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퇴계 이황 선생 시

퇴계 이황선생의 시 편

아베베1 2014. 7.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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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길 선생(吉先生)의 정려(旌閭)를 지나며 계사년(1533, 중종28)

아침에 길을 떠나 낙수를 지나니 / 朝行過洛水
낙수는 어이하여 그리도 길고 길며 / 洛水何漫漫
낮에는 쉬면서 오산을 바라보니 / 午憩望鰲山
오산은 구불구불 울창도 하구나 / 鰲山鬱盤盤
맑디맑게 흐르는 물 두터운 땅 뚫었고 / 淸流徹厚坤
깎아지른 절벽은 하늘 높이 솟았으니 / 峭壁凌高寒
거기에 봉계란 마을이 하나 있어 / 有村名鳳溪
산과 물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오 / 乃在山水間
선생이 그 가운데 숨어서 살았으니 / 先生晦其中
조정에서 영을 내려 정려를 표하였네 / 表閭朝命頒
대의가 흔들리지 않음이여 / 大義不可撓
티끌세상 싫어서라 어이 그리 말하랴 / 豈曰辭塵寰
천년이라 조대의 풍조여 / 千載釣臺風
또다시 동한 땅에 울리게 되었구나 / 再使激東韓

나라를 부지함은 이미 가망 없었으나 / 扶持已無及
절개를 세움이여 길이 굳고 완전토다 / 植立永堅完
장부는 큰 절개를 귀하게 여기나니 / 丈夫貴大節
한평생 그 마음을 아는 이 드물었네 / 平生知者難
아아 그대 세상 사람들이여 / 嗟爾世上人
부디 높은 벼슬일랑 사랑하지 말아라 / 愼勿愛高官

[주C-001]길 선생(吉先生)의 정려(旌閭) :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고려 말에 나라가 망할 징조를 보고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내려와 금오산(金鰲山) 아래 낙동강(洛東江) 가에 숨어 살면서,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도 받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조정에서 절의를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려 주었다.
[주D-001]천년이라 …… 되었구나 : 조대(釣臺)는 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이 고기 낚던 곳을 말한다. 벼슬을 마다하고 숨어 살던 
월영대(月影臺)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푸른 바닷가 / 老樹奇巖碧海堧
고운이 노닌 자취 모두 연기 되고 말아 / 孤雲遊跡總成烟
이제 다만 높은 대에 달만이 머물러서 / 只今唯有高臺月
그 정신 담아내어 내게 전해 주누나 / 留得精神向我傳

[주C-001]월영대(月影臺) : 합포(合浦)에 있는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다.엄자릉의 고상한 풍조가, 다시 조선에 와서 길야은(吉冶隱)의 절개가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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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촉석루(矗石樓)

강호에 떨어져 산 지 며칠이나 되었던고 / 落魄江湖知幾日
거닐며 시를 읊다 높은 누에 올라 보네 / 行吟時復上高樓
공중에 비끼는 비 한 때의 변화라면 / 橫空飛雨一時變
눈에 드는 긴 강은 만고의 흐름이라 / 入眼長江萬古流
지난 일 아득해라 둥우리의 학은 늙고 / 往事蒼茫巢鶴老
나그네 회포 일렁여라 들구름이 떠가네 / 羇懷搖蕩野雲浮
번화한 것 시상에 들어오지 않나니 / 繁華不屬詩人料
한 번 웃고 말없이 푸른 물을 굽어보네 / 一笑無言俯碧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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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영남루(嶺南樓)

누각은 영해 하늘 우뚝이 솟아 있고 / 樓觀危臨嶺海天
좋은 시절 국화 앞에 객은 찾아왔도다 / 客來佳節菊花前
소상강 언덕인가 푸른 숲에 구름 걷히고 / 雲收湘岸靑楓外
형산 남쪽 흰 기러기 물은 떨어지누나 / 水落衡陽白雁邊
비단 장막 광한전의 달을 싸고도는데 / 錦帳圍將廣寒月
옥퉁소 소리 태청의 연기 속에 들어가네 / 玉簫吹入太淸烟
평생에 진실로 시인의 흥이 있어 / 平生儘有騷人興
술두루미 앞에서 비단 자리에 춤추노라 / 猶向尊前踏綺筵


[주C-001]영남루(嶺南樓) : 영남루에 원시(原詩)가 걸려 있었는데, 퇴계가 그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다.
[주D-001]태청(太淸) : 천상(天上)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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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봄을 느끼다 병신년(1536, 중종31)

맑디맑은 새벽이라 아무런 일이 없어 / 淸晨無一事
옷깃을 헤친 채 서헌에 앉았더니 / 披衣坐西軒
어린 종놈 뜨락을 쓸어 내고 / 家僮掃庭戶
다시금 고요히 사립문을 닫누나 / 寂寥還掩門
그윽한 섬돌엔 가는 풀이 자라나고 / 細草生幽砌
꽃다운 동산엔 좋은 수목 흩어졌네 / 佳樹散芳園
살구꽃은 비 온 뒤에 드물고 / 杏花雨前稀
복사꽃은 밤사이에 한창이라 / 桃花夜來繁
향기로운 눈인양 붉은 벚꽃 나부끼고 / 紅櫻香雪飄
은빛의 바다인양 흰 오얏꽃 굽이치네 / 縞李銀海飜
고운 새들 스스로 자랑이나 하는 듯 / 好鳥如自矜
아침의 햇살 아래 무어라 우짖누나 / 間關哢朝暄
빠른 세월 잠시도 머무르지 않나니 / 時光忽不留
그윽한 회포는 애달프기 짝이 없어 / 幽懷悵難言
서울에서 삼 년째 새봄을 맞이하매 / 三年京洛春
옹색하기 마치도 멍에 맨 나귀같아 / 局促駒在轅
실없어라 마침내 무슨 이익 있었던가 / 悠悠竟何益
조석으로 생각하니 나라 은혜 부끄럽네 / 日夕愧國恩
우리 집은 맑디맑은 낙동강 주변이요 / 我家淸洛上
희희낙락 즐거운 한가로운 마을이라 / 煕煕樂閒村
이웃들은 모조리 봄 농사에 나가고 / 隣里事東作
닭과 개가 집에 남아 울타리를 지킨다오 / 雞犬護籬垣
고요한 책상머리 서책들은 쌓여 있고 / 圖書靜几席
봄 안개는 나지막히 강과 들을 감돌리라 / 烟霞映川原
시냇물에 노니는 건 고기와 새들이요 / 溪中魚與鳥
소나무 아래에는 학이며 잔나비들 / 松下鶴與猿
즐거울사 그 산골에 살아가는 사람들 / 樂哉山中人
나도야 돌아가 술이나 마시련다 / 言歸謀酒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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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청평산(淸平山)을 지나다 느낌이 일어 병서(幷序)

춘천(春川) 청평산은 곧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으로 전조(前朝)의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 산에 숨어 살았다. 이 산에 보현원(普賢院)이 있었는데, 이자현이 거기서 거처하면서 문수사(文殊寺)라 불렀다. 경운산을 청평산이라고 개칭한 것도 이자현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이자현은 큰 공신의 가문에서 자라나 풍류(風流)와 운치가 당시에 가장 뛰어났고, 또 일찍이 벼슬하여 빛나고 중한 자리에 올랐다. 그가 부귀를 구하고 청자(靑紫)를 취하기는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웠는데도 영화를 사양하고 지위를 피하기를 마치 더러운 세속에서 매미가 껍질을 벗듯이 만물 위로 홍곡(鴻鵠)이 날듯이 하여 이 산에서 37년 동안이나 오래 머물렀다.
임금이 겸손한 말과 후한 예(禮)로 불렀으나 그 절개를 굽히지 못하였고, 천사(千駟)와 만종(萬鍾)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흉중에 즐기는 바가 없다면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었는데, 사관(史官)이 이자현을 논하면서 그를 몹시 깎아내리고 심지어 그를 가리켜 탐욕스럽고 인색하다고 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아, 어찌 그리 심한 말을 했단 말인가.
예로부터 고인(高人)ㆍ일사(逸士)로서 이자현과 같은 사람이 어찌 적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농촌이나 산간에서 자라 나무와 돌과 더불어 살고 사슴이나 산돼지와 함께 놀면서 조밥과 나물을 먹고사는 것이 본래부터 익힌 생활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을 것이니, 그가 아주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자현처럼 명성과 부귀를 신을 벗듯 떨치고 화려한 생활에서 몸을 빼치고 원망하거나 뉘우침이 없이 끝까지 변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없거나 아주 드물 것이니, 역시 높일 만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자현이 그 자취를 숨긴 것은 그가 고상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는데, 이런 뜻에서 그를 깎아내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 말을 납득할 수 없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하면서 바윗굴 속에서 말라 죽는 그 명성과, 청자(靑紫)를 허리에 두르고 종정(鍾鼎)에 이름이 새겨지며 현가(絃歌)에 오르는 명성이 어느 것이 낫겠는가. 세속의 소견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가 다 같이 명성이지만 그 괴로움과 즐거움은 아주 다른 것이다. 이자현이 부귀에 대해서는 자신을 더럽히기라도 할 듯이 뒤도 안 보고 떠나갔으며 은둔에 있어서는 거침없이 나아가 종신토록 돌아보지 않았는데, 만일 이를 두고 명성을 위해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인정(人情)에 가까운 말이라 하겠는가. 더구나 탐욕스럽고 인색하다는 것이 어찌 합당한 정론(定論)이랴. 이것이 내가, 그의 마음에 스스로 즐기는 것이 있었으며 세속에서 평하는 말이 그릇된 줄 아는 이유이니, 바로 내가 이자현을 사모하는 까닭이다.
또 사관은, 이자현이 밭을 마련하여 그 지방의 농민들을 괴롭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은자인들 어떻게 지렁이처럼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밑으로는 흙 속의 물만 마시고 살겠는가. 약을 팔거나 점쟁이 노릇을 하지 않는 한 밭을 갈아 그 노력으로 먹고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자현이 밭을 갈아 그 노력으로 먹고산 것이 무엇이 나쁘기에 그것을 가지고 비방하는가.
이것은 아마도 영화를 탐하고 이익을 즐겨하여 세속 길에 골몰하던 당시의 사부(士夫)들이, 이자현이 자기들과는 공중의 황곡(黃鵠)과 땅속의 벌레 정도로는 비교가 안 되게 너무나 거리가 멀었으므로 마음에 불평이 있어서 가만히 그가 하는 일을 엿보다가 그것을 꼬집어 내어, “은자는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어찌 밭을 마련하여 농사를 짓는가.” 한 것이다. 그들이 근거 없는 비방을 만들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면 이른바 농민을 괴롭혔다는 것도 그들의 무함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옛날 충명일(种明逸)에게도 늘그막에 밭을 장만하였다는 비방이 있었다. 그러나 논평하는 선비들은 기껏, “세상에 높이 알려진 이름에 걸맞기 어렵다.”거나, “깨끗한 언론이 애석히 여겼다.” 하였을 뿐이었다. 어디에 지금의 사관처럼 각박(刻薄)하게 심히 해치는 말이 있었던가. 전 시대의 사관이 의심스러운 것을 빼지 않고 심한 말로 전하였고, 뒤의 사관이 그것을 경솔하게 믿고서 함부로 논하니, 사람이란 논평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가.
내가 이자현이 조정의 부름에 나아가기를 사양한 글을 보니, 그 글에, “새로서 새를 길러서 종고(鍾鼓)의 걱정을 면하게 하여 주고고기를 보고 고기를 알아서 강해(江海)의 즐거움을 이루게 하소서.” 하였다. 슬프다, 세속의 헐뜯는 자들이 그 사람의 흉금을 어찌 그 만분의 일이나마 엿볼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올 적에 청평산 밑을 지내다가, 그 역리(驛吏)에게 물어서 이 산에 청평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아마 옛날의 이른바 보현원이 바로 이곳인 듯하다. 그러나 갈 길이 바빠 그윽한 자취를 찾아 산문(山門)을 두드리지 못하고, 아쉬운 대로 이 글을 지어 일찍이 사서를 읽다가 가슴속에 느꼈던 것을 위와 같이 표시하고, 이어 시를 짓는다.

산협 사이 감도는 물 잔도는 구불구불 / 峽束江盤棧道傾
홀연히 구름 밖에 맑은 시내 흐르네 / 忽逢雲外出溪淸
지금까지 사람들이 여산사를 말하는데 / 至今人說廬山社
이곳에서 그대는 곡구 밭을 갈았다네 / 是處君爲谷口耕
허공 가득 하얀 달에 그대 기상 남았는데 / 白月滿空餘素抱
맑은 이내 자취 없이 헛된 영화 버렸구나 / 晴嵐無跡遣浮榮
동한의 은일전(隱逸傳)을 누가 지어 전하려나 / 東韓隱逸誰修傳
조그만 흠 꼬집어서 흰 구슬을 타박 말라 / 莫指微疵屛白珩


[주D-001]경운산을 …… 이루어졌다 : 이자현의 호가 청평거사(淸平居士)이므로, 이로 인해 바꿔 부른 것이다.
[주D-002]청자(靑紫) : 대관(大官)의 복장에 청색과 자색이 있었으므로 전하여 높은 벼슬을 이른다.
[주D-003]천사(千駟) : 《논어(論語)》에 “제 경공(齊景公)의 말[馬]이 천사(千駟)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부귀를 말한 것이다.
[주D-004]만종(萬鍾) : 만종록(萬鍾錄)은 가장 많은 녹봉(祿俸)인데, 종(鍾)은 곡(斛) 4두(斗)에 해당된다.
[주D-005]흐르는 …… 양치질하면서 : 진(晉)나라 손초(孫楚)가 은거 생활(隱居生活)을 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돌베개를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한다.[枕石漱流]”고 말할 것을 잘못하여, “흐르는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하겠다.”고 하였다. 옆의 사람이 조롱하기를, “어찌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고 돌로 양치질하려는가.” 하니, 손초는 답하기를,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음은 세상 소리 들은 것이 더러워서 귀를 씻으려 함이요, 돌로 양치질함은 이[齒]를 매우 희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6]종정(鍾鼎)에 …… 오르는 : 국가에 큰 공(功)이 있으면, 그 사실을 기록하여 종(鍾)과 솥[鼎]에 새겨서 영원히 전하고, 그것을 읊어서 악장(樂章)을 만들어 현가(絃歌)에 올리는 것이다.
[주D-007]은자인들 …… 살겠는가 : 제(齊)나라 진중자(陳仲子)가 지나치게 청렴하므로 맹자가 평하기를, “진중자처럼 그렇게 너무 청렴하려면 지렁이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밑으로는 땅속의 누른 물만을 마시고 산다. 그러나 사람이야 어찌 그럴 수 있으랴.”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8]충명일(种明逸) : 송나라 충방(种放)으로, 자(字)가 명일이다. 초년에 고상한 처사(處士)로 이름이 났다가, 조정에 불려 나와 만년에 전장(田場)을 마련하여 당시와 후세에 비방을 받았다.
[주D-009]새로서 …… 주고 :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郊外)에 나타났는데, 노후(魯侯)가 그 새를 모셔다가 큰 상에 음식을 차리고 음악[鍾鼓]을 들려 주었더니, 새가 놀라고 걱정하여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사흘 만에 죽었다. 이것은 노후가 자기가 받는 봉양(奉養)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새로서 새를 기르려면 깊은 숲에 깃들이게 하고 물가에 놀게 하여 미꾸라지나 쪼아 먹게 해야 할 것이다. 《莊子 至樂》
[주D-010]고기를 …… 하소서 :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濠梁) 위에서 놀다가 말하기를, “물고기가 노는 것이 즐겁겠구나.” 하니, 혜자는, “자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가 즐거운 줄을 아는가.” 하였다. 장자는 “자네가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을 자네가 어찌 아는가.” 하였다. 《莊子 秋水》
[주D-011]여산사(廬山社) : 진(晉)나라 혜원 법사(惠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結成)하였다.
[주D-012]곡구(谷口) : 한(漢)나라 은사(隱士) 정자진(鄭子眞)이 곡구에서 밭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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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호당(湖堂)에 매화가 3월에 비로소 피었기에 동파(東坡)의 운을 써서 짓다 2수(二首) ○ 봄에 소명(召命)에 나아간 뒤에 지은 것이다.

내가 옛날 남방에서 매화촌을 찾았더니 / 我昔南遊訪梅村
아지랑이 매일같이 시혼(詩魂)을 녹이었네 / 風烟日日銷吟魂
땅끝에서 홀로 맞아 경국색을 찬탄하고 / 天涯獨對歎國艷
역로에서 부치매 어둔 세상 슬퍼했네 / 驛路折寄悲塵昏
서울에 온 이래로 간절히도 그리워서 / 邇來京輦苦相憶
맑은 꿈은 밤마다 전원으로 날아갔네 / 淸夢夜夜飛丘園
여기가 서호일 줄 어떻게 알았으랴 / 那知此境是西湖
우연히 서로 만나 한 번 웃음 정다워라 / 邂逅相看一笑溫
꽃다운 맘 고즈넉이 늦은 봄에 피어설랑 / 芳心寂寞殿殘春
옥빛 자태 아름다이 돋는 해를 맞이하네 / 玉貌婥約迎初暾
학을 짝한 높은 선비 산에서 나오지 않고 / 伴鶴高人不出山
연 사양한 정숙한 여인 항상 문을 닫고 있네 / 辭輦貞姬常掩門
늦게 피어 복사 살구 누르게 한 하늘의 뜻 / 天敎晩發壓桃杏
묘한 의미 시인인들 다 말하지 못하리니 / 妙處不盡騷人言
아름다운 그 모습 철석간장 무슨 소용 / 媚嫵何妨鐵石腸
병든 몸이 술병 들고 찾아감을 사양 말라 / 莫辭病裏携甖罇

막고산의 신선이 눈 내리는 마을에서 / 藐姑山人臘雪村
수련으로 변화하여 겨울에 피는 매화의 혼이 되었다오 / 鍊形化作寒梅魂
바람 불고 눈에 씻겨 본 모습을 나타내니 / 風吹雪洗見本眞
천연의 옥빛 자태 어둔 세상 초탈했네 / 玉色天然超世昏
이소경 뭇 꽃 중에 높은 정조 들지 않고 / 高情不入衆芳騷
고산의 동산에서 천년 뒤에 한 번 웃네 / 千載一笑孤山園
세상 사람 몰라보니 심제량과 같단 말가 / 世人不識嘆類沈
나 홀로 기뻐하네 온백설자 만난 듯이 / 今我獨得欣逢溫
정신 맑고 뼈가 차매 스스로 깨닫나니 / 神淸骨凜物自悟
지극한 도 거짓없이 노을 햇빛 먹는다네 / 至道不假餐霞暾
어젯밤 꿈속에서 흰옷 입은 선인 만나 / 昨夜夢見縞衣仙
하얀 봉새 함께 타고 하늘문에 날아가서 / 同跨白鳳飛天門
섬궁에서 옥절구로 찧은 약을 달랬더니 / 蟾宮要授玉杵藥
직녀가 인도하여 항아에게 말하더라 / 織女前導姮娥言
깨어나매 그 향기가 옷소매에 가득하여 / 覺來異香滿懷袖
달 아래서 가지 잡고 술병을 기울인다 / 月下攀條傾一罇


[주D-001]역로(驛路)에서 부치매 : 남조(南朝) 송(宋)의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 한 가지를 꺾어 역사(驛使)를 통해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며 아울러 시를 지어 전한 고사가 있다. 《太平御覽 卷970 荊州記》
[주D-002]서호(西湖) : 송나라 임포(林逋)가 서호에 살면서 매화를 많이 심고 매화시를 지어서 이름이 났다.
[주D-003]학을 …… 선비 : 임포(林逋)가 처자도 없이 살면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D-004]연(輦) …… 있네 : 한 성제(漢成帝)의 후궁(後宮) 반희(班姬)가, 임금이 한 수레[輦]에 타라는 것을 사양하였다. 뒤에 버림을 당하여 장신궁(長信宮)에서 문을 닫고 적막한 생활을 하였다.
[주D-005]막고산(藐姑山)의 신선 :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선인(仙人)이 있는데, 살결이 빙설(氷雪)같이 희고 깨끗하며 아름다워서 처자(處子)와 같다 하였다. 《莊子 逍遙遊》
[주D-006]이소경(離騷經) …… 않고 :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에 온갖 초목을 나열하여 썼으나, 매화는 거기에서 빠졌다.
[주D-007]고산(孤山) : 임포가 서호의 고산에 살았다.
[주D-008]세상 …… 말가 : 심제량(沈諸梁)이 공자가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자로(子路)에게 물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述而》
[주D-009]나 …… 듯이 : 공자가 온백설자(溫伯雪子)와 만나서,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눈으로 보고 도(道)를 알았다 한다. 《莊子 田子方》
[주D-010]지극한 …… 먹는다네 : 신선은 수련할 때에 노을을 먹고 일광(日光)을 마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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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7월 보름날 압구정(狎鷗亭)에서 본 바를 읊다 이때에 호당(湖堂)에 사고가 있어 왕에게 아뢰고 여기로 옮겨 와서 거처하고 있었다.

강 위에 바람 일어 빗발이 어둑한데 / 江中風起雨冥冥
잎 위의 청개구리 그쳤다 다시 우네 / 葉上靑蛙止復鳴
쌍쌍이 뜬 고기잡이배 언덕에 기대 놓고 / 兩兩漁舟依別岸
해 저물자 낚시 걷어 사립으로 들어가네 / 晩來收釣入柴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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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지방사(池方寺) 폭포(瀑布) 2수(二首)

맑디맑은 신선 바람 객의 옷에 스미는데 / 灑灑仙風襲客衣
우거진 수풀에는 괴이한 새 날아가네 / 陰陰山木怪禽飛
일 좋아하는 어떤 사람 같이 와서 구경하나 / 何人好事同來看
푸른 벼랑 홀로 대해 붓 가는 대로 쓰네 / 獨對蒼崖信筆揮

돌에 앉아 읊조리니 해는 벌써 기우누나 / 坐石沈吟日欲斜
못은 더욱 짙푸르고 물결도 치지 않네 / 碧潭增色湛無波
맑은 가을 지난 뒤에 다시 옴을 사양 마오 / 莫辭再訪淸秋後
비단처럼 무르녹은 단풍 숲을 보리니 / 要看楓林爛似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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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퇴계 초옥(退溪草屋)에서 황금계(黃錦溪)의 내방을 기뻐하며 경술년(1550, 명종5) ○ 군수(郡守)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이다.

시냇가서 그대 만나 의심을 풀어낼 제 / 溪上逢君叩所疑
즐거이 그대 위해 탁주를 가져왔네 / 濁醪聊復爲君持
매화꽃 늦게 필까 하늘이 걱정하여 / 天公卻恨梅花晩
잠깐 사이 눈 보내니 가지에 가득하네 / 故遣斯須雪滿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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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도연명집(陶淵明集)》에 실린 음주에 화운하다

술 없으면 딱하게도 기쁨일랑 없나니 / 無酒苦無悰
술 있으면 이내 바로 그것을 마신다네 / 有酒斯飮之
한가해야 비로소 즐거움을 얻나니 / 得閒方得樂
즐거운 일 있거들랑 그때 바로 즐겨야지 / 爲樂當及時
훈훈한 저 바람이 만물을 고무시켜 / 薰風鼓萬物
무성한 아름다움 이제 이와 같구나 / 亨嘉今若玆
만물과 내가 함께 즐거움을 누리거늘 / 物與我同樂
가난하고 병든 것을 걱정할 것 있으리 / 貧病復何疑
저 세상 영화로움 내 어찌 모르랴만 / 豈不知彼榮
헛되고 헛된 이름 오래가기 어려워라 / 虛名難久持

나의 생각 닿는 곳 그 자리가 어드메뇨 / 所思在何許
하늘의 끝자락과 대지의 한 모퉁이 / 天涯與地隅
높고도 또 높아라 세상 소리 멀어지고 / 迢迢隔塵響
넓고도 또 넓어라 길은 마냥 이어지네 / 浩浩綿川塗
사람의 인생살이 아침 이슬 같은데 / 人生如朝露
희어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몰아대네 / 羲馭不停驅
손에 있는 녹기금은 / 手中綠綺琴
줄 끊어져 슬픔만 남아 / 絃絶悲有餘
오직 하나 잔 속에 채워진 이 술만이 / 獨有杯中物
외로운 이내 삶을 때때로 위로하네 / 時時慰索居

순 임금도 주 문왕도 오래 전에 세상 떠나 / 舜文久徂世
조양에는 봉새가 이르지 않는구나 / 朝陽鳳不至
상서로운 기린마저 이미 멀리 떠났으니 / 祥麟又已遠
말세는 어두워라 정신없이 취한 듯이 / 叔季如昏醉
낙양과 민중 땅을 멀리서 우러르니 / 仰止洛與閩
현인들이 비늘처럼 뒤이어 일어났네 / 群賢起鱗次
내 어이 때 늦고 외진 곳서 태어났나 / 吾生晩且僻
혼자선 귀한 본성 닦을 길을 모르겠네 / 獨昧修良貴
아침에 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 / 朝聞夕死可
이 말씀 진실로 깊은 뜻이 있구나 / 此言誠有味

우리나라 예로부터 추로라 부르나니 / 吾東號鄒魯
선비들이 모두들 육경을 읽는다네 / 儒者誦六經
그것이 좋은 줄 모르는 이 없건마는 / 豈無知好之
어느 누가 이를 과연 성취해 내었는가 / 何人是有成
높이 뛰어났어라, 정오천이여 / 矯矯鄭烏川
목숨 바쳐 지키며 끝내 변치 않았네 / 守死終不更
뒤를 이은 점필재는 쇠한 사문(斯文) 일으켜 / 佔畢文起衰
도 구하는 선비들 그 문정에 가득했네 / 求道盈其庭
쪽빛에서 나온 청색 쪽빛보다 더 푸르니 / 有能靑出藍
김한훤과 정일두가 서로 이어 울렸네 / 金鄭相繼鳴
그들의 문하에서 섬겨 보지 못했으니 / 莫逮門下役
이내 몸 돌아보며 마음 상해 하노라 / 撫躬傷幽情

술 가운데 묘한 이치 있다고들 하지만 / 酒中有妙理
사람마다 반드시 다 얻지는 못한다네 / 未必人人得
취하여 고함치며 즐거움을 구하는 건 / 取樂酣叫中
그대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 아닌가 / 無乃汝曹惑
잠시 잠깐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오면 / 當其乍醺醺
하늘과 땅 사이에 호연지기 가득차서 / 浩氣兩間塞
온갖 번뇌 풀어 주고 인색한 맘 녹이나니 / 釋惱而破吝
괴안국의 영화보다 훨씬 더 나으리라 / 大勝榮槐國
필경 이런 경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 畢竟是有待
바람 앞에 도리어 부끄러워 침묵하네 / 臨風還愧默


[주D-001]희어(羲馭) : 요(堯) 임금 때에 희(羲)와 화(和)는 해[日]를 맡은 관직이므로, 여기서는 해를 희어(羲馭)라 하였다.
[주D-002]녹기금(綠綺琴)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양왕(梁王)으로부터 하사받은 거문고이다.
[주D-003]낙양(洛陽)과 민중(閩中) : 낙양은 정자(程子), 민중은 주자(朱子)가 살던 곳이다.
[주D-004]추로(鄒魯) :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이다.
[주D-005]정오천(鄭烏川) : 정몽주(鄭夢周)가 오천군(烏川君)이다.
[주D-006]김한훤(金寒暄)과 정일두(鄭一蠹) :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을 말한다.
[주D-007]괴안국(槐安國)의 영화 : 당나라 순우분(淳于棼)이 꿈에 대안국에 가서 남가 태수(南柯太守)가 되어 부귀를 누리다가 깨어 보니 괴목(槐木) 밑에 큰 개미굴이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異聞集》
[주D-008]이런 …… 것이니 : 《장자(莊子)》에 이르기를,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다니다가 보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을 기다려서야 되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정기(正氣)를 타고 무궁(無窮)에 노는 성인(聖人)은 무엇을 기다림이 없이 소요(逍遙)하고 논다.” 하였다. 여기서는 성현(聖賢)은 술이 없이도 도의(道義)의 호기(浩氣)가 가득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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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봄날 한가히 지내면서 노두(老杜)의 시를 차운하여, 절구 여섯 수를 짓다

어제는 구름이 땅 위에 드리우더니 / 昨日雲垂地
오늘 아침 비내려 진흙을 적시었네 / 今朝雨浥泥
수풀을 틔워내어 들사슴 다니게 하고 / 開林行野鹿
버들가지 엮어서 뒤뜰의 닭을 막네 / 編柳卻園雞

산꽃이 어지러이 피어도 상관없네 / 不禁山花亂
길가의 풀마저도 오히려 어여쁜 걸 / 還憐徑草多
그 사람 기약두고 이르지 아니하니 / 可人期不至
이 옥빛 술동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 奈此綠尊何

물소리는 골짜기 어구를 삼키는데 / 水聲含洞口
구름 기운 산 허리를 감싸고 도는구나 / 雲氣帶山腰
조는 학은 모래톱에 가만히 서 있는데 / 睡鶴沙中立
놀란 듯 다람쥐는 나무 위로 오르네 / 驚鼯樹上跳

산속의 밭일망정 콩과 조가 잘 자라고 / 山田宜菽粟
약초 심은 밭에는 싹과 뿌리 무성해라 / 藥圃富苗根
북쪽의 징검다리 남쪽으로 통해 있고 / 北彴通南彴
새로 이룬 촌락은 옛 마을과 닿았구나 / 新村接舊村

나무꾼은 한가로이 골짝에서 나오고 / 樵人閒出谷
어린 새들 다투어 처마 끝에 깃들인다 / 乳雀競棲簷
조그만 집 마련하니 하윤과 같거니와 / 小閣同何胤
높이 솟은 누대는 송섬과는 다르구나 / 高臺異宋纖

푸르게 물든 것은 천 가지 버들이요 / 綠染千條柳
빨갛게 타는 것은 만 송이 꽃이러라 / 紅燃萬朶花
웅장하고 호방한 건 산꿩의 천성이요 / 雄豪山雉性
사치하고 화려한 건 들사람의 집이라네 / 奢麗野人家

[주C-001]노두(老杜) :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목지(杜牧之)는 소두(少杜)라 하였다.
[주D-001]조그만 …… 같거니와 : 양(梁)나라 처사(處士) 하윤(何胤)이 진망산(秦望山)에서 서당(書堂)을 지어 여러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 옆에 따로 작은 각(閣)을 바위 속에 만들고 거기서 거처하면서 자신이 손수 열었다 잠갔다 하며, 하인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주D-002]송섬(宋纎) : 진(晉)나라 처사인 송섬은 주천(酒泉) 남산(南山)에 숨어 살았는데, 태수 마급(馬岌)이 찾아갔으나 높은 누대에서 문을 잠그고 만나 주지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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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계당에서 우연히 흥이 일어 절구 열 수를 짓다

사방의 산기슭은 붉은빛 비단이요 / 四麓唯紅錦
양옆의 깊은 숲은 푸른빛 비단일세 / 雙林是碧羅
누군들 알았으랴 순박한 이곳이 / 豈知淳朴處
도리어 조화옹의 자랑거리 될 줄을 / 還被化工誇

시냇물 소리 타고 징검다리 건너면 / 彴跨溪聲度
골짝 지세 의지하여 서당이 열려 있네 / 堂依壑勢開
너무 깊고 궁벽하다 남들은 웃지마는 / 從他笑深僻
내 본분에 이만하면 배회하기 넉넉해라 / 素履足徘徊

열어 놓은 거울처럼 연못을 만들고 / 開鏡爲蓮沼
구름을 헤치고서 돌문을 세웠네 / 披雲作石門
실바람 불어 화창한 날인가 하면 / 和風吹澹蕩
때맞춰 오는 비는 봄기운 감도누나 / 時雨發絪縕

바위틈에 솟는 샘물 멀리서 끌어 오고 / 石竇疏泉遠
산기슭 깊은 곳에 집 지으니 그윽해라 / 山根卜宅幽
손님이 오실 제에 험난한 것 걱정하나 / 客來愁絶險
오고 가는 그 길이 진실로 유유해라 / 還往儘悠悠

하루가 다 가도록 구름은 비 머금고 / 盡日雲含雨
새들은 봄을 불러 쉬지를 않는구나 / 移時鳥喚春
깊숙한 산골이라 범을 저어 아니하니 / 山村頗狎虎
시냇길에 오가는 이 만나는 일 드물구나 / 溪路少逢人

베개 베고 꿈속에서 신선되어 놀고 나선 / 已著游仙枕
주역을 읽으려고 창문 열어 두었노라 / 還開讀易窓
천종은 손으로 잡을 것이 못 되어라 / 千鍾非手搏
여섯 벗이 서로들 마음에 맞거니 소나무ㆍ대나무ㆍ매화ㆍ국화ㆍ연꽃과 나를 여섯 벗으로 삼는다. / 六友是心降

뻐꾹새는 뻐꾹뻐꾹 농사일을 재촉하고 / 布穀催田務
사다새는 객에게 시름을 자아내네 / 提壺勸客愁
더더욱 어여쁜 건 구름 밖의 학이어라 / 更憐雲外鶴
소나무 꼭대기에 말도 없이 서 있구나 / 無語立松頭

붉은빛 자줏빛은 난만히 쌓여 있고 / 爛熳堆紅紫
푸른빛 초록빛은 청신하게 둘렀는데 / 淸新遶綠靑
우연히 혼자서 석 잔 술 먹고 나니 / 三杯偶獨酌
만사는 본래부터 경영할 것 없구나 / 萬事本無營

병든 몸을 구실 삼아 한가한 몸이 되어 / 因病投閒客
깊숙한 곳 찾아와서 세속 인연 끊고 사네 / 緣深絶俗居
참으로 즐거운 일 무엇인지 알고파서 / 欲知眞樂處
백수가 되도록 경서를 끼고 사네 / 白首抱經書

샘물을 움켜다가 벼루에 따르고서 / 掬泉注硯池
한가로이 앉아서 새로 지은 시를 쓰네 / 閒坐寫新詩
그윽이 사는 취미 스스로 만족하니 / 自適幽居趣
남이 알고 모르고는 탓할 것이 없어라 / 何論知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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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계당에서 우연히 흥이 일어 절구 열 수를 짓다

사방의 산기슭은 붉은빛 비단이요 / 四麓唯紅錦
양옆의 깊은 숲은 푸른빛 비단일세 / 雙林是碧羅
누군들 알았으랴 순박한 이곳이 / 豈知淳朴處
도리어 조화옹의 자랑거리 될 줄을 / 還被化工誇

시냇물 소리 타고 징검다리 건너면 / 彴跨溪聲度
골짝 지세 의지하여 서당이 열려 있네 / 堂依壑勢開
너무 깊고 궁벽하다 남들은 웃지마는 / 從他笑深僻
내 본분에 이만하면 배회하기 넉넉해라 / 素履足徘徊

열어 놓은 거울처럼 연못을 만들고 / 開鏡爲蓮沼
구름을 헤치고서 돌문을 세웠네 / 披雲作石門
실바람 불어 화창한 날인가 하면 / 和風吹澹蕩
때맞춰 오는 비는 봄기운 감도누나 / 時雨發絪縕

바위틈에 솟는 샘물 멀리서 끌어 오고 / 石竇疏泉遠
산기슭 깊은 곳에 집 지으니 그윽해라 / 山根卜宅幽
손님이 오실 제에 험난한 것 걱정하나 / 客來愁絶險
오고 가는 그 길이 진실로 유유해라 / 還往儘悠悠

하루가 다 가도록 구름은 비 머금고 / 盡日雲含雨
새들은 봄을 불러 쉬지를 않는구나 / 移時鳥喚春
깊숙한 산골이라 범을 저어 아니하니 / 山村頗狎虎
시냇길에 오가는 이 만나는 일 드물구나 / 溪路少逢人

베개 베고 꿈속에서 신선되어 놀고 나선 / 已著游仙枕
주역을 읽으려고 창문 열어 두었노라 / 還開讀易窓
천종은 손으로 잡을 것이 못 되어라 / 千鍾非手搏
여섯 벗이 서로들 마음에 맞거니 소나무ㆍ대나무ㆍ매화ㆍ국화ㆍ연꽃과 나를 여섯 벗으로 삼는다. / 六友是心降

뻐꾹새는 뻐꾹뻐꾹 농사일을 재촉하고 / 布穀催田務
사다새는 객에게 시름을 자아내네 / 提壺勸客愁
더더욱 어여쁜 건 구름 밖의 학이어라 / 更憐雲外鶴
소나무 꼭대기에 말도 없이 서 있구나 / 無語立松頭

붉은빛 자줏빛은 난만히 쌓여 있고 / 爛熳堆紅紫
푸른빛 초록빛은 청신하게 둘렀는데 / 淸新遶綠靑
우연히 혼자서 석 잔 술 먹고 나니 / 三杯偶獨酌
만사는 본래부터 경영할 것 없구나 / 萬事本無營

병든 몸을 구실 삼아 한가한 몸이 되어 / 因病投閒客
깊숙한 곳 찾아와서 세속 인연 끊고 사네 / 緣深絶俗居
참으로 즐거운 일 무엇인지 알고파서 / 欲知眞樂處
백수가 되도록 경서를 끼고 사네 / 白首抱經書

샘물을 움켜다가 벼루에 따르고서 / 掬泉注硯池
한가로이 앉아서 새로 지은 시를 쓰네 / 閒坐寫新詩
그윽이 사는 취미 스스로 만족하니 / 自適幽居趣
남이 알고 모르고는 탓할 것이 없어라 / 何論知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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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살구꽃 왕매계(王梅溪)가 한창려(韓昌黎)의 운에 화답한 것을 본받아

한양의 셋집에 동산 뜰이 비었더니 / 漢陽賃屋園院空
해마다 울긋불긋 온갖 꽃이 피어나네 / 年年雜樹開繁紅
담 머리의 작은 살구 집보다 높이 솟아 / 牆頭小杏高出屋
봄 늦어 꽃이 피어 목련 풍치 대신하네 / 春晩始替辛夷風
이제야 알겠도다 서울 땅이 너무 차서 / 乃知王城地多寒
물상이나 기후가 중국과 다른 것을 / 物候不與中州同
가지에 총총 박힌 꽃내음도 짙을시고 / 攢枝日萼香郁烈
한 잎 한 잎 아로새김 조화옹의 솜씨라네 / 一一刻翦含元功
병으로 봄 석 달을 문밖에 출입 않고 / 我病三春不出門
이따금 막대 짚고 동산 속을 거닐었네 / 杖屨時及閒園中
늙은이의 눈에도 오히려 꽃다움은 어여쁘나 / 老眼猶知惜芳華
즐거운 일 젊은이와 함께하기 어려워라 / 樂事難憑年少叢
술동이 앞에 두고 홀로 읊음 싫어 말라 / 罇前莫厭寂寥詠
단풍을 슬퍼하던 초객보다 나으리라 / 猶勝楚客悲吟楓
내일 아침 벗들과 이미 약조하였건만 / 明朝已約數同袍
비바람이 휘몰아쳐 사미를 방해하네 / 風雨飜令四美窮
세상만사 뜻한 대로 되어지기 어렵나니 / 世間萬事苦難諧
해는 서로 날고 강은 동으로 흐르네 / 西飛白日江流東
꽃 대하고 한 번 웃자 꽃이 내게 말하기를 / 對花一笑花有語
아아 그대 밭을 가는 농부가 알맞구나 / 嗟爾合作耕田翁


[주C-001]왕매계(王梅溪) : 송나라 왕십붕(王十朋)으로, 호가 매계이다.
[주D-001]단풍을 슬퍼하던 초객(楚客) : 초객은 굴원(屈原)으로, 그가 지은 《초사(楚辭)》에, 강가의 단풍을 읊은 것이 많다.
[주D-002]사미(四美) : 양신(良辰)ㆍ미경(美景)ㆍ상심(賞心)ㆍ낙사(樂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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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산거(山居)에서 사계절을 각각 네 수씩 읊으니, 모두 16절이다

아침


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 霧捲春山錦繡明
진기한 새 화답하며 갖가지로 울어대네 / 珍禽相和百般鳴
산집에는 요즈음에 찾는 손님 없으니 / 山居近日無來客
푸른 풀이 뜰 안 가득 제멋대로 나는구나 / 碧草中庭滿意生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 庭宇新晴麗景遲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 花香拍拍襲人衣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뜻 말하는데 / 如何四子俱言志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 聖發咨嗟獨詠歸

저녁


동자가 산을 찾아 고사리를 캐었으니 / 童子尋山採蕨薇
반찬이 넉넉하여 시장기를 푸노라 / 盤飧自足療人飢
비로소 알겠구나, 당시 전원 돌아온 객 / 始知當日歸田客
저녁 이슬 옷 적셔도 소원에 어김없음을
 / 夕露衣沾願不違


꽃빛이 저녁 맞아 달이 동에 떠오르니 / 花光迎暮月昇東
꽃과 달 맑은 밤에 의미가 끝이 없네 / 花月淸宵意不窮
다만 달이 둥글고 꽃이 지지 않으면 / 但得月圓花未謝
꽃 밑에 술잔 비울 걱정이 없어라 / 莫憂花下酒杯空

이상은 봄을 읊은 네 절이다.

아침


새벽 빈 뜰 거닐자니 대 이슬이 맑았어라 / 晨起虛庭竹露淸
헌함 열고 멀리 보니 첩첩 산들 푸르러라 / 開軒遙對衆山靑
작은 아이 으레 빨리 물을 길어 가져오니 / 小童慣捷提甁水
세수하면 탕의 반에 나날의 계명있네 / 澡頮湯盤日戒銘


고즈넉한 한낮 산당 햇빛도 밝을시고 / 晝靜山堂白日明
우거진 고운 나무 처마 끝에 둘렀구나 / 蔥瓏嘉樹遶簷楹
북창 아래 높이 누워 희황씨 이전인 듯 / 北窓高臥羲皇上
시원한 산들바람 새소리를 보내오네 / 風送微涼一鳥聲

저녁


석양의 고운 빛깔 시내와 산 움직이니 / 夕陽佳色動溪山
바람 자고 구름 한가한데 새는 절로 돌아오네 / 風定雲閒鳥自還
홀로 앉은 깊은 회포 뉘와 얘기할꼬 / 獨坐幽懷誰與語
바위 언덕 고요하고 물은 졸졸 흐르누나 / 巖阿寂寂水潺潺


텅 빈 산 고요한 집 달은 절로 밝은데 / 院靜山空月自明
이부자리 말쑥해라 꿈도 역시 맑구나 / 翛然衾席夢魂淸
깨어나 말 않으니 알괘라 무슨 일고 / 寤言弗告知何事
한밤중 학의 소리 누워서 듣노라 / 臥聽皐禽半夜聲

이상은 여름을 읊은 네 절이다.

아침


어젯밤 바람 불어 남은 더위 사라지고 / 殘暑全銷昨夜風
아침 되어 서늘함이 가슴속에 스미누나 / 嫩涼朝起灑襟胸
영균이 원래 도를 말한 것이 아니라면 / 靈均不是能言道
어이하여 천년 뒤에 회옹이 느끼겠나 / 千載如何感晦翁


서리 내려 하늘 비고 매는 한창 호기 나고 / 霜落天空鷹隼豪
물가의 바위 끝에 서당 하나 높구나 / 水邊巖際一堂高
요즘 와서 삼경이 유난히도 쓸쓸하여 / 近來三徑殊牢落
국화를 쥐고 앉아 도연명을 생각하네 / 手把黃花坐憶陶

저녁


가을 서당 조망을 뉘와 함께 즐길꼬 / 秋堂眺望與誰娛
단풍숲에 석양 드니 그림보다 낫구나 / 夕照楓林勝畫圖
갑자기 서쪽 바람 지나가는 기러기에게 부는데 / 忽有西風吹雁過
옛 친구는 편지를 보내 올란가 안 올란가 / 故人書信寄來無


차가운 못 달 비치고 하늘은 맑은데 / 月映寒潭玉宇淸
그윽한 이 한 칸 방이 고요하고 밝구나 / 幽人一室湛虛明
그 가운데 스스로 참된 소식 있나니 / 箇中自有眞消息
선의 공도 아니요, 도가의 명도 아니네 / 不是禪空與道冥

이상은 가을을 읊은 네 절이다.

아침


우뚝 솟은 봉우리들 찬 하늘을 찌르고 / 群峯傑卓入霜空
뜰 아래의 국화는 아직 떨기 남았는데 / 庭下黃花尙倚叢
땅을 쓸고 향 사르니 다른 일 전혀 없고 / 掃地焚香無外事
종이창에 해 비치니 밝기가 마음 같네 / 紙窓銜日皦如衷


추운 철 깊숙이 들앉으니 무슨 경영 있겠는가 / 寒事幽居有底營
꽃 가꾸고 대 돌보며 여윈 몸을 조섭하네 / 藏花護竹攝羸形
찾아오는 손님을 은근히 사절하니 / 慇懃寄謝來尋客
겨울 석 달 동안에 손님 영접 끊으려네 / 欲向三冬斷送迎

저녁


나무 모두 뿌리로 돌아가고 해는 짧은데 / 萬木歸根日易西
내 낀 수풀 쓸쓸한데 새는 깊이 깃들었네 / 烟林蕭索鳥深棲
옛날부터 저녁에 두려워함 무슨 뜻일까 / 從來夕惕緣何意
은미한 곳에서 게으름과 욕심을 막음이라 / 怠欲須防隱處迷


눈 흐려져 안 보이니 등불 대기 두려워라 / 眼花尤怕近燈光
늙고 병드니 잘 알겠네 겨울밤 길고 긺을 / 老病偏知冬夜長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읽기보다 나으리니 / 不讀也應猶勝讀
서리보다 차가운 달 앉아서 보았다오 / 坐看窓月冷於霜

이상은 겨울을 읊은 네 절이다.


[주D-001]네 …… 감탄했나 : 공자가 자로(子路)ㆍ증점(曾點)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에게 각자의 뜻을 말해 보도록 하였는데, 늦봄에 목욕하고 바람 쐬며 시를 읊고 돌아오겠다는 증점의 대답에 유독 감탄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2]당시 …… 어김없음을 : 도잠(陶潛)의 시에, “달을 띠고 호미 메고 돌아오니, 저녁 이슬이 나의 옷에 젖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다만 소원이 어김없었으면……[帶月荷鋤歸 夕露沾我衣 衣沾不足惜 但使願無違]” 하였다.
[주D-003]탕(湯)의 …… 계명 : 탕 임금이 세수하는 반(盤)의 명(銘)에,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 하였다.
[주D-004]북창 …… 듯 : 도잠이 6월에 북창 아래 누워서, “희황(羲皇) 이전의 사람이다.” 하였다. 희황은 태고 시대의 임금 복희씨(伏羲氏)를 말한 것이다.
[주D-005]영균(靈均)이 …… 느끼겠나 : 영균은 굴원(屈原)의 자로, 회옹(晦翁) 즉 주희가 《초사(楚辭)》를 주석하였다.
[주D-006]삼경(三徑) : 한(漢)나라 장허(蔣詡)가 대밭 속에 숨어 살면서, 세 길[三徑]을 내어 뜻맞는 친구 양중(羊仲)ㆍ구중(裘仲)과 왕래하였다. 도잠(陶潛)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은 묵었으나, 솔과 국화는 아직 남았네.” 하였다.
[주D-007]선(禪)의 …… 아니네 : 불교에서는 공(空)을 주장하고, 도가에서는 명(冥)을 주장한다. 명은 모든 정(情)과 생각을 초월(超越)한 이상경(理想境)이다.
[주D-008]나무 …… 돌아가고 : 가을에 나무들이 모두 잎이 떨어지는 것을 뿌리로 돌아간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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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자(箚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는 차자 도(圖)를 아울러 올리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 이황은 삼가 재배(再拜)하고 아룁니다. 도(道)는 형상(形象)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나오면서 성인이 이것을 근거로 하여 괘효(卦爻)를 만들었으니, 이때부터 비로소 도가 천하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크니 어디서부터 착수하여 들어가며, 옛 교훈이 천만 가지인데 어디서부터 따라 들어가겠습니까. 성학(聖學)에는 강령(綱領)이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히 요긴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지목하여 해설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초를 보여 주니, 이것 역시 후현(後賢)이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의 마음은 만 가지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요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공격하고 온갖 간사함이 서로 침해하는 곳입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 방종이 따르게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옛날의 성군(聖君)과 현명한 왕은 이런 점을 근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항상 조심하고 공경하며 두려워하기를 날마다 하면서도 오히려 미흡하다고 여겨 스승을 정하여 놓고 굳게 간(諫)하는 직책을 만들어서, 앞에는 의(疑)가 있고 뒤에는 승(丞)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輔)가 있고 오른쪽에는 필(弼)이 있으며, 수레를 탈 때는 여분(旅賁)의 경계함이 있고, 조회를 받을 때는 관사(官師)의 법이 있으며, 책상에 기대고 있을 때는 훈송(訓誦)의 간(諫)이 있고, 침소에는 설어(暬御)의 잠(箴)이 있으며, 일에 당면할 때는 고사(瞽史)의 인도(引導)가 있고, 사사로이 거처할 때는 공사(工師)의 송(誦)이 있으며, 소반과 밥그릇ㆍ책상ㆍ지팡이ㆍ칼ㆍ들창문에 이르기까지 무릇 눈이 가는 곳과 몸이 처하는 곳은 어디든지 훈계를 새겨 놓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방범(防範)하는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으므로 덕이 날로 새롭고 공업(功業)이 날로 넓어져서 작은 허물도 없고 큰 이름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군주는 천명을 받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큼에도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구비한 것이 이같이 엄격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왕공(王公)과 수많은 백성들의 추대에 들떠서 버젓이 성인처럼 굴며 오만 방자하게 구니, 결국 난이 일어나고 멸망하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남의 신하가 되어서 임금을 인도하여 도에 합당하도록 하려는 이는 온갖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장구령(張九齡)이 《금감록(金鑑錄)》을 올린 것과 송경(宋璟)이 〈무일도(無逸圖)〉를 바친 것과 이덕유(李德裕)가 〈단의육잠(丹扆六箴)〉을 바친 것과 진덕수(眞德秀)가 〈빈풍 칠월도(豳風七月圖)〉를 올린 것 같은 따위는 다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깊은 충의와 선을 베풀고 가르침을 드리는 간절한 뜻이니, 임금으로서 깊이 유념하고 공경히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비루한 몸으로 그간 여러 조(朝)에 입은 은혜를 저버리고 병으로 시골에 들어앉아 초목과 함께 썩어가고자 했는데, 뜻밖에 허명(虛名)이 잘못 알려져서 불려 와 강연(講筵)의 중한 자리에 앉게 되니, 떨리고 황송하며 사양하여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미 면하지 못하고 이 자리를 더럽힌 이상, 이에 성학(聖學)을 권도(勸導)하고 군덕(君德)을 보양하여 요순(堯舜)처럼 융성한 데 이르도록 할 직책을 비록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한들 되겠습니까. 다만 신은 학술이 거칠고 말주변이 어눌한데 여기에다 잇따른 병고로 시강(侍講)도 드물게 하다가 겨울철 이후로는 전폐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한지라 근심되고 두려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당초에 글을 올려 학문을 논한 말들이 이미 성상의 뜻을 감동시켜 분발하게 해 드리지 못하고, 그 뒤로도 성상을 대하여 여러 번 아뢴 말씀이 또 성상의 예지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미력한 신의 정성으로는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聖學)을 밝히고 심법(心法)을 얻어서 도(圖)를 만들고 설(說)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초를 가르친 것이 오늘날 세상에 행해져 해와 별같이 환합니다. 이에 감히 이것을 가지고 나아가 전하께 진술하여, 옛 제왕(帝王)들의 공송(工誦)과 기명(器銘)의 끼친 뜻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기왕의 성현들에 힘입어 장래에 유익하도록 하려는 바람에서입니다. 이에 삼가 그중에서 더욱 뚜렷한 것만 골라 일곱 개를 얻었습니다. 그중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정임은(程林隱)의 그림에다가 신이 만든 두 개의 작은 그림을 덧붙인 것이요, 이 밖에 또 세 개는 그림은 비록 신이 만들었으나 그 글과 뜻이 조목(條目)과 규획(規畫)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 현인이 만든 것을 풀이한 것이지 신의 창작이 아닙니다. 이것을 합하여 〈성학십도〉를 만들고 각 그림 아래에 또 외람되게 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삼가 정사(精寫)하여 올립니다. 신은 추위에 떨리고 병으로 꼼짝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힘써서 이것을 하자니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씨가 단정하지 못한 데다 줄과 글자도 바르고 고르지 못하여 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혹여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이것을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리시어 상세하게 논의해서 바로잡고 사리에 어긋난 것을 수정하여, 다시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정본(正本)을 정사해서 해당 관서에 보내어 병풍 한 벌을 만들어서 평소 조용히 거처하시는 곳에 펼쳐 놓으시고, 또 별도로 조그마하게 수첩을 만들어서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기거동작(起居動作)하실 때에 언제나 보고 살피셔서 경계로 삼으신다면, 신의 간절한 충정(忠情)에 이보다 다행히 없겠습니다. 그 뜻에 있어서 미진한 것은 신이 지금 거듭 설명하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맹자(孟子)의 말에, “마음의 직책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못하면 잃어버리고 만다.” 하였고,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할 적에 또, “생각함은 지혜롭다. 지혜로움은 성스러움을 만든다.” 하였습니다. 대개 마음은 방촌(方寸)에 갖추어 있으면서 지극히 허령하고, 이치는 도(圖)와 설(說)에 나타나 있으면서 지극히 현저하고 지극히 진실합니다. 지극히 허령한 마음을 가지고 지극히 현저하고 진실한 이치를 구하면 마땅히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여 얻고 지혜로워 성인이 되는 것이 어찌 오늘날에 징험 되지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허령하다 하더라도 주재(主宰)하는 바가 없으면 일을 당하여도 생각하지 못하고, 이치가 현저하고 진실하다 하더라도 조관(照管)하지 않으면 항상 눈앞에 있을지라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이 도식(圖式)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또 듣건대 공자(孔子)께서는, “배우고도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두워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로워진다.” 하였습니다. 학(學)이란 그 일을 습득하여 참되게 실천하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무릇 성문(聖門)의 학이란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두워져서 얻지 못하는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이치를 통해야 하고, 그 일을 습득하지 못하면 위태로워져서 불안한 까닭에 반드시 배워서 그 실상대로 실행하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생각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서로 분명히 해 주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이 이치를 밝히시고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우시어,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이냐,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된다.”라고 생각하시어 분연(奮然)히 힘을 내셔서 생각하고 배우는 이 두 가지 공부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또한 경(敬)을 지킨다는 것은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동(動)과 정(靜)을 일관하며, 안과 밖을 합일하고 드러난 곳과 은미(隱微)한 곳을 한결같이 하는 도(道)입니다. 이것을 하는 방법은 반드시 삼가고 엄숙하고 고요한 가운데 이 마음을 두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사이에 이 이치를 궁리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더욱 엄숙하고 더욱 공경히 하며, 은미한 곳과 혼자 있는 곳에서 성찰하기를 더욱더 정밀히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그림을 두고 생각할 적에는 마땅히 이 그림에만 마음을 오로지해서 다른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어떤 한 가지 일을 습득할 적에는 마땅히 이 일에 오로지하여서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변함이 없이 매일매일 계속하고, 혹 새벽에 정신이 맑을 때에 그것을 되풀이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 혹 평상시에 사람을 응대할 때에 몸소 경험하고 북돋우면, 처음에는 혹 부자연스럽고 모순되는 불편을 면하지 못하고 또 때로 극히 고통스럽고 쾌활하지 못한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곧 옛사람들이 이른바 장차 크게 향상하려는 징조요 좋은 소식의 징조라고 하겠으니, 절대로 이런 문제로 인해서 스스로 저상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자신을 가지고 힘써서 참된 것을 많이 쌓고 오래 힘써 나가면 자연히 마음과 이치가 서로 물 배듯하여 어느새 이해하고 통달하게 되며, 익히는 것과 일이 서로 익숙해져 점점 순탄하고 편하게 행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엔 각각 그 하나에만 오로지하던 것이 나중에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맹자가 논한 바, “깊이 나아가기를 도로써 하여 자득하게 된 경지”이며 “생겨나면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는 말의 증험입니다. 또 따라서 부지런히 힘써서 자신의 재주를 다하면, 안자(顔子)가 인(仁)에서 떠나지 않은 것과 나라 다스리는 일을 물은 것이 바로 그 가운데 있고, 증자(曾子)가 충서 일관(忠恕一貫)하여 도(道)를 전함을 맡은 것도 바로 자신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공경함이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않아 중화(中和)를 극치(極致)로 하여 천지 만물의 위육(位育)에 참여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으며, 덕행이 떳떳한 인륜에서 벗어나지 않아 천(天)과 인(人)이 합일하는 묘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그 도(圖)와 설(說)을 겨우 열 폭밖에 안 되는 종이에 베풀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생각하고 익히는 것은 평소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하는 것이지만,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령과 근본을 반듯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다 여기에서 나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뜻을 더하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복하되, 하찮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지 마시고 싫증이 나고 번거롭다고 그만두지 않으신다면, 국가로서도 매우 다행한 일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臣)은 야인(野人)이 근폭(芹曝)을 올리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전하의 위엄을 모독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바치나이다. 황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처분을 기다립니다.

태극도설(太極圖說)


第一太極圖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아 동이 극에 이르면 정(靜)하고, 정하여 음(陰)을 낳아 정이 극에 이르면 다시 동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과 양으로 나누어져서 양의(兩儀)가 성립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를 낳아서, 오기(五氣)가 순차적으로 베풀어져 네 계절이 운행된다. 오행(五行)이란 바로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이란 바로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지닌다.
무극의 진(眞)과 이(二 음양)ㆍ오(五 오행)의 정기(精氣)가 미묘하게 합해서 응결되어, 건도(乾道)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이기(二氣)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니, 만물이 나고 또 나서 변화가 무궁하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특하니, 형체가 이미 생기매 정신이 지혜를 발(發)하며, 오성(五性)이 감동하여 선악이 나누어지고 만사가 나온다. 오직 성인은 중정(中正) 인의(仁義)로써 정(定)하되 정(靜)을 주장하여 인극(人極)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밝음이 합하며, 네 계절과 더불어 그 차례가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吉凶)이 합하니, 군자는 이것을 닦아서 길하게 되고, 소인은 이것을 거슬러서 흉하게 된다. 그러므로 “천(天)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지(地)의 도를 세워 유(柔)와 강(剛)이라 하고, 인(人)의 도를 세워 인(仁)과 의(義)”라고 하며, 또 “원시 반종(原始反終)하여 사생(死生)의 설(說)을 안다.”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로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도설(圖說)은 첫머리에 음양 변화의 근원을 말하였고, 그다음에 곧 사람이 천성으로 타고난 바를 밝혔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는 것은 순수지선(純粹至善)의 성(性)이니 이것이 소위 태극이요, ‘형체가 생기자 정신이 발한다.’는 것은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한 작용이다. ‘오성이 감동한다.’는 것은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ㆍ화ㆍ목ㆍ금ㆍ토의 성을 낳는 것이요, ‘선과 악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남성을 이루고 여성을 이루는 상(象)이요, ‘만사가 나온다.’는 것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상이다. 그리고, ‘성인이 중정 인의로써 정하되 정을 주장하여 인극을 세운다.’는 것은 또한 태극의 전체를 얻어서 천지와 더불어 혼합하여 간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랫글에 또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 등 네 가지와 합일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성인은 수행하는 행위에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 이에 이르지 못하여 수양하는 것은 군자가 길하게 되는 까닭이요, 이것을 알지 못하고 거스르는 것은 소인이 흉하게 되는 까닭이다. 수양하고 거스르는 것이 공경하느냐 방자히 구느냐에 달려 있으니, 공경하면 욕심이 적어지고 이(理)가 밝아진다. 욕심을 적게 하고 또 적게 하여 욕심이 무(無)에 이르면, 정(靜)할 때는 허(虛)하고 동(動)할 때는 곧아서 성인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위는 염계(濂溪) 주자(周子)가 스스로 만든 그림과 설(說)입니다. 평암 섭씨(平巖葉氏)는, “이 그림은 〈계사(繫辭)〉의 ‘역(易)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는다.’는 뜻을 유추하여 밝힌 것이다. 다만 역에서는 괘효(卦爻)를 가지고 말하고 이 그림에서는 조화를 가지고 말하였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야말로 도리의 큰 두뇌가 되는 곳이요, 또 백세(百世) 도술(道術)의 연원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이 그림을 첫머리에 내세운 것은 《근사록(近思錄)》에 이 〈태극도설〉을 첫머리로 삼은 의도와 같습니다. 무릇 성인을 배우는 사람이 근본을 여기에서부터 추구하고 《소학》과 《대학》 등에서 힘써 노력하여, 그 효과를 거두는 날에 이르러 하나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것이 이른바 ‘이(理)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는 것이며 이른바 ‘신묘함을 궁구하고 조화를 알아 덕이 성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서명(西銘)


第二西銘圖



건(乾)을 아버지라 일컫고, 곤(坤)을 어머니라 일컬으니, 나는 여기에 미소한 존재로 그 가운데 섞여 있다. 그러므로 천지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나의 몸이 되었고 천지를 이끄는 것은 나의 성(性)이 되었다. 백성은 나의 동포요, 만물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며, 대군(大君)은 내 부모의 종자(宗子)요, 대신(大臣)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것이요, 외롭고 약한 이를 자애하는 것은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 것이다. 성인은 천지와 덕을 합한 자요, 현인은 빼어난 자이며, 무릇 천하의 병들고 잔약한 사람들과 아비 없는 자식, 자식 없는 아비, 그리고 홀아비와 과부들은 모두 나의 형제 가운데 심한 환난을 당하여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이다.
이것을 보존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공경함이요,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은 효(孝)에 순(純)한 것이다.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仁)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못난 사람이요, 형체가 생긴 대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자가 오로지 부모를 닮은 자이다.
조화를 알면 그 일을 잘 계승하고 신묘한 이치를 궁구하면 그 뜻을 잘 계승할 것이다.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부모에게 욕됨이 없는 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는 것이다. 맛 좋은 술을 싫어하는 것은 숭백(崇伯)의 아들 우(禹)가 부모의 봉양을 돌보는 것이요, 영재(英才)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穎封人)이 효자의 동류를 만드는 것이다.
노고를 게을리하지 않고 부모를 마침내 기쁘게 한 것은 순(舜)의 공이요, 도망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 것은 신생(申生)의 공손함이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간 자는 증삼(曾參)이요, 따르는 데 과감하고 명령에 순종한 자는 백기(伯奇)이다. 부귀와 복택(福澤)은 장차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요, 빈천과 근심 걱정은 너를 옥처럼 연마하여 완성시켜 주는 것이다. 나는 살아서는 순종하여 섬기고, 죽어서는 편안히 돌아가리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서명이 ‘이일분수(理一分殊)’를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무릇 건으로 아버지를 삼고 곤으로 어머니를 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이일(理一)’이다. 사람과 만물이 태어남에 있어 혈맥을 지닌 무리는 각각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하고 그 자식을 자식으로 하니, 분수가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하나로 통합되었으면서도 만 가지로 다르니 천하가 한 집이고 중국이 한 사람과 같다 하더라도 겸애(兼愛)하는 폐단에 흐르지 않고, 만 가지가 다른데도 하나로 관통하였으니 친근하고 소원(疎遠)한 정(情)이 다르고 귀하고 천한 등급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만을 위하는 사사로움에 국한되지 않으니, 이것이 서명의 대강의 뜻이다. 어버이를 친근하게 여기는 두터운 정을 미루어서 무아(無我)의 공심[公]을 기르고,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힌 것을 보면, 어디를 가도 이른바 분수가 서 있고 ‘이일’을 유추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서명의 앞부분은 바둑판과 같고 뒷부분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 구산 양씨(龜山楊氏)는 말하기를, “서명은 ‘이일분수’에 대한 것이다. ‘이일’임을 알기 때문에 인을 행하고, ‘분수’임을 알기 때문에 의(義)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어버이를 친한 뒤에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뒤에 만물을 아낀다고 한 말과 같다. 그 분수가 같지 않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차등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쌍봉 요씨(雙峯饒氏)는 말하기를, “서명의 앞 1절(節)은 사람이 천지(天地)의 아들이 됨을 밝혔고, 뒤 1절은 사람이 천지를 섬기는 것을 마치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앞의 명은 횡거(橫渠)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 정완(訂頑)이라고 이름 붙였었는데, 정자가 고쳐서 서명이라 하였고, 임은 정씨(林隱程氏)가 이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대개 성학(聖學)은 인(仁)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모름지기 이 뜻을 깊이 체득하여야 바야흐로 천지 만물과 더불어 일체가 됨이 진실로 이러하다는 경지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을 실현하는 공부가 비로소 친절하고 맛이 있어서 망망(茫茫)하여 손댈 수 없는 걱정을 면할 것이요, 또 물(物)을 자기로 아는 병통도 없어져서 심덕(心德)이 온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서명은 뜻이 극히 완비되었으니, 곧 인의 체(體)이다.” 하고, 또 “이것이 가득 차서 다할 때에 성인이 된다.” 하였습니다.

소학제사(小學題辭)


第三小學圖



원(元)과 형(亨)과 이(利)와 정(貞)은 천도(天道)의 떳떳함이요,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는 인성(人性)의 벼리이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시초에는 착하지 아니함이 없어, 애연(藹然)한 사단(四端)이 외물(外物)에 감동함에 따라서 나타난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함과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함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떳떳한 성품[秉彝]이다. 이것은 순(順)한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성인(聖人)의 성품은 드넓은 하늘과 같으니, 터럭 끝만큼도 더하지 않아도 모든 선(善)이 충분하다. 보통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물욕에 가리어져 그 벼리가 무너지고 자포자기에 빠져 버린다. 성인은 오직 이 점을 가엾게 여겨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서 그 뿌리를 북돋우고 그 가지를 뻗게 하였다. 《소학》의 방법은, 물 뿌리고 쓸고 응답하며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하여 모든 행동에 거스름이 없이 행한 뒤에 여력이 있으면 시(詩)를 외고 글을 읽으며 영가(詠歌)하고 무도(舞蹈)를 하는 데도 생각이 지나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은 이 학문의 큰 요지이다. 밝은 명(命)이 환하여 안팎이 없으니, 덕이 높고 업(業)이 넓어야 그 본래의 본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옛적에도 부족한 것이 아니었거늘 지금이라고 어찌 남음이 있겠는가. 세대가 멀어지고 성인이 없어지니 경전이 쇠퇴하고 교화가 해이해져서 어릴 때부터 교육이 바르지 못하고 커서는 더욱 사치하여, 마을에 좋은 풍속이 없어지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없어서, 이욕(利欲)으로 어지럽고 잡된 말들로 시끄러워졌다. 다행히 사람이 타고난 떳떳한 성품은 하늘이 있는 한 없어지지 아니하니, 이에 옛날에 들은 것을 수집하여 뒤에 오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려 한다. 아, 아이들아 이 글을 공경히 배우라. 이것은 늙은 나의 노망한 말이 아니라 오직 성인의 가르침이시다.

어떤 이가, “그대가 바야흐로 사람에게 《대학》의 도(道)를 말하려 하면서도 《소학》의 글을 참고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학의 대소는 진실로 같지 아니하나 그 도는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릴 적에 《소학》을 익히지 아니하면 방심(放心)을 거두고 덕성을 길러서 《대학》의 기본을 삼을 수가 없고, 커서 《대학》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의리를 살펴 모든 일에 베풀어 《소학》의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어린 학도로 하여금 반드시 먼저 물뿌리고 쓸며 응답하고 진퇴(進退)하는 가운데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익히는 일에 스스로 진력하게 하고, 성장한 뒤에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에 나아가 지선(至善)에 머물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인데 무엇이 불가한가.”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또, “만약 나이가 장성해서도 이에 미치지 못한 자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고 물으니, 주자는 말하기를, “이미 지나간 세월은 진실로 소급할 수 없지마는, 그 공부의 차례와 조목은 어찌 다시 보충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들으니, ‘경(敬)’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聖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소학》을 공부하는 자가 이를 행하지 아니하면 진실로 본원을 함양하여 물 뿌리고 쓸고 응답하며 진퇴하는 절차와 육예(六藝)의 가르침을 삼가지 못할 것이요, 《대학》을 공부하는 자도 이를 행하지 아니하면 총명을 개발하고 덕을 진보시키며 학업을 익혀서 명덕과 신민의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때가 지난 뒤에 배우는 자가 성실히 이에 힘써서 그 큰 것에 나아가고 작은 것을 겸하여 보충한다면, 나아가는 데 있어 장차 근본이 없어 스스로 성취하지 못할 것은 근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 위의 《소학》은 옛날에는 그림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본서(本書) 목록에 의거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서 《대학》의 그림에 짝이 되도록 하고, 또 주자의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대학》과 《소학》을 통론한 설을 인용하여 두 가지를 공부하는 대강을 보였습니다. 대개 《소학》과 《대학》은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런 까닭에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학혹문》에서 이를 통론하였고 이 두 그림에서도 함께 수록하여 구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학경(大學經)


第四大學圖



《대학》의 도는 타고난 깨끗한 본성[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선(至善)에 머무름에 있다. 머무를 곳을 안 뒤에야 정(定)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진 뒤에 편안해질 수 있고, 편안해진 뒤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 얻을 수 있다. 사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시종(始終)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워질 것이다.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정돈하였으며, 그 집을 정돈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았다. 또 그 몸을 닦으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였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하였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앎을 지극하게 하였으니, 앎을 지극하게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연구된 뒤에야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뒤에야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며,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몸이 닦여지고, 몸이 닦여진 뒤에야 집이 정돈되고, 집이 정돈된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수신(修身)으로 근본을 삼는다.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법은 없으며, 후하게 해야 할 데에 박하게 하고 박하게 해야 할 데에 후하게 할 자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가 묻기를 “경(敬)을 당신은 어떻게 힘을 씁니까?” 하니, 주자는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일찍이 ‘마음을 오로지하여 잡념을 가지지 않는 것[主一無適]’으로 말하였고, 또 ‘정제(整齊)’와 ‘엄숙(嚴肅)’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인(門人) 사씨(謝氏 사양좌(謝良佐))의 말에는 ‘항상 깨어 있게 하는 법(常惺惺法)’이라고 한 것이 있으며, 윤씨(尹氏 윤돈(尹焞))의 말에는 ‘그 마음을 단속하여 어떤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있다. 한 마음의 주재(主宰)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그 힘쓸 방법을 알면 《소학》이 여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소학》이 여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면 《대학》이 여기에서 끝맺는다는 것도 같은 이치로 꿰뚫어서 의심 없이 알게 될 것이다. 대개 이 마음이 이미 확립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물을 연구하여 앎을 지극히 해서 사물의 이치를 다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말미암는다.’는 것이요, 이것으로 말미암아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몸을 닦으면 이것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것으로 인하여 집을 정돈하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에까지 미치면 이것이 이른바 ‘몸을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공손함을 독실히 하여 천하를 화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루라도 경(敬)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니, 경이라는 한 글자가 어찌 성학(聖學)의 시종이 되는 요긴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 윗글은 공자가 남긴 《대학》의 첫 장인데, 국초에 신하 권근(權近)이 이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장(章) 아래 인용한 《혹문》의 《대학》과 《소학》을 통론한 뜻은 그 설명이 〈소학도(小學圖)〉 아래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설만 훑어볼 뿐만 아니라 아울러 위아래 여덟 그림도 모두 이 두 그림과 통합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개 처음 두 그림은 단서를 찾아 확충하여 하늘을 본받고 도를 다하는 극치인 것으로 《소학》ㆍ《대학》의 표준과 본원이 되는 것이요, 다음 여섯 그림은 선(善)을 깨닫고 몸을 성실히 하며 덕을 높이고 업(業)을 넓히는 데 힘쓰는 것이니, 이것이 《소학》ㆍ《대학》의 바탕이며 사공(事功)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은 위에서부터 끝까지 통하는 것이니, 공부를 하여 효과를 거두는 데 있어 모두 종사하고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이 그와 같으니, 지금 이 십도도 모두 경으로써 주를 삼았습니다. 〈태극도설〉에 정(靜)만 말하고 경(敬)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주자의 주(註)에서 경(敬)을 말하여 이것을 보충하였다.

동규후서(洞規後敍)


第五白鹿洞規圖



내가 보건대 옛날 성현이 사람에게 공부하는 것을 가르친 뜻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하여 그 몸을 닦은 뒤에 이를 미루어 사람에게 미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그것을 기억하고 두루 보아 사장(詞章)을 짓기에 힘써 명성을 구하고 이록(利祿)을 취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는 상반된다. 성현이 사람 가르치는 법은 경(經)에 갖추어져 있으니,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숙독(熟讀)하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분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자신에게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책려한다면, 그 일상생활의 법도와 금지 규정을 어찌 다른 사람이 베풀어 주기를 기다린 뒤에 준수하고 좇을 필요가 있겠는가. 요즈음에도 학교에 규정은 있지만 학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천박하고, 그 규정도 딱히 고인(古人)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당(堂)에는 더 이상 그 규정을 쓰지 않고, 특별히 성현들이 사람들에게 학문하는 것을 가르친 바의 큰 근본을 취하여 위와 같이 조목조목 열거하여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들은 서로 강명하고 준수하여 이것을 몸에 실행하기를 기한다면,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바가 반드시 저 규정보다 엄격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고 혹 금지 규정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다면 이른바 규정이란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요 실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니, 제군들은 명심할지어다.
○ 위의 백록동규는 주자가 지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도에게 게시한 것입니다. 백록동은 남강군(南康軍) 북쪽 광려산(匡廬山) 남쪽에 있는데, 당(唐)나라 이발(李渤)이 여기에 은거하여 흰 사슴을 길러 데리고 다녔으므로, 이에 따라 백록동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남당(南唐) 때에 서원을 세워 국상(國庠)이라고 불렀는데 학도가 항상 수백 명이었으며, 송나라 태종이 서적을 나누어 주고 동주(洞主)에게 관직을 주어 권장하였습니다. 중간에 황폐해지자 주자가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 학도를 모아서 규정을 만들어 도학(道學)을 앞장서서 밝히니, 서원의 교육이 드디어 천하에 성행하였습니다. 신이 이제 삼가 규문(規文)의 본조목에 의거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서 보고 살피기에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대개 당우(唐虞) 시대의 교육은 오품(五品)에 있고, 삼대(三代)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동규(洞規)의 궁리와 역행(力行)이 모두 오륜에 기본을 둔 것입니다. 또 제왕의 학문이 갖추어야 할 준칙과 금지의 조목은 일반 학자들과 다 같을 수는 없지만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에 기본을 두고 이치를 규명하고 실행에 힘써서 심법(心法)의 절실하고 요긴한 것을 구하는 면에서는 같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이 그림을 헌상하여 아침저녁으로 시종하는 이가 아뢰는 잠언(箴言)에 충당하옵니다.
○ 이상 다섯 도(圖)는 천도(天道)에 기본을 두었는데, 공부는 인륜을 밝히고 덕업(德業)을 힘쓰는 데 있습니다.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


第六心統性情圖



임은 정씨(林隱程氏)가 말하기를, “소위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한다.’는 것은, 사람이 오행(五行)의 빼어남을 받아서 태어남에 그 빼어난 것에서 오성(五性)이 갖추어지고, 오성이 동(動)하는 데서 칠정이 나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그 성ㆍ정을 통섭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아니함이 성이 되는 것은 마음의 본체요, 감통(感通)하여 정(情)이 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장자(張子)가 ‘마음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합당하다. 마음이 성을 통섭하는 까닭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이 되고 또 ‘인의의 마음’이란 말도 있으며, 마음이 정을 통섭하는 까닭에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가 정이 되고 또 ‘측은한 마음ㆍ수오하는 마음ㆍ사양하는 마음ㆍ시비하는 마음’이란 말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성을 통섭하지 못하면 미발(未發)의 중(中)을 이룰 수 없어서 성이 천착되기 쉽고, 마음이 정을 통섭하지 못하면 절도에 맞는 화(和)를 이룰 수 없어서 정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성을 기르고 그 정을 단속하면, 배우는 방법이 얻어질 것이다.” 하였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學論)〉에는 그 정을 단속한다는 말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성을 기른다는 말의 앞에 놓여 있는데 여기에는 도리어 뒤에 있는 것은, 마음이 성과 정을 거느린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치를 따져 말하면 마땅히 정자가 논한 것이 순리라고 하겠습니다. ○ 그림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기에 조금 고쳤습니다.
○ 위의 세 그림 중에 맨 위에 있는 그림은 임은 정씨가 그리고 직접 설명을 하였고, 아래에 있는 두 그림은 신이 외람되게 성현이 말씀을 남겨 가르침을 드리운 뜻을 미루어 만들었습니다. 중도(中圖)는 기품(氣稟) 가운데 나아가서 기품이 섞이지 않은 본연(本然)의 성(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자사(子思)의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과 맹자의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과 정자(程子)의 이른바 ‘즉리의 성[卽理之性]’과 장자(張子)의 이른바 ‘천지의 성[天地之性]’이 곧 이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은 까닭에 그것이 발현하여 정이 된 것도 모두 그 선한 것을 가리켜 말하였으니, 자사의 이른바 ‘중절의 정[中節之情]’과, 맹자의 이른바 ‘사단의 정[四端之情]’과 정자의 이른바 ‘어찌 선하지 않은 것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정과, 주자의 이른바 ‘성(性)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것이 본래 선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정과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 하도(下圖)는 이(理)와 기(氣)가 합한 것으로 말한 것이니, 공자의 이른바 ‘서로 유사하다’는 성과, 정자의 이른바 ‘성이 곧 기(氣)요, 기가 곧 성’이라는 성과, 장자의 이른바 ‘기질의 성[氣質之性]’과, 주자의 이른바 ‘기(氣) 가운데 있으나 기는 기요 성은 성이어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성이 곧 이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은 까닭에 그것이 발현하여 정이 된 것도 이(理)와 기(氣)가 서로 의지하거나 서로 방해하는 곳을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예컨대 사단(四端)의 정은 이(理)가 발현함에 기(氣)가 따르니 자연히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지만, 이가 발현하여 미처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리어진 뒤에는 불선(不善)으로 흘러갑니다. 또 일곱 가지 정은 기가 발현함에 이가 타서 또한 불선함이 없지만, 기가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못하여 그 이를 멸하면 방탕하여 악이 되는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은 까닭에 정 부자(程夫子)는,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아니하면 갖추어지지 않으며,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아니하면 밝지 아니하니, 이것을 따로따로 분리하면 옳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맹자와 자사가 이(理)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불비한 것이 아니라 기를 아울러 말하면 성이 본래 선함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일 뿐이니, 이것이 중도(中圖)의 뜻입니다. 요약하면 이기(理氣)를 겸하고 성정(性情)을 통섭하는 것은 마음인데,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되는 즈음이 곧 마음의 기미(幾微)요, 온갖 변화의 중추인 것이니, 선악이 여기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진실로 경(敬)을 견지하는 데 오로지하여 이(理)와 욕(欲)의 분별에 어둡지 않고, 더욱 이에 삼가서 미발 상태에서 존양(存養)하는 공부가 깊고 이발 상태에서 성찰하는 습성이 익숙하여 참을 쌓고 오래 힘써 그 치지 아니하면, 이른바 ‘정밀하고 오로지하며[惟情惟一] 치우침이 없이 떳떳한 도리를 잡는[允執厥中]’ 성학(聖學)과 ‘체(體)를 보존하고 용(用)을 응(應)하는’ 심법을, 다른 데에서 구할 필요 없이 모두 여기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인설(仁說)


第七仁說圖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이 이것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아직 발현하기 전에 사덕(四德 인의예지(仁義禮智))이 구비되어 있는데, 오직 인만이 이 네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함육(涵育)하고 혼전(渾全)하여 거느리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생(生)의 성(性)이요, 애(愛)의 이(理)로, 이것이 인의 본체이다. 이미 발현된 즈음에는 사단(四端)이 나타나는데, 오직 측은(惻隱)만이 사단을 관철하고 있다. 그리하여 두루 흘러 관철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성(性)의 정(情)이요, 애(愛)의 발현으로, 이것이 인의 작용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미발(未發)은 체(體)이고 이발(已發)은 용(用)이며, 부분적으로 말하면 인은 체이고 측은은 용이다. 공(公)이라는 것은 인을 체득하는 것이니, ‘사심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고 하는 말과 같다. 대개 공은 인이요 인은 애이니,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은 그 작용이고 서(恕)는 인을 베푸는 것이며 지각(知覺)은 이것을 아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천지의 마음은 그 덕이 넷이 있어서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이라 하는데, 원은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것이 운행하면 차례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되는데, 봄의 생기(生氣)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그 덕이 넷이 있어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라 하는데, 인은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인ㆍ의ㆍ예ㆍ지가 발현하여 작용하면 애(愛)ㆍ공(恭)ㆍ의(宜)ㆍ별(別)의 정(情)이 되는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관통하지 않음이 없다. 무릇 인의 도는 곧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만물에 있어 정이 발현되기 전에 이미 이 본체가 갖추어져 있고, 정이 발현하면 그 작용이 무궁하다. 진실로 이를 본받아 보존하면 온갖 선(善)의 근원과 모든 행실의 근본이 이에 있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공문(孔門)의 교육이 반드시 배우는 이로 하여금 인을 구하는 데 급급하게 하는 까닭이다. 공자는 ‘사심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 하였으니, 이는 자기의 사심을 제거하고 천리(天理)로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체(體)가 있지 않음이 없고, 이 마음의 용(用)이 행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 ‘거처하는 것이 공손하고, 일을 하는 것이 공경스러우며, 타인에게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은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며,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공경으로 형을 섬기며 서(恕)로써 상대에게 미쳐 간다.’는 말은 이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 있어서는 끝없이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에게 있어서는 따뜻하게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사덕을 포함하고 사단을 관통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묻기를,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정자의 이른바 ‘애(愛)는 정이요, 인(仁)은 성이니, 애로써 인이라고 이름 할 수는 없다.’고 한 말은 잘못된 것인가?”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정자의 말씀은 애의 발(發)을 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한 것이고, 내가 논하는 것은 애의 이(理)를 인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대저 이른바 정과 성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그 분계(分界)는 같지 아니하나 그 맥락이 통하는 것은 각각 속한 바가 있는 것이니, 어찌 서로 떨어져서 상관하지 않겠는가. 나는 배우는 이가 정자의 말만 외고 그 뜻을 구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확연히 애를 떠나 인을 말하는 데 이른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이것을 논하여 그가 남긴 뜻을 밝혀낸 것인데, 그대가 정자의 말과 다르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묻기를, “정자의 문도 중에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가지고 인의 체(體)로 삼는 이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이란 이름을 해석하는 이도 있으니, 모두 잘못된 것인가?” 하니, 주자는, “만물과 내가 하나로 된다는 것에서 인이 사랑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의 체(體)가 되는 참모습은 아니다. 마음에 지각이 있다고 하는 것에서 인이 지(智)를 포괄한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란 이름을 얻게 된 실상은 아니다.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에 대한 자공(子貢)의 질문에 답한 공자의 말씀과 지각은 인으로 풀이할 수 없다는 정자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으니, 그대는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인을 논하는가.” 하였습니다.
○ 위의 인설은 주자가 짓고 아울러 그림을 만든 것으로, 남김없이 인도(仁道)를 밝혀낸 것입니다. 《대학》의 전(傳)에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친다.” 하였으니, 지금 옛 제왕들이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득한 묘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심학도설(心學圖說)


第八心學圖



임은 정씨 복심(復心) 는 말하기를, “적자심(赤子心)은 인욕(人欲)이 혼탁(混濁)하기 이전의 양심(良心)이요, 인심(人心)은 곧 욕심에 눈을 뜬 것이다. 대인심(大人心)은 의리가 갖추어져 있는 본심이요, 도심(道心)은 곧 의리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니, 실로 형기(形氣)에서 나온 것은 모두 인심이 없을 수 없고, 성명(性命)에서 근원한 것은 도심으로 된 것이다. 이 그림의 ‘유정유일 택선고집(惟精惟一擇善固執)’ 이하는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고, ‘신독(愼獨)’ 이하는 인욕을 막는 곳의 공부이니, 반드시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면 부귀가 마음을 음란하게 할 수 없고, 빈천이 마음을 옮기게 할 수 없으며, 위무(威武)가 마음을 굴하게 할 수 없어 도(道)가 밝아지고 덕이 성립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계구(戒懼)’ 이하는 천리를 보존하는 곳의 공부이니, 반드시 ‘종심(從心)’에 이르면 마음이 곧 체(體)요 욕(欲)이 곧 용(用)이며, 체는 곧 도(道)요 용은 곧 의(義)이며, 음성은 음율(音律)이 되고 몸은 법도가 되어서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얻고 힘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절도에 맞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이 모두 하나의 ‘경(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대개 마음이란 몸의 주재요 경은 또 마음의 주재이니, 배우는 이들이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설(說)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 및 그 마음을 수렴하라든가 항상 깨어 있다라는 설들을 익히 궁구하면, 그 공부가 극진하여 넉넉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위의 심학도는 임은 정씨가, 성현들이 심학(心學)을 논한 명언을 주워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많은 것을 꺼려하지 않고 분류하고 대치시켜서 성학(聖學)의 심법이 한 가지가 아니므로 모든 것에 공력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다만 얕고 깊은 것과 생소하고 익숙한 것에 대개 이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그 공부하는 절차에 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과 같이 선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가 의심하기를, 대개를 서술하였다고 하나 ‘구방심(求放心)’은 힘써 공부하는 초기의 일이니 ‘심재(心在)’ 뒤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구방심’은 얕게 말하면 진실로 제일 처음에 공부를 시작하는 곳이 되지만, 그 깊은 데 나아가서 극진히 말하면 순식간에 잠깐 생각이 어긋나는 것도 방심입니다. 안자(顔子)도 오히려 석 달 뒤에는 인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방심해서입니다. 그러나 안자는 잠깐 어긋났다가도 바로 이것을 알고, 알자마자 바로 다시 싹트지 못하게 하니, 이것 또한 ‘구방심’의 부류입니다. 그러므로 정씨의 그림의 서술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정씨의 자(字)는 자현(子見)이요, 신안(新安) 사람입니다. 은거하여 벼슬하지 아니하고, 행의(行義)가 매우 구비되었으며 늙도록 경(經)을 연구하여 깊이 터득한 바가 있고, 《사서장도(四書章圖)》 세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원(元)나라 인종조(仁宗朝)에 천거(薦擧)로 인해 불러서 곧 기용하려고 하였으나, 자현이 원하지 않아 향군 박사(鄕郡博士)로 삼자 벼슬을 내놓고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소견이 없이 함부로 이것을 지었겠습니까.

경재잠(敬齋箴)


第九敬齋箴



의관(衣冠)을 바로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처하면서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라. 발은 반드시 무겁게 놓고 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 땅을 가려 밟되 개미집도 피하여 돌아가라. 문을 나설 때는 큰손님을 뵙는 것같이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는 것같이 하여 조심조심 하여서 혹시라도 안이하게 처리하지 말라. 입을 다물기를 병(甁)처럼 하고 뜻을 방비하기를 성(城)처럼 하여 성실히 하여 혹시라도 가벼이하지 말라. 서쪽으로 간다 하고 동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에 간다 하고 남쪽으로 가지 말아서 일을 당하면 오직 거기에만 마음을 두고 다른 데로 좇지 않게 하라. 둘로 마음을 두 갈래로 내지 말며 셋으로 마음을 세 갈래로 내지 말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라. 여기에 종사하는 것을 경(敬)을 지킨다고 하니,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어김이 없이 표리(表裏)를 바르게 하라. 잠깐이라도 간단(間斷)이 있으면 사욕(私欲)이 만 갈래로 일어나서 불이 아니더라도 뜨겁고 얼음이 아니더라도 찰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의 자리가 바뀌어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실추될 것이다. 아, 아이들아, 깊이 생각하고 공경하라. 이제 경계의 글을 써서 감히 영대(靈臺)에 고하노라.
주자가 말하기를, “주선(周旋)이 규(規)에 맞는다는 것은 그 회전하는 곳이 규를 대고 그린 것처럼 둥글게 되고자 하는 것이요, 절선(折旋)이 구(矩)에 맞는다는 것은 그 꺾어 도는 곳이 구를 대고 그린 것처럼 모나게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의봉(蟻封)은 개미집이다. 옛말에 ‘말을 타고 의봉 사이로 굽어서 돌아갔다.’ 하니, 이것은 의봉 사이의 골목길이 구부러지고 좁아 말을 타고 그 사이를 구부러져 돌아가면서도 말 달리는 절도를 잃지 않은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다. 입을 다물기를 병처럼 하라는 것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요, 뜻을 방비하기를 성처럼 한다는 것은, 사악한 것이 마음속에 들어옴을 막는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경(敬)은 반드시 하나를 주장해야 한다. 처음에 한 개의 일이 있는데 또 한 개를 더하면 곧 둘이어서 두 개를 이루고, 본래 한 개가 있는데 또 두 개를 더하면 곧 셋이어서 세 개를 이룬다는 것이다. 잠깐 사이라는 것은 때를 가지고 말한 것이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난다는 것은 일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임천 오씨(臨川吳氏)는 말하기를, “〈경재잠(敬齋箴)〉은 모두 10장(章)으로 장마다 4구씩이다. 1장은 정(靜)이 어김없음을 말한 것이요, 2장은 동(動)이 어김없음을 말한 것이다. 3장은 표(表)의 바른 것을 말한 것이요, 4장은 이(裏)의 바른 것을 말한 것이다. 5장은 마음이 바르고 일에 통달함을 말한 것이요, 6장은 일을 하나만을 주장하되 마음에 근본을 둘 것을 말한 것이요, 7장은 앞의 6장을 총괄한 것이요, 8장은 마음이 옮겨 가는 병폐를 말한 것이요, 9장은 일을 하나만을 주장하지 못하는 병폐를 말한 것이다. 10장은 1편(篇)을 총결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경의 뜻은 여기에서 더 이상 더 설명할 것이 없으니, 성학에 뜻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되풀이해서 익혀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경재잠〉 제목 아래에 주자가 쓰기를,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가 남긴 뜻을 주워 모아 〈경재잠〉을 만들어 서재의 벽에 써 붙이고 자신을 경계하노라.” 하고, 또, “이 잠은 경의 조목으로, 그 설은 여러 경우에 해당됨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나름대로 각 경우의 설이 공부를 하는 데에 좋은 근거가 될 것이라 여겼는데, 금화인(金華人)인 노재(魯齋) 왕백(王柏)이 각 경우를 배열하여 이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가지런하게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으니, 항상 일상생활을 하면서 보고 생각하는 사이에 몸소 음미하고 깨닫고 살펴서 얻음이 있다면, 경이 성학의 시종이 된다고 하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第十夙興夜寐箴圖



닭이 울어 깨어나면 이것저것 생각이 차차 일어나게 되니, 어찌 그동안에 고요하게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고 때로는 새로 얻은 것을 생각해 내어 절차와 조리를 분명하게 알아 두라. 근본이 서게 되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차리고 단정히 앉아 몸을 추스른다. 이 마음을 다잡아 마치 떠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하고, 엄숙하고 가지런하며 허명(虛明)하고 정일(靜一)하게 하라. 그러고는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앞뒤에 있을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고분고분 공손히 듣고, 제자들이 문변(問辨)한 것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잡으라. 일이 이르러 응하면 행위에서 증험이 되니, 환하게 밝은 하늘의 명(命)을 항상 주시하라. 일에 응하고 나면 곧 나는 예전과 같아질 것이니,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정신을 모으고 잡념을 버리라. 동(動)과 정(靜)이 순환할 때에 오직 마음이 이를 응시하여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서, 정신을 둘로 나누지 말고 셋으로도 나누지 말라. 글을 읽다가 여가를 틈타서 간간이 유영(游泳)을 하여 정신을 이완하고 정성(情性)을 휴양하라. 날이 저물면 피곤해져서 흐린 기운이 쉽게 타고 들어오니, 재계(齋戒)하고 정제하여 정신을 명랑하게 하라.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면 손발을 가지런히 하고 사유(思惟)를 하지 말아서 심신(心神)을 잠들게 하라.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갈 것이니, 정(貞)하면 원(元)에 돌아온다. 생각을 여기에 두고 또 여기에 두어 밤낮으로 꾸준히 계속하라.
○ 위의 잠(箴)은 남당(南塘) 진무경(陳茂卿 이름은 백(柏))이 지어서 자신을 경계한 것입니다. 금화(金華) 왕노재(王魯齋)가 일찍이 태주(台州)의 상채서원(上蔡書院)에서 교육을 주관할 때 오로지 이 잠만 가르쳐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외고 익혀서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제 삼가 노재의 〈경재잠도(敬齋箴圖)〉를 본떠서 이 그림을 만들어, 그의 그림과 상대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경재잠〉은 공부를 해야 할 경우를 많이 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공부해야 할 경우를 따라 배열하여 그림을 만들었고, 이 잠은 시간에 따라 공부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때를 따라 배열하여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道)란 일상생활에서 유행하여 어디를 가도 없는 곳이 없으므로 한 자리도 이치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선들 공부를 그만두겠으며, 잠시잠깐도 정지됨이 없으므로 어느 순간도 이치가 없는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도란 잠깐 사이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떠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조심한다.” 하고, 또, “은밀한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곳이 없고, 세미(細微)한 곳보다 잘 나타나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번 정(靜)하고 한 번 동(動)함에 언제 어디서나 심성을 기르고 살펴서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과연 이와 같이 하면 경우를 놓치지 아니하여 털끝만큼의 차질도 없을 것이요, 때를 잃지 아니하여 잠깐 사이도 끊어짐이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를 병진하면 성인이 되는 요령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이상 다섯 그림은 심성(心性)에 근본을 둔 것인데, 요령은 일상생활에서 힘쓰고 경외(敬畏)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주B-001]차자(箚子) : 약식(畧式)의 소(疏)인데, 송 태조(宋太祖)가 얼굴에 위엄이 있으므로 신하들이 직접 말을 아뢰기 어려워서 할 말을 글로 써 올린 것이, 임금에게 차자를 올리는 시초가 되었다.
[주D-001]여분(旅賁) : 주나라 때의 관명으로 임금이 출입할 때에 창을 잡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직책이다.
[주D-002]훈송(訓誦) : 옛 성현의 교훈을 외어서 임금에게 들려주는 직책이다.
[주D-003]고사(瞽史) : 눈먼 장님이 점을 치고 글을 외어 들려주는 것이다.
[주D-004]장구령(張九齡)이 …… 것 : 장구령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정승으로, 당시 황제의 생일에는 신하들이 거울을 바쳐서 축하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장구령은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이란 책을 지어 올렸다. 그 책은 역대 정치의 잘하고 잘못한 것을 편찬하여 정치의 거울로 삼은 것이다.
[주D-005]송경(宋璟)이 …… 것 : 〈무일(無逸)〉은 《서경》의 편명인데, 주공(周公)이 지어 성왕(成王)에게 바친 것이다. 그 글은 부지런하고 안일하지 말라는 글이다. 이것을 당나라 송경이 도(圖)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주D-006]이덕유(李德裕)가 …… 것 : 당나라 이덕유가 경종(敬宗)에게 바친 것으로, 단의(丹扆)는 천자가 제후를 대할 때 뒤에 세우는 붉은 병풍이며, 육잠(六箴)은 〈소의잠(宵衣箴)〉ㆍ〈정복잠(正服箴)〉ㆍ〈파헌잠(罷獻箴)〉ㆍ〈납회잠(納誨箴)〉ㆍ〈변사잠(辨邪箴)〉ㆍ〈방미잠(防微箴)〉이다.
[주D-007]진덕수(眞德秀)가 …… 것 : 〈빈풍(豳風)〉은 《시경》의 편명인데, 〈칠월(七月)〉은 그 첫머리이다. 진덕수가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왕에게 올린 것이다.
[주D-008]공송(工誦) : 악공(樂工)이 시를 지어 임금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주D-009]기명(器銘) : 임금의 일용 기물에 명문(銘文)을 새겨 임금을 깨우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D-010]정임은(程林隱) : 정복심(程復心 : 1279~1368)으로, 임은은 그의 호이다.
[주D-011]방촌(方寸) : 사방 한 치란 말인데, 옛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이 가슴 밑 방촌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주D-012]깊이 …… 경지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주D-013]생겨나면 …… 있겠는가 : 《맹자》 〈이루 상〉에 보인다.
[주D-014]중화(中和)를 …… 공(功) :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첫 장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發)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그것이 발하여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과 화를 극치(極致)로 하면, 천지가 위치를 바로 하고 만물이 생육(生育)된다.” 하였다.
[주D-015]야인(野人)이 …… 정성 : 옛날에 들에 사는 백성이 미나리를 먹다가 맛이 좋으므로 그것을 임금에게 바치려 하였으니, 그것은 임금에게는 온갖 진미(珍味)가 있음을 모른 것이요, 또 한 사람은 추운 겨울에 떨다가는 따뜻한 햇볕에 등을 쬐다가, “이렇게 따뜻한 방법을 임금에게 아뢰겠다.” 하였으니, 그것은 임금에게는 따뜻한 방과 두꺼운 의복이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주D-016]원시 반종(原始反終) : 근원을 추구하여 그 마지막 결과를 알 수 있음을 이른다.
[주D-017]근사록(近思錄) : 주희(朱熹)가 그의 친구 여동래(呂東萊)와 함께, 주돈이(周敦頤)ㆍ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ㆍ장횡거(張橫渠)의 학설(學說)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주D-018]대학경(大學經) : 《대학》은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되어 있으며, 성인의 말씀인 경을 풀이한 것이 전이다.
[주D-019]동규후서(洞規後敍) : 동규는 백록동규(白鹿洞規)로 주희(朱熹)가 지은 것이며, 후서 역시 주자가 이에 대해 지은 것이다.
[주D-020]구법(九法) :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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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그림 병풍에 쓴 절구 8수

물가의 모래는 눈보다 희고 / 渚沙白於雪
오리의 가는 깃털 꽃처럼 곱구나 / 鳧毛嫩成花
너희들도 나처럼 한가하거니 / 汝曹閒似我
어찌 백구 나는 물결을 쓰랴 / 焉用□鷗波

비 온 뒤라 산도 물도 푸르른데 / 雨後山水綠
맑은 바람 언덕의 풀에 불어오네 / 光風吹岸草
조그만 물굽이에 물새들 모여 / 小灣集沙禽
화답해 우는 소리 그 뜻이 더욱 좋아라 / 和鳴意更好
들녘의 연못 봄물이 얕아지니 / 野塘春水淺

해오라기 고기를 엿보러 오네 / 窺魚來雪客
어떻게 하면 모든 생물 욕심이 없이 / 安得物無求
제각기 자기 생을 즐길 수 있을까 / 生生各自適

강가 모래톱에 기러기 떼 내린 것은 / 江洲乘雁下
곡식을 주워 먹기 위해서가 아니리 / 非有稻粱意
높이 나는 짝들을 따르지 못해 / 不逐冥飛羣
갈대를 입에 물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리 / □□銜蘆避

물과 나무새의 본성 즐겁게 하니 / 水木樂禽性
천기(天機)가 흔들림 없이 활발하여라 / 天機活無撓
마음이 신묘한 경지에 있지 않다면 / 不有意通神
붓끝에 어찌 교묘히 나타내리오 / 毫端能幻巧

오래 묵은 늙은 나무의 가지에 / 蒼然老樹枝
여기저기 까치들 앉아 지저귀누나 / 高下鵲査査
원래 일이란 이미 정해져 있건만 / 由來事前定
기쁨을 알린다고 사람에게 자랑하네 / 報喜向人誇

눈처럼 털이 흰 하얀 매가 / 白鷹白雪毛
만 리의 허공을 돌아다보네 / 顧視空萬里
가을의 산봉우리 끝에 우뚝이 서 있는데 / 崒立秋峯尖
강바람은 돌의 골수를 흔들 듯 부네 / 江風撼石髓

검은 매가 북극에서 날아오니 / 黑鷹北極來
칼 같은 그 날개 살기가 흐르네 / 劍翎馳殺氣
구태여 그 털에 피를 뿌려 무엇하리 / 何須灑血毛
이미 여우 떼들 두려워하고 있는데 / 已覺羣狐畏

[주D-001]백구 나는 물결 : 원문은 ‘ 鷗波’인데, 두보(杜甫)의 〈증위좌승(贈韋左丞)〉 시에 근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에 “백구가 드넓은 물결 위에 있으니, 만 리에 거침없이 나는 것을 뉘라서 길들이랴.[白鷗波浩蕩 萬里誰能馴]”라고 하였는데, 세사에 얽매이지 않고 호연히 떠나가는 것을 비유하며 한 말이다. 여기서는 ‘별달리 마음에 맞는 좋은 곳’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주D-002]갈대를 …… 것이리 : 기러기는 그물이나 주살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입에 갈대를 문다고 한다. 《시자(尸子)》 권 하에 “기러기는 갈대를 입에 물어 그물을 미리 피하고, 소는 진을 짜서 호랑이를 물리친다.[雁銜蘆而捍網 牛結陣以却虎]”라고 하였다.[주D-021]영대(靈臺) : 
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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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그림 병풍에 쓴 절구 8수

물가의 모래는 눈보다 희고 / 渚沙白於雪
오리의 가는 깃털 꽃처럼 곱구나 / 鳧毛嫩成花
너희들도 나처럼 한가하거니 / 汝曹閒似我
어찌 백구 나는 물결을 쓰랴 / 焉用□鷗波

비 온 뒤라 산도 물도 푸르른데 / 雨後山水綠
맑은 바람 언덕의 풀에 불어오네 / 光風吹岸草
조그만 물굽이에 물새들 모여 / 小灣集沙禽
화답해 우는 소리 그 뜻이 더욱 좋아라 / 和鳴意更好
들녘의 연못 봄물이 얕아지니 / 野塘春水淺

해오라기 고기를 엿보러 오네 / 窺魚來雪客
어떻게 하면 모든 생물 욕심이 없이 / 安得物無求
제각기 자기 생을 즐길 수 있을까 / 生生各自適

강가 모래톱에 기러기 떼 내린 것은 / 江洲乘雁下
곡식을 주워 먹기 위해서가 아니리 / 非有稻粱意
높이 나는 짝들을 따르지 못해 / 不逐冥飛羣
갈대를 입에 물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리 / □□銜蘆避

물과 나무새의 본성 즐겁게 하니 / 水木樂禽性
천기(天機)가 흔들림 없이 활발하여라 / 天機活無撓
마음이 신묘한 경지에 있지 않다면 / 不有意通神
붓끝에 어찌 교묘히 나타내리오 / 毫端能幻巧

오래 묵은 늙은 나무의 가지에 / 蒼然老樹枝
여기저기 까치들 앉아 지저귀누나 / 高下鵲査査
원래 일이란 이미 정해져 있건만 / 由來事前定
기쁨을 알린다고 사람에게 자랑하네 / 報喜向人誇

눈처럼 털이 흰 하얀 매가 / 白鷹白雪毛
만 리의 허공을 돌아다보네 / 顧視空萬里
가을의 산봉우리 끝에 우뚝이 서 있는데 / 崒立秋峯尖
강바람은 돌의 골수를 흔들 듯 부네 / 江風撼石髓

검은 매가 북극에서 날아오니 / 黑鷹北極來
칼 같은 그 날개 살기가 흐르네 / 劍翎馳殺氣
구태여 그 털에 피를 뿌려 무엇하리 / 何須灑血毛
이미 여우 떼들 두려워하고 있는데 / 已覺羣狐畏


[주D-001]백구 나는 물결 : 원문은 ‘ 鷗波’인데, 두보(杜甫)의 〈증위좌승(贈韋左丞)〉 시에 근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에 “백구가 드넓은 물결 위에 있으니, 만 리에 거침없이 나는 것을 뉘라서 길들이랴.[白鷗波浩蕩 萬里誰能馴]”라고 하였는데, 세사에 얽매이지 않고 호연히 떠나가는 것을 비유하며 한 말이다. 여기서는 ‘별달리 마음에 맞는 좋은 곳’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주D-002]갈대를 …… 것이리 : 기러기는 그물이나 주살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입에 갈대를 문다고 한다. 《시자(尸子)》 권 하에 “기러기는 갈대를 입에 물어 그물을 미리 피하고, 소는 진을 짜서 호랑이를 물리친다.[雁銜蘆而捍網 牛結陣以却虎]”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