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5.3.1. 북한산 산행

2015.3.1 조선효자 박태성 정려비

아베베1 2015. 3. 4. 04:52














 

碩齋稿卷之九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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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東外史
[朴泰星


 

朴泰星者。密陽府人也。生三歲。其父死。及長。輒泫然恨未承父顔也。年六十三。而遇父死之年。乃具衰服。287_156a廬其墓側。日侍墓呼哭。墓前立古杉一樹。有鳥巢其顚。䳺身鳩色。人莫能名。泰星出廬戶。鳥乃繞坐苴杖。及抵墓。鳥飛上樹。泰星哭。鳥亦哭。曲折往復。相上下。泰星止哭。鳥亦止哭。自墓至廬。隨苴杖而下。入其戶乃去。日以爲常。三年如一日。旣免喪。鳥不知所之。詩人李秉淵作異鳥歌。村之士女至今歌之。當朴孝子之世。有能觀感如鳥者哉。夫子曰。可以人不如鳥乎。於鳥無愧色焉。斯可乎哉。

 

艮翁先生文集卷之九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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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七言古詩
異鳥歌 爲淸潭孝子朴泰星 


 

高陽之山靑寂寞。澄潭一曲搖寒玉。上有孤松老兀然。墳西一枝春無綠。孝子廬墓西畔松樹。異鳥來坐。隨孝子晨昏啼哭。所坐之枝獨枯云。枝頭有鳥不知名。毛衣鮮白雜靑黑。啼來吊孤兒。孤兒相對哭。孤兒五更起。鳥亦五更集。一哭山石裂。234_191a再哭山月泣。三哭颯颯悲風作。空山百鳥驚蹢躅。淚盡心苦聲酸絶。口吻咽咽逾廹促。孤兒不在山。鳥去雲天上寥廓。孤兒復還山。鳥來繞樹鳴相逐。鳥來爾何意。不語對以臆。孤兒六十老爲翁。孺子之泣如一夕。終身慕父不識面。平居未改顔深墨。塚傍結廬終老計。徵辟不應諸公檄。主上嘉之表其閭。丹楣粉題耀窮峽。皦皦精忱質白日。天公下視一於邑。爲遣仙禽降翩然。獨托靑林月中宿。哀號似說落星心。淸血非爲山花色。倘微求爲歷山耘。無乃願作王祥炙。君不見精衛之鳥爲父塡海死。觜禿不辭啣木石。又234_191b不見蘓耽化鶴上太淸。戀母歸來聲痛廹。此鳥應知二鳥魂。不然胡爲孝子屋丘壠。秋啼霜露中。楟花未落陔蘭碧。嗚呼此鳥誠可異。吾將喚取黃荃畫手來盤礴。丹靑一寫此鳥眞。寄向山中喜事客。他年鄕社祭孝子。與掛祠中一面壁。

 

 

 

존재집(存齋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존재집(存齋集)
판심제  없음
간종  괘인사본(罫印寫本)
간행년  철종 연간 필사(哲宗年間筆寫)
권책  26권 13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6×14.2(cm)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246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92
 저자
성명  박윤묵(朴允默)
생년  1771년(영조 47)
몰년  1849년(헌종 15)
초명  지묵(趾默)
 사집(士執)
 존재(存齋)
본관  밀양(密陽)
특기사항  정이조(丁彛祖)의 문인(門人). 천수경(千壽慶), 왕태(王太), 최면(崔沔), 지석관(池錫觀) 등과 교유
 가계도
 朴受天
 副護軍
 朴弘梓
 通德郞
 玄風尹氏
 尹鎭世의 女
 朴認默
 別提
 朴在默
 通德郞
 朴允默
 
 利安朴氏
 朴載夏의 女
 朴基孝  
 
 淸州韓氏
 韓命喆의 女
 朴基福
 
 朴基祜
 
 朴基祚
 
 女
 
 金學準
 
 女
 
 劉命勳
 
 女
 
 李命舜
 
 女
 
 金東赫
 
 側室
 
 朴基祐
 
 朴鎭默  
 
 朴亨梓
 
 朴鎭默  
 
 朴基中
 
 朴基孝  
 

기사전거 : 行狀(金周敎 撰), 墓碣(尹定鉉 撰), 墓表(尹定鉉 撰, 梣溪遺稿 卷7), 朴弘梓墓碣(朴允默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영조 47 1771 신묘 乾隆 36 1 10월 22일, 태어나다.
~ ~ ~ ~ ~ ~ ~ 漁山 丁彝祚에게 배우다. ○ 스승 정이조가 癘疾에 걸렸을 때, 피하지 않고 곁에서 救護하다.
정조 7 1783 계묘 乾隆 48 13 3월, 부친상을 당하다.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14 利安朴氏 朴載夏의 딸과 婚姻하다.
정조 14 1790 경술 乾隆 55 20 규장각에서 교정 일을 시작하다. 正祖의 知遇를 받다.
정조 17 1793 계축 乾隆 58 23 5월, 모친상을 당하다.
정조 24 1800 경신 嘉慶 5 30 정조가 승하하다. ○ 이후 정조의 忌辰이 되면 王太와 함께 北山에 올라 健陵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순조 3 1803 계해 嘉慶 8 33 夫人 朴氏의 喪을 당하다.
순조 14 1814 갑술 嘉慶 19 44 8월, 「弘齋全書」를 강화 외규장각에 봉안하러 가다. ○ 장남 朴基福이 태어나다.
순조 15 1815 을해 嘉慶 20 45 金剛山을 유람하다.
순조 18 1818 무인 嘉慶 23 48 千壽慶을 곡하다.
순조 19 1819 기묘 嘉慶 24 49 4월, 谷山 馳馬臺에 御製 비문을 세우다. ○ 5월, 監蕫한 공으로 通政大夫가 되다. ○ 북한산 太古寺에 보관 중인 四書三經의 板本을 중수하는 일에 참여하다.
순조 20 1820 경진 嘉慶 25 50 12월, 차남 朴基祜가 태어나다.
순조 21 1821 신사 道光 1 51 盧允迪을 곡하다.
순조 24 1824 갑신 道光 4 54 9월, 李愼民, 金洛瑞, 王太와 佛巖山을 유람하다.
순조 25 1825 을유 道光 5 55 김낙서를 곡하다.
순조 26 1826 병술 道光 6 56 10월, 장남 朴基福의 冠禮를 치르다.
순조 27 1827 정해 道光 7 57 御製를 글씨로 써 바친 공으로 嘉善大夫가 되다.
순조 28 1828 무자 道光 8 58 張混을 곡하다.
순조 31 1831 신묘 道光 11 61 6월, 景福宮 衛將이 되다. ○ 7월, 同知中樞府事가 되다. ○ 8월, 永禧殿 殿監이 되다.
순조 32 1832 임진 道光 12 62 華城을 重修하는 데 監蕫이 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64 魂殿都監 別看役으로 정성을 다하다. ○ 7월, 次男 朴基祜의 冠禮를 치르다. ○ 王太를 곡하다.
헌종 1 1835 을미 道光 15 65 윤6월, 별간역으로 수고한 공으로 특별히 平薪鎭 僉使가 되다. ○ 부임한 후, 私財를 써서 기근을 당한 백성들을 구호하고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한 남녀들을 혼인시켜 주다.
헌종 2 1836 병신 道光 16 66 첨사로 있으면서 南洲 崔沔과 교유하다.
헌종 3 1837 정유 道光 17 67 4월, 잠시 上京하여 純祖와 翼宗의 御眞을 경복궁으로 移奉할 때 別看役 差備官이 되다.
헌종 4 1838 무술 道光 18 68 봄, 僉使에서 체직되다. ○ 兼山 崔瑗과 금강산을 유람하다.
~ ~ ~ ~ ~ ~ ~ 晩年에는 高陽 淸潭里 墳菴에서 대부분 거처하다.
헌종 15 1849 기유 道光 29 79 2월 15일, 졸하다. 고양 청담리에 장사 지내다.
철종 2 1851 신해 咸豐 1 金周敎가 행장을 짓다.
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尹定鉉이 묘갈을 짓다.
철종 7 1856 병진 咸豐 6 徐俊輔가 묘지명을 짓다.
고종 17 1880 경진 光緖 6 2월, 戶曹 判書에 추증되다.

기사전거 : 行狀(金周敎 撰), 墓碣(尹定鉉 撰), 墓誌銘(徐俊輔 撰), 序(崔沔 撰), 跋(朴綺壽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시와 글씨로 이름난 閭巷詩人으로, 오랫동안 奎章閣에서 書吏로 봉직하면서 많은 서적의 간행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여항 시인인 王太와 함께 正祖의 知遇를 받았다. 만년에는 平薪鎭 僉使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편에 서서 善政을 베풀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그린 사실적인 시들을 남겼다.
본집은 26권 13책으로 이루어진 罫印寫本이다. 이것은 저자 생존시에 이미 상당 부분 편차가 이루어진 自編稿를 바탕으로, 저자 사후에 아들들이 만년의 작품들을 보충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서문은 저자가 평신진 첨사로 있던 시기인 1836년에 崔沔이 쓴 것인데, 아마도 당시까지의 작품을 모아서 최면에게 보이고 서문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徐俊輔가 쓴 저자의 묘지명에서 “君이 은퇴하여 나와 한가로이 지내면서 거의 매일 서로 만나 酬唱한 詩文이 수백 편이었는데, 내가 「存齋集」의 序文을 써 주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면, 평신진 첨사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저술을 정리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筆寫는 저자의 세 아들 朴基福ㆍ朴基祜ㆍ朴基祚가 분담하였다. 各冊 끝에 작은 글씨로 謄寫者가 표시되어 있는데, 장남인 朴基福은 2ㆍ6ㆍ8ㆍ9ㆍ10ㆍ11冊과 13冊의 卷26을 등사하였고, 次男인 朴基祜는 1ㆍ4ㆍ7冊을 등사하였으며 三男인 朴基祚가 3ㆍ5ㆍ12冊과 13冊의 卷25를 등사하였다.
謄寫 時期는 哲宗年間으로 추정된다. 부록 중 가장 나중에 쓴 저자의 墓誌銘(徐俊輔 撰)이 철종 7년인 1856년에 지어진 것이고, 권1의 목록 끝에 장남 朴基福이 보충한 詩 한 수의 필사 연도가 곧 철종 13년인 1862년이기 때문에 필사 시기를 1856년과 1862년 사이의 철종 연간으로 추정한 것이다. 부록 끝에 있는 〈追錄〉은 저자의 死後 1880년에 고종이 저자에게 내린 敎旨이지만, 필체로 보아 成冊된 이후 부록에 追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12463)에 소장되어 있다.
이본으로는 장서각장본(4-6480)인 「存齋稿」와 국립중앙도서관장본 「存齋詩集」(한45-가48)이 있다. 「존재고」는 규장각본과 동일하게 26권 13책이고, 저자의 손자 朴昌善이 등사한 것인데, 내용과 체재가 규장각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규장각본을 祖本으로 謄寫한 寫本으로 판단된다. 「존재시집」은 저자의 손자 朴昌善이 1874년에 본집의 詩賦 중에서 일부만을 選別하여 등사한 것이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自編稿를 바탕으로 편차되어 哲宗 연간에 謄寫된 罫印寫本으로, 규장각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 중 권8의 목록은 卷尾題의 編次가 ‘七’로 誤記되어 있다.

기사전거 : 序(崔沔 撰), 跋(朴綺壽 撰), 行狀(金周敎 撰), 墓碣(尹定鉉 撰), 墓誌銘(徐俊輔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26권 13책으로 되어 있다. 卷首에 1836년에 崔沔이 지은 서문이 있고, 卷尾에 1842년에 朴綺壽가 지은 跋이 있다. 각 권마다 앞에 목록이 있다.
권1 앞부분에 賦 3편, 律賦 2편이 있다. 賦는 〈異鳥賦〉, 〈春鳥賦〉, 〈楸廬賦〉인데, 그중 〈이조부〉는 孝子로 旌閭된 저자의 증조 朴泰星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지은 것이다.
권1 중간부터 권22까지 2,600여 題의 詩가 실려 있다. 본집 중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시는 年代順으로 배열되었다. 저자는 주로 抒情的인 시들을 많이 지어 “맑고 깨끗하며 참신하다.”, “간결하고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년에 平薪鎭 僉使로 부임하면서는 〈寡婦歎〉, 〈海民〉 등과 같이 백성의 편에 서서 世態를 관찰한 寫實的인 작품도 많이 남겼다. 唱和하던 인물로 보아 千壽慶, 王太, 盧允迪, 張混, 金洛瑞 등 松石園을 중심으로 모이던 閭巷詩人들과 교유하였으며, 후반기에는 池錫觀의 七松亭에서 모이던 시인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권1 목록 末尾에 저자가 7세 때 지은 〈楸行望三角山有作〉이 별도로 부기되어 있는데, 文稿에서 누락된 것을 아들 박기복이 1862년에 추가한 것이다. 권6에 실린 〈內閣二十詠〉은 내각에 恩賜한 特鐘, 特磬, 琴, 瑟, 投壺, 八環盃, 畫盤, 玉盒, 革帿, 衣桁, 髮拂, 書案, 硯匣, 竹筆架와 새로 제조한 牙牌, 書籍牌, 金牌, 玉燈, 測雨器, 銅字를 소재로 지은 시이며, 권8에 실린 〈挽而已广張翁〉은 張混을 애도하는 3首로 된 만시이다. 권10에 실린 〈七賢悼亡詩〉는 예전에 松石園에서 노닐던 千壽慶, 金洛瑞, 張混, 李宜秀, 金泰郁, 王太, 盧允迪을 그리워하며 저자가 65세 때 지은 시이다.
권23에는 序(20), 記(9), 跋(4)이 실려 있다. 序에는 〈密陽朴氏族譜序〉와 〈玉溪詩史序〉, 〈平薪錄序〉 등이 있다. 記에는 水聲洞, 金仙菴, 日涉園을 유람하고 기록한 王太의 玉磬山房에 붙인 〈玉磬山房記〉, 千壽慶의 松石園에 붙인 〈松石園記〉 등이 있다. 跋에는 저자의 증조 朴泰星의 효행을 기록한 「旌孝錄」에 쓴 발, 詩社에서 지어진 白戰詩를 모은 「白戰帖」에 쓴 발 등이 있다.
권24에는 贊(7), 銘(11), 說(10), 論(2), 墓碣(2)이 있다. 贊에는 저자가 근무하던 鑄字所에 보관되어 있던 활자인 衛夫人字, 韓構字, 生生字, 整理字에 대해 지은 〈鑄字贊〉, 명필이었던 黃運祚의 글씨에 대해 지은 〈道谷黃公運祚筆贊〉, 德山 伽倻山을 여행하다 우연히 얻은 사자 모양의 그루터기에 대한 〈木獅贊〉 등이 있다. 銘에는 저자 신변에서 볼 수 있던 紙器, 文房四友, 깨진 그릇 등에 대한 〈紙祭器銘〉, 〈文房四友銘〉, 〈破盂銘〉 등이 있다. 說에는 〈知命說〉, 〈讀太極圖說〉, 〈明德說〉, 〈好靜說〉 등 성리학과 易學에 관한 설과 조카인 朴基直, 朴基誠, 장남 朴基福에 대한 命名說이 있다. 論에는 〈死生論〉, 〈筆論〉이 있는데, 〈필론〉에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筆體에 대해 언급하면서 筆勢를 터득하기 어려움을 말하였다. 墓碣에는 저자의 高祖妣인 淑夫人 金氏에 대한 것과 부친인 朴弘梓에 대한 것이 있다.
권25에는 雜著(19), 祭文(23), 上樑文(2)이 있고, 끝에 朴綺壽가 지은 跋이 있다. 잡저에는 자신을 경계하는 〈自警文〉과 새로 시집온 부인에게 당부하며 준 글인 〈閨誡〉 등이 있다. 특이한 것으로 종이, 붓, 먹, 벼루, 술을 비유한 5편의 假傳 〈楮白傳〉, 〈毛元鋒傳〉, 〈陳玄傳〉, 〈石坦中傳〉, 〈麴淸傳〉이 있다. 제문에는 친척과 교우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저자의 첫 아내 利安朴氏에 대한 제문은 특히 애절하다. 또한 제문에는 松石園에서 함께 노닐던 李宜秀, 池德龜, 金洛瑞, 王太에 대한 것이 실려 있다.
권26은 附錄으로, 金周敎가 지은 行狀, 徐俊輔, 權大肯 등이 지은 輓詞 7편, 尹定鉉이 지은 墓碣, 徐俊輔가 지은 墓誌銘이 실려 있다. 마지막에 있는 追錄은 저자 사후 32년이 되던 1880년에 아들 박기복이 資憲大夫에 오르자 법전에 의거하여 내려진 追贈 敎旨이다.

필자 : 김진옥(金鎭玉)

 

存齋集卷之二十三 密城朴允默士執著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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㫌孝錄跋 a_292_460a


㫌孝錄一篇也。昔我曾王考白首追服。泣血三年。至誠大孝之亘宇宙而不泯。質鬼神而無愧者。本郡之民訴。道伯之啓本。及夫當時名公鉅卿賢士大夫閭巷之士。莫不傳以記之。詩以歌之。具錄於此。顧小子今何敢贅一辭於其間也哉。猗我先人在時。手寫292_460b此錄數本。爲於祖先。以寓繼述之義。貽于後昆。俾圖悠久之傳。其意懇切。其慮深遠。今我不肖輩。闡明講究之方。愈久愈弛。墜厥家聲。是爲之懼。就其原本。彙分次第。列立條目。精寫數冊。書旣成。卽今年七月日也。是年是月。卽我曾王考花甲再回之年若月。當此年當此月。追慕之切。興感之懷。當復如何。而斯錄之告訖。適在於此際。是尤幸也。謀諸宗。俾圖述先之擧。且以㫌孝錄一本。藏于楸廬。謹寓追遠之万一云爾。

 

 

淵泉先生文集卷之十八 豐山洪奭周成伯著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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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上]
㫌孝錄序 a_293_40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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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余爲童子時。甞往來淸潭別業。未至潭六七里。見荒原窮谷中茆屋廑數家。而有綽楔朱丹于其間者。路傍人。指以相語曰。此孝子門也。余時未知孝子爲誰也。然已心識之。稍長知讀書。獲見吾從祖新齋公所爲朴孝翁傳。然後始知其名氏洎事行之詳。又知向所謂孝子門者。乃其追服守墓之所也。於是益心敬之。其後過孝子門。未甞不惕然想見其人也。或曰。追服禮歟。曰。禮。吾未之學也。然朴孝子之追服也。則出乎天矣。孝子幼失父。長而欲服之。其母不可。則遂293_409a不敢服。而獨䟽食終三年。使孝子有所慕效。勉強而爲歟。則是亦足以成其名已矣。及母沒。孝子哀毁幾不全。至父沒周一甲之歲。孝子年六十三矣。乃追服衰絰。廬墓側。朝夕號哭。旣闋服。遂留不復歸。以終其身。方孝子始廬于是也。叢薄澴山。人跡踔絶。一茅宇不禦風雨。使孝子。有所慕效。勉強而爲歟。則是固不能以時月淹矣。况於三年乎。而况於終其身乎。故曰出於天也。自孝子廬于是也。虎豹無留跡。遠近聞其風而願隣者若而家。於是始稍稍有人烟。每孝子上墓哭。有異鳥隨鳴上下。如是者三歲而後止。夫感人293_409b者。猶容僞。若感物則非至誠不能。故曰出於天也。人性之善。固莫不根乎天者。而唯孝爲㝡先。夫所謂禮者。亦因其出乎天者。節文之而已矣。嗟乎。今之能言禮者。亦不鮮矣。動則曰追服非禮也。廬墓非禮也。然夷考其服喪之實。其居處食飮笑語之際。異於平人者。或幾希。禮吾固未之學也。然若彼者。吾未知其與孝子果孰爲近於禮也。嗟乎。世之侈甲第跨通衢。棟宇亘阡陌。地望聲勢。能震耀奔走人者何限。及時移身往。曾不一瞬。而人未甞過而問者多矣。如孝子者。生閭巷間。終身於寂寞之濱。而其生也。朝廷表其閭。293_409c名公大人。爭爲之咨嗟歌詠。其沒已六十年。樵子饁婦。無不知孝子門者。嗟乎。是豈可以人力求哉。孝子名泰星。其獲㫌也。吾再從高祖府尹公。以邑守上其事。吾曾王考靖惠公。實貳春官。署其奏。而吾三考諸兄弟。咸有紀述。以故孝子之諸孫曾。多出入吾門者。而余自童子時。知欽慕孝子今四十年矣。於是序其所裒輯㫌孝錄以畀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