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5.12.14. 북한산 칼바위리딩

2015.12.14 52차 북한산 칼바위 산행리딩

아베베1 2015. 12. 16. 04:15



●  52차 북한산 칼바위 산행리딩 

    수도권산악회 

● 산행코스 

    길음역 - 솔샘길 - 둘레길 - 칼바위능선-  칼바위 -산성 -대동문 -시단봉 - 욤암사지 - 용암문 -

    도선사 -   도선사 능선 - 고향산천 - 우이동 

● 참석인원 

    9명 (남산우 7명 여산우 2명) 

    산행거리 9킬로  날씨 약간의 비  

●  산행후기 

     겨울의 가량비가 내리던날

    북한산으로 발길을 돌려

   

    가량비가 내리던 잣나무 숲길

    북한산의 잣나무 피스톤 터치

 

    마음껏 마시며

    반가운분 만나서 인사를 나누시고


    정다움 나누며 가는 길

    조선 숙종대왕의 업적인 北漢山城 굽이 굽이


    돌아서 가는 길

    선현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가는 길

 

    歷史的인 여러일들을 되새기면서

    이야기 나누며 걸어가던 시간이 잠시의 追憶이었네


   운무속에 가려진 인수 백운 국망 노적의

   봉우리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조선의 왕들이 올랐던 시단봉에 올라서

   주변의 정취를 느끼고


   龍岩寺는 사라진지 오래이고

   佛塔만 남아서 용암사의 옛터를 지키는 구나

   

  역사속으로 사라져 가는  중요한 문화재 보존 해야할

  문화재는 歲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


  즐거운 산길의 시간이 있어서 

  전망 遠景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중년을 넘어나는 길목에서

  느끼는 산행의 행복 이었네 


  도움 주신님 

  음식을 준비하신님 

  산행에 參席하신님께 感謝를 드립니다 


  다음의 산길에서 건강하시고

  반가운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北漢山에서의 하루를 생각하면서 

  부족한 문장력으로 남기다


   北漢山 길잡이 아베베 배상




















핸폰으로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 그대로 인증샷 한겁니다

 




군정편 3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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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3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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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北山城記 b_113_52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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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本高勾麗北漢山郡。一云南平壤。百濟溫祚王取之。十四年丙辰築城。近肖古王二十六年辛未移都。葢鹵王二十一年乙卯高勾麗長壽王來圍。葢鹵王出走城遂廢。我肅宗三十113_521b七年辛卯。卽溫祚舊址築城。以爲保障之所。城周七千六百二十步。爲二十一里餘。門有十四。曰北門,大東門,大西門,大成門,中城門作虹蜺設譙樓。小東門,小南門亦作虹蜺。西暗門,白雲峯暗門,龍巖寺暗門,東暗門,靑水洞暗門,扶旺洞暗門,袈裟堂暗門。高低不一。又有水門一而中城門在元曉義相兩峯之間。爲西邊水口。低下淺露。將㙜有三。曰東將㙜在奉聖庵後峯。南113_521c將㙜在羅漢峯東北。北將㙜在中城門西北。池二十六。井九十九。壬辰上駕幸。廵視城堞。歎其天作之險。盖山之形便。東西北絶險無地。而仁壽,白雲,萬景三峯屹立于後。稍西曰露積峯。下有重興寺。而萬景峯東轉逶迤。爲釋迦峴,普賢,文殊等峯。展翼爲兄弟。又南爲白岳山。而自文殊一枝轉西爲七星峯。七星出兩支。落爲羅漢甑峯,大望,義相諸峯。至重興水口。一支西走113_521d爲僧迦峯。香林寺後峯白雲峯。西轉爲靈鷲,元曉兩峯。至重興水口西止。四面諸峯壁立如削。自成城郭。眞所謂一夫當關。萬夫莫開之地。但山形局勢。殊不寬敞。恐難容衆。而重興之南。文殊之東。曹溪之西。左右洞壑。地勢少平。山谿之㝡著者曰三角山。山有仁壽,白雲,萬景三峯巑岏如角故名。一名華山。又稱華嶽。我東之山起於白頭。至平康之分水嶺。西出一支。連峯疊嶂。113_522a起伏迤邐。至楊州西南爲道峯。又爲三角。實京城之鎭。仁壽峯卽三角之第一峯。四面純石削立。一巖贅於峯背。故又稱負兒岳。高勾麗東明王之子沸流,溫祚。南行至漢山。登負兒岳。相可居之地。卽此峯也。白雲峯在仁壽之西。一名白雲㙜。卽山之㝡高處。萬景峯在白雲之南。峻拔奇壯。與仁壽爭䧺。露積峯在萬景之西。湧峙磅礴。形如露積故名。文殊峯在普賢西。下有文殊113_522b窟。中有甘泉。鍊石像文殊與五百羅漢。峯之名以此。侍者峯在白雲㙜下。登臨可盡一城之形勝。將軍峯在重興寺西。高麗崔瑩戰地故名。義相㙜在彌勒峯下。新羅義相祖師住錫處。元曉㙜在義相㙜北水口上。義相之弟元曉住錫於此。日月出,盤龍,化龍,潛龍,臥龍,天龍,紫丹,德藏,釋迦,普賢,走馬,靈鷲等峯。羅絡四方。不可殫記。太古,游仙,瑤艸,曲龍之㙜。長春,玉流,靑溪,靈泉,113_522c隱仙,叫龍,白雲,紫霞之洞。盤龍,月印,女妓之潭。國寧,祥雲之瀑。分占而擅勝。寺刹曰香林寺在碑峯南今廢。高麗顯宗庚戌之亂。移安太祖梓宮于是寺。丙辰還塟顯陵。戊午契丹蕭遜寧來侵。又移安于是。己未復塟。曰淸凉寺今廢。舊址未詳。高麗李資玄在淸平山。睿宗幸南京。遣其弟資德諭赴行在。留是寺。嘗引見問養性之要。待遇甚厚。曰僧伽寺在碑峯東今廢。高麗李䫨113_522d重修記云按崔致遠文集。昔有新羅狼跡寺僧秀台。飫聆大師之聖跡。選勝于三角山之南面。開巖作窟。刻石摸形大師道容。益照東土。國家如有乾坤之變。水旱之灾。禱以禳之。無不立應。曰文殊寺,曰편001重興寺,曰편002龍巖,曰편003輔國寺,曰편004普光寺,曰편005扶旺寺,曰편006元覺寺,曰편007國寧寺,曰편008祥雲寺,曰편009西巖寺,曰편010鎭國寺,曰편011太古十二寺羅列於前後峯巒之間而太古寺在重興寺左峰。高麗僧普愚住此。扁以太古。做永嘉體作歌。樓113_523a觀曰沆瀣樓在重興寺洞口。跨溪而有偃龍橋。上建重樓曰山映樓。在重興寺前。有小橋覆以閣。卽此樓也。曰洗心樓在西巖寺前溪上。行宮在上元峯下。內外殿爲五十八架。倉廩曰經理廳。上中下倉。三營門留倉。而並屬於捴戎廳。置管城將守之。古蹟曰古石城在重興寺北。周九千四百十七尺。有石門及門址。曰神穴寺高麗顯宗祝髮寓此寺。千秋太后屢遣人謀害。有113_523b老僧穴地於室而匿之。上置臥榻。以防不測。王咏溪詩云一條流出白雲峯。萬里滄溟路自通。莫道潺湲巖下在。不多時日到龍宮。曰閔公遺棲。卽高麗文仁公閔漬遺址。在水口門內。名其巖曰閔漬巖。寺曰閔漬寺。寺今爲西巖寺。余於十二日。自津寬寺道南門入城。一宿于重興寺。一宿于太古寺。周覽諸勝。逌東門下牛耳洞天。又一宿于在澗亭而還。卽十五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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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8년 임진(1712,강희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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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0일 (임술)
38-04-10[02]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하고 여러 신하들과 북한 산성의 형편을 논하다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다. 아침 일찍 떠나 서교(西郊)를 경유하여 북한 산성에 이르렀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수문(水門)을 차례로 관람하고 이어 소석가현(小釋迦峴)에 올라 성(城) 안팎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닦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시단봉(柴丹峰)에만 올랐을 뿐이었다.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형편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성을 보니 과연 천험(天險)이다. 비록 조그만 흠이 있다 하나 세상에 어찌 십분 꼭 좋은 땅이 있겠는가. 양향(粮餉) 등 일은 반드시 차례로 조치(措置)하면 된다. 이전에 성 밖에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는 꼭 성 안에 들여다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성역(城役)은 이미 마쳤으나, 주관(主管)할 사람이 없습니다. 양주(楊州)는 능침(陵寢)이 있어 형세로 보아 옮겨 들이기 어려우니, 차라리 적성(積城)을 혁파하여 양주에 소속시키고, 양주(楊州)부근 4, 5면(面)과 고양(高陽)의 1, 2면을 이 성(城)에 떼어 소속시켜 한 고을을 건치(建置)하되, 이름은 혹 북한 부사(北漢府使)나 중흥 부사(中興府使)로 일컬으며, 또 남한 수어사(南漢守禦使)의 예(例)에 의해 따로 수비사(守備使) 등의 명호(名號)를 정하여 통찰(統察)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유는 말하기를,
“이곳은 곧 도성(都城) 안이니 따로 한 고을을 설치함은 사체(事體)에 있어 부당합니다. 만일 완급(緩急)이 있다면 삼군문(三軍門)에서 마땅히 호가(扈駕)해야 할 것이니, 그대로 삼군문에 소속시켜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거느리게 하고 병란(兵亂)에 임하면 그대로 체찰사(體察使)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군향(軍餉)은 조지서에 중성을 쌓아 5, 60만 석의 쌀을 조치(措置)하여 해마다 10만석 씩 돌려가며 개색(改色)하되 호조(戶曹)·선혜청(宣惠廳) 및 각 군문의 새로 거둔 쌀로 바꾸어 들인다면 5, 6년 안에 모두 개색하고 저축이 저절로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이미 삼군문으로 하여금 나누어 관장(管掌)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그대로 위임하여 각각 신지(信地)를 주관하게 하고, 또 북한(北漢) 모사(某司)란 명호(名號)를 설정하여 대신(大臣)을 도제조(都提調)로 삼으며, 삼군문 대장(三軍門大將)은 당상(堂上)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즉각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40 집 436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군자(軍資)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주D-001]삼군문(三軍門) :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세 군문(軍門).
[주D-002]개색(改色) :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꿈.


疎齋集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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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 



聖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命訓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置軍營於信地。庾粮備械。國家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也。其十月。城役完。本營。築自龍巖東南。至普賢峰下。二千八百二十一步。一172_258c 千六十五垜。城門二。曰大東小東。皆上設譙樓。暗門二。柴壇峰爲將臺。下有房屋十間。城廊六十區。凡一百七十八間。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營舍倉庫。九十餘間。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哨官邢義賓。經紀財力。把摠張友軫。蕫領功役。至八月告成。石砌一百二十步。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倉廏門廊。共一百三十七間。山抱水深。結搆增固。可以永護儲胥云。



柴丹峯走筆

肩輿遙自丹峯歸。行到重興已夕暉。參謁僧來知俗樣。旖旎旗去見塵飛。林間恠鳥啼難盡。溪外名花開不稀。緬憶先朝臨此地。某山某水正依俙。



홍재전서 제2권

 춘저록(春邸錄) 2 ○ 시(詩)
시단봉(柴丹峯)에서 붓을 달려 쓰다

견여 타고 멀리 시단봉으로부터 돌아와 / 肩輿遙自丹峯歸
중흥사에 당도하니 벌써 석양이로세 / 行到重興已夕暉
참알하는 중이 오니 속된 사람임을 알겠고 / 參謁僧來知俗樣
깃발 펄럭이며 가니 티끌이 나부낌을 보겠네 / 旖旎旗去見塵飛
숲 속엔 괴이한 새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고 / 林間恠鳥啼難盡
시내 밖엔 좋은 꽃들이 흔히도 피었구려 / 溪外名花開不稀
선조 때에 이곳 임어한 것을 멀리 생각하니 / 緬憶先朝臨此地
아무 산과 아무 물이 정히 방불하여라 / 某山某水正依俙

홍재전서 제2권

 춘저록(春邸錄) 2 ○ 시(詩)
북한산(北漢山) 도중에서 회(回) 자를 뽑아 읊다 임진년

어가 호종한 산성 길에 내 말 타고 돌아갈 제 / 扈駕山城我馬回
구불구불 좁은 비탈길 가파르기도 하여라 / 逶迤細磴正崔嵬
하늘 높이 솟은 기세는 세 봉우리 바위요 / 浮天氣勢三峯石
땅에서 빼어난 경치는 바로 두 장대로다 / 拔地形勝二將臺
깃발은 용사 같은 구름 그림자를 끌어 돌리고 / 旗掣龍蛇雲影轉
바람은 고각 같은 시냇물 소리를 전하여 오네 / 風傳鼓角㵎聲來
오늘의 느슨한 행차엔 한가한 일도 많아서 / 徐行此日多閒事
어느덧 앞 수풀에 석양볕이 쌓이었구려 / 不覺前林夕照堆




영조 48년 임진(1772,건륭 37)

 4월10일 (을해)
48-04-10[01] 북한산성의 행궁에 나가 시단봉에 오르다

임금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시단봉(柴丹峰)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還宮)하였다. 북한산성은 도성의 북쪽에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고 가파라서 성궁(城宮)을 쌓아 진양(晉陽)의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였었다. 옛날 임진년 4월에 우리 숙묘(肅廟)께서 어가(御駕)를 타고 임어하여 친히 살펴보신 적이 있었는데, 이날 동가(動駕)한 것은 추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해(南海)·거제(巨濟)·웅천(熊川)에 사는 백성들이 해물과 생선을 채취하여 먹고 혹 중독되어 죽기에 이른 것을 도신이 장문(狀聞)하니, 어주(御廚)에 지공(支供)하지 말고, 백성들이 채취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원전】 44 집 418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법-법제(法制) / *보건(保健) / *수산업-어업(漁業)


[주D-001]진양(晉陽) : 국가가 위급할 때 대피할 수 있는 보장지(保障地)를 가리킴. 전국 시대 초기에 조간자(趙簡子)가 일찍이 윤탁(尹鐸)을 진양에 부임시켜 관대한 정치로 민심을 무마시켜 놓았는데, 뒤에 조간자의 아들 양자(襄子)가 지백(智伯)에게 쫓기게 되자 진양으로 들어가 회복의 터전을 삼고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었음.
[주D-002]임진년 : 1712 숙종 3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