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임시저장

최관(崔寬)의 집 일 최계창(崔繼昌)의 아들 ○ 최선(崔宣)의 어머니 권씨(權氏)는 바로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딸이다

아베베1 2015. 2. 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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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최관(崔寬)의 집 일 최계창(崔繼昌)의 아들 ○ 최선(崔宣)의 어머니 권씨(權氏)는 바로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딸이다. ○ 최관의 5대 손 익남(益男)과 최선의 외손 진익한(陳益漢)은 문과(文科)하였다.

정사년 11월에 전 참봉 최선이 억울한 일이 있다고 징을 치고 잡혔다. 원정(元情)의 대략은, “신의 어머니는 바로 전 감사 최관의 계모입니다. 지난 무술년에 신의 어미가 죽자 형 최관이 제사를 주관하는 장자로서 삼년복을 입었고, 신주 방제(神主傍題)에도 ‘효자 관 봉사(孝子寬奉祀)’라 썼는데, 그 상을 마친 뒤에 신이 성묘 간 때를 기다려서, 계부(季父)인 계웅(繼雄)과 사사로 모의하여 신의 어미의 신주(神主)를 가묘(家廟)에 들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가묘에 고하였으니, 신이 놀라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유를 물으니, 형이 답하기를, ‘이는 조부의 유명(遺命)으로 조모가 이렇게 하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또 묻기를, ‘조부의 유명을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조모의 말을 극구 막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부형의 명을 어찌 감히 거역하겠는가?……’ 하였습니다.가묘에서 추방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데, 모자간의 정에 만약 그런 기미를 알았으면 어찌하여 혼자만 알고 여러 동생에게는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곧 이 말을 듣고는 의심스러워서 신이 울면서 계조모(繼祖母)에게 호소하니, 답하기를, ‘80살이나 된 늙은 할미가 어찌 이 일에 참여했겠느냐? 이는 네 형과 네 아자비가 한 일이다.’ 하시기에, 신이 또 울면서 계부(季父)에게 간하니, 답하기를, ‘이는 나 혼자서 한 일이 아닌데 어찌 나만 탓하느냐?’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신의 형을 지목한 것일 것입니다. 삼년상을 입고 방제(傍題)에 봉사(奉祀)라 쓰고는 상을 마친 뒤에 이처럼 가묘에서 추방하는 계책을 하는 것은 고금천하에 없는 변입니다. 조모는 그때 나이 벌써 80세였으니, 설혹 타당치 않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손자된 도리로서 마땅히 울면서 극구 간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조모가 애당초 참여하여 아는 일이 없다고 한데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한 장의 언문 글을 가지고 유명이라 말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대개 신의 어미가 병자년에 시댁에서 친정에 노모를 뵈러 갔다가 병화(兵禍)가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사세가 급박해서 미처 시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내 외조모와 같이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에 남녀가 물결처럼 밀려 달아나는데, 신의 어미는 노모 때문에 자결하지 못하고 흰 머리 노쇠한 목숨이 마침내 난병(亂兵)들에게 몰리어 개성부(開城府)로 갔었습니다. 그때 마침 소현세자의 행차가 이르렀는데, 빈객(賓客) 박황(朴潢) 및 요속(僚屬) 등이 늙고 병들어서 굶주리고 추워하는 신의 어미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거의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세자에게 고해서 옷과 양식을 얻어주고, 이어서 석 냥 값으로 속(贖)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개성(開城) 도사(都事) 홍정(洪霆)의 가족과 같이 한 배로 강화도로 돌아갔습니다.신의 조부가 난리가 지나자 서울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신이 먼저 어미 있는 곳에서 조부를 와서 보니, 조부가 보고 기뻐서 울며 말하기를, ‘만약 박황과 홍정이 아니었으면 너의 어미는 길가에서 시체가 될 뻔했구나. 다만 네 외조모가 죽었으니 그 장사가 마치기를 기다려서 빨리 네 어미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습니다. 난리 뒤에 장사 지내자니 시일이 자연 늦어졌는데, 정축년 8월에 조부가 죽으니, 신의 어미가 맏며느리로 제사를 맡아 삼년상을 입었고, 조모 곁에 2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같이 있었으나 온 집안이 예전처럼 대접했고, 무술년 신의 어미의 상사(喪事) 때에도 조모가 맏며느리 복을 입었으며, 집안의 시공복(緦功服)의 친족도 모두 그 복을 입었는데, 상을 마치던 날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묘에서 내치려는 의논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당초에 가묘에서 내친 뒤에 선비들의 공론이 중하게 일어나서 모두 ‘어미를 폐하였다.’는 것으로 지목하고, 모두 분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갑자기 일설(一說)이 있어서 사대부들 사이에 돌기를, ‘송시열의 의논은 이같이 처치하는 것이 타당하니, 최관이 상복을 입은 것은 실로 후하게 한 것이다.’ 한다 하니, 듣는 이가 살피지 않고 부화뇌동하므로 신이 생각하기를, 시열은 글 읽은 사람이라 대강 의리를 알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경우 없는 말을 해서 남의 모자(母子)의 윤리를 어지럽히는고? 하고, 곧 시열의 집에 가서 자세하게 그 전후 사실을 진술하고, 이어서 묻기를,‘어디에서 얻어 듣고 이런 나의 형이 삼년상 입은 것은 후하게 한 것이라는 말을 하였는고?’ 하니, 시열이 답하기를, ‘그대의 형의 아들 세주(世柱)가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증조부의 유명으로 계모가 내쫒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상을 입은 까닭은 동기간을 위해서 남의 이목을 덮고자 해서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답한 것이다, 하기에, 신이 또 묻기를, ‘만약 내가 말한 사실과 같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시열이 눈을 감고 답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딴말을 하였으니, 그가 신의 조카에게서 먼저 들은 말로 주장을 삼는 뜻을 대개 추측하였습니다.세주가 변고를 저지르기 전에 거짓말을 꾸며서 시열의 뜻을 시험삼아 탐지해 본 것인지, 혹은 변고를 저지른 뒤에 ‘어미를 폐했다.’는 말을 두려워하여 시열의 말을 빌려 도움이 되게 하려 함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변고 전에 물은 것인지 변고 후에 물은 것인 그것은 놓아두고 아직 논하지 않거니와, 손자로서 조모(권씨)의 허물을 증거댐은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이미 상복을 입었으니 쫓아버리지 않은 것을 증명한 것인데, 후하게 하였다고 칭찬하고 마땅히 쫓아버려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예를 아는 이(시열)의 사람을 가르치는 일입니까? 당초에 신이 형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개정하지 않으면 이는 어미가 없는 것이니, 사람이 어미가 없으면 어떻게 천지간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형이 답하기를, ‘송시열은 당세의 사림의 종장(宗匠)이고, 국가의 원로(元老)이니, 내 마땅히 그의 말을 듣고 결정하겠다. ……’ 하였는데, 신은 세주가 꾸며서 무함한 말을 듣고는 비로소 형이 이미 그 아들을 시켜 먼저 시열의 뜻을 탐지하고서 이 말을 한 것인 줄 깨달았습니다. 다른 뜻을 두고 시열에게 탐문해서 어미의 죄를 구성하는 것은 진실로 사람의 자식으로서는 차마 못할 것인데, 시열은 어찌 의리의 합당 여부와 처사의 어그러지고 그릇됨을 살피지 않고 바로 이런 근거 없는 말을 내어서 드디어 신의 형으로 하여금 그 말을 빙자해서 불측한 데에 빠지게 한단 말입니까?
신의 형이 일찍이 고부(古阜) 군수로 있을 때에 신의 어미의 신주(神主)도 받들고 갔는데, 체차되어 올 때에 신에게는 알리지 않고 신주의 방제(傍題)를 계부 계웅(繼雄)과 같이 사사로 분칠하여 고쳐 신의 이름으로 써서 신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 뒤로부터 여러 고을 수령을 지냈으나 한번도 신의 어미 신주를 받들고 가지 않았으니, 고부로 가져간 것은 다만 개제(改題)할 계략으로 한 것입니다. 신의 형이 일찍이 감사가 되어 신의 어미에게 추증(追贈)이 되니, 신의 생각으로는 형이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 장차 모자의 의리를 회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개제할 때에 또 방제를 전과 같이 형의 이름으로 쓸 것을 청하니, 형이 거절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이는 겉으로만 ‘어미에게 영광을 미치게 한다.’ 하여 전이 송시열의 ‘후하게 하였다.’는 말을 실증하려고 함에 불과합니다.조정 신하들 사이에 이 일로써 형을 논핵하고자 하니 없앨 수 없는 공론에 끝내 잠잠하고 있을 수 없게 되자 문중의 친척들이 서로 같이 모의하기를, ‘이미 잘못된 뒤에는 다시 어쩔 수 없으니, 종자(宗子 최관을 이름)로 하여금 중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이 변을 사실로 만드는 것만 못하다.’ 하고, 처음에 논의가 갑을로 나뉘었던 자들도 점점 합해져서 같이 호응하여 도리어 더욱 얽고 꾸미니 신의 어미의 억울함은 밝히고 씻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 전 감사 최관의 원정의 대략은, “집안의 망극한 변과 말하기 어려운 일은, 변명하고 죽는 것이 변명하지 않고 죽는 것만 못하나, 엄하게 물으시는 아래에서 끝내 침묵할 수 없습니다. 조모가 조부의 유언으로 어미를 처치한 후, 신의 3형제는 망극할 뿐이어서 변통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동생 최선이 번번이 말하기를, ‘조모와 계부가 이미 처치한 것이나, 조모와 계부는 모두 벌써 죽고 지금은 형이 아들로서 홀로 가묘를 받들고 있으니, 그 처치를 고쳐서 어머니의 신주를 가묘에 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기에, 신이 가묘에 들이고 싶은 정은 비록 그의 뜻과 같으나, 이미 조모와 계부가 조부의 유서로 선대를 위하여 계모를 처치하고 유서를 작성해 둔 뒤이므로 이미 그들이 죽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고치지 못할 것 같기에 이 말을 들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그(아우)의 원정을 보니, 여러 많은 말이 모두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오니, 명백하게 아뢰고 나서 죽겠습니다. 무술년 3월 어미가 죽기 전에 미처 처치하지 못하고, 3년이 지난 경자년 1월에 조모가 어미의 대상(大祥)이 되기 전에 처치하고자 하여 여러 자녀들을 모아놓고 의논해서 정하였는데, 그때 동생 최선은 어미 산소에 가 있어서 조모가 불러도 오지 못하고, 신과 막내동생 최헌(崔憲)이 서울의 다른 집에서 어미 상을 받들었는데, 조모가 신의 형제와 여러 숙부를 불러 모두 모아놓고, 조모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조부와 정축년 3월에 피난지에서 처음 서울에 들어왔는데, 너희 조부는 너희 어미가 강화도에서 불행한 일이 있었단 말을 듣고 너희 어미를 처치하려고 하였으나, 큰 난리가 겨우 평정되어 서울에 있던 자녀와 친족들이 먼 밖에 흩어져 있어서 진작 처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병이 중해져서 나와 곁에 있는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내 생전에 미처 처치하지 못하고 죽으니, 내가 죽은 뒤에 내 말대로 며느리를 가묘에 들이지 못하게 하라.’ 하였는데, 정축년 8월에 너희 조부가 죽어서 생전에 너희 어미를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유언대로 곧장 처치할 것이나, 너희 조부 삼년상 안에 망극하게 세월을 보냈고, 또 그가 낳은 자손들은 위해서 차마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지 못하고 해가 오래되도록 시일을 미루었는데 너희 어미가 갑자기 내 생전에 죽으니, 그의 초상 때에는 그가 낳은 자손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이목을 덮고자 해서 너로 하여금 상복을 입게 한 것은 비록 일시의 변통이긴 하였으나 마음에는 끝내 미안한 바가 있었다.대상 전에는 처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 가묘에 고하고 처치하라. ……’ 하니, 신의 형제가 놀라고 황공함을 이기지 못해서 뜰에 내려가 엎드려서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청하였으나, 조모가 엄하게 명하기를, “너희 마음의 가련함을 알기는 하지만 너희 조부 평생에 선조를 위하는 도리가 지극히 공경스럽고 정성스러웠으며 본성품이 엄격하고 단정해서 죽을 때의 유언도 엄중하였다. ……’ 하고, 끝내 들어주지 않아 계부 계웅이 축문을 지어 가묘에 고하고 처치한 것입니다. 쫓겨난 데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조모가 또 신의 조부의 동생들 사이에 왕래하며 의논하여 정했는데, 그때 조부의 누이 동생인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부인이 혼자 세상에 살아 있으니, 가묘는 역시 부부인(府夫人) 부모의 사당이었기 때문에 조모와 계부가 이같이 처치할 뜻을 같이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니, 그 집 자손들도 모두 그 실상을 알고 있습니다. 당초 처치할 때에 참여한 자녀들의 자손 중에는 전 사간 이무, 직장 이재(李㦳)ㆍ이빈(李䎙)ㆍ최식(崔寔)ㆍ장두팔(張斗八)ㆍ최실(崔實) 등이 모두 이 일의 전말을 다 알고 있습니다. ……” 하였다. 이빈은 계창의 아우 계흥(繼興)의 사위이다.
○ 전 사간 이무의 원정에, “외백숙(外伯叔) 최계창(崔繼昌)의 계실(繼室) 권씨가 병자년 난리에 더러운 욕을 당한 일은 세상에 말이 자자하니 제기할 필요도 없거니와, 신 등의 외조부는 행실과 본성품이 엄정하여 집안의 일처리를 한결같이 법도에 따랐습니다. 권씨가 욕을 당한 뒤에 항상 자손과 친족에게 이르기를, ‘권씨가 자살하지 못하고 욕을 참고 돌아왔으니, 그가 어찌 감히 내 집에 발을 들이겠느냐? 그 오라버니 권항(權伉)의 집에 보내라.’ 하였으며, 정축년 8월에 외조부의 상사가 난 뒤에도 권씨가 끝내 분상(奔喪)하지 못하였으니, 외조부의 생시에 맏며느리로 대접하지 않은 것은 이것으로도 알 것이온데, 권씨가 시부상에 삼년을 주관했다는 말은 거짓이 막심하옵니다. 외조부가 임종할 때에 외조모와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번번이 친족을 모아서 가묘에 고하고 처치하려고 하였으나, 큰 난리가 겨우 평정되어 친족이 흩어져 있어서 미처 처치하지 못하였으니, 내 죽은 뒤에 권씨가 비록 죽더라도 결단코 가묘에 들여서 선대의 사당을 더렵혀서는 안 될 것이다.” 한 것은 온 집안 자손들이 밝게 아는 일입니다.권씨가 죽은 뒤에 상복을 입은 일절(一節)은 외숙 계웅이 외조모에게 결정하기를 여쭈니, 외조모가 이르기를, ‘한갓 법으로만 따지면 장손 최관이 상복을 입을 의리가 없으나, 내가 차마 끊지 못하는 것은 권씨가 낳은 최선과 최헌이 있으니 지극한 인정에 차마 못할 것이지만, 삼년상을 입은 뒤에 가묘에 들이는 일은 결단코 변동할 수 없다.’ 한 것입니다. 경자년 1월에 축문을 써서 가묘에 고하고 이내 유서를 작성해 두었는데, 외사촌이 실지로 참여해서 정하고 모두 이름을 썼는데, 최선의 원정에는 조모와 삼촌이 언급하지 않은 말을 지어내서 가묘에서 내친 일을 모두 장형(長兄) 혼자 마음대로 한 일로 돌려서 죄목을 억지로 만들어 근거 없는 모함을 하니, 그 꾸미고 속이고 해괴한 실상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문중의 친족들이 처음에는 의논이 갑을로 나뉘었다가 점점 합치해서 서로 같이 호응했다.’는 말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대체로 가묘에서 내치는 일은 실로 조부의 유언으로 된 것이니, 비록 효도하고 사랑하는 자손이라도 영원토록 고치지 못할 것이니, 최선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원통함을 참고서 그 허물을 덮어야 할 것인데, 지금에 와서 조모와 삼촌이 다 죽은 뒤에 부형을 불측한 말로 얽고 꾸며서 도리어 그 치욕을 스스로 외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외의 여섯 사람의 원정을 기록하지 않으나 대의는 이와 비슷하다.
○ 금부에서 아뢴 대략에, “최관이 상복을 입은 것은 그 두 동생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며, 신주 방제를 처음 썼다가 뒤에 고친 것은 모두 사세의 당연한 것이니, 공자가 말한 ‘허물을 보면 인(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서를 작성해서 처치한 뒤에 그 낳아준 어미와 같이 일체 증직(贈職)을 받았으니 이미 그 조부모의 유의(遺意)에 어긋났으며, 또 임금의 은명(恩命)을 모독하는 죄가 있으니, 마땅히 이 일로써 논정할 것이며, 최선의 어미가 포로가 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고, 죽은 뒤에 가묘에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조부의 유언을 조모가 시행한 것이었고,그 숙부와 여러 종형제가 붓으로 써서 서명하였으니, 이처럼 분명한데도 가묘에서 내친 일을 전적으로 최관이 한 것이라 칭탁하고, 낱낱이 얽어 무고하여 반드시 불측한 죄에 빠뜨리고자 하였으니, 그 어미의 악함을 씻으려 하다가 더욱 그 악함을 드러내었고 무죄한 형을 해치고자 하다가 속이고 무고하는 죄에 스스로 빠졌으므로, 국법에 그냥 둘 수 없으니 법에 비추어 최선은 곤장 1백 대와 삼천 리 유형에 처하고, 최관은 곤장 1백 대에 도삼년에 처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으니 파직시키고 석방하라.” 하였다.

 

40,50 수도권 산우님께

 

도봉산 300회 산행공지 산우님과 함께하셨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덕택에 300회공지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도봉산 공지 300회 기념산행에 참석하여 주신 산우님 축하와 격려의 글을 남겨주신 산우님께

 

감사의 인사을 올립니다

 

 

 

리처드 회장님 , 머릿돌 부회장님 ,니콜 운영자님 ,봉산운영위원님 , 김정희 대장님 ,이찌꼬대장님 등

 

일일 총무님 가나다님, 슈이님 , 소나무향님, 하비슬님

 

 

 

물심양면으로 두움 주신님

 

순한맨발님 ,선생님, 매봉님 재즐님 배건예님 홍마님 로또요님

 

잇다님 오목님 청아한님 스티브메킨님 먼동님 로즈메리님 ....

 

그리고 갑장님 ...

 

된장작가님

 

낭만동자님

 

음식을 준비하신님 , 도움주신 모든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산우님께 찾아 뵙고 인사를 올려야 도리이지만 글로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게 된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넓은 혜랑으로 이해를 구합니다

 

아울러 참석하신 산우님께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많은 이해룰 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봉사를 하겠습니다

 

가정과 직장에 행운이 가득하시고 건강하신 한해가 되십시오

 

앞으로도 많은 성원 부탁드며,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도봉산 길잡이 아베베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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