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4.12. 7. 진천두타산 산행

2014.12.7. 진천두타산 산행 스크랩

아베베1 2014. 12. 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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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충북 진천의 두타산(598m)입니다. 오늘 산행은 두타산의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한반도를 닮은 지형도 보고 약14km를 6시간 동안 걸었습니다.
지난번 첫 눈이 내린 뒤로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어 눈이 녹지 않아 산행하는 동안 내내 눈길을 걸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한걸음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효과음도 좋았습니다. 이제야 재대로 된 겨울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ㅎㅎ
오늘 산행을 리딩하신 인테리어회장님과 미미요총무님 엄청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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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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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부 언행록(附言行錄)
형조 판서 이공(李公)의 시호를 청한 행장 정해년(1707, 숙종 33)


공은 휘가 시발(時發)이고 자가 양구(養久)이고 성이 이씨(李氏)이니, 신라 개국 공신으로 알평(謁平)이 있었는데 경주(慶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에 금서(金書)가 있었는데 삼한 공신(三韓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후 정승을 지낸 임해군(臨海君) 진(瑱)과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 부자(父子)가 크게 현달하였고, 익재의 문장과 덕업은 중국에까지도 크게 알려졌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윤인(尹仁)이 창평 현령(昌平縣令) 공린(公麟)을 낳았는데,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바, 세상에 전하기를 음덕(陰德)이 있어서 8남을 두었다 한다. 셋째가 예조 좌랑 휘 원(黿)인데, 정직한 도를 지키다가 연산군의 갑자사화에 죽으니, 세상에서 재사당(再思堂)이라고 칭하였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발(渤)을 낳았으니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경윤(憬胤)을 낳았으니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대건(大建)을 낳았으니 진사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일찍부터 문장과 행실로 태학에서 명성이 높았다. 배위(配位)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부사직(副司直) 김도(金燾)의 따님이니,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 2)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6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족조(族祖)인 서계(西溪) 이덕윤(李德胤)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장이 날로 진전되어 과장(科場)에서 여러 번 장원하였다. 21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갔으나 스스로 나이가 적고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다시 돌아가 서계를 섬겼다. 조정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이때 대부인이 청주(淸州)에 있어 적의 칼날이 이르게 되자 공은 서울에 있다가 달려가서 문안하고 대부인을 보호하여 피난하였다.
대가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하여 문안할 길이 막히자, 공은 마침내 의병장 박춘무(朴春茂)를 따라 격문(檄文)을 초해서 1000여 명을 모병하고 옆 고을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을 공격하여 쫓아냈다. 계사년(1593)에 도성에 있던 왜적들이 물러가자, 강서(江西)의 행궁(行宮)으로 달려가서 상소하여 환도(還都)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가 상소문을 보고 감탄하기를, “난리가 일어난 뒤로 이러한 의논이 없었고 이러한 문장이 없었다.” 하였다.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병법을 잘 안다고 알려졌다. 이에 선조(宣祖)는 문신 중에 후일 장수를 맡길 만한 자를 선발해서 접반사(接伴使)로 차임하여 병법을 배우게 하도록 명하였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공을 천거하였는데, 낙상지가 공을 보고 놀라 탄복하기를, “중국에도 이런 사람은 드물다.” 하고, 마침내 대부인(大夫人)을 당에서 배알하였다. 공이 돌아오려 하자 낙상지는 상에게 천거하기를, “이모(李某)는 기특한 재주이니, 대왕은 크게 등용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갑오년(1594)에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으로 있다가 천거되어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에 제수된 지 사흘 만에 특별히 전적으로 승진하고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병조 좌랑으로 옮기고 훈련 도청(訓鍊都廳), 한학 교수(漢學敎授),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였다.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언로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논박하기를 몹시 맹렬히 하였다. 공이 인피하여 체직하고 사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오성부원군이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공이 군대의 일을 익숙히 안다 하여, 임금께 아뢰어 병조의 낭관으로 돌아와 자신을 돕게 하니, 춘추관 기사관과 문신선전관(文臣宣傳官)을 겸하였다.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이 칙명을 받들고 동래(東萊)에 있는 왜군의 진영으로 들어가자, 상은 문신 한 사람을 뽑아 그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중국인 복장으로 변장하고 수행하여 왜적의 실정을 정찰하였다.
을미년(1595)에 복명하고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암행어사로 호서 지방을 순찰하고 겸하여 호남의 조련을 관장하였다. 조사(詔使) 이종성(李宗城)이 오자, 어전 통사(御前通事)로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일이 끝나자 채단(綵段)을 하사하여 공의 민첩함을 장려하였다. 다시 호서에 파견되고 성균관 사예로 승진하였다.
병신년(1596)에 홍산(鴻山)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즉시 보고하고 부하(部下)의 병력을 내어 토벌하였으나 미처 싸우기도 전에 적이 이미 평정되었다. 상은 공이 위급할 때에 분발하여 급히 달려간 것을 가상히 여겨 장악원 정으로 승진시켰는데, 시기하는 자가 역적의 변고는 본래 이모(李某)가 조련하느라 백성을 소요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공은 사직하여 안찰하는 임무에서 체직되고 청주로 돌아왔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공을 종사관으로 부르니, 이때 왜적들이 다시 침공한다고 큰소리를 쳐서 중외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찬획사(贊劃使)로 충주(忠州)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지켰으며, 또 조령(鳥嶺)에 목책을 설치하여 굳게 수비할 계책을 세웠다.
정유년(1597)에 왜병이 과연 크게 침입하였는데, 호남 지방을 따라 호서로 돌아 진출하였다. 공은 성을 버리고 청주로 돌아와 싸웠으나 수하의 병력이 너무 적어서 상대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는데, 얼마 후 왜병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명나라 군대에게 격파당하고 도망해 돌아갔다. 공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추격하여 의성(義城)까지 갔다가 돌아와 다시 충주에 주둔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길을 나누어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공은 분호조 참의(分戶曹參議)에 제수되어 군량을 관장하였다. 얼마 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말하는 자가 청주에서 패전했다고 배척하여 새로 제수한 명령을 환수하였다. 그러나 분호조 참의의 임무는 예전과 같이 맡았으며, 또 대신을 대리하여 양 경리(楊經理)의 접반사가 되었다.
무술년(1598)에 분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경주(慶州)에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공은 보고 들은 것을 참작하여 불편한 상황을 아뢰어서 마침내 성을 쌓으라는 명령이 중지되었다. 이어 호조 참의로 충주에서 군량을 관장하였으며, 기해년(1599)에 다시 영남의 도백에 제수되었으나 헌납 박경업(朴敬業)이 공에게 묵은 원한이 있어 그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겼는데, 새로 전란을 겪은 뒤를 당하여 군사와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해서 치적이 크게 드러나니, 고을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렸다.
신축년(1601)에 다시 영남의 도백으로 승진하니, 이때가 세 번째 제수된 것이었다. 대구 부사(大邱府使)를 겸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는데, 도백이 된 지 1년 만에 선비와 백성들이 화합하였다.
임인년(1602)에 상소하여 복수하는 의리와 스스로 강하게 하는 계책과 변방을 대비하는 형세의 편의를 아뢰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경상도에 있으면서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공은 한 번도 문안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이에 노하여 자기 무리들을 사주해서 공을 탄핵하게 하였으며, 또 직접 상소를 올려 감사가 권속을 데리고 감영에 머무는 폐단을 논하였으니, 이때에 공이 막 대부인을 봉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은 그들이 원한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을 알고는 따르지 않았으며, 계묘년과 갑진년에 이르러 연달아 연임하도록 명하였다.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이 이때 도내에 머물면서 공과 함께 수륙을 방어하는 여러 가지 일을 깊이 헤아려 《주변록(籌邊錄)》이라는 책을 만들어 고실(故實)에 대비하였는바, 진주(晉州)의 병영과 고성(固城)의 통영(統營)은 모두 공이 계획한 것이었다.
갑진년(1604) 가을에 비로소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으며, 형조와 병조의 참판으로 옮기고 또다시 도총부 도총관, 실록청,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을사년(1605)에 북쪽 오랑캐 홀추(忽酋)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공을 가려 뽑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공이 뜰에서 하직할 때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선온(宣醞)하였으며, 또 활과 화살, 표범 가죽과 말안장을 하사하였다. 공이 진영에 이르자 홀추가 사죄하고 화해할 것을 청하므로 조정에 보고하고 그들의 소청대로 허락해 주어 우선 변방의 근심을 풀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많이 달랐으나 상은 특별히 공의 의논을 따랐는데, 이후로 다시는 오랑캐가 제멋대로 날뛰지 못했다.
이해에 대부인이 청주에서 봉양을 받으러 오다가 도중에 병에 걸렸다. 상은 이 소식을 듣고 약물을 지어 보내라고 명하였으며, 충청ㆍ경기ㆍ강원 세 도에 하유하여 가마꾼을 보내어 호송하게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예우였다.
공은 홀추를 일시적으로 기미(羈縻 견제하여 종속시킴)하는 것이 오래갈 수 없음을 생각하고 육진(六鎭)과 여러 요해처의 진보(鎭堡)에 신칙해서 포루(砲樓)를 설치하고 성랑(城廊)을 가설하며 토성을 쌓게 하여 수비하는 여러 도구를 일신하였다. 또 함흥(咸興)은 한 도의 요충지인데 자성(子城)이 없다 하여 지형을 따라 높은 곳에 토성을 쌓았는바, 또 도내에 명하여 공과 같은 연갑(年甲)에 태어난 자들에게 와서 부역을 돕게 하니, 이에 비슷한 동년배들이 또한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 얼마 안 되어 성이 완성되었다. 마침내 정자를 짓고 이름을 만갑(萬甲)이라 하였다.
정미년(1607)에 건주(建州)의 노추(奴酋)가 처음 일어나자, 공은 용병(用兵)하는 상황을 정탐해서 알고는 우려하여 말하기를, “후일 우리 국가의 우환이 될 것은 반드시 이들이다.” 하고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였는데, 이윽고 홀추와 종성(鍾城)의 오갈암(烏碣巖) 아래에서 서로 크게 싸웠다. 공은 막 교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변방의 경보 때문에 연임하게 하였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교체하였다. 공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본도의 편의를 조목조목 아뢰어서 시행된 일이 많았다. 다시 돌아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의 기밀을 겸하였으며, 예조ㆍ병조의 참판과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고 서북 지방의 군무를 맡았다.
무신년(1608)에 선조(宣祖)가 승하하였다.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당상관과 승문원 제조에 차임되고,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조사(詔使)가 계속해서 왔는데 공이 적절하게 주선하니,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두 사신 또한 공을 공경하고 예우하였다. 부인 민씨(閔氏)가 별세하자, 상소를 올려 돌아가 장례할 것을 청원하여 체직하고 서추(西樞)에 제수되었으며, 또 선친인 찬성공을 개장(改葬)할 적에 상소를 올려 관직을 해임하여 3개월 동안 심상(心喪)하는 제도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마침 조사가 또 왔으므로 어전 통사로 부름을 받고 마침내 다시 군국(軍國)의 여러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한성 부윤과 병조 참의 등의 직책으로 옮겼다.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고, 임자년(1612)에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공은 평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친하였는데, 일찍이 우복에게 편지하여 세상일을 언급하였다. 이때 정공이 옥사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는데 문서를 수색해 보니 공의 편지가 그 안에 있었으므로 공도 함께 옥에 갇혀 삭탈관직 당하였다.
3년이 지난 을묘년(1615)에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되고 정사년(1617)에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바뀌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체직되었다. 이해 겨울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공은 의논을 올려 배척하였고 또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오년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양사에서는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모두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기미년(1619)에 노추가 요동(遼東)과 광주(廣州)를 침범하니, 우리나라의 두 원수가 또한 패하여 항복하였다. 부체찰사 장만(張晩)이 관서 지방에서 병으로 휴가를 받자, 특별히 공을 나오게 하여 오도찬획사(五道贊劃使)로 삼아 그 일을 대신하게 하였다. 공은 관서에 부임하자 상소하여 공물과 부역을 줄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또 강변의 방수(防守)하는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고 또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10여 개의 병영을 설치하였으며, 또 둔전을 넓혀 군량을 풍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이 오랫동안 근로하였음을 생각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글을 내려 위로하고 유시하였다.
신유년(1621)에 요동 지방이 함락되자, 공은 영유(永柔)에 있다가 안주(安州)로 전진해서 여러 군대를 정돈하여 단속하였으며, 또 차자를 올리기를, “오랑캐가 북경을 침범하면서 우리가 그 뒤를 도모할까 염려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반드시 우리가 먼저 저들의 침공을 받을 것입니다. 청컨대 기강을 진작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며 어진 이와 유능한 이에게 맡기고 세금을 경감하며 완공되어 가는 토목공사를 정지하고 이미 지난 단서(丹書)를 삭제해서 이미 잃은 민심들을 수습하고 영원히 이어갈 천명(天命)을 기구하소서.” 하였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상방(尙方)에서 만든 검 한 자루를 주며 이르기를, “대장 이하 명령을 어기는 자를 이 검으로 처형하라.” 하였는데, 공은 자신의 직책이 원융(元戎 대장)이 아니므로 중요한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는 상하가 모두 무사안일에 빠져 전투와 수비에 뜻이 없었으므로 공이 전후에 걸쳐 간곡히 아뢰고 청원한 것이 대부분 저지당하고 기각되었으며, 크고 작은 군무는 또 멀리 서울에서 통제하는 경우가 많아 이 때문에 장병들이 해이해졌다. 마침 옥강 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오랑캐 기병 100여 명이 보루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다가 관인(官印)과 병부(兵符)를 분실하자, 공은 하사받은 검으로 먼저 목을 베고 뒤에 아뢰었다. 이에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편지를 내려 꾸짖기를, “경의 처사는 교활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으니, 변일은 바로 광해군의 척속(戚屬)으로 혈연이 있는 자였다. 공은 일을 해 볼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으나 또한 체직해 주지 않았다. 공은 낮이면 지붕을 쳐다보며 탄식하고 밤이면 베개를 어루만지며 한탄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1) 봄에 인조대왕이 반정을 하고 비로소 공을 불러 돌아오게 하니, 공이 변방에 있은 지 5년이 경과하였다. 상이 공을 인견하여 변방의 일을 묻자, 공은 차자를 올려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계책을 아뢰니, 상은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비국(備局 비변사)의 유사당상에 차임되고 지의금부사와 춘추관사를 겸하였다. 한성부 판윤으로 있다가 형조 판서로 옮겼다.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체찰 부사(體察副使)의 명령을 받고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순행하며 병력을 수합하여 나아가 평산성(平山城)을 지켜 적침에 대비하였다. 적이 샛길을 따라 곧바로 저탄(猪灘)을 건너오자, 공은 별장 이중로(李重老)를 보내어 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중로는 공의 지시를 어기고는 패전하여 죽었다.
도원수 장만(張晩)이 평양에서 적의 뒤를 밟아 오다가 공과 만났다. 진군하여 적과 육박전을 벌여 안현(鞍峴)에서 싸웠는데, 적이 크게 패하여 도망쳤다. 이때는 상이 남쪽으로 파천한 뒤여서 도성 사람 중에 적도들에게 물든 자가 많았다. 공은 서울로 들어가자 궁중과 사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역적에게 붙은 자들의 이름을 기재한 장부를 모두 가져다가 불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안심하였다.
상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공이 원수와 함께 강가에서 맞이하니, 상은 대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책록될 적에 공은 주장(主將)이 아니라 하여 단지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만 올리고 백금(白金)을 하사하였다. 이어 체찰사로 있으면서 사역원(司譯院), 전생서(典牲署), 주병도감(鑄兵都監)의 제조를 겸하였으며, 강도(江都)를 수호하는 일과 삼남 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와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얼마 후 의논을 올린 것이 성상의 뜻에 맞지 않아 심리(審理)를 받고 곧바로 석방되었으며, 형조를 체직하고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이 병을 오래 앓는다 하여 강화도를 관장하는 직임을 해임하였으며, 을축년(1625)에 또다시 체찰 부사에서 해임되었다. 이때 대부인이 청주에 있으면서 염병을 앓으니, 공은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추후에 사직소를 올렸다. 이에 상은 급히 사자를 보내 약물을 하사하였다.
책봉 조사(冊封詔使) 왕민정(王敏政)이 오자, 공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다 하여 또다시 병든 몸으로 한여름 무더위를 무릅쓰고 봉직하였는데, 조정에 돌아오자 병이 마침내 심해져서 병인년(1626, 인조 4) 정월 초하루에 서울의 집에서 별세하였다.
공이 처음 병에 걸렸을 때부터 상은 내의원의 어의를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게 하였으며, 위태로운 지경이 되자 또다시 어의를 머물게 하여 진찰하고 병세의 차도를 아뢰게 하였다. 그리고 상을 당하자 조문과 치제와 부의를 예보다 넉넉하게 하였다. 진무 원종공신(振撫原從功臣)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뒤에 공의 막내아들이 정승이 됨으로 인하여 은혜를 미루어서 영의정을 더 추증하였다. 이해 4월에 진천현(鎭川縣) 초평리(草坪里)에 있는 묘좌(卯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공은 자품이 순수하고 풍모와 의표가 준엄하고 깨끗하였으며 조용하고 후중하여 일찍이 상황이 급박하다 해서 갑자기 행동을 바꾸지 않았다. 언제나 엄친을 섬기지 못한 것을 지극한 애통함으로 여기고는 여러 숙부들에게 효성을 옮겨서 사랑과 공경에 차이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분발하여 스승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힘써서 제자백가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정주(程朱)의 책에 힘을 썼다. 그러나 과거에 오른 것이 너무 이르고 또 병란을 만나 전쟁하는 사이에 말을 달려서 평소의 뜻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현자를 높이고 선인을 좋아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칭찬하고 사모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남의 잘못과 악행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온화하게 대하였으나 용모와 말소리가 자연 위엄과 후중함이 있어서 비록 군대의 교만한 무관(武官)과 이역(異域)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공을 보는 자는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석갈(釋褐 급제)하던 초기에 선배 여러 분들이 서로 칭찬하고 천거하였다. 이 때문에 군주에게 인정을 받았고 한때의 명사들 또한 마음을 기울여 사귀기를 원치 않는 이가 없었다. 위급할 때에 여러 번 어려운 임무를 맡았는데, 기무(機務)가 매우 많고 명령이 사방에서 이르렀으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입으로 답하고 손으로 결재하여 책상에 쌓여 있는 문서가 없었으며 모두 곡진히 합당하게 하니, 총명함과 영특함과 과단성을 천부적으로 타고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청주의 후영리(後潁里)에 집터를 정하고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스스로 후영어은(後潁漁隱)이라 호하였다. 문장이 풍부하고 화려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유고(遺稿)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초취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진사 민경남(閔敬男)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경연(慶衍)이고 딸은 충의위(忠義衛) 이창운(李昌運), 장령 정백형(鄭百亨), 첨지 조중소(趙重素)에게 출가하였다. 후취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승지 신응구(申應榘)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경휘(慶徽)는 문과로 이조 판서이고 경억(慶億)은 문과 장원으로 좌의정이며, 딸은 부사(府使) 서정리(徐貞履)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경충(慶忠)은 무과로 주부(主簿)이고 경선(慶善)은 문과로 현감이고 경종(慶從)은 무관에 종사하며, 딸은 참판 박정(朴炡)의 첩이 되었다.
내외 손과 증손과 현손이 지금 1000여 명에 이르는데, 문보(文譜)에 기록되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자는 다음과 같다. 경휘의 아들 인환(寅煥)이 참판이다. 경억의 아들 인소(寅熽)가 교리이며, 인병(寅炳)은 문과 장원으로 관찰사이고 인엽(寅燁)은 현재 병조 판서로 있다. 서정리의 아들 서문상(徐文尙)은 참의이고, 서문중(徐文重)은 문과 장원으로 영의정이고, 서문유(徐文裕)는 예조 판서이다. 서문상의 아들 서종태(徐宗泰)는 현재 우의정으로 있다. 자손과 외손의 번성하고 혁혁함이 근고(近古)에 둘도 없으니, 선행을 쌓은 보답을 후손들이 받는 경사에서 징험할 수 있음이 이와 같다고 하겠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예로부터 국가에 어려움이 있음은 천운이 유행하는 것이니, 하늘이 비록 인자하고 사랑하나 또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내어서 난리를 구제하게 하니, 이는 하늘이 이 세상을 도움이 그러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문명이 거듭 빛나고 은택이 여러 번 흡족히 내렸는데, 선조와 인조 두 조정에 이르러 연달아 남쪽 왜적과 북쪽 오랑캐의 난리가 있었으니, 이는 실로 백륙(百六)의 액운이었다.
공은 출신(出身)하던 초기에 왜구의 유린을 당하여 힘을 다해 국가를 다시 세워서 진실로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지위가 높지 않았고 임무를 전담한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공의 재주를 다 펼칠 수 없었으므로 기록할 만한 공이 여기에 그칠 뿐이었으니, 오히려 하늘이 이때를 당하여 이 인재를 낸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관(北關)에 절도사가 되어서는 먼저 여진족(女眞族)의 용병술을 정탐하고 만만(滿萬)을 대적할 수 없음을 우려하였다. 광해군 때에 또다시 서쪽 변경의 임무를 맡아 대장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고 상방(尙方)의 검을 잡게 되어서는 우리가 반드시 중국보다 먼저 병란을 입을까 깊이 우려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지사(志士)와 재주 있는 신하가 몸을 바쳐 쓰일 시기였다. 그러나 금성(金城)의 그림을 이미 올렸고 장가(莊賈)의 주벌이 잇따라 알려졌으나 안에는 계책을 책임지는 위상(魏相) 같은 이가 없고 위에는 법을 재량하도록 허락하는 제(齊)나라 군주 같은 임금이 없어서 계책이 저지하고 동요시키는 데에서 굽혀지고 위엄이 견책당하는 데에서 빼앗겼으니, 끝내 공적을 이루지 못함이 또한 당연하다.
그리고 인조가 중흥하던 초기에는 자나 깨나 영명한 호걸들을 생각하고 노성(老成)한 신하에게 자문하니 성상의 신임이 막 융숭하고 국가를 도움이 실로 중하였다. 그리하여 흉적(凶賊 이괄)의 머리를 베어 전공을 드러내고 여러 군대를 겸하여 총괄해서 임무가 막중하였으니, 가령 공이 수명을 더 연장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했더라면 적개심을 품고 왕을 보호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하고 기우는 조정을 안정시켜 반드시 종묘사직을 호위하였을 터인데, 오십을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갑자기 별세하였다. 난이 연달아 일어나자 중외가 무너져서 마침내 국가로 하여금 고구려가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얻고 고려가 강감찬(姜邯贊)을 얻은 공효에 도리어 부끄러움이 있게 하였으니, 하늘이 인재를 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아, 애통하다.
공의 말씀과 행실과 조정에서 벼슬한 대략을 삼가 차례로 적어서 태상씨(太常氏)에게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청하고, 또 평소 마음에 감개한 것을 뒤에 붙이는 바이다.


[주D-001]양 경리(楊經理) : 경리(經理)는 경략사(經略使)의 약칭으로, 당시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군사의 총지휘관인 양호(楊鎬)를 가리킨다.
[주D-002]단서(丹書) : 붉은 글씨로 쓴 죄인의 명부를 이른다.
[주D-003]백륙(百六)의 액운 : 백륙은 106년을 이르는바, 4500년이 1원(元)이 되고 1원(元) 중에 5번의 양액(陽厄)과 4번의 음액(陰厄)이 있어 106년마다 액운이 있으므로 백륙이라고 한 것이다. 《漢書 卷21 律歷志上》
[주D-004]금성(金城)의 그림 :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에 서강(西羌)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조충국(趙充國)을 보내어 평정하게 하니, 조충국은 “군사(軍事)는 멀리서 예측할 수 없으니, 신이 금성에 도착한 뒤에 방략(方略)을 그림으로 그려 바치겠습니다.” 하고 금성의 지도와 공격할 방략을 그려 바친 일을 가리킨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여기에서는 기미년에 관서에 부임하여 강변의 방수하는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올린 일을 말한다.
[주D-005]장가(莊賈)의 주벌 : 장가는 춘추 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총애하던 신하였다. 진(晉)나라와 연(燕)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하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경공의 명령을 받고 출정하면서 장가를 감군(監軍)으로 임명하고 다음 날 정오에 전 장병이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장가가 회기(會期)를 어기자, 사마양저는 그의 신분을 돌아보지 않고 목을 베어 군령을 엄하게 하니, 진나라와 연나라가 제군(齊軍)의 군령이 엄숙하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철수하였다. 《史記 卷64 司馬穰苴列傳》 여기에서는 옥강 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을 참수한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