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충무공 이순신장군 관련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 통제사(統制使) 충무이공(忠武李公)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篆題>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 이민서(李敏叙) 지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이정영(李正英) 씀.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지돈녕부사(行知敦寧府事) 겸 지경연사(兼 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衞都摠府都摠管) 김만중(金萬重) 전액(篆額)을 씀. 만력(萬曆: 明나라의 연호, 1573~1620년) 25(1597)년 정유(丁酉) 9월에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명량(鳴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이 크게 위축되어 다시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지역을 넘보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 적은 마침내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공(公)인데, 그 중에서도 명량의 전투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고 한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있다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비장한 각오로 병졸과 함께 서약을 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가 해안가로 침입하는 적군을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옥포(玉浦)에서 두 번째는 당포(唐浦)에서 그리고 다시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은 군대로써 많은 적군을 상대로 싸워 죽인 적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한산도(閑山島)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그 위세(威勢)가 크게 떨치니, 이에 나라에서는 공을 통제사(統制使)에 임명하여 삼도(三道; 慶尙·全羅·忠淸)의 수군을 다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한산도에 몇 해 동안 주둔하게 되자 적은 감히 바닷길에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 해에 이르러 적은 크게 병력을 동원하여 과거의 패전을 설욕할 생각으로 전력을 기울여 재차 공격해왔는데, 바닷길로 쳐들어와 바로 서울로 향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때 마침 공은 모함을 입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옛날의 통제사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균(元均)이 공을 대신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적과 싸우다가 적의 계략에 빠져 배와 병졸과 장비와 군량미 등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마저 적에게 빼앗겼다. 돌아보니 이미 패전한 뒤인지라 싸울 만한 군사가 없었다. 관문을 점검하고 바다 위를 부지런히 다니며 점차 도망간 군졸들을 모아들이고 전함(戰艦) 십여 척을 마련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아가 명량 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이 이르자 적군의 망루(望樓)와 노(櫓)가 바다를 덮는 듯 하였다. 공은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뱃머리를 나란히하여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누르는 듯하였다. 이를 본 우리 사졸들이 모두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공은 힘을 내어 병졸을 격려하며 기회를 틈타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은 모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웠고, 배는 나르는 듯이 적선들 사이를 출몰하며 대포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니 바닷물도 끓어오르는 듯 하였다. 이러는 동안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적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처음 전투가 벌어지려 할 때에 거제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衞)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이에 공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호령하며 좌우에 명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하니, 안위가 두려워 돌아와서는 여덟 번이나 용감하게 싸웠다. 이 날에 격파한 적의 배가 오백여척이며,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었다. 이 때에 남쪽 백성들이 전란을 피하여 공에게 와서 따르는 자들의 고기잡이 배가 백여 척이 되었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공이 이 배들을 나누어 바다에 띄어 놓아 마치 전투함인 것처럼 가장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배위에서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여 공의 군사가 적으니 응당 몰살당할 것이라 염려하더니, 적이 물러나고 싸움이 일단락되자 우리편의 배들만이 바다위에 우뚝 남아 아무 탈이 없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놀라 다투어 몰려와 치하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군대의 성세(聲勢)가 다시 크게 떨치게 되었다. 앞서 이일(李鎰) , 신립(申砬) 두 장군이 패전한 이후로는 관군이나 의병이나 모두 적을 만나기만하면 무너지고 패주하여 감히 적의 예봉을 조금이라도 막아내는 자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가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함에 미쳐서야 크게 적군을 섬멸하고 이어 삼도(三都)를 수복하였다. 그런 연후에야 우리 군대들도 점차 적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연안(延安)과 행주(幸州). 등지에서의 승전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는 모두 중국 군대의 위세에 힘입어 가까스로 그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하니, 공과 같이 한 지역 전체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적을 무찔러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적들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역을 차지한지 6,7년에 이르러도록 감히 서해안 지역으로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였던 것이다. 남원(南原)이 함락되자 적의 기세가 더욱 성하였으나 그저 쳐다만 볼 뿐 감히 나오지 못한 것도 모두 공의 덕분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량(露梁)의 싸움은 중대한 결전이었고 또 위대한 승리였으나, 공은 이 싸움에서 운명(殞命)하여 나라에 몸을 바치게 되었으며, 공이 죽자 적들 또한 이 땅에서 물러났다. 그 후 조정에서 왜란을 평정한 공을 논의할 때에 공을 으뜸으로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좌의정(左議政)의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노량에 충민사(忠愍祠)를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舜臣)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니 아산(牙山) 출신이다. 공은 평소에 거처할 때에는 부드럽고 온순하며 단아하고 조심스러워 마치 선비와 같았으나, 난리에 임하여 적을 토벌할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과감하게 내어놓으니 비록 옛날의 뛰어난 명장(名將)이라도 공에게는 미칠 수 없었다. 또 한번 충의(忠義)를 떨쳐 분발하면 그 기상이 해와 달을 꿰뚫고 귀신을 감복시킬 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가는 곳마다 능히 이겼으니, 그 위세는 옆에 있는 적군들을 두렵게 하였고, 그 의리는 중국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공과 같은 이는 예로부터 일러오는 이른바 진정한 장군으로 가히 국가의 대사를 맡길 수 있는 인물이니, 단지 한두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것만이 귀중한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그의 행동거지의 대범함이나 군사 작전의 책략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다른 저술에 자세히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노량을 지나면서 공의 전투지를 보고는 분개하여 탄식하며 한참 동안이나 이리저리 헤매며 그의 사람됨을 그려보곤 하였다. 지금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 그곳에 비를 새우고자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그 비문을 짓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이에 옛날에 들은 바를 대략 기록하고 이어 사(詞)를 짓는 바이다. 사(詞)에 이른다. 명량(鳴梁)의 입구여 좁고도 단단하니, 조수가 밀려오면 양쪽의 땅이 잠길 듯하구나. 지리를 잘 이용하여 기이한 계략을 내었으니, 새까많게 몰려들던 추한 무리들 버틸 수가 없었네. 사졸들이 분발하고 북소리 울리니, 잠깐 사이에 적들을 섬멸하여 말끔히 쓸어버렸다네. 오직 장군만이 용기와 의협심 모두 갖추어, 바닷길 지켜내니 바다에 아무 근심 없었다네. 성난 파도 부딪치어 마치 고래들이 달리는 듯, 옛 싸움터 바라보며 가슴 속에 영웅을 그리네. 영혼은 아름답고도 성하게 바다 한 편에 빛나고 있으니, 별들을 호령하고 바람과 천둥을 부리는 듯하도다. 이 바닷물 마르지 않고 돌이 닳지 않듯이, 밝고도 씩씩한 기상 영원토록 빛나리. 숭정(崇禎) 후 을축(乙丑)년 3월 일 지음.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전라우도수군절도사(行全羅右道水軍節度使) 박신주(朴新胄)가 무신(戊辰) 3월 일에 세우다. 감역(監役)은 출신(出身) 한시달(韓時達)이다 |
海南 李舜臣鳴梁大捷碑
崇禎後乙丑三月 日書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全羅南道 海南郡 門內面 鶴洞里) 1186-7번지에 있는 이순신명량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이다. 이 비는 1597년(선조 30년) 9월에 있었던 명량해전(鳴梁海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석비(石碑)의 형태를 따라,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꽂고, 그 위에 구름과 용을 장식한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것이다. 비문은 당시 예조판서(禮曹判書) 이민서(李敏叙)가 1686년(숙종 12년)에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서하집(西河集)』에도 전하고 있으며, 비신의 글씨는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정영(李正英)이 해서(楷書)로 썼다.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의 12자 전액(篆額)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쓴 것으로, 1688년(숙종 14년)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박신주(朴新胄)가건립하였다. 이 비는 일제시기에 경복궁(景福宮)으로 옮겨졌다가, 8·15 광복 이후에 원래위치로 옮기고 비각(碑閣)을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비문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우수영(右水營)의 건너편에 있는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 진을 치고, 우수영과 진도의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선단(船團)을 격파한 전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