르녹아 그대 위해 피었으며, 버들 그늘 골짜기는 다시 오기 기다리네. 홀로 기댄 난간에는 꾀꼬리 소리 얼싸안아, 한 포기 녹음(綠陰)이 드리웠다. 천생(天生) 요염(妖艶)으로 복사꽃 붉었을 제 천리(千里)에 상사(相思)한들 또 이를 어이하리.
붉은 살구꽃 분분(紛紛)하고 방초(芳草)는 무성하다. 술단지 앞에 기나긴 해 푸른 그늘 어둑어둑 화각(畵閣)이 침침한데. 거문고에 훈풍(薰風) 곡조 황국(黃菊)에 단풍(丹楓)이라, 금수 청산에 기러기 날아간 뒤 눈과 달의 빛 서로 어울리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중흥 성대(中興聖代)에 장락 태평(長樂太平)이라, 사절(四節) 놀이 가사이다.


 

[주D-001]고양(高陽)의 주도(酒徒) : 이는 진(秦) 나라가 멸망할 때에 한고조(漢高祖)를 도운 역이기(酈食其)라는 사람인데 그는 술이나 먹고 난봉 부리던 사람이었다. 한고조를 만난 뒤에 큰 공을 많이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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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사방 경계[本邑四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소백산(小白山) 아래 죽계(竹溪) 가에 있다. 동쪽으로 안동(安東) 내성현(奈城縣) 경계까지 30리 거리이다. 또한 내성(奈城)ㆍ봉화(奉化) 등지를 넘어 본 고을 와란면(臥丹面)이 있으며, 관식산(觀式山)에 이르러 그친다. 남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 경계까지가 10리이다. 서쪽으로는 풍기군(豊基郡) 경계까지가 5리이다. 또 풍기 땅을 넘어 10리 되는 곳에 대룡산면(大龍山面)이 있는데, 이는 풍기와 영천 두 고을 사이에 있다. 또 풍기 땅 욱금동(郁錦洞)을 넘어 20리 되는 곳에서부터 단양군(丹陽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본 고을 죽령(竹嶺)과 창락면(昌樂面)이 있다. 북쪽으로 마아령(馬兒嶺)을 넘어 영월부(寧越府) 경계까지 50리다. 서울에서부터 430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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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경계 중 되찾지 못한 곳[舊彊界未推]


단을촌(丹乙村) : 옛날 순흥(順興) 사마정(司馬亭)이다. 고을 남쪽 5리 대평면(大平面) 단을촌(丹乙村)이다. 지금은 단촌(丹村)이라 일컬으며 풍기군(豊基郡)에 속해 있으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태평촌(太平村)’이라 부르고 있다.

욱금동(郁錦洞) : 소백산 남쪽에 있다.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태(胎)를 안치했는데 옛날 순흥이 이 일로 인해 승격되었다. 안문정공(安文貞公 안축(安軸))이 지은 〈죽계별곡(竹溪別曲)〉에도 〈욱금동(郁錦洞)〉이 실려 있다.

등항성(登降城) : 도솔봉(兜率峯) 아래 남쪽 산록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남쪽을 정벌하러 내려왔을 때 이곳에서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百濟)의 항복 문서가 이르렀으므로 이름 붙인 것이다. 《승람(勝覽)》에 순흥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솔성산(兜率城山) : 죽령(竹嶺) 아래 창락역(昌樂驛)에 있다. 또한 《흥주승람(興州勝覽)》에도 실려 있다.

상을곡성(上乙谷城) : 성의 둘레는 980보, 높이는 5척이다. 성안에 샘 열 곳과 개울 하나가 있다. 《승람(勝覽)》에도 순흥(順興)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탄부(炭釜) : 옛날 이름은 ‘탄분(炭盆)’이다. 《영남지리지(嶺南地理志)》에도 순흥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치동(豆峙洞) : 창락(昌樂)의 전고(前皐)마을 남쪽에 있다. 본래 창락면(昌樂面)에 속해 있었다.

위의 곳들은 아직도 풍기(豊基)에 속해 있다.

내성현(奈城縣) : 《영남지리지(嶺南地理志)》와 《영가지(永嘉志)》에 순흥(順興)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을 창고를 중수하다 발견한 옛날 기와 등에 ‘순흥(順興)’ 두 글자를 새겨서 만든 것이 지금까지 분명하게 있다고 한다.

춘양현(春陽縣) : 《영남지리지(嶺南地理志)》와 《영가지(永嘉志)》에 순흥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단현(開丹縣) : 고을 동쪽 35리 물야계(勿也溪) 상류에 있다. 지금도 옛날 순흥 때의 창고 터가 남아 있다. 또 산 뒤에 옛날 무덤이 있는데, 비석의 글씨가 마멸되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順興府東三十里’ 등의 글자는 지금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재산현(才山縣) : 《영가지(永嘉志)》에,
“순흥(順興)에서 들어와 소속되었다.”
라는 말이 있다.

소천(小川) : 《신증여지승람(新增輿地勝覽)》에 순흥(順興)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의 곳들은 아직도 안동(安東)에 속해 있다.

물야(勿也)ㆍ미곡(瀰谷)ㆍ창해(昌海)ㆍ양정(陽亭)ㆍ유곡(酉谷)ㆍ은봉(殷鳳)ㆍ금봉(金峯)ㆍ각화(覺華)ㆍ도심(道深)ㆍ북지(北枝) : 이들 열 곳의 마을은 모두 옛날 순흥 와란면(臥丹面) 내의 땅이다. 지리지(地理志)에서,
“고을 땅은 와란(臥丹)에서 관식산(觀式山)까지가 41리이다. 그 사이에 마을 열 곳이 있다.”
하였다. 고을이 다시 설치되었을 때 와란(臥丹) 한 마을만 환속되었고, 나머지 열 곳의 마을은 그대로 봉화 땅이 되었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묘지명에서,
“봉화현(奉化縣) 와란리(臥丹里) 유곡(酉谷)에 장사 지냈다.”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볼 때도 유곡이 와란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곳들은 아직도 봉화(奉化)에 속해 있다.

지곡(枝谷)ㆍ답곡(畓谷)ㆍ교천(交川)ㆍ벌지(伐只)ㆍ오록(吾彔)ㆍ우소(迂所) : 《노릉지(魯陵志)》와 영천(榮川)의 현판(懸板)에 이르기를,
“이 여섯 고을이 부석면(浮石面) 안에 있다.”
하였다.

위의 곳들은 아직도 영천(榮川)에 속해 있다.


 

[주D-001]〈죽계별곡(竹溪別曲)〉 : 고려 충숙왕 때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은 경기체가. 5연. 고향인 순흥 죽계 인근의 아름다운 산수와 미풍 속에서 흥에 젖어 있는 모습을 읊었다. 창작 연대는 1330년(충숙왕 17)에서 1348년(충목왕 4)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체가의 효시 작인 〈한림별곡〉에 이은 초기 형성기의 경기체가 작품에 속한다. 《죽계지(竹溪志)》에 실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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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승(形勝)



대평(大平)

퇴계(退溪) 선생의 시에,
대평마을 개울물 잔잔하고 / 大平村裏水潺潺
푸른 버들 봄바람에 날마다 산을 가리네 / 綠柳東風日掩山
태수는 정신없이 술에 취해 가는데 / 太守醉歸渾不省
말발굽 앞에 떨어지는 꽃 어지럽게 날리네 / 落花掩亂馬蹄間
하였다.

대산(臺山) : 사현정(四賢井) 남쪽 죽계(竹溪) 동쪽 가에 있다. 천연적으로 우뚝하게 이루어졌고, 마치 대(臺)와 같이 평평하여 위에 1백여 명은 앉을 수 있다. 그 속에 또 바위가 있는데 5~6명은 앉을 수 있다. 또한 괴정(槐亭)이 있다.

오산(梧山) : 고을 남쪽 율림(栗林) 북쪽에 있다. 일명 봉황대(鳳凰臺)라고도 한다.

관란대(觀瀾臺) : 사현정(四賢井) 남쪽 냇가에 있다. 바위가 기이하고 아랫쪽에 깊은 못이 있다.

사현정(四賢井) : 안씨(安氏) 현인 네 분이 사용했던 우물이다. 후손 안성연(安性淵)이 안동영장(安東營將)으로 재직할 때 비석을 세워 드러내었다.

개암(盖巖) : 율림(栗林) 아래 죽동 냇가에 있다. 돌의 모양이 석종(石鍾)과 같으면서 덮개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렸다. 석공이 바위 면에 글자를 새기려고 하였으나 끌이 들어가지 않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내죽(內竹)

원적봉(圓寂峯) : 초암(草菴) 서쪽에 있다.

연적봉(硯滴峯) : 원적봉 서쪽에 있다.

월명봉(月明峯) : 초암 동쪽에 있다.

청운대(靑雲臺) : 초암사(草菴寺) 앞 시냇가에 있다. 기이하고 높은 돌이 맑은 냇물가에 서 있고, 그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게 서 있는 모양이다. 옛날 이름은 백운대(白雲臺)였으나, 퇴계(退溪)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봉두암(鳳頭巖) : 석륜암(石崙菴) 북쪽에 있다. 바위가 매우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날아가려고 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광풍대(光風臺) : 봉두암(鳳頭巖) 서쪽에 있다.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신재(愼齋)가 명명하였다.

석름봉(石廩峯) : 산허리 위에 있다. 봉우리 전체가 다 돌로 되어 있다.

자개봉(紫盖峯) : 석름봉 동쪽에 있다.

국망봉(國望峯) : 자개봉 동쪽에 있다.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서울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退溪)의 시에,

막막한 구름 속에 늦은 해 드러나는데 / 漠漠烟雲生晩日
용문산(龍門山)도 보이지 않는데 하물며 대궐문이랴 / 龍門不見況脩門
하늘 위 북극성 있는 곳을 찾아보려 하니 / 欲知紫極宸居處
멀리 하늘가로 일말의 자취 보이네 / 天際遙瞻一抹痕

하였다. 신재(愼齋)의 시에,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아도 / 國望峯頭望京國
장안은 보이지 않고 용문산만 보이네 / 長安不見見龍門
용문산 서쪽에 오색구름 피어오르기에 / 龍門西畔五雲起
백발의 외로운 신하 두 눈에 눈물 고이네 / 白髮孤臣雙淚痕

하였다.

제월봉(霽月峯) : 백운암(白雲菴) 앞에 있다.

환희봉(懽喜峯) : 석륜사(石崙寺) 위에 있다.

자하대(紫霞臺) : 환희봉(懽喜峯) 서쪽에 있다.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는데,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산 경치를 이곳에서 다 바라볼 수 있다. 옛날 이름은 산대암(山臺菴)이었으나 퇴계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적성(赤城) :자하대(在紫霞) 동쪽에 있다. 옛날에 석성(石城)이 있었는데, 아직도 주춧돌과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퇴계가 자하대의 이름을 정하고 나서 성을 적성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대개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起而建標]”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백학봉(白鶴峯) : 자하대(紫霞臺) 북쪽에 있다.

백련봉(白蓮峯) : 백학봉(白鶴峰) 서쪽에 있다. 두 봉우리가 대치하고 있으며, 색깔이 모두 희다.

백설봉(白雪峯) : 백학봉과 백련봉 옆에 있다.

상원봉(上元峯) : 석름봉(石廩峰) 서쪽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옛날 길이 있다.

비로봉(毗盧峯) : 상원봉(上元峯) 서쪽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하였다.

윤암봉(輪岩峯) : 본조에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하였다.

옥녀봉(玉女峯) : 이점(梨店) 뒤에 있다.

폭두봉(幅頭峯) : 이점 앞에 있다.

용추(龍湫) : 초암(草菴) 남쪽 다리 아래 수십 보쯤에 있다. 아래위로 반석이 평평하게 깔리고, 좌우에 암각(岩角)이 기이하게 솟아 있으며, 가운데로 급한 여울이 성내 듯 달리다가 폭포가 되고, 밑에는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면서 깊은 못이 되었다. 큰 바위가 못 가운데 누워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면서 구름과 비를 뿜는 듯하여 용추라 불렸다. 가뭄에 빌면 곧 감응이 있었다.

죽계구곡(竹溪九曲) : 부사 신필하(申弼夏)가 일찍이 소백산을 유람할 때 초암사 금당(金堂) 앞에 큰 글씨로 ‘죽계제일수석(竹溪第一水石)’이라 써서 새겼다. 그리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처음으로 반석에 1곡(一曲)이라 새기고 시내를 따라 내려오면서 마지막으로 배점[梨店]에서 9곡(九曲)을 새겼다. 그 사이의 거리가 5리쯤 된다. 계곡이 길고 굽이가 많아서 가장 볼만한 데만 취한다 해도 이뿐이 아닐 텐데, 새겨져 있는 9곡은 거리가 너무 짧지 않나 여겨진다. 중국의 무이구곡은 동구(洞口)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계곡 마지막까지 가는데, 동구가 1곡이 되고 계곡 마직막이 9곡이 되었으니 이곳의 9곡과는 반대인 셈이다. 지금에 본다면, 마땅히 백운동(白雲洞) 취한대(翠寒臺)가 처음 1곡이 되고, 금성(金城) 반석이 2곡이 되고, 백자담(柏子潭)이 3곡이 되고, 이화동(梨花洞)이 4곡이 되고, 목욕담(沐浴潭)이 5곡이 되고, 청련동애(靑蓮東崖)가 6곡이 되고, 용추(龍湫)가 7곡이 되고, 금당(金堂) 반석이 8곡이 되고, 중봉의 합류되는 곳이 9곡이 되어야 한다. 우선 이 설을 기록하여 후인들의 평가를 기다린다.

금당반석(金堂盤石) : 초암(草菴) 금당(金堂) 앞에 있다. 평평한 반석이 상하 수십 보에 깔려 있고, 그 위로 물이 맑고 잔잔하게 흐른다. 좌우에 기이한 바위가 늘어선데다 층층 암벽이 깎아지르고, 앞에 큰 바위가 우뚝 서서 못 입구를 막아 그 으슥함이 세상과 동떨어져, 소요하면서 감상하노라면 속세의 생각이 한 점도 없게 한다.

일부석(一浮石)

단곡반석(丹谷盤石) : 단곡 상류에 있는 반석으로 시내 속에 연이어 펼쳐져 있는데, 그 위로 냇물이 흐르고 그 주위로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삼태봉(三台峯) : 단곡 수구(水口)에 있는 돌산으로 세 개의 작은 봉우리가 늘어선 모양이 태성(台星)과 같다 하여 예부터 ‘삼태봉’이라 하였다. 단곡거사(丹谷居士) 곽진(郭) 삼부자가 여기에서 살았는데, 모두 문장에 능하여 사람들이 ‘삼소봉(三蘇峰)’이라 하였다.

동원(東園)

입암대(立巖臺) : 파회(波回)마을 남쪽 산록에 있다. 기이한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는데, 대구부사를 지낸 김구정(金九鼎)이 축조했다.

관란대(觀瀾臺) : 입암대 남쪽에 있다. 선비 서숙(徐璹)이 그 곁에 살면서 이름 붙였다.

도강(道講)

침류석(枕流石) : 우계(愚溪) 상류에 있다. 평평한 바위가 시내 속에 깔려 있는데, 수십 명은 앉을 만하다.

대적벽(大赤壁) : 침류석(枕流石) 아래 10여 보(步)쯤 되는 냇가에 있다. 깎아지른 석벽 아래에 맑은 못이 있다.

낙화암(落花巖) : 대적벽 아래 수십 보쯤 되는 시냇가에 10여 길 되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태수(太守)가 기생을 데리고 놀았는데, 기생이 술에 취해 춤을 추다가 떨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낙하암(落霞巖)이라고도 한다.

소적벽(小赤壁) : 낙화암 아래 30여 보쯤 되는 곳에 있다.

탄금대(彈琴臺) : 소적벽 아래 10여 보쯤 되는 곳에 있다. 시내 속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위가 평평하고 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운제(雲梯) : 탄금대 아래에 있다.

반타석(盤陀石) : 탄금대 아래 10여 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용추(龍湫) : 반타석 아래 10여 보쯤 되는 곳에 있다. 석벽이 머리를 들어 1백여 척이나 깎아지르고,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조어기(釣魚磯) : 용추 아래쪽에 있다.

삼부석(三浮石)

완폭대(玩瀑臺) : 사문단(沙文丹)마을 북쪽에 있다. 자개봉(紫蓋峰) 아래에서 발원한 물이 동쪽으로 흘러서 골짜기 어귀에 이르면 층암 절벽을 만나 폭포가 되어 남쪽으로 떨어지는데, 아래에 높이가 두세 길 되는 못이 이루어져 있다. 서쪽 편으로 깎아지른 절벽에는 묵은 등넝쿨이 울창하고, 동쪽 편은 층층 바위가 대(臺)를 이루어 면면이 앉을 만하다.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절경이다. 바위에 ‘玩瀑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석문폭(石門瀑) : 완폭대 하류 1백 보 쯤 되는 곳에 있다. 다시 작은 폭포가 되고 암석이 더욱 기이하다. 폭포 아래에 터진 바위가 문이 되었는데, 나무를 걸쳐 놓고 건너다닌다.

소요동(逍遙洞) : 마아령(馬兒嶺) 아래에 있다. 대율계(大栗溪) 상류에 맑은 못이 있고 못 앞에 석벽이 있다. 못 위 토대(土臺)에 옛날 동네 사람들이 지은 ‘소요정사(逍遙精舍)’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부석(二浮石)

명정암(酩酊巖) : 국무당(國武堂) 서쪽 기슭에 있다.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의 기문(記文)이 있는데, 대략 보면, “넓은 반석이 있는데, 바둑판같이 평평하여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호사가(好事家)를 만나면 몇 칸 누각을 지을 만하다.” 라고 하였다.

수식(水息)

회로대(會老臺) : 가구(可丘) 동쪽 냇가에 있다. 물가에 서너 길 높이의 바위가 아래위로 마주 서 있고, 두 바위 사이로 절벽이 이루어져 있다. 물가가 모두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 맑은 못이 있으며, 안계가 시원하게 트여 있다. 문수산(文殊山)과 백병산(白屛山)을 마주 대하고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가 가구(可丘)에 숨어 살 때 늘 그 위에서 소요(逍遙)했기에 그 후손이 터를 닦고 대(臺)를 지었다. 옛날엔 이름이 없었으나, 경종 계묘년에 인근 노인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베풀었다하여 ‘회로대’라고 이름 붙였다.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의 기(記)가 있다.

진의대(振衣臺) : 산운(山雲) 동쪽 기슭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이 냇가에 우뚝 서 있고 절로 층대(層臺)를 이루어 올라가서 조망할 만하다. 훈도(訓導) 안응규(安應奎)가 산운(山雲)에 살 때 당시 명사들과 여기에서 놀았다.

유암(楡巖) : 천곡(泉谷) 뒤 동쪽 기슭에 있다. 바위 주변에 느릅나무가 심어져 있다. 숭정처사(崇禎處士) 배유장(裵幼章)이 이곳에 집을 지어서 ‘유암’이라 하였다.

거래암(去來巖) : 두문(斗文) 수구(水口)에 있다. 흰 반석이 두 산 사이에 가로 펼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로 냇물이 맑게 흐른다. 물가 좌우에 앉을 만한 평평한 돌이 수십 보 연이어 있다. 시내를 따라서 내려가면 삐죽삐죽한 돌이 빽빽이 서 있어 여울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참으로 수석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암(楡巖) 배 처사(裵處士)가 영천(榮川)에 왕래할 때 항상 이곳에서 쉬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행계폭포(杏溪瀑布) : 서당(書堂) 서쪽에 있다. 처마 모양의 깎아지른 바위가 서너 길쯤 우뚝 서 있다. 바위 위로 작은 냇물이 흘러 떨어져 조그마한 못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대(臺)를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서 자못 그윽한 분위기가 난다.

화천(花川)

동애(東崖) : 화천(花川) 동쪽에 있다. 100척이나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 맑은 못이 있다. 선비 김성제(金聖濟)는 생원 김강(金鋼)의 아들인데,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행실이 단아하고 맑았다. 일찍이 동애의 경관을 사랑하여, 거처하는 곳의 편액을 ‘동애’라 하고 그곳에서 소요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시에,
동애 아래에서 발 씻고 / 濯足東崖下
동애 위에서 봄바람 쏘이네 / 風乎崖上春
그윽한 멋 절로 얻으니 / 悠然趣自得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던 분 생각나네 / 可想浴沂人
하였다.

구만(龜灣) : 화천(花川) 남쪽에 있다. 옥봉(玉峯) 층층 절벽이 빙 둘러 서 있는 것이 마치 거북 모양인데 냇물도 에워 돌아 맑은 못이 되었다. 혹 ‘구담(九潭)’이라고도 하며, 대개 9곡의 뜻을 취하였다. 서당이 서쪽에 있다.

동산대(東山臺) : 도촌(桃村) 북쪽에 있다. 들 가운데 솟은 절벽을 시냇물이 휘감아 돌며, 층층의 바위와 푸른 소나무가 물속에 거꾸로 비춘다. 고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집으로, 후손이 그 위에 대(臺)를 쌓고 아래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시에,
오대에서 술자리 파하였는데 취하질 않아 / 飮罷鰲臺醉不成
저물녘에 말 타고 물가 정자로 찾아갔네 / 吟鞭暮指水邊亭
흰 구름 깊으니 어느 곳에서 그윽한 길 찾을꼬 / 白雲何處尋幽逕
밝은 달 다정하여 홀로 가는 길 비춰 주네 / 明月多情慰獨行
시내에는 거문고 소리 가늘게 들려오고 / 石澗細翻琴上曲
산봉우리 그림은 늘 같은 풍광 보여 주네 / 玉峯長送畵中形
이제 서쪽 머리 터 빌려서 살려고 하니 / 從今欲借西頭卜
물고기와 새만이 이름과 성을 알리라 / 魚鳥惟應識姓名
하였다.

모정(茅亭) : 도촌(桃村) 동쪽에 있다. 냇가에 토봉(土峰)이 우뚝 솟아 사천(沙川)을 굽어보고 있다. 동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와란(臥丹)

옥류암(玉溜菴) : 두곡(杜谷)에 있다. 바로 고 숭정처사(崇禎處士) 홍우정(洪宇定)이 살던 곳으로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아홉 봉우리가 둘러 있다. 옥류암 왼쪽에 석천(石泉)이 있고, 석천 아래 작은 연못이 있다. 옥류암은 중년에 없어졌던 것을 그 후손이 중수하여 수호하고 있다. 공의 친구 재상 원두표(元斗杓)가 시를 지어 주기를,
옥류천 가에 있는 처사의 암자 / 玉溜泉邊處士菴
맑고 그윽함이 영남에서 으뜸 / 淸幽獨擅嶺之南
연ㆍ구기ㆍ국화ㆍ소나무ㆍ매화ㆍ대나무 다 심었으니 / 種蓮杞菊松梅竹
도연명(陶淵明)의 삼경(三逕)보다 더 아름답네 / 全勝淵明逕有三
하였다.

문암(門巖) : 우곡(愚谷) 동네 입구에 있다. 시내 바닥에 반석이 넓게 깔려 수십 보 연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가 우묵하게 패여 냇물이 그 위로 흐른다. 층층이 대(臺)를 이루고, 이따금 격류가 쏟아져 두 군데 폭포가 되며, 아래에 깊은 못을 이루었다. 좌우편에 푸른 절벽이 깎아지르고 흰 돌이 옹기종기 수놓이고, 조용하고 시원하여 산중의 아름다운 경계이다.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이 일찍이 이곳에서 소요하였다.

초연대(超然臺) : 한수정(寒水亭) 뒤에 있다.

곡담(曲潭) : 거연헌(居然軒) 아래 1리쯤 되는 곳에 있다. 낭떠러지 절벽이 수십 길 서 있고,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절경이 볼만하다.

천석암(川石岩) : 한수정 북쪽 3리쯤 되는 곳에 있다. 수석의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옛날 사람이 유람한 자취가 있다.

수민단(壽民丹)

요산(腰山) 동애(東崖) : 요산촌((腰山村) 앞에 있다. 허리는 낮고 머리는 높으며, 냇가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바위가 고색창연한 빛깔을 띠고 있다. 그 위에 쌍계당(雙溪堂)이 있다.

고산(孤山) : 사암 동구에 있다. 일명 ‘답청대(踏靑臺)’이다.

중구봉(重九峯) : 단계(丹溪) 동쪽 기슭에 있다. 봉우리 머리에 상하대를 쌓았다. 마을 사람들이 매년 중구절에 모임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룡산(大龍山)

용담(龍潭) : 용암산(龍岩山)에서 근원하여, 용산(龍山)마을을 지나 동문(洞門)에 이르러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흰 돌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기이한 바위가 굽이굽이마다 늘어서 있어 경치가 볼만하다.

산당(山堂) : 용담(龍潭) 위 수십 보쯤에 있다.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경계가 한적하여 공부하기에 좋은 자리이다. 처사(處士) 황세후(黃世㷞)가 지었으나 지금은 없다.

창락(昌樂)

촉령대(矗泠臺) : 죽령(竹嶺) 중간에 있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그의 중형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를 이곳에서 맞이한 후 대를 쌓고 이름 붙였다. 그 기문에서,
“형님이 충청감사로 재임하시면서 말미를 내어 고향으로 오실 때 내가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죽령에서 맞이하였다. 처음에 요원(腰院) 아래에 좋은 자리를 얻어 두 터를 다듬어 대(臺) 둘을 만들었다. 그 동편 것을 잔운대(棧雲臺)라 하였으니, 유뇌계(兪㵢溪)의 〈죽령행(竹嶺行)〉에서 ‘죽령 길 백 번 돌고 돌아 높은 잔도(棧道) 구름 위에 닿았네[竹嶺行百盤 棧道浮雲邊]’라고 한 뜻을 취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서편 것을 촉령대라고 하였으니, 점필재(佔畢齋)의 〈유두류산(遊頭流山)〉 시에서 ‘산은 우뚝하고 묽은 맑네[雲根矗矗水泠泠]’라고 한 것에서 취하였다. 그 골짜기를 안영협(鴈影峽)이라 했으니, 두보(杜甫)의 시에서 ‘기러기 그림자 골짜기 안에 이어졌네[鴻鴈影來連峽內]’라고 한 뜻을 취하였다. 다리를 소혼교(銷魂橋)라 했으니, 강엄(江淹)의 〈별부(別賦)〉에서 '사람의 혼을 녹이는 것은 오직 이별일 뿐이다[黯然銷魂者惟別而已]’라고 한 구절에서 취하였다. 작별할 때 형님이 나에게 ‘자네는 이 고을을 떠나지 말게. 명년에 내 다시 와서 이 자리에서 술잔을 들지’ 하셨다. 그 이튿날 절구 두 수를 지어 보내셨다.”
하였다.
퇴계의 시에,
자연의 터를 다듬어서 두 대(臺)를 꾸미니 / 爲斸天荒作兩臺
감사 형님 오실 때 배웅하기 위함이네 / 鴒原棠茇送迎來
우리 정분 넘치듯이 정겨운 물소리 들려오고 / 泠泠恰似惟情溢
이별의 한 쌓이듯이 산 우뚝 높아라 / 矗矗還如別恨堆
하였고, 또,
안영협 냇가에서 헤어진 날 / 鴈影峽中分影日
소혼교 다리에서 혼절하네 / 銷魂橋上斷魂時
험한 고갯길 평안히 넘어가셨다가 / 好徑嶺路千般險
명년에 다시 오실 기약 저버리지 마소서 / 莫負明年再到期
하였다.
또 대헌공의 시에,
귀신이 한 일인 듯 층대 우뚝하니 / 神輸鬼役築層臺
하룻밤 사이 날 기다려 쌓은 것이라네 / 一夜能成待我來
안계 정히 하늘 끝까지 열리겠기에 / 眼力定應天奧覷
잠시 흰구름 낀 비탈길 올라가 보네 / 暫時斸跛白雲堆
하였고, 또
어느덧 서산에 해는 지는데 / 西日奄奄若不遲
술자리 파하고도 다리가에서 서성거리네 / 躕躇橋上酒闌時
구름 낀 산도 분명 내 말 들었으려니 / 雲山聽我丁寧說
명년에 다시 오리니 기다리게나 / 好待明年來有期
하였다.

용추(龍湫) : 희방사(喜方寺) 아래에 있는데, 연화봉(蓮花峯) 아래에서 발원하였다. 골짜기가 문처럼 좁고 바위 낭떠러지가 깎아지르며, 내리쏟는 물줄기가 수십여 길은 된다. 그 아래 깊은 못을 이루어 ‘용추’라고 불렀는데, 가뭄을 만나 비가 내리기를 빌면 감응이 많았다.


 

[주D-001]적성의 …… 뜻 : 적성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천태산(天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토석의 색깔이 붉고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다.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 하였다. 《文選》
[주D-002]무이구곡(武夷九曲) :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중국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을 나누어 명명한 것. 주희가 이에 대하여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주D-003]곽진(郭 1568~1633)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정보(靜甫), 호는 단곡(丹谷). 아버지는 생원 한(瀚)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참봉 언량(彦良)의 딸이다. 권우(權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5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을 읽고 둘째 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단공산(丹公山)에 작은 암자를 짓고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ㆍ《주서절요(朱書節要)》 등을 취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였다. 1605년 광릉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곧 시세에 어긋나 물러났다. 1618년(광해군 10) 아들 영(瓔)이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주참하자고 상소하였다가 투옥되어 죽자, 1621년에는 그 자신이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써서 올렸다. 시문에 능했으며, 장현광(張顯光)ㆍ이준(李埈)ㆍ정경세(鄭經世) 등과 사우 관계를 맺었다. 백고리사(白皐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단곡문집》 3책이 있다.
[주D-004]삼소봉(三蘇峰) : 삼소는 송(宋)나라 때의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 노천(老泉)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이른다. 모두 문장에 뛰어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었다.
[주D-005]이여빈(李汝馪 1556~1631)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 아버지는 참봉 효신(孝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4대손인 귀윤(貴胤)의 딸이다. 한우(韓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을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주D-006]배유장(裵幼章 1618~1687) : 자는 장은(章隱), 호는 유암(楡巖),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상익(尙益)의 아들로 영주(榮州)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은 충의(忠義)로 명성이 있었는데, 조부는 군수(郡守)로서 임진란에 성(城)을 지켜 난을 막았고, 부친은 광해군(光海君) 때 의를 주장하다가 벼슬을 박탈당했다. 그는 인조(仁祖) 때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시절을 만나 일찍이 좋은 포부로써 높은 벼슬길에도 오를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기별을 듣고 비분하여 산장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 명성이 높아져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여생을 마쳤다.
[주D-007]기수(沂水)에서 …… 분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을 이름. 공자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각기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옷이 이루어지면 어른 대여섯 명, 동자 예닐곱 명과 더불어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 하였다. 공자가 그 말의 기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8]이수형(李秀亨) : 자는 영보(英甫), 본관은 우계(羽溪). 도평의(都評議) 이억(李薿)의 현손이다. 선대에 서울에서 살았는데, 공이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로소 도촌(桃村)에서 살게 되었다. 벼슬은 전생서령(典牲署令)에 이르렀다.
[주D-009]이준(李埈 1560~1635)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에는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벼슬은 사간ㆍ승지ㆍ대사간ㆍ부제학 등을 지냈다. 특히 1613년(광해군 5)부터 1614년(광해군 6) 풍기군수 재임 기간 소수서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락재(至樂齋)를 세우고 앙고대(仰高臺)와 탁청지(濯淸池)를 조성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창석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D-010]원두표(元斗杓 1593~166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ㆍ탄옹(灘翁).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다.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D-011]도연명(陶淵明)의 삼경(三逕) :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삼경은 황폐되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있구나.” 하였다. 삼경은 본래 한나라의 은사 장허(蔣詡)가 집 안에 대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 세 갈래 길을 만들었으며, 오직 구중(求仲)ㆍ양중(羊仲)이 따라다니며 놀았다고 하여 일컬어진 말이다.
[주D-012]홍우정(洪宇定 1595~1656) :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본관은 남양. 봉화 출신. 한성서윤 영(榮)의 아들이다. 광해군 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인조 때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문수산(文殊山)에 숨어살았다. 효종 3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 사재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임명되었다. 영조 22년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순조 16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순조 20년에 개절(介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D-013]이해(李瀣 1496∼155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황(滉)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ㆍ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ㆍ좌승지ㆍ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ㆍ대사헌ㆍ대사간ㆍ예조참판을 지내고, 이 해에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여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 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면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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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山川)



대평(大平)

비봉산(飛鳳山) :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소백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기복(起伏)하였다. 형세가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송학산(松鶴山) : 비봉산(飛鳳山) 남쪽 석교촌(石橋村) 서쪽에 있다.

율림(栗林) : 고을 남쪽 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죽계수(竹溪水) :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백운동(白雲洞)ㆍ율림(栗林)ㆍ죽동(竹洞) 동쪽을 지나 동원면(東園面) 사천(沙川)에서 합친다.

내죽(內竹)

소백산(小白山) : 고을 서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 삼도(三道) 사이에 자리 잡았다. 영남의 큰 진산이다. 퇴계 선생의 〈유산록(遊山錄)〉이 나온다.

죽계수(竹溪水) : 소백산 초암동(草菴洞)에서 발원하였다. 한 갈래는 불동(佛洞)에서 나와 옥녀봉(玉女峰) 아래에서 합친다. 송림동(松林洞)ㆍ금성(金城)ㆍ제월교(霽月橋)ㆍ취한대(翠寒臺)를 지나 태평촌(太平村)의 동계(東溪)가 된다.

일부석(一浮石)

왕산(王山) : 안남동(安南洞) 뒤에 있다. 형체가 ‘왕(王)’ 자와 흡사하여 이름 붙여졌다.

자개봉(紫盖峯) : 지곡(枝谷) 동네의 진산(鎭山)으로, 마아령(馬兒嶺)과 곶치현(串峙峴)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석대암(石臺巖)이 있다.

곶치현(串峙峴) : 아래 〈관방(關防)〉 조목에 보인다.

봉계(鳳溪) : 자개봉(紫蓋峰) 동쪽 골짜기에서 발원했는데, 호문단(好文丹) 서남으로 흘러 삼태봉(三台峰) 아래에서 아계(鵝溪)와 합친다.

아계(鵝溪) : 곶치(串峙) 골짜기에서 발원하였다. 동으로 성곡(聲谷)ㆍ지곡(枝谷)을 지나 서남으로 흘러 삼태봉(三台峯) 아래에서 봉계(鳳溪)ㆍ단곡(丹谷)의 냇물과 합친다.

단곡계(丹谷溪) : 국망봉(國望峰)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단곡 동네를 지나 삼태봉 아래에서 아계(鵝溪)ㆍ봉계(鳳溪)와 합치고, 남으로 흘러 병산(屛山) 서쪽 오현(烏峴)을 지나 동원면(東園面)의 사천(沙川)이 된다.

동원(東園)

무학봉(舞鶴峯) : 구고(九皐)마을 뒤에 있다.

사천(沙川) : 일부석(一浮石)에서 왔는데, 파회(波回) 동네에 이르러 좌우의 작은 냇물을 받아, 구미(龜尾)에 이르러 죽계(竹溪)의 하류에 합친다.

도강(道講)

소지기(韶之岐) : 우수동(愚叟洞)의 주산(主山)이다.

국모봉(國慕峯) : 도봉(道峯)마을 뒤에 있다.

지장산(智藏山) : 영모암(永慕菴)의 주산이다.

우계(愚溪) : 교천(交川)에서 와서 남쪽으로 흘러 낙화암(落花巖)ㆍ우수동(愚叟洞)ㆍ석탄(石灘)ㆍ고산(孤山)을 지나 이부석(二浮石)의 감계(鑑溪)가 된다.

삼부석(三浮石)

법수산(法水山) : 마흘천(馬屹川) 북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갈랑산(葛朗山) : 봉황산(鳳凰山) 북쪽에 있다. 본래 부석사의 옛터였다.

봉황산(鳳凰山) : 고을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태백산에서 갈려 나와 부석사 진산(鎭山)이 되었다. 산마루에 옛 성터가 있고, 고인 물이 있다. 일명 ‘왕산(王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공민왕이 피난길에 이 산에 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마아령(馬兒嶺) : 아래 〈관방(關防)〉 조목에 보인다.

마흘천(馬屹川) : 마아령 아래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마흘촌(馬屹村)과 의풍(義豊)을 지나 영월(寧越)의 거석(擧石)으로 들어간다.

대율계(大栗溪) : 마아령 아래에서 발원하여 성구촌(省丘村) 앞에서 부석 서쪽 골짜기 물과 합류한다. 또 임곡(林谷) 냇물과 합류하여 독유동(獨遊洞)을 지나 고산(孤山) 북쪽에서 사천(斜川)과 합류한다.

사천(斜川) : 자개봉(紫蓋峰) 북쪽에서 발원하여, 사문촌(沙文村)을 지나 동남으로 흐른다. 독유동(獨遊洞) 앞 고산(孤山) 북쪽에 이르러 대율계(大栗溪)와 합류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도강(道講)의 우계(愚溪)로 들어간다.

어니산(於尼山) : 봉황산 서북쪽에 있다. 마아령을 넘어 동북쪽으로 들어가면 옛날에 남대암(南大菴)이라 부르던 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영천향교(榮川鄕校)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 안치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 향교에 도로 봉안하였다. 암자는 지금 없다.

이부석(二浮石)

장악(帳岳) : 감곡(鑑谷)마을 동쪽에 있다.

감계(鑑溪) : 곧 도강(道講) 우계(愚溪)의 하류다. 남동쪽으로 흘러 감계(鑑溪)ㆍ석남(石南)을 지나 수식(水息) 냇물과 합치고, 남쪽으로 흘러 관천(串川)이 된다.

수식(水息)

백병산(白屛山) : 고을 동북쪽 50리에 있다. 태백산에서 갈려 나왔다. 바위 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절벽이 깎아지른다.

우구현(牛口峴) : 추정(楸井)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영월(寧越)과 통한다.

만항현(晩項峴) : 사기점(沙器店) 북쪽에 있다.

만석산(萬石山) : 봉황산에서 갈려 나왔다. 가평(佳坪) 북쪽 산운(山雲) 남쪽에 있다. 동쪽은 곧 안동 땅이다.

응방산(鷹放山) : 고을 동쪽 30리 수식현(水息縣) 동쪽에 있다. 만석산(萬石山)에서 갈려 나왔다.

가구계(可丘溪) : 근원의 하나는 만석산(萬石山) 주륵동(注勒洞)에서, 하나는 응방산(鷹放山) 청운동(靑雲洞)에서 나온다. 토동(兎洞)에 이르러 합류하여 가구촌(可丘村) 경암정(耕巖亭)을 지나 봉화의 물야천(勿也川)으로 들어간다.

애전수(艾田水) : 우구현(牛口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후평(後坪)에 이르러 칠전(柒田) 물과 합류하여 영천(榮川)의 신담(薪潭)으로 들어간다.

압동수(鴨洞水) : 봉황산 동쪽 기슭에서 나와서, 압동(鴨洞)과 사동(沙洞)을 지나 산운(山雲) 동쪽에 이르러 영천(榮川)의 오계(梧溪)로 들어간다.

수식계(水息溪) : 근원의 하나는 천곡(泉谷)에서, 하나는 조동(槽洞)에서 하나는 조양(朝陽)에서 나온다. 두문(斗文) 앞에서 합쳐져 남쪽으로 흘러가 거래암(去來岩)을 지나서 동편으로 지림간(智林澗)을 받고 서편으로 화부간(花釜澗)을 받아 수식현(水息縣)을 지난다. 또 동편으로 도점동(陶店洞) 물을 받아 큰 시내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이부석(二浮石)의 감계(鑑溪)와 합류한다.

화천(花川)

봉황산(鳳凰山) : ‘당산(唐山)’이라 일컫기도 한다. 화천(花川) 남쪽 도촌(桃村) 북쪽에 있다. 산허리에 우물이 있는데,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기도 하며, 가뭄에 빌면 징험이 있다고 한다. 고을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옥봉(玉峯) : 곧 당산(唐山) 동쪽 기슭으로, 귀만서당(龜灣書堂)의 진산(鎭山)이다.

태봉(台峯) : 도촌(桃村) 남쪽에 있다.

화천(花川) : 곧 감계(鑑溪)의 하류이다. 동애(東崖) 모정(茅亭)을 지나고, 수민단(壽民丹)의 요산(腰山)을 지나 안동의 내성천(奈城川)으로 흘러 들어간다. 굽이굽이 감도는 모양이 꿰미와 같아 옛날에 관천(串川)이라 하였다.

와란(臥丹)

문수산(文殊山) : 와란(臥丹)ㆍ우곡(愚谷)ㆍ두곡(杜谷)이 모두 이 산 남쪽 언덕에 있다. 고을에서 50여 리 거리이다.

갈방산(葛方山) : 우곡(愚谷) 동쪽에 있다. 산머리에 철마(鐵馬)가 있다.

관식산(觀式山) : 관식(觀式)마을 뒤에 있는데, 바로 안동 소천(小川) 경계이다. 고을에서 80여 리 거리이다.
와란(臥丹)의 시냇물은 봉화(奉化) 양정(陽井)으로 들어가고, 우곡(愚谷)의 냇물은 봉화 창해(昌海)로 들어가고, 사동(沙洞)ㆍ법전(法田)의 냇물은 봉화 갈천(葛川)으로 흐르고, 춘양(春陽)ㆍ관식(觀式)의 냇물은 안동 소천(小川)으로 흐른다.

수민단(壽民丹)

단산(丹山) : 단계서원(丹溪書院)의 주산(主山)이다.

탑성봉(塔星峯) : 빈동(賓洞) 수구(水口)에 있다.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데,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있다.

단계(丹溪) : 빈동(賓洞) 동남쪽에서 나와, 단계서원(丹溪書院)과 사암(蛇巖)을 지나 동쪽으로 영천(榮川)의 신천(新川)으로 들어간다.

대룡산(大龍山)

용암산(龍巖山) : 고을 남쪽 40리에 있는데, 바로 대룡산의 진산이다.

퇴령(退嶺) : 용암산 남쪽에 있다.

설암(雪巖) : 용산(龍山) 남쪽에 있다.

구지현(仇知峴) : 용산(龍山) 북쪽에 있다.

용계(龍溪) : 용암산에서 발원하여 용산 동구에 이르러 용담(龍潭)이 된다. 장항(獐項) 동남쪽으로 흘러 영천(榮川)의 두전(豆田) 시내로 들어간다.

창락(昌樂)

연화봉(蓮花峯) : 죽령(竹嶺) 북쪽에 있다. 희방사(喜方寺)의 진산으로, 그 뒤에 교내산(橋內山) 팔판동(八判洞)이 있다. 교내산이라 한 것에 대하여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단양(丹陽) 쪽에서 올라와 수교(水橋)를 건너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고 평평하여 사람이 살 만하고, 사방이 암석으로 험하게 이루어져 있어 사람이 들어올 길이 없다. 옛날에 여덟 명의 판서가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도솔봉(兜率峯) : 죽령 남쪽에 있다. 우뚝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바로 창락(昌樂) 전고(前皐)마을의 주산(主山)이다.

죽령(竹嶺) : 아래 〈관방(關防)〉 조목에 보인다.

창락천(昌樂川) : 근원의 하나는 죽령 아래에서 나오고, 하나는 연화봉(蓮花峯)에서 나와 수철교(水鐵橋) 앞에서 모인다. 창락관(昌樂館)을 지나 전고(前皐) 동쪽에 이르러 도솔봉(兜率峯)에서 나오는 물과 합쳐진 후 동쪽으로 흘러가 풍기의 기천(基川)으로 모인다.


 

[주D-001]〈유산록(遊山錄)〉 :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1549년(명종 4)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소백산을 등산한 기록. 《퇴계집》의 원제는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이다. 4월 22일 소수서원에서 묵고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민응기(閔應祺) 등과 함께 죽계를 거슬러 올라 초암(草庵)으로 올랐고, 이어서 묘봉암(妙峯庵)에서 소식을 듣고 온 종수(宗粹) 스님의 안내를 받아 철암(哲庵)ㆍ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이틀 밤을 잤다. 이어서 봉두암(鳳頭巖)ㆍ광풍대(光風臺))ㆍ백운암(白雲庵)ㆍ석름봉(石凜峯)ㆍ자개봉(紫蓋峯)ㆍ국망봉(國望峯)ㆍ중백운암ㆍ상백운암ㆍ제월대ㆍ환희봉(歡喜峯)ㆍ산대암(山臺巖)ㆍ자하대(紫霞臺)ㆍ적성(赤城)ㆍ백학봉(白鶴峯)ㆍ백련봉(白蓮峯)ㆍ금강대ㆍ화엄대ㆍ금당(金堂)ㆍ하가타암(下伽陀庵)ㆍ보제암(普濟庵)ㆍ진공암(眞空庵)ㆍ하가타암을 유람하고 관음굴에서 잤다. 26일 박달현(博達峴)과 비로사(毗盧寺)를 경유하여 욱금동(郁錦洞)으로 내려왔다. 《退溪先生文集 卷41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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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佛宇]



부석사(浮石寺) :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이 태백산(太白山)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기복하다가 우뚝하게 솟았는데, 그 산 남쪽에 절이 있다. 영남에서 제일의 명승지로 꼽는다. 당나라 고종 의봉(儀鳳) 원년(676, 문무왕16)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의상(義相)에게 명하여 창건하고 이름을 ‘부석(浮石)’이라 하였다. 동쪽에 선묘정(善妙井)이 있고 서쪽에 식사정(食沙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하면 감응이 있었다.
절의 스님이 전하는 말에, 의상(義相)이 길지를 찾으면서 손으로 큰 돌을 떨치니 날아와 금당(金堂) 뒤에 떠 있다가 7일이 되어 땅에 내려졌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매우 허탄하다. 지금에 살펴보면, 금당 뒤에 실제로 큰 돌이 있는데, 뿌리가 땅에 붙어 있지 않고 반석이 여러 돌 위에 덮여져 있는 형상이 마치 떠 있는 듯하다. 부석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그로 인하여 생긴 듯하다. 맨 위에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는데, 일명 금당전(金堂殿)이라 한다. 안에 도금불상(塗金佛像)이 안치되어 있으니, 바로 무량수(無量壽)이다.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1백 보쯤 올라가면 암자가 있는데, 조전(祖殿)이라 하고 의상조사(義相祖師)의 상(像)을 안치하였다. 조전 처마 안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선비화(禪扉花)라 한다. 스님이 말하기를,
“의상(義相)이 절을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떠나면 이 나무에 싹이 나올 것이다. 이 나무의 영고(榮枯)를 보아 내 생사(生死)를 징험하라’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싹이 나왔다. 지팡이가 산 나무로서 비를 맞지 앉고도 꽃과 잎이 피고 지면서 지금까지 1천여 년을 살고 있다.”
하였다. 퇴계(退溪) 이 선생의 시에,
옥인 양 높이 솟아 절 문에 기대어 섰는데 / 擢玉森森倚寺門
스님은 의상대사 지팡이가 변한 것이라고 하네 / 僧言卓錫化靈根
지팡이 머리에 응당 조계수(曹溪水) 있어 / 杖頭自有漕溪水
천지간 우로(雨露) 은택 빌리지 않으리라 / 不借乾坤雨露恩
하였다.
숙종 경자년(1720, 숙종46) 사이에 영천(榮川)에 사는 집의(執義) 박홍준(朴弘儁)이 소년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하였는데, 이 나무를 보고 스님이 허탄한 말을 한 것에 대하여 힐난하니 스님이 퇴계의 시를 거론하면서,
“이 나무를 해치는 사람은 죽는다.”
하였다. 이에 박홍준이,
“퇴계의 시는 중의 말을 그대로 적은 것일 뿐 그것을 믿은 것은 아니다. 이제 내가 이 나무를 꺾어 버릴 터인데, 만일 네 말이 옳으면 내가 천금 같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네 말이 증명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의 미혹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하고, 장도를 꺼내 잘라 버렸는데 박홍준이 무사하여 스님의 말이 증명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무가 다시 싹이 나와 세 줄기로 되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부사 조덕상(趙德常)의 시 소서(小序)에서
“부석사 북쪽 암자에 있는 선비화(禪扉花)는 의상선사(義相禪師)가 직접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 하는데, 퇴계 선생의 시에 ‘천지 우로(雨露)의 은혜를 빌리지 않네.[不借乾坤雨露恩]’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후학들이 해괴한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에 그 시에 차운하여 우리 선비들의 의혹을 깨트리겠다.”
하고 시를 쓰기를,
퇴계의 시어는 선문을 비웃은 것이니 / 陶山詩語笑禪門
마른 지팡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말 / 枯杖生花是不根
짧은 처마 아래에서 바람과 이슬 받아 / 短簷風露層階土
하늘과 땅의 은혜 늘 입고 있다네 / 猶荷乾坤長養恩
하였다.
금당(金堂) 서쪽에 취원루(聚遠樓)가 있는데 돌계단을 깎아질러 높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남쪽을 바라보면 온 산이 모두 눈앞에 펼쳐지는데, 시력이 좋으면 3백 리는 바라볼 수 있다. 취원루 북쪽에 장향대(藏香臺)가 있고, 금당 동쪽에 상승당(上僧堂)이 있고, 금당 뜰에 광명대(光明臺)가 있고, 그 앞에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문 앞에 법당(法堂)이 있는데, 법당의 왼쪽은 선당(禪堂)이고 오른쪽은 승당(僧堂)이다. 그 앞에 종각(鍾閣)이 있으며 역시 널찍하고 시원하다. 종각 아래에 또 대여섯 곳의 당실(堂室)이 있는데, 회전문(廻轉門)ㆍ조계문(曹溪門)이 있다. 그 앞에 큰 계단이 있다. 높이가 4~5길은 되고 길이가 1백여 보는 된다. 큼직한 돌을 층층이 쌓아 깎아지른 듯하고 옆으로 이어져 대(臺)를 이루어 온 절간이 그 위에 실려 있다. 귀신이 이룬 듯한 것으로 역시 장관이다.
또 그 아래 수십 보쯤에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아래 1리쯤에 영지(影池)가 있다. 절의 누각이 모두 이 연못 속에 비친다. 조전(祖殿) 서쪽에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은신암(隱神菴)이 있다. 은신암 동쪽에 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몇 길 되고 위에는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은신암 동서에 대(臺)가 있는데, 안계가 탁 트인 것이 이 산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다. 그 아래 골짜기에 극락암(極樂菴)이 있다. 조전 동쪽 골짜기에 동전(東殿)이 있고, 동전 뒤에 국사비(國師碑)가 있다.
주신재(周愼齋)가 취원루(聚遠樓)에서 지은 시에,
천년의 부석사 / 浮石千年寺
멀리 학가산과 평평하네 / 平臨鶴駕山
다락은 구름 위에 있고 / 樓居雲雨上
종소리는 북두성 사이에서 들리네 / 鍾動斗牛間
나무 깎아 멀리 하수 나누어 끌어오고 / 刳木分河逈
바위 갈라 널찍히 옥을 심었네 / 開岩種玉閑
절에서 자는 것을 탐하는 것이 아닌데도 / 非關貪貧佛宿
시원하여 돌아가는 것을 잊네 / 瀟洒却忘還
하였고, 또
만고의 사찰 부석사에서 / 萬古珠琳浮石寺
백발의 몸 석양 속 누각에 기대었네 / 白頭來倚夕陽樓
저문 하늘 밖으로 구름 점점이 흘러가 / 浮雲點點暮天外
고금을 헤아려 보며 시름에 젖네 / 商略古今多少愁
하였다. 퇴계의 시에,
붉은 난간 주위로 층층 쌓은 섬돌 / 矗成雲砌繚紅欄
신이 이룬 역사 감탄하며 구경하네 / 奔走神功偉覽看
천상 세계 놀랄까 큰 소리 내지 못하고 / 不敢高聲驚上界
뭇 산들이 남산에 자랑한 것을 이제 알았네 / 方知衆皺詑南山
신선은 연하 밖에서 살고 / 好居仙客超霞外
흥겨운 나그네 세상 밖으로 나왔네 / 乘興遊人出世間
고금이 일맥(一貉)인 것이 감회로우니 / 感慨古今歸一貉
술잔 앞에서 관직 생활 어려움 말하지 말게나 / 樽前休說宦途難
하였고, 또
귀신과 하늘이 만든 만고의 누각 / 鬼役天成萬古樓
풍운에 맡겨 두고 새 가을 맞네 / 風雲一任洗新秋
깊은 밤 홀로 고승과 마주한 자리 / 夜深獨對高僧榻
오직 먼 허공에 초승달만 바라보네 / 惟見長空月似鉤
하였다.
옛날 소동파(蘇東坡)의 〈취원루(聚遠樓)〉 시에,
끝없는 청산 흩어 놓고 거두지 않았고 / 無限靑山散不收
발 사이로 바람과 비 몰아쳐 오네 / 雲奔浪捲入簾鉤
눈에 보이는 곳까지 경계를 삼는다면 / 直將眼力爲彊界
어찌 인간세상 만호의 제후일 뿐이랴 / 何啻人間萬戶侯
하였다. 시 속의 누각 이름이 이곳과 우연히 같고, 시 속의 말도 정히 이곳 취원루의 기상을 읊은 듯하다. 승려 혜명(慧明)이 소동파의 시를 이 누각의 머리에 걸어 두었는데, 역시 하나의 기이한 경관이다.

영은암(靈隱菴) : 부석사(浮石寺) 서북쪽 기슭 1리쯤에 있다.

내원암(內院菴) : 부석사 서쪽 산허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몽견암(夢見菴) : 부석사 서쪽 20리쯤 되는 자개봉(紫盖峯) 동쪽에 있다.

미륵당(彌勒堂) : 고을 북쪽 15리쯤 되는 곳 큰길가에 있다. 지곡(枝谷) 동쪽 기슭에 석불(石佛)이 있었는데, 크기가 한 길 남짓 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었다. 옛날 영천(榮川) 땅일 적에 영천군수가 한정(閑丁)을 충당하는 일로 누차 면주인(面主人)을 매질하여 바치기를 독촉하니, 면주인이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에 석불이 매질을 면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번포(番布)를 징수할 곳이 없고 매질을 당한 분을 이기지 못하여 석불에게,
“모두가 네 탓이다.”
하고 분풀이를 하고는 그 아래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석불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와서 베를 가지고 가거라.”
하였다. 면주인이 이상히 여기고 다음날 아침 일찍 가니 과연 석불 어깨 위에 베 두 필이 걸려 있어 드디어 가지고 가서 관에 바쳤다. 대개 그날 밤 석불이 김씨 성을 가진 부자로서 아들이 없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
“네가 베 두 필을 내 어깨에 걸어 두면 아들을 얻게 될 것이다.”
하여, 그 사람이 한밤중에 즉시 베를 갖다가 걸고 기도하여 과연 아들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초암사(草菴寺) : 소백산에 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먼저 이 산에 들어와 풀로 암자를 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절 앞의 시냇물이 한 줄기는 석륜동(石崙洞)에서 나오고 한 줄기는 하가동(下伽洞)에서 나와, 중봉(中峯) 아래에서 합류하여 청운대(靑雲臺)를 지나고, 구불구불 돌아 동남쪽으로 내려가 죽계(竹溪)의 원류가 된다. 좌우로 층벽과 기암(奇岩)이 위아래로 쌓여 있고 기이한 반석이 깔려 있다. 혹은 높은 데서 쏟아져 폭포가 되고 혹은 드넓게 고여 맑은 못을 이루니, 굽이굽이 기이한 경관이고 곳곳마다 볼만하다.
퇴계(退溪) 이 선생과 신재(愼齋) 주공이 서로 이어 유람하여 계곡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 기이한 것을 찾고 으슥한 곳을 탐방하며, 곳곳마다 시를 짓고 이름을 붙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큰 현인이 자취를 남겨 깊이 숨겨져 있던 경계가 세상에 드러났고, 후세 사람으로서 이 산을 유람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들이 남긴 자취를 우러르게 되니, 단지 산수의 기이한 경치를 구경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무이구곡(武夷九曲)이 회암(晦庵)을 통해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던 것과 전후 사례가 같고, 이것이 바로 초암사의 가장 뛰어난 자취이기에 기록한다.
철암(哲庵)은 초암사 위 산허리에 있다. 가장 시원한 곳으로 시야가 높고 훤히 트였다. 샘물이 암자 뒤 바위 바닥에서 나와 암자 동서로 물줄기가 나누어진다. 물맛이 달고 차다. 암자는 지금 없어졌다. 명경암(明鏡庵)은 철암 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석륜암(石崙庵)은 명경암 위에 있다. 암자 북쪽에 봉두암(鳳頭菴)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중백운암(中白雲菴)은 석륜암 동부쪽에 있었다. 암자 앞에 옛날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상백운암(上白雲菴)은 중백운암 위에 있는데, 지세가 높고 가파르다. 제월대(霽月臺)가 그 앞에 있다. 상가타암(上伽陀菴)은 석름봉(石廩峯) 아래에 있다. 상하 좌우에 층벽이 우뚝하게 서 있고 기이한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 운천임학(雲泉林壑)이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동가타암은 상가타암 동쪽에 있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에서 9년 동안 좌선하면서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 했으며, 시집이 있다. 퇴계가 말하기를,
“몇 구절만 외어도 모두 경계되는 내용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오곡이 익지 않는 것에 대한 탄식이 일게 한다.”
하였다. 중가타암은 상가타암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하가타암은 중가타암 아래에 있었다. 푸른 산봉우리가 빙 둘러 있어 그윽하고 조용한 것이 기이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관음굴(觀音窟)은 중봉(中峯) 위에 있다.

성혈사(聖穴寺) : 초암사(草菴寺) 동쪽 골짜기에 있는데 초암사와 같은 때 창건하였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성자(聖者)가 바위굴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혈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굴이 있다.

희방사(喜方寺) : 소백산 연화봉(蓮花峯) 아래에 있다.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신라 고승 두운(杜雲)이 이 산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암자 아래에 호랑이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두고 항상 왕래를 했는데, 하루는 호랑이가 스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치 답답함을 하소연하는 시늉을 하였다. 스님이 살펴보니 호랑이의 목에 뼈가 걸려 있었다. 스님이 손을 넣어 빼주니, 호랑이가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흔들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호랑이가 큰 돼지를 지고 왔으므로 스님이 그 뜻을 헤아리고 새끼에게 던져 주었다. 또 하루는 호랑이가 오랫동안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죽을 쑤어 그 새끼에게 먹였는데, 사흘이 지나서 스님이 밤에 염불을 하고 있노라니 호랑이가 또 어떤 사물을 지고 왔다. 스님이 불을 켜고 보니 아리따운 처녀였다. 몸에 상처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온돌에 누여 간호하니 이윽고 깨어났다. 그 사는 곳과 성씨를 물으니 경주 상호장(上戶長)의 딸이었다. 스님이 드디어 남자 복장을 하게 하여 데리고 그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에서는 한창 무당을 불러 놓고 푸닥거리를 하는 중이었다. 얼마 뒤에 여종이 나와서 보고는 들어가 그 주인에게
“저 스님의 상좌(上佐)가 우리 낭자와 흡사합니다.”
하였다. 그 아버지가 나와서 보니 과연 그의 딸이었다. 드디어 안고서 통곡하고 스님을 맞이하여 마루로 올라가 말하기를,
“노스님의 후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제 딸로서 섬기게 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에 스님이 성내며 말하기를,
“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옷깃을 떨치고 떠나왔다. 호장이 재물을 털어 장인을 모아 암자 아래에 두 개의 탑을 세우게 하였다. 그런데 석재를 실은 말이 동구에 이르러 거꾸러지고 나아가지를 못하자 소로 교체하였다. 그 소가 지나간 바위 위에 소의 발자국이 생겼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우적석(牛跡石)’이라 하였다. 절 이름을 ‘희방(喜方)’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 기쁨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
부사 조덕상(趙德常)의 시에,
우적암(牛迹巖) 앞에 해는 저물고 / 牛迹巖前日欲西
흰 구름 속 붉은 나무 길가에 늘어섰네 / 白雲紅樹路高低
산자락 돌아가는 곳에 용추(龍湫) 있어서 / 龍湫知在山回處
온 골 찬 소나무에 이슬 기운 처연하네 / 萬壑寒松露氣凄
하였고, 또
푸른 절벽 폭포에 비 온 뒤 물이 불어 / 蒼崖飛瀑雨餘添
온 골에 우레 소리 대낮에도 찌렁찌렁 / 萬壑輕雷白日嚴
못 속에 숨은 용 장난을 좋아하여 / 潭底潛龍眞好事
반 공중에 수정 같은 발을 드리웠네 / 半空垂下水晶簾
하였다.

도암(道菴) : 문수산(文殊山)에 있는데, 고을에서 70리 거리에 있다. 문수산은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중간에 백병산(白屛山)을 일으키고, 동으로 휘어 골짜기를 지나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았다. 봉우리 동남쪽에 암자가 있으니, 신라의 승려 목우자(牧牛子)가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 하여 이름을 ‘도암’이라 한다. 암자가 산꼭대기에 자리 잡아 안계가 아득하고, 동북으로 바라보면 태백산이 은연히 드러나 뭇 산 밖에 있고, 서쪽으로는 소백산ㆍ월악산(月岳山)ㆍ지리산(智異山)이 달려오고, 동쪽으로는 청량산(淸凉山)ㆍ일월산(日月山)ㆍ주왕산(周王山)이 서 있고, 남쪽으로는 학가산(鶴駕山)ㆍ팔공산(八公山)ㆍ원적산(圓寂山)을 굽어보며, 동남쪽으로는 동해 해변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암자 서쪽 수백 보에 옛날에 문수암(文殊庵)이 있었고, 암자 아래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 나무 홈통으로 받아 절벽을 거쳐 도암으로 흘러들게 했다. 스님이 움켜 마시면 상쾌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금정암(琴鄭菴) : 도암(道菴) 아래 2리쯤에 있다. 옛날에 금씨(琴氏), 정씨(鄭氏) 두 사람이 여기서 글을 읽었다 하여 ‘금정암’이라 하였다. 자리는 도암보다 조금 낮은 곳이나 안계가 트인 것은 못하지 않다.

중대사(中臺寺) : 금정암(琴鄭菴) 아래 1리쯤에 있다. 중대사에서 도암(道庵)까지는 바위를 뚫고 지나가고 돌층대를 밟는 길이 매우 기이하다.

성불암(成佛菴) : 중대사 아래 10리쯤에 있다. 자리가 깊숙하여 매우 그윽한 정취가 있다.


 

[주D-001]조계수(曹溪水) : 물 이름. 원줄기는 광동성 곡강현 동남쪽인데,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이 거기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함. 원문의 ‘漕’는 ‘曹’의 오기로 보임.
[주D-002]퇴계의 시 : 《退溪先生文集》 別集 卷1에 실려 있고, 제목은 〈次聚遠樓〉이다.
[주D-003]일맥(一貉) : 옛글에 “고금이 모두 한 언덕의 여우와 같다.[古與今如一丘之貉]” 라고 하였다.
[주D-004]면주인(面主人) : 조선시대 각 고을에 속하여 고을과 면(面)을 심부름하던 사람.
[주D-005]암자 : 원문의 ‘岩’은 ‘庵’의 오기인 듯하다.
[주D-006]오곡이 …… 탄식 : 맹자가 “오곡이 좋은 식물이지만 익지 못하면 피만도 못하다. 대저 인(仁)도 완숙이 중요할 뿐이다[五穀者。種之美者也。苟爲不熟。不如荑稗。夫仁亦在乎熟之而已矣。]” 하였다. 《孟子 告子章句上》 스님이 이단이지만 뛰어난 사상이 감탄스럽다는 뜻이다.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7]두운(杜雲) : 신라 말기의 승려.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용문산(龍門山)에서 수도하였으며, 870년(경문왕 10) 용문사를 창건하였다. 883년(헌강왕 9)에는 소백산에 있는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하였다. 왕건(王建)이 남쪽을 지나다가 두운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으며, 936년(태조 19)에는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죽계지 서문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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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문성공 사당 기문[白雲洞文成公廟記] 성세창(成世昌)


북쪽 변방에 웅장하게 서 있는 백두산의 남쪽 줄기가 동해안을 따라 달려오다가 강원도에 이르러 크게 응축되어 빼어난 곳이 금강산이고, 다시 남쪽으로 달리다가 삼척(三陟) 지경에 이르러 봉우리가 이루어져 하늘높이 솟아오르니 이는 태백산(太白山)이다. 다시 남쪽으로 뻗어 가다가 기운을 감싸 안고 솟아있는 산이 있으니 바로 소백산(小白山)이다. 그 산 아래로 줄기가 돌고 돌아 그윽하고 깊숙한 골짜기를 이루어 맑은 물이 휘감아 흐르니 이것이 죽계이다. 죽계 가에 옛날 순흥이란 큰 고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풍기군으로 통합되었다. 맑게 서린 그곳 산천의 정기로 보면, 의당 대인군자가 태어나 시운(時運)을 부지(扶持)하고 교화를 일으켜 사도(斯道)를 영원토록 계승시키고도 남음직한 곳이다.
우리 문성공 휘 향(珦)은 실로 특이한 기운을 받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좋아하였고 항상 바른 도리로서 몸을 닦았다.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급제하여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온 후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공은 당시 학교가 퇴폐하여 유가(儒家)의 도가 땅에 떨어지려 하자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사재(私財)로써 학사(學舍)를 세우고 노비를 바쳐 학도에게 이바지하였다. 공께서 문교(文敎)에 공을 끼친 것은 이토록 큰 것이었다.
만년엔 항상 회암선생(晦菴先生)의 영정을 걸어놓고 사모하면서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호를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 장사지내는 날에는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의 학생이 모두 소복을 하고 노제(路祭)를 지냈다.
아, 우리 도의 흥폐는 실로 세교(世敎)의 높고 낮음에 관계되니 이는 쇠퇴해진 고려의 왕업이 공의 힘을 입어 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조가 일어난 이후 학교의 흥성함도 또한 공의 도움이 없지 않았다. 이 어찌 어진 군자의 공이 아니겠는가.
현 군수 주세붕은 뜻을 가지고 옛 도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일찍이 공의 영정을 그 후손 전주서(前注書) 안정(安珽)의 집에서 배알한 바 있었다.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먼저 폐지된 순흥부 성 남쪽 몇 리쯤에 있는 공의 고택을 찾았는데 주춧돌이 다 파괴되고 잡초가 우거져 있으므로 깊은 감회에 젖고 한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다시 고적과 승경(勝景)을 찾아 발길을 옮기다가 옛 순흥부 가까운 곳에서 숙수사 옛터를 찾아내었으니, 그 절은 바로 전현(前賢) 노여(魯璵)의 시에서,
싸늘한 산 빛을 밀치며 스님은 지게문을 닫고 / 寒堆岳色僧扃戶
차가운 냇물 소리 밟으며 나그네 누각에 오르네 / 冷踏溪聲客上樓
라고 읊었고, 안문정공의 시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 산머리에 쭈그리고 있는 모양 / 靈龜形勢縮山頭
그 아래 깊은 시냇가엔 백 척의 누각 우뚝하네 / 下有深溪百尺樓
라고 읊었던 곳이다.
이곳이 바로 공이 어린 시절에 독서하던 곳이었으므로 주세붕은 더욱이 감개무량하였다. 이에 목수를 부르고 물자를 모아 사당을 세우고 주서(注書)의 집에 소장된 화상을 모셔와 봉안하고 때맞추어 경건하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사당 앞에 서원을 세워 인근 고을 선비들이 독서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처음에 터를 다듬기 위하여 한 자쯤 파다가 놋쇠 수백 근을 발굴하였는데 어느 시대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그것을 팔아 경사(經史)를 구입하여 학도의 학업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것을 통하여 주세붕이 선을 숭상하고 옛것을 좋아한 마음을 대략 엿볼 수 있다.
문성공은 나의 할머니 안씨의 6대조이다. 이번에 외손으로서 선조의 덕업이 오래 전해질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사실을 듣고 비감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본말을 기록한다.
가정(嘉靖) 24년(1545, 인종1) 5월 일에, 8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성세창(成世昌)이 삼가 쓰다.


 

[주C-001]성세창(成世昌 1481~1548)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아버지는 예조판서 현(俔)이다. 회헌 안향의 6세손 안종약(安從約)의 사위인 성염조(成念祖)의 손자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며, 이심원(李深源)에게 역학(易學)을 배웠다. 1501년(연산군 7) 사마시에 합격했다. 1504년 아버지가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자 그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사직서참봉에 임명되었고,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정자에 등용된 뒤 저작ㆍ박사ㆍ정언 등을 지냈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의ㆍ사간ㆍ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 등을 역임했다. 1517년 홍문관직제학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려 하자 반대했으며, 1519년 병으로 사직하여 기묘사화의 화를 피했다. 다시 등용된 뒤 강원도관찰사ㆍ형조참판을 지내고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예조참판ㆍ이조참판을 지내며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진사류들의 등용에 힘썼다. 1530년 김안로(金安老)를 논척(論斥)하다가 평해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허항(許沆)ㆍ채무택(蔡無澤)과 함께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유배에서 풀려나와 한성부우윤ㆍ공조판서ㆍ형조판서ㆍ이조판서ㆍ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45년(인종 1) 좌찬성ㆍ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추부(中樞府)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가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신원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많은 외교문서를 작성했고, 글씨ㆍ그림ㆍ음률에 뛰어나 삼절(三節)로 불렸다. 저서로 《돈재집》ㆍ《식료찬요(食療纂要)》가 있으며, 글씨로 〈성이헌여완갈(成怡軒汝完碣)〉ㆍ〈부사정광보묘비(府使鄭光輔墓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주D-001]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 : 칠관(七館)은 고려 때 국학에 설치한 일곱 개의 분과. 즉 《주역(周易)》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이택관(麗澤館), 《상서(尙書)》의 대빙관(待聘館), 《시경(詩經)》의 경덕관(經德館), 《주례(周禮)》의 구인관(求仁館), 《대례(戴禮 : 禮記)》의 복응관(服膺館), 《춘추(春秋)》의 양정관(養正館), 병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예관(講藝館)을 말하는데, 칠재(七齋)라고도 한다. 십이도는 고려 때에 있었던 12사학(私學), 즉 문헌공도(文憲公徒)ㆍ홍문공도(弘文公徒)ㆍ광헌공도(匡憲公徒)ㆍ남산도(南山徒)ㆍ서원도(西園徒)ㆍ문충공도(文忠公徒)ㆍ양신공도(良愼公徒)ㆍ정경공도(貞敬公徒)ㆍ충평공도(忠平公徒)ㆍ정헌공도(貞憲公徒)ㆍ서시랑도(徐侍郞徒)ㆍ귀산도(龜山徒)를 가리킨다.


 

 

권1 안씨행록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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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조선국 추충익대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녕부원군 양도공 안공 묘지명 서문과 함께 [有明朝鮮國推忠翊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興寧府院君諡良度安公墓誌銘 幷序] 윤회(尹淮)


안씨(安氏)의 조상은 순흥(順興)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급제(及第) 석(碩)이 학문에 힘써 집안을 일으키더니, 얼마 안 되어 깊이 숨어 자취를 감추어 시골의 착한 선비가 되었다. 그가 문정공(文貞公) 축(軸)을 낳으니,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였고 고려를 도와 벼슬이 첨의찬성사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僉議贊成事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정사로 일대의 명경(名卿)이 되었다. 그가 문간공(文簡公) 종원(宗源)을 낳았는데, 약관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淸職)ㆍ요직(要職)을 역임하고 드디어 대정(大政)에 참여하였다. 개국(開國) 초년에 나라의 원로로서 덕을 쌓아 판문하부사 집현전대학사(判門下府事集賢殿大學士)가 되었다가 그 지위에서 졸하였다. 우상시(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세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므로 부인을 경혜택주(慶惠宅主)로 봉하였다. 바로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공은 휘가 경공(景恭), 자가 손보(遜甫)이다.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조금도 부호가의 화려한 습속이 없었고, 온화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경건함은 천성으로 타고났다. 지정(至正) 25년 을사년(1365)에 사마시에 올랐고, 홍무(洪武) 5년 임자년(1372)에 산원(散員)에 보직되었고, 명년에 낭장(郞將)에 특진되어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겸하였고, 병진년(1376)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로서 동진사(同進士)에 합격하여 전리(典理)ㆍ전법(典法) 좌랑(佐郞)과 사헌지평(司憲持平) 등을 역임하였고, 예의정랑(禮儀正郞)에서 다섯 차례 전임되어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다. 다시 비순위 상호군(備巡衛上護軍)으로서 판통례문사 진현관 제학(判通禮門事 進賢館提學)을 겸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判典校寺事 知製敎 禮儀判書)가 되었고 또 전법(典法)으로 옮겼다. 이때 죄수를 불쌍히 여기고 공평하게 판결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황주목사(黃州牧使)가 되어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무마하니 백성들이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였다. 임신년(1392) 4월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7월에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아 혁명하였을 때 공이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추대하여 좌대언(左代言)에 올랐다. 관제가 새로 시행되면서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丞旨)에 승진되었다. 이때는 정사가 처음 시작될 시기로서 공이 제일 먼저 승지로 있으면서 왕명출납이 분명하고 진실하였고, 아름다운 계획과 중요한 건의를 올려 도움이 크고 많았다. 계유년(1393)에 사헌부 대사헌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都評議使司使 寶文閣學士)에 승진되었다. 공이 두 차례나 사헌부에 들어가 정직함을 견지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기풍이 엄숙해졌다. 갑술년(1394)에 문간공의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자 자헌대부로서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공훈과 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
영락(永樂) 4년 병술년(1406)에 판공안부(判恭安府)로서 정헌대부에 가자되고, 판한성부(判漢城府)로서 두 차례 더하여 숭정대부가 되었다. 무자년(1408)에 부친상을 당하여 약물의 봉양과 상장(喪葬)의 예식에 정성과 효성을 다하니 보는 이들이 공경하고 우러렀다. 경인년(1410)에 태종이 송도에 거둥할 때 공을 개성유후(開城留後)로 삼았고, 병신년(1416)에 보국숭록대부 집현전 대제학에 특진되어 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직무를 걱정하여 일을 잘 다스리고, 대신이 되어서는 장중한 모습으로 조정의 표준이 되었다. 공이 일찍이 경상도 안렴사와 전라도ㆍ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어서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치면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부지하며 너그럽고 간소하여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신축년(1421) 정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 75세였다. 공이 병에 걸렸을 때 태종과 지금 전하께서 급히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하고 중사(中使)를 시켜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양궁(兩宮)이 애도하여 조문과 치제를 후하게 하고 유사로 하여금 대장(大葬)을 하게 하였고 시호를 양도(良度)라 하였다. 2월 27일 경신일에 금천(衿川) 백사동(栢寺洞)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마음가짐이 곧고 신실하였고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였다. 일찍이 형세에 따라 처신하지 않았으며 또한 특이한 행동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 정성과 믿음으로 하여 거짓이 없었으며, 마음속으로 잘잘못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드러내어 말로 교계하지 않았다. 그 겸손한 덕은 벼슬이 높을수록 더욱 나타났으며, 본래부터 화려함을 싫어하고 검소함을 힘썼다. 만년에 한가히 생활하며 잘 나가지를 않았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으나 오직 기분이 흡족하게 할 뿐이었다. 사치를 숭상하지 않고 흉금이 담담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다. 공의 형제 셋이 모두 명성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직 공만이 천복을 누려 나라의 원로가 되었다. 손자와 증손이 번성하여 문호가 더욱 창성하였으니, 적선한 보답이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부인 오천 정씨(烏川鄭氏)는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의 딸이다. 공신의 맏며느리라고 하여 의정택주(懿靜宅主)로 봉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이 순(純)이다. 현재 숭정대부 호조판서 보문각대제학으로서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숭직(崇直)은 용양사 상호군(龍驤司上護軍)이다. 둘째 숭선(崇善)은 승정원 도승지이니, 경자년 과거에 장원을 하였다. 셋째 숭신(崇信)은 웅무사 호군 중추원경력(雄武司護軍 中樞院經歷)이다. 넷째 숭효(崇孝)는 중군사직(中軍司直)이다. 맏딸은 사헌부 대사헌 이숙치(李叔畤)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조혜(趙惠)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사헌부 감찰 김준례(金遵禮)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상호군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어 사직(司直) 박강(朴薑)에게 출가하였다. 도승지는 상호군 송천우(宋千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훈(訓), 둘째는 의(誼)이다. 맏딸은 경창부승(慶昌府丞) 김숙(金潚)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세자좌사경(世子左司經) 조석문(曺石門)에게 출가하였다. 호군은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숙야(李叔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전(詮)이고, 맏딸은 도염녹사(都染錄事) 최민(崔旼)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사직은 동지충추원사 이숙무(李叔畝)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겸(謙)이고, 둘째는 눌(訥)이다. 딸은 모두 어리다. 대사헌은 딸 하나를 두어 인순부승(仁順府丞) 이계현(李繼賢)에게 출가하였다. 판통례는 5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 지당(之唐)은 종묘서승(宗廟署丞)이고, 둘째 지은(之殷)은 부사정이고, 셋째 지하(之夏)이고, 넷째는 지한(之漢)이고, 다섯째는 지주(之周)이다. 맏딸은 유학 조계번(趙季蕃)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감찰은 4남 4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맹절(孟節)이고, 둘째는 맹의(孟義)이고, 셋째는 맹렴(孟廉)이고, 넷째는 맹치(孟恥)이다. 맏딸은 유학 홍도상(洪道常)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현손(玄孫)은 약간 명이 있다. 박사직(朴司直)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김부승(金府丞)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전(詮)은 2녀를 두었다. 녹사는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서승(署丞)은 1남을 두었고 부사정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아, 참으로 번성한 가문이라고 하겠다.
명(銘)을 한다.

높은 소백산 / 小白之山
위로 푸른 하늘에 닿아있고 / 上磨蒼穹
기이한 기운이 응결하여 / 鍾奇孕秀
7상 5공이 나왔도다 / 七相五公
후하게 양도공을 낳으니 / 篤生良度
대대로 가업을 계승하였네 / 箕裘是承
오직 충과 효로 / 惟忠惟孝
전전긍긍한 삶 / 戰戰兢兢
공훈이 종과 솥에 새겨지고 / 勳銘鍾鼎
명망이 사대부 사이에 중하도다 / 望重簪紳
원로의 덕 / 老成之德
시초와 거북처럼 신묘하였네 / 蓍龜其神
살아서는 은총 높았고 / 生被殊遇
죽어서는 예우 빛났네 / 沒有典章
한 평생의 삶 / 哀榮終始
청사에 빛나고 / 靑史增光
자손이 번성하여 / 子孫繩繩
복록이 다하지 않네 / 福祿未央
돌을 다듬어 글을 묻어 / 鑱石埋辭
길이 후세에 보이노라 / 用示攸長


 


권1 안씨행록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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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별곡(竹溪別曲) 안축(安軸)


죽령 남쪽 영가(永嘉 안동(安東)) 북쪽 소백산 앞에
천 년 흥망성쇠 속에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順政城) 안
다른 데 없는 취화봉(翠華峯)에 왕의 태를 묻었으니
아, 이 고을 중흥 광경 어떠한고

청백한 기풍 지닌 높은 가문
두 나라의 관함을 지녔으니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어떠한고

숙수루(宿水樓)ㆍ복전대(福田臺)ㆍ승림정자(僧林亭子)
초암동(草庵洞)ㆍ욱금계(郁錦溪)ㆍ취원루(聚遠樓) 위에서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 속 비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어떠한고

고양(高陽)의 술꾼들처럼
구슬 신발 신은 3천 식객(食客)처럼,
아, 손잡고 어울리는 광경 어떠한고

채봉(彩鳳)이 날고 옥룡(玉龍)이 서린 언덕
지필봉(紙筆峯)ㆍ연묵지(硯墨池)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마음은 육경(六經)을 공부하고 뜻은 천고를 궁구하는 공자의 무리들
아, 봄에는 글을 외우고 여름에는 거문고 타는 광경 어떠한고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에
아, 갈도(喝道) 외치며 신임자를 맞이하는 광경 어떠한고

초산효ㆍ소운영과 아름다운 계절 동산에서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꼬리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 구름처럼 늘어지는데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복사꽃 붉을 때
아, 천리에서 그리워하니 어찌할꼬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 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푸른 나무 우거지고 단청 고운 누각은 그윽한데
거문고 가락 위로 불어오는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어떠한고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태평을 즐기니
아, 사시사철 즐겁게 놀아보세


 

[주C-001]죽계별곡 : 《謹齋先生集》 卷2 補遺에 실려 있다.
[주D-001]다른 데 없는 : 《죽계지(竹溪志)》 잡록 후(雜錄 後) 〈풍기고적기(豊基古跡記)〉에서 “우리 문종(文宗)의 태(胎)가 명봉산(鳴鳳山)에 안장되었고 소헌왕후(昭憲王后 : 세종비(世宗妃))의 태 및 고려(高麗) 세 왕의 태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 안장되었다. 하나의 산에 어태(御胎)를 안장한 곳이 네 곳에 이르고, 한 고을에 어태를 안장한 곳이 다섯이니 다른 고을에는 없는 바이다.[我文宗胎藏于鳴鳳山。昭憲王后胎及高麗三王胎。皆藏小白山。一山而安御胎至于四。一邑而安御胎至于五者。他邑所無有也。]” 하였다.
[주D-002]취화봉(翠華峯)에 …… 묻었으니 : 취화는 비취(翡翠) 깃으로 장식한 깃발로서 천자의 행차ㆍ어가ㆍ깃발ㆍ일산 등을 표현하는 말. 현재 순흥에 ‘취화봉’이라는 산봉우리는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취화봉은 임금의 태를 묻은 산과 관련된 시어로 추정된다. 고려 성종(成宗) 때에는 순흥을 순정이라 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의 태를 묻고 흥녕현령(興寧縣令)으로 고쳤고, 충숙왕(忠肅王)의 태를 묻고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시켰고,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묻고 순흥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東國輿地勝覽 卷25 豊基》
[주D-003]숙수루(宿水樓) : 현재 소수서원 터에 있었던 숙수사의 누각. 노여(魯璵)의 시 〈順興宿水寺樓〉에서 “가벼운 행장에 짧은 모자 쓰고 그윽한 곳 찾아드니 / 절간은 변함없이 10년 전의 모습 / 벽의 값어치는 수년 간 시와 더불어 중해지고 / 절 이름은 천년 동안 물과 더불어 흐르네 / 싸늘한 산 빛을 밀치며 스님은 지게문을 닫고 / 찬 시냇물 소리 밟으며 객은 누각에 오르네 / 휘바람 불며 서성거리니 어느덧 날은 저물어 / 난간에 기대어 고개 돌리니 향수 일어나네[輕裝短㡌一尋幽。蘭院依然十載遊。壁價幾年詩共重。寺名千古水同流。寒堆岳色僧扃戶。冷踏溪聲客上樓。長嘯徘徊日云暮。倚欄回首起鄕愁。]” 하였다. 《東文選 卷14》
[주D-004]승림정자(僧林亭子) : 승림사는 순흥 석교리(石橋里)에 옛터가 있고 유적으로 석불입상이 남아 있으나,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아직 발견된 문헌이 없다. 승림정인지 승림사의 정자인지도 미상이나, 후자가 가까울 듯하다.
[주D-005]취원루(聚遠樓) : 부석사(浮石寺) 금당(金堂) 서쪽에 있었던 누각. 10여 길 돌계단 위에 자리잡아 남쪽을 바라보면 온 산이 펼쳐지는데, 안계가 트이면 3백 리는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구한말에 소실되어 지금은 없다.
[주D-006]고양(高陽)의 술꾼 : 동진(東晉)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이 술을 매우 즐겨 항상 주식(酒食)을 싣고 양양(襄陽)의 호족(豪族)인 습씨(習氏) 집안의 연못 가에서 진탕 마시고 만취하여 돌아오므로, 그때 아이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는고 / 고양지로 나가는구나 / 해 저물면 거꾸로 실려 와서 / 잔뜩 취해 정신이 없다네[山公出何許。往至高陽池。日夕倒載歸。茗艼無所知。]” 하였다. 《晉書 卷43 山簡傳》
[주D-007]구슬 …… 식객(食客) : 전국(戰國) 시대에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에게 객(客)을 보내면서 화려하게 꾸며서 자랑하려고 대모(玳瑁)로 잠(簪)을 만들어 꽂고 칼집을 주옥(珠玉)으로 꾸몄더니 춘신군의 상객(上客)들은 구슬[珠]로 만든 신을 신고 있었으므로 평원군의 객(客)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주D-008]지필봉(紙筆峯)ㆍ연묵지(硯墨池) : 퇴계 이황의 시 〈過順興鄕校舊址〉에서, “지필봉 앞 연못 물 마르니 / 당시 현송 다시 누가 논할꼬[紙筆峯前池水涸。當時絃誦更誰論。]” 하였고, 그 제목 주기에서 “지필봉과 연묵지가 있다.[有紙筆峯硯墨池]” 하였다. 주세붕의 시 〈白雲洞 次朱文公白鹿洞賦〉에서도 “회헌이 살던 옛 마을을 찾아가니 / 연당(硯塘)이 논으로 변하여 안타까웠어라[咨晦軒之故里兮。悶䆉稏於硯塘。]” 하였고, 연당(硯塘)에 대한 소주(小注)에서 “연묵지(硯墨池)는 없어지고 지금 논이 되었다.[硯墨池。今廢爲水田。]” 하였다.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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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순흥 도호부

◎ 순흥 도호부(順興都護府)
본디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신라에서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흥주(興州)로 고쳤다. 현종 무오년에 길주(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移屬)시키고, 명종 1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렬왕 갑술년 태(胎)를 안치하고 흥령현(興寧縣)으로 고쳐서 영(令)을 두었으며, 충숙왕(忠肅王) 계축년에 또 태(胎)를 안치하고 승격시켜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삼았고, 충목왕(忠穆王) 무자년에 또 태(胎)를 안치하고 순흥부(順興府)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순정(順政)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진산(鎭山)은 소백산(小白山)이다.【부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동(安東)의 부곡(部曲) 소라(召羅)에 이르기 41리, 서쪽으로 죽령(竹嶺)에 이르기 19리, 남쪽으로 영천(榮川)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단양(丹陽)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는 2백 84호, 인구가 1천 6백 79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6명, 진군(鎭軍)이 30명, 선군(船軍)이 81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안(安)·이(李)·신(申)·윤(尹)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석(石)이다. 내성(來姓)이 2이니, 김(金)·정(鄭)이며, 속성(續姓)이 3이니, 김(金)【하나는 경주에서 왔고, 하나는 광주(光州)에서 왔다.】·윤(尹)【주천(酒泉)에서 왔다. 모두 향리이다.】 이다. 인물은 시중 문성공(侍中文成公) 안향(安珦)【충렬왕 때 사람인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판문하부사 문간공(判門下府事文簡公) 안종원(安宗源)【본조 태조 때 사람.】·영돈녕부사 소의공(領敦寧府事昭懿公) 안천보(安天保)【본조 태종 때 사람.】 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2천 4백 59결이다.【논이 7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콩·보리·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칠·종이·석이(石茸)·송이버섯·잣·지초·인삼·자리[席]·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돼지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백급(白芨)·적복령(赤茯苓)·백복령(白茯苓)·맥문동(麥門冬)·웅담(熊膽)·측백나무씨[栢子仁]이다.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산겨자[山芥]·은구어(銀口魚)와, 수정석(水晶石)이 부(府) 서쪽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府)의 북쪽 사동리(沙洞里)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부(府)의 동쪽 가이리(加耳里)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백 30보이며, 안에 우물 둘이 있다.】 소백산 석성(小白山石城)은 부(府)의 서쪽 20리에 있다.【둘레가 5백 31보인데, 높고 험하며, 안에 샘 셋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영천 군창(榮川郡倉)도 함께 아울러 들여다 둔다.】 취원루(聚遠樓)【부(府) 북쪽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창락(昌樂)과 신역(新驛)이며, 험조(險阻)한 곳은 죽령산(竹嶺山)이다.【부(府) 서쪽 33리에 있는데, 충청도 단양(丹陽)의 지로(指路)이다. 그 험조처(險阻處)의 길이가 3리가 넘는다.】 봉화(烽火)가 1곳이니, 죽령산이다.【동쪽으로 기천현(基川縣) 망전산(望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양(丹陽)의 화산(禾山)에 응한다.】
【원전】 5 집 642 면


 

 

 

 

 

 

 

 

 

 

 

 

 

 

 

 

 

 

 

 

 

 

 

 

 

 

 

 

 

 

 

 

 

 

 

 

 

 

 

 

 

 

 

 

 

 

 

 

 

 

 

 

 

 

 

 

 

 

 

 

 

 

 

 

 

 

 

 

 

 

 

 

 

 

 

 

 

 

 

 

 

 

 

 

 

 

 

 

 

 

 

 

 

 

 

 

 

 

 

 

 

 

 

 

 

 

 

 

 

 

 

 

 

 

 

 

 

 

 

 

 

 

 

 

 

 

 

 

 

 

 

 

 

 

 

 

 

 

 

 

 

 

순흥지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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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山川)



대평(大平)

비봉산(飛鳳山) :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소백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기복(起伏)하였다. 형세가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송학산(松鶴山) : 비봉산(飛鳳山) 남쪽 석교촌(石橋村) 서쪽에 있다.

율림(栗林) : 고을 남쪽 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죽계수(竹溪水) :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백운동(白雲洞)ㆍ율림(栗林)ㆍ죽동(竹洞) 동쪽을 지나 동원면(東園面) 사천(沙川)에서 합친다.

내죽(內竹)

소백산(小白山) : 고을 서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 삼도(三道) 사이에 자리 잡았다. 영남의 큰 진산이다. 퇴계 선생의 〈유산록(遊山錄)〉이 나온다.

죽계수(竹溪水) : 소백산 초암동(草菴洞)에서 발원하였다. 한 갈래는 불동(佛洞)에서 나와 옥녀봉(玉女峰) 아래에서 합친다. 송림동(松林洞)ㆍ금성(金城)ㆍ제월교(霽月橋)ㆍ취한대(翠寒臺)를 지나 태평촌(太平村)의 동계(東溪)가 된다.

일부석(一浮石)

왕산(王山) : 안남동(安南洞) 뒤에 있다. 형체가 ‘왕(王)’ 자와 흡사하여 이름 붙여졌다.

자개봉(紫盖峯) : 지곡(枝谷) 동네의 진산(鎭山)으로, 마아령(馬兒嶺)과 곶치현(串峙峴)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석대암(石臺巖)이 있다.

곶치현(串峙峴) : 아래 〈관방(關防)〉 조목에 보인다.

봉계(鳳溪) : 자개봉(紫蓋峰) 동쪽 골짜기에서 발원했는데, 호문단(好文丹) 서남으로 흘러 삼태봉(三台峰) 아래에서 아계(鵝溪)와 합친다.

아계(鵝溪) : 곶치(串峙) 골짜기에서 발원하였다. 동으로 성곡(聲谷)ㆍ지곡(枝谷)을 지나 서남으로 흘러 삼태봉(三台峯) 아래에서 봉계(鳳溪)ㆍ단곡(丹谷)의 냇물과 합친다.

단곡계(丹谷溪) : 국망봉(國望峰)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단곡 동네를 지나 삼태봉 아래에서 아계(鵝溪)ㆍ봉계(鳳溪)와 합치고, 남으로 흘러 병산(屛山) 서쪽 오현(烏峴)을 지나 동원면(東園面)의 사천(沙川)이 된다.

동원(東園)

무학봉(舞鶴峯) : 구고(九皐)마을 뒤에 있다.

사천(沙川) : 일부석(一浮石)에서 왔는데, 파회(波回) 동네에 이르러 좌우의 작은 냇물을 받아, 구미(龜尾)에 이르러 죽계(竹溪)의 하류에 합친다.

도강(道講)

소지기(韶之岐) : 우수동(愚叟洞)의 주산(主山)이다.

국모봉(國慕峯) : 도봉(道峯)마을 뒤에 있다.

지장산(智藏山) : 영모암(永慕菴)의 주산이다.

우계(愚溪) : 교천(交川)에서 와서 남쪽으로 흘러 낙화암(落花巖)ㆍ우수동(愚叟洞)ㆍ석탄(石灘)ㆍ고산(孤山)을 지나 이부석(二浮石)의 감계(鑑溪)가 된다.

삼부석(三浮石)

법수산(法水山) : 마흘천(馬屹川) 북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갈랑산(葛朗山) : 봉황산(鳳凰山) 북쪽에 있다. 본래 부석사의 옛터였다.

봉황산(鳳凰山) : 고을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태백산에서 갈려 나와 부석사 진산(鎭山)이 되었다. 산마루에 옛 성터가 있고, 고인 물이 있다. 일명 ‘왕산(王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공민왕이 피난길에 이 산에 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마아령(馬兒嶺) : 아래 〈관방(關防)〉 조목에 보인다.

마흘천(馬屹川) : 마아령 아래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마흘촌(馬屹村)과 의풍(義豊)을 지나 영월(寧越)의 거석(擧石)으로 들어간다.

대율계(大栗溪) : 마아령 아래에서 발원하여 성구촌(省丘村) 앞에서 부석 서쪽 골짜기 물과 합류한다. 또 임곡(林谷) 냇물과 합류하여 독유동(獨遊洞)을 지나 고산(孤山) 북쪽에서 사천(斜川)과 합류한다.

사천(斜川) : 자개봉(紫蓋峰) 북쪽에서 발원하여, 사문촌(沙文村)을 지나 동남으로 흐른다. 독유동(獨遊洞) 앞 고산(孤山) 북쪽에 이르러 대율계(大栗溪)와 합류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도강(道講)의 우계(愚溪)로 들어간다.

어니산(於尼山) : 봉황산 서북쪽에 있다. 마아령을 넘어 동북쪽으로 들어가면 옛날에 남대암(南大菴)이라 부르던 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영천향교(榮川鄕校)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 안치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 향교에 도로 봉안하였다. 암자는 지금 없다.

이부석(二浮石)

장악(帳岳) : 감곡(鑑谷)마을 동쪽에 있다.

감계(鑑溪) : 곧 도강(道講) 우계(愚溪)의 하류다. 남동쪽으로 흘러 감계(鑑溪)ㆍ석남(石南)을 지나 수식(水息) 냇물과 합치고, 남쪽으로 흘러 관천(串川)이 된다.

수식(水息)

백병산(白屛山) : 고을 동북쪽 50리에 있다. 태백산에서 갈려 나왔다. 바위 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절벽이 깎아지른다.

우구현(牛口峴) : 추정(楸井)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영월(寧越)과 통한다.

만항현(晩項峴) : 사기점(沙器店) 북쪽에 있다.

만석산(萬石山) : 봉황산에서 갈려 나왔다. 가평(佳坪) 북쪽 산운(山雲) 남쪽에 있다. 동쪽은 곧 안동 땅이다.

응방산(鷹放山) : 고을 동쪽 30리 수식현(水息縣) 동쪽에 있다. 만석산(萬石山)에서 갈려 나왔다.

가구계(可丘溪) : 근원의 하나는 만석산(萬石山) 주륵동(注勒洞)에서, 하나는 응방산(鷹放山) 청운동(靑雲洞)에서 나온다. 토동(兎洞)에 이르러 합류하여 가구촌(可丘村) 경암정(耕巖亭)을 지나 봉화의 물야천(勿也川)으로 들어간다.

애전수(艾田水) : 우구현(牛口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후평(後坪)에 이르러 칠전(柒田) 물과 합류하여 영천(榮川)의 신담(薪潭)으로 들어간다.

압동수(鴨洞水) : 봉황산 동쪽 기슭에서 나와서, 압동(鴨洞)과 사동(沙洞)을 지나 산운(山雲) 동쪽에 이르러 영천(榮川)의 오계(梧溪)로 들어간다.

수식계(水息溪) : 근원의 하나는 천곡(泉谷)에서, 하나는 조동(槽洞)에서 하나는 조양(朝陽)에서 나온다. 두문(斗文) 앞에서 합쳐져 남쪽으로 흘러가 거래암(去來岩)을 지나서 동편으로 지림간(智林澗)을 받고 서편으로 화부간(花釜澗)을 받아 수식현(水息縣)을 지난다. 또 동편으로 도점동(陶店洞) 물을 받아 큰 시내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이부석(二浮石)의 감계(鑑溪)와 합류한다.

화천(花川)

봉황산(鳳凰山) : ‘당산(唐山)’이라 일컫기도 한다. 화천(花川) 남쪽 도촌(桃村) 북쪽에 있다. 산허리에 우물이 있는데,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기도 하며, 가뭄에 빌면 징험이 있다고 한다. 고을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옥봉(玉峯) : 곧 당산(唐山) 동쪽 기슭으로, 귀만서당(龜灣書堂)의 진산(鎭山)이다.

태봉(台峯) : 도촌(桃村) 남쪽에 있다.

화천(花川) : 곧 감계(鑑溪)의 하류이다. 동애(東崖) 모정(茅亭)을 지나고, 수민단(壽民丹)의 요산(腰山)을 지나 안동의 내성천(奈城川)으로 흘러 들어간다. 굽이굽이 감도는 모양이 꿰미와 같아 옛날에 관천(串川)이라 하였다.

와란(臥丹)

문수산(文殊山) : 와란(臥丹)ㆍ우곡(愚谷)ㆍ두곡(杜谷)이 모두 이 산 남쪽 언덕에 있다. 고을에서 50여 리 거리이다.

갈방산(葛方山) : 우곡(愚谷) 동쪽에 있다. 산머리에 철마(鐵馬)가 있다.

관식산(觀式山) : 관식(觀式)마을 뒤에 있는데, 바로 안동 소천(小川) 경계이다. 고을에서 80여 리 거리이다.
와란(臥丹)의 시냇물은 봉화(奉化) 양정(陽井)으로 들어가고, 우곡(愚谷)의 냇물은 봉화 창해(昌海)로 들어가고, 사동(沙洞)ㆍ법전(法田)의 냇물은 봉화 갈천(葛川)으로 흐르고, 춘양(春陽)ㆍ관식(觀式)의 냇물은 안동 소천(小川)으로 흐른다.

수민단(壽民丹)

단산(丹山) : 단계서원(丹溪書院)의 주산(主山)이다.

탑성봉(塔星峯) : 빈동(賓洞) 수구(水口)에 있다.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데,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있다.

단계(丹溪) : 빈동(賓洞) 동남쪽에서 나와, 단계서원(丹溪書院)과 사암(蛇巖)을 지나 동쪽으로 영천(榮川)의 신천(新川)으로 들어간다.

대룡산(大龍山)

용암산(龍巖山) : 고을 남쪽 40리에 있는데, 바로 대룡산의 진산이다.

퇴령(退嶺) : 용암산 남쪽에 있다.

설암(雪巖) : 용산(龍山) 남쪽에 있다.

구지현(仇知峴) : 용산(龍山) 북쪽에 있다.

용계(龍溪) : 용암산에서 발원하여 용산 동구에 이르러 용담(龍潭)이 된다. 장항(獐項) 동남쪽으로 흘러 영천(榮川)의 두전(豆田) 시내로 들어간다.

창락(昌樂)

연화봉(蓮花峯) : 죽령(竹嶺) 북쪽에 있다. 희방사(喜方寺)의 진산으로, 그 뒤에 교내산(橋內山) 팔판동(八判洞)이 있다. 교내산이라 한 것에 대하여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단양(丹陽) 쪽에서 올라와 수교(水橋)를 건너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고 평평하여 사람이 살 만하고, 사방이 암석으로 험하게 이루어져 있어 사람이 들어올 길이 없다. 옛날에 여덟 명의 판서가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도솔봉(兜率峯) : 죽령 남쪽에 있다. 우뚝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바로 창락(昌樂) 전고(前皐)마을의 주산(主山)이다.

죽령(竹嶺) : 아래 〈관방(關防)〉 조목에 보인다.

창락천(昌樂川) : 근원의 하나는 죽령 아래에서 나오고, 하나는 연화봉(蓮花峯)에서 나와 수철교(水鐵橋) 앞에서 모인다. 창락관(昌樂館)을 지나 전고(前皐) 동쪽에 이르러 도솔봉(兜率峯)에서 나오는 물과 합쳐진 후 동쪽으로 흘러가 풍기의 기천(基川)으로 모인다.


 

[주D-001]〈유산록(遊山錄)〉 :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1549년(명종 4)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소백산을 등산한 기록. 《퇴계집》의 원제는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이다. 4월 22일 소수서원에서 묵고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민응기(閔應祺) 등과 함께 죽계를 거슬러 올라 초암(草庵)으로 올랐고, 이어서 묘봉암(妙峯庵)에서 소식을 듣고 온 종수(宗粹) 스님의 안내를 받아 철암(哲庵)ㆍ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이틀 밤을 잤다. 이어서 봉두암(鳳頭巖)ㆍ광풍대(光風臺))ㆍ백운암(白雲庵)ㆍ석름봉(石凜峯)ㆍ자개봉(紫蓋峯)ㆍ국망봉(國望峯)ㆍ중백운암ㆍ상백운암ㆍ제월대ㆍ환희봉(歡喜峯)ㆍ산대암(山臺巖)ㆍ자하대(紫霞臺)ㆍ적성(赤城)ㆍ백학봉(白鶴峯)ㆍ백련봉(白蓮峯)ㆍ금강대ㆍ화엄대ㆍ금당(金堂)ㆍ하가타암(下伽陀庵)ㆍ보제암(普濟庵)ㆍ진공암(眞空庵)ㆍ하가타암을 유람하고 관음굴에서 잤다. 26일 박달현(博達峴)과 비로사(毗盧寺)를 경유하여 욱금동(郁錦洞)으로 내려왔다. 《退溪先生文集 卷41 雜著》


천관 수제(天官修制)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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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


경기(京畿)를 봉천성(奉天省)이라 하고, 다음 남쪽은 사천성(泗川省), 그 다음 남쪽은 완남성(完南省), 또 남쪽은 무남성(武南省)이라 한다. 동남쪽은 영남성(嶺南省)이라 하고, 그 서쪽은 황서성(潢西省)이라 한다. 서울에서 동쪽은 열동성(洌東省), 서울에서 서쪽은 송해성(松海省)이라 하고, 또 서쪽은 패서성(浿西省), 또 서쪽은 청서성(淸西省)이라 한다. 서울에서 북쪽은 현도성(玄菟省), 또 북쪽은 만하성(滿河省)이라 하여 총 12성으로 한다.
경기는 경계를 예전대로 분할하는데. 오직 낭천(狼川)ㆍ금성(金城)ㆍ금화(金化)ㆍ철원(鐵原)ㆍ평강(平康)ㆍ이천(伊川)ㆍ안협(安峽) 등 열수(洌水 : 한강) 서쪽 대수(帶水) 동쪽에 있는 일곱 고을은 경기에 붙이고, 양근(楊根)ㆍ지평(砥平)ㆍ제천(堤川) 등, 열수 동쪽에 있는 세 고을은 열동성에 붙인다. 또 송경(松京)으로 황해 포정사(黃海布政司)를 삼고, 장단(長湍)ㆍ마전(麻田)ㆍ풍덕(豊德) 등 세 고을을 송경에 붙여서 대수를 경계로 한다.
생각건대, 들(野)에 획을 그어서 주(州)로 나누는 데는 유명한 산과 큰 냇물을 한계로 해야 한다. 내가 보니, 열수의 근원 중 하나는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나와 용진(龍津) 하류에서 합류한다. 무릇 두 가닥 물의 동쪽에 있는 것을 열동성에 붙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며, 열수 서쪽에 있는 것을 경기에 붙여서 근본(根本)되는 곳을 두텁게 함도 또한 마땅하다. 송경 유수(松京留守)는 한가롭게 하는 일이 없고, 황해 포정사는 궁벽지게 바다 한모퉁이에 있어, 무릇 징발하는 명령이 있어도 멀리 돌아서 가므로 매우 불편하다. 송경 유수에게 황해감사를 겸하게 하고, 도계(道界) 첫머리에 앉아서 평양이나 전주같이 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장단 등 세 고을을 황해에 예속시켜서 임진을 경계로 함이 또한 마땅하다.
살피건대, 경기와 사천성 사이에는 비록 유명한 산이나 큰 냇물이 한계가 된 곳은 없으나, 죽산(竹山) 남쪽에 있는 미수(洣水 : 속명은 天迷川이다)는 동쪽으로 흘러서 열수(驪興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며, 안성 남쪽에는 사수(沙水 : 하류가 素沙河이다)가 있어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며, 그대로 큰 나루가 되어 남북을 가로질러서 두 성의 경계(즉 해협)가 되었으니, 경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사천성이란 지금의 충청도인데, 그 강역(疆域)은 모두 예전대로이나, 오직 제천 한 고을을 열동성에다 고쳐 붙였다.
생각건대, 지금의 금강(錦江)을 옛 사기(史記)에 사비하(泗沘河)라 한 까닭으로 성 명칭을 사천성이라 했다. 이 성은 도성에 아주 가까운 울타리이므로 웅대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깎거나 가르지 않았다.
완남성ㆍ무남성은 지금의 전라도다. 이 도(道)의 동쪽에는 잔수(潺水)가 있고 복판에는 노령(蘆嶺)이 가로뻗쳐서 남북 한계와 똑같다. 이번에 잔수 이동 노령 이북은 완남성에 붙이고 잔수 이서 노령 이남을 잘라서 무남성으로 만들었다.
잔수 동쪽에 있는 것은 구례ㆍ남원ㆍ운봉ㆍ임실이고, 노령 북쪽에 있는 것은 순창ㆍ정읍ㆍ고창ㆍ무창인데, 여기부터 북쪽은 모두 완남성에 붙였다.
잔수 서쪽에 있는 것은 곡성ㆍ옥과이고, 노령 남쪽에 있는 것은 담양ㆍ장성ㆍ영광인데, 여기부터 이남은 모두 무남성에 붙였다.
생각건대, 중국같이 큰 나라도 13성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를 8도로 가른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내려오면서 법제가 분명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았다. 하물며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인재가 흥기(興起)하지 않는데 한 방면의 임무를 부탁하니, 그 직에 능히 맞게 하는 자가 드물다.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지역이 넓고 아득한데, 감사(監司)가 경계 첫 고을에 앉아서 멀리 수천 리 지역을 통제한다. 그래서 명령이 빠를 수 없고, 간악함을 살필 수 없으니 갈라서 두 성으로 함이 마땅하다. 호남과 영남은 백성이 번성하고, 정무(政務)가 번거로우니 능통한 재질(材質)과 큰 기국(器局)이 아니면 다스릴 수가 없다.
나는 남쪽 지방에 15년이나 있었다. 그러나 능히 그 직무를 다하고 백성의 뜻을 크게 두려워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각각 갈라서 두 성씩으로 함이 마땅하다. 하물며 고려제도는 호남에 남북 두 도가 있었고, 영남에도 두 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목릉(穆陵) 때에 영남을 좌우 두 도로 갈라서 왜구를 방어했다. 양남(兩南)을 갈라서 네 성으로 만든 것은 예전에도 그런 법이 있었으며, 내가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남성의 포정사(布政司)는 광주에 있음이 마땅하며 광주는 옛날 무주이다.
영남성ㆍ황서성이란 지금의 경상도이다. 이 도에 황수(潢水 : 낙동강)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백산에서 나온다. 소백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황수 동쪽에 있는 것을 영남성으로 하고 황수 서편에 있는 것을 황서성이라 했다.
순흥ㆍ풍기ㆍ영천ㆍ안동ㆍ비안ㆍ군위ㆍ인동ㆍ현풍ㆍ창녕ㆍ영산에서 아래로 동래까지는 모두 이 물의 동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동쪽은 옛적 진한국(辰韓國)이었다. 예천ㆍ용궁ㆍ함창ㆍ상주ㆍ선산ㆍ성주ㆍ고령ㆍ초계ㆍ의령ㆍ함안ㆍ칠원ㆍ창원에서 아래로 김해까지는 모두 이 물의 서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서쪽이 옛날 변진국(弁辰國)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중세에 영남 우도(右道)의 감사가 진주에 좌정(坐定)했던 것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주는 남쪽 바다에 가까워서, 북쪽으로 용궁ㆍ예천과는 길이 너무 멀고, 상주는 또 북쪽에 치우쳐 있다. 나의 생각에는 황서성 포정사는 성주에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고을은 북쪽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을 두고 서쪽으로는 추풍령이 목이 되어서, 관방(關防)이 될 만한 요충지대이다. 그러므로 진주는 그대로 병영으로 만들고, 성주에다 감영(監營)을 건설하면 관할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살피건대, 성주에서 대구까지는 하룻길이 못 되니, 만약 남쪽 도적이 와서 침범하면 두 성 신하가 편지를 띄워서 일을 의논하여, 수레바퀴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될 것이니 또한 애각(涯角)처럼 서로 동떨어진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열동성(洌東省)이란 지금의 강원도이다. 그 강역(疆域)은 예전대로 하되 오직 낭천(狼川)ㆍ금성(金城)등 열수(洌水) 서쪽 고을은 경기에 옮겨 붙이고(위에 이미 기록했다), 경기의 양근ㆍ지평 두 고을과 충청도의 제천한 고을을 본성(本省)에 옮겨다 붙인 것(위에 이미 기록했음)이 조금 다르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 성의 영동 쪽 아홉 고을(북쪽의 歙谷에서 남쪽의 平海까지)은 본래 현도(玄菟)의 남부이다. 그후 금와(金蛙)의 아버지, 해부루(解夫婁)가 예(濊) 지역에서 동쪽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왔는데, 가섭원은 하서량(河西良)이고, 하서량은 지금의 강릉이다. 이후부터 영동 아홉 고을이 예맥(濊貊)이라는 명칭으로 잘못 불렸으나 실상 예맥은 본래 요동(遼東)에 있었고, 이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산이 서쪽을 막았고, 동해(東海)가 동쪽에 닿았는데 감사는 원주(原州)에 앉았으니, 멀리까지 통제하기란 실상 어렵다. 나의 생각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도 또한 안찰사(按察使)라는 직명을 겸해서, 영동 아홉 고을의 작은 일은 강릉에 영솔(領率)되고, 오직 큰 일만을 감사에게 관유(關由)하도록 함이 또한 알맞을까한다.
송해성(松海省)이란 지금의 황해도이다. 해주(海州)는 궁벽지게 한 모퉁이에 있고, 송경은 다만 성 하나만 관할한다. 위치가 궁벽지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관할이 작으면 권세가 적고 약하다. 그리하여 서도(西道)의 울타리로서는 두 곳을 다 믿을 수 없으니 송경을 황해 감영으로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장단(長湍) 등 세 고을은 저절로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며, 북도(北道)에 있는 중화(中和)ㆍ상원(祥原) 두 고을도 본래 패수(浿水) 남쪽에 있는 것이므로 이번에 본성에다 옮겨붙였다.
살피건대, 원제에 양남(兩南)과 양북(兩北)은 면적이 아주 큰데 복판 4도(道)는 지역이 아주 작으니, 그 안쪽은 중하게, 바깥은 경(輕)하게 하며, 줄기는 억세게, 가지는 약하게 하는 뜻에 있어, 매우 합당하지 못하다. 이제 양남과 양북은 갈라서 8성으로 만들고, 중앙 4도는 그전대로 했다. 그렇게 하면 중한 데에 있으면서 경한 것을 막고, 강함으로써 약함을 제어하게 되니 진실로 형세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패서성(浿西省)과 청서성(淸西省)은 지금의 평안도이다. 이 도는 중앙에 적유령(狄踰嶺ㆍ江界 남쪽 경계)이 있는데, 영 남쪽은 곧 청수(淸水)가 나오는 곳이고, 영 북쪽은 곧 독수(水)가 나오는 곳이다. 설한령(薛罕嶺) 산맥이 서쪽으로 나가서 적유령이 되고 또 서쪽으로 극성령(棘城嶺 : 熙川 서북쪽에 있다)이 되었는데, 가로뻗쳐서 남북의 큰 관(關)이 되었다. 지금은 적유령 남쪽 청수 동쪽에 있는 것은 패서성에 붙이고, 적유령 북쪽 청수 서쪽에 있는 것은 잘라서 청서성으로 만들려 한다.
덕천ㆍ개천에서 안주까지는 청수 동편에 있는데 이 동쪽은 패서성 소관이다. 그리고 희천ㆍ영변에서 박천까지는 청수 서쪽에 있고, 강계ㆍ위원은 적유령 북쪽에 있는데 이 서쪽은 청서성 소관이다.
생각건대, 평안 한 도가 본래 청남(淸南)ㆍ청북(淸北)으로 갈라져 있는데, 두 성으로 가른다는 것은 내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두 성을 설치한다면 청서성 포정사는 영변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영변은 옛 병영인데 이괄(李适)이 이곳을 점거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에 병영을 안주로 옮겼으나 국론은 늘 영변이 안주보다 낫다 한다.
생각건대, 폐4군(廢四郡)이란 무창ㆍ여연ㆍ우예ㆍ자성이다. 네 고을의 지역이 거의 천 리가 넘어서 지금 황해도와 비교하여도 곱절이 넘는다. 비록 고을 관아는 없으나 또한 인민은 섞여서 살고 있다. 네 고을을 회복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남쪽으로 평양과의 거리가 거의 몇천 리여서, 감사가 멀리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 나의 생각에는 강계부사도 또한 안무사라는 직명을 겸해서, 네 고을 수령에게 작은 일은 모두 강계에서 결재를 받고, 오직 큰 일만 감사에게 관유해서 강릉 예와 같이 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다. 다만 강릉이 관할하는 아홉 고을은 포정사에서 고과(考課)함이 마땅하나 강계가 관할하는 폐4군은 고과하는 것마저 강주대사(江州大使)에게 하도록 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가 정의(旌義)ㆍ대정(大靜) 두 고을을 고과함과 같이 함이 가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청렴한가 탐묵(貪墨)한가와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는 멀리 있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폐4군의(廢四郡議)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윽이 압록강의 형세를 보건대, 4군 이서(以西)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등 일곱 고을이고, 4군 이동(以東)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삼수와 갑산이다. 압록강 물은 남에서 북으로 여연에 이르고, 또 꺾여서 남쪽으로 흐른다. 지금 북쪽으로 매우 불거져나간 지역으로서, 대략 지대가 같은 곳을 논한다면 위원ㆍ갑산은 시위[弦]가 되고, 4군은 활이 된다. 강역(疆域)을 분별하는 데에는 활로 다툼이 마땅하고, 울타리를 가리는 데에는 활로 굳게 함이 마땅한데, 지금 폐지하고 돌아보지도 않음이 가하겠는가? 솔연(率然)이라는 뱀은 머리쪽을 치면 꼬리로 달려들고, 꼬리쪽을 치면 머리로 달려들며, 중간을 치면 머리와 꼬리로 함께 달려드는데, 이것이 병가(兵家)의 대세이기도 하다. 지금 솔연의 머리는 갑산에 있고, 꼬리는 위원에 닿았는데, 그 허리와 배는 모두 썩어버렸다. 그런데 오히려 머리와 꼬리로써 구원할 수가 있겠는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과 살아 남고 죽어 없어지는 것은 형세에 달렸을 뿐이다. 산전(山戰)하는 자는 높은 영(嶺)을 먼저 차지하면 이기고, 수전(水戰)하는 자는 먼저 상류(上流)를 차지하면 이기는 것도 형세이다.
강인(疆人) 수천 명이 4군 지역을 차지하여 북쪽으로 갈파(葛坡)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建州) 곡식을 통하면서, 남쪽을 향해 우리를 호령한다면 일곱 고을 정수(亭燧)와 성벽은 장차 흙이 무너지듯, 기와가 부스러지듯 하여, 패수 이북 지역은 다시 조선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4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막는 것이 있기 전에 넘어옴은 해됨이 없거니와, 막았는데도 넘어오는 것은 어지럽게 되는 근본이다.
《시경(詩經)》에 ‘버들을 꺾어서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니, 미친 지아비도 조심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막은 것은 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은 큰 방수(防守)인데 지금 까닭없이 허물어서, 북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은밀히 산림 중에 살면서 그 처자를 끌고 와서 소굴을 만들고, 날마다 금ㆍ는ㆍ동ㆍ철을 캐서 두드리고. 주조하여 재물을 만들고, 아이만한 인삼과 초서피(貂鼠皮)로써 스스로 살찌우며, 활, 살, 창, 작은 창, 화기(火器) 따위를 갖추어서 스스로 호위하고 있는데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는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며 묘당(廟堂)에서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난리는 이미 일어났는데 방어(防禦)는 어디에 있는가? 옛적에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 장수에게 명하고 군사를 출동시켜서 6진(鎭)을 경영할 적에,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성공한 다음에 그만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두만강을 방수(防守)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방수할 곳이 남에게 있어도 오히려 도모했는데, 방수할 곳이 나에게 있건만 어찌해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런 이유로 폐4군은 복구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장수(涱水 : 長進江)의 일대는 곧 우리 내지(內地)이고 방수할 곳이 아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장진에서 북쪽으로 갈파(葛坡)가지 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堡)를 설치한 것이 7~8군데나 되어, 목(項)과 등(背)이 서로 바라보이며 딱다기[刁斗] 소리가 서로 들림은 이 무슨 까닭인가? 대개 장수 서쪽은 곧 폐4군 지역으로서, 고을 관아는 이미 철폐했으나 난민이 섞여 살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4군을 이역같이 여겼으므로 장수도 변경같이 여겨서 이렇게 설비했던 것이다.
그 뜻이 이러했기 때문에 녹수(淥水)를 따라, 동쪽으로는 갈파에서, 서쪽으로는 만포(滿浦)까지 600여 리를 그냥 휑하게 비워 방수하는 곳이 없고, 군사 하나도 머물러 두지 않았다. 또 만포에서 남쪽으로 독수(水 : 禿魯江)를 따라 내려가면서 또 7~8군데 보를 설치하여 장수와 같게 했으니 대개 독수 동쪽도 또한 폐 4군 경계인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는 참으로 폐4군 지역을 버려서 이역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대저 녹수는 하늘이 만든 우리나라의 해자(塹)인데 하늘이 만들어준 해자를 버림은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가경(嘉慶) 17년(1812)에 가산(嘉山) 역적 홍경래(洪景來)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받았는데, 그 격서(檄書)에 문득 폐4군이 응원한다는 말로 허튼 공갈을 했다. 그렇다면 서쪽 토인(土人)들이 폐4군을 조만간 사단을 일으킬 곳으로 여기는 것이 명백하다. 장수 연변과 독수 연변에 설치된 수보(戍堡)가 거의 20곳이나 된다. 지금 이 여러 보를 걷어다가 녹수 연변에 벌여 세워서, 갈파ㆍ만포 사이의 비어 있는 지역을 방색(防塞)한다면 힘을 더 들이지 않고 재물을 더 허비하지 않아도, 녹수는 천연의 해자로서 기능이 완전해질 것이다.
보를 설치하는 방법은 한꺼번에 크게 일으키면 참으로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금년에는 갈파 서쪽 30리 지점과 만포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다음해에 또 새 보의 서쪽 30리 지점과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또 명년에 30리 지점에 세운다면 형세는 주머니 주둥이를 졸라매듯 하고, 공(功)은 무너진 곳을 막는 것 같아서 10년을 넘지 않아 북쪽 변경에 보장(保障)이 완성될 것이다. 보장이 완성되고 나면 고을 관아를 설치하지 못할 곳이 있겠는가? 지금 남쪽에는 백성은 많고 땅은 좁아서, 한 농부가 경작할 만한 땅은 값이 수만이나 되니 이들을 이사시켜서 그 지역에 채우면 즐거워하지 않을 자가 없을 터인데 국정(國政)을 잡은 자가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인가?
패수(浿水) 남쪽에 있는 중화(中和)ㆍ상원(祥原) 두 고을을 이제 예에 따라 송해성(松海省)에 옮겨 붙이려고 한다(이미 위에 기록했다).
생각건대, 당시에 이 두 고을을 평안도에다 붙인 것은 평양이 바로 패수가에 있어, 배를 저어 잠깐 만에 갈 수 있는데 문득 다른 도(道)에 속해 있기 때문에 평양에다 임시로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들에 획을 그어서 고을을 가르는 것은 자연 지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금릉(金陵)이 바로 양자강에 임했으나 강 북쪽 고을을 강 남쪽에다 붙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역(驛)을 설치해서 급변을 경계하면서 변경 보고가 왕래할 때에,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 두고 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온갖 일은 다 중경(中京)에서 영솔(領率)하고 오직 변보(邊報)에 대한 한 가지 일만은 평양의 절제(節制)를 아울러 받게 하여도 아마 폐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역(疆域)의 한계만은 이동할 수 없는 것이다.
현도성과 만하성(滿河省)이란 지금의 함경도이다. 이 도는 한복판에 마천령(摩天嶺)이 있는데, 영(嶺)의 큰 등마루가 바로 장백산(長白山)큰 줄기에 닿아 있으므로 영 이남을 남도(南道)라 하고, 영 이북을 북도라 했다. 이제 이것을 따라 나누어 두 성으로 만들었다. 남성(南省)은 단천(端川)에서 그치고 북성(北省)은 길주(吉州)에서 시작한다. 여기부터 북쪽으로 큰 등성이의 서쪽에 있는 것은 현도성에 붙이고 동쪽에 있는 것은 만하성에 붙인다.
지금 북도 절도사(節度使)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鏡城)에 들어가고 바람이 사나우면 종성 행영(鍾城行營 : 會寧 동쪽에 있다)에 나와서 있는데 이제는 경성을 포정사로 만들고, 종성 행영은 그대로 행영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참으로 알맞겠다.
생각건대, 만하성 6진(鎭)은 본래 북옥저(北沃沮) 지역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말갈(靺鞨)이 점거(占據)해 있었다.발해(渤海)가 번성할 때에는 그 지역을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삼았고,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여 경(慶)ㆍ염(鹽)ㆍ목(穆)ㆍ하(賀) 네 고을을 영솔했다. 당(唐)나라 정원(貞元) 2년(신라 元聖王 2년 786)에 발해 문왕(文王) 흠무(欽茂)가 상경(上京)에서 동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동경(東京 : 《輿地勝覽》에는 南京으로 되어 있다)에다 정했는데 동경이란 지금의 행영(行營)이 혹 그 지역인가 한다. 그 후 발해가 망하자 그 지역을 야인(野人)이 몽땅 차지해서 자주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세종과 세조가 이를 정벌ㆍ경략하고 겨우 경리(經理)하여 만하 이남이 드디어 우리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아주 다르며, 지방 풍속이 우둔하여 이시애(李施愛)와 이징옥(李澄玉) 등이 한번 깃발을 휘두르며 난리를 일으키자, 백성이 쓸리듯 좇았다. 그 후에도 왜장(倭將) 청정(淸正)이 북관(北關)에 침입하니 난민 국경인(鞠景仁) 등 이 시기를 틈타 화동(和同)해서,번신(藩臣)과 수신(帥臣)을 다투어 죽이고 적에게 투항했다. 다행스럽게도 정문부(鄭文孚)의 힘을 입어서 평정할 수 있었으나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가장 걱정되는 곳이 이 지역이다. 게다가 지역이 아주 멀고 소식[聲聞]이 서로 전달되지 않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가 제 뜻대로 탐학(貪虐)해도 조정에서 듣지 못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하여 한 지역 생민(生民)이 마침내 호소할 곳조차 없는 불쌍한 백성이 될 것이니, 무휼(撫恤)하고 위안(慰安)하는 방법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만하성 순찰사(巡察使) 자리는 반드시 경악(經幄)에 가까이 모시던 신하로서, 행실을 힘써 닦은 청렴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백성을 회유하고 오게 하는[來上] 방법을 다하게 함을 그만둘 수 없다.

봉천성(奉天城) : 포정사는 경기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으며, 그 직명은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라 한다. 4주(州), 10군(郡), 22현(縣)을 거느린다.
또 심주(沁州)는 1개 군을 거느린다.

광주(廣州)는 3군, 6현을 관할한다.
3군은여흥(驪興)ㆍ죽산(竹山)ㆍ안성(安城)이고, 6현은 과천(果川)ㆍ양성(陽城)ㆍ용인(龍仁)ㆍ이천(利川)ㆍ양지(陽智)ㆍ음죽(陰竹)이다.
광주 도호부 대윤(廣州都護府大尹)이 경기 수어사(京畿守禦使)를 겸무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를 두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살피건대, 유수(留守)라는 직은 반드시 그 지역이 서울이 되었던 적이 있는 지역에 둘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송도(松都)를 중경(中京),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함은 마땅하나 그 외에는 경(京)이라 일컬을 만한 곳이 없다(경주가 비록 신라의 옛 도읍이었으나 지역이 아득히 멀고, 부여가 비록 백제의 고도이나 고을이 쓸쓸하고 가난하다). 강도(江都)와 광주는 한때 병란을 피했던 곳에 불과한데 어찌 도읍이라 할 수 있으며, 도읍이 되지 않았는데 어찌 유수를 둘 수 있겠는가? 그런데 200년 이래로 광주는 혹 유수가 되기도 하고 혹은 부윤(府尹)이 되기도 하여, 해마다 달마다 고쳐서 명칭이 여러번 변했다. 나의 생각에는 유수라는 명칭은 지금부터 폐지함이 마땅할 듯하다.
그 도호부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호(護)라는 것은 위로 왕국을 호위하고, 아래로 군민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원제에는 주(州)와 부(府 : 평양 같은 곳)가 있고, 도호부와 대도호부가 있다. 주에도 부윤(府尹)ㆍ목사(牧使)ㆍ부사(府使 : 朔州에서는 府使라 일컬음)가 있다. 직관제도(職官制度)는 간략해야 하며, 번거로움은 마땅치 못하다. 이제는 주와 부를 합쳐서 한 등(等)으로 하고, 무릇 주를 모두 도호부라 일컫고자 한다. 그 중에도 예전부터 부윤이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대윤(大尹)이라 일컫고 예전부터 대도호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대사(大使)라 일컬으며, 예부터 목사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목사라 일컫는다. 그리고 새로 승격해서 주로 만든 곳도 또한 아무 주 도호부 목사라 일컬으며, 그 밑에 군수가 있고, 그 밑에 현령이 있다. 현령과 현감은 반드시 명칭을 다르게 할 것이 아니므로 이제 현령을 그냥두고 현감이라는 명칭을 없애서, 중국제도와 같이 함이 잘못이 아닐 듯하다.
여흥(驪興)을 강등하여 군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여흥은 본시 작은 고을이었는데, 왕비(王妃)의 본관(本貫)이라는 이유로 주로 승격되었다.
생각건대, 주와 군을 올리고 낮추는 법은 본래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대저 왕자(王者)가 나라를 세우면서 들에 획을 그어서 주를 가르고, 그 법제를 한 번 정했으면 변동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옛날 고려 때에 주ㆍ군을 승격함이 해로 더하고 달로 불어났는데, 혹은 왕비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공신의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고승(高僧)의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무릇 王師나 國師가 된 자의 관향은 모두 승격하였다). 드디어 관제가 어지럽게 되고 아첨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도 그대로 따라서 법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고쳐야 마땅하다. 국운이 장구하여 천년을 지날 것 같으면 군과 현은 다 주로 승격될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 주ㆍ군ㆍ현 세 등은 그 명칭을 한 번 정했으면 다시 번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왕정(王政)의 큰 것이다.
지금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를 지은 자가 그 고을에서 나오면 비록 웅장한 주와 큰 군이라도 낮추어, 현으로 만들어서 고을 명칭도 고치고(公州를 公山이라 고치는 것과 같다), 혹은 그 도의 명칭마저 고쳤다가(淸州를 강등시켜서 西原으로 만들고, 충청도를 公忠都라 했다)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복구하는데 이것은 매우 무의미한 일로, 그 정도가 심한 것이다. 감정이 없는 물(物)에다 벌을 시행하고, 징계하지 못할 땅에다 징계를 내리니, 장차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죄인이 나온 고을이 현이고 군이 아니어서 다시 더 낮출 수가 없으면 말현(末縣)으로 강등한다. 분명 이와 같으면, 주ㆍ군도 또한 그 본래 등급은 그냥두고 낮추어서 끝자리로 함이 마땅한데 어찌해서 반드시 현으로 낮추는 것인가? 법이 평등하지 못하면 성인의 법이 아닌데, 하물며 죄인이 나온 고을이 원래 말현이라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 법을 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면 막혀서 통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막혀서 통하지 못하는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니다.
죽산(竹山)을 낮추어서 군으로 한 것과 이천(利川)을 낮추어서 현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산과 이천은 모두 작은 고을이니 모두 현으로 낮추어야 할 것이나, 다만 죽산은 한길목에 있어서 평소부터 방어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우선 낮추어서 군으로 했다. 이 다음에 낮추어서 현으로 만든 것은 모두 이와 같다.
화주(華州)는 3군, 6현을 관할한다.
3군은 남양(南陽)ㆍ인천(仁川)ㆍ부평(富平)이고, 6현은 시흥(始興)ㆍ진위(振威)ㆍ양천(陽川)ㆍ안산(安山)ㆍ김포(金浦)ㆍ통진(通津)이다.
화주 도호부 대사(大使)는 경기남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화성이 유수가 된 것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여기에 특별한 뜻이 있어,행궁(行宮)을 짓고 그 전(殿) 이름을 노래당(老來堂)이라 한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은 까닭없이 명칭을 유수라 하여 한갓 관제만 깨뜨려서 완전하지 못하게 할 뿐이니 이번에는 옛 명호를 회복해서 도호부로 만들고자 한다. 오직 그 성지(城池)는 법대로 쌓았고, 또 요긴한 길목에 있으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했다.
양주(楊州)는 2군, 5현을 관할한다.
2군은 파평(坡平)ㆍ고양(高陽)이고, 5현은 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연천(漣川)ㆍ적성(積城)이다.
교하(交河)는 작은 고을이므로 고양에다 합병했다.
양주 도호부 목사는 경기 운향사(運餉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고양은 서로(西路)의 첫 참(站)에 당해서, 공궤(供饋)하는 일이 크게 번거로운데, 고을 힘이 약하니 교하를 합병해서 한 군으로 함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양주는 왼쪽으로 대수(帶水 : 임진강)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열수(洌水)를 안고 있다. 무릇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군량(軍粮) 운반을 책임지우는 것이 마땅하므로 운향사를 겸하게 한다.
철주(鐵州)는 고을 2, 5현을 관찰한다.
2군은 이천(伊川)ㆍ삭녕(朔寧)이고, 5현은 평강(平康)ㆍ안협(安峽)ㆍ김화(金化)ㆍ금성(金城)ㆍ낭천(狼川)이다.
철주 도호부 목사는 경기북도 방어사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철원(鐵原)이란 옛날 철원(鐵圓)으로서 궁예(弓裔)가 도읍했던 곳이다. 바로 북로 요충(北路要衝)에 당해서, 본래부터 방어하는 직을 겸했는데 이번에도 그대로 했다.
심주부(心州府)는 1군을 거느린다.
1군은 교동(喬桐)이다.
심주부 행궁대사(行宮大使)는 경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가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교동 군수는 경기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강화(江華)와 교동에는 관제가 여러번 변했으나, 강화가 이미 경읍(京邑)이 아니니 유수라는 명칭은 마땅치 않다. 그리고 서로 수군(西路水軍)과 특별히 상관되는 바가 없으니,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라는 것도 또한 군더더기이다. 이제 심주 대사가 수군 절도사를 겸하도록 하여 급한 변고에 쓸 수 있으니 반드시 교동에게 중임(重任)을 맡도록 할 것이 아니다.

사천성(泗川省) : 포정사는 공주(公州) 금강(錦江) 남쪽에 있는데 4주, 10군, 28현을 관할한다.
공주(公州)는 3군, 8현을 관할한다.

3군은 천안(天安 : 木川을 합병함)ㆍ노성(魯城 : 石城을 합병함)ㆍ한산(韓山)이고, 8현은 직산(稷山)ㆍ부여(扶餘)ㆍ은진(恩津)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ㆍ임천(林川)ㆍ남포(藍浦 : 庇仁을 합병함)ㆍ서천(舒川)이다.
사천성 순찰사는 공주 도호부 대사를 겸무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보통 사람의 재주와 기국(器局)은 그 거리가 심히 멀지 않은데 어떤 사람에게는 영남ㆍ호남을 전적으로 맡겨도 넉넉함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비인ㆍ남포를 갈라 다스리게 하여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큰 도는 갈라서 두 성으로 만들고, 작은 현은 합쳐서 한 군으로 만드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현을 구차스럽게 남겨두면 그 폐단이 점점 심해진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고을에도 사직(社稷)이 있고, 빈객(賓客)이 있으며, 관원에게 권속(眷屬)이 있고, 관청에 아전과 하례(下隸)가 있다. 백성의 재물을 벗겨내고, 침해해서 큰 고을이 하는 짓을 다 본받고자 하니 백성을 해쳐서 만 가지로 괴롭힌다. 착한 원이 오면 팔짱끼고 구경만 할 뿐 할 일이 없고, 탐학한 원이 오면 백성의 등골을 뽑으면서 제 이익을 구한다. 대개 이와 같은 고을은 점차 합쳐서 용관(冗官)이 점점 줄어들고, 백성의 살림이 점점 펴지도록 함이 마땅하다. 위아래 여러 성에 무릇 둘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은 모두 이러한 뜻에서이니 재찰(裁察)하기 바란다.
살피건대, 감사(監司)의 직을 관찰사라 호칭하면서 순찰사를 겸임하고 있으니 대저 관찰이 곧 순찰인데 겹쳐서 일컫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제부터는 관찰을 버리고, 다만 순찰사라 일컬어서 순찰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별도로 판관을 두는 이유는, 감사는 순행하는 것을 직무로 하여 거처를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또 생각해보니 감사가 솔권(率眷)하기 시작한 이래고 온갖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한 가지 일도 거행되지 않고, 봄가을 순행(巡行)도 겉치레뿐이다. 이제부터는 감사가 솔권하는 법을 영원토록 철폐함이 마땅하다(이 뜻을 監司條에 밝혔음).
홍주(洪州)는 3군, 8현을 거느린다.
3군은 온양(溫陽 : 新昌을 합병함)ㆍ면천(沔川 : 德山을 합병함)ㆍ서산(瑞山 : 海美를 합병함)이고, 8현은 아산(牙山 : 平澤을 합병함)ㆍ대흥(大興)ㆍ예산(禮山)ㆍ보령(保寧)ㆍ당진(唐津)ㆍ태안(泰安)ㆍ결성(結城)ㆍ청양(靑陽)이다
홍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운향사(運餉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홍주는 조운하는 길목에 당했으므로 운향사를 겸하도록 했다. 무릇 군량을 운반하는 관직을 겸한 것은 군사가 일어나면 군량 수운을 관장하고, 평시에는 세곡(稅穀) 조운을 담당하는 것을 규식으로 한다.
청주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황간(黃澗 : 永同을 합병함)ㆍ옥천(沃川)이고, 6현은 청산(靑山)ㆍ보은(報恩)ㆍ문의(文義 : 懷仁을 합병함)ㆍ연기(燕歧 : 全義를 합병함)ㆍ회덕(恢德 : 鎭岑을 합병함)ㆍ연산(連山)이다.
청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중도 방어사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남쪽 도적이 추풍령을 지나서 기내(畿內)로 침범하게 되면 황간에 와서 드디어 두 길로 갈라진다. 한 길은 청산(靑山)ㆍ보은을 지나서 청주로 나오고 한 길은 옥천ㆍ문의를 지나 청주로 나와서 경성(京城)에 도달한다. 이리하여 청주는 중도의 요충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임진년(壬辰年)에 왜구의 큰 진(陣)이 조령(鳥嶺)을 지난 다음 그 가운데 1대가 추풍령을 지나서 청주로 나왔다. 그후 조령에는 세겹 성(城)을 쌓아서 엄중하게 지키고 있으나, 추풍령 길은 잊어버리고 비워둔 것은 또한 무슨 연고인가? 조령은 본디 천연적인 험지(險地)로서, 한 사람이 길목에 버티고 있으면 1만 명이라도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니, 비록 요새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급한 변고에 대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추풍령은 본시 평지이니 만약 견고한 성이 없으면 도적을 막을 수 없다. 나의 생각에는 추풍령 서쪽으로 황간에 이르기 전에 험하고 비좁은 곳을 택해, 견고한 성을 급히 쌓아서 무기와 곡식을 간직하였다가 급한 변고가 있으면 군수에게 가서 지키게 하고 방어하는 신하는 후원(後援)이 되도록 해야 함은 그만둘 수가 없다.
충주(忠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단양(丹陽)ㆍ청풍(淸風)이고, 6현은 영춘(永春)ㆍ괴산(槐山)ㆍ연풍(延風)ㆍ청안(淸安)ㆍ음성(陰城)ㆍ진천(鎭川)이다.
충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동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충주는 조령 길과 죽령(竹嶺)길이 합하는 곳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한 것이다.

완남성(完南省) : 포정사는 전주부(全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

전주(全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여산(礪山)ㆍ익산(益山)이고, 6현은 고산(高山)ㆍ용안(龍安 : 咸悅의 반을 합병함)ㆍ임피(臨陂)ㆍ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 : 함열의 반을 합병함)이다.
완남성 순찰사는 전주 도호부 대윤을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전주는 번성하고 부유해서 큰 도시라고 일컫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일찍이 경읍(京邑)이 된 적이 없으므로 남경(南京)이라는 명칭은 적당하지 않다.
용주(龍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용주는 지금의 남원이다).
2군은 무주(茂朱)ㆍ금산(錦山)이고, 6현은 진산(珍山)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임실(任實)ㆍ운봉(雲峰 : 求禮를 합병한다)이다.
용주 도호부 목사는 완남성 동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용성(龍城)이 동쪽으로 팔량치(八良峙)에 통해서, 신라ㆍ백제의 경계가 되었고, 목구멍 같은 요충지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한다.
나의 생각에는 팔량영은 남방(南方)의 큰 관방(關防)이라 생각한다. 백제가 망할 때에 유인궤(劉仁軌)가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남원을 대방주(帶方州)로 만들어서 신라의 길을 막았다. 고려 말에는 우리 태조(太祖)가 왜구를 만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인 곳으로,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이곳에 있다. 만력 정유년(萬曆丁酉年 : 선조 30년,1597)에는 왜구가 이 길을 지나서 남원을 공격했는데, 명(明)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따라서 이 길목을 방어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지금까지 한 조각의 견고한 성도 없으니 엉성하다 할 수 있다. 운봉 동쪽 10여 리 지점이 그 영의 가장 험한 목에 해당하는데, 견고한 성 하나를 쌓고, 운봉 관아를 이 성으로 옮기도록 함은 그만둘 수 없다.
순주(淳州 : 곧 淳昌임)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태인(泰仁 : 태인은 이번에 승격했다)ㆍ고부(古阜)이다. 6현은 정읍(井邑)ㆍ금구(金溝)ㆍ부안(扶安)ㆍ고창(高敞)ㆍ무장(茂長)ㆍ흥덕(興德)이다.
순주 도호부 목사는 완남성 중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순주에도 노령(蘆嶺)이 있고, 복판 큰 길이 되었으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했다. 또 순주에는 부흥산(復興山)이 있어, 험하게 막힌 것은 비교할 데가 없다. 남쪽 사람들은 모두 병마사(兵馬使)의 영(營)은 순주에다 설치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무남성(武南省) : 포정사는 광주부(光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또 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

광주(光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장성(長城)능성(綾城 : 綾州)이고, 6현은 담양(潭陽)ㆍ창평(昌平)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옥과(玉果)ㆍ곡성(谷城)이다.
무남성 순찰사는 무주(武州)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살피건대, 광주(光州)란무주(武州)이다. 신라 말부터 항상 큰 진(鎭)이었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창의(倡義)하는 군사가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그 고을을 포정사로 한 것이 그것에 연유한다.
나주(羅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광(靈光)ㆍ영암(靈巖)이고, 6현은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압해(押海)이다.
나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우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압해는 나주 바다의 바깥 섬이다. 나주 바다에 열두 개의 큰 섬이 있고, 작은 섬으로서 큰 섬에 딸린 것은 수십 개나 된다. 여러 섬에서 1년 동안 요역(徭役)으로서 고을 관청 사람의 요구에 응(應)하는데 곡식이 1만 섬이나 들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은 든다 한다. 나주 군관이 바깥 섬 주인이 되어, 그 이(利)를 다 먹으면서, 목사가 쓰는 목물(木物)과 잡비를 충당해준다 하니 천하에 무의 무법(無義無法)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섬 백성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와서 고소(告訴)하려 하여도 한 번 부성(府城)에 들어오려면, 헛되이 드는 비용이 매우 많고 사건은 결국 바로잡아지지 않기 때문에 원통함과 억울함이 쌓여서, 별도로 한 현을 세우고, 열두 섬을 다 이 현에다 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그 실정을 익히 알므로, 이번에는 열두 섬 중에 하나를 택해서 관아를 세우고자 하는데 자은(慈恩)ㆍ암태(巖泰)ㆍ압해가 그 후보지이다. 그런데 압해는 본시 옛 현이니 여기에다 관아를 설치함이 또한 마땅하다.
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러 섬에 성 하나, 보(堡) 하나 없으니 우리나라 서남해의 방어는 허술하다 할 수 있다. 바삐 한 현을 설치해서 그 침입을 막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승주(昇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승주는 곧 順天이다).
2군은 장흥(長興)ㆍ보성(寶城)이고, 6현은 광양(光陽)ㆍ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동복(同福)ㆍ금오(金鼇)ㆍ검주(黔州)이다.
승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좌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순천 수영(水營) 남쪽에 금오도(金鼇島)가 있는데 둘레가 300리이고, 그 서쪽에 수태도(愁太島)가 있는데 주위가 200리나 된다. 그리고 돌산(突山)ㆍ내발(乃發)ㆍ횡간(橫看) 따위 여러 섬은 그 수효도 모를 정도이다. 지금은 금오도를 현으로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 예속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생각건대, 흥양 남쪽에 있는 절금도(折今島)는 둘레가 100여 리인데 백성이 많고 토지가 기름지다. 그 서쪽에 산이(山伊)ㆍ조약(助藥)ㆍ벌라(伐羅)ㆍ금당(衾堂) 따위의 섬이 있는데 그 수효도 모를 지경이다. 절금도에 금주현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다 예속시킴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
제주(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
2현은 정의(旌義)ㆍ대정(大靜)이다.
제주 도호부 대사는 탐라부 병마 수군 도절제사(耽羅府兵馬水軍都節制使)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제주는 모두 원래 제도대로 하고 고칠 것이 아니다.

영남성(嶺南省) : 포정사는 달주부(達州府) 성안에 있는데 3주, 9군, 18현을 관할한다.

달주는 3군, 6현을 거느린다(달주는 곧 大邱이다).
3군은 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칠곡(漆谷)이고, 6현은 현풍(玄風)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ㆍ인동(仁同)ㆍ경산(慶山 : 慈仁을 합병함)ㆍ신령(新寧 : 河陽을 합병함)이다.
영남성 순찰사는 달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가주(嘉州 : 곧 安東임)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풍기(豊基 : 順興을 합병함)ㆍ청송(靑松 : 眞寶를 합병함)ㆍ의성(義城)이고, 6현은 봉화(奉化)ㆍ영천(榮川)ㆍ예안(禮安)ㆍ영양(英陽)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 : 比安을 합병함)이다.
가주 도호부 대사는 영남성 상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풍기는 한길 요충에 당했고, 큰 영의 목을 차지했으나 고을 힘이 약하므로 순흥을 당겨서 합병했다.
경주(慶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동래(東萊)ㆍ울산(蔚山)ㆍ영천(永川)이고, 6현은 영해(盈海 : 盈德을 합병함)ㆍ흥해(興海 : 淸河를 합병함)ㆍ장기(長鬐 : 延日을 합병함)ㆍ언양(彦陽)ㆍ양산(梁山)ㆍ기장(機張)이다.
경주 도호부 대윤(大尹)은 영남성 하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동래는 본디 하나의 작은 현인데 이웃 나라와 인접했다는 이유로 부로 승격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군수열(郡守列)에 두었다. 그러나 그 직은 병마 수군절제사를 겸해서 다른 고을 수령과 같지 않다.
생각건대, 경주는 비록 신라의 천년 고도(千年古都)이나 지역이 아득히 멀어서 여러 경(京)에 끼기에는 부족하다.

황서성(潢西省) : 포정사는 황수(潢水) 서쪽 성주(星州)에 있는데 3주, 9관, 18현을 관할한다.

성주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합천(陜川)ㆍ함양(咸陽 : 安義를 합병함)ㆍ초계(草溪)이고, 6현은 고령(高靈)ㆍ거창(居昌)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산청(山淸)ㆍ단성(丹城)이다.
황서성 순찰사는 성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함양이 팔량치 어구에 당했으니 형세를 고단(孤單)하게 할 수 없으므로 안의를 합병한 것이다.
상주(尙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선산(善山)ㆍ예천(醴泉)ㆍ금산(金山)이고, 6현은 문경(聞慶)ㆍ용궁(龍宮)ㆍ함창(咸昌)ㆍ화령(化寧)ㆍ개령(開寧)ㆍ지례(知禮)이다.
상주 도호부 목사는 황서성 북로(北路)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추풍령 북쪽에 화령ㆍ중모(中牟)라는 두 옛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혁파되어서 상주에 속했다. 나의 생각에는 이 고을을 다시 설치하는데 두 고을을 합쳐 하나로 만들고 명칭은 화령이라 하여 추풍령 어구를 충실히 하게 한다면 관방(關防)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진주(晋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김해(金海)ㆍ창원(昌原 : 漆原을 합병함)ㆍ하동(荷東 : 즉 河東으로, 昆陽을 합병함)이고, 6현은 사원(泗原 : 즉 泗川)ㆍ고성(固城)ㆍ함안(咸安 : 鎭海를 합병함)ㆍ웅천(熊川)ㆍ남해(南海)ㆍ거제(巨濟)이다.
진주 도호부 목사는 황서성 남로(南路)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하동은 잔수(潺水) 동쪽에 있어, 서쪽으로 섬진강(蟾津江 : 豆恥津)만 건너면 곧 광양(光陽)에 닿아 전라도에 통한다. 여기도 관방할 곳이니 곤양을 합병해서 한 군으로 함이 마땅하다. 곤양 남쪽, 남해 어구에 노량보(露梁堡)가 있는데 여기가 이순신이 왜적을 막던 곳이다. 곤양 남쪽 두어 마을을 노량에다 예속시켜서 그 힘을 굳세게 함도 또한 마땅한 바이다(노량에다 防寨를 설치하면 蟾津寨는 혁파함이 마땅함).
충청도(忠淸道)를 이번에 사천성(泗川省)이라 고쳤으니 사천현은 사원(泗原)이라 고쳐서, 명칭이 헷갈리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열동성(洌東省) : 포정사는 원주부(原州府) 안에 있다. 3주, 6군, 12현을 관할한다.

원주는 2군, 3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월(寧越)ㆍ정선(旌善)이고, 4현은 제천(堤川)ㆍ평창(平昌)ㆍ횡성(橫城)ㆍ지평(砥平)이다.
열동성 순찰사는 원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열동성 포정사는 춘주(春州)에다 두어서, 남북 이수(里數)가 균등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이번에는 우선 예전대로 했으나 그 의논은 그냥 무시할 것이 아니다. 또 영동 아홉 고을은 바로 이역 같아서 관할하기가 불편하니, 열동에 포정(布政)하는 신하를 봄ㆍ여름은 명주(溟州)에, 가을ㆍ겨울은 원주에 있도록 하여 선화(宣化)를 고르게 함이 마땅하다.
춘주(春州 : 춘주는 곧 春川임)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회양(淮陽)ㆍ양근(楊根 : 본디 경기에 딸렸던 고을이다)이고, 4현은 홍천(洪川)ㆍ미원(迷源)ㆍ인제(麟蹄)ㆍ양구(楊口)이다.
춘주 도호부 목사는 열동성 운향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춘주란 옛적에 낙랑국(樂浪國)이었다. 한(漢)나라에서 처음에 평양에다 낙랑을 설치했는데 그후 고구려에게 빼앗기자, 낙랑 사람들이 우수주(牛首州)에 와서 차지하고, 백제와 연결해서 읍루(揖婁)에 항거하며 고구려와 대항하였다(아울러 《疆域考》에 밝혔다). 지금 사람들은 우수주를 맥국(貊國)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이것은 대개 가탐(賈耽)이 지지(地志)를 찬(撰)하면서부터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 지역이 본래 위치한 형세는 또 한 도의 복판에 있으니 열동성 포정사는 여기에 있음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양근 서북쪽에 미원이라는 옛 고을이 있는데, 아직도 창사(倉舍)가 있다. 이 지역은 홍천ㆍ춘천 두 고을 물이 합류하는 아래쪽에 있어 군사를 숨기고 곡식을 운반하여 급한 사변에 대처할 만한 곳이니, 그 고을을 복구하여 춘주 아래쪽을 받치게 하도록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명주(곧 江陵)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양양(襄陽)ㆍ삼척(三陟)이고, 4현은 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 歙谷을 합병함)ㆍ울진(蔚珍 : 平海를 합병함)이다.
명주 도호부 대사는 영동 안무사(嶺東安撫使)를 겸한다.
생각건대, 나의 숙부가 일찍이 흡곡 현령을 지냈는데, 그때 흡곡에는 민호(民戶)가 400여 호에 불과했다. 400호만으로는 현이 될 수 없으니 통천과 합쳐서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도록 함이 마땅하다. 또 울진이 현으로 되어 있으나 또한 아주 작다고 칭하니 평해를 울진에다 합치는 것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명주 지역이, 동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산이 둘러 있어, 좁고 막힌 것이 문득 이역과 같으므로 감사에게 반(半)은 영동에 있도록 함이 마땅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동 여러 고을의 일반 정무는 명주 대사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고 오직 큰 사건만 감사(監司)에게 관유(關由)하여, 강계(江界)의 폐4군처럼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송해성(松海省) : 포정사는 중경 유수부(中京留守府) 안에 있는데 1경(京), 2주, 12군, 12현을 관할한다.

중경은 개성부(開城府)인데,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장단(長湍)ㆍ평산(平山)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이고, 4현은 마전(麻田)ㆍ금천(金川)ㆍ토산(兎山)ㆍ신계(新溪)이다.
풍덕부(豊德府)는 송경(松京)에다 합병했다.
중경 유수는 송해성 순찰사와 개성부 대윤(大尹)을 겸하며, 서윤(庶尹)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개성부가 이미 주목(州牧)의 체재(體裁)를 갖추었으나 지역이 아주 작고, 성 하나만 웅거했을 뿐이어서 모양이 안 되므로 이번에 풍덕(豊德)을 합쳐서 한 주로 만드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해주(海州)는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장연(長淵)ㆍ풍천(豊川 : 松禾를 합병함)ㆍ안악(安岳)ㆍ신천(信川)이고, 4현은 장련(長連)ㆍ은율(殷栗)ㆍ문화(文化)ㆍ강령(康翎 : 瓮津을 합병함)이다.
옹진이 이미 수영(水營)에 들어 있어도 없는 것 같으니 강령에 합쳐서, 계산에 넣지 않았다.
해주 도호부 목사는 송해성 운향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풍천이 초도(椒島) 어구에 당해 있으니, 일후의 급한 변은 반드시 이곳에서 일어날 것인데, 고을의 힘이 아주 약하므로 송화(松禾)를 합친 것이다.
생각건대, 관서(關西)에 병란이 있으면 남도 곡식을 북쪽으로 실어오고, 경기에 흉년이 들면 서도 곡식을 남쪽으로 수운(輸運)하는데, 신하 하나를 조수(漕帥)로 삼아 두는 것이 마땅하므로 여기에 운향사를 겸하도록 한 것이다.
살피건대, 여러 성에 등(等)을 가를 때마다 군은 적고 현은 많은데, 서북 여러 도에는 군과 현의 수효가 서로 같은 데가 많다. 이것은 본래 큰 군이 많아서 현으로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주(黃州)는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중화(中和)ㆍ봉산(鳳山)ㆍ서흥(瑞興)ㆍ곡산(谷山)이고, 4현은 상원(祥原)ㆍ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인성(麟城)이다.
황주 도호부 목사는 송해성 서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인성이란 봉산 동사리(東四里)이다. 봉산 동남쪽 100여 리 되는 기린역(麒麟驛) 북쪽에 동사리라는 곳이 있고, 또 재령(載寧) 성당면(聖堂面)이 기린역 서쪽에 있다. 이 지역은 텅 비어서, 성곽이 없고, 4방 고을과의 거리는 모두 100리가 넘는다. 그러므로 백성이 법을 모르고 행려(行旅)도 모여들지 않는다. 여기에다 작은 현을 만들고, 명칭을 인성이라 하여, 바둑알과 별처럼 벌여 있도록 하고, 너무 엉성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사람 사는 곳이 아주 희소하면 비워두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이와 같은 평지에 어찌해서 보장(保障)을 만들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는 현을 반드시 설치해야 마땅하다.
재령은 본래 큰 군이었으나 갈라서 인성현을 만들었으므로 이번에 낮추어서 현으로 만들었다.

패서성(浿西省) : 포정사는 서경 유수부(西京留守府)에 있다. 1경, 1주, 6군, 12현을 관할한다.

서경은 평양부인데 4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성천(成川)ㆍ삼화(三和)ㆍ함종(咸從 : 甑山을 합병함)이고, 6현은 강서(江西)ㆍ용강(龍岡)ㆍ순안(順安)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ㆍ양덕(陽德)이다.
서경 유수는 패서성 순찰사와 평양부 대윤을 겸하며서윤(庶尹)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삼화는 패강(浿江)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구에 해당하므로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다. 비록 낮추어서 군으로 만들었으나 방어사라는 명칭은 그냥 겸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생각건대, 증산(甑山)은 작은 취락(聚落)이므로 함종에 합병함이 편당(便當)하나 증산과 함종이 예전에는 다 증지현(增地縣)에 매였던 것이므로 이번에는 함종에 증산의 명칭을 더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안주(安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숙천(肅川)ㆍ순천(順川)ㆍ개천(价川)이고, 6현은 영유(永柔)ㆍ자산(慈山)ㆍ덕천(德川)ㆍ맹산(孟山)ㆍ영원(寧遠)ㆍ은산(殷山)이다.
안주 도호부 목사는 패서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이 3군과 6현은 모두 살수(薩水) 동쪽에 있는데, 은산ㆍ맹산ㆍ영원은 또 패원(浿源) 동쪽에 있다.

청서성(淸西省) : 포정사는 영주(寧州) 약산(藥山) 성안에 있는데 3주, 18군, 2현을 관할한다.

영주(곧 寧邊이다)는 6군, 2현을 거느린다.
6군은 정주(定洲 : 곧 定州임)희천(熙川)ㆍ운산(雲山)ㆍ구성(龜城)ㆍ가산(嘉山)ㆍ곽산(郭山)이고, 2현은 박천(博川)ㆍ태천(泰川)이다.
청서성 순찰사는 영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주ㆍ군 제도가 모두 엄정하여 문란함이 없어야 한다면, 여러 고을이 주(州)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부당하므로 정주(定州)ㆍ삭주(朔州)는 모두 주(州)를 주(洲)로 고쳐야 한다.
의주(義州)는 6군을 거느린다.
6군은 삭주(朔洲)ㆍ창성(昌城)ㆍ벽동(碧潼)ㆍ용천(龍川)ㆍ철산(鐵山)ㆍ선천(宣川)이다.
의주 도호부 대윤은 청서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강변 여러 고을과 바닷가 세 고을은 그 등급이 높아야 할 것이므로 여섯 고을을 아울러 군(郡)으로 하고 현으로 낮추지 않는다.
강주(江州 : 강주는 곧 江界이다)는 6군을 거느린다.
6군은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ㆍ위원(渭源)ㆍ초산(楚山)이다.
강주 도호부 대사는 청서 방어사와 4군 안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4군에 백성을 채우는 방법은, 온 집이 변방으로 이사가는 율(律)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남북은 기후가 아주 다른데 갑자기 멀리 옮기면 인정이 슬퍼할 것이니 지금부터 중죄(重罪)는 1천 리 너머로 이사시키고, 그 다음은 500리 너머로 옮기도록 한다. 그리하여 남방 백성은 복판 도로 옮기고, 복판 도의 백성은 양서(兩西)로 옮기고, 서도 백성은 이에 4군으로 옮긴다면, 남방에는 호총(戶摠)이 죽어들고 4군에는 읍과 부락(部落)이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편리한 방법이다.

현도성(玄菟省) : 포정사는 함주부(咸州府) 성안에 있다. 2주, 4군, 10현을 관할한다.

함주(즉 咸興이다)는 2군, 5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흥(永興)ㆍ안변(安邊)이고, 5현은 덕원(德源)ㆍ문천(文川)ㆍ고원(高原)ㆍ정평(定平)ㆍ장진(長津)이다.
현도성 순찰사는 함주 도호부 대윤을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영흥이 비록 우리 성조(聖祖)가 일어난 곳이나, 반드시 승격시켜서 부(府)로 만들어야 존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 태조(漢太祖)가 용흥(龍興)한 후에도 풍읍(豊邑)은 그대로 현이었고, 패군(沛郡)은 그대로 군이었을 뿐, 그것을 승격시켜서 주목(州牧)으로 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법제(法制)를 한번 정했으면 기강이 있어야 하는데, 영흥은 이미 거느린 고을이 없으니 군이 될 뿐이다.
항주(航州 : 항주는 곧 北靑이다)는 2군, 5현을 거느린다.
2군은 단천(端川)ㆍ갑산(甲山)이고, 5현은 이원(利原)ㆍ홍원(洪原)ㆍ삼수(三水)ㆍ계산(階山)ㆍ후주(厚洲)이다.
현도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항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북청(北靑) 북쪽에 자항산(慈航山)이 있으므로 항주라고 고쳤다.
살피건대, 조정에서 이미 4군을 버려서, 4군은 야인잡류(野人雜類)가 사는 곳이 되어버렸는데, 이에 장수(涱水) 동쪽 연안에 장진(長津)ㆍ신방(神方)ㆍ강구(江口)ㆍ어면(魚面)ㆍ자작(自作)이라는 방수(防戍)를 두어서 갈파(葛坡)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문호를 열어서 적인(敵人)을 인도하는 것으로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선왕이 매우 개탄하여, 먼저 장진보(長津堡)를 장진부(長津府)로 만들고, 장신(將臣) 이경무(李敬懋)를 보내서 이 고을을 경영하였으니, 이것은 왕자(王者)의 큰 계획이었다.
생각건대, 항주 서북쪽에 소백계산(小白階山)ㆍ원동(院洞)ㆍ은동(銀洞)이라는 여러 곳이 어면보(魚面堡) 후면에 있으니, 그 지명을 계산이라 하여 바삐 한 현을 세우면 장수 서쪽 함덕(鹹德)ㆍ판막동(板幕洞) 여러 곳도 차츰 경영하는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고을이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할 것 없다.
살피건대, 폐4군은 모두 강 연안의 고을들인데 그 상류에 후주고성(厚州古城)이 있다. 지금은 조금 옮겨서 후주보(厚州堡)를 만들었는데, 이곳은 4군 외에 또 하나의 폐군(廢郡)이다. 이곳에다 현 하나를 설치하고, 명칭을 후주(厚洲)라 하여, 동쪽으로 삼수와 연하고 서쪽으로 무창(茂昌)에 접하여서 지금의 구갈파(舊葛坡)에 관아를 만들면,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지역이 모두 다스리는 계획 속에 들어와서 북변(北邊) 울타리가 점차 완전해질 것이다.

만하성(滿河省) : 포정사는 경주부(鏡州府) 성안에 있는데 2주, 8군을 관할한다.

경주(鏡州 : 곧 鏡城)는 4군을 거느린다. 4군은 길주(吉洲 곧 吉州)ㆍ명천(明川)ㆍ부령(富寧)ㆍ무산(茂山)이다.
만하성 순찰사는 경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12성 순찰사는 모두 병마절도사를 으레 겸하고 있으나, 실제로 겸한 것은 아니다. 만하성의 경우는 실제로 겸하고 병마영(兵馬營)을 별도로 세우지 않음이 마땅하다.
회주(會州 : 곧 會寧)는 4군을 거느린다. 4군은 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이다.
회주 도호부 대사는 만하성 방어사와 6진 안무사(六鎭安撫使)를 겸한다.
생각건대, 예전 예에 만하성 절도사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鏡城)에 있고 기후가 차가워지면 종성 행영(鍾城行營)에 있었는데 지금은 순찰사가 이 직무를 실제 겸했으니, 또한 옛 예에 따라 옮겨가면서 있음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만하성 순찰사는 문신과 무신이 교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며 무신은 일찍이 승지나 참판을 지낸 자라야 천망(薦望)에 참여하도록 함이 또한 마땅하다.

12성(省) 주ㆍ군ㆍ현의 총수(가경 병자년, 곧 순조 16년, 1816년 8월 23일에 시험삼아 기록했다)
봉천성(奉天省) 38읍(4주, 10군, 22현. 또 沁州 1주, 1군)
사천성(泗川省) 42읍(4주, 10군, 28현)
완남성(完南省) 27읍(3주, 6군, 18현)
무남성(武南省) 27읍(3주, 6군, 18현)
제주(濟州) 3읍(1주, 2현)
영남성(嶺南省) 30읍(3주, 9군, 18현)
황서성(潢西省) 30읍(3주, 9군, 18현)
열동성(洌東省) 21읍(3주, 6군, 12현)
송해성(松海省) 27읍(1경, 2주, 12군, 12현)
패서성(浿西省) 20읍(1경, 1주, 6군, 12현)
청서성(淸西省) 19읍(3주, 14군, 2현)
폐4군 4읍(4군)
현도성(玄菟省) 16읍(2주, 4군, 10현)
만하성(滿河省) 10읍(2주, 8군)
이상 공 314읍이다. 본래는 346읍인데, 줄인 것이 43읍이고(풍덕ㆍ교하ㆍ목천ㆍ석성ㆍ비인ㆍ신창ㆍ덕산ㆍ해미ㆍ평택ㆍ영동ㆍ회인ㆍ전의ㆍ진잠ㆍ함열ㆍ구례ㆍ자인ㆍ하양ㆍ순흥ㆍ진보ㆍ비안ㆍ영덕ㆍ청하ㆍ연일ㆍ안의ㆍ칠원ㆍ곤양ㆍ진해ㆍ흡곡ㆍ송화ㆍ옹진ㆍ증산), 증설한 것이 11읍이다(압해ㆍ금오ㆍ검주ㆍ화령ㆍ인성ㆍ계산ㆍ후주ㆍ폐4군).


 

[주D-001]근본(根本)되는 곳 : 국도를 말함.
[주D-002]목릉(穆陵) : 선조(宣祖)의 능호(陵號).
[주D-003]관방(關防) : 관문(關門)을 만들어서 외적을 방어하는 곳.
[주D-004]애각(涯角) : 천애지각(天涯地角)의 준말. 하늘가와 땅 모퉁이가 아주 동떨어져 있다는 말.
[주D-005]금와(金蛙) : 옛날 북부여(北夫餘)의 임금 금와왕.
[주D-006]이괄(李适) :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했던 무장(武將). 그 후 일부 공신의 횡포에 반항하여 그들을 제거하려는 난을 일으켰고, 서울을 무혈점령했으나 안현(鞍峴) 싸움에 참패하여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음.
[주D-007]정수(亭燧) : 정(亭)은 망대(望臺), 수(燧)는 봉수(烽燧). 망대로써 적의 행동을 탐지하고 봉수로써 급변을 연락하였다.
[주D-008]묘당(廟堂) : 의정부의 별칭.
[주D-009]보(堡) :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설치한 요새. 보루.
[주D-010]말갈(靺鞨) : 만주(滿洲) 동부 지방에 있던 퉁구스계의 일파. 숙신(肅愼)ㆍ읍루(挹婁)ㆍ물길(勿吉)은 모두 그들의 옛 명칭으로 뒷날 여진족(女眞族)으로 불림.
[주D-011]발해(渤海) :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大祚榮)이 속수 말갈(束水靺鞨)을 이끌고 고구려 고토에 세웠던 나라. 만주 동북에서 연해주(沿海州)와 한반도(韓半島) 북부에 걸쳐 있었고, 669년에서 926년까지 존속했음.
[주D-012]야인(野人) :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살던 만주족(滿洲族).
[주D-013]번신(藩臣) : 국경지대를 방위하는 신하.
[주D-014]정문부(鄭文孚) : 선조 21년 식년 문과에 합격하고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회령(會寧) 사람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서 적에게 투항하자, 그는 관민합작(官民合作)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그 반적(叛賊)을 평정하였음.
[주D-015]경악(經幄) : 임금 앞에서 경전(經傳)을 강론하는 자리. 경연(經筵).
[주D-016]강상(綱常) : 유교 도덕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함. 삼강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이고 오상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
[주D-017]선대왕(先大王) : 선대(先代)의 대왕이라는 뜻. 여기에서는 정조 대왕(正祖大王)을 지칭한 말임.
[주D-018]행궁(行宮) : 임금이 대궐을 떠나서 머무는 곳. 행재조(行在所)와 같음.
[주D-019]사직(社稷) : 사(社)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곳. 직(稷)은 곡신(穀神)에게 제사하는 곳.
[주D-020]유인궤(劉仁軌) : 당(唐)나라 장수. 당 고종(唐高宗) 때, 멸망시켰던 백제가 다시 일어났으므로, 신라 군사와 합동해서 평정시킨 일이 있음.
[주D-021]선화(宣化) : 덕화(德化)를 선포함.
[주D-022]읍루(揖婁) :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만주 지역에 살던 부족. 후에 숙신(肅愼)ㆍ말갈(靺鞨)이라는 명칭으로 불림.
[주D-023]가탐(賈耽) : 당(唐)나라 사람으로 순제(順帝) 때에 정승이었음. 독서를 좋아하여 지리(地理)에 밝았고, 음양잡수(陰陽雜數)에도 정통하였음.


 서(序)
영남인물고 서(嶺南人物考序)


영남(嶺南)은 옛 신라국(新羅國)이다. 장백산맥(長白山脈)이 오대산(五臺山)을 거쳐서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신라의 진산(鎭山)이 되고, 서쪽으로는 소백산(小白山)ㆍ주흘산(主屹山)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되어 그치면서 신라의 병폐(屛蔽 병풍처럼 감싸서 막음)가 되었다. 황수(潢水)가 태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그것이 또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모든 역내(域內)의 물이 바퀴살통처럼 모이고 힘줄처럼 모여서 하나로 합친다.
이 때문에 그 산천(山川)의 풍기(風氣)가 기타 다른 도(道)와는 전혀 다르고 그 인물은 영걸하고 특출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는 튼튼하게 하였고 곱고 화려함은 좋아하지 않았다. 국가에 중대한 의논이 있을 적마다 온 나라가 그들의 의견에 이의가 없이 하나로 귀착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일이 없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 등 여러 선생이 나신 이후로 선비들이 모두 예의(禮義)를 숭상하였으므로 성질이 못된 자가 있기는 하여도 공손하게 예모를 차리는 모습은 모두 학자의 기풍이 있었다.
주상 즉위 22년에 명하여 영남(嶺南)의 모든 이름난 사람의 언행(言行)과 사적을 가져다가 뽑아 모아 책을 만들게 하였는데, 채 문숙(蔡文肅 문숙은 채제공(蔡濟恭)의 시호)이 총재(總裁)가 되고 중씨(仲氏 정약전(丁若銓))와 한혜보(韓徯甫 해보는 한치응(韓致應)의 자) 등이 이 일을 관장하였다.
그 이듬해에 내가 곡산(谷山)에서 돌아오니, 중씨가 그 초고(草稿)를 내어놓고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불과 수백 년 동안에 한 지방의 어진이가 이처럼 많으며, 그 행실이 뛰어나고 덕의(德義)가 높은 사람으로 믿을 만하고 사적이 뚜렷한 자가 이처럼 혁혁하단 말인가. 그대는 그러한 까닭을 아는가. 가르침에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이후로 학교의 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백성은 모두 저대로 나서 저대로 자랐다. 지혜로운 자는 혹 스스로 깨달아서 그 혈기(血氣)의 병통을 바로잡기도 하였으나, 어리석은 자는 자포자기하여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마치었으니, 이 점이 특출난 인물이 성긴 까닭이다. 영남은 그렇지 않아서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가숙(家塾)으로 알고 스승과 벗을 친척으로 여겨 떼를 지어 놀고 무리지어 익힘으로써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 재질(材質)이 참으로 좋다면 어찌 이와 같이 성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가르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서문으로 삼는다.

천지문(天地門)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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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문(天地門)
백두정간(白頭正幹)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철령(鐵嶺)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은 여러 산맥이 모두 서남(西南)쪽으로 줄달음쳤다. 철령(鐵嶺)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서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본 줄기이고 그 중간에 있는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갔으니, 이것은 풍수학에서 말하는, ‘버들가지[楊柳枝]’라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오동나무 잎에는 반쪽 씨가 달리고, 버들가지 끝에는 알맹이가 맺는다.”고 하였으니, 그 알맹이의 위치는 영남 지방에 해당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안동(安東)과 예안(禮安) 사이를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태백산ㆍ소백산 이상의 산세가 이러하므로 물이 모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영남 지방만은 동래(東萊)와 김해(金海)를 좌우(左右)로 싸고돌아서 문막이가 되었다. 이것은 곧 산이 끝난 곳에 물이 합류된 형국으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흔적 없이 제거된 것이다. 왼쪽으로는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산의 큰 산맥과 더불어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같이하였다.
거북과 자라, 용과 물고기들이 생산되며 모든 물자가 번식한다. 그러므로 무한한 인재가 양성되었다. 밖으로는 일본(日本)으로 돌아간 큰 산맥이 남으로 또는 서로 뻗어가면서 물의 어구[水口]를 안고 돌아 산맥이 뛰어 건너가서 작은 섬 큰 섬들이 형성되었다. 오른쪽 산맥은 지리(智異)에 이르러 끝났는데, 그 상태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온 듯이 웅장하고 기운차서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 태어난 인물로 말하면, 고려 이전까지는 문화가 미개해서 무지함을 면치 못하다가 우리 왕조(王朝)에 들어와서 중국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퇴계(退溪)가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계통을 받은 인물들이 깊이가 있으며 빛을 발하여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학이 찬란하여 수사(洙泗)의 유풍을 방불케 하였고, 남명(南冥)은 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후계자들은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어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위험이 닥쳐온다 하여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여 독립적 지조를 가졌다. 이것은 영남 북부와 남부의 다른 점이다.
대체로 그 일직선의 큰 산맥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이 되었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에 이름을 붙인 것도 의미가 있었던 듯하며 인물이 산출된 것으로 보아도 이 지역이 인물의 창고라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에서 의존할 수 있는 힘을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위(衛)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았으므로 물고 뜯고 하는 판국에서도 나라를 유지하다가 진 삼세(秦三世) 때에 가서야 망했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간모시(竿旄詩) 한 편이 많은 인재를 양성한 데에 기인한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 가야(伽倻)가 조그마한 나라였으나 고구려와 백제가 아귀다툼을 하는 틈바구니에서도 버티어 나갔고 오랜 세대를 이어 나갔으니 그 사정이 매우 비슷하다. 천만 년의 역사가 지난 뒤에 국가가 위태로운 국면을 당할 경우라도 전략자가 여기에서 나올 것이며 충절도 여기에서 나올 것이다. 이는 장담하고 기다려도 틀림없을 것이다.


 

[주C-001]백두정간(白頭正幹) :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주D-001]수사(洙泗) : 수(洙)와 사(泗)는 모두 노(魯) 나라의 물 이름. 수사는 곧 공자와 그 제자들이 출생한 곳이라는 뜻.
[주D-002]남명(南冥) :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은 경상남도 지방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후학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음.
[주D-003]간모시(竿旄詩) : 《시경》 용풍(鄘風) 가운데에 있는 시편 이름. 이 시는 위 무공(衛武公)과 그의 여러 훌륭한 신하를 칭찬한 것이라 함. 《시경》에는 간모(干旄)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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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문(天地門)
한도(漢都)


고려 태조의 유교(遺敎)에, “차령(車嶺)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에는 산수의 형세가 모두 배주(背走)하였다.”고 했으니, 공주강은 곧 금강(錦江)이었다.
이 물은 원류가 호남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발원하여 역수로 흘러 공주의 북쪽을 둘러 나와 금강에 합류했고, 계룡산(鷄龍山)도 또한 덕유산의 낙맥으로서 임실(任實)의 마이산(馬耳山)을 거쳐 회룡고조(回龍顧祖)가 되어 공(公)자의 형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강은 감여가(堪輿家)의 이른바, 반궁수(反弓水)이니, 송도(松都)와 한양(漢陽) 두 도읍을 등질 뿐만 아니라, 계룡산의 신도(新都)에도 또 한 아무런 관련성이 없게 되었다.
조선 창업 초기에 자초상인(自超上人) 무학(無學)이 신도를 순시하고, 조운(漕運)에 불편하다 하여 버렸는데, 실상은 판국이 좁고 역량이 장원하지 못하며, 이곳으로부터 호남의 산수가 배주하여 옹호해 주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강(漢江)은 오대산(五臺山)에서 발원하여 네 고을을 거쳐 역수로 흐르다가 소양강(昭陽江)과 두미(斗尾)에서 합수하고 삼각산(三角山)을 둘러서 서해(西海)로 흘러들어 간다. 이제 한강 남쪽의 여러 산맥은 속리산(俗離山)에서 뻗어 나와 모두 서울로 머리를 숙여 조회한다.
서울의 산맥은 남으로 뻗어 나온 큰 줄기가 철령(鐵嶺)에서 나뉘고 그 남쪽 가닥이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에 이르러 다시 한강 남쪽으로 뻗어 올라가 바닷가에 그치고, 산맥이 또 바다를 건너 강도(江都)의 나성(羅星)이 되었으니, 범위가 크고 장쇄(藏鎖)가 긴밀하여 남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만세 제왕의 기지요, 술가(術家)가 말하는 오덕구(五德丘)이니, 어찌 하늘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겠는가?


 

[주C-001]한도(漢都) : 한양의 도읍.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주D-001]회룡고조(回龍顧祖) : 산맥이 되돌아서 태조봉(太祖峰)을 바라보고 기지가 되는 것을 말함.
[주D-002]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주장하는 사람.
[주D-003]반궁수(反弓水) : 강물이나 냇물이 이쪽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이쪽을 등지고 흐르는 것.
[주D-004]계룡산의 신도(新都)에도 …… 없게 되었다 : 이 대문은 금강이 계룡산 신도(新都)에 별 관련성이 없다고 했는데, 실상은 금강이 신도를 위하여 태극수(太極水)가 되고 현무수(玄武水)가 되어 계룡산을 안고 삥 돌았으니, 천하에 드문 명승지를 형성하였음.
[주D-005]나성(羅星) : 어느 기지를 위하여 산이 멀리 둘러 있어 그곳을 옹호하고 감싸준 것을 말함.
[주D-006]장쇄(藏鎖) : 기운이 누설되지 않도록 산세가 꽉 짜임새가 있는 것을 말함.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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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풍기(豐基)의 소백산(小白山)


소백산이 태백산과 서로 멀리 이어져 / 小白山連太白山
서리서리 백 리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 逶迤百里揷雲間
동남쪽 경계를 분명하게 갈라놓았는데 / 分明畫盡東南界
천지자연의 비밀을 귀신이 깨뜨렸구나 / 地設天成鬼破慳

지리전고(地理典故)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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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豐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청파(靑坡)》
○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을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ㆍ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虛項嶺)ㆍ보다회산(寶多會山)ㆍ완항령(緩項嶺)ㆍ설령(雪嶺)이 된다.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ㆍ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ㆍ천수령(天守嶺)ㆍ조가령(趙可嶺)ㆍ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
○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ㆍ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ㆍ하검산(下劍山)ㆍ오봉산(五峯山)ㆍ마유령(馬踰嶺)ㆍ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ㆍ쌍가령(雙加嶺)ㆍ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亇屹)ㆍ마유령(馬踰嶺)ㆍ노인치(老人峙) 3령은 모두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 있다. 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ㆍ추지령(楸池嶺)ㆍ금강산ㆍ회전령(檜田嶺)ㆍ진부령ㆍ흘리령(屹里嶺)ㆍ석파령(石波嶺)ㆍ설악(雪岳)ㆍ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ㆍ 연수파(連水波)ㆍ오대산ㆍ대관령ㆍ두타산ㆍ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ㆍ마아령(馬兒嶺)ㆍ소백산ㆍ죽령이 되고,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ㆍ주흘산(主屹山)ㆍ조령ㆍ의양산(義陽山)ㆍ청화산(淸華山)ㆍ속리산ㆍ화령(火嶺)ㆍ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ㆍ무풍령(舞豐嶺)ㆍ대덕산ㆍ덕유산ㆍ육십치(六十峙)ㆍ본월치(本月峙)ㆍ팔량치(八良峙)ㆍ지리산이 된다.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 검산령(劍山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차리령(巨次里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청량산, 고달산(高達山)이 되고 곡산(谷山)ㆍ학령(鶴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한 산맥은 서쪽으로 내려가서 황해도가 되고, 한 산맥은 남쪽으로 뻗쳐 이천(伊川)ㆍ토산(兔山)ㆍ금천(金川) 경계를 지나서 화장산(華藏山)ㆍ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ㆍ오관산(五冠山)이 되고 송악 송경(松京)이 된다.
○ 황해도 산맥은 학령(鶴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쳐 덕업산(德業山)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내려가서 재고개(梓古介)ㆍ석달령(石達嶺)ㆍ증격산(甑擊山) 곡산의 진산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ㆍ망진산(望眞山)이 되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황주(黃州)의 구현(駒峴)이 되며, 정맥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음초산(古音初山)이 된다. 또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서쪽으로 뻗친 한 줄기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되고, 가로 뻗쳐서 서흥(瑞興)ㆍ봉산(鳳山)이 되고, 끊기지 않고 북쪽으로 뻗쳐서 대현산(大峴山)ㆍ자비령(慈悲嶺)ㆍ파령(岊嶺)ㆍ동선령(洞仙嶺)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 차유령(車踰嶺)이 되고, 정족산(鼎足山)이 되며, 남쪽으로는 평산(平山)ㆍ면악(綿岳) 혹은 멸악산(滅惡山)이라고도 한다. 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또 한 가지는 배천(白川)의 치악산과 연안의 비봉산(飛鳳山)이 된다. 정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해주의 창금(唱金)ㆍ수양(首陽)ㆍ북고(北高)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들로 내려가서 평강(平崗)이 되며, 서북쪽으로 내려가 신천(信川)의 치산(雉山)ㆍ달마산(達摩山)이 되며, 북쪽으로 돌아서 문화(文化)의 구월산이 된다.
○ 덕유산은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道)의 어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뻗은 한 가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 고달산(高達山)과 전주 동쪽에 있는 진안(鎭安)의 마이산이 되는데 두 돌봉우리가 치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서북쪽으로는 웅치(熊峙)가 되고,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전주부(全州府), 동쪽은 위봉산성(威鳳山城), 북쪽에는 기린봉(麒麟峯)이 되었으며, 한 산맥은 전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이 된다.
○ 마이산의 한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笠巖山)ㆍ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錦城山)이 되었다.입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추월산(秋月山)ㆍ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동남쪽으로 무등산이 되며, 남쪽으로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돌아 영암의 월출산이 되며, 남쪽으로 만덕미(萬德尾) 황등산(黃等山)에서 그치고, 동북쪽으로 돈 것은 송광(松廣) 계족산(鷄足山)이 된다.
○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熊峙)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石山)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九峯山)ㆍ주취산(珠崒山)ㆍ운제산(雲梯山)ㆍ탄현(炭峴)ㆍ이치(梨峙)가 되며, 대둔산(大芚山)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月城山)이 된다.
○ 월성산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이 된다.
○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ㆍ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七長山)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ㆍ동ㆍ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英陵)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淸溪山)ㆍ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修理山)ㆍ소래산(蘇來山)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 칠장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 영맥(嶺脈)이 되어 대문령(大門嶺)과 마일령(磨日嶺)이 되며, 전의(全義)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에서 일어나 차령(車嶺)이 되며, 또 서쪽으로 무성(武城)ㆍ오서(烏棲)ㆍ가야(伽倻) 등 여러 산이 되며, 흩어져서 내포(內浦)의 여러 산이 된다.
○ 태백산 동쪽 줄기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금장산(金莊山)ㆍ백암산(白巖山)ㆍ평해(平海) 경계가 되고 주령(珠嶺)ㆍ삼승령(三乘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져 영해(寧海) 북쪽에 이르러 월명산이 되며, 바다를 따라 남쪽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금오산이 된다.고개 동쪽 11읍(邑) 영해ㆍ영덕(盈德)ㆍ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ㆍ경주ㆍ장기ㆍ울산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동래 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경주에서 서쪽으로 뻗어 북쪽으로 돌아서 대구부가 된다.
○ 지리산 서쪽 줄기는 화개(花開) 남쪽에 이르러 하동의 경양산(慶陽山)이 되며, 청천강(菁川江)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곤양(昆陽)ㆍ사천ㆍ진해의 북쪽을 지나서 창원의 청룡산이 되고,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에 이르러 구지봉(龜旨峯)이 된다.
○ 주취산(珠崒山) 북쪽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탄현(炭峴)이 되고 운제산(雲梯山)ㆍ정토산(淨土山)이 되며 용화산(龍華山)이 되었으며, 기준(箕準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감)의 옛 성터가 그곳에 있다.
○ 평안도 산맥은 설한령(雪寒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두 줄기 중의 한 줄기가 희천(熙川)의 적유령(狄踰嶺)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북으로 내려간 것은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두 읍의 여러 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은 것은 흩어져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여러 고을의 산이 된다.
○ 설한령의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영원(寧遠)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묘향산에 이르러 두 강 사이를 끼고 꾸불꾸불 내려가다가 알일령(遏日嶺)과 유현(柳峴)이 된다. 안주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자모산(慈母山)과 서경 평양부의 금수산(錦繡山)이 된다.
○ 양덕(陽德) 남곡산(南谷山) 북령(北嶺) 산맥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함박산(含朴山)이 되고, 거꾸로 북으로 내려가서 성천(成川)의 검학산(劍鶴山)이 된다.
○ 자모산의 한 줄기는 영유강(永柔江) 서쪽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용강(龍崗)의 황룡산(黃龍山)이 된다.
○ 총전령(葱田嶺)의 한 줄기는 거꾸로 북쪽으로 내려가서 강계부(江界府)와 폐 4군의 여러 산이 된다.
○ 강원도 오대산의 서북쪽 한 줄기는 홍천 동쪽에 이르러 세 줄기로 나뉘어 하나는 서북쪽으로 내려가서, 춘천의 봉의산(鳳儀山)이 되는데 옛 맥국(貊國)의 땅이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원주부 치악산이 되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검의산(劍倚山)ㆍ팔봉산(八峯山)이 되고 용문산(龍門山)에서 그친다.
○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土門江)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東良)ㆍ북사(北斜)ㆍ지하(地河)ㆍ목하(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束障)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沙次磨島)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
무산(茂山) 서북에 있는 냇물은 근원이 설잠(雪岑) 북쪽에서 나왔고, 박하천(朴下川)은 근원이 장백산 북쪽에서 나왔는데, 두 물이 합쳐져서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무산을 거쳐서 동쪽으로 회령에 이르고 북쪽으로 꺾어져 종성을 거쳐 온성(穩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경원을 지나 경흥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훈춘강(訓春江)은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수빈강(愁濱江)은 근원이 백두산으로부터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는데, 혹은 속평강(速平江)이라고도 한다.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지나서 거양(巨陽)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함흥의 성천강(成川江) 혹은 군자하(君子河)라고도 한다. 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갑산(甲山) 경계 화기령(樺岐嶺) 태백산 남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천(熙川) 경계 황초령(黃草嶺) 동남쪽 에서 나와 합류하여 함흥부 서북쪽 탑란동(塔蘭洞)을 지나서, 성 남쪽 만세교(萬歲橋)에 이르고 함흥부 남쪽 35리 도련포(都連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초원(草原)의 금강진(金江津)은 근원이 검산령(劍山嶺) 동쪽에서 나와 초원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은 그 근원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함흥부 서쪽 50리 떨어진 정변사(靜邊社)에서 나오는데 이름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한다. 그 물 근원인 구멍의 둘레가 5척 3촌이요, 깊기는 끝이 없으며 물이 솟아 내가 된다.또 하나는 함흥부 서북쪽 2백 10리 거리의 마유령(馬踰嶺) 희천(熙川)의 경계 요해지에서 나왔고, 하나는 함흥부 서쪽 1백 80리 거리의 애전현(艾田峴) 맹산(孟山) 경계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와서 고암(庫巖)에서 송어탄(松魚灘)과 합했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용신당(龍神堂)을 지나서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밑에 이르러 창경연(鶬鶊淵)이 되었다.그 밑에 광탄(廣灘)이 있고 광탄 가운데 백마같이 생긴 흰 돌이 있는데, 그 돌이 물 속에 잠기고 물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물의 수위를 짐작한다. 읍성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원(高原)의 덕지탄(德之灘)ㆍ문천(文川)의 전탄(箭灘)과 합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본 이름은 횡강(橫江)인데, 하륜(河崙)이 사신이 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중류에 술자리를 베풀고 “함흥부는 도조와 환조께서 터를 정한 자리이며, 또 태조께서 여기서 탄생하셨는데, 아직도 이 강에 이름이 없으니 또한 한 가지 흠이 아닙니까?” 하니 하륜이 용흥(龍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의주의 압록강은 혹 마자하(馬訾河)라 하고 청하(靑河)ㆍ용만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요동 도사(都司)까지 1백 60리가 된다. 근원은 백두산인데 남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허천강(虛川江)과 합한다.
○ 허천강은 근원이 북청ㆍ북제령(北諸嶺)ㆍ벌성포천(伐成浦川)인데, 산 북쪽 파천(波川)ㆍ독산천(禿山川)ㆍ황수천(黃水川) 등 여러 물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청주기(靑州岐)에 이르고 허천역(虛川驛) 옆을 지나 허천강이 된다. 장백산 서쪽 여러 냇물과 합했고, 또 운총천(雲寵川)과 합류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 두 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삼수(三水)의 경계로 들어가서 압록강이 되고, 가을파지(加乙波知)에 이르러 장진강(長津江)과 합하니, 장진강은 곧 부전령(赴戰嶺)과 황초령(黃草嶺) 이북에 있는 물이다. 또 서쪽으로는 후주강(厚州江)과 합해서 서북쪽으로 흘러 무창(茂昌)ㆍ여연(閭延)을 지나 남으로 꺾여 흘러서, 옛 우예(虞芮)에 이르러 자성강(慈城江)과 합하고, 서남쪽으로는 위원(渭源) 경계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한다.
독로강은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희천(熙川)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신광진(神光鎭)을 지나고, 하나는 함경도 경계 화을첩(和乙岾) 밑 설한령(雪寒嶺) 북쪽 총전령(葱田嶺) 서남쪽에 있는 물 밑에 나와서 평남진(平南鎭)을 거쳐 강계(江界) 입석(立石)에서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강계에 이르며, 남쪽은 독로강이 되고, 서쪽은 위원 북쪽 오로량(吾老梁)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초산(楚山)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 만주강(滿洲江)과 합하며, 만주강은 혹은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하고 또는 퉁가강(佟家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한다.
동건강은 근원이 고리산(古理山)과 숭적산(崇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희천(熙川) 경계에 있는 우현진(牛峴鎭)과 운산(雲山) 경계의 차령진(車嶺鎭)의 여러 냇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를 거쳐 의주 북쪽에서 옥강(玉江)과 합한다.
옥강은 의주 동북쪽 6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천마산(天磨山)과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 옥강진(玉江鎭)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서 담청색 옥이 나기 때문에 옥강(玉江)이라고 한다.
○ 적도(赤島) 동쪽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굽이쳐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는데, 이것을 압록강이라 하니 물빛이 오리 머리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류를 따라 흐르는데, 이것을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고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과 합하고 적강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으니 오랑캐 땅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큰 강이 되어 위화도를 거쳐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다가 미륵당(彌勒堂)에서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고진강(古津江)과 합한다.
고진강은 근원이 보광산(普光山) 북쪽 선천(宣川) 경계 에서 나와서 식송진(植松鎭)을 거쳐 미륵당에서 삭주 지경의 천마산 남쪽 여러 냇물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강이다. 옛 정령(定寧)ㆍ옛 영주(寧州)ㆍ옛 인산(麟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 강기수(姜耆壽)가 여기 빠져 죽었기 때문에 서장강(書狀江)이라고도 한다.
○ 남쪽으로 서해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었다.” 하였고 옛 기록에 “천하의 세 곳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ㆍ장강ㆍ압록강이 이것이다.” 하였다.
○ 안주(安州) 청천강은 혹은 살수(薩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영변(寧邊) 묘향산에서 나와서 10여 리를 흐르다가 어천(魚川)과 합한다. 어천은 근원이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10리를 흘러 어천이 되었다. 영원 서쪽 경계에 있는 물이 서쪽으로 40리를 흐르다가 희천(熙川) 봉단성(鳳丹城)에서 합하고 아래로 흘러 영변 장항진(獐項津)이 된다.이 강은 안주부 동남쪽에 이르러 화천강(花遷江)이 되고, 또 남쪽으로 5, 6리를 흐르다가 안주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또 구음포진(仇音浦津)과 합한다. 구음포진은 근원이 초산과 벽동(碧潼) 지경에서 나와 운산(雲山)의 동천(東川)이 되고 영변을 거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또 개천(价川) 장항강(獐項江)과 합한다. 장항강은 바로 묘향산 남쪽 분탄(犇灘)의 하류인데 동천과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주 북성(北城) 아래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서쪽으로 30리를 흐르다가 박천강(博川江)과 합한다.
○ 박천강은 근원이 창성(昌城)의 부운산ㆍ삭주의 천마산ㆍ청룡산ㆍ옛 구주(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오는데 청천강과 합류하여 태천(泰川) 동쪽에서 오지천천(烏知遷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구성(龜城)의 구림천(仇林川)ㆍ팔령천(八嶺川)과 합해서 동쪽으로 흘러 박천(博川) 서쪽에서 곶적강(串赤江)과 합해서 박천강이 된다. 이 강이 가산(嘉山) 동쪽에 이르러 대령강(大寧江)이 되어 정주 가마천(加磨川)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합하고, 고성진(古城鎭)에 이르러 청천강과 합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노강(老江)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개사강(蓋泗江)이라 불렀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여기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모여서 다리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이름을 대령강이라 하였다.” 한다.
○ 평양의 대동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寧遠)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다시 꺾여 서쪽에서 흘러가다가 덕천 경계에서 삼탄(三灘) 영원 맹산(孟山)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서 합쳐 흐르기 때문에 삼탄이라고 부른다. 과 합쳤고 남쪽으로 흘러 개천(价川) 경계에서 순천강(順川江)이 된다. 다시 순천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었는데,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밑에는 기탄(岐灘)이 있으며 자산(慈山)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되어 은산(殷山)의 대천(大川)과 합했으며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강동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된다.
○ 하나는 양덕(陽德) 북쪽 문음산(文音山)과 오강산(吳江山) 및 맹산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다시 합해서 성천(成川)의 비류강이 되어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나는데 산 밑에 사석혈(四石穴)이 있어 물이 그 구멍 속으로 통해 흐르다가 솟아 올라 서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비류강이라 한다.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동 경계에 이르러서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다시 웅성강(熊城江)과 합한다.
웅성강의 근원은 옛 양덕 북쪽 40리에 있는 고원(高原) 경계 우라발산(亏羅鉢山) 거차리령(巨次里嶺) 남쪽 에서 나오는데, 흘러서 양덕(陽德)의 남천(南川)이 되고 곡산(谷山)으로 들어가서 말흘탄(末訖灘)이 되어 곡산 여러 냇물과 합한다. 이 물은 다시 수안을 지나 북쪽을 삼등(三登) 남쪽에 이르러서 웅성강이 되고, 또 서북쪽으로 흘러 서진강으로 들어간다.
○ 평양성 동북쪽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과 대동강이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그 하류는 평양강과 합한다. 평양강은 근원이 순안(順安)의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웅성강과 합류하여 중화 서쪽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강서의 구림천(九林川)과 합해서 용강(龍崗) 동쪽에 이르러 동쪽 급수문(急水門)으로 빠진다.
○ 금천(金川)의 저탄(猪灘)은 근원이 수안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는데 아래로 흘러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보음탄(甫音灘)이 되며 신계(新溪) 서쪽을 지나서 사팔적탄(沙八赤灘)이 된다. 이 물은 평산(平山)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가서 전탄(箭灘)이 되며, 저탄에 이르러 비로소 커져 하류는 금천 조읍포(助邑浦)의 조운(漕運)하는 곳이 된다.
○ 남쪽은 말롱포(末籠浦)가 되고, 그 남쪽은 배천(白川), 동쪽은 금곡포(金谷浦)의 조운하는 곳이며, 또 그 남쪽은 광정도(匡正渡)와 벽란도가 된다.
○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이라 일컫는다.
○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였지만 우통수가 그 주류이다. 오대산 물이 두타산 북림계(北臨溪)와 삼척의 죽현(竹峴) 물과 합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 동쪽 여량역(餘粮驛)을 지나 군(郡) 북쪽에 이르러 광탄진(廣灘津)이 되고, 군 남쪽은 대음강(大陰江)이 되고, 군 서쪽은 용암연(龍巖淵)이 된다.또 흘러가다가 영월 후진(後津)이 되고 금봉연(金鳳淵)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한다. 금장강은 바로 평창(平昌)의 연촌진(淵村津) 하류이며, 또 서쪽으로 주천강(酒泉江)과 합하는데 주천강은 바로 원주 동쪽 주천현 거슬산(琚瑟山) 여러 물의 하류이다.또 남쪽으로 흘러 영춘(永春)에 이르러서 눌어탄(訥魚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남진(南津)이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단양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상진(上津)과 하진(下津)이 되고, 서쪽은 소요항탄(所要項灘)이 된다. 또 북쪽으로 꺾어지고 서쪽으로 흘러서 청풍강이 되고, 병풍산 밑에 이르러 북진(北津)이 되며, 제천의 광탄(廣灘) 하류에 와서 합하고, 충주 북쪽 10리에 이르러 북진이 되며, 충주 서쪽 10리 금천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서로 합한다.
○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구요(九遙) 팔교(八橋)의 냇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청주 동쪽에 이르러 청천(靑川)이 되고, 청천은 파곶(葩串) 하류와 합하여 괴산에 이르러 괴진(槐津)이 되며, 연풍천(延豐川)과 합한다. 또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 서쪽으로는 월락탄(月落灘)이 된다.그 서쪽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또 그 서북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이 있는데, 섬강(蟾江)과 합한다. 섬강은 바로 오대산 서쪽 횡성(橫城)ㆍ원주의 여러 물인데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양근(楊根)의 대탄(大灘)과 월계천(月溪遷)이 된다. 군(郡) 서쪽 45리 병탄(幷灘)에 이르러 북강과 합하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이수두(二水頭)라고도 한다.
○ 북강(北江)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인제 서화현(瑞和縣) 소파령(所波嶺)ㆍ소동라령(所冬羅嶺)과 춘천 기린현(基麟縣)의 네 냇물이 합쳐서 인제 미륵천(彌勒川)이 된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주연진(舟淵津)이 되고 양구 남쪽에 이르러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며, 춘천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ㆍ주연(舟淵)ㆍ적암탄(赤巖灘)이 된다. 또 춘천부 북쪽 6리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고,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이르러 보제진(菩提津) 하류와 합했다.그 하나는 회양(淮陽)의 화천(和川) 하류에서 덕진(德津)이 되어 은계(銀溪)와 합했으며, 양구의 대연(大淵) 하류에서 회양ㆍ용연(龍淵)ㆍ남곡(嵐谷)의 물이 되어 금성(金城)의 남천(南川)이 되었고, 철령 남쪽 금강 서쪽에 있는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해서 금성(金城)이 보제진이 되는데 속칭 모천(牟遷)이라고도 한다. 이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통구(通溝) 다경진(多慶津)이 되고 금강 남쪽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오다가 양구의 곡계(曲溪)와 합치고 서쪽으로 흘러와 합쳐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남쪽으로는 대리진(大利津)이 된다.또 춘천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고 우두촌(牛頭村) 앞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해서 서쪽으로 흘러 신연진(新淵津)이 된다. 또 홍천강과 합해서 가평 동쪽에 이르러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이 되고 병탄에 이르러 남강과 합한다.
○ 남강과 북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천진(渡迷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또 송파(松波)ㆍ삼전도ㆍ저자도(楮子島)ㆍ뚝섬 두모포(豆毛浦)가 된다.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가 되고 또 서쪽으로는 서빙고ㆍ동작진ㆍ흑석(黑石)ㆍ노량(露梁)ㆍ용산강ㆍ마포ㆍ남타(南沱)ㆍ율도(栗島)ㆍ토정(土汀)ㆍ현석(玄石)ㆍ서강(西江) 농암(籠巖)이 된다.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 북쪽에 이르러 공암진ㆍ행주가 된다.또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임진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안변(安邊)과 영풍(永豐) 냇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장치(防墻峙)를 지나서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 미탄(美灘)의 물은 근원이 박달치(朴達峙)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해서 옛 성진(城津)이 되며 신계(新溪) 경계를 지나 안협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평강(平康) 분수령 물은 안협(安峽)의 저구리탄(猪仇里灘)이 되고 이 물이 합해서 포리진(浦里津)이 되어 토산으로 들어가서 동천(東川)이 된다. 다시 삭녕에 이르러 삭녕도가 되고 연천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며, 마전(麻田)에 이르러 후근도(朽斤渡)가 되어 양주의 대탄(大灘)과 합한다.
○ 그 하나는 철령 물이 서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을 지나서 철원의 체천(砌川)이 되는데 양쪽 언덕이 모두 석벽이어서 섬돌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 물은 순담(筍潭) 화적연(禾積淵)을 지나서 영평 북쪽에 이르러 직탄(直灘)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의 전탄(箭灘)과 합한다.포천의 여러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로주(白鷺洲)가 되고 백운산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영평 남쪽에 이르러 전탄이 되고, 또 마흘천(磨訖川)이 되며, 양주 북쪽에 이르러 대탄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의 아미천(峩嵋川)과 합하여 마전으로 들어가서 삭녕강과 합한다.
○ 적성(積城) 북쪽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 구연강(仇淵江)이 되고, 장단 동쪽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사미천(沙彌川)과 합해서 용산진과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는 덕진(德津)이 된다. 다시 교하(交河)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 오도성은 속칭에 오두현(鼇頭峴)이라 한다.
○ 공주의 금강은 근원이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나오고, 적등진은 근원이 덕유산 서북에서 나오니, 장수ㆍ진안의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용담(龍潭) 달계천(達溪川)이 되고, 무주에 이르러 대덕산(大德山)ㆍ적상산(赤裳山) 냇물과 합해서 금산 경계에 이르러 소이진(召爾津)ㆍ지화진(只火津)이 된다. 다시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中牟縣) 물은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靑山)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懷仁)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서쪽으로 동진(東津)과 합하고, 연기(燕岐)ㆍ동진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의 여러 냇물이 합류해서 청주 작천(鵲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목천ㆍ전의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동진이 된다.다시 공주 북쪽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웅진과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이 된다. 또 은진(恩津)에 이르러 강경포(江景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져 석성의 고다진(古多津)ㆍ임천(林川)의 남당포(南堂浦)ㆍ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ㆍ서천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임천에서 서천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포라고 한다.
○ 계룡산 한 골짜기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잠(鎭岑) 남쪽에 이르러 차탄(車灘)이 되고 진산(珍山)의 옥계(玉溪) 하류와 합했으며 또 동쪽으로 공주ㆍ유성에 이르러 여러 냇물과 합해서 회덕의 갑천(甲川)이 되고, 또 선암천(船巖川)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형각진(荊角津)으로 들어간다.
○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 광양의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에 이르러 방제천(方梯川)이 되며, 곡성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서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바로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 만경(萬頃)의 신창진(新倉津)은 근원이 고산(高山)의 남천(南川)에서 나오는데, 운제산(雲梯山)과 주취산(珠崒山)의 물이 현(縣) 남쪽을 지나 흘러서 전주 북쪽으로 들어가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鴈川)이 된다. 이 물은 또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서 전주 남천의 북류와 합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옥야(沃野)ㆍ이성(利城)을 거쳐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경현을 지나서 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 부안의 동진(東津)은 내장산과 노령 북쪽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으로 흘러서 고부(古阜)의 모천(茅川)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인의 남천(南川)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진이 된다. 금구(金溝) 상왕산(象王山)의 물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동진으로 들어간다. 흥덕(興德) 우등산(牛登山) 물은 고부의 눌제천(訥堤川)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진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경상도의 낙동강은 근원이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경상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또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ㆍ영산강 두 강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고 하였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과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蓼村灘), 물야탄(勿也灘), 대항진(大項津)이 된다.영양ㆍ진보(眞寶)ㆍ청송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祕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豐津)이 된다. 풍기ㆍ순흥(順興)ㆍ봉화ㆍ영천의 물은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ㆍ용연(龍淵)ㆍ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 곶천(串川)에 와서 합한다.
○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ㆍ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ㆍ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鯉埋淵)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는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離)ㆍ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ㆍ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바로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하양(河陽)ㆍ자인(慈仁)ㆍ경산(慶山)의 여러 물과 합하여 대구의 금호(琴湖) 달천진(達川津)이 되어 모두 합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무계진(茂溪津)이 되어 현풍(玄風)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 고령 동쪽에 이르러 개산강(開山江)이 되며, 성주의 가천(伽川)은 고령으로 들어가서 합천의 야천(倻川) 하류와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 초계(草溪) 동쪽 창녕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 덕유산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瀶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이 물은 산청 경계에 이르러 안의의 동천(東川) 하류와 합하여 진주 서쪽에서 우탄(牛灘)이 되며, 단성(丹城)에 이르러 신안진(新安津)이 되는데, 삼가(三嘉)의 여러 냇물이 흘러 합쳐서 진주 서쪽에 이르러 소남진(召南津)이 된다.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산을 돌아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주 서쪽에서 합쳐서 청천강(菁川江)이 되며, 성(城) 아래에 이르러 촉석강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鼎巖津)이 되며, 영산(靈山)의 기음강(岐音江)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亐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혹은 ‘무포(茂浦)’라고도 한다.창원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곳은 혹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보충 : 은하수의 형상은 하늘의 반쪽을 가로질렀는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에서 그쳤는데, 머리는 간방(艮方)이고 꼬리는 곤방(坤方)이다. 우리나라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으로서, 이 세 강은 모두 머리는 간방이고 꼬리는 곤방이다. 《성호사설》
○ 보충 : 우리나라 지도가 옛날에는 모두 평평하고 정방형이기 때문에 형세를 알 수 없었다. 영종(英宗) 경인년에 신경준(申景濬)에게 명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게 하니, 관청에 보관했던 십여 가지를 내어 오고 또 널리 여러 사람들의 금ㆍ고본(今古本)을 찾아 내었으나, 정항령(鄭恒齡)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완전하였다.여기에 약간 교정을 더해서 〈열읍도(列邑圖)〉 8권과 〈팔도도(八道圖)〉 1권과 〈전국도(全國圖)〉 한 폭을 만들었는데, 주척(周尺 주 나라 척도(尺度)를 기준으로 삼음) 두 치로 한 선(線)을 하고 세로는 76선, 가로는 1백 31선으로 하게 하였다. 또 동궁에게 이와 같이 만들어 바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짧은 서문을 지어 족자 위에 썼다. 정씨(鄭氏)의 지도는 항령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에 이르러 보충되었으니, 대개 3대(代) 50여 년이 걸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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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물의 조종(祖宗) 열둘


첫째는 한강(漢江)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강릉 오대산의 우통(于筒)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회양 금강산의 만폭동(萬瀑洞)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보은 속리산의 문장대(文藏臺)에서 발원한다. 달천강(達川江)은 문장대의 서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복천(福泉)이 되어서 북쪽으로 흘러 충주에 이르고 다시 단월(團月)의 서북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신연강(新淵江)은 만폭동의 서남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명연(鳴淵)이 되어 홍천강(洪川江)과 합쳐지고 다시 굴운천(窟雲川)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용진(龍津)이 되어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임진강(臨津江)은 그 근원이 문천(文川)의 노령(蘆嶺)에서 시작되는데 남쪽으로 영풍(永豐)의 고현(古縣)에 이르고 다시 사천(沙川)을 지나 오두(鰲頭)에 이르러서 조강(祖江)에서 한강과 합쳐진다. 그리하여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의 서쪽 지방과 철령(鐵嶺), 분수(分水), 쌍령(雙嶺), 운악(雲嶽), 불곡(佛谷), 왈롱(曰籠) 이남 지방과 대관령, 백복산(百福山), 태백산(太白山) 이서 지방과 조령, 죽령, 속리산 이북 지방과 피반(皮盤), 상당(上黨), 칠현(七賢), 백운(白雲), 광교(光敎), 수리(修理), 안남(安南), 문수(文殊) 이동 지방과 서울의 모든 물들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둘째는 예성강(禮成江)인데 그 근원이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발원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성천(成川)을 지나 미라산(彌羅山) 동방포(東方浦)에 이르러서 벽란도(碧瀾渡)가 되는데, 수룡산(秀龍山),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磨山)의 서쪽 지방과 총수산(葱秀山), 멸악산(滅惡山), 운달산(雲達山) 이동 지방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셋째는 대진(大津)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양지(陽智 지금의 경기도 용인 지역)의 곡돈현(曲頓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청양(靑陽)의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공주의 차령(車嶺)에서 시작된다. 돈곶진(頓串津)은 백월산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여양(黎陽)을 경유하여 왕자산(王子山)에 이르러 승선천(昇仙川)을 지나 북쪽으로 행담도(行擔島)로 들어가서 공진(貢津)과 만난다. 미륵천(彌勒川)은 차령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덕평향(德坪鄕)을 경유하여 온정천(溫井川)을 지나서 단포(丹浦)가 되어 팔당(八堂)의 서쪽에 이르러서 돈곶진과 만난다. 그리하여 광교산(光敎山), 성륜산(聖倫山) 이남과 칠현산(七賢山), 성거산(聖居山) 이서와 차령, 각흘산(角屹山), 사자산(獅子山), 오서산(烏棲山), 가야산(伽倻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든다.
넷째는 금강(錦江)인데 그 근원이 장수산(長水山)의 수분치(水分峙)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용암(龍巖)에 이르러서 송탄(松灘)이 되고 옥천(沃川)에 이르러 강경(江景)을 거쳐 옥구(沃溝)를 지나 용당진(龍塘津)이 된다. 그리하여 장안산(長安山), 성수산(聖壽山), 마이산(馬耳山), 주취산(珠翠山) 이북과 상당(上黨), 피반(皮盤), 황악(黃岳), 대덕(大德) 이서와 망이(望夷), 차령, 각흘 이남의 모든 산들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다섯째는 사호(沙湖 영산강(榮山江))인데 그 근원이 담양(潭陽)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원율천(原栗川)이 되고 작천(鵲川)을 서남쪽으로 지나서 곡강(曲江)이 되어 용포(龍浦)에 와서 머문다. 그리하여 내장산(內藏山), 백암산(白巖山), 추월산(秋月山), 용천산(龍泉山) 이남과 옥천산(玉泉山), 무등산(無等山), 중조산(中條山), 여점산(呂岾山) 이서와 반등산(半登山), 취령산(鷲嶺山), 불갑산(佛岬山), 군니산(君尼山) 이동과 화악산(華嶽山), 덕룡산(德龍山), 쌍계산(雙溪山), 월출산(月出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리로 흘러든다.
여섯째는 섬강(蟾江 섬진강(蟾津江))인데 그 근원이 진안(鎭安) 마이산의 중대(中臺)에서 나와서, 전주의 웅치(熊峙)에 와서 쌍계(雙溪)의 물웅덩이를 지나면서 용연(龍淵)이 된 뒤 남쪽으로 흘러서 두적강(斗赤江)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성수산, 마이산, 소치산(掃峙山), 모악산(母岳山) 이남과 내장산, 금성산(金城山), 설산(雪山), 무등산 이동과 억불산(億佛山), 주월산(舟越山), 도솔산(兜率山), 백운산(白雲山) 이북과 장안산(長安山), 여원산(女院山), 주치산(走峙山), 지리산 이서의 모든 산들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일곱째는 낙동강(洛東江)인데 그 근원이 안동의 태백산(太白山)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산을 뚫고 흐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천천(穿川)이라고도 한다. 천연대(天淵臺)를 경유하여 탁영담(濯纓潭)이 되고 다시 가야천(伽倻川)을 지나 박진(朴津)이 되어 진강(晉江)과 만난다. 그런 다음 호포(狐浦)를 지나 월당진(月堂津)이 되어 다시 흩어져서 삼차하(三叉河)가 된다. 금호강(琴湖江)은 그 근원이 청송(靑松)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서 하빈(河濱)의 고현(古縣)을 경유하여 서쪽에서 낙동강과 서로 만나며, 황둔강(黃芚江)은 그 근원이 무주의 덕유산(德裕山) 불영봉(佛影峯)에서 나와서, 합천(陜川)에 이르러 징심천(澄心川)을 지나서 진천(鎭川)으로 들어갔다가 현창(玄倉)에 이르러 낙동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태백산과 소백산, 조령과 죽령의 이남과 속리산(俗離山), 황악산(黃嶽山), 대덕산(大德山), 덕유산(德裕山), 장안산, 지리산 이동과 고초산(高草山), 백암산, 취서산(鷲棲山), 구룡산(九龍山), 원적산(圓寂山) 이서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여덟째는 대동강(大同江)인데 그 근원이 영원(寧遠) 내악림(內樂林)의 백산(白山)에서 나와서, 금천(金川)을 지나 비류강(沸流江)과 합쳐지고 다시 합장포(合掌浦)를 지나 은탄(銀灘)이 된다. 그런데 능성강(能成江)은 그 근원이 두류산에서 나와서 문포천(文浦川)을 지나 마탄(馬灘)에서 대동강과 만나며, 그리고 월당강(月唐江)은 그 근원이 서흥(瑞興) 웅파산(熊坡山)의 부연(釜淵)에서 나와서 영진(迎津)을 지나 철화강(鐵和江)이 되어 북쪽으로 대동강과 급수문(急水門)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검산(劍山), 마유(馬踰), 철옹(鐵甕), 오강(吳江), 화여(花餘), 재령(載寧) 이서와 악림(樂林), 광성(廣城), 생천(栍川), 알일(謁日), 고야(姑射) 이남과 덕업(德業), 언진(彦眞), 멸악(滅惡), 수양(首陽), 달마(達摩) 이북과 구월(九月) 이동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아홉째는 청천강(淸川江)인데 그 근원이 강계의 갑현(甲峴)에서 나와서, 문천(文川)을 지나 고성진(古城津)에 이르러 노강(老江)이 된다. 그런데 대령강(大寧江)은 그 근원이 의주의 천마산(天摩山)에서 나와서 해망우(海望隅)의 동쪽에 이르러 노강에서 청천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갑현, 적유(狄踰), 구현(狗峴), 우치(牛峙), 구계(九階), 방장(防墻) 이남과 천마, 청룡(靑龍), 길상(吉祥) 이동과 악림, 광성, 생천 이서와 향산(香山), 알일, 고야, 마두(馬頭), 도운(到雲)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째는 용흥강(龍興江)인데 그 근원이 영흥의 철옹산에서 나와서, 비류천(沸流川)을 지나 제인포(濟仁浦)가 되어 남쪽으로 말응도(末應島)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유령, 철옹, 오강, 화여, 재령 이동의 여러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한째는 압록강(鴨綠江)인데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의 대택(大澤)에서 나와서, 지하로 복류(伏流)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청성(淸城), 방산(方山), 옥강(玉江)의 보(堡)와 수구(水口)의 진(鎭)을 거쳐 의주부에 이르러 적도(赤島)의 동쪽에서 다시 세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남쪽으로 흘러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니 이것이 곧 압록강으로서 그 물빛이 마치 오리 머리처럼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간을 따라 흐르는데 이를 이름하여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서 이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백두(白頭) 이남과 원산(圓山) 이서와 후치(厚致), 황초(黃草), 설한(辥罕), 적유(狄踰), 우현(牛峴), 방장(防墻), 천마(天麼), 노동(蘆洞), 망일(望日)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두째는 두만강(豆滿江)인데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의 남쪽 갑산(甲山)에서 나와서, 경흥부(慶興府)에 이르러서 적지(赤池)를 경유하여 수빈강(愁濱江)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서 조산(造山)을 지나 녹둔도(鹿屯島)에 이르게 된다. 백두 이동과 원산(圓山), 장백(長白), 무산(茂山)의 잿마루와 송진(松眞), 백악(白嶽) 이북의 여러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주D-001]대진(大津) : 아산만(牙山灣)을 지칭하는 것 같다. 세 개의 근원이란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安城川), 삽교천(揷橋川) 및 곡교천(曲橋川)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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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백두산(白頭山)


《일통지(一統志)》에 이르기를, “옛날 회령부(會寧府) 남쪽 60리 되는 곳에 백두산이 있는데 산자락이 천리에 뻗쳐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산 위에는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나 되는바 그 물이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混同江)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강(阿也苦江)이 된다.” 하였는데, 홍세태(洪世泰)가 그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숙종 38년(1712)에 오라 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에 와서 경계를 정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 이선보(李善溥)를 보내었는데 이들이 가서 삼수부(三水府)의 연연(蓮淵)에서 목극등을 만났다. 목극등이 역관 김응헌(金應憲)과 김경문(金慶門)만을 데리고 한덕(韓德), 입지(立支)를 올라갔는데 그 산들이 모두 바위산으로 창백색(蒼白色)이었다.
그리고 하늘에 치솟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소백산(小白山)이었다. 그 산마루에 올라서 멀리 바라보니 저만큼 백두산이 웅장하게 서 있었는데 사방 천리가 창취(蒼翠)한 일색이고 그 정상(頂上)은 마치 안반 같은 널판자에 흰 독을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재[嶺] 아래 기슭을 따라서 몇 리를 더 가니 산들이 모두 초목이 없는 민둥산들인데 갑자기 땅이 푹 꺼져서 이루어진 구덩이가 마치 띠처럼 긴 것이 그 깊이는 한이 없으나 너비는 겨우 두 자 정도였다.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는데 마치 신혈(顖穴 숫구멍)과 같았는바 둘레는 2, 3십 리가량 되었으며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측량할 수가 없었다. 못의 사면에는 벼랑이 아득히 깎아질렀는데 마치 단사 칠을 한 것이 진흙 바닥처럼 갈라져서 터진 것과 같았으며 그 북쪽 몇 자 길이쯤 되는 곳에서 물이 넘쳐 나와 흑룡강(黑龍江)이 되었다.
그리고 돌사자가 있는데 색깔이 누른 데다 꼬리와 갈기가 마치 움직이려고 하는 듯하여 중국 사람들이 이를 일러 망천후(望天吼)라고 하였다. 여기서 골짜기가 양쪽으로 나뉘어 물의 흐름을 갈라놓았는데 이를 이름하여 분수령(分水嶺)이라 하였고, 드디어 빗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귀국한 뒤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말하기를, ‘빗돌을 세운 뒤에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을 따라 그 흐름을 살피면서 수십 리의 거리를 훑어보았던바 물이 흐르는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돌서덜이 어우러진 밑으로 숨어서 흐르다가 무려 백 리를 지나서야 비로소 큰물의 흐름이 나타났다. 그러니 이처럼 물의 흐름을 볼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이 나라 간의 경계라는 것을 알게 해서 감히 서로 범접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하여 ‘그렇다면 토문강의 물줄기가 끊어진 곳에 대해서는 돌이나 흙으로 축대를 쌓거나 아니면 목책(木柵)을 세워서 하류 지역까지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뜻으로 대답하여 보냈다.”


 

[주D-001]일통지(一統志) : 중국의 지지(地誌)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다. 처음에 원(元)이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만들었는데 명(明)이 이를 본떠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만들었으며, 청(淸)은 건륭(乾隆) 시절에 이를 만들었다가 가경(嘉慶) 시절에 다시 이를 중수(重修)하였다. 본국의 것 외에 몽고, 티벳 등 모든 주변국들의 것을 대강 망라하였다.
[주D-002]소백산(小白山) : 백두산에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을 따라 백두산 바로 다음인 대연지봉(大臙脂峯) 다음에 있는데, 표고(標高) 2174미터로 우리나라에서 스물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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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저(雜著)
소백산(小白山) 유람기


내가 젊어서부터 영주[榮川]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하였으니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바라보이고 발만 떼면 갈 수 있었는데도 조급하게 허둥대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고 마음으로만 달려간 것이 이제 40년이 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인부(印符)를 차고 풍기에 부임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주인이 되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워하며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백운동에 갔다가 그때마다 산문(山門)도 엿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4월 신유일에 며칠째 내리던 비가 막 개니 산빛이 목욕한 것 같았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유생들을 만나 보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이튿날 드디어 산에 들어갔는데, 진사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나섰다.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 속은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때로 물이 돌 위로 흐르며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걸어서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니, 초암은 원적봉(圓寂峰)의 동쪽 월명봉(月明峰)의 서쪽에 있는데, 양쪽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암자 앞을 감싸며 산문이 되었다. 암자 서쪽에는 바위가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데 그 아래로 맑고 급한 물결이 빙 돌아서 웅덩이가 되고 바위 위는 평평하여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주경유(周景遊)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어 이 이름이 혼동되니 백(白)을 청(靑)이라 고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졌다.
산인(山人) 종수(宗粹)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묘봉암(妙峰庵)에서 이곳으로 찾아왔기에, 인하여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술 두어 순배를 돌렸다.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하였는데, 나는 비록 허약하고 병들기는 하였지만 기어이 올라가 보고 싶었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견여(肩輿)가 아니면 안 되니, 전에 주 태수(周太守)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웃고 승낙하였더니, 잠시 후에 견여가 마련되었다고 알려왔는데, 모양이 간단하고 쓰기에 편하였다. 드디어 서경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갔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승려들이 혹은 앞에서 인도하고 혹은 뒤를 따랐다. 태봉(胎峯) 서쪽에 이르러 시내 하나를 건너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걷다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면 견여를 탔으니, 번갈아 가며 그 힘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산을 나올 때까지 대체로 이 방책을 썼는데,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기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 본 바를 기록하였다. 이날은 철암(哲庵)과 명경암(明鏡庵)을 거쳐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는데, 철암이 가장 소쇄(蕭灑)하였다. 맑은 샘물이 암자 뒤의 바위 밑에서 솟아 동서로 갈라져 흘렀는데 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며, 시야가 꽤 높게 트였다. 석륜사 북쪽에는 바위가 매우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푸드득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옛 이름이 봉두암(鳳頭岩)이다. 그 서쪽에 우뚝 선 바위가 있어서 사닥다리를 놓아야 오를 수 있는데, 경유가 광풍대(光風臺)라고 부른 것이다. 절 안에는 돌을 조각하여 불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승려들이 영험하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튿날인 계해일에 걸어서 중백운암(中白雲庵)에 올랐다. 이름은 잊었는데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짓고 그 안에서 좌선(坐禪)을 하여 선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지금은 승려가 없다 한다. 창 앞에는 묵은 우물이 완연하며, 뜰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할 뿐이었다. 중백운암을 지난 뒤로 길이 더욱 가파르게 깎아질러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수직으로 올라가, 있는 힘을 다하여 더위잡고 기어오른 뒤에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견여를 타고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 남짓 가니 석름봉(石廩峰)이 나왔다. 봉우리 꼭대기에 초막을 지어 놓았고 그 앞에 시렁을 매놓고 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 고되게 여겨졌다. 석름봉 동쪽 몇 리 되는 거리에 자개봉(紫蓋峰)이 있고, 또 그 동쪽 몇 리에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국망봉(國望峰)이다. 만일 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용문산(龍門山)으로부터 서울까지 바라볼 수가 있는데, 이날은 산 안개와 바다의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서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사이로 월악산(月嶽山)이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동쪽을 돌아보면 구름과 산이 천 겹 만 겹 첩첩으로 쌓여서 어렴풋이 상상만 되고 진면목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 태백산(太白山)ㆍ청량산(淸凉山)ㆍ문수산(文殊山)ㆍ봉황산(鳳凰山)이고, 남쪽으로 보였다 숨었다 하며 구름 속에 아스라한 것이 학가산(鶴駕山)ㆍ팔공산(八公山) 등 여러 산이며, 북쪽으로 형상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하늘 한쪽에 아득히 보이는 것이 오대산(五臺山)ㆍ치악산(雉岳山) 등 여러 산이었다. 바라보이는 물은 더욱 적어서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과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의 굽이 정도일 뿐이었다. 종수가 말하기를, “이 산에 올라 조망하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가 좋고 혹은 오랜 비가 새롭게 갠 날이 좋은데, 주 태수도 비에 닷새 동안 막혀 있다가 개자마자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가만히 그 뜻을 이해하였으니, 처음엔 답답하게 막혔던 자가 필경 쾌함을 얻는 것인데, 내가 와서는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떻게 만리의 쾌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매우 고랭(高冷)하여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나무가 자라면서 모두 동쪽으로 기울고 가지와 줄기가 굽어 있고 왜소하였다. 4월 그믐께라야 잎이 피기 시작하고 1년 동안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불과하며, 앙상하게 시달려 모두 애써 싸운 모양을 하고 있으니, 깊은 숲과 큰 골짝에서 자라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이, 식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ㆍ자개ㆍ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병풍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章)을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꽃 숲을 지나 내려와서 중백운암에 이르렀다. 내가 종수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제월대(霽月臺)에 오르지 않은 것은 다릿심이 먼저 빠질까 염려해서였는데, 지금 산에 올라 구경하고도 다행히 남은 힘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종수를 시켜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벼랑을 따라 발을 옆으로 디디면서 올라갔다. 이른바 상백운암(上白雲庵)이란 것은 불에 탄 지가 오래되어 풀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었으며, 제월대가 바로 그 앞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찔하고 떨려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려와서 이날 저녁에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갑자일에 나는 용기를 내여 상가타암(上伽陁庵)을 찾아 올라가 지팡이를 짚고 돌길을 더위잡아 환희봉(懽喜峰)에 올랐다. 환희봉 서쪽의 여러 봉우리들은 숲과 골짝이 더욱 아름다우니 모두 어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십 보를 지나서 석성(石城)의 옛터를 찾았는데, 성안에는 주춧돌과 폐기된 우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석봉(石峯)이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데도 소나무ㆍ삼나무ㆍ철쭉이 우거져 뒤덮고 있어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산중 사람들은 단지 모양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산대바위[山臺巖]라고 불렀다. 내가 사람들을 시켜 가린 것을 찍어 내도록 하고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데가 안 보이는 것이 없어서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주경유를 만나지 못하여 전날의 속된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고치지 않을 수 없어 자하대(紫霞臺)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그 성을 적성(赤城)이라 불렀으니, “적성에 노을이 일어나 이름을 붙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하대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ㆍ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색은 하얗고 달리 이름이 없어, 내가 감히 동쪽 것은 백학봉(白鶴峰)이라 이름하고 서쪽 것은 백련봉(白蓮峰)이라 이름하여, 이른바 백설봉(白雪峰)과 함께 모두 백(白)으로 일컬었다. 이렇게 백(白) 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은 이유는 그 실상을 들어서 소백(小白)이란 이름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또 깊은 숲을 뚫고 높은 산을 넘어 굽어보다가 구름과 물과 바위와 골짝이 더욱 절승한 곳을 찾아냈으니, 곧 상가타암(上伽陁庵)이었다. 그 동쪽은 동가타암(東伽陁庵)이 있는데, 종수가 말하기를, “희선 장로(希善長老)가 처음으로 여기에 살았고, 그 뒤에 보조 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하여 9년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습니다. 시집(詩集)이 있는데 제가 일찍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빌려 갔습니다.” 하며, 몇 구절을 외우는데 모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오곡(五穀)이 익지 못한 탄식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서북쪽의 금강대(金剛臺)와 화엄대(華嚴臺)는 옛 이름을 그대로 두었는데, 고승(高僧)의 자취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동쪽의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석봉(石峯)을 연좌(宴坐)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고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가타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고목(古木)과 푸른 등나무가 얽혀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으며, 가끔 수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중가타(中伽陁)의 어귀에 왔는데 중가타에는 승려가 없어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을 옮기니 몇 층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그 옆에 암석들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옛날에는 고죽(苦竹)이 뭉쳐났으나 지금은 다 말라 죽었는데 아직도 뿌리와 줄기가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암폭포(竹巖瀑布)라고 이름 지었다.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이 바위에만 대가 난 것이 아니라 숲 아래 땅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나서 온 산이 모두 그러했는데, 지난 신축년에 갑자기 일제히 열매가 열리더니 그해에 다 말라 죽었습니다.”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 길을 걸어 작은 시내를 건너니 금당암(金堂庵)과 하가타암에 이르렀다. 중가타암 위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암 옆에는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 모두 승려가 앓고 있다 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하가타를 따라 내려와 시내를 건너서 곧장 관음굴(觀音窟)로 올라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인 을축일에 산에서 내려오니, 산 밑에 반석이 평평하고 맑은 물이 그 위로 쏟아져 쟁쟁히 울리며 흘러가고 양편에는 목련화가 만개하였다. 나는 그 옆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서 양치질도 하고 장난도 하여 마음이 매우 유쾌하였다. 승려 종수가 “시냇물은 옥대(玉帶) 찬 손님 비웃으리니, 홍진의 자취 씻으려 해도 씻지 못하네.[溪流應笑玉腰客 欲洗未洗紅塵蹤]”라는 시구를 읊고는,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입니까?” 하였다. 마침내 서로 쳐다보고 한 번 웃고는 시를 짓고 떠났다. 시내를 따라 몇 리를 가는데 모두 구름과 숲과 벼랑과 골짝이 절경이었다. 길이 갈리는 곳에 이르러 잠깐 쉰 뒤에, 응기와 종수와 여러 승려들은 초암동(草庵洞)으로 향하고, 나는 박달재[博逹峴]로 길을 잡아 갔다. 작은 박달재에 이르러 견여에서 내려 걸어가노라니 인마(人馬)가 그 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시내를 건너 깊은 골짝을 빠져나와 큰 박달재를 넘으니, 곧 상원봉(上元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조금 야트막한 곳이었다. 거기서 상원사까지는 겨우 몇 리밖에 안 되지만 오를 힘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내려와 비로전(毗盧殿) 옛터 밑에 이르러 한낮에 시냇가 돌 위에서 쉬었다. 얼마 후 허공 간(許公簡)과 아들 준(寯)이 고을에서 찾아왔다. 맑은 샘과 무성한 나무가 사랑스러워 한동안 앉아서 얘기하고는 그 앉았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윽고 욱금동(郁錦洞)을 거쳐 나와서 고을에 이르렀다. 대저 소백산에는 수많은 바위와 수많은 골짝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데, 사찰이 있는 곳과 인적이 통하는 곳은 대개 세 골짜기가 있다. 초암과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짝에 있고, 성혈사(聖穴寺)와 두타사(頭陀寺) 등은 동쪽 골짝에 있고, 세 가타암은 서쪽 꼴짝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것은 길이 편해서인데, 얼마 지나 피곤하고 흥이 식으면 그만 돌아오고 만다. 비록 주경유처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유람한 곳은 그중 한 골짝에 그치고 마니,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매우 자세하게 기술했지만 실상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광풍대ㆍ제월대ㆍ백설대ㆍ백운대가 모두 가운데 골짝에만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쇠약하고 병든 내가 한 번 가서 온 산의 경치를 다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결국 동쪽은 남겨 두어 다음날에 유람하기로 하고 오직 서쪽 골짝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짝에서 얻은 백학봉ㆍ백련봉ㆍ자하대ㆍ연좌봉ㆍ죽암폭포 같은 절경을 마음대로 이름 지으며 사양하지 않은 것은 역시 주경유가 가운데 골짝에서 만난 절경에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有司)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었는데, 석륜사에 와 보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나는 그 시와 글의 웅장하고 빼어남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펴서 읊으니, 마치 홍안 백발의 늙은이와 함께 서로 얘기하고 수창(酬唱)하는 것 같아서, 이 때문에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록이 없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이 또 있으니, 문사로서 주경유(周景遊)보다 먼저 와서 유람한 자로 산인(山人)들이 일컫는 바로는 오직 호음(湖陰) 정 선생(鄭先生)과 태수 임제광(林霽光)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기술한 것을 찾아보면 임 태수는 일언반구도 찾을 것이 없고, 호음의 시는 겨우 초암사에서 읊은 절구 한 수가 보일 뿐이다. 또 그 밖의 것을 찾아보면 석륜사의 승려가 황금계(黃錦溪)의 시를 가지고 있고, 명경암 벽에 황우수(黃愚叟)의 시가 있을 뿐이며, 더 이상은 보이는 것이 없다. 아, 영남은 곧 사대부에게 기북(冀北)같은 지역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에 큰학자와 선비들이 잇달아 나와서 찬란하였으니, 이 산에 와서 유람한 사람이 고금을 통하여 얼마나 많았겠으며, 기술하여 전할 만한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竹溪)의 여러 안씨(安氏)들은 이 산 밑에서 정기(精氣)를 타고 나서 이름이 중원(中原)에까지 떨쳤으니, 틀림없이 이 산에서 노닐고 이 산에서 즐기고 이 산에서 읊고 노래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에는 벼랑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들이 입으로 외는 것도 없어서, 자취가 없어 찾을 수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고아함을 좋아하지 않고, 일을 좋아하여 전술(傳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명성을 드높이 세운 여러 안씨들과 큰 산으로 유명한 이 지역의 이 산처럼 빼어난 곳에 대해서도 마침내 전할 만한 문헌이 이와 같이 없으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산 언덕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천년 동안 참다운 은자(隱者)가 없으니, 참다운 은자가 없으면 참다운 감상(鑑賞)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어귀를 거니는 우리 같은 무리야 어찌 이 산에 가치를 실어주겠는가. 우선 본 것을 차례로 펴서 지은 것을 기록하노니, 뒤에 보는 자가 이 글에 대한 느낌이 또한 나의 주경유에 대한 느낌과 같을 것인가.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叟)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


 

[주D-001]주경유(周景遊) : 경유는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의 자이다.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주D-002]축융(祝融) : 남방의 화신(火神)으로, 붉은 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축융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적성에 …… 붙였다 : 진(晉)나라 손흥공(孫興公)이 지은 〈천태산부(天台山賦)〉에 있는 말인데, 천태산에 적성(赤城)이 있다.
[주D-004]오곡(五穀)이 …… 탄식 : 《맹자》 〈고자 상(吿子上)〉에 “오곡은 좋은 종자이지만 익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 하였으니,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이단이나 잡기를 배워 성공함만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5]호음(湖陰) : 정사룡(鄭士龍 : 1491~1570)의 호이다.
[주D-006]황금계(黃錦溪) : 퇴계의 문인 황준량(黃俊良 : 1517~1563)으로, 호가 금계이다.
[주D-007]기북(冀北) : 옛날 중국 기주(冀州)의 북부로 지금의 하북성을 말하는데,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학자가 많이 난 곳이란 뜻이다.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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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순흥 도호부

◎ 순흥 도호부(順興都護府)
본디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신라에서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흥주(興州)로 고쳤다. 현종 무오년에 길주(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移屬)시키고, 명종 1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렬왕 갑술년 태(胎)를 안치하고 흥령현(興寧縣)으로 고쳐서 영(令)을 두었으며, 충숙왕(忠肅王) 계축년에 또 태(胎)를 안치하고 승격시켜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삼았고, 충목왕(忠穆王) 무자년에 또 태(胎)를 안치하고 순흥부(順興府)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순정(順政)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진산(鎭山)은 소백산(小白山)이다.【부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동(安東)의 부곡(部曲) 소라(召羅)에 이르기 41리, 서쪽으로 죽령(竹嶺)에 이르기 19리, 남쪽으로 영천(榮川)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단양(丹陽)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는 2백 84호, 인구가 1천 6백 79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6명, 진군(鎭軍)이 30명, 선군(船軍)이 81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안(安)·이(李)·신(申)·윤(尹)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석(石)이다. 내성(來姓)이 2이니, 김(金)·정(鄭)이며, 속성(續姓)이 3이니, 김(金)【하나는 경주에서 왔고, 하나는 광주(光州)에서 왔다.】·윤(尹)【주천(酒泉)에서 왔다. 모두 향리이다.】 이다. 인물은 시중 문성공(侍中文成公) 안향(安珦)【충렬왕 때 사람인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판문하부사 문간공(判門下府事文簡公) 안종원(安宗源)【본조 태조 때 사람.】·영돈녕부사 소의공(領敦寧府事昭懿公) 안천보(安天保)【본조 태종 때 사람.】 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2천 4백 59결이다.【논이 7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콩·보리·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칠·종이·석이(石茸)·송이버섯·잣·지초·인삼·자리[席]·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돼지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백급(白芨)·적복령(赤茯苓)·백복령(白茯苓)·맥문동(麥門冬)·웅담(熊膽)·측백나무씨[栢子仁]이다.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산겨자[山芥]·은구어(銀口魚)와, 수정석(水晶石)이 부(府) 서쪽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府)의 북쪽 사동리(沙洞里)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부(府)의 동쪽 가이리(加耳里)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백 30보이며, 안에 우물 둘이 있다.】 소백산 석성(小白山石城)은 부(府)의 서쪽 20리에 있다.【둘레가 5백 31보인데, 높고 험하며, 안에 샘 셋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영천 군창(榮川郡倉)도 함께 아울러 들여다 둔다.】 취원루(聚遠樓)【부(府) 북쪽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창락(昌樂)과 신역(新驛)이며, 험조(險阻)한 곳은 죽령산(竹嶺山)이다.【부(府) 서쪽 33리에 있는데, 충청도 단양(丹陽)의 지로(指路)이다. 그 험조처(險阻處)의 길이가 3리가 넘는다.】 봉화(烽火)가 1곳이니, 죽령산이다.【동쪽으로 기천현(基川縣) 망전산(望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양(丹陽)의 화산(禾山)에 응한다.】
【원전】 5 집 642 면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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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순흥 도호부

◎ 순흥 도호부(順興都護府)
본디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신라에서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흥주(興州)로 고쳤다. 현종 무오년에 길주(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移屬)시키고, 명종 1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렬왕 갑술년 태(胎)를 안치하고 흥령현(興寧縣)으로 고쳐서 영(令)을 두었으며, 충숙왕(忠肅王) 계축년에 또 태(胎)를 안치하고 승격시켜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삼았고, 충목왕(忠穆王) 무자년에 또 태(胎)를 안치하고 순흥부(順興府)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순정(順政)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진산(鎭山)은 소백산(小白山)이다.【부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동(安東)의 부곡(部曲) 소라(召羅)에 이르기 41리, 서쪽으로 죽령(竹嶺)에 이르기 19리, 남쪽으로 영천(榮川)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단양(丹陽)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는 2백 84호, 인구가 1천 6백 79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6명, 진군(鎭軍)이 30명, 선군(船軍)이 81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안(安)·이(李)·신(申)·윤(尹)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석(石)이다. 내성(來姓)이 2이니, 김(金)·정(鄭)이며, 속성(續姓)이 3이니, 김(金)【하나는 경주에서 왔고, 하나는 광주(光州)에서 왔다.】·윤(尹)【주천(酒泉)에서 왔다. 모두 향리이다.】 이다. 인물은 시중 문성공(侍中文成公) 안향(安珦)【충렬왕 때 사람인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판문하부사 문간공(判門下府事文簡公) 안종원(安宗源)【본조 태조 때 사람.】·영돈녕부사 소의공(領敦寧府事昭懿公) 안천보(安天保)【본조 태종 때 사람.】 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2천 4백 59결이다.【논이 7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콩·보리·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칠·종이·석이(石茸)·송이버섯·잣·지초·인삼·자리[席]·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돼지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백급(白芨)·적복령(赤茯苓)·백복령(白茯苓)·맥문동(麥門冬)·웅담(熊膽)·측백나무씨[栢子仁]이다.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산겨자[山芥]·은구어(銀口魚)와, 수정석(水晶石)이 부(府) 서쪽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府)의 북쪽 사동리(沙洞里)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부(府)의 동쪽 가이리(加耳里)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백 30보이며, 안에 우물 둘이 있다.】 소백산 석성(小白山石城)은 부(府)의 서쪽 20리에 있다.【둘레가 5백 31보인데, 높고 험하며, 안에 샘 셋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영천 군창(榮川郡倉)도 함께 아울러 들여다 둔다.】 취원루(聚遠樓)【부(府) 북쪽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창락(昌樂)과 신역(新驛)이며, 험조(險阻)한 곳은 죽령산(竹嶺山)이다.【부(府) 서쪽 33리에 있는데, 충청도 단양(丹陽)의 지로(指路)이다. 그 험조처(險阻處)의 길이가 3리가 넘는다.】 봉화(烽火)가 1곳이니, 죽령산이다.【동쪽으로 기천현(基川縣) 망전산(望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양(丹陽)의 화산(禾山)에 응한다.】
【원전】 5 집 642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