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지봉 이수광 행장

지봉 이수광 선생 행장 동지경연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이공 행장(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正

아베베1 2014. 12. 18. 04:13

 

 

 

 

 

 

 계곡선생집 제15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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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5수(首)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행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동지경연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이공 행장(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春秋館事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李公行狀)

 


공의 휘(諱)는 수광(睟光)이요, 자(字)는 윤경(潤卿)이며, 호(號)는 지봉(芝峯)이다.
공의 계보는 국성(國姓)에서 유래한다. 태종(太宗) 공정 대왕(恭定大王)의 아들 배()는 봉호(封號)가 경령군(敬寧君)이요 시호(諡號)가 제간공(齊簡公)인데, 슬하에 모양군 직(牟陽君稙)을 두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모양이 선사군 승손(仙槎君承孫)을 낳고, 선사가 하동군 유(河東君裕)를 낳고, 하동이 휘 희검(希儉)을 낳았다. 이때에 비로소 과제(科第)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여 관직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영의정을 증직받았는데, 정경부인 유씨(柳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해년(1563, 명종 18)에 공을 낳았다.
유 부인이 처음 공을 잉태했을 때 기이한 꿈을 여러 차례나 꾸었는데, 낳고 보니 영특하고 준수한 것이 보통 아이들과 전혀 달랐다. 공은 어려서부터 희롱(戱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5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입을 열기만 하면 기특한 말이 튀어나왔고, 13세에 벌써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에 통하였으며, 16세에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재명(才名)을 떨쳤다.
17세 되던 해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에 걸리기까지 하였으며, 상복을 벗고 나서는 더욱 분발하여 학업에 각고면려한 결과 문사(文詞) 방면에 괄목한 발전을 보였으므로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극구 칭찬하였다.
임오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을유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의 수습 기간을 거쳐 무자년에 정자(正字)로 승진하였으며, 겨울에 천거를 받고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공이 소싯적부터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받아 왔는데, 급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국(史局)에 들어갔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너무 늦다고 평하였다.
기축년에 대교로 옮겨졌다가 무슨 일 때문에 파직된 뒤 곧이어 봉교로 서용되었으며, 차서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고 나서 사헌부 감찰로 전임되었다.
경인년에 사간원 정언과 호조ㆍ병조의 좌랑에 임명되면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그 뒤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경사(京師)에 다녀와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 외방에 나갔다.
이듬해 모친의 병으로 해면(解免)되어 돌아와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정언에 옮겨졌다가 체직되어 호조 좌랑이 되었다. 이때 정시(庭試)에서 고제(高第 우등 합격)를 차지하여 호피(虎皮)를 하사받았으며,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부수찬이 된 뒤 사헌부 지평으로 전임되었다.
겨울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전조(銓曹)로 말하면 뽑히기가 지극히 어려운 곳으로 세상에서 일컫고 있었으므로 후원해 주는 정치적 배경이 없이 이러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공은 간정(簡靖)한 자세를 스스로 지키면서 교유(交游)하는 일을 일삼지 않아 왔으므로,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깊이 경복(敬服)하여 말하기를,
“이름난 벼슬자리를 차지할 뜻이 없으면서 전랑(銓郞)이 된 사람은 오늘날 세상에서 오직 이모(李某)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파직되었다가 바로 교리로 서용되었으며, 다시 이조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임진년에 또 파직되고 말았다.
4월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중외(中外)가 크게 진동하였다. 이때 경상방어사(慶尙防禦使) 조경(趙儆)이 공을 불러들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은 뒤 공의 중망(重望)을 의지하여 스스로 조력을 구하고자 하다가, 이윽고 공이 형제가 없는 데다 태부인(太夫人)이 늙고 병든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공을 위해 방편을 시설해서 군영에 오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임금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난리를 당해 구차히 피하려 한다면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금산(金山)에 이르렀는데, 그때는 이미 이일(李鎰)의 군대가 패하여 무너진 뒤였고 여러 부대들도 서로 잇따라 함몰되는 지경에 놓여 있었으므로 어떻게 해 볼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공이 융막(戎幕)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나 적의 예봉(銳鋒)과 맞닥뜨렸으나 그때마다 천행으로 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공을 수찬에 임명하였다. 얼마 뒤에 선묘(宣廟)가 서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태부인 역시 북쪽 지방으로 거처를 옮겨 병란을 피하였다. 이때 방어사의 군대도 패하여 군세(軍勢)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공 홀로 떨어져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필마(匹馬)로 사잇길을 통해 행재(行在)로 달려가 문안드렸다.
8월에 성천(成川)에 가서 세자를 찾아보고 이어 행조(行朝)로 나아가자 그 즉시 부교리에 임명하면서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을 겸하게 하였다.
9월에 상소하여 노모(老母)의 생사를 알아보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선조가 하교하기를,
“함경도 한 지방만은 변란이 일어난 뒤로 아직껏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있으니 이모(李某)를 사신으로 충당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공이 선유어사(宣諭御史)로 차출된 뒤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명천(明天)에 이르러서 태부인의 소재(所在)를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에 북로(北路)의 반민(叛民)들이 두 왕자와 따라간 재신(宰臣)들을 위협하여 붙잡아 놓은 뒤 장리(將吏)들을 죽여 왜적과 내응하면서 가는 곳마다 둔치고 있었으므로 길이 온통 막혀 있는 상태였다. 이에 공이 분연히 몸을 떨쳐 말 달려 들어가서 격문(檄文)을 지어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의 도리를 가지고 효유(曉諭)하니, 이를 듣고서 모두 참회하며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의려(義旅)들도 감동하여 분기(奮起)하면서 열성(列城)에 향응(響應)하였으므로 왜적도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
계사년 정월에 복명(復命)한 뒤, 누차 지평, 교리, 병조 정랑,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대간(臺諫)은 비국의 낭관을 겸할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신(相臣)이 변란 발생 이후 사절(死節)한 사람들의 사적(事跡)을 찬집(纂集)하는 일을 공에게 맡기면서, 위에 요청하여 공으로 하여금 비국 낭관의 직책을 그대로 겸대한 채 일을 마치도록 하였다.
가을에 승진하여 시강원 필선과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면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또 승진하여 집의가 되었는데, 이때 차자를 올려 10가지 폐단에 대해서 조목별로 진달드리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겨울철에 대가(大駕)를 수행하여 도성에 돌아왔다. 당시 군국(軍國)에 관계된 일이 많이 발생하여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시급히 만들어서 보내야 할 것들 중에 공의 손을 거친 것이 많았다.
갑오년 여름에 승지가 결원(缺員)이 되자, 상이 정청(政請)에 명하여 자격(資格)이 아직 미달되는 자도 아울러 의망(擬望)하여 올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공에게 뜻을 두고 내린 조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통정대부로 품계가 껑충 뛰어오르면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차서에 따라 옮겨져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그 뒤 체직되어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고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였다.
을미년에 우승지와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이때 태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전상(前喪 부친상을 말함)에 비해 예법대로 준행하면서 장례와 제례(祭禮) 모두 완벽하게 구비하여 행하는 가운데 인정(人情)과 예문(禮文) 모두가 극진히 되도록 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 우승지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왜구가 재차 쳐들어왔을 때, 중국 장수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 주둔하였는데, 공을 분(分) 호조 참의로 삼아 군량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그날 바로 하직 인사를 올렸는데, 상이 매우 수척해진 공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황극전(皇極殿)에 화재가 일어났으므로 공이 진위사(進慰使)로 경사(京師)에 갔다가 무술년 봄에 조정에 돌아와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예조와 병조의 참의, 좌승지, 첨지중추부사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기해년 겨울에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시사(時事)가 급변하는 바람에 서애(西厓) 유 상공(柳相公 유성룡(柳成龍))이 축출된 뒤를 이어 그 파장이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의 봉호(封號)) 이공(李公)에게까지 미쳐 자리에 있는 것이 불안하게 여겨지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공이 병을 핑계로 스스로 빠져 나오려 하면서 그 기회에 조정의 혼란상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 결과 시휘(時諱)에 크게 저촉되어 하마터면 탄핵을 받을 뻔하다가 체직되어 대사성이 되었다.
경자년 여름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이첨(李爾瞻)이 그때 헌납으로 있으면서 자기 패거리의 세력을 한껏 떨치며 온갖 교묘한 술책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공을 동요시키려 하였는데, 공이 이에 맞서 끄떡도 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사직하여 체차되고 말았다.
신축년 봄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는데,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고교(考校)하여 올리니, 상이 구마(廐馬)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뒤이어 대사성으로 체직되었다. 그런데 당시 난리를 치르고 안정을 되찾은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문묘(文廟)의 중건이 아직껏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공이 이때 처음으로 영건(營建)하기를 청한 결과 묘전(廟殿)과 강당(講堂)이 차례로 낙성되기에 이르렀다.
여름에 병조 참의로 전임되었다. 제주(濟州)의 역적 길운절(吉云節)을 복주(伏誅)시키고 나서 상이 어사(御史)를 보내 안무(安撫)할 목적으로 옥당에 급히 명하여 교서(敎書)를 작성하게 하였는데, 학사(學士)들이 이를 크게 어렵게 여긴 나머지 오래도록 글을 지어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공에게 위촉하게 되었는데, 생각이 막힘없이 곧장 글을 이루어 냈으므로 학사들이 그만 크게 탄복하고 말았다.
황태자의 책례(冊禮)를 거행한 것과 관련하여 조사(詔使)가 장차 우리나라에 오게 되자 공을 도사(都司)의 영위사(迎慰使)로 삼았는데, 이는 실로 문한(文翰)의 인사들 중에서도 지극히 뽑히기 어려운 자리였다. 그런데 공이 평양(平壤)에 도착했을 때 그만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체차되어 돌아왔다.
임인년에 재차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해면(解免)되었다. 여름에 다시 부제학의 임명을 받고 제유(諸儒)와 함께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校正)하였는데, 그 책이 완성되자 상이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선묘(宣廟)가 장차 김씨(金氏 인목왕후(人穆王后))를 왕비로 책봉하려고 하였는데, 《오례의(五禮儀)》에 묘헌(廟見)에 관한 한 절목(節目)이 빠져 있었다. 이에 공이 상차(上箚)하여 옛 예법대로 준행할 일을 보고드리도록 청하였다.
겨울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체직되었다. 계묘년 여름에 다시 부제학에 임명된 뒤 《사기찬(史記纂)》을 교정해 올리자, 상이 또 구마를 하사하였다.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갑진년 여름에 체직되어 병조 참의와 대사성이 되었다. 정유년 이래로 공이 병조를 맡은 것이 8회였고, 대사성을 맡은 것이 4회였다.
공이 전조(銓曹 이조를 말함)에 있을 때 사류(士流) 3인을 등용하였는데, 모두 당로자(當路者)로부터 달갑게 여김을 받지 못한 나머지 탄핵을 받고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당시 정승이 평소 불량한 조카를 빨리 승진시켜 현달(顯達)하게 해 주려 하였는데도 공이 안 된다고 고집하였고, 또 때마침 정신(廷臣)이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는 판에 공만은 홀로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일들로 인하여 계속 시의(時議)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므로 외방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
을사년 봄에 임지(任地)에 도착하였다. 여름철에 가뭄이 들자 공이 기우제를 지내니 바로 비가 왔다. 부내(府內)에 예전에는 연꽃이 없었는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연못을 파고 연꽃을 길렀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황무지로 변해 있다가 이때에 와서 다시 연꽃이 피기 시작했으므로 부로(父老)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가을에 영외(嶺外)에 큰물이 져 백성의 가옥과 전답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그런데 마침 북변(北邊)의 오랑캐와 관련된 사태가 새로 발생하는 바람에 한창 징발(徵發)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는데, 공이 요령 있게 무마(撫摩)해 준 덕분에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할 수가 있었다. 이 일이 위에 보고되자 특별히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가 정미년 겨울에 이르러 비로소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서용(敍用)되었다. 이에 공이 전적으로 청정(淸靜) 위주의 정사를 행하는 한편, 고을의 제생(諸生)을 향교에 모아 놓고 법도 있게 교과 과정을 설치하여 운영하자 이웃 고을의 학생들까지 그 소문을 듣고는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기유년 여름에 또 병으로 그만두었다가 가을에 첨추(僉樞)로 서용된 뒤 병조 참의로 옮겨졌으며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경술년 여름에 선묘(宣廟)의 승부례(陞祔禮 삼년상이 지난 뒤에 임금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예)가 이루어지자 특별히 가선대부로 가자(加資)되면서 예조참판 겸 승문원제조가 되었다. 가을에 대사간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직을 허락받고 서추(西樞 중추부)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광해(光海)가 사신을 보내 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奏請)하게 하면서 공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므로 공이 8월에 경사에 갔다. 공은 도합 3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왔는데, 스스로 청고(淸苦)한 몸가짐을 견지하면서 서적이나 향(香), 약(藥) 같은 물품을 털끝만큼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었다.
연경(燕京)에 있을 적에 안남(安南), 유구(琉球), 섬라(暹羅) 등의 사신들과 서로 만났는데 모두들 공을 따라다니면서 시문(詩文)을 구걸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안남 사신의 경우는 공의 시를 얻어 가지고 돌아가 자기 나라 안에 전파시키기도 하였다. 조완벽(趙完璧)은 원래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日本)에 포로로 잡혀갔었다. 그가 장사꾼을 따라 배를 타고 교지(交趾)에 도착하자, 교지의 사람이 공의 시를 꺼내어 보여 주며 말하기를,
“당신은 당신 나라에 이지봉(李芝峯)이라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이 바로 그분의 작품이다.”
하였는데, 완벽이 그 뒤에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그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공의 문장이 풍속이 다른 나라에서도 중하게 여김을 받은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가의대부로 품계가 오른 가운데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를 역임한 뒤 부제학이 되었다.
이때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가)의 입장에서 진언(進言)하기를,
“한성(漢城)은 도읍지로서 기운이 다해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는데, 교하(交河)는 형세가 좋으니 그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광해가 그 말에 솔깃하여 정신(廷臣)으로 하여금 집회를 갖고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인정(人情)이 의혹해하는 가운데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견강부회하는 자들도 상당히 나오게 되었다. 이에 공이 관료(館僚)들을 이끌고 상차(上箚)하여 반박하면서 반복하여 수백 언을 개진하였는데, 그 논리가 매우 엄정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일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
광해가 생모인 김씨(金氏 공빈김씨(恭嬪金氏))를 추숭(追崇)하여 왕후(王后)로 삼고 천자에게 책명(冊命)을 청하려 하자, 공이 또 상차하여 경의(經義)를 인용하며 그 일이 비례(非禮)임을 논하였다. 당시 광해의 정치가 문란하였기 때문에 대각(臺閣)에서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는데, 공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올곧은 발언을 하였으므로, 정도를 견지하는 공의 자세에 사론(士論)이 탄복하였다.
재차 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축화옥(癸丑禍獄)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이첨(李爾瞻)이 사수(死囚)에게 상변(上變)하도록 사주하여 대옥(大獄)을 일으킨 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의 집안을 멸망시키는가 하면, 대비(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장차 폐(廢)하려 하면서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은 거의 모두 관직을 박탈하고 유배보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은 자신을 오염시키고 싶지 않아 그 뒤로는 산반(散班)에 몸담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입을 봉한 채 시사(時事)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대사성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사직하여 체직되었는데,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게 되었을 때에만 마지못해 일어나 한 번 사은(謝恩)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병진년 가을에 이르러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외방에 나가게 되자,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제 세상 그물에서 탈출하게 되었으니 내가 이은(吏隱 낮은 관직에 몸담고 은자(隱者)처럼 사는 것)의 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하였다. 현헌(玄軒 신흠(申欽)의 호) 신공(申公)은 공의 막역한 친구였는데, 조정에서 방축(放逐)되어 강외(江外)에 나가 있었다. 공이 작별하려고 찾아가서는 서로들 얼굴을 마주 보고 비통해하면서 밤새도록 회포를 나눈 뒤에 길을 떠났다.
공은 부임한 뒤로 관리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며 자신이 솔선수범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교화에 따랐다. 학교와 마을의 일로부터 어염(魚鹽)이나 신추(薪蒭)와 같은 미세한 일에 이르기까지 공이 조처한 일들을 보면 모두 방법이 적절하여 후세의 법도가 될 만하였다. 기미년에 임기를 만료하고 돌아옴에 백성들이 사모하면서 비석을 세워 공의 은덕을 기렸다.
공이 일단 돌아오고 나서는 수원(水原)의 전사(田舍)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으므로 가인(家人)도 공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물었다. 전후에 걸쳐 대사성, 분 병조 참판, 동지중추부사와 조사(詔使)의 영위사(迎慰使)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이 출사(出仕)하려 하지 않자 광해가 하교하여 준절하게 책망하였는데 그 말이 지극히 준열하고 매서웠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의 정상을 개진하였다. 임술년 봄에 광해가 또 하교하여 어떻게 해서든 불러들여 서울에 오도록 하라고 하자, 관찰사가 수레를 보내면서 그지없이 다급하게 재촉하였다. 이에 공이 일단 서울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계해년 3월에 금상(今上)이 대위(大位)에 올라 구신(舊臣)들을 모두 불러들이면서 공을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하였다. 그뒤 대사간과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체직되어 공조 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경성까지 군대가 육박해 오자 상이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이때 공이 병든 몸을 이끌고 대가(大駕)를 수행했다가 적이 평정된 뒤에 도성에 돌아와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자헌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의정부 우참찬과 대사헌이 되었고 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대왕대비에게 휘호(徽號)를 올릴 때 공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그 공으로 정헌대부에 특별히 가자(加資)되었다. 또 좌참찬, 지돈녕부사,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동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을축년 겨울에 또 대사헌이 되었다. 그때 마침 상이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을 하자, 공이 생각하기를, ‘상이 간절하게 좋은 정치를 해 보려 하지만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화란(禍亂)이 잇따라 일어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정성이 지극하여 실심(實心)을 가지고 실정(實政)을 행한다면 실효(實效)를 거두는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만언(萬言)의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근학(勤學), 정심(正心), 경천(敬天), 휼민(恤民), 납간쟁(納諫諍), 진기강(振紀綱), 임대신(任大臣), 양현재(養賢才), 소붕당(消朋黨), 칙융비(飭戎備), 후풍속(厚風俗), 명법제(明法制)의 12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진달드렸는데, 그 요지는 바로 실제를 힘쓰는 것[懋實]에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명쾌하고 통절하면서 조리 정연하게 병통을 적중시키고 있었으므로, 중흥을 이루게 하는 장소(章疏)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식자들이 일컬었으며, 상 또한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비답을 내려 표창하였다.
정묘년 봄에 노이(奴夷 청 나라 누르하치의 군대)가 대거 침입해 들어왔다. 열진(列鎭)이 모두 무너지는 가운데 적이 드디어 승승장구하여 내지(內地) 깊숙이 들어오자, 의논하는 자들이 경성(京城)을 지킬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3전(殿)이 장차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게 되었다. 이에 상이 먼저 왕세자에게 명하여 분조(分朝)를 거느리고 남하(南下)하게 하면서, 늙고 병든 조신(朝臣)들은 편리할 대로 따라갈 곳을 택하게 하였다.
이때 공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이었는데, 장남 성구(聖求)의 이름이 분조에 소속되어 있었고 차남 민구(敏求) 역시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재직하고 있었으므로, 친지들이 대부분 공에게 우선 분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의연히 말하기를,
“인신(人臣)의 도리상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한 어떻게 감히 어려운 곳을 사양하고 편한 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호가(扈駕)하여 강도로 들어가서 대사헌의 직책을 제수받았다.
대적(大賊)이 가까스로 물러가게 된 상황에서 조가(朝家)에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기백이 날카로운 후진(後進)들이 끝까지 추궁하여 논핵하려고만 들었는데, 공은 언제나 관대하고 공평한 자세로 조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온당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일컬었다. 이와 관련하여 공이 언젠가 말하기를,
“천하에는 본래 해결 못할 일이 없다. 선왕(先王)의 법도대로 행해서 잘못되는 일은 지금까지 있지 않았다. 국가가 여러 차례 상란(喪亂)을 치르게 되어 인심이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데, 편안하게 해 주고 어루만져 주는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어수선하게 새로 일을 만들어 내려고만 한다면, 이는 지금 해야 할 온당한 조처가 못 된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호패법(號牌法)이 처음 시행될 적에 조정의 신하들 대부분이 편리하게 되었다고 일컬었으나 공만은 홀로 이를 걱정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호적(戶籍)이 작성되자 사람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잇따라 오랑캐의 난리가 일어나면서 결국 흐지부지된 채 시행되지 못하였다.
도성에 돌아오고 나서 누차 지중추부사와 좌ㆍ우 참찬에 전임되었으며, 무진년 7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총재(冢宰)의 자리가 빌 때마다 공의 이름이 의망(擬望)하는 명단 속에 꼭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야 낙점(落點)을 받게 된 것이었다. 공이 3차례에 걸쳐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조정에 나와 사은하고 나서 사직소를 5차례나 올렸는데도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아마 이 직책을 수행하다가 죽어야 할 모양이다.”
하고는, 청탁을 일체 배제하고 요행수로 진출하는 길을 막아 백관의 직질(職秩)을 맑게 처리하며 엄체(淹滯)된 관원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량(循良)한 인사를 선임(選任)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산반(散班)의 관리 중에서 성적(成績)이 있는 이들을 차례로 선발해 서용(敍用)하였다. 이에 관방(官方)이 맑고 엄숙해지면서 여론도 모두 흡족하게 여기게 되었다.
공이 한번은 병 때문에 정당(政堂)에 나오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동료 재신(宰臣)이 공을 의국(醫局)의 제조(提調)에 의망하여 병 치료를 편하게 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전조(銓曹)의 장관 자리에 몸담고 있으면서 어떻게 스스로 편한 관서(官署)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며 재차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그 뜻을 양찰하고 특별히 윤허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의 풍질(風疾)이 갑자기 심해지자, 상이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집으로 가서 병을 보살피게 하는 한편 약물(藥物)을 내국(內局)에서 가져다 쓰도록 하였다. 이때 장남 성구가 호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었는데 후임자가 오지 않아 감히 귀성(歸省)을 하지 못하고 있자, 상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후임자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돌아오도록 유시하였다. 이 모두가 특별한 은총에서 나온 일이었다.
병세가 날로 위독해지는 상황에서도 공은 오히려 중책(重責)을 벗어 버리지 못한 것을 깊이 우려하였으며, 장악원 제조를 겸대(兼帶)하고 있는 데 따라 달마다 지급되는 추치(騶直 교통비)에 대해서도 번번이 받지 말라고 가인(家人)을 경계시키곤 하였다. 이에 두 아들이 상소하여 공의 뜻을 설명하며 해직을 청한 결과 체직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12월 26일에 임종을 맞았으니, 이때 공의 나이 6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철조(輟朝)를 하고 조문과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상례(常例)에 비해서 특별히 더해 준 점이 있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된 데 따라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이듬해 2월 11일에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 선산의 묘역에 안장하였다.
공은 천성적으로 자질이 매우 뛰어났으며 기품이 청명(淸明)하고 온수(溫粹)하였다. 소싯적에 고아가 된 뒤 혼자 학업에 힘쓰면서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만년에 들어서는 모두 물리쳐 버린 채 오직 성리학(性理學)에 관계된 책만 가져다 보며 그 깊은 뜻을 탐색하였는데, 일찍이 이에 대해 스스로 술회하며 말하기를,
“내가 15세 무렵부터 지향해야 할 곳을 대충 얻어듣고서 방심(放心)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는데, 문자(文字)에 잘못 빠져 반평생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늘그막에 정신을 차려 구습(舊習)을 씻어 버리고 성현이 말씀하신 깊은 뜻을 찾아보니 뭔가 얻어지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하였다. 그리고 이씨(二氏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설에 대해서도 상당히 깊은 식견을 가지고서 의혹을 가질 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또 말하기를,
“이 세상의 즐거움치고 이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병에 걸려 기력이 쇠해지고 게을러진 나머지 정력을 온통 여기에 쏟지 못할 형편이 되었고, 또 함께 강명(講明)하며 도움을 줄 사우(師友)도 없으니, 해 지는 저녁에 먼 길을 떠나듯 성취할 희망을 갖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도 늘 나를 두고 사인(詞人) 묵객(墨客)으로 지목하곤 하니, 이 말을 들을 때면 번번이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하였다. 무진년 설날을 맞아 공이 지은 자신잠(自新箴) 중에 ‘나이는 다시 젊어질 수 없어도 덕은 고쳐서 새롭게 할 수 있네.[年不再新 德則更新]’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공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광채를 안으로 수렴한 채 자연 그대로 행동하면서 꾸며서 하는 일이 없었다. 모습을 보면 옷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고 말하는 것 역시 제대로 입으로 내놓을 것 같지 않았지만, 자신을 단속하는 일은 무척 엄격하게 하였고 신념을 세운 것이 매우 확고하였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아도 동요하여 뜻을 뺏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
공은 또 본래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성격이라서 화려하게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치면서도 제수하는 명이 내려올 때면 언제나 주저하며 겸손하게 사양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공의 지성(至誠)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된 뒤에야 명에 숙배하곤 하였다.
수십 년 이래로 조가(朝家)에 청의(淸議)가 점점 없어지게 된 결과, 은밀하게 후원자의 배경을 등에 업고 사잇길을 통해 출세를 하는 풍조가 이루어졌으므로, 조금 사부(士夫)의 명망을 얻은 자가 있어도 왕왕 염치를 저버리면서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피하고 이익이 돌아오도록 손을 쓰곤 하였다. 그래서 고상(故相) 심공 희수(沈公喜壽)가 일찍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맑은 절조(節操)를 끝까지 보전하면서 궁액(宮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를 찾는다면 오직 지봉(芝峯)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고 하였던 것이었다.
공은 신분이 귀하고 세력 있는 집의 문에는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편당(偏黨)의 지목을 받게끔 처신하는 일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항상 여미중(呂微仲 송(宋) 나라 여대방(呂大防))과 범순부(范淳夫 송(宋) 나라 범조우(范祖禹))처럼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하였다.
연흥(延興 김제남(金悌男)의 봉호(封號)) 김공(金公)이 국구(國舅)로서 한가로이 지낼 때 공과 한 동네에 살았는데, 언젠가 명사(名士)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면서 공도 참석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해 왔으나 공은 끝내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 뒤 계축화옥(癸丑禍獄)이 일어나면서 그때 참석했던 자들 대부분이 죄를 받았으나 공만은 홀로 초연히 법망(法網)과는 거리가 먼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멀리 내다보는 공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평소에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하루 종일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비속(鄙俗)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음은 물론, 거드름 부리는 모습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질병에 걸려 몸이 고달플 때에도 기대거나 누워 본 적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장중한 태도로 임하고 글자를 쓸 때에도 또박또박 바르게 쓰곤 하였다.
과부가 된 누님과 함께 살면서 받들어 모시기를 극진히 하였고, 생질(甥姪)을 교육시켜 적당한 혼처(婚處)에 장가들여 보내었다. 사람들을 접할 때에는 화기롭고 겸손한 태도로 정성스럽게 대하였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감히 공에게는 버릇없이 굴지 못하였다.
집안의 법도가 청검(淸儉)한 가운데 주고받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집안의 살림살이는 아예 물어보지 않았다. 성색(聲色)이나 화려한 것들에 대해서는 담박한 태도로 좋아하지 않았고 향을 피우지 않았을 뿐더러 촛불을 밝히지도 않았다. 또 연회도 베풀지 않고 음악도 들으려 하지 않았는가 하면 밥상에는 2가지 이상 맛있는 반찬이 놓이지 않았고 방석 또한 변변한 것이 없었으며, 갖옷 하나를 15년 동안 바꾸지 않고 계속 입고 다니기도 하였다. 상탑(床榻)엔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고 온 방 안엔 먼지가 엉겨 붙어 있었는데 정작 공은 그 속에서 매우 쾌적하게 거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찾아왔다가 공을 대한 뒤에는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스스로 물러가곤 하였다. 공이 죽자 친척과 빈객들이 모여 염습(斂襲)을 하면서 모두 말하기를,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혀 우리 공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단지 흰 명주 옷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평소의 공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공의 문장은 경전(經典)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그 문체가 전아(典雅)하였으며, 제가(諸家)가 애용하던 험벽(險僻)한 표현들은 탐탁하게 여기지를 않았다. 그리고 시(詩)는 초당(初唐), 성당(盛唐)의 것을 취하면서 말하기를,
“이 시대 이전의 시는 체격(體格)이 불완전하고, 이 시대 이후의 시는 연약해서 흐물흐물하다. 그런데 오언고체(五言古體)로 말하면, 한(漢)ㆍ위(魏)의 악부(樂府)가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좋다고 하겠다.”
하였다.
공의 저술로는 시문집 23권과 《채신잡록(采薪雜錄)》1권, 《독서록해(讀書錄解)》1권, 《제사(題辭)》1권, 《병촉잡기(秉燭雜記)》2권, 《경어잡편(警語雜編)》1권, 《잉설여편(剩說餘編)》2권, 《지봉유설(芝峯類說)》20권, 《승평지(昇平志)》2권, 그리고 여러 서적들을 찬록(纂錄)한 5부(部) 25권 등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현헌(玄軒) 신공(申公)이 일찍이 공의 시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하였고, 간이(簡易) 최립(崔岦) 역시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공으로 인하여 빛나고 있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도 모두 극구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격이 높고 표현이 절묘한 가운데 전체적으로 내용이 원만하고 뜻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성당(盛唐)의 시 영역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한담(閑淡)하고 온아(溫雅)하여 정인(正人) 군자(君子)의 기상이 서려 있으니, 독론지사(篤論之士)는 반드시 여기에서 취할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부인 모(某)는 모씨(某氏)에 봉해졌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성구(聖求)와 민구(敏求)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여 당대의 명신(名臣)으로 활약하고 있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으로 남녀 각각 약간명이 있다.
나는 몽매한 후생(後生)으로 다행히도 공의 만년(晚年)에 서론(緖論)을 얻어들을 수가 있었다. 공이 의리를 강설하고 문장을 개론(槪論)할 때면 그 조예가 정밀하고 심원할 뿐더러 어떤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아 자득(自得)한 경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가 입으로 옮기는 부류로서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공의 평생을 개괄해 보건대, 공은 천성적으로 염충(恬冲 허심(虛心) 평기(平氣))한 자질의 소유자로서 절조(節操) 또한 정결(貞潔)하기만 하였는데,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모범이 되기에 족하였고 그 문장은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정에 몸담은 44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세상의 변고를 겪으면서도 출처(出處)와 언행(言行)에 있어 조금도 흠되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공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공과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완인(完人)이요 정사(正士)로서 내용과 형식이 모두 찬란하게 빛나는 군자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되 뚜렷이 드러난 사실만을 이상과 같이 논찬(論撰)하면서 역명(易名)의 의전(儀典)에 참고로 할 것을 청하는 바이다. 이것으로 삼가 행장의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