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溪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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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草鄭]13鄭鴻師 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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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鄭基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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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鄭鈗 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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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溪鄭顯叔傳 |
초계정현숙전(草溪鄭顯叔傳
이색(李穡)
초계(草溪)에 숨은 군자인 정상사(鄭上舍)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버지인 가정공(稼亭公)과 같은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아들 중에 습인(習仁)이라는 이가 있는데, 자는 현숙(顯叔)이다. 나는 그의 안면을 안 지가 오래였지만 은근히 즐겁게 지낸 적이 없었고, 정 상사의 아들인 줄도 몰랐으며, 현숙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숙은 의지와 기개가 있고 재주가 있으며 술이 취하면 거리낌 없이 말을 하므로, 같은 대열에 선 사람이 그를 꺼렸다. 을미년 봄에 익산(益山)의 이시중(李侍中)과 죽계(竹溪) 안정당(安政堂)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는데, 현숙이 대책을 지어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맡았는데, 그 공로에 의하여 참관(參官)에 들어갔다. 무턱대고 남을 따르지도 않고 구차스럽게 남과 어울리지 않았다. 관료들은 모두 그와 곧 친하게 지나기를 원하였으나 현숙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선발이 되어 나가서 영주(榮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사무를 보려 하는데 아전이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의햐여 소재도(消災圖) 앞에 나아가서 향을 피워 올리기를 청하였다. 현숙은 말하기를, “신하된 사람으로 떳떳하지 않은 일을 행하지 아니, 재앙이 무엇 때문에 생기겠는가. 만일 느닷없이 생기는 재앙은 군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뿐이다. 병이 생기기 전에는 건강에 주의할 뿐이요, 병이 생기면 약을 쓸 뿐이다. 죽게 되면 내장이 먼저 탈이 났기 때문에 고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인데, 소재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하며, 아전에게 철거하여 버리기를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을 뜯어 가지고 요를 만들어서 깔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한 것이다. 주(州)에 탑(塔)이 있었다. 현숙이 그 탑의 이름을 물었더니 아전이 무신탑(無信塔)이라고 하였다. 현숙이 말하기를, “정말이냐.” 하니, 아전은 “감히 근거 없는 말씀을 드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현숙이 양반들로서 늙어서 집에 들어 앉아 있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그렇다.” 는 것이다. 현숙은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로다. 나무라도 이름이 나쁘면 그 그늘에서 쉬지 아니하고, 샘도 이름을 도둑샘이라고 하는데서는 그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모양이 높다랗게 생겨서 한 고을 사람이 모두 쳐다보는 것을 무신(無信)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는가. 식량을 없애면 사람이 스스로 살지 못할 것이요, 무기를 없애면 사람이 스스로 방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식량을 버리며 무기를 버리기를 헌 신짝처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미더움[信]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공자께서 벌써 말씀하셨다.” 하고, 또 주(州)의 아전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이를 헐어버리고 그 벽돌을 가지고 객사를 수리하게 하였다.
때마침 권력을 잡은 대신이 불교를 턱없이 좋아했으므로, 현숙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신료들이 그 뜻을 딱하게 여기어 현숙을 위하여 임금에게 말씀을 드리는 사람이 많아서 화를 면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현숙의 이름은 더욱 중하게 되었다. 권력을 잡았던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나서 현숙은 다시 기용되어 양주(梁州)를 다스리게 되었고, 또 밀성(密城)을 다스리었다. 가는 곳마다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도와서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다. 사귀(邪鬼)를 받드는 사당을 금지하고, 그 무당들을 때려 쫓아버리는 것은 현숙의 상투적인 사업이었으므로, 이런 데 대한 사실은 생략한다. 그가 중앙에 들어와서 도관랑(都官郞)이 되었을 적에도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또 소재도를 없애버리려 하였으나 지위가 낮아서 해내지 못했다. 현숙은 어머니가 죽어서 3년간 여묘를 살았고 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그가 지극히 슬퍼함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충신은 효자에서 난다는 말이 미더운 것이다.
지금 임금께서 정사를 계승하시게 되자 어진 인재를 구하는 것을 서두르셨다. 재상은 평소부터 현숙의 명망을 중히 여겼으므로 아뢰어서 전교령(典校令)에 임명하였으니, 곧 비서감이다. 3품관의 의복을 내렸으니 영광스러운 대우였다. 마침내 일본에 들어갈 사명을 받았는데, 현숙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현숙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고, 그의 아들이 금년에 진사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으니, 사람들은 그를 슬프게 여겨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숙은 태연스럽게 하고 얼굴에 정의감을 나타내며 말하기를, “살다가는 반드시 죽는 것인데 어째서 지방을 가려야 할 것이며, 신하로서 임금이 계신 바에 어찌 이를 사피할 수 있느냐. 또 나의 목표가 공을 세우는 데에 있으니, 비록 남의 나라라도 꺼릴 것이 없다. 하물며 동쪽은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일컫는 곳이 아닌가. 더구나 지금 두 나라 사이의 친선이 처음으로 시작되어 즐겁게 서로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을 모두 잡아서 소퉁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 공자께서 떼를 타고 멀리 가시려 하던 생각이라든지, 신선이 가서 약을 채취하던 종적이라든지, 운황(雲皇)과 치기(雉紀)의 고사 같은 것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상세히 적어올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노래와 시를 지어서 교외에 차려 놓은 막사에 나가서 전송하려 하였다. 나는 옛날부터의 친구이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비로소 이호연(李浩然)이 말한 것을 근거로 하여 이를 정리 서술하였다.
이호연은 씩씩한 선비이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또 말하기를, “현숙이 여묘를 지킬 때에 그의 아버지가 불교를 좋아하였으므로 매일 불경을 읽다가 마침내 외게 되었고, 오래가도록 잊지 않았다.” 한다. 효자는 그의 부모에 대하여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않기를 이렇게 하였다. 하루는 나갔다가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 집에서 마침 중을 데려다가 재(齋)를 올렸다. 중이 불경 두어 권을 외는데 현숙이 옆에서 줄줄 내려 외었다. 중은 그가 반드시 불교의 신도라 생각하고 성명을 물었더니, 현숙은 곧 대답하기를, “바로 탑을 헐어 버린 정 아무개다.”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크게 웃었고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탄복하였다 한다.
일본의 사절이 현숙이 어떤 사람인가를 관반(館伴)에게 물었다. 관반이 사실대로 일렀더니 일본의 사절은 불교 신자였는데, 그의 강렬(剛烈)함을 두려워하여 곧 말하기를, “부처님을 배척하는 사람은 우리 나라의 법률에 인정되지 못하니 이를 바꾸어 달라.” 부탁하여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이색(李穡)
초계(草溪)에 숨은 군자인 정상사(鄭上舍)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버지인 가정공(稼亭公)과 같은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아들 중에 습인(習仁)이라는 이가 있는데, 자는 현숙(顯叔)이다. 나는 그의 안면을 안 지가 오래였지만 은근히 즐겁게 지낸 적이 없었고, 정 상사의 아들인 줄도 몰랐으며, 현숙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숙은 의지와 기개가 있고 재주가 있으며 술이 취하면 거리낌 없이 말을 하므로, 같은 대열에 선 사람이 그를 꺼렸다. 을미년 봄에 익산(益山)의 이시중(李侍中)과 죽계(竹溪) 안정당(安政堂)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는데, 현숙이 대책을 지어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맡았는데, 그 공로에 의하여 참관(參官)에 들어갔다. 무턱대고 남을 따르지도 않고 구차스럽게 남과 어울리지 않았다. 관료들은 모두 그와 곧 친하게 지나기를 원하였으나 현숙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선발이 되어 나가서 영주(榮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사무를 보려 하는데 아전이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의햐여 소재도(消災圖) 앞에 나아가서 향을 피워 올리기를 청하였다. 현숙은 말하기를, “신하된 사람으로 떳떳하지 않은 일을 행하지 아니, 재앙이 무엇 때문에 생기겠는가. 만일 느닷없이 생기는 재앙은 군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뿐이다. 병이 생기기 전에는 건강에 주의할 뿐이요, 병이 생기면 약을 쓸 뿐이다. 죽게 되면 내장이 먼저 탈이 났기 때문에 고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인데, 소재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하며, 아전에게 철거하여 버리기를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을 뜯어 가지고 요를 만들어서 깔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한 것이다. 주(州)에 탑(塔)이 있었다. 현숙이 그 탑의 이름을 물었더니 아전이 무신탑(無信塔)이라고 하였다. 현숙이 말하기를, “정말이냐.” 하니, 아전은 “감히 근거 없는 말씀을 드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현숙이 양반들로서 늙어서 집에 들어 앉아 있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그렇다.” 는 것이다. 현숙은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로다. 나무라도 이름이 나쁘면 그 그늘에서 쉬지 아니하고, 샘도 이름을 도둑샘이라고 하는데서는 그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모양이 높다랗게 생겨서 한 고을 사람이 모두 쳐다보는 것을 무신(無信)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는가. 식량을 없애면 사람이 스스로 살지 못할 것이요, 무기를 없애면 사람이 스스로 방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식량을 버리며 무기를 버리기를 헌 신짝처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미더움[信]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공자께서 벌써 말씀하셨다.” 하고, 또 주(州)의 아전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이를 헐어버리고 그 벽돌을 가지고 객사를 수리하게 하였다.
때마침 권력을 잡은 대신이 불교를 턱없이 좋아했으므로, 현숙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신료들이 그 뜻을 딱하게 여기어 현숙을 위하여 임금에게 말씀을 드리는 사람이 많아서 화를 면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현숙의 이름은 더욱 중하게 되었다. 권력을 잡았던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나서 현숙은 다시 기용되어 양주(梁州)를 다스리게 되었고, 또 밀성(密城)을 다스리었다. 가는 곳마다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도와서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다. 사귀(邪鬼)를 받드는 사당을 금지하고, 그 무당들을 때려 쫓아버리는 것은 현숙의 상투적인 사업이었으므로, 이런 데 대한 사실은 생략한다. 그가 중앙에 들어와서 도관랑(都官郞)이 되었을 적에도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또 소재도를 없애버리려 하였으나 지위가 낮아서 해내지 못했다. 현숙은 어머니가 죽어서 3년간 여묘를 살았고 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그가 지극히 슬퍼함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충신은 효자에서 난다는 말이 미더운 것이다.
지금 임금께서 정사를 계승하시게 되자 어진 인재를 구하는 것을 서두르셨다. 재상은 평소부터 현숙의 명망을 중히 여겼으므로 아뢰어서 전교령(典校令)에 임명하였으니, 곧 비서감이다. 3품관의 의복을 내렸으니 영광스러운 대우였다. 마침내 일본에 들어갈 사명을 받았는데, 현숙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현숙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고, 그의 아들이 금년에 진사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으니, 사람들은 그를 슬프게 여겨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숙은 태연스럽게 하고 얼굴에 정의감을 나타내며 말하기를, “살다가는 반드시 죽는 것인데 어째서 지방을 가려야 할 것이며, 신하로서 임금이 계신 바에 어찌 이를 사피할 수 있느냐. 또 나의 목표가 공을 세우는 데에 있으니, 비록 남의 나라라도 꺼릴 것이 없다. 하물며 동쪽은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일컫는 곳이 아닌가. 더구나 지금 두 나라 사이의 친선이 처음으로 시작되어 즐겁게 서로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을 모두 잡아서 소퉁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 공자께서 떼를 타고 멀리 가시려 하던 생각이라든지, 신선이 가서 약을 채취하던 종적이라든지, 운황(雲皇)과 치기(雉紀)의 고사 같은 것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상세히 적어올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노래와 시를 지어서 교외에 차려 놓은 막사에 나가서 전송하려 하였다. 나는 옛날부터의 친구이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비로소 이호연(李浩然)이 말한 것을 근거로 하여 이를 정리 서술하였다.
이호연은 씩씩한 선비이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또 말하기를, “현숙이 여묘를 지킬 때에 그의 아버지가 불교를 좋아하였으므로 매일 불경을 읽다가 마침내 외게 되었고, 오래가도록 잊지 않았다.” 한다. 효자는 그의 부모에 대하여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않기를 이렇게 하였다. 하루는 나갔다가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 집에서 마침 중을 데려다가 재(齋)를 올렸다. 중이 불경 두어 권을 외는데 현숙이 옆에서 줄줄 내려 외었다. 중은 그가 반드시 불교의 신도라 생각하고 성명을 물었더니, 현숙은 곧 대답하기를, “바로 탑을 헐어 버린 정 아무개다.”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크게 웃었고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탄복하였다 한다.
일본의 사절이 현숙이 어떤 사람인가를 관반(館伴)에게 물었다. 관반이 사실대로 일렀더니 일본의 사절은 불교 신자였는데, 그의 강렬(剛烈)함을 두려워하여 곧 말하기를, “부처님을 배척하는 사람은 우리 나라의 법률에 인정되지 못하니 이를 바꾸어 달라.” 부탁하여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草溪鄭氏宗稧座目序 a_247_298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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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溪深處可幽居。斷與斯文鄭判書。芸閣劇談恒靜處。柏臺獨坐駁新除。雍容禮峻班行裏。淸苦名存氷蘗餘。自愧病成猶未去。白頭方欲賦歸歟。
초계의 깊은 곳엔 숨어 살 만하거니와 / 草溪深處可幽居 나는 단연코 사문 정 판서를 허여하네 / 斷與斯文鄭判書 운각에서 극론 펼칠 땐 항상 조용했었고 / 芸閣劇談恒靜處 백대엔 홀로 앉아 새 임관을 논박했었지 / 柏臺獨坐駁新除 온화한 예모는 반열 가운데 준엄하였고 / 雍容禮峻班行裏 청고한 명성은 빙벽의 나머지에 있었네 / 淸苦名存氷蘗餘 병든 이 몸은 아직 못 떠난 게 부끄러워 / 自愧病成猶未去 백발의 오늘에야 비로소 돌아가려 하노라 / 白頭方欲賦歸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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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佞於鄭氏三賢實紀。得可警迷俗者三事。何哉。卷中三賢述作。多者不過五六絶句。寡者一絶而止耳。於以見君子之於文多乎哉不多。此一事也。有德而文。愈寡愈珍。文辭而已者。盈箱溢篋。徒爲耳。此一事也。文字無所托則易流落。故或編之用簡。或鑱之用石。或鋟之用梓而後傳。今鄭氏無是焉。而能以口傳口五百年。保守此畸零之韻語。家門孝思之不匱。於斯驗矣。此又一事也。若三賢德行之實。前人之述備矣。微末一腐生。其敢容喙。奉實紀者。鄭氏三員。厚允與焉。厚允前此蓋嘗一訪。及今而再。見其樹立益完固。察其志有方進未已之漸。三賢不食之果。其在君歟。恨吾歲暮日斜。不及見其大成。老閣文墨。其書涴卷端。所以兼勖厚允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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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광유후(光儒侯) 휘(諱) 배걸(倍傑) ○ 7세에 시서(詩書)에 통달하였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8년 정사년(1017)에 전시(殿試)에서 제1인(第一人)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이 예부 상서(禮部尙書), 중추사(中樞使)에 이르렀다. 문종(文宗) 5년 신묘년(1051) 8월 초하루 기묘일에 졸(卒)하였다. 문종 34년 경신년(1080)에 제(制)하기를, “고신(故臣) 정배걸은 충건(忠謇)이 짝할 이가 없었고 재략(才略)이 출중하였으니,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내 어찌 잊겠는가. 특별한 은혜를 내려서 과인이 어진 이를 생각하는 뜻을 밝힐 것이니, 홍문광학추성찬화 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 태위 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광유후(光儒侯)를 추증하도록 하라.” 하였다. 현종 이후로 전쟁이 겨우 그쳐 문교(文敎)에 힘쓸 틈이 없었는데,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이 후진(後進)을 불러 모아 구재(九齋)를 창설하여 그들을 소속시켰으니,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한다. 당시 유신(儒臣)들 가운데 도(徒)를 설립한 자가 모두 열 둘이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광유후의 홍문공도(弘文公徒)이다.부인 최씨(崔氏)가 현명하되 아들이 없었으므로 족친(族親)의 딸을 길러 공의 부실(副室)을 삼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졸하였고, 유복자(遺腹子) 문(文)을 낳았다. 이 일이 《고려사(高麗史)》와 《여지(輿地)》 등의 책에 보인다. 묘(墓)는 초계(草溪)의 옥전(玉田)에 있다. 정간공(貞簡公) 휘 문(文) ○ 자(字)는 의덕(懿德)이다. 나이 겨우 15, 6세에 의연함이 노성(老成)한 이와 같았다. 국자감시(國子監試)에 나아가 ‘군위민천부(君爲民天賦)’를 지었는데, 그 부에 이르기를, “만물이 만약 초췌하면 나는 곧 우로의 은혜를 베풀 것이고, 풍속이 만일 완흉하면 나는 곧 뇌정의 노여움을 베풀 것이다.[物如憔悴 我則施雨露之恩 俗若頑兇 我則布雷霆之怒]” 하니, 문종이 듣고 칭탄(稱嘆)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고, 우습유(右拾遺), 내급사(內給事)로 옮겼다. 숙종(肅宗) 7년 임오년(1102)에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되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교화(敎化)와 예의(禮義)는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기자를 모신 사당이 아직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제사하소서.” 하였다. 갑신년(1104) 7월에 비서감(祕書監)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가 방물(方物)을 올렸는데, 그때는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이었다. 하사받은 금백(金帛)을 종자(從者)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으로는 서적을 사고 달리 구하는 것이 없으니, 송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관직이 검교사공(檢校司空), 예부 상서, 정당문학(政堂文學), 태자빈객(太子賓客)에 이르렀다. 예종(睿宗) 원년(1106) 12월 병인일에 졸하였다.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사람됨이 공검(恭儉)하고 박눌(朴訥)하여 살림을 꾸리지 않아 거처하는 집은 겨우 풍우(風雨)만 가렸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청신(淸愼)하여 일찍이 형조를 맡은 10여 년 동안에 함부로 사람의 죄를 보태거나 줄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공의 일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여지》 등의 책에 보인다.부인은 김씨(金氏)이니, 김윤의(金允義)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장남 복공(福公)은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이고, 다음은 복경(福卿)과 복유(福儒)이다. ○ 이 사이에 계차(系次)가 실전(失傳)되어 계파(系派)가 갈라져 나간 것을 상고할 수 없다. 십 세조(十世祖) 휘 승(丞) ○ 고려 때 국자 박사(國子博士)를 지냈다. 정간공의 세 아들 이후로 세첩(世牒)이 이어지지 않았는데, 이분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났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방주(邦柱)이다.구 세조(九世祖) 휘 방주(邦柱) ○ 고려 때 가정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사(同知中樞事)에 추봉(追封)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공우(公祐)ㆍ공연(公衍)ㆍ공신(公愼)이다.팔 세조(八世祖) 휘 공연(公衍) ○ 대빙재(待聘齋)의 유생이다. 여조(麗朝)에 과거에 응시하는 제생(諸生)은 모두 구재(九齋)에 소속되었는데, 대빙은 곧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목은집(牧隱集)》에 “초계(草溪)에 덕 있는 군자인 정 상사(鄭上舍)가 계시는데, 그는 나의 선인 가정공(稼亭公)과 같은 해에 진사과에 급제한 분이시다.” 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장남 습상(習常)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고, 다음은 습충(習忠)과 습인(習仁)이다. 묘는 안음(安陰)의 방축동(防築洞) 감좌(坎坐)의 언덕에 있다.칠 세조(七世祖) 휘 습인(習仁) ○ 자는 현숙(顯叔)이다. 지기(志氣)와 재능이 있었고, 술을 마시면 기탄없이 바른말을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4년 을미년(1355)에 대책(對策)을 통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에 보임되었는데, 함부로 남의 부정함을 따르지도 않고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도 않았으므로, 진신(縉紳)들이 모두 그와 교분을 맺고 싶어했으나 그들을 멸시하였다.지영주사(知榮州事)로 나갔는데, 아전이 고사(古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에 나아가 분향(焚香)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상규(常規)에 벗어나는 일을 행하지만 않는다면 재앙이 어디에서 생겨나겠는가. 재앙이 뜻하지 않게 발생한다면 그런 재앙에 대해서는 운명으로 알고 순순히 받아들일 따름이니, 소재도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즉시 철거하게 하였다. 그 고을에 무신(無信)이라는 탑(塔)이 하나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괴이하기도 하다. 악목(惡木) 아래에서는 쉬지도 않고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도 않는 것은 그 이름을 미워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뚝 그 모습을 드러내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탑에다 무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단 말인가. 양식과 군대는 버려도 감히 신의는 버릴 수 없다고 우리 부자(夫子)께서도 이미 말씀하셨다.” 하고는, 속히 허물어 버리게 한 뒤 그 탑의 벽돌을 빈관(賓館)으로 옮겼다. 신돈(辛肫)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옥(獄)에 가두어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는데, 조정 신하들이 공을 위해 왕에게 말해 준 덕분에 죽음은 면하였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해졌다. 신돈이 복주(伏誅)된 뒤에, 지양주사(知梁州事)가 되고 또 지밀성사(知密城事)가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세력이 강한 자를 억누르고 부정한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엄금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도관(都官)의 낭관(郞官)이 되었을 때에도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공은 부모의 상을 입음에 3년 동안 여묘(廬墓)하면서 슬픔을 다하였다. 상사를 치르는데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썼다. 우왕(禑王) 초에 재상이 그 이름을 중히 여기고 있다가 아뢰자 전교령(典敎令)에 제수되고 3품(品)의 관복(官服)을 하사받았다. 공이 답례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어 장차 가려 할 적에 사람들은 대부분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태연한 모습으로 얼굴에 의기(義氣)를 드러내면서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임금을 모시는데 어찌 힘든 일이라고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본 사신은 불교 신자인지라 공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하여 곧 말하기를,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율법(律法)이니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으므로, 공이 끝내는 일본에 건너가지 못하였다. 공양왕(恭讓王) 초기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다. 왕이 남경(南京)으로부터 송도(松都)에 돌아올 때 이미 길일을 잡았는데, 비(妃)에게 이롭지 않다는 이유로 그 기일을 늦추려고 우회하는 길을 따라 도성에 들어오려 하였다. 이에 공이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뻐하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윤귀택(尹龜澤)의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지에 유배되었다. 공의 일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실려 있고, 또 《목은집》에 초계(草溪) 정현숙전(鄭顯叔傳)이 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전(悛)과 회(恢)이다. 육 세조(六世祖) 휘 전(悛) ○ 지정(至正) 병신년(1356, 공민왕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읽지 않은 서적이 없었고 한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갔는데 보는 대로 그 뜻을 이해하였다. 홍무(洪武) 정사년(1377, 우왕3)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임술년(1382, 우왕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공주 통판(公州通判)이 되었고, 서해도 경력(西海道經歷), 양광도 경력(楊廣道經歷), 강원도 경력과 원주 교수관(原州敎授官)으로 옮겼다.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3)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바다를 건너 남경(南京)에 사신 갔다가 돌아와서 좌헌납(左獻納),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경력이 되었다. 또 내직으로 들어와 직예문관 겸 직강(直藝文館兼直講)이 되었고, 곧바로 평양 교수관(平壤敎授官)이 되었다. 정해년(1407, 태종7)에 다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직집현전(直集賢殿), 직예문관(直藝文館), 전농정(典農正), 지제교 영(知製敎令), 지문서응봉사사(知文書應奉司事)를 지냈다. 외직으로 나가 지금산군사 겸 권농병마단련사(知金山郡事兼勸農兵馬團練使)가 되었다. 계사년(1413, 태종13)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었다. 갑오년에 예조 좌참의(禮曹左參議),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 되었다. 장헌왕(莊憲王 세종) 원년 기해년(1419)에 독권관(讀券官)으로서 선비들을 시험하였다. 계묘년(1423, 세종5) 겨울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 되었다가 체직을 청하여 함양(咸陽)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68세였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한 시대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팔계선생(八溪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을묘년(1435, 세종17) 2월 26일에 졸하니, 향년 80세였다. 유고(遺稿) 1권이 있어 세상에 전하고, 또 시(詩) 약간 편이 《동문선(東文選)》과 《여지》 등의 책에 실려 있다. 공은 처음에 거창군(居昌郡) 용산(龍山)에 거처하다가 만년에는 함양군 개평(介坪)에 집을 지었다. 묘는 같은 군 덕곡(德谷) 신좌(辛坐)의 언덕에 있다.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니, 군기 소윤(軍器少尹) 박방룡(朴邦龍)의 따님이다. 의령(宜寧)의 지산(芝山)에 별장(別葬)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제안(齊安)이다. ○ 계실(繼室)은 하동 정씨(河東鄭氏)이니,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죽당(竹堂) 복주(復周)의 따님이다. 오 세조(五世祖) 휘 제안(齊安) ○ 홍무(洪武) 경오년(1390, 공양왕2)에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인 영락(永樂) 을유년(1405, 태종5)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정해년(1407, 태종7)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유환(劉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처음에 감음(减陰)에 거처하였으니, 지금의 안음(安陰) 고현(古縣)이다. 68세이던 정축년(1457) 12월 12일에 졸하였으니, 명(明)나라 영종황제(英宗皇帝) 천순(天順) 원년이고, 우리 혜장왕(惠莊王 세조) 3년이었다.배는 유씨(劉氏)이니, 성화(成化) 병술년(1466, 세조12) 7월 19일에 졸하였다. 묘는 감음 북쪽 황산(黃山)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장남은 종아(從雅)이고, 다음은 회아(懷雅)인데 판관(判官)을 지냈고, 다음은 이아(以雅)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고조(高祖) 휘 종아(從雅) ○ 자는 정숙(正叔)이다. 홍희(洪熙) 을사년(1425, 세종7)에 태어났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1)에 무과에 급제하여 우리 광묘조(光廟朝 세조)와 성묘조(成廟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주목사 충주진 병마첨절제사(忠州牧使忠州鎭兵馬僉節制使)에 이르렀다. 학사(學士)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이 이르기를, “충주 목사에서 금원산(金猿山) 아래로 물러나 은거하여 서적 보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하였는데, 그 말이 공의 아우 판관의 묘지(墓誌) 가운데 있다. 향년 74세였다. 무오년(1498) 7월 29일에 졸하였으니 연산군 4년이고, 명나라 효종황제(孝宗皇帝) 홍치(弘治) 11년이었다. 묘는 고현(古縣) 역동(嶧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배는 숙부인(淑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니, 서령(署令) 권회(權恢)의 따님이다. 묘는 같은 언덕 정향(丁向)에 있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옥견(玉堅)이다. 계실은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니, 첨지통례문사(僉知通禮門事) 유중창(柳仲昌)의 따님이다. 묘는 황산 입석(立石) 갑좌(甲坐)의 언덕에 있다. 증조(曾祖) 휘 옥견(玉堅) ○ 자는 불린(不磷)이다. 경태(景泰) 경오년(1450, 문종 즉위년)에 태어났다. 부모를 섬기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부모의 상을 입음에 예제(禮制)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으며, 죽을 먹으면서 3년 동안 여묘(廬墓)하였다. 성묘조에 도신(道臣)이 행의(行誼)로 천거하여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에 권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들이 용사(用事)하였으므로 기미를 보고 물러나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만년에 학담(鶴潭) 가에 능허정(凌虛亭)을 짓고 종신토록 휴식할 처소로 삼고 확계거사(蠖溪居士)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 선생(鄭先生), 금재(琴齋 강한(姜漢)) 강 선생(姜先生)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향년 77세이던 병술년(1526) 9월 24일에 졸하였으니, 명나라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 5년이고, 우리 공희왕(恭僖王 중종) 21년이었다. 뒤에 증손 문간공(文簡公)이 현귀(顯貴)해짐으로 인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금상(今上 순조(純祖)) 3년 계해년(1803)에 금계(金溪)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황산의 생원공의 묘차(墓次)에 있다.배는 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사헌부 집의 김미(金楣)의 따님이다. 남원(南原)의 북곡리(北谷里) 본당(本黨)의 족산(族山)에 별장(別葬)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형(泂)이다. 계실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니, 어모장군(禦侮將軍) 박사영(朴思榮)의 따님이며,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인로(朴仁老)의 손녀이다. 공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담(湛)ㆍ숙淑)ㆍ한(澣)이다. 조(祖) 휘 숙(淑) ○ 자는 징부(澄夫)이다. 진용교위(進勇校尉)를 지냈다. 홍치(弘治) 14년 신유년(1501, 연산군7) 6월 6일에 태어나, 가정 42년 계해년(1563, 명종18) 11월 4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63세였다. 손자 문간공이 현귀해짐으로 인해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배는 증(贈) 숙부인 진주 정씨(晉州鄭氏)이니, 부사용(副司勇) 정순(鄭純)의 따님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정인득(鄭仁得)의 6세손이다. 홍치 계해년(1503, 연산군9) 6월 12일에 태어나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12) 1월 18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77세였다. 역동 간좌(艮坐)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역동은 일명 문주동(文冑洞)이라고도 하니, 옛적 문주역(文冑驛)이었기 때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유명(惟明)이다. 부(父) 휘 유명(惟明) ○ 자는 극윤(克允)이다. 가정(嘉靖) 18년 기해년(1539, 중종34) 3월 4일에 태어났다. 만력(萬曆) 원년 계유년(1573, 선조6)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24년 병신년(1596) 12월 9일에 졸하였으니, 소경왕(昭敬王 선조) 29년이었고, 향년 58세였다. 공은 일찍이 갈천(葛川) 임훈(林薰)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그 도리를 얻었다. 효우(孝友)가 순정하게 갖추어졌고 학문이 정밀하고 순수하였으며, 은거하여 학문을 가르쳐 사림(士林)의 본보기가 되었다. 호를 역양선생(嶧陽先生)이라고 하였다. 아들 문간공이 현귀해짐으로 인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문간공이 행장(行狀) 및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문집 가운데 실려 있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의 상을 입음에 예제(禮制)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고, 3년 동안 죽만 먹어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었는데 오랜 시일이 지나 시력이 회복되었다. 모친을 섬기는 데에는 음성과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모친이 기쁜 마음을 갖도록 힘썼다. 집안이 비록 가난하였으나 정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한 걸음도 궤연(几筵)을 떠나지 않았고 몸에는 최복(衰服)과 마대(麻帶)를 항상 착용한 채, 3년을 하루같이 슬픈 안색으로 슬피 곡읍(哭泣)하였다. 향인(鄕人)이 일찍이 누차 효행(孝行)으로 조정에 알렸는데, 숭정(崇禎) 6년 계유년(1633, 인조11)에 상(上)이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7년 갑술년인 헌문왕(憲文王 인조) 12년에 역천(嶧川)의 향사(鄕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 두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승지공(承旨公)의 묘차에 있다.배는 정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니, 장사랑(將仕郞) 강근우(姜謹友)의 따님이며,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호가 금재(琴齋)인 강한(姜漢)의 손녀이며, 군위 현감(軍威縣監) 강이경(姜利敬)의 증손녀이다. 외조(外祖)는 용성(龍城) 양응기(梁應麒)로 성묘조(成廟朝)의 청백리(淸白吏)였으니,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호가 일노당(逸老堂)인 양관(梁灌)의 아들이다. 가정 무술년(1538, 중종33) 8월 3일에 태어나 숭정 경오년(1630, 인조8) 7월 2일에 졸하니, 향년 93세였다. 정부인은 성격이 온순하고 덕성이 은혜로워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보좌하는데 어긋난 행동이 없었다. 궁핍한 사람과 일가친척을 사랑하고 구휼한 것은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양공이 일찍이 문간공에게 이르기를, “너의 어머니는 덕이 있는 사람이니, 반드시 너의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문간공이 조정에 벼슬하기에 이르러 총애를 받거나 욕됨을 받는 것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환란에 임하여서는 의리에 따라 결단하여 늠연히 범할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범방(范滂)의 어머니에 비유하였다. 거창군 가조현(加祚縣)의 용산(龍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별장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은 률(䋖)인데, 두 아들 창세(昌世)와 창후(昌後)가 모두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 차남은 문간공이고, 막내 백(絔)은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인데, 양자로 나가서 역양공의 종형인 신로(信老)의 후사가 되었다. [주D-001]악목(惡木) …… 것 : 염결(廉潔)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적어도 악(惡)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구준(寇儁)이 말하기를, “악목의 그늘 아래에서는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되고 도천의 물은 혹 실수로라도 마셔서는 안 된다. 재물을 얻고 행실을 잃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惡木之陰 不可暫息 盜泉之水 無容誤飮 得財失行 吾所不取]” 하였다. 《周書 卷37 寇儁列傳》 [주D-002]양식과 …… 말씀하셨다 :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정사의 요체를 묻자, 공자가 풍족한 양식과 군대의 양성과 백성의 신의 세 가지를 들었는데, 부득이하여 하나씩 버려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우선 군대를 버리고 그다음에는 양식을 버리되 백성의 신의는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論語 顔淵》 [주D-003]역천(嶧川)의 향사(餉祠) :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위천면(渭川面) 강천리(薑川里)에 있던 역천서원(嶧川書院)의 향현일민사(鄕賢逸民祠)를 말한다. [주D-004]범방(范滂)의 어머니 : 범방의 자는 맹박(孟博)이며, 여남(汝南) 정강(征羌) 사람이다. 모함을 받아 사지(死地)로 나아갈 때 어머니를 뵙고 작별하자, 그 어머니가 “네가 이응(李膺), 두밀(杜密)과 병칭되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이미 영명(令名)을 얻고서 또다시 오래 살기를 구한다면 될 법이나 하겠느냐.” 하고, 또 “내가 너로 하여금 악한 일을 하게 하려 해도 너는 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너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하였으니, 나는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서 오히려 격려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