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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관련자료 |
[烽燧] 平時一炬。賊現形則二炬。近境則三炬。犯境則四炬。接戰則五炬。京則守直禁軍告兵曹。外則伍長告鎭將。木覔山烽燧。自東至西五炬。東第一準咸鏡,江原兩道來楊州峨嵯山烽。第二準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第三準平安道陸路來母岳東烽。第四準平安,黃海兩道海路來母岳西烽。第五準公忠,全羅兩道來陽川開花山烽。兵曹定人候望。翌日早晨告承政院以啓。有變則雖夜卽告。木覔山。每所軍四人,伍長二人。沿邊則每所軍十人,伍長二人。內地則每所軍六人,伍長二人。軍及伍長並以烽燧近處居人差定。或雲暗風亂。烟火不通之時。烽燧軍次次馳報。○木覔,母岳兩山烽軍戶。各三十。每戶各給保三名。 第一炬。初起慶興西水羅堡牛巖自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鏡城,明川,吉州,端川,利原,北靑,洪原,咸興,定平,永興,高原,文川,德源,安邊,淮陽,平康,鐵原,永平,抱川,楊州通于峩嵯山烽。 間烽。初起茂山南嶺通于會寧。間烽之只準營邑鎭而止者。不盡錄。下同。 ○初起魚游磵遮山通于鏡城。○初起吾村堡下峯通于鏡城。○初起朱溫堡佛巖通于鏡城。○初起南老知堡下田坡通于鏡城。○初起寶化堡松峯通于鏡城。○初起森森坡鎭東峯通于鏡城。○初起西北鎭西山通于吉州。○初起吾乙足浦隱龍㯖通于北靑。○初起魚面堡龍峯通于端川。 已上。直烽一百二十處。間烽六十處。 第二炬。初起東萊多大浦鷹峯自梁山,彦陽,慶州,永川,新寧,義興,義城,安東,禮安,榮川,奉化,順興,豐基,丹陽,淸風,忠州,陰城,竹山,龍仁,廣州通于天臨山烽。 間烽。初起東萊于飛烏通于安東。○初起巨濟加羅山通于忠州。○初起熊川天城堡通于永川。○初起南海錦山通于忠州。 已上。直烽四十處。間烽一百二十三處。 第三炬。初起江界滿浦鎭餘屯臺自渭原,楚山,碧潼,昌城,朔州,義州,龍川,鐵山,宣川,郭山,定州,嘉山,博川,安州,肅川,永柔,順安,平壤,中和,黃州,鳳山,瑞興,平山,金川,開城府,長湍,坡州,高陽通于母岳東烽。 已上。直烽七十八處。間烽二十二處。 第四炬。初起義州古靜州自龍川,鐵山,宣川,郭山,定州,安州,肅川,永柔,順安,平壤,甑山,咸從,龍岡,三和,長連,安岳,殷栗,豐川,長淵,瓮津,康翎,海州,平山,延安,白川,開城府,交河,高陽通于母岳西烽。 已上。直烽七十一處。間烽三十五處。 第五炬。初起順天防踏鎭自興陽,長興,康津,靈岩,海南,珍島,務安,羅州,咸平,靈光,茂長,扶安,沃溝,臨陂,咸悅,龍安,恩津,魯城,公州,天安,牙山,稷山,陽城,水原,南陽,安山,仁川,富平,金浦,通津,江華,陽川通于開花山烽。 間烽。初起喬桐長峯島通于江華。 已上。直烽六十處。間烽三十四處。 | ||||
평시에는 횃불이 하나요, 적이 나타나면 횃불이 둘이요, 국경에 가까이 오면 횃불이 셋이요,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이 넷이요,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 횃불이 다섯이다. 서울에서는 번을 지키는 금군이 병조에 보고하며,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진장(鎭將)에게 보고한다. 목멱산(木覔山)의 봉수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횃불이 5개인데, 동쪽으로 첫째 것은 함경ㆍ강원 양도에서 양주(楊洲)의 아차산(峨嵯山) 봉수로 온 것을 받는 것이요, 둘째 것은 경상도에서 광주(廣州) 천림산(天臨山)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평안도에서 육로로 모악(母岳)의 동쪽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요, 넷째는 평안ㆍ황해 양도에서 뱃길로 모악의 서쪽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요, 다섯째는 공충(公忠)ㆍ전라 양도에서 양천(陽川)의 개화산(開花山)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다. 병조에서 사람을 선정하여 망을 보고 있다가 이튿날 이른 새벽에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린다. 사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곧 보고해야 한다. 목멱산에는 봉수소(烽燧所)마다 군졸이 4명ㆍ오장(伍長)이 2명씩이며, 연변에는 소마다 군졸이 10명ㆍ오장이 2명씩이며, 내지(內地)에는 소마다 군졸이 6명ㆍ오장이 2명씩이다. 군졸과 오장은 모두 봉수가 있는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혹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요란하여 횃불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차례로 달려가서 보고한다. ○ 목멱산과 모악 두 산의 봉군호(烽軍戶)는 각 30이다. 매호에 보(保) 3명을 급여한다. 첫째 횃불[第一炬] : 경흥(慶興)서수라보(西水羅堡)의 우암(牛巖)에서 시작하여 경원(慶源)ㆍ온성(穩城)ㆍ종성(鍾城)ㆍ회령(會寧)ㆍ부령(富寧)ㆍ경성(鏡城)ㆍ명천(明川)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이원(利原)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ㆍ정평(定平)ㆍ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문천(文川)ㆍ덕원(德源)ㆍ안변(安邊)ㆍ회양(淮陽)ㆍ평강(平康)ㆍ철원(鐵原)ㆍ영평(永平)ㆍ포천(抱川)ㆍ양주(楊州)를 거쳐 아차산의 봉수로 통한다. 사잇봉수[間烽] : 무산(茂山)의 남령(南嶺)에서 시작한 것은 회령으로 통한다. 사잇 봉수로써 영ㆍ읍ㆍ진에만 연락되고 마는 것은 다 적지 않는다.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 어유간(魚游磵)차산(遮山)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鏡城)으로 통한다. ○ 오촌보(吾村堡) 하봉(下峯)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주온보(朱溫堡)불암(佛巖)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남로지보(南老知堡)하전파(下田坡)에서 시작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보화보(寶化堡) 송봉(松峰)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삼삼파진(森森坡鎭) 동봉(東峰)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서북진(西北鎭)서산(西山)에서 시작한 것은 길주로 통한다. ○ 오을족포(吾乙足浦) 은룡덕(隱龍㯖)에서 시작한 것은 북청으로 통한다. ○ 어면보(魚面堡)용봉(龍峯)에서 시작한 것은 단천으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直烽] 120개소, 사잇봉수 60개소. 둘째 횃불 : 동래(東萊)다대포(多大浦) 응봉(鷹峰)으로부터 시작하여 양산(梁山)ㆍ언양(彦陽)ㆍ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녕(新寧)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영주(榮州)ㆍ봉화(奉化)ㆍ순흥(順興)ㆍ풍기(豐基)ㆍ단양(丹陽)ㆍ청풍(淸風)ㆍ충주(忠州)ㆍ음성(陰城)ㆍ죽산(竹山)ㆍ용인(龍仁)ㆍ광주(廣州)를 거쳐 천림산(天臨山) 봉수로 통한다. 사잇봉수 : 동래의 우비오(于飛烏)에서 시작한 것은 안동으로 통한다. ○ 거제(巨濟)의 가라산(加羅山)에서 시작한 것은 충주로 통한다. ○ 웅천(熊川)의 천성보(天城堡)에서 시작한 것은 영천(永川)으로 통한다. ○ 남해(南海)의 금산(錦山)에서 시작한 것은 충주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40개소, 사잇봉수 123개소. 셋째 횃불 : 강계(江界)ㆍ만포진(滿浦鎭)의 여둔대(餘屯臺)로부터 시작하여 위원(渭原)ㆍ초산(楚山)ㆍ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朔州)ㆍ의주(義州)ㆍ용천(龍川)ㆍ철산(鐵山)ㆍ선천(宣川)ㆍ곽산(郭山)ㆍ정주(定州)ㆍ가산(嘉山)ㆍ박천(博川)ㆍ안주(安州)ㆍ숙천(肅川)ㆍ영유(永柔)ㆍ순안(順安)ㆍ평양(平壤)ㆍ중화(中和)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ㆍ서흥(瑞興)ㆍ평산(平山)ㆍ김천(金川)ㆍ개성부(開城府)ㆍ장단(長湍)ㆍ파주(坡州)ㆍ고양(高陽)을 거쳐 모악의 동쪽 봉수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78개소, 사잇봉수 22개소. 넷째 횃불 : 의주의 고정주(古靜州)로부터 시작하여, 용천ㆍ철산ㆍ선천ㆍ곽산ㆍ정주ㆍ안주ㆍ숙천ㆍ영유ㆍ순안ㆍ평양ㆍ증산(甑山)ㆍ함종(咸從)ㆍ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장련(長連)ㆍ안악(安岳)ㆍ은률(殷栗)ㆍ풍천(豐川)ㆍ장연(長淵)ㆍ옹진(瓮津)ㆍ강령(康翎)ㆍ해주(海州)ㆍ평산(平山)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ㆍ개성부ㆍ교하(交河)ㆍ고양(高陽)을 거쳐 모악의 서쪽 봉수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71개소, 사잇봉수 35개소. 다섯째 횃불 : 순천(順天)의 방답진(防踏鎭)으로부터 시작하여, 흥양(興陽)ㆍ장흥(長興)ㆍ강진(康津)ㆍ영암(靈巖)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무안(務安)ㆍ나주(羅州)ㆍ함평(咸平)ㆍ영광(靈光)ㆍ무장(茂長)ㆍ부안(扶安)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함열(咸悅)ㆍ용안(龍安)ㆍ은진(恩津)ㆍ노성(魯城)ㆍ공주(公州)ㆍ천안(天安)ㆍ아산(牙山)ㆍ직산(稷山)ㆍ양성(陽城)ㆍ수원(水原)ㆍ남양(南陽)ㆍ안산(安山)ㆍ인천(仁川)ㆍ부평(富平)ㆍ김포(金浦)ㆍ통진(通津)ㆍ강화(江華)ㆍ양천(陽川)을 거쳐 개화산(開花山)의 봉수로 통한다. 사잇봉수 : 교동(喬桐) 장봉도(長峯島)에서 시작하여 강화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60개소, 사잇봉수 34개소. [주D1-001]우암(牛巖) : ‘우암(牛巖)’의 ‘牛’가 어느 본에는 ‘斗’로 되어 있음. [주D1-002]남령(南嶺) : ‘남령(南嶺)’의 ‘嶺’이 어느 본에는 ‘峰’으로 되어 있음. [주D1-003]어유간(魚游磵) : ‘어유간(魚游磵)’의 ‘游’가 어느 본에는 ‘遊’로, ‘磵’이 어느 본에는 ‘澗’으로 되어 있음. [주D1-004]우비오(于飛烏) : ‘우비오(于飛烏)’의 ‘烏’가 어느 본에는 ‘島’로 되어 있음. [주D1-005]용강(龍岡) : ‘용강(龍岡)’의 ‘岡’이 어느 본에는 ‘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장봉도(長峯島) : ‘장봉도(長峯島)’의 ‘峯’이 어느 본에는 ‘烽’으로 되어 있음. [주D1-007]34 : ‘34’가 어느 본에는 ‘64’로 되어 있음. | ||||
을묘년 신라 자비왕 18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백제 개로왕 21년ㆍ문주왕(文周王) 원년(북위 효문제 연흥 5, 송주 욱 원희 3, 475) ○ 고구려가 진격해서 한성(漢城)을 쳐 함락하니 백제왕 경사(慶司)가 성을 나가 달아났으나 옛 신하 재증 걸루(再曾桀婁) 등이 왕을 잡아 시해하였다. 고구려 왕이 대로(對盧) 제우(齊于)와 재증 걸루ㆍ고이 만년(古爾萬年)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이다 등을 명해서 향도를 삼고 백제의 한성 북쪽 성을 쳐서 7일 만에 함락하고, 이동해서 남쪽성을 치며 군사를 나누어 네 길로 마주치고 바람을 타 불을 질러서 성문을 불태우니, 성 안의 인심이 위구(危懼)하여 나와 항복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백제왕은 사태가 위급하여 어떻게 할지를 몰라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재증 걸루 등이 추격해 따라갔다. 백제왕이 말에서 내려 절하는 것을 보고는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그의 죄를 세며 결박해서 아단성(阿旦城)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혹은 영춘현(永春縣)이라 한다 으로 보내어 죽이고 남녀 8천 인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걸루와 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일찍이 왕에게 죄를 짓고서 도망하여 고구려로 달아나서 장수로 피용되었던 것이다. 최씨가 이르기를, “임금된 이는 반드시 잡힐 만한 틈이 있은 뒤에 사람이 그 틈을 엿보게 되며 적에서도 이간하게 되는 것이다. 개로왕은 구구(區區)한 작은 오락을 즐기다가 마음과 뜻을 미혹해서 마침내 적국의 미끼에 걸리고 말았다. 옛글에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伐] 뒤에 남이 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개로를 두고 말함이라 하겠다.” ○ 백제 왕자 문주가 즉위하였다. | ||||
동10월 고구려 왕 양성(陽成)이 훙(薨)하고, 태자 원(元)이 즉위하였다. 고구려가 문자왕(文咨王) 이후로는 모두 용렬한 임금뿐이더니 왕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하여서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왕이 훙하자 호를 평원(平原)이라 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영양왕(嬰陽王)평양왕(平陽王)이라고 한다 이다. 풍채가 뛰어나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하였다. ○ 수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왕을 책봉하였다. 상개부의동삼사 습작요동군공(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으로 책봉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 고구려 대형(大兄) 온달(溫達)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 이북의 옛 경계를 수복하려고 아단성(阿旦城)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온달이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가 우리의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만드니 한강 이북 사람들은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나이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불초(不肖)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나가서 반드시 이를 수복하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떠날 때에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을 우리에게 돌려오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사지내려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의 처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결판났으니 아, 고이 돌아가소서.” 하매, 마침내 상여가 들려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비통히 여겼다. 【인물】 고구려 온달(溫達) 용모가 껄렁[龍鐘]하여 우스웠으므로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 일컬었다. 양강왕(陽岡王)의 어린 딸이 스스로 나서서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요동(遼東)을 치니,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급(級)을 베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분발해 쳐서 크게 이겼다. 왕이 가상히 여겨 탄식하기를, “과연 내 사위로다.” 하고 대형(大兄) 벼슬을 주었다. 평강왕(平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베어 저희 나라의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한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하건댄,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不肖)하다고 여기지 말고 군사를 주어 가게 한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회복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온달이 떠날 때에 임하여 맹세하기를, “계립고개[鷄立峴]ㆍ죽령(竹嶺) 이서를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드디어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널[柩]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지라, 공주가 널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삶이 다르니, 아,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널이 움직여 장사하였다. | ||||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 286년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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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 475년 09월(음) ) 21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註 129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註 130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때 중 도림(道琳)註 131 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 왕 근개루註 132 는 장기와 바둑註 133 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고,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註 134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註 135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註 136 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郁里河)註 137 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註 138 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註 139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註 140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註 141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註 142 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註 143註 144 , 조미註 145 는 모두 복성註 146 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註 147 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註 148 재증, 고이註 149註 150 는 모두 복성註 151 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註 152 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註 153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註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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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이 즉위하다 ( 475년 09월(음) ) 문주왕(文周王)註 001 문주(文周)를 문주(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註 002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註 003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註 004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註 005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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