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퇴계 이황 묘갈명

퇴계 이황 선생의 함춘 (봄을 노래한 시)

아베베1 2015. 3. 16. 06:29

 

 

 

봄을 느끼다 병신년(1536, 중종31)  

                                                                                    퇴계 이황 선생

 


맑디맑은 새벽이라 아무런 일이 없어 / 淸晨無一事
옷깃을 헤친 채 서헌에 앉았더니 / 披衣坐西軒
어린 종놈 뜨락을 쓸어 내고 / 家僮掃庭戶
다시금 고요히 사립문을 닫누나 / 寂寥還掩門
그윽한 섬돌엔 가는 풀이 자라나고 / 細草生幽砌
꽃다운 동산엔 좋은 수목 흩어졌네 / 佳樹散芳園
살구꽃은 비 온 뒤에 드물고 / 杏花雨前稀
복사꽃은 밤사이에 한창이라 / 桃花夜來繁
향기로운 눈인양 붉은 벚꽃 나부끼고 / 紅櫻香雪飄
은빛의 바다인양 흰 오얏꽃 굽이치네 / 縞李銀海飜
고운 새들 스스로 자랑이나 하는 듯 / 好鳥如自矜
아침의 햇살 아래 무어라 우짖누나 / 間關哢朝暄
빠른 세월 잠시도 머무르지 않나니 / 時光忽不留
그윽한 회포는 애달프기 짝이 없어 / 幽懷悵難言
서울에서 삼 년째 새봄을 맞이하매 / 三年京洛春
옹색하기 마치도 멍에 맨 나귀같아 / 局促駒在轅
실없어라 마침내 무슨 이익 있었던가 / 悠悠竟何益
조석으로 생각하니 나라 은혜 부끄럽네 / 日夕愧國恩
우리 집은 맑디맑은 낙동강 주변이요 / 我家淸洛上
희희낙락 즐거운 한가로운 마을이라 / 煕煕樂閒村
이웃들은 모조리 봄 농사에 나가고 / 隣里事東作
닭과 개가 집에 남아 울타리를 지킨다오 / 雞犬護籬垣
고요한 책상머리 서책들은 쌓여 있고 / 圖書靜几席
봄 안개는 나지막히 강과 들을 감돌리라 / 烟霞映川原
시냇물에 노니는 건 고기와 새들이요 / 溪中魚與鳥
소나무 아래에는 학이며 잔나비들 / 松下鶴與猿
즐거울사 그 산골에 살아가는 사람들 / 樂哉山中人
나도야 돌아가 술이나 마시련다 / 言歸謀酒尊

 

咸春

 

淸晨無一事。披衣坐西軒。家僮掃庭戶。寂寥還掩門。細草生幽砌。佳樹散芳園。杏花雨前稀。桃花夜來繁。紅櫻香雪飄。縞李銀海飜。好鳥如自矜。間關哢朝暄。時光忽不留。幽懷悵難言。三年京洛春。局促駒在轅。悠悠竟何益。日夕愧國029_050a恩。我家淸洛上。煕煕樂閒村。隣里事東作。雞犬護籬垣。圖書靜几席。烟霞映川原。溪中魚與鳥。松下鶴與猿。樂哉山中人。言歸謀酒尊。

 

 

 

 

 

봄날 한가히 지내면서 노두(老杜)의 시를 차운하여, 절구 여섯 수를 짓다

 


어제는 구름이 땅 위에 드리우더니 / 昨日雲垂地
오늘 아침 비내려 진흙을 적시었네 / 今朝雨浥泥
수풀을 틔워내어 들사슴 다니게 하고 / 開林行野鹿
버들가지 엮어서 뒤뜰의 닭을 막네 / 編柳卻園雞

산꽃이 어지러이 피어도 상관없네 / 不禁山花亂
길가의 풀마저도 오히려 어여쁜 걸 / 還憐徑草多
그 사람 기약두고 이르지 아니하니 / 可人期不至
이 옥빛 술동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 奈此綠尊何

물소리는 골짜기 어구를 삼키는데 / 水聲含洞口
구름 기운 산 허리를 감싸고 도는구나 / 雲氣帶山腰
조는 학은 모래톱에 가만히 서 있는데 / 睡鶴沙中立
놀란 듯 다람쥐는 나무 위로 오르네 / 驚鼯樹上跳

산속의 밭일망정 콩과 조가 잘 자라고 / 山田宜菽粟
약초 심은 밭에는 싹과 뿌리 무성해라 / 藥圃富苗根
북쪽의 징검다리 남쪽으로 통해 있고 / 北彴通南彴
새로 이룬 촌락은 옛 마을과 닿았구나 / 新村接舊村

나무꾼은 한가로이 골짝에서 나오고 / 樵人閒出谷
어린 새들 다투어 처마 끝에 깃들인다 / 乳雀競棲簷
조그만 집 마련하니 하윤과 같거니와 / 小閣同何胤
높이 솟은 누대는 송섬과는 다르구나 / 高臺異宋纖

푸르게 물든 것은 천 가지 버들이요 / 綠染千條柳
빨갛게 타는 것은 만 송이 꽃이러라 / 紅燃萬朶花
웅장하고 호방한 건 산꿩의 천성이요 / 雄豪山雉性
사치하고 화려한 건 들사람의 집이라네 / 奢麗野人家


 

[주C-001]노두(老杜) :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목지(杜牧之)는 소두(少杜)라 하였다.
[주D-001]조그만 …… 같거니와 : 양(梁)나라 처사(處士) 하윤(何胤)이 진망산(秦望山)에서 서당(書堂)을 지어 여러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 옆에 따로 작은 각(閣)을 바위 속에 만들고 거기서 거처하면서 자신이 손수 열었다 잠갔다 하며, 하인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주D-002]송섬(宋纎) : 진(晉)나라 처사인 송섬은 주천(酒泉) 남산(南山)에 숨어 살았는데, 태수 마급(馬岌)이 찾아갔으나 높은 누대에서 문을 잠그고 만나 주지 않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