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산행사진 1/삼각산 관련 문헌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아베베1 2014. 10. 1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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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정조 9년 을사(1785,건륭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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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7일 (갑오)
북한 산성의 안찰 어사가 된 신기의 보고 서계

교리 신기(申耆)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안찰 어사(按察御史)로 삼았다. 봉서(封書)에 이르기를,
“북한 산성은 곧 보루(保壘)의 중요한 곳이다. 총수(總帥)인 사람이 보수(補修)에 뜻이 없어 군기(軍器)·향곡(餉穀)·성첩(城堞) 등 여러 군무(軍務)를 포기(抛棄)하여 거의 모양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일찍이 신칙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찌 변란에 대한 방비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일전에 비록 수리(修理)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결단코 쓸모 없는 결과가 될 것을 알았으니, 조정에서 근본에 힘쓰는 정책(政策)은 의당 산성(山城)으로부터 해야 한다. 그 근만(勤慢)을 고과(考課)하도록 그대를 북한 산성 군기·향곡·성첩의 안찰 어사로 삼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곧 달려가 먼저 각문(各門)의 열쇠를 거두어 몰래 통하는 폐단을 엄중히 방지하고, 군기와 향곡을 점검(點檢)하고 돌아올 때에 성첩을 두루 살펴서 별단(別單)과 함께 등문(登聞)할 것이며, 성안의 민폐(民弊)와 승폐(僧弊)에 대해서도 마땅히 물어 보고 오라.”
하였다. 신기가 서계(書啓)를 올리기를,
“향곡(餉穀)은 산성을 관리하는 4개 창고와 군영(軍營)에 유치(留置)한 3개 창고 및 상하 창고(上下倉庫)에 비축한 쌀을 유용(流用)한 것이 오래도록 고질적인 병폐(病弊)가 되었습니다. 강창(江倉)에서 무역한 것은 경기도(京畿道) 읍(邑)에 나누어주었는데, 그대로 산성에서 수납할 가을 환곡(還穀)으로 삼았으며, 산창(山倉)에서 대출한 곡물은 경청(京廳)에 수봉(收捧) 유치하게 하였는데, 결국 산성의 향곡(餉穀)으로 허록(虛錄)을 만들었으니, 해마다 향곡이 감손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호조와 선혜청에서 대출한 쌀은 상환(償還)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대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양서(兩西)에 추가된 향곡은 신축년에 떼어 주게 된 것이었으나 처음부터 한 포대(包袋)도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또 관성소(管城所)의 2백 석(石)에 불과한데, 쌀을 교역하여 다른 곡식으로 바꾸고, 시일(時日)이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채워 수봉하지 못한 것이 5천 97석이나 됩니다. 대출하는 쌀과 대출하지 않는 쌀을 절반(折半)으로 한다는 법의(法意)가 엄중함에도 이리저리 흩어져 마침내 더 대출된 것이 5백 7석이요, 금년에 더 대출된 것만도 3천 석입니다. 다만 현재의 급선무는 무역한 쌀을 독촉 수봉하고 허위(虛僞)의 장부를 갖고 있지 말고, 곡물을 옮기는 폐단을 영구히 막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하창(下倉)과 평창(平倉)에서 은(銀) 대신 보관하는 돈[錢]은 없는데, 3천 2백 24냥이 되는 것으로 허위로 기록되어 있고, 을유년·정유년에 특별히 비축한 돈 6천 냥의 경우는 모두 사사로운 대출(貸出)이 되었으며 남아 있는 것은 3백 71냥입니다.
군기(軍器)에 있어서 화포(火砲)는 모두 쇠로 만들어서 정환(釘環)이 혹 탈락(脫落)된 것이 있으나 규격(規格)에는 그다지 손상이 없고, 교자궁(校子弓)이 그 다음이요, 조총(鳥銃)과 환도(環刀)가 또 그 다음입니다. 조총은 파손된 것 외에 자잘한 정환(釘環)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방아쇠가 순조롭지 못한 것은 장마 때의 습기 때문입니다. 환도의 피갑(皮匣)은 파손된 것이 많았고, 칼날은 그런대로 좋았습니다. 철식(鐵飾)은 거칠으나 온전하였으며 장전(長箭)·편전(片箭)의 원 수효는 흠결(欠缺)이 없었으나 치우(稚羽)는 거의 절반이나 손상되고 그을음으로 까매졌으며, 기치(旗幟)·취타(吹打) 등 기구(器具)는 파열(破裂)되어 대부분이 사용할 수 없었고, 동로(銅爐)·철정(鐵鼎) 등의 기구는 이지러지고 깨어졌으나 충분히 고칠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군기(軍器)의 원 수효를 비록 한번에 새롭게 보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금년에 보수하고 명년에 보수하여 계속적으로 쉬지 않는다면 거의 변란(變亂)에 대한 방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훈련 도감 창고에 소금 20섬은 구워서 1백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창고의 유치(留置)해 둔 장(檣)은 대개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작년 봄에 중흥사(重興寺)에 남아 있는 장 10독[甕]과 세 유영(留營)에 남아 있는 장 53섬[石] 영(零)은 개색(改色)하여 중[僧]과 백성들에게 내어주고서 아직도 새로이 담그지 않았으니, 지금은 허위로 유치하고 있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새 영(營)의 군기(軍器)는 산성에 견주어서 대체로 약간 나으나, 역시 파손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성첩의 주위(周圍)는 백운봉(白雲峰)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영취봉(靈鷲峰)에 이르기까지는 산세가 높고 험준하여 본래 성을 쌓지 않았으나 백운봉과 영취봉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두 건성(乾城)이 있고, 영취봉 산허리에서 비로소 성이 시작되어 북문(北門)에 이르렀는데 문루(門樓)는 갑오년의 재변(災變)을 치른 뒤에도 중건(重建)되지 않은 채 문의 자물쇠는 오랫 동안 잠겨져 있고, 홍예문(虹蜺門)은 아직도 완전합니다. 북문에서부터 솟아올라가 원효봉(元曉峰)을 이루었는데, 높고 뾰족하여 성이 끊어졌으며, 돌을 깎아 계단을 이루었습니다. 원효봉의 오른쪽은 단애(斷崖)로서 깎아지르듯이 내려갔고 곁에 층성(層城)을 끼고 있으며, 층성 아래에 암문(暗門)이 있습니다. 암문에서 돌아 내려가 평지(平地)를 이루었는데, 곧 북한 산성의 도수구(都水口)입니다. 양쪽 바위가 깎아 세운 듯하고, 좌우에 있는 성(城)의 모퉁이는 바위에 이르러 그쳤으며, 물은 그 사이로부터 나옵니다. 수구(水口)에서 대서문(大西門)으로 돌아 솟아올라 의상봉(義相峰)이 되었고, 의상봉에서 용출봉(龍出峰)·용혈봉(龍穴峰)·시루봉[甑峰]·나한봉(羅漢峰)·가사봉(袈裟峰)을 거쳐 문수봉(文殊峰)의 높고 깎아지른 곳에 이르러 성이 끊겼으며, 협곡(峽谷)을 지나간 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는 국령사(國靈寺)의 암문(暗門)이요, 시루봉과 나한봉 사이는 원각사(圓覺寺)의 암문(暗門)이며, 가사봉과 문수봉 사이는 가사 암문(袈裟暗門)이요,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의 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大南門)이 되었으며, 문선(門扇)대접철(大楪鐵)은 탈락(脫落)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대남문 오른쪽은 보현봉(普賢峰)이요, 보현봉 아래에 대성문(大城門)이 있는데 경진년에 영구히 폐쇄(閉鎖)한 뒤부터 문루(門樓)와 처마가 퇴락(頹落)하였습니다. 석가봉(釋迦峰)에 이르기 전에 암문 한 곳이 있고, 석가봉의 동쪽이 대동문(大東門)이 됩니다. 또 솟아올라 동장대(東將臺)가 되고, 용암봉(龍巖峰)과 만경봉(萬景峰)이 이어서 백운봉 왼쪽으로 연결이 됩니다. 동장대와 용암봉 사이에 암문이 있고, 만경봉과 백운봉 사이에 또 암문이 있습니다. 대체로 가사봉에서 용암봉까지 성첩(城堞)이 서로 연결되다가 용암봉의 중간층에서 그대로 성이 끊어지게 됩니다. 북서(北西)와 남동(南東)은 대략 이러하고 성첩의 형체는 백운봉에서 대성문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무너진 곳이 많으나 개석(蓋石)은 그대로 덮여 있고, 성벽(城壁)의 회(灰)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대성문에서 용암봉에 이르기까지는 개석이 기울어졌고 성벽의 회도 모두 떨어져 안팎 타첩(垜堞)이 거의 벌집과 같으며, 또 그 무너진 곳은 대성문 이남(以南)에 비해서 10배 이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신축년 무렵에 간간이 보수한 뒤에 지금까지 5년 동안에 애당초 한줌 흙이나 한 조각 돌의 역사(役事)가 없었고, 치첩(稚堞)의 무너진 곳에 대해서는 관할(管轄) 안의 승도(僧徒)가 감히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가려서 임시 변통을 했습니다. 체성(體城)·여성(女城)·성랑(城廊)·문루(門樓)의 무너진 곳 및 성문의 철물(鐵物)이 탈락한 수효도 역시 별단(別單)에 기록하였습니다. 금성 탕지(金城湯池)의 중요한 곳이 장차 쓸모 없이 될 터이니, 전란에 대한 대비를 위하여 마땅히 지금 고쳐 개혁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적간(摘奸)하는 길에 성안 주민(住民) 및 각사(各寺)의 승도를 불러 성교(聖敎)를 선포하고 널리 병폐를 물으니, 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르기를, ‘본성(本城)은 곡물이 생산되는 곳이 아닌데, 성안의 군량(軍糧)이 감축되면서부터 살기가 더욱 어려워져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 가서 그전의 5백 호가 지금은 2백 호에도 차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거주할 사람을 모집하고 배양(培養)할 방법으로는 오직 별파진(別破陣) 아병(牙兵)의 포료(砲料)를 더 창설(創設)하고, 성안 소임(所任)의 자리[窠]는 임진 절목(壬辰節目)에 의하여 본성(本城)의 원주민(原住民) 가운데에서 차출하여 채우는 일입니다. 산성을 수호(守護)하는 데에 있어서는 승려(僧侶)와 속인(俗人)이 똑같은데, 승군(僧軍)에게는 사료(射料)와 포료(砲料) 각 15자리[窠]가 있으나, 민병(民兵)의 경우는 다만 사료(射料)만이 있을 뿐이니 당초 창설할 때부터 뒤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신이 군기(軍器)를 검열할 때에 포구(砲具)의 쏘는 규식(規式)과 화약(火藥)과 탄환(彈丸)의 무게를 군교(軍校)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모두 자세히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한갓 그 기구(器具)만이 있을 뿐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포(砲)를 쏘는 급료(給料)있는 군관을 새로이 정하고, 겸하여 포(砲)를 쏘는 방식을 강(講)하여, 두 기예(技藝) 가운데 우수한 자는 급료있는 군관을 더 설치하여 임명한다면 민정(民情)을 위로하는 일과 무비(武備)를 강구(講究)하여 밝히는 요결에 있어서 일거 양득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을 삭직(削職)하였으니, 어사(御史)의 서계로써 비변사(備邊司)에서 죄를 논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원전】 45 집 530 면
【분류】 *인사(人事) / *군사(軍事)


[주D-001]양서(兩西) : 평안도와 황해도.
[주D-002]신축년 : 1781 정조 5년.
[주D-003]을유년 : 1765 영조 41년.
[주D-004]정유년 : 1777 정조 원년.
[주D-005]문선(門扇) : 문짝.
[주D-006]대접철(大楪鐵) : 가로로 엮어 놓은 큰 쇠붙이.
[주D-007]경진년 : 1760 영조 36년.
[주D-008]신축년 : 1781 정조 5년.
[주D-009]체성(體城) : 몸체가되는 성.
[주D-010]여성(女城) : 성바퀴.
[주D-011]금성 탕지(金城湯池) : 쇠로 된 성(城)과 뜨거운 물이 담긴 못으로서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을 가리킴.
[주D-012]적간(摘奸) : 비리(非理)를 적발함.
[주D-013]포료(砲料) : 급료있는 포수(砲手) 군관(軍官).
[주D-014]사료(射料) : 급료있는 사수(射手) 군관(軍官).

 

 

 

冠巖全書冊十八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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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北山城記 b_113_52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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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本高勾麗北漢山郡。一云南平壤。百濟溫祚王取之。十四年丙辰築城。近肖古王二十六年辛未移都。葢鹵王二十一年乙卯高勾麗長壽王來圍。葢鹵王出走城遂廢。我肅宗三十113_521b七年辛卯。卽溫祚舊址築城。以爲保障之所。城周七千六百二十步。爲二十一里餘。門有十四。曰北門,大東門,大西門,大成門,中城門作虹蜺設譙樓。小東門,小南門亦作虹蜺。西暗門,白雲峯暗門,龍巖寺暗門,東暗門,靑水洞暗門,扶旺洞暗門,袈裟堂暗門。高低不一。又有水門一而中城門在元曉義相兩峯之間。爲西邊水口。低下淺露。將㙜有三。曰東將㙜在奉聖庵後峯。南113_521c將㙜在羅漢峯東北。北將㙜在中城門西北。池二十六。井九十九。壬辰上駕幸。廵視城堞。歎其天作之險。盖山之形便。東西北絶險無地。而仁壽,白雲,萬景三峯屹立于後。稍西曰露積峯。下有重興寺。而萬景峯東轉逶迤。爲釋迦峴,普賢,文殊等峯。展翼爲兄弟。又南爲白岳山。而自文殊一枝轉西爲七星峯。七星出兩支。落爲羅漢甑峯,大望,義相諸峯。至重興水口。一支西走113_521d僧迦峯。香林寺後峯白雲峯。西轉爲靈鷲,元曉兩峯。至重興水口西止。四面諸峯壁立如削。自成城郭。眞所謂一夫當關。萬夫莫開之地。但山形局勢。殊不寬敞。恐難容衆。而重興之南。文殊之東。曹溪之西。左右洞壑。地勢少平。山谿之㝡著者曰三角山。山有仁壽,白雲,萬景三峯巑岏如角故名。一名華山。又稱華嶽。我東之山起於白頭。至平康之分水嶺。西出一支。連峯疊嶂。113_522a起伏迤邐。至楊州西南爲道峯。又爲三角。實京城之鎭。仁壽峯卽三角之第一峯。四面純石削立。一巖贅於峯背。故又稱負兒岳。高勾麗東明王之子沸流,溫祚。南行至漢山。登負兒岳。相可居之地。卽此峯也。白雲峯在仁壽之西。一名白雲㙜。卽山之㝡高處。萬景峯在白雲之南。峻拔奇壯。與仁壽爭䧺。露積峯在萬景之西。湧峙磅礴。形如露積故名。文殊峯在普賢西。下有文殊113_522b窟。中有甘泉。鍊石像文殊與五百羅漢。峯之名以此。侍者峯在白雲㙜下。登臨可盡一城之形勝。將軍峯在重興寺西。高麗崔瑩戰地故名。義相㙜在彌勒峯下。新羅義相祖師住錫處。元曉㙜在義相㙜北水口上。義相之弟元曉住錫於此。日月出,盤龍,化龍,潛龍,臥龍,天龍,紫丹,德藏,釋迦,普賢,走馬,靈鷲等峯。羅絡四方。不可殫記。太古,游仙,瑤艸,曲龍之㙜。長春,玉流,靑溪,靈泉,113_522c隱仙,叫龍,白雲,紫霞之洞。盤龍,月印,女妓之潭。國寧,祥雲之瀑。分占而擅勝。寺刹曰香林寺在碑峯南今廢。高麗顯宗庚戌之亂。移安太祖梓宮于是寺。丙辰還塟顯陵。戊午契丹蕭遜寧來侵。又移安于是。己未復塟。曰淸凉寺今廢。舊址未詳。高麗李資玄在淸平山。睿宗幸南京。遣其弟資德諭赴行在。留是寺。嘗引見問養性之要。待遇甚厚。曰僧伽寺在碑峯東今廢。高麗李䫨113_522d重修記云按崔致遠文集。昔有新羅狼跡寺僧秀台。飫聆大師之聖跡。選勝于三角山之南面。開巖作窟。刻石摸形大師道容。益照東土。國家如有乾坤之變。水旱之灾。禱以禳之。無不立應。曰文殊寺,曰편001重興寺,曰편002龍巖寺,曰편003輔國寺,曰편004普光寺,曰편005扶旺寺,曰편006元覺寺,曰편007國寧寺,曰편008祥雲寺,曰편009西巖寺,曰편010鎭國寺,曰편011太古十二寺羅列於前後峯巒之間而太古寺在重興寺左峰。高麗僧普愚住此。扁以太古。做永嘉體作歌。樓113_523a觀曰沆瀣樓在重興寺洞口。跨溪而有偃龍橋。上建重樓曰山映樓。在重興寺前。有小橋覆以閣。卽此樓也。曰洗心樓在西巖寺前溪上。行宮在上元峯下。內外殿爲五十八架。倉廩曰經理廳。上中下倉。三營門留倉。而並屬於捴戎廳。置管城將守之。古蹟曰古石城在重興寺北。周九千四百十七尺。有石門及門址。曰神穴寺高麗顯宗祝髮寓此寺。千秋太后屢遣人謀害。有113_523b老僧穴地於室而匿之。上置臥榻。以防不測。王咏溪詩云一條流出白雲峯。萬里滄溟路自通。莫道潺湲巖下在。不多時日到龍宮。曰閔公遺棲。卽高麗文仁公閔漬遺址。在水口門內。名其巖曰閔漬巖。寺曰閔漬寺。寺今爲西巖寺。余於十二日。自津寬寺道南門入城。一宿于重興寺。一宿于太古寺。周覽諸勝。逌東門下牛耳洞天。又一宿于在澗亭而還。卽十五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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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北漢記 庚辰 b_098_28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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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故百濟溫祚王舊址也。一名南平壤。距長安三十里許。山有白雲,露積,萬景三峯。屹立巑屼。如三角故曰三角山。實王城之鎭山也。峯巒水石。極其壯麗。盖其中多勝槩云。願欲一往遍覽。而不果如意。露花霜楓。虗送幾春秋也。常歎曰夫看盡天下好山水。此固大丈夫快事。而出遊遠方。又是爲人子之深戒。則雖不如古人一瓢一筇。搜遠探勝。窮耳目之所及。如098_289b彼咫尺名山。鷄犬相通之地。徒望而不能遊焉。何浮生一日之樂。如是不易得也。庚辰春。族兄用休氏約與同往。余欣然許之。數日後休兄騎驢先行。而余輒有故未偕。及休兄又有西遊之擧。而余乃有事于扶旺寺。始知好事之不共有也。然業已决意。何可中止。卽拂衣勇往。而前一日送崔柳兩人。先占勝地。設饌以待。遂以是月二十八日癸酉離發。念獨行踽踽。殊無奈何。惟有朴生願從許之。囊中裝得杜律一卷。花牋數片。步馬出彰義門。北望至數里。下馬休息。此時正暮春三月也。四林落花。韶光已晩。十里芳草。眼力098_289c如窮。流鸎綿綿於樹之上矣。嬌鳥啾啾於磵之中矣。飄然此心。已不在於紅塵間也。朴生盛稱蕩春臺之勝。逶迤前進。又至數里。卽其地銀瀑自北橫流。淸淺見底。水勢不甚壯麗。而流聲曲曲淸瀉。令人聽之。淡無物慾。中流有大石偃卧。平鋪瑩膩。上可坐百餘人。石品淸潤如玉。可以習字。雨洗雖不分明。其畫㨾依俙可見。聞城內近處。兒童時時出遊。因習字云。泝流而上。益多奇趣。欣然忘返。植杖盤桓。忽見畫閣樑上。揭堂號曰洗釰亭。數十步。又有巨石軒然削立。大書鍊戎㙜以刻之。摩挲吟眺感慨。有不盡之想。遂淸吟098_289d一詩。以消愁欝。逐流上下。輒坐忘起起忘步。從者以日勢將曛。난001扶上馬而行。馬上聞處處溪流。不絶在耳。雖心愛而不能悉領也。行復至五里。抵獨松亭。細雨乍作乍止。雲霧四塞。不辨咫尺。南望江天。泱漭無涯涘。恨不見其眞面。遂命奴策馬行行入山。山路險屈曲。馬不能行。幾乎顚跌者數三。前驅後推。步步甚艱。如遇絶險處。輒欲下馬徒步。而暴雨如注。殆不能收拾。且嫌泥濘。衣履沾汚。據鞍匍匐。催鞭前進。從者喘汗如牛。穿入數百步。四面諸峯。環擁簇立。層巖絶壁。聳翠如揷。仰之不知幾千仞。重之以松林葱098_290a欝。藤蔓交綴。遠望之。但蒼蒼然。馬上幽吟唐詩落花芳草無尋處。萬壑千峯獨閉門之句。俯視岸底石灘淺流淙淙而下。間有一條路逶迤曲折。見人先登者。始謂危不可言。及余至則不甚陜窄。回顧後人。又渺然也。行登大城門。石郭嵯峨。巖巒圍之。朴生爲我指點。余擧目視之。眼界平濶。大勝於獨松亭。而西南黑霧連天。江海以外。一色蒼茫。遠近島嶼。雖不能領略。兩岸杉松。隱隱可見。亦一奇也。捨馬徐步。且行且息。時陰雨終日驟下。人馬疲餒。衣襦盡濕。寒縮不可禁。欲尋村家。而四顧人烟蕭瑟。只御倉在東崖上。不得098_290b已往投直房休憇。喚從者取行槖中有藥果數立啖之。可以瘳飢。掩戶憊卧。見床上多儲書冊。靜中披閱。亦一奇趣。須臾從者報雨勢稍霽。請上馬從之。與朴生幷轡而行。到山暎樓。樓在遊仙臺傍。面前左右。諸峯屹立。直欲壓人。芊綿雜樹。羅列環圍。天然作一蒼翠屛障。奇秀如可掬。目下飛瀑從斷崖直下。長可六七尺。落聲汩汩活活。水中別無沙礫。只見大石之嶔崎犖确。槎牙齦齶者。布列交錯。水過之。必飛騰噴薄。聲震萬壑。或徐行爲潭。潭色綠凈如玻瓈。潭盡又遇層崖絶壁。輒復落爲瀑。瀑勢益壯。人過其傍。如聞風098_290c雷。咫尺見人談笑。而但知其形而不辨其語聲也。水洗石色。皆白晢可愛。解衣露坐。手掬淸溜以沃渴。味甚甘冽。沿流徘徊。淸興一倍。崔柳兩生。知余今日來抵。雨中携杖出迎。其情可尙。坐定叙日間寒暄。景孺誇道昨日上白雲臺。遊觀甚壯。使余心淸骨冷。一身如在半空。諸客要余就宿所。余亦以日色近昏。雨意不止。未暇遍覽。遂許之。使諸客前導。余與朴生扶杖隨其後。瀑聲初近漸遠。眞可謂無聲勝有聲。緩步前行。山回境僻。林深樹密。窈然別一隩區。盖此地去京至近。人人皆翫。故不知其爲勝界。而若在四五日程。098_290d則必以爲蓬萊瀛洲也。如是行數百步。山轉幽路轉深。路傍見一石峯峍兀獨立。高可十餘尺。上刻靑霞洞門。顧謂諸生曰。此洞中必有紫霞仙人。相視啞然而笑。遂前數十步。始有一松寺。寺名扶旺寺。古僧曇雲所刱也。前面是甑峯。狀如覆甑故名。後面是鵂巖峯。狀如飛鵂故名。右有羅漢峯。左有靈軸,龍巖,萬頃三峯。皆取物象以名。諸山面面排立。空碧如可掃。寺宇雖不宏麗。而飄然在山間。蕭灑甚可觀。徑投客舘。諸僧紛紛來拜。其面目頑憎。甚不踈雅。有一老偈名坦奇。年已六十餘。容貌淸恬。衣服蕭邁。頗有見識。足098_291a可與語。自道曾經揔攝。已二十餘年。卽今優游於海山間矣。炊僧報夕飯已具。海衣山菜。無非適口之味。在家之時。曾不能喫半器飯。到此飽了一盂。而猶不果然。盖人自奉甚厚者。珍羞滿盤。無下箸處。今余終日飢寒。故爲能甘其苦也。是夜與坦奇細論山水之勝。而憊甚不能談。翌日甲戌。陰雨不止。滿山雲霧掩門。悄坐懷思益寂寥。竟日無所事。已時始煎瓊液。午後雨稍息。扶筇出門。擧頭看山色。左右峯巖。一一崒奇拔。霽後洗出碧芙蓉。淡雲輕靄。掩其半面。呑吐出沒。百態萬狀。欲借龍眠手。憑把一幅丹靑。模出如098_291b許妙景而安可得也。山上多松木。山下有磵水。叢林窈冥。風鳴雨灑。萬壑吼怒也。如鼓淸瑟。如聆暴雷。隱几潛聽。不辨其音。久乃覺之。颼颼淅淅然者。乃松風也。冷冷汩汩然者。乃磵聲也。對此心魂了然。忽如御風乘虗。逍遙于廣莫無何之鄕矣。晩後爲春慵所困。倚枕晝寐。亂夢蘧蘧。一聲黃鳥。欠伸而起。日已黃昏。是夜雨聲如麻不絶。獨倚欄危坐。余自幼未甞離親側。今辭退已踰一日。思慕之懷。益不自勝。崔君好爲詭談。足供閑中一笑也。夜深滅燭就寢。乙亥朝雨快晴。仰觀松嶽。雲氣散如潑墨。僧言水聲山色。淸爽可098_291c賞。早飰後。與柳生朴生徒步出洞門。坦奇爲導。石路樹林葱茂。綠蘿被之。命從者折躑躅爲杖。行行下山。到處遇白石泉流。輒坐而聽之。不知前路之將迫。從余諸客。把我看作支離人。先到山편001樓少憇。起行數百步。山稍闢路稍濶。眼前三四峯。森然競秀。如揷翠䯻。如抽玉簪。峭巖奇壁。挾持掎角。若將橫揖酬酢。色甚黧黑穹隆不可狀。卽所謂仁壽,白雲,萬景,露積。是爲一山之正陽。李石灘存吾詩。三朶奇峯逈接天。虗無元氣積雲烟。仰看廉利攙長釰。橫似參差聳碧蓮。四句足以盡之矣。其曰仁壽者。三角之第一峯。四面098_291d純石卓立。一巖贅於峯背。故又名負兒嶽。高句麗東明王之子佛流溫祚南行至漢山。登負兒嶽。相可居之地。卽此峯也。其曰白雲者。在仁壽峯西。卽山之最高處。望之甚危懔。鑿石爲路。往來者皆攀附而上。不甚艱苦。而苟一跌足則俯身直墜而下。幾至于千萬仞也。余每一欲登臨。而自古有垂堂之戒。故不敢之。昔農翁甞言人嗜當歸菜。登毗盧峯者。皆好名之士。余則曰人食鰒魚。登此峯者。如先賢所指也。盖人之死生大矣。擇勝遊覽。不過一時之遣興。何必耽於遠視。跋涉危境。以冀僥倖之萬一也。然槩聞景孺所傳。098_292a眼界極其廣濶。遠近山川。無不通見。日色晴明。可達燕齊之境。而此則虗妄語也。東望則檜巖,彌智,雉岳,淸平,長古,白雲諸山也。南望則淸溪,天德,寶盖,舞鳳,淸明,鷲巖,伽倻,白華,衆王,鳥嶺諸山也。西望則來蘓,桂陽,文殊,摩尼,德積,松岳鳳勢諸山也。瞻望所及。甚快且遠。其曰萬景者。在白雲峯南。峻拔奇壯。與仁壽爭䧺。而秀麗過之。其曰露積者。在萬景峯西。竦峙磅礴。形如露積故名。重興洞古石城在此。余雖不登此峯遍觀。曾聞本朝李月沙廷龜云甞登最高頂而望之。西南大海。遠自靑齊。浮雲落日。銀界茫茫。目力有098_292b盡而望勢無際。所可記者。水落,峩嵳,冠岳,淸溪,天磨,松岳,聖居諸山。累累如丘垤。月溪峽坼。驚波西注。漢水一帶。如拖氷綿灣回。環繞王都。遙峯亂嶼。隱見雲際。都城百萬家。逼近不能見。但見脚底炊烟。粧點一活畫。雲隙露一螺鬟。知是終南山也。推此可知此山之高且壯矣。盖此三峯對立峭危。而萬景東轉逶迤。爲釋迦峴,普賢,文殊等峯。文殊展翼爲兄弟兩峯。又南爲狗蹲白岳山。而自文殊峯一枝轉西爲七星峯。七星出兩枝落爲羅漢,甑峯,穴望,義相諸峯。至重興水口。一枝西走爲僧伽峯,香林寺後峯。白雲西轉爲098_292c靈鷲,元曉兩峯。至重興水口而止。八面諸嶺。鐵壁如削。自成城郭。人難接足。前代之居于我國者。若早築城址。豈有失守之患哉。其他簇簇峯巒。不可勝記。於是携諸客。步上重興寺。寺在登巖峯下。古寺只有三十間。及築城後。增建爲百餘間。樓觀頗宏麗。金碧爛然。至極樂殿。別無所見。惟三佛巍然獨坐耳。因尋太古寺。寺在太古臺。卽重興左峯。古僧普愚所刱也。普愚爲麗朝恭愍王國師。號太古謚圓凈。以太古倣永嘉休。作歌一篇。及死李牧隱穡撰碑銘。坦奇爲余指點。余從而見之。碑石長數十餘尺。廣四五尺。四邊蒼098_292d苔蕪沒。自腰以下。剝落不可識。拄杖讀之。得拜我太祖大王諱字於碑文中。古跡宛然如昨。回首健陵。不禁悽愴。因攀緣而上。石逕倒危如懸。余素不習山行。氣疲力盡。喘汗沾背。輒五步一休。諸客挽扶以行。至數百步。有大石純圓隆然。如雲龜之伏于淵而出其頭。此爲太古寺之主峯。而將軍,走馬兩峯。角立相對。松檟檜栢。偃蹇樛互。晴嵐蔽之。是日日氣甚熱。脫上袍付從者。幅巾單衣。露坐石上。俯瞰巖下。雲林深邃。顧謂景孺曰。此可十仞歟。景孺曰。不知其幾千仞。余笑曰。十尺爲丈。十丈爲仞。此峯雖高。豈可曰千仞。098_293a景孺不以爲然。但相笑而罷。遂復行百餘步。有東將臺。臺下有御需齋。如遇患難時。鑾輿來住于此臺。而此厨所以備御供處也。臺高三層。其上別無樓閣焉。登城上俯臨地底。杳茫不可測。始悔前言之卛爾。中立四顧。惝怳無際涯。遠山出沒。但見蒼黛。江水澒洞。不辨洲渚。騁目徘徊。飄飄然身如羽化。一擧千里。足接三島十洲。而見安期,赤松也。西望長安。而爲羣山所蔽不可見。眞可謂正面墻而立。與諸客鼎坐于芳草上。朗吟一詩云云。下視奉聖庵。結搆奇妙。僧棲甚可羡也。少焉日色將西。山風吹衣。忙起而行。更尋山098_293b逕。氷崖多躑躅花。在枝者甚稀。春色可愛。放仗疾趨。路甚傾側。直下數百步。人言下山勝上山。今試之果然。終日奔走。脚力蹣跚。心氣困懶。不復游目搜覽。直投別館。家伻自京來傳書札。知兩堂安報。喜可知也。初一日丙子。初二日丁丑。雨收天晴。坐料溪山之趣也。應不改於昨日。而爲煎瓊丹。不得閑漫出入。深鎖空山。甚沓沓也。僮僕朝往夕返。而洛城如隔千里。同來之客。雖至三四人。而猶欠其寂寥。靜中一日。如過三秋。仲父以初三日戊寅發駕。朴致和,金興澤,河希瑞,李士悅諸人。亦皆隨行。午炊普光寺。日晡當抵此098_293c寺。余聞之喜躍不勝。與景孺迎候於山暎樓。日將夕矣。久絶跫音。但聞樓下流水濺濺然。心愛之。下憇磐石。手弄淸流。使景孺高唱편002乃曲。歌聲半雜水聲。隱隱入耳。時見游魚數十頭吹浪游戱。從容自得。襟懷益閑穩淡蕩。俄而忽聞樓上喧噪聲。諸客陪仲父來到。驚喜不可言。忙步登樓。拜問安否。因侍坐良久。仲父亦盛稱溪流之好。比近都諸勝處。淸潭,楓溪無以過之。且一夜春雨。水石益蒨潤淸편003可佳。受瀑處䟽鑿爲石潭。潭水又與衆流洞滙而下流若織紋。盖山之秀麗。不及於楓溪。水之奇爽。不及於淸潭。而二者之098_293d勝兼之。不必讓頭於兩處也。况是萬山落照。無限啼鳥。半餉幽吟。不知歸之將晩。須臾天光漸暝。林木蒼然。始拂衣而起。返尋寺路。至靑霞洞少息。坦奇僧迎入別舘。初四日己卯。仲父欲出遊。喚余隨行。余以連夜失睡。神氣眩亂。而不得已從之。舘中只留崔朴兩人。其餘諸客皆願往許之。早飯出白雲洞。過遊仙㙜下。山回路夷。別無巖石之崎嶇。沿溪而行。但聞水聲激激淸瀉。勝處殆不可一二數。前行數百步。始到中城門。門在元曉,義相兩峯之間。俯倚城堞以臨之。飛瀑從水口直瀉數十尺。落處聲如碎玉。注處聲如震098_294a雷。見之甚快爽也。瀑下爲澄潭。潭色深黑不可測。天晴日朗。倒影波底。又一奇觀。途遇吹簫者。與之偕到城上。使臨風弄之。景孺和而歌。歌簫相應。如出一口。聲極淸雅。水爲之停流。又行數里。上西門譙樓。去寺稍遠。始見往往行人。與坦奇共尋水口瀑。穿入林間。行十餘步。得溪上白石陂陁㒹委。橫亘十數步。衆流橫曳折曲而下。石上有广簷。可庇風雨。磐石澄流。實爲一城之最。步步至水口。瀑勢澎湃吼怒。勢甚可畏。會日暮風力頗多。懸空直下。雪浪騰踴。如垂長虹。如注天河。奇逸不可狀。布作水簾。飛沫噴薄襲人。面髮098_294b皆滋。如在雨中。吾未見廬山之正陽而恐未勝也。盖城內泉源。出自文殊峯北邊。沿溪奔流。至重興寺石橋前。與重興橋合流。歷偃龍橋。與山暎瀑又合。入靑霞洞爲女妓潭。至中城瀑。而瀑勢始䧺。又下數里。與國寧瀑並流。直抵倉石橋。復與祥雲瀑合。卽出自白雲峯泉源也。至半里爲七遊巖下潭。又走數十步。仍作此城水口也。水口之水。曲曲流瀉。至二里許。與老姑山達峴淸潭爲一源。又與聖庵津寬寺泉溪合流。自古稱重興川者此也。自津寬川以下。地是平原。無灘聲。抵昌陵撥站。布流至三十里許。杏州江幷入于098_294c海口。原其所自。遠且長矣。乍立水口。水勢凜然。不可久處。遂下憇洗心樓。樓後有西巖寺。古僧廣軒所刱也。高麗隱士閔漬所居遺址在傍。故曰閔漬寺。今改爲西巖寺。本朝鄭東溟斗卿詩。閔老幽棲處。樵夫亦自傳。小微星不見。七里灘依然。至今五百餘年。相傳爲山中異事。寺樓之宏大遜於重興。而綺麗過之。因出寺後。穿林攀石行數百步。出西門路。兩崖松栗森然。間有一村家。寒烟蕭瑟。山出門見客而吠。忽疑此中是武陵花竹。而身是漁舟子之來訪也。踟躕少頃。奇僧勸余起步。前路稍夷。意謂險阻盡於此矣。行098_294d數里。又得石逕崎傾仄。危不可狀。挽緣而上。步步益艱。河令年已白髮。而步屧如飛。如我少年。反不如老人脚力。尤可歎也。行觀祥雲瀑。坐于石上。家伻來到。知親候之安。稍慰病懷。仍上祥雲寺別舘。仲父與諸人射小的于林下。而余困甚。一枕午睡。覺罷。日欲西矣。午炊後。轉上西將臺。㙜高下於東將㙜。露積爲主脉。而後有數峯兀立卽三角。而其下羣山布列。如子孫北面。牙缺望際頗濶。京江以外。黛色莽蒼。溫陵案山養木處。可以指點矣。西南所見。與東將㙜大槩相同。而雲烟間。隱隱見島嶼而已。座中諸人。各賦一098_295a絶。余亦與焉。仰見白雲㙜上。晴靄出峀。孤松倒壁。翠崖蒼巒。一一呈露。直欲乘風上天而不得。怊悵倍之。農翁所謂人生我國而不見金剛。如過魯而不見孔子者。正謂此也。懷思悠然。彷徨久之。乃下尋歸路。過輔國寺前。直抵山暎樓。俯看石上泉流。流聲曲曲可聽。看山之餘。興又不减。命僧取白粉淸油來。煮花于松間。世外滋味。盡在於此矣。黃昏來投宿所。是日與景孺,致和,興澤三人。中途相失。始知西門看瀑之際。適相交違。三人終日苦待于樓上。飢困先歸也。余笑謂曰。仙界深幽。只許如我佳客相尋。不敎如君俗士098_295b去見。一日遊翫。不亦有數乎。因相顧戱笑。是夜枕藉團歡。而離家已近十日。歸思益切。初五日庚辰。瓊丹始熟。早起發行向洛。與坦奇分手。謂曰北漢花時之遊。其亦樂矣。而猶不及於晩秋。當待楓菊。極意搜索也。遂步出靑霞洞。入管城闕。一覽踰嶺而行。諸客從山下過。細雨微灑。不至濕衣。入林行數十步。山僻樹密。不見天色。出大城門。東望海天。甚濶如也。別是烟霞世界。遠近江山皆入眼。而爲雲嵐所塞。如何得見。復起前行。暫憇獨松亭。跨馬出平地。更尋洗釰亭。溪石甚爽麗。而昨見西門中城。故眼小不足觀。觀於海098_295c者。信難爲水也。入小林庵。庵在絶壁空虗中。綢繆極精妙。佛像以粉白爲塑。其餘別無可觀。上馬而行。歷淸風溪。溪流潺湲。上有太古亭。亭下有三淵。卽淵翁兄弟舊遊處。巖上刻百世淸風四字。尤翁手蹟也。陳跡凄凉無問。爲之悵然。拜謁仙源先生影堂。遺像凜然如生。而先生之墓木已拱矣。感慨遲回者久之。從者輒相催廹。策馬登程。午後來歸到家。塵垢依舊滿面。余遊北漢合七日。而其遊翫不過數三日。追書所歷。爲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