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11세손 응형 관련기사

贈果川太守崔公應亨移任積城兼示病不曾相奉仍作遠別之意 二首]

아베베1 2014. 12. 27. 23:05

 

 

전주최공 문성공 중랑장공 후손

11세손 과천태수 최응형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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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촌공 5세

 의령공  7세 

 처사공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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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으로 이임하는 과천 태수 최공 응형에게 주며, 겸하여 내가 병들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먼 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뜻을 보이다 2수 贈果川太守崔公應亨移任積城兼示病不曾相奉仍作遠別之意 二首]

 


파성에 숙도가 오는 것이 어찌 늦은고 / 巴城叔度來何暮
가시나무에 깃들어 산 지도 다섯 해나 됐어라 / 枳棘鸞栖五載多
매화 핀 누각에 거문고 울려 마음은 자유롭고 / 梅閣琴鳴心不累
꽃 핀 마을에는 개가 졸고 정치는 너그러우리 / 花村犬睡政無苛
담대는 문안 인사에 인색한 게 아니건만 / 澹臺不是慳趨候
사마는 늘 숙환을 앓고 있음을 탄식했어라 / 司馬常嗟抱宿痾
습지를 소제하여 와서 머물게 하려 했거늘 / 將潔習池停皀盖
친분 오랜 동파와 홀연 이별하게 될 줄 어이 알았으랴 / 寧知忽別舊東坡

일개 고을은 큰 재능 펼칠 곳 못 되거늘 / 一縣終非展驥路
무성의 금각에서 몇 해나 세월 보냈던가 / 武城琴閣幾寒暄
삼년 동안 병들어 칩거하느라 찾아뵙지 못했는데 / 三年病蟄違淸眄
오년 동안 은덕을 베풀어주니 지극히 감사하구려 / 五載仁添感至恩
구공을 빌려 고을 더 다스리게 하고 싶어했더니 / 欲借寇公仍舊政
소자의 떠나는 부임 행차에 도리어 놀라노라 / 飜驚蘇子動新旛
노잣돈 주는 산음의 노인을 본받지 못했지만 / 携錢未效山陰叟
멀리 훌륭한 풍모 상상해 길이 잊지 못하리라 / 遙想風流永不諼


[주C-001]적성(積城) :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던 현(縣)이다.
[주C-002]최공 응형 : 최응형(崔應亨). 158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회(汝會)이고 서울에 살았다. 1610년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다.
[주D-001]파성(巴城)에 …… 늦은고 : 훌륭한 지방관의 부임을 뜻한다. 파성은 적성의 이칭인 듯하다. 후한(後漢) 염범(廉范)은 자가 숙도(叔度)이다. 그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었을 때, 화재를 예방하려고 백성들이 밤에 작업하는 것을 못하게 하던 구제(舊制)를 고쳐서 밤에 작업을 하되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도록 엄히 명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기면서 노래하기를 “염숙도(廉叔度)여 어찌 그리 늦게 왔던가. 화재를 우려해 밤일을 금지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일하네. 평소에 저고리가 없었더니, 지금 바지가 다섯일세.[廉叔度來何暮 不禁火民安作 平生無襦今五袴]” 하였다. 《後漢書 卷61 廉范傳》
[주D-002]가시나무에 깃들어 산 : 고을 수령을 맡아 있음을 뜻한다. 후한(後漢) 왕환(王奐)이 “탱자와 가시나무는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아니니, 백 리쯤 되는 작은 고을이 어찌 큰 현인이 있을 고을이겠는가.[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 하였다. 《後漢書 卷106 仇覽傳》
[주D-003]매화 핀 누각 : 매화 핀 누각은 지방 수령의 관아를 뜻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하손(何遜)이 건안왕(建安王)의 수조관(水曹官)으로 양주(楊州)에 있을 때 관청 뜰에 매화 한 그루가 있어서 매일같이 그 나무 아래서 시를 읊곤 하였다. 뒤에 낙양(洛陽)에 돌아갔다가 그 매화가 그리워서 다시 양주로 발령해주길 청하여 양주에 당도하니 매화가 한창 피었기에 매화 나무 아래서 종일토록 서성거렸다. 두보(杜甫)의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記)〉에 “동각의 관매가 시흥을 움직이니, 도리어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 같구나.[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楊州]” 하였다.
[주D-004]담대(澹臺)는 …… 아니건만 : 담대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다. 여기서는 개결(介潔)한 성품의 상대방이 자신을 자주 찾아왔음을 뜻한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었을 때 공자가 “좋은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자유가 “담대멸명이라는 이가 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절대로 저의 집에 오지 않습니다.[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 하였다. 《論語 雍也》
[주D-005]사마(司馬)는 …… 탄식했어라 : 자신에게 숙환이 있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자가 장경(長卿)인데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06]습지(習池)를 …… 했거늘 : 원님인 상대방을 자신의 집으로 놀러오게 하려 했다는 뜻이다. 습지(習池)는 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습씨(習氏) 집의 연못이란 뜻이다.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간(山簡)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을 때 경치가 좋은 습씨의 못을 고양지(高陽池)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으로 가서 노닐며 흠뻑 취해서 돌아왔다.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은 어디로 가는가? 고양지로 가는 게지. 해 저물녘 말에 거꾸로 실려 돌아오나니 술에 흠뻑 취해서 아무것도 모르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하였다. 《晉書 卷43 山簡傳》
[주D-007]친분 …… 알았으랴 : 동파(東坡)는 송(宋)나라 문호인 소식(蘇軾)의 호이다. 여기서 동파는 상대방을 가리킨다. 소식이 7년 동안 황주(黃州) 수령으로 있다가 여주(汝州)로 옮겨갈 때에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도정(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주D-008]무성(武城)의 금각(琴閣) : 훌륭한 지방 수령이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제자인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이란 고을의 읍재(邑宰)로 있으면서 현가(絃歌)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흐뭇해 하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 했다. 《論語 陽貨》
[주D-009]구공(寇公)을 …… 싶어했더니 :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을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후한(後漢) 때 구순(寇恂)이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도적을 평정했다. 뒤에 영천에서 다시 도적이 일어나자 천자를 따라 출정했을 때 영천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구순을 일년 동안 더 영천 태수로 유임시켜 다스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後漢書 卷46 寇恂列傳》
[주D-010]소자(蘇子)의 …… 행차 : 오래 고을을 다스린 지방관의 이임(離任)을 뜻한다. 송(宋)나라 문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7년 동안 황주(黃州) 수령으로 있다가 여주(汝州)로 옮겨갈 때에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도정(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주D-011]노잣돈 …… 노인 : 후한(後漢) 유총(劉寵)이 세 번 벼슬을 옮겨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조정에서 그를 대신으로 불러 회계를 떠날 때, 눈썹에 흰 털이 난 대여섯 늙은이가 산음현(山陰縣)의 약야산(若邪山) 골짜기에서 한가로이 나와 각각 백전(百錢) 씩의 돈을 유총에게 보내주었다. 《後漢書 卷106 劉寵列傳》

 

玉溪先生文集卷之六 外集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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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明朝鮮國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玉溪盧先生諡狀。
 



宣廟之十一年戊寅。吏曹判書盧公。卒于京城之寓舍。訃聞。宣廟慟惜。命輟朝二日。予祭一壇。賻錫加常數。其年。本道以公孝友異行聞。宣廟益嘉之。命有司旌其門。公諱禛。字子膺。始號則庵。後卜居玉溪。又號玉溪。學者稱爲玉溪先生。豊川人。國子進士諱裕。是其鼻祖。世有衣冠。麗末避虜。徙居咸陽。遂037_312d爲咸陽人。入我。朝。諱叔仝。以文章淸白。顯英廟朝。卒官禮曹參判。至諱友明。擧進士不仕。好學守志。有古人安貧樂道之風。號信古堂。卽公考也。娶安東權氏生員時敏之女。以正德戊寅。生公於咸陽天嶺下。公莫悟夙成。容止異凡兒。自在孩提。能解口讀。信古公奇愛之。寫中庸及朱晦菴藏銘跋以敎之。公一見輒誦。愛護其書。若有心會。公年六歲。信古幺卽世。公哭泣秉禮如成人。從伯氏于山廬。不肯歸家。大夫人泣曰。汝纔免孩提。血氣未成。何能勝喪。宜亟食肉。公對曰。子今六歲。及免喪則八歲。八歲之人。不服父037_313a喪可乎。夫人感其言。泣曰。從汝所欲。汝他日必非常人。如是終三年。鄕里莫不歎異。年十五。嘗讀大學。其章句輯釋。悉皆硏精熟覆。公已見大義。丁酉。中生員第七人。公年始二十。游學泮宮。華譽籍甚。德氣粹然。人咸愛敬之。所與游皆當世名人。與金公麟厚,奇公大升,李公後白,金公繼輝,盧公守愼。契許最深。相與爲道義交。丙午。擢第。選補槐院。再薦史局。皆不就講。遂自本院。例陞成均館典籍。遷禮曹佐郞。出補知禮縣監。蓋公素不喜榮進。而家貧急於便養故也。時明廟命揀中外廉謹。公與焉。賜衣一襲以榮之。無何。037_313b選拜弘文館修撰。陞副校理。入對。敷奏詳切。進止閑雅。領事尹公漑出語人曰。眞講官也。移司憲府持平。旋拜修撰。轉校理。俄薦爲吏曹佐郞。戊午。自弼善遷副校理。仍陞副應敎。嘗於筵中。進講綱目王蠋去國事。明廟曰。賢士而去國。不知君臣之義也。公啓言去國者何嘗忘國。不能忘而敢於去國。其情誠可悲也。諫不從言不行而去。則蠋非不知事君之義者也。明廟默然。時退溪李公滉。累辭召命。明廟似有不悅之色。故公指陳如此。群議皆以公言爲深得納誨之道也。己未春。特拜司憲府掌令。薦授議政府037_313c檢詳。陞舍人。歷司憲府執義弘文館典翰。仍陞直提學。時權奸當路。與公連姻者勢甚燻赫。一時流輩冠蓋輻輳。彼以諂語求款。公閉戶不應。終莫能間染。庚申夏。特旨陞秩通政。拜刑曹參議。俄移同副承旨。轉右副。以病遞。辛酉。又召以承旨。明年。以大夫人年踰七十。援法上疏。極陳歸養之懇。明廟留中數日。命授傍近一邑。仍賜豹皮褥。卽拜潭陽府使。癸亥秋。辭歸。甲子。又除晉州牧使。嚴擊强宗。惠撫疲民。潭,晉之人。至今稱之。丁卯。以吏曹參議。出拜忠淸道觀察使。病劇辭還。冬。拜全州府尹。庚午。秩滿歸家。冬。037_313d以副提學承召上來。纔▦月。卽上疏乞歸養。宣廟慰諭。命給暇帶職往覲。公承命歸省。又上章陳懇。付以箴警之辭。言甚切至。宣廟溫諭嘉奬。命本道優給養親之需。公卽上箋陳謝。辛未。除昆陽郡守。以公苦辭京宦也。壬申夏。以大司諫下召。病遞爲吏曹參議。冬。復以左副承旨召之。上狀不赴御筆超拜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公感激恩眷。黽勉赴任。嶺南地大。素稱難治。公能靜以理煩。纖細必親。猾胥斂手。汚吏望風。以病徑還。金公繼輝代公來莅。按公治績曰。不料文學之士兼有如許吏才037_314a也。癸酉冬。以大司憲赴召。兼同知春秋館事。纔一月。申乞歸養。三上章乃許。甲戌。拜兵曹參判,大司諫,藝文館提學吏曹參判。皆不赴。乙亥。特旨陞資憲大夫。拜禮曹判書。卽上疏。首陳無才濫陞。不可拜命之意。中申不惡離母之情。末乃條付箴警聖德之語。其略曰。由養身而養性。先定志而稽古。遠追帝王之遐軌。不狃近規之因循。毋恃獨運而輕一世之士。毋作聰明而兼庶司之務。嚴宮禁尊卑之分。杜近習浸潤之漸。毋進銳而退速。毋始勤而終怠。至於發政立事之際。求三代盛時之法意而師準之。探歷037_314b代弼士之論奏而施行之。斟酌損益。與時宜之。使治道之盛。一出於光明純粹而爲萬世大平之基焉。疏未達而移判吏曹。仍以前懇上狀不赴。十月。大夫人寢疾。公爲之不解帶者數旬。調藥嘗糞。靡所不盡其誠。及屬纊時。値嚴寒。盡去紬衣及毛裘。水醬不八口者累日。旣葬。廬于墓下。雖大風大雨。不廢上塚。祈寒盛暑。不脫衰經。公夙嬰疾病。臨不毁之年。執喪刻苦如此。而乃能支保終喪。人以爲神明所感。丁丑。服闋。遭恭懿殿之喪。以刑曹判書赴召奔臨。病遞爲知樞。又拜工曹判書,大司憲。皆不出謝而遞。俄又自037_314c大司憲。拜兵曹判書。供職二十餘日。而移告乞解。尋拜吏曹判書。公病已劇。殆將不興。政院啓言吏曹判書盧禛。素有德望。爲士林所宗。居喪執禮過苦。病勢危重。自上宜有問病之禮。宣廟卽遣丙醫。仍賜藥餌。公起坐拱手。捧見藥貼而後就臥。病篤彌月。言不及家私。只言吾不得畢命松楸。殮尸於旅邸。實非平生之志。八月壬寅。卒于城西寓舍。享年六十有一。公素淸貧。卒之日。家無留資。賴賜賻之物。乃克殮殯焉。洛中士夫賻祭傾朝。兒童走卒。無不悲慟。其返喪也。咸之士民。無少長迎于境上。哭吊賻無不037_314d盡。其葬也。數郡畢集。至有爲位以哭者。公之得此於人。豈勢利之所誘哉。公爲人莊臿而疏暢。簡潔而和粹。泊然無嗜好之偏。坦然無巧僞之作。平生不近女色。不喜麴蘖。處心樂易。不爲崖岸。而及其臨事制行。一聽於義理。未嘗有依違苟且之態。與人交重然諾。不以死生顚沛有所移易。其事大夫人。左右承順。色養無方。家雖貧約。必求甘旨。早夜定省。未嘗或違。雖年高位尊。常如少壯子弟之能盡其職者。而一出由中之誠。無所勉强焉。自幼事伯氏如父。和敬備至。候省起居。久而益處。伯氏旣亡。顧恤孤寡。能別而恩。賑037_315a其窮乏。歲有恒式。經紀祠廟。備具祭器。不令主祀者憂之。奉先之禮。必遵先儒定制。雖冬月。必浴而後將事。功緦之服。必盡其制。知舊之喪。必致其哀。接引賓朋。誠款見於色辭。年稍長於已者。必倒屣於門庭。雖少者賤者。亦必曲酬拜揖。人或病之而不自知其勞。勤飭農業。以供賓祭。租賦徭役。必先於人。禮遇郡宰。未嘗以私事托屬。喪葬時。賻物別貯。而需用毫不敢自私。有餘則周人之急。族婣之貧乏者咸取足焉。恬於進取。常有引退之志。筮仕三十年。在朝日月。不滿三年。非有恩旨敦迫。未嘗强起也。蕭然旅榻。坐客037_315b無氈。淡饌疏羹。人不堪其若。而處之裕如。歷典潘府馴致卿相。而淡泊眞率。不改鄕野之舊。每遇時和景明。輒邀親舊。携子姪。僧廬溪舍。往來自適。屛騶御除供帳。唯以杖屢書帙自隨。熙然有浴沂之興。人不知其爲宰相也。學徒之自遠來訪者。日以益盛。或携迼學舍。宿留連日。談說道理。亹亹不厭。與退溪及一齋。講論大學宗旨。往復書札。深相敬重。公常曰。爲學不在多言。求之大學篇十六言足矣。半世功力。專在大學。嘗所尊信者。論語,近思錄而已。爲文章。不事浮靡。典雅贍暢。委曲事情。深得濂洛文體。詩亦趣味悠遠。037_315c鑑然有聲。公娶順興安氏己卯名流處順之女。擧七男二女。男長曰士訓。氷庫別檢。娶參奉趙堰之女。生一男一女。男勝。濟用監奉事。前娶文穆公鄭逑女。生男亨遇。娶張益祺女。生一男一女。幼。後娶河愰女。生男亨達。女適呂姬佐。有三子沏,漷,涵。曰士誨。益山郡守。娶柳凝之女。生二男三女。男長。娶生員崔怛慶女。生二男三女。男亨後。娶司藝楊時鼎女。生二男。幼。次。生員。女長適許。次適姜應璜。有子恂。次適李益彬。有子女。皆幼。曰士訢。娶趙完之女。生男脊。娶尹劼女。生一男女。男亨弼。娶縣監金孝可女。生女。幼。037_315d二女。楊龍幹,朴尙質。曰士諤。曰士詮。早亡。曰士詹。娶持平朴光玉之女。無子。取郡守之子爲後。娶司諫崔尙重女。生六男一女。男皆幼。女適許攬。曰士諗。娶金孝思之女。生二男二女。男長郁。生員。娶李毅男女。生一男二女。皆幼。次縢。娶洪行慶女。生二子一女。皆幼。女長適金汝錠。次適郭以峻。壻曰柳起。無嗣而夭。次邇許成弼。有一男一女。男寏。娶李弘元女。生子女。皆幼。女適奉事崔應亨。有二子。皆幼。內外諸孫。並五十餘人。積而未艾者其在斯歟。噫。公超邁之資。從事學問上。早有實見。其於道誼功利。取舍已審。平生之037_316a志。不在縕袍。而家貧親老。未免科第之累。旣落名韁遭際顯隆。則行道濟世。非無抱負之志。而親年日迫。歸養誠切。不能專意立朝。辭榮謝劇。難進易退。未遑有設施之大業。是固公之不幸。而及其服闋還朝。宣廟方倚以爲相。朝野想望風采。而公已病矣。斯非士林之長慟也歟。然其孝悌通于神明。忠義服于遠爾。操履之純篤。精誠之愷悌。皆可爲後世之模範。而興起之效。不泯在人。南中士子尊仰信服。愈久而愈不能忘。旣表其行烈。綽楔公閭。又就公居及常所來往之地。立祀院俎豆之。其遺風餘澤。足以聳動衰俗。037_316b公之道。可謂行於身後也。廷龜從姪也。成童之年。屢獲參拜。及見公道德之光輝。辱蒙一言提撕。亦可謂親炙於門墻。慕德之誠。實倍恒人。蓋嘗銘遺墟之石矣。今於易名之狀。義有不敢辭者。謹就家狀。詮次其槪如右云。謹狀。
崇禎元年正月日。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世子貳師。兵曹判書。知經筵,春秋館事李廷龜。謹狀。
贈諡文孝 勤學好問曰文。慈惠愛親曰孝。

 

 

 

과천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와 함께 잦은 자연 재해로 인해 전후복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16세기 이후 나타나는 전 세계적인 소빙기 현상으로 조선 전역에 비나 눈, 우박 등의 현상이 빈발하였다. 1624년에는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과천 지역의 농량(農糧)이 없어 백성들에게 환자[還上]를 내어 주도록 할 정도였다. 또한 1639년에는 장마가 개지 않아 벼농사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청의 전면적 침공으로 인해 과천은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후금은 이후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요서지방과 내몽고를 정복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고쳤으며 수도를 심양에 정하고 태종을 황제로 칭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청의 요구는 조선 조정을 격분시켜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화론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과의 무력 대결을 불사하는 주전론으로 대세가 기울어졌다. 청은 1638년 12월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군의 선봉대는 압록강을 도하한 지 5일 만에 한성에 도달하여 인조의 강화도 피난을 방해하였다. 이에 인조는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고 전국에 근왕병 소집을 명령하였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모여드는 조선군과 경기도 지역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기도 지역 곳곳이 전란의 피해를 입었고, 과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천은 한성에서 수원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로서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병자호란 기간 동안 이 두 지역에서 북상하는 조선의 근왕병과 이를 저지하려는 청군이 과천을 경유하였다. 또한 남한산성까지 불과 50여 리 밖에 떨어지지 않아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약탈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과천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기간 중 이미 피해를 입은 과천향교의 경우 다시 불타 없어져 3년 후인 1639년에 현감 최응형(崔應亨)이 다시 세우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기간 중 과천의 피해는 전란 중 관악산에 숨은 과천현감을 돌본 향리 변취일(邊就逸), 변해일(邊海逸) 형제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비에, 판서 남이공(南以恭)은 나왔고, 참판 김수현(金壽賢)은 나왔고, 행 참의 김반(金槃)은 나왔고, 도승지 이목(李楘)은 나왔다.

신득연(申得淵)을 우승지로, 이경석(李景奭)을 대사간으로, 정시망(鄭時望)을 한성부 서윤으로, 김업(金)을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최응형(崔應亨)을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민여기(閔汝耆)를 선공감 참봉(繕工監參奉)으로, 민하(閔賀)를 전적(典籍)으로, 김여옥(金汝鈺)을 사예(司藝)로, 박륵(朴玏)을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로 삼았다

 

2) 과천향교의 건립과 제향

 

(1) 건립과 중수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 7)에 과천 읍치(邑治)의 동북방 2리 지점의 관악산록에 건립되었다. 당시 명칭은 과천향교였다. 이때 만들어진 향교 건축물은 사직각(社稷閣),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삼문(三門), 홍살문(紅箭門), 수복가(守僕家) 등이었다고 한다. 과천향교는 1400년(정종 2)에 소실되었다가 7년 후인 1407년(태종 7)에 중건되었고, 다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다시 세워졌다. 그 후 병자호란으로 인해 전소되었던 것을 1639년(인조 17)에 당시 현감 최응형(崔應亨)이 중심이 되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옛터의 위치는 실전(失傳)되어 정확하지 않다.
과천향교가 현재 위치로 이전한 시기는 숙종 때였다. 당시 관내 유생 사이에 과거 급제자가 없는 것이 향교의 터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의논이 있자 현감 황이명(黃爾明)이 현 위치인 읍치소(邑治所) 서쪽 2리 지점으로 옮겨 세웠다. 이곳은 『과천향교지(果川鄕校誌)』에 의하면, “동쪽으로 청계·구룡의 남방을 보고, 빼어난 물과 큰 산이 균형 잡힌 가운데 가일천이 흐르니, 가히 뛰어난 인물이 거듭날 지세다(東望淸溪九龍南方 秀水莫山之衡 中流嘉逸川 可謂人物重出之形局也云云).”라고 운운한 명당이었으므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현재 위치에서 유지되어 왔다.
현대에 와서 과천향교는 몇 차례 중수와 개명 과정을 거쳤다. 1941년에는 그동안 방치되어 퇴락한 대성전과 명륜당을 당시 직원(直員, 1923년 일제의 강요로 직제가 도유사에서 직원으로 바뀜) 김동호(金東浩)가 중심이 되어 중수하였다. 1944년에 일제의 소위 1군 1향교 원칙에 의해 당시 시흥군 관내의 안산향교(安山鄕校, 현 시흥시 수암동 산25-1)와 시흥향교(始興鄕校, 현 서울시 구로구 시흥 2동)가 폐지되고 과천향교로 통합되었다. 과천향교는 1959년에 시흥향교로 개칭되었다가 1996년 4월 1일에 과천향교로 명칭이 복원되었다. 1974년에 전교 박길병(朴吉炳)이 중심이 되어 명륜당, 외삼문 등을 개수하였고, 이듬해 대성전을 해체하여 옛 모양에 의거 복원하였다. 전교 박시영(朴時榮)이 재임하던 1981년에는 향교 외곽에 연건평 300여 평의 유림회관과 관리실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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