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의병활동/인제공 휘 현 신도비

처사 최공(崔公)의 묘갈명공은 휘가 심(深)이고 (안렴사공파)

아베베1 2014. 1. 30. 21:46

 

 

 

 

 

여헌선생문집 제12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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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처사 최공(崔公)의 묘갈명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인 최아(崔阿)는 전주인(全州人)이다. 그 후손에 택(澤)이란 분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영남의 사천(泗川)으로 이거(移居)하였다. 3대에 휘 수지(水智)란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그쳤는데, 손자인 좌윤(左尹) 응룡(應龍)의 귀함으로 인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승지는 뒤에 해평 김씨(海平金氏)에게 장가드니, 바로 고려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인 훤술(萱述)의 후손이며 교도(敎導)인 유사(由舍)의 따님이었다. 인하여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문헌의 유풍을 좋아하여 마침내 고을의 아래 마을에 터를 정하여 거주하였다.
김씨 소생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이회(以淮)인바 음직으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보임되었다. 주부는 성산 이씨(星山李氏)에게 장가들어 치운(致雲)을 낳았는바, 재주가 있었으나 이름을 이루지 못하고 장사랑(將仕郞) 참봉(參奉)을 받았다. 참봉은 김해 허씨(金海許氏) 생원(生員) 유(裕)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으니, 공이 바로 둘째 아들이다.
공은 휘가 심(深)이고 자가 모(某)이다. 어려서 백씨(伯氏)인 진사 해(海)를 따라 유학(遊學)하니, 더불어 사귄 벗이 모두 상주(尙州), 성주(星州), 선산(善山)의 유명한 선비들이었다. 이 때 상사(上舍 진사를 가리킴) 노수함(盧守諴)이 성리잠명(性理箴銘) 한 책을 초(抄)하여 써 주니, 공은 항상 이것을 외고 그치지 않았다.
공은 학문할 적에 널리 섭렵함을 힘쓰지 않고 오직 사서(四書)에 전공하여 겨울 밤이면 언제나 얼음이 언 샘물을 깨서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양치질하여 졸음을 깨곤 하였는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것이 병의 근원이 되어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고질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두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급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마침내 고요히 거처하여 병을 요양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다.
김진락당(金眞樂堂)이 욕심을 끊고 희노(喜怒)를 삼가며 언어를 적게 한다는 등의 긴요한 법을 듣고 공은 이것을 스스로 지켰다. 친구들이 때로 찾아오면 공은 방으로 이끌고 들어가 대략 한훤(寒暄 안부를 가리킴)을 펼 뿐이었으며, 혹 동네 사람이나 친족들이 굳이 초청하면 비록 억지로 가더라도 하루 종일 앉아 있고 말씀하지 않았으며 자리에 시끄럽게 떠드는 자가 있으면 눈을 감고 졸곤하였다. 사람 중에 도리가 아닌 것으로 와서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더불어 따지지 아니하여 마침내 청렴하고 꼿꼿한 지조를 지켰다.
이웃에 어린아이들이 수업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조용히 인도하여 스스로 이해하게 하고 잡기(雜技)와 장난과 해학(諧謔)을 금하였다. 혹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준엄하게 끊으며 말씀하기를, “네 이미 스스로 포기하고 또 함께 배우는 자들을 방해하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였다.
공은 성품이 자상(慈祥)하고 고요하여 세상의 재미에 담박하였으며, 공손하고 신중하고 과묵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가로이 수양한 지 40여 년에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는데 병세가 또한 차츰 감하여 이빨과 머리가 빠지지 않고 정신이 소모되지 않아 항상 깨어 있는 뜻이 있었다.
송산(松山)에 집터를 정하고는 스스로 송암(松庵)이라 호하고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여 천수(天壽)를 마쳤다. 공은 정덕(正德) 임신년(1512,중종7)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기축년(1589,선조22)에 별세하니, 향년이 78세였다.
공이 가정에서 자제들을 훈계한 내용을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평소 때에 따르고 일에 따라 항상 마음을 일깨워 경계하고 권면(勸勉)한 것이 모두 옛 성현의 착실하고 긴요한 말씀이었으며, 시속에서 부형들이 자제들을 가르치고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도 다른 가르침은 없었고 다만 “거처하기를 공손히 하고 일을 잡기를 공경히 하고 사람 대하기를 충성스럽게 하여야 하니, 이것을 비록 오랑캐 나라에 가더라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거듭 당부할 뿐이었다. 이것을 아울러 관찰해 보면 공은 아마도 은군자(隱君子)의 무리일 것이다.
공은 먼저 동래 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고, 뒤이어 덕양 기씨(德陽奇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또한 일찍 죽었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후사(後嗣)가 없음을 서글퍼하여 마침내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선비인 지원(智源)의 따님에게 삼취(三娶)하니, 바로 정언(正言) 맹전(孟專)의 증손이었다. 정언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으로 눈이 멀었다고 칭탁하고 벼슬하지 않았는바, 이 의리는 세상에 함께 전해 온다.
이씨 부인 또한 자상하고 인자하여 비록 종들이라도 함부로 꾸짖지 아니하여 어루만지고 구휼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이웃과 친족들을 후대하고 화목하여, 가산의 있고 없음으로 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별세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공의 배필이라 할 것이다. 신미년(1571,선조4)에 나이 48세로 별세하니, 공의 2남 1녀는 모두 이씨 부인의 소생이다.
장남 흔(昕)은 일찍 죽었고 차남 현(晛)이 실로 가정 교훈을 이어받았는바, 상상(上庠 성균관을 가리킴)에 오를 때에 공이 생존하여 이것을 보았다. 그 후 병오년(1606,선조39)에 문과에 급제하여 얼마 후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견책을 당하여 현재 집에 있다. 딸은 충의위(忠義衛) 이경록(李景祿)에게 출가하였다. 정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부사(府使) 복일(復一)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아들은 산휘(山輝)인데 현재 학업을 부지런히 힘쓰고 있다. 산휘는 강릉 주씨(江陵朱氏)로 무과 급제하여 봉사(奉事)인 응방(應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인박(因博), 인후(因厚), 인적(因積)이고 한 딸은 어리다. 충의는 세 아들을 낳았으니, 원근(遠根), 원수(遠樹), 원지(遠枝)인데 큰아들과 막내아들은 요절하였고 원수는 안동 고씨(安東高氏)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공의 묘소는 처음에 묵어평(默語坪)에 있었고 이씨 부인의 묘소는 오리동(梧里洞)에 있었는데, 을묘년에 함께 옮겨 상림산(上林山)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장례하였으며, 그 후 몇 년 만에 비갈을 세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종적을 감추고 병을 요양하였으나 / 藏踪養病
실은 덕을 기른 것이었네 / 實惟養德
세상의 분화함에 뜻하지 않고 / 絶意紛華
한결같이 담박함에 뜻하였네 / 一味淡泊
사람들과 다투지 않아 / 不與人爭
치욕을 멀리하였으니 / 能遠恥辱
편안히 한 것은 분수였고 / 所安者分
터전으로 쌓은 것은 복받는 일이었네 / 所基者福
간곡한 가훈을 / 丁寧家訓
참되고 간절하게 경계하였네 / 眞切警勅
반드시 성인의 격언을 인용하니 / 動引格言
모두 몸과 마음을 바루는 약석이었네 / 無非藥石
뜻을 잇는 훌륭한 아들 있어 / 繼志有嗣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 받들어 지킨다오 / 奉持兢惕
비석을 새겨 후세에 보이니 / 鐫示來後
영원히 훌륭한 모범이 되리라 / 宜永作式

 

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崔阿。全州人。其後有曰澤。060_225c始移居于嶺南之泗川。三世而有諱水智。以文科仕止比安縣監。因孫左尹應龍貴。贈都承旨。承旨後娶海平金氏。卽高麗壁上功臣萱述之後敎導由舍之女。仍喜江山之勝。文獻之風。乃卜居于縣下里。金出有三子。長曰以淮。蔭補司僕寺主簿。主簿娶星山李氏。生致雲。才不成名。資受將仕郞參奉。參奉娶金海許氏生員裕之女。生三子。公其次也。公諱深。字某。幼從伯氏進士海遊學焉。所與友皆尙星善聞人也。時盧上舍守諴。抄寫性理箴銘一冊以與之。公常誦不輟。其爲學不務博涉。專功四子。每冬夜。扣泉冰盥060_225d漱。以警昏睡。不覺其爲病根。年未三十。已成疾。再中鄕榜。遽停擧業。遂以靜處養痾爲意。聞金眞樂絶嗜慾愼喜怒少言語等要法。用自守焉。親友時至。引入臥內。略敍寒暄而已。或被洞族强邀。雖勉往。坐終日不言。座有喧譁。則閉目而睡。人有以非理來侵者。不與之相較。終遂其廉介之操焉。隣幼有請業者。從容開導。使之自解。禁雜技戲謔。不從者峻絶之曰。汝旣自棄。又妨同學。不可留也。公慈祥恬靜。淡於世味。恭遜愼默。不喜說話。閒養四十餘年。始終如一。而疾亦稍減。齒髮不脫。精神不耗。常有惺惺之意。家于松山。060_226a自號松庵。不出戶庭。以終其天年。公生于正德壬申。終于萬曆己丑。享年七十八。申按其家庭訓戒之別錄。則於其平日隨時隨事所常提擧而警勉之者。無非先聖賢著實喫緊之格語。非時俗中父兄所以敎引其子弟者也。及其屬纊之日。亦無他敎。但以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之言。申之而已。幷是觀之。公蓋隱君子之徒也歟。公先娶東萊鄭氏。早歿。繼娶德陽奇氏。亦早歿。公傷再室無嗣。遂三娶星山李氏士人智源之女。卽正言孟專之曾孫。正言托盲不仕之義。世共傳焉。李氏亦慈祥仁恕。雖婢僕060_226b未嘗詬罵。盡其撫恤。厚睦隣族。不以有無靳施。故其歿也。里巷涕泣悲惜之。信乎公之配也。歲辛未。以年四十八而歿。公之二男一女。皆其出也。長曰昕。早夭。季晛。實承家訓。其升上庠也。公及見之。後丙午登第。頃以正言被譴。方家食焉。女適忠義衛李景祿。正言娶義城金氏府使復一之女。子曰山輝。方勤志業。山輝娶江陵朱氏武科奉事應邦之女。生三子。因博,因厚,因積。一女幼。忠義生三男。遠根,遠樹,遠枝。昆季夭。遠樹娶安東高氏。生四子。俱幼。公之墓。初在默語坪。李氏墓。在梧里洞。歲乙卯。幷遷兆于上林山癸坐丁060_226c向之原。後某年而碣焉。銘曰。
藏踪養病。實惟養德。絶意紛華。一味淡泊。不與人爭。能遠恥辱。所安者分。所基者福。丁寧家訓。眞切警勑。動引格言。無非藥石。繼志有嗣。奉持兢惕。鐫示來後。宜永作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