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의숙공 의민공 쌍충록

의숙 의민공 쌍충록

아베베1 2014. 4. 24. 01:59

 

 

 

 

 

 

 

 

 

 

 

 

 

 

 

 

 

 

 이미지 사진은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상

 

 

 

西山先生文集續集卷之四

 
  

 

 

 
雙忠實錄 


右崔氏雙忠錄。卽蘇湖,蘇溪二公倡義討賊之事實。而始刊於再去癸未者也。其遺文懿蹟。宜321_532c不止此。而兵火之餘。多散逸不傳。公之諸孫。爲是之慨。乃復遍搜遠近。積以歲年。凡得事蹟可補者十數條。並與後來諸家撰述。而將附原錄。以興洛事契有別。責一言以尾其後。顧老弊無文。無以堪是役。而竊惟公兄弟。與我先君子文忠公。相從於難離之際。矢死討賊。共濟艱危。前後晉陽之捷。公實有力焉。先君子葢嘗請見而奬其忠矣。開錄而上其功矣。公兄弟又自云早從金令公。有意於衛國安民之實。今其錄中。語及先君子。非止一二。奉讀愀然。不勝隔晨之感。321_532d謹書此以歸之。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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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6일(병오) 맑음
좌목
 08-03-16[10] 이비의 관원 현황
○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행 판서 이승보(李承輔)는 패초에 나오지 않았고, 참판 임한수(林翰洙)와 참의 오준영(吳俊泳)은 나왔다.
고 판돈녕부사 이병상(李秉常)을 문청(文淸)으로, 고 이조 판서 윤치정(尹致定)을 문청(文淸)으로, 고 이조 판서 변치명(邊致明)을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김유형(金有亨)을 의민(義愍)으로, 고 평원군(平原君) 이림(李琳)을 정헌(定憲)으로, ㅇ증 공조판서 박동명(朴東命)을 충경(忠景)으로, 증 이조판서 임훈(林薰)을 효간(孝簡)으로, 증 좌찬성 김동헌(金東獻)을 효정(孝貞)으로, 증 좌찬성 이채(李采)를 문경(文敬)으로, 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성사제(成思齊)를 정절(貞節)로, 고 지중추부사 임홍망(任弘望)을 효정(孝貞)으로, 고 이조 판서 박기수(朴紀壽)를 효문(孝文)으로, 고 이조 판서 박승휘(朴承輝)를 문정(文貞)으로, 증 영의정 이준(李準)을 숙헌(肅憲)으로, 고 이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을 효정(孝貞)으로, 고 우참찬 정익하(鄭益河)를 충헌(忠憲)으로, 고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을 희정(僖靖)으로, 고 금원군(錦原君) 이령(李岭)을 효문(孝文)으로, 고 영의정 강순(康純)을 장민(莊愍)으로, 증 병조판서 최희량(崔希亮)을 무숙(武肅)으로, 고 예조 판서 성수묵(成遂默)을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이민환(李民寏)을 충간(忠簡)으로, 고 형조 판서 이윤성(李潤成)을 효숙(孝肅)으로, 고 양원군(楊原君) 이희(李憘)를 정혜(貞惠)로, 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을 문헌(文獻)으로, 증 병조판서 송덕영(宋德榮)을 충장(忠莊)으로, 증 이조판서 겸 좨주 임성주(任聖周)를 문경(文敬)으로, 증 영의정 박신규(朴信圭)를 청숙(淸肅)으로, 증 병조판서 채이장(蔡以章)을 충정(忠貞)으로, 증 영의정 심호(沈浩)를 효숙(孝肅)으로, 고 좌참찬 이성규(李聖圭)를 효정(孝貞)으로, 고 우의정 임백경(任百經)을 문정(文貞)으로, 증 이조판서 윤심형(尹心衡)을 청헌(淸獻)으로, 증 좌참찬 안정복(安鼎福)을 문숙(文肅)으로, 증 이조판서 최균(崔均)을 의민(義敏)으로, 증 좌찬성 배흥립(裵興立)을 효숙(孝肅)으로,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숙자(金淑滋)를 문강(文康)으로, 고 우참찬 김경선(金景善)을 정문(貞文)으로, 증 좌찬성 최현(崔俔)을 정간(定簡)으로, 증 병조판서 유응수(柳應秀)를 충장(忠壯)으로, 고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경민(景愍)으로, 고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정민(貞愍)으로 고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을 문익(文翼)으로, 고 경창군(慶昌君) 이산(李珊)을 효헌(孝獻)으로, 고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을 문충(文忠)으로, 고 우찬성 강시영(姜是永)을 문헌(文憲)으로, 증 영의정 이시원(李是遠)을 충정(忠貞)으로, 증 이조판서 이로(李魯)를 정의(貞義)로, 고 사신군(思信君)을 충헌(忠獻)으로, 고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를 정민(貞愍)으로, 증 호조판서 홍림(洪霖)을 충강(忠剛)으로, 고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을 양정(良靖)으로, 고 진안위(晉安尉) 유유(柳頔)를 효숙(孝肅)으로, 고 임성군(任城君) 이호생(李好生)을 정혜(靖惠)로, 고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을 효정(孝貞)으로, 고 완성군(完城君) 이천계(李天桂)를 효민(孝愍)으로, 고 종의군(從義君) 이귀생(李貴生)을 공안(恭安)으로, 증 호조판서 정옥량(鄭玉良)을 효정(孝貞)으로, 고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을 장소(章昭)로, 고 지돈녕부사 신명순(申命淳)을 정무(貞武)로, 고 지중추부사 이산두(李山斗)를 청헌(淸憲)으로, 증 이조판서 이준(李埈)을 문간(文簡)으로, 고 병조 판서 박계손(朴季孫)을 정절(貞節)로, 고 호조 전서(戶曹典書) 채귀하(蔡貴河)를 정의(貞義)로, 증 이조판서 박심문(朴審問)을 충정(忠貞)으로, 고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을 숙민(肅愍)으로, 고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를 효간(孝簡)으로, 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효희(孝僖)로, 고 경선군(慶善君) 이백(李伯)을 효헌(孝憲)으로, 고 우의정 이서구(李書九)를 문간(文簡)으로, 증 좌찬성 송국택(宋國澤)을 효정(孝貞)으로, 증 영의정 이원정(李元禎)을 문익(文翼)으로, 증 이조판서 김익복(金益福)을 충경(忠景)으로, 고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을 정민(貞敏)으로, 증 이조판서 이제두(李齊杜)를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김회련(金懷鍊)을 충민(忠敏)으로, 증 이조판서 김익훈(金益勳)을 충헌(忠獻)으로, 증 이조판서 이홍무(李弘茂)를 충숙(忠肅)으로, 고 형조 판서 조용화(趙容和)를 문헌(文憲)으로, 고 신성군(信城君) 이우(李珝)를 충정(忠貞)으로, 고 해운군(海運君) 이연(李璉)을 효안(孝安)으로, 증 판돈녕부사 박진영(朴震英)을 무숙(武肅)으로, 고 호조 판서 이목연(李穆淵)을 문정(文貞)으로, 고 영의정 유전(柳琠)을 문정(文貞)으로, 증 이조판서 송희규(宋希奎)를 충숙(忠肅)으로, 고 예조 판서 서기순(徐箕淳)을 문청(文淸)으로, 고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을 정간(貞簡)으로, 고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을 정간(貞簡)으로, 고 용성대군(龍城大君) 이곤(李滾)을 장의(章懿)로, 고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정민(貞愍)으로, 고 지사 강유(姜游)를 효헌(孝憲)으로, 고 이조판서 겸 좨주 이현일(李玄逸)을 문경(文敬)으로, 고 은전군(恩全君) 이찬(李襸)을 효민(孝愍)으로, 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을 충정(忠貞)으로 시호를 정하였다.
박유현(朴有鉉)을 송라 찰방(松蘿察訪)으로 삼았다. 교서관 저작에 김창륜(金昌倫)을 단부하고, 정자에 백선행(白璿行)을 단부하고, 부정자에 옥경련(玉景鍊)을 단부하고, 기로소 수직관에 이기조(李基肇)를 단부하고, 검서관에 이상집(李象集)을 단부하고,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이정필(李正弼)을 단부하고, 영해부 안핵사에 박제관(朴齊寬)을 단부하였다. 좌승지 이만운(李晩運)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가자라하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전 가감역관 이면응(李冕應)은 나이가 70세여서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이는 시종신인 수찬 이재만(李載晩)의 아비로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부사(府使) 이빈(李彬)에게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고 동지 이장한(李章漢)에게 병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형조 판서 이용상(李容象)의 2대이다. 고 학생 변취형(邊就衡)과 안광조(安光祚)에게 동몽교관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효행이 특이한 자를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승지 권문해(權文海)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학행(學行)이 특이한 자를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직장 현의준(玄儀俊)에게 호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그는 오위장 현응호(玄膺祜)의 아비이다. 고 학생 이완영(李完榮)에게 공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이집홍(李集弘)에게 공조 참의를 추증하고, 이승원(李升源)에게 군자감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창덕궁 위장 이규신(李圭信)의 3대이다.

 

정조9년 을사(1785,건륭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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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3일(임자)
09-03-03[05]
강  예조가 함안(咸安)의 유학(幼學) 안경일(安慶一) 등의 상언(上言)에 대해 복계(覆啓)하였다.
목  ○ 해조(該曹)가 아뢰기를,
“이번 각인(各人)들의 상언을 살펴보니, 함안의 유학 안경일은, ‘7대조(祖) 안관(安灌)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나이가 막 약관이 되어서는 이름이 궐에까지 알려져서 특별히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실로 영외(嶺外)의 유종(儒宗)이었는데 임금께 알려질 길이 없어서 아직까지 파묻혀 있으니 증질(贈秩)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비록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행실이 있더라도 추증(追贈)하는 은전은 매우 중요하니 수백 년 뒤에 단지 그 자손의 상언으로 인하여 대번에 시행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고성(固城)의 유학 최규찬(崔奎燦)은, ‘7대조 최균(崔均)은 임진란(壬辰亂)을 맞아 백의(白衣)로 의병을 일으켜 사천(泗川)과 진주(晉州) 등지에서 사력을 다해 왜적을 토벌했고 또 촉석루(矗石樓) 앞에서 곽재우(郭再佑)를 도와 종일토록 싸움을 독려해서 적이 밤을 틈타 도망하여 사천을 수복(收復)하니 고성과 진해(鎭海) 등의 현(縣) 일대가 믿고 의지하였는데 그 당시의 사적(事蹟)에서 확연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또 을사년(1605, 선조38) 해구(海寇)를 방비할 때에 앞장서서 무찔러 빠른 시일 내에 소탕하여 선묘조(宣廟朝)에서 글을 내려 가상함을 칭찬하셨지만 관계(官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그쳤습니다. 다른 예에 따라 증직(贈職)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최균이 난리를 당해 의리에 따라 이런 남다른 공적을 세운 것은 비록 매우 가상하지만 오래된 일이라 믿기가 어렵고 추증의 은전은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여(扶餘)의 유학 이영원(李英元)은, ‘조부 이희지(李喜之)는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정성은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맹세하여 흉도들이 가장 꺼리고 미워하는 바가 되어 제일 먼저 멸절되는 참혹한 해독을 입었습니다. 이번에 제신(諸臣)을 표창하는 날을 맞았는데 예전 그대로 벼슬을 하지 못한 포의(布衣)여서 똑같이 대해 주시는 은택을 받지 못했으니 특별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증할 것을 의논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이 다시 돌아온 해를 맞아 충절을 표창하는 은전이 두루 임금을 도와 추대하여 죽음을 바친 제신에게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희지 등 다섯 선비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죽음을 걸고 충성을 바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똑같이 대해 주시는 은택을 입지 못했으니 그 자손이 소외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전에 관계되므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이 공사(公事)가 유중(留中)인 축(軸)에 섞여 있어서 아직 판하(判下)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다른 문서를 살펴보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로 결론지어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聱漢先生文集卷之四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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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日錄 亂中日錄散佚。只有戊戌日錄。 b_011_23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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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正月]
戊戌正月初一日丁亥朔朝。一寓齊會相賀。行酒一廵罷。以收募義粮。運餉天兵事。晩下山南。運粮軍先我到。見我不來。卽還其家。待明齊發云。○初二日。又下山011_239a南爲。督發義粮事也。遇李禮勛鄭仁耆少話。還入椹村。見吳陜川澐,朴居昌廷琓,主簿廷璠,成參奉亮。相議運粮事。○初四日。訪吳陜川。遇李重茂聞賊酋淸正與唐將戰數敗。將出降云。天道好還。人事至此。東民從此有再生之望。皇朝之恩。天地莫量。○初七日至爾勿谷。遇許弘祖,朴齊賢,李休復,李成範,成簡,李富春,光春及正字柳霽叙話。入水口洞。訪宋進士學懋 遠器。其子光宅亦在傍。竟夜懸燈措畫壺漿之事。○初八日。與金上舍允諧 鳳儀,金士粹。分向水村訪諸友。至崔德祐家。聞唐師解圍退次月城云。前日所聞皆妄傳。憤歎何極。入州見011_239b牧伯問之果然。李參謀汝唯,鄭察訪而敬亦在坐。相對咄咄。酒數廵罷出。歷訪大浦李僉知範而還。○初十日下廣巖。見前兵使金應瑞論時事。○十一日。入州見新兵使鄭起龍。遇李天培,宋光啓,曺器哉同話。曺次邁乃是新知而殷勤若舊識。以素相聞名也。○夜夢上瑤臺有詩云。風暖瑤臺別㨾春。桃花李蘂四字而已。未畢而覺。卽踵之曰一般新。將身忽入三淸界。今我殊非昔日身。○十二日。路遇昌原官吏介生。備聞昌邑遭亂以來。孑遺餘民。皆不聊生。極可矜惻。朴喜生訪李光春在柳士華家。邀余同宿。朴弘貞亦至。話至夜分。書帖送鄭011_239c兵使。爲昌原民招集事也。○十四日夜。有感作詩曰自爇松明到夜深。却將蓍草筮升沉。窮通自古皆由命。君子行違易上尋。○二十三日。金海守李汝恬贈一老馬。猶可代步爲幸。○二十四日。以事往河濱。訪鄭銑,鄭鏞。歷入竗洞。訪朴僉知不遇。與朴忠胤,崔斗雲,都聖兪。共觀松溪懸吐韓文。○二十七日。往花路訪加德僉使崔堈,判事李應星,崔塤,崔均。同話而別。

[戊戌二月]
二月初七日。渡伽川及窟峴。聞賊夜襲安林。午入棘田。殺掠不可勝計。逃亂士女顚沛劻勷。遍于山野。卽蒼黃馳還。與金允諧,金士粹,裴仲約,李晦可議避地。遂定計011_239d向湖西。○初八日。允諧,仲約,晦可先發。士粹及張善由,柳秀弘與余同發。李得龜,李山壽,李成節來別。暮至酉谷器哉寓。上舍等先至迎喜。宋君沃,許國柱,曺以坤,以觀來見。○初九日。歷訪朴應敎而章。朴亦以十五發行云。○十一日。過金泉入忠淸界。登途五日。始就一日程。可謂遅遅吾行也。路遇宋學懋。宋亦卜地來也。○十五日。遭雨留永同。允諧吟一絶云身際干戈客路遙。行裝還似過楓橋。請君莫用窮途哭。應有江山待我曹。余亦忘拙而次之。見集中 十八日至沃川眞藥驛。逢牙山人元夢賢,金德明,金質民。細聞牙山事。夢賢弟夢吉家在大011_240a覺村。許以借居。其意可感。○十九日。踰陶峴向牙山。脚部頓憊。寸寸運步。遇洪州人田菑自元帥所來。言賊焚蕩星州上枝。殺掠甚多。朴僉知忠復家亦參其禍云。驚慘不可言。頃年以來。嶺南人士疲於奔竄。多寄寓湖西。而且聞新昌溫陽等地。地僻土饒。可以棲住。故吾輩辛勤跋涉。將向其處。待定居之後。以爲移奉兩親之計。而前頭人事又未可卜。奈何奈何。暮投宋村。村以宋爲名者。以宋氏家盛居也。○二十四日。至正右山。村居士夫吳宗範,宗吉,吳鉉及京人金澨,柳瑜迎話。金公長者。前尙州牧金澥之從昆弟也。又與裴陽智素善。聞其謝世。011_240b嗟悼不已。宗吉邀至其家饋酒。因聞時事諸奇。○二十五日。過燕歧東伊村。入崔洁家。洁出酒欵待。且贈三斗稻。以備行粮。可謂富而好義者也。○三十日。主人出饋酒饌。始覺今日是寒食也。節序上壠。傭丐盡然。獨我輩羈旅他鄕。瞻望庭闈。又思先壠。中情如割。

[戊戌三月]
三月初三日。與一行發出。過魂巖踰狐嶺度廣坪。路遇唐兵數三輩。問吾遠來之故。少無攘奪之志。前所聞者。果過傳也。至豊瑞村。村居士夫徑出迎之。至李演家止宿。聞南奇賊警益熾。我居靡定。戀親思鄕。心緖錯裂。○初四日。與士粹,春孫上子隱橋。遇雨入貢稅洞。尋崔洵,011_240c尹廷顯。聞南洞柴草有裕而土地不膏。金谷則近溫陽郡市。流人謀食甚便。且土廣云。○初六日。發向溫陽。寓木洞李宗彦家。宗彦天安人而文士也。從容叙話。欵待甚厚。虗外室以處之。且見其二子應生,貴生。正子美詩所謂遂空所坐堂。安居奉我歡。誰肯艱難際。豁達露心肝者也。○初十日。與晦可士粹擧室同發。移寓于牙山李兵使世豪金谷田舍。兵使乃蔚山裴公允鼎之壻。而於吾爲戚從妹夫。聞吾寄住卽來訪。借田舍及耕地。極可感幸。火餘屋宇只有數間。一行從徒皆有不滿之意。然旣爲瑣旅。自當隨遇而安奈何。○十一日。訪李思道。011_240d李公鐵城人。與余有戚誼。姜珍山鳳壽。李公之妹夫也。出迎同話。留饋夕飯。見待欵厚。傾盖而故。非虗語也。○十八日。李恒,李時說來訪。時說。時稷之再從也。如見元賓。爲之悵然。○二十日。李思道,姜鳳壽,永壽,興慶,昌慶,李察訪鐵榦,孟主簿惟精,直長惟明,通判惟吉,申主簿泓,姜渰,王德裕等。出文告洞中收送米斗。周急之義可感。○二十二日。張益奎,金孝成,金壽朋,金應祥。自嶺南來。聞李汝唯捐世。朴齊賢除王子師傅。一日中悲喜交幷。

[戊戌四月]
四月初一日。姜珍山遣其子來邀。遂與晦可,士粹往赴011_241a之。飮酒賦詩。珍山有詩曰白石淸溪六七曲。黃冠野服兩三人。提壺不是耽歡樂。爲向殘花餞暮春。句法圓熟可喜。翌日又坐溪亭。談說古今。且以詩話。姜老可謂長於詩者也。○初七日。牙山路中。遇宣傳官李吉元。驚喜不可言。因與入縣穩叙。聞都事金九鼎在舘就訪之。都事榮川人。與余有舊。金侍直達孝亦至。三人鼎坐談話。不覺夜深矣。○十日。歷見溫井。經亂之餘。人民皆非。而石欄依舊。感舊傷今。爲懷如何。

[戊戌五月]
五月初二日。李恒來訪。同入紫霞洞。泉淸石滑。景致奇絶。或漱或濯。逍遙竟日。晡後山雨微作。促杖下來。○禮011_241b山倅盧伋來訪。○初九日。歷入洪州蘆隱洞。訪朴判官思齊。朴亦流寓於此。爲有姓親也。握手歡叙。酒數廵辭出。見防禦使朴名賢。爲其舊城主也。暫話而別。直至州城。時洪丈可臣爲牧伯。頃在丙申。與防禦朴公討平李夢鶴。勳名藉甚。聞吾至卽迎入欵待。情禮俱到。以余流寓。饋贐頗厚可感。○二十日。發行向春陽。○二十八日。到春陽。經年曠省。親候俱安。欣慰曷極。

[戊戌六月]
六月初三日。寄簡于惟政。○十八日。聞賊入永川,慶山境。唐將秘關上京。又聞唐將高某中丸而死云。醜虜陸梁。迄今未已。痛甚痛甚。○二十五日。發向湖西。盖以金011_241c谷新寓之餘。旅契蕭條。移奉旣無計。又不可以久留故也。拜辭出門。五內如焚。

[戊戌七月]
七月初六日。到寓所。同寓皆會。叙行役勞苦。○十二日。與諸益遊過鴈寺浴椒泉。○十三日。士粹作國難思良相賦。性初製策。余偶題一絶曰靑山斜日獨來尋。竹屋荊扉薜荔陰。客去小軒棊子靜。夜牎松籟一張琴。○十四日。善山人黃河潤來訪。黃錞之族人也。與安仁老李希冉。方寓公州云。河潤兄河澄。文察訪之壻也。聞察訪之子瑞日已逝。文家只有此子。今亡矣可惻。○十五日。此日中元也。客中時序。如水東逝。春而夏。夏而秋矣。幾011_241d何而不歲且窮也。不辰之歎。尙寐無吪。一寓中酒食稍豊。黃昏同寓諸益。露坐行酒數廵罷。○延風守呂應祿及朴玹來訪。呂字成之。朴字伯售。○十六日。過金智驛。聞里人李德之病死。其子斷指出血飮之而甦。事已上聞云。彼乃村巷間凡民。而誠孝所感。至於如此。欽歎欽歎。○二十日。早朝一寓齊出耕地種菜。或耕或播或坐或息。且復吟詩。以暢幽懷。筋力雖憊。有同隱遯者事。緬思古人谷口之鋤鹿門之耘。亦如是耶。今日乃吾生朝。同寓皆具酒殽來會。情意可感。而但客地僑寓。定省久曠。戀親之意。此日彌切。○二十一日。家奴自劉綎陣所還。言軍011_242a容壯嚴。亦有楚猿及駱駞。猿能焚敵陣。駞能載運也。○聞方伯入郡。與余有舊。卽往見之。眷厚之意。周恤之誼。㢠出尋常。自顧樗散。何以得此。可感又可愧。

[戊戌八月]
八月十二日。聞賊數百。見殲於茂朱地云。○十五日。日月易邁。忽已中秋。因思去年此日。旅次魯谷。今年此日。寄寓金谷。風蓬人事。歲歲如此。不知明年。又在何處。痛歎痛歎。○二十一日。黃會元自嶺南來傳妻母舍世。不勝痛悼。○二十五日。聞賊酋秀吉斃於七月初四日。故賊兵稍稍亡歸云。聞極痛快。而此等之說。雖屢有之。終歸虗傳。今者此語。又未知如何耳。

011_242b[戊戌九月]
九月初六日。夢與鄭景任穩話。覺來不勝悵然。○十一日。前大司成黃公暹執義權公春蘭。以天兵募粮事通文來到。二公是嶺南人。余雖在寓。義不可以不應。遂與性初往赴。士林會薦姜珍山,郭進士。出文招集境內士子。相議措置。只得若干斛。可歎。○十二日。親自牽牛。牧於善餘舊基。荒薺連空。鼯鼠號鳴。因想故園遺址。亦必類此。言念及此。可堪噎欝。○十三日。往李思道家。借聯芳集及鐵城李氏譜來。○十七日。夢侍主上。從容經席。終夜不已。草莽之臣。涓埃報蔑。夢被殊遇。感涕徒零。玆用識之。○二十四日。有人自湖南來。言曳橋賊陣011_242c勢甚堅。攻之不易。且北賊稱以祭其先祖健墓。來踏我境。此虜狡猾。恐他日大爲國家之患。極可驚慮也。○二十七日。以事至新昌。歷訪咸安人趙光先鄭天祐金漑趙中立。與之欵語。路遇自嶺來人。聞天兵及我軍圍賊有日。及到溫陽。與高山立相遇於馬上。亦言曳橋賊見破於天兵及我軍。賊勢甚挫云。天心悔禍。自今始也。喜不可言。

[戊戌十月]
十月初四日。聞西厓柳相公爲羣小所構誣。將見斥罷云。公當龍蛇之亂。爲國宗臣。盡瘁王室。謀猷䂓畫。忠勤貞亮。當世無比。而今乃至此。誠如是也。國無人焉。011_242d王誰與爲國。又聞天朝以我通信於倭奴。有詰責之語云。南賊未退。上朝有譴。小邦惶蹙。有不可言。不知吾東何時太平。痛歎。○初七日。訪姜遇文,應文,餘慶。遇李芳話。芳乃姜龍壽新壻。咸安趙丈宗道戚從也。問吾以巴山事。情轉殷勤。還寓。裴仲約之子剋自嶺南來。始知妻母謝世之報。黃會元誤傳也。因留剋而宿。聞嶺奇。某也生。某也死。某移卜於某地。某仍寓於某邑。某事如舊。某事非昔。賊勢摧挫。我軍乘勝。晉賊退次於泗川。唐師進軍於晉陽。合道歡聲。已騰萬口。楊經理且進兵泗川。亦可見泗賊之亦退也。一日之內。旣聞妻母之無恙。011_243a又聞賊奴之敗北。今日所得。亂離後第一好消息也。家人自聞訃後。每月朔望擧奠。自今日始廢奠。○二十一日。傳畫曳橋賊陣形勢圖。爲見攻守機也。○二十四日。就李察訪精舍。終日穩話。晴牎凈几。相對吐肝。心神歸定。若脫塵臼。此所謂一日淸閒一日仙者也。因就申主簿第。諸益滿座。斯須日云暮矣。○二十八日。聞皇朝主事丁應泰誣劾楊經理。掩敗爲功。欺慢朝廷。又誣奏我國引倭入寇。上憤怒不視事者屢日。擧朝遑遑。罔知攸措云。噫以我聖上三十年事大之意。乃有此誣。臣子之心憤惋曷極。遂下姜從事鳳壽家。約會李宗彦,011_243b黃浹,申東秀,孫夢說,朴光前,金鏺,李鐵榦,姜興慶,姜得璜。議呈文邢軍門。以明主上被誣事。

[戊戌十一月]
十一月初一日。往赴松亭。欲更議呈文事。邑中士子來會者纔十餘人。率皆晩到。可歎。○初三日。與性初往長命。見方伯終日穩叙。凡百時事及傍近守令賢否。皆入於論說中。又於燈下入夜打話。見邸報知鄭寒岡先生陞嘉善。不勝爲吾道幸。○二十四日。聞曳橋賊玄蘇,平行長等已出乘舟。劉綎陣入據曳橋。舟師擊其後。破三十餘艘。泗川賊沈安道焚壘泛海。蔚山賊淸正亦撤兵渡海云。雖曰好消息。如此語前此多有之。恐又如前也。011_243c○二十八日。聞統制使李舜臣與賊戰。中丸而逝。諸帥死者亦六十餘人。賊之留屯二南者。皆撤兵渡海。狀聞昨日上京云。喜幸何極。但恨不至隻輪不返。而終使爲國長城之一大將遽至不幸痛歎。

[戊戌十二月]
十二月初三日。李芳自都元帥所來。槩言戰所死事者。統制使李舜臣,興陽縣監高德章,加里浦僉使李英男,及樂安郡守,咸平縣監,巨濟縣令,梨津權管,舒川萬戶,慶尙右水營虞候。並失其姓名。▣州牧使南維,全羅右水使安衛中丸。時不死云。又咸安人趙英漢丁酉八月在黃石山城。被據入日本。今年八月離日本。泊于曳橋。011_243d以日本所聞見。達唐將及李統制云。秀吉以七月死。有三國曾爲秀吉所呑幷。其中一國怨毒最深。以是屠掠秀吉境。吉子在襁褓。莫知攸措。其下送書于淸正,沈安道,平行長,玄蘇等云。內變猝急。可速撤歸。以救國亂云。故釜山賊淸正及金海賊。十一月十二日發出渡海。而沈安道兵爲李統制所擊。盡殲於水上。得脫者一二艘。安道被擒於慶尙右水使李藎臣。此十一月十八日事也。順天賊平行長玄蘇。十一月十九日亦逃遁渡海。南邊賊警一時廓掃云。秀吉之稔惡已久。天心悔禍。身死未冷。變亂中作。聞極痛快。○下書堂。姜善伯諸人咸集。011_244a相賀賊報。且令學徒製古風。諸公請余敎授。余辭之。欲以性初,晦可爲師。僉意皆然。遂使晦可宿食於書堂。性初往來于棧橋書堂。○初九日。放大赦。以誕元孫也。○十三日。訪忠州牧金命胤於金灘。自周柳至金灘。皆昔所經行處也。舊時人居。蕩然無存。敗垣遺墟。蓬蒿滿目。客懷不勝悽然。遇金伯胤,魚夢龍,鄭繼元,柳惟寅同話。○十六日。下靑龍村。訪姜希望,柳惟精。遭亂以後。一未見面。今來七年。始得相遇。鄕井故舊。盡歸泉下。只餘兩老免死。他鄕萬里。邂逅萍蓬。感懷如何。歷訪朴潤身,安仁老而歸。○三十日。此日歲除也。流寓年年。客中過歲。011_244b默坐思之。不堪嗚咽。定省之曠。今已幾月。闕掃先塋。七年于玆。其爲人子者。可不爲之愴感乎。拭淚南望。雲天一涯。渺渺此身。何日言旋。顧瞻歔欷。滿目悽然。誰知我懷。惟此同寓。

[己亥正月]
己亥正月初一日。黃會元來訪。○夜夢與鄭景任話。又得刀子一柄。○初三日。下書堂。洞中諸益皆會。酒餠雜進。使學徒製詩。分曹集句。盡歡而罷。○初七日。聞徐科道明當至天安。以辨誣上書事。與性初同往天安。盖以回文書我等名字。且以製呈文屬余。辭不獲已。遂構呈文草。文逸不收 至木洞見黃湜,鄭希益,鄭檣,金應會。至棧橋011_244c書堂。與趙之柔,李汝載,柳思正,李縡話。聞李瀞除淸州牧使可喜。○初八日至天安。科道之行昨昏入。今早已發。而儒生輩亦無至者。未得呈文。可歎。○二十二日。士粹自德鄕來。聞呈文事尙此遲延。可歎。○柳景宜贈硯。豊川石也。石品頗佳。而但差大不宜於行槖耳。○二十五日。與性初至木洞。訪李宗彦。問呈文事。李云昨始呈文。徐給事見其文。多嘉奬語。且云入草室自焚。寧有是理。山虎入村。自傷其身。所謂草室。指我國也。自傷者。指丁主事也。辨誣呈文。於是有光。殊極爲幸。

[己亥二月]
二月初七日。有詠懷一絶。見集中 ○十五日。聞唐將劉綎011_244d誣奏以自去倭賊爲勦滅。而陳給事則以實奏達。皇上大怒。勑還大軍云。○二十一日。公州牧呂裕吉以書要我。懇懇之意。溢於言表可感。○二十三日。發向公州。○二十五日。至公州。牧伯以餞唐將之行。方在江上。將暮牧伯至直入舘所。歡迎叙話。○二十六日。携酒登江臺。絲竹粉黛畢至。坐客朴澄,李義生,李藑,呂複吉,䄄吉,趙相禹,相湯,呂晩,呂碩賓也。主人判官呂應周也。兵戈之餘。有此勝會。一則可喜。一則可惻。日暮還舘。

[己亥三月]
三月初一日。別牧伯。呂䄄吉齎酒送行。情甚殷勤可感。○十二日。此日寒食也。各以所辦奠先而罷。吾有詩云011_245a云。見集中 性初次曰髮白頻携鏡。愁多強把杯。怊悵淸明節。年年客裏回。又李晦可末聯寓追慕之誠云不踏城南路。空煩一夢回。吾又題一絶云一樽誰共醉。笙鶴隔紅霞。所寓地有紫霞洞故及之。性初步韻曰雲隔三淸殿。春深八桂花。羽衣歸去後。誰與共餐霞。○十九日。至棧橋書堂。聞京奇。李相公恒福以辨誣使。陳奏皇朝。快蒙伸雪。主事丁應泰斥罷云。我國得覩天日之皎然。可謂天監孔昭。○二十一日。留別諸寓。發向春陽。○二十七日。到春陽。經年僑寓。定省久曠。承歡膝下。始有今日。欣慰之極。繼之以嗚咽。洞中諸公皆來見。余贈詩011_245b曰春陽縣裏遇春陽。村酒農談也不妨。莫道經年爲客苦。承歡今日卽吾鄕。

 
壬辰上 萬曆二十年。宣祖二十五年。

春。倭人橘光連死義。光連。一名康光。日本對馬島小酋也。庚寅以前。累爲倭使聘我國。朝廷。以重賞貴爵。特加懷柔。逮庚寅。與玄蘇等。偕爲窺覘之行。光連潛告朝廷曰。日本之人。變詐不測。蓄謀多年。已決犯上之計。請誅今來數酋。以弭大禍。我國猶未之信。至是秀吉。以光連詳知我國。與義智等。分定先鋒。刻日渡海。光連拒之曰。此兵何名也。夫朝鮮日本。善隣也。二百年間。少無釁隙。通成交好。極盡誠心。奈何渝盟而興兵。欲犯上國之境乎。況我受上國厚恩。生死肉骨。莫非其德。我雖微眇。亦人心耳。頭戴天日。其何忍背恩忘德。敢過朝鮮之地乎。一死所矣。決不爲驅兵而渡海也。義智以此傳報秀吉。秀吉大怒。卽令收光連島示。並夷九族。光連一小子。幸以商賈。出泊遠島。聞知是變。卽棄行裝。變姓名逃匿。得以全生。其後萬曆三十四年丙午。日本國王源家康。盡革平姓。修書遣使。復請通信。禮曹以武科僉知全繼信。譯官朴希根。爲回答使。遣日本。至對馬島。求見光連之子。有他姓一倭。來探厥由。繼信等知之。撫慰百端。極盡恩義。橘子垂淚。悉陳前事。使還。詳告于慶尙監司。監司柳永詢。具奏朝廷。議建橘祠于釜山。 後辛亥。御相詳傳此事於余。余奇而記之。繼之以詩曰。秉彝良性非求至。臨亂胡爲少信義。衣冠負國尙不恥。夷狄之人乃如此。
두001夏四月。賊倭平秀吉。遣其將平秀家等。三十六酋。 詳見姜沆啓中 領兵入寇。平行長與平義智,平調信等爲先鋒。兵船四萬餘艘。軍號九百萬。蔽海而來。十三日。乘曉霧彌漫。直擣釜山。時僉使鄭撥。出獵于絶影島。初謂朝貢之倭。不以爲虞。俄見舳艫無數。急還入城。城門纔閉。賊已下陸。圍之百匝。未幾城陷。撥死之。時賊變孔棘。朝野蒼黃。鄭撥殉國。未蒙恩命。其後萬曆三十一年癸卯。撥妻任氏。上書訟冤曰。撥守孤城。力戰而死。或以爲棄城遁去。泉壤冤魂。不得瞑目。請令申辨。特賜褒賞。上命本道巡察使。訪問撥戰死曲折以啓。巡察使李時發。移文于左水使李英。英回報。其時土兵加隱山等三人。得脫不死。皆言僉使出獵。見倭船無數。急還鎭。趣城外居民軍人等。無遺入城。使人往見留館倭。只有四人。卽令捉囚。又令戰船,防牌船,中船並三隻。皆鑿穴沈水。僉使。在南門樓過夜。翌日黎明。賊。圍繞城後山以陣。僉使令軍中。愼物動搖。遂移守西門。賊。一時並進。據高大喊。放丸如雨。發無不中。僉使乃中丸而死。僉使之妾。亦自刎死。城遂陷。加隱山等。匿積屍中。午後。賊令軍中勿殺餘民。並摯船上。十七日放還云云。巡察。依報狀具啓。○ 두002十四日。賊陷東萊。府使 文科通政平時例差 宋象賢死之。左衛將蔚山郡守李彥諴等。率軍降。前一日。象賢。聞賊大至。招旁邑兵守城。左兵使李珏。馳到城中。聞釜山已陷。托言我是節制將。當守本營。不宜在此。將出城。象賢大呼曰。孤城將陷。主將來援。何忍棄去。珏不聽。只留牙兵二十人而去。是日黎明。賊兵大進。先作偶人紅衣青巾。背負赤幟。帶長劍。專之長竿。列示堞間。城中震駭。奔走號哭。賊揮劍攔入。助防將洪允寬,中衛將梁山郡守趙英珪,代將宋鳳壽,敎授盧蓋邦等皆死之。象賢登南樓甲上。着團領冠帶。坐轎倚。賊知其爲府使。欲活捉。象賢以靴蹴之至再。罵賊曰。隣國之道果如是乎。我不負汝。汝何至此。賊盛怒。捽曳將斬。神色不變。 或云府使在南樓。賊揮劍突入。府使射之。衆賊亂入。府使以長劍擊殺二賊而死。未知孰是。其妾。北道妓女也。亦不屈。賊並殺之。 良妾李召文率子女。擄入日本。後甲午歲。平行長與慶尙右兵使金應瑞議和時。得放還。 賊。義之。收兩屍。瘞城東門外。豎木而標之。方府使從容就死時。官奴及唱者。號哭趍入。手扶衣裔。甘與同死。賊益奇之。初府使收境內大小婦女。盡入城中。及城陷。賊皆驅之樓上。令妓工張樂。置酒高會。盡發倉庫積峙。船輸其國。未受圍前。象賢北向再拜。手題扇子曰。孤城月暈。大鎭不救。君臣義重。父子恩輕。以付家奴。歸報其父母。其後賊謂被擄者曰。爾國忠臣。唯東萊府使一人而已 。扇面十六字。與顔常山生無死當之言。文信國成仁取義之贊。前後一揆。讀之悲感。不覺流涕。足以激千古忠君負國之賊。 時本道監司金睟在晉州。釜山羽書卒至。遂趣發左右道兵。相繼赴援。○十五日金睟。自晉州馳到班城。 晉州屬縣 聞釜山已陷。卽具馳啓。遂整軍馳過咸安。到漆原。 出本道巡營錄 時本道右兵使申硈已遞。曺大坤代之。朝廷以大坤衰老。金誠一代之。○以李鎰爲巡邊使。邊璣,趙儆爲慶尙左右防禦使。成應吉,梁士俊,朴宗男,邊應星爲慶尙中左右助防將。以郭嶸爲全羅防禦使。李由義,金宗禮,李之詩爲全羅中左右助防將。以李沃爲忠淸防禦使。○十六日。賊兵分道進兵。中道之賊過梁山。盡爲焚蕩。金睟至。靈山。聞賊已過梁山。卽馳赴密陽。賊兵大至。卽退還靈山。夜渡草溪。移文于全羅監司云。爲繼援事。釜山,東萊,梁山。曾已見陷。又犯密陽。觀其兵勢。勢難支保。又將見陷。其後之事。未可言。未可言。言念及此。痛心痛心。此非私禍。乃國事。貴道軍士三四千名及道軍官三四員起送事。文到。湖南洶惧。皆有避敵之計。○慶尙左兵使李珏。退駐蘇山 。東萊屬驛 是日馳還兵營。無意戰守之備。趣令首鎭撫。發人。馬。搬移其妾及綿布千餘匹。鎭撫有難色。珏大怒立斬之 。出本道巡營錄 ○慶尙左水使朴泓聞賊至。焚粮械遁去 。出本道巡營錄두003十七日。左右之賊彌漫列邑。分道而進。一軍充斥彥陽。因犯慶州。中道之賊。直擣密陽之路。府使朴晉。自梁山退還。遮截于黃山危棧臨江處。賊將。乘銀轎,張銀傘。長驅迫逐。晉力戰。斬數級。晉軍官李大樹,金孝友。又連中數賊。中丸而死。賊已踰嶺。截其歸路。前後受敵。晉奔還本府。自焚倉庫而出城。則賊鋒已滿城外。晉單騎衝突潰圍。斬賊二級而走。由是遠近遂知晉名。 出慶尙巡營錄 ○十八日。賊船二百餘艘。自釜山移陷金海。府使徐禮元。棄城走。初中衛將草溪郡守李惟儉守西門。禮元守南門。終日接戰。夜半。惟儉詐稱夜驚。斫守門者先遁。禮元亦稱追惟儉。從西門出走城遂陷。 出慶尙巡營錄 ○十九日。賊兵。自密陽又犯靈山,淸道等地。盡爲焚蕩。勢如風火震雷。所過赤地。金睟留陜川。又移文于全羅道云。慶尙監司爲傳通事。凶賊昨日。密陽陷城。又犯靈山。直指星州路。因上大丘路與否。未能先知。玄風,昌寧等處。公私家一空。本道各營並爲馳報。右關雲峯縣。○二十日。慶尙右兵使金誠一赴營。初誠一受命。倍道馳下。行到宜寧。欲由鼎津。直抵兵營。時賊兵充斥江右。麾下將士相謂曰。此路最近賊窟。莫如由晉州。達咸安。距賊稍遠。而主將令嚴。直前無畏。此行危矣。遂紿告曰。鼎津無船。又囑其子㴒力諫曰。江漲無船。趍晉路爲便。誠一使軍官金玉往見之。玉還瞞告曰。無船不可渡。宜疾趍晉州之路。時前牧使吳澐在村舍。聞新帥至。往拜曰。令公來。軍民氣倍。何不直渡鼎津。欲從晉州迂路耶。誠一愕然曰。吾不曾涉此路。必麾下畏賊瞞我也。卽親往視之。有大船傍岸。誠一大怒。令收玉㴒等行刑。玉呼曰。玉罪當斬。但公之臨戰。願效一死以贖罪。誠一曰。爾旣要貰。前頭遇賊。必須先登。否則並治前罪。斷不容貸。遂趣軍渡江。至海望原。前兵使曺大坤已退于此。錯愕揖迎。與之交授印符。便欲辭去。誠一乃峻責曰。將軍以閫帥。擁兵不進。坐使金海受陷。罪當刑。況以世臣。受國厚恩。當此劇變。義不可逭。大坤慚色掬面。俄而探報賊先鋒已到。大坤恇㥘失措。促誠一上馬。誠一呵止之。令軍毋惑動。選勇士設左右伏以待。二賊騎白馬。着羽衣,金甲,金假面。四方俱有耳目。周回如踏車狀。揮劍躍馬而前。諸將士膽慄。誠一與大坤。晏然對踞胡床。賊怪其不動。不敢近逼。有揮扇步倭數十在其後。誠一令軍官二十餘人出前射之。又選勇士突。擊皆相顧推托。誠一特呼金玉曰。爾旣要先登立功。今尙可回避耶。玉卽挺身上馬。趕至數里。射倒金假面騎倭。乘勝追逐。得金鞍駿馬寶劍而還。是役。卒不滿千。器械掃如。而能挫銳鋒。由是軍情稍振。卽令軍官元士立。李崇仁。獻馘馳啓。遂先驅步卒。誠一最後按轡徐行。是夜移陣咸安。欲收拾內廂。聞有拿命。 出慶尙巡營錄。忠奮所激。士卒用命。敢死力戰。强賊不支。當時將士。何不監此。 ○金睟自陜川。奔向知禮。 出慶尙巡營錄 ○二十一日。右道之賊。由靈山。過昌寧,玄風等地。盡爲焚蕩。中道之賊。自淸道屠過慶山,大丘。浩浩蕩蕩。漫山塞野。自此江左右路塞。左道之賊進向蔚山左兵營等地。李珏出陣于西山。時十三邑兵齊到入城。安東判官尹安性守東門。珏欲空城出陣。安性曰。豈可棄城出陣乎。珏曰。公與虞候諸守令。守城可也。願以公所領石戰軍屬我。我率精兵。出陣西山。俟賊至。內外協擊。遂從西門出。顧視安性等。指太和曰。汝等不知賊鋒已滿于彼耶。卽馳向西山。安性奮罵。撫劍目之。虞候元應斗亦有遁去意。安性怒叱曰。主將無故出城。罪當斬。尙留汝等令守城。汝且欲遁耶。應斗不敢動。賊兵又一運。自彥陽從間途。進陷慶州。時府尹尹仁涵。以捕亡將在西川。判官朴毅長,長鬐縣監李守一等在城。賊一騎馳到東門外。植牌文去。取而視之云。島主領兵來。判官速出城聽約束。毅長等空城遁去。龍宮縣監禹伏龍。以繼援將領軍。馳到牟陽。河陽代將亦領軍五百餘名赴慶州。河陽。本防禦所屬。故兵使。令退聽防禦節制。伏龍方食道邊。見河陽軍退還。疑其爲賊先鋒。招令詰之。代將以實對。伏龍密令軍中曰。此非附倭。則必逃軍也。令軍圍捕。佯爲點閱。而戮之無遺。流血成渠。河陽一縣軍民。以此蕩盡。伏龍卽以捕斬土賊。追報于防禦使。 出慶尙道巡營錄。不能奮義於凶賊。反爲移毒於無辜。不復悔恨。搆報要功。有是乎後其之無狀也。 ○二十二日。金誠一以拿命去。先是誠一。回自日本。啓於榻前曰。日本必不動兵。可保無虞。及變作。上追咎前啓之言。有是命。誠一聞拿命將至。而道梗未及達。人言上旨未降。大寇當前。閫帥。豈可容易棄鎭。誠一曰。君命不可久稽。卽就道。是日。虞候李俠。沈軍械於池水。燒倉廩而遁。昌原府使張義國。亦棄城走。誠一在道。金睟出見。唁其被拿。誠一略無辭色。但曰。國事至此。願令公努力討賊。以報國恩。營吏等相謂曰。被拿不憂。國事爲憂。眞忠臣也。曺大坤蒙宥。復爲兵使 。出慶尙巡營錄 ○賊陷左兵營。李珏,元應斗已先遁去。十三邑兵皆潰。珏武藝絶倫。及除本職。其放炮。別用海磨石。如彈丸者十餘斗以試之。聲勢俱烈。人頗倚重。貪饕無厭。性又恇怯。聞賊犯境。蒼黃失措。東萊之敗。挺身遁走。兵營受圍。空城先竄。 出慶尙巡營錄。○當時之將。旣㥘且貪。鮮有廉己愛士。折衝報國者。實皆漢孔明宋鵬擧之罪人。而李珏之㥘。出於見賊之前。李珏之貪。出於搶攘之時。非但古良將之罪人。實是當時將士之罪人也。두004幼學郭再祐。起兵討賊。再祐慶尙道宜寧人。初聞諸城連陷。列鎭主將及方伯守宰皆避深山。莫敢交鋒。乃奮罵曰。聖朝休養臣庶二百餘年。一朝有急。皆爲自全之計。不顧君父之難。今若以草野不起。則擧一國三百州無一男子。寧不爲萬古羞耶。於是盡散家財。募聚散卒。解所着衣以衣戰士。脫妻子所着衣以衣戰士妻子。且激以忠義。自是所募戰士。如沈大承,權鸞,張文章,朴弼等十餘輩。皆勇敢善射之人。感激泣下。願與同死。是日相與約定擧義。手下勇士五十餘人。發宜寧,草溪倉穀,又取歧江棄船稅米。以餉募士。人言藉藉。或以爲發狂。或以爲作賊。陜川郡守田見龍。以陸賊報巡察使。士卒皆散去。會招諭使下來。聞其名。招見之。激以勸起。於是士卒還集。再祐討賊益力。不問賊之多寡。直前無畏。以一當十。戰時必着紅綃帖裡。具堂上笠飾。自號曰。天降紅衣將軍。馳馬掠陣。往來倏忽。或隱或見。賊徒莫測其端。然後盤馬回旋。擊鼓徐行。以爲行軍節次。賊徒不知其軍兵多少。不敢近逼。自結陣處至賊路二三息之程。連設候望。潛報平否。賊到百里之外。陣中先知之。預備之具。故常逸而不勞。常靜而不擾。賊若多來。則於所望山上。令人持一柄五枝炬。從夜擧之。喊殺相應。有若千兵萬馬。賊徒望輒遁去。又選精銳。潛伏於要害處。寂若無人。賊至輒射殺之。賊亦謂之紅衣將軍。不敢登岸焚掠。再祐又約軍中曰。要須殺賊而已。何必斬級要功。若爲他日受功。而討賊。則非誠心也。衆皆聽命。終始無獻級。巡察使陣下武士金敬老,金景納等交構再祐。再祐亦憤金睟之所爲。移檄聲罪。欲討金睟金睟。論以不軌狀啓。將陷不測之罪。賴招諭使調濟兩間。遂以無事。又以三嘉之兵付于再祐。再祐領二縣之兵。以尹鐸爲代將。朴思齊爲都摠。許子大造軍器。鄭演爲督役使。權鸞爲突擊將。李雲長爲收兵將。沈大承,裴孟伸爲先鋒將。許彥深典軍餉。姜彥龍治兵械。招諭使又令前牧使吳澐。爲召募官。兼摠其數。助以聲勢。鄕之饒戶。出米擊牛。輪日餉軍。軍聲大振。沿江上下。十餘淺灘。皆設伏諜望。往來相援。賊不敢渡數邑人民。作農如平日。 出慶尙巡營錄。○草野起事。忠義二字。水陸奏捷。射斬百級。 ○以漢城判尹申砬爲都巡邊使。以前牧使金汝岉爲從事。領大軍南下。出師之際。威儀嚴整。人不敢仰視 。我國之將雖名佼佼。而一威猛而已。異域之賊。豈汝饒乎。惜乎。何以制此賊。 ○二十三日。中道大賊。焚蕩仁同。右道之賊。由玄風分渡洛江。焚蕩星州。判官高晛遁走。牧使李德悅。僅以身免。終守境土。賊入據城中。假稱牧使誘聚愚民。窮民無賴。或多降附。左道賊一運。自慶州進陷永川。郡守金潤國遁走。金海屯賊。是日進陷昌原。兵營盡爲焚蕩。因進陷漆原。又左賊一運。進向長鬐。縣監李守一。自慶州退還陣于城外。賊兵四進。守一乃退。永川屯賊。進陷新寧。因向安東。府使鄭煕績遁走。左防禦成應吉,助防將朴宗男留義興。退縮不進。時金睟留知禮。祗受都巡察使有旨。 出慶尙巡營錄 ○二十四日。中道大賊。由仁同渡洛。進陷善山。新寧屯賊。移陷義興。縣監盧景福遁走。時金睟。令朴晉,裵楔。覘賊于善山。道遇七人。佩竹牌。訝晉等爲賊黨。乞哀馬前。跪納倭書。上面大書一令字。其下細書曰。郡縣黎民。速還右宅。男嫁苗收麥。女畜蠶繅緖。各勤家業。若吾軍士犯法者必罰焉。天正二十年月日。拾遺侍中平義智。又其下着署。晉等縛而來之。猝遇賊棄走。 時嶺人。降附受牌者不知其數云。 ○巡邊使李鎰到尙州。不明斥候。有告賊已過善山者。鎰怒其惑衆斬之以殉。軍中聞賊已逼。而無敢先告者。 出慶尙巡營錄。○愚者千慮。必有一得。可笑彼其寧不得一。斥候偵探。兵家要畧。詐術詭謀。名帥不辭。守正待敗。殊未聞於古也。두005二十五日。大賊自善山進陷尙州。李鎰大敗走。是日曉霧迷漫。始聞炮聲。知賊鋒已到竹峴。鎰出陣城外北川。賊或耀劍跳躍而入。或鼠伏膝行而前。須臾蔽野。我軍自潰。塡塞北川。賊以突騎蹙之。積屍如丘。從事官朴箎。 李鎰從事 李慶流。 邊璣從事 尹暹。判官權吉等皆被害。鎰僅以身免。奔還忠州。 箎。金睟之壻也。時年二十二。以弘文校理。在朝。鎰承命時。以睟方爲慶尙監司。箎在軍。則睟必盡心力請從事。上依允。至是死。或云朴箎不死於賊。避入山谷。見咸陽人印彥龍曰。吾十八。登壯元及第。受國恩厚。今戰不利。何面目更見天顏。自刎死。두006二十六日。凶賊自尙州。連陷咸昌,聞慶。聞慶縣監申吉元。自變初。不離官門。是日方坐大門。刑其上賊破散倉庫者。賊卒入虛門。人皆駭散。吉元獨騎馬避入山麓。賊追及欲降之。吉元奮罵不屈。賊斷其四肢。而後殺之。比死罵不絶口。 出慶尙巡營錄。○一介忠節萬古誰雙。聞慶前後。只有睢陽。 ○左道賊一運。焚蕩軍威。連陷庇安。縣監金仁甲遁走。一運自長鬐。焚掠迎日,甘浦,安東。判官尹安性。單騎還府。知府使遁去。乃西行。豐基郡守尹克任。棄城遁去。○金睟。自知禮還居昌。斬草溪郡守李惟儉。○申砬過龍仁。聞賊勢猖獗。密啓曰。賊勢甚盛。實難防禦。今日之事。不勝悶迫云云。都下恃申砬如干域。及聞悶迫之啓。士民洶惧。日夜遁潰。○申砬馳過忠州。將欲遮截鳥嶺。以道險多阻。騎射不便。還退忠州。見李鎰於道。砬問賊勢如何。鎰曰。此賊非庚午乙卯之比。 庚午之賊。僅陷熊川數邑而敗。乙卯之賊。陷達梁。殺兵使元迪。康陷津連等官。至靈岩敗。 又不若北狄之易制。今旣不能據險遮截。若交鋒廣野。萬無能當之理。寧退守京城。砬怒曰。爾旣敗軍。又復驚動軍卒。法當斬。第俟賊至。立功自效。遂屯于㺚川 。忠州地 ○二十七日。全羅防禦使郭嶸助防長李之詩。領兵五千。自南原,雲峰。向咸陽。赴援嶺南。○凶賊踰鳥嶺。驅進㺚川。申砬敗死。初賊兵。恐兩嶺之難過。及至山路寥闃。絶無人蹤。遂大喜跳踉。直犯忠州。申砬盡率諸道精兵及武官二千,宗族百餘員,內侍衛卒幷六萬餘兵。自鳥嶺還退忠州。從事金汝岉。因李鎰之言。請堅守山路。砬不聽曰。過海之賊。不能趍步。遂背㺚川。結陣于彈琴臺。俄有斥候將金孝元,安敏等馳告曰。賊鋒已逼。砬怒其驚衆。立斬二人。因下令改易陣伍。賊兵已出我軍之後。圍繞千匝。將卒驚惶。盡入㺚水。賊交刃亂斫。如刈草芥。流血遍野。浮屍塞江。申砬,金汝岉皆渰死。我國精兵。盡殲於忠尙之兩役云。○慶尙右兵使曺大坤。退匿晦山書院。時昌原留賊四十餘騎。追避亂人。亂流渡江。掠宜寧之新反。遂乘虛入城。焚官廨城門。大坤方在三嘉。以爲大賊逼境。棄旗鼓而遁 。出慶尙巡營錄 ○庇安之賊。出屯于醴泉之多仁縣。中道大賊。因陷忠州。牧使李宗長遁走。時忠州等官之人。恃申砬大軍。在家待變。不意軍敗。賊兵四散。殺掠之慘。益不可言。賊傳言于我國曰。鄭琢。李德馨出送云云。○二十八日。星州之賊。連陷開寧,金山。右道防禦使趙儆。從事李睟光。收兵遮截于秋風。 金山驛名 兵潰而走。○慶尙左道助防將朴宗男。自義城。從間途。退走于安東之豐山。盡焚倉庫而去。賊自多仁渡河豐津。出咸龍之境。陣于唐橋。 出慶尙巡營錄 ○慶尙監司營吏李。告因于全羅監司云。今到私通內倭人等衣內。着甲與否則不知。衣外則皆不着甲冑。兵器則只放鐵丸。用劍而已。他無所技。而但鐵丸。無人不放。其放如雨。以此難制。所以列邑軍器。庫外官舍。則不焚。邑內及路傍。則擇大家盛閭衝火。中道之賊不可勝數。由東萊,梁山,密陽,淸道,慶山,大丘,仁同,善山。盡爲焚蕩。至尙州。巡邊使接戰。彼衆我寡。敗北賊徒。亦焚尙州,咸昌,已至鳥嶺。不日間。有踰嶺之勢。而踰不踰。時未得聞。右道之賊。僅四五百名。自金海,昌原右兵營。焚蕩至此。右兵使接戰不勝。賊由咸安,漆原,靈山,昌寧,玄風。盡爲焚蕩。自此分作二三運。一運二百餘名。今到星州。方搜同州境諸閭。又一運百五,六十名。由宜寧,三嘉,陜川。向高靈之後。亦不知厥後之所向。又零賊□三名。不知所從來。潛到金山。右道防禦使接戰。我軍奔潰之後。亦不知去處。右道之賊。由某路上去之計。未能詳知左道慶州路倭賊上去與否。一自變生之後。列邑空虛。道路絶塞。迨未見一張消息。又倭船廿隻。發自釜山浦。已到巨濟島。右水使與全羅左水使。時方約束攻擊。倭賊到處。年少男人則盡斬。老幼與女則不殺。而年少美女。閭家所偸之物。牛馬載駄。道路絡繹。所載牛馬。皆使我人牽行。擄掠我人。以爲其徒者爲半。此外小小形止。難盡枚擧。大槩書送云云。○右路之賊入湖西。焚蕩黃澗,青山等邑。 此路之賊。其數實少。兩湖之兵。足以遮截。而將士驚惶。望風先潰。雖云彼銳我鈍而然。實由時士不盡心之致。惜乎兩湖許多列邑。曾無一人義士耶。두007賊兵。自忠州。直向京畿。上聞申砬敗死。繼聞賊兵已逼畿甸。遂定西幸告急之計。先遣李元翼,崔興元。巡察平安黃海等道。又命大臣。冊立光海君爲世子。監撫軍國重事。大臣兪泓泣諫曰。宗社在此。臣民在此。殿下焉往。不可輕動。使人心驚搖。上抆淚龍袍。喟然長嘆曰。予何往哉。冀得臣民戮力。遂以背城一戰之計。下哀痛敎。以判書金命元爲都元帥。傾率京畿遺漏之丁。出陣于漢濱。兵曹備邊司。督設守城之具。將近旬日。士民皆潰。無人聽從。急令戒嚴城門。不許人物出入。城中貴賤士女。晝夜縋城盡走。或恐眷屬相離。以索相結而遁。都中無賴之徒。結黨追逐。美女財寶。見輒掠奪。不分縉紳。傷殘盈路。父子夫婦。相矣投竄。上聞人心至此。決意避敵。 惜乎。二百年休養之餘。何人心至於此耶。不但含羞於天地。抑亦有愧於凶徒。 ○二十九日。全羅監司李洸。令列邑。調發勤王兵凡十餘萬。慶尙監司金睟。亦收燼餘。欲與兩湖兵偕行。自居昌到咸陽。時嶺南六十餘邑。盡已淪陷。唯右道六七邑。僅免兵火。而軍卒則已散矣。○ 두008三十日。車駕西幸。前數日。都中一空。大小臣僚。近侍衛卒。一時散去。上痛泣曰。二百年休養之中。無忠臣義士一至此。夜半與中殿。率諸宮。奉廟社主。出京城。朝至碧蹄。値雨路中。龍袍盡濕。閭里空虛。八珍闕膳。馳至長湍。府使已遁。四顧無人。一行皆餒。少歇。卽馳向開城府。 此時臣。民安居寢食者。寧不爲奮義討賊。以淺此日無前之痛乎。 ○全羅防禦使郭嶸。領軍至金山境。本道右防禦使趙儆等來會。至金泉驛。捕賊五級。因聞郡中有留倭。進兵圍捕。斬獲三十餘級。我軍被害五十餘名。郭嶸卽還全羅。方接戰時。一賊持長劍闌入。幾擊趙儆。儆以赤手抱賊。相持良久。軍官鄭起龍突進斬賊。儆得不死。○全羅助防將李由義。領軍二千向忠淸。卽還全羅。初宣傳官自京到本陣。傳旨云。領軍二千。馳赴忠州。受申砬節制。由義承命。行至連山。聞申砬已敗。賊至京畿。引兵還。○賊旣知我國將卒善潰。不有孤軍冞入之疑。或十餘名。或五六名。橫行作賊。
五月初一日。凶賊充斥京畿。漢江以南。烟焰漲天。炮聲動地。龍仁,水原,廣州等地。盡爲焚蕩。○南原府使尹安性。聞境內洶惧。卽下開諭帖云。側聞閭閻。聞變騷擾。皆作移避之計云。湖嶺相距之間。有高山大川。萬無卒至之患。而今則慶尙右水使。多數捕賊。勝聲大振。各宜按堵安業。毋相驚動。俱勤耕耘事。 南原。在兩南之間。而余在本府。故記兩南及本府之事頗悉。두009初二日。賊兵大進。漢濱,廣津,麻田,沙平,銅雀等處。一時乘桴亂涉。守江之兵皆散。陪吏伏元帥轎倚下告曰。賊兵渡江。軍卒盡散奈何。再三告稟。一無應辭。仰視之。元帥已無去處。但虛床而已。賊旣渡江。大喜曰。麗國可謂無人。險嶺無兵。長江不守。若有一夫當之。則吾難至矣。進兵至東南大門外。城中寥寂。絶無人形。賊疑之。留外不入。 此乃先鋒賊。大賊。充斥四五日程矣。 ○車駕。至松都駐蹕。命金命元。遮截臨津。放還鄭澈,尹斗壽。爲左右相。 以東西戰被罪 敎旨召兩南兵。 敎旨在下十四日。두010初三日賊入長安城中。前一日。賊屯于門外。城中反氓出迎曰。國空無主。城棄不守。賊乃入之。先是慶尙道梁山官奴黃應禎被擄。賊書示曰。爾國何用防禦。不過二十日。當入京城。至是果如其言。所過列邑。皆留酋稱宰。誘聚愚民。散給倉穀。兼造名牌以標其降附。以此民多姑從。又自釜山。達京開三路。上下三十里。每置一陣以備深入路梗之虞。入城之後。先焚宮闕,宗廟。連燒公私家舍。括索帑藏。日輸本土休兵。擬向關西,朔方之路。○慶尙左兵使李珏。左水使朴泓。各率虞候與防禦使成應吉。助防將朴宗男,邊應星。安東判官尹安性。豐基郡守尹克任。醴泉郡守邊良祐等。托言勤王。棄嶺南,踰竹嶺去。其後元帥在臨津。斬李珏 。出慶尙巡營錄 ○漆浦萬戶文貫道。聞大駕西巡。西向再拜。痛哭良久。兩南義之。 出慶尙巡營錄 ○全羅監司李洸。與前府使高敬命書。大駕西狩。京城不守。國事至此。慟哭慟哭。今日之義。惟當以哀痛迫切之義作檄。招諭四方義侶。刻日擧兵。庶雪通天之痛。言若不切。則無以感動人心。檄文不可草率。敢煩一揮。幸速示。五內如裂。不知所爲。徒北望慟哭而已。且通此意于士重。 金千鎰字 諸公何如。○高敬命答李洸書。國事至此尙忍言哉。唯日北望長慟而已。今奉令書。政及於煎撓萬慮之中。展讀未已。涕淚橫集。敬命衰病餘生。屛伏田間。滯在床簀。而上不能束裝星馳。奔問行在。又不能趍詣幕府。傍贊戎畫。憂惶慚悸。措躬無所。知有一死而已。下敎檄文。某雖久廢翰墨。而義不敢辭。謹此草上。顧以詞理疏鹵。無以揄揚節下倡義興師之意爲恨。但敬命月初。移寓州東敝庄。今見令書。發於初三日。而初六日。陲卒始傳空家。以致稽延之久。深恐緩不及事也。區區鄙懷。妄有所陳。錄在別紙。切冀節下。勿以人廢言。集衆廣忠。果爲國立大功也。金士重。適有書來。具以令意傳告矣。伏惟云云。餘方寸亂矣。萬萬不宣。別紙云今。日之事。鞠旅勤王。是第一義。而亦當要以固結人心爲先。橫賊之侵。固已不勝其擾。而招兵不已。民尤不安其業矣。古人曰。兵務精。不務多。苟善用之。見在之兵。足以制勝。苟不善用。多多何益。只令邦本日搖。國事日去耳。大駕西巡。箕城凋弊。不獨百官有司之須無以支用。至於大官膳羞之供亦爲寒心。竊聞君山上供稅米。到江而回。法聖之倉。未及發船云。信斯言也。今以重賞。厚募漕卒。舟于西海。以達大同之津。倘令其半。得至行在。不但軍國之用賴而不乏。而四方人心亦恃而不恐矣。今倭賊。捨舟登陸。千里轉鬪。雖使竊據都城。陸路已塞。而西方海路。尙未梗也。及今圖之。事可爲矣。但依平常事例。祗以微末庸將。勒令領去。意外之變。亦不可不料。募得忠勇之人通於舟楫者。量給精卒。爲且戰且行之計。則不但軍粮無事得達。而行都軍容。亦稍振矣。但民心方擾。集兵未易。則汲汲措置。祇令漕卒。依前領去。亦或可乎。然若稍延旬日。則安和彼賊。不爲生心。今日朝廷號令。不出於軍前。而四方聲聞。不達於行都。此可爲慟哭流涕者也。若以重購。厚募鮑作。僞若漁採。令達蠟書。無事往返。則許以啓補官資。或優給米布。二者之中。惟其所願。且致其妻子于官。□限回還。間日給酒食。倍加常數。外以示周養之恩。內以行羈縻之計。四方諸將。合力勤王。則要當水陸並進。大軍直從坦途。奇兵間出海道。使賊腹背受敵。疾雷不及掩耳。是亦兵家奇正之道也。 出正氣錄 ○令羅道都巡察使。爲通諭道內父老軍民等事。嗚呼。最爾倭賊。毒鍾蜂蠆。性毓蛇虺。陰懷猾夏之心。敢肆跳梁之患。陷城池數十餘處。屠士卒幾千萬人。恇怯守臣。聞聲而鼠竄。愚駭群姓。望風而波奔。嶺南山河。盡入豺虎之窟穴。湖西草木。半染犬羊之腥膻。石勒之寇。直向神州。宗社之羞罔極。沒喝之師將次河上。廟堂之憂無窮。言念及此。欲寐無覺。宵旰下哀痛之詔。嶽瀆展祈禱之誠。惟我率土之濱。凡在含血之類。所當腐心扼腕。孰不奮拳揮戈。唇亡齒寒。雖失輔車之勢。主辱臣死。宜盡勤王之忠。惟我忍戴不共之天。冀雪無前之恥。雲飛之猛將如虎。鶻擊之勇士若林。祖士雅。誓淸中原。肝膽如斗。張叔夜。入援京洛。涕淚懸河。虎旆龍旌。當掃燕巢於幕上。蛇矛月戟。期翦魚戱於鼎中。惟爾湖南。素稱禮義之鄕。實是人材之府。咸售疾風之勁草。共作板蕩之忠臣。念我二百年休養之恩。一乃億萬人慷慨之志。親上死長。仗大義而先登。斬將褰旗。使隻輪之不返。豈特冲甲。 姓元。高麗人。以匹夫。擧義勤王。削平大亂。 功高一代。抑亦車達。 姓柳。高麗文化人。臨難粮之。車達以車。運私粮以贍軍。事定。賜名車達。錄勳。 澤流耳孫。勉以身許國家。期抗節而效死。無以賊遺君父。誓竭力而捐生。檄到。各勉以忠義。倡率壯夫。晝夜馳來者。洸初聞賊犯京甸。又疑逆兵之該言。慮以方伯。恐難偸生。卽將數書印信節錢。冠帶。置于全州眞殿內。避向古阜本家。衆論喧騰咎之。不得已乃復視師。今向京時。倭賊消息熹微。或本國逆賊。與倭同上京云者甚多。 ○李洸檄嶺南將士文。惟我國家。十三代無怠無荒。無失道德。二百年不追不拒。不事干戈。愼守封彊。綢繆陰雨。頃因醜虜之納款。稍示聖度之包容。廟算懷柔。遂許輕德之信。虜情凶桀。終逞背義之謀。競發虺螫之心。妄肆蜂蠆之毒。虔劉我將士。非止萬千。陷沒我城池。豈特十數。顏眞卿之獨不見。楊萬石之一何多。劉聰直向神州。晉室之危方急。沒喝已次河上。宋朝之辱可言。罪旣滔天。鬼神之陰誅已議。敗必塗地。王師之顯戮當加。方將仗義之三軍。以決背城之一戰。孰倡東窓之計。亟勸西蜀之巡。明滅旌旗。奉天之金與霜露。凄涼警蹕。鳳翔之玉輅風塵。江上之整整堂堂。波奔鳥散。都中之高高下下。煙鎖雲沈。府庫之政圖蕭然。倉庾之儲峙已矣。痛念於此。時勢奈何。祖士雅之誓淸。慷慨可想。張叔夜之入衛。忠義所輸。夷險當以之。擬與戮力而效死。危辱至於是。忍共戴天而偸安。 才非禮樂之鄕。謬膺詩書之將。再握方面之節。常懷國耳之忠。玆竭李晟之忠。以傳鄭畋之檄。孔哀孔棘。其虛其徐。薛景仙取津上。先通貢獻。爰擧義兵。韓世忠由海途。將赴行營。欲復畿甸。風旌號令。山岳威稜。電發江南。虎視漢北。將軍雨泣。孰不扼腕而褰旗。士卒露屯。咸願嘗膽而唾手。若失摯先之會。大乖善後之籌。公等俱以股肱之良。咸都藩鎭之服。共生右文之代。盍奮左袒之忱。祗謁寢園。快雪祖宗之恥。恭迎車駕。大慰父老之望。期張火而爇毛。誓擧山而壓卵。並祈天地。青龍斷義智之頭。同誓山河。赤鬼踐玄蘇之血。倘或遲回晩日。徵發誤機。有愧神祗。負罪百世。將何面目。更立兩間。嗚呼。西關極天。北辰違所。摽擗罔極。奮飛何綠。惟我湖南,湖西曁嶺東,嶺北。無遠無邇。汲汲貔貅之齊驅。自彼自玆。續續腹背而直擣。俾探充斥之氣。乃奏廓淸之功。毋以賊而遺君。期奮忠而進討。有殺身而報國。庶免辱於退生。○ 두011車駕發松都。向海西,關西。路上困苦。臣民鼻酸。不忍聞。一日駐驆山谷。竟夕闕供。野婦泣進粟飯。上御之曰。此味勝八珍。粟之貴如此如此。一日雨大不得行。駐蹕道傍村舍。上御杵室。群臣 扈駕者十餘 雨伏。終日飢餒。 痛矣哉。哀我小中華。介於東夷北狄之間。變亂之作何代無之。然而淪陷之慘。播遷之辱。豈有至於此極哉。惜乎勸課食我之君父。累悲闕膳。綢繆爲民之主上。竟苦陰雨。此賊萬世不可忘。此身一死不足惜。臣民者縱未赴西退而數死。亦當蹈東海而捐生。 ○初四日。嶺南招諭使金誠一到南原。誠一初以拿命。行到稷山。蒙宥。還奉招諭之命。始知朝廷西遷。慟哭還。 湖嶺路塞。故由忠淸內路下來。出慶尙巡營錄。두012李洸率勤王兵。行到公州。聞賊入京。鳴金退師。六軍潰還。時郭嶸率助防將李之詩,從事官李用諄等。自金山還。留陣全州。○郭再祐收復宜寧,三嘉,陜川等邑。右道之賊。聞聲撤去者甚多。再祐結陣鼎津。措捕沿江之賊。○初五日。嶺南招諭使金誠一。向咸陽。本道都巡察使金睟。自咸陽。抵雲峯。路逢招諭使。招諭使曰。封彊。之臣當死封彊何爲至此。全失一道。而不能救。單騎遠投。其能有濟乎。願令公速還。睟乃還咸陽。因到安陰。金誠一至咸陽。郡守李覺。獨坐空館。只有老吏數人。誠一督郡守。召聚鄕人。咸安前縣監趙宗道。前直長李魯等皆來會。誠一立草檄文云。招諭使爲通諭道內守令邊將。文武出身,父老子弟,閑良軍民人等事。國運中否。島夷竊發。橫跳彊場。衝突東西。雄城大鎭。曾無藩籬之限。浹辰之間。已踰關嶺。直搗京師。鑾輿播越。擧國奔竄。自有此東方。夷禍之慘。莫今日若也。列閫爲國家干城。而或望風奔潰。或恇怯退縮。守令爲一邑君長。而率皆搬移妻子。焚棄兵庫。無一人抗義奮忠。先登擊賊者。哀我軍民。尙安所恃賴。而不逃且散哉。狂瀾橫潰。莫可堤防。城無荷戈之卒。邑無效死之臣。賊之所到。如入無人之境。遂使嶺南一道。陷爲賊藪。土崩瓦解。莫保朝夕。此何等時變耶。然此豈徒邊將守令之過。爲士民者亦不得辭其責也。古之當大亂。能守國者。以其上有效死之志。下有死長之心故也。今則賊未至。而士民率先逃竄。藏伏山林。爲苟活偸生之計。使守令無民。將帥無軍。將誰與禦敵乎。或者謂鄒魯之鬨也。有司死者三十餘人。而民莫之死者。以其老羸塡溝壑。而有司不恤民隱也。今玆奔潰之變。孟子所謂豈出乎爾者反乎爾者乎。嗚呼是何言也。近年以來。賦果重矣。役果煩矣。民果不堪命矣。然城池防備之具。皆係陰雨之備。以今觀之。聖主保民之慮遠矣。夫豈厲民而自利者乎。況鄒魯之鬨。雖有勝負。同時中國也。於民無甚利害。惟此染齒之徒。一入我地。便有雄據之志。擊擄婦女。作爲妻妾。屠戮丁壯。靡有孑遺。撲地閭閻。盡付烈炎。公私蓋藏。擧爲其有。毒遍四域。血流千里。生民之禍可忍言哉。此實志士枕戈之日。忠臣殉國之秋。而六十七州之中。迄無倡義奮臂之人。猶恐逃命之或後。入山之不深。曷勝嘆哉。設使入山而避賊。終能全軀而保家。烈士猶以爲恥。況萬無全保之理乎。當職。請究言之。以開士民之惑可乎。此賊急於犯京。兵不留行。故禍未遍及於列邑。逮賊得志之後。凶徒充滿域內。則山林果爲逃死之地乎。比若洪流滔天。烈焰燎原。嗟我億萬生靈。更欲何地容身。不出則日久糧絶。盡爲窮幽之殍。出則父母妻子。被其俘辱。衣冠士族。爲其魚肉。降則永爲梟獍之族。不降則擧作瘡瘢之鬼。此豈待智者而知之乎。然此則只以利害死生言之耳。嗚呼。君臣大義。天之經地之義。所謂民彝也。凡我含血食毛於此土者。坐見君父之蒙塵,宗社之將顚,萬姓之魚爛。而恝然不爲之動念。則其於天經地義。何況父母罹鋒刃。骨肉不相保。私門之禍亦慘。而爲子弟者捧頭鼠竄。不思出萬死而求全。則其於人子之道何如哉。顧惟嶺南。素稱人材之府庫。一千年之新羅。五百載之高麗。及我朝二百年之間。忠臣孝子。英聲義烈。輝映青史。節義之美。俗習之厚。甲于東方。此士民之所共知也。且以近事言之。退溪,南溟兩先生。並生一世。倡明道學。以淑人心。扶人紀爲己任。士子之薰陶漸染。興起私淑者多矣。平日讀許多聖賢書。其自許如何。而一朝遭變。惟貪生避死之是急。自陷於遺君後親之惡。則偸生世間。將何以頭戴一天。之死地下。亦何以見我先正。衣冠禮樂之身其可辱乎。斷髮文身之俗其可從乎。二百年之宗社。其忍輸之於賊手乎。數千里之山河。其忍委之於賊窟乎。中華變爲夷狄。人類化成禽獸。是可忍乎。是可爲乎。上首功之秦。初非純乎。夷狄。魯連猶甘蹈海之死。蠢玆卉服。此何等醜種。而任其盜據我土地。戮辱我民庶。不思所以驅逐之斬殪之乎。說者以爲彼勇我㥘。彼銳我鈍。雖或起兵。無能爲也。噫此何不思之。甚乎。古之忠臣烈士。不以成敗易志。强弱挫氣。義所當爲。則雖百戰百敗。猶張空拳冒白刃。萬死而不悔。況此賊雖强。孤軍深入。正犯軍忌。尙安能善其歸乎。我卒雖㥘。勇怯亦何嘗之謂。忠義所激。弱可使强。寡可敵衆。只在一轉移之間耳。今見逃兵潰卒。布滿山谷。初雖脫身而求生。終知一死之難免。咸思自奮。爲國效力。特未有倡之者耳。當此之時。如有一人義士。奮起一呼。則遠近雲合響應。坐可策也。聖上已下哀痛之敎。又不以小臣爲無狀。付之招諭之責。唐之武夫悍卒。尙泣興元之詔。矧我鄒魯之士。寧不爲之扼腕慨慷。以赴君父之急乎。誠願檄到之日。守令則曉諭一邑。邊將則激勵士卒。文武朝官,父老儒生各人等。傳相告詔。倡率同志。激以義烈。或保塢而自守。或提軍而助戰。富民則運車達之粟以贍軍。勇士則奮冲甲之兵以勦賊。家家人人。各自爲戰。一時並起。則軍聲大振。義氣百倍。鋤耰棘矜。可化爲精甲利兵。賊雖長槍大劍。尙何可畏之有。事成則雪國恥於萬全。不成猶不失爲義鬼。諸君勉之。當職一腐儒也。雖未學軍旅之事。君臣大義。亦粗聞之矣。受任於一道傾覆之餘。志切存楚。未效包胥之忠。哭廟起兵。徒慕張巡之烈。尙賴義士之力。冀辦取日之功。朝廷賞格在後。並宜知悉。初誠一。令文士草檄。不滿其意。乃自製。言出肺膈。筆不暇濡。 出慶尙巡營錄 ○以金玏爲安集使。傳旨曰。今者嶺南。府鎭。連陷于賊。非因一道兵力之少也。只緣變起倉卒。各邑軍民。望風奔潰。以致瓦解。然其本意。豈欲降附倭賊乎。若曉諭頭頭有識之人。激以忠義。糾合同志。且率子弟奴僕。協同官軍。並力死戰則猶可有濟。高麗時。元冲甲匹夫。倡率義旅。摧却大敵。此一驗也。行上護軍金玏。差送本道。使之遍諭遠近。激勸忠義之士。效死勤王。玏慶尙道榮川人。從間途得達嶺南。 出慶尙巡營錄 ○募兵通文。初慶尙道咸安人文臣前縣監趙宗道。前直長李魯等在京聞變。卽馳還本道。宗道謂魯曰。入吾界。當倡起義兵。如不克濟。當與同志溺水死。義不可辱。至是通文列邑云。右文爲招募義兵事。急君父之病。而攘夷狄之禍者義之先也。圖國家之危。而忘死生之患者貞之大也。靈萬物而爲人。秀齊氓而爲士。何謂靈。爲其知君臣父子之倫也。何謂秀。爲其識義利向背之分也。旣食毛之皆臣。寧肥祿之獨死。匪茹至太原。古或有之。直斥犯京師。今其極矣。乘輿播遷。漠風露之何處。宗社震驚。哀陟降疇依。鼠竄鳥伏。率多林翼之投戈。殺妾食馬。未聞張巡之死守。此豈臣子之可忍。斯實人。理之難堪。二百年之培養安在。六十州之忠義掃盡。哭大荒而無歸。擧白日而何顏。父母有疾。寧委命而不藥。大勢旣去。或賴天而克復。死雖可惡。網天地而無逃。生縱欲偸。在犬豕而忍活。等其死也。寧死於義敢望生乎。捨生於仁。背國事雙。其可安歟。髡頂染齒。其可耐歟。官軍逋散。威怖刑而不出。義旅鼓動。庶奮忠而爭赴。況主上西幸之日。下哀矜惻怛之敎。另揀致命之臣。特遣招諭之使。綸音纔降。聞者莫不墮淚。星諭所及。見者應思殞首。良願諸君子。讀書平日。皆懷報國之志。臨危此時。宜豎死君之節。其各敦勸父兄。激勵子弟。徵起隣里。奬率奴僕。或帶弓矢。或佩刀劍。團結作隊。踊躍鼓勇。以應招諭。以洒國恥。玆豈邦家之幸。亦祛門庭之寇。且逃軍避匿者。咸能自現聚屯。則非惟前罪盡貰。亦復後賞可期。更願十分開諭。俾知逆順。千萬幸甚。誠如是也。生爲元夫。死爲英魂。葬刻鮑信之形。陵圖龐德之狀。與其巽耎而生。曷若慨慷而死。倘緣義徒之勤王。得見天路之再淸。未必皆歸於淪沒。庶將共享乎中興。豈不休歟。宜各勉之。嗚呼。天理民彝。有不容泯。人綱人紀。寧肯永墜。觀此一張通書。必有千絶慟哭。趙宗道等。 後丁酉。宗道死節於黃石山城。足見不負寧死於義之初言。 ○慶尙沿途之賊向巨濟。右水使元均。令虞候守營。馳到白川寺。見我國漁船。以爲賊艘。蒼黃奔潰。退遁露梁。虞候聞之。督出滿城老弱。狼藉塞路。虞候恐不得齊避。彎弓亂射。有兩孕婦。斃於一箭。無辜死者甚多。一島將士。皆望風潰散。南海縣令奇孝謹。焚倉庫而走。倭賊尙未犯境云。 出慶尙巡營錄두013賊將平淸正,平行長等。自京城分道而出。初賊魁秀吉。分兵八部。一部之衆。幾至十餘萬。各總大將四五人。分管我國八道而北方。軍讖所忌。故擇其將最勇悍者送咸慶。淸正與焉。至是。秀家等。留屯京城。入南別宮。淸正等。自京城東路。過江原。向咸慶。所過赤地千里無人煙。行長義智等。自京城西路。向海西。都元帥金命元。以申硈爲中軍。李薲,李薦爲左右。禦于臨津。○十四日。全羅監司李洸。又發勤王兵。凡十餘萬。聚屯全州。餽運者倍之。○徵兵有旨。初。朝廷駐松都。下敎旨于兩南。路梗未達。至是到本道。畧云。倭賊充斥近畿。勢不得已。駐箚松都。號令四方。爲勦滅之計。卿其密通于慶尙右道。掃境來援事。有旨半片常紙。細書艱得成字。有同村家私札。臣民見之者莫不揮泣。李洸傳送嶺南。金睟自安陰。到咸陽。率防禦使趙儆,從事官李睟光,助防將梁士俊。自咸陽向南原。時全羅兵使崔遠。領軍來陣南原。○ 두014十八日。金睟自南原到全州。李洸駐兵于此。以睟爲敗軍將拒之不納。一行兵馬。稍稍逃散。將士各自牽馬而行。已而睟見李洸約束登途。○ 두015淳昌玉果之軍。厭赴遠戰。反生凶謀。推郉大元,趙仁爲盟主。據蘆嶺作亂。已而回兵本郡。焚鄕射堂,刑獄。郡守金禮國脫身奔告。李洸傳令兵使。進軍討捕。會潭陽府使李景麟領軍向全州。爲反氓所逐。潭兵亦潰。○十九日。李洸自全州。領軍分道向京。一軍五萬餘名。李洸將之。領全尹羅牧等守令二十餘員。向益山。由忠淸內浦而進。一軍四萬八千餘名。防禦使郭嶸將之。領助防將李之詩,金宗禮及南原府使等二十餘員。向礪山。由忠淸大路而進。皆期會振威。金睟亦從李洸向內浦。○本道餽運之數。以監司分付各官。每二夫一駄。品官八員一駄。校生八員一駄。要功自募。運粮卜駄。各官守令及諸將士。私卜其數。不可勝計。道路絡繹。○二十日。南原求禮,順天之兵八千餘名。到全州參禮。一時潰散。亂槍所斃甚多。李洸軍官王景祚等。拔劍斬退。潰軍擁景祚。至全州得脫。南原府使尹安性,傳令判官盧從齡。開諭聚送。求禮縣監趙士謙等。親還本邑。招集馳還。及于恩津。全州,光,羅之兵到龍安。亦一時潰散。守令等在道招集。然而潰軍未能齊會。李洸亦在道遲回。多有厭進之意。○兵使崔遠。自南原領軍。向淳昌。將討反卒。先以南原判官盧從齡。馳探。金禮國。已獲趙仁等誅之。餘皆不問。○金誠一自咸陽。到山陰。縣監金洛。館誠一于換鵝亭。盛陳茶盤而進。誠一變色。召洛責之曰。如此盛饌。非臣子今日所忍御。雖食不能下咽。洛慚謝而退。縣人吳長,宜寧李旨,丹城金景謹。皆杖劍迎謁。誠一謂長等曰。諸生慇懃來訪。必有異策。願聞一說。景謹曰。不斬金睟。無以伸大義。而成恢復之功。誠一笑曰。除是閑說。話不得濟事。洛聚軍至八百餘名。 出慶尙巡營錄 ○凶賊焚蕩鎭海,固城等處。本道右水使元均。退陣于南海露梁。請援于全羅。賊兵聲言向晉州。牧使李璥,判官金時敏。竄智異山避兵。金誠一聞之。馳到本州。境內一空。判官聞先聲出待。璥稱病。誠一傳令致之。璥因疽發背死。誠一令金時敏。整軍數千。分隊守城。又以前郡守金大鳴。爲召募官。孫承善爲守城有司。許國柱,鄭惟敬爲伏兵將。河天瑞管粮餉。姜起龍治軍器。 出慶尙巡營錄 ○賊兵自固城。來屯泗川。將犯晉州。金誠一令軍官勇健者十餘人。渡江擊逐。賊乃退。又分兵進迫泗川城下。絶其樵汲。賊退還固城。又以前郡守金大鳴爲都召募官。與生員韓誡,鄭承勳。募得六百餘兵。與固城義兵將崔堈等合兵。或誘引。或設伏夜擊。未久賊衆潰向熊川,金海等地。大鳴等領軍。入陣于昌原,馬山浦。 出慶尙巡營錄 ○各道士林義檄。交馳 。自此國家命脈。稍有振起活潑之氣。○京畿監司權澄通書。平義智之來。實出於反氓之請兵。及其軍功還報秀吉之時。反氓每被抑下。因懷憤心。擊殺義智。 此時虛傳。類多如此。 反氓與倭。分爲二軍。不久當自潰散云。一。我國大將。只領百餘人於慕華館。與倭交戰。斬獲甚多。賊倭退北。由新門入。爭門相殺者亦多云。一。賊倭將渡臨津。金命元令公扼江而守。多中片箭。賊不得渡。賊求得二船。滿載其軍。中流覆沒。皆溺死云。○留京大賊一日。令殺人示威。自東大門至南大門。半餉之頃。橫屍盈路。降附之民。未及逃竄。血肉之慘。不可勝言。經日乃止。還嚴禁殺戮。掛榜各門云。男務農。各安其業。女養蠶。紡織爲事。又書示江原京畿云。大王已逃城中。中國今屬日本。故命使价要治各道國士及村民。服日本。猶服前代者。豈有異論乎。然莫散在。今郡縣官倉之米穀,玉帛,絲麻等好矣。且某牧主,某縣監,百姓男女。亦不去某處。而請事使价思旃。天正壬辰日。豐臣秀家行貞吉成等。寄兩道吏,戶,禮刑,工伯等。 凶怪之辭至於此。可謂萬世不可忘。두016三道舟師。追賊至加德前洋大捷。先是。慶尙右水使元均。聞賊連陷諸城。引舟師向加德。見賊船蔽海。遂退還。諸將亦稍稍散去。均盡沈戰船。欲登陸而避之。玉浦萬戶李雲龍不可。遂止之。均與雲龍等數船。退在露梁。賊兵跟追而至。雲龍請求救於全羅。卽以單舠馳赴。時。全羅左水使李舜臣,右水使李億祺。率舟師在左水營前洋待變。望卒呼報。有一小船。自瓦頭海馳來。急令候船問之。則曰。慶尙道玉浦萬戶李某也。賊兵充斥。諸鎭瓦解。右水伯元某。力不能支。退保露梁。凶兵追趕。已滿於泗川,南海之洋。願乞全師。勦擊先鋒。不然則嶺海已矣。禍不遠於湖南矣。惟將軍熟思之。舜臣等聞之。莫不憮然相顧。光陽縣監魚泳湛。時以諸將。在陣中。見諸將推托。奮臂大言曰。嶺南非王土耶。此倭非國賊耶。嶺海諸鎭。已盡陷沒。只有數船。來泊我境。彼賊匪茹。已在其後。我以一道完師。觀望在此。聞請援而恝視。見賊來而恬然。坐使嶺海之兵。今日盡沒。則明日之事。何以處之。不救人急。而坐以待賊。不幾於怯懦乎。將軍計之。諸將聞之。莫不疾視。舜臣不答。沈思過夜。翌曉舜臣。聚將士。召泳湛言曰。光陽以救嶺南爲可。我亦思之。亦且有理。但嶺海討賊。不必露梁而止。深遠水途。無人經試。此不可不慮。泳湛曰。此則我當之矣。願以我爲前鋒。舜臣喜曰。依光陽分付。卽豎將旗。鳴螺放炮。以泳湛爲先鋒。防踏龜船將申汝良爲斥候。順天府使權俊,加里浦僉使具思稷等爲中衛左右將。並李億祺軍船。發向露梁。與元均相會。先發至光洲之洋。則賊船五六艘。縱櫓退去。我軍追之。登陸而走。盡破其船。軍卒生氣。日暮回船。翌曉又向嶺海。至見乃梁。賊船蔽海而來。斥候將申汝良。已圍於賊。以扇麾軍。舜臣見海洋阻隘緩緩退却諸船。以次而出。李億祺已走柱島之外。防踏僉使李純信大呼曰。使道何棄我二船將耶。舜臣不答。賊兵見我退師。急櫓追之。至閑山大洋。舜臣令吹螺角。一時颭旗。吶喊回船。與賊相搏。李億祺促櫓繼至。許多諸船。俱發天地玄箭。銃聲動海。煙焰漲天。合戰未幾。敵船盡沒。燒溺死者不知其數。收斬百餘級。翌日泳湛。因爲先導。行過鎭海洋。至巨濟,唐項浦,珍島上船與南桃浦船。先往遇賊伏兵船二艘接戰。賊敗北下陸而走。焚燒其船。繼逢賊船二十五艘接戰。本月初五日。三道諸船。合擊勦滅。至戌時乃已。初六日。慶尙右水營戰船與全羅寶城船。合擊賊大船二艘。焚滅之。翌日。賊船自栗浦。發向日本。三道水兵。追及于加德前洋。賊兵見我船突進。回船逆戰。一捧螺響。銃筒俱發。矢石交下。薪火亂投。喊聲震海。煙火漲天。賊船破者百餘隻。燒溺死者無數。又收數百級。中有一大船設層樓。高可三四丈。可坐十餘人。外垂紅羅帳。中有金銀屛子。勢甚堅壯。未易撞破。乃賊將所乘船也。船中得金圓扇一柄。一面中央書曰。六月八日。秀吉着署。右邊書羽柴筑前守五字。左邊書鼉井流流守殿六字。疑是秀吉於筑前守處。符信之物。而所斬倭將。政是筑前守。且元均船數雖少。善突擊。舜臣舟形如龜。上蔽蓋板。遍揷鐵釘。尖銳難犯。且甚堅疾。利於赴戰。兼得魚泳湛指導如神。能成前後之功。還營啓聞。魚泳湛慶尙道咸安人。膽畧超世。慷慨異常。未出身已爲呂島萬戶。及第後常爲嶺海諸鎭幕下。海洋之淺深。島嶼之險易。樵汲之便。屯宿之所。莫不經畫於胸中。故舟師前後出入嶺海搜討之時。如履家庭。一不見窘迫急遽之患。大槩舟師之功。泳湛爲最。而只陞堂上。不得與於宣武勳。南邊人無不惜之。○京畿水原屯賊書示云。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原郡禮取可束。 文意險斷。不可錄。而此亦亂中之一事。故書之。○留京賊倭掘宣,靖兩陵 宣。成宗及貞顯王后陵。靖。中宗陵,此誠萬世不可忘此賊。○賊將平行長,義弘等渡臨津。申硈死之。金命元與李薲等潰走關西。初。義智等領十餘萬兵。殺到臨津。知江有備。藏兵山谷。日日示弱。硈見賊羣零星。率兵渡江。伏倭四起。喊殺連天。勢如風火。措手不及。或死于刃。或投于水。無一人脫出。硈亦溺于江。守江之兵。一時驚散前水使劉克良。以元帥別將在軍。詗知賊謀。請硈勿渡。硈詬罵老怯。驅迫渡江。亂斫之時。少不離次。力戰而死。元帥從事官洪鳳翔告元帥以觀光事。渡江亂逐之際。亦爲渰死。 可惜洪從事。隨羊入虎羣。人雖譏浪死。猶善望風奔。 ○避亂之人。各隨便近。嶺南左道。則入山之外。皆入嶺東。右道。則踰入全羅。湖西之人亦然。而京圻之人。盡入江華。牙山等地。 癸巳賊退後。故鄕無措生之路。因留所在。以致癸甲人相食之變。○金海,東萊等地人民皆附賊。殺掠人物。淫穢婦人。甚於倭賊。金海則如都要渚一村。沿江盛居。自亂初。附賊爲盜。或報其平日恩讎。有一書員入日本。磨鍊田稅。或捕蛇以當其稅米。倭性喜喫蛇故也。昌原之賊自稱全羅監司。鄕吏玄虎俊自稱陪吏。出送先文。 出本道巡營錄 ○分慶尙道。置左右巡察。以李聖任爲左巡察。時。賊兵充斥左右。號令不通。故有是命。○招諭使爲通諭事。海賊跳梁。攻陷我城池。屠戮我生靈。東西衝突。如入無人之境。而六十七邑之中。曾無一人倡義起兵以雪國恥。坐使一道。輸於賊手。宗社危於綴旒。正氣掃地。山河抱羞。凡有血氣。孰不痛憤。當職奉命到界。雪涕扼腕。誓不與此賊共戴一天。列邑奔潰之餘。兵力已屈。張空拳冒白刃。獨立慷慨爲如乎。側聞足下。奮起閭閻。招集義兵。殲賊艘於江中。馳義聲於一隅。聞之者莫不爲之增氣。先大夫可謂有後矣。勉卒此志。益張義旅。戮封豕於域內。拯生民於塗炭。上以報君父之讎。下以光忠孝之門。不亦快哉。當職雖駑劣。忠義根於天性。一死報國。敢後於人。糾合同志。激以義烈。願與足下輩。左提右挈。共成柱天浴日之功。足下以爲如何。生爲忠義之士。死作忠義之鬼。惟足下勉之。右下宜寧郭義士足下。○ 두017平義智陷松都。轉陷海西列邑。盡爲焚蕩。○ 두018朝廷至西京駐蹕。冊封光海君。頒八道敎書云。席基緖而忘危。旣値干戈之逼。簡元良而貳極。聿係臣民之望。位雖非安。亂豈忘慶。玆當播越之日。誕布告諭之章。眇予不明。遭家多難。二十五年祇畏。雖欲自盡乎吾心。億萬生靈仳離。奈此方來之民怨。幸玆麟趾之播詠。實賴燕翼之有貽。撫民縱愧乎其方。建儲尙念其當早。冊禮宜謹。漢臣之章奏徒勤。日月久稽。范鎭之鬚髮已換。但玆蠻獠之外侮。適乘邦家之內訌。侵鎬及方。列城之保障齊潰。剝床以膚。七廟之衣冠將遷。天步蒼黃。人心危惧。予何執讓之徒固。是宜定本之當遄。第二子光海君琿。天資英明。學問精敏。仁孝夙著。久屬億兆之望。謳歌思歸。可繼先王之祚。玆進封爲世子。因令撫軍監國。事雖擧於倉卒。計實定於前時。臣工莫謂予偶然。根本固不容遽爾。今來箕邑。始頒中外之書。昔在漢都。已受臣工之賀。關中沾小海之澤。道路望前星之輝。皇天尙佑乎祖宗。社稷豈安於偏壤。遊魂已褫。漢水之風濤向淸。官軍思奮。赤縣之壁壘垂廓。龍樓整問寢之禮。鶴襟復舊都之儀。嗟我臣民。諒予告意。願爲太子死。無貽一人羞。敷告用亶。爾公咸遭。於戱若涉大水。茫未知其津涯。弘濟艱難。用敬保於元子。 擇建賢嗣。以從人望。他日昇平。實由今日之擧也。 ○慶尙道永川進士鄭世雅。新寧奉事權應銖。河陽奉事申海。固城奉事崔堈。皆募兵討賊。世雅時年六十七。賊方據本城。世雅與座首柳夢瑞,生員曺希益等招集散軍。捕斬頗多。其後全城大捷。皆世雅等首事之力也。應銖初以水營軍官。率子弟奴僕。斬殺上道土賊。又伏兵要路。斬殺零賊。又募聚丁壯。或邀擊尾擊。未嘗畏避。累被掩襲。賴馬健獲全。招諭使以爲義兵大將。堈少而解文。晩中武科。有膽量。恥爲武夫干進請托之行。性又剛直。不能曲意循人。至是起兵。兵雖不多。而能得其心。臨戰以身先之。與鄭起龍,安信甲齊名。御衆之才過之。 出慶尙巡營錄두019 雲峯縣監爲馳報事。今五月二十四日子時到付。五月二十三日。在晉州成貼。慶尙招諭使秘密傳通內。當日昌原居黃奉贊奴沈香。現納本府使了。老戶長黃仲明五月二十二日成貼告目內。本府留鎭倭人二百餘名是沙餘良。常時閭里賊倭。或百餘名運運橫行。米布雜物。盡數持歸叱分不喩。今月二十二日。金海來倭言。內。當日入府客使九百餘人。全羅監司,御史,都事,察訪四行次稱號。其道出歸。亦府中留連爲旀。先文咸安,宜寧,三嘉,丹城,山陰,咸陽,雲峯,南原,任實,全州指向。次次傳通。同行次陪吏玄虎俊。馬頭李祿祥。預定當日陪行作計爲如乎。昨日下雨。今日發行是如爲旀。他倭或熊川之路。或金海之路。或百餘人五十餘人。連綿入府。或上京爲臥乎味。告目是置有亦。相考爲乎矣。賊之先聲。雖不可信。我國老吏。方在賊中。視賊所爲如是告目。賊之指向全州之計。似爲不虛。湖南將士。掃境。勤王內地。極爲可慮。次次傳通。防備措置。日新待變爲乎矣。本道巡察使。左右水使處。並只馳報向事傳通是齊。此亦中。咸安假將李享進告內。賊倭全羅監司稱號。已到咸安,宜寧,鼎津是如爲在如中。黃仲明告目果爲不虛。相考施行。右報巡察使。敎世子書。涉大水無津涯。方圖舟楫之攸濟。若顚木有㽕蘗。唯幸付托之得人。玆寄軍國之權。冀收興復之業。顧予涼德。叨守丕基。先陰雨而撤桑有戎。每戒於暮夜。凜朽索之御馬用畏。寧忽於民嵒。何意海島之醜夷。不念人獸之異性。始挾憾於上國。擬彎射天之弧。終嫁禍於我邦。敢鼓噬人之吻。蹂躙殆遍於黎庶。衝突遽及於京都。七廟烟消。不勝丘墟之嘆。三宮星散。同罹播越之艱。憤已極於神人。讎可忘於薪膽。是雖邦運之不幸。諒由寡昧而致然。輪臺之悔過已勤。民不見德。奉天之罪己徒切。言未動人。曷歸之怨方深。如臨之惧轉劇。念非主鬯承桃之重。莫副興邦之期。世子琿。歧嶷夙成。仁孝素聞。羣下愛戴。足贊中興之運。四方謳歌。咸曰。吾君之子。授禪之計久決。摠帥之命可稽。玆今琿。權攝國事。凡除拜官爵賞罰等事。便宜自斷。於戱回靈武之義。旗冀見乾坤再闢。置未央之壽酒。佇待父子重懽。各勵協戴之心。共底煕平之績。唯爾政府。曉諭中外。咸使聞知。故玆敎示。想宜知悉。○南原府使尹安性到恩津。移本府士子書云。府官爲倡義事。玄風居士子郭再祐。 本玄風人。今居宜寧妻鄕。 在賊倭全陷之地。只率村兵。再逐賊兵。使賊船。不得更渡洛江爲有臥乎所。其義聲高節。聞來不覺歎服遙拜爲置。本道段美俗之稱。冠於諸道爲乎矣。尙無擧義之人。極爲羞愧爲在果。似聞金綾城 益福時任本縣 欲與同志之人。謀擧義兵。將恢復王業是如爲臥乎所。足知有人於斯。萬一通議衣冠子弟之家。念我二百年休養之恩。成一道千萬感忠義之名爲在如中。榮加一身。澤及萬葉。青史功名。朗耀見聞。急速擧行。以盡臣民之道。○大軍赴京之後。湖南各官。盡括遺丁及品官校生八結煙戶等軍。以備城守。○京畿文臣禹聖傳。擧義兵討賊。○兵馬節度使爲知音事。節到付巡察使關內。今到忠淸監司關內。行在所道路遽塞。聲息不通。自募人啓本。陪持上京爲如乎。當日同人。持來備邊司關內節啓下。敎五月初九日江原監司書。傳聞入城之賊。足腫氣疲。夜則散處困睡云云。爲去乙。敢死士卒五十名。設賞召募。告天同盟。乘暗亂斫。次初八日入送。五月初八日。都檢察使李陽元書狀。使軍官柳廷彥潛入城底。窺覘賊勢。賊勢頓衰。晝則專以摽掠爲事。夜則散處困睡。不省我人之往來。臣京家奴。自賊中來言曰。臣家亦被倭賊摽掠。見賊形止。只持短劍。我人被擄相半散出作賊。有人發射。則解劍求生。氣勢窮蹇。似不足畏。卽與五十人。重賞約束。期於初十日入城亂斫。五月初十日。都元帥金命元書狀。賊徒慾氣。縱恣無忌。孤單出沒摽掠之輩。亦多爲我人所殺。人之視賊。皆欲射殪者。當初我國恐動虛聲。無不畏㥘。愚下之民。或有告哀偸生之計。而及據京城。凡百所爲無不駭愕。凡有血氣。莫不罹毒。我國向導者亦散去。其號囂而出入者。無不氣疲而足腫。無馬罵之勢。不爲送死之寇。前日恐惧者奮激。圖生者怨怒。咸思勦賊。謳吟思報。在京下賊之徒亦爲狙擊之計。五月初十日檢察使書。捕得賊中被擄人鄭仁等三人。皆言持鐵丸者。四五人中僅一人。丸數不過十五六。我人向導者居五分之一。羣倭分處閭閻。熟睡如平日。了無疑慮。曁朝洗面。方佩刀劍。將帥則日晏乃起。或十或廿爲屯。別無結陣待變之意。大槩賊徒旣得財貨之後。多掠牛馬。輸出於漢江。似有退兵之意。是如各各書狀啓下爲有昆。前此我國人民。枉聞倭賊之聲息。轉發恐怯。不戰自潰。在在皆極爲痛憤。今其賊勢如此。凡有義氣者。奮起勦捕事。各道各官。火迫知委云云。○前奉敎鄭經世 慶尙道尙州人 上招諭使啓曰。小醜稔猾夏之毒。羞辱已及於宗祊。匹夫有效死之心。規畫敢諗於星御。望襜帷而灑泣。托簡書而披誠。恭惟我國家垂休。實與古商,周比盛。神傳聖繼。十三代丕顯丕承。物阜民安。二百年旣庶旣富。軍簿不閑兵革。民業只知耕桑。那知伏島之凶酋。敢逞無邦之猾計。夷其君奪之社稷。稔惡已浮於窮寒。驅厥旅。夫我陵阿。不恭有同於獯密。恥厥兵之無言可執。責我邦以難受之辭。聲言牧馬于燕郊。冒頓之書辭太慢。謂當交質以德鎭。暴秦之恐喝無窮。人心咸怒其窮凶。天意豈容乎助逆。凡師曲則爲老。驟雨不應終朝。我王赫然命征。太山寧勞壓卵。是何國運當危。人謀不臧。奪以殷之時。築誰何之城。有何寸益於國。驅不敖之民。與必散之地。曾是尺童所羞。廟之失宜旣然。邊臣之犯律何甚。兵使擁營軍而逗撓。咫尺不救釜山。方伯避賊鋒而逡巡。喬英常傍湖境。下至州牧府使。延及郡守縣監。未嘗接刃交鋒。牙旗便曳於中野。平生佩符懷聖恩更忘於危時。司馬之法若行。此人之肉可食。遂使鳥道失守。糜爛嶺南生靈。鳳輦蒙塵。慘惔邠郊行色。腥煙薰染於鐘簴。冤鬼啾咈於荊蓁。言之只益痛心。古來寧有此事。 等。 太平餘息。委巷殘氓。田耕井鑿。莫非仁恩。四方欣被服聖化。草伏水宿。苟求存活。豈意遭逢亂離。家破且置莫憂。國辱何方可雪。不知兵非眞儒也。縱乏旋乾轉坤之雄鞱。惟降衷所同得焉。孰無忠君愛國之良性。斯切戴天之憤。遂作枕戈之謀。聚同志而運籌。收召散亡之卒。擇要害而設伏。邀擊劫鈔。凶徒。第此牧守敗遁之餘。正値民情渙散之極。旗鼓闕主。中軍無指南之人。紀律難嚴。臨陣有奔北之患。非無可建之長策。以爲莫大之深憂。竊念吾州之地形。實爲我國之天府。禮義行而民俗篤厚。有新羅一千年餘風。倉庫實而戶口繁滋。爲辰韓七十州都會。襟領大維之列鎭。控帶長江之上流。河北雖散而莫收。豈乏一人義士。睢陽苟棄而不守。是無千里江淮。商量今日之良圖。莫若此城之堅保。誠能擇良將而鎭撫。使之披義聲而周旋。簡精卒而守洛水之津。絶海道輸歸之漕途。檄旁郡而據龍湫之阨。塞踰嶺遁還之關防。邇連洛左之諸州。遙應湖南之未巨閫。合聲勢而長驅。士氣自倍。仗忠義而直進。衆情咸歸。縱來能越海而。求秀吉之頭。亦何難臨漢而臠仁義之肉。伏惟令公。忠信可行蠻貊。仁義所學聖賢。岳飛初受金牌。三軍慟如雷之哭。張浚復來河上。百姓動加額之懽。心膽證知於鬼神。旌旗係望於父老。顧惟吾黨之翹企。比諸他邦烏血誠。痛百年文物之靡遺。倡大義而思奮。念一時義氣之無托。領單兵而何歸。望名帥而難逢。抱寸心而自惜。至誠則人無不動。棨戟寧憚於來臨。有志者事必竟成。腥膻庶幾乎迅掃。幸憐曠野之匪兕。亟回原隰之維駰。於戱。凡玆環海生靈。孰非李氏赤子。一片葵藿誠悃。非緣食祿而不食祿有淺深。七尺草芥身驅。當看除賊未除賊而爲死生。未論垂名於竹帛。但當效命於干戈。東海只在眼前。事未成。則蹈之未晩。北辰實臨頭上。義當取。而生則不偸。大略如斯。餘言可旣。竢承顏色。敬敷心腸。○二十四日。李洸之師次溫陽。忠淸巡察使尹先覺。率防禦使李沃。兵使申益。先已駐兵于此。至是與兩南巡察使一時向京。郭嶸領軍過公州。轉向天安。○二十六日。大軍皆會振威坪。凡十三萬。旌旗蔽日。餽運百餘里。京湖避亂之人。誤恃驅羊之勢。或有還集者。○慶尙右水使元均。又請全羅舟師。討賊于嶺海。 見六月左水營營吏告目 ○前掌令鄭仁弘擧義兵討賊。仁弘慶尙道陜川人。初。官軍潰散。賊勢長驅。直指京城。大駕西巡。仁弘與前佐郞金沔,朴惺,郭趨及其門徒。共謀義擧。通文于列邑。士民聞者莫不思奮。以門下河渾,曺應仁,文景虎,權瀁等參佐。分定有司使。之聚兵。又以朴而章,文弘道任軍粮募辦。以僉使孫仁甲爲中衛將。屬所聚軍。仁甲戰死于草溪之沙幕。以縣令金浚民代之。未久而遞。厥後臨戰定將。埋伏襲擊。非一二計。而如開山之襲。彥安之捷。星峴,井野之圍。丹溪,檟田之功其尤。而恥於告捷。多不以報幕下。軍功最居人後。而其實。則嶺南擧義。仁弘爲首。金晬以三嘉,草溪,星州,高靈之軍屬焉。 出慶尙巡營錄 ○賊倭全羅監司稱號。殺奔宜寧之鼎津。郭再祐設疑兵擊却之。○全羅左右道士子等倡擧義旅。左道則拜前府使僉知高敬命爲大將。學諭柳彭老,學官梁大樸爲從事。正郞李大胤,正字崔尙重,楊士衡,楊希廸等爲募粮有司。右道則拜前府使金千鎰爲大將。 敬命光州人。前爲東萊府使。千鎰羅州人。前爲水原府使。 初。柳彭老聞京城失守。龍馭西巡。晝夜號泣。不安寢食。與同志人梁大樸,楊希廸往謀于敬命。倡起鄕兵。北首勤王。敬命喜其先獲。欣然從之。卽日移檄列邑。徵會秋城。約日建旗。本道倡義彭老等爲首。故湖南有三倡義之稱。○慶尙道高靈士人金應聖。聚軍千有餘名。屬于鄭仁弘。選銳從征。茂溪之戰。安彥之捷。星州之焚城及沙代,伽川之役。皆助焉。又擊洛江之賊。全船捕捉。多至五六隻。仁弘報于招諭使爲召募官。幕下所斬亦至三十餘級。 出慶尙巡營錄 ○慶尙左道。無監兵水使。號令久廢。道路梗塞。列邑之事。未得聞知。盈德縣監安璡馳報右巡察使云。左道列邑。盡爲賊窟。唯寧海府使韓孝純,龍宮縣監禹伏龍,禮安縣監申之悌。各守孤城云云。三邑距賊稍遠之故。非緣死守拒戰而然也。 出慶尙巡營錄 ○慶尙道前牧使金弘敏。擧義兵討賊。○ 初。平義智在忠州。請見李德馨。朝廷恨而未之許。後六月。義智到大同江邊又欲見。德馨挺身出城。船于江中相見而退。
六月初一日。折衝將軍行副護軍知製敎高敬命。馳告于道內列邑士庶等。玆者本道勤王之師。一潰於錦江返旆之日。再潰於列郡招諭之時。蓋緣控禦乖方。紀律蕩然。訛言屢騰。衆心驚疑。今雖收拾散亡之餘。而士氣摧沮。精銳銷愞。其何以應緩急之用。責桑楡之效乎。每念乘輿播越。官守之奔問久曠。宗社灰燼。王師之肅淸尙稽。興言及此。痛徹心膂。惟我本道。素稱士馬精强。聖祖荒山之捷。有再造三韓之功。先朝朗州 靈巖 之戰。有片帆不返之謠。至今赫赫照人耳目。于時賈勇先登。斬將褰旗者。豈非此道之人乎。況近歲以來。儒道大興。人皆勵志爲學。事君大義。其孰不講。獨至今日。義聲消薄。恇擾自潰。曾無一人出氣力。思與賊交鋒。而競爲全軀保妻子之計。捧頭鼠竄。惟恐或後。斯則本道之人。不唯深負國恩。而抑亦忝厥祖矣。今則賊勢大挫。王靈日張。此正大丈夫立功之會。而報君父之秋也。敬命章句迂儒。學昧鞱鈴。屬玆登壇。妄推爲將。恐不能收士卒已散之心。爲二三同志之羞。但人臣之義。當死於國難。而兼以師直爲壯。不在多寡。惟思張膽洒泣戎行。爲士卒先。庶幾少答主恩。今月十一日。是惟師期。凡我道內之人。父詔其子。兄勖其弟。糾合義旅。與之偕作。願勇決而從善。毋委迷而自誤。○初三日。三道之師次于水原。李洸陣禿城。本府之賊。聞大軍猝至。前二日已遁。合勢于龍仁之賊。○左義兵陣中回文。義兵來十一日發行。諸具旣備。而軍糧獨無出處。大將所已收衆議。近地各官。隨便借得。而凡食土地有餘積者。皆可任其多少。以助樵㸑之資。此乃徒中之望也。所得軍糧。半歸輸送之費。如人馬千里之債。皆出於此故也。如或精兵。或戰馬,卜馬中。隨其所有出扶。千萬幸甚。赴戰運糧將。進士朴天挺幼學楊希廸。在鄕運糧將正郞李大胤,正字崔尙重等。○賊兵自海西。轉向關西。扈從諸臣。收集散兵。守箕城。以金億秋等設伏于大同江禦之。○前佐郞金沔。擧義兵討賊。沔慶尙道高靈人。初聞大駕西巡。卽欲奔隨。鄭仁弘欲與沔擧義討賊。沔乃聚兵于高靈。聞賊沿江猝至縣境。引兵禦之。沔。以高靈殘縣不足以禦賊。遂馳赴居昌。居昌士子等已聚跡人 俗號山尺 若干。以屬沔。卽令抄發諸軍。以郭趍,文緯,尹景男,朴廷璠,柳中龍爲參謀。掌書記。朴惺募軍糧。四五日間。聚兵二千餘名。分遣二百餘名。守縣北牛峴,箱巖,木通,馬嶺等處。自引大軍出陣于高靈。聞賊船沿江流下。督兵邀擊。遂獲全船二隻。斬首八十餘級。 是役實朴廷琬所爲。詳見下廷琬傳。 所載之物。皆是內帑珍寶也。得一金紙障字。有光廟御諱。及祭服二領。赤舃二部。送于招諭使。知禮之賊將踰牛峴。伏兵將李亨戰死。沔以居昌。乃晉州以上一帶頭腦也。居昌不保。則十數餘邑。亦將難保。遂定將使守高靈。自將居昌之兵。以禦知禮之賊。以前府使徐禮元爲中衛將。萬戶黃應男爲副。襲擊知禮雄據之賊。大獲厮役。以裴楔不用命。不得盡殲。而餘衆夜遁。又與鄭仁弘約攻星州之賊。兩軍合勢圍之。賊自開寧來援。令裴楔遮截其路。而楔不赴。故諸軍見賊援大潰。沔遂還居昌。移陣于知禮。分遣伏兵。以遏金山之賊。使不得衝突居昌。監司以咸陽,安陰,山陰之兵屬焉。賊勢方熾。戰無虛日。監司令晉州牧使金時敏。爲之助防。一日賊又大至。過沙郞岩。 知禮地 沔躍馬揮劍。告時敏曰。國家待公以高秩者。要爲今日用也。有死而已。不可退也。時敏遂旋馬馳突。連射二賊。諸軍大呼崩之。賊乃退。自是金山,開寧之賊。相繼摽掠。自九月至十二月。無日不戰。將士未嘗解甲。或夜斫。或誘引。大戰十餘合。摧却三十餘度。其後陞爲合道義兵都大將。 出慶尙巡營錄○金,鄭兩將。繼郭而起。蔽▦江淮。保全餘邑。苟論其功。固不細矣。只恨沔沮抑朴廷琬。獲全船。斬首八十餘級之功。不救孫仁甲蛇院洞伏兵之擧。而反陷違衆敗軍之罪。誠恐不免積功搆捏之痕。 ○初五日。李洸使先鋒將白光彥。覘賊于龍仁。賊結陣于縣北北斗文小山。陣微兵殘。勢似孤弱。光彥還告曰。此零賊也。急擊勿失。時。光州牧使權慄。以防禦使中衛將在軍中。力言于洸曰。京城不遠。大賊當前。不可爭鋒於小敵。以致損折兵威也。洸不聽。卽以助防將李之時及先鋒守令等付光彥督戰。光彥等以爲虜在目中。肉薄挑戰。從卯至巳。賊兵藏伏不出。午時。我軍懈體。賊倭草伏膝行。揮劍齊發。殺入軍中。左斬右斫。死者不知其數。李之詩,白光彥,古阜郡守李允仁,咸悅縣監鄭淵等皆被害。大軍氣奪。是日有旨自西海。到龍仁陣中。還合慶尙左右巡察使。左監司李聖任。路塞未到故也。○ 두020初六日。三道之師潰於龍仁。是朝。李洸等漸次進兵。陣廣敎山。令軍朝食。炊煙纔起。賊騎突至。先來五賊。着金假面。騎白馬。持白旗揮劍直前。忠淸兵使申益。以先鋒在前。望風先潰。十萬將士。一時皆散。賊數騎。追趕十餘里而去。李洸等諸將。敎書,印信,節鉞,旗麾及軍器軍糧。倍數餽運之物。皆委棄。賊一炬燒之。是時。留京倭將二十餘名。各乘銀轎。盛列兵衛。皆着紅衣着帽。婦女騎馬。作雙而出。滿途前行。連日不止。我軍以爲京賊。聞大軍至。而退去也。厥後被擄人來言。京賊出來。藏兵于廣州。欲竢我軍。到陽川北浦。自南掩襲。迫逐于漢江。聞我軍敗走而止。方大軍潰還之時。前日京湖還集之人。多被踐傷。老弱奔遑。哭聲雷震。○全羅道義兵將行副護軍高敬命。馳檄于諸道守宰及士民軍人等。頃緣國運中否。島吏外狺。始效逆亮之渝盟。終逞勾吳之荐食。乘我不戒。擣虛長驅。謂天可欺。肆意直上。秉將鉞者徘徊歧路。累郡印者投竄林幽。以賊虜遺君親。是可忍也。使至尊憂社稷。於汝安乎。何圖百年休養之生靈。曾無一介義氣之男子。孤軍深入。女眞本不知兵。中行未笞。大漢自是無策。長江。遽失其天塹。凶鋒。已迫於神京。南朝無人之譏。誠可痛矣。北軍飛渡之語。不幸近之。肆我聖上。以太王去邠之心。爲明皇幸蜀之擧蓋亦出於宗社之至計。玆不憚於方岳之暫勞。鞏洛驚塵。玉色屢形於深軫。岷峨危棧。翠華遠涉於修程。天生李晟。肅淸。正賴於元老。詔草陸贄。哀痛。又下於聖朝。凡有血氣而含生。孰不憤惋而欲死。奈何人謀不善。國步斯頻。奉天之駕未回。相州之師已潰。蠢玆蜂蠆之醜。尙稽鯨鯢之誅。假息城闉。回翔何異於幕燕。竊據畿輔。跳躑有同於檻猿。雖天兵掃蕩之有時。亦凶徒逬逸之難期。敬命丹心晩節。白首腐儒。聞半夜之鷄。未堪多難。擊中流之楫。自許孤忠。徒懷犬馬戀主之誠。不量蚊蝱負山之力。玆乃糾合義旅。直指京都。奮袂登壇。洒泣誓衆。批熊拉豹之士。雷厲風飛。超乘跳▦之徒。雲合雨集。蓋非迫而後應。强之使趍。惟臣子忠義之心。同出至性。在危急存亡之日。敢愛微軀。兵以義名。初不係於職守。師由直壯。非所論於脆堅。大小不謀而同辭。遠近聞風而齊奮。咨我列郡守宰。諸路士民。忠豈忘君。義當死國。或藉以器仗。或濟以糗糧。或躍馬先驅於戎行。或釋耒奮起於農畝。量力可及。惟義之歸。有能捍王于艱。竊願與子偕作。緬惟行宮。逖矣西土。廟謨行且有定。王業夫豈偏安。善敗不亡。福德方臨於吳分。殷憂以啓。謳吟益思於漢家。豪俊匡時。不作新亭之對泣。父老徯后。佇見舊都之回鑾。想宜出氣力以先登。是用敷心腹而誕告。 出正氣錄 全羅道義兵將行副護軍高敬命。謹馳告于濟州節制使楊令公 時楊大樹爲本州牧 麾下。伏以島夷構孼。乘輿蒙塵。使至尊而獨憂。爭懷保妻子之計。窺左足而先應。孰有衛社稷之心。興元之駕未回。相州之師已潰。迅掃伊洛。尙稽恢復之期。委棄兵糧。反藉寇賊之手。幸天意之未絶。猶國事之可爲。敬命爰擧義旗。擬淸妖孼。聞風影附。率多荊楚奇材。執銳先登。亦有燕趙劍客。第恨步卒之無足。難望策馬而刺良。緬惟海東之耽羅。無異中華之冀北。超騰澗谷。不唯射獵之是資。馳逐戎行。抑亦死生之堪托。倘蒙海舟之滿載。庶見軍容之大張。某官深荷主恩。專制海域。執書以泣。應動一方之風聲。奮臂而呼。豈無十室之忠信。如有壯士之願赴。更仰常情之勿拘。 出正氣錄。高從厚代製。 ○全羅道義兵大將張下士,前縣令高從厚,權知成均館學諭柳彭老等。謹再拜通文于忠淸,京畿,黃海,平安四道列邑守宰及鄕校堂長有司。竊以島夷不恭。乘輿遠狩。七廟灰燼。萬姓塗炭。此誠古今所未有之變。而忠臣義士捐軀報國之秋也。然而方鎭重臣。觀望逡巡。徵兵之敎。非止一再。而未有一人北首死敵者。今日士大夫。可謂負朝廷矣。竊惟湖南。素稱兵精。而勤王之師。纔到錦江。都城失守。訛言遠播。主將未暇。博詢衆議。而遽爾傳令罷陣。十萬之衆。無故空還。一道人心洶洶。恰如狂瀾橫潰。及其再度調兵。而下民至愚。不從其令。漆室之憂。實有所不忍勝言者。幸賴社稷之福。祖宗之靈。潰卒日集。軍聲大振。庶幾肅淸宮禁。奉迎鑾輅。而人謀不臧。天禍未悔。零賊纔見。大軍又潰。委棄兵糧。反藉寇賊。嗚呼。我朝列聖數百年涵養之餘。豈無一介敵愾之臣乎。公論在下。古人已稱其不幸。草萊倡義。亦知計非得已。君父在難。遑恤其他。重念嶺南兩湖。寔爲我東根柢。而嶺南則義兵雖起。而隔絶賊藪。未易直至京邑。以勤王室。湖西千里之地。又豈無義氣男子。㥘於殺掠之餘威。想亦自救之不暇。今日中外所恃。其不在於湖南一道乎。肆我幕府出萬死之計。鼓一方之衆。民心思漢。烈士雲集。步騎之多。已至五萬二千。方將長驅北路。以掃妖孼。而千里運糧。私力難辦。如非好義諸君子合力相扶。則非常之大功。何能盡出於一人之手乎。今日域中。莫非王土。兩湖之兵。足以興復。伏願諸公。共奮殉國之志。勉盡指囷之義。各出米粟以助軍食。則能言距楊墨者。是亦聖人之徒也。且念山谿險夷。道路迂直。苟不籍鄕兵而指導。亦難免倉卒之艱虞。召募土人以張吾軍。不但廟社深羞。得以一洒。而父子兄弟之死於鋒鏑者。亦得瞑目於九泉之下矣。今日之事。雖愚夫愚婦。亦皆痛心疾首。況列邑守宰。咸受國恩。豈忍坐視秦瘠。必有投袂而起者矣。語曰。食人之食。死人之事。如有聞風慷慨。領兵來赴者。願歃盤血。共從王事。或祗以糗粮資械。輸送軍前。是亦一助。豈不美哉。海西關西雖曰。道路不通。各募可信之人。從間道而出。次次相傳。毋滯一刻。則遠近聞之。或將恃而不恐矣。通文到日。列邑鄕校堂長有司。各謄一本。傳諭境內士衆。使之無不通知事。 出正氣錄○高敬命,金千鎰。以梁山璹郭玄奉出師表。由西海送行朝。時賊兵充斥五六道。而京畿,黃海尤甚。故西路絶塞。至是始通水路。○各處之賊。以我國降附人。分定焚蕩列邑之守。使之句管一境之事。如朴茂金之金海。僧贊煕之密陽之類也。贊煕入城。誘聚軍民。朴晉密捕誅之。茂金其後。逃出蒙宥。○倭賊自昌寧,玄風至金山。開一條大路。充斥上下。其間星州。倉實民殷。賊以重兵屯據。而距玄風稍遠。茂溪一津。在兩間。最爲要害。賊乃屯據津西山上。以通水陸之路。以此江左右道路阻塞。蟻子不通。鄭仁弘謂孫仁甲曰。茂溪之賊。在玄,風星州間。往來相援。必先去此賊。把截江路。而後星州可復。仁甲然之。遂推仁弘爲軍帥。去月二十七日行兵。聞草溪告急。馳赴之賊騎百餘。焚掠閭舍。望見軍至。遁向江路。追趕不及。二十九日。屯兵高靈。徵居昌兵。約與共擊茂溪。金沔以兵械未完。遲五六日不知。仁弘曰。兵多糧少。不可引日。決意進兵。仁甲請先往。相視茂溪形勢。仁弘許之。仁甲卽與數人密探回來。遂定三路進軍之計。高靈領兵將金應成。星州起軍將李承等來會。本月初四日。乘夜進兵。軍不習戰。衆情疑惧。左突擊曺應亨。率軍踰嶺。軍卒虛驚自潰。大將一陣不動。因此稍定還集。而夜斫焚巢之計不成。五日黎明。仁弘令右先鋒韓汝澤,左先鋒河宗海。引兵由右嶺。直두021 茂溪驛。高靈代將鄭尙禮。由左嶺大路而進。又使前郡守李彥誠,成定國。領星州軍。埋伏於安彥驛路。以截星州後援之賊。鄭彥忠埋伏於老多村。以截下江之賊。仁弘與仁甲。率中衛。直擣倭幕。賊以所掠財寶。積滿茂溪驛舍。一炬燒之。奪其牛馬。韓汝澤,河宗海奮身力戰。倭將建大旗出戰。見我軍盛銳。走入幕中。諸軍乘勝。四面薄戰。燒其屯糧外幕。進退齊射。賊勢甚蹙。以草席苫柴。遮蔽自衛。死者甚多。初放鐵丸。從寅至巳。炮聲斷絶。只有哭聲。我軍進逼。將擧火燒盡。餘賊走入江。引船中流。不意繼援之賊數百。自玄風遽至津頭。時起事之初。弓矢未優。我軍曉夜進兵。皆未食飽。力戰疲乏之餘。忽逢生力之鋒。矢且已盡。不敢强戰。而退。幕中之賊。只有六七追來。未及五里而還。後數日。陜軍捕避擄人供曰。幕中之賊。百四十餘名。死者過半。餘皆傷箭。一屯之賊。幾盡掃蕩於此戰。而未及擧火而退。由是賊倭添兵固守。益廣屯幕云。仁甲自加利縣。還陣高靈。仁弘與河渾,權瀁,李承,金應成等由山上中路。還陣檟林。俄而合陣于梅村。馳報軍功。時。金沔領居昌兵始來。頗以獨擧茂溪爲不快。時。軍卒不閑軍法。自戰場。各還其家。久不至。只有數百跟隨。仁甲憂之曰。軍卒不集。惟先生敎之。遂分檄召聚。數日畢集。渙散之餘。人心不固。故不敢行罰。只敦諭厲戒而已。 出慶尙巡營錄 ○倭船十八艘。自雙山驛 在玄風北十五里 上來。自稱政丞安國寺行次。欲探伽倻山。乃前日稱全羅監司。在昌原發先文者也。至鼎津爲郭再祐所却退。由靈山,昌寧將渡歧江。因稱全羅監司向湖南。又送先文迎待云。草溪,宜寧等士民恐惧,或竄山不出。愚者或有迎候之語。郭再祐又馳到賊頭。引出士民。諭以義理。發帑餉士。嚴兵設備。賊見郭兵部伍嚴整。惧曰。此必鼎津紅衣將軍。無復可渡。退由雙山。向星州。 出慶尙巡營錄○安國寺。見姜沆啓中。 ○以朴晉爲慶尙左兵使。時。晉從金睟勤王之師。行到溫陽。受命還下。到本道。以泗川,河東,昆陽,晉州賊勢方熾之。故未得渡江。金誠一在右道移文曰。將軍恭膺褒賞之命。杖鉞臨邊。威聲已著。一道恃如干城。但左路阻絶。無以用武。見今晉州將受兵。勢甚危急。當職手下。雖有千兵。白髮書生。不閑軍旅。豈能濟事。將軍若單騎臨此。則願以義兵悉付麾下。計料左右兵使。內外相應。討泗川零賊。全晉州巨鎭。以保內地。在將軍一擧足之間。勿以左右道異責爲辭。以酬從前忘身殉國之志。 出慶尙巡營錄두022十五日。賊兵陷平壤。朝廷向義州。先數日。賊兵逼大同江。守兵皆潰。十一日。車駕幸肅川。遣李德馨詣遼東告急。請救。到寧邊。分遣中殿于江界。臨海,順和君于咸慶道。命世子。奉廟社主。送江原道。車駕至定州。聞箕城已陷。馳咨遼東。請內附。因到義州。從官追及者只有數十人。時。上國地方。訛言惹起。至云。朝鮮引倭嚮導。傳徹京師。兵部遣差官黃應陽等來覘實狀。두023上接見于龍灣館 。義州客舍談話間。應陽見賊僧玄蘇等在平壤。遺本國禮曹書。拊膺瀉淚曰。爲中朝。替被兵禍。而義聲未暴。反受此惡名。天下寧有是冤。因回報事情甚悉。兵部力奏請救。時。謝恩使申點在京。哭訴兵禮部各衙門。繼奏告急。中朝令副摠兵祖承訓。遊擊將史儒等。領遼兵三千過江。 出攷事 ○發遣宗室湖城監于兩湖。徵起義旅'湖城到界。發忠義內奴爲兵。自募勤王者亦許。○左義兵將高敬命進陣全州。召集義徒。因移關本道列邑云。大將爲馳援事。國家之事至於此極。今日之望。唯在義兵之擧。而召募之數。不滿數百。必于慷慨之志。堂堂難犯爲乎喩良置。聲勢不張。非官軍助力。則似非萬全之計是置。同助戰軍。勿限多少。只擇精銳。前日落後之人。極力召募。諭以忠義。罔晝夜馳援事。○全羅監司李洸與金睟奔還全州。睟卽向咸陽。因到居昌。時金誠一亦駐本縣。○星州留屯之賊。付書四門云。奉命國。○ 두024賊將淸正過江原。殺到鐵嶺。鐵嶺以前。人無孑遺。咸慶體察使金貴榮。監司柳永立。率南兵使李榮。北兵使韓克諴。盡聚道內壯弱男丁五萬餘名。把守鐵嶺。先鋒之賊連日交戰。敗衄而退。淸正引大軍繼至。立斬前鋒將。乃令曰。一鼓蟻附。敢後者死。卽自下馬。揮劍督戰。賊兵敢死先登。勢如風火震雷。我軍大潰。金貴榮等僅以身免。走向六鎭。淸正克鐵嶺。入咸慶道。焚蕩作賊。殺掠之慘。倍편001。他道○全羅兵使崔遠發兵二萬餘名。與本道右義兵將金千鎰兵二千。赴京勤王。○都元帥傳八道檄文云云。興師直爲壯。方恢討賊之謨。急病義之先。敢緩勤王之擧。凡我同志。各肩一心。惟我國家。聖繼神承。重煕累洽。浹仁澤於黎庶。先陰雨而綢繆。數千里玉燭均調。二百年金甌無缺。將期內寧而外安。反致文恬而武嬉。蠢玆海島中黠夷。實是天地間醜種。始挾憾於上國。欲彎射天之弧。終嫁禍於我邦。敢鼓噬人之吻。吠堯之犬。謂秦無人。夕烽纔徹於漢宮。妖氛已纏於商嶺。長江失險。諒由師律之不嚴。仙仗蒙塵。足見廟算之非吉。廟社灰燼。朝市變遷。茶毒遍及於閭閻。淫穢彰聞於遠邇。神人之憤已極。君父之讎可忘。尤可痛者。列城土崩。唯知開門而迎拜。群將膽破。孰能賈勇而先登。失我固守之心。助彼長驅之勢。使柱屬而及見。奚待舊知。如眞卿之復生。當作何狀。況今彼賊。猖狂驕惰。浮寄孤懸。力已疲於戰攻。勢必難久。欲惟在於摽掠。志亦可知。思漢者競效謳吟。附賊者亦多潰散。已爲送死之寇。莫保偸生之謀。歲星守箕。知福德之有兆。皇天祚宋。詎恢復之無期。今我濫承推轂之恩。專委除凶之責。以兼諸道都巡察使。領兵三千。本月初十日。拜辭行在所。直指京城。洛下超乘之士。半在褊裨。關西蹶將之才。盡屬部伍。三軍之氣漸振。萬姓之心稍蘇。此誠一國臣子。協心戮力。忘身殉國之秋也。惟各道觀察使節度使等。或專屛翰之權。或授閫鉞之寄。提重兵於一道。寧忘捍衛之勤。望美人於西方。想切洒泣之痛。宜率貔貅之旅。共掃蛇豕之群。首尾夾攻。迭爲猗角之勢。東西並進。用作唇齒之援。穴蟻可逃。鼎魚將爛。裂裳裹足。奚憚千里之勞。被髮纓冠。當急同室之救。各酬不世之遇。懋建非常之勳。勖哉無違。時乎難得云云。時。金命元率諸將。收散兵。禦賊于順安。○遼東都指揮使司。爲倭變事。准分守道。咨蒙撫院。逅見搪報。倭王關白。已被彼國人刺殺。因傳咨本司。煩爲朝鮮國王。乘會人心渙散。督率官曹。勉圖恢復。須至咨者。咨下禮曹。吉爲琉球人所刺殺。 此皆虛傳 平壤馬戰時。行長,義智,凋信爲將云云。○左水營營吏告目。水使去五月二十九日。發營。直到南海境露梁。慶尙右水使相逢。同日泗川船滄倭人四百餘名。登山結陣。立白幟。賊船如樓閣者十三隻。終日接戰。盡破船隻。逢箭死倭。不知其數。斬一級。今月初二日。唐浦船滄倭人三百餘名。入浦焚湯。據險放炮。倭船九隻。大如板屋。其中一大船。斗起層樓。樓上倭將。堅坐不動。逢箭墜落斬之。又斬九級。盡破其船。逢箭死者亦多。初五日固城。唐項浦倭大船。多數潛泊。直向同處。本道右水使繼援馳到。與之偕行。至其浦。倭大船十二隻。小船二十二隻。分泊海洋。一大船。斗起層樓。樓上倭將。堅坐不動。中矢墜落又斬之。其船所得分軍件記七軸。倭數五千餘名。各其名下。血染着▦。必是歃血同盟。盡破其船。斬四十三級。初八日巨。濟地栗浦前洋倭大船六隻追捕。又斬三十七級。凡斬八十九級。本道右水使及慶尙右水使。幷斬二百餘級。加德天城沒雲臺等處。連二日。備細搜討。益無賊蹤。初十日還營時方啓聞。○十七日孫仁甲。設伏于蛇院洞。 在星州南二十五里 不利而退。朴應星與勇士張浩。赴敵而死。初。星州。玄風之賊。沿江絡繹。廣設木柵。運卜駄流下。仁甲曰。蛇院洞安彥等處。可合設伏。遂選射軍數百。乘暮而發。請援于金沔。金沔陣下將士多不肯。沔使人止之。仁甲不聽。埋伏于蛇洞之路。是日。賊三百餘名。自星州運卜流下。仁甲約曰。待主將放炮而發。遊擊將朴應星違約突出。賊衆盛銳。我軍敗北。應星等力戰死之。應星首先應募。勇敢力戰。常以死自許。不幸輕敵而死。一軍惜之。是擧也。仁甲以埋伏處多。而射軍少。請助於沔而沔不援。以致僨事。頗有不足之意。十九日。沔領軍還居昌。時。招諭使金誠一在居昌。以金山。知禮賊勢猖獗。將有闌入居昌之患。傳令陜川高靈軍來禦牛馬峴。仁甲聞令。卽治行裝。仁弘曰。金山之賊雖急。茂溪之賊。亦不可忽。今若撤軍移彼。則高靈陜川。將不免賊窟。不如往探金公行止。彼若引還。則我不可動。時。持招諭使傳令者。自金山陣中來出示金沔答曰。居昌縣監文字云云。孫仁甲。違衆議。設伏敗軍。賊必衝突。勢難引還。仁甲大怒曰。是欲殺我也。擁兵不救歸咎於我。是果君子意耶。渠旣不往。吾不可不從招諭之令。卽引兵。行到勸賓驛秣馬。金沔領兵馳過。仁甲益疑之。適招諭傳令又到。令勿來。仁甲遂還。仁弘獨往見誠一而還。沔往居昌。後不再還。由是鄭,金二兵。分爲兩岐。沔鎭居昌。以禦牛馬峴。仁弘鎭高靈。以禦星州。茂溪之賊。全致遠,李大期陣草溪。郭再祐陣宜寧。江右一帶。賴以保全。 出慶尙巡營錄 ○洛江賊船。自上流下。二船致沒。一船縱櫓下去。郭再祐全船捕獲。斬二十七級。所載皆宮中寶物。太祖所着靴亦有之。卽傳送于招諭使。 出慶尙巡營錄 ○星州主簿裵楔爲本州假將。募兵數百。設伏遮截。斬馘頗多。褒陞陜川郡守。其父前郡守德文。亦捕斬賊僧贊煕。賞職判事。時贊煕附入星賊。僞稱判官。發帑誘民 。出慶尙巡營錄두025郭再祐與賊倭安國寺。自鼎津隔江相距。賊不得渡。沿江上去。再祐亦相望追趕。及至星州安彥驛路。率精兵。竊發交戰。彼衆我寡僅獲數級而退。○郭再祐聞金睟還道。大痛曰。當初賊來少無防禦之計。及至勤王。不知死國之義。謂我道無人。敢擧顏再來。吾當移兵先擊之。招諭使金誠一峻責乃止。遂移檄于金睟曰。痛矣哉。使。我一道潰散。使我京師陷沒。使我聖上播遷。使我一國生靈。肝腦塗地者皆汝之爲也。汝之罪惡貫盈。而汝不自知。則是愚人也。汝果愚人乎。汝非愚人也。釀成禍亂。至於此極。禿天下之兔。不足以盡記。汝罪。罄,天下之竹。不足以盡書汝惡。人皆以刻期築城。虐民茶毒。爲汝之罪。節制乖方。使賊闌入。爲汝之罪。是不知者之言也。內地築城。雖失人心。而意在於禦賊。則非汝之罪。節制顚倒。雖敗軍機。而才短於應變。則亦非汝之罪也。以此罪汝。何以服汝之心乎。汝罪有一曰。迎倭。何謂迎倭。汝抄一道精兵勇士五六百名。以爲帶率東萊之陷。先走密陽。密陽之敗。又遁伽倻。賊過尙州。退竄居昌。一未嘗勸起將士。使之擊賊。遂令倭賊。如入無人之境。卒陷京師於一旬之內。自知其身無所容。托以勤王。逃踰雲峯。人可欺乎。天可誣乎。汝罪有二曰。喜敗。何謂喜敗。老怯曺大坤。固不足責。然以一道元帥。旣不救金海之陷。未及見倭。先棄主鎭。退陣鼎津。鼎津距倭所在。幾百餘里。而虛驚潰散。竄入晦山書院。遂使列陣各邑。望風奔潰。則大坤之罪不可不誅。而汝不梟首以警人心。汝果不知棄城敗軍之律乎。汝罪有三曰。忘恩。何謂忘恩。聞汝祖先。十世朱紱。七代銀章。祿旣厚矣。寵亦隆矣。義當與國同休戚。共死生。苟能奮忠義之氣。發慷慨之心。身先士卒。有死之心。則凡我嶺南二百餘年培養之士。孰不忘身效死。以雪國恥乎。汝乃喜君父之遷。甘京都之陷。汝果不知急君父之難者乎。汝罪有四曰。不孝。何謂不孝。聞汝父雖不幸早世。眞慷慨忠義之士。如使汝父違今之變。必奬義兵。以復國讎。入地英靈。想必冥冥之中。痛汝之所爲。憤汝之不軌曰。豈意無君忘親。出於吾兒乎。汝罪有五曰。欺世。何謂欺世。汝之方仕朝廷也。朝廷目之以剛果耿直。挼節嶺南也。嶺南稱之以聰明才藝。以剛果耿直聰明才藝之人。誠有折衝禦侮之心。則據險守固。以遏長驅。易如轉環。而袖手傍觀。曾莫能畫一策。設一謀。任倭之屠戮。則前日之剛果才藝。餌好爵也。今日之若愚若怯。欲何爲也。汝罪有六曰。無恥。何謂無恥。汝棄嶺南於倭賊。踰雲峰入全羅。托跡於勤王之師。師到龍仁。見倭六名。棄軍糧。投軍器。失金貫子而走。云。是預去金貫子。而渾於軍中。使賊莫知也。偸生之心平日所定。苟活之謀無所不至矣。汝罪有七曰。忌成。何諸忌成。汝在道內。汝無討賊之心。故軍心沮喪。莫先赴敵。幸賴招諭使激發忠誠。鼓動義氣。使義兵四起。醜類授首。人心稍合。聲勢自張。掃淸區域。奉還鑾輿。指日可待。而汝乃忘羞忍恥。擧顏再來。出號令。發節制。使義兵有渙散之心。使招諭使敗垂成之功。則前惡旣往。今罪罔赦。嗚呼。北天遼邈。道路阻絶。王法不行。汝首猶全。假氣遊魂。雖視息於天壤。汝實無頭之屍也。汝若少知臣子之分。則使汝軍官。斬汝之頭。以謝天下後世。如其不然。我將斬汝頭。以洩神人之憤。汝其知哉 。出慶尙巡營錄○當初郭再祐起事之時。軍威日盛。殺賊甚多。右兵使曺大坤。忌其成功。置疑於啓辭。監金睟亦做不測之言於啓中。至是再祐。亦枚擧前檄。上疏曰。慶尙道宜寧幼學臣郭再祐。誠惶誠恐。頓首頓首。謹百拜上言于主上殿下。伏聞京師陷沒。車駕播遷。北望摧心。不勝痛哭。倭賊之來。武夫健將。莫不望風奔潰。非兵革之不堅利也。非城池之不高深也。只由於人心離散。而有土崩之患也。夫使人心離者乃金睟也。金睟再爲此道監司。發政甚於猛虎。聖澤壅而不下。土崩之形。已見於無事之前。及其寇來。身先退竄。使一道守將。一未交兵相戰。開城門納大賊。猶恐或後。若喜夫倭之滅我國者然。金睟之罪。雖擢髮而誅之。猶不足以厭人心。故臣移檄于金睟云。痛矣哉云云。汝其知哉。人或以言道主之過。爲咎。當平居無事之日。則固不當非其道主。如此急難危亡之際。若皆含默。則是徒知有道主。而不知有殿下也。使慶尙一道之人。莫非殿下之臣。則安忍金睟之罪。負殿下於垂亡之時乎。宋之高宗。不聽胡銓之疏。故爲天下後世之恨。如蒙殿下採納蒭蕘之言。則中興之功。可立而成也。宗社幸甚。臣民幸甚。臣誠駑鈍。屛跡江湖。今遇賊變。宗社危亡。自念祖先三世朝仕。神謀秘計。雖不及於子房。而復讎之心。臣誠有之。故出萬死之計。四月二十二日。募起而防倭寇。幸賴殿下威靈。以至于今日。誓心戮力死。而後已。區區寸忱。萬萬無他。伏願恕其狂譖。而察其愚衷焉 。出慶尙巡營錄 ○宜寧義兵將郭再祐。播告一道義兵諸君子。金睟乃亡國之一大賊也。以春秋之義論之。則人人皆得以誅之。論者或以道主之過。猶不可言。況欲斬首云乎哉。是徒知有道主。而不知有君父也。迎賊入京。使君父播遷者。謂之道主可乎。袖手旁觀。喜國之滅者謂之臣子可乎。使一道之人。皆爲金睟之臣。則不可以言金睟之罪。斬金睟之頭。一道之人無非主上殿下之臣。則亡國之賊。人皆可誅。喜敗之奸。人皆可斬。而說者或以爲斬金睟。不宜於事體。復國讎討國賊。斯所謂事體也。金睟滅事體久矣。事體之宜不宜。固不可論。而先斬奸人使無班師之詔。然後奉還鑾輿。建中興之功。則大有宜於事體也。伏願義兵諸君子。詳覽檄文。領率軍人會于金睟所在處。斬其首。獻于行在所。則功倍於納秀吉之首。義士諒之。或守令。不念宗國之將亡。君父之大義。傅會賊睟。使其邑人。不能擧義者。與睟同誅之。 出慶尙巡營錄 ○時金睟自居昌移駐山陰。忽見右檄。不勝憤駭。金景謹又馳告曰。再祐欲害令公。領大軍來。宜速避之。睟卽日夜半。馳到咸陽。令郡守守城。戒嚴列烽燧候望。且謂將佐曰。再祐之來。應戰防禦。勿爲恐怯。因令軍官金景訥。傳檄于再祐曰。檄逆賊郭再祐。再祐乎。汝知汝之爲逆賊耶。假托擧義。陰謀不軌。兇謀敗露。遺臭億載之下者。此非董卓亂賊耶。記曰。刑不上大夫。又曰無專殺大夫云。則秩崇位高之人。雖犯當死之律。以人主生殺之權。不輕加之者。所以待重臣之道也。本道巡察使。曾經六卿。再按玉節。況陞受一道都巡察使之任。設使巡察使身負大罪。自上當問。非朝廷所可處置。況本道之人。其可以法加之耶。汝賊之乘亂嘯聚。數罪傳檄者。不過假托擧義。陰謀不軌。兇謀敗露。預爲自全之計也。厥今賊勢鴟張。已陷京都。鑾輿播越。廟社丘墟。少有慷慨之志者。縱非食祿之人。所當枕戈敵愾以雪國恥。而況本道之得免兵火之邑。洛水以東。則未嘗知其幾陷與否。近處州縣。只餘七八零賊蜂屯。方據固城,星州,金山。又陷錦山。將陷居昌。餘存七八之邑。比如將死之人。氣息奄奄。藥餌不下。呼吸不通。血色只在於唇吻。生道十分之一。汝賊之心。苟出乎義氣所激。則當與巡察使,招諭使金松庵,鄭來嵒兩先生。戮力討賊之不暇。而唯以反逆爲心。欲先除一道之大將。數罪傳檄。使不得專意征謀。餘存七八之邑。將見豺虎之橫行。娣妹妻妾。盡被擄掠。父子兄弟。皆爲魚肉。有父母妻子者。孰不欲臠汝之身啗汝之肉乎。汝賊之敢爲此擧。前後狼狽。進退惟谷。而不得已之事也。何者。汝賊擧兵之初。於其設心。以爲當國家空虛之時。多聚無賴之徒。結以私恩。爲我心腹。摽掠零賊。大振軍聲。不幸而事定。則不失爲一代之元勳。若幸而國亡。則亦可成刱立之大功。包藏禍心。假托義兵。竊取草溪之官穀。攘奪晉州之田稅。公然白日。肆行盜賊之事。汝黨鄭大成被誅之時。巡察使疑汝賊無將之心。盤問幕下。倘靡安世煕,金景訥兩人之力陳非賊。則汝之頭足。曾已異處矣。而汝賊之魂。亦必與卓。進悔於地下矣。事變未出之前。巡察不過爲一道之方伯。方伯之所率。不過五六人。節制不及於兵水使。事變旣出之後。聞釜山東萊之陷。自晉州馳到密陽。密陽,淸道等五六官。連陷於二三日之內。賊犯星州。則馳到高靈。賊向金山。則馳向知禮。路過星州伽川里。駐馬村邊。招致儒生等四五人。諭以擧義起兵之意。不入伽倻。直到知禮。始受都巡察使之任。而所率亦不過幕下之人而已。招致敗軍逃走之李惟儉。斬首竿之。請罪不救。金海之曺大坤。白衣從軍。而督戰金山。斬首數百餘級。定將列邑。多致俘馘。皆由巡察使節制。今者賊已踰嶺。京師旣陷。則領軍勤王之意。馳啓于行在所。僅率千餘名。行到雲峰。因招諭使。聞全羅巡察之自公州還,下全州。未及調兵。且從招諭使之力止。還駐安陰。一見急急來援之有旨。垂泣誓心。獨領百人。進止水原。路遇零賊。斬殺甚多。賊乃退去。至於翌日。賊衆突陣。兩湖巡察。皆已奔北。而本道巡察使幕下將士。已令赴戰。而只有數三人。畧無動色。至拔佩劍。欲斬退將。獨殿軍後。全師而還。此非忠憤之奮發耶。汝賊雖欲殺害。恣行胷臆。朝廷命令。尙行於八方。大將命令。亦行於一道。一道八方之人。其皆俯首聽命於汝賊之手下。而恝視巡察之被害乎。劇賊衝突之初。連陷巨鎭。焚蕩屠戮。昇平之民。望風潰散。爲將者無如之何。若林之榝。如入無人之境。直衝蹂躙。闌入都城。此非巡察使不能節制之所致也。汝賊雖曰。欲加之罪。何患無辭云。而敢爲兇慘之事。旣檄於幕下之人。劫行刺客之事。巡察委諸狂生之言。付之一笑而已。汝賊又檄於巡察使。觀其指語。皆是譸張不實。而其中。有忠義氣節。許巡察使之先人。可謂天理之不泯處也。自古及今。忠義氣節之人。當此之時。倡義勤王。終始所爲。一出於正大無僞之道。故人不得間。行事如青天白日。來朝之諸臣。當代之金鄭兩先生是也。汝賊素無可觀之行。而托稱義兵。陰謀不軌。黨與羽翼。皆是陰險無狀。兇惡不道之人。則今此兇慘之言。非獨汝賊之所爲也。以汝反逆之狀。巡察使馳啓行朝。而熊虎之將。拔山之材。皆在幕下。爭相請纓。莫不痛心。檄召諸將。縛致轅門。梟示不軌。汝令來降。則可免赤族之禍。吉凶禍福之間。汝賊黨與。各審去就。且汝賊平日所行悖逆之狀。所可道也。言之醜也。姑置不擧。知悉。○慶尙道巡察使幕下金敬老等。檄郭義陣中云。檄再祐黨與。凡天下事機之未著者。則智者。猶或不知。幾之已著者。則雖至愚無不知之。今再祐之平居悖惡之行。乘機肆兇之狀。昭昭易見。不待智者而後可知。道內之人。或不能盡知。同入兇黨。共陷不道之地。竊爲諸君惜焉。姑擧其衆所共知者言之。諸公審聽。悉其情狀。以定去就。以決向背。再祐本以貪暴之人。藉父兄之勢。專事割耕。奪人牛馬。其所交結。皆是兇惡之李旨之輩。則其心之不正。可知矣。文德粹之謀殺土主。叱辱方伯。告訴閫帥。無非再祐之贊助。則其心之陰兇可知矣。及今生變之後。假托義兵。誘聚無賴之徒。先破草溪倉庫。軍糧淸蜜及軍器雜物。全數偸去。又掠宜寧縣倉穀。且奪晉州田稅四百餘石。輸入私庫。分給四隣無賴之徒。以爲施恩之資。未逐倭賊。便生兇計。陽示討賊之跡。陰蓄不臣之謀。欲先除方伯。傳檄郡縣。謀殺邑宰。恐動上下人民曰。方伯督民築城。茶毒生靈。不爲防禦。使賊闌入。其罪大矣。乘其機會。可以謀害。蚩蚩愚民。落講儒生。不知日陷於兇悖之術中。使忠義之方。變作暴亂之鄕。而將使一道玉石俱焚。未免惡名於千載之下。豈非諸公之所深恥也。且再祐之當初擧兵。眞義擧耶。若其義擧。則當倭賊方熾之時。釋其私憾。專意討賊。寧濟生靈可也。不此之務。報私怨。行無上之計。是再祐之心跡。人所共疑者也。而諸公獨不疑之何也。且李魯之用心。千古所無。而再祐貪其財貨。娶其女爲妾。再祐之心術。實同狗彘。少有識者。望望然歸。若將澆焉。而諸公咸歸附之。惟令是從。爲諸公不取也。設使再祐。得行兇計。殺我邑宰。害我方伯。終至於謀不軌之日。則諸公其何以處之乎。其從再祐之事。而自陷於亂逆之罪乎。其不從再祐之事。而爲忠臣烈士乎。是必利害吉凶禍福。判然於今日之所爲。幸願諸公。早別逆順之理。先斬再祐之頭。來獻轅門。則齊民喜其士氣。國家嘉乃忠義。垂芳名於永世。享爵祿於無窮。豈不美哉善哉。 暴義之徒痛其構辭。敢爲申▦曰。草溪。宜事取穀等事。已詳於招諭使啓辭。姑置不辦。晉州田稅事。則平時本州稅米。載自南江。船由岐江而去。至▦舟至岐江。賊兵突至。格軍棄散。米船獨浮空江者十餘日。將有齎盜之患。義士收而爲軍餉。故▦所謂岐江棄船稅米者此也。而此等人。欲加之罪。以爲奪。良可痛哉。 ○三嘉進士尹彥禮,學諭朴思齊等見右檄。卽通文于列邑。暴白金敬老等構陷義士之罪曰。頃見巡察使軍官輩送郭義士書二度。一則曰。檄逆賊郭再祐。一則曰檄再祐黨與。義士果是逆賊。而有黨與者乎。其中所言。皆是傅會構捏之辭。祗足以彰己陰慝害正之心術。不足爲郭義士病。指忠義爲逆賊。乃秦檜兇狡之餘術。一秦檜足以泄憤於班師。況衆秦檜萃集於巡察之幕下乎。爲義兵首事者。寧不爲之寒心乎。郭義士當列郡奔潰之時。奮百死不顧之計。忠義激切。名正言順。人有耳目。不待贅說。而蔽遮江淮。爲郡縣藩籬。噫。忠如郭,義如郭。亦未免逆賊之名。其所以害義士。乃所以害義兵。其心所蓄。亦未可知也。義士頃者之檄。信有輕動者。而亦不過忠義奮激之過擧。何必深訾之乎。彼軍官輩。徒知有迎倭之巡察。而不知有討賊之義士。傳檄於郭。欲逞私憾。其私憾者金景訥。與李魯有隙久矣。窺魯多年。未乘其隙。適逢此變。喜行胷臆。忽見義檄。心語口曰。郭妾李女也。殺魯者其在此乎。以魯爲陰嗾之魁。以郭爲見嗾之人。訥亦人也。豈不知郭公之爲義士也。爲忠臣也。欲逞其讎。指義士爲逆賊。欲將此意。仰達宸聽。北天遼邈。呼籲莫及。伏願諸處義兵所。各出通文。使義士明白之心。不爲讒構者所陷。不勝幸甚。嗚呼秉彝良性。人皆有之。逆順是非。自有公論。而敢將大惡不道之名。欲加忠臣義士之上。寧非可痛耶。孟子曰。賊義者謂之賊。倡大義者謂之賊乎。誣非辜者謂之賊乎。僉君孰察之。出慶尙巡營錄 ○金景謹往居昌。金誠一方寢。景謹納言曰。再祐將害巡察。景謹旣告而避之。令公亦宜善處云。誠一辭以疾。使人語曰。汝見我於山陰。奮臂大言曰。不斬金睟。無以伸大義於天地。再祐癡漢。安知非汝輩所囑乎。謹慚懼而退。金睟雖傳檄大折。而頗有危懼之意。密通于誠一。使之開曉。誠一。亦知人心怨睟已甚。恐因致不靖之變。卽貽郭再祐書曰。義將自變生之初。傾財敗產。首起義兵。奮不顧身。一以爲國討賊爲心。雖古烈士。何以加此。當職到界之初。卽下書招之。義將不以老拙。爲無侶。來見丹城。一揖之間。知忘身殉國之志。厥後提孤軍。橫行洛江之上。先登討賊。前後斬馘甚多。賊不能長驅闌入。一帶諸城。至今保存。英聲四馳。聞者莫不聳動。遠近響應。滅賊之功。指日可期。義將雄風義烈。非但振輝一世。抑將垂諸竹帛。而無愧。忽聞義將移檄巡察營門。敢肆悖慢之言。方伯是何等官。義將是何等人。而敢欲爲此等事耶。方伯雖實有罪。自有朝廷處置。非道民所當下手。豈料義士生忠義之門。擧討賊之義。大功將成。而自陷於殞身滅族之地耶。唐之反卒。竄逐主帥。以▣敗亂。凡幾人也。覆車之轍。其欲蹈之耶。迷復之戒。大易所訓。轉禍爲福。智士所取。從我則順而多福。不從我則逆而取害。其幾間不容髮。惟義將思之。○金海屯賊千餘名。移入固城。倭將乘銀轎。自稱監司。將犯晉州。城中將士。請援于本道諸鎭。郭再祐亦領兵馳援。道見招諭使書。立馬草復曰。再祐誠惶誠恐。頓首頓首。謹上書于招諭使閤下。今見開諭之帖。不勝感激隕淚之至。懇懇之敎。諄諄之諭。無非欲使再祐。免將來之禍。成莫大之功。豈但閤下仁愛之至。視再祐猶子而然也。抑亦爲國之心。發於至誠。使人人忘身於討賊也。雖然下諭之辭。抑揚太過。使見之者可喜可懼。再祐則不爲之喜。亦不爲之懼。嗚呼。閤下之爲巡使謀可謂忠矣。只恐巡使之爲閤下謀不如也。巡使亦人也。豈不自知其罪。巡使之言。閤下可使之改也。巡使之事。閤下可使之改也。未知巡使之心。閤下其能改之乎。雖閤下之至誠厚德。終莫能改巡使之心。則再祐恐莫須有之言。必發於巡使之口也。閤下憂再祐之必陷於不測之地。再祐恐閤下之亦終不免也。以閤下之愛我。猶以非倫不軌疑之。況他人乎。況巡使乎。況與再祐爭功者乎。再祐知殞身滅族之禍必至。而猶耳不已者。出天之性不可卒改。憤鬱之心未能遽回故也。然而閤下。君父之所遣。則閤下之敎。卽同王言也。何敢執一己之見。而違閤下之敎乎。晉州告急。領兵到介金院。軍務紛擾。萬不一一。 出慶尙巡營錄 ○金睟貽書義兵將金沔。務令鎭定再祐。沔亦知再祐奮憤之志。恐有慮外之患。卽遺郭再祐書曰。聞幕府名。尋常欽仰。卽今暑熱。想惟領兵有相。指揮萬安。沔一介腐儒。黽勉在軍。何能有濟。徒自惕慮而已。但人謀不▦。縱賊踰嶺。至於京師不守。大駕蒙塵。則責有所歸。而但左右非朝廷命令。而白面擧義。所患者不在義氣之不足。惟恐處事之失宜也。當今行在隔遠。奏請莫通。惟我草茅起事者。無所依賴。不得已稟令王人。然後名正言順。可以攻賊。可以勤王。體統有序。條。暢有理矣。若以誤事之人。爲可罪而有所云云。則義氣堂堂則有之。而順理濟功之道。恐有所未盡也。如何如何。左右奮忠一呼。千百影從。水攻陸戰。兇賊遁散。使洛右一帶。按堵無虞者。實義士之功也。所謂蔽遮江淮。沮遏其勢者。今亦有其人矣。令人欽賞不已。惟願左右。幸勿以蒭蕘爲棄。臨事必思其順理。抑其所已長。增其所未至。集義長進。無所欠缺。則聳出一世。輝映萬古。豈有他哉。適因郭是理之歸。畧序區區嚮慕之忱。不宣謹狀。沔拜。○金睟馳啓曰。小臣上恃聖明。妄意防備諸具。若得十分措置。則其於倭賊衝突之患。庶有捍禦之益爲白乎▦。到界初。備禦一事。罔或少忽。而內地築城。校生沙汰。是臣斂怨之地。不顧人言。期得成事。其時右兵使申硈適與意合。雖有輕銳過嚴之病。其盡心國事之誠。實爲可嘉。與之同事。凡干軍務相與議論。處置▣▣▣激物情。文德粹之上書。一道之人。多以爲異姓三寸姪前直長李魯之指揮。而臣前於狀啓。微露其意。故魯之欲害小臣者。曷嘗須臾忘哉。國運不幸。賊勢猖獗至此。臣罪當死。乘此機會。百端構捏。益無不至。而其妾女壻宜寧居郭再祐。當初擧事之時。自稱郭越之子。率無賴之人三百餘名前導。步從羅將。儼然帶行。自草溪南大路行軍。突入官廳。先縛典守者官人。打破官庫米糆及油淸眞末等雜物。全數偸取。又破司倉庫門。軍粮穀物。盡數散出。分給黨類是如。同郡三公兄等文狀來呈。而臣意以爲郭越乃世族也。世族之子。豈有敢行盜賊之事。必是無賴陸賊。假稱郭越之子。更爲聞見以報。亦回送。後兵使曺大坤已爲馳啓。臣亦只枚擧公兄文狀啓達。未久又聞宜寧新反縣倉穀偸取。如草溪所爲。晉州田稅船四隻。公然掠奪。輸入私庫。分給四隣。不逞之徒。以爲酬恩之資。再祐實爲國家急難。倡率義兵。欲攻倭賊。而無兵粮。則當告守令。或報臣處。依法受出饋餉。而不爲如是。恣行劫奪。有同劇賊之事。臣明知其有悖逆之心。而急於討賊。且冀其革心從善。通諭各官。使之來現。徐觀其終。更爲馳啓計料爲白如乎。再祐誤聞兵使捕捉之令。出於臣之所爲。兇慘之言。公然發說於招諭使金誠一在處。至欲殺臣所送營吏。誠一極力止之。而不果爲之云。微臣區區之意。在於鎭定。不形辭色。反爲啓聞嘉奬。而渠之憤怨未消。誘致落講儒生。聚黨日衆。名稱義兵。外示討賊之跡。內懷不測之計。不知者以爲義兵。知之者慮其應有難圖之患。至有嚴令子弟等。勿入於其中者。而不道之言。聞者亦多。臣不早處置者。以其事勢有難故也。今則先檄小臣幕下將士。劫行刺客之事。又數臣之罪。通文列邑。將擧兵構亂。而守令如有使邑人不從者。並與守令誅之之意。亦及通文中。又移檄於小臣處。兇慝之語。口不可言。而刻期築城。虐民荼毒。節制乖方。使賊闌入。爲臣之罪。築城一事。臣不須言也。使賊闌入。果是臣罪。而昇平百年。人不知兵。軍卒望風奔潰。邊將惜死退北者。豈皆緣臣節制乖方而然哉。變生之後。各項節制得失。皆經御覽爲白有齊。抄一道精兵勇士五六百名。以爲帶率東萊之陷。先走密陽。密陽之敗。又遁伽倻。賊過尙州。退竄居昌。一未嘗勸起將士。使之擊賊。自知其身無所容。托跡勤王。逃踰雲峰。爲臣之罪。當初不兼巡察之任。元無帶率軍官。加啓請八人中洪允寬。金敬老。則以兼助防將。已曾分遣於左右道。李應星。則變生前。唐浦助戰將差送。姜晩男,張處文。則變生之後。卽時發遣東萊等地。使之救援。而傳令於金海府使徐禮元處。抄給精兵各三十名。以臣之手下本無一兵故也。厥後加口傳軍官六人安世煕等特命馳送。而與道內假率軍官若干人及加德僉使崔夢聖,梁山郡守邊夢龍等並。只不滿五十人。所謂帶率五六百精兵者。不幾於誣陷乎。去四月十五日朝。臣在晉州。聞賊倭犯境。卽具馳啓。午後發行。路聞釜山東萊兩鎭之陷。▦晝夜兼程。十六日夕。馳到密陽。則是聞東萊之陷。而急急走入密陽。非自東萊而退走也。欲於此守城。以待其變。而本府城子爲雨水所圮太半。而未及修築。本府之軍。則同府使朴晉能射槍軍三連。幷全數領軍。馳救於東萊,梁山等處。而所餘守城老弱。僅百餘名。隣近淸道靈山昌寧之軍。亦赴於應赴之處。萬無合勢共守之理。臣若見圍於其城。則無可東西策應之路。絃如聞賊犯本府鵲院。退守靈山。聞密陽之不救。又退草溪。聞賊又陷金海。將指草溪之路。移駐於陜川。聞賊犯星州。馳到高靈。聞賊向金山。馳到知禮。爲在近策應之計。而各處潰散之卒。僅得四百餘名。分。給防禦使趙儆。助防將梁士俊。使之馳救金山。趙儆,梁士俊等一自金山接戰之後。軍卒盡散。自是雖督令各官使守令。收合領來。而亡卒等畏蒙其罪。人處深山。惟恐不深。更令生員進士及有識品官。召集散卒。而生員進士。亦入深山。頓無聚軍之路。防禦使已爲無軍之將。賊犯知禮境。始到居昌。其時賊已犯宜寧,三嘉等處。居昌實居中之地。留屯于此者。爲其上下策應之計。而變生之後。足跡不及伽倻。亡卒等以臣親不赴戰。多有自現者。或送於兵使。或送於防禦使。則旋卽逃亡。而以此分送之。故亦不自現於臣處矣。兵使防禦使等。只率軍官而然猶以不爲力戰。累次移文而申勑。捉致軍官而嚴敎。郭嶸,李之詩等。自湖南。領精兵來屯知禮二日。而趙儆等同在一處。不卽赴戰。臣聞而憤之。臣之軍官孫仁甲,姜晩男,張處文等給傳令。起送梁士俊等行刑施爲次。郭嶸等馳赴金山。斬倭二十餘級。其所謂密陽之敗。又遁伽倻。賊過尙州。退竄居昌。一未嘗勸起將士。使之擊賊者。又不幾於誣陷乎。賊踰嶺路。忠淸諸將士。亦敗。直入京城之禍。迫在朝夕。思之至此。聲淚俱發。念不計他。收拾燼餘。與湖南監司李洸。合勢勤王之意。節次狀啓。率軍一千三百餘名。行到全羅道雲峰。因金誠一始聞鑾輿西幸。京城已空。而李洸亦已退師全州。加抄精兵。趂未調發云。臣率孤軍獨赴。其勢甚難。誠一力勸還師。募聚散卒。討滅州府雄據之賊。收復郡縣。糾合義旅。更起勤王之師。而軍糧只計二十日。恐有中路狼狽之患。姑還本道。則其非逃踰也。明矣。反以托跡勤王。爲臣之罪。領軍勤王者。敬遵急急掃境來援之▣而乃以棄嶺南於倭賊。踰雲峰入全羅。托跡勤王爲罪者。不亦異乎。忘羞忍恥。擧顏再來。出號令。發節制。使義兵有渙散之心。使招諭敗垂成之功。爲臣之罪。夫鄭仁弘,金沔等之謀擧義兵也。條陳十策。往復相議。軍糧軍器之措備。章標文移之處置。莫不咨及而定奪焉。陜川義兵將孫仁甲。乃臣所差定。則其處事從容。固非再祐荒唐者之比。臣還道之後。凡百大小之事。一一文報。而他處義兵。亦莫不如是。若有一毫渙散之心。則其肯若此乎。義兵等事。皆與招諭使金誠一商確處置。而少無獨全撓沮之事。至以兩間將士往來之言。不可傾信相疑之意。丁寧面約。則所謂敗垂成之功者。其亦誣矣。況統率見存諸將。糾合義兵。收復郡縣。以收桑楡。聖旨丁寧。則所謂義兵者。臣豈可不得號令節制。而如彼云云。其心不難知矣。假使渠誤因傳說之言。無知妄作。猶未免叛民之歸。渠之討賊之功。終難掩罪。矧乎李魯文德粹等。皆以一家相連之人。三憾挾勢。魯則日在再祐之側。敎誘謀害。不有餘力。冀行兇計。在所不疑。然招諭使金誠一聞此奇。累次移文。陳以禍福。極力開諭。期於鎭定。金沔,鄭仁弘及他義兵。亦皆責之。渠或有悔心之理。且終始鎭定。是臣素志。渠實革面覺悟。則臣豈敢不待之如初。以畢其功。但禍機已發。臣之死生。恐決於旬日之內矣。臣之罪。自有朝廷處置。而如是陳達。近於自明。極知未安。第以誣陷情狀始終。思於未死之前。庶皆畢陳。得以瞑目於地下爲白乎去爲白乎旀。通文於招諭使金誠一。使之善處亦爲白在果。旣遭變故。更不可强顏因留。號令一道斯速處置。以鎭一方。○招諭使金誠一。痛郭再祐以忠烈而被構。明其無罪而馳啓曰。宜寧郭再祐起兵討賊事段。已曾累次啓達矣。今者意外之變。出於計慮之所不到。罔知所處之宜。極爲痛慮。再祐乃故通政郭越之子。南溟曺植之孫壻也。中間業武。去而讀書。質朴無文。居喪致哀。鄕曲皆以孝子稱之。變生之初。聞兵水使相繼遁走。賊之將犯密陽也。監司金睟。乃謂節制之帥。不當在圍城中。乃退還靈山。旋向草溪。再祐奮然曰。兵水使遁走。而不爲行刑。今又賊出左道。而退走草溪。監司亦可斬也。乃杖劍。欲邀諸路。鄕人力禁乃止。厥後右兵使曺大坤及防禦使,助防將,守令等一皆望風奔潰。旬日之間。賊犯京闕。再祐扼腕慷慨曰。此輩護倭入京。貽禍君父。皆可斬也。稠人廣坐之中。常常大言。一朝乃散家財。以募壯士。其妾諫曰。奈何出浪死計。再祐大怒。拔劍欲斬之。妻子衣服。散給戰士之妻子。家業因此蕩盡。不免飢餓。乃托其妻子於其妹夫許彥深。率所募壯士。聲言擊賊。鄕人聞之。皆以爲發狂。其時宜寧,草溪兩邑賊。敗空官而宜寧官庫。則已經焚蕩。再祐軍無見糧。乃發草溪及新反縣以餉軍。陜川郡守田見龍。以賊論報兵使。兵使下令捕之。應募者聞之。皆有散去之意。臣到界之初。卽貽書招之。軍乃再振。自是一向擊賊。不問賊之衆寡。必先登馳突。故所率戰士。勇氣百倍。無不當百。戰時必着紅綃帖裡。具堂上笠飾。自號紅衣天降將軍。馳馬掠陣。往來倏忽。賊雖齊放鐵丸。亦不能中。或於馬上擊鼓徐行。以爲行軍節度。或令人吹笛鳴笳。以示無惧。或於山藪中。多設疑兵。吹角鼓噪。或處處設伏。寂若無人。賊至輒射殺之。或逐賊船。臨岸追射。無日不戰。戰必獲勝。斬馘之多。最於諸將。射殪者不知其數。賊謂之紅衣將軍。不敢登岸。作賊。宜寧,三嘉兩邑人民。皆安業力農。五穀之盛。無異平日。道內餘民。至今保存者。再祐之功居多。忽聞三道師之潰於水原。有似發狂之人。危言妄語。無數發說。巡察雖貽書褒美。啓聞上功。亦不回意。人或以取禍戒之。則必按劍而怒。今忽再度移檄巡察營門。歷數其罪。聲言欲討。且通文列邑義兵將。諭以討罪之意。臣聞之驚愕。不覺矍然失席。巡察移關于臣。令宜寧官捉囚。臣竊念再祐實有逆心。則方握精兵。非一力士之所捕。若無逆心。則一書足以開悟。卽下手書于再祐。譬曉多端。金沔亦貽書戒之。再祐飜然聽順。聞晉州危急。乃提兵馳援。已爲發去。再祐以一介道民。欲犯道主。至於聲罪移檄。雖自謂爲國憤憤。以至於此。跡涉亂民。卽爲除討宜當。而再祐當擧國陷沒之餘。能以孤軍。奮勇擊賊。道內殘民。倚爲干城。今以亂言。卽加誅戮。則保存餘城。禦賊無計。軍民未知其罪。一時潰散。臣欲爲彌縫鎭定之計。再三戒勑。已爲從順。而得罪於都巡察使。恐難相容。惹起他變。臣聞乙卯年倭變時。全羅監司金澍自靈嵒郡。出走他邑。前水原府使尹箕。時以儒生。在圍城中。欲拔劍斬之。澍不爲怒。談笑處之。論者至今稱箕之勇。而多澍之能容。今再祐之事。雖甚狂妄。心實無他。監司亦如澍之所處。便怗然無事。故貽書金睟。使之善處。則無可虞之變。但金睟以叛賊已爲啓聞。又以他人指嗾爲言。若果如此加罪。非但渠不服罪。一道人心。恐難收拾。極爲痛迫。渠之忠義奮發之狀。奮勇討賊之功。布着於一道。兒童走卒。皆稱郭將軍。且聞善於用兵。有將帥之才。若少緩狂妄之誅。則必有成效。臣不幸受命之後。再逢此變。臣四月中。取路湖南。到雲峰縣。湖南之人。以巡察使李洸。緩於勤王。欲討之。或有密言於臣。臣以大義折之。卽議于金睟。欲通于洸以備之。睟曰彼以勤王之緩。欲討之。可謂義士也。若誅此人。則一道人心益激。李洸處不通可也。臣從其言。而止之。今再祐之事。政類於此。睟苟以處湖南之義。處再祐。則事無難處者矣。臣及金沔。戒勑再祐之書。渠答書幷爲謄書上送。 於此啓辭。足見公之忠厚之素心矣。 ○兇賊自知禮。犯湖南。有跡人五六名。自稱青鶴將軍。白鶴將軍。埋伏射殺。賊少退。 出慶尙巡營錄 俄有大賊。闌入茂朱縣。焚蕩作賊。時。本道防禦使郭嶸陣錦山。助防將李由義陣八良。李繼鄭陣六十峴。張義賢陣釜項。金宗禮陣冬乙巨旨。防守待變。賊兵又自沃川。向錦山。防禦使退入郡內。請援于監司。李洸發軍八百。定將入送。○二十三日。星州之賊七百餘名。出陣于羊亭。欲探伽倻。山。又一運由知禮。向茂朱。焚蕩順英等村。順英茂朱驛名 又固城之賊千餘名。出屯于城外。 出慶尙巡營錄 ○西北荐食之賊。於所經數道。連續置陣。以備議後之患。○ 두026賊兵入錦山。郭嶸,金宗禮退遁高山。賊分據茂朱錦山。焚蕩龍潭,鎭安等地。有人自賊中來言。此賊乃前日在昌原。稱全羅監司發先文者也。初欲直向全州。爲紅衣將軍所阻。迂由星州,知禮至此云云。本道列邑搜括遺丁。分道防禦。方賊入錦時。郡守權悰病死。○李洸在全州。以本州人文臣李廷鸞爲州守城將。聚旁邑兵。戒嚴待變。又傳全南原。集兵守城。時。本府士子等募聚散卒。稱鄕兵。推前牧使丁焰爲將。○義兵將高敬命。自全州發向礪山。密與將士等相議曰。錦茂之賊已向龍鎭。此必有意於全州,南原也。若然則大軍合應盡去。本鎭則當留老弱。守後而已。我軍自珍山。出其不意。殲盡餘黨。躡踵追擊。則彼賊進不得據。退無所歸。狼狽中路。自致荒山之敗耳。因指恩津。連山同陣軍粮色告目內。所持軍粮。礪山郡輸納。 色吏。乃南原色吏。軍粮。乃南原軍粮。蓋助義之事。各邑皆然 大將行次。二十二日。全州離發。二十三日。礪山因留。當日到付錦山傳邇內。沃川,陽山縣焚蕩之賊。指向本郡結陣事。二十四日同郡傳邇內。十里程結陣事。京城之賊。申砬,尹斗壽,爲左右大將。千餘名捕捉是如。礪山郡守口傳事。義兵恩津,連山,錦山了指向事。右義兵金千鎰行次。兵使一時自稷山。向振威事。○助防將李由義。領南原判官盧從齡等。自八良移陣于錦山松峴。以備衝南之患。○陜川義兵將孫仁甲。大戰于草溪,馬津。盡殺沿江之賊。仁甲溺水死。先是。仁甲聞草溪馳報江賊流下。仁甲星夜進兵。草溪義兵。已滅江賊。乃遂引還。未及卸鞍。草溪報追至。江賊又大至。仁甲刻期馳赴。且報于鄭仁弘。仁弘遲明發行。賊船十二隻。重載所掠之物。行過草溪。草溪,高靈軍。孤弱不敢捕。仁甲與之合勢大戰。盡殲之。流船蔽江有一船。急棹遁去。沙灘水淺。不能急刺。仁甲乘勝。入水追之。沙頭溶軟。連人馬溺水。衆軍未及拯救。一陣慘沮。無意斬級。大慟而還。蓋此時。軍不習戰。非主將身先士卒。則莫肯赴敵。故仁甲每戰。先自突鋒觸刃。以至失一良將。士卒莫不垂涕。村巷聞之。亦皆悲泣。仁弘▣請金俊民于監司爲假將。俊民初爲巨濟縣令。變起之初。修繕城池。以爲死守計。金睟托以勤王。帶率軍官。龍仁潰還之後。尙在監司麾下。至是。仁弘遣權瀁。請以俊民代仁甲。金睟乃許遣之。 能勇能怯。兵家奇略。赴水之死。或有憑河之▦。莫視貪生忘國之徒。是誠忘生爲國之人也。噫。 ○錦茂之賊。勢甚猖狂。荐食內地。士民危惧。時丁焰以南原鄕兵將。留在南亭。府使尹安性。了丁焰書曰。卽有醜物族人之稍解言語者。今朝發自全州。 尹妾。全州妓也。 而來說賊勢及他聲耗如是矣。防禦使,助防將。與錦山賊對陣。官軍見賊群數少。欲掩擊之。俄有伏倭共起。官軍不多。不能交鋒。退兵于高山。請援于全州監司。抄送八百名云。道路之所謂敗潰者此也。京賊大敗。京城無餘賊。故兵使將回兵。方指高山云。後運義兵。亦指高山云。賊住沃川界。不敢越入錦山地云。是知彼賊之少畏也。願布諸軍。休懷畏賊之心。申砬,尹斗壽諸君。盡殲賊類云。伏喜蒼蒼。欲助宗社也。○全羅道義兵將行副護軍高敬命。馳檄于本道都巡察使節下。島夷構孼。乘輿遠狩。中外所恃。只在湖南。而纔奉告急之旨。遽散勤王之師。節下之心。必有所謂。而節下之跡。無以自白。朝廷號令。雖曰隔絶。而一道人言。亦可畏也。屬者龍仁之潰。寔由先鋒之敗。而節下身爲主將。難免其責。節下今日。何以爲計。莫能收東隅之失。慰南顧之憂。使旣往之愆。與化俱逝。自新之善。照映方策。不惟聖朝撥亂反正之基。抑亦節下轉禍爲福之日。本道義兵。初向北路。擬淸妖氛。以迎鑾輅。路聞尹左相領西北之精兵。討留京之兇醜。北方之事。庶保無虞。而湖西之賊。轉入錦山。防禦之兵。尙且留住龍溪。未聞有一人誓衆而前者。節下此時。苟不廣集軍兵。大張形勢。哀我湖南一方生靈。擧將騈首於鋒刃之下矣。節下上之不能恢復神州。下之不能保障江淮。一朝鯨鯢盡殲。翠華旋軫。以一紙敎書。布告遐邇。不獨湖南之人。無以自立於天地之間。節下亦何以爲效忠補過之地乎。節下倘以此賊慓悍。難與爭鋒。分兵守險。以遏其衝。時出奇兵。以挫其銳。賊性輕躁。不能持久。不出旬日。大功可成。同爲王臣。共是國事。彼我無間。形勢相倚。各有所見。合要詳量。善自爲謀。毋貽後悔。 出正氣錄高從厚製 ○年月日全羅道義兵大將行副護軍高敬命。馳檄于海南,康津兩使君義兵麾下。敬命前日秋城擧義之初。謹將一紙滿腔之血。遍告列邑守宰。願與共濟艱難。而誠未動人。倡而不和。草萊之人。徒奮空拳。兵糧之繼。未得善策。竊聞義檄遙傳。精兵繼援。湖南五十州。獨有兩使君。先聲所曁。士氣自倍。苦佇旆旌。以掃妖氛。不圖兵相馳檄以招。深恐去留不得自由也。今者錦山之賊。與淸鎭之賊。聲勢相接。進退自如。一運已陷龍潭。一運已陷茂朱。作爲三窟。謀犯完山。私念完山爲邑。不獨湖南根本之地。眞殿所在。實是聖朝豐沛之鄕。敬命欲回義旗。以蔽兇鋒。重念此賊。變作百出。珍山兵勢單弱。若使踰越珍連之險隘。突出恩礪之坦途。則豈但湖南腹背受敵。錦江之師。亦將洶惧。而湖西隔絶。賊勢鴟張。湖南之糧。何以得達於水原。 時。本道兵使崔遠義兵將金千鎰。領軍次水原。 朝廷之聲聞。何以得通於四方。肆乃移兵入珍。尾擊錦賊。使龍茂之賊。有反顧之慮。而徐待兩軍。直擣虎穴。庶使兇醜。進退無據。則不但勤王室之上策。是亦救完府之一奇。而使君今若固守故常。不思變通。敬命亦軍孤力寡。難以輕擧。湖南之賊。旣未易翦除。水原之師。倘又曠時日。緬惟兵相之軍。皆是湖南之人。如聞賊徒今日過某地。明日入某縣。則饋餉之不通。軍情之洶惧。是乃目前之急。不待智者而知矣。然則兩使君之合擊錦賊。非止爲湖南保障之計。亦所以爲兵相聲援之謀。古人曰。將在外君命且有不受。貴在臨機制變。不取膠柱鼓瑟。況我兵相。遠在千里。不知此道危若一髮。豈可捨近賊。而貽後悔哉。私恐使君。上不及水原之期。下不顧錦山之約。則無乃他日之議。以爲圖避賊鋒乎。竊願善爲自謀。無取人言。 出正氣錄高從厚製 ○擬與宰相書。自聞梁山,密陽連陷之後。賊兵乘勝。已有長驅之勢。識者憂其擣虛直上。莫不寒心。巡察之在羅州也。人皆望其尅日提兵。入援京師。光州牧使丁允祐。亦往見巡察。力言勤王之意。而巡察漠然不以爲慮。丁公悶默而退。一道之人。徒自扼掔憤惋而已。及聞徵兵有旨。蒼黃失措。盡發一道之軍。使之齊赴礪山。而師期太迫。兼以霖潦連旬。列邑守令。恐被後至之譴。在道驅迫。晝夜兼程。飢渴俱逼。至有自縊於路傍者。其艱楚之狀。若是之甚。而不敢怨叛。蓋知勤王事急。以義興師故也。巡察到公州。聞京城不守。乘興西幸。卽令一軍官。手持傳令牌。奔馬來呼曰。罷陣罷陣。諸軍莫不愕眙。有一二守令。馳入公州。見巡察。言不可罷陣之意。巡察不從。於是諸軍。一時皆散。慢罵盈路。咸曰。巡察意不在勤王。而徒勞我輩爲也。自是衆皆鬨然。始有散志。如水沛然。莫之禦也。及其再徵兵也。諸郡兵。在道潰散者。相繼。雖或招集。旋集旋潰。至于再三。而不止。如光州則朴君光玉。奔走開諭。收拾散亡。令賤子從厚。因厚分領。到水原戰所。交付于光牧。是時。巡察。在道遲回。諸軍到振威。留宿四五日。人皆兩立。至於龍仁之戰。賊兵少勢窮。結陣于山頂絶險之處。設柵自衛。忠淸巡察節度。全羅巡察防禦之兵。衆可十萬。叢爾小醜。足以一麾撲滅。而不幸白光彥諸人。輕敵先登。一時陣亡。然大軍尙全。策勝不難。而忽見三賊。挺身直前。忠淸節度之兵先潰。諸軍繼之。火藥銃筒戰馬。擧以遺賊。敬命親見戰士四五人。言之甚詳。不約而同。長城縣監白守宗所言。亦與戰士相同。古今天下。兵敗者非一。而未有如此可痛可惋可惜者也。巡察僅以身免。由忠淸內浦。到臨陂。卽馳關道內列邑。徵發精兵。欲由海路。達臨▣。人皆恇擾。莫肯應命。雖或抑而驅之。終必潰散。如前無疑矣。巡察今在泰仁。托稱有議事。檄召左水使李舜臣。茂朱助防將李繼鄭。皆會于泰仁。泰仁去左水營與茂朱路。皆絶遠。當此賊兵壓。境。變在呼吸之頃。未知巡察所議者何事也。敬命時在全州。見繼鄭馳過。又得各官傳報。賊倭入茂朱屬縣。焚蕩民家。賊船二艘。又犯順天。一境戒嚴。蓋賊倭用我人爲謀。故乘虛而竊入也。歷觀巡察前後擧措。則實未知其意之欲何爲也。今見崔都事鐵堅。權府尹時。崔鐵堅爲全羅都事。權爲全州府尹。 亦曰巡察之意。莫測其由云。可怪之甚也。可痛之甚也。當初兵使崔公。聞義兵之起。喜形于色。凡可以相濟者。不遺餘力。其時巡察出境。故兵使牒報于巡察。請以各官餘軍器。分給于義兵。以此起軍之後。略得些少軍器于所過列邑。率皆故弊不用之物。而數亦不多。一行所帶軍官。亦未盡分給。況戰場臨急之用乎。今聞巡察。自龍仁潰敗之後。每諉以本道人心悍惡。唯歸罪於潰兵。以爲他日自解之計。及義兵一起。應募者雲合。巡察意甚不樂。至以擅發軍庫爲名。吁可異也。亦可怕也。凡守令之願從於義擧者亦多。而掣肘於巡察。爲義不終。守令亦有承望風旨。多方阻截。以沮赴義之心。至有捉囚應募者妻子。而猶復相隨。不肯捨去。誠可悲也。玆者諸道勤王之師。無一與賊交鋒者。致令兩京灰燼。終至於以賊遺君父。翠華飄轉。遠狩咸關。區區所恃。唯在義兵一擧。而巡察之意如此。朝廷隔離千里之外。天門九重。叫閽無路。深恐抱冤。自陷於不測之誅也。所賴遠近。聞風響應。勇夫壯士。重繭四集。唯思洒泣原野。以白此心而已。主辱臣死。古今通論。成敗利鈍。非所計也。惟願相公。洞察鄙生一片赤心。勿令曲端冤死幸甚。 苔軒手草出正氣錄 ○全州前萬戶黃璞。聚自募軍二百餘名。設伏于熊峴。峴乃全州鎭安之界也。時李洸使羅州判官李福男。金堤郡守鄭湛等爲伏兵將。把守峴上。璞爲之助焉。○慶尙招諭使金誠一。以玄風前郡守嚴泓爲本縣義兵將郭趲爲召募官。時。玄風等處大家巨族。皆渡洛江。入伽倻,德裕等山。誠一傳令招泓等。差本任。且移檄以諭吏民云。國運極否。染齒長驅。鑾輿播越。廟社蒙塵。噫。人皆有秉彝之心。凡在食土茹毛者。孰不欲畢義竭忠。捐駈而殉國乎。顧惟嶺南。素稱鄒魯之邦。而玄風一縣。又爲士子之淵藪。其間伏節死義之士何限。今者賊據城中。四出焚蕩。其爲見害者。非其父母。則乃其妻子也。上之君父之讎。不可與共天。下之兄弟之仇。不可與同日。吾知伏山藪者。枕戈嘗膽之志。未嘗頃刻而忘于懷也。未聞一人。倡義起兵。慷慨討賊者。豈不以劇賊充斥。吾民無用武之地乎。然而忠義之士。不以死生易志。勇武之人。不以强弱自沮。切願密相通諭。倡起義兵。力可以禦賊。則在鄕而奮冲甲之兵可也。勢若不可以自立。則提軍而赴閫帥之兵可也。或不以當職爲可棄。則渡江赴義。亦何不可之有哉。頃者陜川鄭宜寧仁弘。高靈金佐郞沔。奮忠竭義。一呼而州郡響應。比來軍聲大振。恢復之期。庶幾可圖。本縣士民。勿爲倭奴積威之所劫。益勵義烈之氣。一以復君父之讎爲念。則忠憤所激。勇氣百倍。彼惡敢當我哉。況今倭賊。懸軍冞入。兇鋒已挫。大敗於開城之青石。平沈於西京之大同。踰鐵嶺者。又爲巡邊使李鎰所沒。唐兵五萬。旣渡鴨綠江。祖郭王三大將。各率精兵數萬。分道馳援。又舟師十萬。自山東。直擣倭奴巢穴。我勢自張。賊亡無日。此正志士奮袂立功之秋也。若遲延時日。而坐失機會。則不惟無以勘定禍亂。將得罪於君父之大倫。其將何面目。立於天壤間乎。第惟民庶之無識。或不知君父之義者。則惟賞罰。可以勸懲。其不見朝廷事目乎。勿論公私賤。斬賊一級。及第二級。六品。三級。通政。斬倭將者。錄勳嘉善云。武夫勇士。急赴義兵。銳意赴戰。則上可以取通僕之印。下不失爲勳臣之列。榮極一身。澤流後裔。不亦恔乎。如或計不出此。一向隱伏林藪。則雖脫倭奴之鋒刃。其免窮山之餓殍乎。借令萬一偸生而苟活。一朝事定。則國有常刑。非但身不保首領。爲其妻子者。不免孥戮之刑。其親力戰成大功取重賞者。利害禍福爲如何哉。生爲烈士。死作忠魂。惟爾等勉之。 如庇安等列邑。皆移此文。 ○敎中外大小臣民書。王若曰。予察理不明。政失其要。仁靡實有。而澤不下究。土木連因。重困民力。宮闈不嚴。罔民細利。至於外方山澤。亦被勢威所占。群怨喁喁。予惛不知。惟念邊圉之虞。築城鑿池。鍊兵繕械。期衛生靈。免於賊鋒。民怨因此益積。人心因此益離。敵兵近境。望風先潰。保民之具。終爲藉寇之資。興言及此。無地自容。予惟嶺南。實是人材之府庫。父老敎忠孝。子弟習詩書。金庾信之慷慨平亂。金春秋之挺身赴敵。皆是本土之人。列郡八十餘區。豈無忠義之士。惟爾士庶。乃父乃祖。涵濡國家厚恩。一朝臨亂。乃欲棄予。予不汝咎。汝寧忍予 。輪臺一詔。乃平時悔悟之事。而漢民猶且感激。況今危亂。聖上之哀痛至此。引咎至此。此實草木昆蟲。俱當感動。況有秉彝知大倫之善人乎。況識義理抱忠愛之士子乎。固當▦命於干戈。以盡敵愾之效。而無一人北首勤王。以濟君父於孔棘之日。使龍馭久滯於龍灣千里。痛哉。두027天將祖承訓。史儒等。領兵到義州。○慶尙道高靈士人朴廷琬。募聚壯士四百餘名。沿江設伏。傾財饋餉。自辦弓矢。昌寧,玄風,星州往來衝突之賊。多數勦捕。又治江船。設水杖以遏沿江流下之賊。金沔茂溪之捷。廷琬宣力居多。而功不與焉。人皆惜之。 出慶尙巡營錄○慶尙道草溪全致遠,李大期,全雨等。募起軍兵。屬于鄭仁弘。協討茂溪及洛江往來之賊。出慶尙巡營錄
秋七月初二日。賊兵自龍潭。向長水。助防將李由義等棄師而遁。南原判官盧從齡。馳到本府。聲言賊鋒已過長水。卽將上二衙屬。避送于南山外山洞村。因入妙峯寺。從齡亦以單騎遁去。是昏投入原川村。 止宿鄙舍 翌向山洞。守城元軍八結煙戶軍及鄕兵。皆散。府使尹安性。獨在于府南述山。待變。 其實賊兵不來 李由義潰軍。皆是中道之人。闌入城中。掠取倉穀軍器。敎坊官廳。一時蕩然。境內之人。亦入城中。偸取其餘。尹安性知賊不來。又聞亂兵偸掠之甚。旋馬馳入。斬其尤者。因駐臨春樓上。 東門樓名 府使。乃余先人同閈舊執也。時。余避兵。方在龍湫洞上。聞其由。馳謁府伯。摻手垂涕。訪問民間還集。因下帖于各坊云云。初三日。虛傳賊勢爲去乙。官府之物。移置無路。終爲倭賊所得。散與百姓無妨是如。不甚禁止爲有如乎。司倉官廳。各處雜物。蕩然一空。朝夕之供。計無所出。勢不得已。八結別于支用。而無名懲納。亦甚未安爲置。各其坊官物持去人。亦中盡情開諭。自現輸納。則元非盜取之事。萬無論罪之患爲沙餘良。優數納上人。則就其數三分之一。給賞事。急急知委向事。○前日金沔。郭再祐兩軍所獲倭藏。多有宮中之物。金誠一以南原距賊稍遠。送而藏之。初三日偸掠時。全數蕩失。○初四日。前都事趙憲。擧義兵討賊。憲忠淸道沃川人。初自謫所。蒙恩來在本縣村舍。朝耕夜讀。以爲生涯。及聞京城失守。車駕西遷。慟哭奔走。招集義旅。是日。建旗鼓于公州。應募者千餘人。手草檄文。傳下三道云云。天地之大德曰。生。思萬物各得其所。神人之所憝者賊。矢同仇不返其鄕。凡百瞻聆。庶幾憤疾。顧玆島夷之爲寇。甚於苗民之不恭。殺人民如刈草芥。怨盈一國。弑君長如獵狐兔。罪通于天。昧寒浞之自顚。動逆亮之遠伐。甘言詐計。初要啗利而罔人。匿跡潛師。終欲越海而有地。昇平之久。雖曰捍禦之無人。蹂躙之深。不圖猖獗之匪茹。悲鳥嶺之失守。痛耀兵於漢濱。悶龍輿之遠狩。悵望辰於塞外。豈料數百州縣。終欠一介男兒。孤人子寡人妻。猶謂傷和而致異。屠民族焚民產。寧不稔惡而速辜。日積黎民之冤。月增義士之氣。矧容妾臣之逋逃。甚於禽獸之婪淫。有人形斯有人心。不思惻隱與羞恥。奉天命必奉天討。寧畏隳突與强梁。善戮者服上刑。先白起兮賜死。好殺者犯大辟。後黃巢兮敗殲。故聞華夏蠻夷。咸思此賊之顯戮。抑必山川神鬼。已議醜類之陰誅。顧念行師之近規。類非文人之元吉。執黃金之橫帶。白麻之重宣。迂廻嶺湖。不知君父之憂急。逗遛畿甸。坐致寇虜之壁堅。擁三道不救先登。因一敗永失後擧。論厥養寇之巨罪。豈合分閫之大權。隔廟堂兮遙遙。▦賊藪兮疊疊。嘆軍聲之累挫。絶生民之再蘇。若許翦滅不休。必至糜爛乃已。將使箕範餘化。永爲鴃舌之區。天佑朝鮮。尙全湖南一域。民思周道。豈無楚戶三良。項見羽檄之過江。果知片言之重趙。高東萊甚於料敵。金水原長於用軍。郭將軍提兵嶺南。有桓桓之壯氣。金上舍飛箋海曲。抱烈烈之威光。是皆幹世之英材。必有動人之妙術。佇見貔貅之盛集。而致狗鼠之消亡。況以湖西之士風。倍如鄧君之雅意。爭懷敵愾之志。豈無垂帛之勳。請勿憚於一勞。期有成於三捷。宜同聲之相應。知普天之遙孚。用仁憲之奇謀。定致孫寧之剝面。思武穆之妙算。須見兀朮之剔鬚。志未解則神感人隨。事欲成則天助地佑。肯使無道之殘賊。久容不軌於明邦。元冲甲一鼓鷹揚。摧哈丹於鷄嶽。金元侯一箭射殪。退蒙兵於黃岷。寔爲儒而或僧。非倘武與著將。由一念之向上。留千古之令名。睠玆土之山河。實人材之府庫。前朝之季。屢有海寇。而憑先輩而却之。乙卯之夏。忽起邊塵。而因俊傑而定也。今焉休養之百歲。豈無胷藏乎萬甲。或外百步而穿楊。或遵大陵而扼虎。視文武爲異技。可噫廟算之非良。念國家如一身。難見臣職之盡道。遇患而寧忽毖彼。鑑古者固宜禦前。苟有旋乾轉坤之籌。寧惜帶河礪山之誓。合三道之力。以解危急。此維其時。竭一生之才。弘濟艱難。當及是日。顧我同志之士。惜此難得之幾。周曉赳赳之武夫。期續岌岌之大命。張我弓挾我矢。先射拔都之喉。稱爾戈比爾干。連斫拐子之足。則賊自驚散之不暇。民應還集之爲望。芸田者庶遂晩農。伐木者求葺燬舍。廓開湖嶺之一路。永通商旅於四方。迎聖主於三巴。當下哀痛之詔。明舜朝之四目。繼集藥石之言。昔日之弊瘼自除。昭代之恩澤可究。是知致力於一戰。乃爲重裕於後昆。○ 두028初五日。賊兵自鎭安。向全州。李洸使李廷鸞。率本府各種軍兵守城。自領各邑軍卒。出陣于萬頃臺山城。移關于嶺南云。錦山之賊。已據茂朱,龍潭,鎭安等地。又犯全州。或稱監司,安撫使。專以招集爲事。所過列邑愚氓。爭相趍附。錦山,龍潭尤甚云云。 移關以下。出慶尙巡營錄。 ○慶尙左兵使朴晉。自高靈。夜渡洛江。先發移關云云。爲上使事。兵使。從監司勤王之師。行到溫陽。承命還下。完全各官軍兵。整齊討賊次。當日發向安東等官諸軍及遺丁搜抄。設伏要路。以雪國恥爲旀。各種軍糧。雜色軍士。主將帶率牙兵業武,武才戰馬,刷馬,水陸軍定別甲成冊上使。以待傳令爲旀。賊徒往還。連續飛報爲齊。陷城各官。當初接戰。陷城節次。狀啓次論報爲旀。龍宮,醴泉之賊。捲旗退去。猶恐不及。各官守令軍卒聚集。設伏邀擊。以報大讎向事云云。晉間行到密陽豐角。招集散民。晉前爲府使。故願從者五百餘人。率彥陽縣監金玉。奉事金大虛等二十餘人。欲往據安東。行到新寧。聞安東已陷。以新寧義兵將奉事權應銖。爲助戰將。轉向靑松安德。得達眞寶。安東人進士辛敬立來見。細陳安東地勢及賊屯形止。因言兵不滿萬。猶可圖也。晉曰。吾前所率僅八百。皆下道之卒。未諳本府道路遠近迂直。必須加募近地人。以本府人。爲前驅。然後可以進攻。未可輕易擧事。出慶尙巡營錄 ○慶尙道庇安屯賊付榜云。當途者。日本國宰相。奉綸命所令敎世治人也。郡內之人。避亂于山中海外者。如前歸家安居。日本人。奪唐人妻子者。縛而誅之。業農者勤田留耕。引水拔草。以待秋成。朝鮮若腰弓矢。以妨吾兵之往還者。悉捕刑罰。若逃民有可訴之事。錄進于開寧吾將軍陣。右件條目。幸若容疑。天道昭鑑。不可相違。天正二十年七月日。安藝宰相代完戶元次三寶元忠。出慶尙巡營錄○賊將輝元留老開寧,庇安之賊。必是輝元管下也。觀其辭意。凶詐不忍言。 ○初六日。李洸使幕士。拿致盧從齡。杖治虛驚之罪。○慶尙道三嘉學諭朴思齊兄弟。募兵得九百餘名。奉事盧欽,儒生權瀁,丹城人權世春。權濟等亦起兵。金誠一聞之大喜。卽日馳啓。以咸安人李瀞爲召募官。時郡守柳崇仁。棄城已走。至是還官。與之共事。瀞募兵千餘人。屬之郡守。以拒鎭海。昌原衝突之賊。每戰捷。輒歸功於郡守。不自與。思齊。以奉事尹鐸爲代將。領其軍付郭再祐。以捍靈山,昌寧往來之賊。 出慶尙巡營錄 ○高敬命留陣連山。傳令防禦使郭嶸。約攻錦山留後之賊。李洸使軍官請敬命回兵共守。敬命不許。發自連山。進珍山。抄精銳。分道偵探。李洸傳令郭嶸馳來。嶸不從。隨義兵。向錦山。○慶尙道金山召募官博士呂大老。聚軍討賊。以權應星爲假將。金沔知禮,金山之戰。應星有協擊之功。其後應星。爲賊所襲。力戰死之。 出慶尙巡營錄 ○慶尙道昌寧生員辛邦楫。忠義衛成天禧。正字成安義。幼學郭趲等。聚軍七百餘名。設伏擊賊。相繼獻馘。保人曺悅及成天禧等。領千餘兵。圍昌寧。終日交戰。有一賊騎白馬。稱爲邑宰。乃射之立斃。越三日。賊焚柵遁去。宜寧前牧使召募官吳澐。開諭一縣。得軍二千餘人。 出慶尙巡營錄두029初八日。賊踰熊峴。伏兵將金堤郡守鄭湛死之。初。都伏兵將羅州判官李福男,陣中峰。黃璞守其上。鄭湛守其下。李洸加將添兵以助軍勢。是日黎明。先鋒之賊。幾至數千。負旗揮劍。直入陣前。喊殺連天。放丸如雨。李福男等敢死先登。射矢如破。軍皆殊死戰賊兵稍却。朝日上東後。賊大至。漫山蔽谷。數不可計。肉薄峴腰。分運入戰。白刃交錯。飛丸雹落。繼援之賊。俄而又至。合勢鏖戰。勢如風火。黃璞天竭力盡。潰入羅州陣。賊兵乘勝。衝突上嶺。羅陣亦潰。湛曰。寧加殺一賊而死。不可退一步而生。敢與賊肉戰而死。福男等且戰且退。屯兵于安德院。 在全州東十里程 其後萬曆二十三年乙未。金堤郡儒生趙誠立等。思湛之德。慕湛之義。惜其泯滅。申冤于金瓚云。某等上書于檢察使相公閤下。伏以有善必褒。有功必賞。國家勸勉之典也。故郡守鄭湛。爲人忠貞慷慨。喪亂方極。受任于郡。奮忠討賊。招選武勇。擊牛爲酒。供億優裕。士卒感激。願爲其用。歸自公山。罷陣之日。 公山,卽公州,李洸初勤王時 與前縣監魚得濬。泣而言曰。京城已陷。勤王不擧。主將之意。未能知也。計將提義。徒遠從車駕。欲由陸而趍。畿賊充斥。浮海而進。郡非沿海。本無舟船。若何以致遠於吾王之所乎。每對食。輒悵然遲御。顧謂將佐曰。一蔬一粒。何莫非主上之賜也。而今我主上。播越西關。飢渴已逼。惟我與爾。忍享此饌。此豈臣子所敢安心處也。又嘗謂郡居士人曰。吾於某年出身。某年爲某官。今又超秩來此。受聖恩已厚矣。況有一子。可承家事。以死報國。有何所憾。我志決矣。君等見我爲也。因嗚咽泣下。又嘗往還於助防將白光彥。約以同心討賊。一道聞之。皆感國士之風。勇敢者有托心焉。爲伏兵將。防戍於熊峴也。潔牛酒。告社而行。視截險。斬木設柵。與士卒誓以必戰無退。及賊騎大至。約可萬餘。郡守督率射夫。立當陣面。射矢如破。一無不中。賊徒披靡。累度退却。賊魁一人。乘白馬。樹紅旗。董率其衆。直向陣前。郡守更前數步。抽矢引弓。示諸將佐曰。我以此矢。必落彼魁。果應弦而倒。衆皆快服。或欲出取其馘。郡守叱止曰。汝在我陣中。何以貪功爲。賊知於郡守之陣。終不可犯。逼自羅州陣疏處。而突入其陣。將士皆散。裨將一人。遽進而言曰。彼陣已潰。賊鋒衝突。可少退觀勢。郡守張目大叱。與從事官李葑及裨佐若干人。堅立不動。奮拳而言曰。寧加殺一賊而死。不忍奉身潰走。使賊長驅也。發矢益壯。繼來之賊。一時四圍。遂力屈而死。噫。郡人往求郡守之屍處。於積骸中得衣間所書姓名。以辨其眞。其死戰之志。平日所定也。列邑生還將士。往來相語曰。某郡郡守之討賊也。發矢必中。中必疊貫。其所獨殺。幾百餘級。且其所殺賊將。最爲魁傑。乃賊所稱全羅監司者也。賊爲文祭之。慟哭而歸。兇賊之竟不得衝突於全州。皆鄭湛之力也。盍於事定之日。聚力立廟。以報豐沛保存之功云爾。蒿葬境上。朔望供祭。歲時哭奠。郡人之慕義。止於此而已。兇賊退矣。慰忠烈於死者。勸將士於將來。在國家寧可少忽。伏乞閤下。轉啓于朝。俾無泯滅焉。○初九日。賊兵進襄陽驛。焚蕩閭舍。烟焰漲天。翌日衆賊衝突。耀兵于完山城外。出入作賊。李洸遁向金溝萬頃臺。兵一時潰散。賊見我軍奔走。疑其襲後。卽夜遁還錦茂。 天佑吾東。完府幸全。山城之潰。尙亦有利。 方賊兵衝突城下。慶基殿主官吳姓者。奉睟容走沃溝。舟于西海。得違行在。上拜哭親祭。命禮曹。奉安于寧邊。其後萬曆四十二年甲寅。光海君七年秋九月十八日。奉還于全州。慶尙道靈山居孔撝謙。亂初附賊。同向京城。寄書其家曰。吾當爲慶州府尹。下不失密陽府使。且有犯上之言。郭再祐聞之憤甚。一日撝謙還到其家。再祐縛致斬之。人皆快之。時豪悍奴僕。多殺主橫肆。或加鋒刃。或相淫穢。再祐聞卽捕斬之。 出慶尙巡營錄 ○知禮之賊犯居昌。賊將乘銀轎。建三大旗。鼓噪而至。金沔力戰擊却之。 出慶尙巡營錄 ○尙州進士金覺。校書正字李埈。倡義討賊。其檄文云。伏以西轅未回。北風其涼。敵愾之責。臣子所荷。不審日夜嘗膽之餘。凡百經畫於胷中者。足以破兇賊之心肝耶。卽今僉莅數郡之地。賊勢已息。而臥榻之外。尙爾充斥。報國之擧。固藩之策。有如救焚之急。而同舟遇風。豈容緩救耶。同謀協事。盡瘁竭誠。各厲蚍蜉之力。以挫鷸蚌之勢。正惟此其時也。埈奮心射天之兇。擬辦浴日之功曾與同志二三。募聚散卒若干。庶幾梟侵鎬之兇。慰踰梁之窘。而但以本州兵火板蕩之餘。農畝不收。武庫隨灰。糧資少半菽之儲。器械無一鏃之遺。飯難齊旅之飽。矛未周師之立。雷擊電奔之士。率皆虛橐。扛鼎褰旗之徒。半是空拳。討賊有志。而用武無地。是實今日所大懼耳。念惟僉莅之邦。焚蕩之患。不至於本州之甚。若不以界限之別。而同力於討賊之具。則惟彼假氣遊魂之輩。是猶倒滄海。而沃漂灰耳。以一道兵力之衆。而何患蝟結蟻屯之肆其毒乎。伏願各隨力量所逮。或惠以釜秉之粟。或輸以零寸之鐵。則仰施於僉君者。雖細。而爲用於軍需者甚博。士有見可之糧。而無患於乃裹。兵有可稱之具。而不憂於斯張。㸑钁之魚。可期消爛。而泥露之羞。快見昭雪。戮力在援之功。甚有賴於中興之會矣。玆委典兵糧二人。憑致尺素。略紓寸丹。若使視同秦越之肥瘠。而裒如於唇齒之形勢。則甚非間關致价之意。而協力同事之願。又將責之於何地耶。 出慶尙巡營錄 ○屯錦之賊書示云。大日本大王。施政道於朝鮮。欲恤羣氓戶。何故防川陸之往還。成仇讎。所謂蟷蜋當轍。蚍蜉撼樹者乎。因玆探入深巷。騎兵步卒。揚旗橫鋒。城門失火炮各家家也。逆黨等。悉雖欲刎頸。難辨別罪科之深淺。況亦爺孃妻子憐憐。故赦宥焉。須救飢全命。雖然如此。鬪者害之。向來武官在野之人。悔前非。歸舊宅。隨日望風俗。而獲攏棲歸捍戶。日域皇帝與朝鮮皇帝。必開衣裳會。汝等亦不知乎。須告此言於山中之武官。橐弓匣刃來降。何遭罪哉。若背此意旨者。重駐駕於此地。將數百之兵官。更加誅戮焉。長鋏。吾將大王。再安爲此邦天子於舊朝廷。則亦蒙天幸矣。不宣。天正二十載。扶桑臣安國寺。 觀此則果是全羅監司稱號者 又得投書云。野雲。高敬命解曰。廣野迷雲斷。空山半月斜。○李洸以光州牧使權慄。差南原守城將。慄領兵來守南原。移文道內列邑。擬攻李洸不赴勤王之罪。○陜川義兵大將鄭仁弘與假將金俊民。領軍二千八百餘名。邀擊安彥之賊盡殲之時。俊民初來。未有所試。星州加利縣李弘宇軍在伊傅山。高靈陜川軍在伽川。 星州西面村名 文勵軍亦在星州。咸聽仁弘約束。仁弘令軍中。必値大賊然後乃發。凡吾將士。以先登擊賊。窮追多殺爲頭功。射賊賊死者次之。要功斬級者爲下。是夜屯于星州大橋川上。結陣待曉。大雨暴下。勢未擧事。不得已回軍。還高靈村舍。仁弘言曰。宗社丘墟。賊勢日增。吾輩在此擧義。本欲戮力一戰。以效敵愾之志。事機連延。坐消時日。天又不助。今日又如是。此實無狀。爲國誠薄之致。其將奈何。因哽咽涕洟。哭不成聲。金俊民在坐。動容起拜曰。今日之事已無及矣。明日若晴。則當竭心盡力。死生唯命。卽傳令更定約束。夜半進軍傍蛇院洞安彥之路而陣。藏兵六七處。相去一二里外。仁弘率中衛。結陣高阜。俯臨指揮督戰。翌日。賊自茂溪。發向星州。約四百餘名。 往來之賊日日如此 牛馬百餘駄,多張旗幟。連亘數里。或着金銀假面。金銀甲冑。或爲鷄羽衣。放炮舞劍。人皆膽寒。有頃陜川左先鋒一軍。應炮突起。賊徒不行。屯結路左斷峯頭。以卜駄居中。劍炮手列置前後。金俊民,鄭邦俊。率射手千餘。馳馬下山。一時發射。賊亦吶喊揮劍而出。最前一倭將。騎青黑大駿馬。馬前擁鷄羽衣。着金假面。揮紅柄大劍。劍手數百隨之。大叫突至。我軍一時驚却。青黑馬。蹄疾如飛。飜騰上山。諸弩俱發。中馬後脚。馬卽奔逸。倭將落於軍前。卽奪其馬。斬其將。餘賊中箭。躑躅退走。高靈軍自南乘之。星州軍自北乘之。金俊民,鄭邦俊等。殊死混戰。伏兵四起。喊聲振谷。左右山上。矢下如雨。賊欲爲潰走之計。以炮劍手爲殿。面星峴而走。仁弘在山上。揮旗督戰。勿令脫過一賊。賊盡棄輜重旗幟而走。伽川軍又不意突出。賊無意抗戰。諸軍追殺二十餘里。僵屍相續。流血盈野。餘賊帶箭。踰入星峴。星峴薄近星邑。遂整軍而還。是役快殺一陣。諸軍生氣。以將令不貴斬級。故首級不多。所奪卜駄百有五十餘匹。日月大旗幟三秩。鐵丸火藥等物甚多。所奪駿馬。額間有肉角。長寸餘。善走如飛。金俊民每騎赴戰。耀武軍前。最大劍則於柳板塗金者也。不久金俊民。又領兵進薄老多村。乃茂溪陣外也。賊堅閉不出。砦柵甚固。不得攻破。卽耀武而還。未幾茂溪之賊撤去。合于星州。玄風之賊撤去。合于大丘。 出慶尙巡營錄 ○郭再祐收復慶尙右道列邑。賊兵盡走左路。初。玄風,昌寧,靈山屯賊甚盛。連雲結陣。爲上下之路。以達于星州。再祐多幻奇謀。抄精銳數百。引進玄風。或觀兵山上。或馳馬城外。百爾挑戰。終不敢出。再祐又設一柄五枝炬。乘夜登嶺。一時擧火。光照賊陣。擊鼓吹螺。放炮吶喊。衆口齊應曰。紅衣天降將軍在此。明當接戰。必盡殺乃已。其無悔。卽滅火潛退。明曉視之。則玄風之賊夜已遁矣。是擧。適與茂溪之▣同時。故賊尤恐惧而遁。越五日。昌寧之賊。亦聞風撤去。唯靈山之賊。恃其衆强。久不遷動。再祐告招諭使金誠一。發三嘉,宜寧,陜川等軍。陜川,三嘉。則尹鐸領之。以爲繼援。宜寧軍。則再祐領之。入陣于賊屯。對峯分爲三寨。而再祐居中。賊先鋒百餘騎。馳突直犯中堅。再祐畧不驚動。射前鋒着甲者。連倒五六人馬。鐵丸如雨。再祐安閑自如。士卒以身翼蔽。殊死逆戰。交下矢石。賊先鋒馬。數十顚斃。賊死甚衆。餘賊暫退。城中賊望見酣戰。一時齊進。尹鐸軍潰散。賊乘勝蹙之。再祐勢不相敵。且戰且退。登山回避。賊亦不敢窮趕。乘昏招集散兵。無一死傷。責尹鐸不救先逃之罪。將欲行刑。鐸願立功自效。於是更爲約束。明日進戰不利。又明日不利。限三四日。期於必勝云云。翌日曉頭。祐領軍。再入結陣峰頭。遣人偵探。城門洞開。煙火寂寥。畧無動靜。疑其有計。平明使人視之。賊夜已半焚幕已遁。鳥鳶飛堞而已。自此昌寧一路。賊騎斷絶。唯中路密陽,大丘。至仁同,善山爲賊往來之路矣。 出慶尙巡營錄 ○因傳旨。知軍功賞格之後。或有斬飢民及逃還人頭。瞞以賊馘。以要爵賞。軍功出身。多出於此。慶尙道義興縣。有斬兩飢民頭。剃髮而獻者。巡察使令本縣倅按之。乃守令要功者所爲。而疑似難辨。遂寢不問。義城縣。有倭頭出身縣令鄭希賢。設宴於官家以相慶。有一朝紳。作詩嘲之曰。飢民頭上桂花浮。紅紙群中怨血流。太守慶筵知有酒。盍分殘瀝慰啾啾。 出慶尙巡營錄 ○慶尙道禮安一縣士子等。奮義起兵。進士李叔樑作檄文傳諭列邑。 出慶尙巡營錄 ○安集使金玏在榮川。以訓鍊奉事權希舜爲義城守城將。博士黃曙爲豐基守城將。前縣監李愈爲醴泉守城將。幼學朴淵爲義興守城將。一邑軍務。各自勾當。蓋列邑守令。皆遁去故也。李愈與安東生員金翌。進士金允思,定虜衛安淑等。各募里中丁壯。以禦多仁之賊。 多仁。醴泉屬縣。出慶尙巡營錄 ○安集使金玏到安東。士子品官至者五十餘人。乃以前都事安霽。前檢閱金涌爲守城將。以出身權詮爲領兵將。因傳令各邑竄伏守令。還官視事。時。賊鋒尙遠而守令輩。任自逃竄。獨禮安縣監申之悌聚軍官門。鉗馬待變。捕斬土賊。牢守倉庫。 出慶尙巡營錄 ○慶尙道安東生員任屹傳檄列邑。諭以忠義。募兵聚糧。共討國賊。 出慶尙巡營錄 ○慶尙道金海屯賊五百餘艘。移泊薺浦,昌寧,靈山之賊。出陣江邊。或稱宜寧倅。或稱草溪倅。將向兩邑。郭再祐設疑兵却之。 出慶尙巡營錄。○此。疑卽前未收復時事。 ○大駕因御義州。鶴駕移駐伊川。忠淸監司傳通及嶺南巡營。馬徒姜萬澤。自行朝來說。 出慶尙巡營錄 ○賊將淸正等。盡陷朔方二十餘邑。赤地千里。春燕將歸於林木。因過豆滿江。焚蕩野人六七部而還。○ 두030初十日。全羅左道義兵大將高敬命討賊于錦山。敗績死之。前一日。與防禦使郭嶸合兵爲左右翼。進屯錦城外之十里地。敬命先發精騎數百。進退侵射。軍官金廷昱傷馬退走。賊兵乘勢蹙之。我軍稍却。至夕時。賊兵還入城中。敬命使呈才人三十餘名。走入城底。 土城 盡焚城外公私家舍。又放震天雷。延爇城內倉庾。賊中女徒汲水救之。日暮各斂兵屯守。翌日黎明。官義諸陣。進軍賊所。敬命據盤楸村前峰下寨。郭嶸止社稷堂後山結陣。官軍戰北門。義兵戰東門。賊徒遂空壁而出。喊殺連天。勢如風火。先犯官軍。前鋒將靈嵒郡守金成憲馳馬先走。賊因逼光州興德等陣。郭嶸觀望遁走。義陣因而崩潰。敬命及子文臣因厚。從事官柳彭老。掌書記幼學安瑛等皆死之。敬命長子前縣令從厚。當潰散之際。不知父弟之死。束出於潰軍之中。得不死。○其後高從厚。答李適書云云。島夷構孼。乘輿遠狩。一家三父子。同在仕版。才雖淺短。不忍坐視邦家之覆。輿一道士友。共擧義兵。從厚與亡弟。先已開諭本州潰卒。領付水原。將向西都。路阻而回。亡弟來趁義旗於秋城擧事之日。從厚病滯礪山。中路來迓于泰仁縣。到金溝廢縣。募人泛海。傳檄耽羅。以請追鹿馬。亡弟陪先親向完山。以會南原一帶之兵。從厚由金堤臨陂等官。收募兵糧。期于礪山。亡弟又自完山。領麾下勇士。設伏于鎭安,茂朱等界。以遏嶺南賊鋒之侵。先親。仍留完山以待變。未幾賊鋒之來犯茂朱者。還向嶺南。然後始爲整兵北上之計。三父子會于礪山。傳檄湖西,京畿,海西。以達于平安道。發宿恩津。將向尼山。聞黃澗,永同之賊踰入錦山。麾下之人。爭欲還救本道。議者以爲不如進屯連山。控扼險要。資兩湖之兵食。徐觀賊勢。以爲南北上下之計。遂向連山。欲以策應兩路。未幾完府之勢日急。不得已移兵。入于珍山郡。自珍山入錦山。防禦合兵爲左右翼。義兵苦戰終日。初爲賊所蹙。退走十里許。還蹙賊兵于土城。焚蕩城外客舍。用震天雷。延爇城內官倉。而被虜婦子。汲水救之。官軍。若合力苦戰。役不終日。而官軍不用力。日暮而止。防禦遣珍山守來議明日之事。從厚進言于父親曰。今日我軍得利。持此勝勢。全軍而返。相勢更來。出入困賊可也。與賊對壘夜宿。恐有夜驚之患。父親曰。爾以父子之情。畏我之死乎。吾爲國事。一死何傷。從厚遂不敢言而退。防禦其夕。罪諸將之戰不力者。賊徒以其夜。謀犯義陣。伏兵軍官聞有人涉川聲。遣一卒候于田中。賊倭之先伏于田中者。以爲義兵覺其謀。遂退走。翌早進軍。賊徒忽空壁而出。致死於我。防禦諸將靈嵒郡守金成憲。遽策馬先走。不交一鋒。光州,興德兩陣。皆被圍。防禦望風而潰。義兵大陣與防禦。相望對陣。已知其退走。而猶爲獨當之計。義軍之出戰者。見官軍之潰。遂退走。坌入于中軍。陣中洶擾。而尙且持滿以待。忽一人後至。望見防禦陣處。遽爾驚呼曰。防禦退走。義陣遂潰。恰如狂瀾橫決。不可復制。當其未潰時。先親在中。從厚在一邊。亡弟自督戰所。來在一邊。及其潰也。從厚之馬。躓于棘上。撥開勒馬而行。諸軍已遠。尾而馳走。父子兄弟相失。獨此苟生。猶言猶食。負罪天地。日竢神遣而已。亡親嘗曰。吾則不閑騎馬。不幸戰敗。惟有一死。且吾輩成敗。係國家安危。豈止一身禍福耶。師潰之日。墜馬馬逸。從行儒士安瑛。故判書李後白之外孫也。下馬而援步而隨之。安亦殞于賊手。從事柳彭老。乘健馬先出。問其奴曰。大將脫乎。曰。未也。卽還轡策馬。從亡親於亂兵之中。亡親顧語曰。吾必不免。君盍先出。柳君曰。吾豈可棄大將。而苟活乎。累言之而不肯先。終始娨護。嗚呼痛哉。不肖遺孤。不能橫屍戰場。而獨使二烈士。同日而死。天地間一罪人。痛哭何言。亡弟落後。而欲整已潰之軍。死於陣下。軍皆先走。幸而無他同死者。得借義兵僧軍。收拾遺骸而來。亡親變初。潛瘞山中。亦借義兵僧人棺斂而來。兩喪旣已永窆。不肖遺孤。雖死亦無憾矣。病身常恐不保朝夕。變生之後。以死自期。四月以後。長在馬上。冒雨野宿。非止一再。終焉隨行義兵。而遭此大故。親舊皆憂其不保葬前。幸而小延頑喘。得以襄奉大事。業已苟生。欲爲病母弱弟計。且撫育亡弟之四子一女。冀其成立。而但念病根深痼。疾勢一發。則雖扁醫。亦將斂手矣。湖南之義兵之再起者。蓋因亡親之遺緖。而勇士健馬。乃亡親檄召于耽羅者也。從厚欲隨其軍。親舊皆曰。扶病含哀。必死無益。且念此身一死。親喪之窆。弟骨之收。弟姪孤弱難辦。隱忍以待葬事。明日哭于几筵而行。往從義兵都廳。與諸友共事。庶幾少酬亡父志願。而死生任天所爲耳。親讎未報。國恥未雪。何以生爲。只要一死分明耳。又云云。父子同在戰陣。臨危相失。獨此苟生。至今假息於覆載間。神理所不容。唯有一死而止耳。今奉手札遠來。憑審奉親避賊。一家安穩。從厚妻孥。賴以保全。一味悲感而已。衰病本無安意。又遭此大故。雖欲少延頑喘。以保母弟。且撫存亡弟孤兒。而自恐氣力終不支耳。父子之痛。無以向人言者。亡弟素無弓馬之技。徒以區區忠義。投袂而起。常率健兒。獨當陣面。少無怖容。其恒言曰。今日之事。雖殺身沈族。猶不足悔。所親皆聞之矣。及其軍潰。殿後授命。而無狀者獨全其軀。春草池塘。阿連誰夢。風雨中宵。舊約難尋。日往月邁。肝摧心死。而其英姿爽氣。宛宛在目。直欲相從於九泉。而猶言猶食者爲何人哉。又別紙云云。吾一家不學軍旅。衆所知也。欲以區區忠義。感發人心。而亡弟素性慷慨。以死自決。嘗於賊兵踰鳥嶺之後。欲倡義兵。兄弟共草檄文。大畧曰。鳥嶺無異坦途。漢水只隔一帶。於斯時也。安危雖在於大臣。若是恝乎。肝腦宜塗於中野。又曰。二百年衣食於此土。咸囿列聖之生成。數千里禮義之大邦。豈無一介之男子。其末句。乃亡弟全撰者。有曰。彼則肆然有魯連之蹈海。今日尙矣。冀田單之反齊。以此推之。亦可驗其所存矣。檄文已成。而諸友不從曰。本道官軍尙全。勤王不患無兵。不相樂者。或以託兵誣陷。則奈何。吾一家亦謂傳檄。而不從。則無益而有害。事遂中止。李洸錦江退兵之後。人情洶洶。將不可收拾。羅州金千鎰令公。傳書相約。欲傳檄聲罪。問其罷兵之由。然後擧義收兵。從厚一家。報以巡察不勤王室。誠爲有罪。如此處置。恐妨事體。且巡察方將再擧。而道內士論。合辭而非之。巡察無以號令一道。恐有軍民不服之患。金與李爲婚姻家相切。勸以善導巡察。使收桑楡之效。果然巡察調兵。而列邑小民皆曰。錦江之師。無故罷陣。今何爲再擧勞民乎。所在逃潰。漆室之憂。實有不忍勝言者。各邑品官儒生。共爲開諭。艱難起送。而道亡相繼。散入山中。於是乃有倡義之計。一以鎭定人心。一以繼援大軍。三路之兵。潰於龍仁。義兵傳檄北上。欲救完山根本。而敗於錦山。師雖無功。然當時若無義擧。湖南魚肉之患。不待島夷之來矣。金千鎰令公。同約擧義。而其軍只調羅州一官。故先發家軍。收諸邑之兵。故在後追發。家親嘗有書曰。賊豈一日忘湖南哉。蓋必待勤王義旅之發。金則已向北路。今入江華。亡親師次湖西初面而本道有警。不得遠赴王室。埋恨地中。嗚呼痛哉。亡親嘗語于一家曰。今年天象。將星不佳。將必不利。然則家親擧義之時。已決必死之計矣。前年七月。家前大木。先世所手植者二株。爲風所拔。今年五月。本州客舍鄕所門前。數百年喬木。又拔於風壓鄕所門。門崩墻潰。人皆疑怪。然豈知本州首事義兵。而吾一家。獨受其禍哉。嗚呼痛哉。李洸再擧之時。求檄文于吾一家。吾兄弟合辭成文以送。未至而用他人檄。吾一家。只願渠補過贖罪。效忠於國。而渠反有憾於義兵。亡親死事之後。狀啓沒實。而同死諸人之事。亦不詳錄以達朝廷。夫豈盡察此意乎。嗚呼痛哉。緬惟聖祖之創運。實自上穹之簡衷。鴨綠回軍。大義昭於天下。荒山奏捷。神功蓋乎域中。靈長終必賴之。恩澤何可忘也。此當日檄文中語。而欲使人知之。故並錄告。 並出正氣錄○其後三年。東宮致祭。其文云。維萬曆二十二年歲次甲午正月庚辰朔二十日己亥。王世子。謹遣臣翊衛司副率李希幹。致祭于贈判書高公之靈。 大略高吟大醉三千首。幾處紗籠之舊題。便宜方畧十二條。兩度相鄕之遺愛。遠邦家之多難。倡忠義而勤王。投袂而行。武夫關口而奪氣。登壇而誓。三軍奮臂而忘生。衆推元規之主盟。人慕天祥之擧義。朝廷鍊兵三十載。討賊反出於書生。國家養士二百年。輸忠幸見於今日。何長城之遽壞。竟一木之難支。血戰當之。陷千金於虎口。男兒死耳。輕七尺於鴻毛。棄前功於半途。齎壯志而沒地。事之成敗也命。夫復何言。天之報施於人。果孰能測。一門之內。死事者三。旬月之間受禍最酷。死而不朽。想英爽之猶存。魂其有知。倘髣髴而來享。 出正氣錄 ○其後己亥。尹根壽作敍曰。嗚呼。壬辰倭亂之初。參議高公。倡湖南起義旅。凡檄書通文。往復赤牘。橐爲一帙。不出於參議手筆。則出於臨陂兄弟之手。一家忠義之辭。萃於此編。烈烈之氣。溢於言外。嗚呼其可敬也。夫熄滅之調常。賴此以存。匪直言之。終允蹈之。其所以勸臣子臨難盡節之擧者。殆無窮矣。噫。公與其子。俱死王事。實同於卞成陽。而文章。則卞無傳焉。以大科壯元。而死節於賊手。公又同於文信國。而信國二子。只病死於道路而已。又非公之二子。先後殉節者比也。公之一家所成就。豈不亦卓絶鮮覯哉。處承明賜長暇。而以文章著。綰黃綬典鉅郡。而以廉白聞。捉烏合之卒。抗焱銳之賊。徒以大義激勵之。成敗在天。旣不效矣。則以身殉之。終以忠節顯。公豈非一世之全人哉。世之日訾薄文人。鮮實用者。至此其有不爽然自失者乎。昔羅一峰跋丈山帖。自謂一字一涕。讀是錄者。字字可以釀淚矣。非夫一字一涕者哉。歲乙未。余有嶺南之行。回駐鳳城。公之子由厚氏。謬以余爲公之知己。來見客館。出示斯編。而請名。余題曰。正氣錄。而倂諾其敍文之請。乃未卽就。荏苒數歲。而由厚亦已下世。悲夫。今其弟用厚氏。又申前請。余豈敢已諾於逝者乎。抑因此而竊有慨矣。印行靖節文山等集者。出於特命。而乃在兵亂之前。淵衷若知有今日。而豫爲培植節義計者。謂非默契天心而何哉。是錄之有關於世敎者。實與文山等集並。則此豈但藏於一家而止哉。兵塵稍息。而議及文事。則爲臣勸忠。莫先此編。剖劂而行於世。余斯拱而竢之耳。萬曆紀元之己亥十月日。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尹根壽敍。 出正氣錄 ○碑文。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蓋歲萬曆之壬辰。國有倭難。而參議高公。以死難著大節。旣十餘年。而神道之文未有托也。一日公之孤用厚。謁余而請曰。先人獲與公兄弟遊。而死事顚末。公所明知。敢徵惠一言。以爲不朽計。且申以母夫人之命。嗟夫語公事行。而泫然悲不已也。余雖不文。安敢辭。當倭賊之大擧來犯也。公里居光州之村舍。聞我軍。每戰輒北。鳥嶺失險。而湖南之任巡察者。未有捍衛王室之意。公獨與子從厚,因厚謀擧義。旣而又聞鑾輿西幸。都城不守。公日夜哭失聲。巡察領勤王兵。到錦江。聞京師已陷。倉黃罷陳。一道人心洶懼。公貽書巡察。責以後效。言多剴切。而不見省。公慟邦家傾覆。與羅州人前府使金千鎰共圖興復。竿尺往復。公首決倡義計。五月戊子。會于潭陽府。玉果人學諭柳彭老等。推公爲盟主。公非素閑軍旅。而慨然登壇。不以老病爲辭。因傳檄道內。應募者日集。六月己亥。公出師潭陽府。時三路之師。潰於龍仁。兩湖益搖。獨猗公爲重。公自全州整旅北上。次礪山。手草檄文。遞告諸道。以達關西。公將向尼山。聞賊自黃澗踰錦山。而郡守敗死。賊勢猖獗。麾下士爭欲還救本道。公亦然之。七月庚申。公遂移兵珍山。將擊錦山之賊。銳士就募者愈衆。軍聲益振。丙寅。遂部分將士入錦山。與防禦使郭嶸爲左右翼。公先遣精騎數百。直趍賊巢。爲賊所乘而退。公鳴鼓督戰。士皆殊死戰。還蹙賊兵于土城。焚城外館舍。又以礮延爇城內。聲勢俱壯。賊。冒死突出。義軍四面攻圍。賊多死傷。不敢出。會日暮。官軍又不肯助戰。土城厚完。不可猝拔。乃退師還陣。是夕防禦使遣人。約以明日合戰。公之長子從厚。言于公曰。今日我軍得利。持此勝勢。全軍而返。可相機更出以困賊。與賊對壘野宿。或虞夜驚。公曰。爾以父子之情。畏我死乎。吾爲國一死職耳。是夜。賊果謀犯。竊出設伏。爲邏卒所覺。翌日丁卯。公與防禦使進兵。公去賊五里許止陣。與防禦陣相望。公遣八百餘騎。挑戰未合。賊空壁而出。先犯官軍。防禦管下將金成憲策馬先遁。賊薄光州,興德兩陣。防禦陣。望風而潰。公爲獨當之計。令士皆持滿以待。人忽急呼曰。防禦陣潰矣。義軍因而崩潰。公嘗曰。吾則不閑騎馬。不幸戰敗。唯有一死耳。至是左右請騎馬而跳。公曰。吾豈苟且免者哉。公之麾下扶公上馬。公旋墜馬。馬逸。公之麾下儒生安瑛下馬授公。徒步從之。公之從事柳彭老馬健先出。問其僕曰。大將脫乎。曰。未也。彭老遽策馬還入。從公於亂兵中。公顧曰。吾必不免。爾可馳出。彭老曰。吾豈忍棄大將求活。賊鋒遂及。公竟死之。彭老自以身扞蔽公而死之。安瑛亦死之。公之次子因厚。率礪武士在前列。出入矢石。及軍潰,下馬整其部伍。在陣死之。近縣士民。聞公敗。老少荷擔顚頓曰。吾屬死矣。哭聲振野。軍潰。士卒不知公存亡。稍稍來集。及聞公不幸。皆號泣而散。南中士民。識與不識。皆相弔痛惜之。公以白首書生。當板蕩之日。仗義而起。爲湖南倡。雖愚夫悍卒。逃匿林藪者。皆聞風爭赴。旬月之間。義旅至數千人。蓋公之義色。發於至誠。有可感動故也。公於壬辰春。仰觀天象。語一家人曰。今年將星不佳。將必不利。然則公固晢於死生。而擧義之日。已決捐軀之計矣。及討錦賊與女壻朴橚書。托以家累。公之自處。蓋素定也。當賊之屯據錦山也。文武握兵之將。逗撓岐路。而獨公不計事之利鈍。親蹈虎穴。與賊血戰。亡身徇國。雖未能奏捷成功。而公沒之後。視公進死。攻賊者繼起。故賊雖婁勝。死傷亦過半。捲甲宵遁。則國家之保有湖南。以爲他日恢復之地者。其功有所歸矣。公之體魄。潛瘞錦山山中。賊兵阻絶。不能卽收。八月某甲。遺孤從厚等乞義兵僧。取出公屍。凡四十餘日。乃始就斂。大駕在龍灣之日。聞公擧義而來。動容嘉悅。授公工曹參議兼招討使。賜書勞之。書中有節制列邑。策應調度。恢復都城之語。時。工曹佐郞梁山璹。自行在南還。上面諭曰。歸語高敬命,金千鎰願爾等。及時恢復。俾予得見爾等面目有日也。爵命未至。公已沒矣。事聞。上震悼。命贈官爵。 在右 後加贈議政府左贊成。公之沒也。巡察因前嗛。至以乘暗行師。軍潰而死。誣公於馳啓中。厥後李廷馣爲巡察。褒公死事之狀。則曰。高某首擧義兵。倡義勤王。身犯賊鋒。與賊血戰。不幸軍敗。父子俱死者。始得其實云。乙未夏命有司。棹楔門閭。辛丑秋。因門生前縣監朴之孝等疏。特命建專祠光州。賜額褒忠。遣官致祭。仍春秋祭。世世勿絶。嗚呼。此可以觀君臣矣。公諱敬命。字而順。系出耽羅。其先世賜貫長興。遂爲長興人。嘉靖癸巳十一月三十日戊辰生。有子六。長卽從厚。丁丑武科。自喪次起兵。誓復父讎。轉戰嶺外。晉州城陷。投江而死。贈都承旨。次卽因厚。己丑文科。隨公同死於陣。贈禮曹參議云云。尹根壽撰。○其後又致祭。其文云。維萬曆三十一年癸卯八月日。國王。遣臣戶曹正郞趙曄。諭祭于判書高敬命之靈。惟靈。聲華夙著。才學俱優。筆掃千人。胷藏萬甲。在先朝而簡拔。 戊午文科 幾遷張率之官。逮中歲而沈淪。未見眞卿之面。一朝寇至。列郡波奔。郭州營中成裕之夜遁。皆是睢陽城裡張巡之死守。伊誰獨能奮義而聚師。誓欲捐軀而報國。城池器械。無一可恃。誰遏醜虜之長驅。遠近大小。不謀而同。實由義烈之先倡。孤忠自許。一死何難。兵義者强。彼此順逆之旣別。師直爲壯。軍旅衆寡之寧論。飮血登陴。張拳冒刃。非戰罪也。始知天意之難諶。得死所焉。莫道書生之無膽。忠孝大節。父子三人。每恨封墓之未遑。深喜妥靈之有所。廟貌肅肅。足想烈丈夫之風。香火年年。不啻鄕先生可祭。不待朝家之修擧。乃出士子之經營。欲使表節于千秋。祠豈無扁。錫以褒忠之二字。實固稱名。鄕閭炳燿而生輝。奚止淸獻之里表。行人捐點而墮淚。不必峴首之龜趺。致祭爲遣乎廷臣。追爵尙歉夫宗伯。天乎已矣。精忠難作於九原。魂兮歸來。薄奠庶饗於一酌。 並出正氣錄 ○京畿道水原忠義衛洪彥秀擧義兵討賊。彥秀有賤子。名季男。勇力超絶。庚寅爲通信使軍官。與黃進等往還日本。詳知彼賊强弱。至是隨父兵討賊。累戰皆捷。前後獻馘。幾至百餘級。近地屯賊。畏縮不出。卽以軍功。除本府判官。○忠淸道前察訪朴春茂。擧義兵討賊。○全羅道寶城前縣監任啓英,朴光前等與綾城縣令金益福。謹再拜奉書于列邑諸友。嗚呼。國家所恃。而無虞者三下道。而慶尙忠淸旣已潰裂。爲賊窟穴。獨此湖南。僅全一隅。軍粮歸輸。精卒徵發。皆倚一道。興復之機。實在于此。今者以王城爲急。巡察領精兵。有從海道上去之計。兵使領數萬兵。已越錦江。兩義亦各勤王。已離本道。列邑將士。定將出去。所餘無幾。賊路咽喉。備禦極疏。湖西之賊。已犯境上。席卷之勢。將成。克復之望何恃。國家之事。岌岌乎誠可痛哭。此義士奮發之秋也。下以思之。則賊至城下。屠戮丁壯。哀我生民。措躬何地。室家置之何所。嶺南已然之跡。耳所聞也。目所見也。林藪竄伏之計左矣。苟保性命之計誤矣。等死耳。何不死於國事乎。況萬一控扼要害。使賊勢沮遏。則死中求生。此其機也。雪恥復國。此其時也。凡我道內必有遺漏之丁。散亡之卒。如使有識之士。相與召募勸勵。協力奮起。自成一軍。視賊所向。固守要衝。則上可以爲王師之聲援。下可以保一境之生靈。及此勉圖。無若嶺南人。然。嶺南之人。當賊之初。不思一心捍禦。奉頭鼠竄。是雖倉黃急遽。罔知所爲之致。而今日思之。必有追悔矣。及其賊勢猖獗。宅舍灰燼。妻子汚辱。然後義士奮起。多數斬獲。雖曰。差强人意。而亦已晩矣。伏願諸君。咸創若時。化秀偸惰。爭先振發。赴期不後。生等素乏弓馬之才。不知鞱鈴之策。而制挺撻楚之計。可謂疏矣。區區倡首者。一以激義士之志。一以奮勇夫之氣。人心所同然者未嘗泯滅。必有所興起矣。檄到之日。卽與有志之人。曉諭一邑。開錄軍人。月二十日。來會寶城官門。一失事機。後悔何及。主辱不救。何以爲人。咸思終始而倡義。僉君是圖。○宋濟民檄。伏以濟民。去月二十三日。從義將到水原山城。留五日。以京城之賊尙熾。而淸州,鎭川流賊亦肆。孤軍深入。糧途可慮。故一軍共推鄙生。送募忠淸義兵。以淸梗路之賊。以通來援之兵。故來與忠淸士友。號召義徒。兩旬之間。得二千精卒。從衆望。共推前都事趙憲爲左義大將。以禦黃永以下之賊。前察訪朴春茂爲右義大將。以防錦江以上之賊。措事未畢。遽聞錦山之敗。時耶命耶。抑亦人事之未盡耶。旋馬南還。迨及義徒之未散。而更有召集之計。行到恩津。始知大軍之散。無可爲矣。嗚呼。人孰無死。得其所者爲難。當島夷孔棘之日。驍帥悍將。亦皆觀望奔走。偸生苟活。而高霽峰。以儒雅文臣。素不知軍旅之事。一朝爲衆所推。奄登將壇。殉國亡身。以死報君。而子從父死。忠孝並生於一家。死有餘榮。烈烈有光。人各一死。在霽峰爲盡其道。得其所矣。何屑揮泣。所深痛者君父西巡。廟社爲灰。朝鮮七道。盡爲兇賊蹂躙之場。只有湖南一道。尙幸完全。恢復之基。實在於此。而惰將驕卒。動必潰散。一自倡義之後。人心始定。皆思敵愾。而及其一戰敗滅。義氣摧沮。無可收拾。反爲惰將驕卒之所笑罵。嗚呼。惟彼頑夫悖卒。喜功貪利之徒。窺利而趍。見害而避。自是謀身之常態。何責何誅。曾以湖南禮義之鄕。而沐祖宗休養之思。數百餘年。在平時以士自名。而矜仁誇義者。旣皆功名謀避。而數千勁卒。一時潰散。無一人救其將之死。此豈但庸人俗夫之所共嗤哉。實有愧於兇夷者矣。嗚呼。歃血拜將。秋城之府庭在彼。誓心天地。白日之照臨如彼。不知將此面目。何以自容於天地耶。嗚呼。仁義之根心。實稟於天賦之初。人我之所同。固無彼此之殊。茅塞梏亡。失其本心者庸或有之。則形人而心獸者亦有之矣。惟忠與孝。豈可責之於人人乎。然此討倭之事。抑亦不忠不孝者之所共懟也。豈但忠義者之私讎哉。以他己然言之。取人妻子,娣妹。十夫爭淫。漲斃相繼。屠戮父兄。煮祭孩童。焚蕩閭室。奪掠財貨。驅人牛馬。役人奴僕。摽奪良田。拔人丘壟。窮兇極惡。貫盈天地。無辜士民。避地逃竄。顚仆道路。塡于溝壑者不知其幾千萬也。今七道蕩然。又陷五郡。惟彼五郡。實是湖南函谷。險阻四塞。因山爲固。此有攻之之難。而彼有扼腕拊臂之便。論此形勢。旣有難易。我軍新挫。士氣▣沮。敵旣乘勝。倭勢自張。幸賴熊峴血戰。賊銳少挫。全州有備。量力自退。勢有驅逐之漸。湖西義兵。環恩,連,鎭,沃守備有制。而大將趙憲。參將李天駿。以應時人物。測天觀時。量敵制勝。動合古人。勢不能西走北奔。必由茂朱。東走嶺南。則金郭兩將。用兵如神。威懾賊膽。必不肯越嶺。而天兵五萬。與我勤王之師。掀天動地。自北而南。則松漢逋賊。忠淸餘孼。卷地而來。無所於歸。則必與錦賊合勢。南衝西突。窮寇輕生。則以喜退之將。驅善潰之卒。安得必保其支吾乎。此實湖南父老士庶莫大之憂也。嗚呼。古之人。以天下之民爲吾同胞。況我一道士子。自祖先來生於斯長於斯。先人魂魄之所綏妥也。父母妻子之所安養也。兄弟兒孫之所生息也。隣里朋友之所交遊也。一朝遭變。甘爲夷虜之臣妾僕役。辱亦甚矣。一死榮矣。況又繼之以凶慘。骨肉親戚。同爲賊手屠戮者乎。於死也。則不猶愈於赴敵而死乎。今若避一戰。而必欲求生。則其生終不可得而有如是之慘。若或決一戰。不畏其死。則亦無可死之理。而終免慘酷之禍。永受無窮之福矣。此皆切迫。而不得已之擧也。豈必愛君憂國。發於誠而後然哉。嗚呼。同舟而濟。胡越一心。凡我同生於一道者。實有同舟之勢。而胥沈糗載之患。迫在朝夕。雖胡越之人。不得不一心力。以濟艱難。況山川稟氣之相近。遊學連業之同術。實有兄弟之義。則非但古人所謂泛然同胞之云也。凡我道內列邑父老。父勖其子。兄勉其弟。礪志砥節。更擧義旅。以遏兇鋒。上以復君父之讎。雪神人之憤。下以孝父母保妻子。永安其家業。千萬幸甚。○湖城監收兵兩湖。得二千餘名。由牙山。舟于西海。向行在勤王。○光州牧使權慄自南原。領軍向鎭安。以巡察改分付。進兵珍山梨峴。與同福縣監黃進等據險設伏。○郭嶸自錦山之潰。到全州。因留同營。營吏告目。使留全州一從事官。 李用諄 在韓山聞家患。時未還營。錦山還聚之賊。四散焚蕩。搜探殺掠。倍前慘酷。二十日。珍山官舍焚蕩。還入錦山。或駄輸于沃川,茂朱之賊。亦輸于知禮。皆有退遁之計是如。同縣縣監張別將。魚伏兵將等馳報是齊。珍山東院助防將李繼鄭,羅州判官李福男。同福縣監黃進,務安海南縣監等梨峴。康津縣監苧古里。靈光郡守杻峴。高山縣監松峙。扶安縣監,咸平,茂長縣監照臨院。南平縣監巡察使軍官全夢星。別將南應吉自長水,茂朱地境。淳昌,寶城郡守長水縣監炭田,竹峙等處。任實,鎭安縣監等防守相勢進攻。亦傳令發送。臨陂縣令。領軍八百。皇華亭結陣。以爲聲援事。昨日。傳令發送。唐兵初七日。圍箕城。賊徒已遁。與京城之賊。盡涉露梁。自靑溪山至振威。盈滿結陣。向牙山云云。喬桐貢生高彥伯夜入箕城。夜驚賊徒二百餘名。自相擊殺。因是退遁。卽除其人。爲揚州牧使云云。慶尙右水使軍官李冲自行在所。受都摠都事。行過玉果言。主駕移駐龍川。鶴駕已到江界。百官分定兩所。妃嬪只有七駕從之。臨海已播北道。大槩人心稍定。玉候平安。唐兵三萬。已到龍川。繼援兵馬。來陣江邊。遼尹李成樑。 遼東刺史也。有子八人。如松,汝枏,汝柏,如梅,如板,如檜。如梧,世稱八將軍者。 代差祖承訓爲大將。而王楊,郭史諸君爲其副。以唇亡齒寒之計爲急。用兵之誠可謂勤矣。向者大同之戰。賊陣之中。平義智爲大將。行長,玄蘇,平秀長爲次。率黨分三衛。一衛之賊多至三千餘名。留府諸將。多設方略。萬弩俱發。殲盡一衛。我軍堅守。賊已挫氣。詐術奸謀。出於不意。夜渡淺灘。乘暗長驅。我軍大敗。旣陷箕城。留屯之日。關西勇士數人。夜入賊中。射殺四將中最年少者一人。實是義智餘賊。流下海西。留京之賊。其數亦少恢復神州。指日可待。平壤尹 朱言愼 以敗軍見遞。○錦山之賊數千餘名。焚掠珍山,梨峴。伏兵將光州牧使權慄。同福縣監黃進等督軍拒戰。進中丸稍却。賊兵躍入寨砦。我軍驚潰。慄拔劍斬退。冒死先登。進亦扶瘡更戰。士卒無不當百。賊兵大敗。盡棄器械而走。斬三十餘級。○郭嶸。令光州判官寶城郡守等領軍入探。茂朱助防將李繼鄭入探錦山。並潰還。時。本道將士。累攻兩窟。一未奏捷。每致崩潰。此豈必彼賊勇銳之致。嗚呼。一何無男子。○嶺南招諭使關內。月二十三日。昌原府使馳報內。月十九日。城中恒留倭桂兵部。幷三十三名。城內閑雜人十名。不意捉去。卜物負持記官朴春丁並金海海洋船隻。看望次出歸爲旀。恒留之倭亦有還歸本土之計。今逢自金海出來之人。問賊去留。則金海海洋各處賊船。彌滿左右山麓。假家連排。金海密陽交通之人。堆牛釀酒。相與飮啖。有同隣里之人。退計十餘日間。賊倭六名。自京下來。附耳傳言。衆賊一時慟哭。兩府交通之人。不分男女。全數斬殺。多至二百餘名。各處假家。盡數衝火。滿江之船。一夜盡下。似有撽歸之漸爲齊。貴道錦茂之賊。某處指向爲臥乎喩。更良傳通事。右關全羅。○左義兵陣中士子等召聚散卒八百餘名。推前府事和順崔慶會爲盟主。月二十六日。建旗鼓于光州。以鶻字爲章標。由右道收兵。向南原。因稱右義兵。擧會之日。通示諸軍云。賞一人而千萬人勸。今此義兵之敗。幼學安瑛見其將所騎馬驚。自以其馬與大將代乘。徒步匍匐。甘心被殺。學諭柳彭老當賊刃亂斫之際。奴僕皆請馳出。以避賊鋒。怒拒不從曰。我若馳出。置將何地。見其將奴僕盡散。馬不能進。命奴護其將以行。自以身爲殿捍賊。奄爲擊殺。嗚呼。當此人心板蕩之日。背君忘國。偸生苟活。處處皆然。親上死長。寂然無聞。二子者無謀利計功之心。乃能舍生取義。奮不顧身。若不汲汲彰義。以聳一時耳目。則何以植已挫之士氣。扶旣頹之綱常乎。事若不急。而所關至重。伏望列邑鄕校鄕所。各收賻物。隨其多少。專人弔賻于其家。擧義之後。爲收骸骨。會哭祭奠而後。具由上聞。旌表其門。鼓動義氣事。○兩南舟師。會于見乃梁。 巨濟固城之界 見倭大船十隻。中小船七十餘隻。相與接戰。我軍再放銃筒。了無撞破之勢。退陣于閑山島。大洋。更與約束三道諸船。鼓噪並進。幾盡勦滅。賊船十隻。脫走珍島。郡守宣居怡追趕未及。初十日。賊船七十餘艘。結陣于安骨浦船滄。三道諸船百餘艘。突進接戰。未得盡破。 出慶尙巡營錄。 ○前縣監任啓英。擧義兵討賊。啓英全羅道寶城人。初。本道官義將士。並擧勤王。一道空虛。而兇賊乘釁。荐食入境。衝突之患。迫在朝夕。內地之危。甚於欹器。啓英與同志諸人。傳檄募兵。以爲守禦之計。因發本郡。由樂安,順天向南原。行收兵。得千餘人。稱左義兵。以虎字爲章標。 初畫虎爲之。後印虎字爲之。○金千鎰,崔遠等領軍。自水原向仁川。徵援本道。李洸以助防將李由義。珍島郡守。宣居怡等領軍馳援。○嶺南之賊潛送前日海印寺乞食人莫失。莫石于湖南。窺覘形勢。 招諭使秘密 ○京畿果川縣監傳通內。賊兵一運。結陣于開城府青石洞。爲我軍所敗。申砬自忠州敗軍之後。變着倭衣。潛入都城。亂斫二百餘級。都元帥尹斗壽所率之軍。又斬千餘級。京賊退走事云云。○嶺南招諭使關內。本道右路諸義兵二萬餘騎。逐日擊賊。高靈以下已爲恢復。京城流賊。不得進退。出而還入山中。避亂人處急通此意。使之人人奮起討賊事。 出慶尙巡營錄 ○都巡察使爲知音事。當日到付兵使牒呈內。今到有旨內。遼東大發精兵五萬。留駐江邊。以爲聲援。廣寧總兵官楊元。親率向義撻子五千。前來邀擊。祖總兵郭王遊擊三大將。各率數千兵馬。已渡鴨綠江。史遊擊將精銳一千五百。爲之前鋒。昨夕。義州牧使謄送寬奠堡票帖內。中朝令山東道舟師十萬。徑由水路。直搗倭奴巢穴。卿其令沿海各官。將此緣由。官門街巷。掛榜知委事。有旨據牒呈是置有亦。中朝援兵。已渡鴨綠江。兵勢大振。勦滅兇賊。恢復神州。指日可期。是昆知委民間。咸使聞知事。右關各官。○賊倭自入箕城之後。常日作賊。不過斧山內面以回。有若畏戢不敢者然。讖記之言。不盡誣矣。 斧山府西三十里。時有讖云。倭亂七年自釜山至斧山。胡亂十年。自鴨綠至鴨綠。
亂中雜錄第一終

[난-001] : 賊陷釜山僉使鄭撥死之
[난-002] : 賊陷東萊府使宋象賢死之
[난-003] : 賊兵分道回京
[난-004] : 郭再祐起兵討賊收復右路
[난-005] : 李鎰戰尙州敗走
[난-006] : 聞慶縣監申吉元死節
[난-007] : 賊兵進迫京城
[난-008] : 車駕西行
[난-009] : 賊兵渡漢守兵潰散
[난-010] : 賊兵入京城
[난-011] : 車駕自松都奔西京
[난-012] : 李洸領兵。勤王至公州。潰還
[난-013] : 賊兵自京城分道出向溯方關西
[난-014] : 湖南勤王兵又向京中路盡潰
[난-015] : 淳昌玉果潭陽等軍潰還作亂
[난-016] : 舟師大捷于嶺海
[난-017] : 賊入松都
[난-018] : 朝廷至義州冊封光海君爲世子
[난-019] : 賊兵稱全羅監司御史都事察訪四行次指向本道
[난-020] : 三道之師十三萬潰於龍仁
[난-021]扺 :
[난-022] : 賊兵渡大同江車駕奔義州
[난-023] : 遣使中原請援
[난-024] : 淸正踰入鐵嶺焚蕩列邑
[편-001]簁 :
[난-025] : 郭兵擊逐賊兵于鼎津
[난-026] : 賊自湖西入本道據茂朱錦山
[난-027] : 天朝發兵赴援
[난-028] : 賊兵向全州
[난-029] : 熊峴之敗鄭湛死事
[난-030] : 高敬命敗死于錦山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광련은 일명 강광(康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작은 두목[小酋]이다. 경인년(1590, 선조 23)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명 나라를 말함)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吉)이 귤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의지가 이 말을 수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길이 대노하여 곧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만력 34년 병오년(1606, 선조 39) 일본 국왕 원가강(源家康)이 평성(平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譯官) 박희근(朴希根)을 회답사(回答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유상(柳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彝良性非求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亂胡爲少信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冠負國尙不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었고야 / 夷狄之人乃如此
하였다.

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왜적의 변란이 심히 다급해서 조야(朝野)가 창황하였다. 정 발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으나 은명(恩命)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그 후 만력 31년 계묘년(1603, 선조 36)에 정발의 처 임씨(任氏)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발은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정발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하니, 지하의 억울한 혼이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본도 순찰사(巡察使)에게 명하여 정발이 전사한 곡절을 탐문해서 아뢰라 하니, 순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이첩하였고, 이영이 회보하기를, “그때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명은 탈출할 수가 있어서 죽지 않았는데,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첨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왜선이 무수함을 보자 급히 부산진에 돌아와서 성 밖의 주민과 군인 등을 독촉하여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가보게 했는데, 단지 네 명이 있을 뿐이어서 곧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또 전선(戰船)ㆍ방패선(防牌船)ㆍ중선(中船) 등 도합 세 척을 모두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에 가라앉게 한 뒤에, 첨사는 남문의 성루(城樓)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왜적이 성 뒷산을 둘러싸고 진을 치자 첨사는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고는, 마침내 서문으로 옮겨가 수비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일시에 함께 진격해 와 높은 곳을 점령하고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데, 쏘는 탄환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첨사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첨사의 첩도 스스로 목 베어 죽었으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가은산 등은 쌓인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오후에 왜적이 군중에 영을 내려 남은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 하여 다 배 위에 잡혀 있다가 17일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하다. 순찰사가 그 회보에 의하여 자세히 아뢰다.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하루 전에 송상현은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접 고을 군사를 불러다 동래성을 지켰다. 이리하여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동래성에 달려 들어왔는데, 부산이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게 아니다.”라고 핑계하고, 성을 나가려 했다. 이때 송상현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않은 채 아병(牙兵) 20명만을 남겨 놓고 가 버렸다. 이날 날샐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우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 놓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으며,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다.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 중위장(中衛將)인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등이 모두 이 싸움에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단령(團領)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교의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차례나 차고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하니, 왜적이 몹시 성내면서 그를 잡아 끌고 목 베려 할 즈음에도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죽이고 죽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도의 기생이었는데 역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양첩(良妾) 이소사(李召史)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부사가 조용히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부사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애초에 부사가 경내의 대소 부녀들을 모아 모두 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그들을 모두 문루 위로 몰아 오르게 하고, 기생과 악공에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벌여 모여 신나게 놀았으며, 창고를 다 털어서 준비했던 배에 싣고 저희 나라로 돌려보내다. 포위를 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暈]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종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다.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부채면의 16자(字)는 안 상산(顔常山)의 “신(臣)은 무상(無狀)하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말과 문신국(文信國)의, “인(仁)을 이룩하고 의(義)를 취한다.” 한 찬(贊)과 더불어 전후로 같은 정신이다. 글을 읽고 비감(悲感)에 젖어 모르는 결에 눈물을 흘렸으니, 천고에 걸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족하리라. 그때 본도의 감사(監司) 김 수(金睟)가 진주(晉州)에 있었는데, 부산의 급보가 졸지에 도착하자 마침내 좌우 도(道)의 군사들을 독촉 징발해서 계속 구원하러 나가게 하다.
15일. 김수가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班城) 진주의 속현 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해 가지고는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본도의《순영록(巡營錄)》에 나온다. 그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은 이미 갈리어 조대곤(曹大坤)이 그와 교체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노쇠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경질하고 김성일(金誠一)로 대신하였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변기(邊璣)와 조경(趙儆)을 경상 좌우 방어사로, 성응길(成應吉)ㆍ양사준(梁士俊)ㆍ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을 경상 중좌우 조방장(慶尙中左右助防)으로, 곽영(郭嶸)을 전라 방어사로, 이유의(李由義)ㆍ김종례(金宗禮)ㆍ이지시(李之時)를 전라 중좌우 조방장으로, 이옥(李沃)을 충청 방어사로 하다.
16일. 왜적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전진했는데,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이 양산(梁山)을 지나면서 그곳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김수는 영산(靈山)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양산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밀양(密陽)으로 달려갔는데, 적병이 대거 이르자 바로 영산(靈山)으로 후퇴하였다가 밤중에 초계(草溪)를 건너 전라 감사에게 이첩하였는데,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의 화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 4천 명과 도의 군관 3, 4명을 보내 주시오.” 하다. 이 통첩이 도달하자 호남은 겁에 질려 들끓고 다들 적을 피할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후퇴하여 소산(蘇山) 동래의 속역(屬驛)이다. 에 머물렀다. 이각은 이날 병영으로 달려 돌아가서는 싸우고 지키고 하는 대비에는 뜻이 없었고, 수석 진무(鎭撫)를 독촉해서 사람과 말을 내어 자기 첩과 면포(綿布) 천여 필을 운반해 옮겨 놓으라고 시키다. 진무가 어려운 기색을 보이자 이각이 대노하여 당장에 그를 목 베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는 도망쳐 버리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17일. 좌우의 왜적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찼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다. 한 대열은 언양(彦陽)에 함빡 몰려 들었다가 이어 경주(慶州)를 범했고,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은 곧장 밀양 가는 길로 해서 바로 들어 갔다. 부사 박진(朴晉)은 양산에서 후퇴하여 돌아와 황산(黃山)의 높은 잔교(棧橋)가 강에 임해 있는 그곳에서 적의 길을 막았다.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펴고서 줄기차게 휘몰아 바싹 뒤쫓았다. 박진은 힘을 내어 싸워 여러 급(級)의 목을 베었고, 박진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 역시 연달아 여러 왜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재[嶺]를 넘어 그의 귀로를 끊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박진이 본부(本府)로 달려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차 있었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8일.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부산에서 이동하여 김해(金海)를 함락시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애초에 중위장(中衛將)인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고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면서 종일 접전했는데, 밤중에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 사칭하여 문지기를 찍어 죽이라 하고는 먼저 도망했고 서예원 역시 이유검을 추격한다고 청탁하고는 서문으로 해서 달아나, 김해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9일. 적병이 밀양에서부터 또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를 범해 깡그리 불태워 없앴는데, 그 기세가 바람에 불길 같고 진동하는 우레 같아 지나가는 곳이 다 초토(焦土)가 되었다. 김수는 합천(陜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 전라도에 이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다.
20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병영으로 갔다. 애초 김성일이 어명을 받고 잽싼 걸음으로 달려 내려가 의령(宜寧)에 당도하고는, 정진(鼎津)을 거쳐 병영에 직접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 적병이 강의 우안(右岸)에 가득 모여 들자, 김성일의 휘하 장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길은 왜적의 소굴에 가장 가까우니 진주로 해서 함안(咸安)에 도달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왜적과도 좀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군령이 엄하여 곧장 전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 하고는,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 다시 그의 아들 김혁(金湙)에게,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힘들여 간하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속여 보고했다. 그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락의 집에 있다가 새 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배례하고,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했습니다만 왜 정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 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하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다. 김성일이 대노하여 김옥ㆍ김혁 등을 잡아들여 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곧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렀다.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과 부절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하게 책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 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 극렬한 변란에 임해서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마 안 있다가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자,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 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킨 다음 군사들에게 망동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좌우의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다.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羽衣]과 금 갑옷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는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장병들이 겁내어 떨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왜적은 그가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오는 왜적 수십 명이 그 뒤에 있었다.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하게 했으나, 다들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루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특히 김옥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 기왕에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 서서 말에 올라 수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그 금가면의 말탄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리고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금안장[金鞍]ㆍ준마(駿馬)ㆍ보검(寶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전투는 병졸이 1천 명도 되지 않고 병기도 쓸어낸 듯이 없었건만,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기가 약간 진작되매, 곧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을 시켜 괵수(䤋首)를 바치고 장계(狀啓)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보졸들을 앞에 가게 하고 김성일은 맨 뒤에서 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 김성일이 함안으로 진을 옮기고, 내상(內廂)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자기를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충성스러운 분기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무릅쓰면서 힘을 내어 싸워 강한 왜적이 부지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장병들은 왜 이것을 거울 삼지 않았는가.
○ 김수가 합천에서 지례(知禮)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1일. 우도(右道)의 왜적은 영산(靈山)을 거쳐 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지를 지나서 깡그리 태워 없앴고, 중도(中道)의 왜적은 청도(淸道)로부터 경산(慶山)과 대구(大丘)를 지나가 홍수가 밀어닥치듯 산과 들을 메웠으니, 이때부터 강 좌우의 길이 막혀 버렸으며 좌도(左道)의 왜적은 울산(蔚山) 좌병영(左兵營) 등지를 향해 전진했다. 이각(李珏)은 서산(西山)으로 나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열세 읍의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다.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이 성을 비우고 나가서 진을 치려고 하자 윤 안성이 말하기를, “어찌 성을 버리고 나가서 진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이각이 대답하기를, “공은 우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을 나에게 예속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하겠소.” 하다. 마침내 이각이 서문으로 해서 성을 나가더니 윤안성 등을 돌아보고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고는, 곧 서산으로 향해 달려 가니, 윤안성이 흥분하여 꾸짖으며 칼을 잡고 그를 노렸다. 우후(虞候) 원응두(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갖자, 윤안성이 성을 내며 힐책하기를, “주장이 까닭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적병의 또 한 패가 언양(彦陽)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켰다. 그때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서천(西川)에 있었고,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 등은 성 안에 있었다. 왜적의 기병(騎兵) 한 명이 동문 밖에까지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다. 그것을 가져다 보니,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씌여 있으매,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은 계원장(繼援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모양(牟陽)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하양(河陽)의 대장(代將) 역시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하양은 본래 방어사의 소속이었으므로, 병사가 하양 대장으로 하여금 물러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게 하다. 우복룡이 막 길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이 왜적의 선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불러다 물어보게 하다. 대장이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우복룡은 몰래 자기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이들은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틀림없이 도망하는 군사들이다.” 하고는 자기 군사들을 시켜 하양의 군사들을 포위해 잡아다가 점검을 가장하고 깡그리 죽여버리니,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다. 하양 한 고을의 군민이 이로 인하여 탕진돼 버리다. 우복룡은 곧 토적(土賊)을 잡아 목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사후 보고를 내다. 《경상도 순영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22일. 김성일(金誠一)이 체포 명령에 응하여 길을 떠나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일본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합니다.” 하고 아뢴 적이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전번에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성일이 체포 명령이 도달하리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길이 막혀서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 곧 길을 떠난 것이다. 이날 우후(虞候)와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김성일이 가는 도중에 김수(金晬)가 나와 만나보고 그의 피체(被逮)를 위로하니, 김성일은 말이나 안색에 전연 나타내지 않고 다만,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하였다. 영리(營吏)들이 서로 말하기를, “체포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다. 조대곤(曹大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珏)과 원응두(元應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 만한 10여 두(斗)의 해마석(海磨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거(鵬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ㆍ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을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난경(難境)은 돌보지 않으니,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주(州)를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이리하여 자기 가산을 전부 뿌려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전사(戰士)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전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모집된 전사들 중에 심대승(沈大承)ㆍ권란(權鸞)ㆍ장문장(張文章)ㆍ박필(朴弼) 등 10여 인은 다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곽재우와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이날 서로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정하고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ㆍ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이니,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었는데, 그때 마침 초유사(招諭使)가 내려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 만나 보고야 의병을 일으키라고 격려하니, 이리하여 군졸들이 되돌아왔다. 이에 곽재우는 더욱 힘을 내어 왜적을 토벌하였다. 적이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으로 열 명을 당해내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는 것을 군사를 움직이는 절차로 삼으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異狀)의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마련하였으니,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한 군인을 골라서 요새지에 잠복시키고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또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요(要)는 왜적을 죽여야 하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다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하겠느냐. 만약 후일 공의 대가(代價)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성심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ㆍ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김수(金睟)가 하는 짓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곽재우는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초유사가 양편을 조정해 준 덕으로 마침내 무사하였다. 또 초유사가 삼가(三嘉)의 군사를 곽재우에게 주니, 곽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박사제(朴思齊)를 도총(都摠)으로, 허자대(許子大)를 군기제조(軍器製造) 책임자로, 정연(鄭演)을 독역사(督役使)로, 권란(權鸞)을 돌격장(突擊將)으로, 이운장(李雲長)을 수병장(收兵將)으로, 심대승(沈大承)과 배맹신(裵孟伸)을 선봉장(先鋒將)으로, 허언심(許彦深)을 군 급량(給糧) 책임자로, 강언룡(姜彦龍)을 무기 수리(武器修理) 책임자로 하였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즉 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성세(聲勢)를 이루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 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 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초야에서 일어나 충의(忠義) 두 글자를 받들고 수륙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적 1백 급(級)을 쏘고 베고 하여 죽였다.
○ 한성 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하고, 전 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從事)로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신립이 출동할 때엔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장수는 비록 이름은 훌륭하지만 위엄과 용맹 하나뿐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적들이 어찌 너를 살려 주겠는가. 아깝다! 어떻게 이 왜적을 제압할 건가.
23일. 중도(中道)로 오는 대부대의 왜적은 인동(仁同)을 불태워 버리고, 우도(右道)의 왜적은 현풍(玄風)으로 해서 길을 나누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는 성주(星州)를 불태워 버리니, 성주 판관(星州判官) 고현(高晛)은 도망쳐 달아났고, 목사 이덕렬(李德悅)이 겨우 몸만 살아 남아서 끝까지 고을을 지키다. 토적(土賊)이 성 안에 들어와 점거하고 있으면서 목사를 가칭(假稱)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으자, 궁박해진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 토적에게 항복하고 부동하는 자들도 많다. 좌도(左道) 왜적의 한 떼는 경주(慶州)로부터 진격하여 영천(永川)을 함락시켰는데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도망쳐 달아났고,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이날 진격하여 창원(昌原)을 함락시켜 병영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이어 칠원(漆原)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다. 또 좌도 왜적의 한 떼는 장기(長鬐)로 향해 진격해 왔는데, 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경주로부터 후퇴하여 돌아와서 장기성 밖에 진을 쳤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진격해 와서 이수일은 곧 후퇴하고 말았다. 영천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신령(新寧)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 안동(安東)으로 향했는데, 부사 정희적(鄭熙績)은 도망쳐 달아났고, 좌방어(左防禦) 성응길(成應吉)과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은 의흥(義興)에 머물러 있으면서 움츠리고 물러난 채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김수(金睟)는 지례(知禮)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만 도순찰사의 지휘만 받고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이르렀는데 척후(斥候)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群衆)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아는 게 있기 마련인데, 가소롭다, 차라리 한 가지도 아는 게 없을 망정 척후로 정탐을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못 들었다.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26일. 흉악한 왜적이 상주(尙州)로부터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변란 초기부터 관청의 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막 대문 앞에 앉아서 관의 창고를 부수어 흩뜨린 토적(土賊)을 처형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방비가 허술한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고,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 기슭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적이 쫓아가서 그를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신길원이 호되게 꾸짖고 굽히지 않자 왜적이 그의 사지를 절단한 후에 죽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성(睢陽城)에서 순절한 장순(張巡)이 있을 뿐이다.
○ 좌도 왜적의 한 떼가 군위(軍威)를 불태워버리고 연달아 비안(庇安)을 함락시키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 도망쳐 달아났고, 한 떼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과 감포(甘浦)를 불태우고 약탈하다. 안동 판관 윤안성(尹安性)이 단기(單騎)로 부(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도망쳤음을 알고서, 서쪽으로 풍기(豐基)에 가니 군수 윤극임(尹克任) 역시 성을 버리고 도망가다.
○ 김수(金睟)가 지례(知禮)로부터 거창(居昌)에 돌아와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을 목베다.
○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 선조 3)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㺚川)충주의 땅이다. 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 경상 우병사 조대곤(曹大坤)이 후퇴하여 회산서원(晦山書院)에 숨다. 때마침 창원(昌原)에 잔류하고 있던 왜적 40여 기(騎)가 피란하는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건너와 의령(宜寧)의 신반(新反)을 약탈하고 마침내 빈틈을 타 성으로 들어가서는 관아와 성문을 불사르니, 조대곤이 마침 삼가(三嘉)에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닥쳐온 줄로만 생각하고 군기와 북을 버리고 숨었던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28일. 성주(星州)의 왜적이 개령(開寧)과 금산(金山)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우도의 방어사 조경(趙儆)과 그의 종사 이수광(李睟光)이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추풍(秋風) 금산의 역 이름이다. 을 막아 적의 길을 끊었으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다.
○ 경상 좌도의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이 의성(義城)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安東)의 풍산(豐山)으로 후퇴하고는 창고를 깡그리 불사르고 가버리다. 왜적은 다인(多仁)에서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함용(咸龍) 땅으로 전진하여 당교(唐橋)에다 진을 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감사의 영리(營吏)인 이(李)란 사람이 전라감사에게 고목(告目)을 보내며 말하기를, “지금 도착한 소식통에 의하면 왜적들이 옷 안에 갑옷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옷 밖에는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병기인즉 단지 철환(鐵丸)을 쏘고 칼을 쓸 뿐입니다. 다른 재주는 없으나 다만 철환을 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쏘는 것이 빗발치듯 하여 그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고을의 군기고 외에 관사 같은 것은 태우지 않고, 읍내와 길가에서는 큰 집과 좋은 마을만을 골라서 불을 지릅니다. 중도(中道)의 왜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정도라서 그들은 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 및 선산(善山)을 거쳐 오며 다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순변사(巡邊使)가 그들과 접전하였지만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패배당했습니다. 왜적의 무리는 상주와 함창(咸昌)도 태우고 이미 조령(鳥嶺)에 이르렀고 불일간 조령을 넘어갈 기세까지 있다고 합니다만,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은 겨우 4, 5백 명으로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해서 우병영을 불태웠는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 우병사가 그들과 접전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적은 함안(咸安)ㆍ칠원(漆原)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을 거쳐 오면서 모두 불태웠고, 거기서부터 둘 내지 세 대열로 나누어 편성했는데 한 대열은 2백여 명으로 지금 성주(星州)에 도달해서 막 그곳의 여러 마을을 수색하고 있고, 또 한 대열의 1백 5, 60명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을 거쳐 고령(高靈)의 뒤로 향했는데 역시 그 후에 간 곳은 모르겠습니다. 또 흩어진 왜적 □3명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몰래 금산(金山)에 도착하자 우도의 방어사가 접전했는데 아군이 무너져 달아난 후 간 곳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이 어느 길로 해서 올라갈 계획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의 경조(慶州) 길로 해서 가는 왜적이 올라갈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한 번 변이 일어난 후로는 여러 고을이 텅 비고 도로는 끊기고 막히고 하여, 한 장의 소식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왜선 20척이 부산포(釜山浦)를 떠나 이미 거제도(巨濟島)에 도달했는데, 우수사와 전라 좌수사가 지금 그를 공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왜적이 가는 곳마다 젊은 남자는 모두 목 베고, 늙은이와 어린이 및 여인은 죽이지 않으나 예쁜 여자와 여염집에서 훔친 물건은 소와 말에 실려서 길에 연달아 있습니다. 싣고 가는 소와 말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끌고 가게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자기 무리로 삼은 것이 태반이나 됩니다. 이 밖에 소소한 행동을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 어렵기에 대강 써 보냅니다. 운운.” 하다.
○ 우도의 왜적이 호서(湖西)로 들어가 황간(黃澗)ㆍ청산(靑山) 등의 고을을 불태우다. 이 길의 왜적은 그 수효가 사실 적어서 양호(兩湖)의 군사로 넉넉히 막아낼 수 있었는데,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멀리서 왜적을 바라보고는 먼저 무너졌다. 비록 적군은 정예하고 아군은 둔하다고 하나, 사실은 장병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깝다, 양호의 허다한 고을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었던가.
○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서쪽으로 명 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우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元)을 보내어 평안도ㆍ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또 대신에게 명해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와 국무의 중대한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게 하였다. 대신 유홍(兪泓)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 흔들리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곧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 볼 계획하에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경기의 남은 장정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備邊司)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독려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아깝다! 2백 년 동안 휴양한 끝에 어찌하여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흉악한 왜적의 무리에게까지도 부끄럽다.
29일.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昌)에서 함양(咸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2백 년이나 길러온 그 속에 충신과 의사(義士) 없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는, 밤중에 중전과 함께 여러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서 서울을 떠나서 아침에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도중에 비를 만나 곤룡포는 다 젖었고, 동네가 텅 비어 팔진미(八珍味) 식사도 궐한 채 장단(長湍)으로 달려갔으나, 부사는 이미 도망했고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사람이라곤 없어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로 향하다. 이때에 편히 살며 침식(寢食)하는 백성들은 어찌하여 충의심을 일으키어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 이날 같은 전례없는 비통을 남겼단 말이냐!
○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金山) 땅에 이르자 본도 우방어사 조경(趙儆) 등이 와 합세하여 금천역(金泉驛)에 이르러 왜적 5급(級)을 베었다. 이어 군(郡) 내에 잔류한 왜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전진 포위하여 잡아 30여 급을 목 베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50여 명이었다. 곽영이 곧 전라도에 돌아와서 막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 전라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향했다가 곧 전라도로 돌아가다. 애초에 선전관이 서울에서 본진(本陣 즉 전라도에 있는 이유의의 진을 말함)에 와서 교지를 전하기를,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달려가서 신립(申砬)의 지휘를 받아라.” 하였다. 이유의가 어명을 받고 연산(連山)까지 갔었지만 신립이 이미 패하여 왜적이 경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끌고 돌아간 것이다.
○ 왜적이 우리나라 장병이 잘 무너짐을 알자, 소수의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위험성에 대한 의구심도 갖지 않아 혹은 10여 명, 혹은 5, 6명으로 패를 지어 마구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다.
5월 1일. 흉악한 왜적이 경기도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龍仁)ㆍ수원(水原)ㆍ광주(廣州)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리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경내(京內)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개유첩(開諭帖)을 내리기를, “듣자니, 민간인들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키며 다들 다른 데로 피해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나, 호남과 영남 사이에 높은 산과 큰 개울이 있으니 졸지에 닥쳐올 근심은 전연 없다. 더구나 지금 경상 우수사가 왜적을 많이 잡아 승세(勝勢)가 크게 떨치고 있으니, 각기 마음을 놓고 생업에 안정하여 서로 경동(驚動)하지 말고 함께 농사일에나 힘써라.” 하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고 내가 본부, 즉 남원에 있었기 때문에 호남ㆍ영남 및 본부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퍽 상세한 것이다.
2일.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漢濱]ㆍ광나루[廣津]ㆍ마전(麻田)ㆍ사평(沙平)ㆍ동작(銅雀) 등처에서 일시에 떼[桴]를 타고 마구 건너왔는데,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배리(陪吏)가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 5일의 거리가 된다.
○ 거가(車駕)가 송도(松都)에 이르자 잠시 멈추고 김명원(金命元)에게 명해서 임진강(臨津江)을 차단하게 하고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을 방면하여 좌ㆍ우의정을 시켰으며,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벌을 받았던 것이다. 교지를 내려 호남과 영남의 군사를 소집하다. 교지는 아래 14일 조에 있다.
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과 좌수사 박홍(朴泓)이 각각 우후(虞候)들을 거느리고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 풍기 군수(豐基郡守) 윤극임(尹克任), 예천 군수(醴泉郡守) 변양우(邊良祐) 등과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갔는데, 그 후 원수(元帥)가 임진강에서 이각을 목 베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있다고 여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낸 서한에,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애통하고 절박한 취지로 격문을 띄워가지고 사방의 충의있는 동지를 불러 유시하여 지체없이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씻기나 바라야겠습니다만, 격문의 말이 만약 간절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길이 없으니 격문을 거칠고 엉성하게 지어서는 안 됩니다. 격문을 지으셔서 속히 보여주기를 감히 바랍니다. 오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갓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또 이 뜻을 사중(士重)김천일(金千鎰)의 자(字)이다. 등의 제공(諸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다.
○ 고경명이 이광에게 보낸 답서에,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매일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방금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이 속태우고 있는 가운데 귀하의 글월을 지금 받았습니다만, 끝까지 다 펴 읽기도 전에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군요. 저 경명은 쇠병(衰病)으로 여생을 밭[田] 사이에 묻고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위로는 행장(行裝)을 갖추고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문안드리지 못하고 또 막부(幕府)로 가서 군사 계획을 곁에서 돕지도 못하니, 근심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모르며, 한 번 죽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말씀하신 격문은 제가 비록 오랫동안 글 짓는 일에서 손을 떼었지만, 의리상 감히 피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이에 지어 보내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말의 조리가 엉성하여, 귀하께서 말씀하신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창도하여 거병(擧兵)하게 하라는 취지를 선양할 길이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다만 저 경명이 월초(月初)부터 이 고을 동부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지금 귀하의 글월을 보니, 3일에 낸 것인데 6일에야 군졸이 빈 집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늦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늦어서 일에 맞춰 쓰이지 못할까 무척 근심하고 있습니다. 구구한 제 심정을 망령되이 진술할 것이 있어 별지(別紙)에 기록했습니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귀하는 못난 이 사람이라 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 충의의 뜻을 넓히시어 과연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게 하십시오. 김사중(金士重)이 마침 편지를 보내왔기에 귀하의 뜻을 갖추어 전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운운. 나머지는 마음이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하고, 또 별지에, “오늘의 할 일 중엔 군대를 길러서 근왕(勤王)하는 것이 첫째 가는 충의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횡포한 왜적의 침범은 물론 그 소요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끝없이 군사를 불러 모은다면 백성들은 더욱 그들의 생업에 안정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이르기를, ‘군사는 정예하기에 힘쓰지, 많기에 힘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잘만 쓴다면 지금 있는 군사로도 넉넉히 승리를 거둘 것이고, 만약 잘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리고 나라의 일이 날로 빗나갈 뿐입니다.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셨는데, 기성(箕城 평양을 두고 한 말임)이 피폐하여, 백관과 유사(有司)의 수요를 공급해 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대관들의 식사 공급까지도 한심스럽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산(君山)이 세미(稅米)를 바치러 강에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법성(法聖)의 창고도 양곡을 실은 배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많은 상을 내걸고 조졸(漕卒)을 후하게 모집하고 서해로 배를 몰아서 대동강의 나루에 도달하게 해서, 가령 그 반만이라도 행재소(行在所)까지 보낼 수 있다면 비단 군대와 국가의 수요가 그 덕으로 충족될 뿐 아니라 사방의 인심까지도 역시 그것이 힘이 되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왜적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서 천 리를 전진하며 전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로 하여금 외람되이 서울을 점거하게 하여 육로가 이미 막혔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바닷길들은 그래도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이번에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평상시의 사례처럼 못난 말석의 용렬한 장수 따위나 억지로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한다면 의외의 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으로 배질에 능통한 자를 뽑아가지고 정예한 군졸을 정해 주어 일면으로는 싸우고 일면으론 나아가는 계획을 행하게 한다면 군량이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도(行都) 군사들의 사기 역시 조금은 진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민심이 소란하여 군사 모으기가 쉽지 않으니, 서둘러 조치해서 조졸(漕卒)만을 시켜서 전례대로 가지고 가게 하는 것도 혹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흘 정도나 지연되는 경우 저들 왜적이 약탈해 갈 생각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호령이 군중에 이르지 않고 사방의 소식이 행도에 도달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만약 중한 값으로 보자기[鮑作]를 후히 모집해서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고 납서(蠟書)를 전달하게 하여 무사히 갔다 오면 관자(官資)에 보직(補職)해 주거나 혹은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주는 두 가지 중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해 주고, 또 그 처자를 관□에 데려다 놓고 그가 돌아올 동안을 기한으로 매일 보통 지급하는 양보다 배가 되는 주식(酒食)을 지급해 주어, 밖으로 구휼하고 양육해 주는 은혜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붙들어 두는 계획을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방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게 되면, 요는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해야 하는 것이니 대군은 곧장 탄탄한 길로 해서 진격하고 기병(奇兵)은 간간이 바닷길로 나아가, 왜적들로 하여금 앞뒤로 적(敵)을 맡게 하여 빠른 우레에 귀를 가릴 사이가 없듯 공격한다면 이는 또한 병가(兵家)에서 쓰는 기정(奇正)의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父老)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다. 아! 조그마한 왜적들이 독하기론 벌과 전갈이 모인 듯하고, 천성은 뱀을 타고났도다. 그들은 음흉하게도 중국을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석륵(石勒)의 도적들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듯 쳐들어왔으니 종묘 사직의 수치가 한이 없고, 말갈(靺鞨 원문은 몰갈(沒喝))의 군대가 강가에 머무르려 하듯 한강에 임했으니 조정의 근심 또한 한정이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밤낮으로 애통한 조서(詔書)가 내리고 산과 강에 기도하는 정성을 드리게 되었으니, 온 땅끝까지의 피를 지닌 우리 모든 사람이 마음을 썩히며 팔를 걷고 나서야 할 일인 것이다. 누군들 주먹에 힘을 주고 창을 휘두르지 않겠는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비록 서로 돕는 힘을 잃었다지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근왕(勤王)하는 충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차마 원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전례 없는 치욕을 씻기 바라는 바이다. 관운장(關雲長)ㆍ장비(張飛)와 같은 맹장들이 범처럼 무섭고, 매가 공격하듯이 날랜 용사들은 숲과 같이 많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中原)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할 젠 간담이 말[斗]같이 컸고, 장숙야(張叔夜)가 들어가 경락(京洛)을 구원하였을 땐 눈물이 은하수를 매단 것 같았다. 범을 그리고 용을 그린 기[虎旌 龍旌]로 장막 위에서 제비 둥우리를 쓸어버리듯 하고, 사모(蛇矛)와 월극(月戟)으로 솥 속에서 노는 물고기를 잡듯 하길 기대한다. 너희들 호남은 본래 예의의 지방으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실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모두 질풍(疾風) 앞의 억센 풀[勁草]같이 굳은 절개를 나타내고 함께 변란기의 충신이 되어 다오. 그리고 우리 왕실이 2백 년 동안 길러 준 은덕을 생각하고, 너희들 억만 인의 강개에 찬 뜻을 한결같이 하여라.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를 위해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하며, 대의(大義)를 무기로 앞장서서는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아 적의 수레바퀴 한 짝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대(一代)에 공이 높았던 충갑(冲甲) 성은 원(元)이다. 고려 때 사람인데, 필부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다. 아니면 후손에까지 은택을 미치게 했던 차달(車達)성은 유(柳)이다. 고려 때의 문화(文化) 사람이다. 난에 임하여 양곡이 모자라자, 차달이 수레를 가지고 개인의 양곡을 운반해다 군에 보급해 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차달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녹훈(錄勳)하다. 만 못하다 하겠는가. 몸을 국가에 바치도록 권면하여 절조를 지키고 죽을 힘을 다하기를 기약할 것이요, 왜적 때문에 군부(君父)를 버리지 말고 힘을 다하고 목숨 버릴 것을 맹세하라. 격문이 도달하거든, 각각 충의로써 권면하여 장부들을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오라.” 하다. 이광(李洸)은 애초에 왜적이 서울 등지에까지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역한 군사들의 유언비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방백의 신분으로는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 및 관대(冠帶)를 전주(全州)의 진전(眞殿)에 모아 두고는 고부(古阜)의 자기 본가로 피해 가다. 대중의 여론이 시끄럽게 일어나 그를 허물하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다시 군대를 맡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할 때 왜적의 소식이 희미하매, 본국의 역적이 왜적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퍽 많다.
○ 이광이 영남의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내다.
우리 국가는 13대에 걸쳐 태만한 일도 없었고 황음(荒淫)한 일도 없어서 도덕을 잃지 않았고, 2백 년 동안 가는 사람 좇지도 오는 사람 막지도 않아서 전쟁을 일삼지 않았으며, 조심스러이 강토를 지키며 세심하게 준비를 해왔다. 근자에 추한 오랑캐[醜虞 왜인을 말함]가 성의를 표해 오기로 성군(聖君)의 포용있는 도량을 약간 보여주었고 조정은 그들을 회유할 셈으로 그들의 말을 경솔하게 신용하였더니, 오랑캐의 마음이란 흉악하기 짝이 없어 마침내 의리를 배반한 음모를 구사하여 독사가 물듯이 악독한 마음을 앞다투어 내고 벌과 전갈 같은 독을 함부로 쏘아 우리 장병을 살해한 것이 만이나 천 이상이었고, 우리 성을 함몰시킨 것도 어찌 수십으로 헤아릴 정도이겠는가. 안진경(顔眞卿)의, “본 적이 없다.” 한 말과 양만석(楊萬石)의, “어찌 그리 많으냐.”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요, 유총(劉聰)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자 진실(晉室)의 위태로움이 다급하여지고, 말갈[沒喝]이 하상(河上)에 들어오자 송조(宋朝)의 치욕이 말할 수 없이 되었던 그 일에나 견줄 수 있겠나. 왜적의 죄는 이미 하늘까지 치닫아 귀신의 음주(陰誅)가 이미 의정(議定)된지라, 그들은 패하여 반드시 그 피를 땅에 칠하리니 우리 군사의 현륙(顯戮)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충의를 무기로 삼는 삼군(三軍)으로 배성의 일전[背城之一戰]을 결행하려는 터에 누가 동창의 계교[東窓之計]를 내세우고, 서촉(西蜀)으로의 피란을 서둘러 권했단 말이냐. 깃발이 보일락 말락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금 가마는 서리와 이슬에 젖었고, 처량하게 봉상(鳳翔)에 머무는 옥 수레에는 바람과 먼지가 날린다. 강(江) 위에 정정당당하던 우리 군사들은 물결처럼 달아나고 새같이 흩어졌으며, 서울 안의 높고 낮은 집들은 연기에 싸이고 구름 속에 잠겼다. 부고(府庫)의 정책은 소연(蕭然)하고 곳집에 저축해 둔 곡식은 몽땅 없어졌다.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시대의 형편인지라 어찌 하리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한 일에서 그 의분을 상상할 수 있거니와 장숙야(張叔夜)가 서울에 들어가 방위하였음은 충의심을 쏟은 것이다. 평탄하건 험악하건 언제든지 함께 힘을 다해 목숨을 바치기를 꾀해야 할 일이건만 위태롭고 모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함께 하늘을 이고 구차하게 안일을 구하겠는가. 나 이광(李洸)은 재질이 예악의 고장에 노닐 사람이 못 되지만, 잘못 시서(詩書)의 장수로 임명을 받아, 두 차례나 방면(方面)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매, 늘 나라만이 있을 뿐이라는 충성심을 품어 왔었다. 이에 이성(李晟 당 나라 때 충용을 겸비한 인물)의 충성을 다해서 정전(鄭畋 당 나라 말년 황소(黃巢)의 난을 수습한 인물)의 격문을 전한다. 심히 애통하고 심히 급히 급하니, 어찌 허수하게 하며 느긋하게 할 일이겠는가. 설경선(薛景仙)은 나룻길로 해서 먼저 공물(貢物)을 상납한 후 의병을 일으켰고, 한세충(韓世忠 송(宋)의 명장(名將))은 바닷길로 해서 행영(行營)으로 가 경기 지방을 회복하고자 바람에 날리는 깃발로 치는 호령에 산악 같은 위엄으로 강남을 번개같이 떠나서는 한강 북안을 무섭게 바라본다. 장군이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우니, 누군들 주먹을 불끈 쥐고 적장의 기를 뽑으려 하지 않겠는가. 병졸은 노숙(露宿)을 하면서 모두 쓸개를 핥듯 복수를 다짐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적을 쳐부수길 원하고 있다. 만약 선수를 잡는 기회를 잃는다면 뒷수습을 잘하려는 계획은 크게 어긋날 것이다. 공(公)들은 다 임금의 고굉(股肱)이 될 좋은 자질을 가진 몸으로 모두 번진(藩鎭)에 처하고 있고, 함께 문화를 숭상하는 시대에 나서 어찌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정성을 떨치지 않으리오. 임금의 능에 경건히 참배하여 조종의 수치를 시원하게 씻고, 거가(車駕)를 공손히 맞아 부로(父老)들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라. 불을 지펴 털을 사르듯 하기를 기약할 것이며, 태산을 들어 새알을 짓누르듯 할 것을 맹세하라. 아울러 천지에 빌어 청룡도(靑龍刀)로 의지(義智)의 머리를 자르고, 함께 산천에 맹세하여 적토마(赤兎馬)로 현소(玄蘇)의 피를 밟아라. 만약 머뭇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져 의병 징발에 기회를 놓친다면 천지의 신(神)에게 부끄럽고, 백 대를 두고 죄를 짓게 될 것이니, 그러고야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지의 사이에 서겠는가. 아! 서관(西關) 하늘 끝으로 파천하시매, 북극성도 제자릴 옮겼도다. 가슴을 쳐도 그 슬픔 한이 없고, 분연히 날아가려 한들 길이 없다. 우리 호남ㆍ호서와 영동ㆍ영북의 모두는 멀고 가깝고를 물을 것 없이 계속 비휴(豼貅)같은 군사들을 일제히 몰고 가서 저곳 이곳에서 속속 앞뒤로 곧장 두들겨 대어, 천지에 가득찬 요망한 기운을 거두어 버리고 확청(廓淸)의 공을 이룩하게 하라. 왜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의심을 떨치고 나아가 왜적 토벌하기를 기할 것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이지 달아나서 목숨을 살려 치욕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기를 바란다.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관서(關西)의 노상에서 겪은 곤고(困苦)를 신민으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식사를 올리지 못해 촌 여인이 울면서 조밥을 드렸다. 임금이 그것을 드시고 이르기를, “이 맛은 팔진미보다 낫다. 조의 귀중함이 이와 같구나, 이와 같아.” 하였다. 또 하루는 비가 심해 갈 수가 없어서 길가 촌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은 방앗간[杵室]에 들고, 신하들 거가를 호종한 자가 10여 명이었다.은 빗속에 엎드려 종일 굶주렸다.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 농사일을 장려하여 우리를 먹여준 군부(君父)가 여러 차례 궐선(闕膳)하기까지 하는 비참한 지경을 당했고, 세심하게 백성을 다스린 임금이 마침내 궂은 비에 괴로움을 당했으니, 이 적이야말로 만세를 두고도 잊을 수 없거든, 이 몸 한 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신민된 자로서 비록 서쪽으로 퇴각하는 데에 달려가서 목숨을 바치지는 못하였더라도, 마땅히 동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어야 할 것이다.
4일. 영남 초유사 김 성일(金誠一)이 남원(南原)에 도착하다. 김성일이 애초에 체포한다는 어명에 따라 직산(稷山)까지 갔으나 사면을 받고 도로 초유사의 책임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조정이 서쪽으로 옮겼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돌아오다. 호남과 호서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충청도의 내로(內路)로 해서 내려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이광(李洸)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왜적이 서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징을 울려 군대를 퇴각시키니 육군(六軍)이 무너져 돌아오다. 그때 곽영(郭嶸)은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종사관 이용순(李用諄)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으로부터 돌아와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다.
○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니, 우도의 왜적들 중에는 소문을 듣고 철거한 자들이 퍽 많았다. 곽재우가 정진(鼎津)에 진을 치고 낙동강 연변의 왜적을 추적해서 잡았다.
5일. 영남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咸陽)으로 향하고, 본도 도순찰사 김수(金睟)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운봉(雲峯)으로 가는데, 도중에 초유사를 만났다. 초유사가 말하기를, “지방을 맡은 신하라면 마땅히 맡은 지방을 사수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이오. 온 도를 다 잃으면서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단기(單騎)로 멀리 와봤자 무슨 구제할 길이 있겠소. 원컨대, 영공(令公)은 속히 돌아가시오.” 하매, 김수가 함양으로 돌아갔다가 이어 안음(安陰)으로 갔다. 김성일이 함양에 도달하니, 군수 이각(李覺)이 홀로 빈 관아에 앉아 있는데 다만 늙은 아전 수 명이 있을 뿐이었다. 김성일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자, 함안의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다 모여들었다. 김성일이 그 자리에서 격문을 아래와 같이 기초하다.
초유사는 도내의 수령, 변장(邊將), 문ㆍ무 출신의 부로(父老) 자제와 한량(閑良),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하노라. 국운이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외람되이 발동하여 나라 땅에서 마구 날뛰고 동서로 충돌하면서 웅장한 성과 큰 진(鎭)도 아랑곳없이 함락시켜 버리고,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미 관령(關嶺)을 넘고 곧장 서울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임금은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이 도망쳐 달아나니, 이 동방의 나라가 생긴 이래로 오랑캐 화(禍)의 참혹하기가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다. 여러 병사(兵使)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 어떤 자는 풍문만을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고 어떤 자는 겁을 집어 먹고 움츠리기만 하며, 또 수령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이건만 모두 처자를 이사시키고 무기고를 태워 버려서는, 한 사람도 의를 지켜 굽히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또 무엇을 믿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겠는가. 미친 파도가 마구 몰려오듯 하여 막아낼 수가 없으매, 성마다 창을 멘 병졸이 없고 읍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신하가 없다. 그리하여 왜적이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하여 마침내 영남 한 도를 왜적의 굴혈로 만들었고,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하여 아침 저녁 동안도 지켜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갓 변장과 수령의 허물뿐이겠는가. 군사와 백성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큰 변란을 당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싸울 뜻을 지녔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이 오기도 전에 군사와 백성이 앞장서서 달아나 산림 속에 잠복하고는 구차스럽게 살아남을 계획이나 함으로써 백성이 없는 수령과 군사 없는 장수를 만들었으니, 앞으로 누구와 함께 적을 방어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싸울 때 유사(有司)로서 죽은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지만 백성은 그들을 위해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노약(老弱)한 백성들이 구렁에 빠져 죽어도 유사들이 그들의 고난을 구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도망쳐 무너지기만 하는 이 변은 맹자(孟子)가 말한, 「너한테서 나온 것이 너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한 그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 그것이 무슨 말인가. 최근 몇 년 동안 부세(賦稅)가 중했고 부역이 많아서 백성은 과연 명령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지(城池)의 방비 기구(器具)는 모두 불의의 변에도 대비할 만큼 보전되어 있었으니, 지금 와서 볼 때 성스러운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려던 생각이 원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백성을 학대해서 자신의 이(利)나 꾀한 것이었겠는가. 하물며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이 비록 승부는 있었으나, 같은 중국(中國)이었기 때문에 백성에게는 별 이해(利害)가 없다. 그러나 이 이[齒]에 물들인 무리는 우리 땅에 들어오자, 곧 차지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처첩으로 삼고 장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하였으며, 마을을 습격하여 깡그리 불태웠고 공사(公私)의 소장품(所藏品)을 다 그자들의 소유로 하여, 그 해독이 사방에 두루하였고 피가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의 화(禍)는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지사(志士)가 창을 베고 잠을 자야 할 때이며,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67주(州) 가운데 여지껏 충의를 부르짖으며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도망쳐 살아나는 데 있어서 혹시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하는 일이나 또는 입산(入山)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만을 염려하니, 어찌 이루 개탄할 수 있겠는가. 설사 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해서 끝내 자기 몸과 집안을 보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그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거든, 하물며 보전할 도리가 만무한 경우에 있어서랴. 본관은 이 점을 철저하게 구명해서 군사와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리라. 이 왜적은 서울을 범하는 데 마음이 급하여 군사를 지체하지 않고 가기 때문에 그 피해가 모든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적이 뜻을 이룬 후, 그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충만하게 되면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하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테면 홍수의 흐름이 하늘에 치닿고 무서운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 할 터인데, 아! 우리 억만의 생령(生靈)이 또 어느 곳에 몸을 둘 것인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감에 따라 양식이 떨어져 다들 깊은 산 속의 시체가 될 것이고, 나온다 해도 부모 처자는 그자들의 포로가 되는 곤욕을 당할 것이다. 의관을 갖춘 사족(士族)들은 그자들의 어육(魚肉)이 되어서, 항복하면 영원히 효경(梟獍)의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칼 맞아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런 일이야 어찌 지혜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사생(死生)만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이다. 아! 군신 간의 대의(大義)는 하늘의 법도요 땅의 도리니, 이른바 백성의 떳떳한 양성(良性)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혈기가 있고 곡식을 먹는 우리들로서, 임금이 몽진(蒙塵)하고 종묘 사직이 전복되려 하며 만백성이 어육으로 문드러지듯 하는 것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조금도 근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하늘의 법도와 땅의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왜적의 칼을 맞고 골육이 서로 보전되지 못하여 개인적인 가문의 화(禍) 역시 참혹할 것이니, 자제 된 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쥐같이 달아나기나 하고 만 번이라도 죽을 힘을 내어 부모 보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 된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다만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고장으로 1천 년의 신라, 5백 년의 고려, 그리고 우리 조정의 2백 년 동안 충신과 효자의 뛰어난 명성과 의열(義烈)이 청사(靑史)에 빛나고 절조와 의리의 아름다운 습속이 동방에서 첫째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이다. 근자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퇴계(退溪)ㆍ남명(南溟 조식(曹植)의 호)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道學)을 제창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사람의 기강(紀綱)을 바로잡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자, 선비들도 그 감화에 점점 물들어 사숙(私淑)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또 평소엔 허다한 성현의 책들을 읽어 그 얼마나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더냐.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오직 살 길이나 탐내고 죽음을 회피하는 일만을 서둘러,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돌리는 죄악에 스스로 빠져 버리니 구차스러이 세상에 산다 한들 어떻게 머리로 하늘을 이고 살고, 지하에 죽어 가서도 또한 어떻게 우리 선대(先代)의 현자(賢者)들을 뵈올 것인가. 의관을 차리고 예악을 숭상하던 몸을 욕되게 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 놓는 습속을 따를 수 있겠는가.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산천을 차마 왜적의 굴혈로 둘 수 있겠는가. 중화(中華)가 변하여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으며 또 할 수 있겠는가.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것을 으뜸가는 공로로 삼는 진(秦) 나라도 처음에는 순전한 이적(夷狄)은 아니었건만, 노중련(魯仲連)은 오히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풀로 엮은 옷을 입고 꿈틀거리는 섬 오랑캐가 얼마나 추잡한 종자인데, 그자들이 우리 땅을 훔쳐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욕보이는 대로 내버려만 두고, 그자들을 몰아내고 목 베어 죽일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자들은 용맹스러운데 우리는 겁이 많고, 저자들은 예리한데 우리는 둔하니 비록 군사를 일으켜도 성사할 수 없다.” 하니, 아! 그렇게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성패로 인하여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 때문에 지기(志氣)가 꺾이지 않아,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빈 주먹을 버티며 흰 칼날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 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병법의 금기(禁忌)를 범한 것이다.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들이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나, 용맹하거나 겁많은 것이 어찌 고정된 것이겠는가. 충의에 격동되면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단지 마음을 한 번 돌리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보건대, 도망치거나 무너진 졸병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깔려 있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비록 몸을 도망쳐서 살기를 바랐다가도 마침내 한 번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 바치려고 생각할 것이나, 다만 솔선하여 부르짖는 사람이 아직 없었을 뿐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의 의사(義士)만이라도 분발하고 일어나 한 번 외치기만 한다면 원근의 장정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같이 호응해 올 것은 가만히 앉아서도 획책할 수 있는 일이다. 성상(聖上)께서 이미 애통한 교서(敎書)를 내렸으며, 또 이 소신(小臣)을 못난이로 여기지 않고 초유(招諭)하는 책임까지 맡기셨다. 당(唐) 나라 때의 씩씩한 무부와 표한(剽悍)한 병졸도 흥원(興元 당 덕종(唐德宗)의 제2 연호, 서기784)년에 덕종이 이회광(李懷光)의 반란 때 내린 조서에 울었거늘, 하물며 추로(鄒魯)의 공자와 맹자의 교훈을 받드는 우리 군사들이 어찌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차 임금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나가지 않겠는가. 진실로 원하건대, 이 격문이 도달하는 날에 수령은 온 고을의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알려주고, 변장(邊將)은 장병들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문무(文武)의 조관(朝官)과 부로(父老)ㆍ유생(儒生) 등은 각각 서로 정해서 일러주어 동지들을 불러 모아서 의열(義烈)로 격려하여 혹은 마을을 보호하여 스스로 지키고, 혹은 군사를 끌고 전투를 도와야 할 것이다. 부유한 백성은 차달(車達)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군사들의 식량을 보급해 주고, 용맹한 군사는 충갑(冲甲)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왜적을 죽이도록 하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 전투에 임하기 위해 일시에 다 일어나면 아군의 성세가 크게 떨치고 사기가 백 배 되어 호미자루 창자루도 예리한 무기가 될 것이니, 아무리 왜적의 긴 창과 큰 칼인들 또 무엇이 무서울 게 있겠는가.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치욕을 씻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리 있는 귀신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니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본관은 한 부유(腐儒)인지라 비록 군사에 관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 군신 간의 대의는 그래도 대강 들었다. 한 도가 다 결딴이 난 후에 임명을 받아, 초(楚) 나라를 보존시킬 마음은 간절하면서 아직 포서(包胥)의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고, 사당[廟]에 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은 장순(張巡)의 의열(義烈)을 사모한 것일 뿐이니 오히려 의사들의 힘에 의뢰하여 해[日]를 취(取)하는 공을 이루기 바라고 있다. 조정의 포상 제도가 뒤에 있으니, 다들 잘 알지어다. 애초에 김성일이 문사(文士)를 시켜 격문을 기초하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가 지었는데, 말이 감격에서 우러나 붓을 먹물에 적실 사이도 없이 단숨에 써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륵(金玏)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지금 영남의 부(府)ㆍ진(鎭)이 연이어 왜적에게 함락된 것은 한 도의 병력이 적어서가 아니다. 다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서 와해(瓦解)되기에 이른 것이니, 그들의 본의야 어찌 항복해서 왜적에게 부동(附同)하려고 한 것이었겠느냐. 만약 식견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똑하게 효유(曉諭)하고 충의로써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며 또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관군(官軍)에 협력하여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제할 길이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원충갑(元冲甲)은 한낱 필부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적을 꺾어 물리쳤으니 그것이 한 가지 좋은 전례다. 행상호군(行上護軍) 김륵을 본도에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원근의 백성들을 두루 효유하고 충의로운 군사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목숨을 바쳐 근왕(勤王)하게 하노라.” 하다. 김륵은 경상도 영천(榮川) 사람이니, 그는 사잇길로 해서 영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모병통문(募兵通文)하다. 처음에 경상도 함안(咸安) 출신의 문신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서울에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 본도에 달려 돌아왔다. 조종도가 이노에게 말하기를, “우린 고향 땅에 들어가면 의병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일 성사하지 못한다면 동지들과 물에 빠져 죽을 망정 의리상 왜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이번에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었다. 다음 글은 의병을 모집하는 글이다. 임금의 고통을 급한 일로 여겨서 이적(夷狄)의 화(禍)를 물리치는 것은 충의(忠義) 중에서도 급선무요, 국가의 위기에 관하여 도모하여서 생사(生死)의 근심을 잊음은 정절(貞節) 중에서도 큰 것이다.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하여 사람이 되고, 다같은 백성 중에서 뛰어나 선비가 된다. 왜 영묘하다 하는가? 사람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알기 때문이다. 왜 뛰어나다고 하는가? 선비는 의(義)와 이(利)의 향배(向背)를 분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나는 것을 먹고 살았으면 모두 신하이지, 어찌 많은 녹을 먹은 자만이 죽어야 하겠는가. 요량없는 비여(匪茹 자신을 요량하지 않는다는 뜻)로 적이 태원(太原)까지 왔던 일은 옛날에 어쩌다 있었던 일이라 하겠거니와, 곧장 서울에 침범하기론 이번의 일이 가장 극심하다. 임금은 파천하여 어디서 바람과 이슬에 시달리고 계신지 막연하고, 종묘 사직이 진동하여 놀랐으니 신령이 어디에 의지해서 오르내리시는지 슬프구나. 쥐같이 달아나고 새같이 숨어 거의가 다 임익(林翼)같이 창[戈]을 버렸고, 애첩을 죽이고 말을 잡아 먹어 장순(張巡)같이 결사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다 함은 들어보질 못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냐. 이는 실로 사람의 도리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일이다. 2백 년 동안이나 길러온 보람이 어디에 있는가. 60주(州)의 충의가 쓸은 듯이 없어졌다. 광야에 울어도 돌아갈 곳이 없고, 백일하에 고개를 들자니 낯이 없도다. 부모가 병이 들었는데 어찌 운명에만 맡겨 약을 쓰지 않으리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어도 혹 하늘에 힘입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이 비록 싫지만 천지에 그물이 쳐 있으니 도망갈 길 없고, 살 길을 설사 구차하게 얻고 싶어도 개 돼지 틈에서야 차마 살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같을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 감히 살기를 바라는가. 인(仁)에 생명을 버려라. 나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면 편안할 수 있겠으며, 까까머리 되고 이[齒]에 물들이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관군은 도망쳐 형벌을 겁내고 나오지 않으니, 의병이 힘차게 움직여 충의심을 떨치고 앞다투어 와주기를 바란다. 하물며 주상(主上)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시던 날에 애통하고 간절한 교서를 내리고, 따로 목숨을 바치는 신하를 골라서 특히 초유사로 보내셨다. 윤음(綸音)이 내리자 듣는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성유(星諭 초유사의 격문(檄文))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응당 목숨 바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실로 바라거니와, 여러 군자들은 글을 읽어 평소 모두 나라에 보답할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니, 위급한 이때에 임하여 의당 임금을 위해 죽는 절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각기 부형들을 권면하고 자제들을 격려하며, 이웃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며 노복들을 격려하여 거느리되, 혹은 활과 화살을 혹은 칼을 차고서 단결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세차게 용기를 고무하여 이 초유에 부응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 어찌 나라만의 다행한 일이리오. 각 개인에 있어서도 문 앞의 원수를 없애는 일인 것이다. 한편 군대를 탈영하여 피해 숨은 자들까지도 모두 스스로 나타나 모일 것인즉, 그들에 있어서도 비단 전날의 죄가 다 용서될 뿐더러 회복된 후의 포상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다시 바라는 바는, 그들을 십분 타일러서 역(逆)과 순(順)에 화복이 매었음을 알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천만 다행한 일인가 한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살아서는 씩씩한 사나이가 될 것이고 죽어서도 빛나는 혼이 될 것이며, 장사지낼 땐 포신(鮑信)의 형상을 새기게 될 것이고 능(陵)에는 방덕(龐德)의 형상을 그리게 될 것이니, 연약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강개하게 죽는 것이 어떠한가. 만약 의병의 근왕(勤王)으로 말미암아 하늘 길이 다시 맑아짐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의병으로 나섰다고 해서 반드시 다 죽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장차 함께 중흥(中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땅히 각각 힘쓸지어다. 아!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양성(良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기강(紀綱)인들 어찌 영원히 떨어지겠는가. 이 한 장의 통고문을 보면 반드시 천 번이나 기절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조종도 등이 쓰다. 그 후 정유년(1597, 선조 30)에 조종도는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으니, 그가, “차라리 의에 죽어야 한다.” 한 처음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장수 평청정(平淸正)ㆍ평행장(平行長) 등이 서울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출발하다. 애초엔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군사를 8부(部)로 나누었는데, 1부의 무리가 거의 10여만 명에 달했고 총대장(總大將)은 각각 4,5 명으로 해서 우리나라 8도를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북방은 군사의 비결에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운 자를 택하여 함경도로 보냈던 바 평청정이 그를 맡은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수길 등은 서울에 머물러 주둔한 채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가 있었고 평청정 등은 서울에서 동쪽 길을 잡아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했는데, 이들이 지나 가는 곳은 적지(赤地)가 되어 천 리를 가도 사람 사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평행장ㆍ평의지(平義智) 등은 서울에서 서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는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신길(申硈)을 중군(中軍)의 장군으로 삼고 이빈(李薲)과 이천(李薦)을 좌우의 장군으로 삼아 임진(臨津)에서 방어하다.
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
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
○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군졸을 토벌하려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원 판관 노종령을 시켜 달려가 실정을 탐지케 했는데, 김예국(金禮國)이 이미 조인(趙仁) 등을 잡아서 죽여 버렸는지라,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부쳤다.
○ 김성일(金城一)이 함양(咸陽)으로부터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현감 김낙(金洛)이 김성일에게 환아정(換鵝亭)에 사관(舍館)을 정해 주고 다반상[茶盤]을 대단스럽게 차려드렸다. 그러나 김성일이 변색을 하고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 같은 성찬은 신하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다 해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하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산음현 사람 오장(吳長),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 등이 모두 칼을 집고 김성일을 찾아뵈니,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기를, “제군이 은근하게 찾아왔으니 반드시 기이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하였다. 김경근이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대의를 펴고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성일이 웃으면서, “부질없는 소릴.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한다.” 하였다. 김낙이 군사를 모았는데 8백여 명에 달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흉악한 왜적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지를 불태워 재물을 없애버리니, 본도 우수사 원 균(元均)이 퇴각하여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의 수군에 구원을 청하다. 적병이 진주(晉州)로 향한다고 떠들썩하자,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에 숨어 피하였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본주(本州 즉 진주)에 달려가니, 경내(境內)는 싹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나오라 했는데, 이경은 등창이 발작하여 죽었다.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영을 내려, 수천 명의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 쳐서 쫓으니 왜적이 곧 퇴각하였다. 다시 군사를 나누어 사천의 성 밑까지 진격해 들어가서는 그들의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자, 왜적은 퇴각하여 고성으로 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하여 생원(生員) 한계(韓誡)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하여 고성의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합병(合兵)해 가지고 혹은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매복했다가 야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 웅천(熊川)ㆍ김해(金海) 등지로 향하였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들어가서 진을 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각 도 사림(士林)들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다. 이때부터 국가의 명맥에 활발한 기세를 얼마간 떨치게 되었다.
○ 경기 감사 권징(權澄)의 통서(通書)에,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에 온 것은 실은 모반한 백성들이 군사를 청한 데서였다. 그런데 수길(秀吉)에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모반한 백성들이 번번이 억눌리고 깎여 내리게 되자 분한 마음을 품게 되어 평의지를 쳐 죽이고 이때의 거짓 소문이 대부분 이러한 따위다. 모반한 백성들과 왜적이 두 군으로 나뉘었으니, 오래 가지 않아서 틀림없이 자연 무너져 흩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한 대장이 겨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꽤 많은 자들을 목베고 사로잡았는가 하면, 왜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신문(新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또 왜적의 장수 한 사람이 임진강을 건너려 하자, 김명원(金命元)이 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어 많은 자들이 편전(片箭)에 맞아 왜적들이 건널 수 없었고, 왜적이 배 두 척을 구하여 그 군사들을 가득 실었는데 강 복판에서 뒤집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하였다.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湛)이 그때 여러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진중에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미루고 칭탁하는 것을 보자 팔뚝을 걷어올리고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영남 바다의 여러 진이 이미 다 함몰되고 단지 몇 척의 배만이 우리 경내에 와서 정박해 있으며 저 사나운 왜적이 요량없이[匪茹] 이미 그 뒤에 와 있다는데, 우리가 한 도의 완전한 군대를 가지고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서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질시하였지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이 장병들을 모아 놓고 어영담을 불러다 말하기를, “광양 현감은 영남을 구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나도 생각해 보니 역시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바다에서의 왜적 토벌은 반드시 노량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텐데, 깊고 먼 물길을 시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어영담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맡겠소이다. 나를 선봉으로 삼아 주기 바랍니다.” 하자, 이순신이 기뻐하면서, “광양의 말에 따라 분부하겠다.” 하고,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 억기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이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을 버리고 갑니까?” 외쳤으나, 이순신(李舜臣)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병은 아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급히 노를 저어 쫓아왔다.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소라와 나팔[角]을 불게 하여 일시에 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배를 돌려 왜적과 맞붙어 싸웠다.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허다한 배들이 다 천지현전(天地玄箭 화살 가운데 천ㆍ지ㆍ현의 세 종류가 있음)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선은 다 침몰되고 왜적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목을 벤 것만도 1백여 급이나 되었다. 그 이튿날, 어영담이 계속 선도(先導)가 되어 진해(鎭海) 바다를 거쳐 거제(巨濟)에 이르렀다. 당항포(唐項浦)ㆍ진도(珍島)의 배와 남도포(南桃浦)의 배가 앞서 가다가 왜적의 복병선(伏兵船) 2척을 만나 접전했는데, 왜적이 패배하고 육지로 내려 달아나자 그 배들을 불태워 버렸고, 이어 왜적의 배 25척을 만나 접전했다. 이달 5일, 삼도(三道)의 여러 배들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함대를 쳐 없애고 술시(戌時 지금의 하오 8~11시 동안의 시간을 말함)에 가서야 끝냈다. 6일, 경상 우수영의 전함이 전라도 보성(寶城)의 배와 합동으로 왜적의 큰 배 2척을 공격하여 불태워 없앴다. 그 이튿날, 왜적의 배들이 율포(栗浦)에서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삼도의 해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쫓아 갔는데, 적병은 우리 배들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배를 돌려 우리 배들을 맞아 싸웠다. 소라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총통(銃筒)을 일제히 발사하였고 화살과 돌이 뒤섞여 쏟아지며, 섭불[薪火]을 요란하게 던지니 함성이 바다를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하늘에 가득 찼다. 왜적의 배가 부서진 것이 1백여 척이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으며, 수백 급의 목을 거두었다. 그 가운데 큰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층루(層樓)가 마련되어 있고 그 높이는 3, 4장(丈) 가량에 10여 명을 앉힐 수 있었으며, 밖에는 붉은 깁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병자(屛子)가 있어 생김새가 퍽 견고하여 쳐부수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왜적의 주장(主將)이 탔던 배였다. 그 배 안에서 금색의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한쪽 면의 중앙엔 ‘6월 8일에 수길이 서명함[六月八日秀吉着署]’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오른편에는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의 5자가, 왼편에는 ‘타정류류수전(鼉井流流守殿)’의 6자가 씌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수길이 축전수에게 표신으로 준 물건일 것이고, 그 배에서 목 베인 왜장(倭將)은 바로 축전수였을 것이다. 원균의 배들은 비록 그 수효는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 판자를 덮어 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퍽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영에 돌아와 장계를 올려 전후의 전승을 알렸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咸安)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島嶼)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 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 경기도 수원(水原)에 주둔한 왜적이 글로 고시하기를, “지난 20일 일본에서 사람을 서울로 보내 이 친구를 보내게 했다. 저 일본 사람이 길에서 조선 사람이 머리를 채취하는 것을 물은즉 그 이튿날 목을 벤 사람을 내놓고 그 수효를 세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한 짓이다. 또 조선 사람에게 기식(寄食)하던 5명을 사로잡았는데 그 가운데 4명에게는 사형을 집행했고 남은 한 사람은 명 나라를 다루는 계략에 통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지나가게 해준 것이다. 이 자가 양성부(陽城府)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물어서 양성의 촌 백성이 그를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풍신행정(豐臣行貞)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수원에 체류하는 동안 장군 수종(秀宗)이 지령서를 주어 이르기를, ‘백성 남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수원군을 예로 취하고 단속하라.’ [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原郡禮取可束] 하였다.” 하다. 글 뜻이 알아보기 힘들어 재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왜란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이기 때문에 써둔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을 파내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진실로 이 왜적은 만세를 두고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과 의홍(義弘) 등이 임진강을 건너고 신힐(申硈)이 이 싸움에 죽었으며, 김명원(金命元)ㆍ이빈(李薲) 등이 패하여 관서(關西)로 달아났다. 애초에 의지(義智) 등이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쇄도해서는 강에 방비가 있음을 알자 산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겨 두고 매일같이 약하게만 보였다. 신힐(申硈)은 왜적의 무리들을 엉성하게만 보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잠복했던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면서 닥쳐 오는 소리가 하늘에 치닿는 듯하고 그 형세가 바람에 불길 같아서, 손쓸 사이도 없이 혹은 칼에 맞아 죽고 혹은 물에 몸을 던지고 하여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질 못했다. 신 힐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일시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전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원수별장(元帥別將)으로 군에 있었는데, 그는 왜적의 모략을 염탐해 알았으므로 신힐에게 건너가지 말기를 청했지만 신힐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나무라며 몰아세우고는 강을 건넜던 것이다. 마구 찍어댈 때에도 유극량은 조금도 자기 부서를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원수 종사관 홍봉상(洪鳳翔)도 원수에게 관광(觀光)의 일을 고하기 위해 강을 건넜는데 왜적이 마구 몰아댈 때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애석하다. 홍 종사는 양을 따라 범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사람들은 쓸데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나무라지마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 피난하는 사람들은 각기 가깝고 편리한 대로 피난했다. 영남의 좌도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간 외에는 다 영동(嶺東)으로 들어가고 우도 사람들은 전라도로 넘어 들어갔으며, 호서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고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江華)ㆍ아산(牙山) 등지로 들어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간 후 고향에서 살아갈 길이 없자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계사년과 갑오년(1594, 선조 27)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고를 빚게 됐다.
○ 김해ㆍ동래(東萊)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都要渚)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창원(昌原)의 왜적은 전라 감사를 자칭했고, 향리(鄕吏) 현호준(玄虎俊)은 전라 감사의 배리(倍吏)라 자칭하여 선문(先文 관리 출장의 도착일을 미리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다. 본도의《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ㆍ우 순찰(巡察)을 두었는데,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로 했다. 당시 적병이 경상 좌우도에 가득 차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명이 내린 것이다.
○ 초유사(招諭使)가 다음과 같은 통유문(通諭文)을 내다.
해적이 도량(跳梁)하여 우리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우리 생령(生靈)을 도륙하였으며, 동서로 충돌하면서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나, 67읍 중에서 한 사람도 충의를 제창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의 치욕을 씻은 자가 없었고 우두커니 앉아서 온 고장[道]을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종묘 사직은 깃술[綴旒]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곤 쓸은 듯이 없어져 국토[山河]엔 수치만이 안겨 있으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본관은 어명을 받들고 이 땅에 와서 눈물을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왜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러 읍이 무너져 달아난 끝에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인지라 빈 주먹을 뻗고 흰 칼날을 무릅쓰면서 홀로 서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하는 여염에서 분발하고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배를 섬멸하여 의병의 명성을 한 고장에 날려 사람마다 기운을 돋구었다 하니, 선대부(先大夫)께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하시겠습니다.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기에 힘쓰고 의병을 더욱 확장하여 역내(域內)에서 돼지 같은 왜적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기는 하나 충의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그들을 격려한 다음 족하(足下)들과 더불어 좌우로 제휴하여 함께 하늘을 받치고 태양을 맑히는 공을 이룩하기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는 일이니 귀하께서는 노력하십시오. 의령(宜寧)의 곽 의사(郭義士)께 내림.
○ 평의지가 송도를 함락하고 다시 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해서 깡그리 불타 없어지다.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 사람 봉사(奉事) 권 응수(權應銖), 하양(河陽) 사람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이 다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토벌하다. 정세아가 그때 나이 67세였다. 왜적이 막 본성(本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세아가 좌수(座首) 유몽서(柳夢瑞), 생원(生員) 조희익(曹希謚)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왜적을 잡아 목 벤 것이 무척 많았다. 그 후 성을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다 정세아 등이 먼저 나서서 일한 힘이었다. 권응수는 애초에 수영(水營)의 군관으로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土賊)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고, 요로에다 군사를 잠복시켜 흩어져 다니는 왜적들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혹은 요격(邀擊)하고 혹은 추격하곤 하여 일찍이 두려워하고 피한 적이 없었고, 누차 습격도 당했으나 말[馬]이 씩씩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유사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최강은 젊어서부터 글을 해득했고 늦게야 무과에 급제하였다. 담(膽)이 커서 무인이 승진 청탁 따위를 하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한편 성질이 강직해서 자기 뜻을 굽혀서 남에게 따르질 못했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그들한테서 인심을 얻었으며 전투에 당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에 있어선 이들보다도 나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운봉 현감(雲峯縣監)이 다음과 같이 치보(馳報)하다.
이번 5월 24일 자시에 도부(到付 문서가 도착한 것)한, 5월 23일 진주(晉州)에서 성첩(成貼 책임자가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傳通 차례로 서로 전하는 통문)에 말하기를, “당일 창원(昌原)에 사는 황봉찬(黃奉贊)의 종 침향(沉香)이 본 부사(府使)에 현납(現納)한, 퇴로한 호장[戶長] 황중명(黃仲明)이 5월 22일에 성첩하여 고목(告目)한 속에, ‘본부(本府)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고 있는 왜인은 2백여 명이나마, 늘 동리에 왜적이 혹 백여 명이 떼를 지어 횡행하고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깡그리 가지고 갈 뿐 아니라, 이달 22일 김해에서 온 왜적의 말에 의하면 당일 부(府)에 들어와 9백여 명을 받아들여 사용하며, 전라감사ㆍ어사ㆍ도사ㆍ찰방 네 행차의 칭호로 그 도에 나갔다 오고 또 부중(府中)에 머물러 있기도 하며, 함안(咸安)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에 선문(先文 출발하기 전 먼저 도착 일자를 알리는 글)을 내어 그곳을 향해 갈 것을 차례로 전통하였고, 동 행차의 배리(陪里) 현호준(玄虎俊), 마두(馬頭) 이녹상(李祿祥)이 당일 배행(陪行)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였다가 어제 비가 내려 오늘 떠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왜적은 혹은 웅천(熊川)의 길로 해서 혹은 김해의 길로 해서 혹은 백여 명 혹은 50여 인이 잇달아 부에 들어가고 혹은 서울로 올라간다.’ 고 고목이 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이며, 왜적의 선성(先聲)은 믿을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노리(老吏)가 방금 왜적 가운데서 왜적이 하는 바를 본 것이 이러하니, 이 고목과 같다면 왜적이 전주로 향해 가는 계획은 거짓이 아닌 것 같은데, 호남의 장병들은 쓸은 듯이 내지(內地)에 근왕하러 갔으니 극히 우려된다. 차례로 전통하여 방비하고 조치하여 날마다 새로이 변란에 대비하되, 본도의 순찰사와 좌우 수사가 있는 곳에 모두 치보하여 앞의 일을 전통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함안의 가장(假將) 이향(李享)이 진고(進告)한 것인데, 왜적으로 전라 감사를 칭호하는 자가 이미 함안ㆍ의령ㆍ정진(鼎津)에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황중명의 고목이 과연 거짓이 아니니 참고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상 순찰사에 보고함.
○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은진(恩津)에 도달하여 본부(本府)의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다.
부관(府官)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위하여서로다. 현풍(玄風)에 사는 선비[士子] 곽재우(郭再祐)본래는 현풍 사람인데 지금 의령(宜寧) 처의 고향에 산다 가 왜적에게 완전히 함락된 땅에서 단지 촌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적병을 구축(驅逐)하여 왜적의 배가 다시는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는 바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를 듣기만 하여도 모르는 결에 탄복하여 멀리서 배례(拜禮)하였다. 본도는 아름다운 풍속의 일컬어지는 것이 여러 도의 으뜸이로되 아직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극히 수치스러웠는데, 듣자하니 김능성(金綾城)익복(益福)이 그때 본현을 맡고 있었다. 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업(王業)을 회복하려 한다 하는바 이로서도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관 자제(衣冠子弟)들의 집에 통문(通文)하고 의논하여 나라가 2백 년 동안 휴양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한 도의 전체가 충의를 느끼는 이름을 이룩하게 된다면, 영광이 한 몸에 가해지고 은택이 만 대에 미치며, 청사에 새겨진 공명(功名)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가운데 밝게 빛날 것이니, 급속히 거행해서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 대군(大軍)이 서울에 다다른 뒤에 호남의 각 관아에서 남은 장정 및 품관(品官)ㆍ교생(校生)ㆍ팔결(八結)ㆍ연호(煙戶) 등의 군사들을 다 모아서 성의 방어에 대비시키다.
○ 경기도의 문신(文臣) 우성전(禹聖傳)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 병마절도사가 통지하는 사연으로 순찰사에게 도부(到付)한 관내(關內)에, 지금 도착한 충청 감사의 관내에 전하기를, “행재소의 도로가 갑자기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모집해서 계본(啓本)을 가지고 상경케 하였더니, 당일로 동인(同人)이 비변사(備邊司)에 가지고 관내에 하교하신 것이 있었소. 5월 9일의 강원 감사의 글에, ‘전문(傳聞)하건대, 성에 들어온 왜적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을 잡니다. 운운.’ 하거늘,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군사 50명을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하늘에 고하고 함께 맹세케 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왜적을 마구 찍어 죽이려고 8일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더니, 5월 8일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서장(書狀)에, ‘군관 유정언(柳廷彦)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왜적의 기세를 엿보게 했더니, 왜적의 기세가 급히 쇠해서 낮에는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자느라 우리들이 왕래하는 것도 모른다 하며, 신의 서울집 종이 왜적 가운데서 빠져 나와 말하기를, 신의 집 역시 왜적에게 약탈당했는데 왜적의 형상을 보니, 단지 단검(短劍)을 가졌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들이 반이나 섞여서 흩어져 나가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총이나 활을 쏘면 검을 풀고 목숨 살려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기에, 그 기세가 곤궁한 것이 두려워할게 못 될 듯하여 곧 5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걸고 결속하고서 10일을 기해 성에 들어가 왜적들을 마구 찍어 죽이기로 하였더니, 5월 10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서장에, ‘왜적의 무리들은 욕기(慾氣)가 방자스러워 꺼리는 것이 없는데, 적은 수로 출몰하여 약탈하던 무리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피살되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왜적을 보면 다들 쏘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당초에 우리나라는 헛된 소식에 두려워 동요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혹 애걸하여 구차스럽게 살아날 계획을 하는 자가 생기고는 했는데, 왜적이 서울을 점거하게 되자 온갖 하는 짓들 치고 해괴하지 않은 게 없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다 그 해독을 입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역시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그 시끄럽게 외치고 드나들던 자들 치고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붇지 않은 이가 없어 호통치던 기세는 없어지고 목숨을 내놓은 도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날에 두려워하던 자들은 분격하고, 살아나기를 꾀하던 자는 원망하고 성내어 다들 왜적을 무찌를 것을 생각하여서 제창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는데, 서울에서 왜적에 굽혔던 무리들 역시 왜적들을 저격할 계획을 합니다.’ 하였고, 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왜적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가 5분의 1이 남아 있고, 여러 왜적이 동리에 갈라져 있으면서 평상시같이 숙면하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아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서야 비로소 칼을 찬다. 장수는 대낮이 되어야 일어나고 혹은 10명씩 혹은 20명씩 모여 있으면서 별로 진을 치거나 변고에 대비하자는 생각이 없다.」하였습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이 재물을 얻고난 후에 소와 말을 많이 약탈해서 한강으로 보내는 걸 보니, 군사를 퇴각시킬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소. 이상의 갖가지 서장은 계하한 것이니, 이에 앞서 우리나라 인민들이 왜적의 소식을 잘못 듣고 서로 겁을 내어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모든 것이 다 극히 통분스러운 일이오. 지금 왜적의 기세가 이러하니 무릇 의기(義氣)가 있는 자는 분발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고 왜적을 잡아야 할 것이오. 각 도의 각 관원에게 급속하게 알려 주도록 하시오. 운운.” 하다.
○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가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음과 같은 계(啓)를 바치다.
작고 추한 것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해독을 쌓아 수치스럽고 욕됨이 이미 종묘에까지 미쳤습니다. 한낱 필부이기는 하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계획을 감히 사신께 고하고자, 계시는 천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울면서 글월에 부쳐 성심을 피력하는 터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아름다운 덕을 전해온 것은 실로 고대의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그 성대함을 비길 것입니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내려온 13대 동안 위대하게 드러나고 위대하게 왕업을 계승하여 물품이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하였습니다. 2백 년 동안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군의 기록은 병란에 익숙하지 않았고 (즉 전쟁이 없었다는 말임) 백성들의 생업은 단지 농경과 양잠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숨겨진 섬의 흉악한 괴수[凶酋]가 감히 나라를 무시하는 교활한 계교를 마구 부려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악을 쌓은 것이 이미 궁(窮)과 한(寒)보다 심하였고, 그 군대를 몰아다가 우리 언덕에 버티고 있으니 불공함이 훈육(獯鬻)밀(密)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핑계로 잡을 만한 말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으로 우리나라를 책하였습니다.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고 소리쳐 말하니, 묵특[冒頓]의 서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요,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고 말하니 포악한 진(秦)의 공갈이 무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 끝없는 흉악함에 성내니 하늘의 뜻이 어찌 역적을 돕는 데에 용납하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의리로 보아 곧지 못하여 굽으면 기운이 쇠하기 마련이고 소나기는 아침 내 계속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 임금께서 진노하여 왜적을 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니 태산이 어찌 알을 짓눌러 깨는 일을 힘들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국운입니까.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여 융성한 때를 빼앗았으니 외적을 막는 성을 구축하였으나 그것이 나라에 무슨 조그마한 이익인들 있겠으며, 거기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모아다가 그들이 반드시 흩어져 버려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땅을 준다는 것은 본래 삼척동자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조정의 계획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미 그러했거니와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군율(軍律)을 범함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병사(兵使)가 군영의 군사를 옹유하고 있으면서도 머물러 꺽이어 지척에서 부산(釜山)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백(方伯)은 왜적의 창끝을 피해서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호남ㆍ호서 경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목(州牧)ㆍ부사(府使)에서 군수ㆍ현감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대고 창끝을 겨루어 본 일도 없이 아기(牙旗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대장의 기)는 들판 가운데에 끌리고는 하였으니, 이들은 평소 부절(符節)을 차고 성군의 은덕을 생각하고 살다가 위급한 때에 와서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마의 법[司馬之法 군법(軍法)]이 만약 시행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입니다.(즉 사형을 가해 주살될 것이라는 말) 이러한 자들의 무책임한 소행 때문에, 마침내 새나 다닐 험준한 요새지가 지켜지지 않아 영남의 생령(生靈)들이 도륙되어 썩어 문드러지게 하였고, 임금이 몽진하니 빈교(邠郊)의 행색이 참담했습니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종묘의 악기를 그을리고 물들였으며, 원한에 찬 귀신들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소리쳐 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다만 마음 아픈 것을 더할 뿐, 고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태평세대에 살아남은 좁은 골목길의 지친 백성들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사는 것도 임금님의 인자하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사방이 흔연히 성군의 교지를 받아 풀 속에 엎드리고 물구렁에서 자며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난리를 만나게 되어 집이 부서진 것은 잠시 버려둔다 하더라도 나라가 당한 치욕을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병법(兵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닙니다. 설사 건곤을 변하게 할 웅대한 군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진정한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누구인들 충군 애국하는 본성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원수와 같이 하늘을 이고 사는 분함이 절박하여 마침내 창을 베고 잠을 잘 각오로 왜적과 싸울 모의를 하여 동지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하고, 흩어져 도망간 군졸을 불러 거두어 요해지를 택해서 복병을 설치해 왜적을 요격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나 수령들이 피해서 달아난 끝이라 바로 민심이 극도로 흩어져 있으니, 군기(軍旗)와 군고(軍鼓)를 주관할 자가 없어 군중에 지휘할 사람이 없고 기율을 엄하게 하기 어려워 전진에 임해서 군사들이 달아나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세울 만한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막대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우리 주(州)의 지형은 사실 우리나라의 하늘이 내려 준 부고(府庫)입니다. 예의(禮義)가 행해지고 민간의 습속이 돈독하고 후한 것은 신라 1천 년의 여풍이 있음이요, 창고가 차 있고 호구는 많은 것은 진한(辰韓) 70주의 중심되는 요지(要地)인 것입니다. 크게 집중되는 여러 진(鎭)을 모을 수 있고 긴 강의 상류를 둘러 있으니,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수복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겠습니까. 진실로 수양(睢陽)을 포기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는 1천 리 되는 강회(江淮)의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택해서 진무(鎭撫)케 하고 그로 하여금 의로운 외침을 피력하여 주선합니다. 정병을 골라서 낙동강[洛水]의 나루터를 지켜서 바닷길로 수송해 돌아가는 뱃길을 끊고, 곁 군(郡)에 격문을 내어 용추(龍湫)의 좁은 목을 거점으로 버티게 하여 고개를 넘어 도망해 돌아가는 관문을 막습니다. 가까이는 낙동강 좌안의 여러 주와 연락하고 멀리는 호남의 큰 군영과 호응해서 성세를 합해 멀리 몰고 간다면 군사들의 기세는 절로 배가할 것이요, 충의를 내걸고 곧장 전진한다면 그때에는 뭇 백성들의 마음이 다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秀吉)의 머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어찌 한강에 나아가 인의의 칼로 무도한 왜적의 고기를 저미는 것이 또한 어렵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영공(令公)께서는 충신(忠信)이 만맥(蠻貊)의 땅에서도 행해지고 인의(仁義)는 성현으로부터 배운 바입니다. 악비(岳飛)가 갓 금패(金牌)를 받자 3군이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장준(張浚)이 다시 황하가에 부임해 오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좋아하였습니다. 영공의 마음 속은 귀신도 알아 증명하고, 군기[旋旗]는 부로(父老)들의 바람[望]이 매여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무리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것은 다른 고장에 비한다면 피나는 정성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1백 년 동안을 두고 이룩해 놓은 문물이 남김없이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면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한때 의로운 기운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장수를 바라나 만나기가 어렵고, 조그만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예가 없는 것이니 영공의 계극(啓戟 고관을 전도(前導)하는 붉은 칠을 한 창으로, 여기서는 초유사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이 어찌 내임(來臨)하는 것을 꺼리겠으며, 뜻을 지닌 자는 일이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니 비린내 나는 것들을 신속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부디 광야에서 외뿔소도 아닌데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가련하게 여겨, 저 들판의 당신의 얼룩말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주소서. 아! 무릇 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 안에 살아있는 백성이면 누구인들 이씨(李氏)이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해바라기 같은 한 조각의 정성스러운 충심은 나라의 녹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에 따라서 얕고 깊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7척의 초개 같은 몸으로 왜적을 제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보고서 사생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백(竹帛 역사)에 이름을 남기느냐를 따질 것 없이, 다만 창과 칼 사이에 목숨을 바쳐야만 할 것입니다. 동해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일이 이룩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그곳에 빠져버려도 늦지 않을 것이고, 북극성이 실로 머리 위에 임해 있으니 의(義)는 마땅히 취해야 하고 사는 것은 구차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뢸 말씀은 대략 이상과 같으니 나머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영공의 안색을 받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마음속을 삼가 진술합니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
○ 경상도 고령(高靈)의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정인홍(鄭仁弘)에 예속하고, 정예한 군사를 골라서 전투에 참가하다. 무계(茂溪)의 싸움, 안언(安彦)의 승리, 성주(星州)에서 성(城) 태운 일 및 사대(沙代)ㆍ가천(伽川)의 전역(戰役)을 모두 도왔다. 또 낙동강의 왜적을 공격하여 온 배를 포획하니, 많게는 5, 6척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초유사에게 보고한 바, 소모관(召募官)의 막하에서 왜적을 목 벤 것 역시 30여 급에 이르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좌도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가 없어 명령이 오랫동안 폐해졌고,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을 들어 알 수 없었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 하였다. 세 고을이 성을 각각 지킬 수 있는 것은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애초에 평의지(平義智)가 충주(忠州)에서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염려하면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6월에 평의지가 대동강 변에 도달하여 또 이덕형을 만나고자 하니, 앞장서서 성을 나가 강 가운데 배를 띄우고 만나 보고서 물러 나왔다.
6월 1일.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折衝將軍行副護軍知製敎) 고경명(高敬命)이 도내 여러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치고(馳告)하다.
이번에 본도의 근왕군(勤王軍)이 금강(錦江)에서 퇴각하던 날 한 차례 무너지고 다시 여러 군(郡)에서 초유(招諭)할 때에 무너진 것은, 대개 단속하는 방법이 어긋나 기율이 없으므로 와전되는 말이 자주 일어나서 여러 병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스러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 비록 흩어져 없어진 나머지의 병사들을 수습하여도 사기가 꺾여 정예한 기운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긴급한 소용에 응하여 후일의 효력을 책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생각하건대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했는데 관직 있는 자들이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이 오래도록 없었고, 종묘 사직이 재가 되어 버렸는데 왕사(王師 왕의 군사)가 숙청하는 일은 아직도 멀었으니 이런 일에 언급하게 되면 아픔이 마음속까지 사무친다. 생각하면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병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력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황산(荒山)에서 승리를 거두신 것은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이룩하신 공이 있고, 선대(先代 고려)가 낭산(朗山)영암(靈巖) 에서 전투할 때는 한 조각의 돛도 돌아가지 못했다.’ 는 노래가 있어 지금까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는데, 그때 용기를 떨쳐 먼저 나서서 장수을 목 베고 적기(敵旗)를 뽑아온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근년부터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뜻을 세워 학문을 하게 되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구인들 강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서 의로운 소리는 없어지고 겁내어 혼란해져 스스로 무너져서 여지껏 한 사람도 기운을 내어 왜적과 창끝을 마주치고 싸우기를 생각하는 자는 없고, 앞다투어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할 계책을 꾸며 머리를 끌어안고 쥐같이 달아나는 것만 혹시나 남에 뒤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본도의 사람들이 나라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인즉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우리 임금의 위령(威靈)이 날로 뻗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대장부가 공을 세울 기회이고 임금에게 보답할 때인 것이다. 나 고경명은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학문은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나를 추대한 두세 명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하는 터이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는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겸해서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담을 크게 갖고 눈물을 뿌리며 전투를 하여 사병들의 앞장이 되기를 생각하여, 임금의 은혜에 약간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달 11일이 군사를 결집하는 기일이다. 무릇 우리 도내의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3일. 삼 도(三道)의 군대가 수원(水原)에 머무르다. 이광(李洸)이 독성(禿城)에 진을 쳤다. 본부의 왜적은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에 이미 도망쳐 용인(龍仁)의 왜적과 합세하였다.
○ 좌의병(左義兵)의 진중의 회문(回文)은 다음과 같다.
의병은 오는 11일에 떠난다. 여러 장비는 다 구비되었으나 군량만은 나올 데가 없다. 대장이 이미 모은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가까운 곳의 각 고을에서 편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것이나, 무릇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남아 쌓은 것이 있는 자는 모두 임의대로 양을 정하여 군사들의 식사에 댈 물자를 도와야 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얻은 군량은 그 반이 수송 비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과 말이 천 리를 가는 비용 같은 것이 다 그것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정병(精兵)이나 군마(軍馬)나 짐 싣는 말 중에 자기가 소유하는 것에 따라 내놓아서 도와주면 심히 다행이겠다.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 진사 박천정(朴天挺), 유학 양희적(楊希廸), 재향운량장(在鄕運糧將) 정랑 이대윤(李大胤), 정자 최상중(崔尙重) 등.
○ 적병이 해서로부터 돌려서 관서로 향하니 거가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모아 기성(箕城 즉 평양)을 수비하고 김억추(金億秋) 등을 대동강에 매복시켜 방어하게 하다.
○ 전 좌랑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김면은 경상도 고령(高靈) 사람이다. 처음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대가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정인홍(鄭仁弘)이 김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를 원해서 김면은 고령에서 병사를 모았던 것이다. 김면은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서 졸지에 고령현의 경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김면은 고령 같은 쇠미한 고을로는 왜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거창(居昌)으로 달려갔는데, 거창의 선비들이 이미 적인(跡人) 속칭 산척(山尺)이라 한다. 약간을 모았으므로 그것을 김면에게 소속시켰다. 김면은 곧 여러 군사를 뽑아내게 하여 곽준(郭䞭)ㆍ문위(文緯)ㆍ윤경남(尹景男)ㆍ박정번(朴廷璠) 및 유중룡(柳中龍)을 참모와 장서기(掌書記 문서 맡는 사람)로 삼고 박성(朴惺)에게 군량을 모으도록 하였다. 4, 5일 사이에 병사 2천여 명을 모아서 2백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현 북부의 우현(牛峴)ㆍ상암(箱巖)ㆍ목통(木通)ㆍ마령(馬嶺) 등 여러 곳을 수비하게 하고, 대군을 영솔하여 고령으로 나가서 진을 쳤다. 왜적의 배가 강류(江流)를 따라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독려하여 이를 요격하니, 마침내 성한 배 2척을 노획하고 왜적을 목 벤 것이 80여 급이나 되었다. 이 전투는 실은 박정완(朴廷琬)이 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아래 박정완전에 보인다. 그 노획한 배에 실려있는 물건들은 다 내탕(內帑)의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금종이로 꾸민 장지[障子] 한 벌을 얻었는데 광묘(光廟 즉 세조, 휘는 유(瑈))의 어휘(御諱)가 쓰여 있었고, 제복(祭服) 두 벌과 붉은 신[赤舃 임금의 예복에 신는 신을 말함] 두 켤레가 있으므로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지례(知禮)의 적장이 우현을 넘으려고 할 때에 복병장 이형(李亨)이 전사하였다. 김면은 거창이 진주(晉州) 이상 일대 지역의 두뇌같이 중요한 지역이라 거창이 지켜지지 않으면 10여 읍 역시 지켜내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장수를 정해서 고령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거창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례의 왜적을 막았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김면이 마침내 거창으로 돌아왔다가 지례로 옮겨가서 진을 치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 금산(金山)의 왜적을 저지하여 거창으로 충돌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가 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산음(山陰)의 군사를 김면에게 예속시켰다. 왜적의 기세가 한창 왕성하여 전투로 쉬는 날이 없자, 감사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시켜 김면을 위해 조방(助防)해 주게 하였다. 하루는 왜적이 또 수없이 밀려와 사랑암(沙郞巖) 지례의 땅이다. 을 지나가자 김면이 말을 달려 검을 휘두르며 김시민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높은 벼슬자리로 공을 대우한 것은 요컨대 오늘에 쓰기 위한 것이오. 죽음이 있을 따름이지 퇴각해서는 안 되오.” 하니, 김시민이 마침내 말을 돌려서 달려 들어가 계속하여 두 명의 왜적을 쏘아 잡았다. 여러 군사들이 크게 외치며 왜적을 무너뜨리자, 왜적이 그제서야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금산과 개령의 왜적들이 뒤이어 약탈을 계속하여 9월부터 12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어 장병들이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으니, 혹은 밤중에 찍어 들어오고 혹은 유인해 내어 큰 전투가 10여 차례였고 꺾어 물리친 적이 30여 번이었다. 그 후 합도의병 도대장(合道義兵都大將)으로 승임(陞任)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면과 정인홍 두 장수가 곽재우에 이어서 일어나 강회(江淮) 즉 낙동강 일대를 막아 나머지 읍들을 보전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전공을 논한다면 물론 작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김면이, 박정완(朴廷琬)이 왜적의 배를 노획하고 80여 급을 목 벤 공을 억눌러 나타내 주지 않았고,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에서 복병을 쓴 작전을 도와 주지 않고 도리어 그가 여러 사람의 모의를 어기고 패군했다는 죄로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공(功)을 시기하여 모함한 흔적이 있음을 면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일. 삼도(三道)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지다. 이날 아침 이광(李洸) 등이 점차로 군사를 전진시켜 광교산(廣敎山)에 진을 치고 군에 영을 내려 조반을 먹게 하였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자마자 왜적의 기병이 돌격해 왔다. 먼저 왜적 다섯이 왔는데, 금 가면을 쓰고 흰 말을 탔으며 흰 기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며 곧장 전진해 온 것이다. 충청 병사 신익(申益)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먼저 무너져버려 10만의 장병이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왜적이 기병 수 명으로 10여 리나 쫓아가다가 가버렸다. 이광 등 여러 장수들이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ㆍ기휘(旗麾)와 군기(軍器)ㆍ군량 등 배수(倍數)로 수송해 온 물건들을 다 버려두었는데, 왜적이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태워버렸다. 이때 서울에 머물러 있던 왜적의 장수 20여 명이 각각 은 가마를 타고 호위병을 대단스럽게 벌여 세우고서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부녀자들은 말을 타고 쌍을지어 나와 길을 가득히 채우고 앞으로 가는 것을 연일 계속하고 멈추지 않았다. 아군은 서울의 왜적이 우리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해 간다고 생각했다. 그 후 왜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서울의 왜적은 나와서 광주(廣州)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아군이 양천(陽川)의 북쪽 포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려 남쪽으로부터 엄습하여 한강으로 몰아부치려고 하였는데 아군이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하였다. 우리 대군이 무너져 돌아갈 때에 전일 경기와 양호 지방의 피난에서 돌아와 모였던 사람이 많이 짓밟혀 다치고 노약자들이 질겁을 해 달아났으며 곡성이 우레같이 울려났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
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
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
○ 각처의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항복하고 붙좇는 자들을 나누어 여러 분탕된 고을의 수령으로 정하여 온 경내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니, 박무금(朴茂金)이 김해(金海)를, 중[僧] 찬희(贊熙)가 밀양(密陽)을 맡은 따위가 그것이다. 찬희는 성에 들어와 군민(軍民)을 꼬여 모으다가 박진(朴晉)이 몰래 잡아서 죽였고, 박무금은 그 후 도망쳐 나와 용서를 받았다.
○ 왜적이 창녕(昌寧)ㆍ현풍(玄風)으로부터 금산(金山)에 이르는 한 줄기의 큰 길을 닦고 위아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성주(星州)는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많아 왜적이 큰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풍에서 좀 멀어서 무계(茂溪) 나루가 두 지점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지이므로, 왜적이 나루 서쪽 산 위에 주둔하여 수륙의 길을 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의 좌우편 도로가 막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니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손인갑(孫仁甲)에게 말하기를, “무계의 왜적이 현풍과 성주 사이에 끼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도와 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왜적을 먼저 제거해서 강길을 끊어 놓은 후에야 성주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손인갑이 옳다 여겼다. 마침내 정인홍을 군의 주장으로 추대하고 지난달 27일에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초계(草溪)에서 위급을 고해 와 달려가니 왜적의 기병 백여 기가 마을의 집을 태우고 약탈하다가 군사가 온 것을 보고 강길로 향해 달아나므로 추적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29일에 고령(高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居昌)의 군사를 불러 약속하기를, “함께 무계를 공격하자.” 하고 요구하였으나 김면(金沔)이 병장기가 완비되지 못해 5, 6일이 늦어질지 모른다 하니, 정인홍이, “군사는 많은데 양식이 적으니 날짜를 끌어서는 안 된다.” 하고, 군사를 전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손인갑이 먼저 가서 무계의 형세를 살피겠다고 요청하여 정인홍이 허락하니, 손인갑이 곧 두어 사람을 데리고 밀탐하고 돌아와 드디어 세 길로 진군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고령 영병장(高靈領兵將) 김응성(金應成), 성주 기군장(星州起軍將) 이승(李承) 등이 와서 모였다. 이달 4일 밤을 타서 진군하였는데,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 좌돌격(左突擊) 조응형(曹應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가자 군졸들이 헛되이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 대장(大將)이 지휘하는 한 진(陣)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그로 말미암아 약간 안정되어 도로 모였으나, 밤중에 쳐서 소굴을 불태우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5일. 여명에 정인홍(鄭仁弘)이 우선봉 한여택(韓汝澤)ㆍ좌선봉 하종해(河宗海)를 시켜 군사를 끌고 오른쪽 재로 해서 곧장 무계역(茂溪驛)에 이르게 하고, 고령 대장(高靈代將) 정상례(鄭尙禮)를 시켜 왼쪽 재의 대로로 해서 진군하게 하였다. 또 전 군수 이언성(李彦誠)과 성정국(成定國)으로 하여금 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언역(安彦驛)의 길에 매복하여 성주(星州)에서 후원해 오는 왜적을 끊게 하고, 정언충(鄭彦忠)을 시켜 노다촌(老多村)에 매복케 하여 강을 내려가는 왜적을 끊게 하였으며, 정인홍은 손인갑(孫仁甲)과 더불어 중위군을 거느리고 곧장 왜적의 군막을 짓이겨 대었다. 왜적이 약탈한 재보(財寶)를 무계의 역사(驛舍)에 가뜩 쌓고 횃불 하나로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빼앗았다. 한여택과 하종해가 몸을 솟구치고 나서서 역전(力戰)했는데, 왜적의 장수가 큰 기를 세우고 나와서 싸우다가 아군이 많고 정예한 것을 보고는 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전한 기세를 타고 사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싸워서 그 양곡을 저장한 외막(外幕)을 불태우고 전진하고 후퇴하며 일제히 활을 쏘니, 왜적의 기세가 매우 군색해져서 자리ㆍ거적ㆍ땔나무 등으로 가리면서 자위(自衛)했는데 죽은 자가 퍽 많았다. 처음 철환(鐵丸)을 쏜 인시부터 사시에 이르자 포성은 끊어지고 곡성만이 났다. 아군이 다가가 불을 질러 태워버리려 했는데, 나머지 왜적이 달아나 강으로 들어가 배를 강물 복판에 끌고 들어갔다. 이때에 의외에도 구원하러 온 왜적 수백 명이 현풍(玄風)으로부터 갑자기 나루터 가로 왔다. 그때가 거사할 시초라 활과 화살이 넉넉하지 못했고 아군은 새벽에 진군해서 군사들이 다들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힘을 다해 싸워 지쳐 빠져버렸는데, 갑자기 생생한 기운을 가진 적의 공격을 받았고 거기에 화살 또한 이미 다한지라 감히 무리한 전투를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막(幕) 안에 있던 왜적은 6, 7명이 쫓아왔을 뿐인데 5리도 못 오고 돌아가버렸다. 수일 후에 합천(陜川)의 군사가 피난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을 잡았는데, 공술하기를, “막 안의 왜적은 1백 40여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반이 넘고 나머지는 다 화살에 다쳐 한 떼의 왜적이 거의 다 이 전투에서 소탕되었으나, 불을 지르지 못하고 퇴각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왜적이 군사를 증가시키고 주둔하는 군막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하였다. 손인갑이 가리현(加利縣)으로부터 돌아와 고령에다 진을 치고, 정인홍은 하혼(河渾)ㆍ권양(權瀁)ㆍ이승(李承)ㆍ김응성(金應成) 등과 더불어 산 위와 가운데 길로 해서 돌아와 가림(檟林)에다 진을 쳤다가 곧 매촌(梅村)에 진을 합치고 싸운 공을 치보(馳報)하였다. 그때에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로소 와서 무계의 습격을 단독으로 거사한 것을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군졸들은 군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싸움터에서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돌아 오지 않고 단지 수백 명만이 뒤따르고 있었다. 손인갑이 이것을 근심하여, “군졸이 모이지 않으니 선생은 가르쳐 주시오.” 하자, 마침내 격문을 돌려 그들을 불러 모았는데 수일 동안에 다 모였다. 흩어져버렸던 끝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다만 잘 타이르고 엄하게 경계할 따름이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에 있다. 으로부터 올라와 정승 안국사(政丞安國寺)의 행차라 자칭하고 가야산(伽倻山)을 탐승하려고 했는데, 이 자가 바로 전날 전라 감사를 칭하고 창원(昌原)에서 선문(先文)을 띄웠던 자이다. 정진(鼎津)에 이르러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草溪)ㆍ의령(宜寧) 등지의 사민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士民)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부오(部伍)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안국사(安國寺)는 강항(姜沆)의 계문(啓文) 가운데 보인다.
○ 박진(朴晉)을 경상 좌병사로 삼다. 그때 박진은 김수(金睟)의 근왕군을 따라 온양(溫陽)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도로 내려와 본도에 도달했는데, 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곤양(昆陽) 및 진주(晉州)의 왜적의 기세가 막 성하기 때문에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우도에서 글을 보내 이르기를, “장군께서는 포상하는 어명을 받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변경에 임해 위엄 있는 명성이 이미 드러나 온 도가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는데, 다만 왼쪽 길이 막히고 끊어져 위무(威武)를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진주가 적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정세가 심히 위급한데 본관의 수하에 비록 천으로 헤아리는 군사가 있기는 하지마는 저 같은 백발 서생은 군무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만약 단기(單騎)로라도 이곳에 오신다면 의병을 다 장군의 휘하에 드리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좌우의 병사가 안팎으로 호응하여 사천(泗川)의 소수 왜적을 토벌하여 큰 진(鎭)인 진주를 보전해서 내지(內地)를 지키게 되는 것은 장군께서 발을 한 번 드는 데 달려 있으니, 좌ㆍ우도의 책임이 다르다는 말로 사양하지 마시고 종전에 결심하였듯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따라 죽겠다던 뜻을 실현하도록 하십시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5일.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조정은 의주(義州)로 향하다. 몇 일 전에 적병이 대동강에 다가들자 그곳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 11일에 거가가 숙천(肅川)으로 가서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요동(遼東)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중전(中殿)은 강계(江界)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각각 나누어 보내고, 세자에게 명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원도로 가게 하였다.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기성(箕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치자(馳咨)하여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 의주(義州)에 도달했는데 시종하는 관원으로 따라간 자가 단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때 중국 지방에서는, “조선이 왜를 향도한다.”는 헛말까지 나와 수도에까지 전해져서 병부(兵部)에서 차관(差官) 황응향(黃應陽) 등을 보내와 실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용만관(龍灣館) 의주의 객사이다. 에서 접견하였는데, 담화하는 동안에 황응양이 왜적의 중[僧]인 현소(玄蘇) 등이 평양에서 본국의 예조에 보낸 글을 보고는 가슴을 두들기고 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대신 병화를 당하면서도 의롭다는 명성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이 악명을 받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황응양이 사정을 퍽 자세하게 회보하여 명 나라 병부에서 강력히 상주(上奏)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중국의 수도에서 곡소(哭訴)하고 병ㆍ예부 각 아문(衙門)에서 계속 상주하여 위급을 고하자, 중국 조정에서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요동병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 종실(宗室) 호성감(湖城監)을 양호(兩湖)로 파견하여 의병을 징집시키다. 호성감은 양호 땅에 도달하여 충의로운 내노(內奴)를 내놓아 군사로 하고 자진하여 근왕군에 나오는 자도 역시 허락하였다.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
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사방의 문에 봉명국(奉命國)이라고 써 붙이다.
○ 적장 청정(淸正)이 강원도를 지나 철령(鐵嶺)으로 쇄도하였는데, 철령 이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함경 체찰사 김귀영(金貴榮)과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남병사(南兵使) 이 영(李榮)과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을 거느리고 도내의 기력이 왕성하거나 약한 남정(男丁) 5만여 명을 다 모아 가지고 철령을 지켰다. 선봉의 왜적이 연일 교전하다가 패하고 물러나자, 청정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달해서 당장에 선봉장을 목 베고서는 영을 내리기를, “한 번 북이 울리면 개미같이 달라 붙어라. 감히 뒤지는 자는 죽는다.” 하고는 곧 자신이 말에서 내려 검을 휘두르며 독전하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나서서 그 기세가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울려나는 우레 같았다.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김귀영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육진(六鎭)으로 향해 달아났다. 청정이 철령에서 이기고 함경도로 들어와 불태워 없애고 도둑질을 하는데, 그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의 참혹함이 다른 도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
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
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
○ 요동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왜적의 변란에 관한 것으로 준분수도(準分守道)의 자문(咨文)에, “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우연히 본 바에 의하면, 왜왕 관백(關白)은 이미 그 나라 사람에게 사살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전하는 것으로, 본사는 조선 국왕이 수고스러운 대로 왜의 인심이 흩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관원들을 독려하고 통솔해서 힘써 회복을 꾀하도록 바란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자문을 예조에 내리기를, “수길은 유구(琉球) 사람에게 사살되어서 이것은 다 소문이다. 평양에서 기병 전투를 할 때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조신(凋信)이 장수가 되었다. 운운.” 하였다.
○ 좌수영 영리(左水營營吏)의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사(水使)는 지난 5월 29일 영을 떠나 곧장 남해(南海) 경내의 노량(露梁)으로 가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습니다. 같은 날 사천(泗川) 선창(船滄)의 왜인 4백여 명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흰 기치(旗幟)를 세웠고, 누각 같은 적선이 13척이었는데 종일 접전하여 그 배들을 다 격파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고 죽은 왜적이 부지기수였고, 1급(級)을 목 베었습니다. 이달 2일에 당포(唐浦) 선창의 왜인 3백여 명이 포구에 들어와 분탕질하고 험준한 곳에 기대서 포를 쏘는데 왜선 9척의 크기가 판자집 같았습니다. 그중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층루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그를 목 베었고, 또 9급을 목 베고 그 배들을 깡그리 격파하였으며, 화살을 맞아 죽은 자들 역시 많았습니다. 5일에는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 왜의 큰 배가 다수 숨어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고 본도 우수사가 뒤이어 구원하려 달려와서 그와 함께 같이 그 포구로 갔는데, 왜의 큰 배 12척, 작은 배 22척이 바다에 분산되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누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또 그 자를 목 베었습니다. 그 배에서 얻은 분군(分軍)한 서류 7축(軸)에 기재된 왜인의 수효는 5천여 명인데 각각 자기 이름 밑에 피로 물들인 서명이 있으니, 틀림없이 삽혈동맹(歃血同盟)일 것입니다. 그 배를 다 격파하고 43급을 목 베었습니다. 8일에는 거제 땅 율포(栗浦) 앞 바다에서 왜의 큰 배 6척을 추격 나포하고 또 37급을 목 베었으니 도합 89급을 목 베었습니다. 본도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합해서 2백여 급을 목 베었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몰운대(沒雲臺) 등지를 연 이틀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전혀 왜적의 종적이 없었습니다. 10일에 영에 돌아왔을 때에야 겨우 아뢰었습니다. ” 하였다.
17일.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성주(星州) 남쪽 20리에 있다. 에 복병을 매설했다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박응성(朴應星)이 용사(勇士) 장호(張浩)와 같이 적군에 달려가 죽다. 처음에 성주(星州)와 현풍(玄風)의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 연달아 널리 목책(木柵)을 시설해서 짐바리를 운반하다 떠내려보냈다. 그러자 손인갑이 말하기를, “사원동ㆍ안언(安彦) 등지에 복병을 매설하면 되겠다.” 하고, 마침내 사군(射軍) 수백을 골라서 저녁을 이용해 떠났다. 김면(金沔)에게 지원군을 청했으나 김면 휘하의 장병들이 대부분 가려 하지 않자, 김면이 사람을 시켜 복병 작전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손인갑이 듣지 않고 사동(蛇洞) 길에다 복병을 매설하였다. 이날 왜적 3백여 명이 성주에서부터 짐을 운반하다 흘러 내려 왔는데, 손인갑이 약정하기를, “주장이 포 쏘기를 기다려서 발사하라.” 하였다. 유격장 박응성이 약정을 어기고 돌출했는데 왜적의 무리가 많고 정예해서 아군이 패배하였다. 박응성 등은 힘을 내어 싸우다 죽었다. 박응성은 맨 먼저 응모하여 용감하게 힘내어 싸웠고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을 경시하다가 죽으니 전군이 그를 아까워 하였다. 이 거사에 있어서 손인갑은 매복할 곳은 많은데 사군(射軍)이 적어서 김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김면이 구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므로 자못 불만스러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금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낙동강에서 왜적의 배가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두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놓고 내려갔는데, 곽재우가 배를 고스란히 나포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그 배에 실려있는 것은 다 궁중의 보물들이었는데, 태조가 착용했던 목화[靴]도 들어 있었다. 곧 그 보물들을 초유사에게 보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곽재우가 왜적 안국사(安國寺)와 정진(鼎津)으로부터 강을 격해서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하였다.
○ 곽재우는 김수(金睟)가 도(道)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하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 하였는데, 김성일이 준책해서 그만두고 마침내 김수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보냈다.
가슴 아프다. 우리 온 도를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고 우리 서울을 함락하게 하였으며, 우리 성상을 파천하게 만들고 우리 온 나라 백성들의 간과 골을 땅바닥에 으깨지게 만든 것은 다 네가 한 것이다. 너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찼는데도 네가 스스로 모른다면 이것은 우매한 인간이다. 네가 과연 우매한 인간인가. 너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라, 재앙과 변란을 양성(釀成)하여 이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온 천하의 토끼털[필(筆)]을 다 모지라지게 해도 네 죄를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고, 온 천하의 대[竹 옛날에는 대를 엮어 종이를 대신하였음]를 다 없앤다 해도 네 악을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한을 정해서 성을 쌓게 해서 백성들을 학대한 것이 혹심했던 것을 너의 죄라고 하고, 군사를 절제(節制)하는 데 방법이 없어서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한 것을 너의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은 비록 인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마음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었은즉 그것은 네 죄가 아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데 전도(顚倒)한 것은 비록 군사의 기밀을 패하게 하였다고는 하나 재주가 병란을 대응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은즉 역시 너의 죄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를 죄 준다면 어떻게 네 마음을 굴복시키겠느냐. 그러나 네 죄가 하나 있으니, 왜적을 환영한 일이다. 왜적을 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온 도의 정병과 용사 5, 6백 명을 뽑아 인솔하고서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먼저 밀양(密陽)으로 달아났고, 밀양이 패하게 되자 또 가야(伽倻)로 도망쳤으며, 왜적이 상주(尙州)를 지나가자 거창(居昌)으로 물러나 숨었다.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치도록 한 적이 없어 마침내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종내는 열흘 안에 수도가 함락되게 하였다. 자기 몸 붙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근왕을 칭탁하고 도망쳐 운봉(雲峯)을 넘어 갔으니,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죄의 둘째가 있으니, 패전을 기뻐하는 것이다. 패전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늙은 겁장이 조대곤(曹大坤)은 본래 책망할 게 못 된다. 그러나 한 도의 원수(元帥)로 김해(金海)의 함락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왜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있던 곳[主鎭]을 버리고 정진(鼎津)으로 퇴각해서 진을 쳤고, 정진은 왜적이 있는 곳에서 몇 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헛되이 놀라 무너져 회산서원(晦山書院)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여러 진(陣)과 각 읍들이 풍문만을 듣고 무너져 도망치게 만들었은즉, 조대곤의 죄는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너는 그 자를 목 베어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각시키지 않았으니, 너는 과연 성(城)을 버리고 패전한 군율을 모르는가. 네 죄의 셋째가 있으니, 나라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은혜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조상은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고 하니, 녹도 후했고 은총 또한 융숭하였다. 그러니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충의의 기운을 분발하고 강개한 마음을 발동하여 자신이 사졸에 앞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릇 우리 영남의 2 백여 년을 두고 배양해 온 사람들이 어찌 몸을 잊고 죽음을 무릅써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군부(君父)의 파천을 기뻐하고 수도의 함락을 달갑게 여겼으니, 너는 과연 군부의 곤란을 서둘러 구해낼 줄 모르는 자인가. 네 죄의 넷째가 있으니, 불효다. 불효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아비는 비록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참으로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이었다. 만약 네 아비로 하여금 지금의 변란을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의병을 권장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땅속에 들어간 영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너의 한 짓을 가슴 아파하고 너의 불궤(不軌)함을 분해하며, “임금을 무시하고 어버이를 잊은 일이 내 자식한테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하고 말할 것이다. 네 죄의 다섯째가 있으니, 세상을 속인 것이다. 세상을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조정에 출사할 때 조정에서는 강과경직(剛果耿直)하다고 지목하였고, 영남에 절(節)을 갖고 내려왔을 때 영남에서는 너를 총명재예(聰明才藝)하다고 일컬었다. 강과 경직하고 총명 재예한 사람이 정말로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할 마음이 있었다면 험준한 곳에 거점을 두고 견고하게 진지를 지켜서 멀리 몰고 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轉環]같이 쉬웠을 터이다. 그런데 너는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가지 계책도 획책하지 않고 한 가지 모의도 시행하는 일이 없이 왜적이 도륙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은즉, 전일의 강과와 재예는 좋은 작위를 낚으려는 것이었으나 오늘의 우매한듯 겁내는듯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네 죄의 여섯째가 있으니, 무치(無恥)한 것이다. 무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영남을 왜적에게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서 근왕군에 몸을 기탁했다가, 근왕군이 용인(龍仁)에 도달했을 때 왜적 6명을 보고는 군량을 버리고 군기(軍器)를 내던지고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미리 금관자를 버리고 군사 중에 섞여 왜적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차하게나마 살아 보자는 마음은 평소에 정해졌던 것이고, 구차하게 살아나는 꾀는 못하는 짓이 없었던 것이다. 네 죄의 일곱째가 있으니, 남의 성공을 꺼리는 것이다. 성공을 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도내에 있으면서 네가 왜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저상해서, 앞장서서 적에게 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초유사가 충성심을 격발하고 의기(義氣)를 고무하여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만들어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게 된 덕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 가라앉고 성세가 자연 커져서 지역 내의 왜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거가를 받들어 돌아오는 날을 가리키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는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고서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하고 지휘권을 발동해서 의병들로 하여금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다 이룩하게 된 공을 망치게 만들었은즉, 전의 악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아아! 북쪽 하늘은 멀고 도로는 막혀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아 네 목이 아직도 온전한 것이다. 너의 가짜 기운과 떠도는 혼이 비록 천지 사이에서 보고 숨쉬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는 사실 머리 없는 시체다. 네가 만약 신하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 버리도록 하여 천하와 후세에 사과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 머리를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도록 할 것이다. 너는 알아 두라.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초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의 위세가 날로 성해 가고 왜적을 죽인 것이 퍽 많았다. 우병사 조대곤이 그의 성공을 꺼려 계사(啓辭) 안에 의심하는 말을 써 넣었고 감사 김수(金睟) 역시 계문 안에 불측한 말을 꾸며 넣었다. 이에 이르러 곽재우 역시 앞의 격문에 든 김수의 죄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경상도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신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백 차례 큰절을 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드리나이다. 엎드려 듣건대, 수도가 함락되고 거가 파천했다 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을 억제하지 못하나이다. 왜적이 오자 씩씩한 사나이와 건장한 장수가 누구나 다 빠짐없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난 것은 무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아서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흙같이 무너지는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한 자는 바로 김수입니다. 김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의 감사를 지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이 맹호보다 더 포학하여 성군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오지 않아 흙같이 무너질 형세가 이미 일이 생기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오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먼저 퇴각해 숨어버리고 온 도의 수장(守將)으로 하여금 한 번도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고 큰 적을 맞아 들여 혹시나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마치 저 왜적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김수의 죄는 비록 머리털을 잡아쥐고서 주살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운운. 너는 알아 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 도주(道主)의 과오를 말한 것을 잘못한 짓이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무사한 날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도주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마는, 이같이 위급하여 존망이 우려되는 때에 만약 다들 잠자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체의 모든 사람이 전하의 신하라면 어찌 김수의 죄를 용인하고 이 나라가 망해가는 때에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고종(高宗)이 호전(胡銓)의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후세의 원한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이라도 채납하여 주신다면 중흥의 공은 곧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할 것이고 신민들이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노둔(駑鈍)하여 강호(江湖)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이제 왜적의 변을 당해 종료 사직이 위태로우니, 스스로 조상 3대에 조정에서 벼슬 한 일을 생각할 때 신비한 모의와 계략은 비록 자방(子房 한 고조를 도운 군략가인 장량(張良))에 미치지 못하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신이 정녕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4월 22일에 의병을 모집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막아 왔던 것으로, 다행히 전하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힘을 다해서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마음으로 맹서하거니와 이 하찮은 신의 심정은 전연 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광기와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살피소서.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가 온 도의 의병 여러 군자에게 널리 고한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역적이다. 《춘추(春秋)》의 대의를 가지고 논하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를 주살할 수 있다. 따지는 사람은, 혹 도주(道主)의 과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그 목을 베겠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것은 단지 도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왜적을 영접하여 서울에 들여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파천하게 한 자를 도주라고 해서 되겠는가. 수수 방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신하라고 해서 되겠는가. 온 도의 사람들이 다 김수의 신하가 된다면 김수의 죄를 말하거나 김수의 머리를 베어서는 안 되겠지만, 온 도의 사람이 주상 전하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을 사람들이 다 죽일 수 있고 패망을 기뻐하는 간악한 인간을 다들 목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혹 김수를 목 베는 것이 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치면 그것이 이른바 일의 체통이다. 김수가 일의 체통을 멸실한 지 오래되니 일의 체통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본래 따져서는 안 될 것이나, 먼저 간악한 인간을 목 베어 군대를 돌아가게 하라는 조서가 없게 만든 연후에 거가를 받들어 돌아와 중흥의 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일의 체통에 크게 어울린다. 엎드려 원하건대, 의병으로 나선 여러 군자들은 격문을 자세히 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김수가 있는 곳에 모여 그 목을 베어 행재소에 바치라. 그렇게 하면 공(功)이 수길(秀吉)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의사들은 이 점을 알아두라. 혹시 수령들이 나라가 망할 것과 임금에 대한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도적 김수에 부회(傅會)하여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를 못하게 한다면 김수와 함께 같이 주살할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때 김 수는 거창으로부터 산음(山陰)으로 옮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위의 격문을 보게 되어 분하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했다. 김경근(金景謹)이 또 치고(馳告)하기를, “곽재우가 영공(令公)을 해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니 속히 피해야 하오,” 하여, 김수가 그날로 밤중에 함양으로 달려가 군수를 시켜 성을 지키고 계엄을 펴고 봉화(烽火)를 늘어놓고 기다리게 하고, 또 막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가 오면 응전하여 이를 방어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이어 군관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곽재우에게 격문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곽재우야, 너는 네가 역적임을 아느냐. 의병을 일으킨다고 가탁(假托)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실패하고 탄로가 나서 억만 년 후에까지 그 추악한 냄새를 남긴 자가 동탁(董卓)의 역적질이 아니었느냐. 옛 기록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였고, 또, “대부를 독단적으로 죽이지 말라.” 하였은즉, 서열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비록 죽어야 할 법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임금의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 것은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인 것이다. 본도의 순찰사는 일찍이 육경(六卿)을 지내고 두 차례나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하물며 한 도의 도순찰사의 직책을 받았음에랴. 설사 순찰사가 직접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조정에서도 처치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본도의 사람이 그 어찌 법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너 역적이 난리의 틈을 타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전한 것은 의거를 가탁하여 불궤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깨져서 탄로날 때를 위해 미리 자기를 보전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불과하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굳세고 거침없어 이미 수도를 함락시키고 거가가 파천하였으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강개한 뜻을 가진 자라면 비록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창을 베고 자며 적개심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본도와 같이 병화를 면한 고을 사람들이겠는가. 낙동강 동쪽은 몇 번이나 함락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근처의 주현(州縣)이 단지 7, 8군데가 남았을 뿐이다. 소수의 왜적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는데 지금 고성ㆍ성주ㆍ금산(金山)에 버티고 있으며, 또 금산(錦山)을 함락시키고 장차 거창을 함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나머지 7, 8개 읍도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약이 넘어가지 않고 호흡이 불통하고 혈색이 단지 입술에만 남아 있어 살 길은 10분의 1밖에 없는 것과도 같다. 너 역적의 마음이 만약에 의기에 격동되어 나왔다면 마땅히 순찰사ㆍ초유사와 김송암(金松庵 김면)ㆍ정내암(鄭箂嵒 정인홍) 두 선생과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느라 여가가 없을 것인데, 오직 반역할 마음만으로 먼저 한 도의 대장을 제거하려고 죄를 늘어놓고 격문을 전해 그로 하여금 정벌하는 책모에 전심하지 못하게 하여, 남아 있는 7, 8개의 읍이 장차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이 횡행하는 데 직면하여 자매와 처첩이 깡그리 사로잡혀 가고 부자 형제가 다 어육이 되어 비참하게 도륙되었으니 부모 처자가 있는 자들이 어찌 네 몸뚱아리를 난도질하고 네 살을 씹으려 들지 않겠느냐. 너 역적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전후로 낭패(狼狽)하여 진퇴유곡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 역적이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네 마음속에 작정하기로는, 국가가 공허할 때에 무뢰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인 은혜로 이들을 묶어 심복을 만들어 작은 왜적을 약탈하여 군의 성세를 크게 떨쳐 불행히 일이 가라앉으면 일대(一代)의 원훈(元勳)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요행히 나라가 망하면 또 새 왕조를 창립하는 대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심(禍心)을 품고 의병을 가탁하여 초계(草溪)의 관곡(官穀)을 점취하고 진주(晉州)의 전세(田稅)를 탈취하는 등 공공연히 도적질을 자행했다. 네 도당 정대성(鄭大成)이 주살될 때, 순찰사가 역적인 네가 장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막하에 자세히 캐어 물었었는데, 만약 안세희(安世熙)ㆍ김경눌(金景訥) 두 사람이 네가 역적이 아님을 힘써 진술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머리와 발은 벌써 각각 따로 떨어졌을 것이고, 너 역적의 혼 역시 동탁과 지하에서 뉘우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순찰사는 한 도의 방백에 불과했고, 방백이 거느린 것은 5, 6인에 불과하여서, 절제(節制 지휘권)가 병사와 수사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 버린 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부터 밀양으로 달려갔고, 밀양ㆍ청도(淸道) 등 5, 6개 지방이 2, 3일 내에 연달아 함락되어 왜적이 성주를 범하게 되자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하자 달려서 지례(知禮)로 향했다. 도중에 성주 가천리(伽川里)를 지나 마을 가에 말을 멈추고 유생 등 4, 5인을 초치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타일러 주고서는 가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지례까지 갔는데, 그때에 비로소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임명을 받았으나 거느린 것이 역시 막하의 사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도주한 패군 이유검(李惟儉)을 초치하여 목 베어 장대에 내걸고 죄를 청했고, 김해의 조대곤이 백의종군하는 것을 구원해 주지 않았으나 조대곤은 금산에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을 목 베었고, 여러 읍에 장수를 정해서 포로와 수급을 많이 올리게 하였으니, 이것들은 다 순찰사의 절제가 탁월했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제 왜적이 이미 고개를 넘어갔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어 버리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겠다는 뜻을 행재소에 치계(馳啓)하고 겨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雲峯)까지 갔는데, 이어 초유사가 전라 순찰사가 공주로부터 돌아 내려오고 전주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또 초유사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 돌아와 안음(安陰)에 머물렀다. 급히 와서 구원하라는 교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맹서하여 홀로 1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까지 나가서 머물렀는데, 도중에서 소수의 왜적들을 만났으나 목 베어 죽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은 퇴각해 가 버렸다. 그 이튿날에 이르러 왜적의 무리가 진으로 돌격해 왔는데 양호의 순찰사들은 다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본도의 순찰사 막하의 장병은 이미 전투에 나가게 했으므로 단지 수삼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퇴각하는 장수를 목 베이려고까지 하며 혼자서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 우리 군대를 손상 없이 온전히 돌려왔으니 이런 것들이 충분(忠憤)의 분발이 아니겠느냐. 너 역적이 비록 살해하려고 가슴속의 흉악한 모략을 실제로 자행하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아직 팔방에 행해지고 대장의 명령 역시 한 도에 행해지고 있다. 한 도와 팔방의 사람들이 다 고개를 숙여 너 역적의 수하에 복종하고 순찰사가 해를 입는 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극성스러운 왜적이 충돌해 오던 초기에 큰 진(鎭)을 연속하여 함락시키고 분탕하고 도륙하였으므로 태평시대의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흩어졌으니 장수된 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풀을 찍듯[樧]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찌르고 유린해 들어와 도성에 마구 들어왔으니 이것은 순찰사가 절제하지 못한 소치는 아니다. 너 역적이 비록 ‘죄를 씌우려면 어찌 말 없는 것을 근심하랴’ 하여 감히 흉악 처참한 일을 하고 이미 막하의 사람들에게 격문을 전해 자객(刺客)의 일을 하도록 위협하였으나, 순찰사는 미치광이의 말로 버려 두고 일소에 부쳤을 따름이다. 너 역적은 또 순찰사에게 격문을 냈는데 거기에 지적한 말을 보니 다 거짓되고 사실이 없으나, 그 가운데 충의기절(忠義氣節)로 순찰사의 선인(先人)에 허락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리(天理)가 민멸(民滅)하지 않은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옛부터 지금까지 충의기절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때에 의를 제창하고 근왕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바가 한결같이 정대하고 거짓 없는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이 이간하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송조(宋朝)의 여러 충성스러운 신하에 비길 인물은 당대의 김ㆍ정 두 선생이다. 너 역적은 본래 볼 만한 행실이 없었으면서도 의병을 칭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몰래 꾸몄고, 도당과 우익(羽翼)은 다 음험 무상하고 흉악 무도한 사람들인즉 지금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은 너 역적만이 한 짓이 아니다. 네가 반역한 상황을 순찰사가 행조(行朝)에 치계하였고, 곰과 범 같은 장수와, 산을 뽑아낼 인재가 다 순찰사의 막하에서 서로 다투어 너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어 격문을 내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묶어 오게 하여 불궤한 너를 효시(梟示)하자 한다. 네가 지금 와서 항복하면 멸족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길흉 화복 사이에서 너 역적 도당은 각각 거취를 살펴라. 또 너 역적이 평소에 행한 패역 무도한 정상은 말할 수는 있겠으나 말하면 추악해지니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 잘 알아 두어라.
○ 경상도 순찰사 막하의 김경로(金敬老) 등이 곽 의사의 진중에 격문을 내어 다음과 같이 이르다.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전한다. 무릇 천하의 일 중에 그 기미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라도 혹 모르지마는,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지극히 우매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자가 없다. 이제 곽재우의 평소의 패악한 행실과,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정상은 명백하여 보기 쉬우니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 연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내의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해서 같이 도당에 들어가 함께 무도한 지경에 빠졌으니 남 몰래 제군을 아깝게 생각하는 터이다. 잠시 그중에서 여럿이 다 아는 것을 들어서 말할 터이니 제공(諸公)은 자세히 듣고 그 정상을 알아서 거취를 정하고 향배를 결정하라. 곽재우는 본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 부모의 세도를 믿어 오로지 할경(割耕 남의 밭을 침범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일)을 일삼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으며, 그가 사귀는 것은 다 흉악한 이지(李旨) 같은 도배(徒輩)들인즉 그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덕수(文德粹)가 토주(土主)를 모략하여 죽이고 방백을 질책해 욕하며 병사를 고소한 것은 다 곽재우가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은즉 그 마음의 음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생긴 뒤 의병에 가탁하여 무뢰한 무리를 꾀어 모아서 먼저 초계의 창고를 파괴하고 군량ㆍ청밀(淸蜜) 및 군기(軍器)ㆍ잡물을 전부 훔쳐 갔으며, 또 의령현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고 또 진주의 전세(田稅) 4백여 석을 개인 창고에 옮겨 넣고서, 인근의 무뢰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은혜를 베푸는 거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왜적을 쫓아내기 전에 흉계를 꾸며 표면으로는 왜적을 치는 것으로 보이고 속으로는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모략을 간직하고 있었다. 먼저 방백을 제거하려고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고 읍재(邑宰)를 모략을 써서 죽여 위아래의 인민들을 공갈하고 말하기를, “방백은 백성을 독촉하여 성을 쌓느라고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었고 방어를 하지 않아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해할 것이다.” 하니 멍청하고 우매한 백성들과 강(講)에 낙방한 유생(儒生)들은 날로 흉악하고 패란한 술수 속에 빠져 들어감을 모르고 충의의 고장으로 하여금 난폭한 곳으로 변하게 만들어 장차 온 도를 옥석이 함께 타게[俱焚] 하려고 하니, 천년 후에까지 악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공이 깊이 부끄러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곽재우가 애당초 거병한 것이 진정한 의거였던가. 만약 그것이 의거였다면 왜적이 막 성할 때에 직면하여서는 자기의 사적인 유감을 버리고 왜적 토벌에 전심하여 생령을 편안해지도록 구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계략을 행했으니, 이 점으로 해서 곽재우의 마음 먹음을 사람들이 다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공이 유독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이노(李魯)가 마음 쓰는 것은 천고에 찾아볼 수 없이 악한데 곽재우는 그의 재물을 탐내 그의 딸을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곽재우의 마음 쓰는 것이 실로 개돼지 같아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멀리서 바라보고는 되돌아 가 버리고 더럽혀질까 겁낼 터인데, 제공은 다 그에게 부동하여 오직 그 명령에만 복종하니 제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곽재우가 흉계를 실행할 수 있어서 우리 읍재를 죽이고 우리 방백을 해치며 마침내는 불궤한 짓을 꾸미는 날에 이르게 된다면, 제공은 그래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난동 반역의 죄에 빠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르지 않고 충신 열사가 되겠는가. 시비 이해와 길흉 화복은 오늘 하는 일에 판연하게 가름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은 일찍이 반역과 충순의 이치를 분별하여 먼저 곽재우의 머리를 베어서 원문(轅門)에 가지고 와 바치면 모든 백성이 그 사기(士氣)를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꽃다운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고 작록을 무궁토록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지 않겠는가. 의를 사모하는 무리들이 그 모함하는 말을 가슴 아파하여 감히 그 거짓됨을 신변하여 이르기를, “초계와 의령에서 양곡을 취한 것 등의 일은 이미 초유사의 계사에 상세하므로 잠시 내버려 두고 변론하지 않겠거니와, 진주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인즉 평시 본주의 세미는 남강(南江)으로부터 배가 기강(岐江)으로 해서 가는데 이때에 와서는 배가 기강에 이르자 적병이 돌연히 닥쳐 와서 격군(格軍 : 뱃군 즉 선박의 승무원)이 배를 버리고 흩어져 쌀 실은 배만 빈 강에 홀로 떠 있은 것이 10여 일 되었다. 그러므로 도둑에게 줄 우려가 있어 의사가 거두어서 군량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이른바 기강에 버려진 배의 세미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죄를 씌우려고 정당한 물건을 탈취했다고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삼가(三嘉)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위의 격문을 보고는 곧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어 김경로 등이 의사를 모함한 죄를 폭로하여 다음과 같이 이르다.
요사이 순찰사의 군관배가 곽 의사에게 보낸 글 두 가지를 보니 하나는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고, 하나는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다. 의사가 과연 역적이고 도당을 가진 자인가. 그 가운데 말한 것은 다 부회하고 날조한 말들로 단지 자기네들의 음흉하고 사특하며 정의를 해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족할 뿐이지, 곽 의사의 병폐를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충의를 가리켜 역적이라 하니 그것은 진회(秦檜)의 흉악하고 교활한 묵은 술수다. 진회 하나로도 악비의 군대를 돌림으로 분을 풀기에 족했거늘, 하물며 여러 진회가 순찰사의 막하에 모였음에랴. 의병에 앞장서 일한 이가 어찌 그 때문에 한심해지지 않겠는가. 곽 의사가 여러 군대가 달아나고 무너질 때를 당해서 백 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결행하여 충의가 과격하고 절실하며 이름이 올바르고 말이 순리함은 사람들이 이목이 있는 이상 췌언할 필요가 없거니와,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군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는데, 아! 충성이 곽 같고 의기가 곽 같은데도 역시 역적의 이름을 면치 못하니, 그 자들이 의사를 해치는 것은 바로 의병을 해치는 것으로 그 자들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의사가 근자에 낸 격문에는 사실 경솔하게 움직인 점이 있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충의에 분격한 지나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 하필 그것을 깊이 허물해서 무엇하랴. 저 군관배는 한갓 왜적을 환영한 순찰사가 있는 것만 알았지 왜적을 토벌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모르고 곽에게 격문을 전해서 사적인 유감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그 사적인 유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김경눌(金景訥)과 이노(李魯)는 사이가 나빠진 지가 오래되어 여러 해 동안 이노를 모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이 변을 만나 자기 가슴속의 흉계를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던 차에 의사의 격문(檄文)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곽의 첩은 이의 딸이니 이노를 죽일 구실은 여기에 있을 게다.” 하고, 이노를 뒤에서 사주한 괴수로 만들고 곽을 사주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김경눌 역시 사람이니 어찌 곽공이 의사이고 충신임을 모르기야 하랴마는,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의사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을 임금[宸聽]께 앙달(仰達)하고 싶으나 북쪽 하늘은 아득히 멀어 소리내어 외쳐도 도달하지 않는다.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 곳의 의병소(義兵所)에서 각각 통문을 내어 의사의 명백한 마음으로 하여금 참소하고 모함하는 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다. 아! 올바른 도리를 지닌 타고난 본성은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고 역순(逆順)과 시비는 본래 공론(公論)이 있는데도 감히 대악 무도한 이름을 충신 의사의 위에 덮어 씌우려고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맹자가 이르기를,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한다[賊義者謂之賊].”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제창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무죄한 자를 무고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제군은 이 점을 깊이 살피라.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김경근(金景謹)이 거창에 갔는데 김성일(金誠一)이 막 자고 있었다. 김경근이 말씀드리기를, “곽재우가 순찰사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저 김경근이 이미 고하여 피하게 하였사오니 영공(令公)께서도 선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병을 핑계하여 면회를 거절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가 산음(山陰)에서 나를 만났을 때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천지에 대의를 펼 길이 없다.’ 하였고, 곽재우는 어리석은 사내이니 너희들이 부탁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전하니, 김경근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물러갔다. 김수는 격문을 전해 곽재우를 크게 꺾어 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비밀리에 김성일에게 내통하여 곽재우를 타이르게 하였다. 김성일 역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김수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변고를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져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의병장은 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시초부터 재산을 탕진해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분발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한들 어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본관이 임지에 도착하자 곧 글을 보내 초청하였던 바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본관을 함께 할 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만나 주었고, 한 번 읍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고립 무원한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여 전후로 목을 베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이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지 못해 그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고, 뛰어난 명성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듣는 사람 치고 감동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근에서 호응해 와서 왜적을 토벌해 버릴 공훈을 손꼽아 기대하였으니, 의병장의 영웅적인 풍도와 의열은 비단 한 대에 떨치고 빛날 뿐 아니라 또한 죽백(竹帛)에 기록되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홀지(忽地)에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감히 패만(悖慢)한 말을 마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백이 어떠한 관직이고 의병장이 어떠한 인물인데 감히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방백이 비록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조정이 있어 처치할 것이고 도민이 손을 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이 이룩되려고 하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져 일족을 멸망시킬 곳으로 빠져 들어가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당(唐) 나라의 반역한 병졸이 주장(主將)을 쫓아 내고서 □ 패란을 초래한 것이 무릇 몇 사람이었습니까. 전복한 수레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미혹했다가 되돌아 온다는 경계는 태역(大易)에서 교훈한 바이거니와 앙화를 바꿔 복으로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니,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순조로워 복이 많아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거슬러서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기미는 사이에 머리털도 안 들어갈 정도로 미묘하니 의병장은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 김해에 주둔해 있는 왜적 1천여 명이 고성(固城)으로 옮겨 들어가다. 왜장이 은가마를 타고 감사를 자칭하고 진주를 범하려 하여 진주성 내의 장병이 본도 여러 진(鎭)에 구원을 청하였다. 곽재우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도중에 초유사의 글을 보고는 말을 세우고 답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초유사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타이르시는 글을 보고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간곡하신 가르치심과 친절하신 타이르심은 다 저 곽재우로 하여금 장래 닥쳐올 앙화를 모면하고 막대한 공을 이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찌 합하의 지극한 인애로우심으로 저 곽재우를 자식같이 보신 데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지성에서 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는 데 자기 몸을 잊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내리신 말씀은 억양이 너무 지나쳐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두려워하게 할 것이나, 저 곽재우는 그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그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 합하가 순찰사를 위하여 꾀하시는 것은 충성스러우십니다. 다만 두렵기는 순찰사가 합하를 위해 꾀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순찰사 역시 사람입니다. 어찌 자기 죄를 자기가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순찰사가 말하는 것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순찰사가 하는 일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순찰사의 마음을 합하께서 고치실 수 있으시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합하의 지성(至誠)과 후덕으로도 끝내 순찰사의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신다면, 저 곽재우가 두려운 것은 합하를 모함하는 말이 반드시 순찰사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합하께서는 저 곽재우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것을 근심하였으나 저 곽 재우는 합하께서도 끝내는 그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실까 두려워합니다. 합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으로도 저를 비륜(非倫)하고 불궤(不軌)하다고 의심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순찰사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 곽재우와 공을 다투는 자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곽재우가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멸망시키는 앙화가 반드시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 졸지에 고칠 수 없고 울분에 찬 마음을 급히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신 분인즉 합하의 가르치심은 곧 왕의 말씀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한낱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고 합하의 가르치심을 어기겠습니까. 진주에서 긴급을 고해 와 군사를 거느리고 개금원(介金院)에 왔습니다. 군무가 복잡하여 만의 하나도 사뢰지 못하고 줄입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수가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글을 보내 곽재우를 진정시켜 달라고 하니, 김면 역시 곽재우가 분에 못 견뎌 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 의외의 환난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다.
막부(幕府)의 이름을 듣고 늘 흠앙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더운 날씨에 거느리신 군사들에게 도움이 있고 지휘가 만안하시길 바랍니다. 저 김면은 일개의 썩은 선비로 애써 군에 있으니 어찌 도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의 책모가 좋지 않아서 왜적이 고개를 넘어가게 놓아주어 수도를 지키지 못해 어가[大駕]가 몽진(蒙塵)하기에까지 이르렀은즉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이 아닌데도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근심할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처사가 마땅함을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행재(行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주청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 민간에서 거사한 사람들은 의뢰할 데가 없어 부득이 왕이 임명한 사람한테서 명령을 받은 연후에야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왜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근왕(勤王)할 수 있게 되며, 체통에 질서가 있게 되고 일을 해가는 데 조리가 있게 됩니다. 만약 일을 그르친 사람을 죄를 주어야 한다고 운운(云云)하는 바가 있다면, 의기가 당당한 점은 있지마는 순리로 공을 이룩하는 방법에는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귀하께서 충성심을 떨쳐 한바탕 외치심에 천백 명이 그림자같이 따라 나서서 물에서 공격하고 뭍에서 전투하여 흉악한 왜적이 도망쳐 흩어졌으니, 낙동강 우안(右岸) 일대를 안도하고 근심없이 지내게 만든 것은 실로 의사의 공입니다. 이른바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그 기세를 막은 것은, 지금에도 역시 그 사람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오직 원컨대 귀하께서 다행히 하찮은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순리를 생각하셔서 그 이미 자란 것은 누루시고 그 지극하지 못한 것은 증진시키셔서 의를 모아 멀리 뻗어나가게 하여 결함이 없게 하신다면, 일대에 솟구쳐 나오고 만고에 빛나게 되실 것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침 곽시리(郭是理)가 돌아가는 편을 인해서 구구하나마 사모하는 마음을 대략 적었습니다. 이만 줄이며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면배(沔拜).
○ 김수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소신(小臣)이 위로 성명(聖明)의 명철하심을 믿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방비하는 제구를 만약 충분히 조치해 둘 수 있다면 왜적이 충돌해 오는 환난에 대해 막아낼 보탬이 거의 있으리라고 여겨, 임지에 도착한 초기에 방어하는 한 가지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지에 성을 구축하는 데 교생(校生)들을 일시에 많이 징발해다 쓴 것이 신이 원한을 모은 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병사 신할(申硈)이 마침 신과 뜻이 맞아 비록 날쌘 군사에게 지나치게 엄히 한 폐단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정성은 실로 가상한 것이어서 그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하여 무릇 군무에 관련된 일은 다 함께 의논하여 처치하였던 것이 □□□ 물정을 격하게 한 것입니다. 문덕수(文德粹)의 상서(上書)는 온 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성(異姓)의 삼촌질(三寸姪) 전 직장(前直長) 이노(李魯)의 조종이었다고 생각하여, 또 신이 전에 장계(狀啓)에서 약간 그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이노가 소신을 해치려고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었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겠으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방으로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은 더욱 못하는 짓이 없을 만큼 성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사위가 된 의령에 사는 곽재우는 시초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곽월(郭越)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무뢰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수종하게 하였으며, 나장(羅將 고을의 장교)들을 엄연히 대동하고 초계(草溪)의 남쪽 대로로부터 행군하여 관청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지키는 자와 관가 사람을 묶고 관의 창고를 쳐부수었으며, 쌀과 밀가루 및 기름ㆍ꿀ㆍ찹쌀가루[眞末] 등 잡물까지 전부 훔쳤습니다. 또 사창(司倉)의 창고 문을 부수고 군량과 곡물을 깡그리 훑어내서 자기의 도당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 등이 문서[文狀]로 보고해 왔으나 신이 생각하기는, 곽월은 세족(世族)인데 세족의 아들이 어찌 도적질을 감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무뢰한 육지의 도적들이 곽월의 아들을 가칭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듣고 보아서 보고하라 하여 역시 회송한 뒤에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치계하였고 신 역시 공형의 문서만을 낱낱이 들어 계달(啓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듣건대, 의령의 신반현(新反縣)의 창곡(倉穀)을 초계에서 한 것같이 훔쳐 가졌고, 진주의 전세선(田稅船) 4척을 공공연하게 약탈해서 개인 창고에 옮겨 넣어가지고 근방의 못된 도배들에게 나눠 주어 은혜를 갚을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곽재우가 정말로 국가의 위급한 난국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려는데 군량이 없었다면 마땅히 수령에게 고하거나 혹은 신이 있는 곳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받아 내다가 먹여야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겁탈을 자행하여 극악한 왜적이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신은 그가 패역(悖逆)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급했고 또 그가 마음을 고치고 선에 따르게 되기를 바라 각 관원에 통유(通諭)하여 그로 하여금 와서 나타나게 하고 서서히 그 끝장을 보고서 다시 치계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가 병사(兵使)의 체포령을 신이 시킨 것이라고 잘못 듣고는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공공연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있는 곳에서 발설하였고, 신이 보낸 영리(營吏)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김성일이 극력 말려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微臣)의 구구한 생각은 그를 진정시키는 데 있으므로 불쾌한 감정을 안색이나 언사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장계를 올려 그의 군공을 보고하여 그를 가장(嘉獎)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원한이 가시지 않아 시험에 떨어진 유생들을 꼬여내어 도당을 매일같이 많이 모아 이름을 위병이라고 칭해서, 겉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나타내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의병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을 빛어낼 것이라고 근심하여, 자제들에게 엄명을 내려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까지도 있었고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들은 사람도 많습니다. 신이 일찍 처치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세에 난처한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먼저 소신 막하의 장병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자객의 짓을 하게 강요하였고, 또 신의 죄를 늘어놓아 여러 읍에 통문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꾸미라고 권고하였는데, 수령 중에 고을 사람을 그것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수령까지도 함께 죽이겠다는 뜻도 역시 그 통문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또 소신이 있는 곳에 격문을 보내왔는데 그 흉악한 말은 입으로 말할 수 없으나, 기한을 굳게 작정하여서 성을 구축하는 데 백성들을 못살게 학대하고 절제(節制)에 방법을 어겨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신의 죄입니다. 성을 구축한 일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든 것은 과연 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평 시절 백 년에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고, 변방의 장수들은 죽기가 아까워 퇴각한 것이 어찌 다 신의 절제가 올바른 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변란이 발생한 후 각 항의 절제의 득실(得失)은 다 어람(御覽)을 거쳤거니와, 한 도의 정병 용사 5, 6백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래가 함락되는데 먼저 밀양으로 달아나고 밀양이 함락되는데 또 가야로 도망갔으며,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해 숨었고 한 번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공격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신이 몸둘 곳을 몰라 근왕을 칭탁하여 도망쳐 운봉을 넘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죄라고 합니다. 당초 신은 순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지 않아 원래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이 없었습니다. 계청하여 8인을 보탠 가운데 홍윤관(洪允寬)과 김경로(金敬老)는 조방장을 겸했기 때문에 이미 좌ㆍ우도로 각각 파견하였고 이응성(李應星)은 변란이 생기기 전에 당포(唐浦)의 조전장(助戰將)으로 보냈으며, 강만남(姜晩男)과 장처문(張處文)은 변란이 생긴 후에 즉시 동래 등지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맡게 하였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있는 곳에 전령하여 정병 각 30명씩을 뽑아서 주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수하에는 본래 군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전(口傳)으로 군관 6인과 안세희(安世熙) 등을 특명으로 치송(馳送)한 것을 추가한 것과 도내의 가솔군관(假率軍官) 약간 명 및 가덕 첨사(加德僉使) 최몽성(崔夢聖)ㆍ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 등을 다 합해도 단지 50인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른바 5, 6백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한 것은 거짓으로 모함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15일 아침 신이 진주에서 왜적이 경내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갖추어 치계하고 오후에 출동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산과 동래 두 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16일 저녁에 밀양까지 달려갔으니, 이는 동래의 함락을 듣고 서둘러서 밀양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지 동래로부터 퇴각해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성을 지키고서 변란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본부(本府)의 성이 빗물에 태반이 무너졌는데 채 수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의 군사는 부사 박진(朴晉)이 능사창군(能事槍軍) 세 부대와 아울러 남은 군사 전부를 거느리고 동래ㆍ양산 등지를 구원하러 달려갔고, 성을 지키는 나머지의 사람은 노약자 겨우 백여 명뿐이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청도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의 군사들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합세하여 함께 지킬 도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그 성에서 포위된다면 동서로 책응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왜적이 본부의 작원(鵲院)을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여 영산을 지켰고 밀양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초계로 퇴각하였으며, 왜적이 또 김해를 함락시키고 초계의 길로 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합천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고 왜적이 성주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례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책응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며, 각처에 무너져 흩어진 졸병 겨우 4백여 명을 얻어 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梁士俊)에게 나눠주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 금산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조경ㆍ양사준 등이 한 차례 금산에서 접전한 후부터 군졸들이 다 흩어져 이때부터 비록 각 관원을 독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나, 도망간 군졸들이 죄책을 받을까 겁을 내어 깊은 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오직 자기가 있는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원ㆍ진사 및 유식한 품관(品官)을 시켜 흩어진 군졸을 소집하게 하였으나 생원ㆍ진사 역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려 급작스레 군졸을 모을 길이 없어졌고 방어사는 이미 군졸이 없는 장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적이 지례의 땅을 범하자 비로소 거창으로 왔는데 그때 왜적이 이미 의령ㆍ삼가(三嘉) 등지를 범했으므로 거창은 사실상 왜적이 침범한 복판에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로 책응하기 위한 계책에서였고, 변란이 발생한 후에 가야까지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도망했던 군졸 중에는 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자가 많았으나, 그들을 혹은 병사에게 보내고 혹은 방어사에게 보내고 하였더니 곧 도망가 버렸고 또 그렇게 나눠서 보냈기 때문에 역시 신이 있는 곳에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사ㆍ방어사 등은 단지 군관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신은 그래도 힘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누차 글을 보내서 신칙(申飭)하고 군관을 잡아다가 엄하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곽영(郭嶸)ㆍ이지시(李之詩) 등이 호남에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례에 와서 2일 동안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경 등이 한군데 같이 있으면서 곧 전투하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의 군관인 손인갑(孫仁甲)ㆍ강만남(姜晩男)ㆍ장처문(張處文) 등에게 전령을 발급하여 양사준(梁士俊) 등을 형벌 집행차 그곳으로 보내니, 곽영 등이 금산으로 달려가 왜적 20여 급을 목베었습니다. 이른바 밀양이 패전하자 또 가야로 도망갔고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하여 숨어버리고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하여 왜적을 공격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 또 거짓으로 모함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적이 영로(嶺路)를 넘었는데 충청도의 여러 장병 역시 패해 왜적이 곧장 서울로 들어갈 앙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울음 소리와 눈물이 다같이 나와 다른 일의 계획을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남은 것들을 수습하여 호남 감사 이광(李洸)과 합세하여 근왕할 뜻으로 절차에 따라 장계로 올리고 군사 1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운봉까지 갔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비로소 어가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서울이 이미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광 역시 전주로 군사를 철수해 버리고 정병을 더 뽑느라고 아직 출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혼자 가기에는 사세가 퍽 어렵고, 김성일이 강력하게 권하기를 군대를 돌리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주부(州府)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토멸하여 군현(郡縣)을 수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근왕하는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군량이 단지 20일분뿐이어서 도중에 낭패할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 잠시 본도를 돌아왔으니, 도망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근왕을 칭탁한 것으로 신의 죄를 삼는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한 것은 급히 서둘러 경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구원하러 오라 하신 □ 교지를 삼가 따른 것인데, 왜적에게 영남을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에 들어가 근왕을 칭탁하였다고 죄를 삼는 것은 또한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으며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의병으로 하여금 풀어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이룩되어가는 공을 무너뜨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대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킬 모의를 할 때에는 열 가지 책략을 조목조목 진술해서 신과 왕복하며 상의하였고, 군량ㆍ군기(軍器)의 준비와 문서류의 처리는 다 신에게 문의해서 시행하였습니다. 합천의 의병장 손인갑은 바로 신이 정해서 보낸 사람이니, 그 처사의 온건함은 진실로 곽재우의 황당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신이 본도로 돌아온 후 온갖 대소사를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였고 다른 곳의 의병 역시 다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의병이 일호(一毫)라도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들었겠습니까. 의병들의 일은 다 초유사 김성일과 의논해서 처치하였고 조금도 독자적으로 막은 일은 없었으며, 두 사람 사이(즉 김수와 김성일 사이를 말함)에 장병이 오가는 말은 믿거나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만나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이룩되려 하는 공을 깨뜨렸다고 한 것 역시 거짓입니다. 하물며 현존하는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군현을 수복해서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는 성지(聖旨)가 간절하셨으니, 이른바 의병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호령하고 지휘할 수 없겠나이까. 그런데 저렇게 운운(云云)하니 그 마음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그가 전해지는 말로 인하여 오해해서 무지하게 망령되이 굴었다 하더라도 반역한 백성이 된 결과를 면치 못하고 그가 왜적을 토벌한 공이 끝내 그 죄를 보상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이노(李魯)ㆍ문덕수(文德粹) 등이 다 한 집안에서 연결된 사람으로 세 사람의 유감이 위세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이노는 매일 곽재우 곁에 있으면서 모해를 가르치고 꾀느라 있는 힘을 다하고 흉계를 실행하기를 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이 이러한 해괴한 소식을 듣고는 누차 글을 보내서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극력 타일러 진정하기를 바랐고, 김면ㆍ정인홍 및 다른 의병 역시 다들 그를 책하였습니다. 그가 혹시 그의 악한 마음을 뉘우치는 수가 있고 또 종내 진정한다면 그것이 신의 본뜻이니, 그가 정말로 얼굴을 고쳐서 깨닫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를 처음같이 대우해서 그의 공을 완성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앙화의 기틀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신의 생사는 아마도 열흘 안에 결정될까 염려하나이다. 신의 죄는 본래 조정에서 처치할 것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진달하는 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 가까우니, 온당하지 못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짓으로 모함하는 정상을 죽기 전에 내내 생각하여 다 진술하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까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자초지종을 통문하여 그로 하여금 선처토록 하겠습니다만, 이미 변고를 당하고서도 다시 얼굴을 억지로 들고 그대로 머무르며 온 도에 호령할 수 없으니 속히 처치하여서 한 지방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가 충열(忠烈)한 인물인데 모함을 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혀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의령 사람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은 이미 누차 계달하였습니다. 지금 의외의 변이 생각지 못한 데서 나와 적절히 처리할 길을 몰라 극히 근심하고 있나이다. 곽재우는 바로 고 통정대부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손녀 사위입니다. 중간에 무예를 배우다가 버리고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됨이 질박하고 문채가 없으며, 부모 상중에 슬픔을 다해 이웃에서는 다들 그를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왜적의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병사와 수사가 뒤이어 달아나고 왜적이 밀양을 범하게 되자, 감사 김수는 지휘하는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영산으로 퇴각해 돌아왔다가 곧 초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곽재우가 분연히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달아났는데도 형벌을 가하지 않고,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에 나왔는데 초계로 퇴각해 달아났으니, 감사 역시 목 베어야 한다.” 하고는, 검을 짚고 길에서 만나 죽이려 하기에 동향 사람들이 강력하게 말려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우병사 조대곤(曹大坤) 및 방어사ㆍ조방장ㆍ수령 등이 하나같이 다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 열흘지간에 왜적이 서울의 궁궐을 범하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올리며 강개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왜적을 보호해서 서울에 들어가게 하여 임금에게 화를 끼쳤으니 다 목 베어야 한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있는 넓은 자리에서 늘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의 재물을 풀어서 장병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의 첩이 말하기를, “왜 쓸데없는 죽음을 할 계획을 합니까.” 하였는데, 곽재우가 크게 노하여 검을 뽑아 목 베이려 하였고, 처자의 의복을 전사(戰士)의 처자들에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자, 자기 처자를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에게 맡기고, 모집한 장병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치겠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다들 곽재우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의령과 초계 두 읍이 패전하여 관아가 비어 있고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분탕되었으므로 곽재우의 군사는 가지고 있는 양곡이 없어서 초계 및 신반현(新反縣)의 관고에 있던 양곡을 풀어서 군사들을 먹였는데,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 병사에게 보고하였고 병사는 명을 내려 그를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곽재우의 군대에 응모했던 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들 흩어져 가 버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이 갓 임지에 도착해서 즉시로 글을 보내서 불렀더니 곽재우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왜적을 쳤는데, 왜적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곽재우는 반드시 먼저 나서서 달려가 돌격하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전사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일당백(一當百)의 구실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곽재우는 전투할 때면 반드시 홍초첩리(紅綃帖裡)를 착용하고 당상관의 갓[堂上笠飾]을 갖추고는 홍의 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자호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스치며 오가는 것이 섬광같이 빨라서 왜적이 비록 일제히 철환(鐵丸)을 쏘아도 맞추지 못합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며 천천히 가서 군사를 행진시키는 절도로 삼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고 호드기를 불게 하여 겁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혹은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만들어 놓고 호각을 불고 시끄럽게 북을 치기도 하고, 혹은 곳곳에 복병을 매설해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조용하게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기도 합니다. 혹은 왜적의 배를 몰아 강 언덕에까지 가서 추격해 쏘기도 하고 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날이 없고, 전투를 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는데,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인 수효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많고 왜적을 쏘아 죽인 것은 부지기수입니다. 왜적들은 그를 ‘홍의장군’ 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도적질을 하지 못하니, 의령ㆍ삼가 두 읍의 인민들은 다 생업에 안정하고 농사에 힘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화시와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에는 곽재우의 공이 많습니다. 곽재우는 갑작스레 삼도의 군대가 수원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험하고 망령된 말을 무수히 발설하였고, 순찰사가 글을 보내 그를 칭찬하고 장계를 올려 그의 공을 아뢰었어도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혹 그렇게 하면 앙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그를 경계하기도 하였으나, 곽재우는 반드시 검을 거머잡고 성을 내고는 하였습니다. 지금 곽재우는 갑작스레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죄를 차례로 늘어놓고 토죄하겠다고 떠들어대며, 또 여러 읍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내어 토죄할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모르는 결에 눈이 휘둥그래져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서 의령의 관원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 하였으나,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로는, 곽재우가 실제로 반역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한창 정병을 장악하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에게 잡힐 상대가 아니고, 만약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글 한 장으로 족히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곧 곽재우에게 친서를 내어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어 일깨워 주었고 김면 역시 글을 보내 경계하였던 바, 곽재우는 타이르는 말에 마음을 바꿔 순종하였고, 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고자 이미 떠나갔다고 합니다. 곽재우가 일개 도민(道民)으로 도주(道主)를 범하려 하고 심지어 도주의 죄를 성토하여 격문을 보내고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위해 분노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하지마는 형적이 난동을 부리는 백성이 된 바에는 곧 토죄해야 의당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후에 고군(孤軍)으로 용기를 떨쳐 왜적을 격파해내어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그를 간성(干城)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난언(亂言) 때문에 곧 주륙(誅戮)을 가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고 왜적을 방어할 계책이 없어져 군사와 백성들은 그의 죄를 알지 못한 채 일시에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사태를 임시로나마 진정시킬 계획으로 재삼 경계하여 곽재우가 이미 순종하였는데 도순찰사에게 죄를 죄었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 어려워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됩니다. 신이 듣기에는 을묘년 왜변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군(靈嵒郡)으로부터 다른 읍으로 달아났던 바, 전 수원 부사 윤기(尹箕)가 그때 유생의 신분으로 포위된 성 안에서 검을 뽑아 그를 목 베려고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담소로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논자(論者)는 지금까지 윤기의 용기를 칭찬하고, 김주가 능히 용납하였던 것을 장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제 곽재우의 일은 비록 심히 광기를 띠고 망령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사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감사 역시 김주가 대처한 것같이 하면 조용하고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晬)에게 글을 보내 그로 하여금 선처하게 한다면 근심할 만한 변고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김수가 곽재우를 반란한 역적으로 장계를 올려 아뢰었고 또 다른 사람이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과연 그렇게 죄를 씌운다면 비단 그가 그런 죄목에 불복할 뿐 아니라 온 도의 민심을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극히 가슴 아픕니다. 그가 충의로 분발한 정상과 용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공은 온 도에 널리 알려져 아동과 주졸(走卒)까지도 다 곽 장군을 칭송합니다. 또 듣건대 곽재우는 군사를 잘 쓰고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하니, 만약 광기 띠고 망령된 자에 대한 주벌을 좀 늦춘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불행하게도 임명을 받은 후에 두 번이나 이러한 변고를 당했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으로 길을 잡아 운봉현에 도달했었는데 호남 사람이 순찰사 이광이 근왕하는 데 늑장을 부린다고 그를 토죄(討罪)하려 한다고 어떤 사람이 신에게 몰래 말해 왔습니다. 신은 대의(大義)를 가지고 의사를 꺾어 말리고, 곧 이광에게 통지하여 대비하게 하고자 김수에게 의논했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근왕하는 것이 느리다고 해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이니, 의사라고 할 수 있소. 만약 그 사람을 죽인다면 온 도의 민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니 이광이 있는 곳에 통지해서는 안 되오.” 하여,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바로 이와 유사합니다. 김수가 만약 호남의 의(義)에 대처하던 태도로 곽재우에게 대처한다면 난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및 김면이 곽재우를 경계한 글과 그의 답서를 함께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 이 계사(啓辭)에서 넉넉히 공의 충후하고 깨끗한 마음을 알 수 있다.
○ 흉악한 왜적이 지례(知禮)에서부터 호남을 범하다. 적인(狄人) 5, 6명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을 자칭하고 매복하여 왜적들을 사살하니 왜적이 좀 물러났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조금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무주현(茂朱縣)으로 마구 들어와 불태워 버리고 도적질을 하였다. 그때 본도 방어사 곽영(郭嶸)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조방장 이유의(李由儀)는 팔량(八良)에 진을 쳤으며, 이계정(李繼鄭)은 육십현(六十峴)에 진을 치고, 장의현(張義賢)은 부항(釜項)에 진을 쳤으며,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에 진을 쳐서 수비하며 왜적의 변란을 대기하였다. 적병이 또 옥천(沃川)으로부터 금산으로 향하자 방어사도 군(郡)의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감사에게 구원을 청하니, 이광(李洸)이 군사 8백을 내어 장수를 정해서 금산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23일. 성주(星州)의 왜적 7백여 명이 양정(羊亭)으로 나와 진을 치고 가야산을 탐색하려 하였고, 또 한 떼는 지례(知禮)로부터 무주(茂朱)로 향하면서 순영(順英) 등 마을을 분탕질하다. 순영은 무주의 역 이름이다. 또 고성(固城)의 왜적 1천여 명이 고성의 성 밖에 나와서 주둔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서북을 잠식해 들어가는 왜적이 지나온 여러 도에 연속하여 진지를 마련해서 후면을 공격 당하는 데 대비하다.
○ 적병이 금산(錦山)으로 들어가다. 곽영(郭嶸)과 김종례(金宗禮)는 퇴각하여 고산(高山)에 숨었다. 왜적이 무주와 금산을 나누어서 점거하고 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지를 분탕질하였다. 어떤 사람이 왜적 속에서 나와 말하기를, “이 왜적은 바로 전날 창원(昌原)에서 전라 감사를 자칭하여 선문(先文)을 낸 자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곧장 전주(全州)로 향하려 하였으나 홍의장군에게 저지당하자, 우회해서 성주와 지례를 경유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운운.” 하였다. 본도 여러 읍에서 남은 장정을 찾아 모아가지고 길을 나누어 방어했는데, 왜적이 금산으로 막 들어오자 그때의 군수 권종(權悰)이 병으로 죽었다.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조방장 이유의(李由義)가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등을 거느리고 팔량(八良)으로부터 금산의 송현(松峴)으로 진을 옮겨서, 왜적이 남쪽으로 부딪쳐 내려올 우려에 대비하였다.
○ 합천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은 초계(草溪)의 마진(馬津)에서 큰 전투를 하여 강 연안의 왜적을 깡그리 죽이고, 손인갑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앞서 손인갑은 강 연안의 왜적이 물을 따라 내려간다는 초계에서의 치보(馳報)를 듣고, 손인갑이 밤중에 군사를 전진시켰으나 초계의 의병이 이미 강 연안의 왜적을 토멸해 버렸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왔다. 그런데 안장을 채 내려 놓기도 전에 초계의 보고가 오기를, 강 연안의 왜적이 또 많이 닥쳐왔다고 하였다. 손인갑은 시간을 다퉈 달려갔고 또 정인홍에게 보고하였다. 정인홍은 여명에 길을 떠났다. 왜적의 배 12척이 약탈한 물건을 무겁게 싣고 초계를 지나가는데 초계와 고령의 군대는 고립되고 약해 감히 잡지 못해서 손인갑이 그들과 합세하여 왜적과 크게 싸워 깡그리 섬멸하였다. 떠가는 배가 강을 덮었는데 그중 배 한 척이 노를 급히 저으며 도망갔으나 모래 여울의 물이 얕아서 급히 배질할 수 없었다. 손인갑은 승전한 기세를 타고 물에 들어가서 추격했는데 모래턱이 부드러워 사람과 말이 함께 물에 빠졌다. 여러 군사들이 미처 건져내지 못했으므로, 온 전진(戰津)의 군사들이 참담하고 사기가 저상하여 수급(首級)을 벨 생각도 없어지고 크게 통곡하며 돌아왔다. 대체로 이때에는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장(主將)이 몸소 사병에 앞서 나가지 않으면 적에게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인갑은 전투할 때마다 먼저 자신이 적의 칼날과 맞섰기에, 한 좋은 장수를 잃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사병들 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촌락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슬프게 울었다. 정인홍은 김준민(金俊民)을 감사에 □계청하여 손인갑이 거느리던 군대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김준민은 처음에 거제(巨濟)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갓 일어나자 성지(城池)를 수선해 가지고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김수(金晬)가 근왕을 칭탁하여 군관을 데리고 다니다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감사의 휘하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인홍이 권양(權瀁)을 보내 김준민으로 손인갑이 맡았던 자리를 대신 맡도록 해달라고 청해 김수가 허락하고 그를 보냈다. 용감할 수 있고 겁낼 수 있고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기략(奇略)이다. 물에 들어가서 죽은 것은 혹 황하수를 맨몸으로 건너려는 아둔한 짓이라는 나무람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탐내어 나라를 잊는 도배와 비한다면 이 손인갑은 살기를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인 것이다. 슬프도다.
○ 금산(錦山)ㆍ무주(茂朱)에 있는 왜적의 기세가 매우 거세어서 내지(內地)로 쳐들어오므로 백성들이 공포심에 싸여 있었다. 이때에 정염(丁焰)이 남원(南原)의 향병장(鄕兵將)이 되어 남정(南亭)에 머물고 있었는데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정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추물(醜物 첩(妾)을 말한 것임)이 일가집 사람으로 언어를 좀 알아 들을 만한데, 오늘 아침에 전주(全州)에 윤씨의 첩은 전주 기생이다. 와서 왜적의 동향과 그 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내용에,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관군(官軍)은 적의 떼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덮쳐 공격하려 하였다. 이윽고 왜의 복병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관군은 수가 많지 않아서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산(高山)으로 후퇴하여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구원을 청하자, 8백 명을 뽑아 보냈다 하니, 길가에서 패해 무너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서울에 있는 적은 크게 패하여 서울 안에는 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병사(兵使)가 군사를 돌이켜 방금 고산으로 향하는 중이라 하고 후군(後軍)인 의병도 역시 고산으로 향한다 하며, 왜적이 옥천(沃川) 경계에 주둔하고 감히 금산(錦山) 지대를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 이것으로써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컨대 각 진영에 선포하여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하라. 신립(申砬)ㆍ윤두수(尹斗壽) 제군이 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찔렀다고 하니 하느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도와 주려는 것이라 매우 기쁘다.
○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주 전 만호(萬戶) 황박(黃璞)이 자원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아 웅현(熊峴)에 복병을 설치하니,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鎭安)의 경계이다. 이때에 이광(李洸)이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감(鄭湛) 등을 복병장으로 삼아 웅현을 파수하게 했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 경상 초유사(慶尙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전 현풍 군수(玄風郡守) 엄홍(嚴泓)을 본군의 병장으로 삼고, 곽찬(郭趲)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에 현풍 등지의 유수한 집안들은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가야산(伽倻山)이나 덕유산(德裕山) 등지로 들어갔는데, 김성일이 영지(令旨)를 전달하여 엄홍 등을 불러 본임(本任)으로 정하고, 또 격문을 띄워 이민(吏民)을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라의 운수가 극히 비색하여 칠치(漆齒 왜적을 이름)가 몰아 들어오니 임금은 파천(播遷) 길을 떠나시고 종묘 사직은 먼지를 무릅쓰게 되었다. 슬프다! 사람이면 다 양심이 있는 법이니, 무릇 이 땅에 살며 밥을 먹는 자는 누구나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영남(嶺南)은 본시 추로(鄒魯 문명의 나라를 이름)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왔거니와 현풍 한 고을은 더욱이 선비의 집단지가 되어 있으니, 그 사이에 절의를 위해 죽은 이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 적이 성중을 점령하고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있으니 그 해를 입는 자는 부모가 아니면 곧 처자다. 위로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요, 아래로 형제의 원수와는 더불어 하루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알건대, 산중에 엎드려 있는 자는 창을 베고 자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일찍이 잠시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분개하며 적을 토벌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워낙 극성스러운 적의 무리가 가득 몰려들어 우리 백성이 싸워 볼 만한 여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의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고, 용맹 있는 사람은 강하고 약한 것으로 기운이 꺾이지 않는 법이니, 원컨대 긴밀히 서로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그 힘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다면, 고을에 있으면서 충갑(冲甲)의 군사처럼 떨쳐도 좋고, 형세가 능히 자립할 수 없거들랑 군사를 이끌고 병사의 진영으로 가도 좋다. 혹시 당면한 직책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다면 강을 건너 의거에 참여해도 무엇이 불가할 것 있겠느냐. 지난 번에 합천(陜川)과 의령(宜寧)에서 정인홍(鄭仁弘)의 경우와 고령(高靈)에서 좌랑(佐郞) 김면(金沔)의 경우에 충성을 떨치고 의기를 다하여 한 번 외치자 각 고을이 호응하였고, 요즘 와서는 군사의 성세가 크게 떨치니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거의 확실하다. 본군의 백성들이 왜놈의 위력에 겁내지 말고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분기가 격동하여 용기가 백 배나 솟을 것이니 저 왜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적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와서 그 흉악한 기운이 이미 개성(開城)의 청석(靑石)에서 꺾이었고 서경(西京 평양)의 대동강에 침몰되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어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빼앗기고 명(明) 나라 병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祖)ㆍ곽(郭)ㆍ왕(王) 세 대장이 각기 정병 여러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달려와 응원하며, 해군 10만 명이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곧장 왜놈의 소굴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 세력은 저절로 확장되고 적은 망할 날이 머지 않은즉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옷소매를 떨치며 공을 세울 절호의 시기다. 만약 시일을 끌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는다면 화란을 안정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군신(君臣) 간의 대륜(大倫)에 비추어 죄를 얻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겠는가. 다만 무식한 서민은 임금을 섬기는 의를 모를 수도 있은즉 그들에게는 오직 상과 벌로 권하고 징계할 수 있으니, 그들은 조정에서 내린 방목을 보지 못했는가.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목 하나나 둘을 베어 바친 자에겐 육품(六品)의 관직을 주고 목 셋을 바친 자에겐 통정(通政 삼품)을 주고, 왜의 장수를 베어 바친 자에겐 가선(嘉善 종이품(從二品))을 주어 공을 기록한다 하였다. 무부(武夫)와 용사가 급히 의병에 참여하여 날랜 기운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높게는 통후(通侯)의 인(印)을 받을 수 있고 낮아도 공신의 반열에 서게 되어 영화가 한 세상에 빛나고 덕택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 혹시 계책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숲 속에만 숨어 있다면, 비록 왜놈의 칼날은 벗어날지 모르나 깊은 산중에서 굶어 죽는 신세를 면하겠는냐. 가령 만에 하나로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면 국가에는 엄연한 형벌이 있으니 비단 제 자신만 목이 달아날 뿐 아니라 그 처자된 사람까지도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몸소 싸워 큰 공을 이루고 중한 상을 받는 것에 비하면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떠하겠느냐.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비안(庇安) 등 여러 읍에 모두 이 격문을 띄웠다.
○ 중외(中外)의 대소 신민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여 정가가 그 요령을 잃었고, 어진 덕도 실지로 있지 아니하여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했으며, 토목(土木)의 공사는 연이어 거듭 백성의 힘을 곤하게 했고, 궁중(宮中)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끗으로 백성을 죄망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바깥 지방의 산택(山澤)까지도 세력가에게 점령을 당하여 뭇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한데, 나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변방의 근심만 생각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기어이 민생을 보호해서 적의 칼날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성의 원망은 더욱 쌓이고 이로 인해서 인심은 더욱 이반되어, 적의 군사가 경내에 가까이 오자 형세를 바라보고 먼저 무너지니 백성을 보호하자는 설비가 마침내 도적에게 필요한 물자가 되고 말았다. 말이 이에 미치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구나. 나는 생각건대, 영남은 실로 인재의 부고로서 부로들은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혀서, 저 옛날 김유신(金庾信)은 강개(慷慨)한 결심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김춘추(金春秋)는 앞장서서 적진에 달려 들었는데, 이 모두 본 지방 인물들이니 도내 80여 고을에 어찌 충의의 선비가 없겠느냐. 그런데 오직 너희 사서(士庶)는 네 아비와 네 할아비가 국가의 후한 은혜에 젖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당하자 이내 나를 버리고자 하니, 나는 너희들을 허물하지 않으나 너희가 차마 나를 버린단 말이냐. 윤대(輪臺)에서 내린 한제(漢帝)의 한 장 조서(詔書)는 바로 평시에 지난 일을 후회한 것 뿐인데도 한 나라 백성이 오히려 감격했거늘, 하물며 지금 난리 중에 성상(聖上)께서 애통하심이 이에 이르고 허물을 자책하심이 이에 이르렀음에랴. 이는 실로 초목ㆍ곤충도 모두 감동할 일인데, 더구나 양심을 지니고 윤리를 아는 우리 사람임에랴. 더구나 의리를 알고 충성을 품은 선비들임에랴. 진실로 마땅히 전장에서 목숨을 던져 적개심을 다해야 할 터인데, 한 사람도 북면(北面)하고 근왕(勤王)하여 임금을 위급한 시기에 구출하는 자가 없어 임금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용만(龍灣) 천리 밖에 머무르게 하니, 원통도 하다.
○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 경상도 고령(高靈) 선비 박정완(朴廷琬)이 장사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강 기슭에 복병을 설치하고,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구입하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에 왕래하며 충돌하는 적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또 배를 수선하고 수장(水杖)을 설치하여 강을 타고 내려 오는 적을 막았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긴다. 《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도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군사를 모집해 일으켜 정인홍(鄭仁弘)에게 소속되어 무계 및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가을 7월 2일. 적병이 용담(龍潭)으로부터 장수(長水)로 향하자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 등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다. 남원 판관(南原判官) 노종령(盧從岭)이 본부로 달려가서, “적의 부대가 이미 장수를 지나갔으니 곧 두 관아(官衙)의 권속을 남산 밖 산동촌(山洞村)으로 보내어 대피시키고 묘봉사(妙峯寺)로 들어가라.” 외치고, 노종령도 단신으로 도망쳐서 이날 밤에 원천촌(原川村)으로 들어가 잤다. 내 집에 유숙하였다. 이튿날 산동(山洞)으로 가본즉 수성원군(守城元軍)ㆍ팔결연호군(八結煙戶軍) 및 향병(鄕兵)은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고 부사(府使) 윤안성(尹安性) 만이 홀로 부 남쪽 술산(述山)에 남아서 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적병이 오지 않았다.
이유의의 분산된 군사는 모두 중도에 떠도는 자들이라, 성중에 함부로 들어와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마구 가져가니 교방(敎坊)ㆍ관청이 일시에 탕진되고, 경내 사람들도 역시 성중에 들어와 그 나머지 물건을 훔쳐냈다. 윤안성은 적이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또 난병(亂兵)이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듣자, 말을 돌이켜 달려 들어와 그중 심한 자를 목 베고 임춘루(臨春樓)에 주둔했다. 동문루의 이름이다. 부사는 바로 나의 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옛친구 분이시라, 때마침 내가 난리를 피해서 용추동(龍湫洞)에 있다가 그 연유를 듣고 달려가 뵈니 부사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민간을 방문해서 도로 집합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방(坊)에 첩지를 내려라. 운운” 하였다.
3일. 적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관부의 물건을 옮겨 둘 방법이 없으니, 마침내 왜적의 소득이 될 바에야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겨 심히 금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창(司倉)ㆍ관청 각처의 잡물이 전부 탕진되어 조석의 지공(支供)조차 나올 데가 없었다. 형편이 부득이 하여 팔결군(八結軍)은 따로 지출을 하는데 명분 없는 징수는 역시 심히 미안하므로 각 방(坊)에 관청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을 잘 개유하여, “자진해서 다시 바치면 원래 도덕질해 간 것이 아니니 죄를 따질 까닭이 만무하며, 많은 수효를 바친 사람에게는 그 수효 중 삼분의 일을 상으로 줄 터이니 급히 실행하라.” 하였다.
○ 전날 김면(金沔)ㆍ곽재우(郭再祐) 양군(兩軍)에서 노획한 왜놈 장물 가운데 궁중의 물건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김 성일(金誠一)은 남원 고을이 적과 거리가 멀다 여겨 보내어 보관하게 했는데, 3일 난병이 도적질해 가서 전부 없어졌다.
4일. 전 도사(都事)는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나서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 사람인데 처음에 귀양가 있던 곳으로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본현(本縣) 마을 집에 와 있으면서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윽고 서울이 무너지고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분주히 의병을 모집하여 이날에 공주(公州)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모집에 응한 자가 천여 명이었다. 손수 격문을 초하여 삼도(三道)에 전달했다.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生)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 모두들 보고 들으면, 거의 분개하고 미워하리라. 저 침략해 오는 왜적을 보면 버릇없는 묘민(苗民)보다 심하구나.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여 원한이 온 나라에 가득찼고, 군장(君長)을 시해하기를 여우와 토끼 사냥하듯 하니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 저 한착(寒浞 은(殷) 나라의 역적)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을 모르고, 역량(逆亮 금(金) 나라 임금)이 멀리 치러 갔던 것을 본떴다. 달콤한 말과 간사한 꾀로 처음에는 이익을 제공하여 사람을 속이더니, 자취를 감추고 군사를 숨기어 마침내 바다를 넘어 땅을 차지하려 드는구나. 태평한 지 오래라, 비록 막아낼 만한 군사가 없다지만 유린해서 깊이 들어오니 이처럼 번질 것은 생각지 않았다. 조령(鳥嶺)이 마침내 무너지니 한강(漢江)에서 무기가 번뜩이는 것이 원통하고, 용여(龍輿 임금의 수레)가 멀리 순행하니 변방에서 북두별 바라보는 것이 슬프도다. 어찌 생각했으랴! 수백 고을에 끝내 한 명의 남아가 없을 줄이야.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도 오히려 화기[和光]를 손상하여 재앙을 이룬다 하거늘, 백성의 집안을 도륙하고 백성의 살림을 불태우면 어찌 악이 차서 죄를 부르지 않을까 보냐. 서민의 원한은 날로 쌓이고 의사의 기운은 달로 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죄 짓고 도망간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이 탐욕 많은 금수(禽獸)보다 심함에랴. 사람의 꼴을 지녔으면 양심이 있을텐데 측은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으니, 하늘의 명령을 받들면 반드시 천벌을 봉행(奉行)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힘세고 강포한 자를 무서워하랴. 전쟁을 잘하는 자는 최상의 형(刑)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백기(白起 진(秦) 나라 장수)가 사형을 받았다. 죽이길 좋아하는 자는 대벽(大辟 목 베어 죽이는 형)을 범하는 것이니, 뒤에는 황소(黃巢 당(唐) 나라 역적)가 패해 처단되었다. 그러므로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이 왜적을 떳떳이 죽일 것을 생각한다 들었고, 또한 반드시 산천 귀신이 이미 추악한 무리를 음주(陰誅)하기로 의논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군사를 이끌어 가는 규율을 생각하면, 대개 《주역(周易)》에 나타난장인(丈人)의 원길(元吉)이 아니다. 누가 황금으로 띠를 두르고 백마(白麻 사장령)의 소중한 선고를 받았는가. 영호(嶺湖)를 돌고 돌면서 군부(君父)의 근심과 급함도 모르고 경기 근처에 머뭇거리면서 단단한 오랑캐를 앉아서 불러들이며, 삼도(三道)를 끼고 있으면서 앞서 출전한 자를 구원하지 않고 한 번 패함으로 인해 영영 뒤에 일어날 기회조차 잃었으니, 그 도적을 기른 큰 죄상을 따진다면 어찌 분곤(分閫 임금의 특명을 받은 대장)의 대권을 맡을 수 있으랴.
묘당(廟堂 조정)은 격리되어 머나먼데, 적진은 빙 둘러서 첩첩하구나. 군사의 기세는 누차 꺾이어 한탄만 하고 민생이 다시 소생할 길은 끊어졌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미란(糜爛 죽이 풀어진 것같이 썩어 문드러짐)되고 말 것이다. 장차 기자(箕子)가 끼친 풍화로 하여금 영원히 야만의 지역이 되게 한단 말이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서 아직도 호남 한 지역이 온전하니, 백성이 주도(周道 조국)를 생각하매 어찌 초호(楚戶)의 세 집이 없을쏜가. 우격(羽檄 징병하는 격문)이 강을 지나는 것을 조목조목 보니, 과연 한 마디 말이 중함을 알겠다. 고 동래(高東萊)는 적을 잘 추적하고 김 수원(金水原)은 군사를 잘 쓰며, 곽 장군(郭將軍)은 영남(嶺南)에서 군사를 이끌어 용감한 기운이 있고 김 진사[上舍]는 바다 고을에서 격문을 날려 열렬한 위엄을 지녔다. 이 분들은 모두 세상을 바로잡을 영재들이라 반드시 사람을 움직일 묘법이 있을 것이니, 머지 않아 비후(豼貅) 같은 용감한 군사가 왕성하게 모여서 개나 쥐 같은 오랑캐를 없앨 것이다. 하물며 호서(湖西)의 선비들 풍습은 진실로 등군(鄧君)의 본뜻에 갑절은 되어 앞다투어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어찌 역사에 남길 공이 없을쏘냐. 청컨대 한 번의 수고를 꺼리지 말고 세 번 이기는 공을 이루도록 기약하세. 의당 뜻이 같으면 서로 호응할 것이니, 응당 온 나라가 멀리 합세하리라. 인헌(仁憲)의 기특한 꾀를 쓰니 단정코 손녕(孫寧)의 낯가죽을 벗기게 될 것이고, 무목(武穆)의 묘한 계산을 생각하니 모름지기 올출(兀朮)이 수염 깎는 꼴을 볼 것이다. 뜻이 해이하지 않으면 귀신이 감동하고 사람이 따르는 것이요, 일을 이루고자 하면 하늘이 돕고 땅이 보호하나니, 어찌 무도한 도적으로 하여금 밝은 나라에 오랫동안 불법을 범하게 할까보냐. 원충갑(元冲甲)이 한 번 북을 울리고 용맹을 떨치자 합단(哈丹)을 계악(鷄嶽)에서 무찌르고 금(金) 원후(元侯)가 한 번 활을 쏘아 적을 죽이자 몽고병(蒙古兵)을 황민(黃岷)에서 물리쳤으니, 이들은 선비와 승려로서 무력이 있는 명장이 아니지만 한 번 생각을 잘함으로써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느니라. 이 나라 강산을 돌아보면 실로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전조(前朝) 말엽에 해적이 여러 번 침략했으나 선배들의 힘을 입어 물리쳤고, 을묘년 여름에 갑자기 변방의 난리가 일어났으나 호걸들이 나서서 평정했다. 이제 백 년 동안이나 백성을 잘 길러냈는데, 어찌 만갑(萬甲 만군(萬軍))을 가슴속에 감춘 이가 없으랴. 혹은 백 보 밖에서 쏘아 버들잎도 뚫고 혹은 큰 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범을 잡으니, 문무(文武)를 차별해 보는 것은 정책의 그릇됨이 한탄스럽다. 생각건대 국가를 제 몸같이 여겨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자를 보기 어렵구나. 환란을 당하면 어찌 뒷 조심을 경솔히 하랴. 옛일을 거울 삼는 자는 마땅히 사전에 방비해야 한다. 진실로 천지를 돌려놓을 만한 계략이 있다면 어찌 황하(黃河)가 띠 되고 태산이 숫돌 되도록 영원하자는 맹서를 아끼겠는냐. 삼도의 힘을 합하여 위급을 해결하는 것이 오직 이때요, 일생의 재주를 다하여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이날이다. 뜻을 같이한 우리 여러 선비는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감한 무인들과 결속하여 위급한 국맥(國脈)을 이어 나가도록 하자꾸나. 우리의 활을 당기고 우리의 화살을 먹여서 먼저 아지발도(阿止拔都)의 목구멍을 쏘고 그대의 창을 들고 그대의 방패를 나란히 하여 괴자(拐子)의 발을 연이어 찍는다면 적은 저절로 놀라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며 백성은 응당 도로 모일 가망이 있을 것이다. 밭을 매는 자는 늦은 곡식을 가꾸게 되고 나무 베는 자는 불에 탄 집을 수리하며, 호남과 영남의 한 길을 시원스레 터서 장사꾼들이 사방에 영원히 통할 것이다. 당 나라 현종(玄宗)을 파촉(巴蜀)에서 모셔 왔듯이 우리 성주를 모셔 오면 당연히 애통히 여기는 조서가 내릴 것이고, 순(舜) 임금이 조정의 사목(四目)을 밝혔듯이 우리 이목을 밝혀 약석(藥石) 같은 말을 모아들이면, 옛날의 폐단이 절로 제거되고 좋은 세상의 은택이 미쳐올 것이니, 한 번 싸움에 힘을 다해야만 후손에게 복을 끼치리라.
5일. 적병이 진안(鎭安)으로부터 전주(全州)로 향하니 이광(李洸)이 이정란(李廷鸞)을 시켜 본부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만경대(萬頃臺) 산성으로 나가 진을 치고, 영남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이르기를, “금산(錦山)의 왜적이 이미 무주(茂朱)ㆍ용담(龍潭)ㆍ진안 등지를 점령하고 또 전주에 침범하여 혹은 감사(監司)ㆍ안무사(安撫使)의 명령이라 칭탁하고 오로지 군사의 모집을 일삼으니, 놈들이 지나가는 열읍에는 우매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서로 따라붙는데 금산ㆍ용담이 더욱 심하다.” 하였다. ‘공문을 발송하여’ 이하는《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고령(高靈)으로부터 밤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먼저 공문을 발송해 이르기를, “상사(上使)에 관한 것이다. 병사가 감사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따라 온양(溫陽)에 당도하여, 명을 받고 도로 내려와 각 읍의 군병(軍兵)을 완전히 정돈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당일에 안동(安東) 등지로 떠나는 중이다. 여러 군사와 빠졌던 장정을 수색해 내서 요로에 복병을 설치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이며, 각종 군량과 잡색 군사는 주장이 인솔하고 아병(牙兵)ㆍ업무(業武)ㆍ무재(武才)ㆍ전마(戰馬)ㆍ쇄마(刷馬)ㆍ수군ㆍ육군은 따로 정하여 상사에게 문서를 작성해 올려서 전령을 기다리도록 하며, 적들이 왕래하는 것을 잇달아 빨리 알리되 함락당한 각 읍에 대해서는 당초 접전한 상황과 함락당한 절차를 장계에 일일이 따져서 보고해야 한다. 용궁(龍宮)ㆍ예천(醴泉)의 적이 깃발을 올리고 물러가기를 서두르고 있으니 각 읍 수령들은 군졸을 집합하고 복병을 설치해 요격해서 큰 원수를 갚도록 할 것이다. 운운.” 하다. 박진이 샛길로 밀양(密陽)ㆍ풍각(豐角)에 당도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이는데, 박진이 전에 본군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종군을 자원하는 자가 5백여 명이었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김옥(金玉)과 봉사(奉事) 김대허(金大虛)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안동을 점령할 양으로 신녕(新寧)에 도착하였는데 안동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신녕 의병장인 봉사 권응수(權應銖)를 조전장(助戰將)으로 삼아 청송(靑松)ㆍ안덕(安德)으로 전향하여 진보(眞寶)에 당도했다. 안동 사람 진사(進士) 신경립(辛敬立)이 찾아와 안동 지세와 적이 주둔한 형상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적병이 만 명이 채 못 되니 오히려 쳐부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진이 말하기를, “내 앞에 거느린 군사가 겨우 8백 명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도 모두 하도(下道)의 군사들이라 본부(本府) 도로가 멀고 가까움과 굽고 곧은 상황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가까운 지역 사람을 더 모집하여 본부 사람을 길잡이로 삼은 연후라야 진격할 수 있소. 그러니 경솔히 행동할 일이 아니오.”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비안(庇安)에 주둔한 적이 방을 써서 붙이기를, “당도자(當途者) 일본국 재상(宰相)이 어명(御命)을 받든 것은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니, 군내(郡內)의 사람이 산중이나 혹은 해외로 피난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라. 일본 사람으로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은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있으니,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고 풀을 제거하여 가을 수확을 기다리라. 조선(朝鮮)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 군사의 왕래를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서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開寧) 우리 장군의 진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느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천정(天正) 20년 7월 일. 안예 재상(安藝宰相) 대리 완호원차 삼보원충(完戶元次三寶元忠).” 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의 장수는 휘원유로(輝元留老)이니, 개령ㆍ비안(庇安)의 적은 필시 휘원의 부하일 것이다. 그 사연을 보니 흉악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6일. 이광이 막하 군사를 시켜 노종령(盧從岭)을 잡아다 곤장을 때려 사실 무근인 일에 놀라게 한 죄를 다스리다.
○ 경상도 삼가(三嘉)의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형제가 군사를 모집하여 9백여 명을 얻었고,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權濟) 등이 또한 의병을 일으키니, 김성일(金誠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당일로 장계를 올려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날에야 임소로 돌아와서 일을 함께 했다. 이정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군수에게 소속시켜 진해(鎭海)ㆍ창원(昌原)에서 충돌하는 적을 대항하였는데, 매번 싸움에 이기면 선뜻 공을 군수에게 돌리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다. 박사제(朴思齊)는 봉사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郭再祐)에게 부속시켜 영산(靈山)ㆍ창녕(昌寧)을 왕래하는 적을 방어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고경명(高敬命)이 연산(連山)에 머물러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영(令)을 전달하여 금산(錦山)에 남아 뒤처진 적을 치자고 약속했는데, 이광이 군관을 시켜 고경명에게 군사를 돌이켜 함께 지키기를 청하였다. 고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연산에서 떠나 진산(珍山)으로 전진하면서 정예부대를 뽑아서 길을 나누어 정탐하게 했다. 이광이 곽영에게 영을 전달하여, “달려오라.” 했는데, 곽영이 듣지 아니하고 의병을 따라 금산으로 향하였다.
○ 경상도 금산(金山) 소모관인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면서 권응성(權應星)을 임시 장수로 삼았는데, 김면(金沔)의 지례(知禮)ㆍ금산 싸움에 권응성이 협조해 공격한 공이 있었다. 그 후 권응성은 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 죽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창녕(昌寧)의 생원 신방즙(辛邦楫),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이 군사 7백여 명을 모아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쳐서 서로 계속 적의 귀를 베어 바쳤다. 보인(保人) 조열(曹悅)과 성천희 등은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녕을 포위하여 종일토록 교전하는데, 적 한 놈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칭 고을 원님이라 하므로 마침내 그 놈을 쏘아 당장 죽게 하였다. 그런 지 3일 후에 적은 울을 불태우고 도망갔다. 전 의령 목사(宜寧牧使) 소모관 오운(吳澐)이 한 고을을 개유(開諭)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얻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8일. 적이 웅현(熊峴)을 넘으니 복병장(伏兵將)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싸우다 죽다. 처음에 도복병장인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이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황박(黃璞)이 그 위에서 지키며 정담은 그 아래서 지키는데. 이광(李洸)이 장병을 더 보내어 군의 위세를 도왔다. 이날 동이 틀 무렵에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선봉 부대가 모두 기(旗)를 등에 꽂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가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먼저 나와 활을 쏘아 낱낱이 명중시키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우니 적병이 점점 퇴각하였다. 아침 해가 동으로 올라와, 뒤의 적이 산과 골짜기를 덮으며 크게 몰려오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산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어울려 번쩍이고 나는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뒤를 이어 응원하는 적이 얼마 안 있다가 또 와서 합세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과 같았다.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 되어 무너져 나주 진중으로 들어갔다. 적병이 승세를 타고 충돌하여 고갯마루로 오르니 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후퇴하여 살 수는 없다.” 하고, 용감히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안덕원(安德院)에 전주 동쪽 10리 길에 있다. 군사를 주둔하였다. 그 후 만력(萬歷)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김제군의 유생(儒生)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담의 덕과 의를 사모한 나머지 그 공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김찬(金瓚)에게 신원장(申寃狀)을 올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성립 등이 검찰사(檢察使) 상공(相公) 합하(閤下)에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권면하는 법전입니다. 작고한 군수 정담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강개하며, 난리가 한창 심할 적에 본군 원으로 오게 되자 충성심을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용맹 있는 장정들을 뽑아들여 소 치고 술 걸러 배부르게 먹이니 병사들이 감격하여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공산(公山)으로부터 진을 파하던 날에 공산은 곧 공주(公州)이니, 이광(李洸)이 처음 근왕(勤王)한 곳이다. 전 현감 어득준(魚得濬)과 더불어 울며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근왕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주장(主將)의 뜻을 알 수 없다. 장차 의병을 이끌고 멀리 전하의 행차를 따를 생각을 하면서, 육지를 거쳐 좇으려고 하는가. 경기의 왜적이 그득히 퍼져서 바다를 건너 고을로 진군하고 있으니, 연해(沿海)가 아니면 본래 배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전하께서 계신 데까지 이를 것인가.” 하였습니다. 매양 밥상을 대하면 문득 송구하게 여겨 달게 먹지 않으면서 장좌(將佐)들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나물 한 가닥 쌀 한 톨이 모두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주상께서 서도(西道)로 파천하시어 기갈(飢渴)이 매우 심하실텐데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차마 이 밥을 먹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 편안할 일이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본군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에 과거에 올라 아무 해에 아무 벼슬이 되었다가 지금 또 급이 올라서 이 고을에 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미 후히 입었다. 하물며 아들 하나가 있어 집안 일을 맡길 만하니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인하여 목이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백광언(白光彦)에게 왕래하여 합심해서 적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도내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용감한 자들이 마음을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병장이 되어 웅현(熊峴)에 방어하러 갈 적에는 주효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고사를 지내고 떠났으며, 그곳에 가서 보고는 험준한 데를 가려서 나무를 베어 울을 막고 군사들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절대 싸워야 하며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병 만여 명이 고개로 올라오자 군수가 활쏘는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진 앞에 서서 활을 쏘는데, 하나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적의 무리가 쓰러져 여러 번 퇴각하였습니다. 적의 괴수 한 놈이 백마를 타고 붉은 기를 꽂고 그 무리를 독려하여 곧장 진 앞으로 다가오자, 군수가 다시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며 여러 장령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화살로 반드시 저 괴수놈을 떨어뜨릴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모두가 탄복하였습니다. 혹자가 나가서 그 적의 귀를 베어 오려고 하자 군수가 꾸짖고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내 진중에 있는데 어찌하여 공을 탐내느냐.”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적이 군수의 진은 마침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주 진의 허술한 곳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오니 그 진의 장병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바삐 와서 말하기를, “저쪽 진이 이미 무너져 적의 선봉이 충돌해 들어오니 조금 후퇴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군수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종사관 이봉(李葑) 및 보좌관 몇 명과 더불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이 몸을 끌고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길게 몰아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활을 쏘니 뒤미처 오는 적이 일시에 사방을 포위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본군 사람들이 가서 군수의 시체를 찾는데, 쌓인 시체 속에서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싸우다 죽을 뜻은 평소부터 정해졌던 것입니다. 살아 돌아온 각 읍 장병들이 오며 가며 서로 말하기를, “아무 고을 군수는 적을 토벌할 적에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고 맞히면 반드시 꿰뚫었다. 그가 단독으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며 또 그가 죽인 적의 장수는 가장 괴걸한 자인데, 그 적이 바로 전라 감사라 자칭하던 자다. 적은 글월을 만들어 제사하며 통곡하고 돌아갔다. 흉악한 왜적이 마침내 전주에 충돌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담의 힘이니 어찌 난리가 평정된 이날에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풍패(豐沛 전주)를 보존한 공을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며, 경내에 초빈을 하고 초하루ㆍ보름과 세시(歲時)에 곡하고 제를 지내니 본군 사람들이 의를 사모하는 것은 이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 흉적이 물러갔으니 죽은 이의 충렬을 위로하고 장래의 용사를 격려하는 것이 국가에 있어 어찌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조정에 장계하여 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9일. 적병이 양양역(襄陽驛)으로 전진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다. 이튿날 적의 떼가 거침없이 날뛰어 완산성(完山城) 밖에서 진을 치고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니, 이광(李洸)이 금구(金溝)로 도망해 가서 만경대(萬頃臺)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우리 군사가 분주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뒤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금산(錦山)ㆍ무주(茂朱)로 돌아갔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전주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산성이 무너진 것이 도리어 유리하게 되었다. 한창 적병이 성 아래에서 충돌할 적에 경기전 주관(慶基殿主官) 오씨(吳氏)가 어영(御影)을 받들고 옥구(沃溝)로 달아나 뱃길로 서해 바다를 거쳐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니, 주상 전하께서 울며 절을 드리시고 친히 제사하신 후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영변(寧邊)에 고이 모시게 하셨다. 그 후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光海君) 7년 가을 9월 18일에 다시 전주에 모셨다.
○ 경상도 영산(靈山)에 사는 공휘겸(孔撝謙)이란 자가 난리 초반에 적에게 붙어 함께 서울에 와서 자기 집에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당연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요, 낮아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벼슬은 차지할 것이다.” 하고, 또 주상전하께 범하는 말이 있으므로 곽재우(郭再祐)가 듣고 몹시 분개하였다. 하루는 공휘겸이 제 집에 돌아오는 것을 곽재우가 포박해 다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다. 이때에 거세고 사나운 남의 집 종들이 많이 주인을 죽이고 횡포를 부려 혹은 칼질을 하며 혹은 간음을 하므로, 곽재우가 들을 적마다 즉시 잡아 죽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지례(知禮)의 적이 거창(居昌)을 범하는데 적의 장수가 은가마를 타고 큰 기 세 개를 세우고 고함을 치며 들어오자, 김면(金沔)이 힘껏 싸워 후퇴시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상주(尙州) 사람 진사(進士) 김각(金覺), 교서관 정자(正字) 이준(李埈)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시어 돌아오지 못하시고 세상은 몹시 어지러우니, 적개심을 분발할 책임은 신하된 도리상 당연히 져야 한다. 묻노니, 밤낮으로 와신상담하는 나머지에 가슴속에 계획하는 여러 가지 일이 족히 흉한 적의 심장을 쳐부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다스리고 있는 두어 고을만은 적의 부대가 이미 물러갔으나 그 밖에는 아직도 가득 차 있으니, 국가에 보답하는 의거와 울타리를 굳건히 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는 불길을 잡는 것보다 급한데 같은 배에 풍파를 만났으니 어찌 구원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함께 협조하고 성의를 다하여 각기 부족한 힘을 합쳐서 방휼(蚌鷸)의 형세를 좌절시킴이 오직 이때이다. 나 이준은 하늘에다 활을 쏘는[射天] 흉적을 없앨 마음이 분발하여 취일(取日 몽진한 임금을 도로 모셔옴)의 공을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지 2, 3사람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 약간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 침범한[侵鎬] 적을 무찔러 서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 본주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창고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군량은 반쪽의 콩도 저장된 것이 없고 무기는 한 개의 화살촉도 남은 것이 없어서, 저 옛날 제(齊) 나라 군사가 밥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처럼 먹이기는 어렵고 주(周) 나라 군사가 창을 겨누고 섰듯이 무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우레처럼 공격하고 번개처럼 달리는 날랜 군사는 모두 다 빈 보따리뿐이요 구정(九鼎)을 들 수 있고 적의 깃발을 빼앗을 만한 힘센 무리는 태반이 빈 주먹이라, 적을 토벌할 뜻은 있으나 무력을 써볼 수 있는 바탕이 없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는 것이외다. 생각건대, 제공(諸公)들이 다스리는 고을은 난리를 겪은 것이 본 고을같이 심하지는 아니하니 만약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준비에 힘을 같이해 주신다면, 저 허세를 부려 날뛰는 놈들쯤은 바로 한 바다에 거꾸러져 사라져가는 잿더미와 같은 격이니 한 도내의 많은 병력으로 어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개미처럼 모여서 그 독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각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혹은 한 바리의 곡식이나 혹은 부스러기 쇠붙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제공에게 힘 되는 것은 극히 미세하지만 군수에 소용되는 것은 매우 긴요할 것입니다. 군사는 먹을 양식이 있어 싸 가지고 가는 데 근심이 없고 무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적은 부뚜막에 걸린 솥 속의 고기라 문드러지게 삶아낼 것이요 우리는 진흙 속과 이슬 속에서 헤매는 부끄러움을 쾌히 씻을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서로 구원해주신 공이 중흥하는 즈음에 힘입은 바 클 것입니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자 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올려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월(越) 나라와 진(秦) 나라가 서로 형편을 상관하지 않듯이 여기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형세를 무시한다면, 기대했던 본의가 심히 아닐 것이며, 협력하여 일을 같이 하자는 청원을 또 어느 곳에 구하리까.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적이 다음과 같은 글월을 고시하다.
대일본(大日本) 대왕은 정치의 도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를 사는가. 이른바 당랑(蟷蜋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항거하고 비부(蚍蜉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이로 인해 깊은 여항(閭巷)을 찾아 들어가서 기병ㆍ보병이 깃발을 드날리고 칼날을 비껴 드니, 성문은 소실되고 집집마다 포성이 진동하였다.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죄과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또 그 부모 처자가 가엾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굶주림을 구원해서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 비록 이같이 했으나 싸우려 달겨드는 자는 살해할 것이다. 지난번 무관으로 들[野]에 있었던 사람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옛집으로 돌아가서 해를 따라 풍속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정리하여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황제가 조선 황제와 더불어 반드시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아무쪼록 이 말을 산중의 무관에게 알리어 활과 칼을 버리고 와서 항복한다면 무슨 죄를 당하겠느냐. 만약 이 뜻을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거듭 이 땅에 주둔하여 수백 명의 병관(兵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륙을 가할 것이다. 장협(長鋏) 오장대왕(吾將大王)이 거듭 안무하여 옛 조정에서 이 나라 천자를 위하니, 또한 천행(天幸)의 은혜가 내리기를. 이만 줄인다. 천정(天正) 20년 부상(扶桑) 신 안국사(安國寺). 이것을 보면 과연 전라 감사라고 칭호한 자이다.
또 투서(投書)를 얻어 보니, ‘야운(野雲)’이라 했다. 고경명(高敬命)이 해석하기를, “넓은 들에 희미한 구름 끊어지고, 빈 산에 조각달이 비끼었구나.” 하였다.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
○ 합천(陜川)의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의 적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 이때 김준민은 처음 와서 재주를 시험해 본 바 없었고,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 이홍우(李弘宇)의 군사는 이부산(伊傅山)에 있었으며, 고령(高靈)ㆍ합천의 군사는 가천(伽川) 성주 서면의 마을 이름이다. 에 있고 문여(文勵)의 군사도 역시 성주에 있어 모두 정인홍의 지휘를 받았다. 정인홍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반드시 대부대의 적을 만난 연후에야 나가 싸우되, 무릇 우리 장병은 앞서 나가 적을 공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많이 죽이는 것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는다. 적을 쏘아 죽이는 것이 그 다음이요, 공을 요청하기 위해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이 최하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성주 대교천(大橋川) 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새벽을 기다리는데,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도저히 싸울 수 없으므로 부득이 회군하여 고령 마을 집으로 돌아왔다. 정인홍이 말하기를, “종묘 사직은 빈 터가 되고 적의 세력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시 힘을 다해 한 번 결전하여 적개심을 분발하기로 한 것인데, 사세가 지연되어 앉아서 시일만 허비했으며 하느님이 돕지 아니하여 오늘도 또 이러하니 이는 실로 내가 국가를 위하는 정성이 박약한 소치이다. 이를 장차 어찌하랴.” 하며,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김준민이 옆자리에 있다가 감격한 얼굴로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어쩔 도리 없으나 내일 만약 비가 갠다면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즉시 전령하여 다시 약속을 정하고 밤중에 군사를 내서 사원동(蛇院洞) 안언(安彦) 길 옆에 진을 치고서 군사를 6, 7개소에 매복시키되, 서로 한두 마장 거리를 떨어지게 하였다. 정인홍은 중위(中衛)를 인솔하여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서 굽어보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튿날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김준민이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노다촌(老多村)을 육박하니 바로 무계(茂溪) 진 밖이었다. 적이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돌과 나무토막으로 막은 울이 심히 견고하여 쳐부술 수 없으므로 곧 기세만 올리고 되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무계의 적은 철거하여 성주의 적과 합하고, 현풍(玄風)의 적은 철거하여 대구(大丘)의 적과 합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곽재우(郭再祐)가 경상 우도 열개의 읍을 수복하니 적병이 모두 좌도로 달아났다. 처음에 현풍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에 주둔한 적이 매우 성하여 구름과 잇닿을 만큼 진을 높이 치고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어 성주와 상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본래 신기한 꾀가 많은지라,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뽑아서 현풍으로 끌고나가 혹은 산상에서 군사를 보고 혹은 성 밖에서 말을 달려 백 가지로 싸움을 거니, 적이 시종 감히 나오지 못했다. 곽재우가 또 한 자루에 다섯 가지가 난 횃불을 만들어 밤중에 고갯마루에 올라 일시에 불을 붙여 들어 불빛이 적진에 비치게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고함을 치며 여럿이 서로 응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여기 있으니 내일 접전하게 되면 반드시 다 죽이고 말 것이다.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라.” 하고, 곧 불을 꺼버리고 몰래 물러났다. 그리고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이 거사는 마침 무계의 싸움과 같은 때였기 때문에 적은 더욱 공포심이 생겨서 도망간 것이다. 그 후 5일 만에 창녕의 왜적이 역시 소문을 듣고 철거했는데, 오직 영산의 적이 군사가 많고 강함을 믿고서 오래도록 옮기려 하지 아니하였다. 곽재우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고하여, 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합천(陜川) 등의 군사를 내게 하여, 합천ㆍ삼가의 군사는 윤탁(尹鐸)이 영솔해서 후원을 하게 하고, 의령의 군사는 곽재우가 거느리고 적진과 마주 보는 봉 위에 들어가 진을 쳤다. 3진으로 나누어 곽재우가 중앙에 있었으므로 적의 선봉부대 기병 백여 명이 말을 달려 돌격하여 곧장 중앙으로 범하는데, 곽재우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고 적의 전봉(前鋒)으로 갑옷 입은 자를 쏘았으며 5, 6명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는데도 곽재우는 태연자약하였다. 군사들이 자기 몸으로 곽재우를 가리며 결사적으로 어울려 싸워 화살과 돌을 마구 던지니, 적의 선봉 말 수십 필이 넘어져 죽고 적도 매우 많이 죽었다. 남은 적이 잠깐 후퇴하자 성 안에 있는 적이 격전하는 것을 바라보고 한꺼번에 나란히 나오니, 윤탁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므로 적은 승세를 타서 육박했다. 곽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하지 못하게 되어 한편 싸우며 한편 후퇴해서 산으로 올라가 적을 회피하니 적도 역시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보니 하나도 사상을 당한 자 없었다. 곽재우가 윤탁이 구원하지 아니하고 먼저 도망간 죄를 책하여 장차 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윤탁이 다음에 공을 세워 형을 보상하기를 자원하므로 마침내 다시 약속하기를, “명일에 나가 싸워 불리하거든 또 명일에 나가 싸우고 그래도 불리하면 3, 4일을 한하여 기어코 반드시 이기도록 하라. 운운.” 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곽재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들어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였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밥 짓는 연기도 전혀 나지 아니하여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그들이 무슨 계획이 있는가 의심했는데, 밝은 아침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적은 밤중에 군막을 불태우고 이미 도망하여 까마귀 까치만 성첩에 날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창녕 한 길은 적병이 단절되고, 오직 중간 길로 밀양(密陽)ㆍ대구에서 인동(仁同)ㆍ선산(善山)에 이르기까지가 적이 왕래하는 길목이 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전지(傳旨)로 인하여 군공(軍功)에 내리는 상의 격식을 알게 된 뒤로부터 혹은 굶주린 백성이나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라 속여 바치고 관작과 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군공으로 출신(出身)한 자는 흔히 이런 수법에서 나왔다.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에서 굶주린 백성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터럭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바친 자가 있다 하므로 순찰사가 본군 원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다. 곧 수령으로서 공을 요청한 자의 행위인 듯한데 확실치 못해서 마침내 덮어 두고 묻지 않았다. 의성현(義城縣)에서 왜놈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출신한 현령인 정희현(鄭希賢)이 관가에 잔치를 베풀어서 축하하니 조정의 한 벼슬아치가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린 백성 머리 위에 계화가 둥실 떴고 / 飢民頭上桂花浮
붉은 첩지 가운데 원망의 피 흘렀구려 / 紅紙群中怨血流
원님의 잔치자리 술이 응당 있을텐데 / 太守慶筵知有酒
어찌 남은 술 나누어 우는 귀신 위로하지 않는가 / 盍分殘瀝慰啾啾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경상도 예안(禮安) 고을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이 격문을 지어 열읍을 효유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이 영천(榮川)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권희순(權希舜)을 의성(義城) 수성장으로, 박사(博士) 황서(黃曙)를 풍기(豐基) 수성장으로, 전 현감 이유(李愈)를 예천(醴泉) 수성장으로, 유학 박연(朴淵)을 의흥(義興) 수성장으로 삼아서 한 고을 군무를 각자 담당하게 하였으니 대개 열읍 수령들이 모두 도망간 때문이다. 이유가 안동(安東)의 생원인 김익(金翌), 진사(進士) 김윤사(金允思), 정로위(定虜衛) 안숙(安淑) 등과 더불어 각각 마을 안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다인(多仁)의 적을 방어하였다. 다인은 예천의 속현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안동의 생원 임흘(任屹)이 열읍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로써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아서 함께 나라의 적을 토벌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김해(金海)에 진을 친 적의 배 5백여 척이 제포(薺浦)로 옮겨 정박하였다. 창녕(昌寧)ㆍ영산(靈山)의 적이 강가에 나와서 진을 치고는 혹은 의령(宜寧) 원이라 칭하고 혹은 초계(草溪) 원이라 칭하고서 장차 두 고을로 향하려 하는데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물리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이는 직전에 아직 수복하지 못했을 때의 일인 듯하다.
○ 대가(大駕)는 의주(義州)로 행차하시고 학가(鶴駕 세자의 행계(行啓))는 이천(伊川)으로 이주(移駐)했다. 이는 충청 감사가 전하는 통문도 있거니와 영남 순영(巡營) 마도(馬徒) 강만택(姜萬澤)이 행조(行朝)로부터 와서 말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적의 장수 청정(淸正) 등이 북도 20여 고을을 모두 함락시켜 천 리의 주위에 농작물이 하나도 없으니, 봄철의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놈들은 그래도 두만강까지 밀고 나가서 야인(野人)의 마을 6, 7부락을 불태워 없애고 돌아갔다.
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
또 별지(別紙)에,
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
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경기도 수원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홍언수가 미천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홍계남(洪季男)으로 용맹과 힘이 무리중에서 뛰어났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이 되어 황진(黃進)과 더불어 일본을 다녀왔기로 그놈들의 강약을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아비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첩을 올렸다. 전후로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백여 개에 달했으므로, 인근에 진을 친 적들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곧 군공(軍功)을 들어 본부(本府)의 판관을 제수했다.
○ 충청도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전라도(全羅道) 전 보성 현감(寶城縣監) 임계영(任啓英)ㆍ박광전(朴光前) 등이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돌리는 글월은 다음과 같다.
아! 국가가 믿고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래 삼도(三道)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ㆍ충청은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모두 이 한 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부흥할 기틀이 실로 이에 있다. 그런데 이제 서울이 급박하다 하여 순찰(巡察)은 정병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있고, 병사(兵使)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錦江)을 넘었으며, 두 의병장의 진 역시 각기 근왕(勤王)을 위하여 이미 본도를 떠났다. 열읍의 장사(將士)들도 장차 나가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몇이 없으므로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방비가 극히 허술하고 호서(湖西)의 적이 이미 본도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席卷)의 형세가 장차 이루어질 터인데 극복할 희망은 무엇을 믿겠는가. 국가의 일이 너무도 위태하니 진실로 통곡할 일인 동시에 이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적이 성 밑에 당도할 때, 우리 장정들을 무찔러 죽일 것은 뻔한 일이다. 슬프다! 우리 민생이 몸 둘 곳이 어디며 실가(室家)는 어느 곳에 둔단 말이냐. 영남에서 이미 이렇게 당한 것은 귀로도 들었고 눈으로도 보았으니, 산중으로 도망가 숨을 수도 없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여 살길도 없어서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물며 만에 하나라도 중요한 길을 막아 지켜서 적의 세력을 저지시킨다면 사지(死地)에서 살아나는 것도 이 기회요, 부끄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이 때인 것이다. 대체로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흩어져서 도망간 군사가 있을 것인즉, 만약 식견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불러 들여 권면하고 격려해서 힘을 모아 일어나 스스로 한 군단을 편성하고 적의 향하는 바를 감시하여 굳건히 요충지대를 지킨다면 위로 관군의 성원이 될 것이요, 아래로 한 지방의 생명을 안보할 것이다. 이 시기에 미처 일을 도모하기는 영남 사람 만한 이가 없는데 영남 사람은 적을 만난 처음에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막아 내려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망치는 것만 일을 삼았다. 이는 비록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데서 나온 까닭이었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적의 세력이 팽창하여 가옥들이 불에 타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하고서야 의사가 분연히 일어나서 많은 수효의 적들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비록 사람의 마음을 비교적 강인하게 하였다고 하겠으나 역시 이미 늦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나태한 습성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 기약한 날짜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은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가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니 지휘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는 너무도 생소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먼저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 용사의 기운을 분발하자는 바이니, 인간의 양심이 일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흥기하는 바 있을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곧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온 고을을 효유하여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달 20일 보성(寶城) 관문으로 와 모이도록 하라. 한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이 욕을 당해도 구원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모두 전말을 생각하여 창의할 것이니, 여러분은 도모하시라.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 곽영(郭嶸)이 금산(錦山)에서 무너져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영(營)에 머물고 있는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이 있어 그대로 전주에 머물게 하다. 그 종사관(從事官) 한 사람 이용순(李用諄) 이 한산(韓山)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물러서 아직 영에 돌아오지 않았다. 금산에 돌아와 모인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놓고 수색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전보다 배나 참혹했다. 20일에 진산(珍山) 관사를 불태우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와 혹은 옥천(沃川)으로 물자를 실어내며, 무주(茂朱)의 적도 역시 물자를 지례(知禮)로 실어내어 모두 후퇴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고 동현(同縣)의 현감 장 별장(張別將)과 어 복병장(魚伏兵將) 등이 보고해 왔다. 진산(珍山)과 동원(東院)은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무안 현감(務安縣監)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등이, 이현(梨峴)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저고리(苧古里)는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추현(杻峴)은 고산 현감(高山縣監)이, 송치(松峙)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함평(咸平)은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조림원(照臨院)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순찰사 군관 전몽성(全夢星),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은 장수(長水)로부터 무주(茂朱) 지경을, 순창(淳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ㆍ장수 현감이, 탄전(炭田)ㆍ죽치(竹峙) 등지는, 임실현감(任實縣監)ㆍ진안 현감(鎭安縣監) 등이 방어하되 형세를 보아 진격하라는 명령도 역시 전달하여 발송했다. 그리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에게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황화정(皇華亭)에서 결진(結陣)하여 성원할 것을 어제 전령(傳令)하여 발송했다. 명(明) 나라 군사가 7일에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적의 떼가 이미 도망하여 서울의 적과 함께 모두 노량(露梁)을 건너고 청계산(靑溪山)에서 진위(振威)까지 잇대어 결진하여 아산(牙山)으로 향했다고 한다. 교동(喬桐) 공생(貢生) 고언백(高彦伯)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여 적의 무리 2백여 명이 저희들끼리 서로 쳐 죽이고 이로 인해 후퇴해 도망갔으므로 곧 그 사람을 등용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의 군관 이충(李冲)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도총도사(都摠都事)의 직을 제수 받아 옥과(玉果)를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용천(龍川)으로 옮기시고 동궁(東宮)의 행차는 이미 강계(江界)에 도착했으며, 온갖 관원은 나누어 정해지고 두 곳의 비빈(妃嬪)은 다만 칠가(七駕)가 시종하고 있으며, 임해(臨海)는 이미 북도로 파천했다. 대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며 주상께서도 안녕하시다. 명 나라 군사 3만 명이 이미 용천(龍川)에 도착했으며, 뒤이어 구원병도 와서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 요동 윤(遼東尹) 이성량(李成樑)요동 자사(遼東刺史)인데 아들 이여송(李如松)ㆍ이여남(李如楠)ㆍ이여백(李如栢)ㆍ이여매(李如梅)ㆍ이여판(李如板)ㆍ이여회(李如檜)ㆍ이여오(李如梧) 8형제를 두어 세상에서 8장군이라 칭한다. 의 후임으로 조승훈(祖承訓)이 대장이 되고 왕(王)ㆍ양(楊)ㆍ곽(郭)ㆍ사(史) 등 여러 장수가 그 부관이 되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급급히 싸움을 서두르니 그 성의가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대동강 싸움에 적의 진중에서는 평의지(平義智)가 대장이 되고 행장(行長)ㆍ현소(玄蘇)ㆍ평수장(平秀長)이 부장이 되어 삼위(三衛)로 나누어 군사를 거느렸는데, 한 위(衛)의 수효가 많을 적에는 3천여 명에까지 달했다. 그래서 부중(府中)에 머무른 여러 장수들이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일제히 만여 개의 화살을 쏘아 한 위의 적을 모조리 죽였다.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고 적이 이미 기운이 꺾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술책을 내어 밤에 얕은 여울물을 건너 어둠을 타서 내려 몰아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평양을 함락당했다. 적이 주둔하던 날에 관서(關西) 용사 두어 사람이 밤에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4장수 중에 가장 나이 젊은 자 한 놈을 쏘아 죽였는데 실로 이 놈은 의지(義智)였다. 그래서 남은 적은 해서(海西)로 도망해 내려가고 서울에 머물던 적도 그 수가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국토를 회복할 것이 손꼽아 기대된다. 평양 윤(平壤尹) 송언신(宋言愼) 이 싸움에 진 책임으로써 교체되었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곽영(郭嶸)이 광주 판관ㆍ보성 군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무주의 적을 탐색하고,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은 금산에 들어와 적을 탐색하다가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이때에 본도 장병이 여러 번 적의 두 소굴을 공격했으나 한 번도 승첩을 거두지 못하고 매양 무너지고 마니 이 어찌 반드시 저 왜적이 용감하고 날래서만이겠는가. 아!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이냐.
○ 영남 초유사(招諭使)의 공문 내에, “금월 23일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보고해 온 것을 보면 금월 19일에 성중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왜적과 계병부(桂兵部) 도합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명을 불시에 잡아다가 물건을 짊어지게 하고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ㆍ해양(海洋)의 선척(船隻)을 간망(看望)하러 나갔다 돌아왔다고 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왜적도 역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김해에 나갔다 온 사람을 만나서 적의 거취를 물은즉 김해ㆍ해양 각처의 적선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는 가설된 집들이 잇대어 있으며, 김해ㆍ밀양(密陽)에 교통하는 사람들과는 소를 치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씹어서 이웃 마을 사람과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나는 10여 일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로부터 내려와서 귀에 대고 말을 전해주자, 뭇 왜적이 일시에 통곡하며 두 고을을 교통하는 사람을 남녀도 가려내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여 2백여 명에 달했으며, 각처의 가설된 집들도 수효대로 불을 놓았고 강에 가득하던 배는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으니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貴道)의 금산ㆍ무주에 있는 왜적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다.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공문이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임계영은 전라도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본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근왕(勤王) 길에 나가고 온 도내가 공허하게 되자 흉한 왜적이 틈을 타서 경내에 쳐 들어오니 충돌당할 근심이 조석에 박두하여 내지(內地)의 위태로움이 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는 것보다 더하므로, 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해서 방어할 계획을 했다. 그래서 본군에서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향해 다니면서 군사를 수합하여 천여 명을 얻어 좌의병(左義兵)이라 칭하고, 호(虎)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만들었다.
○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 영남의 왜적이 몰려 전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밥을 빌어먹던 막실(莫失)ㆍ막돌[莫石]을 호남으로 보내어 형세를 엿보게 하다. 초유사의 비밀이다.
○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 왜적이 평양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가 도적질을 하되 부산(斧山) 밖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며 마치 무엇이 두려워서 감히 못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니 예언[讖記]의 말도 다 거짓은 아닌 듯싶다. 부산(斧山)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이때에 참언(讖言)에, “왜적 난리 7년에 부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오고, 왜놈 난리 10년에는 압록으로부터 압록까지 온다.” 하였다.


 

[주D-001]안 상산(顔常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이니, 원문의 안 상산(顔常山)은 안 평원(顔平原)의 잘못인 듯하다. 안평원 열전(列傳)에 ‘신무상죄당사(臣無狀罪當死)’라는 말이 있다.
[주D-002]문 신국(文信國) :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니, 위왕(衛王) 때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주D-003]내상(內廂) : 여기서는 안쪽 지방[內地] 즉, 함안ㆍ창원ㆍ이령 등지를 말한 듯하다.
[주D-004]한(漢) 나라의 …… 나라 붕거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남송 말년의 명장 악비(岳飛)이니,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이다. 이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D-005]장순(張巡) : 당(唐) 나라 때의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병(起兵)하여 안녹산을 토벌했는데, 허원(許遠)과 수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양성이 함락되매 안녹산을 역적이라 꾸짖고 피살되었다.
[주D-006]납서(蠟書) : 편지를 납덩이 속에 넣어서 물이 새어들지 않게 한 것이다. 《송사(宋史)》
[주D-007]석륵(石勒) : 진(晉) 나라 때 중국을 침범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갈인(羯人 : 중국의 변경 민족)이다.
[주D-008]조사아(祖士雅) : 진 나라 때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조적이 진 원제(晉元帝) 때 군사를 통솔하여 북벌하기를 자청하자, 원제는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하였다. 그가 북벌군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갈 때 노를 치며 맹서하기를, “중원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게 된다면, 이 강물에 빠져 죽겠다.” 하였던 바, 조적은 마침내 석륵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주D-009]장숙야(張叔夜) : 송 나라 때의 사람으로 금(金) 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쳤다. 《송사(宋史)》
[주D-010]사모(蛇矛)와 월극(月戟) : 사모는 창의 한 종류로 전장에 쓰는 무기이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도 한다. 월극도 창의 일종으로, 날이 초생달같이 굽어 그리 칭한 것이다.
[주D-011]안진경(顔眞卿) : 당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경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하자 북방의 여러 군에서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여 하북초토사(河北招討使)로 하였다.
[주D-012]유총(劉聰) : 진(晉) 나라 때 흉노의 황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진 나라를 침략하였다.
[주D-013]동창의 계교 :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주D-014]서촉(西蜀)으로의 피란 :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으로 피란하였으므로, 선조의 거가가 서행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봉천(奉天)으로 향하는 …… 먼지가 날린다 : 당 덕종(唐德宗) 부자가 금(金)의 군사에게 잡혀 봉상현 봉천으로 끌려간 고사가 있는 바, 선조의 파천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6]이에 물들인 무리 : 왜적들은 이빨에 칠을 하였으므로 칠치(漆齒)라 부른다.
[주D-017]포서(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초 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초 나라의 보전을 위해 힘을 다한 바 있다. 《춘추(春秋)》정공(定公) 4년
[주D-018]포신(鮑信) : 중국 후한 말년의 절개가 있던 인물로, 황건적(黃巾賊)과 접전하다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주D-019]방덕(龐德) :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변경 민족인 저강(氐姜)의 침공을 격파하였다.
[주D-020]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 범진은 북송(北宋) 때의 명신이다. 인종(仁宗)이 재위 35년에 후사가 없으매, 범진이 종실의 근속(近屬) 중에서 현량한 자를 골라 황제의 지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범진은 굽히지 않고, 인종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우니, 인종도 울면서 말하기를, “짐은 경의 충성을 아오. 경의 말이 옳소. 하지만 다시 2,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였다. 범진이 장주를 10여 차례 바치고 1백여 일 동안 어명을 기다린 끝에 수염과 머리가 희어지자, 조정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다. 《송사(宋史)》권 337
[주D-021]소해(小海) : 세자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원고(元臯) 위에서 남으로 유해(幼海)를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유해는 소해(小海)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太子)는 소해에 비한 것이다.
[주D-022]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심(心)이란 별이 있는데, 중간 별[中星]은 천자(天子)를, 앞 별[前星]은 태자(太子)를, 뒷 별[後星]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하였다.
[주D-023]용루(龍樓) : 한(漢) 나라 성제기(成帝紀)에 있는 말로, 성제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했었다.
[주D-024]학금(鶴禁) : 한 나라 궁궐소(宮闕疏)에 있는 말로, 학궁(鶴宮)은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인데 어느 사람이라도 드나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학금(鶴禁)이라 하였다.
[주D-025]칠묘(七廟) : 중국의 고제(古制)에 의하면, 천자가 칠묘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울에 있는 종묘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王制〉
[주D-026]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 :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 나라 무제(武帝)가 중앙아시아(당시에는 서역(西域)이라 했다)를 정벌하여 군사가 그곳까지 가 있었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에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주D-027]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 : 봉천은 당 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이다.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는데, 그곳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것을 죄기조(罪己詔)라 한다.
[주D-028]영무(靈武)의 의기(義旗) : 당 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현종(顯宗)은 촉(蜀)으로 파천했는데,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안녹산을 물리쳐 당 나라를 수복했다. 그 고사를 가지고 세자 혼(琿 즉 후의 광해군)에게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광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D-029]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 :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의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마시는 술. 미앙궁의 수주는 서울의 궁전을 회복하기를 고대하는 선조의 마음을 나타낸 말.
[주D-030]중국 : 하(夏)를 옮긴 말이다. 여기서는 글의 서두로 감개를 나타내는 대목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D-031]궁(窮)과 한(寒) : 궁과 한은 모두 중국 고대 하 나라 시대의 역적으로 궁은 유궁후예(有宮后羿)의 약한 것이니, 그는 하 나라를 역적질하였고 한은 한착(寒浞)이니 후궁유예의 아들로 역적질한 아비를 죽이고 그 아비의 자리를 빼앗았던 역적이다.
[주D-032]훈육(獯鬻) : 중국 고대의 변경 족속인 흉노(匈奴)의 별칭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33]밀(密) :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주D-034]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 : 연교는 중국 북방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의 교외로, 그곳에 말을 치겠다는 것은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말이다.
[주D-035]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 : 덕진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푸는 산이니, 덕진으로 교질하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명산을 내놓으라는 말이 된다.
[주D-036]조정의 계획 : 원문에는 묘(廟) 밑에 한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묘산(廟算)으로 보고 ‘조정의 계획’으로 옮겼다.
[주D-037]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 원문에 교영(喬英)이라 한 말은 ‘교만하게 굴며’라고 해석이 되는데, 나는 교(嶠)와 영(嶺)의 오서라 보므로 모두 영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준순교영(逡巡喬英)’을 영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38]빈교(邠郊) : 빈(邠)은 옛날 주 문왕의 조부인 태왕(太王)이 있던 도읍이었는데, 적(狄)의 침략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 한다.
[주D-039]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황하 이북이 모두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주D-040]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부에 있던 지명으로,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그곳을 굳게 지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의 땅을 막아 안녹산 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D-041]악비(岳飛)가 갓 ……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 악비는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다.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태위소보(太尉少保)에까지 올라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가 되어 금군(金軍)을 대파하고 수일 내로 황하를 건너가 실지(失地)를 광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진회(秦檜)는 금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하루에 12번 금자패(金字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했다. 삼군이 통곡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 후 진회는 만사설(萬俟卨) 등을 시켜 악비를 탄핵해서 체포 투옥하여 처형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42]장준(張浚) : 남송 초기 주전파의 거물이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 금을 제어하고 있다가 주화파인 진회에게 몰려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가서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고 강회(江淮)의 군사를 도독(都督)하였으니, 주전파로 널리 민간의 환영을 받았다.
[주D-043]해바라기 : 해바라기는 해를 항상 처다본다 하여, 충신이 항상 임금을 향하는 데 비유한다.
[주D-044]동해가 바로 …… 않을 것이고 : 옛날 전국 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가 강성하여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자 진 나라를 황제로 존칭하고 종주국을 삼자는 의논이 생겼는데 이때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나는 차라리 동해를 밟고 죽을지언정 진 나라같이 악독한 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45]의병(疑兵) :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 또 그렇게 꾸민 군사를 말한다.
[주D-046]역적 양(亮)이 …… 어긴 일 :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나라를 건국하고 송(宋) 나라를 침략하여 송 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으므로 이때부터 남송이라 한다. 남송에서는 금 나라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 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 하여 역량(逆亮)이라고 부른다. 그 완안량은 남송과 평화의 약조를 깨뜨리고 남송을 침략하다 남송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까지 부하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주D-047]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 중행률(中行律)은 원래 한(漢) 나라 사람인데, 흉노족(匈奴族)에 항복하여 흉노의 참모가 되어서 도리어 한 나라를 괴롭혔다.
[주D-048]장강(長江)이 급작스리 …… 날아서 건너왔다 : 중국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양자강(揚子江)을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天塹]라 하여 그 강을 건너오려거든 날아서 건너오라 하였으나 그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면 남조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D-049]태왕(太王)이 빈(邠) …… 떠나던 마음 : 주(周) 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 : 豳)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리웠다.
[주D-050]명황(明皇)이 촉(蜀) …… 갔던 일 :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현종(玄宗)은 몽진하여 촉으로 파천했다.
[주D-051]공락(鞏洛) :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D-052]민아(岷峨)의 위험한 …… 멀리 갔다 : 당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러한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 민아(岷峨)는 촉 땅의 산으로 민은 민산(岷山), 아는 아미산(峨嵋山)이다. 취화(翠華)는 임금이 탄 수례의 장식이니, 그것을 타고 가는 임금을 말하는 뜻으로 쓰인다.
[주D-053]이성(李晟) : 당 나라 때의 사람으로 덕종(德宗) 때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하였고, 황제가 봉천(奉天)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 포위를 풀어 황제를 구출했다.
[주D-054]육지(陸贄) : 당 덕종의 신하로 덕종이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임금이 매일 백으로 헤아릴 만큼 많은 조서를 내리는데 붓을 휘둘러 그것을 써내리기를 생각이 샘솟듯하여 다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그때 그때의 필요에 잘 맞춰 나갔다고 한다.
[주D-055]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있었는데, 당 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구절도(九節度)의 군대가 반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주D-056]장막의 제비 : 장막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제비가 집을 짓고도 그 천막이 곧 없어질 것을 모르고 찍찍거린다는 것으로 대단하지 않아 소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주D-057]밤중의 닭소리 :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난리가 날 징조라 한다.
[주D-058]중류(中流)에 뜬 …… 노를 치면서 : 중국에 여러 호족(胡族)이 침략하여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족 한 사람이 강남으로 쫓겨가서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는데, 그때에 조적(祖逖)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호족을 정벌하러 떠날 적에 양자강 중류에서 배의 노를 치면서, “만일 저 오랑캐를 쳐서 평정하지 못한다면 저 강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맹서하였으나 그는 중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D-059]복덕(福德)이 바야흐로 …… 분야에 임했고 : 하늘의 복덕성(福德星)이 비치는 땅을 침략하면 침략하는 나라가 도리어 패한다고 한다.
[주D-060]노래하고 읊조리는 …… 생각하게 된다 : 한(漢) 나라가 중간에 왕망(王莽)에게 역적질을 당한 때가 있었는데 왕망이 정치를 하도 포악하게 하여서 백성들은 노래하는 데도 한 나라 옛적을 생각하였다 한다.
[주D-06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 남경시 남쪽에 있었던 정자로, 동진 때 시세가 혼란하여 명사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보고 개탄하였다 한다.
[주D-062]흥원(興元) : 흥원은 당 나라 서울 서북쪽에 있는 땅으로 당 나라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군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었다.
[주D-063]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 : 옛날 중국 초 나라에는 뛰어나게 용맹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는 것을 취해서 쓴 말임.
[주D-064]연조(燕趙)의 검객 : 옛날 중국 연ㆍ조 지방에서는 검술에 비상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65]말을 채찍질하여 …… 찌를 것 : 관우(關羽)가 조조(曺操)에게 있을 때에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를 공격해 왔으므로 조조도 군대를 내어서 응전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진하면서 안량은 수백 명의 부장들에게 옹위되어 진두에 나섰는데 그때에 관우는 조조에게 적토마(赤兎馬)라는 좋은 말을 선사 받았다. 그래서 관우는 그 말을 몰고 달려가서 안량의 진으로 들어가 안량을 단번에 찔러 죽였다. 그것은 그 좋은 말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주D-066]기북(冀北) : 기북은 중국의 북경 근처로 예전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주D-067]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 : 중국 삼국 시대에, 오(吳) 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에 들러 군량을 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양곡 노적가리가 둘이 있었는데 각각 3천 곡(斛)씩이 들어 있었다. 노숙이 그 중의 하나를 가리켜 그것을 주유에게 주었다는 고사이다.
[주D-068]양주(揚朱)와 묵적(墨翟) : 유가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양주의 사상이나 극단적인 박애주의자 묵적의 사상을 이단으로 극력 배척한다.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는 자는 곧 선비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9]곤란 : 중국의 진(秦) 나라는 서북에 위치하여 있고 월(越) 나라는 동남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이 수척한 곤란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말이 있다.
[주D-070]봉명국(奉命國 : 천명을 받든 나라라는 뜻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주D-071]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 기다릴 것인가 : 춘추 시대의 사람으로, 거(莒)의 오공(敖公) 밑에서 벼슬을 살다가 그 재능이 알려지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극도의 빈곤에 쪼들렸다. 오공이 변란을 당하자 그는 벗들과 하직하고 오공에게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주여숙의 이러한 행동은 후세의 임금 중에 인물을 못 알아 보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임금의 은총을 받고도 임금의 급난에 자신만을 보전하려 드는 신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주D-072]안진경(顔眞卿)이 다시 …… 할 것인가 : 당 나라 안녹산의 반란 때에 하북 17군(郡)이 모두 붕괴하여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는데 오직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만이 성을 지켰으므로, 현종이 “짐은 안진경이 어떻게 생겼는지[作何狀] 모르나 참 장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73]세성(歲星)이 기(箕)의 …… 기약이 없으랴 : 이 글에서 한실과 송은 다 중국의 한족이니 변경의 침략적인 족속과 비교해서 나타낸 말이다. 즉 여기서는 곧 조선의 왕실 내지 조선을 말한 것이다. 세성이 기의 분야를 지켜서 복덕이 내릴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은, 기를 조선의 분야로 보고서 한 말로 고래의 점성술(占星術)에 기대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74]서방(西方)에 미인 : 미인은 임금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詩經)》〈패풍(邶風)〉
[주D-075]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 되었다. 운운. : 이것은 명 나라 때의 자문인데, 형식이 특이하고 원문 전후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자(咨)는 동등한 기관 사이에 쓰는 공문 형식이다. 원문의‘須至’의 ‘至’는 ‘知’의 와오일 것이고, ‘吉’자 위에는‘秀’자가 오탈했을 것이고, ‘凋信’의 ‘凋’자는 ‘調’의 와오일 것이다.
[주D-076]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 : 주불은 붉은 색의 치마 같은 무릎 덮개로, 고관 대작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였다. 은장은 은으로 만든 인장으로 고제(古制)에 의하면 2천 석의 녹을 타는 벼슬을 하면 그 관인을 은으로 만들고 ‘모관지장(某官之章)’이라 새겼다 한다.
[주D-077]금관자(金貫子) : 금으로 만든 관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주D-078]호전(胡鈿) : 호전은 주화파의 괴수 진회(秦檜)를 목 베고 금에 항전(抗戰)할 것을 상소했다. 곽재우는 호전이 진회를 목 베라고 주장한 것이 정당한 것같이 자기가 김수를 목 베자고 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D-079]동탁(董卓) : 중국 동한(東漢) 말년의 사람으로, 전공(戰功)이 있어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이 되었고 병주목(幷州牧)의 벼슬을 얻었다. 영제가 죽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 환관을 죽이고 그 일이 평정되자 자기가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퍼져 원소(袁紹) 등이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였는데, 동탁은 헌제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자기가 태사(太師)가 되어 가지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었다. 왕윤(王允)이 역사(力士) 여포(呂布)를 꾀어 동탁을 자살(刺殺)시키고 그 족속을 멸했다.
[주D-080]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 본래 대부 이상에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 이상이면 형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또 형벌을 받을 만한 죄를 대부가 범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고 곽재우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그 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예기(禮記)》〈곡례(曲禮)〉
[주D-081]옥절(玉節)을 잡았으며 : 지방 장관이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82]강회(江淮)를 차단하여 …… 구실을 하였는데 : 낙동강 연안을 지켜 그 일대를 안온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83]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 《맹자(孟子)》 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나 약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원문에는 ‘적인자 위지적(賊仁者謂之賊)’이 아니라, ‘적의자 위지잔(賊義者謂之殘)’이라 하였다.
[주D-084]근왕(勤王) : 왕실에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구하려면 근왕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구원하는 것을 근왕이라 하였다.
[주D-085]간섭을 받아 :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고 뒤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님이 되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여 글씨를 쓰라 하고 뒤에서 팔목을 끌어당기며 글씨가 잘 되지 않으면 성내니, 글씨 쓰는 자가 돌아 가서 노(魯) 나라 임금께 고했다. 노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복자천이 내가 자기 일을 간섭할까 두려워서 한 짓이다.” 하였다. 《설원(說苑)》
[주D-086]곡단(曲端) : 송(宋) 나라 사람으로 금인(金人)과 싸워 공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사람의 참소를 만나 옥중에서 죽었다.
[주D-087]한착(寒浞)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 : 한착은 하대(夏代)의 사람으로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제위를 빼앗아 하 나라 대신 유궁씨(有窮氏)로 일컬을 때 그의 재상이 되었다가 후일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후에 소강(小康)에게 멸망되었다.
[주D-088]장인(丈人)의 원길(元吉) :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에 보인다.
[주D-089]초호(楚戶)의 세 집 : 초(楚) 나라 남공(南公)이 예언하기를, “초 나라 3집만 남아도 진(秦) 나라를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90]혜련(惠連) : 혜련이 10살 때 이미 글을 잘 지으니 그 형 사영운(謝靈運)이 매양 혜련을 대하면 좋은 글구가 저절로 나왔다. 영운이 일찍이 영가(永嘉) 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못이루었는데 꿈에 문득 혜련을 보고, “못 가에 봄 풀이 돋아난다 [池塘生春草].” 하는 글귀를 얻었다 한다. 《남사(南史》〈사혜련전(謝惠連傳)〉


 

 

 

 

 

 

 

      崔堈   시호 의숙   무과 증 병조판서


崔堈均弟號蘇溪居固城少而業文有膽畧又剛直不能典意循入 宣祖朝登武科


壬辰以前奉事與兄倡義討倭起兵雖不多能得其心臨陣以身先之與鄭起龍安信甲齊名而御

 

衆之才過之與李達赴援晉州乘馬馳突竟夕鏖戰士民頼而得全望之者指為千古勇將錄原從

 

功一等官止捕将■忤光海黜為喬桐别將令殺臨海堈不從遂歸郷里後贈兵判與兄同時

贈謚義肅

 

 

 

 

 

 
立齋先生文集卷之三十六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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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碣銘
嘉善大夫五衛都摠府副摠管崔公墓碣銘 並序 


公諱堈字汝堅號蘇溪。蘇湖公之弟也。系在蘇湖公碣。公以明廟己未生。峻爽弘毅。氣像豪邁。驍勇絶254_092c倫。人皆以遠大期之。及龍蛇之難。與伯氏公倡起義兵。推伯氏爲謀主而自爲大將。時賊已大充斥於洞口。公以匹馬短鎗。率精銳衝蕩賊中。竟夕酣戰而盡殲之。諸賊望風不敢近。又斬羅氏家犯害賊。自是軍聲大振。避亂人爭來附。鶴峯金先生以招諭使到咸陽。聞公兄弟名。招見而大奇之。公因與倡義諸公歃血同盟。時賊將犯晉陽。公與金時敏等合勢擊之。賊敗走。其據昌原者。與鎭海者相應。冦晉陽。公與李達及昆陽郡守李光岳。分爲左右翼擊走之。又與金時敏潛踰大芚嶺。鼓譟迫城。又隱伏要路。俟其遁追擊。254_092d殺賊將平小太。遂復鎭固泗三城。賊又圍晉陽十匝。公與李達,鄭惟敬,趙凝道馳援。殺傷甚衆。夜登望陳嶺。令軍中各擧四五炬。擂鼓震山谷。賊驚駭焚幕而遁。捷書至。金先生大喜。謂諸將曰。此城得保。一路餘城皆將得保矣。癸巳秀吉復發三十萬兵陷晉陽。公與李達領兵赴救。至頭骨坪賊圍之。公躍馬衝突而芟刈之。賊風靡潮退。避亂士民三百餘人賴而得全。賊自金海屯熊川安民嶺。李達,安信甲以公左右翼。爲其所圍。公用伯氏計使全軍得脫。語在蘇湖公狀。其他戰勝攻取之功。不可勝記。朝廷嘉之。由都摠254_093a經歷特除加里浦僉使。乙巳海浪賊大擧入濟州。列鎭莫敢救。公用伯氏火攻計燒盡賊船。捷書聞。上大嘉之。以璽書增秩。錄功一等。拜順天府使。公嚴明爲治。减海饍以惠民。民立碑頌德。丙午夏陞慶尙左水使。前後遞歸時。吏所附馬轎布帛。一切遣還。襆被蕭然如寒士。及拜副摠管。章服亦假諸人。上聞之。賜錦段使製用。人以祭遵之無奇衣比之。光海朝備局擬慶尙右兵使。有一尙宮傳言待納銀落點。公正色曰臣子於君父。可以賂得官耶。吾受恩先朝。位至宰列。此布衣之極。終不聽。光海不悅。拜忠淸水使。254_093b公見政亂倫斁。喟然歎曰我是海隅一武夫也。何更求榮爲。遂與伯氏同歸不仕。其後又有捕盜大將之命而公謝病不起。光海甲寅卒。享年五十六。遣禮官優賻致祭。又令地師定山。葬于九萬廟洞艮坐原。海氓數十人來供祭需。終三年不懈。士林立祠于吾道山下。幷享蘇湖公。公天性孝友。事二兄如父。事無大小。必稟命而行之。聯床共被。和樂且湛。內行如此。宜其忠之如彼哉。配貞夫人宜寧南氏。通政世雲女。與公同塋。有一男一女。鳴虎主簿。女姜晉善。鳴虎一男洛察訪。洛四男由碩,由磅武科,由礴,由礩。三女盧漢254_093c鑄,金萬兼,盧舜弼。由碩一男震泰。二女鄭達兼,朴泰臨。由磅三男震衡,震嵩,震華。二女郭文瀷,尹大鳴。由礴一男震宗。一女盧成弼。由礩一男震翰。餘不錄。日公傍孫祥羽。以晩覺李君東汲狀示余求爲銘。銘曰。
烈烈維公。武畧天畀。相符燕頷。技遒猿臂。虎榜伊始。龍節已擬。國運忽否。島夷大肆。吾嶺首刳。列陣風靡。公奮厥義。投袂以起。單鎗殲賊。倡旅竪幟。迨聞西狩。誓死敵愾。矛鋒所向。戰克攻破。或扼其路。或迫之隘。望風有遁。聞鼓卽駭。三城旣復。餘堞亦可。鶴老大喜。鵝陣相賀。晉陽之陷。敵衆十倍。躍馬揮劒。草薙魚臠。254_093d賊遂崩潰。人得安奠。有被其圍。賴公得免。海冦匪茹。萬艘將戰。邊邑傷弓。縮手莫展。公又用計。一炬燒遍。湖伯褒聞。特授䧺州。牛刀入石。屹立道周。位登閫帥。淡若寒儒。知足不枉。貞節卓殊。歸卧衡門。潔跡昏衢。最公終始。今古罕比。維靈有妥。歲奔衿佩。九洞一面。雲孫追緬。刻詩賁幽。我言匪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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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碣銘
通政大夫崔公墓碣銘 並序 a_254_09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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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均字汝平號蘇湖姓崔氏。系出全州。高麗門下侍中文成公阿之後也。自是歷四世冠冕不絶。入本朝又歷開寧縣監贈判事子涇。比安縣監贈都承旨水智。至郡守以湜。是爲公高祖。曾祖諱潤身武科僉使。祖諱潭以儒行薦補參奉。贈漢城右尹。考諱云哲贈刑曹判書。妣淸風金氏。參奉德厚女。以中廟丁酉生公。有異質峻整醇厚。孝友出天。兄254_091a弟三人。同居共財。或勸析箸。公歎曰可以産業易湛樂哉。常戒子弟毋得驕奢。喜讀易。潛心默究。旁通天文地理。及當龍蛇之難。與弟蘇溪公倡起義旅。旬日間衆至數十百人。時賊入九萬洞。公使蘇溪公率精銳馳馬奮擊。賊奔潰。一方賴以安堵。有羅氏者闔族死於賊。賊方入據其宅。公兄弟引兵擊逐之。招集其散匿奴丁。收屍以葬。奴皆感服願從。軍聲益振。山中避亂人爭歸附。於是以蘇溪爲上將。以表姪李達爲次將。公則爲謀主。贊畫籌策。辦給饋餉。方蘇溪公之赴援晉固泗昌之急也。公分兵屯墻峙北。多張旗幟。254_091b自號風雲將。大書揭之街上。以眩惑賊而控扼之。令山下居民晝則務農。夜則咸聚嶺上。一人各擧四五炬。羅列左右。鼓譟聲振天地。忽滅火寂若無人。已而又復如之。夜夜倍增其炬。以示兵盛。選壯士數十人。持弓弩出沒山谷馳突。賊大疑懼不敢近。時招諭使鶴峯金先生聞公兄弟名。招見而大奇之。因與倡義諸公歃血同盟。各據江左右。諸公乏軍糧。賴公助者多。賊之據熊川安民嶺也。公與蘇溪公往討之。左右翼諸軍被其圍急。公令亂投石。潰一面而馳突以出。又患昌鎭賊與固城賊。畏公潛相往來。布沙於路而254_091c得其跡。設伏斬殺無數。朝廷聞而嘉之。特除守門將。公不就。其後乙巳海浪賊大擧入冦濟州。舟艦蔽海而至。列鎭風靡。蘇溪公時爲加里浦僉使。公適到鎭所。爲之謀曰賊衆我寡。其鋒甚銳。不可以兵力抗。察其形勢。正合火攻。其制置方畧如此如此。則賊之就擒必矣。蘇溪公如其計。燒盡賊船。湖伯爲褒聞。上命錄勳增秩陞通政。公素無宦情。逮當昏朝。見彝倫斁敗。兄弟掛冠南歸。臨行題一詩曰。可笑功名等弊屣。白頭微祿愧斯身。何處蓴鱸秋正好。扁舟擬向五湖濱。及歸兄弟同處。友愛之情。老而益篤。人名其254_091d廬曰孝友廬云。光海八年丙辰九月日卒。享年八十。墓在會賢面唐頂山子坐原。公器局宏大。智畧淵深。臨機制勝。變化不測。汗馬搴旗之功。雖不及於乃弟。而坐運奇籌。自作江淮之保障。以孤軍弱卒。捍禦勁賊。終能樹立大功。雖古之不跨馬穿札者。何以加此。及其奏捷論功。一皆讓諸將。人比之於大樹將軍。是其崇執謙退。尤可尙。顧朝廷所以酬報者。不過三等錄券而已。豈非當日志士之憾哉。配淑夫人晉陽鄭氏。進士寬女。有四男二女。男興虎,山虎,起虎,振虎察訪。女徐舜凱,李明愿。興虎二男洽,洪察訪。山虎,起254_092a虎无后。洽一男由砬。洪二男由磼,由硈贈刑曹參議。振虎三男濂,濈,澳。濂三男由磐,由厚出,由久。濈嗣由厚。澳二男由磧,由埴。由磐二男震瞻,震望。由厚二男震泰,震斗。由久男震樞。由磧二男震極,震峻。由埴二男震寶,震標。餘不錄。日公之八世孫祥羽。以李晩覺東汲所撰狀。示余求銘公墓曰。先祖已享於道山祠。惟是墓道無顯刻。故敢以請。辭不獲。遂叙次如右。系曰。
猗嗟蘇湖。異質天賦。易窮理象。倫篤孝友。國難倡義。鞱靲胷富。畫策如良。拙射如杜。饋餉坐辦。方畧行裕。254_092b料敵制勝。解圍走冦。神籌所在。奇效動奏。海艦火攻。賊無遺醜。推功與人。畧不自有。孟策殿馬。馮屛大樹。朝錄其功。通政纔授。迨至昏朝。彜倫將斁。掛冠遐擧。邈彼雲峀。棣華一堂。湛樂皓首。將畧儒行。公實備具。多士景慕。享以俎豆。雲孫寓誠。壠碑斯竪。最績顯詩。以詔千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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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山院廟宇重建記 a_297_46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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祀賢之有院。所以尊其人象其德。而勸慕興起斯民297_467c也。鐵城古有道山書院。以祀贈吏曹判書蘇湖崔公及其弟贈兵曹判書蘇溪公。而歲久廟宇傾撓。今統相白公殷鎭。制閫之明年丙午。聞之歎曰。廟以象尊貌。苟不易其耳目。人且倦怠。何以示後。則捐財以倡之。於是人士競勸。工殫民趨。閱數月而告訖。乃於七月某甲妥靈。後孫祥純。北走五百里。請書其事。余惟人心之感。久則忘。久而不忘者。必其感之深者。今去二公之世數百年。而人心益勸。其偉烈可知也。方島夷豕突。列郡鼠竄。二公以草莽之人。奮袂敵愾。握籌則料賊如指掌。橫槊則摧堅如拉朽。神運電掣。297_467d以成一家忠義。旣而宦成名立。又含蘆色擧。攜手同歸。以成物外遐躅。世亂則爲肉食者先。時昏則樂玄中之趣。夫然後知塤唱篪和。講劘砥礪之有素。而未可但以志於功名者擬之也。於此見大節之在人心。能愈久而未已也。夫爲國家仗使節。莫大於勸人爲忠。白公可謂知所務矣。抑非輿情之所共稱誦。又何以發潛光而樂爲之倡也哉。此皆可書也。終始幹其事者。士人許瑢後孫祥雲其人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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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祝文
固城道山書院奉安文 a_297_49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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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亂制勝。人謂智略。而豈徒哉。本然後達。眼大敵小。義重身輕。事無難者。投之有聲。猗我蘇湖。寔惟其人。奮袂草莽。義氣橫旻。始試萬洞。指麾中的。且戰且集。297_493b一體叔伯。進至昌晉。授謀密勿。自以孤軍。留屯遮遏。夜火赫翕。晝旗眩煌。揭號風雲。當街大張。賊懼以逃。人賴以安。文忠見賞。諸義共殫。轉鬬出計。沙石效奇。不自爲功。門鑰是辭。海狠稱兵。適公到鎭。蔽海舟艦。一炬消盡。功收在季。籌畫惟公。寵秩之加。頂玉齊崇。後値昏亂。攜手同歸。終始大節。棣萼交輝。後聖紀功。申以贈爵。惟玆道山。報祀伊昔。不有更新。曷以引後。使相捐財。多士咸趨。尊貌克稱。還奠神几。吉蠲以告。陟降孔邇。右告蘇湖崔公
應運挺生。其德不孤。連峙幷秀。終古特殊。桓桓蘇溪297_493c湖老是兄。伯長謀猷。叔擅英聲。海寇之猘。迭爲脣齒。節制惟兄。公自刷恥。奮厥武勇。鷙擊虎攫。單槍匹馬。羣醜喙息。鄰仇旣復。流人四委。大振厥聲。文忠拊脾。協同諸義。仰天誓血。旌麾所指。輒有聲績。旣完晉城。前至大嶺。且鼓且伏。妖酋授領。進戰退戮。公無不在。安嶺之捷。爲羣帥魁。潰圍脫衆。三軍賴安。紀功王府。加浦作翰。耽羅之津。又奏奇功。候風縱火。萬艦爲空。聖主嘉乃。增秩賜券。偃武爲治。民自無怨。龍虎符節。琴鶴行裝。冥冥遐擧。伯兮共翔。倫綱不斁。樂我天常。故玆衿紳。畏壘是崇。聯卓幷尊。牖我羣蒙。歷歲旣297_493d久。楹桷有毁。使相興喟。修擧廢墜。士勸工殫。涓吉妥靈。庶其陟降。惠我光明。右告蘇溪崔公
性齋先生文集卷之十八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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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樑文
鄭藍圃旌閭上樑文 a_308_36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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兒郞偉。志士殺身以成仁。名垂宇宙。聖王樹聲而彰善。旌表門閭。慰忠魄於九原。颺義烈於百世。緬惟藍圃鄭公。遠矣晉陽之系。興自麗朝以來。大提學文定公之令名。顯於太宗之代。右議政忠莊公之大節。著於端廟之朝。世業相傳箕裘。家聲勿替簪組。有是華胄。承厥葉靈。智勇稱爲人豪。能文能武。忠孝得之天性。惟義惟仁。盖自投筆之初。素蓄裹革之志。遭値龍蛇之亂。倡率熊羆之軍。尹梧陰薦將帥之材。素所愛重。崔蘓溪謀戰守之策。要與討平。南江308_361d始振軍聲。連戰大破。三嘉更挫賊勢。乘勝長驅。不幸敵愾之忠。遽作立慬之節。三軍矢復。惜乎三十之壯年。二弟輿尸。悽然八百之義旅。招諭使上死戰之奏。奬義褒功。昭敬王嘉殉國之誠。錄勳贈秩。事光簡冊。恩溢泉臺。逮我聖上之十四年。復採統梱之論。特下綽楔之命。三百年幽潛之事。玆焉益彰。七十州忠義之倫。可以觀感。盖其熊掌所取。日星千秋。是以烏頭之成。閥閱雙闕。允邁竹帛之紀。奚翅帶礪之盟。苟美苟完。載筮隆棟之吉。善禱善頌。庸勖修樑之勞。拋樑東。榑桑日射門紅。金鳳山月溪水。靑未了流不竆。拋樑南。燕相賀語喃喃。海最鉅環如帶。世閱人308_362a桑變三。拋樑西。抨蓐收護榱題。登防禦望嘉樹。古戰塲風塵迷。拋樑北。而衆星拱辰極。冷山屹馬嶺峙。仰彌高過者式。拋樑上。雷在天盖取象。天之經地之義。親其上死其長。拋樑下。臨平川頫曠野。嶺以南江左右。千載下聞風者。伏願上樑之後。肯搆肯堂。善繼善述。子孫宗族。化於善移孝爲忠。隣里鄕黨。慕其名居仁由義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一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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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贈兵曹參判新庵朴公墓碣銘 a_308_4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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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連弘字以瑞。朴氏新羅之姓。中葉爲密陽人。重大匡密城君諱陟爲鼻祖。歷高麗入我朝。代有顯官。永樂中有諱重豪正言。是生浹監察。是生聖時參奉。是生末新自大邱徙居鐵城。潛德不仕。是生文顯。以經學薦爲參奉。是生亮副司果。是爲公六世以下。妣贈貞夫人順天朴氏。天根女也。夢天馬降于庭。俄而有身生公。嘉靖丙辰八月二十八日也。風儀峻秀。氣像異凡。父母奇愛之。兒時讀蘇308_429a武傳。至齧雪操節歎曰如此然後。可以戴天履地。及長膽畧過人。龍蛇之亂。寇至所居洞口。公身布幔。手持長竿。踴躍而出。爲眩賊之術。賊疑有備。自相驚散。公因謂其弟連亨曰世祿之家。與萌隷不同。吾雖白徒。當爲國效命。汝宜撤家入山。忽有一駿馬飛來。鞍掛一長釰。公卽策馬提劒而出。衆以爲神助。依附者日益多。乃與蘇溪崔堈。馳詣縣官請益兵。縣官義而許之。幷與軍器。公乃整部伍樹營柵。据泗川倉粟爲拒守計。一日倭兵猝至。其酋馬姓者恃勇直前。公斬其首。因擧大石以投之。死者甚衆。賊遂奔散。今藍津其石尙立。初公及崔堈,李達,崔角虎,崔勇虎,丁俊,308_429b崔屹,崔大觀。號稱固城八壯士。皆同心協謀。又與假縣令趙凝道聲勢相依。固,鎭,泗,昆之間賴而稍安。十月賊入晉陽。招諭使金公督諸義將進戰。公與凝道,堈領兵至南江。賊疑援兵大至遁去。癸巳賊復大擧圍晉城竟陷。先是公族兄判官承男同聲倡義。公分軍馬送之晉。至是同會。爲賊所害。公之身中三丸。後又從忠翼公郭忘憂於鼎津。幷力攻戰。所向無前。郭公曰忠勇無過於朴某。朝廷聞之。特除訓鍊院僉正。丁酉倭復至。公又以鄕兵擊背屯山城賊破之。亂靖後陞掌隷院判决事。錄宣武原從功三等。公退居新川精舍。自號新庵。口不言起義時事。己酉卒。得年308_429c五十四。葬會賢洞知鳴山負壬之原。夫人平康蔡氏。父行一名天齡。墓合祔。生三男四女。男誠立,有立通德郞,俊立察訪。女壻李之覺,鄭興達,李稷,卞泊。誠立一男中粹。有立二男世章守門將,世華。俊立二男世郁,中燁。餘不可勝記。後贈兵曹參判。銘曰。
兎罝干城。無衣甲兵。鍾鼎之銘。帶礪之盟。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一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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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贈兵曹參判新庵朴公墓碣銘 a_308_4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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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連弘字以瑞。朴氏新羅之姓。中葉爲密陽人。重大匡密城君諱陟爲鼻祖。歷高麗入我朝。代有顯官。永樂中有諱重豪正言。是生浹監察。是生聖時參奉。是生末新自大邱徙居鐵城。潛德不仕。是生文顯。以經學薦爲參奉。是生亮副司果。是爲公六世以下。妣贈貞夫人順天朴氏。天根女也。夢天馬降于庭。俄而有身生公。嘉靖丙辰八月二十八日也。風儀峻秀。氣像異凡。父母奇愛之。兒時讀蘇308_429a武傳。至齧雪操節歎曰如此然後。可以戴天履地。及長膽畧過人。龍蛇之亂。寇至所居洞口。公身布幔。手持長竿。踴躍而出。爲眩賊之術。賊疑有備。自相驚散。公因謂其弟連亨曰世祿之家。與萌隷不同。吾雖白徒。當爲國效命。汝宜撤家入山。忽有一駿馬飛來。鞍掛一長釰。公卽策馬提劒而出。衆以爲神助。依附者日益多。乃與蘇溪崔堈。馳詣縣官請益兵。縣官義而許之。幷與軍器。公乃整部伍樹營柵。据泗川倉粟爲拒守計。一日倭兵猝至。其酋馬姓者恃勇直前。公斬其首。因擧大石以投之。死者甚衆。賊遂奔散。今藍津其石尙立。初公及崔堈,李達,崔角虎,崔勇虎,丁俊,308_429b崔屹,崔大觀。號稱固城八壯士。皆同心協謀。又與假縣令趙凝道聲勢相依。固,鎭,泗,昆之間賴而稍安。十月賊入晉陽。招諭使金公督諸義將進戰。公與凝道,堈領兵至南江。賊疑援兵大至遁去。癸巳賊復大擧圍晉城竟陷。先是公族兄判官承男同聲倡義。公分軍馬送之晉。至是同會。爲賊所害。公之身中三丸。後又從忠翼公郭忘憂於鼎津。幷力攻戰。所向無前。郭公曰忠勇無過於朴某。朝廷聞之。特除訓鍊院僉正。丁酉倭復至。公又以鄕兵擊背屯山城賊破之。亂靖後陞掌隷院判决事。錄宣武原從功三等。公退居新川精舍。自號新庵。口不言起義時事。己酉卒。得年308_429c五十四。葬會賢洞知鳴山負壬之原。夫人平康蔡氏。父行一名天齡。墓合祔。生三男四女。男誠立,有立通德郞,俊立察訪。女壻李之覺,鄭興達,李稷,卞泊。誠立一男中粹。有立二男世章守門將,世華。俊立二男世郁,中燁。餘不可勝記。後贈兵曹參判。銘曰。
兎罝干城。無衣甲兵。鍾鼎之銘。帶礪之盟。
 
西山先生文集續集卷之四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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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忠實錄跋 a_321_53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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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崔氏雙忠錄。卽蘇湖,蘇溪二公倡義討賊之事實。而始刊於再去癸未者也。其遺文懿蹟。宜321_532c不止此。而兵火之餘。多散逸不傳。公之諸孫。爲是之慨。乃復遍搜遠近。積以歲年。凡得事蹟可補者十數條。並與後來諸家撰述。而將附原錄。以興洛事契有別。責一言以尾其後。顧老弊無文。無以堪是役。而竊惟公兄弟。與我先君子文忠公。相從於難離之際。矢死討賊。共濟艱危。前後晉陽之捷。公實有力焉。先君子葢嘗請見而奬其忠矣。開錄而上其功矣。公兄弟又自云早從金令公。有意於衛國安民之實。今其錄中。語及先君子。非止一二。奉讀愀然。不勝隔晨之感。321_532d謹書此以歸之。

 
陽園遺集卷十三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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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附墓誌銘○墓表
淑人崔氏墓誌銘 幷序○辛丑 a_348_29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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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固城郡地法山。李氏之阡負癸之原。有封若堂曰淑人崔氏之墓。淑人系出全州。蘇溪義肅公諱堈之九世孫也。曾祖諱慶燁。祖諱信岳。考諱應斗。妣南平文氏父尙佑。生于純廟癸未四月十二日。自幼柔婉貞靜有至行。長適縣監咸安李君秉貞。卽同中樞贈兵曹判書雲圃李公諱達之七世孫也。公與義肅348_297d公爲中表叔姪。龍蛇之變。同倡義旅。勳名齊隆。至是淑人又歸李家焉。孝養皇舅。敬事夫子。處妯娌無間言。睦姻戚得歡心。閨門之內。雍睦如也。今上戊寅三月八日卒。享年五十六。育三男二女。男長恒奎。次彬奎,萬奎。女適崔聖淳,崔讚淳。恒奎男鎭斗進士,鎭玉,鎭奉生員,鎭璿,鎭俠。女成澣柱。彬奎男鎭,鎭孝,鎭年。萬奎男鎭浩,鎭祥,鎭吉。女河海弘。崔聖淳繼子德模。崔讚淳子冕模。曾孫男女多不盡錄。今鎭斗之長子完洙。年踰弱冠。筮仕旋除郡。而縣監君尙無恙。一門福祿之盛。罕有倫比。是豈徒李氏積慶不食之348_298a報。抑淑人之懿順慈惠。實有陰德。而人不能盡知之也。是可銘。銘曰。
欲知淑人之德。請看李門之福。我銘幽竁。其辭不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