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4.5.5. 남양주 사능탐방

2014.5.5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소재 사릉 탐방

아베베1 2014. 5. 7. 09:43

 

 

 조선 6대 임금 이신 단종의 왕비이신 정순왕후의사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릉과 유적이 있는 곳...

  

 ○ 11월. 대신ㆍ육경과 정부의 서벽(西壁)과 관각(館閣)의 당상관을 빈청으로 모이라고 명하였다. 노산대군의 시호를 ‘순정 안장 경순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다. 중정(中正)하고 순수한 것을 ‘순(純)’이라 하고, 크게 인자(仁慈)를 생각하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바른 것을 행하고 뜻이 화(和)한 것을 ‘장(莊)’이라 하고, 의를 말미암아 이루는 것을 ‘경(景)’이라 하고, 인자하고 온화하며 널리 밝은 것을 ‘순(順)’이라 한 것이다.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였는데,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 것을 ‘단(端)’이라 한 것이다.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였는데, 순수한 행실이 어그러짐이 없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 것이다. 휘호(徽號)를 ‘단량제경(端良齊敬)’이라 하였는데,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마음을 중도로 하여 일을 경건하게 처리하는 것을 ‘양(良)’이라 하고, 마음을 잡고서 장엄하게 있는 것을 ‘제(齊)’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 것이다.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정업원

 서울의 동대문(東大門:흥인문(興仁門)) 밖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었던 여승[僧尼]들만이 기거하던 절. 뒤에 정순 왕후(定順王后:단종비(端宗妃))가 이 곳에서 평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함.

중종 13년 무인(1518,정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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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5일 (임인)
단종 비가 자기의 노비와 재산을 정미수의 아내에게 주기를 청하다

노산군 부인(魯山君夫人)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여 자기의 노비와 재산과 집을 정미수(鄭眉壽)의 아내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정원이 이어서 아뢰기를,
“노산군 부인이 정미수를 시양자(侍養子)로 삼았는데, 정미수는 이미 죽고 또 후사(後嗣)가 없습니다. 정미수의 아내가 죽게 되면 노산군에게 제사지내 줄 사람이 없어져서 제사가 끊어질 것이니 매우 참담합니다. 다시 대신으로 하여금 후사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김정국(金正國)이 이 의논을 내었다.】
하니, 전교하기를,
“송씨의 소원은 정미수의 아내에게 뜻이 있었으니 후사 세우는 일을 다시 의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원전】 15 집 45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가족-가족(家族)


[주D-001]노산군 부인(魯山君夫人) 송씨(宋氏) :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 왕후(定順王后)로 사육신 사건으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자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다가 후에 정순 왕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주D-002]시양자(侍養子) : 양사자(養嗣子)로 할 목적이 아니고 동성(同姓)이나 이성(異姓)임을 가리지 않고 세 살 넘어 수양(收養)하는 양자. 즉 수양아들.

 

 

 

 

 

 

 

 

 

 

 

 

 

 

 

 

 

 

 

 

 

 

 

 

 

 

 

 

정순왕후사릉표.

조선국정순왕후사릉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송씨(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는 단종대왕의 왕비이다. 정통 5년 경인년(세종 23, 1440년)에 탄생하여 경태 5년 갑술년(단종 2, 1454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을해년(세조 1, 1455년)에 작위를 높여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고 천순 원년 정축년(세조 3, 1457년)에 작위가 낮아져 부인(夫人)이 되었다. 정덕 16년 신사년(중종 15, 1521년) 6월 4일에 승하하여 양주 남쪽 군장리(群場里)의 남향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춘추는 82세이다. 숙종 무인년(숙종 24, 1698년)에 복위하고 시호를 올렸다.

숭정기원후 144년 신묘년(영조 47, 1771년) 10월 일에 세움.

 

朝鮮國 定順王后思陵」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 端宗大王妃正統五」年庚申誕生景泰五年甲戌冊封王妃乙亥尊爲懿」德王大妃天順元年丁丑降爲夫人正德十六年辛」巳六月四日昇遐葬于楊州南羣塲里癸坐之原壽」八十二 肅宗戊寅復位上諡」

崇禎紀元後一百四十四年辛卯十月 日立」

 

 

(1440~1521) (). () . . 24(1698) . 1771 .
, 1970 .

 

임하필기 제14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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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사릉(思陵)의 복릉(復陵)


숙종 24년(1698)에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장릉(莊陵)과 정순왕후(定順王后 단종의 비 송씨(宋氏))의 사릉(思陵)을 회복하였다. 사릉의 총리사(摠理使)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사릉이 있는 곳은 본래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의 가산(家山)으로, 정미수는 곧 문종(文宗)의 외손입니다. 때문에 왕후가 살아 계실 때에 후사(後嗣)를 정미수에게 부탁하였던 것인바, 그대로 제사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능소(陵所)의 좌측 청룡(靑龍) 기슭의 분묘들이 모두 정미수의 자손들이며, 우측 백호(白虎)의 몇몇 무덤 또한 정씨 가문 족속(族屬)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비록 혈손(血孫)은 아니지만 이미 뒷일을 부탁한 터이고, 또한 체백(體魄 시신(屍身))을 이 산에다 의탁하였으니, 은의(恩義)와 정리(情理)의 중함으로 말하면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약 봉릉(封陵)을 이유로 옮기거나 헐거나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신도(神道 신령(神靈)) 또한 저승에서 결코 편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릉(齊陵 태조의 제1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 경내의 옛 무덤들에 대하여 이를 이미 파서 옮긴 일이 없고 정릉(貞陵 태조의 제2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 경내의 옹주(翁主)의 묘 또한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니, 정씨 가문의 무덤들 또한 참작하여 선처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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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2
사릉(思陵)을 배알하고 느낌을 기록하다


용 깃발은 펄럭이고 새벽 빛은 차가운데 / 龍旂拂拂曙光寒
신령한 비가 새로 십 리 여울에 더하였네 / 靈雨新添十里灘
소자가 당시의 일을 감히 말할 수 있으랴 / 小子敢言當日事
천심은 만 년 편안할 곳을 진작 정했도다 / 天心曾卜萬年安
동봉의 새벽달 아래선 연원을 바라보고 / 東峰曉月瞻燕院
두견새 우는 봄바람엔 월단을 감상하여라 / 杜宇春風感越壇
두 곳의 선향이 알건대 서로 멀지 않으니 / 兩地仙鄕知不隔
단풍과 잣나무에 맺힌 이슬을 다시 보리라 / 更看楓柏露漙漙


 

[주C-001]사릉(思陵) : 단종비(端宗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호이다.
[주D-001]두 곳의 선향(仙鄕) : 영월(寧越)에 있는 단종릉(端宗陵)과 양주(楊州)에 있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을 가리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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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祭文) 4
사릉(思陵)에 친히 드리는 제문


이해 봄에 / 是歲之春
장릉에 일이 있었는데 / 莊陵有事
누각에서는 들불을 찾고 / 樓尋野燒
제단에 잔을 드리는 예를 거행했네 / 壇擧酹觶
정순왕후(定順王后)께서 하늘에 계심에 / 后配在天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프리라 생각되는데 / 想欣以愴
정업원이 있던 곳을 / 淨業之院
동망봉이라 하네 / 峯曰東望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 其望維何
영월(寧越)의 높은 산일세 / 越岫崚嶒
소자가 지금 와서 보니 / 小子今來
마치 장릉에 절하는 듯하네 / 如拜莊陵
과천에 비석을 세우고 / 竪碣果阡
해평부원군을 받들어 함께 제사를 드리며 / 陪侑海平
그 자손을 찾아서 녹용(錄用)하여 / 錄及其裔
나의 작은 정성을 펴노니 / 爲紓微誠
바라건대 내려와 임하소서 / 冀垂降騭
나의 제사가 매우 밝나이다 / 我祀孔明


 

[주C-001]사릉(思陵) : 단종(端宗)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으로, 양주(楊州)에 있다.
[주D-001]누각에서는 들불을 찾고 : 유창(劉滄)의 시 장주회고(長州懷古)에 “빈 들에 들불을 놓으니 다 갈대 재인데, 이곳에 오왕의 누대가 있었네.[野燒空原盡荻灰 吳王此地有樓臺]”라는 말을 근거로, 회고의 정을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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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祭文) 4
장릉(莊陵)에 드리는 제문


단종께서 승하하신 지 / 端廟眞遊
어언 삼백 년인데 / 三百春秋
길쌈하는 아낙과 농사짓는 남정네들 / 紅女農夫
말이 미치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네 / 語到涕流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 / 孰使之然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같아서일세 / 彝性攸同
태세 정축년에 / 太歲丁丑
왕께서는 영월(寧越)에 계셨네 / 王在在東
영월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니 / 東人稽首
곤의와 수상으로 / 衮衣繡裳
편편히 희게 장식한 상여를 타고 / 翩翩素驂
운향으로 떠나셨네 / 去朝雲鄕
곡조는 선소에서 끝나고 / 曲終仙韶
지경엔 영우만 남으니 / 境留靈雨
벽산(碧山)이 찌푸리고 백일(白日)이 오열함이 / 皺碧咽白
무협과 청령포(淸泠浦)였네 / 巫峽泠浦
땅은 곧 백월이고 / 地是百粤
산은 구의와 흡사하니 / 山似九疑
나라를 사양하고 들로 나감은 / 讓國巡野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네 / 從古於斯
두우의 혼은 새가 되어 울고 / 鳥啼杜宇
사람은 한 나라 왕릉에 절하니 / 人拜漢陵
숙종께서 의로써 일으켜 / 肅祖義起
왕호를 회복하여 임금의 예를 갖추게 하였네 / 禮備千乘
풍성(風聲)을 수립하고 절의를 장려함이 / 樹風奬節
선조의 50년 동안의 일이었으나 / 先朝五紀
그나마 다할 겨를이 없었던 것은 / 如其未遑
책임이 소자에게 있다네 / 責在小子
금궤에 비록(祕錄)을 살피고 / 金匱考祕
문초에 진상이 드러나자 / 紋礎露眞
취화가 임한 듯하니 / 翠華如臨
단청이 거듭 새롭게 되었네 / 丹雘重新
능침(陵寢)을 따라 제단을 쌓으니 / 循寢築墠
여기에 따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 誰其從與
종실의 공자(公子)와 문무 대신들 / 宗英文武
사림과 복어일세 / 士林僕御
좌우에서 모심에 / 右之左之
기쁜 마음으로 영령이 은미하게 감통(感通)하니 / 悅豫肸蠁
청명의 절후에 즈음하여 / 爲趁淸明
종백(宗伯)에게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네 / 宗伯替享


 

[주D-001]선소(仙韶) : 선소곡(仙韶曲)으로, 일반적으로 궁정의 악곡을 지칭한다.
[주D-002]영우(靈雨) : 임금의 은택을 비유한다.
[주D-003]구의(九疑) : 산 이름으로, 순(舜)임금을 장사 지낸 창오(蒼梧)의 다른 이름이다.
[주D-004]두우(杜宇) : 두우는 주 나라 말기 촉왕(蜀王) 망제(望帝)의 이름인데, 죽어서 원혼이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새의 울음소리가 처절하여 능히 객수를 자아낸다고 한다. 자규(子規) 또는 촉혼(蜀魂)이라고도 한다.
[주D-005]취화(翠華) : 제왕 의장(儀仗)의 일종이다. 취우(翠羽)로써 장식한 기치(旗幟) 또는 수레의 덮개를 말한다. 곧 임금의 행차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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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祭文) 4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고하는 축문(祝文)


내가 즉위한 15년인 신해년(1791) 3월 3일에 국왕은 신 예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을 보내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용(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유(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영(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어(), 영풍군(永豐君) 정렬공(貞烈公) 전(瑔), 판중추원사 이양(李穰),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병조판서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효전(鄭孝全), 영양위(寧陽尉) 증 의정부 영의정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판돈녕부사 증 영돈녕부사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 돈녕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도총부도총관 증 의정부좌찬성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별운검(別雲劒) 증 병조 판서 충강공(忠剛公) 박쟁(朴崝), 형조판서 증 의정부좌찬성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승정원우승지 증 이조판서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형조참판 증 이조판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집현전직제학 증 이조판서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예조참판 증 이조판서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성균관사예 증 이조판서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도총부도총관 증 병조판서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박(河珀),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집현전부수찬 증 홍문관부제학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부사 증 이조판서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영월군호장 증 공조참판 엄흥도(嚴興道)의 신위(神位)에 제사를 드리게 하노라.

예로는 함께 제향되어야 하고 / 禮䙡與享
의로는 묘정(廟庭)에 배향되어야 하니 / 義取配庭
서른 명 남짓한 사람이 / 餘三十人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도다 / 炳烺日星
갈사가 먼 것을 꺼려서 / 嫌遠葛祠
가까이 있는 모옥으로 나아가니 / 就近茅屋
서로 돌아보며 흠향함이 / 相將顧歆
매년 한식 때일세 / 每年寒食
임금과 신하를 일체로 제향하여 / 一體君臣
위에는 각이고 아래는 단이니 / 上閣下壇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 萬歲千秋
길이 옥란을 보호하소서 / 長護玉欄

계유년(1453, 단종1), 병자년(1456, 세조2), 정축년(1457, 세조3)에 죽음으로 섬긴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등 236명의 종사(從祀)하는 신위와 함께 흠향하소서.

 


 

 

 

 

 

 

 

 

 

 

 

 

 

 

 

 

 

 

 

 

 

 

 
숙종 24년 무인(1698,강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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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9일 (경진)
판중추부사 최석정이 출사하니 인견하여 위유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출사(出仕)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최석정이 말하기를,
“기근과 질병으로 백성들의 장차 다 죽어가고 있으니, 산릉(山陵)의 모든 일은 마땅히 절약함을 좇아야 합니다.”
하고, 이어 군대를 모집하는 데 소용되는 전포(錢布)를 외방(外方)의 병영에서 취용(取用)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최규서(崔奎瑞)가 원종 대왕(元宗大王)을 추숭(追崇)할 때에 신주(神主)의 방제(傍題)를 삭제한 일을 들어 재량하여 처리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 예에 따라 하라고 명하였다. 정순 왕후(定順王后)가 장수를 누려 나라의 동쪽 교외에서 살다가 승하한 후에 고(故) 찬성(贊成) 정미수(鄭眉壽)의 선산(先山)에 장사지냈었다. 그래서 정씨(鄭氏)들이 대대로 그 제사를 받들어 이에 정중휘(鄭重徽)의 이름을 방제(傍題)한 것이니, 정중휘는 곧 정미수의 후손이요, 정미수의 어머니 경혜 공주(敬惠公主)는 단종 대왕의 고모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최규서(崔奎瑞)가 말하기를,
“지금 이 추복(追復)은 마땅히 먼저 태묘(太廟)에 고(告)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물으소서.”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모든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고(告)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또 위(位)에 나아가 고유(告由)해야 하는가 아닌가를 의논하라고 명하니, 예조(禮曹)에서 축사(祝辭)의 식례(式例)에 대한 것도 함께 대신들에게 묻기를 청하였는데, 대원군(大院君)의 신주(神主)에 ‘능원봉사(綾原奉祀)’라는 일컬음을 삭제하고 제사를 설시하여 고유(告由)한 예(例)에 따라 정행(定行)하였다. 제사를 고하는 축호(祝號)는 평일에 올린 존호를 그대로 쓰고 축사(祝辭)에는 사왕신(嗣王臣)이라 칭하였다.
【원전】 39 집 514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재정-국용(國用) / *왕실-종사(宗社) / *풍속-예속(禮俗)


[주D-001]방제(傍題) : 신주 아래 왼쪽에 제사 받드는 사람의 이름.
[주D-002]정순 왕후(定順王后) : 단종의 비.

 

정순 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를 복관하도록 특명을 내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후의 부모는 작위에 봉하는 것이 법식인데,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고(考) 송현수(宋玹壽)는 당초에 죄를 입고 다시 용서하라는 명이 없었으니, 법식에 따라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복관(復官)하도록 특명(特命)하고, 성향(姓鄕)인 여산군(礪山郡)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원전】 39 집 52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왕실-비빈(妃嬪)



 

 

 

정순 왕후의 기신제에 관하여 명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좌참찬과 대사성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순 왕후(定順王后)예척(禮陟)한 해가 바로 신사년 6월 초4일이다. 그날에는 특별히 숭품(崇品)의 중신(重臣)을 보내어 제사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해야 하겠으며, 제문(祭文)은 의당 지어서 내리겠다.”
하자, 승지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기신제(忌辰祭)는 이미 조천(祧遷)한 능(陵)에는 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예(禮)입니다. 인정은 비록 다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의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회(感懷)가 일어나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조신(朝臣)들이 예(禮)를 너무 괴로울 정도로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소녕원(昭寧園)을 봉(封)함에 있어 몇 해 동안 뜻을 품고서도 그것을 이루기가 어려웠는데, 오직 이천보(李天輔)와 원경하(元景夏)가 찬성한 힘으로 이루었다.”
하고, 이어서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44 집 59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주D-001]정순 왕후(定順王后) : 단종 비(端宗妃) 송씨(宋氏).
[주D-002]예척(禮陟) : 승하(昇遐).
[주D-003]신사년 : 1521 중종 16년.

 

 
영조 44년 무자(1768,건륭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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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2일 (정사)
예조가 사릉의 사초에 관한 일을 아뢰니 김양택에게 봉심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사릉(思陵)의 능 위에 사초(莎草)가 말랐음을 아뢰니, 내국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에게 명하여 봉심(奉審)한 뒤에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원전】 44 집 296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주D-001]사릉(思陵) :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능.
○ 사릉(思陵)에 행행하여 직접 제사지냈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의 묘에 관원을 보내어 전작(奠酌)하기를 장릉(莊陵)에 배식(配食)하는 규례대로 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내외의 묘에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부원군의 묘소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부인의 묘소에 함께 제사지내고, 경기 감사에게 명해서 작은 표석을 세우고 묘지기 두 가구를 지급하게 하였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묘에 제단(祭壇)을 세우고, 경혜공주(敬惠公主)의 묘소에도 일체 치제하였으며, 여량부원군의 후손과 영양위의 사손(祀孫)을 조용하였다. 또 국내(局內)에 있는 정씨(鄭氏)의 11개 분묘를 능관이 검찰하고 구호하도록 명하였다.
 
 西坡集卷之十九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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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文
思陵親祭祭文 己卯 a_152_38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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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惟端廟。在沖嗣服。篤生碩媛。俔天媲極。夙著152_381c陰功。柔嘉雝穆。勛華禪授。秉德彌勤。東巡之後。事難索言。竹淚長滋。欄花又春杳。邈僊遊。掩翳芳塵。一抔維楊。荒麓蓁蓁。樵蒭隕泣。行路傷神。重光盛典。累朝因循。神理弸鬱。輿情痛衋。藐玆小子。眷言疇昔。一念愴傷。中心蘊結。旻天孔昭。有定必伸。惟斷予衷。寔先議臣。遵先王志。稽我家禮。事固宜然。時若有待。煥復天位。光宣大冊。民謠士抃。慶騰宗祏。並隆坤極。齊陞太室。煌煌彤管。永揚徽烈。寢園之制。仍舊加飾。百年蓬科。有儼象設。父老改觀。山原動色。近在畿服。玆申禮覿。涼秋荏苒。氣候搖落。嵲嵲岡巒。152_381d蕭蕭松柏。顧瞻徘徊。增予心慽。克蠲芬苾。虔薦悃愊幽明不隔。庶冀降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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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숙종 24년 11월 초8일 대왕의 시호 올릴 것을 의논하다

11월 초8일에 영의정 유상운(柳尙運)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 대왕의 시호 올릴 것을 의논하기를,
“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 하고,【중정 정수(中正精粹)를 순(純)이라 하고, 대려 자인(大慮慈仁)을 정(定)이라 하며, 호화 부쟁(好和不爭)을 안(安)이라 하고, 이정 지화(履正志和)를 장(莊)이라 하며, 유의 이제(由義而濟)를 경(景)이라 하고, 자화 편복(慈和徧服)을 순(順)이라 한다.】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수례 집의(守禮執義)를 단(端)이라 한다.】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소서.”
하고, 왕후의 시호를 올려서 말하기를,
“ ‘정순(定順)’이라 하고,【순행 불삽(純行不爽)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비[和比于理]함을 순(順)이라 한다.】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고,【수례 집의(守禮執義)를 단(端)이라 하고, 중심 경사(中心敬事)를 양(良)이라 하며, 집심 극장(執心克莊)을 제(齊)라 하고, 숙야 경계(夙夜儆戒)를 경(敬)이라 한다.】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소서.”
하였다.
○복위하고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고유한 제문[復位告由宗廟永寧殿祭文] 【무인 11월 16일.】
“을해에 선양(禪讓)하여 주심은 대체로 덕 있는 이에게 물려주심이었으나, 일에는 불행함도 있어서 위호(位號)를 아직도 복구하지 못하시니, 연대가 무천(貿遷)하여 감에 원울(冤鬱)함이 한이 없었습니다. 이제 곧 욕례를 거행하고, 보책(寶冊)을 추상(追上)하여 단종(端宗)·정순(定順)이라 하니, 묘호와 시호가 오직 새로와져, 진실로 정리와 예문에 맞아 거의 신인을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이유를 고하고 삼가 명연(明禋)을 드립니다.
○신주를 사묘(私廟)로부터 시민당(時敏堂)으로 이봉(移奉)하는 제문[神主自私廟移奉時敏堂祭文]【11월 22일.】
“생각하건대, 예전의 정난(靖難) 때에는 대체로 선수(禪授)하여 왕위 계승함을 본받으시매 높으심이 상왕(上王)으로 계시니, 융숭한 위호(位號)가 갈리지 아니하시었으나, 그 끝에 가서 잘 되지 못하심을 어찌 전적으로 사람에게 말미암은 것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운수는 열리는 바가 있고, 일은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외로운 무덤이 산골에 의지하여 사사로이 제사지냄도 유(類)가 아니니, 군정(群情)의 슬퍼하는 것에 어찌 멀고 가깝다 하여 간격이 있겠습니까? 이에 말하는 사람이 있음에 곧 마음에 느낌이 있어 이 일을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여러 사람의 의논도 또한 같았으므로, 추전(墜典)을 빨리 거행하고, 욕의(縟儀)를 즉시 강구하여 능(陵)의 이름과 묘(廟)의 시호를 차례로 추상(追上)하고, 조위(祧位)에 제부(躋祔)하며 신주를 개제(改題)하니, 예(禮)에 또한 마땅하며 일에 기대함이 있는 듯하므로 어찌 의로 일어남을 혐의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사묘(私廟)에 그대로 둠이 합당하지 못하고, 삭거(削去)하여 방제(旁題)함도 또한 전자에 한 일이 있으므로, 이제 길한 때를 가리어 별전(別殿)에 옮깁니다. 당일을 감념(感念)하니 애연(僾然)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말을 아뢰어 고유하고 간략한 분필(芬苾)을 드리니, 양양히 계시거든 바라건대 흠향하소서.”
○그전 신주를 이봉(移奉)한 뒤에 봉안하는 제문[舊主移奉後奉安祭文]【11월 22일.】
“그 처음의 사묘(祠廟)는 사가(私家)에 기재(寄在)하여 지금까지 여러 대를 지나오면서 보는 이마다 탄식하더니, 다행히 이제 추복하고, 이미 위호(位號)를 정하니, 그 사체를 헤아려 볼 때 전과 비교하여 다름이 있습니다. 그대로 구차(舊次)에 안치함은 마땅히 예가 아닌 것 같아 빨리 옮겨 모실 것을 생각하였더니, 조정의 의논도 또한 합치하는지라, 이제 좋은 때를 가려 삼가 전우(殿宇)로 나아가서 잠깐 권의(權宜)에 따라서 제부(躋祔)로 대접합니다. 신의 의용(儀容)이 이에 열(列)함에 물채(物采)도 모두 갖추어지니, 진실로 정리와 예문에 맞아 신리(神理)가 거의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에 사유를 아뢰고 공경하여 깨끗한 음식을 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흠향하여 어김이 없도록 하소서.”
○종묘에 청시(請諡)한 고유한 제사의 축문[請諡宗廟告由祭祝文]【12월 22일.】
“광전(曠典)을 능히 들어 욕례를 행하여 하여 이미 위호를 회복하였으니, 역명(易名)이 있음도 마땅합니다. 아아, 깊은 청묘(淸廟)에 빛나는 선령이 계시므로 길일을 가려서 고유하오니, 분필(芬苾)을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영녕전에 청시하는 고유제 축문[請諡永寧殿告由祭祝文]【12월 22일.】
“성한 전례(典禮)를 행하려 하옵기에 대명(大名)을 즉시 바꾸고, 의식에 따라 명천(明薦)하므로 이에 삼가 아룁니다.”
○그전 신주에게 시호를 올리며 고유한 제사의 축문[上諡舊主告由祭祝文]【12월 22일.】
“위호(位號)가 이미 복구되었으니 제부(躋祔)에도 기약이 있으므로 역명(易名)을 징행(徵行)하고, 곧 욕의(縟儀)를 거행하여 삼가 아름다운 칭호를 받들고, 엄숙히 보책(寶冊)을 아룀에 일에 앞서 삼가 고하오니, 슬픈 사모의 마음을 어찌 다 하오리까?”
○부묘(祔廟) 때 영녕전에 미리 고한 제사의 축문[祔廟時永寧殿預告祭祝文]【12월 25일.】
“욕의(縟儀)를 추후하여 거행하게 됨은 명우(冥祐)를 힘입어서입니다. 드디어 제부(躋祔)를 고하고 삼가 포육(脯肉)과 술을 드립니다.”
○종묘에 예고한 제사의 축문[宗廟預告祭祝文]【12월 25일.】
“아아, 깊숙한 영녕전에 성한 전례를 거행함이여! 예에 있어서 마땅히 삼가 아뢰어야 하므로 감히 비박한 제사를 베풉니다.”
○명정전 예고제 때 이봉(移奉) 뒤의 봉안제를 겸하여 행한 축문[明政殿預告祭時移奉後奉安祭兼行祝文]【12월 25일.】
“예를 마치자 신주를 쓰니 기일이 부묘(祔廟)에 가까왔으므로 잠시 수전(邃殿)에 봉안하게 되었으니, 거듭 삼가 아룁니다.”
○신주를 쓴 뒤에 전(奠)을 드린 축문[題主後設奠祝文]【12월 25일.】
“이름을 바꾸고 신주로 다시, 쓰게 전례(典禮)에 잘 화합되었습니다. 옛 것을 버리시고 새로운 데로 나아가시니 길이 만세를 누리소서.”
○대왕 시책문(大王諡冊文)
“유세차(維歲次) 무인년 12월 신축삭(辛丑朔) 25일 을축에 사왕(嗣王)인 신(臣)【이돈(李焞).】은 삼가 재배하고 머리 조아려 말씀을 올립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추위(推位)하여 양국(讓國)하신 지극한 덕은 무어라 말할 수 없으므로, 시호를 드리고 이름을 높여 궐하였던 예전에 거행하고, 이제 현책(顯冊)을 올리려 하여 감히 미미한 정성을 드립니다. 엄숙히 생각하건대, 공의 온문(恭懿溫文) 대왕께서의 어지신 명성과 아름다운 자태는 세손(世孫)이며, 원사(元嗣)이시니 약세(弱歲)에 계실 때부터 영릉(英陵)께서 등에 업어주시는 사랑을 받으셨고, 연하여 대상(大喪)을 만나며, 문종(文宗)께서의 희면(頮面)의 교훈을 받았으나, 국보(國步)의 다난(多難)은 어쩔 수 없어 역수(曆數)의 돌아감을 부르게 되자 상궁(上宮)으로 옮아 계시게 되시니 예에 더욱 존양(尊養)을 극진히 하였으나 휘호(徽號)를 굳이 양하시니, 뜻이 더욱 휘겸(撝謙)에 있었습니다. 또 주나라 태백(泰伯)의 형(荊)을 사모하여 인하여 순제(舜帝) 중화(中華)의 순야(巡野)함을 지었으니, 꽃을 봄에 하늘이 멀어 경명(景命)이 연장되지 못함을 슬퍼하고, 의관을 장사함에 산이 깊으니 욕의(縟儀)의 미비함을 개탄하여 온 지 이제 거의 2백 년 쯤 지났으나 아직도 천만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함이 계셨으므로, 여러 공인에게 드디어 의논을 모아서 마침내 열조(列祖)에게 승부(升祔)할 것을 결정하니, 호분(虎賁)의 엄한 호위는 익실(翼室)의 택종(宅宗)을 맞이하는 듯하였고, 용기(龍旂)가 행차를 경계함은 면복(冕服)을 받들고 박(毫)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습니다. 비록 전통의 서차는 조위(祧位)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절혜(節惠)에 이장(彝章)을 궐하겠습니까?
정밀하고도 순수하시며 사랑하고도 어지심은 경쟁할 이가 없으셨고, 바른 것을 밟고 의(義)를 말미암으심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묘(廟)에 이름을 붙여 찬양함 같은 데 이르러서는 더욱 예절을 지키어 공손함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만승(萬乘)을 가볍게 여기시니, 진실로 그 높은 기풍을 논의하기 어려우며, 덕이 천추에 무거우시니 진실로 그 성하고 아름다움을 표게(表揭)함에 합당합니다. 이에 길일을 점쳐 곧 명연(明禋)을 벌리고,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받들고 존시(尊諡)를 올려,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 하고,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니, 우러러 바라건대, 영령이시여! 충감(沖鑑)을 굽어 드리우소서. 비로소 성한 예를 알맞게 하오니, 이것을 흠향하심이 마땅하오며, 거듭 큰 아름다움을 주셔서 창성하게 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아아, 슬픕니다. 삼가 말씀 올립니다.”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이 지어 올리다.】
○왕후 시책문(王后諡冊文)
“유세차(維歲次) 무인년 12월 신축 삭(朔) 25일 을축일에 사왕(嗣王) 신(臣)【이돈(李焞).】은 삼가 재배(再拜)하고 머리 조아려 말씀 올립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현호(顯號)로서 공렬(功烈)을 드날림은 제부(躋祔)하는 욕의(縟儀)를 추후로 닦음에서이며, 아름다운 덕이 지존(至尊)【임금.】과 같이 짝이 되시매, 인하여 절혜(節惠)의 광전(曠典)을 거행하여, 비로소 잘 명실(名實)에 맞게 되니, 귀신과 사람을 서로 위로할 것입니다. 엄숙히 생각하건대, 의덕 왕후(懿德王后)께서는 돈독한 자질로 빛나는 가문에서 태어나 빛나게 어리신 임금의 배필이 되시니, 아름다운 자태가 일찍부터 혜명하시어, 시초(始初)의 맑고 밝음을 도우셨고, 음으로 교화함이 보이지 않게 진실하시어, 내외(內外)의 옹목(雝穆)에 협찬하였습니다.
내려와 달권(達權)하여 선양(禪讓)함에 이르신 것도 대개 또한 유모(猷謀)를 도와 성취에 바탕하려 함이었으니, 태비(太妃)의 높은 이름을 받으심도 또한 아름다움을 지녀서입니다.
일국의 융숭한 봉양을 받아 함께 우아하고 한가함을 기뻐하시더니, 불행하게도 당시에 변란이 자주 일어나 마침내 조정의 의논이 많이 그릇됨을 부르게 되어, 햇빛이 꺼지고 달빛이 어두어져 황도(黃道)에서 아울러 밝은 빛을 잃었으니, 포사(浦思)·산애(山哀)에 창오(蒼梧)에 따르지 못한 슬픔이 맺혔습니다. 곤궁함에 처하여서도 옥 같은 법도에 티가 없었으나, 위임하고 순종하여도 좋은 계산이 더욱 멀어지오니, 신리(神理)가 오랫동안 하늘에 계시면서 답답하시어, 꽃다운 티끌이 점점 가리고, 종묘의 제사가 아직도 여러 세대에 궐하였으니, 여러 백성들이 함께 한숨을 짓습니다. 생각하건대, 비칭(丕稱)이 어찌 유현(幽顯)에 따라 간격이 있겠습니까마는, 잃었던 예절도 혹 구원(久遠)한 후세에 기대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 일을 옛 제도에 참고하여 결단을 미충(微衷)으로부터 내렸습니다. 저 천도(天道)가 반드시 펴짐을 헤아린다면 감히 표게(表揭)함을 늦출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종사(宗事)가 흉함 없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정문(情文)을 갖추어야 하겠으므로, 이에 왕장(王章)을 복구하여 조실(祧室)에 올려 모셔 대수를 차례로 하고, 동시에 곤위(壼位)도 높여 보책(寶冊)을 올리고 이름을 바꾸니, 황연(怳然)하게 휘적(翬翟)이 거듭 빛나며, 완연(宛然)하게 건곤(乾坤)이 몸을 가즈런히 하셨습니다.
성조(聖祖)께서 높이 받드는 밝은 뜻을 생각할 때 어찌 영광되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 조정의 척강(陟降)하시는 밝으신 영령들께서도 잠자코 열어주신 것이 있다 하겠습니다. 진유(眞遊)가 이곳에 모이니, 한(漢)나라의 발과 휘장이 능히 비로소 세워지고, 경광(耿光)이 다시 밝으니, 주(周)나라 종묘의 완염(埦琰)이 곧 빛납니다. 고실(故實)을 생각하여 감회가 더하므로, 물채(物采)을 진설(陳設)하고 정성을 드립니다.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유상운(柳尙運)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받들고 가 존시(尊諡)를 추상(追上)케 하여 말하기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였으니, 깊은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밝게 영특한 하감을 내리시어, 아름다움을 역사에 드리우신다면, 비록 2백 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경사를 연장하는 아름다운 도모가 천만 년에 이르도록 바뀜 없기를 바랍니다. 아아, 슬픕니다. 삼가 고합니다.”
【대제학(大提學) 서종태(徐宗泰)가 지어 올리다.】
○영녕전에 부위(祔位)하고 친히 제사한 제문[祔永寧殿親祭祭文]【12월 27일.】
“아아, 소(昭)인 온문(溫文)은 현묘(顯廟)의 목(穆)이 되십니다. 어존(御尊)에 임함이 계시었으나 선양(禪讓)의 마음을 나타내시어, 덕 있는 사람에게 양위하시니, 높은 존호(尊號)를 올리고 종묘에 향사함이 전상(典常)에 마땅하온데, 만나신 때가 불행하여, 성한 예절이 오래도록 궐하게 되었으니, 신리(神理)의 억울하심이 이제 백년이 되었습니다. 여러 조종에서 인순(因循)하여 온 것은 대체로 그 일을 중히 여겨 이겠지만, 소자(小子)가 멀리 생각하건대, 감회가 마음속에 일어났습니다. 공경하여 잘 이어받을 것을 생각하고 조정의 의견을 물었더니, 조정의 의논도 같았습니다. 대(代)는 비록 조위(祧位)에 미치었으나 예에 있어서 의당히 추원(追遠)하여야 하므로 부의(祔儀)를 거행하게 동시에 곤위도 높이어 지위가 이실(禰室)을 이어받게 함이 정리에 맞고 법도에 합당하므로, 높이 모심을 처음과 같이 함으로써 성조께 빛을 더하게 하오니, 우러러 바라건대, 척강(陟降)하시어 같이 위로하며 기뻐하소서. 몸소 나아와 고성(告成)하고, 삼가 분필(芬苾)을 드립니다.”
○구주를 매안하는 고유제 축문[舊主埋安告由祭祝文]【12월 27일.】
“이미 부례(祔禮)를 거행하였으므로 그전의 신주(神主)를 합하여 묻음에 이제 좋을 때를 택하여 삼가 고합니다.”
○구위판을 매안하는 고유제 축문[舊位版埋安告由祭祝文]【기묘(己卯) 정월 12일.】
“태묘(太廟)에 새로 올려 모시니, 욕례(縟禮)가 더욱 빛납니다. 길일을 가려 사유를 아뢰고 그전 위판을 이에 간직합니다.”
○장릉 개봉릉시(莊陵改封陵時)의 선고 사유제 축문[莊陵改封時先告事由祭祝文]【정월 27일.】
“아름답습니다. 지극한 덕을 가지신이여! 진실로 달권(達權)하시어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여 주심이 순(舜) 때의 선양과 같았습니다. 슬픕니다. 이 한 언덕은 또 옛 구의(九疑)이니, 의관을 간직한 곳인데도, 대체로 욕의(縟儀)를 궐하여 온 지 2백 년이 지났으매, 귀신과 사람이 원통하게 여겼습니다. 미충(微衷)에 감회한 바 있었는데, 조정의 의논도 동일하므로, 곧 능호(陵號)를 복구하고, 이에 현책(顯冊)을 아룁니다. 이장(彝章)과 물채(物采)를 긴 사다리에 높이 장식하고, 이제 수역(隧域)에 나아가 봉식(封植)하고, 고칠 것을 생각하여 제도 비결(備缺)을 상고하여 국가의 법식에 맞게 합니다. 신위(神衛)·상설(象設)과 선침(仙寢)·재려(齋廬)를 길인을 보내어 일을 감독하게 하니, 공도(工徒)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예령(睿靈)께서는 어쩌다 놀라지 마소서. 이제 그 연유를 아뢰고, 조심하여 필형(苾馨)을 올립니다.
○장릉 봉릉제 축문[莊陵封陵祭祝文]【3월 1일 문일(文逸)하였다.】
사릉 개봉릉시의 선고 사유제 축문[思陵改封陵時先告事由祭祝文]【정월 22일.】
“일찍이 곤극(坤極) 자리에 오르셨으나, 이어서 부운(否運)을 만나 구의(九疑)에 따르지 못하여 한 움큼 무덤이 멀어졌습니다. 인산(因山) 때 예를 결하였으매 온 국민이 함께 원통해 하였으며, 귀신과 사람이 바라온 지도 2백 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마음에 느낀 바 있어 바로 잃어 버렸던 제전을 거행하여, 융호(隆號)를 이미 복구하고, 현책(顯冊)을 이제 올리며, 드디어 옛 수역(隧域)에 나아가 빨리 봉식(封植)을 개수하니, 곧 의제(儀制)에 따라 공사를 시작하였으므로, 이제 좋은 때를 택하여 감히 그 연유를 고하오니, 놀라지 마시고 분필(芬苾)을 흠향하소서.”
사릉 봉릉 제축문[思陵封陵祭祝文]【2월 20일.】
“광례(曠禮)를 비로소 닦으며, 봉축(封築)을 이에 고치니, 상설(象設)이 엄연하여 높은 언덕에 광채가 더하여졌습니다. 답답하게 막혔음이 몇 해이겠습니까마는, 의문(儀文)이 비로소 갖추어졌습니다. 구의(九疑)가 아득함에 현대(玄臺)를 길이 생각합니다. 공역이 갓 끝났으므로 예관을 보내어 준공을 고하오니, 만년의 진택(眞宅)에서 영원히 편안하고 길하소서.”
○태묘(太廟)에 부의(祔儀)한 뒤 중외의 대소 신료와 기로(耆老)·군민(軍民)·한량인(閑良人) 등에게 교유한 글[祔廟後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왕이 말하노라. 광전(曠典)은 종묘의 신주(神主)를 닦아 부의(祔儀)가 벌써 이루어졌고, 대경(大慶)은 귀신과 사람에게 흡족하여 윤음(綸音)이 곧 퍼지니, 그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 그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갚노라. 전대에 선양하여 왕위 전하던 성한 규모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당시에 위호(位號)의 융숭한 보답이 있어야 하였을 것이었다. 대체로 만승(萬乘)을 신짝같이 벗어 버림은 진실로 그 지극한 덕을 이를 데 없는데, 더욱 한 나라에 군림하시었으니, 어찌 존명(尊名)이 끝끝내 궐하여야 되겠느냐?
엄숙히 생각하건대, 단종 대왕께서는 원자(元子)로 정위(正位)에 올라 어린 나이에 기업(基業)을 이어받았다. 천질(天質)이 일찍이 나타나 영명(英明)하였으므로 수문(守文)의 성함을 기약할 만하였으나, 시운(時運)이 비록 계속하여 광명하고 흡화하였다 하더라도 오히려 어려운 근심이 많이 있었으니, 예의를 잡아 큰 윤리에 잘 조심하여서 자기를 비어서 우러러 의척(懿戚)을 이루려 하셨었다. 의비(倚毗)함이 깊고 지극하여 물약(沕若)함이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대하듯 하고, 읍손(揖遜)이 조용하여 애연(藹然)함은 순제(舜帝)가 신우(神禹)에 주듯이 하셨으니, 그것이 달권(達權)이요, 명을 앎이었다. 이것을 힘입어 왕업을 공고히하며 도모를 길게 함이 있어, 태상(太上)의 존영(尊榮)을 누리매, 네 글자의 아름다운 칭호가 이미 갖추어져, 양궁(兩宮)의 화경(和敬)이 두터웠으므로 달마다의 조례(朝禮)를 자주 펴더니, 불행하게도 변란이 자주 일어나, 마침내 숭봉(崇奉)이 영원히 쇄하게 되었다. 겸손한 빛을 위에 있는 하늘에게 따질 만하였으나, 어찌 왕실에 위의(危疑)의 근심이 있었으랴?
그릇된 의논이 모조리 조정에 가득한 신하에게서 나왔으니, 진실로 성조께서 친애(親愛)하시는 뜻이 아니었다. 음성과 은택이 가리워지니, 종묘의 향사가 궐하여도 의지할 곳이 없었고, 산천은 아득하니, 선유(仙遊)가 멀어서 어디인가? 드디어 신리(神理)가 오래 답답하게 되매, 여정(輿情)에 서운함이 생겼다. 3년 동안 임어(臨御)하셨던 임금을, 어찌 유현(幽顯) 때문에 달리 함이 있겠느냐? 일대에 선양한 아름다움을 아직껏 표게(表揭)하여 높이지 못하였으매, 옛날 사실에 징험하여 항상 감탈함을 품어 왔노라. 조정의 의논에 물어서 정례(情禮)를 펴고자 바랐지만, 오직 여러 조정의 인순(因循) 때문에 서운함만 있을 뿐이었다. 마땅히 계승하고 전술하는 방법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세월이 오래고 멀어 조(祧)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감히 경상(經常)의 전례(典禮)를 늦출 것이랴?
추후로 묘실(廟室)에 올려 모시고 의장(儀章)을 모조리 복구하며, 동시에 곤위(坤闈)도 높여 크게 아름답고 높음을 드날리니, 황연(怳然)하게 정령(精靈)이 밝게 임하여 위에서 양양하는 듯하니, 생각하건대, 조종께서 잠잠하게 명명(冥冥)한 속에서 위로되는 듯하다. 상설(象設)이 침원(寢園)에 모조리 새로와지니 백신(百神)이 와 호위하며, 용기(龍旂)가 곧 사제(私第)에 가까와짐에 모든 백성이 서로 기뻐하니, 진실로 천도(天道)가 반드시 펴짐을 바로 2백 년을 지나서야 기다렸던 듯하다. 국가의 예법을 시작함이 유감 없으니, 천만 대에 보여 주어도 할 말이 있겠다. 진실로 희활(稀闊)한 성하고 아름다움이 되니, 어찌 넓은 은택이 없을소냐?
죄인을 사면하되, 중벽(重辟)에까지 이르게 하여 모두 고루 살게 하며 은혜를 미루되, 서료(庶僚)에까지 미치게 하여 아름다움을 함께 경축하리라. 본월 27일 매상(昧爽) 이전의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과, 자손으로 조부모 부모를 모살(謀殺)하거나 구타하고 욕한 죄와, 처첩(妻妾)으로 주인을 죽이려 한 죄, 노비(奴婢)로 주인을 죽이려 한 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 염매(魘魅)·고독(蠱毒), 국가의 강상(綱常)에 관계된 죄, 장오죄(贓汚罪)·강도(强盜)·절도죄(竊盜罪)를 제외한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의 도형(徒刑)·유형(流刑)·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된 자가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거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못했거나, 이미 발각(發覺)되었거나 아직 발각(發覺)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決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못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여 죄를 제(除)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하는 자는 그 죄로써 그를 죄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주며, 자급이 다한 자는 대신하여 더하여 준다. 아아, 이장(彝章)이 처음으로 먼 제사에게 시작하니, 그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양찰하고, 환호(渙號)를 크게 다방(多方)에 펴니, 함께 새로움을 시도하는 다스림에 힘쓰라. 그러므로 이제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잘 알 줄을 생각한다.”
【대제학(大提學) 서종태(徐宗泰)가 지어 올리다.】
【원전】 7 집 46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 *사법-행형(行刑) / *인사(人事) / *어문학(語文學)


[주D-001]옹목(雝穆) : 화목한 모양.
[주D-002]달권(達權) : 그때그때 일의 기틀에 따라 적당하게 썩 잘 처리하여 감.
[주D-003]선양(禪讓) : 임금의 지위를 물려줌.
[주D-004]황도(黃道) : 태양이 도는 길.
[주D-005]창오(蒼梧) : 순임금이 죽었다는 곳. 창오산을 말함.
[주D-006]비칭(丕稱) : 높은 칭호.
[주D-007]휘적(翬翟) : 붉은 비단에 나는 꿩을 수놓은 왕후가 입던 옷을 말함.
[주D-008]완염(埦琰) : 아름다운 옥으로 만든 홀.
[주D-009]이실(禰室) : 아버지 사당.
[주D-010]구의(九疑) : 구의산(九疑山). 산 이름.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남쪽에 있는데 순(舜)의 종묘(宗廟)가 있음.
[주D-011]수역(隧域) : 묘지.
[주D-012]인산(因山) : 왕가의 장례.
[주D-013]희활(稀闊) : 보기드뭄.
[주D-014]중벽(重辟) : 사형수.

 

西坡集卷之十九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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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文
思陵親祭祭文 己卯 a_152_38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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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惟端廟。在沖嗣服。篤生碩媛。俔天媲極。夙著152_381c陰功。柔嘉雝穆。勛華禪授。秉德彌勤。東巡之後。事難索言。竹淚長滋。欄花又春杳。邈僊遊。掩翳芳塵。一抔維楊。荒麓蓁蓁。樵蒭隕泣。行路傷神。重光盛典。累朝因循。神理弸鬱。輿情痛衋。藐玆小子。眷言疇昔。一念愴傷。中心蘊結。旻天孔昭。有定必伸。惟斷予衷。寔先議臣。遵先王志。稽我家禮。事固宜然。時若有待。煥復天位。光宣大冊。民謠士抃。慶騰宗祏。並隆坤極。齊陞太室。煌煌彤管。永揚徽烈。寢園之制。仍舊加飾。百年蓬科。有儼象設。父老改觀。山原動色。近在畿服。玆申禮覿。涼秋荏苒。氣候搖落。嵲嵲岡巒。152_381d蕭蕭松柏。顧瞻徘徊。增予心慽。克蠲芬苾。虔薦悃愊幽明不隔。庶冀降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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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文
思陵親祭祭文 己卯 a_152_38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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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惟端廟。在沖嗣服。篤生碩媛。俔天媲極。夙著152_381c陰功。柔嘉雝穆。勛華禪授。秉德彌勤。東巡之後。事難索言。竹淚長滋。欄花又春杳。邈僊遊。掩翳芳塵。一抔維楊。荒麓蓁蓁。樵蒭隕泣。行路傷神。重光盛典。累朝因循。神理弸鬱。輿情痛衋。藐玆小子。眷言疇昔。一念愴傷。中心蘊結。旻天孔昭。有定必伸。惟斷予衷。寔先議臣。遵先王志。稽我家禮。事固宜然。時若有待。煥復天位。光宣大冊。民謠士抃。慶騰宗祏。並隆坤極。齊陞太室。煌煌彤管。永揚徽烈。寢園之制。仍舊加飾。百年蓬科。有儼象設。父老改觀。山原動色。近在畿服。玆申禮覿。涼秋荏苒。氣候搖落。嵲嵲岡巒。152_381d蕭蕭松柏。顧瞻徘徊。增予心慽。克蠲芬苾。虔薦悃愊幽明不隔。庶冀降格。
 
明谷集卷之十六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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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疏箚
論莊思陵神版埋安箚 不果上。筵中口達。 a_154_18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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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於莊陵奉審狀啓。以陵所舊祠。有兩位神版。請令禮官稟處。而榻前稟定時。以端宗大王舊主及陵祠兩位神版。幷爲奉埋于莊陵事定奪矣。臣竊思之。帝王神主。親盡則入祧廟。無埋安之禮。惟虞主。練後奉埋于宗廟階間。士庶之禮。則親盡之主。埋祠宇階間。而都下人家。未必皆精潔。故埋于墓所。合櫝之主。雖各葬不分埋。同奉一處。已成通154_183a行之禮。今此大王王妃舊主。以帝王家禮言之。當埋安于宗廟。而以其降號時所立。將奉埋于陵所。此則合於禮從宜之訓也。第念先儒鄭玄之言曰。同時在殯異几。體實不同。祭於寢同几。精氣合。以生時夫婦宜別。沒後魂氣尙合。故同几同卓以祭。灌鬯焫蕭。亦無別異。此其制禮之精意也。埋主陵墓。本非古禮。而二百年合櫝之主。拘於因山之未祔。而分以二之。非但不便於事情。實亦有乖於禮意。若以神道言之。則蒼梧未從之痛。鬱結已久。東望名峯。傳之至今。思陵定號。意亦有在。舊主兩位。因其合櫝而154_183b奉埋於思陵。揆以平日情理。恐爲允當。且卽今定奪。舊主則分埋兩陵陵下。神版則同埋一處。亦似斑駁。雖是節目間事。陵廟之禮。所宜十分審愼。勿之有悔。旣有淺見。不敢自隱。伏乞聖明申命禮官。更加確處。不勝幸甚。

 
艮齋集卷之七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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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應製錄
思陵丁字閣上樑文 戊寅 a_161_12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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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祏擧升祔之儀。儒號如舊。園陵遵寢廟之制。棟宇維新。情文始宣。觀聽俱聳。恭惟定順王后。篤生名閥。休有聖姿。當中壼之配尊。丕贊神化。及上王之禪位。共膺徽稱。那知變故之屢興。奄見崇奉之終替。冤深泣竹。痛山川之阻脩。遊遠看花。慨年代之遷謝。雖精禋之是藏。粤自累朝。尙褥儀之未陳。以待今日。玆有曠古之典。聿伸追遠之誠。悉復王章。禮幷隆於坤極。纔修廟享。事宜亟於山陵。旣崇 161_125d 樹乎堂封。乃經營於寢閣。羣情胥悅。爭先子來之民。大役易完。已成丁字之制。倏翬飛而鳥革。甍桷交輝。怳鳳翥而龍盤。岡巒改色。新加陵號。表前日遠望之思。仍置私墳。取中朝陪葬之義。固知神理之無憾。益見聖德之有光。載擧脩樑。恭陳善頌。兒郞偉拋樑東。重疊青山入望中。誰道越州千里遠。日邊消息曉先紅。兒郞偉拋樑西。參差松柏戛雲齊。顯陵也識無多遠。仙駕朝朝路不迷。兒郞偉拋樑南。江流凝靜碧於藍。遙憐錦障西來水。纔到維楊便作潭。兒郞偉拋樑北。山形控列擁神閾。定知陰谷早生春。喜 161_126a 氣于今彌八域。兒郞偉拋樑上。氛散雲消宸宇曠。翼翼觚稜承紫微。四星天極重明朗。兒郞拋偉樑下。羽帳珠簾備掃灑。肅肅扃除護百靈。倘疑陟降於焉舍。伏願上樑之後。天神降祐。地祗效祥。黝堊長新。垂浩劫而不改。籩豆載列。錫純嘏而無疆。俾重煕於大邦。期勿替於永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