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산당공집 휘 충성 (2)

문성공 7세손 휘 충성 산당공 관련 신문기사 증실기관련자료

아베베1 2014. 5. 1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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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跋]
山堂集跋[朴世采] a_016_601c
  
 

016_601d山堂書客崔公者。諱忠成。字弼卿。完山府人。煙村先生德之之孫。寒暄堂先生金公之門人也。公生當成化,弘治之際。家于湖南之光州。天性高潔無累。惟以讀書山堂爲樂。窮晝夜不舍。故以自號焉。少已學爲文章。諸子百氏。無不染指。下筆輒數百千言。汪洋自肆。幷事博士零業。及從金先生於漢師。始聞爲學大要。與李勣,尹信齊名。遂究心於性情理氣之蘊。尤以明人倫。闢異端爲主。一時士友爭推之。佔畢齋金先生。嘗巡按湖南。公上書極言佛,巫之弊。請亟屛絶。佔畢先生待之加禮。公旣久游山堂。凡國內三角,白岳016_602a天磨,聖居,瑞石,頭流諸名山。皆徒步跋涉。其跡幾遍。或再三至焉。以此得風病。至辛亥歲。益劇尋卒。年三十有四。惜哉。秋江南處士孝溫。與公善。後著師友名行錄。乃以公名殿焉。靈巖士子。又配公于所謂存養祠。卽煙村先生專享之所也。余嘗聞公遺藁尙存。介人求見。旣而公之後孫秀華。因其同宗邦彥氏。請釐其編而跋其尾。況今兵燹之餘。惟公師弟估畢,寒暄間事。幾於掃地盡矣。隻字片言。益可貴重。茲敢不辭而書之如右云。時崇禎乙丑臘月初吉。潘南朴世采。識。
016_602b崇禎紀元後三乙丑六月日刊

 

 양정제공 미백 선생이 보관중인 자료를 반남인 박세체 선생의 서문을 받아서  산당집을 편찬하셨다   

 

  전주최공 문성공파 7세손 

  휘 충성 산당공 

  연촌공의 손자 되시는 분이시고  의령공 휘 지성 17대조고의 형님 되시는 분이시다

  한훤당 ,추강선생의 문화생이기도 하다 ...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어느덧 서리가 내릴 만큼 춥게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추워지면 당연 따뜻한 것을 자주 찾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찜질방이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찜질방 한두 곳은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전 국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이 되었고, 해외에도 여러 곳 생겨 외국인들도 찾는 명소가 되었다는 보도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그런데 가끔 찜질방이 우리 고유의 문화인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이다. 한증욕, 찜질방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조선 전기부터 전할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증욕은 한국 전통의 문화로 외국인들에게는 특이한 사례였기에, 일제강점기의 이마무라 도모(1870~1943)는 그의 ‘조선만담(朝鮮漫談)’에 한증의 풍속과 찜질방의 구조를 이야기로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찜질방’ 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한증욕은 외국인들에게 이국적인 문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유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운영한 의학적 용도의 증실(蒸室)에 대한 대략적인 기록 외에는 우리의 찜질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보고된 바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 1458~1491)의 ‘증실기(蒸室記)’라는 작품이 발굴·보고되면서 조선 전기 찜질 문화의 다소 구체적 정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최충성은 조선 전기의 명문집안에서 출생하였는데, 집안에 거처하기보다 산당에서 책읽기를 좋아하여 산당서객(山堂書客)이라고 스스로를 일컬었고 산당이라는 말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하였다. ‘증실기’를 통해 확인 가능하지만, 그는 어린 나이 때부터 전국을 유람하다시피 하면서 살았다. 공부나 유람 과정은 피로를 풀 사이 없이 지나치도록 계속되었다. 결국,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연 중풍을 앓게 되어, 이 병으로 인해 2년 후에 세상을 뜨고 만다.

최충성은 건강을 돌보지 않은 생활 때문에 결국 병을 얻고 말았다. 최충성이 중풍을 앓고 비탄에 잠겨 과거를 회상한 부분이 ‘증실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을 기르는 양생법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이었다. 이때부터 온갖 처방을 다 쓰지만 낫지 않자 결국 누군가의 말을 듣고 증실(찜질방)을 만들어서 한증욕을 하기에 이른다. 묘사된 정황은 오늘날 찜질방의 정경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방 두 칸 중 한 곳에 들어가고 나머지 방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증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며 땀을 낸다. 게다가 온돌 위에 창포, 창이, 길경, 쑥 등을 쌓고 물을 뿌려 그 기운을 받으려 하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또 여러 명이 한 방에 들어가 함께 찜질하는 것까지 닮아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충성은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고 만다. 그의 중풍은 ‘사지에 마비가 오고 오관(五關)이 막혀서 정신이 나가 혼절’한 증상으로 보아 중장(中臟), 즉 장기에 풍을 맞은 것이다. 중장에 걸렸을 때는 땀을 무리하게 내어서는 안 되는데 도리어 반대로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의학에서는 중장에 걸렸을 때 땀을 무리하게 내면 진액이 고갈될 수 있어 크게 경계한다. 중장에 걸린 다음 회복단계가 되면 외부로 나쁜 기운을 빼내겠다는 것보다는 몸을 보양해나가는 것으로 치료목적을 삼아야 한다. 최충성도 병이 악화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서 ‘증실기’ 말미에 비탄에 잠겨 글을 맺고 있다.

최충성의 ‘증실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전기에 만연했던 치료목적의 무분별한 증실 사용의 폐단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증실을 치료목적에 잘못 사용하여 환자들이 죽게 되어 사회문제가 된 경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전문적인 의료인의 절대부족 상황 속에서 발생한 문제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하겠다. 한의학에서는 땀 내는 요법이 기본 요법 중의 하나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생명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 닥칠 수 있음을 누차 이야기하곤 한다. 다이어트를 위해 무리하게 땀을 빼는 경우가 이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용도에 맞게 쓰지 않거나 무리하게 한다면 탈이 되는 법이다. 찜질도 용도에 맞게 내 몸에 적절한 정도로 해야 우리 몸에 좋은 게 아닐까 한다. 점점 추워지는 계절에 따뜻한 것을 찾게 되는데, 넘치면 화가 되는 법이니, 내 몸에 맞는 짐찔 비법을 찾는 게 중요한 시기이다.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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蒸室記 


病焉而醫者。情也。醫之而痊者。理也。旣病而不治。治之而不勤者。以父母之遺體。棄之道路者乎。治之,雖勤而反添違者。其又不幸乎。誰當其責。今余是已。016_593d余自桑弧之初。志於四方。年未一紀。從兄而北學於長安。結友二三子。讀書于學宮。而文房瀟灑。書齋凜洌。罅風隙冷。浸入肌骨。旣及長也。讀聖賢之書。解諸子百家之傳。知古人志大量遠。雖拳土塊石。無不欲觀以畜其有。慨然欲效之。癸卯而月出。甲辰而湧巖。乙巳而漢都之三角,白嶽。松都之天磨,聖居。丙午而瑞石。丁未而頭流。尋師從友。負笈橫行。旅況殊惡。山氣高爽。觸霧犯風而寒濕積聚。戊申春。又在方丈。晩聞金先生大猷丁憂。義當匍匐。忙劇之至。未遑取馬。徒步往哭於嶺南。歸來。足已繭而氣已憊矣。其年。亦016_594a復鶯月而完山。季夏而玉川。孟秋而雪山。強從諸生。隨行逐隊。仲秋而昌平監試。菊秋而金堤文場。自春曁秋。橫行東西。占席驢背。卜鼎道傍。暫無休暇。氣因困乏。形容枯槁。顏色黎黑。不知自止休養氣息。反以井蛙之見。妄意蟾宮之桂。與友生金子虛,兪翼之。鍊業于月出山精廬。愼富仁,李可售,成放翁。自光山繼至。姪子義叔。携李伯元自鳳城最後而至。諸友咸集。志穿鐵硯。然猶未警司馬之枕。或不免孫康之睡。余以爲於涼處處之。志氣爽塏則心自惺惺。而可以避睡鄕也。常自占冷座。而蚤暮起居。呼風逼寒。氣又不016_594b調。素積之風。忽爾乘隙。始焉咳嗽。中焉喘急。反覆相因。終焉中風。四肢不仁。五關閉塞。魄遁神返。與人世不相關。幾五六日。幸賴吾兄奔救之力而得蘇。復見天地日月。則如萬物旣冬而復春。兩曜旣晦而復明矣。烏飛兔走。奄至于春。語漸期期。視漸䀮䀮。步雖萍梗。而倚杖則可行。不啻涸鱗得西江之決。而圉圉焉洋洋焉。悠然而逝。吾兄又以爲荒村獨廬。醫疏藥乏。治療無計。請軍于路官。擔轎載疾。得與兄弟敍盡心懷。則恍若出自覆盆之下。而覩靑天白日之光矣。涉遠歷險。身尙康勝。亦足爲喜。而所可恨者。如飛鳥折016_594c右翼矣。千方萬藥。靡有餘力。人言汗蒸。則可以立效。余以爲信然。於是。構蒸室二間。一爲休憩之所。而一爲燠室。厚塗四壁。俾無容錐之隙。壘石作突。而以沙石塡罅。可容坐三四人矣。燃薪許多。令極熱而塞竈口。俾不泄氣。積菖蒲,蒼耳,桔梗,生艾于突上而傾注盆水。乃裎身入處其中則氣蒸於上。如煙如霧。凝結爲露。兼之以汗流如漿如雨而注於頤下。如卒然暴雨。而傾屋霤之水矣。焰氣外熾。而呼吸喘息尙不能自擅。必須以帨巾掩口。而後可以通吾氣也。與余共耐其苦者數人。而強者了一飯之頃。弱者行百步之016_594d間。甚者。雖須臾之刻。尙不能堪忍也。余以爲忍苦無據則尤難。以心念原道一篇爲期。將庶幾畢念也。心熱腸爛。卽促念了則出。用以鹽湯浴洗。而重綿挾纊。漱口歠粥。良久休歇。而又還入焉。如是者日四五度矣。連九日困於炎蒸之中。自茲以來。日益沈痼。氣日益失和。將以愈疾。而適以資夫疾之尤甚。眞所謂非徒無益。而又害之者也。余嘗觀醫書吐,汗,下,三法。所以該盡天下治病之源也。夫蒸所以汗者也。汗而可療者。卒然傷風寒。冷客於皮膚之間。而未之深入者。非若吾病之謂也。嗚呼。醫不三世。不服其藥。康子016_595a饋藥。孔子不敢嘗。古人之所以謹疾者如是。而今我始旣不能戒愼。而馴致此疾。傍有伯兄。款曲而手救之。遠有仲兄。慇懃而命藥之。諸父諸兄。莫不賜念。而今又輕信樵童野夫之言。自招其舊疾之復焉。非徒見責於吾兄。抑亦前修之一罪人也。噬臍莫及。書以爲記。聊以爲後人如我者之戒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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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堂書客傳 
 


書生不知何許人。姓字莫解。貫源難評。又未知所自來也。其在山堂也。以讀書爲業而衣縫掖之衣。冠章016_599c甫之冠。庶幾乎有儒者氣像。故自號山堂書客。其爲人也性喜澹泊。心絶浮華。人雖譽之而不以爲喜。人雖毀之而不以爲憂。喜怒不見於榮辱。憂樂不繫於得失。不求人之知。不求名之顯。故嘗愛吟古詩云。自知寡足眞堪笑。賴有顏瓢一味長。其爲養眞也則布被百結。藜羹一盂。一簞食。一瓢飮。得之則飽焉。冬一裘。夏一葛。得之則服焉。不以飢渴而苟得於人。不以困窮而改其初心。忍飢忍寒而講讀不撤。故嘗愛吟古詩云。直在胸中窮亦樂。何須戚戚向平生。其爲讀書也則窮探聖經。盡閱賢傳。上師聖人。下友群賢。以016_599d弟子之問。爲己之問。以聖人之答。爲己之耳聞。求其意於言語之間。探其理於文字之外。豈可以博聞強記。巧文麗辭。致力於詞章之末。而不知其本哉。故嘗愛吟古詩云。欲爲天下屠龍手。肯讀人間非聖書。其爲學業也則正其衣冠。尊其瞻視。起居必中於理。動靜無違於禮。早夜孜孜。而思顏子之所學者何學。窮年兀兀。而求孟氏之必稱堯舜者何道也。終夜不寐。終日不食。仰而思之。幸而得之。去其不如聖賢者。就其如聖賢者而兢兢業業。惟日不足。故嘗愛吟古詩云。術業貴及時。勉之在靑陽。希顏亦顏徒。要在用心016_600a剛。其爲存心也則邪思妄念。不作於意。淫謀讒術。不留於胸。事未來而其體之寂然不動者。如鑑之空而理無不具焉。事方至而其用之感而遂通者。如鑑之照而物無不見焉。體用相須。內外一體。隨事而存。靡他其適。豈以一時而應兩事哉。故嘗愛吟古詩云。人心妙不測。出入乘氣機。至人秉元化。動靜體無違。其爲立志也則寧學聖人而未至。不以小善而爲名。寧以天下爲己任。而不以一己之利害爲計。陽德方亨而虎嘯風冽。則可出而兼善。以覺其未覺者。豈可以高不事之心。踰墻而避哉。北風其涼而詑詑拒人。則016_600b可退而保身。自樂其身也。豈可以立齊而操瑟。獻璧而求售哉。過門閉戶。隨時而處。素富素貧。惟義所適。故嘗愛吟古詩云。不汲汲於富貴。不戚戚於貧賤。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其爲論道也則曰。用具於未始之前。體立於有形之後。太極流行於陰陽之中。陰陽不出乎太極之內。二氣交感。理亦賦焉。於是乎萬物生矣。萬物之中。飛者走者。動者植者。厥類非一。而明三綱五常之道。習六藝九疇之法。強不呑弱。下不陵上。此人之所以爲貴者也。人而不知則其何以異於禽獸哉。此書生之所以致力於學問者016_600c也。故嘗愛吟古詩云。若識無中含有象。許君親見伏羲來。又云。由來道理非高遠。須向人間事上求。或問曰。欲明三綱五常之道而去父子。離妻子。獨居山中。惡在其爲求道也。欲定其心而去聲色。斷外物。寂在深林。其非反鑑而索照者乎。子之學。無乃有幾於釋氏之空寂耶。書生曰然。父子之親。夫婦之別。長幼之序。親親然。友友然。怡怡然。和而睦之。然後家可齊也。耳之於聲。目之於色。口之於味。固人之所不可無者也。但於其間。識其眞僞。而不以此累其心。然後心可得而定矣。吾非惡此而不爲也。又非有所托而逃之。是016_600d亦有說焉。不可幸而致也。家在某州。門戶零丁。內乏甔石之儲。外無應門之童。冬暖而兒號寒。年登而妻啼飢。救死而恐不贍。奚暇治禮義哉。魯齋先生曰。學當先治其產業。產業不贍而衣食於奔走。則雖欲學。其可得乎。今者書生之窮。若是其甚焉。則必也荷鋤帶犢。躬自耘耕而手胼足胝。然後可以免死而已。雖欲誦聖人之書。求聖人之道而以至於聖人之域。不亦難矣乎。此書生之所以樂于山間。而忘其家者也。胡安定之裂家書。范文正之斷虀羹。而居于山間。終成其道者。豈非以是故歟。故書生嘗自吟云。靑山疊疊。016_601a綠水汩汩。塵喧不到。世慮不接。無思無慮。獨行獨樂。仰觀俯察。不愧不怍。風來山亭。於焉而臥。雲橫山腰。於焉而坐。鶴舞山顏。與之共嬉。猿號山嶺。與之相宜。鬱鬱山松。爲廬爲室。盤盤山石。爲床爲席。月掛山上。可以看詩。花落山庭。可以療飢。山中之樂。樂且無央。遊於斯樂於斯。終吾生以徜徉。此其爲山堂書生之樂乎。書客不知其何者。而傍有山人。遂爲之傳云。

 

山堂集附錄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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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書山堂集附錄後[崔秉潤] 


吾先祖山堂先生道學德行。旣有我東諸賢之贊美。則不肖藐孤。更何敢贅說於其間也。嗚呼。先生之蘊其高大遠密。非斯集可盡。若余不學鹵莽。於斯集猶未之究。其何以有所發揮哉。秋江南先生師友錄。殿以公名而其曰。茂材篤行如其師。師卽寒暄先生金文敬公也。蓋先生之學。得於寒暄。寒暄之學。得於佔畢齋。佔畢之學。傳受於其父叔滋。叔滋之學。得於冶隱。冶隱之學。得於圃隱。圃隱實爲吾東方理學之祖。則先生學問之淵源。如是其016_632b正大。以若其材之茂學之博。其所造詣。固不可量。而天不假年。中途而夭。纔過顏子之二歲。是所謂仁者不必壽者耶。嗚呼惜哉。先生遺集一卷。旣行于世。而又有遺漏於舊刊者存焉。隻字片言。益可貴重。昔我先君。裒輯於涔寂之中。命我舍伯。寫之一通。將欲附刊印行于世。而有志未就。公則沒矣。可勝痛哉。第當今春。吾門僉議。咸謀剞劂。故余乃奉出于篋笥中。典刑之所寓。手澤之所著。爛然如隔晨。孤孑餘生。撫卷一痛。烏可忍也。蓋其篇秩尠些。雖不無泰山毫芒之歎。而古人曰。觀鳳一羽。可016_632c以知五彩之俱。一臠之肉。可以知全鼎之味。烏可以篇秩之小而恨哉。且幷取擅勝樓題詠及進士公詩一絶。僉知公遺事。附錄於先生遺集之端。志可謂勤矣。功可謂博矣。嗚呼。三世家藏文蹟。又皆蕩散於兵燹之後。其餘存者。百不一二。可勝惜哉。僉知公以剛方之性。實學篤行。無愧爲煙村,山堂兩賢祖之孫。而且當丁酉之亂。大有功於王室。上甚爲嘉之。敎以扶植國脈。多活人命。召拜僉知中樞府事。于斯時也。朝家之酬報。士林之景仰。當如何哉。嗚呼。公以篤至之行。宜其乘運高蹈。展布016_632d所蘊。足以振世敎。正士趨。措國勢於鼎呂。而事與心違。命與世仇。隱約遐陬。蹈晦以終。至于今諶於古乘。又未蒙國朝腏享之褒典。此非但世所興歎者也。豈不爲雲仍百世之恨耶。所輯編文。當以因本鋟刊。而與元集字行不齊。故不肖乃敢更以書之。鋟梓告訖。事遂得成。吾先君積歲未遑之事。抑亦有待而然歟。幸我先祖遺美之不泯。感吾先君蒐葺之至意。而不可無一語以著卷尾。故敢忘蕪荒。識此顚末云爾。
歲丙寅五月上句。不肖後孫秉潤。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