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전주최공 문성공계 서산대사

전주최공 문성공계 서산대사관련 자료

아베베1 2014. 12. 29. 00:21

 

 

 

본관은 완산 (현 전주), 전주최공 문성계 후손으로 로 분류되는 분이시기도 하다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임진 (임진왜란)승장  휴정

 

 

 

묘향산(妙香山)의 늙은 중 휴정(休靜)은, 호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이고 또 청허선사(淸虛禪師)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一國都大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堦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원수(元帥)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권율(權慄) 막하에 갔다.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曜仙) 천길 노송나무[檜]인데 / 舜日曜仙千丈檜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隔林□□一聲灘

조선 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법호임.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며 안주(安州) 사람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오래 있어서 서산대사라 칭한다.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안주 목사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동학(同學) 몇 사람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열람하다가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고 마침내 중이 되었음.

 

 

 

본관은 완산 (현 전주), 전주최공 문성계 후손으로 로 분류되는 분이시기도 하다

 

 

 

청성잡기의 내용중에 과거에 선과 장원을 하셨다

 

승과(僧科)와 보우(普雨)

명종조에 선종(禪宗), 교종(敎宗) 두 종의 승과를 개설하고 보우가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이 선과에 장원을 하고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이 교과에 장원을 하였다. 보우가 뽑은 인물이 이와 같으니, 그도 범속한 중은 아니다. 보우는 허응당(虛應堂)이라 자칭하였는데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 가서 죽었고 두 종의 승과도 폐지되었다.

 

조선 정조대왕 홍재전서의 내용중에는

 

석가(釋家)를 통칭 사미(沙彌)라고 하는데, 사미란 식자(息慈)이니 자비의 땅에서 안식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수다라(修多羅)가 으뜸이며, 불교에 십회향(十回向)이 있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으뜸이다. 대체로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자비를 구승(究乘)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법계(法界)의 공덕도 여기에 있고, 항사(恒沙)의 복전(福田)도 여기에 있으니, 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자비의 가르침이여. 후세의 사미는 그렇지 않아서 운천(雲天)과 수병(水甁)의 실상(實相)의 밖에서 마음을 유람하고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정이 없는 물체에 몸을 비교하니, 마침내 우리 유학에서 고목(枯木)과 사회(死灰)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유학에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사미가 스스로 비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같은 이의 사미됨은 아마 자비에서 안식하는 뜻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석장(錫杖)을 지니고 여러 곳에 두루 참례하여 법당(法幢)을 세움으로써 인천안목(人天眼目)이 되어 운장(雲章)과 보묵(寶墨)의 하사품이 특별히 융성하였으니, 지금까지 정관(貞觀)이나 영락(永樂)의 서문과 도솔란야(兜率蘭若)에서 영광을 다툴 지경이다. 중간에는 종풍(宗風)을 발현하여 국난을 크게 구제하고 의병을 창설하여 군왕을 구제한 원훈(元勳)이 되어 요사스럽고 성전(腥羶)한 기운이 손을 따라 맑아졌으니, 지금까지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한 공적은 염부제(閻浮提)ㆍ무량겁(無量劫)에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인연을 따라 현신(現身)하고 업보를 따라 섭신(攝身)하여 인과(因果)를 찾아 상승(上乘)의 교주가 되어 매화가 익고 연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한 초상이 남아 있어 서북과 남도의 영당에서 정례(頂禮)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삼천 대천(三千大千)을 구제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몇 알의 염주로 면벽(面壁)하거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따위를 자비라고 할 수 있겠으며, 탑묘(塔廟)를 많이 건축하고 경률(經律)이나 많이 쓰는 것으로 자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영당(影堂)의 편액을 요청하는 서남 도신의 청에 따라 남도는 표충당(表忠堂)이라고 하사하고, 서도는 수충당(酬忠堂)이라고 하사하는 한편, 관리에게 명하여 제수(祭需)를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금년이 갑인년(1794, 정조18)이므로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선세선사(善世禪師)에게 시를 하사한 고사를 추억하여 서설과 명문을 지어 영당에 걸게 하노라. 내 비록 불가의 진체(眞諦)를 익히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법화경》의 의해(義解)를 들은 일이 있는데, 게(偈)의 의미가 유학의 서문(序文) 다음에 오는 명문(銘文)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유학의 명문은 진실로 범어의 게송이다. 명문은 이러하다.


불일이 처음 비추니 / 佛日初照
자비의 구름 법이 되도다 / 慈雲爲經
호겁에 외길로 전수되니 / 浩劫單傳
부탁함도 정녕하다 / 囑付丁寧
그 맹서하여 발원한 것을 묻는다면 / 問其誓願
누구인들 보시(普施) 아니라 할쏘냐만 / 孰非施舍
의리의 바다 망망하니 / 義海茫茫
건너는 이 적었는데 / 津逮者寡
복된 나라 도움 많아 / 福國多祐
높은 스님 시기에 맞추었네 / 高僧應期
석장 세우고 한 소리 외치니 / 卓錫一喝
마귀의 군졸 흩어졌고 / 魔軍離披
하늘 맑고 달 밝은데 / 天晶月朗
파도는 잠들고 물결도 조용하여라 / 波恬浪平
우담바라의 꽃이 / 優曇鉢華
동해에서 피어났네 / 涌現東瀛
경사는 적현으로 돌려주고 / 歸慶赤縣
진으로 돌아간 곳 청련이어라 / 返眞靑蓮
엄숙하고 아늑하다 쇠북과 목어(木魚)여 / 肅穆鐘魚
선방의 등불 하나 호젓하구나 / 禪燈孤懸
이름은 죽간에 전해지고 / 名流竹簡
도는 패엽에 남겼도다 / 道存貝葉
적막한 시골 주발만 한 절간에 / 寂鄕鉢寺
모습 전하여 빛나도다 / 交暎眉睫
보답하는 제사 어떻게 하나 / 報祀伊何
채소 음식은 관청에서 보내리라 / 蒲饌自官
신령스러운 복 내린다면 / 儻布靈貺
길이 시주를 보우하리 / 長蔭旃檀
상마(桑麻)와 도량(稻粱) 대나무와 갈대가 / 麻稻竹葦
온 나라에 두루 무성하여 / 匝域蓊若
주 나라의 부유하고 많음을 짝하고 / 匹周富庶
당 나라의 농경에 비견하리라 / 媲唐耕鑿
팔만 사천 세를 / 八萬四千
자자손손이 함께 즐기리 / 子孫同樂
내 즉위한 지 십팔 년 / 予卽阼之十有八年
갑인 사월 초파일에 / 甲寅四月初八日
표충사와 수충사에 봉안하노라 / 安于表忠酬忠之祠中

海東外史내용중에는


西山大師者。完山人也。俗姓崔氏。父昌世爲箕子廟參奉。師誕三歲。而有老人謂其父曰。吾訪少沙門耳。遂以兩手擧兒。呪數聲撫其頂曰。以雲鶴字此兒。因忽不見。以故名曰雲鶴。甞與羣兒遊。輒立石爲佛。聚沙爲塔。及長。風骨英秀。力學靡懈。事其親至孝。十歲287_152d而父母歿。就學於泮宮。欝欝不得意。南遊智異山。遂悟禪旨。聽法於靈觀大師。剃髮於崇仁長老。年三十。中禪科。自大選陞禪敎。判兩宗事。忽喟然歎曰。吾出家之志。豈在於斯乎。卽解綬歸楓岳。及壬辰之役。國王西幸龍灣。乃仗劒道謁。王曰。世難極矣。爾可弘濟耶。遂泣而拜命。命爲八道十六宗都捴攝。諭方岳禮遇之。當是時。雪英起於關東。處英起於湖南。師募緇徒一千五百。合關東湖南僧軍五千人。與提督李如松。戰倭于牧丹峯。斬獲甚多。倭宵遁。師以勇士百人。迎駕還都曰。臣年八十。精已耗矣。請以戎事287_153a屬臣之徒惟政處英。歸老西山。惟政者雪英也。王嘉其志。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捴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二十有三日。會比丘於竗香山之圓寂菴。爇香講法。取影本書其背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遂趺坐而逝。年八十五。法臘六十七。異香滿室。二十餘日而始歇。師法號休靜。名其堂曰淸虗。甞登香爐峯題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醢鷄。師雖鞱光不耀于世。而問道者日衆。李提督甞以詩贈之曰。無意圖功利。專心學道仙。今聞王事急。捴攝下山巓。李如松亦稱細玩尊287_153b書。足覘所養。予以紅柬。東征文武諸公。又以爲國討賊。忠誠貫日。不勝珍謝。各以銀五兩靑布一段。謹助義饗。曰勑使行人司行人薛藩。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加一品服兵部右侍郞宋應昌。贊畫兵部員外劉黃裳。兵部主事袁黃寬。奠督陣葉邦榮。參贊軍機事同知鄭文彬。知縣趙汝梅。經理戶部主事艾維新。欽差布政司都御史韓取善。遼東都司張三畏。經歷鄧璠。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総兵官中軍都督府都督寧夏伯兼太子少傅李如松。中協守副総兵都督楊元。左287_153c協守副総兵李如栢。右協守副総兵都指揮張世爵。原任都司李鎭。中都司吳夢豹。遊擊章接。遊擊李文昇。督陣遊擊徐輝。義州衛參將李如梅。參將駱尙志。統領宣府東路副総兵楊紹先。提督標下中軍參將方時春。統領宣府副総兵任自強。統領宣府遊擊周弘謨。統領大同營遊擊高策。統領大同營遊擊谷燧。遊擊王承恩。統領標下親丁遊擊李寧。眞定遊擊趙文明。保定遊擊梁心。陝西遊擊高徹。山西遊擊施朝卿。參將陳邦哲。經畧標下遊擊錢世禎。密雲標營都司方時輝。建昌車營都司王問。防海南兵遊擊吳惟287_153d忠。參將胡澤。遊擊王守寬。遵化左營參將李芳春。原任參將張應种。參將郭夢徵。參將蘇國賦。參遊佟養中。參遊胡鸞寬。奠副総兵佟養正。副総兵祖承訓。副総兵査大受。原任副総兵孫守廉。副総兵王維貞。副総兵王有翼。副総兵吳希漢。經歷孫論。經畧委官通判王君榮。旗皷中軍王承恩。中軍王汝禎。答應官李起明。經畧沈思賢。遊擊張奇功。遊擊葛逢夏。遊擊沈惟敬。遊擊戚金。遊擊王友迪。監督都司樓大有。遊擊戴胡弁。參遊李郁。參遊李如梧。參遊趙之牧。參將周易拜。其見重於中國人有如此。今上甲寅。命建遺287_154a像之堂。以宸章銘之

 

 

정조 12년 무신(1788,건륭 53) 조선왕조실록에

 

 

호조 판서 서유린의 청으로 서산 대사의 사당을 세우게 하다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중 휴정(休靜)의 사적이 고 재상 이정귀(李廷龜)·장유(張維)가 지은 비문에 실려 있는데, 비문에 ‘서산 대사(西山大師)가 임진 왜란 때 국가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선묘(宣廟)께서 팔도 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 삼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 내리신 선묘의 전교와 의발(衣鉢)이 호남 대둔산(大芚山)에 간직되어 있으니, 영남의 예에 따라 사당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이어 표충(表忠)이란 두 글자의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포장(褒奬)하는 뜻에 부합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정조 18년 갑인(1794,건륭 59)

묘향산 서산 대사 휴정의 사당에 수충사라는 이름을 내리다

 

묘향산(妙香山) 서산 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사당에 수충사(酬忠祠)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동시에 제위전(祭位田)을 주었다. 이는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정조18년 갑인(1794,건륭 59) 승정원 일기의 내용중에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사당 칭호를 수충(酬忠)이라고 하사하고, 이어 치제(致祭)하는 일과 제전(祭典)을 헤아려서 지급하는 일은 모두 표충사(表忠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이병모(李秉模)의 장계에,

“영변(寧邊)의 묘향산은 서산대사 휴정이 열반(涅槃)한 곳으로,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사적비(事蹟碑)의 비문을 지었고, 신의 선조(先祖)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도 일찍이 그의 유집(遺集)에 서문(序文)을 지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장수들의 명첩(名帖)이 모두 절 안에 있는데, 전 도신 홍양호(洪良浩)가 이를 돌에 새겨 전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나라를 지킨 휴정의 공로에 대해서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모두 외우고, 국가가 표창(表彰)한 은전도 지극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그의 유상(遺像)이 내원(內院)에 있으나 봄과 가을의 재공(齋供)이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 도신 홍양호가 사찰의 승려를 도내(道內)의 도승통(都僧統)으로 차출하고 각 사찰에서 쌀을 수송하게 하여 재공에 필요한 비용을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작년 가을에 순행하다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승려들이 ‘예조에 보고하여 도승통의 인신(印信)을 새겨 주어 여러 사찰을 감독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으므로, 호남의 예를 끌어다가 한 차례 상에게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조심스러워서 감히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승려들이 몇 칸의 건물을 세우고 유상을 옮겨 설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급히 장계하니, 사액(賜額)하는 문제와 고을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는 문제를 예조에서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해 주소서. 그의 제자인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이 동시에 의승(義僧)을 일으켰고 이어서 또 멀리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의 유상도 내원에 같이 있으므로 휴정과 같이 시행하도록 하더라도 외람될 정도는 아닙니다. 도승통의 인신 1과(顆)도 만들어 준다면 더욱 산문(山門)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모두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휴정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명나라 군대를 도운 데 대해서는 그의 공을 포상하고 가상히 여기는 성조(聖祖 선조(宣祖))의 하교가 영예로운 자리보다 나으며, 유정이 동시에 의승을 일으키고 휴정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기도 하였으니, 도신이 청한 것은 참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연전에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를 새로 세운 것은 공로를 기록하고 충성을 장려하려는 성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던 만큼 이중으로 설치하는 일이라서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그러니 사액하는 문제는 이제 우선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격려하고 권장하는 정사를 관서가 호남보다 뒤떨어지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액을 하지 않더라도 옛 터에 집 1칸을 따로 지어서 스승과 제자의 유상을 봉안하고, 봄과 가을 향사(享祀) 때에 지방관이 제수를 헤아려서 지급하게 하여 영구히 변함없이 시행하도록 하며, 도승통의 인신 1과도 청한 대로 만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증(贈) 표충 선사(表忠禪師) 휴정이 종묘와 사직을 지킨 공로는 어찌 사람들이 칭송해야만 알겠는가. 성조의 매우 특별한 총애와 은덕은 공로에 보답하고 충성을 장려하는 성대한 법을 따른 것으로,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명성이 후세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그의 공로를 기억하는 조정의 정사로 볼 때 무슨 일인들 아끼겠는가. 묘향산은 그에게 있어 근본이 되는 곳이니, 이중으로 설치하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장계에서 청한 대로 해남의 예에 따라 사당의 호칭을 수충이라고 하사하고, 시임 도신이 비문(碑文)을 짓고 전임 도신이 비석의 전자(篆字)를 쓰도록 하라. 치제하는 일과 제전을 헤아려서 지급하는 일은 모두 표충사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 성조께서 어시(御詩)를 써서 내려 주셨으니, 이번에 치제할 때에도 어찌 일반적인 전례만을 따르겠는가. 경이 문임(文任)이므로 제문을 지어 올리라. 그리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