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쌍충록 의숙 의민

전주최공 문성공 후송 쌍충록 (의숙공 의민공관련 신문기사 스크랩)

아베베1 2014. 5. 26. 17:02

 

 
 

이순신 '생생한 필체' 담긴 친필 편지 원본 발견(종합)


부산포해전 후 친구 강응황에게 보내…의병장 최균 가문서 소장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수군은 조선 수군의 주력부대가 돼 경상남도 연안에서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거제 옥포해전, 사천 사천포해전, 통영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등 기념비적 전투를 여러 차례 치른 이순신은 이어 같은 해 9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 수군 전단을 기습, 100여척을 격파해 또 하나의 대승리를 전사(戰史)에 남긴다.

그 와중에 이순신은 먼 북쪽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아들고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편지는 앞서 그해 4월 선조의 피란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선비 백천(白川) 강응황(姜應璜)이 보낸 것이었다.

이순신과 강응황의 관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산포해전 이후인 10월30일 이순신이 보낸 짧은 답장에서 그가 강응황을 벗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하루빨리 전세를 역전해 국난을 타개하기를 바라는 충정도 엿보인다.

'지난번 용만에서 보내온 편지는 꿈속에 그린 정의 의미가 아닐는지요. 재삼 펼쳐 읽어보니 편지 가득 간절한 뜻은 실로 내 친구 위서(渭瑞, 강응황의 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정성을 다한 행동입니다. 잘은 모르겠으나 요사이 안부가 어떠신지요. 멀리서 그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 사람은 졸렬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고 왜적의 우두머리가 재차 움직여 어지러운 세상이 된 가운데서 '근심 우(憂)' 한 글자만 생각났습니다. 다행히 별장(別將) 최균(崔均)과 최강(崔堈)의 힘을 입어 웅천(熊川, 경남 진해)의 적을 크게 이기고, 또 바다에 떠있는 적장을 사로잡으니 마음이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수레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군무가 어지럽고 심히 바빠 이만 줄입니다.'

이 편지는 그간 영인본으로만 내용이 알려졌으나 최근 이순신의 친필 원본이 새로 발견됐다. 원본은 편지 본문에도 언급된 의병장 최균의 후손이 소장하던 것으로, 얼마 전 '이순신의 리더십'을 출간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확인했다.

원본 편지는 한때 화재를 당해 아래쪽 일부가 소실됐지만, 나머지 부분은 민간에서 400여 년간 보관한 문건치고는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30여 년 전 만들어진 영인본은 글자가 상당히 퍼진 탓에 친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이번에 발견된 문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전문가들도 '원본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내놨다고 노 소장은 설명했다.

노 소장은 "그간 내가 발굴한 이순신의 문건 가운데 그의 필체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라며 "벗을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일수록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순신의 충정이 담긴 글"이라고 말했다.

pul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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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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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장.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 아버지는 운철(云哲)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내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강(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쌍충록(雙忠錄)』

     

     

     

     

     

     贈兵曹判書崔堈諡號望


    義肅[주:見義能忠曰義正己攝下曰肅]

    武肅[주:折衝禦侮曰武正己攝下曰肅]

    貞敏[주:淸白自守曰貞應事有功曰敏]

     

     

    선조 191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9월 24일(을미) 4번째기사
    병조에서 최강 등 무신에게 상전을 베풀 것을 건의하다

    좌부승지 최염(崔濂)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최강(崔堈) 이하 5인은 모두 품계가 높은 무신으로서 직사를 밝게 다스리고 주사(舟師)의 모범이 되어 매우 가상하니, 항상 해진(海陣)에 두어 급변에 대비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겠습니다. 송덕일(宋德馹) 이하 7인은 모두 직사에 근실하여 현저한 공적을 남겼으니, 상전(賞典)을 베풀어 격려의 소지를 삼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것이라 아랫사람으로서 감히 마음대로 천단할 일이 아니니, 성상께서 재량하여 시행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최강 등만을 항상 해진에 둘 것이 아니라 그중 우수한 자도 곤임(閫任)으로 발탁하라. 이것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타당한 일이며 권장하는 데에도 한 가지 방법인 것이다. 송덕일 등도 각각 그 재능에 따라 변장(邊將)으로 승직시키기도 하고 변지의 수령으로 옮겨 제수하기도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이 해진(海陣)에 순도(巡到)하여 주사(舟師)를 점검하였는데, 임치 첨사(臨淄僉使) 송덕일(宋德馹), 어란 만호(於蘭萬戶) 임영립(林英立),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경신(宋敬臣), 천성 만호(天城萬戶) 김시약(金時若)은 주즙(舟楫)과 기계(器械)가 모두 극히 정교하고 담략과 재능 또한 모두 볼만한 것이 있었다. 당포 만호(唐浦萬戶) 이희삼(李希參), 적량 만호(赤梁萬戶) 한극인(韓克訒),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노홍(魯鴻)은 주사(舟師)를 익히 알고 직사에 근실하였다.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최강(崔堈), 발포 만호(鉢浦萬戶) 김성옥(金成玉), 방답 첨사(防踏僉使) 조계종(趙繼宗), 가덕 첨사(加德僉使) 박광춘(朴光春),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이섬(李暹)은 병선(兵船)과 전기(戰機)를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어 주사의 모범이 되었다. 이에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논상(論賞)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병조의 이 아룀이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106책 191권 13장 B면
    【영인본】 25책 122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雙忠實錄跋 a_321_532b


    右崔氏雙忠錄。卽蘇湖,蘇溪二公倡義討賊之事實。而始刊於再去癸未者也。其遺文懿蹟。宜321_532c不止此。而兵火之餘。多散逸不傳。公之諸孫。爲是之慨。乃復遍搜遠近。積以歲年。凡得事蹟可補者十數條。並與後來諸家撰述。而將附原錄。以興洛事契有別。責一言以尾其後。顧老弊無文。無以堪是役。而竊惟公兄弟。與我先君子文忠公。相從於難離之際。矢死討賊。共濟艱危。前後晉陽之捷。公實有力焉。先君子葢嘗請見而奬其忠矣。開錄而上其功矣。公兄弟又自云早從金令公。有意於衛國安民之實。今其錄中。語及先君子。非止一二。奉讀愀然。不勝隔晨之感。321_532d謹書此以歸之。

     

    西山先生文集續集卷之六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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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吾山崔公行狀 a_321_572d


    公諱台鎭字應天。崔氏全州人。高麗侍中諡文成諱阿。其上祖也。四世諱斯泌入本朝。文科司僕正。生諱子涇文科縣監。縣監公二子。長諱水智都承旨。次諱水勇參軍。生諱仁恪。中廟321_573a朝。錄靖國功。五世諱秀岡司圃別提。光海朝棄官歸。號海亭。四世諱暹副司直。陞嘉善。無子。取義敏公諱均六世孫諱鳴大爲嗣。都承旨之世也。於公爲高祖。曾祖諱光參。祖諱祥珏有至行。贈敎官。考諱必泰。妣碧珍季氏。士人致和女。判書健之後也。公以純廟甲子生。幼有異質。旣就傅。穎達異凡。不費程督。文理日就。製作贍敏。儕友皆推爲前列。先公以門戶久替。敕子孫不得無故廢擧。公重違親意。隨衆應副。乙巳春。喟然謂其友曰。士生斯世。營營得失。不知有爲321_573b己之實事。可哀也。遂與數三同志。贄謁于定齋柳先生之門。書質面稟。反復不置。先生與先公書曰。賢器趣操見識。裒然可敬。乙卯先生責湖南之智島。公冒暑往候之。丙辰丁內艱。公年已過五旬。哀戚踰禮。衰絰不去身。己未丁外艱。守制如前喪。辛酉柳先生易簀。公持心喪三年。不與宴會。祥日有故未赴。則設位而哭。丁卯赴省試。疾卒于京邸。二月二十八日也。歸葬于固城大芚里先兆艮坤之原。配坡平尹民。通德郞宅範女。貳相銑之八世孫。溫柔嘉惠。得婦道甚。先321_573c公四年歿。生二男三女。長圭升。次翰升。女適李孝範,許▼(禾+寅),鄭祺永。圭升男正愚。公家世孝友。篤於儒術。擩染庭規。不肅而成。奉二親五十年。未嘗有違忤色。咳唾之聲。不出戶外。溫凊滫瀡。務適親旨。有不安節。衣不解帶。藥餌必先嘗。帬牏溷褻之衣。躳自洗濯。不令婢僕代之。姊妹三人。友愛甚至。至老不衰。祭先盡其誠潔。前期沐浴齊素。至滌器具饌。皆身親莅之。已祭。猶肅然以及日。遇新物。必薦于廟。敦親恤竆。慈惠洽人。儉歲荒春。鄰里仰哺。置義庄於故里。賑族親之貧321_573d不自給與里人之顚連無告者。外氏貧無依。則爲買數頃田。以資香火。又與姨弟二人。立禊以贍之。嘗客于咸安。姊壻負租不能償。則稱貸以濟之。每當試期。資給力不能赴者。親疎有差。親知有過。未始不以義裁之。至錢財相欺負。雖多不問。見其窘甚。猶施之不輟。家近大路。責應浩穰。而禮勤惠周。無不得其歡心。居常薄於自奉而厚於接人。儉於冗費而豐於施予。嘗曰吾平生衣食。不求精美。苟使急於自養。則其有以及人者乎。以是賢愚貴賤。一辭稱德人。壬戌芻亂。321_574a境內巨室華屋。盡入灰燼。而惟公家全焉。及歾輀行在道。而巷哭者數十里不絶。此可以見公樹德之驗也。世家固城九巒里。中歲移卜晉之介川。以所居有吾道山。扁其軒曰吾山。日必晨興盥櫛。展謁家廟。退則明囱凈几。端坐終日。潛心性理。所與交。皆一時名德。往復質難。益廣其聞見。倡率門子弟。嚴講學之規。以訓迪而奬勵之。律己也嚴。而不爲矯激之行。處衆也和。而恥於近名之事。方伯致書餽。要與相見。公辭謝不往。凡於非義之求。勢利之誘。毅然不爲其所動321_574b也。雅慕先賢。凡其藏修尸祝之地。遊覽想象。不遠數百程。行過鷺梁。酹六臣墓。以致感慨之意。晩年留意禮書。講求常變。參酌情文。要得其恰當而後已。敎誨二子。必以義方。躳幹家務。使之專意讀書。每戒之曰。凡事恭儉以得之。驕泰以失之。汝曹念之。所著有八經彙捃,心性說,太極辨疑及東賢錄藏于家。興洛生後地間。未能一瞻顔色。款承誨言。而見公之二子。皆恂恂有文學。正愚君又夙有志業。爲朋友所期倚。見公刑家敎子之範。久而有足徵者。於是而益恨其同321_574c出門牆而失於承薰也。迺者圭升甫托以紀善之狀。則興洛固淺陋不敢當。而旣屢辭不獲。謹就遺事。略加丁乙。附以平日所聞。撰錄之如此。以備宰文者去取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