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2016.12.14. 아차산 정기산행

2016.2.14. 아차산 용마산 산행 수도권

아베베1 2016. 2. 1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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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관련자료 


[烽燧]

平時一炬。賊現形則二炬。近境則三炬。犯境則四炬。接戰則五炬。京則守直禁軍告兵曹。外則伍長告鎭將。木覔山烽燧。自東至西五炬。東第一準咸鏡,江原兩道來楊州峨嵯山烽。第二準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第三準平安道陸路來母岳東烽。第四準平安,黃海兩道海路來母岳西烽。第五準公忠,全羅兩道來陽川開花山烽。兵曹定人候望。翌日早晨告承政院以啓。有變則雖夜卽告。木覔山。每所軍四人,伍長二人。沿邊則每所軍十人,伍長二人。內地則每所軍六人,伍長二人。軍及伍長並以烽燧近處居人差定。或雲暗風亂。烟火不通之時。烽燧軍次次馳報。○木覔,母岳兩山烽軍戶。各三十。每戶各給保三名。

第一炬。初起慶興西水羅堡牛巖自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鏡城,明川,吉州,端川,利原,北靑,洪原,咸興,定平,永興,高原,文川,德源,安邊,淮陽,平康,鐵原,永平,抱川,楊州通于峩嵯山烽。
間烽。初起茂山南嶺通于會寧。間烽之只準營邑鎭而止者。不盡錄。下同。 ○初起魚游磵遮山通于鏡城。○初起吾村堡下峯通于鏡城。○初起朱溫堡佛巖通于鏡城。○初起南老知堡下田坡通于鏡城。○初起寶化堡松峯通于鏡城。○初起森森坡鎭東峯通于鏡城。○初起西北鎭西山通于吉州。○初起吾乙足浦隱龍㯖通于北靑。○初起魚面堡龍峯通于端川。
已上。直烽一百二十處。間烽六十處。
第二炬。初起東萊多大浦鷹峯自梁山,彦陽,慶州,永川,新寧,義興,義城,安東,禮安,榮川,奉化,順興,豐基,丹陽,淸風,忠州,陰城,竹山,龍仁,廣州通于天臨山烽。
間烽。初起東萊于飛烏通于安東。○初起巨濟加羅山通于忠州。○初起熊川天城堡通于永川。○初起南海錦山通于忠州。
已上。直烽四十處。間烽一百二十三處。
第三炬。初起江界滿浦鎭餘屯臺自渭原,楚山,碧潼,昌城,朔州,義州,龍川,鐵山,宣川,郭山,定州,嘉山,博川,安州,肅川,永柔,順安,平壤,中和,黃州,鳳山,瑞興,平山,金川,開城府,長湍,坡州,高陽通于母岳東烽。
已上。直烽七十八處。間烽二十二處。
第四炬。初起義州古靜州自龍川,鐵山,宣川,郭山,定州,安州,肅川,永柔,順安,平壤,甑山,咸從,龍岡,三和,長連,安岳,殷栗,豐川,長淵,瓮津,康翎,海州,平山,延安,白川,開城府,交河,高陽通于母岳西烽。
已上。直烽七十一處。間烽三十五處。
第五炬。初起順天防踏鎭自興陽,長興,康津,靈岩,海南,珍島,務安,羅州,咸平,靈光,茂長,扶安,沃溝,臨陂,咸悅,龍安,恩津,魯城,公州,天安,牙山,稷山,陽城,水原,南陽,安山,仁川,富平,金浦,通津,江華,陽川通于開花山烽。
間烽。初起喬桐長峯島通于江華。
已上。直烽六十處。間烽三十四處。

평시에는 횃불이 하나요, 적이 나타나면 횃불이 둘이요, 국경에 가까이 오면 횃불이 셋이요,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이 넷이요,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 횃불이 다섯이다. 서울에서는 번을 지키는 금군이 병조에 보고하며,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진장(鎭將)에게 보고한다. 목멱산(木覔山)의 봉수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횃불이 5개인데, 동쪽으로 첫째 것은 함경ㆍ강원 양도에서 양주(楊洲)의 아차산(峨嵯山) 봉수로 온 것을 받는 것이요, 둘째 것은 경상도에서 광주(廣州) 천림산(天臨山)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평안도에서 육로로 모악(母岳)의 동쪽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요, 넷째는 평안ㆍ황해 양도에서 뱃길로 모악의 서쪽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요, 다섯째는 공충(公忠)ㆍ전라 양도에서 양천(陽川)의 개화산(開花山)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다. 병조에서 사람을 선정하여 망을 보고 있다가 이튿날 이른 새벽에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린다. 사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곧 보고해야 한다. 목멱산에는 봉수소(烽燧所)마다 군졸이 4명ㆍ오장(伍長)이 2명씩이며, 연변에는 소마다 군졸이 10명ㆍ오장이 2명씩이며, 내지(內地)에는 소마다 군졸이 6명ㆍ오장이 2명씩이다. 군졸과 오장은 모두 봉수가 있는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혹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요란하여 횃불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차례로 달려가서 보고한다. ○ 목멱산과 모악 두 산의 봉군호(烽軍戶)는 각 30이다. 매호에 보(保) 3명을 급여한다.
첫째 횃불[第一炬] : 경흥(慶興)서수라보(西水羅堡)의 우암(牛巖)에서 시작하여 경원(慶源)ㆍ온성(穩城)ㆍ종성(鍾城)ㆍ회령(會寧)ㆍ부령(富寧)ㆍ경성(鏡城)ㆍ명천(明川)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이원(利原)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ㆍ정평(定平)ㆍ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문천(文川)ㆍ덕원(德源)ㆍ안변(安邊)ㆍ회양(淮陽)ㆍ평강(平康)ㆍ철원(鐵原)ㆍ영평(永平)ㆍ포천(抱川)ㆍ양주(楊州)를 거쳐 아차산의 봉수로 통한다.
사잇봉수[間烽] : 무산(茂山)의 남령(南嶺)에서 시작한 것은 회령으로 통한다. 사잇 봉수로써 영ㆍ읍ㆍ진에만 연락되고 마는 것은 다 적지 않는다.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 어유간(魚游磵)차산(遮山)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鏡城)으로 통한다. ○ 오촌보(吾村堡) 하봉(下峯)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주온보(朱溫堡)불암(佛巖)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남로지보(南老知堡)하전파(下田坡)에서 시작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보화보(寶化堡) 송봉(松峰)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삼삼파진(森森坡鎭) 동봉(東峰)에서 시작한 것은 경성으로 통한다. ○ 서북진(西北鎭)서산(西山)에서 시작한 것은 길주로 통한다. ○ 오을족포(吾乙足浦) 은룡덕(隱龍㯖)에서 시작한 것은 북청으로 통한다. ○ 어면보(魚面堡)용봉(龍峯)에서 시작한 것은 단천으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直烽] 120개소, 사잇봉수 60개소.
둘째 횃불 : 동래(東萊)다대포(多大浦) 응봉(鷹峰)으로부터 시작하여 양산(梁山)ㆍ언양(彦陽)ㆍ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녕(新寧)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영주(榮州)ㆍ봉화(奉化)ㆍ순흥(順興)ㆍ풍기(豐基)ㆍ단양(丹陽)ㆍ청풍(淸風)ㆍ충주(忠州)ㆍ음성(陰城)ㆍ죽산(竹山)ㆍ용인(龍仁)ㆍ광주(廣州)를 거쳐 천림산(天臨山) 봉수로 통한다.
사잇봉수 : 동래의 우비오(于飛烏)에서 시작한 것은 안동으로 통한다. ○ 거제(巨濟)의 가라산(加羅山)에서 시작한 것은 충주로 통한다. ○ 웅천(熊川)의 천성보(天城堡)에서 시작한 것은 영천(永川)으로 통한다. ○ 남해(南海)의 금산(錦山)에서 시작한 것은 충주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40개소, 사잇봉수 123개소.
셋째 횃불 : 강계(江界)ㆍ만포진(滿浦鎭)의 여둔대(餘屯臺)로부터 시작하여 위원(渭原)ㆍ초산(楚山)ㆍ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朔州)ㆍ의주(義州)ㆍ용천(龍川)ㆍ철산(鐵山)ㆍ선천(宣川)ㆍ곽산(郭山)ㆍ정주(定州)ㆍ가산(嘉山)ㆍ박천(博川)ㆍ안주(安州)ㆍ숙천(肅川)ㆍ영유(永柔)ㆍ순안(順安)ㆍ평양(平壤)ㆍ중화(中和)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ㆍ서흥(瑞興)ㆍ평산(平山)ㆍ김천(金川)ㆍ개성부(開城府)ㆍ장단(長湍)ㆍ파주(坡州)ㆍ고양(高陽)을 거쳐 모악의 동쪽 봉수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78개소, 사잇봉수 22개소.
넷째 횃불 : 의주의 고정주(古靜州)로부터 시작하여, 용천ㆍ철산ㆍ선천ㆍ곽산ㆍ정주ㆍ안주ㆍ숙천ㆍ영유ㆍ순안ㆍ평양ㆍ증산(甑山)ㆍ함종(咸從)ㆍ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장련(長連)ㆍ안악(安岳)ㆍ은률(殷栗)ㆍ풍천(豐川)ㆍ장연(長淵)ㆍ옹진(瓮津)ㆍ강령(康翎)ㆍ해주(海州)ㆍ평산(平山)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ㆍ개성부ㆍ교하(交河)ㆍ고양(高陽)을 거쳐 모악의 서쪽 봉수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71개소, 사잇봉수 35개소.
다섯째 횃불 : 순천(順天)의 방답진(防踏鎭)으로부터 시작하여, 흥양(興陽)ㆍ장흥(長興)ㆍ강진(康津)ㆍ영암(靈巖)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무안(務安)ㆍ나주(羅州)ㆍ함평(咸平)ㆍ영광(靈光)ㆍ무장(茂長)ㆍ부안(扶安)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함열(咸悅)ㆍ용안(龍安)ㆍ은진(恩津)ㆍ노성(魯城)ㆍ공주(公州)ㆍ천안(天安)ㆍ아산(牙山)ㆍ직산(稷山)ㆍ양성(陽城)ㆍ수원(水原)ㆍ남양(南陽)ㆍ안산(安山)ㆍ인천(仁川)ㆍ부평(富平)ㆍ김포(金浦)ㆍ통진(通津)ㆍ강화(江華)ㆍ양천(陽川)을 거쳐 개화산(開花山)의 봉수로 통한다.
사잇봉수 : 교동(喬桐) 장봉도(長峯島)에서 시작하여 강화로 통한다.
이상 직로봉수 60개소, 사잇봉수 34개소.


[주D1-001]우암(牛巖) : ‘우암(牛巖)’의 ‘牛’가 어느 본에는 ‘斗’로 되어 있음.
[주D1-002]남령(南嶺) : ‘남령(南嶺)’의 ‘嶺’이 어느 본에는 ‘峰’으로 되어 있음.
[주D1-003]어유간(魚游磵) : ‘어유간(魚游磵)’의 ‘游’가 어느 본에는 ‘遊’로, ‘磵’이 어느 본에는 ‘澗’으로 되어 있음.
[주D1-004]우비오(于飛烏) : ‘우비오(于飛烏)’의 ‘烏’가 어느 본에는 ‘島’로 되어 있음.
[주D1-005]용강(龍岡) : ‘용강(龍岡)’의 ‘岡’이 어느 본에는 ‘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장봉도(長峯島) : ‘장봉도(長峯島)’의 ‘峯’이 어느 본에는 ‘烽’으로 되어 있음.
[주D1-007]34 : ‘34’가 어느 본에는 ‘64’로 되어 있음.


을묘년 신라 자비왕 18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백제 개로왕 21년ㆍ문주왕(文周王) 원년(북위 효문제 연흥 5, 송주 욱 원희 3, 475)


○ 고구려가 진격해서 한성(漢城)을 쳐 함락하니 백제왕 경사(慶司)가 성을 나가 달아났으나 옛 신하 재증 걸루(再曾桀婁) 등이 왕을 잡아 시해하였다.

고구려 왕이 대로(對盧) 제우(齊于)와 재증 걸루ㆍ고이 만년(古爾萬年)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이다 등을 명해서 향도를 삼고 백제의 한성 북쪽 성을 쳐서 7일 만에 함락하고, 이동해서 남쪽성을 치며 군사를 나누어 네 길로 마주치고 바람을 타 불을 질러서 성문을 불태우니, 성 안의 인심이 위구(危懼)하여 나와 항복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백제왕은 사태가 위급하여 어떻게 할지를 몰라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재증 걸루 등이 추격해 따라갔다. 백제왕이 말에서 내려 절하는 것을 보고는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그의 죄를 세며 결박해서 아단성(阿旦城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혹은 영춘현(永春縣)이라 한다 으로 보내어 죽이고 남녀 8천 인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걸루와 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일찍이 왕에게 죄를 짓고서 도망하여 고구려로 달아나서 장수로 피용되었던 것이다. 최씨가 이르기를,
“임금된 이는 반드시 잡힐 만한 틈이 있은 뒤에 사람이 그 틈을 엿보게 되며 적에서도 이간하게 되는 것이다. 개로왕은 구구(區區)한 작은 오락을 즐기다가 마음과 뜻을 미혹해서 마침내 적국의 미끼에 걸리고 말았다. 옛글에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伐] 뒤에 남이 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개로를 두고 말함이라 하겠다.”

○ 백제 왕자 문주가 즉위하였다.

경술년 신라 진평왕 12년, 고구려 평원왕 32년ㆍ영양왕(嬰陽王) 원년, 백제 위덕왕 37년(수 문제 개황 10, 590)

동10월 고구려 왕 양성(陽成)이 훙(薨)하고, 태자 원(元)이 즉위하였다.

고구려가 문자왕(文咨王) 이후로는 모두 용렬한 임금뿐이더니 왕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하여서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왕이 훙하자 호를 평원(平原)이라 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영양왕(嬰陽王)평양왕(平陽王)이라고 한다 이다. 풍채가 뛰어나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하였다.

○ 수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왕을 책봉하였다.

상개부의동삼사 습작요동군공(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으로 책봉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 고구려 대형(大兄) 온달(溫達)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 이북의 옛 경계를 수복하려고 아단성(阿旦城)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온달이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가 우리의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만드니 한강 이북 사람들은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나이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불초(不肖)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나가서 반드시 이를 수복하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떠날 때에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을 우리에게 돌려오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사지내려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의 처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결판났으니 아, 고이 돌아가소서.”
하매, 마침내 상여가 들려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비통히 여겼다.


【인물】 고구려 온달(溫達) 용모가 껄렁[龍鐘]하여 우스웠으므로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 일컬었다. 양강왕(陽岡王)의 어린 딸이 스스로 나서서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요동(遼東)을 치니,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급(級)을 베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분발해 쳐서 크게 이겼다. 왕이 가상히 여겨 탄식하기를, “과연 내 사위로다.” 하고 대형(大兄) 벼슬을 주었다. 평강왕(平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베어 저희 나라의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한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하건댄,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不肖)하다고 여기지 말고 군사를 주어 가게 한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회복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온달이 떠날 때에 임하여 맹세하기를, “계립고개[鷄立峴]ㆍ죽령(竹嶺) 이서를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드디어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널[柩]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지라, 공주가 널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삶이 다르니, 아,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널이 움직여 장사하였다.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 286년 (음) )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100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101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102과 사성(蛇城)103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104

註 100
대방군을 가리킨다. 대방은 기원전 108~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진번군(眞番郡) 15 속현(屬縣)의 대방현으로 기원전 82년 진번군의 7현과 함께 낙랑군(樂浪郡)의 속현이 되었고, 기원전 75년경 7현이 모두 낙랑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의 관할에 들어가 명맥을 유지하다 25년에 후한(後漢)이 건국되면서 후한의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후한 말에 이르러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204년 공손탁을 이은 공손강(公孫康)은 강성해진 한(韓) 및 예(濊)를 견제하고자 대방현을 중심으로 낙랑남부도위 관할의 7현을 대방군(帶方郡)으로 개편하였는데, 그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서 황해도 황주(黃州) 자비령(慈悲嶺) 이남 지역이다.
註 101
대방왕은 대방태수를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대방국을 낙랑 남부 지역의 호족이었던 장씨(張氏)가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신채호, 《조선사연구》, 1972).
註 102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廣壯洞)과 구의동(九宜洞)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아차산은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으로 불렸는데,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축조되었다. 성문지(城門址)는 동쪽·서쪽·남쪽에 남아 있으며,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성벽 구조는 삭토법(削土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石壘)를 쌓은 듯한데,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2m이다.
註 103
백제 사성(蛇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풍납토성(이병도, 「광주 풍납리 토성과 백제의 사성」, 《진단학보》 10, 1939, 1939), 하남시 미사리 구산토성(방동인, 「풍납리토성의 역사지리적 검토」, 《백산학보》 16, 1974), 서울 강남구 삼성동토성(이도학, 《백제고대국가연구》, 일지사, 1995, 1995, 280쪽) 등으로 보고 있다.
註 104
백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 의하면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은 고이왕 때에 군현의 압박과 말갈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이루어졌다(문안식, 《백제의 영역확장과 지방통치》, 신서원, 2002, 85쪽).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고이왕은 체계적인 왕성의 구조와 방어체계를 확보하지 못하고, 목책을 세우고 민호를 옮기는 수준에 그쳤다. 하남위례성과 그 주변의 방어체계가 확립된 것은 고이왕을 계승한 책계왕 때에 이루어졌다. 책계왕은 즉위한 해(286)에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개축하였는데, 성곽의 보수에 그치지 않고 위례성의 위상을 새롭게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책계왕은 사성과 아단성을 축조하여 한강 하류나 상류 방면에서의 공격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책계왕 때에 이르러 위례성은 한강 수로망을 바탕으로 백제 왕성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여호규,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제와 방어체계」, 《백제연구》 36, 충남대 백제연구소, 2002).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 475년 09월(음) )

21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129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130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때 중 도림(道琳)131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 왕 근개루132는 장기와 바둑133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고,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134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135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136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郁里河)137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138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139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140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141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142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143144, 조미145는 모두 복성146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147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148 재증, 고이149150는 모두 복성151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152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153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154

註 129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조에 나온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에 대해서는 개로왕 20년(474)으로 기록한 자료(《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7년 秋七月條), 476년으로 기록한 자료(《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도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에 인용된 《百濟記》에는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王城降陷”이라 하여 乙卯年(475: 개로왕 21년)으로 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조에는 63년(475)조에 기록되어 있어 47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註 130
장수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북성인 풍납토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개로왕은 포위된 성이 위태로워 탈출을 시도하다가 재증걸루 등에게 사로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다. 재증걸루는 개로왕을 포박하여 장수왕이 머물고 있던 의 본영으로 보내 죽음에 처하게 하였다.
註 131
고구려의 승려이다. 장수왕(長壽王)의 밀사로 백제에 들어가 뛰어난 바둑 솜씨를 이용하여 개로왕의 신임을 얻었다. 개로왕을 설득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도록 하여 백성을 곤궁에 빠뜨렸으며, 장수왕이 백제를 쳐서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하는 데 공을 세웠다.
註 132
백제 21대 개로왕을 말한다.
註 133
博은 장기와 바둑, 고누 등 대국하는 놀이를 말한다. 局戱라고도 한다. 奕은 ‘圍棊’로 바둑을 의미한다. ‘博奕’이라는 용어는 《論語》 陽貨篇의 “子曰飽食終日 無所用心難矣 不有博弈者乎 爲之猶賢乎已”에 대한 集註에 “正義曰…博說文簙局戱也…圍棊謂之弈”이라 하고 있다. 博의 古字는 ‘簙’이며 이는 12줄로 되어 있는 局面에서 흑·백 6말로 되어 있는 고누를 말한다. ‘棊’는 ‘棋’ 또는 ‘碁’라고도 쓰며 이는 바둑을 의미하는 데 山海關 이동의 魯·齊 지방에서는 이를 ‘奕’이라고 불렀다. 唐나라 이전의 바둑은 가로·세로 17줄에 289점이었고, 현재는 가로·세로 19줄에 361점이다. 장기는 漢나라 이후의 놀이로서 局戱의 하나이다. 바둑에 관한 기사로는 《삼국사기》 권48 열전 都彌傳 “(蓋婁王)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라 것과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有投壺樗蒲等雜戱 然尤尙奕棊”라 한 것을 들 수 있다.
註 134
개로왕은 즉위한 후 20여 년이 지난 후에 노지(露地)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는 부왕의 뼈를 장사하였는데, 이는 비유왕이 정변에 희생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개로왕 14년까지가 공백인 점도 그의 집권 과정에 정변이 일어난 사실을 반증한다. 백제는 개로왕 초기의 기록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왕위계승 문제로 지배세력 간의 내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양기석, 1990, 앞의 글, 119~123쪽).
註 135
이 기사는 漢城도읍기의 都城이 土城이었음을 보여준다. 흙을 쪄서 성을 쌓은 예로서는 중국의 경우 《晉書》 권130 赫連勃勃傳에 “阿利性尤工巧 然殘忍刻暴 乃烝土築城 錐入一寸 卽殺作者 而幷築之”라 한 기사를 들 수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백제 토성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몽촌토성과 풍납리토성이다. 이들 토성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흙을 쪄서 축조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신 이 토성의 축조는 판축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風納洞土城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 제3책, 1967 참조. 夢村土城에 대해서는 몽촌토성발굴조사단, 《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 1985와 서울대 박물관, 《夢村土城-동남지구 발굴조사보고-》, 1985 및 《夢村土城-서남지구 발굴조사보고-》, 1989 참조).
註 136
臺는 흙을 높이 쌓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고, 榭는 목조로 집을 지어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尙書》 泰書 上 第1의 “惟宮室臺榭陂池侈服 以殘害于爾萬姓[注 土高曰臺 有木曰榭…正義曰…釋宮又云 闍謂爲之臺 有木者謂之榭 李巡曰臺積土爲之 所以觀望也 臺上有屋 謂之榭 又云 無室曰榭 四方而高曰臺]”라고 한 기사 참조.
註 137
지금의 한강을 말한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아리수(阿利水)로 되어 있다.
註 138
한강 유역에서 확인된 백제 한성시대의 묘제는 크게 土壙墓系 묘제, 積石塚系 묘제, 複合墓制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積石塚은 石村洞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큰 돌로 壇을 쌓아 만들었다. 토광묘는 封土 가까이에 기와나 石片을 한 겹 덮은 것이 특색이다. 可樂洞 3호분은 土壙에 木棺을 넣고 棺 밖에 토기를 부장하였으며, 高句麗系 黑陶壺가 출토되었다. 複合墓制로는 葺石封土墳·圍石封土墳·土壙積石墓 등이 있다(임영진, 「백제한성시대고분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참조). 본 기사에 보이는 ‘큰 돌을 가져다가 만든 石槨무덤’을 積石塚으로 보아 석촌동 4호분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김원룡, 《제3판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86, 179쪽).
註 139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경기도 河南市 倉隅洞 동남방의 黔丹山에 비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93쪽).
註 140
개로왕 때에 축조한 제방은 동쪽 종점(崇山之北)에 해당하는 아차산 대안인 고덕동 일대에서 시작하여 삼성동토성에 이르렀으며, 단순한 제방이 아니라 풍납토성 등 중심 성곽의 외곽으로 확장된 시가지를 감싸면서 군사 방어적 기능까지 수행한 나성(羅城)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이도학, 《새로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1997, 1997, 159쪽 | 여호규, 2002, 앞의 글, 10쪽).
註 141
원문에 社는 본래 토지의 主神이고 稷은 穀神이다. 옛날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社稷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의 存亡을 같이 하였으므로 轉하여 國家(王朝)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註 142
목현만치가 웅진 천도 후 왜국으로 건너가 소아씨(蘇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이근우, 1994,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85~91쪽).
註 143
고구려의 관명(官名)이다.
註 144
백제의 귀족가문의 姓으로 複姓의 하나. 이 목협씨는 후에 單姓化될 때 가문의 分枝化에 의해 木氏와 劦氏로 나뉘어졌다.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의 大姓八族의 하나로서의 木氏와 劦氏는 木劦氏의 分枝化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日本書紀》에는 ‘木刕不麻甲背’(《日本書紀》 권17 繼體紀 10년조), ‘中部德率 木刕今敦’(《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3년조) 등의 예에서 보듯이 ‘木刕’를 姓으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劦’과 ‘刕’는 字形이 유사하고, ‘刕’와 ‘羅’는 음운이 상통하므로 ‘木劦’·‘木刕’·‘木羅’는 同一 實體에 대한 異表記라고 할 수 있다.
註 145
백제의 複姓의 하나. 이 祖彌는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7년(513)조에 나오는 姐彌文貴 將軍의 ‘姐彌’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姐瑾의 ‘姐’는 姐彌의 ‘彌’를 생략하여 單姓化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祖彌’·‘姐彌’를 ‘차미’로 읽고 이를 眞의 訓 ‘참’과 관련시켜 眞氏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今西龍, 《百濟史硏究》, 1934, 297~298쪽) 받아들이기 어렵다.
註 146
성이 두 字 이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單字姓이나 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複姓이 대부분이다(《魏書》 권113 官氏志 참조). 백제의 姓도 왕실의 姓인 夫餘氏나 大姓八族의 하나인 沙宅氏 등에서 보듯이 복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면서 單字姓制를 채용하게 되었다. 夫餘氏가 餘氏로, 沙宅氏가 沙氏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백제의 성씨에 대해서는 이홍식,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참조).
註 147
木劦을 木氏와 劦氏로 나누어 본 것을 말한다. 이 목씨와 협씨는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각각 백제의 大姓八族(沙氏·燕氏·解氏·劦氏·眞氏·國氏·木氏·苩氏)의 하나로 나온다.
註 148
고이만년재증걸루는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를 공격할 때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군사를 거느리고 온 인물이다. 이들은 전제왕권이 확립된 469년 이후 자신감의 발로에서 추진한 대토목 공사를 반대하는 등 개로왕과 그를 지지하는 집단에 맞섰다가 정쟁에 패배하여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김수태, 1998, 「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백제사상의 전쟁》, 충남대 백제연구소, 149쪽).
註 149
이병도는 북성은 한수 이북의 구위례성(舊慰禮城), 남성은 한성(하남위례성)으로 보았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491쪽). 그리고 북한 학계도 고구려군이 먼저 북한성(오늘날의 서울)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남한성(경기도 광주지방)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91, 《조선전사3-고구려사》, 151쪽). 그러나 북성은 풍납토성으로 남성은 몽촌토성으로 보고 양자를 합하여 한성이라 보는 견해(김기섭, 1990, 앞의 글, 59쪽)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396년 고구려군이 아리수 곧 한강을 도하하여 백제 도성을 공격한 사실이 기록되어 북성과 남성 모두 한강 남안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여호규, 2002, 앞의 글, 5쪽).
註 150
백제의 複姓의 하나. 《日本書紀》 권15 顯宗紀 3년조에 古爾解가 보이는데 ‘尒’와 ‘爾’는 상통하는 字이다. 따라서 고이해의 ‘古爾’도 복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註 151
이 기사에 의할 때 당시 백제의 도성은 北城과 南城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王城에 대해서는 몽촌토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왕성이 몽촌토성일 경우 몽촌토성의 북쪽에 있는 風納洞토성이 북성에 비정될 수 있겠다.(몽촌토성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몽촌토성-동부지구발굴보고서》, 1987 | 《몽촌토성-동남지구발굴보고서》, 1988 | 《몽촌토성-서남지구발굴보고서》, 1989 참조. 한편 풍납동토성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 제3책, 1967 참조). 그런데 근래 풍납동토성 내부의 발굴결과 백제시대의 주거지 등이 출토되고 있어 향후 연구가 기대된다.
註 152
여기서의 남성은 왕이 살고 있던 居城을 말한다. 北城이 풍납동토성이라고 하면 남성은 夢村토성에 비정할 수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에는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攻大城 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라 하여 大城·王城·慰禮가 보인다. 여기에 보이는 大城은 바로 王城이며, 본 기사의 북성과 남성을 합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慰禮는 都城을 지칭하는 말이다.(한성시기 백제의 도성구조에 대해서는 김기섭, 「백제전기 도성에 관한 일고찰」, 《청계사학》 7, 1990 참조).
註 153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의 아차산을 말한다.
註 154
再曾桀婁와 古尒萬年은 백제 개로왕대의 사람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 사실과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조에는 원년에서 14년까지 아무런 기사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개로왕 초기에 정변이 생겨 그 결과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한국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976, 139쪽).


문주왕이 즉위하다 ( 475년 09월(음) )

문주왕(文周王)001 문주(文周)를 문주(汶州)로도 쓴다.개로왕의 아들이다.002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003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004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005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註 001
백제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한성에서 왕위에 올라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러나 재위 4년에 兵官좌평 解仇에 의해 피살되었다. 문주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細注에는 文洲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文周王一作文明”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년)조에는 汶洲로 나온다. 한편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 “(前略) 使兼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이라 한 기사에 보이는 백제왕 牟都는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輔國將軍 餘都”와 동일인이며 문주왕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중국사서에 보이는 백제왕 모도에 대하여」, 《역사학보》 62, 1974, 30~33쪽).
註 002
문주왕의 出自에 대해서는 본 기사와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조에는 “春三月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洲王 救興其國…(汶洲王蓋鹵王母弟也)”라 하여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두 설 가운데 문주가 개로왕대에 上佐平으로 활약하였다는 것과 輔國將軍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할 때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기백, 「백제왕위계승고」, 《역사학보》 11, 1959, 26쪽 | 천관우, 「한국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1976, 141쪽 | 이도학, 「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1984, 8~11쪽).
註 003
고구려의 남정군은 하남위례성을 함락한 후 계속 주둔하지 않고 아차산 본영으로 철수하였다. 고구려는 구원 사절로 파견된 문주가 신라군 1만과 함께 돌아오고 있었고 백제의 지방군도 합세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한강 북안(北岸)으로 철군하였다. 또한 장수왕아차산 본영에 머물고 있다가 한성을 함락한 주력이 한강을 건너오자 그들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갔다.
註 004
고구려가 백제 왕도를 함락함으로써 백제가 입은 피해에 대해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475)조에는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로 나온다. 한편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20년조에는 “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攻大城 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라 하여 왕을 비롯하여 大后와 왕자 등도 모두 죽은 것으로 나온다.
註 005
문주개로왕 4년(458)에 관작의 제수를 宋에 요청한 인물 중에서 보국장군(輔國將軍) 여도(餘都)이었음이 밝혀졌다(이기동, 「중국사서에 보이는 백제왕 모도에 대하여」, 《역사학보》 62, 1974). 개로왕은 형(兄)인 문주보다 동생 곤주(昆支)를 상위의 관작인 정로장군(征盧將軍)에 제수하도록 요청하였는데, 이는 그의 즉위에 곤지가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주가 즉위할 때 곤지는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는 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