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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씨지(官氏志) 2

아베베1 2015. 1. 7. 05:35

 

 

 

해동역사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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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씨지(官氏志) 2
씨족(氏族)

 


○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여 그의 자손이 조선을 식읍(食邑)으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씨(氏)로 삼았다. 《풍속통(風俗通)》 ○ 《청일통지(淸一統志)》에, “기자가 조선에 도읍하였는데, 분야(分野)로는 기성(箕星)의 분야에 해당되었으므로 이를 씨(氏)와 국명(國名)으로 삼았다.” 하였다.
○ 기자의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지방을 식읍으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선우(鮮于)를 씨(氏)로 삼았다. 《성원(姓苑)》
○ 기준(箕準)이 달아나 바닷가로 들어가 한(韓) 땅에 살면서 한왕(韓王)이라고 스스로를 호칭하였으므로, 기준의 자식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를 인하여 한씨(韓氏) 성을 썼다. 《삼국지 및 위략》
살펴보건대, 평안도(平安道)에 지금 선우(鮮于)란 성씨가 있는데, 이는 기자(箕子)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평양(平壤)의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은 선우씨(鮮于氏)가 맡고 있으면서 대대로 기자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씨족대전(氏族大全)》을 상고해 보면, 역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고, 그의 소자(少子)가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이 선우씨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우씨는 바로 기자의 소자(少子)의 후예이지 기준(箕準)의 후예가 아니다. 또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마한(馬韓)의 후기에 잔손(孱孫) 3인이 있었는데, 친(親)과 양(諒)과 평(平)이다. 친(親)은 신라(新羅) 탈해왕조(脫解王朝)에 벼슬살이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옛 나라를 인하여 한씨(韓氏)로 성씨를 삼았으니, 이것이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 양(諒)은 용강(龍岡)의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그대로 선우씨(鮮于氏)를 이었다. 평(平)은 평강(平康)으로 돌아가 기씨(奇氏)가 되었는데, 지금 양덕(陽德)의 기씨는 모두 그 후예이다.” 하였다.
○ 주몽(朱蒙)은 흘두골성(紇斗骨城)에 살면서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칭하면서 이어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 《후주서》
살펴보건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주(注)에 이르기를, “주몽이 처음 탄생하자, 온 나라가 그를 높였으므로 고씨로 성을 삼았다.” 하였고, 권문해(權文海)의 《운옥(韻玉)》에는 이르기를, “주몽은 본디 성이 해씨(解氏)인데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로 햇빛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여 드디어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하였다.
○ 고구려(高句麗)에는 모두 5족(族)이 있는데,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노부(桂奴部)이다. 《후한서》 ○ 살펴보건대, 5족이 뒤에 5부(部)로 되었는데, 관제조(官制條)에 상세히 나온다.
고화(高和)는 고구려(高句麗)의 지서(支庶)인데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므로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진서(晉書)》
○ 후연(後燕)의 고운(高雲)은 본디 고구려(高句麗)의 지속(支屬)으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가 되어 성씨가 모용씨(慕容氏)가 되었으며, 그 뒤에 연왕(燕王)의 자리에 즉위하여서는 고씨 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에 통호(通好)하였다. 《자치통감》
○ 후위(後魏)의 우진씨(羽眞氏)는 본디 고구려의 고씨(高氏)로, 우진씨로 고친 것이다. 《속문헌통고》
○ 고려(高麗)의 우씨(羽氏)는 성씨를 고쳐 고씨(高氏)가 되었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살펴보건대, 우씨(羽氏)에 대해서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유리왕(琉璃王) 24년에 왕이 기산(箕山)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이인(異人)을 얻었는데, 양쪽 겨드랑이에 깃털이 있었으므로 우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 요(遼)의 장호(張浩)는 본디 성이 고씨(高氏)로, 동명왕(東明王)의 후예인데, 증조인 고패(高覇)가 요나라에 벼슬살이하면서 장씨(張氏)로 성을 바꾸었다. 《금사》
○ 을지씨(乙支氏)는 동이(東夷)의 복성(複姓)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있다. 《급취편(急就篇) 성씨(姓氏) 주》
개소문(蓋蘇文)은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천씨(泉氏)인데,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신당서》 ○ 《급취편》 주에, “천씨(泉氏) : 고구려 개소문의 성이 천씨로, 그의 아들은 천남생(泉男生)이고, 천남생의 아들은 천헌성(泉獻誠)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개소문의 본성(本姓)은 연씨(淵氏)로, 인물고조(人物考條)에 상세히 나온다.
○ 사선씨(沙先氏) : 당나라 무덕(武德) 연간에 사선영문(沙先英問)이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으로 있었는데, 본디 고구려의 종족이었다. 《만성통보(萬姓統譜)》
○ 곽리씨(霍里氏) : 조선(朝鮮) 사람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있다. 《상동》
○ 비씨(卑氏)는 비리국(卑離國)의 후예로, 공손연(公孫淵)의 대장군(大將軍) 비연(卑衍)이 있다. 《자치통감》 ○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마한(馬韓)의 50국 가운데 비리국(卑離國)이 있다.
○ 척왕씨(拓王氏)의 본디 성은 왕씨(王氏)로, 낙랑(樂浪) 사람이다. 원조(遠祖)인 왕비(王羆)가 후위(後魏)의 복파장군 진무후(伏波將軍鎭武侯)가 되었는데, 척왕씨로 성씨를 하사하였다.
살펴보건대, 《만성통보(萬姓統譜)》를 보면, “을불씨(乙弗氏)에는 고구려의 왕인 을불리(乙弗利)가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왕의 성은 고씨(高氏)로,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성씨가 바뀐 적이 없었으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다.”고 한 것과, 《통감》에 “고구려 왕 을불리(乙弗利)가 자주 요동을 공격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능적지(凌迪知)는 오랑캐들에게 복성(複姓)인 을불씨(乙弗氏)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왕의 성씨가 을불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백제 왕의 성씨는 여씨(餘氏)이다. 《북사(北史)》
○ 백제는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으로, 왕의 성씨는 부여씨(夫餘氏)이다. 《후주서》 ○ 《만성통보》에, “부여씨(夫餘氏) : 백제국 왕 부여관(夫餘寬)이 부여장(夫餘璋)을 낳았는데, 대방군왕(帶方郡王)이라 불렀고, 이가 부여의자(夫餘義慈)를 낳았는데, 당나라에서 대방군왕(帶方郡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였으며, 이가 부여융(夫餘隆)을 낳았는데, 웅주도독대방군왕(熊州都督帶方郡王)이 되었고, 이가 부여문선(夫餘文宣)을 낳았는데, 사선경 좌위대장군 낙랑군공(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이 되었다.” 하였다.
○ 부유씨(鳧臾氏)는 백제의 부여씨(夫餘氏)가 음이 변하여 부유씨(鳧臾氏)로 된 것이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 《속통고(續通考)》에, “부여씨가 부유씨(鳧臾氏)로 된 것은, 이는 대개 잘못 와전되어서 고쳐진 것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백제의 선조는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혹 여씨(餘氏)라고도 칭하고 혹 부여씨라고도 칭하며, 또 와전되어서 부유씨로도 되어 있는데, 사실은 똑같은 것이다.
○ 백제국 안에는 대성(大姓)이 8종족(種族)이 있는데,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구씨(氏)이다. 《수서》
백제의 8성(姓)은, 첫 번째는 진씨(眞氏)이고, 두 번째는 사씨(沙氏)이고, 세 번째는 여씨(刕氏) -음은 여(黎)이다.- 이고, 네 번째는 해씨(解氏)이고, 다섯 번째는 목씨(木氏)이고, 여섯 번째는 연씨(燕氏)이고, 일곱 번째는 국씨(國氏)이고, 여덟 번째는 백씨(苩氏)이다. 《만성통보》
살펴보건대, 협씨(劦氏)는 《북사(北史)》에는 역(力) 자 세 개를 써서 음이 협(協)이라 하였고, 《만성통보》를 지은 능적지(凌迪知)는 조(刁) 자 세 개를 써서 음이 여(黎)라 하였다. 그리고 《통지》에는, 백제전(百濟傳)에서는 여씨(刕氏)는 음이 여(黎)라 하고, 또다시 씨족략(氏族略)에서는 음이 협(俠)이라 하여, 한 책에서 두 가지 음으로 표기하였다. 그런즉 협제(夾漈) 역시 소루하게 한 것이다.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면, 도(刀) 자 세 개를 쓴 여(刕) 자는 있으나 조(刁) 자 세 개를 쓴 여() 자는 없는데, 도(刀) 자 세 개를 쓴 글자는 음이 여(黎)이니, 그렇다면 아마도 잘못하여 조(刁) 자 세 개를 쓴 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구씨(氏)는, 《수서》에서는 초두변[艹]에 구(臼) 자를 써서 구씨(氏)로 하였고, 능적지(凌迪知)는 《만성통보》에서 초두변에 백(白) 자를 써서 백씨(苩氏)로 하였는데, 구() 자의 음은 구(舊)이고, 백(苩) 자의 음은 백(白)이다. 《운회(韻會)》에는 “백제에는 백씨(苩氏)가 있으니, 초두변 아래에 백(白) 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통지》에도 역시 음이 백(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북사》에는 또 묘씨(苗氏)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백(苩) 자가 와전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원년에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 백제에 백씨(苩氏) 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난씨(難氏)는 백제 사람이다. 《급취편 성씨 주》
○ 흑치씨(黑齒氏)는 백제 서부인(西部人)으로, 당나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있다. 《통지 씨족략》
○ 사타(沙吒)는 오랑캐의 복성(複姓)으로, 백제의 별장(別將) 사타 상여(沙吒相呂)가 있다. 《자치통감 주》
○ 대씨(大氏) :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으로 발해(渤海)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급취편 성씨 주》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풍속통(風俗通)》에 ‘대씨 성은 대정씨(大庭氏)의 후예로, 대관(大款)이 전욱수(顓頊帥)가 되었다.’ 하였다.” 하였다.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대련(大連)이 거상(居喪)을 잘하였는데, 동이(東夷)의 후예이다.”고 하였는바, 대개 동이에 대씨 성이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자치통감 주》
○ 신라 왕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귀인(貴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백성들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신당서》
신라의 대족(大族)은 김씨와 박씨이다. 《오대사》
○ 고려의 사인(士人)들은 문벌(門閥)을 중하게 여기며, 유씨(柳氏), 최씨(崔氏), 김씨(金氏), 이씨(李氏) 4성을 귀족(貴族)으로 꼽는다. 《송사》
○ 김씨는 고려 사람 김행성(金行成)이 있고, 박씨는 고려 사람 박인량(朴寅亮)이 있다. 《급취편 성씨 주》
○ 육합(六合)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대부분 박(樸)과 같이 부르는데, 실은 음이 표(瓢)로, 고려의 성씨이다.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살펴보건대, 박(朴)의 음은 표(瓢)로, 이것은 중국의 음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방언(方言)이다. 대개 신라의 시조(始祖)가 알[卵]에서 나와 박(朴)으로 성씨를 삼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시조가 나온 알이 표주박[瓢]과 비슷하였는데, 방언에 표주박을 박이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또 박(朴) 자와 박(樸) 자는 중국 사람들 역시 통용하였으니, 《전당시(全唐詩)》의 고비웅(顧非熊)이 쓴 ‘송박처사귀신라시(送樸處士歸新羅詩)’라는 시에서 박씨(朴氏)를 박씨(樸氏)라고 하였다.
○ 유(妞)의 음은 유(紐)로, 성씨인데 고려에 있다. 《자휘(字彙)》
○ 북(北)은 고려의 성씨이다. 《만성통보》 ○ 살펴보건대, 《정자통(正字通)》에도 역시 이것을 인용하였다.
○ 금(金)나라의 본명은 여진(女眞)으로, 숙신씨(肅愼氏)의 유종(遺種)인 발해(渤海)의 별족(別族)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삼한(三韓) 가운데 진한(辰韓)의 역나씨(役拏氏)는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미천하다.” 하고, 혹은 또 이르기를, “처음에는 추장(酋長)이 본디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는데, 완안은 중국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하였다. 《금사》
○ 홍씨(洪氏)의 선조는 중국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재자(才子) 8명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가르치게 하였는데, 홍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자손들이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귀하게 되어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하여 당성(唐城)이라 하였다. 《원사》 ○ 살펴보건대, 당성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로,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모두 그의 후예이다.
○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5년(1365, 공민왕14)에 차황후(次皇后)인 고려의 기씨(奇氏)를 세워 황후로 삼고, 기씨를 고쳐서 숙량합씨(肅良合氏)로 삼았다. 《상동》
○ 철령 이씨(鐵嶺李氏)는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 때부터 벌열(閥閱)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朝鮮)에서 나왔으며, 양평(襄平)으로 이사한 것은 이영시(李英始)부터였다. 《왕어양집(王漁洋集)》
살펴보건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우리나라의 벽성(僻姓)으로 성주(星州)에 소씨(㸴氏)가 있는데, 음은 ‘소(小)’이고 뜻은 없다. 소(㸴) 자는 돌석[石] 자 아래에 소우[牛] 자를 쓰기 때문에 음이 소(小)이며, 소의 언음(諺音)은 ‘쇼’로, 세속에서는 우(牛)를 ‘쇼’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성원(姓苑)》을 보면, 석우씨(石牛氏)가 있으니, 바로 복성(複姓)이다. 소씨는 본디 석우씨인데, 석(石) 자와 우(牛) 자가 합하여져 소씨가 된 것인가? 또 《금사》의 국어해(國語解)를 보면, 석말한(石末漢)의 성은 소(蕭)라고 하였는데, 고려 때 석말천구(石抹天衢)가 있었는바, 말(末) 자가 잘못 우(牛) 자로 되고, 이 두 글자가 합해져서 소(㸴) 자로 된 것을 인해서 음이 소(蕭)로 된 것인가? 소(蕭) 자 역시 언음(諺音)은 ‘쇼’이다.
또 궉씨(鴌氏) 성이 있는데, 음은 권(權)과 억(億)의 반절(半切)로 -언음(彦音)은 ‘’이다.-, 《지봉유설》에 이르기를, “순창(淳昌)에 궉씨가 있다.”고 하였고, 《앙엽기(盎葉記)》에는 이르기를, “선산에 궉씨촌((鴌氏村)이 있다.”고 하였다. 궉(鴌) 자에 대해서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창제한 글자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살펴보건대, 《증정편해(證正篇海)》를 보면, ‘鴌’의 음은 봉(鳳)이라고 하였고, 《오음정운(五音正韻)》를 보면, ‘鴌’ 자는 고문(古文)의 봉(鳳) 자라고 하였다. 그러니 궉씨(鴌氏)는 글자의 음과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평이하게 잘못 권(權)과 억(億)의 반절로 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앙엽기》를 보면, 광주(廣州)에 왹씨(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자칭 음은 와(臥)와 억(億)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언음(彦音)은 ‘왹’이다.- 왹() 자는 《증정편해》를 보면 어(魚)와 열(列)의 반절로, 그 음이 얼(孽)로 되어 있고, 《자휘보(字彙補)》에는 “문왹(門)이다.”고 하였다.
또 연안(延安)에 헝씨(遤氏)가 있는데, 음은 훤(喧)과 응(應)의 반절이며 -언음은 ‘헝’이다.-, 자서(字書)에는 이런 글자가 없다. 또 《강화지(江華誌)》에는 할씨(㔛氏) 성이 실려 있는데, 자서(字書)에 ‘할(劼)’ 자가 있고, 《집운(集韻)》에는 음이 힐(詰)이라고 하였고, 《설문(說文)》에는 삼간다[愼]는 뜻이라고 하였고, 《서경(書經)》 주고(酒誥)에는, “너는 은나라의 어진 신하들에게 힘써 삼가도록 해야 하니[汝劼毖殷獻臣]”라 하였으니 ‘할(㔛)’ 자는 혹 할(劼) 자가 종으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또 흥양(興陽)의 목자(牧子) 가운데 뼘씨(乀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고, 음은 ‘뼘’이다.
그리고 천씨(千氏), 돈씨(頓氏), 승씨(承氏), 야씨(夜氏), 편씨(片氏), 골씨(骨氏), 공씨(公氏), 옹씨(邕氏), 방씨(邦氏), 일씨(一氏), 먀씨(乜氏) -음은 미(彌)와 야(也)의 반절로, 언음(諺音)은 ‘먀’이다.- 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역시 우리나라의 벽성(僻姓)이다.


 

[주D-001]기준의 …… 썼다 : 이 부분의 원문은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이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는, “《위략》의 찬자는 준왕이 ‘자호한왕(自號韓王)’이라 하였기 때문에 고국에 억류된 그의 아들과 친족들도 인하여 한씨(韓氏)를 모칭(冒稱)한 것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조선왕 기준이 남쪽으로 도망해 오기 이전의 반도 중부 이남에는 아직 한(韓)의 칭호를 가진 지방이 없었고, 기준이 한왕이라 칭한 것도 본디 자신의 성이 본래 한씨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칭한 것이다. 또 고국에 억류된 친족들도 새삼 한씨를 모성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 역시 그러한 까닭에 한씨라고 인성(因姓)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50쪽》
[주D-002]마한(馬韓)의 …… 후예이다 : 이에 대하여 《동사강목》 부록 상권 고이조(考異條)에는, “이정귀(李廷龜)가 쓴 기자숭인전비(箕子崇仁殿碑)에 ‘마한 말기에 잔손(孱孫) 3인이 있었는데, 친(親)이란 사람은 뒤에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란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양(諒)이란 사람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친(親)은 바로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말한 ‘기준의 아들 우친이 머물러 있다가 한씨로 모성하였다.[其子友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병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세보(世譜)를 보면 그들의 원조(遠祖)를 기자(箕子)로 삼고 있다. 이것은 《위략(魏略)》의 글에 의거한 것인데, 그 세보에는 《위략》에 운(云)이라 하고 기자의 후에 우친(友親), 우평(友平), 우량(友諒)이 있어, 그중에 우량이 마한을 공격하여 이기고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너무도 심한 날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날조자는 《위략》의 글에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 운운의 급(及) 자가 《문헌통고》와 같은 서적에 잘못 우(友) 자로 와전된 것을 그대로 보아, 그 밑의 친(親) 자와 합하여 ‘우친(友親)’이란 인명으로 오독(誤讀)한 후 진일보하여 우 자의 항렬을 붙이어 우평, 우량 두 허위 인물을 더 추가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1쪽》
[주D-003]흘두골성(紇斗骨城) :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표기한다.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04]고화(高和) : 이병도는, “고화는 앞서(고국원왕 12년 12월) 전연(前燕)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의 국도인 환도성(丸都城)을 무찌르고 남녀 5만여 구를 노략하여 갔을 때 잡혀간 포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대로 연(燕)의 신하가 된 자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5쪽 주》
[주D-005]고운(高雲) : 고화(高和)의 손자로, 연왕 모용보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 뒤에 연왕으로 있던 모용희(慕容煕)가 실정(失政)을 하자, 풍발(馮跋)에 의해 연왕으로 추대되었다.
[주D-006]개소문(蓋蘇文)은 …… 천씨(泉氏)인데 : 이병도는, “개소문에 대하여는 《신당서》 고려열전(高麗列傳)에 ‘개소문이란 자가 있는데, 혹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천씨이다.[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이에 의거하면 소문의 완칭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요, 다른 한 이름은 개금(蓋金)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6년 및 10년 조에 보이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당서》의 ‘소문의 동생 정토[蘇文弟淨土]’와 같은 사람임을 보면, 천씨(泉氏)는 본래 연씨(淵氏)였던 것이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한 뒤 천(泉) 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함이 통설(通說)이다. 《삼국유사》 보장봉노조(寶藏奉老條)에 적힌 ‘스스로 성은 개이고 이름은 금이라고 칭하였으며, 지위가 소문에 이르렀는데, 바로 시중의 직책이다.[自稱姓蓋 名金 至位蘇文 乃侍中職也]’라 하여 소문(蘇文)을 관직명이라 한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21쪽 주》
[주D-007]백제 …… 여씨(餘氏)이다 : 백제 왕족의 성씨는 본디 부여씨(扶餘氏)인데, 흔히 여씨(餘氏)로 약칭한다.
[주D-008]협제(夾漈) : 《통지》를 지은 정초(鄭樵)를 말한다. 정초가 협제산(夾漈山)에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협제 선생(夾漈先生)이라 칭하였다.
[주D-009]가림성(加林城) : 임천(林川)의 성흥산성(聖興山城)이다.《國譯三國史記 401쪽》
[주D-010]앙엽기(盎葉記) :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안에 들어 있는 서명(書名)이다.
[주D-011]할씨(㔛氏)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 2에는 음이 ‘할(轄)’이라고 하였다.
[주D-012]뼘씨(乀氏)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53 제계고(帝系考) 씨족(氏族)에, “음은 사폄념(沙貶念)의 절(切)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