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글 /삼각산 북한산성 탐방

북한산성 자료

아베베1 2014. 1. 31. 21:23

 

 

 

 

捴戎廳
[北漢山城]

北漢○北漢山城在三角山溫祚舊基。肅宗辛卯。相臣李濡建請。築山城建行宮。峙餉糓,軍器。以爲保障之所。城周七千六百二十步。城廊一百二十一。將臺三。池二十六。井九十九。大門四。暗門十。倉庫七。大寺十一。小寺三。置管城所。 城餉。自宣惠廳劃送。城堞,軍器。訓,禁,御三營設倉分守。置經理廳。在鄕校洞。 以勾管矣英宗丁卯。以北漢當爲捴戎廳信地。特敎罷經理廳。合屬本廳。專管北漢。加設敎鍊官三員。仍差訓,禁,御三倉監官。○正宗壬寅。捴戎使李昌運作减額大節目。减經理軍官四員只存本廳軍官三員。 正宗癸丑。捴戎使李邦一以本廳凋殘。城堞修築。啓請還屬三軍門。管城所木代錢二百兩。取殖。補用於每年北漢治道。○公廨,寺刹修補時。添餉條,月課條,或空名帖,補土所錢等。請得以用。 別牙兵千捴管城將一員。正宗壬寅。以勿拘階梯。擇人自辟。專管糶糴。周年交遞定式。辛卯築城後。以曾經閫帥人啓下。始稱行宮所衛將。後稱都別將。壬寅。改稱管城將。英廟丁卯。罷經理廳合屬本廳後。中軍例兼。甲申。改軍制爲五營時。以防禦使履歷擇差。兼中部千捴。恒留本城。辛卯。因捴戎使金孝大所啓。管城將。依前以中軍兼差。正宗壬子。改軍制爲三營時。改號爲別牙兵千捴兼管城將。 把捴一員。哨官五員。別破陣哨官一員。守堞捴二員。敎鍊官四員。旗牌官五員。軍器監官一員。軍官三員。付料軍官二十員。每朔試射。計劃。付料。內山直監官三員並入。 門部將三員。守堞軍官二百人。散在畿邑。 山城員役四十六名。書員五名。庫直十一名。大廳直二名。使令五名。軍士十二名。門軍士十一名。 軍制。一司五哨。把下軍三十名。別破軍二百名。牙兵五哨。散在畿邑。 標下軍一百九名。十九名。有料。 ○置僧兵號曰緇營。在重興寺。 捴攝一人。本以原居僧差出矣。正宗丁巳。因水原留守趙心泰所啓。以龍珠寺僧輪差。 中軍僧一人。將校僧四十七人。有料。 僧軍三百七十二名。七十三名。有料。 太古寺。在太古臺下。一百三十六間。○藏經書,通史,古文,唐詩板。 重興寺。在登岸峯下。一百四十九間。○緇營所在。 輔國寺。在禁倉下。七十六間。 鎭國寺。在露積峯下中城門內。一百四間。 扶旺寺。在鵂巖峯下。一百十一間。 國寧寺。在義相峯下。七十間。 普光寺。在大城門下。七十五間。 元覺寺。在甑峯下。八十一間。 龍巖寺。在日出峯下。八十八間。 祥雲寺。在靈鷲峯下。八十九間。 西巖寺。在水口門內。閔漬菴舊基。○一百七間。 右十一寺。各置僧將一人。首僧一人。番僧三名。奉聖菴。在龜巖峯下。二十五間。 元曉菴。在元曉峯下。十間。 文殊菴。在文殊峯下。○行宮。在上元峯下。內正殿二十八間。行閣十五間。水剌間六間。廁三間。內門三間。外正殿二十八間。行閣十八間。中門三間。月廊二十間。外門四間。山亭門一間。 ○管城所。在上倉。大廳十八間。內衙十二間。餉米庫六十三間。軍器庫三間。執事廳三間。軍官廳四間。書員廳四間。庫直家五間。月廊二間。各門七。 中倉。大廳六間。餉米庫七十八間。庫直家五間。大門二間。 下倉。大廳六間。餉米庫三十四間。庫直家八間。大門二間。 別庫。在行宮傍。○大廳三間。餉米庫十二間。庫直家五間。大門二間。 右。上倉,中倉,下倉,別庫。謂之管城四倉。○別舘四。山暎樓十間。射亭六間。東將臺三間。御製碑閣一間。○東將臺。壬辰。因特敎建置。 訓倉。大廳十八間。內衙八間。餉米庫六十間。軍器庫十六間。中軍所四間。郞廳所五間。書員廳五間。拘留間三間。行閣十一間。 禁倉。大廳十八間。內衙六間。餉米庫五十四間。軍器庫十三間。中軍所五間。書員廳四間。月廊八間。 御倉。大廳十八間。內衙七間。餉米庫四十八間。軍器庫十間。中軍所四間。書員廳二間。月廊十二間。 ○山城附近之地。分定外字內。新屯,淸潭,西門下,橋峴下爲訓倉字內。彌阿里,靑水洞,加五里,牛耳洞爲禁倉字內。津寬里,小興洞,女妓所,三千洞爲御倉字內。 ○屬屯四。甲士屯。在楊州樓院。○本。兵曹牧場。肅宗甲午。以本屯當爲北漢犄角之勢。筵禀請得。屬之北漢。隨起收稅。置還米盡分取耗。接濟屯屬。餘數添付元還。 水逾屯。在楊州。附於甲士屯。○本。粮餉廳屯。景宗辛丑。經理堂上閔鎭厚請得。屬之北漢。置還租。 黔巖屯。在楊州黔巖。○肅宗己亥。買置。置還租盡分取耗。接濟屯屬。 新屯。在北漢西門外。附於黔巖屯。○肅宗庚子。經理堂上閔鎭遠買置。 ○甲士,黔巖二屯皆有別將。黔巖別將。英宗辛巳。以故別將李聖臣子寅亮永差別將。代代承差事。受敎。


 

 

 

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강  영조36년 경진(1760,건륭 25)  8월 20일

 

 

강관을 보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나아가 대전께 문안하게 하였다.

 


목  ○ 이때 상께서 북한산성에 어가(御駕)를 타고 행차하셨기 때문이다.

 

 
동사강목 제1하 원문이미지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임신년 신라 지마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80년, 백제 개루왕 5년(한 순제 양가(陽嘉) 원년, 132)

춘2월 백제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추7월 고구려 좌보 목도루(穆度婁)가 사면하였다.
왕의 아우 수성이 왜산(倭山)지금 미상 에 사냥하며 좌우와 연회하였는데 관나우태(貫那于合) 미유(彌儒)와 환나(桓那)의 어지류(菸支留)와 비류나 조의(沸流那皂衣) 양신(陽神) 등이 수성의 심복이 되어, 가만히 수성에게 이르기를,
“처음 모본왕(慕本王)이 죽었을 때 여러 신료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고 왕에게 사양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미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으면서도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계획하소서.”
하니, 수성이 말하기를,
“승습(承襲)을 적장(嫡長)으로 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常道)이다. 왕이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넘보겠는가?”
하였다. 미유가 말하기를,
“아우가 어질어서 형의 뒤를 이은 일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대는 의심하지 마시오.”
하니, 좌보 목도루가 수성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탁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안】 목도루는 난을 겪기 전에 놀라 물러났으니, 가히 명철한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속된 세상을 도망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찬탈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다가 마침내 역점놈의 신하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계해년 신라 진평왕 25년, 고구려 영양왕 14년, 백제 무왕 4년(수 문제 인수 3, 603)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침략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북한산성이 신라의 소유가 되면서부터 고구려인들이 기어코 이를 취하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당시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취하려 하니, 신라 왕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지나매, 북한산 성중에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니, 고승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안】 열국(列國)이 분할하여 다스릴 적에는 경계가 있게 마련인데, 그 지형이 험준한 땅[形勝]을 내가 지키게 되면 요지가 될 것이요, 적이 웅거하면 해가 될 것이니, 그러므로 나라를 가진 자는 반드시 이런 것을 다투어 차지하여 나라를 굳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임진강(臨津江)에 미치고, 동으로는 태산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굽어보아 사방의 거리가 쪽 고르니, 이것은 해동 제일의 요새(要塞)이다.
그러므로 삼국 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차지하면 신라와 백제가 싸움에 어렵고, 신라가 차지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패배시키니, 진실로 지리(地理)가 좋은 곳이다.


 

 

 

 신유년 신라 태종 8년, 문무왕 원년, 고구려 왕 장(藏) 20년, 백제 왕 풍(豊) 원년(당고종 용삭(龍朔) 원년, 661)

 

신유년 신라 태종 8년, 문무왕 원년, 고구려 왕 장(藏) 20년, 백제 왕 풍(豊) 원년(당고종 용삭(龍朔) 원년, 661)

동사강목 제4상 원문이미지 
확대 원래대로 축소
신유년 신라 태종 8년, 문무왕 원년, 고구려 왕 장(藏) 20년, 백제 왕 풍(豊) 원년(당고종 용삭(龍朔) 원년, 661)


춘정월 백제의 종실(宗室)인 복신(福信)이, 옛 왕자인 풍(豊)을 주류성(周留城)에서 왕으로 세우고 나아가 웅진(熊津)을 포위하였다.
풍은 일찍이 왜(倭)에 인질(人質)로 가 있었는데 무왕(武王)의 종자(從子) 복신이,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 지금은 미상 을 점거하고 풍을 맞아 세우니,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고, 또 부성(府城) 근처 네 곳에 성을 만들어 포위하여 지키면서, 유인원의 군사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2월 신라가 군사를 보내 웅진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백제 사람들이 사자성을 공격하므로 신라 왕이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명하여 대당 장군(大幢將軍)을 삼고 문왕(文王) 양도(良圖)로 부장을 삼았으며, 문충(文忠)으로 상주 장군(上州將軍)을 삼고 진왕(眞王)으로 부장을 삼았으며, 의복(義服)으로 하주 장군(下州將軍)을 삼고, 무염 욱천(武欻旭川)으로 남천 대감(南川大監)을 삼고, 문품(文品)으로 서당 장군(誓幢將軍)을 삼고, 의광(義光)으로 낭당 장군(郞幢將軍)을 삼아서, 사자성을 구하게 하였다. 품일이 먼저 두량윤성(豆良尹城)지금은 정산(定山) 의 남쪽에 이르러 진영 설치할 땅을 살펴볼 때 백제 사람들이 신라군의 진영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급히 나와 공격하니, 신라의 군사들은 놀라 무너졌다. 대군(大軍)이 계속 와서 고사비성(古沙比城 지금은 미상 바깥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1개월 6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돌려 빈골양(賓骨壤)지금은 미상 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백제 군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였다. 그리하여 무기와 치중(輜重)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오직 문충ㆍ의광만이 백제의 군사를 각산(角山)지금은 미상 에서 격파하고 그들의 둔보(屯堡)로 들어가서 2천여 급(級)을 베었다. 왕은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金純)ㆍ천존(千存)ㆍ죽지(竹旨) 등를 보내어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 지금은 미상 에 이르러 군사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패전했기 때문에 벌을 논하였는데 차등이 있게 하였다.
○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군사를 일으켜 복신에 호응하였다.
상지(常之)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 키가 7척이며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어 벼슬이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풍달(風達)지금은 미상 군장(郡將)을 겸하였다. 정방이 백제를 멸할 때에 상지가 전부(前部)로써 항복하였으나 정방이 왕 의자(義慈)를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므로 상지는 두려워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를 모으니, 한달 만에 귀부(歸附)한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정방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고 별부(別部) 사타상여(沙咤相如)와 함께 각각 요험지(要險地)에 웅거하니, 여러 성이 많이 귀부하였다. 이때에 군사를 이끌고 복신에 호응한 것이다.

3월 당의 유인궤(劉仁軌) 및 신라의 군사들이 웅진을 구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복신은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였다.
그때 낭장 유인궤는 죄에 연좌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 민간의 자격으로 종군하는 것)하였는데, 조칙(詔勅)으로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 대방주는 《지리고(地理考)》에 보인다 를 삼아 왕문도(王文度)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신라의 군사를 내어 유인원(劉仁願)을 구하게 하니, 인궤는 기뻐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에게 부귀를 누리게 한다.”
하고, 당력(唐曆)과 묘휘(廟諱)를 청해 가지고 가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이(東夷)를 깨끗이 평정하고 정삭(正朔)을 해표(海表 바다 바깥이라는 뜻)에 반포하리라.”
하였다. 인궤는 군사를 엄정히 제어(制御)하여 신라의 군사와 함께 옮겨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복신 등은 웅진 입구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막았으나 인궤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하여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는 도망하여 목책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서로 다투다가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1만여 인이나 되었다. 복신 등은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에 웅거하였다. 신라의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서 돌아갔고, 또 부성(府城)이 곤핍(困乏)하였기 때문에 다시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여 주니, 웅진은 이로 인하여 모두 살아났다.
○ 백제 장수 복신이 신라의 구원병을 요격(邀擊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하는 것)하여 패배시켰다.
그때 도침(道琛)은 스스로 영군 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상잠 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유민(遺民)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사자를 인궤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들으니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을 모두 섬멸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어찌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인궤도 사자를 보내어 글을 지어 화복(禍福)을 갖추어 말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그 사자를 외관(外館)에 가두어 두고 교만한 말로 이르기를,
“너는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니 함께 논의할 수 없다.”
하고, 답서(答書)도 없이 돌려보냈다.
당이 군사 1천 명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인궤는 무리가 적었기 때문에 인원(仁願)의 군사와 합하고 사졸을 쉬게 하고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신라 군사와 합하여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은 그의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원케 하였다. 그리하여 고사(古泗)에 이르러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복신이 군사적은 것을 알고 요격하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葛嶺)지금은 미상 에서 도망하여 오니, 신라의 군사들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신에게 항복하였다. 복신은 승세(勝勢)를 타고 다시 부성(府城)을 포위하니 웅진의 길이 끊기고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건장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몰래 식량을 보내어 그들의 곤핍(困乏)을 구제하였다. 이때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하였으나 풍(豊)은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주제(主祭)만 할 뿐이었다. 복신은 인원이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음을 알고는 사자를 보내어 타일러 말하기를,
“대사(大使)는 어느 때에 서쪽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갈 때는 사람을 보내 송별(送別)하겠소.”
하였는데,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하4월 당이 임아상(任雅相) 등을 보내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쳤다.
당이 다시 아상(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와 행군총관(行軍摠管)을 삼고 계필 하력(契苾何力)으로 요동도(遼東道)의 행군총관을 삼고, 소정방으로 평양도(平壤道)의 행군총관을 삼아 소사업(蘇嗣業) 및 여러 호병(胡兵)과 함께 모두 35군(軍)을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제(帝)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니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이를 도모하기에 이릅니까? 만일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게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동원하면 국내의 인심이 편치 못할 것이니 이는 천하가 수비하는 것 때문에 피폐될 것입니다. 신은, 정벌(征伐)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滅)하는 것이 멸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무후(武后)가 또한 간하므로, 조칙하여 군사를 돌아오게 하였다.

5월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생각하기를, 신라의 정예병(精銳兵)은 모두 백제에 가 있고 내지(內地)는 비어 있으니 칠 수 있으리라 하고, 뇌음신(惱音信)을 보내어 말갈의 장수 생해(生偕)와 함께 수륙(水陸)으로 나아가 합군(合軍)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여주(驪州) 오포(梧浦)이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을 공격하는데, 고구려 군사는 서쪽에 진영을 설치하고 말갈은 동쪽에 둔진(屯陣)하여 포거(砲車)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대니 성과 집들이 마구 무너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陀川)은 성 바깥에 질려(蒺藜 적을 막는데 쓰는 마름쇠)를 던져서 성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뜯어다가 성의 파괴된 곳에 망루(望樓)를 만들어 굵은 밧줄로 얽고 마소의 가죽과 비단옷을 매달고 안에 노포(弩砲 쇠뇌)를 설치하여 놓고 지켰다. 그때 성내의 남녀는 2천 8백 인밖에 없었는데 이들을 격려하여 사수(死守)한 지 20여 일이 경과되자 식량은 떨어지고 힘도 지쳐 있었다. 그러나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고구려의 진영에 떨어졌고, 또 우레의 변괴가 있었다. 마침내 뇌음신은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고 왕은 동타천을 발탁하여 대내마를 삼았다.
그때 신라는 바깥으로는 당의 군사와 호응하고 안으로는 백제의 땅을 경략(經略)하면서, 또 남은 힘으로 고구려와 말갈을 막은 것은 모두 김유신의 힘이었다. 유신이 어느날 남문 밖에 서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오니 유신이 고구려의 첩자(諜者)임을 알고 묻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첩자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유신이 또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왕은 위로는 하늘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들은 생업(生業)을 즐기고 있다. 너는 돌아가 너의 나라에 알려라.”
하고, 드디어 놓아 돌려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라가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김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하였다.
○ 신라는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 지금의 합천(陜川)에 옮겼다.
아찬 종정(宗貞)으로 도독을 삼았다.

6월 신라의 대관사(大官寺) 샘물이 피로 변하였다.
또 금마군(金馬郡)에는 땅에 피가 흘러 5보(步)의 넓이에 번졌다.
○ 신라 왕 춘추(春秋)가 훙(薨)하고 태자 법민(法敏)이 즉위하였다.
신라의 제도에, 왕에게 하루 반미(飯米) 서 말과 수꿩 아홉 마리를 바쳤는데, 왕이 백제를 멸하고는 주선(晝膳 점심)을 없앴다. 이때에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어 베 한 필이 벼 30석, 혹은 50석과 맞먹어서 백성들이 성대(聖代)라 일컬었다. 왕은 군사를 조련(操鍊)하고 무사(武士)를 기르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이 있는 자를 부려서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할 운(運)을 열어 놓았다. 훙(薨)할 적에 나이는 59세였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 지금의 경주부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이가 문 무왕(文武王)이다. 왕비 김씨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니, 이가 자의 왕후(慈儀王后)이다.

추8월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크게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마읍은 《일통지(一統志)》에 평양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미상
○ 신라 왕이 당의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쳤다.
김인문(金仁間)ㆍ김유돈(金儒敦) 등이 당에서 돌아와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이르기를,
“짐(朕)이 이미 백제를 멸하여 그대 나라의 환란을 없앴다. 그런데 지금 고구려가 험고함을 믿고 예맥(濊貊)과 같이 악행을 하니, 짐이 그대와 함께 망해가는 오랑캐를 섬멸하려 한다.”
하였다. 왕이 우복(憂服 부모의 상(喪)) 중에 있었으나 제의 칙령 어기기를 어렵게 여겨 김유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진주(眞珠)ㆍ흠돌(欽突)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천존(天存)ㆍ죽지(竹旨)ㆍ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품일(品日)ㆍ충상(忠常)ㆍ의복(義服)을 상주 총관(上州摠管)으로, 진흠(眞欽)ㆍ중신(衆臣)ㆍ자간(自簡)을 하주 총관(下州摠管)으로, 군관(軍官)ㆍ수세(藪世)ㆍ고순(高純)을 남천주 총관(南川州摠管)으로, 술실(述實)ㆍ달관(達官)ㆍ문영(文穎)을 수약주 총관(首若州摠管)으로, 문훈(文訓)ㆍ진순(眞純)을 하서주 총관(河西州摠管)으로, 진복(眞福)을 서당 총관(誓幢摠管)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총관(郞幢摠管)으로,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矜大監)으로 삼고, 상이 스스로 23총관을 거느리고 행군(行軍)하였다.

9월 신라 왕이 웅현(熊峴)에 주둔하여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그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하였다.
그때에 당의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칙령을 받들고 신라 왕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軍糧)을 운반하게 하였다. 그때 또 웅진도 독부에서 사자를 보내 급박함을 알리니, 왕이 덕민(德敏)에게 이르기를,
“평양에 먼저 군량을 공급한다면 웅진의 길이 끊어져서 그곳을 지키는 한병(漢兵)이 적의 손에 떨어질까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덕민과 함께 행군하여 이곡정(飴谷停)지금은 미상 에 이르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제의 잔적(殘賊)이 옹산성(甕山城) 지금은 미상 에 웅거하고 있다.”
하니,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효유(曉諭)하였으나 성장(城將)이 따르지 않았다. 왕이 웅현정(熊峴停) 지금은 미상 에 도착하여 여러 군사들에게 서약하고 진군(進軍)하여 이들을 포위하였다. 김유신이 사람을 시켜 성장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죄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 명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니 무엇 하러 외로운 성을 혼자 지키는가? 빨리 항복하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성은 작으나 군사와 식량이 넉넉하고 사졸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니, 유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곤핍한 짐승이 오히려 싸우려 한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하고,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공격하여 먼저 큰 성책(城柵)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이 친히 싸움을 독려하니 사졸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3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으며 그 장수를 잡아 죽였고, 품일이 또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천 급을 베었다. 마침내 백제의 달솔(達率)인 조복(助服)과 은솔(恩率)인 파가(波加)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왕은 두 사람을 급찬(級飡)으로 삼았고, 또 조복에게는 고타야군(古陀耶郡)의 태수(太守)로 제수하고 전택(田宅)과 의물(衣物)도 겸하여 하사하였다. 왕이 여러 군사에게 영(令)을 내려, 웅진에 성을 쌓아 도로를 개통시키게 하였다.
【안】 신자(臣子)가 되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나라가 망함에 회복하기를 도모하는 것은 신자의 직분(職分)이다. 옹산성을 지키던 장수가 임금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된 뒤를 당하여,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 당과 신라의 군사에 항거하고, 김유신에게 답하는 말에,
“성은 작으나 사졸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니, 그 충과 용은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서(史書)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 성이 함락된 뒤에 유신이 마땅히 예로 초치(招致)할 것이요, 만일 그래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죽기로써 맹세하거든 마땅히 그의 충절을 이루어 주어 죽게 하고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 주며 그 묘에 비석을 세워서 기리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그의 처자에게도 생업(生業)을 주어야 인자(仁者)의 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유신은 성내어 죽였으니 무엇으로 인신(人臣)된 자를 권장하겠는가?
○ 당(唐)의 계필 하력(契苾何力)이 고구려의 군사를 압록강에서 격파하고 돌아갔다.
개소문(蓋蘇文)이 그의 아들 남생(男生)을 시켜 정병(精兵)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건너지 못하였다. 마침 계필 하력이 얼음이 언 때를 만나서 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강을 건너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하력이 수십 리를 쫓아가 죽이니 죽은 자가 3만 명이었고, 남은 무리들은 항복하였으며, 남생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그때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칙이 있어 돌아갔다.

동10월 신라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왕이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정방을 만나보게 하니, 정방이 회답하기를,
“내가 명을 받고 적을 토벌하기 위해 만 리 바다를 건너와서 한 달이 넘도록 배회(俳徊)하였는데도 왕(신라의 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고, 양곡도 대어 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였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와 의논하니, 모두 적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에게 중책을 주시면 죽어도 어려움을 사양치 않겠습니다. 오늘은 이 노신(老臣)이 충절을 다하는 날이니, 적전 속으로 달려가 소 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왕은 기뻐서 이르기를,
“국경을 넘은 뒤에는 상벌(賞罰)을 자의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왕이, 당의 조제사(吊祭使)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유신에게 맡기고 돌아오니,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을 기다렸다.

12월 신라가 군량을 웅진에 운반하여 주었다.
그때 유덕민(劉德敏)이 평양에 군량 수송할 것을 독촉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웅진의 양곡이 다하였는데 먼저 웅진으로 운반하면 칙지(勅旨)를 어기는 것이 되고, 만약 평양으로 운반하면 또한 웅진의 양곡이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하고, 이에 노약자(老弱者)를 뽑아 웅진으로 양곡을 운반케 하고, 정병(精兵)들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웅진이 백제의 핍박을 받음에 있어, 신라가 군량 수만 곡(斛)을 남으로 웅진에, 북으로 평양에 전후 공급했고, 또 머물러 진수(鎭守)하는 한병(漢兵)의 의복까지도 모두 신라에서 공급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신라의 백성은 공급에 피폐되어 풀뿌리를 캐어 먹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였다.


 

[주D-001]당력(唐曆)과 묘휘(廟諱) : 당의 달력과 임금이 죽으면 올리는 휘(諱)인데, 제후의 나라에 내리는 것임. 여기에서는 항복을 받아 달력과 묘휘를 내리겠다는 뜻.


 

평창고(平倉庫)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설치한 뒤에 군향(軍餉)에 대비하기 위하여 숙종(肅宗) 계사(1713, 숙종 39)에 탕춘대(蕩春臺)에 창고를 설치하여 탕춘창이라 명칭하였다. 영종(英宗) 무진(1748, 영조 24)에 총융청(摠戎廳)이 출진(出鎭)할 때에 총융청에 이속(移屬)하고 총융청의 평창(平倉)을 본청(本廳)에 소속(所屬)시켰다. 탕춘대에 있음. 고가 14문. 호남 9문 ○ 영남 4문 ○ 호서 1문.
동창고(東倉庫)

     

 

'개인 글 > 삼각산 북한산성 탐방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각산 북한산성 탐방   (0) 201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