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문성공 족보/전주최씨 족보 (문성공파)

全州崔氏族譜重刊序

아베베1 2014. 1. 3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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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墓誌)


추성 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 묘지명(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 병서(幷序)



이제현(李齊賢)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예부 낭중(禮部郞中) 균(鈞)이 서 동(東)으로 된 판본도 있다 적(西賊)의 난리 때 순절한 후부터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그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왕(高王)의 정승이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은 봉어(奉御) 윤칭(允偁)을 낳았고, 봉어는 학사(學士) 소(佋)를 낳았으며, 학사는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다. 비일이 사재경(司宰卿) 신 홍성(辛洪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이름을 다섯 번 바꾸었는데, 부(阜)ㆍ당(璫)ㆍ수(琇)ㆍ실(實)이요, 맨 나중 이름이 성지(誠之)이다,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20세 전에 진사로서 지원(至元) 갑신년(충렬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鷄林)의 관기(管記)가 되었다가 사한(史翰)에 보직받았다. 춘관속(春官屬)으로 뽑혀 덕릉(德陵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집정관들이 덕릉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가지 꾀로 달래어 가도록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궁하고 영달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해에 동요됨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대덕(大德) 말년에 황태제(皇太弟)를 부호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하였는데, 공이 항상 좌우에 기거하면서 일을 도왔으나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조현총랑(朝顯摠郞)에서 여섯 번 전직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관품은 봉익(奉翊)이다. 얼마 후에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로 영전되니, 관품은 중대광(重大匡)이요,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덕릉이 토번(吐藩)으로 가는데,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도중에서 만나 공과 함께 관서(關西)까지 따라가는 도중, 때마침 중 원명(圓明)이 배반하여 중남(中南)에서 군사(軍事)가 막아서 앞으로 더 갈 수 없었다. 일이 평정되어 농서(隴西)를 넘어 임조(臨洮)에 닿았는데, 험악한 지경은 단기(單騎)로 갈 수 없으므로 임조에서 반년을 머무르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본국 사람들이 패당을 지어 서로 소송하므로 조정에서 성(省)을 세워내지(內地)와 같이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과 전 재상(宰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글을 올려 이해(利害)를 진술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하게 하였다. 심부(瀋府)의 관원들이 또 국가의 잘잘못을 지목하여 장차 묘당(廟堂)에 말하려고 하는데, 공이 홀로 서명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주모자들이 부중(府中)에서 함께 앉아 녹사(錄事)를 시켜 지필(紙筆)을 가져다가 서명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을 지냈는데, 여러 녹사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은 기가 꺾여 그만 그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7년)에 상서(上書)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었다. 광양군(光陽君)으로서 집에 있는데, 소리하는 기생을 두고 손님들을 청해다가 청담아소(淸談雅笑)로 세월을 보내고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충숙왕 17년)에 병이 들어 7일만인 계해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65세였다. 나라 관원이 상사(喪事)를 다스리고,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획(字畫)이 해정(楷正)하고, 시는 순후하고 여유로워 즐길 만하였으며, 더욱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깊었다. 법관ㆍ선거(選擧)ㆍ천문ㆍ사원(詞苑)에 임명되기 또한 20년이었는데, 덕릉의 후한 대우는 종시 공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일찍이 과거를 보일 때 안진(安震)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중에는 명사(名士)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김씨는 찬성사 둔촌거사(贊成事鈍村居士) 훤(晅)의 딸로서 행실이 어질었는데, 공보다 3년 먼저 죽었다. 아들은 하나인데 전 상호군(上護軍) 문도(文度)이다. 글을 읽되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였고, 선진(先進)들과 교제하였다. 딸은 하나인데 만호 밀직부사(萬戶密直副使) 권겸(權謙)에게 출가하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 爲名家之嗣
그 임금을 얻어 그 뜻을 펴고 / 得其君而伸其志
예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 進以禮
의리로써 물러났도다 / 退以義
어진 아내가 공의 평생을 봉향하였고 / 有賢妻以養其生
착한 아들이 공의 죽음을 보내도다 / 有良子以送其死
지금 시대에서 구하면 / 求之今時
열에 한 둘이 못 되네 / 十無一二
아, 광양군이여 / 嗚呼光陽
유감이 없으리로다 / 可無憾矣


 

[주D-001]성(省)을 세워 : 우리 나라를 완전히 원(元) 나라 영토로 하고, 지방청인 성(省)을 두어 중국 본토와 같이 행정하게 하자는 의논이 그때에 있었다.
[주D-002]심부(瀋府)의 관원들 : 충선왕은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하였는데, 고려왕의 왕위는 충숙왕(忠肅王)에게 넘겨주고 심양왕의 왕위는 작은 아들 고(暠)에게 전해 주었으나, 심양왕이란 말뿐이요, 실제로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
[주D-003]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도수(度數)를 추산하여 책력을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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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완산(完山)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蕆)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衛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衛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편001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冗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迺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敭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敭之於後。吾實恥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揔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去之日人如失怙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盖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改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衛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陵崔密直安沼而歸。盖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甞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愨別將。女適禮儀揔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
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強。公退則决。允矣明哲。嗚呼崔公。世歆其風。




 
 
 
 


 

 

 

 


雪谷先生集上
  
 

壬申春。予所蓄馬暴死。外舅春軒聞之。有書云。袖詩來。馬可得也。因以是詩獻。春軒先生。完山崔氏。諱文度。字義民。門下侍郞平章事。贈諡文定公甫淳之後。文定娶祗侯秦仲基之女。生尙舍奉御允稱。奉御娶左司諫黃驪閔元■之女。生戶部尙書輸林學士致仕佋。學士娶左僕射呂水朴倫之女。生贊成事致仕毗一。贊成事娶司宰卿靈山辛洪成之女。生都僉議贊成事光陽君贈諡文簡公誠之。文簡娶政堂文學義城金晅之女。生先生。至正五年乙酉。先生年五十四。以匡靖大夫僉議參理卒于官。贈諡良敬公




塊處依依類楚囚。賸將心事更添愁。傍花行樂雖堪廢。束帶趨朝詎可休。得馬愧居張籍後。作詩先被晉公求。聖門也有乘肥者。款段還嗤馬少游。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약천집 제27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서(序)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지난해에 구만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도사(都事) 최한경(崔漢卿) 씨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저의 9대조이신 평도공(平度公)의 묘소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옛날에 글을 쓴 표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지고 넘어져서 이제 다시 새 것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대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마땅히 이 일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구만은 늦게 태어나고 몽매하여 선대(先代)의 고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한경 씨가 최씨의 족보를 새로 편수했다는 말을 듣고서 청하여 살펴보았다. 구만의 고조인 승지공(承旨公)은 박씨(朴氏)의 사위가 되고, 박씨의 위 3대는 최씨(崔氏)의 사위가 되고, 최씨의 위 4대는 바로 평도공(平度公)이니, 구만에게 11대조가 된다.
아, 나의 몸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은 또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면 비록 연대가 더욱 멀고 계파가 더욱 많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분들이니, 내 성씨의 종통(宗統)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마침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잊고서 내가 이 몸을 소유하게 된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면할 수 있는 길은 보첩을 편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경 씨의 족보를 통하여 마침내 이 구만이 최씨의 외손이 됨을 알았으니, 만약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 한경 씨가 족보를 편수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이 구만처럼 몽매한 자들이라 해도 씨족을 상고한 내용을 얻어들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친척에게 돈독히 하려는 마음이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 선조를 추모하고 친척에게 돈독히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비록 후덕해지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첩을 편수하는 자가 또 나와 같은 성씨의 후손이 아니라 하여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이제 최씨의 보첩은 외손들을 함께 기록하여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룩한 덕의 아름다움이 외손에게까지 미침이 또한 이와 같아 다만 본손(本孫)들이 세상에 혁혁할 뿐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구만과 같은 무리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이 후덕해지는 데에 면려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선조를 잊지 않기를 바람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한경 씨가 보첩을 다 편수한 다음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모든 원류(源流)에서 쌓은 덕의 깊고 멂과 기재한 범례의 요체에 있어서는 족보를 보는 자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여기에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며, 다만 구만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주D-001]최한경(崔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의 자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최혜길(崔惠吉)의 아들인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약천의 제자이다.


 

 
全州崔氏族譜重刊序 a_303_307c


全州之崔。以高麗侍中文成公爲鼻祖。文成有子四303_307d人。曰按廉使,大護軍,判事,中郞將也。郞中十一代孫監察公。始草成一卷譜。至英廟癸亥。參考草譜。合成四派之譜。其所修刊。以周甲爲期。再修於純廟癸亥。昨年又是癸亥之三周也。按廉護軍兩派。經修於年前。判事派議或參差。郞將一派不得已各謀重刊。廣加裒輯。以活字印出於完山之分土洞。總九卷。郞將後孫根厚,元錫,基一等。跋履數百程。徼以一言之惠。余經歲抱疴。神不俱來。且不嫺於文。極知不敢當。而固辭不獲。則起而復之曰。未成一統。雖若可欠。而合而或分。更成會通。已有歐陽之論。固爲無害。而303_308a且譜者。將以傳於世而徵於後者也。以宋朝文明。程夫子尙歎其無百年故家。略閱是譜。則文成以上。玄遠難考。而以後綿歷幾近千禩。則其久於傳世。可以知也。文成公種德績功。濬發其源於勝國。而至烟村公。以德行名節。著于史乘。益顯於本朝。溯其前後嗣承之文章行義磊落相望。克趾先烈。已詳於舊序。不失名家。亦由子孫之賢。足以徵後矣。傳世徵後旣若斯。則其源深而流羡。根巨而條達。理所然也。何待余言之贅哉。然更有一轉語奉勉。繼自今同譜之人。各自勉勸。遵先訓敍彜倫。篤於保族宜家之道。則其303_308b所傳徵於來後。又豈但如旣往之久遠而已乎。崔氏之門。迄今維持者。皆上世之垂裕也。願崔氏一惟法象於上世。恒思無忝。則謂之善繼述無疑也。詩云毋念爾祖。聿修厥德。崔君其以斯歸與諸宗而警之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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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宜人全州崔氏墓誌 a_154_3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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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寧南子長有賢配。曰完山崔氏。始祖諱純爵。與吾同譜。其十代祖平度公有慶。九代祖敬節公士康。亦吾祖世也。高祖諱巏。判決事。曾祖男秀。祖瑾。考俊明。武科僉節制使。以就學飭行聞。妣加平李氏。兵曹參判長生之玄孫。考曰惟信。宜人生稟端莊。事舅姑事君子。咸得其宜。治家有法。使君子忘其貧。以庚午三月十三日卒。得年僅四十有七。葬于楊州水落山西154_388b麓。從南氏先兆也。擧三男。鶴增,鶴徵,鶴應。子長屬余爲誌曰。吾妻賢而年不永。不及見吾仕。可悲也。記子長冠鶴增也。余忝賓席。飮酒而旨。識其有賢助。其喪。蓋詩以哀之。又吾宗也。何可辭。子長名啓夏。藥泉南先生之族弟也。有文行。屢詘公車。爲內贍主簿。與余善。

 

 


 
耳溪集卷十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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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山崔氏族譜重刊序 a_241_189d


大易家人之象曰。風自火出家人。風象其和。火象其明。此處家人之道也。同人之象曰。君子以。類族辨物。此譜牒之攸源也。堯典曰。平章百姓。盖謂百官之得姓者。此族姓之肇起也。逮于成周。始立族師之官。以掌其戒令。下至春秋。晉有欒郤。齊有高國。楚有昭屈。皆以氏族爲重。而漢晉以降。稱貴姓名宗者。可摟指數也。惟我東尤重氏族。粤自新羅六部大人。共立西干。建邦設都。各得姓爲宗臣。崔氏其一也。崔有衆派。241_190a而貫完山者最盛。稱三韓之甲族。在隆慶中。始有譜牒。而世遠則難稽。人衆則易漏。本支益繁。編簡隨增。爰有萬曆崇禎庚申乙丑之譜焉。皆因後承之賢者。裒輯而辨證。當世之名公。鋪張而記述。亦旣詳且備矣。乙丑之後。諸派又盛。咸曰時可以續成。盖於羅麗之間。文章名節。磊落相望。皆以完州伯爲祖。而洎本朝有若判敦寧襄度公,左贊成敬節公。以忠孝淸白。兄弟聯武。顯名一代。有若遲川文忠公。勳業盖世。明谷文貞公。經術贊襄。祖孫相繼。傑然爲名相。觀察使弘僩,大冢宰天健,左參贊寬。亦皆高官聞人也。東方241_190b之望。罕與爲比。而惜其後裔寢微。力不能改修。遲川公冢孫郡守在修氏。慨然發憤。與其宗長守忱氏。通告諸族。合謀登梓。而未及就緖。今郡守之嗣子文顯。克紹先志。銳意經始。求序於良浩。禮曰。尊祖故敬宗。敬宗故收族。收族之道。不外乎和與明。和以通其志。明以辨其類。家人之卦盡之矣。崔君勉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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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先祖柳下公家狀 a_154_47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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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惠吉。字子迪。柳下其號也。完山之崔。始于六部大人。高麗時有諱純爵。官檢校神虎衛上將軍。其後選部典書得枰,完山君宰。仍世大顯。爲麗季名臣。完山君生諱有慶。入我朝。參贊議政府事。諡平度。生諱士康。左贊成。諡敬節。生諱承宗。司饔僉正。生諱孝恭。未弱冠。以材武薦。爲宣傳官。早卒。生諱命孫。從仕郞。是爲公之高祖也。曾祖諱嶪。以蔭官止別提。贈吏曹154_472b判書。祖諱秀俊。隱德不仕。贈左贊成。考諱起南。文科歷敭淸顯。官止通政永興府使。贈領議政。號晩翁。妣曰全州柳氏。兵曹參判永立之女。有子男四人。公卽第三也。公生于萬曆辛卯十月庚戌。中癸丑司馬。癸亥仁祖反正。與聞密策。拜工曹佐郞。乙丑春。陞翊衛司翊贊。秋。擢文科別試。拜禮曹佐郞。丙寅春。移侍講院司書。三月。改佐兵曹。俄拜司諫院正言。言事忤旨。特補松禾縣監。丁卯春。金人入寇。管餉使辟公以自從。戊辰春。入玉堂爲修撰。一年三拜。間爲持平,正言,直講,禮曹正郞。自是常帶三字御。己巳春。拜校理。154_472c秋。入佐東銓。時仙源金相國實秉銓衡。郞舍空無人直。薦公自佐。物情咸允。庚午春。陞正郞兼文學。秋。以暗行御史。承命廉察關東。辛未春。拜議政府舍人,弘文館應敎。轉執義,司諫,成均司成,濟用監正。壬申夏。以司諫兼弼善。又拜舍人。仁穆大妃喪。差殯殿都廳。事完。加資陞通政。拜承旨。其後累入銀臺。或拜諸曹參議。乙亥。以冬至使。從水路朝天。丙子夏還朝。冬。從駕入南漢。賞從。加階陞嘉善。自是歷大司成。累拜兩司長官,六曹參判。凡亞銓衡者二。長薇垣者十有八。長風憲者八。外任則忠州寧海。藩節則江原154_472d京畿。間爲松都留守。己亥春。復拜京畿觀察使。未幾以疾遞。遂沈淹數載。以壬寅十一月十六日捐館舍。享年七十有二。明年正月某甲。葬于豐德祖江光大院面亥之原。二夫人祔焉。前夫人咸平李氏。觀察使春元之女。觀察公號九畹。以文章節行稱。生二男。長曰後定。淸安縣監。贈左承旨。次曰後亮。中辛卯生員。筮仕爲通政淸風府使。後夫人順興安氏。先賢文成公裕之後。成均生員溫之女。生一男二女。男後遠進士。官止內侍敎官。早沒。女適參奉宋以鉉,進士鄭鈗。側出男三人。以定通德郞。以遠司猛。後章進士。女五154_473a人。適進士柳實,武科韓斗明,業武李勛岳,進士吳任道,士人元萬齡。承旨公娶司禦李揚休女。生一男一女。男錫齡進士。女爲大司諫李柙繼室。府使公出爲仲父相國文忠公之後。娶觀察使安獻徵女。生三男二女。男長錫晉進士。今爲堤川縣監。次卽錫鼎。次錫恒文科。今爲司諫院正言。女適進士尹濟明,學生申轂。敎官公娶郡守李以省女。無子。以錫恒爲之子。宋參奉有四男二女。男曰文淵,聖淵,道淵,明淵。女適金宅三,郭守績。鄭進士有一男二女。男洙源。女適柳晉伯,申達源。以定男錫蕃。二女適鄭後演,沈若聖。以遠154_473b男錫瑞。柳實三男。慶運,濟運,顯運。女二人。韓斗明一男。李勛岳三男。吳任道二男三女。元萬齡二男並幼。錫晉四男。昌憲生員。次昌演,昌敏,昌億。錫鼎一男昌大。二女。長適李祥輝。次幼。李柙一男翊夏。三女適李觀朝,金鎭華,洪重呂。內外曾孫若干人。公天資溫雅。內行淳篤。容䫉和睟。美鬚髥。與人言。恂恂若不出口。退然執議。不自矜大。顧其操守內確。視約如泰。於功名勢能之榮。退避如怯夫然。光海之季。廢科自守。中興初。將勘公勳籍。公力辭曰。二兄旣參正勳。豈可忘履滿之戒而叨冒富貴乎。諸公知公心。遂不強焉。物154_473c論多之。其在南漢。孤城受圍四十餘日。以戰以和。俱未決。諸公色懼惴惴。獨公夷然處之。唯日夕盡所職而已。遲川公語人曰。山城中不怕死者。獨子迪耳。位亞卿垂三十年。竟不遷一資。居官潔廉自守。累典州臬。位已高而家食甚匱。或乏甔石。具饘粥。田園不滿數頃。童僕僅十數人。故事按畿藩者。自營刱偏裨廳於屋內。公獨不許構舍。及再按。亦如之。嘗謂人之生也。寒則處於土室。暑則蔭樹下。是本分也。何用室屋靡麗爲。其爲諫官也。守正不阿。獨持淸裁。亂後。仁祖命治孝廟潛邸第宅。公諫曰。國家安。大君何患154_473d無第。貴戚憚之。麟坪公子每挾聲伎出遊。近公門則輒屛懸以過。癸未。奉使赴瀋。時淸主有疾。公爲預具喪儀弔服以往。旣至。淸主死。以素講故。倉卒無乏事。人稱季文子之深識焉。姜氏之獄。公以憲長在鞫廳。自點欲株及昭顯諸子。要公論奏。公執不可。自點遂自上奏鉤致而嗛公甚。諸公皆爲公危之而不少詘。爲吏政尙簡約。所至有惠愛聲。按臬亦然。惟民生之隱。是詢是祛。至家私則泊如也。其在帷幄。累上奏陳君德之要。及從儲君於瀋中。每以古昔訓誡。勤勤納誨。累入銓部首尾數十年。其門如水。爲文。粹然154_474a典麗。不尙藻采。而辭理贍備。詩亦鍊暢有詞致。一時以文詞名者。率皆許以壇坫。顧公不欲以華藻自夸。輒務韜晦。以此文盟之選不及焉。公於亂後。奉使到瀋留數月。時淸陰,白江二相國。與遲川公同幽瀋館。與公日酬和詩篇。白江問於淸陰曰。柳下詩。可與長公軒輊否。答曰。難兄難弟。素隱愼公天翊嘗言柳下之文。如細苧布織錦文。眞典文衡之才也。其見重於諸公如此云。


 

 

 
明谷集卷之二十九 원문이미지 
  
 行狀
先祖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行狀 a_154_45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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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諱鳴吉。字子謙。姓崔氏。系出全州。始號滄浪。後改號遲川云。始祖諱純爵。高麗檢校神虎衛上將軍。六世而有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廉直自守。人敬憚之。典書生諱宰。進賢館提學重大匡完山君。世濟其美。卒諡文貞。名蹟具載牧隱李公所撰墓誌及高麗史列傳。文貞公有三子皆貴。其季曰有慶。事我太祖。參贊議政府事。卒諡平度。事親有至行。旌其門。後選淸白吏。平度公有子六人。皆有名位。其第四曰士康。世宗朝。爲議政府右贊成。兼判吏曹事。卒諡敬節。生諱承宗。以任子仕。官止司饔院僉正。生諱孝恭。以蔭薦補宣傳官。早歿。生諱命孫。從仕郞。是爲公之高祖。曾祖諱嶪。氷庫別提。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祖諱秀俊。養德不仕。累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考諱起南。字興叔。號晩翁。早游牛溪先生之門。文行伏一時。晩捷文科。歷敭華顯。旣而爲群小所擠。官止通政大夫永興府使。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谿谷張公實銘其神道。三代追爵。以公貴也。晩翁公娶全州柳氏。咸鏡道觀察使諱永立之女。有子四人。其達者三人。公於倫爲第二。公生於萬曆十四年丙戌八月丁亥。幼而簡嚴不戲。靜重如成人。八歲始受書。一日自言今日爲曾子。明日爲顏子。又明日爲孔子。晩翁公嘆奇之。遂授以論語。自此文義日進。雖古文簡奧難解者。輒辨析無扞格。先生長者亟稱之嘖嘖不容口。十餘歲。已能操觚著文章。而尤長於詞賦。年十四。受朱子書于家庭。兀兀晨夕講誦不輟。詞學驟長。如水之沛然。旣成童。自鄕莊來游館學。其譽藉甚。流輩以一識面爲榮。甲辰。貫增廣初試三場。遂占其明年司馬生員第一人。而進士亦中二等第三人。仍擢文科。唱第之日。玄軒申相公在銀臺。謂院僚曰。崔某雖抱羸疾。精神粹鍊。如精金美玉。他日爲世大用者。必此人也。選隷承文院。己酉。被薦史局。病不應講。序陞成均館典籍。庚戌。除司憲府監察,禮曹佐郞。皆病不拜。辛亥。轉爲工曹佐郞。改佐兵曹。壬子。陞正郞。癸丑。又入兵曹。時賊臣爾瞻輩方煽揚讎母之論。會華使在館。恐事泄被華使知。以禁軍環館垣。使內外不得通。公以騎省郞在館外。有一士人醉過館下。偶與館人相識者相勞苦。守卒執以告。公釋之。光海聞而大怒。逮繫之。事且不測。其士人曰。我若逃隱。禍必及公。吾何忍負活我之恩乎。遂自見。以故事已。猶被削黜。丙辰。丁大夫人憂。與兄弟守喪于加平莊舍。制盡之明年。又遭外艱。六年持服。以毀得疾。幾至滅性。憂旣吉。罪名亦解。顧不樂近跡城市。棲遑郊甸之間。時主昏政亂。民墜塗炭。綱常泯絶。旣夷延興。爆殺永昌。至戊午。群兇遂慫惥之。脅百僚廷請。廢仁穆大妃。絀去尊號。錮處西宮。危辱備至。而光海意猶不厭。必欲加以不測。賊臣筠等承其指。欲因儺夕作難。民間或傳大妃已遇害。聞者莫不扼腕流涕。公見時事至此。憂憤忼慨。仰屋而已。申平城景禛新拜安州牧。來見公。公勞之。平城曰。我意在扶護西宮。不欲遠赴邊塞。蓋平城先與金昇平諸公。密有撥亂之志。故其語云然。亡何。公訪李延平。慨然語及時事。遂定中興大策。謨謀區畫之際。公之所斷者甚多焉。或勸公往謁仁祖潛邸。公曰。他日策名臣事之地。義不當私謁。遂不往。識者韙之。時同事諸人。散在中外。引日持久。幾至渙散。公以爲大計不可遷就。卽自鄕居入城。自卜反正師期。於是與昇平延平諸公。奉仁祖大王。由彰義門以入。延大妃于西宮。進復位號。卽癸亥三月也。中興初政。拜吏曹佐郞。時天將往來。咨揭旁午。酬應頗患於窘速。太學士玄軒申公啓請公及浦渚趙公,谿谷張公。俾管其事。俄陞正郞。夏。特授通政階。拜吏曹參議。冬。錄勳一等。進爵嘉義。賜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封完城君。仍陞吏曹參判。兼備局有司堂上。公早負公輔之望。鼎革之初。首入銓曹。博采衆論。務恢公道。其所退黜。皆曩時點染之人。而所進用。皆宿望全節之士。除目每下。朝野爲之拭目改觀。甲子春。西帥适稱兵犯闕。仁祖狩于湖西。將出。命公爲摠督副使。赴都元帥玉城張公軍督戰。公間道馳往。宣諭聖旨。一軍莫不感勵。鞍之戰。公在元帥軍中。實多密贊云。初朝廷以西事爲憂。以适爲副元帥。出鎭寧邊。公憂其跋扈。與二三勳宰。欲先事而制。壞其機牙。適爲執政所沮。公策不得行。然朝廷預知賊情。有所賴焉。乘輿還都後。仍在亞銓。乙丑春。公上箚請變通官制。仍極論政化習俗之弊。君相以爲舊制未易猝改。公言不果行。已而辭遞。拜弘文館副提學。移拜司憲府大司憲。時王弟綾原大君殺人。公率群僚抗章論之。語甚截直。貴戚憚之。夏。拜副學。秋。上因災異。責154_452a已求助。公上箚條陳十二事。曰明心學謹辭令。嚴宮掖定大婚。親勳舊重相臣。器使人通庶孼。除免稅戒數遷。植公論崇儒學。皆指陳要務而切中時病。上嘉納焉。冬辭遞。已而還拜。仁祖之初卽位。追尊元宗爲定遠大院君。稱仁獻王后爲啓運宮。丙寅春。啓運宮薨。上命禮官定行三年喪。於是大臣三司合辭爭之。上遂下杖期之命。諸臣仍復力請降服不杖期。以綾原大君爲喪主。論議紛紜。公時在玉堂上箚。上陳降服之失禮。中論追崇之不可。末又請建別廟。箚凡萬餘言。略曰。三年之喪。自天子達於庶人。斯乃天地之常經也。然禮有隆殺。情有屈伸。考之於經。母之服應降者三。庶子爲父後。則爲所生妾母服緦。父在母喪及爲出母。服杖期是也。父之服應降者一。爲人後則爲本生服不杖期是也。儀禮斬衰條爲人後章下子夏傳曰。何以三年也。受重者必以尊服服之。何如而可爲之後。同宗則可爲之後。何如而可以爲人後。支子可也。不杖期條爲人後者爲其父母報章下子夏傳曰。何以期也。不貳斬也。何以不貳斬也。持重大宗者。降其小宗也。爲人後者孰後。後大宗也。曷爲後大宗。大宗者尊之統也。大宗者收族者也。不可以絶。故族人以支子後大宗。夫諸侯之別子爲祖。而別子之子祭別子者。謂之大宗。別子之庶子不得祭別子。而其子孫各立禰廟者。謂之小宗。然則曰大宗曰小宗者。乃兄弟分派之名。非父子之謂也。曰同宗曰族人者。乃三從以上之親。非祖孫之謂也。其或大宗無後。則取同宗支子以爲後。而其爲後者。不敢以本生父母爲父母。其服降同於伯叔父之服。斯所謂不貳斬也。斯所謂持重大宗者。降其小宗也。今之議者以親孫爲祖後者。擬之於族人之支子。後大宗之例。此臣之所未曉也。夫人有子則傳子。子死則傳孫。理之常也。不幸而無子。又無孫然後。不得已取同宗之支子以爲後。二者之相去。不啻千里。而論者強以同之何哉。且所謂不貳斬者。以其服斬於所後。故降期於所生。何則。不貳本也。非爲人後而降其父母。則是無一斬也。無一斬則無本也。豈其可乎。又曰。昔者晉蔣萬問范宣曰。適孫亡無後。次子之後。可得傳祖重否。宣曰。禮爲祖後者三年。不言適庶則通之耳。無後猶取繼。況見有孫而不承者耶。庶孫之異於適者。但父不爲之三年。祖不爲之周。而孫服父祖不得殊也。此條分明畫出今日事者也。又服制令曰。無適孫。則適孫同母弟。無同母弟。則衆長孫承重。詳此二條。則殿下乃承重者也。非出繼也。爲祖後也。非爲人後也。玆豈非灼然明甚者乎。大抵無論適孫庶孫。其爲受國於祖則一也。無論當立不當立。其爲君之父母則一也。寧有適孫承重則得以父其父。而庶孫承重則不得父其父者乎。當初禮官獻議之日。旣以稱考稱子爲請。而朝議皆以爲可。則是已知不可以爲人後論也。至於今日。反引爲人後之說。以爲降服立喪主之證。是何前後之矛盾也。又曰。喪服小記曰。庶子不以杖卽位。今綾原爲喪主。而厭於殿下。不得以杖卽位。則是殿下以庶子自處也。殿下與綾原。俱以杖卽位。則是喪有二孤也。殿下旣父大院君。而使綾原主祭。則是又以支子自處。而以宗子待綾原也。且殿下必將時有親祭之擧。其祝辭。將稱以孝子乎。將稱以介子乎。欲稱孝子則綾原已稱之矣。欲稱介子則天地易位矣。不稱孝不稱介。則又不成爲子矣。此將何以處之乎。禮曰。人道親親也。親親故尊祖。尊祖故敬宗。夫尊祖敬宗。何莫非親親之推。而議者反欲以尊祖廢親親何哉。又曰。堯授天下於舜。舜固有瞽瞍存焉。然舜不敢尊其父而君之者。天下者堯之天下。舜不得以私其父也。舜雖不得以私其父。而孝養之禮則有加焉。父其父而不敢君其父。此舜之所以爲孝也。所謂父其父而不敢君其父者何也。生則養之以父。歿則喪之以父。祭之以父。而不敢以帝王之號。加於其父之謂也。公羊云父母子之天也。子不得爵命父母。此言子之於父母。不敢加之以爵者。乃所以尊之至也。宣祖大王於大院君。蓋嘗封之爲君矣。未嘗命之爲適嗣。則程子濮議所稱先朝之封。豈陛下之敢易。爵秩之命。豈陛下之敢加云者。正謂今日道也。追崇之不可。固已章章明矣。禮又云士大夫不得祔於諸侯註云。公子公孫之爲士爲大夫者。不得祔於先君之廟。夫宗廟者。祖宗之宗廟。非後王之所得私者也。今大院君。以殿下視之。則父母之尊也。以祖宗視之。則亦一諸王子耳。殿下之私尊。豈得容於其間乎。又曰。或曰旣不得追崇入廟。則諸侯之祭。將安所施乎。曰。別立廟可也。於古有之乎。曰。宣光已行之矣。周公亦行之矣。周禮。大司樂奏夷則。歌小呂。舞大濩。以享先妃。先妃者姜嫄也。姜嫄感神靈而生后稷。是周之先母也。周立廟。以后稷爲始祖。故姜嫄無所配。特立廟而祭之。謂之閟宮。夫豈非禮而周公爲之。夫不可入廟。而又不可以無祭。則此別廟之所由設也。或曰。別廟則固可矣。其題主及祝辭。當何以稱之乎。此係變禮。未可輕議。然一以意推之。當稱皇考定遠大君。而其祝辭。稱孝子國王。且其塚墓。稱陵則上逼祖宗。稱墓則下同士庶。宜倣戾園濮園故事。稱之以園。而優置守塚人。俾無未盡之悔可矣。或曰。稱考而不加皇字。稱子而不加孝字。已爲朝廷定論。今加二字何也。曰。程子濮議言祭告。當曰姪嗣皇帝某敢昭告于皇伯父濮國大王云。今此所論。非臣之言。乃程子之言也。況諸侯之祭。殿下必自主然後。方可行之。則孝子之稱。在所不已者也。蓋公前此引父爲士子爲天子諸侯。葬以士祭以天子諸侯。及聖庶奪適等語。曾已陳箚。至是推源極論。畢伸己見。因此重忤朝議。臺臣劾公請罷職。上不許。公遂連章辭遞。丁卯春。金人入寇。連陷義,定,安,三城。列鎭皆奔潰。朝野洶駴。虜到平壤。以書求和。公在賓廳。言於諸宰曰。國小力弱。虜勢張甚。不如巽辭以緩之。李延平深然之。大臣諸宰。皆心知其可而未能決。時都體察使李元翼,左議政申欽。將陪世子南下。大臣要二公問計。二公皆以公言爲可。於是令大司成張維爲書答之。及上之幸江都也。道聞虜使爲和事且至。諸宰會議其進止。公謂兵交。使在其間。不必遽示斥絶。且宜聽其所言而處之。於是遂接虜使於鎭海樓。繼而虜降將姜弘立偕虜使劉海持書來言。自此不復踏平山以東。朝廷以爲虜前後遣使。皆以講和爲言。而蠶食深入。已薄畿甸。是謾我也。時劉海請見。朝議又難之。公陳於榻前曰。觀虜求和。似出實情。爲宗社大計。詘意一見。恐無所妨。仁祖遂召見劉海。於是和議始定。時賊屯去行朝堇百餘里。而輿衛單弱。上下危懼。雖斥和者。內實幸和議之成。而特畏浮謗。莫敢言。唯公獨冒群毀。無所顧避。竟以是彈章重發。律以竄黜。諸宰中言和者。以公爲戒。稍稍變其初論者。久而爭執。只命推考。公不安於朝。屛居江上。未幾除刑曹參判。移亞西銓。召命屢下。公上箚辭職。上答曰。自古擔當國事之人。得免人謗者幾希。卿勿嘆䘏。速出行公。公仍請告。命政院還給辭單。公又箚辭。溫批不許。秋。改葬興慶園。是爲章陵。靈轝自楊州將過都城。廷臣以爲私親之喪。不可穿都取路。議欲發民剗治東城外峻岅以行轝。公謂大院君雖未踐位。乃君之父也。避都城從間路。於理有違。且鑿山開路。應費數萬役丁。民力不已殫乎。遂上箚爭之。大臣亦悟其非。乃止。啓運宮初期已過。朝臣屢請卽吉。上不許。以素服終三年。而至如稱墓以園。祭以諸侯等事。皆用公丙寅箚中意。至戊辰旣禫之後。啓運宮神主。將合祔於私廟。公上箚以伸別建禰廟之論。請於合祔之日。削去綾原傍題。別建一廟。以奉禰祭。奏假則別制樂章。祼獻則例命廷臣。而四時薦享。勿與宗廟同日。以示差別之意。箚入。被玉堂之斥。公又上箚逐條論辨。仍乞罷免。不許。公以蹤跡臲卼。求補外。拜京畿觀察使。畿邑規制。頗頹沿襲已久。公損益時宜。條其科目。使之遵行。列邑便之。津田盡爲權貴家所占。津人失利。以此舟楫朽敗。行旅溺死者相踵。前公巡按者。皆畏憚莫敢矯。公狀聞。悉還其舊。故事道主生日。州郡備送饌需。公曰。此亦出於民。並却之。訪詢民瘼。措置有方。而尤眷眷賑飢。畿民勒碑頌德。久而追思。己巳。參判戶兵二曹。時朝臣前後輩持論緩急不同。輾轉相激。且有蜚語。左議政金瑬指少年名流五六人爲朋黨。以老西少西之說。白于上。上震怒。貶逐朴炡,兪伯曾,羅萬甲三學士于外。吏曹判書張維。亦以救護萬甲。特除羅州牧。公見朝論橫潰。心甚憂之。遂將前後輩睽阻曲折。上箚備陳。未幾。三學士並蒙恩召。張谿谷亦以刑曹判書徵還。人言公之箚。語懇意到而具載實跡。故能格回君心云。時諸道軍兵。徒擁虛簿。乙丑春。朝家欲申明軍籍。以充闕額。公與李延平相議曰。籍軍雖古制。當民生癉瘁之日。不可遽議。不如先行號牌。丁壯中有產業者充軍額。無產業者稱餘丁。歲稅綿布一匹。以補軍用。兩班中健者充武學。弱者稱保率。參酌處置。務得其當。則不待籍軍而軍額自足矣。於是定行號牌法。命公爲堂上。管其事。條法井井。行之一年。民爭趨令。後因丁卯虜警遂罷。號牌旣罷。仍行籍軍之擧。公實管之。至是事完。例陞資憲。庚午。拜議政府右參贊。椵島主將陳繼盛爲其下劉興治所殺。朝廷欲興師致討。公條六事。箚陳其不可。辛未正月。上特召靖社元勳諸宰。引見於春暉堂。東宮兩大君分侍左右。諸臣以次伏。上親擧觴以侑。而命用御盞行酒。聞公新得男子。爲致喜意。從容竟夕。搢紳傳以爲榮。夏。仁祖問追崇當否於大臣。大臣皆力爭不可。上欲奏聞天子而請之。政院及兩司爭之。二品以上。會賓廳陳啓以爭。輒下嚴敎。五月。特旨移授公副學。公三上箚辭職。不許。公又上箚乞免。仍陳朝廷議禮之失。且申論別廟之說。略曰。今玆加隆之擧。實出於聖上尊親之至情。而禮無明文。事涉義起。廷議未同。奏請居先。揆諸事體。殊未妥當。朝廷之不敢承順固也。第廷臣之意。蓋欲殿下以爲人後自處。而大院君之主。使綾原傍題而主其祭也。爲人後則不可稱考於所生。旣已稱考則不可謂之爲人後。稱考而使其弟主祭。於禮未有所據。此臣之所疑者一也。大院君之主。只書考字而不書傍題。啓運宮之主。書以顯妣而綾原爲傍題。傍題而可。則大院何爲而不書。傍題而不可。則啓運之獨書何義。此臣之所疑者二也。禮諸侯五廟。太祖及高祖以下四親是也。世室之外。親盡則遷。今大院君已稱考。故宣廟爲祖。明廟爲曾祖。仁廟爲旁親。故稱伯曾祖而不在世數。中廟爲高祖。成廟已爲五代祖。而又稱高祖。是於一廟之中。而有兩高祖焉。此臣之所疑者三也。又曰。殿下之事。與宣光自別。而乃以稱考之神主。降置閭閻而令支子奉祀。與稱叔之德興。少無差別。其於情禮。果何如也。議禮以來。于今九年。老師宿儒。旁搜廣引。而皆非今日的證。獨禮記葬以士祭以諸侯一章。最爲襯着。臣之從前所執。只此數句話耳。近見賓廳啓辭。但就此一章。拈出葬以士一款。以爲爭執之地。而至於祭以諸侯一款。則全不理會。是於聖人之訓。得其半而失其半也。又曰。別廟之制。其來已久。如周之姜嫄廟。西漢之戾悼兩園。東漢之章陵四祠。皆是也。李唐之世。只以一后配廟。而其餘繼后則祭於別廟。武昭王爲唐始祖。故別爲立廟。未聞以二廟爲譏者也。春秋之義。父不祭於支庶之宅。國朝有順懷廟。夫國君之嗣。猶不可祭於私室。況於君之父母而降祭於支庶之家。以犯春秋之義乎。又曰。成廟以聖躬觀之。則雖已五代。以宗廟觀之。則恰成四代。親盡則遷。禮之常也。變以從厚。事之權也。但非高祖而強稱高祖。則不幾於誣祖先乎。更其屬號。仍列昭穆。別爲祝辭。明告厥由。然後陟降之靈。始安於芬苾之享矣。上答曰。今之廷臣皆曰識禮。而平生讀書。以儒自處者。不知父母之不可無。朋友在喪。則無論親疏。皆往一哭。而啓運宮之喪。百官不爲會哭。君上成服於內。而臣下着吉於外。金長生稱叔之語。至今猶爲杜漸之訃。若此不已。則必至於臣不臣而子不子矣。彼昏塞好勝之徒。終無改悟之理。故欲爲奏聞天朝。以定是非。而朝廷以違經之言無據之說。逐日張皇。自以爲擧國公論。亦甚異哉。卿之疏中所謂旣已稱考。則不可謂之爲人後。稱考而使其弟主祭。於禮未有所據。此亦不過一時義起而定之者耳。義起而從厚。猶爲可疑。義起而從薄。豈無未安。一廟中兩高祖。亦爲不可等語。皆有所見。然彼務勝護短之輩。必不見此而回心也。且禮記中葬以士一款。每每拈出。以爲爭執之地。而祭祀一款。全不理會。箚中所謂得其半失其半。是也。因余不學無識。見侮於臣僚。非一非再。良可嘆也。卿之固辭。殊甚過當。速出行公。公上箚論批語有欠和平。兼陳不敢出謝意。壬申。拜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仁祖下敎曰。聖人之孝。以尊親爲大。人君爲治。以孝敬爲先。考廟不可久在陋巷。禰位不可長作空室。事關天理綱常。令禮官從速議定。公詣闕回啓曰。今日之禮。經傳無可證。史籍無可據。請倣光武故事。建別廟。以從祭以諸侯之禮。上下嚴敎責之。大臣三司爭執閱月。而上竟以追崇之意。遣使奏聞。請頒誥命。於是追尊定遠大院君。爲元宗大王。啓運宮爲仁獻王后。公以大宗伯。兼追崇都監堂上。例加正憲。冬。拜吏曹判書。兼內局提調。癸酉。進爵崇政。兩館大提學缺。僉擧歸公。又兼體察副使。甲戌。仍在吏曹。公旣秉銓衡。以進賢才退不肖。破朋黨恢公道爲己任。塞奔競之路。杜僥倖之門。門無私謁。請托不行。公以爲爲國之要。在於安民。安民之本。係於守宰。預記治績著聞者。遇劇邑有缺。輒以注擬。且曰蔭官初筮仕。官雖微。他日宰百里陞郞署者。皆由此發軔。尤致愼簡。其後出爲良吏者甚多。常具一冊。子置諸几案。毋論識與不識。苟聞其有才。輒疏其名於中。次第調用。守令新授者。署經兩司後之任。乃故事也。雖曾已歷典州郡。每當新拜。輒復署經。公曰。一署足矣。遂入啓改其法。只署初授。時西北人士不許淸顯。其來蓋久。公以爲天之降材。無間彼此。用舍寧以地拘乎。於是始通淸選。乙亥春。遞吏判。夏。拜戶曹判書。冬。仁烈王后薨。丙子春。公以國葬都監堂上。胥原于畿內諸山。路中疾甚。辭遞度支及籌司之任。夏。移長兵部。病未行公。秋。拜漢城府判尹。是年春。虜遣使于我。朝廷聞其已僭號。絶和甚峻。廟堂不能鎭遏。不受虜書。接遇甚薄。虜使怒徑歸。都下兒童。爭以瓦礫歐之。公聞之曰。東土生靈。且苦兵矣。遂陳于榻前曰。虜以不受書爲釁。徑自還去。此乃渝盟之計也。兵革之端。可以灼見。今日登對。蓋欲定國家大計也。仍請預講戰守之策。至秋。廟堂議欲馳一介使。以覘虜情。臺諫論其不可。爭執浹月。竟不果發。公於上前備白不可不速宜送使狀。且曰。言官氣節。誠可尙矣。而我國之人。不解戎機。當丁卯駕幸江都也。三司以夜擊一事。露諸啓辭。誠可一笑。朝家擧措。節節如此。賊若猝然傳都。則將何以爲計。臣中夜思之。直欲痛哭。今日之事。須與腹心大臣相議。雖承旨內官。亦不當聞。反復論奏之際。臺諫以當三司爭執之日。不顧公論爲非。公曰。苟有所懷。君父之前。安敢不盡。臺諫又以與三司抗爭斥之。公遂趨出。朝廷將送別使于北。而不齎國書。報以口語。公上箚曰。虜旣跨據大漠。無所受制。肆然稱帝。誰復禁止。而必欲藉口於我國者。其心或難知。我若只以口語答之。則事跡晻昧。無可證據。臣之愚意。例答之外。別爲一書。備陳僞號之不可僭。臣節之不可易。以明大義而存國體。仍將虜書及我國所答。移咨督府。轉奏皇朝。一面下諭八方。訓飭兵馬。以待其變。使天下之人。曉然知朝廷處置之明白。然後可以折虜謀而壯士氣。書之史冊。無愧辭矣。時國事日急。而廷議日激。以戰以和。皆未決定。公又上箚曰。旣不決戰守之計。又不爲緩禍之謀。一朝虜騎長驅。不過體臣入守江都。帥臣退處正方。生靈魚肉。宗社播越。到此地頭。咎將誰任。臣之愚意。體臣帥臣。皆當開府於平安道。兵使亦宜入處於義州。約束諸將。有進無退。且移書瀋陽。備陳君臣大義。仍言秋信不送之由。一以探虜情形。一以觀彼所答。若別無他心。仍用兄弟之禮。則依胡氏所論姑守前約。內修政事。以爲後圖。務反石晉之前轍。如其不然。則固守龍灣。背城一戰。決安危於邊上。雖或計非萬全。猶愈於束手待亡。捨此不圖。一向媕婀。欲言進戰。不無疑懼之念。欲言羈縻。又恐謗議之來。彼此不及。進退無據。江氷將合。禍迫目前。所謂待汝議論定時。我已渡江者。不幸而近之矣。臺諫擧公筵中說話。彈章重發。上答曰。莫如密議云者。恐輕者妄泄大事也。若如爾等所論。則良平皆爲萬古罪人矣。此人以元勳重臣。不求虛名。專務實事。忠誠計慮。人所莫及。爾等因此數語。欲爲搆陷。其計可謂疏矣。公上箚歷陳忱悃。仍論時事。略曰。今日攻臣之論。出於若干年少之口。而擧朝靡然。環立相視。終不敢明臣心事者。無他。一開口則相隨而入於和議科臼中故也。此見主和二字。爲臣一生身累。然於臣心。尙未覺今日和事之爲非。請反覆而明之。蓋石晉高祖之起兵也。桑維翰勸令稱子稱臣於契丹。借兵以取中國。出帝卽位。景延廣建議去臣稱孫。言於契丹曰。翁怒則來孫有十萬。橫磨劍以待之。桑維翰屢請遜辭以謝。出帝不聽。其後契丹之怒。囂然未已。中國疲弊。不能自存。始乃遣使請復稱臣。契丹不許。及三年。契丹入寇而晉遂亡。桑維翰之諫。近於智矣。而導主臣虜。以基中國之難。景延廣之言。近於正矣。而輕開虜釁。以致覆亡之禍。故朱子綱目。削其官而兩貶之。且先儒胡氏之論曰。卽事而言。延廣亡晉之罪。無可贖者。卽情而論。以晉父事契丹。中外人心。皆不能平。故慨然欲一洒之。而不思輕背信好。自生釁端。一朝之忿。亡其身以及其君。如使延廣姑守前約。內修政事。則不出數年。可以得志。夫以胡氏學術之正。尊中國攘夷狄。乃其一生事業。則追議得失於百年之後。有何一分顧藉。而乃以姑守前約等語。反覆抑揚。恕其心而罪其跡。若是者何哉。蓋以人臣謀國。不存遠慮。以致亡人之國。則其事雖正而罪不可逃也。曾在宣廟朝。天朝諸將。倦於用兵。始有講和之計。令我國奏請天朝。故臣成渾首陳可許之意。及全羅監司李廷馣繼發講和之言。將被重罪。渾與時相柳成龍獨憐其忠。約於上前同辭救解。渾曰。廷馣之言。乃以伏節死義爲心者也。宣祖大怒。自此攻渾之論益急。爲渾門生者。亦致疑於渾。渾以書往復自解曰。主於是非。則見理而不見物。主於利害。則見物而不見理。然在朝廷則或有是非利害合而爲一。處朝廷利害之所在。卽是非之所在也。又曰。秦檜在前。千載之下。孰不欲剚刃其腹。是以言涉於和。衆共棄之。雖然。制事者必察其時。論人者當原其情。不可律之以一切之法。又曰。朱子云旣不枉尺而直尋。又不膠柱而鼓瑟。若使天下道理只有上一句而已。則又安用更說下一句哉。又曰。與其講和而存。無寧守義而亡。此乃人臣守節之言。宗社存亡。異於匹夫之事。又曰。韓侘胄之伐金。可謂伸大義於天下。而先儒以幾危宗社罪之。張南軒以復讎爲事業。而以金不可伐爲言。凡以此者宗社爲重。而相時度力。爲時中之義耳。凡此數款語。豈非今日廷臣之所當深思者乎。成渾旣被謗而去。柳成龍仍持和議。成龍旣敗。李德馨又持前說。我國之至今保存者。雖出於皇朝拯濟之惠。而亦由於前項數臣不避謗言。竭忠擔當之力也。今日之事。以時勢言之。則旣無石晉兵力之強盛。又無壬辰天兵之可恃。以義理言之。則初無稱子稱臣之辱。又非祖宗難忘之讎。如使朱,胡兩賢及成渾,柳成龍,李德馨,李廷馣諸臣。復生於今日。則其是非得失之所在。不難定矣。議者皆曰。丁卯之和。固不害義理。至於今日。賊已僭號。不可更與之通使。此言似矣。而實未深思者也。使奴違丁卯兄弟之盟。而迫我以非禮。則於義決不可從矣。今旣不然。而仍用隣國之禮。則彼之僭號與否。非我所當問。何可以禮義責夷狄乎。臣之爲此羈縻之言者。非敢不顧是非。徒爲利害之說。以誤君父也。酌之以時勢。裁之以義理。證之以先儒之定論。參之以祖宗之往迹。如是則害於道理。如是則合於事宜。靡不爛熟思量。信其必然。嘗竊以爲國力方竭。虜兵尙強。姑守丁卯之約。以緩數年之禍。得以其間發政施仁。收拾民心。築城儲糧。益固邊備。斂兵不動。以觀彼釁。爲我國計無出此者。旣已素定於心。又以屢言於人。入陳於榻前。出爭於大臣。焦唇乾舌。不自知止。凡若是者。豈有他哉。悶宗國之將危。而不暇計一身之利害耳。朝廷之上。苟有惻隱之心者。宜若在所哀矜。而乃反怒目相視。攻擊如不及。亦獨何心哉。箚入。群議譁然攻之。十一月。復拜吏判。十二月。虜大擧入寇。直從大路長驅。而至日行數三百里。勢如驚風驟雨。十二日。賊兵渡江之報至。十四日。車駕將幸江都。令原任大臣陪廟社及嬪宮大君先行。日未午。大駕隨發。纔到崇禮門。虜騎已迫弘濟院。而以一枝兵遮陽川江邊。以截江都之路。上御南門樓下敎曰。事急矣。將奈何。大臣諸宰慌忙罔措。不知所對。公進曰。宗社存亡。在於呼吸之頃。事無可爲者。臣請以單騎馳往虜唓。見賊將問曰。十年和好。曾無釁隙。而無端動兵。潛師深入者。抑何意歟。虜若不復聽臣而殺臣。則臣當死馬蹄下。幸而接話。則相與酬酢之際。庶可少住其鋒。近京保障之地。繕城儲糧。形勢險固。莫如南漢。請上由水溝門疾馳入山城。以觀其變。上曰。若然則何幸如之。卿冒萬死投虎狼。以緩君父之急。誠可嘉嘆。公曰。李景稷慷慨多氣節。可與共爲辭命。請以爲副。上許之。公卽辭訣馳往。上輟與禁軍二十人154_461a以從。皆鳥散。從之者李公景稷及裨將一人。公到沙峴遇虜兵。遂駐馬。詰其渝盟動兵之端。故爲拖引說話。以至日昃。於是仁祖率世子及百官。遂入南漢。是日公與李景稷還都城。齎與虜問答。走人啓達於南漢。翌日將夕。回批不來。虜大怒以爲欺己。將欲害公。其中一人曰。和事未成。遽殺此人不可。卽進兵南漢。公與李景稷入城。上召見勞之。仍命公進前。執手謂公曰。卿之精忠。人所罕匹。一心奉公。終始不懈。向使如卿者多在於朝。今日國事。豈至於此乎。因出涕嗚咽。時兵不滿萬。備禦甚疏。守堞之士。不能成列。而虜騎籠山絡野。圍城數匝。縱兵四劫。軍情危懼。莫保朝夕。而攻和之議。喧然不已。虜言若許講和。當卽撤兵。大臣持兩端。媕婀不決。公曰。今日之策。唯有和與戰兩事。而欲戰則無兵可恃。言和則咸懷畏忌。奉君父。入一片孤城。將置宗社於何地。諸宰中是公言者甚多。而皆畏謗莫敢言。孤城受圍四十餘日。諸路勤王兵。望風犇潰。外無蚍蜉蟻子之援。而軍餉且盡。幷日給食。掘木根以爲薪。撤茨蓋以爲芻。天寒大雪。凍死者相繼。虜連以飛砲撲城。殆無完堞。北門之戰。我師殲焉。群心沮喪。形勢日以危急。自是始講和事。淸陰金公尙憲於廟堂。裂和書痛哭。公笑而拾之曰。朝廷須有裂壞此書之人。而如我者亦不可無也。金淸陰以爲王若出城。則恐有靑城之行。諸臣亦以此爲憂。公以爲虜人之侵我。非愛我土地。其意正在於和。斷無意外之變。不思緩禍。徒事泄泄。則一朝城陷。上下魚肉。孰與不失此機。圖存宗社乎。蓋公灼見時勢。知其必不然也。一日三城諸卒。承體府微旨。一時齊呼露刃行殿。請出送斥和臣。景象駴慘。獨西門李延陽一軍不動。公聞之。引大義責諸城大將。以折驕卒之氣。聞者悚然。時虜要我執送斥和臣。體府擧斥和臣十數人名。與三司議。並欲執送。大諫朴潢曰。此皆一時名流。何忍盡投虎口。於是體府以二人定送。初體府邀公。欲與同鈔斥和臣。公曰。此非銓曹所可預。遂不往。旣而江都陷沒之報至。滿城惶駭錯愕。相顧失色。殆無以鎭定。遂有城下之盟。卽丁丑正月晦也。四月。拜右議政。當此之時。滿目灰燼。庶事草創。公外應機變。內修政令。散民稍集。時事粗安。公新膺大拜。慨然有匡復之志。上箚陳時務十事。語皆切實。仁祖嘉納。仁祖自出城以來。每有歉然之色。公懼王心因此少解。又上一箚。推明義理。反覆開陳。仍請改官制罷郞薦省避嫌。語多切中時宜。上下其箚于備局。令政府及原任大臣六曹三司長官會同相議。而論議參差。未果盡施。識者惜之。亂定之後。酬勞恤民等事。略已講行。獨於崇隱之典。有未暇擧者。公建白令諸道錄聞陣亡將士及忠臣烈女。以議褒美之典。至於戰場胔骼。亦令募人掩瘞。自官設祭。俘人贖還者。往往乏食。顚斃中路。公啓移關西。轉粟鴨江以西濟之。初虜許贖被俘人。貴族及市井富民。急於贖其骨肉。不復計價多少。以致虜人索價。公於是設爲禁制。隨其老少貴賤。下上其價。多者毋過百金。而踰越此數者。論以重罪。以此贖還者甚衆。秋。陞左相。自往年牛疫熾盛。耕者皆以人替牛。農人告病。公嘆曰。此甚於兵禍也。申嚴屠禁。徧飭法府及諸道。仍令州郡益鑄錢鏄鉏斸。分給貧民。以備明春耕具。兵餘孑遺困於誅求。公箚陳其弊。請改貢案之謬規。蠲潰軍之徵布。愼擇守宰。察其治而勸懲之。九月。奉使瀋陽。始城下之盟。淸人旣定金幣。仍有徵兵之請。公答以不可從。至是朝家將遣使于北。李延陽時白曰。非某莫可。公遂銜命至瀋。備將君臣分義之不忍。我國事力之不逮。反復爭論。事得寢。贖被俘者數千餘口。至捐盡行費。以贖無親戚不能贖者。還到灣上。疾甚。上遣醫救視。戊寅春。始還朝。召見慰諭。公之使北也。關西邊邑之民。亂前逋糴甚多。聞公行過。齊訴馬前。公啓聞蕩其簿。夏。因旱審理。公陳箚請宥斥和諸臣。上不從。先是朝家新定制令。在鄕人不得注擬三司。而除職者不爲下諭。朝臣之請暇下鄕者。不得帶職往來。公箚陳其不可。秋。陞領相。時淸人將犯錦州界。復徵師於我。朝廷不知所以爲計。公以爲往時出城。勢窮力竭。圖存宗社。計不得已。今日助兵之擧。國可亡。義不可從。遂拒而不許。致後師期。淸人大怒。嘖言日至。擧朝恟懼。禍且不測。公陳於榻前曰。我國大臣一二人。爲助兵事死。方可以有辭於天下後世。況此事臣實主之。臣請自當。於是遂馳往自首。將行。上親見慰諭。賜豹裘一襲。資送有加。至瀋。淸人列坐衙門。招公詰責曰。今此徵兵。乃大國重事。何人敢爲沮塞乎。公曰。我身爲首相。凡本國之事。無不主管。此事專出於我。惟願一死。公不少攝。以身自當。淸主義而釋之。以此終公在相府。一不助兵。始公之赴北也。意謂此行萬無生理。藉令免死。必有拘囚之厄。備治喪諸具及四時衣服以行。親戚送于西郊。公弟參判公臨別痛哭。公笑曰。汝無哭爲。男兒何必死兒女子手乎。己卯。仍在相府。夏。上御經筵。公進曰。祖宗朝旣有常參。又有朝晝夕講及夜對。是無日不接臣僚也。近日群臣進見甚疏。下情頗似壅滯。請數開經筵。且令臣僚不時請對。以復祖宗之制。又曰。欲法堯舜。當法祖宗。而大典之法。廢壞已久。律官隨意低昂。殊失治國之本。自今以後。令六曹漢城府堂上率其屬。各自講習。以爲修擧之地。上皆從之。其後公請對奏曰。頃日筵中臣所請數接臣僚一款。快賜允許。甚盛擧也。而其後廷臣154_463b無一人請見。臣之今日登對。蓋欲以身先之也。仍曰。世稱宰相之職。不過曰調陰陽順四時而已。故身居廊廟者。率以含默爲高致。臣則以爲不然。上輔君德。下收人才。匹夫匹婦。皆得其所。然後陰陽可調。四時可順。若一切含默。務持大體。則非大臣輔弼之道。但近日該曹所管。皆歸備局。此則專付該曹。似爲得宜。上悅。參議李楘曾以諫長言事忤旨。至是特補鍾城府使。公連章力爭。遂寢成命。時仁祖寢疾經歲。而宮中有巫蠱之變頗狼藉。上疑貞明公主家。一日使內戚宰臣傳密旨於公。命致其獄。公執不可。居數日。上果下其事。公不遵上旨。遂率群臣伏閤。請移御別宮。仍請嚴宮禁。上嚴批不許。累爭不已。上震怒。特差節使赴瀋。申平城欲箚留公行。公止之。行至關西。上下敎于玉堂。辭旨極嚴。有曰頃者有一相臣。外爲大言。內懷不直。草草治獄。終不參鞫。其意難測。其事可駭。而前後臺官。不以爲非。獨於迷劣女人。兩司齊憤。至於合啓。割鷄焉用牛刀。時有一宮人。容接女巫。引入別宮。兩司合啓請屛黜其宮女。臺諫以擬律失當引避。玉堂處置請出。而批辭如此。蓋怒臺閣之不劾公也。公旣奉使命。不敢徑自引退。又不可閔默前行。在龍灣具一箚。備陳前事。仍請罷免。有曰今此宮中詛祝之變。乃擧國臣民之所共憤。而愚臣過慮。終有忌器之嫌。求厥善後。轉覺難處。今若以暗昧難明之事。輾轉連累。使公主驚憂傷心。不得盡其天年而死。則爲今日首相者。安得辭其責。亦將何以見先王於地下。故凡臣之疑難於此事。非爲公主之婢子。所以不忍於公主也。其所以不忍於公主者。非爲公主。所以不敢負先王也。亦所以不敢負聖恩也。向使愚臣徒懷一切之念。輕起大獄。甘心於宣祖之骨肉。而曾不以爲難。則是誠難信之臣。其他日負殿下。亦猶是也。殿下亦安所用之哉。又引江充,李泌事。反覆論之。公自西行疾作。到灣上。症甚危以聞。朝廷使介將事。公遂滯留醫治。庚辰春。疾勢未已。路上封章辭遞相職。二月。來住西江未幾。因質事罷官。往寓衿川村舍。夏。蒙敍入城。又以微事坐罷。壬午八月。復入相府。兼提擧內局。辭單十二度。再遣承旨敦諭。仍陳疏乞解。而天意懇迫。遂出視事。十月。因北人嘖言。有瀋陽之役。丁丑亂定之初。公備將爲宗社詘意圖存狀。移咨陳都督弘範。冀得轉聞于皇上。而海路遼遠。書浮沈不可知。欲得一信使。更暴小邦情事而未有便也。戊寅秋。林慶業爲平安兵使。江邊邏卒得一僧。獨步其名。本以我人。丙子以事往椵島。因亂不得還。轉入中國。留洪軍門承疇幕府。爲詗東事出來者也。慶業卽報于公。公使之津遣輦下。至則招見與之語。爲人慷慨善詞令。可托以事。於是公與機密宰臣議。具奏聞附諸獨步。由水路入送中國。而別構一咨。抵洪軍門。辛巳秋。中國載還我人之被俘者。僧從軍門。齎文書出來。時公已解相務。時相申景禛。令林慶業帶僧。訪公于家曰。此是國家大事。相公雖已解職。咨揭酬答。須出公手。公撰定回咨。更送獨步。蓋獨步往來時海路。必過淸國壤界。故淸人覘知之。怒我與天朝相通。遣其將于義州。詰其事。朝廷捐萬金行計。得不究。而汗之疑終未釋也。至是兵部尙書洪承疇降于淸。備言送僧事。宣川府使李烓與漢船潛商。事覺。淸將挾昭顯世子。出駐鳳凰城。縳致烓鉤問。烓欲賣國以蘄生。盡告送僧移咨事。仍書我國宰臣及名流十餘人以與虜。公名亦在其中。而我未之知也。淸人迫令諸臣來置對。將核治之。君臣上下。莫不危懼。申平城納林慶業議。以爲雖有嘖言。旣無可證之端。不如諱之。公以爲彼旣偵知漢船往來狀而有此擧。今若不以實言。是益其疑。且天下事未可知。畢竟事發。至於難諱之境。則轉加一層。將未免禍歸於君父。誠有不可言者。不如以實言之。禍止吾與林二人之死而已。以此累爭於上前。上亦以公之獨當危禍爲難。猶預不忍決。公遂赴鳳城。將行。上親見慰諭。賜五百金以助行資。仍賜貂裘。公倍道疾驅。到龍灣。參判朴潢,査問使鄭致和,尹順之諸人並來會。明燭而語。朴公曰。林慶業則職是西閫。前後裝船送僧。皆出其手。萬無全活理。今若委於林。則患可以紓。且相公之於林。輕重懸殊。而亦非有負於林也。公曰不可。旣與人同事。欲立名義於天下。今何忍臨死生地。委人以自免乎。諸公悚然嘆服。朴公出戶外泣語人曰。觀相公言。以死自定。忠臣烈士。顧不當如是耶。明發。公渡鴨江而去。林慶業亦被淸人責送。追發至高陽。乘夜逃去。公到鳳城。淸將列坐堂上。兵衛甚盛。引公于庭。詰之曰。送僧明朝。何人主張。公曰。我爲本國首相。事之大小。皆關於我。此事我獨主張。而林慶業爲平安兵使。故使之裝船以送。旣非主上所知。諸臣亦無知者。座上漢人解文字者。書公所對。送于瀋陽。遂以兵圍守。操之日甚。淸將來昭顯館所言曰。崔閣老事事自當。可謂鐵石肝腸。遠接使李景曾,平安監司具鳳瑞備將公置對說話。具實啓聞。未幾。淸主回答至自瀋。同時被拘諸宰。並被放釋。獨以公加鎖杻入瀋中。幽諸北館。北館者淸國死囚所拘也。癸未四月。移係南館。時北使到京。都民萬餘人要歸路齊呼曰。願爲東國生靈。活一賢相。北使爲之感動。公拘幽燕獄者凡四年。危端駴機。人所難堪。公處之晏如。取中庸周易。日夜不釋手。講誦探賾。樂而忘憂。不知其身在異域。嘗曰。千古聖賢相傳之蘊。盡在於此。吾所以孜孜至此。庶幾識得聖賢微旨。不虛此生矣。時金淸陰尙憲,李白江敬輿。亦同拘一館。淸陰聞公讀書聲。每歎其衰境下工之篤。公與二公。晨夕相會。或談道義。或和詩篇。笑語琅然。亹亹不倦。其後中朝人。遇我人謂曰。爾國二閣老一尙書。以事關天朝之故。被繫瀋陽。東方節義。令人起敬云。乙酉春。淸人送還世子大君及諸卿質子。於是公與淸陰白江俱得釋自瀋東歸。秋。請暇往淸州。仍寓鎭川莊。搆草舍於臥龍溪上。將爲終老計。冬。拜御營提調。陳情乞。遞。上敦勉不許。不獲已承召上來。丙戌春。湖西土賊起。大司馬李公時白領軍南下。京中且有募兵之擧。公曰。大司馬足辦此賊。何至紛紛募兵爲。箚陳其不可。未幾賊平如公言。癈姜之獄。上遽下賜死之命。臺章論執久而未允。公上箚論之。有曰易曰衆允悔亡。今姜之罪。國人皆曰可廢。而臺諫所爭。只在賜死一節。則衆志允於廢而不允於死也。請從臺臣之請。以示聖人在物之怒。上下批責之。公自往年冬得疾。至秋益危。上令御醫視之。問所欲飮食。分御饌以賜。季冬晦。症勢卒䜪。上聞之。命入直御醫往救。公家在城外。夜深城已閉。特使宣傳官持標信開門出送。仍使不離救視。掖庭人問病者相屬。或連日或間日或日再。藥餌之賜。前後相望。至令內府給薪炭。以備湯藥之資。招視疾醫官。問公病輕重。仍下敎曰。崔相病雖力。平日精神瘉人。若得良藥治之必瘳。汝其竭心視之。若是者再。一日別遣人問之。仍使聞公所對而來。公疾已革。不能言。但感泣而已。竟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于正寢。春秋六十有二。訃聞。仁祖悼甚。爲之御素膳者五日。不視朝者三日。大殿東宮俱遣使護喪。殯斂諸需。令該司庀輸。賜御衣三襲藍紅段衾各一。發內帑粟布。別致賻檖。命長生殿賜154_466b棺材。而問諸孤曰。木若不佳。當更擇賜。以公元勳大臣。例賜一等禮葬。旣成服。別遣中使。弔諸孤勸粥。旣卜葬。又遣禮官中使弔祭。命限三年給祿。勅葬師令擇吉兆。其發靷也。兩宮各遣中使。護至葬所。是年八月十九日。安厝于淸州治之北大栗里先祖完山君墓左負坎之原。前夫人仁同張氏。議政府右贊成兼兵曹判書玉城府院君諱晩之女。在室。已有令聞。及歸于公。莊和淑哲。能執婦道。公早歲嬰疾。沈淹床席者殆十年。藥餌飮食。窮不能辦。夫人盡賣容飾以供之。嘗有一婢子偸取閣中所藏。夫人見而避之曰。154_466c婢子知我得其情。心必媿赧。置而不問。守夢鄭公曄之喪。公往弔。欲以衣服助其斂襲。送言于夫人。夫人立送新裁緋袍以襚之。弔者無不贊嘆。丁卯之亂。乘船避兵。遇大風。檣楫傾摧。舟中人驚撓罔措。夫人卽取刀斷帆繂。遂席下而舟安。恒居自奉儉約。不近華靡。以丁卯九月初五日卒。春秋四十三。無子。以公弟參判次子後亮爲之子。後夫人陽川許氏。高麗陽川伯諱文宣之後。宗廟署令諱嶙之女。自幼志行端方。姿稟異凡。早歲主饋。婦道甚備。待親懿以誠款。御僮使以恩恕。閨壼之內。和而有則。公久處機要。或有154_466d夤緣蹊徑。欲以貨款者。輒正言拒之。公之秉銓也。有一相家夫人。爲其子弟求官。以書私託。夫人答云朝廷除拜間事。非婦人所敢干。其操守謹愼類此。擧二男。長後尙。次殤而夭。夫人之初歸。嚴君以公後子。未及成童。慈愛撫養。出於至誠。及有已出。視之如一。宗戚翕然稱之。以庚辰六月二十八日卒。春秋三十二。兩夫人初葬廣州之秋峴。及公之葬。皆遷祔焉。所後子後亮。前行司僕寺僉正。娶觀察使安獻徵女。生三男二女。長曰錫晉。以蔭爲典設司別檢。次卽錫鼎文科。今爲弘文館典翰。季曰錫恒進士。女長適進士尹154_467a濟明。次適申轂。次子後尙文科。今爲司憲府執義。娶咸陵府院君李澥女。無子。取錫鼎爲之子。側室女一人。爲武科僉知具鐄妻。公天資甚高。識量弘遠。外和而內剛。度偉而行方。胸中洒然。絶無偏係意。言若不出口。體若不勝衣。而容貌凝嚴。神采動人。語音如從金石中出來。年十七八。游白沙,玄軒兩公之門。兩公許以大器。深加敬重。嘗造白沙論易。白沙服其精造。語人曰。崔某易學見處甚高。非老夫所可窺。其見重前輩如此。少與浦渚趙相國,谿谷張相國,延陽李相國結爲道義交。講磨學問。交誼無間。其在朝廷。論事154_467b是非。各執所見。不苟相合。而友道至老如一。世以四友稱之。當昏朝時。廢處田野。絶意榮塗。與谿谷延陽諸公。或棲山房。或會靜室。專用力於爲己之學。日取性理諸書。潛心講究。恣意探賾。積以歲月。以就充養之功。文章學識。爲一世所推重。中興以來。際會風雲。以爲聖君在上。賢士滿朝。誠不負所學之秋。於是以陶鑄一世爲己任。及長銓衡。一時人才。無不甄拔。人稱反正後秉銓公明者。指不得先公屈。嘗於榻前。論用人之道。公奏曰。儒者國家之元氣。培國脈敦世敎。必藉於此。如金集。蚤以行誼見稱。宜備誠禮召之。154_467c且聞金長生門人宋浚吉,宋時烈。皆以學行著名。朴知誡門人中。亦有篤行之人。宜並召用。以爲崇奬之地。仁祖嘉納焉。嚴於辭受之際。雖各邑例餽。少有逾制。輒却之。有濟州通判送駿馬于朝貴。並及於公。公不受。及爲相。嘗坐備局。見壁上有錢穀記。公曰。此有司之任。命吏去之。其爲政。務大體類如此。公謀國以義。不爲一毫苟且計。明以燭其理。斷以制其事。雖衆言叢沓。而卓守所見。不少撓沮。張谿谷嘗言國家大事。裁度便宜。我或差長於子謙。而其決疑善斷。吾所不及也。每論事榻前。或不可於上意。而公執之154_467d堅。上有時厲聲不許。則輒辨析。無所摧屈。必盡其所見。一日登對。公進前白事。反覆苦爭。得請而後已。李延陽適同侍筵中。出謂公曰。今日事。不甚緊重。公何爭之力耶。公曰。事無大小。皆有是非。豈可諉以細事而苟合人主意乎。李公退而歎曰。大臣上前爭是非者。癸亥以來。惟公一人。再入相府時。手書署諸門曰。人才取舍。或可參聞。臺閣評彈。非所敢干。能言吾過。是愛我者。有益國事。幸以敎我。公立朝二十餘年。頻遭逆境。事多不稱意者。嘗喟然發嘆曰。若使栗谷白沙在世者。某之身世。不若是孤也。蓋憂時慨世154_468a之意也。庚辰罷相之後。卜居于興仁門外。數年就閑。閉門謝客。絶口不言時事。日取經書。沈潛誦習。至夜不倦。時有自得。輒箚記冊子。燕居必儼然端坐。未嘗跛倚。嘗以慕蘧扁其居曰。五十知非。雖已過矣。六十而化。吾亦庶幾。庭前一老檜挺特可愛。公嘗勉子弟曰。此檜自寸根。至於干霄。學者之立志。當如此矣。公雅志林壑。老而不衰。顧遭時不幸。國事搶攘。旋罹西河之厄。留滯異域者。且四年矣。東還之後。初欲定居湖西。以遂棲遲之願。俄而召命遽下。公以爲數年異域。違阻天陛。一瞻威顏。退尋初志非晩也。黽俛154_468b赴召。奄嬰奇疾。易簀前。搆致仕疏而未及脫藁焉。公旣深於學問。見識卓然。每當謀國論政之際。必以義理爲主。和金之議。本之經傳。參以先儒定論。裁度時義。圖存宗社。固非專出於一時權宜之計者。奏議班班可覆視也。丁丑以後。身當鼎軸。惓惓以扶大義爲心。力阻徵師之請。以却北人。密送咨奏於天朝。必達乃已。以伸小邦情事。至於再拘燕獄。歷歲幽辱而不少挫。及其密奏上聞。獲被崇禎皇帝璽書褒美之典。公之尊周大義。可與畏天保邦之道。並行而不相悖者。又可見矣。公勇於改過。樂於從善。雖賤微154_468c之人。如有規其所失者。輒誠心開納。喜形于色。與人語。襟懷坦率。不設畦畛。及其收斂身心。靜嘿改容。則不威而嚴。治家有法度。男僕不敢入於中門之內。內外斬斬。禮防甚嚴。處兄弟盡其友。敎子弟必以正。遠近宗戚。一以誠意待之。親戚皆以公爲歸。晩翁公側室有遺腹兒。公撫恤其母子。爲之鳩材架屋。置諸比隣。分臧獲廩祿。以遂其生計。里人感歎。紀勳之初。田民第宅恩賜甚優。而不曾以產業經意。往往稱貸以給。家人或以罄絶告。公笑曰。未聞有身爲宰相而憂餓死者也。不復問其有無。平居衣服飮食。自同韋布。154_468d賜裘一襲。服之十年。終不易也。及公捐館將斂。幹喪者求屛風。家無所貯。及出其平日衣服。無一華靡。見之者皆歎曰。不料相公家乃至斯也。公旣取姪爲後。後有己出。仁祖問公後事。公對曰。昔胡文定取胡寅爲後。及生己子而不使還宗。以己子爲次子。臣亦欲以此爲准矣。上許之。公於喪祭之禮。定爲家式。墓祭不用四節。只行寒食秋夕。生日不薦獻。凡祭不用油蜜果。葬不用外棺。蓋參取朱子家禮及我東儒先所論而折衷焉。公處備局久。京外文簿。雲委山積。公一覽不復考。當其覆啓。使人拈筆口授。如誦宿搆。154_469a初若不甚經意。而一揮句斷。積案若洗。取而讀之。則區畫處置。各得其宜。辭理條暢。纖悉無餘。每一篇出。備局諸公。莫不交口嘖嘖。公於文章。才分甚高。而未嘗以詞華自誇嫮。然一時宗匠鉅公。卒讓公一頭地。論者謂公之文章。文辭贍麗而義理爲主。蓋其識見甚高。輔以學術。故發於言者如此。澤堂李公謂公奏議文字。筆頭有舌。可與陸宣公上下云。所著有詩四卷,疏箚十卷,啓辭二卷,碑狀雜著三卷。刊行于世。周易語孟記疑卦變說綱庸學管見藏于家。張谿谷每字公而稱之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之154_469b臣。又曰。子謙之南漢主和。以箕子爲心者也。李白江曰。當南漢將士脅君之日。國勢危疑。而賴有完城一言。不至生變。臨事剛毅。人所不可及也。又曰。屈子之忠。過於忠者也。完相之忠。亦過於忠者也。趙浦渚祭公文曰。兄之敏銳之才。深妙之文。絶出等夷。及至臨難見危。勇於自當。視身如鴻毛。辭直理正。不攝不絀。此兄所以大過人者而歲寒乃見也。雖叔孫昭子之見執於晉。何以過之。始則悶其陷不測之危。終則喜其不可奪之節。足有辭於世也。李延陽論中興人物。必以公爲稱首。嘗以爲完城事業可言者多。而撮其154_469c大者有八。癸亥反正。協贊匡復之業一也。丙寅議禮。能明父子之倫二也。丙子之亂。單騎赴敵。以緩賊鋒三也。南漢之圍。冒謗主和。以存宗社四也。戊寅徵兵。以義拒之。視死如歸五也。送僧天朝。卒踐危機。而以身自當六也。處人骨肉。務欲全恩。而不避觸忤七也。處心行事。廓然大公。而不染朋比八也。嗚呼。先祖立朝始終。槪具於此。而延相所論八條。尤詳而核。顧奚待於一二譚哉。記仁祖禮陟祔廟之日。朝廷議選從享功臣。至於六人。而公不得與焉。李延陽上箚爭論。請以公並享。而事未果施。今上之二年丙154_469d辰秋。命選顯宗室從享名臣。仍問故典追享有無。命考諸列聖實錄。得世宗朝以宜城君南誾追配太祖室故事。遂下敎曰。故相臣崔鳴吉爲國忠誠。同符古之賢臣。及丙子之亂。南漢受圍之日。獨持和議。能使三百年宗社。環東土方數千里。旣亡而復存。其遠慮善圖。孰過於此。故相臣金堉德業冠一世。爲國安民。百世可尙。斯二臣者。禮宜配享廟庭。血食千秋。而俱未與焉。予甚慨惜。今觀國朝故事。亦有追享之規。其令禮官議于大臣。未及獻議。前參議李沃上疏論故相鄭太和從享新宮及先祖追配154_470a世室之不可。諫院繼論之。再啓而命寢公追享。噫。先祖生而竭忠於王室。沒不得配食於淸廟。識者咸以爲聖朝一闕事。幸賴聖上追念勳勞。有此曠世之恩命。而群小齮齕。使明主懋績褒忠之盛意。旣發而旋格。豈不痛哉。嗚呼。先祖之沒。已過三十餘年。尙未能謀所以易名而壹惠者。非敢緩也。蓋有待也。懼日月寢遠。事蹟愈昧。謹摭族出官歷事始終而敍次如右。以俟立言君子之發揮焉。庚申八月穀朝。孫男中直大夫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漢學敎授錫鼎謹狀。
154_470b明谷集卷之二十九

 

明谷集卷之二十三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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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碣銘
高祖妣贈貞敬夫人宜寧南氏墓碣銘 a_154_3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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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人姓南氏。諱某。系出宜寧。八代祖諱在。太祖朝開國功臣。領議政宜寧府院君。生景文。兵曹議郞。贈領議政。生智。左議政。生倫。觀察使。觀察生府使憬。是爲夫人之高祖。曾祖諱致元。尙成廟慶順翁主。封▦城尉。號琴軒。王父諱沂。敦寧參奉。父諱尙質。字仲繪。養德不仕。贈戶曹參議。母曰李氏。卽我穆祖兄注簿諱英襲之後。安東府使瑀之女。年若干。歸于崔154_324b氏。贈左贊成諱秀俊。其配也。崔亦三韓大姓。舅曰贈判書諱嶪。平度公有慶之後。贊成公年四十而早卒。參議公無子。只有一女。以託後事。夫人以萬曆丙申六月初二日卒。後贊成公之歿二十四年矣。夫人擧二男二女。男長曰起南。卽我曾祖。文科。官至通政永興府使。象村申相公誌其幽堂。谿谷張相公銘其顯刻。次起源。僉知中樞府事。二女皆早歿無子。曾祖有四男。長來吉。文科工曹判書完川君。其次鳴吉。文科領議政。號遲川。諡文忠。文章勳業冠一時。次惠吉。文科吏曹參判。次敬吉改名晩吉。中樞經歷。一女適參154_324c判韓必遠。側出男正吉。折衝護軍。僉樞公有二男。廷吉通德郞。獻吉宣敎郞。女適承旨尹得說。側出男二人女一人。完川君生一男後胤。魁文科。官止持平。三女適主簿李齊賢,郡守尹鴻擧,掌令李堥。議政公初娶玉城府院君張晩女。無子。以弟參判公第二子後亮爲後。卽我嚴君也。今爲忠勳府都事。繼室宗廟署令許嶙女。有二男。後尙文科。今爲弘文館副校理。次殤而夭。側出女一人。參判公生三男。長曰後定縣監。贈左承旨。其次卽嚴君後遠。敎官二女適參奉宋以鉉,進士鄭鈗。側出男三人女五人。經歷一男後寔。154_324d筮蔭仕。女三人。通德一男後徵。女四人。宣敎出爲宗叔起門後而無子。以族人之子爲後。尹得說一男三女。內外雲仍不盡記。嗚呼。完山之崔。自得姓來。世襲冠冕。逮我高祖。歷五世不達。曾祖永興公甫成童而孤。崔氏之緖。不絶而僅續。世又以淸素傳家。家事益落。殆無以復振。而夫人鞠遺孤甚劬。以底有成。子姓詵詵。皆知服詩禮之訓。簪笏聯翩。俾不墜家聲。凡我嗣人。寧可不知其所自歟。惜乎。年代旣遠。事蹟無徵。梱範徽音。十不能記其一二。豈非後承之恨哉。始高祖窆于高陽郡之西。而夫人之葬。在楊州治之東。欲154_325a改卜他山而合祔焉。臺史曰。兩山並吉。不必遷。遂寢不遷。銘曰。
維楊東板谷里。水回環山秀異。坤其面艮其背。百世之後。知其爲崔相遲川之王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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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碑銘
領議政文靖洪公神道碑銘 a_154_31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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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瑞鳳。字輝世。號鶴谷。姓洪氏。其先蓋中國人。黃巢之亂。浮海東來。家于唐城。仍籍焉。有諱悅。佐麗祖。封匡翼效節獻襄定難弘濟奮庸亮采保乂經濟功154_313b臣。位三重大匡太師。其後有諱灌。司空尙書。當資謙之亂。以身殉節。諡忠平。有諱奎。以御史中丞。擒賊臣林惟茂。策功。諡匡定。終始勝國。勳伐舃奕。有諱敬孫。我成宗朝。守成均館事。能文章。與李樗軒石亨。同撰大學衍義補以進。寔公五世祖也。高祖諱潤德。奉常副正。贈吏曹參議。曾祖諱係貞。藝文館待敎。贈吏曹判書。祖諱春卿。黃海道觀察使。號石壁。以文章名世。考諱天民。承政院都承旨。贈領議政。妣興陽柳氏。高麗侍中濯之後。濟用監主簿樘之女也。公以隆慶壬申十二月廿一日生。先是卜者占之。得彩鳳飛雲154_313c之兆。生而明秀。器度異凡。三歲而孤。六歲。就外傳。自知屬文。季父益城君聖民命以猫字作句。公應聲曰。猫鳴驚千鼠。益城大奇之。每歎曰。吾兄仁德。未享遐福。興吾宗者。其在此兒乎。年十四。讀書江上。鄭松江來訪。令公賦詩。援筆立就。意多箴諷。松江大加稱賞。庚寅。中司馬。壬辰倭寇。奉柳夫人。入關東。先是公知亂將作。經營避地計。時方昇平。人多笑之。後乃服。芝川黃公。與其子獨石公。承朝命。陪兩王子。向北關。獨石。卽公外舅也。相遇於鐵原。要與北上。辭不行。及芝川公在北遭難。一行無得免者。衆皆推其先見。甲午。154_313d擢文科別試選。隷承文院。陞成均館典籍。庚子。拜司諫院正言。入玉堂爲修撰。移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選知製敎。辛丑。詔使顧天峻出來。月沙李公爲儐使。極選僚佐。朴南郭,李東岳及公爲從事官。石洲權公以白衣從行。車天輅,金玄成爲製述官。文章之盛。爲一時所艷稱。時一番人用事。鄭仁弘爲都憲。劾公罷職。癸卯。拜禮曹正郞。轉司藝。差京畿左道量田御史。兵荒之餘。經界紊亂。公隨地均賦。輕重不失。畿民賴之。甲辰。出牧星州。居三年罷還。戊申。拜校理。自司成移應敎。賜暇湖堂。中重試甲科。陞堂上。己酉。差都154_314a司迎慰使還。拜江原道觀察使。公在星州。治頗尙嚴。及莅關東。見民事凋瘵。尙寬仁。行部。屛騶從舍車而乘馬。遇之者不知其爲按使也。明黜陟減征徭。政化大行。庚戌。拜承政院同副承旨。兼承文副提調。以禮曹參議。差聖節使赴燕還。遇建州夷入貢者。先是夷人遇我使行。輒肆劫掠。至是駐馬招譯胥。只問燕中蔘價。一行皆賀。公愀然曰。夷虜劫掠。乃其習性。今者鈐束如此。可見法令嚴明。此天下之憂也。壬子。又拜承旨。光海引見平安兵使李守一。公同侍前席。陳建夷可憂狀。仍言中國城制甚悉。光海謂守一曰。備154_314b禦之策。卿宜盡心。城池規劃。宜一如承旨所言。守一改築寧邊城。是年夏。誣獄起。獨石公罹禍。公陳疏乞免遭罷。自是絶意世事。杜門屛居。公之外黨。方乘時用事。勸公隨世低昂。怵以利害。嚴辭斥之。公聲望素重。雖屛廢。每當有事。輒議起用。毛文龍始至。儐接難其人。備局請以公差送。爲媢嫉者所沮。又以詔使將至。欲藉以華國。請起廢用之。一時坐廢諸人。因此多被甄收。而獨公及北渚金公,淸陰金公愚伏鄭公。竟寢不用。時彝倫旣斁。昏亂日甚。宣廟舊臣。皆屛散在外。公日夜憂憤。與北渚金公。密謀匡濟。奉仁廟154_314c正位。寔天啓癸亥三月也。卽拜兵曹參議。旋移吏曹。遞拜大司諫,右副承旨。兼槐院副提調。秋。策勳賜奮忠贊謨靖社功臣號。進階封益寧君。轉左副承旨右副。例兼刑房。時大獄連起。公隨事敷奏。多所平反。上甚任之。在銀臺凡二年。終不換房。甲子。西帥适反。臨津守兵潰。上倉卒南狩。命公扈慈殿。仍以標信付公曰。臨急便宜從事。公受命而出。馳至崇禮門。夜已深。守門者皆散去。城門閉。大駕且至。前隊阻不得出。人馬騈闐。公撞破門鎖。門旣開。軍馬決驟無阻。公先至漢江。舟者中流。呼不應。武人禹尙中從154_314d公行。素多力能水。使往取之。尙中卽游至江中。擊仆船人。得五六艘。乃得利涉。時夜未晨。將士與從官。紛挐將潰散。公謂大將申景禛曰。至尊尙未登舟。賊若猝逼。則不可言也。公宜急收軍伍。陳于高阜。建旗鼓明燈燭。賊雖來。我有備。必不敢輕犯。申公乃結陣鳴柝。衆心乃定。及賊平。進嘉義。爲右承旨,兵吏參判。兼同知經筵,成均館事,世子右副賓客。仍兼籌司堂上。俄拜副提學。移都承旨。丙寅。詔使姜曰廣出來。又以副學差鐵山迎慰使。丁卯之亂。上幸江都。以都承旨從。秋。以副學拜,大司諫,大司成,吏曹參判。戊154_315a辰。柳孝立等謀逆。遣其黨。載兵器入城。刻日犯闕。危機甚急。許䙗聞其謀。走報公。公急通于廟堂。設機擒捕。諸賊皆伏誅。錄勳賜竭忠效誠炳幾寧社功臣號。超階正憲。拜漢城判尹。兼知義禁。俄拜大司憲移禮曹判書。己巳。拜議政府右參贊。兼弘文提學。復改禮判。兼知經筵。時國家連有事變。軍需罄竭。諸衙門各自興販射利。多擾民。公筵白自古軍興之時。需用無極。故必先理財。此雖不可廢。然方今民窮財竭。貿販多門。民不能堪。宜停罷以紓民力。其言剴切。識者韙之。羅公萬甲以銓選通塞。語侵銓長。北渚相公上154_315b章論之。上疑其專擅。遽命竄流。谿谷張公陳箚救之。上怒。出補羅州。以此朝論有岐異之形。公陳于筵中曰。萬甲言語間。雖或差失。其心斷無他。豈有專擅之事。至於張維則操心和平。處事信實。無一毫私心。亦豈偏護萬甲。今此流放斥補。甚駭瞻聆。今若洞察兩臣心事。平心處之。則允合於群情矣。上嘉納。累拜大憲,禮判。庚午冬。拜吏曹判書。辛未。仁穆大妃違豫。旣而平復。以侍藥勞陞崇政。時上將追崇章陵。廷臣交爭之。延平李公貴素主追崇之議。傅會者見斥於政注。延平以此怒銓地。遂於上前斥154_315c公曰。當此之時。洪某豈可爲銓長。仍詆公至誤擧注擬事。大臣陳其非實。上燭其事狀。因公辭疏。累下溫音。公連章力辭。而疏中稱朴彭年忠臣。上怒命推考。因此遞職。癸酉。拜左參贊。移禮判。甲戌。拜兵曹判書。兼藝文提學。詔使盧惟寧至。公爲館伴。乙亥。元宗祔廟禮成。以都監勞陞崇祿。復拜禮判。兼兩館大提學,判義禁。是歲變異疊見。朝野以爲憂。公於講筵極論曰。古云元日至人日。多陰晦則最可憂。今年正月以後。絶無開朗之時。日月告凶。示警非常。社稷省牲時。祭牛逬出。逼傷祭官。此亦古所罕聞。傳曰。154_315d不見其形。願察其影。變陰沴爲休祥。只在聖上一念。且廓開言路。乃當今急務。近來言者固多狂妄。然不計利害。惟懷一端憂愛。何至深罪。請並宥還。不納。時因爭論廟議。被譴逐者。久未蒙放。故公言如此。其七月。京城大風。折拔太廟垣中木七十餘章。公又進言。風動物也。多係兵象。其應尤速。宋劉錡爲將。遇暴風曰。此乃虜至之象。整軍以待。得大捷。辛卯。京都有風變。迎恩門鐵鎖中斷。其明年。倭寇大至。今虜釁方生。風災甚於辛卯。不可無先事之戒。縷縷不已。時廟算劻勷。卒不得有所施行。丙子。進拜議政府右154_316a議政。仁烈王后喪。爲摠護使。俄陞左議政。司諫趙絅上章誣公。以受人賂馬。上疑之。令政院詰問其言誰所受。絅不肯首。上欲下絅吏。詢諸大臣。北渚金公及仙源金公尙容以謂臺諫雖重。不過與宰相等耳。今絅所論大臣事非細故。不可不究覈處之。於是上遂命下吏推問。時公出江上。陳章待罪。聞絅就獄。上疏言絅不的指言根。亦有所守。國家二百年待臺諫之道。緣臣壞了。後雖有可言。臺諫以言爲戒。緘口不言。則非國家之福也。言者亦以逮問臺官爲未安。遂寢不問。淸陰金公時爲吏判。上疏力辨陳絅154_316b因宿嫌構誣。仍極言人心世道之不可救。棄官歸田。公辭疏十餘上。呈告四十度。始遞。是年十二月。淸兵大來。上將避兵。復拜公左議政。扈駕入南漢。翌日有移蹕江都之議。命公留守本城。大駕纔出而復入。不果行。旣而長圍合。上命公往虜陣議和。聞命卽行。自此淸人數至城下。求見我人。上輒命公出應。隨事周旋。咸中機宜。凡往返十數。丁丑正月晦。和議成。隨駕還都。三月。將送使瀋陽。上引見大臣六卿曰。助兵一事最難處。將何以應之。公對曰。我國與大明。有父子之義。一朝以兵刃相加。義所不忍。不154_316c佞先祖遲川公所對。與公一致。朝廷初頗堅拒。末後所處。卒不能如公言。俄遭內艱。戊寅。倭書來。意在探試朝廷。時當大亂之餘。人情洶洶。公自以義同休戚。不可以身在憂服爲嫌阻。遂疏陳接應備豫之道。上優答。己卯服闋。拜領議政。庚辰冬。淸人疑我國密通明朝。責致首相及吏判都承旨於灣上。旣至。拘係數月。無所撓屈。淸將歎服。辛巳春。以風疾乞免。不許。壬午。固辭得遞。甲申。復拜領相未幾。因北渚拜相。公降爲左相。乙酉。昭顯世子新喪。元孫沖弱。儲位久虛。上以孝宗有聖德。欲立爲世子。詢于群154_316d臣。領相對無異辭。公進曰。聖意以宗社爲重。有此非常之問。而創業之後。世承宗統。是守經之道。判府事李公敬輿曰。左相之言。萬世之經常也。上不納。是歲熒惑入東井。星官言大臣厄。七月。公屬疾危苦。上遣右承旨問疾。內醫看病。八月八日考終。享年七十四。訃聞。上震悼輟朝三日。遣都承旨。致弔問孤。加賜賵襚。其十月。官庀襄事。葬于積城治南先塋側坐壬之原。從治命也。公狀貌不及中人。而資性簡重。識量深遠。早以國器稱。平居冠帶必飭。未嘗設惰容。對人言笑樂易。和氣藹如。然見人涉於非義。若154_317a將浼焉。事母夫人。左右無違。及丁憂。年垂七十。猶致毀。饋奠必躬親。人或勉其節抑。公曰。三歲失怙。未行喪制。今何忍以年老而不自盡乎。事季父益城公。移孝盡誠。敦族婣恤朋友。曲有恩義。在朝或遭橫逆。初不芥滯於胸中。延陽李相公時白兄弟。以延平之故。頗有自阻意。公待之坦然。每稱延陽忠厚有才。薦爲守禦使。其後延陽兄弟。俱有危疑事。禍將不測。公極意救解。事竟得已。洪都憲茂績嘗以事侵公。公則夷然戒子弟曰。臺諫言雖過當。不宜較量。爾輩愼勿置懷。洪公聞而語人曰。洪相度量。人不可及。再策勳。恩154_317b賜之外。無所增益。爵位崇顯。被服不用華美。母夫人嘗謂曰。汝年位已高。雖服錦段。非不衷也。對曰。素無才德。濫冒至此。每思之惕然兢懼。服飾華侈。心所不欲也。爲文章。遒健奧深。尤長於詩。自成一家。李東岳詩名振一世。見公詩。輒瞠然推服。與北渚淸陰二公。童丱交游。並躋卿相。迭秉文衡。一時稱爲盛事。所著述多逸於兵燹。遺藁若干卷刊行于世。噫。公當宣廟煕運。早蜚英館閣。旋値昏朝。錮蟄累年。及其遭遇風雲。位極台鉉。艱危之際。勞勩弘多。齒爵齊尊。功言並偉。允爲上下所倚重。顧以時丁板蕩。鍾標季百六154_317c之厄。嘉謨英猷。竟不得大有展布焉。然觀人必於晩節。當建儲之議。在朝諸公。率多順旨。其能守經毋撓者。獨公與白江數公而已。非夫斷斷之心。不恤一身之禍福。孰能如是。嗚呼。此可以觀公風節矣。夫人長水黃氏。從封儷美。名相翼成公喜之後。祖府院君諱廷彧。考承旨諱赫。卽芝川,獨石也。後公一年生。先公一年沒。葬與公同塋異室。夫人柔和有則。奉君子無違行。姑柳夫人性嚴。敬愼愉適。未嘗少忤。丁丑之亂。避兵于江都。見虜兵。以刀自刺仆船中。救之堇穌。時子婦李,外孫婦羅同船。見夫人剚刃。皆赴海。兩孫子154_317d儀,子同。年方髫齔相隨溺死。節義相聯。亦可見公之家法矣。擧一男一女。男命一文科歷淸顯。官至觀察使。女適大司憲朴潢。觀察初娶完山李氏。卽節婦。生一女。適進士趙相鼎。再娶綾城具氏。生二男一女。男處宇縣令。處宙通政府使。女適,判決事洪萬恢。朴都憲四男。世相郡守,世柱署令,世桓,世楠。處宇三男。九澤九采判官。次九行。女適生員金昌緝。處宙二男。九鼎縣令。次九章。三女適士人鄭夏臣,生員柳時模士人朴敍揆。趙相鼎二男。仁壽都事,大壽舍人。二女適僉正李成朝,僉正沈廷協。洪萬恢一男重聖參奉。五154_318a女適監司李㙫,士人尹漴,監司李光佐,奉事趙尙慶,士人鄭錫疇。世相四男。泰辰參奉,泰春監役,泰淳大司成。次泰珍。女適佐郞韓配義。世柱無子。以泰春爲後。世桓二男。泰延縣監。次泰進。世楠一男泰遜吏曹參議。女適左議政金昌集。內外曾玄摠四十餘人。錫鼎生晩。不及登門望顏色。以祖世同盟之故。契好不替。每覽遺集。傾仰實深。殆若洪鐘之在序。熒斗之垂天。公孫府使君屬余以徑樹之文。義不敢辭。謹敍次而系以銘。銘曰。
洪氏之先。實自中國。浮海而東。南陽是宅。有佐麗祖。154_318b策功匡翼。簪組蟬嫣。世載名德。亹亹成均。厥有詞學。補衍經義。成廟動色。內翰無年。是生石壁。再鳴以文。知申繼跡。公濟厥美。受材英特。鶱于科試。翔于禁掖。儐幕竗選。公應其辟。湖堂累世。衆所罕覿。方面司喉。綽有裨益。運値昏淫。倫常斁蝕。公奮其忠。與建大策。翊扶聖主。鞏安社稷。逆帥詬犬。三京霧塞。王狩于南。公執羈靮。遂長論思。遂參籌劃。迺師儒宮。迺賓儲席。克淸內訌。重勘勳籍。遞秉兩銓。振揚淹側。文苑主盟。頡頏谿澤。請開言路。宥還罪謫。思遏利源。保養民力。恒陰以風。憂在兵革。先事陳謨。證曏古昔。154_318c上察忱誠。人推遠識。相府潭潭。公乃峻陟。有評以衊。有辨以晢。困敦之冬。虜騎充斥。彼砠漢山。從王矢石。易子爨骸。禍迫朝夕。奔走先後。益殫勞勣。北人徵師。錦州之役。同我先祖。奏對懇激。父母之邦。服事二百。再造洪恩。寧忘萬曆。兵刃相加。我心攸衋。時際艱虞。義深休戚。邊情實封。豈嫌憂服。西船泛海。大致隣嘖。公以首相。係于徽纆。元良新喪。望屬季歷。議多順旨。公對以直。忠鯁之操。老而彌篤。象緯告災。離日俄昃。隱卒有加。哀榮備極。公有勳業。著在竹帛。公有文章。粲如珪璧。莘莘後承。善慶攸積。子壻並顯。義154_318d烈騈植。峽岫峨峨。寔藏公魄。我作銘詩。昭玆千億。

 
明谷集卷之二十三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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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碣銘
高祖妣贈貞敬夫人宜寧南氏墓碣銘 a_154_3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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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人姓南氏。諱某。系出宜寧。八代祖諱在。太祖朝開國功臣。領議政宜寧府院君。生景文。兵曹議郞。贈領議政。生智。左議政。生倫。觀察使。觀察生府使憬。是爲夫人之高祖。曾祖諱致元。尙成廟慶順翁主。封▦城尉。號琴軒。王父諱沂。敦寧參奉。父諱尙質。字仲繪。養德不仕。贈戶曹參議。母曰李氏。卽我穆祖兄注簿諱英襲之後。安東府使瑀之女。年若干。歸于崔154_324b氏。贈左贊成諱秀俊。其配也。崔亦三韓大姓。舅曰贈判書諱嶪。平度公有慶之後。贊成公年四十而早卒。參議公無子。只有一女。以託後事。夫人以萬曆丙申六月初二日卒。後贊成公之歿二十四年矣。夫人擧二男二女。男長曰起南。卽我曾祖。文科。官至通政永興府使。象村申相公誌其幽堂。谿谷張相公銘其顯刻。次起源。僉知中樞府事。二女皆早歿無子。曾祖有四男。長來吉。文科工曹判書完川君。其次鳴吉。文科領議政。號遲川。諡文忠。文章勳業冠一時。次惠吉。文科吏曹參判。次敬吉改名晩吉。中樞經歷。一女適參154_324c判韓必遠。側出男正吉。折衝護軍。僉樞公有二男。廷吉通德郞。獻吉宣敎郞。女適承旨尹得說。側出男二人女一人。完川君生一男後胤。魁文科。官止持平。三女適主簿李齊賢,郡守尹鴻擧,掌令李堥。議政公初娶玉城府院君張晩女。無子。以弟參判公第二子後亮爲後。卽我嚴君也。今爲忠勳府都事。繼室宗廟署令許嶙女。有二男。後尙文科。今爲弘文館副校理。次殤而夭。側出女一人。參判公生三男。長曰後定縣監。贈左承旨。其次卽嚴君後遠。敎官二女適參奉宋以鉉,進士鄭鈗。側出男三人女五人。經歷一男後寔。154_324d筮蔭仕。女三人。通德一男後徵。女四人。宣敎出爲宗叔起門後而無子。以族人之子爲後。尹得說一男三女。內外雲仍不盡記。嗚呼。完山之崔。自得姓來。世襲冠冕。逮我高祖。歷五世不達。曾祖永興公甫成童而孤。崔氏之緖。不絶而僅續。世又以淸素傳家。家事益落。殆無以復振。而夫人鞠遺孤甚劬。以底有成。子姓詵詵。皆知服詩禮之訓。簪笏聯翩。俾不墜家聲。凡我嗣人。寧可不知其所自歟。惜乎。年代旣遠。事蹟無徵。梱範徽音。十不能記其一二。豈非後承之恨哉。始高祖窆于高陽郡之西。而夫人之葬。在楊州治之東。欲154_325a改卜他山而合祔焉。臺史曰。兩山並吉。不必遷。遂寢不遷。銘曰。
維楊東板谷里。水回環山秀異。坤其面艮其背。百世之後。知其爲崔相遲川之王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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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春。予所蓄馬暴死。外舅春軒聞之。有書云。袖詩來。馬可得也。因以是詩獻。春軒先生。完山崔氏。諱文度。字義民。門下侍郞平章事。贈諡文定公甫淳之後。文定娶祗侯秦仲基之女。生尙舍奉御允稱。奉御娶左司諫黃驪閔元■之女。生戶部尙書輸林學士致仕佋。學士娶左僕射呂水朴倫之女。生贊成事致仕毗一。贊成事娶司宰卿靈山辛洪成之女。生都僉議贊成事光陽君贈諡文簡公誠之。文簡娶政堂文學義城金晅之女。生先生。至正五年乙酉。先生年五十四。以匡靖大夫僉議參理卒于官。贈諡良敬公。 a_003_24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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塊處依依類楚囚。賸將心事更添愁。傍花行樂雖堪廢。束帶趨朝詎可休。得馬愧居張籍後。作詩先被晉公求。聖門也有乘肥者。款段還嗤馬少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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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七代祖秉節校尉宣傳官府君墓誌 a_154_40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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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山之崔。肇自純爵。神虎上將。世閥赫奕。選部得枰。文貞諱宰。孝謹剛直。名載麗史。平度有慶。參贊議政。旌孝奬廉。自號竹亭。敬節士康。位躋贊成。四世傳序。遹駿厥聲。是生承宗。司饔僉正。娶于驪興。父曰閔犇。寔公考妣。內外名聞。公諱孝恭。字曰令德。薦授宣傳。武階秉節。嗟有材力。夭圽無年。配全義李。太師其先。154_402a孝靖貞幹。純行棹楔。父曰一仝。司憲監察。公葬果川。漢江之南。夫人異堋。楊州檜巖。長子奉孫。無嗣不官。其季命孫。從仕郞銜。婦翁謂誰。鈴川尹磻。一男曰嶪。凌室別提。累贈吏書。其配申氏。仲舟之後。厥考承澡。男長秀英。筮仕司饔。次曰秀俊。贈官貳公。女李元輔。金昱其壻。饔參二胤。生員起祖。無子有女。起門典簿。門承宗祀。獻吉爲後。贊成二男。長曰起南。歷敭淸顯。中舍侍講。卒官永興。貤爵上相。其次起源。陞秩僉樞。永興四子。來吉判書。鳴吉相國。靖社元功。是號遲川。卒諡文忠。惠吉亞銓。追贈吏判。晩吉樞經。女韓必154_402b遠。折衝正吉。是其側產。僉樞二男。廷吉獻吉。女尹得說。文科按察。曰鳳與誼。二人庶出。雲來以下。只錄顯官。後胤文學。龍榜魁元。後亮左尹。襲封完陵。後尙文譜。翰林臺弘。錫鼎不肖。忝登台鉉。錫恒崇政。連長兩銓。昌大銓弘。副學大成。大家餘業。累世不振。仁必有後。天道詘信。不食之報。可徵嗣人。來孫後寔。祔葬先山。厥考樞經。移厝近阡。體魄不孤。神理則安。燔土埋辭。以昭永年

 

宋子大全卷一百九十四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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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平昌郡守崔公墓表 a_114_37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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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故家右族。能世舊德者。有完山崔氏家平昌公。114_372b尤不失靑氈素業。兼有絶藝。自幼爲稱家兒。其墨妙入神。見賞於宣廟。恨不以爲翰林。朱詔使之蕃願與相見。見其揮灑飛動而極稱之。由是雖爲蔭仕。而名聲藉甚。平看玉堂鑾坡矣。氣度淸曠。操履嚴重。孝親友弟。夫婦如賓。其家法蓋不失風火嗃嗃之象矣。嘗渡江遇風船幾覆。整坐如常。旁舟敗沒。篙工不拯其漂浮者曰俗忌也。公疾聲大呵曰。人死敢言俗忌乎。其人竟得以活。人服其氣定而心仁也。蓋公喜讀心經近思義理諸書。其所得所養者如此。外官時。復父母仇者。當以殺人論死。公曰此義殺也。若殺此人。114_372c世敎傷矣。上官不聽。公卽棄歸。此幾於周夫子置手版風彩矣。公亦嘗好觀一雙鵝。及解官。依留犢故事。不以籠歸。亦見其標格也。百姓立鐵碑以頌之。始祖高麗神虎上將軍純爵。本朝益爲名族。平度公有慶,揚度公士儀。仍父子以廉潔載國乘。至大司諫諱鐵堅。卓犖偉人也。事載象村所撰墓碣。娶晉州鄭氏。生公。諱行。字之源。崇禎丁丑。年六十八而終焉。其官自司饔參奉。平進累轉司憲府監察。爲江東,牛峯二縣監。麻田,寧越,平昌三郡守。墓在楊州松山先塋。配沈氏。其考監司岱。李氏其考校理尙弘。皆別葬。男繼114_372d昌,繼興,繼雄。繼雄府使。女壻蓬萊君炯胤,僉樞張仲仁,李義老,安定邦,鄭時廣,府使朴敏道,李亨業,李有淓。長男及二女。沈氏出也。長房生寬。今爲大司憲。追恩贈公吏曹參議。次宣,憲。次房生實直長,定縣監。季房生寔,㝢。寔爲縣令。公好山水遊。每有超然出塵意。不屑屑於俗務。故以其才藝氣槩。終於下僚。今大憲蔚然爲盛朝名臣。豈公遺澤也耶。


 

 
전라도(全羅道) 원문이미지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옥야현(沃野縣)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진관】 군(郡)이 6이다. 익산(益山)ㆍ김제(金堤)ㆍ고부(古阜)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여산(礪山) , 현(縣)이 11이다. 정읍(井邑)ㆍ 흥덕(興德)ㆍ부안(扶安)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금구(金溝)ㆍ용안(龍安)ㆍ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
【관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성씨】 본부(本府) 이(李)ㆍ최(崔)ㆍ유(柳)ㆍ박(朴)ㆍ전(全)ㆍ경(庚)ㆍ한(韓)ㆍ백(白), 방(房) 내성(來姓)이다. 양(梁) 주계(朱溪). 장(張) 결성(結城). 김(金) 모평(牟平). 우주(紆州) 박(朴)ㆍ이(李)ㆍ정(鄭)ㆍ황(黃)ㆍ최(崔)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홍(洪). 양량(陽良) 백(白)ㆍ나(羅)ㆍ강(康)ㆍ유(劉). 이성(利城) 이(李)ㆍ백(白)ㆍ정(鄭)ㆍ손(孫)ㆍ진(陳)ㆍ최(崔). 두모촌(豆毛村) 책(冊)ㆍ최(崔)ㆍ이(李). 이성(伊城) 조(趙)ㆍ배(裵)ㆍ장(張)ㆍ구(仇)ㆍ염(廉)ㆍ고(高)ㆍ온(溫). 옥야(沃野) 임(林)ㆍ장(張)ㆍ염(廉)ㆍ구(仇)ㆍ양(梁). 경명(景明) 김(金)ㆍ임(林)ㆍ배(裵)ㆍ인(印).
【풍속】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주기(州記)에,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고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하였다. 백성들이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볼 만하다.”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자는 대부분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한다. 이경동(李瓊同)의 기(記)에 있다.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물건을 싣는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형승】 국가의 풍패(豐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 윤곤(尹坤)의 기(記)에 있다. 주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모두 서거정의 기에 있다. 안팎으로 산과 개천이 있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안팎의 산과 강이 판적에 들어 있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止山)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 완산(完山)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 일명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는데, 읍을 설치한 후로부터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덕산(高德山)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 무악산(毋岳山)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 기린봉(麒麟峯)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작은 못이 있다. 청량산(淸涼山) 부의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방산(西方山) 부의 동북쪽 25리에 있다. 가련산(可連山)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사람들의 말이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가련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여현(礪峴) 부의 남쪽 42리에 위치한다. 웅현(熊峴) 부의 동쪽 47리, 진안현(鎭安縣) 경계에 있다. 서고산(西高山)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태실산(胎室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여기에 예종(睿宗)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 황화대(黃華臺)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읍인(邑人)들이 봄ㆍ가을로 올라가 제사술을 마셨다. 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하였다. 안천(雁川) 주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즉 고산현(高山縣) 남천(南川)의 하류가 주계(州界)에 이르러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이 되며,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와서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남천(南川)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금상 4년에 시내를 막고 돌을 쌓으니 길이가 6천 자나 되었다. 남천(南川)의 근원은 여현(礪峴)에서 나오는데 부의 동남에 이르러 성을 둘러 북으로 가련산(可連山)을 지나 추천이 되고, 무악산(毋岳山)에서 나온 물과 합해서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 다시금 고산(高山) 웅현(熊峴)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洄浦)가 되며, 조수(潮水)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옥야(沃野) 이성(利城)을 지나서 신창진(新倉津)이 되었다. 신창진(新倉津)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김제군(金堤郡)과 만경현(萬頃縣) 조에도 있다. 덕진지(德眞池)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西北方)이 비어 있어 전주의 기맥(氣脈)이 이쪽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기운을 멈추게 하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천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한번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쳐 있네. 옛부터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 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 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깊고 맑은 물에 허공이 비쳐 있고, 덕을 쌓았으니 제물(濟物 사물을 구제하는 것)하는 공(功)을 갖추었네. 이곳에 참 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뇌풍(雷風)을 찾았으리오.” 하였다. 공덕지(孔德池)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판토포지(板吐浦池)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굴연(堀淵)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돌기둥 여섯 개가 있는데 녹담정(綠潭亭)의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신증』 발산(鉢山)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우락암(于樂巖) 옥야창(沃野倉) 북쪽 2리에 있다. 그 위에 50여 명이 앉을 수가 있다. 봉황암(鳳凰巖)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황학대(黃鶴臺)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석봉(石峯)이 솟아 있고, 큰 시내가 끼고 돌아간다. 전하는 말에 황학(黃鶴)이 놀던 곳이라 한다.
【토산】 석류(石榴), 종이 상품(上品)이다. 생강[薑]ㆍ울금초(鬱金草)ㆍ벌꿀[蜂密]ㆍ웅어[葦魚]ㆍ옻[漆]ㆍ사기그릇[磁器].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5천 3백 56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그 안에 2백 23개의 우물이 있다.
【궁실】 경기전(慶基殿) 부성(府城)의 남문(南門) 안에 있다. 영락(永樂 명(明)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경인년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였다. 참봉(參奉) 2명을 두었다. 유순(柳洵)의 시에, “시기에 호응하여 도록(圖錄)에 맞게 동한(東韓)을 평정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도다. 성덕(聖德)을 마땅히 백세에 제사하리니, 천추에 묘모(廟貌)는 단청(丹靑)이 맑으리라.” 하였다. 실록각(實錄閣) 경기전(慶基殿)의 동쪽 담 안에 있는데 본조의 실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김길손(金吉孫)의 기(記)에, “아국(我國)은 조종(祖宗) 이래로 세대에 따라 실록을 편찬하여 안과 밖에 수장하였으니, 안에는 춘추관(春秋館)이 있고, 밖에는 충주(忠州)ㆍ성주(星州)와 같이 모두 장서각(藏書閣)이 있는데, 오직 본부(本府)만이 없었다. 을축년 겨울에 비로소 부성(府城) 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갑신년 가을에 진남루(鎭南樓)에 이안했다. 세조께서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각(藏閣)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연이어 흉년이 들어 공역(工役)을 중흥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미루어오다가, 임진년 봄에 세조와 예종(睿宗)의 양조 실록이 이루어지니, 주상께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양성지(梁誠之)를 파견하여 이것을 부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상국(相國) 김지경(金之慶)은 본관(本館)의 구신(舊臣)으로서 이곳에 안찰(按察)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장각을 세우고자 하여, 양공(梁公)과 더불어 경기전(慶基殿)의 동편에 자리를 정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계(狀啓)를 올리고, 인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백 명을 역군으로 하고, 부윤인 상국(相國)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하였으며, 순창(淳昌) 군수 김극련(金克鍊)으로 하여금 감독하도록 하여, 지난해 12월 중공(衆工)이 일을 같이하여 금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하였다.
객관(客館) 이경동(李瓊同)의 〈서헌기(西軒記)〉에, “신묘년에 우리의 좌주(座主) 조근(趙瑾) 공이 전주 부윤으로 왔는데,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 교화에 좇았다. 공은 판관(判官) 김신(金信)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에게 도모하여 말하기를, ‘부의 관(館)은 대청(大廳)에 중앙에 있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있는데, 동편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동편은 넓고 서쪽은 좁은데, 다행히 창리고(創吏庫)에 남은 재물이 있어 서헌(西軒)을 고쳐 동헌(東軒)과 같이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민(吏民)들이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에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다른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건물이 새로워지니, 주(州)의 남녀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건물이 고쳐진 것만 볼 뿐이요, 공역(工役)이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공의 뒤를 잇는 사람도 백성 사랑하기를 공과 같이 하고 관직 수행을 공과 같이 하며, 건물과 장벽(墻壁)을 늘 보수(補修)하여 임금의 세계근원(世系根元)이 길이 발상한 이 고장으로 하여금 그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疆)한 복조와 더불어 상서(祥瑞)를 같이한다면, 어찌 우리 부의 큰 행복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누정】 진남루(鎭南樓) 공관(公館)의 후원(後園)에 있으며 영락(永樂) 기축년에 감사(監司) 겸 부윤인 윤향(尹向)이 지은 것이다. 신유년에 부윤 한승순(韓承舜)이 중수하고 정곤(鄭坤)이 기문을 썼다. 윤향(尹向)의 시에, “백제성 중에 백척 루며 경영은 바야흐로 태평시기에 당하였네. 기린봉(麒麟峯)에 비 뿌리어 주렴(珠簾)을 흔들고, 무악산(毋岳山)에 구름 이어 그림 기둥에 떠있네. 기둥에 기대어 동남으로 몇 개 군에 임하고, 난간에 의지하여 서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누에 오르니 3년을 지낼 손[客]이 가소롭고 호기(豪氣)는 오히려 바다 구석까지 넘쳐 있네.” 하였다. ○ 허주(許周)의 시에, “맑은 경치를 연유하여 새 누각에 의지해 섰네. 눈은 깜짝 지는 잎을 보고 가을을 깨닫도다. 수많은 민가의 저녁 연기는 어렴풋이 푸르고, 사산(四山)의 아리따운 기운은 무성하게 피어오르네. 유수(留守)의 부절을 나누니 2천 석이요, 월(鉞 군(軍)이나 지방 장관의 표시로 임금이 준 도끼)을 짚고 서서 50주를 관풍(觀風)하네. 다행히 세월은 성시(盛時)를 당했으니,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궁촌에까지 들리네.” 하였다. ○ 이경동(李瓊同)의 기문에,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 땅인데, 당(唐) 나라 현경(顯慶 당 고종의 연호.) 연간에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신라(新羅)에 들어왔다. 경덕왕(景德王)이 처음으로 전주(全州)라 불렀는데, 신라가 기울자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 하였다. 40년이 지난 뒤 고려의 태조가 이를 멸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곧 다시 전주라 하였다. 뒤에 혹 승화(承化)라 하기도 하고, 또는 순의(順義)라고도 하여 비록 그 연혁(沿革)은 일정하지 않으나, 언제나 남방에 있어서 큰 고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선조(先祖)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땅을 근원해서 주(州)를 승격하여 부로 하고, 자제(子弟)들을 뽑아서 숙위(宿衛)에 넣음으로써 총애를 유달리 하였으며, 승하하신 뒤에는 경기전(慶基殿)을 지어 수용(晬容)을 봉안하니, 전주를 중요히 여김이 이에 성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언제나 재상(宰相) 중에서 위망(威望)이 있고 다스림의 대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뽑아 부윤으로 삼았다. 우리 성상께서 태묘(太廟)에 제사한 다음해에 남원(南原)의 윤효손(尹孝孫) 공이 당시 예조 참의(禮曹參議)였는데, 늙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하고 임금의 특별한 임명을 받고 전주의 부윤으로 내려왔다. 공의 덕으로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으며 뛰어난 정치를 베풀었다. 귀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니,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말한다.)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갔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는 매양 기도를 올리면 곧 감응이 있었다. 노인을 공양하는 외로운 사람을 돕는 일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첩소(牒訴)는 바쁜 중에도 모두 손수 써서 처리하였으며, 부역을 간소하게 하고 세금을 고르게 하며, 형벌은 가볍게 하고 정치는 맑게 하니, 백성이 마침내 기쁨으로 복종하였다.
임금이 그 정치가 뛰어남을 들으시고 을미년 여름 6월 21일에 교서를 내려서 포장(褒獎)하여 이르기를, ‘민생의 즐거움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렸다. 이전에 전주 백성이 재해를 입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었는데, 그대가 백성을 다스리면서부터 많이 구제하여서 걸인이 목숨을 부지하고 유랑하는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특히 정사를 고르게 하고 소송을 다스리니, 백성은 편안히 살게 되고, 치적 또한 남다른 바가 있으니, 그 백성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 당의(唐衣) 표리(表裏) 한 벌로 그대의 뛰어난 치적을 표창하노라.’ 하고, 곧 감사에게 명하여 포상(褒賞)하는 의의(意義)를 열읍(列邑)에 널리 알려 그 나머지 사람들을 권장하니, 아름답도다. 그 가상함이 이에 이르니 그 누가 감동되지 아니하랴. 당시의 통판(通判) 김신(金信)이 또한 엄명(嚴明)하고 청신(淸愼)하여 간활한 자들을 복종시키고 공을 보좌함에 공로가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가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직책을 맡아 주야로 바삐 잘못이 없을까 두려워하였는데, 홀연히 임금의 은명(恩命)이 내리니, 이는 비록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죄 피할 길이 없다 하겠으나, 이전 재신(宰臣) 중에도 없던 영광된 일이라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은총을 탐하여 사적인 것으로 삼으리오. 마땅히 성은을 넓혀 영광을 막료들과 함께 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김후(金侯 김신(金信))가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두 공(부윤과 통판)이 성상(聖上)의 돌보아 주심이 중한 것을 체득하고 계속 교화를 넓혀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하게 하여, 은혜와 위엄이 다 같이 드러나고 기강(紀綱)이 크게 행해졌으니, 전주 백성의 은혜 받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부의 북쪽에 누(樓)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여기에 본조실록(本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정의(政議)에서 너무 소홀하다고 하여 달리 각(閣)을 세우고 실록을 옮겨 놓으니, 드디어 진남루는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하루는 공을 찾아뵈니 공이 자리를 내어주고, 이 누각의 연고를 언급하고 나에게 기문을 쓰게 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완산(完山)이 주가 된 것은 양(梁 중국 육조(六朝) 중의 소연(蕭衍)이 세운 나라) 나라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정치의 잘못과 풍속의 선악은 때에 따라 서로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책을 끼고 어른을 따라 거리에서 놀 때는, 풍속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검소한 것을 즐기지 아니했고, 후생들은 노는 데에만 힘쓸 뿐 책을 읽고 활쏘기와 차 모는 것을 익히는 자는 아주 적었다. 그런데 그 후에 습속이 크게 변하여, 자제들은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고 성균관(成均館)에 뽑히는 자가 시험 때마다 7ㆍ8명에 이르고, 문과와 무과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시험 때마다 빠지는 수가 없었다. 사시(四時)로 연방회(蓮榜會)를 열면 참여하는 자가 언제나 수십 명이 되었으니, 후진은 흥기하고, 상숙(庠塾)에는 글을 강론하고 배우는 소리가 높았다. 봄 가을 향사(鄕射)에는 활을 쥐고 술잔을 높이 든 자 쏘면 반드시 명중하니 간성(干城)의 재목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자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는 여자와 같이 수레를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옛날에 보던 바와는 크게 상반된다고 하겠다. 일찍이 《지리지(地理誌)》를 보니, ‘풍속은 교활하고 늙은 사람이 보면 창피한 일도 있다.’ 하였는데, 내가 보고 기억한 바로는 어려서 장성하기까지 수십 년에 불과하나 풍속은 많이 변하여서 기약한 일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졌으니, 다시 한번 좋아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제 성상께서 바야흐로 흥운(興運)을 융성하게 하고, 윤공(尹公)이 처음으로 총명(寵命)을 받아 우리 호남(湖南) 50여 주의 열백(列伯)을 창도(唱導)하여 우리 완산(完山) 1천여 년의 구도(舊都)를 거듭 새롭게 하니 정치의 융성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때를 당하여 더욱 중하도다. 아, 주는 비록 오래나 천명은 새롭고, 누각은 오래나 그 이름은 처음이니, 옛날에 숨었다가 오늘에 드러남이여, 그 기대함이 있음이로다. 산하(山河)의 뛰어남과 경치의 부미(富美)함은 정사(政事)의 급한 바가 아니므로 굳이 기록하여 뒤에 전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것으로 기문을 대신하노라.’ 하였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계묘년에 부윤 이봉(李封)이 세웠다. 『신증』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매화[梅兄]와 달[桂魄]이 다 같이 청신(淸新)하여, 높은 정자를 웃고 차지하여 주인이 되었도다. 호반(湖畔)에서 임포(林逋)의 신선된 이야기를 들었더니, 지금은 들보 위에 이백(李白)의 전신구(傳神句)를 보겠네. 찬 겨울에 처음으로 매화 향기 언덕에 퍼지고, 가을이면 둥근 달이 그림자를 비치네. 담장 구석에 대나무도 쓸쓸히 서 있으니, 바람에 말을 전하여 같이 친해보자.” 하였다. ○ 허침(許琛)의 시에, “가련하다, 매화 꽃술 달 가운데 청신하니, 냉담(冷淡)한 심기(心期)를 몇 사람이나 알아줄까. 구름이 끊어진 곳에 참 모습을 더하고, 눈이 차가운 곳에 옛 정신을 비치네. 주렴이 흔들거리니 성긴 그림자가 비끼고, 지붕 모서리에 창랑히 반달이 나왔으니, 다 같이 세간에 속물이 아닐진대, 나도 한몫 끼어 서로 친해본들 어떠리.”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매화[玉蕊]와 달[金波]이 서로 청신함을 다투어, 맑은 빛 담담한 모습이 우리의 벗이로다. 달 그림자[廣寒影]가 천상에 춤추니, 고야산(姑射山)에 아가씨처럼 고운 신선이 그 아닌가. 눈이 깊으니 달 속 두꺼비는 뼛속까지 차갑고, 바람 탄 무학(舞鶴)은 날개가 바퀴처럼 크구나. 나부산(羅浮山)은 고래로 신선과 진인(眞人)이 사는 곳. 사웅(師雄)으로 하여금 하룻밤을 친하게 한들 어떠리.” 하였다.
제남정(濟南亭) 성의 남쪽 시내 위에 있다. ○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계축년 봄에 이곳의 부윤으로 와서 하루는 과업을 권장하러 남문을 나섰다가, 동천(東川) 가에 누(樓)가 있고, 한쪽에 고인의 시판(詩板)이 있었는데, 또한 목은(牧隱) 선생이 남겨 놓은 시가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것을 다시 세울 생각을 가졌다. 놀고 있는 사람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으고 있는 중 갑인년 가을에 나는 병으로 면직이 되고, 동년(同年)인 조종생(趙從生) 공이 대신 와서 나의 뜻을 이어서 경영을 하며, 규모를 넓히고 단청(丹靑)을 선명하게 하여 그 오른편에 송백(松柏)을 심어 놓으니, 실로 제향(帝鄕)의 승관(勝觀)이더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남(橋南) 교북(橋北)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니,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여기를 바라고 지나가네. 높은 정자가 강가에 있으니 올라가 바라보는 이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에, “나의 벗 이백승(李伯勝) 후(侯)가 전주 부윤이 된 지 3년에, 진남(鎭南)ㆍ제남(濟南) 두 누각의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직접 내 발로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내 눈으로 그 경치를 보지 못한 터에, 후(侯)가 나에게 기문을 쓰라고 하니, 내가 후를 위해 기문을 쓴다 하면 마음과 안목(眼目)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니, 바람을 잡고 달을 잡는 것처럼 효험 없는 일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예전에 한창려(韓昌黎)는 등왕각(滕王閣)을 보지 않고 기문을 쓴 일이 있는데, 다만 세월만 서술하고 광경은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나의 기문이 이와 비슷해야 하나. 삼가 글을 보고 말하건대, 누(樓)는 주성의 남문(南門) 밖에 있으니 어느 때 지은 것인지 모르겠다. 목은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가 남아 있고, 홍여방(洪汝方) 공이 중수하였는데, 연대가 오래되니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손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안침(安琛)이 남방의 감사로 와서 이 누각을 보고 다시 고칠 뜻이 있었으나 임기가 문득 차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후가 와서 안공(安公)이 부지런히 부탁하기에, 감사에게 청하여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모집하여 그 제도(制度)를 일신하고, 문식을 더하였다. 또한 담장을 쌓아 빙 둘려서 관문(館門)에까지 닿게 하였다. 그러한 뒤에 형세는 장대하고 누의 경개(景槪)는 또 뛰어나게 되었다. 대천(大川)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누각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그 동서로는 돌을 쌓아 방죽을 이루어 물이 언덕을 깎아먹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 밖으로는 뭇 산이 둥글게 줄을 지어 손을 마주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읍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경대(萬景臺)는 유리알 같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린봉(麒麟峯)은 동쪽 구석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논밭은 수놓은 것 같고 촌락은 즐비하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는 수목 사이에 어렴풋하고 망망한 넓은 들은 안계(眼界)가 공활(空闊)하다. 오르는 자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 흥취(興趣)가 무궁하다. 대개 유락(游樂)의 적취(適趣)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깊은 것과 넓은 것이 그것이다. 만약 여러 귀빈을 초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촛불 들고 밤까지 노는데, 예로써 대접함에는 진남루(鎭南樓)의 깊은 것이 좋고,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성정을 즐겁게 하고 울적함을 풀기에는 제남루(濟南樓)의 넓은 것이 좋으리라. 주의 인물은 풍성하고, 예문(禮文)은 번다하며, 소송 문서는 밀려 좌우로 지휘하며 응접할 겨를이 없다가, 하루아침 이 누각에 오르면 사람의 왕래는 무한하고, 물상이 널려 있는 것은 무궁하여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그 마음에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천부(千夫)의 삼태기와 가래로 애써 농사한 자는 조세를 왕실에 먼저 바치고, 십묘(十畝)의 상자(桑柘)로 부지런히 길쌈하는 자는 비단을 귀가[閭右]에 먼저 올리며 어부는 고기를 잡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목자(牧者)는 말을 먹여도 자기는 타지 못한다. 짐을 지고 실어 허리 굽혀 왕래하는 자 그 누구나 다 의식(衣食)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고, 추운 자는 옷을 입게 하고자 하며, 피곤한 자는 휴식시키기를 하고자 하여서 백성의 편안하지 못한 것을 보기를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면 남방 백성을 구제하려 하는 마음이 공황(龔黃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둘 다 한(漢) 나라 신하)의 정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정교(政敎)에 도움이 어찌 적다고 하랴.”라고 하였다.
공북정(拱北亭) 부(府)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부의 북쪽 5리쯤에 정자가 있으니 공북정이라 한다. 조정에서 덕음(德音)을 펴거나 사명(使命)이 있으면 부윤이 관리들을 인솔하여 의관을 갖추고 이곳에 나와서 경례하여 맞이하며, 만약 국왕의 생일이나 국가의 큰 경사, 큰 상서를 만나면 부(府)와 주(州)가 각기 전문(箋文)을 받들어 대궐을 향하여 예를 행하고, 또한 여기에서 사신을 떠나보낸다. 그런데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거의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예를 행하는 자가 들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이언(李堰)이 부윤이 되어 개연(慨然)히 이를 다시 세울 뜻을 가지고 바야흐로 일을 경영하려 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전임이 되었다. 이형손(李亨孫)이 후임으로 와서 공인을 모으고 자재(資材)를 갖추어 거의 일이 되어가는 차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또 교대되어 갔다. 계속해서 부윤 이번(李蕃)과 통판(通判) 최지(崔漬)가 와서 공사를 완결시키기를 도모하고, 읍인 김사효(金思孝)를 시켜 공사를 독려하였다. 일 없이 노는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농민들을 괴롭히지 아니하였으며, 수개월이 지나 완성을 보자 주의 부로(父老)들이 이 일을 자랑하고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전주(全州)는 산천의 좋은 기운이 얽히고 서려 왕업의 자취를 창립하였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주(周) 나라의 태빈(邰豳)과 같은 곳이요, 목조(穆祖)가 북방으로 옮겨간 것은 마치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열고, 열조의 성군이 서로 이어받아 부(府)를 설치하고 윤(尹)을 두어 한 도의 머리가 되게 하니, 대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주의 부로와 자제들이 오래 선왕(先王)의 남은 교화를 입고 열성(列聖)의 깊은 은혜를 받아 풍패(豐沛)에 살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니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 실로 만 배나 더하리라. 전후로 내려온 수령들은 모두가 조정에서 중선(重選)된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부윤과 통판(通判)이 또한 일시(一時)의 명망(名望)을 받는 이들로 정사(政事)는 왕명을 공경하고 왕사(王使)를 예로 맞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이는 곧 공북(拱北)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아, 고인이 말하기를, ‘그 경내(境內)에 들어가면 교화(敎化)를 안다.’고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전주(全州)를 지나면서 우리의 풍속을 물으면 우리의 풍속이 어떠하며 우리의 고장이 어떠한가를 알 것이니, 춘추(春秋) 시대에 왕을 높이던 그 의(義)와 예(禮)를 깊이 체득하는 것이 반드시 이 정자(亭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정자를 수리함이 미관상 아름답게 하여 노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두 분 부윤과 통판의 뜻을 모르는 말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새로 고친 거룩한 뜻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신증』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완산국(完山國)의 번영을 다 흠모하니, 성안에 가득찬 문물(文物)이 무성한 귀인[纓簪]이네. 덕음(德音 임금의 말)이 널리 퍼져 교외에까지 나아가 다투어 맞이하니, 북궐(北闕)에는 언제나 임금을 받드는 마음[捧日心]이 걸려 있더라.”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임금의 명령을 지니고 달려가니 스스로 공경하네. 우연히 정자 위에 오르니 귀현[華簪]들이 모였구나. 팔마(八馬 고관의 행차 앞에서 교통을 정리하며 가는 사람) 남행하는 나그네 다시 임금 생각하는 마음 간절함을 누가 알리요.” 하였다. 내사정(內射亭) 성내(城內) 남쪽에 있다. 부윤 정자제(鄭自濟)가 지었다.
쾌심정(快心亭)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이 끊어지고 물이 돌아 내려가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돌을 쌓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강물은 길이 흘러 운잠(雲岑)을 둘렀는데, 강 위 높은 정자에는 꽃과 대[竹]가 깊구나. 붉은 난간을 서성거리며 두 눈이 맑으니 세상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가리랴.” 하였다. 『신증』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기루재(倚樓才 시를 빨리 쓰는 재주)를 빌릴 필요가 없네.”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부윤 강징(姜澂)이 세웠다. 만화루(萬化樓) 향교(鄕校)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학교[庠序]는 궐리당(闕里堂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세운 집)에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교학(敎學)을 시행한 집과 비슷하고, 장수(藏修)는 모두가 초국(楚國) 재목이로다. 연어(鳶魚)는 호호(浩浩)하게 천지(天地)를 나누었고, 현송(絃誦)은 양양하게 담 밖으로 퍼지는구나. 물이 방지(方池)에 출렁이니 가슴속 생각이 깨끗하고, 바람이 문행(文杏) 나무를 흔드니 웃음 소리가 시원하도다. 학생들을 분발 흥기시킴에 내가 방책이 없으니, 누전(樓前)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행실을 행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는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비록 궁벽한 고을이라도 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전주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 땅이며 남쪽 지방의 인재가 모인 같은 곳이니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러니 교육을 제일로 삼고 고을의 자제들이 또 문헌세가(文獻世家)들이 많아 선(善)을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일향(一鄕)의 교화가 잘되고 많은 인재가 그 중에서 배출되니, 이는 비록 지령(地靈)의 좋은 기운이 모여서 된 것이라고는 하나 또한 교육에 바탕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부의 학[序學]이 이전에는 정청(政廳)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에 태조의 빛나는 용상(容像)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와 태만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었다. 마침내 성의 서쪽 6ㆍ7리 되는 곳으로 옮겼는데 무릇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재랑(齋廊)과 부엌이 차례로 완비되었다. 그러나 부지가 매우 넓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도적이나 범의 화가 근심이 되어 담장을 두르고 자물통을 단단히 하니, 오직 단단하고 치밀한 것을 제일로 하였다. 기해년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부윤으로 와서는 먼저 선성(宣聖 공자를 말함)을 뵌 다음에는 제생을 불러들여 제사 지내는 일에 관해서 강론하고, 교화를 일으키고 어진 이를 독려함을 마음으로 삼고, 학과에 순서가 있고 공급(供給)은 넉넉하며, 수선(修繕)하는 작은 일도 여유있게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 봄에 다섯 채의 새 누각을 지으니, 높고 밝아서 제반 마련이 알맞았다. 완성을 본 다음에는 선생이 제생을 인솔하고 누에 올라 술잔을 기울여 낙성식을 하였다.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그대들이 이 누각에 올라오니 얻은 바가 있는가.’ 하니, 제생이 대답하기를, ‘전에 누각을 짓기 전에는 교사가 낮고 좁아서 우리가 책을 읽는 여가에 비록 답답함을 풀고 정신을 맑게 하고자 하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쉴 자리와 놀 자리가 없어 늘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오르니 우리의 번거로운 마음을 씻어 주고 막힌 생각을 밝게 해서 산을 보고서는 인(仁)을 체득할 수 있고, 물을 보면 지혜를 기를 수 있으며, 솔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물 속에 뛰노는 것을 보고 도체(道體)의 밝게 드러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한번 내려보고 우러러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요, 한번 움직이고 고요함이 또한 배우는 것이라, 무릇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천지간 만물의 많은 것이 그 어느 것인들 천성을 기르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공(功)을 미루어 나가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天地)와 그 공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니, 선생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지극함이 있습니다. 만약 유락(遊樂)에 빠져 흥청거리는 것이나 강송(講誦)을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선생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니 제생이 공(公)의 주신 은혜를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이 속해 있는 사람으로 그 뜻을 사양할 수 없노라.” 하였다.
【역원】 삼례역(參禮驛)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열두 개이니 반석(半石)ㆍ오원(烏原)ㆍ갈담(葛覃)ㆍ소안(蘇安)ㆍ재곡(材谷)ㆍ양재(良才)ㆍ앵곡(鸎谷)ㆍ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영원(瀛原)ㆍ부흥(扶興)ㆍ내재(內才)가 그것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 병사를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들에 엎드려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상주(上奏)하기를,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이니, 청하건대 왕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반석역(半石驛)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앵곡역(鸎谷驛) 옛날에는 장곡역(長谷驛)이라 하였다.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 고려 현종이 이 역에 묵었다. 이날 밤에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이 역에 머무르게 하고, 왕을 끼고 호령을 하고자 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이 흰 깃대를 관(冠)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치며 들어오므로 지채문(智蔡文)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금광원(金光院)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숙점원(宿店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안덕원(安德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대원(四大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허고원(虛高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 상관원(上館院)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추천원(楸川院)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월당원(月塘院)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金廷雋)이 세우고, 재호(齋號)는 월당(月塘)을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 읍에 전하니 월당(月塘)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皮界院)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산원(補山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초원(大初院)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탄현원(炭峴院) 부의 서쪽 16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남복원(南福院)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모즐지원(毛叱知院)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내현원(奈峴院)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불우】 귀신사(歸信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왜병(倭兵) 3백여 기(騎)가 주성(州城)을 함락하고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북쪽 뜰에는 산들바람 대밭에 불고, 남향 창문을 열면 넓고 아득한 만겹 산이로구나. 소나무 관문과 돌길 시내 건너 들어와서, 고승(高僧)을 대하고 앉아 잠시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를 보광사(普光寺)라 한다. 실로 백제(百濟)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比丘)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 뜻을 품었는데, 주(州)의 사람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鳳) 공이 황제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원통(元統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공(高公 즉 고룡봉(高龍鳳))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난 몸으로 상국(上國)에 와서 이토록 뜻을 얻으니 어찌 인과(因果)가 아니겠습니까. 공은 군상의 측근에서 주야로 반걸음도 좌우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군상(君上)의 은택에 빛남과 여복(輿服 타는 수레와 입는 옷)의 아름다움을 고향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이 알 수가 없으니, 소위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향에 절을 지어서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아래로 대중들과 복을 같이하여 우뚝하게 한 자리 귀앙(歸仰)할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옷을 입는 격[晝錦]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 불교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을 두게 했다. 그 뒤 공은 재신(宰臣)의 이간질을 당하여 남방에 출거(出居)하게 되고 중향(中向)도 또한 산으로 돌아와서 건물을 수리하고 공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지정(至正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으로 개원(改元)하기 2개월 전에 간신들을 출척하고, 정화(政化)를 다시 베풀어 바람과 우레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성과 비처럼 시행하자, 공은 다시 사환(賜環)되어 임금의 사랑이 더욱 새로웠다. 중향은 다시 경사에 들어갔는데 공은 전에 뜻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그 비용을 더해서 공사를 독려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세시(歲時)에 전장(轉藏)하고 전후로 보시(布施)한 것을 합하니, 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 50명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사람이 15명이며, 백금으로 새겨서 기명(器皿)을 장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무릇 건물의 기둥은 1백여 개나 되는데, 정축년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 겨울에 완성을 보았다. 일이 끝나는 달에는 산인(山人) 담숙(旵淑) 등이 시주를 널리 모아서 크게 화엄회(華嚴會)를 개최하여 낙성식을 하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 3천명이요, 시일은 50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공양(供養)하고 찬탄(讚嘆)하니,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에 넘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중향(中向)이 마땅히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다 하여 고공(高公)의 명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견훤씨(甄萱氏)가 본국에 들어온 지 4백 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에 창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비(碑)나 기문도 없어 그 세월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키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공(高公)을 기다려서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三韓) 땅에 태어났으니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인데, 인연이 닿아서 일월(日月) 같은 천제(天帝)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 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향국(鄕國)에 그 여택이 많이 미쳤다. 또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고[祝釐] 근본을 갚아서[報本] 끝없이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서고사(西高寺) 서고산(西高山)에 있다. 남고사(南高寺)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부의 동쪽 성 밑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온 집이 푸른 산 옆에 와서 산다네. 얕은 모자 가벼운 옷으로 침상에 누웠네. 폐부가 마르니 촌 술맛이 더욱 좋고, 정신이 혼미하니 들차[野茶] 향기가 또한 좋구나. 대나무 뿌리는 지상에 흩어져 뻗으니 용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 같고, 파초 잎이 창 앞에 닿으니 봉의 꼬리처럼 길구나. 삼복(三伏)이 일찍 그치고 백성의 송사가 적으니, 이때 다시 부처님을 섬김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고달산에 있다. 이절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普德大士)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기(記)에,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주하였다. 어느날 홀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니,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明德)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 한다.
임천사(臨川寺) 서산(西山)에 있다. 사대사(四大寺)ㆍ흑석사(黑石寺) 두 절 모두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원암사(圓巖寺) 청량산에 있다. 봉서사(鳳棲寺) 서방산에 있다. 대원사(大圓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박춘령(朴椿齡)의 시에, “문서 다루는 3년 생활에 몸에는 백 가지 병이라, 공사에서 물러나 때때로 옛 정이 든 벗을 찾아가네. 높고 낮은 데 수목은 빽빽하여 길이 없나 의심하고, 철 따라 꽃이 피니 달리 봄이 있도다. 골짜기는 음청(陰晴)하여 부앙(俯仰)간에 다르고, 연기와 노을은 자색과 푸른색으로 아침저녁 다르네.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 산인(山人)들이 스스로 보내고 맞이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기린봉(麒麟峯)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몽험기(夢驗記)〉에, “나는 일찍이 완산(完山)에 장서기(掌書記) 벼슬로 있었다. 평소에 성황사에 가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에 사당에 가서 당하에서 절하였는데 법조(法曹)의 동배자(同拜者)가 있는 듯하였다. 법왕(法王)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기실(記室 고을 원의 비서일은 맡은 사람)은 계(階)에 오르라.’하였다. 내가 청사에 올라서 재배(再拜)하니 법왕이 베로 된 모자에 검은 빛의 유의(襦衣)를 입고 남쪽 뜰에 앉았다가 일어나 답배(答拜)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끌어 앞으로 오게 하니 홀연히 한 사람이 탁주를 들고 와서 부었는데 술과 찬이 또한 초라하였다. 한참 동안 같이 마시다가 말하기를, ‘들으니 목관(牧官)이 근자에 새로 12국사를 찍었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어찌 나에게 주지 아니하는가. 내가 여러 아들이 있는데 읽도록 하고 싶으니 몇 책을 보내줄 수 있는가.’ 하였다. 내가 예예 하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아전의 우두머리 누구는 좋은 사람이니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노라.’ 하였다. 내가 다시 승낙하고, 화복이 어떨지를 물었더니 법왕이 길 위에 달리다 축이 꺾인 수레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그대의 운수가 마치 이 수레의 모양이니, 금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주를 떠나리라.’하고 곧 가죽띠 두 개를 가지고 나에게 주면서 말히기를, ‘자네는 존귀할 것이므로 이것을 준다.’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당시에 안렴사(按廉使) 낭장(郎將) 노공(盧公)이 목관을 시켜 12국사를 새로 찍게 한 일이 있고, 또 관리 중에 아무개가 내 뜻에 맞지 않아서 어떤 일로 인하여 내몰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낮 그 아전을 불러 12국사 두 책을 갖다가 바치게 하였고, 그 사람의 죄는 불문에 부치었다. 이 해에 과연 동료자의 고소로 파직을 당하고서 비로소 차축에 비유한 말을 깨우쳤다. 그러나 한가한 생활 7년에 한 번도 벼슬을 받지 못하여 곤란이 막심하였으므로 다시는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요직을 지내고 벼슬이 3품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깊이 믿지를 아니하다가 이제 상국(相國)의 지위를 제수받고서야 이에 존귀하게 되리라 하던 말이 부합되어 틀림이 없는 것을 크게 믿게 되었다. 아, 신도(神道)의 그윽한 감응도 역시 때로는 믿을 만하니 어찌 모두가 허망하다고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증』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소상(塑像)을 부셔버리고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적】 고토성(古土城)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 고덕산성(高德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천 9백 20척(尺),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7개, 시내 하나가 있다. 우주 폐현(紆州廢縣) 우(紆)는 오(汚)로 쓰기도 한다.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인데, 신라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성 폐현(利城廢縣) 주의 서쪽 7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경명향(景明鄕) 영명(榮明)이라고도 한다. 부의 북쪽 1백 20리에 있다. 양량소(陽良所) 우주(紆州)의 동북쪽, 즉 우양촌(右楊村) 철소(鐵所)에 있다. 두모촌소(豆毛村所) 이성현(利城縣)에 있다. 녹균정(綠筠亭) 청사(廳事)의 북쪽에 있다. 지정(至正) 정미년에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亭)을 바꾸어 누(樓)로 만들었다. 이달충(李達衷)이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는데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다. 효자리(孝子里)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돌을 세워 효자를 표창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고.” 하였다.
【명환】 신라 용원(龍元) 신문왕(神文王) 때 총관(摠管)이다. 김웅원(金雄元) 헌덕왕(憲德王) 3년 도독(都督)이 되었다. 고려 정항(鄭沆) 예종(睿宗) 조의 우정언(右正言)이며, 시사를 의논할 적에 곧게 직면하여 권신들에 거슬리어 통판(通判)으로 나갔다가 불려와 사간(司諫)이 되었다. 오연총(吳延寵) 전주 목사이며, 정사가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가혹하지 아니하였으며, 아전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뛰어난 치적이 알려져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소배(召拜)되었다. 박춘령(朴椿齡) 완산(完山)의 수령이다. 조영인(趙永仁)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는데 정무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규보(李奎報) 신종(神宗) 2년 기미년에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에 임명되었다. 박원계(朴元桂) 사록(司錄) 겸 장서기였다. 경내에 호랑이 소동이 났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를 못하고 박원계(朴元桂)에게 맡겼더니 원계가 말을 타고 좁은 지역에서 한 화살로 적중시켜 죽였다. 백득주(白得珠) 장원하여 서기(書記)가 되었다. 당시에 안렴사가 대궐로 가면서 절구 한 수를 남기었다. 백득주가 화답하기를, “사신[星使]이 임금께 돌아간 후에 유영(柳營)은 벌써 봄이네. 무정한 푸른 풀도 원망을 하거늘, 하물며 정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랴.” 하였다. 안렴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고 작별했다. 곽예(郭預) 고종(高宗) 때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지대(金之垈) 고종 때 사록에 임명되었다.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고 부호와 강포한 사람들을 누르고 잘못을 귀신처럼 적발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정선(鄭僐) 원종(元宗) 말에 사록이 되었다. 한공의(韓公義) 충혜왕(忠惠王) 때 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였다. 이우(李瑀) 이암(李嵒)의 아버지이다. 재간(才幹)이 있어 목사가 되어 나갔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이다. 처를 거느리고 집에서 사는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래 판결을 보지 못했다. 정운경이 그 처가 사통하는 자가 있는가 물었으나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만 이웃에 한 놈이 늘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으면 일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놈을 밖에 잡아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여 말하기를, “모월 모일 너의 자식이 집에 있었느냐, 아니면 나갔느냐.” 하니, 어미의 말이, “이날 밖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친구와 술을 마셔 취하였다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즉시 이웃 남자에게, 같이 술마신 자가 누군가 물으니 바로 사실을 자복하였다. 김도(金濤) 공민왕 때 사록(司錄)이 되었다. 윤곤(尹坤) 부윤이 되었다.
본조 허조(許稠) 태종 때에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청절(淸節)을 지키고 강직하고 현명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그릇된 법으로 일을 처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非法斷事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작은 판에 써서 청사에 걸었다. 권담(權湛) 세종 때의 부윤이다. 홍여방(洪汝方)ㆍ김길통(金吉通) 다 같이 부윤을 지냈다. 이언(李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세조께서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봉(李封) 부윤이 되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유인(李有仁) 부윤인데 치적이 있다. 학교를 증수(增修)하니 교생들이 그가 죽은 날에는 제사를 차렸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부윤인데, 정사는 자비롭고 어진 것을 숭상하였고 아전들과 백성이 그를 사랑하므로 포상하여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렸다. 김선(金瑄) 부윤인데, 정사를 부지런히 삼가하였다. 가선(嘉善)으로 포상하여 올려 주었다. 최자숙(崔自淑) 판관인데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인물】 고려 최균(崔均)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출중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주 벼슬이 올라 소부(少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의 재상(宰相) 최윤의(崔允儀)가 봉지(奉旨)하고, 문사(文士)를 택하여 예의(禮儀)를 상정(詳定)함에 있어서 최균(崔均)을 제일 먼저 뽑았다. 뒤에 최윤의가 임종할 때에 홀로 최균을 천거하여 임금은 각문지후(閣門祗侯)를 제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예부시랑으로서 병마부사(兵馬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을 공격하다가 잡혀 해를 입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최척경(崔陟卿) 아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초에 경산부(京山府) 판관(判官)이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에 돌아와서는 10여 년간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했다. 뒤에 다시 탐라령(耽羅令)이 되었다가 자주 옮겨 감찰어사가 되고,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예부시랑 비서감(禮部侍郞祕書監)까지 지냈다. 맑은 이름과 굳은 절개는 늙어서도 쇠하지를 아니했다. 애초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연구(聯句 몇 사람이 함께 연철(聯綴)해서 시를 완성하는 형식)로써 군동(群童)을 뽑는데, 최척경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함께 데리고 가서 권하여 학문을 시켜, 뒤에 세 사람이 다 명사(名士)가 되었으니, 당시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라 불렀다. 이준양(李俊陽) 청백함으로 유명하고, 의종(毅宗)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최보순(崔甫淳) 최균(崔均)의 아들인데 벼슬은 평장사,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광식(柳光植) 풍도와 모습이 매우 크고 청검하고 절약하였으며 신중하고 말이 적었다. 중외(中外)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는데, 세칭 수부쌍전(壽富雙全)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대숙(戴肅)이다. 유소(柳韶) 유광식의 아들인데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꿋꿋했으며 남을 인정함이 적었고,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으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성지(崔誠之)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이며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인데,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광양군(光陽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성품은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했고 글씨는 매우 반듯하였다. 시(詩)는 온자(溫藉)해서 좋고 음양 술수를 잘했다. 풍헌(風憲)과 어사직(御史職), 선거(選擧)와 이부직(吏部職)ㆍ성관(星官 천문관직(天文官職))ㆍ예원(藝苑 한림원직(翰林院職)) 등을 20년간 역임을 했다. 유방헌(柳邦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득평(崔得枰) 성품이 염정(廉靜)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벼슬은 이부(吏部)의 전서(典書)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충렬(忠烈)ㆍ충선(忠善)ㆍ충숙(忠肅)의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 중에 충선왕이 더욱 중용하였다. 최재(崔宰)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고 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뒤 면직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끌려간 뒤 임금이 설치한 것은 모두 다시 바뀌었는데, 도감(都監)을 세우고 최재(崔宰)를 판관(判官)으로 삼으니 최재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실덕은 임금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좌우에서 임금의 과실을 유도하여 인도한 것이다. 앞에서 맞이하고 뒤에서 맞아 들쳐 올리니, 내가 실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하고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하였다.
최용갑(崔龍甲)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이자을(李資乙)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최용갑(崔龍甲)과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곡(李穀)의 〈완산도중시(完山途中詩)〉에, “장원(壯元)한 최(崔)ㆍ이(李)의 재명(才名)이 크고, 경계 머리[界首] 완산(完山)이 전라도에 기상이 웅장하구나. 과객은 신분이 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 공경(公卿)이 이 한 고을에서 많이 나왔네.” 하였다. 최칠석(崔七夕) 장수(將帥)의 재량이 있었다. 이문정(李文挺) 지순(至順) 경자년 과시에 뽑히어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최부(崔府) 벼슬은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백유(李伯由) 이문정(李文挺)의 손자인데 개국공신이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하였다. 이의손(李義孫)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이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사철(李思哲) 과거에 급제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최경지(崔敬止) 함열(咸悅) 우거(寓居) 편에 보인다. 이경동(李瓊仝) 이문정(李文挺)의 4대손이며,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과에도 합격하여 벼슬은 병조 참판까지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신증』 유헌(柳軒)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었으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숭조(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동지(同知)를 지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효행이 있었다. 『신증』 오영로(吳齡老) 생원(生員)인데 계모의 상을 입고 기년(期年)에야 비로소 소식(疏食)을 시작했다. 연산(燕山) 때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오영로는 오히려 예대로 상을 입었다. 금상 4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세직(朴世直) 생원(生員) 나이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 동안 슬프게 울었으며, 아버지가 작고해서는 묘막에서 죽으로 3년상을 마치었다. 금상 23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김천동(金千同) 사노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임씨(林氏) 낙안군사(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처이며,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임씨가 피난하여 달아나자 왜구가 쫓아와서 욕보이려 하였다. 굳게 항거하니 왜구가 한 팔을 끊었는데 그래도 따르지 아니했고, 또다시 다른 팔을 끊어도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최이원(崔以源)의 처인데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그 뜻을 뺏고자 하니 이씨는 밤에 시부모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부모가 후회하고 개가시킬 것을 포기하였다. 세종 24년에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박형문(朴衡文)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3년간 머리를 빗지 아니했다. 조석으로 직접 상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시절에 따라 옷을 지어 신주(神主)에 바치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욕방의관비왕사(欲訪衣冠悲往事) 이색(李穡)의 시에, “견성(甄城)의 경치가 오르기를 권하니, 옛 사람을 위무(慰撫)하며 유연히 웃음을 머금도다. 의관을 찾고자 하니 지나간 일들이 슬퍼지고 부질없이 도기(圖記)만을 가지고 옛 궁터를 말하네. 술은 황국(黃菊)에 맑은 서리 내린 후 맛을 다하고, 주렴(珠簾)은 청산(靑山) 낙조(落照) 사이에 걷혀 있네. 고금(古今)의 영웅이 지나가는 새와 같으니, 피곤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갈 줄을 알아야 하겠네.” 하였다. 견훤농병지(甄萱弄兵地) 정추(鄭樞)의 시에, “중간에 길이 산과 강을 갈라 놓으니, 남주(南州)의 물색(物色)이 구분되었네. 얽힌 소나무는 옛날 역원(驛院)을 알리고, 긴 대나무는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네. 말[馬] 그림자는 거치른 다리에 비치고, 까마귀 소리는 황폐한 절간의 구름 속에서 들리네. 견훤이 군병을 지휘하던 땅, 물가에 임하여 싸립문이 걸렸네.” 하였다.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 권근(權近)의 시에,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하였다. 완산거진승남양(完山巨鎭勝南陽)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 하였다. 세마기가누근수(洗馬幾家樓近水)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비둘기, 비는 촉촉이 내리네.” 하였다. 남리임구제효우(南里林鳩啼曉雨) 성임(成任)의 시에, “남리(南里) 수풀 속 비둘기는 새벽비에 울고, 동풍(東風) 연기 속 버들은 봄 성(城)에 어둡다.” 하였다. 압계공업서하산(鴨鷄功業誓河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대세(大勢)를 반드시 휼방(鷸蚌)의 고사를 참고로 해서 보아야 하네.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을 산하(山河)에 맹세하도다. 추풍이 한 번 견훤을 위하여 웃으니, 노발(怒髮)은 무단히 관을 들먹거리는구나.” 하였다. 완산가려고명도(浣山佳麗古名都)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옛날의 명도(名都)로다. 용호(龍虎)가 서리고 걸터앉은 듯 울성하게 얽혀 있네. 정령(精靈)이 쌓여 지키고 도우니, 기운(氣運)도 아름다워라. 때에 발설하니 바른 부서(符瑞) 이루었네. 국조의 근원이 이곳에서 비롯되니, 대대로 맑은 덕음(德陰)이 동우(東隅)에 덮였어라. 신풍(新豐) 계견(鷄犬)을 어찌 족히 비기리요. 충후(忠厚)는 빈풍(豳風)과 다를 것이 없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부동(府東) 끝이 5리이다. 부서(府西) 끝이 5리이다. 부남(府南) 끝이 10리이다. 부북(府北) 끝이 7리이다. 봉상(鳳翔) 동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40리이다. 귀이동(龜耳洞)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림곡(雨林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조촌(助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양량소(陽良所) 원래의 양량소는 북쪽에 있으며, 처음이 1백 1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연산(連山) 남쪽이고, 진산(珍山)의 서쪽이며, 고산(高山)의 북쪽이고, 은진(恩津)의 동쪽에 있다. 초곡(草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양(所陽)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완전(薍田)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전포(田浦)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용진(龍進)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상관(上關)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오백조(五百條)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우동(紆東)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서(紆西)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우북(紆北)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위의 3면은 우주(紆州)이다. 이동(伊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이남(伊南)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서(伊西)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이북(伊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의 4면은 이성(伊城) 땅이다. 이동(利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이서(利西)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이북(利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 3면은 이성(利城) 땅이다. 동일도(東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남일도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이도(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북일도(北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북이도(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6면은 옥야(沃野) 땅이다. ○ 이성(利城) 3면은 동쪽으로 익산(益山)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김제(金堤)ㆍ만경(萬頃)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임피(臨陂)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함열(咸悅)과 접한다. ○ 옥야(沃野) 6면은 남쪽으로 사수(泗水)와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金堤)와 접한다. 낭산(朗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귀산(歸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경명향(景明鄕)ㆍ북일백(北一百)ㆍ두모촌(豆毛村)은 이성(利城) 땅이다.
【창고】 창고(倉庫)가 3곳이 있다. 본읍. 고(庫)가 10곳이 있다. 감영(監營)이 성내에 있다. 옥야창(沃野倉) 서쪽으로 70리이다. 이성창(利城倉) 서쪽으로 60리이다. 우주창(紆州倉) 북쪽으로 10리이다. 봉익창(鳳翔倉) 동리쪽으로 40리이다. 외성창(外城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내성창(內城倉)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있다. 양량소창(陽良所倉) 동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진도】 신창진(新倉津) 서쪽 70리에 있으며, 김제(金堤)와는 남쪽으로 20리 거리이다. 사천진(沙川津) 횡탄(橫灘) 아래쪽에 있다.
【토산】 대[竹]ㆍ감ㆍ붕어[鯽魚]ㆍ게[蟹].
【누정】 호경루(護慶樓) 남천(南川) 곁에 있다. 큰 시내가 누정 밑을 둘러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푸른 산이 둘러 있다. 만화루(萬化樓) 위와 같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궁실】 조경묘(肇慶廟) 부성(府城)의 동문(東門) 안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있다. 영종(英宗) 47년에 세웠다. 이조(李朝)의 시조(始祖)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있다. 성은 이씨이고 휘는 한(翰)이며, 신라 때 벼슬은 사공(司空)이다. 배필은 김씨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인데, 신라 태종(太宗)의 10세 손이다. 봄과 가을에 상삭(上朔)에서 상순(上旬) 사이에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 영(令) ㆍ별검(別檢)이 각 1명이다.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선조 무인년에 세우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송인수(宋麟壽) 청주(淸州) 편에 보인다.

[주D-001]풍패(豐沛) : 풍패(豐沛)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다. 여기서는 태조(太祖)의 선대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기 때문이다.
[주D-002]예를……되었다 : 《좌전(左傳)》에, “정국(鄭國)에 큰일이 있으면 자피(子皮)를 싣고 들에 가서 모의한다.” 하였다.
[주D-003]태빈(邰豳) : 주(周)의 선대가 일어난 땅이다.
[주D-004]주의 태왕이……때이다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태왕(太王)이 침략하는 적인(狄人)을 피하여 도읍지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가매 백성들이 따라갔다.
[주D-005]사환(賜環) : 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쫓겨났을 때에 구경에 가서 처분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결(訣)을 주면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요, 환(還)을 주면 돌아오라는 뜻이다.
[주D-006]전장(轉藏) : 불교의 장경(藏經)을 독송강설(讀訟講說)하는 것이다.
[주D-007]원공(遠公)은……건너지 마소 : 동진(東晉)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호계를 넘었다.
[주D-008]유애(遺愛) : 그 사람이 간 뒤에도 백성에게 대한 사랑이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어 잊지 않는 것이다.
[주D-009]병상[蟻床] :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마음에 병이 있어, 평상 밑에 개미들 싸우는 것이 마치 소싸움[鬪牛]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다.
[주D-010]휼방(鷸蚌)의 고사 : 휼새[鷸]가 조개[蚌]를 쪼아 먹으려고 조개의 벌린 껍질 속에 입을 넣었다가, 서로 버티는 동안에 어부(漁父)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갔다는 것이다.
[주D-011]오리와 닭의 공업(功業) : 태봉(泰封) 말기의 참서(讖書)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 하였는데, 과연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 신라)을 먼저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주D-012]신풍([新豐) : 풍(豐)은 한 고조의 고향으로, 한(漢)의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성과 거리의 모양을 풍(豐) 땅과 같이 만들어 놓고 풍 땅의 백성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신풍(新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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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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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我十二代祖選部典書。十一代祖藝文提學完山君諡文貞公兩世墓。在淸州之北大栗里。墓前無碑表石床。相傳舊有之而今亡云。孝宗戊戌間。先君子與諸宗人謀修歲祭之禮。行之四十年于玆。嘗欲營豎碑表而未就。往年秋。錫鼎與宗人議。發書于先祖後孫之爲邑宰者五六人。宗叔後徵宰淸安。是邇先墓。遂委重於宗叔。命工伐石。治表石各一。床石各一。題曰高麗選部典書崔得枰墓。一曰高麗完山君崔宰墓。九代祖平度公以孝旌閭。世遠門毀。顯宗甲寅。改營棹楔。今又毀破久。亦以石碑改之。題曰朝鮮孝子參贊平度公崔有慶之門。攻石刻訖。以是年端午。建于墓前。孝子門。舊在墟門街竹亭舊基。今移立碑于完山君墓近處。具祭奠祝告。後孫參拜者三十餘人。噫。先代碑表。曠三百年未立。今始營建。豈非私門之大幸歟。後孫錫弼宰臨陂。寯宰永同。後章爲安奇郵官。各捐俸以助。柱天宰信川。寔爲咸興判官。追有助。墓下主事者命稷。有司則世顯,後俊云。錫鼎印出碑表數件。裝爲帖。家藏之。庚辰秋七月日。平度公十世孫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錫鼎謹書。
 
동문선 제123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묘지(墓誌)
최태감 묘지(崔太監墓誌)

최해(崔瀣)

나의 천성은 게으르고도 싸우는 데 겁이 많다. 생각하면 지금부터 10년 전에 왕에게 사랑받는 한 내시의 무고를 당하여, 나같이 게으른 몸으로도 한 번 가서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이름 있는 사대부들이 모두 손님 자리에 있고, 그 문전이 저자 같았다. 좀 있다가 내시가 나오니 손님들이 맞아 절하여 무릎을 굽히는데, 혹시라도 뒤질세라 하였다. 나는 선비로서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하고, 예절에 의하여 서로 인사하려 하니 내시가 거만하게 보며 그만 말을 타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것이었다.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하여 물러나서 말하기를, “그런 일로 하여 왔던 것이 원래 틀린 생각이었으니, 변별이 없다 하여도 무엇이 안 될 것이랴. 들으니 최 밀직(崔密直)이 날마다 왕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어, 세상에 칭찬을 듣고 있다 하니, 혹 권고하여 왕께 뵈옵고, 분별하여 아뢰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가서 문간 옆에서 기다렸다. 밀직이 곧 나를 여러 사람 가운데서 바라보고, 특별히 좌석 차례를 건너서 먼저 인사하고 와서 찾은 사연을 묻기에 여기서 사실을 다 말하였다. 이때 그 내시의 세력이 한창 성하여 억압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일은 불문에 부치고 말았지만, 밀직의 그 특별히 먼저 받아들이고 선비를 면대하여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옛날 의협(義俠)과 같은 기풍이 있는데 감동하여, 이후로는 늘 가서 만나고 만날 때마다 특별한 예우(禮遇)를 받았다. 밀직은 우리 나라 벼슬이요, 천자의 조정에서 벼슬한다면 지위가 3품관이다. 지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나라고 어찌 생각이 없을 것인가. 마땅히 그 아들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그의 행적을 차례로 적어 글을 지어서 나의 슬픈 생각을 표하려고 한다. 공의 휘는 안도(安道)요 성은 최씨이며, 어릴 때 이름은 나해(那海)이다. 선대는 해주(海州)가 본향인데 후에 용주(龍州)에 옮겨 그대로 본적을 삼았다. 그 선조들을 멀리까지는 상고할 수 없지만, 증조부 휘(諱) 광(光)은 주의 부호장(副戶長)이었으며, 조부 휘 대부(大富)는 처음으로 벼슬하여 검교대장군이 되었고, 아버지 휘 현(玄)은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상호군이었는데, 공이 귀하여지므로 조정에서 조청대부(朝請大夫) 대도로 동지효기위(大都路同知驍騎尉)를 증직하고 대흥현남(大興縣男)을 추후 봉작하였으며, 어머니 김씨는 추후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하였다. 지대(至大) 원년(충렬왕 34년) 공의 나이 15세에 산원(散員)으로 뽑혀 낭장(郞將)이 되었으며, 연우(延祐) 4년(충숙왕 14년)에 호군에 임명되니, 관품은 봉상대부(奉常大夫)였으며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 상호군의 직품에 올랐으며, 세 번 전임하여 정순대부에 이르렀다. 태정(泰定) 4년(충숙왕 14년)에 응양군(鷹揚軍)을 주장하고 판군부서가 되었으며, 지순(至順) 9년에는 부밀직사에 승진되어 관품이 봉익(奉翊)이었다. 마침내, 감찰대부 동지밀직사사로 고쳐졌으며, 협모동덕(協謀同德)의 공신 칭호를 받았고, 또 중국 조정의 칙명을 받아 정동행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다. 2년에는 어명을 받들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숙위(宿衛)를 하였으며, 원통(元統) 원년(충숙왕 복위 2년)에는 특별히 중상감승관(中尙監丞官) 봉의대부(奉議大夫)에 제수되었다. 지대(至大) 2년에는 태부감 소감 관조청(太府監少監官朝請)에 전임되었으며, 6년에는 또 본감태감관(本監太監官) 중의대부(中議大夫)에 전임되었다. 경사(京師)에 벼슬한 9년에 세 번 관직이 전임되고 두 번 조서를 받들어서 본국이 영광이 되었는데, 먼저는 지순 3년(충혜왕 3년)이요, 나중은 지원(至元) 5년(충숙왕 복위 8년)이었다. 다음해 봄에, 사신일을 마치고 환조(還朝)하려다 병이 나서 7일 만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47세이며, 경진년 3월 27일의 일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 조청공(朝請公)을 따라 태위심왕(太尉瀋王 충선왕)을 경도(京都) 집에 섬기면서 드디어 3국 말을 통하였다. 등용되어 선왕의 관속이 되었으며 복종하여 섬기기를 오래하였는데, 그 수고에 대하여 밭 100결(結)과 노비 10명을 하사하였다. 지치(至治) 연간에는 선왕이 역신들에게 모함을 입어 경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이 시종하면서 두 마음이 없었으므로 밭 200결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으며, 태정(泰定) 초년에는 원 나라 조정에서 배반한 사람의 말을 듣고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다른 곳의 예와 같이 하려 하므로, 공이 작고한 정승 김이(金怡) 등과 함께 힘써 변론하여 그만두게 되자, 그 공으로 밭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하였다. 후사왕(後嗣王 충혜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서는 갑자기 밀직에 임명되어, 의지하고 맡김이 그 위에 더할 수가 없었다. 또 지순(至順) 연간에 금상(今上)이 해상(海上)에 있을 때에는, 공급하고 시종하는 준비가 그의 사력(私力)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므로 후에 왕위를 바로하면서 물건 주심이 매우 후하고, 친서를 내려주어서 모든 전지나 산업을 다른 사람이 침노하고 빼앗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가 조정에 벼슬한 것이 실은 여기에 근본한 것이었다. 아, 이것을 보면 대략 그 사람됨을 볼 수 있는 것이니, 다른 것은 의논할 것이 없는 일이다. 아내 구씨(具氏)는 고 봉익대부 휘(諱) 예(藝)의 딸인데 역시 공으로 하여 귀하게 되어 박릉군군(愽陵郡君)을 봉하였으며,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유(濡)인데 지금 상호군이요, 다음은 원(源)인데 지금 호군이며, 다음은 숙신(淑臣)이며, 다음은 문구(文丘)인데, 모두 아직 벼슬하지 못하였다. 큰딸은 전 호군 인당(印璫)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전 낭장 김유온(金有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전 별장 임희재(林熙載)에게 시집가고, 막내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이해 5월에 공을 아무곳에 장사 지냈으니 예법에 의한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본국에 벼슬하여 본국 신하되고 / 仕王國爲王之臣
천자 조정에 벼슬하여 천자의 신하되는 것 / 仕天子之朝爲天子之巨
피차간의 경중을 / 彼輕此重
어찌 이몸에 계교할 것 있겠는가 / 曾何足計乎吾身
옛말에 한 나라의 선비도 되고 / 古語云有一國之士
천하의 선비도 된다 하였으니 / 有天下之士
모든 것 겸한 그 재주 아니면 / 才非有兼人
뉘라서 이러하오리 / 其孰能如此
애석하다 / 惜也
지혜는 길기도 긴데 나이는 어이 길지 못한고 / 慮甚長而年則不長
못 믿을 세상 일 / 所未可恃者
이것이 하늘이 아닌가 / 其曰不在於蒼蒼
이것이 하늘이 아닌가 / 其曰不在於蒼蒼

하였다.

[주D-001]지순(至順) 9년 : 지순(至順)은 원(元)나라 문종(文宗)의 연호인데, 그 기간이 3년까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의 지순 9년은 잘못 적은 것이다. 또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최안도는 충혜왕(忠惠王)초에 감찰어사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충혜왕 원년이 지순 2년에 해당하는 것인 즉, 여기의 지순 9년은 실은 지순 원년이며 충숙왕 17년으로 보여진다.


 

 

○ 3년에 양원왕 8년 문선제(文宣帝)가 영주(營州)에 이르렀다. 박릉(博陵) 최류(崔柳)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나라 말기에 고구려로 유망하여 들어간 사람들을 송환시키기를 요구하였는데, 최류에게 칙명하기를, “만약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조처하라.” 하였다. 최류가 고구려에 이르러 이를 허락받지 못하자, 두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고구려 왕 고성을 주먹으로 쳐서 용상 밑으로 넘어뜨렸다. 그러자 고성의 좌우에 있던 고구려의 신하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면서 사죄하였다. 최류가 5천 호를 이끌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북사》

 

[주D-002]《씨족지(氏族志)》가 …… 되었다 : 《씨족지》와 《성씨록(姓氏錄)》의 편찬, 그리고 금혼령(禁婚令)의 성격은 여기서 정조(正祖)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르다. 당 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6년(632)에 문망(門望)을 팔아먹는 매혼(賣婚)을 금지하고 12년(638)에는 ‘정관씨족지(貞觀氏族志)’를 편찬하여, 기존 산동 사성(山東四姓) 최(崔), 노(盧), 이(李), 정(鄭)으로 대표되는 산동 귀족 중심의 문벌 체제를 당 나라 종실과 관품(官品)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체제로 바꾸고자 하였다. 즉 황족과 왕후족을 1등, 2등으로 하고, 이하는 조정의 관품에 따라 성씨의 등급을 매겨 종래 천하 제일이라고 하던 박릉 최씨(博陵崔氏)를 3등으로 낮추었다. 그 이후 무후(武后) 정권이 들어서자 고종(高宗) 현경(顯慶) 4년(659)에 산동 귀족인 칠성십가(七姓十家) 간의 통혼을 금지하고, 문망을 높이기 위해 이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면서 결혼하는 배문혼(培門婚)을 금지시켰다. 아울러 당시 권력자인 이의부(李義府), 허경종(許敬宗) 등이 무후와 자신들의 가문이 ‘씨족지’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성씨록’을 편차하고 이전의 씨족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성씨록’은 특히 군공(軍功)이나 과거(科擧)로 입신한 5품 이상의 관료를 사류(士類)로 편성하여 등재함으로써, 오히려 위진남북조 이래로 사서(士庶) 구별이 엄격했던 문벌제도에 타격을 주고 새로운 관료 세력을 형성한 서민층의 성장을 인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계명(李啓命), 수당관료제의 성립과 전개, 172~211쪽》

 故奉翊大夫諱藝之女也。亦以公貴。封博陵郡君。生四男四女。男長曰濡。今上護軍。次曰源。今護軍。次曰淑臣。次曰文丘。俱未仕。女長適前護軍印璫。次適前郞將金有溫。次適前別將林煕載。季未有適。是五月。葬公于某地之原。禮也。銘曰。
仕王國。爲王之臣。仕天子之朝。爲天子之臣。彼輕此重。曾何足計乎吾身。古語云。有一國之士。有天下之士。才非有兼人。其孰能如此。惜也慮甚長而年則不長。所未可恃者。其曰不在於蒼蒼。其曰不在於蒼蒼。

 

 崔博陵之擧族淸愼
 선사의 본관이 박릉 최씨로서, 최씨는 중국의 명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덩달아서 최씨라면 박릉 최씨라고 과장해 말하는 것이다.

 

錦谷先生文集卷之十四 원문이미지 
  
 墓碣
完山君墓碣後記 壬戌 a_303_39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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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向因公十四世孫憲翊之謁。書公考黃岡公墓石。而撮錄其四五世子姓矣。憲翊更言曰。墓在洞麓。則猶當就攷。而完山君葬地。旣在全州西馬田十餘里之間。則未見大碑。無以詳知。願得數行各記。余曰然。更按其狀而略叙。公之先肇於完山。而璿系之同源也。考諱文挺號黃岡。以正學直疏。顯於麗季。妣靑松沈氏。祭酒淑女。生一男。卽公也。公諱蒙。生員官檢校中樞院事。胤子伯由上書乞以臣職授臣父。上允之。賜伯由敎書。有陞其父爵之語。盖以子貴也。公之事行。世遠不可詳。舊碑磨漶不可考。而有曰官至二品。年逾七旬。又其銘曰。天性仁厚。子孫振振。毋忝乃祖。各敬其身。語愈約而愈足懲也。非後承之賢。烏能與此哉。配全州崔氏。直提學龍甲女。墓與公雙封。生三子。長伯由封完城君。謚良厚。次仲由監務。次季由護軍。其餘孫曾。皆見黃岡公大碑。完城君墓在公塋下數步。以舊刻之頑缺。謀移他石者。卽後孫斗玉也。後復頑缺。而又有移刻如今日。則可保不朽於無窮。豈非幸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