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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順崔氏族譜引

아베베1 2015. 3. 22. 17:13

 

 

和順崔氏族譜引 



 

君子所以爲譜。將以明系本。合親疎。使覽之者。油然247_321c生孝悌之心也。然而系本不明。則親疎難合。而第爲一姓之廣撮。不詳系本之同異。則非爲譜之意也。是以贊皇之李。別於隴西。眉山之蘇。不並河內。勢不可强合也。崔氏系出於完山。而其後或貫海洲。或籍和順。盖以受封之祖而自分其氏族也。近者。嶺南崔氏有貫和順者。新刊族譜。以麗末海州牧使永濡爲鼻祖。而世傳永濡封和順君。而其墓碣。又曰永濡和順人也。以此觀之。永濡之前。已有和順之封。而其主譜者。通文諸道。將合和順之崔。與之爲一。而上舍綱宇。湖南人也。以爲嶺譜。自永濡以後。世系多不傳。雖欲247_321d合之。無可徵。於是自舍人公濬爲始。而謀刊小譜。未就而沒。其胤崑欲繼先志。服才闋。重蠒上洛。廣加詢求於國朝榜目萬姓譜等書。得舍人公以上十五代。推本溯源。始知與海州之崔。同祖麗初文憲公冲。而永濡乃恭愍時人也。於此。可見嶺譜之大誤。而上舍不欲强合之意。至是而益有徵矣。余於是有感焉。樂正公當光陵朝。以白衣侍講。而龍蛇之變。主簿公當敵辦死。志節照爛。其後石軒公。又以宮僚。事我孝廟。眷遇之隆。至請勿遷久任及其歷試內外。以淸白一節。爲報效之資。盆菊宮貂。後先煇煌。祖孫名德。247_322a百年相望。而其鄕居隱德者行誼學問。樂志无悶。如竹谷四昆季。以及上舍之世。亦皆著稱邑里。見高人士。親族率襲。可占其後之昌。則豈可曰此譜之小而別歟。且夫崔碩士承其先志。栖遑京洛。而稽其旣失之譜於殘編敗馥之間。若有相之。滿意而歸。其成此譜也。聞見之不洽。事力之不逮。又非所慮於君。何也。盖其孝悌之心。將有以起其擧宗之人。不待勸而裕如者。燦然成帙。指在不日。余於是。又有感焉。而况與石軒公義同自出。不敢以蕪拙。辭於其求記也。書此以竢之。

 

和順崔氏烏山家乘後序 



 

佐少讀眉叟記言。至守愚崔先生己丑事。未嘗不掩309_510b卷扼腕。及觀西厓柳文忠公手記。有曰余爲嶺伯。造其廬。廬在萬竹間。布衣與一鶴處其中。長身美髯。風神偉如也。設酒相對。酒酣。語及當世事驚人。覽未半。便覺淸風灑人。若承警咳於其側焉。去歲踰大嶺。遍訪先賢舊蹟。歷晉之德山。謁南溟守愚二先生院。道道洞。讀石田李斯文所撰守愚堂遺墟碑。摩挲久之而去。景行之思。尙未已也。是夏病暑。卧一間樓中。有一儒生使奚童背一書囊。入門而揖。視之乃南行時相識於咸陽郡齋。爲守愚裔孫。鳳信甫其人也。解其囊。出烏山家乘一冊示余而曰。此吾族大父柱夏氏之309_510c所裒輯刊出者也。歲年久。後承之可紀者多闕焉。且吾祖守愚高行懿躅之現錄家乘。殆涉疎畧。吾用是恤焉。乃周遊京鄕。博詢廣採。得御製誄文若記言事實遺墟碑記。方謀追載而增修焉。敢以弁卷之文請。余辭不獲。謹覽一通。義例嚴。考證確。眞得史家之軆。而自烏山君以下。各派之德業文章。忠孝節烈。炳烺照耀。若忠節公之臨亂效命。文惠公之積德完名。老谷,圭菴之終身嬰慕。澤巖,養恥之倡義立殣。尤其表表特著。而三池之於己卯。守愚之於己丑。不幸同之。亦异矣。噫。尙其人而不知其世可乎。今讀是書。益309_510d信夫大賢之世。世德家風之所從來遠矣。顧近時陵遅甚。散處遐逖。幾於不振。可惻也。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夫孝莫大於尊親。有先美而不之表揚。非孝也。柱夏氏爲是之懼。苦心爲先。會稡成書。並與同譜中諸派之一善一行。靡不畢錄。以壽其傳。亦仁者事也。今鳳信甫又踵而修潤之。補其闕漏。其爲不匱大矣。推是心也。安知不崔氏之門繼此昌大。以衍錫類之慶也哉。佐於守愚先生。嘗所慕仰。三池公寔爲吾先祖巖軒公之外曾孫。遂樂爲之序以歸之。

 

 

 

 

 

고려사절요 제12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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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무술 8년(1178), 송 순희 5년ㆍ금대정 18년

 


○ 봄 정월에 장군 노탁유(盧卓儒)를 금 나라에 보내어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게 하고, 병부낭중 최효구(崔孝球)를 보내어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복산회충(僕散懷忠)을 보내어 생신을 축하했다.
○ 찰방사(察訪使)를 각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고, 관리와 봉사자(奉使者)를 출척(黜陟)하게 하였는데, 과거 10년 동안을 한정하여 성적의 우열을 추론(追論)하도록 하였다. 탄핵을 입은 자가 무려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운중도찰방(雲中道察訪) 최효저(崔孝著)는 고핵(考覈)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다 하여 파면되었으며, 전라도의 송군수(宋君秀)는 승진과 파면에 사심을 부렸으나, 권력 있는 집안의 자제라 하여 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없었다.
○ 흥왕사(興王寺)의 중이 중방(重房)에 고하기를, “절의 중 가운데 덕수현(德水縣 경기 풍덕(豐德)) 사람과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하는 자가 있는데, 산원(散員) 고자장(高子章)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니, 중방에서 중과 자장을 체포하여 먼 섬에 귀양보내고, 비밀히 사람을 보내어 강물에 던져 버렸다. 자장은 성질이 몹시 포악하고 패려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였다.
○ 서북로병마사 이의민(李義旼)이 서적 3백여 명을 베고 승첩을 고하였다.
○ 2월에 서경유수 판관(西京留守判官) 박인택(朴仁澤)이 장차 부임하려고 가다가 고원역(高原驛)에 이르렀는데, 적(賊)이 길에서 요격하여 죽였다.
○ 추밀원사 이광정(李光挺)ㆍ동지원사 최충렬ㆍ부사(副使) 문극겸 등이 아뢰기를, “연등(燃燈)은 예전에는 2월 보름에 하였는데, 근래에 부왕의 휘삭(諱朔 조상의 돌아가신 달)으로 인하여 정월로 바꾼 것은 선왕의 본의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요사이 해와 달과 별이 이변을 보이고, 음양의 두 기운이 조화롭지 않은 것이 혹 이때문인가 합니다. 청하건대, 2월 보름에 비록 축하 행사를 벌이고 풍악을 연주하는 일은 않더라도, 공사(公私) 관민으로 하여금 모두 각자 분수에 따라 연등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 3월에 청주 사람들이 그 고을 사람으로서 서울에 적(籍)을 가지고 그곳에 물러가 사는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그들을 거의 모두 잡아 죽였다. 그 무리로서 서울에 있는 자들이 듣고 원수를 갚고자 하여, 왕의 명이라 속이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청주로 향하였다. 장군 한경뢰(韓慶賴)를 보내어 뒤쫓아가서 제지시키려 하였으나 추급(追及)하지 못하였는데, 고을 사람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이를 금지하지 못했다 하여 목부사(牧副使) 조온서(趙溫舒)와 사심관(事審官) 대장군 박순필(朴純弼)과 장군 경대승(慶大升)을 파면하였다.
○ 각도의 찰방사가 구속하여 압송한 장리(贓吏) 35명을 용서하였다.
○ 내시낭중 최정(崔貞)이 해면되었다. 이때 금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에게는 데리고 가는 하인의 수에 정원이 있었으므로, 장사의 이득을 바라는 자는 사신의 집에 다투어 가서 은(銀) 2, 3근씩을 뇌물로 준 뒤에야 따라갈 수 있었다. 최정이 생일회사사(生日回謝使)가 되니, 송유인(宋有仁)이 자기의 종 한 명을 데리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최정은 이미 뇌물을 받은 자가 정원수에 찼으므로 더 넣을 수가 없었다. 종은 주인의 세력을 믿고 따라갔다가 마침내 금 나라의 검문에 걸려 체포 송환 되었던바, 최정이 돌아오자 곧 파면되었다.
○ 재(宰)ㆍ추(樞)와 문ㆍ무관 3품 이상을 불러 서경의 처리를 의논하였다.
○ 여름 4월에 병부에서 무인(武人) 산관(散官)을 모아 전주(牋奏) 짓는 것을 시험보여서 외관 보임 후보에 추천하였다.
○ 서적이 곡주(谷州 황해도 곡산(谷山))ㆍ수안(遂安)을 함락시키고, 재물과 양곡과 우마(牛馬)를 약탈하여 갔다.
○ 태묘(大廟)에 체제(禘祭)를 올렸다.
○ 서경의 관제(官制)ㆍ녹봉ㆍ청사(廳舍)ㆍ공수전(公須田)을 다시 정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 5령(領)의 군사를 동원하여 서적을 잡게 하였다.
○ 6월에 진광순(陳光恂) 등 30명과 명경(明經) 3명과 은사(恩賜)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옛 제도에, 새로 급제한 사람의 홍패(紅牌)는 사자를 내려 보내 그의 집에 가서 하사하였는데, 영접의 번거로움과 드는 비용이 가난하게 공부해 온 선비로서는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니, 지금부터는 대궐의 주렴 앞에서 홍패를 하사하시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중서문하부(中書門下府)에서 반박하여 아뢰기를, “선왕의 제도에 반드시 그의 집에 가서 하사하게 한 것은 장차 마을과 거리를 영광스럽고 빛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시행해 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 의견을 좇았다.
○ 어사대(御史臺)에서 병부(兵部)의 전주(銓注 인사 행정)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탄핵하였다. 여기에서 병부의 판사(判事) 민영모(閔令謨)가 소장(疏章)을 올려 스스로 중서문하성과 중방(重房)의 사례를 열거하여 도로 반박 탁핵하니, 어사대에서 전원이 죄 받기를 빌었으나 왕이 간곡히 타일러서 모두 나와 일보게 하였다.
○ 찰방사(察訪使)가 탄핵한 장리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정치의 성적이 우수한 자는 모두 자급을 올려주었다.
○ 윤달에 평장사 이광진(李光縉)이 졸하였다.
○ 가을 7월에 태학박사 노보여(盧寶璵)를 울주방어부사(蔚州防禦副使)로 임명하니, 참지정사 송유인이, “지방관은 문관과 무관을 섞어서 임명하도록 하는 정해진 법이 있는데, 지금 울주판관도 문관 출신이니 문관인 보여를 나란히 임명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고, 고신(告身)에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그때 또 명주부사(溟州副使)와 관성현령(管城縣令)이 모두 문관 출신인데, 이부(吏部)에서 또 문신(文臣)을 판관(判官)과 위(尉)에 임명하여 성(省)의 결재가 이미 통과되었다. 보여가 이것을 전례로 인용하여 유인에게 말하니, 유인이 성내었으나 전에 이미 잘못 서명하였으므로 일의 형평상 자신이 아뢸 수가 없었다. 이에 중방을 달래서 반박하여 아뢰게 하니, 보여와 명주판관과 관성위(管城尉)가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다.
○ 정중부의 집 종이 금제(禁制)를 범하였으므로 중승(中丞) 송저(宋詝)와 어사 진광인(晉光仁)이 묶어 놓고 문초하니, 중부가 성내어 송저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의 아들 균(筠)이 간하여 중지시키니, 중부가 드디어 왕에게 아뢰어 송저 등을 죄주고자 하였다. 그때 마침 기두(旗頭) 녹상(祿尙)이 중부에게 고하기를, “대장군 장박인(張博仁)과 전 장군 조존부(趙存夫) 등이 어두운 밤을 틈타 공의 집을 침범하려 합니다." 하니, 중부가 그 말을 믿고 조옥(詔獄)에 잡아 가두기를 청했다. 왕이 내시장군 오광척(吳光陟) 등에게 명하여 조사하고 심문하게 했으나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또 기두가, 같은 영내(領內)의 기두 80명이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박인(博仁)을 옥에서 빼앗아 올 것을 의논하였다고 고하니, 중부가 국문하여 보았으나 역시 증거가 없었다. 마침내 박인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 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또 기두 강실(康實)이, 추밀(樞密) 최충렬(崔忠烈)은 박인과 같은 무리라고 무고하니, 중부가 다시 안찰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옥사가 잇달아 일어나서 송저 등을 치죄할 겨를이 없었다. 왕은 중부가 분한 마음을 시원스럽게 풀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송저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광인을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으로 좌천시켰다.
○ 8월에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술승(術僧) 치순(致純)의 말을 따른 것이다.
○ 광덕리(廣德里)에 옛날 태후(太后)의 별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화재로 인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좌승선(左承宣) 정균(鄭筠)이 사서 사삿집으로 하겠다고 청하니, 태후가 그 대금을 도로 돌리고 그냥 주라고 명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크게 공사를 일으켰다. 그때 왕이 수창궁(壽昌宮)에서 태후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그 땅이 궁에서 1백 보(步)의 거리도 못 되며, 또 세행(歲行 연운(年運))에 그곳은 태후에게 꺼리는 방위(方位)이므로 왕이 매우 싫어하여 그 공사를 중지시키고자 하였으나, 균을 꺼려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 9월에 장경도량(藏經道場)을 명인전(明仁殿)에서 7일 동안 베풀고, 참지정사 송유인에게 명하여 행향(行香)하게 하였다. 지후(祗候) 최영유(崔永濡)가 찬인(贊引)으로서 늦게 도착하니, 대감어사(臺監御史)가 탄핵하고자 하매, 영유가 시어사(侍御史) 안유발(安劉勃)에게 청탁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참정(參政)에게 빌어서 양해를 얻었으니 아뢰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유발이 말하기를, “나는 참정의 뜻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꼭 왕께 아뢰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대가 왕께 주달(奏達)하여 무사히 만들 수밖에 없다." 하였다. 영유가 왕의 아우인 중 충희(冲曦)에게 부탁하여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작은 허물이니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참정이 성내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땅히 참정에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유발이 뒤에 이부낭중(吏部郎中)이 되었는데, 그때 이부에서는 처음 벼슬에 오를 자의 성명에 점을 찍어 가지고 들어가 아뢰는 준례가 있어서 점주(點奏)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처음 벼슬하는 자는 모두 백은(白銀)을 뇌물로 주면서 예물이라고 하였으므로, 다투어 점을 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 아무개 벼슬은 모두 내게서 나왔다."고 하되, 오직 유발만은 의젓한 태도로 점을 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나는 아는 바가 없다."하니, 세상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 겨울 10월에 친히 태묘에 협제(祫祭)를 올려 서적(西賊)의 평정을 고유하고, 사령(赦令)을 내렸다.
○ 서적의 괴수 광수(光秀)를 교위(校尉)로 삼고, 김보(金甫)를 섭교위(攝校尉)로, 사진(思進)ㆍ식단(軾端)ㆍ계훈(戒訓)을 대정(隊正)으로 삼았다.
이전에, 위총(位寵)의 남은 무리가 다시 모여 3군(三軍)으로 나누니, 사진ㆍ식단이 중군행수(中軍行首)가 되고, 계훈이 지유(指諭)가 되며, 김보가 전군행수(前軍行首)가 되고, 광수가 후군행수가 되었다. 흩어져 가주(嘉州 평북 가산(嘉山))ㆍ위주(渭州)ㆍ태주(泰州) 연주(漣州 평남 순천(順川))ㆍ순주(順州 평남 순천(順川)) 등 각 주의 산골에 있으면서 앞뒤로 약탈을 감행하니, 크게 백성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일찍이 자주(慈州 평남 자산(慈山))ㆍ숙주(肅州) 두 고을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또 묘덕(妙德)ㆍ향산(香山)의 여러 절을 무찔렀다.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으나, 여러 번 싸움에 승리하지 못하였다. 대장군 박제검(朴齊儉)이 병마사가 되어 처음 군영에 도착하였을 때, 녹사(錄事) 김중갑(金重甲)과 함께 여러 장교들을 몇 부분(部分)으로 나누어서 흥화(興化)ㆍ운중도(雲中道)의 주(州)와 진(鎭)의 병마를 동원하여 습격할 계획을 모의하였으나, 적(賊)은 산림 속에 의거해 숨어서 끊임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니,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여러 고을 주민들로서 도적의 이목(耳目)이 된 자가 많아 군중(軍中)의 동정을 번번이 적(賊)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면 한 번 교전에 군사들은 모두 패배하였다. 관군이 이 소문을 듣고 용기가 저상(沮喪)하여 망설이면서 전진하지 않았다. 겨우 5백 명을 유둔(留屯)시켜 성원하게 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니, 적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영주(寧州)의 영화사(靈化寺)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중들을 몰아 군사로 삼아서 드디어 연주(漣州)를 공격하는 등, 적의 기세가 도리어 강성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다니며 도둑질하는 시일이 오래 되니, 성벽이 없는 촌항(村巷)은 이미 모두 약탈되어 남은 것이 없고, 큰 성은 굳게 지키고 있어서 갑자기 깨뜨릴 수 없으며, 들에는 구득할 것이 없게 되자 점차로 굶주리고 곤궁하게 되어 스스로 항복해서 세월을 연장하려고 꾀하더니, 그때 마침 가주(嘉州)의 적(賊)이 길에서 창주(昌州 평북 창성(昌城))의 기사(記事) 백공식(白公軾)을 만나 먼저 성심으로 항복할 뜻을 진술하므로, 제검(齊儉)이 듣고 사람을 보내서 달래며 부르니, 여러 진둔(陣屯)의 적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제검이 매양 적(賊)이 오는 것을 보면 곧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하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니, 전후로 무려 6백여 곡(斛)이나 되었다. 이에 그들의 점거(占居)를 허락해서 귀주(龜州)와 연주(漣州) 등의 고을에 나누어 살게 하여 생업에 안심하도록 하고, 3군의 행수들은 모두 역전(驛傳)의 편의를 제공하여 서울로 보내었다. 유독 중군행수 진국(進國)만 항복하지 않고, 그의 무리 1백 50여 명을 거느리고 북쪽 오랑캐에게 투항(投降)하려 하니, 제검이 군사를 보내어 모두 사로잡아 참살하였다. 귀주별장(龜州別將) 동방보(東方甫) 등 17명도 일찍이 적들과 함께 왕래하였으므로, 역시 모두 참형을 받았다.
○ 백좌도량(百座道場)을 대관전(大觀殿)에 베풀고, 중(中)ㆍ외(外)로 하여금 중 3만 명을 공양하게 하였다.
○ 11월에 장군 기세준(奇世俊)을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을 축하한 것을 사례하고, 낭중 김량(金諒)에게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 팔관대회(八關大會)에 내시 태부소경(內侍大府少卿) 정국검(鄭國儉)을 보내어 성재(省宰)의 막차(幕次)에 꽃과 술을 하사하였는데, 때가 조금 늦었다고 참정 송유인이 성내어 받지 아니하므로, 왕이 승선(承宣)을 보내어 간곡히 타이르니 비로소 받았다. 국검은 탄핵을 입어 금적(禁籍 내시(內侍)의 명부)이 삭제되더니, 뒤에 유인에게 붙어서 다시 내시가 되었다.
○ 왕이 편전(便殿)에 임어(臨御)하여 동ㆍ서 양계(東西兩界)의 여러 성(城)의 상장(上長)과 도령(都領)을 인견(引見)하고, 상장에게는 필(匹)로 된 비단을, 도령에게는 비단옷과 금대(金帶)와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서적을 평정한 뒤에도 도적이 자주 일어나므로, 다시 동요할까 염려하여 이런 하사가 있었는데, 식자들은 그러한 고식책(姑息策)을 탄식하였다.
○ 금 나라의 8장(八將)의 군병이 의주(義州)의 관외(關外)에 와서 주둔하므로, 병마사 염약신(廉若信)이 사람을 보내어 따져 물으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서경의 조위총이 서송(西宋)에 구원병을 청하여 우리를 치고자 한다기에 군사를 주둔시켜 대비하는 것이고,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또 따지기를, “위총이 이미 참살되었고 송 나라는 또 대해(大海)에 막혀 있으니, 청병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헛말이니, 청하건대 그 말을 고한 자의 이름을 묻노라." 하니, 금 나라의 장수가 용주(龍州 평북 용천(龍川)) 사람 아무개라고 하였다. 신약이 사람을 시켜 가서 찾으니, 그 사람이 이미 도피하였다. 여러 성으로 하여금 물색(物色)하게 하였더니, 영청현(永淸縣 평남 평원(平原))에서 찾아 내었다. 국문하니 그 사람이 과연 자복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항상 국가의 기밀을 가지고 가서 금 나라 사람에게 고하여 후한 이득을 많이 얻었는데, 죽게 되었을 때에 나에게 부탁하였으므로, 내가 이것으로 공갈(恐愒)하여 저 사람들의 후한 상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하므로, 드디어 그 사람을 베고, 그의 어머니를 몰입(沒入)하여 관비(官婢)로 삼았다.
○ 문하시중 정중부가 치사(致仕)하고, 송유인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이전에, 정중부가 총재(冢宰)로서 중서성에 있으니, 유인은 중부와 옹서간이라는 피혐(避嫌)으로 재상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여러 해를 추밀원에 있었다. 추밀시종관(樞密侍從官)은 오래 있어도 이득이 없고 오직 상서성(尙書省)이라면 있을 만하다고 여겨 가만히 나인(內人)에게 부탁해서 왕께 아뢰어 즉시 상서복야가 되었었다. 중부가 치사하게 되니, 곧 평장사로 임명하였다. 그때 민영모(閔令謨)가 먼저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던바, 왕은 유인이 무신으로 기세를 부리고, 또 중부의 사위임을 마음으로 꺼려서 영모의 윗자리에 반열(班列)하게 하니, 유인이 굳이 사양하므로 또 영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하여 유인의 위에 반열하게 하였다. 유인이 일찍이 수덕궁(壽德宮)을 청해 얻어서 거주하니, 가옥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실로 신하된 자가 살 집이 아니었으며, 부귀와 호화 사치함이 왕실에 비길 만하였다

 

 

동문선 제9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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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율시(五言律詩)
고산 말 위에서 구를 얻어 공관 벽에 쓰며[高山馬上得句書公館壁]

 


최영유(崔永濡)

왕사로 다니면서 / 自喜從王事
그로 인해 좋은 구경 기쁘구나 / 仍能占勝遊
산가마귀는 언덕 나무에서 까옥까옥 / 山鴉啼壟樹
들오리는 시냇물에 둥실둥실 / 野鴨泛溪流
눈[雪]을 띠어[帶] 앙상하게 여윈 봉들 / 帶雪千峯瘦
마을로 가는 그윽한 외줄기 오솔길 / 連村一逕幽
이따금 절승한 경개를 만나면 / 選來逢絶致
가다가 말을 세우고 한참이나 머무르고 / 立馬更遲留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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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

 


동쪽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4리,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5리, 남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쪽으로 여산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2리, 북쪽으로 충청도 연산현(連山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9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고산현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조에 다시 나누었고,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봉산(鳳山)ㆍ난등량.
【성씨】 본현 고(高)ㆍ송(宋)ㆍ전(全)ㆍ배(裴), 가(價) 가(賈)라고도 한다. 천(千). 운제(雲梯) 배ㆍ백(白)ㆍ수(水)ㆍ송ㆍ유(兪).
【풍속】 사신(邪神)에 제사하기 좋아한다.
【형승】 위봉절령벽립만인(危峯絶嶺壁立萬仞) 이규보의 기에,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길이나 벽처럼 서 있고,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내려서야 다닐수 있다.” 하였다.
【산천】 주줄산(珠崒山) 현의 동쪽 34리, 운제현에 있다. 대둔산(大芚山) 현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솔산(兜率山)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불명산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운제산(雲梯山) 운제현에 있는데, 산이 아주 높고 험하다. 탄현(炭峴) 현의 동쪽 50리에 있는데, 진산군(珍山郡) 이현(梨縣)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가점(加岾) 현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15리이며, 용계성(龍鷄城)이 그 동쪽에 있다. 용계천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의 하나는 현의 탄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주의 이현에서 나오는데, 합쳐서 북쪽으로 흘러 충청도 연산현 경계에 들어간다. 남천(南川) 근원이 운제ㆍ주줄 두 산에서 나와 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전주 경계에 들어간다. 용연(龍淵)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데, 범의 머리를 담그면 문득 효응이 있다. 『신증』 용연 운제현 동쪽 15리에 있는데, 샘물이 솟아나서 못이 되었고, 주위는 1리쯤 되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증험이 있다.
【토산】 오수정(烏水精) 현의 동쪽 이암현(耳巖峴)에서 난다. 녹반(綠礬) 현의 동쪽 월막암혈(月幕巖穴)에서 난다. 꿀[蜂蜜]ㆍ송이[松蔈]ㆍ감ㆍ석류ㆍ모시ㆍ옻ㆍ석이[石蕈].
【누정】 요산루(樂山樓)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권건(權健)의 시에, “그림 기둥 조각한 난간 제작이 공교로운데, 경영한 것은 응당 농사일[田功] 위해서이리. 날카로운 산봉우리 앞뒤로 둘러 있고, 논두렁 밭둑들은 동서로 엇비슷하구나. 못 수면에는 갈매기 그림자 깨끗하게 잠기고, 담장 머리엔 버들 가지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네. 주인의 마음 바탕 얼마나 너그러운가. 기묘한 경치 다 거두어 눈 가운데[眼中] 넣는다.” 하였다. 권가루(勸稼樓) 객관 남쪽에 있는데, 현감 김석현(金錫賢)이 세웠다.
【학교】 향교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옥포역(玉包驛)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서원(西院)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삼기원 삼기정 아래에 있다. 이생원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불우】 화암사(花巖寺)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하여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워진 나무가 있었는데, 푸른 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栴檀木)이라고 부른다. ○ 고려 백문절(白文節)의 시에,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말[馬]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시내를 타고 있는 정자 벽에는 시가 가득하고, 풍헌(風軒)의 현판에는 용과 교룡이 꿈틀거리네. 현공(玄公)이 지은 기문 옛말을 모았는데, 황견유부(黃絹幼婦) 세상에 드물도다. 샘물은 비녀다리같이 갈라져서 구슬을 내뿜는데, 문득 오목한 돌 만나 몇 개의 못 이루었네. 백 마리의 고기는 여기서 노닐고, 아홉 마디 창포(菖蒲)는 푸른 실처럼 어지럽다. 열 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두드리면 산새들은 모두 놀라 날아가네. 지팡이 짚고 웃고 맞는 것은 참으로 방미(厖眉 큰 눈썹인데, 점잖은 사람)인데, 종남산(終南山) 엄연한 노인의 풍모로다. 흰 옷 입은 신선은 달 가득한 자태인데, 단정히 앉은 높은 당은 팔부위중(八部圍中)에 싸였네. 누런 모란꽃은 뜰을 비추고, 작약(芍藥)꽃에 취서시(醉西施 일종의 작약)도 있도다. 대통으로 나오는 가는 물줄기는 씻고 양치질 하겠고, 약포(藥圃)와 채전(菜田)에 가물들면 뿌려도 주네. 부들 자리에 찻잔 두고 말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비로자나물(毗盧遮那佛)과 해장(海藏 연화세계(蓮花世界))을 혓바닥 밑에서 펼쳐내네. 면마(眠魔 잠 귀신)가 찾아오면 반드시 항복기(降服旗) 꽂으리니,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은 지 80년이라. 내가 와서 도 물으며 스승되기 청하니, 배운 학식 다 털어 주어 헛되이 돌아감을 면했도다.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三竿] 기울었도다.” 하였다. 위봉사(威鳳寺)ㆍ운암사(雲巖寺) 모두 주줄산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도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ㆍ여단 모두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고적】 운제폐현(雲梯廢縣)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운산(雲山)이다. 본래 백제 지벌지현(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덕은군(德殷郡)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 전주에 붙였다. 본조 태조 원년에 이 고을에 붙였다. 삼기정(三奇亭)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 하연(河演)의 기에, “고산현의 동쪽 5리쯤에 조그마한 산등성이가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서 있다. 그 아래에는 긴 시냇물이 있어 빙빙 돌면서 맑고 맑은데,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있어 무성하게 우거져 푸르르며, 그 서쪽은 편평하게 고르다. 임인년 봄 내가 순찰 차 이곳에 도착하여 올라가 관람하니, 안개와 초목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눈앞에 보이는데, 그 중에도 물ㆍ돌ㆍ소나무는 특히 기묘하게 좋은 경치였다. 이에 3기(奇)라고 이름을 정해 나무를 깎아 써 두었더니, 지금 현감 최득지(崔得之)가 여기에다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나는 처음 명명(命名)한 사람이라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개 사람의 정(情)은 물(物)에 감동이 되어서 변하는데, 눈으로 보는 바는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냇물이 맑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연(本然)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고, 돌이 높게 겹친 것을 보면 확연(確然)히 뽑지 못하는 뜻이 더욱 굳어지며, 소나무가 늦도록 푸른 것을 보면 곧고 굳은 절개가 더욱 높아지는데, 이 산등성이의 세 가지 물건이 어찌 관람하는 데에 기이하고 무더운 여름철의 휴식하는 쾌락뿐이겠는가. 내가 보는 바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 올라서 감흥이 되어 마음을 붙이고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마음을 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목욕하고 바람 쏘이면서 읊조리고 돌아가는 즐거움이 될 것이니, 옛날에 내가 명명한 뜻을 대개 짐작할 것이다.” 하였다.
용계성(龍鷄城) 용계천(龍溪川)가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10리쯤 되고, 서북쪽으로 연산현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옛 성이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4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지금은 반절이나 무너졌다.
【인물】 고려 고의화(高義和) 천성이 조용하고 날쌔며 여력(膂力)이 있었다. 군보대정(軍補隊正)에 뽑혔고, 후에 벼슬이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이르렀다.【효자】 고려 유석진(兪石珍) 현리(縣吏)이다. 아버지 천을(天乙)이 악질에 걸렸는데, 발작만 되면 숨이 끊어지니, 석진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고 하니, 석진은 곧 왼손 무명지를 잘라 말대로 해서 먹였는데, 아버지 병이 곧 나았다. 차달(車達) 운제현 지불역(祗弗驛) 백성이다. 형제 세 사람이 늙은 어머니를 같이 봉양하는데, 차달이 자기 아내가 어머니에게 삼가지 않는다고 쫓아버리니, 두 아우도 다 장가를 들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성종 9년에 세 사람을 다 역을 면해 주고, 그 소원에 따라 주현에서 호적에 넣어주었다.
【제영】 연촌일경유(連村一徑幽) 고려 최영유(崔永濡)의 시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은 나라 일에 종사하면서 인해서 좋은 놀이 점령함이라네. 갈가마귀는 둑 위 나무에서 울고, 들 오리는 시냇물에 떠 있도다. 눈 덮인 천봉우리는 수척하고, 시골로 이어진 한 길은 깊숙하네. 멀리 와서 좋은 경치 만났으니, 말 세우고 다시 오래 머문다.” 하였다. 수포원촌류(水抱遠村流)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산은 가까운 성곽 따라 둘러 있고, 물은 먼 마을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운심동부유(雲深洞府幽) 정지담(鄭之澹)의 시에,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후하고, 구름 깊으니 동부가 깊숙하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남면(南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면(西面)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운동(雲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서(雲西)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북(雲北)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3면은 운제(雲梯)의 옛 현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산창(山倉) 비봉산성(飛鳳山城)에 있다.
【교량】 세심교(洗心橋)ㆍ봉림교(鳳林橋)ㆍ호액교(虎額橋)ㆍ거사교(居士橋).
【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뽕[桑]ㆍ묵토(墨土) 서쪽 30리에 있는 부금리(赴金里)에서 난다.


 

[주D-001]황견유부(黃絹幼婦) : 황견유부(黃絹幼婦)라는 말은 변해 쓰는 말이다. 한 나라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한 말인데, 황견(黃絹)은 물들인 실[色絲]이니 절(絶) 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가 된다. 그래서 절묘(絶妙)하다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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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 경계까지 69리,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 남쪽으로 강령현(康翎縣) 경계까지 49리, 서쪽으로 옹진현(甕津縣) 경계까지 94리, 장연현(長淵縣) 경계까지 92리, 북쪽으로 신천군(信川郡) 경계까지 56리, 재령군(載寧郡) 경계까지 41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5리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라 고쳐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고을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년에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절도사를 두고 해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며, 양주(楊州)와 함께 경기의 좌우 보(輔)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는 절도사를 폐지하고 네 도호부의 하나로 정하여 안서(安西) 도호부라 불렀으며, 예종(睿宗) 때에는 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다시 목으로 고쳤는데, 공민왕조에 왜적이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죽이니, 고을 아전으로서 목사를 구원하지 않은 자를 베고, 주(州)를 군으로 강등하였다가 후에 다시 목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 17년에 평산부의 서쪽 지경을 나누어서 예속시켰으며, 세조조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도호부가 2 연안(延安)ㆍ풍천(豐川). 군이 1 배천(白川). 『신증』 현으로 강등하였다. 현이 6 송화(松禾)ㆍ은률(殷栗)ㆍ강음(江陰)ㆍ강령ㆍ옹진ㆍ장연. 『신증』 배천.
【관원】 목사ㆍ판관ㆍ교수 각 1인.
【군명】 내미홀ㆍ지성ㆍ장지ㆍ폭지ㆍ대녕(大寧)ㆍ서해(西海)ㆍ안서(安西)ㆍ수양(首陽)ㆍ고죽(孤竹) 《수서(隋書)》〈배구전(裵矩傳)〉에 “고려는 원래 고죽국이라 하였는데,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지금의 해주이다.’ 하였다.” 하였다.
○ 이제 살펴보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영평부(永平府) 서쪽 15리에 고죽국 군(君)의 봉한 땅이 있다.” 하였으며, 또 “부성(府城) 서북쪽에 고죽국의 삼군(三君)의 무덤이 있고, 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이 있으니, 이곳이 고죽국인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하였다. 배구는 아마도 백이ㆍ숙제가 동이(東夷) 사람이라고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이첨이 해주를 고죽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성씨】 본주 최ㆍ정(鄭)ㆍ오ㆍ민ㆍ임(林)ㆍ문(文)ㆍ경(景)ㆍ임(任)ㆍ욱(郁)ㆍ송.
【형승】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이다 모두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있는 말이다.
【산천】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광석천(廣石川)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동구 안이 깊숙하고 양 가로 꽃나무들이 무성하고 총총하며, 가운데에 반석(盤石)이 있어 평평하고 넓으며 반듯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샘물이 돌을 덮고 흘러 비단필 같다. 우이산(牛耳山) 고을 북쪽 11리에 있다. 지성산(池城山) 고을 동쪽 20리에 있는데, 꼭대기에 폭포가 있어 3백여 자나 날아 떨어진다. 불족산(佛足山)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산마루 돌 위에 사람 발자국이 있는데 사람들이 부처 발자국이라 한다. 북숭산(北嵩山) 고을 서쪽 31리에 있다. 수미산(須彌山) 고을 북쪽 17리에 있다. 자단산(紫丹山) 고을 서쪽 93리에 있다. 선녀산(善女山) 고을 서쪽 4리에 있다. 공수산(公須山) 고을 동쪽 62리에 있다. 달마산(達磨山)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취라산(吹螺山) 고을 동쪽 65리에 있다. 청태암(靑苔巖) 고을 동쪽 29리에 있다.
수양산(首陽山) 고을 동쪽 5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대(臺)가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청산은 창해(滄海)가에 첩첩하고, 창해는 청산 앞에 아득하네. 산 이름 수양이 기이하고 빼어난데, 지도에는 주(周) 나라 땅에 들지 않았네. 옛 대(臺)가 완연하여 아직도 변함없는데, 고을 사람들 역력하게 서로 전하네. 중을 찾아서 야사(野寺)에 갈 것도 없고, 신선을 찾아 바다배를 띄울 것도 없네. 고사리 캐던 옛 자취 그 아니 우러러 볼 것인가, 높이 백세천세(百世千世)에 뛰어났네. 주려도 주 나라 곡식 먹지 않고, 가서 숨는데 형과 아우 같이 하였네. 이것을 달게 여기고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고 그 자취를 산중에 의탁했네. 산이 있으니 이 내 뼈는 묻을 수 있는 것, 주 나라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목구멍에 넣을 것인가. 기어이 한 번 죽음으로 후세 사람들 깨우치니, 높은 바람 천 년 후에도 늠연(凜然)하게 분다네. 아, 외나무로 큰 집을 버티어서, 길이 은(殷) 나라를 오래 가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로세.” 하였다.

바다 고을 동남쪽 10리에 있다. 어사교천(於賜橋川) 고을 동쪽 53리에 있다. 근원이 공수산(公須山)에서 나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작천(鵲川) 고을 동쪽 22리에 있다. 근원이 불족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읍천(泣川)이 된다. 읍천 고을 동쪽 31리에 있다. 작천의 하류가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간다. 광탄(廣灘) 고을 서쪽 95리 장연현과의 경계에 있다. 삼탄(三灘)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취라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평산부 성불산(成佛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그 부 모란산(牧丹山)에서 나오는데, 취라산 동쪽에 와서 합류하고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간다. 마산온천(馬山溫泉) 고을 서쪽 63리에 있는데, 근처의 지기가 모두 따스하고, 물맛이 또 짜다. 수압도(睡鴨島) 대소 두 섬이 고을 남쪽 해중 60리쯤에 있는데, 두 섬의 거리는 5리다. 용매도(龍媒島) 용매량(龍媒梁)의 남쪽에 있다. 원래는 소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금상 3년에 소를 그만두고 말을 방목하였다.
연평도(延平島) 고을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목장이 있다.
○ 선덕(宣德) 10년(세종 17년)에 연평도 순검군이 왜선 1척을 붙잡아 궁전(弓箭)ㆍ도검(刀劍)ㆍ갑주(甲冑)ㆍ수은ㆍ진주ㆍ유황ㆍ법라(法螺) 등 물건을 빼앗았는데, 세종이 명하여 영(嶺) 밖으로 귀양보냈다.

산연평도(山延平島) 연평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거서(秬黍 검은 기장) 세종 때에 거서를 해주에서, 경석(磬石)을 남양(南陽)에서 얻어서 박연(朴堧)을 명하여 편경(編磬)을 제조하게 하였다. 박연이 밀납을 녹여서 거서의 알 형태를 만들되 약간 크게 하여 분(分)을 모아 관(管)을 만드는데, 한 알로 한 분을 하며 열 알을 모아 촌(寸)을 하였다. 법에는 황종(黃鐘)의 길이는 9 촌으로 하되, 3분을 덜하고 더하여서 12율(律)을 이루게 하여 새 경(磬) 두 틀을 지어 드렸다. 세종이 이르기를, “새 경이 바로 되어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그런데 이칙(夷則) 소리 하나가 조화되지 않으니 어쩐 일인가.” 하니, 연이 곧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먹금이 아직 남아 다 갈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곧 가니 먹금이 다 없어지고 소리가 제대로 조화되었다.
사(絲)ㆍ삼[麻]ㆍ청옥(靑玉) 용유리(龍遊里)에서 난다. 철(鐵) 사곶(沙串)에서 난다. 석철(石鐵) 황곡리(黃谷里)에서 난다. 하엽록(荷葉綠) 청태암(靑苔巖)에서 난다. 지치[紫草]ㆍ미역[藿]ㆍ사곽(絲藿)ㆍ청각(靑角)ㆍ백하(白蝦)ㆍ곤쟁이[紫蝦]ㆍ대하(大蝦)ㆍ굴[石花]ㆍ홍어(洪魚)ㆍ게[蟹]ㆍ홍합(紅蛤)ㆍ은어[銀口魚]ㆍ조기[石首魚]ㆍ삼치[麻魚]ㆍ농어[鱸魚]ㆍ붕어[鯽魚]ㆍ청어(靑魚)ㆍ밴댕이[蘇魚]ㆍ조개[蛤]ㆍ낙지[絡締]ㆍ소라(少螺)ㆍ숭어[季魚]ㆍ소금[鹽].
【성곽】 읍성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만 1백 97척이며, 높이가 16척이며 안에 우물 12곳이 있다.
【관방】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성 안 동쪽에 있다. 용매량영(龍媒梁營)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
【봉수】 남산 봉수(南山烽燧) 동쪽으로 마아미(馬兒彌)에 응하고, 남쪽으로 사포곶(沙浦串)에 응한다. 송산(松山) 봉수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피곶(皮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마아미에 응한다. 피곶 봉수 고을 동쪽 69리에 있다. 동쪽으로 평산부 성곶(聲串)에 응하고 서쪽으로 송산에 응한다. 사포곶 봉수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동쪽으로 남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령현 견라산(堅羅山)에 응한다. 마아미 봉수 고을 동쪽 27리에 있다. 동쪽으로 송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남산에 응한다.
【궁실】 객관 동헌(客觀東軒)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해주는 관서의 큰 고을인데,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폭지군(瀑池郡)을 설치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에, 고을이 남쪽이 큰 바다에 임하였으므로 처음으로 해주라 이름하였다. 성종이 12목을 설치할 때에 해주가 그 하나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절도사로 고치고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였다. 현종조에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고치고 예종조에는 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고종조에 다시 해주목을 설치하였으며, 공민왕 22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목사를 죽였는데 읍의 아전들이 구원하지 않았다. 이에 주를 강등하여 군으로 하였다가 마침내 다시 목으로 하였으며, 이름하기를 대령(大寧)이라 하고 고죽(孤竹)이라고도 하였다. 주에는 대수압(大睡鴨)ㆍ소수압ㆍ연평ㆍ용매의 네 섬이 있으며, 그 지역은 넓고 그 백성은 많아서, 전지의 비옥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여러 주 중에서 제일이다. 여기에 관원으로 온 자가 사무는 번거롭고 처리하기가 고되어서, 어려운 일[盤錯]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면 다스리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관원을 보낼 때마다 그 인재 구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성화(成化) 11년 을미(성종 6년)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여기에 목사로 갔는데, 부임한 지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정사가 크게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기를 좋아하게 되니, 공은 개연히 폐하여 없어진 것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객관에 동헌이 있으니, 홍무(洪武) 무인년(태조 7년)에 목사 김회련(金懷鍊)공이 지은 것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서 무너져 있었다. 공이 통판 우찬(禹贊)공과 의논하고, 중신(重新)할 계획을 조정에 보고하여 허락을 얻은 다음, 옛터를 쓰되 그 규모를 더 크게 하니, 건물이 높직하고 단청이 찬란하였다. 8월 초순에 시작하여 10월에 가서 준공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병신년 봄, 내가 압록강으로 사신 나갈 때, 다시 이후(李侯)를 봉산군(鳳山郡)에서 만나니, 기문을 지어 달라 부탁하며 말하기를, ‘주의 진산(鎭山)을 용수산(龍首山)이라 하는데, 높고 험하며 북쪽으로는 우이(牛耳)ㆍ불족(佛足) 두 산에 연접해 기세가 웅장하여 수십 리에 서리어 있다. 난간 동쪽 3리쯤에는 수양산(首陽山)이 있는데, 산 위에 이제대(夷齊臺)가 있고, 소나무ㆍ노송나무가 하늘에 닿아서 옥창끝[玉槊] 같은 것이 총총하며, 또 고사리가 나는데 통통하고 연한 것이 보통과 다르다. 2리쯤에는 광천(廣川 광석개)이 있는데, 넓이가 백 보쯤은 되고 밑에 흰 돌이 돗자리처럼 깔렸으며, 물이 푸르고 맑아 손으로 움켜 마실 만하다. 농어[鱸魚]니 붕어니 하는 아름다운 고기가 수백 수천 마리 떼를 지어 한가롭게 노니는데, 물 위에 서서 내려다보면 손가락을 꼽아 세일 수 있으며, 낚시질할 수 있고 작살질할 수 있으며 그물을 던져 잡을 수도 있다. 난간에서 조금 북쪽으로 나가면 대(臺)가 있는데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들메나무[楠] 두 그루가 무성하고 울창하여 층층한 그늘이 땅을 덮어서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삼괴정(三槐亭)이 있는데, 경치 좋기로 남정(楠亭)과 서로 최고를 다툰다. 그 남쪽에 못이 있어 연을 심으니 붉은 향기 푸른 그림자가 좌우로 어른거리며, 그 헌(軒) 앞에는 욕실(浴室) 두어 채가 있고, 욕실 아래 위에 모두 새 못을 파니 넓이가 10여 길씩 되며, 연을 심고 고기를 기르니 윗못의 물이 졸졸 섬돌밑을 따라 돌아서 아랫목으로 들어간다. 목욕을 마치고 난간에 의지하면, 유쾌하고 시원하여 번거로운 세상 생각 씻고 혹심한 더위를 잊을 수 있다. 동헌 옆에 또한 누(樓)가 있는데 높고 밝으며 상쾌하여, 사신이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여기서 술 마시고 시를 짓는다. 이것이 이 고을 형승의 대략인데, 그 중에도 여러 승경을 다 모은 곳은 우리 동헌이다. 그대는 좀 드날려 주오.’ 하였다. 내가 듣고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동헌의 승경이 이와 같은데도 오래도록 폐지하고 수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큰 흠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어진 판관ㆍ목사와 어진 통판을 만나서 새롭게 되었으니, 기쁨을 알 만한 일이다. 세상에 논하는 자들이 모두 관청 건물을 수리하고 안하는 것이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먼 옛적에는 집이 없이 나무 위에 살거나, 들판에 거처하였는데, 성인이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하여 궁실을 경영하였다. 더구나 관청 건물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며, 빈객을 접대하고 사신을 높이고 관청을 엄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그럭저럭 두어두고 다 무너져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요즘의 수령들을 보니, 무능하고 오활한 자들은 문서에도 오히려 멍청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또 어느 겨를에 무너진 건물들을 수리하여 새롭게 할 것인가. 무너진 건물들을 수리하여 새롭게 하는 일은 사실 어진 사람과 유능한 사람들의 하는 일인 것이니, 이것은 내가 두 수령을 보고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주에는 산수의 승경이 이미 저렇고, 관부 청사의 아름다움이 또 이러하니,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여기에 거처하는 이가 노는 데 빠져서 세월을 허송하는 폐단이나 없을까 하는 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관청 건물의 수리가 이야말로 정치에 방해가 되고, 외물에 끌려 뜻을 상실하는 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 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는 마땅히 어진 마음에서 근본하여 어진 정사가 베풀어져서, 백성 부리는 데 도리가 있어 농사철을 빼앗지 않고 본말이 함께 시행된 연후에야 옳을 것이다. 아, 옛날 성인이 《춘추》를 지을 때, 모든 건축 관계의 일을 반드시 썼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 부리는 일을 중히 여긴 것이다. 백성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 때가 맞지 않는데 일을 크게 벌인다면 폄(貶)하고, 재력을 손상하지 않으며 농사때를 어기지 않게 하면 포(褒)한 것이다. 이번 후(侯)의 이 일은 《춘추》의 예(例)에 의하면, 특별히 써서 아름답게 여겨 포(褒)하여야 할 일이니, 내가 어찌 말이 없을 수 있는가. 이러므로 기문을 적는다.’ 하였다.” 하였다.

【누정】 봉지루(鳳池樓) 객사 동쪽에 있으며, 연못이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한 지역 외로운 성이 바닷가에 가까운데, 봄바람의 먼 나그네 혼자서 누에 올랐네. 산은 서북쪽으로 잇달아 천 겹으로 푸르고, 땅은 동남쪽으로 터져서 만고에 흐르네. 널리 포용하니 하늘이 큰 것을 알겠고, 바다가 아득하니 세상이 떠 있는 줄 깨닫겠네. 백 년 동안 분주하여도 무슨 일을 이루겠나, 연파(煙波)에 낚싯배나 띄워 볼거나.” 하였다. 『신증』 관찰사 남곤(南袞)이 이름을 영해(瀛海)로 고쳤다.
○ 정난종(鄭蘭宗)의 시에, “북소리 나팔소리에 변방의 성이 저물고, 호산(湖山)에 가을빛이 깊었네. 마른 연잎은 밤새도록 소리 내고, 쇠잔한 버들 반못[半池]에 그늘지누나. 주렴에 반딧불 처음 지나가고, 누대에는 달이 들어오려 하네. 이때 객의 한(恨) 절로 나니, 잔나비 울음 들어서가 아니네.” 하였다.
○ 조위(曺偉)의 시에, “멀리 노니니 한 해가 저물려는데, 병들었다가 일어나니 술잔 깊은 것이 두려워라. 나뭇잎 떨어지니 가을빛 줄어들고, 누가 높으니 저녁 그늘 생기는구나. 풍광은 가는 곳마다 다른데, 서늘한 기운 앉은 자리에 스며드네. 한나절 중을 만나 이야기하다가, 외로운 회포를 짧은 시에 적어보네.”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뭇산이 들에 비껴 끊겼는데, 온 지경이 다시 맑고 깊네. 복사ㆍ오얏 새 길을 이루었고, 소나무ㆍ전나무는 옛 그늘이 자랐네. 새가 우니 봄빛이 늦었고, 누대가 고요하니 달빛이 침노하네. 술항아리 자주 권하니, 시를 짓고도 읊어보지 못하네.” 하였다.
○ 송질(宋軼)의 시에, “절(節)을 안서부(安西府)에 멈추고 누에 오르니 감회도 깊구나. 주렴에는 황학(黃鶴) 그림자 보이지 않는데, 산에는 흰 구름 그늘이 오락가락하누나. 숲 빛은 연기 속에 어두운데, 연꽃은 비 뒤에 피었네. 앉아서 못가의 풀 푸른 것 보다가, 사공(謝公)의 시가 모자람을 한탄하네.” 하였다.

해운정(海雲亭) 주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우(辛禑) 3년에 우리 태조가 왜적을 해주에서 치다가 주의 동정자(東亭子)에서 싸웠다. 싸움이 한창일 때, 진흙에 빠지는 땅이 한 발이 넘는 곳을 만났는데, 태조의 말이 한 번에 솟아올라 뛰어서 지나가니 따르던 자들은 모두 건너지 못하였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으로 적을 쏘아 열일곱 번에 모두 죽이고, 군사를 풀어 진격하여 드디어 적을 크게 깨뜨렸다.
은행정(銀杏亭) 동헌 북쪽에 있다. 모란정(牧丹亭) 별관 북쪽에 있다. 서정(西亭)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신증』 부용당(芙蓉堂) 객관 서쪽에 있는데, 목사 김망(金望)공이 고쳐 지었다. 당이 연못가운데 있어, 극히 맑은 운치가 있다.
【학교】 향교 고을 북쪽 2리에 있는데,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옛 집터이다. 지방 사람들이 최충을 문묘에 배향하였는데 목사 정성근(鄭誠謹)이 사전(祀典)에 없는 것이라 하여 파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우리나라는 문교(文敎)가 크게 밝아져서 중화에 견준다. 수령이 먼저 선성(先聖)을 알현한 뒤에서야 관청에 나가서 일을 보며, 감사가 수령들의 성적을 보는 데에도 학교를 잘하는 것으로 제일[最]을 삼았으니,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여 다스림을 도모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다. 해주 고을은 지역이 넓고 사람이 많으며, 등급이 목(牧)이 되는데도 학교가 폐지되어 수리하지 못하여 선생과 제자가 다른 곳으로 가서 거처하니, 아, 관원으로서 법을 받들어 조정의 뜻에 맞게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정통(正統) 경신년 봄에, 쌍매당(雙梅堂) 이 선생의 적손 창(昶)이 해주에 목사로 갔는데 부임하자마자 정사는 공평하고 형벌은 깨끗하니, 사람들의 믿음을 받았다. 다음해에 통판 김자행(金自行)군과 더불어 학궁(學宮) 지을 것을 계획하니, 아전들이 시절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후(侯)는 그럴 수 없다 하며 말하기를, ‘노후(魯侯)가 반궁(泮宮)을 수리한 것을 《춘추》에 쓰지 않았으니 성인의 뜻을 알 수 있다. 어찌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 되고, 인재를 기르는 그 곳을 오래도록 폐지하고 중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땅을 문헌공 최충의 옛 집터에 정하였는데, 재목은 옛 관청을 헐어 쓰고 산에서 베지 않았으며, 인력은 이졸을 시키고 백성을 부리지 않았다. 경영한 지 10개월 만에 완성되니 성전(聖殿)이 매우 넓으며 명륜당이 남쪽에 날아갈 듯하며 좌우의 협실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남쪽 행랑까지 칸수가 모두 35칸이었다. 목사가 병으로 인하여 고을을 버리고 가고 정발(鄭發)공이 후임으로 와서 다스리는데, 그는 또 벼슬하는 집 후손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역시 학교를 중하게 여겨서 단청을 새로 하고 부엌이나 마굿간 같은 것을 증설하며 기와로 덮고 담장으로 두르니, 제도가 새롭고 외관이 더욱 장려하며, 방과 마루, 다락 고방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겨울에는 덥고 여름에는 서늘하였다. 선생과 제자가 거처할 데가 있고, 포주(庖廚)와 창름(倉廩)이 차례가 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고을 사람들의 기쁨일 뿐이겠는가. 후일의 미담도 될 일이다.
임술년 겨울에 그 고을 사람인 장연 교도(長淵敎導) 백하선(白河善)이 나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주학(州學)이 오래도록 폐지되어 우리 지방의 수치였더니, 수리되는 것이 앞사람에게서 되지 않고 쌍매당의 손자를 기다렸으며, 손질하여 꾸미는 것이 뒷사람에게 넘겨지지 않고 정공에게서 갖추어졌으니 해주의 다행함이 어떠하겠소. 문헌공 옛 집터가 몇 해인지 모르게 풀 속에 묻혀 있다가 반드시 오늘에 와서 개척하게 된 것도 그 역시 하늘의 뜻이 그렇게 시킨 것이요, 우리 고을 인재 중의 문헌공ㆍ쌍매당 같은 현인이 이후로 배출될 것이요, 그대 역시 우리 고을 사람이니, 이상 두 목사의 공적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기문을 지어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바라오.’ 하여, 대략 그 본말을 기록하여서 책임을 때우는 바이다.” 하였다.
『신증』 목사 정성근(鄭誠謹)이 중수하였는데 성균관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 남곤(南袞)의 중수기에,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다음해에, 크게 온 나라에 고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교육하여 태평의 정치를 도와서 이루게 하니, 대소 관원들이 송구하여 유시한 조문을 삼가 받들었다.
이때는 반정(反正) 후 새로운 것이 시작되어 조정과 재야에 일이 많고, 시절도 풍년이 들지 못하여 백성들이 소생하지 못하며, 관리는 문서를 받들고 정기 집회에 응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 관한 일은 손댈 사이가 없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서 모두가 옳게 아는 것이 없게 되니,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5년 경오년에, 조정에서 풍산(豐山) 심염문(沈廉問)공을 서해도 감사로 보내었는데, 개연히 생각하기를, ‘백성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관원에게 있으며, 관원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은 감사에게 있다.’ 하여, 먼 곳도 가까운 곳처럼 보고, 험한 곳도 평지 가듯 하여 두 달도 못 되어 순시의 행차가 두 번이나 관내를 돌았다. 모든 민간의 이익과 고통을 풍속의 후박에서 알게 되어, 궁벽한 여염집과 흩어진 마을의 하찮은 원통이나, 고부간의 싸움하는 말까지도 모두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수령 중의 더욱 혼미하고 나약하여 일하지 못하는 자 한 사람을 파면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니, 정사가 실시되고 명령이 행하여져서, 위엄에는 두려워하고 은혜에는 감복하였다.
공이 또 생각하기를, ‘해주 고을이 웅장하게 자리잡아 물산이 많고, 지역이 커서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 모두 모여들고 여러 고을을 관리하는 곳이니, 정령을 시행하고 풍교를 펴는 것을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하겠다.’ 하여, 수레를 이곳에 멈추고,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방법을 어찌하면 그 근본을 얻을까 생각하였다. 이에 길일을 택하여 관띠를 갖추고 선성(先聖)의 사당에 알현한 다음, 물러나 명륜당에 앉아서 여러 생도들을 불러 읍하게 하니, 의관을 제대로 갖춘 선비들이 모두 뜰아래 모였다. 이에 노숙한 선비를 앞에 나오게 하여, 학교를 세운 역사를 물으니, 답하기를, ‘정통(正統) 연간에 이후(李侯) 창(昶)이 우리 주에 목사로 와서 처음으로 터를 잡아 지었는데 하동(河東) 정상공(鄭相公)이 그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홍치(弘治) 연간에 와서는 정후(鄭侯) 성근(誠謹)이 유학계의 명망 있는 이로 여기에 와서 고을을 다스리면서, 낡은 것은 새것으로 바꾸고, 좁은 것을 넓혀서 크게 하며, 부족한 것을 완전히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하여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은 다 그가 규정 제작한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더욱 혼자 마음으로 느끼고 분발하기를, ‘아, 내가 말하는 풍속을 교화하는 근본이 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온갖 공인(工人)들이 가게에 있어야 그 일을 이루는 것인데, 지금의 학교는 선비들의 가게이다. 만일, 건물이 막히고 답답하다면 거기서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막힌 생각 통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가게를 헐어놓고 공인들에게만 일을 잘하라고 책망하는 것이나 같으니, 그 이른바 감추고 닦고 놀고 쉬는 데에 결함이 있지 않을 것인가.’ 하며, 드디어 수리할 것을 계획하고, 막료인 장사문(張斯文) 맹우(孟羽)에게 물으니 의논이 잘 맞았다.
목사 한후(韓侯) 사개(士价)를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후 역시 일에 숙달한 사람이라 공장들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으되 털끝만큼도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 집을 고쳐 짓지 않고 허물어진 데 따라 손질하며, 뜰안을 더 넓히지 않고 지형을 따라 평탄하게 하였다. 계단의 벽돌이 무너진 것은 새로 쌓고, 담벽의 구멍 뚫리고 틈난 것은 흙으로 발랐다. 당의 동서쪽을 트고 익실(翼室)을 붙이며 단청을 새로 하고, 주회암(朱晦庵)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옛 어진이 언행 중의 경계가 될 만한 것을 나무판에 써서 문 위에 걸었다. 또 여러 고을에서 재주 있는 사람 몇 명을 뽑아 여름철 공부를 시키는데, 후한 음식으로 공궤하고 예로 우대하며, 날마다 그 재주를 비교하고 달마다 그 능력을 시험보니, 얼마 안 가서 저절로 모두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 공이 서신을 서울로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며 이르기를, ‘해주는 그대가 노닌 곳이 아니며, 학교는 그대가 와서 본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 어느 것 하나 그대의 의사 아닌 것이 없으니, 그대가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다. 내가 서신을 받고서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기에까지 생각이 있었겠는가. 기한을 정해 놓고 만기가 되기만을 기다리며, 책벌을 면하기만을 바란 것뿐이니,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았으리오. 만일 공의 이 일을 사필(史筆) 잡은 이가 듣는다면 정말 사책(史冊)에 적을 것이지만, 나의 직책이 태사관(太史官)에 속하지 않았으면 문장이 또 생색낼 수 없는 것으로, 장차 그 성대하고 아름다운 사적을 매몰시키게 될 것을 어찌하랴. 다만 공의 인재를 육성하는 아름다운 뜻을 여러 생도들을 위하여 분부할 뿐이다.
지금 선비의 관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고 이 고장에 있는 자들은 역시 이 고장이 어떠한 고장인 줄을 아는가. 이것이 문헌공(文獻公)이 도(道)를 강론하던 궐리(闕里)가 아닌가. 9재(九齋)의 생도들이 빨리 모여 와서 낙성(樂聖)ㆍ성명(誠明)으로 공부를 삼아서, 북치면 모여 책을 들고 당에 오르는 자가 문 밖에 신이 항상 가득하며, 진덕(進德)하여 대빙(待聘)하는 자가 띠뿌리 뽑히듯 한꺼번에 진출하여, 고려조 5백 년 간의 문풍을 크게 일으켰던 것으로서, 그 당시 인재의 성함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땅이 그 땅이요, 학문도 다른 학문이 아닌데, 지금 또한 그때의 인물이 있는가.
지금 호남ㆍ영남으로 말하면 서울 가기가 천여 리나 되지만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공부에 부지런하여 과거 때마다 갑ㆍ을과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사방 선비에 비하면 언제나 태반을 넘는데, 관서 지방은 알려진 이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인재 내는 것을 예전에는 많이 하고 지금은 인색하게 하며, 동남 지역엔 후하게 하고 서북 지역에 박하게 하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관된 자가 잘 지도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인가. 혹시 이곳 인사들이 힘쓰지 않은 것인가. 장관이 지도하지 않은 것은 이것을 광직(曠職)이라고 하여 그 벌이 동(銅)으로 속(贖) 바치고 녹을 깎는 데에 그칠 뿐이지만, 선비들의 힘쓰지 않는 것은 이것을 자기(自棄)라 하는 것으로서 그 해가 소ㆍ말에 옷 입히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금수의 지경에 돌아간다면 모두들 어떻다 할 것인가.
학문은 정미함과 거침이 있고, 글은 화(華)와 실(實)이 있다. 주석이나 주워 모으고 구두를 나누어 끊어서 입과 귀만으로 받아들이고 털과 가죽만을 깎는 것은 학문의 거친 것이요, 깊은 곳을 끌어내고 속을 헤치며 털끝만한 것도 나누고 실오라기도 갈라서 도(道)가 체(體)와 용(用)을 겸하고, 공(功)이 중화(中和)의 극치(極致)에 이름은 학문의 정미한 것이다. 글귀만을 읊조리고 아로새겨 꾸미는 데에 마음을 쓰며, 청(靑)과 황(黃)을 대우(對偶)로 맞추고 새와 짐승이나 읊조리는 것은 글의 화(華)요, 음양을 이리저리 얽고 우주를 진동하여 경(經)이 되고 위(緯)가 되어 국가의 정치에 문채를 놓는 것은 실(實)인 것이다. 그 실과 정은 원래가 용이하게 얼른 얻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 화하고 거친 데서부터 공부를 한다면 아마 나중에는 얻게도 될 것이다. 생도들은 단지 정한 것을 찾고 실한 것을 채우는 것이 어려운 줄만을 알고, 그 화하고 거친 것까지도 모두 폐지하니,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지금 조정이 밝고 사방에 근심이 없어, 군사에 뽑히거나 공사에 증발되는 부역이 몸에 미치지 않으니,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식을 기르며 배불리 먹고 즐겁게 노는데, 문학을 버리고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 세월은 가고 우리와 함께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작은 것을 쌓으면 정말 큰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아래로 인사를 배우는 것이 곧 위로 천리를 통달할 수 있는 길이니, 여러 생도들은 힘쓸지어다. 서촉(西蜀) 사람들이 문옹(文翁)이 태수로 온 것을 만나서야 문장이 비로소 성하여졌다. 이 역시 서로 만나는 것이 때가 있고 일어나는 것이 시기가 있어,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난 후에야만 성취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장경(長卿)ㆍ자연(子淵)ㆍ자운(子雲)의 재주가 어찌 우리 관서 지방에만 없을 것인가. 이 늙은이가 지금부터 눈을 비비며 기다리겠다.’ 하였다.” 하였다.

【역원】 청단역(靑丹驛) 고을 동쪽 40리에 있다. 찰방이 있다. 본 도에 속한 역이 아홉인데, 금곡(金谷)ㆍ심동(深洞)ㆍ망정(望汀)ㆍ금강(金剛)ㆍ문라(文羅)ㆍ금동(金洞)ㆍ신행(新行)ㆍ유안(維安)ㆍ남산(南山)이다. ○ 찰방 1인. 망정역 고 을 남쪽 2리에 있다. 금강역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고을 성 동쪽에 있다. 읍천원(泣川院) 읍천 언덕에 있다. 삼탄원(三灘院) 삼탄 언덕에 있다. 작천원(鵲川院) 작천 언덕에 있다. 금강원(金剛院)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점석원(粘石院)ㆍ증원(甑院) 모두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광탄원(廣灘院) 광탄 언덕에 있다. 수여원(水餘院)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신증』 양거원(楊距院) 고을 서쪽 70리에 있다. 가천원(茄川院)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불우】 신광사(神光寺)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지정(至正) 2년에 원(元) 나라 황제가 원찰(願刹)이라 칭하고, 태감 송골아(宋骨兒)를 보내어 목공과 장인 37명을 거느리고 와서 고려 시중 김석견(金石堅)ㆍ밀직 부사 이수산(李守山) 등과 함께 감독하여 설계 건축하였다. 지금도 전당(殿堂)과 불상의 금은 단청을 한 것이 완연하여 엊그제 한 것 같다.
『신증』 남곤(南袞)의 시에, “천 겹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빠져나와, 십홀(十笏) 선방에서 자리를 빌려 자네. 6월의 무더위가 들어오지 못하니, 절간에 별다른 천지가 있네.”
○ “동구에 들어오니 저 멀리 종소리 들리더니, 다리를 지나서야 전각들이 보이누나. 구름과 안개가 어찌 잠갔으랴, 관원들의 티끌 자취 절로 오지 못한 것이리.”
○ “지정 연간 황실에서 난리 있을 때에, 신광사 절간이 찬란히 세워졌네. 지금 사는 중들 천 명이나 되는데, 모두들 송골아가 이 절을 지었다고 말하네.”
○ “한가한 날 서로 이끌고 절간 찾으며, 시내와 산 가는 곳마다 맑은 놀이 마련했네. 그대들과 함께 술 마시니, 풍류스러운 자리 위에 내가 오두(遨頭)로세.”
○ “미투리 행장 경쾌도 하게 내시 따라 들어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벽예(薜荔) 덩굴 그늘에 술항아리 옮기네. 명일에는 도로 관도(官道)로 갈 것이니, 천 겹 어지러운 봉우리에는 매미만 울겠네.” 하였다.

보현사(普賢寺) 불족산(佛足山)에 있다. 서진사(棲眞寺) 수양산에 있다. 금강사(金剛寺) 지성산(池城山)에 있다. 자비사(慈悲寺) 우이산(牛耳山)에 있다. 빈발사(鬢髮寺)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명석사(命石寺) 우이산에 있다. 동고산사(東高山寺) 동고산에 있다. 서고산사(西高山寺) 서고산에 있다. 중대사(中臺寺) 우이산에 있다. 수다사(水多寺) 청암산(靑巖山)에 있다. 은동사(恩洞寺)ㆍ은적사(隱寂寺) 모두 자단산(紫丹山)에 있다. 원통사(圓通寺) 취라산(吹螺山)에 있다. 묘자사(妙慈寺) 우이산에 있다. 선정사(禪定寺) 달마산(達磨山)에 있다. 묵방사(墨房寺) 천봉산(天鳳山)에 있다. 광조사(廣照寺) 수미산(須彌山)에 있다. 고려 검교상서좌복야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진철대사(眞澈大師)의 비가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남산에 있다. 우이산사(牛耳山祠) 사전(祀典) 소사(小祀)에 실려있는데, 봄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 보내서 제사지낸다. 여단 고을 서쪽에 있다. 지성산사(池城山祠) 관에서 제사 드린다.
『신증』 최충묘(崔冲廟) 문묘 서쪽에 있는데 아들 유선(惟善)을 함께 제사 드린다.
【고적】 형제도(兄弟島)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30리에 있다. 두 작은 섬이 있으므로 민가에서 형제도라고 이름한다 그 중 하나는 높이가 12보(步)이고 하나는 높이 8보인데, 둘레는 모두 1백 20보이고 서로의 거리는 2백 70보이다. 전해 오는 말에, “백이ㆍ숙제가 여기서 죽었다.” 한다. 우다굴(亏多窟)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굴의 높이가 두 길이 넘는데 구멍이 어두워서 사람들이 불을 가져야만 들어간다. 5리쯤 가면 구멍이 굽어지며 깊어지고, 또 물이 있어 그 근원을 모른다. 전해 오는 말에, “우다장군(亏多將軍)이 이 구멍으로 들어가서 구월산(九月山) 꼭대기의 구멍에 도달하였다 하는데 거리가 백여 리나 된다. 굴 안에서 불을 피우면 10여 일 만에 구월산 구멍으로 나간다.” 한다. 수양산성(首陽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요, 높이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童仲) 세 사람이 있어, 터를 보아 쌓았다.” 한다. 산중에는 또 고죽군(孤竹君)의 옛 터가 있다. 마산처(馬山處) 곧 마산온천이 있는 곳이다. 백석처(白石處)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청산소(靑山所) 고을 북쪽 90리에 있다. 장봉소(長峯所)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황암소(黃菴所)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지성산고성(池城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4백 57척이다.
【명환】 고려 김한충(金漢忠) 선종(宣宗)조에 수안서도호부(守安西都護府)가 되었다. 이백겸(李伯謙) 충선왕(忠宣王)조의 목사였는데 정치 잘하기로 알려졌다. 조돈(趙暾) 목사가 되었다. 김흥조(金興祖) 목사가 되었다. 최영유(崔永濡) 목사로서 관사에서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고을 북쪽에 장사지내고 묘지기를 두어, 나무 베고 소ㆍ말 먹이는 것을 금하며, 죽은 날짜를 목판에 써서 고을 관청 벽 위에 걸어 두고, 죽은 날이나 명절을 당하면 제사드린다.
『신증』 본조 구치곤(丘致崑) 목사가 되어, 청렴 간이하며 백성을 사랑하였다. 정성근(鄭誠謹) 목사가 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돌보아 주었다.
【인물】 고려 최충(崔冲) 주의 아전 온(溫)의 아들인데, 풍체가 훌륭하고 지조가 굳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목종(穆宗)조에 갑과에 첫째로 뽑혔으며 벼슬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겸 문하시중 상주 국내사령(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內史令)에 이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자세한 것은 개성부 고적편에 보인다. 최유선(崔惟善) 충의 아들이다. 현종(顯宗)조에, 을과에 첫째로 뽑히고, 벼슬이 중서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화(文和)요,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우 유길(惟吉)은 수사공 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이다. 아버지 최충이 연령은 높으나 아직도 탈이 없었는데 왕이 나라의 원로들을 잔치할 때에 유선ㆍ유길이 충을 부축하여 들어가니, 당시에 모두들 성대한 일이라 하였다. 한림학사 김행경(金行瓊)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상서령이 중서령을 모시고, 을장원(乙狀元)이 갑장원을 부축하였네.” 하였다.
최사제(崔思齊) 유선의 아들이다. 문종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판이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평(良平)이다. 최약(崔瀹) 사제의 아들이다. 예종(睿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예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최사추(崔思諏) 충의 손자이다. 문종조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왕이 사추가 명문가 자제로서 박학다문하다 하여,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였다. 숙종(肅宗)조에는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수태사 중서령에까지 이르렀다. 사추는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공정하고 청렴하며, 문벌 지위로써 사람들에게 교만하지 않으니, 조정에서 벼슬하기 40여 년간에 조금도 과실이 없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옛 제도를 고치지 않았으며, 문인 자제 중에 와서 뵙는 이가 있으면 언제나, 임금 섬기는 도리로서 교훈하고, 사사로운 일을 말하지 않았다.
최사량(崔思諒) 나이 18세 과거에 합격하여 문종조에 공부시랑검교태사를 거쳐 좌복야 참지정사에까지 승진되었다. 사량이 행동과 외모가 단아하며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며, 국권을 잡고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명망이 당시에 중하였다. 시호는 강경(康敬)이다. 최윤의(崔允儀) 충의 현손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에 이르렀다. 문벌 높은 집안에서 성장하여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일을 의논하는 데 사리가 명백하고 뜻이 강개하였다. 이부(吏部) 관리 임명을 맡았을 때에 공평하고 정당하였으며, 두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당시에 그는, 선비를 잘 뽑았다 하였다.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50권을 편찬하였으며, 의종(毅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자(崔滋) 충의 후손이다. 젊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 강종(康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수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최유엄(崔有渰) 자의 아들이다. 천성이 겸손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아서, 10년 동안에 승진이 없었는데, 충렬왕(忠烈王)이 오래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여러 번 승진시켜 도첨의 찬성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원 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신하 중의 어진이를 보내라 하였는데, 유엄이 명에 의하여 원 나라에 갔으며 원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하고, 세록(世祿)과 노비법을 혁파하려 하는 것을 유엄이 힘써 청원하여 정지시켰다. 돌아오자 나라 안 사람들이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삼한(三韓)을 보존한 최 시중이다.” 하였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고, 4왕조를 내리 역임하며 섬기며 세가의 원로가 되었는데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최춘명(崔椿命) 충의 후손인데, 천성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절조가 있었다. 고종조에 자주 부사(慈州副使)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이르렀다. 자산군(慈山郡) 편에 자세하다. 최홍윤(崔弘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사마시(司馬試)를 창설하자 네 번 고시를 맡았는데, 뽑은 사람이 모두 이름 알려진 사람으로 경상(卿相)이 된 사람도 많았다. 세상에서 옥순문생(玉筍文生)이라 불렀다. 최함(崔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오연총(吳延寵)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기거랑(起居郞)이 되었으며 후에 전주 지주(全州知州)가 되었다가 불려서 추밀원에 들어갔다. 예종(睿宗)이 여진을 정벌하는데, 연총이 윤관(尹瓘)의 다음이 되어서 여진을 격파하고, 지경을 개척하여 9성을 쌓았다. 후에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오형(吳詗) 처음 이름은 한경(漢卿)이다. 원종(元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빛나고 요긴한 직위에 역임하고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호는 쾌암(快庵)이요, 학문이 정밀하고도 해박하였다. 드러난 공적은 없지만 너그럽고 간략하여 겉치레가 없어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정유산(鄭惟産)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상서 한림학사로 대제학을 맡았다.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자의 이름을 봉하는 법을 세웠으며, 벼슬이 문하평장사에까지 이르렀다.
본조 정이(鄭易)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아들 충경(忠敬)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고, 충석(忠碩)은 벼슬이 동지중추에 이르렀다. 최만리(崔萬理)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고 뽑혀서 집현전에 들어갔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신증』 정희량(鄭希良)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예문관 봉교로 무오사화를 당하여 귀양갔다. 후에 방면되어 돌아왔으나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었다. 시를 잘 짓기로 이름이 났으며 《허암집(虛庵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정미수(鄭眉壽)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다. 관직이 찬성에 이르고,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였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효자】 본조 경비(敬非) 그 아버지 한중덕(韓仲德)이 병이 나서 3년이 되도록 낫지 않으니, 경비가 자기의 손가락을 찧어 국에 섞어서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신증』 이성동(李性同) 어머니가 악질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끊어서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5년에 정문을 세웠다. 장수이동(張愁伊同) 소경인데 아버지가 악질에 걸렸을 때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5년에 정문을 세웠다. 김수원(金守元) 아버지가 악질에 걸렸는데, 수원의 나이 13세에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송세광(宋世匡) 어머니가 병이 급하였는데 다리살을 베어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곧 나았다. 금상 9년에 정문을 세웠다. 김산동(金山同) 어머니가 나쁜 병을 앓았는데, 산동의 나이 13세에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1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섬들은 많이도 봉화(烽火)에 비치네 이색(李穡)의 시에, “섬들은 많이도 봉화에 비치고, 밭두둑은 태반이 다북쑥에 묻혔네.” 하였다. 바다 출렁거려 앞을 둘렀네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높은 산은 층층한 구름가에 은은한데, 넓은 바다는 출렁거려 앞을 둘렀네.” 하였다. 땅은 바다 어귀를 곁하여 깊었네 김자지(金自知)의 시에, “고을은 수풀 언덕을 의지하여 궁벽하고, 땅은 바다 어귀에 곁하여 깊었네.” 하였다. 만고의 백이ㆍ숙제 살던 곳이네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만고에 백이ㆍ숙제 살던 곳인데, 그 유풍(遺風)에 감회도 깊구나.” 하였다. 우이산(牛耳山) 높은데 동부(洞府) 음침하네 최한보(崔漢輔)의 시에, “용매도(龍媒島)가 머니 바다 어귀 넓고, 우이산 높은데 동부(洞府) 음침하네.” 하였다. 금도(金桃)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네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금도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고, 은행은 푸른 잎 처음으로 그늘지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8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읍의 큰 의옥(疑獄) 사건으로써,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내동변(內東邊) 처음이 읍내이고, 끝이 10리이다. 외동변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서대공(西大公)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동대공(東大公)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소문(蘇文)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천결(泉潔)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일신(日新)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내성(來城)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동강(東江)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추이동(秋伊洞)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위의 10면은 모두 주(州)의 동쪽이다. 서변(西邊) 처음이 읍내에 있으며 끝이 20리이다. 가좌동(茄佐洞)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아달(阿達)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마산(馬山)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가천(茄川)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이다. 교정(交井) 처음이 90리, 끝이 1백 50리이다. 대진(代陳) 처음이 70리, 끝이 1백 리이다. 삼곡(三谷)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고장박(高壯朴)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월량곡(月良谷)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10면은 모두 주의 서쪽이다.
고촌(古村)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송림(松林) 처음이 물에서 40리, 육지에서 50리, 끝이 80리이다. 상평(上平) 처음이 70리, 끝이 1백 리이다. 하평(下平)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3면은 주의 동남쪽이다. 청산(靑山)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백운(白雲) 처음이 60리, 끝이 1백 리이다. 검단(黔丹) 위와 같다. 표지(票枝) 처음이 50리, 끝이 90리이다. 미륵(彌勒)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고산(高山)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취거(取車)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위의 7면은 주의 서북쪽이다. 해남(海南) 남쪽으로 처음이 물에서 30리, 육지에서 40리, 끝이 50리이다. 수미(須彌)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군량곡(軍糧谷) 처음이 40리, 긑이 60리이다. 송라동(松羅洞)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석동(席洞)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위의 4면은 주의 북쪽이다.
【영아】 순영 본조 태조 4년에 설치하였다.
【관원】 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ㆍ순찰사ㆍ해주 목사를 겸하였다. 도사(都事)ㆍ중군(中軍)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역학훈도(譯學訓導)ㆍ심약(審藥)ㆍ검률(檢律) 각 1인.
【진보】 용매량진(龍媒梁鎭) 섬 가운데 있는데 옛날에 만호를 두었었다. ○ 수군동첨절제사가 1인. 요망(瞭望) 가천(茄川)ㆍ흑두포(黑頭浦)ㆍ옹진(甕津) 편에 상세하다.
【봉수】 피곶(皮串) 동남쪽으로 80리이다. 용매도(龍媒島)ㆍ수압도(水鴨島)ㆍ연평도(延平島) 이상은 수로원봉(水路元烽)이다. 사곶(沙串) 이상은 지보순영(只報巡營)이다.
【창고】 고(庫) 12 읍성내에 있다. 결성창(結城倉) 갯가에 있다. 서별창(西別倉) 서별강가에 있는데, 옛날 수장산곶(收長山串) 이북의 여러 읍 전세(田稅)를 배에 실어 서울에 이르렀다. 조운(漕運)은 지금 폐지되었다. 남창(南倉) 취야포(翠野浦)가에 있다. 일소둔창(一所屯倉) 가천에 있다. 구해창(舊海倉) 읍천포(邑川浦)가에 있다. 청단역창(靑丹驛倉)ㆍ용매진창(龍媒鎭倉)ㆍ산성창(山城倉)ㆍ점석둔창(粘石屯倉) 서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다. 해남창(海南倉)ㆍ표지창(票枝倉)ㆍ상평창(上平倉)ㆍ하평창ㆍ동강창(東江倉)ㆍ소문창(蘇文倉) 모두 면내에 있다. 수미창(須彌倉) 광조사(廣照寺) 옛 터이다.
【역참】 가동역(嘉東驛)ㆍ남산역(南山驛).
【목장】 용매도장(龍媒島場) 본래 목우장(牧牛場)인데, 뒤에 마장(馬場)이 되었다가 진을 설치한 뒤에 폐해졌다. 연평도장(延平島場) 폐해졌다.
【교량】 어사천교(於賜川橋) 여름에 물이 부르면 배를 사용함. 읍천교(邑川橋)ㆍ작천교(鵲川橋)ㆍ석담천교(石潭川橋)ㆍ죽천교(竹川橋).
【토산】 먹[墨]ㆍ박석(薄石).
【누정】 공북루(拱北樓) 북성문루(北城門樓)이다. 탁열정(濯熱亭) 북녘 마을에 있다. 백림정(栢林亭)ㆍ취야정(翠野亭)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묘전】 청성묘(淸聖廟) 숙종 신미년에 세우고 신사년에 어필로써 편액을 썼다. 백이(伯夷) 성(姓)은 묵씨(墨氏), 이름은 구(九), 자는 공순(公淳)이며 고죽군(孤竹君)의 장자(長子)이다. 시호는 이(夷)이며 송 나라에서 청혜후(淸惠侯)로 봉하였다. 숙제(叔齊) 이름은 지(智), 자는 공달(公達), 고죽군의 막내 아들이다. 시호는 제(齊)이며 송 나라에서 인혜후(仁惠侯)로 봉하였다.
【사원】 문헌서원(文憲書院) 명종(明宗) 기유년에 세우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최충(崔冲)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태사상주국 중서령으로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헌이다. 최유선(崔惟善) 최충의 아들인데 벼슬은 사도중서령이고, 시호는 문화(文和)이다. 소현서원(紹賢書院) 선조(宣祖) 정축년에 세우고, 광해주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晃)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모두 문묘 편에 보라.


 

[주D-001]지도에는……않았네 : 백이ㆍ숙제가 주(周) 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절개를 지켜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었기 때문에, 수양산은 주 나라 지도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02]황종(黃鐘) : 음악에 12율(律)의 첫째가 황종인데 율관(律管)을 제정할 때에 황종을 기본으로 한다.
[주D-003]어려운 일[盤錯] : 반근(盤根) 착절(錯節)을 만나지 아니하면 잘 드는 연장을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반근은 나무의 뿌리가 서려 구부러지고 뭉친 것인데 잘 드는 연장이 아니면 그것을 다듬을 수 없다. 착절도 역시 나무의 교착(交錯)된 마디다. 즉 어려운 일을 당하여야 일을 잘 처리하는 재주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주D-004]성인이……경영하였다 : 주역에 대장괘(大壯封)가 있는데 계사(繫辭)에 말하기를, “상고에 사람들이 구멍에 살고 들에 거처하였더니 후세에 성인이 궁실(宮室)을 지어 바람 비를 막은 것은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5]본말 : 마음은 본(本)이요 정사는 말(末)이다.
[주D-006]잔나비 : 중국 삼협(三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구슬프게 우는 잔나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슬퍼진다 한다. 시인의 글귀에 많이 나온다.
[주D-007]복사……이루었고 : 《사기(史記)》에, “복사꽃 오얏꽃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밑은 저절로 길을 이룬다.” 하였다. 그것은 그 꽃을 보려고 사람들이 저절로 많이 온다는 뜻이다.
[주D-008]사공(謝公)의……한탄하네 : 사영운(謝靈運)의 시에, “못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 하였는데, 명구라 한다.
[주D-009]궐리(闕里) : 궐리는 공자가 살던 동리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충(崔冲)을 해동의 공자라 하므로 최충이 살던 땅을 공자의 궐리에 비하였다.
[주D-010]낙성(樂聖)ㆍ성명(誠明) : 낙성재(樂聖齋)ㆍ성명재(誠明齋)는 최충이 제자를 가르치던 서재의 이름이다.
[주D-011]대빙(待聘) : 대빙(待聘)도 최충의 서재 이름인데 그것은 공부를 하여 나라에서 뽑아서 초빙하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주D-012]띠뿌리 뽑히듯 : 띠는 한 뿌리를 뽑으면 얽힌 여러 뿌리가 한꺼번에 빠진다. 이것은 어진 선비들이 한꺼번에 서로 끌고 진출하는 데 비유한 것이다. 《주역》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3]광직(曠職) : 관직을 비운다는 말인데 직책을 이행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주D-014]청(靑)과……맞추고 : 변려문(騈儷文)을 짓는 데는 청(靑) 자와 백(白) 자 등으로 서로 대우를 맞추어 만들기에 힘을 쓴다.
[주D-015]장경(長卿)……자운(子雲) : 장경과 자연ㆍ자운은 곧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왕포(王褒)ㆍ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모두 서촉(西蜀)에서 난 문인(文人)들이다.
[주D-016]오두(遨頭) : 촉중(蜀中) 성도(成都)의 풍속에 4월 19일에 태수(太守)가 나가서 놀이를 하면, 남녀들이 나무 걸상에서 구경하는데 그것을 오상(遨狀)이라 하고 태수는 오두(遨頭)라 하는데 오두는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해동역사 제35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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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빙지(交聘志) 3
조공(朝貢) 3 고려(高麗)

 


○ 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4년(939, 태조22) -기해- 9월 병술에 고려가 광평 시랑(廣評侍郞) 형순(邢順)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오대사(五代史)》
○ 소제(少帝) 천복 8년(943, 태조26) -계묘- 9월에 고려가 왕자인 태상(太相) 왕신일(王申一)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11월 신축에 고려가 광평 시랑 김인봉(金仁逢)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갑인에 또 태상(太相)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오대사》
○ 출제(出帝) 개운(開運) 2년(945, 혜종2) -을사- 겨울 10월 정축에 고려가 광평 시랑 한현규(韓玄珪), 예빈 경(禮賓卿) 김렴(金廉) 등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무자에 병부 경(兵部卿) 유숭관(劉崇觀), 내군 경(內軍卿) 박예언(朴藝言)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상동(上仝)》
○ 주(周)나라 태조(太祖) 광순(廣順) 2년(952, 광종3) -임자- 정월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소(王昭)가 광평 시랑 서봉(徐逢) 등 97인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7월에 고려의 승려 사태(思泰)가 방물을 바쳤다. 10월에 회남(淮南)에서 고려의 사신 진삼(陳參) 등을 보내어 대궐에 도착하여 알현하자, 칙서를 내려 주식(酒食)과 의복을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 세종(世宗) 현덕(顯德) 원년(954, 광종5) -갑인- 10월에 -살펴보건대 《오대사》에는 2년 10월 무인으로 되어 있다.- 고려가 왕자인 태상(太相) 왕융(王融)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년(955, 광종6) -을묘- 11월에 다시 고려가 광평 시랑 순질(荀質)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고,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6년(959, 광종10) -기미- 정월 임자에 고려국의 왕 왕소(王昭)가 그의 신하인 왕자 좌승(佐丞) 왕긍(王兢)과 좌윤(佐尹) 황보위광(皇甫魏光) 등을 보내와서 명마(名馬) 및 짜서 만든 옷과 바지, 활, 칼, 그릇, 갑옷 등을 바치니, 왕긍 등에게 용의(龍衣), 은대(銀帶), 기폐(器幣) 등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살펴보건대 《오대사》에, “이해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황동(黃銅)을 조공하였다.” 하였다.- 8월에 -살펴보건대 공제(恭帝)가 즉위한 뒤이다. 《오대사》에는 8월 임인으로 되어 있다.- 사신을 파견하여 조회하였다. 11월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황동 5만 근, 백수정(白水精) 2000알을 조공하였다. 《상동》 ○ 《오대사》에, “이해 10월에 또 사신을 보내었다.” 하였다.
○ 송(宋)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3년(962, 광종13) -임술- 11월 병자에 고려국의 왕 왕소(王昭)가 정사(正使)인 광평 시랑 이흥우(李興佑), 부사(副使)인 이여희(李勵希), 판관(判官) 이빈(李彬)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송사(宋史)》
○ 4년(963, 광종14) -계해- 9월에 고려가 사신 시찬(時贊)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바다를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70여 인이었는데, 시찬은 겨우 살아났다. 조서를 내려서 위로해 주었다. 《상동》
○ 건덕(乾德) 3년(965, 광종16) -을축- 봄 정월 을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공물을 바쳤다. 《상동》
○ 개보(開寶) 5년(972, 광종23) -임신- 가을 7월 경인에 고려가 정사인 내의 시랑(內議侍郞) 서희(徐煕), 부사인 내봉 경(內奉卿) 최업(崔鄴), 판관 광평 시랑 강례(康禮), 녹사(錄事) 광평 원외랑(廣評員外郞) 유은(劉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공물을 바쳤다. 《상동》
○ 9년(976, 경종1) -병자- 9월 경오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주(王伷)가 사신 조준례(趙遵禮)를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으로 바쳤다. 《상동》
○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 경종2) -정축- 12월 신사에 고려의 왕이 그의 아들 왕원보(王元輔)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즉위한 것을 축하하고, 양마(良馬), 방물(方物), 병기(兵器)를 가지고 와 조공하였다. 《상동》
○ 3년(978, 경종3) -무인- 10월 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과 병기를 조공하였다. 《상동》
○ 5년(980, 경종5) -경진- 6월 임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981, 경종6) -신사- 여름 4월 병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7년(982, 성종1) -임오- 에 왕주(王伷)가 졸하였다. 그의 동생 왕치(王治)가 지국사(知國事)가 되어 사신 김전(金全)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면서 금실과 은실로 장식한 계금포(罽錦袍), 계금욕(罽錦褥), 금과 은으로 장식한 칼, 활과 화살, 명마(名馬), 향(香), 약(藥) 등을 조공하였다. 《상동》
○ 옹희(雍煕) 원년(984, 성종3) -갑신- 11월 임자에 고려가 사신 한수령(韓遂齡)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3년(986, 성종5) -병술- 겨울 10월 임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단공(端拱) 원년(988, 성종7) -무자- 11월 갑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2년(989, 성종8) -기축- 에 고려가 정사인 선관시랑(選官侍郞) 한인경(韓藺卿), 부사인 병관낭중(兵官郞中) 위덕유(魏德柔), 판관(判官) 소부승(少府丞) 이광(李光)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순화(淳化) 원년(990, 성종9) -경인- 10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신귀수존(神龜壽尊)을 바쳤다. 《옥해(玉海)》
○ 12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2년(991, 성종10) -신묘- 에 고려가 사신 한언공(韓彦恭)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4년(993, 성종12) -계사- 봄 정월 을미에 고려가 사신 백사유(白思柔)를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고, 아울러 경전(經典) 및 어제(御製)를 하사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상동》
○ 요(遼)나라 성종(聖宗) 통화(統和) 11년(993, 성종12) -계사- 3월에 고려국의 왕 왕치(王治)가 박양유(朴良柔)를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죄주기를 청하였다. 《요사(遼史)》
○ 12년(994, 성종13) -갑오- 2월 기축에 고려가 와서 조공하였다. 3월 정사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포로로 잡아간 사람과 가축을 돌려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속환(贖還)하게 하였다. 12월 무자에 고려가 기악(妓樂)을 올렸다. 《상동》
○ 송(宋)나라 순화(淳化) 5년(994, 성종13) -갑오- 6월에 고려가 사신 원욱(元郁)을 파견하여 군사를 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거란(契丹)이 경내를 침구(侵寇)하였다고 하소연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단지 조서를 내려 위무하기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가 거란의 압박을 받아 조공이 중간에 끊어졌다. 왕치(王治)가 졸하고 그의 동생 왕송(王誦)이 즉위하였다. 왕송이 일찍이 병교(兵校) 서원(徐遠)을 파견하여 조정의 덕음(德音)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서원이 오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송사》
○ 요나라 통화(統和) 13년(995, 성종14) -을미- 2월 갑진에 고려가 사신 주정(周楨)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5월 임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매를 진상하였다. 10월 갑신에 고려가 이지백(李知白)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14년(996, 성종15) -병신- 3월 임인에 왕치(王治)가 표문을 올려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6월 기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안부를 물었다. 그 뒤로는 수시로 사신이 왔다. 《상동》
○ 15년(997, 성종16) -정유- 에 고려가 사신 한언경(韓彦敬)을 파견하여 와서 빙폐(聘幣)를 바쳤다. 《상동》
○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咸平) 3년(1000, 목종3) -경자- 에 고려가, 신하 이부 시랑 조지린(趙之遴)이 아장(牙將) 주인소(朱仁紹)에게 명하여 등주(登州)에 와서 정탐하게 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불러서 보았다. 《송사》 ○ 세기(世紀)에 상세히 나온다.
○ 요나라 통화(統和) 20년(1002, 목종5) -임인- 2월 정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송나라를 쳐서 이긴 것을 축하하였다. 가을 7월 신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고려의 지리도(地里圖)를 조공하였다. 《요사》
○ 송나라 함평(咸平) 6년(1003, 목종6) -계묘- 에 고려가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告)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사은하였다. 《송사》
○ 요나라 통화 23년(1005, 목종8) -을사- 5월 병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송나라와 화친(和親)한 것을 축하하였다. 《요사》
○ 26년(1008, 목종11) -무신-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전(文化殿)과 무공전(武功殿)에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을 바쳤다. 《상동》
○ 28년(1010, 현종1) -경술- 11월에 왕순(王詢)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고 조회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상동》
○ 개태(開泰) 원년(1012, 현종3) -임자- 8월에 고려가 전공지(田拱之)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니, 병을 칭탁하고 조회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상동》
○ 송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1014, 현종5) -갑인- 에 고려가 고주사(告奏使)로 어사공부 시랑(御事工部侍郞) 윤증고(尹證古)를 파견하여, 금실로 짜서 만든 용봉안(龍鳳鞍), 수를 놓아 만든 용봉안과 용봉복(龍鳳幞) 각 2폭, 세마(細馬) 2필, 산마(散馬) 20필을 가지고 와서 조공하였다.
○ 8년(1019, 현종10) -기미- 11월 계해에 고려가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곽원(郭元)을 파견하여 동여진(東女眞)과 함께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연익이모록(燕翼貽謀錄)》에, “대중상부 8년에 장복(張復)이 상언(上言)하여 조공하는 여러 나라의 의관(衣冠)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풍속(風俗)을 기록하여 사관(史官)이 기록하는 데 대비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이때 조회하러 온 나라는 고려(高麗), 서하(西夏), 주련(注輦), 점성(占城), 삼불제(三佛齊), 몽국(蒙國)뿐이었다.” 하였다.
○ 천희(天禧) 원년(1017, 현종8) -정사- 11월 임술에 고려가 어사형관 시랑(御事刑官侍郞) 서눌(徐訥)을 파견하여 여진(女眞)의 추령(酋領)을 거느리고 와서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또 수춘왕(壽春王)을 봉건(封建)한 것에 대해서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019, 현종10) -기미- 9월에 등주(登州)에서 상언하기를, “고려의 진봉사(進奉使)인 예빈 경(禮賓卿) 최원신(崔元信)이 진왕수(秦王水)의 어귀에 이르러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공물(貢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내신(內臣)을 파견하여 위로하였다. 11월에 최원신 등이 들어와 알현하고서 계금의(罽錦衣), 계금욕(罽錦褥), 오칠갑(烏漆甲), 금으로 장식한 장도(長刀)와 비수(匕首), 계금안마(罽錦鞍馬), 저포(紵布), 약물(藥物) 등을 조공하고, 또 중포(中布) 2000단(端)을 올렸다. 《상동》 ○ 살펴보건대 《책부원귀》를 보면, 이해에 인삼과 약물을 진공하였다.
○ 요나라 개태(開泰) 8년(1019, 현종10) -기미- 12월 신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들이게 하였다. 《요사》
○ 송나라 천희(天禧) 5년(1021, 현종12) -신유- 에 고려가 고주사(告奏使)로 어사예부 시랑 한조(韓祚) 등 179인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다. 또 거란(契丹)과 수호(修好)하였다고 말하였다. 《송사》
○ 요나라 태평(太平) 원년(1021, 현종12) -신유- 11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 현종21) -경오- 에 고려가 다시 어사민관 시랑 원영(元穎) 등 293인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회하고, 금기(金器), 은계도검(銀罽刀劍), 안륵마(鞍勒馬), 향유(香油), 인삼(人蔘), 세포(細布), 동기(銅器), 유황(硫黃), 청서피(靑鼠皮) 등의 물품을 조공하였다. 다음 해 2월에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사신을 파견하여 등주(登州)까지 호송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은 것이 43년이다. 《송사》
○ 요나라 흥종(興宗) 중희(重煕) 7년(1038, 정종4) -무인- 2월 정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12년(1043, 정종9) -계미- 3월 임진에 존호(尊號)를 더해 올린 일로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3년(1044, 정종10) -갑신- 3월 정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6월 병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12월 기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4년(1045, 정종11) -을유- 4월 신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5년(1046, 정종12) -병술- 3월 정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6년(1047, 문종1) -정해- 12월 임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7년(1048, 문종2) -무자- 4월 병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9년(1050, 문종4) -경인- 4월 갑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6월 갑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서하(西夏)를 정벌하여 이긴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22년(1053, 문종7) -계사- 6월 계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23년(1054, 문종8) -갑오- 4월 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도종(道宗) 청녕(淸寧) 2년(1056, 문종10) -병신- 6월 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057, 문종11) -정유- 11월 경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신종(神宗) 희령(煕寧) 2년(1069, 문종23) -기유- 에 고려국의 예빈성(禮賓省)에서 복건전운사(福建轉運使) 나증(羅拯)에게 공첩(公牒)을 보내어 말하기를, “상인(商人) 황진(黃進)과 홍만(洪萬) 등에게 공장(公狀)을 부치니, 답장을 받아 보고서 즉시 예를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하였다. 나증이 이를 아뢰니, 신종이 허락하고 나증에게 명하여 뜻을 효유하게 하였다. 《송사》
○ 요나라 함옹(咸雍) 7년(1071, 문종25) -신해- 11월 병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8년(1072, 문종26) -임자- 6월 정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희령(煕寧) 5년(1072, 문종26) -임자- 에 고려의 왕휘(王徽)가 민관 시랑 김제(金悌) 등 100인을 파견하여 오니, 조서를 내려 하국(夏國)의 사신을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게 하였다. 《송사》
살펴보건대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문종 26년 -바로 희령 5년이다.- 6월 갑술에 김제(金悌)가 송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송나라 황제가 칙서 5통을 보내왔다. 그 가운데 네 번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국의 사신 김제가 성(省)에 와서 진봉(進奉)한 바를 살펴보았다.
어의(御衣) 2벌과 누런 모직으로 만든 난삼(襴衫) 1벌은 금박을 입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붉은 모직으로 만든 편복(便服) 1벌은 금박을 입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싼 다음, 이들을 모두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검은 칠을 한 상자에 넣어 금은으로 도금한 자물쇠로 채우고, 이들을 다시 한데 싸서 홍매화(紅梅花)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40냥쭝인 금요대(金腰帶) 1개는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고,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한 무게가 80냥쭝인 갑(匣)에 담은 다음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다시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30냥쭝인 금속대(金束帶) 1개는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전대에 넣고,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한 무게가 60냥쭝인 갑에 담은 다음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총 무게 60냥쭝인 금합(金合) 2벌에는 각각 모직으로 만든 늑파(勒帕) 2개와 모직으로 만든 겹대자(裌袋子) 2개씩을 담아서 금박을 입히고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에 싼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총 무게 40냥쭝인 금반잔(金盤盞) 2벌은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 겹보로 싼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65냥쭝인 금주자(金注子) 1벌은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150냥쭝인 금사라(金鐁鑼) 1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싼 다음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붉은 모직으로 만든 안석[倚背] 6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누런 모직으로 만든 안석 4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붉은 모직으로 만든 요[褥] 4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누런 모직으로 만든 요 4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싼 다음 이들을 모두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검은 칠을 한 상자 2개에 담아 은으로 만든 자물쇠로 잠그고서,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세궁(細弓) 4개는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담고, 효자전(哮子箭) 24개, 세족전(細鏃箭) 80개, 금으로 도금하고 은으로 장식한 병장기(兵仗器) 2벌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고, 백은을 입혀 검은 가죽으로 장식한 병장기 1벌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고, 금은으로 도금하고 흰 가죽으로 장식한 병장기 1벌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은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은으로 장식한 장도(長刀) 20자루는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검은 칠을 한 칼집에 넣어 채색 비단으로 묶고, 흰 비단으로 만든 외대(外袋) 10개와 푸른 비단으로 만든 외대 10개에 싼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세마(細馬)는 모두 4필인데, 안장 2벌은 금으로 도금하고 은으로 장식한 안장의 부속품과 모직으로 만든 크고 작은 다래와 언치, 붉은 비단으로 만든 안장 깔개를 전부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고, 안장 2벌은 은으로 조각한 안장의 부속품과 검은 가죽으로 만든 큰 다래와 붉은 비단으로 만든 작은 언치, 붉은 비단으로 만든 안장 깔개 등을 모두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그 이외에도 향유(香油) 20단지, 잣[松子] 2200근, 인삼(人蔘) 1000근, 생중포(生中布) 2000필, 생평포(生平布) 2000필이 들어 있었다.”
○ 요나라 함옹(咸雍) 9년(1073, 문종27) -계축- 12월 임진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10년(1074, 문종28) -갑인- 11월 무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희령(煕寧) 7년(1074, 문종28) -갑인- 에 고려가 신하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왔다. 《송사》
희령 7년 봄에 거란(契丹)이 사신 소희(蕭禧)를 파견하여 오자, 한 위공(韓魏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고려가 거란에 신하로 복종하여 우리 조정에 오랫동안 조공하지 않고 있어서 상선(商船)을 보내어 유시하고 왔습니다. 고려에서 사신이 오고 안 오고는 국가에 본디 아무런 손익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란에서 이 사실을 알 경우에는 우리 조정이 장차 거란을 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이는 거란의 의심을 사는 것입니다.” 하였다. 《문견전록(聞見前錄)》
○ 9년(1076, 문종30) -병진- 에 다시 고려가 최사훈(崔思訓)을 파견하여 왔는데, 황제가 총애하는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관소(館所)를 수리하고 아주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 사신으로 오는 사람의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송사》
○ 원풍(元豐) 2년(1079, 문종33) -기미- 에 고려가 유홍(柳洪)을 사신으로 보내와서 의원(醫員)을 보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080, 문종34) -경신- 봄 3월 기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원풍 연간에 고려에서 정조(正朝)를 하례하면서 바친 예물 가운데 자하배(紫霞杯)가 있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
○ 요나라 태강(太康) 7년(1081, 문종35) -신유- 11월 기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송나라 원풍 8년(1085, 선종2) -을축- 에 고려의 국왕 왕운(王運)이 그의 동생인 승통(僧統)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불법(佛法)을 배우기를 요청하였다.
○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고려가 김상기(金上琦)를 봉위사(奉慰使)로, 임기(林曁)를 치하사(致賀使)로 파견하였으며, 그 뒤로 몇 년 동안 사신이 오지 않았다. 《이상 모두 송사》
○ 요나라 태안(太安) 2년(1086, 선종3) -병인- 11월 무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冊封)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요사》
○ 3년(1087, 선종4) -정묘- 3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4년(1088, 선종5) -무진- 3월 을축에 고려의 세공(歲貢)을 면제하였다. 《상동》
○ 5년(1089, 선종6) -기사- 봄 정월 갑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6년(1090, 선종7) -경오- 11월 임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철종 원우(元祐) 5년(1090, 선종7) -경오- 에 다시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 조공하였다. 《송사》
○ 6년(1091, 선종8) -신미-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7년(1092, 선종9) -임신- 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파견하여 와서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쳤다. 《상동》
○ 요나라 수륭(壽隆) 원년(1095, 헌종1) -을해- 2월 계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2년(1096, 숙종1) -병자- 겨울 10월 경진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원부(元符) 원년(1098, 숙종3) -무인-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휘종(徽宗)이 즉위하니, 고려가 임각(任慤)과 왕하(王嘏)를 파견하여 와서 조문하고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바로 원부 3년(1100, 숙종5)이다.
○ 요나라 수륭(壽隆) 7년(1101, 숙종6) -신사- 12월 정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요사》
○ 송나라 숭녕(崇寧) 연간에 고려의 조공하는 사신이 줄을 이었다. 《송사》
○ 금(金)나라 목종(穆宗) 10년(1103, 숙종8) -계미- 2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한 것을 축하하고, 비로소 통교(通交)하였다. 《금사(金史)》
○ 강종(康宗) 4년(1106, 예종1) -병술- 에 고려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습위(襲位)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요나라 천조제(天祚帝) 건통(乾統) 8년(1108, 예종3) -무자- 12월 기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다. 《요사》
○ 9년(1109, 예종4) -기축- 12월 갑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정화(政和) 2년(1112, 예종7) -임진-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3년(1113, 예종8) -계사- 에 고려가 사신 안직숭(安稷崇)을 파견하여 새 약(藥)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영화기문(寧和記聞)》
○ 요나라 천경(天慶) 3년(1113, 예종8) -계사- 12월 경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치제(致祭)한 데 대해 사은하였다. 계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기복(起復)시켜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요사》
○ 송나라 정화(政和) 5년(1115, 예종10) -을미- 에 고려의 사신 왕자지(王字之)가 환국하자,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하였다. 《영화기문》
○ 금나라 태조(太祖) 수국(收國) 2년(1116, 예종11) -병신-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요나라를 쳐서 이긴 것을 축하하고, 또 보주(保州)를 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또다시 포마(蒲馬)를 파견하여 보주를 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금사(金史)》
○ 송나라 정화 6년(1116, 예종11) -병신-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중화(重和) 원년(1118, 예종13) -무술-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금나라 천보(天輔) 4년(1120, 예종15) -경자-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축하하였으며, 아울러 방물을 조공하였다. 《금사》
○ 송나라 선화(宣和) 6년(1124, 인종2) -갑진-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세남(世南)의 집에 일찍이 고려국의 사신이 보낸 서장(書狀) 몇 폭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바로 선화 6년 9월에 고려의 정사(正使)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 지추밀원사 상주국(檢校司空知樞密院事上柱國) 이자덕(李資德), 부사(副使)인 태중대부(太中大夫) 상서예부시랑 주국 사자금어대(尙書禮部侍郞柱國賜紫金魚袋) 김부철(金富轍)이 송나라에 이르러 사은하면서 진봉(進奉)한 것으로, 각각 중국의 문체인 사륙문(四六文)으로 지었다. 사사로이 바친 예물은 복두사(幞頭紗) 3매(枚), 백성삽화은반(白成鈒花銀盤) 1면(面) -무게는 12냥쭝이다.-, 자대문라(紫大紋羅) 2필, 백축대릉(白蹴大綾) 1필, 생화릉(生花綾) 2필, 백세저포(白細苧布) 3필, 대지(大紙) 80폭(幅), 황모필(黃毛筆) 20자루, 송연묵(松煙墨) 20정(挺), 송선(松扇) 3개, 접첩선(摺疊扇) 2개, 나전연갑(螺鈿硯匣) 1벌, 나전필갑(螺鈿筆匣) 1벌, 극사약대(剋絲藥袋) 1매, 수계요(繡繫腰) 1조(條), 복령(茯苓) 2근, 백출(白朮) 2근, 백동기(白銅器) 5벌이었다. 《유환기문(游宦記聞)》
○ 7년(1125, 인종3) -을사-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 조공하였다. 《송사》
○ 금나라 태종(太宗) 천회(天會) 4년(1126, 인종4) -병오- 6월 병신 초하루에 왕해(王楷)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번방(藩邦)을 칭하였다. 10월 정미 천청절(天淸節)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금사》
○ 5년(1127, 인종5) -정미- 정월 신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신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1128, 인종6) -무신- 정월 병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였다. 10월 병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송나라 고종(高宗) 건염(建炎) 2년(1128, 인종6) -무신- 12월에 왕해가 그의 신하 윤언순(尹彦順)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근(朝覲)하였다. 《상동》
○ 3년(1129, 인종7) -기유- 9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겠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정지하게 하였다. 《속송편년자치통감(續宋編年資治通鑑)》
○ 금나라 천회(天會) 7년(1129, 인종7) -기유-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경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1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금사》
○ 8년(1130, 인종8) -경술- 정월 갑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갑신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9년(1131, 인종9) -신해- 정월 기해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 을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면서 보주(保州)로 도망쳐 들어온 요나라 변방 사람들을 색출하는 것을 면제해 주기를 청하였다. 10월 무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0년(1132, 인종10) -임자- 정월 계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임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송나라 소흥(紹興) 2년(1132, 인종10) -임자- 윤4월에 고려가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최유청(崔惟淸)과 합문 지후(閤門祗候) 심기(沈起)를 파견하여 들어와 금 100냥, 은 1000냥, 능라(綾羅) 100필, 인삼(人蔘) 500근을 조공하였다. 《송사》
○ 금나라 천회 11년(1133, 인종11) -계축- 정월 정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병신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금사》
○ 12년(1134, 인종12) -갑인- 정월 신해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경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3년(1135, 인종13) -을묘- 정월에 태종(太宗)이 붕어(崩御)하고 희종(煕宗)이 즉위하였다. 4월 무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14년(1136, 인종14) -병진- 정월 기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을유 만수절(萬壽節)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5년(1137, 인종15) -정사- 정월 계해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기묘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희종(煕宗) 천권(天眷) 원년(1138, 인종16) -무오- 정월 무자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갑진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2월 무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2년(1139, 인종17) -기미- 정월 임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무술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140, 인종18) -경신- 정월 정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계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황통(皇統) 원년(1141, 인종19) -신유- 정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임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정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1월 기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존호를 받은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2년(1142, 인종20) -임술- 정월 을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신해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2월 기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143, 인종21) -계해- 정월 기축 초하루에 황태자의 상(喪)으로 인해 정전(正殿)에 임어하지 않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황극전(皇極殿)에 나아가 멀리서 축하하였다. 을사 만수절에 정조(正朝)의 의식과 같이 예를 행하였다. 《상동》
○ 4년(1144, 인종22) -갑자- 정월 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기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5년(1145, 인종23) -을축- 정월 정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계해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1146, 인종24) -병인-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정해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7년(1147, 의종1) -정묘- 정월 을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신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3월 임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제(弔祭)하고 기복(起復)시켜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8년(1148, 의종2) -무진-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병자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6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9년(1149, 의종3) -기사- 정월 갑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경자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해릉(海陵) 천덕(天德) 2년(1150, 의종4) -경오- 3월 병술에 고려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문공유(文公裕)와 전중감(殿中監) 박순중(朴純中)을 파견하여 보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금사(金史)》 본기(本紀) 2년 6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표(表)에는 3월 병술에 문공유 등을 파견하여 보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고 되어 있다. 반드시 1년에 두 차례 축하하였을 리는 없는바,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표를 따른다.
○ 3년(1151, 의종5) -신미- 정월 계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무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4년(1152, 의종6) -임신- 정월 정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임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정원(貞元) 원년(1153, 의종7) -계유- 정월 신묘 초하루에 황제가 시조(視朝)하지 않고, 조서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고려의 공헌(貢獻)을 받게 하였다. 병오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금사》 열전(列傳)을 보면, 태종의 아들 연(兗)이 천덕(天德) 4년 12월 그믐날 훙하자, 다음 날인 정원(貞元) 원년 원조(元朝)에 연을 위하여 철조(輟朝)하고, 송(宋), 서하(西夏), 고려(高麗)의 하정조사(賀正朝使)가 올리는 조하(朝賀)를 받지 않았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공헌물을 받게 하였다.
○ 2년(1154, 의종8) -갑술- 정월 갑인 초하루에 상이 편찮아 시조(視朝)하지 않고, 고려의 사신이 묵고 있는 관소에 잔치를 하사하였다. 기사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6월 기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1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내려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정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155, 의종9) -을해- 정월 기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갑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정륭(正隆) 원년(1156, 의종10) -병자-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무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2년(1157, 의종11) -정축- 정월 무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계미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3월 병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받은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158, 의종12) -무인- 정월 임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정축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4년(1159, 의종13) -기묘- 정월 병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신미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5년(1160, 의종14) -경진-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을미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1161, 의종15) -신사- 정월 갑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기축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세종(世宗) 대정(大定) 2년(1162, 의종16) -임오- 12월에 고려가 위위 소경(衛尉少卿) 정응기(丁應起)를 파견하여 정조를 하례하였다. 《상동》
○ 3년(1163, 의종17) -계미- 정월 임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 경인에 고려가 수사공(守司空) 김영윤(金永胤)과 상서예부 시랑(尙書禮部侍郞) 김순부(金淳夫)를 진봉사(進奉使)로 파견하고, 예빈 소경(禮賓少卿) 허세수(許勢修)를 파견하여 보위에 등극한 것을 축하하고, 비서 소감(祕書少監) 김거실(金居實)을 파견하여 선위(宣慰)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3월 임진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衛尉少卿) 이공로(李公老)를 파견하여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였다. 12월 을유에 고려가 전중 소감(殿中少監) 김존부(金存夫)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4년(1164, 의종18) -갑신- 정월 정해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고처약(高處約)을 파견하여 정조(正朝)를 축하하였다. 3월 병술 초하루에 고려가 비서 소감 최효온(崔孝溫)을 진봉사로 파견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 위위 소경(衛尉少卿) 정효칭(鄭孝偁)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예빈 소경 김장(金莊)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165, 의종19) -을유- 정월 신해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 고진진(高珍縉)을 파견하여 정삭(正朔)을 축하하였다. 3월 경술 초하루에 고려가 전중 소감 진역승(陳力升)을 진봉사로 파견하고, 비서 소감 원이충(元頤沖)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에 이부 상서(吏部尙書) 이지심(李知深)과 중서 사인(中書舍人) 윤돈신(尹敦信)을 파견하여 존호를 받은 것을 하례하였으며, 위위 소경 왕보(王輔)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6년(1166, 의종20) -병술- 정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태부 소경(太府少卿) 이세의(李世儀)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갑진 초하루에 고려가 국자사업(國子司業) 조인귀(趙仁貴)를 진봉사로 파견하고, 비서 소감(祕書少監) 이복기(李復基) 등을 파견하여 만수절을 하례하였다. 12월 무술에 고려가 예부 소경 최춘(崔椿)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으며, 위위 소경 김자용(金資用)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7년(1167, 의종21) -정해- 정월 경자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司宰少卿) 반함유(潘咸有)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기해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유덕용(柳德容)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임술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현(崔儇)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8년(1168, 의종22) -무자- 정월 갑자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김기(金起)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계해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김광리(金光利)를 진봉사로 파견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 비서 소감 조식(趙湜)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9년(1169, 의종23) -기축- 정월 무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진현광(陳玄光)과 예빈 소경 서추(徐諏) 등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정사 초하루에 고려가 비서 소감 김이성(金利誠)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고, 조산대부 위위 소경 최서(崔偦)를 진봉사로 파견하였다. 12월 경술에 고려가 태부 소경(太府少卿) 배연(裵衍)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사재 소경 이세미(李世美)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0년(1170, 의종24) -경인- 정월 병자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진승(陳升)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임자에 고려가 위위 소경 최신(崔侁)을 진봉사로 파견하고, 상서예부 시랑 최광섭(崔光涉) 등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11년(1171, 명종1) -신묘- 4월 정묘에 고려의 권군국사(權軍國事) 왕호(王晧)가 표문을 올리면서 아울러 그의 형인 왕현(王晛)의 표문도 함께 올려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2월에 권군국사 왕호가 고주사(告奏使) 상서예부시랑 장익명(張翼明)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12년(1172, 명종2) -임진- 정월 경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3월 기사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김황유(金黃裕) 등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고, 위위 소경 채상정(蔡祥正)을 파견하여 존호를 추가로 더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4월 정묘에 고려가 호부 상서 이저(李著)와 국자 좨주(國子祭酒) 최포(崔誧)를 파견하여 존호를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10월에 고려가 검교태위(檢校太尉) 김우번(金于蕃)과 태부 소경 김선(金瑄)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3년(1173, 명종3) -계사-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사정유(史正儒)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계사 초하루에 고려가 태부 소경 이응구(李應求)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14년(1174, 명종4) -갑오- 정월 기축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최균(崔均) 등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병술에 고려가 상서형부 시랑 차인규(車仁揆)를 진봉사(進奉使)로 파견하였다. 3월 무자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김연광(金鍊光)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15년(1175, 명종5) -을미- 9월 신유에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하고 비서 소감 박소(朴紹)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고주(告奏)하였다. 12월 병오에 조산대부 예빈 소경 조영인(趙永仁)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6년(1176, 명종6) -병신- 정월 무신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이장(李章)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채순희(蔡順禧)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자에 고려가 예부 소경 왕규(王珪)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호부 상서 오광척(吳光陟)과 공부 시랑 윤숭회(尹崇誨) 등을 파견하여 조위총의 내부(內附)를 허락하지 않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7년(1177, 명종7) -정유- 정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오숙부(吳淑夫)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기해에 고려가 조산대부 호부 시랑 정수필(丁守弼)을 파견하여 진봉(進奉)하였다. 3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공부 시랑 최광원(崔光遠)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미(崔美)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8년(1178, 명종8) -무술- 정월 병신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손응시(孫應時)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계사에 고려가 이부 시랑 최효구(崔孝求)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을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형부 시랑 이인성(李仁成) 등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무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기세(奇世)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9년(1179, 명종9) -기해- 정월 경신 초하루에 고려가 형부 시랑 김절(金節)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정사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유득인(柳得仁)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기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노탁유(盧卓儒)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임자에 고려가 조산대부 예빈 소경 유득의(柳得義)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0년(1180, 명종10) -경자- 정월 갑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윤동보(尹東輔)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신해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김현공(金鉉公)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계축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손석(孫碩)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병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심진승(沈晉升)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왕탁(王度)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1년(1181, 명종11) -신축- 정월 무진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예부 시랑 -살펴보건대 이름은 잃어버렸다.- 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갑진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이덕기(李德基)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정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신보지(申寶至)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22년(1182, 명종12) -임인- 3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23년(1183, 명종13) -계묘- 정월 정묘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예부 시랑 최영유(崔永濡)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갑자에 고려가 호부 시랑 문장위(文章煒)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병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노효돈(盧孝敦)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24년(1184, 명종14) -갑진- 정월 신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 갑술에 고려의 왕이 모상(母喪)의 졸곡(卒哭)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년의 만춘절 및 진공사를 파견하는 것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자, 조서를 내려 방물진공사(方物進貢使)는 내년의 하정조사(賀正朝使)와 함께 오라고 하였다.
12월 정해에 고려의 최효저(崔孝著)가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자, 조서를 내려 왕호(王晧)에게 답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5년(1185, 명종15) -을사- 12월 무인에 고려가 호부 상서 양기(梁冀)와 경부소감경(京府少監卿) 최소(崔素)를 파견하여 칙서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준 데 대해 사은하고, 사재 소경 강용유(康勇儒)를 파견하여 위문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계인(桂仁)을 파견하여 기복(起復)시켜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6년(1186, 명종16) -병오-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공부 시랑 최인청(崔仁請)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정축에 고려가 호부 시랑 문의혁(門義赫)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기묘 초하루에 고려가 예부 시랑 유공권(柳公權)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자에 고려가 예부 시랑 임유(任濡)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노원(盧元)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7년(1187, 명종17) -정미- 정월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최광보(崔匡輔)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신축에 고려가 예빈 소경 차약송(車若松)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이공균(李公鈞)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존(崔存)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8년(1188, 명종18) -무신- 정월 정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최적원(崔迪元)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을미에 고려가 예빈 소경 길인(吉仁)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정유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이희(李禧)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인에 고려가 호부 시랑 주광미(周匡美)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9년(1189, 명종19) -기유- 정월 임진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이상유(李尙儒)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러 왔다가 세종(世宗)의 병이 위독해 고려의 사신이 되돌아갔다. 계사에 세종이 붕어하자 6월에 칙서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고려에 이보(移報)하여 천수절(天壽節)을 9월 1일에 와서 축하하게 하였다. 7월 신미에 고려가 검교태위(檢校太尉) 정존실(鄭存實)과 전중감(殿中監) 임충(任沖)을 파견하여 와서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8월에 고려가 호부 상서 최응용(崔膺庸)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예부시랑 민시(閔是)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호부 시랑 손연(孫衍)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갑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정조를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이는 다음 해의 정조사(正朝使)인데, 본기(本紀)에는 이달에 실려 있다.
○ 장종(章宗) 명창(明昌) 원년(1190, 명종20) -경술- 8월 기유에 고려가 호부 시랑 진극수(陳克修) 및 진봉사(進奉使) 호부 시랑 정세권(鄭世鬈)을 파견하여 와서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정미에 고려가 호부 시랑 노식(盧湜)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년(1191, 명종21) -신해- 정월 경술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정극온(鄭克溫)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을사에 고려가 호부 시랑 유광수(柳光壽)를 파견하여 와서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송홍적(宋弘迪)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계묘에 고려가 호부 시랑 이지순(李至純)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192, 명종22) -임자- 정월 을사 초하루에 고려가 예부 소경 홍효충(洪孝忠)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 박초(朴初)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비서 소감 사위(師威)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석성계(石成桂)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정묘에 고려가 호부 시랑 정광서(丁光敍)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4년(1193, 명종23) -계축- 정월 기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양서절(楊漵節)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신유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소양미(蘇良美)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이부 시랑 문후식(門侯軾)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9월 갑자 초하루 천수절에 황제가 대안전(大安殿)에 임어하여 고려 사신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12월 경신에 고려가 호부 시랑 진광경(陳光卿) 등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194, 명종24) -갑인- 정월 계해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 이거정(李居正)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기축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권신(權信)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태부 소감 유택(柳澤)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살펴보건대 《금사》의 본기(本紀)에서 9월 무오 초하루에 와서 축하하였다고 한 것은 축하한 날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표(表)에서 8월 기축 초하루라고 한 것은 도착한 날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12월 정사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유방저(劉邦氐)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6년(1195, 명종25) -을묘- 정월 정해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백존유(白存儒)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기묘에 고려가 위위 소경 주원적(周元迪)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9월 임오 초하루에 고려가 예부 시랑 서해(徐諧)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정축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손홍(孫弘)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승안(承安) 원년(1196, 명종26) -병진- 정월 신사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송위(宋韙)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갑술에 고려가 상서예부 시랑 조충(趙沖)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태부감 경(太府監卿) 유응거(劉應擧)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김광당(金光當)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년(1197, 명종27) -정사- 정월 을해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아응경(牙應卿)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무술에 고려가 예부 시랑 조겸(趙謙)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양원(梁元)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3년(1198, 신종1) -무오- 3월 병인에 왕호(王晧)가 나라를 그의 동생 왕탁(王晫)에게 양위하였다는 내용으로 예빈 소경 조통(趙通)을 파견하여 와서 아뢰고,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해에 왕호가 훙하고 왕탁이 뒤를 이어 즉위하고는 예빈 소경 백여주(白汝舟)를 파견하여 와서 고하였다. 《상동》
○ 4년(1199, 신종2) -기미- 8월 기유에 고려가 호부 시랑 유원순(劉元順)을 파견하여 와서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정방보(鄭邦輔)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을유에 고려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척후(金陟候)와 태부 경(太府卿) 왕의(王儀)를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200, 신종3) -경신- 정월 무자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백원식(白元軾)을 파견하여 와서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임자에 고려가 호부 시랑 지자심(池資深)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신주석(申周錫)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태화(泰和) 원년(1201, 신종4) -신유- 정월 임자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이유경(李惟卿)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에 고려가 호부 시랑 정공순(鄭公順)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예빈 소경 조숙(趙淑)을 파견하여 진봉하였으며, 위위 경(衛尉卿) 진언광(秦彦匡)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을사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남부(崔南敷)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2년(1202, 신종5) -임술- 정월 정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문효식(門孝軾)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경자에 고려가 호부 시랑 사홍우(史洪祐)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예빈 소경 한저(韓氐)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윤12월 기사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송홍렬(宋弘烈)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3년(1203, 신종6) -계해-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곽공의(郭公儀)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에 고려가 예빈 소경 사공직(師公直)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9월 병인 초하루 천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2월 계해에 고려가 예빈 소경 임덕원(林德元)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4년(1204, 신종7) -갑자-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이연수(李延壽)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을축에 고려가 호부 시랑 조광수(曺光壽)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이경(李儆)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정사에 고려가 예빈 소경 강식재(姜植材)를 파견하여 진봉하고, 사재 소경 차부민(車富民)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호부 상서 김경부(金慶夫)와 예부 시랑 최극우(崔克遇)를 파견하여 칙서를 내려 제사를 지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위위 소경 문존(門存)을 파견하여 위문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황효경(黃孝卿)을 파견하여 기복(起復)시켜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205, 희종1) -을축- 정월 기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임인석(林仁碩)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윤8월 신사에 고려가 사재 소경 최의(崔義)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1월 신사에 고려가 위위 경 오응천(吳應天)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6년(1206, 희종2) -병인- 정월 계미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보순(崔甫淳)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병자에 고려가 위위 소경 이통유(李通儒)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위위 경 김승(金升)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경 이일(李佾)을 파견하여 기복시켜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지추밀원사 한기(韓奇), 태부 경 이승백(李承白) 등을 파견하여 와서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을해에 고려가 위위 소경 경유승(慶裕升)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7년(1207, 희종3) -정묘- 정월 정축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사응첨(師應瞻)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임신에 고려가 위위 소경 서광(徐光)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위위 소경 김의원(金義元)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정광습(鄭光習)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8년(1208, 희종4) -무진-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임주재(林柱材)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을유에 고려가 예부 시랑 임영조(林永祖)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예빈 경 지이중(池利中)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겨울 10월 신사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위소왕(衛紹王) 대안(大安) 원년(1209, 희종5) -기사-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211, 희종7) -신미- 정월 을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선종(宣宗) 흥정(興定) 3년(1219, 고종6) -기묘-요동행성(遼東行省)에서 고려가 다시 표문을 받들고 조공하려는 뜻이 있다고 하자, 고려의 표장(表章)은 행성에서 받도록 하고, 조공하는 예는 뒷날에 서서히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 뒤로는 다시 통문(通問)하지 않았다. 《상동》
○ 원(元)나라 태조(太祖) 14년(1219, 고종6) -기묘- 정월에 고려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윤공취(尹公就)와 중서주서(中書注書) 최일(崔逸)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 첩문(牒文)을 보내왔다. 9월에 고려가 방물을 올렸다. 《원사(元史)》
○ 15년(1220, 고종7) -경진- 9월에 고려가 방물을 올렸다. 《상동》
○ 16년(1221, 고종8) -신사- 7월에 고려가 비로소 표문을 받들고 진하(陳賀)하였다. 《상동》
○ 태종(太宗) 4년(1232, 고종19) -임진- 3월에 고려국의 왕 왕철(王㬚)이 중랑장(中郞將) 지의원(池義源), 녹사(錄事) 홍거원(洪巨源), 김겸(金謙) 등을 파견하여 국신(國贐)과 첩문(牒文)을 싸 가지고 살례탑(撒禮搭)의 둔소(屯所)에 보냈다. 4월에 고려가 장군(將軍) 조숙장(趙叔章)과 어사(御史) 설신(薛愼)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10월에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낭중(郞中) 조서장(趙瑞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실정을 진달하였다. 《상동》
○ 10년(1238, 고종25) -무술- 12월에 고려가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宋彦琦)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11년(1239, 고종26) -기해- 6월에 고려가 예빈 경 노연(盧演)과 예빈 소경 김겸(金謙)을 진봉사(進奉使)의 정사와 부사에 충원해서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회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김보정, 송언기 등 148인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공하였다. 《상동》
○ 12년(1240, 고종27) -경자- 3월에 고려가 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조수(趙修)와 합문 지후(閤門祗候) 김성보(金成寶)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공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송언기와 시어사(侍御史) 권위(權韙)를 행리사(行李使)에 충원해서 들어와 조공하였다. 《상동》
○ 13년(1241, 고종28) -신축- 가을에 고려의 왕이 조카인 왕준(王綧)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볼모로 들여보냈다. 정종(定宗)과 헌종(憲宗) 때를 당하여 세공(歲貢)이 들어오지 않다가 헌종 말엽에 세자 왕전(王倎)을 파견하여 들어와 조회하였다. 《상동》
○ 헌종(憲宗) 6년(1256, 고종43) -병진- 에 고려국의 왕이 와서 조근(朝覲)하였다. 《상동》
세조(世祖) 중통(中統) 원년(1260, 원종1) -경신- 6월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倎)이 그의 아들 영안공(永安公) 왕희(王僖)와 판사재사(判司宰事) 한즉(韓卽)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2년(1261, 원종2) -신유- 3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4월에 고려의 왕이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6월에 고려가 세자 왕심(王愖)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9월에 고려가 시어사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262, 원종3) -임술- 봄 정월 병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사은하니, 은혜가 두터운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4월에 고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박륜(朴倫)과 낭장 신홍성(辛洪成)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6월 병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8월에 박륜 등이 돌아갔다. 10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4년(1263, 원종4) -계해- 3월 기유에 고려가 신하 주영량(朱英亮)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면서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11월에 역(驛)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면제해 준 데 대해 고려가 한림학사(翰林學士) 한취(韓就)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사은하였다. 《상동》
○ 지원(至元) 원년(1264, 원종5) -갑자-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축하하였다. 돌아가는 고려의 사신에게 하유하여 왕으로 하여금 친히 경사(京師)에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여름 4월 기묘에 고려가 신하 김녹(金祿)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5월에 고려가 차국자 좨주(借國子祭酒)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고을독(古乙獨) -살펴보건대 4월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자이다.- 을 따라 들어와 조현(朝見)하였다. 6월 무신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겨울 10월 임인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12월에 고려의 왕을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2년(1265, 원종6) -을축- 정월에 고려가 왕의 동생인 공(公) 왕순(王珣)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조공하였다. 6월에 고려가 신하 영윤숙(榮胤宿)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성탄절(聖誕節)을 축하하였다. 8월 무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266, 원종7) -병인- 정월 을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8월 무자에 고려가 대장군 박기(朴琪)를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4년(1267, 원종8) -정묘- 정월에 고려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와 차 예부 시랑(借禮部侍郞) 김찬(金贊)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흑적(黑的) 등을 따라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 살펴보건대 송군비 등은 3년 12월에 조사(詔使) 흑적 등을 인도하여 일본(日本)에 갔다가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8월에 고려가 비서 소감(祕書少監) 곽내필(郭來弼)을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원사(元史)》에 또 이르기를, “정월 을사에 백제(百濟)가 신하 양호(梁浩)를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니, 금수(錦繡)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에는 백제라고 칭하는 나라가 없었으니, 여기에서 와서 조공하였다고 한 것은 상고할 수가 없다.
○ 5년(1268, 원종9) -무진- 정월에 고려의 왕이 그의 동생 왕창(王淐)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 4월에 고려가 문하시랑 이장용(李藏用)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우야손탈(于也孫脫) 등을 따라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가을 7월에 고려의 왕이 신하 최동수(崔東秀)를 파견하여 와서 군사를 갖추고 병선을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차 예부 시랑(借禮部侍郞)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탈타아(脫朶兒)를 따라 들어와 조회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탈타아는 같은 해 7월에 군대와 병선을 점검하는 일로 사신으로 나왔다.
○ 6년(1269, 원종10) -기사- 정월에 고려가 대장군 강윤소(康允紹)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권신(權臣) 김준(金俊) 등을 목 베었다고 아뢰었다. 3월에 고려가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흑적(黑的)을 따라 들어와 조회하였다. -살펴보건대 신사전은 5년 12월에 흑적과 함께 일본에 갔었다.- 6월 병신에 고려가 세자 왕심(王愖)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회하니, 왕에게는 옥대(玉帶) 1개를, 왕심에게는 금 50냥을, 따라온 관원들에게는 은폐(銀幣)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9월에 고려가 형부 상서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권국왕(權國王) 왕창(王淐)의 표문을 받들고 와서 국왕이 병에 걸려 동생인 왕창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하였다고 호소하였다. 10월에 고려의 왕이 조서를 받고 복위(復位)한 다음 차 예부 시랑 박걸(朴杰)을 파견하여 흑적을 따라 들어와 조회하였다. 12월에 고려의 왕이 친히 경사(京師)에 조회하였다. 《상동》
○ 7년(1270, 원종11) -경오- 정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8월 경진에 고려의 세자 왕심(王愖)이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8년(1271, 원종12) -신미-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비서감 박항(朴恒)과 낭장 최유엄(崔有渰)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공(歲貢)을 바쳤다. 또 추밀사(樞密使) 김련(金鍊)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현(朝見)하면서 결혼(結婚)하기를 요청하였다.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7월에 고려가 상장군(上將軍) 정자여(鄭子璵)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진도(珍島)를 평정한 것을 사은하였다. 고려의 세자 왕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 송분(宋玢), 군기감(軍器監) 설공검(薛公儉) 등 벼슬아치들의 맏아들 28인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입시하였다. 11월에 고려가 동지추밀원사 이창경(李昌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결혼을 허락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9년(1272, 원종13) -임신-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경 선문열(宣文烈)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공(歲貢)을 바쳤다. 또 별장(別將) 백거(白琚)를 파견하여 장탁(張鐸) 등 12인과 더불어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현하였다. 2월 임진에 고려가 제안후(齊安侯) 왕숙(王淑)을 파견하여 와서 국호(國號)를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10년(1273, 원종14) -계유- 봄 정월 을묘 초하루에 고려가 세자 왕심을 파견하여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6월에 고려가 대장군 김흔(金忻)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제주(濟州)를 공격해 격파하였다고 아뢰었다. 가을 7월 무신에 고려가 안순공(安順公) 왕종(王悰)과 동지추밀원사 송종례(宋宗禮)를 파견하여 황후(皇后)와 황태자의 책봉례가 이루어진 것을 축하하였다. 8월 정축 성탄절에 고려가 상장군 김선(金詵)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1년(1274, 원종15) -갑술- 봄 정월 기묘 초하루에 고려가 소경(少卿) 이의손(李義孫) 등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공(歲貢)을 바쳤다. 8월에 고려국의 왕 왕심(王愖)이 추밀사(樞密使) 박구(朴璆)를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9월에 고려가 제안후 왕숙(王淑)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11월에 황녀(皇女)가 고려의 서울에 들어가자 고려가 다시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사은하였다. 《상동》
○ 12년(1275, 충렬왕1) -을해- 봄 정월 계유 초하루에 고려가 판합문사 이신손(李信孫)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세폐(歲幣)를 바쳤다. 8월 병인에 고려가 추밀 부사(樞密副使) 허공(許㤨), 장군 조규(趙珪)를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11월에 고려가 대방후(帶方侯) 왕징(王澂)을 파견하여 벼슬아치들의 자제 20인을 거느리고 들어와 입시하였다. 《상동》
○ 13년(1276, 충렬왕2) -병자- 7월에 고려가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서 송(宋)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11월에 고려가 판비서시(判祕書寺) 주열(朱悅)을 파견하여 와서 왕의 이름을 왕춘(王暙)으로 고쳤다고 고하였다. 《상동》
○ 16년(1279, 충렬왕5) -기묘- 정월 기유 초하루에 고려가 첨의중찬 김방경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폐를 바쳤다. 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상동》
○ 17년(1280, 충렬왕6) -경진- 정월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첨의중찬 김방경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폐를 바쳤다. 6월 무술에 고려가 장군 박의(朴義)를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8월 무술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18년(1281, 충렬왕7) -신사- 정월 무술 초하루에 고려가 첨의중찬 김방경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폐를 바쳤다. 임자에 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이 고려의 변경을 침범하였기에 천병(天兵)이 추격하였다고 말하였다. 8월에 고려가 밀직사사(密直司使) 한강(韓康)을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5월 임자에 탐라국(耽羅國)이 금년에 조공으로 바쳐야 할 백저(白紵)를 면제해 주었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탐라가 이미 고려의 군현(郡縣)이 되었으니, 이는 특별히 옛 호칭을 인해서 기록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 19년(1282, 충렬왕8) -임오- 정월 임술 초하루에 고려가 대장군 김자정(金子廷)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세포(細布) 400필을 조공하였다. 《상동》
○ 20년(1283, 충렬왕9) -계미- 정월 병진 초하루에 고려가 대장군 유홍신(兪洪愼)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을축에 고려가 또 올랄대(兀剌帶)를 파견하여 들어와 조공하면서 첩포(氎布)와 면주(綿紬) 400단(段)을 진공(進貢)하였다. 《상동》
○ 21년(1284, 충렬왕10) -갑신- 3월에 황제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예가 이루어진 데 대해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였다. 4월 무신에 고려의 왕과 공주(公主)가 세자 왕원(王謜)을 보내어 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22년(1285, 충렬왕11) -을유- 6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3년(1286, 충렬왕12) -병술- 6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9월 임진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인 포로를 바쳤다. 《상동》
○ 25년(1288, 충렬왕14) -무자- 정월 임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10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6년(1289, 충렬왕15) -기축- 정월 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7년(1290, 충렬왕16) -경인- 정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8년(1291, 충렬왕17) -신묘- 정월 계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11월에 탐라국(耽羅國)이 사신을 파견하여 동저(東紵) 100필을 조공하였다. 《상동》
○ 30년(1293, 충렬왕19) -계사- 2월에 고려의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다시 이름을 왕거(王昛)로 바꾸었다고 아뢰고, 공신(功臣)의 호를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11월에 고려의 왕이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성종(成宗) 대덕(大德) 2년(1298, 충렬왕24) -무술- 5월에 탐라가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299, 충렬왕25) -기해-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9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늘려 둔 것에 대해 표문을 올려 진정(陳情)하였다. 《상동》
○ 10년(1306, 충렬왕32) -병오- 정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상동》
○ 태정제(泰定帝) 3년(1326, 충숙왕13) -병인- 정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정조를 축하하였다. 《상동》
○ 치화(致和) 원년(1328, 충숙왕15) -무진-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상동》
○ 문종(文宗) 천력(天曆) 2년(1329, 충숙왕16) -기사-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상동》
○ 지순(至順) 3년(1332, 충혜왕2) -임신-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국의 왕 왕정(王禎)이 그의 신하 원충(元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 축하하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순제(順帝) 지원(至元) 3년(1337, 충숙왕 복위 6) -정축- 4월 임오에 고려의 왕이 들어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상동》
○ 명(明)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2년(1369, 공민왕18) -기유- 에 고려국의 왕이 표문을 받들어 축하하고 방물을 조공하였으며, 또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가을에 고려가 총부 상서(摠部尙書) 성유득(成惟得),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 김갑량(金甲兩)을 파견하여 감사해하는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였다. 이로부터 공물을 바치는 사신이 자주 와서 원조(元朝) 및 성절(聖節)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회하고 축하하는 것이 해마다의 관례로 되었다. 《명사(明史)》
○ 3년(1370, 공민왕19) -경술-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감사해하는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4년(1371, 공민왕20) -신해-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5년(1372, 공민왕21) -임자- 에 고려의 공사(貢使) 홍사범(洪師範), 정몽주(鄭夢周) 등 150여 인이 경사(京師)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39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 홍사범도 끼어 있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자주 들어와서 조공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그런데 고려가 다시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강인유(姜仁裕)를 파견하여 말을 조공하였으며, 하정조사(賀正朝使) 김서(金湑) 등은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에 황제가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고는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하라고 유시하였다. 《상동》
○ 이해에 고려가 예부 상서 오계남(吳季南)과 민부 상서(民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오학편(吾學編)》
○ 9월 성탄절에 고려가 배신(陪臣)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축하하고, 아울러 황태자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니, 황제가 중서성(中書省)에 조서를 내려서 모두 면제하라고 유시하였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 6년(1373, 공민왕22) -계축- 에 갑량(甲兩) -살펴보건대 바로 김갑량(金甲兩)으로, 《명사》에서 성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등이 들어와서 조공하고 말 5000필을 바쳤다. 《명사》
○ 7년(1374, 공민왕23) -갑인- 에 고려가 감문호군(監門護軍) 주의(周誼)와 정비(鄭庇)를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9년(1376, 우왕2) -병진-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0년(1377, 우왕3) -정사- 여름에 고려가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말과 방물을 조공하니,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겨울에 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다음 해의 정조(正朝)를 축하하였다. 이해에 사신이 다섯 차례 나왔는데, 사왕(嗣王)이 즉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쳤다. 《상동》
○ 11년(1378, 우왕4) -무오- 4월에 고려가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2년(1379, 우왕5) -기미- 겨울에 고려가 이무방(李茂芳) 등을 파견하여 와서 황금 100근, 백금 1만 냥을 조공하니, 전에 약속한 것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상동》
○ 13년(1380, 우왕6) -경신- 에 고려가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자, 붙잡아 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상동》
○ 16년(1383, 우왕9) -계해- 에 고려가 장백(張伯)과 최계(崔洎)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자, 기일에 늦게 왔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쳤다. 《오학편(吾學編)》
○ 이해에 고려가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여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줄 것과 승습(承襲)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17년(1384, 우왕10) -갑자- 6월에 고려가 사복 정(司僕正) 최연(崔涓)과 예의 판서(禮儀判書) 김진의(金進宜)를 파견하여 말 3000필을 조공하였다. 《명사》
○ 18년(1385, 우왕11) -을축-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니, 3년에 한 차례씩 조회하게 하였다. 《상동》
○ 이해에 말 5000필, 금 500근, 은 5만 냥, 포 5만 필을 조공하니, 21년(1388)의 정조(正朝) 때에 와서 조공하게 하였다. 《엄주별집(弇州別集)》
○ 19년(1386, 우왕12) -병인- 9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명사》
○ 이해에 흑포(黑布)와 백포(白布) 1만 필, 말 1000필을 조공하였다. 《엄주별집》
○ 20년(1387, 우왕13) -정묘-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명사》
○ 이해에 말 3040필을 진공하였다.
○ 탐라(耽羅)가 말을 진공하니, 값을 치러 주게 하였다. 《엄주별집》
○ 21년(1388, 우왕14) -무진- 에 고려가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이숭인(李崇仁)을 파견하여 경사(京師)에 와서 정조를 축하하고, 중국 관원이 감국(監國)하기를 요청하였다. 《열조시집》
○ 22년(1389, 창왕1) -기사- 에 상이 봉천전(奉天殿)에 임어하여 조하(朝賀)를 받았으며, 문화전(文華殿)에서 군신들에게 크게 잔치하고, 황태자가 동궁(東宮)의 관속들에게 문화전에서 잔치하였는데,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고 진하(進賀)하였다. 《속문헌통고》
○ 23년(1390, 공양왕2) -경오-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명사》
○ 24년(1391, 공양왕3) -신미- 에 고려국의 왕 왕요(王瑤)가 그의 아들 왕석(王奭)을 파견하여 조하(朝賀)하였다. 《상동》
○ 8월에 고려가 판선공시(判繕工寺) 양천식(楊天植) 등을 파견하여 시장에서 산 말 1500필을 진공하고자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11월에 김지탁(金之鐸) 등을 파견하여 호시(互市)의 말 2500필을 보내고자 요동에 이르렀다. 《엄주별집》


 

[주D-001]원욱(元郁) : 원문에는 ‘元都’로 되어 있는데,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신교본(新校本) 《송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왕송(王誦) : 고려 제7대 왕인 목종(穆宗)의 휘(諱)이다.
[주D-003]왕순(王詢) : 고려 제8대 왕인 현종(顯宗)의 휘이다.
[주D-004]어사(御事) : 원문에는 ‘御史’로 되어 있는데, 중화서국(中華書局) 신교본(新校本) 《송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세마(細馬) : 길들인 말을 이른다.
[주D-006]산마(散馬) : 길들이지 않은 말을 이른다.
[주D-007]서하(西夏) : 원문에는 ‘四夏’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주련(注輦) : 인도의 코로만델해안에 있던 옛 나라인데, 주련은 Coromandel의 음역이다.
[주D-009]점성(占城) : 원문에는 ‘古城’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점성은 안남(安南)의 남쪽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인 참파(Champa)를 말한다. 2세기 말엽에 건국하여 17세기 중엽에 멸망하여 청나라에 예속되었다.
[주D-010]삼불제(三佛齊) : 자바(Java)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남조 때에는 간타리(干陀利)라 칭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라 칭하였고, 송나라 때에 비로소 삼불제라 칭하였다.
[주D-011]외대(外袋) : 원문에는 ‘外裝’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권9 세가(世家) 문종(文宗) 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다래와 언치 : 다래는 안장의 좌우에 드리우는 안장의 진흙받이를 말하고, 언치는 안장을 지울 때 말 등에 덮는 천을 말한다.
[주D-013]한 위공(韓魏公) :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송나라의 명신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주D-014]의원(醫員)을 …… 사은하였다 : 이때 문종이 병이 들어서 중국에 의원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자, 중국에서 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 의원을 데리고 가서 치료하게 한 데 대해 사은한 것이다.
[주D-015]을축 : 원문에는 ‘己丑’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왕운(王運) : 고려 제13대 왕인 선종(宣宗)의 휘이다.
[주D-017]승통(僧統) :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가리킨다. 의천은 선종의 동생이 아니라 선종의 넷째 아들이다.
[주D-018]수륭(壽隆) : 요나라 도종(道宗)의 연호는 수창(壽昌)인데, 《요사》에는 수륭(壽隆)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주D-019]사신을 …… 사례하였다 : 이때 예종(睿宗)의 어머니인 명의태후(明懿太后)가 훙(薨)하자, 요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예종을 기복시켜 주었다.
[주D-020]대성아악(大晟雅樂) : 송나라의 대성부(大晟府)에서 만든 아악(雅樂)으로, 궁중의 제례의식(祭禮儀式) 때 연주하는 아악을 말한다. 등가악기(登歌樂器) 17종, 헌가악기(軒架樂器) 20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식의 종류에 따라서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악기를 배치하는 악현(樂懸)은 국왕이 참석하는 경우와 국왕을 대신해 대신이 참여하는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9~602쪽》
[주D-021]보주(保州) : 요나라에서 설치한 주로, 치소(治所)가 평양(平壤)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D-022]고려가 …… 축하하였으며 : 이때 금나라가 요나라의 주군(州郡)을 손에 넣은 것을 축하한 것이다.
[주D-023]세남(世南) : 송(宋)나라 때의 장세남(張世南)으로, 바로 《유환기문(遊宦記聞)》을 편찬한 사람이다.
[주D-024]을사 : 원문에는 ‘己巳’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5]왕해(王楷) : 고려 제17대 왕인 인종(仁宗)의 휘이다.
[주D-026]만수절(萬壽節) : 금(金)나라 황제의 생일이다.
[주D-027]6월 : 원문에는 ‘六年’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적고내(迪古乃)이다.
[주D-029]만춘절(萬春節) : 금나라 황제의 생일이다.
[주D-030]왕호(王晧) : 원문에는 ‘王皓’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왕호는 고려 제19대 왕인 명종(明宗)의 휘로, 정중부(鄭仲夫)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다.
[주D-031]왕현(王晛) : 고려 제18대 왕인 의종(毅宗)의 휘이다. 이때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난(武臣亂)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주D-032]조위총(趙位寵)의 난(亂) : 고려 명종 4년(1174)에 조위총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으로, 처음에는 여러 차례 관군(官軍)을 격퇴시켰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성(城)을 들어 내부(來附)하는 조건으로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명종 6년에 서경이 함락되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
[주D-033]사은하였다 : 원문에 ‘諫謝’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陳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4]12월 …… 답하였다 : 《금사》 권61 교빙표 중(交聘表中)에는 이 기사가 23년의 기사에 실려 있다.
[주D-035]계인(桂仁) : 《금사》 권61 교빙표(交聘表)에는 최인(崔仁)으로 되어 있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과 《고려사》에도 최인으로 되어 있다.
[주D-036]왕탁(王晫) : 고려 제20대 왕인 신종(神宗)의 휘로,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옹립되었다.
[주D-037]양위하였다 : 원문에는 ‘謙’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8]요동행성(遼東行省) : 금나라 때 요동 지역의 행정(行政), 군사(軍事), 일반 사무를 담당하던 특별행정군사기구이다.
[주D-039]중서주서(中書注書) : 원문에는 ‘中書住書’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0]왕철(王㬚) :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高宗)의 휘이다.
[주D-041]표문을 받들고 : 원문에는 ‘奉使’로 되어 있는데, 《원사(元史)》 권208 외이열전(外夷列傳)에 의거하여 ‘奉表’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2]합문 지후(閤門祗候) : 원문에는 ‘閤門祗修’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208 외이열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3]왕전(王倎) : 고려 제24대 왕인 원종(元宗)의 휘이다.
[주D-044]세조(世祖) : 원문에는 ‘世宗’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5]왕심(王愖) : 왕심(王諶)의 잘못된 표기이다. 왕심은 충렬왕(忠烈王)의 본래 이름으로, 그 뒤에 왕춘(王暙)으로 바꾸었다가 충렬왕 19년(1293)에 다시 왕거(王昛)로 바꾸었다.
[주D-046]우야손탈(于也孫脫) : 원문에는 ‘子也孫脫’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7]강윤소(康允紹) : 원문에는 ‘康胤玿’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208 외이열전(外夷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8]신사전(申思佺) : 원문에는 ‘申思全’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208 외이열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경오 : 원문에는 ‘庚子’로 되어 있는데, ‘庚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 계사년까지 원문에 신미(辛未)가 신유(辛酉)로, 임신(壬申)이 임술(壬戌)로, 계유(癸酉)가 계해(癸亥)로, 갑술(甲戌)이 갑자(甲子)로, 을해(乙亥)가 을축(乙丑)으로, 병자(丙子)가 병인(丙寅)으로, 기묘(己卯)가 기사(己巳)로, 경진(庚辰)이 경오(庚午)로, 신사(辛巳)가 신미(辛未)로, 임오(壬午)가 임신(壬申)으로, 계미(癸未)가 계유(癸酉)로, 갑신(甲申)이 갑술(甲戌)로, 을유(乙酉)가 을해(乙亥)로, 병술(丙戌)이 병자(丙子)로, 무자(戊子)가 무인(戊寅)으로, 기축(己丑)이 기묘(己卯)로, 경인(庚寅)이 경진(庚辰)으로, 신묘(辛卯)가 신사(辛巳)로, 계사(癸巳)가 계미(癸未)로 각각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으며, 주석은 달지 않았다.
[주D-050]진도(珍島)를 평정한 것 : 원나라의 간섭에 항거하여 삼별초(三別抄)가 진도로 들어가 대항하자, 원나라에서 흔도(忻都), 사추(史樞), 홍다구(洪茶邱)를 파견하여 대패시키고 삼별초군이 왕으로 추대하였던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목 베었다.《元史 卷208 外夷列傳》
[주D-051]허공(許㤨) : 허공(許珙)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주D-052]공주(公主) : 원나라의 공주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말한다. 제국대장공주의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米失)이며, 충렬왕(忠烈王)과 혼인하였다.
[주D-053]왕원(王謜) : 원문에는 ‘王’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4]성유득(成惟得) : 《고려사》에는 성준득(成准得)으로 되어 있다.
[주D-055]김갑량(金甲兩) : 《동사강목》과 《명실록(明實錄)》에는 김갑우(金甲雨)로 되어 있다.
[주D-056]전에 …… 않았다 : 홍무(洪武) 10년에 금 100근, 은 1만 냥, 말 100필, 세포(細布) 1만필을 조공하기로 약속한 것을 말한다.
[주D-057]시호(諡號)를 …… 요청하였다 : 공민왕(恭愍王)의 시호를 요청하고 우왕(禑王)의 승습을 허락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松沙先生文集卷之十三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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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城世稿序 a_345_30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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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吾耳目之所及。所謂文行古家者。可數而槩乎。父而傳子。祖而傳孫。不二三世而替者。蓋絶無而僅有。若和順崔氏。帶方一家。自竹谷公南來。至今八世有餘。而皆孝友爲世風。文學爲家計。退可以模範鄕邦。進可以黼黻王庭。而躬行獨善。澹泊世好。仁義爲茶飮。文章代珪組。一世而二世。傳至四五七八。祖德不衰。孫謨益彰。古人云百世一賢。如接踵而至。千里一士。猶比肩而立。其云一賢一士。非一姓一門而猶爾。而崔氏之賢與士。父子祖孫。接踵比肩於一家者。求之古與今。實罕其倫。吁盛矣。竹谷公以前。家近京輦。名揚朝著。事業斑斑可述。而家世遺安。實自肥遯。二世而梅軒,睡菴,竹西公。三世而養默公。四世而孝子345_308b公。五世而雲齋公。或栖遁雲林。菀爲隱德。或養兼志軆。表宅樹風。或儒行師表。士林俎豆。蓋皆孝爲基本。學以成德。餘事文章。菀然爲南土名家。而五世之後。又顯然可述者三世。以已往占未來。又不知有幾五世而幾三世。源淸者流潔。根深者條達。崔氏祖德之茂可知。崔氏收稡五世文稿。合編而分類。各附狀誌挽誄。名以烏城世稿。若其三世之稿。姑以去古未遠。考据未博。有待於後日。稿將入梓。後孫翼浩氏實尸其事。而重,燮在幷轡過余。託之玄晏。姑擧其遠者大者如右。而所告於二君子。無過曰玆卷之行。祖德具在。無念聿修則不出戶而道在是矣。爲諸公雲仍者。盍相與勉焉

 

 

계당 처사 최공 묘표〔溪堂處士崔公墓表〕


옛날 명묘(明廟 명종(明宗)) 시대에 당시 고현(高賢)과 일사(逸士)는 왕왕 인적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피해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대곡(成大谷), 조남명(曹南冥), 성동주(成東洲) 등 제공(諸公)과 같은 분들은 지금까지도 논자들이 그분들의 의리를 칭송해 마지않고 있는데, 처사(處士) 계당(溪堂) 최공 흥림(崔公興霖)도 그러한 분이었다.
처사의 자는 현좌(賢佐),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고려조(高麗朝)에 휘 영유(永濡)가 있었는데,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맡고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에 맞서 굴복하지 않다가 못에 인수(印綬)를 던지고 순사(殉死)하였다. 이에 고을 백성들이 사당에 그 신위를 모셔 제사 지내어 누세토록 계속해서 지냈다. 처사는 바로 이분의 후손이다.
증조는 휘 한정(漢禎)으로 이조 참의를 지냈다. 조부는 휘 중청(重淸)으로 광흥창 수(廣興倉守)를 지냈다. 부친은 휘 해(垓)로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났고, 모친은 홍씨(洪氏)로 군수(郡守) 여주(汝舟)의 따님이다.
처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청수(淸粹)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행동거지가 근엄하여 덕(德)이 있는 자의 기상을 지녔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지극한 효로 명성이 났고, 더욱이 거상(居喪)함은 남들이 따를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처사는 명가(名家)의 자손으로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이와 같았으니, 사람들마다 모두 원대하게 기대하였다. 그런데 상을 마치자, 겨우 약관(弱冠)을 넘은 나이로, 일찍 어버이를 여윈 자신의 신세를 개연히 슬퍼하고 또 시대 상황이 근심스러움을 보고는, 마침내 은거하여 독서(讀書)하려는 뜻을 품어서 서울에서 가솔(家率)을 모두 이끌고 보은(報恩)의 금적산(金積山)으로 들어갔는데, 그 계곡의 유심(幽深)함을 좋아하여 집을 짓고 살았다.
이로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여 날마다 경전(經傳)을 읽고 도의(道義)를 함양하며, 뜻이 같은 자들과 강학하고 토론하여 즐거워하였고, 한가로울 때에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시를 읊어 자신의 신세를 까마득히 잊어서 종신토록 금적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대곡(大谷), 남명(南冥) 등 제현(諸賢)이 모두 처사를 고상하게 여기고 기꺼운 마음으로 왕래하며 산중에 오래 머물다가 떠났는데,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이 일을 아름다운 고사로 전하고 있다.
처사는 만력(萬曆) 신사년(1581, 선조14)에 향년 76세로 별세하였고, 보은현 서쪽 검운산(劒雲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 부인 채씨(蔡氏)는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휘 치정(致禎)의 따님으로, 처사보다 먼저 별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사의 묘소에 합부(合祔)되었다.
내가 일찍이 삼산(三山)에 유람할 적에 이른바 계당에 한번 가서 제현이 남긴 자취들을 찾아보았다. 그러고는 고금을 회상하며 크게 탄식하면서, 처사가 살아서는 은거하고 죽어서는 또 전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인물이 있었던 줄 모르게 될 것을 슬퍼하였다. 옛날에 일민(逸民)과 작자(作者)의 부류는 다행히 성인(聖人)의 붓을 통해 후세에 드러날 수 있었는데, 지금 처사의 고상한 정취와 고원(高遠)한 운치가 어찌 반드시 그러한 인물들보다 전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이 적막하니, 이에 나는 또 처사의 불우함을 안타까워하였다.
처사는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첫째는 지원(知遠)이고, 둘째는 명원(明遠)이다. 모두 처사의 명으로 대곡(大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명성과 행실이 있었다. 딸은 찰방(察訪) 이의정(李宜正)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 소생은 봉사(奉事) 행원(行遠), 참봉(參奉) 성원(省遠), 사원(思遠)이다.
손자는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된 대인(大仁),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익(大益), 생원(生員) 대복(大復), 선전관(宣傳官) 대영(大榮) 및 측실 소생인 대곤(大坤)ㆍ대수(大秀)는 첫째 아들의 소생이며, 판관 대윤(大允) 및 측실 소생인 대관(大寬)ㆍ대준(大俊)은 둘째 아들의 소생이다.
지금 처사의 후손 복세(復世)와 유함(有咸)이 찾아와서 나에게 묘표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아, 내가 어찌 그 묘표를 짓기에 합당한 사람이겠는가. 다만 처사에게 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 되겠기에, 삼가 다음과 같이 쓴다.
산은 높고 물은 길게 흐르니, 이곳에 최 처사(崔處士)의 묘소가 있다오.〔山高水長 此崔處士之墓〕”


 

[주D-001]성대곡(成大谷) : 성운(盛運, 1497~1579)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이다. 부정(副正) 성세준(成世俊)의 아들이다. 1531년(중종2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 그의 형이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화를 입자 보은(報恩)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그뒤 참봉ㆍ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선조 때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서경덕(徐敬德)ㆍ조식(曺植)ㆍ이지함(李之菡)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저서에 《대곡집(大谷集)》 등이 있다.
[주D-002]조남명(曹南冥)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仲), 호는 남명,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3]성동주(成東洲) : 성제원(成悌元, 1506~1559)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이다. 부원군(府院君)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의 고손(高孫)이다. 유우(柳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과거 공부 보다는 고도(古道)에 힘썼다. 산경(山經)ㆍ지지(地誌)ㆍ의학(醫學)ㆍ복술(卜術)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552년(명종7) 관찰사(觀察使)가 효행으로 조정에 아뢰고,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1553년(명종8) 6품관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보직되었다.
[주D-004]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학문을 이른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삼산(三山) : 보은(報恩)의 이칭으로, 속리산(俗離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06]일민(逸民)과 …… 있었는데 : 일민(逸民)은 뛰어난 학문과 덕행을 소유하고서도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사람을 이르고, 작자(作者) 역시 은거한 사람을 이른다. 여기에서의 성인(聖人)은 공자(孔子)를 가리키는 것으로, 공자가 일민과 작자를 《논어》에 기록한 것으로 인하여 이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논어》 〈미자(微子)〉에 “일민은 백이(伯夷), 숙제(叔齊),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유하혜(柳下惠), 소련(小連)이었다.”라고 하였고, 〈헌문(憲問)〉에 “일어나 은둔한 자가 일곱 사람이었다.〔作者七人矣〕”라고 하였다.
[주D-007]산은 …… 흐르니 : 이는 일반적으로 위인(偉人)의 인품이 고결하여 후세에 영구히 전해질 만함을 형용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奄)의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서, 엄광(嚴光)의 인품과 덕행을 추켜세우며 “선생의 유풍(遺風)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장구하리.〔先生之風 山高水長〕”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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